작성일 : 2018.11.17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시16..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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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존재 정의 : 프뉴마(네페쉬, 루아흐)--프쉬케--소마] 창2:7  전3:21 눅1:46, 47  살전5:23  히4:12

...흙으로 아담을 지으신 하나님.. 

하나님생명(조에...모든 생물의 생동력과 활력의 근원)의 생기를 아담의 코에 직접 불어 넣으심으로써 영혼의 기능중심인 마음에 성령의 거하시는 처소(사람의 영=네페쉬.프뉴마, 루아흐) 마련...

----생기(샤마 ..첫글자가 대문자로 쓰는 성령을 뜻하는 페쉬, 아흐, 뉴마와 동의어)는 소마(중립적 몸)에 산소와 영양분으로 생동력과 활기를 지속적으로 공급케 하고(바이오스), 자각하는 인격(프쉬케)이 가동되게 함

---따라서 참사람은 결국, 본래 하나님생명의 호흡 기운(페쉬, 뉴마, 아흐….곧 생명의 성령...하나님말씀(모든 호흡하심)안에는 영(성령)과 생명(조에)이 거하심)으로 사는, 소마(타락이전의 몸)에 거하는 생령(=영적 존재=성령 거하심 통해 살아있는 네페쉬[소문자]...성령과 하나된 영 강조 )이요 산 혼 (살아있는 프쉬케=관계적 인격적 존재...living soul, living being)임. 

---하나님을 배제한 세상의 심리학은 결국 죽은 심리학이요, 거기에는 구원이 없음

---기능적 측면 == 그리스도인의 존재상태 : 영>혼, 비그리스도인의 존재상태 : 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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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6편 

[개역개정] 1.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2.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4.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5.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6.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7.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8.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9.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10.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11.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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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번역]1.하나님, 나를 지켜 주십시오. 내가 주님께로 피합니다.

2.나더러 주님에 대해 말하라면 '하나님은 나의 주님, 주님을 떠나서는 내게 행복이 없다' 하겠습니다.

3.땅에 사는 성도들에 관해 말하라면 '성도들은 존귀한 사람들이요, 나의 기쁨이다' 하겠습니다.

4.다른 신들을 섬기는 자들은 더욱더 고통을 당할 것이다. 나는 그들처럼 피로 빚은 제삿술을 그 신들에게 바치지 않겠으며, 나의 입에 그 신들의 이름도 올리지 않겠다.

5.아, 주님, 주님이야말로 내가 받을 유산의 몫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필요한 모든 복을 내려주십니다. 나의 미래는 주님이 책임지십니다.

6.줄로 재어서 나에게 주신 그 땅은 기름진 곳입니다. 참으로 나는, 빛나는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7.주님께서 날마다 좋은 생각을 주시며, 밤마다 나의 마음에 교훈을 주시니,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8.주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는 분,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9.주님, 참 감사합니다. 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고, 이 몸도 아무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은,

10.주님께서 나를 보호하셔서 죽음의 세력이 나의 생명을 삼키지 못하게 하실 것이며 주님의 거룩한 자를 죽음의 세계에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11.주님께서 몸소 생명의 길을 나에게 보여 주시니,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에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이 큰 즐거움이 영원토록 이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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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편에는 다윗에 대해 약간 언급되어 있으나, 그리스도에 대해 더욱 많이 언급되어 있다. 이 시편은 그리스도께 적용될 수 있는 그런 기도의 표현으로 시작되어 있다. 그리고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관찰했던 것처럼(행 2:24, 13:36) 다윗에 대한 것으로서 볼 수는 없고, 오직 그리스도에게만이 적용되어야 하는 부활(그리고 썩지 않을 정도로 알맞은 때에 일어나는 부활에 대한)에 대한 확신으로 끝나고 있다. 왜냐하면 다윗은 죽어서 묻히었고 또 썩었기 때문이다.

1. 다윗은 그리스도께 속한 일원으로서 그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모든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말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그의 확신(1)과 그에 대한 동의(2),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그의 호의(3), 하나님을 참되게 섬기려는 그의 고집(4), 하나님 안에 있는 완전한 안도감과 만족감, 그리고 그의 안에 있는 자신의 유익(5-7)을 고백하고 있다.

2. 그는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그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자신의 말로 하고 있다. 이 시편의 나머지 부분은 모두 사도행전 2장 25절 이하에서 자세히, 그리고 광범위하게 그리스도께 적용되고 있다. 다윗은 그리스도에 관해(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여호와를 뵈었음이여……” 하고 말하고 있다. 그는 선지자로서 이렇게 말한다(30-31).

   (1) 그는 그리스도께서 봉사하시고 고난받으실 때 하나님께서 특별히 함께하실 것을 말하고 있다(8). 

   (2)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의 사업을 기꺼이 수행하게 했던 그 자신의 부활과 그 뒤에 따를 영광에 대한 전망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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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의 대화와 그에 대한 확신(시 16:1-7)

이 시편에는 “믹담”(Michtam)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황금”의 시라고 번역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매우 가치 있고 금보다도, 정금보다도 더 귀중한 시로 평가해야 한다. 왜냐하면 구약의 영역에서 감추어져 있는 참된 보물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에 대해 매우 명백히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Ⅰ. 다윗은 여기에서 믿음이 있는 확신을 가지고 기쁘게 하나님의 보호로 뛰어들고 있다(1절).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끊임없이 위협당하고 있는 죽음으로부터, 특히 죄로부터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오직 주께만 피하나이다.” 믿음으로 자기 자신을 거룩한 돌보심에 의탁하고, 스스로 거룩한 인도에 복종하는 자들은 그 두 가지의 혜택을 기대할 수 있다. 이는 “아버지여, 나를 이 시간에서 구하소서” 하고 기도하셨고, 하나님께서 그를 구하실 것을 믿으신 그리스도께 적용될 수 있다.

Ⅱ. 그는 그의 (언약의)하나님이신 하나님께 그 자신이 엄숙히 헌신될 것을 인식하고 있다(2절).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여호와이시오니 나는 담대히 주를 의지할 수 있다 하였나이다.”

1. 주님(YH)을 우리의 주님(아도나이)으로 인정하고 우리 자신을 그에게 복종시켜 그에게 의지하는 것이 우리 각자의 당연한 의무이며 권리다. “아도나이”는 “나의 옹호자”, 내 마음의 힘을 의미한다.

2. 이것은 우리 영혼으로써 행해져야 한다. 내 영혼아, 네가 그것을 말했도다(우리 성경과 약간 다름─역주). 하나님과의 언약은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되어야 한다. 우리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은 그 일에 전념하고 그것으로써 속박되어야 한다.

3. 주님을 그들의 주님으로서 공언하는 자들은 자주 그들 자신에게 그들이 행한 것을 상기시켜야 한다. “너는, 주는 나의 주시오니라고 주님께 말씀드린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다시 말하고, 그것을 주장하며, 그것을 지키라. 그리고 결코 그것을 말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라. 너는 그것을 말한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즐거움을 취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라. 그는 너의 주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하라. 그리고 네 눈은 항상 그를 향하라.”

Ⅲ. 그는 성도들을 섬김으로써 그 자신을 하나님을 위해 바치고 있다(2-3절). “나의 선함이 당신께는 이르지 못하나 성도들에게는 이르나이다.” 여기에서 다음을 주시하라.

1. 주님을 자기들의 주님으로 받아들인 자들은 그와 같이 선하면서 선을 행해야 한다. 우리는 선함이 없이는 행복을 기대할 수 없다.

2. 어떤 선함이 우리에게 있든지, 또는 우리에 의해 행해지든지간에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에게까지 미치지는 못한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선한 행동에 의해 공적을 쌓는다고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봉사가 필요치 않으시다. 그는 그것에 의해 유익을 얻지도 아니하시며, 또한 그것이 그의 무한하신 완전함과 축복에 더 보탬이 될 수도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가장 선하며 가장 유용한 자들도 하나님께 유익할 수는 없다(욥 22:2, 35:7). 하나님은 우리보다 무한히 위에 계시며, 우리 없이도 행복하시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선행을 하든 모두 그로부터 나온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에게 은혜를 입고 있는 것이지 그가 우리에게 은혜를 입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윗도 이것을 인정해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을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라고 말하고 있다.

3. 하나님이 우리의 것이라면 우리는 그를 위해 우리의 선함을 그의 것인 자들, 즉 땅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르도록 해야 한다. (마땅히!!) 왜냐하면 그들을 그의 수납인으로 세우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베풀어진 것을 그 자신에게 베풀어진 것으로 여겨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1) 땅에는 성도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땅 위에서 (참되고 진정한 의미에서 주님 소유된)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하늘에서 성도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써 새롭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에 전념하는 자들은 땅에 있는 성도들이다.

(2) 땅에 있는 성도들은 뛰어난 자들이며, 위대하고 유력하며 존귀한 자들이다. 그들 가운데에는 이 세상에서 너무 궁핍해 다윗의 선함이 그들에게까지 미치는 것이 필요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주신 은혜로써 그들을 뛰어나게 만드신다.(다른 이들과 비교할 수 없이 독특한 탁월함) 의로운 자는 이웃들 중에서 뛰어나리라.”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탁월한 자로 여긴다.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귀하고 영예롭다. 그들은 그의 보석, 그의 독특한 보물이다. 그들의 하나님은 그들의 형상이며, 그들에 대해 아름다운 왕관이시다.

(3) 주님을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은 그의 성도들을 뛰어난 자들로 여겨 기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품고 있기 때문이며, 그는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다윗은 왕이었을지라도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의”, 심지어 가장 비천한 자의 “동무”(119:63)였는데, 이것은 그의 기쁨이 그들 가운데 있다는 표지였다.

(4) 우리는 성도들을 기뻐하는 것만으로 그쳐서는 안 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의 선함이 그들에게 이르도록 해야 한다. 즉 우리는 그들에게 필요한 친절을 베풀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며, 그들에게 풍성한 사랑의 수고를 보여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적용될 수 있다. 즉 그가 우리를 위해 역사하신 구원은 하나님께 아무런 소득도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우리의 멸망이 그에게는 조금의 손실도 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의 선함과 유익은 인간에게 미친다. 그는 인자들을 기뻐하시며(잠 8:31),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한다”고 말씀하신다(요 17:19). 땅 위에 있는 성도들의 연약함과 여러 가지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그 성도들을 기뻐하시는데, 이것은 우리가 그들을 기뻐해야 하는 좋은 이유가 된다.

Ⅳ. 그는 그릇된 신들을 숭배하는 것과, 그릇된 신을 숭배하는 자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을 모두 거절하고 있다(4절).

1. 그는 우상 숭배자들의 파멸을 깨닫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우상에 미쳐서 다른 신을 좇기에 바쁘며, 마치 그 우상들로부터 벗어날까봐 두려워하는 자처럼 열심히 그것들을 따라간다. 그러나 “그들의 괴로움은 더할 것이다.그 괴로움은 그들이 버린 참된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에게 내려온 심판에 의한 것이며, 그들이 받아들이는 그릇된 신들에게서 느끼는 실망에 의한 것이다. 신들의 수를 늘리는 자들은 스스로에게 괴로움을 더하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하나이신 하나님을 부족하게 여기는 자는 두 개의 신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며, 수백 개의 신들도 충족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는 그들뿐만 아니라 그 흑암의 무익한 일과도 관계를 갖지 않으려는 자기 결심을 선포하고 있다.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로다. 그것은 그들이 제시하는 신들은 거짓될 뿐만 아니라, 그 제물조차도 야비하기 때문이다.” 피는 속죄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제단에서 피를 마시는 일은 매우 엄격히 금지되었고, 제주는 포도주를 썼다. 그러나 마귀는 그의 숭배자들에게 제물의 피를 마시는 잔인성을 배우도록 지시했다. 이에 대해 다윗은 “나는 피비린내 나는 신들과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겠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름을 내 입에 올릴 때 그들에 대한 어떤 기쁨이나 존경심도 품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한다. 이처럼 우리는 완전한 증오로써 우상과 우상숭배를 미워해야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또한 그리스도와 그의 사업에 적용시키면서 그가 제시한 제물의 특수성을 보여주고 있으며(율법에 따라 바쳤던 것은 소와 염소의 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결코 열거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 자신의 피였다), 또한 믿음이 없는 유대인들의 슬픔이 더해 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유대인들은 다른 왕, 가이사를 좇기에 바빴고, 여전히 다른 메시야를 좇기에 바쁘나 그들의 찾음은 헛된 일이다.

Ⅴ. 그는 그의 소득과 행복을 위해 하나님을 엄숙히 택했음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으며(5절), 그 선택으로 인한 즐거움을 취하고(6절),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7절). 이것은 헌신적이고 경건한 영혼이 그 은혜로운 경험 속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1. 그는 그의 소득과 행복을 위해 여호와를 택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주된 유익을 위해 세상을 취하며, 그들의 지복을 그 즐거움 속에 둡니다. 그러나 나는 여호와는 내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라고 말하겠습니다. 곧 내가 선택한 소득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아무리 내 상태가 초라해지더라도 나는 기쁘게 그것을 따르겠습니다. 내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부어주시고, 내가 그에게 용납되게 하소서. 내게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즐거움을 주시고, 그의 은혜와 즐거움을 얻는 만족을 주소서. 내게 그의 약속 가운데 있는 유익을 주시고, 약속으로써 영원한 생명과 미래의 행복을 누릴 자격을 주소서. 그러면 나는 충분할 것이며, 더이상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내 지복을 이루기 위해 더이상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훌륭하고 지혜롭게 행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우리의 산업과 잔의 소득으로 여겨야 한다.

(1) 그는 저 세상에서 우리 산업의 소득이 되신다. 천국은 산업이다. 거기서 하나님 자신이 성도들의 산업이시며, 성도들의 영원한 축복은 그런 그를 기뻐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산업, 우리의 가정, 우리의 휴식, 우리의 영속하는, 영원한 선으로 여겨야 하며, 이 세상을 우리가 여행할 때 지나가는 나라 이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2)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양육되고, 활기를 회복하며 기절하지 않도록 해주는 우리 잔의 소득(때를 따라 도우시는, 샘솟는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시키는 참포도주이신 하나님!!)으로 여겨야 한다.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가장 활력을 주는 청량제로 여기지 않으며, 그것에 순응하지도 않고, 이 현재의 모든 괴로움을 상쇄시키고 환난의 가장 쓴 잔을 달게 해주기에 충분한 것으로서 여기지 않는다.

2. 이 소득을 그가 안전케 해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여호와는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주께서 나의 것이 되심을 약속으로 밝히신 주님은 은혜롭게도 약속하신 것을 잘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행복을 빼앗기도록 나 홀로 남겨두시지는 않을 것이며, 도적질해 가도록 그것을 나의 대적들의 세력 안에 내버려두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아무것도 나를 당신으로부터 탈취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나를 주의 사랑에서, 다윗의 그 확실한 긍휼에서 떼어놓지는 못할 것입니다.” 성도들과 그들의 복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지켜지는 것이다.

3. 이 소득을 기뻐하며 그 속에서 만족을 얻고 있다(6절). “내게 줄로 재어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도다.” 하나님을 자기 소득으로 지닌 자들은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귀한 소득, 아름다운 산업을 가진 자들이다. 그보다 더 나은 것을 그들이 어떻게 가질 수 있겠는가? 그들이 어떤 것을 더 원할 수 있을 것인가? “나의 영혼이여, 너의 안식처로 돌아오라.” 그리고 더이상 바라지 말라.

은혜로운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더욱 열망할지라도 하나님 이외의 것은 결코 열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자비하심이 확인될 때 그들은 그 자비를 아주 만족스럽게 여기고, 세속적인 환락과 관능적인 즐거움과 기쁨을 결코 부러워하지 않는다. 즉 그들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것 속에서 자신을 진실로 행복하게 여기며, 그들이 바라는 것 속에서 온전히 행복해질 것을 전혀 의심치 않는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이 알려지고 숭배되는 빛의 땅에, 소망의 계곡에 자기의 분깃을 정한 자들은 그런 면에서 “내게 줄로 재어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도다” 하고 말할 만하다. 수단뿐만 아니라 그 목적도 갖고 있는 자들, 즉 임마누엘의 땅뿐만 아니라 임마누엘의 사랑을 갖고 있는 자들은 더욱 그럴 만하다.

4. 그것에 대해, 그리고 이 지혜롭고 행복한 선택을 하도록 만든 은혜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다(7절). “그를 내 소득과 행복으로 택하도록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고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눈을 좇게 된다면, 우리는 매우 무지하고 어리석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망상을 택할 것이며, 거짓되고 헛된 것을 위해 우리 자신의 긍휼을 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소득으로 취하고, 감각적이며 일시적인 것들보다도 영적이고 영원한 축복을 더 좋아한다면,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그런 선택을 하도록 지시하시고 능력을 주신 거룩한 은혜의 능력과 선하심을 감사하게 인정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하나님께 그것에 대한 찬미를 드리도록 하자.

5. 그것을 선용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그를 훈계하셨을 때 그 자신의 “심장”(그 자신의 생각)도 또한 밤중에 그를 가르쳤다. 그가 조용하고 한적했을 때, 그리고 세상에서 물러났을 때, 그 자신의 양심은(“심장”이라 불리고 있다. 렘 17:10) 그가 만든 선택에 대해 기쁜 마음으로 회고했을 뿐만 아니라, 이 선택에서 야기되는 의무에 대해 그를 가르치거나 훈계했으며, 그에게 시험하여 물어보았다. 그리고 믿음에 의해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를 향해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을 자신의 소득으로 택한 자로서 살아가도록 그를 격려했고, 또 촉구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에게 적용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여호와를 자기 소득으로 삼았고, 그 소득을 기뻐했다. 그의 아버지의 영광을 그의 가장 높은 목적으로 삼았으며, 그것을 구하고 그의 뜻을 행하는 것을 그의 음식과 음료로 여겼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분깃을 지켜주시고, 그로 그 사업을 완성하도록 해주실 것을 믿었으며, 그의 일을 수행하고 그 아버지의 훈계를 좇기를 기뻐했다. 우리는 이 시편을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다. 즉 이것을 노래함으로써 거룩한 안심과 만족을 지닐 수 있고, 하나님을 우리의 것으로 선택한 사실을 새롭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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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시 16:8-11)

사도 베드로는 이 모든 구절들을 오순절에 성령이 부어진 후 그 첫번째 설교에서 인용하고 있다(행 2:25-28). 그리고 그는 다윗이 그 속에서 그리스도에 관해, 그리고 특히 그의 부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에 관한 모든 일을 온전케 해주시도록 그의 은혜에 의지하고, 복된 소망을 바라며 하나님의 즐거움 안에서 죽음 저편에 있는 행복한 상태를 바란다. 우리는 이런 것을 하나님께로 향한 다윗의 경건하고 헌신적인 애정에서 우러나온 일들로 간주할 수 있다. 하나님과 하늘을 향한 이 거룩한 들어올림 속에서 그는 그 스스로의 생각과 그 자신의 주장을 완전히 초월한 예언의 영을 통해 이처럼 매우 독특한 표현으로, 그리고 그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말로 메시야의 영광을 예언하고 있다. 신약은 우리에게 이 구절들의 신비를 열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하고 있다.

Ⅰ. 이 구절들은 당연히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신 영광을 미리 증거”했던 것처럼(벧전 1:11), 예언자 다윗도 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여기에서 이 예언의 주제가 되고 있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이(다윗 자신이 이 시편의 다른 예언 가운데에서 이에 관해 분명히 보여준 것과 같이. 눅 24:44, 46) 예시되어 있다(고전 15:3-4).

1. 그는 고난을 받으시고 죽을 것이다. 그가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8절) 하고 말하는 구절에 이런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는 그의 영혼이 심히 괴로우셨을 때 번민하셨던 것과 같이, 괴롭힘을 당하시고 그에게 무서운 충격이 가해질 것을 짐작하셨고, 그 잔이 그에게서 지나가기를 간구하셨다. 그가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다”라고 한 말에는 그가 육체를 떠나야 하므로 사망의 고통도 치러야 한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그의 영혼이 육신과 분리된 상태가 되어야 하며, 그처럼 남겨진 그의 몸은 썩는 것을 보게 될 절박한 위험에 놓이게 되리라는 것─그가 죽어야 할 뿐만 아니라 묻혀서 잠시 동안 사망의 권세 아래 거해야 한다는 것이 또한 분명히 시사되어 있다.

2. 그는 고난을 당하고 죽어가는 속에서도 거룩한 능력에 의해 훌륭하게 견디어나가실 것이다.

(1) 그는 요동해서는 안 되신다. 그의 사업으로부터 축출당하거나 그 무게에 눌려 가라앉아서는 안 되신다. 즉 쇠하거나 낙담해서는 안 되며(사 42:4) “다 이루었다”고 말할 때까지 그 일을 계속 진행시켜야 한다. 비록 그 봉사가 힘들고 투쟁이 심했더라도, 즉 홀로 포도즙 짜는 기구를 밟았더라도 그는 요동치 아니했으며 그 일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했다(사 50:7-9). “나는 여기 있으니 이들은 그들의 길을 가게 하라.”

(2) 그의 마음은 기뻐해야 하셨고, 그의 영광은 기쁘게 받아들여져야 했다. 그의 사업을 단호히 행할 뿐만 아니라 즐겁게,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기쁨과 만족감을 갖고 계속 행하셔야 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니,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이다”(요 17:11) 하는 말씀과 “아버지가 나에게 주신 잔을 어찌 마시지 않으리요?” 하는 말씀, 그리고 그밖의 여러 말씀 가운데에서 목격할 수 있다. 사도행전 2장 26절에도 나타나 있듯이 그의 “입술”은 그의 영광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입술은 우리의 영광이며,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에 쓰였을 때보다 더 영광스러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때 그가 이처럼 기꺼이 참으시고 수행하셨던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였다.

① 그는 그의 아버지의 뜻에 경의를 품으셨고, 그가 행하신 것에 영광을 돌리셨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십니다.” 그는 언제나 그의 아버지의 계명(요 10:18, 14:31)과 그에게 주어진 아버지의 뜻을 주목하셨다. 그는 아버지의 영광과, 사람들 가운데 그의 나라의 권세를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셨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어떤 난관에도 요동치 않으시도록 해주었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그의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일들을 하셨기 때문이다.

② 그는 고난 중에서도 그의 아버지가 자기와 함께하실 것을 확인하셨다.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나를 즉시 도우시며, 필요한 때에 바로 옆에 계시도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신다”(사 50:8). 그가 내 우편에 계시어 나를 지시하고 견고히 하며 힘있게 하신다(89:21). 그가 번민 중에 있었을 때 사자(천사)가 하늘로부터 나타나 힘을 도왔다(눅 22:43). 십자가의 승리와 개가는 모두 이런 은혜를 입은 것이었다. 그의 우편에서 “열왕을 쳐서” 파하신 것은 바로 여호와이셨다(110:5; 사 42:1-2).

③ 그의 고난이 영광스런 결말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하셨다. “그가 십자가를 참으신” 것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함이었다”(히 12:2). 그는 소망 속에서 거하였고, 그것은 그의 거한 곳을 영화롭게 만들었다(사 11:10). 그는 그의 부활에 의해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시고, 또한 곧 영광을 얻으시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요 13:31-32 참조).

3. 그는 그의 고난에서 구해지고 영광스런 부활에 의해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실 것이다.

(1) 그의 영혼은 음부에 내버려지지 않을 것이다. 즉 그의 인간적인 영은 다른 사람들의 영처럼 오랫동안 육신과 분리된 상태에 있지 않고 곧 돌아와 다시 연합해 결코 헤어지지 않을 것이다.

(2) 그는 특별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며, 구원의 사업에 바쳐지고 죄에서 완전히 떠난 자이므로, 그는 그것이 부패하는 것을 보거나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가 무덤에서 일어나실 것뿐만 아니라, 그의 죽은 몸이 썩기 시작하기 전에 곧 일어나시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만일 그가 제3일에도 일어나시지 않았다면 몸은 자연의 법칙대로 썩었을 것이다. 영혼이 매우 부패한 우리는 우리의 육신도 또한 부패하리라는 것을 예상해야 한다(욥 24:19). 그러나 죄를 알지 못한 하나님의 거룩한 자는 부패함을 보지 않았다. 제단에 바쳐진 굽지 않은 희생의 고기를 썩지 않도록 하기 위해 결코 제3일까지 놓아두지 말 것을 율법으로 엄격히 명했다(레 7:15, 18). 이것은 그리스도가 부패함을 보지 않도록, 뿐만 아니라 그의 뼈 역시 조금도 상하지 않도록, 제3일에 일어나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4. 그는 하나님 앞에 있는 기쁨으로 그의 고난에 대한 보상을 풍성히 받을 것이다(11절).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신했다.

(1) 그는 자기의 영광을 볼 것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고 이 어두운 골짜기에서 나를 그 생명으로 인도하시리라.” 이에 대한 확신 속에서 그의 기운이 다했을 때 그는 “아버지여, 나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말씀하셨고, 또 기운이 다하기 조금 전에는 “아버지여,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하고 말씀하셨다.

(2) 그는 하나님의 존전에 영접되어 그의 우편에 앉게 되신다. 그가 하나님이 계신 곳에 오도록 허용된다는 것은 그의 봉사가 용납됨을 의미하고, 그를 그 우편에 앉히심은 그런 봉사에 대한 보상이 될 것이다.

(3) 이처럼 그가 우리의 구속을 위해 겪으신 슬픔에 대한 대가로서, 그는 “기쁨이 충만하고, 영원한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온 세상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얻으실 것이다. 또한 그의 자손과 그의 사업이 성공하고 흥함을 보는 가운데에서 중재자로서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실 것이다(사 53:10-11).

Ⅱ. 그리스도는 몸의 머리요,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에 이 구절들의 대부분은 그리스도의 성령에 의해 인도되고 활기를 되찾는 모든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구절들을 노래함에 우리가 제일 먼저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릴 때(우리의 영원한 즐거움으로써, 이 구절들의 내용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우리는 그것으로써 우리 자신을, 그리고 서로를 격려하고 교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를 노래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1. 주님을 항상 우리 앞에 모시고, 그가 계속 우리의 우편에 있는가를 살피고,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그를 우리의 주된 유익과 최고의 목적으로, 우리의 주인, 통치자, 그리고 재판장으로 여기고, 우리의 자비하신 은인이며, 확실한 안내자와 엄격한 감찰자로 여기는 것이 우리의 지혜며 의무다. 그리고 우리가 이처럼 행하는 한 우리는 우리의 의무나 위로로부터 요동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축복받은 바울은 주님을 그 앞에 두었으며, 결박과 환난이 그를 기다렸을 때일지라도(행 20:24) “이러한 것들은 그 어느 것도 나를 요동시키지 못하리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었다.

2. 우리 눈이 항상 하나님께로 향한다면 우리 마음과 입술도 항상 그 안에서 즐거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과실이다. 만일 마음이 하나님을 기뻐한다면 그런 풍성한 마음의 기쁨으로 우리의 입이 그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교화를 위한 말을 하도록 하자.

3. 죽어가는 그리스도인은 죽어가신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기쁜 부활을 믿으면서 기꺼이 육체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이다.” 우리 육신은 이 세상에서는 거의 휴식을 취할 수 없으나, 무덤에서는 자기의 침상에 있는 것과 같이 편히 쉴 것이다(사 57:2). 우리는 이 생애에서 거의 소망을 가질 수 없지만, 더 나은 생애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소망 가운데 육체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사망은 “사람의 소망을 끊으나”(욥 14:19) 훌륭한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끊지 못한다(잠 14:32). 즉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죽음 속에서도 소망을 가지며, 죽어가는 순간에도 살아 있는 소망을 갖는 것이다. 육체가 무덤 속에 영원히 남아 있지 않으며, 잠시 동안 그것이 썩을지라도 마지막 때에는 불멸성을 지니고 일어날 것을 바란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그의 부활은 곧 우리 부활의 전조가 될 것이다.

4. 하나님을 주목하면서 경건하게 살아가는 자들은 천국을 보면서 편히 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슬퍼하지 않을 수 없으나, 하늘에는 기쁨이 있다. 여기에서의 우리의 모든 기쁨은 공허하고 불완전한 것이나, 하늘에는 기쁨이 충만하다. 또한 여기에서 덧없고 순간적인 우리의 즐거움은 오래 지속되기에 합당치 않은 성질을 지니고 있으나, 하나님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환상과 결실 가운데에서 불멸의 영혼에 부여되는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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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심리학의 조화(어느 심리학도의 독후감...) 

제 1 부 심리학은 우리 자신에 관하여 무엇을 가르치는가? 

1 너 자신을 알라 

심리학이 그리스도인들을 곁길로 가게 만들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인들 역시 여전히 심리학적 측면에서도 보아야 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불교신자들이나 힌두교인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각 사람의 영혼이 값지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심리학의 눈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 단지 그것이 인간의 영적 목적을 부인할 경우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자아를 찾도록 도와주는 일에는 못미칠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눈을 통해서는 스스로를 알지 못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부딪칠 때에라야 비로소 자신을 알 수 있는 것이다. 

2 에고(ego)란 무엇인가? 

에고는 자아 인식( self-awareness)이다. 이 "나"는 나의 정체로서, 나를 다른 사람들이나 사물로부터 구별시켜준다. 각 개인의 자아 인식은 스스로 자신과 세상에 대햐여 만들어낸 가정(가정)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이 가정은 세 가지 종류로 구분된다.

1. 현실가정(reality assumptions) 2. 가치가정(value assumptions) 3. 미래가정(possibility assumptions)

건전한 에고는 균형있고 건전한 생의 전망을 지니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에고가 없는 영적 생활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에고가 없는 대인 관계난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건전함과 진실성 그리고 인격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건전한 에고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이기주의와 구분된다.

하나님은 에고를 가진 사람을 창조하셨다. 따라서 에고를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손으로 지으신 것을 부인하는 것이 될것이다. 

3 자아 - 그것의 다양한 면들 

각 사람의 마음은 "가설적 구성 개념"(hypothetical constructs) 이라 칭해지는 세 가지로이루진다.

첫번째 부분은 "이드"(id)라 칭하여진다. "이드"(id)는 신체내부에서 일어나는 충동을 표현한다.

인격구조에 있어서 이드 저편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초자아"(superego)이다. 그것은 인간의 에고 위에 놓인 일련의 규범을 따르려는 외적 압력이다.

사람의 마음 가운데 세번째 부분으로서 가장 중심적인 것은 바로 에고이다. 에고는 이드(id)와 수퍼에고(superego) 사이에 있으며 그것들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역할을 한다.

프로이드는 인간 행동을 너무 기계적인 방식으로 설명하였기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관점은 노이로제의 이해에 대한 많은 통로를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에게 배울 점이 있다.

회개는 사람의 욕망을 변화시키나 그것이 그로부터 유혹을 제거하여 주지는 않는다. 즉 구원받았다고 해서 영적으로 즉시 성숙하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깨졌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새롭게 소생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되 그의 있는 그대로를 구원하신다. 구원은 삶의 모든 문제를 치료해 주는 약은 아니다. 구원은 "영혼에 관한 것"이다. 

4 정상적인 에고의 발달 단계 

성숙은 정서적 발달의 부산물이다. 성숙한 사람은 그의 성품 내에서의 갈등으로부터 자유하다. 성숙은 그의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보이게 되며, 따라서 성숙한 사람은 그의 세계에 순응하고 적응할 수 있다.

* 발달의 단계

1) 완전한 의존 : 아기가 태어나면 그 생활은 엄마에게 의존된다.

2) 어린아이는 구강기 - 수동적 위치에서 공격적 위치로 옮겨간다.

3) 모든 경험이 입과 연결되어 있는 단계(구강기)가 지나면 어린아이는 곧 자신의 독립심을 발달시킨다.| 수동적 숙달 단계에서 어린아이는 공격적 - 적대적 숙달 단계로 옮겨갈 수도 있다. 이런 초기 단계에서 문제를 지녔던 성인은 보통 적개심이 매우 강한 사람이 된다.

4) 공격적인 행동 발달의 단계 다음에는 노출증(exhibitionism)의 시기로 접어들게 된다. 이것은 감정을 표명하는 시기이다. 이 단계를 성공적으로 극복하면 현실의 문턱에 들어서게 된다.

5) 성숙의 마지막 단계는 나누어 줌(sharing)이라는 이 한마디 말로 요약되는데 이것은 생식의 단계이다. 이 시기에는 자기 중심적이기보다는 그 젊은이는 이제 사물에 대한 객관적인 안목을 갖는다. 에고는 사람들이나 현실과의 접촉에 의해서만 자라날 수 있다. 

5 가치의 증진 방법 

아기는 곧 그의 부모의 가치관을 배우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모방하는 데에 엄청난 수용력을 지니고 있다. 아이가 자라나면서 자신의 주체성을 경험하기 시작할 때 그는 배운 것을 시험해보며, 이 때의 그는 한 독립적인 인간이 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가치 체계는 변화되어야 할 과제이다. 심리학적 원리는 기독교의 영역내에서 적용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가치 체계의 불평들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너무 편협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정상적으로 사고하는 인간으로서 기능을 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목사도 영적 고착증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때문에 당신은 많은당신에게 적용되는 것만을 취할 필요가 있다. 

6 주체의식이 약한 사람들 

에고는 현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모든 형태의 정신병은 가장 심각한 에고의 손실이며 침해임을 증명한다.

* 연약한 에고의 증세

1) 에고 분열의 하나의 정신병적 표출은 환각이다. 이는 현실과의 접촉을 상실한 경우이다.

2) 연약한 에고의 또 한 가지 증세는 지나친 공상이다.

3) 연약한 자아 개념의 또 한 가지 징후는 퇴행이며, 연약한 에고를 지닌 사람일수록 퇴행을 보였을 때 회복하는 과정이 느리다.

방어기제는 약한 에고를 지닌 사람이 걱정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에고가 현실을 보다 효과적으로 다루어나가도록 도와주는 능력이다. 이 방어기제는 어린아이의 성장과정에 정상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존속시키는 사람의 정당한 방어들을 강화시키실 것을 약속하고 계시다. 

7 불안에 대처하는 법 

대부분의 경우, 정신병은 지나친 걱정에 대처하기 위해 에고에 의해 착안된 과장된 방어적 책략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서로의 경험이 같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경험과 적응 문제에 대해 각기 다른 방어 기제를 발달시킬 수도 있다.

불안은 에고에게 고통을 주는 무의식 가운데의 그 어떤 것이 의식 속으로 들어오게 되히라는 것을 에고에게 알려주는 한가지 신호이다. 그러나 불안을 비정상적으로 만드는 것은 지나치게 많은 불안이다.

* 불안의 유형

1) 히스테리는 보통 전향 히스테리(conversion hysteria)를 가리킨다. 이는 염려가 신체적인 증상으로 전환된 것을 말한다.

2) 공포증도 흔히 불안 상태와 관련되어 있다. 공포증은 전위, 투사 그리고 도피에 의해 내면적으로 야기된 긴장을 약화시키려는 시도이다.

공포증의 종류에는 고소 공포증, 폐소 공포증, 광장 공포증, 동물 공포증 등이 있다.

* 공포증은 현실적으로 이유가 없을 때에만 공포증이 된다.

3) 지나친 불안에 대한 에고의 또 한 가지 방어는 해리적(해리적) 반응이며, 해리상태의 가장 심한 상태는 "이중적인 인격"이다.

4) 강박신경증(obsessive-compulsive, 강박신경증) : 강박관념은 사람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생각이다.

5) 정서적 불안의 또 한 가지 유형은 우울증이다.

우울증의 원인 : 1) 지나친 상실감 2) 지나친 죄의식 3) 부모의 기준에 일관성이 없거나 그 기준이 너무 높을 때

6) 분열적 성격은 자신을 사람들로부터 격리시킴으로써 자신의 불안을 처리한다.

정신분열증의 네가지 상태는

1) 자폐성(자폐성,autism) 2) 양면(량면) 가치의 공존(ambivalence)3) 연상(련상,association)의 혼란 4) 정서(affect)의 혼돈 등이다.

7) 정신병의 마지막 영역은 성격이상(character disarders)이다. 이는 가장 다루기가 어렵고 절망적인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다.

* 요약해서 말한다면 정신병에 있어서 에고의 방어는 일반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어와 같다. 그 사람을 병적으로 비정상적으로 만드는 것은 방어의 남용이다. 

제 2 부 성경은 우리 자신에 관하여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8 성경과 상처입은 에고 

성경은 적합한 해석과 적용이 없이는 일상적인 문제와 실패와 괴로움을 치료해 주는 신비로운 만병통치약이 되지 못한다. 성경은 비록 오류가 없지만, 그 목적상 다루지 않는 부분이 있기에 특정한 요구에 맞도록 성경을 사용하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우울증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그들의 무가치함을 논증하는 성경구절을 찾는다. 그러나 이것은 그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또한 구원은 죄에 대한 생각 등을 자동적으로 없애주지는 않으며, 그에 대한 사람의 감정등은 정당한 것이다.

만일 편집형의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해치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깨달을 수 있다면, 그의 불안은 완화돌 수 있을 것이며 이 새로운 관계는 점차 발전하여 사람들과 보다 신뢰감 있는 교제로까지 발전될 수 있을 것이다.

신경분열증 소유자도 움츠러드는 경향을 지니고 있으며 사랑과 용납을 그의 인생 경험에서 맛볼 필요가 있다.

사회병질적인 사람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영적 가치 체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불안에 시달리는 히스테리 성격에서, 왜 그 사람이 그처럼 불안한가를 찾아내어야 한다. 그 후 문제가 어떠한 것인가를 정확히 분별한 다음에 적합한 성경말씀을 직접 그것에 적용하는 일이 중요하다. 

9 성경은 자아에 관하여 어떻게 가르치는가? 

성경의 말씀에는 우리의 에고가 부정되어져야 한다는 가르침의 기본이 될 만한 것이 들어 있지 않다. 사람들은 강한 에고를 갖지 않고서는 인생의 문제들을 직시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의 아들을 따르고 우리 믿음을 부인하지 않는 것이다.

십자가를 짐은 좀 더 넓은 삶을 발견하기 위하여 자신을 잃음을 말한다. 우리는 나 자신을 잃는 가운데 자신의 사역에 몰두하여야 하며, 보다 높은 선과 목적을 위하여서는 자신을 부인하고 잃을 필요가 있다. 인간의 에고는 결코 이 일을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것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자기 자신과 행복을 찾을 것이다.

딤후 3:2에서와 같은 말세의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한다는 개념은 남을 조금도 생각지 않는 자기만을 위하는 사랑을 말한다.

성경은 사실상 자애(자애)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자애에 대한 건전한 관념과 실제적인 사랑이 없다면 그 사랑이 하나님께나 자기 동료, 이웃 그리고 대적 -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명하신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능력에 있어서 제한받게 된다. 사도 바울은 강한 자아를 가진 사람의 일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달란트와 업적을 존중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과 일치한다.

연약한 에고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승리의 생활과 제자로서의 삶을 누리기 위한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는 것이다. 훌륭한 에고는 우리가 하나님과 훌륭한 관계를 갖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10 자존심을 직시하자 

긍지를 지니는 것이 언제나 악하거나 나쁘지는 않다. 본질적인 특성에 근거한 건전한 긍지나 자존심이 있는 것이다. 그릇된 자존심은 참된 자아를 직시하고 사람들을 동등하게 보는 것을 막는 데에 사용하는 방어이며, 신경증적인 상태로서 진리의 왜곡상태이다. 신경증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참된 자아를 보기를 외면하며, 그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상을 추구한다.

신경증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그릇된 감정으로써 자신을 합리화시켜 나간다. 이때 프라이드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건전한 자존심이며, 다른 하나는 환상적인 그릇된 삶의 공상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진실을 다루기를 원하신다. 신경증적인 프라이드를 지닌 사람은 우리의 이해를 필요로 한다. 

11 균형있는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인은 신앙 체험 가운데 성숙해갈수록 그의 과거 경험 때문에 현실에 대한 지각력이 더욱 커진다. 기독교는 "순간적인" 행복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행복과 기쁨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에 의해 공급된다.

올바른 적응을 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그 인격의 에고가 강하며 적응할 능력이 있을 때에야 가능하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과 외적인 현실, 영적 가치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 합당한 견해를 지닌다. 

12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표징 

성경은 인생의 가장 훌륭한 모형을 제시하고 있다. 잘 적응하는 사람은 균형있는 삶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모형임을 명백하게 해주고 있다.

*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표징

1) 성경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첫번째 표징이 사랑임을 말해준다. 이것은 또한 영적 의미에서도 참되다.

2) "성령의 열매"의 두번째 표징은 기쁨(joy)이다.

3)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의 세번째 표징은 화평(peace)이다.

4)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네번째 표징은 오래 참음(longsuffering)이다. 오래 참음은 인내와 끈기를 내포하며 에고로 인한 하나의 큰 미덕이다.

5) 성숙의 다섯번째 표징은 자비(gentleness)이다. 자비는 나약한 인격이 아닌 강하면서도 따스하고 사랑에 넘치는 인격을 가리킨다.

6) 성숙의 여섯번째 표징은 양선(goodness)이다. 성경에서 자비와 양선은 때로 같은 것으로 보이나 양선은 적극적인 자선 행위나 타인을 위한 일이라는 면에서 인간적인 친절과 더욱 동등시되어야 한다.

7)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지닌 사람의 일곱번째 표징은 충성(faith)이다.

8)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여덟번째 표징은 온유(meekness)이다. 이런 종류의 사람은 온건하다.

9) "성령의 열매"의 마지막 표징은 절제(temperance) 또는 자기 통제이다. 절제하는 사람의 에고는 그의 행동을 완전히 책임진다.

정서적 성숙이나 영적 성숙이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에게서도 완전하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진실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그리스도인은 인생의 길을 걸어나감에 따라 성숙하게된다. 영적 성장은 이생 저편까지 확장되나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삶은 여기에서 그리고 지금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중요하다. 이 관계는 시간과 영원을 넘어 지속되는 안정된 사랑의 목표를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며, 예수께서는 그것을 영생(everlasting)이라고 부르신다. 

제 3 부 심리학과 성경을 조화시켜 우리 자신을 살펴봄 

13 심리 치료는 과연 정당한 것인가? 

심리 치료는 전체적인 그리스도인의 세계관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도 증강시켜준다.정서적 문제가 모두 영적 문제는 아니며, 심리 치료는 성경적 개념이다.

첫째, 성경 자체는 그러한 분야의 존재와 필요를 인정하고 있다.

둘째로, 성경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여러 영적 선물들을 주셨는데, 이중 하나는 병 고치는 은사이다.

셋째, 그것이 사실상 상호적인 의사 소통 방법을 마련해 주는 반면 설교나 성경은 일반적으로 일방적인 의사 소통 방법이다.

성경은 죄악의 병에 대한 교과서이다. 반면 정서적인 병은 인간 관계와 관련되어 있는 왜곡 상태, 상처, 좌절 등을 다루고 있다. 더우기 성경의 진리는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며, 정서적으로 불안한 사람들과 교통한 것은 아니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나, 이 진리 가운데 많은 것들은 성경에 있는 진리의 범위 바깥에 있다.

심리 치료가 정당한 권리를 갖는 또 하나의 주된 이유는 그것이 다른 지식 수준이 공급하지 못하는 어떤 특정한 요구를 채워준다는 것이다. 모든 병에는 그에 합당한 처방이 있으며, 심리 치료는 다른 방법으로 채워질 수 없는 어떠한 요구를 채워준다는 점에서 정당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러한 심리 치료는 죄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는 방법들을 제공해준다. 또한 심리 치료의 존재는 이 세상에서 사람의 다른 큰 필요들을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과 구원의 계획을 증거하는 수단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14 귀신들림인가, 아니면 정신질환인가? 

귀신에 대한 기상천외한 생각들이 횡행하고 있다.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면 모든 증거를 조사해 볼 것이다. 물론 마귀들은 항상 사람들을 괴롭혀 왔으며, 또한 사단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또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최종적으로 멸망당할 때까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그에게 잡아두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마귀가 비록 실재한다고 하여 환각과 귀신들림을 동일시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단일화이다.

마귀들린 것과 환각(정신병)의 차이

1) 첫째, 마귀들림과 정신병자의 두 가지 상태에 있는 사람은 모두 공통적으로 괴상한 행동을 나타낸다. 그러나 마귀들은 분리된 개성을 지니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과 연합하기를 원하는 반면에 정신병자는 그것과 상반되는 것을 원한다.

2) 또한 마귀들은 합리적이나 정신분열증 환자들의 말과 논리는 매우 일관성이 없다.

3) 다음으로 그리스도와 마귀를 묘사하고 있는 복음서의 해설은 마귀가 현실에 관여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귀신들림은 오늘날에도 존재하며, 그것은 영적인 면으로써 치유될 수가 있다.

그러나 정신이상자의 치료는 엄밀히 말해서 대인관계의 개선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15 죄는 과연 정서상의 문제들을 유발하는가? 

모든 질병은 악에 뿌리를 박고 있으나, 죄의 결과들을 다루는 데에는 한 가지이상의 방법이 있다. 정서적인 병의 원인 및 치료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원죄의 보편적인 영향으로 사람들은 두려움과 죄책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세상은 불완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분명 죄는 인간의 정서적 문제의 원인이 될 수 있으나 그 사람의 특정한 죄가 그의 모든 정서적인 문제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죄의 개념은 과녁을 빗나갔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죄의 존재와 영향을 인식하고 있다. 연약한 에고를 지닌 사람은 죄로부터 자유롭기가 힘든데, 신학은 이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심리학과 신학은 동전의 앞| 뒷면처럼 이런 견해에 대하여 궁극적으로 같은 견해를 보이고 있으며, 정서적 및 영적 성숙 역시 이러한 관계에 있다. 

16 심리학적 성장과 기독교 신앙 

성경은 성장을 장려하나 성장은 자동적인 것이 아니다. 즉 영적 성숙이 오직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교회에 출석하며 금하여진 행위들의 목록을 삼가함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주님은 우리 각 사람이 성장과 안정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성장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여러 유형을 보면,

첫째, 수동적-비독립적 그리스도인  둘째, "만물박사"형의 그리스도인  셋째, "뽐내는"형의 그리스도인...이 모든 속성들은 미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다. 

17 그리스도인이 심리학적 도움을 구해도 되는가?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을 행하실 때에 반드시 사람들을 사용하셨다. 앞에서와 같이 심리학과 그 치료에 정당한 권리가 있다면 훈련받은 카운셀러들은 필요한 변화를 제공함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연결대의 역할을 한다.

이 때 전문적인 상담은 주체성을 명백히 해 주며, 현실을 보는 눈을 수정하여 준다. 이러한 개인상담의 필요성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으나, 비록 주님만을 의지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18 그리스도와 상처입은 사람들 

우리는 상담 과정의 한 모형을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얻을 수 있는 데, 그리스도께서는 상처입은 영혼들에 대한 관심이 지극하셨다. 그 분은 그들의 문제의 근원(source)을 다루셨으며, 결코 그 증상(symptoms)을 다루는 데 관심을 기울이시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실천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보다도 의미있는 방도로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을 도와주는 일임을 보여주신다. 이에 우리는 진정한 용서를 베품으로써 그 분의 뜻을 행하고 신체적, 정서적 그리고 영적인 면들에서 바르고 적절한 자리에 조화를 이루어 온전한 사람(전인)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십자가복음이 빠져버린 그 어떤 심리학적 접근도 구원이 없는 허망함과 사망으로 귀결된다.!!

** 복음은 십자가에 달린 구주예수님의 인격으로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든지 비그리스도인이든지 상관없이 적용되는 바, (하나님을 오해하고 거절하며 내 인생은 나의 것, 곧 자신이 전능자라고 스스로 착각함으로써 생겨난)심리적 측면을 포함한 인간사회와 자아의 제문제와 병폐들을 명료하게 성령의 빛가운데 드러내고 근원적으로 치유하신다.....인간심리적 측면에서 상한 마음의 문제들도 또한 마찬가지이다.....이 치유의 과정은 믿는 이 스스로가 자기자신에게 먼저 날마다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일어나게 되어 궁극적 치유를 체득하게 되는데, 그 결과는 타락한 자아(거짓자아)의 파쇄를 통해 새로운 피조물됨에로 옮겨가게 한다.. **한편, 하나님을 배제한 심리학적 치료는 인지적 방법으로든 과학적 방법으로든 그 어느방면에서 도움을 받더라도 결국 그 목표를 (거짓)자아의 재건에 두고 있기에 그 치료는 허상을 좇는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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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세속적 심리학과 성경적 상담은 서로 협력이 가능한가? ---답변: 

---세속적인 심리학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칼 융(Carl Jung), 칼 로저스(Carl Rogers)와 같은 정신 분석가의 가르침에 근거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무신론자 심리학자들은 인간 상태에 대한 진정한 통찰력을 전혀 갖지 못합니다.

반면에 성경적 또는 권면적(nouthetic) 상담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기초합니다. 성경적 상담자들은 사람의 근본적인 문제는 본질적으로 영적인 문제라고 가르칩니다. 성경적 상담은 성경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하여금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갖추기에 충분하다고 봅니다(딤후 3:17). 

---이와 관련해서 알아야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기독교 상담"이라고 불리는 상담은 종종 성경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심리학을 추가로 사용하는 점에서 "성경적 상담"과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기독교 상담은 성경적 상담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상담자들이 종종 세속적인 심리학을 그들의 상담에 통합/혼합시키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성경적 또는 권면적 상담자들은 세속적인 심리학을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세속적 심리학은 그 바탕 사상은 세속적 인본주의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인본주의는 진리와 도덕의 최고 표준으로서 인류를 장려하고 신앙과 초자연적인 것들과 성경을 거부합니다. 그러므로 세속적 심리학은 영적인 것들을 언급하거나 인식함이 없이(즉, 제쳐놓고) 사람의 영적인 면을 이해하고 고치려는 인간의 시도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반면에,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유일한 피조물로서 영-혼-몸으로 이루어지며, 죄로 인한 타락의 결과 모든 문제들이 발생했다고 선언합니다(창 1:26, 2:7). 성경은 사람의 영성을 분명하게 다루면서 죄로 인한 타락, 죄의 결과,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의 현재 관계를 알려줍니다.

---세속적인 심리학은 사람이 근본적으로 선하며 그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자신 안에 있다는 사상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성경은 사람의 상태에 대한 매우 다른 그림을 그려줍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선하지’ 않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엡 2:1). 중생하지 않은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렘 17:9)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적 상담자는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을 해야 합니다. 즉, 영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사람의 마음 속에서 찾기 보다는 죄에 맞서고 위로부터 지혜를 얻고(약 3:17) 하나님의 말씀을 그 상황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성경적 상담자들은 심리 치료사 및 일부 기독교 상담사들과는 대조적으로 성경만을 상담에 대한 포괄적이고 상세한 접근의 원천으로 여깁니다(딤후 3:15-17; 벧후 4:2). 

성경적 상담은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위해 말씀하시도록 하는데 전념합니다. 

성경적 상담은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사랑, 죄를 다루고 순종을 가져 오는 사랑을 사역의 목표로 삼습니다.

그런데, 세속적 심리 요법은 개개인의 결핍에 근거해서 이루어 집니다. 따라서, 자부심, 사랑과 수용, 그리고 자신의 중요성에 대한 필요충족이 심리 요법을 지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필요가 충족된다면, 사람들은 행복하고 친절하며 도덕적인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요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비참하고, 증오하며, 부도덕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 성경적 상담은 진정한 만족과 행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경건의 추구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 이기적인 사람을 비 이기적으로 만들 수 있는 심리 치료법은 없지만 하나님을 순종하는 종은 즐겁고 비이기적인 마음으로 남들에게 베푸는 것을 만족스럽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고후 9:7).

그렇다면 심리학은 성경적 상담과 함께 일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 추구하는 바 수단과 목표가 다르기때문입니다. 

세속적인 심리학은 시종일관 인간 및 인간의 생각으로 시작되고 끝나며, 그 목표는 자기신뢰를 통한 자아발견/자아재건/자부심입니다.  

반면에, 참된 성경적 상담은 내담자들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안으로 인도합니다. 성경적 상담은 목회 활동이며, 권면의 영적 은사의 산물이며, 그 목표는 하나님 신뢰함으로 말미암는 자아파쇄/성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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