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8.11.22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특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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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8]*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2.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신자의 특권(1)(롬 8:1-9)

Ⅰ. 사도는 참된 신자의 특유한 특권 하나를 들어 말하면서 이 특권에 속한 자들의 특성을 열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1절) 이것은 앞 장에서 우울한 불평과 갈등에 이어지는 그의 승리다. 곧 죄가 남아 있어서 괴롭히고 고통을 주지만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그것이 파멸을 가져 오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불만은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만 그러나 그는 겸손하게도 위로는 여기에 관심있는 모든 참 신자들에게 돌리고 있다.

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정죄가 없다는 사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특권이자 위로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그들에 대한 비난이 없다"는 식으로 얘기하지 않는다. 아직도 그 비난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비난이 무효화되고 고소가 취하된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정죄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식으로 얘기하지 않는다. 아직도 그걸 보고 있으며 몸에 소유하고 있어서 그걸 슬퍼하고 그것 때문에 자신들을 저주하는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에 가서 그들의 파멸을 가져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더 이상 십자가가, 고통이, 그 고통의 불쾌감이 없다"는 식으로 얘기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걸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주님의 채찍을 받기도 할 것이지만 그러나 세상과 함께 정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이 특권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서 오는 것이다. 그들이 믿음을 통해 그분과 연합한 덕분에 이처럼 안전을 확보한 것이다. 이들은 마치 도피성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으며 따라서 보복자의 피에서 보호를 받는다. 그분이 그들의 대변자이기에 이들을 처치해 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율법에 대해 이루신 속량에 관계된 이들이기에 더 이상 정죄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이들을 정죄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을 두고 한껏 기뻐하시는 것이다(마 17:5).

2. 이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정죄를 벗어나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른다"(흠정역 삽입)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특성이다. 어떠한 특별한 행동이 아니라 그들의 진로와 방향 전체에 대한 성격이다. 여기에 따르는 질문은 이것이다. 따라가는 걸음걸이의 원칙은 무엇인가? 육신인가 영인가? 아니면 옛 성품인가 새로운 성품인가? 타락인가 은혜인가? 이 중에 어느 것을 우리는 염두에 두며 이 중에 어느 것을 우리의 것으로 하며 이 중에 어느 것을 우리는 편들고 어느 것을 작별하고 있는가?

Ⅱ. 이 위대한 진리를 다음 절에서 그는 설명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이 특권을 누리게 되었으며 우리는 이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를 제시해 주고 있다.

1.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정죄가 없다"는 칭의의 특권과 "우리는 영을 쫓아 따라가는 것이요 육신을 좇아 다가가는 것이 아니다"(이것은 우리의 특권이라기 보다는 의무다)라는 성화의 특권, 이들은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되었는가? 그 기원을 살펴 보자.

(1) 율법이 그 일을 할 수 없다(3절).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할 수도, 성화시킬 수도, 죄책에서 벗어나게 할 수도, 죄의 능력에서 헤어나게 할 수도, 사죄나 은혜의 약속도 모조리 불가능하다. 율법은 그 어느 것도 완전하게 할 수 없다. "율법은 연약하였다." 어떤 이들은 율법이 그런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는 식으로 수작을 부리지만 맙소사! 그것은 그럴 힘이 없었다. 그런 복된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허약은 율법 자체의 어떠한 결함 대문이 아니라 "육신으로 말미암은" 곧 인간 본성의 타락 때문인 것이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율법에 이해 의롭게 될 수도 성결케 될 수도 없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없게 되었고 실패를 해도 행위 언약으로서의 율법은 무슨 대책을 강구할 수 없고 우리를 있는 그 상태에 그대로 내버려 둘 뿐이다. 아니면 그걸 의식적인 율법으로 이해해 보시라. 그것은 상처를 싸매기에는 폭이 좁은 붕대였다. 죄를 씻어 없앨 수 없었다(히 10:4).

(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잇는 생명의 성령의 법"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2절).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상대로 맺어진 은혜 언약은 공로와 은혜의 보고(寶庫)요 그리로부터 우리는 사죄와 새로운 성품을 받으며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곧 죄의 죄책과 능력에서, 율법의 진로와 육신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른 언약, 다른 주인, 다른 남편, "성령의 법" 아래 놓이게 되었으니 이 법은 성령을, 곧 영적인 생명을 주어 우리로 하여금 영생에의 자격이 가능하게 하는 법이다. 이 자유의 기초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업적에 담겨 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냈다"(3절). 보시라, 율법이 실패한 곳에 하나님은 또 다른 방법을 허락해 주신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을 가나안 복지 국경선에까지 데려 왔으나 그는 거기서 죽고 그들을 그냥 버려둔 셈이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모세가 할 수 없던 것을 해냈으니 그들에게 가나안 복지를 소유하게 해 준 것이다. 이처럼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을 그리스도께서는 해내셨다. 이에 대한 최선의 주석은 히브리서 10장 1-10절에 담겨 있다. 본문의 말뜻을 보다 명백하게 하기 위해 이런 식으로 읽어 보자. "하나님께서는 자기 외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과 죄에 대한 제물로 보내심으로 육신에게 죄를 정죄하셨으며 이것은 율법이 육신을 통해 해낼 수 없던 것이다."

① 그리스도의 모양.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그 자체로는 죄가 없었다. 그는 거룩하고 무흠하며 더렵혀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오직 죄악스러운 육신의 모양을 입으신 것이다. 이 타락과는 전혀 거리가 먼 그였지만 말이다. 그의 할례, 속죄, 세례 등은 모두 죄있는 육신의 모양을 그대로 입증하고 있다. 불뱀에게 물어 뜯긴 자국이 이들을 물어뜯은 뱀의 모양만 갖추었지 그 독은 하나도 없던 구리뱀의 모양으로 완전 치료되었다. 본래 하나님이신 분이 육신의 모양을 취하시는 것만도 고마운 일인데 거룩하신 분이 육신의 모양을 취하신 것은 더더욱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죄를 인하여," 여기에 최선의 희랍 사본은 콤마를 찍는다. 하나님은 그를 "죄있는 육신의 모양과 죄에 대한 제물로"(엔 호모이오마티 사르코스 하마르티아스) 보내셨다. 칠십인역은 죄에 대한 제물을 그냥 "죄로 인하여"(페리 하마르티아스)로 처리해 버리고 있다. 그리스도는 제물이었으며 그 일로 보냄을 받았다(히 9:26).

② 이 모양이 이룬 업적. 죄가 "정죄받았다"(죄를 정하사, 개역). 곧 거기에 더 없는 하나님의 죄에 대한 증오가 들어난 셈이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위해서 죄의 저주와 지배력이 부숴지고 제거된 것이다. 정죄받은 자는 더 이상 고소할 수도 지배할 수도 없다. 그의 증언은 무효며 그의 권위도 무효다. 이처럼 그리스도에 의해서 죄는 저주를 받고 말았으니 그게 살아 남아 있다 해도 성도들에게 남아 있는 그 죄의 생명은 사형선고받은 죄수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죄가 저주받음으로 사망의 무장이 해제되고 사망권을 뒤흔들던 악마가 멸망받게 된다. 죄에 대한 정죄로 말미암아 죄인이 정죄를 모면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들 때문에 죄가 되셨다(고후 5:21). 이렇게 죄가 되셨으니 그가 정죄받을 때 죄도 그리스도의 몸에서 곧 인성에서 정죄를 받고 만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의 공의에 대한 만족이 이뤄지고 죄인의 구원의 길이 열려졌다.

③ 이것의 복된 결과(4절). "율법의 요구"(율법의 의, 흠정역)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려함이다." 우리의 칭의나 성화에 있어서 율법의 의가 성취되었다. 율법을 어긴 데 대한 성화의 의는 그리스도의 철두철미 완전한 의의 전가에 의해 성취되었으니 그리스도의 의는 마치 속죄소가 법궤와 같이 크고 넓듯이 율법의 최대요구를 채워 주고도 남는다. 율법의 계명에 대한 순종의 의는 성령께서 사랑의 법을 우리 마음에 새겨 넣을 때 우리 속에서 성취되며 이 사랑이 곧 그 율법의 성취다(13:10). 율법의 의가 우리에 의해서 성취되지는 않아도 우리 속에서 성취된다는 사실은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다. 율법의 의도를 만족시켜 주는 것이, 바로 여기에, 곧 참된 모든 신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이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가는 우리들"에게서, 이상이 이 특권에 관계된 모든 자들의 묘사다. 이들은 육적이 아닌 영적인 원리에 따라 행동하는 자들이요 다른 이들에게는 그 율법의 의가 그들의 파멸을 가져옴으로 성취될 것이다.

2. 이 특성에 우리는 어떻게 응할 것인가.

(1) 우리의 마음을 살피자. 우리가 육신을 쫓는가 영을 쫓는가 하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의 마음 먹는 바를 살피면 된다. 곧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잇는가 영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가에 딸린 것이다. 육적인 쾌락, 세상적인 이득과 영광, 육신과 현재의 일들, 이 모든 것은 육신의 일들 곧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이 마음 먹는 바다. 하나님의 은총, 영혼의 복지, 영원에 대한 관심, 이 모든 것은 영의 일들, 곧 영을 쫓아 사는 사람들이 마음 먹는 바다. 한 인간은 그 마음 그대로다. 마음은 생각의 틀인 것이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 23:7). 어느 쪽을 가장 즐겁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어느 쪽을 가장 만족으로 여기고 있는가? 어느 쪽에 대해 계획과 모사가 따르고 있는가? 어느 쪽에 대해 더 머리가 잘 돌아가고 있는가? 세상  쪽인가? 우리 영혼 쪽인가? "그들이 육신의 일을 풍긴다"는 말씀이 있듯이 말이다(마 16:23). 우리의 취향이 무엇이며 어떠한 진리, 어떠한 소식, 어떠한 위로를 가장 반가와하며 맘에 들어하고 있는가? 이제 이 육적인 마음씨를 경계하기 위해서 그는 그것의 비참과 해독성을 보여 주며 그것과 영적 마음씨의 형언할 수 없는 탁월성과 위로를 비교하고 있다.

① 그것은 사망이다(6절). 그것은 영적 사망이요 영원한 사망에로의 탄탄대로다. 그것은 영혼의 죽음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요 누구와 연합하고 밀착하느냐에 따라 그 영혼의 생명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육적인 영혼은 죽은 영혼이니 철저하게 죽은 영혼이다.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 율법적으로 죄책을 받아 죽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상태가 육적이라서 죽어 있는 것이다. 죽음 속에는 모든 비참이 내포되어있다. 육적인 영혼은 비참한 영혼이다. 그러나 "영의 생각"(영적으로 마음씀, ‘프로네마 프뉴마토스), 곧 영적 취향(위로부터 보는 지혜, 곧 은혜의 원리)은 "생명과 평안"이다. 그것은 영혼의 지복이요 행복이다. 영혼의 생명은 그것이 마음을 통해 영적인 일과 연합하는데 달려 있다. 성화된 마음은 살아 있는 영혼이요 그 생명은 평화이니 곧 아주 아늑한 삶이다. 영적인 지혜의 모든 길은 평화의 길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생명이요 평화다. 영적인 마음씀은 영원한 생명과 평화의 시작이요 그것의 완성에 대한 확고한 담보물이다.

②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이다(7절). 이것은 전자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전자는 육적인 죄인을 가리켜 죽은 죄인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그를 가리켜 인간의 악마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원수일 뿐 아니라 적개심 그 자체다. 그것은 영혼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일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영혼의 반대요 그의 권위에 반기를 드는 것이요 그의 계획을 침해하는 것이요 그의 이익을 싫다는 것이며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속을 썩히는 것이다. 이보다 더한 적개심이 또 어디 있을 수 있겠는가? 원수는 화해를 시킬 수 있지만 적개심은 그게 불가능하다. 이 얼마나 육적인 마음씀에 대한 우리를 겸손케 하는 경고인가! 우리의 창조주요 소유자요 지배자요 위로자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적개심을 품으며 거기에 계속 젖어 있을 것인가?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 그는 "이는 하나님에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하나님의 율법의 거룩과 육적인 마음의 불결은 마치 빛과 어둠처럼 일치 불가능하다. 육적인 사람은 신의 은총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육적인 마음"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부숴지고 제거되는 수밖에 없다. 인간의 타락한 의지가 어떻게 죄에 매여 종살이하고 있는가를 보시라. 육적인 마음이 지배하는 한 하나님의 율법에 기울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서건 변화가 일어난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에 의한 것이지 인간 의지의 자유에 의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는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절)고 결론을 내린다. 육적이요 중생하지 않은 상태에 잇는 자들, 곧 죄의 지배력 하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는 것은 기쁘시게 하는 원리인 은혜와 기쁘시게 해 드리는 중보자인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잠 15:8),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 우리의 최대의 목적이요 이걸 육신에 있는 자들은 행할 수 없으며 아예 그게 부족하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는커녕 불쾌히 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상태와 특징을 살필 필요가 있다.

(2) 우리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가 없는가를 살피자(9절).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여기에 영혼의 상태와 조건이 천차만별이라는 게 드러난다. 성도들에게도 모두 육신과 영이 있다. 그러나 육신에 속하는 것과 영에 속하는 것은 정반대다. 그것은 이 둘 중에 어느 하나의 원리에 압도되고 굴복하느냐 하는 문제다. 마치 술에 빠진 사람과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것에 압도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제 우리의 질문은 우리가 육신에 속하는가 영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요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하고 있는가? 우리 속에 성령이 거한다는 것은 우리가 성령에 속해 있다는 최선의 증거다. 왜냐하면 거한다(dwelling)는 문제는 상호적이기 때문이다(요일 4:16):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성령이 좋은 뜻으로 중생치 않은 자들을 자주 찾아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성화된 자들 속에서는 항상 거하고 계신다. 거기에 자리를 펴시고 거기서 다스리시는 것이다. 그곳이 자기 집과 같으며 환영 받는데요, 거기서만 주권 행사를 하신다. 누가 이 집에 거하고 있으며 누가 다스리고 누가 지키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의 마음에 던져보지 않겠는가? 어느쪽 관심이 더 우세한가? 여기에 그는 일반적인 시련의 준칙을 덧붙이고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것(정말 신자가 되고 그의 자녀가 되며 종이 되고 그의 친구가 되어 그와 함께 연합하는 자)은 특권이요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실제로는 여기에 아무런 상관이 없으면서도 그걸 가졌노라고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그 얼마인가? 그의 영을 갖지 않은 자는 그 어느누구도 그의 소속이 아니다. 좀 더 이 말을 자세히 얘기해 보자.

① 그분처럼 영적인 자들은 그분이 그러했듯이 온유하고 겸손하며 자기를 낮추고 참으며 사랑이 있다. 그분의 영이 없으면 그의 발자취를 따를 수 없다. 우리 영혼의 틀과 성향이 그리스도의 패턴에 일치해야 한다.

② 하나님의 영의 지도를 받는 자는 그를 성화자로 교사로 위로자로 받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한다는 말과 똑 같다. 이 양자는 하나와 똑 같은 것이니 하나님의 영을 자신들의 규범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자들은 그리스도의 영을 자신들의 패턴으로 받아들여 거기에 일치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첫 자유의 특권에 속한 자들의 특성을 지금까지 묘사 했는데 이것은 다음에 이어지는 다른 특권에도 다같이 적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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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특권(2)(롬 8:10-16)

여기에 사도는 참된 신자에게 오는 두 가지 탁월한 혜택을 더 얘기하고 있다.

Ⅰ. 생명. 여기의 행복은 소극적인 행복 곧 정죄받지 않는 데 있는 게 아니고 적극적인 것이다. 곧 생명에로의 도약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말할 수 없는 행복이다(10, 11절).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그 영이 우리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다. 그분은 믿음을 방편으로, 마음에 거주하시는 것이다(엡 3:17). 이제 그리스도께서 거하고 계시는 당사자들의 몸과 영혼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얘기다. 다음에 이어지고 있다.

1. 물론 "몸은 죽은 것이다." 곧 몸은 약하고 죽어 가도록 되어 있으며 조만간 죽게 마련이다. 흙으로 된 집이요 먼지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확보하시고 약속하신 생명이라도 현재의 몸을 불멸하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죽어 있다. 곧 죽기로 예정된 것이요 사형선고를 받고 있다. 사형선고 받는 사람은 다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생명 가운데 있으면서도 우리는 죽음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몸이 아무리 튼튼하고 건강해도 죽은거나 마찬가지다(히 11:12). 이것은 오로지 "죄로 인하여," 곧 죄 때문이다. 몸을 죽이는 것은 죄다. "너는 흙이다" 할 때의 맨 처음 위협의 결과가 곧 이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만가지 이론을 덮어 놓고 보더라도, 우리 몸에 대한 애착은 당연히 죄를 미워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죄는 그 자체가 우리 몸에 대해서 원수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몸마저 죽어야 한다는 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하심의 증거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얘기다.

2. 그러나 영은 곧 생명이다. 곧 그것은 영적으로 살아 있다. 한 마디로 생명이다. 영혼 속의 은혜는 그것의 새 성품이다. 성도의 생명은 영혼 속에 담겨 있지만 죄인의 생명은 몸 이상 벗어나지 못한다. 몸이 죽어 흙으로 돌아가더라도 "영은 생명이다." 곧 살아 있어 불멸할 뿐 아니라 생명에게 삼킨 바 되는 것이다.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은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기에 합당하도록 이 육체의 흙과 짐으로부터 천래의 영이 해방을 받는 것에 불과하다. 아브라함이 죽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으니 그때도 그의 영이 생명이었기 때문이다(마 22:31, 32; 시 49:15 참조). 이 모든 것은 "의를 인하여" 곧 그 의 때문이다. 그들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가 더 나은 부분인 영혼을 사망에서 건져 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 속에 들어 있기에 곧 그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형상이 새로워졌기에 그 영혼이 보전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죽음에 이르러서는 크게 승화되어 성도들의 유업을 빛 가운데서 받아누리는 데 적합하도록 해 주시는 것이다. 영혼의 영생이란 하나님을 뵈옵고 향유하는 것인 만큼 이것이 성황의 의에 의해서 영혼에게 자격을 구비케 한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라"(시 17:15).

3. 마침내는 불쌍한 몸도 살게 되어 있다.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11절). 여호와는 몸의 편이다. 물론 죽을 때는 쓸모 없는 깨진 그릇처럼 제쳐지지만 하나님은 자기 손의 작품에 마음이 있으시며(욥 15:15) 흙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한 줌이라도 상실하지 않으실 것이다. 마침내는 육체가 영혼에 재연합 될 것이요 그에 일치하는 영광으로 덧입을 것이다. 더러운 몸이 새롭게 단장될 것이다(빌 3:21; 고전 15:42). 육체의 부활에 대한 두 가지 위대한 보장이 여기 언급되어 있다.

(1) 그리스도의 부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살리시리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은 모든 성도들의 머리와 첫 열매 그리고 선주자로서 그리된 것이다(고전 15:20). 그리스도의 몸도 선택 받은 모든 자의 죄를 전가했기에 무덤에 갇혀 있다가 마침내 그것을 깨친 것이다. 오, 무덤이여, 그렇다면 너의 승리는 어디로 갔는가? 우리가 다시 살아날 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덕분이다.

(2) 성령의 내주. 영혼을 일으키시는 동일한 성령께서 곧 이어 육체도 일으켜 세우실 것이다. "너희 안에 거하시는 영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몸은 성령의 전이다(고전 3:16; 6:19). 이제 이전이 얼마 동안은 고통을 받아 잿더미 속에 갇혀 있을지라도 곧 다시 재건될 것이다. 무너진 다윗의 성전은 제 아무리 높은 산이 그 길을 가로 막고 있어도 곧 개축되고야 말 것이다. 성령께서는 죽어 있는 메마른 뼈에 바람을 불어 넣으셔서 살아나게 하실 것이니 성도들은 육체를 입고도 하나님을 뵈올 것이다. 그러기에 사도는 우리가 육신대로가 아니라 영을 좇아 사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의무라고(12, 13절) 얘기하고 있다. 우리의 생명을 육신의 뜻과 바램에 내맡겨 두지 말아야겠다. 그에 대한 두 가지 이유를 그는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① 우리는 육신의 채무자가 아니다. 그것과 아무런 이해관계도, 거기에 특별히 감사해 할 이유도 아무런 속박관계도 없는 것이다. 우리의 육적인 욕망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영의 종으로서의 몸을 옷 입히고 먹이며 돌볼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은 필요 없다. 우리는 거기에 빚진 자가 아니다. 거기에 충성을 바치게끔 육신이 우리에게 해 준게 없다. 이 말은 우리는 그리스도와 성령에게 빚진 자라는 얘기다. 거기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덕 보고 있으며 우리의 소유와 행위 모두가 수 천 수만 개의 의무의 쇠고랑으로 거기에 묶여 있는 것이다. 그처럼 크나큰 사망에서 그처럼 속량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우리 구원자에게 깊이 빚진 자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전 6:19, 20).

② 그 결과를 보자. 이 모든 일의 결국은 무엇이겠는가? 여기에 생명과 죽음이, 축복과 저주가 제시되어 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곧 영원히 죽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육신을 기쁘게 하고 만족시켜 주고 종살이한 결과다. 곧 영혼의 파멸이니 두 번째 죽음이다. 진정한 죽음은 영혼의 죽음이요 성도들의 죽음은 수면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러지 않으면 "너희가 살리라" 곧 영원토록 살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다. "너희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모든 육신의 욕정과 집착을 꾹꾹 누르고 육체를 기쁘게 하고 달래는 일을 거부하면, 이것도 성령을 통해서 그렇게 하면, 하는 뜻이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이뤄 주시지 않으면 우리 독자적으로는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노력이 없으면 성령께서도 해 주시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는 이 진퇴양난에 처해 있는 것이다. 몸을 불쾌하게 해 줄 것인가, 영을 파괴할 것인가?

Ⅱ. "양자의 영"이야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의 또 다른 특권이다(14-16절).

1.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 관계에 들어간다(14절).

(1) 그들의 특성. 이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이다. 마치 생도가 그 배움에 있어서 교사의 인도를 받고, 여행자가 안내자의 인도를 받으며 복무중인 군인이 상사의 인도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다. 주의할 점은 짐승처럼 끌려 다니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성적인 피조물로서 사랑의 매는 줄에 의해 끌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를 받는다는 것이 모든 참된 신자들의 틀림없는 특성이다. 믿는 순간 자신을 굽혀 그의 안내를 받기로 하였으니 순종하는 가운데 그 안내를 받는 것이요 모든 진리와 모든 의무에 있어서 달갑게 따라 가는 것이다.

(2) 그들의 특권.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곧 입양에 의해서 하나님의 가족으로 쳐지며 그의 자녀로서의 사랑과 소유에 대상이 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아들된 자들에게는 영이 있다.

(1) 그 영은 그들 속에서 자녀의 성품을 기르고 있다.

①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15절).

첫째 이 영의 속박 속에 살던 자들은 그 시대의 흑암과 공포로 인해서 그렇게 된 구약시대 교회다. 휘장은 속박을 의미했다9(고후 3:15; 17 절 참조). 그 당시는 입양의 영이 오늘처럼 그렇게 풍성하게 내려지지는 않았다. 율법은 상처를 열어 놓기만 하지 치료하는 데는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너희는 더 이상 그런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그런 영을 받고 사는 게 아니다.

둘째 우리들 대부분이 회개하기 전에 놓여 있던 그 속박의 영을 생각하면 된다. 그 때 우리는 행 2:37에 있는 자들, 간수(행 16:30) 그리고 바울처럼(행 9:6) 성령의 의해서 죄와 진노의 확정판결을 받고 있었다. 그때는 이 성령 자신이 성도들에게 속박의 영이었다. "그러나"하고 사도는 말을 잇는다.  "이것이 너희에게는 지나간 얘기다." "심판관으로서의 하나님께서는" 하고 맨튼 박사는 얘기한다. "속박의 영에 의해서 우리를 중보자의 그리스도에게로 보내시고 중보자인 그리스도께서는 입양의 영에 의해서 우리를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에게 되돌려 보내신다." 하나님의 자녀는 속박의 두려움을 다시 맛보고 자신의 아들됨을 의문시할지 모르지만 복되신 성령께서는 다시는 더 이상 속박의 영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비진리를 입증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② 그러나 너희는 "양자의 영을 받았다." 인간들로서는 입양수속을 제시해 보여 줄 수는 있지만 그러나 정작 입양의 영-자녀의 성품을 주시고 입양해 가는 것은 하나님의 대권이다. 입양의 영이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게 하는 효성을 발동시키고 있으니 아버지로서 그분을 즐거워하며 아버지로서 그분에게 의지하는 일이 곧 그것이다. 자녀가 그 아버지를 닮듯이 성화된 자녀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다. 그러기에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기도가 여기서는 부르짖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간절한 마음뿐 아니라 자연스런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말 못하는 얘기들은 울음 소리로 그 요구 사항을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고 있으니 겸손하고도 자신 있게 기도하라는 뜻이다. "아바 아버지." "아바"는 "아버지,""나의 아버지"라는 뜻의 시리아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 희랍어 "아버지"(파테르)가 함께 쓰이고 있다. 왜 "아바 아버지"하고 둘을 다 쓰고 있는가? 그리스도께서도 기도하실 때 "아바 아버지여"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요(마 14:36). 우리는 이 아들의 영을 물려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랑어린 보챔이요 거기에 딸린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꼬마들은 아버지에게 뭘 요구할 때, "아빠, 아빠"하면 그만이다. 이보다 더한 웅변이 따로 없다. 이것은 입양이 유대인에게나 이방인 모두에게 공통적이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아바"라고 부를 수 있으며 헬라인들은 "아버지"(파테르)하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2) 그 영은 그들의 자녀 관계를 증거하고 있다(16절). 앞에서 말한 것은 성화자로서의 성령의 하시는 일이요 이번 일은 보혜사로서의 일이다. "우리 영으로 더불어……증거하시나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선한 상태에 대해서 자기 영의 증거는 받고 있지만 여기에 성령의 증거는 일치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평화를 말씀하시지도 않는데 스스로에게들 평화를 말한다. 그러나 성화된 자들은 하나님의 영이 있어서 그들의 영과 함께 증거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무슨 특별 계시를 통해서 하시는 게 아니라 성령의 일상적인 일을 통해서 하시고 있으니 곧 영혼에게 평화를 말해 주며 위로를 주는 방법을 통해서다. 이 증거는 언제고 기록된 말씀과 일치하며 따라서 성화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왜냐하면 마음에 있는 성령은 말씀의 성령을 거스릴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자녀의 성품과 성향을 갖지 않은 자들에게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이 자녀의 특권을 증거해 주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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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특권(3)(롬 8:17-25)

여기서 사도는 신자들의 네 번째 행복을 묘사하고 있으니 곧 미래 영광에 대한 자격이다. 이것은 우리의 아들됨(sonship)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자녀로서의 입양이 우리로 하여금 저 영광에로의 자격을 차지하게 하듯이 자녀로서의 성품 도한 여기에 일치하도록 우릴 준비시켜 주기 때문이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요"(17절), 세상적인 상속에 있어서는 이 법칙이 통하지 않는다. 오직 장자만이 상속자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들이 모두 상속자라는 면에서 장자(첫번 태어난)교회다. 하늘은 모든 성도들이 상속자로서 누리는 유산이다. 하늘은 모든 성도들이 상속자로서 누리는 유산이다. 그들은 물론 자신들의 공로가 무엇으로 이걸 사거나 획득했기에 이걸 받는 것이 아니라 상속자로서 받는다. 곧 순전히 하나님의 행동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이 상속자를 만드시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비록 이 세상에서는 연령 미달 상속자이지만 엄연한 상속자다(갈 4:1, 2). 그들의 현재 상태는 상속을 위한 교육과 준비상태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가진 게 없어 보이지만 반대로 풍족하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는가! 그러나 상속자의 명예와 행복은 그가 물려 받는 유산의 가치와 내용에 담겨 있는 것이다. 바람을 유산으로 받는 자들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 이 약속의 내용을 몇 가지 간추려 보자.

1. "하나님의 후사." 여호와 자신이 성도들의 상속의 몫이니(시 16:5) 선한 유업이다(6절). 성도들은 여호와를 그들의 유업으로 받는 영적인 제사장들이다(민 18:20). 하나님을 뵈옵고 하나님을 향유하는 것이 성도들이 물려받을 유업의 대종을 이룬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계 21:3).

2.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 증보자로서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의 상속자라는 말이 있고(히 1:2) 또 참 신자들은 그분과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계 21:7). 지금 그의 형제로서 그리스도의 영에 가담한 자들은 그의 형제로서 그의 영광에 가담할 것이요(요 17:24) 그와 함게 그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계 3:21). 주여,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높여 주십니까! 이제 미래 영광이 더 나아가서 현재 고통의 보상과 현재 소망의 성취로 얘기되고 있다.

Ⅰ. 성도들의 현재 고통의 보상. 이것은 풍성한 보상이다. "……면……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17절). 이 세상에서의 교회상태는 언제고 그렇지만 특별히 그때는 억눌린 상태였다. 당시 그리스도인이란 틀림 없는 고난자였다. 이제 이들의 고통을 위로하기 위해 그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나나을 받았다고 얘기하고 있다. 곧 그의 명예와 선한 양심의 증거를 위해 살았으니 그와 함께 영광을 받을 것이다. 다윗이 박해 받고 있을 때 그와 함께 고난을 받은 자들은 그가 왕관을 차지할 때 그와 함께 영전되었으며 그와 함께 지냈다(딤후 2:12).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의 수확을 명심해야겠다. 우리가 지금은 그를 위해 모든 걸 잃는 자가 되지만 끝에 가서는 그분이 계씨니 잃는 자가 될 수도 없거니와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은 복음이 이곳 저곳에서 보증하는 바이기도 하다. 이제 고난받는 성도들이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든든해지고 위로를 받게 되자 그는 이걸 저울에 비교하고 있다(18절). 양자 사이의 차이를 좀 보자.

1. 한 쪽 저울 접시에 그는 "현재의 고통"을 올려 놓는다. 성도들의 고통은 현재의 고통에 불과하다. 유한한 시간을 넘어서지 못하는(고후 4:17) 가벼운 고통이요 잠정적인 고통이다. 그래 그는 이 고통에 "중량미달"이라는 판정을 내린다. 저울에 달아보니 가볍다는 얘기다.

2. 다른 접시에 그는 영광을 올려 놓고 무게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한 무게가 거기 담겨 있음을 알게 된다. "나타날 영광" 현재로서는 저 영광을 향유하는 면에서 뿐 아니라 그 지식에 대해서도 부족하다(고전 2:9; 요일 3:2). 그것은 장차 계시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보아 온 것과 알아 온 것을 모조리 능가하고 마는 것이다. 현재의 하사품도 매우 달콤하고 매우 귀하지만 그러나 장막 뒤에 숨어 있어 나타날 것이 있으니 이것은 모든 것을 압도하고 말 것이다. "우리에게(우리안에서, 흠정역) 나타날," 우리에게 나타날 뿐 아니라 우리에게 보여질 것이요 우리 안에서 계시될 것이니 우리가 향유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속에 있으며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3. 그는 그 고통이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영광과 비교할 가치가 없다, ‘우크 악시아 프로스 텐 독산)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들은 이 영광을 공로로 물려받는게 아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충분한 공로가 못된다면 하물며 우리의 행동이랴? 이 고난이 저 영광을 진지하고 꾸준하게 추구하는 우리를 방해하거나 겁나게 해서는 안 된다. 이 고통은 잠시동안이요 하찮은 것이니 오직 몸에만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그 영광은 풍성하고 위대한 것이니 영혼에 관련된 것이요 영원한 것이다. 이것을 그는 계산에 넣고 생각한 것이다. "생각컨대"(나는 평가한다, logivzomai). 이것은 되는 대로의 성급한 생각이 아니라 아주 신중하고 깊은 사려의 소산이다. 스스로 마음 속으로 생각해 보고 양쪽 접시에 저울질도 해 본 후에 마침내 내린 결론이다. 이 현재의 고난에 대해서 세상이 가지는 편견과는 그 의미가 얼마나 천지차인가! "나는 평가한다." 마치 수입지출을 따지는 계리사처럼 말이다. 그는 먼저 현재의 고통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지불한 것을 종합해 보고 그게 아주 사소하다는 걸 발견한다. 그리고나서 그는 장차 나타날 영광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확보되는 것을 종합해 보고 그게 모든 이해를 벗어나 계산할 수 없게 무한하다는 걸 발견한다. 지출이 충분히 보상되고 적자가 무한대로 상쇄된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기를 겁낼 것인가? 그도 전에는 우리와 함께 고난을 받으신 분이니 보상에 있어서 뒷짐 지고 가만히 계실 분은 아니잖는가? 여기에 바울의 판단력이 그지없이 예리하고 뛰어난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이것을 계산으로만 안 것이 아니라 체험에 의해 알고 있다. 그는 현재의 이 고난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익히 알고 있었다(고후 11:23-28). 그는 하늘의 영광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고후 12:3, 4). 따라서 그는 이 둘을 다 알기에 이러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현재의 모든 고난 속에서도 우리의 영혼을 달래고 부축해 주는 것은 장차 나타날 영광을 믿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보다 더한 것은 없다. 그리스도를 위한 능욕이 보상으로 갚아 주실 것을 내다보는 자들에게는 부요로 보이는 것이다(히 11:26).

Ⅱ. 성도들의 현재 소망과 기대의 성취(19절 이하). 성도들은 이것을 위해 고난을 받는 만큼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확실하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에 의해 이 소망을 불러 일으켜 놓고 그들을 실망과 좌절로 몰지는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는 소망을 일으킨 자기 종들에게 말씀을 지키실 것이다(시 119:49). 따라서 천국은 달콤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소망이 지체되면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그 소망이 이뤄질 때는 그게 생명의 나무가 되기 때문이다(잠 13:12). 이제 그는 이 영광의 기대를 몇 가지 살피고 있다.

1. 피조물에게 있어서(19-22절). 이것이야 말로 위대하고 초월적인 영광이니, 모든 피조물이 그렇게도 학수고대하는 것이다. 여기서 얘기된 것은 몇 가지 난점이 있는데 주석가들을 더욱 당황하게 하는 것은 성경 다른 데서 이걸 가지고 비교할 다른 유사 구절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 "피조물"이란 말을 어떤 사람들은 이방 세계로 보고 그들이 그리스도와 복음을 기다리는 것이 묘사된 식으로 보는데 이건 억지다. 이 피조물은 자연의 전 구조, 특별히 이 낮은 세계의 전 구조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곧 전 창조계, 생물 무생물의 복합구조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것들이 상호조화와 의존 관계에서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형성하기에 다수명사 "피조물"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뿐이다. 이 네 구절에 담긴 사도의 의도를 다음 몇 가지로 살펴보자.

(1) 인간의 죄 때문에 이 피조물이 굴복하는 허무가 있다(20절). 인간이 죄를 범할 때 이 땅은 인간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요 그것과 함께 모든 피조물이 이 저주에 굴복하게 되었으니 가변적이요 가사적(可死的)이 된 것이다. "썩어짐의 종노릇"(21절) 인간의 타락에 의해서 피조물은 불결, 훼손, 그리고 불안전을 차지하게 되었다. 창조 세계가 얼룩투성이가 되고 그 아름다움은 사라진 것이다. 한 피조물과 다른 피조물 사이에 적대관계가 형성되고 하나하나가 변화되고 썩어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며 인간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회초리를 면할 길이 없게 되었다. 온 세상이 그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함께 빠져 죽게 되니 허무 그 자체에 굴복한 것이다. 온갖 종류의 피조물이 불에 의한 전면적인 파멸로 줄달음질하고 있으며, 또 그렇게 작정되어 있다. 그것들이 인간들에 의해서 죄의 도구로 사용, 아니 오용되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들의 허무성이다. 이 피조물은 그들의 창조주에 대한 불명예를 가져 오는 일을 하며 그의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고, 그분의 원수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한다. 피조물이 우리 욕정의 먹이와 불씨 노릇을 할 때가 바로 허무에 굴복하는 것이다. 곧 죄의 법에게 포로 노릇을 하는 것이다. 이것도 "자기 뜻이 아니다." 곧 자기들의 선택으로 그러는 게 아니다. 모든 피조물은 스스로의 완성과 성취를 바라고 있는데 이들이 죄의 도구로 전락할 때는 이것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들이 이처럼 종살이를 하며 질질 끌려 다니는 것은 그들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죄 때문이다.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아담이 이 짓을 대표적으로 저지른 것이다. 피조물이 그에게 데려져 왔을 때 그는 자신을 내어 줌과 동시에 이 모든 피조물도 마찬가지로 타락의 속박으로 내던진 셈이다. 하나님의 이 행위는 사법적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 때문에 피조물에게 선고를 내리셨으며 여기에 피조물이 굴복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멍에를 저 불쌍한 피조물들은 그것이 항상 그러지는 않을 것이라는 소망 중에 참고 있는 것이다.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피조물 자체가……는 소망 중에, ‘에프 엘피디 호티 카이’ 이하). 희랍 사본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동조하고 있다. 우리의 죄 때문에 허무에 굴복하게 된 불쌍한 피조물을 우리는 딱하게 여길 줄 알아야겠다.

(2) 이 피조물들은 이 허무와 타락 가운데 모두들 "탄식하며 고통하고"있다(22절). 이것은 은유법이다. 죄는 전 피조물에게 짐이다. 유대인들의 죄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온 세상을 흔들어 놓았다. 우상은 지쳐 있는 짐승들에게도 짐이었다(시 46:1). 인간의 죄를 보고 온 피조물 세계가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있는 것이다. 돌들이 성벽 너머로 소리지르며(합 2:11) 땅들이 소리지르고 있다(욥 31:38).

(3) 이처럼 짐을 지고 끙끙대는 피조물이 만물의 회복기가 차면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21절). 더 이상 그들이 허무와 썩어짐에 굴복하지 않으며 지주의 열매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이 낮은 세계가 새롭게 될 것이다. 새 하늘이 서면 새 땅도 생길 것이다(벧후 3:13; 계 21:1). 그리고 이 모든 피조물에게 그들에게 적합한 영광이 수여되리니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저들의 크나큰 영전이 아닐 수 없다. 불도 마지막 날에 가서는 소멸하고 파괴하는 불이 아니라 정련하는 불이 될 것이다. 짐승들의 혼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을 살펴 보면 이들도 회복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걸 반대한다면 영화롭게 된 성도들에게 이들은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아담이 순수한 상태에 있을 때 그랬듯이 저들이 여러모로 쓰여질 것이라는 걸 예상할 수 있다. 그것이 저들의 창조주의 지혜, 능력 그리고 선하심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라면 이것으로 족하다(시 96:10-13; 시 98:7-9 참조). "하늘이여 여호와 안에서 즐거이 노래하라. 저가 임하시리라."

(4) 그러므로 이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을 학수고대하고 있다(19절).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습을 들어낼 것이다. 현재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감추인 자들이다. 마치 죽정이 더미 속에 감춰진 밀알처럼 말이다. 그러나 마침내는 모습이 들어나고 말 것이다. 아직은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날지 알 수 없으나(요일 3:2) 그 때 가서는 그 영광이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각자의 모양에 따라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피조물의 구속도 그 때까지는 보류되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저주 아래 놓이게 된 것이 인간과 함께, 인간 때문에 구원을 받을 것이다. 지금 피조물에게 붙어 다니는 모든 저주와 더러움은 이 지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은 자들이 그와 함께 지상에서 왕노릇할 그 때 가서 모두 깨끗하게 씻어 없어지고 말 것이다. 이것을 온 피조물 세계가 바라고 기다리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짐승에게 친절해야 하는 좋은 이유가 될 수도 있다.

2. 새로운 피조물인 성도들(23-25절).

(1) 성도들이 이걸 기대하는 근거. 우리의 바램을 불러 일으키고 우리의 소망을 북돋아 주며 양면에서 우리의 기대를 부풀게 하는 것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우리가 받은 그것이다. 첫 열매가 전체를 성화하고 확보한 것이다. 은혜는 영광의 첫 열매요 영광의 시작이다. 광야에서 한 다발의 포도덩굴을 받은 우리는 천상의 가나안에 가서 풍성한 수확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이뿐 아니라"(그들뿐 아니라, 흠정역), 곧 성령의 첫 열매같은 행복을 맛볼 수 없는 피조물뿐 아니라 현재 그걸 풍성히 받아 누리고 있는 우리들까지도 더 풍성하고 더 위대한 것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성령의 첫 열매를 받음으로 우리는 아주 귀중한 것을 소유한 셈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갖고자하는 모든 걸 다 가진 것은 아니다. "우리까지도 탄식하여"(우리 속에서 탄식한다), 이 말은 이 소망의 강도와 은밀성을 암시한다. 마치 위선자가 자리에 누운 채 먹을 것을 달라고 소리치듯 고래고래 큰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니라 숨을 죽여가며 안타까와하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그 어느 것보다도 하늘로 직행하는 것이다. 또 이것을 "우리가 우리 가운데 탄식한다"로 볼 수도 있다.       온 교회가 한가지, 만장일치로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하고 바라는 것이다. 탄식이란 더없이 절실하고 간절한 소망이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니 그것이 지체하는 바람에 영혼이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얘기다. 현재 우리의 받아 누리는 혜택과 위로는 많은 위대한 탄식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 탄식은 죽음의 고통이 아니라 해산의 고통 같은 것이니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전조로 하는 탄식이다.

(2) 이 기대의 대상. 이처럼 우리가 바라고 기다리는 것은 무엇인가? 뭘 갖고자 하는가?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이다. 영혼이 인간의 중심부이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이 몸을 위해 많은 영광과 존귀를 준비해 놓으셨다 부활이라는 말을 여기서는 "몸의 구속"이라 부르고 있다. 그때 가서 그것이 사망과 무덤의 능력, 그리고 썩어짐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니 더러운 몸이지만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몸처럼 새롭게 단장되고 아름답게 될 것이다(빌 3:21; 고전 15:42). 이것이 곧 입양이다.

① 이것은 온 세계, 천사와 만민들 앞에 들어나는 입양이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지만 그게 드러나지 않고 구름에 공표하실 것이다. 지금 현재는 기록되고 날인되어 봉인된 입양 증서가 그때 가서는 선포되고 공포될 것이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그랬듯이 성도들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 자녀로 공표될 것이다(1:4).

② 그것은 완전 성취된 입양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몸과 혼이 있는데 이 몸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광된 자유를 얻기까지는 그 입양이 완전한 게 아니다. 그러나 그때 가서는 그게 완성될 것이다. 우리 구원의 대장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끄실 것이다(히 2:10). 이것이 우리의 기대하는 바요 거기에 우리의 육신이 소망을 두고 있다(시 16:9, 10). 우리 모두는 이 약속된 날을 기다리고 있으니 모든 게 변화되어 그가 우릴 부르면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는 그날, 당신께서 당신의 손의 일에 마무리를 지으시는 그 날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욥 14:14, 15).

(3) 이것은 우리의 현재 상태와 일치한다(24, 25절). 우리의 행복은 현재 소유에 있지 않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다른 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이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현재 상태를 시련과 단련의 상태로 삼고 있으니 그 보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사람은 신용거래를 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은혜 가운데 하나는 소망이요(고전 13:13) 이것은 그 소망의 대상이 좋은 것이라는 걸 뜻한다. 신앙은 약속을 존중하고 소망은 그 약속된 것을 존중한다. 신앙은 보이지 않은 것들의 증거요 소망은 이 보이지 않은 것들을 기대하는 것이다. 신앙은 소망의 어머니다. "우리가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 영광을 소망하는 우리는 이것이 오는 길목에서 당하는 여러 고통과 그 지연을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길이 험하고 거칠어도 오실 자는 오시고 말 것이요 지체하지 않으리니, 따라서 그것이 지체하는 것같이 보여도 그분을 기다리는 게 우리로서는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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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특권(4)(롬 8:26-28)

사도는 여기서 참 신자의 두 가지 특권을 더 얘기하고 있다.

Ⅰ. 기도에 있어서 성령의 도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보지 못하는 것을 소망하고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기도하고 있어야 한다. 소망은 바램을 전제로 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바램이 곧 기도다. 우리가 탄식하는 것이다.

1. 기도에 있어서 우리의 약점.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고 있다."

(1) 우리의 간청의 본질에 있어서 우리는 뭘 달라고 물어야 할지 모르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상황을 판단하는데 있어 역부족이다.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좋은 것, 흠정역)인지 누가 아는가?"(전 6:12) 우리는 다분히 근시안적이요 육신의 편에 기울어 있는 만큼 목적과 방법을 구분하기 어렵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마 20:22). 우리는 과일이 익기도 전에 먹지도 못할 걸 달라고 졸라대는 어린애와 같이 어리석다(눅 9:54, 55).

(2) 기도의 방법에 있어서 우리는 어떻게 기도할 줄 모르고 있다. 좋은 일을 그저 행하는 것으로 족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걸 더 좋게 질서정연하게 하느냐가 문제다. 여기에 우리는 가끔 당황하는 수가 많다. 은혜가 약하고 애정이 매마르며 생각은 중구난방인 터에 "마음이 기도하는 걸 보기"가(삼하 7:27) 그리 쉽지 않다. 사도는 이것을 일인칭으로 "우리가……알지 못한다"고 말하는데 자기 자신도 이 속에 낀다는 뜻이다. 기도에 있어서 어리석음, 허약함, 그리고 마음의 산만, 이것은 성도라면 누구나 불평하고 있는 점이다. 바울같이 위대한 성도가 뭘 위해 기도해야 할 지 모르고 있었다면 우리가 뭔데 자력으로 이 힘을 얻겠다고 헤멜 것인가!

2. 이 기도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성령께서 주시는 조력.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기도하는 데 있어서 연약한 것을, 곧 그것 때문에 우리가 당황해 하고 있는 걸 거들어 주신다는 얘기다. 성령은 말씀 가운데서 도우신다. 곧 여러 가지 규범과 약속이 말씀 가운데 있어서 우리를 도와 준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마음 가운데 있어서, 우리 속에 거하면서, 우리속에 역사하면서, 은혜와 간구의 영으로서, 특별히 우리가 고통받는 상태에서 실패하기 쉬울 때 당하는 연약함을 도와  주신다. 이 일을 위해 성령이 부르신 바 되었다. "도우신다"(쉬난틸람바네타이), 곧 "우리와 함께 들어 올린다, 아니면 우리 맞은 편에서 들어 올리듯이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다. 우리의 노력을 도와주고 우리의 가진 힘을 도와주는 것이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서 성령이 도와주실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성령께서 앞서 가시면 우리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할 수 없고 하나님은 우리 없이 하지 않으시려 한다.  무슨 도움이 왜 오는가. "성령이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곧 성령께서 우리 요구 사항을 다 아시고 우리의 탄원을 대신 위해서 올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있고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계신 것이다. 기도하는 남은 자에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은혜로운 대책을 강구하셨는가를 생각해 보시라. 계몽하는 영으로서의 성령은 뭘 위해 기도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성화의 영으로는 기도하는 은혜를 위해 일하시고 그걸 불붙여 주시며 위로의 영으로서는 우리의 공포를 달래시고 모든 좌절에서 건져내 주시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께 향한 우리의 모든 바램과 호흡의 원천이다. 이제 이 성령의 중보의 기도의 특성을 살펴 보자.

(1)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령께서 이루시는 바램의 강도와 열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갈 만하다. 한마디 말을 내뱉지 않는 곳에도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수가 있다. 모세가 그랬고(출 14:15) 한나가 그랬다(삼하 1:13). 대언자로서 우리 속에서 성령이 이루시는 것은 우리 기도의 열변과 웅변이 아니라 이 기도의 믿음과 열정이다. "말할 수 없는," 영혼은 시험과 고통의 뒤범벅 속에 갈피를 잡지 못한 나머지 우리는 뭘 얘기해야 하고 어떻게 얘기해야 할 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언의 기도를 드리는 성령이 등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아바, 아버지"하는 정도에 그치고 그에게 겸손한 용기를 가지고 나머지를 맡겨 버릴 때 성령의 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뜻대로"(27절). 마음 속의 성령은 말씀 속의 성령을 거스리는 법이 없다. 하나님의 뜻에 거스리는 바램이 성령에게서 나올 수 없다. 우리 속에서 일하시는 성령은 더더욱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녹여 버리는 것이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3. 이 대언의 기도의 성공은 틀림없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27절). 그의 모든 종교가 입에 달린 위선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그의 모든 위장을 속속들이 알고 계시다는 사실보다 더 더러운 게 없다. 반대로 자신의 일을 마음으로부터 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께서 마음을 꿰뚫어 보신다면 자기가 표현할 말이 없어 못 표현하는 자기의 바램을 보시고 들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구하기 전부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알고 계신다(마 6:8). 그는 우리 속에 있는 자신의 영의 마음이 무엇인지도 알고 계신다. 그리고 그는 아드님의 우리를 위한 기도를 언제고 들어주시듯이 마찬가지로 우리 속에서 대언의 기도를 하고 있는 성령의 기도도 언제고 들어 주신다. 그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말에 있어서 이보다 더 주의 백성에게 위로가 되는 게 또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에게 그의 뜻대로 구하면 주실 것이다"고. 그러나 어떻게 하면 그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인가? 이 사람아, 성령께서 그걸 가르쳐 주시잖는가! 야곱의 후손이 구한 것이 결코 허사로 끝나는 일은 없었다.

Ⅱ.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의 유익을 위한 모든 섭리의 일치(28절). 여기에 이 모든 신자들의 특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수많은 역경 속에 갇혀 있지 않느냐는 반론이 나올 만하다. 성령께서 이들을 위해 대언의 기도를 하고 있지만 그들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물론 당연한 얘기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신자들의 처지가 어떠하든 이 모든 것이 합하여 그들의 유익을 가져오고 있다는 이 점에 있어서 성령의  대언의 기도는 언제고 효과적이다.

1. 이 특권에 관련된 성도들의 특성. 참으로 성화받은 자들 모두에게 공통되는 특성이 여기 묘사되어 있다.

(1)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 말은 최고 선이요 최대 목표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영혼의 애정의 모든 표현을 다 포함하고 있다. 온갖 섭리를 유용하고 유익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의 행동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고 선한 일이면 다 편들기 마련이다.

(2) "그들은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 곧 영원한 목적에 따라 유효하게 부름받은 자들이다. 이 부름은 유효하다. 우리의 어떠한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2. 성도들의 특권은 이것이니 곧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다. 그들에게 관계된 하나님의 모든 섭리가 그렇다는 얘기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이들을 위한 것이다(시 57:2). 그들의 죄는 하나님의 실천이 아니었다. 물론 그의 죄 허용이 이들에게 유익하게 작용했지만 말이다(대하 32:31).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섭리는, 자비로운 섭리나, 압박하는 섭리나, 개인적이거나 공공연한 것이거나, 모두 그들의 것이다. 이게 모두 선을 위한 것이다. 요셉의 고통같은 경우처럼 현세적인 유익을 위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 영적이요 영원한 유익을 위해서다. 이것이 유익한 것은 그들의 영혼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건 간접적으로건 각각 섭리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영적 유익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으니 이들을 죄에서 떨어져 나가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게 하며 세상으로부터 멀어져가고 하늘에 적합하도록 하는 것이다. "협력하여 이룬다." 마치 의술이 의사의 의도에 따라 여러 방면에서 신체를 위해 작용하듯이 모두 환자의 유익을 위해 나가는 것이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이룬다." 약속의 여러 가지 성분이 의도에 합치하듯 그렇다는 얘기다.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일을 다른 일에 비춰 설정하신다(전 7:14). "이루다"(쉬네르게이)는 복수명사에 쓰인 단수동사로서 섭리와 이에 따르는 모든 목적의 조화를 암시한다. 모든 바퀴가 한 바퀴와 같은 것이다(겔 10:13). "그가 모든 일이 합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고 하는 번역도 있다. 섭리 각각의 특별한 성격 때문이 아니라 이 섭리들 속에서, 그것과 함께,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나님 말씀과 우리 자신의 체험 그리고 모든 성도들의 체험에 비춰 보아 우리는 확실히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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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특권(5)(롬 8:29-30)

사도는 참 신자들의 행복의 여러 가지 요소를 평가한 뒤에 이제 이모든 것의 기초를 제시하고 있으니 그는 그걸 예정해 두고 있다. 이 귀한 특권들이 언약의 특성에 따라 우리에게 전달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모든 것은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경륜에 기초한 것이다. 우리 구속의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헛수고하지 않게 하려고, 그의 힘과 생명을 공연히 허비하지 않게 하려고 그에게 남은 자가 주어져 있으니 곧 그가 보게 될 후손이다. 이것은 여호와의 기쁨이 당신의 손에서 더욱 더 커지게 하려는 뜻에서다. 이것을 더 설명하기 위해서 그는 우리에게 우리 구원의 순서를 제시하고 있으니 깨어질 수 없는 황금 사슬이다. 여기에는 네 가지 이음이 있다.

Ⅰ. "하나님이 미리 아시니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하나님께서 목적으로서의 영광과 행복을 위해 설계하신 모든 것을 그는 수단으로서의 은혜와 성결에 어울리게 하신다. 그가 거룩한 것으로 미리 안 자들을 거룩하게 예정하신 게 아니다.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는 인간의 나약하고 변덕스런 의지에 좌우되어 굴러 다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에 대한 예지는 그들을 사랑한 것으로 얘기되는 그 영원한 사랑과 동일하다(렘 31:3).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아시는 것은 그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과 동일하다(시 1:6; 요 10:14; 딤후 2:19; 11:2 참조). 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사랑하고 있다는 뜻을 종종 내포한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란 말이 있다(벧전 1:20). 똑같은 말이 "예정"이라는 말로 옮겨지기도 한다(벧전 1:20). "미리 아신 자들"은 곧 자기의 친구요 총아로 계획한 자들이란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이름으로 너를 안다"고 말씀하셨다(출 33:12).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아신 자들을 그는 그리스도에게 일치하도록 예정하셨다.

1. 성결은 그리스도의 형상에 대한 우리의 일치에 있다. 이것이 성화의 전부요 이에 대한 위대한 귀감과 모범은 그리스도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살고 행하며 그리스도처럼 고난을 참고 이겨낸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들어낸 모습이요 성도들은 이 그리스도의 형상에 일치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되찾고 하나님의 형상이 새롭게 된 것은(이 둘에 인간의 행복이 담겨 있다) 그리스도의 중보와 개입 때문이다.

2.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애정을 가지고 예지하신 자들 모두를 그는 그리스도와 일치하도록 예정하셨다. 그리스도에게 우리 스스로를 일치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당신께서 우리를 그에게 내어 주신 데서 연유하며 우리를 그에게 내어 주심에 있어서 그는 우리가 그의 형상에 일치가능 하도록 예정하셨다. 따라서 선택교리를 가리켜 방종의 교리라고 떠들어대면서 그것이 죄를 조장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갖잖은 중상이다. 마치 목적이 수단과 분리되고 행복이 성결과 분리된다는 식이다. 그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형상에 대한 일치를 떠나서는 자신들의 선택을 알 수 없다. 선택받은 모든 자들은 성화를 위해서 선택받았기 때문이다(살후 2:13). 확실히 그것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일치하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믿기 위해서 세상과 짝해야 된다는 식의 시험일 수 없다.

3. 여기에 주로 목적하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니 그가 "많은 형제 중에 맏아들"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께서 위대한 왕일 뿐 아니라 위대한 귀감이 되는 영광을 누리시도록 하려는 것이다. 다른 면에서 뿐 아니라 이 일에 있어서도 그에게 탁월성이 있게 하려는 것이다. 율법 시대에는 맏아들을 통해서 모든 자녀들이 하나님께 바쳐졌다. 맏아들은 가족의 우두머리요 그에게 나머지 가족이 의존했었다. 이제 우리 성도들의 가정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께서 이 맏아들의 영광을 누려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형제들이 많다는 점이다. 한때 한곳만 보면 극소수인 것 같지만 한데 모이면 그 수가 무수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업이 확보되게 하기 위해서 일정한 숫자가 예정되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만일 이 사건이 우연에 내맡겨지고 인간의 덧없는 의지에 내팽겨졌더라면 그리스도께서는 극소수, 아니 전혀 한 명도 없는 형제의 맏아들이 되었을 것이니 부하가 없는 대장이요 신하가 없는 왕과 같은 것이다. 이것을 방지하고 그에게 많은 형제들을 확보하기 위해서 절대적인 섭리가 공포되고 그 일이 확인된 것이다. 곧 그가 그의 후손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 그의 형상에 일치하도록 예정된 나머지가 잇는 것이다. 이 섭리는 선택된 인류의 성결과 행복에서 그 성취를 이룰 것이다. 그러므로 흑암의 모든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아주 많은 형제 가운데 맏형이 되실 것이다.

Ⅱ.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이것은 외적 소명(선택받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의 경우다, 마 22:16; 22:14)이 아니라 내적이요 효과적인 소명이다. 전자는 귀에까지만 오지만 후자는 마음에까지 미친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은혜와 영광에로 예정하신 자들을 그는 시간이 차면 유효하게 부르신다. 이 소명은 우리가 그 소명에 응할 때 유효적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소명에 응하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끌어 당겨 죄와 진노를 확신시켜 주고 이해력을 깨우치고 뜻을 숙이게 하여 약속 가운데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설득하며 힘 주실 때, 곧 그의 능력의 날에 우리가 자발적이도록 하실 때만 가능하다. 그것은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하나님, 그리스도, 그리고 하늘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게 하며 죄와 허무에서 은혜, 성결, 그리고 성실을 우리의 수단으로 삼게 하는 유효적 소명이다. 이것이 복음의 소명이다. "또한 부르시고," 선택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서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선택받은 그 상태로 부름받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택을 확실하게 하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소명을 확실하게 하는 길밖에 없다(벧후 1:10).

Ⅲ.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유효적 소명을 받은 자들은 모두 의롭게 된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사면을 받고 의로 받아 들여지는 것이다. 이들이 "법정에서 옳다"(recti in curia)는 판정을 받은 것이다. 그들이 과거에 지은 어떠한 죄라도 이들을 불리하게 만들거나 이들을 저주할 수 없다. 책에서 이미 그어지고 쇠고랑이 벗겨졌으며 재판석은 공석이요 기소는 번복되어 더 이상 형사범 취급을 받는 게 아니라 친구로서의 총애를 받으며 소유되고 사랑을 받는 것이다. 이처럼 죄악의 용서를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싫다고 복음 소명에 끝까지 버티는 자는 죄책과 진노 아래 거할 수밖에 없다.

Ⅳ.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타락의 능력이 유효적 소명에서 박살나고 죄의 죄책이 칭의에서 제거되었으니 이제 방해가 되는 건 깨끗이 없어진 셈이요 어느 것도 영혼과 영광 사이에 끼어 들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이미 과거지사로 얘기되고 있는 점을 명심하라. 그것이 확실한 것이기에 "그가 영화롭게 하셨다." 그러기에 그는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거룩한 소명으로 우리를 불러 "내셨다." 모든 선택받은 자들의 영원한 영화,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의 설계는 성취된다. 이것이 지금까지 계속 그가 목적하던 바이니 곧 하늘 나라에 이들을 데려 가는 것이다. 영광보다 못한 것은 그 어느 것도 하나님으로서 가지는 그들과의 관계를 성취할 수 없다. 그러기에 그가 그들을 위해, 그리고 그들 속에서 행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는 바로 이 점을 마음에 두신 것이다. 이들이 선택 받았다고? 그렇다. 구원에도 선택받은 것이다. 그들이 부름을 받았다고? 그렇다. 그의 하늘 나라와 영광에로 부름 받은 것이다. 다시 태어났다고? 그렇다. 그것은 썩어지지 않는 상속에로 태어난 것이다. 고통을 받는다고? 그렇다. 그것은 이들에게 그의 무한하고 영원한 영광의 무게를 더하시려고 고통을 주신 것이다. 이 모든 일의 원 저자는 하나님이시라는 걸 명심하시라. 예정하시고, 부르시며,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 자신이다.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창조받은 의지도 너무 변덕스럽고 창조받은 능력도 너무 약하기에 이상의 일이 어느 하나라도 피조물에게 맡겨졌더라면 이 모두가 흔들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손수 시종일관 이 일을 처리하셨으니 우리가 계속 그에게 의지하고 굴복하며 모든 찬송을 그에게 돌리게 하려는 뜻에서다. 곧 온갖 면류관이 그 보좌 앞에 내던져지게 하려는 뜻에서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과 소망에 더없이 막강한 힘이다. 하나님으로 말하면 그의 길과 그의 일은 완전무결하기 때문이다. 기초를 놓으신 그분께서는 그 위에 건물을 지으실 것이요 대들보가 마침내 큰 소리로 외치는 가운데 놓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은혜로다. 모든 것이 은혜로다. 하고 외치는 것이 우리의 영원한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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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특권(6)(롬 8:31-39)

사도는 신자들의 특권에 대한 멋진 강론을 모든 성도들의 이름을 빌어 거룩한 승리로 끝맺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와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누리는 무한히 위대하고 귀한 특권을 광범위하게 다룬 그는 마치 뛰어난 웅변가처럼 결론을 내린다. "그런즉 이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이상에서 얘기한 모든 걸 어떻게 우리의 것으로 할 것인가? 그는 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칭송하는 일에 압도되어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높낮이와 그 폭을 신기하게 여기는 투다. 일반 사물은 우리가 알면 알수록 그만큼 덜 신기하게 여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의 신비에 젖어 들면 들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욱 그걸 칭송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이 여기에 할 말을 잊었다면 우리로서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하다. 바울의 얘기는 뭣인가? 바울이 승리의 병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갔다면 바로 이런 식일 것이다. 그는 담대하고 지고한 정신과 유창하고 풍부한 표현력으로 이 모든 특권을 생각한 나머지 자신과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그는 긴 장갑을 내던지며 도전을 하고 있으니 곧 성도들의 모든 원수들에게 실력껏 덤벼 보라는 듯이 이들에게 대들고 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이 도전의 근거는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는 데 있다. 이것으로 그는 우리의 모든 특권을 종합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는 사실은 모든 뜻을 내포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우리하고 화해되어 있을 뿐 아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으며 우리와 계약 관계에 있어서 그의 모든 속성이 우리를 위한 것이요 그의 모든 약속이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의 전 존재와 소유와 그리고 행동이 당신의 백성을 위한 것이다. 그는 모든 걸 이들을 위해서 베푸신다. 그가 이들의 뜻에 반대되는 처사를 하는 듯해도 그는 이들 편이시다. 그렇다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우리를 거스려 승리하며 누가 우리의 행복을 방해할 것인가?" 제 아무리 그들이 위대하고 힘센들, 제 아무리 수효가 많고 막강한들, 제아무리 악독한들, 저들이 뭘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가 그의 사랑 안에 머무는 한 우리는 담대하게 저 모든 흑암의 권세를 무찌를 수 있는 것이다. 사탄에게 재량껏 죄악을 퍼부어 보라지. 그는 쇠고랑을 차고 있지 않는가.  세상더러 할 짓을 다해 보라지. 이미 정복된 세상이 아닌가. 권세자들이나 능력은 약탈당하고 무장 해제되고 항복하고 말았으니 이 모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데 누가 감히 우리를 상대로 싸우려 할 것인가? 좀 더 상세하게 살펴 보자.

Ⅰ. 우리가 부족할 때는 언제고 보급이 대기하고 있다(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한……이가……." 누가 우리를 상대해서 우리의 위로를 앗아갈 것인가? 우리가 찾아갈 샘이 있는데 누가 우리의 물줄기를 끊을 것인가?

1.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일을 생각해 보시라. 거기에 우리의 소망이 세워져 있다. "그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다." 아버지께서 우리의 구원을 시도하는 데 있어서 그는 자기 아들과 헤어지는 것도 불사하셨으니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는 데 있어서는 아낄 수 없는 선물로 생각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처럼 당신의 아들, 독생자, 외아들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가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아야겠다(창 22:12). 그보다 못한 것으로는 인간을 구할 수 없고 인간이 멸망할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내 품에서 떠나가도 가게 내버려 두겠다는 심정이다. 이처럼 그는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를 내어 주셨다." 곧 모든 선택받은 자를 위한 것이다.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우리의 모든 유익뿐 아니라 우리를 대신해서 죄 속량이 되는 속죄 제물로서 내어 준 바 된 것이다. 그가 이일을 시행하심에 있어서 그는 이 아들까지도 아낌없이 내어 주신 것이다. 그가 자기 외아들이었지만 우리를 대신한 죄가 된 이상 여호와께서는 기쁘게 그를 매질하신 것이다. 저 큰 빚을 한푼도 "그는 그에게 경감해 주지 않으셨다"(우크 에페이사토, 8:32). 오히려 그 책임을 정통으로 물으신 것이다. "오, 칼이여 깨여라.": 그가 "자기 외아들을 아끼지 않으신 것"은 우리를 아끼시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우리는 그에게 불실했을 뿐인데도 말이다.

2. 그가 뭘 해 주실 것으로 기대할 것인가. 그는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실"것이다.

(1) 이 말은 그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신다는 뜻이다. 만물이 그에게 주어져 있으니 이 모든 것이 그와 함께 우리를 위해 주어질 뿐 아니라 그와 함께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우리를 획득하기 위해 자신이 그만한 희생을 치르셨으니 분명코 그걸 우리에게 적용하는 걸 주저하지 않으실 것이다.

(2) 그는 그와 함께 모든 걸 거져 풍부하게 주실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좋은 것은 모조리, 우리가 더 이상 바랄 수 없을 정도로 주실 것이다(시 34:10). 무한한 지혜자는 우리에게 그게 유익한 것인지, 필요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잘 판단할 것이다. "은사로 주다"(거저 주다. 흠정역). 주저하지 않고 거져 준다는 뜻이다. 곧 그의 은총을 언제든지 우리에게 주시려고 준비상태에 있다는 얘기다. 이것은 또 거저, 보상을 바라지 않고, 돈없이 값없이 준다는 얘기다. "아니하시겠느냐?" 더 위대한 일은 하시고도 더 못한 일은 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말인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렇게도 큰 선물을 우리 위해 주신 이가 친구가 되고 자녀가 된 지금에 와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거절하신다는 게 상상이라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부족사항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우리를 위해 왕관과 하늘 나라를 예비하신 분이니 그리고 가는 길목에서 필요한 물건은 충분히 충당해 주시고도 남을 것이다. 우리에게 때가 차면 자녀의 상속을 계획하신 분이니 그 동안 필요한 걸 모르고 지내도록 해 주실 것이다.

Ⅱ. 우리에게는 모든 비난에 대한 대답이 준비되어 있으니 모든 저주에 대한 보증이다(33, 34절). "누가 능히 송사하리요?" 율법이 그들을 고발하는가? 그들의 양심이 그들을 비난하는가? 형제들의 고발자인 악마가 하나님 앞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고발하고 있는가? 이 모든 고발을 묵살하는 대답은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는 말씀이다. 인간들은 바리새인들처럼 스스로를 의롭다고 정당화할지라도 그들에 대한 비난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시면 모든 게 끝이다. 그는 심판관이요 왕이시며 피해 당사자요 그의 판단은 진리에 따른 것이니 조만간 온 세상이 그의 마음에 합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고발자들을 불러 내 도전하는 것이다. 의롭다 하시는 이가 의롭고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데는 그들도 모두 나자빠지지 않을 수 없다. "누가 정죄하리요?" 그들의 고소내용이 불실한 게 뻔해도 이들은 당장 저주하려 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체포령에 반대하여 내세우는 항변이 있으니 더 이상 억누를 수 없는 항변이다. "죽으실 뿐 아니라……이는 그리스도시니." 우리가 이처럼 확고하게 된 것은 우리의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 우리의 그와의 연합 덕분이다.

1. 그의 죽음. "죽으신 이는 그리스도다." 자기 죽음으로 그는 우리의 채무를 이행하셨다. 담보물의 지불이야말로 채무에 대한 훌륭한 항변이 아닐 수 없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이시니 전충족적이요 능력 많으신 구주시다.

2. 그의 부활. "다시 살아 나신 이는" 이것은 보다 더 확고한 힘이 되는 말씀이다. 이것이야말로 신의 공의가 그의 죽음 덕분에 충족되었다는 확고부동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의 부활은 그의 사면이었으니 법적인 해제였다. 그러기에 사도는 "뿐 아니라 다시" 하는 말을 쓰고 있다. 그가 죽기만 하고 다시 살지 않았다면 우리는 과거 상태 거기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3. 하나님 우편에 차지한 자리. "그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자요." 그의 일을 마침내 완성하셨다는 보다 더 좋은 증거요 우리의 모든 비난에 대해서 우리가 그런 친구를 법정에 가지고 있다는 막강한 격려인 것이다. "하나님 우편에"라는 말은 거기에 항상 대기 상태로 계시며 거기서 다스리고 계신다는 말이니 모든 실권이 그에게 넘겨졌다는 얘기다. 우리의 친구는 자신이 심판관인 것이다.

4. 거기서 행하는 그의 대언의 기도. 그는 거기서 우리에게 무관심한 채로가 아니라, 우리를 망각한 채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고" 계시는 자다. 거기서 우리를 위한 대리인으로서, 우리를 위한 변호자로서 모든 비난을 대변하며 우리의 신립을 주장하시고 효과적으로 처리하시고 우리를 위해 나타나 우리의 탄원을 드리고 계신 것이다. 이거야말로 크나큰 위로의 본질이 아닌가? 여기에 우리가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오, 주 하나님이여, 이게 우리의 처지입니까? 더 이상 의심해 하고 울적해 할 여지가 어디 있는가? 오, 내 영혼아, 왜 낙심해 하고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여기 언급된 비난과 정죄는 성도들이 인간들에게서 받는 고통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수없이 새빨간 거짓 죄목을 뒤집어 쓰지 않았던가? 이단, 반란, 반역 등등 헤아릴 수 없다. 이런 여러 가지를 들어 권세자들은 그들을 정죄했다. "그러나 그건 걱정할 것 없다"(고 사도는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정에 꼭 서 있기만 하면 인간들의 법정에서는 그 자리가 어디건 간에 상관 없다. 그 모든 어려운 심판과 악독한 중상 모략, 인간들의 불공평하고 의롭지 못한 선고, 이 모든 걸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이걸 상쇄하는 우리의 정당성을 들어 가볍게 받아 넘길 수 있는 것이다"(고전 4:3, 4).

Ⅲ. 우리가 이 복된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든든한 보장(35-39절).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놓치지는 않을까 하는 공포심은 종종 사람을 미치게 실망시키며 혼란을 가져 오는 때가 있다. 그러나 이 공포를 안정시키고 저 폭풍을 달랠 것이 여기 있으니 결코 그들을 떼어 놓지 않을 바로 그것이다. 그 내용이 여기 있다.

1. 할 수만 있으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그들을 떼어 놓으려 하는 성도들의 모든 원수에 대한 과감한 도전. "누가……하리요?" 아무도 없다(35-37절). 하나님께서 우릴 위해 자기 외아들을 지체하지 않고 주셨는데 우리가 그보다 못한 다른 것이 그 사랑을 따 돌리고 무효화 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1)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자들의 현재 재앙의 예상. 사면으로 "환난"을 받으며, "곤고"한 상태에 처해 있으며, 이 세상에서 어디로 가서 도움과 쉼을 얻어야 할지 모르며,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자들을 언제고 미워하던 성난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으며, "기근"으로 고생하며, "적신"으로 아사 지경에 이르며 모든 피조물의 위로가 없기에 보다 더 큰 "위험"에 처하며 법정의 "칼"이 언제고 오장육부를 가르고 피로 멱감을 준비를 하고 있는 그런 상태다. 이보다 더 답답하고 흉칙한 상황을 또 그릴 수 있겠는가? 시편 44편 22절의 구절이 인용되고 있다. "우리가 주를 위하여 종일 죽임을 당케되며," 이 말씀은 불같은 피의 시련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지 말라는 뜻이다. 구약 성도들도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다. 우리 앞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 같은 핍박을 받은 것이다. "종일 죽임을 당하고 있다," 날마다 계속해서 치명타에 노출되어 있다는 얘기다. 지금도 매일 매일, 하루 종일 하나님의 종들은 이 사람 저 사람 박해자 원수의 횡포 아래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이들이 그리스도인을 살해하는 건 양을 도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양이 도살되는 것은 그게 살아서 해로워서가 아니라 죽어서 더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을 살해하는 것은 그들 자신을 기쁘게 하고 그들 악의의 밥으로 삼기 위해서다. "저희가 떡먹듯이 내 백성을 먹는다"(시 14:4).

(2) 이 모든 것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지 못한다. 그게 가능하며 실제 또 그런가? 아니다. 어림없는 소리다. 이 모든 것이 합쳐져도 그리스도와 참 신자들간의 사랑과 우정의 결속을 깨뜨릴 수 없다.

① 그리스도께서 이런 모든 것 때문에 우리를 그만큼 덜 사랑하시지도 않거니와 그러실 리도 없다.  이 모든 고통은 주 예수의 강력하고 한결같은 사랑에 아주 일치한다. 이것들은 그의 사랑의 경감에 대한 원인도 증거도 아무 것도 아니다. 바울이 뭇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며 돌맹이질을 당해도 그리스도께서 그를 그만큼 덜 사랑하셨던가? 그의 사랑이 중단되고, 그의 미소가 감춰지며 그의 돌보심이 뒷걸음질했던가? 아니다.  그 반대다. 이런 것들은 우리를 우리 친구들의 사랑에서 떼어 놓는다. 바울이 네로 황제 앞에 붙잡혀 왔을 때 모두들 그를 버리고 달아났지만 주님은 그의 곁에 서 계셨다(딤후 4:16, 17). 박해자 원수가 우리에게서 뭣이든 다 앗아갈 수는 있어도 그리스도의 사랑은 앗아갈 수 없으니 그의 사랑의 표시를 차단할 수도, 그의 돌보심을 방해하거나 배제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라. 이 모든 것이 참 신자를 비참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② 우리는 이것 때문에 그만큼 그를 덜 사랑하는 것도 아니요 앞으로 그럴 수도 없다. 그것도 그가 우리를 덜 사랑한다고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결코 악의를 품지 않으며 헛된 생각을 달가와하지 않으며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으며 불친절한 생각을 내세우지 않으며 사랑으로부터 오는 좋은 면만을 간추리는 것이다. 참 그리스도인은 그가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당해도 그를 그만큼 덜 사랑하지 않으며 그 때문에 모든 걸 잃어도 그리스도를 그만큼 더 언짢게 생각치 않는다.

(3) 신자들의 승리(37절).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아니, 우리는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정복자 이상이다)

① 우리는 정복자다. 하루 종일 죽임을 당해도, 그래도 정복자인 것이다. 이상한 식의 정복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게 그리스도의 방법이었다. 그도 이처럼 자기 십자가에서 권세자와 능력자를 상대로 승리하셨다. 그것은 불과 총보다 신앙과 인내로 얻는, 보다 더 고상하고 보다 더 확실한 정복의 방식이다. 원수들도 가끔 순교자들의 불구의 용기와 인내 때문에 당황하고 압도되었다는 고백을 하지 않는가. 순교자들은 이처럼 자기들의 몸을 아끼지 않고 죽음에 내던지므로 더 없이 승승장구하는 왕을 이겨냈던 것이다(계 12:11).

② 우리는 정복자 이상이다. 이 시련을 참고 견디노라면 우리는 그저 단순한 정복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정복자 이상으로 된다. 곧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정복하는 자는 정복자 이상이다.

첫째 손해가 없다. 대부분의 정복 뒤에는 대가가 심하게 따른다. 그러나 고난받는 성도가 잃는 건 뭔가? 아, 이 사람아, 그들이 잃는 건 황금이 이 용광로에서 잃는 것 곧 찌꺼기뿐일세. 있지도 않은걸 잃는 건 손해가 아니다. 곧 우리가 잃는 것은 흙에서 온 몸뿐이다.

둘째 이득이 크다. 노략물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니 일그러지지 않는 영광, 존귀, 평화, 의의 면류관이다. 바로 여기에 고난받는 성도들이 승리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진 게 아닐 뿐 아니라 그것을 더욱 더 귀하게 품고 안아 보게 된 것이다. 고통이 심할수록 그 위로도 그만큼 풍성한 것이다(고후 1:5).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조여들 때도 우리에게는 정복자 이상 가는 분이 계신 것이다. 형틀을 붙잡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어서 오라. 영원한 생명이여 어서 오라"고 외치던 성도나 웅장한 감옥 뒷뜰에서 "나는 이 불에서 마치 깃털 침대에 푹신히 누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노라"고 증거하던 성도나 순교 직전에 질문을 받았을 때 "그저 즐겁습니다. 하늘로 가는 거니까요"하던 여성도나 모두들 웃으면서 형틀을 맞이했으며 그 화염 속에서도 찬송을 그치지 않았으니 이들이야말로 정복자 이상 가는 자들이었다.

③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다. 그의 죽음의 공로가 우리의 이 모든 고통의 통증을 제거해 주며 그의 은혜의 영이 우리에게 힘을 주어 이 모든 고통을 거룩한 용기와 인내로 견디게 하며 특별한 위로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정복자가 되는 것이다. 곧 우리들 자력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에 의해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우리의 관련으로 말미암아 이처럼 정복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우리를 대신해서 세상을 정복하셨다(요 16:33). 세상의 좋은 일이나 나쁜 일 모두에 있어서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승리를 추구하며 그 노략물을 분배하는 일밖에 없으니 정복자 이상이 아닐 수 없다.

2. 이 전반적인 문제의 직접적이요 적극적인 결론. "내가 확신하노니……"(38, 39절). 이것은 신의 사랑의 힘과 감미로움에 대한 체험에서 일어나는 강력하고 애정 깃든 전적인 확신이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그리스도와 신자들을 떼어 놓을 만한 것들을 모두 들추면서 그것의 불가능성을 들어 결론을 내리고 있다.

(1) "사망이나 생명이나"-한편으로는 죽음의 공포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의 안락과 쾌락이 있으나 이 죽음의 공포나 생의 소망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 죽거나 살거나 저 사랑이 우리를 갈라 놓지 못한다는 얘기다.

(2)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능력이나" 선악간의 천사 모두를 가리켜 권세자와 능력이라고 부르고 있다(선한 천사, 엡 1:21; 골 1:16 ; 악한 천사, 엡 6:12; 골 2:15). 둘다 이걸 해내지 못하고 말 것이다. 선한 천사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지만 악한 천사들은 그렇게 할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선한 천사들은 맺어진 친구들이요 악한 천사들은 짓눌린 원수들이다.

(3) "현재 일이나 장래 일어나" 현재 당하는 고통 의식이나 다가오는 고통에 대한 공포가 이 일을 해 내지 못할 것이다. 유한한 시간이 우리를 떼어 놓지 않을 것이요 영원히 우리를 떼어 놓지 않을 것이다. 현재 일이 우리와 다가올 일을 떼어 놓고 다가올 일이 우리를 현재 일에서 갈라 놓아도 그 어느 것이나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지는 못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현재 일이나 장차 일이 다 하나로 연결되는 것이다.

(4) "높음이나 깊음이나" 번영과 영전의 절정이나 역경과 치욕의 낮음이나, 위로부터 오는 폭풍이나 태풍이나 땅에 있는 바위나 바다나 똥더미나, 그 어느 것도 불가능하다.

(5)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생각할 수 있고 이름을 댈 수 있는 그 무엇이든 그 어느 것도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 놓지도 않을 것이지만 그럴 수도 없다.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나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손상시키거나 멍들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죄가 아니고서는 그 어느것도 이 일을 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 하나님과 참 신자 사이에 있는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한 것이다. 그분이 우리 사랑의 증보자이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나 우리가 감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모두 그분 안에서요 그분을 통해서다. 이것이 사랑의 일관성에 대한 근거요 따라서 하나님은 그의 사랑 안에 거하신다(습 3:17). 그분 안에서 그가 우리를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앞으로 영원토록 동일하기 때문이다.

스콧트랜드의 한 뛰어난 그리스도인인 휴 케네디라는 분은 임종하는 자리에서 성경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자기 시력이 다 했음을 안 그는 "로마서 8장을 펴서 내 손가락을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하는 말씀 위에 놓아다오" 하고 말했다. "자 내 손가락이 이 말씀 위에 있느냐?" 하고 묻자 그렇다고 말을 듣고 그는 말했다. "자, 애들아, 하나님이 함께 하시길 바랜다. 나는 너희들과 아침상을 들었지. 오늘  밤에는 내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저녁을 들 것이다." 그리고 그는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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