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9.01.26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긍휼 갈망 5분체조 의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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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her God, we thank you for your presence. love, joy, and peace today

Till now you have done all things we need best for us.

You thoroughly know us  and love and serve us. also we pray let us do unto you as it is.

And we pray that in reality and truth let us do oneness. that is, let us live Jesus.

Truly we had united  in cross and resurection and you are more closer  beyond our respiration and consciousness, 

We thank you that you give us your wisdom and understanding, your council and power, and your knowlegde, and let us do reverence everyday.

And this time, thank you for this meal to enjoy, be energetic, and healthy and share fellowship.

Through all of your grace also, let us be your joy and glory. in Jesus'name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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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G MY BODYT CLOSER]] Keith Green

Chorus 1

Bring my body closer Bring my body home 보혈 통해 나오라 주의 자녀들이여

Bring my body closer Bring my body home 사랑으로 하나된 주의 몸이여

Verse 1

Children you must learn to listen Learn to know My will(Thy will be done) 자녀여 서로 마음 다해 주뜻 알기 힘쓰면

I will shower out My spirit  Learn to let your heart be filled  부어주신 성령으로 충만케 됨 알리니

Verse 2

Children I want no division Learn to be as one(Jesus makes us one) 자녀여 서로 너그러이 하나됨을 이루라

My blood was shed for all who love Me  Sacrificed for everyone   사랑하는 모든 자녀 십자가로 샀으니

Verse 3

Children though your hearts be hardened  Love will break you down(We submit to You)  자녀여 주는 사랑으로 막힌 담을 허셨네    

Cast out all your condemnation Let the love of God abound   부어주신 주의 사랑 모든 정죄 이기니


**사랑과 진리의 창조주하나님이 각사람을 향한 Original design과 Destiny를 추구하라**오해와 착각(사탄이 기만과  궤휼에 의한)에서 벗어나라

http://www.mytwelve.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32 예배에서의 수직적(Vertical) 찬양과 수평적(Horizontal) 찬양

@@긍휼 : 같은 태에서 나온 이들에게 품는 감정....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말하는데 ‘라함’(racham; 자궁)에서 나온 말이다. 

이 단어는 ‘같은 태에서 나온 이들에 대한 감정’이라는 기본적인 의미에서 ‘긍휼’, ‘자비’라는 의미로 발전했다. 젖을 빠는 아기에 대한 어머니의 반응(사 49:15),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서 가지는 반응(렘 31:20), 형제가 형제에 대해 기대하는 마음의 상태(암 1:11) 등을 나타내는 데 이 단어가 쓰였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감정 차원보다는 사랑의 표현이나 행위(출 33:19; 왕하 13:23; 시 102:13 등)로 드러났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죄에서 돌이켰을 때 주어지는 용서와 회복의 은혜를 표현할 때 쓰이기도 했다(사 14:1; 렘 12:15; 겔 39:25). 

신약에서는 긍휼에 해당되는 헬라어로 ‘엘레오스’(eleos), ‘스프랑크논’(splagchnon) 등이 쓰였다. 

긍휼은 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치유 속에 드러내신 예수님의 사역에서 잘 드러났다. 

또 1만 달란트 빚진 종을 불쌍히 여긴 왕(마 18:23-35), 방탕한 생활을 하고 돌아온 아들을 측은하게 여기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 아버지(눅 15:11-32), 강도 만났던 자를 불쌍히 여겨 살려낸 사마리아인(눅 10:25-37) 등의 본문에서도 긍휼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또한 예수님은 세리,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비난하는 바리새인을 향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닌 긍휼이라고 하셨다. 

이렇듯 긍휼은 정신은 외면한 채 형식만 중시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율법의 핵심으로 말씀하셨던 의(크리시스; krisis), 인(엘레오스; eleos), 신(피스티스; pistis) 중의 하나였다(마 23:23). 

바울은 병 치유의 근원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있음을 고백했으며(빌 2:27),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관련해서(롬 9:15; 11:30-32) 구원은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긍휼(엡 2:4; 딛 3:5)과 은혜(엡 2:7-8)로 인해 얻는 것임을 말했다. 

성경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자들은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롬 12:8; 약 3:17). 또한 긍휼은 구제와 자선 등으로 나타나며 긍휼 베푸는 일은 심판 날 긍휼을 받는 것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딤후 1:18; 유 21). 무정한 자, 무자비한 자에게 하나님은 심판을 내리실 것이기 때문이다(롬 1:29-32; 약 2:13). → 자비를 참고하라.

긍휼을 베푼 사람들: 성경에는 긍휼을 베풀었던 사람들이 여럿 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자신을 팔아넘겼던 형들을 용서했을 뿐 아니라 돕고자 했다(창 50:20-21). 

모세는 양에게 물을 먹이려다가 목자들에게 쫓겨난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을 도와 주었으며(출 2:17) 

보아스는 자기 밭에서 룻이 이삭을 줍도록 배려했다(룻 2:16). 

또한 다윗은 왕이 된 후 요나단을 생각하여 그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었다(삼하 9:1-13). 

이 외에도 기적과 회심을 체험한 빌립보 감옥의 간수는 바울과 실라의 상처를 돌봐 주었으며(행 16:33), 

멜리데 섬의 토인들은 여행 도중 난파당한 바울 일행을 보살펴 주기도 했다(행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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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慈悲,Mercy) : 어려운 이를 사랑하고 가엾게 여김.

자비(Mercy) 

무력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말한다. 인자(창 19:19), 은혜(창 20:13), 긍휼(마 9:13)과 같은 말이다.

구약에서 자비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여러 단어이다. 

히브리어 ‘라함’(ra?am)은 긍휼의 감정이며, 주로 ‘사랑’(love)으로 번역되었다. 

또 ‘하난’(hanan)은 사랑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적극적인 도움이며, 종종 ‘은혜롭다’(to be gracious) 또는 ‘자비를 베풀다’(to show mercy)로 번역되었다. 

주로 ‘인애’로 번역된 ‘헤세드’(chesed)도 ‘자비’(대상 16:41)로 번역된 곳이 있다. 

헬라어 ‘엘레오스’(eleos)는 고통에 의해 우러나오는 깊은 정서적 관심을 의미하며, 적극적인 도움을 준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성경에서 ‘엘레오스’를 사용하여 묘사되는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에 의해 마음이 깊이 움직이는 분이시며 우리를 그분과 원수 되게 하는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돕기를 선택하신 분이시다(약 5:11). 

자비는 특별히 복음서와 신약의 서신서에 잘 나타난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자비를 간청할 때마다(마 9:27; 15:22; 17:15; 막 10:47-48; 눅 18:38-39) 예수님께서는 응답하시고 그 사람의 필요를 채우셨다. 

예수님께서는 자비가 하나님의 성품의 기본이라고 가르치셨고(마 5:43-48 참조)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라고 선언하셨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의 과오 중 하나는 구약 율법의 세부사항을 강조하느라 그 뿌리가 되는 “의와 인과 신”(마 23:23; 12:7 참조)을 간과한 것이었다. 

서신서들은 구원이 하나님의 자비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준다(엡 2:4; 벧전 1:3).  

우리는 영적으로 무력하므로 구원을 얻기 위해 자신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자비를 온전히 의뢰해야 한다(롬9:16).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매일매일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해야 하며, 우리에게는 이런 권면이 주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 긍휼, 사랑, 인애를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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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엽다 : 가이 없다...가=아내...도울사람이 없다//

---불쌍하다 : 도울 이(짝=쌍)가 없다 또는 상서롭지 못하다(돕는 배필로 인한 토브<지고지선>를 잃어버린 상태)

---가긍하다 :불쌍하고 가엾어 도와주다

---절상하다 : 뼈가 부러지거나 뼈마디가 어긋나 다치다.

---가련하다 : 불쌍히 여겨 동정하며 돕다. 

---측은 : 불쌍히 여겨 간절히 전심으로 슬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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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두 번도 생각지 않고 사용하는 말들의 어원들을 살펴보면 재미도 있고 새로운 깨달음들도 있습니다. 

‘얼굴’은 ‘정신’ 혹은 ‘영혼’을 뜻하는 ‘얼’이 들고나는 ‘굴’이랍니다. 

그래서 “나이가 40이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도 있는 가 봅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정신을 가지고 살았는가가 얼굴에 묻어난다는 거지요.

‘어리석다’는 말의 유래를 누구는 ‘어리다’, ‘어린아이-스럽다’에서 찾기도 하지만 또 누구는 ‘얼이 썩은’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둘 다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어느 소설을 읽다 ‘불쌍하다’는 말의 어원이 ‘不雙’ (아닐 부, 쌍 쌍)에서 나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이 불쌍한 상태를 “불쌍하기가 ‘짝이 없다’”고 표현했다고 하네요. ‘불쌍하다’의 다른 표현이기도 한 ‘가엽다’는 말도 ‘가’는 ‘계집’, ‘가시내’ (그래서 가시어머니는 아내의 어머니를 뜻함)를 의미하기에 ‘아내’가 없는, ‘짝’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고 합니다. 

물론 다른 어떤 분들은 ‘不祥’ (아닐 부, 상서로울 상), 즉 좋지 못한 상태를 뜻하는 것이라고도 합니다만 ‘쌍’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가 ‘불쌍한’ 것이라는 말이 어쩐지 저에게는 더 새롭게 와 닿았습니다. 아마도 성경구절 한 구절이 그 순간 떠올라서 그랬을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 2:18)” 짝을 이루지 못하고 혼자 사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아니한 것, 즉 ‘악한’ 것이 됩니다. 

아직 시집 장가가지 못한 노처녀, 노총각들이 이 글을 읽으시면 상처가 되고도 남을 만한 말들을 제가 적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성령님과 ‘짝’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친밀한 ‘동행’없이 ‘솔로’같이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불쌍함’에 대해 말하고 싶어 이렇게 장황하게 말의 어원들에 대해 적은 겁니다.

주님께서는 저희에게 성령님을 ‘보혜사’로 보내주셨습니다. ‘보혜사’는 ‘돕는 배필’이란 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돕는 배필’이 있음에도 간혹 우리는 ‘홀로서기’를 시도합니다. 그야말로 ‘불쌍’을 자초하는 ‘얼이 썩은’ 짓입니다.

절대적으로 선하시고 능하신 우리의 배필 되시는 성령님의 도움을 잘 받는 사람은 건강합니다. 그럴 때야 드디어 우리는 참 그리스도인다워질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또한 다른 사람들과도 잘 어울려 지냅니다. 반대로 다른 성도들과 좋은 교제를 잘 나누는 것이 성령 충만의 한 비결인 것도 사실입니다. 순모임, 각 선교회 모임 등에 적극 참여하는 노력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성령님과 좋은 짝이 되고 다른 성도들과도 복된 짝을 이루는 상태를 성경에서는 ‘샬롬’이라 하는 겁니다.

‘샬롬’이 깨지면 참 불쌍한 겁니다. 그것 참 가엽고 불쌍하기가 짝이 없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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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하는 heart, soul, mind, body] === heart(심령, 마음) in Bible 

= spirit(사랑과 진리의 하나님과의 교통/누림 위함)+soul(지성<생각자리-mind>정서<감성> 의지<심지>) ==> 성령께서 내주하실 때 Livng Soul --->표출 : pers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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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3:10-17]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 나는 다음의 3가지를 참되게 알기 원합니다, (*1>먼저 예수그리스도 그분자신을 더 완전히 친밀하게 알고 , 그리고  현저히 구별되는 그분의 인성의 놀라운 신비를 더 완벽하게 이해하며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2>그리고 (그분이 주신 바) 이미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안에 넘쳐나며 생동하고 있는, 그분의 부활의 권능을 생생한 경험통해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3>세째로는 그분의 어떠하심안으로 더 (힘써) 나아가 부단없는 일치/하나됨를 통해서 마침내 ((죽음의 바로 그 순간조차도 하나님을 경외함과 믿음으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신))그분의 죽으신 죽음까지 그 고난의 친밀한 교통에 동참함을 알기 원합니다..... 오직 이로써 죽은자로부터의 부활을 얻게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10 And this, so that I may know Him [experientially, becoming more thoroughly acquainted with Him, understanding the remarkable wonders of His Person more completely] and [in that same way experience] 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which overflows and is active in believers], and [that I may share] the fellowship of His sufferings, by being continually conformed [inwardly into His likeness even] to His death [dying as He did]; 11 [d]so that I may attain to the resurrection [that will raise me] from the dead.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 내가 이미 그리스도를 빼어닮고자하는 목표를 온전히 이루었다거나, 죽은자로부터 부활을 이미 얻었다는 것이 결코 아니라 다만 나는 그리스도예수께서 먼저 나를 붙드사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기에 그것을 능동적으로 힘써 추구하고 있습니다. Not that I have already obtained it [this goal of being Christlike] or have already been made perfect, but I actively press on [e]so that I may take hold of that [perfection] for which Christ Jesus took hold of me and made me His own.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 형제자매여러분 생각컨데, 나는 그 목표가 아직까지는 내것이 되지 않았다고 여깁니다. 다만 지금 제가 힘쓰는 것은 뒤엣것은 잊어버리고 오직 앞에 있는 것을 붙잡고자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이 위로부터 불러내신 바,  하늘의 상급을 얻는 그 목표를 향해 힘써 나아갈 따름입니다. 13 [f]Brothers and sisters, I do not consider that I have made it my own yet; but one thing I do: forgetting what lies behind and reaching forward to what lies ahead, 14 I press on toward the goal to win the [heavenly] prize of the upward call of God in Christ Jesus.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 영적완전함을 추구하고 있는 우리, 곧 성숙한 이들 모두는 마땅히 이러한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어떤 점에서 어떤 다른 측면이 있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명백하게 나타내 주실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지금 얻었고 서 있는 바로 그것을 참되게 행하도록 하십시다. 형제자매여러분, 모두 함께 나의 선례를 따르도록 하십시요. 또한 우리가 여러분들에게 보여준 패턴대로 사는 이들을 잘 분별하며 눈여겨 보십시요 15 All of us who are mature [pursuing spiritual perfection] should have this attitude. And if in any respect you have a different attitude, that too God will make clear to you. 16 Only let us stay true to what we have already attained. 17 Brothers and sisters, together follow my example and observe those who live by the pattern we gav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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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 These 5 Exercises Every Morning - 5 Minute Mobility & Stretch Routine

Do These 3 Things EVERY Morning!


==생명의 공동체 세우기==

이제 갓 태어난 아기들 부터 임종 앞둔 형제자매들에게 이르기까지 

한몸의 지체된 형제자매  성도들을 주께 올려드리나이다

주안에 거함으로, 하나님 경외함을 즐거움으로 삼아 주로 주 되시게 하며(=경건...야레) 

주를 기뻐하며 감사함을 통해 주님 뜻을 따라 주와 연합하여 하나되어 사는 자 

진실로 JC의 장성하신 분량의 충만에 이르기까지 JC를 빼어닮아가려는 열정을 부으소서

구하오니 오직 모든 의식가운데 호흡하는 모든 시간마다 존재중심에 주임재의 생명빛 비추소서

내게 주신 은혜를 다른이가 받았더라면 나보다 더 주를 잘 섬길 수 있을텐데도 자격없는 내게 허락하신 크나큰  은혜 감사 감격하며

구원받을 백성 위해 이끄시는 곳마다 복음 전파하는 지고지상의 사명 맡기셨음을 감사하며 눈물로 통회하며 자복하고 중보하는 애통의 사람 

날마다 옛사람은 온전히 죽고, 오직 주와 하나된 휴거의 영으로 사는, JC의 부활생명의 새사람을 살게 하소서, 

오직 주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십자가고난에 이르기까지 주와 하나됨을 이루소서

고난의 물과 불을 통과하시며 등에 고랑새겨짐의 세상 환난을 이미 이기신 주여, 

주님 신뢰함으로써 버티고 견디며 기도하며 기다리며 담대히 이미 이긴 세상이김을 사는자, 

하나님이 손수 새로 빚으신 투명한 정금-순은-진주-보석의 그릇, 

하나님이 그토록 기다리고 기대하시는, 하나님 영광 가감없이 공급하는 유통자, 성령의 갈대피리, 주영광의 반사경, 

주님 마음 알아 사랑의 열정으로 빨갛게 달구어진 어디서나 중보하는 주님나라의 선두주자로 빚으소서

영원 유일무이한 실체, 존재하는 모든 차원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손수 기록하신 모든 말과 단어안에 주님이 불어넣으신 진정한 의미를 일깨우소서, 서로 연결되며 살아 움직이게 하소서

그 안에 감추인 하나님의 생명과 생동력의 차원을 참되게 생생하게 경험하며 

그안에 있는 영과 생명으로 조성되게 하소서

주의 선하심-인자와 성실-을 깊이 묵상할 때 모든 차원의 지식 열어주사 참되게 알고 감동받게 하소서

차별이 없고, 비교하지 않으시며 자신을 온전히 부어 내어주시는 절대적 사랑과 그 열심을 

추구할 때마다 더 깊고 넓게 열어주사 체득하게 하소서, 

주님의 참된 지식 [야다]를 배우고 바로 그렇게 주님 알며 사랑하는 지고지선의 진복 누리게 하소서.

사랑의 주여, 주님 뜻 이루소서

친히 나를 아심처럼 삼위일체하나님을 참되게 알아 그 마음 알아드리기 원하며, 

날 사랑하심처럼 참되게 사랑하며 나를 섬기심처럼 참되게 섬기며, 

주님 영광에 참여함으로 살며, 

다스리게 하신 피조물을 바로 그 사랑으로 참되게 섬기며 다스림을 실행하게 하소서

주께서 내맘에 두신 7가지 갈망 이루소서
하나님의 열납하시는 자 처럼, 내가 또한 바로 그분의 아가페요, 기쁨과 즐거움 ---내가 하나님의 영원한 즐거움의 대상임을 알기 원하는 갈망
영광체험 통해 그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날마다 경험 ---넘치는 경이감에 매혹되고 싶은 갈망
하나님의 [올인]하시는 무한한 사랑의 열정 바로 그대로 반응---전심으로 열정을 쏟아 붓고 싶은 갈망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합당한 파트너로서의 아름다움---아름다움을 소유하려는 갈망
하나님과 완전한, 친밀한 연합 이룸 --부끄러움 없는 친밀함
바로 그렇게 그 비밀한 사랑을 전파하여 참여케 함---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갈망
하나님의 뜻 온전히 이룸 ---성공을 향한 갈망

-----[[의 인 신]]마23:23--------
의 krivsi"(2920, 크리시스) 결정, 판단.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크리시스(Aeschyl., Hdt. 이래)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a)  '분리, 분할, 불화, 다툼, 분쟁',
(b)  '선택',
(c)  '결정, 판단, 판결, 선고, 고소, 고발'
(d)  전쟁에서 '결정'이나 질병에서 '진단'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크리시스는 70인역본에서 약 25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미쉬파트(공정, 법령, 소송, 판결, 심판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크리시스는 신약성경에서 약 47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크리시스는 '결정, 판단, 심판'을 의미한다. 어떤 것에 관하여 내리는 결정, 판단, 특히 정의와 불의, 옳은 것과 그릇된 것에 관하여 내는 결정이나 판단 및 심판을 나타낸다.
(a)  법적 의미에서, 하나님 또는 메시야 예수님의 심판에 대해: 보편적으로, 약 2:13; 살후 1:5; 히 10:27; 복수, 계 16:7; 계 19:2; '마지막[최후의] 심판'에 대해: 히 9:27; 마 10;15; 마 11:22, 마 11:24; 마 12:36; 막 6:11; 벧후 2:9; 벧후 3:7, 요일 4:17; 유 1:6; 계 14:7; 마 12:41이하; 눅 10;14; 마 11:31이하; 유 1:15. 특히 '정죄의 판결': 히 10:27; 벧후 2:4; 계 18;10; 행 8:33; 약 5:12, 영원한 정죄, 막 3:29; 마 23:33.
(b)  요한의 용법에서 크리시스의 의미.
① 악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제공한 구원을 거부함으로써 불행과 형벌을 스스로 자초하였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가 발생시킨 그 심판을 나타낸다. 요 3:19에서 빛이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그리고 인간들이 이 빛을 미워함으로써 심판이 발생한다.
요 5:27에서 "심판하다"는 것은 '심판을 실행하다'를 의미한다.
요 5:24에서 "심판에 이르다"는 '정죄받은 자의 상태로 들어가다'를 의미한다.
요 12:31에서 "이 세상의 심판"은 이 세상이 악하다고 유죄 선언을 받고 이 세상의 권능이 파괴되었다는 점에서, 이 세상에 내려진 정죄적 판결을 의미한다.
요 16:8에서 "심판에 대하여"는 '내려진 심판에 대하여' 이다.
② 악인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 정죄를 나타낸다. 요 5:29에서 심판의 부활은 (정죄가 뒤따르는 부활)을 가리킨다.
③ 요 5:30에서는 앞의 두 개념이 결합되어 있다: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요 5:22에서 '심판하는 일 전체'를 나타낸다.
(c)  다른 사람 등에 대한 사람의 판단이나 심판에 대해.
① 사람에 대한 사람의 판단에 대하여, 요 7:24; 요 8:16.
② 마귀에 대한 천사장의 판결에 대하여, 벧후 2:11; 유 1:9.
(d)  마 5:21 이하에서 크리시스는 '재판 판단', '그 재판정'을 가리킨다. 이것은 갈대아어 디나(단 7:10, 단 7:26)와 같으며, 팔레스타인의 여러 도시에 있었던, 칠인의 재판정이며, 예루살렘에 소재한 "산헤드린"과는 구별된다[참조: Schurer, Neutest. Zeitgesch. §23],(신 16:18; 대하 19:6; Joseph. antt. 4, 8, 14; b.j. 2, 20, 5).
(e)  크리시스는 마 23:23; 눅 11:42에서 '올바름, 정의'; 마 12:18에서 의의 힘을 가지게 될 그것, 마 12:20에서 '올바른 대의'를 나타낸다.
(참조: J.H.Thayer; F.Buchsel). 
인e[leo"(1656, 엘레오스) 불쌍히 여김, 동정, 자비.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엘레오스(Homer 이래)는 '자비, 불쌍히 여김, 동정'을 의미한다. 헬라어에서 엘레오스는 하나의 파도스(pavqo", 3806), 곧 다른 사람들이 부당하게 당하는 고통에 의해 생겨나고 자비 뿐만 아니라 두려움의 요소를 포함하는 감정이다. 이것은 귀족들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감정이며 재판을 행하는데에 하나의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스토아 학자들은 이 감정을 현자들에게 합당하지 않은 건전치 못한 것으로 간주했는데 이는 스토아 학자들이 잔인해서가 아니라, 그들은 도덕적 관계가 파도스(pavqo", 3806)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엘레오스는 70인역본에서 약 400회 나오며, 주로 헤세드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a)  이 단어는 상호 관계, 예를 들면 친척들 간에, 주인과 손님 간에, 주인과 종 간에, 언약 관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태도를 나타낸다. 이것은 성벽(disposition)이라기 보다는 행동이며, 신뢰를 근거로 하고 충성을 적절한 태도로 삼는다. 따라서 예를 들어 통치자와 신하 사이에 의무의 요소는 본질적인 것이다. 우월한 자의 편에서, 헤세드에는 또한 은혜도 포함된다. 이것은 특히 하나님의 편에서 그렇다. 하나님은 임의로 자신을 자기 백성과 묶으셨으며, 따라서 의인은 그들 자신이 자비를 보일 때 하나님의 헤세드에 의존하게 된다. 하나님의 헤세드는 비록 우리가 요구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기대할 수는 있으며 또한 약속된 신실하고 자비로운 사랑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불충실하기 때문에, 이 사랑은 궁극적으로 결정적인 구원을 가져올 용서하는 은혜의 형태를 취하며, 따라서 헤세드는 종말론적인 용어가 된다. 라하밈의 경우에도 일반적으로 동정보다는 사랑의 행위나 표현이 문제가 된다. 그런데 이 단어는 본래 육체적인 의미를 지녔으며 사랑의 관심을 나타내었다.
(b)  후기 유대교에서 헤세드는 사랑의 행동에 대해 사용되었지만 이 단어는 특히 하나님의 자비를 가리키는데, 종종 그 자비의 신실성에 강조점을 두며, 또한 진노와 구별되는 자비를 언급한다. 하나님의 엘레오스는 이스라엘이나 그를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임한다. 하나님의 엘레오스는 계시되고, 기대되고, 소망되고, 탄원되는 그의 은총의 행동이다. 구원 시대는 엘레오스의 시대이다. 필로는 율법이 엘레오스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엘레오스를 하나님의 능한 행사들 중의 세번째 것으로 간주한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구주이시다. 그렇지만 필로에게 있어 자비는 행동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감정이며,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엘레오스는 신약성경에서 27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엘레오스는 종종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태도에 대해 사용되었다. 마 9:13; 마 23:23에서 이 단어는 상호 관계에 있어서의 친절을 나타낸다. 70인역본의 "자비를 베풀다"라는 표현이 눅 10:37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동들에 대해 사용된다.
약 2:13에서 자비에 대한 요구는 우리의 자비에 선행하는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한다(참조: 마 18:33). 유대교와 비교해 볼 때, 신약성경에서의 새로운 특징은 하나님의 자비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려진다는 것이다. 약 3:17에서 엘레오스는 비록 동정을 포함하지만 일반적인 자애(lovingkindness)를 포괄한다. 이 자비는 또한 일시적인 안녕 뿐만 아니라 영원한 안녕에 대한 관심을 의미할 수도 있다(참조: 유 1:22).
(b)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엘레오스는 종종 그의 은혜로운 신실성을 가리킨다(눅 1:58; 엡 2:4; 벧전 1:3; 롬 11:30). 바울은 의미심장하게 하나님의 엘레오스를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시킨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종말론적 행동이다(딛 3:5). 롬 9:22-23에서, 하나님의 엘레오스에 반대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이다. 롬 9:15 이하; 롬 15:8-9에서는 종말론적인 의식이 또한 고찰될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들은 이제 하나님의 자비에 사로잡힌 바된다. 심판 때에 자비가 요구된다는 사실은 딤후 1:18; 유 1:21(참조: 마 5:7)에 표현되어 있다. 갈 6:16과 같이 인사말에서 엘레오스는 그리스도를 간접적으로만 언급할 뿐이다. 딤후 1:16에 의하면 바울에게 보여졌다고 하는 자비에서 볼 수 있듯이, 일반적인 것일 수도 있고 개별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항상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언급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참조: H. -H. Essen; R. Bultmann). 
신pivsti"(4102, 피스티스) 믿음 faith.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피스티스(Hes., Hdt.이래)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a)  피스티스는 '신뢰, 확신, 확실성, 확고한 확신'을 의미한다.
(b)  피스티스는 사람이 가지는 확신 뿐만 아니라 사람이 향유하는 확신, 즉 '신뢰할 수 있음, 의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차이가 있을지라도 확실성이나 신뢰성과 관련되어 있다.
(c)  피스티스는 신뢰의 가능성, 의지할 수 있는 것을 보장하는 '보증, 증명, 증거, 신실성'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피스티스는 70인역본에서 약 55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에무나(경고, 충실, 성실, 확고부동의 믿음)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피스티스는 신약성경에서 약 23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피스티스는 '신실성, 신뢰성'을 의미한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롬 3:3; 딛 2:10; 갈 5:22; 살후 1:48.
(b)  피스티스는 '엄숙한 약속, 서약'을 나타낸다: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딤전 5:12).
(c)  피스티스는 '증거, 보증'을 의미한다: 행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딤후 4:7.
(d)  피스티스는 '신뢰, 확신, 믿음'을 나타낸다.
① 하나님에 대하여, 막 11:22; 벧전 1:21; 히 6:1; 살전 1:8; 롬 4:5; 롬 4:9; 롬 4:11-롬 4:13; 롬 4:16; 롬 4:19이하 등.
② 그리스도에 대하여, 마 8:10; 마 9:2; 마 9:22; 마 9:29; 마 15:28; 막 2:5; 마 4:40; 마 5:34; 마 10:52; 눅 5:20; 눅 7:9; 눅 7:50; 눅 8:25; 눅 8:48; 눅 17:19; 눅 18:42. 롬 3:23; 롬 3:26; 갈 2:16; 갈 2:20; 갈 3:22; 엡 3:12; 빌 3:9; 약 2:1; 계 14:12.
(e)  피스티스는 '신앙의 내용, 교리'를 나타낸다: 유 1:3, 유 1:20; 롬 1:5; 갈 1:23; 갈 3:23이하; 딤전 1:19; 딤전 4:1, 딤전 4:6; 딤전 6:10; 딤후 2:18; 롬 12:6; 딤후 4:7.
(참조: Walter Bauer; A.Weiser; O.Mich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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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의 죄(마 23:13-33).....애통하며 회개하라!!
이 구절들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마치 시내산에서의 천둥소리와 번개불과도 같은 여덟 가지 화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다. 
"세 가지" 화는 매우 무섭게 보여진다(계 8:13; 9:12). 
그러나 여기에 있는 "여덟 가지" 화는 여덟 가지 복에 대치되고 있다(마 5:3). 
복음은 율법과 함께 화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복음의 저주는 모든 저주 중에서 가장 무거운 저주이다. 
이 화들이 더욱 두드러진 것은 그 권위 때문만이 아니라 그를 공격한 자들에 대한 온유함과 고상함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축복하려고 오셨으며, 또한 축복하기를 좋아하셨다. 그러나 분노가 타오르게 되면 분명히 이에 대한 동기가 있는 것이다. 
이 위대한 중보자가 반박한 자를 누가 감히 탄원할 수 있겠는가? 주님께로 말미암는 저주는 다시 구제될 수 없는 저주이다.
여기에서 반복되는 실로 무거운 짐이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외식하는 자들이었다. 
이 말 속에는 저들의 모든 악한 성격이 요약되어 있다. 그것은 저들이 말하고 행한 모든 사실에 맛을 준 누룩이었다. 
외식가는 종교적인 연극 배우이다(이것이 이 낱말의 원래 의미이다). 외식하는 자는 현재 자기가 그렇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장차 그렇게 될 수도 없고 또한 그러한 사람이 되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의 역할을 한다.
2. 그러한 위선자들은 비판한 상태와 조건 아래에 놓여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이여." 주님께서 그들의 처지가 비참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그렇게 될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종교는 헛되다. 그들이 죽을 때 파멸은 크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대한 화마다 각각 그 이유가 첨가되어 있는데, 그들에게 해당되는 구별된 죄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들의 위선을 입증하고 있고 그들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심판을 정당화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화, 즉 그의 저주는 결코 이유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원수들이며 따라서 영혼의 구원에 대한 원수들로 선언되었다(13절).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 앞에서 닫았다." 즉 그들은 할 수 있는 대로 백성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천국을 열기 위함이었다." 즉 우리를 위해 그리로 들어가는 "새롭고 산 길"을 터놓으시며 사람들을 그 나라의 백성으로 데려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모세의 자리에 앉아 지식의 열쇠나 되는 것처럼 가장하였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메시야와 그의 나라를 가리킨 구약 성경을 열어 참되고 적절한 의미로써 백성들을 돕는 일에 기여했어야만 하였다. 모세와 선지자의 글을 해석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던 그들은 마땅히 백성들에게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가를 보여 주어야만 했었다. 
다니엘의 주간들이 다 가고 있었고 "홀은 유다에게서 떠나고 말았다." 그러므로 지금은 메시야가 나타날 시간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 위대한 일을 도와 많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는 고사하고 그들은 천국문을 닫아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폐하여지고 의식적인 법을 만들고 부여하는 일을 주임무로 삼았으며, 또한 지금 성취되어 버린 예언들을 가르치거나 또는 백성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을 거스리도록 편견된 생각을 집어넣기에 급급하였다.
--- 그들은 그 자신들이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요 7:48) 
결코 없었다. 그들은 너무도 교만하였기 때문에 주님의 비천함에 고개를 숙이려고 하지 않았으며, 너무나 형식적이어서 주님의 솔직함에 부합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겸손과 자기 부정, 세상에 대한 멸시, 영적인 예배 등을 강조하는 종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회개는 이 나라로 들어가도록 허용된 문이었다. 
자신을 의롭다고 경탄하는 바라새인들에게 있어서 회개하는 것, 즉 자신을 낮추고 미워하라는 것보다 더 어울리지 않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 자신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 그들은 "그리로 들어가려고 하는 자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는 것도 나쁘지만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서 떨어지도록 하는 것은 더욱 나쁘다. 그러나 그것이 위선자들에게는 흔히 있는 방법이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 종교적으로 그들보다 앞질러 가거나 자신들보다 더 훌륭하게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이 들어가지 않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방해가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백성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지도자가 거절하기 때문에 많은 무리들이 복음을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밖에도 죄인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환영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며(눅 7:39) 또한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환영하는 것도 반대하였다. 
그들은 그의 교훈을 왜곡하였으며, 그의 이적들을 반대하였으며,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다투었으며, 또한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과 그의 재정은 가장 부정직하고 손해되는 것이라고 백성들에게 단언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신앙을 고백하는 자를 여지없이 출교시켰으며, 그를 대항하기 위하여 악을 행사하는 일에는 온갖 술수와 권력을 다 동원하였다. 이와 같이 그들은 "천국 문을 닫았으므로" 그리고 들어가려는 자는 "침노를 해야만"(마 1:12)하며 또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무리와 길에 놓여있는 온갖 장애물들과 난관들을 뚫고 "그리로 들어가야만 한다"(눅 16:16).
우리의 구원이 이 세상의 어떤 사람이나 어떤 무리들의 손에 맡겨지지 않는 것이 우리를 위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만일 그러하였다면 우리는 결코 구원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교회문을 닫는 자들은 할 수만 있으면 천국문도 닫으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의 악의가 하나님의 택한 자에게 대한 "그의 약속을 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폐할 수 없음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Ⅱ. 그들은 종교와 경건의 모양을 자신들의 탐욕스러운 행위와 욕망에 대한 구실로 삼았다(14절).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그들의 사악한 행위는 어떤 것이었는가? 
그들은 "과부의 집을 늑탈하였는데" 그 방법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최고로 할 수 있는 환영을 그들 자신이나 그들 하수인들에게 하도록 강요하면서 그 집에 숙식하거나 또는 교묘하게 그들의 환심을 삼으로써 그들이 손쉽게 미끼로 삼을 수 있는 재산 관리인의 자격을 얻는 것 등이었다. 
그들이 이러한 사람이라고 누가 감히 나서서 말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이 목표했던 것은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또한 이것이 저들의 주된 최고의 목적이었으므로 의와 공평에 대한 모든 생각은 다 제쳐 두었으며, 과부의 집들은 그들에게 희생 제물이 되고 말았다. 
과부들이란 연약한 처지에 있는 연약한 몸이었으며 쉽사리 사기를 당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미끼를 삼기 위하여 과부들에게 눈독을 들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특별히 보호하고 후원하며 구원해야 할 과부들을 늑탈하였다. 
구약에서 "과부를 미끼로 삼는"(사 10:1, 2) 자들에게는 화가 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화를 내림으로써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하나님은 과부의 심판자이시다. 그는 그들을 특별히 돌보시며, "과부의 지계를 세우셨고"(잠 15:25), "그 까닭을 밝히셨다"(출 22:22, 23).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과부들의 집을 통채로 삼켜버렸던 것이다. 
그들은 "사악한 재물로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늑탈은 탐심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잔인하게 억압하는 것을 나타내는데 미가 3장 3절에 잘 묘사되어 있다. 즉 "저들은 재산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긴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율법을 구실 삼아 자행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교묘하게 행하였으므로 아무 비난도 받지 않았으며 또한 그들에 대한 백성들의 존경심도 전혀 줄지 않았기 때문이다.
2. 그들이 이 악한 행위를 가린 옷(구실)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들은 거짓으로 오래 기도하였다." 
실제로 그들은 오래 기도하였다. 어떤 유대인 저술가가 우리들에게 전해 준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명상과 기도 예식에 있어서 한 번에 세 시간씩을 소비하였으며 그것도 매일 한 번씩이나 하였는데, 이것은 의무적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한다는 사실을 남에게 의식케 하거나 또는 늘 그렇게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려는 교만한 마음에 불과하였다. 
이런 일은 어떠한 의무적인 일도 가지지 않고 언제나 외적인 상업 일에만 몰두했던 바리새인들에게는 매우 쉬운 것이었다. 이렇게 간교한 재주로 그들은 재물을 얻었고 그들의 위엄을 유지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긴 기도는 즉흥적인 것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 때에(박스터씨의 말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가졌던 것 보다 더 많은 기도의 은사를 가졌지만, 말로써 이야기하는 것처럼 기도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책망하신 것은 그들의 긴 기도가 아니라 의식적인 기도였다. 만일 그들이 선한 것을 나타내려고 하지 않았다면 위선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악한 행동들을 가리는데 사용된 겉옷은 매우 두꺼운 것이어야만 했다. 그리스도 자신은 "온 밤을 새우시면서 기도하셨으며," 곧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고백해야 할 죄가 많이 있고 공급받기 위해 기도해야 할 부족한 점이 많이 있으며, 감사드려야 할 많은 자비가 있으므로 오래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기도는 공연히 오래 반복하는 기도였으며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외식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긴 기도로 말미암아 그들은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경건하고 독실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으며 또한 천국의 은총을 받은 자라는 칭송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이 차마 자신들을 속일 사람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과부들은 바리새인들에게 기꺼이 자기들의 재산을 맡겼고 자녀들의 보호를 의뢰하였다 !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기도의 날개를 휘저으면서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듯 보였으나 그들의 눈은 솔개와 같이 땅에 있는 미끼, 즉 과부의 집이나 그들에게 유용한 어떤 것들을 향해 번득이고 있었다. 이와 같이 세겜 족속은 탐욕을 위해 외식적인 할례를 받았으며(창 34:22, 23), 압살롬은 자신의 반역을 숨기기 위해 헤브론에서 서원을 드렸으며(삼하 15:7) 또한 이스르엘에서의 금식은 나봇의 살인죄를 감추기 위한 것이었고, 바알 신을 박멸한 것은 예후가 그의 야심을 펴기 위한 하나의 기초 작업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경건의 모양을 구실로 삼아 가장 증오스러운 일들을 은폐시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은밀할 것을 심판하는 그날에는" 외식적인 경건이 지금은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말지 모르지만 이중적인 불법으로 간주될 것이다
3. 이 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선고된 운명. "그러므로 너희는 보다 큰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정죄에는 정도(degrees)가 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가진 사람은 그로 말미암아 "그 파멸이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2) 외식하는 자들이 지금 자신들의 죄를 위장하고 변명하는 그 종교적인 위선은 머지 않아 자신들의 정죄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이러한 죄의 속임수 때문에 죄인들이 자신들의 죄를 속죄하기를 희망하는 바로 그 일이 그들을 오히려 거스리게 되며 또한 그들의 죄를 더욱 극심한 죄가 되게 할 것이다. 
오히려 죄인들의 변명이 불법이 되며 또한 그들의 탄원(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였으며, "주의 이름으로"오래 기도하였다)이 그들에 대한 형벌을 더욱 가중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Ⅲ. 그들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일에는 그렇게 원수 노릇을 하였지만 자신들의 파벌을 위하여 사람들을 악용하는 일에는 그렇게도 열심이었다. 
1.그들은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서려는 자들에게 천국문을 닫아 버렸지만, 자신들의 "교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녔다"(15절). 여기에서 살 펴 볼 수 있는 것은,
(1) 유대교 교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그들의 칭찬할 만한 열심. 즉 노아의 아들의 일곱 까지 규례만을 지키면 되는 "문"(gate), 교인(역주:완전한 교인이 아닌 초신자) 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모든 의식에 전념하는 "의"(righteousness), 교인(역주:완전한 교인)을 만들기 위해 그들은 매우 분주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열망하는 바였다. 그 때문에 그들은 비록 한 사람일지라도 그를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녔으며, 교활하게 온갖 수단을 다하여 접근하며 여러 계획을 세웠으며, 타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쓰기도 하였으며 지칠 줄 모르게 일을 하였다. 그들이 노리는 점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나 영혼들이 잘 되기를 위한 것이 아니었고 다만 그들을 교인으로 삼음으로써 신용을 얻고 또한 그들을 미끼로 삼아 이익을 얻기 위함이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교인을 만드는 일이 진리와 참된 경건을 위한 것이며 또한 선한 의도에서 행해진다면 아름다운 일이며 열려와 수고를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영혼은 매우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영혼을 죽음에서 구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을 하든지 지나치다고 할 수는 없다. 여기에 나타난 바리새인들의 근면은 보다 나은 원칙 하에서 행동하려고 하지만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는 아무런 수고나 비용도 쓰지 않으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의 나태함을 보여 준다.
(2) 교인을 얻기 위해서는 바다나 육지도 건너가야만 한다. 모든 방법들과 수단들이 강구되어야만 한다. 이런 방법도 써보고 저런 방법도 써보아야만 한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힘을 다 바쳐야만 한다.
(3) 육적인 마음은 그들의 육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수고를 거의 아끼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를 섬기는 교인을 만들기 위해 실망하지 않고 바다나 육지를 두루 다니려고 하였다.
2. 교인을 만든 후에 그들에게 저지른 바리새인들의 가증스러운 불경건한 행위. 너희는 즉시 그를 바리새인의 제자로 삼아버리며, 그는 한가지로 바리새인의 사상에 빠지고 만다. 그렇게 함으로써 "너희는 그들을 너희보다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외식하는 자들은 스스로 천국의 상속자가 될 것처럼 상상하지만 그리스도의 심판 때에는 지옥의 자식이 되지 말 것이다. 
그들의 위선은 지옥에서부터 유래된다. 왜냐하면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위선은 지옥을 향하여 있다. 지옥은 그들의 본향이며, 그들이 물려받을 기업이다. 그들이 "지옥 자식"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천국에 대한 그들의 뿌리 깊은 적개심 때문이며 이것은 바리새주의의 원리요 정신이다.
(2) 복음을 악랄하게 반대하는 자들은 모두 지옥 자식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배나 더 사납고 편협 되며 악의적인 경우가 있다.
(3) 개종한 교인들은 대개 가장 편협 된 자들이었다. 제자가 선생보다 나은 격이다.
① 의식을 좋아하는 점에서 나았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부과시킨 것들이 다 어리석은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으므로 마음속으로 자신들을 따르는 자들의 아첨을 비웃었다. 그러나 개종자들은 바리새인의 가르침을 열심히 추종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어리석은 자들은 흔히 현명한 자들(이들은 보통 공적인 목적을 위하여 어리석은 자들을 추켜세운다)이 천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그러한 행사나 의식 등을 예찬한다는 사실이다.
② 기독교에 대해 분노하는 점에 있어서 나았다. 
개종자들은 그들의 교활한 지도자들도 소유하기를 원하지 않는 규칙들을 쉽게 받아들이며 또한 진리에 대하여 극렬히 반대한다. 사도들이 각처에서 만날 극렬 분자들은 주로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 유대인들이었다(행 13:45; 14:2-19; 17:5; 18:6). 바리새인의 문하생이었던 바울은 "기독자를 박해하는데 매우 열심이었다"(행 26:11). 그러나 그의 스승인 가말리엘은 보다 온건했던 것으로 보인다.

Ⅳ.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그들 자신의 세상적인 유익과 명예를 추구함으로써 거짓을 만들어내고 부당한 사항들을 정하였으며, 이것으로써 그들은 백성들을 특히 맹세하는 일에서 위험한 오류를 범하도록 인도하였다. 이것은 종교의 보편성의 증거로써 모든 나라들에 의하여 신성시되었다(16절). "소경된 인도자여."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소경된 자의 인도하에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소경된 인도자는 그들도 모르는 길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이다. "그의 파숫군은 소경이다"(사 56:10), 종종 백성들은 그러한 파숫군을 가지기를 좋아하였으며, 보는 자들에게 "보지 말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백성의 지도자들이 잘못되게 하는 것"(사 9:16)은 나쁜 일이다.
2. 소경된 인도자를 둔 사람들의 상태도 서글픈 것이지만, 소경된 인도자의 상태는 더욱 저주스러운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영혼들의 피에 대해 답변해야 할 소경된 인도자들에게 저주(화)를 선고하고 계신다.
이제 주님께서는 그들의 소경됨을 증명하기 위하여 특별히 맹세의 문제를 들어 그들이 얼마나 말만 앞세우는 타락한 자들인가를 나타내 보여 주고 계시다.
(1) 주님께서는 그들이 가르친 교훈을 제시하고 계신다.
① 바리새인들은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봉사를 위해 드려지고 그와 더불어 특별한 관계에 있게 된다면 피조물로 맹세해도 좋다고 이를 허락하였다. 그들은 성전과 제단으로 맹세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에 불과하며 하나님의 영예의 동참자가 아닌, 단지 그 영예의 종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맹세는 하나님, 즉 그의 전지성과 공의에 대한 하나의 호소이다. 어떤 피조물에게 이러한 호소를 한다는 것은 그 피고물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는 것이다(신 6:3 참조).
② 그들은 "성전"으로 한 맹세와 "성전의 금"으로 한 맹세를 구분하였다. 즉 다시 말하면 "제단"으로 한 맹세와 "제단에 드린 예물"로 한 맹세를 구별하였다. 후자는 구속력이 있는 맹세로 하였고 전자는 구속력이 없는 맹세로 하였다. 여기에 이중적인 사악함이 있다.
첫째, 그들이 필요로 하지 않거나 또는 경시하며, 진리를 주장하거나 약속을 이행하는데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는 맹세가 있었다. 
그들은 마땅히 성전이나 제단으로 맹세를 하지 말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맹세했을 때 그것들은 그들의 입의 말로만 여겨졌다.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신앙의 불이행을 묵인해 주는 그러한 교리는 하나님의 진리가 될 수 없다. 맹세는 날(dege)을 가진 예리한 도구이며 조롱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그들은 성전의 금이나 제단의 예물을 더 좋아하였다. 
이는 백성들로 하여금 제단에 예물을 가져오거나 성전 금고에 금을 가져오도록 장려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이런 방법으로 그것들을 탈취하려고 애썼다. 금을 자신들의 소망으로 삼고 은밀한 예물들에 의해 소경이 된 자들은 고르반에 대한 위대한 친구였다. 수많은 계략을 사용하여 소득을 경건으로, 또한 그들은 종교로 하여금 세상적인 이익에 무릎을 끓게 하였다. 타락한 교회 지도자들은 물질이 그 사용하는 목적에 따라 죄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고 하였으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이나 영혼들의 잘 됨 보다는 자신들의 이익과 관련된 것에 더 큰 강조를 두었던 것이다.
(2) 주님께서는 이 구별이 어리석고 불합리한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17-19절). 
"우맹이여, 소경들이여."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우맹"이라고 부른 것은 분노에 찬 책망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꾸짖음이었다. 그것은 죄스러운 견해와 행위의 어리석음을 보여 주는 지혜의 말씀인 것이다. 특별한 사람에 대해 그 성격을 비난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맡기자 그는 사람 안에 있는 것을 아시며, 우리들에게 "어리석은 자"라고 말하지 말 것을 단호히 역설하였다. 그들로 하여금 어리석음을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직접 호소하고 있다. "어느 것이 크뇨. 금(금 그릇이나 장식물 또는 금고에 있는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누구든지 Propter quod aliquid est tale, id est magis tale ─즉 어떤 것이 특별한 방법으로 한정되기 때문에 그 자체는 동일한 방법으로 더욱 한정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성전의 금으로 맹세한 자들은 그것을 거룩하게 보는 안목을 지니고 있다. 성전의 거룩성 이외에 그것이 예물로 쓰여지는 것을 거룩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성전은 금보다 덜 거룩하게 될 수는 없으며, 그보다 더 거룩한 것이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고 거룩케 함을 받기 때문이다(히 7:7). 성전과 제단은 고정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요, 금이나 예물은 이차적으로 드려진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제단이요(히 13:10) 성전이시다(요 2:21).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예물을 성별케 하시며 그것들을 받으실 만한 것으로 만드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벧전 2:5). 자신들의 행위를 칭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대신하려는 자들은 제단의 예물을 더 좋아하는 바리새인의 어리석은 죄를 짓는 자들이다. 모든 참된 기독자는 살아있는 성전이다. 그 때문에 모든 것은 그에게 성별 되어진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며"(딛 1:15) "믿지 아니하는 남편은 믿는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해진다"(고전 7:14).
(3) 주님께서는 그들이 만들어낸 모든 맹세들을 맹세의 참된 의미, 즉 주님의 이름으로 한 것으로 환원시킴으로써 그들의 잘못된 점을 교정하고 계시다. 그러므로 성전이나 제단이나 하늘로 맹세한 것은 형식적으로 나쁜 것이지만 그 맹세는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 Quod fieri non debuit, factum valet ─ 즉 해서는 안 될 약속들이라도 일단 하고 나면 구속력이 있다. 사람은 자신의 허물을 결코 속일 수가 없을 것이다.
①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로 하여금 "제단은 나무와 돌, 그리고 놋쇠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그 맹세에 대한 의무를 떨쳐버리게 하지 말자. 
왜냐하면 맹세는 그 자신에 대하여 가장 강력하게 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는 비난을 받아야 하며 맹세의 의무가 보존되도록 하기 위해 it res potius valeat quam pereat ─ 즉 맹세로 말미암은 의무는 없어지지 않고 더욱 강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단으로 한 맹세는 그 제단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종속되는 것은 주되는 것과 함께 통과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단에 있는 것들은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기 때문에 그 제단과 거기에 있는 것들로 맹세하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 자신을 증인으로 삼은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제단이기 때문이다. 그리로 가는 자는 하나님에게로 가는 것이다(시 43:4; 26:6).
②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그가 자신이 하는 것을 이해한다면, 성전에 대한 이러한 존경의 근거가 이 집이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라 예배를 위해 드려진 하나님의 집, 즉 그의 이름을 거기에 두기 위해 선택한 장소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거기에 자신을 나타내시며 또한 그의 임재의 표식을 제시하기를 기뻐하셨다. 그러므2로 그것으로 맹세하는 자는 누구든지 "이 곳은 내 휴식처이니 내가 이곳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으로 맹세하는 것이 된다. 훌륭한 기독자는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그 속에 거하신다(고전 3:16; 6:19). 또한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대해 행할 것을 그 자신에 대해 행한 것으로 여기신다. 은혜로운 영을 근심케 하는 자는 그 영과 또한 그 속에 거하는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이다(엡 4:30).
③ 만일 사람이 하늘로 맹세하면 이는 죄를 짓는 것이다(마 5:34). 
따라서 그는 맹세한 의무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그가 맹세한 하늘이 그의 보좌임을 그로 하여금 알게 할 것이다(사 66:1). 보좌로 맹세하는 자는 거기에 앉아 있는 자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맹세의 형식으로 그에게 행해진 신성 모독에 대해 분개하시며 따라서 그는 분명히 그것을 위반함으로써 그에게 행해진 보다 큰 모독에 대해 보복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맹세가 그럴 듯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엄숙한 맹세에 대해 회피하는 것을 결코 묵인하지 않으실 것이다.

Ⅴ. 그들은 사소한 율법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세밀하였으나 보다 더 중한 것에 있어서는 무관심하고 허술하였다(23, 24절). 
그들은 "율법에 편벽되었고"(말 2:9), 그들이 이해 관계나 감정에 따라 자신들의 의무를 취사 선택하려고 하였다. 신실한 순종은 보편적인 것이며, 올바른 원칙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어떤 규칙을 순종하는 자는 그것들에 대하여 온전히 존경할 것이다(시 119:6). 그러나 자신들을 위해 종교적으로 행동하는 외식자들은 그들 자신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편견성은 여기에서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1. 그들은 사소한 의무는 지켰으나 보다 큰 의무들은 지키지 않았다. 
그들은 십일조가 "박하, 회향, 근채"가 될 때까지 그것을 정확히 바쳤으며, 그것을 십일조로 정확하게 바치는 데 있어서 그것들 많이 드리려고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큰 소리를 내면서 바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명성을 값싸게 사려고 하였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나는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자랑하였다(눅 18:12). 그러나 그들은 결국 그들이 바친 것을 자신이 가졌으며, 또한 거기에서 자신의 것을 찾아내려고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십일조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바쳐졌고 또한 그들과 관련이 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그들의 친절함에 대해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의무였으며 또한 율법이 요구하는 바였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십일조를 바치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있는 곳에서 일정한 목회를 후원하고 유지하는데 기여해야만 된다는 사실이다.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것"이라고 불리우고 있다(말 3:8-10).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으면서도 그들을 가르치는 자와 교제를 가지지" 않는 자, 즉 값싼 복음을 좋아하는 자는 바리새인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그들을 정죄하는 죄목은 그들이 "율법이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버린 것이었다." 
그들은 십일조를 드리는 데 있어서 만일 그것이 하나님 앞에 속죄하는 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그것을 내지 못한 것에 대해 사람들에게 변명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의 모든 일들은 중한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에 있는 내적인 거룩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들은 가장 중한 것들이다. 즉 그것은 자기 부정이나 세상에 대한
멸시,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같은 것들인데, 여기에 종교의 생명이 들어 있다. 
사람에 대한 심판이나 자비 또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율법의 중한 것들이며, "우리 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선한 일들"(미 6:8)이다. 의롭게 행동하거나 자비를 사랑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자신을 겸손하게 하는 것, 이런 것들이야말로 제사나 십일조보다 더 나은 순종인 것이다. 심판은 제사보다 더 앞서 있다(사 1:11).
십일조를 제사장들에게 공평하게 드리면서도 그 밖의 다른 사람을 속이고 사취하는 것은 하나님을 조롱하고 우리 자신을 속이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자비가 제사보다 더 앞서 있다(호 6:6). "주님의 헌금으로 살찌우는 자"들에게 좋은 음식을 먹이면서도 벌거벗었거나 매일의 양식이 모자란 형제 자매에게 대하여 긍휼의 그릇을 닫아버리는 것이나 또는 박하의 십일조를 제사장에게 드리면서도 거지 나사로에게 빵부스러기를 주기를 거절하는 것은 긍휼 없는 심판에 처하게 될 처사들이다. 긍휼 없는 심판을 한다고 하면서 긍휼을 나타내 보이지 않은 자들에게 행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율법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진리 안에서 영광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들은 사소한 죄들은 피하면서 보다 더 큰 죄를 범하였다(24절). 
"소경된 인도자여." 그는 전에 그들의 타락한 교훈 때문에 그들을 이와 같이 불렀다(16절). 여기에서 그가 그들을 이와 같이 부르는 것은 그들의 타락한 생활 때문인데, 그들의 실제 생활은 그들의 교훈만큼이나 주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생활에 있어서도 소경이요 편벽되었다. 그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켰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훈에서 하루살이는 걸러내었다. 즉 백성들에게 장로들의 유전 중에서 그 어느 것도 범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제 행위에서 하루살이를 걸러내었다. 즉 그들은 죄를 몹시 미워하며 사소한 것에 대해서도 두려워하는 것처럼 떨면서 그것들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들과 비교하면 하루살이에 비해 낙타와 같은 죄들을 서슴치 않고 자행하였다. 과부의 집을 늑탈할 때 그들은 실로 "낙타를 삼켜버렸다." 그들이 유다에게 무죄한 피의 대가를 주었을 때 그 돌아온 돈을 성전고에 두기를 꺼려하였다(마 27:6). 그들은 더럽힘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재판석으로 나아가지 않고 문에 서서 거룩하신 예수를 거스려 소리를 질렀다(요 18:28). 그들은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을 인하여 제자들과 다투었지만 고르반을 채우는 것을 인하여 백성들에게 제 5계명을 깨뜨릴 것을 가르침으로 그들은 하루살이, 즉 사소한 일은 걸러내고 낙타와 같은 것을 삼켜 버렸다.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책망한 것은 적은 죄에 대해 망설이는 것이 아니다. 비록 하루살이와 같이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만일 죄라면 마땅히 걸러져야만 한다. 그러나 그러한 죄를 짓는 것은 낙을 삼키는 일인 것이다. 율법의 작은 일들에서는 미신적이고 큰 일들에서는 모독적인 것이 여기에 정죄된 위선이다.

Ⅵ. 그들은 모두 종교의 외적인 면을 치중했고 내적인 면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 인정받기보다는 오히려 사람에게 경건하게 나타내 보이기를 더욱 소원하고 갈망하였다. 이것은 두 가지 비유에 의해 설명되고 있다.
1. 그들은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더러운 그릇으로 비교되고 있다(25, 26). 
바리새인들은 종교를 고작해야 "잔을 씻는 것"(마 7:4) 즉 고상함과 같은 것에 두었다. 그들은 깨끗한 잔이나 주발에 음식을 담아 먹는 것에 관심을 두었지만 그들의 음식이 착취에 의해 얻은 것이며 또한 그것을 지나치게 포식한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하등의 깨달음이 없었다. 사람이 겉에서 보이는 잔의 외부만을 씻고 실제로 사용되어지는 내부는 더러운 채로 내버려둔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와 같이 그들은 자신들의 명성이 사람들에게 손상되게 할지 모르는 수치스러운 죄만을 피하였으며 정결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가증스럽게 될 마음의 사악함은 묵인하려고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로 살펴보기로 하자.
(1) 바리새인들의 실제 행동. 그들은 겉을 깨끗이 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이웃들이 주시하는 일들에서는 매우 정확한 것처럼 보여졌으며, 또한 사악한 음모를 너무도 교묘하게 실천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사악함을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였으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을 매우 선한 사람들로 여겼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깊은 곳과 그들의 생활의 외진 곳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즉 "폭력과 음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하몬드 박사는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불의와 폭음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경건하게 보이려 했지만, 온전하거나 의로운 곳이 전혀 없었다. 그들의 "심중은 심히 악하였다"(시 5:9). 우리는 내적으로 참되어야만 한다.
(2) 이러한 행위에 반대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규칙(26절). 이 규칙은 소경된 바리새인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보는 자"(요 9:39)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소경"이라고 부르고 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즉 그리스도께서 판단하실 때는 자신의 사악함에 대해 나그네처럼 전혀 모르거나 또는 그것을 원수와 같이 미워하지 않는 자가 소경이다(그들은 다른 일들은 얼마나 빨리 보았던가). 다시 말하면 마음속에 거하는 은밀한 죄를 보지 못하거나 미워하지 않는 자가 소경인 것이다. 자기를 모르는 것은 가장 수치스럽고 해로운 무지이다(계 3:17). 그 규칙은 곧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들 작가가 특히 유의해야 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사악한 것에서부터 씻는 일이다(렘 4:14). 기독자의 주요한 임무는 "영혼의 더러움"에서부터 안을 깨끗이 씻는 일이다. 타락한 감정과 경향들, 영혼에 자리잡고 있는 은밀한 정욕들은 남의 눈에 띄어지지 않거나 또는 주시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선적으로 억제되고 굴복되어야만 한다. 그러한 죄는 의식적으로 삼가야 한다.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눈이 이에 대한 유일한 증인이다.
기술된 방법에 대해 살펴보자.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오직"이 아니라 "먼저"이다. 그 이유는 만일 이것에 대해 적절한 조치가 취해진다면 자연히 겉도 깨끗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외적인 동기가 유인(誘引)은 안이 더럽게 되어 있을지라도 겉은 깨끗이 보존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새롭게 하고 정결케 하는 은혜가 안을 깨끗이 한다면 그것은 겉에도 영향을 미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도적인 원리가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만일 마음이 잘 지켜지면 모든 것은 좋아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에서 생명이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그 폭발은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만일 마음과 영이 새롭게 된다면 생명의 새로움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더불어 시작해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의 첫째 과업이 될 때 우리는 확실한 일을 착수할 수 있을 것이다.
2. 그들은 "회칠한 무덤"과 비교되고 있다(27, 28절).
(1) 그들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는" 무덤과 같이, 겉은 깨끗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유대인의 관습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눈에 띄도록 하기 위하여 무덤을 흰색으로 칠하였으며, 만일 그것들이 특별한 장소에 있다면 그것들을 사람들이 만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였다. 왜냐하면 그 무덤을 만짐으로 말미암아 의식적으로 더러워지기 때문이었다(민 19:16). 또한 그것이 퇴색되었을 때 흰색으로 칠하는 것은 큰길가에 있는 감시자들이 하는 일이었다. 무덤은 이와 같이 남의 눈에 띄게 만들어졌다(왕하 23:16, 17). 자신들을 은근히 세상에 나타내려고 했던 외식자들의 형식은 현명하고 선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에 의해 더러워질까 두려워하여 그들을 더욱 피하려고 하는 결과만을 초래했을 따름이었다. "서기관들을 조심하라"(눅 20:46). 이것은 저명한 사람들의 무덤을 더욱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희게 칠하는 습관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서는 그들이 "의인들의 비석을 꾸몄다"(29절)라고 언급되고 있다. 위대한 사람들의 무덤에 비석을 세우고 사랑하는 친구들의 무덤에 꽃을 심는 것은 우리들에게 흔히 있는 일들이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움은 단지 보이기 위한 무덤의 장식품이나 죽은 자에게 입히는 옷(수의)에 불과하였다. 그들의 궁극적인 야망은 "사람에게 옳게 보이며," 그들에 의해 칭찬을 받고 칭송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2) 그들은 무덤과 같이 안은 "더러웠으며,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였다.
영혼이 몸에서 떠날 때, 우리의 몸은 그렇게도 더러운 것이다! 이와 같이 그들은 위선과 불법에 가득 차 있었다. 위선은 모든 불법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마음에 죄가 가득한 사람이 자신들의 생활에서 비난을 받지 않고 매우 선한 것처럼 나타내는 것은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의 주인께서 "잘 하였도다"고 말씀하지 않으신다면 우리의 동료 하인들에게 좋은 말을 한 것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른 모든 무덤이 열리게 될 때 이 흰 무덤도 들여다보게 될 것이며 또한 죽은 사람들의 뼈들과 모든 더러운 것이 "끌어내어져 하늘의 뭇 별 아래 쬐이게 될" 것이다(렘 8:1, 2).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겉모양이 아닌, 은밀한 것들을 심판하시게 될 날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이웃들에게 칭찬을 받았던 그들이 어떻게 영낙없이 지옥으로 떨어져 버렸는가를 기억하는 것은 외식하는 자들과 함께 분깃을 나눌 자들에게는 부끄러운 위안이 될 것이다.

Ⅶ. 그들은 현재 자신들과 더불어 함께 있는 선지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면서도 이미 죽어 고인이 된 선지자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대단한 호의를 가지고 있는 척 위장하였다. 이것이 맨 나중에 언급된 것은 이것이 그들의 특징 중에서 가장 최악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명예를 위해 율법들과 규례들에 대해 열심을 가지고 계시며 만일 그것들이 모독되고 비방을 받게 된다면 분노하신다. 그러나 그는 종종 자신의 명예를 위해 그의 선지자들과 사역자들에 대하여 동일한 열심을 가지고 계시며 만일 그들이 손상을 당하고 핍박을 받게 된다면 더욱 분노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이 대목에 이르러서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 보다 더욱 철저하게 말씀하고 계시다(29-37절). 왜냐하면 그의 사역자를 건드리는 자는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와 "그의 눈동자"를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미 죽은 선지자들에 대해 가진 척 위장하는 존경심(29, 30). 이것은 겉치레였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겉으로 옳게 보였다.
(1) 그들은 선지자의 유물을 존중시하였으며 그들의 무덤을 쌓고, 그들의 무덤을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아마도 그들의 매장지가 알려졌던 것 같다. 다윗의 묘실은 그들과 함께 있었다(행 2:29). "하나님의 사람"의 무덤에 대한 칭호가 있었으며(왕하 23:17), 또한 요시야는 "그의 뼈를 옮기지" 않는 것이 그것을 존경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18절). 그러나 그들은 한술 더 떠서 그것들을 다시 쌓고 아름답게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① 이것은 죽은 선지자에게 대한 존경의 한 본보기로 생각될 수 있다. 
선지자들은 그들이 살아 있을 때 만물의 찌꺼기 같이 여김을 당하였으며 또한 그들을 거스려하는 모든 사악한 말을 들었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나쁜 사람들에게까지도 경건과 거룩함의 영예에 대해 강제적으로 인식케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며, 또한 종종 그러한 자들에게서 멸시를 받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삼하 6:22). 선지자들은 박해하고 미워한 자들의 이름이 수치로 가리워질 때 "의인의 비석은 복될 것이다." 의무를 다하는 가운데 꾸준하고 확고하게 영광을 돌리는 것은 영원한 영광이 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 나타내 보여지는 자들은 그들 주위에 있는 자들의 의식 가운데 나타나게 될 것이다.
②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의 한 본보기로 생각될 수 있는데, 그들은 선지자들에게 존경을 드렸다. 
육적인 사람들이 이미 죽어 고인이 된 신실한 사역자들의 비석에 대해 쉽사리 존경을 드리는 것은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그들을 비난하거나 저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은 선지자들은 "보지 못하면서도 본 자들"이며 또한 그들은 그 선지자들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증거를 viva voce ─ 즉 생생한 음성(계 11:10)으로 한 살아 잇는 증인들에게 했던 것과 같이 그들을 괴롭히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들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말한 죽은 선지자들의 기록에 대해 존경심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현재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말하고 있는 살아있는 선지자들에게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아니하였다. Sit divus, modo non sit vivus ─ 즉 성도들이 있게 하여라. 그러나 여기에 살도록 하지는 말라.
이미 죽은 성도들의 유물에 대해 바치는 과도 존경심, 특히 순교자들의 이름에 날들과 장소들을 바치며 그들의 유물을 안치하고 그들에게 기도를 드리며 또한 그들의 형상에 예물을 드리는 것(그들은 그들 당시의 성도들의 피에 취해 있었지만)은 선지자의 무덤을 쌓으면서도 그 교훈을 미워한 허울 좋은 외식 종교에 있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능가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선지자들을 죽인 것에 대하여 항의하고 있다(30절).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그들은 결코 아모스를 잠잠케 하거나 미가야를 감옥에 집어넣거나 하나니를 광속에 감금하거나 예레미야를 웅덩이에 빠뜨리거나 스가랴를 돌로 치거나 주님의 종들을 조롱하거나 그의 선지자들을 능욕하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다. 그들의 오른 팔이 잃어버리지 않는 한 이 일을 즉시 행하려고 달려들 것이다. "무엇이라고, 네 종이 개이냐?" 그들은 바로 이때에 "모든 선지자들이 증거한"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만일 그들이 선지자 당시에 있었다면 그들의 말이 기꺼이 듣고 순종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가져온 빛에 대하여 반항을 하였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헤롯과 헤로디아가 세례 요한에 대해 행하였던 처사는 아합과 이세벨이 엘리야에게 행하였던 처사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죄인들의 마음이 속임수는 여기에 많이 나타나고 있다. 즉 그들이 그 당시의 죄의 시냇물을 따라 내려가면서 이전의 죄의 시냇가로 거슬러 헤엄쳐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만일 그들이 다른 백성들이 가졌던 기회를 가졌었다면 그들보다 더욱 충실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만일 그들이 다른 사람이 받았던 시험을 받았었다면 그들은 단호히 이를 물리쳤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거들은 지금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회를 이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받고 있는 시험도 물리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 살았더라면 그를 얼마나 꾸준히 따랐을 것인가를 생각할 때가 있다. 즉 우리는 그 당시에 그들이 했던 것 같이 그를 업신여기고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지금 성경과 말씀, 그리고 사역자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더 나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계시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대한 그들의 적개심과 반대,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그들 자신과 그 세대에 임하게 된 파멸(31-33절). 여기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1) 입증된 고발. "너희가 스스로 증거하였도다." 
죄인들은 그들에 대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심판을 피하려고 할 수는 없다. 그 때에는 그들 스스로가 쉽게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청원은 취소되고 유죄로 판결될 것이다. 그리고 "저희의 혀가 저희를 해할 것이다"(시 64:8).
① 그들은 선지자들을 죽인 것이 그들의 조상들이 저지른 큰 죄악이었음을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이 죄악임을 알면서도 여전히 동일한 죄를 짓고 있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다른 사람의 죄를 정죄 하면서도 스스로 동일한 죄나 더 사악한 죄를 짓는 자들은 다른 모든 자들보다도 더 용서받지 못할 자(롬 1:32-2:1)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박해자들과 더불어 행동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그것들을 추구하는 자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자기 모순의 진술은 심판날에 양심의 가책을 받는 계기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의도한 것보다 또 다른 건축물을 그들이 쌓은 선지자들의 무덤 위에 올려놓고 계신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아름답게 꾸밈으로써 그들의 살인을 정당화한 것처럼 보인다(눅 11:48). 왜냐하면 그들은 계속적으로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② 그들은 이 소문난 박해자들의 조상들임을 스스로 고백하였다. "너희는 그들의 자손이다." 이것은 단지 그들이 혈통으로 그들의 자손이 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영과 성격에 의해 그들이 그 조상들의 자손이 됨을 말씀하고 계시다. "너희는 그들 조상에게서 났으며 또한 그들의 소욕을 행하려 하고 있다." 너희가 말하듯이 그들은 "너희"의 조상들이며, 너희는 "너희 조상들을 따르고 있다." 너희들이 그 혈통을 물려받은 것이 죄이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행 7:51). 그들은 박해하는 족속이 되었으며, "그들의 열조를 계승하여 일어난"(민 32:14). "행악의 종자"(사 1:4)가 되고 말았다.
악의와 시기, 잔인함이 그들과 더불어 뼈 속에 배어 있었으며 또한 그들은 이전에 "그들 조상들이 행한 대로하는 것"을 하나의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렘 44:17). 여기에서 그들이 얼마나 세심하게 그 관계를 언급하고 있는가(30절)를 유의해 볼 만하다. "선지자들을 죽인 자들은 우리의 조상들이며, 그들은 영예롭고 힘있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그들의 자손이며 계승자들이다." 만일 그들이 자신들이 마땅히 했어야 할 것으로써 그들의 조상들의 사악함을 미워하였다면, 그들을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부르기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 조상들이 과거에 많은 위엄과 지배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박해자와 동류가 되는 것은 영예스러운 일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2) 그들에게 내려진 선고.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계속적으로 그들로 하여금 고칠 수 없는 죄를 짓도록 내버려두셨다(32절).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만일 에브라임이 우상과 결탁하고 회개하기를 싫어한다면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어라." "더러운 자는 여전히 더럽게 되도록 내버려두어라."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지금을 죽이려고 하고 있고 또 수일 내로 그것을 성취할 것임을 잘 알고 계셨다. "좋다, 너희는 음모를 계속하라. 너희가 하려고 하는 일을 하라. 너희 마음의 길과 너희 눈이 보기에 좋은 대로 행동하라. 너희가 행하려고 하는 바를 속히 행하라. 너희는 범죄의 양을 채우게 될 것이며, 그 후에 이것은 분노의 홍수가 되어 넘치게 될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완전한 멸망이 개인이나 가족들, 교회나 국가에 이르기 전에 채워질 수 있는 죄의 양(量)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지만, 그가 "더 이상 참지 못할"(렘 44:22) 때가 올 것이다. 우리는 더 채워질 수 있었던 아모리인의 분량(창 15:16)에 대해 찾아 볼 수 있으며, "낫으로 거두어들일 수 있는"땅의 "추수"(계 14:15-19)와 또한 끝까지 속임으로써 "마침내 속이고만"(사 33:1) 죄인들에 대해 읽어볼 수 있다.
둘째, 어린 자녀들이 계속적으로 아버지의 죄와 동일하거나 비슷한 죄를 행한다면 그 아버지의 죄의 양을 채우게 된다. 국가적인 파멸을 가져오는 국가적인 범죄는 많은 사람들이 몇 년 동안이나 또는 사회가 지닌 죄목들을 계속적으로 이어오면서 형성된 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조상들의 발자취를 밟아 가는 아이들에게 그들 조상들의 범죄를 정확하게 뒤집어씌우시기 때문이다.
셋째,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과 사역자들을 박해하는 것은 그 어떤 죄보다 더 빨리 국가의 범죄의 양을 채운다. 이것이 바로 돌이킬 수 없는 진노를 그 조상들에게 가져다 준(대하 36:16)죄이며 또한 그 후손에게 끝까지 진노를 가져다 준(살전 2:16) 죄인 것이다. 이것은 네 번째 범죄로써, 이 죄가 다른 세 개의 죄에 첨가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그 벌을 돌이키지 2않으시려고 하셨다"(암 1:3, 6, 9, 11, 13).
넷째, 자신들의 만족을 채우기를 완고히 고집하는 자들을 그들 자신의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은 하나님께 당연한 일이다. 앞뒤를 가리지 않고 파멸에로 달려 가려고 하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목에 고삐를 매도록 하라. 사람들이 이러한 지옥과 같은 상태에 놓이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실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② 그는 계속적으로 그들을 돌이킬 수 없는 파멸, 즉 저 세상에서의 개인적인 파멸에로 내버려두셨다(33절).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이것은 그 입술에 은혜가 넘치는 그리스도의 입에서부터 나온 이상한 말들이다. 그러나 그는 가공할 만한 일을 말하실 수 있으며 또 말하실 것이다. 또한 이러한 말들에서 그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선고하신 "여덟 가지" 화를 설명하시고 종합하고 계신다. 여기에 보면,
첫째, 그들에 대한 묘사가 있다. "뱀들아" 그리스도께서 이름들을 부르시는가?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할 것을 장려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정확하게 아셨으며 또한 그들을 땅에 기어다니면서 흙을 먹고사는 뱀과 같이 간교한 자들로 아셨다. 그들은 훌륭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속에는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그 혀 밑에는 독을 가진 옛 뱀의 자손들이었다. 그들은 "독사의 새끼들"이었다 그들과 그들 앞서 갔던 자들, 그들과 연합하였던 자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대적하는, 독을 가지고 노를 품고 있으며 교활한 대적자들의 새끼였다. 그들은 사람들에게서 "랍비, 랍비"라 칭함을 받기를 좋아하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뱀"과 "독사"라고 부르고 계신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본래 성격을 제시하시며 교만한 자를 멸시하시기를 즐겨하시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의 운명(선고). 그는 그들의 상태가 매우 슬프고 절망적임을 나타내고 있다.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리스도 자신이 지옥과 판결에 대해 설교하신 것은 그의 사역자들이 이에 대해 들으려고 하지 않은 자들에 의해 종종 비난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지옥의 판결은 패역한 모든 죄인들의 두려운 최후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온 이 선고는 이전에 있었던 선지자들이나 사역자들에게서 나온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심판자이시며, 그의 손에 지옥과 사망의 열쇠가 주어져 있으며 또한 그가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정죄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이 판결을 피하는 방법이 있는데, 여기에 암시되어 있다. 즉 어떤 사람은 "장차 오는 진노에서 구원함을 받게 된다."
3. 모든 죄인들 중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정신을 가진 자들은 이 판결에서 피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회개와 신앙이 이를 피하는데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에 대하여 자만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대하여 그렇게 편견을 가진 그 자들이 어떻게 회개하고 믿을 수 있겠는가? 자신들의 상처를 찾아내거나 거기에 길르앗의 유향을 바르려고 하지 않는 그들이 어떻게 치유함을 받아 구원될 수가 있겠는가? 자신들의 병을 깨닫고 그것을 의사에게 내보인 세리들과 창녀들은, 큰 길(역주:가기 쉬운 죄인들의 길)가에 있으면서도 천국가는 길에 있다고 생각한 자들보다 더 쉽게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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