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04.03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시66.이혼과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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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66편 [개역개정]대한성서공회  


1.온 땅이여 하나님께(엘로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2.그의 이름(솀)의 영광을(카보드..무한한 풍성, 풍부, 무게, 영예) 찬양하고(자마르 : 노래, 연주, 찬양)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테힐라...영광, 찬미, 찬양의 노래부름)

3.하나님께 아뢰기를 주(아도나이..모든 존재의 근원이시요 주관자, 영생하시는 만주의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주의 큰 권능으로 말미암아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4.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노래하며 주의 이름을 노래하리이다 할지어다 (셀라)

5.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 사람의 아들들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야레....기묘하고 놀라우신 주의 성품, 이름과 행하심의 영광 그대로 참되게 인정/전심으로 경외함

6.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가 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걸어서 강을 건너고 우리가 거기서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

7.그가 그의 능력으로 영원히 다스리시며 그의 눈으로 나라들을 살피시나니(차파..깨어 주의하여 감시하여 살펴보며 경계하며 보살핌)거역하는 자들은 교만하지 말지어다 (셀라)

8.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바라크..무릎꿇고 경배, 기도, 말씀경청, 감사, 찬양) 그의 찬양 소리를 들리게 할지어다

9.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10.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11.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12.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13.내가 번제물을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서 나의 서원을 주께 갚으리니

14.이는 내 입술이 낸 것이요 내 환난 때에 내 입이 말한 것이니이다

15.내가 숫양의 향기와 함께 살진 것으로 주께 번제를 드리며 수소와 염소를 드리리이다 (셀라) 

16,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17.내가 나의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나의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18.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19.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음이여 내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도다

20.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1.Shout joyfully to God, all the earth;

2.Sing the glory of His name; Make His praise glorious.

3.Say to God, "How awesome are Your works! Because of the greatness of Your power Your enemies will give feigned obedience to You.

4."All the earth will worship You, And will sing praises to You; They will sing praises to Your name." Selah.

5.Come and see the works of God, Who is awesome in His deeds toward the sons of men.

6.He turned the sea into dry land; They passed through the river on foot; There let us rejoice in Him!

7.He rules by His might forever; His eyes keep watch on the nations; Let not the rebellious exalt themselves. Selah.

8.Bless our God, O peoples, And sound His praise abroad,

9.Who keeps us in life And does not allow our feet to slip.

10.For You have tried us, O God; You have refined us as silver is refined.

11.You brought us into the net; You laid an oppressive burden upon our loins.

12.You made men ride over our heads; We went through fire and through water, Yet You brought us out into a place of abundance.

13.I shall come into Your house with burnt offerings; I shall pay You my vows,

14.Which my lips uttered And my mouth spoke when I was in distress.

15.I shall offer to You burnt offerings of fat beasts, With the smoke of rams; I shall make an offering of bulls with male goats. Selah.

16.Come and hear, all who fear God, And I will tell of what He has done for my soul.

17.I cried to Him with my mouth, And He was extolled with my tongue.

18.If I regard wickedness in my heart, The Lord will not hear;

19.But certainly God has heard; He has given heed to the voice of my prayer. 

20.Blessed be God, Who has not turned away my prayer Nor His lovingkindness from me.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권고(1)(시 66:1-7)

Ⅰ. 이 대목 속에서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만백성에게 요청하고 있다. “온 땅, 온 세상”, 곧 하나님을 찬양할 능력이 있는 세상의 온 거민에게 요청하고 있다(1절).

1.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자들의 찬양을 받을 가치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하시며, 모든 민족에게 찬양의 소재를 공급해 주시기 때문이다.

2. 이것은 사람의 의무, 곧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찬양할 의무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창조 법칙의 일부로 각 창조물에게 요구된다.

3. 이것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리라는 개종에 대한 예언이다. 온 땅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때가 올 것이며, 분향이 각처에서 그에게 올려질 것이다.

4. 이것은 시편 저자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선한 사업에 대해 갖고 있었던 진실하고 선한 의지를 말하고 있다. 그는 풍성하게 찬양하려 한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에 의한 것만이 아니고, 온 세상의 민족들에 의해 바쳐지는 찬사를 받게 되기를 원하고 있다.

(1) 그는 온 땅이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하도록” 일깨우고 있다. 거룩한 즐거움은 우리의 모든 찬양을 북돋아주어야 할 경건한 마음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찬양이 신앙의 고함은 아닐지라도(사곡한 자들은 “저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한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사 58:4), 하나님을 찬양함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

① 우리는 진실되고 열렬해야 한다. 우리의 온 힘을 기울여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써 행하도록 한다.

② 우리는 우리의 주인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들이 되어 개방적이고 공개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소리를 발하는 것, 즐거운 소리를 발하는 것도 포함한다.

(2) 즐겁게 노래 부르며, 다른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 “그 이름의 영광”, 즉 무엇보다도 그가 자신을 알리셨던 그 모든 것 중의 “최고의 것인 그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도록 일깨우고 있다”(2절). 하나님 이름의 영광은 우리 찬양의 소재가 되어야 한다.

(3) 할 수 있는 한 “영화롭게 찬양하라”고 촉구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는 그를 영화롭게 할 수 있을 만큼 찬양해야 하며, 그것이 우리의 모든 찬양의 범위와 요지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너희 최대의 영광으로 간주하라”(이렇게 보는 견해도 있다). 피조물에게 창조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찬양할 자격이 있다는 것은 최고의 영예다.

Ⅱ.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온 땅에 요청했다(1절). 그리고 그는 이제 그들이 그대로 하리라는 것을 예고하고 있다(4절). “온 땅이 주께 경배하리이다.” 땅의 모든 지역, 심지어 가장 먼 지역에 있는 사람들도 경배할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한 복음이 여러 나라와 족속에게 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하늘과 땅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는 말씀의 취지다(계 14:6-7). 이처럼 전파되기 때문에, 그 말은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얼마가 되었든간에, 온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를 찬송하도록 만들 것이다. 복음의 시대가 되면, 하나님이 시편의 노래로써 경배받을 것이다. 시편의 노래가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즉, “주의 이름을 찬양”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이름으로써 그 자신을 알리신 것은 단지 그의 서술적인 영광에 불과하며, 그의 본질적인 영광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찬양으로써 그의 본질적인 영광에는 조금도 기여할 수 없다.

Ⅲ. 우리가 찬양의 소재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여기에서 “와서 하나님의 행하신 것을 보라”고 요청받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찬양하든 안하든, “주의 행하신 것이 주를 찬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더욱 그리고 더 잘 찬양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올바로 주의깊게 살펴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보고 그 속에 있는 그의 지혜와 능력과 행하심에 대한 실례를 살펴보자(5절). 그리고 나서 성실하게 그것들에 대해 그에게 말하자(3절).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주의 행하심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할지어다.”

1. 하나님의 일은 그 자체로서 훌륭하며, 이러한 것들을 잘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당연히 놀라움으로 가득 차게 된다. 하나님은 그의 크신 권능으로 행하시는 그 일들 속에서 “엄위하시다.” 그리고 그의 크신 권능은 그의 모든 행하심 속에서 매우 찬란하게, 매우 강하게 빛나고 있으므로, 정말로 “주의 일과 같은 일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그는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다”고 일컬어지고 있다(출 15:11). 인생에게 행하시는 그의 모든 역사 속에서 그를 엄위하신 분으로 알아서,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주목해야 한다. 신앙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경외에서 온다.

2. 하나님의 일은 그의 대적들에게 무서운 것이며, 그들을 여러 차례 위압하고 놀라게 해, 그들로 하여금, 억지로 복종하는 척하도록 만들었다(3절). 아무도 그 앞에 설 수 없는 “주의 큰 권능으로 인하여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단어 그대로), “저희가 주께 엎드릴 것입니다.” 즉, 그들은 자기들의 뜻과는 아주 반대로, 어떠한 조건에서라도, 주와 함께 억지로 화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두려움으로 인해 복종하는 것은 거의 진실되지 못하다. 그러므로 강압은 믿음을 전파하는 적합한 방법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교회로 개종한 자들에게는 큰 기쁨이 있을 수 없으므로, 결국엔 교회를 치는 거짓말쟁이들로 나타날 것이다(신 33:29).

3. 하나님의 일은 그의 백성들에게 위로가 되며, 유익하다(6절).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는 그들 앞에 있는 바다를 변하여 육지로 되게 하셨으며”, 이 사실은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안내에 따르도록 그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들의 싸움을 격려하기 위해 요단 강이 그들 앞에서 갈라졌고, “무리가 도보로 강을 통과했다.” 그리고 하늘에 의해 뚜렷이 인정받은 이러한 발걸음은 여호와의 전쟁에서 보병대라기보다는 기병대를 뜻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거기서 그들 앞에 있던 대적들은 참으로 떨었으나(출 15:14-15; 호 5:1), “거기서 우리가 주로 인하여 기뻐하였다.” 즉, 주의 능력을 믿고(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은 흔히 그를 기뻐함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주의 찬송을 불렀다(106:12). 거기서 우리가 기뻐했다. 즉, 우리의 선조들이 거기서 기뻐했고, 우리는 그들의 허리 속에 있었다. 우리 조상의 기쁨은 우리의 기쁨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도 그 기쁨에 동참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4. 하나님의 일은 모든 사람들을 지배한다. 하나님은 그의 역사하심으로써 이 세상에 대한 자기의 주권을 지키신다(7절). “저는 그 능으로 영원히 치리하시며, 눈으로 열방을 감찰하신다.”

(1) 하나님은 통솔하는 눈을 갖고 계신다. 높은 하늘에서 그의 눈은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지휘하시며, 그들 모두를 선명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살피신다. “주의 눈은 땅을 이리저리 살피신다”고 했다.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 또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열방도 그의 감찰 아래 있다.

(2) 그는 통솔하는 팔을 갖고 계시다. 그의 권능은 영원히 치리하시며, 결코 약화되거나 방해받지 않는다. “그의 손은 강하며, 그의 오른손은 높으시다”고 했다. 여기에서 시편 저자는 “거역하는 자는 자고하지 말지어다” 하고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 패역하며 반역적인 마음을 가진 자는, “내가 왕이 되리라”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높이 올렸던 아도니야처럼, 하나님께 대한 공공연한 반역행위를 하려고 감히 일어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반역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뜻을 이루리라고 자긍하지 말라. 아니, 그들은 잠잠하라.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고, 사람은 거기에 반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권고(2)(시 66:8-12)

이 대목에서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특별히 요청하고 있다. 온 땅이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땅은 특별히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라. 그를 우리의 하나님으로서, 우리와 언약하신 하나님, 그리고 우리를 자기의 백성으로 돌보시는 하나님으로서 송축하라. 그들의 “송축소리가 들리게” 하라(8절). 그가 특별히 총애하시고 택하신 수행인들에게서가 아니고 누구에게서 그 소리가 나오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송축해야 할 이유로 다음 두 가지가 있다.

Ⅰ. 일반적인 보호(9절).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두신다”(붙드신다). 그리하여 그 영혼이 저절로 떨어지지 않게 하신다. 우리 영혼은 계속해서 우리 손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명과 영혼을 함께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선한 섭리이며, 우리의 영을 보존하시는 것은 그의 은총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는(단어 그대로) 우리의 영혼을 생명 안에 두신다.” 우리에게 존재를 부여하신 그가 끊임없이 소생시키는 행위로써 우리로 하여금 존재하도록 붙들어주신다. 그리하여 이전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위로를 주심으로써 우리로 새 생명이 되게 하신다. “생명이란 이름을 붙일 값어치가 있는 것은 존재가 아니라 행복이다”(Non est vivere, sed valere, vita). 그러나 우리는 비틀거려 넘어지기 쉬우며, 병에 의한 죽음이나 재난으로 인한 죽음 따위 여러 가지 해로운 사건의 위협 속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시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하나님 권능의 보호를 받고 있다. 그는 여러 가지 예측하지 않은 화, 즉 우리가 그 위험을 알지도 못하고 있던 화를 막으시어,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신다.” 우리가 오래 전에 끝없는 멸망 속으로 떨어져버리지 않은 것은 오로지 그의 덕분이다. “그는 자기 성도들의 발을 지키시리라.”

Ⅱ. 큰 환난으로부터의 특별한 구원. 다음을 관찰하자.

1. 그 환난과 위험은 얼마나 심했던가?(11-12절) 본문이 가리키고 있는 교회의 구체적 환난은 나타나 있지 않다. 아마도 어떤 개인이나 사사로운 가족들만의 환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었든지간에 그들은 올무에 놀란 새처럼 놀랐고, 그물에 걸려든 고기처럼 포위되어 얽혀들었다. 그들은 그 재난으로 위압되었고, “허리에” 짐을 진 것처럼 억제당했다(11절). 그러나 그들은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을 인정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물 속으로 끌어들이지 않는다면 결코 그물에 들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환난을 내리시지 않는다면 결코 환란 아래 있게 되지 않는다. 불과 물보다 더 위험한 것이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통과했도다.” 즉, 여러 가지의 역경을 겪었도다. 하나의 고통이 끝나자 또 다른 고통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한 가지 위험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또 다른 종류의 위험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나님의 가장 훌륭한 성도들의 환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사 43:2). 그러나 교만하고 잔인한 자들은 불과 물처럼, 그리고 그 이상으로 위험한 존재들이다. “사람들을 삼가라”(마 10:17).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났을 때 그것은 불이었고 물이었으며, 그 모든 것은 위협적이었다(124:2-4). 그리고 여기에서의 경우도 그러했다. “주께서 사람들로 우리 머리 위로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를 짓밟고 우리를 욕하고 우리를 괴롭히고 모욕하고, 더욱이 우리를 완전히 노예로 삼게 하셨나이다. 그들은 우리 영혼에게 엎드리라. 우리가 넘어가리라(사 51:23)고 말했나이다.” 신하들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선한 방백들의 즐거움인 반면, 그들의 머리 위로 타고 가는 것이 폭군들의 자랑이다. 그러나 이 점에서도 고통당하는 교회는 또한 하나님의 손을 시인한다. “주께서 그들로 이처럼 나를 학대하게 만드셨나이다.” 왜냐하면 가장 포악한 압제자들도 위로부터 그에게 주어진 것 이외에는 어떤 능력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2. 그들을 이 환난과 위험으로 이끄신 일 속에는 얼마나 은혜로운 하나님의 의도가 있었던가?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보자(10절).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셨나이다.” 우리가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의 고통을 바라볼 때, 우리는 환난에 의해 유익을 얻을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그 밑바닥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그 목적 속에 있는 우리 자신의 영광과 이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에 의해 우리는 불 속에 있는 은처럼 단련된다.

(1) 단련됨으로써 우리의 은혜는 더욱 분명해지고, 그렇게 함으로써 다듬어져 순은으로 판명되었을 때의 은처럼 우리는 인정받을 것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와 또한 아마도 이 세상에서도 “우리의 칭찬”이 될 것이다(벧전 1:7). 욥의 순전함과 꾸준함은 그의 고통에 의해 증명되었다.

(2) 훈련됨으로써 우리의 은혜는 더욱 강하게, 그리고 활발하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은이 불로써 정련될 때 불순물이 제거되어 더 깨끗해지는 것처럼,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도 향상될 수 있다. 이는 우리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유익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되기 때문이다(히 12:10). 공공연한 환난은 교회를 정결케 하기 위한 것이다(단 11:35; 계 2:10; 신 8:2).

3. 마침내 그 결과는 얼마나 영광스럽게 되었던가? 교회의 환난은 분명히 좋게 끝날 것이다. 이 환난도 그러하다.

(1) 그 환난의 출구는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과 물 속에 있으나 그것을 통과한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불꽃이나 만조로 인해 멸망당하지 않았도다.” 성도들은 어떤 환난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을 송축하라. 그들을 통과시킬 길이 있는 법이다.

(2) 더 나은 상태로 향해 있는 입구는 더욱 큰 행복이다.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여호와의 동산처럼(단어 그대로) 물이 잘 되어 있는” 곳에, 따라서 비옥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을 환난 가운데로 끌어들이사 그들의 위로가 그후에는 더 달도록, 그리고 그들의 고통이 이처럼 의로움의 평화로운 열매를 맺도록 해주신다. 따라서 이 세상에 있는 가장 보잘것없는 곳을 풍성한 곳으로 만드신다.


다윗의 결심(시 66:13-20)

시편 저자는 앞에서 만백성들을, 그리고 특별히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일깨워 여호와를 송축하도록 한 후, 여기에서 그 자신을 선동시켜 스스로 그렇게 하고 있다.

Ⅰ. 그의 하나님께 대한 헌신 속에서 송축하고 있다(13-15절).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것으로써 즐거운 소리를 발하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이제 스스로 그는 더욱 굳게 결심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려 하고 있다.

1. 즉, 율법시대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바쳐졌던 값진 제물을 가지고 찬미하려 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제물을 바치지 않았거나, 하나님을 찬미하는 데 그처럼 비싼 것을 바칠 만한 성의를 못 가졌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할 능력이 있었고, 또 기꺼이 자기의 의무인 하나님께 경의를 표하고 있다(13절). “내가 번제를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리이다.” 그의 제물은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공개적으로 바쳐져야 했다. “내가 그것들을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리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성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영적 예물을 그에게로 가져가야 한다. 그리고 그에 의해 우리의 예물은 성별된다.

또 다윗의 제물은 가장 좋은 “번제물”로 바쳐져야 했다. 번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제단에서 완전히 살라야 하며, 바치는 자가 그것을 나누어 갖지 못하는 제사였다. 그것은 “살진 것”으로 드린 번제, 즉 절룩거리거나 야윈 것이 아니라 가장 살진 것, 그리고 하나님의 상에 올려놓았을 때 가장 잘 용납될 수 있는 것이라야 했다. 가장 훌륭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훌륭한 것으로 대접받으셔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베푸시는 연회는 “기름진 것과 골수가 가득한 것으로 베푸시는 연회이다”(사 25:6). 우리도 이러한 제물들을 그에게로 가져와야 한다.

다윗은 “수소와 염소를 드릴” 것이다. 그처럼 후하게 찬미할 것이며, 결코 거기에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 다윗은 자기에게 별 소용이 없는 것을 바치려 하지 않고, 자기에게 아주 귀중한 것을 바치려 했다. 그리고 그것을 “양의 향기와 함께” 바쳤다. 즉, 양의 기름과 함께 바쳤다. 그것이 제단 위에서 태워졌기 때문에, 그 연기는 향기처럼 위로 올라갔다. 또한 “향기와 함께 양을” 바쳤다. 그 향기는 그리스도의 중보를 상징하고 있다. 그의 중보 없이는 우리의 가장 기름진 제물도 용납되지 못한다.

2. 양심적으로 그의 서원을 이행함으로써 찬미하고 있다. 우리가 환난 속에 있을 때 했던 서원을 양심적으로 갚지 않는다면, 우리를 환난에서 건지심에 대해 입으로 하나님을 찬미할지라도 용납받지 못한다. 시편 저자의 결심은 이것이었다(13-14절). “내가 나의 서원을 갚으리니, 이는 환난 때에 내 입이 말한 것이니이다.” 다음 사실들에 유의하자.

(1) 우리가 어떤 고통에 눌려 있을 때 또는 긍휼을 추구할 때, 서원을 하고 주님 앞에 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죄에서 떠나도록 채찍질하고, 우리의 의무에 더 철저하도록 우리 자신을 붙들어두는 매우 일반적인 방식이며, 또 매우 장려할 만한 일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상응되거나 귀중한 생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은총의 징표를 받기 위한 준비이기 때문이다.

(2) 우리가 환난 가운데 있을 때 한 서원은 그 환난이 끝날 때 잊혀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잘 이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서원하고 갚지 않는 것이 서원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Ⅱ. 다윗은 자기 친구들에게 선포하는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송축하고 있다(16절). 그는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주심에 대해 감사드리는 이야기를 들으라고 선한 사람들의 회중을 부르고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1. “너희는 나와 함께 연합하여 찬송할 것이며, 내가 감사드리는 일을 도울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간구하는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받은 긍휼에 대해 감사드리는 일에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의 도움을 원해야 한다.

2. “너희는 내가 해야 할 말에 의해 교화되고 격려받을 것이다.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34:2). 주를 경외하는 자가 나를 보고 기뻐하리라(119:74). 그러므로 나로 하여금 그들과 함께 하도록 하라.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선포할 것이다. 그것을 조롱하고 그것을 희롱할 허탄하고 정욕적인 백성들에게가 아니고(진주를 돼지에게 던져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것을 선용할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위해 행하신 것을 내가 선포하리라.” 이것은,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욱 하늘의 총아라고 생각되도록 하려는 자만이나 헛된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으며(우리는 정당한 부채로서 이것을 그에게 빚지고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들의 경험을 서로 나누어야 한다. 우리는 매사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 특히 그가 우리 영혼을 위해 행하신 위대하고 친절한 일에 대해, 또 그가 거룩한 일들로 우리를 축복하신 그 영적 축복에 대해 서로에게 이야기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이 일에 매우 열심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로써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를 원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영혼을 위해 행하신 것은 무엇이었는가?

(1) 하나님은 그에게 단련하시어 기도의 의무를 사랑하게 하셨고, 그의 은혜로써 그 의무에 그의 마음을 쏟도록 해주셨다(17절). “내가 내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었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위해 행하신 일들 가운데서 우리에게 “아바 아버지”라 부르도록 가르치고, 또 부를 수 있게 해주시는 양자(養子)의 영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도록 명하셨으며, 기도하도록 격려하셨고, 또 기도할 마음을 주신(모두에게 면류관을 씌우신) 바로 그것이, 우리가 감사한 마음으로 그를 찬송해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었을 때, “우리 혀로 높이 찬송하였다”면, 즉 우리가 그로부터 긍휼과 은혜를 구할 때, 믿음과 소망으로 그에게 영광을 돌릴 능력이 있었고, 아직 소유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기대하고 있는 긍휼에 대해 그를 찬송할 능력이 있었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에게 부르짖음으로써 우리는 실지로 그를 찬송하게 된다. 그는 정직한 자의 겸손하고 믿음에 찬 기도에 의해 그 자신이 영예롭게 되신 것으로 여기시길 즐거워한다. 그리고 그가 우리와 함께 관심을 결합시키는 것을 매우 크게 기뻐해 왔으므로 우리 자신의 번영을 구하는 가운데 우리가 그의 영광을 구한다는 것은 그가 우리 영혼을 위해 행하신 하나의 위대한 일이다. “그의 찬송이 내 혀 밑에 있었다”(그것을 이렇게 풀이할 수도 있다). 즉, 나는 어떻게 그의 이름을 높이고 찬미할 수 있을까를 내 마음에 생각하고 있었다. 기도가 우리 입에 있을 때, 찬송이 우리 가슴에 있어야 한다,

(2) 하나님은 그에게 역사하시어, 기도의 적인 죄를 두려워하게 하셨다(18절).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는 것을 나는 매우 잘 알고 있다. 유대학자들 중 어떤 자들은 위선자인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지니고 있는데, 그들은 이 말에 매우 부패한 주석을 달아놓고 있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즉(그들은 말한다) 내가 마음의 죄만을 허락하고 내 말이나 행동으로 죄악을 범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듣지 아니하시리라.” 즉, 그가 나를 불쾌하게 여기시지 않을 것이고, 주목하지 않으실 것이며, 따라서 나를 책망치 않으시리라고 해석한다. 마치 마음의 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가 아닌 것처럼 책망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릇되다는 사실을 우리 구주는 율법에 대한 영적인 해설 속에서 보여주셨다(마 5장). 그러나 이곳에서의 이 의미는 명백하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즉 “내가 그러한 생각에 호의를 가지면, 내가 그것을 사랑하여 그것에 몰두하고 내 자신을 그것에 허용하면, 또 내가 그것을 친구로 대우하고 그것을 환영하며 그것을 준비하며 그것과 헤어지기를 싫어하면, 비록 이처럼 장려하고 많이 범한 것이 마음의 죄에 불과할지라도 내가 그것을 달콤한 음식처럼 내 혀 밑에 굴리면, 내가 속마음으로 그것을 즐거워하면,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으시지 않고, 용납하시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즐거워하시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나는 그것에 대한 평화의 응답을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마음에 품은 죄악은 분명히 기도의 위로와 성공을 망친다는 사실을 유의하자. 왜냐하면 “사악한 자의 제물은 여호와께 가증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계속 사랑하고 그것과 동맹하는 자는 약속 속에서나 중보자 안에서 유익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기도에서 성공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3)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대해 은혜롭게 평화의 응답을 허락해 주셨다(19절).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도다.” 비록 나 자신이 내 안에 잘못된 것을 많이 자각했기 때문에 내 기도가 거절될까봐 두려워하기 시작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존중하기를 즐거워하셨음을 발견했다. 이것을 하나님은 그의 영혼을 위해 행하셨다. 그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써, 하나님은 그에게 그의 은총의 표적을, 그리고 그가 그 안에 선한 일을 역사하셨다는 증거를 주셨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하고 결론 맺고 있다(20절).

앞에 두 구절은 삼단논법의 대명제와 소명제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하나님이 듣지 아니하시리라.” 그것이 명제다.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도다.” 이것은 가정이다. 여기에서 그는 합리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추론했다. “그러므로 나는 내 마음에 죄악을 품지 아니하나이다.” 그러나 그 자신이 위로를 취하는 대신, 그는 하나님께 찬미를 돌리고 있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전제가 어떠한 것이든, 하나님의 영광이 항상 그 결론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들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우리가 기도로써 얻은 것은 찬미와 함께 써야 한다. 기도에 응답하는 긍휼은 특별히 우리로 하여금 감사하게 만든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그 구원이 그의 어떤 기도가 가치 있기 때문에 허락되었다고 생각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덕분으로 돌리고 있다. 이것을 그는 수정하는 방식으로 첨가하고 있다. “구원을 끌어온 것은 내 기도가 아니라, 그것을 보낸 그의 인자하심이었다”고.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신다. 그가 우리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므로 그것은 우리 소망의 근원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 찬미의 내용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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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8034, 솀) 이름 name

이 단어의 확실한 어원은 아직 입증되지 않고 있지만 오늘날에는 스미스(W. R. Smith, Kinship, 213)가 내놓은 견해가 몇몇 학자들의 지지를 받는다. 스미스의 주장에 따르면 솀(shem)은 '표를 하다' to mark 혹은 '...에 소인을 찍다' brand를 뜻하는 아랍어 어근 wsm에서 유래하였으며, 따라서 솀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다른 사물이나 사람과 구별시켜주는 외적인 표시이다(참조: TWOT).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864회 나오며 그 중에서 약 90회가 복수형으로 사용되었다.

(a)  이스라엘 사람들도 또한 고유한 개인적 이름들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가장 잘 알려진 실례는 나발의 이름인데 그의 이름이 암시하는 것처럼 그는 미련한 자이다(삼상 25:25). 또한 사람들과 장소들에 이름이 주어질 경우에 추가되는 수많은 (국가의) 어원학적 해석은 이러한 맥락에 속한다. 하와: "모든 산 자의 어미"(창 3:20, 아담 Adam, art. Heua), 가인: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참조: 카나: 얻다, 창 4:1), 바벨: "이는 여호와께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참조: 발랄: 혼잡케 하다, 창 11:9). 이삭이라는 이름은 그의 부모의 웃음을 상기시킨 것이다(창 17:17, 창 18:12, 아브라함). 야곱은 발꿈치를 잡는다(창 25:26, 이스라엘). 추가하자면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주권과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참조: 창 2:19 이하의 동물에 대하여 아담의 주권. 삼하 12:28에서는 한 성에 대하여, 시 49:11에서는 땅에 대하여, 여자들은 남자의 이름을 칭하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그의 소유가 되고 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사 4:1). 별들에 이름을 부여하는 자로서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창조자이시며 주님이시다(시 147:4). 같은 방법으로 그는 이스라엘의 이름을 부르시고 그를 자기의 소유로 만드셨다(사 43:1, 사 63:19). 압살롬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으므로 자기 이름을 기억할 기념비를 세웠다(삼하 18:18).

또한 이름을 변경하는 것도 이름의 중요성을 증거하는 것이다(창 41:45, 왕하 23:34). 여호와께서도 어떤 사람의 이름을 변경시키면서 자신이 선택하신 자들에게 현재 처해진 환경, 혹은 미래를 위하여 새로운 중요성을 부여하셨다. 예컨대 아브람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인 아브라함이 된다(창 17:5). 야곱은 이스라엘이 된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과 겨루었기 때문이다(창 32:28). 아브라함의 이름과 또한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이름은 그 이름의 실제 소유자보다 훨씬 더 중요성을 지닌다(창 48:20). 예루살렘은 말세에 새 이름을 받는다(사 62:2). 이사야는 자신의 자녀에게 상징적 이름을 주었으며(사 7:3, 사 8:3), 구원을 전하는 자들의 이름들은 여호와의 은혜의 증거이다(사 7:14, 슥 6:12).(F. F. Bruce)

구약성경에서 인격적인 이름이라는 개념에는 종종 존재, 성격, 평판의 개념이 포함된다(삼상 25:25). 솀의 복수형은 종종 '사람들' persons이라고 번역된다(한글개역, "명수", 예: 민 1:2, 민 1:18, 민 1:20, 민 3:40, 민 3:43, 민 26:55). 나아가 "이름을 제하여 버리다"라는 말은 그 사람 자체를 없앤다는 말과 같았다(신 7:24, 신 9:14, 삼상 24:21 등). 아이에게 선택하여 붙여준 이름은 종종 그 아이가 어떤 인물로 성장해 주었으면 하는 부모의 소원이나 기대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은 새로이 이름을 붙여주는 과정에서 특별히 분명하다. 예를 들어 야곱이 이스라엘로 개명한 경우가 있다(창 35:10). (W. C. Kaiser)

(b)  ① 여호와의 이름이 가장 의의가 깊다. 그가 친히 그 이름을 계시로 알리셨다(창 17:1, 출 3:14, 출 6:2). 성경적 계시의 가장 기본적이며 본질적인 특징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도 이름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개인적인 이름을 가지셨고 그 이름에 의하여 그를 부를 수 있으며 또 불러야 한다. 여호와께 호소할 때 그는 가까이 오셔서 약속을 지키신다: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출 20:24, 참조: 민 6:24 이하, 기억하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심지어 왕까지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한다(축복하다, 민 6:27, 신 10:8, 삼하 6:18). 진실로 여호와의 이름은 그의 인격적 통치와 활동의 강력한 표현이기 때문에 여호와 자신을 말함에 있어서 그 이름이 대용될 수 있다(레 18:21, 시 7:17, 암 2:7, 미 5:4). 여호와께서 인간과 접하시는 면이 바로 그의 이름이며, 이 이름으로써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계시하신다. 과거(출 3:6, 출 3:13, 출 3:15)와 현재(출 20:7)와 미래(겔 25:17, 겔 34:50 등)를 통한 인간에 대한 그의 역사적 다루심은 그의 이름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마술 혹은 거짓 맹세로써 이 이름을 오용하는 것을(왜냐하면 맹세가 여호와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금하였다(출 20:7). 왜냐하면 여호와의 이름은 계시의 선물이며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창 17:1, 출 3:14, 출 6:2). 여호와의 이름은 이스라엘을 신용하여 그들에게 맡긴 것이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그 이름을 모른다(시 79:6). 이스라엘은 그 이름을 거룩케 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것은 예배 의식, 희생 제사, 기도, 축복과 저주 또한 거룩한 전쟁(시 29:8)에서 발생한다. 다시말해 여호와를 섬기되 그만을 섬기며 그의 계명에 복종함으로써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다. 따라서 다른 신의 예배 의식에 참예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힘을 뜻한다(레 19:21).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루살렘(렘 25:29), 성전(렘 7:10), 언약궤(삼하 6:2)를 일컬으며 이것들을 성별하여 여호와와 관련시키는 것이 바로 그러한 신성화의 유일한 기초이다.

②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여호와와 관계하였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하고 있다. 여호와는 자신은 하늘에 거하시지만 그러나 그는 땅에 그의 "이름"이 거할 한 장소를 선택하셨다(신 12:11, 신 14:23, 참조: 삼하 7:13, 왕상 3:2, 왕상 5:17). 그의 이름이 성전에 거한다는 점에서 여호와의 임재 그 자체가 보증된다. 그러나 성전이 더럽혀질 그러한 경우라도 하나님의 초월성은 보존된다(참조: 여호와께서 두꺼운 흑암 중에 거하신다고 표현한 왕상 8:12과, 여호와의 이름이 성전에 거한다고 언급한 왕상 8:14 이하). 여호와의 이름은 그 자신과 마찬가지로 주권성을 지닌다.

③ 결과적으로 여호와의 이름은 그 자체의 능력있고 독립된 존재로 생각될 수 있다. 물론 그의 이름은 여호와 그 자신과 여전히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이름 자체의 능력있는 힘을 통하여 경건한 자들은 여호와의 보호와 도움을 경험한다(참조: 잠 18:10, 말 1:11, 시 54:6). 그의 이름은 여호와 자신의 어떤 본질에 거의 가깝다(참조: 시 54:1, 시 89:24, 시 118:10 이하). 이 이름은, 타 종교에서 예배의식적 관념이 점유하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참조: G.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Ⅰ, 1962, 183 이하).

④ 후대에 여호와의 이름은 종종 여호와에 대한 "찬양", 여호와의 "영광"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사 26:8, 사 55:13, 시 41:10).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혹은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출 15:3, 사 51:15, 렘 10:16, 암 4:13, 시 23:3)와 같은 표현 변화가 있어도 같은 방향을 가리키며, 세상에서,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 의미를 알리는 모든 국가 중에서의 여호와의 주권과 영광에 대한 그의 주장을 지적해준다(사 12:4, 시 105:1-3). "진실로 종말에 여호와께서 세상에 계시됨으로써 온갖 우상숭배가 사라지고 모든 무릎들이 홀로 하나이신 그의 이름 앞에 꿇을 것이다"(슥 14:9, 사 45:23, G. von Rad, 구약 신학론, Ⅰ, 185).(F. F. Bruce)

⑤ 여호와(YHWH)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야훼(Yahweh)라고 발음되며 구약성경의 이름에 관한 신학의 큰 주제이다. 출 6:2-3에서 하나님은 족장들에게 그의 이름인 야훼로는 특별한 계시를 준 적이 없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나 야훼라는 이름이 창세기에서 거의 150회 가량 나온다는 이유로 많은 학자들은 이것이 창세기에서 이 이름이 나오는 부분들은 후대에 기록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거나 오경에 있는 두 전승 사이에 분명한 모순이 있음을 지적해 주는 것이라고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에 대한 해결점은 출 6:2-3에서는 니팔 재귀 동사가 사용되었다는 점과 '엘 샷다' 앞에 본질을 나타내는 베드(Beth Essentiae)가 붙어 있으며 그 의미가 확대되어 여호와 앞에도 베드가 붙어 있는 것과 같다(실제로는 여호와 앞에 베드가 없음)는 점에 있다. 그 결과로 이 본문에서 확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엘 샷다의 성품으로는(in the character of[Beth Essentiae]) 나 자신을 나타내었으나 여호와라는 성품으로는(in the character[Beth Essentiae]가 암시되어 있음) 그들에게 내 자신을 알리지 아니하였다"라고 주장하신다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사상이 출 3:13에서도 암시되어 있다. 이 구절에서 의문사 마(무엇)는 어떤 사람의 신분(성질)을 묻는 것이고, 반면에 미(누구 who)는 단지 신원(정체)만을 묻는 것이다.

몇몇 구절들에서 솀 야훼는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너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야훼의 현현과 거의 같은 역할을 한다(출 23:20-21, 사 30:27).

하나님의 이름은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하심과 진실하심으로 자신을 온전히 계시하시는 것을 의미한다(시 22:22).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행할 수 있다(walked in), 즉 사람들은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아야 한다(미 4:5). 

폰 라드(Von Rad)는 실제적 임재가 모든 이러한 개념들의 본질로 향하는 보다 세련된 경향으로 대체된 진화론적 발전을 주장한다: 즉 법궤, 여호와의 천사, 여호와의 얼굴, 야웨의 영광, 여호와의 이름은 여호와의 임재를 나타내고 보증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오히려 그것은 장차 오실 성육신하신 그의 아들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를 완전하게 계시하기 위하여 우리 주 여호와께서 준비하신 것이다.(W. C. Kai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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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119): 60 / 520.5 04.29(120): 60 / 524 신약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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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9:1-12]]==
1.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2.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
3.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한 몸에서 갈비뼈를 따로 떼어내어)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7.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아르케...죄가 들어오기전 창조 당시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라(이혼이란 개념은 결코 없었다)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10.제자들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 
11.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12.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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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이혼 문제(마 19:3-12)
바리새인들과 변론함으로써 이혼 사건에 관한 그리스도의 법을 본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의 반박하는 이야기를 매우 참을성 있게 귀담아 들으셨으며, 그것을 자신의 제자들을 교육시키는 데 이용하셨다.
Ⅰ. 바리새인들이 던진 질문(3절).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까?" 그들이 이와 같이 질문한 것은 그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며, 그에게서 배우기 위하여 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 이 이혼 문제에 대하여 그 당시의 일반적인 관례와는 상반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신 일이 있으셨다(마 5:31, 32..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그와 같이 정면으로 이혼 문제를 논박하려고 하신다면 바리새인들은 이를 미끼로 삼아 그에 대하여 이 지방 사람들의 반감과 분노를 일으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 사람들은 그들이 탐닉하고 있던 한 가지 자유인 이혼 문제를 제한시키고 누리지 못하게 하려 하는 자에 대하여는 살기에 찬 분노를 터뜨려 왔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훈의 말씀 중에서 어느 것에 의해서나 또는 이 문제로 인하여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잃게 되기를 희망하였다. 즉 그들의 시험은 다음과 같이 계획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이혼은 불법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혼을 허락하고 있던 모세의 율법을 거스리는 원수라고 그를 비난하려고 했으며 만일 그가 이혼은 합법적인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그의 교리와 가르침이 메시야의 교리나 가르침에 기대된 완전성을 결여한 것으로 헐뜯어 보려고 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혼이 묵인되고는 있었지만, 다소 엄격한 사람들은 이혼을 그리 좋은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은 주장하기를 모세의 율법이 이혼을 허용하였지만, 바리새인들 사이에는 이혼의 사유를 어떤 것으로 정하느냐는 문제를 놓고 의견 대립이 있었는데, 그리스도께서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는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결혼문제로 인한 소송사건이 그 당시 허다하였는데, 때로는 매우 복잡하고 난처한 경우도 있었다. 그 사건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저촉되어 일어난 것들이 아니라 인간의 욕정과 어리석음에 의하여 생긴 것들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흔히 이혼 문제에 있어서 자기들이 좋을 대로 합의 이혼해 버렸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질문은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연고가 있을 때에는 아내를 버리는 것이 인정되었지만 지금과 같이 일반적으로 난잡한 사람들에 의하여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행해지고 있는 이혼 행위도 인정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부도덕한 사람들은 매우 사소한 이유일지라도 남자 편에서 생각해 볼 때 정당한 사유가 될 수 있다고 여겨지면, 예를 들어 여자가 보기 싫어지기만 해도 이혼할 수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이혼을 묵인하여 허락한 것은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잘못 해석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신 24:1)이다. 그들은 이 성경 말씀을 매우 광범위하게 해석하여, 아무런 연고가 없어도 그 여자가 미워지고 싫어지면 그것을 이혼의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Ⅱ. 이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그리스도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양심과 도의에 관한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직접적으로 대답하지는 않으셨으나, 매우 효과적인 충분한 대답을 해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당시 일반화되어 있던 자의적인 이혼들을 묵인하는 원리들을 단호하게 논박하심으로써 이것이 결코 합법적이 아님을 밝히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합리성을 결여한 법칙을 제시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성경적인 진리나 근거가 없이 자기의 판단을 주장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의 논증은 다음과 같다. 즉 "남편과 아내가 하나님의 뜻과 작정에 의하여 완벽하게 하나로 결합이 되었을 때는 어떠한 경우를 물론하고 경솔하게 나누어져서는 안 된다. 그들의 결합이 신성한 것이라면 쉽게 풀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 있는 결합을 증명하기 위하여 세 가지로 말씀하시고 계시다.
1.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심. 그리스도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창조에 관하여 바리새인들 자신의 성경 지식에 호소하고 있다. "너희는 읽지 못하였느냐?" 그들이 읽어서 익히 알고 있는 성경 구절을 가지고 논증을 하면 매우 유리할 때가 있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것"(창 1:27; 5:2)을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 인간의 창조에 대하여, 즉 어떻게, 누가, 무엇으로, 왜 우리를 창조하셨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하나님은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한 남성을 위해 한 여성을 만드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그의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를 취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택하여 취할 수 있는 다른 여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곧 그들의 결합이 분리할 수 없는 것임을 의미한다. 하와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온 갈비뼈였다. 그러므로 그 하와를 쫓아내어 버려야 한다면 그것은 그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분명한 의도에 어긋난다.
그리스도께서는 본문에서 이 문제를 간단하게 암시만 하셨지만, 바리새인들이 읽은 바 그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언급하심으로써 그 말씀이 본래 지니고 있는 의미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 말씀에서 우리가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다른 나머지 피조물도 수컷과 암컷으로 창조되었지만 그 말씀은 그들 중 어떤 것에도 해당되지 않으며 오직 인간만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왜냐하면 남녀간의 결합은 이성적이며 단지 감각을 즐겁게 하거나 움직이자를 보존 번식시키는 것 이상의 고상한 목적들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편간의 결합은 짐승들의 암수간의 결합보다 훨씬 밀접하고 확고한 것이다. 또한 짐승들은 아담고 하와처럼 서로 간에 배우자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남녀를 표현하는 방식은 어느 정도 단수로 되어 있다(창 1:27). "하나님은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역주:이를 흠정역대로 번역하면). "하나님은 그의 형상대로 그를 창조하시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이 구절을 보면 "그를"과 "그들을"이 뒤섞여 사용되고 있다. 그들이 둘이 되기 이전에 창조시는 하나였기 때문에 그들이 결혼언약에 의하여 다시 하나로 되었을 때 그 하나됨은 더욱 밀착되고 결코 나눌 수 없는 것으로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 결혼의 기본법.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5절). 남편과 아내간의 촌수는 부모와 자식 간 보다 더 가깝다. 그러므로 부자(父子) 사이의 관계가 쉽게 깨뜨려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결혼의 결합 관계는 더욱 깨뜨려 질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연고가 있다고 해서, 아니 어쩔 수 없는 연고가 있다고 해서 자식이 자기 부모를 죽게 내버려두거나 부모가 자기 자식을 길거리에 내버려도 좋은가? 결코 그럴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남편 된 자는 자기 아내를 더구나 쫓아 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의 사이는 혈통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작정하여 가지어 주신 것이므로 그 관계는 부모와 자녀들의 관계보다 더욱 가깝고 그들의 결합은 더욱 강하다. 왜냐하면 한 남자가 자기의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화합하게 될 때에 부자 간의 관계는 결혼에 의하여 완전히 대체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제도가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제도로 말미암아 결과된 결혼이라는 결합은 혈연 관계가 낳은 최대의 결합인 부자 관계보다 더욱 우세하다.
3. 결혼 계약의 성질. 결혼은 인격의 결합이다.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고 한 몸이다." 한 사람의 자녀들은 그 자신의 부분에 불과하지만 그의 아내는 자기 자신이다. 부부간의 결합이 부부간의 경우보다 더 밀접한 것 같이, 그것은 어떻게 보면 인체내의 각 지체들 간의 상호 관계와도 같다. 바로 이 점은 남편들이 자기 아내들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요, 또한 그들이 자기 아내들을 쫓아 내지 말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아직껏 자기 자신의 몸을 미워하거나 그것을 잘라 내거나 또한 잘라내려 하지 않고 다만 그것을 잘 가꾸며 귀중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그것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그들 둘이 이제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한 아내만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한 아담을 위하여 한 하와만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추론하시기를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하셨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배필이다. (suzeuvgnumi) ─ 즉 그는 함께 멍에를 매게 했다는 뜻으로 그 말씀의 뜻은 매우 깊다. 하나님 자신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를 무흠한 상태로 제정하셨다. 결혼과 안식일은 하나님이 가장 먼저 정하신 규례들이다. 결혼은 교회의 고유한 규례는 아니고 세상에 속한 일이지만 하나님이 제정하여 인치셨고 또한 여기에서도 우리 주 예수님에 의하여 인준되었음으로 결혼은 경건된 것으로 다루어지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성별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 결혼의 규례에 있어서 하나님께 대해 양심적인 관계를 가지게 되면 부부간의 의무를 서로 잘 이행할 수 있게 되며 결과적으로 위로가 넘치게 될 것이다.
(2)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의 규례에 의하여 짝지어진 것이므로 결코 인간의 어떤 규제에 의하여 나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이 그것을 나누어서도 안 된다. 남편 자신이나 정부의 어떤 관리도 이 둘 사이를 나눌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것을 행할 권위를 주신 일이 결코 없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노라"(말 2:16)고 하셨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짝 지워 주신 것을 나누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하나의 일반 원칙이다.
Ⅲ. 이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반대 질문. 이 반대 질문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럴 듯한 질문이다.(7절).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즉 그런 경우에도 아내를 쫓아내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이혼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성경의 근거를 말씀하셨고, 바리새인들은 이혼을 인정하는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자체 내에서 상호 모순되어 보이는 구절들은 마음이 부패한 사람들에게 난제요 큰 거침돌이 된다는 사실이다. 모세는 자기를 택정하신 분에게 충성하였고 또한 주님에게서 받은 말씀만을 명하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로 바리새인들이 "모세가 명한 것"이라고 주장한 바는 다만 "허용"에 불과한 것이었다(신 24:1). 그리고 모세가 말한 바 그 말씀은 이혼 그 자체를 장려하려는 것보다는 그것이 지나치지 않도록 억제하려고 계획된 것이었다. 유대인 학자들도 그 법의 제한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이혼은 진중을 기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다고 하고 있다. 즉 특정한 이유가 있어야 되고 이혼증서가 반드시 작성되어야 하며 그리고 사법상의 모든 정식 서류를 구비해야만 한다. 그 이혼증서는 자기 아내의 손에 직접 전해 주어야 하며 또한 그들이 다시 합해지는 재결합은 명백히 금지되었었다.
Ⅳ. 이와 같은 반대 의견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
1.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관한 바리새인들의 오해를 바로 잡아 주셨다. 바리새인들은 그 율법(신 24:1)을 "명령"으로 보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허용" 또는 "묵인"으로 보고 있다. 경건하지 못한 세속적 인간들은 한 치를 주면 한 자를 달라고 하기 쉽다. 즉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이혼에 관하여 불가피하게 묵인한 것을 가지고 명령한 것으로 왜곡시킨 것이다. 이 경우에 있어서 모세의 하나님께서 백성을 통치하는 행정상의 정치적인 법으로 주신 것이다. 또한 이혼이 묵인된 것은 세속 정부의 여러 가지 사정에 기인하였다. 결혼으로 말미암은 결합은 자연법이 아닌, 강제법에 의한 결과로써 너무도 엄격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혜를 따라 자기의 거룩성을 침해하지 않고 어떤 경우에는 이혼을 폐지시키기까지 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이혼을 허용하게 된 데는 한 가지 이유가 있음을 말씀해 주시고 있다. 그것은 결코 바리새인들이 특출하거나 신망이 있어서가 아니다.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내어버림을 허락하였느니라." 모세는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고 "목이 곧음"을 인하여 불평한 바 있다(신 9:6; 31:27).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목이 곧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들 백성들 상호 간에 목이 곧고 마음이 완악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난폭하고 잔인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네들의 아내가 밉고 싫증이 나는 데도 이혼을 못하게 할 경우에는 그 아내들을 잔인하게 취급하여 구타하고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는 살해까지 할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세상에서 가장 완악한 사람은 자기 아내를 학대하는 자라는 사실이다. 유대인들은 특히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악명이 높았던 것 같다. 그러기에 아내들을 쫓아내는 것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나약하고 불쌍한 아녀자들이 학대를 당하여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하는 것"(말 2:13)보다는 차라리 이혼하는 것이 더 나았다. 미친 사람과도 같이 목이 곧고 광란에 사로잡힌 사람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조금 양보하여 이혼을 허락해 주는 것은 더 큰 재난을 예방할 수 있다. 강제법은 자연법을 보존시키기 위하여 폐지될 수 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시고 제사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들은 목이 곧고 비열한 자들이어서 그것을 필요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마음을 완악하게 먹지 않고서는 아무도 이혼하는 자유를 얻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너희"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너희"는 그 당시 살고 있던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후손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의 완악함을 아실 뿐만 아니라 미리 아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규례와 섭리를 인간의 본성과 기질에 적합하게 하시되 두려워하게 하셨다. 계속해서 본문에 보면 모세의 율법은 사람의 완악한 마음을 고려하였으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것을 치유해 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는 돌 같은 딱딱한 마음을 제거하고 살결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준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 되었으나, 복음에 의해서는 죄를 정복하게 된 것이다.
2. 그들에게 최초의 결혼제도의 의의를 깨닫게 해 주었다. "그러나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규례 중 어떠한 것에든지 부패성이 개재되면 그 부패성은 그 제도가 처음에 제정될 당시의 것으로 올라감으로써 일소될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어떤 사본이 오류 투성이일 경우 원본에 의해서 검토되고 수정되어야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주님의 성만찬에 관하여 고린도교회 내에 여러 가지 의견이 난립하고 있을 때 그들의 의견을 바로 잡아 주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처음 그 성만찬을 주님이 베푸시던 사실에 대해 언급하였다(고전 11: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라." 진리는 언제나 처음부터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적 길 곧 선한 길"을 구해야만 한다(렘 6:16). 그리고 후대의 견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초기의 표준들에 의해서 개혁을 한다.
3, 그리스도께서는 확실한 법에 의하여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9절). 이는 그가 이전에 말씀하신 것과 일치한다(5:32). 그 때에는 그 말씀이 설교 가운데서 언급되었었고, 지금은 변론 가운데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그 말씀은 동일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언제나 변함이 없으시고 동일하시기 때문이다.
(1) 음행의 경우에만 이혼을 허락하였다. 이혼을 반대하는 율법의 동기는 바로 이것이다."저들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그러므로 만일 아내 된 자가 음행을 행하여 음행한 남자와 한 몸을 이루게 되면 그 율법의 동기는 종식되고 또한 그 율법도 종식된다.
세의 율법에 의하면 음행은 사형에 해당하였다(신 22:22).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을 좀 완화시켜서 사형대신 이혼으로 벌을 받게 하신 것이다. 휘트비(Whitby)박사는, 우리 주님께서 porneiva(음행)란 단어를 사용하심으로써 혼전에 범하였으나 결혼 후에야 발견된 부정한 행위로 이 음행을 이해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결혼 후에 행해진 것이라면 그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서 이혼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2) 그 외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혼을 불허하고 있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이는 그들의 질의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으로써 이혼이 합법적이 아님을 말씀해 주시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복음 시대는 다른 점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개혁의 시대"이다(히 9:10). 그리스도의 법은 인간을 그의 최초의 순수성으로 회복시켜 준다. 사랑, 특히 부부간의 사랑은 새로운 계명이 아니고 처음부터 있었던 계명이다. 자의적인 이혼 때문에 뒤따르게 되는 가족과 국가의 불행, 혼란, 무질서 등이 어떠한 것인가를 고려해 보면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법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며 기독교가 세속적인 일에 있어서도 얼마나 좋은 친구인가를 알 수가 있다.
모세의 율법은 인간의 마음이 완악한 까닭에 이혼을 허락하였고, 그리스도의 법은 이혼을 금하였다. 이는 곧 그리스도인은 사랑과 자유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심령은 온유하고, 결코 유대인처럼 완악하지 않게 될 것을 기대케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화평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사랑 안에서 서로 참아 주며, 용서를 받고 또한 용서받기를 소원하는 자들처럼,"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이후로는 "우리를 내어 보내지'(사 50:1) 않을 것을 확신하는 자들처럼 서로를 용서해 준다면 결코 이혼이란 있게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남편들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들은 그들의 남편들에게 순종한다면," 그리고 그들이 생명의 은혜를 이어받을 자로서 함께 산다면 이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법이요, 이는 모세의 율법에서는 찾을 수가 없는 법이다.
Ⅴ. 제자들은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법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였다(10절).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제자들 자신들도 이혼하는 자유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듯하다. 그들은 이혼이 결혼 생활에서 얻는 안락함을 보전하는데 편리한 방편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토라진 어린아이들처럼 그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것을 가지지 못하게 되면,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내던져 버리겠다는 식이다. 즉 그들이 원할 때 자기들이 아내를 내어버릴 수 없다면, 그들은 아내를 처음부터 갖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이혼이 허락되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으니라" 하시고는 그들을 축복하셨다. 즉 이와 같이 완전히 한 몸으로 결합된 자들이 복 되도다 선언하신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부패한 본성은 제약을 참지 못하여 그리스도의 속박을 산산조각 내기를 좋아하며, 자기 자신의 정욕을 위한 자유를 누리기를 기뻐한다.
둘째, 사람이 세상의 즐거움을 그 안에 섞여 있는 십자가와 같이 고난 때문에 포기한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고, 심술궂은 일이다. 이는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이 우리 마음에 흡족하지 않다고 하여 우리가 세상을 뛰쳐나가야 한다는 것과 같다. 또는 어떤 유익한 직업이나 지위도 그 안에 우리가 예속되어야 할 의무를 지워 준다고 해서 그것을 거절해야 한다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좋은 약이 입에 쓰다고 하여 내뱉는 것과도 같기 때문이다. 우리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는 거기에 우리의 생각을 맞추어야 하고 그것이 주는 낙을 인하여 감사하며, 그것이 지니고 있는 십자가 를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병행하신 것처럼 양자를 서로 병행시키고 그것을 선용해야만 한다.(전 7:14). 만일 결혼이라는 멍에를 기쁠 대는 내 벗어버리지 않아도 좋은 것이라면 "그러므로" 우리는 멍에를 메지 않아야 한다가 아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멍에를 메어야 할 때 사랑과 온유와 인내로 그 멍에에 자신을 맞추려는 결심을 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혼은 가장 불필요하고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 될 것이다.
Ⅵ. 이 이의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11, 12절).
1. 어떤 자는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인정하셨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말한 것을 인정하셨다.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으니라." 이는 이혼을 금지하기 위하여 독신을 장려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에게 성욕을 절제하는 은사를 받아 결혼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계속하여 독신으로 머물러 산다면(고전 7:1) 자기들의 최선을 다하게 된다는 하나님의 원칙을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은 마음만 먹으면 "주님의 일을 위하여 어떻게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고전 7:32-34) 염려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 염려에 대해 보다 덜 고민하게 되고, 그 대신 보다 나은 일들을 하는데 마음과 시간을 쏟아 바칠 수가 있다. 은혜가 증가하는 것은 가족이 늘어나는 것보다 나으며,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가지는 교제는 다른 어떤 교제보다도 먼저 취해야 할 교제가 아닌가!
2. 그리스도께서는 결혼을 금하는 것이 가장 불행한 것으로 보시고 그것을 허락지 아니하셨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극소수만이 이 말을 받을 수 있다. 그 누구도 이 말을 받아, 결혼하지 않고 지낼 수 없다. 그러므로 결혼 생활의 십자가를 반드시 저야 하며, 그 십자가를 피하려는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화형을 당하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더 낫다.
그리스도께서는 결혼하기에 부적당한 것을 두 가지로 말씀하셨다.
(1)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된 것은 개인적 측면에서 어찌 보면 일종의 재난일 수는 있다... 나면서부터 고자이거나 사고를 당하였든가 사람에 의해 원치 않게 고자가 된 자 또는 성욕이 상실되어 결혼 생활을 영위할 수 없어서 고민하는 자들은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러한 재난을 상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보다 더 잘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있다.
(2)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은 일종의 미덕일 수 있다. 그러한 미덕은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 된 자"의 것이다. 이는 결혼을 하는데 육신적으로 부적당한 것이 아니라 실상은 심적으로 부적당한 것을(성생활의 즐거움에 대한 무관심에 도달한 나머지 충분히 절제할 수 있는) 의미한다(어떤 사람들은 이 성경 구절을 오해하여 어리석고도 사악하게 육체적으로 자신을 고자로 만든 자들이 있다). 결혼 생활에서 얻는 모든 즐거움에 대하여 거룩한 무관심에 도달하고 그 즐거움들을 전적으로 금할 것을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 안에서 확고하게 결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와 같이 자신을 고자로 만든 것이다. 그들은 금식과 극기하는 모든 수단들에 의해서 결혼에의 모든 정욕을 억제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이 말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이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은 저들이 결코 결혼하지 않겠다는 서원에 의해서 자신들을 얽매어 놓아서는 안 된다. 다만 그들이 지금 마음으로만 결혼하지 않을 것을 결심해야 한다.
① 독신 생활에 대한 이러한 결심은 하나님에게서 주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이 말을 받지 못하고 "타고난 자라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성욕을 억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으로써 어떤 자에게 주어져 있으나 다른 어떤 자에게는 주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독신 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 어떤 사람이 경험에 의하여 이 은사를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 스스로 결정하고 또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7장 37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마음을 굳게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때에는 자신을 그렇게 지킬 수 있을 만큼 결혼의 필요성을 느끼지 말아야 하며 자신의 의지를 다스릴 만한 능력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거짓된 은사를 자랑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잠 25:14).
② 독신 생활은 천국을 위하여 결심되어야만 한다. 결혼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들 중에는 모든 의무를 벗어버리고 자신의 이기적인 무뚝뚝한 기질을 만족시키거나 아니면 자신의 다른 정욕과 괘락을 누릴 수 있는 보다 많은 자유를 얻고자 하는 자들도 있다. 이것은 미덕이기는커녕 사악한 악덕이다. 그러나 신앙을 위하여, 그렇지만 (교황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공적을 쌓는 행위로써가 아니라 오직 우리의 마음을 지켜 신앙의 봉사에 전심전력하는 수단으로써 부양가족을 거느리지 않게 되면 우리는 보다 많은 선행들을 할 수가 있다. 그때에만 하나님께서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그 결심을 인정하기고 합당하게 여기신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독신생활이라는 그 조건은 우리를 위하여 가장 좋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택하여 전념할 만하다. 또한 그 조건은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도 가장 좋다. 천국을 위하여 우리가 준비하고 그 천국에 우리가 계속 남아 있을 수 있도록 하는데 가장 적합한 조건이 바로 독신생활이다. 즉 천국을 위하여 우리가 선택하고 신앙의 열심을 격려할 목적으로 결단하는 독신생활은 우리 자신과 영혼을 위하여 가장 좋은 환경이요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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