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06.23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욥2.질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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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2.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

*3.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4.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5.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6.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7.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8.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9.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10.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11.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12.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13.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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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욥이 그에 대한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시험을 무사히 치룬 것을 보았다. 사탄은 욥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치라는 허락을 얻었고, 욥이 정녕 대면하여 하나님을 욕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욥은 하나님을 찬미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정직한 자이며 사탄은 그릇된 고발자임이 증명되었다. 어떤 사람은 이제 시험은 끝나고 욥이 다시는 그의 명성을 의심받지 않으리라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꿰뚫을 수 없는 갑옷을 입은 자로 알려진 욥은 여기에서 다시 과녁이 되었으며, 두 번째 시험을 당하게 되었다.


1. 사탄은 그의 뼈와 살을 치는 두 번째 시련을 주고자 동의했다(1-5).

2. 하나님은 거룩한 목적을 위해 그것을 허락하셨다(6).

3. 사탄은 극심한 고통과 불쾌한 병으로 욥을 괴롭혔다(7, 8).

4. 그의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도록 그를 유혹했으나, 그는 그것을 물리쳤다(9, 10).

5. 그의 친구들은 그를 조문하고 위로하러 왔다(11-13).

그리고 여기에서 이 선한 사람은 환난을 겪으며, 인내하는 자들의 모범으로 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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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을 괴롭히도록 다시금 허락받은 사탄(욥 2:1-6)

하나님과 모든 선한 자들의 숙적인 사탄은 여기에서 욥에 대한 사악한 계획을 수행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이 욥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를 미워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를 괴롭히고는, 하나님을 저주하도록 종용하면서 그와 그의 하나님 사이를 이간시키고, 그들 사이를 불화케 하고, 또 재앙을 끼치게 하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온갖 노력을 다했다. 어떤 사람은 마귀가 매우 수치스럽게 결국 좌절되고 실망 당하고 말았지만, 욥에 대한 그의 첫 번째 시도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정도였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악의는 끊임이 없다. 마귀와 그의 도구들도 그렇다. 선한 사람들을 중상하고 그들을 거짓되게 고소하는 자들은 비록 결과가 아무리 명백하고 분명하게 그 반대로 나타나고, 그들이 그들 스스로가 파놓은 함정에 빠졌을지라도, 그들 나름대로 변명을 한다. 

사탄은 욥이 거듭 참소당하도록 만들고자 하였다. 거룩한 자들에게 악의를 품고 부당하게 그리고 매우 지분거리면서 학대하는 자들은 그 거룩한 자들을 대적하여 여러 번 응답을 받았던 일들을 여전히 반복하고 재촉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는 자로서 묘사되었다(계 12:10). 이처럼 사탄도 여기에서 날마다 욥은 참소했다.

Ⅰ. 재판정이 마련되었고, 고발자 혹은 참소자가 전번처럼(1:6, 7) 나타났다(1, 2절). 천사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고, 사탄도 그들 속에 끼어 있었다. 어떤 사람은 그가 나와서 욥에 대한 그의 악의를 자백하고 또 그를 잘못 이해한 사실을 시인하면서 "내가 잘못했나이다"라고 말할 것을 기대했을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칭찬했던 자를 속였으므로 용서를 구해야 마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기는커녕, 욥을 더욱 대적할 의도를 품고 나아 왔다. 그는 이전과 똑같이 "네가 어디서 왔느냐?"라는 질문을 받았고 이전처럼 "땅에 두루 돌아 다녀왔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그것은 비록 그가 그 선한 자를 능욕했었을지라도, 아무런 해로운 일도 행하지 않은 사실을 나타내는 것과 같은 어투였다.

Ⅱ. 재판장 자신이 고소당한 자를 위해 변호하셨다(3절).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선한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리고 이제 마침내 그가 순전하고 정직하여 충성된 나의 종이라는 것을 깨달았느냐? 너는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킨다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이제 욥의 성품의 훌륭한 점을 더해 주었다. 그는 그의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을 저주하는 대신, 오히려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믿음이 필요한 때라는 것을 알고 믿음을 굳게 지켰다. 그는 형통할 때나 곤경에 처할 때나 모두 한결 같았다. 아니 오히려 더 나았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데 있어서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진심이었고 활기를 띄고 있었으며, 이처럼 흔들릴 것에 대비하여 더욱 그 뿌리를 굳게 박고 있었다.

1. 욥에 대한 사탄의 진술은 이렇게 정죄를 받았다. "너는 고발자로서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다." 또는 "네가 나를 격동하여 욥을 치게 한 것이 헛되도다. 왜냐하면 나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한 자들은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후 4:9). 사람이나 마귀가 우리의 재판장이 되지 않는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그들은 옳든 그르든 우리를 망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그의 심판에는 결코 잘못이나 편견이 없으시다.

2. 이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지조를 지킨 욥은 이런 칭찬을 받았다. "그는 자기의 순전을 그의 무기처럼 굳게 지켰다. 이제 너는 그의 보물과 같은 그의 무장을 해제시킬 수 없으며, 그것을 빼앗을 수 없다. 아니, 그렇게 만들려고 한 너의 시도는 그로 하여금 더욱 그것을 굳게 지키도록 만들었다. 유혹에 의해 믿음의 근거를 잃기는커녕 그는 오히려 그것을 얻었다." 하나님은 감탄과 즐거움으로 그리고 그의 은총의 능력에 대한 일종의 승리감으로 그것을 말씀하셨다.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이처럼 욥의 믿음의 시련은 "칭찬과 영광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벧전 1:7). 견고함은 순전함을 이룬다.

Ⅲ. 더 많은 고발이 있었다(4절). 사탄은 그의 전번 시도가 실패한 것을 어떻게 변명하였는가? 그가 그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매우 자신만만했었는데, 이제 그것을 변명하기 위해 무엇이라고 말했던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이 말에는 자기애와 자기보존의 원리가 사람의 마음을 매우 강력히 움직이고 있다는 약간의 진리가 들어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가장 가까운 혈족 심지어 그들의 분신인 자식들보다도 더욱 사랑한다. 그리고 자기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그들의 재산을 투자할 뿐만 아니라 그냥 주기도 한다.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행복하고 고귀한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가 건강하고 편한 상태에 있을 동안에는 그들이 무엇을 잃든지 간에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고통을 멀리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유익하게 이용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과 건강을 지속시켜 주시고 우리 사지와 감각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시는 한 우리는 다른 즐거움을 잃은 것을 더욱 끈기 있게 참아야 한다(참조, 마 6:25).

1. 그러나 사탄은 이러한 근거 위에서 욥을 고발하면서 어리석게도 그를 그의 주위에 있는 자들에게 너무 무심한 자라고 묘사하였다. 즉, 그의 자녀나 종들의 죽음에 대해 조금도 상심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의 가죽이 온전한 한, 그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죽이(이렇게 표현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꼼짝없이 벗겨졌건마는 이에 대해 무관심한 자라도 그를 묘사하고 있다. 그는 자녀들의 영혼에 대해서는 매우 자상했는데, 그들의 육신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며, 타조처럼 그의 자식들이 그의 것이 아닌 양 완고하게 돌아서는 자인 것같이 말했다.

2. 완전히 이기적이며 그 자신의 안이와 안전 이외에도 어떤 것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그의 믿음이 그를 심술궂고 침울하고 비뚤어지게 만든 것과도 같았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과 그 백성들은 마귀와 그의 하인들에 의해 흔히 잘못 진술된다.

Ⅳ. 욥의 순전함을 더욱 시험하기 위한 도전이 제기되었다(5절). "이제 주의 손을 펴서(내 손은 그를 치기에 너무 짧고 그를 상하게 하기엔 너무 약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 오니) 그의 뼈와 살(그를 쳐서 상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부분-미 6:13)을 치소서. 그러면 그가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며, 그의 순전함을 버릴 것이라는 말을 자신있게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육신의 날카로운 고통과 병이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생각을 초조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우리도 경험에 의해 알고 있다. 감각에는 논쟁이 필요 없다. 사도 바울 자신도 육체의 가시를 참기 위해 많은 수고를 했고, 그리스도로부터의 특별한 은총 없이는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고후 12:7, 9).

Ⅴ. 이러한 시련을 주도록 사탄에게 허락이 내려졌다(6절). 사탄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손을 펴시어 그것을 행하시도록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생으로 고생하며 조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며," 또한 그것을 즐거워하시지도 않으시고 그 자신의 자녀들에겐 더욱 그러하시다(애 3:33). 그러므로 만일 그러한 일이 행해져야 한다면 그것을 행하기를 기뻐하는 사탄으로 하여금 하도록 만드신다.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너의 가장 악한 것을 그에게 행하라. 그러나 한 가지 단서와 제한이 있다. 오직 그의 생명은 또한 그의 영혼은 해하지 말지니라. 그를 괴롭히되, 죽이지는 말라."

사탄은 귀한 생명을 노렸다. 그리고 그가 할 수만 있었다면, 죽어가는 고통이 욥으로 하여금 그의 하나님을 저주하도록 만들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시련 이후에 욥에게 줄 자비를 남겨두셨다. 그러므로 욥은 반드시 살아남아야만 했다. 그리고 비록 욥이 환난을 당할지라도 그의 생명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어야만 했다. 만일 하나님이 그 으르렁거리는 사자를 묶어 두시지 않으셨다면 얼마나 쉽사리 우리를 삼켰겠는가! 하나님께서, 사탄과 사악한 사람들이 분노를 품고 그의 선한 백성들을 계속 치도록 허락하시는 한, 하나님은 그것이 장차 그와 그들의 칭찬이 반드시 되게 하시고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실 것이다"(시 76:10). "그의 영혼을" 즉(어떤 사람의 견해대로) "그의 이성은 해하지 말지니라. 그로 그것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공정한 시험이 아니다. 만일 그가 혼미한 정신 상태에서 하나님을 저주하였다고 해도 그것으로 그의 순전함을 반증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의 마음에서가 아니라, 정신 이상에서 나온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욥은 이처럼 사탄에 의해 해를 입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한 원형이 되었다. 그리스도에 관한 첫 번째 예언을 보면 사탄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리라고 되어 있다(창 3:15). 그리고 그 예언은 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사탄은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마 4:6)이라고 말하면서 그로 하여금 그의 고결함과 하나님의 아들됨을 버리도록 유혹했었다. 사탄은 그리스도를 배반한 유다의 마음 속에 들어가서(어떤 사람들의 견해대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스도를 위협하고 그의 마음을 번민케 했다. 사탄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살려 주어야 한다는 조건도 없이 무조건 그의 뼈와 살을 치라는 허락을 얻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죽으심으로써 욥이 할 수 없었던 일, 즉 "사망의 권세 잡은 자 곧 마귀를 멸망시키는" 일을 하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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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들은 욥(욥 2:7-10)

불쌍한 욥을 괴롭히고 근심시키도록 허락받은 마귀는 우선 괴롭히는 자로 그 다음엔 유혹하는 자로서 욥에게 곧 역사하기 시작했다. 마귀는 우선 그의 자녀들을 유혹하여 죄로 끌어들인 후 그들을 괴롭게 함으로써 멸망으로 이끈다. 그러나 그는 이 하나님의 자손에 대해서는 먼저 환난을 주고 그를 괴롭힌 다음에 그 환난을 악용하도록 유혹했다. 그가 욥에게 노렸던 것은 하나님을 저주하게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저주하도록 만들기 위해 사탄이 어떻게 욥을 충동하였는지 그 과정을 볼 수 있다. 사탄은 그가 노하도록 만들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욥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자극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정보를 제공해 주었는데, 그렇지 않다면 욥은 결코 그러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늙은 뱀이 온갖 간교를 다해서 고안해낸 유혹은 매우 교묘하다. 그 뱀은 우리의 최초의 조상을 희롱하던 바로 그 수법으로(창 3장) 욥과 그의 하나님 사이가 갈라지도록 그를 유혹하고 그의 순전함을 빼앗으려고 노리면서 욥을 치고 있다.

Ⅰ. 그는 악창으로 욥을 괴롭히고 그렇게 하여 그 자신이 그의 짐이 되도록 함으로써 하나님을 저주하도록 욥을 격동시키고 있다(7, 8절). 전번 공격도 매우 과격했으나 욥은 그의 군거를 지켰고, 용감히 그 고통을 참았으며, 그 때를 벗어났다. 그러나 마귀는 여전히 끈을 더욱 단단히 조르고 있었다. 뒤에는 더욱 나쁜 것이 숨어 있었다. 비가 온 후에 다시 구름이 낀다.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연이어 공격을 가하고 있으며, "심연은 심연을 부른다."

1. 욥을 엄습한 병은 매우 가혹했다. 사탄은 "욥을 쳐서" 머리에서 발까지, 그의 온 몸에 "악창이 나게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독한 염증"으로 보고 있는데, 아마도 그것은 매우 심한 단독(erysipelas)이었을 것이다. 종기 하나가 곪았을 때에도 매우 아프며, 매우 큰 고통과 불편을 준다. 그런데 하물며,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이 온 몸에 종기가 나고, 마귀가 할 수 있는대로 그 몸에 극도로 열이 나게 하여 "지옥의 불을 피운" 것처럼 된 욥의 상태는 어떠하였겠는가! 천연두는 매우 아프고 고통스러운 병이다. 그 병에 걸리기만 하면 보통 삼일 안에 끝장이 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더욱 큰 두려움을 준다. 그렇다면 욥의 병은 얼마나 극심했겠는가? 그의 온몸엔 악창 또는 심한 궤양이 생겨 심장이 쓰릴 정도로 그를 아프게 했고, 그에게 격렬한 고통을 주었다고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몸 전체에 퍼져 있었기 때문에 욥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편안하게 누울 수 없었다.

만일 우리가 어떤 때 극심한 병으로 단련받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때로 그의 성도들과 종들을 훌륭하게 만들기 위해 그러한 일을 행하신다는 사실 이외에는 달리 아무 것도 생각지 말기로 하자. 우리는 사탄이(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사람의 아들들과 그리고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히는 질병을 마음대로 구사하여, 또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이 심한 전염병을 펼치고 다니며, 불뱀으로부터 오는 염증이 기세를 떨치게 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여러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사람에 대한 기사를 읽을 수 있다(눅 13:16). 만일 하나님께서 표독스런 자로 하여금 우리 중에 누구를 마음대로 치도록 버려두신다면 그 사자는 얼마나 쉽사리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2. 이러한 질병 가운데서 욥은 매우 이상하게 처신했다(8절).

(1) 그는 상처를 치료하기는커녕, "기와 조각" 깨어진 돌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었다." 이 슬픈 자에게 또 하나의 슬픔이 찾아왔다. 사람이 병을 앓고 고통을 당할 때, 만일 자상하고 세심한 돌보심을 받는다면 그것을 어느 정도 잘 참을 수 있을 것이다. 부유한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에 있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자상한 손으로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나사로도 개들이 와서 혀로 "그 헌 데를 핥았을" 때 어느 정도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불쌍한 욥은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다.

1) 그 자신의 손 이외에는 아무 것도 그의 악창을 보살펴 주지 않았다. 그의 자녀들과 종들은 모두 죽었고, 그의 아내는 불친절했다(19:17). 그는 의사들을 불러올 만한 돈이 없었다. 더욱이 무엇보다도 슬픈 일은, 그가 이전에 친절을 베풀어 주었기에 그의 고통을 덜어 주려고 노력하고 그들의 손으로 그의 상처를 치료해 주거나 닦아줄 정도로 그에 대해 매우 큰 존경심과 감사함을 지녀야 할 사람들이 이제 와서 그의 병이 매우 악취가 나고 불쾌감을 주며 또 그것이 전염되는 병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돌보아 주지 않는 점이다. 이처럼 인간은 이전에도 그러했지만, 마지막 날에도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감사할 줄 모르며, 사랑을 품을 줄도 모르는" 자들이다.

2) 그가 그의 종기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해야 "그것을 긁는 것" 뿐이었다. 그 종기들은 부드러운 헝겊으로 싸매지 않았으며 기름을 바르지도 않았다. 그리고 깨끗이 씻거나, 깨끗하게 보존하지도 않았고, 고약으로 치료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불쌍한 환자들을 진정시키는 마취제나 진정제를 써서 그의 고통을 완화시키거나 그에게 휴식할 수 있는 평정을 주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그의 기력을 돕기 위해 어떤 강장제를 쓴 것도 아니었다. 모든 조처란 종기들이 부쩍 성한 후 스러지기 시작하고, 천연두가 끝날 때의 일반증상으로 그의 몸 전체가 머리 비듬처럼 되기 시작했을 때, 긁는 것뿐이었다. 그의 종기를 하나씩 치료하기란 끝이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사람들이 가장 나쁜 치료 방법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방법 밖에는 달리 할 수가 없었다.

3) 그는 종기를 긁는 데도 "기와 조각" 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에게는 종기를 긁는 좋은 어떤 외과 의사의 기구같은 것이 없었다. 기와 조각은 그의 종기를 덜어 주기는커녕 더욱 악화시켜 줄 따름이었다. 극심한 병 중에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지시와 훈련을 받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환자들은 특히 그 자신을 잘못 관리하기 쉽기 때문이다.

(2) 그는 부드럽고 따뜻한 침상에서 쉬기는커녕, 오히려 "재 가운데 앉아 있었다." 아마도 그는 침상을 뒤로 물리고 일부러 재 가운데 앉아 있었던 것 같다(비록 그의 밭이 황폐케 되긴 했어도 우리는 그의 집이 불타거나 약탈당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그의 침상에 진저리가 났거나, 아니면 자신을 혐오하는 표징으로 재와 티끌 속에 있던 참회자의 자태와 장소를 그 스스로 지키려한 때문이었을 것이다(42:6; 사 58:5; 요 3:6). 이처럼 그는 하나님의 강하신 손 아래 그 자신을 겸손히 맡겼고, 그의 마음을 가난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살에 "구데기와 흙 조각을 의복처럼 입혔고" 따라서 "그 가죽이 합창되었다가 터진 것을" 불평하였다(7:5).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재 가운데 앉히셨다면, 그는 만족스럽게 거기 앉아 있을 것이다. 겸손한 마음은 낮은 환경에 잘 어울리며, 그곳에 적응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 준다. 칠십인역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성읍 없는 거름 더미 위에 앉았다"(이 이야기에 대해 언급할 때는 언제나 이 말이 전해진다). 그러나 원본에는 그가 "재 가운데" 앉아 있다고만 적혀 있는데, 그는 아마도 그 자신의 집안에 있었던 것 같다.

Ⅱ. 마귀는 그의 아내를 통해 욥이 하나님을 저주하도록 역설하였다(9절). (여기에 적힌 것 이상의 것을 더 알기를 탐하는) 유대 사람들은 욥의 아내가 야곱의 딸인 디나였다고 말하고 있으며, 갈대아 판에도 그렇게 적혀 있다. 그러나 그 여자였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였든지간에 그녀는 욥에게 있어서 다윗의 경건함을 조롱했던 미갈과도 같았다. 그녀는 욥에게 인색했다. 그의 모든 위로가 사라져 그녀 자신이 그를 위로해야 했을 때에, 그녀는 그를 괴롭히고 유혹하는 자가 되었다. 사탄이 없앨 수 있는 허락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것을 남겨 두었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어떤 악독한 계획이 숨어 있다. 그가 하와를 통해 아담을 유혹하고, 베드로를 통해 그리스도를 유혹했던 것과 같이, 우리와 가까운 자의 손을 통해 유혹을 보내는 것이 사탄의 술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사람들에 의한, 아니 우리가 언제나 매우 귀중하게 여겼던 사람들에 의한 영향력이나 그 세력 또는 간청에 유혹되어 잘못된 것을 말하거나 행하지 않도록 주의 깊게 경계해야 한다. 이 유혹이 얼마나 강한가를 보라.

1. 그녀는 욥이 계속 그의 믿음을 지키는 것을 비웃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킵니까? 믿음이 당신의 병에 어떤 도움도 못 주는데 그것만 고집합니까? 당신은 당신의 봉사를 은총의 표시로써 보답하기는커녕, 진노를 살 만한 이유도 없는데, 이처럼 당신을 비참하게 만들고 빼앗고 징벌하는 것을 즐겁게 여기는 듯이 보이는 하나님께 그렇게 굴종할 정도로 얼간이가 되어 쩔쩔매겠습니까? 이렇게 하는 데도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축복하며 섬깁니까?"

네 헌신이 헛된 것을 네가 보지 않느냐?

네 기도가 재앙과 고통 이외에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손해를 깨닫지 못하느냐

별나게도 의롭고, 어리석게도 선하겠느냐?

이 쓰라린 상처들과 이 모든 재앙은

하늘이 어리석은 성도를 얼마나 경홀히

여기는가를 보여 주고 있고나.

손댈 수 없을 정도로 경건한 자여 !

네 하나님이 그의 막대기로 네 어리석은

미덕을 고칠 수 없단 말인가?

R. 블랙모아(Blackmore)경

이처럼 사탄은 우리의 최초의 조상에게 행했듯이 하나님은 그의 창조물이 비참하게 되는 데서 행복과 기쁨을 찾는 자라고 가혹하게 시사함으로써,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끌어내도록 여전히 노력하고 있는데, 이러한 시사는 그 무엇보다도 거짓된 것이다. 사탄이 사용하는 또 다른 술책은 사람들이 믿음을 굳게 지키는 것을 조롱하고 비난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떠나도록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비난을 예상할 필요는 있으나, 거기에 마음을 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의 주님께서도 친히 그런 일을 겪으셨고, 우리도 그것에 대한 보상을 풍성히 받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조롱자들을 반박하면서 이렇게 말할 필요가 있다. "너희는 하나님을 찬미하며 살아야 할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의 불경건을 여전히 굳게 지킬 정도로 미련하냐?"

2. 그녀는 욥이 믿음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며 도전하게 되고 또한 담대하게 가장 큰 악을 행하도록 종용하였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시오.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거나 그로부터의 위로를 기다리지 말고 당신이 당신 자신의 사형 집행인이 됨으로써 자신의 구원자가 되시오. 생명을 끝냄으로써 당신의 고통을 끝내시오. 이처럼 항상 죽어가는 상태에 있기보다는 단 한번 죽는 것이 좋습니다. 당신은 이제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그를 욕하면서 목매달아 죽어도 됩니다." 위의 두 가지 유혹은 사탄의 모든 유혹들 가운데 가장 험악하고 끔찍스런 것이다. 선한 사람들도 때로 격심하게 이러한 공격을 받는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보다 자연적인 양심에 위배되는 것은 없으며, 자살행위보다 더욱 본성에 위배되는 것은 없다. 주여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그 어떤 시험에도 들지 말게 하옵시되 특히 이런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Ⅲ. 욥은 그 유혹을 용감하게 항거하였으며 이를 뿌리쳤다(10절). 그는 즉시 그녀에게 대답했다(사탄은 욥이 그의 혀를 가지고 하나님께 저주하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에 그의 혀는 남겨 두었다). 여기에서 욥은 그의 순전함을 결코 버리지 않고서 하나님께 매달리고 그에 대한 선한 생각을 유지하기로 한 그의 결심을 보여 주었다.

1. 욥은 그 유혹에 대해 매우 분개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대해 그렇게 말한 것에 대해 매우 노했다. "뭐, 하나님을 욕하라고? 생각만해도 끔찍스러운 일이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다른 경우에 있어서 욥은 매우 온화한 태도로 그의 아내와 조리를 따졌었고, 심지어 그녀가 그에게 불친절했을 때도 그러했다(19:17). "욥은 그의 몸에서 나온 자녀들을 위해서 그의 아내를 정중하게 대해 주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에게 하나님을 욕하도록 설득했을 때는 이를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라고 말했다. 욥은 그의 아내를 "어리석은 자"나 "무신론자"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병 중에 고통당하는 자들이 흔히 하듯이 그의 불쾌함을 품위 없는 어조로 폭발하지도 않았으며, 또 그런 언사가 용서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욥은 그의 아내가 이교도들과 우상 숭배자들이 "주릴 때에 변조하여 자기의 왕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하는"(사 8:21) 말을 하였다는 것, 다시 말해서 그녀의 말이 악하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우리는 경건한 가장이었던 욥의 아내 역시 매우 신앙심이 깊은 여자였었으나, 이제 그들의 모든 재산과 즐거움이 사라지자 그녀는 그 손실을 욥과 같이 자제하는 마음으로 견딜 수 없게 되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이처럼 끔찍한 생각으로 그의 마음을 더럽히려고 하려는 것을 보고 욥은 더 이상 이러한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1) 오직 죄에 대해서만 노하고, 시험을 가장 큰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자들 그리고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하는"(계 2:2) 자들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않는다. 베드로가 그리스도께 사탄 노릇을 했을 때 그리스도는 그에게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 16:23)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2) 우리가 지혜롭고 선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어떤 때 어리석고 잘못된 것을 우리에게 말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성실하게 책망해야하며, 그들이 말한 것이 사악한 것임을 보여 주고, 그들의 죄를 방임해서는 안 된다.

(3) 하나님을 저주하라는 유혹은 증오심을 가지고 물리쳐야 하며, 그런 말에 동조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저주하도록 우리를 유혹하는 자는 그가 누구이든 우리의 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우리가 만일 그들에게 굴복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위험스러운 일이다. 욥은 하나님을 욕하지 않았고, 아담처럼 변명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고도 생각지 않았다.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여자가 나를 꾀어 그런 일을 하게 했습니다"(창 3:12)라고 말했다. 이 말 속에는 하나님과, 그의 계율과 섭리에 대한 암시적인 비난이 들어 있다. 아니, 만일 네가 비웃는다면, 네가 저주한다면, 너는 그것을 혼자 감당하게 될 것이다.

2. 욥은 그 유혹을 다음과 같이 논박하였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 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책망하는 자들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겼을지라도 여전히 순전을 왜 굳게 지켜야 하는가를 알려 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욥은 복과 재앙이 서로 대조적인 것이긴 해도 서로 반대되는 근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손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사 45:7; 애 3:38).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우러러 보면서, 그가 보내신 복에 대해서 감사해야 하고, 그 재앙에 대해서도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욥이 주장하는 요점을 살펴보자.

(1) 그는 재앙이란 참아야 하는 것만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고도 주장하였다. "우리가 재앙을 받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1) "우리가 재앙도 받게 되리라고 예상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처럼 많은 복을 주셨다면, 그가 때로 우리를 괴롭히심으로써 형통과 곤고가 서로 엇갈려서 되풀이 되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 한들 우리가 놀라거나 그것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있겠는가?"(벧전 4:12)

2) "우리 스스로 그것을 옳게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 이 말은 그것을 선물로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고 있으며, 환난 가운데서도 경건한 감정과 영혼의 기질을 잃지 않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즉, 그것을 멸시하거나 그 속에서 허덕이지 않고 그것을 선물로 간주하며(빌 1:29), 그것을 우리 죄악의 형벌로 받아들이며(레 26:41),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그가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게 하라"),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빌 4:12) 자로서 그것에 우리 스스로 적응하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겸손케 하는 섭리에 의해 마음이 겸손해지고 위축되었을 때 우리는 거기에서 "교훈은 받고"(습 3:2) 우리 고난을 달게 받아들이게 된다.

(2)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생각에서 기인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그렇게 많은 복을 받아 여지껏 화평하고 형통하게 살아오지 않았느냐?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앙을 내리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인 지금, 우리가 그것을 받지 않겠느냐?" 과거와 현재의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우리의 환난을 합당한 정신 상태에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7년 동안 풍년이 들어 모든 사람들과 함께 우리가 복을 나누어 가졌다, 7년 동안 기근이 들었을 때 모든 사람들과 함께 우리의 재앙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한가? Qui sentit commodum, sentire debet et onus.-즉 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손해도 함께 받을 준비를 하여야 한다. 만일 우리가 많은 것을 받아 크게 기뻐했다면 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지 못하겠는가? 우리가 그처럼 많은 즐거움을 얻었다면, 우리의 즐거움을 장식해 주고 그것을 더욱 귀하게 만들며(우리는 때로 자비를 얻지 못할 때 그것의 가치를 배운다), 우리를 즐거움으로 인도하는 길이 되어, 그 즐거움에서 오는 위험성을 덜어 주고 균형을 이루게 해 주며, "너무 자고하지" 않도록(고후 12:7) 해 주는 환난들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하겠는가? 우리가 육신을 위해 매우 많은 복을 받았다면 영혼을 위해 또한 복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겉사람을 슬프게 함으로, 마음을 더욱 선하게 만드는 환난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예하지 못하겠는가?(히 12:10) 그러므로 자랑은 물론 불평하는 것도 언제나 배척하도록 하자.

Ⅳ. 이처럼 욥은 여전히 그의 순전함을 굳게 지켰으며, 욥을 치려던 사탄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였다." 그는 이것에 대해 말을 잘한 것만이 아니다., 그때 그가 한 모든 말은 믿음과 올바른 이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이 모든 우환 가운데서 그는 한 마디도 실수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또한 선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비록 그의 마음 속에는 약간의 동요와 타락이 일고 있긴 했지만, 은총이 그를 다스리고 있었고 그는 쓴 뿌리가 나서 그를 괴롭게 하지 못하도록 주의했다(히 12:15).

"그의 마음이 풍족한 것"은 유익한 것을 내시고 거기에 있는 재앙을 억압하시사 더 선한 쪽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덕분이었다. 그가 어떤 악한 것을 생각했을지라도 "그 손으로 입을 막아"(잠 30:32) 악한 생각을 질식시켰고 더 이상 번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이것 때문에 그가 참된 은혜를 누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힘차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순전하고 정직한 자"의 성품을 빼앗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러한 시련 가운데서도 "말에 실수가 없는 자"임이(약 3:2; 시 17:3) 드러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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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의 방문을 받은 욥(욥 2:11-13)

우리는 여기에서 욥의 세 친구들이 고통 중에 있는 욥을 친절하게 방문한 사실에 대해 알 수 있다. 그가 놀랍게 고통당하고 있다는 소식은 여러 지역으로 퍼져갔다. 왜냐하면 그는 뛰어나게 위대하고 선한 자였으며, 그가 당하고 있는 환난은 매우 특별한 환난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대적이었던 자들은 그의 재앙을 듣고 개가를 올렸다(16:10; 19:18; 30:1 이하). 아마도 그들은 그를 두고 노래를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은 그를 염려했고, 그를 위로하고자 했다.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잠 17:17).

그들 세 사람의 이름은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었다(11절). 우리는 나중에 네 번째 친구 즉, 엘리후를 만나게 되는데 그도 처음부터 모임에 참석했었던 것 같다. 그가 여기에서 욥의 친구로서 왔는지 또는 단지 방청인으로 왔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이 세 사람은 그의 "친구"라고 일컬어지고 있는데, 다윗과 솔로몬이 각각 "왕이 친구"라고 일컫던 자들을 궁중에 한 사람씩 두고 있었던 것처럼 그와 친한 자들이었다. 이 세 사람들은 그들의 대화에서 나타나듯이 매우 지혜롭고 선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매우 연로한 자로서 많은 지식의 소음자들로 소문났었고, 사람들은 그들의 판단을 귀히 여겼다(32:6). 그들이 그 나라의 위대한 인물 다시 말해서 방백이나 족장들이었음직도 하다.

Ⅰ. 욥은 만사가 형통할 때 그들과 우정을 나누었다. 그들이 그와 동등한 자라 하더라도 그는 그들을 시기하지 않았고, 그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었다 할지라도, 신분의 격차는 그들과 친밀한 대화와 교제를 나누는 데 방해가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경멸하지 않았다. 이러한 친구를 갖는다는 것은 그가 모든 가축들의 주인이 되는 것보다 형통한 날에 더욱 큰 행복을 가져다 주었다. 인생의 즐거움은 정중하고 덕망 있는 자들과 사귀고 우정을 나누는 가운데에서 많이 맛볼 수 있다. 그리고 소수라도 이러한 친구들을 가진 자는 그들을 매우 귀하게 여겨야 한다.

욥의 세 친구들은 모두 특별한 언약으로부터 이루어진 가문을 이루어 여러 자손째 아브라함의 형통함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이 보이며, 그 성실한 아버지들의 경건한 교육을 받아 좋은 성과를 누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엘리바스는 에서의 손자인 데만(창 36:11)의 후손이며, 빌닷은 아브라함이 그 두라의 몸에서 낳은 수아(창 25:2)의 후손처럼 보인다. 소발은 에서의 후손인 스보(창 36:11)와 동일 인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언약과는 낯선 자들이었던 자들 가운데서 이처럼 큰 지혜와 경건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후세대에 칸막이 벽이 무너져 하나님의 은총이 이방인들에게도 전파된다는 행복한 전조였다. 에서는 거부당했으나 그에게서 나온 많은 사람들은 가장 훌륭한 축복을 물려 받았다.

Ⅱ. 대부분의 친구들이 욥을 버렸을 때에도(19:14) 그들은 곤경 중에 있는 그와의 우정을 지속했다. 그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우정을 표시하였다.

1. 그들은 환난 중에 있는 욥을 친절히 방문함으로써 그와 함께 슬퍼했고, 그를 위로했다(11절). 그들은 그가 형통했을 때에도 그를 괴롭히거나 공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또 춤추거나 카드 놀이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와의 유식하고 경건한 대화를 통해 그들 스스로를 교화하고 즐기기 위해 늘 그를 방문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그가 곤경에 처하자 이전에 그의 즐거움을 나누어 가지기 위해 왔었던 것 같이, 이제는 그의 슬픔을 함께 나누어 가지기 위해 왔다. 그들은 그의 "마음이 초상집에 있는"(전 7:4) 지혜자들 이었다. 고통당하는 자나, 아프고 괴로워 하는 자, 또는 아버지가 없거나 자식이 없어서 슬픔 가운데 있는 자들을 돌보는 것은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을 이룬다(약 1:27). 그리고 만일 그것이 선한 원리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곧 풍성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마 25:36).

(1) 고통당하는 아들과 딸들을 돌봄으로써 우리는

1) 우리 자신이 은혜를 받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서 우리는 많은 좋은 교훈들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들을 살피고 교훈을 받아들임으로써 지혜롭고 신중한 자가 된다.

2) 그들을 위로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 대한 관심을 표함으로써 우리는 그들을 격려할 수 있으며, 그들에게 몇 마디의 훌륭한 말을 들려줌으로 그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도록 도와 줄 수 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방문한 것은 그가 환난 당한 이야기를 듣고 그 상황이 놀라운 것을 봄으로써 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으며, 더욱이 다윗의 나쁜 친구들처럼(시 41:6-8) 그를 불쾌하게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와 더불어 슬퍼하고, 그와 함께 눈물을 흘림으로써 그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다. 우리는 우리가 먼저 유죄판결을 내려야 하는 자들을 방문하는 것보다 환난 중에 있어 우리의 위로가 필요한 자들을 방문하는 것이 더욱 즐거울 것이다.

(2) 이 방문자들에 대해서 살펴보자.

1) 그들은 부름을 받고 온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왔다(6:22). 이에 대해 카라일(Caryl)씨는 말하기를 "초상 집에는 불청객일지언정 찾아가는 것이 좋고," 친구를 위로하는 일에는 적극적으로 그 초대에 임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2) 그들은 같이 오기로 서로 합의했다. 선한 사람들은 선한 일을 행하도록 서로 합의하며, 서로 그것을 하도록 권유하고 재촉해야 하며, 그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서로 협력하고 격려해야 한다. 경건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서로 손을 잡아야 한다.

3) 그들은 그를 위로할 목적으로 왔으나(우리는 그것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이 욥을 대하는 기술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형편없는 위로자가 되고 말았다. 훌륭한 일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실수로 인해 그들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2. 그들은 욥에게 따뜻한 동정을 보여 주었고, 환난 중에 있는 그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그들이 멀리서 그를 보았을 때, 그의 모습은 악창으로 인해 매우 추하고 흉했으므로 그를 잘 알아보지 못했다(12절). 그의 얼굴은 "산호보다 붉었었으나" 이제는 "숯보다 검게"된 예루살렘의 나사렛 사람들처럼(애 4:7, 8) "울음 때문에 붉게 되었다"(16:16). 심한 병이 있건 없건, 짓누르는 근심과 걱정은 순식간에 사람의 외모를 얼마나 많이 변하게 하는가! "이가 나오미냐?"(룻 1:19)라고 사람들은 외쳤다. 마찬가지로 "이가 욥이냐?"라고 말한다. 네가 얼마나 몰락했는가, 얼마나 네 영광은 얼룩져 더럽혀졌으며, 모든 네 영예는 티끌 속에 묻혔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변화시키시려 하니!

그가 이처럼 비참하게 변했어도 그들이 무서워 하거나 싫어하여, 그를 떠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이처럼 더욱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을 주시하라.

(1) 그들은 욥에게 와서 그와 함께 애통해 하면서, 일상적인 어조로 꾸미지 않은 슬픔을 그대로 폭로했다. 그들은 "크게 울었다."(전과 다름없는) 그들을 보자, 욥의 슬픔은 되살아나 다시 울게 되었고, 이것은 또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의 홍수가 쏟아지게 했다. 그들은 그들의 친구가 빼앗김을 당하고 능욕당함을 보고 그들 자신이 빼앗김을 당하고 능욕 당한 자와 같이 "자기의 옷을 찢고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렸다."

(2) 그를 위로하기 위해 와서 그들은 욥과 같이 땅에 앉았다. 왜냐하면 욥은 그러한 자세로 방문객들을 맞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인사치레가 아닌 참된 동정심에서 그들 스스로도 똑같이 천하고 불편한 곳에서 그러한 자세를 취하였다. 그들은 그가 형통한 때에 여러 번 그와 함께 그의 안락 의자와 식탁에 앉았을 것이다. 그처럼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기쁨과 풍족함을 나누었기 때문에, 이제 기꺼이 그와 함께 그의 슬픔과 궁핍함을 나누고자 했다. 그들의 방문은 단지 그를 살피고는 가버리는 그러한 흔히 돌아가는 짧은 방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의 친구가 이처럼 비참한 가운데 있는 동안에는 그들 자신도 아무 즐거움을 누릴 수 없는 자로서, 그의 상태가 회복되거나 환난이 끝나는 것을 그들이 볼 때까지 그와 함께 머무르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비록 그들을 이전처럼 대할 수 없을 지라도 그의 옆에 머물렀고, 따라서 그들은 그 자신의 몫을 감당해야만 했다.

17일 동안을 매일 그와 동석하기를 허용하는 시간에 그들은 와서 그와 함께 앉아 그의 환난을 함께 나누었으며, Nullels ad amissas ibit amicus opes-즉 재물을 잃은 자는 친구들이 찾아올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원칙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그와 함께 앉았으나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이" 단지 자기의 환난에 대한 욥의 푸념을 듣고만 있었다. 그들은 충격을 받고 놀란 자들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Curae leves loquuntur, ingentes stupen-즉 슬픔이 가벼울 때는 말을 하나, 슬픔이 더욱 압박을 가해오면 말을 잃는다.

그들은 그처럼 거대한 재앙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매우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도다.....R. 블랙모아경

그들끼리는 서로 어떤 말을 나누었든지 간에 그들은 훈계하는 방법으로써 현재의 이러한 상태를 호전시키기 위한 말을 한 마디도 욥에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중에 그를 번민케 하는 말을 많이 했지만(4:2), 지금은 그런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슬픔이 이미 매우 큰 것을 알았으며, 그들은 처음부터 고통받는 자에게 더욱 고통을 가하기를 원치 아니했기 때문이었다. "말하지 아니해야 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악인이 우리 앞에 있어," 말을 해도 그들이 더욱 완고해지거나(시 39:1), 말함으로써 우리가 "주의 아들들의 시대에 대하여 궤휼을 행하게" 되기 쉬울 때이다(시 73:15).

그들이 칠일째 되는 날에서야 비로소 엄숙히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 사실은 그것이 안식일이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족장 시대에도 안식일을 지켰다는 사실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그날까지 의도한 회합을 연기시켰다. 왜냐하면 그 때에 사람들이 평상시와 같이 욥과 더불어 예배를 드리기 위해 그의 집으로 모여들기 때문에 그들도 함께 가르치고자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는, 오히려 그들이 오래 침묵을 지킴으로써 그들이 이제 말하는 바는 심사 숙고와 많은 생각 끝에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지혜자의 마음은 많은 연구를 한 뒤에야 비로소 대답을 한다." 우리는 한 번 말하기 전에 두 번 생각해야 하며, 더욱이 이러한 경우에는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좀더 간략하고 효과 있게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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