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11.29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단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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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evlhma(2307, 델레마) 뜻 will, 의도, 의향 intention .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델레마(Antipho soph 이래로)는 델로(qevlw, 2309: 바라다, 원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본래 '소원, 목적'을 의미하며, 그 다음 '욕망'(성적 욕망도)을 의미한다. 그 다음에 인간의 '욕망', 왕의 '의지, 자아 의지'를 의미하게 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a)  델레마는 70인역본에서 약 5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하페츠(즐거워하다, 기뻐하다)와 라촌(기쁨, 호의, 뜻, 소원)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델레마는 주로 하나님의 기뻐하심(예:시 40[39]:8; 렘 9:23; 말 1:10)을 나타내나, 하나님의 뜻으로도 나타나며(시103[102]:7; 사 44:28), 특히 하나님의 뜻을 행함(예: 시 103[102]:21; 시 143[142]:10); 델레마가 사람에 관하여 사용될 때는 '소원'(예: 시 107[106]:30), '뜻, 의지'(예: 왕의 뜻, 단 11:3, 70인역본)를, 또한 부정적으로는 '악의'(ill-will), '독단적인 행동'(렘 23:26; 집회서 32:17)을 나타내기도 한다.
(b)  헤르메스 문헌에서는 델레마는 상당수가 신의 선하고 주권적이고, 창조적이고, 자기 결정적인 의지를 가리켜 사용했다. 랍비들의 글에서 델레마는, 하나님의 의지는 종종(주기도문에서처럼) 그의 이름, 통치와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델레마는 신약성경에서 62회 사용되며, 그 중에 60회는 단수, 2회는 복수(행 13:22; 엡 2:3)로 나타난다.
(a)  사복음서에서 델레마. 사복음서에서 마태와 요한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보다 자주 말한다. 그러나 마가는 막 3:35에서만, 누가는 눅 22:42에서만 말한다.
① 마태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은 항상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다. -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마 18: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마 21: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마 26: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따라서
마 7:21-마 7:23은 유대교에서와 같이 마태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뜻이 토라와 일치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자들은 불법을 행한다. 그렇지만 이제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과 이웃 사랑으로 하나님의 뜻의 근본적인 목적을 나타낸다(참조: 마 22:34-마 22:40; 마 24:12).따라서 마 18:4에 의하면 "소자 중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마 26:42에서 하나님의 델레마(뜻)에 대한 예수님의 복종은 오직 겟세마네의 기사에서만 언급되어 있다: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병행구, 눅 22:42).
②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보내신 자의 뜻을 자기의 전생애의 기초와 내용으로 직접적으로 언급하신다. 요 4:34에서 예수님은 절대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책임지고 있는 분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 5:30에서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고 판단하신다: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요 6:39에서 하나님의 뜻은 구세주(소테르, 참조: 요 3:17)인 예수님이 생명을 약속 받은 자들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요 6:40에 의하면 하나님의 뜻으로 생명을 얻는 자들은 예수 안에서 구원을 깨닫고 그 구원을 간직한 자들, 즉 그를 믿는 자들이다("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이외에도 요한은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며(요 9:31; 요일2:17) 인간의 뜻이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요일 5:14이하).
요 7:17에서 계시자의 정당성을 실현하는 유일한 기준은 그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그러나 요한에게서 윤리가 신앙보다 우월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다시금 지식이 신앙에 순종하게 됨을 의미한다.
(b)  바울 서신에서 델레마는 가장 자주 하나님의 뜻에 대해 사용되었다.
① 롬 2:18에서 하나님의 뜻을 토라와 동일시한다: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오직 여기서만 유대인들에게 말한다. 율법 학자는 그가 율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식별할 수 있으므로 소경의 인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과 그 자신의 행위 사이에 존재하는 바로 그 모순은 하나님의 뜻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리스도는 새 세대의 여명이시기 때문에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 즉 성령을 받아 생각이 변화되는 것이 필요하다(롬 12:2). 이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일부이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안에서 믿는 자들은 합당한 행동을 해야한다(롬 12:2).
② 살전 4:3에서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성화(기록)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③ 살전 5:18에서 하나님의 뜻은 항상 감사하는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④ 골 1:9; 골 4:12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은 성경이 주시는 지혜와 총명에 관계되어 있다. 즉 그것은 교리의 지식, 토라에 대한 성장과 관계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성장과 관련되어 있다.
⑤ 하나님의 뜻은 생명의 형상을 만든다: 따라서 예수님의 그의 생애의 희생(sacrifice )는 하나님의 뜻에 기초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갈 1:4).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고후 1:1; 골 1:1; 엡 1:1; 딤후1:1), 그의 사도직의 수행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정되었다(롬 1:10; 롬 15:32).
그렇지만 고후 8:5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마게도냐 교회의 헌금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뜻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⑥ 에베소 교회에서 축복의 주체는 전 인류와 우주 역사를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의지이다. 이 행위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넓으신 구원의 뜻에 맞추어 아들들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엡 1:5) 이를 위하여 우리에게 그의 구원의 뜻의 신비를 드러내셨다(엡1:9). 왜냐하면 모든 만물이 그 안에서 하나로 통일되게 하신 것이 그의 뜻이기 때문이다(참조: 엡 1:10).
이러한 구원의 뜻에 기초하여 그의 백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창조의 지혜에 대하여 그들의 눈을 떴는데 이는 지금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형성된 공동체 안에서 나타난다. 이스라엘을 그의 자유로우신 예정 안에서 그의 기업이 되게 결정하시고 그의 모든 역사하심을 계승하도록 결성하신 것도 또한 그의 뜻과 일치한다(엡 1:11). 델레마 투 데우(하나님의 뜻)가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미리 정하신 구원의 뜻을 나타낸다.
(c)  후기 사도들의 기록에서 델레마는 의심없이 하나님의 뜻의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능력을 표현한다. 특별히 신 의지의 능력은 히 10:7, 히 10:9이하의 예수님의 수난에서 보여졌다. 그리고 벧전 3:17; 벧전 4:19에서 보여졌다. 그것은 항상 "미쁘신 조물주"의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벧전 4:19).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인류를 향해 선을 도모하고(요일 5:14; 히10:10), 각 사람에게 그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갖추어 주는,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앞에 즐거워하는 것을 이루는 자의 뜻이다(히 13:21).(참조: Walter Bauer; M.Limbeck; D.Muller; G.Schren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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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vrio"(2962, 퀴리오스) 주님 Lord, 주인 lord.
1. 고전 헬라어의 용법.
퀴리오스는 퀴로스(ku'ro": 힘, 권위)에서 유래했으며,
(a)  형용사로는
① '힘이 있는, 권세(력)을 가진, 권한을 부여 받은, 권위 있는, 유효한'을 뜻한다. 여기서 힘이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지배력을 뜻하며, 법의 경우에는 유효하다를 뜻하며, 사람에게 사용될 때는 권위 있거나 자격이 있다는 뜻이며, 통치자의 경우에는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다를 의미한다.
② '중요한, 결정적인, 주요한'을 의미한다.
(b)  명사로 초기에 드물게 사용되었으나 두가지 고정된 의미
① 종, 집, 시민의 주인,
② 아내나 여자 아이의 법적 보호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두 의미 모두 합법성과 권위라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아테네에서는 데스포테스(despovth", 1203: 주, 주인, 소유자)라는 단어가 더 흔하게 사용되었다. 코이네 헬라어에서 퀴리오스가 법률적인 의미를 더 강하게 지니고, 소유권보다 처분권에 더 강조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두 단어는 거의 서로 교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신약시대에 가까워질수록 법률적인 요소가 더 강조되게 되었고 데스포테스가 퀴리오스로 점점 대체되는 경향이 있었다.
(c)  처음에 공직자들은 퀴리오이(복수)라고 불리지 않았지만 점점 그 칭호를 붙이는 관습으로 발전 되었고, 나중에는 퀴리오스가 철학자, 의사, 청중들, 남편(아내가 부를 때), 아버지(자식이 부를 때)에 사용되었으며, 그리고 지위가 높은 사람은 누구든 아주 일반적으로 퀴리오스로 일컬어지고 퀴리에(여성형), 퀴리아(Kuriva, 2959)라고 불리워졌다.
(d)  초기 시대에는 퀴리오스가 왕들이나 신들의 칭호로 사용되지 않았다. 헬라 시대에 퀴리오스라는 칭호를 왕들(통치자들)이나 신들에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주전 1세기에 이르러서 였다(참조: W. Foerster).
퀴리오스 바실류스(주, 왕)는 주전 64년과 50년 사이에 자주 사용되었다. 주전 12년에 이집트에서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데오스 카이 퀴리오스(하나님과 주)라고 일컬어졌다(BGU, 1197, I, 15). 상부 이집트에서 여왕 간다게(참조: 행 8:27)는 헤 퀴리아 바실릿사(여주인, 여왕)으로 불리워 졌다. 퀴리오스라는 명칭은 헤롯 대왕(약 73 ~ 4 B.C), 아그립바 1세(약 10 B.C ~ A.D 44), 아그립바 2세(A.D 27 ~ 약 100)에게도 사용되었다. 통치자들 외에, 고관들도 이 칭호를 받았으며, 예를 들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총독이 이 칭호를 받았다. 시리아에서도 사정은 이집트에서와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주전 1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동양에서도 군주를 퀴리오스라고 불렀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퀴리오스 데오스(주와 통치자)와 같은 칭호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퀴리오스는 신들에게 사용되어 그 시대에 유행했던 사상과 언어에서도 신들을 주(lord)라고 불렀다. 이 경우에 퀴리오스는 기초가 되는 셈어의 상당어구(예: 아돈, 마라, 여성형 랍바트)를 번역한 것이다. 이런 용어들에는 항상 인칭 대명사(나의, 우리의 등)가 첨가되어 신의 이름 앞에 붙여졌다. 퀴리오스를 신에게 사용했을 경우, 이 말을 사용한 종은 그 신에 대한 인격적인 책임 관계에 있게 되며 이때 신은 개인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의 아돈이 권력을 가진 주를 의미할 때,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상당어는 당연히 퀴리오스이다. 각 신들은 그들에게 제사하는 공동체의 주(lord)로써, 그리고 그 공동체에 속한 각 구성원들의 주 lord로써 숭배 받았다. 다른 주 lord(신)들을 숭배하는 것이 배제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신들 중 어느 하나도 우주적인 주로서 형성화되거나 숭배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e)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B.C. 31 ~ A.D. 14)와 티베리우스(Tiberius, A.D. 14 ~ 37)는 로마인들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동방 형태의 군주정치를 거부했으며, 그와 더불어 퀴리오스라는 칭호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모든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칼리굴라(Caligula, A.D 37 ~ 41)는 퀴리오스라는 칭호가 매력적인 칭호임을 인식하였다. 네로의 비문에는 호 투 판토스 코스무 퀴리오스(세상 모든 사람들의 주, SIG 814, 31)가 묘사되어 있는데 네로(Nero, A.D 54 ~ 68) 이후에 퀴리오스라는 칭호는 더욱 더 자주 사용되었다. 가장 오래된 예문 중의 하나가 사도행전 25:26이다. 퀴리오스라는 칭호는 도미티안(Domitian, A.D 81 ~ 96)에 의해서 다시 평판이 나빠졌는데, 이는 그가 공식적인 서한에서 자기 자신을 도미누스 엣 데우스 노스테르(우리의 주와 하나님)라고 불렀기 때문이다(Suetonius, De Vita Caesarum, 13, 2). 도미티안의 사후에 이 칭호는 그에 대한 기억(담나티오 메모리아에)과 더불어 혐오스러운 것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어는 나중에 다시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본래부터 저절로 퀴리오스라는 칭호가 황제를 신이라고 부르지 아니하였다. 그가 신으로 숭배될 때 주라는 칭호도 신의 속성으로 간주된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국가의 전체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거부한 것은 곧 지나치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는 이런 종교적 주장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처음으로 퀴리오스라고 부르는 용법은 70인역본에서 나타난다(참조: H. Bietenhard).
2.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
퀴리오스는 70인역본에서 약 9000회 이상 나오며, 24개의 히브리어 단어 및 어군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a)  퀴리오스는 히브리어 아돈(주, 주인)의 역어로 190회, 바알(주 Lord)의 역어로 15회 사용되었는데, 결혼과 재산법에서 바알이 아내나 토지의 주인을 의미하는 반면(호 2:18; 삿 19:22; 삿 19:23 등), 아돈은 사회적 요인에 의하여 결정되며 한 단체에서 책임을 맡고 있는 우두머리인 명령자를 의미한다(삼상 25장).
(b)  퀴리오스는 또한 게비르(지휘관, 사령관), 아람어 마라(주 lord), 샬리트(통치자, 지배자)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c)  그러나 많은 경우에(약 6000회 이상) 퀴리오스는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고유명사, 즉 신성 4문자 YHWH를 대신한다.
여호와는 창조자이시며, 전 우주와 인류의 주, 또는 주인이시며, 생명과 사망의 주(인) Lord이시다. 무엇보다도 여호와는 이스라엘 즉, 그의 언약의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여호와를 뜻하는 말로 퀴리오스를 선택함으로써 70인역본 헬라어 본문도 법적인 권위에 관한 사상을 강조했다.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여 그들을 자기 소유로 선택했기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합법적인 주 Lord이다. 세상의 창조주로서 그는 또한 세상을 무한히 통할하는 세상의 합법적인 주이기도 하다.
퀴리오스는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인 아도나이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창 18:27-32).
3. 신약성경의 용법.
퀴리오스는 신약성경에서 725회 나오며, 그 중 대부분 누가의 기록(210회)과 바울서신(275회)에 사용되었다.
(a)  퀴리오스의 통속적인 용법.
신약성경에서 퀴리오스는 포도원의 주인(막 12:9과 병행구절), 나귀(눅 19:33)와 개의 소유자(마 15:27), 청지기의 주인(눅 16:3), 종들의 주인(행 16:16; 행 16:19; 엡 6:5; 엡 6:9; 골 3:22; 골 4:1)을 의미한다.
퀴리오스는 또한 어떤 것, 예를 들면 추수(마 9:38) 또는 안식일(막 2:28)을 주관하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퀴리오스의 공손한 어법은 눅 1:43에 나오고, 벧전 3:6; 막 12:36-37; 행 25:26에서는 우월성을 암시한다. 종들이나 일군들은 퀴리에(참조: 눅 13:8)라는 칭호를 사용한다. 유대인들은 마 27:63에서 빌라도에게 같은 호칭을 사용했고, 마리아는 요 20:15에서 동산지기에게, 간수장은 행 16:30에서 바울과 실라에게 같은 호칭을 사용했다(참조: 또한 마 21:29; 행 10:4).
퀴리오스의 형태는 팔레스타인 용법과 일치하며, 마 7:21-22; 마 25:11; 눅 6:46에 나타난다. 고전 2:8("영광의 주")과 살후 3:16("평강의 주")에서는 속격과 결합되어 나온다.
퀴리오스는 천사들을 칭할 때도 사용되었으며(행 10:4; 계 7:14), 다메섹 밖에서 하늘의 환상을 볼 때 (자기가) 알지 못하는 이에게도 사용되었다(행 9:5; 행 22:8; 행 22:10; 행 26:15).
(b)  퀴리오스이신 하나님.
헬라 회당에서 사용하던 용법에 따라, 하나님을 종종 퀴리오스라고 칭하였으며, 특히 여호와를 뜻하는 말로 퀴리오스를 사용하는 수많은 구약성경 인용문에서 그러했다. 공식적으로 성경을 봉독할 때에 신성 4문자 대신 퀴리오스를 사용하는 관습과 일치한다(예: 롬 4:8 = 시 32:2;시 9:28이하. = 사 10:22이하.; 사 10:16 = 사 53:1; 사 11:3; 눅 19:10; 눅 11:34 = 사 40:13; 사 14:11 = 사 45:23; 사 15:11 = 시 117:1; 고전 3:20; 시 94:11; 시 14:21 = 사 28:11이하.).
퀴리오스는 자주 누가복음의 탄생 기사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말한다(예: 눅 1:32; 눅 2:9).
퀴리오스가 속격으로 나와 다른 단어와 함께 쓰이는 형태는 구약성경의 용법과 일치하는데 예를 들면 퀴리오스의 손(눅 1:66; 행 11:21); 퀴리오스의 천사(마 1:20; 마 2:13; 마 28:2; 눅 1:11; 눅 2:9; 행 5:19;행 8:26; 행 12:7); 퀴리오스의 이름(약 5:10; 약 5:14); 퀴리오스의 영(행 5:9; 행 8:39); 퀴리오스의 말(행 8:25; 행 12:24; 행 13:48이하.; 행 15:35이하.)등이다.

"퀴리오스가 말씀하시니라"라는 공식 문구(롬 12:19 = 신 32:35; 고후 6:17; 사 52:11; 계 1:8 참조: 출 3:14)도 역시 구약성경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요한계시록의 기자는 때때로 "주 하나님"(퀴리오스 호 데오스)이라는 구약성경의 어구에 강조적인 엄숙한 단어 판토크라토르(전능하신 이)를 첨가한다(계 1:8; 계 4:8; 계 11:17; 계 16:7; 계 19:6; 계 21:22).
우리 주 우리 하나님(호 퀴리오스 카이 호 데오스 헤몬) 이라는 공식 문구는 도미티안이 채택하여 사용했던 칭호를 생각나게 한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참조: 요 20:28).
계 11:15; 계 22:6에 나오는 예배의식상의 공식 문구는 주목해 볼만하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하늘과 땅의 퀴리오스"(마 11:25; 눅 10:21; 참조: 히 1:2; 집회서 51:1; 토빗 7:18)라고 했을 때 그는 유대식의 언어 형태를 채택한 것이다.
마 9:38에 보면 하나님은 (종말론적인) 추수의 퀴리오스이다. 하나님은 유일한 통치자이시며 왕중의 왕이시며 만주의 퀴리오스이시다(참조: 단 2:47), 그는 우리의 퀴리오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나게 하실 분이시다(딤전 6:15).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며 따라서 만물의 주이시다(행 17:24). 하나님을 퀴리오스라고 부르며 또한 그렇게 인정함으로서 신약성경은 특별히 하나님이 창조주이심과 역사 속에서 나타난 그의 능력, 그리고 그의 공정한 우주 지배권을 표현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에 대한 믿음과 구약성경의 믿음과의 연속성을 고백하고 있다.
(c)  퀴리오스이신 예수님
① 퀴리오스이신 지상의 예수님. 지상에 계신 예수님에게 사용된 퀴리오스는 처음에는 정중한 형태의 호칭이었다(마 17:4, 퀴리에: 요 6:34; 요 13:6). 이런 호칭의 형태도 예수님을 지도자로서 인정하며 그에게 기꺼이 순종한다는 뜻을 내포한다(마 7:21; 마 21:29 이하; 눅 6:46). 인자(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은 또한 안식일의 퀴리오스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한 날을 다스린다(막 2:28 이하). 그의 죽음과 부활 후에도 지상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기독교 공동체의 무한한 권위를 지닌다. 바울은 최종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는 퀴리오스의 말씀들에 호소했다(고전 7:10; 고전 12:25; 살전 4:15; 참조: 행 11:16; 행 20:35).
② 퀴리오스이신 높임 받으신 예수님. 예배에 사용된 신앙 고백적인 외침인 퀴리오스 이에수스(예수는 주이시다)는 의심할 바 없이 바울 이전의 헬라 기독교 공동체에서 유래했다. 이 고백이 가장 오래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가장 오래된 기독교 신조들 중의 하나이다. 이런 고백으로 신약 공동체는 자신을 주님께 복종했지만 동시에 그를 세상의 통치자라고도 고백했다(롬 10:9; 고전 12:3; 빌 2:11).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며 그를 만민의 퀴리오스라는 자리로 높이 올리셨다. 더욱이 하나님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즉 자기 자신의 이름인 주라는 이름을 "주셨으며"(빌 2:9 이하.; 참조: 사 45:23 이하) 그와 아울러 그 이름에 적합한 지위도 주셨다(빌 2:5-11). 높임을 받은 퀴리오스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을 다스린다(롬 14:9). 그밖에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모든 왕들을 다스리는 통치자로, 만주의 주로, 만왕의 왕 King으로 불리운다는 사실에 암시되어 있다(계 17:14; 계 19:16). 이런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한 영예의 칭호를 받았다(딤전 6:15; 참조: 단 2:47). 그 당시의 유대 사상에 따르면, 자연과 역사에 있어서 세상의 다른 영역은 천사들의 힘으로 다스려졌다. 그리스도가 이제 퀴리오스의 지위로 높여졌으므로, 모든 권세들이 그에게 예속되었으며 또한 그를 섬겨야 한다(골 2:6; 참조: 엡 1:20이하.). 한 하나님과 한 퀴리오스이신 예수님은 이교 세계의 수많은 신들 및 주들과 반대된다(고전 8:5이하.; 엡 4:5이하).
예수님의 높이심과 주로써 취임한 것에 관한 성경적인 근거는 시편 110:1에 나와있다(참조: 마 22:44; 막 12:36; 막 16:19; 눅 20:42이하.; 행 2:34). 시편에서 따온 이 구절의 유대적인 해석은 메시야적 미래를 기대했으나 - 메시야적인 해석은 교회를 반대하는 유대인들 가운데서 오랫동안 은폐되어 있었다 - 기독교인의 믿음 안에서 이 소망은 현재의 것으로 전이되었다. 메시야인 예수님의 주권은 현재적인 실재이다. 그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권세와 주권을 감추어진 방법으로 실행하고 있으며 종말론적인 미래에는 메시야의 통치가 완성될 것이다. 이 믿음은 도마의 신앙고백(요 20:28), 호 퀴리오스 무 카이 호 데오스 무(나의 주 나의 하나님)에서 분명해졌다. 원시 기독교는 예수님을 주로 세우는 것을 일신교에 위배된다고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신교를 확고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보았다(고전 8:6; 엡 4:5; 빌 2:11). 주 예수님을 높이셔서(행 2:36) 그를 만물의 주로 삼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③ 퀴리오스와 주의 만찬. 퀴리오스는 주의 만찬과 관련된 표현에 자주 나온다. "주의 상"(고전 10:21); "주의 죽으심"(고전 11:26); "주의 잔"(고전 10:21; 고전 11:27);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고전 10:22),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고전 16:22); "주의 만찬"(고전 11:20),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고전 11:32),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고전 11:27). 이런 다른 여러 가지 표현들은 주의 만찬이 기독교 공동체가 특별한 방법으로 퀴리오스의 구원의 사역을 따르며 또한 퀴리오스의 몸과 능력을 나누어 받는 장소임을 나타내고 있다.
④ 퀴리오스와 성령. 바울은 기독교 공동체에 성령으로 말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별하라고 훈계했다(고전 12:3). 어떤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그는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퀴리오스이신 예수님에 대한 충성을 고백함으로써, 새로운 언약에 속한 사람은 누구든지 또한 영의 세계에 속하여 더 이상 옛 언약과 그 문자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자유로운 상태에 놓여 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⑤ 서신의 문안에 나오는 퀴리오스. 바울 서신의 처음 인사말(마지막 부분에는 그렇지 않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글귀 옆에 자주 언급된다(롬 1:7; 고전 1:3; 고후 1:3; 갈 1:3; 빌 1:2; 살후 1:2; 딤전 1:2; 딤후 1:2; 몬 1:3). 마지막 인사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혹은 너희 심령과, 또는 너희 모든 사람에게] 함께 있을지어다"라는 말은 바울 이전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이 전통의 궁극적 기원은 아마도 주의 만찬에 있었던 것 같다(참조: 고전 16:23; 고후 13:13; 몬 1:25; 계 22:17-21).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묘사하는 것은 이방기독교 헬라 공동체로 소급되어야 한다(롬 15:6; 고후 1:3; 고후 11:31; 참조: 벧전 1:3; 엡 1:3; 엡 1:17; 골 1:3). 이 공식 문구가 본래의 유대 문맥(하나님에 대한 찬양) 속으로 삽입되었다. 이방 세계의 많은 퀴리오이들과 대조되고 창조의 대행자(고전 8:6)로 인정된 단 한분 퀴리오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교에서 고백하는, 그리고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전도할 때 전파하는 한 분이신 하나님과 일치하는 분이다. 따라서 기독교 선교사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믿을 뿐만 아니라 퀴리오스이신 예수님도 믿으라고 촉구했다(행 5:14; 행 18:8).
(d)  퀴리오스의 주권.
① 퀴리오스이신 예수님 앞에서의 기독 공동체(교회)의 활동. 기독교 공동체의 삶에 관한 모든 표현들을 보면 기독교 공동체는 권위를 가지고 그것을 공동체에 행사하는 퀴리오스 앞에 서있다(고전 4:19; 고전 14:36; 고전 16:7). 그는 그 공동체를 성장하게 하며(살전 3:12 이하) 사도들에게 권위를 부여하고(고후 10:8; 고후 13:10) 그의 몸의 지체들에게 서로 다른 직책을 부여한다(고전 3:5; 고전 7:17; 고전 12:5). 퀴리오스는 환상과 계시를 제시해준다(고후 12:1). 기독교 공동체의 삶 전체가 공동체와 퀴리오스의 관계에 의하여 결정된다(롬 14:8). 몸 즉 완전히 지상적인 기독교인의 존재는 퀴리오스에게 속한 것이다(고전 6:13). 이러한 사실이 음란한 행동들을 못하게 한다. 퀴리오스는 각 사람에게 맞는 양의 믿음을 준다(고전 3:5; 고전 7:17; 엡 4:7). 그는 평화의 퀴리오스이시므로 평강을 주시며(살후 3:16) 자비를 베푸시고(딤후 1:16) 총명을 주신다(딤후 2:7). 퀴리오스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기초 위에서는 심지어 주인과 종의 세속적 관계조차도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세상의 퀴리오이를 충성스럽게 섬기는 것은 곧 교회의 퀴리오스를 섬기는 것이다(골 3:22이하.; 참조: 벧전 2:13).
② '퀴리오스를 통하여, 퀴리오스 안에'라는 문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공식문구는 감사(롬 7:25; 고전 15:57); 찬양(롬 5:11); 권고(롬 15:30; 살전 4:2)라는 매우 다양한 문맥에 나온다. 이 모든 구절들에서 퀴리오스라는 단어는 교회의 생활과 개인의 생활에 대해 가지는 높임 받은 주님의 능력을 주장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주 안에서"라는 문구는 특별히 바울서신에 자주 나온다(예: 고후 2:12; 엡 4:17; 살전 4:1; 롬 14:14; 롬 16:2; 빌 2:29; 빌 3:1; 빌 4:1; 롬 16:21; 롬 16:22; 고전 16:19).
③ 재림에 관한 구절들(고후 5:6; 고후 5:8; 살전 4:17; 고전 1:8; 고전 5:5; 고후 1:14; 살전 5:2; 살후 2:2; 고전 1:7; 살후 2:1; 딤전 6:14; 고전 4:5; 빌 4:5; 살전 6:16이하,; 약 5:7; 살후 1:9; 살후 2:8; 빌 3:20등). (참조: H. Bietenhard).
(참조: W. Foerster; H. Bietenhard;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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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povstolo"(652, 아포스톨로스) 사도 apostol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아포스톨로스(Lysias, Demosth.)는 처음에는 동사적 형용사로 사용되었으나 후에 명사로 사용되었다.
(a)  아포스톨로스(ajpovstolo", 652)는 '보내다'를 뜻하는 동사 아포스텔로(ajpostevllw, 649: 보내다)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기본적 의미는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b)  아포스톨로스는 고전 헬라어에서 처음에 해양 언어로 발견되는데, 화물선이나 보낸 선단, 후에는 원정 함대의 함장이나 해외로 임무를 위해 '파견된 자'나 원정대, 또는 일단의 식민 개척자들을 의미하였다.
(c)  아포스톨로스는 헤로도투스의 두 구절에서만 한 인격으로써 '사절, 대사, 특사'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그는 Alyattes가 Miletus에게 보낸 사자와 같은 메시지의 전달자를 말한다(1.21).
(d)  아포스톨로스는 파피루스에서 나일강의 배로 운반되는 정부의 곡물 창고로부터 알렉산드리아로 보내는 곡식의 선적량을 지시하는 공식 서류인 나타내는 전문 용어이다. 아포스톨로스는 여권, 안전 통행증, 또는 심부름꾼이 떠나려 할 경우의 출국 허가서(P.Oxy. 1271; 참조: Strabo 2.3.5), 수출 면허장을 말한다. '여권 없이 승선한(알렉산드리아에서) 사람에 대한 법적 조치가 장관의 관할 하에서 취해진다'는 규정이 있었다(Gnomon of the Idios Logos 162).
2. 70인역본 및 구약 등의 용법.
(a)  아포스톨로스는 70인역본에서 왕상 14:6에 한번 샬라흐의 역어로 나오며, 여로보암의 아내에게 신적인 메시지를 전달한 아히야의 임무를 서술하는데 사용되었다.
대하 17:7-9에 의하면 이 보냄을 받은 자들은 단순한 사절이 아니라 책임있는 직무, 즉 어떤 사람의 권한을 위임받은 대표를 말한다. 그의 행위는 "보낸 사람"에 의해 결정된다. 이 점에서 당사자(보낸 사람)과 그 대리인은 동일하다: "어떤 사람의 샬리아흐는 그 사람 자신과 같다. 그러므로 사자는 자신에게 사명을 준 사람의 대리인이 된다(참조: 삼상 25:40 이하; 삼하 10:4, 6). 사자나 그에게 사명을 준 사람의 인격에는 관계 없이 그리고 심지어 임무에도 관계 없이 샬리아흐라는 말은 '전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행동하는 사람'을 의미한다(참조: W. Schmithals). 이 규칙이 종교적인 영역에까지 적용된다. 샬리아흐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행할 때 그것은 아브라함, 엘리야, 엘리사의 경우(Midr. Ps. 78 5; 173b)에서처럼 하나님 자신이 행하시는(b. B. Mes. 86b) 것과 같다. 랍비들은 희생 제물을 바치는 제사장들을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 이상을 행하는" 하나님의 샬리아흐로 생각했으며(b. b. Qidd. 23b; 참조: Rengstorf), 속죄의 날에 그들은 대제사장을 "하나님 앞에 있는 백성들의 대표자"로 불렀다(m. Yoma 1. 5; m. Git. 3.6). 회당 기도회의 인도자는 공동체의 샬리아흐였다. 랍비들은 고국의 유대인들과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들을 시찰하고 결집시키는 산헤드린의 대리자로 보냄을 받았다. 다른 한편 미쉬나와 탈무드에서 샬리아흐는 공동체를 대표하여(m. Ros, Has, 4.9), 그의 선거인들에 의해 권한을 부여받는다. 이러한 사실들은 신약성경의 사도의 의미에 영향을 주었다.
(b)  요세푸스는 이 단어를 사명을 받고 파송된 사절단에 대하여 사용하였다(로마에 보낸 유대인들).
(c)  아포스톨로스는 아마도 후대 영지주의적 계통에서 신적 계시의 중재자로서의 '사자'라는 동방적인 개념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들의 학설에서 그 단수로는 '천상의 구세주'를, 복수로는 '수많은 구원자들' 즉 '영적인 사람들'을 표현하는데 사용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아포스톨로스는 신약성경에서 80여회 나타난다.
(a)  신약성경에서는 고전 헬라어의 경우와는 달리, 아포스톨로스라는 말이 오직 '사자'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무엇보다 하나의 특정한 직무 즉 원(原) 사도직에 대한 확고한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눅 6:12-눅 6:13, "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따르고, 그의 삶을 함께 나누고, 그에게 속한 제자들 중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그를 대표하고, 그와 보다 더 친밀하게 교제하고, 그럼으로써 특별한 권한을 가지게 될 열 두명을 선발하셨다. 그 당시에는 단지 샬리아흐라는 단어 자체가 그들이 합당한 권세를 지닌 사절이나 대리인이 될 것이라는 것을 나타낼 뿐, 그들의 역할에 대하여 아무 것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 역할에 대해서는 막 6:7에서 잠시 동안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전도를 위해 보내실 때에 말씀하신다: "열 두 제자를 부르사 (그들)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참조: 마 10:1-마 10:2). 사도들은 그들이 배치될 때에 예수님의 엑수시아(권세)와 함께 그들의 사명을 수행하도록 준비되었다. 여기에서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사도직의 본질적인 특성을 보게 된다.
(b)  사도는 경건한 사람이며 예수님에 의해 다른 사람들 중에서 선택되어 부름받은 자이다; 이것은 사도는 예수님의 처지를 공유하고 그의 재산과 그의 직업과 그의 가족을 포기하며, 그의 잔을 마시고(마 20:23) 이와 함께 주님께서 받으시는 세례(침례)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것(막 10:39)을 포함한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셨다"(행 1:2; 참조: 요 15:16; 요 15:19)고 주장한다. 바울은 항상 대리자로서의 그의 권위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즉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즉 소명에 의한 사도(롬 1:1)이다. 되풀이하여 나타나는 문구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고전 1:1; 고후 1:1; 골 1:1; 엡 1:1)이다. 속격 크리스투(벧전 1:1)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명백히 설명되고 하나님의 뜻(델레마)으로 보강된, 소유와 기원에 대한 속격(참조, 롬 1:5)이다. 사도의 사명의 합당함을 위해 더 이상 확실한 근거는 있을 수 없다: 그 위임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갈 1:1) 것이다. 이러한 위임은 공적이며 영속적이다.
(c)  사도는 본래 어떤 누군가에 의해서 다른 누군가에게 보내어진 사람이다. 그 목적은 다소 세속적일 수 있다; 대리자나 대표로서 '아포스톨로스는 그를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다'(요 13:16);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다"(요 13:20). 한 사람이 살리아흐를 대하는 태도는 실제로 보낸 사람을 향한 것이다. 사도의 사명은 우선 첫째로 전도하는 것이지만 또한 교회들을 세우고(고전 9:2), 죄를 용서하며(요 20:23), 성령을 전하고(행 8:18), 집사를 안수하고(행 6:6), 장로들을 세우는 것(딛 1:5)이다. 만약 필요하다면 다른 청중도 열거된다: 베드로는 할례자에게 보내어지고(갈 2:7),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보내어진다(롬 11:13; 참조, 고후 10:13-고후 10:16).
(d)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의 이러한 역할을 위해서는 사도에게 능력과 권위가 부여될 필요가 있다(눅 24:49; 살전 1:5).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성령과 마귀를 억제하는 엑수시아(권세)를 주셨다. 그리스도의 후계자 또는 대리자로서 사도들은 순회하는 전도자로서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위를 지닌 공동체의 우두머리로서 살아간다: "사도들로 인하여, 보다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고후 6:7)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행 2:43; 행4:33; 행 4:37; 행 5:12). 실제로 그들은 그들의 주님으로부터 받은 말씀만 전하였기 때문에(살전 2:13-"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것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약속들이 매우 신뢰할 만한 것임을 증명한다 (벧후 3:2; 유 17). 그들은 이것을 깨닫고 있었으며(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에 "성령의 능력의 증거"가 함께 했다[고전 2:4-고전 2:5;참조, 행 4:7-행 4:33]), 비록 그들이 만물의 페립세마("찌꺼기")로 여겨진다 할지라도(고전 4:13) 그들 스스로 지도자에 어울리게 처신한다. 그들은 특별한 특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종이다(요 13:12-요 13:17; 눅 22:25-눅 22:27).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왕국에서 최고의 계급이다. "거룩한 사도들은"(엡 3:5; 계 18:20) 하나님께 완전히 바쳐진 자들이므로 아포스톨로스는 영예로운 칭호이다("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고전 15:9];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살전 2:6]).
(e)  신약성경에는 높은 사도들이 있고 두 번째 가는 지위의 사도들이 있다.
① 누가는 열 두 제자들을 사도로 알고 있다: 눅 6:13("열 둘"). 마 10:2은 열 두 사도를 열거한다. 막 3:13-막 3:19에서 셈족의 어투로 된 '에포이센 도데카'(문자적으로 '열 둘을 만드셨다')는 참으로 예수님 자신께서 새 이스라엘을 통치하시기 위해 열 두명의 성직자회(college)를 세우셨다는 것을 확증한다. 이들은 그가 소유하신 능력을 부여받은 대리자, 대표, 전권 대사들이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참조: 눅 10:16; 마 10:14). 교회를 다스릴 때에(참조, 마 19:28; 눅22:28-눅 22:30), 쿰란(Qumran) 공동체를 다스리던 "열 두 사람과 세 명의 제사장"보다 나은 이 사도들은 "기둥들"(갈 2:9), "유명한 자들"(갈 2:2; 갈 2:6)이며 영원히 지속되도록 세워진, 그리스도와 연합한 정통 신앙의 재판관이자 보증인이다. 그들은 "어린 양의 십 이 사도"들이다(계 21:14).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사도직에 관해 생각해 볼 필요를 느낀다. 골 1:1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디모데는" 하며, 그의 서신을 시작한다. 여기서 바울은 그 말의 가장 높은 의미, 곧 보다 제한적인 의미로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주장을 공포한다. 그는 자신을 예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졌던 12제자들의 반열에 선 사도로 간주한다.
바울은 최초의 12 사도에 속하는 사도가 아니다. 사도직의 자격 중 하나는 예수님을 목격하는 것이다. 그도 역시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었다(고전 9:1; 고전 15:8-고전 15:9). 하나님은 그에게 그의 사도직을 입증할 기적적인 능력을 주셨다(고후 12:12; 히 2:3-히 2:4). 그가 세운 교회들은 그의 사도직에 대한 봉인이 되었다(고전 9:2). 그리고 그의 몸에는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은(고전 15:10), 표적인 예수님의 흔적이 있었다(갈 6:7).
제자들의 특별한 경험과 비교할 때 바울도 복음 전파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직접 개인적으로 보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행 26:15-행 26:19; 갈 1:11-갈 1:17). 그는 예수님이 부활하여 살아서 축복하고 다스리심의 인격적 경험이 입증하는 특권에 그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에 대한 선택된 증인들인 원 사도들과 동등함을 주장한다.
바울의 전(全)기독교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에게 실제로 나타났었던 그 경험과 확신 위에 세워졌다. 다메섹 도상에서 본 그 환상은 그의 생애에 대변혁을 일으켰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의 주님을 보고 주님의 입술로부터 그의 임무를 받았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의 사도이다.
그의 사도직과 그 권위에 대한 주장은 그의 제자 디모데에 관한 묘사에서도 나타난다. 바울은 자신을 "사도"로 묘사하는 반면 디모데를 "형제"라고 묘사한다(참조: 롬 16:23; 고전 1:1; 고전 16:12). 이것은 일반적 의미로 디모데가 사도이지만(참조: 살전 2:6), 그러나 바울과 동일한 사도가 아님을 나타낸다(참조: H. M. Carson).
바울은 그의 서신의 서언에서 항상 그의 사도적 권위를 말하지 않았다. 그의 최초기 서신, 곧 데살로니가에 보낸 서신들에는 이러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던 즐거운 서신에서 그는 그의 권위를 주장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 아무도 그것을 전에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레몬에게 보낸 개인 서신에서 우정은 최상이며, 그가 말한 것과 같이 매우 대담하게 명령할 수 있을지라도, 그는 도리어 간청하며 사도로서 명령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갇힌자로서 호소한다.
그는 그의 다른 서신들에서 그의 사도권에 관한 언급을 골로새서처럼 전면에 두지 않는다. 그리고 기억할 것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사도권과 그 토대가 하나님의 뜻으로 인한 것임을 매우 강하게 강조한다는 것이다. 거기서 그는 다른 어떤 곳에서 반대를 받은 것보다 더 반항적인 반대를 받았던 것이다.
한편 골로새서의 경우 그가 자신의 권위를 그렇게 강력히 주장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그의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전하는 말이 주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의 권위를 분명히 밝혀둘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그의 말은 초대 교회 당시에 활동하였던 한 위대한 선교사 개인의 견해 이상의 권위를 갖게 된다. 즉 그는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그리스도의 대변자로서의 권위를 갖고 있었다. 골로새 교인들은 이러한 바울의 서신을 읽을 때, 그 말씀을 단순한 인간 바울의 말로 받아들여서는 안되며, 사도 바울의 말,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는 선포에 포함된 사상은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에, 사도로서 너희에 말한다. 나는 나의 결정(의지)이나 나의 공로로 말미암은 사도가 아니다 나는 사도라 칭함을 받을 가치도 없다. 너희들과 같이 초라한 죄인이며, 하나님은 순전한 자비와 사랑의 이적으로 이 입에 그의 말씀을 두셨다. 하나님은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내가 전하는 말씀은 나의 것도 아니고 어떤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숨결이 음악을 만드는 깨진 파이프에 신경을 쓰지 말고 그 음악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의 메시지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권위에 대한 단호한 주장은 깊은 겸손과 연합되어 있었다. 소수의 기독교 교사들은 바울 처럼 강직한 성격을 가지거나 계속적으로 두드러진 경험을 가진다. 그러나 그가 전하는 말씀에 수반되기를 기대하는 영향력은 전적으로, 자기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에 있는 것이다.
② 다음으로 아포스톨로스는 '보냄 받은 자' 곧 '사자'(使者)라는 일반적 의미로 사용된 실례는 적지 않다. 고전 15:5-고전 15:8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먼저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은 열 둘(제자)에게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시고 맨 나중에 나에게 나타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열 두 제자들 다음에 언급한 이들 아포스톨로이(사도들)는 신적으로 사역자로 임명될 수 있으며 교회의 공적인 성직자들 중에서 첫 번째로 명기된 카리스마를 지닌 자들인데(고전 12:28-고전 12:31; 엡 4:11), 성직과 은사 사이에는 아무런 갈등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을 익명으로 한 것은 행 15:4; 행 15:6; 행 15:22; 행 15:23; 행 16:4에서 막연한 교회와 관계가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의 경우와 같다. 그렇지만 우리는 바울의 협력자인 바나바(행 14:4; 행 14:14; 고후 12:7)와 에바브로디도(빌 2:25). 디모데와 실루아노(살전 2:6), 디도(고후 8:23)와 사도들 중에서 유명한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같은 특별히 열심있는 전도자들을 알고 있다.
③ 항상 불충성한 청지기가 있는 것처럼 편견으로 굳어진 유대인 그리스도교 전도자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사도의 칭호를 자랑하고 그들의 명성을 선전하였으니, "지극히 큰 사도로" 여긴 것이다(고후 12:11). 이들 "지극히 큰 사도들"(고후 11:5)은 "거짓 사도들"이다(고후 11:13). 에베소 교회는 그들의 정체를 밝힘으로 칭찬받는다: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계2:2).
(f)  히 3:1에서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고 말한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를 아포스톨로스라고 묘사한 유일한 구절이다(before Justin, 1 Apol. 1.12). 아마도 여호와의 천사, 사자, 광야를 지날 동안 이스라엘을 인도한 안내자(출 14:19; 23:20, 23; 32:34; 33:2; 민 20:16), 그의 백성을 위하여 사람의 형상을 입으신 하나님의 돕는 자에 대한 언급일 수도 있다. 우리는 또한 이스라엘을 인도하기 위해 그들 가운데서 선택받았으나, 아들처럼 하늘에서 오신 자가 아닌 모세와는 명백히 다르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기자는 그리스도가 최초의 으뜸가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은 받으신" 분이라는 요한복음의 전통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요 17:3; 요 17:18; 요 20:21; 요일 4:10).
요 9:7의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를 주목하라. 그 복음서 기자는 운하 또는 물을 "보내는"을 의미하는 명사 살르아흐(실로암)를 수동 분사로 표현하여 그것을 고유의 이름으로 간주하고(참조, 사 8:6이하; 창 49:10, 히브리어 실로; 창세기에서 메시아에 대한 해석으로 주어짐. Rab. 98.13; 99.10; Tg. Onq.), 그 이름을 "보내신 이", 즉 예수님에 대해 환칭으로 사용한다(요 3:17; 요 3:34; 요 5:36; 요 7:29). 더욱이 히 3:1에서의 사도와 대제사장과의 결합은 예수님의 신성한 사명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대표하고 믿는 자들에게 변호를 위임받은 자, 변호자(요일 2:1), 샬리아흐가 되며 하늘의 지성소에서 그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중보하는 것이다(요 14:13-요 14:14). 그의 "사도직"은 그의 영속하는 제사장직이다.
(참조: C. SpicQ, TLNT; C. Brown; K. H. Rengsto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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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htov"(2822, 클레토스) 부름 받은 called.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클레토스(Homer 이래)는 칼레오(kalevw, 2564: 부르다)에서 유래했으며, '부름 받은, 초대 받은, 환영하는'(호머의 오딧세이)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형용사 클레토스는 70인역본에서 18회 나온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미크라(4744: 소집, 집회, 모임)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성'회(출 12:16; 레 23:2; 레 23:3; 레 23:4; 레 23:7; 레 23:21; 레 23:24; 레 23:35; 레 23:36; 레 23:37; 민 28:25)를 나타내며, 카라(7121: 부르다, 초대하다, 소환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어 '청함을 받는 (자)'나 손들'을 나타낸다(삼하 15:11; 왕상 1:41; 왕상 1:49; 습 1:7).
3.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클레토스는 신약성경에서 10회 나오며, 마태복음에서 2회, 바울 서신에서 7회, 유다서와 요한계시록에서 각 1회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때로는 동사로, 때로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명사로 사용된다.
(a)  바울은 교회의 구성원들을 클레토이(부름을 받은 자들)라고 칭하고 있으며(롬 1:6 이하; 롬 8:28; 고전 1:2; 고전 1:24), 롬 1:7과 고전 1:2에서는 클레토이 하기오이(성도로 부름을 받은 자들)라고 칭하고 있다. 그는 교회의 존재와 교회에 속한 개개의 구성원들의 존재가 모두 오로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사역에만 의거하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b)  매우 드문 현상이긴 하지만 바울이 클레토스를 개인의 직무에 사용한 경우도 있다. 롬 1:1과 고전 1:1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클레토스 아포스톨로스(사도로 부르심을 받다)라고 선언하는 가운데 사도인 자신의 직무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c)  유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부르심을 입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호의적인 주권이다.
(d)  계 17:14,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승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세 가지의 특징, 즉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이다. 선택을 받은 자들은 부르심을 받았고 자신의 진실함을 입증한다(A. T. Robertson).(참조: K. L. Schmidt; L. Coen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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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giavzw(37, 하기아조) 거룩하게 하다, 성별하다, 봉헌하다, 성화(성결)하게 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하기아조는 거의 독점적으로 성경 헬라어에 속한다. 형용사 하기오스(a{gio", 40: 신성한, 거룩한)에서 유래했으며, '거룩하게 하다, 신성(거룩)하다고 '선언하다. 봉헌하다, 성별하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a)  하기아조는 70인역본에서190여회 나오며, 주로 카다쉬(거룩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 동사의 사용법은 그것이 사용되는 배경에 있어서 명사나 형용사보다 더 일률적이다.
(b)  민 16:38에서 고라 자신의 향료들이 거룩하다고 한다. 출 29:21; 출 29:37; 출 30:29에서 제사 의식에 사용된 특정 물품이 하나님께 봉헌됨으로서 거룩한 것으로 여긴다.
(c)  어떤 사람이 부정함으로 인하여 공동체의 생활에서 일시적으로 배제되어 있을 때 그는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삼하 11:4).
(d)  또는 그가 하나님과 접촉하려 할 때 그는 자신을 성결하게 한다. 출 19:14 전후에 나오는 신의 현현 기사, 삼상 21:5이하에 나오는 거룩한 전쟁에 관한 기록, 그리고 삼상 16:5에 나오는 이새의 가족이 제사드리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제사에서 여호와께서는 그 가문의 가장 높은 친척이 되신다.
(e)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거룩히 구별하거나(삼상 7:1에서는 엘리아살이 제사장 직분으로 성별된다), 사물들을 거룩히 구별하여 삿 17:3 등에서는 은을, 왕상 8:64에서는 성전의 앞 뜰을 거룩히 구별한다.
(f)  거룩하다는 개념의 윤리적 의미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영역을 혼란시키는 행위에 대한 금지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레 22:32). 하나님은 죄를 심판함으로써 자기의 거룩함을 입증하신다(레 10:3; 민 20:13; 겔 28:22). 그의 거룩함은 또한 자기 약속들을 굳게 지킨다는 점에서 예증된다(겔 20:41; 겔 28:25; 겔 39:27).(T. E. Mccomiskey; O. Procksch; C. Brown).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하기아조는 신약성경에서 28회 사용되었는데, 공관복음서에 4회, 요한복음에 4회, 사도행전 2회, 바울 서신에 16회, 베드로전서 1회, 유다서 1회, 요한계시록 1회 나온다.
(a)  주기도문의 첫번째 간구에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구절이 나온다(마 6:9; 눅 11:2).
논리적으로 거룩하게 하는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아니다. 이것은 뒤따르는 간구들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의 나라가 임하거나 그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에 의해 거룩하게 여김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의 이름은 그의 인격이며, 그 자체로 거룩하고, 그 거룩으로 계시되는 것이다(참조: 겔 20:41; 겔 38:16). 계시는 종말론적으로 마지막 심판에서 일어나며, 역사적으로 신자들에 의해서가 아닐지라도 신자들 안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의 신성(deity)이 예배 행위(the mystery of worship)에서 인간에게 계시되고(참조: 사 6:3), 그 다음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된다(즉 신성시 된다.).
예배의 요소는 여기서 하나님의 신성이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느끼는 예배에 열중되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성화(sanctification)는 오로지 하나님께 속한다. 성전(마 23:17), 제단(막 23:19), 제사(히 9:13)가 거룩할 때라도 거룩하게 하는 능력은 오로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바탕을 둔다.(Procksch, TDNT).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스테토는 하기아조의 명령 과거 수동태로 여기서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시옵소서'이며, 과거형이 사용된 것은 완전한 실현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행위자가 명시되어 있지 않으며, 따라서 두가지 의미를 함축한다.
첫번째 의미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거룩하게 하거나 여김을 받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시는 행동을 하실 때 그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거나 여김을 받게 된다.
두번째 의미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거나 여김을 받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거나 여길 때 그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거나 여김을 받게 된다.
힐(D. Hill)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거나 여긴다는 말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높인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며,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예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로메아어(Krnst Lohmeyer)에 따르면, 주기도가 기원하고 있는 성화는 적극적인 의미와 소극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상반되는 감각적 영역에 속한 모든 것을 버림을 뜻한다. 왜냐하면 존재와 행위에 있어서 거룩한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봉사하는 천사와 같이 행위를 존재에, 그리고 존재를 행위에 일치시키는 사람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둘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안에서 모든 인간적, 역사적 존재가 고양되고, 그리하여 완성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을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성화의 과정은 또한 그 자체를 넘어선다. 왜냐하면 성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을 통한 세상의 성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통한 하나님의 성화에 있기 때문이다. 세계와 인류도 결국은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을 나타내시는 성화 과정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참조: C. Brown, DNTT)
(b)  하기아조는 요한복음에 4회 나오는데 그 첫번째 구절에서 이 동사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과 일을 수행하도록 특별히 성별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으로 뜻하고자 하는 바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도록 성별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① 요 10:36에서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거룩하게 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보내신 자가", 요 10:36) 문맥이 보여주는 바, 예레미야가 그의 출생 이전에 거룩하게 된 것과 같이(렘 1:5), 성육신 이전에 이루어졌다. 이것은 제자를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요 17:19) "거룩한 하나님"(참조: 6:69)의 자기를 거룩하게 하는 것에 해당하는 것이다(요 17:19).
②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그의 기도에서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였다(요 17:17; 요 17:19).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70인역본에서 동사 하기아조가 제사장이나(예: 출 28:41; 29:1, 21) 희생 제물(예: 출 28:38; 민 18:9)을 거룩하게 하는 것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위하여 자기 자신을 구별하였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거룩하게 하거나 교회를 거룩하게 하실 때(엡 5:26) 그것은 그의 신성의 증거이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하나님께 거룩하게 헌신하셨고, 그런 방법으로 그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다. 그것은 우리에게 갈보리, 그리고 갈보리가 의미하는 모든 것을 나타내어 준다.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제자들과 관련된다. 그것은 '제자들을 위하여' 행하여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죽으셨다. 즉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그들이 스스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셨던 것이다. 나아가 그것은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거룩함을 얻기를 기대하면서, 즉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되기를 기대하면서 죽으셨다.' 제자들의 거룩하게 됨은 진리로 거룩하게 되고 속죄로 완성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또한 진리를 행하는 일이기도 하다(70인역본의 시 119:142을 참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람은 거룩함을 입어야 한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인용한 이 모든 말씀들의 문맥이 명백히 입증하고 있는 바이다.(D. Procksch, TDNT, C. Brown, DNTT)
(c)  히브리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는 거룩하게 하는 방법으로 매우 분명히 기술되어 있다. 히 2:11의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는 말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이 혈육에 속한 자녀처럼(히 2:14), 하나에서 나왔다는 것을 말한다. 육체적 관계에 대한 강조가 보여주는 바, 이 하나는 하나님이 아니고 아담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역시 하기오스(거룩한 자)이며, 따라서 그들을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를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는 그의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거룩함을 얻게 하셨다(히 10:10; 히 10:14). 그의 피는 그들을 위한 화해(reconciliation)의 수단(means)이다(히 10:29; 히 13:12):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히 13:12). 여기에는 속죄의 개념과 거룩하게 함의 개념 간의 분명한 관계가 있다. 하기오이(거룩한 자들, 성도)로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의 상태에 놓여 있을 때라도 거룩하게 함의 진행을 그들 안에서 계속 진행시켜야 한다(계 22:11: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d)  바울 서신에서 의롭게 함(justification)의 사상은 하나님의 한 기능인 거룩하게 함(sancti fication)을 흐리게 한다. 그는 그 개념을 거룩하게 된 자에 대하여 말하면서 능동적으로보다 수동적으로 적용한다. 그에게 있어서 역시 거룩하여지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그들의 뿌리를 가지며(고전 1: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지고"), 이방 기독교인들은 제물(prosforav, 4376), 곧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된 제물이다(롬 15:16). 그러므로 다시 거룩하게 함의 개념이 화해의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 거룩하게 함은 인간의 편에서는 도덕적 행위가 아니지만 하나님의 영향 받는 효과적인 상태(고전 6:11: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 곧 세례(침례)에서 그리스도와 연합(교제)에서(롬 6:4; 골 2:12) 거룩하게 함과 의롭게 함의 기초가 있는 것을(참조: 고전 1:30) 보여주는(혹은 설명) 세례(침례)적 씻음이다. 거룩함(sanctification)이 하나의 상태이다는 것은 특별히 분명하게 한 기독교인 배우자가 어떤 거룩함의 성격을 이교인 배우자와(고전 7:14), 또한 기독교인들이 아닌 자녀들에 영향한다는 사실에서 명백해진다. 후기 바울 서신, 예를 들면 에베소서(엡 5:26: "깨끗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와 목회서신(딤전 4:5; 딤전 2:21)에서 거룩의 개념은 완전히 유대인 식의 순결의 개념에 가깝다(참조: 엡 1:14; 골 1:22).
(e)  사도행전에서 "거룩함을 입은 자들"(하기아스메노이)이란 표현은 사도 바울이 두번 언급했으며(행 20:32: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행 26:18: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두번 다 신 33:3의 "모든 성도가 그의 수중에 있으며"라는 말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골 1:12)에 기독교인의 참여라는 바울 사상에 상응하며, 그 외에도 수동태 헤기아스메노이(거룩함을 입은 [자들])가 거룩의 상태라는 주장을 더욱 강조한다.
(f)  마지막으로 벧전 3:15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거룩하게 하라는 부름을 받는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를 삼아(주 그리스도를) 거룩하게 하고". 여기서 전제 조건은 그들이 거룩한 자들(하기오이, 벧전 1:16)이라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의 성전인 그들 안에 거하시며, 어떤 불순결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더욱 더 마음의 순결은 거룩함의 한 조건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거함으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듯이 그들은 행위에서 거룩해야 한다.
(g)  그리고 하기아조는 물건에 대하여 '속된 것에서 분리하여 하나님께 바치다, 성별하여 신성하게 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금", 마 23:17; "예물", 마 23:19; "그릇", 딤후 2:21.
(참조: O. Procksch; C. Br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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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io"(40, 하기오스) 거룩한 holy, 신에게 바친 sacred.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하기오스는 어원이 분명치 않다. 이 단어는 하조마이(a{zomai)와 관련이 있다. 하조마이는 '~에 두려워하다, 움츠리다'('신이나 부모를 두려워하는 것, Homer, Il. 1, 21에서 아폴로를 두려워하는 것)와 '존경하다'(Aesch., Eumenides 1002에서는 제우스가 팔라스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들을 존경함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를 의미한다. 은유적으로는 '그것은 나를 죽음의 공포로 채우지 않는다'(Eur., Orestes 1116)라는 표현에서 사용되었다. 부정적으로 쓰일 경우에는 '거룩한 분노로 채워지다'를 의미한다(Eur., Frag. 348). 하기조마이는 70인역본에나 신약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옛 헬라어 하기오스는 존경의 의미에서든 반감의 의미에서든 '두려움의 대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금기(taboo)보다는 예배할 가치가 있는 거룩한 것을 더 강하게 시사한다. 그 후에 '사당'(shrine; Herodouts에서), '사람'(Aristoph)에 대해 사용되었고, 헬레니즘 시대에 이 단어는 '신들'이나 '신들을 묘사하는 수식어'로 사용되었다.
하기오스는 동방의 신들(이시스[Isis], 세라피스[Serapis], 바알[Baal] 등. TDNT Ⅰ89)을 묘사하는 수식어로 사용되었는데, 이로부터 헬라의 신들에 대해서도 적용하게 되었다.
2.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
형용사 하기오스는 70인역본에서 약 800여회 나오며, 20개의 히브리어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주로 코데쉬와 카도쉬를 번역했다.
70인역본에서 하기오스에 해당하는 이런 단어들은 '분리'나 '구별'이라는 개념이 강하다. 따라서 카도쉬는 본질적으로 거룩한 것, 또는 신적 의식이나 제의 행위에 의해 거룩한 영역에 속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 구약에서 거룩한 것들은 도덕적 순결보다 범속한 것으로부터 분리, 곧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보통 사용으로부터 분리하여 놓거나 따로 떼어 놓은 것들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라는 말은 모든 것, 특히 악한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절대적 분리성을 표현한다(사 17:7). "거룩한 백성"은 하나님이 다른 민족들로부터 분리, 구별하여 자기의 소유물로 삼았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레 20:26; 신 7:6; 14:2; 26:19).
예배 의식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룩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님 예배를 위해 따로 떼어(분리, 구별)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영역에 속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희생제사의 여러 부분(레 6:16; 7:6), 제사의 의식에 사용된 특정 물품(출 29:37; 출 30:29), 제물, 거룩한 향(출 30:37), 거룩한 기름(출 30:37), 성전과 그 구성요소(시 65:4; 레 6:16 등), 제사장(레 21:6, 8), 레위인(대하 35:3), 절기, 안식일(출 16:23; 사 58:14) 등이 이에 해당한다.
같은 맥락에서 '예배하기 위해 모인 회중', '이스라엘 백성', 때때로 '천사들'을 "성도들"이라고 부른다(출 15:11; 19:6; 신 7:6; 시 16:3; 34:9; 89:5, 7; 단 7장; 에녹 1:9; 19:1, 4-5; 유딧 31:14).
그러므로 '거룩한 것'이라는 개념은 윤리 이전의 개념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또한 윤리적 가치를 지향하는 개념이기도 하다(출 31:13; 시편과 선지서).
하기오스는 구약성경을 통과하면서 '거룩한, 신성한, 성별된, 봉헌된, 순결한'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하기오스는 신약성경에서 약 23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하나님의 거룩. 신약성경에서 거룩은 구약성경에 근거하여 물질적 요소는 인격적 요소에 크게 양보한다. 신약성경의 거룩은 하나님의 내적 본질의 묘사를 담고 있다. 그것은 전능, 영원, 영광을 포괄하며, 두려움을 불러 일으킨다.
① 계 6:10에서 순교자들은 하나님을 "거룩하고 참되신" 분이라고 부른다: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② 요 17:11에서도 하나님의 거룩은 "거룩하신 아버지"로 나타난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③ 벧전 1:15이하에도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 나타난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구약성경과 비교하면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묘사하는 경우가 매우 적다.
(b)  거룩하신 자(하기오스)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간혹 하기오스로 묘사되었으며 이 묘사는 잘 알려진 중요한 것이다.
① 누가복음에서 그것은 "성령"이 마리아에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녀를 덮으신 예수님의 기적적 탄생에 근거되어 있다(눅 1:35). 여기서 토 겐노메논("나실 바")과 관련된 하기온("거룩한 자")은 주어에 속하고 휘오스 데우("하나님의 아들")는 술어에 속한다. 토 겐노메논 하기온("나실 바 거룩한 자")은 새 생명의 초자연적 기원을 설명하며, 그 기원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운다. 그러므로 여기서 휘오스 데우 곧 하나님의 아들은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직무에 근거하지 아니하고 그의 기원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마귀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부른다(막 1:24; 눅 4:34). 70인역본에서 이러한 칭호는 삿 13:7과 삿 16:17에만 나타나며, 이 표현의 지칭 인물이 거룩함으로 충만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② 요 6:69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고백 받는다: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③ 요일 2:20에서 그리스도는 거룩하신 자로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기름을 부어 주신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④ 유사하게 계 3:7에서 그리스도는 거룩하고 진실하신 자로 나타난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이러한 구절에서 하기오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⑤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종"으로 불리운다(행 3:14; 행 4:27; 행 4:30).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이 과거에도 선지자들을 언제나 부인하고 죽였듯이 예수님을 거부하였다(행 7:51이하).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았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 저항하는 것은 하나님께 저항하는 것과 똑같다.
(c)  거룩한 영(성령)
성령의 거룩은 그리스도의 거룩과 분리될 수 없다(참조: 행 2:17이하).
① 성령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특히 세례(침례) 받으실 때에 활동하셨다(마 1:18; 마 1:20; 눅 1:35; 마 3:11과 병행구). 이는 성령의 시대의 시작인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는 성령의 세례(침례)를 베풀 것이라고 하였고(행 1:5), 부활 후에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오순절, 행 2:4). 성령은 이제 나타나셨으며, 그러므로 거부는 용서받을 수 없다. 세례(침례)는 이제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② 누가는 특히 한정적, 비한정적 형태 모두에서 프뉴마 하기온, "거룩한 영"(성령)이라는 어구를 즐겨 사용한다. 누가는 하나님의 영을 다른 영들과 구별하기를 원하며, 그 제의적 요소보다는 카리스마적인 요소를 강조한다.
③ 바울은 보다 더 인격적 강조를 하며, 제의적 측면을 지지하나 영적화 한다. 예를 들어 거룩한 성전인 교회와 그리스도인 안에는 성령이 거하신다(엡 2:21; 고전 6:19; 참조: 롬 15:16; 고후 13:13; 살전 4:8). 세례(침례)와 성찬(고전 12:13)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나누는 것(교제)을 의미하는 예배 공동체의 표시이다.
(d)  교회의 거룩. 구약성경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종인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신 성령의 전으로서 거룩하다. 거룩한 백성들인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해야 한다(벧전 2:9; 벧전 1:16). 그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다(고전 1:2).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들은 이제 성도들 중에 속한다(엡 2:19). 교회와 마찬가지로 교회들도 거룩하다(고전 14:33). 거룩은 본래부터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은총의 부르심으로 말미암는다(롬 1:6; 고전 1:24; 빌 1:1). 거룩한 백성은 하나님의 기업을 가진다(엡 1:8; 골 1:12; 참조: 신명기).
(e)  그리스도인의 거룩. 교회가 성전인 것처럼(고전 3:17; 엡 2:21)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롬 12:1; 롬 15:16). 사랑으로서 서로 섬기는 것은 거룩을 나타내는 것이다(갈 5:13; 롬 15:25; 롬 16:2). 거룩한 입맞춤은 그것을 보증한다(고전 16:20).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된 자는 그들의 가족 전체를 거룩하게 만든다(고전 7:14). 여기서의 거룩은 도덕적인 성격을 지니며, 불순, 특히 이방의 성적인 것과 대조되는 것이다(행 10:14; 엡 5:5). 거룩에 대한 제의적인 언급은 거룩을 단순한 도덕적인 것으로 되는 것을 막아준다.
끝으로 마지막 심판에서 거룩의 원리는 기준인 것이다(고전 6:2). 신자들은 심판할 것이다-이리하여 믿음은 그 자체가 거룩하다고 불리워질 수 있는 것이다(유 1:20).
(f)  교회의 승리.
① 거룩한 천사들은 승리를 거둔 교회에 속한다(막 8:38; 눅 9:26; 계 14:10; 유 1:14).
천사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돌아올 것이다(살전 3:13). 그러나 이 구절은 세상을 떠난 성도들을 가리키거나 포함하는지도 모른다(살후 1:10).
② 그리스도인들은 성도로서 승리한 교회에 속한다(계 14:12; 계 17:16).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될 것이다(계 22:11).-그러나 스스로 거룩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거룩해졌다. 거룩은 이미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인 그리스도인들의 중심 결의(central determnation)인데, 그리스도인들이 벌써 그리스도의 거룩한 제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되고 성령의 전이 된 것이다.(참조: O. Procksch; H. Seebass; C. Br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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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jkklhsiva(1577, 엑클레시아) 집회, 회중, 교회.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에클레시아는 에크(ejk, ejx, 1537: …로부터)와 칼레오(kalevw, 2564: 부르다 call)에서 유래되었으며, 따라서 이 단어는 '불러낸 자들(의 전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 단어는 유리피데스(Euripides)와 헤로도투스(Herodotus)(주전 5세기)부터 사용되었으며, 고대의 용법에서는 폴리스(povli", 4172: 도시 city)의 유자격 시민 전체의 대중 집회를 나타낸다. 이 집회는 5세기 경에 가장 큰 중요성을 갖고 정규적으로 모였으며(아테네에서는 일년에 약 30-40회, 그밖의 곳에서는 아테네보다 자주 모이진 않았다) 또한 임시 엑클레시아로서 긴급한 경우에 모였다.
이 공회의 활동 영역은 법률 개혁, 제안, 관리의 임명에 대한 결정, 그리고 적어도 공회의 전성기에 있어서는 대 내외 정책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결정(계약, 조약, 전쟁과 평화, 재정)을 포함했다. 특별한 경우에는 여기에다 재판의 임무가 추가되었는데 이것이 발전되어 결과적으로 재판정이 되었다.
에클레시아는 그 도시의 신들에게 기도와 제사를 드림으로 개회 되었다. 이 모임은 그 당시의 법률에 의해 구속을 받았다. 모든 시민들은 연설할 권리와 토의해야할 문제들을 제안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한 전문적인 의견이 있을 때에만 그 안건이 다루어 질 수 있었다(Aristot. Ath. Pol. 45). 결정은 일정한 수의 찬성을 얻어야만 유효하였다. 참가의 권한과 이 집회를 소집하는 방법 그리고 투표의 방법 - 아테네에서는 손으로, 또는 박수 갈채로, 또는 무기명으로 판자나 돌에 쓰는 투표로 - 은 매우 엄격히 규제되었다. 이 집회의 통제는 프리라네이스(Prytaneis)의 의장에게 속해 있는 것이었고 주전 4세기 경부터는 9인회에 위임되었다.
따라서 구약성서의 번역과 신약 시대의 수세기 전에 엑클레시아는 분명히 하나의 정치적 현상으로 규정되어 나타났고 특정한 규칙에 따라 그리고 특정한 범주 내에서 반복되었다. 엑클레시아는 전체 시민들의 집회로, 기능에 있어서 민주주의 구조에 뿌리를 내린 것이었으며, 여기에서 기본적인 정치적 결정과 사법적 결정이 내려졌다.
2. 70인역본의 용법.
엑클레시아는 70인역본에서 약 100회 나오며, 그 중 22회는 외경에 나오는데 그 3회는 히브리어 상당어가 없이 나온다. 엑클레시아는 거의 항상 히브리어 카할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하지만 카할이 항상 엑클레시아로 번역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엑클레시아는 창세기에서 민수기까지 23개절, 예레미아 5개절, 에스겔 15개절에 나오지 않은다. 그 대신 쉬나고게(회중,회당; 창세기에서 민수기까지 21개절, 에스겔, 예레미아 등에서 나옴), 쉬스타세이스(모임,연합;창49:6), 오클로스(군중, 다수;렘31:8; 겔16:40; 17:17; 23:24 등), 플레도스(큰수, 회중, 무리;출12:6; 대하31:18)가 역어로 사용되었다.
70인역본에서 엑클레시아는 '집회 assembly'를 뜻하며, 따라서 '모임, 회집'이란 의미(참조: 신9:10; 18:16의 총회)와 '모인 자들, 회중'이라는 의미(왕상8:65의 큰 회중)를 가진다. 실제적 의미는 '모인 자들' 곧 '집회를 구성한 자들'이다.  삼상 19:20의 "선지자 무리"라는 표현이 이를 지지한다.
신명기에서 엑클레시아/ 카할은 무엇보다도 시내산 언약을 맺기 위해 모인 회중을 의미하고 있다(신 9:10). 엑클레시아/ 카할은 여호와의 이름파 연결됨으로써 제한적인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엑클레시아 퀴리우: = 케할 예호와: 신23:2 이하; 참조, 대상28:8; 느13:1; 미2:5). 신명기(9:10; 10:4;  18;16)에서 케할 예호와의 결합이 정당화된 이유를 볼 수 있다.  야웨와 그의 그의 백성과의 관계를 처음 확립한 엑클레시아/ 카할은 시내산에 있는 회중이며, 야웨와 이스라엘이 함께 하는 날이 욤 학카할 곧 집회의 날(총회의 날)이다. 야웨는 그들을 모두 하나로 부르시는 분이시다.
여기서 엑클레시아/ 카할은 여호와께서 소집한 백성, 곧 여호와께서 주신 규례들에 구속을 받는 백성을 나타내며, 그들의 여호와 언약에 참여는 순종에 의해서만 이루어 지는 것이다. 따라서 엑클레시아/ 카할은 또한 특별하고 엄숙한 집회의 종교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솔로몬 성전 봉헌 때에 예배하는 공동체는 에엑클레시아/ 카할이며(왕상 8:14 이하; 대하 6:3),  에스라가 율법책을 남자, 여자. 아이들에게 "율법을 낭독하고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께 경배"했던 초막절에 집회(혹은 모인 회중)(느 8:2, 17), 히스기야의 명령에 따라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모인 백성(대하 30:2, 4, 13, 17), 국가적 위기에서 여호사밧이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소집한 이스라엘 회중은 엑클레시아/ 카할이다(대하 20:5, 14).
엑클레시아/ 카할이 30회나 사용되어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역대기에서 종교적인 결정(법궤를 옮기는 것, 대상 13:2, 4)이나 또는 제의적 행사를 포함하는 행사(대상 29:10)을 위해 왕이 소집하는 지도자들의 집회나 그런 집회에 모인 무리들을 모두 나타내는 대표적인 의미로 사용었다. 이(성전에 모인) 무리가 시편에서는 카할로 지칭된다(예를 들어 시 22:23; 89:7 "거룩한 자의 회중"; 149:1 "신도의 회중").
그리고 엑클레시아/ 카할은 전쟁을 위한
사람들의 소집(참조:삼상 17:47)이며, 다른 종류의 소집은 중대한 사건에 대처하기 위한 국가적 비상 집회로의 부름이다(렘 26:17; 44:15; 삿 21:6, 8).
우리는 포괄적으로 엑클레시아/ 카할을 전쟁을 위한 동원이나 시급한 사법적 모임과 같은 남자들만의 모임이든, 에스라에서와 같이 온 백성의 모임이든 특별한 경우나 행사에 소집된 집회나 회중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렇게 모인 집회일 때 엑클레시아/ 카할은 그것에 참예할 자격이 있는 자들에 대해 사용될 수 있다(신 23:2이하).
한편 카할이 다른 단어로 번역된 경우에 주로 종교적인 의미없이 전쟁터에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모든 남자들의 무리에 대해(쉬스타세이스/ 창 49:6; 쉬나고게/ 민 22:4), 그리고 이스라엘의 공동체에 대해 사용되었다(오클로스/ 렘 31:8; 플레도스/ 출 12:6; 대하 31:18). 에스겔서에서는 대부분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민족의 무리나 병력에 대해 사용되었다(오클로스/ 겔 17:17, 애굽; 쉬나고게/ 27:27, 두로;32:22, 앗수르). 창세기에서 민수기까지의 대부분의 구절에서는 많은 군중에 대해 양적으로만 사용된다.
특히 쉬나고게는 창세기 28:3; 35:11에서는 백성 people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레 4:13; 민 15:15; 16:3, 33; 20:6; 신 33:4 등에서는 여호와께 속한 한 백성으로서의 성전과 율법에 중심을 둔 신앙 공동체의 집회(혹은 모인 회중 전체)를 나타낸다. 이 의미에서 카할/ 쉬나고게는 에다 쉬나고게의 의미를 가진다.
에다는 어떤 사람이 태어나고 소속하며, 만일 그가 남자라면 정확하게 규정되고 한정된 분량의 특정한 권리와 의무를 가질 수 있는 영구한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를 소집하는 힘은 법률로 규제될 수 있는 엄정한 출생에 의한 공동체의 힘이다. 에다는 성전과 율법을 중심하고 것에 의해 결정되는 전체 유대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가장 세속적인 자들이라도 율법과 성소와 어떤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L. Coenen, DNTT).
그러나 카할/ 엑클레시아는 언약을 맺음으로써 생겨난 회중, 시내산 공동체 사회에 대한 의례적인 표현이다. 이 카할/ 엑클레시아는 부름을 듣고 이를 따르는 자들만을 포함한다. 따라서 카할/엑클레시아는 야웨의 부름에 응답함으로써 특징 지워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관한 문제가 제시되는 곳에만 사용된다,  확실히 카할/ 엑클레시아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위대성이 암시되는 곳에서 특별히 사용되며, 아마 헬라인 독자에게 단지 당시 유대 사회의 정치적, 생래적 주장을 암시할 수 있는 곳에서는 사용을 회피하였다. 아마 이것은 공동체 사회의 생활을 규정하고 있는 율법에 관한 구절들에서 카할이 쉬나고게로 번역되는 이유일 것이다(L.V.Rost, Op. cit., , 127).
카할이 신약성경의 엑클레시아로 발전한 것에 관해서, 우리는 이 말이 시내산에서 언약의 체결에 참예한 자들과 또한 에스라의 지도 아래 율법에 새로히 서약한 자들에 대해 사용된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엑클레시아/ 카할은 언약과,그리고 그것과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가진 자들을 가리키는 전문용어이다. 적어도 에스라 시대에(참조: 이미 렘 44:15에서)  여인들과 아이들이 엑클레시아/ 카할에 속했다는 사실 역시 의미심장한 것이다.  이것은 카할이 70인 역본에서 엑클레시아로 버역된 이유의 하나이다(K.L.Schmidt, TDNT).  사실은 카할이라는 용어 자체 여인들과 아이들도 충분한 자격이 있는 것으로 허락된 기독교 공동체을 뜻할 수 있는 적합한 용어인 반면에 쉬나고게는 그 요성이 남자들만의 참여와 관련되기 때문에 적합치 않은 용어이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엑클레시아는 신약성경에서 114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엑클레시아에 대해서 무엇보다도 뚜렷한 것은 이 단어가 마 16:18과 마 18:17을 제외하고는 복음서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이 단어를 23회 사용한 사실은 적어도 누가가 예수님의 지상 활동 시기에 속한 부분에 대해서는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단어의 표현 중 대부분은 단연 바울 서신에 나오며(총 114회 중 46회: 에베소서의 9회와 골로새서의 4회를 포함) 무엇보다도 고린도전서에 22회 나온다. 이 개념을 특별히 구체화한 사람은 바로 바울이었고 이 개념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특히 우주적 의미로 더욱 발전되었다. 이 단어는 베드로전후서와 디모데후서, 디도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야고보서와 히브리서에는 단절된 예문들만이 나오며 또한 요한삼서에서만 사용된다.
(b)  원시 공동체.
모든 복음서에 엑클레시아가 나오지 않는 것(마 16:18; 마 18:17은 예외)은 그들이 기록할 때에 이 개념이 당시의 통용하는 용법이 아니었다는 주장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복음서의 문학 형태가 바울 서신과 동시대 또는 보다 후기의 문학 형태에 속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초대 기독교의 모든 제자들이 엑클레시아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심과 부활하심 후에 나타난 교제 모임을 나타내는 데에만 사용하였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참조: O. Cullmann, The Early Church). 이 단어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 시기 또는 예수님 주위에 모인 제자들을 묘사하는 데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큄멜(W. G. Kummel)은 문헌상에서 볼 수 있는 이 단어가 역사적인 사실과도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지적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상 생애 기간 동안에 이러한 엑클레시아를 세우지 않으셨으며, 주의 만찬 의식 제정을 통해서 엑클레시아를 세우신 것도 아니다("Kirchenbegriff", Symblae Biblicae Upsalienses, I 1943, 23이하, 36).
그러나 교회의 의식이 원시 기독교 공동체 사회 초기에 싹트고 있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 근원은 제자들 중 일부가 부활 사건의 증인들이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곧 그들은 구원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소식을 전할 사명을 위임받은 증인들이 되었던 것이다. 원시 공동체에 있어서 교회라는 개념은 부활 사건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종말론적 상황에 대한 의식으로 특징 지워진다(참조: 고전 15:3이하). 그것은 이미 종말의 징조를 경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원시 기독교의 엑글레시아는 그리스도의 주권(Lordship)을 전달하는 자, 그 자체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의 주권은 곧 임박한 재림과 함께 다가오고 있었고 이미 그들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주권이 실감되고 있었다(참조: Cullmann, Op. cit., 특히 126이하). 그러나 교회는 여전히 이 세대에 속한 일부분에 불과하며 따라서 바실레이아(하나님의 나라)와 동일한 것이 아니었다(Cullmann, Op. cit., 22).
(c)  마태와 누가
① 마 18:17의 문맥에서 엑클레시아는 한 장소에서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구성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곧 이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 메시야 예수님께 대한 충성으로 인하여 스스로를 참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한다(마 18:16; 참조, 신 19:15; 민 35:30). 마태복음 기자는 이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질서의 요지를 추적하는 데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엑클레시아가 이곳에서 에다(회당 synagogue)의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구절은 도덕률 폐기론적 경향을 지닌 회중에 대한 논쟁적 특성을 나타냈을지도 모른다.
마 16:18의 해석은 더 어렵다. 일례를 들어 이곳에서 엑클레시아의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의 정확한 상당어귀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는 이 문맥에서 미래형인 오이코도메소(내가 세울 것이다)가 예수님의 생애를 언급하는 것인지 또는 예수님의 죽음 후의 시기를 언급하는 것인지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베드로에게 부여된 역할은 우리가 초대 교회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에서 단호하게 판단될 수는 없다. 갈 2:9에는 기둥들로 간주된 다른 사람들도 나온다. 행 11:1이하의 반대도 참조하라.
이것과는 별도로 예수님께서 지상생애 동안 교회의 터전을 예견하셨는가 하는 문제는 예수님께서 이미 자신을 메시야로 생각하셨는가 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아무리 카할 곧 엑클레시아가 메시야적 공동체로서 메시야에게 속한 것일지라도 이 미래 시제는 예수님의 죽음 후의 시기를 말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며,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의 교회의 터전이라는 견해는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 당시에 존재한 교회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의미로 해석 하기는 분명히 불가능하다.
"음부의 권세(사망의 권세들, 헬라어: 음부의 문들)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이 공동체가 죽음을 정복한 승리자로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그 근거를 둔다.
② 누가에 있어서 교회 시대는 부활과 재림 사이에 있는 구원사의 특별한 부분이다. 이것은 누가가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과 직접 관련이 있다. 곧 엑클레시아가 누가복음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반면에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행 5:11이후부터 16회를 사용한다(2장에는 나오지 않는다).
(d)  사도행전
처음 몇 구절(행 2:49; 행 5:11; 행 7:38; 행 8:1, 행 8:3; 행 9:31)은 매우 의미있는 구절이다. 행 8:1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엑클레시아에 대해 듣는다. 행 7:38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인도한 이스라엘 백성을 엑클레시아로 부르고 있다. 이것은 신 9:10을 언급하고 있을 지라도 문자적 인용이 아니다(마소라, 카할, 70인역본 엑클레시아). 행 9:31에서 이 단어는 예루살렘 공동체 뿐만 아니라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공동체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엑클레시아는 처음 단일 회중이었는데 이제 여러 회중을 뜻하므로, "회중"보다 "교회"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 기억할 것은 본문 증거는 행 9:31에서 단수뿐만 아니라 복수도 지지하며, 따라서 헤 엑클레시아 = 아이 엑클레시아이이다는 것이다. 행 15:41에서는 복수가 더 좋은 것으로 인증되며, 단지 B Dpc에서만 단수이다. 행 16:5에서는 분명히 복수가 사용되었다. 다른 경우에 단수가 지배적이며, 행 11:22; 행 12:1, 행 12:5; 행 15:4, 행 15:22에 예루살렘에 있는 공동체, 행 13:1; 행 11:26; 행 14:27; 행 15:3의 시리아 안디옥에 있는 공동체, 행 18:22의 가이사랴에 있는 공동체, 행 20:17-18; 행 20:28의 에베소에 있는 공동체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행 14:23에 엑클레시아의 표현은 각 교회(church wise)를 뜻하며 아마도 복수일 것이다(루터: 회중들 congregations, AV, in every church).
특별히 의미심장한(시사적인) 말은 행 20:28이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넷슬(Nestle은 시 73:2에 있는 병행구를 회상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엑클레시아보다 쉬나고게를 가진다: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70인역 쉬나고게)(시 74:2)
신약의 교회나 공동체에 대한 개념의 특징은 분명히 사도행전에서 온 이 구절들에 나타난다. 강조점은 서로 다른 지역들에 있는 회중은 서열이나 상호관계의 문제없이 단순히 교회로 부른 것이다. 지역 관계는 결정적 요점이 아니다. 이것은 유대, 갈릴리, 사마리아에 있는 엑클레시아에 대한 앞의 언급에서 보여졌다. 강조해야 하는 것은 단수와 복수가 무차별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엑클레시아가 엑클레시아이로 나누어진다는 것이 아니다. 엑클레시아의 총화가 엑클레시아를 만든다는 것도 아니다. 하나의 엑클레시아는 언급된 여러 지역에 존재하며, 이것이 서로 나란히 있는 엑클레시아에 대한 언급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회중과 회중들"이든 "교회와 교회들"이든 우리는 항상 이해하고 번역해야 한다. 둘 중에 전자는 더 바람직 하지만 우리는 후자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이는 회중이 오늘날 전체로서의 공동체와 지역 회중을 구별하기 위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가지 중요한 요점은 같은 단어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기독교 회중과 안디옥에 있는 이방인 회중에 대해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장식용 형용어구(통칭)를 결코 발견하지 못한다. 오직 한정사는 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부른다면 속격(하나님의)이다. 이 속격은 구약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것이 나타나지 않을 때라도 그것을 이해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엑클레시아의 충분한 의미는 이해될 수 없다. 하나님의 회중이나 교회는 항상 사회의 다른 형식(관행)과 대조하여, 그리고 심지어 반대하여 서 있다. 이것은 행 2:47에 있는 첫 언급에서 분명한 것이며, 그것은 라오스(laov", 2992: 백성)나 코스모스(kovsmo", 2889: 세상, 세계)보다 먼저(중요)하게 언급된다(D).
세 구절에서 서로 매우 밀접한 관계로(행 19:32, 행 19:29, 행 19:40). 엑클레시아는 백성의 모임, 즉 세속적 집회에 대해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엑클레시아는 완전한 의미의 세속적 용어이다. 만일 우리가 동일한 단어가 동일한 저자에서는 일관하게 번역되어야 한다는 기본적으로 필요하고 합당한 원칙을 따른다면 이것은 "교회"에 대한 사용을 포함한다. 다른 한편 그것은 역시 영어의 "회중"을 허용하지 않으며, 심지어 독일어 Gemeinde(참조: 대회, 집회)는 "정치적인"과 같은 어떤 선행하는 형용사가 없으면 보통 교회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 기반 위에서 우리는 우리가 동일한 용어를 사용 할지라도 세속적 집회와 교회의 집회를 구별할 수 있다. 이 단어는 역시 단수와 복수의 분명한 연대를 잘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복수는 모임이라는 의미의 집회를 의미한다. 결정적 요점은 어떤이나 어떤 것이 모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이는 자나 모이는 것이다. "하나님의"나 "주의"의 분명한 부가나 무언의 부가는 모이는 자나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자를 말해준다. 엑클레시아로 말해질 때(행 20:28)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것을 모으시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엑클레시아에는 하나님의 것인 모든 사람들이 속해 있는 것이다. 행 5:11과 행 15:22에는 홀레(o{lh: 온 whole)가 분명히 부가되어 있다; 이것은 모임이나 집회라는 의미에 상응한다. 그것은 특별히 새로운 어떤 것을 가하지 아니한다. 그것이 단순히 강조하는 것은 엑틀레시아 투 데우에 내포된 것을 강조한다. 세속적 엑클레시아와 대조해서 이것은 양적인 용어가 아니고 질적인 용어이다. 국가적인 집회는 존재하고 있고 존재한다고 하고 더욱 크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백성의 집회는 크기는 고려(기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신의 소유를 모을 때 존재하는 것이다. 참으로 먼저 교회는 부르고 모이게 하신 자를 믿고, 그 다음, 그 부름에 응답하여 함께 모이는 자들에 의존해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e)  바울서신(Ⅰ)
이 단어에 대한 바울의 용법은 사도행전에서와 유사하다; 참조: 바울 역시 단수형과 복수형을 자유롭게 사용하며(롬 16:23; 롬 16:4, 롬 16:16; 갈 1:13, 갈 1:22), 홀레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고(롬 16:23), 장소(롬 16:1)나 구역(고전 16:19)을 언급한다. 때때로 관사의 생략은 엑클레시아가 거의 고유명사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참조: 고전 14:19; 고후 8:23). 작은 가정 교회도 엑클레시아로 불리울 수 있다(롬 16:5). 각 지역 교회는 전체 교회를 나타낸다(고후 1:1, '고린도에 있는 교회'). 따라서 지역 교회에서 적용되는 것(고전 6:4; 고전 11:18; 고전 14:34)은 모든 곳에서 적용된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단수형이든(고전 1:2), 복수형에서든(고전 1:16) 투 데우가 중요한 수식어이다(이것은 바울이 때때로 그런 것처럼 교회와 교회들을 구분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도하시기 때문에 엔 크리스토(갈 1:22)나 투 크리스투(롬 16:16)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표현을 번역할 때 '그리스도의'라는 말은 지나치게 색채가 없는 번역이다. 우리는 또한 고전 14:33에서 "성도들의 교회들"이라는 말을 발견한다. 고전 1:2에서 엑클레시아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사람들"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이 표현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실제로 바울은 교회에 대하여 초기의 제자들과 동일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구약성경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엑클레시아 투 데우(하나님의 교회)이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을 성취하셨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그들에게 그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모으라는 사명을 부여하셨다는 점에서 새로운 요소를 지닌다. 교회가 세워지고 권위를 지니게 된 것은 제자들과 바울에 의한 카리스마적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현현에 의해서이다. 따라서 바울은 최초의 공동체와 그 공동체의 지도자들의 특권을 인정한다. 우리는 바울이 예루살렘을 위해 헌금을 모금한 것(이것은 단순한 자선이나 전략적인 문제가 아님)과, 갈 2:9에서 야고보 등을 "기둥들"로 기술한 것에서 이러한 점을 찾아 볼 수 있다(비록 그들의 인간적인 오류 및 권위를 지닌 자들을 지나치게 높이려고 하는 일부의 잘못된 욕구에 비추어 볼 때, 여기에 아이러니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바울은 교회에 대하여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고자 하는 욕구는 없었으며, 오히려 초기의 혁신적인 견해들에 반대하여 본래의 견해를 지키려고 하였다.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만 기초를 두느냐, 그리스도만을 주님으로 고백하느냐, 사람들과 장소들에 대한 지나친 강조를 거부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교회가 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한다. 바울은 교회에 대한 어떤 기술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회중들로 이해함으로(사도행전의 견해와 유사함) 이 문제에 대한 핵심에 이른다.
(f)  바울서신(Ⅱ): 골로새서와 에베소서.
이 두 서신에서 교회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교리가 전개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다(골 1:18, 골 1:24; 엡 1:22; 엡 5;23). 교회와 그리스도 간에는 협조와 종속의 관계가 있다(엡 5:24-25, 엡 5:29). 교회는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 한다(엡 5:27). 하나님의 지혜는 교회를 통해 알려진다(엡 3:10).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에 대해 말한다(엡 3:4-5).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연합의 신비는 남편과 아내 간의 결합 모델이 된다. 남편과 아내의 결합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에 의해 예증되어 있다(엡 5:25이하). 이러한 의미는 당시의 세계로부터 받아들인 것이다. 즉 구속자는 하늘에서 강림하실 때 적대적인 세력들을 이기시고(엡 4:8이하), 분열의 벽을 허시며(엡 2:4이하), 새 사람을 창조하시고(엡 2:15), 교회를 그의 배우자로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시며(엡 5:22이하), 교회를 그의 몸으로 세우신다(엡 2:19 이하). 이러한 개념들이 영지주의적 사변의 세계와 관련되어 있고, 따라서 롬 12:4이하와 같은 구절들에서는 거의 이끌어 낼 수도 없고, 일관된 묘사로 융합되긴 하지만 그 중요성은 이론적이거나 신비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이 개념들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엄격한 관계를 표현한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론적 교회론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② 이 개념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간의 갈등과 거짓된 가르침에 의해 야기된 어려운 상황에서 고양된 그리스도론을 보호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장소와 사람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교회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유대인들의 사상과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 간의 교회보다는 그리스도와 지혜와의 결혼을 가정하는 영지주의의 과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개념 체계가 사용되어야 하겠지만, 이러한 관심사들은 전적으로 바울적인 것이다. 진정, 로마서와 고린도전후서와 같은 서신들에는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 나오는 이러한 개념들이 나타난다(공식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실제적으로 그러하다). 고린도전후서에 따르면 교회는 상호 연관되어 있는 몸이며(고전 12장), 바울의 목적은 교회를 그 남편에게 순수한 신부로 드리는 것이다(고후 11:2). 언어는 영지주의적일는지 모르나 요점은 교회가 단순한 인간 사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 규정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론은 그리스도론이며 그 역(逆)도 사실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적 차이는 초월된다(골 3:11; 참조: 갈 3:28). 그러나 이것이 곧 그리스도 신비주의는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부름에 오직 순종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은 지금 새 언약을 세우신 옛 언약의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 집회는 구약성경의 회중이 완성된 것이다. 거룩이 공동체에 돌려진다면, 그 거룩은 하나의 특성으로 부여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를 의롭게 해주시고 성화시켜 주는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부여된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에게 한 약속의 말씀은 이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취된 약속의 말씀이다.
(g)  야고보서와 히브리서
엑클레시아의 장로들을 언급하는 약 5:14은 이 단어를 분명히 유대 회당식으로 조직된 지방에 있는 회중을 나타내는 순수한 전문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반면에 히 2:12은 시 22:22(히브리어 카할)을 인용하는 것으로 제의적인 축제 모임을 의미한다. 히 12:23은 다르다. 이 곳에서 이 단어는 유대 전통에서 취한 일련의 종말론적 술어들(시온산,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 하늘의 예루살렘) 안에서 나오며 엑클레시아 프로토토콘 아포게그람메논 엔 우라노이스(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로 한정된다. 여기서 문맥상 이 "총회"에 들어감은 "온전케 된 의인"과 교제, 또는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가능케 된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의 교제 관계에 들어감으로 이해된다. 이곳의 문제는 한 집단(아마 조직이라는 말로 한정될 수도 있음)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종말론적 사건(파네귀리스로도 나타내어지는 예배의 봉사; 참조: O. Michel)의 특성 묘사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히브리서는 또한 구약성경의 전문 용어(비록 엑클레시아가 이러한 모임을 나타내는 확정된 표현은 아니나)를 사용하며 새 언약을 받은 "하나님의 방랑하는 백성"에 대해 묵시적인 존칭을 사용한다(E. Kasemann).
(h)  반면에 요한계시록에서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와 같이 엑클레시아가 특정한 장소에 존재하여 특정한 장소에서 만나는 장성한 회중 집회를 의미한다. 행 22:16까지 엑클레시아에 관한 모든 언급은 2장과 3장의 편지 또는 그 편지들보다 앞인 1장의 일곱 촛대의 환상에 나타난다(계 1:4, 계 1:11, 계 1:20, 항상 아시아의 일곱 엑클레시아에 대한 언급). 이 편지들은 각각 일정한 장소에 있는 엑클레시아의 사자들에게 보내진다(테스 엔…엑클레시아스, 계 2:1, 계 2:8, 계 2:12, 계 2:18; 계 3:1, 계 3:7, 계 3:14).
이 모든 구절들에서 몇몇 중요한 사본들이 여격으로 쓰이는 토(tov)를 지명에 붙여 문법적으로 사자에 연결시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사자를 수호 천사와 전령으로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회중의 본질적인 특성들의 구체화로, 따라서 역사적 실제와는 별개로 이해해야 함을 암시한다(참조: E. Lohmeyer). 따라서 여기에는 회중에 대한 개념이 묵시적으로 과장된 표현으로 나타난다. 이 회중의 의미는 역사적 회중들임을 나타내는지도 모른다. 이 역사적 회중들은 유혹과 직면하고 있었으며, 이 편지들에 의하면 그들은 결코 믿음과 순종과 거룩함으로 특징 지워진 자들이 아니며 그들이 시험을 지속적으로 받거나 통과하게 되는 것에 대한 결정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참조: 마 16:18).
각 편지에서 일치된 결론을 맺는 진술은 모든 다른 엑클레시아이를 묶는 특정한 지역 교회에 대한 언급으로 말하여진 것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끝에 교회들에 대한 언급에도 적용된다(계 22:16). 여기서 유일한 차이는 계 22:16에서는 높임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고 계신 반면에 요한계시록 앞 부분에서는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요한삼서의 세 구절들(요삼 1:6; 요삼 1:9, 요삼 1:10)은 모두 하나의 특정한 지역의 기독교인 회중을 가리킨다.(참조: K. L. Schmidt; L. Coen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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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jpikalevomai(1941, 에피칼레오(마이)) 부르다, 호소하다, 상소하다, 청원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에피칼레오(마이)는 에피(ejpiv, 1909)와 칼레오(kalevw, 2564: 부르다)에서 유래한 합성어이다. 이 단어는
(a)  '~에 이름을 붙이다, 별명을 붙이다, 별칭하다'(Xen., Plato.),
(b)  '소환하다'(Dem.).
(c)  '호소하다, 상소하다, 청원하다', 신에게 드리는 예배와 관련하여 '호소하다'나 '청원하다'라는 의미로(Hdt., 이래; Plato, Polyb.), 법에 호소하거나 통치자, 국가 관리들에게 상소를 제출할 때 법률적 용어로 사용되었다(Plut.).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에피칼레오(마이)는 70인역본에서 약 200회 나오며, 거의 카라(7121: 부르다, 요청하다, 초대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70인역본에서 대체적으로 보아 에피칼레오는 '요청하다, 예배 드리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가장 중요한 용어이며, 또한 공개적 고백이라는 특수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창 4:26; 33:20 등). 예배는 하나님 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대상 4:10)에게나 여호와(왕상 17:21)에게 아뢰는 것이거나 또는 무엇보다도 예배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창 13:4; 신 14:23 이하; 사 64:7; 렘 10:25). 자주 셈어투의 엔(토) 오노마티 그리고 자주 셈어 투의 '이름으로'(왕상 18:24 이하)가 발견된다. 이것은 예배드리는 자는 마치 견고한 망대 안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 아래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상에 영향을 입었을 것이다(잠 18:10).
신명기에 따라 하나님은 그가 선택한 장소에서 경배 받기 원하신다는 관점에서 70인역본에서 히브리어 샤칸(거하다)을 에피칼레이스다이로 번역하기도 한다(출 29:45 이하; 신 12:11; 신 16:2; 신 16:6; 신 16:11). 하나님의 존재의 계시와 현현의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예배를 드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길로 그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에피칼레오(마이)는 신약성경에서 3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에피칼레오마이는 별명을 가진 사람에 대해 사용되었다(행 4:36; 행 12:25; 행 10:18; 행 11:13; 행 12:12). 마 10:25에서 에피칼레오는 고유명에 대한 확인으로 사용되었다: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b)  고후 1:23에서 하나님을 증인으로 호소하는 것은 사법적인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전 헬라어에서 에피칼레오는 이미 이러한 의미를 지닌다: Herodotus; Antpho). 에피칼레오는 바울의 심리에 관한 본문에서 '호소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행 25:11 이하; 행 25:21; 행 25:25; 행 26:32; 행 28:19).
(c)  에피칼레오는 신학적 의미에서 중간태로 사용되어 교회의 선포에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고백의 내용으로서 언제나 "이름" 즉 선포된 주님 자신을 가진다.
① 롬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문맥상 예수님을 주로(참조: 롬 10:9 상반절) 기원하는 것(롬 10:10 하반절)으로 해석된다. 이것이 인류의 구원의 기초가 된다. 롬 10:12 하반절에서처럼 여기서 에피칼레오는 고백(confession)의 외침에 대해 사용된다(아우투는 롬 10:12 상반절에서 퀴리오스를 가리킨다). 여기에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 소유 관계의 근원(법률적 주장의 의미에서도)인 구약성경적 배경이 고려되어 한다.
② 행 2:21의 베드로의 말에서 구약성경의 인용(욜 3:5, 70인역본)에서도 주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의 측면이 전제되어 있다. 요엘의 말씀은 원래 종말론적 의미에서 의도된 것이지만 성령으로 충만한 선포와 함께 현재의 구원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행 2:16; 행 2:22-24 참조).
③ 고전 1:2 ("주의 이름을 부르다")에서 이미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공동체의 모든 사람을 언급하는 말이 되었다(세례의 기초, 참조: 고전 1:13). 여기서 이 말은 단일체의 기초가 되는 진술로 기능한다.
④ 롬 10:14에서는 피스튜오(pisteuvw, 4100: 믿다)와 관련됨으로써 에피칼레오의 이러한 어감은 (전례상의) 찬성의 외침으로 분명해진다.
⑤ 행 9:14; 행 9:21에서 에피칼레오 토 오노마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대명사와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관계는 행 22:16에서도 볼 수 있다.
⑥ 행 7:59에서는 직접 부르기 때문에 목적어가 제거된다.
⑦딤후 2:22("주를 부르는")과 벧전 1:17("아버지라 부른")은 동일한 내용에 대해 더 나은 헬라어 표현을 제공한다.
⑧ 벧전 1:17은 롬 8:15; 갈 4:6에 의거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새로운 선물의 실례이다.
(d)  에피칼레오의 동일한 의미가 히 11:16의 상이한 종류의 구문에서 나타난다("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정사 에피칼레이스다이는 수동태로 간주된다.
약 2:7("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에서 부정과거 수동 분사는 세례(침례)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말미암는 소유권의 이전에 대해 사용되었다(참조: 고전 1:2).(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W. Kirchschla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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