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11.29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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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eov"(2316, 데오스) 하나님 God, 신 god.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데오스는 기본어이며, '하나님' God, '신' god를 의미한다.
(a)  헬라의 신개념.
일반 용법에서 데오스는 단수형과 복수형으로 사용되며, 명확하게도 사용되고 막연하게도 사용되어 신들, 신, 그 신, 신성(godhead) 사이에 의미상의 구별이 거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데오스는 일신론적 의미에서의 단일한 특정 인격체를 나타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세계의 단일성을 표현한다.
헬라의 신개념은 본질적으로 다신론적이지만, 이는 많은 개개의 신들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신들의 질서정연한 전체성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이런 견해는 사실상 데오스라는 말을 강하게 뒷받침해 준다. 신들과 인간들의 아버지로서의 제우스가 이러한 사상을 표현해준다. 제우스는 데오스의 첫 문자와 마지막 문자를 가지고 있으므로 경건한 자들은 때때로 그를 단순히 신과 관련시킨다. 신들에 대한 다수 개념에서부터 신들의 계보와 계급이 발전된다. 우리는 높고 낮은 신들, 신들의 집안, 그리고 만신전을 본다. 제우스, 아폴로 등은 신이라고 불리우며, 우주도 역시 신이라 불리운다. 데오스는 자연적(원시적인 힘들)에 대해서도 사용된다. 가장 깊은 본질은 신이다. 헬라인이라면 요일 4:16의 말씀을 거꾸로 뒤집어 "사랑은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본체(reality)는 다중적이며, 따라서 데오이(신들)가 사용된다. 영웅들, 비범한 사람들, 탁월한 통치자들도 신이라고 불리운다. 따라서 황제 제의에서 데오스는 관직의 명칭이다.
끝으로 철학자들은 데오스를 형이상학적 힘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따라서 종종 그들은 데오스를 신성, 선, 존재, 운명 등의 상당어로 사용한다. 우리는 여기서 신화의 신적 인물들의 영적화 및 도덕화를 보게되며, 이는 저들의 위엄은 강화시켜주지만, 인간과의 관계에서와 신화적 존재와의 관계에서 근접성은 상실시킨다. 그러나 신의 형태는 비록 변화할찌라도 신 개념의 내적인 골자는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있다.
(b)  헬라의 신 개념의 내용.
신들은 하나의 주어진 요인(factor)이다. 신들은 비록 영원한 것들이긴 하지만 그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존재하게된 것들이다. 신들은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지는 않았으나, 오히려 혼돈과 투쟁하여 원시적으로 존재하는 거대한 힘들을 통제하여 다스리는 질서요 형태(그러므로 세상의 의미)이다. 신들은 예를 들면 국가에서의 질서와 같은 인간적 질서와 동일시 된다. 그들의 영원성은 영원한 젊음을 포함한다. 신들은 우월한 능력과 지복을 누리지만 도덕적 진지성은 결여한다. 이들은 무한한 존재들이지만 우리들과 동일한 종류의 존재들이다. 그들 마저도 변경시킬 수 없는 비인격적 운명과 달리, 이 신들은 의미있는 계획과 목적을 가진다. 신들은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그들의 위엄은 가장 고귀한 생물체의 위엄이다), 그들의 감정과 관습도 인간의 것과 비슷하다(참조: E. Stauffet, TDNT).
2.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
데오스는 70인역본에서 약 4,000회 나오며, 거의 대부분 엘로힘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그밖에 15개 이상의 단어들의 역어로도 사용되었다.
엘로힘은 창세기와 성경의 첫 주제이며, 구약성경에서 사용 횟수가 두 번째로 많은 명사로, '하나님, 신, 신들' 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창 1:1에서는 '우주의 주권적인 창조주 하나님' 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엘로힘의 어원에 대해서 어떤 학자들은 엘(하나님, 신. 강한 자)의 추정 어근인 울(강하다)에서 유래되었다고 하고, 다른 학자들은 엘로아흐[하나님, 신]의 추정 어근인 알라(두려워하다)에서, 또 다른 학자들은 엘과 엘로힘은 모두 엘로아흐에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한다.
보다 적절한 견해는 엘로힘이 엘로아(와 함께 알라)에서 유래하여 히브리 성경에서 독특하게 발전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엘로힘은 복수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구약성경에서 복수의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심지어 단일 이방신을 가리키는데도 복수형 엘로힘이 사용되었다(예: 삿 11:24; 왕상 11:5; 왕하 1:2).
일반적으로 엘로힘이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될 때 복수 어미는 일반적으로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것이며, 진정한 복수를 의도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명사 엘로힘이 항상 단수 동사, 그리고 단수 형용사나 대명사와 함께 사용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창 1:1에서 바라 역시 3인 단수 완료형이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이 복수형은 완전을 나타내는 형태로 이해했다. 즉 하나님은 실제로, 그리고 그 단어의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이시라고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이 복수형이 사용된 이유의 또 하나는 성경 자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즉 창세기 1장에서 한 분이신 하나님의 단일성을 나타내면서도 위격의 복수성(삼위일체)을 허용해 줄 수 있는 용어의 필요성을 찾아보게 된다(창1:2, 26). 엘로힘이란 어형이 히브리어에서만 나올 뿐, 다른 셈어에서는 나오지 않으며, 심지어 성경 아람어에서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엘로힘이 삼위일체되신 유일무이하신 하나님이심을 지칭하는 이스라엘의 독특한 신명임을 확증해 준다.
참 하나님으로서의 엘로힘은 인간에게 계시된 모든 신적 활동의 주체이자, 인간에게 받는 모든 참된 존경과 경외의 대상의 역할을 하신다. 이 한분의 신 외에는 어떤 신도 있을 수 없다(사 41:4; 42:8; 43:10 이하). 이방신은 신이 아니다(레2:11). 그는 우주의 전능한 창조주(사 45:18), 우주를 지배하는 주권자(창24:3, 9; 신4:39; 10:17), 심판자 하나님(시50:6; 58:11; 75:7), 구원자 하나님(시 18:46; 신8:15; 렘20:24등), 위엄과 영광의 하나님(사 30:18; 65:16; 렘10:10; 삼상6:20)등으로 나타난다. 엘로힘은 또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 3:6등)이 되시는 것처럼 또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
엘로힘이 나오는 3, 4개 구절이 문제가 된다. 시8:5에서 엘로힘을 개역, 현대인, KJV는 "천사", NIV는 "하늘의 존재들(heavenly Beings), 공동(하느님), 표준새, NASB, RSV 등은 "하나님"으로 번역했다.
출 26:6에서 엘로힘을 개역, 현대인, KJV,NIV,LB는 "재판관들", GNB는 "예배 처소", 표준새, 공동,(N)RSV는 "하나님"으로 번역했다. 이상의 구절에서 엘로힘은 그 문자적 의미대로 "하나님"으로 번역해야 한다.
끝으로 엘로힘은 신상(창 35:2; 출 20:23; 신 7:25), 신들(출 23:13; 24,32,33 등)에 대해 사용되었지만 이 경우 이스라엘의 엘로힘과는 다른 저속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데오스는 신약성경에서 1,319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데오스는 신적 존재 일반에 대해 사용되었다(행 28:6; 고전 8:4; 살후 2:4; 행 12:22; 갈 4:8).
(b)  데오스는 그리스도에 대해 사용되었다(요 1:1; 요 20:28; 히 1:8; 히 1:9; 요일 5:20; 롬 9:5; 딛 2:13 등).
(c)  데오스는 참 하나님에 대해 사용되었다.
① 관사를 가지는 경우(마 1:23; 막 2:12; 눅 2:13; 요 3:2; 행 2:22; 갈 2:6 등).
② 관사가 없는 경우(마 6:24; 눅 2:14; 요 1:18; 롬 8:8; 롬 8:33; 고후 1:31; 고후 5:19; 고후 6:7; 살전 2:5 등).
③ 호격으로 나타나는 경우(막 15:34; 눅 18:11; 히 1:8; 히 10:7 등).
(d)  데오스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① 사람에 대하여(요 10:34; 요 10:35),
② 아무개가 전적으로 자신을 바쳐 오직 그것만을 위해 사는, 그러한 인격이나 사물, 식욕, 배에 대해(빌 3:19).(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G. Qu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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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hvr(3962, 파테르) 아버지 father.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a)  명사 파테르(Homer 이래)는 인도 유럽어에서 유래된 파테르(pater) 즉 아버지는 고전 헬라어에서 실제 아버지나(Homer) 가계의 족장(Josephus) 또는 일반적으로 조상들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기도 한다(Homer).
이밖에도 비유적 의미로 이 단어는 '선구자, 창시자, 존경받는 사람, 노인, 선생'에 대해 사용되었으며, 지적이나 영적인 부권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b)  하나님은 아버지로, 즉 모든 존재의 창조자로 부르는 것은 오래된 일이다.
① 고대 동방과 고대 그리스 로마의 종교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아이를 낳는 원초적인 행동과,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자연적, 육체적인 후예라는 신화적인 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따라서 우가릿의 신 엘(El)은 '인류의 아버지'라고 불리웠고, 바벨로니아의 달의 신 신(Sin)은 '신과 인간의 아버지'로 불리웠다.
② 헬라의 제우스는(호머 시대부터) 모든 신적 존재와 모든 인간 존재의 아버지이며, 우주의 신이었다. 애굽에서 바로는 특별히 육체적인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로 여겨졌다. 아버지란 이름은 무엇보다도 복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나타내지만, 동시에 그의 자비로운 사랑과 선과 돌봄을 표현하기도 한다. 인간의 역할에 대한 적절한 태도는 두가지 태도이다. 한편으로는 '그 자신의 무력함과 신에 대한 완전한 의존을 깨닫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신에 대한 어린애 같은 신뢰와 사랑의 태도'이다(G.Mensching, RGG3 Ⅵ1233).
(c)  ① 플라톤은 만물의 근원이 아버지라는 사상을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창조 신화에서 우주론적 형태의 아버지 개념을 제시한다. 하나님은 창조자시며, 아버지시다.
② 스토아 학파의 가르침에 의하면,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권위는 우주에 충만해 있다: 그는 그의 자식이며 그에 관련되어 있는 인간의 '창조주이며 아버지이며, 유지자'이다. 스토아 사상에는 제우스와 헬라의 성스러운 혼인 신화를 이용하여 세상을 신들이 낳은 것으로 그 기원을 생각한다. 이것은 인간에게 신의 아들로서의 자격을 부여하고 인간이 신의 로고스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단지 현명한 사람들만이 알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단지 좋은 사람들만의 아버지라는 의미가 다소간 있는 것이다.
③ 고대의 신비교파에서는 초신자의 중생과 성화(聖化)가 신에 의해 태어나는 행동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신은 기도에서 "아버지"로 불리운다.
④ 영지주의자들도 역시 최고신을 아버지나 첫번째 아버지로 묘사한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는 모두 사라진다. 인간의 몸 안에 들어앉게 된 하나님으로부터 퍼져나오는 섬광은 첫번째 아버지에게는 바닷물에 대한 물 한방울과 같은 것이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파테르는 70인역본에서 거의 전적으로(1,180회)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종교적 의미로는 아주 드물게(15회) 사용되었다.
(a)  파테르의 일반적인 용법.
① 육체적인 부권은 창조주의 선물이며 명령이다(창 1:28).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로서(참조: 창 27), 아버지는 그의 가족과 집(참조: 수 24:15b)의 우두머리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존경받아야 할 권위자인 것이다(출 20:12; 출 21:15, 출 21:17; 잠 23:22). 그의 가족을 먹이고 보호하고 교육시키는 것이 그의 의무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그는 가족의 제사장이며(출 12:3이하) 선생이다(출 12:26이하; 출 13:14이하; 신 6:7, 신 6:20이하; 신 32:7, 신 32:46; 사 38:19). 그는 그의 가족의 생활을 언약에 따르도록 하는 책임이 있었으며, 자식들이 종교적인 가르침을 받도록 해야 했다. 종들까지도 주인을 "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다(왕하 5:13).
② 파테르는 이스라엘의 초기 세대들에 대해 사용되었으며(시 22:4; 시 106:7), 그 이전 시대의 특출한 하나님의 사람들(집회서 44:1이하)과, 특히 하나님의 언약을 전하고 중보하던 자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은 그렇게 불리웠다(수 24:3; 대상 29:18).
③ 파테르는 제사장(삿 17:10; 삿 18:19)과 선지자(왕하 6:21; 왕하 13:14)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되었다. 왕하 2:12에서 선지자의 제자가 그렇게 부를 때도 또한 영적인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아버지란 칭호가 흔히 존경받는 서기관을 일컫던 랍비적 유대주의에서(SBⅠ 918f.)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는 토라의 선생과 학생 사이의 관계에 때로 적용되고 있다(SBⅢ304이하).
(b)  파테르의 종교적 용법
하나님은 구약성경에서 아버지로 언급되어 있다. 지상 아버지와 비교를 제외하고는(시 103:13; 잠 3:12; 참조: 신 1:31; 신 8:5), 아버지라는 명칭은 하나님에 대하여 단지 15회 사용되었는데, 13회는 통칭으로, 2회는 기도로 나타난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묘사한 것은 오직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신 32:6; 사 63:16; 2회; 사 64:8; 렘 31:9; 말 1:6; 말 2:10), 혹은 이스라엘왕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삼하 7:14과 병행구 대상 17:13; 대상 22:10; 대상 28:6; 시 89:26; 참조 시 2:7). 그 단어는 결코 다른 개인이나(시 68:5) 혹은 일반적인 인류와의 관계를 나타내지 않는다. 이러한 견해와 이스라엘의 이웃 나라들이 주장한 하나님의 부권에 관한 견해 사이의 차이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부권은 생물학적, 혹은 신화학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구원 신학적인 의미에서 이해된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은 자연적 상태나 특성보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과 구속의 기적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참조: 출 4:22; 신 14:1이하; 호 11:1이하).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연관되어 창조와 출생의 언어가 사용된 곳에서 조차 그 뜻은 생물학적 의미에서 이미 존재한 백성에 대한 역사적 선택과 구속의 행동을 나타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다(사 63:16; 사 64:8). 선택하시고 구속하시는 분이신 하나님이 아버지로 묘사될 때, 그의 자비롭고 용서하시는 사랑(렘 31:9, 렘 31:20; 참조: 호 11:8)과 존경 및 순종에 관한 요구(신 32:5이하; 렘 3:4이하, 렘 3:19; 말 1:6)등 두 가지가 다 표현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됨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충실해야 할 특별한 의무를 가지고 있다(말 2:10). 만일 한 개인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긴다면 그것은 그가 백성의 일원이라는 신분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것에 상응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기 때문인 것이다(시 68:5; 시 68:4-시 68:10의 문맥에서).
호격 "내 아버지"는 렘 3:4, 렘 3:19에서만 찾아볼 수 있으며, 여기에서 의미심장하게, 개인의 부르는 것이 아니고 선택된 백성의 기도로 사용된 것이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파테르는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인 의미로 157회, 종교적 의미로 245회 사용되었다.
1. 파테르의 일반 문자적 의미.
(a)  파테르는 아버지를 나타낸다: 마 2:22; 마 4:21이하; 마 8:21; 눅 1:17; 요 4:53; 행 7:14; 고전 5:1 등; "육체의 아버지"는 육체적 인간의 아버지들, 낳은 아버지를 가리킨다, 히 12:9.
엡 6:4에서 아버지는 적어도 할아버지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 명시된 가족의 규율은 아버지와 어머니께 순종하라는 계명을 강조하고 있으나, 그것들은 또한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인간적이고 영적인 책임을 가리키고 있다(엡 6:1-엡 6:4; 골 3:20이하). 그리고 복수형은 양친 모두를 가리킨다.
(b)  파테르는 '보다 먼 조상', 곧, '종족이나 부족의 시조, 한 민족의 조상, 선조'를 나타낸다. 아브라함(마 3:9; 눅 1:73; 눅 16:24; 요 8:39; 행 7:2; 롬 4:1Rec., 롬 4:17이하), 이삭(롬 9:10; 야곱, 요 4:12), 다윗(막 11:10; 눅 1:32).
복수, '선조들', '조상들'(마 23:30, 마 23:32; 눅 6:23, 눅 6:26; 눅 11:47이하; 요 4:20; 요 6:31; 행 3:13, 행 3:25; 고전 10:1).
'종족의 시조들'(요 7:22; 롬 9:5; 롬 11:28).
(c)  '나이가 더 앞선 자', '연장자'와 같은 의미: 요일 2:13이하.
2. 파테르의 비유적 용법.
(a)  파테르는 어떤 것의 원조이며 그것을 후세에 전해 물리는 자: "할례자의 조상"(롬 4:12), 자기 자신과 동일한 정신에 의해 생기를 부여받은 어떤 동족이나 사회의 원조: 예컨대 "믿는 모든 자의 조상", 롬 4:11, 참조: 롬 4:12, 롬 4:16(마카베오일서 2:54) 자신의 정신을 타인들에게 주입시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지배하는 자: 그리스도(요 8:38), 마귀의 자식들(요 8:41이하; 요 8:44)에 대해 사용되었다.
(b)  파테르는 아버지의 위치에 서서 아버지다운 방식으로 남을 보살피는 자: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를 나타낸다.
(c)  파테르는 하나의 명예로운 칭호로서(참조: Sophocles) 다음과 같은 인물들에게 적용되었다.
① '교사들', 즉 생도들이 받은 지식과 훈련의 출처가 그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마 23:9).
② '공회의 회원들', 남보다 뛰어난 지혜와 경험을 바탕으로 남들의 이해 관계를 보살피는 것이 그들의 특권이었다(행 7:2; 행 22:1).
3. 아버지로서 하나님.
(a)  "빛들의 [아버지]", 별들의, 하늘 발광체들의 아버지, 이는 그가 그것들의 창조자, 유지자, 통치자이기 때문이다(약 1:17).
(b)  '천사들이든 인간들이든, 모든 이성적, 지성적 존재들의 아버지', 왜냐하면 그가 그들의 창조자, 보존자, 수호자, 보호자이기 때문이다(엡 3:14이하). "영의 [아버지]", 영적 존재들의 아버지(히 12:9), 그리고 동일한 이유로, '모든 인간들의 아버지'(마 6:4, 마 6:8, 마 6:15; 마 24:36; 눅 6:36; 눅 11:2; 눅 12:30, 눅 12:32; 요 4:21, 요 4:23; 약 3:9), "하늘에 계신 아버지"(마 5:16, 마 5:45, 마 5:48; 마 6:1, 마 6:9; 마 7:11, 마 7:21; 마 18:14; 막 11:25, 막 11:26; 눅 11:13), "천부", 하늘의 아버지(마 6:14, 마 6:26, 마 6:32; 마 15:13).
(c)  '그리스도인들의 아버지', 즉 이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특별히 가깝고 친밀한 관계에로 높여졌으며 그를 이제는 더 이상 죄인들의 준엄한 심판자로서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과 화목한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존경한다. 신약성경의 서신들에 일반적인 이 개념은 롬 8:15; 갈 4:6에서 특별히 밝게 빛난다. 이 용어에 대한 요한의 용법에서는 이 용어가, 복음 안에서 역사하는 그의 성령의 권능에 의해 그들을 거룩한 생명에로 새로이 낳은 자라는 추가적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듯하다: 독립적으로(고후 6:18; 엡 2:18; 요일 2:1, 요일 2:14[요일 2:13], 요일 2:16; 요일 3:1), "하나님…곧 만유의 아버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아버지(엡 4:6), "자비의 아버지"(고후 1:3).
(d)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즉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과 친밀성의 가장 가까운 끈으로 자신과 결합시켰으며 자기의 목적들을 그에게 깊이 알리셨고, 사람들 가운데서 구원 계획을 설명하고 수행하도록 그를 지정하셨으며(요한의 가르침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또한 그로하여금 자신의 신성을 공유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 인물에 의해 그와 같이 불린다.
① 예수님 자신에 의해(마 11:25-마 11:27; 눅 10:21이하; 요 5:20-요 5:23; 요 5:26, 요 5:36이하; 요 10:15; 요 10:30), "내 아버지"(마 11:27; 마 25:34; 마 26:53; 눅 10:22; 요 5:17; 요 8:19; 요 8:49; 요 10:18; 요 10:32;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자주; 계 2:28[계 2:27]; 계 3:5; 요 3:21 등).
② 사도들에 의해(롬 15:6; 고후 1:3; 고후 11:31; 엡 1:3; 엡 3:14Rec.; 골 1:3; 히 1:5; 벧전 1:3; 계 1:6).(참조: Walter Bauer; J.H.Thayer; O.Hofius; G.Schre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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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stov"(5547, 크리스토스) 그리스도 the Christ.
크리스토스는 '기름 붓다'를 뜻하는 크리오(crivw, 5548)에서 파생되었으며, 아람어 메쉬하, 히브리어 마쉬아흐에 해당하며, 그 의미는 어떤 직책을 위해 의식적으로 '기름부음 받은 자'를 의미한다. 메쉬하의 헬라어 음역은 멧시아스인데 시그마(-s)를 붙여 격 변화된 것이다. 멧시아스란 단어는 헬라어 신약성경에서 요 1:41과 요 4:25에만 두 번 나오는데 복음서 기자는 두 경우 모두 크리스토스로 번역했다. 한글 개역은 크리스토스를 그리스도로, 멧시아스를 메시야로 음역했다. 구약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은 선지자, 제사장, 왕이었으며 이들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다(TDN).
크리스토스는 신약성경에서 596회 사용되었다.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K. H. Rengsto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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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hsou'"(2424, 이에수스) 예수 Jesus (인)
이에수스는 구약에 나오는 예수아라는 유대 이름의 헬라어형인데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음역한 다음 주격 변화를 위해 시그마(-s)를 붙인 것이다. 예수아는 바벨론 포로기 무렵부터 예호수아 대신 일반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이름은 여호와라는 신성한 이름을 포함한 오래된 이름이며 '여호와는 도움이시다' 또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NTD).
예수스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알려준 것으로, 아들의 사명을 나타낸다. -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
(a)  이에수스는 구약의 여호수아(출애굽기등에 나타나는 눈의 아들의 이름, 학개와 스가랴에 나타나는 대제사장의 이름, 삼상 6:14과 왕하 23:8의 두 사람 이름, 대하 31:15의 레위인의 이름)의 헬라어 형태이다.
(b)  이에수스는 주후 2세기 초기까지만 해도 통상적인 이름이었다. 신약은 행 7:45; 히 4:8에서 여호수아를 이에수스라고 표기한다(개역: "여호수아"); 참조: 눅 3:29의 이에수스, 마 27:16의 이에수스 바랍바스(개역: "바라바"), 행 13:6의 바리에수스(개역: "바예수"), 골 4:11의 이에수스(개역: "유스도라하는 예수"). 2세기 이후부터는 이에수스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아마도 의식적으로 그 이름을 사용하기를 피했기 때문인 것 같다.
(c)  이에수스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나타낸다. 그는 바로 이 이름으로 사셨고, 이 이름으로 선포되었고, 이 이름으로 거론되었다.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기타 인물들과 예수님을 구별하기 위하여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마 21:11), "다윗의 자손"(막 10:47-48; 막 1:24; 막 27:37; 요 18:5 등) 같은 문구를 덧붙였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이 이에수스를 "생명의 주"(행 3:15), 하나님의 그리스도, 주님, 구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이에수스와 호 퀴리오스(주님) 사이에는 아무런 구별이 없다. 왜냐하면 이에수스는 하나님께서 주님과 심판자(참조: 빌 2:7; 갈 3:1; 행 17:31)로 만드신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공관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는 간단하게 이에수스라는 이름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우리는 또한 호 퀴리오스(누가복음) 및 이에수스 크리스토스(예수 그리스도), 호 퀴이오스 이에수스 크리스토스(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고정된 표현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외의 신약성경에는 간단히 이에수스만 사용되는 경우는 드물다. 바울은 살전 14:14; 고후 4:11이하; 빌 2:10과 같은 곳에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을 생각하면서 "예수"라는 이 단어를 주로 사용하였다. 히브리서와 요한계시록에서도 이에수스라는 이름은 예수의 역사가 신앙의 근거를 형성한다는 것을 암시한다(예: 히 2:9; 히 6:20; 히 10:19; 계 1:9; 계 14:12; 계 20:4; 계 22:16).
(d)  예수라는 이름은 역사적 실존의 견지에서 볼 때 중요하다. 마태와 누가는 예수라는 이름이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의 백성을 그들의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려고 오셨기 때문에 그 이름이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마 1:21). 이 이름의 완전한 히브리어 형태는 하나의 문장을 이루는데, "야훼께서 구원하신다"이다. 몇몇 교부들은 이에수스와 헬라어 이아오마이(낫게 하다)를 관련 짓기도 하였고, 오늘날, 예수는 구원의 여신인 이아소의 남성형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유세비우스는 예수라는 이름의 히브리어적인 근거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이에수스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인들과 헬라 세계와의 접촉보다 더 이른 시기부터 사용되었다.
(e)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라는 인물의 역사적 실존을 의심하고 복음서를 신에 대한 역사적 신화로 이해하고자 하는 자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하나님에 대한 유대 신화가 있다는 사실을 보이고 개개의 기사들을 그 구체적인 형태와 연속적인 면에서 비역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도식(schema)을 만들어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해야만 한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라는 이름은 신화적인 인물의 이름이라는 것도 증명되어야만 하며 기독교 이전의 예수 제의가 있었다는 증거도 제시해야 한다. 그러한 어떤 제의에 대한 직접적 혹은 명확한 증거가 없다(예수 제의는 아마도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관련이 있는 듯하나 이에 대한 논증은 이새 분파가 있었다고 하는 주장이나 테라퓨테가 예수라 하는 제의적 신을 숭배했다고 하는 주장들과 같이 순전히 사변론적인 것이다). 여호수아에 관해서 고찰해 볼 때, 후기 유대교에게 있어 출애굽은 극히 중요하지만, 여호수아의 지휘 하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사실은 율법 수여에 비하면 이차적인 중요성만을 가질 뿐이며, 여호수아는 아무데서도 메시야의 원형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신약에서 율법은 아브라함과 그리스도 사이에서 일시적인 중요성만을 가질 뿐이다. 여호수아가 언급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역사적 사건과 관련되어서만 언급될 뿐이며(히 11:30-31; 행 7:45), 출애굽 사건이 성취를 가져다 주지 못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언급될 뿐이다(히 3:7이하). 나세네 시편(Nassene Psalm)과 마술 파피루스들이 그리스도교 이전의 본문들이라면, 이 본문들은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 제의를 가리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본문들은 후기의 것이며, 단순히 역사적인 예수가 준 영향을 단순히 증거하는 것이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예수라는 이름의 단순한 용법은 예수의 역사적 실존에 대한 유력한(완전히 비의도적인) 증거가 된다.(참조: W. Foer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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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jcaristevw(2168, 유카리스테오) 감사하다 thank...주임재의식안에서 말씀대로 이루심에 대해 깊이 묵상/되새김 통한 영적 감사
1. 고전 헬라어 문헌
동사 유카리스테오는 유카리스티아에서 유래했으며,
(a)  '감사하다'(주전 4세기 Demosthenes; 384-22 주전]로 부터).
(b)  '감사를 드리다'  (주전 2세기 Polybius 로부터). 물론 이러한 단어들은 비문들 속에서 자주 발견된다.
2. 70인 역본의 용법
동사 유카리스테오는 70 인역본의 외경에서 6 번 나온다. 마카베오이서 12:31에서 마카베오 일당에 속한 사람들은 어떤 이교도들이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베풀어준 친절에 대해 감사한다. 외경 에스더서(Ad. Est.)16:4에서 어떤 관리들은 자기들에게 은혜를 베푼 페르시아 왕에게 갚아야 할 감사를 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이유들로는 대적들에 의한 압제와 박해로부터의 구원(마카베오이서 1:11, 마카베오삼서 7:16), 승리하게 하심(마케베오이서 10:7) 때문이다. 지혜서 18:2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악용한 자들에 대하여 앙갚음을 하지 않게 하여 주심을 감사하는 거룩한 백성들의 감사가 기록되어 있다. 유딧 8:25에는 어떤 역경과 불우한 환경과 사정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고 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유카리스테오는 신약성경에서 38회 나오며, 거의 독점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단지 2회만(눅 7:l6; 롬 16:41) 사람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영적 행동을 뜻하는 문맥으로 이해된다.
(a) 유카리스테오는 바울서신의 서론 부분에 매우 흔히 나온다. 아무리 그 서신에 충고와 비판을 뒤이어 기록할지라도, 사도 바울은 자주 그의 수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서언적 인사말을 쓴다. 즉 그들의 믿음과 그로 인해 "온 세상에" 전파된 결과(롬 1:8), 교회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고전 1:4), 믿음과 실천적인 사랑 사이의 조화(엡 1:15 이하; 골 1:3 이하, 살전 1:3, 몬 1:4 이하), 복음 안에서의 성도의 교제(빌 1:5), 견고한 믿음(살전 1:2 이하), 하나님께서 택하신 일(살후 2:13)  등이다. 바울이 격식을 갖추려는 것이 아니라 점차 그 서신의 주제로 이끌어 가기 위해 자신의 감사함을 삽입해 넣었다는 사실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b)  바울은 신학적 논증에서 자기 자신을 언급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기도 한다(고전 1:14; 고전 14:18; 참조: 행 28:15). 대조적으로,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을 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아니한다(롬 1:21).
(c)  감사는 끊임없는 의무이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20; 고후 1:11; 골 1:12; 골 3:17; 살전 5:18).
(d)  눅 18:11 이하(자기 만족적인 바리새인들)과 요 11:41 이하(나사로 무덤 앞에 선 예수님의)에 감사 기도가 나온다. 이 단어가 고전 14:16 이하에선 방언으로 드리는 감사기도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e)  바울은 서신의 서론 이외에서도 자주 일반적이며 특별한 은사들에 대한 감사를 언급한다. 예를 들면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음에 대해 (골 1:12), 성도들이 사람에 의해 설교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임에 대해(살전 2:13), 방언의 은사에 대해(고전 14:18) 감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 14:18에서 바울은 독자들의 관심을 교회의 진실한 성장과 일치에 가지도록 하기 위해 그의 감사함을 말할 때 얕보는 듯한 의미의 표현을 쓰고 있다.
(f)  마 15:36과 병행구절 막 8:6에서 예수님께서 음식을 위하여 감사하셨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한 후에 않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바울은 유대인의 습관과 예수님의 본을 따라 음식 앞에서의 감사 기도에 대하여 말한다. 이 관습은 기독교 공동체에서 일반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사도는 음식과 관련된 논증에서도 감사기도를 언급한다. 이 기도는 고전 10:30에서 깊이 생각할 문제이다. 우상들에 바친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한 논의에서 바울은 그가 감사한 것에 대해 왜 비난을 받는가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한다.
(g)  유카리스테오는 또한 주의 만찬(Lord's Supper) 의식을 언급하는 말에 나온다. 예를 들면 눅 22:19에서 떡과 포도주와 함께, 고전 11:24에서 단지 떡과 함께(그러나 25 절의 "또한 이와같이"란 말 속에 포도주가 포함된 것이다), 막 14:23과 마 26:26 (그러나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란 말은 상당어구로 사용된 것이다)에서만이 포도주와 함께 언급된다. 그러므로 2세기 동안에 유카리스티아(eujcaristiva, 2169)란 말은 전체적인 성만찬 예배를 의미하는 일반적인 명칭이 되었다.
(h)  유카리스테오는 요계시록의 찬가 가운데 감사의 찬송을 의미하기도 한다(계  11:17 이하). 감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천적 존재의 영광송에 속하는 것이다. (참조: Walter Bauer; J.H.Thayer; H.-H,Es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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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go"(3056, 로고스) 말, 진술, 연설. 참된 진리-사상을 말함(구변)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a)  로고스의 다양한 의미.
명사 로고스는 서사시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지만, 헬라의 합리성(rationality)의 출현과 더불어 중요한 단어가 되었다.
① 이야기, 연설, 말로서의 '설명'
② 하나의 원리, 증명 또는 설명(상업적으로는 계정)으로서의 계산의 결과.
③ 수학적으로는 '비례', '관계', 또한 더욱 일반적으로는 '기준'이나 '순서'
④ 주관적으로는 인간의 이성, 정신 또는 사상을 의미한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이 단어는 표현, 열거, 정의(定義) 등의 개념들을 결합한다. 이 단어는 반드시 진리, 지식, 미덕, 법, 생명, 본질, 영과 같은 단어들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이 단어는 풍부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한편, 창조적인 힘을 지닌 말이나 연설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된 적은 없다. 강조점은 말 속의 합리적인 요소에 있다; 레마는 감정적이며 의지적인 면에 강조점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로고스는 있는 것에 대해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것, 귀소본능을 의미한다. 마술에서만 이 단어가 주문(呪文)이라는 전문적 의미로 사용된다.
(b)  헬라 세계에 있어서 로고스 개념의 발전.
① 그 양면성. 한 면에서 볼 때 로고스는 어떤 것을 해명해 주거나 설명해 주는 것으로서의 말이나 계시를 의미한다. 어떤 사물의 법칙, 의미, 기초, 구조의 견지에서 볼 때 로고스는 그것의 내용이다. 다른 면에서 볼 때 로고스는 형이상학적 실재, 사물의 기본적인 이해할 수 있는 법칙으로서, 생을 설명할 수 있고, 결정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로고스는 후에 우주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② 헤라클리투스(Heraclitus). 로고스는 우주와 인간 양자의 존재를 구성하는 것으로서 인간을 우주, 인간 자신, 신과 연결시킨다. 따라서 로고스는 인간을 참된 존재로 확립시킨다. 여기서 로고스는 인간의 말과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말이자 의미이다. 사물의 법칙 또는 원리로서 로고스는 인간의 견해를 초월하며, 프쉬케의 근거가 되며, 우리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권리를 주장한다.
③ 소피스트(Sophists). 이제 로고스는 현저히 인간의 이성을 의미하게 된다. 즉 사고력과 말하는 능력을 의미하며 정치에서는 설득력을 의미한다. 그것은 정치 생활 뿐만 아니라 교육과 문화의 기초이다.
④ 소크라테스(Sophists)와 플라톤(Plato).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더불어 로고스의 개념은 발전하여, 일상 언어를 통해 나온 로고스는 사물의 실재에 일치하는 방식으로 친교를 확립하는 능력을 가진다. 이성의 로고스와 실재의 로고스간의 조화가 전제가 된다. 로고스가 사물들을 해석해 줄 때, 진리를 얻게 된다. 그러나 로고스는 사물들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로고스는 그것이 존재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철학을 가능케 한다. 로고스는 사고, 말, 사건, 본질, 존재, 규범과 상호 연관되어 있다.
⑤ 아리스토텔레스(Aristole).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로고스는 인간의 미덕과 신앙의 근원인데, 이는 행동은 이해에 의해 결정되며, 인간은 말에 의해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2. 신약성경의 용법.
로고스는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인 의미와 신학적인 의미 두 가지 모두로 331 회 사용된다(빌레몬서와 유다서를 제외하고 모든 문서들에 나온다). 로고스는 신약성경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는데,‘진술, 말, 언사, 포고, 격언, 선언, 강화, 연설, 가르침, 교훈, 교리, 이야기, 일, 용건, 사건, 행위, 질문, 명령, 보고, 정보, 소문, 어법, 입으로 하는 말, 이성, 고려, 계산, 해명, 설명, 관계, 원인, 근거, 기록된 말씀, 그리스도 자신이신 말씀’등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특별히 생각하고자 한다.
그러면 이“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말씀인가? 우리는 여기서“하나님의 말씀”으로 불리워진 몇 가지를  제시할 수 있다.
(a)  사도행전에서“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적 용법은 이미 사도들의 전도에서의 통상적인 우회적 표현이다(행 4:29; 행 6:2; 행 6:7; 행 8:4; 행 11:19; 행 13:5; 행 13:7; 행 13:44; 행 13:46; 행 16:32; 행 17:13; 행 18:11). 하나님의 말씀은 그 내용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사건(word-event)을 갖고 있으니 곧 유대에서의 말씀의 시작에서부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제자들의 파송까지의 말씀의 역사(history)이다(행 10:37).  사도들이 선포하는 사도적 말씀-사건(word-event)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말씀 -사건에 기초된 것이며(행 10:36이하), 이것이 그 규범적인 주제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의 메시지는 유대인과 헬라인, 곧 세계인 모두를 위한 "구원의 말씀"이다(행 17:30).
사도의 전도에 있어서 이 하나님의 말씀, 또는 주의 말씀이 전해지고(참조: 행 4:29, 31; 11:19; 13:46) 선포되고(행 l3:5; 15:36; 17:13), 또한 받아들여졌다(행 8:14; 행 17:11).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행 4:4; 13:7, 44; 19:10), 또한 믿음으로 영접되고 찬양받았다(행 4:4; 15:7; 13:48). 만일 사도들의 전도하는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사건에 대한 메시지라면‘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G. Kitte1. TDNT Ⅳ 116).
(b)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다(눅 6:1). 예수님의 말씀들은 성부의 말씀이며,  그 안에서 성부의 역사가 실행된다(요 14:24; 참조: 3:34; 14:10; 17:8).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요 5:24; 8:51; 12:48; 14:24; 15:3; 17:14, 17). 예수님의 말씀은 동시에 성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따라서 그것은 구원의 말씀이며(요 14:24), 진리의 말씀이니(요 17:17)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 신자들에게 생명을 주고(요 5:24) 비신자들에게는 심판을 초래하는(요 12:47 이하) 이유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들은 그 전체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자기 계시이다(요 14:6, 14. 17).  이 계시자(the Revea1er) 의 말씀들은“말씀 the Word”로서 계시자(the revealer) 와는 동일하지 않다(R. Schnacken -burg,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c)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이신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요 1:1, 14). 하나님의 말씀들로서의 예수님의 (선포의) 말씀들은 말씀으로서의 예수님의 본질에 근거한다. 그가 말씀, 또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발언하셨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로고스다고 불리움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예수님께서 로고스이시기 때문에, 즉 신적 계시자이시며 구속자이시기 때문에 그의 말씀들이 하나님의 말씀들의 힘(force)을 소유하는 것이다(R.Schnackenburg,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로고스를 예수님과 동일시함으로써 이처럼 로고스 개념을 완전히 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요 1:1, 14 외에는 오직 요일 1:1(“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과 계 19:13 에서 발견된다. 계 19:13에서는“하나님의 말씀”이란 명칭이 승리 가운데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사용된다(지혜서 18:5와 단 7장의 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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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nw'si"(1108, 그노시스) 지식 knowledge. 경험적 참지식(생동하는 산 지식)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그노시스는 기노스코(ginwvskw, 1097: 알게되다, 지각하다, 알다, 깨닫다)에서 유래했다.
(a)  그노시스는 '지식의 수단' means of knowing, '사고' thowght, '판단' Judgment, '의견' opinion을 의미한다.
(b)  그노시스는 에피스테메(ejpisthvmh: 이해, 지식)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목적을 나타내는 속격을 필요로 하며, 지식 자체보다는 아는 행위를 암시한다. 이 행위는 사물 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하여, 모든 지식(인식) 기관 및 방식, 예를 들면 보고 듣고 조사하고 경험함으로 말미암아 아는 모든 지식(인식)기관 및 방식을 포함한다. 그렇지만 지식은 절대로 눈에 의한 확인, 검증을 함축한다. 따라서 지배적인 개념은 객관적 관찰에 의한 지식의 개념이다. 이 개념은 헬라의 현실관(실재관)과 관련된다. 실재는 다양한 형태들과 형상들로, 즉 실재를 형태 지우는 여러 요소들과 원리들로 이루어져 있다. 참된 실체는 모든 변화 속에서도 변치 않는 무시적(timeless)인 실재이다. 이 참된 실체를 보거나 아는 사람들은 이것을 소유하고 통제한다. 그러므로 참된 것을 아는 지식은 인생에서 최고의 가능성을 가져다 준다. 아는 자들은 영원한 것에 참여한다. 따라서 그들은 플라톤이 생각한 것처럼 올바른 정치적 행위를 할 수 있거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바처럼 무사 무욕한 과학적 성찰의 이상을 성취할 수 있다.
(c)  그노시스의 영지주의의 용법.
그노시스에 대한 헬라니즘과 특별히 영지주의의 용법은 어느 정도 고전적 개념 발전에 뒤따르지만, 또한 구원에로 인도하는 은밀한 지식이 명상하는 신비 종교(mysteries)의 신앙과 그 지식이 초자연적 힘을 주는 마법 같은 것들에서 유래된다.
① 그노시스는 아는 행위 뿐만 아니라 지식 그 자체를 의미하며, 따라서 강조점은 일반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에 두고 있다. 하나님은 그노시스의 자명한 대상이며, 생성하는 다른 모든 것과 구별된다. 따라서 이 세상으로부터 돌아섬으로써만이, 즉 특별한 종류의 지식에 의해서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
② 영지주의의 지식은 누스(nou'", 3563)나 로고스(lovgo", 3056)의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카리스마(cavrisma, 5486)이다. 즉 이 지식은 무아경적 환상이나 신비한 환상에 의한 조명(illumination)이다. 이 지식은 소유할 수 없지만 이 지식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지식은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참된 영지주의에서 이 예비적 지식은 입교 훈련에 의해 얻게 되는 비교적(esoteric)지식이며, 가르침은 철학적 가르침보다는 입회자에 대한 가르침이다. 따라서 이 지식을 얻는데 요구되는 것은 과학적인 탐구보다는 믿음에 대해 듣는 것이다.
초기 단계에서 신성한 전승에 의해 주어지는 이 지식은 죽음 후에 영혼의 승천을 보증한다.
더 높은 단계에서 입회자의 신생(regeneration)은 효험 있는 신비한 신조와 같은 말을 들음으로 일어난다. 이 교의의 내용은 우주론과 인간론을 포함한다. 그런데 이것은 항상 구원에 이르게 하는 자아, 즉 빛의 세계에서 온 영혼으로서의 자아 - 이 자아는 물질에 얽혀 있기 때문에 이 물질 세계를 외면함으로써 그것의 참된 본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 에 대한 지식에 관한 것이다.
③ 영지주의의 지식은 신성의 부여를 수반한다. 이 지식은 죽음을 몰아내는 신적 능력이며, 마치 빛이나 생명과 동일시되는 어떤 마술적인 액체처럼 작용하며, 금욕적인 생활 방식에 의해 보장되는 영혼의 신비적 속성을 이루는 것이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그노시스는 70인역본에서 약 60회 나오며, 히브리어 다아트(1841: 지식)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그노시스는 그 창시자가 지식의 하나님이시며(대상 4:10; 지혜서 1:7; 마카베오이서 6:30; 사 40:14), 의인들이 소유하고 있으며(잠 24:26; 잠 16:8; 잠 2:6; 지혜서 7:17), 하나님의 현자나 종이 가르치는(사 53:11) 계시된 지식을 의미한다.
죄인들, 배교자들, 우상숭배자들은 이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잠 13:19).
이 지식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통찰을 의미하기도 한다(단 12:4). 이 지식은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하는 것이긴 하지만(시 139:6) 모든 피조물은 신자들에게 이 지식을 선포한다(시 92:2).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그노스시는 신약성경에서 29회 나오며, 바울 서신에 23회, 누가복음에 2회, 베드로서에 4회 사용되었다.
(a)  눅 1: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여기서 "구원을 알게 하리니"는 '구원의 지식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b)  눅 11:52, "화 있을찐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그노시스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관하여 알려진 것을 가리킨다.
(c)  그노시스는 고후 4:6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것이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d)  그노시스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 그리스도를 구주로서 아는 것이다.
①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② 벧후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e)  그노시스는 롬 11:33에서 하나님께 속하는 것을 아는 지식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f)  그노시스는 엡 3:19에서 그 자체로서 일반적인 '지성, 이해(력)을 의미한다: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g)  그노시스는 기독교에 대한 일반적 지식을 가리킨다.
① 롬 15:1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② 고전 1:5,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h)  그노시스는 보다 더 고등한 것에 속하는 기독교에 대한 더 깊고 완전하고 큰 지식을 가리킨다.
① 고전 12:8, "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② 고전 13: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③ 고전 13: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④ 고전 14: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⑤ 고후 6: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⑥ 고후 8: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찌니라".
⑦ 고후 11:6,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i)  그노시스는 특히 그리스도에게 합당한 것과 합당치 않는 것들에 대한 지식을 가리킨다.
① 고전 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② 고전 8:7,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③ 고전 8:10; 고전 8:11,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j)  그노시스는 거짓 교사들이 자랑하는 그리스도교와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더 높은 지식을 가리킨다: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딤전 6:20).
(k)  그노시스는 올바른 삶에서 나타나는 영적 지혜를 가리킨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벧후 1:5).
(l)  그노시스는 다른 사람들과 교제에서 나타나는 영적 지혜를 가리킨다: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m)  그노시스는 객관적 지식, 즉 하나님의 일들과 사람의 의무에 관하여 알려진 것을 가리킨다.
① 롬 2:19,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② 골 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n)  그노시스와 소피아(4678: 지혜)가 함께 사용될 때, 전자는 그 자체로 고려되는 지식을, 후자는 행동에서 드러나는 지혜를 암시하는 것 같다: 롬 11:33; 고전 12:8; 골 2:3. 그노시스는 단순히 직관적인 것이고, 소피아는 추론적인 것이다. 또한 그노시스는 주로 진리에 대한 이해에 적용되고, 소피아에는 진리를 추론하는 능력과 그들의 관계를 추적하는 능력이 첨가된다.(Bp. Lghtft).
① 롬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② 고전 12:8, "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③ 골 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R. Bultmann; E. D. Schmi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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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outivzw(4148, 플루티조) 부하게 하다, 풍부하게 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플루티조(Aeschyl., Xen. 이래)는 플루토스(plou'to", 4149)에서 유래했으며, '부유(요)하게 하다, 풍부하게 하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플루티조는 70인역본에서 13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아 아샬(부유하다, 부유하게 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창 14:23; 삼상 2:7; 삼상 17:25; 욥 15:29; 시 65:9; 잠 10:4, 잠 10:22; 잠 13:7).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플루티조는 신약성경에서 3회, 고린도전후서에만 나오며, 고전 헬라어 용법과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a)  고전 1:5에서 하나님은 교회를 모든 것에 있어서 풍부하게 하신다: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b)  고후 6:10에서 기독교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풍성함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하여 부요하게 한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9:11,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참조: J.H.Thayer; Walter Bauer; F.Sel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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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uvrion(3142, 마르튀리온) 증거 testimony.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마르튀리온은 마르튀스(mavrtu", 3144: 증인)에서 유래했으며, '증거, 증언, 증명'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증언하는 행위와 비교해 볼 때 오히려 '진술의 내용'(Hdt)이나 '한 마디의 증언'(Plato, Leg.)이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마르튀리온은 70인역본에서 약 290회 사용되었으며, 십계명이 기록된 두개의 석판(출 31:18; 출 32:15), 증거의 장막(출 29:4, 출 29:10이하; 출 40:2이하; 레 4:4이하; 민 4:25이하), 증거의 궤(출 40:3; 출 5:21; 레 16:2 등), 언약의 기둥(창 31:44), 기념비(수 22:27; 수 24:27), 심판의 증거(호 2:12; 지혜서 10:7), 말씀, 말씀의 증언, 여호와에 대한 지식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마르튀리온은 신약성경에서 19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고소를 위한 증거.
신약성경에서도, 통상적인 헬라의 용법과 같이 마르튀리온이 객관적 증거나 증명을 의미한다. 이점은 약 5:3; 막 6:11의 "너희[저희]에게 증거가 되며[증거를 삼으라]"라는 표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막 1:44-45도 참조하다: "44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막 13:9에서, 제자들은, 회당에서 채찍질 당하고 통치자들 앞에서 심문 받으면서 증언을 행할 것이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되려함이라".
마 24:14에서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한 증거로서 전파될 것이다. 이 사례들에서 믿을 기회가 제공될 수 있지만, 복음 전파는 불신의 경우에도 증거가 될 것이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b)  어떤 것에 대한 증언.
마르튀리온은 주체의 속격(고후 1: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이나 객체의 속격과 함께(행 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어떤 것에 대한 증언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한 용례에서 마르튀리온은 복음, 메시지, 또는 가르침에 상당한다(딤전 2:6).
(c)  증언 행위.
마르튀리온은 히 3:5에서 증언함이라는 행동적 의미를 가진다: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거기에 모세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다음 백성에게 이야기해 주어야 할 그것을 증언함에 있어서 충성된 종이었다고 언급된다. 여기에서나 기타의 곳에서도 마르튀리온이 순교사적 방향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참조: H. Strathmann; A. A. Tri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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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baiovw(950, 베바이오오) 확고하게 하다, 확실하게 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베바이오오(Thu., Pla. 이래로)는 베바이오스(bevbaio", 949: 확고한, 확실한)에서 유래했으며, '확고하게 하다, 강화하다, 확립하다, 확증(확인)하다, 확실하게 하다, 안전하게 하다'를 의미하며 사물과 인격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베바이오오는 70인역본에서 3회 나오며, 히브리어 나차브(5324: 서다, 임명하다, 자리 잡다), 쿰(6965: 일어서다, 견디다, 고수하다, 견고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세우다'(시 41:13; 시 119:28)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베바이오오는 신약성경에서 8회 나오며, 다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a)  막 16:20에서 말씀을 '확증 또는 확실히 하는' 것을 묘사한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b)  롬 15:8에서 약속을 '유효하게 하는' 것을 표현한다: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c)  고전 1:6에서 믿음과 고백에서 확고하게 하는 것을 표현한다.
(d)  고전 1:8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견고하게 되는 것을 표현한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e)  고후 1:21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견고하게(즉 굳세게) 하는 것을 표현한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f)  골 2:7에서 믿음에 뿌리를 박는 것을 표현한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g)  히 2:3에서 '확증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h)  히 13:9에서 마음을 강화하는 것을 표현한다: "여러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 Schl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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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vrisma(5486, 카리스마) 은혜의 선물, 은사.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카리스마는 카리조마이(carivzomai, 5483)에서 유래했으며, 그 의미는 행위로서의 카리스의 결과, 즉 '호의의 증거, 은혜, 은사'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카리스마는 70인역본에서 집회서에서만 2회 나오며, '호의'를 나타낸다(7:33; 38:30).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카리스마는 신약성경에서 17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롬 5:15은 "이 은사(카리스마)는 그 범죄(파라프토마)와 같지 아니하니"라고 선언한다. 이 곳에서 카리스마는 카리스의 의미로 사용된다. 카리스마는 "하나님의 은혜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고 하는 생명의 은사이다. 이런 의미가 훨씬 더 공식화된 곳이 롬 6:23; 롬 1:11이다. 여기서는 바울이 나누어 줄 무슨 신령한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고전 7:7에서는 개인적인 면이 부각된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 각각 은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독신 생활이 율법처럼 강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b)  한 성령을 통해 개개인의 기독자들 안에서 한 은혜가 다방면으로 나타나는 것을 바울은 카리스마, 곧 은혜의 개인적 부여라고 칭한다. 이것은 카리스마의 일반적인 용법과는 다른 특별화된 용법이다. 로마서 12장과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은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의 섬김을 위한 이 특별하고 영적인 부여의 의미를 발전시킨다. 이 카리스마에는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이 있으니 선포의 은사로서의 예언, 섬김, 가르침, 영적인 권면, 회중 가운데서의 다스림이 있고, 또한 구제와 긍휼이 있다(참조: 롬 12:6-8). 이에 추가하여 바울은 고전 12:9 이하와 고전 12:28 이하에서 이미 믿음, 병 고치는 은사, 영을 분간하는 특별한 능력, 방언 말함, 방언 통역함을 열거하였고 이 기능들의 순서에 첫째로 사도의 봉사를 둔다(28절). 어떤 은사도 없는 기독자가 있다는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동시에 한 개인이 한가지 이상의 은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바울 자신은 사도직 외에도(고후 1:11), 사도직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독신의 은사를 소유하고 있었다(고전 9:5). 또한 그는 방언의 은사를 소유하고 있었으며(고전 14:18), 또한 분명히 예언의 은사와 가르치는 은사와 다스림의 은사도 소유하고 있었다. 영적 봉사를 위한 능력은 그가 현재 소유한 카리스마에 의해 결정된다. 카리스마는 야심으로 한도를 넘어서는 안된다(고전 12:11-27; 롬 12:3-5; 참조: 벧전 4:10). 한편 바울은 더 좋은 은사들을 사모하라고 격려하였다(고전 12:31). 이 더 좋은 은사는 공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기도와 순종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롬 11:29은 구원 역사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변치 않는 특권들을 카리스마타로 칭한다(참조: 롬 9:4).
(c)  딤전 4:14; 딤후 1:6에서 안수식은 직분의 카리스마를 수여한다.
벧전 4:10에서는 사랑으로 하는 모든 봉사가 카리스마이다: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여기서 성령의 은사라는 것은 사실상 자질이나 마찬가지이다.(참조: H. Congzelmann; H. -H. Es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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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pokavluyi"(602, 아포칼륍시스) 폭로, 덮개를 벗김, 드러남, 계시.
1. 고전 헬라어 문헌
명사 아포칼륍시스는 아포칼륍토(ajpokaluvptw, 601: 덮개를 벗기다, 드러내다, 폭로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덮개를 벗김,’또는‘이전에 감추인 것을 나타냄’이란 의미에서‘폭로, 드러냄, 벌거벗김, 계시’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후기에 사용되었으며, 주로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아포칼륍시스는 70인 역본에서 삼상 20:30에서만 발견되며, 거기에서 히브리어 에르와(벌거벗음 nakedness)의 역어로 사용되었고, 외경 집회서에서 히브리어 상당어 없이 3회(집회서 11:27; 집회서 22:22; 42:1)나온다. 집회서 22:22과 42:1에서는 비밀의 누설 혹은 폭로라는 세속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집회서 11:27에서는 신학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인생의 종말에 '그의 행적의 계시'가 있다고 한다. 아마도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 같다.
구약성경에서 그것은 신적 계시에 대한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70인 역본에서 취할 수 있는 하나의 좋은 예는 아모스 3:7이다 -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다". 이에 따르면 하나님의 계시가 예언자들에게 선포되기 전에 마지막 사건이 등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하나님의 통고는 예언자들을 위해서만 규정된 것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계속 전해져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되어야 한다(암 3:8). 예언자들의 권능은 예언자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계획과 그 계획이 역사적으로 실현되는 것 사이의 중간 매체로써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세상의 종말도 역시 그것이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서 예언됨으로써 비로소 초래된다. 이것이 이 계시록의 보다 깊은 의미이다(Heinrich Kraft).
3. 신약성경의 용법
신약성경에서 아포칼륍시스는 19회 사용되었는데 바울이 그 중 13회, 요한 계시록에 1회 사용되었다.
(a)  눅 2:32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의 전달자이다: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롬 16:25에서 바울은 "비밀의 계시"(the revelation of the mystery)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사도들의 메시지의 계시적 성격을 구체화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비와 일치한다.
갈 1:12에서 바울은 그의 복음을“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받았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b)  사도들의 메시지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일컬어진다(고전 14:29; 참조: 골 1:25; 눅 5:1; 눅 8:21). 예수님의 선포만이 계시요 초대 교회의 설교는 그것에의 접근에 불과하다는 견해는(J.Jeremias) 상기의 주장의 관점에서 볼 때, 신약성경의 진술을 공정하게 다루지 못한 것이다. 신약성경 기자는 여기서 구분을 짓지 않는다. 신약 성경은 사도들의 메시지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한다. 이러한 이해의 결론은 초대 기독교가 복음서에 전해진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 문서들을 정경으로 채택하여 신적 계시의 권위있는 기록으로서 인정하였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울 서신에서 아포칼륍시스는 그리스도의 기초 메시지에만 사용되지는 않았다. 갈 2:2에서 바울은 자신이 계시에 근거하여 사도 회의에 참석차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였다고 보도하는데, 다시 말해서 그가 하나님의 지휘에 기초하여 여행하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어떤 방법으로 그 계시를 받았는지에 대한 더 상세한 내용에 관하여는 알지 못한다. 고후 12:1 이하와 고전 14:6에서는 "환상과 계시"라는 말이 언급되어 있는데, 바울이 이것을 경험하였으며 또한 이것은 황홀한 경험이었던 것같다.
그러나 이 계시들이 사도 바울 개인의 신앙과 생활을 위하여 얼마나 중요한 것이든 간에, 우리는 그것들을 그리스도의 기본적인 첫 계시와 구별해야 한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다른 기독교인들도 그러한 계시를 받을 수 있다(고전 l4:26; 참조: 고전 14:30; 빌 3:15). 이것은 엡 1:17에서 하나님이 에베소인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실 것을 구하는 바울의 기도에 대한 설명이다. 제자들을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계시를 이해케 한다(참조: 엡 2:18; 요 16:13).
(c)  아포칼륍시스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사용되고 있다. 강림일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권능의 충만함으로 나타나시는 그리스도 계시의 날이다(고전 1:7; 살후 1:7). 강림일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계시 및 하늘의 영광의 계시와 결부되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러한 영광 때문에 그 시대의 고통을 망각해 버리고 만다(롬8:18 이하). 롬 2:5에서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이다.
베드로전서에서 베드로가 이 단어를 사용할 때는 언제나(벧전 1:12은 별도로) 마지 막 계시를 염두에 두고 있다. 그리스도의 계시는 그의 영광의 계시이니, 지금은 기독교인들이 고통과 여러 가지 유혹을 당하나, 이 계시 안에서 분깃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모든 소망을 이 구원과 은총에 두어야 한다(벧전1:5 이하; 벧전 1:13; 벧전 4:13).
(d)  그러한 아포칼륍시스는 요한 계시록(계 l:l)의 대 주제이기도 하다. 요한계시록에서 이 단어는 계 1:1에서만 사용되었다. 빈센트(Vincent)는‘여기 계시록은 신적 비밀(the divine mysteries)이 드러난 것이다’고 말했다.“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란 말은 무슨 의미인가? “예수 그리스도의”라는 문구를 목적 속격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가 된다.  그러면 예수님이 계시되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 견해의 근거는 우리가 계시록 첫 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환상을 가진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그러나 이것은 계시록의 내용으로 볼 수 없다.  다음으로, 주어 속격으로 보면,'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시'가 된다.  이것은 계시록의 내용의 거의 전체를 설명해준다. 현대의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후자의 견해를 받아들인다.
요한계시록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라는 기도로 이 미래 환상이 끝난다. 이 영원한 미래에 대한 소망은 양도될 수 없는 계시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한 부분이다.(참조: W. Mundle).

--ajpekdevcomai(553, 아페크데코마이) 기다리다 wait, 간절히 기다리다 wait earerly.

1. 일반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아페크데코마이는 아포(ajpov, 575)와 에크데코마이(ejkdevcomai, 1551)에서 유래했으며, '열심히 끈기있게 기다리다'를 의미한다. 접두사 아포(ajpov, 575)는 기다리는 상태와 소망하는 바의 성취 시기 사이의 간격에 역점을 둔다. 소망이 성취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자는 참고 견디어내야 하는 것이다. 70인역본에는 나오지 않는다.

2. 신약성경의 용법 

아페크데코마이는 신약성경에서 8회 중, 바울 서신에 6회 , 히브리서에 1회, 베드로전서에 1회 사용되었다. 아페크데코마이는 열심히 인내로 '기다린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기다리는 방법을 암시하는 문맥들에만 나온다. 내용적인 면으로 볼 때 이 기대는,

(a)  빌 3:20에서 그가 우리의 육체를 변화하게 하심으로 자신이 우리의 "구주"이심을 증명하실 주님의 재림을 지향하는 것이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b)  롬 8:23에서 몸의 부활을 통하여 온전한 아들됨의 부요 속으로 들어가게 됨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c)  따라서 갈 5:5에서 최후의 심판 때의 디카이오쉬네(의)를 지향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d)  롬 8: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여기에서 인간과 인간을 제외한 다른 피조물은 타락과 구원의 결과들에 있어서 인간과 동일하게 참여하기 때문에 죽음의 저주로부터 구원되기를 바라는 피조물의 기대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영광 가운데 들어가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다.

(e)  롬 8:25에서 소망의 본질을 깨달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현시대의 고난을 인내하며 "참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참조: J.H.Thayer; E.Hoffmann; W.Grund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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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evw(2564, 칼레오) 부르다, 이름 짓다, 초대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칼레오(Homer 이래)는 '부르다' call라는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a)  칼레오는 사람을 호명하는 경우이든(Homer, Il.) 어떤 사람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경우든 간에, '이름을 붙이다(짓다, 명명하다)를 의미한다. 수동 분사 칼루메노스(Hdt., 6, 61)가 인명이나 지명에 사용될 때는 '불리워지는' called, '소위' so called를 의미한다. 이름은 사람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므로 수동 부정사 칼레이스다이는 사실상 에이나이(ei+'nai, 1511: to be)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예: Homer, Od.).

(b)  '초대하다' invite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어떤 집으로 초대하다, 어떤 연회에 초대하다(Homer, Od.) 등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분사형 클레토스는 '초대받은, 환영받은, 손님'(Homer, Od., 17, 386)을 의미한다. 그 초대 자체가 특별한 영예가 되었을 경우, 이 단어는 '선택된'이라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Homer, Il).

(c)  칼레오마이는 증인들 또는 어떤 사람의 적을 법정 앞에 '소환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Dem., Xen., Hell.).

(d)  칼레오는 매우 드물게 신의 부름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것은 신비 종교(예: 이시스의 신비 종교) 및 70인역본과 특히 신약성경의 용법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것들로부터 칼레오는 '요구하다'(Herm., 119B Ⅲ, 10 이하), '위탁(위임)하다'(CPR 18, 9)라는 의미를 띠게 되었다.

(e)  헬라 사회가 '부름' calling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몰랐기 때문에 거기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소명' vocation의 개념이 없다. 직업에 있어서 사람이 하는 행동은, 에르곤(일하다), 포노스(짐), 에팡겔리아(동의, 약속), 프라그마(행위, 일), 테크네(기술), 스케시스(상황, 조건, 상태) 또는 탁시스(순서, 질서) 등으로 불렸다. 육체 노동에 대한 일반적인 용어가 모색되기도 했지만 '소명' vocation 의식은 사제들에게만 국한, 남아 있었으며 지적인 일이나 행정 업무에 헌신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의식이 어느 정도 존재하였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칼레오는 70인역본에서 약 300회 나오며, 거의 대부분 히브리어 카라(부르다, 불러내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칼레오는 '이름을 짓다, 명명하다'라는 의미로 매우 자주 사용되었다. 사물의 이름을 짓는 것(예: 창 1:5; 창 1:8 이하, 낮, 밤, 하늘, 땅; 창 2:19, 짐승들) 혹은 사람의 이름을 명명할 경우(예 창 25:26, 야곱; 창 29:32-35; 창 30:6-24, 야곱의 아들들), 도성(예: 삼하 5:9, 다윗의 성), 또는 특성, 속성에 이름을 붙이는 경우(예: 사 35:8에서는 길, 출 12:16에서는 어떤 날을 거룩하다고 부른다; 사 56:7에서는 성전이 "기도의 집"으로 불림) 등이다. 유대 사람들이 "여호와의 제사장"(사 61:6)이나 또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호 1:10)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종들을 "다른 이름"(사 65:15)으로 칭한다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새로운 존재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b)  칼레오는 '선포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 61:2과 렘 34:17에서 면제년 선포에 관해 사용되었다.

(c)  칼레오는 '부른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① 예를 들면 부모가 자녀를 부르는 것(창 24:58), 통치자가 신하를 부르는 것(출 1:18; 삿 12:1), 모세가 장로들을 부르는 것(출 12:21; 출 19:7) 등이다. 이러한 부름은 항상 명령이지 단순한 초청은 결코 아니었다(욥 13:22). 이러한 부름에는 상대가 듣고 대답해 주기를 바라는 요망이 들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사 65:12).

② 그는 기근(시 105[104]:16)과 칼(렘 25:29)을 부르신다.

③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는 것을 표현한다. 이 경우 인간은 그 부름에 응답하기 전에 그가 들은 부름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성소에서 조차 이 부름에 준비되어 있지 못하여 이 부름과 여타의 음성을 얼마나 구별하기 어려운가 하는 것이 사무엘의 부름의 기사에 극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삼상 3:4-10). 단지 하나님의 부름이 인간에게 어떤 요구를 하신다는 것 때문에 이 세상 주권자들의 요구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엘리야[왕하 1:3, 9]와 모세[출 3:4; 출 5:2]). 이 부름 때문에 종종 하나님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기도 할 것이다.(참조: L. Coenen).

3. 신약성경의 용법. 

칼레오는 신약성경에서 14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칼레오는 ① 목적의 대격과 서술 대격을 수반할 때는 '~라고 부르다, 이름 부르다. 명명하다, 이름 짓다(붙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마 10:25; 마 22:43; 마 22:45; 마 23:9; 눅 1:29; 눅 20:44(=마 22:45), 행 14:12; 롬 4:17; 롬 9:25(=호 2:25), 히 2:11; 벧전 3:6; 마 1:21; 마 1:23(=사 7:14); 마 1:25.

눅 6:46에서는 대격과 호격이 뒤따른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 어찌하여...".

특별히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름을 지어주시는 경우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과(눅 1:31)과 요한(눅 1:13)의 이름을 지어주심으로써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그들의 삶을 그가 주관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신다(L. Conen).

② 수동태로 '불리워지다, 일컬음을 받다, 명명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마 2:23; 마 5:9; 마 21:13; 마 23:7; 마 23;8; 마 23:10; 마 27:8; 막 11:17; 눅 1:32; 눅 1:35; 눅 1:36; 눅 1:60; 눅 1:12; 눅 1:76; 눅 2:4; 눅 2:21; 눅 2:23; 눅 6:15; 눅 7:11; 눅 8:2; 눅 9:10; 눅 10:39; 눅 15:19; 눅 15:21; 눅 19:2; 눅 19:29; 눅 21:37; 눅 22:25; 눅 23:33; 요 1:42; 행 1:12; 행 1:19; 행 1:23; 행 3:11; 행 7:58; 눅 8:10; 행 9:11; 행 10:1; 행 13:1; 행 15:22; 행 15:37; 행 27:8; 행 28:14; 행 28:16; 행 28:1; 롬 9:26; 고전 15:9; 히 3:13; 약 2:23; 요일 3:1; 계 1:9; 계 11:8; 계 12:9; 계 16:16; 계 19:11; 계 19:13.

(b)  칼레오는 '~에 부르다, 초대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마 2:7; 마 20:8; 마 22:3; 마 22:4; 마 22:8; 마 22:9; 마 25:14; 막 3:31; 눅 7:39; 눅 14:7; 눅 14:8; 눅 14:9; 눅 14:10; 눅 14:12; 눅 14:13; 눅 14:16; 눅 14:17; 눅 14:24; 눅 19:13; 요 2:2; 요 10:3; 행 4:18; 행 24:2; 고전 10:27.

(c)  복음서의 몇몇 구절과 바울 서신에서 자주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부르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부르신다(마 2:15).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부르신다(마 4:21; 병행구 막 1:20). 예수님은 죄인들을 불러 회개케 하신다(마 9:13; 병행구 막 2:27; 눅 5:32). 하나님은 우리를 그 자신에게로 즉 구원으로 부르신다(롬 8:30).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부르셨다(롬 9:7; 히 11:18).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모두 부르셨다(롬 9:24).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불러 그의 아들과 교제케 하신다(고전 1:9).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평안(고전 7:15), 은혜(갈 1:6), 자유(갈 5:13), 그의 나라와 영광(살전 2:12), 거룩(살전 4:7; 참조: 살전 2:13-14), 영생(딤전 6:12), 빛(벧전 2:9)으로 부르시며, 그와 동시에 고난에 참여하도록(벧전 2:20-21) 부르시기도 하신다. 그리스도 자신도 부름을 받았다(히 5:4).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았는데(히 11:8),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예표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며(계 19:9), 단순히 "부름받은 자"로 기술할 수도 있다(계 9:15).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사람들을 부르시는 것은 하나님의 역할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부름에 대한 적절한 응답은 믿음이다. 이 믿음에는 제자가 되는 것 뿐만 아니라 구원의 축복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용어의 배후에는 심판과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전체 사역이 있다. 이러한 부름은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부르시거나 복음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진다(살후 2:14). 따라서 이 단어가 이러한 용법으로 사용될 때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전문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참조: K. L. Schmi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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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inwniva(2842, 코이노니아) 교제 fellowship, 참여 participation, 나누어줌 impartation.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코이노니아(Plind. 이래)는 코이노노스(koinwnov", 2844: 동료, 참여자)에서 유래했으며,

(a)  '참여' participation,

(b)  '나누어줌' impartation.,

(c)  '친교, 교제' fellowship.

(d)  '자선품이나 기부금'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목적 속격(나누는 것), 주격 속격(나누는 사람 또는 물건), 여격(수령자)과 함께 사용되거나 전치사 및 목적 속격(참여하고 있는 자)과 함께 사용되었다.

·인간 생활-나눔은 여러 분야에서 일어난다. 예를 들면 사업, 법률관계, 결혼 등, 또한 헬라인에게 있어서 친교의 최고의 표현이 우정이다. 시민권 또한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회의 보존과 실로 세계(cosmos)의 보존은 정치적, 세계적 나눔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제의적 언어-원시 사상에 의하면 먹고 마심에서 신비한 신적 능력을 내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개념은 제의적인 축제나 심지어 성적인 결합을 통하여 신과 연합한다는 헬라 개념에도 잔존해 있다. 철학은 이 개념을 순화한다. 따라서 플라톤에게 있어서 신과의 교제는 친교의 최고 형태이다. 반면에 완전한 우주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는 스토아 철학은 인간 사이의 친교와 신과의 모든 인류의 친교를 강조한다. 신비주의는 친교를 합일(union)로 대체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코이노니아는 70인역본에서 3회 나오며, 레 6:2에서 '담보'라는 의미로, 지혜서 8:18에서 물질적 참여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코이노니아는 신약성경에서 19회 나오며, 3회를 제외하고는 모두 바울 서신에 사용되었다.

1. 코이노니아는 '함께 나누는 것'을 나타낸다.

(a)  ① 고전 1:9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친교하도록 초청받았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이런 친교에는 신비적 합일이 없으니 이 친교는 그들의 생명과 그의 생명(그리스도의)과 동일시하는 믿음으로 인한 것이다. 이 친교는 현재 얻게 된다 할지라도 미래에 완성될 것이다(참조: 살전 4:17).

② 빌 1:5에 보면 이 친교에는 복음에의 참여가 수반되며,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참조: 고전 9:23),

③ 믿음의 교제가 수반된다: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몬 1:6).

(b)  고전 10:16 이하에서 코이노니아는 주의 만찬에서 일어나는 교제에 대한 매우 중요한 표현에 사용되었다: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바울은 주의 만찬에서 가지게 되는 친교에 대해 코이노니아를 매우 의미심장하게 사용하였다. 기본적으로 완전히 믿음 안에서 알게된 그리스도에게 참예하는 일은 어떠한 교리와도 연관되지 않은 채 성례전에서, 고양된 형태로 이루어지고 경험된다.

먼저 바울은 주의 만찬을 유대교와 이교의 제사 의식과 구별한다. 고대의 일반적인 신앙에 따를 때 제의적 식사에 참여하는 자들은 그 신과 함께 하는 자들이 됨은 자명한다. 따라서 유대의 희생 제물을 먹는 자들은 "제단에 참예하는 자"(고전 10:18)가 된다. "제단"은 분명 하나님을 가리켜 사용된 것이다. 제단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고 보증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교 제사에 참여하는 자들은 "귀신과 교제하는 자"(고전 10:20)들임이 분명하다. 유추적으로 주의 만찬에 참예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동류들인 것이다. 주의 만찬에서 생기는 진정한 교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의 의무 가운데 하나인 제의적 식사를 피해야만 한다는 매우 당연한 종교적 결론을 수반한다(고전 10:21).

따라서 바울은 주의 만찬의 성격을 그리스도의 인격과의 교제의 견지에서 설명한다. 즉 그의 몸과 피에 참예하는 것(코이노니아)이라고 한다(고전 10:16). 유대의 제단이 하나님의 임재를 보증하는 것이듯이 떡과 포도주(잔)는 그리스도의 임재의 방편이다. 떡과 잔에 참예함은 하늘의 그리스도와 연합(함께함)하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 높임받으신 그리스도는 몸과 피를 가진 지상의 역사상의 그리스도와 동일하신 분이다. 코이노니아는 내적 합일(연합)을 표현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이 의식에서 중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높임 받으신 그리스도와의 진정한 합일은 그의 사망으로 말미암아 얻으신 용서의 축복을 반드시 포함하는 것임이 자명하다.

제의적 식사에서 이러한 합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바울은 귀신과의 교제에서도 그리스도인의 교제에서도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 바울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이 유사한 친교 방식의 성격이 아니라 친교의 사실 그 자체이다.

고전 10:17절에 삽입된 진술에서 바울은 희생 제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주의 만찬에서도 참여자들 사이에 친교가 존재한다는 것을 선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한 개의 떡으로 표현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와의 공통적인 연합에서 생겨난다.

(c)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와의 친교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롬 6:8; 롬 8:17; 롬 6:6; 딤후 2:12; 고후 7:3; 골 2:12-골 2:13; 엡 2:5-엡 2:6). 여기에는 두가지 측면의 교제가 있는데, 첫째는 그리스도의 수치(굴욕)와의 친교이며, 둘째는 그의 높임 받으심과의 친교이다. 바울은 그의 생애와 사역에서 그리스도의 전체 고난에 동참한다(빌 3:10; 참조: 골 1:24). 그러나 그는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영광에도 참여하기를 소망한다(빌 3:10; 참조: 롬 8:17).

(d)  성령에 참여는 그리스도인의 표시이다.

① 고후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성령으로 그리스도는 신자들에게 오신다. 우리가 여기서 가지는 것은 성령에 참여이다.

② 빌 2: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여기서 '성령의 교제'(코이노니아 프뉴마토스)는 '긍휼이나 자비'와 같이 사람에게 있는 어떤 것과 같이 성령 안에서 친교(교제)이며, 성령이 실행하는 친교(교제)가 아니다.

(f)  요일 1:3; 요일 1:6; 요일 1:7,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여기에서 코이노니아는 그리스도 및 하나님과의 신비적 결합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안의 교제를 언급한다.

이 사귐은 여기서 시작하여 이후에 완성될 동거함(참조: 요일 3:2; 요일 3:24; 요일 4:13)에 의하여 성부 및 성자와의 친교로 시작한다(요일 1:3; 요일 1:6). 이 사귐은 신자들의 가족적 교제를 가져온다(요일 1:3).

그 근거는 역사적 예수님에 대한 사도의 설교와 빛 안에서의 행함과 모든 죄를 씻기시는 예수님의 피에 있다. 따라서 이것은 성육신을 부정하고 죄의 특성을 잘못 전달하는 분파적인 자만심을 배격한다.

2. 코이노니아는 '어떤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을 나타낸다.

(a)  행 2:42에서 코이노니아는 독립적인 의미의 예배 생활의 필수 부분으로 간주될 수 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코이노니아는 '참여, 함께 나눔(나누어줌), 교제(친교)'라는 의미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피"(빌 2:1)와 복음 사역에서의 협동(빌 1:5), 가난한 자들을 위한 헌금(고후 8:4; 고후 9:13) 등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코이노니아의 정확한 의미에 관한 다양한 견해가 있다. 그것은 행 2:44에 있는 재산의 분배를, 혹은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의 한 마음을, 혹은 친교적 의미에 있어서의 주의 만찬(고전 10:16)을, 혹은 공동 식사에 참여해서 나누는 교제, 혹은 아가페(애찬)를 말할 수도 있다.

코이노니아는 새롭고 독립적인 어떤 것을 나타낸다. 곧 성령에 의해 전달된 일치와 연합을 나타낸다. 개인은 이 공동체에 의해 완전한 후원을 받았다.

(b)  고후 9:13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져온 기부금, 곧 가난한 자들을 위한 헌금은 교회들의 교제를 나타내주는 확실한 표현이다: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 기부는 종교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결합하는 하나의 복음으로부터 발생되었고 바울이 롬 15:26에서 말하는 것과 똑같은 영적이며 물질적인 주고 받음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는 실제적인 궁핍이 있었다. 예루살렘 성도들 중에는 가난한 이들이 대다수였다. 예루살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영적인 은사들"의 시냇물은 "세상의 선물들"의 마주쳐 흐르는 시냇물로 응답되었다.

초대 교회의 이 모범은 단절된 채로 남게 되었다. 이 모범을 모방하는 것은 요구되지도 않았고 행해지지도 않았다. 사유 재산의 보전은 모든 교회들에서 당연한 일로 간주되었다. 기독교는 새로운 사고 방식을 가져온 것이지 새로운 사회 질서를 가져온 것이 아니다. 1895년의 복음 사회 협의회(Evangelical Social Conference)에서 프리드리히 나우만(Friedrich Naumann)은 '종교의 관점에서 경제 체계에 이르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고 말했고, 반면에 에른스트 트뢸취(Ernst Troeltsch)는 기독교에 독립적인 혁명적 요소가 있으나 혁명을 선동할만한 뜻은 없다고 지적하였다(The Social Teaching of the Christian Churches, 1, 1931, 3969).

(c)  바울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과 관련하여 이 의미를 사용한다. 이 모금은 두 부류의 기독교인 간의 친교를 보여주는 분명한 형태이다(갈 2:9; 롬 15:26). 이 모금은 신실하고(고후 8:4) 마음에서 우러난 나눔(고후 9:13)으로 섬기는 교제의 의의를 지닌다. 히 13:16에서도 적극적인 나눔을 뜻한다.(참조: J. Schattenmann; F. Hauck;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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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stov"(4103, 피스토스) 믿을만한, 신실한, 신뢰하는, 신임하는, 믿는.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피스토스(Homer 이래)는

(a)  피스토스는 '신뢰하는, 신용하는'을 의미하며, 무기의 정확성이나 기술, 사람의 신용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리고 '복종하는'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b)  피스토스는 '신뢰할 수 있는'을 의미하며, 신성한 법의 영역에 사용되었다.

(c)  토 피스톤은 계약을 맺는 자들의 '신빙성', '충성', 일반적인 '신뢰성'이나 '확실성'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형용사 피스토스는 약 70회 이상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아만(진실하다, 의지할만하다, 신실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신뢰할 수 있는, 신실한'(왕상 22:14; 마카베오이서 1:2 등), '신임하는, 신뢰하는'(민 12:7; 집회서 1:14, 23 등)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피스토스는 신약성경에서 약 67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피스토스는 수동적 의미로 '신뢰할 수 있는, 신실한, 믿을만한, 신뢰나 믿음을 불러일으키는'을 의미한다.

① 인간에 대하여, 마 24:45; 마 25:21, 마 25:23; 눅 12:42; 고전 4:2; 계 2:13; 계 1:5; 계 3:14; 계 19:11; 계 17:14; 히 2:17; 히 3:2; 고전 4:17; 엡 6:21; 골 4:7; 골 4:9; 벧전 5:12; 히 3:5; 딤전 1:12; 히 11:11; 계 2:10; 눅 16:11; 눅 19:17; 딤전 3:11; 고전 7:25.

② 하나님에 대하여, 고전 1:9; 고전 10:13; 고후 1:18; 살전 5:24; 히 10:23; 히 11:11; 벧전 4:19; 요일 1:9; 살후 3:3; 딤후 2:13.

③ 사물에 대하여, 딤전 1:15; 딤전 3:1; 딤전 4:9; 딤후 2:11; 딛 3:8; 딛 1:9; 계 21:5; 계 22:6; 행 13:34; 요삼 1:5.

(b)  피스토스는 능동적 의미로, '신뢰하는, 신용하는, 믿는, 믿음을 가진, 믿음이 있는'을 의미한다, 갈 3:9; 히 3:5; 요 20:27; 행 16:15; 엡 1:1; 골 1:2; 벧전 1:21; 행 16:1; 고후 6:15; 딤전 4:10; 딤전 5:16; 딤전 6:2; 딛 1:6; 행 12:3; 딤전 4:3; 딤전 4:12; 행 10:45.

(참조: Walter Bau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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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nevgklhto"(410, 아넹클레토스) 책망할 것이 없는, 비난할 점이 없는, 결백한.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아넹클레토스(Pla., Xen. 이래)는 부정 접두어 a와 엥클레마(e[gklhma, 1462; ① 고소, 고발, ② 범죄, 결함)에서 유래했으며, 플라톤에서부터 고소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람, 또는 죄가 없는 사람이나 사물을 의미하였고, 따라서 본래의 의미는 '고소받을 점이 없는, 결백한'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난할 것이 없는, 훌륭한'이란 의미도 지니게 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아넹클레토스는 70인역본에서 마카베오삼서 5:31에 한번 나오며, '결백한'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아넹클레토스는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아넹클레토스는 고전 1:8에서 원래의 법적 의미로 비난할 것 없는, 즉 '무죄한' 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여기서 주님은 종말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은 주의 날에 신자들을 책망할 것 없는 결백한 자로 견고하게 지키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비난이나 책망할 것이 없다는 말은 윤리적 자질, 곧 기독교인 자신의 공로로 이해되어서는 안되며, 그것보다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에로의 부르심에 따르는 것이다(고전 1:9). 따라서 주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끝까지 굳게 잡음의 결과인 것이다(고전 1:8).

골 1:22에서도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이 구절도 심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기독자의 책망할 것이 없음의 근거를 이루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이니,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달성된 화해(Reconciliation)이다. 골로새서의 기자는, 칭의(justification)에 대해 말하고 있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의 화목케하는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심판 때에 흠없는 자로 서게 될 것이다(참조: 롬 8:33-롬 8:34). 여기에서 전제되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과(고전 1:8) 믿음에 계속 거함이다(골 1:23).

(b)  아넹클레토스는 목회서신에서 보다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① 딛 1:6에서 장로는 아무도 비난할 것이 없어야한다고 한다: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여기서 '책망'보다는 '비난'으로 번역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넹클레토스는 여기서 카테고리아("비방")와 병행하기 때문이다.

② 감독도 마찬가지이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③ 딤전 3:10에서도 집사에 대해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요". 책망이나 비난받을 것이 없는 생활은 현재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참조: Walter Bauer; J.H.Thayer; W.Grundmann; H.Wahris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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