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12.05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시135.신앙.김소월.찬송.찬양.송축.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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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시135....28복의근원강림하사


1.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할랄) 여호와의 종들아(에베드) 찬송하라

2.  여호와의 집 우리 여호와의 성전 곧 우리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

3.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토브)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나임)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자마르)

4.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세굴라) 택하셨음이로다(바하르..선택/결심하다)

5.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께서는 위대하시며(가돌) 우리 주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도다

6.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하페츠)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7.  안개를 땅 끝에서 일으키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를 만드시며 바람을 그 곳간에서 내시는도다

8.  그가 애굽의 처음 난 자를 사람부터 짐승까지 치셨도다

9.  애굽이여 여호와께서 네게 행한 표적들과(오트) 징조들을(모페트)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들에게 보내셨도다

10.  그가 많은 나라를 치시고 강한 왕들을 죽이셨나니

11.  곧 아모리인의 왕 시혼과 바산 왕 옥과 가나안의 모든 국왕이로다

12.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나할라) 주시되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셨도다

13.  여호와여 주의 이름이 영원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를 기념함이(제케르) 대대에 이르리이다

14.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며(딘..심판하다.다투다.변호하다) 그의 종들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시리로다(나함)

15.  ○열국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16.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17.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들의 입에는 아무 호흡도(루아흐) 없나니

18.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로다

19.  이스라엘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바라크) 아론의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20.  레위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를 경외하는(야레) 너희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21.  예루살렘에 계시는(샤칸) 여호와는 시온에서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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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B]시135

1.  Praise the LORD! Praise the name of the LORD; Praise HIM, O servants of the LORD,

2.  You who stand in the house of the LORD, In the courts of the house of our God!

3.  Praise the LORD, for the LORD is good; Sing praises to His name, for it is lovely.

4.  For the LORD has chosen Jacob for Himself, Israel for His own possession.

5.  For I know that the LORD is great, And that our Lord is above all gods.

6.  Whatever the LORD pleases, He does, In heaven and in earth, in the seas and in all deeps.

7.  He causes the vapors to ascend from the ends of the earth; Who makes lightnings for the rain; Who brings forth the wind from His treasuries.

8.  He smote the first-born of Egypt, Both of man and beast.

9.  He sent signs and wonders into your midst, O Egypt, Upon Pharaoh and all his servants.

10.  He smote many nations, And slew mighty kings,

11.  Sihon, king of the Amorites, And Og, king of Bashan, And all the kingdoms of Canaan;

12.  And He gave their land as a heritage, A heritage to Israel His people.

13.  Thy name, O LORD, is everlasting, Thy remembrance, O LORD, throughout all generations.

14.  For the LORD will judge His people, And will have compassion on His servants.

15.  The idols of the nations are [but] silver and gold, The work of man's hands.

16.  They have mouths, but they do not speak; They have eyes, but they do not see;

17.  They have ears, but they do not hear; Nor is there any breath at all in their mouths.

18.  Those who make them will be like them, [Yes,] everyone who trusts in them.

19.  O house of Israel, bless the LORD; O house of Aaron, bless the LORD;

20.  O house of Levi, bless the LORD; You who revere the LORD, bless the LORD.

21.  Blessed be the LORD from Zion, Who dwells in Jerusalem. Praise the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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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편은 할렐루야 시편 중의 하나다. 할렐루야가 이 시편의 표제며 아멘(Amen)이고, 알파(Alpha)요 오메가(Omega)다.

1. 이 시편은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부름으로 시작된다. 특히 앞에 나온 시편과 같이 “여호와의 종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부른다(1-8).

2. 이 시편은 우리에게 찬양해야 할 대상을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하나님은 찬양 받으실 분이다.

   (1) 야곱의 하나님으로서(4).

   (2) 많은 신 중의 하나님으로서(5).

   (3) 모든 세계의 하나님으로서(6-7).

   (4) 이스라엘의 대적자들에 대한 무서운 하나님으로서(8-11).

   (5) 이스라엘에 대한 은혜로운 하나님으로서, 그가 이스라엘을 위해   과거에 행하시고 장차 하시고자 원하시는 점에서 (12-14).

   (6) 유일하게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서. 다른 모든 신들은 공허하며 거짓되다(15-18).

3. 이 시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다른 권면으로 결론을 맺는다(19-21).

이 시편을 노래하면서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입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는 것으로 넘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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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받으실 하나님(시 135:1-4)

Ⅰ. 우리는 해야 할 의무를 요청 받는다.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그를 찬송하고, 그를 찬송하라.” 우리는 그가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도 찬양해야 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행하신 것을 위해서도 찬양해야 한다. 모든 경우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진리와 도에 선한 말을 올려야 한다.

Ⅱ. 이것을 행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여호와의 종들”, “하나님의 집에 섰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그리고 거기에서 예배드리기 위해 “하나님의 전정에” 섰는 열심 있고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2절). 하나님의 집의 특권에 참여한 자들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가장 큰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의 관대하심을 경험한 자들은 찬양할 가장 큰 이유를 본다. 그들에게서 찬양이 기대된다. 그들은 끝까지 저희의 장소를 즐거워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찬양하지 않는다면 누가 찬양할 것인가?

Ⅲ.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

1. 우리가 찬양해야 할 그가 “선하시기” 때문에. 선은 모든 사람이 찬양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는 모두에게 선하시다. 우리는 그에게 그러한 찬양을 드려야 한다. 그의 선하심은 그의 영광이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위해 그것을 언급해야 한다.

2. 그 일이 그 자체의 응보이기 때문에. “그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을 찬양하라.” 그것은 즐거운 영으로 행할 가장 좋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이행하는 즐거움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찬양 받으시는 것은 땅 위의 하늘이다. 그 즐거움은 우리의 입을 죄의 쾌락에 대한 경험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한다.

3. 하나님 백성의 특수한 특권 때문에(4절).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을 택하셨음이로다.” 그러므로 야곱은 그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를 위해 한 백성을 선택하사 그들로 하여금 “이름과 칭예가 되게”(렘 13:11) 하셨다. 그러므로 야곱은 존귀하게 구별되어 찬양해야 할 풍부한 것을 갖는다. “이스라엘”은 만백성 중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다(출 19:5). 그들은 그에게 특유한 백성인 그의 “세굴라”(Segullah), 즉 그가 기뻐하며 그의 눈에 진귀하고 영광스러운 백성이다. 이것은 다른 것과 구별되는 놀라운 은총으로, 야곱의 자손들이 그를 찬송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해 아래서 가장 무가치하게 은혜를 모르는 백성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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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위엄과 인자하심(시 135:5-14)

시편 저자는 앞에서 우리에게 우리의 즐거운 찬양의 합당한 대상으로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제시해 주었다. 여기서는, 우리의 경외의 찬양의 합당한 대상으로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해박하다. 우리는 앞에서 이것을 조금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Ⅰ. 그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교의를 주장한다(5절). “여호와께서는 광대하시며”, 실로 위대하시다. 그는 시간이나 공간의 한계를 넘어서신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주장한다. “나는 그가 광대하신 분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그것을 그 증거의 관찰에 의해서 알 뿐만 아니라 그 계시에 대한 믿음에 의해서도 안다. 나는 그것을 안다. 나는 그것을 확신한다. 나는 내 영혼에 작용하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나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그것을 알고 있다.” 그는 그들이 그에 대항하는 동맹에 가담하려고 할지라도 모든 현학자들에 대한 거룩한 도전으로 그것을 주장한다.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신 위에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신들 위에 계시며, 그들 위에 무한하게 높이 계시며, 그와 그들 사이에는 비교할 수 없는 거리가 있다.

Ⅱ. 그는 하나님이 그의 권능의 광대함에 의해서 위대한 하나님이 되심을 입증한다(6절).

1. 그는 절대적인 권능을 갖고 계시며, 그가 원하는 것을 하실 수 있다.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다 행하셨도다.” 아무도 그를 통제할 수 없고, “당신이 무엇을 합니까?” 하고 말할 수도 없다. 그는 그가 기뻐하시기 때문에, 그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시며, 그의 어떤 일들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않으신다.

2. 그는 전능한 능력을 갖고 계시며, 그가 원하는 것을 행할 수 있다. 만일 그가 역사하신다면 아무도 방해할 수 없다.

3. 이러한 절대적인 전능한 권능은 우주적인 영역에 미친다. 그는 “천지와 바다”, 바다 밑바닥이나 땅 속에 있는 “모든 깊은 데서” 그가 원하는 것을 행하신다. 이방의 신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으며, 모든 것을 행하신다.

Ⅲ. 그는 하나님의 위대한 권능에 대한 예를 든다.

1. 자연 세계에서(7절). 자연의 모든 힘은 자연의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증명한다. 자연은 그로부터 기원했으며, 그에게 의존한다. 자연의 인과의 연쇄는 처음부터 그에 의해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 의해 계속 보존된다.

(1) 수증기가 물과 뭍으로 된 지구에서 일어남은 바로 그의 힘에 의한 것이다. 태양열이 수증기를 일으키지만,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권능을 가진다. 그러므로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가 없도다”(19:6)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일례로 주어진 것이다. 그는 땅에서부터, “땅 끝에서”, 즉 땅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에서 “안개를 일으키신다”(우리는 도울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

(2) 그러한 안개를 일으켜 비를 이루시는 분도 바로 하나님이시다. 땅은 안개로 보내는 것을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풍성한 소나기로 이득이 더해져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3) 같은 안개로부터 그는 “비를 위하여 번개를 만드신다”(그것도 그의 놀라운 권능이다). 번개로써 하늘의 병을 여시고, 구름을 진동시켜 땅에 비가 내리게 하신다. 여기에서 불과 물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의해 철저하게 융합되었다. 그것들이 함께 있지만, 물이 불을 끄지 못하며 불이 물을 핥아버리지도 못한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기뻐하실 때 하늘에서 내려온 불과 같다(왕상 18:38).

(4) 다른 목적으로 작용하는 같은 수증기가 바람으로 바뀐다. 바람은 원하는 대로 불고 원하는 범위까지 분다. 우리는 그 방향을 알지 못하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말할 수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바람을 그 곳간에서 내신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신중한 왕이 그의 재무국에서 돈을 발행하라고 명령하는 것처럼, 가장 정확성을 기하고 목적에 부합되게 행한다.

2. 인간들의 왕국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전에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인자하심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의 증거가 된다. 기적들을 행하는 데 쓰인 사람 모세에 의해 기록되기 시작한 구약성서의 진리의 확증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지배와 대항할 수 없는 권세를 관찰해 보자.

(1) 많은 재앙으로 바로를 겸손하게 만들고,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보내게 했던 애굽으로부터의 이스라엘 구원 사건에서 이러한 재앙들은 “징조”와 “기사”로 불렸다. 그 재앙들이 섭리의 통속적인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개개가 신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바로와 그 모든 심복에게 임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종, 그의 아들, 그의 처음 난 자라고 주장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재앙에서 제외되었고, 어떠한 재앙도 그들의 거처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인간과 가축에서 처음 난 것의 죽음은 모든 재앙 중에서 가장 큰 것이었다. 그것이 목적을 이루게 했다.

(2) 그들 앞에 있던 가나안 왕국들을 멸망시킨 사건에서(10절). 이스라엘에게 할당된 땅을 소유했던 자들은 소유를 지키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 백성은 수가 많았고, 전쟁을 좋아했으며, 이스라엘에 대항해 제휴했다. 거대한 국가가 약하고 천한 왕을 가졌다면, 거짓을 드러내는 것이다. 오히려 이 거대한 나라들은 “강한 왕”을 갖고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때림을 당하고 살육 당했다. 즉, “시혼과 옥과 가나안의 모든 국왕이로다”(10-11절). 지옥이나 땅의 어떤 권세도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막을 수 없다. 정한 때가 왔기 때문이다.

(3) 약속의 땅에 그들을 정착시킨 사건에서. 그가 기뻐하는 자에게 왕국을 주시는 하나님은 가나안을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유업이 되도록 주셨다. 가나안은 상속으로 그들에게 전해 내려왔다. 그들의 조상들은 소유하지 못했어도 그 약속을 받았다. 그리고 가나안 땅은 그들의 후손에게 기업으로 전해졌다. 이것은 오래 전에 이루어졌지만, 하나님은 이제 그로 말미암아 찬양 받는다. 그리고 아주 당연하게, 자녀들은 이제 그 은택을 즐거워한다.

Ⅳ.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의 항구성을 찬양한다.

1. 그의 영광에 대해서(13절). “여호와여, 주의 이름이 영원하시니이다.”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표명은 영원한 열매요 결과다. “무릇 하나님의 행하심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전 3:14). 그의 이름은 그의 백성들의 끊임없는 영원한 찬양에서 영원할 것이다. 그의 기념은 교회의 모든 세대를 걸쳐 존재하며, 지금까지 내려왔고, 장차 대대에 이를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일컬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 출애굽기 3장 15절에 관해 언급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덧붙이기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고 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며 신실하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는 그의 교회에 동일하시다. 그의 교회는 감사의 찬송을 부르는 백성이며, 그에게 항상 동일하다. 이와 같이 그의 이름은 “영원하다.”

2. 그의 은총에 대해서 그는 그의 백성에게 친절하시다.

(1) 그는 자기 백성과 싸우는 자들에 대한 그들의 항소를 변호하신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실 것이다.” 즉, 그는 그들을 위해서 판단하시며, 그들이 비방됨을 참지 않으실 것이다.

(2) 그는 영원히 그들과 다투지 아니하신다. 오히려 “그 종들을 긍휼히 여기시리로다.” 결코 그들과 논쟁하는 자리에 들어가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그들을 위해서 자비를 베풀며, 또는 그가 그들에게 위로를 베풀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자비의 방식에 따라 갚아주시며, 그들에게 선을 행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이 구절은 모세의 노래에서부터 유래된 것이다(신 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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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에의 초대(시 135:15-21)

이 구절들이 쓰인 목적을 다음에서 살펴보자.

Ⅰ.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숭배와 모든 거짓된 예배행위에 대해서 무장하도록 한다. 우리가 앞에서 읽은 경우와 같이(115:4 등)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들의 종류를 열거함으로써 무장하게 하는 것이다.

1. 그들은 저희가 만든 신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런 힘도 가질 수 없으며, 수공자들이 만든 것일 뿐이다. 수공자들이 만든 우상에게서 무슨 능력을 받을 수 있겠는가? “우상은 사람의 수공물이라.” 우상에게 주어졌다고 상상되는 신성도 인간의 공상과 생각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2. 그들은 동물의 형체를 가졌지만 작은 행동도 할 수 없고, 동물적인 생활 중에 가장 작은 행위도 할 수 없다. 그들은 “보지 못하며,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며, 아무 기식도 할 수 없다.” 우상에게 “눈과 귀와 입과 목구멍”을 만들어 넣은 것은 하나의 조롱거리였다. 사람들은 거짓 신상에게서 어떤 선한 것을 기대하기 위해 합리적인 피조물로 투영해 놓고, 어떻게 하는가를 보려고 한다.

3. 그러므로 우상 숭배자들은 우상과 같이 미련하고 무감각하다. 섬기기 위해서 만드는 자들이나 우상을 신뢰하는 자들이나 모두 그와 같다(18절). 감각의 대상으로, 몰지각하게 그러한 신들을 예배하는 것은 예배자들을 감정적이며 미련하게 만든다.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우리를 영적이며 지혜롭게 한다.

Ⅱ.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진실한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서 진정한 헌신을 하도록 감동시키려는 것이었다(19-21절).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나라들의 상황이 한탄스러울수록 우리는 더 잘 알게 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다음에서 우리의 할 바를 살펴보자.

1. 예배의 행위를 준비하고 그 일에 전념하자. “여호와를 송축하라.” 그리고 반복해 “여호와를 송축하라.” 평행구에서(115:9-11) 우상들의 무능을 추론해 냄으로써 우리에게 부과된 의무는 바로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를 송축하는 것”이 마찬가지의 의무로 나타나 있다. 우리의 신뢰를 하나님께 둠으로써 우리는 그에게 영광을 돌린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그에게 감사할 조건이 결핍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를 찬양하라고 부르심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의 족속”(국가 일반)과 “아론의 족속”, “레위의 족속”(여호와의 성소에 있는 그의 성직자들), 그리고 이스라엘 족속은 아니지만, “여호와를 경외하는” 모든 다른 사람들.

2.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여호와는 찬송받을지어다.” 찬사는 “시온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이 지은 모든 것이 그를 찬송하며, 그의 성도들이 그를 송축한다. 그들은 찬사를 표하기 위해 멀리 갈 필요가 없다. 그가 “예루살렘에 거하신”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교회에 거하신다. 그들은 교회의 일원이며, 하나님은 항상 그들의 경의를 받기 위해 그들 곁에 계신다. 땅에서 사람들과 함께 거하는 그의 은총의 겸손은 우리의 은혜롭고 감사한 회답을 요청하며, 우리의 반복되는 할렐루야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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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김소월

눈을 감고 잠잠히 생각하라
무거운 짐에 우는 목숨에는
받아가질 안식을 더 하라고
반드시 힘있는 도움의 손이
그대들을 위하여 기다릴지니

그러나 길은 다하고 날이 저무는가
애처로운 인생이여
종소리는 배바삐 흔들리고
애꿎은 조가는 비껴 올 때
머리 수그리며 그대 탄식하리

그러나 끓어앉아 고요히
빌라 힘있게 경건하게
그대의 맘 가운데
그대를 지키고 있는 아름다운 신을
높이 우러러 경배하라

멍에는 괴롭고 짐은 무거워도
두드리던 문은 멀지 않아 열릴지니
가슴에 품고 있는 명멸의 그 등잔을
부드러운 예지의 기름으로
채우고 또 채우라

그러하면 목숨의 봄두던의
살음을 감사하는 높은 가지
잊었던 진리의 봉우리에 잎은 피어
신앙의 불붙는 고운 잔디
그대의 헐벚은 영을 싸 덮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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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h;(1984, 할랄) 밝게 비추다, 자랑하다, 찬양하다
할랄(동사)은 (a) 밝게 비추다, (b) '자랑하다, 찬양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65회 나온다(창 12:15, 삿 16:24, 욥 44:8, 시 49:6, 시 73:3, 렘 50:38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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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5650, 에베드) 노예 slave, 종 servant
에베드(명남)는 아바드(db'[; , 5647: 일하다, 섬기다)에서 유래했으며, '노예 slave, 종 servant'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800회 나온다.
(a)  에베드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노예'이긴 하지만 이스라엘에서 노예 신분은 그렇게까지 넌더리 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노예 신분도 여러 권리들을 지니고 있었고 종종 신뢰할 만한 지위도 소유했기 때문이다. 동료 이스라엘인은 그의 뜻에 거스려 무기한으로 노예로 삼을 수 없으며 그 기간은 6년으로 제한되었다(출 21:2). 심지어 노예를 그 주인의 금전으로 기술하는 매우 항의를 많이 받고 있는 출 21:20-21의 서술도 하나의 '실리적인 사상'이 아니라 오히려 주인에 의한 육체적 학대를 통제하는데 기여하였다.
악한 의도가 있었음이 증명되는 경우(출 21:14)나 종이 죽는 경우(출 21:20)에는 언제든지 그 주인은 형벌을 면할 수 없었다. 만약 주인의 의도가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경우 상해를 당한 노예는 최소한 자유를 얻으며(출 21:26-27) 주인은 대부금을 잃는다(출 21:21).
또한 창 24장 이하, 창 41:12(참조: 창 15:2)에 언급된 종의 영예로운 위치를 주목하라.
(b)  왕의 신하들은 왕의 모든 봉신들(vassal kings, 삼하 10:19)및 속국들(대상 18:2, 대상 18:6, 대상 18:13)과 마찬가지로 그의 종들이다(창 21:25, 출 7:28). 관리들("신하" 삼상 19:1), 공무원들("시신", 왕하 22:12), 사절들("신하들", 민 22:18)을 포함하여 왕에 대한 직무를 맡은 모든 자들도 역시 왕의 종들이다(창 40:20).
(c)  '종'이라는 용어는 종종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공손하고 겸손한 말로 사용되었다(창 33:5). 이것은 "당신의 개 같은 종" 등등과 같은 표현에서처럼 극단적일 수도 있다(왕하 8:13, 삼하 9:8). 텔 엘 아마르나 서판들(Tell el Amarna tablets)과 라기쉬(Lachish) 서신들 2, 5, 6번을 참조하라. "당신의 종" 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자주 사용되었다(출 4:10, 시 19:12, 시 19:14, 시 109:28).
(d)  '종'이라는 용어의 가장 중요한 용법은 메시야를 지칭하는 것인데, 이 용어는 메시야에 대한 구약성경의 가르침을 나타내는 가장 두드러진 인격적, 전문적 용어이다. 메시야에 대하여 중심적인 가르침을 주는 구절들은 이사야의 마지막 27장들(즉 사 39-66장)에서 발견된다. 거기에서 이 단어는 단수로 20회(사 39-53장), 복수로 11회(사 54-66장) 나타난다.
(e)  단수로 쓰인 20회 용례 중 12회와 복수로 쓰인 11회의 용례에서 종은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킨다. 단수가 나타나는 구절들로는 사 41:8-10, 사 42:18-19, 사 43:9-10, 사 44:1-3, 사 44:21, 사 45:4, 사 48:20, 아마도 사 49:3이고 복수가 나타나는 구절은 사 54:17, 사 56:6, 사 63:17, 사 65:8-9, 사 65:13-15, 사 66:14이다. 윌리스 비처(Willis Beecher)가 상기시켜주는 바와 같이 이것은 단순한 인종집단으로서의 종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다른 무엇을 나타낸다. 이것은 또한 아브라함 및 다윗과 맺은 약속(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원주민이든 주민으로 받아들여진 자들이든 상관없이 이 약속에 참여하는 민족인 이스라엘과 영적인 이스라엘 둘 다를 가리킨다.
(f)  또한 몇몇 구절에서 종은 실제 이스라엘과 구별되며 이스라엘에 대하여 선교사명을 띠고 있다(사 49:1-9, 사 42:1-7, 사 50:4-10, 사 52:13-15, 사 53:1-12). 이 종은 종으로서의 이스라엘과 동일시되어야 하면서도 그들에 대하여 사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동시에 구별되어야 한다(사 49:5-6에서 분명히 진술되어 있다. 참조: 사 49:3). 분명히 이 종은 그 이름을 그들 나라와 민족에게 남기어 그 동일한 이름이 그들 나라와 민족 양자 모두를 가리키게 하는, 이름의 시조가 되는 영웅들과 반대된다. 여기에서 그 집단의 핵심적인 일원은 처음보다 오히려 마지막에 온다. 그 집단에는 프란츠 멜리취(Franz Delitzsch)의 설명에서 맨 밑바닥은 모든 이스라엘 민족을 나타내고(사 42:19), 중간은 영적인 이스라엘, 즉 본토 신자들과 양자로 받아들여진 신자들(사 41:8-10)을 나타내고, 꼭대기는 메시야, 즉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피라미드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는 세 집단 간에 통합적 연대성이 있다.
또 다른 견해는 이 구절들에서 두 명의 종, 즉 사 42:19, 사 49:3 등에 나오는 소경인 실패한 종 이스라엘과 사 42:1과 사 49:5, 사 50:10, 사 52:13과 사 53:11에 나오는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종 메시야를 본다.
이 용어를 언약의 백성에게 적용시키는 선지자로 이사야 외에도 있다. 렘 30:10, 렘 46:27-28, 겔 28:25, 겔 37:25을 또한 보라. 이 단어는 렘 33:21-22, 렘 33:26, 겔 34:23-24, 겔 37:24-25에서 다윗, 약속의 메시야에게 적용되며, 학 2:23에서는 다윗의 후손 스룹바벨에게 적용된다. 특별히 흥미로운 점은 이 단어가 메시야적 칭호인 '가지' branch("순", 슥 3:8)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g)  다른 종교적 용법들로서 이 단어는 모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 worshipers(모든 셈족 사람들이 예를 들면 "바알의 종", 마르둑 등과 같이 그들의 거짓 신들을 가리킬 때도 흔히 사용하는 표현이다), 성전에 있거나 성전에서 봉사하는 모든 종들,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여호수아, 갈렙, 다윗, 히스기야, 엘리야김, 스룹바벨과 같은 하나님의 종들로서의 독특하고 유일한 역할로 그들의 여호와를 섬긴 자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또한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칭호인 "나의 종들", 혹은 "그의 종들" 혹은 "당신의 종들"이라는 표현이 24회 나온다.(참조: W. C. KAISER;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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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f(2896, 토브) 좋은, 선한, 즐거운, 선, 이익, 번영, 복지
토브(형용사)는 토브(b/f , 2895)에서 유래했으며, 형용사로는 '좋은, 선한, 즐거운, 유쾌한', 명사로는 '좋은 것, 선, 이익, 번영, 복지'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60여회 나온다.
'선한'은 실제적인 혹은 경제적인 이익을 언급하는 것으로 잘 나온다. 좋은 열매(창 2:9)와 바로의 꿈에 나타난 이삭(창 41:5, 창 41:36)은 먹기에 좋은 것이었다.
요셉의 노예상태가 "좋은" 것은 양식과 민족의 생존 같은 실재적인 이익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선하지 못한" 모세의 재판에는 실제의 행정적인 불이익도 포함되었다: "모세의 장인이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하는 것이 선하지 못하도다"(출 18:17).
토브로 전달된 다른 실제적인 선은 아합에게 거부한 승리의 약속(대하 18:7); 환대와 우정(창 26:29); 유익한 충고(삼하 17:7, 삼하 17:14); 일반적인 경제번영(왕상 10:7); 농업 번영(호 10:1, ASV); 그리고 하나님의 의지(암 9:4) 등이다.
그러나 국가의 풍기를 문란케한(느 5:9) 강포한 삶(잠 16:29)과 행동은 "선하지 못하다"고 일컬어 진다.
노동의 "선"은 일에서 얻은 실제적인 이득을 가리키는 것 같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전 3:13, 참조: RSV '기쁨' pleasure).
"선"은 여러 가지 광범위한 추상적인 관점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선한 이름은 명성이나 평판의 관점에서 볼 때, 후손보다 더 낫다: "내가 내 집에서, 내 성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사 56:5). 다윗이 제후인 아기스에게 충성한 것은 "선한 것"으로 묘사된다: "아기스가 다윗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내 목전에 하나님의 사자 같이 선한 것을 내가 아나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은 말하기를 그가 우리와 함께 전장에 올라가지 못하리라 하니"(삼상 29:9, RSV '흠이 없는' blameless).
엘리후는 진리나 타당성과 관련 지어볼 때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결정하라고 동료들에게 요구했다: "우리가 스스로 옳은 것은 택하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 보자"(욥 34:4).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있어, 노를 더디 내는 것은 이상적인 용사의 폭력적인 힘보다 더 바람직하였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마찬가지로,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아이는 고집 센 왕보다 "더 나았다"(전 4:13).
이 단어는 심미적이거나 감각적인 선함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비친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이나 매력(창 6:2), 리브가의 아리따움(창 24:16), 그리고 밧세바의 아름다움(삼하 11:2)을 묘사한다. 이 단어가 사람을 묘사할 때, 영어의 관용구는 '잘생긴' handsome이란 말을 사용한다(삼상 16:12).
감각적인 기쁨이나 좋은 것은 "단"이라고 묘사하는 데에서(렘 6:20), 그리고 다메섹의 물이 요단의 흙탕물보다 더 "낫다"는 나아만의 판단(왕하 5:12)에서 나타난다.
다른 것보다 더 나은 것으로서의 한 포도를 묘사하는 데에는 감각적인 매력도 포함되어 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이제 행한 일이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삿 8:2).
'선한'은 자주 '행복한' happy을 나타낸다. 이것은 왕이 결혼하는 때를 묘사한다: "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왕에 대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같도다"(시 45:1). 행복한 축제일은 "좋은 날"로 묘사되기도 한다: "왕의 조명이 이르는 각 도, 각 읍에서 유다인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로 경절을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에 8:17, RSV '휴일' holiday; 참조: 삼상 25:8).
"좋은 마음"은 행복을 나타낸다(대하 7:10, 잠 15:15).
행복은 술에 의해 야기되기도 하는 것 같다(전 9:7).
토브를 포함하는 관용어로는 선호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는 "[어떤 사람의] 눈에 선한"이란 용법이 있다. 이런 용법의 예들로는 도망친 노예가 어떤 곳을 거처로 택함(신 23:16, RSV "그를 기쁘게 하는 곳), 그리고 슬로브핫의 딸들이 남편으로 택함(민 36:6)이 있다. 하나님의 뜻은 이런 식으로 표현될 것이다(삼상 3:18). 이것은 타락하고 죄에 가득찬 욕망을 묘사한다(창 19:8, 삿 19:24). 이런 경우에, 이 관용어는 도덕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토브는 우수한 질이나 상재적인 가치에 대한 개념도 포함한다. 이런 식으로 이 단어는 하윌라의 "정"금(창 2:12)과 고급 향유(아 1:3, RSV "바르는 기름" anointing oils)를 묘사한다.
우수한 장인은 모세가 "준수하다" (즉 고귀하다)고 묘사되는 경우(출 2:2)처럼, 인간의 성품의 특성이나 고귀성과 마찬가지로 이런 식으로 지칭된다(사 41:7).
토브의 중요한 용법은 도덕적인 선을 가리킨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시 34:14, H15)라는 명령은 분명히 "선"을 도덕적인 악과 대조 시킨다. 하나님께서 다루기 어려운 자기 백성을 가르치실 "선한 길"은 도덕적인 삶을 가리킨다(왕상 8:36). '선한'과 '옳은'을 뜻하는 야샤르는 종종 도덕적인 선을 뜻하는 유사한 말로 나온다(대하 14:1, 대하 31:20).
토브는 하나님에 대해 사용되었다.
어떤 용법들에는 앞에서 논의된 둘 이상의 의미의 영역들이 뒤섞여 있다. 옛 언약의 "좋은 땅"은 실제적이며, 경제적이며 미학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신 1:25, 수 23:13).
마찬가지로, "선한 분"으로서의 하나님 개념도 "선한"이란 단어의 모든 가능한 의미들을 충분히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은 선하시며(시 106:1, 대상 16:34), 좋으신 주님이시다(시 52:9).
구약성경에서 선의 개념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신앙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하나님의 개념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적인 것으로서의 선의 개념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선은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은사이며, 그렇기 때문에 선은 인간의 힘의 통제권 밖에 존재한다(창 3:5).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단지 '선'이 아니라 선하신 성품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사상이 철두철미하게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인식이 구약성경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 개인의 관계가 성숙해지는 과정에서 더욱 발전하였다.
하나님만이 오로지 선하신 분이시다라는 사실은 구약성경에서 그가 선택한 백성을 구원하신 것, 율법을 주신 것(신 30:15, 잠 28:10), 그리고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출 18:9, 신 10:29이하)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명백해졌다. 이스라엘인들은 하나님의 창조 활동(창 l:1-8)에서건, 그의 말씀에서건(사 39:8), 그의 영에서건(시 l43:10), 심지어 그가 반대자들에게 말하기 위해 나타나셨을 때 조차도(창 50:20) 그에게서 유래되는 모든 것은 선하다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하나님을 오로지 선하신 분으로 찬양하는 새로운 계기로 발전하였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한 그의 사역에서 선(참조: 출 l8:9)을 행하시는 바 그 목적은 구원이며, 율법을 통해 인간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는데 있다. 선은 이미 행해져 왔으며, 또한 준비되어 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약속했던 선은 메시야적, 종말론적 구원에서 실제로 성취될 것이다(레 32:39 - 42; 사 52:7). 한편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통하여 선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선을 행하는 자는 선하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도움,없이 가능할 것인가는 논쟁이 되고 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도움,없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전 7:20).
랍비 유대주의는 하나님의 선함이 구원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했다. 선한 것과 성취 가능한 것은 율법에 계시되어 있다. 하나님의 법을 실행할 때 비로소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고 또 선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선은 오로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동료 인간들 사이의 인격적 관계에서만 실행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앞의 논의에 비춰볼 때, 각 개별 용법은 앞의 의미들 중 어느 것이 가능한지를 고찰하기 위해 분명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수많은 문학적인 표현들은 특별한 취급을 필요로 한다. "선과 악"은 보편성에 대한 관용어로 이용된다(민 24:13, 삼하 13:22). 어떤 이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이런 보편성을 뜻하는 관용어에 지나지 않는다고 시사하였다(창 2:9). 그러나 창세기 앞부분의 문맥은 전체적으로 이 어구의 도덕적 의미에 기초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선한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곧 동의나 수용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도덕적 판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왕하 20:19, 참조: 삼상 20:7).
"선한 눈"은 관대함을 나타낸다(잠 22:9, RSV '관대한 눈' bountiful eye ).
전도서에서, "선을 보다" to see good는 좋은 것이나 삶의 기쁨을 경험하다로 번역된다(전 5:18, RSV '기쁨을 발견하다' find enjoyment; 전 6:6, RSV '선을 향유하지 못하다' enjoy no good).(참조: A. BOWLING; E. BEYREU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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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n:(5273, 나임) 즐거운, 사랑스러운, 아름다운, 노래하는
1. 나임(형용사)은 나엠(![en: , 5276)에서 유래했으며, '즐거운, 유쾌한'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1회 나온다.
(a)  나임은 '즐거운, 유쾌한'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울과 요단(삼하 1:23), 재물이나 보배(잠 24:4), 말(잠 23:8), 성도의 교제(시 133:1), 여호와 찬양(시 135:3, 시 147:1), 지혜로운 교훈을 지키는 것(잠 22:18), 지상적인 번영이나 형통(욥 36:11), 영적 즐거움(시 16:6, 시 16:11) 등 매력적이며, 기쁨을 주는 것을 묘사한다.
(b)  나임은 '사랑스러운, 아름다운'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아 1:16).
2. 나임(형용사)은 외국어에서 유래했으며, '노래하는, 감미로운 소리 내는, 음악적인'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회 나온다.
시 81:2에서 감미로운 소리내는 수금에 대해 사용되었다: "시를 읊으며 소고를 치고 아름다운 수금에 비파를 아우를찌어다".
삼하 23:1에서 이스라엘의 음악가나 노래 잘 하는 자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올리운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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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m'z:(2167, 자마르) 노래하다, 찬양하다, 연주하다
자마르(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노래하다, 찬양하다, 연주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5회 나오며, 여호와를 찬양하는데 사용되었다.
(a)  찬양의 노래는 출 15:2에 처음으로 나온다. 여기에서 모세는 홍해에서의 애굽인에 대한 승리를 노래한다. 이 동사는 삿 5:3, 드보라가 시스라와 그의 강한 병거의 격파를 기념하기 위하여 쓴 승리의 노래에서 사용된다(참조: 시 68:4[5], 시 68:32[33]).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사는 날 동안 그들의 목소리와 악기를 높여 여호와를 찬양한다(시 104:33, 시 146:2). 몇 구절에서 이 찬양은 여호와의 '이름'에 돌려진다. 왜냐하면 그 '이름'이 여호와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이다(시 66:4, 시 18:49[50], 시 135:3).
신실한 자들은 음악으로 '그 행사'(시 9:11[12])에 대하여, 그분이 이루신 '영광스러운 일' 혹은 '기이한 행동'(사 12:5, 시 105:2)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한다. 시 101:1에서는 여호와의 사랑과 정의가('인자와 공의') 찬양 받는다. 시 119:54에서 하나님의 '율례가 나의 노래의 주제이다'(NIV)고 한다.
사 24:16에서 노래의 말은 '의로우신 자에게 영광'이다. 시 47:7은, 하나님은 모든 지상의 왕이시므로 사람들은 그에게 '마스길'을 노래해야 한다고 한다. 또한 시 45장의 제목에서 의미가 불확실한 이 용어가 발견된다.
(b)  자마르는 악기와 직접 연관되어 사용되었다. 수금(시 71:22), 열 줄 비파(시 33:2, 시 144:9), 하아프(시 98:5, '수금'), 탬버린(시 149:3, '소고')은 모두 하나님을 찬양할 때 '연주하기' 위해 사용된다.
시 149:3의 병행구는 춤으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에 대한 언급이다: "춤 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찌어다". 이런 언급들을 고려해 볼 때, 자마르나 그 동족어가 나오는 곳에서 반드시 노래하는 것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c)  자마르는 부정적인 의미의 노래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사 25:5은 여호와께서 '포악한 자의 노래'를 멈추게 하심으로써 가난하고 궁핍한 자에게 그의 신실하심을 보여주신다고 한다.
암 5:23에서 이스라엘이 공평과 의를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절기에서 부르는 노래와 음악 듣기를 거부하신다고 한다.(참조: R. L. Har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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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gus](5459, 세굴라) 소유, 소유물, 재산
세굴라(명여)는 사용되지 않은 어근 사갈(lg"s;: 재물을 얻다)에서 유래했으며, '(귀중한) 소유, 소유물, 재산' possession, property을 의미하며, 기본의미는 개인의 재산이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8회 나오며, 그러나 신학적, 영적 의미로 가득 차 있다.
코헤렛(Qoheleth)은 가장 좋은 것을 개인 소유로 축적하여 두는 일은 순전히 무익한 일이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대심판의 때에도(말 3:16-18) 결코 잊지 아니할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말 3:17).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개인 소유였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시 135:4).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속박에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것이 이스라엘의 선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그 족장들에게 주신 약속에 충실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생각나게 하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며 그의 명령을 따라 살아야 하는데(신 14:2 이하) 이는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고(출 19:5-6)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갱신한 그 언약의 조건들에 전심으로 순응하여 사는 생활 가운데 그의 규범을 깊이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매우 훌륭하게 성공하게 될 것이다(신 26:16-19). 모든 신자들도 이와 같이 될 것이다. 신명기의 이러한 구절들은 의심 없이 딛 2:14과 벧전 2:9에 암시되었다.(참조: R. D. Patterson;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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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j'B;(977, 바하르) 선택하다, 결정(결심)하다
바하르(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선택하다, 결정(심)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70회 나오며, 대부분 칼형으로 사용되었으며, 니팔형(6회)과 푸알형(1회)은 몇 개 절에만 사용되었다.
(a)  이 어근의 개념은 분명히 '예리하게 살피다' take a keen look at(KB)이다. 따라서 이 단어가 사 48:10과 잠언의 니팔 어간 용례(예: 사 10:20 "정선한 은")에서 '시험' testing이나 '검사' examining라는 의미를 지니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또한 이 어근은 아랍어 바하라(쪼개다 cleave, 땅을 갈다 till the ground, 통찰하다 penetrate)와 관련이 있으며, 따라서 '구별하다' distinguish와 같은 그러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고 시사되어 왔다. 그러나 아카디아어 베룸(선택하다 choose, 시험하다 test)은 가장 중요한 셈어 병행어이다(J. N. Oswalt).
(b)  바하르는 사 40:20에서 적절한 재료(우상을 위한 목재)의 선택을 묘사하며, 창 6:2에서는 신중한, 동시에 좋아함과 욕구의에 의한 아내의 선택을 묘사하며, 창 13:11에서는 롯이 가장 유망하게 보이는 일부분의 땅을 선택한 것을 묘사한다.
잠언에서는 니팔형이 다른 것과 비교할 때 특히 바람직한 대상을 묘사하는 데에 사용된다. 분별력, 하나님을 경외함, 지혜, 요컨대 헌신과 하나님 앞에서의 순종 생활은 은과 금보다 더 우선적으로 선택되어야 한다(잠 8:10, 잠 8:19, 잠 16:16).
바하르는 또한 백성들에 의한 왕의 선택이라는 의미로도 발견된다(삼삼 8:18). 분사형인 바후르미로도 발견된다(삼상 8:18). 분사형인 바후르와 바히르는 특별히 선택된 정예 부대(삿 20:15 이하, 삼상 24:2, 대하 25:5) 또는 적절한 재료(출 14:7, 전차)를 묘사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
바하르는 언제나 신중하게, 잘 생각해서 행한 선택이란 의미를 포함한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참조: 삼상 17:40, 왕상 18:25, 사 1:29, 사 40:20).
(c)  바하르는 여러가지 가능성들 중에서의 신중한 선택이란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다(부과된 형벌, 삼하 24:12; 또는 약속된 보상, 삼하 19:39). 마지막으로 이 동사는 여호와와 다른 신들 사이의(수 24:15), 또는 하나님의 성전에서의 생활과 행악자들 세계에서의 생활 사이의 근본적이며 종교적인 결정에 대해서 사용된다(시 84:10).
(d)  바하르가 발견되는 대부분의 경우에서 선택을 행하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곧 선택을 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시다. 이것은 특별히 신명기,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 그리고 시편의 일부, 이사야서에서 그러하다. 하나님의 선택의 대상으로서, 다음과 같은 것들이 묘사되어 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께서 특별한 임무를 위해 택하여 내신 백성들과(신 4:37, 신 7:7, 신 14:2)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위하여 예배와 희생제 실행의 중심지로서 지명한 곳은 다른 모든 곳을 배제하는 한 장소(히브리어, 마콤; 헬라어, 토포스)이다(신 16:6 이하, 신 18:5 이하, 신 26:2). 열왕기상(왕상 11:13, 왕상 11:32, 왕상 14:21)과 역대하(대하 6:34, 대하 6:38, 대하 12:13)에서 이 장소는 보다 엄밀하게 다윗의 성으로 제한된다(시온의 선택에 대해서는 예루살렘). 다윗 자신도 이 문맥에서 선택된 자로 묘사된다(왕상 8:16, 왕상 11:34). 제사를 말하는 부분에서 우리는 제사장들의 선택도 발견한다(신 18:5, 삼상 2:28, 대하 15:2, 대하 16:41, 레위인들도 포함한). 사울과 다윗은 왕으로 택함을 받은 자로 간주된다(삼상 10:24, 삼상 16:8-10, 그리고 특히 삼하 6:21, 그러나 이 구절과 삼상 8:18 간의 대조점을 주의해 보라). 마지막으로 이사야서의 후기 장들에서 백성들의 선택에 대한 신명기적 진술들이 종과(사 43:10), 그리고 백성들의 대표자로서의 야곱과 아브라함(사 41:8)에게 적용된다(L. Coenen).
하나님의 선택은 이 모든 경우에 선택하는 분은 단순한 임의성보다 실용성에 염두에 두고 있다. 예를 들어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거룩한 자로 택하시어 열방들 가운데서 그의 증인이 되도록 택하셨다(신 14:6). 그러나 이스라엘이 선택된 것은 이스라엘 자신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크신 사랑 때문이다(신 7:7 이하). 이스라엘이 선택되었다는 것은 포로생활과 복구에 의해 확증된다. 왜냐하면 이제 이스라엘은 새로운 방식으로 주님을 만방에 증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사 41:8 이하, 사 43:10, 사 48:10). 하나님의 선택 능력에 관한 성경의 교리는 우주의 중심에 맹목적 기계론이 아닌, 목적과 인격이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일을 위해 특정한 사람들을 신중하게 택하셨으므로, 만일 그들이 이 목적에서 벗어날 때는, 그들을 거절해 버릴 수도 있다(삼상 2:27 이하)(J. N. Oswa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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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OdG:(1419, 가돌) 위대한, 큰 great
가돌(형용사)은 가달(ld'G: , 1431)에서 유래했으며, '위대한, 큰 great'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20회 나온다.
(a)  가돌은 크기와 범위에서 '큰'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바다(민 34:6), 강(창 15:18), 광야(신 1:19), 비(왕상 18:45), 산(슥 4:7), 도시(창 10:12), 집(렘 52:13), 제단(수 22:10), 보좌(대하 9:17), 바다 괴물(창 1:21), 물고기(욘 2:1), 독수리(겔 17:3), 상수리 나무(삼하 18:9), 재물(창 15:14), 부요(단 11:2), 승리(삼상 19:5), 우물(삼상 19:22).
(b)  가돌은 수에서 '큰'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민족(창 12:2), 회중(무리)(렘 31:8), 진영, 군대(대상 12:22, 겔 17:17), 희생 제사(왕하 10:19), 살륙(신 28:59, 삼상 4:17).
(c)  가돌은 강도에 있어서 '큰'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두려운 일(신 4:34), 통곡(사 38:3), 권능(출 32:11), 기쁨(욘 4:6), 진노(신 29:23), 분노(렘 21:5), 죄(창 20:9), 죄벌(창 4:13), 악(창 39:9), 침해(겔 9:7).
(d)  가돌은 소리가 '큰'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큰소리(창 39:14), 큰 곡성(출 11:6), 외침(수 6:5).
(e)  가돌은 나이에서 '큰'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맏아들(창 27:1), 큰 딸(창 29:16), 큰 형(창 10:21), 큰 형(여)(겔 16:46).
(f)  가돌은 중요성에서 '큰'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중요한 일이나 사건(출 18:22, 신 4:32, 삼상 12:16, 왕하 5:13, 왕하 8:13, 렘 30:7, 호 1:11, 욜 2:11, 욜 2:31, 습 1:14, 말 4:5), 위대한 사람(출 11:3, 삼하 5:10, 욥 1:3, 에 9:4, 전 9:14, 렘 27:7 등), 하나님에 대해(대하 2:4, 느 4:8, 느 8:6, 시 86:10, 시 99:2, 시 135:5, 사 12:6, 렘 10:6 등), 역사, 영광, 이름, 자비, 동정 등에 대해 사용되었다.
(참조: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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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j;(2654, 하페츠) 기뻐하다, 즐거워 하다
1. 하페츠(동사)는 기본어근이며, '기뻐하다, 즐거워 하다'를 의미한다.
기본적인 의미는 '어떤 것에 대해 큰 호의를 느끼다'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유사한 어근들, 즉 하마드, 하샤크, 그리고 라차와 구별되며, 그 이유는 이 어근들이 감정적인 것을 별로 함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마드와 하샤크는 일반적으로 '바라다' desire로 번역되며 라차는 필요나 승인의 판단에 의거한 호의를 '수락하다' accept를 의미한다. 하페츠는 그 객체가 그 자체의 본질적인 속성으로써 호의를 갖도록 유혹하며, 주체는 그것이 탐나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그것에 매혹당하는 경우에 사용된다. 어느 정도 이와 비슷한 네 번째 어근 '길'은 훨씬 더 큰 감정적인 의미를 함축한다. 여기에서 주체는 즐거워 하는 태도와 행동으로 자기의 기쁨을 표현한다.
구약성경에서 하페츠는 75회 나오며, 칼형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감정적인 기쁨을 경험하다'를 의미한다.
이런 기쁨은 인간도 느낄 수 있고 하나님도 느낄 수 있다. 남자들은 여자에 대해서 이것을 경험한다고 한다. 하몰의 아들 세겜은 야곱의 딸 디나를 보고 "기뻐"했다: "이 소년이 그 일 행하기를 지체치 아니하였으니 그가 야곱의 딸을 사랑함이며 그는 그 아비 집에 가장 존귀함일러라"(창 34:19).
아하수에로 왕의 미인선발 대회에 참가한 경쟁자들은 왕이 한번 보고 난 후 그들을 기뻐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에게 다시 가지 못했다: "저녁이면 갔다가 아침에는 둘째 후궁으로 돌아와서 비빈을 주관하는 내시 사아스가스의 수하에 속하고 왕이 저를 기뻐하여 그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면 다시 왕에게 나아가지 못하더라"(에 2:14).
사람들은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서 이것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사울왕이 자기 딸 미갈을 다윗과 결혼시키려고, 종에게 지시하기를, 다윗에게 가서 왕이 그를 "기뻐"한다고 전하라고 하였다: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명하되 너희는 다윗에게 비밀히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왕이 너를 기뻐하시고 모든 신하도 너를 사랑하나니 그런즉 네가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이 가하니라 하라"(삼상 18:22).
이 기쁨은 사건과 일에 대해서 경험될 수 있다. 요압이 다윗에게, 왜 인구조사를 하려고 하는가, 왜 군사들을 모으려고 하는가(파카드를 보라), 즉 왜 그것을 기뻐하는가를 물을 때,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요압이 왕께 고하되 이 백성은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되"(삼하 24:3). 이 단어는 또한 어떤 활동에 대해 기뻐하는 백성들에게도 사용되었다. 아하수에로 왕은 하만에게,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에 6:6).
이 단어의 또 다른 용법은 독립적인 의미로 나온다. 예를 들면, 아가서에 되풀이하여 나오는 표현,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 깨우지 말찌니라"에서 그렇게 나온다(아 2:7, 아 3:5, 아 8:4).
이 단어는 어떤 백성들을 기뻐하는 하나님에 대해 사용되었다. 구원의 노래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자기를 구출해 주셨다고 말한다(삼하 22:20). 스바 여왕은 하나님이 솔로몬을 "기뻐하셨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송축하였다(왕상 10:9).
하나님은 인간들의 선행에 대해 이런 기쁨을 느낀다고 한다. 예를 들어 그는 안식일을 지키고 율법을 준수하는 것(사 56:4)과 "자비"와 "하나님을 아는 것"(호 6:6), 그리고 "진리"(시 51:8)를 기뻐하신다. 자신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신다(시 115:3, 시 135:6).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는 여호와의 천사가 자기 자신과 아내에게 나타났으므로, 그들이 죽을까봐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하기를 "기뻐"하셨더라면 그들의 재물을 받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대답했다(삿 13:23).
2. 하페츠(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몸을 구부리다 bend down'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욥 40:17에서 1회 나온다: "그 꼬리 치는 것은 백향목이 흔들리는 것 같고 그 넓적다리 힘줄은 서로 연락되었으며".
포프(Pope)는 욥 40:17(AB)에서 "활 모양으로 구부려져 있는 것"이 꼬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가정한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작은 꼬리를 가진 하마를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꼬리"라는 단어가 부속 기관을 의미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경우에 그 부속 기관은 백향목처럼 뻗쳐있는 몸통일 것이다(Lisowsky).(참조: L. J. WOOD;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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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c;[;(6213, 아사) 일하다, 행하다, 만들다, 형성하다, 이루다
아사(동사)는 기본 어근이며, '일하다, 행하다, 만들다, 형성하다, 이루다'를 뜻하며, 그 기본 의미는 '행하다, 만들다'이다. 이 단어는 많은 표현에서 항상 동일한 기본 개념을 지닌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630회 나오며, 칼형, 니팔형, 푸알형으로 사용되었다.
(a)  아사는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서 매우 자주 나타나며, 이는 중요하고도 매우 흥미롭다.
바라(ar:B: , 1254)는 칼형에서 (1) 관련된 대상의 개시, (2)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 (3) 창조된 대상의 완전한 새로움, (4) 무에서 창조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아사는 의미의 영역이 훨씬 넓으며, 어떤 특수한 어감을 거의 지니지 않은 채 대상의 형성을 주로 나타낸다. 아사는 자주 바라와 상호 교대로 사용되어 단순히 창조 과정에서 관련된 대상들을 조성하거나 만드는 행동을 나타내는 반면에 바라는 그 물체에 대한 창시를 강조한다(참조: 창 1:1).
창 1:7에서 하나님께서 '창공(궁창)이 있으라'고 명령하셨으면 창공은 만들어질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공을 만드셨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것은 창공이 있으라는 명령이 창공이 실존하기에 불충분함으로 보충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진 이후 그것이 실현되기까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계속적으로 발휘되었음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성령의 역사를 감지할 수 있다.
아사는 하나님께 사용되면 흔히 역사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활동을 강조한다. 이러한 문맥들은 구약성경 신학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 즉 하나님은 초월적이실 뿐만 아니라 역사 안에 내재하셔서 그의 주권적인 목적을 이루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모세는 애굽에서의 하나님의 크신 행사들을 회상하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백성들에게 상기시킬 수 있었다(신 29:1). 하나님께서 여러 민족들에게 행사신 일은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심을 증거해 준다(수 23:3). 솔로몬은 봉헌 기도에서 하나님께서 "행동하실" 것을 간청한다(왕상 8:39). 아사는 종종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대해 사용되어(수 24:17, 시 98:1, 사 25:1)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내재하심에 관하여 크게 강조함을 다시 증명한다.
아사는 구약성경의 그 밖의 곳에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여러 측면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시 86:9, 시 95:5, 시 96:5).
(b)  아사는 윤리적인 의무의 개념으로 종종 사용된다. 언약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행하라'는 명령을 자주 받는다(출 23:22, 레 19:37, 신 6:18, 등). 이 개념이 나타나는 무수한 문장은 하나님께 윤리적으로 응답하는 것의 중요성을 입증해 준다. 여기에서 응답은 단순한 정신적인 추상적 개념을 넘어선 것이며, 논증할 수 있는 행동에서 분명이 증거되는 순종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아사는 선악간에 행하는 것(창 3:14, 창 20:10, 왕하 12:3, 왕하 14:13, 왕하 8:18, 왕하 8:27, 신 16:12, 신 30:8, 민 15:39 등)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사는 죄, 잘못에 대해 사용될 때 '저지르다, 범하다'라는 의미를 지니며(호 6:9), '~에 대하여 행동하다'(슥 1:6), 그리고 충고를 따른다는 의미에서 '따르다'(삼하 17:23)를 뜻한다.
(c)  아사는 어떤 것을 만들다(출 20:4, 신 9:12, 창 3:21), 전쟁하다(창 14:2, 수 11:8, 신 20:12, 신 20:20), 친절하게 대하다(삿 1:24), 신실함을 보여주다(창 32:10), 제물을 드리다(출 10:25), 어리석게 행동하다(신 22:21), 희생제물을 드리다(출 10:25), 유월절을 지키다(출 12:48), 복수하다(삿 11:3), 식물이 열매를 맺다(창 1:11), 음식을 준비하다(창 18:7 이하), 직무를 행하다(왕하 17:32), 화해하다(사 27:5), 제사장들을 세우다(왕상 12:31, 왕상 13:33), 사용하다(삼상 8:16), 보내다(전 6:12) 등을 의미하거나 그런 의미를 구성한다.
(참조: T. E. Mccomiskey; BDB; 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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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5927, 알라) 올라가다, 오르다
알라(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올라가다, 오르다, 올라오다'를 의미하며, 여기서 '떠나다, 멀리가다, 끌려가다, 높여지다, ~에 달하거나 미치다, 가져오다, 취하여 가다, 바치다, 높이다' 등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900회 나온다.(참조: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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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x;y:(3318, 야차) 나가다, 나오다, 떠나다, 앞으로 가다, 나가게 하다, 이끌어내게 하다
야차(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나가다, 나오다, 떠나다, 앞으로 가다', 히필형에서 사역적 의미, '나가게 하다, 나타나게 하다, 이끌어내게 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000회 나오며, 칼형과 히필형으로만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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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k;n:(5221, 나카) 치다, 때리다, 죽이다
나카(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치다, 때리다, 죽이다 smit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00회 나오며, 니팔, 푸알, 히필, 호팔형으로 사용되었다.
동사 나카는 종종 한 번의 치명적이 않은 타격으로 대상을 '치거나 때리는 것'을 가리켜 사용된다. 사람이 나귀와 같은 동물을 '때릴' 수 있고(민 22:23, 민 22:25, 민 22:27), 또한 사람의 뺨(시 3:7, H8, 애 3:30)이나 눈(출 21:26)을 '칠' 수 있다. 출애굽기는 모세의 지팡이가 하수(출 7:17), 티끌(출 8:16, H12, 출 8:17, H13), 반석(출 17:6)을 '쳤다' struck고 기록한다. 사람은 물매돌(삼상 17:49), 화살(왕상 22:34), 혹은 창(삼상 19:10, 참조: 삼상 26:8)과 같은 날아가는 물체의 목표물이 되기도 한다. 어근 나카는 또한 양심에 타격을 받는 것(참조: 사울의 옷자락을 베었을 때의 다윗, 삼상 24:5, H6), 그리고 왕 앞에서 손뼉을 치는 것(왕하 11:12)을 언급할 수도 있다.
나카는 또한 어떤 대상을 매질하는 것을 묘사하는 구절들에서도 나타난다. 어떤 사람은 싸우는 가운데 타인에게 '매질'을 당할 수 있다(출 2:11, 출 2:13, 신 25:11). 느헤미야는 이방 여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몇몇 유대인들을 '때렸다'(느 13:25). 아가서에서, 성읍의 거리마다 그녀의 애인을 찾아 다니는 신부는 수라꾼들에게 맞는다(아 5:7). 구약의 율법은 어떤 범죄에 대하여 채찍질하는 것을 허용했음이 분명하다(신 25:2-3, 참조: 고후 11:24).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는 무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관원들에게 매질을 당했다(렘 20:2, 렘 37:15). 고난 받는 종도 마찬가지였으며, 그는 자기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내주었다(사 50:6, 참조: 마 26:67). 잠언은 지혜를 얻게 하고 훈육하기 위해 매질하는 것의 중요성을 언급한다(잠 19:25, 잠 23:13-14). '반복하여 친다'는 개념은 옥외의 모든 것들을 '내리 쳤던' struck down 애굽의 우박 재앙에서 역시 보여진다(출 9:25).
매우 많은 구절들에서 나카는 '살해하다, 죽이다, 쳐 죽이다'를 의미한다(참조: AV는 '살해하다' slay로 약 90회 가량 번역한다). 이 단어는 고의적으로든(삼하 2:23), 고의적으로가 아니든 간에(신 19:4), 타인을 살해하는 것(출 21:12, 수 10:26 등)에 대해 사용되며, 사람이 사자를 죽이는 것(삼하 17:35), 사자가 사람을 죽이는 것(왕상 20:36), 벌레가 식물을 공격하여 죽게 하는 것(욘 4:7)에 대해 사용된다.
또 다른 많은 구절에서 이 어근은 사람들의 무리(창 32:8, H9, 창 32:11, H12, 수 8:21), 집(암 3:15), 성읍(수 10:28 등) 같은 대상을 '공격하다' stack, '멸망시키다' destroy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 용법은 싸움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smitten(나카) 쓰러지거나(나팔) 부상당한다(할랄)고 언급하는 많은 예들과 관계가 있다. 따라서 기드온의 싸움에서 120,000명이 '쓰러졌다' fell(삿 7:10)고 했을 때 그것은 단지 그들이 싸움 중에 죽었거나 부상당했거나 실종되었으며 15,000명만이 전투 병력으로 남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따라서 또한 아비야가 여로보암을 대항하여 일으킨 전쟁에서 "그들은 그들을 크게 쳐서(막카) 쳐부수어(나카) 오십만명을 부상시켜(할랄) 쓰러뜨렸다(나팔)(참조: R. L. Harris, Man-God's Eternal Creation, Moody, 1971, pp. 155-56).
특별히 신학적 중요성을 지니는 것은 하나님께서 종종 나카의 주체가 되신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을 눈을 멀게 함으로(왕하 6:18), 그리고 재앙으로(신 28:22, 신 28:27-28, 신 28:35) '치시는' smites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하여 인간에게 심판을 내리시며(왕상 14:15, 레 26:24) 심지어 죽음도 내리신다(삼하 6:7). 마찬가지로 자연도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다. 왜냐하면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를 '쳤기' 때문이다(시 105:33).(참조: M. R. WILSON;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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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226, 오트) 표시, 표징, 징조, 표적
오트(남, 여)는 아와(hw;a; , 184: 표시하다)에서 유래했으며, '표시, 표징, 징조(후), 신호, 표적 sign'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8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오트는 창 1:14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으며, 기후와 때의 변화를 표시해주는 징조를 의미한다. 렘 10:2에서는 열국을 깜짝 놀라게 하는 징조(전조)로서 하늘의 변화를 언급한다. 시 65:9에서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b)  오트는 어떤 사람이나 집단을 특징적으로 표시해 주는 어떤 것을 나타낸다. 이 의미는 창 4:15에 강조되어 나온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mark, NASB에는 sign)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분명히 가인의 보호를 약속하신 것은 초기에 매우 일반적이며, 파멸을 초래하는 피의 복수를 억제하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심판의 표시로 말미암아 복수를 피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는다(A. M).
라합은 그녀를 방문한 이스라엘인 손님들에게 진실한 '표'(mark, NASB에는 '진실한 서약' pledge of truth으로 되어 있음)를 요구하였다. 그들이 그녀가, 그들을 창문을 통하여 성 밖으로 나가게 한, 붉은 줄을 표로 삼은 것이다(수 2:12, 수 2:18).
출 8:23에서 여호와께서는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에 구별을 두리니 내일 이 표징이 있으리라" 약속하셨다. 그것은 피의 표적이다(출 12:13).
시 86:17에서는 은총을 보증하는 표시를 언급한다.
(c)  오트는 언약의 표시, 곧 그것을 보증하는 표시를 의미한다. 무지개는 노아 언약의 표시며(창 9:12, 창 9:13, 창 9:17), 할례는 아브라함 언약의 표시이다(창 17:11).
안식일도 언약의 한 표시(징)이다. 안식일은 구약시대에서 할례의 표시(징)와 같은 부류에 속한 것이다. 출 31:13, 출 31:17과 겔 20:12 이하에서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표시(징)이며, 이방인과 구별하는 표시(징)로 주어진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내적인 은혜에 대한 외적 "증거"로서 의식을 언급할 때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런 "증거"를 사용하는 것이다.
(d)  오트는 군기나 기호에 대해 사용되었다(민 2:2, 시 74:4).
(e)  오트 "기적적인 징조" miraculous signs를 가리킨다. 출 4:8에서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이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둘째 이적의 표징은 믿으리라"고 한다. '표징들'은 선지자의 메시지의 정당성에 대한 증거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선지자를 평가하는 최상의 혹은 최종적인 도구는 아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과거의 계시에 준거하여 전해야만 한다(참조, 신 13:1-5).
애굽인들에게 내린 모든 재앙은 "이적"이란 의미의 보족어 모페트(mopet, 참조)가 자주 나온다(출 7:3, 신 4:34, 신 6:22, 신 7:19, 신 26:8, 느 9:10, 사 20:3, 등).
신 13:1 이하에 의하면, 꿈꾸는자든 선지자든, 참되든 거짓되든 간에 "표징"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f)  오트는 선지자의 상징적인 표시를 의미한다(사 8:18, 겔 4:3).
(g)  오트는 어떤 예언된 사건들에 대한 보증으로서 선지자로 말미암아 약속한 징조를 가리킨다(삼상 10:7, 삼상 10:9, 출 3:12, 삼상 14:10).
오트는 아하스에게 행한 이사야의 유명한 예언에서도 사용되었다(사 7:11, 사 7:14). 궁전계단 위로 나아간 해 그림자는 고통을 당하고 있던 왕 히스기야에게 주신 하나의 "증거"였다(왕하 20:9, 사 38:7).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제물로 드린 음식을 태움으로써 기드온에게 "표징"을 보여주셨다(삿 6:17). 재앙이 있으리라는 예레미야의 위협적인 말의 성립은 하나의 참된 "표징"이었다(렘 44:29). 반면에 이사야는 거짓말하는 자의 "징조"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사 44:25).
(h)  오트는 때로 증거물로서의 표시 token를 의미한다. 아론의 지팡이는 패역한 자에 대한 하나의 "경고"였다(NAB와 히브리어 성경에는 민 17:25, 한글 개역성경에는 민 17:10에 나옴). 요단의 돌(수 4:6), 제단을 싸는 편철(민 16:38), 그리고 애굽에 있는 증거 기둥(사 19:20), 손의 기호(출 13:9) 등도 이와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 민 16:38의 제단을 싸는 편철은 경고하는 표징이다.
(i)  오트는 욥 21:29에서 여행자들의 증거를 가리킨다. 여행자들, 즉 여행을 많이 해서 인간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자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 그들의 오토트(증거들)를 너희가 부인하거나 무시할 수 없다.(참조: BDB; R. L. Alden;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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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pe/m(4159, 모페트) 이적, 기사, 표시, 징조, 전조
모페트(명남)는 야파(hp;y: , 3302)에서 유래했으며, '놀라움, 경이 wonder, 기적, 이적 miracle, 표시, 표징 sign, 징조, 전조 portent'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3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이적, 기사': 하나님의 능력의 특별한 표명으로서 '기적, 이적'(출 7:3, 출 11:9, 시 105:5, 대상 16:12).
모세와 아론에 의한 이적(출 4:21, 출 11:10, 출 7:9).
거짓 선지자에 의한 이적(신 13:1, 신 13:2, 신 4:34).
일반적으로 이적에 대한 언급(신 6:22, 신 7:19, 신 26:8, 신 29:3, 시 78:43, 시 105:27, 시 135:9, 렘 32:20, 렘 32:21, 느 9:10).
(b)  '표시, 증거': 신적 보호의 표시(시 71:7).
악한 자들을 벌하시는 신적 공의의 증거나 표시(신 28:46).
(c)  '전조', 미래 사건의 '징조': 왕상 13:3, 대하 32:24, 대하 32:31.
상징적 행동(사 20:3), 사람(사 8:18, 겔 12:6, 겔 12:11, 겔 24:24, 겔 24:27, 슥 3:8).
(참조: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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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l'v;(7971, 샬라흐) 보내다, 뻗치다, 쫓아내다, 내보내다
샬라흐(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보내다, (손을) 뻗치다, 쫓아내다, 내보내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850회 나오며, 칼, 니팔, 피엘, 히필, 푸알형으로 사용되었다.
동사 샬라흐는 '보내다', '내보내다', '풀어 주다'를 뜻하며, 다툼과 불화의 측면에서 사용될시 '펴다', '전개하다'를 의미하고, 손이나 막대기에 사용될 때는 '내밀다', '내뻗다'를, 뿌리와 가지에 사용될 경우 '뻗다', '뻗어나가다'를, 그리고 에쉬(불)와 함께 쓰이면 '불붙이다'를 의미한다.
(a)  샬라흐는 사람이 타인을 모처에 보낸다든지(창 28:5, 창 37:13) 또는 사람이 공물이나(삿 3:15) 편지를 보낸다(왕상 21:8, 왕하 5:5)는 표현에 사용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종종 사람들을 자기의 사자, 대리자로서 어떤 공적 임무에 보내는 것으로 묘사된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자기의 선지자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경고하도록 커다란 열심을 가지고 그들을 보낸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참조: 사 6:8, 렘 1:7, 렘 25:4, 렘 26:5, 렘 35:15, 겔 2:3-4, 삿 6:8).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보내지 않았다(렘 14:14-15). 모세는 하나님의 대리자였고(출 4:28, 신 34:11) 기드온도 그러하였다(삿 6:14). 선지자들의 메시지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것으로 간주된다(슥 7:12, 사 9:8). 그리고 그 메시지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것이다(사 55:11).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구주를 보내어 마음이 상한 자들을 싸매 주고 갇힌 자들을 해방시켜 준다는 사실이다(사 61: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해낼 때 표적과 기사를 보내었다(시 135:9). 그러나 그들이 만일 자기에게서 돌아서서 우상에게로 향하게 되면 그들에게 견책과 혼란과 저주를 보낼 것이라고 경고한다(신 28:20).
(b)  샬라흐의 '내보내다', '쫓아내다'라는 의미는 일반적으로 피엘형에서 발견된다(창 12:20, 창 18:16). 창 3:23은 분명히 추방을 뜻하며 렘 28:16은 죽음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혼은 아내를 내어 보내는 것이다(신 22:19, 신 22:29, 사 50:1).
(c)  샬리흐는 '풀어주다, 해방하다'를 의미하며, 역시 주로 피엘형으로 발견된다. 이 때는 손님이 떠나는 것을 정식으로 허용한다는 가벼운 의미로 사용되거나(창 18:16, 창 24:54) 또는 애굽의 이스라엘과 같은 노예들(출 4:21), 바벨론 포로들(사 45:13) 그리고 구덩이의 죄수들을 풀어준다(슥 9:11)는 보다 강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시 81:12에서는 하나님이 거역하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임의로 행하도록 버려두어 그 결과를 감수하게 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 위에 여러가지 형태의 재앙을 풀어 놓는다는 구절들도 피엘형이 사용된 이상, 물론 이와 동일한 범주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보호의 손길을 거두고 여러가지 적대적 세력을 풀어놓는다는 의미이다(민 21:6, 렘 9:16, 암 4:10, 기타 등등).
(d)  샬라흐는 다툼을 '펴다, 전개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잠 6:14, 잠 6:19).
(e)  샬라흐는 손을 '내뻗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삼상 24:6에서 이런 의미를 나타낸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시 110:2에서 메시야는 열국을 통치할 때 자기의 홀을 뻗친다. 렘 17:8과 겔 17:6에서 뿌리와 가지가 뻗어 나간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f)  샬라흐는 '불붙이다, 불을 보내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호 8:14, 암 1:4, 암 1:7, 암 1:10, 암 1:12).(참조: H. J. Aust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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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h;(2026, 하라크) 죽이다, 살해하다
하라크(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죽이다, 살해하다 kill, slay'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67회 나오며, 칼, 니팔, 푸알형으로 사용되었다.
1. 칼형에서 이 단어는 '죽이다, 살해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동물을 죽이는 것 뿐만 아니라 살인 및 사법적 사형의 개념도 포함한다.
이 단어의 맨 처음 용법은 아벨의 피 - 복수를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는' 아벨의 피를 흘린 가인의 범죄를 기록한다(창 4:8). 다윗은 이스보셋의 살해자들을 사형에 처하도록 명하였다(삼하 4:11-12). 동일한 단어가 창 9:6의 명령에 부합하는 살인 및 사법적 사형 모두를 나타내는데 사용된다. 살인자는 사형에 처해졌는데, 이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그 범죄를 용인하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는 것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나아가 살인은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인 것(왕상 18:13), 레위와 시므온이 세겜 족속을 살해한 것(창 34:26),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일(삼하 3:30)과 같은 것들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하라크는 하만에 의한 유대인 살해계획(에 3:13, 에 7:4), 방어와 복수에서 유대인의 원수들을 살해하는 것(에 8:11, 에 9:6, 에 9:10, 에 9:12, 에 9:15, 에 9:16), 전쟁에서 죽이는 것(민 31:7, 민 31:8, 민 31:17, 수 8:24, 수 10:11, 삼하 10:18, 왕상 9:16, 겔 26:8, 겔 26:11 등), 하나님이 심판으로 죽이는 것(창 20:4, 출 4:23, 출 13:15, 암 2:3, 암 4:10, 암 9:1, 암 9:4, 애 2:4, 애 2:21 등),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사람이 행사하는 살해(출 32:27, 레 20:15, 레 20:16, 민 25:5, 신 13:10, 겔 9:6), 짐승을 죽이는 것(민 22:29, 레 20:15, 사 22:13, 사 27:1), 짐승이 사람을 죽인 것(사자: 왕하 17:25, 뱀: 욥 20:16).
2. 니팔형에서 이 단어는 '죽음을 당하다, 살해되다'를 의미한다(애 2:20, 겔 26:6, 겔 26:15).
3. 푸알형에서 이 단어는 '살해되다, 죽음을 당하다'를 의미한다(사 27:7, 시 44:22).
(참조: BDB;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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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k,zE(2143, 제케르) 기억, 기념물
제케르(명남)는 자카르(rk'z: , 2142)에서 유래했으며, '기억, 상기, 회상 remembrance, 기념(물) memorial'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2회 나온다.
(a)  제케르는 '기억'을 의미한다. 이것은 '기억' memory이라는 정신 활동을 가리킨다. 어떤 집단에 대한 기억의 상실은 그 집단의 완전한 멸망을 나타낸다. 이러한 집단의 예로서 아말렉인(출 17:14, 신 25:19), 사악한 자(욥 18:17, 시 34:16), 원수(시 9:6) 혹은 일반적인 인간(전 9:5)이 포함된다.
제케르는 여호와에 대한 '기억'을 묘사한다(시 6:5, 시 102:12).
제케르는 여호와의 성품과 행사에 대한 기억을 묘사한다(시 30:4, 시 97:12, 시 111:4).
제케르는 특별한 날에 대한 기억, 즉 기념적인 절기를 준수하는 것을 묘사한다(에 9:28).
시 112:6에서는 의인에 대한 영원한 '기억'에 대해 사용되었다: "저가 영영히 요동치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념하게 되리로다".
(b)  제케르는 '기념물'을 의미한다. 그것에 의해 사람이 기억하게 된다. 잠 10:7, 전 9:5, 특별히 여호와에 대하여, 출 3:15, 호 12:5, 사 26:8, 시 135:13.
제케르는 호 14:7에서 이스라엘의 명성(renown)을 묘사한다: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찌라 저희는 곡식 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참조: BDB; TWOT; 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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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Di(1777, 딘) 심판하다, 다투다, 변호하다
딘(동사)은 기본 어근이며, 심판하다, 다투다(또는 노력하다), 설득(간청)하다, 변호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4회 나온다(창 6:3, 창 15:14, 창 30:6, 욥 36:31, 시 7:8, 잠 22:10 등).
창 6:3에서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 하리니"는 '그가 사람과 다투거나 설득하지 아니할 것이다'를 의미할 수 있다. NASB, NIV, Green은 이런 의미로 번역하였다. 이 경우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로 120년 동안 노아 시대 사람들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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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n:(5162, 나함) 후회하다, 위로하다
나함(동사)은 기본어근이며, '후회하다 repent, 위로하다 comfort'를 의미하며, '회개하다, 애석해 하다, 유감으로 생각하다'라는 의미도 함축한다. 이 어근의 기원은 '깊이 숨쉼' 따라서 사람의 감정, 주로 슬픔, 동정, 위로의 육체적 표출이라는 개념을 반영하는 것 같다. 이 어근은 우가릿어(UT 19: no 1230의 '위로하다'를 보라)에서 나타나며 느헤미야, 나훔, 므나헴과 같은 구약성경에 언급된 고유명에서 발견된다. 70인역본은 나함을 메타노에오와 메타멜로마이로 번역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00회 이상 나오며, 니팔, 피엘, 푸알, 히트파엘형으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후회하다'라는 의미로 약 40회, '위로하다'라는 의미로 약 60회 이상 사용되었다.
(a)  나함은 '후회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니팔형으로 38회).
학자들은 이 단어를 성질의 변화, 마음의 변화, 목적의 변화, 또는 행위의 변화에 대한 강조와 연관시킴으로 말미암아 나함의 의미를 확인하려 한다.
'후회하다'라는 의미에서 대부분의 실례가 인간의 후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후회를 언급한다. 인간의 후회나 회개를 나타내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단어는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이키다(to turn)'를 뜻하는 슈브(bWv , 7725)이다. 죄를 자각하여 진정한 후회와 비애를 느끼는 인간과 달리, 하나님은 죄에서 자유하신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후회하신다는 것(창 6:6-7, 출 32:14, 삿 2:18, 삼상 15:11 등), 즉 그는 자신의 주권적 목적에 따라서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거나 사람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말해준다. 표면상으로 볼 때 이런 언어는 하나님의 불변성을 단언하는 어떤 구절들과 상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조화하지 않는 것 같이 보인다(참조: 삼상 15:11, 시 110:4).
그러나 나함이 하나님께 사용될 때 그 표현은 신인동형론적인 것이며 궁극적 긴장은 없다. 단지 인간의 제한되고 세상적이고 휴한한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뜻이 변화한 것 같이 보일 뿐이다. 그리하여 구약성경은 하나님께서 행하기로 작정하셨던 심판이나 재앙을 내리시기를 '후회하셨다', 즉 '돌이키셨다'고 말한다(대상 21:15, 렘 18:8, 렘 26:3, 렘 26:19, 암 7:3, 암 7:6, 욘 3:10). 확실히 렘 18:7-10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예언이 인간의 반응에 따라 조건부적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상기시켜 준다. 이와 관련하여 헤셀(A. J. Heschel)은 '어떠한 말씀도 하나님의 최종적인 말씀이 아니다. 인간의 행동이 변화하면 하나님의 심판도 변한다'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후회에 대해 좀더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창 6:6에서 하나님은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 이 구절에서 '후회하다'는 마음을 바꾸거나 뜻을 돌이키는 것을 함축한다. 하나님은 그가 이미 행한 일에 대해 사람처럼 후회하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는 변화된 그 상황과 조화하는 방향으로 행동하셨다. 인간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변경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죄를 범할 때 하나님은 교제의 관계를 징계의 관계로 바꾸신다. 인간이 죄로부터 하나님께 돌아올 때 하나님은 교제의 관계를 회복시키신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를 완전히 심판의 관계로 바꾸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후회하심, 곧 돌이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후회하시거나 뜻을 돌이키지만 인간과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신실하게 유지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마찬가지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repented, NASB는 'changed his mind'로 번역함)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때로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관련하여 시행하려고 계획했던 방침을 '돌이키신다'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repent)"(렘 18:8).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케 하리라 한 선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repent)"(렘 18:10).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repent) 재앙을 내리지 아니 하시나니"(욜 2:13). 다른 실례들에서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변경하신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분명히 인간이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서 마음을 바꿀 때 하나님께서도 마음을 바꾸신다. 그러나 인간이 악한 행위를 계속할 경우 악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바뀔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행위는 변하지만 그 자신의 의로우심에 대한 신실하심은 영원 불변하다.
어떤 상황에서는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기'(repenting)에 실증을 내시는데(렘 15:6),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규정을 수행해야 할 점이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행위의 실례로 사울에게 전한 사무엘의 말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사무엘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의 왕권을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repent)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삼상 15:29).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악한 행위에 대한 참회와 중재의 기도로 말미암아 자신의 마음을 바라고 자신의 행위를 '돌이키신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한 중보자로서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간청하였다.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repent)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출 32:12). 이 기원의 응답은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출 32:14)는 말씀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니느웨에 전한 말씀에서도 이 용례를 볼 수 있다.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turned)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repented of)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욘 3:10). 이러한 실례에서 하나님은 후회하시거나(repent) 그의 뜻을 돌이켜서(change his mind) 자신의 계획을 변경시키신다. 그러나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신실하게 유지되는 것이다.
다른 구절들에서 인간들의 태도의 변화(혹은 이 변화의 부족)를 뜻하는 말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사악함을 회개하지 않을 때에 반역을 선택하여 벌하신다(렘 8:6).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에브라임(이스라엘 북쪽 지파의 대표자) 지파가 회개(repent) 한다면(렘 31:19)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실 것이다(렘 31:20).
사람도 타인에게 회개를 표명할 수 있다. 베냐민은 부도덕한 죄를 범함으로써 심한 고통을 받았다(삿 19-20장). "이스라엘 자손이 그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repented) 가로되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끊쳤도다"(삿 21:6, 삿 21:15 참조).
(b)  나함은 '위로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피엘형에서 '위로하다', 니팔, 푸알, 히트파엘형에서 '위로 받다'를 의미한다.
① 나함은 바벨론 유수에서 살아남은 모든 경건한 유대인에게 잘 알려져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이사야의 '위로의 책'의 서언인 '나하무 나하무 암미'(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함'은 또한 '위로하다' (comfort)를 의미하기도 한다. 바벨론으로 망명한 자들은 생존자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도착했을 때 '위안을 받았다'(겔 14:23). 여기서 '위로하다'라는 말과 '후회하다(회개)'라는 말의 관계는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이 진실하다는 것에 대한 증거로서 예루살렘에 내린 재난에서 결과된 것이다.
동일한 단어가 시 23:4에도 나오는데, 여기에서 다윗은 그의 하늘의 목자에 대하여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말한다.
② 다윗은 밧세바의 죄 중에서 태어난 아이가 죽은 후에 그녀를 '위로하였다'(삼하 12:24). 이것은 그들의 부주의로 생긴 일에 대한 다윗의 후회를 지적하는 것 같다. 많은 구절들은 죽은 자들을 인하여 위로 받는 것("조상하다")을 다룬다(삼하 10:2, 대상 19:2, 사 61:2, 램 16:7, 렘 31:15). 사람들은 유아(삼하 12:24), 10대의 아들(창 37:35), 어머니(창 24:67), 아내(창 38:12) 등으로 인하여 위로받았다.
어머니는 자기 자녀를 위로함 같이(사 66:13)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로하신다(시 71:21, 시 86:17, 시 119:82, 사 12:1, 사 49:13, 사 52:9).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나훔, 나함의 파생어)이 따뜻하고 포근하게 된다'(호 11:8).
③ 다른 한편 이 단어는 인도적인 감정에 나온 '위로'에 대해 사용되었다. 욥은 세 친구들에게 물었다 - "이러한 즉 너희의 위로가 헛되지 아니하냐 너희의 대답은 거짓 뿐이니라"(욥 21:34, 욥이 뜻한 것은 그들의 태도는 잔인하고 무감각한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위로'(comfort)를 간구했다.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시 71:21).
④ 나함은 '애석해하다, 유감으로 생각하다, 동정하다'라는 의미도 나타난다(신 32:36 = 시 135: 14).(참조: M. R. WILSON; NEDOT;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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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D;(1696, 다바르) 말하다 speak
다바르(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말하다'를 의미하며, '말하다, 선언하다, 담화하다, 명령하다, 약속하다, 경고하다, 위협하다, 노래하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150회 나온다(창 8:15, 창 12:4, 출 9:13, 출 9:35, 출 11:2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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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7200, 라아) 보다, 바라보다, 조사하다
라아(동사)는 기본 어근이며, '보다, 바라보다, 조사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300회 이상 나온다(창 1:4, 창 1:12, 창 16:13, 창 17:1, 창 19:28, 창 21:16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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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238, 아잔) 듣다 hear
아잔(동사)은 '듣다, 귀를 기울이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40여회 나오며 대부분 명령형으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사마(듣다)와 학쉬브(주의하다)의 병행어로, 주로 시가서에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시가서가 아닌 책에서 사용될 때도, 라멕(창 4:23), 모세(신 32:1), 그리고 드보라(삿 5:3)의 노래와 같은 시적인 구절들에 사용되었다.(참조: H. Wolf; HE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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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r(7307, 루아흐) 숨, 바람, 영
루아흐(명여)는 루아흐(j'Wr , 7306: 숨쉬다, 불다)에서 유래했으며, 그 기본개념은 '움직이는 공기'이며 '숨(호흡), 바람, 영'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730회 나온다.
(a)  숨, 호흡 breath.
① 입의 숨: 욥 15:30 하나님의 입'김'; 참조: 욥 19:17 내 '숨'; 코의 숨 애 4:20 우리의 콧'김'(왕을 가리킴); 우상에 대하여 렘 10:14 "그곳에 생기가 없다"는 것은 '호흡'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시 135:7, 렘 51:17, 합 2:19.
② 명령적인 말, 루아흐는 입의 호흡 곧 말하는 것을 나타낸다. (1) 하나님의 명령, 시 33:6, 참조: 사 34:16. (2) 메시야 왕의 명령, 사 11:4.
③ 단순한 숨(인 말), 욥 6:26, 욥 16:3, 렘 5:13.
④ 분노의 거친 콧 숨: (1) 하나님에 대하여, 출 15:8, 삼하 22:16, 욥 4:9, 시 18:16, 사 30:28, 사 59:19. (2) 사람에 대하여, 사 25:4.
⑤ 생명의 표시와 상징, 창 6:17, 창 7:15, 창 7:22, "기식": 겔 37:5, 겔 37:6, 겔 37:8, 겔 37:9, 겔 37:10, 겔 37:14(숨 또는 영).
(b)  바람 wind.
① (하늘의) 바람 창 8:1, 출 15:10, 민 11:31, 왕상 18:45, 렘 10:13, 렘 51:16, 시 135:7, 호 13:15, 사 40:7, 참조: 욥 26:13. 동풍 출 10:13, 출 14:21, 시 48:8, 렘 18:17, 겔 17:10, 겔 19:12, 겔 27:26, 욘 4:8. 북풍 잠 25:23. 해풍(서풍), 출 10:19. 낮의 바람, 창 3:8. 사방 바람, 렘 49:36, 겔 37:9, 단 8:8, 단 11:4, 슥 2:10, 슥 6:5. 광풍, 시 107:25. 광풍 시 148:8, 겔 1:4, 겔 13:11, 겔 13:13, 시 55:9. 뜨거운 바람, 사 11:15. 바람의 인격화, 삼하 22:11, 시 18:11, 시 104:3, 참조: 호 4:19, 시 104:4.
② (바람의) 방향 quarter, 편 side. 겔 42:16 (동)편; 겔 42:17 (북)편; 겔 42:18 (남)편; 겔 42:19 (서)편; 대상 9:24 (동서남북) 사방; 렘 52:23 사면.
③ 공기 air, 가스 gas, 사 26:18, 사 33:11.
④ 무익, 공허한 것. 욥 7:7("호흡"), 나의 생명은 바람이다. 욥 15:2("헛된 지식"). 바람의 지식은 헛된 지식이다. 사 41:29. "우상은 바람이요" 우상은 무익하거나 헛된 것이다. 전 1:14, 전 2:11, 전 2:17, 전 2:26, 전 4:4, 전 4:6, 전 6:9. 바람을 잡은 것은 무익하거나 공허한 것을 잡은 것이다. 참조: 전 1:7, 전 4:16, 전 5:15.
(c)  마음의 자세, 기질, 성질, 생기(활기, 기운), 기분, 감정, 정신.
① 정신, 생기, 왕상 10:5, 대하 9:4 숨을 더 쉴 수 없는 정신 상태, 곧 넋을 잃는 것을 뜻한다. 창 45:27, 삿 15:19, 삼상 30:12 기운을 회복하는 것, 왕상 21:5 마음의 근심.
② 용기 courage. 수 5:1, 시 76:12(표준-군왕들의 "호흡"), 개역-방백들의 "심령". 사 19:3, 시 77:4, 시 142:4, 시 143:4, 수 2:11, 잠 18:14.
③ 기(성)질, 기분, 특히 분노, 수 9:23, 수 8:3, 잠 16:32, 참조: 잠 25:28, 잠 29:11, 욥 15:13, 슥 6:8, 전 7:9, 전 10:4.
④ 성마름(조급함)이나 참을성, 출 6:9. 참조: 미 2:7, 잠 14:29, 욥 32:18, 욥 21:4, 전 7:8.
⑤ (번민하거나 근심하는, 불만하는) 마음, 기질. 창 41:8, 창 26:35, 사 54:6, 참조: 겔 3:14, 욥 6:4, 욥 7:11, 삼상 1:15.
⑥ (압도당한, 꺾인) 마음, 기질. 겔 21:7, 참조: 사 61:3, 잠 15:4, 잠 15:13, 잠 17:22, 잠 18:14, 시 143:7.
⑦ 기타 성질 및 성향, 충동적인 성질. 대상 5:26, 대하 21:16, 대하 36:22, 스 1:1, 스 1:5, 렘 51:11, 학 1:14, 왕하 19:7 = 사 37:7, 민 14:24, 말 2:15, 말 2:16, 신 2:30, 민 5:14, 민 5:30(시기), 호 4:12, 호 5:4, 사 19:14, 사 28:6, 창 41:38, 잠 17:27.
(d)  예언의 영. 민 27:18, 왕하 2:15, 왕하 2:9, 사 29:10(참조: 창 2:21, 창 15:12, 사 19:14). 깊이 잠들게 하는 영. 미 2:11, 슥 13:2, 참조: 겔 13:3.
(e)  생물의 영, 숨쉬는 존재.
① 하나님의 선물과 창조. 슥 12:1, 욥 27:3, 참조: 사 42:5.
② 하나님은 영을 보존하신다. 욥 10:12, 욥 12:10, 민 16:22. 민 27:16, 잠 16:2.
③ 그러므로 그 영은 하나님의 영이다. 창 6:3,
④ 영은 죽을 때에 떠난다. 시 78:39, 사 38:16(생명의 원리), 시 146:4, 시 104:29, 시 104:30, 욥 17:1, 욥 34:14(참조: 15절), 사 57:16, 전 8:8, 전 11:5, 전 3:21, 전 12:7, 시 31:6.
⑤ 육체를 떠난 영혼. 욥 4:15.
(f)  하나님의 영, 곧 삼위일체의 제 3위인 성령.
① 대부분의 표현에서 여호와의 신(영)은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교적 의미에서 성령이라는 것을 문맥이 명백히 입증하며, 신약성경의 유비(analagy)가 강하게 시사해준다(A. F. Kirkpacrich cambridge Bible. Psalms 11. P 293).
② 최초로부터 하나님의 루아흐는 하나의 실재 혹은 인격으로서 태초의 수면에 운행하셨다. 이는 성령께서 한 인격으로 창조 사역에 참여하셨음을 시사한다. 창 1:2. 참조: 민 11:17, 민 11:25.
③ 처음으로 다윗이 그를 "성령"이라고 지칭했다(시 51:11, 참조: 사 63:10-11).
④ 이사야는 그들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자로 생각하든지 아니면 동료 화자로 생각하든지 간에 메시야,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사 48:16)를 인용하면서 그가 말할 때 그의 분명한 인격체를 말한다.
⑤ 하나님의 신의 역사는 창조 때에나(욥 26:13)나 섭리에서(욥 33:4, 시 104:30), 우주적이며, 중생에 있어서 구속적이다(겔 11:9, 겔 36:26-27). 하나님의 신은 신자를 지지하고 인도하기 위해 내주 하시며(느 9:20, 시 143:10, 학 2:5), 지도권(민 11:25, 삿 6:34, 삼상 16:13), 섬김(민 11:17, 삿 6:34, 삼상 16:13), 섬김(민 11:17, 미 3:8, 슥 7:12)을 위해 혹은 메시야(사 11:2, 사 42:1, 사 61:1)와 그의 백성들(욜 2:28 [H 3:1], 사 32:15)에게 능력을 제공해 주기 위해 임하신다.
(g)  초자연적 존재, 천사 같은 존재.
① 악한 영. 삼상 16:14, 삼상 18:10, 삼상 19:9.
② 참소하는 큰 영. 왕상 22:21.
③ 바람이나 불을 천사로 삼음. 시 104:4(참조: 왕상 19:11-12).(참조: BDB;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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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f'B;(982, 바타흐) 믿다, 신뢰하다, 의지하다, 안심하다, 안전하다
바타흐(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믿다, 신뢰하다, 의지하다, 확신하다', 여기서 '안심하다, 염려 없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의 기본적인 개념은 '확고부동' firmness이나 '견고함' solidity과 관련있는 것 같다. 어쨌든 히브리어에서 바타흐는 신뢰할 만한 것이나 사람이 있다는데서 오는 행복감과 안도감을 나타낸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20회 나오며, 칼형과 히필형으로만 사용되었다.
70인역본이 바타흐를 결코 피스튜오(4100: ~을 믿다 believe in)로 번역하지 않고 엘피조(1679: 소망하다, 기대하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다), 엘피스(1680: 소망, 기대), 아스팔레이아(803: 견고함, 안전함, 확실성)으로 번역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바타흐가 "믿음"에 포함된 계시에 대한 완전히 지적이고 의지적인 반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거나 확실하다고 느끼는 감정을 강조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 같다. 따라서 바타흐 어군은 '안전감'이나 '염려 없는 평온'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바타흐는 인간 관계에 사용될 때는 불안정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이웃과 함께 "마음 편히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쉽게 믿고 쉽게 속는 것으로 인하여 상처 받는 한편, 그들의 무방비한 태도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비난 받았다(참조: 세겜인들의 거짓된 안전대, 레위와 시므온의 잔인성, 창 34:25, 이스라엘의 거짓된 안전대, 곡의 잔인성, 겔 38:10-11). 잠 3:29은 믿고 있는 이웃을 속이는 것에 대해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의뢰한데서 오는 이런 확신감의 타당성을 다른 어떤 종류의 어리석은 안심과 대조 시킨다. 이런 모든 신뢰가 치욕과 수치로 끝날 것인데 반해(시 31:14, H15),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사람들은 원수에게서 구출되며(시 22:4, H5), 그들의 기도가 응답 받으며(대상 5:20), 그들이 똑바른 길로 가며(잠 3:5),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시 16:9, 시 33:21), 마음의 평안을 깨닫고 공포가 없어질 것임(시 4:8, H9, 사 26:3)은 분명하다. 그래서 여호와를 신뢰하라고 거듭 권고하고 있다(잠 16:20, 사 30:15, 렘 17:7).
바타흐는 가장 많이 사용되는 시편들(전부 181회 중 50회 사용)에서 대부분 일관성 있게 하나님을 믿는 것의 가치를 표현하고 있다. 이 구절들은 또한 소망의 근거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의 공적이나 일종의 "오는 말에 가는 말"(tit-for-tat)과 같은 그러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헤세드와 그의 확고한 신실하심과, 그의 자비로우신 애정에 있음을 지적해 준다.
겔 33:13은 어느 누구도 감히 생명의 소망을 자기 자신의 의로움에 기반을 둘 수 없음을 분명하게 말해주며, 렘 7:4, 렘 7:8, 렘 7:14은 신성한 문구(신근)와 건물을 믿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영생의 선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있다고 선포하는 신약성경을 예시해 준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소망은 일종의 불평하는 바람이 아니라 확신하는 기대이다. 그칠새 없는 근심이 통례였던 이방 종교들과는 달리 히브리 종교는 신뢰성과 확실성이 주된 성품이신 한 분 하나님을 알았다(신 33:28, 삼상 12:11, 시 27:3). 근심과 확신 사이의 이런 대조는, 이교도가 기교 없이는 결코 남아있지 못하고 이것을 통해서 자기가 스스로의 운명을 어느 정도 지배했다고 느낀데 반해, 경건한 히브리인은 개인적인 수단 없이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알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상기할 때, 훨씬 두드러진다. 변덕스러운 신들, 복수심에 불타는 악마, 그리고 불가사의한 마력의 바다에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인자하고 믿을 만한 하나님께 철저하게 의존하는 것이 더 낫다. 인간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다스림과 하나님의 완전한 신뢰성을 고려해 볼 때 인간이 하나님이 아닌 어떤 다른 것을 신뢰한다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든 해악으로부터 자동적으로 보호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기를 거부한다고 해서 반드시 가난과 박탈의 길로 들어서는 것도 아니다. 욥은 위로자들의 부드러운 확신에 대해, 어느 정도 통렬하게 비꼬면서 이런 분명한 모순을 지적하였다(욥 12:6, 욥 24:23). 그렇지만 욥도 고통가운데서 다른 어떤 안전의 근원도 결국에는 무가치해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욥 31:24, 욥 39:11, 사 50:10).
구약성경은 이런 거짓 안전의 근원을 어느 정도 상세하게 고찰하여, 하나님게 대한 소망의 탁월함과 대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거짓된 안전의 근원에는 인간(시 118:8, 시 146:3, 잠 25:19, 렘 17:5), 악(사 47:10), 폭력과 압제(시 55:23, H24, 시 62:10, H11, 사 30:12), 부(시 49:6, H7, 시 52:7, H9, 잠 11:28), 우상(시 31:6, H7, 시 115:8, 사 42:17, 합 2:18), 군사력(신 28:52, 시 44:6, H7 사 31:1, 렘 5:17, 호 10:13), 종교(렘 7:4, 렘 7:8, 렘 7:14), 자기 자신의 의로움(겔 33:13, 호 10:13), 이방인들과의 동맹(사 36:4 이하, 겔 29:16)이 포함된다. 특별히 성경은, 그런 만족의 보잘것없는 근거를 결코 평가하지 않고서 이런 만족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경멸한다(사 32:9-11, 겔 30:9, 암 6:1).
아마도 바타흐를 둘러싼 핵심 문제가 짧은 범위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곳은 왕하 18장 왕하 19장일 것이다. 여기에서 앗수르왕 랍사게는 하나님을 믿는 히스기야의 믿음의 가치에 도전하는데 이 믿음은 충분히 입증된다. 이 단어는 이 곳과 병행구절들에 20회 나온다(사 36-37장, 대하 32장). 인간관계에서는 단 하나의 믿음의 영역이 권고된다. 즉 현숙한 성품을 가진 아내를 믿는 남편(잠 31:11, NIV)에 대해서이다.(참조: J. N. Oswalt;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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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1288, 바라크) 무릎을 꿇다, 축복하다, 복을 주다, 찬양하다
바라크(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무릎을 꿇다, 축복하다(복을 주다), 찬양하다'를 뜻하며, 다른 의미로는 주로 하나님에 대하여 '저주하다, 욕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왕상 21:10, 왕상 21:13, 욥 1:11, 욥 2:5). 기본적으로 바라크는 '유익한 능력을 부여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구약성경에서 '축복한다'는 것은 '성공, 번영, 생산, 장수 등을 위한 능력을 부여한다'를 의미한다. 이 의미는 부여하는 과정과 부여 받는 상태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진정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다. 또한 바라크의 의미를 보면 무릎을 꿇는 것과 축복이나 복을 받는 것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1)  무릎을 꿇는 것, 곧 기도하는 것은 축복을 받는 비결이다.
대하 6:13(참조: 왕상 8:14, 왕상 8:54)을 보면 솔로몬은 성전 봉헌에서 놋대 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의 복은 백성들이 예배가 끝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갈 때 그들에게 내려졌다. 이렇게 하여 이 복은 그들의 일상 생활에 실현된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이삭의 신부를 구해오라는 주인의 부탁을 받고 메소포타미아 나홀의 성에 이르러 낙타를 그 성밖 우물 곁에 무릎을 꿇게 하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 종의 기도로 주인과 종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삭의 좋은 신부감을 얻는 복을 받은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열심히 기도하자.
(2)  무릎을 꿇는, 곧 여호와를 경배하는 것은 복을 받는 비결이다.
시 95:6이하에서 시인은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을 듣기를 원하노라"(빌 2:10, 빌 2:11)라고 말했다.
시인은 시 115:2이하에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무론 대소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라고 노래했다.
(3)  신앙 공동체는 자기가 받은 복에 대하여 여호와를 찬양함으로서, 곧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라는 외침으로 응답했다.
시 28:6, 시 28:7에서 다윗은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노래했다.
여러분 바라크라는 말을 기억하라.
바라크 -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다.
바라크 -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것이다.
바라크 -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이다.
바라크 - 받는 복을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이다.(참조: H. -G. LINK; 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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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y:(3373, 야레) 경외하는 (자), 두려워하는 (자)
야례(형용사)는 야레(arey: , 3372: 두려워하다, 경외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두려워하는, 경외하는'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6회 나오며, 명사적 의미와 형용사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두려워하는 자, 경외하는 자'라는 표현이 자주 나타난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자'는 실제적인 의나 경건을 자기의 두려움을 이행할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로서 욥은 악을 피한다: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1). 시 128:1에서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는 여호와의 길로 나아간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메시지에 응답함으로써 자기의 특별한 경건을 입증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악한 자와 대조된다(전 8:13). 하나님의 선하심(시 31:19), 필요한 것의 조달(시 34:9), 보호(시 33:18, 시 33:19), 보호하시는 자비(시 103:11)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는 약속(시 145:19)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제공된다.
야레의 흥미있는 용법은 시 22편에서 발견된다. 여기에서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라는 어구는 한편으로는 '야곱의 자손' 및 '이스라엘의 자손'과 병행되며(시 22:23), 다른 한편으로는 "대회"(시 22:25)와 병행된다. 이 병행구들, 특히 그 중에서도 마지막 병행구는 이 용어가 예배 드리기 위해 모인 예배 회중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 용법의 가능한 두 개의 다른 실례들도 발견된다(시 115:11, 시 115:13, 시 118:4).
야레는 또한 두려움의 감정이나 악에 대한 예상을 나타낸다(출 9:20, 신 20:8, 삿 7:3).
(참조: A. BOWLING;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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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7931, 샤칸) 정착하다, 거주하다, 머물다
샤칸(동사)은 기본어근이며, '정착하다, 거주하다, 머물다, 체류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25회 나오며, 칼, 피엘, 히필으로 사용되었다(창 3:24, 창 9:27, 창 35:22, 출 24:16, 민 10:12, 신 12:11, 신 14:23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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