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12.23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요1 : 1-18.무한풍성충만의Q말씀생명빛길진리은혜.아버지Q영광의 광채.창조주독생자JC.화육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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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말씀(JC...어떠하심..길.법.양식 --아버지의 나라...반드시 응함...그 진복에의 참여.누림 여부는 오직 순종에 달려 있음)..계시(reveal : 베일을 벗기다)..종교(근본과 으뜸되는 가르침)


개역개정]요1장  말씀이 육신이 되시다


**[[누가 하나님괴 같으랴!! ..하나님은 믿는, 절대긍정-절대신뢰-절대기쁨으로 하나됨을 사는 내게 절대 만족-절대진리-절대진복이요 영생이심 ]] 

^^피상적인 허망한 색성향미촉의 오감 중독/상대적 일시적 만족감을 초월한 근원적 절대만족(무한 풍성-부요-충만-능력) * 열납하시며 열어주사 누리게 하시는 바 절대기쁨/절대긍정/절대신뢰의 유일무이한 초월적 근원적 진리 샘(길-진리-생명) * 지고지선의 진복=요동없는 초월적 절대 평강의 하나됨/거함/누림/의지-빼어닮음/행복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일시적/파괴적/자멸의 허망함으로 귀결됨  ::: Q불신/배역함의 미혹 도구 :=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 = 5욕(식성수물명)추구 + 5감만족중독(색성향미촉) << Q 말씀안에는 원하는 바, 이 모든 것에 대한 근원적 만족-기쁨-누림의 무한 풍성충만-영원한 공급, 더 나아가 영생이 있음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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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새번역]제1장 육신이 되신 말씀

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2.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으니, 그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의 안에서 생겨난 것은 생명이었으니, 그 생명은 모든 사람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6.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 사람은 빛을 증언하러 왔다. 그 증언으로 모든 사람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 자신은 빛이 아니었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온 것뿐이다.

9.  ○그 빛이 세상에 오셨으니,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시다.

10.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11.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13.  그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났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 영광은 아버지께서 주신 독생자의 영광이며, 그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15.  (요한은 그를 증언하여 외쳤다. "이분이 내가 말씀드린 바로 그분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을 나보다 앞선 분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이분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그분은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16.  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한 데서 은혜 위에 은혜를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에게서 받았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18.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나, 아버지의 품 속에 계시는 독생자이신 하나님이 그분을 나타내 보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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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B]제1장 

1.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2.  He was in the beginning with God.

3.  All things came into being by Him, and apart from Him nothing came into being that has come into being.

4.  In Him was life, and the life was the light of men.

5.  And the light shines in the darkness, and the darkness did not comprehend it.

6.  There came a man, sent from God, whose name was John.

7.  He came for a witness, that he might bear witness of the light, that all might believe through him.

8.  He was not the light, but [came] that he might bear witness of the light.

9.  There was the true light which, coming into the world, enlightens every man.

10.  He was in the world, and the world was made through Him, and the world did not know Him.

11.  He came to His own, and those who were His own did not receive Him.

12.  But as many as received Him, to them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even] to those who believe in His name,

13.  who were born not of blood, nor of the will of the flesh, nor of the will of man, but of God.

14.  And the Word became flesh, and dwelt among us, and we beheld His glory, glory as of the only begotten from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15.  John *bore witness of Him, and cried out, saying, "This was He of whom I said, 'He who comes after me has a higher rank than I, for He existed before me.'"

16.  For of His fulness we have all received, and grace upon grace.

17.  For the Law was given through Moses; grace and truth were realized through Jesus Christ.

18.  No man has seen God at any time; the only begotten God, who is in the bosom of the Father, He has explained [Him.]

===[요한복음 서론]===

요한복음(서론)

이 복음은 분명히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 요한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이 복음이 쓰여진 시기와 장소를 묻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요한은 야고보의 형제이며, 12사도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예수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라는 존경받을 만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그는 다윗의 자손이 데리고 다니던 중요한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떠난 휴식과 그의 변화산의 변형 및 그의 고뇌하시던 모습을 특히 잘 증거해 주고 있다. 

그는 12사도 중에서 가장 오래 산 사도라고 하며, 다른 사도들은 순교를 당했지만 요한만은 자연사(自然死)했다고 교부들은 전하고 있다.

이 복음은 고린도에 있는 이교(異敎)와 예수가 “단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에비온파(Ebionites)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아시아에 있는 몇몇 교회의 동역자들의 요구로 에베소에서 요한이 기록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가 밧모섬으로 유형되기 전에 썼다는 것이 거의 확실한 것 같다. 왜냐하면 거기에서는 정경(正經)을 끝맺으려는 뜻으로 “계시록”을 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은 그 유배 후에 쓰여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후대 교부들이 말하는 대로, 요한복음은 그가 유배 중에 썼다는 말과, 요한이 유배에서 돌아온 후, 즉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몇년간에 걸쳐서 썼다는 말은 신빙성이 없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중 혹자는 예루살렘 파멸 당시 요한이 90세라고 보며, 어떤 이는 100세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복음서 중 제일 끝으로 요한복음을 썼다. 

그것은 이 복음서를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 보면 명백해진다. 이제 그 비교를 관찰해 보자.

1.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빠뜨린” 것을 요한은 “말하고” 있다. 

그는 “후미를 맡았다.” 그의 복음서는 “후방 부대”와 같은 것이다. 그는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지나쳤던 것을 수집했다. 

이와 같은 경우는 솔로몬의 잠언을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후에” 편집한 것과 같다(잠 25:1). 그러나 이 편집 내용은 솔로몬이 말한 것보다는 훨씬 짧다(왕상 4:32).

2.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역사”만 보여 주었으나, 요한은 역사의 “신비”(오의)까지 보여 주고 있다. 

먼저 예수의 행하시고 가르치심의 나열이 필요한데, 이것은 복음서 기자들이 한 대로 “예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기 시작하신 모든 것을 선포”(눅 1:1; 행 1:1)하는데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런 선포는 두세 사람의 목격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래서 “요한은 완전한 데로 나아가고 있다”(히 6:2). 즉 그는 “초보에 머무르지 않았다.” 

어떤 고대인들은 요한 이전의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의 “육신적인” 일들을 더 많이 기록한 것을 볼 수 있으나, 요한은 복음의 “영적인” 일들, 즉 복음적인 삶과 정신을 기록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요한복음을 “전도자들의 열쇠”라고 부른다. 이 복음은 “하늘 문을 여는” 열쇠이며, 거기서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첫 음성은 “더 높이, 더 가까이 오라”는 것이다. 

옛 사람들은 요한이 본 환상에서 나오는 네 생물들이 4복음서 기자들을 가리킨다고 보았으며 요한을 “날아다니는 독수로”로 보아, 그 독수리는 “더 높이 나르고,” 거룩하고 신성한 일들로 “더 확실하게” 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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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개요)

본 장(章)의 범위와 목표는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신앙을 굳건하게 하며, 이 세상의 참 메시야이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또한 그를 우리의 예언자, 제사장, 왕으로 의지하게 하며, 그에 의해서 통치되고 가르침을 받고 구원받도록 우리를 인도하려는 것이다.

Ⅰ. 요한은 성령의 감동으로 그리스도를 증언하는데, 그에 대한 요한복음 전체에 있어서의 자기의 목표는 무엇인가를 말한다.(1-5, 10-14, 16-18).

Ⅱ. 그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 (6-9, 15) (19-37에 자세히 다시 나온다).

Ⅲ. 예수가 자신을 안드레와 시몬 베드로(38-42), 또 빌립과 나다니엘에게 보여 주셨다.(4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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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신성(요 1:1-5)

"어거스틴은 그의 '신국'에서, 자기 친구 심플리시우스가 들려 준 한 철학자 플라톤의 이야기기를 들려주고 있다.(신국 10권 29장). 그에 의하면, 그 철학자는 요한복음의 이 첫 구절은 ""황금으로 기록해 둘 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했다. 

해박한 주니어스(Fhancis Junius)는 자기의 일생을 묘사하면서, 자기가 젊었을 때는 종교에 대해서 대단히 어설픈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기 아버지가 건네 준 성경에서 우연히 이 대목을 읽고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요한의 논법에서 신비를, 그의 문체에서 권위와 위엄을 발견하고는, 그의 몸이 떨렸다고 했다. 그는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아 온종일 자기 자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고 했다. 그로부터 그의 신앙생활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성귀에서 무엇이 숨겨 있는지를 알아야 하겠다. 여기서 기자는 그가 증명해야 할 위대한 진리를 주장하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며 또한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계시다는 점이다. 이제 자세히 살펴보자.

Ⅰ. 요한복음에 있어서는 ""말씀""이란 단어가 특별한 뜻이 있다(1:1, 7; 계 19:13 참조). 

그러나 어떤 사람은""그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라고도 한다(행 20:32; 히 4:12; 눅 1:2). 갈대아판은 아주 빈번히 메시야를 Memra -즉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의역(意譯)하고 있으며, 구약에서 많은 일은 ""여호와의 말씀""에 의해서 뿐 아니라 ""여호와""(주님)에 의해서 된 일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일반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과 같은 뜻으로 알고 있다. 

요한 기자는 자기의 언설 끝에서 그리스도를 ""말씀""으로 호칭하는 이유를 간결하게 말하고 있다(18절). 그것은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자로서, 하나님을 나타내 보였기""떄문이다. 

""말(씀)""이란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다. lovgo" ejndiavqeto"- 즉 생각된 말과 lovgo" profovriko" - 즉 발설된 말이다. e[sw와ejlehmosuvnh - 즉 지성과 발언의 말이 있다.

1. 생각된 말, 즉 ""사고""로써의 말이 있는데, 이것은 영혼(사고의 모든 작용)의 유일하고 직접적인 산물과 개념이며, 영혼과 한가지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에 있어서 제 2 격을 ""말씀""으로 부른다. 그가 ""하나님의 첫 아들""이기 때문이다. 즉 영혼이 사고를 가지고 있듯이, ""주(여호와)께서 태초에 지니셨던""(잠 8:22) 영원한 지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고한다""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지만, ""어떻게"" 사고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누가 영혼 속에서 어떻게 사고가 발생하는지를 말하리요?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정신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는 신비로 덮어 둔 채 그 깊이를 더욱 존중하게 된다.

2.""발설된 말"" 즉 ""언어""가 있다. 이것은 정신의 가장 중요하고 자연스러운 지표이다. 그리스도도 그와 같은 ""말씀""으로써,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이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말씀하셨고(히 1:2), 친히 ""그에게 들으라""고 명하셨다(마 17:5). 

[골1:9-23][[하나님의 형상이시요 교회의 머리시라]]

*9.○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0.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11.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12.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1.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3.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골1:24-2:5]...[골1장]*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2장] *1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힘쓰는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2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4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정신)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는 숨겨지고 감추어진 것들을 놀랄 만큼 훌륭하게 드러내신다. 그래서 그는 ""놀라운 담화자""이다(사9:6, 단 8:13 의 주석 참조). 아들하나님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들을 잠깐 묵상해 보라!!..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또한 그 영광의 광채)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전지전능의 창조주, 만유/만물 -모든 왕권과 주권(정사)-권세(와 능력)의 근원, 교회의 머리, 아버지의 모든 충만이 거하시는 분(골1:15-18), 영원히 그 어깨에 정사를 매신분 =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골2:10)(만왕의 왕, 만주의 주King of kings(딤전6:15), Lord of lords,)..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신] 경이-기묘/기묘자Wonderful-모사/상담자/담화자Counseller, 전능하나님Almighty God, 영존하시는 아버지Everlasting Father, 평강의 왕-의의 왕 Prince of peace, King of Righteousness )...아버지께서 믿는 우리를 위해 숨겨두신/알려지지않은 자 = 비밀과 신비(Secret-Mystery)...아버지 하나님의 지혜(고전1:23, 24)요,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주시는 분.그안에 지식과 지혜의 모든 보화가 가득히 감추어져 있는 분(골2:3) ..믿는이 모두가 그의 장성하신 분량의 충만까지 빼어닮아갈(엡4:13, 14) 영광의 소망(골1:27).그는 우리에게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대신하여) 하나님께 말씀하시는 분이다

세례 요한은 ""음성""이고, 그리스도는 ""말""이다. ""말""이기에 그는 ""진리""이시며, ""아멘""이시며,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신실한 증언""이시다.

Ⅱ. 이와 같은 말은 ""그가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을 조금도 모순 없이 입증해 준다.

1.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사실은, 말씀이 성육 전에도 계셨을 뿐만 아니라 영원 전부터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만물이 창조되어 존재하기 시작하던 시간의 처음에 이미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은 있었다. 세상은 ""태초부터"" 있었지만, 말씀은 태초 ""안에""(in) 있었다. 영원이란 것을 흔히 ""창세 전""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하나님도 영원하심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즉 ""산들이 생기기 전에""라고 했다(시 90:2).고로 ""말씀""은 태초 전에도 계셨다(잠 8:23). 태초에도 있었던 분은 ""때의 시작이 없으며,"" ""영원하시다.""

2. 그가 하나님 아버지와 공존하였음을 주장했다. 

""말씀이 하나님과 더불어 계셨으며,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 어떤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로 그 사람을 인도한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같이 계시며,""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2절에서 반복되고 있다. 

우리가 믿고 전파하는 바로 그 그리스도가 태초에 ""하나님과 더불어"" 있었다. 그는 영원부터 그러하시다. 세상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지만, 말씀은 하나님과 ""더불어"" 있었다.

(1) 그것은 ""본질""과 ""실체""에 있어서 그러하다. 

""말씀은 하나님이었다."" 별개의 인격 혹은 실체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실체이셨다. 그는 ""하나님이었기""때문이다(히 1:3).

(2) ""자기 만족""과 ""지복""(至福)의 관점에서 그러하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그리스도는 ""하나님 과 더불어 "" 영광과 영화를 지니셨다(17:5).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 품에 계셔서 무한히 행복하셨다. 그는 아버지의 즐거움이었을 뿐 아니라 그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다(잠 8:30).

(3)""뜻""과 ""계획""이란 관점에서 그러하다. 

성육된 하나님 말씀이 인간을 구원하는 신비는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 안에 숨어"" 있었다(엡 3:9).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그리스도는(벧전 3:18). 하나님과 ""영원부터"" 함께 계셨다. 그러므로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려는 그 위대한 일은 영원부터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관련되어 있었으며, 서로도 완전히 그 일에 대한 이 해가 있었다(슥 6:13; 마 11:27). 즉 그리스도는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처럼 그 옆에"" 계셨다.(잠 8:30)

3. 세상을 창조할 때의 말씀의 직능을 주장했다(3절).

(1) 그것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다. ""만물이 말씀에 의하여 지은 바 되었다."" 

말씀은 ""하나님과 더불어"" 있었는데, 영원부터 하나님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태초에 하나님의 창조활동에 ""참여하고""있었다. ""그 때 내가 그분 옆에 있었도다""(잠 8:30). 하나님은 세상을 ""말씀 한 마디로"" 지으셨으며 (시 33:6),리고 그리스도가 바로 ""그 말씀""이시다. 즉 종족의 도구로써가 아니라, 상호협력자로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셨다""(히 1:2).

(2) 모순이 없다고 했다. 가장 높은 천사로부터 미천한 벌레까지, ""만들어진 모든 것은 그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다."" 

즉 하나님은 말씀과 더불어서만 일하셨다.

① 이것은 그가 ""하나님임""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은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히 3:4). 

또한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자기 자신을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으로 드러내고 있다.(사 40:12, 28; 41:4; 렘 10:11, 12).

② 기독교의 탁월성을 드러내고 있다. 즉 기독교의 창시자가 이 세상의 창조자시라는 것이다. 

모든 탁월성의 근본인 자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얼마나 위대할 것인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경배할 때, 우리는 족장들이 창조주라고 하던 분, 만물이 그에게 의존된 분을 예배하는 것이다.

③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즉 만물을 지으신 전능한 자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 만이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존재의 근원이요, 만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4. 그 안에 생명과 빛의 근원이 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4절). 

이 구절에서 그가 하나님임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의 모든 사업에 자격을 구비해 주는 것이다.

(1)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참 하나님""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생명이다. 그래서 맹세할 때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한다고 하신다.

(2) 만물은 그 안에서 생명을 가지고 있다. 만물이 그에 의해 지음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 의해서 생명을 받았다. 

움직이는 생명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다(창 1:20; 행 17:25). 사람이 떡이 아니라 말씀을 의지하고 살아야 한다고 했을 때의 그 말씀이 바로 이분이다(마 4:4).

(3) 이성적인 동물은 그로부터 ""빛""을 받는다. ""인간의 빛""인 ""생명""은 그에게서 나온다. 

인간의 생명은 다른 동물의 생명보다 더 위대하고 고귀한 것으로써, 인간은 단순히 ""동물적이"" 아니라 ""이성적인"" 존재이다. 인간이 ""생명""이 있을 때, 그의 생명은 ""빛""이었으며,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동물들과 구별되는 고귀한 능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주님의 촛불""이다. 이 촛불을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은 바로 영원한 말씀이다. 이성의 빛도 말씀에서 나오며, 또한 말씀에 의존되어 있다. 왜냐하면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과 빛은, 타락해서 ""어두움""과 ""죽음""의 권세에 놓여 있는 인간에게는 가장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이성의 빛을 주신 분이 아니고 보다 더 나은 계시의 빛을 누구에게서 기대할 수 있겠는가?

5. 그가 인생들에게 나타났음을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을 통하여 창조되었는데 그가 세상에 왔다면 그를 무시하는 것은 어째서 일까? 여기에 대한 성서의 대답은,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5절)이다. 관찰해 보자.

(1) 영원한 말씀은 성육 이전에도, 타락된 세상에 있었다. ""빛이 어두움에서 비치다."" 

빛은 자기를 증거하며, 그 자체를 알도록 한다. 이 빛은 어두움을 비추고 있었다.

[1] ""하나님이신"" 영원한 말씀이 ""본성적 양심의 어두움"" 속에서 빛나고 있다. 

비록 인간이 타락되어 ""암흑"" 속에 있지만, 인간 안에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있었다.(롬 1:19, 20 참조). 본성의 빛이 암흑에서 빛나는 이 빛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 말씀의 어떤 능력 즉 ""창조""하고 ""지배""하는 능력을 알 만한 내적 소질을 가자고 있다. 이런 능력이 없다면 이 세상은 완전한 지옥으로 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아직 그렇게 되어지지는 않고 있다.

② 중보자인 영원한 말씀이 구약 성서의 예형과 상징이라는 어두움 속에서도, 즉 메시야에 대한 예언과 약속 안에서도 빛을 비추고 있다. 

어두움을 쫓으려고 이 세상에 빛을 명하신 그분이 여전히 어두움의 이 세상을 비추시고 있는 빛이다. 그러나 이 빛은 얼굴에 수건을 쓴 것같이 가리어져 있다(고후 3:13).

(2) 타락한 세상이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무능력을 보자. ""어두움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더라."" 

대부분의 인간들은 어두움을 비추는 이런 빛 곧 하나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다.

① 인간은 자기 오성 속에 있는 본성의 빛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그 생각이 미련해지고 허망하여졌다(롬 1:21, 28). 죄와 악이 이런 참빛을 가리워서 하나님이 거듭 말씀하셔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욥 33:4).

② 구약이라는 빛을 지녔던 유대인들은 아직도 그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있다. 

이는 마치 베일이 모세의 얼굴을 가린 것처럼 그들의 마음이 구약의 빛에 대해 가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빛은 예형과 그림자들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미련하므로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방 세계의 잘못을 고쳐 주고, 유대 교회의 진리를 개선해 주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필히 오셔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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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의 증언(1)(요 1:6-14)

복음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명예롭게 할 증언하는 일을 세례 요한에게 부과시키고 있다.

Ⅰ. 기자는 그가 내세우려는 증인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은혜로운"이라는 뜻을 지닌 "요한...예호하난..그에게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그를 여호와께서 은혜롭게 해 주셨다"이다. 그의 말은 엄하지만 그의 인격은 은혜로움, 그 자체였다.

1. 일반적으로 말해서, 성육하신 그는 "하나님과 같이" 계셨고 "하나님이었다"고 했지만, 요한은 단지 자신을 "하나님의 보내신 바 된 사람, 단순한 사람"으로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을 통해서 말씀하시길 기뻐하신다. 요한은 "위대한 인간"이지만, 그는 한 사람이며, 사람의 아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며, 하나님의 "사자"로 불리워진다(말 3:1). 

하나님은 요한에게 사명과 함께 전할 메세지를 (곧 두가지 다 신임장이며 동시에 가르침(훈령)인) 주셨다. 요한은 기적을 행사하지 않았으며, 그가 환상이나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생활과 교훈은 엄격하고 순수했다. 그래서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의도는, 그를 통해서 세상을 개혁시키고, 인간들에게 천국에 관한 관심을 다시 불러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2. 요한의 직능에 대한 말을 들어보자(7절). "그는 증인으로 왔다." 즉 목격자, 선두 증인이었다. 

그는(에이스 마르튀리안)-즉 증거를 위해서 왔다. 유대 교회에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위한 증거에 대한 법적 제도가 있어 왔다. 그래서 "증거의 회막," "증거궤," "율법과 증거"라는 등등의 말이 있어 왔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계시는 또 하나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증거요, 또한 하나님의 증거이다(고전 1:6; 2:1). 사실 하나님은 이방인에게도 자기 자신을 드러내셨다.(행 14:17). 그러나 구원의 대속주(Redeemer)는 이방인들에게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요한이 와서 증거하기전까지는 그에 대해서 깊은 침묵만이 있었던 것이다.

(1) 이제 요한의 증거 내용을 보자. "그는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왔다."  

빛은 자체로서 증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빛에 대하여 눈을 감아버린 사람에게는 빛을 증거 할 사람이 필요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빛이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어두움이 그것을 필요로 한다. 요한은 잠자는 사람들에게, 빛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새벽을 알려 주며 동네를 돌아다니는 야경군과 같았다. 또는 "밤이 어떻게 되었으며," "아침이 언제 오는지"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하는 파수군과 같았다(사 21:11, 12). 

요한은 오랫동안 대망하던 메시야가 지금 오고있다고 세상에 증거 하려고, 또 그가 증거 하는 메시야는 이방인들에게 빛을 비추며,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영광을 받으실 분이라 말하며, 또한 그는 생명과 영광으로 인도해 줄 시대가 왔다고 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다.

(2) 그의 증거의 목표를 보자. "그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듣고 믿게 하려 함이다." 

물론 그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기는 단지 길을 예비하는 자임을 말해야 한다. 즉 죄에 대한 회개를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게 하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죄를 보고, 듣고, 깨닫게 해서,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토록 했다. 이 사람의 증거를 받으려는 자는 그보다 훨씬 더 위대한 하나님의 증거를 받게 되리라(요일 5:9; 요 10:41).

3. 그는 빛이 아니라 곧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온 자(8절)라는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즉 요한은 우리가 기대했고 약속 받은 그 빛이 아니라 단지 참된 빛을 증거 하러 왔다. 그는 동방박사들을 예수에게로 인도하는 새벽 별이지 태양은 아니다. 그는 신랑의 친구이지 신랑은 아니다. 그는 왕자의 선발자(先發者)이지 왕자가 아니다. 에베소 교인들처럼 요한의 세례 외에는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행 19:3). 여기에서 복음서 기자가 이러한 잘못을 고치려고, 비록 그에 관해서 매우 명예롭게 말하지만, 아직도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자리를 준비하는 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요한은 최고의 예언자만큼 위대하지만 그 에언자 자체가 아니다. 우리는 사역자들을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는 일이 없도록 유의해야 한다. 그들은 우리의 주인도 아니고 우리의 신앙을 지배하는 자들도 아니며, 단지 우리 주님의 집의 청지기이다. 우리는 믿음이 약해서 그들의 행위에 우리 자신을 맡겨버리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빛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증언을 유의하고 받아들여야 하며 존경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참빛을 증거 하도록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다. 

만일 요한이 자기를 참빛이라고 주장했다면, 그는 그 빛에 대한 착실한 증언을 할 수 없었으리라. 그렇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강탈하는 자이고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명예를 잃는 자이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가 참 빛은 아니지만, 참 빛의 증거자로서 매우 충성스러운 자였다. 요한은 빛은 아니었지만 대단히 유익한 빛의 증언자였다.

Ⅱ. 기자는 요한의 증언을 계속하기 전에 요한이 증거 하는 그 예수를 다시 설명한다. 

요한복음의 서두에서 기자는 이미 예수의 신성의 영광을 말했고, 여기서는 그의 화육의 은총과 중재자로서 인간에게 대한 호의를 나타내고 있다

1. 그리스도는 "참 빛"이었다.(9절). 그러나 세례 요한이 거짓된 빛이라는 말은 아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와 비교해서 하나의 아주 작은 빛이었다. 여기에 비해서 그리스도는 참 빛으로 불리 울 만한 위대한 빛이었다. 다른 빛(광명체)들은 오직 상징적으로만 빛이라 불릴 수 있다. 참 빛만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요, 모든 위로의 근본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빛이 이 세상에 있는 각 사람에게 어떻게 비치고 있는가?

(1) 그는 창조의 능력에 의하여, 각 사람을 이성의 빛을 가지고 비추고 있다. 

인간의 빛인 생명은 그에게서 나오며, 모든 이성의 발견과 지시, 그리고 이성이 주는 모든 위로, 모든 아름다움은 그로부터 나온다.,

(2) 그의 복음을 모든 나라에 전파함으로써 실질적으로 만민에게 빛을 비추신다. 

세례 요한은 하나의 빛이다. 그는 하나의 방을 비추는 촛불처럼, 단지 예루살렘과 유대, 그리고 요단 주위를 비추는 데 불과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참 빛으로써 이방 세계까지 비추신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복음은 모든 나라에 모든 언어로 전파된 것이다(계 14:6). 마치 태양처럼 그리고 향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빛은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시 19:6 참조 ; 롬 10:18). 이제는 하나님의 계시가 이전처럼 한 민족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나타나 있다.(마 5:15).

(3) 그리스도는 그의 영광과 은총의 작용에 의해서 구원을 향하여 개방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고 있다. 

그의 빛을 받지 않는 사람들은 어두움 속에서 멸망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안에" 있다고 했다. 또 그 빛은 태초에 어두움 속에서 빛나라고 말씀하신 그 빛과 비교가 되는데, 이 빛은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에게 비추는 빛(광명)이다. 사람들이 어떠한 빛을 받건간에, 즉 그 빛이 자연적인 빛이든 초자연적 빛이든간에, 그것은 그리스도 덕분이다.

2. 그리스도는 "세상에 계셨다"(10절). 그는 본질적인 말씀으로써 세상에 계셨으니, 성육되기 전에도 만물을 주관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 존재하셨다는 이 말은,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으시고 계셨던 일을 말한다(16:28 참조). "내가 세상에 왔다." 독생자가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세상으로, "빛"에서 "어두움"으로, "거룩"에서 "죄"로 물든 세상으로 왔다. 그는 축복과 영광의 세계를 떠나 우울하고 비참한 이 세계에 있었다. 그는 세상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려고, "이 세상에" 와 애썼으며, 결국 화해시켰다. 그래서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켰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호의를 얻도록 했다. 그는 세상에 있었으나, 세상에 속하지는 않았다. 그는 승리의 기쁨으로 말하기를 "이제 나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다"(17:11)고 하셨다. 보잘 것 없고 비천한 우주의 한 부분으로써의 이 세상이 이제까지 지닌 최대의 영광은 하나님의 독생자가 한 번 이 세상에 육으로 계셨다는 점이다. 이런 일은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다는 것 이상의 것에 관심을 갖게 하며, 그리스도가 육으로서 현재 우리의 거하는 세상에 계셨음을 알게 한다. 그가 잠시 동안 세상에 계셨다는 것은 잠시 지나간 일처럼 들려진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간단히 세상에 들렸다 가게 된다.

(1) 그리스도를 논한다고 하면 이 세상에서 가능한 가장 자애롭고 존경심에 가득찬 환영의 마음으로 맞아들여야 한다. 

그 이유로는 "그가 세상을 만드셨고," 그런고로 그가 오신 것은 잃어버린 세상을 다시 찾기 위해서이다. 그 자신의 본래의 형상을 다시 찾으려 관심을 쏟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그가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그를 존경해야 한다.

(2) 예수는 하나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냉대를 받았다. 그것은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의 창조자요, 통치자이고 구원자이신 예수가 세상에 있었지만 세상 사람들은 거의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소는 자기 주인을 알지만, 사람들은 자기 창조자를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예수를 알지 못했으므로 그를 섬기지도 영접하지도 않았다. 즉 예수는 세상 사람들이 기대했던 외적인 영광과 위엄을 나타내지 않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무시했다. 그의 나라는 "눈으로 봐서" 알 수 있게 오는 것이 아니라 시련과 시험을 통해서 온다. 예수가 심판자로 올 때는 세상 사람들이 그를 알 게 될 것이다.

3. 그는 "자기 백성에게 왔다"(11절). 그는 "자기의" 세상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특별히 택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셨다. 

즉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더불어 살았으며, 그들에게 먼저 파견된 것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볼품없는 민족으로, "그들의 왕관이 그 머리에서 떨어졌었다." 옛 계약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은 범죄 했고 초라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을 자기가 택한 선민으로 인정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타 이디아’ - 즉 그의 것들을 말한다. 이것은 참된 신자들을 ‘호이 이디오이’ - 즉 그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13:1). 그의 집, 그의 땅, 그의 가구들처럼 유대인들은 예수가 사용하시고 소유하신 "그의 것들"이었다. 그러나 신자들은 부인과 자녀들처럼 사랑 받는 그의 사람들이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자기 것이기 때문에 찾아서 구원하시려고 오셨다. 즉 예수는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들에게로 보내어졌는데, 그것은 그 양들이 예수의 양들이기 때문이다.

(1)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를 "거절했다." 거의 모든 유대인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이 예수를 통해서 큰 은혜를 받고 또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는 것을 생각할 때는, 그의 백성들이 그를 영접해 주리라고 기대되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구세주가 나타날 시기와 장소, 그리고 어느 부족과 가문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하나님의 신탁을 사전에 받고 있었다. 예수는 징조와 기적들과 더불어 그리고 가장 위대한 존재로서 그들에게 나타났다. 그러므로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한" 것은(10절) 그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은 그를 알 수밖에 없었지만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메시야로서 그를 영접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 자신을 더 공고히 해서 그를 공격했다. 레위지파인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경멸하고 핍박하는 장본인들이었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는 매우 "부당한" 행위였다. 그들은 "그의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들에게서 존경을 받아야 했다. 또 그것은 예수에게는 매우 "불친절하고," "무례한" 짓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을 찾아 구원하려 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백성"이라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 이유는 그들이 그들의 죄에서 떠나지도 않았고, "예수가 자기들을 다스리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2) 그러나 그를 "인정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그에게 신실한 자들이다. 

비록 그들이 그를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를 "영접한" 자들이 있었다(12절). "이런 자들도 많이 있다." "이스라엘 나라는 불신앙을 고집하다가 멸망했지만, 그리스도에 복종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① 참 그리스도인에 대한 묘사와 특성을 보라. 그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다.

첫째, 그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영접, 곧 중심으로 전적으로 동의하고 전존재를 열어 받아들여 하나됨 이룬다는 것을 말한다

먼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임을 명심하라.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사실을 참되게 동의하며, 그리스도에 관계된 복음의 계획에 참되게 동의하는 것, 곧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성령과 연합-교통-거하며 성령을 따름으로써 그안에 거하며 동거동주동행하며 복음을 살아내며 전파하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만왕의 왕"이며, "의(義)의 주"이며 "구원자"이시다. 또 그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 이름들이 나타내는 위대함을 "알고(기노스케=야댜..참되게 생생하게 경험-실감하는 앎)" 그것이 우리 자신에게도 항상 언제까지나 바로 그러함을 "인정하는(참으로 그러하시니, 그리하시옵소서 하고 시인함 = 아멘)"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를 하나님, 하나님의 선물로써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교훈을 참되고 선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즉 그의 계명을 옳고 거룩하게, 그의 선물을 친절하고 유익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우리는 우리의 감정과 행위를 지배하는 원리는 "그의 은혜/은총과 아가페사랑 감사"라고 인정해야 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위엄과 특권은 두 가지다.

첫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의 수효 중에 들게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지금까지는 자녀직이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된다("이스라엘은 나의 아들이며, 첫 아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갈 3:26). 그들도 "권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어떠한 사람도 스스로가 이런 능력을 취할 수는 없지만 복음의 특허장에 의하여 "허락 받은" 자는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하나의 "권리"를 준다. 그들에게 고귀한 지위를 준다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은 이 고귀성을 지니고 있다." 다음을 명심하자.

a>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말할 수 없는 특권이다. 

그들은 원래 비참한 이 세상의 자녀들이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면, 그러한 특권을 얻는다. 터툴리안(Tertullian)은 말하기를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는가!"(요일 3:1) 하나님은 그들을 "자기 자녀"라 부르고,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이러한 것들은 자녀의 특권, 곧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b> 양자가 되는 특권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함이다. 

그는 자기 이름을 믿는 바로 그 사람, 그와 결합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양자로 예정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그로부터 우리는 양자의 성품과 영을 받았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형제들 중에서 처음 난자"(맏이)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아들이 되며, 인간의 자녀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신다.

둘째, "중생의 특권"(13절)이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거듭난다"는 것을 명심하자. 

하나님의 양자가 된 모든 자들은 중생한다. 더욱이 이러한 "참" 변화는 그리스도에 의해서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귀함을 주는 곳에서 자녀의 본성과 특성을 새롭게 하신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을 양자로 삼았을 때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새 삶의 원천을 보아야 한다.

a> 소극적으로 본다면

(a) 그것은 우리의 부모로부터 자연스럽게 태어난 탄생이 아니다

우리가 거듭난 것은 "혈육의 의지나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다"(벧전 1:23). 

인간을 혈육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인간이 거기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혈육을 가진 부모의 자녀가 되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같지 않다. 은총은 혈육을 타고 흐르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라. 타락한 인간은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창 5:3). 그러나 성화 되고 거듭되고 거듭난 사람이 자기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을 수는 없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을 대단히 자랑했는데, 그것은 자기들에게는 거룩한 피가 흐르고 있다고 믿은 때문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양자라 불리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 성서에서 말하는 양자됨은 유대인과 같은 천연적인 관계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다.

(b)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의지력으로 거듭남 곧 "탄생되는" 것도 아니다

....거듭남은 "혈"이나 "육"의 의지가 아니듯, "사람의 의지"로도 아니란 뜻이다. 

이것은 인간은 어느 것이 선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도덕적 무력 상태에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거듭난 생활의 원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리를 거듭나게 만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어떤 인간의 법이나 사상들이 한 영혼을 거룩하게 그리고 결코 거듭날 수 있도록 하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b>그러나 적극적으로 말하면, 거듭남은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 

이 거듭남은 수단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된 것이고 (벧전 1:23),위대하고 유일한 창조자인 성령으로 된 것이다. 진실 된 신도들은 하나님에게서 난 자들이다(요일 3:9; 5:1). 하나님의 자녀란 꼭 거듭나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과 같은 어떤 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거듭날 수 없다면 자녀의 특권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4. "말씀이 육이 되었다"(14). 이것은 그리스도의 화육을 전보다 더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그의 거룩한 현존을 통해서 항상 "세상에 계셨고," 자기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왔었다." 그러나 이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갈 4:4). 의인 욥의 믿음과 소망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육으로 나타나셨다. "그러나 나는 내 육체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6).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1) 그리스도를 감싸고 있는 "인간성"이다. 그 인간성은 두 가지로 나타났다.

①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자녀들이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셨다"(히 2:14). 소시니안주의자들은 예수가 하나님이며 인간임을 인정하지만, 예수는 "인간이었으되" 모세처럼 "신(神)이 되었다"고 말한다(출 7:1). 이것은 요한의 말과 정반대다. 요한은 예수가 "하나님이었으나," "육체가 되셨다"고 했다. 이것을 요한복음1장 1절과 비교해 보자. 1장 1절은 예수가 진정으로 인간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을 인간의 불행과 비참에 종속시키었음을 말한다. 그는 "육"으로서, 스스로 가장 비천한 인간이 되었다. 육이 인간을 "약하게" 하듯이 그리스도께서도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후 13:4). "육체"가 인간을 "멸망"으로, 죽음으로 이끈다(시 78:39). 그리스도는 "육체로 죽으심을" 당하셨다(벧전 3:18). 아니 육체가 사람을 "죄악으로 더럽히게"했다(창 6:3). 그리고 그리스도도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이지만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사"(롬 8:3),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다(고후 5:21). 아담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이 아담에게 "너는 흙이다"라고 말했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흙 속에 묻힌다는 말이다. 인간의 타락은 마치 인간을 세상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받은 그리스도도 "육신"이 되셨고,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롬 8:3). 

육신이 그와 같이 나쁜 이름으로 변할 때에 영원한 말씀이 육신으로 되셨다는 것은 놀랄 일이다. 만물을 창조한 그 자신이 가장 비천한 상태인 육신이 되어야 했고, 또한 전혀 거리가 먼 육신에 복종케 되었다니 말이다. 복음서에서 들려오는 것을 들어보면,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시 40:6), 그것은 오히려 구속주의 사랑을 더 훌륭하게 표시한다. 우리를 되찾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가 육신이 되셨으며, 풀과 같이 시들었지만, 주의 말씀은 그치지 아니하셨다.

②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거하셨다." 

그는 인간성을 취함으로써 자기를 사람의 위치에 처하게 하셨다. 말씀은 육신이 되셨어도 천사들 사이에 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말씀은 우리와 같은 성질의 "몸"을 취하사, 우리와 같은 세상에 오셨고 살으셨다. 그는 벌레 같은 인간들, 필요나 쓸모가 없는 인간들, 부패하고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 또한 하나님을 반역한 인간들과 같이 사셨다. 여호와 하나님은 오셔서 심지어 "반역한 자들과 더불어 사셨다"(시 68:18). 고상하고 뛰어난 존재들인 천사들과 거주하시던 그리스도께서 "독사의 자식"들과 "죄인"들인 "우리와 함께 거하셨다." 

우리들은 다윗에게 대한 메섹과 게달, 혹은 에스겔에 대한 전갈, 혹은 "사탄의 세력이 들끓는" 버가모 교회보다 그리스도께서는 더 못마땅한 자들이다. 하늘나라 즉 영의 세계를 볼 때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육신이 그리고 인간의 운명이 던져진 이 세상이 얼마나 비천하고 경멸스럽게 보일까! 또한 깊이 생각해 보면 하늘 나라와 화해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러나 영원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육신과 이 세상을 모두 존귀하게 해 준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할 일을 맡기시는 동안은 우리도 기꺼이 육신에 살도록 해야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도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룰 때까지는 이 악한 세상에서 거주하셨기 때문이다(17:4). 예수는 유대인들 중에 증거 하셨다. 그것은 "그가 셈의 장막에 거하리라"는 성경을 이루기 위함이다(창 9:27).유대인들이 예수를 냉대했지만, 예수는 여전히 그들과 같이 거했다. 몇몇의 고대 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는 에뎃사(Abgarus)의 압가루스(Abgarus)왕에 의하여 좋은 대우를 해 주겠다는 청을 받았지만, 다른 어느 나라에도 가지 않았다. 그는 우리와 함께 "거하셨다." 그는 단지 방에만 머무는 도보 여행자로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거주하는 자로서 이 세상에"거주하셨다." ‘에스케노센 엔 헤민’ - 즉 그가 우리와 함께 거주했다는 뜻이다. 즉 "회막 안에서 처럼" 거주했다는 뜻인데, 이것은 다음을 암시한다.

첫째, 장막에 거하는 목자들처럼 아주 "누추한" 환경에 거하였다는 것이다.

 "궁정에서처럼"이 아니라 장막에서 처럼 우리와 함께 거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머리 둘 장소도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 그의 국가는 "군정치하"에 있었다. 

군인들은 "장막에 거하였다." 예수는 오래 전에 "독사의 새끼"들과 전쟁을 선포한 이래 이제 몸소 "출전"했다. 그래서 군기를 세우고, 천막을 쳐, 전쟁을 시행하려 한다.

세째, 우리 중에 머무름은 영구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고향에서처럼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장막에서처럼 머물렀다. 족장들은 회막에 거하면서, "자기들이 지상에서 나그네요 순례자들이라"고 말하면서, 더 좋은 나라를 사모했다. 그리스도도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고 있다(히 13:13, 14).

네째, 옛날 모세의 회막에서 그룹들 사이에 쉐키나에 의하여 하나님이 거하셨듯이, 이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인간성 안에 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는 지금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의 상징인 진정한 쉐키나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청원을 간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

(2) "육의 베일"을 통하여 나타난 "그리스도 영광의 광채"를 보자.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다. 그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이다." 

그 태양은 구름으로 가리워지건 일식을 만날 때건 여전히 빛의 근원이다. 마찬가지로 비록 그가 이 세상에서 우리와 더불어 살지만 여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빛되신주 어둠가운데 비추사 내 눈 보게하소서!!....말라기 4:1-3.. 치료하는 광선을 가지신, 떠오르는 의로운 해!!)이다. 유대인들은 그를 사소하게 생각했다. 그것을 베일을 통하여 보았던 때문이다.

이러한 영광의 증인들을 보자. 그와 더불어 가장 솔직하고 친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예수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인, 바로 "우리들"이 있다. 

사람들과 가장 친했던 사람들은 흔히 그들의 결점을 발견하지만, 그리스도에게서는 그러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와 가장 친했던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그의 영광을 보았다. 제자들은 그의 교훈을 통해서 영광의 신비들을 알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단지 그의 인간성의 베일만 보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세상이 아니라," 그들에게 나타냈다. 12명은 증언자로서는 완전한 숫자이다. 그들은 솔직하고 성실한 사람들이며, 어떠한 계획이나 음모에서도 떠난 사람들이다.

② 그들의 증거의 내용을 보자. "우리가 그것을 보았다." 

기록에 의하여, 간접으로 전해들은 것이 아니라 예수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목격한 자들이다. "우리는 보았다." 이 말은 확고하고 영속적인 증거를 뜻하고 있다. 이러한 증거를 본 제자들 자신이 증거하기를, "우리가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본 바요, 들은 바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요일 1:1).

그 영광은 무엇인가? 그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다. 

즉 말씀이 육이 된" 영광이란 "하나님의 아들로서 태어난" 영광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다음을 염두에 두자.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독생자이다. 

믿는 자들은 양자라는 특별한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비슷한 본성을 지닌 자이다.(벧후 1:4). 완전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같은 본성을 지닌 자이다. 하나님의 인격의 표현이며, 영원한 출생에 의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천사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이지만, 그들의 어느 누구에게도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히 1:5).

둘째, 그리스도는 분명히 아버지의 독생자로 증거 되는데, 그 때문에 그가 우리와 함께 거하실 때 그의 영광이 나타났다. 

외적(外的)으로는 "종의 모양"으로 태어났지만, 은총의 면에서는 그의 모양은 "하나님의 아들처럼," 불타는 풀무 중에 나타났던 "제4의" 인물이다. 그의 영광은 그의 가르침의 거룩함과 장엄에서도 나타났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그의 기적에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그의 모든 생활에서 순결, 선함, 그리고 자비가 드러나고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의 영광이며, 그는 선을 베풀려고 돌아다니셨다. 그는 매사에 성육신 된 독생자 아들 하나님으로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셨다. 특히 복음서 기자는 "변화산상"의 사건을 염두에 둔 것 같다(벧후 1:16-18 을 보라).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부르셨다. 그러나 이런 모든 증거는 그의 부활에서 더 온전히 드러났다.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거했다는 것이 무슨 유익을 주는가?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충만한 은혜와 진리로써" 거했다. 하나님이 옛 회막에서는 "율법"이었고, 지금은 "은혜"이시다. 즉 구약 시대에는 "예형"으로 계셨으나 지금은 "진리"로 계신다.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담당케 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데, 타락한 인간은 이 두 가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그의 능력과 위엄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 했다.

첫째, 그는 그 자신에 있어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여, 무한한 성령을 가졌다

그는 아버지에게 허락 받은 넘치는 은총을 소유함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탄원할 자격을 갖추었다. 또한 계시로 우리에게 알려 줄 넘치는 "진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들을 가르쳐 주시기에 적합하다. 그는 지혜와 자비가 충만하시다.

둘째, "우리를 위해서"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시다. 그가 하나님에게서 "받으신" 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며, 하나님은 그를 기뻐하시고, 그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와 같이 기뻐하실 것이다. 이런 관계는 율법적인 "예형"에 대해서도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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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의 증거(요 1:15-18)

Ⅰ. 복음서 기자는 그리스도에 관한 세례 요한의 증거를 다시 전하고 있다(15절). 세례 요한은 그에 대하여 증거하러 왔다고 말하고 있다(8절).

1. 세례 요한은 증언을 뭐라고 했는가? 그는 예언을 통하여 자기는 "외치는 자의 목소리"라고 말하고 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큰 소리로 자기 백성의 "죄"를 외치고 있으며, 신약의 이 예언자들은 큰 소리로 자기 백성의 "구원자"를 외치고 있다. 여기에는 숨은 뜻이 있다.

(1) 이 외침은 공적인 증언이 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 

거짓 선지자는 이 외침을 은밀히 감추나, 참 선지자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광장에서 널리 알린다.

(2) 세례 요한은 메시야에 대한 증언을 거침없이 그리고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는 자기가 증거 할 진리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그리고 열정적인 사람처럼 외치고 있었다. 태어날 때는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기쁨으로 어머니의 배속에서 뛰었던 요한이 이제는 기쁨에 넘쳐서 그리스도의 공적 출현을 영접하고 있다.

2. 세례 요한의 "증언" 내용을 보자. 

세례 요한은 증거하기 시작할 때, 자기는 그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며,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을 영접하도록 사람들에게 외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처음부터 이것을 알리고 있었다. 세례 요한처럼 곧은 원칙과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또한 그리스도의 영광과 존엄에 대한 변함없는 안목을 가지고 사도직을 수행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증언을 해야 하는 사역자들에게 매우 어울리는 일이다. 

세례 요한은 얼마 전에 자기가 세례를 준 예수이시나 충성을 다해 높여 드렸으며, 예수는 하늘로부터 놀랄 만한 인정을 받았다. "내가 말하는 것은 이 사람을 두고 하는 것이다." 요한은 사람들 중에서 그분이 잠시 후에 나타나리라고 말하지 않았다. 요한은 구약을 믿는 모든 예언자들을 능가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분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내가 전에 말한 사람이 바로 이분이다. 우리 모두를 화해시킬 사람이다." 이제 요한의 말을 들어보자.

(1) 세례 요한은 이 예수를 선택된 자라고 증거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탄생과 공적 출현에서는 나보다 늦으셨으나 나보다 먼저 선택되셨다. 내 "뒤를 이어" 가르치고 제자들을 택할 그 분은 모든 점에서 훨씬 뛰어난 사람이다. 즉 뒤에 따라오는 왕자나 귀족처럼 그 앞에서 길을 예비하는 선발자(選拔者)나 궁내관(宮內官)보다 월등함과 같다. "지극히 높으신 자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예수 그리스도는 (눅 1:32)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로만 일컬음을 받는 세례 요한보다 먼저 택해졌다(눅 1:76). 

요한은 신약 성서의 사역자지만, 그리스도는 신약의 중보자이다. 요한은 위대한 사람이고 큰 자이지만, 그리스도를 인정하는데 주저치 않았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자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관심사보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일에 우선권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는" 모든 자들은 나쁜 심판을 받으리라(빌 2:21). 

"그리스도는 나보다 이후에 오셨지만, 나보다 먼저 택함을 받았다"고 고백한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에 따라서 은사를 주신다. 야곱이 행한 것처럼, 흔히 연장자보다 연소자를 앞세우신다. 바울은 복음의 섬김과 수고에 있어서 자기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을 훨씬 능가했다.

(2) 요한은 그렇게 된 데 대한 하나의 좋은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나보다 전에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먼저이다." 즉 그분은 나의 제1원인이며, 나의 근원이다. 처음이란 하나님의 이름 중 하나이다(사 44:6). "그분은 나보다 이전에 계셨고," 나의 "처음이시다."

① 연장자 순으로 볼 때도, 그분은 아브라함 전에 있었기 때문에 "나보다 먼저 계셨다"(8:58). 

아니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계셨다(골 1:17). 그분은 이전에도 계셨고 영원히 존재하신다. 세례 요한이 있었던 것은 그 당시뿐이지만(마 3:1), 우리 주 예수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2). 이 말은 그리스도안에 두 본성이 있음을 입증한다.

세례 요한 이후 예수의 공적 출현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와, 요한 이전에 계셨던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이다. 그렇지 않고는 그리스도가 어떻게 요한보다 이전에 계시고, 또 어떻게 영원히 존재하시겠는가?

② 고참순으로 볼 때도 그리스도는 "나의 군주"이다. 

왜냐하면 군주를 "제일인자"라 부르기 때문이다. "내가 보냄을 받은 그를 받들기 위해서이다. 즉 그리스도는 주인이시요, 나는 그의 일군이요 전령이다."

Ⅱ. 복음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다시 이야기하려 했으나, 19절까지는 세례 요한의 증언을 끌어낼 수 없었다. 16절은 14절,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말씀과 감사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그의 충만에서 우리가 모든 것을 받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들을 위하여 은사를 받아"(시 68:18), 인간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다(엡 4:8). 또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려고 자신이 충만하셨다(엡 1:23). 그는 "우리의 보물을 채워 주시려" 하신다(잠 8:21). 그분은 충만함의 근원이시다. "우리 모두는 받았다.""모든 사도들"과 그 밖의 어떤 사람이 그러하다. 

우리들은 이런 사도직의 총애, 즉 "은혜"를 받았다. 그러나 사도직의 적격은 "진리"이다. 또는 "우리 믿는 모든" 자가 그렇다. 많은 자들이 그로부터 충만함을 받는다(16절).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모든 참 신도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위대한 성도들도 그리스도 없이 살 수 없었고, 가장 비천하고 연약한 자들도 그에 의지해서 산다. 이 은사는 자랑하고 교만하는 자 이외의 모두에게 주신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은사를 받기 바랄 뿐이다. 이제 우리가 받은 은사에 대해서 알아보자.

1. 우리들은 "은혜에 은혜"를 받았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가 받은 것들은 "은혜"라는 한 마디의 말로 요약되어진다. 우리들은 은혜뿐 아니라 아주 큰 은사와 부와 매우 귀중한 것들을 받았다. 그것이 바로 "은혜"이다. "은혜에 은혜"라고 말이 반복되어 있다. 그것은 이 건물의 주춧돌에서부터 꼭대기 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은혜, 은혜"를 부르짖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것을 찾아보자.

(1) 받은 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은혜"이다. 

은혜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의지이며,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한 의지가 선한 역사를 낳는다. 그러면 그 선한 역사는 우리로 하나님의 선한 뜻에 더욱 합당하게 만든다. 저수지가 수원(水原)으로부터 물을 받고, 나뭇가지가 뿌리로부터 수액을 받듯이, 빛이 태양으로부터 나오듯이, 우리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은혜를 받고 있다.

(2)은혜를 받는 양식을 보자.

 ‘카린 안티 카리토스’ - 즉 은혜 위에 은혜, 이 문장은 단수로써, 해석가들은 각각 다르게 해석하고 있으나,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은혜의 풍성함을 뜻한다고 본다. 이제 "은혜 위의 은혜"란 뜻을 알아보자.

① 이 은혜의 "값없음"을 뜻한다. 그것은 은혜를 위한 은혜이다. 

그로티우스(Grotius)는 그렇게 말한다.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은혜에 따른 선물"이다(롬 12:6).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에게 나타난 은혜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기뻐하시고, 따라서 그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 기뻐하신다(엡 1:6)

② "넘치는 은혜이다." 

은혜 위에 "은혜"란 하나의 은혜 위에 또 하나의 은혜가 쌓여 있다는 것으로써, 풍성한 은혜를 말한다. 또 그것은 쏟아지는 축복으로 더 이상 받아드릴 자리가 없는, "넘치는 구원"이다. 즉 한 은혜에 더 은혜를 주시겠다는 표시이다. 요셉은 갑절의 은혜를 받았다. 이런 은혜란 하나님의 풍성하심이 우리를 채워 주신다는 뜻이다. 마치 우리가 우리 자신의 품에서 어려움이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거하면 우리에게는 어려움이 없다.

③ 넘치는 은혜의 "유용성." 

이런 은혜는 은혜를 증진시키고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은혜이다. 이 은혜는 우리 자신에 의해서 "발휘되어질" 은혜이다. 은혜스러운 행위를 위한 은혜스러운 습관이다. 이 은혜는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되어지는 은혜이다. 은혜스러운 행위를 위한 은혜스러운 습관이다. 이 은혜는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되어지는 은혜이다. 또한 은혜스러운 성취를 위한 은혜스러운 허락들이며, 서로 교환될 하나의 재능이다. 사도들은 은혜를 받아(롬 1:5; 엡 3:8) 서로 교통하였다(벧전 4:10).

④ 신약 성서의 은혜는 구약 성서의 은혜를 "대치"한다고 베자(Beza)는 말한다. 

이 뜻은 17절에 의해서 확실하다. 왜냐하면 구약에서의 은혜는 율법 안에서 이지만 신약에서는 진리 안에서이다. 구약에도 은혜가 있다고 복음서는 가르치고 있는데(갈 3:8), 이 은혜가 신약에 와서는 대치되어 더 큰 영광이 이른다(고후 3:10). 이제는 신약의 은혜가 더 뜻이 명확하고, 더 풍성히 주어지고 있다. 이것이 "은혜 위에 은혜"이다.

⑤ 또 그것은 은혜의 "지속"과 "증대"를 말해 준다. 

은혜 위에 은혜란 한 은혜에 다른 은혜가 개선되고, 확인되고 완전케 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거룩한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며, 한 은혜에서 다른 은혜에 이른다(고후 3:18). "진실한" 은혜를 가진 자에겐 "더 큰 은혜"를 주신다(약 4:6).

⑥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은혜와 성도들의 은혜가 "일치"함을 뜻한다고 클라크(Clark)는 말한다. 

은혜 위의 은혜란 그리스도의 은혜에 상응하는, 우리 안의 은혜이다.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우리의 은혜가 우리를 "같은 형상으로 변하게 한다"(고후 3:18). 즉 "아들의 형상으로 변하게 한다"(롬 8:29). "하늘에 속한자의 형상으로 변케 한다"(고전 15:49).

2. 우리는 은혜와 진리를 받았다(17절). 그리스도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14절). 그래서 그에 의해서 은혜와 진리가 우리에게 왔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은혜를 받았다. 요한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기쁨으로 말하고 있다. 그는 이런 은혜에 관해서 두 가지를 말하고 있다.

(1) 그것이 모세 율법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율법은 모세에 의해서 주어졌으며, 그 율법은 인간에 관련된 하나님의 뜻과 인간에 대한 그의 선한 의지를 찾을 수 있는 은혜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의무와 행복을 훨씬 더 확실하게 보여 준다. 모세에 의해 주어진 율법은 두려움과 위협과 벌칙으로 묶여져서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위협을 주었다(히 12:18).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 복음은 또 다른 의미를 주는데, 그것은 율법의 온갖 유익한 용도를 내포하며, 두려움이 내포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은혜가 "가르치고"(딛 2:11) "다스리기" 때문이다(롬 5:21). 복음도 법이긴 하지만 "구제하는 법"이다. 사랑을 나타냄이 복음의 특징이지 법과 재앙의 두려움이 그 특징은 아니다.

(2) 이것은 진리와 결합되어 있다. "은혜와 진리"라 했다. 

복음 속에서 우리는 의지와 애정으로 포용해야 할 "넘치는" 은혜뿐 아니라 오성으로 파악해야 할 "가장 위대한" 진리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신뢰할 수 있는 교훈"이면서, "모두가 받을 만한 가치"이다. 곧 "은혜와 진리"이다. 은혜 제공자는 "신실하다." 그에게 우리 영혼을 걸 수 있다. 또 "은혜와 진리"는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과도 관계가 있다. 그 이유로서는,

① 이것은 모든 규약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우리는 흔히 "자비"와 "진리"가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한다. 즉 약속에 따른 자비이다. 여기서는 "은혜"와 진리"가 약속에 의한 "은혜"를 가리킨다.(눅 1:72; 왕상 8:56 참조).

{2] 그것은 구약 성서의 모든 예형과 그림자의 본체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위해 제정된 규례(의식)나 이스라엘을 위해 베풀어진 섭리 속에는 다같이 다소 이 은혜가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나타날 것의 그림자에 불과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기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난" 은혜를 가리키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예수가 "참으로" 파스카 어린 양, 참 속죄 염소, 참 "만나"이시라. 구약은 그림 속에 있는 은총이나, 우리는 사람 속에 있는 은총을 지니고 있다. "은혜와 진리"이다. “은혜와 진리가 ‘에게네토’” - 즉 이루어졌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만물을 지으셨다"고 했을 때 나오는 말(3절)과 같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알려졌을" 뿐이나, 이 은혜와 진리는 예수를 통해서 알려졌을 뿐 아니라 "존재"케 되었다. 이것은 그를 통해서, 세상 창조처럼 "만들어진" 것이다. 그에 의해서 "은혜와 진리"가 "일하게 된다."

3. 그리스도에게서 받는 또 한 가지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계시이다(18절).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선언"하셨고, 그분은 "아무도 일찍이 보지 못했던" 분이시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가져온 은혜와 진리이니, 곧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와의 교분이다. 다음을 살펴보자.

(1) 다른 모든 지시물로는 불충분하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다." 이것은 다음을 시사한다.

① 하나님의 본성은 "영적"이라서, 육신에는 안보이며, "아무도 볼 수 없는"(딤전 6:16)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에 의해서 살아가야" 할 필요가 있으니, 그 믿음에 의해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분을 본다"(히 11:27).

② 구약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낸 계시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나타낸 자기 계시보다 매우 짧고 불안전했다. 

누구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즉 그리스도의 서육 이전에 하나님을 보았고 알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 이후에 보고 안다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생명과 불멸성이 구약 시대에 비해 아주 뚜렷하게 나타났다.

③ 구약의 어떤 예언자들도 우리 주 그리스도가 인간들에게 보여 준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나타내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결코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세는 여호와의 형상을 보았으나"(민 12:8), "여호와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고 기록되어졌다(출 33:20). 그러나 하나님을 보았던 분에 의하여 이 계시가 주어졌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종교를 우리에게 더 분명히 천거하는 것이다.

(2) 복음의 충족성이 그 저작자에 의해서 입증되었다. 

즉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있는 독생자가 하나님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몇 가지를 관찰해 보자.

①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데 가장 "합당한" 자이다. 

그리스도만이 "책을 취하시고 그 인봉을 열기에 합당한"자이시다(계 5:9). 그 이유는

첫째, 그분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아들로서 아버지를 잘 아는 자이기 때문이다. 누가 아버지를 아들보다 잘 아는 자가 있겠는가?(마 11:27) 그는 아버지와 똑같은 본성을 취했으므로, "그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이다(14:9).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15:15). 모세는 신실한 종이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둘째, 그는 "아버지의 품안에" 있기때문이다. 그는 영원전부터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다. 그는 세상에 오기 전에는 여전히 하나님이셨으며, 아버지의 품속에 가셨다. 여기서 "아버지의 품안에"라는 뜻은

a.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 안에" 거하며, 그 안에서 기뻐하고 항상 즐거워한다는 뜻이다. 모든 하나님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손안에" 거하지만, 아들인 그는 품안에 거하신다. 즉 본성과 본질에서 "하나"이다. 그러므로 사랑 안에서 가장 최고인 하나이시다.

b. 아버지의 "은밀한 뜻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잘 알며 숨기는 것이 없다(마 11:27). 어떠한 사람도 그만큼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 왜냐하면 아들만큼 아버지의 생각을 아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대부분의 비밀을 "자기의 가슴에" 숨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은밀한 품속을 잘 알고 계신다. 예언자들은 학자들처럼 "그의 발 밑에" 앉지만, 그리스도는 친구처럼 하나님의 품안에 안긴다(엡 3:11 참조).

② 그는 하나님을 아주 "자유스럽게"(행한 모든 일 그 자체가) 드러내고 있다. 

즉 "하나님을 나타내셨다." 그는 이제까지 어떤 사람도 보거나 알지 못한 하나님을 드러냈는데, 하나님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는 숨겨진 것도 드러내고 있다(엡 3:9). 그는 막연하거나 의심스러운 섬이 없이 분명한 설명에 의하여, 쉽고 명백하게, 그리고 충분히 드러내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뜻과 구원의 길을 밝히고 있다. 이것이 "은혜"와 "진리"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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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의 증언

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4.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25.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28.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요한의 두 제자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르시다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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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의 증언

19.  ○유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내서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어 보게 하였을 때에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였다.

20.  그는 거절하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하고 고백하였다.

21.  그들이 다시 요한에게 "그러면, 당신은 누구요? 엘리야요?" 하고 물으니, 그는 "아니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당신은 예언자요?" 하고 물으니, 요한은 "아니오" 하고 대답하였다.

22.  또 그들이 말하였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할 말을 좀 해주시오. 당신은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

23.  요한이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24.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그들이 또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면, 어찌하여 세례를 주시오?"

26.  요한이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이가 한 분 서 계시오.

27.  그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 만한 자격조차 없소."

28.  이것은,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다.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아라

29.  ○이튿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한 분이 오실 터인데, 그분은 나보다 먼저 계시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다'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분을 두고 한 말입니다.

31.  나도 이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이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32.  요한이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령은 이분 위에 머물렀습니다.

33.  나도 이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분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내려와서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아라' 하셨습니다.

34.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첫 제자들

35.  ○다음날 요한이 다시 자기 제자 두 사람과 같이 서 있다가,

36.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서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하고 말하였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하는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갔다.

38.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랍비'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고 대답하시니, 그들이 따라가서, 예수께서 묵고 계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을 그분과 함께 지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이다.

41.  ○이 사람은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42.  그런 다음에, 시몬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게바'는 베드로라는 말이다.)

빌립과 나다나엘이 부르심을 받다

43.  ○다음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떠나려고 하셨다. 그 때에 빌립을 만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44.  빌립은 벳새다 사람으로,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고을 사람이었다.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나서, 말하였다. "모세가 율법책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습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46.  나다나엘이 그에게 말하기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니, 빌립은 그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48.  나다나엘이 예수께 물었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49.  나다나엘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50.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다고 해서 믿느냐? 이것보다 더 큰 일을 네가 볼 것이다."

51.  예수께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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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And this is the witness of John, when the Jews sent to him priests and Levites from Jerusalem to ask him, "Who are you?"

20.  And he confessed, and did not deny, and he confessed, "I am not the Christ."

21.  And they asked him, "What then? Are you Elijah?" And he *said, "I am not." "Are you the Prophet?" And he answered, "No."

22.  They said then to him, "Who are you, so that we may give an answer to those who sent us? What do you say about yourself?"

23.  He said, "I am A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MAKE STRAIGHT THE WAY OF THE LORD,' as Isaiah the prophet said."

24.  Now they had been sent from the Pharisees.

25.  And they asked him, and said to him, "Why then are you baptizing, if you are not the Christ, nor Elijah, nor the Prophet?"

26.  John answered them saying, "I baptize in water, [but] among you stands One whom you do not know.

27.  "[It is] He who comes after me, the thong of whose sandal I am not worthy to untie."

28.  These things took place in Bethany beyond the Jordan, where John was baptizing.

29.  The next day he *saw Jesus coming to him, and *said, "Behold, the Lamb of God who takes away the sin of the world!

30.  "This is He on behalf of whom I said, 'After me comes a Man who has a higher rank than I, for He existed before me.'

31.  "And I did not recognize Him, but in order that He might be manifested to Israel, I came baptizing in water."

32.  And John bore witness saying, "I have beheld the Spirit descending as a dove out of heaven, and He remained upon Him.

33.  "And I did not recognize Him, but He who sent me to baptize in water said to me, 'He upon whom you see the Spirit descending and remaining upon Him, this is the one who baptizes in the Holy Spirit.'

34.  "And I have seen, and have borne witness that this is the Son of God."

35.  Again the next day John was standing with two of his disciples,

36.  and he looked upon Jesus as He walked, and *said, "Behold, the Lamb of God!"

37.  And the two disciples heard him speak, and they followed Jesus.

38.  And Jesus turned, and beheld them following, and *said to them, "What do you seek?" And they said to Him, "Rabbi (which translated means Teacher), where are You staying?"

39.  He *said to them, "Come, and you will see." They came therefore and saw where He was staying; and they stayed with Him that day, for it was about the tenth hour.

40.  One of the two who heard John [speak,] and followed Him, was Andrew, Simon Peter's brother.

41.  He *found first his own brother Simon, and *said to him, "We have found the Messiah" (which translated means Christ).

42.  He brought him to Jesus. Jesus looked at him, and said, "You are Simon the son of John; you shall be called Cephas" (which is translated Peter).

43.  The next day He purposed to go forth into Galilee, and He *found Philip. And Jesus *said to him, "Follow Me."

44.  Now Philip was from Bethsaida, of the city of Andrew and Peter.

45.  Philip *found Nathanael and *said to him, "We have found Him of whom Moses in the Law and [also] the Prophets wrote, Jesus of Nazareth, the son of Joseph."

46.  And Nathanael *said to him, "Can any good thing come out of Nazareth?" Philip *said to him, "Come and see."

47.  Jesus saw Nathanael coming to Him, and *said of him, "Behold, an Israelite indeed, in whom is no guile!"

48.  Nathanael *said to Him, "How do You know me?" Jesus answered and said to him, "Before Philip called you, when you were under the fig tree, I saw you."

49.  Nathanael answered Him, "Rabbi, You are the Son of God; You are the King of Israel."

50.  Jesus answered and said to him, "Because I said to you that I saw you under the fig tree, do you believe? You shall see greater things than these."

51.  And He *said to him, "Truly, truly, I say to you, you shall see the heavens opened, and the angels of God ascending and descending on the Son of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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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의 증언(2)(요 1:19-28)

여기에 요한의 증언이 있다. 이것은 자기를 시험하러 예루살렘에서 보낸 사자들에게 한 것이다.

Ⅰ. 요한에게 파송한 자들과 파송 된 자들은 누구인가?

1. 우선 사람을 보낸 자들은 누구인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로서, 유명한 산헤드린, 혹은 최고 재판관들이었으며, 유대교를 대표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종교에 관계되는 모든 문제들을 심리하는 역할을 한다. 그들은 종교에 관계되는 모든 무리들을 심리하는 역할을 한다. 그들은 지식의 원천이요, 교회의 안내자로서 성경에 의하여 메시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만큼 시대를 잘 분별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자기들의 인도자로서 그리스도를 즉시 알아야 했고, 받들어야 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알고 받드는 대신에 요한과 "문답하려고" 사자들을 보냈다. 세속적 지식, 위엄, 그리고 권한은 거룩한 빛을 영접하려는 인간의 마음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다.

2. 그들이 보낸 사자들은 누구인가?

(1)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로서, 아마도 그 공의회의 회원들일 것이며, 현명하고, 중대하고 권위 있는 자들이다. 세례 요한도 아론 자손의 제사장이므로, 제사장 이외에 어떤 사람에게도 시험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케"해야 한다고 요한의 직무를 예언한 예언이 있었다.(말 3:3). 그러므로 그들이 요한과 그의 개혁을 시기했다.

(2) 그들은 "바리새인으로서," 교만하고 독선적인 자들이며, 자기들은 회개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자기들의 일에 대하여 회개하라고 가르치는 자에게는 참을 수가 없는 자들이다.

Ⅱ. 그 사자들의 임무는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요한과 "그의 세례"에 대해서 심문하는 것이다. 그들은 요한을 부르러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 아마도 "무리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요한이 있는 곳의 무리들이 분노할까봐 겁이 났고, 또는 자기들 주변의 민중도 그를 잘 알게 될까봐 겁이 났고, 또는 자기들 주변의 민중도 그를 잘 알게 될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요한을 무리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요한에게 질문했다.

1. 그것은 자기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려고 해서이다. 아덴 사람들이 호기심 때문에 바울의 교리에 관하여 물은 것처럼(행 17:19, 20) 그들도 물었다. 그들은 대단한 자만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회개의 교리가 그들에게는 이상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그를 심문한다는 것은 자기들을 "위대하게" 보이게 하리라 생각했다.

3. 그들은 요한의 교리에서 어떤 구실을 발견한다면, 그를 "억누르고" 잠잠케 하려는 의도를 가졌다. 그들은 커가는 그의 인기를 시기했으며, 그의 전도가 그들이 오랫동안 영향받아 왔던 모세의 율법과 일치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생각했던 메시야 왕국의 건설에도 빗나갔기 때문이었다.

Ⅲ. 요한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세례에 대한 답변과 설명을 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 했다.

1. 그 자신에 설명을 보자. 그들은 "네가 누구냐?"하고 요한에게 물었다. 요한의 차림은 놀라왔다. 그는 자기 자신을 나타낼 때까지 광야에 살았다. 그의 정신, 외침, 그리고 교리는 이제까지 존경을 받던 그들에게 도전하는 무엇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유혹자 처럼 하지 않았고, 자기 자신을 위대한 사도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는 "위대하게 보이기" 보다는 "선한 일을 하려고" 애섰다. 그래서 정식으로 심문 받기까지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하려 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낮추어 말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로서 요한은 자기의 업적들을 자기의 업적들을 자기의 입으로 사랑하지 아니했다. 요한은 그들의 심문에 대답하고 있다.

(1) 소극적인 면에서 보자. 요한은 자기가 사람들이 기대하는 만큼의 위대한 선지자가 아니라 했다. 하나님의 신실한 증인들은 불공평한 경멸에 대해서 보다는 지나친 존경에 대해서 더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 바울은 자기를 지나치게 평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그저 바울이오"하고 타일렀다. 또 그를 과소평가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자기의 육체는 연약하다고 했다. 그는 자기를 신으로 부르는 자가 있을 때 자기의 옷을 찢었다.

① 요한은 자기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했다(20절). 즉 "그는 나는" 지금 당신들이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그리스도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서역자들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특권을 침해해서는 안되며, 자기 자신들을 그렇게 높여서도 안 된다. 사역자들은 그리스도가 아니므로, 하나님의 특권을 지나치게 뽐내서도 안 되며,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주장하려 해서도 안 된다. 그들은 은혜와 평화를 창조하지 못한다. 즉 그들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며, 회개나 중생이나 위안을 주지 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요한에 대해서 그 말이 얼마나 강조되고 있는가를 유의하라. 여기 원문은 "그는 부인하지 않고, 고백했다"고 했다. 즉, 그는 자기의 단언에 대해 열렬히, 그리고 항구여일하게 나아갔음을 뜻한다. 교만해지려는 유혹,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명예를 취하려는 유혹은 많은 열정과 솔직성을 가지고 거절해야 한다. 요한은 자기가 메시야로 인정되었을 때, 그것을 묵인하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애매성의 여지도 없이 솔직하고 엄숙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이 표현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말은 아니다. 자신을 낮추어 보잘 것 없이 여기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린다. 그러나 자신을 부인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상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사람이다.

② 그는 자기가 엘리야임도 부정한다(21절). 유대인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엘리야 같은 사람을 기대했다. 그래서 그들과 같이 거하며, 자기들에게 위대한 일들을 약속해 주기를 바랬다. 요한의 성격, 교리, 그리고 세계를 보고 또한 엘리야가 승천한 바로 그 지점에서 내려 온 사람으로 여긴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요한은 역시 이런 존경을 부인한다. 그러나 그는 참으로 엘리야의 이름으로 예언된 자이다.(말 4:5).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온 자이며(눅 1:17), 또 "오리라 한 엘리야" 이다(마 11:14). 그러나 한편 그는 엘리야가 아니다. 엘리야가 왔으나 그들은 "그를 알지 못했다"(마 17:12). 그래서 그는 자기를 엘리야로서 알리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결코 약속한 일이 없는 그런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③ 그는 자기가 "선지자"임을 부인했다.

첫째, 그는 모세가 말했던 "주께서 자기 형제들 위에 세우실" 그런 선지자가 아니었다. 만약 그들이 이렇게 생각했다면, 그들은 질문할 필요도 없다. 그 이유는, 그런 선지자는 바로 메시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은 이미 자기는 바로 그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했다.

둘째, 그는 사무엘과 엘리야 같은 또는 공적인 사건에 끼어 들어 자기들을 로마의 명예로부터 구원해 주리라 기다리는 그런 선지자도 아니었다.

셋째, 그는 선지자들처럼 꿈이나 환상에 의한 선지자가 아니라 계시를 지닌 선지자였다. 그래서 그의 전도와 사명은 다른 한 선지자라고 말했다면 그의 말은 유리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역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말을 조심을 하여 사람들이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2) 긍정적으로 보자. 그에게 온 자들은 적극적인 답변을 요구했다. "무슨 권위"로 일하는지를 알려 했다(22절). "누군지 말하라. 우리는 너를 믿고 세례를 받진 않지만, 우리를 보낸 자에게 대답을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니라." 요한은 신실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일부러 애매한 답을 하리라 생각지는 않았다. 분명하고 뚜렷한 답을 하리라고 생각했다.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그래서 요한은 그렇게 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 여기서 다음을 관찰하자.

① 요한은 성서의 구절을 인용해, 자기에서 성서가 이루어졌음을 나타냈으며, 또 자기 임무가 신의 권위에 의하여 인정된 것임을 말했다. 성서가 말하는 사역자의 사명은 고귀한 소명을 받은 사람에 의해 수행되며, 하나님 말씀만이 그렇게 만든다.

② 요한은 대답으로써 매우 보잘 것 없고 겸손한 그리고 자기 부정의 표현을 하고 있다. 그는 자기를 낮추어, 자신의 관작이 아니라 의무와 의존에 의해 수행함을 나타내며, 단지 소리에 불과한 것처럼 나는 그저 "광야의 소리"라고 말한다.

③ 요한은 자기에게 경청하도록 하고, 감명을 주고 깨우칠 수 있도록 설명했다. 그는 "소리"이다.(사 40:3 참조). 또 경성의 소리이며 지시하는 소리이다.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소리요 매개자이다. 바울과 아볼로도 단지 전달자들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첫째, 요한은 한 "인간의" 소리였다는 점이다. 사람들을 천둥소리와 큰 나팔소리처럼 자기들을 두렵게 하는 소리로써 율법을 받을 준비를 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나타나신 때처럼 (왕상 19:12) 복음은 인간의 목소리로, "조용하고 작은 음성"으로 들을 준비를 해야 했다.

둘째, 그는 "외치는 자"의 소리였다.

a.. 그의 "진지함"과 "집요함"이 사람들을 회개토록 부르고 있다. 즉 여유를 주지 않고 큰 소리고 외치었다. 사역자들은 진지함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열정을 가지고 가르쳐야 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그것에 먼저 자신들이 감화를 받아야한다.

b. 그가 가르치는 교리는 아주 "공개적이다." 그는 "외치는" 소리로써 모든 사람들이 듣고 주목할 수 있었다.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잠 8:1)

셋째, 목소리가 외치는 곳은 "광야이다." 광야는 조용하고 고적한 장소로써, 세상의 소음이나 분주한 일이 없는 곳이다. 세속적인 일의 시끄러움에서 떠날수록 우리는 그만큼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넷째, 그의 외침은 "주의 길을 곧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말은 이런 뜻이다.

(a) 하나님의 길에 대해 사람들의 잘못을 "바로 잡는다"는 것이다. 주의 길은 확실히 바르나, 율법을 왜곡해서 해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굽게 만들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본래의 법칙으로 돌아오도록 요구하고 있다.

(b) 그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사람들이 영접하고 즐길 수 있도록 예비하러 왔다. 즉 왕자나 위대한 사람을 위해 "방을 예비하는" 선발자(先發者)들과 같은 격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 우리는 그분을 영접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면 영광의 왕이 들어가실 것이다.(시 24:7).

2. "세례"에 관한 그의 증언을 보자.

(1) 그것에 관한 사자들의 질문을 보자.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니면,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25절).

① 그들도 세례가 거룩한 의식이나 행사로써 적절하게 사용되어야 할 줄로 알고 있었다. 유대 교회에서는 세례를 할례와 더불어 개종자의 입단식으로써, 죄로 더럽혀진 이전의 상태에서 씻음을 받는 표시로 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의식은 기독교 교회에서 사용됨으로써, 더 잘 어울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새로운 것을 즐겨 사용하진 않으셨다. 그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② 사자들은 세례가 메시야의 도래 때에 사용될 것이라 기대했는데, 그 이유는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며"(슥 13:1), "맑은 물이 뿌려지리라"(겔 36:25)라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엘리야, 그리고 "바로 그 예언자"는 죄로 "더러워진 세상을 깨끗케 하실 것이다.

③ 그러므로 사자들은 요한이 어떠한 권위로 세례를 베푸는지를 알려했다. 그가 엘리야 혹은 그 예언자가 아니라는 자기 부인은 사자들에게 더 질문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네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사람의 겸손이 오히려 그를 거역하고 또 나뿐 편견을 조성한다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마귀가 우리를 교만으로 유혹하고 우리를 죄인으로 선고해 우리의 교만한 사상을 이용당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우리를 멸시하려고 우리 자신의 겸손한 사상을 이용하는 것이 더 낫다.

(2) 거기에 대한 요한의 설명을 보자(26,27절).

① 요한은 자기 자신을 외형적인 세례를 주는 사역자라고만 나타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는게 전부이다. 나는 육의 눈으로 보이는 것 이상이 아니다. 나는 세례 요한이란 이름 이외에 다른 이름이 없으며, 물이 상징하는 성령의 은사는 줄 수 없다." 바울은 아무도 자기를 지나치게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했다(고후 12:6). 세례 요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인 체해서는 안 된다.

② 그는 자기보다 더 위대한 사람을 그들에게 지시했다. "나는 단지 물로 세례를 주며, 그것을 나의 최선의 사명으로 여긴다. 나는 단지 내 뒤에 오시는 분을 안내할 따름이며, 그분에게 사람들을 넘겨 줄 뿐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의 위대한 역할이란 바로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에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사역자들은 자기 자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야 한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전했던 복음을 그대로 일반인들에게 전해야 한다. "내가 전하려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15절). 요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였다. 그의 증언은 한결같이 변함이 없었다. 산헤드린의 대제사장들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요한을 시기했으나,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에게 자기를 능가할 사람이 문에 서 있다고 말했다.

첫째, 요한은 이 때에 "사람들 중에 있는" 그리스도를 이야기했다. 즉 "여러분 중에 한 사람이 있는데, 여러분들은 그분을 알지 못합니다." 이 때 그리스도는 무리들 사이에서 계셨으며, 그들 중의 한 사람처럼 보여졌다. 여기서 이 점을 살피자. 이 세상 안에는 참다운 가치가 숨겨져 있다. 여기서 이 점을 살피자. 이 세상 안에는 참다운 가치가 숨겨져 있다. 즉 참다운 탁월성은 흔히 가려져 있다. 성도들은 하나님이 "숨겨놓은 자들"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잘 모르고 있다."

또한 하나님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가까이 계신다. "주님이 바로 곁에 계셨지만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기다리던 메시야가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나님 나라는 여기에, 혹은 저기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둘째, 그는 그리스도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분이 내 뒤에 오시지만 나보다 먼저 택하심을 받았다." 이 말에 이어서 그는 "나는 그의 신들에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러므로 나는 그와 같이 이름 불리우기에도 적합치 못하겠노라. 그러므로 나는 그와 같이 이름 불리우기에도 적합치 못하며, 너무 위대하므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명도 나는 감당할 수 없다"(삼상 25:41). 그리스도의 중요성을 아는 자들은 그에 대한 봉사, 심지어 가장 낮은 문지기까지도 영광으로 알고 있다(시 84:10 참조). 만약에 요한과 같은 위대한 사람이 가까이 계시는 그리스도의 위엄을 감당치 못한다고 말하면, 우리 자신들은 얼마나 무가치하랴!

이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을 생각해 보자. 메시야가 그들 가까이에 접근하고 있다는 외침에, 그들은 메시야가 누구이며, 어디 있는지를 들었을 법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이 사자들은 요한을 방해하러 왔기 때문에, 그에게서 어떠한 교훈도 거절했다. 그래서 그들의 무지는 "고의적인"것이 되었다. 그리스도를 알 수 있었으나 알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것이 행하여 진 장소에 주목된다. 이 장소는 "요단강 건너편의 베다니"이다(28절). 베다니는 "과객의 집"이란 뜻이 있다. 어떤 사람은 이 장소가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요단강을 건너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는 바로 그 장소로 추측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길이 열려 복음이 들어간 곳이다. 그래서 이 장소에서 요단을 건너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아주 멀다. 아마도 요한이 그 장소를 택한 것은 예루살렘에서 거의 방해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아모스 선지도 법정에서 먼 이 지역에서 외쳤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그의 평화"에 속한 길을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요한은 자기가 세례를 주고 있는 바로 그 장소에서 증거 했고 그의 세례를 받으러 온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 했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른다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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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등장(요 1:29-36)

이 구절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으로서, 요한이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이 증언을 했다. 그리스도는 세례를 받고 즉시 광야로 가서 시험을 받았다. 거기서 그리스도는 40일 동안 시험받으시고 "자기에게로 나아오시는 예수를 보았다." 시험을 이기신 그리스도가 전도하며 세례를 주고 있는 요한에게 즉시 돌아왔다. 그리스도가 아주 모범으로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격려가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있다.

1. 우리가 "어려운" 시험 상태에 있을 때는, 규례(의식)와 밀접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야"한다(시 73:17). 사탄과의 싸움은 우리로 성도들과 더욱 밀접한 친교를 갖게 하는데 그것은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더 낫기 때문이다.

2. "영예로운" 승리 때문에 "의식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는 시험을 이긴 후 천사들이 수종을 들었지만, 결구 전도하고 세례를 베푸는 요한에게로 돌아 왔다. 우리가 하는 이쪽에 속해 있는 한,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특별히 받았다 하더라도 여전히 은혜와 위로를 받는 일반적인 방법에 가까워져서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이제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두 증언"이 나타나는데, 이 두 증언이 "하나로 일치"된다.

Ⅰ.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나온 첫 날, 그에 대한 요한의 증거가 있다. 즉 요한이 자기 앞에 있는 그리스도에 관해 증언한 4가지가 있다.

1.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29절)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이런 것을 배운다.

(1)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그는 인간의 죄 때문에 보상되어지고,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려는 큰 희생 재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제사의 희생물로 쓰이는 어린양이 자기 자신이라고 암시했다. 왜냐하면 어린양은 온유의 상징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는 자기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같이 되어야 하고(사 53:7), 나아가 특별히 다음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① 아침저녁으로 매일 드리는 "날마다의 희생 제물"인 "어린 양"이다(출 29:38). 이것은 영원한 속죄를 증거 해 주는 그리스도의 예형이다.

② "유월절의 어린 양"을 가리킨다. 그것은 문설주에 그의 피를 뿌리고, 이스라엘인들을 멸망시키는 천사들로부터 구했던 양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월절 양이다(고전 5:7). 그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하나님이 그를 세우셨고(롬 3:25), 하나님에게 바쳐졌고(17:19), 하나님에게 인정받았다. 그를 하나님이 기뻐하셨다. 속죄제로 드릴 염소를 뽑는 제비를 "주님(여호와)의 제비"라고 했다(레 15:8, 9). 그래서 죄의 대속물인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불리 우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어린 양"인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져다 버린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희생함으로(히 9:26), 죄를 제거하려고 나타나신 것이며, 그것이 사명이었다. 세례 요한은 죄의 용서를 받도록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했다. 비록 우리의 회개가 죄에 대하여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죄의 용서가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 의하여 가능하며, 또한 회개를 통하여 우리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있다. 우리가 주목하는 근거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것 뿐 이다.

① 그리스도는 "죄를 짊어지신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증보자인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거룩성을 침해하고 인간의 행복을 파괴하는 죄를 짊어지신다. 그가 오신 것은

첫째, 그의 죽으심으로써 죄를 제거하며 인간이 처해 있는 심판을 거두게 하시고, 박탈된 권리를 회복시키며, 그의 배상 행위로서 회개하고 순종하며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려는 것이다.

둘째, 은혜의 영으로 죄의 권세를 물리침으로써 죄가 우리를 주관치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롬 6:14).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우리 피 속에 있는 죄들을 깨끗이 씻기를 바라고 있다. 즉 그는 우리를 "의롭게"하시며 동시에 "성화 시킨다." 그는 죄를 짊어지신다

곧 그는 세상에서 죄를 져다 버리고 계신다. - ‘호 아이론’ - 이것은 한 번이 아니라 계속적인 제거를 뜻한다. 그 짊어지심은 그의 계속적인 활동이고 임무이며, 시간이 끝나기 전에는 끝날 줄 모르는 "시간의 임무"이다. 하늘에서 그의 계속적인 피의 중재와, 땅에서 그의 계속적인 은혜의 감화를 통하여 그는 항상 죄를 져다 버리고 계신다.

② 그는 "세상 죄"를 짊어지시고 있다. 그는 어느 나라나 국가, 그리고 어느 언어를 가지고 있든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용서를 하나님에게 구하고 있다. 율법의 제사는 이스라엘의 조에 대한 이스라엘만의 보상이지만, 하나님의 어린양은 "온 세상의 죄"를 위한 화해 제물이다(요일 2:2 참조). 이것은 우리들의 신앙에 용기를 준다. 만일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짊어지신다면, 나의 죄를 짊어지시지 않겠는가? 그리스도는 자기 능력을 죄가 범람하는 중심 부분에 거누고서, 그 뿌리를 꺾으시며, "온 세상에" 편만한 "사악함"을 물리치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화해하셨다.

③ 그는 "죄를 친히 담당하신다." 그는 "세상 죄를 담당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난외에는 그런 뜻으로 되어 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죄를 담당하였다." 따라서 "우리에게서" 죄를 가져간다. 희생 염소가 자기 머리에 이스라엘의 죄를 담당하듯이(레 16:21),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지셨다." 하나님은 엣 세상의 죄를 제거하셨던 식으로, 역시 죄인을 제거시킴으로써 죄를 제거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없애는 방법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죄"를 자기 아들에게 부담시킴으로써 죄인들을 살려두시고 계신다.

3) 믿음의 눈으로, 세상 죄를 담당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죄를 담당하는 그를 보면 죄를 미워하게 되고, 죄에 대항하는 새로운 결심이 일어나게 된다. 하나님의 어린양이 제거하러 오신 그런 금식에 매달리지 말라. 그는 우리의 죄나 우리 자신을 제거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죄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신"(계 1:5)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도록 하자.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무엇을 제거한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우리의 죄가 사라진다면 영리는 거기에 감사해야지 불평할 이유가 없다.

2. 요한이 전에 말했던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30,31절). 요한은 예수께서 서 계신 곳을 가리키면서, "내 뒤에 오신다고 했던 사람이 이 사람이"라고 말했다.

(1) 요한은 가장 영예로운 예언자였다. 많은 예언자들은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말했지만, 요한은 이미 그분이 오신 것을 알았다. "이 사람이 그다." "지금" 내가 그를 보며, "가까이서" 보았다(민 24:17). 현재의 믿음과 장차의 기다림과는 차이가 있다. 현재 우리는 보지 않은 사람을 사랑한다. 그러나 장차에는 우리의 영혼이 사랑하는 그분을 볼 것이며, 그분과 이야기할 것이다. 내가 말하던 사람, "나의 그리스도," "나의 전부," "내가 사랑하는 이," "내 친구"가 이 사람이다.

(2) 요한은 그리스도를 "사람"이라 했다. 자기 뒤에 "한 사람이" 올 것이라 했다. 곧 "강한 사람," "남자"다운 사람, "하나님의 오른 팔과 같은 사람"이다.

(3) 그는 자기가 전에 말한 것을 인용한다. "내가 말했던 그가 이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가장 고귀한 점을 이야기했던 사람들은 그것들을 철회해야 될 이유를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그만큼 그를 더 존경하게 된다. 요한은 여전히 자신을 비천하게 여기고 그리스도를 높이고 있다. 그리스도가 어떤 외적인 장관이나 위엄스런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요한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내가 말한 그가 이분이며, 나 이전에 택함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그를 말하지 않았던들 지금까지 요한이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하던 그가 이렇게 매우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4) 그는 이러한 예수와 어떤 사건의 공모나 동맹이 없었다고 했다. "나는 그를 모른다." 비록 서로(엘리사벳은 동정녀 마리아와 사촌간이다) 어떤 인척 관계는 있다 하더라도, 서로 사이에는 전혀 친분이 없었다. 즉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 받으러 오는 것을 볼 때까지는 예수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다. 서로의 삶의 양식이 달랐다. 즉 요한은 대부분을 광야에서 그리고 고적한 데서 보냈으며, 예수는 나사렛에서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지냈다. 그들 서로간에 연락이나 대화가 전혀 없었다. 이것은 서로간의 개인적 어떤, 계획이나 모의에 의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늘의 지시나 처분에 따라 진행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요한은 모든 공모의 관련성을 부인할 뿐 아니라, 일체의 편파성도 부정한다. 그는 예수를 친구로서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서로 사이에 우정이나 친밀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요한에게 낯선 사람이기 때문에 편견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예수가 정말 낯선 사람이기 때문에 "하늘에서 주신" 바가 아니면 그에 대해서 어떠한 일도 알 수 없을 것이다(3:27).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 그들이 보지 못했던 사람을 "믿고" 고백하는 자는 복이 있다.

(5) 요한의 전도와 세례의 중요한 의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주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그를 드러내려 함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여기서 다음을 주목하자.

① 예수를 만나 본 일이 없었지만, 요한은 그를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하늘의 즐거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분명히 알려지리라는 사실만은 알 수 있다.

② 요한은 세부적인 것에 대해서 아직도 미궁에 있지만, 그리스도임을 나타내야 한다는 일반적인 확신만을 가지고도 결의를 가지고 일을 수행했다. 보이지 않는 일의 실재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우리는 의무를 능히 이행할 수 있다.

③ 하나님은 점차적으로 자기 백성에게 자신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요한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가 분명하게 드러내리라는 사실밖에 몰랐다. 그런 확신으로 세례를 주었다. 그런데 그가 그를 보게 되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보지 않는 것을 멀지 않아서 보게 될 것이다.

④ 말씀과 규례(의식)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해서 보다 분명하게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는 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다.

⑤ 물로 주는 세례가 우리의 부패와 타락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길목이 된다.

3. 이는 "성령이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임하신" 그 사람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증언을 확실케 하기 위하여, 그는 세례에서 나타나는 이상한 현상을 하나님이 그리스도 사명의 놀랄 만한 증거가 되었다. 이제 그것을 더 살펴보자.

(1) 세례 요한은 비둘기같이 임하는 성령의 증거를 보았다. 그는 "기록을 가졌다." 그 사실을 하나의 이야기처럼 말한 것이 아니라, 열정과 단호함을 가지고 아주 확고하게 목격자로서 증거하고 있다. 그는 이 사실을 맹세했다. 즉 "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성령을 보았다." 요한은 직접 성령을 표상하는 비둘기를 보았다. 이제 그 성령이 그리스도에게 머물러, 그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그리스도는

도는 왕관이 내려졌거나 그의 형체가 변화됨으로써가 아니라 비둘기 같은 성령이 내려옴으로써 세상 죄를 지고 갈 분 임이 알려 지셨다. 이와 같이 제자들의 첫 증언도 성령이 임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은혜"에 의해서 드러난다. 하나님 자녀로서 영광은 장차 주어지게 된다. 여기서 다음을 주목하자.

① 성령이 "하늘로부터" 내려 왔다. 선하고 완전한 선물은 모두 "하늘에서" 온다

② "비둘기같이" 임했다. 순종과 온화함, 그리고 온순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가 "가르치기에 적합함"을 나타낸다. 또 비둘기는 평화를 나타내는 감람나무 잎사귀를 가져 왔다.(창 8:11).

③ 예언된 것처럼 그리스도에게 임한 성령은 "그에게 남아 있다"(사 11:2). 성령은 그에게 삼손처럼 때때로가 아니고(삿 13:25) "내내" 계신다. 그에게는 성령이 "측량할 수 없도록" 주어졌다. 즉 그에게는 항상 성령이 계셔서, 어느 때고 일할 수 있었다.

(2) 요한은 증거를 아주 확실하게 해야 했다. 요한은 그가 하나님의 다들이란 사실을 예측에서가 아니고 순전히 임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알았다. 그것은 "지정된" 약속이었다. "나는 그를 몰랐으나 전에 나에게 말씀하신 그가 표적이 나타나면 그리스도인 줄을 알라고 했다"(33절). 그는 이 계시가 없었더라면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몰랐을 것이다.

① 요한이 전도하며 세례를 베풀었던 확신의 근거들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최대한 만족으로써 증거 할 수 있었다.

첫째, 그는 "보냄이 없이는" 전하지 않았다. 즉 하나님이 "세례를 베풀도록 그를 보냈다." 그는 자기가 정했던 것을 하늘로부터 보장받았다. 사역자로서의 부름이 명백하면 때때로 그의 사역이 성공치 못하더라도 확실한 위로가 있다.

둘째, "시급함이 없이는" 전하지 않았다. 그가 "물로써 세례를" 주도록 보냄을 받았을 때,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줄" 사람을 지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러한 의향에서, 세례 요한은 우리에게 회개와 믿음을 주고 그를 기초로 해서 건물을 짓고 완성시킬 수 있는 그리스도를 영접토록 가르쳤다. 밖으로 드러난 표적들이 봉사를 통해서 생명과 능력으로 나타난다. 사역자들은 귀에 말하지 말고 마음에다 말하라. 그러면 마른 뼈들이 생기를 얻을 것이다.

② 그가 메시야란 인물을 말하는데 사용한 말의 확실한 근거를 알아보자. 하나님이 사울에 관해서 사무엘에게 지적했듯이 요한에게 전에 한 표적을 주었다. "성령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거든, 그 사람이 그다." 이 말은 어떠한 잘못도 예방할 뿐만 아니라 담대하게 증언토록 했다. 이러한 말이 요한에게 주어짐으로써 담대하게 되었을 때는 기대가 매우 컸었다. 그래서 그 예언이 정확하게 사건으로 나타났을 때, 그의 믿음은 그만큼 더 확고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을 우리로 믿도록 하기 위해 기록되어졌다.

4.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말이 요한의 증언의 결론이 되었다.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도다"(33절).

(1) 외쳐진 진리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하늘의 소리가 들리어 요한이 기록했는데, 그는 신의 능력을 가지고 성령으로 세례를 줄뿐만 아니라 신의 본성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마 16:16). 이것은 사도신경의 한 내용인데, 여기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2) 요한의 증거를 보자. "내가 보고 증거 하였다. 내가 지금 그 사실을 증거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보는 순간에 증거 했었다(기록했다)."

① 그는 증거 할 것을 보았다. "우리는 보고들을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20).

② 그는 본 것을 증거 했다.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은 목격자들의 증언이다. 그래서 그만큼 더 신빙성이 있었다. "너희에게 전하려는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 1:16).

Ⅱ. 그 다음날에 그리스도에게 대해 요한이 한 증거가 있다(35,36절).

1. 요한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려고 모든 기회를 이용했다. 요한은 무리로부터 떨어져 자기의 두 제자와 함께 서서 이야기하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았으나, 직접 그에게로 가지는 아니했다. 그것은 가가 예수와 모의하고 있다는 최소한의 의심도 사람들에게 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즉 침착하게 그러면서 계속 눈길을 떼지 않았다.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려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때때로 그리고 부지런히 그리스도를 심사숙고해야 한다. 요한은 전에 그리스도를 보았지만 지금은 그를 "주목"하고 있다(요일 1:1).

2. 그는 그리스도에 고나한 진리의 증언을 전날과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다. 그의 증언은 한결같고 계속적이며 모순이 없었다. 그의 말은 바울처럼 공과 사가 일치되었다(행 20:20, 21). 사람들에게 들은 것을 반복하는게 좋다(빌 3:1). 훌륭한 사역자들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의 속죄 교훈을 특히 강조해야 한다. 특히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강조해야 한다.

3. 그는 자기와 같이 서 있던 두 제자들에게 이 교리를 특별히 주지시키고 있었다. 그는 기꺼이 자기 제자들을 그리스도에게 가도록 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자기 두 제자에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둘은 자기 두 제자를 그리스도에게 보내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 요한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제자들을 택했고,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위해서 제자들을 택했고,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섬기도록 했다(눅 1:17). 그는 그리스도의 세력이 점점 더 커지는 것 이외는 바라는 것이 없었다. 겸손하고 관용성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기꺼이 낮추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의 장점들을 주려고 한다.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진 명성이란 자기 자신을 다 내 주도록 헌신한다고 해서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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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와 베드로(요 1:37-42)

여기서 우리는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에게로의 전향하는 것을 본다. 그들 중의 하나가 제 3일에 택해지며, 그래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첫 열매가 된다. 교회의 처음 시작이 얼마나 초라했는지 보라. 또한 위대한 일들의 새벽이 어떠했는지 보라.

Ⅰ. 세례 요한의 제자인 안드레와 또 한 제자가 그리스도를 좇았다(37절). 다른 한 제자는 이름이 나와 있지 않는데 21장 2절과 비교할 때 아마 도마인 것으로 보인다. 또 어떤 사람은 요한 자신으로 본다. 그는 이 복음서의 기록자이며, 그이 태도로 보아 자기의 이름을 굳이 밝히지 않는 것 같다(13:23; 20:3).

1. 그리스도를 좇는 두 제자의 즉각적인 태도를 보자. 그들은 "요한에게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린양이란 사실을 듣고서" "예수를 좇았다." 아마도 그들은 그 전날도 같은 소리를 요한에게서 들었으나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그 다음날 예수를 좇은 것을 보면, 거기에는 같은 내용의 반복과 서적으로 개인적인 대화가 영향을 준 것 같다. 즉 요한으로부터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이야기로써 이 대화가 그리스도를 좇게 만들었을 것이다. 현명하고 깨우치게 하는 정신으로 예수를 따르게 하는 가장 강하고 거의 사로잡을 듯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요한이지만, 예수만이 죄를 짊어지신다.

2. 친절하고 세심한 그리스도가 그들을 보았다(38절). 그들이 그의 뒤를 좇았을 때, 그는 그들을 알아보고 돌이켜 좇아오는 그들을 보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리스도는 자기에게로 오는 사람의 첫 행동과 하늘의 길을 걷는 첫 걸음을 먼저 알고 계신다는 점이다(사 64:5; 눅 15:20 참조). 그는 그들에게 지체하지 않고 먼저 이야기했다. 한 인간과 그리스도와의 사귐이란 이런 과정을 말한다. 시작하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그가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이런 질문은 자기에게 오는 사람의 대담함을 책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찾으러 오신 그리스도는 자기를 찾으러 온 어떤 사람을 책하려 하는게 아니라 반대로 수줍어하고 겸손해 하는 그들을 영접해서 자기의 친구로 삼으려는 것이다. "와서, 나에게 말하려는 것이 무엇이냐? 너의 청원이 무엇이냐? 너의 요구가 무엇이냐?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역자들은 겸손하고 온화해야 하며, 사람들이 묻도록 용기를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이 제자들에게 한 질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좇아 그의 거룩한 종교를 전파하려 할 때에 자신들에게 물어야 한다. "무엇을 구하느냐? 우리가 계획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이 이냐?"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사람들은 아직도 세상을 구하거나 자기를 구하거나 혹은 자신을 송이고 인간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찾고 있는 우리는 무엇을 구하는가? 선생, 통치자 혹은 화해자인가?" 만약 이 때의 우리 눈이 정직하다면 우리는 빛으로 충만하게 된다.

3. 그의 거처에 대한 그들의 가장 겸손한 물음을 보자. "랍비여 어디 계십니까?"

(1) 그를 "랍비"라 부름으로써, 그에게 가르침을 받겠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랍비란 뜻은 선생 즉 가르치는 선생을 말한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박사들 혹은 학자들을 랍비라고 부른다. 그에게 있어서 랍비란 말은, 선생, 위대한 사람 등등 많은 뜻을 가진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랍비는 결코 그런 뜻이 아니라, 지혜와 지식의 원천으로써의 랍비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를 따른 이 둘이 그의 제자가 된 것처럼, 그를 따르려는 사람들은 그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요한은 이 두 제자에게 그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랍비로서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다(계 5:9). 우리가 그들에게 통치되고 가르침을 받는데 우리 자신을 맞기지 않는 한, 그는 우리의 죄들을 짊어지지 않을 것이다.

(2) 그의 거처를 묻는다는 것은 그와 더 친히 지기를 바라는 암시가 있다. 그리스도는 이 지방에서 하나의 낯선 사람이었으므로, 그들은 그가 기거하는 숙소를 알고 싶어했다. 그래서 가르침을 받고자 그가 정하는 알맞은 시간과 장소에 가려는 것이었다. 즉 알맞은 시기에 찾아가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들은 정중함과 좋은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또 한편으로 그들은 그와의 간단한 이야기보다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요했다. 그리스도와 어떤 친분을 가지려는 사람들은 부업이 아니라 주요 사업처럼 생각하고 나아가야 한다.

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그를 더 알려" 할 수밖에 없다.

② 그와의 "확고한 교제"를 원한다. 그들은 그의 곁에 앉아서 그의 교훈을 들으려 했다. 그는 그들에게 "와서 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향하는 좋은 바람이며, 그와의 친교를 장려하는 말이다.

(1) 그는 자기 처소로 그들을 초대한다. 우리가 그에게 더 가까이 접근할수록 그의 아름다움과 우월성을 볼 수 있다. 사기꾼들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멀리함으로 자기 세력을 유지하나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자기의 존경과 매력을 맡기고, "내가 거하는 초라한 숙소를 와서 보라.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에게 아부하여 그들을 랍비라고 부르는 자들처럼 그런 기대를 가지고 오지는 말라. 나를 따르려면 어떤 것을 생각해야 되는지 와서 보라"(마 8:20 참조)고 말씀하셨다.

(2) 그는 이 제자들에게 "즉시" 오라고 했다. 그들은 좀더 좋은 때에 그를 시중들려고 그의 거처를 물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즉시 와서 보라, 지금보다 더 나은 때가

결코 없다"고 말했다.

①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도 배우자. 사람들이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그들을 택하는 것이 최선이다. 즉 쇠는 달았을 때 쳐야 한다.

② 우리 자신에게 대해서도 배우자. 현재의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 현명하다. "보라, 지금이 은혜받을 때요, 구원의 날이다."(고후 6:2).

5. 기쁘고 감사에 넘쳐 그들이 초대를 수락했다. "그들은 그가 거처하는 곳을 가서 보았고," "그날을 그와 함께 거했다."

(1) 그들은 즉시 그와 동행해, "그의 거처를 가서 보았다." 은혜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은혜스러운 초청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즉 다윗처럼 한다(시 27:8). 그들은 그와 어떻게 기거할지를 묻지 않고 되어가는 대로했을 것이며, 그들이 알고 있는 최대로 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거처하고 있는 곳은 어디나 좋다.

(2) 그들은 "그 날을 그와 같이 기거한다"는 것을 매우 기뻐했다("주님, 여기가 좋사옵니다"). 그리고 그는 환영했다. 이 때가 제10시경이었다. 흑자는 요한이 로마의 계산에 따라서 그 때를 아침 10시로 모았으며, 그들은 그와 밤까지 머물렀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유대인의 계산에 따라서 말한 것으로 보고, 그 때가 오후 4시이며, 그들이 그날 밤부터 다음날까지 기거했다고 말한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보낸 그 다음 날이 안식일이며, 안식일 전날에는 집에 갈 수 없으므로 지체하고 있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에, 우리의 영적인 이익과 도움이 되는 만큼 우리는 안식일을 어떻게 해서든 지켜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살아있는 신앙, 사랑, 헌신의 활동으로 그리스도와 친교 하는 그들의 안식일을 보낸 축복 받은 자들이다. 참으로 안식일은 "인자(人子)의 날," 즉 주의 날이다.

Ⅱ. 안드레는 그의 형제 베드로를 예수에게 데려 갔다. 만일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처음이라면 카토릭 교도들은 그 사실에 대하여 소란을 피웠을 것이다. 베드로는 참으로 은혜 안에서 후에 더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안드레가 먼저 그리스도와 친분을 가지는 영예를 획득했으며, 베드로를 그리스도에게 데려 가는 도구 역할을 했다.

1. 안드레게 베드로에게 준 "정보"를 보자.

(1) 안드레가 베드로를 "찾았다." "안드레가 먼저 그의 형제 시몬 베드로를 찾았다." 즉 베드로를 두루 찾았다. 시몬은 안드레와 함께 요한의 설교와 세례에 따라 다녔으므로 안드레는 시몬을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알고 있었다. 아마도 안드레와 함께 있었던 다른 제자들은 같은 시간에 그의 친구를 찾으러 밖에 나갔을 것이다. 안드레는 "먼저" 요한을 만나려고 왔던 시몬을 만났으나, 그의 기대는 예수를 만나는 것이었다.

(2) 안드레는 자기들의 경험을 시몬에게 말했다. "우리는 메시야를 보았다." 다음을 주시하자.

① 안드레는 겸손하게도, 그리스도를 만난 영광을 자랑하지 않고 "내가 그분을 찾았다"가 아니라, "우리가 같이 그분을 찾았다"라고 말했다.

② 안드레는 대단히 기뻐하면서 말한다. 우리는 가치가 있는 진주와 참다운 보물을 찾았다. 그래서 그는 마치 문둥이들이 외치듯이(왕하 7:9)외쳤다.

③ 안드레는 알아듣기 쉽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메시야를 만났고, 그분은 이제까지 들은 그 이상의 사람이다. 요한은 "그가 하나님의 어린양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했다. 안드레는 그 말을 구약 성서와 비교하면서, 그분은 때가 찼기 때문에 온 아버지께서 보내라고 약속하신 그 메시야이다라고 단정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안드레는 "하나님의 증거를 명상함으로써," 이제까지 "그의 선생"인 요한이 말한 것보다 더 확실하게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시 119:99).

(3) 안드레는 "시몬을 예수에게 데려갔다." 안드레는 자신이 설명하지 않고, 근원이신 예수에게로 데려가 그를 소개했다.

① "자기" 형제를 진실로 사랑한 하나의 모범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친척들에게 영적인 행복을 찾아 주려는 특별한 관심을 경주해야 됨을 배운다. 우리와 그들의 관계가 그들의 영혼이 잘 될 수 있는 기회를 보태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② 그것은 안드레가 그날 그리스도와 대화한 결과이다. 은혜로써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최선의 증거는 앞으로 우리의 생활이 거룩해지고 유용성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안드레는 "예수와 함께 있었고," 그래서 그의 얼굴이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충만한 것을 알았다. 은혜를 맛보면서 그는 자기의 형제들도 같이 맛볼 수 있을 때까지는 편안할 수가 없었다. "참다운 은혜는 독점을 싫어하며 한 조각이지만 혼자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한다."

2. 예수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준 "환대"를 보자. 그의 형제 안드레의 권유로 온 베드로를 예수는 환영했다(42절).

(1) 그리스도가 베드로의 이름을 불렀다. "예수가 베드로를 보고, 말하기를 네가 요나의 아들 시몬이로다 하니라."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몰랐을 것이 분명하다.

① 그렇다면 첫 눈에 어떤 물음도 없이 그리스도가 그의 이름과 그의 아버지 이름을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전능함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주님은 자기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처지를 알고 계신다."

② 그러나 시몬은 보잘 것 없는 하찮은 사람인데도 그리스도가 꾸밈없고 친절하게 그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하강적인 은혜와 호의의 한 예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모세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호의를 나타내는 한 예이다(출 33:17) 혹자는 이름의 특징을 주목한다. "시몬"은 "복종적"이란 뜻이요, "요나"는 "비둘기"란 뜻이다. 비둘기같이 복종적인 정신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데 필요한 자질이다.

(2) 그는 베드로에게 "게바"라는 이름을 주었다.

① 이름을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총애"를 뜻하는 것이다. 또 새 이름은 어떤 관작을 나타내기도 한다(계 2:17; 사 62:2). 이러한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리스도는 그의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가문의 수치를 씻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제자로 택하셨다.

②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뜻하는 이름이다. "너를 게바(번역하면 반석)라 하리라." 베드로는 천성이 딱딱하고 완고하고, 그리고 단호했던 것이 그리스도가 그를 "게바"(반석)라 부른 중요한 패를 겪지 않게 하려 그리스도에게 확고하게 하며, 동시에 그의 "형제들에게 힘을 주며," 다른 형제들에게 도움이 됨으로써 참으로 "게바"(반석)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에게 오는 사람들은 하나의 반석처럼 단단히 그리고 천천히 그러면서도 확고한 결심을 가지고 와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되어질 수 있다. "한결같이 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를 반석처럼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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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과 나다나엘(요 1:43-51)

우리는 이 대목에서 빌립과 나다나엘의 소명을 볼 수 있다.

Ⅰ. 그리스도에 의한 부름에 즉시 응하는 빌립. 그는 안드레처럼 요한이나 베드로에 의해서 그리스도에게 인도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직접적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해서 선택한 사람들을 부르신다. 그러나 그 방법이 다양하지만, 그 방법에 얽매이지 않는다.

1. 빌립은 예수가 먼저 발견하고 불렀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찾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는 우리들을 찾으셨다. "빌립"이란 이름은 원래 희랍말이며, 이방인들 사이에서 많이 상용되었는데, 이 때의 유대 교회는 쇠퇴되어 이방인들과 닮아가는 중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의 이름을 바꾸도록 하지 않았다.

2. 그는 "다음 날" 부름 받았다. 그리스도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시는지를 보라. 하나님을 위해 일할 때는 한 날도 낭비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성령을 받기 전에는 하루에 한 두 사람씩을 불렀으나 성령을 받은 후에는 실제로 하루에 수천 사람들을 불러서 일을 성취시키신다(14:12).

3. 예수가 그를 부르러 "갈릴리로 가시고자 하셨다." 그리스도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은 누구나 어느 곳에 있든지 찾으시며, 잃지 않는다.

4. 빌립은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수반된 그리스도의 권능에 의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다. 진실한 기독교인의 태도를 보라. 이 태도란 "그리스도를 따르고," 자기 자신을 그의 말씀과 행동에 복종시키며, 그의 전도에 참여하고, 그가 가는 길에 뒤따라 가는 것이다. 또 말씀을 실행되게 하는 은혜의 효능을 보라. 그것은 "그의 권능의 자랑이다."

5.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다(44절). 이런 훌륭한 제자들이 고향 벳새다에서 존경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 동네에 영광을 주었다. 벳새다는 "그물의 집"을 뜻하는데, 대부분 어부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택했으며, 그들은 특별한 은사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학식은 특별히 필요치 않게 되었다. 벳세다는 사악한 장소로서(마 11:21), 아직도 남아 있음은 은총에 의하여서이다.

Ⅱ. 나다나엘은 빌립에 의하여 그리스도에게 인도되었다. 그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있다.

1. 흔히 초심자들에게 볼 수 있듯이 연약하나 경건한 열성을 나타내는 빌립과 나다나엘을 가로지르는 것은 단지 "시온으로 가는 길을 묻는 물음"이다.

(1)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준 기쁜 소식을 보자(45절), 전에 안드레처럼 빌립도 그리스도에 관한 어떤 지식을 가지고서 그가 구세주라는 사실을 분명히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빌립은 비록 그리스도와는 처음 사귀지만 나다나엘을 인도하려고 하였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는 최선의 기회가 주어졌을 떼에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는 것이다(행 20:35). 우리도 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야 한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만났다"(45절). 여기서 주목해 보자.

① 빌립이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사귐에서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가? "우리가 자주 이야기했고 오랫동안 바랬고, 기다렸던 그이가 결국에는 왔고, 우리가 그를 발견하고 찾았도다!"

② 빌립이 구약 성서를 잘 알고 있어서, 복음의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그래서 더 쉽게 이해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유익이 되었던가! "모세와 예언자들이 기록했던 그를" 그는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구약 성서에 기록된 사실은 부분적이고 몇 번에 걸쳐서, "거국한 계시들"의 책에서 베껴 쓴 것이다. 거기에는 여인의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 실로, 모세와 같은 예언자, 다윗의 자손, 임마누엘, 인자(人子)순, 메시야, 왕 등으로 그에 관해 영광스럽게 기록되어 있다. 빌립은 이러한 사실들을 잘 알았기 때문에 즉시 그리스도로 영접했다.

③ 빌립이 범한 실수와 약점을 보자. 그는 그리스도를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다. 그러나 실상 그는 "베들레헴" 출신이었다. 그리고 "요셉의 아들"이라 했다. 그러나 단지 그렇게 추정될 뿐이었다. 초심자들은 오류를 범하기가 쉽다. 그러나 그것을 분명히 하는 말도 잘못이다. 사실은 그들이 찾기 전에 그리스도가 먼저 그들을 찾았기 때문이다. 빌립은 아직도 바울처럼,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것을 (빌 3:12) 알지 못했다.

(2) 이에 반대한 나다나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절)

① 그의 "신중"은 칭찬할 만하다. 그는 듣은 것들을 가벼이 수락하지 않고 일단 시험해 본다. 속담에 "돌다리도 두들겨 보라"는 말이 있다.

② 그러나 그의 이의는 무지에서 발생했다. 만일 그가 나사렛에서는 어떤 선한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면, 그것은 신의 은총에 대한 그의 무지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장소의 우열이나 또는 사람 자신의 어리석음과 심술궂은 관찰에 기인함과 같다. 만일 메시야 즉 위대한 일이 나사렛에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면 이제까지의 그의 생각은 옳다(율법에서 모세의 기록을 보면, 메시야는 유대에서 나올 것이며, 예언자들은 그가 태어날 장소를 베들레헴으로 정했다). 그러나 이때의 나다나엘은 이 "사실"을 몰랐다. 이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를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분에게로 데려 가게 되는 실수가 벌어졌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가르치는 자의 실수가 가끔 듣는 자에게 편견을 줄 수가 있다는 점이다.

(3) 나다나엘의 이의에 대한 빌립의 간단한 대답은 "와서 보라"이다.

① 그가 만족할 만한 대답을 주지 못한 것은 그의 "연약함"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초심자에게 있어서는 흔한 경우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만족시키는 방법은 잘 알고 있지만, 만만찮은 상대의 트집을 침묵시키는 방법에는 자신 있다고 말할 수가 없다.

② 그가 직접 그 이의에 답할 수 없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것, "와서 보라"하고 대답한 것은 그의 "지혜"와 열성이었다. 더 이상 논의해도 해결할 수 없는 것과 싸우지 말자. 우리가 가서 그리스도와 이야기하면 이런 어려움 모두가 즉시 사라질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의심스러운 논쟁으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어리석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보다 나은 시간 활용과 보다 좋은 목적을 위해서는 경건과 헌신의 훈련이 필요하다. "와서 보라." "가서 보라"는 것이 아니다. "오라. 그러면 내가 함께 가겠다"이다(사 2:3 참조). 빌립과 나다나엘의 이러한 대화에서

첫째,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사건의 시비곡직에는 전혀 관계없이 어떤 이국적인 분위기 때문에 종교를 적대시하는 불합리한 편견에 사로잡혀서 신앙의 길을 떠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둘째, 무조건 종교를 적대시하는 자들의 편견을 제거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직접 시험해서 시비를 가리게 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기 전에 미리 대답을 하지 말자.

2. 나다나엘과 우리 주 예수 사이에 되어진 일을 보자. 나다나엘은 와서 "보았으며," 그러한 행동이 무익하지가 않았다.

(1) 우리 주 예수는 나다나엘의 순전성을 영예롭게 증언하셨다. 예수는 그가 오는 것을 보시고 호의 있는 태도로 그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를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라고 하셨다.

① 그를 "칭찬했다." 예수의 칭찬은 아첨이나 자신이 선한 호의를 과시하는 게 아니고, "겸손한" 사람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생각이 좁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은 나다나엘의 진실함을 의심했을 것이다. 이런 태도에서 그리스도를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나다나엘은 어떤 사람보다도 그리스도를 반대했지만, 여기서 그리스도는 그를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갈릴리의 이름 없는 한 마을, "가나에서 어떤 선한 일이 날 수 있겠는가?"(21:2) 그러나 예수는 빌립을 논박하지 않았다. 그는 나다나엘에게 호의를 보이셨다. 이것은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할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용기를 주며, 또한 무조건 우리에게 하찮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위엄 있게 말하도록 우리를 가르치시며, 또 그들에게 적당한 칭찬을 하도록 해 주신다.

② 그의 "순전함"에 대한 그리스도의 칭찬을 보자.

첫째,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사람의 참됨을 아는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우리는 "최상을 바랄" 뿐이다. 명목상으로는 그 민족 전체가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서 난 사람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롬 9:6),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있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이다.

에서의 교활성에 반(反)하여, 나다나엘의 순전함을 가진 사람이 이스라엘의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는 그의 혈통과 정신에 있어서도 야곱의 참 자손이 되어진다.

이스라엘 신앙의 진실한 고백자라야 한다. 그가 고백하는 종교에 신실하며 그렇게 살아 왔다. 즉 그는 정말 선하게 보였으며, 그의 행위는 평화에서 나왔다. 그는 "내면적으로도" 유대인(롬 2:29)인 진정한 유대인이다. 그래서 역시 기독교인이기도 한다.

둘째, 그는 "간사함이 없는," 즉 참 이스라엘의 특성을 지녔다. 참 기독교인의 한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에게 간사함이 없는 사람으로 속임이나 음모가 없는 진실한 사람이며, 또 하나님에게 간사함이 없음이란, 자기의 죄를 진정으로 통회함과, 하나님과 진실한 계약을 맺음이며, 마음에 "간사가 없음"(시 32:2)을 뜻한다. 이는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간사함"이 없다는 것이다. 비록 그가 여러 가지 일에 있어서 어리석고 미련할지 모르지만, 잘못함이 없으며, 하나님을 멀리하는 부도덕함이 없다. 즉 그에게도 비록 결점은 있지만, 범죄라 인정할 만한 사실은 없었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면, 우리들은 그의 가르침을 알게 되고, 그를 정말 좋아하게 된다." "그를 찬양하라. 즉 바라 보라. 그러면 놀라게 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으로 유대 교회와 유대인들이 물이 들어, 그들의 종교가 타락되어 형식화 되거나 국가 정책화되었다. 그러나 참 이스라엘인은 욥처럼(욥 1:8), 신의 은혜에 놀라와 "경외하는 자"이다.

(2) 나다나엘은 자기가 이전에 행했던 신앙 생활을 그리스도가 아심으로 인해서 그의 전능함에 매우 놀랐다.

① 여기에서 나다나엘의 겸손이 나타난다. 즉 그는 그리스도의 세심한 주의에 당황했는데 이 당황에서 그리스도는 그를 기꺼이 맞아 들였다. "나같이 무가치한 자를 어찌 아십니까? 주 여호와여, 내가 무엇입니까?"(삼하 7:8) 이 태도가 그의 진실함을 나타내는 하나의 증거이다. 그는 그가 접한 놀라운 사실은 알지 못했지만, 그 놀라움에 빠져 들어 갔다. 그리스도는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를 잘 안다. 사람들은 표정을 보고서 사람들의 현재의 마음을 알 수 없지만, 그리스도 앞에서는 모든 것들이 드러내지고 열려진다(히 4:12, 13). 그리스도가 우리를 알고 있는가? 이제 그리스도를 알아보자.

②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그에게 좀 더 "나타내셨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내가 너를 보았다."

첫째, 그리스도는 자기가 그를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줌으로써, 자기의 신성을 드러내고 있다. 사람과 더불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런 능력을 가지시고 그리스도는 여러 경우에 자기 자신이 하나님임을 나타내신다. 메시야에 관해서는, 그가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한채 아니하고" "공의와 정직으로 판단하신다"(사 11:2, 3)고 예언되어 있었다. 이 예언이 여기서 했다(딤후 2:19 을 참조).

둘째, 빌립이 그를 부르기 전에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 이런 말은 그의 특별한 친절을 표시하고 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기 이전에, 그리스도가 먼저 나다나엘을 주목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점을 알기 전에 먼저 그가 사람들을 알고 계신다(사 45:4; 갈 4:9 참조).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어떤 사람도 너를 볼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 때 너를 보고 있었다." 들에서 이삭이 명상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처럼 무화과나무 아래서 나다나엘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즉 어쩌면 그 장소에서 그는 주님과 깨뜨릴 수 없는 계약을 맺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은밀히 보고 그의 행위에 따라서 그에게 공개적으로 보답했다.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있다"는 것은 정신의 "안정과 침착을 나타내며,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더 가까워질 수 있다(미 4:4; 슥 3:10 참고). 이 점에서 나다나엘은 참 이스라엘인이었다. 그는 이스라엘처럼 하나님하고 씨름했으며(창 32:24), 위선자처럼 거리의 모퉁이에서 기도하지 아니하고 무화과나무 아래서 기도했다.

(3) 나다나엘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충만한 확증을 얻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는 고백에 나타나 있다(49절). 즉 간단히 말하면 당신이 정말 메시야입니다라는 뜻이다.

① 확고한 마음으로 믿는 그의 신앙을 보라. 비록 그가 그리스도에 대한 몇 가지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모든 편견들이 사라졌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살아 있는 신앙 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편견들이 사라진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가 바로 으뜸 선이며, 따라서 그 예수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② 아주 "꺼리낌 없는" 그의 고백을 보라. 그의 고백은 우리 주 예수에 대한 경모의 형식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다.

첫째, 그는 그리스도를 "랍비"라 부름으로써,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직능을 고백했다. 이 랍비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흔히 가르치는 자들에게 부여하는 이름이다. 그리스도는 위대한 랍비로서,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둘째, 그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시 2:7 에서 일컬어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으로써 그의 신성과 사명을 인정하고 있다. 비록 그가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지만 신의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나다니엘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있었다.

세째, 그는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시며, 그 왕을 우리들은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습니다"고 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다. 여기서 나다나엘은 자신이 이스라엘 왕을 즉시 받아들여서 그에게 복종하는 참 이스라엘인임을 증명하고 있다.


(4) 그리스도는 나다나엘의 희망과 기대를 보다 큰 어떤 것으로 들어올리신다(50,51절). 그리스도는 개심자(改心者)에게 매우 친절하셔서, 비록 그들이 약하지만, 그들의 선한 출발을 격려해 주신다(마 12:20).

① 그리스도는 나다나엘의 준비된 믿음을 보시고 그를 칭찬하신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고 해서 믿느냐?" 그리스도의 지혜에서 나타난 결과에 그는 감탄했다. 즉 이것은 나다나엘이 사전에 준비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에 대한 존경과 그의 은혜는, 그가 첫 설교를 듣고 마음이 사로잡혀졌음을 보아서 그만큼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② 그리스도는 그에게 더 위대한 증거를 약속했으며, 그가 처음에 가졌던 믿음을 더 굳게 가지도록 하셨다.

첫째, 일반적인 것을 보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즉 내가 메시야임에 대한 더 확고한 증거들을 보리라." 이것은 그리스도의 기적으로, 그의 부활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지니고 있는 것을 선용하면 할수록 그에게 더 좋은 것이 주어지게 된다. 복음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은, 그 복음에 대한 증거를 더욱 알게 되며, 그 믿음에 대한 결과를 점점 더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발견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기꺼이 그의 백성이 된다는 것으로써, 세상에서 이름을 떨치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갖는 것이다. 즉 아직은 보이지 않는 영광을 갖는다는 것이다.

둘째, 세부적으로 보자. "너만이 아니라 너희들, 제자들 모두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이 말은 무화과나무 밑에 앉아 있는 나다나엘에게만 말한 것이라고는 볼 수는 없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라"는 서두가 있는데, 이 말은 집중된 주의력과 의심할 바 없는 완전한 동의를 요구하고 있다. 비록 유대인들이 흔히 기도의 끝에 이 말을 사용하곤 하며, 또 때로는 두 변씩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리스도 이외는 어떤 사람도 이 말을 문장의 처음에 사용하지 않았다. 이 말은 하나의 엄숙한 단언이다. 그리스도는 "아멘"이시요(계 3:14), 여기서도 "나는 아멘이요, 아멘으로써" 너희에게 이른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나, 신실한 증인"으로서.......하는 식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그의 말씀 의에 우리의 확신이 세워졌을 때 드러난다. 이제 그리스도가 확신하는 말을 살펴보면, 지금으로부터, 혹은 잠깐 동안, 혹은 멀지 않아, 혹은 장차, "너희들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a. 여기서 그리스도가 스스로를 "인자(人子)"라 지칭하고 있다. 이 지칭은 복음서에서 그리스도께서 흔히 자기를 지칭하는 칭호이다. 나다나엘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이라 부르고 있지만, 그는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칭하고 있다.

(a) 그것은 존귀의 절정에서도 그가 지니는 "겸손"을 나타내며

(b) 그의 신성과 마찬가지로 "인간성"을 가르치고 있다.

(c) 현재의 그의 굴욕을 시사하는 것으로써, 나다나엘로 외적인 영화 속에 나타나는 이스라엘 왕을 기대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b. 그러나 그리스도가 예언한 것은 놀랄 만한 사건들이다. "너희들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a) 어떤 사람은 특별한 사건을 지적함으로써 글자 그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

[a]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시현(視現)을 말한다. 이 시현은 글자 그대로 이루어졌으며,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그리스도의 변화 산상의 모습을 보았듯이 나다나엘이 어떤 영광스런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20:30), 어째서 기록하지 않았을까?

[b] 우리 주 예수에 대한 천사들의 많은 수종으로 이루어졌는데, 특히 그의 승천시 하늘 문이 열리며,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그를 영접하고 그에게 영광을 베풀었으며, 이 광경을 제자들이 보았을 때이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의 사명의 위대한 증거였으며, 제자들의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였다(6:62).

[c]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 때는 하늘이 열릴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볼 것이며,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를 호위하는 것처럼 오르락 내리락할 것이고 사람들은 기도하는 그 날이 올 것이다(살전 1:10 참조).

(b) 또 어떤 사람들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어떤 상태나 일련의 사건들을 말함으로써 비유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a] 나다나엘은 그리스도의 표적들을 믿는다. 그것은 옛 예언자들처럼 그리스도도 자기에게 비밀스러운 일들을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는 하늘이 열리는 것처럼 옛 예언자들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놀랄 만한 표적들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마치 탁월한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 그의 지시를 계속적으로 수행하는 것처럼 그러한 능력이 인자에 의해서 구사되어질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즉시 그리스도는 표적을 행하셨다.(2:11).

[b] 그의 중재로, 즉 하늘과 땅 사이를 왕래하시는 복된 교제를 통하여, 제자들은 점점 신비 속에 들어가게 된다.

첫째, 중재자인 그리스도에 의하여 제자들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복 것이며, 우리들은 그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히 10:19, 20). 하늘이 열린 것을 우리는 신앙으로 바라보고 결국에는 들어가서 주의 영광을 보며, 그의 기쁨에 참여하게 된다.

둘째, 제자들은 인자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천사들을 복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거룩한 천사들과 교제를 나누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하늘과 땅이 화해되고 함께 합쳐진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야곱의 사닥다리와 같다(창 28:12). 그로 말미암아 천사들은 계속 성도들 주의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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