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12.25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믿음,진리,길.생명.조력자 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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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 ]....그 본래적 의미

   ‘믿음’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바로 '에무나(אמונה)'이다.

   '에무나'는 '확고함', '안전', '신뢰성', '정직’,    '진리’, '영구적인 의무’, '성실하다', '평안하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에무나(אמונה)’는 ‘아만’이란 기본어근에서 나왔고   ‘아만'은 '지속하다’,  ‘지탱하다’, 확고해지다’   ‘성실하다', ‘견고하다’, ‘부양하다', '팔로 나르다'   '아이를 운반하다’, ‘영구적인', ‘끊임없는',    '마르지 않는’,  ‘확실하다', ‘신뢰하다', ‘믿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아만’에서 ‘참되다', ‘진리이다' 라는 뜻의    우리가 잘 아는 '아멘’이 나왔고    '진리'를 의미하는 '에메트’란 단어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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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하니라(출17:12)====

hn:Wma?(530, 에무나) ....내려오지않음....

에무나(명여)는 아만(@m'a; , 539: 지지하다, 신실하다)에서 유래했으며, 견고함, 확고부동, 신실함, 충실, 성실'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0회 나온다.

70인역본에서는 이 용어를 알레데이아(진실, 신뢰, 정직, 진리)와 피스토스(신뢰, 신실성, 신빙성, 안식 신뢰, 신앙)로 번역했으며 KJV는 '신실'faithfulness, '진리'truth, '직무이행'setffice, '신실함=성실하심=미쁘심=참되심'faithfulness, '신실한=미쁘신=참되신=성실하신'faithful 등으로 번역한다.

(a)  에무나는 '견고함, 확고함'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안정하다 stady)"(출 17:12).

(b)  에무나는 '신실성'을 의미한다.

...기본적으로 이 단어는 하나님 자신에게 사용되어(신 32:4) 그의 완전한 신실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 단어는 자주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에 열거되곤 한다(삼상 26:23, 시 36:5[H 6], 시 40:10[H 11], 애 3:23). 이 단어는 하나님의 행사(시 33:4); 그리고 그의 말씀(시 119:86, 시 143:1)을 나타낸다.

...애무나는 또한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보증받는 사람들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신실함을 기대 하신다(잠 12:22, 대하 19:9). 실로, 이런 신실성이나 믿음의 생활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들의 특징이다(합 2:4).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사람으로 하여금 참되고 신실한 길을 취하게 한다(시 119:30).

이로부터 우리는 신자에게 위임되어 그의 의무(신실한 책임, 대상 9:22, 대하 31:15, 등)나 직무가 된 의무 개념도 볼 수 있다(참조: J. B. Scott).

(c)  에무나는 체데크(공의 righteousness, 참조, 사 11:5), 헤세드(hesed: 인자 loving kindness, 참조: NASB, 시 98:3), 미쉬파트(공의 justice, 참조: 렘 5:1)의 동의어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헤세드(사랑)로 가장 잘 묘사된다. 그러나 동의어인 에무나도 매우 적합한 단어이다. 호세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하나의 결혼으로 묘사했으며,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성'을 말하고 있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 2:19-20)

이 구절에서 '의, 심판(공의), 은총, 자비, 진실함'이란 단어들은, 에무나의 동의어들이 하나님의 '신실성'과 '사랑'을 표현하는 언약적 용어들이라는 결론을 확증해준다. 언약과 약속들에 대한 보증은 하나님의 성품에 의해 확립되는 것이다: 그는 '신실'하시다.

...사람의 행동(잠 12:22)과 말(잠 12:17)은 하나님과 더불어 자신의 은총 받은 상태를 반영시켜야 한다. 결혼 관계에 있어서 '신실성'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다. 부부관계가 안정되기 위하여 두 당사자는 서로 '신실'하게 대해야 할 것이다.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지' 못했음을 다음과 같이 책망한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렘 5:1; 참조, 사 59:4, 렘 7:28, 렘 9:3).

(d)  신실성은 메시야 시대에 이루어질 것이다(사 11:5). 이 선지자적 기대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는 것은, 그의 동시대인들이 그에게서 하나님의 자비(참조: 헤세드)와 진리(참조: 에무나)를 목격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요한이 이 두개의 용어를 병행시킨 사실은 의의가 깊다. 이 두 용어는 구약성경에서도 함께 발견된다. (참조: NEDOT).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pivsti"(4102, 피스티스) 믿음 faith.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피스티스(Hes., Hdt.이래)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a)  피스티스는 '신뢰, 확신, 확실성, 확고한 확신'을 의미한다.
(b)  피스티스는 사람이 가지는 확신 뿐만 아니라 사람이 향유하는 확신, 즉 '신뢰할 수 있음, 의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차이가 있을지라도 확실성이나 신뢰성과 관련되어 있다.
(c)  피스티스는 신뢰의 가능성, 의지할 수 있는 것을 보장하는 '보증, 증명, 증거, 신실성'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피스티스는 70인역본에서 약 55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에무나(경고, 충실, 성실, 확고부동의 믿음)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피스티스는 신약성경에서 약 23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피스티스는 '신실성, 신뢰성'을 의미한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롬 3:3; 딛 2:10; 갈 5:22; 살후 1:48.
(b)  피스티스는 '엄숙한 약속, 서약'을 나타낸다: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딤전 5:12).
(c)  피스티스는 '증거, 보증'을 의미한다: 행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딤후 4:7.
(d)  피스티스는 '신뢰, 확신, 믿음'을 나타낸다.① 하나님에 대하여, 막 11:22; 벧전 1:21; 히 6:1; 살전 1:8; 롬 4:5; 롬 4:9; 롬 4:11-롬 4:13; 롬 4:16; 롬 4:19이하 등.
② 그리스도에 대하여, 마 8:10; 마 9:2; 마 9:22; 마 9:29; 마 15:28; 막 2:5; 마 4:40; 마 5:34; 마 10:52; 눅 5:20; 눅 7:9; 눅 7:50; 눅 8:25; 눅 8:48; 눅 17:19; 눅 18:42. 롬 3:23; 롬 3:26; 갈 2:16; 갈 2:20; 갈 3:22; 엡 3:12; 빌 3:9; 약 2:1; 계 14:12.
(e)  피스티스는 '신앙의 내용, 교리'를 나타낸다: 유 1:3, 유 1:20; 롬 1:5; 갈 1:23; 갈 3:23이하; 딤전 1:19; 딤전 4:1, 딤전 4:6; 딤전 6:10; 딤후 2:18; 롬 12:6; 딤후 4:7.
(참조: Walter Bauer; A.Weiser; O.Michel).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

@m'a;(539, 아만)  확실하게 하다, 지지하다, 충실하다, 믿다

아만(동사)은 기본어근이며 '확실하게 하다, comfirm, 지지하다, 기르다 support, 충실하다, 신실하다, 성실하다 be faithful, 믿다, 신뢰하다 believe, trust'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10회 나오며, 칼, 니팔, 히필형으로 사용되었다.

성경 교리에서 매우 중요한 이 단어의 개념은, 이 단어에 대한 많은 대중적 개념과 대조 구별되는 '믿음'(faith)의 성경적 의미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제공해 준다. 이 어근의 의미는 핵심에는 '확실성'(certainty)의 개념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히 11:1 나타나 있는 신약성경의 믿음에 대한 정의에 의해서 확증된다.

이 어근의 기본적인 개념은 '확고함'(firmness)이나 '확실성'(certainty)이다.

1. 칼형에서 이 단어는 '지지하다, 기르다'를 의미한다.

왕하 18:16에서 이 단어는 '버팀 기둥'을 묘사한다. 에 2:7에서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자기 딸같이 양육했다. 민 11:12에서 "양육하는 아비", 룻4:16에서 아기의 "양육자"를 묘사한다.

2. 히필형에서 이 단어는 '확실하게 하다' 혹은 '~에 대해 확신하다', '보증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런 점에서, 히필 동사 변화에서의 이 단어는 '믿다'를 의미하며, 성경에서의 믿음은 '보증' assurance, '확실성' certainty으로서, 이는 믿음을 있음직하고, 아마도 참되긴 하지만 확실치 않은 어떤 것으로 보는 현대의 개념과 대조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로부터 이 단어는 '확립된 사람' 혹은 '굳혀진 사람' 즉 '충성된 자'(삼하 20:19, 시 12:1, 시 31:23)라는 수동적인 의미로 사용된 칼의 수동 분사형으로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3. 니팔형에서 '확립(확정)되다'를 의미한다(삼하 7:16, 대상 17:2, 대상 17:3, 대하 6:17, 사 7:9).

'신실하다, 충실하다, 확실하다, 신뢰할만 하다'를 의미하며, 분사형에서 신자들을 나타낸다(민 12:7, 삼상 2:35, 느 9:8). 이 어형은 또한 모든 확실성의 근거가 되는 것, 즉 하나님 자신(신 7:9), 그리고 그의 언약(시 89:28)을 묘사하는데도 사용된다.

'믿음'과 '견고한 것' 사이의 관게에 관한 흥미있는 한 가지 실례는 사 7:9에서 발견된다: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라도 육십 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아하스는 만일 그가 믿지(히필형) 않는다면, 그가 견고히 서지(니팔형) 못한다. 즉 믿음이 없이는 그가 안정되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런 파생어들도 확실성과 신빙성에 대한 똑같은 개념을 반영해 준다. 파생어 아멘(진실로 verily)은 신약성경에서 아멘이란 말로 받아들여져서 오늘날의 영어 단어 'amen'이 되었다. 예수님은 어떤 문제의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하셨다(마 5:18, 마 5:26 등). 이 히브리어 어형과 헬라어 어형은 기도와 찬양송의 끝에 온다(시 41:13, 시 106:48, 딤후 4:18, 계 20:20 등). 이것은 우리의 기도에서 이렇게 사용된 이 용어가 우리가 기도드리는 주님에 대한 확신을 표현하는 것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참조: J. B. Scott;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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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따라서 진정한 믿음은 그 분의 진리로부터 나오게 된다.

초대교회의 사도인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들음이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듣는다는 것은 그냥 표면적으로 듣는 것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을 듣고 깨닫는 것을    진정한 들음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표면적으로 듣고   그 본질을 듣고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와 신앙의 행위를   하나님은 헛된 경배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마 15:9)  ...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듣는 것   청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믿음과 관련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온전히 깨닫는 것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말한다 .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마 15:10) #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막 7:14)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 골 1:6)....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과 같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에무나)’이란    우리 자신이 주체가 되어 무엇을 확신하는 것 이전에   하나님의 온전한 진리를 듣고 깨닫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 서기관, 대제사장들은   지금 우리로 생각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고   열심히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으로 본 그들은 믿음이 없는 자들이었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막16:!4).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알지 못하고 그 진리 위에 기초한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아만"이 처음 나타난 곳은 창15:6이다.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에무나’가 성경에 처음 쓰인 곳은   출애굽기 17:12절이다.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출 17:12)....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하다’라는 구절에   '내려오지 않다'에 '에무나'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에무나)'이 무엇인지를    자세히 보여주는 그림이다.   

성경에서 어떤 단어가 처음 쓰일 때는    그 단어가 가진 가장 본질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는 특징이 있다.    성경은 그냥 일반적인 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담고 있으며    전지 전능한 하나님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이런 단어 하나, 순서 하나   몇 번 사용되고 하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의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에무나'는 무엇인가를 견고하게 지탱하고    지속하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반석(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위에 앉아서   하나님의 지팡이를 든 모세의 팔이 내려오지 않게 하는 것이다.....   성경 전체에서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고전 10:4)를 의미하고   예수님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지팡이는 '마테'라는 히브리어인데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의 지팡이   왕의 명령, 가르침, 교훈, 양식을 의미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시 110:2)...   이 '권능의 규'가 바로 모세가 든 지팡이와    같은 히브리어 '마테'인데  시온에서부터 나오는 주의 권능의 규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그는 원수를 다스린다. ...   모세와 아론과 훌이 높은 산에 올라가   반석 위에 앉아 이 지팡이를 든    모세의 팔이 올라갈 때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이기는 것은   바로 이런 그림을 보여준다.   여호수아는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대표적인 인물이고, 아말렉은 육신의 소욕, 하나님을 대적하고   이스라엘의 약한 자들을 치고 약탈하는 원수의 모형을 모여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고 약하고 병들게 만드는    아말렉을 진멸시키고 이스라엘의 약하고 병듦을 고치고 싸매시는   진정한 구원자이신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이스라엘의 약한 자들, 온갓 병자들을    일일히 손을 얹고 고치시는 그림과 닮아있다. 

#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눅 4:40-41  )....   '귀신'이란 헬라어는 '아가달토스 프뉴마'로   더러운 영, 거룩한 영, 성령(하기오스 프뉴마)과   반대되는 거짓과 불법, 비진리를 의미하고   이스라엘을 약하고 병들게 하는 아말렉과 같은   요소들을 말한다.   그것을 진멸하고 회복하는 것이   여호수아, 곧 예수 그리스도시니, 그 아말렉과의 전쟁은 예수그리스도의 전쟁인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그림인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귀신 들린자,   모든 약한 자와 병든 자들을 고치신 것과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싸우는 그림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딤전 4:1-2 )...   믿음에서 떠나게 되면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게 된다.  진정한 믿음은 그 안에 거짓, 불법이 없어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과 진리로서의   믿음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찾으시는 믿음이다.  믿지 않는 사람이란 어떤 불신자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믿는 자들 가운데 진정한 믿음이 없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딤전 1:5-8) ...   이 교훈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는 것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사도들은 말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인데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온전)하게, 적법하게    선을 행하신 거짓 없는 믿음의 주이시다.   그리고 그로부터 진정한 사랑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고 그 분의 온전한 뜻을 따르는   사랑을 행하신 분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거한다는 것은   바로 그 분의 이 믿음과 사랑을 본받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제자인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5-17).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5) ...  '거짓이 없는 믿음’이란 율법을 적법하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쁘신 뜻을 따라 행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참된 믿음, 진리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이 말한 믿음은 성경(율법, 선지자, 시편)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인데   그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기록하고 있고   그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기록한 것이다.   이 교훈과 책망과 의를 깨달을 때 진정한 믿음 안에 거하게 된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개념이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이야기하고    자신이 믿음 위에 서 있다고 확신 할 수 있지만   진리 위에 서지 않으면 그 믿음이 거짓이 되고   헛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진리 위에 세워진 믿음인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믿음 안에 있다라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소유한 믿음을 말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만   초대교회에는 더 깊고 엄밀한 의미에서 믿는 이 와 한 영으로 연합하여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지신 바, 바로 그 믿음'을 가지고 그 믿음을 통해 살아감, 곧 "산을 옮기는 바, 살아 생동하는 예수그리스도의 바로 그 믿음"을 생생하게 발휘함이   진정한 믿음을 가진 것이란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골 1:4).. 

#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딤전 3:13)... 

#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2.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빌 3:7-16)...   9절에서 (not having a righteousness of my own derived from the Law, but that which is through faith in Christ, the righteousness which comes from God on the basis of faith, that which is through faith in Christ)를 우리말로는 그리스도를 믿음이라고 번역했지만    원문에는 '그리스도안에 있는(즉, 그리스도의) 바로 그 믿음'이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자..마찬가지로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킹제임스]*20.I am crucified with Christ: nevertheless I live; yet not I, but Christ liveth in me: and the life which I now live in the flesh I live by the faith of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NIV]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한글성경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라고 번역했지만   원문은 '그 하나님의 아들의 그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더 정확한 번역인데,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By the faith of the Son of God   그 하나님의 아들의 (바로) 그 믿음에 의해서 ..  라고 영어로 번역하였다.   성경에서 정관사가 붙으면 그냥 믿음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가리키는 특정한 믿음,    본질적인 믿음을 가리킨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 정확하게 표현해서 정리해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바로 그 믿음',   '믿음 자체'이며 '믿음의 주(창시자)’이시다(히12:2).   성경이 말하는 거짓이 없는 믿음이란   믿음의 창시자이신 그 분의 믿음, 하나님의 진리말씀이신 그 분의 진리 안에 거함, 곧 그분안으로 믿어들어가 하나되어 그분을 내 생명삼고 거하는 것을   진정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갈 3:23)...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5-27) ...   이 믿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며 좀 더 깊은 의미에서 살아 생동하는 진정한 믿음을 발휘하신 예수그리스도 자신이라 할 수 있고,  진정한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그 교훈과 가르침을 온전히 듣고 깨닫고 순종하는 것이다.

=======모세를 도운 아론과 훌 ====

/ 출애굽기 17장 8-13절 출 17:8-13, 24:14절, 384.388.391장.*

사람은 혼자서 모든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곁에서 도움을 베푸는 손길이 필요합니다. 영웅 모세도 출애굽을 단행하고 광야 생활을 하며 백성을 인도할 때 여러 사람들로보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본문은 아말렉과의 전쟁(戰爭)중에도 모세를 도운 충성(忠誠)스러운 사람들을 성경(聖經)은 보여줍니다. 그들은 여호수아[예호와+아샤....여호와는 구원이시다 =구원하시는 여호와=예수]와 아론[아하론...총명한 : 모세의 형]과 훌[후르...빛남, 고귀, 존귀...전승에 의하면 모세의 누이인 미리암의 남편?]입니다. 그 중에서 훌은 매우 젊은 나이였습니다....그럼에도 모세의 팔을 들어서 기도(祈禱)를 도와 보좌한 사실(事實)은 그가 매우 지위(地位)가 높은 보좌관(輔佐官)이었고 하나님의 신실(信實)한 일꾼이었음을 알게 해줍니다.....즉 훌은 아론과 여호수아 못지 않은 모세의 훌륭한 조력자(助力者)요 보좌자였던 것입니다. 과연 훌은 어떤 인물(人物)이며 또 어떻게 충성(忠誠)했는지 함께 살펴보면서 교훈(敎訓)을 얻도록 하겠습니다.

1.훌은 모세에게 신임받은 젊은이였습니다. 

1)모세 가정의 신앙을 본 받은 젊은 이였습니다.

 "훌"의 원어적인 의미는 "빛남, 고귀, 존귀"입니다.... 마치 잘 다듬은 보석을 뜻하는 이름입니다. 그 이름의 뜻에 걸맞게 훌은 평소에 성실하게 자신을 다듬어 하나님이 쓰실 그릇으로 자신을 준비했습니다....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훌은 모세의 누이 미리암의 남편이라고 합니다. 어릴때부터 훌은 신앙이 뛰어났던 모세 가정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아말렉의 전쟁에서 모세가 중보 기도의 동역자로 훌을 선택한 사실을 보면 평소에 그의 신앙이 돈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평소에 자신을 준비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평소에 자신을 주님이 쓰실 귀한 그릇으로 예비하는 훈련을 할 것을 교훈합니다. 정직한 신앙을 지닌 이웃과 교제하는 생활이 자신을 훈련시키는 길중 하나입니다. .....딤후2:20-22절에 "큰 집에는 금(金)과 은(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貴)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고 했습니다.

2)훌은 모세에게 인정받았습니다. 

훌이 모세와 함께 아말렉 전쟁을 수행한 사실을 보면 그가 상당한 지도력을 겸비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중요한 전쟁을 수행하면서 평범한 사람을 모세가 보좌관으로 대동할 리는 만무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세가 훌을 평소부터 신임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늘 같이 높은 최고 지도자에게 신임을 받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 신임은 모세가 여호수아와 함께 시내 산에 올라갈 때 장로들과 아론과 함께 특별히 훌을 지명하여 백성을 다스리라고 한데서 잘 드러납니다.....출24:14절에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라 아론과 훌이 너희와 함께하리니 무릇 일이 있는 자는 그들에게로 나아갈 지니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최고 지도자의 부재 중에 책임자로 임명된 것입니다. 이는 소위 "권한대행"을 말하는데 거기에서 훌은 최고 재판관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지도자가 자리를 비우면서 성실과 신뢰가 검증되지 않은 사람을 대행자로 세울 리는 만무합니다. 그만큼 훌은 성실성과 지도력이 검증된 탁월한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2.훌은 모세를 성실하게 도운 사람입니다. 

1)이스라엘 군대가 승리하기를 위하여 기도로 도왔습니다. 아말렉의 침공에 대하여 모세와 훌이 산 위에 올라가서 기도(祈禱)합니다.

여호수아는 군대(軍隊)를 이끌고 싸웠습니다. 그런데 전쟁승리을 위해 여호와께 중보기도하는 모세의 한 손은 지팡이를 잡고 한 손은 하늘을 향해 들고서 기도하던 중 한쪽 손이 자꾸만 내려갑니다. 위대한 지도자(指導者)였지만 인간적인 약점은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목회자(牧會者)도 인간(人間)이기에 이럴 때에 도움이 필요(必要)합니다.....이 때, 아론과 훌은 모세의 양손을 양쪽에서 받쳐  들어 올려 줌으로써 모세의 수고와 기도의 짐을 분담했습니다. 공동체(共同體)가 바르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이런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 아론과 훌이 수고와 기도를 아끼지 않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전쟁(戰爭)에서 승리(勝利)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약하나 하나님은 강하십니다....사40:28-31절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엿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감 같을 것이요. 달음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기 위해서는 약한 사람들끼리 서로 돕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도 마18:20절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2)성실한 자세로 조력자의 역할을 합니다.

훌은 일을 주관하는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조력자의 역할을 수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조력자는 위로는 지도자를 보좌하고 아래로는 백성에게 지도자의 명령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실천하도록 감독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책임의 중요성은 그누구보다도 크다고 하겠습니다. 조력자의 충성과 성실이 결여되면 좋은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훌은 이렇게 어려운 조력자의 직무를 성실과 충성으로서 감당했습니다.

훌의 성실함과 충성심이 드러난 것은 모세가 시내산에 다시 올라갔을 때였습니다. 거기에서 모세는 훌을 이론과 함께 특별히 지명하여 자기의 부재시 권한을 맡겼습니다..... 그때 노인이었던 아론은 백성의 우상 숭배에 함께 휩쓸렸으나 오직 훌은 그와 같은 우매함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출32:1-6절), 훌은 자기의 본분에 매우 충실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고전4:2절에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했습니다. 맡겨진 본분에 충성을 다하는 진실된 자세가 바로 목회자(牧會者)를 돕는 최선(最善)의 자세(姿勢)입니다.

3.훌은 후손(後孫)에게 신앙(信仰)을 계승시킨 열매(熱媒)를 남긴 신앙(信仰)인입니다. 

훌의 손자 중에 브사렐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브사렐"은 "하나님의 보호 속에" 특별한 은사를 받아서 성막을 건축하였던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출31:1-11절), 그 브사렐의 아버지는 "우리"였고 할아버지는 "훌"이었습니다. 또한 훌은 갈렙과 에브랏 사이에 태어났습니다.(대상2:18-20절), 족보를 이렇게 언급하는 이유는 정탐꾼 갈렙으로부터 시작된 훌륭한 신앙이 브사렐까지 계승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깨달음을 홀로 얻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음으로 양으로 지도를 받게 되며 그 중 부모의 신앙이 가장 영향력이 있습니다. 훌은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받았고 뿐만 아니라 신앙을 계승시킴으로 참된 신앙의 열매는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만이 아니라 이웃에게 전파하고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신앙이라야 진실된 신앙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스스로 보기에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신앙을 가졌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웃의 신앙에 대해서는 판단을 잘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신앙의 수준을 검증하는 일은 인색합니다. 참된 신앙상은 훌 처럼 자신부터 공동체에 성실과 충성으로 헌신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자기 가족과 자녀에게 신앙을 계승시켜, 하나님의 귀한 일꾼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영적 아들이었던 디모데를 보십시오.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거짓이 없는 믿음을 물려 받았습니다.....딤후1:5절에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위대한 신앙인들은 훌륭한 믿음의 후계자를 그 삶의 열매로 남겨놓기 마련입니다.....마7:17-20절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딤후2:2절에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팔을 들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기도하고 있는 훌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땀을 흘리며 매우 힘든 모습을 히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성실을 보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실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훌의 성실(誠實)한 신앙(信仰)과 그 삶을.. 오늘 우리들은 귀한 보석처럼 간직하고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다윗도 아버지 양들을 충실하게 돌보고 있을 때 이스라엘 왕으로 선택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불평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며 열심 있는 자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성취하시는 일꾼으로 쓰십니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쓰임받는 일꾼들이 되시기를...

====에무나와 피스티스 ===

먼저 "믿음"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살펴보자.

어느 학자는 구약에서 "믿는다"라는 "에무나" 동사가 138번 나오지만 명사는 찾기 힘들다고 했다. 또한 어느 학자는 "에무나"가 "버티다", "견고하다"로 49번 사용되었고 "신실한", "성실한", "정직한"으로 44번 사용되었다고 하였다. 결국 "에무나"는 믿음, 신앙, 의지, 성실 등으로 번역됨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믿는다"라는 동사는 창세기 15:5에서 "그가 여호와를 믿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그것을 아브라함의 의로 여기셨다"에서 나오는 바 "믿는다"라는 동사는 "아만"의 힢일 형태인 "헤에민"이다. "아만"이라는 동사가 힢일 형태를 취할 때 "믿는다"라는 동사가 된다는 이야기다. 

"아만(믿는다)"이라는 동사의 명사형은 "에무나"이고 구약에 49번 나오며 하박국 2:4을 빼고는 모두가 "신실함(Faithfulness)이라고 번역된다. 이유는 이 단어 모두가 하나님과 관련하여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믿음의 주인인데 하나님의 믿음이라고 한다면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의 신실함"이라 번역한다. 

단지 한 곳 하박국 2:4에서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고 번역한다. 믿음을 가지는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나 의인은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번역하여도 하자가 없다. 구약 전체 "에무나"와 일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성실함"으로 라는 단어는 "버팀으로"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는 출애굽기 17장 12절에서 출애굽하던 이스라엘이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이 내려오면 아말렉이 이긴 사건에서 모세의 손이 아론과 훌에 의하여 양쪽에서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출 17: 12하- 13)에서 "에무나"가 "끝까지 버틴다"는 의미로 "안정되게 남아있다, 확고하게 남아있다"의"remained steady"로 번역되었음을 볼 수 있다.

 하박국 2:4은 로마서 1:17과 갈라디아서 3:11절에서 인용하고 있다.

그러면 "신실함"을 왜 "믿음(faith)"이라고 번역했는가 이다. "에무나"의 대응어는 신약 헬라어 "피스티스"이다. "피스티스"는 신약에서 243번 중 거의가 "믿음"이라고 번역했고, 로마서 3:3에서 "미쁘심"이라고 번역했다. 물론 그 의미도 "에무나"와 같은 "신실하심"인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에무나"나 "피스티스"가 하나님과 관련할 때는 "신실하심"으로 사람과 관련할 때는 "믿음"으로 번역됨을 알게 되었다. 

갈라디아서 2:16절을 보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토라)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토라)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토라)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보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처럼 그리스도가 목적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라는 소유격이라는 것이다. 

직역하면 "사람은 토라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통하여 의롭게 되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토라의 행위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의롭게 되기 위함입니다. 이는 토라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의롭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이다.

목적격 조사로 번역하느냐? 소유격 조사로 번역하느냐?의 문제다. 왜 이런 소동일 일어났을까?

라틴어 역인 불가타와, 시리아역인 쉐쉬타, 옛날 스페인 번역이나, 종교개혁이전의 영어 번역인 위클맆이나, 그리고 제네바 성경은 소유격으로 번역하였는데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할 때 이신칭의의 신학이 그로 하여금 목적격으로 번역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후 영어성경은 이 번역을 따르게 되었고 중국어 성경, 한국어 성경도 그 뒤를 이었다는 연계적 사실이다. 이로써 소유격을 목적격으로 번역하여 믿음과 행위를 분리시키는 우를 범했고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인간의 믿음으로 대체했다는 것이다.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믿음이라는 단어는 신실함과 동의어라는 것과 하나님께는 신실함으로, 사람에게는 믿음으로 번역하되 믿음은 신실한 행함이 동반된다는 것을 간과하여서는 않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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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무나가 49번 나오는 구약의 용례 

---Exod. 17:12; Deut. 32:4; 1 Sam. 26:23; 2 Ki. 12:16; 22:7; 1 Chr. 9:22, 26, 31; 2 Chr. 19:9; 31:12, 15, 18; 34:12; Ps. 33:4; 36:6; 37:3; 40:11; 88:12; 89:2f, 6, 9, 25, 34, 50; 92:3; 96:13; 98:3; 100:5; 119:30, 75, 86, 90, 138; 143:1; Prov. 12:17, 22; 28:20; Isa. 11:5; 25:1; 33:6; 59:4; Jer. 5:1, 3; 7:28; 9:2; Lam. 3:23; Hos. 2:22; Hab. 2:4

###피스티스가 243번 나오는 신약의 용례

---Matt. 8:10; 9:2, 22, 29; 15:28; 17:20; 21:21; 23:23; Mk. 2:5; 4:40; 5:34; 10:52; 11:22; Lk. 5:20; 7:9, 50; 8:25, 48; 17:5f, 19; 18:8, 42; 22:32; Acts 3:16; 6:5, 7; 11:24; 13:8; 14:9, 22, 27; 15:9; 16:5; 17:31; 20:21; 24:24; 26:18; Rom. 1:5, 8, 12, 17; 3:3, 22, 25ff, 30f; 4:5, 9, 11ff, 16, 19f; 5:1f; 9:30, 32; 10:6, 8, 17; 11:20; 12:3, 6; 14:1, 22f; 16:26; 1 Co. 2:5; 12:9; 13:2, 13; 15:14, 17; 16:13; 2 Co. 1:24; 4:13; 5:7; 8:7; 10:15; 13:5; Gal. 1:23; 2:16, 20; 3:2, 5, 7ff, 11f, 14, 22ff; 5:5f, 22; 6:10; Eph. 1:15; 2:8; 3:12, 17; 4:5, 13; 6:16, 23; Phil. 1:25, 27; 2:17; 3:9; Col. 1:4, 23; 2:5, 7, 12; 1 Thess. 1:3, 8; 3:2, 5ff, 10; 5:8; 2 Thess. 1:3f, 11; 2:13; 3:2; 1 Tim. 1:2, 4f, 14, 19; 2:7, 15; 3:9, 13; 4:1, 6, 12; 5:8, 12; 6:10ff, 21; 2 Tim. 1:5, 13; 2:18, 22; 3:8, 10, 15; 4:7; Tit. 1:1, 4, 13; 2:2, 10; 3:15; Phlm. 1:5f; Heb. 4:2; 6:1, 12; 10:22, 38f; 11:1, 3ff, 11, 13, 17, 20ff, 27ff, 33, 39; 12:2; 13:7; Jas. 1:3, 6; 2:1, 5, 14, 17f, 20, 22, 24, 26; 5:15; 1 Pet. 1:5, 7, 9, 21; 5:9; 2 Pet. 1:1, 5; 1 Jn. 5:4; Jude 1:3, 20; Rev. 2:13, 19; 13:10;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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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호4: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tm,a,(571, 에메트) 신실, 성실, 확실함, 진리
에메트(명여)는 아만(@m'a; , 539)에서 유래했으며, '신실(성), 성실(성), 충실함, 확고함, 확실함, 진리, 진실'을 의미한다. 에메트는 헬라어 알레디아에 해당한다.
구약성경에서 에메트는 126회 나오며, 다음의 의미를 나타낸다.
(a)  에메트와 의미
에메트는 아멘, 곧 확고한, 확실한, 신실한 것으로 생각되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진실한 것을 의미한다. 인격에 대해 사용될 때 그것은 때때로 주로 그의 말, 행동, 사상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을 표현한다. 이쉬 에메트는 그의 행위가 진리의 규범에 지배를 받는 사람이며, 그러므로 성실한 사람이다. 하나님께 적용될 때, 특별히 그의 신실성에 대해 사용된다. 이 단어는 '확고하다'를 뜻하는 어근 'mn에서 파생된 것으로 학자들은 이해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구약성경 학자들은 히브리 저술가들이 말하는 '진리'란 의미상 '불변성'(stability), '확고함'(firmness) 혹은 '확실성'(reliability)이란 개념을 시사해주는 '신실성'(faithfulness)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예프센(Jepsen) 기록을 요약해서 말한다면, '에메트는 신뢰할만한 것으로 입증되어야 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영어로 이 개념을 전달하는 데에는 'Reliability'(확실성)가 가장 포괄적인 단어일 것이다. 에메트는 다른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고 했다. 예프센은 이것을 인간의 진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 적용시키는 것으로 말을 맺는다. 진리의 하나님으로서 "여호와는 ... 그의 말씀과 사역 안에서 우리가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TDOT Ⅰ313).
이런 견해를 근거로 하여 구약성경에서 진리는 단순히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성에 근거한 것이라는 주장이 종종 있어 왔다. 만일 이 견해를 받아 들인다면, 이것은 진리에 대한 히브리적 개념과 헬라적 개념 사이의 근본적으로 분명한 대조를 보여주는 요인이 될 것이다. 볼트만(R. Bultmann)은 쉽사리 알레데이아의 헬라어 용법이 셈어적 용법과 대조된다고 말한다(TDNT Ⅰ238). 이 이론에 따르면, 고전 헬라어에서 알레데이아는 단순한 현상과 대조되는 '진리'(truth)를 의미하는데 반해, 히브리어에서 이에 병행되는 단어는 '불변성'(stability) 혹은 '신실성'(faithfulness)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런 대조가 어느 점에서는 타당성을 지니는 반면, 이 주장들이 조심스럽게 한정되지 않을 경우에는 잘못될 수도 있고, 지나치게 단순화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에메트는 그 사용된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나타낸다. 에메트가 에메트로 간주되고, 에메트에 의해 지적되는 독특한 사실들을 항상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우에 이 단어는 법률적 영역을 넘어가는 불확정한 일반적인 타당성이나 정당성을 지적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진실이나 사실(reality)로 인정하기를 항상 요구하는 사실(facts), 신과 인간의 질서에 일치하여, 존중을 받는 정상 상태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유사하게 미쉬파트(fP;v]mi , 4941: 공의, 심판)의 체다카(hq;d;x] , 6666: 의), 샬롬(!/lv; , 7965: 완전, 평화)과 같은 관련 용어에 반영되어 있다. 그 의미와 일치하여 그것은 전혀 일반적으로 진리나 진실(truth)로, 심지어 정상적 개념으로서 '진실성'(veracity)으로 번역할 수 있다.
(b)  에메트의 법률적 용법.
에메트는 기본적으로 가장 확실히 법률 용어에서 '사실상의 과정이나 인과의 진실을 묘사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 22:20에 "그 일이 참되어(에메트)..."라는 표현에서 앞의 경우와 같이 "그 일이 비방거리에 근거하지 않고 확실한 사실들, 곧 진실에 근거한다면"이란 의미를 읽는다.
삿 9:16(삿 9:19)의 "너희의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라는 말에서 에메트는 의와 관련되며, 그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따지고 있는 것이다.
삿 9:15에서는 "참으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메트가 사물에 적용되는 경우에 법률 용어의 비유적 용법을 보게 된다.
창 24:48에 "바른 길"이 데레크 에메트, 즉 제시되는 많은 길들 중에 확실히 성공하는 길이다.
렘 23:28의 "내 말을 받는 자(선지자)는 성실함으로(에메트) 내 말을 말할 것이라"는 말에서, 에메트는 그 자체 꿈으로가 아니라 실제적 역사(operation, 렘 23:29)를 나타내는 사실(a fact)을 가리킨다. 단 8:26에서(이상이 확실하니) 에메트는 그 계시가 실제로 일어날 명백한 것임을 확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사 59:14, 사 59:15에서 진실이 부족하다는 불평은 사 59:13 상반절에 "배반하는 것"에 관한 언급이 있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 이스라엘의 불신실성에 대한 언급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좀 더 세밀하게 검토해 보면, 불평의 참된 원인은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마찬가지로 예레미야도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혀로 거짓말 하기를 가르친다"고 불평하였다(렘 9:5). 틀림없이 이런 일 때문에 결국 어느 누구도 자기 형제를 신뢰할 수 없는 것 같다(렘 9:4). 그러나 여기에서 주요 문제는 거짓말 그 자체이다.
스가랴도 이와 같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을 베풀고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특별히 에메트의 개념에 있는 평결(judical finding)과 재판의 기준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다.
시편의 세 구절들에서 진리는, 많은 학자들이 오로지 헬라 문헌에서만 발견된다고 주장하는 거의 그런 의미에서, 은폐(concealment)와 대조하여 나온다. 시 43:3에서 기자는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라고 기도한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계실 것을 바라는 기도가 아니라 "간사한 자"(시 43:1)의 유혹적인 말에 직면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건의 진상을 보여주기를 원하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그는 진리와 빛을 필요로 한다. 진리란 그를 어둠에서부터 벗어나게 하여 사건들이 있었던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시 45:4에서 왕은 진리의 옹호자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염두에 둔 것은 왕의 확실성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의심스럽고, 부정하고, 공정치 못하거나 거짓된 것은 무엇이든지 기꺼이 다 드러낼 그의 마음 자세이다. 왕의 고통 당하는 자들의 고통의 원인을 공공연하게 드러냄으로써 그들을 옹호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시 51:6의 "중심에 진실함을"이라는 유명한 언급은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앤더슨(A. A. Anderson)은 여기에서 에메트가 '신실성'(faithfulness)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Psalms, Ⅰ, 396). 그러나 이 개념은 시편 기자가 충실함을 간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기만으로부터의 해방을 간구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인 것 같다. 이 시편의 주제는 고백이며, 이 고백은 하나님께서 보신 그대로 사건들의 상태의 진실됨을 시인하는 것이다. 이 해석은, 만일 우리가 "중심"(inward parts)을 계시의 필요와 관련되어 있는 "덮여 있는 것"을 의미하고(E. A. Leslie, The Psalms, 1949, 400), 이 시편의 주제를 여호와께서 공정하시다라는 것으로 이해한다면(S. Mowinckel, The Psalms in Isreal's Worship, 1967,Ⅰ, 214), 훨씬 더 적합할 것이다.
그리고 잠언에서 진리와 거짓말(혹은 속임수) 사이의 대조를 배경으로하여 에메트가 사용된다. 지혜가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잠 8:7)라고 말할 때, 그 요지는 지혜가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을 기만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혜는 교육과 지식을 통해서 그에게 모든 것을 드러낼 것이다. 잠 22:21에서는 진리가 참된 대답이 행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즉 그곳에 거짓이나 허위가 없도록 하기 위해 드러내어 진다.
(c)  에메트의 종교적 용법.
① 법률적 영역에서 중요한 다른 표현과 같이, 진리의 개념은 특별히 구약성경의 종교적 용어에 그 자리를 잡고 있다. 에메트의 종교적 용법은 항상 비유적으로 이해하지 아니하지만, 종교적 이해(통찰)에서 생겨날 수도 있다. 어쨌든 많은 경우에 그것은 법률적 용법에 의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종교적 사실을 오로지 의미한다. 때때로 사법적으로 의인으로 묘사된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태도를 명백한 진리의 사실에 근거하며, 진리가 하나님 자신의 행위와 말씀 안에 있는 토대인 것 같이 진리를 행한다. 하나님의 진실함은 인간의 진실함을 요구한다(시 51:6). 여호와의 성산에 거하기에 합당한 자는 그 마음에 에메트("진실")를 말하는 자이며(시 15:2),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생의 질서라는 의미에서 진리에 전념하는 마음을 가진 자이다. 이 마음은 사회 생활에서 실제적으로 표현된다(참조: 겔 18:8).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한다(참조: 18:9). 하나님은 그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라고 명하신다(왕상 2:4).
호세아가 호 4:1에서 이 땅에 진실(에메트)이 없다고 불평할 때, 진실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즉 생의 모든 영역에서 진실함은 하나님의 뜻을 틀림없이 아는데서 성장하고, 이러한 앎은 그것에 관한한 진실함의 실현이라는 것이다.
지혜 문학에서 문맥은 셰켈(허위, 거짓)이나 아울라(불의)와 대조시키므로, 진실의 개념을 강조하는 한편(말 2:6, 잠 11:18, 렘 9:4, 참조: 잠 12:19), 악과 대조는 더욱 명확히 종교적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느 9:33): "우리의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는 진실히(에메트: 신실하게) 행하셨음이니이다."
② 에메트는 자주 신실성이란 의미로 특히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시 31:5에서 하나님을 "진리의 하나님"으로 부른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으로서 일반적으로 의인과 사람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으실만 하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으로서 항상 신실하게(에메트) 대하신다. 하나님은 영원히 진실함의 규범을 지키신다(시 146:6).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진리를 확립하고 그 자체 진리인 법, 곧 진정한 율법(토로트 에메트)을 수여하셨다(느 9:13).(참조: Quell).
에메트는 보통 "내가 주의 에메트를 찬양하리이다"(시 71:22)와 같은 특징적인 구절들에서 '신실성'이란 의미로 나온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영원히 지속된다(시 117:2). 앤더슨(A. A. Anderson)은 시 119:43에 나오는 "진리의 말씀"이란 어구조차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에 관한 기록이란 의미로 해석했다(The Book of Psalms). 시 30:9에서 하나님의 에메트에 대한 증거의 개념이 훨씬 더 두드러지게 나오는데, 스올(Sheol)이 하나님의 신실성을 선언하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신자에게 하나님의 신실성을 새롭게 증거해 줄 계속적인 경험이 중단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그들에게는 그들이 호소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기 때문이다(시 30:9, 참조: 사 38:18).
③ 에메트가 '신실성'(faithfulness)이란 의미로 사용될 때 자주 헤세드(변함없는 사랑)와 병행되어 나오다. 이런 경우에 에메트가 '신실성'을 의미하는 문맥과 '진리와 진실'을 의미하는 문맥을 구별해야 한다.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에게 헤세드와 에메트를 보여주기를 브두엘과 라반에게 요청하는 대목에서(창 24:49), 이 두 단어의 의미를 '충성'(loyalty)과 '성실'(fidelity)로 볼 수 있겠지만 개역 표준 성서(RSV)에 따라 정직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다라는 의미의 "deal loyally and truly"(충성스럽고 진실하게 대하다)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같은 장(창 24장)의 앞 부분에 나오는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맨처음 만나는 대목에서 엘리에셀을 "헤세드와 에메트를 끊이지 않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 뜻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약속에 충실하고 신실했다는 것이다(창 24:27). 창 32:10에서 야곱은 아주 똑같은 방식으로 그가 하나님의 모든 신실하심(에메트)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창 32:10).
그 특징은 시편에서 찬양과 기도가 모두 하나님의 신실성을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에메트의 용법 중 반수 이상이 이런 의미를 지닌다. 시편 기자가 "여호와의 모든 길은 ... 인자와 진리로다"(시 25:10)라고 외칠 때,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가 언약에 대한 충성으로 특징 지워지기 때문에 아주 신뢰할 만하다고 증거하는 것이다(M. Dahood). 에메트가 시 57:3, 시 57:10, 시 61:7, 시 69:13, 시 108:4, 시 115:1에서 헤세드와 결합되어 나올 때, "신실성"(faithfulness)이 에메트의 의미로 나온다. 흠정역 성서에 나타나 있듯이, 이런 의미에서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난다"(시 85:10)라고 번역된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은 그의 신실성에 대한 하나의 표현으로 명시된다. 그리고 알레데이아는 '충실, 성실'을 뜻하는 에무나(시 88:11-49), '신실한, 신뢰하는'을 뜻하는 에문(시 12:1, 시 31:24), '확실한, 진실한'을 뜻하는 야칩(byXiy' , 3330; 단 2:8), '정직한'을 뜻하는 야샬(rv'y: , 3474; 욥 23:7), '완전, 성실'을 뜻하는 톰(!To , 8537, 잠 28:6), '진실'을 뜻하는 케쇼트(f/vq] , 7187; 단 2:47), '진실로'를 뜻하는 옴나(욥 9:2, 욥 19:4), 우림(신 33:8)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④ 우리가 에메트가 사용된 여러가지 측면들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매우 많은 문맥들에서 진리가 단순히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말씀으로만 아니라 행위로 자기의 진리를 드러내시며, 이 진리는 사실상 그의 백성의 체험 속에서 입증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진리에 대한 존중을 추상적인 이론으로가 아니라 그들의 이웃에 대한, 그리고 그들의 구두상의 상업적 거래에 대한 일상적인 증언으로 나타낸다.
시 119:142에서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단순한 실존적인 진리 이상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신자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보여줄 등이요 빛이다(시 119:105). 여기에서 그는 사실상 그와 관련될 때의 사건의 진상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내발 ... 내길").
⑤ 이러한 진리는 신뢰할 만하며 또한 확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통찰이 오로지 신학적 기초 위에서만 도달되는 것이 아니다. 확실히 신자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에메트, 헤세드, 에무나)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그에게 의지할 것이다. 그러나 에메트의 이런 특별한 용법이 이 단어의 모든 용례들의 배후에 있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인들은 다른 사람들도 인정했던 논리적 진리, 곧 참된 말은 그것이 실제와 일치하기 때문에 믿을만하다는 점, 그리고 진리의 하나님에게 있어서나 진실한 사람에게 있어서 언행이 일치한다는 점을 인정하였다(참조: 수 24:14, 시 145:18). 진리를 말과 행동의 일치로 보는 개념이 신약성경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참조: R. Butman; A. C. Thisel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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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리 ]
히브리어 '에메트(אמת)'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진리'를 의미한다.
'에메트'는 '아만'이란 히브리어에서 나왔는데   우리가 잘 아는 '아멘'이란 히브리어의 원형이다. 
'아만'은 '지속하다', '지탱하다', '성실(신실)하다',   '영구적인', '마르지 않는', '믿다', '신뢰하다', '확실하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믿음'이라는 단어 '에무나'도    바로 이 '아만'에서 나왔다.  히브리어에서 진리와 믿음, 그리고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영원, 성실(신실)함은 언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할 때  '진실로 진실로'의 히브리어가 바로 '아만'이다.   이것은 '참이다', 확실한 변함없는 진리다'라는 의미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곧 '길이요,    진리요 , 생명(요14:6)'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자체가 '진리'이며 '에메트'이신 것이다.   따라서 '에메트(אמת)'라는 히브리어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알고 영생에 이르는(요17:  중요한 기초가 되며 '영'과 '진리(요4:24)'로 예배하기 위한   중요한 기초가 된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아버지의 영광을 이 땅에 가져 오셨는데   그 모든 삶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고   요한은 기록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여기서 '알레데이아'라는 '진리'를 의미하는 단어의  히브리어가 바로 '에메트'이다.   성경에서는 '은혜(헤세드)'와 '진리(에메트)'는   하나님 나라의 기초이며 중요한 본질이다.
@공의와 정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헤세드)과 진실함(에메트)이 주 앞에 있나이다(시 89:14)...   
여기서 인자는 '헤세드'이고   진리가 바로 '에메트'이다.   요한이 말한 은혜와 진리는 바로   이 '헤세드'와 '에메트'이다.   하나님의 '공의(쩨다카)'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이들을 구원하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인 '헤세드'와 짝을 이루고  하나님의 '공의(미쉬파트)'는  비진리와 죄, 곧 하나님의 의(법)를 모르고   자기 뜻과 불법을 행하는 구조를 심판하여 회복하는   '진리(에메트)'와 연결되어 있다.   (유대교에서는 '쩨다카'를 행하는 자들을    '하시드/헤세드를 행하는 자' 라고 한다)
@아침마다 주의 인자(헤세드)를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에메트)을 베풂이 좋으나이다(시 92:1)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편 92:1에서    주의 '인자'는 '헤세드'   주의 '성실'이 바로 '에메트'이다.   이 시편은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영원하신 성품을 의미하며   하나님 나라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다.   성경에서 '아침(보케르)'은 빛이 밝아오는   빛에 거하는 영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그 빛의 시간에는 하나님의 헤세드가 있다.   그리고, '밤'이라는 영적인 어둠의 시기에는  '에메트'를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토브', 선하심, 기쁘신 뜻이다.   (토브 : '선하다'는 뜻.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에메트(אמת)'는 히브리 알파벳의 첫 글자인 '알레프(א)'와    알파벳의 중간에 위치하며 생수,  말씀을 의미하는 '멤(מ)'   그리고 알파벳의 마지막 글자인 '타브(ת)'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히브리적인 개념에서 하나님의 '진리(에메트)'란    처음(א)과 중간(מ) 그리고 끝(ת)까지 하나님의 진리인    이 생수가 흐르는 것이며, 진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며 불변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 생수는 창세기 처음인 에덴에서부터 마지막인 계시록까지   동일하게 흐른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니라(계 22:13)   ('알파'와 '오메가'는 히브리어 '알레프'와 '타브'의 개념을   헬라어로 표현한 것이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5-7) ...
요한계시록의 이 말씀은    히브리어 '에메트'가 가진 진리의 개념을 토대로 하고 있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공의와 정의,    '헤세드'와 '에메트'로 다스리시는   진리이신 그 분(예수님)은    알파(알레프)와 오메가(타브) 처음과 마지막이시다.   그 분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분이다.
@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아니하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더라)( 요 7:37-39)
이 생수의 강은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킨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요14:17)'이시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랐지만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들이 아직 온전한 믿음과 '진리' 가운데    있지 못함을 의미한다.
@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생각나게 해 주신다.
@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17)....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다.   성령님을 통하여 깨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바로 '진리'이고, 예수님의 말씀 역시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여 주셔야만이 온전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진리는 생명수 샘물이고 '알레프(알파)'와 '타브(오메가)'이며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본질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이 곧 '진리'라는 개념이다.   그 말에 거해야 진리를 알고 진지를 아는 참 제자가 된다.   
@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1-32)
예수님은 이 말씀을 그들을 믿은 유대인들에게 하셨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있지만 '진리'안에 있지는 않을 수 있는데  초대교회에서 다른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않는 자들은  불신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는 자들이었다.
@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요이 1:9)
예수님은 오셔서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시고(요12:49)   아버지의 일을 하셨다(요14:10).   '다른 복음'이라는 것은 아버지와 하나된 아들이신 예수님이    전하신 '에메트'가 아닌 것,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동일한 본질로의 그리스도의 교훈이 아닌 것,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말하지만, 그 가르침의 본질이 아닌 것.   이것은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이 명령하지 않은   다른 불을 드리는 것(레10:1)과 같다.
@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개 전파히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4)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가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진리'라고 하면 하나님 말씀이 다 진리이고   말씀을 믿으면 진리를 믿는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성령님을 통해 깨달은 말씀을    '진리'라고 한다. 깨닫지 못하면 온전한 진리 안에    거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진리 위해 거하기 위해서는    이 본질을 깨닫기 위해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림이 매우 중요하다.
@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 13:13)
예수님의 말씀의 그 본질을 깨달아야만 진리를 알고  진리 안에 거하게 된다.  이 깨달음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교훈에 속하지 못하게 되고   아버지와 아들을 모실 수 없게 된다.  그 진리 안에 거하는 자들이 '참 제자'이고  '이기는 자'이고, 생명수 샘물을 상속받는 '아들'이 된다.
@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5-7)
'이기는 자'란 '진리'를 가진 자를 말하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증언)의 말씀을    끝까지 지켜 인내로 결실한 자들을 말한다.   이런 이기는 자들이 상속받는 생명수 샘물이   바로 '진리'인 것이다.   그리고 이 진리를 가진 자들이    성경이 말하는 '아들'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자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출 19:15)이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지키고   환난과 핍박을 이기고 인내로 결실하여   이 진리를 상속받은 자들을 말한다.   예수님은 이들을 가리켜   '나를 믿는 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냥 믿는 자가 아니라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를 말하는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 자들이   예수님께 나와 생명수 샘물(진리)을 마시게 되면   진정한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 상속자가 되고   그 배에서 진리인 생수의 강, 그 유업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순절에 임한 성령님을 통해   제자들에게 임한 것이다.   오순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불'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진리)을 받은 날이고   성령님은 '진리의 영'으로 오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조차 가로막고   말씀을 깨닫지 못했지만 오순절의 성령 강림이 후  지혜와 총명의 영이 임하자 예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게 된 것이다.  그후에 비로소 그들이 전한 복음, 그들의 가르침은    바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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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8:31-32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
ajlhvqeia(225, 알레데이아) 진리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알레데이아(Homer 이래)는 어원적으로 '가리워져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보여지거나, 지적되거나 표현된 정도(범위)의 상태나 사태, 그것도 이러한 보임과 지적과 표현에서 나타내지거나 그 자체 사실 그대로 나타낸 정도의 상태나 사태를 지적하며, 물론 그것은 숨겨지거나 위조되거나 왜곡되거나 생략되거나 은폐될 수도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알레데이아는 사건의 진상(full or real stale of affairs)을 의미한다. 이것은
(a)  사법에서 여러가지 진술에 대항하여 지지될 수 있는 사건의 진상,
(b)  역사에서 신화와 완전히 구별되는 실재적 사건,
(c)  철학에서 절대적 의미의 참된 것 등을 의미한다(R. Bultmann).
그러므로 알레데이아는 일반적으로 거짓이나 거짓말에 반대되는 '진실'을 의미한다.
2.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 
(a)  에메트와 의미와 그 역어 알레데이아.
알레데이아에 상당하는 히브리어는 에메트이다. 구약성경에서 에메트는 126회 나오는데, 85회 알레데이아로 번역되었다.
에메트는 아멘, 곧 확고한, 확실한, 신실한 것으로 생각되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진실한 것을 의미한다. 인격에 대해 사용될 때 그것은 때때로 주로 그의 말, 행동, 사상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을 표현한다. 이쉬 에메트는 그의 행위가 진리의 규범에 지배를 받는 사람이며, 그러므로 성실한 사람이다. 하나님께 적용될 때, 특별히 그의 신실성에 대해 사용된다. 이 단어는 '확고하다'를 뜻하는 어근 'mn에서 파생된 것으로 학자들은 이해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구약성경 학자들은 히브리 저술가들이 말하는 '진리'란 의미상 '불변성'(stability), '확고함'(firmness) 혹은 '확실성'(reliability)이란 개념을 시사해주는 '신실성'(faithfulness)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예프센(Jepsen) 기록을 요약해서 말한다면, '에메트는 신뢰할만한 것으로 입증되어야 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영어로 이 개념을 전달하는 데에는 'Reliability'(확실성)가 가장 포괄적인 단어일 것이다. 에메트는 다른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고 했다. 예프센은 이것을 인간의 진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 적용시키는 것으로 말을 맺는다. 진리의 하나님으로서 "여호와는 ... 그의 말씀과 사역 안에서 우리가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TDOT Ⅰ313).
이런 견해를 근거로 하여 구약성경에서 진리는 단순히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성에 근거한 것이라는 주장이 종종 있어 왔다. 만일 이 견해를 받아 들인다면, 이것은 진리에 대한 히브리적 개념과 헬라적 개념 사이의 근본적으로 분명한 대조를 보여주는 요인이 될 것이다. 볼트만(R. Bultmann)은 쉽사리 알레데이아의 헬라어 용법이 셈어적 용법과 대조된다고 말한다(TDNT Ⅰ238). 이 이론에 따르면, 고전 헬라어에서 알레데이아는 단순한 현상과 대조되는 '진리'(truth)를 의미하는데 반해, 히브리어에서 이에 병행되는 단어는 '불변성'(stability) 혹은 '신실성'(faithfulness)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런 대조가 어느 점에서는 타당성을 지니는 반면, 이 주장들이 조심스럽게 한정되지 않을 경우에는 잘못될 수도 있고, 지나치게 단순화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에메트는 그 사용된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나타낸다. 에메트가 에메트로 간주되고, 에메트에 의해 지적되는 독특한 사실들을 항상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우에 이 단어는 법률적 영역을 넘어가는 불확정한 일반적인 타당성이나 정당성을 지적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진실이나 사실(reality)로 인정하기를 항상 요구하는 사실(facts), 신과 인간의 질서에 일치하여, 존중을 받는 정상 상태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유사하게 미쉬파트(4941: 공의, 심판)의(6666: 의), 샬롬(7965: 완전, 평화)과 같은 관련 용어에 반영되어 있다. 그 의미와 일치하여 그것은 전혀 일반적으로 진리나 진실(truth)로, 심지어 정상적 개념으로서 '진실성'(veracity)으로 번역할 수 있다.
요약하면 알레데이아는 70인역본에서 히브리어 에메트의 의미를 따라, '신실(성), 성실(성), 충실, 진리나 진실, 확실한, 정직한, 진실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b)  에메트/ 알레데이아의 법률적 용법.
에메트는 기본적으로 가장 확실히 법률 용어에서 '사실상의 과정이나 인과의 진실을 묘사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 22:20에 "그 일이 참되어(에메트/ 알레데이아)..."라는 표현에서 앞의 경우와 같이 "그 일이 비방거리에 근거하지 않고 확실한 사실들, 곧 진실에 근거한다면"이란 의미를 읽는다.
삿 9:16(삿 9:19)의 "너희의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라는 말에서 에메트/ 알레데이아는 의와 관련되며, 그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따지고 있는 것이다.
삿 9:15에서는 "참으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메트가 사물에 적용되는 경우에 법률 용어의 비유적 용법을 보게 된다.
창 24:48에 "바른 길"이 데레크 에메트(알레데이아), 즉 제시되는 많은 길들 중에 확실히 성공하는 길이다.
렘 23:28의 "내 말을 받는 자(선지자)는 성실함으로(에메트/ 알레데이아) 내 말을 말할 것이라"는 말에서, 에메트는 그 자체 꿈으로가 아니라 실제적 역사(operation, 29절)를 나타내는 사실(a fact)을 가리킨다. 단 8:26에서(이상이 확실하니) 에메트/ 알레데이아는 그 계시가 실제로 일어날 명백한 것임을 확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사 59:14, 15에서 진실이 부족하다는 불평은 13절 상반절에 "배반하는 것"에 관한 언급이 있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 이스라엘의 불신실성에 대한 언급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좀 더 세밀하게 검토해 보면, 불평의 참된 원인은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마찬가지로 예레미야도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혀로 거짓말 하기를 가르친다"고 불평하였다(렘 9:5). 틀림없이 이런 일 때문에 결국 어느 누구도 자기 형제를 신뢰할 수 없는 것 같다(4절). 그러나 여기에서 주요 문제는 거짓말 그 자체이다.
스가랴도 이와 같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을 베풀고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특별히 에메트/ 알레데이아의 개념에 있는 평결(judical finding)과 재판의 기준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다.
시편의 세 구절들에서 진리는, 많은 학자들이 오로지 헬라 문헌에서만 발견된다고 주장하는 거의 그런 의미에서, 은폐(concealment)와 대조하여 나온다. 시 43:3에서 기자는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라고 기도한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계실 것을 바라는 기도가 아니라 "간사한 자"(1절)의 유혹적인 말에 직면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건의 진상을 보여주기를 원하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그는 진리와 빛을 필요로 한다. 진리란 그를 어둠에서부터 벗어나게 하여 사건들이 있었던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시 45:4에서 왕은 진리의 옹호자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염두에 둔 것은 왕의 확실성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의심스럽고, 부정하고, 공정치 못하거나 거짓된 것은 무엇이든지 기꺼이 다 드러낼 그의 마음 자세이다. 왕의 고통 당하는 자들의 고통의 원인을 공공연하게 드러냄으로써 그들을 옹호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시 51:6의 "중심에 진실함을"이라는 유명한 언급은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앤더슨(A. A. Anderson)은 여기에서 에메트가 '신실성'(faithfulness)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Psalms, Ⅰ, 396). 그러나 이 개념은 시편 기자가 충실함을 간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기만으로부터의 해방을 간구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인 것 같다. 이 시편의 주제는 고백이며, 이 고백은 하나님께서 보신 그대로 사건들의 상태의 진실됨을 시인하는 것이다. 이 해석은, 만일 우리가 "중심"(inward parts)을 계시의 필요와 관련되어 있는 "덮여 있는 것"을 의미하고(E. A. Leslie, The Psalms, 1949, 400), 이 시편의 주제를 여호와께서 공정하시다라는 것으로 이해한다면(S. Mowinckel, The Psalms in Isreal's Worship, 1967,Ⅰ, 214), 훨씬 더 적합할 것이다.
그리고 잠언에서 진리와 거짓말(혹은 속임수) 사이의 대조를 배경으로하여 에메트/ 알레데이아가 사용된다. 지혜가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잠 8:7)라고 말할 때, 그 요지는 지혜가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을 기만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혜는 교육과 지식을 통해서 그에게 모든 것을 드러낼 것이다. 잠 22:21에서는 진리가 참된 대답이 행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즉 그곳에 거짓이나 허위가 없도록 하기 위해 드러내어 진다.
(c)  에메트/ 알레데이아의 종교적 용법.
① 법률적 영역에서 중요한 다른 표현과 같이, 진리의 개념은 특별히 구약성경의 종교적 용어에 그 자리를 잡고 있다. 에메트의 종교적 용법은 항상 비유적으로 이해하지 아니하지만, 종교적 이해(통찰)에서 생겨날 수도 있다. 어쨌든 많은 경우에 그것은 법률적 용법에 의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종교적 사실을 오로지 의미한다. 때때로 사법적으로 의인으로 묘사된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태도를 명백한 진리의 사실에 근거하며, 진리가 하나님 자신의 행위와 말씀 안에 있는 토대인 것 같이 진리를 행한다. 하나님의 진실함은 인간의 진실함을 요구한다(시 51:6). 여호와의 성산에 거하기에 합당한 자는 그 마음에 에메트("진실")를 말하는 자이며(시 15:2),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생의 질서라는 의미에서 진리에 전념하는 마음을 가진 자이다. 이 마음은 사회 생활에서 실제적으로 표현된다(참조: 겔 18:8).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한다(참조: 18:9). 하나님은 그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라고 명하신다(왕상 2:4).
호세아가 호 4:1에서 이 땅에 진실(에메트)이 없다고 불평할 때, 진실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즉 생의 모든 영역에서 진실함은 하나님의 뜻을 틀림없이 아는데서 성장하고, 이러한 앎은 그것에 관한한 진실함의 실현이라는 것이다.
지혜 문학에서 문맥은 셰켈(허위, 거짓)이나 아울라(불의)와 대조시키므로, 진실의 개념을 강조하는 한편(말 2:6; 잠 11:18; 렘 9:4; 참조: 잠 12:19), 악과 대조는 더욱 명확히 종교적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느 9:33): "우리의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는 진실히(에메트: 신실하게) 행하셨음이니이다."
② 에메트는 자주 신실성이란 의미로 특히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시 31:5에서 하나님을 "진리의 하나님"으로 부른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으로서 일반적으로 의인과 사람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으실만 하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으로서 항상 신실하게(에메트) 대하신다. 하나님은 영원히 진실함의 규범을 지키신다(시 146:6).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진리를 확립하고 그 자체 진리인 법, 곧 진정한 율법(토로트 에메트)을 수여하셨다(느 9:13).(참조: Quell).
에메트는 보통 "내가 주의 에메트를 찬양하리이다"(시 71:22)와 같은 특징적인 구절들에서 '신실성'이란 의미로 나온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영원히 지속된다(시 117:2). 앤더슨(A. A. Anderson)은 시 119:43에 나오는 "진리의 말씀"이란 어구조차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에 관한 기록이란 의미로 해석했다(The Book of Psalms). 시 30:9에서 하나님의 에메트에 대한 증거의 개념이 훨씬 더 두드러지게 나오는데, 스올(Sheol)이 하나님의 신실성을 선언하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신자에게 하나님의 신실성을 새롭게 증거해 줄 계속적인 경험이 중단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그들에게는 그들이 호소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기 때문이다(시 30:9; 참조: 사 38:18).
③ 에메트가 '신실성'(faithfulness)이란 의미로 사용될 때 자주 헤세드(변함없는 사랑)와 병행되어 나오다. 이런 경우에 에메트가 '신실성'을 의미하는 문맥과 '진리와 진실'을 의미하는 문맥을 구별해야 한다.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에게 헤세드와 에메트를 보여주기를 브두엘과 라반에게 요청하는 대목에서(창 24:49), 이 두 단어의 의미를 '충성'(loyalty)과 '성실'(fidelity)로 볼 수 있겠지만 개역 표준 성서(RSV)에 따라 정직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다라는 의미의 "deal loyally and truly"(충성스럽고 진실하게 대하다)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같은 장(창 24장)의 앞 부분에 나오는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맨처음 만나는 대목에서 엘리에셀을 "헤세드와 에메트를 끊이지 않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 뜻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약속에 충실하고 신실했다는 것이다(창 24:27). 창 32:10에서 야곱은 아주 똑같은 방식으로 그가 하나님의 모든 신실하심(에메트)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창 32:10).
그 특징은 시편에서 찬양과 기도가 모두 하나님의 신실성을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에메트의 용법 중 반수 이상이 이런 의미를 지닌다. 시편 기자가 "여호와의 모든 길은 ... 인자와 진리로다"(시 25:10)라고 외칠 때,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가 언약에 대한 충성으로 특징 지워지기 때문에 아주 신뢰할 만하다고 증거하는 것이다(M. Dahood). 에메트가 시 57:3, 10; 61:7; 69:13; 108:4; 115:1에서 헤세드와 결합되어 나올 때, "신실성"(faithfulness)이 에메트의 의미로 나온다. 흠정역 성서에 나타나 있듯이, 이런 의미에서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난다"(시 85:10)라고 번역된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은 그의 신실성에 대한 하나의 표현으로 명시된다. 그리고 알레데이아는 '충실, 성실'을 뜻하는 에무나(시 88:11-49), '신실한, 신뢰하는'을 뜻하는 에문(시 12:1; 시 31:24), '확실한, 진실한'을 뜻하는 야칩(3330; 단 2:8), '정직한'을 뜻하는 야샬(3474; 욥 23:7), '완전, 성실'을 뜻하는 톰(8537, 잠 28:6), '진실'을 뜻하는 케쇼트(7187; 단 2:47), '진실로'를 뜻하는 옴나(욥 9:2; 19:4), 우림(신 33:8)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④ 우리가 에메트가 사용된 여러가지 측면들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매우 많은 문맥들에서 진리가 단순히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말씀으로만 아니라 행위로 자기의 진리를 드러내시며, 이 진리는 사실상 그의 백성의 체험 속에서 입증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진리에 대한 존중을 추상적인 이론으로가 아니라 그들의 이웃에 대한, 그리고 그들의 구두상의 상업적 거래에 대한 일상적인 증언으로 나타낸다.
시 119:142에서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단순한 실존적인 진리 이상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신자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보여줄 등이요 빛이다(105절). 여기에서 그는 사실상 그와 관련될 때의 사건의 진상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내발 ... 내길").
⑤ 이러한 진리는 신뢰할 만하며 또한 확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통찰이 오로지 신학적 기초 위에서만 도달되는 것이 아니다. 확실히 신자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에메트, 헤세드, 에무나)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그에게 의지할 것이다. 그러나 에메트의 이런 특별한 용법이 이 단어의 모든 용례들의 배후에 있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인들은 다른 사람들도 인정했던 논리적 진리, 곧 참된 말은 그것이 실제와 일치하기 때문에 믿을만하다는 점, 그리고 진리의 하나님에게 있어서나 진실한 사람에게 있어서 언행이 일치한다는 점을 인정하였다(참조: 수 24:14; 시 145:18). 진리를 말과 행동의 일치로 보는 개념이 신약성경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3. 알레데이아의 신약성경의 용법. 
신약성경에서 알레데이아는 109회 사용 중, 바울 서신과 요한의 기록에서만 9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a)  알레데이아는 "확실성과 힘을 지니는"(has certainty and force)"에 대해 사용되었다(에메트의 의미로).
① 타당한 규범. 알레데이아는 엡 4:21; 엡 4:22에서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이 진리는 지적 진리에 대한 단순히 이론적인 감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복음에서 나타날 때는 진리에의 위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와 만남으로써, 결국 삶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고, 이 변화를 통해서 신자들은 과거의 속임수에서 벗어나게 된다.
갈 2:5에서도 알레데이아는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함이라". 여기서 바울은 유대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문제가 된 것은 완전히 "복음의 진리"라고 선언하였다. 바울의 판단에 따르면, 복음을 더럽히도록 유혹하는 것은 곧 진리(타당한 규범)를 더럽히도록 유혹하는 것이요, 그 반대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유혹에 굴복한다는 것은 그 자신의 성실의 의미에서나 구원사에서의 현재 있는 그대로의 실제 상황이라는 의미에서도 진리 곧 타당한 규범을 부인하는 것이다.
갈 2:14에서 알레데이아 역시 같은 의미를 가진다: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게바는 복음의 타당한 규범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고후 13:8의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라는 바울의 언명에서 진리는 복음의 진리인 동시에, 더 나아가서 이 언명은 아마도 진리의 개방에 의해(그 결과야 어쨌든간에) 진리의 능력이 그리스도의 주의와 복음을 오직 보급시킬 수 있다는 사상을 전달하는 것이다. 진리는 타당한 규범이다. 하나님의 요구는 롬 2:8과 롬 2:19에서 알레데이아이다.
② 올바름, 정직. 알레데이아는 에메트와 같이 '올바름, 정직'이라는 보다 약한 의미를 가진다. '진리를 좇는 것(행하는 것)'이란 표현에서 나타난다(요 3:21; 요일 1:6). 유사하게 요이 1:4; 요삼 1:1 이하에서 "진리에 행하는 것"은 정직하게 행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같은 맥락을 따라 알레데이아는 아디키아(ajdikiva, 93: 불의)의 반대이다(고전 13:6; 롬 1:18). 이 단어는 또한 디카이오쉬네(dikaiosuvnh, 1343: 의)와 결합하며(엡 4:24; 엡 5:9; 엡 6:14), 아마도 때때로 그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약 3:14; 약 5:19).
(b)  알레데이아는 '진술의 사실'(truth of statement)에 대해 사용되었다. 행 26:25에서 바울은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고 하였다. 여기서 "참된 ... 말"(레마타 알레데이아스)은 환상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사실에 기초한 것이다. 엪 알레데이아스라는 문구는 일반적으로 '사실과 일치하여'나 '사실대로'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막 12:32; 눅 4:25; 눅 22:59에 나온다. 따라서 엪 알레데이아스를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 사건의 사실을 정확하게, 혹은 바르게 진술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눅 4:25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서 중요하다. 예레미아스는 주장하기를 이 문구는 예수님이 자기의 말씀을 강화하고 자기 권세를 나타내고 자기 메시지의 확실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하신 것이라고 한다(J. Jeremias, New Testament Theology).
(c)  알레데이아는 드러난 '사건의 실상이나 진상'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롬 1:18("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서 확신하는 것은 이 경우에서 알레데이아를 하나님의 요구하는 것으로나 의(디카이오쉬네)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롬 1:19의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는 말을 보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된 사실(revealed reality)"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롬 1:25("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단순히 프슈도스(yeu'do", 5579: 거짓, 허위), 즉 우상에 반대되는, 참된 또는 실질적인 하나님을 의미하지 않으면 위와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Bultman).
좀 더 설명하면, 바울은 알레데이아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자기 의지의 계시나 혹은 심지어 율법을 통해서든 어느 순간에는 창조를 통해서든 자기 존재의 계시를 나타낸다. 이런 용법은 로마서의 처음 두 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은 사악함으로 인하여 "진리를 막고"(롬 1:18),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꾼다(롬 1:25). 그러므로 진리에 순종치 않는 자에게는 진노가 있을 것이다(롬 2:8). 반대로 율법 그 자체는 지식과 진리의 구체화이다(롬 2:19)("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 여기서 문제가 되는 진리는 근본적으로 복음의 진리가 아니다. 바울은, 요한의 경우와 같이 사람들이 메시야를 알아볼 수 있는 지식을 받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창조주요 심판자이신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거부하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바울은 모든 이방 세계가 고의적으로 복음-진리를 거부하였다고 말하지 않고 이 세계가 창세로부터 하나님과 그의 주권적인 주장들에 대해서 고려될 수 있는 것, 즉 분명히 보여진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롬 1:20)을 고의적으로 은폐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된 사실'이다.
유사하게 알레데이아는 다음과 같은 전치사와 함께 '실제적으로(real)'를 의미한다. 골 1:6(엔 알레데이아)에서 실제적인 경험을, 행 10:27과 행 10:34(엪 알레데이아)에서 실제적인 행위를 표현한다. 한편 롬 2:2에서 카타 알레데이안을 '사실과 일치하여, 사실대로'를 의미하며, 롬 2:11에 프로소포렘프시아(편파적임, 불공정)와 반대되는 것이다.
요일 3:18에서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는 대조는 헬라에서는 흔한 표현이다. "행함과 진실함으로"는 '실제적 행위로'를 뜻한다.
또한 고전 헬라어의 표현 '진실을 말하다'는 70인역본에서 뿐만 아니라(대하 18:15; 잠 8:7), 신약성경에도 나온다. 막 5:33에서 알레데이아는 "사실"을 의미한다. 무리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만진 혈루증 앓는 여인은 "모든 사실"을 고하였다. 즉 아무 것도 숨기지 않고 사실을 말했다. 롬 9:1에서 참말을 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과 반대이며,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고후 12:6에서 참말을 하는 것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요 8:40; 요 8:45 이하; 요 16:7에서도 역시 '진리를 말하는 것'이 나오는데, 여기서 알레데이아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듣거나 본 사실들, 곧 하나님의 계시로 해석할 수 있다.
(e)  알레데이아는 '믿거나 의지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① 신뢰성이나 신뢰할만함, 롬 3:3 이하; 롬 15:8.
② 성실, 진실, 진심. 알레데이아는 '거짓말, 은폐, 속임수'와 반대되는 '진실' truth이라는 의미를 지니거나 '성실' sincerity의 의미로 나온다. 마 22:15 이하(막 12:14)에서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을 올가미에 걸리게 하려고 다음과 같은 말로 이 질문을 시작한다: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알레데스) 참으로써(엔 알레데이아)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여기에서 요점은 예수님이 그 말을 함으로써 얻어질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진리를 감추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그는 자기 견해를 피력하는데 정직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고후 7:14("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 우리의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고후 11:10("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에도 나타난다. 따라서 그것은 고전 5:8에서 에일릭리니아(명확, 순수, 성실)와 연결되어 있으며, 빌 1:18에서 프롭하시스(편파적임, 불공정)와 반대된다. 때때로 헨디아디스의 형태로 친족어와 관계되어 있다: "믿음과 진리"(딤후 2:7). 요이 1:1과 요삼 1:1에서 이 용법이 사용되었다: "참으로 사랑하는 자",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를 가리킨다.
(f)  알레데이아는 복음, '참된 가르침 또는 믿음'에 대해 사용되었다.
① 고후 13:8: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여기서 알레데이아는 (a)①의 의미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다른 복음(에테론 유앙겔리온)(참조: 고후 11:4)과 대립되는 참된 교리를 의미한다.
② 이런 이유로 고후 4:2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반적으로 그의 활약으로분명히 나타낸 알레데이아로 부르기도 한다("진리의 나타냄"). 이 경우에 알레데이아는 앞에 나온 말 로고스 투 데우("하나님의 말씀")의 개념을 포함시킨다(참조: 고후 2:14; 골 4:3 이하; 딛 1:3).
③ 갈 5:7에서 바울은 마치 "복음을 순종치" 아니했다고 말한 것처럼(참조: 롬 10:16). "진리를 순종치" 않는 것에 대해 말한다.
④ 벧전 1:22에 의하면 기독교의 믿음은 "진리를 순종함"이라고 할 수 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참조: 벧전 1:21 이하).
⑤ 또한 복음의 설교(전도)는 진리의 말씀이다(고후 6:7; 골 1:5; 엡 1:13 등).
⑥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진리를 아는데 이르는 것"이며(딤전 2:4; 딤후 3:7; 딤전 4:3; 히 10:26; 요이 1:1).
⑦ 살후 2:10-살후 2:12에서는 알레데이아는 "거짓"(yeu'do", 5579)과 "불의"(ajdikiva, 93)라고 불리는 적그리스도의 계시에 대립되는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⑧ 딤전 3:15에서 에클레시아(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 묘사된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⑨ 벧후 1:12에서 알레데이아는 단순히 기독교 신앙이다.
⑩ 알레데이아가 '참된 가르침'이라는 것은 특히 그릇된 교훈과 반대된다.
딤전 6: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딤후 2:18,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딤후 3: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알레데이아는 순종할 의향에 의해 결정되는 피스티스의 개념처럼 "권위있는 교훈"이다.
딤후 4: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딛 1:14,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g)  알레데이아는 또한 "진짜임", "하나님의 실체", "계시"를 의미한다.
① 계 8:44에서 신적 능력으로서의 알레데이아와 반신적인(anti-divine) 것으로서의 프슈도스(거짓)가 대조되어 있다. 알레데이아와 프슈도스는 인간 존재의 본질이라기보다는 진정한 가능성들로 이해된다. 이것은 말씀과 말씀의 경청에 대한 생각에 의해 결정되는 계시에 의해 보존되므로, 우리는 또 다시 진정한 존재의 가능성을 지닌다. 알레데이아는 하나님의 실체,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짐으로, 즉 죄로 말미암아 구성된 인간 존재와는 반대되고 가까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실체이며, 계시는 하나님과 조화되지 않는 존재가 도달할 수 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기적 사건이다. 계시에서 그의 고유한 존재의 참된 가능성이 그에게 드러나며, 그 때, 그와 만나는 계시의 말씀에 직면하여 그는 항복할 것을 결심한다. 그러므로 알레데이아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성이나 비교(esoteric)의 지시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정신적인 각오와 연습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순종하는 믿음 속에서 일어난다.
② 요 8:44에서 하나님의 실체와 반신적 실체 간의 대조가 나타난다: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그러나 이것은 간접적으로 알레데이아가 생명을 주며, 알레데이아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은 것은 죽음으로 인도된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 말씀은 또한 알레데이아가 있을 때에 알레데이아는 그 자체가 구체적인 행위를 이루는 결정적인 힘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 뒤따르는 말씀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은 "거짓말" 또는 "허위"라는 첫 번째의 잠정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그 문맥은 명백히 첫째, 신성한 실체와 악마적인 실체가 모두 말로 표현되었다는 것과, 둘째, 이들 실체들이 존재의 활동 방식인으로서의 현실이라는 것, 또는 역으로 하나님의 또는 악마적인 실체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의 모든 활동 방식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요일 1:8과 요일 2:4에서 하나님의 계시된 실체로 인한 존재의 결정이 지적되어 있다: "진리가 그 속에 있지"(않다). 이것은 또한 그러한 결정이 구체적인 행위로 그 자체를 나타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③ 이런 이유로 요한복음에는 특유의 다의성(ambiguity)이 생겨난다. 예수님께서 알레데이아를 말씀하실 때에 이것은 첫 번째로 "진리를 말하다"라는 표면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또한 "말씀으로 계시하다"를 의미한다(요 8:40; 요 8:45; 요 8:46, 반대의 개념인 프슈도스[yeu'do", 5579] 대신에 더 일반적인 하마르티아[aJmartiva, 266]가 사용된 곳, 특히 요 8:47, 알레데이아 대신 하나님의 말씀[타 레마타 투 데우]이 쓰여진 곳).
④ 이 단어가 세례(침례) 요한에 대해 말해질 때 같은 이중의 의미가 나타난다: 그가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요 5:33). 그것은 요 18:37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여기서 빌라도의 질문이 그 말씀을 강조하고 계속되는 말씀에서 알레데이아가 스스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실체라는 것과 그것의 이해는 자유로운 존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실체로 말미암은 존재의 결정에 기초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⑤ 계시로서 알레데이아는 기노스케인(아는 것, 요 8:32; 요이 1:1, 요일 2:21)의 대상이다. 첫번째로 표현되는 것은 이해될 수 있는 말씀(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과 같은 계시의 결정적인 능력의 특성이다.
알레데이아는 본질적으로 질문한 사실의 표면적인 진실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것을 일반적이고 표면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크게 오해하는 것이다. 엘류데리아(ejleuqeriva, 1657: 자유)가 인간 의지의 자유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참조: 요 8:34), 의미하는 바는 일반적인 지식이 아니라 계시에 대한 지식이다.
요 17:17; 요 17:19의 진리도 마찬가지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즉 아버지에 의해 예수님께 위탁된 선언),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하려 함이니이다"(요 17:19). 계시의 말씀은 말 또는 사상의 집합체도 아니고, 구체적인 마주침으로 성취되는 말씀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예수님 개인과 그의 역사에서 성취하신 사건들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에 의해 드러난다(요 17:17-요 17:19). 그는 단순히 그의 말씀에 의한 전달로서가 아니라 알레데이아를 위하여 자신을 거룩하게 함으로 알레데이아를 가져오므로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러므로 계시는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수단인 동시에 목적(조에: 생명)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신성이 나타날 때에 진정으로 받아들여진다. 하나님께서 계시로 나타나신다는 것은 요 1:14; 요 1:17에 나오는데, 거기서 "독생자의 영광"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으로, 즉 하나님의 실체는 그것 안에 나타난다고 묘사되었다.
⑥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에 대한 요구(요 4:23 이하)를 같은 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요한에게는 알레데이아 뿐만 아니라 프뉴마도 인간과 완전히 구별되는 신성의 본질과 출현의 영역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참된 예배는 영성과 의인화된(anthropomor- phic) 개념이 제거된 하나님의 개념에 기초한 순수한 지식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본질 즉 프뉴마에 의해 결정될 때에 일어난다. 알레데이아가 더해진다면 이것은 그러한 예배는 오직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계시(요 4:25)에 의해 결정될 때에, 따라서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신 계시자(요 1:18; 요 14:6)에 의해 결정될 때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⑦ 세상을 떠나시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는 요 14:17; 요 15:26; 요 16:13에서 "진리의 영"이라고 해석되며, 이것이 요한복음이 이 공동체에 주어진 "성령"의 전통적인 개념을 이해하도록 의도한 방식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참조: 특히 막 13:11; 행 1:8). 바로 그분 자신이 요 14:16에서 보혜사라는 용어를 선택하신다. 프뉴마 테스 알레데이아("진리의 영")가 단순히 하나님의 성령만을 의미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 알레데이아 만큼이나 하기오스에 의해서도 표시되기 때문이다(참조: 요 17:17-요 17:19). 그러나 그 단어가 프뉴마에 대해 말할 때에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요 16:13)는 우리에게 요한에게 하나님의 진리는 항상 계시 안에서 작용하므로, "진리의 영"으로서 역사하시는 파라클레토스(보혜사)의 역할은 공동체에서 계속 역사하는 계시로 묘사되고, 요일 5:6에서 증거하시는 프뉴마는 바로 알레데이아와 같다. 같은 의미로 요일 4:6에서 "미혹의 영"과 대조되는 "진리의 영"에대한 언급이 있으며, 어떤 것이 하나님에 속한 것인지 아니면 불경한 세력에 속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기준은 실제적인 행위, 즉 공동체 안에서 선포된 말씀을 듣는가 또는 안듣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레데이아는, 그것이 선포된 한은, 옳은 교리이며 프슈도스(거짓, 거짓말)는 잘못된 것이다(요일 2:21). 한편 요삼 1:3의 알레데이아가 계시에 의하여 결정되는 삶의 방식을 나타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요일 1:6의 "진리를 행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과 반대되는 삶의 방식(-->242)을 나타낸다. 참으로 요삼 1:12에서 어떤 사람이 "뭇 사람에게" 가졌다는 증거는 "진리에게도"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계시는 공동체를 결정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요삼 1:8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공동체가 훈계,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함이니라"로 그것의 구체적인 기독교적인 행위에 동기를 부여한다. 이 결정이 개개의 신자들을 결속시킨다. 그 때문에 요한이서의 저자는 편지의 표현을 사용하여 그의 지도자들에 대해서 말한다: "1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2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요이 1:1-요이 1:3).(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R. Bultman; A. C. Thiselton). 
===----[요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oJdov"(3598, 호도스) 길 way, road, 대도 highway, 생활 방식 way of lif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기본어 호도스는 호머(Homer)로부터 나타나며,
(a)  그 일차적 요소는 동작(action)의 요소이다. 즉 행동으로서 '도보', 육지에서의 '여행'이나 바다에서의 '항해, 출발', 군대의 '행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b)  그리고 지역적, 공간적 의미에서, 이 단어는 사람이나 차량이 다니거나 행진하는 장소인 '길(way), 작은 길(path), 도로(road)', 강 '줄기(course)', 그리고 또한 배의 '항로'를 의미한다(Homer 이후로, 그리고 비문과 파피루스에 나옴).
(c)  이 단어는 초기에 벌써 회화적이면서 비유적인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길을 이용하거나 그 길로 가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호도스는 어떤 것에 도달하거나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 방책, 절차, 무엇을 행하거나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의미를 얻게 되었다. '삶의 길' 또는 '삶의 양식'이라는 문구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삶(인생)은 때때로 길에 비유된다(Democritus, Frag. 230). 개개의 경우에 있어서 옳지 못한 행동은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이라고 묘사되었다(Thuc., 3, 64, 4). 전문적인 철학적 용법에서 이 단어는 '질문 방법'이나 '인식 방법', '순서나 절차'(method)를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d)  헬라 문헌에서 두 길에 대한 묘사가 자주 발견된다. 악으로 가는 길과 선으로 가는 길, 경건한 자를 위한 장소에 이르는 오른편 길과 불의한 자들을 위한 형벌의 장소로 이끄는 길에 대해 언급한다.
호도스가 종교적인 관점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의가 깊다. 죽음 이후에 인간이 가는 두 길이 있다는 것은 일반적인 사상이다.
진리의 길, 지식을 가진 인간을 인도하는 길로서 하늘의 빛에 이르는 길,
길로서 그노시스, 지식 있는 자가 가고 있는 생명의 길 또는 완전한 길에 대한 언급이 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호도스는 70인역본에서 약 880회 나오며, 18개의 히브리어 상당어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주로 히브리어 데레크(1870: 길, 도로, 거리, 여행, 방식, 방법 등)의 역어로 나타난다(약 600회 이상).
구약성경에서 데레크/ 호도스는,
(a)  걸어다니는 길로서 '생명 나무의 길'(창 3:24), 술로 가는 길(창 16:7), 중요한 대로(민 20:17; 민 21:22), 해변의 길(사 9:1).
(b)  '여행'(창 45:23; 수 9:13; 창 24:21).
(c)  '활동, 행위'(시 1:6; 창 6:12).
(d)  '여호와의 길'(창 18:19; 신 9:16).
(e)  '태도, 습관'(창 19:31; 창 31:35).
(f)  '창조의 역사'(욥 40:19; 잠 8:22; 욥 26:14) 등에 대해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호도스는 신약성경에서 102회 나오며, 주로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바울 서신 6회, 히브리서 3회, 야고보서 3회, 베드로후서 4회, 유다서 1회, 요한계시록 2회 사용되었다.
(a)  ① 호도스는 문자적 의미로 '다니는 길, 도로'에 대해 사용되었다. 마 2:12; 마 7:13 이하; 마 13:4; 마 13:19; 막 4:4; 막 4:15; 막 10:46; 눅 8:5; 눅 8:12; 눅 10:31; 눅 18:35; 눅 19:36; 행 8:26; 행 9:17; 약 2:25 등.
"길에서". '노중에서, 길의 도중에서, 길가면서', 눅 10:4; 행 8:36; 행 25:3; 행 26:13.
② 마 10:5에서 "이방인의 길"(호도스 에드논)은 이방적인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지역 바깥의 이방인 지역으로 통했던 길을 의미한다.
③ 눅 2:44에서 헤메라스 호도스("하룻길")는 사람이 하루에 걸어가는 거리, 즉 하룻길을 말한다.
행 1:12에서 사바투 호도스("가기 알맞은 길")는 출 16:29의 계명(참조: 민 35:5)을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안식일에 유대인에게 허락되었던 보행 거리를 의미한다. 이 거리는 약 880미터였다.
(b)  호도스는 문자적 의미에서 '여행의 길, 여정, 노정, 여행'에 대해 사용되었다. 여행 중에, 마 5:25; 마 15:32; 마 20:17; 막 8:27; 막 9:33; 막 10:32; 막 10:52; 눅 12:58; 눅 24:32; 눅 24:35; 행 9:27; "여행 중에"(여행 길로부터), 눅 11:6; "여행을 위하여", 눅 9:3; "길을 가다"(여행하다), 가던 여행길을 계속하다, 행 8:39.
(c)  호도스는 '길'이라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구약의 용법에서처럼, 일부는 '하나님의 행위와 구원 사역을 뜻하는 말로(예: 롬 11:33; 계 15:3; 히 3:10), 또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말로(예: 마 22:16; 막 12:24; 눅 20:21; 마 21:32) 사용되었다.
구약의 인용구 중에서도 매우 자주 나타나며(행 2:28; 참조: 시 16:11; 시 13:10; 호 14:9; 롬 3:17; 시 36[35]:1; 눅 1:79; 사 9:2), 생활 방식을 의미한다(행 14:16; 롬 3:16; 고전 4:17; 약 1:8; 약 5:20).
(d)  마 3:3과 그 병행구 막 1:3; 눅 3:4(참조: 요 1:23)에서는 주를 위하여 길을 예비하라는 부름과 아울러 사 40:3을 인용한다. 퀴리오스("주")라는 칭호가 예수께로 전이됨에 따라, 세례(침례) 요한의 사역을 구약성경 말씀의 성취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요한은 선구자로서, 예수님의 오심을 알리어 회개를 촉구하고 세례(침례)를 줌으로써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였다(참조: 막 1:2에서 인용된 말 3:1; 참조: 마 11:10; 눅 1:17; 눅 1:76; 눅 7:27).
주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가지고 우리 마음에 도달할 수 있는 그런 길이다. 눅 1:79의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라는 표현에서 호도스는 '방법, 수단'을 의미하기보다 '길'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들과 평화를 이루며 사는 것을 말하고 있는 사 59:8(참조: 롬 3:17)과는 대조적으로, 여기서의 평강은 메시야적인 '구원'을 일컫는다.
(e)  마 7:13; 마 7:14에서 두 길의 상징을 사용한다: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첫번째 말씀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뒤이어지는 길에 대한 병행 은유법처럼 보인다. 의의 길이 넓은 길이라는 다른 기록들과 대조하여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처럼 협착하다. 여기서는 문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입구(눅 13:24에서 처럼)로 생각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길은 넓은 악의 길과 대조되는 의미로서 경건한 좁은 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의도하는 바는 그리스도인, 곧 제자가 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은 좁고 이 길은 어렵다. 그러나 이외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다른 길은 없다. 이 길에 들어서는 자가 적다면 이 길이 너무 좁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더 쉬운 길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길은 제자들의 삶의 길(방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기대하는 그 무엇이다. "문"과 마찬가지로 "길"도 들어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목적지는 이미 밝혀져 있다. 즉 멸망이 아니라 생명이다. 14절의 "찾는"이라는 문구는 여러 개의 길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거나 어려운 형국에서 길을 발견하려고 애쓴다거나 아니면 오랜 탐사 끝에 좁은 문으로 찾아 들어온다는 의미가 아니다. 좁은 길은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역사가 없이는 찾을 수 없는 길이며 찾는 자가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길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길이며 이 길로 들어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시다.
마태복음에서는 특히 천국에 들어가는 것(예: 마 5:20), 생명에 들어가는 것(예: 마 18:8 이하) 또는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예: 마 25:21; 마 25:23)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마 7:13 이하의 말씀도 이 범주에 속한다.
(f)  히브리서에서 호도스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에 대해 사용되었다.
-히 9: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위의 두개 구절에서 호도스는 상호 관련되어 있다. 히 9:8의 호도스는 분명히 위치상 성전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히 10:19에 비추어 볼 때 '길'이라기보다는 '들어감, 접근, 나아감'이며, 에이소도스(ei[sodo", 1529)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확실한 언급은 없지만 이 길은 명백히 하나님(과의 교제)께 나아가는 길이다. 이러한 논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관한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가신 분(참조: 히 6:20) 또는 인도자(참조: 히 2:10; 히 12:2)로서, 미증유(未曾有)의 살아있는 접근로(living way of access)를 열어 놓으셨다. 이것은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위해 길을 예비하는 구속자에 관한 영지주의적(gnostic) 논재와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히브리서의 사상은 희생 제물로서의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휘장을 갈라 놓으심으로써 그 길을 예비하셨는데, 이 휘장은 그의 육체이다. 영지주의적 견해에 의하면, 이것은 하늘의 세계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물질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성경적 견지에서, 예수님께서 자기의 살(과 피)을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드렸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갈라 놓은 것은 물질이 아니라 죄라는 점이 명백해진다. 악한 양심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참조: 히 10:22; 롬 5:1; 엡 2:18 이하; 엡 3:11 이하). 히브리서의 배경에 깔려 있는 표상은 속죄제(참조: 레 16장)이다.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 희생의 피를 가지고 부지중에 지은 백성의 죄들을 속(贖)하였다. 옛 언약 하에서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여호와께 그와 같은 접근을 할 수가 있었다. 벧후 1:11도 이러한 문맥에 속한다.
(g)  요한복음에서 호도스는 예수님의 인격에 적용되었다(요 14:1-6). 이는 신약성경의 독특한 용법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어디로 떠나 가시는지 그 장소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또한 그 길도 알지 못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바로 아버지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밝히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의 목적지는 아버지와 함께 거하는 곳이다(요 14:6b와 요 20:17). 또한 이를 통하여 그 제자들의 길이 열린다.
(h)  사도행전에서의 호도스.
① 행 2:28,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여기서 호도스는 '수단, 방법' 혹은 부활의 '가능성'을 가리킨다.
② 행 16:17,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여기서도 호도스는 '방법, 수단'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③ 행 14: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여기서 호도스는 '처세'(walk), '행동(위)'을 의미한다.
④ 행 13:10에서 '길'은 그에 병행되는 단 3:27과 호 14:9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역사, 또는 하나님의 행동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명하신 행동의 뜻으로 볼 수도 있다.
⑤ 행 9:2; 행 19:9; 행 19:23; 행 22:4; 행 22:14; 행 22:22 등에서 호도스는 성도의 교제로 표현된 삶의 양태를 의미한다. 여기서 단수형으로 사용된 호도스는 다른 사람들(특히 적대적인 유대인들)이 하이레시스(ai{resi", 139, 참조: 행 24:14)라고 부른 것과 동등한 그리스도인 편에서의 개념이다. 이 길은 다른 사람들은 비난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옳은 길이라고 믿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⑥ 행 16:17("구원의 길")은 기독교의 메시지와 분명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행 18:25("주의 도")과 행 18:26("하나님의 도")은 예수님에 관한 선포와 관련되어 있다.
⑦ 행 22:4에서 바울은 "도"를 핍박하였다고 말한다: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여기서 "도"는 십자가에 못박힌 자의 부활에 관한 기독교의 메시지와 아울러 기독교 공동체까지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길"이, 가르침과 기독교 공동체 중 어느 하나만을 의미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잘못된 양자택일을 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용어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으며 또한 두 의미가 함께 속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독립적으로 사용된 "길"의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독교인의 말씀 선포 및 기독교인들에 대한 칭호로 이해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길"은 이러한 말씀 선포가 특별한 생활 양식 또는 삶의 길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포괄하고 있다.
(i)  고전 12:31 하반절에서 바울이 말한 "제일 좋은 길"은 사랑(아가페)에 의해 지배되는 삶을 의미한다. 이 사랑은 영적 은사들에 대한 모든 열망 위에, 그리고 그에 우선하여 위치한다(참조: 고전 14:1; 빌 2:1 이하). 우리는 고전 12:31 하반적의 "길"(way)을 고전 4:17과 함께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
고전 4:17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길들"("그리스도 ... 안에서 나의 행사"-한글판 개역성경)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거기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조화되는 삶의 길에 관해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삶의 길을 그는 각처에서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위 속에서도 이것이 뚜렷하게 증거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명사 "나의 길들"("나의 행사"-개역)이라고 말할 수 있었고, 신도들에게 자기를 "본받는 자"되라고, 즉 그리스도와 조화되게 살라고 촉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j)  약 1:8에서 '처세'나 '행동'을 의미한다: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약 5:20에서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k)  베드로후서에서는 거짓 교리와 이단의 교사들을 논박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진리의 도"(벧후 2:2; 참조: 약 5:19 다른 읽기), 그리고 "의의 도"(벧후 2:21)라고 부른다. 이 길은 새로운 도덕성을 가져오며 또한 도덕성을 요구하고(참조: 벧후 2:20 이하, "거룩한 명령"). 나아가서는 그것에 의해 이교 사상과 구별이 된다. 바로 이러한 새로운 도덕성이라는 입장에서 살펴볼 때, 이 "길"의 의미가 선명히 드러난다. 거짓 교사들은 수치스러운 행위와 함께 "바른" 길(즉, 하나님께서 지시하시고 원하시는 길)에서 떠나 "발람의 길"(벧후 2:15)을 좇음으로써 기독교의 평판을 떨어뜨렸다. "발람의 길"과 "가인의 길"(유 1:11; 참조: 창 4:3-8; 민 22-24장)이라는 표현은 구약의 입장(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행위)에서보다는 후기 유대 전승에 준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후기 유대 전승에서는 구약의 입장을 고수하여 가인과 발람을 모든 방탕자와 이단자들의 조상과 스승으로 보고 있다(참조: Philo, Post.).
(참조: W. Michaelis; G. Ebel; Walter Bauer; J. H. Thayer).
---[시5:8]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r,D,(1870, 데레크) 길, 도로, 여행, 태도, 방식
데레크(명남)는 다라크(&r'D; , 1869)에서 유래했으며, '길 way, 도로 road, 여행 journey, 태도 manner, 습관 habit, 인생행로, 행위, 일, 일의 방식'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700회 나온다.
(a)  동사 다라크(&r'D; , 1869: 밟다, 걷다)와 관계되어 있는 데레크는 처음으로 계속적 걸어다님에 의하여 닦인 길을 언급한다. 창 3:24은 "생명나무의 길"을 언급하는데, 인간의 타락 후 그 길은 차단되었다. 하갈은 천사가 자신을 만났을 때 술로 가는 길에 있었다(창 16:7). 이것은 또한 "술로 가는 도중에"로 번역되어 질 수 있다(참조: 창 38:21, 출 4:24). 가끔 데레크(der다)는 트랜스 요르단(Trans-jordan)의 남북으로 뻗은 왕의 대로(데레크 함멜레크)처럼 주요 대로를 언급한다(민 20:17, 민 21:22). 후에 비와 마리스(Via Maris)로 알려진 '해변 길'(사 9:1)은 가사로부터 다메섹까지 뻗쳐 있었다. 출 13:17은 애굽으로부터 블레셋을 경유하는 해안 길을 언급한다.
(b)  데레크는 "여행"을 의미하며, 주로 수일 동안의 여행을 언급한다. 요셉은 그의 아버지의 애굽 여행을 위하여 여행에 필요한 물자를 준비하였으며(창 45:23), 기브온 족속들은 완전히 "여행이 심히 길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여호수아를 속였다(수 9:13). 엘리야는 그들의 바알신이 "길을 행하는" 중에 있을 것이라고 시사함으로써 바알의 선지자들을 조롱했다(왕상 18:27). 창 24:21에서 아브라함의 종은 메소포타미아에까지 자신의 여행(혹은 임무)을 성공적으로 하게 해주신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c)  데레크는 은유적 용법으로 가끔 사람의 활동과 행위를 묘사한다. 사람은 의인의 길 혹은 악인의 길을 따른다(시 1:6). 의인의 길은 "여호와의 길"과 밀접하게 관계된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여호와의 도를 지키라"고 명령하게 되는데(창 18:19, 잠 22:6), 이것은 하나님 율법의 규례와 계명에서 발견된다(왕상 2:3). 하나님의 도는 인간의 도보다 훨씬 더 높으며 사악한 자들은 자신들의 범죄의 길을 버리도록 촉구받고 있다(사 55:7-9).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길(행위)이 패괴하였기" 때문에 홍수를 내리셨으며(창 6:12), 심지어 율법을 주신 후에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들의 길이 형통치 못하리라는(신 28:29) 것을 확인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곧 바로 여호와의 도를 이탈하였다(신 9:16). 분열 왕국 시대에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일관성 있게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으며, 하나님을 무시하였다(왕상 16:26). 그들은 옳다고 여기는 길을 택하였으나 그러나 결국은 그 길은 죽음으로 인도하였다(잠 14:12).
(d)  잠 30:19에서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한 자취(행위)는 공중을 나르는 독수리, 반석 위를 기어다니는 뱀, 그리고 바다의 배의 기이한 움직임들에 비교된다: "곧 공중에 날아 다니는 독수리의 자취와 반석 위로 기어다니는 뱀의 자취와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와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한 자취며".
(e)  데레크는 '태도 manner' 혹은 '습관 custom'을 의미한다. 롯의 딸들은 자신들의 아버지와 근친상간의 죄를 범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소돔성이 멸망한 후 결혼의 정상적 '관례'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창 19:31). 창세기에서 라헬은 여인의 습관(경수) 때문에 그녀의 아버지가 나타났을 때 일어설 수 없다고 스스로 변명하였다(창 31:35).
(f)  욥기에서 2회, 잠언에서 1회, 데레크는 창조의 문맥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언급한다.
욥 40:19에서 거대한 하마는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 으뜸'으로 불리운다. 잠 8:22에서 동일한 관용구(레쉬트데레크)는 또한 하나님의 창조물 중 으뜸인 것으로 의인화된 지혜를 언급한다. 욥 26:14에서 창조와 역사에서 하나님의 권능의 증거는 '그의 행사의 술 장식'(NASB) 혹은 '하나님 역사의 외적 술 장식'으로 불리운다(NIV).
(g)  '도'(ways)는 렘 3:13과 잠 31:3에서 성격적 편애에 대한 희귀한 의미를 지닌다.
(h)  도로 road와 '지배' 간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 단어는 고든(Gordon)에 의해 인용된 '행진하다'라는 의미로 드러나는 것 같다(UT id.). '밟다 tread'의 개념은 권세로 억누르다 혹은 도로나 길을 밟다로 확대될 수 있다. 어떤 경우든 '지배, 능력, 힘, 권세'라는 번역에 의하여 명료하게 되는 구약성경의 성구들이 있다. 포프(Pope)는 욥 17:9과 욥 26:14에서 두 경우를 발견하였다("욥" AB, in loc). 다후드(Dahood)는 시편과 그 외의 많은 성구에서 그러한 의미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Bib 38:306-20). 그가 자신의 '시편' AB에서 제시하는 성구는 다음과 같다, 시 1:1, 시 1:6, 시 67:2, 시 77:13, 시 90:16, 시 101:2, 시 102:23, 시 119:37, 시 138:5, 시 146:9. 이들 중 어떤 성구들은 설득력이 있으나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다. 그 의미는 HCHL에서 허용되며 의심할 여지 없이 몇몇 구약성경 문맥에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참조: Wolf; BDB).
----[시16:11]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jr'ao(734, 오라흐) 길, 통로, 작은 길
오라흐(명남)는 아라흐(jr'a; , 732: 방랑하다, 여행하다)에서 유래했으며, '길, 통로 way, 작은 길 path'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60회 나오며, 삶의 길이나 죽음의 길을 묘사하는 비유적 의미로 가장 자주 사용되었다. 의미상 이 단어는 종종 동의적 대구를 이루는 히브리어 데레크와 비슷하다.
오라흐는 여행하기에 좋은 구획된 행로인 '길'(창 49:17), '대로' highway(삿 5:6)를 의미한다. 해가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에 비유되는 곳에서(시 19:5) 오라흐는 대로나 뱀이 다니는 원시적인 소로라기 보다는 경주로를 나타낸다. 자신의 길을 곧게 행하는 자는 손짓으로 부르는 창녀에게로 돌이키지 않고 곧장 자기 길을 가는 자이다(잠 9:15). 따라서 여기서의 이 단어는 사람이 작은 단위로 생각되는 그의 출발점과 도착점 사이를 거의 한걸음씩 걸어가는 '행로'을 나타낸다.
오라흐는 해로(시 8:8), 또는 사람이 밟고 다니는 길로서의 땅 자체(사 41:3, 욥 30:12)를 의미하는 것 같다.
오라흐는 개인 또는 집단의 전형적인 반복적 생활사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단어가 맨처음으로 나오는 창 18:11에서는 '여인의 월경', 욥 16:22은 "수년이 지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혹은 죽음)을 언급한다.
한편 다른 구절들은 삶의 활동(욥 34:11, 문자적으로, "행위") 혹은 생활 방식에 대해 말한다. 잠 15:10에서 "도[정해진 생활 양식]를 배반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요", 잠 5:6에서 "그는 생명의 평탄한[생명에 의하여 그 특질을 나타내는] 길을 찾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고 언급한다. 따라서 오라흐는 때때로 행동의 타당한 길 또는 정해진 영역 내에서의 진행-공평의 도(사 40:14)를 묘사한다.
명사 오레흐는 3회 나오며 '방랑하는 무리' 혹은 '대상'(caravan, 창 37:25)을 의미한다.
참고-죄와 죽음의 길과 순종과 생명의 길은 서로 대조된다. 이것들은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선택권을 다 없애 버린다.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선택하지만, 자기 자신의 결과를 선택하지는 못한다. 생명의 길(시 16:11, 잠 2:19, 잠 5:6, 잠 10:17, 잠 15:24)은 성실의 길(시 27:11), 정직한 길(잠 2:13), 공평의 길(잠 2:8, 잠 17:23, 사 26:8, 잠 40:14), 의의 길(잠 8:20)과 일치한다. 반대로, 우리는 악인의 길을 내어버려야 한다(시 119:101). 이 길은 거짓된 길이기 때문이다(시 119:104, 시 119:128). 진리와 생명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곧 하나님 자신의 길을 따른다는 것이다(시 25:4, 시 25:10, 시 44:18, 시 119:115, 여기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의 율법의 동의어로 나온다, 사 2:3).
사람이 선택한 길은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 여기에는 돌아올 수 없는 '길'과 같은 것도 있다(욥 16:22). 빌닷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사람의 '운명/길'에 대해 언급한다(욥 8:13). 흥미있게도, 70인역본은 이 구절에서 오라흐를 타 에스카타(끝 end)로 번역한다. 잠 1:19은 "이를 탐하는 자의 길[끝]은 다 이러하여", 즉 악행의 결과는 그 행동에 본래부터 내재해 있는 것이지, 형벌로서 첨가된 것이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이런식으로 성경은 범죄자의 길(데레크)이 곤고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두 길, 두 문, 그리고 두 목적지를 대조시킬 때(마 7:13-14), 그는 기본적으로 히브리 지혜 문학에서 가르친 오라흐와 데레크의 개념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언급하신 것은 예수님이 생명에 관한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해답이 아니다. 해답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이것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같다. 그는 해답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우리가 이길로 나아가고난 후에라야,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이 생명에 관한 진리이심을 발견하게 된다. 지혜 문학도 옳은 길, 생명의 길,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로 나아가도록 우리에게 요구한다(J. P. Lewis).
(참조: BDB; NEDOT;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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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j'(2416, 하이) 살아있는, 생존하여 있는
하이(형용사)는 하야(hy:j; , 2421: 살다)에서 유래했으며, '살아있는, 생존하여 있는 living, alive'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00회 나온다.
이 형용사는 종종 하나님에 대한 수식 형용사로 사용되고 있으며(수 3:10, 호 2:1, 시 42:3, 등), 또한 죽었거나 말라버린 것에 대조되는 사람, 동물, 채소에 대해서도 사용되고 있다. 복수어형은 흐르는 물 혹은 신선한 물을 묘사하고 있다(창 26:19, 레 14:5, 레 14:6, 민 19:17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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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whv(2222, 조에) 생명 life....=참생명 하나님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조에(Homer 이래)는 '생명(life)'을 의미한다.
(a)  조에는 헬라에서 유기적 존재들, 동물, 사람, 식물의 물리적 생명력을 의미한다. 생명은 물건이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을 특징 지우는 생명성(vitality)이다.
각 개개인 뿐만 아니라 전 우주까지도 살아있는 유기체, 또는 영혼을 갖고 있는 세계로 생각되었다.
(b)  헬라인들은 세 번째의 성분, 곧 이성 Reason, 정신 mind, 이해력 understanding(nou'", 3563)이 인간의 생명을 특징 지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마(sw'ma, 4983)와 또한 다소간 프쉬케(yuchv, 5590)가 자연적 생명을 구성하는 반면 누스(nou'", 3563)는 외부로부터 인간 생명으로 들어가 이 생명을 자연적 생명, 즉 동물의 생명 이상으로 향상시키고 여러 가지 양자택일을 할 수 있는 하나의 존재의 유형을 생산해내는 신적 요소인 것이다.
(c)  만약 신의 조에가 누스와 관련되어 있다면, 이것은 조에가 자연의 생명력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초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최고 가능성은 또한 누스이며, 누스는 육체와 분리될 수는 없지만, 육체와 구별함으로써만이 그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 따라서, 참된 인간의 조에는 사람이 그것을 통해 몸과 혼을 결합함으로 조온이 되는 조에가 아니다. 프쉬케는 물질에 있어서 생명력의 원리이지만, 이것은 또한 물질과 대조되는 것인 인간의 자아(selfhood)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조에는 자연의 현상으로서의 생명이지만 또한 특별히 인간의 생명이기도 하다. 이 인간의 생명의 가능성은 유기적인 본질에서 성취되지 않으며 이것은 종(species)의 영속화를 넘어선 의미를 지닌다. 인간의 생명은 그 자체의 운명을 가지며, 행복과 불행을 알고, 그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명은 그것에 고유한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2. 70인역본의 용법
조에는 70인역본에서 약 260회 나오며, 거의 대부분 히브리어 하이('살아있는' 것)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조에는 무엇보다도 생명의 길이나 질병, 죽음과 구별되는 생명력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때리시고 치료하시는 생명과 역사의 주인이시다. 후에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참조: 마카베오사서 18:18). 고대의 비문들은 지상의 생명에 대해 언급을 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조에는 신약성경에서 13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조에는 자연적 생명을 나타낸다.
① 조에는 자연적 죽음과 구별되는 자연적 생명을 가리킨다.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고전 3: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② 눅 16:25에서 '살아있는 동안'을 묘사한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눅 12:15; 행 8:33에서도 마찬가지이다.
③ 고전 15:19에서 이 세상에서 '삶을' 표현한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딤전 4:8에서도 같은 의미를 가지며, "내 생"과 대조되어 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④ 약 4:14에서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생명을 묘사한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⑤ 히 7:3에서 '생'의 끝을 묘사한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⑥ 계 11:11에서 '생'기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참조: 창 6:17; 창7:15).
(b)  조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초자연적 생명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이 생명은 신자들이 미래에 받을 것이지만, 이 땅에서 지금 향유하는 것이다.
① 요일 5:20에서 하나님은 참 생명, 곧 영생이시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요 5:26a에서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요 12:50에 의하면 하나님의 명령은 영생이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② 요 5:26b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셨다.
요 1:14에서 "그 안에 생명이 있다". 요일 5:11에서도 이를 증거한다. 그는 "생명의 주"이시며(행 3:15), "생명의 말씀"이시다(요 1:1). "이 생명이 인간에게 나타내시게 된 것이다"(요일 1:2). 그는 "생명의 떡"이다(요 6:35; 요 6:48; 요 6:33). 그는 단순히 "생명"이란 말로 표현되었다(요 11:25; 요 14:16). 그는 "우리의 생명"이시다(골 3:4). 그 안에 있는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며(요 1:4b) 따라서 사람들은 그를 따름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빛을 얻는다(요 8:12).
(c)  조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얻는 신자들의 생명을 나타낸다.
① 이 생명은 은혜와 거룩의 생명이다.
롬 6:4에서 우리는 "세례(침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된다.
엡 4:18에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들을 묘사한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② 이 생명은 구원과 영광의 생명이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며(딤후 1:1), 그의 말씀과 복음의 전도로 말미암아 효력을 발한다, 요 6:68; 요 6:63; 행 5:20; 빌 2:16; 딤후 1:10; 고후 4:12. 사도들은 복음의 전도로, 사람들을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게" 한다(고후 2:16).
③ 성령은 생명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신다, 롬 8:2; 롬 8:6; 롬 8:10; 요 6:63.
④ 그리스도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계명(엔톨레)도 생명에 이르게 한다, 롬 7:10.
⑤ 이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로 간주되었다, 딤후 1:1에서 "썩지 아니할 것"과 함께, 벧후 1:3에서 "경건"과 함께, 롬 8:6에서 "평안"과 함께 나타난다.
⑥ 진실로 생명의 에클레시아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생명, 곧 은혜의 선물의 상속자들이다, 벧전 3:7.
⑦ 이 생명은 그들이 육체로 거하는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 있다, 골 3:3.
⑧ 그의 생명을 상실 당한 자는 누구든지 영광의 생명에서 제외된다. 행 11:18; 행 13:46; 행 13:48.
⑨ 특별히 요한복음에 따르면, 하나님의 생명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자는 생명(요일 5:12), 곧 영생을(요 6:40; 요 6:47) 소유하였고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요 5:24; 요일 3:14).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영생은 사랑과(참조: 요 15:17), 기쁨(참조: 요 16:20-요 16:24) 안에서 그 모습을 나타낸다. 요일 3:14에 따르면 형제간의 사랑은 참 생명의 척도가 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에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비록 요한의 생명에 대한 견해에 많은 점들이 영지주의자들의 관점과 일치한다고 할지라도 요한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지주의자들은 영생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거의 도달하기 어려운 세계로 옮겨 버린 반면에 요한은 영생을 바로 현재로 가져오며 또한 그리스도의 말씀과 계명과 인격에 굳게 닻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요 17:3). 이 영생을 지금 이곳에서 소유하는 신자들은, 사망과 심판이 더 이상 생각할 요소들이 아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요 5:24; 요 11:25). 왜냐하면 영생은 그 안에 영원의 씨앗들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4:14; 요 6:27; 요 12:25).
(d)  조에는 종말의 복된 시대에서 누릴 생명에 대해 사용되었다: 요 3:15.
① 내세의 영생, 마 10:30; 눅 18:30; 막 19:29.
② 영생에 대한 질문, 막 10:17; 눅 18:18; 눅 10:25; 마 19:16이하.
③ 마지막 심판의 결과, 마 25:46; 롬 2:7; 마 7:14; 마 18:8이하; 막 9:43, 막 9:45; 롬 5:17이하, 롬 5:21; 롬 6:22이하.
④ 죽은 상태에서 나온 자들의 생명, 롬 11:15; 갈 6:8; 딤전 1:16; 딤전 6:12, 딤전 6:19; 벧전 3:10.
⑤ 이 생명은 참 생명으로 불리워진다, 딤전 6:19; 딛 1:2; 딛 3:7.
⑥ 생명 책, 빌 4:3; 계 3:5; 계 13:8; 계 17:8; 계 20:12, 계 20:15; 계 21:27.
⑦ 생명의 나무, 계 2:7; 계 22:2; 계 22:14; 계 22:19.
⑧ 생명의 면류관, 계 2:10.
⑨ 생명수, 계 21:6; 계 22:1; 계 22:17; 계 7:17.
(참조: Walter Bauer; H.G.Link; R.Bult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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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이 이루어지다......임마누엘]]  
[마2:13-23] ((애굽으로 피하다))*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애굽에서 이스라엘 땅으로)) *19.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20.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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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6 : 25-28] *25.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26.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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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20: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말씀 그대로 이루어짐을 믿는 자에게 임하는 복.....임마누엘]]========
.......혹시 당할 수 있는 모든 비하/비천/비난/손해/손상/죽음까지도 감수하고 (그 각오 + 참음과 견딤...이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고난에 동참함으로 여기신다!!) 주님의 모든 말씀(기록된 말씀 + 즉각적인 말씀)을 바르게 믿는 것은 믿는 이 자신과 주님, 그리스도의 교회, 더 나아가 지금과 다가오는 온세상 모두에게 지복직관, 지고지선의 영생진복인 바  바로 그것을 열어주는 능력과 효력으로 나타나기에...그대로 반드시 이루심을 믿고 [살아있고 발휘되는 살아 생동하는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 신실함 그 자체, 참믿음의 창시자이신) 그리스도의 바로 그 믿음으로 행하기,.. 영접하여  그 말씀 안으로 믿어 들어가 주님을 기대-앙망하며 그 말씀안에 머무르며 마침내 그 영광 누림].. "주님 뜻하신 말씀 그대로 주의 종인 내게 그대로 이루소서라고 의지적 결단의 순복으로 나아갈 때 향후 그 모든 상황의 단계마다 하나님께서 친히 교통하며 구체적으로 행할 바 지시하심!!.....생생한 누림과 증거  주심
[요11: 40]*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눅1:45] *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눅2:37, 38]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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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치유자, 임마누엘 주 JC, 주 바라기]]....주를 아는가/자녀인가?....누가 주와 같으랴!!.....여호와,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 여호와 라파[치료하는 광선 JC].....주를 아는가...하나님의 사랑[치유]을 사모하는자/내 주 같은 분 없네/주님의 뜻을 이루소서/눈을 들어 영광의 왕을 보라/내눈여소서/주와같이길가는것.....요1장...마4:4...롬5장, 시23편, 시131편..체휼하시는 구주JC
##그 어떤종류의 질병(팬데믹-에피데믹-개인의 질병이라도)-전쟁/재앙(그 어떤 크기-규모의 손상이라도)-기근이라도.... 임마누엘 하나님은 완전한 치유 그 자체이심.....JJ-Island-an apt.배경((파견된 사람들.의 거처-병원...치명적 방사선 노출로 전대미문의 집단적 선택적 hypothyr.발생....잠시 함께 있게 됨....전적인 무력/소망상실-절망적 상황의 사람들//심기능약화 동반....누군가 1페이지로 정리된 말씀 요청--찬양 요청....주만 바라볼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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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말 4:2)
신학자 파울 틸리히는 현대인들의 마음속에는 세 가지 회색지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공허감이 있다고 합니다. 속이 텅 빈 허전한 마음입니다. 여기서 우울증이 생깁니다. 둘째는 죄책감입니다. 평안이 사라지고 두려움과 쫓기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양심이 아픔을 느끼는 상태입니다. 셋째는 공포감입니다. 무서움과 두려움과 불안한 마음상태입니다. 여기서 정신질환이 생기기도 합니다.
또 나폴레옹 힐 박사는 이러한 마음의 회색지대 원인을 7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경제적 빈곤 문제입니다. 둘째는 치료되기 어려운 난치병을 앓을 때입니다. 셋째는 목표가 실패로 돌아갈 때입니다. 즉 사업 실패와 학교 진학 문제, 진급과 인사 문제들입니다. 넷째는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할 때입니다. 다섯째는 부모님을 모시는 갈등 문제입니다. 여섯째는 자녀 문제입니다. 일곱 번째는 기타 여러 가지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물론, 이상과 같은 문제들이 원인이 되는 경우도 있겠으나 근본원인은 따로 있습니다....영적 존재, 곧 하나님의 영으로 살며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에너지를 받아 호흡하는 존재로 지음받은 자이기에 성경에서 그 근원을 살펴 찾아 본다면 다름아닌 절대유일무이한 영혼의 생명양식, 곧 하나님의 말씀 JC의 결핍증후군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기]를 잊었거나 떠난 현대인들마다 저도 모르게 생명결핍현상, 곧 정신적 강박관념으로 인한 마음의 병으로 생활 속에서 각종 재앙과 사고를 유발하게 됩니다.
세계적으로 해마다 100만명 가까운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으며 이는 40초당 1명꼴인 셈이라고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자살방지협회(IASP)가 최근 밝혔습니다. 육체의 병은 수술하고 치료할 수 있는 가망성이 그나마 있지만 영적이고 정신적인 병은 현대의학으로 치료가 절대불가입니다.
어떻게 하면 치유될 수 있을까요? 마음의 눈들어 하나님이름 부르며 앙망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말 4:2) ........경외라는 말은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함, 곧 무한완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사랑하며 기뻐 섬기되 그분께 합당하게!! 모든 죄를 소멸하는 불이신 그분의 거룩한 임재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을 살펴 회개하고 JC이름의지하여 나아가 동행함의 신앙으로 하나님임재을 의식하면서 사는 신앙생활 태도와 방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에게는 첫째 의로운 해가 떠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정신적 어둠의 세력이 물러가고 치유되며 (육체적인 병의 치유는 말할 나위가 없지요.....참된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의 치유의 극치의 완전은 심신의 온전을 넘어서서 영까지 완전한 회복, 완전한 지복직관의 환희, 지고지선의 영생진복누림 곧  주와 연합한 하나됨안으로 믿어 들어가 상호거함안에서 JC를 사는 것!!....이세상에서나 천국에서조차) 즉,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받게 됩니다. 둘째는 외양간 송아지처럼 기쁨과 안정과 평안을 갖게 됩니다. (세째, 하나님의 입, 곧 그분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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