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12.30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요2.가나혼인잔치..공중영접-혼인잔치-7년환난-재림-아마겟돈-천년왕국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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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가나의 혼인잔치]]...JC재림-어린양의 혼인잔치의 모델..
....[약혼식]성문앞에 장로들, 마을사람들, 신랑측 사람들(친척들, 친구들) 신랑, 신부, 신부측 사람들(친척들, 친구들. 들러리들)이 함께 모인가운데 신랑의 아버지가 (반드시 ~하게 구체적으로 시행하겠노라고 확정하는) 혼인약속의 서류를 낭독하고 신랑은 포도주를 특별한 잔에 담아서 신부에게 건네는데,( 신부는 약혼조건이나 신랑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 잔 받기를 거절하면 그 혼약은 취소됨), 그 포도주잔을 마심으로써 혼약은 이루어지고 (결혼준비에 쓰일)신부의 지참금은 지급되며, 이제 신랑측은 모두 함께 당당히 아버지집으로 돌아가게 됨.[[그리스도의 승귀]]
....혼인식날짜는 전적으로 신랑의 아버지에게 일임하는데((약혼식후 대개 1년이내에 그 언제라도)) 신랑의 아버지가 신부를 데려오는 바로 그날밤에 피로연을 베풂으로서 이루어지게 됨...(대개 밤중에 갑자기 결혼피로연을 시행함).
....[신랑과 신부의 결혼준비]이제, 신랑은 아버지 집의 공간을 넓혀서 부부(또한 자녀들이) 함께 거할 공간을 스스로 완비한 채 언제나 심신을 정결하게 가꾸고 스탠바이 상태로 지내게 됨...한편, 신부는 들러리들(항상 넉넉한 등기름과 등을 예비한 슬기로운 7처녀 모델)과 함께 자기집에서 웨딩예복을 마련한 후 매일밤마다 그 옷을 마련해 두고 항상 청결하게 심신을 유지한 채 그옷을 입고 자도록 예비함 ((더불어 신부 및 늘 함께 머무는 들러리는 항상 등과 함께 매일 밤 등불을 밝히는데 쓰일 기름을 각자 넉넉히 준비해 두어야 신랑을 알아 볼 수 있고록 불을 밝힐 수 있게 되며 신부와 함께 혼인피로연이 베풀어지는 신랑의 아버지집까지 동행하며 결혼피로연의 누림까지도 참여할 수 있음))
....[혼인식:: 신랑의 아버지가 돌연히 가장 적절한 시점이라고 깨닫는 그 시점에 신랑을 갑자기 깨워서 ((자, 이제 네신부를 데려오라))고 하면 신랑은 뿔나팔을 불면서 당당하게, ((마음에 참여하리라고 미리 작정함으로써))이미 초청받은 인근 이웃들과 마을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제 베풀어 질 혼인잔치에 깨어나 참석하라}}고 일깨우고 신부를 맞으러 나아감.....나팔소리를 들은 신부는 들러리와 함께 이미 모든 것 준비된 채로 자기처소에서 나와 집 문밖에 서 있다가  신랑을 맞고((신랑친구들이 마련한 가마에 앉혀진 채로)) 신랑과 함께 마을거리들을 지나 신랑의 아버지 집 문앞까지 도달한 후 내려서 문안으로 뿔나팔소리와 함께 들어가고 모든 동행자들과 뿔나팔소리를 듣고 깨어난 사람들도 함께 아버지집에 들어간 후((JC재림-신부의 공중영접 ==>어린양의 혼인잔치 개시 조건 완비)) 이윽고 곧 문이 닫히게 되며 향후 7일간((이른 바 그 기간동안 지상에서의 7년 대환난 경과??))은 문을 여는 일이 결코 없게 됨....그 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은 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됨...==>심판주로서 재림, 아마겟돈전쟁-->천년왕국 -->곡과 마곡의 전쟁 -->새하늘과 새땅


개역개정]요2장  가나의 혼례

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12.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여러 날 계시지는 아니하시니라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다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예수는 사람의 마음속을 아신다

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24.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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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새번역]요2장 가나의 혼인 잔치

1.  사흘째 되는 날에, 갈릴리 가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다. 예수의 어머니가 거기에 계셨고,

2.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그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3.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니,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말하기를 "포도주가 떨어졌다" 하였다.

4.  예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그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나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5.  그 어머니가 일꾼들에게 이르기를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였다.

6.  그런데 유대 사람의 정결 예법을 따라, 거기에는 돌로 만든 물항아리 여섯이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물 두세 동이들이 항아리였다.

7.  예수께서 일꾼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항아리에 물을 채워라." 그래서 그들은 항아리마다 물을 가득 채웠다.

8.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제는 떠서, 잔치를 맡은 이에게 가져다 주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그대로 하였다.

9.  잔치를 맡은 이는,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으나, 물을 떠온 일꾼들은 알았다. 그래서 잔치를 맡은 이는 신랑을 불러서

10.  그에게 말하기를 "누구든지 좋은 포도주를 먼저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뒤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데, 그대는 이렇게 좋은 포도주를 지금까지 남겨 두었구려!" 하였다.

11.  예수께서 이 첫 번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은 그를 믿었다.

12.  ○이 일이 있은 뒤에, 예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에 내려가서, 거기에서 며칠 동안 머물러 계셨다.

예수께서 성전을 정결하게 하시다

13.  ○유대 사람의 유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는데,

14.  성전 뜰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환전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을 둘러 엎으셨다.

16.  비둘기 파는 사람에게는 "이것을 거둬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7.  제자들은 '주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하고 기록된 성경 말씀을 기억하였다.

18.  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묻기를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 주겠습니까?" 하니,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하였다.

20.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짓는 데 마흔여섯 해나 걸렸는데, 이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습니까?"

21.  그러나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그가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서, 성경 말씀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다.

예수는 모든 사람을 아신다

23.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에, 많은 사람이 예수께서 나타내 보이신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다.

24.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의지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사람을 다 알고 계셨으므로,

25.  사람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증언이 필요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속마음까지 다 알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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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B]요2장

1.  And on the third day there was a wedding in Cana of Galilee, and the mother of Jesus was there;

2.  and Jesus also was invited, and His disciples, to the wedding.

3.  And when the wine gave out, the mother of Jesus *said to Him, "They have no wine."

4.  And Jesus *said to her, "Woman, what do I have to do with you? My hour has not yet come."

5.  His mother *said to the servants, "Whatever He says to you, do it."

6.  Now there were six stone waterpots set there for the Jewish custom of purification, containing twenty or thirty gallons each.

7.  Jesus *said to them, "Fill the waterpots with water." And they filled them up to the brim.

8.  And He *said to them, "Draw [some] out now, and take it to the headwaiter." And they took it [to him.]

9.  And when the headwaiter tasted the water which had become wine, and did not know where it came from (but the servants who had drawn the water knew), the headwaiter *called the bridegroom,

10.  and *said to him, "Every man serves the good wine first, and when [ men] have drunk freely, [then] that which is poorer; you have kept the good wine until now."

11.  This beginning of [His] signs Jesus did in Cana of Galilee, and manifested His glory, and His disciples believed in Him.

12.  After this He went down to Capernaum, He and His mother, and [His] brothers, and His disciples; and there they stayed a few days.

13.  And the Passover of the Jews was at hand, and Jesus went up to Jerusalem.

14.  And He found in the temple those who were selling oxen and sheep and doves, and the moneychangers seated.

15.  And He made a scourge of cords, and drove [them] all out of the temple, with the sheep and the oxen; and He poured out the coins of the moneychangers, and overturned their tables;

16.  and to those who were selling the doves He said, "Take these things away; stop making My Father's house a house of merchandise."

17.  His disciples remembered that it was written, "ZEAL FOR THY HOUSE WILL CONSUME ME."

18.  The Jews therefore answered and said to Him, "What sign do You show to us, seeing that You do these things?"

19.  Jesus answered and said to them, "Destroy this temple, and in three days I will raise it up."

20.  The Jews therefore said, "It took forty-six years to build this temple, and will You raise it up in three days?"

21.  But He was speaking of the temple of His body.

22.  When therefore He was raised from the dead, His disciples remembered that He said this; and they believed the Scripture, and the word which Jesus had spoken.

23.  Now when He was in Jerusalem at the Passover, during the feast, many believed in His name, beholding His signs which He was doing.

24.  But Jesus, on His part, was not entrusting Himself to them, for He knew all men,

25.  and because He did not need anyone to bear witness concerning man for He Himself knew what was in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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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장 (개요)

전 장 마지막에서는 예수가 부른 첫 제자들, 즉 안드레,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의 기사를 보았다. 이들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첫 열매들이다(계 14:4). 이제 본 장(章)에서는 다음을 살필 수 있다.

Ⅰ. 예수가 갈릴리의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첫 표적의 기사(1,2). 그리고 가버나움에 나타나심(12).

Ⅱ. 그의 공생애 시작 이후 예루살렘에 머무르신 첫 유월절 기사.

     .....파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을 성전 밖으로 내어쫓으심(13-17). 그와 다툰 자들에게 주신 표적(18-25).

그러나 예수는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확신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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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기적(요 2:1-11)...갈릴리 가나, 혼인잔치...물로 포도주 만드심

우리는 여기서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그리스도가 물을 기적적으로 포도주로 변화시킨 기사를 본다. 그를 믿고, 그를 따를 만큼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있을 때는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 "당신은 무슨 표적을 보여 주겠습니까?" 하는 질문을 하는 자들이 생기기까지 많은 것을 행하지 않은 것 같다. 그는 전에도 기적을 나타낼 수 있었으며, 또한 기적을 그의 일상적인 일로 삼아 자기 친구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기의 교훈을 확증해 주는 거룩하고 귀중한 징표로써의 기적은, 그가 말씀을 가르치기를 선포하면서부터 시작했다.

Ⅰ. 이 기적의 필요성을 보자.

...마이모니드즈( Miamonides)는 모세가 "필요한 경우는" 광야에서 기적을 행했다는 것이 모세의 영예였다고 했다. 즉 그는 무리들이 음식을 요구할 때, 만나를 제공했다. 그리스도도 그렇게 하셨다. 다음을 살펴보자.

1. "때." 예수가 갈릴리에 들어 간 "제3일"이다.

복음서 기자는 그날 그날의 사건을 일지에 기록했다. 어떤 특별한 일이나 말씀이 없이 지낸 날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기의 종들보다 더 뜻 있는 나날을 지내신다. 그러므로 밤에 로마 황제처럼 "또 하루를 잃었구나!"하는 탄식을 할 필요가 없었다.

2. "장소." 그곳은 아셀 지파가 살고 있는 (삿 19:28) 갈릴리의 가나이다.

... "거기서 기름진 식물이 난다"고 했다(창 49:20). 그리스도는 공개적으로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벽촌에서 기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가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고자 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5:41). 그는 오히려 "천한자들을" 높여 왔다. 소박하고 정직한 갈릴리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오만이 가득 찬 랍비들, 지도자들 그리고 귀족들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3. "혼인 잔치"가 계기가 되었다.

...아마도 혼인 당사자 중 어느 한 쪽이 친척이 되는 바(?), "예수의 모친"도 "거기"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어머니가 "청함"을 받았다는 말은 없다. 이 사실은 예수의 어머니에게는 그 지방이 고향이거나 고향과 같을만큼 친숙함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혼인 의식을 존중한 것을 보게 된다. 그는 그 의식에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처음 기적을 나타냄으로써, 그 의미를 더 진지하게 하셨다. 그 의식은 인간이 죄 짓기 이전에 축복으로 제정된 것이며, 또 그것을 통해서 그가 계속 "거룩한 자손을 찾고" 있기 때문이며, 또 의식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혼인 의식을 지나치게 성스럽게 여겨 하나의 성례식으로 발전시킨 반면 약혼식과 결혼 생활에 대해서는 어떠한 성스러움과는 관계없는 것처럼 부당하게 비하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는 "혼인 잔치"가 있었다. 그래서 그 의식을 더욱 뜻 있게 했다. 결혼식날은 흔히 잔치피로연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었고(창 29:22; 삿 14:10), 거기에 초청받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고 그 제자들이다. "예수의 어머니(이것은 가장 존경스런 그녀의 칭호이다)도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요셉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죽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예수는 "청함을 받고," 초대에 응했다. 그리고 사람들과 즐거움을 나눈다. --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친척들이 비록 지위가 낮지만, 그들을 "존경하고," "사귀라"는 교훈을 받는다.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의 태도와는 달랐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과 같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마 11:18, 19). 교제를 "거절하는" 방법보다는 "신용하는" 방법이 더 사려 깊은 생각이다.

(1) 결혼식과 청함을 받은 예수.

① "결혼식"이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청한다는 것, 즉 그의 영적인 은혜의 현현으로 혼인을 인정받고, 축복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 이 때의 결혼식은 참으로 영예로왔다. "주 안에서 혼인하는" 사람들은(고후 7:39) 주를 떠나지 아니한다.

② 결혼식에 주님을 모시려는 사람들은 기도로써 주님을 청해야 한다. -- 이때의 기도는 주님을 청하는 사자의 역할을 한다. 그러면 주님은 오실 것이다. "네가 부르라. 내가 대답하리라." 그때 주님은 오셔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킬 것이다.

(2) 제자들도 역시 초대받았다. 그 수는 그가 먼저 택하고 부른 다섯이었다. 아직까지는 다른 제자들이 추가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의 가족이었고, 함께 초대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예수의 처분에 맡겼다. 예수께서 돈은 없지만, 자기들의 좋은 친구가 되었음을 그들은 알았다. 이 점을 주의하자.

① 그리스도를 "따르려는"사람들은 그와 함께 "잔치에 참여"해야 하며, 그가 가는 곳에 동행해야 한다(12:26).

-- "내가 어느 곳에 처하든지, 거기에 내 종들도 있으리라."

②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입증되어진다.

-- "우리의 선행이 그에게까지는 못 미치나 성도에게는 미친다."

칼빈은 그 잔치의 주인을 상당히 너그러운 사람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그 주인이 비록 초라하게 차린 잔치이지만, 그가 처음 생각했던 사람 외에 낯선 사람 4,5명을 더 청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 주인은 그들이 예수를 따르는 사람임을 알고 청했는데, 이것은 지위가 높은 사람들보다는 낮고 평범한 사람들이 보다 자유스럽고, 활발하고, 그러면서도 참다운 우애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Ⅱ. 기적의 내용을 보자.

1. "포도주가 모자랐다"(3절).

(1) 포도주는 잔치에 소용되는 것으로써 많이 준비해 두었지만 모자랐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우리가 풍족하다고 여겨질 때에도 가끔은 궁핍을 겪는다. 항상 쓰면 우리가 미처 알기도 전에 모자라게 될 것이다.

(2) 미리 치밀하게 잘 준비했다고 여겨지는 "혼인 잔치" 석상에조차도 부족된 점이 있었다. ..."결혼해서," "세상 것을 염려하며" 사는 자들은 "육체의 어려움"과 실망되는 점들이 있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3) (아마도..??)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이 부족의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들이 준비하고 기대했던 이상의 손님들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로 인해서 부족하게 된 자는 손해보지 않게 될 것이다.

2.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마음 쓰며 사정을 살피던) "예수의 모친"은 도와 달라고 예수에게 간청했다. 이 때에 예수와 그의 모친과의 대화가 있다(3-5절).

(1) 그녀는 자기들이 처한 곤경을 예수에게 알려왔다. "그녀는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예수에게 말했다"(3절).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그의 모친이 예수에게서 어떠한 기적적인 도움(예수는 이제까지 표적을 행사한 적이 없었다)을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그 여인은 단지, 손님들에게 어떤 "적절한" 양해를 예수가 해 줄 것을 바랐다고 본다. (그것은 신랑의 체면을 살리기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 여겼다.) 혹은 칼빈이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가 어떤 성스러운 방법으로 포도주의 부족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을 그의 모친이 미리 알고 청했다고도 본다. 그러나 아마 거의 틀림없이 예수의 모친은 하나의 기적을 기대했으리라. 왜냐하면 그녀는 예수가 모세처럼 시의적절하게 이스라엘의 결핍을 채워 주는 위대한 예언자로 출현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록 이 기적이 예수의 첫 공적 기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아마도 그리스도는 때때로 자기의 궁핍한 가정 생활을 돕는 일을 했을 수도 있다.) 타인이 보기에는 어쩌면 신랑측에서 포도주를 더 가져 오도록 사람을 보낼 수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예수의 모친은 생수의 근원인 예수에게로 나아왔다.

① 우리는 우리 친구들의 궁핍이나 부족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하다. --단지 "우리 자신의 것에만 집착해서는 " 안 된다.

② 우리의 소유와 우리 친구들의 곤궁에 대하여는 기도로써 그리스도에게 간청하는 것이 우리의 지혜요 의무이다.

③ 그리스도에게 고할 때, 우리는 그에게 명령할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우리의 처지를 겸손하게 내놓음으로써 우리 자신을 그에게 완전히 맡겨야 한다.

(2) 자기 모친에 대한 예수의 견책으로 읽어야 마땅한 표현이 나와 있다. 아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어떤 잘못이 그녀에게 있었기 때문이리라.

견책의 내용을 보자.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지만 그만큼 또 견책도 하고 응징하기도 한다. 그는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여자여(여인이여)"라 [그래도 부드럽게!!]부르고 있다. ...우리가 주제넘는다고 생각될 때에는, 자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막론하고, 연약하고 어리석고 그리고 부패한 자인 것을 자각하고 어떻게 구하여야 할 지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 ‘티 에모이 카이 소이’라는 질문은 "나와 당신에게있어서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로 읽을 수도 있는데, 보통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라고 해석되어 왔다(삿 11:12; 삼하 15:10; 에 4:3; 마 8:29 에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질문은 부모를 공경하라(존경과 순종을 나타내야 한다)는 제5계명과는 전혀 무관한 일종의 의로운 분노감정을 나타내고 있다(눅 2:51). 왜냐하면, 레위가 "자기 아버지에게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고 했을" 때도 오히려 칭찬했기 때문이다(신 33:9). 이제 이 질문에서 의도하는 것을 보자.

첫째, 예수의 신성에 속하는 행위 문제에 참견하려는 모친을 견책(질책??)한 것이리라.. -- 그것은 어머니에 의존하지 않으며, 그 문제(신성에 속한 것을 육적 관점에서 참견함)에 대해서는 그녀가 모친이 아니라는 뜻이다. ... 비록 그가 인간으로서는 다윗의 자손이고 여인의 아들이지만, 신으로서는 다윗의 주이며, 여인의 주이며, 이 사실을 자기의 모친에게 알려 주고 싶었던 것이다. ....가장 훌륭한 출세를 했더라도 그것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처지를 잊게 하거나 은혜를 경멸하게 해서는 안 된다.

둘째, 그것은 여기에 참석한 그의 다른 친척들을 향한 교훈을 주는 것이다. -- 예수와의 혈연관계를 이용하여 기적을 기대하거나 특혜를 바라서는 안 된다 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얼굴을 대면한 듯이 알 수는" 없다..

세째, (이 장면 부분을 잘못 해석함으로써)후세의 로마 카톨릭 교회는 동정녀 마리아를 지나치게 숭배함의 우상 숭배를 범하게 되었다. 본문은 실상은 결코 그렇게 해석함으로써 우상숭배를 허용할 수는 없음, 곧 바로 그 우상숭배를 유도한 오류에 대해 강력한 반증을 제기하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마리아를 "하늘의 여왕," "세상의 구원," 자기들의 "중재자," 또 "생명"과 "소망"이라고 부른다. 더욱이 그녀의 공적과 중재를 의존할 뿐만 아니라, 자기들에게 복을 베풀어 달라고 "그녀의 아들에게 부탁하도록" 그녀에게 간구를 드린다. Monstrate esse mathem-즉 (예수의 모친이시여) 구원주에게 당신의 모성적 부탁을 올리소서, .... 예수는 기적을 나타내실 때, 심지어는 그가 모욕을 당하실 때에도,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는가? 이 말은 엄청난 우상 즉 무서운 신성 모독을 "예방하며," 따라서 그런 숭배를 더욱 정죄하는 말이라고 하겠다.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우리의 변론자이지만 우리 주의 어머니는 아들과 같이 우리의 변론자가 될 수 없다.

② 이런 책망의 이유를 보자.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했나이다." 그가 행하는 모든 일에는 그의 때, 즉 적합하고 가장 알맞은 시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본다.

첫째, "기적을 행할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못했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때가 이르기 전에라도, 제자들의 믿음과 유익을 위해) 기적을 나타내셨는데, 이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기 제자들의 믿음을 확고하게 해 줄 필요를 예견하였기 때문이다(11절). 여기에 그의 모든 기적의 목적이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그의 때가 이르렀을 때 그가 행한 많은 기적들의 전조였다.

둘째, "공개적으로 기적을 드러낼 수 있는  나의 때가 아직도 이르지 않았나이다. 그러므로 공공연하게 기적에 대해서 말해서는 안됩니다."

세째, "아버지가 허락하여, 예언자로서 행동을 나타내기 시작할 때가 아직 안 왔나이다." 그레고리 니센(Gregory Nyssem)은 그렇게 본다.

네째, "이러한 기적을 나타낼 수 있는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나이다." ..

.... 포도주가 "모자라기 시작하자" 예수의 모친이 저들을 도와 달라고 그에게 왔는데(3절 참고), 그의 때란 포도주가 "완전히 소비"되어, 전혀 없을 때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직도 남아 있는 포도주에 물을 섞었다는 의심을 없앨 뿐만 아니라, 인간의 철저한 궁핍으로 인해 궁지에 몰려 무력/연약함의 극치에 달할  바로 그때가 하나님이 인간을 돕고 구원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라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최악의 궁핍에 이르러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비로소 그의 때가 이르게 된다. 참된 용자, 용기 있는 사람이란 비록 그의 때가 아직도 이르지 않았지만 반드시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자비의 지연을 기도의 거절로 해석해서는 결코 안 된다.

(3) 이러한 예수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러한 곤궁에서 도와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예수의 모친은 한층 더 용기를 내어,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했다(5절).

① 모친은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 꾸중을 들었다. 결코 변명하지 않았으며 낙심하지도 않았다. -- 물론, 그리스도에게 책망 받지 않는 게 최선이고, 꾸중을 들어도 온순해지고, 침착해지며, 그 책망을 친절한 행위로 여기는 것이 차선이다(시 141:5 참조).

② 모친은 자기 소망을 그리스도의 자비에 맡겼고, 그리스도 역시 모친의 소망을 채워 주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러 나아갈 때, 우리에게 용기를 꺾는 두 가지 일이 있다.

첫째,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이다. -- "기도를 해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불안전한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둘째, "우리 주의 분노와 책망"에 대한 생각이다. -- 계속적인 고통과 구원의 지연, 또한 우리의 기도에 화나신 듯한 하나님의 표징 등이다.

...이 두 가지 전부가  예수의 모친에게 해당되는 경우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친은 소망을 가지고 용기를 내었기 때문에... 결국 예수는 안심되도록 하는 대답을 주었다. -- 여기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에 근거하여 하나님 영광 보기를 구하는 바) 기도는 믿음으로 열렬히 중단없이 이루어짐 볼 때까지, 심지어는 일의 진행이 우리의 기대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같이 보일 때라도, 하나님과 믿음으로 붙들어서 끝까지 씨름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 우리는 희망 할 수 없는 중에서도 희망을 얻어야 한다(롬 4:18).

③ 모친은 즉시 하인들더러 그를 주시하도록 일렀다. 하인들더러 그녀 자신을 주시하라고 하지 않았다. 모친은 이제 예수에 대한 어떤 주장이나 간섭을 포기하고 있다. -- 이제, 하인들은 예수만 바라보고 있었다(시 62:5 참조).

④ 모친은 하인들에게 논쟁이나 질문도 하지 말고 그가 시키는 대로 하도록 일러두었다. -- 즉 모친은 예수에게 지시함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인들에게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그래서 채워 줄 수 있는 그의 때와 방법에 복종하도록 일러두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비록 그의 말이 부적당하다고 생각되어질지라도 괜찮다. 만약 손님들이 포도주를 청할 때, 그들에게 물을 갖다 주라고 말씀하시더라도 그렇게 하라. 혹은 다 비운 포도주병을 그들에게 부어 주라 하더라도 그렇게 하라. [그는 몇 방울의 포도주로도 많은 포도주를 만들 수 있느니라.]"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사람은 그의 명령에 철저히 복종해야 한다는 점이다. 마땅한 의무의 길에 행할 때  자비를 받게 된다. 그리스도의 방법은 어느 곳에서도 구애받지 않는다.

(4) 그리스도는 결국 기적적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셨다. 때때로 그의 말씀 이상의 기적을 행하시기는 하나 결코 말씀에 못미치는 일은 아니한다.

①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기적.

-- 물의 본질과 형태가 모두 새로운 형태로 바뀌어 포도주가 되었다. 이런 "변형"은 "기적"이다. ((그러나 카톨릭의 "화체설(化體說)" 즉 본질은 변화되나 우연적 성질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는 설은 하나의 괴물이다.)) 이리하여 그리스도는 자신이 본성적으로 하나님임을 나타내셨다. 하나님만이 땅에서 포도주를 나게 하신다(시 104:14, 15). 매년 기름진 땅에서 포도즙을 짜내는 것도 능력 있는 일이지만, 그러나 자연법칙면에서 볼 때는 이 기적만큼 놀라운 일은 못된다.

--모세가 기적을 베풀기 시작한 것은 물로 피로 만드는 때부터이다(출 4:9; 7:20). 그러나 그리스도의 표적의 시작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것이다. ... 이것은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복음 사이의 차이를 암시하고 있다. 율법의 저주는 물을 피로 되게 하는 즉 일반적인 즐거움을 고뇌와 공포로 바꾸는 것이지만, 복음의 축복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것이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믿는 사람 모두에게 삶의 즐거움을 증진시켜서 참 즐거움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그의 사명임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는 "포도주로 옷을 빤다"고 했다(창 49:11). 즉 물이 "포도주로 바뀐"것이다. 그리고 복음은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포도주를 사먹으라"(사 55:1)고 우리들을 부르고 있다.

② 기적의 여건이 거기에 어떤 속임수도 없었음을 보여준다.

첫째, 돌항아리에서 된 일이다. "돌항아리 여섯이 놓여 있었다"고 했다(6절). 이러한 물통은 의식법상의 부정을 율법적으로 점화시키기 위해 쓰여졌다. "유대인들은 손을 씻기 전에는 먹지를 않는다"(막 7:3). 그래서 그들은 씻는데 많은 물을 사용한다. 여기에 6개의 큰 물항아리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물항아리에 대한 속담이 있다. "씻는 데 물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많은 재물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이다.

-- 그리스도가 이 돌항아리를 사용함으로써 그들이 의도했던 사용 방법과는 아주 달라졌다. 즉 기적을 드러내는 포도주 항아리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같은(사 9:13). 복음의 은총을 가져 왔다, "유익하고 빈약한" 성질의 물과 같은 율법의 그림자를 가져 온 것이 아니라 한 번도 포도주 항아리로 사용되지 않은 물항아리가 있었다. "물"항아리는 향기를 보존하는 데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 이 항아리 하나에 "두세 통"(1통은1/4배렐...1배럴은 159리터,,,따라서 물항아리 1통은 대략40리터들이), 즉 2,3밧 또는 에바 들이였다. 확실치는 않지만 아주 상당한 크기이다. 많은 기름처럼(왕하 4:7), 포도주는 결혼한 새 부부에게 자비를 베풀려는 것이지 잔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을 취하게 만들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역시 자기 자신도 이렇게 풍성히 주신다. 풍성한 영광에 어울리도록 주신다. 이 항아리가 두세 통의 크기라는 것은 기록자의 말이다. 성령은 이 항아리의 크기를 아주 정확하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6:19 처럼), 우리가 아주 확실한 확신을 가지지 않은 물건들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확신을 가지지 말고 이야기하도록 할 것을 가르쳐 준다.

둘째,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하인들이 항아리의 "아구까지" 채웠다(7). 주의 종의 모세에게 하나님이 명했을 때, 바위로 가서 물을 나오게 한 것처럼, 이 하인들도 그리스도가 명하였을 때, 물을 길어 포도주를 취하였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제까지 어떤 어려움도 하나님의 능력에는 저항할 수가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명령의 말씀에 반대되어지는 것은 일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세째, 기적이 순식간에 일어났고, 그래서 더 놀랍게 되었다.

a. 하인들이 물항아리를 채우자 즉시 "떠서 갖다 주라"라 했다(8절). 그리고 그대로 행해졌다.

(a) 아무런 의식도 거치지 않고 남들이 보는 중에 했다. :::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나아만처럼, 예수가 나아와 서서 여호와의 이름이라도 부르길 바랬을 것이다(왕하 5:11). 그러나 그리스도는 말없이, 여전히 앉아 계시면서 기적을 행하셨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리스도는 "소란을 피우지 않고" 은밀히 기적을 행했다는 점이다. 때때로 그리스도는 기적을 행하시면서 말씀과 표적을 사용하신다. 그러나 그것은"둘러선 무리를 위함이었다"(11:42)

(b) 그리스도의 마음에는 어떤 주저나 불안이 없다. "떠먹어 보고 갖다 주라"고 말하지 않았다. ....비록 이 기적이 첫 기적이지만,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알았던 것처럼,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도 알았다. 그렇다고 자기의 기적을 시험해 보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이 표적은 잘 되었으며, 처음이지만, 아주 잘 되었다.

b. 우리 주 예수가 하인들에 지시한 것을 보자.

(a) "뜨라." 즉 항아리 속에 두지 말고 마실 수 있도록, 떠서 갖다 주라. 마시게 하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a] 그리스도의 일들은 모두가 "우리를 위한"것이란 점이다. 그는 어떤 사람에게 묻어두라고 재능을 주진 않았다.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지혜와 은혜를 주었는가? 당신의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는가? 그것은 "모두를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떠서 갖다 주라."

[b] 그리스도를 알려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시험해 보아야 한다. 보통의 수단을 사용해서 그에게 시중을 들어보면, 특별한 감화를 받게 될 것이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모두를 위하여 "쌓아 두신" 것이 "주를 신뢰하는 자들을 위하여 쓰인다"(시 31:19). 고로 신앙을 발휘하여 "쌓아 둔" 은혜는 "퍼다 써야" 한다.

(b) 포도주를 "연회장에게" 주라 했다.

...어떤 성서학자는 이 연회장이 주빈으로 가장 상석에 앉았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다면, 오로지 우리 주님이 주빈으로서 그 좌석을 차지했어야 한다. 그러나 아마도 상좌에는 그 자리를 "좋아하는" 사람(마 23:6), 그래서 그것을 선택한 사람(눅 14:7)이 앉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자신의 규율에 의하여 "가장 아랫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비록 그가 연회의 주빈으로 대우를 받지 못하지만, 자신을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과의 친구임을 친히 나타내고 있다. 그는 잔치를 베푼 자는 아니지만 잔치의 최고 후원자였다.

...또 어떤 성서학자는, 이 연회장이 연회의 감시자이고 운영자라고 생각한다. 즉 플루타크(plutarch)의 연회장(symposiarcha)과 같은 것으로써, 그의 직책은 매사가 충분한가, 지나치게 행동하는 사람은 없는가, 음란한 행위자나, 무질서한 자들이 없는가를 감시하는 자라는 것이다. --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연회는 통제자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연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 자체의 통제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 또 다른 성서학자는 이 "연회장"을 제사장이나 레위인 같은 "성무 담당자"(chaplain)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축복을 빌고, 감사제를 드린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연회장에게 술잔을 주었고 이 연회장은 술잔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축복을 기원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출현과 능력의 독특한 시현이 있었지만, 경건과 헌신의 일반적인 규칙과 방법을 깨거나 무시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네째, 이와 같이 기적으로 만들어진 포도주는 연회장에게 인정받은 가장 최상의 종류이었다.

....즉 과찬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그것은 그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를 그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만큼 사실이다(9,10절).

다시 떠온 술이 포도주임이 확실했다. 비록 연회장은 이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를 모르지만, 그가 맛봄으로써 포도주임을 알았다. 하인들은 이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를 알지만, 아직 맛을 보지는 못했다. 만약 맛본 자가 어디서 가져 왔는지를 알았다면, 혹은 떠다 준 자가 그 맛을 알았다면, 이 사실을 환상으로 돌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가장 좋은 포도주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리스도의 기적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조차 드러난다는 점이다. 기적의 결과는 항상 최고의 품질이다. 이 포도주는 일반 것보다 더 "강한 밀도"와 더"좋은 맛"을 지녔다. 이 연회장은 더없이 즐거운 기분으로 신랑을 바라보았다.

a. 그것은 흔히 하는 방식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좋은 포도주는 먼저 손님들의 정신이 맑고, 욕구가 신선할 때 가져다주어, 그 포도주를 칭찬하게 한다. 그리고는 손님들이 적당히 취해 그들의 정신이 몽롱하고 욕구가 침체되었을 때는 좋은 포도주가 아니라 나쁜 포도주를 내온다. 그래서 즐거운 기분이 사라지고, 곧 싫증이 나 불쾌해지며, 더 이상 즐길 수 없게 된다.

b. 이 신랑은 비축 둔 좋은 포도주로, 손님들에게 호의를 보였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이 연회장은 이 좋은 포도주를 베푼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좌석에 앉아 있는 신랑에게 감사했다. "곡식과 포도주를 내가 저에게 준 것을 저는 알지 못하였다"는 말이 있다(호 2:8).

(a) 그리스도는 손님들에게 포도주를 풍성하게 제공함으로 특별히 즐거운 시간에는 포도주를 사용하여 건전한 즐거움을 삼을 것을 허용했었지만(느 8:10) 그렇다고 그가 우리의 마음이 어느 때나 심지어 결혼 잔치에서라도 "방탕함과 술 취함"으로 지내서는 안 된다는 자신의 경고의 말씀을(눅 21:34) 무효화시킨 것도 아니요, 그 말씀을 손상시키신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에게 그들이 마시도록 좋은 포도주를 제공한 것은 그들이 절제할 수 있는가를 시험해 보시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었고 "인간의 수단에는 결핍이 따른 수밖에 없으나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풍성함이 있음을 보여 주려는 데 뜻이 있었다. 강요된 절제는 칭찬할 만한 덕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의 섭리로 우리가 충만한 기쁨을 받고 또 신의 은혜로 그것을 절제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칭찬 받을 만한 자기부정(극기)이다.

(b) 그리스도는 자기와 함께 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법의 표본을 보여 주었다. 즉 "끝까지," "좋은" 포도주를 비축해 그들의 봉사와 수고의 보답은 하늘 나라에서 받을 것이다. 장차 드러날 영광이다. 죄의 쾌락은 술잔을 보기 좋게 하지만 "마직막에는 쓰다" 그러나 신앙의 쾌락은 갈수록 더한 즐거움으로 변하게 된다.

Ⅲ. 이 이야기의 결론에서(11절) 다음을 듣게 된다.

1. 예수가 "처음으로 기적"을 나타내셨다.

...예수의 탄생과 세례에서-그러나 그 자신이 바로 가장 큰 기적이다. 많은 기적들이 있었지만. 이 기적은 그가 행하신 첫 기적이었다. 그는 성전에서 율법학자들과 논쟁할 때가 이르지 않았었다. 그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때는 아직도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었다. 그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때는 "능력을 감출 때"였다.

2. 여기서 그는 "그의 영광을 나타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냈고, 하나님의 영광이 독생자이신 예수의 영광임을 증명하였다. 그는 또한 자기 일의 성격과 목적을 나타내셨다. 그의 모든 기적들에서, 특히 이 혼인 잔치의 기적에서 자신이 오랫동안 기대하던 메시야임을 명백히 했다.

3. 그의 제자들이 [기적 나타내심의 영광을 직접 보고!!]그분이 메시야이심을 (이제 확실히 알고) 믿게 되었다....다만 말씀하신 그대로 주께 순종한 하인들은 그 기적이 참됨을 알고(경이롭게 여겼겠지만) 메시야로 믿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가 불렀던 제자들은 아직도 기적을 보지 못하고 그를 따랐는데, 이제 기적을 보고, 그들의 믿음이 더욱 굳어졌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1) 믿음이 진실하더라도 처음에는 연약하다. --가장 강한 사람도 어린아이였을 때가 있는 것처럼 아주 믿음이 돈독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2) 그리스도가 영광을 나타냄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더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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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전 정화(요 2:12-22)...성령세례 받으시고 행하신 바 3년간의 공생애사역 중, 총4번의 유월절 중 첫 유월절

Ⅰ. 그리스도는 가버나움에 잠간 동안 계셨다(12)

--- 이 가버나움은 가나에서 하루 정도 걸리는 크고 잘 알려진 도시이다. 그곳은 "예수의 본 동네"라고 했다(마 9:1). 그 이유는 그가 그 곳을 갈릴리의 사령부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거기에 잠시 머물렀다. 그 곳은 사람이 있는 집합지이므로, 그 곳을 택해서, 그의 설교와 기적의 소문이 퍼져나가게 하려 했다.

1. 그 지역으로 그와 동행한 사람들은, "그의 어머니, 그의 형제,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었다. 그리스도는 가는 곳마다

(1) 혼자가 아니라, 그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취하사 그들을 가르쳤고 그들은 그의 기적을 증거 했다.

(2) 그는 혼자 "갈 수 없었다." 그들이 그를 따르려 했다. 그들은 그의 가르침, 혹은 포도주의 맛을 좋아했기 때문이다(4:26).

...예수는 자기의 전도 사업에 있어서는 어머니를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생각한다고 알려주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그를 따랐다. 즉 그를 방해하지 않고 그에게 배우려고 따라 다녔다. 역시 혼인 잔치에 참석했던 그의 "형제"들과 친척들도 그가 행한 기적을 보고 따라 다녔으며, 또한 "그의 제자들"도 그가 가는 곳마다 따라 다녔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거의 낯선 사람으로 여길 때가 오히려 잘 안다고 생각할 때보다 그의 기적에 더 영향을 받는 것 같다.

2. 그는 거기서 "여러 날을 머무르지 않았다." 나중에도 단지 "필요한" 정도로만 친숙해지려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그는 "한" 장소에만 머물 수 없었다. 그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나그네"처럼 행동해서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그리고 섬기도록 인도하시는 분이 이끄는 대로 가라고 가르치곤 했다

...당시는 그리스도가 회당 안에서 가르친 것이 아닌 것 같다. 단지 개인적으로 자기 친구들에게 가르치면서, "점차적으로" 자기의 사업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 같다. -- 젊은 사역자들은 개인적으로 경건하고 덕성을 기르는 일에 익숙해지는 것이 좋다. 그래야 그들은 더 나은 준비와 더 큰 경외심을 가지고 공적인 일에 접근할 수 있다.

...그는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가야 하기 때문에 가버나움에 오래 지체할 수 없었다. 만사에 적합한 때가 있는 법이다. 작은 선은 보다 큰 선에게 양보해야 한다. 또 야곱의 모든 거처들은 시온의 문들에게 양보해야 한다.

Ⅱ.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켰다. 

-- 성령으로 세례 받으신 후 첫 유월절이다. 복음서 기자는 이후 예수가 지키시는 유월절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4번의 유월절을 지키셨는데, "4번째에" 수난을 당하셨으며(3년 이후), 살펴보고자 하는 지금, 이 유월절은  성령으로 세례받으신 후 반년쯤 경과한 때이다.

-- 그리스도는 "율법에 매여" 있으므로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켰다(출 23:17 참조). 이와 같이 그는 모범적으로, 거룩한 의식의 철저한 준수와 집회의 열성적인 참석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는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그 행사에 먼저 참석하셨다. 이 행사가 유대인들에게만 특별하기 때문에 "유대인의 유월절"이라고 부르고 있다(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월절이시다). 그러나 이제 곧 하나님은 그것을 인정치 않으실 터였다. ...그리스도는 12살 이후부터 율법에 따라, 매년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맞이하셨는데, 이제는 공적인 임무를 띠고 올라갔다. 우리는 예수가 예루살렘에 머무심에서 두 가지 일을 볼 수가 있다.

1. "성전을 깨끗이 하셨다"(14-17절).

(1) 예루살렘에서 그를 발견할 수 있는 처음 장소는 성전이다.

--이 성전에 나타나기까지는 어떤 공적인 나타남이 없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의 그의 나타나심과 가르치심의 사실이 제2 성전의 보다 큰 영광이었다(학 2:9). 또 예언된 말씀을 보면(말 3:11), "내가 내 사자," 곧 세례 요한을 "보내리라." ... 그는 성전에서 가르치지 않았으나, 너희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임한다는 것이다. 이 때가 예언되었다. 그 때이며, 성전이 그 장소이며, 그분은 우리가 기대했던 메시야이시다.

(2) 성전에서 그가 하는 첫 사업은 성전의 "청소"였다.

--이일은 예언되어진 것이다(말 3:2, 3). "그는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같이 않아서 레위자손을 깨끗케 하리라." ...이제 개혁의 시기들의 방법에 따라서, 그는 먼저 나쁜 것부터"제거했다"(히스기야 시대처럼, 이것이 유월절에 할 일이다. -대하 30:14, 15 - 요시아 시대에도 그렇게 했다- 왕하 23:4). 그후 그들에게 잘 하도록 가르쳤다. 먼저 "묵은 누룩을 치운 다음 잔치를 한다." 먼저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목적은 이 세상의 개혁이었다. 자기에게 오는 사람들의 생활을 바꾸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생각이었다(창 35:2). 성전을 청소하심으로써 그리스도는 바로 이것을 가르치셨다.

① 부패한 것들을 청소해야 한다.

--그는 성전의 한 모퉁이가 시장터가 되어있음을 발견했다. 그 장소는 이른 바 "전의 산" 안에 있는 "이방인들의 뜰"이라고 불리웠다.

첫째, 그곳에서 그들은 제물에 쓸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팔고 있었다. ...우리가 생각해 볼 때, 이것은 처음에는 일반장사의 용도가 아니었다. 먼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희생 제물을 가져 올 수가 없기 때문에, 그들의 편리를 제공하려는 것이었다(신 14:24-26 참조). 아마 이 "시장"은 원래는 베데스다 연못 곁에 있었을 것이다(5:2). 그런데 대제사장이 (부정한 이득을 위하여) 성전 안에서 팔도록 허락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의심할 바 없이, 그 안에 설치한 장소사용료(지대地代)와 거기에서 파는 동물들을 검사하는 수수료에, 그리고 흠이 없는 동물로 인증(認證)하기 위한 인증료 등은 그들에게 상당한 수입이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교회 내의 큰 타락은 사역자들이 돈에 대한 집착을 늘일 때 온다(딤전 6:5, 10).

둘째, 그들은 "돈을 바꾸었다." ...왜냐하면 성전의 사업을 매년 정금(正金)으로 반 세겔을 성전세 형식으로 지불하는 사람들의 편리를 위해서였다(출 30:12)..[로마화폐를 성전에서 사용하는 전용화폐로 바꾸어주면서 환전료를 징수]

② 우리 주께서 이런 부패들을 일소하신 과정을 보자.

--그는 이전에도 성전 안의 이런 부패를 보아 왔다. 그때는 사적인 신분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성전의 부패를 일소하려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공적인 예언자의 성격을 취했다. 그는 이제 대제사장들이 이런 부정을 암암리에 조장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첫째, 그는 장사치들이 "팔고 있는 양과 소들을" 성전 밖으로 추방했다.

--그는 성전 안으로 어떤 것을 끌어들이려고 "힘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단지 신성을 더럽히는 것들을 추방하려고 그랬다. 비록 그는 짐승들이 성전을 모독하는 침입자라는 것을 알지만, 그 짐승들을 직접 붙잡아서 가두어 두지 않았다. 단지 장사치들과 짐승들을 내쫓으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는 장사치들이 짐승들을 모는 데 쓰다가 버린 "가느다란 줄"로 된 회초리를 집어들었을 것이다. 죄인들은 자기 스스로가 성전 밖으로 쫓김을 당하려고 채찍을 휘두른 게 아니라(그의 징벌은 전혀 성질이 다르다), 단지 성밖으로 쫓으려는 것이었다. 즉 그의 목적은 오직 개혁이었다(롬 13:3, 4; 고후 10:8 참조).

둘째, 그는 "환전상의 돈을 쏟으셨다."

--돈을 쏟으심으로써 돈에 대한 경멸심을 보이셨다. 돈을 땅에다 던지셨다. 그는 상을 뒤엎으심으로써 종교를 빙자해서 세속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자들에게 적대감정을 나타내셨다. 성전 안의 환전상들은 성전의 수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개혁에는 철저한 개혁이 좋다는 것이다 그는 가축을 모두 내쫓을 뿐만 아니라, 환전 상인들과 거래자들을 내쫓았으며, 상을 뒤엎어 버렸다.

세째, 비둘기(가난한 자들이 드리는 희생물)를 파는 자들에게는, "여기서 가져가라고 하셨다."

--비록 그들은 소나 양을 파는 장사치들보다 장소를 덜 차지하고, 폐를 덜 끼치지만, 성전 안에서의 장사행위는 허용할 수 없었다. 참새와 제비는 섭리에 따라서 주의 집에 거할 수 있었지만(시 84:3), 비둘기는 사람에게 이익을 줄 수 있으므로 성전에 사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하나님 성전은 비둘기의 집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의 열성 속에서도 신중함을 보라. 양과 소들을 내쫓을 때는 주인들이 그 흩어진 가축들을 붙잡아 데리고 나갈 수 있으며, 돈을 쏟아도 주인들이 다시 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비둘기들을 흩어서 날아가게 한다면, 아마 다시 붙잡을 수 없을 것이므로,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고 말하셨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신중성이 항상 우리의 열성을 인도하고 통제해서, 우리 자신을 가다듬고,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네째, 그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타당성을 제시하고 있다.

--"나의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개혁하려는 힘은 확신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a. 여기에는 장사치들이 성전을 더럽힐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이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지, 장사치들의 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사란 성전 안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의 좋은 일이다....[주께서 뒤집어 엎으시기전에 Q말씀앞에서 먼저 정욕과 탐심으로 둔해져 있지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아 회개/토설하여 마음안의 성전을 깨끗하게 하자!!]

(a) 그러나 이 행위는 하나님의 위엄을 "저해하는" 신성모독이며, "약탈" 행위이다.

(b) 성전의 신성과 엄숙을 저하시켜서, 천하게 만들었다.

(c) 사람들이 가장 귀중하고 진지하게, 그리고 열성적으로 생겨 야 할 예식들을 혼란시키고 왜곡시켰다. --특히 양과 소와 함께 떼를 지어 예배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이방인에게서 모욕당하게 했으며, 시장의 소음 속에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흩어지게 했다. 왜냐하면 이 시장은 이방인들의 뜰에 있었기 때문이다.

(d) 종교의 업무를 세속적인 이해(利害)에 부수적인 것이 되게 했다. --왜냐하면 장소의 거룩에 대한 생각이 시장을 번창케 하고, 상품의 판매를 촉진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고 있었다.

[a] 종교 의식에 참석하면서도 그들의 마음은 세상일의 염려로 가득차 있다(암 8:5; 겔 33:31).

[b] 부정한 이득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하며 성령의 은사를 팔았다.(행 8:18).

b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그것을 청소했다고 했다.

(a) 그는 "아들"이므로 그 집을 청소할 권위를 지녔다(히 3:5, 6).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 부름으로써, 그는 사람들이 말하던 메시야가 자기임을 드러내고 있다.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삼하 7:13, 14).

(b) 그러므로 그는 성전을 청소하려는 열심을 가지고 계셨다. 즉 "성전이 내 아버지의 집이므로, 그 집이 더럽혀지고 아버지가 모욕당함을 참을 수가 없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만약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요, 따라서 우리의 소망이 되신다면, 그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바라야지 그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게 해서는 결코 안 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성전 청소는 당연히 놀라운 기적의 하나로 인정할 수 있다. 히에론(Hieron)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놀라운 기사(奇事)중에서 이 성전 청소의 사건이 나에게 가장 감명을 주었다"고 했다.

[a] 그는 "친구"의 "도움" 하나 없이 이 일을 수행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을 충동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성전을 모독하는 자들에 대항해서 "폭동"을 선동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는 결코 무질서와 소란을 방조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손으로 그 일을 수행하셨다.

[b] 그는 장사치들이나, 그것을 팔도록 허용해 준 "원수들"의 "저항"하나 없이 그 부패는 너무나 명백하여 정당화될 수 없었다. -- 죄인 자신의 양심이야말로 개혁자의 가장 좋은 친구이다. 그러나 양심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즉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능력이 필요한대, 이 능력 안에서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능력이 필요한데, 이 능력 안에서는 인간의 어떤 저항도 소용이 없다. "그가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말 3:2, 3)

다섯째, 그의 제자들의 말을 보자(17절). 즉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고 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자기들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이스라엘 왕으로 믿었던 그가, 사소한 일에 이렇게 열심을 내고 혼자서 덤벼드심을 보고 다소 놀랐지만, 이 행동이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순함과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해 주는 성경 구절을 생각해내게 했다. 다윗도 메시야를 말하면서, "하나님의 집을 위한 열심"을 주목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크나 "그를 삼키었다"고 했다(시 69:9). 좀 더 자세히 관찰해 보면,

a. 제자들은 성경 구절을 기억함으로써 그리스도가 행하신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일은 서로를 설명하고 예증한다는 것이다. 섭리 안에서 감추어진 성서의 의미들이 설명되어진다. 그리고 이 둘을 성서로 비교함으로써 난해한 섭리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사용한 이런 방법이 얼마나 훌륭한가! 제자들은 성경으로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한 기억에 의하여 그들은 선한 일들을 해 나갈 것이다.

b. 그들이 기억한 성경 구절은 매우 적절했다. "당신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켰나이다."--다윗도 그리스도의 예형으로써, 주의 집을 사모하는 열심이 있었다(시 132:2, 3). "내가 이미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힘을 다하였다"(대상 29:2 참조). 이 구절의 후반부(시 69:9)도 전반부처럼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다(롬 15:3). 구약의 성도들에게서 발견된 모든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빛나며, 특히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그러하며, 또한 우리들에게 좋은 모범을 제시한다.

(a)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전 즉 교회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하나님의 전을 사랑했고, 하나님의 전의 존엄과 번영을 위하여 열성이었다.

(b) 심지어 이러한 열성이 "그를 삼키어 버렸다." --이 열심히 자신을 겸손하게 하고 진력토록 하며, 자신을 드러내도록 한다. "내 열성이 나를 소멸하였나이다"(시 119:139). .

...우리의 위신, 안일, 평안이 우리의 의무와 봉사에 경쟁이 될 때는,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열성이 그것들을 돌아보지 못하게 한다. 때때로 의무에 우리의 마음을 전념할 때 우리의 몸이 마음과 보조를 같이하지 못하게도 된다. 그래서 그 때는 "자신을 아끼십시오"하는 자에게 귀머거리가 되었던 주님처럼 우리도 자신의 안일에 귀머거리가 된다. 여기에서 시정되고 있는 불평은 작은 일이다. 너그러이 봐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전 안에서 사고 파는"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 그리스도의 열성이었다.


##[말3:1-3]*1.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2.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시69:9] *9.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2. 성전을 청소하신 그리스도가, 이런 행위를 하는 권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여 하나의 표적을 주었다. 이제 그 표적을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1) 표적을 요구했다. "그때 유대인들이 대꾸했다."

--즉 지도자들과 더불어 있던 군중들이다. 이들은 유대인이므로, 성전의 권위를 옹호하는 그를 지지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지지 대신에 그를 반대하고 나섰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진심으로 개혁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는 이들은 반대에 부딪힐 각오를 해야 한다.

--그들은 일 자체에 대해서는 어떠한 반대도 할 수 없었지만, 예수에게 무슨 권리로 그런 일을 했느냐고 물었다.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네가 이러한 일을 하도록 위임받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느냐?" ...성전 청소는 참으로 선한 일이지만, 무엇이 그에게 그런 일을 하도록 했으며, 누가 하도록 했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성전 청소 사건을 사법권의 행사처럼 간주했기 때문에, 예수는 자기를 "예언자," 아니 "그 이상"임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 일 자체로 충분한 표적이 되지 않을까? 아무런 저항도 없이, 많은 자들의 지위를 추락시킨 그의 능력이 그의 권위를 증명하고 있다. 그가 신적인 능력을 발휘했다면 그것은 그가 신적인 위임을 받은 것이다. "왜 도망치고 물러났는가?" 오로지 "주님이 나타나셨기" 때문이다(시 114:5, 7).

(2) 이런 요구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19절)을 보자.

...그는 그들을 확신시킬 기적을 즉시 나타내지 않고, 앞으로 되어질 어떤 사건 즉 신명기 18장 21,22절에 따른 사건에 의하여 분명히 나타날 진리의 한 표적을 주었다.


#[신18:18-22]*18.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19.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20.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21.네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께서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22.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① 그들에게 준 표적은 그의 죽음과 부활이다. 그는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그들에게 유의시키고 있다.

첫째, 그것은 그의 마지막 표적이다. 만일 그들이 보고 들었던 것으로 확신되지 않는다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둘째, 메시야됨을 나타낼 수 있는 "큰 표적"이다. 그에 관계된 예언의 말씀을 보면, 그는 상함을 받으시고(사 53:5), 끊어짐을 당하신다(단 9:26). 그러나 그는 부패되지 않으신다(시 16:10). 이런 일들이 복되신 예수에게서 이루어짐으로 진실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의 아버지 집인 성전을 숙청할 권리를 가졌던 것이다.

② 그는 때때로 자기 제자들에게 말한 것처럼, 자기의 죽음과 부활을 말한 것이 아니고 상징적인 표현을 구사해서 말하고 있다.

--그가 한 표적을 주었는데, 그 표적을 "예언자 요나의 표적"이라고 불렀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그러면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와 같이 그는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마 13:13, 14). 정말 참되게 깨달아 알려고 겸손히, 끈질기게 추구하지 않는 자들은 보지 못할 것이다. 그의 상징적인 표현이 그들에게 장해물이 되어 그를 성전 모독 죄로 입증하려는 거짓 증인들이 많이 있었다.(마 26:60, 61).

--만일 그들이 겸손하게 그가 말한 뜻을 물었다면, 그는 설명해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생명으로 인도하는 향기가 되었을 것인데, 흠을 잡아 죽음에 이르도록 했다. 깨닫지 못한 그들은 완고해졌다. 그러나 이것이 예언의 성취를 가져 왔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라는 이 말에서, 예수는 자기가 유대인들의 원한을 받아 죽을 것을 예언하고 있다. 즉 "너희가 성전을 헐라. 너희가 허는 것을 내가 허락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의 전도 시초에서부터 그리스도는 마지막에까지 고난의 연속인 것을 분명하게 예언했지만, 기꺼이 수행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시초에서부터 죄악을 대비한다는 것은 좋다.

그는 자신의 권능에 의하여 부활을 예언한다.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가 다른 사람들을 일으킨 일도 있지만, 여기서는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이 살아나 생명을 회복한다는 것이었다.

③ 그는 "성전을 헐고, 다시 세운다"는 표현을 선택했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첫째, 그들이 더럽힌 성전을 청소하는 자기를 정당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마치 이런 말과 같다. --"성전 하나를 더럽힌 너희는 또 하나를 헐리라. 그러나 청소를 통하여 다시 세움으로써 성전에 대한 나의 권위를 증명하리라." 성전을 모독한다는 것은 성전을 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개혁은 재건을 뜻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죽음이란 참으로 유대인 성전의 멸망을 의미하며, 그의 부활은 새로운 성전 즉 복음적인 교회의 발흥을 뜻하기 때문이다(슥 6:12). 저들의 땅과 "민족"의 멸망(11:48)이 모든 이방인들에게 풍요를 주었다(암 9:11; 행 15:16 참조).

(3) 이런 대답에 대한 그들의 트집을 보자. ,,,,"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다(20절). 성전 건축은 언제나 많은 시일을 요하는 데, 네가 그렇게 빨리 지을 수 있느냐?"

① 그들이 가진 지식으로, 성전 건축이 얼마나 오랜 기간이 소요되는지를 대답할 수 있다.

...라이트푸트(Lightfoot)박사는 고레스 즉위 제2년에 있었던 스룹바벨의 성전 기공에서부터, 아르탁세케스 제32년에 있었던 준공까지가 꼭 46년이라고 계산하고 있다. 또 헤롯 재위 18년째에 이 성전 건축이 시작되어, 유대인들이 이런 말을 하는 지금까지도 46년이라 한다.

② 그들의 "무지"가 나타났다.

첫째, "그리스도의 말 뜻"에 대한 무지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성서가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사람들은 흔히 큰 잘못을 범하고 있다. 많은 잘못이 해석에서 온다. "이것이 나의 몸이다"란 말을 육체적 형체적으로 보면 안 된다.

둘째, "그리스도는 전지전능"에 대한 무지이다. --만약 그들이, 6일 동안에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이가 그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3일 동안에 그가 성전을 지을 수 없다는 어리석은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4) 그들의 트집에 대한 그리스도의 변호를 보자. 용어를 설명함으로써 어려운 뜻이 풀렸다. "그는 자기 몸을 성전으로 말하고 있었다"(21절).

--그리스도가 성전 청소에서 성전에 대한 큰 존경을 표했지만 그가 그렇게 열심히 갈구하는 성전의 성스러움은 단지 "예형적인" 것임을 알려 주려 하고 있다. 그래서 단지 그림자에 불과한 그것이 본질적인 성전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다(히 9:9; 골 2:17).

--어떤 성서학자는 그리스도가 "이 성전을 헐라"고 말할 때, 자기의 몸을 가리키거나 더럽혀진 유대인의 성전에 손을 대면서 말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가 말씀하신 성전이란 자기의 몸을 두고 한 말이란 점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리스도의 몸이 진정한 성전이며,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은 하나의 예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① 성전처럼 몸도 직접적인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지어졌다. "주께서 나를 위해 몸을 마련하였도다"(대상 28:19).

② 성전처럼, 몸도 "거룩한 집"이다.

③ 성전처럼, 몸도 하나님의 영광의 거처이다. 즉 영원한 말씀, 진실한 세키나가 거하는 곳이다. 그는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시다.

④ 성전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처이며 "중간점"이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자신을 나타내신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자신을 바치고 그에게 봉사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 예배자들은 그러한 성전을 바라보아야 한다.(왕상 8:30, 35).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려야 한다.

(5) 오랜 후에 자제들이 예수의 이런 말씀을 기억했다(22절).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했다. 전에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된 것을 기억하는 제자들을 볼 수 있는데(17절), 여기서도 그에게 들었던 사실을 기억하는 제자들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억은 "엣 것"과 "새 것"을 갖추어둔 좋은 살림꾼의 보옥과 같다(마 13:52).

① "그들이" 그 말을 "기억했던" 때를 보자.

--그 때란,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이다. 그들이 당시에는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뜻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란 그들은 지혜에 있어서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아 그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만 있었다. 그 후에야 그들은 지혜가 있고 유능하게 활용할 줄도 알게 되었다. 장래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사 42:23). 현재는 의미나 용법을 잘 모르는 진리들도 몇 년 후에는 쓸모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이 보다 훌륭한 숙달에 이를 때에야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피타고라스 제자들에 관한 실화에 보면, 그의 제자들이 40세가 되어서야 그의 교훈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했다. 그리스도의 이런 말씀도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후에야 그이 제자들이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그때서야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는가?

첫째, 그 때에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의미를 분명히 그리고 즉시 기억에서 되살리도록 성령을 부어 주셨기 때문이다.(14:26).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바로 그 날에 그는 제자들을 이해시켰다.(눅 24:45).

둘째, 그때가 말씀을 성취시키는 때이다. 그의 몸인 성전이 멸하고 다시 3일만에 세워졌다. 그 때에 제자들은 다른 말씀들 중에서 그가 이런 목적으로 이야기하신 것을 기억했다. 성경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고,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사건을 통하여 예언은 설명되어질 것이다.

② 그의 말씀을 어떻게 사용했는가? "그들은 성경과 그의 말씀을 믿었다." 이러한 그들의 신앙은 새로운 확신과 힘을 주었다. 그들은 믿는 마음이 더디지만(눅 24:25), 확실했다. 성서와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기서는 함께 공존하고 있는데, 그것은 서로의 일치나 정확한 동의가 아니라, 상호간에 서로 예증하고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구약에서 알고 있는 것과,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에서 그의 죽음과 부활의 성취를 들었을 때, 이 둘에서 그들의 믿음은 더 확실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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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유월절 예루살렘 사역(요 2:23-25)

그가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유월절을 지키는 동안 그의 가르침과 표적 행하심에 대한 성공의 이야기들이다.

Ⅰ. 우리 주 예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가르치시고 표적들을 나타내셨다. 

--사람들이 "그를 믿는다"는 것은 그가 거기서 전도하셨음을 암시하고 있다. 또 "그들은 그가 표적을 나타내심을 보았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가 지금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 계시니, 거기서 "주의 말씀이 전파되어 갔다." 대부분 갈릴리에 머무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머무실 때는 매우 분주했다. 유월절은 거룩한 때이고, 축제의 날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날로 지정되었다. 이 날에 레위 사람들은 여호와의 선한 지혜를 가르쳤다(대하 30:22). 그리스도는 많은 무리들이 모일 수 있는 이 때를 이용해서 가르쳤으며, 거룩한 제도인 유월절을 그는 인정하고 귀히 여겼다.

Ⅱ.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믿었다. 

--니고데모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는 것처럼(3:2), 위대한 선지자로 믿었다. 또한 예루살렘에서 구원을 기대하는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그를 약속된 메시야로 믿어, 그의 첫 나타나심을 영접할 준비를 갖추기로 했을 것이다.

Ⅲ. 그러나 아직도 예수는 "그의 몸을 저들에게 의탁지 아니하셨다.(24절). 

--그는 저들 속에 있는 것을 아셨다." 

"의탁한다"와 "믿는다"는 같은 단어이다. 고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을 그에게 "맡기고"(의탁하고) 그의 지도에 전적으로 따른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의 새로운 변화에, 어떤 신뢰를 둘 만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 그 곳에는 또한 그를 파멸시키려고 애쓰는 많은 반대자들이 있었다.

1. 그들은, 적어도 그들 중 몇몇이 "거짓됨으로" 기회만 있으면 그를 배신하거나 파멸시킬 궁리를 했다. 

--그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갈릴리인들을 더 신뢰하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은 갈릴리인들이 더 많다. 위험스러운 때와 장소에서 사람을 조심하는 게 현명한 처사이다.

2. 혹은 이 무리들은 "연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배반"하는 게 아니라,

(1) "소심해서" 열심과 용기가 없으며, 잘못된 일을 저지르면 매우 겁을 먹게 될 것이다. 

--어렵고 위험한 때에 무리를 신뢰한다는 것은 합당치가 않다.

(2) 또는 그들은 "소란스러우며," 신중성과 처리의 수완이 결핍되어 있다. 

--만일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을 그들에게 의탁해, 그들의 지도자로 내세워진다면 -그러나 그의 나라는 이 땅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없지만 -예루살렘에 속한 이 무리들은 다른 지도자들보다 더 들리워진 메시야의 감정적인 통치를 기대하고서, 그들은 정부에 대한 어떤 대담한 시위를 할 준비를 할 것이다. 이 무리들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은 하지마는 이들은 소란스럽게 들떠서 이들과 같이 행동을 한다면 우리 주님은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Ⅳ. 그가 "자기 몸을 저희에게 의탁하지" 않으신 것은 저희들을 "잘 알기" 때문이다(25절). 또 저들 속에 있는 사악함과 무력함을 아시기 때문이다. --복음서 기자는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전지전능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1. 그는, 우리가 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들 "모두"를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의(심지어는 자신조차도 거의 모르는)본성, 의향, 기호 등을 모르지만, 그들의 이런 생각까지도 전부 알고 계신다. 

--그의 능력 있는 손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의 불꽃같은 눈으로 인간을 감찰하시며, 속까지 들여다보시기 때문에, 그는 그들 모두를 알고 계신다. 그는 자기의 교활한 적들과 그들의 음모를 자기의 거짓 형제들과 그들의 진짜 성격을 그리고 그들이 누구이며, 누구인 체하는지를 알고 계신다. 그는 그들 중에서 정말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알고 계시며, 그들의 완전함과 그들의 결점도 알고 계신다. 그는 그들의 마음 상태를 알고 계신다.

2. 그에게는 "어떤 사람이든 시험해 볼 필요가 없다."그의 지혜는 사람들의 전달에 의존해 있지 않고, 전혀 오류가 없는 직관에 의해서이다. 

--세상 왕자들의 불행이란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눈을 통해서 보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귀를 의지해서 듣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순전히 자신의 지혜에 의해서 판단하시고 처리하신다. 천사들은 그의 사자이지 첩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친히 땅을 이리저리 감찰하시기 때문이다(대하 16:9). 이것이 사탄의 고발에 우리의 위로로써, 그는 사탄의 고발로 인간을 판단치 않으신다.

3. 그는 "사람이 어떤지를 알고 계신다." 즉 구체적으로 인간의 본성과 종족을 알고 계신다.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그들이 어떠한지를, 즉 마음을 시험하시고 굴레를 시험해 보신다. 이것이 본질적으로 영원한 말씀의 특권이다(히 4:12, 13). ....우리가 사람의 마음을 감히 판단한다면, 그의 특권을 침해하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가 "인간의 구세주"이신 것이 얼마나 다행이며, 의사로서 환자의 상태와 경과, 유쾌와 불쾌 등등을 완전히 알고 계시는 명의이시다! 또한 만물의 심판자이신 것이 정말 합당하시다! 왜냐하면 인간의 전체를 아시는 그의 판단은 진실에 의하여 판단하시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그리스도의 순례 중,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그의 가르침과 표적 행하심의 모든 성공을 볼 수 있었다. 주께서 성전에 이르자, 단지 약하고 천한 한 무리만이 따르려 나아왔는데, 그리스도는 그들을 믿고 의탁할 수 없으셨고, 결국 자신의 고난을 예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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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ilaiva(1056, 갈릴라이아) 

갈릴리 Galilee 1. 갈릴리(지방, 영토) 

갈릴리는 팔레스타인의 북부지역, 요단의 서편을 가리켜 구약성경에서 다소 막연하게 사용하게 된 명칭이다. 갈릴리는 히브리어 명칭으로, 왕하 15:29에서 '하갈리아', 수 20:7; 수 21:32에서 '하갈릴', 왕상 9:11에서 '에리츠 갈릴'로 표기되었다. 그 의미는 '원', 혹은 '순회'라는 뜻이다.

갈릴리는 원래 가나안을 분배할 때 스불론지파(수 19:10-16), 아셀 지파(수 19:24-30), 납달리지파(수 19:32-39)에게 할당되었으나, 삿 4장, 5장에 기록된 유혈 전쟁에도 불구하고 이 지파들 중 어느 지파도 가나안 원주민을 쫓아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삿 1:30-33). 히브리 왕조 시대에 갈릴리는 시리아 전쟁으로 고통 당했다. 갈릴리는 벤 하닷에게 유린되었으며(왕상 15:20) 그 후 아람왕 하사엘의 지배를 받았다(왕하 12:18; 왕하 13:22). 주전 734년 디글랏 빌레셀 3세는 앗수르 군대를 위해 대로를 건설하였고(왕하 15:29) 많은 거민을 포로로 잡아갔다. 사 9:1(ASV 난외)에서 갈릴리는 "열방의 지역"으로 지칭되어 있다. 마케베오일서 5:15은 갈릴리를 "이방인들의 갈릴리"라고 부름으로써 이 지역의 이방인들과의 혼합성을 지적하였다. 일부 유대인들은 포로에서 돌아와 갈릴리에 정착하였다.

갈릴리는 다양한 정치적 운명을 겪는 가운데 주민들이 혼합되었으며, 그들만의 독특한 언어 및 방언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예루살렘 유대인들은, 그들의 언어 습관을 통하여 갈릴리인들을 쉽게 식별할 수 있었다(마 26:69-73; 막 14:70; 요 7:41); 아람어를 사용하는 갈릴리인의 발음은 특이했다. 특히 후음이 그러했다.

갈릴리 지역의 정확한 경계는 시대마다 다르다. 그리스도 시대에 갈릴리는 잘 구획된 로마 속주였다. 이 지역은 상부 갈릴리와 하부 갈릴리로 구분되었으며, 하부 갈릴리는 에스들론 평원 일부와 요단강, 갈릴리 바다를 포함하며 보다 낮고 평평하다. 상부 갈릴리는 봉우리가 2000~4000피트에 이르는 산과 산악 고원 지대였다(마 28:16). 나사렛은 이곳의 중심에 위치하였으며, 예수님으로 하여금 방대한 범위의 지리적 환경을 접할 수 있게 하였다. 강에 의해 물을 풍부하게 공급 받는 갈릴리는 매우 비옥하였다. 골짜기마다 풍성한 곡물과 목초지가 있었고 향료, 올리브 및 고산지대에서 나는 다른 열매들이 많이 산출되었다. 갈릴리 지역은 도로도 잘 갖추어져 있었다.

구약성경의 "바다의 길"(사 9:1)은 하부 갈릴리를 통과하였다. 애굽과 아라비아와 시리아 상인들이 대상로를 따라 이동하였다. 이 길은 오늘날에도 따라갈 수 있는데, 나중에 이 길 위에 로마 도로가 포장되었다.

그리스도 시대에 갈릴리인들의 생활을 특징짓는 물질적 풍요와 넓은 시계는 예수님의 비유에 반영되어 있다(마 20:1-8; 마 21:33; 마 25:14; 막 4:3; 마 13:34; 눅 13:6-9).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는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갈릴리 분봉왕 헤롯 안티바스가 통치하였다(B.C. 4 - A.D. 39)(눅 23:5-7). 헤롯 안티바스는 분봉왕으로 임명된 후에 락카드(Rakkath) 지역 근처에 수도를 세우고 왕에게 입은 은택을 기념하여 디베랴로 명명하였다.

갈릴리에는 가나안 땅을 분배할 당시에 60개 이상의 성읍이 있었던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갈릴리의 성읍으로는 하솔(삿 4:2); 디베랴를 세우기 전 갈릴리 수도였던 셉포리스(Sepphoris),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하리라(마 5:14)고 하신 말씀에 나온 그 동네와 유사한 사베드(Safed), 여전히 활력이 넘치는 농업 마을인 가나(요 2:1-11), "도피성" 가데스(요 21:32); 바니아스(Banias)에 인접한 가이사랴 빌립보(마 16:13), 예수님께서 자라나신 동네 나사렛(눅 2:39; 눅 2:51); 그 유적지가 오늘날 광범위하게 남아있는 가버나움(마 4:13; 마 9:1; 눅 10:15); 고라신(마 11:21); 벳새다 혹은 율리아스(눅 9:10; 요 1:44)등이 있다.

갈릴리 사람들은 그들의 종교와 나라에 헌신적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순례여행을 하였으나(요 4:45), 순수한 혈통을 지닌 보다 엄격한 정통파인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어딘지 모르게 건방진 모욕으로 멸시 받았다. 일상적으로 헬라 및 로마인의 생활과 접촉하는 유대교와 갈릴리인 사이의 이 묘한 긴장 때문에 예수님은 가장 초기에 제자들을 모았던 것이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작은 야고보, 다대오, 열심당원 시몬은 모두 갈릴리인이었다. 마리아라 이름하는 여자 중 하나는 막달라 출신이었다. 처음의 12제자 중에서 유일한 유다 출신 가룟 유다가 제외되고 이제 100 갈릴리인으로 이루어진 사도의 무리가 오순절에 구경꾼들의 중언으로 확증된다(행 2:7). 예수님은 이 갈릴리사람들이 가진 더 큰 경험과 더 넓은 사고방식에 호소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통하여 "그의 이야기를 기쁘게 들은"(막 3:7) 큰 무리를 모았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신 일들은 갈릴리인들의 마음 속에 오래도록 기억되었으며,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행하신 사역에 관한 많은 기록들이 복음서에 기록될 수 있었다. 갈릴리인 베드로가 겪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비한 경험으로 기독교는 승리의 길을 내딛게 되었다(막 14:28; 요 21:1-23).

빌라도가 예수를 심리할 때 피고인이 '갈릴리인'인지 물었을 때(눅 23:6), 그는 이전에 문제를 일으킨 갈릴리인들에 대한 자신의 인기를 떨어뜨린 판결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눅 13:1-3), 이 나사렛인 예수님에 대한 판결을 헤롯 안티바스에게 넘겨주고자 하였던 것이다.

주후 6년에 갈릴리인 혁명가 유다(행 5:37)는 "우리에겐 하나님 외에 주가 없다"고 가르쳤다.

"갈릴리에서 무슨 선지자가 나겠느냐"는 비웃음은 드보라, 요나, 엘리사를 간과한 것이었으며, 갈릴리인들의 문화적, 종교적, 애국적 특성을 반영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대도시의 관료적인 유대인의 선입견을 드러낸 것이었다.

로마와의 전쟁에서 상부 갈릴리의 고지대 사람들이 유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일년 동안 로마 군대에 맞서 버티는 동안 150,000명의 갈릴리인들이 죽음을 당했다. 예루살렘이 끝내 멸망하자(주후 70년) 거처를 잃은 랍비 학파들이, 경멸 받던 갈릴리에서 도피처를 찾았으며, 사베드(Safed)와 디베랴가 그 중심지가 되었다. 미슈나와 "예루살렘 탈무드"가 그리스도교 시대의 초기에 갈릴리에서 쓰여졌다.

2. 갈릴리 바다 

갈릴리 바다는 북팔레스타인에 있는 심장 모양의 담수호. 요단강 수로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성경에서 여러 이름으로 나타난다. 신약성경에서는 갈릴리 바다(마 4:18, 마 15:29; 막 1:16; 막 7:31; 요 6:1); 디베랴 바다(요 6:1; 요 21:1); 게네사렛 호수(눅 5:1); 4회는 "호수"(눅 5:2; 눅 8:22 이하; 눅 8:33); 몇 회는 "바다"(요 6:16-25)라고 언급되어 있다. 구약성경에서 이 호수는 "긴네렛(하프) 바다"(민 34:11; 수 13:27) 혹은 "긴네롯"(수 12:3)으로 알려져 있다.

이 호수의 길이는 약 13마일, 너비는 8마일이고 표준 해수면 아래 680피트에 있다. 가장 깊은 곳의 깊이는 약 200피트에 이른다. 호수의 동쪽에는 2,000피트 높이의 산맥이 연안에서부터 솟아 있는 반면 서쪽 산맥은 비교적 덜 가파르다.

북쪽 방향으로는 북서쪽의 비옥한 게네사렛 초목 평야와 북동쪽의 엘 바딜라(티 Batila) 초목 지대가 완만하게 펼쳐진다. 요단강은 꼭대기가 눈으로 덮여 있는 헬몬산과 레바논에서 물을 공급 받아 이 호수로 흘러 들어 간다. 플리니(Pliny)는 이 바다가 "활기에 찬 마을들로 둘러 싸여 있었다"고 함으로써 신약성경이 이 호수에 대해 제공하는 인상을 확증한다.

예수님과 연관되어 있는 마을 가운데 가버나움(마 4:13; 요 6:17); 벳세다(막 6:45); 고라신(눅 10:13); 막달라(눅 5:39); 가다라(막 5:1)가 있다. 성경에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예수님 당시에 번성했던 마을 가운데 시나브리스(Sinnabris)와 트리케아([Tarichaea] 문자적으로 절이는 마을[Pickle town])가 있다. 이 마을에서 생선을 염장하고 말리고 보존하여 스페인(Spain)과 같이 먼 곳의 시장에 까지 배로 운송했다.

아마도 팔레스타인 경제사에서 순수한 의미에서의 최초의 산업도시 중의 하나일 것이다.

디베랴 교외에서 솟아나는 유황 온천은 몇 세기를 지나는 과정에서 의학적 가치를 인정 받게 되었다. 헤롯은 이 유익한 물이 솟는 곳 근처에 왕국을 지었다. 이곳은 이러한 치료용의 목욕과 해수면 아래 위치한 이 호수의 열대성 기후로 인해 건강을 위한 유흥지로 각광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의 치료의 손길을 얻기 위해 이 호숫가에 몰려든 수 많은 병자들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막 1:32이하; 막 6:53-56).

배는 고기를 잡거나 호수가 마을들 사이의 교통 수단이 되었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배를 만드는 목수였기 때문에 거주지를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옮겼을 것이다. 예수님은 바다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배(막 4:38)나 항해(막 4:35), 그리고 고기잡이(요 21:6)와 친숙해 있었다. 호수 주변 바로 가까이에 있는 육지와 멀리 호수 위로 솟아 있는 산맥과 고원 지대 사이의 기온차로 인해 호수에는 사나운 폭풍이 자주 발생한다(마 8:24). 바람은 연안에 인접한 산맥 때문에 호수 가장 자리로부터 몰아치다가 호수 중심에서 약해지고, 종종 맞은편 연안에서 사나워진다. 보다 덜 막혀 있는 북쪽 변두리가 폭풍을 자주 만난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거라사로 가는 도중에(마 8:23; 막 4:37; 눅 8:23; 눅 8:26), 그리고 벳세다에서 가버나움으로 가는 도중에(마 14:24; 막 6:48; 요 6:17이하) 폭풍을 만났다.

오늘날의 성지 순례자들은 갈릴리 바다와 그 성스러운 기슭을 방문하였을 때 받은 영적 감동을 표현할 만한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일출 때 해가 동쪽 연안의 언덕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깊은 곳"에 던져 내리는 작은 낚시 바늘을 비추는 것을 보았을 때나, 장엄한 일몰 시에 오래 전 폐허가 된 마을에서 발에 걸리는 돌 한 개를 주워서 가지고 노는 동안 청 초록색의 바닷물이 살아있는 빛깔로 넘실거리는 것을 보았을 때나, 그 갈릴리 연안과 바다물은 평강과 폭풍, 성공과 불운의 대기에 젖어 있으니,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사역의 가장 활동적이고 광범위한 부분을 특징 지워주는 것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BD; IS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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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a'(2580, 카나) 가나 Cana(지)

카나는 갈릴리에 있었던 한 동네이며, '갈릴리 가나'라고 불렸다. 고대 및 중세의 전통에 의하면 가나는 나사렛 북동쪽 약 6㎞ 지점에 위치한 게프르켄나와 동일시한다. 어떤 학자들은 이곳에 나다나엘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나사렛 북쪽 약 13-14㎞ 지점에 위치한 '길벳 가나'라고 생각한다.

가나는 신약성경에서 요한복음에서만 4회 나온다.

(a)  예수님은 가나에서 그의 첫번째 이적, 물로 포도주를 만든 이적을 행하셨다: "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11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 2:1; 요 2:11).

(b)  예수님은 가나에서 관헌의 아들의 병을 고치신 이적을 행하셨다: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요 4:46).

(c)  가나는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 나다나엘의 출신지였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요 21:2).(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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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ov"(2570, 칼로스) 선한, 좋은, 아름다운, 고상한.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칼로스(Homer 이래)는 산스크리트어(Sanskrit) 칼리아(Kalya: 건전한, 강력한, 강한, 탁월한)와 기원상 관련이 있으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이 단어는

(a)  '조직상 건강한, 적합한, 유용한, 쓸모있는'을 의미하며, 알맞은 피난처(Homer), 건강한 몸(Plato), 순수한 금속(Theognis), 흠없는 희생 제물(Xenophon), 알맞거나 편리한 장소(Xenophon),

(b)  미학적으로 '아름다운'을 뜻하며, 따라서 '마음에 드는, 매력적인, 사랑스러운'이란 의미도 지닌다.

(c)  사람의 내적 성질에 적용될 때 이 단어는 '도덕적으로 선한'이란 의미를 가진다(Sophocles, Pindar).

칼로스의 개념은 헬라 사상의 역사 과정에서 '탁시스' 질서와 '쉼메트리아'(symmetria: 대칭, 균형)와 연결되어 총괄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칼로스는 이러한 상황에서 '외적 현상이든 내적 성향이든 간에 건전함, 건강, 완전함, 질서의 완전한 상태'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래서 헬라 세계에서는 이 용어를 특히 신의 세계에 적용한다(W. Grundmann, kalos, TDNT, Ⅲ537).

2. 70인역본의 용법. 

형용사 칼로스는 70인역본에서 약 225회 나오며, 15개의 히브리어 단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a)  칼로스는 야페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예: 창 12:14; 창 29:17; 창 39:6; 창 41:2), '아름다운'을 나타낸다. 그러나 대부분 토브('유용한, 선한'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유용한'(예: 창 2:9), 더욱 자주 '도덕적으로 선한'을 의미한다(잠 17:26; 잠 18:5 등).

칼로스가 도덕적 선으로 나타나는 곳에는 토브의 역어로 사용되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칼로스는 창조 기사에서 질서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의미가 나타나 있기는 하지만(창 1:4; 창 1:10; 창 1:12; 창 1:21; 창 1:25; 창 1:31), 미학적인 의미는 대체로 결여되어 있다.

(b)  대부분의 경우에 칼로스는 구약성경과 유대의 윤리적 체제에서 '도덕적 선'을 의미하며 아가도스(ajgaqov", 18)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민 24:1; 신 6:18; 신 12:28; 대하 14:1; 잠 3:4; 사 1:17; 암 5:14 이하; 미 6:8 등). 칼로스는 타락 기사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창 2:17; 창 2:18; 창 3 5 이하; 창 3:22).

(c)  칼로스가 아가도스와 병행하여 사용될 때, '사랑스러운', 또는 '기뻐하는'이라는 의미를 지닌다(시 135:3). (참조: G. Bertram).

3.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칼로스는 신약성경에서 99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칼로스는 신약성경에서 '선한'을 뜻하기 위해 아가도스(ajgaqov", 18: 선한, 좋은, 104회)만큼 자주 사용되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이 신약성경 전반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특기할 일이다.

(a)  공관복음서의 용법.

① 세례(침례) 요한의 설교에서 "좋은 열매"에 대한 비유를 본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 3:10; 병행구 눅 3:9). 열매가 단수라면 그것은 새로운 삶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개개의 선한(혹은 악한) 행위들을 더 이상 하나 하나 헤아릴 수 없다(KRV Study Bible).

② 예수님의 '나무와 열매에 대한 비유'에서도 '좋은 열매'가 나타난다(마 7:17; 마 7:18; 마 7:19; 마 12:33). 좋은 열매가 나는 것은 나무가 전체적으로 건강한 경우이다. 이와 같이 사람도 예수님의 선포에 뿌리를 박고 그것으로부터 살 때에 좋은 열매를 맺는다.

사람이 자기 밭에 뿌린 "좋은 씨"는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말씀이다(마 13:24; 마 13:27; 마 13:37; 마 13:38).

③ 그물로 잡아 그릇에 담은 좋은 것들은 메타노이아(metavnoia, 3341: 마음의 변화, 회개)에 의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게 된 사람들을 의미한다(마 13:48). 선교라는 그물은 악한 자들과 선한 자들을 공동체에 끌어들인다. 여기서 칼로스는 항상 하나님의 바실레이아(나라)를 지향한다.

④ 마 5:16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선행을 요구하신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착한 행실"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의롭게 하려고 애썼던 구식 '율법의 공적'이 아니라(참조: 롬 3:10; 롬 3:28; 갈 2:16), 지금 동터 오는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 걸맞는 삶과 행동거지를 가리킨다. 즉 마 5:3-12과 마 5:21-48에 제시된 척도에 따르는 삶과 행동거지이다(참조: 엡 2:8-10).

⑤ 베다니의 시몬의 집에서 기름 붓는 기사에서(막 14:6) 예수님은 자신의 임박한 수난을 알아채고, 그에게 행한 그 사랑의 행위를 제자들의 기름을 판 돈으로 행할 수 있는 자선보다 중요하고 훌륭한 것이라고 하셨다. 이러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기회-그의 육체에 미리 기름을 부음으로써 그의 수난의 길을 제자들에게 확인시키는-란 오로지 이 역사적 계기 안에서만 제공될 수 있을 뿐이었다. 이 일을 행할 기회는 더 이상 없으나 구제는 언제나 할 기회가 있는 것이다.

(b)  요한복음의 용법.

① 요 2:10에서 칼로스는 다른 종류보다 '더 우수한, 상질의'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여기에서 '상질의 포도주'는 종말론적인 기쁨과 삶의 풍요를 미리 맛보는 것이며, 그것에 대한 상징이다(욜 3:18; 암 9:13; 창 49:10-12).

② 요 10:11; 요 10:14에서 예수님을 "선한 목자"로 묘사한다: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이것은 헬레니즘의 목신(牧神)들 및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자들(지도자들)과 대조되는 독특한 주장을 전달한다. 그 주장의 근거는 선한 목자가 그의 양떼들을 알고 있다는 것과 그는 양떼들을 이리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다는데 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양떼들로 하여금 그 자신이 성부 하나님과 나누고 있는 친교에 참여케함으로 말미암아 그 자신이 선하고, 능력이 있으며, 찬양을 받을만한 참 목자임을 입증하신다.

③ 요 10:32; 요 10:33에서 유대인들과 논쟁하는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행한 많은 선행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예수님은 그의 선행 중에서 어떤 것 때문에 백성들이 나를 돌로 치려고 하느냐라고 묻는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은 하나님의 일이었기 때문에 선하다. 그렇지만 그가 한 일들에는 백성들이 받아들일 수 없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메시야 주장이 포함되어 있다. 백성들이 그를 돌로 치려한 것은 그 선행 때문이 아니라 그의 메시야적 주장 때문이었다.

(c)  바울 서신의 용법.

① 바울 문헌에서 최초의 용법은 독립적이며, 이 단어는 토 아가돈(선 good)과 동의어이다. 롬 7:18; 롬 7:21에서 이 단어는 우리가 내적으로 행하기를 원하는 선을 나타낸다: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그러나 이 선은 육신의 법과 상충하므로 우리는 칼론을 성취할 수 없다.

고후 13:7에서 동일한 의미에서 이 단어는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사용된다: "...너희로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이 가능성은 그리스도인 전체 삶을 채우는 것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갈 6:9).(참조: 롬 12:17, 여기서 칼론은 찬양을 받는 것이다)

② 다른 한편 이 단어는 '옳은, 좋은, 칭찬할만한, 귀중한' 것에 대해서 사용된다(부정사와 함께 칼론 에스티). 예를 들면 고전 7:1; 고전 7:8; 고전 7:26에서 부부 관계의 자제나 처녀성에 대해 그렇게 사용된다. 그러나 이 단어는 갈 4:18의 좋은 일에 대한 열심, 롬 14:21의 형제를 위하여 먹는 것을 삼가는 것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③ 롬 7:16에서는 형용사로 율법에 대해 사용된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고전 5:6에서는 고린도인들의 자랑에 대해 사용된다: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바울 문헌에서 이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알 수가 없다. 바울은 교회에게 사랑의 일이라는 의미에서의 선한 일을 요구한다. 예를 들면 궁핍한 자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롬 12:20)., 대접하는 것(롬 12:13; 고전 16:11)이 선한 일에 속한다.

(d)  목회 서신의 용법.

① 목회 서신에서 카로스는 더욱더 중요한 단어이기 때문에 특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Julicher는 그의 Einleitung에서 '목회서신에서 칼로스가 독립적으로 24회 사용되고 10개의 바울 서신들에게 단 6회만이 사용되었으며, 게다가 바울은 거의 항상 명사로 사용하는 반면에 목회서신에서는 형용사로 20회 사용되고, 특히 에르가(디도서에서 4회)와 함께 사용되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② 딤전 5:10; 딤전 5:25; 딤전 6:18; 딛 2:7; 딛 2:14; 딛 3:8; 딛 3:14에서 카라 에르가(선한 행실)가 언급되어 있고, 딤전 3:1에서는 칼론 에그론(선한 일)이 언급되어 있다. 카라 에르가는 그리스도께서 마음 먹고 있는 것이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4). 그것들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 사랑과 자비의 일이다. 그 결과는 믿음에 기초한 사랑에 의해 만들어지는 삶의 양식(mode)이다(특히 딤전 5:10 이하). 딛 3:8은 카라 에르가에 대해 말한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르다우며 사람들에 유익하니라".

중보 기도는 모든 사람과 국가와 권위를 가진 자들을 위하여 필요하며, 또 평안한 생활을 위해 필요하다. 이것은 선한 것이다. 따라서 이 권면은 "이것은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딤전 2:3)라는 말로 끝맺는다. 여기서 칼론은 70인역본에서처럼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그 독특한 색채를 취한다.

③ 또 칼로스는 군사적인 이미지와 연관된다. 디모데(서신의 수신자)는 딤전 6:12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딤후 2:3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딤전 1:18 이하에서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딤전 1:18 이하)라는 권면을 받는다. 기자는 딤후 4:7에서 자신에 대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말한다.

④ 기자는 서신의 수신자 디모데에게 이전에 많은 증인들 앞에서 증거한 칼레 아몰로기아("선한 증거")를 회상시킨다: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셨다"(딤전 6:12 이하). 그런데 이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생각나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선한 증거(또는 고백)을 해야 한다.

⑤ 그리고 칼로스는 칼로스 노모스, 즉 구약성경(딤전 1:8), 감독이 지녀야만 하는(딤전 3:7) 칼레 마르튀리아("선한 증거"), 집사들이 칼로스 디아코네인으로 마땅히 얻는 바드모스 칼로스("아름다운 지위", 딤전 3:13), 서신의 수신자(디모데)가 공동체를 올바르게 지도하면 될 칼로스 디아코노스("선한 일군", 딤전 4:6), 복음인 칼레 디다스칼리아("선한 교훈", 딤전 4:6), 사람이 선한 일로써 이루는 칼로스 데멜리오스 에이스 토 멜론("장래에 좋은 터", 딤전 6:19), 디모데게 복음을 통하여 받은 칼레 파라데케(딤후 1:14, "부탁한 아름다운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판크티스마 데우)이 선하다고 한다(딤전 4:4). 이러한 구절들에서 칼로스는 대체로 옳은 행위, 올바른 가르침, 세상에 합당한 태도와 같은 것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선한, 올바른, 탁월한, 질서정연한'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 복음을 지향한다. 목회 서신에서 이러한 용법이 사용된 이유는 명확하다. 이 단어는 헬레니즘의 대중 언어에서 인기가 있었으며, 헬라니즘의 가치 감각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이 단어가 제 2세대의 기독교인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특징 짓는 것을 더욱 분명히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e)  공동 서신과 히브리서의 용법.

공동 서신과 히브리서의 용법은 동일한 노선을 따른다. 따라서 칼로스는 벧전 4:10에서 "선한 청지기", 약 2:7에서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 약 3:13에서 "선행", 벧전 2:12에서 "선한 일", 히 13:18에서 "선한 양심"에 대해 사용되었다.

비록 어구 자체가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사랑의 행위로서의 선한 일은 특히 야고보서에서 훈계의 주제이다(약 1:27; 약 2:15; 약 2:16).(참조: G. Bertram; E. Beyr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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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mei'on(4592, 세메이온) 표시, 표적.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세메이온은 세마(sh'ma: 표시, 예고)에서 유래했으며, 세마와 함께 '징조, 표시'를 의미하며, 다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a)  이 단어는 사람이 특정한 사람이나 사물을 인식하는 '표적' sign, 확신 시키는, 확증하는, 증명하는 '특징', '표' mark 혹은 '표', '증거' token를 의미한다. 호머의 작품에서 이 단어는 병의 징후, 짐승의 냄새, 배의 깃발, 희생제물로 바칠 짐승임을 보증해주는 표시, 통치자의 왕관, 반지의 인장, 방패에 있는 문장, 양 떼에 찍은 소인 등을 나타낸다.

(b)  이 단어는 다가올 사건을 알리는 '징조' foretoken, 혹은 '전조' omen을 의미한다.

(c)  세메이온에 놀라움의 성격이 있을 때 이 단어는 "기적의 표적"(miraculous sign)의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사물의 자연적 진행과는 모순되는, 신 혹은 기적을 행하는 자가 행한 '기적'(miracle)을 뜻하기도 한다.

이 단어는 주전 2세기의 저술(Polyb. 3, 112, 18)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어구 세메이가 카이 테라타(표적들과 기사들)에서 발견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세메이온은 70인역본에서 약 12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오트의 역어이며, 이 히브리어 처럼

(a)  '표적' sign, '특징', '표' mark, '징후' token.

(b)  '기적의 표적' miraculous sign, '기적' miracle을 의미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세메이온은 신약성경에서 77회 나온다.

(a)  ①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세메이온은 어떤 사람을 알아 볼 수 있는(눈에 보이는)표시 sign이다. 예를들면, 마 26:48에서 배신자가 성전 파수꾼에게 예수님을 넘겨 줄 때의 입맞춤(사전에 합의한 표시임) 혹은 눅 2:12에서 갓 태어난 구세주임을 지적해주는 말구유("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에 대해 1Q 27Ⅰ1:5; 출 3:12; 삼상 2:34; 삼상 14:10를 참조하라)가 세메이온이다.

경고의 '징조' omen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며, 대개 우주적 성질을 띠며, 역사의 종말을 알리는 것이다(막 13:4; 눅 21:7). 혹은 인자의 임하심과 세상의 끝(세대의 완성)에 징조가 있다(마 24:3). 이때 "메시야의 발자국"과 함께(m. sota 19:15) 전쟁의 무질서와 기근, 온역, 지진이 있으며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눅 21:11)가 있을 것이며, "일월 성신에 '징조'"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구약성경의 영향이다(참조: 막 13:24이하와 병행구에서 사 13:10; 사 34:4과 행 2:19에 인용된 요엘 3:3). "여호와의 날"에 수반하는 현상은 마지막 때의 세대에게 경고의 표시로서 삽입적이고 법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표적"은 이해되지 않는다(마 16:3). 파루시아의 중대한 시점은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나타나는 것인데(마 24:30), 이것은 완성을 가리키며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으며, 또 다니엘이 밤에 이상 중에 본 종말론적 심판관의 도래 및 즉위와 관련된다(단 7:13이하; 슥 12:10-14). 예수님 자신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비방을 받는 표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세움 받는다; 예수님의 사역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드러낼 것이며, 이 마음들은 그들 자신의 종말론적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② 세메이온, 하나님의 주권의 은혜로운 의를 드러내고 믿음을 전제로 하는 능력의 역사(뒤나미스)인 예수님의 치유의 기적과는 대조되어,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세주 혹은 선지자임을 확증해주는 기적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표적들은 믿음을 일깨우기 위해 의도되며(참조: 출 4:1-9), 간청된다기 보다는 강력히 요구되거나 촉구된다.

지팡이를 뱀으로 변하게 한 기적이 한 예이다(출 3:12; 출 4:1-5; 출 7:8이하); 애굽의 재앙들도 하나님을 지시하는 표적들이다(출 7:3; 출 10:2; 신 7:19; 신 26:8; 참조: 행 7:36). 유대 전쟁 이전에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심을 증명하려는 의도에서 "자유의 표적들"을 약속하면서 나타났다(요세푸스 B.F.ⅱ259: Ant. xx. 168). 이들이 약속한 기적들의 상징적인 특징은 모세나 여호수아의 행위들과 일치한다는 것이었다(참조: Ant. xx. 97.과 수 3:7; xx. 169이하와 수 6:8이하). 그러나 요세푸스는 그들을 사기꾼이라고 비난하였다(Ant. xx. 167; B.J.ⅱ259-61). 막 13:22과 마 24:24은 거짓 선지자들과 메시야들에 대해 경고한다. 그들은 심지어 택함 받은 백성까지도 속이려고 큰 포적들과 이적들을 일으킬 것이다(참조: 신 13:1-4). 그들의 활동무대는 광야이다(마 24:26; 참조: B.J.ⅱ259).

예수님은 "하늘로서 (즉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표적"을 행하라는 요구를 강력하게 거부하신다(막 8:11이하; 마 16:1; 눅 11:16; 참조: 마 12:38); 이 요구는 단지 패역한 세대의 믿음의 결핍을 드러낼 뿐이다(막 8:12; 마 16:4; 마 12:39). 마 12:39; 마 16:4; 눅 11:29에 따르면 이 세대는 오직 "요나 선지자의 '표적'"밖에 받을 것이 없다. 이것은(Q에 따르면) 이방의 도시 니느웨에서 요나의 성공적인 회개에의 요청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스라엘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회개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마 12:41; 눅 11:32). 마 12:40에 따르면 물고기에 의해 기적적으로 구조된 것이 이 "요나의 표적"이며 따라서 인자가 "땅 속에" 있는 것, 즉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킨다. 아마도 이 해석은 눅 11:30에도 적용될 수 있으며(요나는 니느웨에게 표적이 되었다). 요한복음에서는 나흘 만에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일이(요 11:39) 요나의 표적 대신 나온다. 마지막으로 헤롯 안디바는 예수님에게서 (확증해주는) 표적을 헛되이 기대했다(눅 23:8). 마 4:1-11 병행구의 마귀의 요구들도 표적을 요구한 것으로 이해되며, 예수님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도전한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막 15:30 병행구). 폭풍을 꾸짖으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소량의 떡으로 많은 무리를 먹이신 것과 같은 기적들은 출 14-16과 관련이 있으므로 확증의 표적이라는 인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지만, 그러한 기적들은 도움을 주시는 자비의 행위로 묘사된다(막 4:38이하; 막 6:34, 막 6:50이하). 마가복음의 끝맺음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약속하시는데, 이 기적들은 제자들이 보고하였고 교회에서 은사들 가운데서 나타났다(막 16:17; 참조: 눅 10:17-19; 고전 12:4이하, 고전 12:28이하). 그러한 기적들은 선포를 눈에 보이도록 확증하기 때문에 "표적들"이라 불리운다(막 16:20).

③ 비록 요한도 역시 표적들과 표적에 대한 요구에 포함되어 있는 본질적인 문제들을 인식하지만(요 2:18, 요 2:23; 요 4:48; 요 6:2, 요 6:14, 요 6:30)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들을 세메이아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기적들을 통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의 사명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요 2:11; 요 20:30이하). 세례(침례)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않은 반면에(요 10:41), 많은 위대한 표적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특징짓는다(요 3:2; 요 7:31; 요 9:16; 요 11:47; 요 12:37). 부활하신 예수님의 나타나심도 이와 유사하게 이해되어야 한다(요 20:30). 요한복음의 기적들은 기적 자체를 넘어 종말론적 구세주를 지시하며(요 6:14; 요 7:31; 요 12:18), 그에 대한 믿음을 가져오는 것이다(요 2:11, 요 2:23; 요 4:53; 요 9:35; 요 11:47이하; 요 20:30이하); 그러나 이 믿음은 피상적이거나 자기 중심적인 채로 남아있기도 하고(요 4:48; 요 6:14, 요 6:30) 거부되기도 한다(요 12:37, 요 12:39). 그리고 예수님이 일개 사기꾼이라는 확신을 표적들이 항상 제거할 수는 없었다(요 11:47이하, 신 13:1-4을 따름). 따라서 표적이 의미하는 것, 즉 기적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며, 그의 "팔"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것이 간과된다(요 12:37이하, 사 53:1의 인용; 참조: 요 5:20, 요 5:36; 요 9:3이하; 요 17:4). 표적들을 해석하는 구절들을 제쳐놓더라도 요한은 표적들의 확증하는 능력을 각각의 특성들로써 설명하는데, 그것의 목적은 모세, 엘리야, 엘리사의 기적들 같은 고전적인 실례들을 무색케 하는 것이다(참조: 요 2:1-11; 요 4:46-54; 요 5:1-7과 왕상 17장; 왕하 5장, 요 6:9과 왕하 4:42이하, 요 6:31과 출 16:4, 출 16:13-15). 요 2:11; 요 4:54에서 시작된 표적의(단속적인) 계수는 모세(출 4:8)와 엘리야(왕상 17장)의 처음 두 표적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찰하면 이 표적들은 요한의 신학과 일치하고 빈틈을 드러내지 않는다.

④ 사도행전도 역시 예수님과 사도들의 기적들을 확증하는 표적으로 이해하지만 실제로 예수님의 표적에 대해서는 뒤나메이스라는 용어가 더 많이 사용되고 또한 세메이아 카이 테라타(표적과 기사)에 부가되어 나타나기도 한다(행 2:22; 행 8:13). 자주 사용된 "표적과 기사"라는 어구는 두 표현 사이의 차이점이 모호해져서 "기사와 표적"이라는 순서도 역시 가능하다(행 2:22, 행 2:43; 행 6:8; 행 7:36).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 가운데서 그를 통하여 행하신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그들 앞에 "입증되셨다"(행 2:22). 이 표적들의 계시적·도구적 성격은 선교사역의 이상에 기초하며 모세를 향하여 있으며, 연속성을 위해 의도되어 있다: 모세는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으니" 하나님 자신과 같이 임하는 선지자임을 지적하는 것이다(행 7:36이하): 하나님께서 이 선지자에게 능력을 부여하셔서 보내셨기 때문에(신 18:15) 하나님은 또한 예수님을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표적의 근원이시다. 표적과 기사들은 사도들에 의해(행 2:43; 행 5:12), "집사" 스데반에 의해(행 6:8), 빌립에 의해(행 8:6; 행 8:13),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행 14:3; 행 15:12) 행해졌다. 비록 하나님 자신께서 사도들의 표적들에서 역사하시지만 행 4:30에 따르면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적을 행한다(참조: 행 3:6과 행 2:21이하). 높임 받으신 그리스도로서 예수님은 그의 사자들을 통하여 치유하시고(행 9:34), 따라서 예수님 자신이 그를 선포하는 말씀의 진실됨을 확증하신다(행 14:3). 이 표적들은 말씀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앉은뱅이를 고친 일(행 3:1-8)은, 심지어 적대자들까지도 시인하였으며, 그들이 말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모든 거민에게 알려진 표적으로서(행 4:16), 말씀 선포의 진실됨에 관한 문제를 야기시킨다. 이 표적들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며(행 8:6; 참조: 행 9:35, 행 9:42) 시몬 마구스의 마술을 패배 시킨다(행 8:13). 그러나 이 표적들은 애굽의 술사들에 대한 모세와 아론의 승리 같은 단순한 시위적인 기적들도 아니고(참조: 출 7:1-13), 응징의 기적들도 아니며(행 5:1-11은 세메이온을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치유이다(행 4:22; 행 9:32-42). 욜 2:30을 인용한 행 2:19에서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는 실로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세메이아)"로 보완된다. 여기서 세메이아는 아마도 예수님과 사도들의 기적을 가리키는 것 같다. 행 15:12에 언급된 "표적과 기사"는 바울과 바나바의 이방인 가운데서 성공적인 선교사역을 가리킨다.

(b)  ① 바울에게 세메이온은 서신을 끝맺을 때 자신의 서명과 같은 (외적) '표시'이기도 하다(살후 3:17). "할례의 표"는 아브라함을, 믿는 이방인들의 조상으로 만든 "믿음의 의의 인"이다(롬 4:11).

②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지만(고전 14:22)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그것을 하나님에 의해 유발된 의사소통으로 인식하지 못하며(참조: 고전 14:21에 인용된 사 28:11), 그것을 조롱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완악함과 구제할 도리가 없는 절망적인 상태를 드러낸다.

③ 마지막으로 세메이온은 임박한 구속과 하나님의 활동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기적'일 수 있다. 바울은 "표적을 구하는 것"을 유대인의 종말론적 기대의 특징으로 간주한다(고전 1:22); 십자가의 선포를 받아들이는 것은 헬라인들이 지혜를 사랑하는 것 만큼이나 똑같이 거리끼는 것이 된다(참조: 막 8:11이하). 고후 12:12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가운데서 그를 통하여 행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참된 사도의 표"라고 말한다. 그 표들은 바울이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 평가는 어리석은 짓이다(고후 12:11), 왜냐하면 이 표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바울 사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복음의 진실을 증거하고 복음 선포자를 정당화 시켜준다. 사도의 표는 카리스마적인 기적들 뿐만 아니라 회중들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 성공적인 선교사역을 가리키기도 한다(참조: 고후 3:2).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때 기적을 수반할 것이다. 바울은 신 13:1-4을 따라서 그런 기적들을 "거짓 '표적'과 기사"라고 부른다(살후 2:9). 교회의 분당은 믿음을 시험하는 역할을 할 수 있으므로 필요한데,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종말론적으로 상징적인 특성을 가진다(고전 11:18이하).

히 2:4에 따르면 예수님의 선포와 그의 최초의 경청자들의 선포는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 증거되었다(참조: 행 2:22).

(c)  요한계시록 기자는 통렬한 묵시적 표적들을, 즉 극적인 사건들을 가져올 상징적으로 의도된 하늘의 장면들을 본다: 즉 초승달 위에 있는 한 여자(계 12:1), 그녀의 대적자 용(계 12:3), 일곱 대접을 가진 천사들(계 15:1)이다. 이 표적들은 또 기적적인 일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마지막 때에 거짓 선지자들이 이 기적적인 일들을 행하여 사람들이 "짐승"을 섬기도록 유혹한다(계 13:13, 계 13:14; 계 19:20). 이 짐승에게서 나온 영들도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종말론적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은다(계 16:14).(O. Betz).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K. H. Rengstorf; O. Hof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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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vxa(1391, 독사) 광채, 영광, 영화, 명성.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독사(Homer이래)는 도케오(dokevw, 1380)에서 유래했으며, 기본 의미는 '생각하는 것, 의견'이다. 이것은 두 가지 형태를 취하는데, '나는 생각한다'라는 도케오의 의미에서 '내가 가지는 의견'을, '나는 ~라고 간주한다'라는 도케오의 의미에서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가지는 의견'을 의미한다.

(a)  이 단어는

① '기대, 의견, 견해, 단순한 추측', 철학적 주의.

② 좋은 평판, '명성, 칭찬'.

③ '빛, 광채'를 의미한다.

(b)  이 단어는 요세푸스와 필로의 작품에서,

① '견해'나 '주의',

② '명예'나 '영광',

③ '장려' 그리고

④ '하나님의 광휘'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독사는 70인역본에서 400회 이상 나오며, 25개의 히브리어를 번역하며, 주로 카보드(영광)를 번역한다.

독사는 70인역본에서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카보드와 동일한 의미를 나타낸다. 독사는 '견해, 의견'(전 10:1; 집회서 8:14; 마카베오사서 5:17), '장려, 권능, 세상적 장엄'(사 17:4; 사 35:2; 학 2:3),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사 24:7이하; 사 29:3; 사 42:8),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사 2:10, 사 2:19, 사 2:21; 출 33:22; 시 102:15) 등을 의미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독사는 신약성경에서 167회 나오며, 한글개역 성경은 한번 '광채'로 번역하고, 모두 '영광'으로 번역했다.

(a)  독사는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나타낸다. 신약성경에서 독사의 용법은 일반 헬라어 용법보다 70인역본을 따른다. 이 단어는 '평판'과 '능력'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표현한다. 따라서 이 용어는 헬라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성서적 용어가 되었다.

신약성경에서 70인역본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 영예', '하나님의 장엄',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가견적 광채는 고전적인 것이 아니며, 단지 문맥에서 차이를 식별해야 한다. 그렇지만 항상 표현되는 것은, 비록 신현현의 가시적 요소를 여러 가지로 강조할지라도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다. 예를 들면,

행 7:2에서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본 "하나님의 영광",

눅 2:9의 크리스마스 기사에서 "주의 영광",

눅 9:31이하; 벧후 1:17의 변형에 대한 기사에서 "지극히 큰 영광",

행 22:11의 다메섹 도상의 경험 "그 빛의 광채",

계 15:8; 계 21:23의 하늘의 성전과 하늘의 도성에서 "하나님의 영광" 등이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이미 실재하는 것을 실제적 인정과 감사로 고백하거나(행 12:23; 롬 4:20; 계 16:9) 찬양하는 것(눅 2:14; 눅 19:38; 롬 11:36; 롬 16:27; 엡 3:21; 빌 4:20; 딤전 1:17; 계 4:9; 계 7:22 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송영은 에스틴(ejstivn)을 전제한다(갈 1:5; 벧전 4:11).

요한의 독특성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키는 용법과 인간이나 하나님이 부여해 주는 명예나 찬양에 대한 용법을 거의 순수하게 병행시킨다는 사실이다(요 12:41; 요 12:43).

(b)  독사는 예수님의 영광을 표현한다. 신약성경에서 독사를 하나님과 관련시킨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관련시킴으로써, 결정적인 단계를 취한다.

이 관계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표현되며,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의 전동력론(whole dynamism)은 독사의 용법에 반영되어 있다.

롬 6:4에서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영광에 의해 다시 살아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딤전 3:16에서는 영광 속으로 올리워진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행 7:55에서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광의 오른 편에 계신 그를 보았다.

베드로전서에서 그의 "고난 후에 받으실 영광"(벧전 1:11)과 그에게 "영광을 주신 하나님"(벧전 1:21)에 대해 말한다.

히 13:21에 의하면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지는 것처럼 그에게 돌려진다. 그는 영광의 주님이시다(고전 2:8; 약 2:1)

종말론적인 소망(참조: 사 40:5)은 우리의 위대하신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나타남이다(딛 2:13; 벧전 4:13; 벧전 5:1; 막 13:26등). 이 언급들의 대부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며, 독사가 성육신한 예수님에 적용된 것은 매우 드물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이 단어는 재림(parousia)과 관계되어 있다(막 8:38; 막 10:37; 막 13:26과 병행구, 마 19:28; 마 25:31).

누가복음에서 독사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변모 기사에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탄생에 독사의 계시(눅 2:9)는 천사들의 출현과 같이 하늘나라에서 그의 오심을 지적한다. 요 17:5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 전 "하나님과 함께 가졌던 독사"를 언급한다.

요한복음에서, 오직 믿음으로 또한 성육신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다(요 1:14; 요 2:11; 요 11:40). 그리스도의 이 독사는 본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요 7:39; 참조: 요 12:23; 요 13:13; 요 16:14; 요 17:1, 5의 기도). 영광으로 들어간 것은 십자가에서이다(요 13:31). 여기에서 하나님의 독사가 고백되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 신자들이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은 이 수난의 빛에서이다.

(c)  독사는 신자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강조점은 하나님의 독사를 보는 것에 있다(참조: 레 9:6; 사 6:1; 사 35:2). 랍비들에게 있어서도 영원한 행복은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강조점은 참여에로 옮겨진다.

빌 3:21에서 부활 때에 몸은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영광의 몸으로 변모된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화롭게 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 영광에 참예할 것이다(골 3:4).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을 것이다(참조: 롬 8:17). 그리스도는 영광의 소망이다(골 1:27).

독사에의 참여는 그리스도에의 참여로 말미암는다. 영원한 영광이 우리의 부르심의 목적이다(벧전 5:4; 고전 5:10; 살전 2:12; 살후 2:14; 고후 4:17; 딤후 2:10). 여기에서부터 그 영광을 누리는 것이 신자의 목적의 하나이다(롬 5:2). 이 죄많은 시대에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한다(롬 8:18; 롬 8:21). 욕된 것으로 심겨진 것이 영광스런 것으로 다시 산다(고전 15:43). 그렇지만 미래의 영광은 그 근거를 하나님의 목적과 행동에 두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이미 영화롭게 되었다고 말해질 수 있다(참조: 롬 8:29 - 롬 8:30; 고전 2:7). 성령은 영광을 가져오는 새로운 것의 보증이다(참조: 엡 3:16; 벧전 4:14).

이것은 특히 고후 3:7이하에서 분명해진다. 여기에서 모세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새롭고 더 큰 영광과 대조시키며,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신자들이 어떻게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되는가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움직임은 현재의 영광에서부터 종말론적인 완전한 영광에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의 사역에 의해 실행된다. 왜냐하면 복음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고전 4:6).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17장에는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것이며(요 17:24), 그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되며(요 17:10), 그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을 그들에게 주신다(요 17:22)고 언급되어 있다.

(d)  독사는 천사들의 영광을 표현한다.

겔 9:3 등에서 그룹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고 유대교에서처럼 천사가 영광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히 9:5은 영광의 그룹에 대해 언급한다: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계 18:1은 천사의 영광에 대해 언급한다: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유다서와 베드로후서에서 천사들을 '독사이'라고 부른다. 유 1:8에서는 "영광", 벧후 2:10에서는 '영광있는 자들'로 번역했다.

(e)  독사는 인간 또는 세상 권세에 대하여 사용되었으며, '화려, 장대, 탁월' 등을 나타낸다. "천하 만국과 그 영광", 즉 그것들의 자원, 부, 그들 도성들의 장대함과 위대함, 그것들의 비옥한 땅, 그것들의 많은 인구(마 4:8; 눅 4:6), "땅의 왕들의 영광"(계 21:24), "만국의 영광"(계 21:26), 왕의 영광, 찬란한 의복 등(마 6:29; 눅 12:27), "육체의 영광"(벧전 1:24), "직분의 영광"(고후 3:8 - 고후 3:11), "여자는 남자의 영광"(고전 11:7), "땅에 속한 자의 영광"(고전 15:40), "해, 달, 별의 영광"(고전 15:41)을 나타낸다.(참조: Walter Bauer; J.H.Thayer; S.Aalen; G.Kitt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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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erovw(5319, 파네로오) 계시하다, 알리다, 보여주다, 나타내다.

1. 고전 헬라어 문헌 

파네로오는 파네로스(fanerov", 5318:보이는, 명백한, 뚜렷한)에서 유래했으며, '보이게하다, 계시하다, 나타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감추어져 있거나 알려지지 않은 것을, 명백하게, 또는 눈에 보이게, 또는 알려지게 하거나 말이든 행위든 또는 어떤 방식으로 든지 명백히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파네로오는 70인역본에서 렘 33:6에 한번 나타나며, 갈라(나타나다, 보여주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3. 신약성경의 용법 

파네로오는 신약성경에서 47회 나타나며, '계시하다, 알게하다, 보이다, 나타내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a)  마가복음에서 파네로오는 3회 나타난다. 막 4:22에서 속담에 담긴 비유의 숨은 뜻을 보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막 16:12; 막 16:14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것을 언급한다.

(b)  바울은 파네로오와 아포칼륍토(ajpokaluvptw, 601)를 동의어로서 사용하였다. 이것은 특별히 롬 1:17과 롬 3:21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롬 1:19과 고전 4:5에서 파네로오는 '보이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전자에서는 창조에서의 "하나님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성"의 계시에 관하여 언급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후자에서는 모든 감추어진 것들이 드러날 때 임할 심판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여기에는 그가 때가 이르기 전에 심판을 공표하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의 주관에 맡긴다는, 아울러 그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때이른 칭찬을 받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실제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다른 언급들에서 요점은 복음 안에서의 계시이다. 재귀적 용법은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 특별한 일들은 항상 계시된다. 롬 3:21은 롬 1:17을 되풀이 하는데 현재형 아포칼륍테타이("나타나서")를 완료형 페파네로타이("나타났으니")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의 특별한 때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에 의한 칭의에 대한 단 한번의 계시를 의미한다(참조: 롬 3:24 - 롬 3:26; 롬 1:3이하).

바울은 파네로오를 고린도후서에서 9회나 사용하고 있는데, 특히 논쟁 문맥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는 이 단어를 그의 설교를 통하여 임하거나 일어나는 계시에 대해(고후 2:14; 고후 11:6), 바로 그의 생활에 대해 사용했다. 그 자신의 사도적 생활 방식은 그 자체가 그리스도 자신의 생활 방식과 비교 된다는 데에서 그리스도의 역설적 계시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 그의 대적들을 포함하여 - 하나님께서 성공 중에 자신을 나타내실 것을 기대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계시는 다르게 임한다. 바울의 사도적 방식은 고난과 고통의 방식이어서,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 4:10 이하).

다른 한편으로, 교회 안에 믿는 남녀가 있다는 사실로 그들이 그리스도로부터 온 편지이며, 바울의 대적들이 자랑하는 신임장과는 다르게 바울의 사도직을 입증하는 분명한 증거임을 알 수 있다. 고후 5:10 이하에서 파네로오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만인이 출두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이 동사는 3회 나타나는데, 우리가 출두할 뿐만 아니라(10절), 우리가 누구인지 하나님께 알리어진다(ll절a). 바울은 여기에 그것이 독자들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는 소망을 덧붙였다(11절b). 고후 7:12에서 바울은 자신이 기록한 의도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 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다"하고 선언하였다. 비록 바울의 웅변술이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사도직과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 명백해지었다는 소망을 표현한다(고후 11:6).

(c)  그외의 바울 서신에서도 파네로오와 아포칼륍토는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골 1:25 이하와 엡 3:5을 비교하면 할 수 있다. 계시는 선포에서 발생한다(골 1:25이하; 골 4:4; 롬 16:25 - 롬 16:27). 엡 5:13 이하에서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빛의 관점에서 취급되었다: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계시의 사상은 이 세대들에게는 감추어졌으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어진 신비라는 관점에서 훨씬 더 발전되었다(골 1:26; 골 3:4; 골 4:4; 참조: 엡 3:5; 엡 6:19).

바울은 딤전 3:16에서 원시 기독교 찬송가를 인용하여 신비의 주제를 채택하고 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여기서 파네로오는 성육신(incarnation)을 말한다(참조: 요 1:31; 히 9:26; 벧전 1:20; 요일 1:2; 요일 3:5; 요일 3:8에서의 예수님 성육신적 사역을 뜻하는 용례). 군드리(Gundry)는 이 구절이 다음과 같은 사실에 비춰볼 때, 승천에 이르기까지의 전체적인 지상 사역을 언급한다고 생각한다.

① 인간의 생애를 뜻하는 사르크스(savrx, 4561)를 사용했다는 점(참조: 갈 2:20; 빌 1:22, 빌 1:24; 히 5:7).

② '태어난다'와 같은 보다 특정한 동사 대신에 '나타난다'라는 일반적인 동사를 사용했다는 점,

③ '영광 중에 받아들여졌다'라는 종합적인 언급을 했다는 점. 이렇게 해서 에파네로데는 행동이 전체로서 생각되었음을 나타내는 단순 과거 수동태이다.

또한 딤후 1:1O에서 화네로오는 성육신의 의미를 뜻하는 말로도 사용되는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권능 안에서 복음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목회서신들에서 이 동사가 나오는 다른 구절들에서도 성육신(incarnation)을 염두에 두고 있으나, 이제 그것은 선포에 의해 전달된다: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딛 1:3).

(d)  파네로오는 히브리서 9장에서 2회 나오나 의미는 약간 다르다. 히 9:26에서 성육신에 관하여 언급되어 있는데, 성육신의 목적은 구약성경의 희생제사와 속죄(의식)일을 능가하는 속죄 희생제를 드리려 함이었다. 그리스도의 현현은 유일회적이며 다시 되풀이 될 수 없다: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찌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5 이하). 역으로, 저자는 앞서 논하기를 법궤의 구조(그리고 암암리에 성전)와 대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성소 내부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 옛 언약의 종교와 의식의 불완전성의 증거라 한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히 9:8).

(e)  파네로오는 또한 베드로전서에서도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말로 2회 나오는데,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삶에서와 그의 재림에서의 두 가지 현현에 관하여 언급되었다. 벧전 1:20에서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라고 하였고, 벧전 5:4에서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다"고 하였다.(참조: C.Brown).

(f)  요한의 기록에서 파네로오는 실제로 아포칼륍토(ajpokaluvptw, 601)의 동의어로 자주 사용되었는데, 아포칼륍토는 사 53:1을 인용하고 있는 요 12:38에서만 사용되었다.

요 1:31에서 세례(침례) 요한이 와서 물로 세례(침례)를 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다. 요 2:11에서 가나의 표적이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었다.

요 7:4에서 "세상", 곧 모든 사람의 눈 앞에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격려하며 말하기를,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였다. 그러나 그 말은 믿음의 부족을 드러낸 것이며(요 7:5), 예수님은 아직 그의 때가 오지 않았을 때에 그들의 권면을 거절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때, 그리고 세상을 따르는 그들의 태도는 항상 여기에 있다(요 7:6).

예수님은 하나님의 실체, 하나님의 이름(요 17:6), 하나님의 하시는 일(요 3:21; 요 9:3)을 나타내신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님의 모든 행위는 계시라고 부를 수 있다(요 2:11).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실체는 증거에서 계시된다. 예를들면, 세례(침례) 요한의 증거 등이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요 1:31). 요 21:1("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과 요 21:14(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에서 화네로오는 그의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의 자기 계시, 곧 부활하신 주님의 나타남을 의미한다.

요한일서에서도 화네로오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예수님의 사역는 계시로 묘사되어 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요일 3:5).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 그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 4:9; 요일 3:16). 그 목적이 살리려 한 것이라면 전계시(全啓示)는 역시 생명(조에, 요일 1:2)으로 요약될 수 있다: 요한은 예수님 안에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고 하였다. 그것은 또한 생명의 말씀의 내용이다(요일 1:1).

요일 2:19에서 공동체를 떠나는 불신자들의 행동은 그들이 참으로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파네로오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요일 2:28: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요일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요한계시록에도 2회 나타난다. 계 3:18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요하신 그리스도로부터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는 권면을 받는다. 여기에는 자기 만족적인 번영에 빠져 결국 교회의 참된 상태에 눈이 멀어버린 그 교회의 미지근한 태도가 언급되어 있다. 계 15:4에서 이긴 자들은 "오직 주만이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는 사실을 찬송하고 있다.(참조: R.Bultmann/D.Luhrmann; C.Br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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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steuvw(4100, 피스튜오) 믿다 believ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피스튜오(Aeschyl., Soph.,이래)는 피스토스(pistov", 4103)에서 유래했으며, '신뢰하다, 의지하다, 순종하다, 믿다, 위탁하다, 신임하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피스튜오는 70인역본에서 약 90회 나오며, 주로 아만(진실하다, 의지할만하다, 신실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피스튜오는 신약성경에서 약 250회 나오며, 신약성경에서 피스튜오는 일반 헬라어 용법에서와 거의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a)  피스튜오는 '의지하다, 신뢰하다'를 의미한다. 말씀(요 4:50), 하나님(행 27:25)에 대해 사용되었다.

(b)  피스튜오는 '믿다'를 의미한다. 말이나 말하는 자에 대해 사용되었다(막 13:21; 요 4:21).

(c)  피스튜오는 인격이나 사물의 여격(요 4:21; 행 27:25; 계 4:17), 사물의 여격(요 4:50; 행 24:14), 사물의 대격(요 11:26; 고전 13:7)으로 구성되어 있다.

(d)  피스튜오는 수동태로(믿게되다) 나타난다(살후 1:10; 딤전 3:16).

(e)  피스튜오는 대격이나 여격과 더불어 에피(ejpiv, 1909)와 함께(롬 4:5; 롬 4:24; 마 27:42; 행 9:42; 행 11:17; 행 16:31; 행 22:19), 엔(ejn, 1722)과 함께(막 1:15) 사용되었으며, '~을 믿다'를 의미한다.

(f)  피스튜오 에이스는 '~을 믿다' believe in는 의미로서(예: 갈 2:16; 요 1:12; 요 3:18) 일반 헬라어와 70인역본에서는 없는 독특한 것이며, 교회 선교의 문맥에 나타난다.

(g)  예수님의 역사에 있어서 특별한 사건들(살전 4:14; 롬 10:9), 기독론적인 문장(요 20:31)과 믿음을 연관시키는 호티 문장들(피스튜오 호티: …을 믿다 believe that…)은 헬라 교회의 언어 용법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다. 이 문장들은 특별한 역사적 내용을 기독론적 고백에 결합시킨다.

(h)  피스튜오는 '자신을 위탁하다'를 의미하며(눅 16:11; 요 2:24), 수동태도 이와 같이 사용되었다(롬 3:2; 고전 9:17; 갈 2:7; 살전 2:4; 딤전 1:11; 딛 1:3).(참조: J.H.Thayer; R.Bultmann; O.Mich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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