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12.31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요3.그선한힘에 고요히감싸여...참고.사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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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능력으로(본 회퍼)]]

#1.그 선한힘에 고요히 감싸여  그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나 그대들과 함께 걸어가네  나 그대들과 한 해를 여네

#2.지나간 허물 어둠의 날들이  무겁게 내영혼 짓눌러도  오주여 우릴 외면치 마시고  약속의 구원을 이루소서

#3.주께서 밝히신 작은 촛불이  어둠을 헤치고 타오르네  그 빛에 우리 모두 하나되어  온누리에 비추게 하소서

#4.이고요함이 깊이 번져갈 때  저 가슴 벅찬 노래 들리네 다시하나가 되게 이끄소서   당신의 빛이 빛나는 이밤

--그 선한힘이 우릴 감싸시니  믿음으로 일어날일 기대하네 주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 하루 또 하루가 늘 새로워


[[감사하신 하나님 에벤에셀하나님]]

개역개정]요3장 


예수와 니고데모
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22.○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23.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4.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
31.○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32.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33.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34.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35.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36.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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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새번역]요3장 

예수와 니고데모

1.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대 의회원이었다.
2. 이 사람이 밤에 예수께 와서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같이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하시는 그런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4. 니고데모가 예수께 말하였다.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5.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7. 너희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을, 너희는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8.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9. 니고데모가 예수께 묻기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니,
10.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
11.○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우리가 본 것을 증언하는데,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2.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인자 밖에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15.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17.○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18.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20.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21.그러나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한다
22.○그 뒤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 지방으로 가서, 거기에서 그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세례를 주셨다.
23.살렘 근처에 있는 애논에는 물이 많아서, 요한도 거기에서 세례를 주었다. 사람들이 나와서, 세례를 받았다.
24.그 때는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기 전이었다.
25.○요한의 제자들과 한 유대 사람 사이에 정결 예법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26.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와서 말하였다. "랍비님, 보십시오, 요단 강 건너편에서 선생님과 함께 계시던 분, 곧 선생님께서 증언하신 그가 세례를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로 모여듭니다."
27.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28.너희야말로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분보다 앞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한 말을 증언할 사람들이다.
29.신부를 차지하는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크게 기뻐한다. 나는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30.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하늘로부터 오신 이
31.○위에서 오시는 이는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여서, 땅의 것을 말한다. 하늘에서 오시는 이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32.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33.그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참되심을 인정한 것이다.
34.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을 아낌없이 주시기 때문이다.
35.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여, 모든 것을 아들의 손에 맡기셨다.
36.아들을 믿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는 도리어 하나님의 분노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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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V]요3장
1.  Now there was a man of the Pharisees named Nicodemus, a member of the Jewish ruling council.
2.  He came to Jesus at night and said, "Rabbi, we know you are a teacher who has come from God. For no one could perform the miraculous signs you are doing if God were not with him."
3.  In reply Jesus declared, "I tell you the truth, no one can see the kingdom of God unless he is born again."
4.  "How can a man be born when he is old?" Nicodemus asked. "Surely he cannot enter a second time into his mother's womb to be born!"
5.  Jesus answered, "I tell you the truth, no one can enter the kingdom of God unless he is born of water and the Spirit.
6.  Flesh gives birth to flesh, but the Spirit gives birth to spirit.
7.  You should not be surprised at my saying, `You must be born again.'
8.  The wind blows wherever it pleases. You hear its sound, but you cannot tell where it comes from or where it is going. So it is with everyone born of the Spirit."
9.  "How can this be?" Nicodemus asked.
10.  "You are Israel's teacher," said Jesus, "and do you not understand these things?
11.  I tell you the truth, we speak of what we know, and we testify to what we have seen, but still you people do not accept our testimony.
12.  I have spoken to you of earthly things and you do not believe; how then will you believe if I speak of heavenly things?
13.  No one has ever gone into heaven except the one who came from heaven -- the Son of Man.
14.  Just as Moses lifted up the snake in the desert, so the Son of Man must be lifted up,
15.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may have eternal life.
16.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17.  For God did not send his Son into the world to condemn the world, but to save the world through him.
18.  Whoever believes in him is not condemned, but whoever does not believe stands condemned already because he has not believed in the name of God's one and only Son.
19.  This is the verdict: Light has come into the world, but men loved darkness instead of light because their deeds were evil.
20.  Everyone who does evil hates the light, and will not come into the light for fear that his deeds will be exposed.
21.  But whoever lives by the truth comes into the light, so that it may be seen plainly that what he has done has been done through God."
22.  After this, Jesus and his disciples went out into the Judean countryside, where he spent some time with them, and baptized.
23.  Now John also was baptizing at Aenon near Salim, because there was plenty of water, and people were constantly coming to be baptized.
24.  (This was before John was put in prison.)
25.  An argument developed between some of John's disciples and a certain Jew over the matter of ceremonial washing.
26.  They came to John and said to him, "Rabbi, that man who was with you on the other side of the Jordan -- the one you testified about -- well, he is baptizing, and everyone is going to him."
27.  To this John replied, "A man can receive only what is given him from heaven.
28.  You yourselves can testify that I said, `I am not the Christ but am sent ahead of him.'
29.  The bride belongs to the bridegroom. The friend who attends the bridegroom waits and listens for him, and is full of joy when he hears the bridegroom's voice. That joy is mine, and it is now complete.
30.  He must become greater; I must become less.
31.  "The one who comes from above is above all; the one who is from the earth belongs to the earth, and speaks as one from the earth. The one who comes from heaven is above all.
32.  He testifies to what he has seen and heard, but no one accepts his testimony.
33.  The man who has accepted it has certified that God is truthful.
34.  For the one whom God has sent speaks the words of God, for God gives the Spirit without limit.
35.  The Father loves the Son and has placed everything in his hands.
36.  Whoever believes in the Son has eternal life, but whoever rejects the Son will not see life, for God's wrath remains on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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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와 예수(요 3:1-21)
앞장의 끝에서는 예루살렘에 머무시는 그리스도에게 몇몇 사람이 왔는데, 여기서 상당한 지위에 있는 한 사람이 그에게 왔다. "한사람"이지만, 구원을 위해서라면 먼 길을 갈 만한 값어치가 있다.
Ⅰ. 니고데모란 어떤 사람인가?
...많은 권세자가 주께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 다소의 권세를 지닌 한 사람이 있다. "많은 지도자"가 아니라 한 "바리새인"이다.
1. 이 사람은 "바리새인 중 한 사람"으로, 학식을 가진 선생이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교육을 받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이란 이야기는 하지 말자. 바리새파의 원리들과 그 파의 특색은 문자를 넘어서 참생명Q을 믿고 영접함으로 동행하는 관계를 가장 중시하는  기독교의 정신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어서 그들은 더욱더 많은 규칙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고 있는가로 의로움 여하를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거만한 사상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에 복종하려 한 사람이 몇 명 있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진실로 최대의 반대자도 굴복시킬 수 있다.
2. 그는 "유대인의 관원"으로 유명한 산헤드린의 회원이고, 귀족이며, 추밀원 회원이요 이스라엘의 선생(디다스칼로스....랍비는 아님??)이다. 

---예루살렘에서는 권세 있는 사람이었다. 상황은 여의치 않았으나, 정말 제대로 진리따라 살아보려는 몇몇 관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당시의 풍조가 그들에게 너무 옥죄고 있어서 거의 바라는 바 선을 행할 수가 없었다. 당시 지배계급에 속한 자들은 다수라는 무기를 지나치게 휘둘렀으며, 부패한 자들처럼 세상과 어울려서, 바리새파사람들 틈에 섞여 있으면서 동시에 그들이 바라는 대로 행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계속 그의 직책에 있으면서, "바라는"것은 못했지만 "할 수 있는"한 선은 행할 수가 있었던 사람이다.
Ⅱ.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진지한 말(2절).
1. 그의 방문 시기를 보자. 그는 "밤에 예수에게 찾아 왔다."
(1) 그는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특별한 이야기를 했다. 

-- 그리스도의 공적인 설교를 듣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단독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이야기하기로 결심했다. 우리 자신의 문제에 대하여 유능하고 신앙이 돈독한 목사님들과의 개인적인 대화는 우리에게 매우 유익 되게 한다(말 2:7).
(2) 그가 이런 이야기를 "밤에" 했다는 것에 주목할 만하다.
① 그의 "신중성"과 "사려분별"통한 행위를 보여 준다. 

-- 그리스도는 온종일 공적인 일을 행하시고도, 예기치 않은 그의 야간 방문을 거절하지 않으셨다. 즉 쉬실 때이지만 맞아들였다. (우리 자신과 가족들의 개인적인 편리를 위해 빈번하게,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의 쉼을 침해해서는 곤란하다.) 그리스도에게는 많은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는 대제사장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몰래 그에게 왔는데, 만일 대제사장이 이 사실을 안다면 그를 그리스도보다 더 미워하게 될 지도 몰랐다.
② 그의 "열성적이고 재빠른" 행동. 

-- 니고데모는 사업가여서, 낮에는 그리스도를 방문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방문 시간을 저녁이나 밤의 휴식을 택하기로 했을 것이다. 

-- 다른 사람들이 잠자고 있을 때, 다윗이 명상에서 위로를 받은 것처럼(시 43:6; 119:148). 그는 지식을 얻고 있었다. 아마 그가 그리스도를 방문한 때는 그리스도의 표적을 본 바로 그 다음 날 밤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확신을 얻을 수 있는 첫 기회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가 이 도시를 조만간 떠날지도, 또는 이 축제 중에 무엇이 발생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결코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듣고 깨달은바를 더 확실히 확인하고 깊고 넓게 확장시켜 가는 것이 반드시 필요!!)) 또 밤중에는 그리스도와의 대화가 더 자유스러울 것이며, 그만큼 방해를 덜 받게 될 것이다. 

③ "두려움"과 "소심한" 행동이다. 

-- 그는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이 두려웠거나 부끄러워 밤중에 찾아갔다. 한 종교가 쇠퇴할 때는 관리들 중에서 특히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들이 대거 속출하는 데, 이들은 전에 자기들이 섬기던 종교보다 그리스도와 그의 종교에 더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첫째, 그가 비록 밤에 찾아갔지만, 그리스도는 그를 환영하고 그의 연약함을 용인했다. 

....그는 그의 "기질"을 존중했다. 그는 아마 성격 탓으로 소심하고 지위와 직책에서 오는 유혹도 받고 있었을 것이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자기 제자들에게 모든 사람의 본의 되며, 비록 연약하지만 이들의 초창기 신앙을 격려토록 가르쳤다. "바울도 유명한 사람들에게 사사로이 가르쳤다"(갈 2:2).
둘째, 비록 그가 "밤중에" 왔지만, 그러나 이 후에 기회가 있을 때 그는 조금 지나서부터는 그리스도를 "공공연하게" 인정하였다(요7:50; 19:39) 

....처음엔 비록 한알의 겨자씨 같은 은혜이지만 점점 자라서 큰 나무가 된다.
2. 그가 한 말은 무엇인가?
-- 그는 비록 관원(정치 지도자)이었지만 정치나 사회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찾아 온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영혼과 구원 문제를 해결하려고 지체하지 않고 왔다. 

-- 그는 그리스도를 랍비라 불렀는데, 이것은 "위대한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사 19:20 참조).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한 구원자, 위인(Savior and Mighty one/strong one, defender-rescurer/deliverer)을 보내시리라." 원문은 "한 구원자요 랍비"라 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소망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명예스럽게 말한다. 그는 자기 지식은 그리스도와는 절대 비교가 안 된다고 했다. "주는 하나님이 보내신 선생인 줄 압니다."
(1) 그리스도에 대한 그이 "단언"을 보자.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 틀림없으십니다." 

-- 다른 선생들처럼 사람에 의하여 교육받고 임명받은 선생이 아니라, 신의 영감과 권능에 의하여, 교육받은 선생이 아니라, 신의 영감과 권능에 의하여 인정받은 선생이었다. 왕국의 통치자가 될 그는 먼저 선생으로 오셔서 엄한 대신에 이성으로, 무력 대신에 진리의 힘으로 다스릴 것이다. 이 세상은 무지하고 오류에 빠져서, 유대인 선생들은 부패되어 있고, 사람들을 오류로 이끌고 있었다. 주님의 일하실 때가 바로 이 때이다. 그는 자비스러운 아버지처럼 어두운 거짓 세상을 긍휼히 여겨,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었다. 즉 이 하나님은 빛의 아버지이며, 진리의 근원이시고 또한 우리의 영혼을 감히 내맡길 수 있는 모든 빛과 진리이시다.
(2)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임을 "확신"했다. "우리가 압니다." 

--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란 사실은 분명하고 당연한 사실로 여기고 있다. 아마 그는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관원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주의 은혜를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또는 그가 그리스도에게 가르침을 받도록 자기의 동료들과 관원들 한두 명을 그에게 데려 왔기 때문에 그가 "우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선생님"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가르침을 받고 당신의 제자가 되려고 찾아 왔습니다."
(3) 이런 확신의 근거를 보자.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 하시면(=임마누엘!!)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① 우리는 그리스도가 행한 표적이 진실하다는 것을 확신하며, 이 표적들이 허위가 아닌 것도 확실히 분별하고 있는 바. 여기서 니고데모는 사려분별이 있고, 현명하며, 호기심이 강한 사람으로, 그리스도가 행한 표적들을 참되게 깨달아 알려 하는 "이유"와 "기회"를 가지게 된다. 

---니고데모는 이런 표적들이 진실된 증거로써, 그 증거의 나타남은 그리스도 자신의 이익과 지식의 획득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에 매우 만족했다.
② 그리스도의 표적으로부터 어떤 독특유일무이한 특징을 보게 된다. 그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임을 알게 된다. 

-- 그의 표적들을 그의 표적들은 그의 신임장들이다. 자연의 순리는 변경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가능하시다. 이런 표적은 그가 하나님의 진리이시고 선하심이시기에, 결코 자신을 감추거나 가장하려고 하지 않으신다.
Ⅲ. 그리스도와 니고데모 사이의 대화 혹은 오히려 그가 니고데모에게 가르친 설교. 

-- 본문의 내용은 그의 공적 가르침이 요약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11,12절 참조). 여기에 우리 주님이 가르치신 4가지의 사실들이 있다.
1. "거듭남의 필요성과 본질"을 가르쳤다(3-8절). 이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1) 이것도 니고데모의 말에 대한 "예수의 적절정확한 대답"이었다.(3절). 이 대답은 다음 두 가지 뜻 중 하나일 것이다.
① 니고데모의 말에서 발견하신 바, 부족함/결점을 "꾸짖음"이라 할 수 있다.
-- 그가 그리스도의 표적을 칭송하고 그의 기적을 칭송하고 그의 사명을 인정하는 것으로 할 바를 다 했다고 볼 수 없다. 한걸음 더 용기있게 나아가서 마땅히 그는 "거듭나야 한다".

니고데모가 "하늘 나라" 즉 메시야의 왕국이 곧 임하기를 바란 것은 분명하다. 그는 그 날의 여명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견해에 따라서, 그 날이 웅장한 모습으로 능력을 수반하고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있는 이방나라를 응징함으로써 주의 나라를 회복하는 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표적을 나타내신 예수가 메시야이거나 혹은 하나님의 그 예언자임을 믿고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어쩌면 그에게 비위를 맞추고, 아첨해서, 그의 왕국에 대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리스도는 (니고데모의 기대와는 달리) 더 중요한 본질적인 문제, 곧 거듭나는 것에 상응하는 "정신,"원리, 성질 등의 변화가 없이는 즉 사람의 외적 변화만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니고데모는 궁리끝에 밤중에 찾아 왔다. "그러나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라고 그리스도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사람 이전에 그 사람의 신앙이 인정되어야 한다고 하몬드(Hammond)박사는 말하고 있다.
② 니고데모의 말속에 "숨겨진 의도"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이라고도 볼 수 있다.  

-- 니고데모가 그리스도를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 즉 하늘로부터 특별 계시로 오신 선생임을 고백했을 때에, 이런 계시가 무엇인지를 알려고, 그리고 이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준비에 대한 바램을 분명하게 시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그것을 밝혀 주고 계셨다.
(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중생을  그토록 "적극적이고 열렬하게" 강조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른다." 즉 "나는 아멘이요, 아멘이므로 네게 이른다." 다시 말한다면 "나는 신실하고 진실 증인이다." -- 여기서 확실한 것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네게 이르노니, 바리새인이거나 이스라엘의 선생이거나 상관없이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
① 이 말이 요구하는 것이란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우리는 "새 생명"으로 태어나야 한다.
-- 출생이란 생명의 시작이다. 중생은 이제까지 많은 잘못을 범했거나, 헛되이 살았던 사람들이 거듭나서 새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낡은 건물을 수선하는 것이 아니라, 기초부터 새로 시작해야 된다.
둘째, 우리는 새로운 본성, 새로운 원리, 새로운 사랑, 새로운 목표들을 가져야 한다. 

-- 우리는 위로부터 (새 생명으로)거듭나야 한다. 우리는 다시 새롭게 태어나야 하며(갈 4:9), 생명근원으로부터(눅 1:3), 거듭나야 한다. (죄성가운데서) 첫번 태어남과 동시에 우리는 부패되어 죄와 불의에 심히 빠져들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새로운 Q의 참생명으로) 위로부터 거듭나야 한다. 즉 우리의 영혼이 새롭게 형성되어 활기를 띠어야 한다. 또 우리는 "위로부터" 나야 한다.((물세례가 의미하는 본 뜻은 물에 잠김으로써 "자기 옛사람의 죽음, 그 멸절되어 마땅함을 인정하는" 선포로 행함이다!!))
 .... 이 말은 복음서 기자에 의하여 사용된 단어로써(3:31; 19:11) 여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위로부터" 난다는 것은 거듭남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새롭게 남이란 하늘로부터의 남을(1:13), 그리고 하늘을 향하는 자세이다. 다시 말하면 거룩하고 신적인 Q생명(Zoe)으로, 하나님과 하늘나라와 교제하는 삶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신의 본성을 나누어 받아야 하고 "Q의 형상"을 지녀야 한다.((물론 JC를 빼어닮음의 완전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여전히 [-되었다 함이 아니다]라는 것을 기억하라...즉, [이미, 그러나 아직도 아니]의 날카로움 가운데 있음을 잊지말고 부지런히 날마다 생각 나는 죄악을 토설하여 깨끗게 함 받고 Q의 사랑으로 인침 받은 Q의 사랑받는 자요 JC를 사랑하신 사랑으로 공급빋고 Q을, 더 나아가 세상사람들을 HS안에서 사랑하는 자로서 죄와 악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 Q생명을 사는 것임을 명심하자!!))   
② 거듭남의 필요불가결을 보자.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은총으로 시작해 영광으로 완성되어진] 하늘 나라를 볼 수가 없게 된다."  --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이 아니고서는 결코 하늘 나라를 볼 수 없다.
첫째, 우리는 중생의 "성질"을 "이해할 수 없다." 

-- 하늘 나라에 관련된 사물의 본성(니고데모가 알기를 바랐던)은 우리가 그것을 깨닫고 이해하기 전에 먼저 (마귀의 본질인 죄성에서 참생명Q으로...죄의 습관따르는 옛자아/옛사람의 죽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어떠하심 그대로 따르는 영의 참자아/새사람) 다시 태어나 영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전 2:14).
둘째,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서 어떤 혜택을 기대할 수 없다면, 역시 하늘 나라의 위로도 받을 수 없다. 

-- 다시 탄생한다는 것은 앞으로 우리의 행복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현재 우리의 본성을 생각해 본다면 절망적으로 부패하고 죄로 가득 차 있는 바,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있으며, 하늘 나라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우리는 거듭나야 한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지 않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고전 6:11, 12), 이와 같이 거듭남의 필요성에 대한 진리가 강조되고 있다.
a. 니고데모는 의혹을 가졌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4절). 여기에서
(a) 그의 지식의 한계와 연약함이 드러남, 곧 그의 지식은 육적 범주에 국한되어 있음이 드러났다. 

--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그는 육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육의 다시 태어남이 아니라, 불멸하는 영의 새로운 탄생을 모르는 것과 같으며, 또한 영과 육의 관계에 있어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육만을 새롭게 태어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니고데모는 분명히 자기의 출생지가 거룩한 땅 예루살렘인 것, 그의 경건과 권위들과 자기의 가문, 예를 들면 바울이 누릴 수 있는 혈통(빌 3:5)을 아주 대단하게 여기며 만족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거듭난다는 소리가 그에게는 매우 놀라왔다. 그래서 그는 어쩌면 JC께서 말씀하시는 바 "거듭남이란 이스라엘인으로 태어나서 자란 것보다 더 좋은 출생과 성장으로 또는 메시야 왕국 그 자체안에서의 출생과 성장"을 생각했을 것이다. 참으로 그는, 개종한 이방인들이나 유대교신앙에 가입하여 다시 태어나거나 새롭게 되는 것으로 여겼지, 유대인 더구나 바리새인이 거듭난다면..., 처음 출생 방법 그대로의 되풀이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첫 출생을 자랑하기 때문에 다시 "새로운 출생"이란 거의 생각할 수가 없었다.((여기까지면 충분하다고...스스로 제한하고 있음!!))
(b) [그러나 한편으로는]가르침을 받으려는 그의 열의가 아직도 남아 있다. 

-- 니고데모는 그리스도의 난해한 말씀 때문에 포기하여 떠나버리지 않고 보다 더 잘 이해하려는 욕심에서 솔직하게 자기의 무지를 인정했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주께서 들려 주시는 바  그 말씀이 나에게 하나의 수수께끼이므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사람이 자기 어머니를 통하지 않고 태어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습니다." 어두움에 감추어져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진리에 접했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해 줄 때까지" 우리는 겸손과 근면으로써 계속 추구해야 할 바 지식의 수단을 잘 활용해야 한다.
b. 우리 주 예수님은 그에게 더 자세히 설명하신다.
(a) 예수는 자기의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거듭 확신시킨다.(5절).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전과 같으니라." 성경의 교훈들은 "예"와 "아니오"가 아니라 "예"와 "아멘"이다.
(b) 예수는 거듭남에 대해서 분명하고 상세하게 말씀하셨다.
[a] 예수는 이 복된 변화의 "저작자"이시다. "거듭난다는 것은 영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5-8절). 

-- 이 변화, 곧 [죄성따라 살아온 바, 영죽을 죄인됨을 인정하고 Q을 떠나 자행자제함으로써 [마귀에게 사로잡힌 포로로 산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물에 잠김으로써 [죄로 사는]옛자아의 죽음, 곧 죄와의 절연이 절대적 필요함을 인정하고 (( 돌이켜 간절히 주예수이름 부를 때 참생명이신 HS이 위로부터/하늘로부터 거듭남/다시 태어남을 주관하시며 )) 물에서 나와 [진리의 HS 임하심으로 인해 참되게 자유함의]구원 얻은 자, Q께 속한 바 Q자녀/백성 JC의 연인/신부, 형제-친구-제자의 패러다임따라 새로운 참생명이신 HS으로 살아감으로의 변화는 우리 자신의 어떤 지식이나 능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성령에 의한 권능과 강화에 의해서이다. 이것은 성령의 성화에 의해서(벧전 1:2), 그리고 새롭게 하시는 성령에 의해서 (딛 3:5)이다.
[b]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는 본질은 "영"이다(6절). 

-- 거듭난 자들은 성령으로 난 사람으로서, 성령의 점유하심이 확장되어 갈수록 비례적으로 [신진대사적 변화를 통해] 육욕의 찌꺼기가 [마침내] 없어지게 될 것이다. 이성적이고 불멸하는 영(JC의 영이신 HS)에 의하여 거듭난 자들은 육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회복한다.  외적인 경건과 행함을 중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도 참으로 굉장한 변혁이 될 것이다.
③ 이런 변화의 "필요성".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는 "일의 성질상" 거듭남의 필연성을 보여 주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듭나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합당치 않기 때문이다. 즉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6절). 

-- 육을 입었다는 것이 우리의 병패이므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다른 방도가 없다.
첫째, 현재의 우리들은 "썩어질 육체"이다(창 6:3). 

-- 영혼은 여전히 영적 실체이지만 육과 결합되어 있으며, 육의 의지에 따라 개발될 수 있고, 육의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사탄의 포로가 된] 이런 상태에서는 영이신 하나님과 우리에게 어떤 사귐이 가능하겠는가?
둘째, 육을 입고 태어난 우리가 "어떻게" 거듭날 수 있겠는가?
-- 육을 입은 우리들은 타락되어 있으므로, 새로운 본성 즉 영적 참생명은 두 번째의 태어남에서 비롯되어짐이 틀림없다. 니고데모는 모태에 다시 들어갔다가 날 수 있느냐고 말하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만약 그가 100세에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더라도 소용이 없다. 그 이유는 육으로 태어난 사람은 여전히 육이기 때문이다.
-- 그는 또 다른 근원, 곧 성령으로 거듭나야지만 영의 사람이 된다. 즉 간단히 말하자면, 처음에는 인간이 육과 영이 조화가 되어서 영이 육을 거의 주관함으로써 살아있는 영(창 2:7)의 인도를 받았었지만, 육의 탐심따라 금지된 과일을 먹음으로써 영의 주관을 받던 인간이 육욕적인 탐심의 횡포따라 사는 노예가 되어 더 이상 살아 있는 영, "참생명Q"으로 사는 인간이 아니라 육의 인간이 되어 버렸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 살아있는 영이 거의 무력하고 침체되었다. 아담이 죄를 범한 이후 참 인간은 죽고, 인간은 육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런 타락의 상태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인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참 인간성을 부패시키고 타락시켰으며, 이러한 나쁜 상태가 계속 만연되어지고 있다. 그래서 부패와 죄가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 즉 우리는 죄에 젖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본성이 거듭나서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새로운 옷이나 새로운 얼굴을 갖추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새로워져야 한다.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그렇게 되기를 거듭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본성이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 우리가 새로운 옷이나 새로운 얼굴을 갖추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새로워져야 한다.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그렇게 되기를 거듭 강조하고 있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고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7절). 그리스도가 거듭나도록 말씀하신 것을 사람들이 반박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들은 그의 말씀에 따라서 거듭나야 한다. 그리스도는 위대한 법률가로서, 그의 뜻이 곧 법이다. 즉 그는 신학의 위대한 중재자로서, 우리와 하나님을 화해시킬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소유하고 계신다. 또한 그는 영혼의 위대한 치유자로서, 우리의 병을 잘 아시며, 치유토록 강조하신다. "너희들은 거듭나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즉 모든 사람들에게 말한다. 너희들은 거듭나야 한다. 이스라엘의 피지배자들과 지배자들 그리고 제사장들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 또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우리가 치러야 하는 것들, 즉 우리의 구원에 대한 위대한 계획, 우리의 본성의 부패, 그리고 우리 앞에 놓여진 행복의 성취와 함께 하나님의 거룩함을 깊이 생각해 볼 때 우리에게 필요한 유일한 한가지를 강조한 것인데, " 거듭나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 강조를 우리는 이상스럽게 여길 필요가 없다.
[d] 두 개의 비교로써 이러한 변화가 설명되어지고 있다.
첫째, 성령으로 인한 거듭남의 역사가 물로 비교되고 있다.(5). 

-- 거듭남의 역사를 이루는 것은 " 물과 성령"이다. 즉 성령과 불로써(마 3:11)란 말은 불과 같이 역사하는(=죄를 태워 소멸하는) 성령을 뜻하는 것이니.., 물과 같이 역사하는(=죄를 씻어 거룩하고 정결케 하는) 성령을 의미한다.
1. 원래 여기서 뜻했던 것은 영혼을 씻어 거룩하게 하는 성령을 말하고 있다.
(1) 하나님 나라에 합당토록 성령의 물로써 죄를 씻고 깨끗케 하여야 한다. 우리의 구원은 중생의 씻음(딛 3:5)이며, 죄 씻기움을 받아야 한다(고전 6:11; 슥 36:25 참조).
(2) 물이 상한 마음과 피곤한 여행자를 진정시키는 것처럼 성령은 우리의 영혼을 진정시키고 새롭게 하신다. 성령이 물로 비유가 되고 있다.(7:38, 사 44:3). 

-- 첫 창조시에, 하늘의 열매들이 "물로 태어났다"(창 1:20). 이 말은 아마도 (암암리에) 위로부터 태어나는 자는 물로 태어남을 가리키는 것 같다.
2. 그리스도는 세례 의식을 염두에 둔 것 같다. 

-- "너희는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영적인 은혜의 보이는 징표로써,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모든 유대인 중에서 오직 세례 받은 사람만이 구원을 받았다.즉 성령의 불세례에 의하지 않았지만, 성령의 물세례에 의해서 거듭나게 되었다. 육적 유대인들은 메시야 왕국을 차지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그 나라를 갈망해 왔다. 그러나 그들이 율법의 공로를 주장하는 데서 벗어나서 죄의 사면을 위한 복음과 그 의무를 수락하지 않는 한 그 나라를 차지할 수가 없게 된다는 말이다.
둘째, 성령은 "바람"으로 비유된다. 

-- "바람이 임의로 불 듯"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러하니라"(8절). 바람과 성령은 같은 단어이다. 성령이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제자들에게 임했으며(행 2:2). 죄인들의 마음속에"놀랄 만한" 영향력을 가져다 주며, 성도들의 영혼 속에는 "바람의 호흡"이 작용한다고 했다(사 41:16). 
... 이러한 비유를 통해서 중생에 있어서의 성령은 "임의로운," 자유로운 행위자처럼 작용하신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HS을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 HS은 우리의 지시에 종속되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람을 지시하시며," 바람은 그 말씀을 쫓는다(시 148:8). 성령은 언제어디서나 사람에게 감화를 주시며, 합당한 정도에 따라서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다"(고전 12:11).
...또 성령은 "힘 있고" 확실한 증거로 역사하신다. "너희가 그 소리를 듣는다." 즉 비록 그 원인은 감추어져 있지만, 그 결과는 뚜렷하다. 영혼이 죄 때문에 신음할 때, 타락의 멍에로 괴로워할 때 그리스도가 마지막 숨을 내쉬며 "아바"라 부르짖을 때 우리는 성령의 소리를 들으며, 그의 역사 하심을 볼 수 있다. "그가 기도하도다"(행 9:11).
... 성령은 "신비스럽고" 감추어진 방법으로 역사하신다. "너희는 성령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갔는지를 알 수 없다." 성령이 어떻게 임해서, 어떻게 작용되는지는 우리에게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즉 성령이 역사하는 모양과 방법은 하나의 신비이다. 어느 길이 성령이 다니는 길이냐?(왕상 22:24)(전 11:5; 시 139:14 비교)
3. 복음 진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과 니고데모의 무지.
(1) 니고데모는 여전히 반론한다(9절).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 거듭남의 필요성에 대한 그리스도의 설명이 그에게 아직도 분명하게 이해되지 않은 것 같다. 거듭남은 "필연적인" 것으로는 매우 수수께끼 같았다. ... 비록 그가 그리스도를 선한 선생으로 인정했지만 그가 알고 있던 사상과 반대되자 그리스도의 교훈을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대체로 그리스도의 교훈을 인정은 하지만, 아직도 기독교 진리를 믿지 않으며, 기독교 율례(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치 않고 있다.((기존 사고의 패러다임을 버리고 영적 패러다임을 취하라!!! ,,,,바꾸고 끊어버랄 뿐 아니라 JC의 말씀과 HS으로 살겠다는 결단 통해 겸손히 말씀과 HS을 따름이 필요하다!!))
① 니고데모는 결국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뜻을 알지 못했다.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러한 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으로 내 능력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합니다." ..

...[내 혼적 인지능력이 안된다고 느낄 때가 진정 회개하고 영으로 돌이킬 바로 그 때이다!!]
--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은 보통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보인다." 사람은 영적 세계의 일들과 멀어져 있기 때문에 모를 뿐 아니라 게다가 거기에 대해 일종의 편견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들이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경향이 있다.
② 이러한 교훈이 그에게 "불가해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는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에 대한 진리를 알려고 물었다. 마치 그러한 진리가 그에게 역설이었기 때문에, 그 진리 자체가 괴물이었다. 

--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은 지식의 한계를 느끼게 되면,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증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포기하고 만다. 사람들은 지식으로 그리스도를 결코 알지 못한다.
(2) 그의 우둔과 무지에 대한 그리스도의 책망을 보자.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 맞느냐?" 

-- 선생이란 가르치는 자로서, 모세의 위치에 서있는 자이다. 그러나 아직도 거듭남의 진리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진리를 이해할 능력이 없는 것이냐? 이 말씀은 책망이다.
① 사람들을 가르치는 선생들이 의(義)의 말씀에 대해서 아직도 무지하고 서툴렀다. 

② 종교의 개념들과 의식들, 성서의 미묘한 점들과 비판들을 배우고 가르치는 데에 시간을 보내다 보니, 마음과 삶을 실제적으로 개혁시키는 데 소홀히 했다. 

-- 책망하는 이 두 말씀이 매우 두드러지게 눈에 띄고 있다.
첫째, 그의 운명이 던져진 장소가 이스라엘로서, 그 곳은 지식을 받을 수 있는 방편이 많이 있으며, Q의 나타남이 있었던 장소였다. 따라서 그는 이런 거듭남의 교훈은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구약 이외에서도 직접 깨달아 알 수 있는 터이였다. ((겨울나무를 묵상해 보라!!))
둘째, 그가 알지 못했던 거듭남이란, 필연적인 일, 중요한 일, 거룩한 일이었다. 그는 시편 1편 5, 10절, 에스겔 18장 31절, 36장 25,26절을 늘 읽지 않았던가?
(3)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실성과 웅대함을 말하는 그리스도의 담화(11-13)가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여지며, 그들을 통하여 우리도 알도록 해 주고 있다.
① 그리스도가 가르치고 있는 진리들은 아주 확실하므로 과감히 그 안으로 믿어들아가자, 전진해 나가야 한다(11절). "우리는 우리가 [실지로 경험했고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기에!!] 안다고 이야기한다."
 -- "우리"란 그리스도외에 누구를 가르키는가? 혹자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또한 지상에서 그와 함께 전도 사업을 한 예언자들과 세례 요한을 말한다고 본다. 그들은 자기들이 "알고," 보았던 것을 "말하고" 있어서, 스스로 그것을 입증할 증인을 대동한다.
-- 또 어떤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성령을 말한다고 본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리스도와 함께 계시며, 주의 영은 그리스도 주위에 머물러 계신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저에게 가리라"(14:23)처럼 복수로 말씀하신다.
첫째, 그리스도의 진리들은 의심할 바 없는 확실성이 있다.
--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교훈이 신실성 있는 교훈이란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분께 우리의 영혼을 과감히 맡기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분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 "신실한" 증인이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속임을 받지 않는 "유능한" 증인이시다. "우리는 우리가 보았던 것을 증언한다."
-- 그분은 소문에 의하지 않고 가장 확실한 증거 위에서 말씀하시므로, 가장 위대한 확증자이시다. 그가 하나님, 보이지 않는 세계, 천국과 지옥, 우리와 관련된 아버지하나님의 의지, 그리고 평화의 사자등등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그가 알고 있고 이미 보았던 것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 곁에 있어서, 날마다 기뻐하신 바가 되었기 때문이다(잠 8:30). 그가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 그분 자신의 초월적 지식에서 나온 말씀이시다.
둘째, 죄인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전혀 오류가 없는 그리스도 진리의 확실성이 심히 약화되어가고 있다.
-- JC의 진리는 이렇게 확실하고 분명한데, 아직도 세인들은 우리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무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예전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었지만, 믿음안으로 들어가게 된 계기가 너무 확실하고 설득력이 있어서, 믿지 않을 수가 없었음을 기억하자.
② JC가 가르치신 진리들은, 비록 일반적이고 세속적인 일들에서 나온 용어와 표현들로 전달되었지만, 사람들에게는 매우 고상하고 거룩하게 들려졌다.
--이런 암시가 들어 있는 말씀을 보라."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12절),... 즉 거듭남과 바람의 비유처럼 세인들이 더 쉽고 더 잘 알 수 있도록 땅의 일들을 비유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어도 또 내가 이와 같이 사람들의 한계에 내 눈높이를 맞추고 나를 적응시켜, 사람의 용어로 말하더라도 사람들은 나의 교훈을 이해하지 못할 것으로 여기고 귀를 막고 듣지 않으며, 그럼으로써 믿고 영접하기를 거절한다면, 만일 내가 영적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특성을 따라 천사의 입으로 말을 한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즉, 그렇게 낯익은 표현들이 듣고 믿는데 방해가 된다면 영적 추상적인 관념은 오죽하랴?".....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漲溢)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렘12:5)**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첫째,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높고 깊음을 존중해야 한다. 

... 그의 진리는 지복직관, 지고지선, 최상의 존귀하고 훌륭한 선함의 신비이다. 마찬가지로 복음 사업들은 지존고귀의 훌륭한 사업으로 인간 이상의 물음을 넘어서서, 그 이상(以上)을 발견토록 한다.
둘째, (우리 위해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겸손을 감사하게 받아 들여야 한다. 

... 그는 복음을 우리의 능력에 알맞도록 드러내시는데, 마치 어린아이에게 이야기하듯이 그는 우리가 땅에서 태어나, 땅에서 생활하는 우리의 처지를 고려해서, 땅의 일로 말한다. 그래서 땅의 일을 영적인 전달의 수단으로 삼아 우리에게 더 쉽고 잘 알 수 있도록 한다. 이와 같이 그는 비유와 의식의 언어를 활용하셨다.
세째, 우리의 본성의 부패를 슬퍼하셨다. 

... 즉 그리스도의 진리를 받아들여 깊은 묵싱 통해 깨닫고 즐거워함에 이르려 하지 않는 우리의 완악하고 고집스런 비합리성, 땅의 것은 천하기 때문이라 하고 하늘의 것은 알기 어렵다고 함으로써 모두 외면해 버린다. 그래서 어떠한 전달방법을 통해서 전해지든지 상관없이 여전히 들으려 하지 않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마 11:17). 반대로 주의 자녀들은 JC의 진리말씀을 경청하며 묵상하는 바, 하나님의 지혜를 통해 더 깊고 넓게 깨닫게 되고 사랑스런 순종 통해 의롭다 여김 받으며, 또한 실지로 그렇게 되어질 것이다.
③ 우리 주 예수만이 우리에게 그의 교훈을 분명하게 그리고 자세하게 나타내 주신다. 하늘에서 내려 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올라가 있어서 하늘나라를 살아 본) 자가 없기 때문이다(13절).
첫째,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 주실 분이다. 

... 니고데모는 여기에서는 그리스도를 일개 예언자로서 여기며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구약의 모든 예언자들보다 위대하신 분이다. 그것은 그 어떤 예언자도 하늘에 올라간 (올라가서 살아본) 자가 없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주신바 영감으로 성서를 기록했지, 자기 자신의 지혜로 기록한 것이 아니다(1:18 참조). 가령 모세는 산으로 올라갔지 하늘로 올라간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지식과 하늘의 일을 생생한 경험적 지식으로 지닌 사람은 없다(마 11:27 참조). 아직 우리는 가르침을 위하여 하늘로 올리워지지 못한다. 하늘의 뜻이 우리에게 보내져, 받을 수 있도록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잠 30:4; 신 30:12 참조).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낼 수 있으며, 모든 면에서 자격을 갖추셨다. 

1. 그는 무리들에게 하늘의 일에 대한 실증을 주려고 하늘에서 내려 온, 그러나 "인자"이신 분을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만일 "사람의 영혼"의 거듭남 사건을 기이하게 여긴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 한 사건도 마찬가지로 기이하게 여길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일들은 참으로 거룩하고 신성한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한 인격에 있는 두 본성을 알 수가 있다. 하늘로부터 내려 온 그의 신성과 사람의 아들인 그의 인간성이다. 그는 아직도 "하늘에 있는" "사람의 아들"로서 이 두 본성이 결합되어 있다.
2. 그는 무리들에게 하늘의 일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그들을 하늘나라의 신비로 안내할 수 있다고 증거하신다.
(1) "그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통이 위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 우리는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보내어진다. 그것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에게 보내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① 그리스도의 신성을 암시한다. 

... 그가 "하늘로부터 내려왔기" 때문에, 그는 확실히 인간 그 이상이다. 즉 그는 하늘로부터 온 주(主)이시다(고전 15:47).
② 그는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 그것은 그가 하늘로부터 내려왔기 때문에 하나님과는 계속적인 친교를 맺고 있다.
③ "하나님을 나타내심"이다. 

... 구약에서는,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대하 7:14), 또는 "하늘을 바라봄"으로써(시 80:14), 또는 "하늘로부터 말씀함으로써(느 9:13), 나타내셨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우리를 가르치고 구원하시려고 하늘로부터 몸소 육신을 입고 내려오신 하나님이 보여 주고 있다. 이와 같이 그가 내려오신 것은 놀랄 만한 하나의 신비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위치를 변경시키거나 하늘로부터 자신의 몸을 가져오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내려 오심"은, 정말 그의 놀라우신 자비로써, 여기에 그의 사랑이 있다.
(2) "그는 인자(人子)이다." 이 말은 다니엘(7:13)이 한 것이며, 유대인들은 항상 땅에 있지만, 그분은 아직도 하나님처럼 하늘에 속해 있다. 인성을 가진 "인자"로서는 승천할 때까지 하늘에 있지 않고 땅에 있으나 신성으로서는 하늘에 동시에 있다. 
... 영광의 주 자체는 십자가에 달릴 수 없으며, 하나님 자신도 그럴 수 없다. 그러나 영광의 주이신 분, 바로 성육신하여 "인자"가 되신 그 하나님이 친히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며(고전 2:8),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보혈로" 대가(우리 죄의 죄값)를 치르고 교회를 자기소유로 되사셨다(행 20:28). 
... 메시야를 그렇게 불렀다. "인자"로 칭함으로써 그리스도는 자기를 제2의 아담임을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첫 번째의 아담이 "사람의 시조"였기 때문이다. 모든 구약의 이름이 메시야로 되어 있지만, 그는 스스로 거의 "인자"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이 말이 자기의 겸손을 가장 잘 나타내는 바, 현재 땅에 있는 자기의 초라함과 거의 일치하게 때문이다.
(3) 그는 "하늘에 있다." 그가 땅에서 니고데모와 이야기하고 한 인격 안에 두 본성이 아주 긴밀히 결합되어 서로 본질적인 교통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분"이며, 하늘은 "그의 거룩함"의 처소이다.
3. 그리스도는 자신이 "세상에 내려 온 위대한 의도와 자기를 믿는 자의 행복"을 말한다(14-18절). .

... 여기에 모든 복음의 핵심이 들어 있다. 그리스도는 Q의 신실한 말씀이신 바(딤전 1:15), (몸의 소멸과 함께 참생명Q으로부터 분리됨의 이중적인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세상을(죄인을 찾아) 구하시러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이제 (Q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은 죄인이므로, 정죄 받아 진실로 이중적으로 이미 죽었다.(그 집행만 남은 셈이다...그러므로 집행유예상태에 있는 지금이라도 주께 돌이켜서 JC 영접하고 믿어들어가 그 이름을 부름으로써 죄사함 받고 영생을 얻으라!!)

(1) 치명상을, 혹은 불치의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그리스도는 뱀에 물린 이스라엘인들을 구리뱀이 치유시킨 것처럼(14,15절) "우리들을 치유하러"오셨다.
(2) 용서받지 못할 범죄로 죽음이 선고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 율법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처지를 생각하사, 그리스도는 배상의 행위를 치루는 왕자나 재판관으로서 혹은 어떤 조건하에서든지 관용을 베풀기 위해 오셨다. 이러한 구원은 정죄와는 정반대다(16-18절).
① 이스라엘 백성이 불뱀에 물리어 죽어가고 있을 때 ((말씀하신 바로 그대로)) 구리 뱀을 바라봄으로 생명을 건지게 한 것처럼(민 21:6-9) JC는 우리를 "치료하시러" 오셨다. 

-- 범죄한 자기 백성이 죽음 직전에서, 모세의 손을 통하여 구원받은 마지막 기적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이같은 그리스도의 모형에서 몇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첫째,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의 본성" 

....죄책은 불뱀에 물린 "고통"과 같다. 타락의 힘은 이와 같이 독액이 퍼지는 것과 같다. 
--악마는 처음에는 간교하나(창 3:1), 나중에는 그 유혹이 불과 같이 급격해, 그의 공격은 무시무시하며, 그의 승리는 파괴적이다. 깨어 있는 양심에게 물어 보라. 저주받은 죄인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은 죄의 유혹이 얼마나 달콤한지를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뱀에게 물릴 것이다"(잠 23:30-32). 
--죄 때문에 임한 하나님의 분노는 ((의식과 무의식을 아우르는 바, 오직 Q을 믿음, 바로 그안에 있는 영원한 참생명의 평강과 안식, 그 누림을 상실함에 따르는 멸망, 곧 영원한 이중적 죽음의 불길한 예감인 바, 죄책감과 정죄감으로서 우울-불안-공포/공황-좌절/무력-절망감 가운데 사로잡혀 옴짝달싹못하도록 독방에 갇힌 죄수가 되게 하는 바))하나님이 친히 베푸신 바 Q의 구원을 의심하고 배역하고 불평한 자기 백성에게 불뱀을 보내어 그들의 불평을 근절시키는 것과 동일하다. 율법의 저주는 불뱀과 같아서, 그것이 Q의 분노에 대한 징표가 되고 있다.
둘째, 능력 있는 치료에 의해서만 이런 치명적인 질병을 구할 수 있다. 

....죽은 죄인들의 경우는 애처롭다. 그러나 그들은 어쩔 수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길르앗에 향유가 있음을 하나님에게 감사드려야 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a. 이스라엘 백성을 치료한것은 "구리뱀"이다. ....구리(영문은 "놋")란 "밝은"색으로 성서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발이 "구리처럼 빛나고" 있음을 본다(계 1:15). 구리가 영속성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도 그러하다. 이 구리뱀은 "불뱀"의 모양으로 만들어졌으나, 독이 없고 쏘지 않아 그리스도를 표상하기에 적절하다. 

--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죄를 지셨지만, 죄를 알지 못하며, 죄로 물든 육의 형상을 가졌지만, 죄로 물들지 않으셨다. 이것은 마치 독이 없는 구리뱀과 같으시다. 뱀은 저주받은 짐승으로, 그리스도도 우리를 위하여 저주받으셨다. 그들의 치유를 통해서 그들의 곤경을 상기토록 하셨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가 무서울 정도로 분명하게 드러났다.
b. 모세의 지팡이가 ((죄사함의 구원을 위해))들려진 것처럼 인자도 들려져야 한다. .. 이와 같이 "그를 바라보라"(눅 24:26, 46). 바라보는 자마다 치유가 임했고, JC는 들려져 있다.
(a) 들려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수난을 상징한다. 

... 그는 십자가에서 들려졌다. 그의 죽음을 가리켜 "십자가에 들려짐"이라 했다(12:32, 33). 마치 그가 무가치하게 되고 버림받은 사람처럼 하늘과 땅 사이에 들려졌으나, 실은 일대의 장관처럼 그리고 하나의 징표로써 들려졌다.
(b) 그의 "영광"을 나타낸다. 

... 그는 아버지의 오른편에 들리워져, 지금도 보좌에서 친히 믿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 그가 십자가에서 들려짐으로 마침내 하늘보좌에까지 들려지게 되었다.
(c) 그의 영원한 복음이 "가르쳐지고 전파됨"을 상징한다(계 14:6). 

... 수천 만의 이스라엘인들이 볼 수 있도록 구리뱀이 들려졌다.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가 우리 앞에 확실히 드러내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징표로써 들려지고 있다(사 11:10).
c. 그것은 모세에 의하여 들려졌었다. 그리스도는 모세의 율법하에 들어갔고, 모세가 그를 증거 하였다.
d. 이와 같이 들려졌다는 것은, 불뱀에 물린 사람들을 치유하려고 지정된 일이다.  
... 재앙을 보낸 바로 그분이 마련하신 유일한 치료책이다

-- 우리를 자기의 의로 정죄하신 분 이외는 어떠한 사람도 우리를 구원할 수가 없다. 하나님만이 속량의 근거가 되시며, 그 속량의 효험은 그의 지시 준수 여부에 달려 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의심했기 때문에 처벌토록 "불뱀"이 보내어졌으나(그래서 사도들이 이야기함-고전 10:9), 그들이 다시 믿고 그분께로 돌아섰기 때문에 치유되었다. 우리가 거역했던 그리스도 그분이 진정 "우리의 평화"이시다.

세째, 이러한 최상의 "적용"과 그 효능은 오직 JC를 영접하고 앙망함, 곧 JC안으로 믿어들어가 하나되어 교통하며 품안에 거하는  "믿음"을 통해서만 된다.

 ... 즉 이스라엘인들이 치유 받기 위해서 구리뱀을 "바라보기만"하면 된다고 했던 것은 바로 그것을 말해 준다. 만일 뱀에 물린 어떤 이스라엘인이 거의 자기 고통과 위험을 깨닫지 못했거나 혹은 모세의 말을 믿지 않고 구리뱀을 바라보지 않았다면, 그는 기필코 상처로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구리뱀을 "바라보았던" 사람들은 치유되었다(민 21:9). 만일 이제까지 죄로 인한 질병중에 있는자가 JC에 의한 처방을 조금이라도 소홀히 여겨 경멸한다면 그들의 피는 그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는 "보라, 그러면 구원을 얻으리라고"했다(사 45:22). 

-- 위대한 희생 제물이시고 중재자이신 JC의 화해로, 죄악된 세상을 구하시려는 그의 무한한 지혜의 방법에 우리는 만족하고 찬성해야 한다.

네째, 신앙으로 그를 바라보도록 우리에게 커다란 용기를 준다.
a.. 그가 "들려지심"은 이런 목적에서다. 그를 따르는 자는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b. 그에 의하여 "누구나" 구원받는다.
c. 주려고 내놓은 구원은 완전하다.
(a) 그들은 "멸망되지 않으며," 상처로 죽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들이 고통을 당하고, 심히 두려워했을지 모르나, 범죄로 멸망 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이 아니다.
(b)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차지할" 것이다. ....그들은 광야에서 그들의 상처로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에 도착할 것이다 (그 때의 그들은 가나안 땅에 즉시 들어가려 했다). 그들은 약속된 안식을 누릴 것이다.
②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용서함으로" 우리의 구원이 임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의 선고에서 해방 받게 되었다(16,17절). 여기에 참으로 복음이 있으며, 하늘에서 땅끝까지 이르는 최고의 소식이 있다. 여기에 화해의 말씀이 모두 내포되어 있다.
첫째, 여기에 "세상을 사랑하사 자기의 아들을 내 준"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16절). 우리는 여기서 세 가지의 일을 볼 수가 있다.
a. 위대한 "복음의 신비"가 나타남. 

-- "하나님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성령에 의한 우리의 거듭남과 아들Q의 들려지심에 의한 것이며 우리의 화해의 근원이 되신다.
(a)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 이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시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위대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여기에는 또한 아버지의 위엄과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사랑이 표현되어 있다. 그는 항상 아버지의 즐거움이 되신다.
(b)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서이다. 

...하나님은 기꺼이 자기 "독생자를 주셨다." 하나님은 차고 넘치는 능력으로 하늘과 땅을 화해시키려고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 아들을 주셨다. 즉 훌륭한 화해자로서 혹은 속죄의 희생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이 고통 당하고 죽도록 하셨다. 
...여기에 그리스도가 "들려져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아버지에 의해서 결정되어졌고 계획되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목적 때문에 자기 아들을 육신으로 보내셨다. 
...아버지가 허락치 않으시면, 원수들조차 JC에게((그리고 그리스도안에 있는 믿는 이마다마다에게)) 손가락 하나 댈 수가 없다. 비록 그가 아직도 십자가에 달려 계시지는 않지만, "아버지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주었다"(행 2:23). 즉 하나님께서 그를 진실히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또한 새 언약의 취지와 목표로써 그를 제공하셨다. 그래서 그를 증언하는 우리의 예언자로, 우리의 평화자로, 교회의 머리로,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필요충분조건 되시는 자로 내어 주셨다.
(c)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을 세상에 주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 
... 그의 피조물들은 그의 지극한 사랑을 깨달아야 하며, 또한 피조물들이 정말 잘되기를 원하는 하나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타락된 천사들을 미워하는 만큼 타락된 인간의 세계를 그만큼 사랑하신다(롬 5:8; 요 14:10 참조). 보라, 이 놀라운 사실을! 전능하신 하나님이 "쓸모 없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다니! "거룩하신" 하나님이 어떠한 위로도 기대할 수 없는 이 사악한 세상을 선하신 뜻으로 사랑하셨다. 이러한 사랑이 참 사랑이다(겔 16:6, 8). 
... 유대인들은 자기 백성만을 사랑하는 메시야가 오셔서 이방나라들을 황폐케하시고 지배하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JC는 유대인들에게 자기는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 땅끝의 이방인들까지 사랑하려고 왔다는 것을 전파하고 있다(요일 2:2). 비록 온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JC를 믿지 핞음으로써 멸망할 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보내심은 이 세상에 대한 그의 사랑의 실증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인류에게 생명과 구원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돌아와서, 회개하고, 헌신하려는 모든 자들에게 죄의 용서와 사면을 선포함으로써, 거역하고 불순종한 이 세상을 사랑하고 계신다. 
... 이제까지 하나님은 거역하고 타락한 세상에 자기 아들 독생자를 보내실 정도로 사랑하시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유래되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 땅끝까지 구원자로서 알려지고 있다.
b. 위대한 "복음에 대한, 복음 들은자의 마땅한 의무"가 있다. 

--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보내 주신 그리스도), 그의 은혜를 받아들여 보내 주신 자의 뜻에 응답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아들에 관한 말씀의 기록에 성실히 수긍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예언자, 제사장, 그리고 왕이 되심으로 우리는 그에게 통치되고 가르침을 받으며, 그에 의해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
c. 복음의 유익함이 나와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멸망을 받지 않는다." 

...그가 전에 말씀하신 이 구절이 여기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이 구절은 믿는 사람 모두에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된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영원히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a) 그들은 지옥의 비참에서 구원되었으며, 끝없는 함정에서 건지어졌다. 

-- 그들은 멸망 받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사하시니, 그들은 죽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용서가 주어짐으로 권리를 되찾았다.
(b) 그들은 하늘의 기쁨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 즉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고 유죄로 선고된 반역자가 용서함을 받고 또 등용되어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고 나중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왕 중 왕이 되었다. "그는 옥에서 나와 왕이 되었다"(전 4:14).
둘째,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낸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 그것은 그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는 판단과 능력으로써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그리스도의 생명과 구원을 우리에게 확실히 주셨으므로, 믿음으로 그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를 따라 선하게 될 것이다(7절).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이 세상," 즉 죄가 많고, 반역하고 불순종하는 세상에 "보내셨다." 다시 말하면 때때로 그가 세상의 방문자이고 거주자인 천사들처럼 보낸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사자나 대사로서 보냈다. 인간이 죄를 범한 이후부터 죄책을 느끼고 심판을 염려하는 것처럼, 또한 하늘에서 어떤 특별한 사자의 출현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직대한다면 정녕 죽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난다면, 그가 어떤 목적으로 오시는지를 인간들은 관심 갖게 된다. 평화를 주시려고? 사람들이 사무엘에게 두려운 마음으로 물었던 것처럼, "그분은 평화를 위해 오십니까?"한다. 그가 평온하게 오심을 성서에서 찾아 보면
a. 그는 세상을 정죄하러 오시지 않았다. 
...우리는 이 세상이 죄로 더럽혀졌기 때문에, 그가 확실히 오시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율법에 따르면 유죄의 선고는 처벌받아야 하는데, 어째서 그러한 처벌이 주어지지 않는가? 그 명분이란 무엇인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행 17:26)는 사실 때문에 게하시의 문둥병처럼 인류는 유전병으로 "감염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자손까지 멸망시킨 아말렉의 범죄처럼 "죄책을"지게 되었다. 그래서 세상이 심판 받는 세상으로 되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려 했다면, 불꽃같이 무서운 검을 가진 그룹들(천사들)로 하여금 즉시 멸망시키도록 명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멸망시키려 했다면 그이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심판하실 수 있는 능력이 계시지만(5:22, 27), 아직도 심판하시지 않았고, 그의 은총을 거두어 가지 않았으며, 또한 거룩한 계약에 대한 우리의 불이행을 추궁하지 않고 오히려 은혜의 보좌 앞에서 재심을 받도록 했다.
b. 하나님은 아들을 통하여 세상이 구원받도록 하셨다. 또 그 구원의 문을 세상에 열어 놓고, 누구든지 그 문을 통하여 들어오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세상을 화해케 하고, 세상을 구원시키려 하였다. 사면조치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취해짐으로 이 세상 사람들은 첫 계약에 의하지 않고 둘째 계약에 의하여 구원받게 될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은 구원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구원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즉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구원은 없다." 이것은 상처받고 피흘리는 영혼을 치유키 위한 복음인데, 곧 그리스도는 우리의 재판관으로서 우리를 정죄하지 않고 구원하시려고 오셨다는 사실이다.

4. 믿지 아니하는 자와 무지몽매한 자들의 비참한 상태에 관한 그리스도의설명을 듣자(18-21절).
(1)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의 운명을 볼 수가 있다. 그들은 이미 정죄를 받고 있다. 여기서 관찰해 보면
① 믿지 않는 자들의 죄가 얼마나 큰 가를 알 수 있다.
...그들이 경시한 그분의 존엄성 때문에 그들의 죄가 더 무겁다. 즉 그들은 무한히 진실하신 하나님의 독생자 이름을 믿지 않았으며, 그의 무한히 선하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가치가 있음을 믿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시어 우리를 구원토록 하셨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를 그만큼 사랑하시지 않는단 말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그이 이름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② 믿지 않는 자들의 비참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다. 그들은 이미 "정죄를 받았다."
첫째, 확실한 정죄를 말하고 있다. ...이미 그들이 정죄함을 받은 것처럼, 마지막 날에 반드시 심판날에 반드시 정죄받은 그대로 유예된 집행을 받는다.
둘째로, 현재에 정죄함따라 그들에게 이미 저주가 임했다.

 ...지금 그들에게 하나님의 분노가 앞당겨지고 있다. 그들은 이미 정죄함을 받았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그들을 스스로 정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째, 과거 그들이 죄를 범한 근거가 정죄함이 된다. ...그의 모든 죄가 법에 의해서 드러났기 때문에 그는 이미 정죄함을 받았다. 법의 의무가 그를 완전히 고발하고 있다. 그가 신앙에 의하여, 복음 안에서 율법이 폐기되는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믿지 않기 이미 정죄함을 받았다. 불신앙은 진정 멸망과 파멸에 이르는 큰 죄라고 칭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를 또 다른 범죄들로 향하도록 충동질 하기 때문이다. 죄는 치유와 대조이며, 우리의 구원과 치유를 위한 호소를 Q이 듣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다.
(2) 그리스도를 알 만한 빛을 주었으되, 선입관과 편견때문에 어리석게 되고, 참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파멸을 역시 알 수가 있다.(19절).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 그리고 그의 표적들을 알고 싶어했으나, 그들은 그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그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주정뱅이처럼 무관심하고 어리석어서 그를 믿지 않았다. 이것이 정죄가 되어, 그들을 파멸시킨다. 즉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약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것이다. 여기서 관찰해 보면
① 복음은 빛이다. 

...복음이 세상에 왔을 때란 곧 "빛이 세상에 왔을 때이다." 빛은 자기를 스스로 증거하듯, 복음도 마찬가지이다. 복음은 그 자신의 신적 근원을 나타내고 있다. 빛은 드러내게 하며 참 빛은 쾌적하고 마음을 기쁘게 한다. 어두움을 비추는 빛이 없으면 세상은 정녕 암흑이 된다. 복음의 빛이 "온 천하에 들어왔다"(골 1:6). 구약의 빛처럼 어느 한 장소에 한정되지 않았다.
② 빛보다도 어두움을 (더구나 빛도 복음의 빛인데) 사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할 수 없이 어리석다. 

...유대인들은 율법이란 어두움을, 또한 그리스도의 가르침보다 눈먼 소경의 교훈을 사랑했다. 그리고 이방인들은 복음이 요구하는 온당한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미신적인 예배 행위를 사랑하였다. 죄인들은 그들의 육욕과 결합되어 무지와 과오를 사랑했으며, 그러한 것들이 그리스도의 진리들보다는 죄에 더 열중토록 했다. 금지된 지식을 사랑하게 된 인간의 거역이 오히려 무지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죄에 빠져 비참하게 된 인간은 자신의 질병과 종살이를 좋아하고 있다.
③ 인간이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하는 뚜렷한 이유는 "그들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의 약한 행위들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두움을 사랑한다. 또 자기들의 죄와 비참을 드러내어, 자신들 안에 있는 선한 생각들을 잃게 한다고 하여 빛을 미워하고 있다. 그러한 경우는 비참한 상태로써 그들은 개선되어지지 않고, 빛을 볼 수가 없게 되고 만다.
④ 무지몽매함이 심판날에 죄의 변명이 될 수 없다. 

-- "심판은 정죄" 그 자체로써, 그들의 영혼은 파멸되고, 그들의 눈은 빛을 외면하여 그리스도 그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음에 따른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이렇게 말하다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를 알기를 즐겨하지 않나이다"하니라(욥 21:14). ... 그들은 영생복락 Q안으로 들어가 누림의 구원, 곧 지고지선, 최상의 보배요 보화 그 자체인 주의 도리를 알려고 하지 않으며 혹 (피상적으로라도) 알게 되더라도 그것을 행하려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분명히 심판을 받을 것이다. 즉 실지로 그들은 주의 도리를 범하는 지혜뿐만 아니라 지킬 수 있는 지혜까지도 피상적 지식으로는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이러한 설명에 비추어 보면(20,21절) 인간의 마음과 삶이 선하고 악함에 따라서, 그들이 빛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도, 안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영접해야 한다.
첫째, 악을 행하고 계속 악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 그것은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는"것이 일반적인 견해이기 때문이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처벌에 대한 부끄러움과 두려운 생각을 넘어서서 자기들의 행위를 숨기려고 애쓴다(욥 24:13 참조). 

...악한 행위는 어두움의 행위이다. 처음부터 죄악을 숨겨 허물을 가리려 했다. (욥 31:31). 

...빛이 악인들을 쫓아버리듯(욥 38:12, 13), 복음은 악한 세상에 대해서 하나의 무서움이다. 그들의 행위가 고쳐지지 않는 한, 이러한 빛에 가까이 올 수 없고, 가능한한 멀어지려고 한다.
a. 복음의 빛은 죄인들의 악한 행위를 "책망하기"위해 세상에 왔다. 

-- 즉 모든 것을 드러내고(엡 5:13), 그들의 범죄를 사람들에게 "보이고," 그들이 죄인으로 책망 받았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다. 그래서 "새로운" 계명에 의하여 죄는 "더욱 죄악적인"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복음은 죄에 대한 위로이면서 또한 선고이다.
b. 그래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복음의 빛을 미워한다. 

-- 그러나 "악을 행하였으나" 그것을 슬퍼하여 이러한 빛을 환영하는 자들도 있다. 세리나 창녀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악을 행하고 계속해서 악에 빠져있고, 빛을 싫어하는 자들도 있다. 그들은 자기의 잘못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에서 저항 받은 것은 악한 "마음" 때문이다. 죄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미워한다.
c. "빛에 가까이 오지" 못하는 자들은 빛을 싫어한다는 증거다. 

-- 만약 그들이 "구원하는 지식"에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저주스런 무지"에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둘째, 한편으로, 하나님에게 자신의 순결함을 실증한 고결한 마음이 이런 빛을 받아들인다(21절).

...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나아온다." 그때 비록 복음 대적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소수의 환영하며 기쁘게 영접한 복음 친애자들도 여전히 있었던 것 같다. "진리를 구석진 곳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 정직하게 표현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환한 빛아래에서 수행되는 세밀한 조사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기를 바란다. 이러한 사람들이 복음의 빛에 진정 알맞다. 복음의 빛이 악을 행하는 자들을 지적하고 두렵게 하는 것처럼, 선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참된 안심과 위로를 준다.
a. "선한 사람"의 성격을 보자.
(a) 진리를 좇는 자이다. 

...즉 그의 모든 행위가 선하고 참되다. 때때로 그가 선을 행하는 데 부족할 지 모르지만, 진리를 좇아서 선을 행하려는 것이 그의 목표이다. 그는 비록 결점이 있지만, 조속히 그의 선을 JC안에서 회복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신실하게 행동한 가이오나 바울(고후 1:12), 나다나엘(1:47), 아사(왕상 15:14)와 같다
(b) 빛으로 나아온 자이다. 

...하나님은 그가 (추구하며) 빛으로 나온 만큼 더 자기를 계시하여 주시며 그가 자기를 깨닫고 영접토록하여 주신다. 진리를 좇는 자는 스스로 (분발하여 추구함으로써) 진리를 깨우쳐 자기의 행위를 주의 법도에 맞게 해야한다. 선한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시 26:2)라고 한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열망하며, 비록 자기 자신이 뜻과 관심에 대립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려고 결심한다.
b. "선한 일"의 성격을 보자. 

-- 선한 일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헌신적인 사랑에 의한 그와의 친교 안에서, 그리고 계약 신앙에 의한 그와의 연합 안에서 (JC의 품안에 머물 때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통해) 역사한다. 

-- 그 때에 우리의 일은 선하고 시험에 견딜 것이다.((오직 JC안에 있는 끈기 있는, 승리하는 믿음의 칠전팔기, 백전불굴의 참음과 견딤!!!)) 그때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 일의 법칙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일의 목표가 될 것이다. 또한 그의 능력 안에서 일을 하게 될 때는 그에게 최선을 다하게 된다. 복음의 빛에 의하여 그렇게 된다면, ((JC어떠하심 빼어닮기를 추구하는))우리의 일도 그와 같이 됨이 명백하다. "그때에 우리가 기뻐하게 될 것이다"(갈 6:4; 고후 1:12). 

....이제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와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이 두 사람 사이에는 더 많은 대화가 교환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좋은 결과가 있었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니고데모가 이상스럽게 여겼으나 후에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이 되었기 때문이다.(요7:50, 19:39을 보라...산헤드린회의는 만장일치제였다..니고데모 한사람의 반대로 JC탄핵발의를 무산시킴...담대히 빌라도에게 나아가 JC의 시신을 달라하여 부활하실 JC의 몸에 대한 동산의 새무덤[아리마대요셉]안에 몰약과 침향 섞은것 100리트라로 씻기고 수의를 입혀서 안치함으로써 공공의 적 취급받기를 감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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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의 증거(요 3:22-36)
Ⅰ. 예수께서 유대 땅으로 가서(22절) 제자들과 함께 유하셨다.
1. 우리 주 예수께서 공적인 일을(공생애사역) 시작하신 이후, 예수는 마치 정처 없이 많은 여행을 하신 것은 그의 겸손을 나타내는 하나의 좋은 예이다. 바울은 "가끔씩 여행"을 했다. 예수는 많은 전도 여행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셨다. "의(義)의 빛"이 하늘 끝에서 나와 하늘 끝까지 운행하신다(시 19:6).
2. 그는 예루살렘에 오랫동안 머무르지 않으셨다. 

-- 비록 그가 예루살렘에 자주 출입하셨지만, 여기서처럼 즉시 다른 지방으로 돌아 다니셨다. "이 일 후에," 즉 니고데모와 사적으로 이야기를 한 후, 유대 땅에 가셨다. 

...그 땅은 아직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예수의 초라함을 잘 나타내 줄 수 있는 보잘 것 없고 미미한 장소이지만 훌륭하게 쓰였다. 굿뉴스의 근원지이고 유대 교회의 지도자들이 많은 예루살렘은 그의 가르침과 기적들로 "소란"했을 것이나, 거기서는 아무 선도 행하지 않았다.
3. 그가 유대 땅에 갔을 때 "그의 제자들이 따라왔다." 

-- "그가 시험에 처해 있을 때에도 계속해서 함께 한"자들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거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들었지만, 시골로 따라가지는 않았다. 다만 제자들만이 시골까지 따랐다. 언약궤가 옴겨지면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다 그 언약궤를 따라 좇는 것이 낫다.
4. 유대 땅에서 예수는 "제자들과 머물면서," 사적으로 "이야기하기도"하고 "가르치기도"하였다. 

-- 그는 안정과 휴식을 취하려고 시골로 간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과 좀더 자유스럽게 이야기하려고 갔었다(아 7:11, 12 참조).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자들은, 예수의 제자들과 "그와 함께 머물" 준비도 해야 한다. 예수는 그 곳에 5,6개월 정도 거주하신 것 같다.
5. 예수는 그 곳에서 "세례를 베푸셨다." 

-- 세례를 통하여 자기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지녔던 정직과 용기가 보다 더 크도록 하셨다. 요한이 유대 땅에서 세례를 베풀기 시작했으므로(마 3:1), 예수도 거기서 베풀기 시작했다. 그것은 요한이 "내 뒤에 오실 분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지시와 가르침에 따라서 제자들이 준 것이다(4:2). 그렇지만 이 제자들의 세례는 예수가 주신 세례와 마찬가지이다. 이 세례 베품이 비록 제자들에 의해서이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허락을 받았다.
Ⅱ. 요한은 옥에 갇히기 전까지 계속 세례를 주었다(23,24절). 여기서는 다음을 듣게 된다.
1. 요한이 세례를 주고 있었다.

[[살렘은 애논 가까이에 위치해 있다...유대땅, 곧 예루살렘 동북방]]  

 *애논 :  요한이 세례(침례)를 베풀던 곳으로 요단강에서 서쪽으로 9마일이요 예루살렘에서 동북 6마일 근처의 아이논,  와디 파라의 상류 근처인 나블루스(Nablus)의 북동쪽에 있는 아이눈(Ainun)으로 보고 있다 ///*살렘 : 제롬과 유세비우스는 스구도볼리(현재의 텔 라드가)의 남쪽 12㎞ 지점에 위치한 살루미아(Salumias)를 살렘의 옛 장소로 생각했다. 인근에 여러 개의 샘이 있다. 어떤 학자들(IDB 등)은 예루살렘 동북방 8.4㎞ 지점에 위치한 와디 파라의 샘 근처에 있는 와디 살레임으로 생각한다.

-- " 요한의 세례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세례와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요한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 그리스도는 "요한이 쇠하기"전에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요한이 쇠할 때 요한의 제자들을 받아들여 전도 사업을 계속 순조롭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 요한과 같이 위대한 사람들이 자리에서 물러 설 때 자기들의 의치를 맞아서 계승하는 사람들을 본다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큰 위로가 되는 것이다.
(2) 요한은 그리스도가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지만 계속해서 자기도 그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 그것은 요한 자신에게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계속적인 선포의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회개를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그를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요한은 계속해서 증거했다. 요한은 하늘로부터 명령을 받았으므로, 하늘의 철회 명령이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증거해야 했다. ...이전에 그리스도에 대하여 요한이 증거했는데 그 증거가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날 때까지 요한은 그리스도에게 찾아가지 아니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 계속해서 증거하고 있었다. 갑의 더 큰 은총이 을의 노력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일손이 동원되어야 할 충분한 일거리가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사명에 책임을 가지고, 그 사명이 다할 때 "끝까지"완수토록 노력해야 한다.
2. 요한은 살렘 근처에 있는 애논에서 세례를 주었는데, 그 장소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 그 장소가 어디에 위치해 있었든, 요한은 한 장소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즉 요한은 요단강에 어떤 이점(利點)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요한은 그 곳에 머물면서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었지만, 다시 물이 있는 곳으로 옮겼을 것이다. 

...목회자는 자기의 기회를 잘 좇아야 한다. 요한은 물이 많은 장소를 택했다. 즉 개울이 많은 장소를 찾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기꺼이 세례를 줄 수 있도록 많은 물이 있는 장소를 택해서 소기의 목적을 수행할 수 있었다. 요한이 세례를 준 곳은 물이 "많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3. 거기서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세례를 받았다." 

-- 요한은 공적인 전도를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지는 않았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어떤 성서학자는 이것은 요한과 예수의 세례를 둘 다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그들의 마음이 하나이듯 세례도 하나였다는 것이다.
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않았다는 것이 주목되어 있다(24절). 

-- 이 구절은 순서상 마태복음 4장 12절 이전에 와야 한다. 요한은 갇히기 전까지 자기의 일을 결코 그만 두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생이 짧다는 것을 예견했기 때문에 보다 더 열심이었던 것 같았다. 즉 그는 "아직 옥에 갇히지 않았지만," 멀지 않아 밤이 올 것을 알았다(9:4).
Ⅲ. "요한의 제자와 유대인 사이의 결례"에 대한 변론이 나온다(25절). 그리스도의 복음이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주려 왔음을 알라.
1. 변론자들이란 "요한의 제자 몇몇과 유대인"으로서, 유대인들은 회개의 표지인 바 요한의 세례를 거부하고 있었다. 

-- 회개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이 죄 된 세상을 분열시키고 있다. 이 변론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공격자로서 유대인에게 도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신중함보다는 열성을 가진 초심자임이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의 진리가 흔히 경솔한 자들에 의하여 상처받곤 한다. 그들은 그 진리를 변호할 수 있기도 전에 벌써부터 그렇게 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2. 변론의 문제점은 "결례"이다. 즉 정결 의식이다.

....***[[유대인의 정결례]] 성전시대에 유대인들이 ‘불결’하게 되었을 때 일반적으로 ‘정결’을 회복하는 길은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 할라카(수족씻기...성전예배 침석시, 귀가후 ::: 모르고 지은 죄와 오염 제거) + [불결씻기...알고인지한 죄 씻기](1)기다림 (진 밖에서 대기하거나, 거룩한 성전에 접근이 금지되는 격리의 시간); (2)정결 욕조(미크베)에 들어감; (3)희생제물을 바침.***
(1)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 선생의 세례가 "가장 뛰어나다"고, 즉 유대인들의 모든 정결 의식을 보완시키며, 완전케 하는 것으로 주장했으리라. 

-- 아직도 미숙한 초심자들은 자기들의 재능을 과시하기가 쉽다. 그러므로 진리를 찾으려는 사람은 그 찾은 진리가 확실하다는 것을 알 때까지는 "감추어 두어야"하며, 그 진리에 대하여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
(2) 의심할 여지없이,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정결 의식, 즉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또 장로들의 전통에 의하여 만들어진 정결의식을 주장했을 것이다. 

--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은 신의 보증이고 장로들의 전통은 교회의 관습이기 때문이다. 이런 변론에서, 요한의 세례가 탁월한 특성과 목적을 가졌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세례를 구실삼아 상대적으로 요한의 세례를 폄하했을 것이며, 그래서 결국 본문의 불평이 나왔을 것이다(26절). 유대인들은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동시에 그리스도도 다른 곳에서 세례를 준다"고 말했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이 그만큼 칭찬했던 요한의 세례는 다음 둘 주의 하나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① "이런 것은 교회와 국가의 평화를 위해서는 위험스럽고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 그것은 끝없는 분열을 자초하기 때문이다. 요한이 세례를 주고 있으므로 우리는 세례에 대해서 볼품없는 선생을 세운 셈이다."
② 혹은 "이런 것은 기껏해야 잘못된 것"이고 불완전하다. 

-- 요한의 제자들의 주장처럼 "요한의 세례가 옳다면, 건너편에서 행하는 예수의 세례가 더 낫지 않느냐. 너희 세례는 이미 더 큰 빛에 의하여 어둡게 되고, 조만간 사라지고 만다." 이같은 반대는, 마치 아이 때와 성인 때가 서로 대조를 이루고, 건물의 상부가 토대와 상충하는 것처럼, 복음의 빛을 그 자체의 발전과 대립되게 만들고 있다. 그리스도의 세례가 요한의 세례와 상충될 이유가 없다. 그것은 서로가 잘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Ⅳ. 요한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세례에 대하여 자기 선생에게 한 불평을 보자(26절). 

-- 세례에 대한 상충의 이야기에 당황되어 화가 나고 분개한 자들이 자기의 선생 요한에게 찾아가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니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3:26). 어찌된 일입니까?"라고 말하고 있었다. 변론하고 싶은 그들의 마음이 이 때에 일어났다. 변론에 열중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엉뚱한 사람을 헐뜯게 된다. 이게 바로 사람들에게 흔히 범하는 일이다. 만일 이러한 요한의 제자들이 세례에 대해 변론하기 전에 "세례의 교리"를 알고 있었다면, 이렇게 화나고 분개함이 없이도 적절하게 답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불만이 있지만, 그들은 자기의 선생에게 정중한 태도로 말하고 있다. ..."랍비여," 그러나 비록 그들이 이름을 들먹이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구세주를 경홀히 여기고 있었다.
1. 그들은 그리스도의 세례 주심을 주제넘는 일로 생각했다. 제 마음대로 하는 세례로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세례는 이 장소에서 처음으로 세례를 주고 있던 요한의 특허권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세례는 그가 발명한 특허품인가? "요단 건너편에서 당신과 함께 있던, 당신의 제자를 보십시오. 당신이 세례 주는 것과 똑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것처럼 주예수의 자발적인 겸손이 때때로 사람들에게 시기심을 야기시켜 비난을 받기도 한다.
2. 그들은 그것이 요한에게 배은망덕한 짓으로 여겼다. 

--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줍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가 요한에게서 존경받을 만한 어떤 특성을 받은 것처럼 생각하고, 아직도 요한이 예수보다는 훌륭하다는 선입감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를 가지고 계셨다(5:36). 그는 요한에게 받은 것도 있지만, 오히려 요한 자신에게 더 큰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불신자가 믿는 이에게 더 영향을 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의 경우가 흔히 있다.
...그리스도의 세례는 결코 징계가 아니라 하나의 위대한 개혁이며 요한의 세례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데 불과하다. 요한은 이런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그래서 요한의 증거에 대하여 JC는 말하기를 요한의 증거를 따르도록 요한의 전도를 더욱 칭찬하셨다.
3. 그렇게 되면 요한의 세례가 빛을 잃게 되리라고 요한의 제자들은 추측한다. 

--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갑니다. 우리를 따르던 사람들조차 그에게 모여들므로 우리들도 신중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다 그에게로 모여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까지로 보아서 JC가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이 뚜렷한데도, 어째서 요한의 제자들은 이것을 애석하게 여길까? 

... 과거의 어느 시대에서나 교회를 타락시키고, 교인들과 성직자들에게 치욕을 가져왔던 것은 영광과 존귀의 독점 때문이었다. 또한 이권의 다툼, 그리고 대립과 경쟁의 질투심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스도의 특별한 은사와 은총이 그리고 그의 역사하심과 그 역사의 유용성이 반대를 통하여 위축되거나 비난이 되어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성령은 자기의 뜻이 따라 각자의 사람들에게 다양하게 베푸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무슨 방도로 하든, 심지어는 그리스도의 전파를 막는 방법까지도 그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이므로 기뻐했다(빌 1:18). ...선택하고 역사하심은 하나님이고, 우리는 그가 기뻐하시는 그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영광을 독점하려고 탐해서는 안 된다.
Ⅴ. 자기 제자들의 불평에 대한 요한의 대답이 있다(27절). 

....제자들은 자기들의 불평에 요한이 동조해 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JC의 출현은 요한에게 너무 당연한 기대였다. 다시 말하면 놀람이 아니라 갈망이었다. 그러므로 요한은 제자들의 불평을 제지하고 이스라엘에서 자기가 차지했던 모든 관심과 존경을 JC에게 기꺼이 넘겨주었다. 요한의 이러한 대화에서, 예수의 사역자들은 모두가 자신을 겸손하게 나타내고, 주 예수만 드러내는 훌륭한 표본을 보게 된다.
1. JC와 비교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낮추는 요한(27-30절). 

-- 사람들이 우리를 높여줄수록 그만큼 우리는 자신의 위치와 됨됨을 생각하고, 겸손해져야 하며, 자만과 자기 과시의 유혹 그리고 우리의 존경받음에 대한 친구들의 질시도 경계해야 한다(고전 3:5).
(1) 요한은 하늘의 처분에 따르고, "복종"한다(27절). 

--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은 다 위로부터 내려온다"(약 1:17).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각종의 직책이 주어지며,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각종의 재능이 부여된다.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다(히 5:4). 

...우리의 육적인 삶의 행위들이 모두 하나님의 섭리에 따르는 것처럼, 영적인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에 계속 그리고 필연적으로 의존되어진다. 여기에 다음의 이유가 나와 있다.
① 어째서 우리는 우리보다 더 큰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시기"할 수 없는가?
...여기에 대하여 요한은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가 "하늘이 허락해 주지" 않았다면 자기를 능가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일러준다. 하나님이 요한에게 성령을 한량 없이 주셨다면 그의 제자들이 그것에 대하여 시기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이러한 이유가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보다도 다른 사람들에게 능력과 행운을 더 주신다고 한다면 그 사실에 대하여 불쾌히 여기고, 하나님은 불공정하고, 현명하지 못하며, 국부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마 20:15 참조)
②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은사와 유용성에서 뒤져 있더라도, 그들의 탁월성에 시기심을 품거나 "불만을" 갖지 말아야 할 이유는 요한은 자기가 선생으로, 예언자로, 또는 세례를 주는 자로 된 것은 하늘의 자연스러운 은사인 것으로 알고 있다. 즉 그가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된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이다. 그래서 이제 그에 대한 관심이 약화되었다면, 그것은 역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다.
...하늘로부터 받는 자란 허락된 것만 취할 수 있는 자이다. 또 요한은 "영속적인" 사명을 받은 것이 아니다. 단지 "일시적인" 사명을 하늘로부터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즉시 끝난 것이 분명했다. 그러므로 요한은 자기의 사명을 완수했을 때에, 자기가 쇠퇴됨을 만족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어떤 성서학자는 이 구절에 대해서 아주 색다른 의미를 주고 있다. 즉 요한은 제자들과 같이, 자기의 세례가 그리스도의 나타남과 관계가 있다고 사람들에게 아주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러나 자기 뒤에 오신 그리스도가 아직도 자기보다 뛰어나지 않으므로 어쩔 수 없이 그러한 말을(3:27)했다. 그러나 결국 스승인 요한보다 그리스도가 점점 뛰어남에 제자들은 질투를 갖게 되었다. 여기서 요한은 제자들의 질문에,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라고 대답하고 있다는 것이다.
... 사역이란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이 없이는 무익한 일이 되고 만다. 복음을 이해하고 믿도록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떠한 사람도 복음의 가장 작은 것도 알지 못하며, 복음의 가장 확실한 것도 믿지 못한다.
(2) 요한은 전에 자기가 증거했던 사실을 재강조 한다(29절).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에 앞서 그의 길을 예비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증거는 아주 확고하고 꾸준한 것으로써,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었다. 그의 태도는 대제사장들처럼 불쾌한 표정도 아니고, 자기 제자들처럼 우쭐거림도 아니었다.
① 이것은 자기 제자들의 불합리한 불만을 책했다. 

-- 자기의 선생이 예수에 대해 증거한 내용을 제자들이 말했다(26절). 요한은 "자, 내가 증거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라. 그러면 흠 잡기 좋아하는 너희의 마음이 찾아 낼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는가? 어째서 너희들은 그때 나를 그와 대립하는 것처럼 여겼는가? 나는 그 앞에 보냄을 받은 자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내가 그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 어째서 너희에게는 이상스럽게 여겨지는가?"라고 말했다.
② 요한은 자신을 그리스도와 대등한 위치에서 비교할 만한 "건덕지"를 제자들에게 주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위로"를 받는다. 

-- 그러나 제자들이 언제 그런 일을 범할 모르기 때문에, 특히 행할 때, 제지해야만 한다. 요한은 자기가 메시야라는 소망을 자기 제자들에게 고무시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분명히 그 반대라고 했다. 그것이 그에게 안심을 가져다주었다.
...권위를 지나치게 강요하는 세상사람들의 일반적인 하나의 구실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면 "속여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의 해로운 격언이다. 그들은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말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는다."
(3) 요한은 그리스도의 진출에 아주 만족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자기의 제자들은 실망했지만, 그는 기뻐했다. 그는 이 기쁨을 훌륭한 비유로써 나타내었다.
① 그는 구세주를 신랑으로 비유하면서,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다. 

-- 사람들 모두가 신랑에게 가는가? 그곳이 아니면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신랑이 사람들의 마음을 독차지했는가? 그가 아니면 누구가 그렇게 해야겠는가? 그것은 신랑의 권리이다. 신부는 신랑에게만 가야 하지 않을까?" 그리스도는 구약에서도 신랑으로 예언되어졌다(시 45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그러나 본성의 차이가 "혼인에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를 정결케하는 의식이 있었지만, 죄의 더럽힘을 막지는 못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신부로 맞으신다. 그래서 교회를 자기의 신부로 사랑하시고 교회의 약속을 주셨다. "교회는 그리스도에 종속되어 있다." 성도들이 믿음과 사랑으로 그에게 헌신하는 한, 신랑도 신부에게 그만큼 하신다.
②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비유한다, 

-- 그를 시중하고, 그가 존경과 예배를 받도록 하며 교회와의 결혼을 수행토록 그를 도우며, 그에 대한 복음을 전하며, 그를 대신해서 진력하며, 이 결혼이 계속되고 있음을 기뻐했다. 그리고 모두가 절정에 세례를 주었던 모든 것은 그를 안내하려는 것이었다. 이제 그는 오셔서 그가 원하는 것을 하셨다. "신랑의 친구는 서서 그의 음성을 듣고 있다." 즉 서서 그를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신랑의 친구인 요한은 오랫동안 기대했던 결혼이기 때문에 "신랑의 음성을 듣고 기쁨이 충만하였다."
첫째, 신실한 사역자들은 신랑의 친구로서, 사람들의 사랑을 그에게 전하야 한다. 

...즉 신랑의 친구는 대리인이기 때문에 신랑에게 소식을 주기도 하고 그의 뜻을 전달하기도 한다. 그들은 이 일에 신실해야 한다.
둘째, 신랑의 친구들은 "서서,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래서 그에게 지시들을 받고, 그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들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구해야 한다(고후 13:3). 이것이 "신랑의 음성"이다.
세째, 믿음과 사랑 안에서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시키는 것이 선한 사역자들이 모두 바라는 기쁨의 충만이다. 

...그리스도의 결혼 날 친구의 마음이 기쁘다면(아 3:11). 신랑을 사랑하고, 신랑의 존귀와 그 나라의 왕성을 바라는 신부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4) 요한은 바른 고백을 했다. 그리스도의 "명성과 능력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30절). 

-- 만일 요한의 제자들이 주 예수의 위대함이 점점 나타나는 것을 보고 애석하게 여긴다면, 그들은 시기와 경쟁에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처럼, 더욱 더 슬픔을 당하게 된다. 요한을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한다"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회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① 요한은 점점 퍼지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보고"아주 기뻐했다." 

-- "그는 흥해야 한다. 그리스도에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앞으로 모일 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여명과 같이 그리고 겨자씨와 같이 점점 커지게 될 것이다.
② 요한은 자신의 인기가 쇠하는 이런 결과에 대하여 결코 불쾌하지 않았다. 

-- "나는 쇠하여야 한다." 피조물의 탁월성이란 이런 것이므로, "쇠하여야 한다." 나는 완전함의 한 목표를 깨달았다."
첫째, 장차 그리스도 영광의 광채가 다른 영광의 모든 광체들을 실추시킨다. 

-- 그리스도와 겨루려는 이 세상의 영광과 육적인 영광은 이 세상에서 쇠하고 사라지지만, 그리스도의 지혜와 사랑은 흥하고 점점 퍼지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도 그리스도에게는 도움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여명이 밝아지므로 새벽별 빛은 사라지는 것과 같다.
둘째, 우리의 낮아짐과 모욕당함을 통해서 최소한 JC의 이름이 흥하도록 하리라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친히 사시는 삶 통해 존귀케 됨 을 추구!!))

-- 우리는 기쁨으로 그러한 일을 감수하고 만족을 얻어서 그리스도가 "전부"가 되도록 해야 한다.
2. 여기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흥하게 하며," 그에 대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오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지 말며, 그들 스스로가 그에게 간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1) 요한은 "존귀한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다(31절). "그분은 위로부터 오셔서 만물 위에 계시는 자이다."
① 여기서 요한은 그리스도의 오심이 "위로부터," 즉 하늘로부터임을 알고, 수태 이전에 이미 지니고 있던 신적인 본성까지도 증거하고 있다.
...우리에게 하늘의 뜻 혹은 하늘 나라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 줄 수 있는 적합한 사람은, 하늘로부터 오신 그분 이외는 없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하시려고 그를 "내려 보내셨다."
② 그런 까닭에 요한은 그의 나라도 추론하고 있다. 그는 "만물 위에" 계시다. 이러한 그와 우열을 다툰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주 예수의 존귀함을 말하게 될 때, 그 존귀함은 우리의 개념과 표현의 모두를 넘어서고 있으므로, 단지 우리는 그가 만물 위에 계시다는 것밖에 할 말이 없다. 기록에 의하면, 세례 요한은 여인 중에서 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자라했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그리스도의 오심이 그의 신적인 권위의 박탈은 아니다. 여전히 그는 "만물 의에 계신다." 이 말은 어떠한 사람도 그와 우열을 다툴 수 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또한 그는 이 세상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육을 입으셨다. 그의 출생지는 이 세상이며 그의 양식도 이 세상에서 구했다. 또한 그의 이야기는 이 세상에 관한 일이고, 그이 관심은 이 세상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첫째, 인간의 기원은 이 세상으로, 첫 사람인 아담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욥 33:6).
둘째, 그러므로 인간의 제도도 "세상적이다." 

-- 인간의 육은 연약하고 죽을 것일 뿐만 아니라 그의 영도 부패되고 세상적으로 되었다. 예언자들도 사도들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성질의 인간들이다. 비록 그들이 자신 속에 훌륭한 비밀을 지니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육으로 지음을 받았다 .이렇게 육을 입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우열을 다툴 수 있겠는가? 질그릇과 같은 우리들은 서로 우열을 다툴 수 있겠는가? 질그릇과 같은 우리들은 서로 우열을 다툴 수 있겠지만, 하늘로부터 오신 그와는 우열을 다툴 수가 없다.
(2) 탁월하고 확실성이 있는 JC의 교훈에 관하여 그분의 가르침이 요한보다 더 존숭되고 따르는 자가 더 많게 됨으로써 요한의 제자들은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요한은 이러한 이유의 타당성을 자기 제자들에게 설파하고 있다.
① 요한은 자기의 역할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또 무리들에게 이야기했다. 

....자기는 "땅에 속했다"고 한다. 예언자들도 마찬가지다(고후 3:5). 예언자들과 요한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비교하여 볼 때 얕고 평범했다. 하늘이 땅보다 훨씬 높은 것처럼, 그리스도의 가르침도 그들의 가르침과 비교하여 볼 때 그렇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 세상 것을 말씀하시나,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는 "하늘의 것"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② 하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는 그의 인성뿐만 아니라 교훈에 있어서도, 이제까지 활동한 어떤 예언자들보다 월등하다. 

....어떤 사람도 그와 같이 가르친 사람은 없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교훈이 우리에게 권장되고 있다.
첫째, 전혀 오류가 없이 "분명"함으로 잘 받아들여진다. "그는 자기가 보고들은 것을 증거 하신다."(32절). 여기서 관찰해 보면
a. 그리스도의 신적인 지식이 있다. 

....JC는 자기가 보고들은 것만 즉 그가 완전히 알고 철저하게 정통한 것만 증거하고 있었다. 그가 하나님의 본성과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드러낸 것은 그가 그것을 알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하나님의 뜻을 드러냈다는 것은, 간접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다는 것이다.
...예언자들이 증거하는 것은 그들이 직접 보고 들었던 사실이 아니라, 천사들의 도움에 의하여 꿈과 환상으로 안 것을 전한다. 요한은 외치는 자의 소리로써 "증거자체이신 분께 영광을 양보하라. 그리고  잠잠하라."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들 각자 자유스럽게 믿고 안믿고 할 수 있는 철학적 가설이나 새로운 개념처럼 의심스러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의 계시이다. 그 계시 자체가 영원한 진리이고, 우리에 대한 계속적인 관심사이다.
b. 그의 거룩한 은총과 선함을 보자. 

....그가 보고 들었던 것이 거의 우리에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는 기꺼이 그것을 알려 주었다. 바울도 낙원(셋째 하늘)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기지 못할 말이지만(고후 12:4). JC는 자기가 보고 들었던 것을 그대로 말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란 그의 증언을 말하는 것으로
(a) 그의 증언의 확실성은 소문에 의하여 들려지는 소식이 아니라, 법정에서 진술되어진 증거처럼 심사숙고와 확신에 찬 진술임을 말해 준다.
(b)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애정이 넘치는 그의 진지함이, 사도행전 18장 5절처럼 그이 관심과 때를 통하여 입증되어졌다. 그리스도가 가르치는 교훈의 "확실성"에서 요한은 때를 얻어
[a] 대부분 사람들의 불신앙에 대하여 한탄했다.
...비록 그가 전혀 오류가 없는 진리를 증거 했지만, 어떤 사람도 그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며, 듣지도 안고, 염두에 두지도 않고 신용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요한은 놀라움과 슬픈 일로써 말하기를, "그러한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누가 우리의 증거를 믿겠는가? 사람의 가장 위대한 임무가 무엇인지 알고 믿고 받아들이기에는 참으로 어리석고 둔하다. 제자들조차도 적이로구나!)고 했다.
...요한의 제자들은 사람들 모두가 JC에게 가는 것을 슬퍼했다(26절). 그 제자들은 JC에게 아주 많은 사람들이 따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한은 JC를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슬퍼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거의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죄인들의 불신앙은 성도들의 슬픔이다. 바울의 큰 근심도 이와 마찬가지이다(롬 9:2).
[b] 그는 택함을 받은 남은 자들의 신앙을 칭찬했다.(비록 적은 무리이지만)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우리가 확약하지(인치지...인정하지)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참되시다.
 ...하나님이 참되시다면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장이가 된다. 하나님의 진리가 도움을 받으려고 우리의 신앙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신앙에 의하여 그의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우리 스스로가 존귀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스스로가 존귀하심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의 약속은 모두가 예와 아멘이다. 믿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아멘이라 대답한다(계 22:20 처럼). 그리스도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자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이름"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명과 그리스도의 증거는 함께 있다(계 12:17).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우리는 (Q으로부터)인침을 받는다.
첫째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에 관해 그의 모든 약속에 대하여 그리고 그의 모든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게 대하여, 신실하시다. 

-- 하나님은 우리 선조들과 약속하신 것을 모두 지켰고, 어느 것 하나도 지키지 않은 것이 없다(눅 1:70; 행 13:32, 33).
둘째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약속은 모두 진실이다. 

-- 우리는 하나님의 진실하심에다 우리의 목숨을 건다.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그가 진실하심에다 우리의 목숨을 건다.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그가 진실하신 분으로 여기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행복을 누리려고, 이세상에서 모든 것을 단념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심히 존경하고 귀히 여긴다. 사람들은 신뢰할 수 있는 분에게 존경을 돌린다."
셋째, "거룩한" 가르침이라고 사람들에게 천거된다. 이 천거는 그리스도 자신의 추천이 아니고 그를 보내신 이의 추천이다(34절).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는 전하도록 보내심을 받았고, 또한 전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성령을 한량없이"주셨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은 하늘로부터 소식을 가져오는 사자들과 같지만, 그리스도는 하나의 대사의 자격으로 오셔서, 사람들에게 대사로서 활동하셨다. 때문에
a.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지, 인간의 약점을 발설하지는 않았다. 

-- 그의 본질과 언어는 거룩하시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로 증거했기 때문에(3:2), 그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탁으로써 말하는 선지자들과 "신앙의 정도에 따른"예언을 하나님이 보내신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b. 그는 어떤 예언자도 예언하지 않았던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그에게 할량없이 주셨기" 때문이다. 

-- 어떠한 사람도 성령의 도움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가 없다(고전 2:10, 11). 구약의 예언자들도 "다소" 성령을 받았다(왕하 2:9, 10).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성령을 주셨지만(고전 12:4), 그리스도에게는 "한량없이"주셨다. 다시 말하면 그 안에 성령이 충만하여 한이 없으시다. 그에게는 성령이 그릇처럼 제한되어 있는 게 아니라 샘처럼, 한없이 길은 바다처럼 간직되어 있다. "예언자들은 하나의 한정된 방식으로 성령을 받고, 어떤 특정한 것만 말하며, 흔히 자기 말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는 항상 성령이 무제한으로 내주해서 그의 선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이다"라고 휘트비(Whitby)박사는 이야기하고 있다.
(3) 그리스도에게 "부여된 능력과 권위"는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도 탁월하며, 그의 명성도 마찬가지이다.
① 그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아들"이다(34절). 

-- 그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신다. 예언자들은 종으로서 신실하지만, 그리스도는 아들로서 신실하시다. 그들은 종으로서 봉사하지만, 그리스도는 아들로서 사랑을 받으며,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자이다(잠 8:30). 하나님은 그 아들을 아주 기뻐하시며, 그를 사랑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사랑하시고 있다. 하나님은 그가 굴욕의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도 여전히 사랑하셨으며, 그가 굶주림과 곤경에 빠져 있을때에도 계속해서 사랑하셨다.
② 그는 "만유의 주(主)"이다. 

-- 자기 아들에 대한 사랑의 확증으로써 "아버지는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다." 사랑은 아끼지 않는다.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서 만족을 취하시고 확신을 가지셔서, 자기 아들을 인간에 대한 신뢰로써 수령자로 세우셨다. 그 아들에게 한량 없는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그에게 만물을 맡기셨다. 그것은 그 아들이 주인으로서 만물을 다스릴 자격이 갖추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아들인 중보자 속에 만물을 다 주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존귀이며, 모든 그리스도의 모든 권세가 설명된다(마 28:18).
--모든 피조물이 그의 발아래 있고, 구원의 모든 사건이 그의 손안에 있다. 고로 그는 만유의 주이다. 천사들이 그의 종들이듯, 마귀들은 그의 포로들이다. "그의 상속물로 주어진 이방인들," 곧 모든 인간들에게 권능을 나타낸다. 또한 하늘나라도 그의 통치를 받고 있다. 그는 위대한 전권대사로서 화해 계약의 조건을 정할 수 있으며, 위대한 입법가로서 교회를 다스리시며, 위대한 시물(施物)분배 관리임을 물을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 그의 손에는 황금으로 된 홀(笏)과 철로 만든 막대를 가지고 있다.
둘째, "모든" 은혜 전달의 통로인 그의 손안에 있다. 

-- 즉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시려는 선한 모든 것, 즉 영원한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나님이 우리 손에 이러한 모든 은혜를 직접 부어주시기에는 우리가 무가치한 자들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그의 분노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수탁자로 정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려던 것들을 자기 아들의 손에 주었다. 그 아들은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데, 하나님에게서는 권위를 그리고 우리에게서 호의를 받을 만하다. 모든 은혜가 그의 손에 주어졌고, 또한 그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신앙에 대해서 하나의 커다란 격려로, 새 계약의 풍요가 그만큼 확실하고, 애정이 깃들어 있으며, 그만큼 흡족하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을 주시며, 자기에게 그 모든 것을 간구토록 하신다. 하나님과 신자들 모두가 그에게 맡길 만큼 그는 능력이 있다.
③ 영원한 행복을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인 신앙의 대상이 되신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만물보다 선재하신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36절).
...이것은 요한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에 관하여 증언했던 요약이 이 구절로써, 또한 그의 모든 일이 결론이기도 하다. 만일 하나님이 자기 아들에게 이런 권위를 주셨다면,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신앙으로 존귀함을 드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들을 허락해 주시기 때문에, 그의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의 증언을 믿고, 그의 말씀을 선하고 진실된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이러한 하나님의 은사에 참여할 수 있다.
...받는다는 것은 준다는 것의 적절한 대답이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 이 말씀이 그의 복음의 요체이다. 여기서
첫째,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축복 상태를 보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a.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특성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으로 그가 말씀하신 것을 참되게 믿으며, 그를 따르고, 그 안에서 확신을 갖는 것이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이익이란 영생에 못지 않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희생을 치르시어 우리에게 영생을 주려고 하셨다. 즉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불멸하는 영혼의 행복과 같다. 이제까지 믿음이 진실한 자들은 영생을 얻었다. 즉 그들은 현재도 얻었을 뿐 만 아니라 앞으로도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a) 그들은 영생에 대한 아주 좋은 보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보증에 의하여 영생이 그들에게 확실하다. 즉 이 영생이 그들의 보호자의 손에 있어서, 아직은 그들의 소유로 되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영생을 얻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그 안에서 영생을 얻게 된다.
(b) 그들은 현재 하나님과 그 사랑의 증표자인그리스도와의 사귐에서, 영생에 대한 안락하고 만족스러운 기대를 가지고 있다. 은혜란 이미 시작된 영광이다.
넷째, 불신앙자들의 비참한 상태. "그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다."
...이 말은 "불신"과 "불순종"을 뜻하고 있다. 불신앙자란 그리스도의 교훈을 신뢰하지 않는 자이고, 그리스도의 통치에 반대하는 자이다. 이런 자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다스림을 받지 않을 것이다.
a. 그들은 이 세상에서와 앞으로 올 세상에서 행복을 누릴 수 없다. 그들은 영생, 즉 그리스도가 주실 생명을 보지 못할 것이다. 

-- 그들은 영생을 맛보지 못할 것이며, 영생에 대한 어떤 만족할 만한 기대도 갖지 못할 것이고, 결코 영생을 알지도 못해서 더욱 자신들을 타락으로 악화시킬 뿐이다.
b. 그들은 비참하게만 된다. 

-- 불신앙자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뿐이다. 하나님의 은총이 영생인 것처럼,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는 정녕코 죽음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다. 율법을 어김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 자들은, 복음의 은총에 의하여 그 진노를 벗어나게 하지 않는다면 저주받을 수밖에 없다. 그는 매일매일의 범죄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며, 항상 그 진노에 머물러 있다. 그에게는 과거의 부채가 해결되지 못한 채, 또 새로운 부채가 증가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심판의 날을 늦추거나 지연시키지 않고 하루하루를 준비하시고 계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진노는 나타날 것이며, 그날을 비장(秘藏)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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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mei'on(4592, 세메이온) 표시/표식/표적(행한 바 그가 누구/무엇인지 식별할 수 있는 기적).징조/전조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세메이온은 세마(sh'ma: 표시, 예고)에서 유래했으며, 세마와 함께 '징조, 표시'를 의미하며, 다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a)  이 단어는 사람이 특정한 사람이나 사물을 인식하는 '표적' sign, 확신 시키는, 확증하는, 증명하는 '특징', '표' mark 혹은 '표', '증거' token를 의미한다. 호머의 작품에서 이 단어는 병의 징후, 짐승의 냄새, 배의 깃발, 희생제물로 바칠 짐승임을 보증해주는 표시, 통치자의 왕관, 반지의 인장, 방패에 있는 문장, 양 떼에 찍은 소인 등을 나타낸다.

(b)  이 단어는 다가올 사건을 알리는 '징조' foretoken, 혹은 '전조' omen을 의미한다.

(c)  세메이온에 놀라움의 성격이 있을 때 이 단어는 "기적의 표적"(miraculous sign)의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사물의 자연적 진행과는 모순되는, 신 혹은 기적을 행하는 자가 행한 '기적'(miracle)을 뜻하기도 한다.

이 단어는 주전 2세기의 저술(Polyb. 3, 112, 18)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어구 세메이가 카이 테라타(표적들과 기사들)에서 발견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세메이온은 70인역본에서 약 12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오트의 역어이며, 이 히브리어처럼

(a)  '표적' sign, '특징', '표' mark, '징후' token. (b)  '기적의 표적' miraculous sign, '기적' miracle을 의미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세메이온은 신약성경에서 77회 나온다.

(a)표시, 징조

①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세메이온은 ***어떤 사람을 알아 볼 수 있는(눈에 보이는)표시 sign이다. 

---예를들면, 마 26:48에서 배신자가 성전 파수꾼에게 예수님을 넘겨 줄 때의 입맞춤(사전에 합의한 표시임) 혹은 눅 2:12에서 갓 태어난 구세주임을 지적해주는 말구유("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에 대해 1Q 27Ⅰ1:5; 출 3:12; 삼상 2:34; 삼상 14:10를 참조하라)가 세메이온이다.

***경고의 '징조' omen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며, 대개 우주적 성질을 띠며, 역사의 종말을 알리는 것이다(막 13:4; 눅 21:7). 혹은 인자의 임하심과 세상의 끝(세대의 완성)에 징조가 있다(마 24:3). 이때 "메시야의 발자국"과 함께(m. sota 19:15) 전쟁의 무질서와 기근, 온역, 지진이 있으며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눅 21:11)가 있을 것이며, "일월 성신에 '징조'"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구약성경의 영향이다(참조: 막 13:24이하와 병행구에서 사 13:10; 사 34:4과 행 2:19에 인용된 요엘 3:3). "여호와의 날"에 수반하는 현상은 마지막 때의 세대에게 경고의 표시로서 삽입적이고 법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표적"은 이해되지 않는다(마 16:3). 

파루시아의 중대한 시점은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나타나는 것인데(마 24:30), 이것은 완성을 가리키며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으며, 또 다니엘이 밤에 이상 중에 본 종말론적 심판관의 도래 및 즉위와 관련된다(단 7:13이하; 슥 12:10-14). 

예수님 자신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비방을 받는 표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세움 받는다; 예수님의 사역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드러낼 것이며, 이 마음들은 그들 자신의 종말론적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② 세메이온, ***하나님의 주권의 은혜로운 의를 드러내고 믿음을 전제로 하는 능력의 역사(뒤나미스)인 예수님의 치유의 기적과는 대조되어,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세주 혹은 선지자임을 확증해주는 기적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표적들은 믿음을 일깨우기 위해 의도되며(참조: 출 4:1-9), 간청된다기 보다는 강력히 요구되거나 촉구된다.

+++지팡이를 뱀으로 변하게 한 기적이 한 예이다(출 3:12; 출 4:1-5; 출 7:8이하); 애굽의 재앙들도 하나님을 지시하는 표적들이다(출 7:3; 출 10:2; 신 7:19; 신 26:8; 참조: 행 7:36). 유대 전쟁 이전에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심을 증명하려는 의도에서 "자유의 표적들"을 약속하면서 나타났다(요세푸스 B.F.ⅱ259: Ant. xx. 168). 이들이 약속한 기적들의 상징적인 특징은 모세나 여호수아의 행위들과 일치한다는 것이었다(참조: Ant. xx. 97.과 수 3:7; xx. 169이하와 수 6:8이하). 그러나 요세푸스는 그들을 사기꾼이라고 비난하였다(Ant. xx. 167; B.J.ⅱ259-61). 막 13:22과 마 24:24은 거짓 선지자들과 메시야들에 대해 경고한다. 그들은 심지어 택함 받은 백성까지도 속이려고 큰 포적들과 이적들을 일으킬 것이다(참조: 신 13:1-4). 그들의 활동무대는 광야이다(마 24:26; 참조: B.J.ⅱ259).

***예수님은 "하늘로서 (즉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표적"을 행하라는 요구를 강력하게 거부하신다(막 8:11이하; 마 16:1; 눅 11:16; 참조: 마 12:38); 이 요구는 단지 패역한 세대의 믿음의 결핍을 드러낼 뿐이다(막 8:12; 마 16:4; 마 12:39). 마 12:39; 마 16:4; 눅 11:29에 따르면 이 세대는 오직 "요나 선지자의 '표적'"밖에 받을 것이 없다. 이것은(Q에 따르면) 이방의 도시 니느웨에서 요나의 성공적인 회개에의 요청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스라엘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회개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마 12:41; 눅 11:32). 마 12:40에 따르면 물고기에 의해 기적적으로 구조된 것이 이 "요나의 표적"이며 따라서 인자가 "땅 속에" 있는 것, 즉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킨다. 아마도 이 해석은 눅 11:30에도 적용될 수 있으며(요나는 니느웨에게 표적이 되었다). 요한복음에서는 나흘 만에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일이(요 11:39) 요나의 표적 대신 나온다. 마지막으로 헤롯 안디바는 예수님에게서 (확증해주는) 표적을 헛되이 기대했다(눅 23:8). 마 4:1-11 병행구의 마귀의 요구들도 표적을 요구한 것으로 이해되며, 예수님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도전한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막 15:30 병행구). 폭풍을 꾸짖으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소량의 떡으로 많은 무리를 먹이신 것과 같은 기적들은 출 14-16과 관련이 있으므로 확증의 표적이라는 인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지만, 그러한 기적들은 도움을 주시는 자비의 행위로 묘사된다(막 4:38이하; 막 6:34, 막 6:50이하). 

마가복음의 끝맺음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약속하시는데, 이 기적들은 제자들이 보고하였고 교회에서 은사들 가운데서 나타났다(막 16:17; 참조: 눅 10:17-19; 고전 12:4이하, 고전 12:28이하). 그러한 기적들은 선포를 눈에 보이도록 확증하기 때문에 "표적들"이라 불리운다(막 16:20).

③ 비록 요한도 역시 표적들과 표적에 대한 요구에 포함되어 있는 본질적인 문제들을 인식하지만(요 2:18, 요 2:23; 요 4:48; 요 6:2, 요 6:14, 요 6:30)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들을 세메이아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기적들을 통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의 사명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요 2:11; 요 20:30이하). 

세례(침례)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않은 반면에(요 10:41), 많은 위대한 표적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특징짓는다(요 3:2; 요 7:31; 요 9:16; 요 11:47; 요 12:37). 부활하신 예수님의 나타나심도 이와 유사하게 이해되어야 한다(요 20:30). 

요한복음의 기적들은 기적 자체를 넘어 종말론적 구세주를 지시하며(요 6:14; 요 7:31; 요 12:18), 그에 대한 믿음을 가져오는 것이다(요 2:11, 요 2:23; 요 4:53; 요 9:35; 요 11:47이하; 요 20:30이하); 그러나 이 믿음은 피상적이거나 자기 중심적인 채로 남아있기도 하고(요 4:48; 요 6:14, 요 6:30) 거부되기도 한다(요 12:37, 요 12:39). 그리고 예수님이 일개 사기꾼이라는 확신을 표적들이 항상 제거할 수는 없었다(요 11:47이하, 신 13:1-4을 따름). 따라서 표적이 의미하는 것, 즉 기적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며, 그의 "팔"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것이 간과된다(요 12:37이하, 사 53:1의 인용; 참조: 요 5:20, 요 5:36; 요 9:3이하; 요 17:4). 표적들을 해석하는 구절들을 제쳐놓더라도 요한은 표적들의 확증하는 능력을 각각의 특성들로써 설명하는데, 그것의 목적은 모세, 엘리야, 엘리사의 기적들 같은 고전적인 실례들을 무색케 하는 것이다(참조: 요 2:1-11; 요 4:46-54; 요 5:1-7과 왕상 17장; 왕하 5장, 요 6:9과 왕하 4:42이하, 요 6:31과 출 16:4, 출 16:13-15). 

요 2:11; 요 4:54에서 시작된 표적의(단속적인) 계수는 모세(출 4:8)와 엘리야(왕상 17장)의 처음 두 표적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찰하면 이 표적들은 요한의 신학과 일치하고 빈틈을 드러내지 않는다.

④ 사도행전도 역시 예수님과 사도들의 기적들을 확증하는 표적으로 이해하지만 실제로 예수님의 표적에 대해서는 뒤나메이스라는 용어가 더 많이 사용되고 또한 세메이아 카이 테라타(표적과 기사)에 부가되어 나타나기도 한다(행 2:22; 행 8:13). 자주 사용된 "표적과 기사"라는 어구는 두 표현 사이의 차이점이 모호해져서 "기사와 표적"이라는 순서도 역시 가능하다(행 2:22, 행 2:43; 행 6:8; 행 7:36). 예

수님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 가운데서 그를 통하여 행하신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그들 앞에 "입증되셨다"(행 2:22). 

이 표적들의 계시적·도구적 성격은 선교사역의 이상에 기초하며 모세를 향하여 있으며, 연속성을 위해 의도되어 있다: 모세는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으니" 하나님 자신과 같이 임하는 선지자임을 지적하는 것이다(행 7:36이하): 하나님께서 이 선지자에게 능력을 부여하셔서 보내셨기 때문에(신 18:15) 하나님은 또한 예수님을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표적의 근원이시다. 

표적과 기사들은 사도들에 의해(행 2:43; 행 5:12), "집사" 스데반에 의해(행 6:8), 빌립에 의해(행 8:6; 행 8:13),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행 14:3; 행 15:12) 행해졌다. 비록 하나님 자신께서 사도들의 표적들에서 역사하시지만 행 4:30에 따르면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적을 행한다(참조: 행 3:6과 행 2:21이하). 높임 받으신 그리스도로서 예수님은 그의 사자들을 통하여 치유하시고(행 9:34), 따라서 예수님 자신이 그를 선포하는 말씀의 진실됨을 확증하신다(행 14:3). 이 표적들은 말씀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앉은뱅이를 고친 일(행 3:1-8)은, 심지어 적대자들까지도 시인하였으며, 그들이 말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모든 거민에게 알려진 표적으로서(행 4:16), 말씀 선포의 진실됨에 관한 문제를 야기시킨다. 이 표적들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며(행 8:6; 참조: 행 9:35, 행 9:42) 시몬 마구스의 마술을 패배 시킨다(행 8:13). 그러나 이 표적들은 애굽의 술사들에 대한 모세와 아론의 승리 같은 단순한 시위적인 기적들도 아니고(참조: 출 7:1-13), 응징의 기적들도 아니며(행 5:1-11은 세메이온을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치유이다(행 4:22; 행 9:32-42). 

욜 2:30을 인용한 행 2:19에서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는 실로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세메이아)"로 보완된다. 여기서 세메이아는 아마도 예수님과 사도들의 기적을 가리키는 것 같다. 행 15:12에 언급된 "표적과 기사"는 바울과 바나바의 이방인 가운데서 성공적인 선교사역을 가리킨다.

(b)  ① 바울에게 세메이온은 서신을 끝맺을 때 자신의 서명과 같은 (외적) '표시'이기도 하다(살후 3:17). "할례의 표"는 아브라함을, 믿는 이방인들의 조상으로 만든 "믿음의 의의 인"이다(롬 4:11).

②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지만(고전 14:22)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그것을 하나님에 의해 유발된 의사소통으로 인식하지 못하며(참조: 고전 14:21에 인용된 사 28:11), 그것을 조롱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완악함과 구제할 도리가 없는 절망적인 상태를 드러낸다.

③ 마지막으로 세메이온은 임박한 구속과 하나님의 활동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기적'일 수 있다. 바울은 "표적을 구하는 것"을 유대인의 종말론적 기대의 특징으로 간주한다(고전 1:22); 십자가의 선포를 받아들이는 것은 헬라인들이 지혜를 사랑하는 것 만큼이나 똑같이 거리끼는 것이 된다(참조: 막 8:11이하). 

고후 12:12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가운데서 그를 통하여 행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참된 사도의 표"라고 말한다. 그 표들은 바울이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 평가는 어리석은 짓이다(고후 12:11), 왜냐하면 이 표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바울 사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복음의 진실을 증거하고 복음 선포자를 정당화 시켜준다. 사도의 표는 카리스마적인 기적들 뿐만 아니라 회중들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 성공적인 선교사역을 가리키기도 한다(참조: 고후 3:2).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때 기적을 수반할 것이다. 바울은 신 13:1-4을 따라서 그런 기적들을 "거짓 '표적'과 기사"라고 부른다(살후 2:9). 교회의 분당은 믿음을 시험하는 역할을 할 수 있으므로 필요한데,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종말론적으로 상징적인 특성을 가진다(고전 11:18이하).

히 2:4에 따르면 예수님의 선포와 그의 최초의 경청자들의 선포는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 증거되었다(참조: 행 2:22). 

(c)  요한계시록 기자는 통렬한 묵시적 표적들을, 즉 극적인 사건들을 가져올 상징적으로 의도된 하늘의 장면들을 본다: 즉 초승달 위에 있는 한 여자(계 12:1), 그녀의 대적자 용(계 12:3), 일곱 대접을 가진 천사들(계 15:1)이다. 이 표적들은 또 기적적인 일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마지막 때에 거짓 선지자들이 이 기적적인 일들을 행하여 사람들이 "짐승"을 섬기도록 유혹한다(계 13:13, 계 13:14; 계 19:20). 이 짐승에게서 나온 영들도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종말론적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은다(계 16:14).(O. Betz).(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K. H. Rengstorf; O. Hof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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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Jabbiv(4461, 랍비) "나의 주"를 뜻하는 히브리어 랍비의 음역.
1. 유대교의 용법 
(a)  셈어 랍은 '큰, 위대한'을 뜻하며, 높은 존경받는 지위에 있는 사람을 뜻하는 칭호이며, '관리'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따라서 랍비는 '나의 큰(위대한) 자, 나의 존경할만한 분'을 의미하며,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스승에게 말을 걸 때 습관적으로 사용한 칭호이며, 선지자 엘리야, 메시야, 하나님에 대해 사용되기도 하였다.
(b)  이 용어가 선생들에 대해 사용된 것은, 생도들이 그들의 선생을 공손히 순종하여 따랐던 주전 2세기부터이다. 이 용어는 가르칠 자격을 가진 사람에게 생도들이 사용한 칭호이며, 이 칭호를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 용어는 팔레스타인, 시리아, 키프로스, 이탈리아의 많은 비문에 나타난다(참조: E.Lohse).
(c)  랍비는 신약시대에서는 시민들이 서기관들에 대하여, 혹은 제자가 그의 선생에 대하여 부여한 존경의 표시로서의 칭호였다. 점차적으로 이 단어는 안수식(세미카)을 받은 자, 즉 종교적인 일을 다루는 재판관으로서의 권한을 수여받은 자를 가리키는 전문 용어가 되었다. 이러한 안수는 그에게 손을 뻗쳐 갖다 대는 것으로써 수여되었다. 안수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어떤 점에서는 기독교적인 견지에서의 목사였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는 오로지 회당에서 배워야만 하였던 율법(토라)에 관한 권위자일 뿐이다. 이 안수식은 팔레스타인에서만 실행되어 오다가 4세기에 와서는 중단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세 사람의 랍비가 율법을 해석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하는 세미카에게 랍비 칭호를 수여하게 되었다.
(H.L.Ellison; J.H.Thayer).
2. 신약성경의 용법 
랍비는 신약성경에서 15회 나오며, 복음서에서만 나타난다.
(a)  ① 랍비는 서기관들과 그들의 제자들,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의의 칭호였다: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 23:7; 마 27:8). 세례(침례) 요한의 제자들은 세례(침례) 요한에게 말할 때 이 칭호를 사용하였다: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다"(요 3:26).
② 랍비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여러번 사용되었다. 요 3:2에서 니고데모에 의하여 사용되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요 1:49에서 나다나엘에 의하여 사용되었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베드로에 의하여(막 9:5; 막 11:21), 유다에 의하여(마 26:25, 막 26:49; 막 14:45) 또한 요 1:38; 요 4:3; 요 6:25; 요 9:2; 요 11:8에서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사용되었다.
③ 랍비라는 칭호의 사용은 성전이 파괴된 후에야 일반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신약성경의 용법은 복음서들이 후기에 구성된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라는 논쟁에 종종 부딪치게 된다. 그 논쟁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랍비를 전문 용어로서 사용한 것은 분명히 보다 일찍이 서민들이 사용하던 용법에서 유래하였기 때문이다.
(참조: H.L.Elli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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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davskalo"(1320, 디다스칼로스) 교사 teacher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a)  명사 디다스칼로스(Homer 이래)는 디다스코(didavskw, 1321: 가르치다)로부터 유래한 작위명사(nomen agentis)로서, '교사, 가정교사'라는 의미로 헬라어 문헌에서 널리 사용되었다(예: Homer,Hymnus ad Mercurium 554이하; Aesch., pv llO 이하; plato, Prt. 326 c; Epictetus, Enciridion l7).
이 단어는 초등학교 교사로부터 시작해서 가정교사, 철학자, 그리고 공연을 위해 시가를 연습시켜야 하는 합창단 지휘자를 칭할 때 사용되었다. 시인은 그의 활동이 합창하는 시(詩)든 비극이든 자신에 대해 디다스칼로스라고 불렀다.
이 단어는 처음부터 합리적이고 전문적인 요소가 강하였다. 여기에 기술의 가르침과 소질 계발도 특별히 포함된다. 이 단어는 지식이나 기술을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일에 정식으로 종사하는 모든 사람을 두루 지칭한다. 보기로 필로는 이 단어를 율법을 전해준 모세와 나병에 관해 가르치는 제사장 뿐만 아니라(Gig.54)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도(Rer.Div. Her. 1O2 등등) '교사'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두 경우에 그는 지식을 전달해 주는 사람을 교사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윤리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사람을 교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b)  디다스칼로스의 특성이 그 용법에 끼친 영향을 찾아 볼 수 있다. 교사의 활동이 특정한 분야에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디다스칼로스라는 단어는 자주 그가 가르치고 있는 내용에 따라 더욱 엄밀하게 정의되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왜 소크라테스가 이 단어를 거부하고, 에픽테투스가 이 단어를 받아들이고, 70인 역본이 대부분의 경우에 이 단어를 기피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 플라톤의 변증(Apologia, 33ab)에서 소크라테스는 자기의 진술들이 구속력 있는 체계로 만들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디다스칼로스로 불리우기를 거부하는 것 같다. 그는 지적인 것을 경멸하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을 이것을 초월하여 도덕적 행동에로 이끌려고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그는 또한 이런 일을 모든 사람을 위해 행하려고 하였으며 따라서 학파 형성을 거부하였다.
- 반대로 에픽테투스는 디다스칼로스로 일컬어지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학계의 교사로서 자기의 추종자들이 완전해지도록 돕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완성을 염원하는 사람들의 선생이라고 실제로 자처하였다(Dissertationes 1. 9. 12).
2. 70인역본의 용법. 
7O인역본에서 디다스칼로스는 단지 2회 나온다. 에 6:1에서 이 단어의 의미는 '읽는 자'(reader)이고, 넓은 의미에서 아마도 내시들의 교육을 맡은 시신(slave)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지만 마카베오이서 l:10에서 이 단어는 이것보다 훨씬 더 나아간다. 여기에서 마카베오 공동체는 대제사장 가문들 중의 한 가문에 속하고 이집트의 유대인 공동체의 수령인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에게 글을 쓰고 있는데, 그를 프톨레미 필로메터 왕(King Ptolemy Philometor)의 디다스칼로스라고 불렀다. 그 칭호는 그 왕이 수여한 것이 아니고 아리스토불루스가 그 왕에게 모세오경 주석을 헌정한 일에서 그것을 해석하였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이 부여한 것이다. 아리스토불루스는 그 왕에게 율법을 해석하였기 때문에 왕의 디다스칼로스라는 칭호를 받았다. 여기에서 디다스칼로스가 율법 교사를 의미하는 용법은 이제까지 우리가 논의해 왔던 이 단어의 여러가지 의미와 두드러진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용법은 일반 헬라어 용법이나 필로의 용법(디다스칼로스를 지식을 전달해 주는 사람 또는 가정교사로 의미하는 것)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유대교 및 히브리어 동사 라마드에 기초하고 있다. 이 라마드는 '배우다, 가르치다'를 뜻하며, 그 목적으로 '실천하다'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70인역본에 이 단어가 드물게 사용된 이유는, 히브리어 성서의 번역자가 헬라적 칭호인 디다스칼로스는 율법 교사를 가리키는 용어로서는 적당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만이 아닌 것같다. 디다스칼로스에 상당하는 히브리어 모레(1475)도 역시 드물게 사용된데다가 그나마 단 한번 잠 5:13에서 분사 디다스코(가르치는)로 번역되었다. 그밖의 다른 구절에서 이 히브리어 단어는 플라논테스(유혹자, 사 30:20에서 2회), 플라사스(조각가, 합 2:l8), 브로마다(음식, 욜 2:23) 따위의 다른 단어로 번역되었다. 구약성경에 이질적인 것은 '교사' (teacher)라는 단어가 아니라 그 개념이다. 그 까닭은 구약성경이 지식의 전달보다는 율법에의 복종을 더 중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지상에 계실 때 유대교에서 랍(rab) 또는 랍비(rabbi)는 토라를 해설하며  율법에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을 과업으로 하고 있었다. 그는 제자들(탈미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제자들은 스승의 성경 해석과 판단을 공부하며 스승을 존경하고 그에게 복종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제자들은 보통 자기 선생을 랍비(나의 선생님)라고 불렀으며 접미어가 붙은 이 어형이 바로 주후 1세기에 오직 공식적으로 임명된 율법 교사를 가리키는 용어로서만 사용되었다(참조: K. H. Rengstorf; K. Wegenast).
3. 신약성경의 용법. 
1. 디다스칼로스의 용법.
(a)  명사 디다스칼로스는 신약성경에서 58회 나온다. 그 중 48회는 복음서에서 나온다(요 8:4을 계산하지 않는 경우).
① 복음서에서 이 단어는 예수님에 대해 41회 사용되었는데, 그 중 29회에서 예수님을 직접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되엇다.
② 그리고 7회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되었다. 눅 3:12에서 백성들이 요단 강변에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는 세례(침례) 요한을 "선생"이라고 부른다.
요 3:10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부르신다. 눅 2:46에서는 "선생들 중에 앉으사"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는 소년 예수를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끝으로 마 10:24 이하와 눅 6:40에는 마데테스(제자)와 디다스칼로스의 관계에 관한 기본적인 선언이 언급되어 있다.
③ 복음서의 용례와 그밖의 모든 용례에서 그 용법은 서로 일치한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초기 기독 공동체에서 주도적인 집단인 디다스칼로이에 관한 언급들이다(행 13:1; 고전 12:28 이하; 엡 4:11; 참조: 약 3:1).
딤전 2:7; 딤후 1:11에서 기자는 자신을 디다스칼로스 에드논 혹은 단순히 디다스칼로스라고 부른다.
다른 세 구절들에서 이 단어는 본문으로부터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롬 2:20; 딤후 4:3; 히 5:12).
(b)  신약성경에서 디다스칼로스의 용법을 통해 드러나는 첫째 요점은 예수님이 디다스칼레로 지칭될 때 이 용어가 퀴리오스(kuvrio", 2962)와는 달리 어떤 위엄의 속성도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디다스칼로스가 요한에게(눅 3;12), 혹은 성전에 앉아 있는 디다스칼로이에게(눅 2:46), 혹은 심지어 거짓 교사들의 무리에게(딤후 4:3) 적용된 것은 디다스칼로스가 예수님에 대해 사용되었을 때조차도 분명한 한 사실만을 나타낸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왜냐하면 누가가 이 단어를 사용하여 한편으로 요한을 지칭하고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을 지칭할 때 누가가 다른 의미에서 사용한다고 결코 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임은 복음서에서 디다스칼로스가 사용된 구절들로부터 아주 쉽게 알 수 있으며, 이 단어가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된 구절들로부터 가장 잘 알 수 있다.
예수님 자신(마 10:24 이하와 병행구)이 마데테스(제자)와 디다스칼로스(선생)를 대조하신다. 전자는 그의 목적과 한계 양자 모두를 후자와의 비교를 통하여 배워야 한다. 이것으로 예수님께서 랍비의 생도와 그 스승과의 관계를 묘사하며, 자기와 자기의 추종자 사이에 실재하는 관계에 적용한다. 요 3:10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부르셨을 때 문맥은 특별한 철학적 능력을 염두에 두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준다. 사람들이 율법과 선지자를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뜻에 대한 탁월한 해석자로서 그를 존경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그를 예우하시는 것이다.
눅 3:12에서 세리들이 세례(침례) 요한의 회개의 외침에 마음이 움직여 세례(침례)를 받고자 할 때 요한에게 이렇게 묻는다.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그 호칭과 질문 양자 모두 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요한의 지식에 근거하여 요한이 그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가장 모호한 언급은 눅 2:46의 다디스칼로이이다: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그러나 여기서 디다스칼로이도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서 볼 때 율법에 대해 제기되는 질문들에 답하는 일을 하는 서기관들이라고 추론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디다스칼로스가 예수님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된 복음서의 네 다섯 구절에서는 용법의 일관성을 가진다. 이 단어는 그 의미의 내용이 림메드(가르치는)에서 파생한 70인역본과 신약성경의 디다스케인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환언하면 디다스칼로스는 '토라로부터 하나님의 길을 지시하는 자'이다. 이것은 두 가지 문제를 야기한다.
첫째, 우리는 예수님이 디다스칼로스로 묘사될 때 동일한 용법이 어디까지 적용하는지 고찰해야 하고, 그러므로 예수님과 관련하여 이 용어의 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신약성경의 다른 본문들이 복음서에서와 같은 의미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는지를 고찰해야 한다.
2. 디다스칼로스로서의 예수님.
(a)  예수님이 디다스칼레라는 호칭으로 불리웠다는 것은 그가 유대인의 디다스칼로이의 모습과 외적으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복음서에 나타난 디다스코(didavskw, 1321)의 용법에서 이미 우리는 예수님이 기본적으로 그의 가르침의 형태와 내용 두 면에서 서기관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보았다. 단순히 때때로 가르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디다스칼로스가 되는 것은 디다스칼로스 주변에 모이는 제자들이 있다는 특징을 요구한다.
예수님과 요한의 경우에(요 1:35 이하)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말에 감동을 받아서 스스로를 생도와 제자들의 위치에 두었다는 사실은 당시 사람들의 눈에 디다스칼로스로서의 결정적인 조건이 외적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들이 그들에게 디다스칼로스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으며, 그들을 디다스칼레라고 불렀으며, 그들을 백성들의 교사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디다스칼레라는 호칭이 실제로 이러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요 1:38에서 입증된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이 구절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랍비로 부르는데, 이 형태의 호칭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디다스칼레로 번역하였다(참조: 랍부니, 요 20:16).
예수님은 또한 마 26:25, 막 9:5, 막 11:21, 요 4:31, 요 9:2, 요 11:8에서 그의 제자들에 의해, 요 3:2에서 니고데모에 의해, 요 1:49에서 요한의 제자들에 의해, 요 6:25에서 열광적인 군중에 의해, 마 26:49, 막 14:45에서 체포 당하실 때 유다에 의해 랍비로 불리운다. 하지만 디다스칼레가 교사를 가리켜 모호하지 않게 사용되는 반면에 랍비는 어떤 지위가 높거나 고귀한 인물에게 적용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 용어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된다.
복음서는 매번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가 랍비의 생도들과 교사들(masters)의 관계에 일치하며 군중들이 예수님을 교사들에게 상응하는 존경으로 대했음을 분명히 한다. 제자들을 마데타이(히, 탈미딤)로 묘사하고 아콜루데오(ajkolouqevw, 190: 따르다)를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애착(attachment)에 대해 사용한 것은 후기 유대교의 어법을 따른 것이다. 심지어 그들이 그를 섬기는 방식은 당시의 관습과 일치한다. 생도는 랍비의 신발을 가져오고(T. Neg. 8, 2), 필요할 때 그를 도우며(bJeb., 42b), 그 앞에서 길을 준비하고(bket., 63a), 그의 나귀를 몬다(T. Chag., 2.1). 더 후기의 언급에서는(bkeb., 96a; R. Joshua b. Levi, c. 250A.D.) 신발을 벗기는 것 외에도 종이 주인에게 행하는 모든 일들을 생도가 그의 주인인 교사에게 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하였다. 이 가운데 발을 씻기는 것도 포함되는지는 특별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이 일이 제자들이 서로에게 행해야 할 일들 가운데 포함된다고 하셨으며, 위대한 랍비들이 유사한 경우를 당했을 때와 같이(예: 12:30에 대한 S. Dt., 38) 그들로부터 동일한 종류의 반대에 부딪혔을 때(요 13:8) 친히 본을 보여 주었다(요 13:1 이하).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를 젓는 일을 하였으며(막 4:35 이하 및 병행구), 또 무리를 먹일 때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막 5:37 이하 및 병행구; 막 8:6과 병행구). 그들은 예루살렘 입성을 위해 당나귀를 얻어왔으며(막 11:1 이하) 유월절을 위해 준비하였는데(마 26:17 이하), 이 일에는 종종 노예들에게 맡겨진 어린양을 잡는 일도 포함되었다(참조: Pes., 8, 2). 이 모든 것은 그의 제자들 가운데서 예수님의 위치가 진실로 당시의 디다스칼로스, 생도들 가운데서 랍비의 위치와 같았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을 이와 같이 대접한 것은 비단 제자들 뿐만이 아니라 군중들도 이런 식으로 그를 영예롭게 하였다. 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사람이기 때문에 백성들은 교사를 심지어 부모보다도 더 높은 위치에 둔다. 교사는 자기 아버지보다 앞에 설 뿐만 아니라(BM, 2, 11), 만약 교사가 아버지라면 아들 앞에 선다(bQid., 33b). 아키바(Akiba)가 유명한 사람이 되어 학교에서 왔을 때 장인과 아내가 그의 발에 존경의 입맞춤을 하였다고 한다(bket, 63a). 또 이스마엘(R. Ishmael)의 어머니는(d. c. 135) 그의 아들이 회합을 마치고 와서 그녀가 사용한 물을 마시고자 했을 때 아들의 발을 씻기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그는 제 5 계명에 근거하여 이것을 금했으나, 그의 어머니는 이것을 금하는 것은 사실상의 위반으로, 이 행위에서 자기 아들을 통하여 그녀 자신이 영화롭게 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jPea, 15c, 41 이하).
베드로의 장모가 고침 받은 후 예수님께 행한 봉사(마 8:15)와, 물질로 예수님을 섬기고 따른 여자들(눅 8:3; 참조: 마 27:55와 병행구)이나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 마르다(눅 10:40)가 예수님께 행한 봉사는 위와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 이것은 식탁에서 섬기는 것만을 가리키지는 않으나, 그것이 단연 두드러지는 것은 사실이다. 예수님의 어머니를 영예롭게 하는 것에 대해서도 언급되며 위대한 랍비들의 경우에서 유사한 예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노선에 따라 디다스칼로스이신 예수님에 대한 묘사는 예수님 당시의 관습에 일치하며,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에게 적용된 디다스칼로스는 후기 유대교의 랍비와 명백히 연관된다.
요세푸스는 디다스칼로스를 초보 교사에 대해 사용하지만, 또한 율법을 연구하는, 즉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을 연구하도록 이끌고 그것으로부터 행동의 규칙을 취하는 자들에게도 이 용어를 사용한다. Vit., 274에서도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서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파의 사자들은 그들이 단순히 그의 동료 시민들이지만 그의 디다스칼로이라고 자랑한다.
(b)  예수님에게 적용된 호칭 디다스칼로스의 의미를 파악하려면 예수님께서 어떤 의미에서도 디다스칼로스, 랍비로서의 새로운 비범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결정적으로 백성들의 귀와 눈을 다시 한번 하나님의 뜻과 그 구속력있는 능력을 향해 열게 했을 때 취하신 방법은 평범한 방법이었다.
예수님은 또한 인정을 받으셨다. 심지어 서기관 무리들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참되시며(ajlhqhv", 227)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지적해 내셨다는 인정을 받았다(마 22:16과 병행구; 참조: 막 12:32; 요 3:2). 만약 교사로서의 예수님의 활동에 대한 어떤 반대가 있었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어떤 가르침의 집단으로부터 규정된 교수 과정 내지는 인정된 권위를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요 7:15; 마 13:35과 병행구).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자체로는 그의 죽음을 초래한 갈등을 가져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힐렐과 샴마이 같은 학파를 세웠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평범한 토론 방식을 통하여 서기관들과 함께 그의 차이점에 대해 토의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노선에 따라 그의 견해를 확립하려 시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어떤 걸림돌을 제공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럭저럭 견디어 인정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길을 취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위임하신 대의(cause)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국 예수님은 힐렐과 샴마이의 견해와 맞지 않는 어떤 의미에서 자신을 인간의 대의(cause)로 삼았다.
예수님은 논의할 수도 없었고 논의하려 하지도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시고 그에 대해 듣고 그를 만난 모든 이들에게 필연적으로 감동을 준 절대성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분리될 수 없었다. 이 주장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것은 디다스칼로스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전통적인 형식과 선포를 넘어서서 새로이 직접적으로 다루는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의 노선을 다시 취한 그 점에서 일어난다. 그렇지만 그는 선지자 이상이신 분이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시의 보수적인 종교와 인간 중심적인 도덕률에 반대하여, 선지자들의 아마르 예호와(여호와의 말씀), 네움 예호와(여호와의 말씀)를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내가 오직 너희에게 말한다"(에고 데 레고 휘민)고 하시며, 이것은 일개 대변자로서가 아니라 그와 함께 하나이신 그의 뜻의 책임있는 담지자로서, 하나님과 자기 자신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음을 청중들에게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노모스(movno", 3441: 율법)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처음으로 친히 성취하시는 자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는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밝히시고 또 그것을 초월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제공하기까지 하신다(마 5:17; 마 5:20). 왜냐하면 그는 아들(The Son)이시기 때문이며, 요한의 말대로 그의 가르침은 그람마테이스와 기타의 가르침과 다르기 때문이다. 형태와 내용상 유사한 것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제까지 있었던 가르침과는 다른 것이다.
(c)  따라서 디다스칼로스가 예수님에 대해 사용될 때, 그의 인격으로 인해 다른 곳에서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새로운 가치를 부여 받게 된다. 우리는 감히 이 단어가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 인상지운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새로운 모세는 율법을 국가적 한계로부터 해방시키고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예수님의 권위와 위엄 양자 모두를 나타내준다. 이리하여 우리는 공관복음에서 최후의 만찬을 위해 필요한 방을 구할 때 디다스칼로스가 누구인지 지적해주는 자세한 지칭 없이 호 디다스칼로스 레게이라는 문구로 충분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마 26:18과 병행구). 또 예수님의 죽음 이후 디다스칼로스라는 명칭을 제자들이 전유하지 못한 이유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도들과 같이 성경 연구를 직업으로 한 그러한 유대교 집단의 새 지도자가 랍비/ 디다스칼로스로 불리우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이상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이 용어는 주의 형제 야고보에게도 결코 사용되지 않는다. 나중에 폴리캅이 종교적인 의미로 디다스칼로스를 사용했다면(Mart. Pol., 12, 2; 16, 2; 19:1), 그의 시대의 교사들과 첫 시대의 교사들 사이에 분명한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후자에게는 마 23:8의 완전한 규칙이 적용된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그것은 단순히 예수님과 나란히 혹은 예수님 아래 어떤 종교적 권위도 인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말씀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서 만이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께로부터 알려지게 되었을 때 "모세의 제자"라는 것 조차도 잘못이다(요 9:28). 예수님은 완전한 디다스칼로스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모세가 그 안에서 자신이 성취되었다고 보는 그 분이시다(요 5:45 이하). 따라서 구원을 찾는 인간에게 유일한 가능성은 디다스칼로스이신 예수님에게 귀기울이는 것이요 그의 마데테스가 되는 것이다.
복음서를 제외한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선포에서 이 칭호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는 것 같다. 이것은 말씀(어록)의 집합체보다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기독교 메시지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과 조화를 이룬다. 단지 기독교의 지성화의 발전과 더불어 비로소 다시금 디다스칼로스인 예수님이 언급된다. 그러나 이제 이 용어는 처음의 제자들에게 지녔던 랍비라는 의미에서 사용되지 않고 철학적인 학파의 창설자라는 의미에서 사용된다. 비록 여전히 절대성에 대한 주장의 개념은 포함되어 있을지라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후기 사도 교부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예컨대 Barn. 2, 6에서 예수님은 카이노스 노모스를 가져오셨다고 하며, 2Cl. 3.1에서 그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의 중보자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 디다스칼로스라는 용어는 Ign. Eph. 15, 1에서만 발견된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께 적용되는 것이라면 그는 변증가들에서만이 디다스칼로스의 자리를 부여받는다(참조: Just. Apol., I, 4, 7; 12, 9; 13, 3 등).
3.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디다스칼로이
우리가 사도행전(행 13:1)과 서신들에서(고전 12:28 이하; 엡 4:11; 참조: 약 3:1) 그리스도인 디다스칼로이를 읽을 때 이 용어를 이해하기 위해 초기 그리스도교 및 후기 유대교 용법을 벗어나거나 헬라 세계로부터 조명을 구할 필요가 없다.
(a)  약 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이 구절에서 만일 이 서신이 초기의 것이거나 랍비 유대교의 범주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면, 그 상황은 가장 분명하다. 그 경우 이 단어는 분명히 율법의 올바른 이행을 가능케하는 율법 해석자를 나타낼 것이다. 문제는 그 가정(assumptions)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 서신에서 헬라 용법을 제안할 만한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야고보서의 소피아는 이론적인 것이라기보다 실질적인 것이며, 따라서 분명 헬라적 성격을 가진다기보다 랍비적이기 때문이다.
히 5:12에는 이미 "교사"가 된지 오래이지만 아직도 믿음의 초보를 배울 필요가 있는 기독교인들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딤후 4:3에서 이 단어는 이단자들에게 풍자적으로 적용된 듯하다.
(b)  고전 12:28에서 디다스칼로이는 공동체 내에서 특별한 역할을 맡은 자들의 목록에서 아포스톨로이(사도들)와 프로페타이(선지자들)를 뒤이어 세번째의 카리스마적 직책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 직책을 맡은 사람들의 과업은 기독교 신앙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주고 구약성경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는 일이다(참조: K. Wegenast).
엡 4:11의 유사한 목록에서는 아포스톨로이, 프로페타이와 유앙겔리스타이 뒤에 나오며, 포이메네스(문자적으로 '목자들')와 함께 분류된다.
행 13:1에서 그들("교사들")은 프로페타이("선지자들")와 함께 언급된다.
이 사람들은 모두 유대교 출신이며, 따라서 율법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선지자는 신적으로 영감을 받은 메시지의 성경적 선포자로 더욱 영적인 자들을 가리킨다(참조: 고전 14:29 이하; 행 11:28). 디다스칼로이는 그들의 보다 더 분명한 해석으로 회중을 가르치고 교화하는 자들이다. 여기서 서신들의 디다스케인에서 역시 그러하듯이 동일한 유대교 및 초기 기독교 용법이 적용된다.
엡 4:11에서 공통 관사가 디다스칼로이와 포이메네스를 동일한 것으로 분명히 가리킨다면 이것은 격의 성격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포이멘은 공동체의 생활에 책임을 지는 자들이며, 따라서 가장 넓은 의미에서 디다스케인은 그의 직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전 12:28 이하와 엡 4:11의 목록에는 계급의 서열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 디다스칼로스의 활동은 아포스톨로스와 프로페테스의 활동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망과 양식을 세우기 위한 토대를 놓을 때에 필요하다. 최초의 공동체의 디다스칼로스는 이와 같이 후기 유대교의 하캄(현명한) 혹은 소포스(지혜로운, 현명한)와 연관되어 있으며, 그의 일은 공동체 영역 내에 놓여 있다. 따라서 엡 4:11에서 아포스톨로이와 최초의 세대 전체가 교회의 삶으로부터 사라지기 시작할 때에 포이메네스와 디다스칼로이가 선교의 책임을 새로이 맡은 유앙겔리스타이 뒤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상황은 최초의 복음서에서와 아주 흡사하다. 여기서 예수님은 믿음을 일깨우는 유앙겔리스테스로 처음으로 나타나고(마 4:12 이하, 마 4:23 이하) 그 다음으로 비로소 디다스칼로스로 나타난다(마 5:1 이하). 그것은 초대 교회, 그리고 특히 바울의 통찰력의 표시이다. 교화의 문제에서 그들은 이 점에서 예수님의 본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
일단 고전 12장과 엡 4장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딤전 2:7과 딤후 1:11은 분명히 이해된다. 케뤽스("전파하는 자")가 유앙겔리스테스(복음 전도자)를 대신하고, 디다스칼로스로 아포스톨로스의 이중 역할을 묘사한다. 여기서 우리는 선교에 대한 높은 감각을 보며, 또한 똑같이 바울의 전형적인 사역에 대한 강한 인식을 본다.
한 면에서 다스림에 대한 랍비적 주장이나 다른 면에서 지식에 대한 헬라의 주장에 대해 문제가 있을 수 없다. 기자가 딤후 2:7에서 자신을 "이방인의 스승"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그의 사역의 범위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c)  초기 교회의 용법은 사람들과 관련된 초기 기독교의 용법과 뚜렷이 구분되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Did의 본문 구절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디다스칼로스가 가장 오랫동안 유지된 이집트 교회에서의 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집트인들에게 디다스칼로스는 고전 12:28 이하의 교사와 매우 다르다. 교회는 지금 알렉산드리아의 지혜의 침범을 받고 있으며, 이 때문에 필로에서와 같이 이 지혜를 표현하고 가르치는 자로 디다스칼로스를 사용할 것을 채택한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최초의 기독교 교사의 활동의 연속이 아니라 헬라 제도를 기독교화된 형태로 교회 속에 도입한 것이다. 이와 같은 선상에서 초기 변증가들과 교사들의 임무는 기독교를 조리있게 소개하고 변호하는 것이었다. 이 교사들 중에서 행한 기독교의 지성화와 신앙은 예수님과 바울 및 초기 교사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을 위해 전력을 하여 반대한 바로 그것을 재소개한 것이다. 이것은 여러 면에서 불행한 일이다.(참조: K. H. R. Rengstore; K. Wegen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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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wqen(509, 아노덴) 위로부터, 처음부터, 다시, 새로이.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부사 아노덴(trag., Hdt. 이래)은 아노(a[nw, 507: 위에, 위를 향하여)에서 유래했으며,
(a)  지역적으로 '위로부터'(Dit., Syll.),
(b)  시간적으로 ① '처음부터, 시작부터'(Pla., Demosth., Dit., Syll.),
② '오랜 시간 동안'(Dip., Syll.).
(c)  '다시' again, '새로이' anew(pla., Epict.)를 의미한다.
2. 신약성경의 용법. 
부사 아노덴은 신약성경에서 13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아노덴은 공간적으로 '위로부터'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① 마 27: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병행구 막 15:38). 여기서 휘장의 윗부분 곧 꼭대기에서부터를 의미한다.
요 19:23,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여기서도 옷의 '윗부분'을 가리킨다.
② 아노덴은 '하늘로부터' 또는 하늘에 거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요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요 19: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약 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약 3: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약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b)  아노덴은 시간적으로 '처음, 또는 시작부터'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① 행 26:5에서 '바로 처음부터'를 의미한다: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② 눅 1:3에서 '시작부터'를 의미한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줄 알았노니".
(c)  아노덴은 '다시, 새로이'를 의미한다.
① 요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요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② 갈 4: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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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navw(1080, 겐나오) 낳다, ~의 아버지가 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겐나오(Pind., Hdt. 이래)는 겐나(gevnna)에서 유래했다.
(a)  겐나오는 '낳다, ~의 아버지가 되다'를 뜻하며, 아버지에 의한 출생과 어머니에 의한 출산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항상 그렇게 사용하지 않고 직계 후손, 또는 법적 후손에 대해 사용하기도 한다.
(b)  신약성경 시대의 세속 세계에서 겐나오는 비유적 의미로 '생기게 하다, 태어나게 하다, 존재하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겐나오는 70인역본에서 주로 히브리어 얄라드(낳다)의 역어로 간혹 하라(잉태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문자적인 용법 외에도 욥 38:28에는 비유적인 용법이 나온다: "비가 아비가 있느냐 이슬 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겐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호칭에서 신뢰나 애정의 표시로 사용되었다(삼상3:16; 삼상 24:12; 왕하 3:12).
겐나오는 하나님께서 메시야 왕을 낳으심에 대해 사용되었다(시 2:7; 시 110:3).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겐나오는 신약성경에서 97회 나오며, 마태복음에 45회, 요한의 기록에 28회 사용되었다. 겐나오의 실제적인 의미는 고전 헬라어의 용법과 같이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모두 사용되고 있으므로 문맥에 의하여 능동태와 수동태로 결정된다(참조: 마 1:3, 마 1:5이하; 마 2:1, 마 2:4; 마 19:12; 눅 1:13; 요 9:34; 요 16:21; 갈 4:23). 그러나 이 동사는 다음과 같은 비유적인 의미 또는 확대된 의미로도 사용된다.
(a)  겐나오는 여러 구절들에서 어떤 사람을 낳았다고 언급되는 하나님 자신에게 사용되었다.
① 행 13:33과 히 1:5; 히 5:5은 시 2:7을 인용한다. 히브리서의 구절들은 의미심장하게 이 술어를 시 110편과 삼하 7;14와 관련시킨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아들이며, 하나님의 왕으로 나타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의 왕들이 성취하지 못한 것들을 성취하셨다. 왜냐하면 십자가 상에서 죽으시고 무덤에서 살아나신 분으로서, 그는 참되게 기름 부으심을 받은 분으로서 여호와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직분을 취하셨다. 두드러진 것은 신약성경이 시 2:7을 예수님의 탄생 기사들에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 2편이 신약성경에서 인용되는 어는 곳에서나 육체적이며 성적인 출생은 완전히 배제된다.
행 13:33은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라는 말씀을 예수님의 부활에 적용한다.
반면에 눅 3:22의 서방 본문(고대 라틴 역본들, 저스틴과 오리겐)의 다양한 독법은 시2:7의 말씀을 세례(침례)에서의 예수님께 적용한다.
히 1:5과 히 5:5에서 "오늘 날"에 대하여 그 의미를 정확하게 결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스트라드만(H. Strathmann)은 이것은 예수님의 세례(침례)를 언급하는 것이며 이것이 단순히 본문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시 2:7의 하반절이 히브리서에 인용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J. Jeremias and H. Strathmann). 케제만(E. Kasemann)은 겐나오를 승천 후에 하늘의 선언을 통한 아들 신분의 확증과 동일시한다(Dss Wandernde Gattesvolk, 58). 그러나 "오늘 날"이라는 단어는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에 의한 출생이 양자됨이라는 구약성경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은 명백하다. 이 구절들은 성자께서 이미 어떤 분이라는 것에 대한 선언과 선포에 관계한다. 예수님의 아들 신분은 하나님의 성육신의 신비를 나타낸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아담이시다(호 에스카토스 아담, 고전 15:45). "이와 같은 출생이 양자됨이라는 의미에서 혹은 동정녀 탄생의 의미로 생각해야 한다는 사상은 그리스도를 믿는 초기 기독교 신앙과 성경의 이해에 대한 오해에 근거하는데 특히 예수님의 부활과 그 결과로서의 새로운 아이온의 기본 의의에 대해, 요컨대 초기 기독교 사상의 종말론적 충동에 대한 오해에 근거한 것이다"(F. Buchsel).
② 요한이 기술한 성경들은 겐네데나이 에크(~에서 탄생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신자들의 기원을 묘사하고 있다. 이 어구는(에크시-) 에르케스다이 에크(~에서 나오다; 참조: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는 요 8:42)와 에이나이 에크(~에서 오다, ~의 출신이다 be from; 참조: 행 5:39 사건들에 대해; 요일 3:10, 사람들에 대해)와 비교된다.
신자의 자신의 참된 존재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신자는 이것을 알고 있다. 곧 자신의 시작과 끝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거듭남(겐네데나이)에 대한 언급은 사람이 새로운 혈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자신의 옛 본성을 버리고 새로운 본성을 취하여 거듭나야 한다(요 3:3, 요 3:5-8; 참조: R. Bultmann, The Gospel of John). "거듭 남"이라는 개념은 "하나님께로서"(에크 투 데우, 요일 3:3; 참조: 요일 2:29; 요일 4:7) 거듭남과 또한 "위로부터"(요 3;7; 참조: 요 8:23) 거듭남과 같은 동일한 본질적인 사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이 사상을 하나님의 행위로 묘사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이하). 사람의 생각에는 이러한 거듭남이 필연적으로 불합리하게 보인다(요 3:4). 왜냐하면 이 개념이 인간의 역량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이것을 성령님의 역사로 돌린다(요 3:5-8). 오직 성령으로 태어난 자만이 자신의 혈통을 이해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요 3:5; 참조; 마 19:28).
수많은 학자들이 아노덴 겐네데나이(위로부터 나다)라는 표현이 영지주의에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아노데(위로부터)은 거듭남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요 3:3, 요 3:7) 위로부터 빌라도에게 주어진 권세에 대해서도 사용된다(요 19:11). 예수님께서는 위에서(아노) 난 자신을 아래서(카토) 난 자신의 대적자들과 비교하신다(요 8:23).
그러나 아노덴은 또한 "다시"라는 뜻을 나타낼 수도 있다. 이 탄생은 또한 물(엑스 휘다토스)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을 언급한다(요 3:5). 그러나 요 1장과 요한일서에서 물 또는 세례(침례)에 대한 언급은 없다. 요한과 바울은 모두 세례(침례)를 2차적인 것이며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요 4:2; 고전 1:14-17).
요 3:5에서 물이 창조를 언급하는 것이 아닌가(창 1:2) 하는 문제와 씻음이 탄생에 따르는 것이 아닌가(인간의 탄생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는 문제는 충분한 주의를 끌지 못하였다. 중생이 세례(침례)의 동의어가 된 것은 저스틴(Justin)과 이레네우스(Irenaeus)와만 관련된 것이다.
(b)  바울은 겐나오를 고전 4:15와 몬 1:10에서 자신의 개심과의 관계에 대해 사용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신자들 속에 형성되기까지의 수고함(오니노) 또는 해산의 고통을 겪음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었다(갈 4:19). 동일한 사상들이 믿음 안의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말하는 구절들의 배경으로 존재한다(고전 4:17; 딤전 1:2; 딤후 2:1; 참조: 벧전 5:13).(참조: A. Ringwald; R. Bult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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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dw(1492, 에이도) 보다, 알다, 경험하다.
동사 에이도는 호리아(oJravw, 3708)에 속한 단어이며, 동일한 의미를 가지며, 신약성경에서
(a)  '본다, 지각한다'(마 2:2; 마 3:16; 요 21:21 등).
(b)  '느끼다, 감지하다, 인지하다'(마 27:54; 막 15:39; 눅 17:15).
(c)  '주목하다, 알아채다, 관찰하다, 발견하다'(마 27:49; 요일 3:1; 마 9:2; 눅 9:47; 롬 11:22 등).
(d)  '당하다, 경험하다, 체험하다'(눅 2:26; 요 11:40; 히 11:5; 벧전 3:10; 계 18:7 등).
(e)  '방문하다, 찾아보다'(눅 8:20; 행 16:40; 고전 16:7; 살전 2:17; 살전 3:10).
(f)  '생각하다'(요 3:1; 행 15:6).
(g)  '알다'(마 25:13; 막 10:19; 요 10:4; 롬 7:7; 고전 2:2; 계 2:2; 계 2:9 등), '알다'에서 '지식을 얻다, 이해하다, 인식하다'(마 12:25; 막 12:15; 눅 6:8; 눅 11:17; 막 4:13; 고전 13:2 등).
(h)  히브리어투로 '~을 존중하다, 소중하다, 주의를 기울이다'(살전 5:12; 참조: 창 39:6).(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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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Jravw(3708, 호라오) 보다 se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호라오(Homer 이래)는
(a)  '보다, 바라보다, 관찰하다, 지각하다'.
(b)  '상상하다, 경험하다, 출석하다, 참여하다'.
(c)  비유적 의미로 '이해하다, 인식하다, 고려하다, 주의하다'.
(d)  수동태로 '나타나다, 보이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호라오는 70인역본에서 매우 많이 나오며, 주로 라아와 그 다음으로 하자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보다, 깨닫게 하다'(창 27:1), '주목(주의)하다, 의식하다'(시 34:8), '알다, 경험하다'(신 11:2), '염려하다, 관심하다'(창 37:14; 사 5:12), '듣다'(렘 33:24), '이해하다'(삼상 12:17), '보이다' 등을 의미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호라오는 신약성경에서 449회 나오는데 호라오와 미래형 옾소마이가 110회, 부정과거형 에이돈이 336회 나온다.
(a)  눈으로 '보다, 주목하다'(마 28:7; 마 28:10; 막 16:7; 눅 16:23; 요 8:57; 요 9:37; 요 14:9; 요 6:16; 요일 4:20; 계 1:7 등), '보이다, 나타나다'(행 2:3; 계 11:19 등).
(b)  마음으로 '보다, 인지하다, 알다, 이해하다'(행 8:32; 골 2:18; 히 2:8; 약 2:24), '의식하다'(요삼 1:11).
(c)  '경험하다'(눅 3:6; 눅 17:22; 요 3:36 등).
(d)  '주의하다, 조심하다, 삼가다'(마 8:4; 마 18:10; 막 1:44; 살전 5:15; 마 16:6; 막 8:15 등).
(e)  '마음을 쓰다, 유의하다'(마 27:4; 행 18:15).
(f)  수동태로 '나타내다, 보이다'(눅 9:31; 천사들 눅 1:11; 눅 22:43; 행 7:30, 35; 하나님, 행 7:2; 죽은 자, 마 17:2; 막 9:4; 부활하신 예수님, 눅 24:34; 행 9:17; 행 13:31; 행 26:16; 고전 15:58; 딤전 3:16; 장차 재림하실 예수님, 히 9:28; 환상, 행 16:9; 계 11:19; 계 12:1, 3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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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jsevrcomai(1525, 에이셀코마이) 들어오다 come in, 들어가다 enter.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에이셀코마이(Homer 이래)는 에이스(eij", 1519)와 엘코마이(e[rcomai, 2064)에서 유래했으며, '~에로 들어가다, ~에로 들어오다'를 의미하며, 때때로 '들어가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상업과 관련하여 돈과 상품의 유통에 대하여, 법적 용어로서 법정에 들어가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직무에 들어가는 것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비유적 의미로 용기, 배고픔이나 욕구는 '생기거나 일어나다'고 할 수 있다.
파피루스에서 이 단어는 상업적 용법을 떠나서 '어떤 사람에게 청구(요구)하다'를 의미한다. 때에 관해서는 이 단어는 '오고 있는' 때를 나타낸다.
제의적으로, 이 단어는 신(神)에게 기원하는 고대 기도문에 나온다.
2. 70인역본의 용법. 
에이셀코마이는 70인역본에서 약 700회 나오며, 대부분 히브리어 보(가다, 도착하다, 들어가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에이셀코마이는 공간적 의미 뿐만 아니라 성적 의미로 흔히 사용되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용법은 제의적, 성례적 용법이다. 이 단어는
(a)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오는 것(창 20:3; 신 4:34),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으로 들어오는 것(겔 43:4), 신성한 생명의 성령이 죽은 자에게 들어오는 것(겔 37:1).
(b)  사람들이 성전에 들어가는 것(출 24:3, 18; 대하 29:16).
(c)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시 88:2; 79:11).
(d)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민 14:30; 15:2)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에이셀코마이는 신약성경에서 192회 나오며, 복음서와 사도행전, 히브리서에 자주 나오며, 바울 서신에는 매우 드물게 4회만 나온다.
(a)  에이셀코마이는 문자적, 공간적 의미로 집, 도시나 동네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마 8:5; 마 10:12; 막 2:1; 막 11:11; 행 23:16; 행 23:33 등).
(b)  에이셀코마이는 제의적 용법으로는 성전(토 히에론)으로 들어가는 것(행 3:8), 성전(톤 나온)으로 들어가는 것(눅 1:9; 계 15:8),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마 12:4; 눅 6:4), 회당으로 들어가는 것(막 1:21 ;막 3:1; 눅 4:16; 행 13:14), 혹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막 11:11)을 나타낸다. 그리고 천사가 마리아에게 오는(눅 1:28), 하나님의 은혜의 엄숙한 행위를 표현한다.
(c)  신학적으로 가장 의미있는 진술은 에이셀코마이가 에이스와 함께 사용될 때이다.
① 이러한 표현들 중에서 공관복음에 나오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요건들이 요구된다.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는 것(막 10:15과 병행구), 계명들을 지키는 것(마 19:17),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마 7:21), 새로운 시작(마 5:20), 깨끗한 절단(마 18:8-마 18:9), 경계(마 25:10), 그리고 충성(마 25:21 이하) 등이다. 이러한 요구를 이루지 못하는 자들은 결정적 순간에 거절을 당한다(마 22:12). 예수님과 제자들의 책무는 천국으로 들어가도록 사람들을 부른다. 그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마 7:13). 그러나 재물(막 10:23)이나 독선의(눅 11:52) 방해를 받을 수도 있다.
② 요한은 물과 성령에 의한 중생의 필요를 추가하며(요 3:5), 천국으로의 접근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강조한다(요 10:2; 요 10:9). 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환난을 겪어야 한다(행 14:22).
(d)  에이셀코마이의 일반적인 종교적 용법.
① 공관복음에서 이 단어는 예수님의 행위에 대해 사용되었다: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오시며(눅 19:7),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그들과 교제하셨다(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 눅 24:29).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신 후 승천하신 것은 자기의 영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눅 24:26).
이 단어는 사탄과 귀신의 세력의 활동에 대해 사용되었다. 사탄은 유다에게 들어갔다(눅 22:3; 요 13:27). 에이셀코마이는 귀신들이 사람의 몸을 소유하는 것(귀신들림)을 나타낸다(눅 8:30). 그러나 예수님은 메시야적 사역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셨다(막 9:25).
이 단어는 제자들의 행위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제자들은 유혹에 빠지지(유혹에 들어가는 것) 않도록 기도해야 하며(막 14:38) 기도하기 위해 그들의 방으로 들어가야 한다(마 6:6).
② 바울 서신에서 에이셀코마이는 4회 나오며, 불신자들이 기독교인의 모임에 들어오는 것(고전 14:23-고전 14:24), 죄의 오는 것(롬 5:12), 그리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는 것(롬 11:25)을 나타낸다.
③ 히브리서에서 에이셀코마이는 대제사장이 지성소 안으로 들어오는 것에 대해(히 9:25), 하늘의 대제사장이 하늘의 성소로 들어오는 것에 대해(히 6:19; 히 9:12; 히 9:24; 히 6:20), 그리스도가 희생 제물이 되기 위해 세상으로 들어오는 것에 대해(히 10:5), 그리고 신자들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히 3:11; 히 3:18; 히 4:1 이하) 사용되었다.
④ 요이 1:7에서 미혹하는 자들(속이는 자들)이 세상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약 5:4에서는 경제적으로 압제 당하는 자의 울부짖음이 하나님께 올라간다고 말한다.
⑤ 요한계시록에서 생명책에 이름이 적혀 있는 사람들만 거룩한 도성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계 21:27).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그를 위해 문을 열어둘 때 그 안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말씀하신다(히 3:20).(참조: J. H. Thayer; Walter Bauer; J. Schnei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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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urevw(3140, 마르튀레오) 증언하다, 증거하다 to bear witness.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마르튀레오(Semonides, Hdt. 이래)는 마르튀스(mavrtu", 3144: 증인)에서 유래했으며,
(a)  '증언하다, 증인이 되다',
(b)  '확증하다, 선언하다',
(c)  '호의적으로 말하다, 잘 말하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마르튀레오는 70인역본에서 17회 사용되었으며, 법률상의 증언에 대해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민 35:30; 신 19:15; 신 19:18) 기념비의 기념적 기능(창 31:46 이하)과 모세의 노래(신 31:19; 신 31:21)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것은 언약 문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위반하는 사람들에 대한 고발장이 될 수 있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마르튀레오는 신약성경에서 7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사실들에 대한 인간의 선언.
마르튀레오는 신약성경에서 법적 증언에 대해 사용되지 않지만 종종 사실들 또는 사건들의 선언 내지 확증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마 23:31; 롬 10:2; 갈 4:15; 고전 15:15; 행 22:5; 요 2:25; 고후 8:3 등).
요 13:21에서, 사건은 미래의 사건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요 4:44에서 사실은 체험의 일반적 사실이다: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b)  좋은 평판.
독립적 용법에서 마르튀레오는 '좋은 평판을 하다(또는 받다)'를 의미한다(눅 4:22; 행 6:3; 딤전 5:10). 그 사상은 항상, 사람(들)이 직접적 관찰에 근거하여 증명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c)  하나님, 성령, 또는 성경의 증언.
특별한 용례에서는, 하나님, 성령, 혹은 성경이 판단이나 진술을 보증한다(행 13:22; 히 7:8; 히 7:17).
행 14:3에서 기적들의 확증적 증거가 사도의 선포를 뒷받침해 준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주로 히브리서 11장에 마르튀레오(marturevw, 3140)라는 동사가 오직 수동태로만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히브리서는 신약성경의 다른 문서들과 구별된다. 호명된 사람의 신앙을 확증하면서 증거하시는 이는 하나님 자신이다. 이 말이 수동태 동사들 뒤에 숨겨져 있다(히 11:2; 히 11:4; 히 11:5; 히 11:39). 죽음으로써 신앙의 순교(martyrdom)의 모든 징표들을 얻는 사람들은 한 사람의 증인을 얻게 된다. 즉 하나님에게서 인정을 받게 된다. 이것은 그들의 신앙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인정을 받은 이 사람들이 현재 교회가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라는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바로 이 사실과 일치한다(참조: 히 12:1).
(d)  종교적 증거.
증거되는 사실들이 하나님에 의해 확립된 사실들일 경우에는 특별한 용법이 생겨난다. 따라서 그 증거는 또한 계시된 진리에 대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행 23:11이 좋은 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e)  요한의 특별 용법.
요한복음에서의 증언은, 특유하게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사실들에 대해서만 주어지는 증언일 뿐 아니라, 특히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서의(요 1:15; 요 1:34) 예수님의 인격에 대해 주어지는 증언이다(요 1:15; 요 5:31 이하; 요 8:13 이하). 예컨대 세례(침례) 요한은, 빛이 되시는 성육신한 로고스를 증언하기 위해 왔다(요 1:8; 참조: 요 8:12).
아들로서 예수님은 진리이시며 따라서 진리를 증언하는 것은 그를 증언하는 것이다(요 3:26; 요 5:32; 요 5:33). 그에 대한 증언이 세례(침례) 요한에 의해(요 1:7; 요 1:8), 성경에 의해(요 5:39), 하나님에 의해(요 5:32), 그의 사역에 의해(요 5:36), 그 자신에 의해(요 8:13; 요 8:14), 그리고 나중에는 성령에 의해서와(요 15:26),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요 15:27) 주어진다.
요일 5:7에서, 증언하는 셋이란 세례(침례), 주님의 성만찬, 그리고 성령인 듯하다. 하지만 요 19:34; 요 19:35에 대한 시사를 내포했을 가능성도 있다. 요한에게 있어 증언은 신앙 고백이다. 확실히,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의 저자는 실제 목격을 강조한다(요일 1:1-2). 그러나 그 증언은 또한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한 증언이기도 하다(요 1:14; 요일 5:9-10). 따라서 증언은 목격자가 아닌 자들 즉 예수님이 누구였는지와 그가 무엇을 의미하였는지를 고백하는 자들에 의해서도 주어질 수 있다. 이 용어가 결코, 자신들의 증언으로 인해 죽음을 당하는 자들만을 가리켜 사용되지는 않는다. 또한 이 사실이 요한계시록의 네 용례에서 마르튀레오에도 해당된다. 거기에서 마르튀레인은, 예언적 말씀을 증언하는 것(계 1:2; 계 22:20) 또는 그 예언을 수호하는 경고를 증언하는 것(계 22:18)을 의미한다.
(f)  딤전 6:13.
딤전 6: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여기서 디모데는 빌라도를 향한 자신의 증언으로 친히 선한 고백을 하신 그리스도 앞에서 권고를 받는다. 논점은, 자기의 선언 또는 자신의 죽음 또는 이 양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자기의 메시야적 사명에 대한, 예수님의 인정이다.(참조: H. Strathmann; A. A. Tri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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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Jyovw(5312, 휩소오) 높이다 exalt, 올리다 rais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a)  동사 휩소오(Hippocr. 이래로)는 성경 밖의 헬라어에서 후기에 드물게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들어올리다, 높이 올리다, 높이다, 올리다'를 의미하며, 문자적 의미와 전이된 의미로 사용되었다(참조: G. Bertram).
(b)  높임이나 오름에 대해 바벨론의 창조 서사시에서 승리한 마르둑이 신들의 회합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주권자의 지위에 오르게 된 내용이 나온다.
애굽에서 신-왕의 대관식 예식 때에 사용되었던 왕 신화(주전 14세기)에서 바로왕 투트모세(Thut-mose) 3세가 태양신 레(Re)에 의해 스스로 빛의 영역에까지 높여져서 거기에서 즉위하여 신의 아들로 임명되었다는 내용이 있다.(참조: ANET)
바벨론의 아다파(Adapa) 신화에서 아다파는 애써 하늘에 까지 도달했으나 그곳에서 생명의 양식을 얻지 못한 사람이었다. 이 계획은 신들의 인과응보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곧 이 신들은 인간을 그에게 지정된 한계 속으로 몰아넣었다.
에타나(Etana) 신화에서 에타나는 자기 신세를 입은 독수리를 따라 하늘에 있는 아쉬탈 보좌에 도달하려는 헛된 노력을 했다. 그의 목적은 죽음 없는 불멸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이 두 신화들에는 인간 자신의 노력을 통해 높아지려는 시도가 포함되어 있는데 반해, 바벨론 창조 신화와 애굽 왕 신화에서 높임은 신들의 일이다.(참조: D. Muller).
2. 70인역본의 용법 
(a)  휩소오는 70인역본에서 약 150회 나오며, 16개의 히브리어 단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는데, 주로 룸과 그 파생어들(찬양, 칭찬, 높음, 거만함 등)을 번역하고 있다(94회). '높다, 높이다, 일어나다'를 의미한다.
(b)  따라서 휩소오는 '높이다'(시 18:46; 시 27:5,6; 출 15:2; 겔 28:2 등), '높다'(시 89:13;시 61:2), '넓게 펼치다'(사 14:26), '소리를 높이다'(사 37:23), '자라다'(겔 31:4,10), '양육하다, 기르다'(사 23:4), '아름답다'(사 4:2; 시 89:16), '높이다, 칭찬하다, 찬양하다'(시107:32; 118:28), '자랑하다, 건방진, 거만한'(시 37:20; 시 131:1,2; 겔 28:5)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c)  휩소오는 주로 하나님께서 높이심을 받으시는 것, 하나님에 의해 높임을 받는 것, 무례하게, 거만하게 자기를 높이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휩소오는 신약성경에서 20회 나온다.
(a)  행 13:17의 바울의 연설문에서 휩소오는 '크게 만들다'를 의미한다: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b)  휩소오는 낮추는 것에 대조되어 나타난다. 예수님은 공관복음서에서 자기 낮춤과 자기 높임에 관하여 말씀하신다(마 23:12; 눅 18:14; 눅 14:11; 눅 1:52; 마 11:23; 눅 10:15). 이 말씀의 배후에는 구약성경의 유대적인 사상이 있다(겔 21:26). '하나님의 구약 계시에 따르면 인간편에서 모든 높아짐은 거부된다. 참으로 높아지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것이다'(Bertram 608).
이와 같은 맥락을 따르는 약 4:10과 벧전 5:6의 권고문에는 하나님(혹은 그의 손)께 복종하여 미래의 영광 때에 높임을 받으라고 기독교인들을 경고하는 내용이 있다. 약 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 5: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휩소오는 고후 11:7에서 좀 다른 의미에서 낮춤과 함께 사용되었다:"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고린도 교인들의 높아짐은 그들이(값없이) 복음을 받는 한편 바울은 그의 무보수의 전도로 자신을 낮추었다는 사실로 되어 있다.
(c)  휩소오는 기독론에서 특별한 의미, 즉 예수님을 통치자의 지위로 높이는 승귀를 나타낸다(행 2:33; 행 5:31). 최초의 기독론적 언명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부활과 높임을 동시에 고찰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구절들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주로 임명 받으신 것이 높임으로 묘사된다(참조: 2:36). 이 구절들이 사도행전1장에 나오는 승천에 관한 누가 신학과는 다른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시사해주므로 여기에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은 보다 초기의 전통임에 틀림없다. 이 전통에 의하면, 부활절 사건은 구원에 있어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그 사건 속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주요 그리스도로 임명 받았기 때문이다. 곧 높여졌기 때문이다(행 2:36). 예수님의 높임은 기름부음을 받으심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의 완성이자 교회와 세계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주권의 시작이요 계속이자 예기된 성취를 뜻한다.
(d)  휩소오는 요한복음에서 5회 나오는데, 명백한 신학적 의미를 나타낸다. 이 5개 구절의 실례 모두에서 휩소오는 이중적 의미,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 들려 올리워진 것은 동시에 그의 (천국으로의) 승귀를 의미한다는 것을 나타낸다(요 3:14; 요 8:28; 요 12:32: 요 12:34). 이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그의 순종의 최종적인 귀결이자 목표라고 보는 요한의 견해에 기초하여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세상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목적이 십자가에 들어 올리어진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님을 의미한다. 그들은 '그분을 십자가에 들어올림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그를 자기네의 심판자로 삼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들어올림'의 이중적인 의미는 명백하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그를 들어 올렸다. 그렇지만 엄격히 말해서 그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그는 인자로서 하늘의 영광으로 들어올려졌다. 그들이 예수님을 심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는 그들의 심판자가 된다(Bultmann). 반대로 신자들은 죽음에까지 이른 예수님의 순종 가운데에서 아버지와 그의 완전히 하나됨을 인식하고, 이렇게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이 아들로 영광을 받게 하고 되돌아옴이요 신자들을 위한 구속이 됨을 깨닫는다(요 12:32). 그러므로 십자가에 들어 올리워짐은 아버지의 영광 속으로의 높임의 시작이다. 높임에 대한 요한의 가르침은 공관복음서에 나와 있는 승천의 실제적인 묘사에 대해 요한이 제시한 것(counterpart)이다.
(참조: G. Bertram; D. Muller; G. Lude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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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jlevgcw(1651, 엘렝코) 드러내다, 폭로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엘렝코(Homer 이래)는
(a)  '조롱하다, 비웃다, 모욕을 주다',
(b)  '창피주다',
(c)  '비난하다',
(d)  '폭로하다, 저항하다',
(e)  '해석하다, 상술하다',
(f)  '조사하다'를 의미하게 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엘렝코는 70인역본에서 약 7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야카흐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엘렝코는 70인역본에서 '꾸짖다(책망하다), 처벌하다, 정죄하다' 혹은 '유죄를 선언하다, 시험하다, 훈계하다' 등을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엘렝코는 신약성경에서 17회 나오며, 용법이 한정되어 있다. 사람 대격과 함께 이 단어는 개인적으로든(마 18:15) 회중적으로든(딤전 5:20) '백성들에게 그들의 죄를 보여주고 그들에게 회개하도록 권고하다'를 의미한다. 성령이 이 일을 하며(요 16:8) 또한 그리스도도 지금(계 3:19) 그리고 재림 때에(유 1:15) 이 일을 한다. 어느 누구도 이 일을 예수님에게 할 수 없다(요 8:46). 죄인들은 선지적 소명(눅 3:19), 하나님의 교훈(히 12:5), 혹은 율법(약 2:9)에 직면할 때, 이러한 폭로를 경험한다. 페리(~을 인하여)는 잘못을 나타내는데 사용되며(눅 3:19), 보다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호티(o{ti, 3754)도 더불어 사용되기도 한다(요 16:9 이하). 폭로나 정죄 뿐만 아니라 교정이나 징계를 암시하기도 한다.
엘렝코로 나타내어진 죄에 대한 투쟁은 구약성경과 유대교에 기초한다. 레 19:17은 징계(책선)를 요구한다. 랍비들에게 있어 질책은 사랑의 절대 필요한 요소이다. 잠 3:12; 욥 5:17 등은 하나님을 징계로 교육하시는 분으로 묘사한다(히 12:5).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F. Buch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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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erovw(5319, 파네로오) 계시하다, 알리다, 보여주다, 나타내다.
1. 고전 헬라어 문헌 
파네로오는 파네로스(fanerov", 5318:보이는, 명백한, 뚜렷한)에서 유래했으며, '보이게하다, 계시하다, 나타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감추어져 있거나 알려지지 않은 것을, 명백하게, 또는 눈에 보이게, 또는 알려지게 하거나 말이든 행위든 또는 어떤 방식으로 든지 명백히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파네로오는 70인역본에서 렘 33:6에 한번 나타나며, 갈라(나타나다, 보여주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3. 신약성경의 용법 
파네로오는 신약성경에서 47회 나타나며, '계시하다, 알게하다, 보이다, 나타내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a)  마가복음에서 파네로오는 3회 나타난다. 막 4:22에서 속담에 담긴 비유의 숨은 뜻을 보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막 16:12; 막 16:14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것을 언급한다.
(b)  바울은 파네로오와 아포칼륍토(ajpokaluvptw, 601)를 동의어로서 사용하였다. 이것은 특별히 롬 1:17과 롬 3:21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롬 1:19과 고전 4:5에서 파네로오는 '보이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전자에서는 창조에서의 "하나님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성"의 계시에 관하여 언급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후자에서는 모든 감추어진 것들이 드러날 때 임할 심판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여기에는 그가 때가 이르기 전에 심판을 공표하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의 주관에 맡긴다는, 아울러 그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때이른 칭찬을 받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실제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다른 언급들에서 요점은 복음 안에서의 계시이다. 재귀적 용법은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 특별한 일들은 항상 계시된다. 롬 3:21은 롬 1:17을 되풀이 하는데 현재형 아포칼륍테타이("나타나서")를 완료형 페파네로타이("나타났으니")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의 특별한 때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에 의한 칭의에 대한 단 한번의 계시를 의미한다(참조: 롬 3:24 - 롬 3:26; 롬 1:3이하).
바울은 파네로오를 고린도후서에서 9회나 사용하고 있는데, 특히 논쟁 문맥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는 이 단어를 그의 설교를 통하여 임하거나 일어나는 계시에 대해(고후 2:14; 고후 11:6), 바로 그의 생활에 대해 사용했다. 그 자신의 사도적 생활 방식은 그 자체가 그리스도 자신의 생활 방식과 비교 된다는 데에서 그리스도의 역설적 계시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 그의 대적들을 포함하여 - 하나님께서 성공 중에 자신을 나타내실 것을 기대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계시는 다르게 임한다. 바울의 사도적 방식은 고난과 고통의 방식이어서,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 4:10 이하).
다른 한편으로, 교회 안에 믿는 남녀가 있다는 사실로 그들이 그리스도로부터 온 편지이며, 바울의 대적들이 자랑하는 신임장과는 다르게 바울의 사도직을 입증하는 분명한 증거임을 알 수 있다. 고후 5:10 이하에서 파네로오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만인이 출두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이 동사는 3회 나타나는데, 우리가 출두할 뿐만 아니라(10절), 우리가 누구인지 하나님께 알리어진다(ll절a). 바울은 여기에 그것이 독자들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는 소망을 덧붙였다(11절b). 고후 7:12에서 바울은 자신이 기록한 의도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 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다"하고 선언하였다. 비록 바울의 웅변술이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사도직과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 명백해지었다는 소망을 표현한다(고후 11:6).
(c)  그외의 바울 서신에서도 파네로오와 아포칼륍토는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골 1:25 이하와 엡 3:5을 비교하면 할 수 있다. 계시는 선포에서 발생한다(골 1:25이하; 골 4:4; 롬 16:25 - 롬 16:27). 엡 5:13 이하에서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빛의 관점에서 취급되었다: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계시의 사상은 이 세대들에게는 감추어졌으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어진 신비라는 관점에서 훨씬 더 발전되었다(골 1:26; 골 3:4; 골 4:4; 참조: 엡 3:5; 엡 6:19).
바울은 딤전 3:16에서 원시 기독교 찬송가를 인용하여 신비의 주제를 채택하고 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여기서 파네로오는 성육신(incarnation)을 말한다(참조: 요 1:31; 히 9:26; 벧전 1:20; 요일 1:2; 요일 3:5; 요일 3:8에서의 예수님 성육신적 사역을 뜻하는 용례). 군드리(Gundry)는 이 구절이 다음과 같은 사실에 비춰볼 때, 승천에 이르기까지의 전체적인 지상 사역을 언급한다고 생각한다.
① 인간의 생애를 뜻하는 사르크스(savrx, 4561)를 사용했다는 점(참조: 갈 2:20; 빌 1:22, 빌 1:24; 히 5:7).
② '태어난다'와 같은 보다 특정한 동사 대신에 '나타난다'라는 일반적인 동사를 사용했다는 점,
③ '영광 중에 받아들여졌다'라는 종합적인 언급을 했다는 점. 이렇게 해서 에파네로데는 행동이 전체로서 생각되었음을 나타내는 단순 과거 수동태이다.
또한 딤후 1:1O에서 화네로오는 성육신의 의미를 뜻하는 말로도 사용되는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권능 안에서 복음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목회서신들에서 이 동사가 나오는 다른 구절들에서도 성육신(incarnation)을 염두에 두고 있으나, 이제 그것은 선포에 의해 전달된다: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딛 1:3).
(d)  파네로오는 히브리서 9장에서 2회 나오나 의미는 약간 다르다. 히 9:26에서 성육신에 관하여 언급되어 있는데, 성육신의 목적은 구약성경의 희생제사와 속죄(의식)일을 능가하는 속죄 희생제를 드리려 함이었다. 그리스도의 현현은 유일회적이며 다시 되풀이 될 수 없다: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찌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5 이하). 역으로, 저자는 앞서 논하기를 법궤의 구조(그리고 암암리에 성전)와 대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성소 내부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 옛 언약의 종교와 의식의 불완전성의 증거라 한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히 9:8).
(e)  파네로오는 또한 베드로전서에서도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말로 2회 나오는데,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삶에서와 그의 재림에서의 두 가지 현현에 관하여 언급되었다. 벧전 1:20에서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라고 하였고, 벧전 5:4에서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다"고 하였다.(참조: C.Brown).
(f)  요한의 기록에서 파네로오는 실제로 아포칼륍토(ajpokaluvptw, 601)의 동의어로 자주 사용되었는데, 아포칼륍토는 사 53:1을 인용하고 있는 요 12:38에서만 사용되었다.
요 1:31에서 세례(침례) 요한이 와서 물로 세례(침례)를 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다. 요 2:11에서 가나의 표적이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었다.
요 7:4에서 "세상", 곧 모든 사람의 눈 앞에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격려하며 말하기를,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였다. 그러나 그 말은 믿음의 부족을 드러낸 것이며(요 7:5), 예수님은 아직 그의 때가 오지 않았을 때에 그들의 권면을 거절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때, 그리고 세상을 따르는 그들의 태도는 항상 여기에 있다(요 7:6).
예수님은 하나님의 실체, 하나님의 이름(요 17:6), 하나님의 하시는 일(요 3:21; 요 9:3)을 나타내신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님의 모든 행위는 계시라고 부를 수 있다(요 2:11).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실체는 증거에서 계시된다. 예를들면, 세례(침례) 요한의 증거 등이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요 1:31). 요 21:1("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과 요 21:14(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에서 화네로오는 그의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의 자기 계시, 곧 부활하신 주님의 나타남을 의미한다.
요한일서에서도 화네로오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예수님의 사역는 계시로 묘사되어 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요일 3:5).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 그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 4:9; 요일 3:16). 그 목적이 살리려 한 것이라면 전계시(全啓示)는 역시 생명(조에, 요일 1:2)으로 요약될 수 있다: 요한은 예수님 안에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고 하였다. 그것은 또한 생명의 말씀의 내용이다(요일 1:1).
요일 2:19에서 공동체를 떠나는 불신자들의 행동은 그들이 참으로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파네로오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요일 2:28: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요일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요한계시록에도 2회 나타난다. 계 3:18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요하신 그리스도로부터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는 권면을 받는다. 여기에는 자기 만족적인 번영에 빠져 결국 교회의 참된 상태에 눈이 멀어버린 그 교회의 미지근한 태도가 언급되어 있다. 계 15:4에서 이긴 자들은 "오직 주만이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는 사실을 찬송하고 있다.(참조: R.Bultmann/D.Luhrmann; C.Br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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