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1.09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요8.간음여인판단사건.성전헌금함앞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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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요8장
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나는 세상의 빛
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3.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17.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18.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
19.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내가 가는 곳
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22.  유대인들이 이르되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25.  그들이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26.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
27.  그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39.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1.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48.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4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50.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52.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53.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5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55.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59.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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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B]요8장
1.  But Jesus went to the Mount of Olives.
2.  And early in the morning He came again into the temple, and all the people were coming to Him; and He sat down and [began] to teach them.
3.  And the scribes and the Pharisees *brought a woman caught in adultery, and having set her in the midst,
4.  they *said to Him, "Teacher, this woman has been caught in adultery, in the very act.
5.  "Now in the Law Moses commanded us to stone such women; what then do You say?"
6.  And they were saying this, testing Him, in order that they might have grounds for accusing Him. But Jesus stooped down, and with His finger wrote on the ground.
7.  But when they persisted in asking Him, He straightened up, and said to them, "He who is without sin among you, let him [be the] first to throw a stone at her."
8.  And again He stooped down, and wrote on the ground.
9.  And when they heard it, they [began] to go out one by one, beginning with the older ones, and He was left alone, and the woman, where she was, in the midst.
10.  And straightening up, Jesus said to her, "Woman, where are they? Did no one condemn you?"
11.  And she said, "No one, Lord." And Jesus said, "Neither do I condemn you; go your way. From now on sin no more."}
12.  Again therefore Jesus spoke to them, saying, "I am the light of the world; he who follows Me shall not walk in the darkness, but shall have the light of life."
13.  The Pharisees therefore said to Him, "You are bearing witness of Yourself; Your witness is not true."
14.  Jesus answered and said to them, "Even if I bear witness of Myself, My witness is true; for I know where I came from, and where I am going; but you do not know where I come from, or where I am going.
15.  "You people judge according to the flesh; I am not judging anyone.
16.  "But even if I do judge, My judgment is true; for I am not alone [in it,] but I and He who sent Me.
17.  "Even in your law it has been written, that the testimony of two men is true.
18.  "I am He who bears witness of Myself, and the Father who sent Me bears witness of Me."
19.  And so they were saying to Him, "Where is Your Father?" Jesus answered, "You know neither Me, nor My Father; if you knew Me, you would know My Father also."
20.  These words He spoke in the treasury, as He taught in the temple; and no one seized Him, because His hour had not yet come.
21.  He said therefore again to them, "I go away, and you shall seek Me, and shall die in your sin; where I am going, you cannot come."
22.  Therefore the Jews were saying, "Surely He will not kill Himself, will He, since He says, 'Where I am going, you cannot come'?"
23.  And He was saying to them, "You are from below, I am from above; you are of this world, I am not of this world.
24.  "I said therefore to you, that you shall die in your sins; for unless you believe that I am [He], you shall die in your sins."
25.  And so they were saying to Him, "Who are You?" Jesus said to them, " What have I been saying to you [from] the beginning?
26.  "I have many things to speak and to judge concerning you, but He who sent Me is true; and the things which I heard from Him, these I speak to the world."
27.  They did not realize that He had been speaking to them about the Father.
28.  Jesus therefore said, "When you lift up the Son of Man, then you will know that I am [He,] and I do nothing on My own initiative, but I speak these things as the Father taught Me.
29.  "And He who sent Me is with Me; He has not left Me alone, for I always do the things that are pleasing to Him."
30.  As He spoke these things, many came to believe in Him.
31.  Jesus therefore was saying to those Jews who had believed Him, "If you abide in My word, [then] you are truly disciples of Mine;
32.  and you sha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shall make you free. "
33.  They answered Him, "We are Abraham's offspring, and have never yet been enslaved to anyone; how is it that You say, 'You shall become free'?"
34.  Jesus answered them, "Truly, truly, I say to you, everyone who commits sin is the slave of sin.
35.  "And the slave does not remain in the house forever; the son does remain forever.
36.  "If therefore the Son shall make you free, you shall be free indeed.
37.  "I know that you are Abraham's offspring; yet you seek to kill Me, because My word has no place in you.
38.  "I speak the things which I have seen with [My] Father; therefore you also do the things which you heard from [your] father."
39.  They answered and said to Him, "Abraham is our father." Jesus *said to them, "If you are Abraham's children, do the deeds of Abraham.
40.  "But as it is, you are seeking to kill Me, a man who has told you the truth, which I heard from God; this Abraham did not do.
41.  "You are doing the deeds of your father." They said to Him, "We were not born of fornication; we have one Father, [even] God."
42.  Jesus said to them, "If God were your Father, you would love Me; for I proceeded forth and have come from God, for I have not even come on My own initiative, but He sent Me.
43.  "Why do you not understand what I am saying? [It is] because you cannot hear My word.
44.  "You are of [your] father the devil, and you want to do the desires of your father. He was a murderer from the beginning, and does not stand in the truth, because there is no truth in him. Whenever he speaks a lie, he speaks from his own [nature;] for he is a liar, and the father of lies.
45.  "But because I speak the truth, you do not believe Me.
46.  "Which one of you convicts Me of sin? If I speak truth, why do you not believe Me?
47.  "He who is of God hears the words of God; for this reason you do not hear [them,] because you are not of God."
48.  The Jews answered and said to Him, "Do we not say rightly that You are a Samaritan and have a demon?"
49.  Jesus answered, "I do not have a demon; but I honor My Father, and you dishonor Me.
50.  "But I do not seek My glory; there is One who seeks and judges.
51.  "Truly, truly, I say to you, if anyone keeps My word he shall never see death."
52.  The Jews said to Him, "Now we know that You have a demon. Abraham died, and the prophets [also]; and You say, 'If anyone keeps My word, he shall never taste of death.'
53.  "Surely You are not greater than our father Abraham, who died? The prophets died too; whom do You make Yourself out [to be]?"
54.  Jesus answered, "If I glorify Myself, My glory is nothing; it is My Father who glorifies Me, of whom you say, 'He is our God';
55.  and you have not come to know Him, but I know Him; and if I say that I do not know Him, I shall be a liar like you, but I do know Him, and keep His word.
56.  "Your father Abraham rejoiced to see My day, and he saw [it] and was glad."
57.  The Jews therefore said to Him, "You are not yet fifty years old, and have You seen Abraham?"
58.  Jesus said to them, "Truly, truly, I say to you, before Abraham was born, I am."
59.  Therefore they picked up stones to throw at Him; but Jesus hid Himself, and went out of the 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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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 (개요)
본 장(章)에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보게 된다.
Ⅰ. 유대인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예수에게 데리고 옴으로써 그를 체포하려 했던 그 음모를 그리스도께서 피하신 것(1-11).
Ⅱ. 그에게 트집을 잡고, 그에 반대되는 경우를 찾고, 그가 말한 모든 것을 시비하려고 한 유대인들과 그가 가졌던 그의 여러 설교들과 토론들,
1. 그의 세상에서의 빛 되심에 관하여(12-20).
2. 불신하는 유대인들의 파멸에 관하여(21-30).
3. 자유와 속박에 관하여(31-37).
4. 그의 아버지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 관하여 (38-47).
5. 그들의 역설적인 비난들에 대한 대답으로써의 그의 설교(48-50).
6. 믿는 자들의 불멸성에 관하여(51-59). 이 모든 것 속에서 그는 자기에게 반대한 죄인들의 잘못을 참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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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행 중에 잡힌 여인(요 8:1-11)
그리스도가 앞장에서 통치자들과 무리들에 의해 심히 모욕을 당하셨다고 하여도 아직 여기서 우리는, 그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안아 있음을 보게 된다. "그가 얼마나 자주 그들을 모으려 했던가!"(마 23:37) 다음 사실들을 생각하여 보자.
Ⅰ. 성을 벗어나심(1절).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셨다." 장막절을 맞이하여 그가 어떤 친구의 집에 가신 것인지 또는 어떤 상점에 가신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가 쉬셨는지 혹은 어떤 사람이 생각하듯이 밤을 새며 하나님께 기도를 하셨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밤에 자기에게 기거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줄 만한 용기와 친절심을 가졌던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부터 빠져나가신 것처럼 보인다.
-- 그의 박해자들이, 쉴 수 있는 자신들의 집들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7:53) 그는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한 곳에 그의 머리를 쉴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가 가야 했던 곳은 성으로부터 한두 마일 떨어진 데 있었다. 그는(어떤 이가 생각하듯이) 자신을 밤에 무리들의 폭동의 위험에 드러내 놓지 않으려고 퇴진하셨다.
--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내에서 위험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신 것이 좋은 것이다. 낮에, 그가 성전에서 해야할 임무를 수행하실 때, 그는 자신을 기꺼이 드러내 놓으셨고, 특별한 보호 밑에 있었다(사 49:2). 그러나 밤에 일을 하실 필요가 없었던 때는 지방으로 철수하여 거기서 쉬셨다.
Ⅱ. 성전에서 자신의 일을 계속하시려고 아침에 다시 돌아오심(2절).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1. 근면한 설교자이신 그리스도. "이른 아침에 그는 다시 돌아왔고, 그리고 가르치셨다." 그는 어제 가르치셨지만, 오늘도 다시 가르치셨다. 그리스도는 때를 가리시지 않는 끈질긴 설교자였다. 그리스도의 설교에 대해 주목을 요하는 세 가지 사실이 있다.
(1) 시간. "그것은 이른 아침이었다." 그는 성밖에 기거하셨고, 아마도 밤의 대부분을 은밀한 기도로 보냈을 것이지만, 그러나 그는 "일찍" 오셨다. 한 날의 일이 하나님과 인간들의 영혼을 위한 일 일 때 일찍이 그 날을 충실하게 산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2) 장소. "그것은 성전에서였다." 그것이 하나의 "신성한" 장소였기 때문이라기 보다는(그래서였다면 그는 다른 때도 이 곳을 선택하셨을 것이다) 그 곳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예배를 위한 진지한 집회들을 볼 수 있었고 또 사람들을 그 성전에 나오도록 권고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그것이 멸망되도록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3) 그의 자세. 그는 권위가 있는 분과 같은 모습으로 또한 앞날을 위해 권위를 지키고 있는 분처럼 "앉아서" 가르치셨다.
2. 그의 가르침에 대한 백성들의 깊은 관심. "모든 무리가 그에게 나왔다." 그리고 그 들 중 많은 사람들은 시골 사람들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이날 유월절 행사로부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그들이 돌아가기 전에, 그리스도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훌륭한 설교 한 편이라도 더 들으려고 갈망하였다.
-- 그들은 그리스도가 일찍 나오신 그 때에 벌써 그에게로 모였다. "일찍 그를 찾는 자들은 꼭 그를 발견할 것이다." 통치자들이,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그에게로 나왔던 자들을 미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르쳤다." 그들 가운데 어떤 유명한 인물들의 모습이 거의 혹은 한 명도 없었다해도,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을 환영했고, 그들을 가르쳤다.
Ⅲ. 그를 시험하기 위해서 "자기에게로 간음한 여인을 데려 왔던"자들에 대한 그의 태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스스로 참을성 있게 듣지 않을 뿐 아니라, 무리들이 그에게 집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방해하였다. 본문에서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1. 그와 싸움을 걸려고 애쓰고 또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였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그에게 제시된 도전(3-6).
(1) 그들은 예수 앞에 그 죄인을 세웠다(3절). 그들은"간음한 여인," 아마도 최근의 장막절 기간 중에 그러했을 여인을 그에게 데려 왔다. 아마 여인숙에 거하며 축제를 즐기는 그 분위기 속에 좋은 것을 망쳐 버리는 사악한 마음이 끼여 들어와 죄를 저지르는 경우들이 생겼을 것이다. 유대인들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했던자"들은 죽음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고, 로마의 권력은 그들을 처형하도록 허락했다. 따라서 그 여자는 교권에 의하여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 "그 여인이 간음하다가 잡혀 왔음을" 생각하여 보자. 간음은 어둠의 일이고, 거기서 범죄자들은 보통 할 수 있는 대로 그 일을 은폐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때때로 그것이 이상하게도 밖에 드러나게 된다. 죄 속에서 스스로의 비밀을 지키려 하는 자는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여자를 심판관처럼 의자에 앉아 있었던 그리스도에게로 데려 왔고, 마치 그들이 그 여인을 그리스도의 심판에 전적으로 맡기겠다는 듯이, 그녀를 그 모임의 한가운데로 데려 왔다.
(2) 그들은 그 여자를 기소하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의기양양하게 "선생이여 이 여인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4절)라고 말한다. 그들은 마치 누가복음 20장 20절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어제는 기만자라 불렀던 그를 여기서는 선생으로 부르면서 아첨으로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말로 영향을 받을 지는 모르지만, 그 마음을 감찰하시는 자는 결코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① 그 죄인을 기소했던 죄는 간음보다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었다. 간음은 모세의 율법 이전 족장 시대에 있어서 조차도 사사들에 의해 "응징 받게 되는 하나의 불법으로" 간주되었다(욥 31:9-11; 창 38:24). 바리새인들은, 이 범법자를 심한 태도로 기소하므로 죄에 대한 적의가 대단한 것처럼 보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들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사실 "그들은 모든 부정으로 가득차 있었다"(마 23:27, 28).
--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푸는 자들이 타인의 죄에 대해서는 엄격한 것이 보통 있는 일임을 기억하자.
② 그 범죄의 증거는 현장에서 잡힌 연고로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것은 논쟁할 여지가 없는 증거였다. 곧 그 여인은 "간음하다가 잡혔다." 그래서 죄가 아니라고 변명할 아무런 여지가 없었다. 만일 그녀가 이렇게 현장에서 잡히지 않았었다면 그녀는 그녀의 마음이 완전히 굳어버릴 때까지 또 다른 사람과 간음을 계속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죄가 백일하에 드러나는 것이 죄인들에게는 자비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더 이상 "망령되게 행동하지 않을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 죄로 인하여 저주를 받기보다는 죄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이 낫고, 죄로 인하여 정죄 되기 보다는 죄를 정죄하고 믿음에 이르는 것이 보다 좋다.
(3) 그들은 예수 앞에 전후 사정을 말하였다. 그리고 그것에 근거하여 그녀를 고소하였다. 모세는 율법으로 "그와 같은 죄는 돌로 쳐죽여야 한다고" 명령하였다(레 22:10; 신 22:22). 그러나 그 음녀가 시집을 가서 그 사실이 드러나지 않거나 혹은 제사장의 딸이었을 경우는 그들은 돌로 쳐죽임을 당하지는 않았다(신 22:21).
-- 간음은 최대의 죄스러운 죄임을 기억하자. 왜나햐면 그것은 계명에 거스리는 것뿐 아니라 우리 하나님의 계약에 거스리는 몹쓸 욕망으로 인한 반역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타락한 사람의 가장 비열한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것으로써, 순수한 신의 법령을 뒤엎는 것이다.
(4) 그들은 사건에 대한 그의 심판을 간청하였다. "낡은 율법을 새롭게 하고, 새 것을 구현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인 체하는 당신은 "무어라 말하겠나이까?" 이 경우에 "당신은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 만일 그들이 그의 마음을 알기를 갈망하는 하나의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진지하게 이 문제를 물었었다면, 그것은 대단히 칭찬할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의(義)의 계명을 신뢰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똑바로 바라보았으리라.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한 것이었다."
① 만일 그가 율법이 정한대로 이 문제를 처리하였다면 예수의 언행이 불일치하다는 것과(그는 지금까지 세리와 창기들을 용납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온순해야 하고 구원을 지니고, 해방의 해(年)를 선포해야 하는 메시야의 특성과도 불일치하는 것으로 그를 비난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그를 유대인들로 국가 권력을 남용하도록 장려하였다는 명목으로 로마 통치자에게 고소했을 것이다. 그러나
② 만일 그가 그녀를 용서하고, 그리고 그 율법의 조문이 그대로 수행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그의 견해를 내세운다면(그들이 그가 그러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를 다음과 같이 다루려 하고 있었다.
첫째, 모세의 율법에 대한 적으로서, 그리고 외람 되게 그것을 수정하고 통제할 권위를 가진 자처럼 행세하려 하였다고 몰아 붙었을 것이고, 그의 적들이 그렇게 선전하려고 무척이나 애쓰던 대로 "그가 율법과 선지자들을 폐하려 온 것이라"고 선전하였을 것이다.
둘째, 그가 죄인들의 친구이며, 결국 죄의 보호자라고 몰아 붙였을 것이다. 만일 그가 그와 같은 사악함을 용서하여서 그것을 정죄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면, 그들은 그를 범죄자의 옹호자로서, 그것을 유지시켜 주는 자로서 묘사했을 것이다. 그가 만일 범죄자를 보호하였다면, 예언자로서, 사업과 순수함과 엄격성을 고백했던 그로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2. 이 사건을 해결하시기 위하여 그가 사용하신 방법. 이로써 그는 그들의 함정을 모면하셨다. 그는 "몸을 굽히사 땅에 쓰셨다." 그가 무엇을 썼는지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그것을 묻는 것은 불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서에서 그리스도가 글을 쓰셨다는 유일한 언급이다.
-- 유세비우스(Eusebius)는 에뎃사의 왕 압가루스(Abgarus)에게 예수가 편지를 쓰셨다고 전해 주고 있다. ***어떤 이들은, 자기들이 그가 여기에 무엇을 썼는지 추측하여 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로티우스(Grotius)는, 그것은 대단히 심각하고 무게 있는 말씀이었고, 현인들이 자기들이 어떤 일에 대해 심가하고 있을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제롬(Jerome)과 암브로스(Ambrose)는 예수의 쓰심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사악한 자들의 이름들은 땅이 기억하고 그들을 취하여 가리라." ***다른 이들은, "땅에 속한 너희들이 서로 고소하나 그러나 심판은 나의 소관이다"라고 하셨을 것으로 생각한다.
-- 이것을 통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어려운 경우가 닥치게 될 때, 말을 빨리 내뱉지 말고, 천천히 말하도록 가르치고 계신 것이다. 어떤 도전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혹은 우리가 조롱 당할 때, 우리가 대답하기 전에 심사숙고하고 멈추어 생각하도록 가르치신다. 한 번 대답하기 전에 두 번 생각하라.
-- "현인들은 대답하기 전에 말할 것을 미리 마음으로 준비한다."
-- 그가 글을 쓰신 이유로써* 그가 그들의 말을 듣지 못하는 것처럼 이란 말이 추가되어 있다(그러나 대부분의 사본들은 이 내용이 없다. 역주: 한글 개역에도 이 부분은 없다). 그는 그들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식으로 딴전을 부리셨다. 이 태도는 사실 "누가 나를 재판관 혹은 심판관으로 세웠느냐?"는 뜻의 말씀과 같은 것이었다.
-- 답변하지 말아야 안전한 경우에는 답변을 않는 것이 안전하다(시 38:13).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자들이 세속적인 일에 얽혀들지 않을 것을 바라신다.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에게 속하지 않은 일들로 분주하기보다는 차라리 율법을 연구하는 일에나(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땅바닥에 글을 쓰는데 그들의 시간을 바치도록 격려하자. 그러나 그리스도가 마치 그가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처럼 보였을 때도, 그는 자신이 그들의 말들을 들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생각까지도 알았다는 사실을 나타내셨다.
(2) 그들이 끈질기게, 아니 건방지게 그에게 대답하도록 강요하자 그는 그 죄인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그 박해자들에게 밝히셨다(7절).
① "그들은 계속해서 그에게 물었고" 그들을 주목하지 않는 듯한 그의 모습에 그들은 더욱 격분하였다. 왜냐하면 이제 그들은, 자기들이 그를 이겼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이었다.
-- 그들은 만일 그가 그녀를 저주한다면, 그 자신의 자비와 용서의 교리에 모순됨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그에 대한 자기들의 주장을 힘을 내어 추진하였다. 한편 그들은 자기들에 대한 그의 무시를 자기들의 계획에 대한 그의 도전으로써 생각했고, 마치 그들 자신의 명예로 생각하여 그만 물러가라는 뜻의 태도를 받아들였다.
② 마침내 그는 한 마디 말씀으로 그들 모두가 수치와 침묵으로 던져 넣었다.
-- 그는 마치 잠으로부터 깨어 나온 자와 같이 "일어나셨다"(시 78:65). 그리고 그들에게 "너희들 중에 죄가 없는 자가 그녀에게 먼저 돌을 던지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
첫째, 여기에 그리스도는, 그들이 그를 몰아 넣으려고 하였던 함정을 피하셨고, 그리고 자신의 명성을 높이는 계기로 삼으셨다.
-- 그는 율법을 그대로 맹종하지도 않았고, 죄인의 죄를 기소하지도 않았다. 또 한편으로 그들의 가열된 모습과 기소를 권장하지도 않았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주장을 직접적인 과정을 통해 관철시킬 수 없을 때 우회하며 일을 처리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둘째, "그들은 자기들이 던져 놓은 말속에, 그들 자신의 발이 걸려들게 된다." 그들은 그를 비난할 생각으로 왔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자신을 비난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처해지게 되었다.
-- 그리스도는 그 죄인을 기소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그 기소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그 기소자가 되기에 합당한지 아닌지를 그들의 양심에 대고 호소하였다.
a. 그는 모세의 율법에 범죄자들을 처형하기 위하여 정한 규칙을 본문에 적용시킨다. 즉 "증인이 그에게 먼저 손을 대라"는 규칙을 적용하신다(신 17:7).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때도 그러하였었다(행 7:58).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여인에 반대하는, 증인들이었다. 이제 그리스도는, 그들 자신의 율법에 따라, 그들이 감히 처형자들이 되려고 하는지를 보려고 그들에게 그것을 제시하셨다. 그들이, 자기들의 말로써 빼앗으려고 하였던 여인의 생명을 정말 손을 들어 빼앗으려고 할 것인가? 만일 그들이 그랬다면, 양심이 그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으리라.
b. 그는 논박할 여지가 없는 도덕적 공리를 세우셨다. 곧 사람들이, 자기들은 슬슬 범죄를 저지르면서 다른 사람들의 죄들을 정죄하는데 열심인 것은 대단히 불합리하다고 하신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범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보다 조금도 낫지 아니하였다. 그들 자신이 똑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 그러므로 "너희 중 누구라고 죄가 없는 자가 있다면, 즉 방탕이나 간음의 죄를 짓지는 않았더라도 본성의 죄까지 없는 자가 있다면, 그 여자에게 처음으로 돌을 던지도록 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고 치리자들이 자기들에게도 죄가 있는 것을 인정하는 이상 다른 사람을 묵인해 주라는 뜻의 말씀은 아니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a)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죄를 발견하게 되면 우리 자신을 반성하고 다른 사람들의 죄보다 자신의 죄를 더 엄히 다스려야 한다.
(b) 죄를 사랑해서는 아니 되겠지만 그 죄를 진 자에 대해서는 애정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과 우리 자신의 왜곡된, 썩은 본성을 생각하면서, "온순한 정신으로" 그들을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 Aut sumus, aut fuinms, viel possumus esse quod hic est - 즉 우리는 그와 마찬가지이거나, 마찬가지였든지, 앞으로 마찬가지가 될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이것이 우리의 형제에게 돌을 던지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그들의 결점을 외쳐대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억제시켜 준다. 이러한 설교는 "죄가 없는 사람"이 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래야 자기들의 죄에 대하여 참으로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그 설교를 듣고 기꺼이 "죄를 떠나게 될 것이다."
(c) 어떻게 하여서든지 다른 사람들의 결점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돌이켜 보기를 잘하며 또 자신들을 순수하게 보존한다(마 7:5). 그러므로 성막에서 사용되는 촛불 끄는 기구도 "순금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c. 그는 아마도, 질투 많은 남편에 의해 혐의를 받고 있는 여인에 대한 구약의 재판 내용을 염두해 두시고 계신 것처럼 보인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 여인을 그리스도에게로 데려 왔던 것처럼, 구약에서도 그 사람이 그 여자를 제사장에게 데려 왔다(민 5:15).
-- 이제, 만일 그의 부인을 송사하려 했던 남편이 어느 순간에 간음 죄를 범한 일이 있다면, Aquoe mon explorant ejus uxorem - 즉 그 쓰디쓴 물도(민 5:19 참조) 그 여인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통용된 견해였고, 경험에 의해 확인된 것이었다.[결과적으로 근친상간죄를 범한 유다와 다말의 경우를 생각해 보고 유다의 진정한 회개를 기억하라] 이에 따라 그리스도도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오라 너희 자신의 전승에 따라 내가 너희의 소송을 심판하리라." 만일 고소하는 너희가 죄가 없다면 고소는 성립되고 그 간음한 여인은 처형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여인이 죄를 졌어도, 너희가 죄가 있다면 그 여자를 데려다 놓은 너희도 같은 죄인이므로, 너희 자신의 율법에 따라 그 여자는 자유롭게 될 것이다."
d. 여기에서, 그는 그가 세상에서 이루려고 하셨던 위대한 사업 곧 죄인들을 회개하게 하는 일을 이루어 놓으셨다. 그는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그는, 그 여자에게 자기의 자비를 보여 줌으로써 그 죄인을 회개시키려는 목적을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자기들의 죄들을 보여 줌으로써 그 박해자들 역시 회개하도록 했다.
-- 그들은 그를 곤경에 빠뜨리려 하였으나 그는 그들을 깨닫게 하고 돌아서게 했다. 이같이 "피에 굶주린 자는 의로운 사람을 미워하지만 그러나 의로운 자는 악인의 영혼을 구하기를 바라신다."
③ 그들에게 이 놀랄 만한 말씀을 주신 후, 그는 그들이 그것을 생각할 수 있도록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다"(8절).
-- 그들이 자기들의 계획을 이야기했을 때, 그들의 의문을 경멸하셨던 것처럼 그가 그들에게 대답을 주었을 때도 그는 자신의 말에 대한 그들의 분노를 무시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에 관해 무어라고 하든지 관심을 갖지 않으셨다. 아니 그들은 어떤 대답도 할 여지가 없었다. 그의 말씀은 그들의 가슴 깊이 파고들어 갔다. 이제 자기들이 판단을 내리는 문제만 남아 있었다. 혹은 다음의 이유 때문인지도 몰랐다. 즉 그가 그들이 갑자기 자신들을 정당화시키려 하거나 자존심 때문에 그것을 고집할 경우를 대비하여 그들의 답변을 기다리고 계신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그들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고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그랬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 이같이 하나님께서도 "내가 귀를 기울여 들었다"(렘 8:6)고 하셨다. enos hekastou auton tas hamartias - 즉 그가 그들 각자의 죄를 땅에 쓰셨다라고 되어 있다. 그가 이 일을 능히 하실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모든 불의를 아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앞으로 그는 이 일을 행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 앞에 우리의 죄를 정연하게 나열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우리의 죄악을 싸매 주시기도 하신다"(욥 14:17). 그러나 그는 인간의 죄를 모래 위에다 기록함으로 금방 잊혀지게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는 우리의 죄가 용서될 때까지 잊혀지지 않도록 "철필"이나 금강석을 부착시킨 철필로 기록하신다(렘 17:1).
④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너무 놀랐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박해를 포기해야 했다.
-- 그들은 그리스도를 더 이상 시험할 수 없게 되었고 그들이 기소한 여인에 대하여 재판해 줄 것을 계속 강요할 수 없이 되었다(9절). "그들은 하나씩 하나씩 나갔다."
첫째, 아마도 땅에 쓴 그의 글씨는, 마치 벽에 쓴 손 글씨가 벨사살을 놀라게 했던 것같이, 그들을 놀라게 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그가 자기들을 저주하는 글, 곧 그들의 참혹할 운명을 쓰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둘째, 그의 말씀은 놀랍게도 그들로 깊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자신들을 반성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만일 그가 다음 말씀을 하실 때까지 머물러 있다가는 세상에 자기들의 진상이 드러날까봐, 그래서 사람들 앞에 자기들이 수치를 당할까봐 두려워하였고, 따라서 그들은 물러가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시끄러운 도망으로 그리스도를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빠져나가기 위해 "하나씩 하나씩" 가버렸다. 그들은 마치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하는 사람들처럼"(삼하 19:3)"몰래" 가버렸다.
-- 그들의 떠남은 "장로로부터 시작하여" 질서 있게 이루어졌다. 아마 장로들이 가장 많은 죄를 졌기 때문이거나, 혹은 그들이 수치를 당할 위험을 먼저 깨달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만일 연장자가 현장을 떠나 수치스럽게 퇴진한다면 젊은이들이 그들을 따른 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이제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a. 죄인들을 판결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힘.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고 하였다. 양심은 영혼에 있어서 하나님의 대리인이다. 그로부터 나온 한 말씀은 양심을 움직이게 한다(히 4:12).
-- 오랫동안 음란에 젖어 있으면서 한편으로 스스로 자만심에 빠져 있었던 자들이 그 중 가장 고령자일지라도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 섬찍한 놀라움을 맛보았다. 자신들에 대하여 가장 자신 만만하였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조차도,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 수치를 느끼고 퇴진하였다.
b. 그리스도의 확신 앞에서 밝혀진 죄인들의 "어리석음." 이것이 바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나타난다.
(a) 유다가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염려된다(창 38:23)고 하였듯이 확실한 진실 앞에서 수치만 피하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다.
-- 우리는 체면을 유지하려는 것보다도 우리의 영혼을 구하는 데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울이 "나는 죄를 지었사오나, 이제도 나를 존귀하게 여기사 당신께 기도하게 하옵소서"라고 말하였을 때, 자신의 거짓을 증거 했던 것이다. 회개의 수치를 감수하지 않고서는 회개의 위로와 영광을 얻을 길은 없다.
(b) 확고한 진실 앞에 선 자들이 어떻게 그 진실을 변경하여 그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를 바란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아픈 곳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그 환부가 발견되고 치료되기를 바라야만 했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을 그들은 "무서워했고, 싫어하였다.
(c) 진실 앞에 서게 된 자들이 본문의 인물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나가려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양심의 상처를 치료해 줄 수 있고, 우리에게 평화를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들의 양심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은 자는 그들의 대재판관이신 하나님에 의해 저주받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들의 대속자에 의해 의롭게 인정받지 않는다면 그들이 어떻게 대재판관으로부터 도망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누구에게로 도망할 수 있겠는가?
⑤ "자기 기만에 빠져있던" 기소자들이 그 현장을 떠나, 한결같이 도망쳤을 때, "스스로 죄됨을 인정하는" 죄인은 우리 주 옆 수의 심판을 받을 각오를 하고 그 곳에 서 있었다. 이제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라새인들의 무리들이 떠난 뒤 "홀로 남아 계셨다." 또한, 그들의 방해로부터 자유로와 지셨다. 그리고 그 무리들의 한 가운데 서 있었던 그 여인은, 그들이 그녀를 데려다 놓은 바로 그 곳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3절). 그 여인은 도망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망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를 기소한 자들이 예수에게 그녀를 고소하였고 그리하여 그녀는 그의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이제 그녀는 그에게 최종의 판결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자기의 죄를 주 예수에게로 가져 온 자들은 결코 그것을 다른 법정으로 옳길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회개하는 자들의 피난처이기 때문이다.
-- 우리를 비난하고 우리를 대적하여 심판하려는 율법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 철수되었다. 예수의 보혈에 의해 율법의 요구들은 보상되었고, 그 소란스러운 요구는 끝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복음의 법정에 내놓아야 한다. 우리는 다만 예수와 함께 남겨져야 한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와 관계를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모든 심판이 위탁되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하여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자. 그리고 우리를 영원히 그의 것으로 삼자. 그리고 그의 복음이 우리를 다스리도록 하자. 그것이 우리를 확실히 구해 줄 것이다.
⑥ 본문에 그 재판에 대항 결론이 내려지고 "예수께서 일어나셔서, 그 여인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셨다"(10,11절). 그리스도께서 무엇이 이야기되고 행해졌는지를 주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며 또한 시비가 벌어진 사람들끼리 "그를 스스로 그것을 처리하도록"하시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의 심판의 시간이 올 때에, 그는 더 이상 침묵을 지키지 않을 것이다. 다윗도 하나님께 호소할 때 그는 "여호와여 일어나소서"라고 기도하였다(시 8:6; 114:2). 그 여인은 결과가 어떻게 될까하는 염려와 함께 떨며 재판석에 서 있었던 것 같다. 사실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셨고" 그러므로 먼저 돌을 던질 자격을 갖춘 분이었다. 그는 무한히 의롭고 거룩하셨으며, 죄에 대하여 그처럼 증오하신 분도 없었다. 그렇지만 죄인들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연민을 지니고 계셨다. 왜냐하면 그는 무한히 자애롭고 은혜로우시기 때문이다. 이 가련한 행악자는 그가 그러한 분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의 석방을 바라며 서 있었다. 본문에 나타난 재판 처리 과정을 살펴보자.
첫째, 기소자들이 소환된다. 그러므로 본문에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고 물으신다. 물론 그리스도는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물었다. 이것이 그의 심판을 기피한 무리들로 수치를 느끼게 하며 바울도 같은 방식으로 도전하며 말하기를 "누가 하나님이 선택한 자를 송사하리라?"라고 하였다. "형제들을 기소한 자"는 추방되어야 마땅하고, 모든 그들의 기소는 법적으로 그리고 격식을 따라 취소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둘째, 그 물음이 주어졌을 때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본문에 보면 "너를 고소하던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라고 주님이 물으신다. "주여 없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그 여인은 그리스도에게 존경심을 갖고 말하며 그를 주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고소자들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는 기소자들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연인은 그들의 후퇴를 기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남의 걱정일랑 말고 제 주제나 똑바로 하고 다니라"는 식으로 비난하지도 않는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심판자에 의해 용서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고소자들을 용서해야만 한다. 만일 그들의 고소가 우리 비위에 거슬리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양심을 깨우쳐 주는 좋은 계기가 된다면, 우리는 "그들의 잘못을" 가벼이 용서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 여인은, "너를 정죄한 자들이 있느냐?"라는 자신에 관계된 질문에는 답변하였다.
-- 참으로 회개한 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 하나님께 드릴 이야기가 참으로 회개한 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 하나님께 드릴 이야기가 많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비난을 삼갈 것이리라.
셋째, 그 죄인은 용서를 받았다. 본문에 의하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라. 그러니 가서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a. 세상적인 형벌로부터의 용서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이 네가 돌로 쳐 죽임을 당하도록 저주하지 않는다면 나도 그러하지 않겠다"라는 뜻의 말씀이다.
-- 이는 그리스도께서 정의의 칼을 쓰실 권리가 상실되었거나 죄인에게 중벌을 가하는 것이 그의 바라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이것과는 달리 복음에 의해 공공 정의의 법령은 세워졌고 또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해 유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의에 의해 왕들이 통치하리라"는 말씀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연인을 저주하지 않은 것은 다음의 이유 때문이었다.
(a) 그가 세상에 오신 것은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그는 재판관도 아니고 재산 분배자도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세속적인 문제들 속에 끼어 들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Tractent fabrilia fabri - 즉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영역에서 행동하게 하라.
(b) 그 여자가 그녀보다 더 많은 죄를 지었고 그러면서도 부끄러움도 모르고 이 여자에게 정의의 재판을 해달라는 뻔뻔스러운 자들에 의하여 고소되었기 때문이었다. 율법은 법죄자에 대해 증인들이 먼저 돌로 친 다음 나중에는 모든 사람들이 돌로 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도망가서 그녀를 정죄할 자들이 없게 되었다면 그 기소는 자연히 기각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정의는 속세의 일을 심판하실 때 의를 상대적 입장에서 판단하신다. 그러므로 한 부류의 행위자들을 처벌함으로 그들보다 더 나쁜 자들이 합리화되게 될 때에, 덜 악한 자들에 대한 처벌은 보류하신다(신 32:26, 27). 그러나 그리스도가 그녀를 보냈을 때, 그는 "가서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는 주의를 주어서 보내셨다.
-- 무처벌주의는 범죄자를 격려해 주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범죄한 자이면서, 율법의 구속망을 교묘히 피하는 자들은 "사탄이 이를 얻지 못하도록" 배전의 경계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정당한 방법에 의해 놓아주더라도 가서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는 경고는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한 범죄자의 생명을 구하여 준 사람들은, 여기서 그리스도가 하신 것처럼 이러한 조심으로 그 영혼을 구하도록 하여야 한다.
b.영원한 형벌로부터 그녀가 용서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실제로는, "나는 너를 용서하노라"는 뜻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인자는 지상에서 죄를 용서할 권세를 가지시었다." 이러한 정당한 근거에 입각하여 그는 면죄를 해주셨다. 왜냐하면, 그가 그 고소자들의 굳은 마음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을 알아서, 그들을 당황하게 한 말씀을 하신 것같이, 그는 이 죄인의 어린애다운 진실한 회개를 아셨고, 따라서 그녀를 위로하셨다.
-- 그는 이와 같이 죄인이었던 한 여인이 마찬가지로 바리새인에 의하여 경멸을 받고 있을 때에 그리하셨다(눅 7:48, 50). 누가복음에서 주님은 그녀에게 "너의 죄가 용서되었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역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라"고 하신다. 다음 사실을 유의하라.
(a) 그리스도께서 정죄하지 않는 자들은 참으로 행복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의 사면은 모든 다른 도전들을 충분히 막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coram non judice - 즉 그들은 모두 권위 없는 심판관들 앞에 있기 때문이다.
(b) 그리스도는, 비록 죄를 졌다해도, 가서 더 이상 죄를 짓지 아니할 자들은 정죄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점이다(시 85:8; 사 55:7). 그는 만일 우리가  주께 항복을 하고 예전처럼 충성한다면, 우리의 이전 범죄로 인해 그가 우리를 치시지 않을 것이다.
(c) 과거에 지은 죄들을 사하시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호의를 베푸시는 것은, "가서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는 간곡한 부탁이라는 점이다(롬 4:1, 2).
--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정죄하기를 바라지 않음을 아십니까? 그러면 가서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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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바리새인들과 논쟁(1)(요 8:12-20)
본장의 남은 부분은 그리스도와 그를 반대하는 죄인들 사이의 논쟁들로 채워져 있다.
그들은 그의 입에서 나왔던 가장 은혜로운 말씀들에 화를 냈다. 이러한 논쟁들이 간음한 여인이 기소되었던 같은 날에 있었는지의 여부는 획실하지가 않다. 아마도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본서의 복음서 기자가 다른 날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 2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는 일찍 한 날의 사업을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그 여인을 고소했던 바리새인들은 혼이 났지만, 그리스도를 가로막는 다른 바리새인들이 있었다(13절).
그들은 그들의 일부가 수치스러운 퇴각을 했는데도 낯하나 변하지 않는 철면피들이었다. 가능한한 그들은 패배한 동료들의 명예회복을 위해서 그리스도와 싸움을 거는데 훨씬 더 열심을 내었다. 본문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Ⅰ. 위대한 가르침의 전개. 그것은 그들의 변론을 막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1. 가르침은 "그리스도가 세상의 빛이라"(12절)는 것이다. 본문에 보면 "또 일러 가라사대"라는 말씀이 있다. 그는 그들에게 거의 득도 없이 위대한 내용을 이야기하셨고, 또 그의 말씀이 반대에 부딪쳤어도 그러나 "그는 다시 말씀하셨고, 또 그의 말씀이 반대에 부딪쳤어도 그러나 "그는 다시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한편으로 안 되면 두 번까지도 말씀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가 말씀하신 것에 대해 못들은 척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다시금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임을 기억하자. 랍비 중 한 사람이 "빛은" 메시야의 이름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다니엘 2장 22절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그는 신들 가운데 으뜸가는 하나님이요 빛 가운데 빛이시다. 그는 "이방을 밝게 비추어 줄 빛으로 기대되었다"(눅 2:32). 그래서 유대교의 빛이라 하지 않고 "세상의 빛이라":고 하였다.
-- 세상의 보이는 빛은 태양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의(義)의 태양"이시다. 하나의 태양이 전 세계를 비추듯이, 한 분 그리스도께서 전 세계를 비추신다.. 그러므로 더 이상 빛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빛으로 부르심으로 다음의 사실을 나타내려 하신다.
(1) 그의 속성. 그것은 가장 우수하고 영광된 것이었다.
(2) 세상을 향한 그의 사명. 그는 만인을 밝게 해 주는 빛의 원천이시다. 태양이 없다면 세상은 얼마나 토굴 같을 것인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없으면 인간 삶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빛이 세상에 오셨다"(3:19).
2. 이 가르침으로부터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운 밤에 빛을 따라가는 여행자처럼, "어두움 속에 거하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가 빛이라면,
(1) 그의 인도에 우리 스스로를 복종시키고, 매사에 그의 지시를 받고 행복으로 이끄는 길로 "그를 따른 다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파멸로 이끄는 ignes fatu - 즉 거짓 빛들을 따라간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참 빛"이시다. 이 빛을 "쳐다보고" "응시만 하는 것"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우리는 그 빛을 따라야 하고 그것을 믿어야 하고 그 속에서 걸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눈"에 대해서만 빛이 아니라, "우리의 발"에 대해서도 빛이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어두움에 다니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행복이다.
-- 그들은, 파괴적인 실수로부터 자기들을 보호해 주는데 필수적 진리인 교훈들, 그리고 저주받을 죄로부터 자기들을 지켜 주는데 필수적 진리인 교훈들, 그리고 저주받을 죄로부터 자기들을 지켜 주는데 필연적 의무의 길인 그러한 방향들이 결핍된 채로 남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이 세상에서는 영적인 "새 영의 빛"을, 저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의 빛"이 될 하나님의 지혜와 기뻐하심, 곧 생명의 빛을 갖게 될 것이다. 거기에는 죽음도 없고 어두움도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라. 그러면 우리는 양쪽 세계에서 모두 행복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라. 그러면 우리는 그와 함께 천국으로 갈 것이다.
Ⅱ. 이 가르침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반박.
-- 그것은 대단히 가소롭고 경솔한 것이었다. 그들은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너의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다"(13절)고 반박한다. 예수의 말씀을 반박하기 위하여 그들은 우리가 보통 자기 과시를 하는 사람을 경멸하여 말하듯이 그에게 그렇게 대하였다. 그들은 우리가 남을 저주하기는 기뻐하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처럼 예수도 자기에 대한 사랑에 빠져서 이 말을 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 그 반대는 대단히 부당하다. 왜냐하면
1. 그들은 필연적이고도 피치 못할 신의 계시를 받은 분의 가르침들을 신빙할 수 없는 것으로 취급하였고 오히려 죄라고 그에게 뒤집어 씌웠기 때문이다.
-- 사실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도 자기들이 하나님의 사자들임을 천명할 때, 자신들에 대하여 변론하였었다. 한편 바리새인들은 세례 요한에게도 "네가 너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인가?" 하고 물었던 것이다.
2. 그들은 모든 다른 증인들의 증거를 무시해 버렸다.
-- 다른 사람들의 증언도 그가 자신을 증거 했던 증언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만일 그만이 유독 자신에 대해 증거 했던 증언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만일 그만이 유독 자신에 대해 증거 했다면, 그의 증거는 "의심스러운 것"이 되었을 것이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믿음은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한 두 사람 이상의 신빙성 있는 증인들에 의해 입증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의 말씀마다 그러하였다.
Ⅲ. 이러한 반박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14절). 그는 ("너희는 너희 자신을 거룩하고 선량한 사람으로 고백한다. 그러나 너희의 증거는 참이 아니다.") 그들을 꾸짖지 아니하시고 평범하게 자신을 변호하고 계신다. 그가 자신을 위한 증거를 보류하신 적도 있었지만(5:31). 여기서는 자기를 위한 증거를 고수하신다. 그렇다고 예수의 현재의 결단이 그의 다른 증거들의 신빙성을 훼손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본문의 말씀은 그의 다른 증거들의 힘을 보여 주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었다.
-- 그는 세상의 빛이다. 그리고 빛이 자기 증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빛만의 특성이다. 제일 원리들은 누구의 도움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명성을 지닌다. 그는 그의 증거가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명성을 지닌다. 그는 그의 증거가 비록 자신에 대한 것이긴 하지만 참되고 이치에 맞는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세 가지를 주장하고 있다.
1. 그는 자신의 권위를 스스로 의식했고, 그것에 관해 스스로 만족으로 넘쳐 있었다. 그는 확신이 없는 사람처럼 이야기하지 않았고 논박을 당할까 염려하면서 어떤 관념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그는 절대적 공리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입장을 고수해야함을 설명했다. 그는 분명하게 "나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자신이 하실 일을 충분히 알았다. 누구의 심부름으로 그가 왔는지를 알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성공을 이루는 길인지를 알았다. 세상에 자기를 드러내 보이기 전에 자신이 누구였으며, 또 장차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그는 아셨다. 즉 그는 "자기가 아버지로부터 왔고," "그에게로 가고 있으며"(16:28) 영광으로부터 와서 "영광으로 가고 있다는 것"(17:5)을 알았다.
--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던 것처럼, 기독교인들 하나하나를 알아주지 못한다 해도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생명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향하는지를 알며 또한 확실한 근거에로 향하고 있는 것을 알수 있다는 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2. 그들은 그에 대해, 그리고 그이 가르침에 대해 대단히 부족한 심판관들이었다. 그들은 아무 존경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1) 왜냐하면 그들은 무지하였기 때문이다.
-- 또한 그들은 자기들의 무지를 기뻐하고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는 "너희들은 내가 어디로 와서 어디고 가는지를 알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 문제 대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또 알려고 애쓰지도 않는 자들과 이야기해 보아야 무슨 쓸데가 있는가?라는 말씀이다. 그는 그들에게 자기가 하늘로부터 와서 하늘로 되돌아감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의 말씀이 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은 "짐승 같은 사람들은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이었다"(시 112:6). 그들은 자기들이 이해하지도 못할 그리고 그들의 상식을 아주 벗어난 문제를 판단하려고 덤벼들었다.
-- 그리스도의 주권과 위엄을 경멸하는 자들은,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것을 나쁘게 이야기한다(삿 5:8, 10).
(2) 그들이 편파적이었기 때문이다(15절).
-- 그러므로 "너희는 육체에 따라 판단한다"고 말씀하신다. 육체적인 지혜가 심판의 척도가 될 때, 그리고 외적인 모양만이 증거로 주어질 때 그리고 그 사건이 그것들에 따라서 결정된다면, 그것이 바로 "육체에 따라 판단한다"는 것이라고 하겠다.
-- 그리고 세속적인 이익에 대한 관심이 영적인 문제들을 판단하는 척도가 될 때, 육체의 생각을 기쁘게 해주기 위하여 판단하고 그리고 우리를 육의 세계에 천거하기 위하여 판단할 때 그것이 곧 육체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다. 잘못된 규범에 의한 재판이 올바를 수 없는 것이다.
--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외적인 모습들에 의해 판단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미천하게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그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논리에 의하면 구름에 가린 태양은 태양이 아니라는 식이었다.
(3) 그들이 그를 부당하고 공정치 못하게 대하였기 때문이다.
--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말씀에서 나타나고 있다.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들의 정치적인 문제에 관여하지 않겠고 또한 나의 가르침과 행위가 너희의 시민권이나 세속적인 권력을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않았도다"라고 하신다. 이같이 그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았다. -- 만일 그가 "육체에 대하여 싸우시지" 않았다면, 그를 그들이 "육체에 따라 판단하는 것은"참으로 불합리했고, 그를 정권 당국에 거슬리는 하나의 범법자로 취급하려 하는 것은 불합리했다.
-- 또는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다음의 뜻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곧 "지금은 내가 심판하지 않겠으나 내가 다시 올 때는 너희를 심판하리라"(3:17). "Prima dispensatio christi medicinalis est, non jubicialis - 즉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의 목적은 정의를 다스리시기 위함이 아니라 치료하는 일을 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었다.
3. 그 자신에 대한 그의 증거는, "그와 함께 계시고, 그를 위해 계신" 그의 아버지의 증거에 의해 충분히 보강되고 확증되었다(16절). 그러므로 그는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다"고 하신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에서, 비록 정치적으로는 아니었지만, 판단하셨다(9:39). 거기서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그를 생각해 보자.
(1) 심판관으로서, 그 자신의 판단은 확실한 것이었다. "심판을 행사할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모든 만물이 내게 주어져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성령을 가지고 있는 나! 그 내가 만일 판단한다면, 내 판단은 참되다. 그리고 그것은 비교할 수 없는 강직함과 누구도 압제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닌 참된 것이니라(롬 2:2). 만일 내가 판단한다면 내 판단은 진실한 것이리라. 그러므로 당연히 너희는 저주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심판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고 너희도 아직 저주받지 아니하고 저주가 보류되고 있으므로 따라서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라고 하신다. ***크리소스톰(Chrysostom) 도 이 같은 말을 하였다. 그의 심판을 면할 사람이 없는 까닭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① 그의 아버지가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내가 아버지와 함께 있다"고 하신다. 그는 아버지의 다스리시는 계획에 참여하고 있었다.
--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께서 세상을 지을 경륜을 베푸실 때 그가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것처럼 아버지도 그와 같은 경륜을 수행하고 집행함에 있어서 이 세상에서 그와 함께 하셨다. 그리고 그를 결코 inops consilii - 즉 권고 없이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셨다(사 11:2). 모든 "평화의 경륜들"(전쟁의 계획도 물론)은 그들 둘이 의논하여 결정하였다(6:3). 그는 그가 할 무슨 일이든지 권위있고 확신있게 할 아버지와 일치하는 힘을 역시 가지고 있었다(시 89:21; 사 42:1 참조). 그는 앞의 권위로, 그의 이름과 그의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행동하였고 그것과 분리하여 움직이지 않았다(5:17; 14:9, 10).
② 그에 대한 그의 아버지의 위탁. 그러므로 그는 "나를 보내신 것은 아버지이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그가 보낸 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오라, 내가 너를 보내리라.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출 3:10, 12)고 하였다.
-- 만일 그리스도가 그 아버지로부터 위임을 가지고 있었다면, 또 그의 모든 사업에서 그와 함께 하시는 아버지의 현존을 의식하고 있었다면, 의심할 바 없이 그의 판단은 참되고 타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심판을 벗어날 예외가 있을 수 없고 또 다른 곳에 호소할 여지도 없는 것이다.
(2) 그를 하나의 "증인"으로서 생각하여 보자. (아직 그는 심판의 보좌에 앉지 않으셨으므로) 증인으로서 자기를 나타내 보이신다. 그리고 그의 증거는 참되고, 예외적인 것이 없었다. 그는 이 사실을 17,18절에서 보여 주고 있다.
① 그는 유대인 율법의 공리를 인용하신다(17절). 그것은 "두 사람의 증거가 있으면 참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스스로 참되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손에 손을 잡고 거짓 증거를 하기 위해 연합하기 때문이다(왕상 21:10). 그러나 두세 사람의 증거는 확실한 근거(verumdictum)를 지닌 충분한 증거로써 인정된다. 그리고 모순점이 없다면 그것은 "사실"로써 간주된다.
-- 본문에 그 율법의 내용이 참조되고 있다(신 17:6). 거기에 의하면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거고 죽일 것이라"고 하였다(신 9:15; 민 35:30 참조). 현대의 모반죄를 다스릴 때처럼 중대한 사건에 두 사람의 증인들이 요구된 것은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② 그는 이 공리를 직접 본문의 경우에 응용하고 있다(18절). 그러므로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고 하신다.
-- 이 두 증인을 보라! 인간의 법정에서도 두 사람의 증인이 요구되고 있다. [[그렇지만 그 중 범죄자나 용의자는 증인이 되도록 허용되지 못한다. !!!]]
-- 그러나 순수한 신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곧 그것은 신의 증거에 의해서만이 입증될 수 있는데, 그럴려면 하나님 자신이 증인이 되어야만 한다. 두세 증인의 형식이 고수된다면, 영원하신 아버지나 영원하신 아버지의 아들과 영원한 성령 이외에 증인이 될 사람은 없는 것이다. 두 명의 저명한 사람들의 증거가, 그들도 사람이어서 스스로 속거나 속이기 쉬운게 사실이라면,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아들의 증거는, 그에 관한 그의 아버지의 증거로 뒷받침되어야 한다(요일 5:7, 5:9-11 참조). 이 사실은 아버지와 아들은 두 명의 다른 분들일 뿐 아니라(왜냐하면 여기서 그들 각자의 증거들은 두 명의 각기 다른 사람의 증거들로써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은 또한 한 분이심을 입증해 준다. 그들은 증거에 있어서 하나일 뿐 아니라 힘과 영광에 있어서도 하나이며, 따라서 두 분은 본질상 똑 같으시다. ***성 어거스틴은 본문을 통하여 그의 청중들에게 한편으로는 신성속에 인간을 복합시킨 사벨리안주의와, 또 한편으로는 아들과 성령 속에 있는 신성을 부정한 아리안주의를 주의하도록 경고한다. Aliusest filius, et alius pater, non tamen alind, sed hoo ipsum est etpater, et filius, scilicet unus Deus est - 즉 아들은 한 인격이며, 아버지는 또 다른 인격이다. 그러나 그 둘은 별다른 두 존재는 아니다. 아버지는 아들과 똑같은 존재이다. 따라서 아들은 참 유일하신 하나님이신 것이다(Tract, 36, in Joann).
-- 그리스도는 여기서 세상에 대한 증인으로서 자신과 아버지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는 인간들과 상대하시고 있으므로 그들이 깨달을 수 있는 증거를 들어 말씀하신다. 이러한 세상에 대한 증언은 그 마지막 날에 불신을 고집했던 자들에게 불리한 증언들이 될 것이고, 이 증언이 사람들을 판단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이러한 육체적인 유대인들 사이에 있었던 첫 번째 대화의 전부였다. 그의 말씀의 결과 그들이 얼마나 수다스러워졌고 그러면서 그의 말씀이 어떻게 위압되었는지 본문은 말씀해 주고 있다.
첫째, 그들은 그의 말씀을 책잡기 위하여 수다를 떨었다(지옥에서는 이에 대한 벌로 저들의 혀가 축 늘어지게 된다). 그가 지금까지 하신 말씀 속에는 인간적인 정책이나 기교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신적인 확실성만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에게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퍼부었다. 보지 않으려고 마음먹은 소경이야말로 최대의 불치의 소경인 것이다. 주의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a. 그들이 트집을 잡아 확실한 진리를 기피한 사실.
-- 본문에 보면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고 저희가 묻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이 설교와 다른 설교를 통해 그가 아버지라고 할 때에는 하나님 자신 외에 다른 분을 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한 평범한 사람으로 취급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그가 자기에 대하여 증거하시자 그들은 그에게 다른 증인을 대보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그가 증인을 대자 다음과 같은 말로 또 도전하였다. "너의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이같이 그들은 그리스도가 말씀했던 것처럼(15절) "육체에 따라 판단하였다." 아마 그들은 이것을 통해 그의 가족의 비천함과 낮은 신분을 들추어내려고 한 것 같다. "너의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이와 같은 경우에 그가 적절한 증거를 줄 수 있단 말인가?"라고 그들은 말한다.
-- 그들은 그가 말했고 지혜와 영을 거절할 수 없게 되자 그것을 조롱거리로 취급하였다.
b. 그가 보다 큰 확신으로 그들의 모함을 피한 사실.
-- 그는 그들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어디 계신지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고의적인 무지로 대항해 오는 그들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신다. "너희는 나도 모르고 내 아버지도 모른다. 너희에게 신적인 것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야. 내가 신적인 것들에 대하여 얘기한다는 것은 장님에게 색깔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과 같아 가련한 인생들이여! 너희가 그 문제는 전혀 알지 못함을 알겠다"고 하신다.
(a) 그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 대해 그들과 맞서고 있다.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유다에서 자신을 나타내셨다(시 76:1). 그러므로 그들은 세상을 만드셨던 하나님으로서의 그에 대해 약간의 지식을 갖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면전에서 빛나고 있는 그의 여왕의 빛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 있었다.
-- 기독교회에서는 적은 어린이들까지 아버지를 안다. 그들은 그를 아버지로서 알고 있다(요일 2:13). 그러나 이들 유대인들의 통치자들은, 그들이 그를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알 수 없었다.
(b) 그는 그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데 대한 그 진정한 원인을 보여 주었다. "만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너희는 나의 아버지도 역시 알았을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 사람들이 어찌하여 하나님을 모르는가 하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앎으로 다음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a] 그를 앎으로써, 우리는 아버지를 알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타난 형상이다(14:9). ***크리소스톰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가 그의 아버지와 하나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우리는, "사람을 알고 있는 자는 천사를 알 수 있다"라든가 혹은 "피조물을 알 고 있는 자는 창조주를 알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자는 아버지를 알 수 있다.
[b] 그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과의 사귐에 들어가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보다 잘 알면, 아버지도 역시 보다 잘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경멸받고 반대에 부딪치는 곳에서, 참된 하나님에 대한 신망은 곧 없어지거나 옆으로 밀려질 것이다.
-- 이신론은 무신론을 위한 길을 만들고 있다. 그러한 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배우려 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상상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 것이다.
둘째, 이같이 되어 그들은 말로써 그를 대답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그들이 어떻게 되어 예수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되었는가를 살펴보자.
-- 지옥의 악을 억제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이었다. 예수께서 이러한 말씀들을, 그토록 과감하고 논리가 분별하며 확신 있는 말씀들을 성전에 위치한 연보궤에서 이야기하셨다. 사실 자기들의 경건을 유일한 소득으로 여겨야 할 대제사장들은 그들의 수입을 더욱 올리기 위하여 주로 헌납소에 거하다시피 하였다. 그리스도는 "성전에서 가르치셨는데" 필요에 따라서 성전 내의 여러 곳으로 장소를 옮기시며 가르치셨다. 성전에 그토록 큰 관심을 가졌었고 그 장소를 자기들만의 영역으로 간주하였던 제사장들은 그들의 배후에 있었던 근위병들의 도움으로, 쉽게 잡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를 잡아다 무리를 선동하여 처치할 수도 있었다. 이런 형벌을 그들은 반역자에 대한 처형"이라고 불렀다. 혹은 적어도, 마치 아모스가 유대 땅에서는 허락되었지만(암 7:12, 13) 왕의 궁전에서 예언하는 것을 금지 당했던 것처럼 그들은 그를 침묵시키고, 그의 입을 막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손을 뻗치기만 하면 곧 잡을 수 있는 성전에서 조차도, 아무도 그를 잡지 아니하였다.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a. 보이지 않는 힘이 그의 박해자들로 그를 체포하지 못하게 제어하였다. 그들 주 아무도 감히 그를 붙잡지 못하였다.
-- 하나님은 마치 바다의 물결에 대해 그러하듯이, 사람들의 분노를 묶어 놓으실 수 있다. 따라서 의무를 행하는데 있어서 닥칠 위험을 두려워하지 말도록 하자.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탄과 그가 사용하는 병기들을 통제학 계시기 때문이다.
b. 이 억제의 이유. 그것은 "그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말씀에 대한 빈번한 언급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확고한 계획과 명령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는 오고 말 것이다. 아니 지금도 그 날은 오고 있다. 아직 오지 아니하였어도 그 날은 아주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의 적들도 아버지께서 정하신 그 시간보다 그것을 더 빨리 오게 할 수 없고, 우리의 동료도 그것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이러한 그 살은 모든 선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된다. 그들은 앞을 바라보며 기쁘게 "나의 때는 당신의 섭리 가운데 있나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것보다 좋습니다"라고 말한다. 그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사업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의 증거가 완성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하나님의 목적들에는 다 때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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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바리새인들과의 논쟁(2)(요 8:21-30)
그리스도는 여기서, 그들의 불신의 결과가 어떠한 것인지를 고려하도록 하기 위해 조심성 없는, 불신하는 유대인들에게 임할 진노에 대해 적절한 경고를 주고 있다. 그들은 너무 늦기 전에 그것을 미리 막아야 했다. 왜냐하면 그는 은혜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진노에 대한 말씀들도 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음의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Ⅰ. 그들의 겪을 진노의 최후가 경고됨. "예수께서 그들에게" 혹 그들의 개전하게 될까하여 "다시 말씀하셨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교리를 거절했지만, 그것을 받아들인 몇 안 되는 사람들을 위하여 계속 가르치셨다.
-- 이 사실은 교역자들도 반대를 무릅쓰고 자기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좋은 본보기이다. 왜냐하면 남은 자가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어조를 바꾸신다. 그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하여 "피리를 부셨다." 그러나 "그들은 춤추지 아니하였다." 이제 그는 그들이 통곡하게 되기를 바래서 진노의 질타를 퍼부으셨다. "그는 나는 내 길을 간다. 그리고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지만, 너희는 너희의 죄 속에서 죽을 것이고, 내가 어디로 가는지 너희는 알 수 없으리라"고 말씀하셨다.
-- 모든 그의 말씀은 무섭고 또 영적인 심판을 경고하고 있었다. 영혼에 대한 심판이야 말로 모든 심판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며, 구약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전쟁, 기근, 포로보다 더욱 나쁜 것이었다. 본문을 통하여 네 가지가 유대인들에 대해 위협적으로 경고되고 있다.
1. 그들로부터 그리스도의 떠나심.
-- 본문에 의하면 그는"나는 내 갈 길을 간다"고 사셨다. 곧 "내가 머지않아 떠날 것이다. 너희가 나를 몰아내려고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나는 내 스스로 갈 것이로다"는 뜻의 말씀이다. -- 그들은 그에게 "우리를 떠나라. 우리는 네 길에 대해 알기를 원하지 않노라"고 말하였다. 그는 이러한 그들의 말에 대하여 답변하신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그리스도가 떠나 버리는 그러한 자들에게 화가 있을 찐저! 그리스도가 가시면 영광도 사라지고, 우리의 방패도 없어진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리스도는 자신이 그들을 떠나기 전에 그들에게 자기의 떠남을 빈번히 경고하셨다.
-- 그는 떠나기 싫은 사람이 나누는 그런 작별 인사를 자주 했고, 또 저들이 자기를 초대해 주기를 원하셨다. 그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그들이 그를 붙잡도록 마음을 움직일 수 있기를 바라셨다.
2. 참 메시야에 대한 그들의 적의.  그리고 그가 가신 후 다른 메시야가 오실까하여 추궁한 그들의 소용없는 질문. 이러한 적의는 그들의 죄의 결과요 또한 형벌이기도 하였다.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다"는 말씀은 다음의 두 가지 사실 중 한 뜻을 지닌 말씀일 것이다.
(1) "참 그리스도를 증오하여" 그들이 그를 찾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다. "너희들은 나의 가르침과 추종자들을 박해함으로 나의 목적을 뿌리뽑아 버리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내 교훈과 추종자들을 근절시킨다는 것은 헛수고가 되고 말 것이다"는 말씀이다.
-- 그의 교훈과 추종자들은 그들 자신에게는 계속적인 골치거리였고 아픔이 되었다.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치료할 수 없는 잘못된 본성에 빠지게 하였고, (하나님의 그리고 그들 자신의) 본성에 최대로 거역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하였다. 혹은
(2) 그들이 "거짓 그리스도를 추구할 것이다"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다. "너희는 그가 이미 왔는데도, 메시야를 계속 바랄 것이고, 그가 오리라는 망상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고 하신다. "문을 찾을려고 고심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장님이 되었던 소돔인들과 같이 너희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씀하신댜.(롬 9:31, 32).
3. 최후까지 회개하지 않을 그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죄가운데서 죽을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영역본 성경은 본문을 잘못 번역하였다(로마 교도들의 라전어 번역을 제외하고는). 심지어 옛 감독들의 보역이나 제네바 역본까지도 잘못되어 있다. 왜냐하면 모든 희랍어 사본들은 죄를 단수로 표현하고 있다. ‘엔 테 하마르티아’(8:21) -즉 너의 죄 속에서로 되어 있다(영역에 sins이라는 뜻이다).마찬가지로 모든 라전어역도 그러하다.
***칼빈은 본문과 타이스 하마르티아이스, 즉 복수로 표현된 24절과의 차이점에 대해 주(註)를 달고 있다. 그에 의하면 본문은 특별히 불신의 죄 곧 in hoc peccato vesto -즉 너희의 바로 믿지 않는 죄를 의미하고 있다고 본다.
-- 불신 속에서 살다가 불신 속에서 죽는다면 영원히 구속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또는 본문은 에스겔3장19절과 33장9절과 같이 "너희는 너희의 죄악 중에서 죽을 것이다"는 말씀으로 이해되어도 좋을 것이다. 오랫동안 죄 중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통해 때맞춘 회개를 함으로 죄 속에서 죽어가는 것으로부터 구원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죄만 짓다가 이미 죽어서 죄로 인한 보상을 치루고 있는 사람들의 죄는 용서될 수도 없고 죄의 권세를 깨뜨릴 수도 없는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위안도 없고 어떤 구원의 능력도 그들을 구할 수 없는 것이다(욥 22:11; 겔 32:17).
4. 그리스도와 그 안에서 맛본 모든 행복으로부터 그들의 영원한 분리. 고로 "내가 가는 곳으로 너희는 울 수 없다"고 그는 말씀하신다.
-- 그리스도가 세상을 떠나실 때, 그는 완전히 행복한 곳으로 가셨다. 그는 낙원으로 가셨다. 그는 회개한 강도도 자기와 함께 그 곳으로 데리고 가셨다. 그 강도는 그의 죄 속에서 죽지 않았다. 그러나 회개치 못한 자는 그에게로 오지 못할 것이고 또 올 수도 없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천국은 성화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올 수 없다. 왜냐하면 너희는 예루살렘에 들어 올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되어 있다(계 22:14). "내가 가는 곳을 너희는 올 수 없고' 또 따를 수도 없다는 말씀이다. ***휘트비(Dr. Whitby)박사는 이 말씀으로 위로를 삼았다. 마찬가지로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말씀은 위로가 된다. 그들이 하늘 나라에 갈 때 그들은 그들의 원수들의 증오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Ⅱ. 그들이 그의 경고를 농담으로 간주함. 이 말에 대해 그들은 떨기는커녕, 그것을 농담으로 여겼고, 가소롭게 생각했다(22절). 그러므로 그들은 "그가 자결하려 하는가?"라고 물었다. 다음 사실들을 생각하여 보자.
1. 그들이 그리스도의 위협에 대해 지녔었던 경멸 어린 생각들.
-- 그들은 서로 그의 말을 웃음거리로 삼았다. 그들은 여호와의 사자를 조롱하였고 "여호와의 말씀을 지나치는 말"로 생각하였고 계속되는 경계와 교훈을 우스운 노래처럼 가볍게 여겼다(사 28:13).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묶은 띠가 우리를 조이지 못하도록 조롱하는 자가 되지 말도록 하자.
2. 그리스도의 의도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생각.
-- 그들은 그가 사울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에게 가해진 모멸을 파하려고 비열하게 자살하려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너를 따를 수 없는 참된 이유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살하지는 않을 것이니 말이다"라고 그들은 말한다. 이같이 하며 그들은 그리스도를 그들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더 나쁜 자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로마인들에 의해 초래된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자살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가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친다는 말인가?" 하고 그의 가신다는 말씀을 해석하기도 하였다(7:34, 35). 이제 악에 관여할수록 어떻게 더욱 악랄하여지는가를 살펴보자.
Ⅲ. 그가 말씀하셨던 것에 대한 재확인.
1. 그는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그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23절). 그것은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 너희는 ‘에크 톤 카토’ - 즉 아래에 있는 것들에 속하고 있다고 하시는데 이는 그들이 아래에 속한 것에서 나왔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애착을 지니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다음과 같은 뜻의 말씀이다.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들과 같이 세상에 속한 것들에만 관심이 있도다. 이같이 너희의 영혼과 인간됨이 나의 것과는 그토록 반대되니, 어떻게 너희가 내가 가는 곳으로 올 수 있겠는가?" 다음 사실들을 살펴보자.
(1) 우리 주 예수의 영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고 위로부터 온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세상의 부와 육체의 안이함, 사람들의 칭찬들에 대해서는 완전히 관심이 없으셨다.
-- 그는 온전히 신적인 것과 하늘 나라의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위로부터 나서 하늘 나라와 사귐을 갖는 자"를 제외하고는 그와 함께 할 자가 아무도 없을 것이다.
(2) 그들의 영은 예수의 영혼과 대립된다는 점이다. 고로 "너희는 아래에서 난 자이고, 이 세상에 속한 자이다"라고 말씀하신다.
-- 바리새인들은 세속적인 육욕의 영에 속해 있었다. 그러니 어찌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실 수 있었겠는가?
2. 그는 "너희는 너희의 죄 속에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 "내가 분명히 말하노니 너희가 아래에서 난 자들이기 때문에 너희의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 그리고 그는 그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보다 큰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즉 "내가 그라는 것을 너희가 믿지 아니하며, 너희는 너희 죄 가운데 죽으리라"는 것이다(24절).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보자.
(1) 우리가 믿도록 요구되고 있는 내용.
-- 그것은 "내가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 - 내가 스스로 있는 자임을 믿어야 된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스스로 있는 자란 하나님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런데 전에 Ehejeh asher-Ehejeh -즉 나는 나의 뜻대로 만사를 다스릴 것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구원은 장차 올 좋은 것들의 형상이기 때문이었다. 즉 과거에 그는 이것들을 이룰 것이라고 말씀하셨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내가 바로 그이다"라고 말하신다. 즉 "오리라고 하던 그요, 너희가 메시야로서 기다리는 바로 그분이다. 아니 나는 단순히 메시야라는 칭호로 끝나는 인물은 아니다. 나는 스스로 메시야라 칭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그이라"고 말씀하신다.
-- 진정한 신앙은 공허한 말소리로 영혼을 즐겁게 하려 하지는 않는다. 참 신앙은 그리스도의 화해의 가르침을 사랑한다. 그것이야 말로 참 된 효능을 나타내 주는 본래의 것인 것이다.
(2) 우리가 이것을 믿어야 될 필요성.
-- 우리가 이 신앙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이 없이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① 신앙이 없이는 우리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죄의 힘으로부터 구원받을 수는 없다.
-- 우리는 마지막 날까지 철저히 죄의 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가르침 외에는 아무 것도 죄의 세력을 충분히 극복할 수 없고, 그리스도의 은혜의 성령 이외에는 죄로부터 우리를 하나님에게로 향하게 할 사자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주어진 성령과 주어진 가르침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만이 효능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사탄이 신앙에 의해 점령되지 않는다면, 그는 영혼에게서 그 생명을 빼앗을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우리를 치료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경우는 절망적이고, 우리는 우리의 죄 속에서 "죽게 될 것이다."
② 신앙이 없이는 우리가 죽을 때,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는 믿지 아니하는 자를 위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막 16:16).
-- 불신은 저주받을 죄이다. 그것은 치료를 거부하는 죄악. 그런데 본문에는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가 그분임을 믿는다면, 그리고 그를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 속에서 죽지 않을 것이다"는 위대한 복음의 약속이 담겨져 있다. 율법은 마치 그리스도가 말씀하셨던 것처럼(21절), 철저히 "너희가 너희 죄가운데서 죽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는 범법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은 믿음을 상대 조건으로 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놓아 줄 것을 약속한다. 율법의 저주는 복음의 은혜에 복종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폐기되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사랑, 그리고 그의 품속에서 죽는다. 따라서 그들의 죄에서 죽는 것으로부터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
Ⅳ. 자신에 관한 예수의 보다 진전된 강론.
-- 이 내용은 구원의 조건으로써 자신을 믿을 것을 강조하는 가운데 비롯된 말씀이었다(25-29절).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1. 유대인들이 그에게 던졌던 질문(25절).
-- 그것은 "당신이 누구이나?"는 것이었다. 이것을 그들은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비웃기 위하여 물었다. 그는 너희는 "내가 그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강조하여 말하지 않았으나 그는 자기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정의될 수 없는 자이며, 그 직능상,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 기대되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음을 명백하게 암시했다. 그 속에 대단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이 무서운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치 그가 스스로도 자신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그를 비난하였다. "당신이 누구이나? 그래 우리가 당신이 전능하신 그분 이심을 꼭 믿어야 옳다는 말인가. 우리가 당신이 누구인지, 또는 무엇인지, 또는 알 가치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믿으라는 말인가?"라고 말한다.
2. 이런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
-- 거기서 그는 그들에게 그를 알 수 있는 세 가지 방법들을 지시해 주고 있다.
(1) 그는 지금까지 모든 사람에게 그가 말했던 것을 다시 그들에게 언급하신다. "너는 내가 누구인가를 묻고 있는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해 온 그 똑 같은 자이다"라고 하신다.
***희랍어 본분에 의하면 여기에 약간 미묘한 문제가 있다. 즉 ‘텐 아르켄 호 티 카이 랄로 휘민’(8:25)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를 어떤 학자는 이렇게 읽고 있다. 즉 나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대로 처음 있는 시초 자이다라고 본다. 어거스틴이 그것을 그렇게 읽고 있다. 그리스도는 !!!아르케(746) - 즉 시작(골 1:18; 계 1:8; 21:6; 3:14)으로 불리워지고, 따라서 그것은 24절의 "내가 그 노라"는 말씀과 일치하고 있다. "나는 처음 있는 자요 내가 곧 그니라"(사 41:4)는 말씀과 비교해 보라. 이같이 ‘텐 아르켄’이 대격인 것을 반대하며 그러므로 ‘티스 에이’(8:25) 를 받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문법상 규칙에 따라 같은 표현인 계시록 1장8절의 ‘호 엔’을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현재 영역본의 번역을 따르고 있다.
-- 그는 "너희가 나를 누구라고 묻느냐?"고 하신 후 다음과 같은 뜻으로 말씀하신다.
① 나는 태초부터 너희에게 말씀한 바로 그라고 하신다.
-- 그러므로 그는 구약 성서를 통하여 "태초부터 너희에게 말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태초에 여인의 후손이 뱀을 밟으리라 하였는데 내가 바로 그 사람이, 교회의 모든 역사 속에서의 계약의 중재자였으며, 족장들의 신앙의 중재자였던 바로 그 똑같은 자이라"고 하신다.
② 나는 나의 공생애 시작에서부터 말해 온 바로 그라고 하신다.
-- 그는 이미 자신에 대하여 설명하시었다. 그는 그의 말을 지킬 것을 결심하셨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했었고(5:17) 그리스도로(4:26) 선언했었다. 그리고 생명의 떡이며 자신을, 구원에 필요한 신앙의 대상으로 이야기하셨었다. 이것을 그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그들에게 다시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과 하나인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말했던 것을, 아직도 말씀하고 계시다. 그의 복음은 영원한 복음이다.
(2) 그는 자기 아버지의 심판과 그가 그로부터 받은 지시를 그들에게 언급하고 있다(26절). "나는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말할 것을 많이 갖고 있고 그리고 그 말로 너희를 판단할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내가 왜 너희로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며 나를 지켜주시며 나를 감싸주시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내가 세상에 말하는 것은(이것을 위해 내가 대사로 보냄을 받았는데) 모두 오직 아버지께로부터 들은 것이라. 그렇기 때문에 그가 나를 지켜 주시는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본문을 통하여 다음 사실들을 생각하여 보자.
① 그는 그들에 대한 그의 변호를 강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 그는 그들을 트집잡을 것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반박할 많은 증거가 있었다.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그는 우리가 발견하는 죄 이상의 죄들을 찾아내시고 그것에 의해 우리를 판단하실 것이다(요일 3:20).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죄인들과 계산하신 이상의 계산할 죄가 죄인들에게는 남아 있다(신 32:34).
-- 아무리 나쁜 사람에게라도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않는 법을 배우도록 하자. 우리에게는 비난해야 할 많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말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다. 말해 보아야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② 그는 그들에 대하여 아버지께 호소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아버지를 "나를 보내신 자"라고 부른다. 여기에 그를 위로한 두 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 그가 그의 아버지에게 진실하였었고 아버지도 그를 신뢰하셨다는 점이다.
--  (그의 복음은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되어야 했기 때문에) "내가 그로부터 들었던 모든 것을 말하노라"고 그는 말씀하신다. 그는 사람들에게 증인이 됨에 있어서(사 55:4) 그는 "아멘이었고, 충성된 증인이었다"(계 3:14).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세상에 말하였다(일반적 관심의 대상이 되기 위하여 그것은 모두에게 알려져야 했었다). 그는 그것을 바꾸거나 변경하지 않았다. 또 자기를 보낸 하나님으로부터 그가 받았던 교훈을 여러 가지로 다양화하지도 않았다.
둘째, 그의 아버지가 앞으로도 그에게 대해 신실하실 것이라는 점이다.
-- 그가 그의 입을 날카로운 검처럼 만들리라던 약속에 대해 신실하셨다. 또 아버지에 관한 그의 목적에 대해 진실하셨다(시 2:7). 또한 그를 부인하는 자들에 관한 그의 분노의 경고에도 그는 진실하셨다. 그가 그의 아버지에게 그들을 고소하지 않았다 해도, 그를 보낸 그의 아버지께서 그들을 분명히 좋지 않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하나님께서 세우셨던 그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 자에게 그 책임을 추궁하리라고 말했던 것에 대해 진실하셨다(신 18:19).
-- 그리스도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말씀하신다. "나를 보낸 자가 진실하므로 내가 그들에 대한 심판을 요구하지 않더라도 그가 그들에게 심판을 가할 것이다"라고. 따라서 그가 현재 기소를 포기하신 것은 그가 그들을 심판의 날로 넘기시는 것이다. 그때 그들이 믿으라는 권고를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해야 너무 늦은 것이다. "나는 당신이 들을까 보아 귀먹은 자 같이 듣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시 38:13, 15).
-- 우리 주님의 설교의 이 부분에 관해 복음서 기자는 쓸쓸한 심정으로 기록한다(27절). "그들은 그가 아버지에 대해 그들에게 말했던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음을 보라.
a.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만드는 사탄의 힘.
--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에 대해 그토록 분명하게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가 누구를 의미했는지 알지 못했고, 다만 그가 갈릴리의 자기의 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신다고 생각했다.
-- 따라서 그들의 편견을 굳게 고수하려고 결심한 자들에게는 가장 명백한 일들도 수수께끼요, 비유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장님에게는 낮과 밤이 별 차이가 없다.
b. 위협의 말씀이 죄인들의 마음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한 이유.
-- 그것은 그들에게 계시된 그의 진노가 그들에게 주어질 것임을 그들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심판에 대해 그들이 준비하도록 경고하기 위하여 자기를 보내신 분에 대해 "진리에 의거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그 경고를 경멸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스스로 웃음꺼리로 만든 심판을 누가 행할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3) 그는 이후에 그들이 자기에 대하여 갖게 될 확신에 대하여 언급한다(28,29절). 그는 그들이 자기를 이해하지 못할 것임을 아셨다. 따라서 더 큰 증거가 이루어질 때까지 저들에 대한 판단을 연기하신다. 그러므로 "보지 않으려 하던 자들이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되어 있다(사 26:11).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자.
① 그들이 미구에 확신하게 될 사실.
-- "너희는 내가 그라는 것을, 예수가 참 메시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사람 옆에서 시인하든지 안하든지 그것을 너희 자신의 양심으로 알게 될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질식시켜 버리고자 하지만 그것을 꺾을 수 없으리라. 나는 그다. 나는 너희가 내가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그는 아니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그러리라고 설교한 대로 오기로 한 바로 그이다." 앞으로 그들이 믿게 될 두 가지 사실.
첫째, 그가 혼자서 하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이다.
-- 그는 아버지 없이 인간 예수로서만이 존재하여 있었거나, 또는 자기만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시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와 연합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본래 가지고 계신 능력을 손상시키지도 않으셨다. 다만 그는 그를 거짓 예언자로 보는 그들의 도전을 부정하셨다.
-- 자신이 거짓 선지자라는 모함을 그가 극구 부정한 것은 그들은 "자기의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서" 또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따라서" 예언한다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째, 그의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그가 이 사실들을 말했다"는 점이다.
-- 그는 ‘아우토디다크토스’ - 즉 자기 자신를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데오디다크토스’ - 즉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치는 자이셨다. 그가 가르치신 교훈은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재생시킨 것이었다.
--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그는 대단히 잘 알았다. ‘카도스 에디닥센 메 호 파테르 타우타 랄로’ - 즉 그가 내게 가르쳐 주신대로 같은 신의 능력과 권위로 말씀한다는 뜻이다.
② 그들이 위의 사실을 확신하게 될 시기.
-- 본문에 의하면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라고 하였다. 마치 그가 장대에 달린 구리뱀처럼(3:14) 또한 율법에 의거한 희생 제물로써(그리스도는 큰 희생제물이셨다) 십자가에 그가 달리실 때라는 말이다. 구약에서도 희생제물이 받쳐질 때 "들고 흔들었다(요제)"고 기록되어 있다. 그 까닭에 제사 중에 가장 오래 되었고 또 가장 존귀히 여겨졌던 번제는 "높이 올려드리는 제사"라고 불리워졌던 것이다. 그리고 많은 다른 제사에 있어서도 제물을 쌓아 올리는 것과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흔드는 예식을 중요시하였다.
-- 이같이 그리스도는 "높이 달리셨던 것이다." 또는 본문의 의미가 그의 죽음이 곧 그의 영광이었음을 의미하는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를 죽인 무리들은 이제 영원히 그와 그의 목표를 좌절시킨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오히려 그와 그의 목표를 고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12:24).
-- 인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므로 영광을 받으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전에는 "내가 간다"고 표현하시었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자기가 들리어져야 한다"는 말로 나타내신다. 이같이 성도들의 죽음이란 이 세상에 대한 작별도 되지만 한편 보다 나은 곳으로의 그들의 승격도 되는 것이다.
-- 그가 말씀을 나누고 있는 사람들을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할 도구"로 그가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유의하도록 하자. 그러므로 본문에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그를 제물로 높이 들어 바치는 제사장의 역할을 한다는 말이 아니라(예수 자신이 자신을 들어 바치시는 제사장이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그들이 그에 대한 배반자요 살인자가 되리라는 말씀이다(행 2:23). 그들은 그를 십자가에 "높이 달았다." 그러나 그는  (실지로는) 자신을 그의 아버지에게로 높이신 것이다.
-- 그가 자신을 죽일 자들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그런 자들에게 대단히 부드럽고 상냥하게 말씀하신 사실을 생각하여 보자. 이 사실은 우리로 우리를 미워하고 해치기를 바라는 자들이라고 여겨지는 자들일지라도 그들을 미워하거나 해치려고 하지 말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 이제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이 유대인들의 분노의 결과임을 굳게 확신하면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야" 이 사실들을 "깨달으리라"고 하신다. 어째서 그러면 그가 죽으신 후에야 깨닫게 되는가?
첫째, 마음이 산만하고 무사려한 사람들은 귀한 것이 있을 때는 귀한 줄 모르다가 그것이 없어지면 그것의 가치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눅 17:22).
둘째, 그리스도를 죽인 죄책감이 저들의 양심을 일깨워 진지하게 구세주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될 것이고, 그 때가 되어서야 그들은 예수야 말로 구원할 수 있는 오직 한 분임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사실 이 말씀은 그대로 입증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악한 손을 들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살해하였다"는 사실을 사도들의 말을 듣고 깨달았을 때 "우리가 어찌해야 할까?라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이 예수가 "주,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행 2:36).
세째, 그의 죽음에는 기사와 표적들이 수반되었기 때문이었다.
-- 그리고 죽음에서 그가 부활되심으로 "높이 들리움을 입으신" 사실은 지금껏 있었던 어떠한 증거보다 더 그가 메시야 되심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였다. 이로써 무리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되었다. 그들이 전에는 그를 모함하고 반대하였던 것이다.
네째,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성령의 임재가 실현되었기 때문이었다. 성령은 "예수가 그로라"고 세상을 깨우칠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죽임으로 심판을 자초하였다는 점이 그가 메시야이심을 깨닫게 한 강력한 증거였다.
-- 그리스도를 죽임으로 그들의 불의가 채워졌고 이로써 와진 예루살렘의 멸망은 그들 중 가장 완악한 자에게까지 "예수가 그이심"을 확신케 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주 그들의 어떻게 할 수 없는 불신에 대한 처벌로 예루살렘이 황폐될 것과 "이 일이 이루어지고 나서야"(안타깝게 이 말씀은 실현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큰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던 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겔 33:33).
③ 그의 생전에 우리 주 예수에게 위로가 된 요소(29절).
-- 그는 본문에서 "나의 모든 사업에 있어서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였다. 또한 "아버지가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신다"고 하신다. 그가 나 홀로 문제를 처리하도록 버려두지 않으시며 그의 사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내 사업이나 나를 방관하시지 않는다고 하신다. 그 이유는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사실 아버지가 이 모든 구속 사업의 첫 근원이셨고 그가 이 일의 주동자이시었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첫째, 아버지가 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그리스도의 확신.
-- 그는 동시에 그로 이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는 신의 능력과 이 일을 하는데 있어서 자기에게 보여 주신 신의 사랑을 확신하였다. 즉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신다"고 믿으셨다(사 42:1; 시 89:21). "그의 종의 말을 확증하시는" 아버지를 그가 가지셨고 또 아버지께서 자기와 함께 하심을 아셨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대단히 고무시켜 준다(사 44:26).
-- 왕 중 왕은 자기가 보낸 대사와 함께 하시면서 그의 사명을 증언해 주시며 그의 치리를 도우시고 "결코 홀로 버려두시지 않는다." 즉 그의 대사로 고독 속에, 연약함 속에 머물러 있게 하지 않으신다. 또한 이러한 그리스도의 확신은 그를 반대하는 자들을 더욱 악독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또한 그의 확신은 그들이 그에게 항거함으로써 스스로 죄악 속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암시해 주었다.
-- 그리스도는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도전자"임을 아셨다. 그들은 그를 격퇴하여 없애는 일을 쉽게 여겼다. 그러나 예수의 배후에 그를 지원해 주시는 분이 있으신 대도 그들이 그에게 항거했다는 것은 미치광이 짓에 불과한 것이었다.
둘째, 이러한 확신의 근거. 본문에 의하면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즉 다음과 같은 뜻의 말씀이다.
a. 우리 주 예수께서 계속 위하여 종사하신 위대한 사업은 곧 "그를 보내신 아버지의 사업"으로 그 일은 아버지께서 "크게 기뻐하시는 일이었다." 그의 모든 사업은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사 53:10). 왜냐하면 그의 일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아래서 비롯된 것이요, 그의 영원하신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b. 그 일에 대한 예수의 시행 과정에서 그의 아버지를 불쾌하게 해드린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버지께서 위탁하신 것을 행함에 있어서 그의 모든 지시를 꼬박꼬박 지키셨고 그의 지시를 마음대로 하나도 변경시키지 않으셨다. 타락 이래로 어떠한 인간도 그리스도처럼 말할 사람은 없었다(왜냐하면 '우리는 범사에 다 범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는 어떤 일에서도 그의 아버지를 거스리지 않으셨다. 다만 그는 "모든 의를 성취하셨다."
-- 그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린다는 것은 그가 드리는 희생 제사를 효과 있게 하고 가치 있게 하기 위하여 필수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만일 그가 어느 일에서고 아버지를 불쾌하게 해드리거나 추궁당할 죄를 저질렀다면 아버지께서 그를 우리 죄를 위한 선물로 기뻐 받으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를 위한 이러한 제사장과 희생 제물이 되시기 위하여 온전히 흠 없고 순전하시었던 것이다.
-- 이 사실을 통하여 우리들은 하나님의 종들도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선택하고 행한 후에야"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사 66:4, 5).
Ⅴ. 그리스도의 이 말씀이 몇몇 청중들에게 끼친 좋은 효과(30절). 본문에 보면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고 하였다. 다음 사실들을 기억하자.
1. 대다수의 무리들은 그들의 불신 가운데서 멸망하였지만 은총의 선택에 의해서 "영혼의 구원을" 믿는 남은 자들이 아직도 있었다(사 49:5).
-- 사도들은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어진 약속"을 거절하는 유대인들을 달래기 위하여 남은 자에 대하여 강조한다. 남은 자는 어느 때나 있는 법이다(롬 11:5).
2. 그리스도의 말씀 특히 그의 경고하시는 말씀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갈급한 심령들 속에 그를 믿게 하는 효과를 이루어 놓았다는 점이다.
--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만일 그들이 믿지 않는다면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요,"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들 때 그들은 자신들을 반성해 볼 때가 이르렀다고 생각하였다(롬 1:16, 18).
3. "대다수의 적대자들" 가운데일지라도 그 중에 "마음 문을 넓게 열고 권고의 말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 "이방이 분노할지라도" 그리스도는 그의 할 일을 수행하실 것이다. 복음은 때때로 대단한 반발에 부딪치는 곳에서 위대한 승리를 이루기도 한다.
-- 이 사실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수많은 반대"에 부딪칠지라도 용기를 내서 복음을 전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그들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많은 사역자들이 타락한 정신을 가진 자들의 온갖 비난과 충동을 통하여 하나님께 은밀히 나아가는 기회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어스틴(Austin)은 본문의 말씀을 강론하면서 다음과 같이 열정적으로 호소하고 있다. Utinam et, me loquenti, mltcm redant; non in me, sed mecum in eo - 즉 내가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그를 믿기를 나는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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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바리새인들과의 논쟁(3)(요 8:31-37)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을 배우게 된다.
Ⅰ.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누릴 영적 자유에 관한 위로의 교훈.
-- 이 교훈은 "그를 믿은 유대인들"을 격려하시기 위한 말씀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가르침이 일부 청중들 가운데 감화를 일으킴을 아시고 또한 자기에게서 감화력이 그들에게 나갔음을 인식하시고 거만한 바리새인들과의 대화를 피하시고 이들 "연약한" 신앙인들에게 말씀을 주셨다. 그는 마음이 강팍하여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퍼부으셨지만 "그를 믿는 소수의 연약한 유대인들에게는 위로의 말씀을 주신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1. 주 에수께서 "그의 말씀을 들고 떠는" 자들을 자비롭게 여기시사 저들을 용납한 사실.
-- 그는 들을 귀를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원하셨다.
2. 은혜에 참석한 초보자들에게 그가 주의 깊게 베푼 사랑,  또한 그를 향하여 나오는 자들을 그가 만나 주신 사실.
-- "그를 믿은 유대인들은" 아직도 연약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리스도는 그들을 추방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는 "어린양들을 그의 품에 안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믿음이 연약한 상태에 있을 때 그는 그것을 보호하시며 가슴에 안고 젖을 빨리신다. 이는 그 믿음이 아직 충분히 자라지 않은 상태에서 죽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내용 가운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언제나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신다.
(1) 그리스도의 참 제자의 특징.
-- 그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된다"고 하셨다. 그들이 그를 대 선지자로서 믿게 되자 그들은 자기들을 포기하고 "그의 제자들이"되었다. 그들이 그를 배우기 위하여 그의 품으로 돌아오자 그는 본문의 말씀과 같은 고정된 규칙을 설정하셨다. 즉 그는 "그의 말씀을 계속하여 지키는 사람들"만을 그의 제자로 삼으신다는 규칙이었다.
① 이 말씀은 스스로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고백하나 참된 의미로써 그의 제자가 아니요. 외관상 이름만이 제자인 무리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② 이 말씀은 외견상으로 "신앙이 강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더라고 건전한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 대단한 관심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최고의 제자의 부류에는 끼지 못한다고 해도 그들은 "참 제자"인 것이다.
③ 외견상으로나 그리스도의 제자처럼 보이고자 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그에게 오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즉 그들이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의 곁에 거할 결단을 하고 오지 않는 한에 있어서 말이다. 그리스도와 계약을 맺고자 하는 생각을 지닌 사람들은 그 계약을 자기가 언제나 폐기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어린이들이 학교에 보내지면 단 몇 년간만 생도 노릇을 하면 그 의무가 끝났다.
--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도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전생을" 그의 구속(拘束)아래 기꺼이 맡기지 아니하면 안 된다.
④ "그리스도의 말씀에 거하는 자들"은 그의 "참 제자"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또한 그의 제자는 모든 경우에 불평 없이 그의 말씀을 따라야 하며 배반함이 없이 끝까지 그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메이네테’(8:31) - 즉 거한다는 말은 우리가 집에서 거하는 것같이 거한다는 말로 그가 자기 생의 중심이 되고 안식처요, 피난처가 됨을 뜻하는 것이다. 말씀과의 세속적인 사귐, 또한 말씀에 일치한 생활은 언제나 있어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끝까지 그의 제자가 되고 다른 길로 빠지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 자기가 "참 제자"임을 입증한 것이라고 하겠다.
(2) 그리스도의 참 제자에게 주어지는 특권. 본문에 자신이 참 제자임을 보일 수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두 가지의 귀중한 약속이 있다(32절).
① 진리를 알게 되는 특권이다. 즉 이런 말씀이다. "너희가 진리를 알 것이다. 너희가 알 필요가 있고 또 알아서 유익할 모든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에 대한 믿음이 더욱 확고해질 것이요, 진리의 확실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다음 사실들을 기억하자.
첫째, 참 신앙인, 참 제자인 자들일지라도 그들이 알아야 할 많은 일들에 관하여 대단히 무지할 수 있으며 또한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 하나님의 자녀도 자녀는 자녀이다. 그들도 어린이들처럼 이해하고 말한다. 다른 말로 우리가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면 우리는 제자가 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둘째, "진리를 안다는 것"은 대단한 특권이다.
-- 우리가 믿는 특정 진리들을 안다는 것, 그리고 그 진리들의 상호의 존엄성과 관련성을 알며, 그 진리가 우리의 믿음의 근거와 이유가 됨을 안다는 것은 대단한 특권이다.
② 진리가 자유를 주는 특권이다.
--고로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고 말씀되었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가르치는 진리는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말이다(사 59:11). -- 의인(義認)은 우리를 죄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하게 해 준다. 바로 그 죄에 대한 책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구속당하고 놀라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 또한 성화(聖化)는 우리를 타락의 멍에로부터 자유하게 해 준다. 이 타락에 의하여 완전한 노예로 만드는 율법 아래 속박된 것이다. 복음의 진리는 우리를 형식적인 율법의 멍에로부터 자유롭게 해 준다. 또한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더욱 무거운 짐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하나님을 자유롭게 섬기게 하며 자유로이 아들의 특권을 누리게 하며 그것 자체가 자유인 위로부터 내려 올 새 예루살렘에서 자유롭게 해 준다.
둘째, 이 진리를 알고 즐거워하며 믿어야 사실상 우리가 자유롭게 된다. 즉 그렇게 할 때 속박하며 좀 먹는 것에 불과한 편견과 오류와 잘못된 관념들로부터 우리가 자유롭게 되며 정욕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영혼을 창조주에게 복종하도록 몰아 넣음으로 영혼으로 본래의 상태로 돌아오게 해 준다.
-- 사람의 마음도 빛과 능력을 지닌 그리스도의 진리를 인정함으로 무한히 시야가 넓어지고 폭이 있어지며 대단히 고귀해지며 일반적 지각을 초월하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 마음이 율법 아래 있을 때처럼 마지못하여 순종하는 흉내를 내지는 결코 않는다(고후 3:17).
-- 기독교의 원수들은 "자유롭게 사고하는 것"처럼 가장한다. 반면에 참으로 자유로운 이성을 지닌 사람들은 믿음에 의하여 인도됨을 받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에 귀속시키는 자들이야말로 참으로 "자유로운 생각을 지닌" 사림들이다.
Ⅱ. 육에 속한 유대인들이 이 가르침에 대하여 범한 잘못.
-- 그들은 그의 가르침에 반대하였다. 그의 가르침은 포로들에게 자유를 주는 기쁜 소식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그것을 비난하였다.(33절).
-- 바리새인들은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위로의 말씀에 적의를 품었다. 다만 곁에 서 있기만 하였던 그들에게 그의 말씀은 아무런 뜻도 없는 말로 들렸다. 그들은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자유의 고귀한 헌장을 자기들 나름대로 생각하고 대적하였다. 그들은 대단한 오만과 한편 시기심을 갖고 그에게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자유인으로 태어나서 날 적부터 지녔던 자유를 잃어 본적이 없었도다. 우리가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유대인인 우리에게 자유케 되리라고 하는가?"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1. 그들을 화나게 한 요소.
-- 그것은 너희가 자유케 되리라"는 말속에 감추어진 풍자적 요소 때문이었다. 그의 말은 유대 교회와 민족이 일종의 예속 상태에 있고(이 말은 넓게는 유대인들 전체를 가리킨 것이었다) 또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계속 그러한 속박 상태에 있을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들렸다(이것은 특별히 바리새인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불신앙인들의 시기와 안달은 신실한 자들이 즐기는 특권임을 기억하자(시 112:10).
2. 그리스도가 저희가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는 말씀에 대하여 저희들이 반박한 내용. 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방백이요 위인이다. 비록 우리가 가나안에서 살지만 가나안 족속의 후손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노예들 중의 노예가 된 일은 없었다. 우리는 자유로운 구제는 해왔어도 노예 신분으로 전락된 적은 없다"고 말한다.
-- 쇠락해 가는 가문은 그 조상들의 영광과 위엄에 대한 자랑이나 늘어놓으며 조상들의 이름을 통해 명예를 누리려고 한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 조상들의 이름에 치욕을 들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본문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주장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나아가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계약을 맺으셨고 그의 자녀가 되는 권리를 얻었다.(롬 11:23). 그 계약은 자유의 계약이요. 노예 상태와는 거리가 먼 특권이 그들에게도 수여되었다(롬 9:4).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같은 대단한 대가를 치루고서 자유를 얻어야 된다는 것이 곧이 들리지 않았다. 이같이 그들이 자유인으로 태어났으니 말이다.
-- 경건한 가문과 교육이 참된 거룩함의 결여를 보상하는 것처럼, 그것을 특권으로 여기고 자랑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었다. 그러나 지옥에 떨어진 자가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불렀을 때 우리가 찾아 볼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자손이라는 사실이 무슨 유익함을 준단 말인가. 우리의 구원은 세상의 일반 권리처럼 우리나 우리 자손에게 상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하늘 나라에 가는 자격도 세습적으로 수여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우리의 혈통을 밝힘으로 우리가 "법적 상속인"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우리의 자격은 순전히 대가를 치름으로써만이 얻어질 수 있다. 우리가 대가를 치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대속자가 대가를 치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과 계약을 우리가 알지 못한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고 하여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같이 많은 사람들에게 중생의 필요성을 역설하면 그들은 "교회의 교인이면 되지 다른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라는 말로 말머리를 들려버린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 다 참된 이스라엘인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2) "우리가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① 이 주장이 거짓됨.
--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나는 그들이 많은 군중들 앞에서 황당무계한 주장을 그토록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었는지 의아스럽게 생각된다. 그래 아브라함의 자손이 애굽인들의 속박 아래 있지 아니하였던가? 또한 사사 시대에 그들은 여러 번 인접 민족의 속박 아래 있지 않았던가? 또 바벨론에 70년간 포로 생활한 적도 있었지 않았는가? 지금도 로마인들에게 세금을 바치고 있고 사실 그들이 노예 노릇은 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국가적으로는 예속 상태에 처하여 지금도 자유롭게 되기를 갈망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그들은 그리스도와 대적하기 위하여서 우리가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는 뻔뻔스러운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함으로 그들은 그리스도를 궁지에 몰아 놓고자 하였다. 즉 자기들의 자유의 존엄성을 어떻게 해서든지 수호하려는 유대인들로 그를 증오하게 만들려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그들이 정복한 민족으로 노예 상태에 있다는 생각을 갖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는 로마인들에게 그를 위험 인물로 인식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② 그들의 계획의 어리석음.
-- 그리스도는 진리가 그들을 자유케 하는 그런 자유에 대하여 말씀하셨었다. 그것은 "영적"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진리는 마음을 부요하게 해 주며 자유롭게 해주며 마음을 과오와 편견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 자유에 대한 제공을 자기들이 세상적 삶의 노예가 된 적이 없었다는 말로 거절하고 반박한다. 그들이 누구에게도 예속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힌 적도 없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이다.
-- 육욕에 사로잡힌 자들은 육신이 당하는 괴로움이라든가 그들의 세상적 사업에 손해가 주어지는 것은 슬퍼하지만 그 외의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시민의 자유와 재산이 침해될 것이라고 생각해 보라. 또는 그들의 농토가 황폐되고 가옥들이 훼손될 것이라고 말해 보라. 그들은 그 말을 잘 이해하고 또 분별력 있는 답변을 너희에게 할 것이다. 즉 그 일들이 직접적으로 그들과 관련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죄의 속박이라든가 사탄에게 포로가 된 상태라든가 그리스도가 주시는 자유에 대하여 설교하여 보라. 또 그들에게 그들이 자기들의 귀중한 영혼을 얼마나 잘못 취급하고 있으며 그들의 영원한 복락이 위험스러운 상태에 있다고 말해 보라. 그리고 그들의 귀에 어떤 기이한 사실들에 대하여 들려주어 보라. 그들은 그 말을 듣고 (겔 20:49 에 나오는 인물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그가 비유를 말하는 자가 아니냐?"하고 말할 것이다. 니고데모도 "중생"이란 말씀에 관하여 이같이 못 알아듣는 실수를 범하였던 것이다.
Ⅲ. 그의 가치침에 대한 이러한 반대에 대한 우리 구세주의 변증 및 그의 가르침에 대한 보충 설명(34-37). 본문에서 그는 다음 네 가지 사실들을 주장한다.
1. 그는 그들이 자유로운 시민이며 그들이 가시적인 교회의 일원일지라도 그들이 예속 상태에 있을 수 있음을 보여 주신다(34절). 그러므로 본문에 "죄를 범하는 자마다 비록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남의 노예가 된 적이 없다고 할지라도 죄의 종이라"고 하신다.
--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거짓된 항변을 꾸짖지 아니하시고 또 그들의 현재의 예속 상태를 지적하지도 않으시고 그들의 교화(敎化)를 위하여 그가 말씀하셨던 것을 보충 설명하신 사실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이같이 사역자들도 그들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온유함으로 가르치고 그들이 바르게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며 성을 내는 그들을 윽박지름으로써 그들로 더욱 혼란을 일으키게 하여서는 아니 된다. 다음 사실들을 생각하여 보자.
(1) 그의 말씀의 서두의 엄숙함.
-- 그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서두는 대단히 경고적인 성질의 것으로 우리 구세주께서 청중을 특별히 경청케 할 필요가 있을때나 수용 태세를 준비시키고자 하실 때 자주 사용하신 것이었다. 선지자들은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는 형식의 서언을 사용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으로서의 자신에게 충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아들이시므로 자신의 이름으로 말씀하신다. 고로 "진실된 증인이요, 아멘인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의 말씀 앞에다 자신의 진실됨을 선언하신다. 즉 본문은 "마치 그 사실이 너희를 구원할 수 있기나 하듯이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하는 너희에게 내가 이 사실을 말하노라"는 뜻의 말씀이었다.
(2) 이 진리는 모든 사람이 관심을 가져야 할 그러한 진리였다. 비록 본문에서는 특별한 경우를 다루고 있지만 말이다. 본문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으로 자유롭게 될 필요가 있도다"라고 말씀한다. 죄의 상태는 노예의 상태와 마찬가지이다.
① 누구에게 이러한 노예의 낙인이 찍히는 것인가를 살펴보자.
-- 그는 "죄를 범하는 자"이다. 희랍어 사본에 ‘파스 호 포이온 텐 하마르티안’(8:34)으로 되어 있는데 이 정확한 뜻의 죄를 범하는 자는 누구나 다라는 뜻이다.
-- 이 세상에 사는 사람치고 죄를 짓지 않는 "의로운 사람:"이란 없다. 그러나 죄를 짓는다고 다 죄의 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죄의 종이 되는 자는 "죄를 도모하여 죄를 선택하며, 거룩한 길보다 행악의 길을 더 좋아하는 자들이다"(렘 44:16, 17). 즉 죄와 계약을 맺고 죄와 동맹 관계를 가지며 죄와 결혼한 무리를 말하며 죄를 "고안해 내며" 육을 위하여 삶을 계획하며, 불의를 획책하는 무리를 말하는 것이며, 죄의 관습에 빠져 육을 따라 살며, 죄와 협상을 하는 자들이 곧 죄의 종인 것이다.
② 이같이 죄를 범하는 자들에게 그리스께서 어떤 낙인을 찍으시는지를 살펴보자.
-- 그가 그들에게 찍으시는 낙인은 노예의 표적이다. 그들은 "죄의 종"이다. 그들은 죄의 견책아래 잡혀 있으며 체포되어 있으며 죄 아래서 살기로 작정한 무리들이다. 그들은 죄의 세력에게 노예가 되어 있다.
2. 그는 그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집에 거하고 있다고 하여도 아들로서 유산을 상속받을 자격이 없으며 노예의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다. 왜냐하면(35절) "종"은 잠시 집안에 거하기는 하지만 "종"은 어디까지나 종으로 "영원히 집에 거하지는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을 섬기는 종에게는 상속권이 없다. 그들은 그 집에 일시적으로 충성할 뿐이지 영원히 거할 자격은 없다. 그러나 그 가정의 아들은 영원히 거할 수 있는 것이다.
(1)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유대 교회와 유대 민족에 대한 부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의 장자였었다. 그러나 그들은 비참하게도 종의 위치로 전락되고 말았고 세상과 육체의 노예가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출생에 의거하여 교회의 일원의 자리가 보장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이 스스로 종으로 전락되었으므로 "영원히 아버지의 집에 거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 자유를 선포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대하고 사람을 속박하는 시내산의 계약을 고수하므로 예루살렘은 그 때가 만료되자, "그 자녀로 더불어 종노릇하게 되었다"(갈 4:24, 25). 따라서 예루살렘 성에는 교회가 없어지고 그곳 거민의 공민권이 박탈당하였다. 예루살렘은 종 된 여인의 자식처럼 추방당하였다(창 21:14). *
**크리소톰(Chrysos-tom)은 본문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모세의 율법에 있는 예식과 의식에 의하여 죄로부터 자유로와 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모세는 종에 불과하였고 아들이 가지신 것과 같은 교회에서의 영구적인 권위는 지니시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만사는 잘될 것이다"(36절). 그러나 본문은 더 나아가서
(2) "죄의 종"이 된 모든 사람들에 대한 거부의 말씀으로 또한 그들을 "하나님의 양자로 택할" 수 없음을 나타내 주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다.
-- 무익한 종들이 하나님의 집에 잠시 동안 그의 식구에 대한 종복으로서 거할 수는 있지만 종 된 여인에게서 난 자녀와 자유자에게서 난 자녀가 구별되는 날이 반드시 오고 마는 것이다. 참된 신앙인들만이 즉 약속과 계약의 자녀인 사람들만이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으며 이삭처럼 영원히 하나님의 집에 거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땅 위에서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될 것이다"(스 9:8). 그리고 거룩한 하늘 나라에서 "웅장한 집"(mansins)을 지니게 될 것이다(14:2).
3. 그는 그들에게 이러한 속박의 상태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로" 들어가는 구원의 길을 보여 주신다(롬 8:21).
-- 죄의 종이 된 자들의 입장은 비참하다. 그러나 그들에게 전혀 도움이 없거나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게 된다. 영원히 자기 집에 거하는 것이 아들들이 노리는 특권이요, 종들보다 그들을 엄위롭게 하는 것인 것처럼 아들이며 더구나 모든 형제들 중 장남이요 모든 재산의 상속자인 주님이 노예사면과 양자 선택의 권력을 가진 것은 당연한 것이다(36절). 그러므로 본문에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하였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다는 점이다. 그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권위와 능력이 있으시다.
① 죄인들을 사면해 주실 수 있다.
-- 그는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름으로써 "우리를 의롭게 하심"(Justification)을 통하여 이일을 이루신다(복음이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의인이다. 이 의인은 일반 모든 사람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조건적 "사면장"이요 모든 참된 신앙인들에게는 그들의 믿음에 의거한 절대적 "사면령"이 되는 것이다).
-- 또한 그는 "우리의 부채"를 청산해 주심으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다. 왜냐하면 이 부채 때문에 우리는 율법에 의해 체포당하며 형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보증으로써 아니 그보다는 우리 대신 형을 치룬 대속자로서(왜냐하면 그는 본래 우리처럼 속박되지 않으셨으나 우리의 지불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속박을 받으신 것이기 때문이다) 채권자의 마음을 달래시고 손상 당한 의에 대한 요구를 그 이상의 갑으로 지불하셨으며 결박과 심판을 친히 담당하시고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그에게 나오는 모든 사람들을 사면해 주신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과 회개를 가지고 그에게 나아가는 것을 그의 영예로 높여 드리는 보상의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같이 하여 신앙인들은 자유를 얻게 된다. 즉 모든 부채로부터 그들은 영원히 놓여나게 되며 무죄가 되며 사면되는 것이다 일괄 석방이란 모든 판결이나 배상 청구를 폐기시키는 석방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믿음과 회개)에 응하기를 거절하고 항거하는 자들에게는 이 특권이 주어지지 아니하고 구속자의 수중에 이러한 보장은 강력한 힘을 지닌 채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② 그는 "갇힌 노예"를 구출할 권력이 있으시다.
-- 그리고 그는 이 일을 성화를 통하여 이루신다. 그는 복음의 강력한 설득력에 의하여 또한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통하여 영혼 속에 깃든 부패의 세력을 타도하시고 분산되어 있는 이성과 덕의 힘을 규합하사 죄와 사탄을 물리치려는 하나님의 뜻을 확고하게 하신다. 이로써 영혼 역시 자유롭게 된다.
③ 그는 "나그네와 이방인들을 하나님께로 귀화시키는" 권력을 갖고 계신다.
-- 그는 양자(養子)를 삼으심으로 이 일을 이루신다. 이것은 보다 큰 은혜의 행위이다. 우리는 용서받고 치료될 뿐만 아니라 은총을 입게 되는 것이다. 용서의 사면장이 있는 것처럼 특혜를 베푸는 헌장도 있다. 이같이 아들은 우리를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국가요 새 예루살렘인 그곳의 거류민으로 삼으신다.
(2) 그리스도가 자유롭게 해 준 자들이 "참 자유"한 자들이다.
--본문의 "참으로"(8:36)란 용어는 31절에서 "참 제자"라고 할 때 사용된 ‘알레도스’(230)가 아니고 ‘온토스’(3689) - 즉 참으로, 진짜로 (really)이다. 이 "참으로"란 말이 뜻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① 자유에 대한 약속의 진실됨과 확실성을 나타내 준다.
--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자유는 상상적인 자유였다. 그들은 "거짓된 은사"를 자랑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주시는 자유는 확실한 것이다. 그것은 실제적인 것이고 실제적 효과가 있는 것이다.
-- 죄의 종들은 스스로에게 자유를 약속한다. 그리고 그들이 신앙의 집단에서 떨어저 나가게 될 때 자기들이 자유롭게 된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를 속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신 자들 외에는 "참으로 자유"한 사람은 없다.
② 이 말은 약속된 자유만이 유일하게 빼어난 탁월성=우수성을 지닌다는 뜻을 의미한다.
-- 그가 주시는 자유만이 이름을 부여받을 수 있는 자유이다. 이 자유에 비교하면 다른 모든 자유들이란 노예 제도에 다를 바 없는 그런 자유들이다. 그는 그의 자유에 의하여 자유롭게 된 자들에게 영예와 이익이 돌아가기를 바라신다.
-- 그가 주신 자유는 "영광스러운" 자유이다. 그가 주신 자유는 자유라는 존재 자체이다(그러므로 ‘온토스’(3689)는 특별한 의미를 띠는 것이다). 그것은 "본질"적 자유이다(잠 8:21). 이 세상의 사물이란 그림자에 불과하나 존재 자체는 그렇지 아니한 것이다.
4.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하는, 불신과 비난으로 가득 찬 유대인들에 대한 답변으로 이 말씀을 하신다.(37절). 그러므로 본문에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또 그렇게 하므로 너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받을 명예까지 상실하고 만 것이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자.
(1) 그는 그들의 혈통에 대한 긍지를 인정하셨다.
-- 그러므로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아노라. 아니 누구든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은 너희의 명예이다"라고 말씀하신다. -- 그는 사실은 사실대로 수긍하신다. 그렇다고 그들의 말 가운데 거짓된 것을 들어(그들이 누구에게도 노예 노릇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 그들을 책하지도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의 유익한 길을 택하려 하셨고 그들을 격분시키려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하여 그는 그들이 기뻐할 말을 하신다. 즉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고 하신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이 그들의 이름을 존귀하게 하며 그들의 명예를 드높여 주기나 하는 것처럼 그 사실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은 그들의 죄악을 "조장시켰을" 따름이었다. 또한 그들로 넘치게 죄를 짓게 만들었을 따름이었다.
--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을 통하여 장래에 그는 혈통과 교육을 자랑하는 자들의 허영에 찬 위선을 심판하실 것이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가? 그렇다면 어째서 너희가 그가 걸어갈 믿음과 복종의 발자취를 따라가지 않는 것인가?"라고 그는 힐문하실 것이다.
(2) 유대인들의 자기들의 명예와는 상반된 이율배반적 행동.
-- 그것은 본문의 "그러나 너희가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라는 말씀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여러 번 이 일을 시도하였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계획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저들의 의도가 곧 나타나는 59절에 "저희가 돌을 들어 그를 치려"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인간들에 의하여 자행되는 모든 악행을 아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악행에 대한 사전의 그들의 의도라든가 이를 수행하려는 노력도 아신다.
-- 순전한 사람을 죽이기를 바라는 것만도 상당한 죄가 되는 것이다. 더구나 왕 중 왕이신 분을 죽이려고 "궁리하고 상상하는 것은" 글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극악한 범죄인 것이다.
(3) 저희의 이율배반적 행동의 이유.
--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면서 그를 통하여 그들과 "땅에 거하는 모든 족속들이' 축복을 받게 될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던 예수를 어찌하여 완고하게 죽이려 하였는가? 우리 구세주는 본문에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신다.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본문이 희랍어 사본에는 ‘우 코레이 엔 휘민’(8:37), 벌가타(Vulgate)에는 Non Capit in vobis - 즉 너희가 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도다. 심지어 그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는도다. 너희가 내 말에는 흥미가 없고 다른 일들은 열심을 내고 또 기뻐하는도다란 뜻이다. 또는 이러한 뜻이다. 내 말이 너희에게 아무런 작용도 없도다. 그것이 너희에게 능력이 되지도 못하고 감화를 일으키지도 못하는도다. ***어떤 비평가들은 본문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내 말이 너희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지 못하는도다. 내 말이 비처럼 쏟아지지만 마치 바위덩이에 쏟아지는 것 같아서 다 흘러가 버리고 갈아엎은 땅에 내린 비가 땅을 적시듯이 그들의 마음을 적시지 못하는 도다." ***또 시리아 사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너희가 나의 말을 묵묵히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 말의 진실됨에 의해 설득되지도 않고 또 그 말의 선한 뜻을 기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다"는 현 영역판 내용이 가장 잘 뜻을 표현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 그들은 그를 죽이려 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다시는 말을 못하도록 하기를 바란 것이다. 이는 그가 그들에게 무슨 해를 끼쳤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의 말씀이 지니는 확신에 찬 강압적인 증언을 견딜 수 없었기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① 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 안에 가장 깊고 좋은 곳에 모셔야 된다는 점이다.
-- 그의 말씀이 무슨 나그네나 낯선 사람이 들렸다 가는 것처럼 잠깐 들렸다 가시게 하지 말고 우리가 자기 집에 머물 듯 그렇게 우리를 말씀이 "거하실" 곳으로 제공하자. 또한 우리를 그의 말씀이 "역사하는" 곳으로 드리도록 하자. 말씀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서 "다스릴" 장소를 필요로 하신다. 다스리는 자리는 가장 좋은 곳에 설정되는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보좌"를 그에게 드리자.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마음대로 거하실 수 있게 해드리자.
② 신앙은 고백하나 그 안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거할 곳은 없는 그런 무리들이 많다는 점이다.
-- 왜냐하면 그들이 그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사탄은 할 수 있는 한 사람들에게서 말씀을 추방하려고 한다. 그리고 말씀이 거해야 할 자리에 다른 것들이 거하게 조장한다.
③ 하나님의 말씀이 거할 곳이 없는 곳에 좋은 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다.
-- 왜냐하면 그 곳에는 모두 온갖 죄악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불결한 영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비어있는 마음을 발견하면 "들어가 거기 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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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바리새인들과의 논쟁(4)(요 8:38-47)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와 유대인들의 쟁론이 계속되고 있다. 유대인들이 그를 끝까지 모함하고 반박하려 하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신앙을 주고 회개케 하고자 하신다.
Ⅰ. 그는 본문에서 그의 생각과 그들의 생각의 차이점을 규명하시고 그들의 생각은 그의 생각과 다른 기원과 유래를 갖고 있음을 밝히신다(38절). 그러므로 본문에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고 하시었다.
-- 본문에 두 가계(家系)에 따른 두 아버지에 대한 말씀이 있다. 사람의 아들들도 이 두 가계(家系)에 따른 두 아버지에 대한 말씀이 있다. 사람의 아들들도 이 두 가계(家系)로 나뉘어진다. 한 아버지는 하나님이요, 또 다른 아비는 악마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둘은 서로 대립적인 위치에 있다.
1.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하늘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그의 가르침은 무한한 분의 지혜의 경륜과 영원한 사랑의 취지가 재현된 것이었다.
(1) 그는 "내가 본 것을 말하노라"고 말씀하셨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알게 하신 하나님과 저 세상은 추측이나 풍문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직접 눈으로 보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저 세상의 본질을 저희에게 철저히 알려 주셨고 그 진실됨을 확증하셨다. 백성들에게 증인이 되신 그분은 목격자이셨고 그러므로 그의 증언은 절대 완벽한 것이었다.
(2) 그가 하신 말씀은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이라고 하신다.
--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럴듯한 논쟁에 의하여 옹호되는 가설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원하신 분의 마음속에 깃든 비교 할 수 없는 진리를 정확하게 재현시킨 것이었다. 그의 말은 그가 아버지로부터 들은 것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평화에 대한 경륜을 논하시면서" "아버지와 함께" 보신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삼층천을 직접 구경하였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본 것을 말로 표현할 수도 없었고 또 말해서도 아니 되었다. 왜냐하면 말하는 것마다 자기가 본 것이요 또 그가 본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만이 지닌 절대권이기 때문이다.
2. 저희의 "소행"은 지옥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신다.
-- "너희는 너희 자신의 행위를 통하여 너희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드러낸다. 너희가 누구를 닮았느냐 하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너희의 조상을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다"는 내용의 말씀이다. 아버지에게 육을 받은 어린이가 아버지의 말과 행동을 본받고 그의 본성만 닮아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위도 모방하며 자라나듯이 유대인들도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악의를 품고 반대하므로 자신들이 악마의 자식들임을 들어내었다. 그들은 그들 앞에 있는 악마를 부지런히 모방하였다.
Ⅱ. 그는 저희들의 조상들이 아브라함과 하나님이라는 허영된 자랑을 벗겨버리시고 그들의 헛되고 거짓된 위장을 들춰내신다.
1.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자기들의 주장을 전개하였다.
--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이 주장에 대하여 답변하신다. 본문에 보면 저희들은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고 말하고 있다(39절). 이 말을 한 그들의 의도는 다음과 같다.
(1) 자기들에게 명예를 돌리므로 자기들이 위대하게 보이기를 바라서였다.
-- 그들은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이었다"는(신 26:5)선조들의 저희의 유래에 관한 수치스러운 고백을 잊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 사람이라"(19:3 절)고 한 그들의 타락한 조상들에 대한 비난의 말씀을 잊고 있었다(그들은 자기들의 타락한 조상들의 길을 뒤따른 것으로 그들이 그들의 가문 가운데 처음으로 타락한 자들은 아니었다).
-- 쇠락해가는 가정들이 그들의 뛰어난 조상을 자랑삼는 일이 흔히 있는 것처럼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들이 그 교회의 첫 창시자의 탁월함이라든가 교회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것도 흔히 있는 일이다. Fuimus Troes juit Ilium -즉 과거의 트로이 사람들로 트로이 시가 번창한일이 있었다는 얘기와 같은 자랑은 아무 수용도 없는 것이다.
(2) 그들은 그리스도가 그들이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악을 배운 것이라고 말하였을 때 그가 조상 아브라함을 가리켜 모욕하였다고 욕설을 퍼부을 계획을 하고 있었다.
--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리스도에게 시비를 걸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의 주장을 봉쇄하시고 알기 쉬운 변론을 통하여 그들의 말의 허구를 노출시키신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행한 대로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너희는 아브라함의 일을 행하지 않는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것이다."
① 그의 논리의 전제는 명백한 것이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다시 말하여 너희가 그와 그의 자손과 맺은 계약에 대하여 이 권을 주장할 만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그것은 너희에게 명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려면 너희가 아브라함의 일을 행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처럼 여호와의 길을 지키는 자만이 아브라함의 집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하나님도 그가 말씀한 것을 지키실 것이다" (창 8:19).
--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간주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복종의 길을 뒤따라야만 하는 것이다(롬 4:12). 유대인들은 그들의 족보가 있었고 또 애를 써서 혈통을 유지하여 왔지만 그들이 그와 같은 정신을 갖고 살지 않는 한 상속의 이권을 취할 수 있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할 수 는 없는 것이었다. 또한 여인들도 사라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으려면 "선을 행하여야만이" 가능한 것이라고 하였다(벧전 3:6).
--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입증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그의 믿음뿐만 아니라 그의 행위도 본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약 2:21, 22). 또한 그가 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해야 하며 하나님이 인도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를 따라야 하며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것도 그에게 드릴 수 있어야 하며,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와 길손처럼 나그네와 길손처럼 살아야 하며, 그들의 가정에서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의롭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② 전제에 대한 결론적 가설 또한 명백하다. 그것은 "너희가 아브라함 일을 행해야 하는데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그는 계속 말씀하신다. "하나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전하는 사람인 나를 너희가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40절).
첫째, 그는 그들에게 그들이 현재 막 착수하려고 하는 일을 보여주신다. 그것은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한" 사실이었다. 그들의 악한 의도는 다음의 세 가지로 나타낼 수 있다.
a. 그들은 비정상적인 무리들이었다.
--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과 같은 사람, 그것도 그들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 또 그들에게 어떠한 해독을 끼치지도 않았고 노를 품지도 않은 사람의 생명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저희는 "사람을 해하려는 저의를 품고 있었다"(시 62:3).
b. 그들은 감사할 줄 모르는 무리들이었다.
--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에게 진실을 말하고 그들에게 어떠한 해도 입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능한 최대의 친절을 베푼 사람의 생명을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에게 거짓말로 설득시키려 한 것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주요한 진리를 가르친 사람을 죽이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저가 저희의 원수일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c. 그들은 불경한 무리들이었다.
--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들은"진리를 그들에게 보낸 사자인 그분의 생명을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저희의 음모는 quasi deicidium - 즉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행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소행이었고 그들은 이런 소행을 끝까지 고집하였다.
둘째, 그는 그들에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그럴 수 없음을 보여 주신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다."
a. "아브라함은 이와 같은 어떤 일도 행하지 아니하였다."
-- 그는 인도적인 인물로 유명하였고 또한 경건으로 유명하였다. 전자의 예로써는 그가 여러 가지 사건마다 하늘의 환상에 복종하신 사실을 들 수가 있다. 또한 그는 부드러운 마음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현재 유대인들은 불신앙으로 오만을 부렸으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께 항거하였으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하였다. 이같이 그들이 그와 같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브라함이 그들을 모른다고 그들을 인정치 아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사 63:16; 렘 22:15-17 참조).
b. "그가 현재 살고 있었다면 그들과 같이 행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저자는 자기가 그때 살았더라도 그러지는 아니하였을 것이라고 부연하였다: 역주). 그러므로 어떤 이들은 본문(아브라함은 .........아니하였다)을 Hoc Abraham non fecisset - 즉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라는 가정형으로 해석한다.
-- 이같이 우리는 악한 길을 떠나서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아브라함이나 이삭 또는 야곱이라면 그렇게 하였을까?라고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그들과 같이 행하지 않는다면 그들과 함께 거하는 것은 기대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③ 최종적 결론(41절). "너희가 아무리 자랑하고 잘난 척해 보아야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다. 너희의 아버지는 다른 혈통에 따른 아버지이다(41절) 너희는 바로 그 아비의 행사를 하는 것이다. 너희는 그의 영을 받고 그와 닮은 자들이다."
-- 그는 그들이 계속 비방하는 말로 그들의 아비가 누구인지 설명하라고 강요하기까지 그들의 아비가 마귀라는 사실을 명백히 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비록 악한 자들일지라도 예의와 존경심을 갖고 대하고 사실이 그렇더라도 거짓 말로 그들에게 말하지 말 것을 가르쳐 준다.
-- 그는 그들이 악마의 자식들이라는 소리를 듣고 양심의 찔림을 받게 하기보다는 그들의 회개하는 모습을 보기 원하였다. 심판날에 그리스도로부터 악마의 자식들이란 소리를 듣기 이전에 우리의 생각과 행위를 바꿈으로 나쁜 아버지를 버리고 참 아버지를 모시며 악의 가계(家系)를 떠나 의의 가계에 속하도록 하자.
2.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기에는 그들이 너무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자 그들은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들어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한다.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사생아도 아니며 합법적 아들들이다. 우리의 아버지는 한 분 하나님이다"라고 그들은 주장하였다.
(1) 어떤 이들은 저희의 말을 축어적으로 이해한다.
-- 사실 그들은 이스마엘처럼 하녀에게서 난 자녀들도 아니었고 모압이나 암몬 족속처럼 근친상간의 관계에 의해 출생되지도 아니하였다(신 23:3). 그들은 아브라함 가문의 서자 계열에 속하지 아니하였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들이었다. 그들은 "합법적" 결혼관계에서 태어났으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다. 그가 이 영예로운 제도를 순결하게 제정하신 것이었다. 또한 이혼이나 여러 아내를 거느림으로 더럽혀지지 않은 아버지에게서 난 합법적 자손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워졌다(말 2:15).
(2) 어떤 이들은 저희들의 말을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 즉 그리스도께서 말씀하는 것이 육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영적 아버지에 대하여 말하는 것임을 저희가 알았다고 본다. 그러므로 저희들이 자기들의 신앙의 아버지에 대하여 말한 것이라고 이들은 해석한다. 이렇게 볼 때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① 그들은 자신들의 우상 숭배자들의 후예임을 부인한다. 즉 "우리는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우상 숭배하는 부모의 자녀들도 아니며 우상 숭배하는 환경 속에서 자라지도 아니하였다"고 말한다.
-- 성서에는 흔히 우상 숭배는 영적 "음란"으로 또 우상 숭배자들은 "음란의 자녀"들로 언급되고 있다(호 2:4; 사 57:3). 그러나 지금 그들이 자기들은 우상 숭배자의 후예가 아님을 나타내려고 하였다면 그들의 주장은 거짓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포수기 이전의 유대인들이야 말로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상들은 그랬으나 자기들은 더 이상 우상 숭배를 안한다는 뜻으로 그들이 그런 말을 하였다고 치자. 물론 우리가 우상 숭배를 버릴 수는 있다. 그러나 다른 불의 가운데 빠져버리면 아브라함의 계약은 무의미해지고 말 것이다. 즉 "그들이 우상 숭배 죄는 범하지 않았다"하여도 (우상 숭배를 영적 음란으로 간주할 때) 그들이 생명을 살해하면 그들은 계약을 범한 자들이 된다. 반항적인 탕자는 그가 비록 음란한 가운데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았다면 상속권을 상실하고 말았을 것이다.
② 그들은 자기들이 참 하나님에 대한 참 예배자임을 자랑하였다. 그들은 "우리는 이방인들이 많은 신, 많은 주를 섬기는 것처럼 많은 아버지를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이 없다면 창녀의 자식처럼 아버지가 많으나 확실한 아버지는 누구인지 모르는 경우에 빠져들고 말 것이다.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만을 우리의 유일한 아버지로 모시도록 하자. 그래야 우리에게 복이 된다.
-- 다음과 같은 자들은 스스로 비위 맞추는 자들이며 자기들의 영혼에 저주스러운 속임수를 쓰는 자들임을 기억하자. 즉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지도 않고 진실한 신앙 고백을 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참된 신앙의 고백과 참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자기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상상하는 자들이다. 이제 우리 구세주는 저희의 불합리한 주장에 대하여 완전한 답변을 제시하신다(42,43절). 그리고 두 가지 사실을 들어서 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권리가 없음을 입증하신다.
첫째, 그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는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그들이 자기를 죽이려한 사실을 들어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주장을 반박하셨었다(40절).
--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들이 그를 사랑하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들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님을 반증하시었다. 만일 한 사람이 큰 죄를 지어 그리스도의 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는 아브라함의 자녀로 인정될 수가 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의 진실한 친구요, 추종자가 되지 않는 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증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 사랑을 가져야 하며 그의 인격을 존중하고 그를 감사한 마음으로 깊이 사랑하며 그의 목적하심과 나라를 성실히 사모하며 그에 의하여 선사된 구원과 그 구원의 방법과 조건을 만족히 여기고 또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확실한 징표로써 그의 계명을 세심하게 지켜야함을 기억하자.
--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우리의 창조주에게 어떻게 행하는지 시험받는 상태에 있다. 이 시험 결과에 따라 우리는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믿게 하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취하시었다. 그 한 방법으로 그는 아들에게 충분히 입증될 만한 아들로서의 권한과 사명을 주어서 그를 세상에 보내시었다. 그리고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아들에게 입을 맞추고 많은 형제들 가운데 장자인 그를 환영하라고 지시하셨었다(요일 5; 참조).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양자됨은 입증되기도 할 것이며 또 반증되기도 할 것이다. "누구든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는 상관이 없는 자로서 파문을 당하고 저주를 받을 것이다(고전 16:22). 이제 우리 구세주는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였다면 그들이 그를 사랑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신다. 그 이유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그를 사랑해야 했다.
a.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이다.
-- 그는 본문에 "내가 하나님께로 났다"고 말씀하셨다. ‘엑셀돈’(8:42)이란 그의 신적인 ‘엑셀뤼시스’를 의미하며 또는 그의 신적 본체와의 사귐과 그의 인성에 신적 ‘로고스’를 연합시킴에 의하여 자신이 하나님께 기원을 두고 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휘트비(Dr. Whitby)박사도 같은 주장을 한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게끔 되신 분이었다. 그리스도는 "사랑 받는 자"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아버지의 사랑 받는 자이심으로 또한 모든 성도들에게 "사랑 받는 분"이 되셔야 하기 때문이다(엡 1:6).
b.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이셨기 때문이다.
-- 그는 인간 세계에 하나님의 대사로 보냄을 받으시었다. 그는 거짓 선지자들의 세계에 하나님의 대사로 보냄을 받으시었다. 그는 거짓 선지자들처럼 스스로 오신 것이 아니었다. 거짓 선지자들은 스스로 온 것이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도 없었고 메시지도 없었다(렘 23:21).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임을 는 대단히 강조하고 계신다.
--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신임을 받으셨고 또 그의 교훈을 받으셨다. 또한 그는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11:52) 또한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하여"오셨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다 이러한 사명을 띠고 그들의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자를 양 팔을 벌려 영접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자기들이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도 없음을 나타내었다.
둘째, 그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 그들이 하나님의 가정에서 사용되는 언어와 변증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그들이 그 가정에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그러므로 그는 ‘텐 랄리안 텐 에멘’ - 즉 너희가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 말씀은 신적인 것이요, 하늘 나라에 속한 것이었다. 그러나 구약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음성에 친숙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납득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창조주의 말씀을 친숙하게 가까이 한 사람들은 구속자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다른 열쇠가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생소하였고 그 가운데서 문제 의식만을 느끼고 있었다. 어떤 거침들이 저희를 넘어지게 하였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갈릴리 사람은 그 말만 듣고도 갈릴리 사람인가 아닌가가 드러나는 법이다. 에브라임라 지파는 십볼렏( Sibboleth)이란 용어를 정확히 발음할 수 있어야 에브라임 지파로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하나님의 성령의 말씀에 감동되어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계신데 그를 야만인 취급하는 경우가 성립될 수 있느냐는 말이다.
-- 하나님의 말씀에 친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이 신적 본질에 대하여도 낯선 자가 되어 있지 않는가 하는 점을 두려워할 이유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의 방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3:34). 그런데 자칭 그 나라에 속해 있다고 하는 자들이 그 나라의 관용이나 성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방인이나 부랑아처럼 그 말씀을 비웃었다. 이제 그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들을 더욱 구제할 수 없는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는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라"고 말씀하신다. 즉 다음과 같은 뜻이다. "너희가 내 말을 주의 깊게 또한 공정하게 편견 없이 들어보려고 노력도 하지 않는도다. 본문의 "들을 줄 알지 못함"(Cannot)의 뜻은 거만하여 "고의적으로 듣지 않으려 함"을 뜻한다. 마치 유대인들이 스데반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한 것이나(행 7:57) 바울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한 것(행 22:22)과 마찬가지였다.
-- 그리스도의 교훈에 대한 인간들의 부패한 마음에서 비롯된 뿌리 깊은 반감이 그의 말씀에 대하여 무지할 수밖에 없고 그것에 대하여 오류와 실수를 범하게 되는 진정한 이유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들은 그의 교훈을 좋아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교훈을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마치 베드로가 여종이 그에게 질문할 때에 사실은 자기가 그 말을 이해하였으나 그 말에 무엇이라고 답변할 줄 몰랐던 것인데도 마치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둘러댄 것과 같다. 즉 이는 "너희가 너희 귀를 막았기 때문에 내 말을 깨달을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의 말씀인 것이다(시 8:4, 5). 또한 하나님이 그의 의의 심판의 방법으로 "너희의 귀를 막어버린"탓이라는 뜻의 말씀이다(사 6:10).
Ⅲ. 그들이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님을 논증하신 다음에 그는 그들이 누구의 자녀인가를 명백하게 말씀하신다. 본문에 보면 그는 그들을 가리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 낳았다"(44절)고 하신다.
--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그들은 악마의 자녀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사탄은 인간 세계에서 각각 다르게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마는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서 역사한다"고 말씀되고 있다(엡 2:2). 모든 악한 백성들은 악마의 자녀들이요, "벨리알의 자녀들이요"(고후 6:15), 독사의 자손들이요(창 3:15), 행악하는 자의 자녀들인 것이다(마 13:38). 그들은 사탄의 본성을 지녔고 그의 형상을 닮았으며 그의 명령에 복종하고 그의 본을 따른다. 우상 숭배자들은 "나무를 향하여 너는 나의 아비"라고 말하였다(렘 2:27).
-- 이 말은 대단한 도전이요 또한 매우 거칠고 무섭게 들린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인간들, 특별히 교인들까지도 "악마의 자녀"라고 불리울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우리의 구세주는 이 사실을 완벽하게 존중하신다.
1. 그는 보편적 논법을 통하여 이 사실을 논하신다. 그는 본문에 보면 ‘델레테 포이에인’(8:44) - 즉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한다고 말씀하신다. 다음과 같은 뜻의 말씀이다.
(1) "너희가 악마의 소욕대로 행한다. 그는 자기의 욕심을 너희 속에 채우려 하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그를 만족케 하며 기쁘게해 주는도다. 그리고 그의 유혹에 따라 그의 노예가 되어 그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악마가 성취하고 싶어하는 욕심을 행하고 있다. 악마는 사람들로 육적인 욕망과 세상적 욕망에 따라 행하게 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는 영적 존재이므로 독자적으로 그것을 실현시키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악마가 특별히 갖고 있는 소망은 너희를 통하여 영적 행악을 실현하는 것이다. 지적 권세에 대한 욕망, 타락한 이론 추구, 거만, 질투, 분냄, 추행, 선에 대한 원한, 다른 자들을 악으로 유인하는 것, 이런 것들이 악마가 이루려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의 지배 아래 있는 자들은 마치 자녀가 그 부모를 닮는 것처럼 악마를 닮아가는 것으로, 죄 가운데서 죄를 도모하고 계획하고 거기서 은밀한 만족을 누릴수록 더욱 악마의 소욕과 닮는 것이다.
(2) "너희가 악마의 소욕대로 행하기를 바랄 것이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 이러한 욕망에 대하여 바라면 바랄수록 그들 안에 악마가 자리를 잡게 된다. 죄로 우연히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지을 때 또한 자발적으로 죄를 짓지는 않아도 죄를 짓는 데서 기쁨을 느낄 때 또한 "우리가 이방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따라 가리라"고 말한 무리들처럼 과감한 억측과 필사적인 결단을 통하여 죄를 고집할 때 이러한 죄인들을 가리켜 악마의 소욕대로 행하기를 바라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더 나아가 "너희가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행하기를 기뻐하는 도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몬드 박사(Dr. Hormmond)도 이렇게 해석한다. 이러한 욕망들이란 혀 아래서 꿀처럼 달콤하게 느껴지게 마련인 것이다.
2. 그는 두 가지 특별한 실례를 들어 이 사실을 논증하신다. 이 행위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악마와 닮았음을 명백해 나타내 보였다. 즉 "살인과 거짓"이었다.
-- 악마는 생명에 대한 원수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요, 생명은 인간의 행복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또한 악마는 진리에 대한 원수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요, 진리는 인간, 사회의 유대를 유지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 악마는 "태초로부터 살인한 자"였다.
-- 그러나 이 말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살인자라는 말씀은 아니다. 왜냐하면 원래 그는 빛의 천사로 창조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순수한 것과 선한 것 속의 첫 상속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간이 창조된 후 곧 그의 반역은 시작되었고 그때 그는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그는 ‘안드로포크토노스’(8:44) - 즉 살인한 자였다.
① 그는 인간을 증오하는 자였다.
-- 그는 인간을 살해하는데 취미가 있었고 또 그 일을 사랑하였다. 원래 "사탄"이라는 그의 이름도 stinah - 즉 증오하는 데서 유래된 것이었다. 그는 인간에게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증오하였다. 또한 그는 인간의 행복을 시기하고 인간을 파멸시키기를 열심히 바랬다. 그는 전 인류에 대한 공인된 원수였다.
② 그는 세상에 죽음을 오게 한 그 죄로 인간을 유혹하는 유혹자였다.
-- 그러므로 그는 전 인류에 대한 실력 있는 살인자였다. 즉 영혼을 죄 가운데로 유인하여 그 죄로 영혼을 살해하는 자였다(롬 7:11). 그는 금단의 열매로 인간을 독살하며 사태를 악화시켜서 인간으로 자신에 대한 살인자가 되게 한다. 이같이 그는 태초에 한 번만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그 이후로 계속 살인을 저질러 왔다. 그는 인간을 유혹하여 살해하는 것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대유혹자는 곧 대파괴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악마를 죽음의 천사"라고 부른다.
③ 그는 가인에 의하여 수행된 첫 살인의 주동자였다.
-- 가인은 악한자에게 속하여 그의 형제를 죽였다(요일 3:12). 만일 악마가 가인에게서 강하게 역사하지 않았다면 그의 형제를 죽이는 것과 같은 자연스럽지 못한 짓을 저질렀을 리는 만무하였다. 가인은 살인자라고 불리우는 악마의 교사를 받아 그의 형제를 살해하였다. 악마의 교사를 받았다고 가인의 죄에 대한 책임이 약화된다는 뜻은 아니다.
--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오니까 악마의 살인 행위도 늘어날 것이고, 그 희생물도 더욱 늘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추론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죄악 속으로 그는 인간을 끌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악마의 계교를 쳐부수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여 보자(그는 살인자이기 때문에 그가 그럴듯한 말을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해를 가할 목적으로 하는 말이 틀림없는 것이다). 또한 인간들의 살해자인 그가 인간들의 수락에 의하여 아직도 그들의 주인 행세를 한다 것을 기이하게 여기지 말자.
-- 본문에 보면 유대인들이 악마의 추종자들이요, 그처럼 살인자들임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장님을 구덩이에 빠지게 하는 영혼에 대한 살인자들이고 사람들을 지옥의 자녀로 만들며, 그리스도에 대해 서원 한 적수로 만들고 그리스도에 대한 배신자와 살인자가 되게 하는 자들이다. 같은 이유 때문에 가인도 아벨을 죽였다. 이들 유대인들은 "여인의 발 뒷꿈치를 물었던 독사의 자손들이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나를 죽이려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2) 그는 "거짓말장이"였다.
-- 거짓말은 진리와는 상반된다(요일 2:21). 따라서 본문에 악마가 거짓말장이로 묘사되고 있다.
① 그는 진리에 대한 원수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원수이기도 한 것이다.
첫째, 그는 진리로부터의 도망자였다.
-- "그는 진리안에 거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창조되었던 본래의 순수하고 청렴한 본성에 계속 머무르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본래의 상태에서 이탈하였다. 그는 선으로부터 타락하게 되자 진리에서도 이탈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배반은 거짓말에 근거를 둔 것이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여호와의 군대"였다. 그러나 타락한 자들은 그들의 지휘자와 통치자에게 진실하지 않은 것이며 신뢰될 수 없는 무리들인 것이다. 그들은 어리석은 자요, 변절자인 것이다(욥 4:18).
-- 진리에 의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이해하게 된다. 이 진리를 그리스도는 가르치셨고 유대인들은 반대한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아비 악마를 좋아하였다. 그런데 이 악마는 하나님이 "첫 아담"에게 주신 존귀를 보고 또 "둘째 아담"에게 주실 더 큰 영예를 예견하고서 하나님의 뜻에 화합하려 하지 아니하였고, 그 뜻에 관한 "진리 가운데 거하려" 하지도 아니하였다. 다만 오만과 질투의 화염에 쌓여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고 그 의도를 훼방하였다. 이제 유대인들이 악마의 자녀와 파견자로서 본문에 보면 이러한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그는 진리에 대한 "파괴자"였다.
-- "그에게는 진리가 없었다." 세상에 대한 그의 욕심은 거짓과 위선에 의하여 지원되고 있는 속에, 또는 그가 말하고 행하는 것 속에 진리는 없다. 그리고, 또 우리가 믿을 만한 것도 없다. 선과 악에 대하여 선전하는 말들은 거짓이요, 오류투성이며, 그가 제시하는 증거는 거짓된 기적이요, 그의 달콤한 말은 모두 속임수이다. 그는 진리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하여 원수였으므로 "그 안에 진리가 없다"고 말씀된 것이다.
② 그는 거짓의 친구요 후원자이다.
-- "그가 거짓말을 하면 그것은 그의 내면에서 울어나는 것이었다." 거짓에 대하여 말하는 가운데 본문에 악마의 거짓에 대한 세 가지 사실이 언급되고 있다.
첫째, 그가 거짓말장이라는 사실이 언급된다.
-- 그의 점은 거짓점이다. 그의 선지자들은 거짓된 선지자들이요, 그에 대한 숭배의 상징으로 만들어진 우상은 "거짓말의 교사들"이다. 그는 완전한 거짓말을 우리의 첫 번 선조를 속였다. 모든 그의 유혹은 "악을 선이라고 하며 또한 선을 악이라"고 하는 거짓말에 의하여 수행된다. 그리고 죄를 지어도 용서된다는 거짓된 약속에 의하여 추진된다. 그는 그의 말이 거짓임을 안다. 그러나 인간들을 속여서 파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거짓말을 우리에게 한다. 그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가운데 복음을 싫어하는 마음을 집어넣은 것도 거짓말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후에 죄인들을 통하여 복음을 타락시킨 것도(천주교를 의미하려는 것이다 :역주) 강한 기만 곧 교묘란 거짓말에 의해서였다.
둘째, 그는 거짓을 말할 때마다 그 거짓은 그의 속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에크 톤 이디온, “제것으로”).
--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제 속에서 나온 말을 하는 것"이 사단의 본래의 모습이다. 그렇다고 그를 창조하신 분이 그의 마음에 거짓을 불어넣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사람들은 악마에게서 그 거짓말을 빌려다 쓴다. 그러므로 말씀되기를 "사람이 저희의 마음을 거짓으로 가득 채웠다"고 하였다(행 5:3). 사람들은 이같이 사탄에게서 거짓말을 빌려오지만 악마가 거짓말을 할 때 그 거짓말의 모형은 바로 그의 구조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겠다. 또한 거짓말의 동기도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 이 사실은 배반한 영혼들이(악마를) 사로잡혀 있는 악의 절망적인 깊이가 어떠함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그들이 처음 하나님을 배반할 때도 그들을 유혹한 존재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가득 찬 죄도 자신들 속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째, 그는 거짓의 아비(아우투)였다는 점이다.
a. 그는 모든 거짓의 아비이다.
-- 그는 자신만 거짓말을 하는데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거짓을 하게 만들었다. 그는 모든 거짓의 주인공이요 개척자이다. 인간등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그에게서 빌린 것이요, 바로 그의 입을 통하여 말하는 것이다. 거짓은 본래 그에게서 유래된 것이요, 사탄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b. 그는 "모든 거짓말장이의 아비"이다.
-- 이렇게 표현할 때 본문은 더 잘 이해된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창조할 때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다. 우리가 진리를 말한다는 것은 이성이나 자연의 법칙, 우리의 능력의 한계 또는 사회 법칙에 일치한다. 그러나 죄의 원흉이며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 역사 하는 영인 악마는 인간의 본성을 타락시킴으로 악한 자들에 대하여 말씀하기를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라고 하였다(시 58:3). 그는 인간들로"그들의 혀를 속이는데 사용하도록"가르쳤다(롬 3:13). 그는 거짓말장이의 아비이다. 그가 거짓말장이들을 낳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를 닮았고 그에게 복종한다. 그와 함께 모든 거짓말장이들은 영원히 그들의 몫을 받게 될 것이다.
Ⅳ. 그리스도는 이같이 모든 살인자들과 거짓말장이들이 악마의 자녀들임을 입증하신 후에 이 말에 대한 판단은 청중들의 양심에 맡기셨다.
-- 그는 그들이 "당신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분이로소이다"라고 말하게 되기를 바라셨다. 그는 그들이 자기의 말을 그들 자신들의 입장에 적용하기를 바라셔서 다음 구절들을 통하여 힌트를 주시었다. 그는 그들을 "거짓말장이"라고 부르지 않으신다. 다만 그들이 "진리에 대한 친구가 아님"을 보여 주신다. 그리고 그들이"진리 안에 거하지 않는" 그자와 같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악마의 속에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두 가지 점을 그들에게 책망하신다.
1. 그들이 "진리의 말씀을 믿으려"하지 않는다는 점을 책망하셨다(45절). ‘호티 텐 알레데이안 레고 우 피스튜에테 모이’.
(1) 그의 말씀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①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하지만 너희가 나를 즉 내가 진리를 말한다는 사실을 (o{ti)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말로 생각해 볼 수 있다.
--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을 받으셨다는 사실과 인간들에 대한 그의 사랑을 충분히 입증하셨지만 그들은 그가 그들에게 진리를 말하였음을 믿으려 하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진리가 거리에 엎드러진" 시기였기 때문이었다(사 59:14, 15). 어떤 자들은 가장 위대한 진리도 조금도 신뢰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욥 24:13). 또는 본문은,
②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하였기 때문에(우리는 현재 그러한 뜻으로 번역하여 읽고 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않았다"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잇다.
-- 그들은 그를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았고 선지자로서 영접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그들에게 그들이 듣기 싫은 불쾌한 진리를 말하였고, 또한 그들과 그들 자신의 입장에 관한 진리를 말하였고 아첨할 줄 모르는 거울에 그들이 얼굴을 비추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까닭에 그들은 그가 말한 것은 한 마디도 믿지 않으려 하였다. 신적 진리의 빛이 고통스럽게 여겨지는 자들이야 말로 불쌍한 자들이다.
(2) 그들에게 그들의 불신의 비합리성을 보여 주기 위하여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은 정당한 주장을 통하여 친절히 설명하신다(46절). 그와 그들 사이는 심각한 대립 상태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잘못 되었거나 그들이 잘못되었던 둘 중의 한 경우일 것이다. 두 가지 측면에서 각각 고찰하여 보자.
① 만일 그가 잘못되었다면 어째서 그들이 그를 바른 확신을 갖도록 하지 못하였는가? 하는 문제부터 생각하여 보자.
--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됨은 그들의 가르침의 악한 경향에 의하여(신 13:2). 또는 그들의 말의 잘못된 방향에 의하여 드러난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지자로 판단하는 산헤드린의 회원인 너희들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그를 악한 여러 죄목 즉 먹기를 탐한다든가, 술에 취하였는가, 안식일을 범하였다든가, 사탄과 연합하였든가의 이유를 들어 그를 고소하였었다. 그러나 그들의 고소는 악의에 찬 근거 없는 비방이었고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러한 고소들이 전혀 거짓이란 사실을 알았다. 그들이 그에게 어떤 죄라도 찾아 내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간교와 계락, 위중과 술책을 썼으나 오히려 그를 정죄한 그 재판에 의하여 그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다는 사실이 인정되었다. 그는 본문에서 그들이 자기에게 책잡는 죄가 어떤 것이냐고 다음과 같이 도전하신다.
첫째, "내 교훈이 일치하지 않는가?"라고 물으신다.
-- 그들은 그의 증언을 들어왔다. 그 결과 그들이 그의 교훈 가운데서 믿기에 불합리한 것이라든가 무가치한 것 또는 예수 자신이나 성서와 그의 이론이 불일치하는 것 또는 그의 가르침에 의하여 제시된 진리나 교훈의 전달 방법에 부패된 요소가 있는가 제시해 보라는 말씀이다(18:20). 또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도 볼 수 있다.
둘째, "내 교훈이 논리에 모순이 있는가?"라고 힐문하신다.
-- "너희 중에 누가 나의 말과 행동에 있어서 선지자답지 않은 요소를 공정한 입장에서 지적할 수 있느냐?"고 물으신다. 여기서 우리는 주 예수님의 놀라운 낮추심을 배우도록 하자. 그는 자신을 무리하게 믿어 달라고 요구하지 않으셨다(렘 2:5, 31; 미 6:3 참조). 여기서 사역자들이 배울 점은 다음과 같다.
a. 가장 날카로운 주시자에게도 사역자들에게 죄가 있다는 확신을 주지 않도록, 또한 "그들의 사역이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b. 세심한 주시자들의 주도면밀한 관찰을 기꺼이 인정하자는 점이다.
-- 우리가 많은 일에 옳다고 자신을 가질 수 있겠지만 우리는 혹시 자신이 오류를 범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점을 타인들로부터 기꺼이 지적 받을 수 있어야 한다(욥 6:24 참조).
② 만일 그들의 잘못이라면 어째서 그들이 그에 의하여 바른 확신을 제공받으려 하지 아니하였는가? 하는 문제이다.
-- 본문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너희가 내 잘못을 지적할 수 없다면 너희는 내가 진리를 말한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희에게는 내 말을 수긍한다는 표시가 없는가? 어찌하여 너희는 나를 믿지 아니하려 하는가?" 만일 사람들이 그들의 불신의 이유를 반성하여 보고 그들이 반박할 수 없는 진리를 왜 믿지 못하는지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자신들의 모순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 다음에는 수치를 느낄 수밖에 없으리란 것을 기억하자.
--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죄에서 떠나기 싫어하기 때문이며, 우리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충분히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기독교 신앙에 속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 신앙에 속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우리 구세주에 대한 불신은 우리 창조주에 대한 근원적인 반항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2. 그들에게 추궁된 다른 문제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47절). 그것은 하나님에게 속하여 있다는 주장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잇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 한 원칙이 제시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사실이며 곧 다음과 같은 뜻이다.
① 그는 그것을 기꺼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잇다는 말이다.
--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이 어떠한가를 알려고 갈망하며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여기지는 것은 무엇이든 기쁘게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말씀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모든 자에게 권위를 지니며 또 그들에게 납득이 된다. 그들은 어린 사무엘이 "말씀하소서, 당신의 종이 듣나이다"하고 말했던 것처럼 그 말씀을 받아들인다.
② 그는 그 말씀을 "이해하고 식별한다"는 말씀이다.
--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그 속에서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그것은 자연인이 들을 수 없는 것이다(고전 2:14).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인간들에게 가깝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곧 알아차린다(시 75:1). 가족들이 그 주인을 발 소리와 문 두드리는 소리를 알고 즉시 문을 열어 주듯이(슥 12:36), 또는 양들이 낯선 자와 구별하여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고 있는 것처럼(10:45; 막 2:8) 말이다.
(2) 이 원칙의 목적. 그것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신앙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너희는 그 말씀들을 듣지 않고 있다. 곧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았고, 이해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들을 조심스럽게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들에 대한 너희의 귀먹고 죽어 잇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 하나님께서 자신을 밝혀 주시고 우리 속에 현재하시는 것은 그의 말씀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좋게 여기느냐 나쁘게 여기느냐에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않는가의 문제가 결정된다(고후 4:4; 요일 4:6 참조). 또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하지 않았고. 믿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말씀이 모호하거나, 증거가 결핍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아니었고 중생하지 못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 나라의 말씀이 어떤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잘못은 그 씨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흙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의해 나타나고 있다(마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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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바리새인들과의 논쟁(5)(요 8:48-50)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우리 주 예수에게 던졌던 그 비열한 어조 속에서 악마의 악의가 번득이고 잇다. 지금까지 그들은 그의 가르침을 트집잡았었다. 그리고 그의 교훈에 근거없는 비난들을 가하였었다. 그가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을 때(43,47절) 그들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결국 노골적으로 성을 내게 된다(48절). 그들은 평민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당시 영향력을 행세하였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완고한 죄악에 대하여 선고를 받게 되자 다음과 같은 말로 그 선고를 피하여 버렸다.
--  "우리가 당신을 사마리아 사람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그 말이 옳지 않소?" 이들의 가증된 태도에 우리는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1. 사악한 유대인들이 우리 주 예수를 일반적으로 무엇이라고 비난하는가 하는 전이 저희의 말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1) 그를 사마리아인이라고 하였다.
-- 곧 그들은 그를 교회와 국가의 적으로 취급하였다. 그들은 그를 미워했고 참을 수 없는 자로 여겼다. 따라서 그들은 그 백성의 악평을 그에게 전해 주었다. 유대 사회에서 사마리이인이었다면(그들이 그렇게 불렀듯이), 성전에 들어온 것 때문에 벌을 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자주 그를 "갈릴리인"이라고 불렀었다. 그 의미는 "비천한 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았음인지, 스스로 언어의 모순을 초래하면서까지 그를 "사마리아인"들을 비난의 뜻에서 cuthoei -즉 사마리아인들이라고 부른다.
-- 훌륭한 사람들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일은 어느 시대에나 흔히 있는 일임을 기억하자. 일단 누명을 쓴 사람을 군중들을 동원하여 매장하여 버리는 것은 쉬운 일임을 기억하자. 아마도 그리스도가 제사장들과 원로들의 교만과 파괴하고 개혁을 노리고 있으며 또한 성전을 사마리아인에게 넘겨버리려 한다고 뒤집어 씌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2) 그가 귀신들렸다고 하였다. 이 말은 다음 둘 중의 한뜻일 것이다.
① 그가 "귀신과 결속하고 있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다.
-- 사마리아인 주위에 기울어지고 있다고 그의 가르침을 비난한 후 여기서 그들은 그의 기적을 바알세볼과 결탁하여 행한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또는,
② 그가 귀신에 씌웠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다.
-- 즉 그가 우울증 환자라는 말이다. 곧 그의 머리가 흐리멍텅했고 그는 미친자이며 그의 두뇌는 열에 들뜬 상태여서 그가 말했던 것은 왜곡된 미친 사람 혹은 환각에 빠진 사람외에는 더 이상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성을 초월하는 신의 계시는 때때로 광신주의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선지자들도 "미친 자들"이라고 불리워졌다(왕하 9:11; 호 9:7). 이교도들의 신탁과 그들의 예언자들의 신탁은 광적 상태에서 실현된다. 그리고 이러한 신탁을 전수 받는 자들이 당시에는 그들 옆에 있었다. 그러나 참으로 신적인 계시는 그렇지 않았다. "지혜는 그 자녀들에 의해 인정을 받는 법이다"라는 말은 과연 옳은 말이다.
2. 그들이 이러한 성격을 예수에게 전가시키고 그것을 현재의 여건에 응용한 방법.
그들은 "우리가 당신이 그렇다고 말한 것이 옳은 것이 아니오?"라고 말한다. 누구나 그의 훌륭한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그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고 그들로 복종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의 마음은 한결 굳어졌고, 그들의 편견은 한층 강화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결코 좋게 평한 적이 없었다.
-- 최고의 악한 상태에 도달한 자들은 불경건하게 산다고 공공연하게 선서하며 그들이 철회해야 마땅한 것을 계속 수행하며 그 때문에 그들이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이유를 제시하여 오히려 그들을 정당화한다. 나쁜 것을 말하고 불의를 행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자랑하는 것은 더욱 나쁘다. 즉 '화를 낸 것은 잘 한 일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 그리스도께서 그 지도적 인물들의 죄에 대해 과감히 말씀하고 이로써 그들로 그를 박해하는 요인이 되게 했을 때, 세속적이고 육욕적인 것 외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자들은, 예수가 미쳤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미친사람외에는 아무도 자기 영달을 상실 당하거나도 그의 신앙과 양심 때문에 자기 생명을 위태하게 하는 짓은 안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Ⅱ. 이러한 비열한 비방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 속에서 빛나고 있는 하늘 나라의 자비와 긍휼(49,50절).
1. 그는 자기에 대한 그들의 항변을 부정하신다.
-- 그는 바울이 그리하였듯이(행 26:25) "나는 귀신들리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그 비난은 온당치 못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은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나는 악마에 의해 행동하지도 않았고 악마와 결속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이 사실을 그가 악마의 왕국에 대항해서 행했던 사례를 제시하므로 증거 하였다. 그는 그들이 자기를 사마리아인으로 부르는 것을 문제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비방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생각에 불과한 것으로 고려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사업을 악마의 위임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데 대하여는 해명을 하셨다. ***성어거스틴(St. Augustine)은 그의 주석에서 그들이 예수를 사마리아인이라고 칭한데 대하여 그가 답변하지 않은 것은 진실로 자신이 그의 비유 속에서 말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2. 그는 자신의 의도의 신실성을 주장한다.
-- 그러므로 그는 "오히려 나는 내 아버지를 공경하려 한다"고 말씀한다. 그들은 그가 스스로 부당한 명예를 취했다고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명예를 찬탈했다고 생각했다. 본문에서 그는 이러한 견해들을 그의 사업이 그의 아버지만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부정하고 잇다. 이 사실을 통하여 그가 귀신들리지 않았다는 것이 입증된다. 왜냐하면 그가 귀신들렸다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라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 자들은 인간들의 중상과 비방에 대해 충분히 무장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3. 그는 그들의 자기에 대한 무고(誣告)한 잘못을 비난한다.
-- 그러므로 본문에 "너희가 나를 비난하는 도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사실을 통하여 그가 자기에게 가해진 모욕과 명예 손상에 대하여 인간의 입장에서 가벼운 반응을 보이신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들의 비난은 그의 뼈를 깍는 칼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참으셨다. "모든 사람들이 아들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 그러나 그의 명예을 훼손시키는 많은 무리들이 있다. 이러한 무리들의 비뚤어진 생각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려는 인간의 육적 마음에 깃들어 잇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 어떤 인간도 따를 수 없는 만치 아버지를 영예롭게 해드렸다. 그럼에도 한편 그는 어떤 인간도 받지 못하였던 모욕을 스스로 당하시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를 영예롭게 하게 되리란 약속은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4. 그는 자신에 관한 본문의 말씀 속에서 그가 허영을 추구한다는 비난을 반증하시었다(50절).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1) 세상적 영예에 대한 그의 "경멸."
-- 그러므로 그는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한다"고 말씀하셨다. 그의 자신에 대한 말씀에서나 박해자들에 대한 항변 속에서 그는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셨다. 그는 인간들의 찬사를 구치 아니하였고 세상에서의 출세를 탐내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는 이것들을 싫어하셨다.
-- 그는 아버지의 영광과 관계 없이는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셨다. 또한 아버지와 별도의 이익을 추구하지도 않으셨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스스로 구하는 영광은 참된 영광이 아니기 때문이며(잠 25:27) 그들의 목표하는 바와는 전혀 다르게 수치를 당하게 된다. 이것이 본문에서 그리스도가 그들의 비난을 가볍게 생각하신 이유라고 하겠다.
-- "너희가 나를 비난하려 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동요시킬 수 없고 또 앞으로도 나를 불안하게 만들 수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찬사에 대하여 무관심한 사람들은 그들의 경멸에 대하여 서로 안연히 견딜 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 세상적 치욕 속에서 그가 받은 위로.
-- 그 이유는 그의 영광을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는 두 가지 사실을 들어 그가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시하신다. 그리고 그는 이 두 가지 사실 속에서 자기를 만족케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말씀해 주신다.
① 그는 인간의 존경을 구치 아니하였고 그것에 대하여 무관심하였다.
-- 이 문제를 그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나의 영광에 개의하지 않더라도 내가 사람들의 경의와 애정을 받도록 나의 영광를 구하고 보장하며 인도하는 분이 있도다." 하나님은 자기의 영예를 구하지 않는 사람들의 영예를 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영광 앞에는 반드시 겸손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② 그는 인간의 도전에 대하여 보복하지 않으셨다.
-- 그러므로 본문에 "판단하는 이가 계시니 그가 네 영예를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말씀한다. 만일 우리가 겸손한 항고인이 되어 참을성 있게 기다리면 우리는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판단하시는 이가 계심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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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요 8:51-59)
Ⅰ. 믿는 자들의 불멸에 대한 그리스도의 교훈(51절). 본문의 말씀은 예수께서 잘 사용하시는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란 서두로 본론에 도입되고 있다. 이 서두의 말씀은 듣는 이들의 경청과 또 수락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말씀하시고자 한 내용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는 것이었다.
1. 믿는 자의 특징.
-- 그는 주 예수의 "말씀을 지키는"자이다. 본문에는 ‘톤 에몬 로곤’ -즉 나의 말씀으로 되어 있다. 즉 내가 너희에게 전해 주는 "나의 말"이라는 뜻이다. 이 말씀을 우리는 받을 뿐만 아니라 간직해야 한다. 또한 간직할 뿐만 아니라 지켜야 한다. 우리는 그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기억하며 사랑과 열정을 가지고 보존해야 한다. 그 말씀을 침해하는 또는 그것과 대립되는 어떤 요소도 작용하지 못하도록 간직하고, "흠 없이" 간직하며(딤전 6:14), 우리에게 믿고 위탁된 것으로 간직해야 하며, 어디를 가든지 그것을 간직하고, 우리의 인생의 준칙으로 삼아야 한다.
2. 믿는 자의 특권.
-- "그는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할 것이다." 타락하지 않은 인간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렇다고 믿는 자들의 육체가 죽음을 면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지존한 분의 자녀들도 사람처럼 죽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추종자들도 오히려 다른 사람들 이상으로 자주 죽고 또 "종일토록 죽임을 당해야"하는 것이다. 그러면 믿는 자들이 죽음을 보지 아니할 것이라는 약속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옳겠는가?
(1) 죽음의 개념이 신자들에게는 변경된다.
-- 그들은 죽음을 죽음으로 보지 않으며 죽음을 두렵게 여기지 아니한다. 그 두려움은 그들에게서 완전히 제거된다. 그들의 시야는 육적 감각만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처럼 죽음 앞에서 종결되지 아니한다. 오히려 그들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초월하여 명백하게 또한 담담하게 앞을 바라본다. 그리고 죽음 저편에 있는 그들의 생활에 관심을 갖는다. 그들은 죽음을 무시하고 보지 않는다.
(2) 그들 앞에서 죽음의 세력은 부서지고 만다.
-- 비록 죽음을 면케 하는 약은 없고 누구나 죽음을 보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영원히 죽음을 보지 못 할 것이요. 항상 죽음에 붙들려 있는 일은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이 이김에 삼키울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들은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옮기워 졌다. 그리고 "두 번째 죽음의 해(害)을 입지 아니할 것이다."
-- 본문에서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는 죽음은 특별히 이 두 번째 죽음을 말한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과는 상반되는 개념이다. 신자들은 이 죽음을 결코 맛보지 아니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정죄함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이상 죽음이 없는 곳에서 또 "그들이 영원히 죽지 아니할 곳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눅 20:36). 현 세상에서는 그들이 죽음을 피할 수 없고 그것을 맛보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들은 곧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할"곳에서 살게 될 것이다(출 14:13).
Ⅱ. 유대인들의 이 가르침에 대한 비난.
-- 불멸에 대한 이 귀중한 약속을 간직하는 대신(생명을 사랑하고 죽음이 닥치는 갓을 두려워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바라는 것임에도)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이 친절한 제안을 그를 비난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금 네가 귀신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도 죽지 아니하였는가?"라고 말한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저희들의 조롱.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지금 네가 귀신들린 줄을 우리가 아노라. 너는 미치광이이며 허풍장이이며 알지도 못하는 말을 지껄이는 자이다."
-- 귀중한 진주와 같은 복음의 약속들을 이 돼지떼들이 어떻게 짓밟았는가를 생각하여 보자. 정말로 그들은 이제 그가 미쳤다는 사실을 입증할 증거물을 잡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였다면, 그들은 증거를 잡기 이전에도 어찌하여 "너는 귀신이 들렸다"(48절)은 말을 하였는가?하는 점이 문제이다. 이 사실 속에서 그들의 말은 비난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먼저 아무렇게나 말을 지꺼려 놓고 다음에 그 말을 입증할 건덕지를 낚시질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우리가 아노라"고 답변하였다. 만일 그가 자신이 "하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입증하지 못했다면 그를 쉽사리 믿었던 그의 추종자들에게까지 불멸에 대한 그의 약속은 조롱을 받았을 것이요. 자비를 베푼다는 그의 약속도 한낱 미치광이의 환상으로 간주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교훈은 분명히 신적인 것이었다. 그가 행한 기적이 그 사실을 뒷받쳐 주었다.
-- 유대인들의 신앙은 그들에게 이러한 선지자를 고대할 것과 그를 믿을 것을 가르쳤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같이 그를 거절하는 것은 그들의 "열두 지파들이 오리라고 희망하였던" 그 약속을 포기하는 곳과 같은 것이었다(행 26:7).
2. 그들이 제시한 논리. 그들의 이론의 의도는 이렇게 하여 "그를 없이하려는 것이었다." 결국 그들은 "그가 자기를 아브라함이나 선지자들"보다 더 높은 자라고 칭하므로 용서 할 수 없는 오만죄를 범하였다고 생각하였다.
-- 그들의 논리는 "아브라함이 죽었고 선지자들도 죽었으니 그들도 죽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논리는 정연하다. 그러나 바로 이 논리에 의하여 그들은 자기들이 조상을 죽인 자들 곧 사탄의 자손임을 증명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논리의 정연함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1) 아브라함과 선지자들이 위인들이란 점. 그들이 하나님의 대단한 사랑을 받고 인간들도 대단히 그들을 사랑하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2)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고" 그 말씀에 복종하였다는 것도 사실이다.
(3) 또한 그들이 죽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 그들은 불멸을 지닌 척하지도 않았으며 더구나 남에게 불멸을 줄 수는 없었다. 그들도 하나씩 그의 차례가 되면 "그들의 조상이 잠든 곳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믿음 안에서 죽었다는 것은 그들의 영예였다. 그러나 역시 그들도 죽어야만 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브라함이 죽고 선지자들이 죽었다면 구태여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 그들의 논법이나, 그들은 그들이 걸어간 어두운 골짜기를 뒤따르려고 하였다. 이러한 생각도 우리를 죽음과 화해케 하고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기는 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그들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가 미치광이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였다. 죽음을 "맛본다는"는 말은 죽음을 경험한다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점에서 죽음은 슬픈 것이 틀림없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파멸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의 논리의 두 가지 잘못을 지적해 보고 지나가자.
① 그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 세상에서의 불멸로 이해한 점이다.
-- 이것이 그들의 실수였다. 그리스도의 논법에 따르면 아브라함과 선지자들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금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거룩한 선지자들의 하나님이며" (계 22:6) 또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브라함과 선지자들은 지금도 살아있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생각대로 그들은 죽음을 "보지도 맛보지도 않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② 그들은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보다 위대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 물론 그들은 아브라함이나 어떤 선지자들보다 메시야가 위대하다는 사실은 수긍하였다. 아브라함이나 선지자들도 위대하였으나 메시야는 이들 모두를 능가하였다. 정확히 말해서 그들은 그에게서 그들의 위대함을 빌린 것이라고 봄이 옳겠다. 아브라함이 메시야의 아버지라는 것은 그의 명예였다. 선지자들 또한 그가 오시기 전에 미리 그에 관하여 맛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영예였다. 그러므로 그가 "그들보다 더욱 뛰어난 이름을 얻으셔야 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유대인의 실수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아브라함보다 위대하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에게 악마가 들렸다고 말하는 대신에(아브라함이나 어떤 선지자들도 지금껏 이루지 못한 업적을 그가 이루신 것을 통하여) 그의 말이 옳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은 멀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랄하게 "너는 너로 누구라 하느냐?"라고 묻는다.. 마치 그가 오만과 허영의 죄를 범하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현재의 외견상으로 그리스도는 자신의 위대함을 확실히 보이신 것은 아니었다. 그의 영광은 베일로 가리워져 있었고 그는 자신을 비우시사 선재시의 그보다 자신을 훨씬 낮추셨으며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겸손의 위대한 본을 보여 주셨다.

Ⅲ. 이 모함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

-- 아직도 그리스도는 모든 입이 할 말을 잃을 때까지 그들과 변논하는 것을 허용하신다. 물론 하시고자 하면 그는 그 자리에서 그들을 벙어리가 되게 하거나 죽이실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인종(忍從)의 때"였으므로 참으셨다.

1. 답변에 있어서 예수는 자기에 관한 자신의 증언을 반복하여 주장하지 아니한다. 

-- 오히려 그는 증언이 충분하거나 결정적인 것이 아니기나 한 것처럼 그의 증언을 포기하신다. 그리고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로 말씀의 방향을 돌리신다.  ***본문은 희랍어 사본에는 ‘에안 에고 독사소’(8:54)로 되어 있다. 

-- 자화자찬이란 명예가 될 수 없음을 기억하자. 영예를 지닌 것처럼 꾸미는 것은 그것을 상실해 버렸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영광이 될 수 없다"(잠 25:27). 그러나 또한 자화자찬하는 일이 비난을 받을까 보아 그 사실을 부지런히 감추려하는 것은 더 큰 죄이다. 사실 남의 칭찬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도 남들에게 그렇게 여겨지는 것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영예는 키메라(희랍 신화에 나오는 사자의 머리, 염소의 몸, 뱀의 꼬리를 한 불을 뿜는 괴물, 역주)와 같은 것이다. 그 속에는 아무 것도 실질적인 것이 없다. 그러므로 "허영"이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자화자찬하는 자들은 "스스로를 속이는 자"들이다. 우리 주 예수는 그들의 말처럼 스스로의 영광을 구하는 분은 아니시었다. 다만 그는 영예의 원천이신 분에 의하여 관 씌우심을 받았다. 또한 그가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한 것이 아니었다(히 5:4, 5).

2. 그는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아브라함을 그들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1) 그의 아버지는 하나 이시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는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다"라고 하였다. 이 말씀을 통하여 그가 뜻하고자 하시는 것은 다음과 같다.

① 그가 지금은 주장한 자신의 모든 영예는 그의 아버지께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는 뜻이다. 

-- 그는 그들에게 그를 믿고 따르며 그의 말을 지키고 그에게 영광을 돌릴 것을 명하시었다. 그러나 그에게 "도움을 주시고" 그 안에서 온갖 것을 이루시고 그를 거룩하게 하시며 그를 보호하시며 그를 세상에 보내사 메시야로서 받아야 합당할 온갖 영광을 받게 하신 분은 아버지셨다. 이 아버지로 인하여 그는 온갖 영광을 받게 하신 분은 아버지셨다. 이 아버지로 인하여 그는 온갖 경의에 대한 요구를 사람들에게 떳떳이 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② 그는 자기가 앞으로 바라는 모든 명예를 그의 아버지에게 의뢰하셨다는 뜻이었다. 

-- 그는 그 시대의 찬사를 바라지 아니하셨다. 오히려 그것을 경멸하셨다. 그 이유는 그의 모든 신경은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약속하신 영광에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세상이 있기 이전에 아버지와 함께 그 영광을 누리시었었다." 그는 아버지께서 자기를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실 때를 바라고 계셨다(빌 2:8, 9). 

-- 그리스도와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자신들의 영예를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를 기억하고 있는 곳에서 자기에게 주어질 영예로 확신하는 사람들은 지금 그 영예가 주어지지 않으므로 경멸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개의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그가 이같이 자주 자기 아버지에 근거하여 호소를 하셨고 그의 아버지가 자기에 대한 증거를 말씀하셨음에도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도, 믿으려 하지도 아니하였다.

첫째, 그는 본문에서 그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불신한 이유를 제시하신다. 

-- 그것을 "너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즉 이런 뜻의 말씀이다. "너희가 나의 아버지를 전혀 알지 못하니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하심에 대하여 내가 아무리 말해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너희가 말로는 그를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지만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는도다."

a. 그들의 하나님과의 상관성에 대하여 그들이 고백한 내용. 

-- 그것을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는 그를 너희 하나님이라 칭한다. 또한 그 하나님을 너희가 택하였고 너희는 그와 계약관계에 있으며 너희는 이스라엘이 아닌 것이다"(롬 9:6). 

--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관심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며 그가 그들의 하나님인 것처럼 가장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 말의 정당성을 행동으로 제시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야곱의 얼굴에 먹칠을 하면서 자칭 "여호와의 전"이라고 부르는 자들은 거짓말을 신뢰하는데 불과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의 백성으로의 신실성을 지키지 않는다면 또한 그가 바라시는 그러한 생을 살지 않는다면"그가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 그리스도는 본문에서 유대인들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고백을 그들의 불신을 더욱 심화시킨 것으로 간주하신다. 모든 그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영예롭게 하신 사람들에게 찬사를 보내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들 유대인들은 여호와가 그들의 하나님이 영예롭게 하신 자에게 어떻게 하면 극도의 모욕을 가할까를 영구하고 있었다. 우리의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 또는 그에 대한 관심의 고백이 우리의 생활로 입증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 고백이 우리를 해롭게 할 것이다.

b. 그들의 고백하고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그와의 소원(疏遠0함.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서 "그럼에도 너희가 그를 알지 못한다"고 하신다.

(a) 본문은 "너희가 전혀 그를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 이들 바리새인들은 이질적이고 사소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그들의 전승에 대한 연구에 너무 집착하여 있어서 그들은 가장 필요하고 또 유익한 것에 대하여는 결코 알려고 하지도 아니하였다. 그들은 마치 구약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이 "그들의 몽사를 통하여 백성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잊게 하였던" 것과 같이 행위를 하고 있었다(렘 23:27).

(b) 또는 본문은 "너희가 그를 바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겠다. 

-- 그를 잘못 아는 것은 그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나쁜 일이며 어느 면에서는 그 이상 나쁜 것이라고 하겠다. 인간들은 교묘한 말로 하나님에 관하여 이러쿵 저러쿵 얘기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그를 자기들과 같은 분으로 여기고 있음에 불과하고 그런 것은 "그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 너희가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우리가 "우리의 것"에 대하여 알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과 친근한 관계라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기억하자. 그들이 배워서 이야기하고 허세를 부리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 뿐이요 하나님의 본질, 그의 본성, 완전성, 그의 피조물과의 관계에 대하여서는 그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 "너희가 이곳을 말함은 그들로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서이다"(고전 15:34). 대중은 "알지 못하는 하나님"과의 명목상의 관계만으로 스스로 만족한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속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경고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a] 그들이 하나님과 관계가 있다는 가정이 얼마나 허황되고 근거 없는 것임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였다. 

-- "너희는 그를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너희는 스스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그를 알지 못하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한 대상을 잘 아는 척할 때 그에 대한 무지를 노출시키기만 한다면 그 속임수는 드러나고 비난을 받게 되기 마련이다.

[b] 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기적에 의하여 감화되지 못한 참된 이유를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인식하지도 못하였고 그 가운데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임을 기억하자. 인간들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에 복종치 않는 것이다"(롬 10:3).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에도 복종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는 한 본질의 양면인 것이다(살후 1:8).

둘째, 그는 그들에게 그의 아버지가 그를 영광되게 하며 그를 시인하실 것을 그가 확신하시는 이유를 제시하신다. 

-- 본문에서 그는 "그러나 나는 그를 안다"고 하시고 다시 "내가 그를 아노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그의 아버지에 대한 앎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신뢰도 의미하는 말이다. 그가 아버지를 아시는 것은 그의 품 안에 있으셨기 때문이요, 그를 신뢰하는 것은 그의 곁에 서 있으셨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자신에 관하여 예언된 것처럼 아버지를 증거하는 일을 자기의 전 사업의 목적으로 삼으셨다. 그는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리라"(사 50:7)는 말씀에 따라 담대히 아버지를 증가하셨고(딤후 1:12)"내가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내가 그의 일로 여기고 있는 그 일에 그가 신실하시며 능력 있으시며 전심으로 도우심을 안다"고 하신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a. 그의 아버지에 대한 고백의 방법. 

-- 그는 아버지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처럼 대단한 확신을 가지고 이 사실을 고백한다.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서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같이 거짓말장이가 되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유대인들의 비위를 맞추고 그들의 비난을 파하기 위하여 또는 그들에게 더 이상 괴로움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에 대한 그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으신다. 또한 그는 말하신 것을 철회하거나 그가 현혹을 당하였든가 또는 현혹자라고 고백하지도 않으신다. 만일 그가 그리하셨다면 하나님의 자신에 대한 거짓 증인임이 들어났을 것이다. 베드로처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그와의 관계로 부정하는 사람들은 거짓말장이들이다. 그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는 위선자들처럼 말이다(딤전 6:13, 14 참조). ***클라크(Mr. Clank)씨가 이에 대하여 잘 지적하여 말하기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는 것은 큰 죄이다라고 하였다.

b. 그가 아버지에 대한 그의 지식을 증명한 방법. 

-- 그것에 대하여 그는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고 하였다. 인간으로서 그리스도는 도덕법에 복종하셨고 구속자로서의 그는 중재법(仲裁法)에 복종하셨으며 그리고 그는 이 두 가지로 그의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셨고 또 아버지에게 하신 자기 약 속의 말을 지키셨다. 

--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그의 말씀을 지킬 것"을(51절)요구하신다. 그는 우리에게 복종에 본을 보여 주셨다. 그것은 흠이 없는 모본이었다. 즉 그는 "그의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신 것이다." "복종을 배운"사람만이 복종에 대하여 잘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다(히 5:8, 9 참조). 그리스도는 이 사실을 통하여 그가 아버지를 아신다는 사실을 증명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가장 좋은 증거는 그에 대한 복종에 있음을 기억하자.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만이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이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상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알 것이라"(요일 2:3)는 말씀이 대표적인 말씀이다.

(2)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그들의 아버지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들은 그 아버지와의 관계성을 대단히 자랑으로 여겼다. 그들의 아버지는 바로 아브라함이었다. 이 말씀으로 논쟁은 종결된다.

①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이 자기(그리스도)를 고대하였고, 또 그를 경외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이르기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56절)고 하신다. 이 말씀을 통하여 그는 "자신이 아브라함보다 더 위대하다"는 지론이 전혀 빗나간 것이 아님을 증명하신다. 약속된 메시야에 대한 아브라함의 경외에 대하여 그는 두 가지 사례를 말씀하신다.

첫째, 그가 "그의 날 보기"를 대망하였다. 

-- ‘에갈리아사토’- 즉 기뻐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여기서는 고대하였다는 말이 보다 가깝다. 본문의 ‘에갈리아사토’는 일반적으로 기쁨을 의미하지만 본문에서는 "바람(所望)에 열중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이 구절의 끝 부분을 보고 기뻐하였느니라"는 말씀과 중복된다. 즉 앞의 상반절은 그가 "나의 때 볼 것"을 미리 생각하고 기뻐하였다는 말이다. 마치 삭개오가 "예수를 보려고" 앞서 달려가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 듯이 말이다. 

-- 아브라함은 그가 장차 오실 메시야로 영접하게 되리라는 사실에 대단히 가슴이 부풀어 있었다. 그는 진지하게 메시야에 대하여 더욱 많이 알기를 바랐다. 어렴풋한 암시 그것이 인간들로 생각하게 만들며 "누가," "무엇을," "어디서," "언제," "어떻게"라고 진지하게 묻게 만든다. 이같이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은 장차 올 막연한 은혜에 대한 개념을 갖고 "부지런히 탐구하였다"(벧전 1:10). 그들 못지 않게 아브라함도 이 일에 열심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가 그의 후손에게 줄 땅과 그들에게 주기를 계획하신 부와 영예에 대하여 그에게 말씀하셨다(창 15:14). 그러나 그는 인자의 날을 보기를 원한 것만큼은 그 날을 보기를 고대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가 약속된 땅을 고대하듯이 그렇게 약속된 자손 보는 것을 무관심하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그는 약속된 땅의 경우에는 무관심할 수 있었으나 약속된 후손에 대하여는 무관심할 수 없었다. 

-- 그리스도에 대하여 한 면만이라도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은 그에 대하여 진지하게 더욱 알기를 바라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의의 태양, 빛의 동틈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들은 그가 떠오르는 것을 보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속의 신비는 "천사들도 보기를 흠모하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일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우리가 구속의 신비를 더욱 사모해야함은 당연한 일이다. 아브라함은 아직 그리스도의 날이 멀리 있었음에도 그의 날 보기를 사모하였다. 그러나 그의 타락된 후손들은 그의 날을 분별치 못하였고 또 그 날이 왔을 때 그것을 환영하지도 아니하였다. 그리스도의 현현, 그것은 은총을 입은 영혼들은 사랑하며 기다리나 육적인 마음을 지닌 자들은 그 날을 두려워하고 괴롭게 생각한다.

둘째, 아브라함이 보려한 것을 보았을 때 느낀 만족. 

-- 그것에 대하여 본문은 "그가 보고 기뻐하였다"고 하였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자.

a. 아브라함의 경건한 소원을 하나님이 채우신 방법. 

-- 그는 그리스도의 날 보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그가 그날을 우리가 복음 아래서 보는 것처럼 그렇게 명백하고 만족스럽고 분명하게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그날의 일면을 보았고 후에 그는 전에 보았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았다. 가진 자와 구하는 자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가 가진 것을 허용하고 또 개선하며 그리스도를 더욱 알게 해달라고 바라고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더욱 많은 것을 주실 것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날을 보았단 말인가?

(a)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그가 저 세상에서 보았다는 말씀으로 이해한다. 

-- 아브라함의 분리된 영혼은 육체의 장막이 벗겨졌을 때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신비를 보았다. 칼빈도 본문을 이러한 의미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강조하지는 않는다. 선택받은 영혼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은 그들이 하늘 나라에 갔을 때 완전히 충족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아니 된다.

(b) 그러나 본문은 그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날에 대하여 무엇인가 보았다는 뜻으로 더욱 보편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 그러므로 "이 사람들이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았다"(히 11:13)고 하였다. 

-- 발람은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 오신 것을 가까이 본 것은 아니었다. 

-- 아브라함이 그리스도와 그의 날에 대하여 어떤 비전을 보았으리라는 가설은 가능한 것이다. 그 비전은 아브라함만을 개별적으로 충족시키려는 것으로 다니엘의 경우처럼 "마지막 때까지 간수되고 봉함 될 말씀"이었던 것이다(단 12:4). 그리스도는 모세가 보았던 것 이상을 아브라함이 보았다는 사실을 아셨다. 아브라함에게 처음 약속이 주어졌던 때보다 그는 더 많이 보기를 바랐고 또 보기를 바란 것 이상으로 본 사실이 여러 가지 기록되어 있다. 그는 멜기세덱에게서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한 분" 곧 영원한 제사장을 보셨고 또 마루레 평원에서 여호와가 두 천사를 대동하고 나타나신 것을 보았다. 또 그는 소돔을 위한 중재를 함으로써 거기서 그리스도의 중재의 유형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이스마엘을 추방하고 이삭에게 계약을 물려 준 사실을 통하여 그는 복음의 때에 나타날 인물을 보았다. 복음 때는 곧 그리스도의 날로써 그가 본 모든 것들은 이 날에 대한 비유였다. 이삭을 바치러 가서 이삭 대신 양을 드린 일을 통하여 그는 대(大)희생 제물의 두 가지 유형을 보았다. 그가 한 곳을 "여호와이레" 곧 "그것이 보여질 것이다"라는 이름으로 명명하므로 다른 사람이 본 이상의 것을 그가 보았음을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 또 그의 종에게 서원을 시킬 때, 손을 들어 자기 옆구리에 넣게 함으로 메시야의 일면을 보여 주었다.

b. 아브라함이 그리스도의 날에 대한 이런 사실을 보고 기뻐하고 이 날을 환영한 사실. 

-- "그는 보고 기뻐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푸신 사랑을 보고 기뻐하였으며 또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위하여 예비해 두신 자비로 보고 예견하고 기뻐하였다. 아마도 이 말씀은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나님이 그에게 확증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웃은 사실을 염두에 둔 말씀인 것 같다(창 17:16, 17). 이때의 아브라함의 웃음은 사라의 웃음처럼 불신의 웃음이 아니었고 기쁨의 웃음이었기 때문이다. 아들에 대한 약속에서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날을 보았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를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채웠다." 이같이 그는 약속들을 가슴에 포용하였다. 그리스도와 그의 날에 대한 믿음의 모임은 마음속에 기쁨을 준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믿음의 기쁨 같은 기쁨은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사귀기 이전에는 결코 참 쾌락을 맛보지 못한다.

② 유대인들은 예수의 이 말씀에 대하여 트집을 잡는다(57절).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이 말은 뜻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들은 아브라함이 그와 그의 때를 보았다면 그도 역시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 되는 것이라고 가정한다. 이 말이 적절한 이유가 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의 말에 대한 그들의 반대 방향에 서서 제시한 견해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밝히는데 도움이 되는 말이 되고 있다. 확실히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을 보았고 사람들이 친구와 얘기하는 것처럼 그와 대화를 나누신 것은 진실이었다.

둘째, 그들은 예수가 자신이 태어나기 수 십 세대 전에 죽은 아브라함을 본 것처럼 얘기하는 것이 매우 모순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 죽은 사람은 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말씀한 것을 육적으로 이해한 옛 과오를 또 다시 범하고 있다. 예수의 말을 그들은 그의 젊음을 비웃는 계기로 삼았다. 그들은 그가 애송이로서 활약한 지가 얼마 안 되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존재라는 뜻으로 그를 힐책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지 않았는가?"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에게 "네가 아직 사십은 못되지 않았는가?"라고 말해도 될 수 있었으리라. 왜냐하면 당시 그는 삼십 이세나 삼십 삼 세에 불과한 나이였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 대하여 초대 교회의 교부 가운데 하나인 이레니우스는 전승으로 입증하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그가 성 요한과 대화를 나누었던 사람을 알고 있는데 그가 우리 구세주께서 오십세까지 사셨다고 전해 주더라는 것이다(Advers, Hoeres, lib. ii. cap. 39,40). 이 기회에 우리는 전승이란 것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이냐 하는 점을 기억하고 지나가도록 하자. 

-- 사실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예수의 나이를 대략적으로 말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대략으로 한 번 얘기해 본 것으로 아직 오십에 이르기는 먼 것처럼 보였고 그렇다고 사십은 넘은 것처럼 보였으므로 그들이 생각한 것을 발언한 것뿐이었다. 그들은 그가 오십이 못되었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설령 오십이라고 해도 아브라함과 동시대가 되기는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여겼다. 저들은 오십이 되면 그 때부터 노인으로 간주하였다(민 4:47). 그러므로 그들은 그의 나이를 오십 너머의 나이로 확대시켜 부르지는 아니하였다. 즉 다음과 같은 뜻의 말이다. "너는 아직 노인이라고 할 수도 없지 않는가? 우리 중에는 너보다 연장자들이 많다. 그렇지만 우리 중에 너처럼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사람은 없다." 어떤 이들은 그의 안색이 슬픔과 긴장 때문에 노쇠해 보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그가 오십세의 어른처럼 보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다"고 하였다(사 52:14).

③ 우리의 구세주는 이 비난에 대하여 효율적으로 답하신다. 

-- 그는 자기가 아브라함이 있기 휠씬 전에 있었음을 엄숙히 단언한다(58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라. 나의 말한 대로 전할 나의 제자들에게 사적으로 말할 뿐만 아니라 내 원수요 박해자인 너희들에게도 말하노라. 너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든지 너희 정면에서 말한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프린 아브라암 게네스다이 에고 에미’ - 즉 아브라함이 생기기전 또는 태어나기전 내가 있느니라는 말씀이다. 이 말속에는 아브라함은 피조된 자요, 그는 창조자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그럼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그는 어떤 상태로 있었는가?"

첫째, 그는 하나님으로 계셨다. 

-- "나는 있는 자"(I am)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시다(출 3:14). 이 말은 그의 스스로 존재하심을 의미한다. 그는"내가 있었다"고 말씀하지 않고 "나는 있다"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처음이요, 나중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변함없이 같은 분이시다(계 1:8). 이같이 그는 아브라함 이전에 계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세계가 있기" 전에 있으셨다(1:1; 잠 8:23).

둘째, 그는 중재자로 계셨다. 

-- 그는 아브라함이 있기 오래 전에 메시야로 임명받으시었다. 그는 "창세 때에부터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다"(계 13:8).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빛과 생명과 사랑을 운반하는 통로이시다. 이 사실은 그의 신적 본질이 영원부터 언제나 동일함을 나타내 준다(히 13:8). 또한 그는 타락 이후 인간에게 한결같으신 분임을 나타내 준다.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이전에 그에게 있었던 믿음에 의하여 아담과 아벨, 에녹, 노아, 셈 또한 살다가 간 모든 족장들에게 하나님의 지혜와 의와 성화와 구속을 중재하여 주셨다. 아브라함은 유대 민족의 뿌리였고 그들이 떠냄을 받은 바위였다. 그리스도가 아브라함 이전에 있었다면 예수의 종교나 가르침이 새로울 것은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유대주의의 본질을 이루는 것으로 그것에 우선한 것이며 그러기에 유대주의를 대신하여 교체될 수가 있는 것이다.

④ 이 위대한 말씀은 논쟁을 순식간에 종결시켰다. 즉 그의 말씀은 논쟁에 대한 종결점이 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그의 말을 참고 들으려 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이 같은 훌륭한 고백을 하신 이상 그들에게 무슨 다른 말씀을 하실 필요를 느끼지 아니하셨다. 그의 본문의 고백은 그의 모든 주장들을 뒷받침해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그리스도의 강론이 은혜와 영광으로 광채를 발하였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이 거기에 사로잡혔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거룩한 영적인 가르침과 그리스도의 율법은 그들의 교만과 세속성과는 너무나 상대적이었으므로 그들은 이것들에 대한 고질적인 편견을 같고 있었고 이 편견이 그들을 확신시키려는 예수의 모든 노력들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말았다. 이로써 계약에 의하여 사자(使者)가 "그의 성전에 임할 때" 그들이 "그의 오는 날을 능히 당치 못하리니" 이는 그가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라"(말 3:1, 2)는 예언이 성취되었다

첫째, 그리스도의 하신 말씀 때문에 저희들이 그에게 격노함. 

-- "그들은 돌을 들어 치려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그를 신성 모독자로 간주한 것처럼 보인다(레 24:16). 이런 자들은 돌로 쳐죽이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죽이기 전에 먼저 법에 의한 재판을 행하고 그들을 정죄하는 것이 순서였다. 

-- 사실 누구나 다 자기 마음대로 법을 집행하려고 한다면 정의와 질서는 끝장이 나고 말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조금 전에 그를 머리가 돈 사람 취급을 하였었다. 그렇다면 더구나 머리가 돈 사람을 그가 말한 것을 책잡아 행악자로 처형한다는 것은 지각과 사려가 없는 행동이었다. "그들은 돌을 들었다"고 하였다. ***라이트푸트(Dr. Lightfoot) 박사는 그들이 성전에 들어올 때 미리 돌을 준비해 가지고 들어온 것이라고 보고 있다. 당시에 성전을 수리하고 또는 증축하기 위한 노동자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들로부터 그를 칠 목적으로 돌덩이를 얻어 가지고 여기에 참석하여 있었다고 본다. 여기서 우리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또는 위에서 역사 하는 죄와 사탄의 필사적 힘이 어떤지를 짐작하게 된다. 인간들의 마음속에 이러한 악함이 있을 수 있음을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또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도록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입증한 그분을 공개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마음이 그들에게 있었음을 누가 감히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이같이 사람이란 누구나 다 그의 거룩한 신앙에 대하여 던질 돌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행 28:22).

둘째, 그가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신 방법.

a. 그는 "숨으셨다." 즉 자신을 숨기셨다. 

-- 본문에 의하면 예수께서 ‘에크뤼베’ 라고 되어 있다.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던 무리들이 그에게 피할 곳을 제공했든지(보좌에 앉아 높이 추대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군중 속에 숨어서" 지내는 법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는 스스로 성전의 벽 또는 기둥 뒤에 숨으셨든지 (이와 같이 시편에 "나를 그 장막 은밀한 속에 숨기신다"는 말씀이 있다. 시 27:5) 또는 신적인 능력에 의하여 그들의 눈앞을 안개가 가리움으로 그가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되었든지 간에 여하간 그는 자기를 숨기셨다. "악한자가 활개를 칠 때는 사람이 숨는다"(잠 28:12, 28). 특히 지혜로운 사람과 경건한 사람이 그러하다. 그리스도께서 피하신 것은 자기가 말한 것을 수호하기가 두려워서 또는 부끄럽게 여겨서가 아니라, "그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의 사역자들과 백성들이 박해에 직면하였을 때 기회가 허락되면 도피하는 것을 지지하신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와 바룩도 숨기셨다(렘 36:26).

b. 그는 군중들을 헤치고 "성전을 나가셨다." 

-- 그러면서도 그는 발견되지 않고 통과되시었다. 그의 도피는 불명예스럽고 겁먹은 도피가 아니었다. 또는 죄책이나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논란 할 수도 없는 그런 도피를 하셨다. 그에 관하여 예언되기를 그가 좌절하지도 낙심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사 42:4).

(a) 본문의 사실은 그의 적들에 대하여 그가 가지신 권력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 그들은 그가 그들에게 허용하신 것 이상의 행위를 그에게 할 수 없었다. 이 사실을 통하여 후에 그가 그들에게 잡히신 것은 "그가 자신을 내 주셨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10:18). 지금 그들은 그를 틀림없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그들의 눈이 멀었든지, 아니면 그들의 손이 움직일 수 없게 되었든지 간에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유유히 그들 사이를 지나 가셨다. 이같이 그는 그들 앞에 연기처럼 사라지시므로 그들을 먹이를 놓친" 사자와 같은 형국에 빠지게 하셨다.

(b) 본문의 사실은 자신의 안전에 대하여 그가 사전에 대책을 세우시었다는 좋은 실례이다. -- 그는 아직 그의 사업이 끝나지 않았고 그의 증언도 끝나지 않았음을 아셨다. 이같이 하여 그는 자신이 세운 규칙, 곧 "저희가 너희를 핍박하면 이 성에서 저 성으로 피하라"는 규칙에 대한 본을 친히 보여 주셨다. 경우에 따라서는 엘리야가 그랬던 것처럼 "황야"로 피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고 (왕상 19:3, 4) 여인처럼 교회로 피해야 할 때도 있다(계 12:6). 그들이 그리스도를 치려고 돌을 들었을 때 움직이지 못하는 돌들에게 명하여 저희를 쳐서 "전 밖으로 내치고" 그리스도의 억울함을 복수하게 하며 땅으로 입을 열어 그들을 삼키게 하라고 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추종자들이 그를 보고 모방할 수 있도록 본이 되시기 위하여 기적 없이 현재의 조건을 그대로 이용하시었다.

(c) 본문의 사실은 그를 돌로 치려고 하였던 자들에 대한 의로우신 후퇴이었다(저희는"그에게 떠나기를 간구하였던" 거라사 지방의 사람들보다 더 완악하였다). 

-- 그리스도는 그를 쫓아내려고 하는 자들과 오래 머물러 계시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그리스도는 떠나기가 싫어서 몇 번이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처럼 이 일이 있은 후에도 다시 성전을 방문하셨다. 그러나 결국 그는 영원히 그것을 포기하시고 멸망하게 내버려두신다. 이제 그리스도는 유대인들 사이로 지나가셨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에게 머물러 계시도록 간청하지 않았고 그를 붙잡아 두려고 선동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가 가시는 것을 족하게 여겼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를 향하여 물러가라고 한 번 격노케 하신다고 어느 누구를 버리시지 않는다. 또 그를 붙잡으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까지 그는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 칼빈은 이들 대제사장들이 그리스도를 성전에서 내쫓았을 때 그들이 성전에 보유하고 있는 재물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버리신 교회나 성전을 자랑으로 아는 사람들은 스스로 속는 자들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떠나셨을 때 그는 조용히 아무도 알아차리지 않게 지나가셨다고 언급되고 있다. ***희랍어 사본에는 ‘파레겐 우토스’(TR)라고 되어 있다. 그 뜻은 그들이 그를 의식하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 그리스도께서 교회나 한 개인을 떠나실 때 은밀히 떠나시고 이 사실이 곧 인식되지 않게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게 임하지 않는 것처럼 그 나라의 떠남도 보이게 떠나는 것은 아니다(삿 16:20 참조). "삼손은 여호와께서 그로부터 떠나시지 말 것을 바랐다." 그러나 이제 이들 버림받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떠나셔도 결코 애석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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