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1.13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요16.출교박해.능력의성령(죄-의-심판 증거).믿음의기도.세상이긴믿음평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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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요16장

===성령의 일

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2.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3.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4.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

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

25.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28.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29.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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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B]요16장

1.  "These things I have spoken to you, that you may be kept from stumbling.

2.  "They will make you outcasts from the synagogue, but an hour is coming for everyone who kills you to think that he is offering service to God.

3.  "And these things they will do, because they have not known the Father, or Me.

4.  "But these things I have spoken to you, that when their hour comes, you may remember that I told you of them. And these things I did not say to you at the beginning, because I was with you.

5.  "But now I am going to Him who sent Me; and none of you asks Me, 'Where are You going?'

6.  "But because I have said these things to you, sorrow has filled your heart.

7.  "But I tell you the truth, it is to your advantage that I go away; for if I do not go away, the Helper shall not come to you; but if I go, I will send Him to you.

8.  "And He, when He comes, will convict the world concerning sin, and righteousness, and judgment;

9.  concerning sin, because they do not believe in Me;

10.  and concerning righteousness, because I go to the Father, and you no longer behold Me;

11.  and concerning judgment, because the ruler of this world has been judged.

12.  "I have many more things to say to you, but you cannot bear [them] now.

13.  "But when He, the Spirit of truth, comes, He will guide you into all the truth; for He will not speak on His own initiative, but whatever He hears, He will speak; and He will disclose to you what is to come.

14.  "He shall glorify Me; for He shall take of Mine, and shall disclose [it] to you.

15.  "All things that the Father has are Mine; therefore I said, that He takes of Mine, and will disclose [it] to you.

16.  "A little while, and you will no longer behold Me; and again a little while, and you will see Me."

17.  [Some] of His disciples therefore said to one another, "What is this thing He is telling us, 'A little while, and you will not behold Me; and again a little while, and you will see Me'; and, 'because I go to the Father'?"

18.  And so they were saying, "What is this that He says, 'A little while'? We do not know what He is talking about."

19.  Jesus knew that they wished to question Him, and He said to them, " Are you deliberating together about this, that I said, 'A little while, and you will not behold Me, and again a little while, and you will see Me'?

20.  "Truly, truly, I say to you, that you will weep and lament, but the world will rejoice; you will be sorrowful, but your sorrow will be turned to joy.

21.  "Whenever a woman is in travail she has sorrow, because her hour has come; but when she gives birth to the child, she remembers the anguish no more, for joy that a child has been born into the world.

22.  "Therefore you too now have sorrow; but I will see you again, and your heart will rejoice, and no one takes your joy away from you.

23.  "And in that day you will ask Me no question. Truly, truly, I say to you, if you shall ask the Father for anything, He will give it to you in My name.

24.  "Until now you have asked for nothing in My name; ask, and you will receive, that your joy may be made full.

25.  "These things I have spoken to you in figurative language; an hour is coming when I will speak no more to you in figurative language, but will tell you plainly of the Father.

26.  "In that day you will ask in My name, and I do not say to you that I will request the Father on your behalf;

27.  for the Father Himself loves you, because you have loved Me, and have believed that I came forth from the Father.

28.  "I came forth from the Father, and have come into the world; I am leaving the world again, and going to the Father."

29.  His disciples *said, "Lo, now You are speaking plainly, and are not using a figure of speech.

30.  "Now we know that You know all things, and have no need for anyone to question You; by this we believe that You came from God."

31.  Jesus answered them, "Do you now believe?

32.  "Behold, an hour is coming, and has [already] come, for you to be scattered, each to his own [home,] and to leave Me alone; and [yet] I am not alone, because the Father is with Me.

33.  "These things I have spoken to you, that in Me you may have peace. In the world you have tribulation, but take courage; I have overcome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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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6장 (개요)

하나님이 자신에 대하여 말씀한 여러 귀한 말씀들이 있다. 그 중 "내가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한다"는 말씀도 귀한 말씀에 포함된다(신 32:39). 

앞 장에서 계속되어 본장에서 종결되는 제자들에 대한 송별 설교인 본문의 말씀도 같은 의미의 말씀이다.

Ⅰ. 여기 상하게 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즉 그들 앞에 고난이 있으리라는 말씀이 제자들에게 주어지고 있다(1-6).

Ⅱ. 또한 본문에는 치료하는 말씀도 나온다. 

그것은 그들이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그가 그들을 도우심으로 위로가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다섯 가지로 그 내용을 나 눌 수 있다.

1. 그가 그들에게 보혜사를 보내실 것이라고 하신다(7-15).

2.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다시 그들을 찾아 오실 것이라고 하신다(16-22).

3. 그가 그들의 모든 기도에 대하여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23-27).

4. 지금은 그들과 함께 있으나 이제 아버지께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신다(28-32).

5. 이 세상에서 그들이 어떤 어려움에 직면하든지 그가 이 모든 것을 이기셨으므로 그들이 그 안에 있으면 편안할 것이라고 하신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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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에 대한 그리스도의 예고(요 16:1-6)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세심한 관심을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그는 그들에게 닥칠 최악의 사태를 말씀해 주시므로 그들로 각오를 새롭게 하도록 하시었다. 

앞 장에서 그는 제자들에게 세상이 그들을 미워할 것을 각오하라고 말씀하셨었다. 본문에서도 그러한 내용이 계속되고 있다.

Ⅰ 그는 그들에게 고난을 예상하라고 그들을 경고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1절에 말씀되고 있다.

1.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십자가 앞에서 두려워 떨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십자가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누구나 넘어지기 쉽다. 십자가 앞에 서게 되면 훌륭한 사람들일지라도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거나 그 길에서 등을 돌이키거나 마지 못해 하나님의 길을 따르게 하도록 만든다. 

십자가 앞에서는 그들의 지혜도 기능을 상실하며 복음에서 받던 위로도 사라져 버린다. 그러므로 고난받는 때를 시험의 순간이라고 부르는 것도 지나친 말은 아닌 것이다.

2. 우리 주님 예수는 우리에게 닥칠 고난을 알려 주심으로 우리로 고통에서 오는 공포를 떨어버리게 하려고 하시었다. 즉 고통이 우리에게 놀람이 되지 않게 하고자 하셨다. 

고난으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우리의 평온을 해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실망에 부딪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며 우리의 영혼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손님이 오리라고 예상하면 보다 쉽게 그를 맞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Praemoniti, praemuniti - 즉 사전에 받는 경고는 사전에 무장을 갖추는 것과 같다는 말은 뜻이 있는 말이라 하겠다.

Ⅱ.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어떠한 고난을 받게 될지를 특별히 예고하신다(2절). 

본문에 이르기를 "권세를 지닌 자들이 너희를 그들의 회당에서 출회할 뿐 아니라 최악의 경우에 이르면 그들이 너희를 죽이기까지 하리라"고 하신다. Ecce duo gladii - 즉 양 손에 검을 든 자가 주 예수 따르는 자들을 대적하여 칼을 휘두르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1. 첫 번째 칼은 교회의 권위를 이용한 비난의 칼이다. 

유대인들이 그들에게 겨눈 것이 바로 이 칼이었다. 그 때 유대인들은 자칭 교회의 권력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너희를 자기들의 회당에서 쫓아낼 것이라" 하신다 ‘아포쉬나고구스 포이에수신 휘마스’ - 즉 그들이 너희를 출회할 것이라는 뜻이다(출회는 모든 공민권의 박탈을 뜻하는 것임). 이 말씀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그들이 너희를 너희도 일원이 되어 있는 그 회당에서 쫓아내리라"는 뜻이다. 

먼저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율법을 더럽힌 자라고 하여 채찍질하고 다음 그들을 구제할 수 없는 자로 몰아서 내쫓았다.

(2) "그들이 너희를 유대인들로 구성된 민족, 교회 곧 이스라엘 회중으로부터 쫓아낼 것이라"는 뜻이다. 즉 기독교 개종자들에서 유대인의 공민권을 박탈하고 그들을 치외법권에 속한 자들로 추방한다는 뜻이다. 

속담에 qui caput gerit lupinum이라는 말이 있는데 - 즉 늑대가 당하듯이 그렇게 머리를 맞고 쓰러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어려움을 당한 것은 사실이었다. 

또 계속 말씀하기를 "그들이 너희를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 또는 세리처럼 대하리라"고 하신다. Interdico tibi aqua et igne - 즉 나는 너희가 물과 불을 쓰는 것도 금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들도 이런 어려움을 당하리라는 말씀이다. 만일 처형을 당하고 재산이 몰수되며 공민권을 박탈당하는 등의 어려움이 없이 출회당한다는 것이, 집이 병균에 감염되어 거기 살면 안 되겠기에 나가 달라는 정도라면 그것이 무어 괴로운 일이라 하겠는가? 

부당하게 출회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흔히 당하는 운명임을 기억하자. 과거에 천주교에서는 많은 진리의 말씀을 저주하여 낙인을 찍고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탄에게 넘겨주는 일을 하였던 것이다.

2. 두 번째 칼은 정부의 권력을 이용한 칼이다. 

본문의 말씀을 풀이하면 이런 내용이다.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너희 조상들이 당하던 것보다 더 어려움을 당하리라. 너희가 이단자로 추방을 당하겠고 또 그들이 너희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할 것이며 다른 이들도 그렇게 여리리라"고 하신다.

(1) 그들이 참으로 악질적인 것을 너희가 알 것이라고 하신다. 

또한 그들이 너희를 죽일 것이다. 이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양떼들은(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함) 도살하기 위한 양으로 취급받았다. 전해 오는 바로는 요한 이외에는 12사도 모두가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실로 그리스도께서 즉 "너희가 martureivte - 즉 증거할 것이며, 순교자가 될 것이며, 피를 흘림으로써 곧 너희 심장의 피를 흘림으로써 진리를 인봉하리라"(수호한다는 말)고 말씀하셨던 대로 이루어졌던 것이다(15:27).

(2) 그들이 양심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너희에게 악을 행함을 너희가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요, 스스로 하나님에게 좋은 제물을 바치는 것(라트레이안 프로스페레인, 16:2)으로 여길 것이라고 하신다. 그들은 마치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종들을 추방하고 "여호와께서 영광을 나타내시리라"고 말했던 자들과 같으리라고 하신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원수 노릇을 하는 자들이 그를 섬기는 일에 열심히 특심한 것처럼 가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사단의 역사가 하나님을 가장하여 나타나는 일은 흔한 일이다. 그리고 기독교가 지금껏 가졌던 가장 끔찍한 원수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전에" 앉아 있는 것이다(로마 천주교를 가리킴).

② 이들은 하나님께 충성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것처럼 하면서 실상은 신앙에 반대되는 일들을 그런데 두둔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장 큰 괴로움을 당한 것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박해를 자행하는 자들에게 박해를 받을 때였다. 

사도 바울도 전에는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는 일을 마땅히 해야 할 일로 생각하였었다. 그러나 박해자들의 위장된 선행이 그들의 죄를 결코 경감시키지는 못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져다 붙인다고 악당이 거룩해지는 법은 결코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의 행위는 피박해자들의 고난을 가중시키며 하나님께 원수 노릇하는 자인 그들이 그의 백성을 죽이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그러나  환난 날에 박해당한 자들은 몸뿐만 아니라 그 이름도 살아 기억되게 될 것이다.

Ⅲ.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고 그들에 대하여 노여워하는 참된 이유를 알려 주신다(3절).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너희가 그들에게 해를 입혔기 때문이 아니요, 저들이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가 위로를 삼을 것은 아무리 악한 사람일지라도 너희 적수가 되지 못하겠기 때문이다"고 하신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자칭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뜻밖에도 그에 대하여 전혀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자칭 그를 섬긴다고 하는 자들은 그들이 그를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에 대하여 폼은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계약을 범하고도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를 아나이다"(호 8:2)라고 부르짖었던 것이다.

2.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알 권리도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인간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아는 척하면서도 한편 그리스도와 기독교는 무시해 버리고 말 때가 많다.

3.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전혀 무지한 자들은 착한 백성을 박해하는 일에 종사하는 것을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예배로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의 생명을 멸하고자 하심이 아니요 구하러 오셨음을" 안다. 또한 그리스도는 불과 검으로써가 아니라 진리와 사랑의 능력으로써 다스리심을 안다. 섬기는 교회와는 거리가 멀고 다만 박해나 일삼는 교회는 이 그리스도를 알 수 없는 것이다.

Ⅳ.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그들에게 이 사실을 복음의 사역을 시작하던 처음부터 알리지 않으시고 지금 알려 주시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씀하신다.

1. 그가 지금 이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 주시는 이유는(4절) 그들이 낙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며, 그들이 현재 당하는 슬픔에 또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렇다고 그는 위험이 닥칠 때 어떻게 노력하므로 그것을 피할 수 있는지 그들에게 말씀해 주시지는 않았다. 

다만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그 때는 틀림 없이 올 것인데) 내가 너희에게 이 말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라"고만 하신다. 고난의 시기가 닥칠 때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고난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는 것이 대단히 유익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1) 그리스도의 예견과 성실함에 대한 우리의 신념이 확고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2) 우리가 사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알게 되면 그것에 대비하여 신앙으로 무장하기 때문에 고난으로 인한 슬픔이 감소되겠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면 놀라게 되지도 않겠고 또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처럼 그 일을 바라보지도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고통 중에 그가 받는 고난이 성서의 말씀을 이루고자 함인 것을 볼 눈이 있으셨듯이 각각 고통 중에 그를 따르는 우리도 그러한 눈이 띄어져야 하겠다.

2. 그리스도께서 이 사실을 제자들을 부르시던 초창기에 말씀해 주시지 않은 이유가 말씀되고 있다. "내가 처음부터 곧 나와 너희가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는 것이 그 이유라고 하신다.

(1) 그가 그들과 함께 계신 동안은 그가 세상의 적의를 품은 공격을 친히 담당하셨다. 

그리고 싸움터의 맨 선두를 담당하셨다. 어둠의 모든 세력들이 그를 대적하여 총력을 투입하였다. 어두움의 세력들은 "작은 자나 큰 자와 더불어 싸우려 한 것이 아니고 오직 이스라엘의 왕과 싸우려 하였다"(대하 18:30). 그러므로 그가 계실 때에는 그들에게 고통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싸움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보잘 것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편 그는 공생애 초기에도 고통에 대하여 준비하라는 말씀을 하신 곳도 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 이런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여기서 그가 고통에 대하여 말씀한 것은 다른 보혜사가 오리라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공생애 초기에 그리스도는 보혜사에 대하여 거의 말씀하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친히 그들과 함께 하셔서 그들을 훈계하고 인도하며 위로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성령의 특별하신 임재에 대한 약속이 당시에는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신랑이 들리움을 받기 전까지는 신방에 있는 어린이들이 위로받기 위한 또 다른 보혜사가 필요 없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하신 말씀 때문에 그의 제자들이 현재 느끼고 있는 슬픔에 대한 열렬한 관심을 표명하신다(5,6절). 

"이제 내가 더 이상 너희와 함께 있지 못하리라. 나는 이제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노라. 거기 가서 지금까지의 피로를 풀며 쉬게 되리라. 그런데 너희 중에서 용기를 내어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는가? 묻고 대답을 받는다면 너희에게도 위로가 될 터인데 묻는 대신 슬픈 일만 생각하느라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하였도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지극한 사랑을 대하게 된다.

1.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그들을 떠나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본문에 의하면"내가 나의 길을 가노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강제로 끌려가신 것이 아니었고 자진하여 그들을 떠나셨다. 

그는 우리들처럼 생명을 빼앗기신 것이 아니고 스스로 맡기셨다. 그는 그의 활동을 보고하기 위하여 그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셨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우리를 이곳으로 보내신 분에게 가게 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전심을 다하여 선한 목적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즉 우리에게는 수행해야 할 사명이 주어져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정해진 날에 반납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선한 목적을 위하여 살아야 하겠다.

2.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가 그들을 떠난 후 그들이 고통을 당할 것이며 그들이 전에 누렸던 것과 같은 안온한 생활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그들에게 그가 남겨 주실 유산이 이러한 것이라면 그들은 손해만 본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이요 당장에는 이 때문에 그들이 곤혹을 느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러한 그들에 대해 연민을 느끼시면서도 한편으로는 주님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그들을 꾸짖으신다.

(1) 그들이 위로 받을 일에 대하여 무관심하며 용기를 내서 위로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책망하셨다. 그러므로 본문에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종류의 질문을 최초로 던진 것은 베드로였었고(13:36), 두 번째는 도마였었다(14:5). 그러나 지금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추궁하지도 않았고 대답을 사모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이 문제에 관하여는 무감각하여 더 이상 물으려 하지도, 보다 만족스러운 답변을 구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계속하여 구하지도 않았고 두드리지도 않았다. 

무지하고 연약한 제자들에 비하여 그리스도는 인정 많고 친절한 스승이심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많은 스승들은 제자가 같은 질문을 두 번씩 던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세상의 스승은 제자가 가르쳐 준 내용을 재빨리 간파하지 못하면 그대로 지나쳐 버리고 만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은 어린이들은 하나씩 세밀히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셨다. 

만약 본문에서 제자들이 계속 질문을 던졌다면 그의 가심은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그러므로 그와 그들과의 이별은 그들에게 지나친 고통이 될 수는 없겠고(그가 영광 받으신다는대 제자들이 반대할 이유가 없겠기에 그들에게 고통도 가벼우리라는 말이다) 오히려 그들에게 유익한 것임을 알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가 영광 받으시기 위해 그들이 고통을 당해야 한다면 그것이 무어 그리 어려웁겠는가 말이다.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신 예수님을 대하는 것은 스데반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대단한 위로가 되겠기 때문이었다. 

베일 속에 가려진 하나님의 섭리의 뜻과 경륜을 믿는 마음으로 겸손히 묻는 것은 우리가 그 섭리에 적응하는데 또한 섭리로 인한 슬픔이나 두려움을 감소시키는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섭리가 언제 이루어지는지는 물을 수 없어도 그 섭리의 향방이 어떻게 되어져 가는지 묻는 것은 가능하며 그 물음은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 올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줄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롬 8:28).

(2) 제자들이 자기들이 당한 슬픔에만 지나치게 골몰하여 있음을 주님은 책망하셨다. 그러므로 본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하였도다"라고 하셨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기쁨이 충만할 수 있는 내용의 말씀들을 많이 하셨었다(15:11). 그러나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롭지 못한 사실만을 보고 그들을 위해 하신 말씀은 지나쳐 버림으로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고 기쁨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비관적인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저지르는 잘못은 구름이 덮인 어두운 면만을 보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기쁨과 희락을 주시는 음성에는 귀머거리 노릇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본문에서 제자들은 현실에 대하여 지나친 애착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마음은 슬펐고 또 용기를 북돋아 주려는 그리스도의 역사를 방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주님이 지상에서 이룰 외적인 나라와 그 영광에 대한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고 그 나라에서 그들도 그와 함께 찬란하게 다스릴 줄로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약속 대신에 옥에 갇힘과 고통당할 사실만을 주님으로부터 듣게 되자 이 사실들이 그들의 마음을 참으로 슬프게 하였다. 세상을 사랑하는 한 수단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 결과는 세상의 슬픔밖에는 안겨지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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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작별이 제자들에게 주는 유익(요 16:7-15)

구약의 예언에서 교회(이스라엘 민족을 뜻함)가 재난을 당하고 있을 때 메시야에 대한 약속으로 교회를 위로하였듯이(사 9:6; 미 5:6; 슥 3:8), 이제 메시야가 오시자 그의 교회에세 성령을 주시겠다는 약속으로 교회에 용기를 넣어 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본문에 뵤혜사의 내님에 대한 세 가지 사실이 기록되고 있다.

Ⅰ. 보혜사가 오시기 위하여 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떠나시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이 말씀되고 있다. 

제자들은 이 사실을 믿기를 싫어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평상시보다 더욱 분명히 이 사실을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본문에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한다"고 하셨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모든 사실이 비록 그가 우리에게 믿도록 강요하지는 않으시더라도 진실임을 믿어야 한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마음에 평안을 주시고자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다.

1. 먼저 그리스도께서는 원칙적인 말씀을 하시는데 그것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리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언뜻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교훈이다. 그러나 이 말씀이 사실이라면 이 말씀은 충분한 위로가 될 수 있고, 그러고도 남음이 있다. 또한 그들의 슬픔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 하겠다. 그는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떠나가는 것이 나를 위해서 뿐 아니라 너희를 위해서도 유익이라." 제자들은 이 사실을 알지도 못하였고 또 믿기도 싫어하였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표면적으로는 우리에게 슬픔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사실들이 실질적으로 우리를 위하여 유익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특별히 우리가 우리의 갈 길을 마치고 이 세상을 작별할 때 더욱 그러하다.

(2) 우리 주님 예수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지간에 우리를 위하여 가장 유익한 것만을 언제나 준비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는 우리가 선택하는 어리석은 방법대로 살게 버려두지 않으시고 은혜롭게도 우리의 선택을 통제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먹기 싫어하는 약을 주신다. 왜냐하면 그 약이 우리에게 유익한 줄로 아시기 때문이다.

2. 그가 떠나시는 것이 유익함은 그러므로 성령을 보내실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그리스도의 가심은 보혜사의 오셔서 내주하심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① 이 말씀은 부정적인 문귀로 표현되고 있다. 즉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라" 하셨다. 왜 그가 떠나시지 않으면 보혜사가 오실 수 없을까?

첫째,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이 이 사건에 대하여 그렇게 정해 놓으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 방법이 변경될 수는 없었다. 

이는 "너를 위하여 땅이 버림을 당하겠느냐?"(욥 18:4)는 욥기의 말씀과도 통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뜻대로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다른 선물을 주시기 전에 우리가 그건 싫다고 하여도 먼저 준 선물을 거두어 가기도 하신다.

둘째, 상주(常住)할 외교관들이 오기 전에 교섭을 위하여 온 특별 대사는 소환당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셋째, 성령을 보내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그 대가를 치루시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그의 죽으심 곧 그들에 대한 그의 작별이었던 것이다.

넷째,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통 속에서 그렇게 간구하셨기 때문이었다(14:16 참고). 

성령의 오심에 대하여 우리가 큰 비중은 두는 것은 이 선물이 우리 주님 예수에 의하여 그 대가가 치루어진 것이요, 또한 그가 간구하신 것이기 때문이라 하겠다.

다섯째,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승천하사 거기서 영접받으셔야 성령께서 떳떳이 세상에 증거할 수 있으시겠기 때문이었다(10절; 7:39 을 참조하라).

여섯째,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함께 하시는 어린 아이의 상태를 벗어나야 되겠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함께 하심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새로이 내리시는 성령의 도움과 위로를 맏을 준비를 채 갖추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이유들이 그가 떠나셔야만 하는 이유였다.

② 또한 긍정적인 어조로도 표현되고 있다. 

그것은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내가 떠나도 너희에게 손실이 생기지 않도록 방책을 세울 것이니 아를 믿으라"는 뜻의 말씀이다. 

영광을 받으신 구세주는 지상에 있는 그의 교회에 대하여 절대 무관심하지는 않으시며, 또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시지 않고 교회를 떠나시는 일도 없으시다. 그는 떠나시지만 그는 보혜사를 보내신다. 그러므로 그가 떠나시는 것은 보혜사를 보내 주시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마찬가지로 한 시대를 주름잡던 교역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떠나면 그 자리에 또 다른 교역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서게 마련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의 후계자들이 늘 유지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계시는 것보다 그의 성령이 그의 교회에 계시는 것이 훨씬 유익하고 바람직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떠나시고 보혜사를 보내 주시는 것이 우리를 위하여 참으로 유익하다는 말이다. 

그가 육신으로 계신다면 그는 한 시간에 한 곳에만 나타나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성령은 같은 시각에 어디서나 동시적으로 역사하실 수 있으신 것이다. 즉 "그의 이름으로 두 셋이 모인 곳이면 어디서나" 함께 하실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현존은 사람들의 시선을 만족케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의 성령의 현존은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케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죽이는 것은 문자요 살리는 것은 영이라"는 말씀과도 통하는 내용이라 하겠다.

Ⅱ. 성령의 임재는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과업을 수행하시는데 절대로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이 말씀되고 있다(8절). 그러므로 본문에 ‘엘돈 에케이노스’ - 즉 그가 와서라고 기록되고 있다. 

성령은 보냄을 받으셨을 뿐 아니라 스스로 오시기를 원하셨다. 그가 오셔서 먼저 하실 일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또 어떤 난외주(註)에 의하면 너희의 사역을 통하여 "그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에 확증하려고 오셨다"고 하였다.

1. 이젠 본문을 통하여 성령의 직능이 무엇인지 그가 보냄을 받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살펴 보자.

(1) 책망하기 위하여 그는 오셨다. 

말씀과 양심을 통하여 성령은 우리를 책망하시는 분이시다. 교역자들은 직책상 책망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교역자들을 통하여 책망하는 일을 수행하신다.

(2) 확증하기 위하여 그는 오셨다. 

이것은 법적은 용어로써 증서를 수집하여 사건을 분명하고 참된 증거에 의거해 오래 조사하여 사건을 귀결짓는 판사의 직능을 말하는 것이다. 

그가 확증하실 것이라는 말씀은 다음과 같은 뜻을 지닌 말씀이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와 그의 후계자들의 반대자들을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거짓됨과 허위를 드러내 보이심으로 꼼짝 못하게 하시며, 그들이 반대하고 있는 자들의 참됨과 확실함을 보여 주신다"는 내용인 것이다. 

확중하는 일이 성령이 하시는 일임을 기억하자. 그는 이 일을 효율적으로 이루어 내신다. 그리고 그 외에는 아무도 이 일을 할 수 없다. 인간이 할 수 있다면 어떤 계기를 이룰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여시는 것은 오직 성령뿐이시다. 

성령은 7절에서 보혜사라고 칭하여지고 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그가 확증하실 것이라고 하였다. 아마 확증한다는 말 때문에 그의 위로는 냉정할 것이라 여길 사람들이 있으리라. 그러나 처음에는 확증하시고 다음에 위로하시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방법이다. 그는 처음에는 상처를 헤집어 놓으시고 그런 다음 치료제를 투입하신다. 또는 어느 것이 옳은지를 보이시기 위하여 먼저 확실한 증거를 찾으신다는 것은 성령의 위로가 확실하며 진리에 근거한 것임을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한 것이다.

2. 그가 책망하고 확증하시는 대상이 어떠한 자들인가를 살펴 보자. "세상"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곧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1) 성령께서는 가장 강력한 방법을 통하여 세상에 확증을 보여주실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세상에 나아가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파하므로 큰 결실을 거두겠기 때문이다.

(2) 성령께서는 복음에 대한 세상의 반대와 나쁜 편견을 제거하시고 그들로 입을 다물게 하실 능력을 가지고 나가실 것이라고 한다. 과연 이 말씀대로 많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모든 사람에게 확증당하고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아"(고전 14:24)믿음에 귀의함을 볼 수 있다.

(3) 성령께서는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믿게 하심으로 그들로 구원에 이르게 하실 것이라고 한다. 즉 연령에 구애됨이 없이 또한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개종할 것이라고 한다. 제자들이 당할 곤난이 말씀된 데 비하면 이 말씀은 그들에게 큰 격려가 되는 말씀임을 깨달을 수 있다.

① 그들이 신나는 일을 보게 될 것인데 사탄의 나라가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리라 하신다. 이것은 성령 뿐 아니라 그들에게도 기쁨이 될 것이다. 

비록 사악한 세상일지라도 성령께서는 역사하실 것이며 죄인들이 확신에 이르게 되는 것은 신실한 교역자들의 위로가 되리라고 한다.

②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 이르는 것은 제자들의 섬김과 그들이 당하는 고난의 결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러한 섬김과 고난은 아름다운 복음 사역에 다대한 공헌을 한다.

(1) "죄에 대하여" 성령이 증거하실 것이다(9절). 이는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 때문이라고 한다.

① 성령께서 보냄을 받은 것은 죄인들에게 죄에 대하여 단순히 알리고자 하신 것이 아니요, 죄를 확증시키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즉 죄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결과를 초래함을 확증시키려 오신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 죄에 대하여 증거해 주시고 그들로 그 죄를 그들이 소유하고 있음을 시인하게 하고자 성령은 오신 것이다. 8장 9절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양심의 가책을 받게 하시며" 그들의 추행을 그들로 깨닫게 하고자" 하신다. 

성령은 죄의 사실에 대하여 증거하신다. 곧 그는 우리가 이러이러한 죄를 저질렀음을 입증하신다. 그는 또한 죄의 실책에 대하여 곧 우리가 죄를 지으며 행한 잘못을 입증하신다. 성령은 죄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곧 우리가 올바른 이성에 거슬려 행한 사실을 밝히시며 우리의 본래의 관심이 어디 있는가를 밝히신다. 그는 또한 죄의 추잡함에 대하여 곧 죄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불결하여졌음을 입증하시며 죄의 근원인 우리의 부패한 본성에 대하여 입증하신다. 

마지막으로 그는 죄의 결과에 대하여 곧 그 결과는 사망임을 증거하신다. 성령께서는 모든 세상의 타락과 부패를 드러내 주시며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 죄있음을 보여 주신다.

② 성령께서는 특별히 그들의 불신의 죄 곧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을 문책하신다.

첫째, 그 이유는 불신의 죄가 가장 큰 지배력을 행사하는 죄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세상의 무리들이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죄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본래의 양심에 의해 살인이나 도적질이 죄임을 사람들은 깨닫는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고 복음에 의해 제공된 구원을 거절하는 것이 조임을 사람들에게 확증시키시는 것은 성령의 초월적인 역사이다. 

자연 종교는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하여도 구원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자연 종교가 우리에게 제시해 주는 과제는 언제고 신의 계시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그것이 신에게서 비롯된 것임이 충분히 입증되면 우리가 그것을 용납하고 그 계시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범하는 자는 곧 말씀하신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불신은 죄가 되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에 대한 불신은 사람을 가장 크게 멸망시키는 죄이기 때문이다. 

모든 죄는 그 자체의 성격상 파멸의 요소를 지닌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는 멸망에 이르게 하는 죄는 없다. 죄가 죄되는 것은 오직 불신을 통해서이다. 이 불신 때문에 죄인들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리고 이 불신 때문에 죄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하는 것이다. 고로 불신이야말로 치료를 불가능하게 하는 죄인 것이다.

셋째, 불신은 모든 죄의 기초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칼빈도 불신을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성령께서는 세상에게 죄가 그들 가운데서 지배하고 있는 참된 이유는 그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기 때문임을 확실히 알려 주신다. 그러므로 칼빈은 No putimus vel guttam unam rectitudinis sine Christo nobis inesse - 즉 그리스도를 떠나서 우리가 잠시라도 정직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2) "의에 대하여" 성령이 증거하실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하겠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10절).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겠다.

①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의에 대하여 증거하실 것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백부장이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눅 23:47)f라고 한 것과 같이 성령께서 나사렛 예수는 의로운 그리스도이심을 세상으로 알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이다(요일 2:1). 

그리스도의 적들은 그를 세상에서 제일 악한 인물로 몰아 버렸고 따라서 군중들도 그가 나쁜 사람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런 사실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또한 그가 악인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그들은 그의 가르침을 받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제 "성령에 의하여 의롭다 하심을 입으신다"(딤전 3:16). 

성령에 의하여 그리스도는 사기군이 아닌 의인임이 판명된다. 그리고 성령의 이러한 증거는 실효를 거두었던 것이다. 확실히 그는 위대한 구속자이시든지 굉장한 사기군이든지 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절대 사기군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무슨 근거에 의하여 주 예수의 신실하심을 사람들에게 증거하실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을 고찰해 보자.

첫째, 그들이 주님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 그들의 편견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들은 "욕된 육신의 형체 곧 종의 형체로"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바로 그가 종의 형체를 입으셨으므로 그들이 그를 경시하였던 것이다. 실상 모세도 죽은 후에야 죽기 전보다 더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셨다는 사실이 그리스도의 의를 완전히 확증케 하여 주는 사실이었다. 

약속에 따라 성령이 오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영광되이 앉으신 증거였다(행 2:33). 또한 이 사실이 바로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나타내 주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이 사기꾼을 그의 우편에 앉히실 리는 절대 없겠기 때문이다.

②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알리신 것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다니엘 9장 24절에 보면 메시야께서 입으신 의는 영원한 의인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성령께서는 이 영원한 의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증거하실 것이라고 한다. 

그는 그들의 죄를 알려 주심으로 그들에게 의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리라고 하신다. 그는 그들의 죄의식이 그들을 절망으로 몰아가지 않도록 어디서 이 의를 얻을 수 있으며 어떻게 그들이 의롭게 될 수 있는가를 알리고자 하셨다. 즉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에서 떠나게 되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용납될 수 있음을 알리고자 하신다. 

실상 "힘써 자기 의를 세우려 하는" 자들에게 이러한 그리스도의 의를 확실히 알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롬 10:3).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승천하신 사실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확실히 알리는 가장 좋은 증거이다. 그리스도는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 그리고 그가 나를 영접하신 증거로 너희가 나를 다시는 못보리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명을 조금이나마 완성치 못하고 떠나셨다면 그는 다시 보냄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을 확신하는 것처럼 그가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입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3) 성령께서 "그의 심판에 대하여' 증거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신다(11절).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① "이 세상의 주권자"인 악마는 심판을 받았고 굉장한 사기꾼이요 파괴자로 규탄되었다는 사실이다. 

사단을 대상으로 한 이러한 심판은 이미 행하여졌고 부분적으로 벌써 그들은 처형을 당하였다. 

사단은 이방 세계에서 추방당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신탁은 맞아 떨어지지 않고 그의 제단은 폐허가 되었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거하는 많은 사람들의 몸에서 쫓겨났다. 사단이 쫓겨나는 기적적인 능력은 교회 안에서 오랫 동안 지속적인 효과를 내고 있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함께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사람들의 영혼에서 추방당하고 만 것이다. 즉 그는 "하늘로부터 번개처럼 떨어지고 말았다."

② 이 말씀은 성령께서 심판에 대하여 세상에게 증거하시는 데 더 없이 좋이 근거가 된다. 다시 말하여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첫째, 이 말씀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성결에 대하여 세상에 증거하시는 데 더 할 나위 없는 근거가 된다(마 12:18). 즉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사단보다 강하시며 그러므로 그는 사단의 무장을 해체하고 쫓아내시며 사단의 폐허가 된 나라 위에 자기의 보좌를 세우실 수 있다는 사실이 판명된다.

둘째, 이 말씀은 성령께서 이 세상에게 그리스도께서 새롭고 더 좋은 것을 공급해 주시리라는 사실을 세상에 증거하시는데 더 없이 좋은 근거가 된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사명은 만물의 위치를 바로 정립하시며 개혁과 신생의 시대를 세상에 전파하고자 하신 것임을 보여 주실 것이다. 이렇게 하시므로 실정을 되풀이하는 장본인들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받고 추방당할 것임을 세상에 증명하신다.

셋째, 이 말씀은 성령께서 주님 예수의 권세와 지배에 대하여 세상에 증거하시는데 더 없니 좋은 근거가 된다. 

성령께서는 "모든 심판이 주님의 손 안에 있음을" 세상에 증거하실 것이다. 그가 이 세상의 임금을 심판하셨고 "뱀의 머리를 쳐 죽이사 죄의 세력을 가지고 나라를 황폐케 하는 그를 멸하셨다는" 사실에 의하여 주님께서 만군의 여호와이심을 증거하실 것이다. 이와 같이 사단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굴복당하면 다른 어떤 권세도 그리스도 앞에 서 있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으리라.

넷째, 이 말씀은 성령께서 마지막 심판날에 대하여 세상에 증거하시는 데 더 없이 좋은 근거가 된다. 이제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의 나라의 거만한 원수들은 최후를 맞이할 것인데 이는 그들의 주모자인 악마가 심판을 당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Ⅲ. 성령의 오심은 제자들 자신들에게는 더 없는 유익이 될 것이라고 한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적들에게 그의 심판을 증거하며 그들을 굴복시키는 일을 하실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들과 그의 대행자들에게는 교훈하시며 위로하시는 분으로 역사하신다.

1.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그들의 현재의 연약함을 애석하게 여기시고 계심을 그들에게 알리신다(12절). 그러므로 본문에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고 하셨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어떠한 종류의 스승이셨는가를 생각해 보자.

(1) 가르침의 풍부함에 있어서 그와 같은 분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많은 것을 말씀하셨으나 아직도 하실 말씀이 많이 있으셨다. 그의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보배가 감추어 있었다. 고로 우리가 자신에게 얽매이지 않고 그 안에 거하면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이다.

(2) 그만큼 연민이 많으신 분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말씀하셔야 했다. 특별히 유대인들이 자기를 거부할 것과 고로 이방인들이 소명될 것을 말씀하셔야 했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 말씀을 감당할 수 없음을 그는 아셨다. 이 말씀이 그들에게 만족을 주기보다 당혹과 거침이 되리라는 것을 아셨다. 그러므로 그는 이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았다. 

그가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그에게 "하나님 나라의 회복에 대하여"말했었다. 그때 그는 그들에게 "성령의 오심을" 말씀하셨고 성령이 오시므로 지금은 그들이 감당치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 모든 것들을 감당할 권세를 받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2.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부으심으로 그들이 만족할 만한 협조를 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현재 그들은 자신의 어리석음과 실수가 많음을 스스로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인데 이제 그들의 주님마저 그들을 떠나신다면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그들에 대하여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가 안심해도 될 것이요,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참으로 그대로 이루어져서 성령은 사도들을 인도하셨고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시고 계신 것이다.

(1) 성령이 사도들을 인도해 주신다는 말씀을 생각해 보자.

① 이 말씀은 성령께서 사도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돌보겠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가 너희를 인도하시리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진영이 광야를 지날 수 있도록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셨듯이 인도하시겠다는 말이다. 과연 성령께서는 말을 하는 데 있어서 또 글을 쓰는 데 있어서 그들이 실수함이 없도록 그들의 혀와 펜 끝을 인도하셨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갈 길을 보여 주실 뿐만 아니라 계속적인 도움과 돌보심으로 우리와 함께 가시며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 위하여 보내진 분이시다(롬 8:14).

② 이 말씀은 성령께서 사도들이 그들의 목적을 망각하지 않도록 돌보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일등 항해사가 배를 예정된 항구로 인도해 내듯이 "그가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고 본문에 말씀되었다. 진리 가운데로 인도받는다는 말씀은 단순히 진리를 안다는 이상의 뜻을 지니고 있다. 이 말씀은 진리와 아주 가깝게 그리고 경험적으로 사귀고 있다는 뜻의 말씀이며 진리에 감화를 받아 경건하게 되어간다는 뜻이 말씀이다. 다만 머리 속에 진리에 대한개념을 기억하고 있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진리의 향기와 능력과 위안을 간직한다는 말이다. 즉 점진적으로 진리를 발견함으로 더욱 빛을 발한다는 말이다. 즉 본문은 "성령께서 너희를 처음에는 쉽고 분명한 진리에 의하여 인도해 내시므로 보다 어려운 내용도 깨닫게 하시리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가 과연 어떻게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수 있는가? 그 뜻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 말씀은 그들의 사명과 관계있는 모든 진리 가운데로 그들을 인도하시겠다는 뜻을 지닌다. 그들의 직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아는 것이 필요하거나 또 유용한 것은 성령께서 그들에게 그 내용을 가르쳐 주시겠다는 뜻이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할 진리는 성령께서 그들에게 가르쳐 주실 것이며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하시며 그 진리를 설명하거나 변호하게 하시겠다는 뜻의 말씀이다.

둘째, 이 말씀은 진리 외에는 그 어떤 것에로도 그들을 인도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의 뜻은 "그가 너희를 인도하는 모든 곳이 진리일 것이라"는 뜻이다. 또한 요한 일서 2장 27절에도 "기름 부음이 참되다"고 하였다. 그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란 말씀을 다음에 나오는 내용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이 사실을 증거하신다.

a. "성령께서 진리 외에는 아무것도 가르치시지 않을 것인데 그가 나의 가르침과는 다른 교훈을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리라.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알아 오직 그것만을 말하리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아래와 같은 뜻을 지닌다.

(a) 사도들을 통하여 말씀된 성령의 증거는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고 통달하시며" 또 사도들은 바로 그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고전 2:10, 11) 우리가 성령의 말씀에 우리의 영혼을 의뢰하여도 좋다는 말이다.

(b) 성령의 증거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말씀과 함께 일어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의로 말씀하지 않고 그리스도와는 별다른 자기만의 관심이나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본질상 따라서 나타난 기록에 있어서도 그가 "아버지와 아들과 하나이시기 때문이다"(요일 5:7). 인간의 말과 뜻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 일도 흔하다. 그러나 영원하신 말씀과 성령에게는 결코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없으시다.

b.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진리를 가르치실 것이며 너희를 위하여 유익한 것은 아무것도 보류하시지 않으리라. 오히려 그가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하신다. 

성령께서는 사도들 가운데서 예언의 영으로 일하셨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리란 사실이 구약에 예언되었고(욜 2:28) 말씀대로 그는 사도들을 통하여 예언을 하셨다. "성령은 장래 일을 그들에게 알리셨다"(행 11:28; 20:23; 21:11). 

그 성령이 또한 "후일에" 있을 이단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딤전 4:1). 또한 성령 안에 거하였던 요한도 장차 있을 일을 환상 가운데서 보았다. 

이제 이러한 성령을 보내신다는 약속은 사도들의 마음에 만족을 줄 수 있었으며 그들의 행동에 유익을 주었으며 그들의 사명에 대한 확신을 안겨 주었다. 

한 얀센주의의 추종자(Jansenius)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유익한 말을 남겨 놓았다. "우리는 성령께서 현재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일에 대하여 사도들에게 그리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보여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해서는 안 된다. 다만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저 세상에서 이루어질 일에 대하여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만으로 만족하게 여기자,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최대 관심사이다"라고 그는 말하였다.

(2)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리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14,15절).

① 성령이 오신 것 자체가 그리스도에게는 영광이 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하늘에서 그를 영화롭게 하셨고 성령은 지상에서 그를 영화롭게 하셨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거하여 보냄을 받으셨으며 그리스도의 일 곧 그의 사업을 수행하시고 이루고자 보냄을 받으셨다는 것은 구세주이신 그에게는 대단한 영예였다. 성령의 모든 은사와 은혜 또한 성령의 역사 아래 이루어진 사도들의 모든 설교와 글, 방언과 기적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②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예수 안에 있었던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심으로 그를 영화롭게 하셨다(엡 4:21).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다음 사실을 약속하시였다.

첫째, 성령께서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일들을 알려 주시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고 하셨다. 본질상 성령께서는 아들로부터 유래되었고 따라서 그 영향이나 역사에 있어서도 성령은 그리스도로부터 전해 받으셨다고 볼 수 있다. 

본문에 성령께서 ‘에크 투 에무’ - 즉 내 것을 가지고 알리겠다고 하셨다. 성령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모든 것 곧 그가 우리에게 호소하시는 모든 것은 우리를 가르치고 위로하기 위한 것이며,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은 우리로 강하게 하며 소생시키고자 하심이며 또 그가 우리를 위하여 인봉하여 간수하신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며 그가 가지셨었고 또 이제 그에게로부터 성령을 받으신 것이었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모든 것을 사셨고 그것을 위하여 상당한 값을 치루셨으며 따라서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부를 만한 이유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가 먼저 이 모든 것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주님에게 주어진 것은 그가 교회의 머리가 되시므로 그를 통하여 이것이 모든 그의 교인들에게 전파될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 

성령께서 오신 것은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바로 그 왕국을 앞당겨 실현시키시려는 것 뿐이다. 또한 성령은 그리스도와 같은 관심을 가지시며 같은 계획을 추진해 나가신다. 그러므로 성령에게 속한 척하면서 그리스도를 중상하는 자들은 스스로 속이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이다.

둘째, 성령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사실들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자 오시리라고 하신다. 

주님은 제자들이 이 정도를 받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노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는 말씀을 추가하신다.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그도 아버지께서 가지신 참 빛과 자족하시는 행복을 지니고 계신다. 그는 중재자로서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그에게 주시었다"(마 11:27). 하나님은 자신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자 계획하신 모든 은혜와 진리를 주님 예수의 장중에 맡기셨다(골 1:19). 하늘나라에 속한 영적인 축복들은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를 통하여 아들에게 주어졌다. 또 아들께서는 성령에게 이 하늘에 속한 영적인 축복들을 우리에게 전해 주리고 의탁하셨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앞의 절의 말씀 곧 "그가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는 말씀에 적용시킨다. 이 말씀은 요한 계시록 1장 1절에서 설명되고 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장래 일을 알려주셨고 그리스도는 이 일들을 요한에게 알리셨는데 요한은 성령을 통하여 말씀된 바를 기록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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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떠나셨다가 다시 오실 것이 예언됨(요 16:16-22)

Ⅰ.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위로하시기 위하여 세우신 계획을 그들에게 미리 알리신 취지를 생각해 보자(16절). 그는 그들에게 분몬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1. 그들이 이제 곧 그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본문에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오랫 동안 보아 왔고 또 아직 도 같이 있기를 바라지만 "나를 보지 못하게 되리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에게 모든 유익한 질문을 가지고 있다면 그가 그들을 떠나기 전에 속히 물으라고 하신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은총의 기간이 얼마나 계속될지도 알아서 은총의 시기 동안에 힘써 우리의 상태를 개선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자. 지금은 우리가 평화로이 신앙 생활을 하고 그리스도를 마음껏 섬길 수 있지만 조금 있으면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제자들도 얼마 후에는 그리스도를 더 이상 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1) 그가 죽으심으로 그들은 그를 볼 수 없었다. 

그가 이 세상을 떠나신 후 그는 결코 세상에서 다시는 공개적으로 그를 나타내신 적이 없으셨던 것이다. 죽음이 교우들을 우리로부터 빼앗아 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아주 사라지는 것도 아니요, 축복에서 제외되는 것도 아니며 우리와의 관계가 아주 끊어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의 시야에서 사리질 뿐 마음 속에서는 그들은 영원히 살아있는 것이다.

(2) 그가 부활하셨다가 다시 승천하시므로 그들은 그를 볼 수 없었다. 

즉 그는 부활하신 후 얼마 동안 함께 사귀시던 사람들을 떠나셔서 그들에게 더 이상 나타내시지 않으셨다. 구름이 그를 덮었고 그 다음 그들이 그를 뚫어지라고 쳐다보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었다(행 1:9, 10; 왕하 2:12; 고후 5:16 참조).

2. 그렇지만 그들이 속히 다시 그를 보게 되리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본문에 "또 조금 후면 나를 보리라. 그러므로 너희가 다시는 만날 희망이 없는 사람처럼 슬퍼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의 작별 인사는 최후의 작별 인사가 아니었다. 그들은 다시 그를 보게 되었다.

(1) 그가 부활하심으로 제자들은 그를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는 다시 사셔서 자신을 보이셨고 이에 대한 틀림 없는 많은 증거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40시간도 채 안 되어서 다시 사셨던 것이다(호 6:2 참조).

(2)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그들이 그를 다시 볼 수 있었다. 

성령이 오심으로 그들을 감싸고 있었던 무지와 미혹의 안개는 말끔히 개였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껏 알았던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신비에 대한 더 명백한 통찰력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오신 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오신 것과 같은 뜻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성령의 계심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요, 영구한 것이었고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떠나신 데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되고도 남을 것이었다.

(3) 그가 재림하실 때 제자들은 그를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죽어서 하나씩 그의 곁으로 감으로 그를 다시 대하였고 또 그들은 세상 끝 날에 함께 그를 보게 될 것이다. 세상 끝 날에 그는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요, 모든 사람이 직접 그를 볼 것이다." "잠시후면 그들이 그를 볼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참된 말씀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날들이야 영원한 날에 비하면 일순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벧후 3:8, 9).

3. 그는 그들을 떠나시는 이유를 설명하신다. 그 이유는 본문에 의하면"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셨다. 그의 말씀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1) "하늘나라에서의 사명 때문에 내가 잠시 동안 너희를 떠나 있겠으니 너희는 나를 이해하라. 왜냐하면 실상 나의 일이 곧 너희의 일이기 때문이다."

(2) "그러므로 너희가 곧 다시 나를 보리라.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손해가 없도록 나를 오랫 동안 지체시키지는 않겠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 문제로 가기 때문에 내 일이 끝나는 대로 곧 너희에게로 올 것이요 이 일이 너희에게 위로가 되리라"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취급된 내용은 그가 승천하시었다가 세상 끝 날에 다시 오겠다는 내용이라기보다는 그가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실 것이라는 내용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들이 슬퍼한 것은 그가 승천하시던 때가 아니라 그가 죽으셨을 때였기 때문이다(눅 24:52). 그리고 그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시간 차이는 참으로 "잠시 동안"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본문을 "한동안"(본문은 12:35 에서처럼 ‘에티 미크론’ 이라고 되어 있지는 않다)이라고 읽어서는 안 되고 ‘미크론’ - 즉 잠시 동안이라고 읽어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는 것은 잠시 뿐이다"라는 뜻이 되며 이 "조금"은 그가 사흘 동안 무덤에 계시는 사이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그 후의 본문도 "또 너희가 잠시 동안 나를 보리라"는 말씀으로 이 기간은 그가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전까지의 40일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들는 우리의 동역자들이나 교우들에게 우리가 그들을 떠나 하나님 나라로 불리움을 받을 때나 그들이 우리를 떠나 하나님 나라로 불리움을 받을 때 "한동안 우리가 서로 보지 못하리라"고 말하는 것이 합당하리라.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영원히 작별하는 것은 아니요 얼마 후면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마치 우기가 다시 아침에 만날 사람에게 나누는 저녁 인사처럼 즐겁고 가벼운 인사에 불과한 것이다.

Ⅱ.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당황.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어쩔줄을 몰라하였다(17,18절). 그들 중의 얼마는 서로 수군거리며 물었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은 그렇게 적극적으로, 또 말이 적은 사람은 그런 대로 "그가 우리에게 한 말씀이 무슨 뜻이냐?"고 궁금해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전에도 가끔 이러한 취지의 말씀을 하셨지만 그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지식을 통하여 또 다른 지식을 깨닫는 것이 상례이지만 이것도 하나님이 이해할 수 있는 힘을 주시지 아니하면 불가능한 것이다. 본문을 통하여 아래의 사실들을 더 고찰해 보자.

1. 제자들의 연약함. 

이 연약함 때문에 그들은 분명한 말씀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그가 죽임을 당하시고 다시 사흘만에 살아나실 것"을 분명한 어조로 자주 말씀하셨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고 말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1) "그들의 마음이 슬픔에 가득 차서"위로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지로 인한 몰이해와 슬픔으로 인한 몰이해는 일반적으로 정비례하여 서로에게 상승작용을 끼친다. 과오가 슬픔의 원인이 되고 또 슬픔은 과오를 기정 사실로 만든다.

(2) 또 하나의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왕국을 세우시리라는 생각이 그들의 마음에 뿌리 깊이 박혀서 지금 그가 하시는 말씀을 그들은 전혀 깨달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을 그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알지 못하였다. 만일 성서가 우리의 품고 있는 잘못된 생각과 일치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성서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상이 계시와 조화를 이룰 때는 문제는 용이하게 풀린다.

(3) 그들이 당황한 또 하나의 이유는 "조금 있으면"이란 말 때문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가 끝내 가셔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왜 그가 그렇게 속히 떠나셔야 하는지 또 지금까지 그들과 계신 시간이 얼마 되지 도 않았는데 조금 후면 가신다니 그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같이 우리 자신도 언제인가 틀림 없이 오기는 할 것이라고 생각하던 일이 갑자기 터지게 되면 납득하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도 언제든지 예정된 일이 "먼 때에 이루어지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잠시 잠간 후면" 우리가 떠나게 되리라든가 "잠시 잠간 후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직고해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 그 말을 어떻게 소화해야 좋을지 몰라서 당황하게 되는 것이다.

2. 물어서 알고자 힘쓴 제자들. 

그리스도의 말씀의 뜻에 관하여 깨달을 수 없게 되자 그들은 함께 그 문제를 가지고 의논하였고 서로 질문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우리는 거룩한 것에 관하여는 서로 대화를 통하여 상대방의 지혜의 도움을 받아 우리의 생각을 개선해 가야 한다. 

본문에서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얼마나 정확하게 외워서 대화에 인용하였는가를 생각해 보자.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부딪치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만족하게 해결하지 못한다고 하여서 그대로 지나쳐 버리면 안 된다.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문제를 곰곰히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Ⅲ.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에 대한 설명의 계속.

1.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의문점을 해명하여 주시는데 그가 해명해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고찰하여 보자(19절). 

그 이유는 그들이 그에게 문의하기를 열망하고 있음을 그가 아셨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단 한 분 그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주님에게 그 문제를 가지고 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스도는 그들이 그에게 묻기를 원하나 수줍어서 묻기를 주저하고 있다는 것을 아셨다. 

우리가 문제를 아뢰이기도 전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참된 기대를 아신다.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을 때 그는 선한 축복을 내려 미리 그 문제들을 해결해 주신다. 그리스도는 자기에게 묻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알기만 하시면 그들이 묻기도 전에 그들에게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신다. "우리가 부리기 전에 그는 응답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이 문제에 대해 설명해 주신 또 다른 이유는 그들끼리 이 문제를 가지고 격론을 벌리고 있다는 것을 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너희가 이 문제 때문에 서로 문의하느냐.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해 주겠노라"고 하신다. 그러면 제자들이 어떠한 사람들이었기에 그리스도는 기꺼이 그들을 가르치고자 하셨을까?

(1) 그들의 질문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은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는 겸손한 사람들이었다.

(2) 할 수 있는 수단을 다 동원할 만큼 그들은 근면하였다. "너희가 묻느냐? 그러면 너희가 가르침을 받으리라. 구하는 자는 얻으리라"고 그는 말씀하신다.

2.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그 문제를 설명하신 방법을 생각해 보자. 

그는 근사하고 비판적인 어조로 설명하신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그들에게 더욱 상세히 전개하셨다. 그는 그들에게 "조금 있으면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보리라"(17절)고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이 맛볼 슬픔과 기쁨에 의하여 이 문제를 설명하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상적으로 사물이 주는 인상의 강도에 따라서 사물을 이해하기 때문이다(20절). 

그러므로 본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나의 떠남으로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이를 기뻐하리라. 내가 없는 동안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내가 다시 너희에게 돌아오므로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하신다. 그러나 그는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에 대하여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 그는 이 말이 무엇보다 그들에게 혼동을 일으키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때와 시기에 관하여" 아는 것이 우리에게 중대한 문제는 아니다. 신자들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또 그가 그들과 함께 하시느냐의 여부에 따라서 기쁨과 슬픔이 좌우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1) 그리스도께서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 

그리고 그들의 슬픔과 기쁨에 대한 21절과 22절의 말씀은 제자들의 현재의 당할 상태와 환경으로 일차적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① 그들의 슬픔이 예언되었다.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라"고 본문에 말씀되었다. 그리스도가 당한 수난은 그의 제자들에게 슬픔만을 안겨 주었다. 그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울었다. 우리는 실상 친구의 고통이 우리의 고통으로 느껴지는 경험을 한다. 누가복음 22장 45절에 보면 그들은 슬픔으로 인하여 잠들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자신들의 손실 때문에, 또 그가 가시면 그들이 처할 운명이 어떠할까를 생각하고 울었다.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는데 그가 가시다니 그들은 슬플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서 그들은 너무나 많은 것을 바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미리 그들에게 그들 앞에 슬픔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알려 주셨다. 즉 그들이 이 말을 기억하고 위로 받기를 바라셔서였다.

② 그와 동시에 세상은 이로 인하여 기뻐할 것이 예언되었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러나 세상은 기뻐하리라"고 하였다. 즉 성자들에게는 슬픈 사실이 죄인들에게는 기쁨이 된다는 말이다.

첫째, 그리스도와 낯선 사람들은 계속 그들의 육체적인 향락을 즐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의 슬픔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 그리스도에 대해 이방인 같은 자들에게는 이 사건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애 1:12).

둘째, 오히려 그리스도와 원수된 자들에게는 그들이 그를 정복하기를 바랐으므로 또 그의 사업을 무너뜨리기를 바랐으므로 기쁨이 될 것이라고 한다. 

제사장들도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고 기뻐했음에 틀림 없었으리라. 요한 계시록 11장 10절의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 증인의 죽음을 즐거워하였듯이"말이다. 우리가 "법궤로 인하여" 떨고 있을 때 다른 자들은 환호성을 지르는 것을 본다고 이상하게 여길 것은 없다.

③ 때가 되면 그들에게 기쁨이 돌아오리라고 예언된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러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하다. "악한의 기쁨이 순간으로 끝나고 말 듯이"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슬픔도 순간으로 끝나고 만다. 후에 "제자들은 주님을 뵈옵고 기뻐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죽음에서 부활하여 생명으로 나타나셨다. 그리고 이 순간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그들의 슬픔은 기쁨으로 변모되었다. 이 기쁨은 그들이 당할 어떤 고난도 보상하고 남을 만한 것이었다. 이로써 그들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게 되었고"(고후 6:10), 슬픈 삶을 사는 자 같으나 마음은 기쁨에 넘치는 삶을 살게 되었다.

(2) 이 말씀은 어린 양을 신실하게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며 그리스도인이 늘 당하게 되는 경우를 묘사한 말씀이다.

① 어린 양을 따르는 자들의 생활은 애통하는 생활이다. 

슬픔이 그들의 운명이며 그들은 늘 신중하게 행한다. 그리스도와 사귀는 사람들은 그가 그랬듯이 "슬픔에 익숙해야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가볍게 여기는 것들 즉 자신들의 죄와 주변 사람들의 죄로 인하여 슬퍼하며 애통한다. 그들은 고통을 당하여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하고 자신들을 위하여 애통하지 않는 죄인들을 위하여 애통한다.

② 반면에 세상은 향락에 탐닉한다.

 그들은 웃고 지낸다. 그들이 너무 즐거이 생활하므로 얼핏 보기에는 슬픔을 모르거나 슬픔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로 보인다. 분명코 육체적 향락과 쾌락은 최상의 것이 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극악자들은 이러한 쾌락을 도중에 상실하게 되며 하늘의 사랑이란 그들과 전혀 무관하기 때문이다.

③ 영적인 애통은 곧 영원한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한다. 

"마음의 의로운 자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들은 기쁨의 씨앗을 뿌린 것과 같아서" 곧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된다." 그들의 슬픔에는 기쁨이 뒤를 잇겠고 뿐만 아니라 슬픔이 기쁨으로 변모된다. 왜냐하면 신앙을 위한 슬픔에는 가장 귀중한 위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주님은 임산부의 산고를 비유로 들어 설명한다. 제자들의 슬픔을 주님은 임산부의 산고에 비교한다. 이는 제자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하여 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의 백성이 위로 받는 백성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이기 때문이다.

첫째, 본문에 있는 비유의 말씀 자체를 생각해 보자(21절). 

우리가 알다시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근심한다." 해산할 때가 되면 곧 자연과 섭리에 따라 정한 시간이 되면 여인은 격렬한 고통에 쌓이게 된다. 여인은 이 때를 예기해야 하며 이 고통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인이 아기를 낳게 되면 즉 순산을 하여야 베쓰(대상 4:9)와 같은 아이를 낳고, 베노니(창 5:18)와 같은 자식을 낳지 않는다면 여인은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는"(21절) 것이다. 그 순간에 모든 신음과 불만이 여인에게서 사라진다. 그리고 산후의 고통이란 보다 용이하게 견딘다. 왜냐하면 "세상에 생명을 출생한 기쁨이 넘치기 때문이다." 본문에 보면 ‘안드로포스’라 했는데 이 말은 아들이나 딸이거나를 막론하고 한 인간을 낳는 기쁨을 뜻한다.

a. 여인의 산고와 그로 인한 슬픔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것으로 저주의 결과이다(창 3:16). 

창세기에 보면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라"하였다. 해산의 고통이란 대단한 것이다. 그러므로 최대의 슬픔이나 고통은 산고에 비교된다(시 48:6; 사 13:8; 21:3; 렘 4:31; 6:24). 이 해산 고통은 피할 수가 없다(살전 5:3) 

이 세상은 무엇과 같은가! 장미가 가시에 쌓여 있듯이 세상은 아름다운 것에는 반드시 고통이 숨어 있는 법이다. 사람의 출생이란 것도 생각하면 죄의 어리석음의 원리에 의해 태어난 것이 아닌가. 아기는 어머니의 자궁에 자리를 잡는 순간부터 어머니에게 짐이 되는데 이것은 죄로 말미암은 것이다.

b. 생명을 출산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본문에 여인이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에 그 진통을 잊어 버리게 된다"고 하였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을 벌하셔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을 거두어 가셨더라면 세상의 부모들이 자녀를 품에 안고 위로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을 자닌  아기의 출생이 축복 속에서 인간에게 주어졌으므로 우리가 이를 기뻐하게 된 것이리라.

(a) 부모의 기쁨. 

자녀의 출생은 부모에게 대단한 기쁨이 된다(렘 20:15). 자녀란 것이 돌보아 주어야 하고 그를 통하여 위로를 얻으리란 것이 보장된 것도 아니며, 때로는 그들이 견딜 수 없는 십자가로서 안겨지기도 하지만 우리가 출산을 당하면 기뻐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로인 것이다. 만약 자녀들이 요한과 같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확신할 수 있기만 하다면 그의 양친과 같이 우리도 출산을 맞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해도 되리라"(눅 1:14, 15). 

그러나 생각해 보면 자녀들은 죄 가운데서 태어날 뿐만 아니라 본문에 표현된 대로 조롱과 눈물로 가득찬 세상에 그들이 태어나는 것이므로 "그들이 태어나지 않는 것이 차라리 그들을 위해 좋았으리라"는 말이 이루어지지 않기 위해서 기뻐하되 두려운 마음을 간직해야 하는 것이다.

(b) 출산의 기쁨은 강렬한 것이어서 종전의 고통은 다시 기억되지 아니 하며 "추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이"(욥 11:16) 환난을 잊게 된다. 

이와 같이 요셉도 아이를 낳고 그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을 잊어버리게 하셨다"해서 지은 이름이었다(창 41:51). 해산에 대한 비유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을 해명해 주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a] 이 비유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맛볼 슬픔을 지시하고 있다. 

이 슬픔이란 하도 확실하고 예리한 것이어서 해산의 고통과도 같다. 그러나 이 고통은 오랫 동안 지속되는 것은 아니며, 기쁨의 소산을 얻기 위한 것일 뿐이다. 이런 결과를 낳는 데는 고통이 요구된다. 이러한 경우는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계 12:29). 또한 "모든 피조물"에게도 적용된다(롬 8:22).

[b] 그러나 슬픔 뒤에는 기쁨이 있다.

 주께서 "그 눈에서 눈물을 씻기시는데 이는 이전 것이 다 지나갔기 때문이다"(계 21:4). 그리스도께서 "그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기사" 제자들도 축복의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 그들의 눈물과 수고의 결실을 낱낱이 거두게 되면 그들의 이 세상에서의 수고와 고통은 다시는 기억되지 아니할 것이다.

둘째, 이 비유가 본문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를 살펴 보자(22절).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그리고 더욱 근심하게 되겠으나 그러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겠고" 너희도 나를 보리라. 그러면 모든 일이 잘 해결될 것이라고 한다.

a. 본문에서 다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당할 근심을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떠나므로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라고 본문에서 그는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라"는 말씀으로 강력하게 반증된다. 

그리스도의 떠나심이 제자들에게 슬픔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가 얼굴을 숨기시면"제자들은 괴로움을 당할 수밖에 없다. 마치 태양이 지면 해바라기가 고개를 떨어뜨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들이 당할 슬픔을 미리 말씀해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애통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눈물 받을 그릇을 준비해 주시며 한숨의 순간에 위로를 줄 말씀을 남겨 주시었다.

b. 그리스도께서는 전보다 더 광범위하게 그들에게 기쁨이 돌아올 것을 확증하신다(시 30:5, 11). 그가 스스로 자신의 슬픔을 감당하시고 또 우리의 슬픔도 자신 것은 "자기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서였다." 

그는 똑같은 희망을 우리에게도 말씀해 주심으로 우리의 용기를 북돋우신다. 이 기쁨에 대하여 세 가지 측면에서 생각하여 보자.

⒜ 기쁨의 원인. 

본문에 의하면"내가 너희를 다시 보리라는 말씀이 그들의 기쁨의 원인으로 나타나 있다. 이 말씀은 그가 와서 저희에게 친절과 우정을 베풀며 저희를 돌아 보겠고 저희에게 위로를 주리라"는 뜻의 말씀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a] 잠깐 동안이나마 그리스도께서 그를 기다리는 자를 버리신 것같이 느껴질지는 모르나 그는 은혜로써 그들에게 돌아오실 것이라는 점이다(사 54:7). 

사람들이란 우쭐해지면 자신들의 약점은 거의 보지를 못한다. 그러나 높임을 받으신 그리스도는 다시 그의 제자들을 찾으시리라고 하신다. 그리하여 그들이 영광 중에 계신 그를 대하게 될 뿐 아니라 주님은 비천한 가운데 처한 그들을 보실 것이다.

[b]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심으로 제자들의 기쁨도 회복된다. 

분명하지 않았던 점들이 분명하게 되고 중단되었던 교제가 소생되면 "우리의 입술은 웃음으로 넘치게 되는 것이다."

(b) 진실한 기쁨. 

본문에 보면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라"하였다.  하나님의 위로는 "마음에 기쁨을 넘치게 한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은 확고하며 일시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기쁨은 은밀하다. 그러므로 "외인이 이를 방해하지 못한다." 이 기쁨은 달콤하다. 그러므로 착한 사람은 스스로 만족을 맛본다. 그것은 확실하며, 쉽게 부서지지 않는다. 과연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의 오심을 진심으로, 전존재를 다하여 크게 기뻐하였던 것이다.

(c) 기쁨의 계속성. 

그러므로 본문에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하였다. 사람들이 그들에게서 기쁨을 앗으려고 시도할 것이다. 할 수 있는 힘만 있다면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목적을 성취하지는 못했다. 

어떤 이들은 이 기쁨을 죽어서 영광을 얻은 자들의 영원한 기쁨으로 이해한다.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한 자들은 결코 거기서 제외되는 일이 없다. 지상에서의 우리의 기쁨은 수 없는 우발적인 사건들에 의하여 빼앗길 염려가 있다. 그러나 하늘의 기쁨은 영원한 것이다. 

나는 이 기쁨을 거룩하게 된 자들의 영적인 기쁨으로 이해한다. 특별히 사도직을 감당한 사도들에게 주어진 기쁨으로 보고 싶다. 바울은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였다(고후 2:14). 

악의로 가득 찬 세상은 그들로부터 이 기쁨을 앗아가고자 할 지 모른다. 세상은 그들을 옥에 가두고 추방하며 고문을 가하고 생명을 앗으므로 빼앗으려고 한다. 그러나 세상이 그들로부터 다른 모든 것은 앗아갈 수 있을지 모르나 이 기쁨은 앗아 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슬퍼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므로" 그들이 제자들의 기쁨을 빼앗을 수 없으며 그들의 하나님을 빼앗지도 못하며"하늘에 있는 그들의 보화를" 건드리지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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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장려하심(요 16:23-27)

본문에는 제자들이 더 큰 위로를 받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간구가 응답될 것이라는 사실이 약속되고 있다. 

간구함에는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하나는 질문이요 다른 하나는 요구인데, 질문은 무지한 데서 비롯된 지식에 대한 지도의 요청이다. 또한 요구는 결핍에서 오는 간청이다.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두 가지 경우를 다 말씀하신다.

Ⅰ. 질문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그들이 질문할 필요가 없다고 하신다(23절). 그러므로 본문에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 ‘우크 에로테세테 우덴’ - 즉 너희가 다시는 묻지 않게 되리라는 것이다. 즉 "너희가 넓은 이해성을 지니게 됨으로 복음의 신비에 대한 명백한 지식을 가지게 될 것이고 그러므로 질문할 필요가 없으리라"는 말씀이다(마찬가지로 히 8:11 에서도 저희가 다 알므로 "가르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 말씀의 뜻은 "너희가 지금까지 부지런히 들어서 깨달아 알았던 것 이상의 것을 갑작스럽게 알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들은 때로는 무지에서 비롯된 질문을 던지기도 하였고(9:2), 때로는 야망에서 비롯된 질문을 하였고(마 18:1), 때로는 불신에서(마 19:27), 또 무례함에서(21:21), 또는 호기심에서 질문하였다(행 1:6). 그러나 성령이 강림하시면 이 모든 질문이 필요 없게 되리라고 하신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이야기 가운데서 그들이 다윗처럼 "내가 이것을 하리이까?"든가 또는 "내가 그리로 가오리이까?"라고 질문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을 보게 뇐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속 신의 인도함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중대한 입장에 처하였던 베드로에게도 "의심치 말고"(행 10:20)가라고 하였다. 

흔히 사람들은 질문이란 우리가 난처한 입장에 처했을 때나 질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본다면 아무리 잘난 사람도 질문을 필요로 할 경우를 만나는 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해력을 넓혀 주시겠다는 확실한 보장을 약속받고 있으므로 주저하지 말고 진리와 의무를 수반하는 공명정대한 길로 계속 인도함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이해를 잘 할 수 있으리라는 데 대한 이유가 25절에 제시되고 있다. 이 구절은 전후 문맥을 살펴 볼 때에 그들이 질문할 필요가 없으리라는 약속에 대한 말씀인 것이 분명하다. 25절의 내용을 풀어서 기록하면 다음과 같은 뜻이 된다.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말하였었다. 이에 대하여 너희는 원하는 만큼 분명하거나 알기 쉽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때가 이르면 너희가 요구하는 것처럼 분명하게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그러므로 너희에게 질문할 필요가 없게 되리라"는 것이다.

1.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알려 주시고자 하신 내용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내가 너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어서 너희로 그를 알게 하리라"고 하셨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주고자 하신 것이며 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모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위해 최대의 호의를 표시하실 때 그는 그들에게 그가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내리는 복은 다름 아니라 즉시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을 뵈옵는데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아는 것"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최대의 비결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아는 것이 결단하는데 있어서나 아름다운 마음을 지니고 사는데 최대의 복된 비결이 된다.

2. 이 사실에 대하여 그는 지금까지 비사로 그들에게 말씀하시었었다. 

이 말씀에도 그의 지혜와 교훈적인 요소가 있었으나 한편 추상적이고 윤곽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 그쳤다. 실상 전에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문제들에 대하여 매우 분명하게 그들에게 말씀하셨고 또 제자들에게는 그의 비유로 은밀히 해석해 주시기도 하셨었다. 그러나 지금은,

(1) 제자들의 어리석음과 그의 말씀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그는 비사로 말씀을 하셨다. 그가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인봉된 책과 같은 것이었다(사 29:11).

(2) 지금까지 그가 직접 말씀하셔서 그들을 깨닫게 한 것과 "그의 성령을 그들의 마음에 부으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앞으로 깨닫게 해 주실 것을 비교할 때에 지금까지 말씀하신 것은 비사에 불과한 것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전에 개념의 혼란을 느꼈고 의문투성이었던 날을 생각하며 또 그때에 비교하여 현재는 신적인 사실에 대하여 명백하고 분명한 지식을 소유함을 생각할 때 지금의 깨달음은 놀랄 만한 기쁨이 되었고 그래서 제자들은 신세계에 살게 된 듯한 생각을 할 정도였다. 성령의 역사에 비하면 문자를 통하여 얻은 역사(역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고후 3:8-11).

(3) 그가 비사로 말씀하신 것은 아버지에 대하여 또는 그의 뜻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뿐이었다. 곧 드러날 사실들에 비할 때 그가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은 매우 모호하게 들린 것이 사실이었다(골 2:2).

3.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아버지에 대해서 "명백히" 또한 parjrJhsiva - 즉 자유로이 장차 말씀해 주겠다고 하신다. 

이 약속대로 성령이 임하셨을 때 사도들은 전보다 거룩한 것들에 대한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할 수가 있었다. 이 사실은 그들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에 따라 말한 기사로 보아도 알 수가 있다(행 2:4). 이제 그들은 전에 개념상의 많은 혼란을 느꼈던 것들의 비의를 깨닫게 되었다. 

또한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보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성령께서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처럼 아들은 성령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약속은 하늘에서 완전히 성취되리라. 거기서 우리는 지금처럼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모습을 직접 얼굴에 대면하여 보게 될 것이다(고전 13:12).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침침한 구름 밑에서도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실상 이 더욱 침침한 구름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조리있게 말하지 못하고 흔히 두서없이 지껄이게 된다. 이곳에 있는 동안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많은 궁금증을 품게 된다. 그러나 그 날에는 우리가 모든 것을 명백하게 볼 것이요, "더 이상 묻지 않게 될 것이다."

Ⅱ. 요구에 대해. 

앞으로는 무슨 일이나 요구하는 것은 그가 이루어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스스로 기도에 힘써야 될 것을 종용하신 말씀이다. 그는 말씀으로 또 직접 본을 보이심으로 기도에 힘쓸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셨다. 

기도야말로 주님이 그들을 떠나시게 되면 그들에게 힘과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기도를 통하여서만이 교훈과 지시를 받을 수 있고 힘을 얻고 무슨 일이나 성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 본문에는 주신다는 약속이 표현된다(23절). 

본 단원의 약속에 대한 말씀의 서론적인 23절이 이와 같이 확실함으로 의문의 여지도 남겨 있지 않다. 그 내용은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약속을 성실히 이루기로 약속한다"는 말씀이다. 

이 약속은 비할 수 없이 풍부하고 달콤하게 들린다. "네 소원이 무엇인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 주리라"는 말씀과 함께 주님께서는 금홀을 우리에게 내미시고 계신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에게 "내 이름으로 너희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가 너희에게 주시리라"고 본문에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에도 이러한 약속을 받았었다(14:13). 그러니 우리에게 무슨 말씀이 더 필요하겠는가? 우리가 원하는 대로 그가 약속하셨으니 말이다.

(1) 그는 우리에게 어떻게 구할 것인 가를 가르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해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볼 줄 아는 눈이 열리는 것이 필요하며 하나님 앞에 자녀가 되어야 한다. 또 그리스도를 중재자로 볼 줄 아는 눈이 열리는 것이 필요하며 우리는 그리스도 앞에 변호 의뢰인이 되어야 한다. 또 아버지께 구할 때는 영적 결핍을 느끼고 영적인 축복을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간구할 때는 이러한 축복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에게 아뢸 때는 겸손히 해야 하며 우리를 도울 수 있고 또 언제나 도우시려고 하시는 아버지를 대하는 것처럼 그를 신뢰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할 때는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아무런 가치도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와 교통하심을 믿고 안심하고 "우리의 의가 되시는 주님"이신 그리스도에게 전폭적인 의뢰를 해야 한다.

(2) 그리스도는 구한 것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를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본문에 보면 "그가 구하는 것을 너희에게 주시리라"고 하셨다. 우리가 원하던 것을 갖게 되면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게 구하면 우리의 뜻하는 대로 구하는 것을 받게 되는데 말이다. 그러므로 온갖 아름답고 완전한 선물이 근원되는 구분 자신이 너희가 구하는 것을 주실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가 고귀한 생명을 지불하신 것은 자신을 위한 필요 때문에 아니요 그를 신실하게 따르는 자들을 위함이었고, 이들을 위하여 생명을 내 주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희생에 대하여 충분히 생각하신 후 이 조건을 수락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이 약속에 의하여 하늘의 보화에 대한 어음을 발행하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에 의하여 이 어음을 현금으로 바꾸어 받을 수 있으며, 그가 피로 값을 치루어 사 주셨고 또 약속하신 것을 그의 이름에 의지하여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새 계약의 참된 의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성령에 의하여 마음이 맑아질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를 위하여 기도해야만 하였고 사도행전 1장 14절에 보면 그들은 또 그렇게 하였다. 

하나님은 우리가 요청할 때 소원을 들어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앞으로 완전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면 그 동안에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계속 기도하는 것이다. 완전은 우리가 영원한 안식처에 이를 때에야 결실될 것이다. 그러나 간구하고 응답받는 것은 이 세상에서 순례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위로이다.

2. 본문에 제자들에게 간구하라는 초청장이 주어지고 있다. 

우리는 흔히 위대한 인물에게 간청할 경우 그의 허가만 떨어지면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허가하시는 한편 우리에게는 간구할 것을 요청하신다(24절).

(1) 먼저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지금까지 해오던 일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본문에 보면 그가 "지금까지는 너희가 나의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 점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① 그들의 기도에 대하여. 

본문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풀어 쓸 수 있다. "너희가 지금까지는 간구한 적이 별로 없었다. 또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면 구하라"는 뜻이다. 이제 우리 주 예수님이 그 어느 보호자보다 관대한 보호자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그는 자유롭게 주신다. 

또한 그는 우리가 그의 은사를 자주 큰 것을 간구하신다고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간구하지 않거나 적은 것을 구한다고 책망하신다. "너희는 너희의 결핍에 비교할 때 구한 것이 없었다. "고 하신다. 그는 우리에게 "입을 크게 벌려 간구하라고 하신다.

② 그들이 의지하고 기도한 이름에 대해서 지금까지도 그들은 많은 기도를 해 왔었다. 

그러나 본문에서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하라고 지시한 것처럼 중재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아직도 자신을 희생물로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힘을 의지할 때 우리의 기도는 용납되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아직 우리를 위한 중재를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중재의 향이 피어 올라가야 우리가 봉헌을 할 수 있으며 비로소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었다.

 지금까지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기는 하였으나 왕과 예언자로서의 그의 이름에 의지한 것이었고 제사장으로서의 그의 이름을 구별하여 기도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2) 그리스도는 미래를 위하여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지시해 주셨다. 고로 본문에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하였다.

①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그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 또 그가 약속한 모든 것에 대하여 구하라고 지시하신다.

② 그는 그들이 구하는 대로 받게 될 것을 보증하신다. 

우리가 은총의 하나님의 뜻에 입각하여 구하는 것은 은혜스럽게 받을 수 있다. "너희가 그것을 받으리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에는 그가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는 주실 뿐만 아니라 너희가 그것을 받을 수 있도록 하시겠다고 하였고 받음으로 위로와 유익이 안겨지리라고 하신다. 즉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으리라"는 말씀이다(전 1:2).

③ "그들의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하신다.

첫째, 이 기쁨은 "믿음의 기도"에서 비롯된 축복된 결과이다. 

믿음의 기도는 믿음으로 오는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우리가 만일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기쁨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기도를 많이 해야만 한다. "기쁨이 더욱 넘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쉬임 없이 기도해야"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하신다. 우

리가 기도를 통해 바라는 바 목적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 생각해 보자. 평화 뿐만 아니라 기쁨을 바라는 것인데 이 기쁨은 "충만한 기쁨"인 것이다.

둘째, 이 기쁨은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은 데서 온 축복된 결과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구하라 그리하면 받겠고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하나님의 선물은 영혼의 창고를 채워 기쁨을 맛보게 한다(잠 8:21). 

본문은 이러한 뜻의 말씀이다." 성령의 은사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것을 받겠고 받으면 세상의 다른 지식은 하찮은 것이 될 것이며(전 1:8) 성령이 주시는 지식이 증대되므로 너희 기쁨이 충만할 것이다."

3. 제자들이 하나님께 잘 되도록 기원할 수 있는 근거가 본문에 수록되고 있다(26,27절). 이 내용은 사도가 그의 서신에서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시다"는 말로 짧게 요약하고 있다(요일 2:1).

(1) 우리에게는 대언자가 있으시다. 

그리스도께서는 현단계에 있어서 그의 대언적 기능을 강조하려 하신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작별에 대하여 의미를 밝게 나타내시고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너희를 위해 중재하겠노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또 너희가 바라는 바 세세한 문제를 맡아 담당하겠노라고 말을 하지는 않는다 하여도 하나님과 너희 사이에 직접 나눌 수 있는 대화의 창구를 마련하였고 은혜의 보좌(성령을 의미함)를 만들어 너희를 위하여 지성소에 이르는 새롭고 산 길을 열어 놓았으니 이만하면 충분한 위로가 되리라" 하신다. 

그리스도는 그가 성령의 은사를 내리시어 그들 안에서 중재의 역사를 하게 하셨으니 그의 은총이 더는 필요 없다는 식으로 말씀하신다. 이는 양자의 성령이 그들을 위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그들을 위해서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가 말씀하신 것과는 달리 그 이상으로 우리를 위하여 중재하시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인간들은 흔히 약속일랑 잊어버리고 행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약속한 이상의 것으로 우리에게 주신다.

(2)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직접 아버지께 구할 길을 열어 놓으셨다. 

이것이야말로 다른 모든 축복을 능가하는 귀한 선물이다. 우리가 아버지께 직접 간구할 수 있는 것은 ‘필레이 휘마스’(16:17) - 즉 아버지께서 친히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의 친구가 되사 우리에게 친절을 베푸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사랑을 받는 자임을 기억하자. 그리스도는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진노를 걷어 버리셨고 우리로 하나님과 화평과 화해의 계약을 맺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몸을 바쳐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시켜 우리로 하나님의 친구가 되게 하시었다.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셨다"는 말이 대단히 강조적인 어법임을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은 홀로 자족하실 수 있으며 이러한 그의 자족은 자신의 무한하신 정직하심과 복스러우심에서 비롯된다. 이렇게 부족함이 없으신 데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박탈되었고 진노만이 우리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언자가 필요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의 은혜로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사랑하시게 된 것이다. 다음 사실들을 더욱 상세히 고찰해 보자.

①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사랑하신 이유. 본문에 의하면"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때문이라" 하였다. 

이 말은 그들이 참으로 그의 제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은총을 베푸사 그들의 마음에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고 이러한 그의 수고의 결과를 그는 만족히 여기셨던 것이다.

그러면 먼저 제자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살펴 보자.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그를 사랑한 이유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셨음"과 그가 아버지의 독생자이시며 세상에 대한 최고 책임자이심을 그들이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갈 5:6). 

만일 우리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면 그의 무한하신 사랑스러우심 때문에 우리가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자들의 그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시며, 그리스도는 기쁨을 맛보았고 또 그들의 사랑을 감사히 여기셨다. 그들이 그를 사랑하므로 그들을 아버지께 천거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씀하신다. "세상이 나를 미워하고 배척하였어도 너희는 나를 사랑하고 믿었도다. 이같이 너희가 스스로를 성별하였으니 나도 너희를 구별하리라"고 하신다.

다음은 그리스도의 진실된 제자들에게 주어진 특권을 생각하여 보자. 그것은 아버지가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들을 사랑하는 그의 모든 친구들을 기쁘게 받으신다.

② 그가 그들을 사랑하므로 제자들도 용기를 내어 기도하라고 격려하신다. 그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이 잘되기를 바라시는 분 앞에 와서 그들이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첫째, 이 경고의 말씀은 우리로 하나님을 어렵게 생각지 말라시는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재를 간구하는 기도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그렇다고 그리스도는 자비하신데 하나님께는 진노하심밖에 없다는 식의 간구를 올리라는 말은 아니다. 그런 듯은 전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아버지의 사랑과 선하심이 그리스도를 중재자로 임명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진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그를 내어 주신 자비로써 그 빛이 나타나는 것이다.

둘째, 이 말씀은 우리로 하나님에 대한 좋은 생각을 확고하게 가지게 하여 준다. 

믿는 자란 곧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로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심을 알아야 한다. 또한 어린이가 자애로운 아버지에게 나아가듯이 담대히 그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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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자신에 대한 말씀(요 16:28-33)

그리스도는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을 위로하신다.

Ⅰ. 그가 세상을 떠나시지만 아주 사라지시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아버지께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말씀하여 제자들을 위로하신다(28-32절). 좀 더 자세히 고찰해 보자.

1.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 및 그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할 것에 대한 분명한 선언(28절). 

그러므로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이 일은 너희가 곧 보게 되리라"고 하신다. 

이것이 말씀하고자 하신 모든 내용의 결론이다. 그가 어디서 오셨고 또 어디로 가시는가 하는 이 두 가지 사실 이상으로 그가 끈덕지게 제자들을 가르치려고 하신 말씀은 이제껏 없었다. 즉 구세주는 세상에 오실 때는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으로 오신 것이고 이제 떠나심에 있어서는 "영광된 세계로 영접되어 가시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경건의 비밀"(딤전 3:16)의 알파와 오메가라 할 수 있겠다.

(1) 이 두 가지 큰 진리가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① 몇 마디 말로써 압축되어 표현되고 있다. 

기독교 교의를 간결하게 요약해 놓은 것은 젊은 신앙의 초보자들에게는 대단히 유익하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들을 신조나 교리문답으로 간결하게 요약하는 것은 볼록 렌즈를 통하여 태양 광선을 집중시키는 것과 같은 효과를 지닌다. 이렇게 하므로 하늘의 빛을 땅위에 가져 와 놀라운 능력으로 세상을 태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요약된 말씀은 욥기 28장 28절, 전도서 12장 13절, 디모데 전서 1장 15절, 디도서 2장 11;12절, 요한 1서 5장 11절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욥28:28...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전12:13...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딛2:11, 12...*11.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12.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3.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14.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요일5:11...*11.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13.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14.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15.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② 서로 비교, 대조되어 표현되고 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는 놀라운 조화가 있다. 그들은 서로 상대방의 의미를 확실하게 해 주며 설명해 준다. 그리스도의 오심과 가심도 서로 이러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것을 믿으라고 하셨다(27절). 그리고 다시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가셔야 할 필요성과 당위성을 말씀하신다. 그가 오신 곳으로 가신다는 이러한 말씀은 제자들에게 이상하게 또는 구슬프게 들리지 않는 작용을 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또 소유하고 있는 지식을 적절히 개발하면 어렵고 미심쩍은 것처럼 보이는 내용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2) 구주께서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시겠느냐" 하는 문제는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해답되고 있다.

① 그는 그를 성별하시고 인봉하신 아버지께로부터 오셨다. 

거기를 떠나서 인간들이 살고 있는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또 그는 육신의 몸을 입으심으로 기꺼이 인간으로 오신 것이었다. 그의 이루실 사업이 이 세상에 있었고 이 사업을 이루시려고 세상에 오신 것이었다. 그는 이 낯선 세상을 위하여 그의 고향을 등지셨다. 그는 자신의 궁궐을 버리고 세상의 오두막집으로 오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자기 비하인가!

② 세상에서 그의 일을 마치신 후 그는 세상을 떠나 승천하사 아버지께로 가셨다. 

그가 세상을 떠나신 것은 압력을 받아 억지로 하신 것이 아니었고 스스로의 결단에 따라 행하셨다. 그리고 세상을 심판하시기까지 그는 이곳에 다시 오지는 않으실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영적으로 그의 교회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실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선언을 들은 제자들의 만족(29,30절). 

그러므로 본문에 보면 "아 지금에야 밝히 말씀하시도다"라고 제자들이 말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지금까지 그들이 확신을 가질 만한 말씀을 많이 하셨지만 본문의 한 마디 말씀이 그 어떤 말씀보다 그들에게 유익한 것처럼 보인다. 

마찬가지로 성령도 바람처럼 어느 때 어디서나 부시며 그가 원하시는 대로 말씀하신다. 한 번 아니 두 번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말씀도 반복해서 자꾸 들으면 깨닫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그들에게 개선된 두 가지 사실이 있다.

(1) 그들에게 깨달음이 증진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금에야 밝히 말씀하시는도다"라고 말하였다. 그가 말씀하신 것을 깨닫지 못하였을 때 그들은 그를 비난하는 뜻으로 "지금 말씀하는 것은 깨닫지 못하겠노라"고 말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말씀하시려는 의미를 깨닫게 되자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신데 대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린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야 밝히 말씀하시는도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거룩한 진리의 말씀을 깨닫는 것처럼 기쁜 일은 없다(고전 2:4). 수학자가 오랫동안 의문을 느끼던 난제를 해결하고서 ‘유레카 유레카’ - 즉 발견하였다라고 외치는 것처럼 제자들도 깨달았을 때 의기가 충천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혼에게 분명히 말씀해 주시사 우리로 그의 영광을 직접 대하게 해 주실 때 우리는 그 일로 기뻐해야 한다.

(2) 믿음이 증진되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이제야 우리가 확신하게 되었노라"고 말한다. 다음의 사실들을 고찰하자.

① 그들이 신앙하게 된 것, 

그것은 주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우리가 주께서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믿사옵나이다"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이 사실을 믿었다는 것을 앞 절(27절)에서 말씀하셨었다. 이에 대하여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주여 우리가 이 사실을 믿습니다. 그리고 믿을 만한 이유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사실을 믿고 또 이로써 위로를 맏음을 압니다"라고한다.

② 그들이 신앙하게 된 동기는 주님의 전지하심에 있었다. 

이 사실이 그가 예언자보다 뛰어나신 분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임을 증명해 주었다. 그가 모든 사실을 알고 계시다는 사실은 그가 제자들의 마음에 감추어 있었던 의심을 해결해 주셨고 또 그들이 고백하지도 않았던 잡다한 문제들에 대하여 그가 아시고 답변해 주셨다는 사실에 의하여 그들에게 입증되었다. 

그리스도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경험으로 그를 아는 사람으로 그의 능력에 대하여 "그의 능력이 내게 역사하는도다"라고 고백할 수 있으며 그의 사랑에 대하여는 "그가 나를 사랑하셨도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이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이 사실은 그리스도가 거룩한 사명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었음을 나타내 준다. 또한 그는 사람의 심중의 생각과 뜻을 분별하시는 분으로 그러기에 본래적이요 영원하신 말씀임을 나타내 준다(히 4:12, 13). 또한 그는 모든 교회로 그는 사람의 마음과 뜻을 살피시는 자인 줄 알게 하시는 분이시다(계 2:23). 

본문의 말씀이 제자들의 신앙을 굳게 만들어 주었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 여자가 지금까지 행한 모든 것을" 말씀하셨을 때(4:29) 또 나다나엘에게 그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었을 때"(1:48, 49) 그를 보았노라 말씀하셨을 때 그들이 받았던 것과 같은 장엄한 인상을 제자들에게 주었다. 아무도 질문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말씀하신 그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나타낸다.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가르치는 일에 적합한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는 그의 교훈으로 우리를 지키신다. 그리고 자기 안에 감추어 있는 "지혜와 지식의 보고"를 우리에게 열어 전해 주시며 구태여 우리가 조를 필요가 없도록 알아서 주선하신다.

둘째, 그는 가르치는 일에 재간이 있으신 분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밖에 없다. "배우는 자들이 다른 교사들에게 하듯이 당신에게 의문점을 문의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들이 얘기하지 않아도 그들이 문제를 느끼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유능한 교사일지라도 얘기들은 것밖에는 대답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 또는 제자들처럼 묻기를 두려워하고 있는 점을 아시고 답변하신다(막 9:32). 그러므로 그는 무식한 자를 "능히 용납하실 수 있는 것이다"(히 5:2).

3. 제자들이 이제야 그를 이해하고 신뢰를 표명하는데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가볍게 책망하심(31,32절). 

그들이 깨달은 후 의기가 충천한 것을 보시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이제야 너희가 스스로를 남들보다 앞서 믿음이 견고해진 제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느냐? 이제야 너희가 큰 실수를 저지른 줄 깨달았느냐? 그러나 너희가 자신의 연약함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그러므로 잠시 후면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리라"고 하신다. 본문에서 우리는 아래의 사실들을 고찰해 보도록 하자.

(1) 그들로 생각해 보도록 하시기 위하여 하신 "이제야 너희가 믿느냐?"는 질문을 생각해 보자.

① 이것이 "어찌하여 좀 더 일찍 깨닫지 못하였는가. 전에도 같은 말을 여러 번 듣지 않았는가?"라는 뜻의 말씀이다. 

여러 번 교훈을 듣고 초대를 받은 후에야 결국 설득되어 믿는 자들은 그들이 그렇게 오랫 동안 버틴 사실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② 이것은 "만일 이제라도 깨달았으면 왜 그 깨달음이 계속 지속되지 못하는가? 시험이 닥쳤을 때 너희의 신앙을 어디서 찾아 볼 수 있겠느냐"라는 뜻의 말씀이다. 

신앙이 지속성을 띄지 못할 때 우리 신앙의 진실성은 의문시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정말 믿는 것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2) 그들이 배신할 것을 예언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자. 

그들의 주님에 대한지금의 신앙은 확고부동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들은 모두 주님을 버렸고 그것도 바로 그 날 밤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한 무리의 경비병들에 의해 주님이 체포되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였다"(마 26:56). 그리하여 그들은 다음과 같이 흩어졌다.

① 각각 흩어졌다. 

그들은 동료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이 각각 자기만의 안전을 위하여 제각기 흩어졌다. 고난의 시기는 기독교 사회가 붕괴되는 시기인 것이다. 불운한 시기가 닥치자 그리스도를 따르던 무리들도 흩어지고 만 것이다(겔 34:12). 한 사회가 그러하듯이 그리스도도 명백히 식별되는 분은 아닌 것이다.

②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떠나갔다. 

그러므로 본문에 "너희가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리라" 하셨다. 그들은 그가 재판을 받으실 때 그를 위해 증인들이 되어야 했었고 그가 고난을 당하실 때 그를 섬겨야 했었다. 설사 그들이 그에게 아무런 위로도 드릴 수 없었다면 그들은 그가 믿을 만한 면이라도 보여두려야 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차신 쇠고랑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과 고통을 함께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홀로 남겨두었던 것이다. 

많은 좋은 동기(動機)들도 그것이 원수들에 의하여 방해를 받을 때는 친구들도 그것을 버리고 떠나는 법이다. 그리스도께서 다른 여러 유혹을 당하셨을 때 제자들은 그와 함께 하였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들도 그를 버리고 돌아섰다. 

지금까지 잘해 왔다고 하여 언제나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친구들이 우리에게 불친절할 때면 언제든지 그리스도도 친구들에게 그렇게 당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을 떠나자 각각 제 곳으로 흩어졌다. 그렇다고 예루살렘에 그들의 거주처나 소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의 거주처는 갈릴리에 있었다. 다만 예루살렘에 있다고 하면 친구나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각각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갈 길을 갔다. 각자가 자신의 안전만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일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 그리고 이 세상의 물질을 자신의 소유물(타 이디아, 16:32)로 귀하게 여겨 그들의 행복 여하를 거기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자기 신앙을 위하여 고통을 감수하려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다음의 사실들을 좀 더 고찰하자.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그의 제자들이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자기를 버릴 것을 아셨다. 그럼에도 그는 그들에게 상냥히 대하셨고 조금도 불친절하지 않으셨다. 

우리들은 친구들의 배신을 예견할 수 있다면 결코 그들에게 친절을 아낌 없이 베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의 배신을 아셨으면서도 그들에게 친절하시었다.

둘째, 그는 그들이 배신할 것을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현재의 그들의 성취감에서 맛보는 기쁨을 견제하고자 하셔서였다. 

"이제야 너희가 믿느냐? 그러나 으쓱대지 말고 두려움을 품어라. 그 이유는 너희가 잠시 후면 너희 신앙의 신실함을 의문시할 정도로 너희 신앙이 몹시 흔들림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은총을 통한 위로를 받는 때일지라도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저지를 수 있는 잘못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아니 된다. 우리가 강한 신앙과 뜨거운 사랑과 명백한 확증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내일도 오늘과 같으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 있다고 주장할 만한 충분한근거가 있다고 하여도 우리가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는 있는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배신이 가까이 이르렀음을 말씀하셨다. 

그들이 그를 좋아한 만큼 그를 부끄럽게 여길 때가 이미 왔다는 것이다. 우리의 환경 또는 우리의 심정이 순간에도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3) 제자들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위로의 손길이 자신과 함께 함을 확신하셨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는 제자들의 배신이 자신에게 결정적인 손실을 끼쳤다는 듯이 그들의 배신을 불만스럽게 여기지는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들이 떠나더라도 아버지께서는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신하시었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하였다(instar omnium). 그러므로 그는 "아버지가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그와 함께 하심에 대하여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① 그것은 주 예수께만 주어진 특권이었다. 

아버지는 주님이 고통을 당하시던 순간에도 그와 함께 하셨다. 이러한 예는 전에는 결코 없었던 일이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 때까지도 "아버지의 품 안에"거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인간이 되셨으므로 신의 성품이 인간의 성품을 떠나 홀로 있게 하신 것이 아니라 신의 성품이 인간의 성품을 지원하셨고 보이지 않는 위로로 일하시며 또 이러한 신의 성품의 동참을 통하여 주님의 고난은 비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이었다.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가 하실 모든 일에 그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었다(시 89:21). 또한 그를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사 49:8). 이 사실이 그리스도를 담대할 수 있게 하였다(사 50:7). 그가 아버지께서 그를 버리셨다는 것을 불평할 때일지라도 그는 아버지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또한 잠시 후면 성령을 자기의 손에 맡기심으로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리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는 이 사실로 인하여 늘 스스로 위로를 받았다(8:29). 그러므로 그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그가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특히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함께 하심을 확신하셨다. 

그리스도의 이러한 만족은 우리의 신앙에도 도움이 된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의 모든 사업에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하신 것을 보아 그가 주님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분명해진다.

② 이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함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들에게도 주어지는 특권이다. 

그들은 홀로 있어도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첫째, 그들이 스스로 고독을 선택할 때 아버지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신다.

 명상과 기도를 위하여 이삭이 들에 거하였듯이 또 나다나엘이 무화과 나무 아래 있었듯이 베드로가 집 꼭대기에 있었듯이 신자들이 홀로 거할 때 아버지는 그들과 함께 하신다. 고독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교통하는 자들은 홀로 있다고 외로운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자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좋은 동반자가 되신다.

둘째, 외로움이 깊어질 때 적들도 그를 내버려두고 친구들도 떠나며 욥의 경우와 같이 아내도 그를 버리고 떠난다. 

그러나 그들이 홀로 남겨진 것처럼 생각될 때에도 그들이 홀로 있는 것은 아니다. 요셉이 감옥에 있을 때, 사도 요한이 유형을 당하였을 때 함께 하셨듯이 아버지는 그들과 함께 하신다. 아무리 극심한 고통 가운데 처하여서도 그는 아버지의 동정과 어머니의 위로를 받는 자처럼 대접을 받는다. 또한 하나님의 가호가 함께 하신다면 온 세상이 우리를 버린다 할 지라도 우리는 행복하며 평안할 수 있는 것이다. 

Non Deo tribuimus justum honorem nisi solus ipse nobis sufficiat - 즉 우리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께 마땅한 영광을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 칼빈

Ⅱ. 그리스도는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시겠다고 약속으로 그들을 위로하신다. 

그들이 세상에서 어떤 고난에 직면한다고 하여도 그가 세상에 대하여 이기셨으므로 담대하라고 하신다(33절). 그러므로 본문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하셨다. 그는 계속 말씀하신다. "만일 너희가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지 못한다면 너희가 결코 평안을 누리지 못하리라. 왜냐하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다른 어떤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기뻐할 것은 내가 세상을 이기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신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이 송별 설교를 행하신 목적. 본문에 의하면 그들이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었다." 

그는 이 사실에 대하여 현재 완벽하게 가르치실 의도는 없었다. 그것은 성령이 임하시기만 하면 그들이 곧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현재로써는 그가 그들을 떠나시는 것이 그들을 위하여 최선의 길임을 그들로 알게 하므로 그들에게 만족을 주시기 위하여 이 말씀을 하시었다. 또는 이 말씀을 하신 의도를 넓은 의미에서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즉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말씀을 하신 것은 자기의 기쁨을 그들에게 알리심으로 그들도 스스로 큰 기쁨을 얻기를 바라서였다고 할 수 있겠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제자들이 외적으로는 아무리 어려움을 겪는다 하여도 내적으로는 평화를 누리기를 바라신 것이 그리스도의 뜻이었다는 사실이다.

(2) 그리스도의 평화야말로 단 하나의 참된 평화로 그 안에 거할 때만이 믿는 자들이 이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미 5:5). 

그를 통해서만이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로울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마음에 평안을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말씀의 목적은 "그 안에서 우리가 평안하기를"바라서였다. 평안은 "입술의 열매인대" 곧 그의 입술의 열매인 것이다(사 57:19).

2. 그와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세상에서 직면해야 할 것. 이에 대하여 그는 "너희가 외적인 평화는 누리지 못할 것이요 또 결코 기대할 수도 없다"고 하신다. 

그들은 세상에 평화를 전파하기 위하여 또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선포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지만 세상에서는 고난을 인간들로부터는 악의로 대접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다소 고난이 안겨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운명임을 기억하자. 제자들이 선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를 박해한다. 하나님은 그들이 더 없이 사랑스러우시므로 징계하신다. 세상 인간들은 그들을 세상에서 끊어버리고자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고통을 가하므로 그들이 마음을 하늘로 향하게 하신다. 이 양자 사이에서 그들은 환난을 당하는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주신 격려의 말씀. 

본문에 보면 ‘다르세이테’(11:33) - 즉 그러나 담대하라고 하셨다. "위로를 받으라. 뿐만 아니라 용기를 내라. 기쁜 마음을 가지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라고 하신다. 이 세상의 환난 가운데서 어떠한 압력이 가해지더라도 하나님 안에서 유쾌한 마음을 가지고 기뻐하는 것. 또 어떤 위협이 안겨져도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간직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의무요 관심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세상의 변동에 좌우되다 보면 참으로 슬플 수밖에 없다. 그러나 "환난 가운데서도"(롬 5:3)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후 6:10)고 하신다.

4.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격려의 말씀의 근거. 

그 근거는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곧 그리스도인의 승리이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주권자인 사탄을 이기셨고 그의 무장을 해제하셨으며 그를 추방하셨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사탄을 우리의 발 아래 두셨다. 그는 많은 이 세상의 자녀들을 믿음으로 귀의케 하시고 복음에 복종케 하사 그의 나라의 자녀를 삼으심으로 이 세상의 자녀들을 이기시었다. 그는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라고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기뻐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리고 나의 승리로 너희도 이길 것이다.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지만 너희가 우세하게 세상을 이기리라"(계 6:2)고 하셨다. 그는 또한 이 세상의 악인들을 이기셨다. 실상 그는 여러 번 그의 적들의 입을 막으셨고 수치를 느끼게 하셨었다. 그는 또 "성령께서 너희로 세상을 이길 수 있게 해 주시겠으니 기뻐하라"고 하신다. 

그는 세상의 악한 것들에게 복종하심을 통하여 세상을 이기셨다. 그는 십자가와 십자가의 수치를 경멸하시면서 십자가를 지셨다. 그는 그들에 대하여 전적으로 죽으심으로 세상에서 구해야 할 귀한 것들을 얻으시었다. 세상의 영예는 그의 안중에는 없었다. 또한 세상의 쾌락에 대하여서도 아무런 매력을 느끼시지 않았다. 그리스도처럼 철저히 세상을 정복하신 분은 이제껏 없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용기를 내야 하는 것이다.

(1) 우리 앞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용기를 내야 한다. 

그가 이기셨으므로 우리의 원수는 실상 패잔병에 불과한 것이며 이 때문에 원수들은 수없는 낭패를 경험하였던 것이다.

(2) 그가 우리의 구원의 대장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세상을 정복하셨기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 

우리는 그의 승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의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은 "우리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었고" 이 사실은 세상이 완전히 정복되어 우리의 것이 되었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스도가 세상을 이기셨으므로 신자들이 할 일은 다만 그의 승리를 따르면서 전리품을 나누어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요일 5:4).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을 통하여 세상을 이긴 승리자들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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