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1.13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요20.부활.막달라마리아와제자들에게나타나심.의심하는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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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요20장

===살아나시다

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다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다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도마가 의심하다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이 책을 기록한 목적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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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B]요20장

1.  Now on the first [day] of the week Mary Magdalene *came early to the tomb, while it *was still dark, and *saw the stone [already] taken away from the tomb.

2.  And so she *ran and *came to Simon Peter, and to the other disciple whom Jesus loved, and *said to them, "They have taken away the Lord out of the tomb, and we do not know where they have laid Him."

3.  Peter therefore went forth, and the other disciple, and they were going to the tomb.

4.  And the two were running together; and the other disciple ran ahead faster than Peter, and came to the tomb first;

5.  and stooping and looking in, he *saw the linen wrappings lying [there;] but he did not go in.

6.  Simon Peter therefore also *came, following him, and entered the tomb; and he *beheld the linen wrappings lying [there,]

7.  and the face-cloth, which had been on His head, not lying with the linen wrappings, but rolled up in a place by itself.

8.  So the other disciple who had first come to the tomb entered then also, and he saw and believed.

9.  For as yet they did not understand the Scripture, that He must rise again from the dead.

10.  So the disciples went away again to their own homes.

11.  But Mary was standing outside the tomb weeping; and so, as she wept, she stooped and looked into the tomb;

12.  and she *beheld two angels in white sitting, one at the head, and one at the feet, where the body of Jesus had been lying.

13.  And they *said to her, "Woman, why are you weeping?" She *said to them, "Because they have taken away my Lord, and I do not know where they have laid Him."

14.  When she had said this, she turned around, and *beheld Jesus standing [there,] and did not know that it was Jesus.

15.  Jesus *said to her, "Woman, why are you weeping? Whom are you seeking?" Supposing Him to be the gardener, she *said to Him, "Sir, if you have carried Him away, tell me where you have laid Him, and I will take Him away."

16.  Jesus *said to her, "Mary!" She *turned and *said to Him in Hebrew, "Rabboni!" (which means, Teacher).

17.  Jesus *said to her, "Stop clinging to Me, for I have not yet ascended to the Father; but go to My brethren, and say to them, 'I ascend to My Father and your Father, and My God and your God.'"

18.  Mary Magdalene *came, announcing to the disciples, "I have seen the Lord," and [that] He had said these things to her.

19.  When therefore it was evening, on that day, the first [day] of the week, and when the doors were shut where the disciples were, for fear of the Jews, Jesus came and stood in their midst, and *said to them, "Peace [be] with you."

20.  And when He had said this, He showed them both His hands and His side. The disciples therefore rejoiced when they saw the Lord.

21.  Jesus therefore said to them again, "Peace [be] with you; as the Father has sent Me, I also send you."

22.  And when He had said this, He breathed on them, and *said to them, " Receive the Holy Spirit.

23.  "If you forgive the sins of any, [their sins] have been forgiven them; if you retain the [sins] of any, they have been retained."

24.  But Thomas, one of the twelve, called Didymus, was not with them when Jesus came.

25.  The other disciples therefore were saying to him, "We have seen the Lord!" But he said to them, "Unless I shall see in His hands the imprint of the nails, and put my finger into the place of the nails, and put my hand into His side, I will not believe."

26.  And after eight days again His disciples were inside, and Thomas with them. Jesus *came, the doors having been shut, and stood in their midst, and said, "Peace [be] with you."

27.  Then He *said to Thomas, "Reach here your finger, and see My hands; and reach here your hand, and put it into My side; and be not unbelieving, but believing."

28.  Thomas answered and said to Him, "My Lord and my God!"

29.  Jesus *said to him, "Because you have seen Me, have you believed? Blessed [are] they who did not see, and [yet] believed."

30.  Many other signs therefore Jesus also performed in the presence of the disciples, which are not written in this book;

31.  but these have been written that you may believe that Jesus is the Christ, the Son of God; and that believing you may have life in His 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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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장 (개요)

본 복음서 기자는 본서의 서두를 다른 복음서의 서두와 같게 시작하지는 않으셨지만 끝 부분은 그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歷史)로 종결짓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부활 사건 자체를 기록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부활하시는 모습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부활의 증거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또 이 증거들이 그가 부활하셨음을 우리에게 확실히 나타내 준다. 우리가 본장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들은 다음과 같다.

Ⅰ. 묘지에서 직접 발견할 수 있었던 증거들.

1. 묘지가 비어 있었고 수의가 정리되어 있었다는 점(1-10).

2. 두 천사가 묘지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난 점(11-13).

3. 그리스도가 직접 그녀에게 나타난 사실(14-18).

Ⅱ. 후에 사도들의 모임 가운데서 발생된 증거들.

1. 부활하신 같은 날 저녁 도마만이 자리에 없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셨다(19-25).

2. 다른 한 번은 도마가 제자들과 같이 있던 팔일째 되는 저녁에 자신을 나타내셨다(26-31). 

---본문에 기록되고 있는 내용들은 대부분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기록하지 않은 부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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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1)(요 20:1-10)

사도들은 주님의 부활에 대한 본질적 증거를 제시하는 일에 가장 큰 관심을 가졌다.

1. 그 이유는 예수 자신이 그의 메시야 되심이 최종적이고 가장 설득력있는 증거로 호소하셨기 때문이었다. 

다른 기적들을 믿지 않으려는 자들에게 주님은 요나 선지자의 표적을 말씀해 주셨다. 예수의 적들은 요나의 기적이 곧 예수가 자기의 부활을 말하려고 한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가 부활한다면 그들은 살인자가 될 뿐만 아니라 메시야의 살인자들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요나의 기적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지는 것을 저지하려고 애를 썼다.

2. 그 이유는 우리의 구속과 구원을 위한 그의 사업의 수행이 이 부활에 그 결과가 의존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가 자기 생명을 대속물로 주기만 하고 다시 그것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그의 생명을 드림이 만족스럽게 받아들여진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그가 우리의 빚 때문에 갇히셔서 그대로 거기 머물러 계신다면 우리에게는 절망밖에 없는 것이다(고전 15:17).

3. 그 이유는 그가 부활하신 후 자신의 산 모습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내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행 10:40, 41). 

우리의 욕심대로라면 "예수의 치욕적인 죽음은 알려지지 말고 그의 영광스러운 부활은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같지 아니하셨다. 하나님은 예수의 죽음을 대낮에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게 하셨다. 그러자 태양이 이 사실을 부끄러워하여 얼굴을 감추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활은 그이 특별한 몇 친구들만에게 증거가 제시되었다. 그리고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에게 복이 되기 위하여 몇 증거자들에 의하여 세상에 전파되도록 정해졌던 것이다. 

부활에 대한 증거의 성격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규례를 경건하게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만족함을 주지만 불신 가운데서 무지하고, 오만한 그대로 머물러 있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별 신통성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마련인 것이다. 부활의 증거가 시련을 극복한 사람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정당한 일인 것이다.

우리는 본문의 내용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를 향한 첫걸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묘지가 빈 채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가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고 천사들이 말하였던 것이다(마 28:6). 만일 그가 무덤에 계시지 않았다면 파수군들이 그의 시체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에게 말해야 할 것이며, 아니면 그가 부활하셨다는 결론밖에 내릴 수 없는 것이다.

Ⅰ. 막달라 마리아는 묘지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발견하였다. 

---본서의 기자는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갔던 다른 여인들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아니한다. 다만 막달라 마리아에 대하여서만 언급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여인이 묘지를 방문하는 일에 가장 능동적이고 솔선적이었고 그리고 그녀에게서 가장 큰 사랑을 찾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그녀를 위하여 행한 아름다운 일을 생각하여 정당한 이유 때문에 불붙은 것이었다. 많은 용서를 받았으므로 그녀는 또한 많이 사랑하였다. 그녀는 그가 살아 계신 동안도 그에게 애정을 쏟았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에 경청하였으며 자기의 재산을 드려 그리스도를 섬겼다(눅 8:2, 3). 그녀가 예루살렘에 거하였던 것은 다른 용무가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주님을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당시는 여인들이 절기에 참여할 의무는 없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라간 것처럼(왕하 2:1) 아마 그녀와 다른 여자들도 예수를 계속 따라 다녔던 것 같다. 이 여인들은 주님이 곧 "죽으실" 것을 알고 더욱 그를 가까이서 따라 다녔다. 

---그녀의 사랑의 신실성은 그녀가 그의 죽는 자리에서 또 그의 죽으신 후에도 계속 그에게 보인 경의를 통하여서 증명되는 것이다. 그녀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죽음" 곧 십자가의 죽음 만큼이나 "강하였다." 왜냐하면 그녀의 사랑이 십자가 곁을 지켰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사랑은 "무덤 만큼이나"무서웠다. 왜냐하면 그 사랑이 그녀로 무덤을 방문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무덤의 공포가 그녀의 무덤 방문을 막지는 못하였기 때문이다.

1. 그녀는 그녀의 눈물로 주님의 시신을 씻기 위하여 "묘지에 갔다." 

---이는 그녀가 "무덤에 가서 울었고" " 시체에 향료를 넣어 주기 위하여" 향품을 준비하여 갔다는 사실을 보아 알 수 있다. 무덤이란 사람들이 방문할 마음이 내키지 않는 집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라야 생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주검까지도 사랑하도록 한 막달라 마리아의 그에 대한 사랑은 특별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랑을 연약하고 소심한 여성이 지녔다는 것은 특별히 놀랄 만한 것이었다. "돌을 굴려 버릴" 충분한 힘도 없었던 그녀가 어떻게 무덤에 들어가려는 마음을 먹을 수 있었을까? 유대인들의 신앙에 의하면 필요 이상으로 무덤이나 시체들을 만지는 것은 금지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묘지를 방문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서나 제자들에게 있어서나 "그를 훔쳐 내려고" 한다는 혐의를 받을 각오를 해야 할 일이었다. 이런 정황에 그녀가 주님에게 무슨 봉사를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녀의 사랑은 이것들을 해냈다. 수천 가지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아무런 유익을 드릴 수 없는 정황에서도 그에게 영예를 돌릴 방법을 연구해야만 한다.

(2)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죽음과 묘지에 대한 공포도 벗어나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음침한 골짜기를 거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에게 갈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우리가 그를 사랑하면 "해받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게" 될 것이다.

2. 그녀는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무덤에 갔다. 그녀가 빨리 무덤에 갔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을 통해서 찾아 볼 수 있다.

(1) 그녀는 안식일이 지나간 직후인 "주간 첫날에" 무덤에 갔다. 

.....그녀가 간 것은 "곡식을 팔려거나 밀을 내려고" 해서가 아니라 무덤을 찾기 위해서였다(암 8:5).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사람들은 그들이 그를 존경하는지 시험해 볼 기회를 한 번 가져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날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최초 안식일이었다. 그리고 이 안식일은 그리스도를 찾아 갔던 한 여인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녀는 전 날은 창조의 과업을 기념하는 일을 위하여 보냈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날 쉬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구원의 과업을 찾는 일에 나섰다. 그러므로 그녀는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그리스도를 방문한 것이다.

(2) 그녀는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무덤에 당도하였다. 

.....이 말은 그녀가 집에서 상당히 일찍이 출발하였음을 나타내 준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하여 그를 찾는 사람들은 일찍이 그를 찾아야만 한다!!.

① 단잠을 좀 설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하도록 하자. 

.....그를 놓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일찍이 일어나 그를 찾도록 하자.

② 그를 부지런하게 찾도록 하자.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데는 우리 자신이나 자신의 휴식까지도 부정할 수 있어야만 한다.

③ 늦기 전에 그를 찾도록 하자. .....전 생애에서도 될 수 있는 대로 일찍이 또 하루하루의 삶에서도 일찍이 그를 찾도록 하자. "너희가 아침에 나의 음성을 들을 것이라"는 말씀이 있다. 한 날을 이렇게 시작한다면 보다 아름답게 그 날이 끝날 수 있으리라." 아직 어두울 때에도" 그리스도를 부지런히 찾는 사람들은 그에 관한 깨달음을 얻을 것이며 더욱 밝게 그를 깨달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3. 그녀는 돌이 치워진 것을 발견하였다. 

.....그녀는 그 돌이 "묘지 입구에서 멀리 굴러 가 있는 것을" 보았다.

(1) 그녀는 이러한 경우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광경은 그녀에게 대단히 놀라움을 주었다.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인생의 샘이다. 그의 무덤은 또한 구원의 우물이다. 만일, 우리가 신앙으로 이 무덤을 찾으면 비록 육적 마음을 지닌 자들에게 그것은 닺혀진 샘으로 보일지 모르나 우리는(창 29:10 의 경우처럼) 돌이 굴러간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또 자유롭게 출입하며 그 샘을 통한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일찍이 그를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놀랄 만한 위로가 자주 주어지게 된다.

(2) 돌이 굴러간 것은 영광스러운 발견의 서막이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깨닫지 못했지만 결국 이 사실을 알았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①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따르고 그를 찾는데 부지런한 사람들은 누구나 다 신의 은총을 제일 처음으로 또 달콤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치욕 중에 계신 그리스도를 최후까지 따른 막달라 마리아가 또한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를 최초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을 기억하자.

② 하나님은 보통 점진적으로 자신과 그의 위로를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다는 시실을 가억하자. 

.....또한 그는 점진적으로 우리의 기대감을 불러 일으키시며 주님에 대한 우리의 궁금증을 소생시켜 주신다.

Ⅱ. 그녀는 돌이 굴러간 것을 발견하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서둘러 달려갔다. 

.....그들은 아마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마을 변두리에 거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고 뛰어간 것이다. 그녀는 "저희가 주님이 아름다운 묘지에 묻힌 영광을 시기하여 주로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우리가 그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해야 하는데 그를 어디서 찾을지 알 수가 없다"고 말하였다. 본문에서 아래의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현재의 사태에 대하여 마리아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 

---그녀는 돌이 굴러간 것과 무덤을 들여다 보고 그것이 빈 것을 발견하였다. 우리는 처음 이 광경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틀림 없이 주님이 살아나셨구나"라고 생각하였으리라고 기대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그녀는 그리스도가 죽으셨을 때 비로소 그의 말이 성취된 것을 깨달았다) 그들에게 말씀할 때는 언제나 그는 이어서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실 것도" 추가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녀가 묘지로 오고 있던 중 또는 오려고 준비하고 있는 중에 일어났을 때 진동을 느끼지 못했을까? 그리고 지금 무덤이 빈 것을 보고도 부활하셨으리라는 생각이 안들었을까? 아니 그래 상상이나 의문도 느끼지 못했단 말인가? 아마도 그녀는 옮겨 놓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에 돌이 옮겨진 것을 보고 기이한 해석을 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불행한 날"에 취한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 보게 될 때 자신의 어리석음과 건망증에 놀라게 될 것이다." 이렇게 명백한 해결이 있는데 그때는 그 생각을 어째서 못했지?" "막상 문제에 부딪치니 그래 그렇게 당황하게 된단 말인가"라고 자문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그들이 주님을 가져간 것 같다"고 말하였다. 즉 대제사장들이 그를 더 나쁜 장소로 옮기느라고 가져갔든지 혹은 요셉과 니고데모가 유대인들의 악의에서 그의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를 가져 갔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시신이 없어졌다는 것은 그녀에게 당황함과 불안감을 안겨 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그녀는 의심하였다. 그렇지만 반면에 그녀가 이 현실을 바르게 이해하였더라면 이 이상 더 기쁜 일도 없었으리라. 약한 신자들은 사실은 소망의 근거가 되며 기쁨이 되는 일을 불평스러운 것으로 여기기를 잘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는 이런 저런 이 세상적 위로가 상실당했다고 울부짖는다. 그리고 어떻게 그것들을 회복할지는 알지 못한다. 때로 우리가 그 때문에 탄식하는 세상적 위로의 빼앗김이 우리의 영적 위로를 소생시키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시 이 일에도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2. 그녀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이 일을 알린 사실을 살펴 보자. 

---그녀는 혼자서는 이 슬픔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 일을 그녀의 친구들에게 알린다. 슬픔을 서로 고하는 것 이것은 성도들의 사귐을 증진시키는 좋은 방법임을 기억하자. 

.....베드로는 그의 주님을 부인하기는 하였지만, 주님의 친구들을 버리지는 않았다. 이 사실에 의해 그의 회개의 진실됨이 나타난다. 그는 예수께서 사랑하던 제자들과 합세하였다. 그리고 베드로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전처럼 그와 사귐을 계속한 것은 우리에게 연약한 영혼 때문의 잘못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께서 저희가 회개할 때 저희를 용납하셨다면 어째서 우리는 용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Ⅲ.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에게 진해진 사실의 진실성을 확인하고 또 무슨 다른 사실을 발견이라도 할 수 있을까 하여 무덤으로 전력을 다해 달려갔다(3,4절). 

---어떤 이들은 이 소식이 전해졌을 때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저희들은 누가복음 24장 9절에 "저희가(여자들을 말함)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들에게 고하였다"는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가 오직 베드로와 요한에게만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한다. 

---여하간 제자들 중에 묘지에 간 것는 베드로와 요한뿐이었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사랑했던 세 제자들 가운데 두 명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제자의 의무를 더 잘 감당하고 선한 사업을 하기 위하여 고난과 역경을 감당하는 사람들에게 수제자(首弟子)로서의 영예를 부여한다는 것은 잘된 일임을 기억하자.

1. 본문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살펴 보자. 

---마리아가 자신이 경험한 것을 그들에게 말하였을 때 그들은 그녀의 말을 그녀가 말한 대로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가서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자 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씀의 위로와 그로 오는 유익을 전해 줄 때, 그들의 말을 한 번 직접 시험해 보도록 하자. 그리고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지 와서 보자.

2. 우리가 친구들의 염려와 두려움에 같이 참여할 준비가 얼마나 되었는지 살펴 보자. 

---베드로와 요한은 마리아의 근심에 만족할 만한 답변을 주기 위하여 서둘러 묘지로 달려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약하고 소심한 추종자들을 위로하고 돕는 일에서 오는 고통에 대하여 불평해서는 아니 된다.

3. 우리가 선한 사업이나 좋은 임무를 수행하고자 할 때, 서둘러서 일에 착수해야 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의 안녕이나 또는 당할지도 모르는 위협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할 생각도 아니하고 무조건 묘지로 달려갔다. 이로써 그들은 자기들의 주님에 대한 열심과 사랑을 나타냈고 또한 촌각도 낭비하지 않으려 하였다. 우리도 하나님의 예명을 수행하러 갈 때, 이와 같이 달려가야 한다.

4. 선한 사업을 하는데 좋은 동요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살펴 보자. 

---아마 이들 제자들중의 누구도 감히 혼자 묘지에 가려고 한 사람은 없었으리라. 그러나 함께 힘을 합하니까 어려움이 없었다(전 4:9 참조).

5. 제자들 가운데서 선한 사업에 다른 사람을 능가하고 뛰어나려고 애쓰는 훌륭한 경쟁을 한 사실을 살펴 보자. 

---요한이 젊기 때문에 베드로보다 앞서 달려갔다는 것을 흉이라고 볼 수는 없다. 각자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리고 나보다 다른 사람들이 잘한다고 부러워할 것도 없고 좀 못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들이 최선을 다한다면 경멸하지도 말자.

(1) 이 경주에서 앞서 달린 사람은 예수께서 특별히 사랑한 제자였다. 

.....그러므로 그도 특별한 방법으로 예수를 사랑하였다.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인식하고 다시 우리 속에 그에 대한 사랑을 불붙이는 것은 우리의 덕성을 계발하는데 유익한 것이다. 그 어느 것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에 대하여 충성하도록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2) 뒤에서 달려온 사람은 베드로였다. 

.....그는 그의 주님을 부인하였고 그 때문에 그는 치욕과 슬픔 속에 잠겨 있게 되었고 이 사실이 그의 몸을 천근처럼 무겁게 하였다. 이와 같이 죄의식은 우리를 짓밟고 이것이 우리의 하나님을 섬기려는 마음을 막아 버린다. 양심이 죄로 마비되면 우리는 삶의 근거를 잃어버리게 되고 만다.

Ⅳ. 묘지에 당도한 베드로와 요한은 여러 가지 조사를 해 보지만 거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지 못한다.

1.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가 혼자 갔던 장소 이상 더 나아가지 않았다.

(1) 그는 호기심을 가지고 무덤을 들여다 보았으나 그것은 비어 있었다. "그는 구부려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스도를 발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허리를 구부려 안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즉 겸손한 마음으로 신의 계시의 권위에 복종하고 또 지혜있게 구해야 한다.

(2) 그러나 그는 묘지에 들어갈 용기가 없었다. 

.....온화한 사랑을 지닌 자에게는 흔히 과감성있는 결단이 결여될 때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굳게 서서 싸우는 일은 등한히 하면서 신앙의 경주만을 발리 달리려고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2. 베드로는 비록 늦게 당도하였지만 먼저 무덤에 들어갔고 그리하여 요한이 발견한 것보다 더 정확히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6,7절). 

---요한이 그를 앞서 달려갔지만 그렇다고 베드로는 돌아서려고 하였거나 그 자리에 서 있지 아니하였고 힘을 다하여 그를 따라갔다. 요한이 조심스럽게 묘실을 들여다 보고 있는 동안 그는 당도하여 큰 용기를 내서 "무덤으로 들어갔다."

(1)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용감성과 또 하나님이 그에 은사를 어떻게 다양하게 부어 주시는가를 살펴 보자. 

.....달리는 일은 요한이 베드로 보다 앞섰으나 용기에 있어서는 베드로가 앞섰다.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에 대하여 시적으로 표현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도 용감하다"고 하였는데 이같이 한 사람이 두 가지를 다 갖춘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삼하 1:23). 어떤 제자들은 빠른가 하면 다른 제자들은 용감하다. 전자가 느린 사람들을 촉진시키는데 유익한 반면, 후자는 소심한 사람들을 담대하게 하는데 유익을 끼친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하나라"는 말씀과 같다. 베드로가 무덤으로 감연히 들어간 사실은 다음의 사실들을 가르쳐 준다.

① 진지하게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근거 없는 걱정이나 "가는 도중에 사자나 없을까 또 무덤가에 귀신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하나"라는 어리석은 환상 때문에 겁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②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은 무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누우셨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무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무덤이란 파멸의 구덩이도 아니요, 그 안에 절대로 죽지 않는 벌레들이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시체를 보거나 무덤 가운데 혼자 있다고 해서 생기기 쉬운 두려움에 빠져들지 말고 그것을 정복해야만 한다. 오히려 우리도 곧 죽어 무덤에 묻히리라는 것을 생각하며 죽음과 무덤을 우리의 가까운 친구처럼 사귀도록 하자(욥 17:14).

③ 우리는 무덤을 거쳐서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나아가야만 한다. 

.....그 길을 거쳐서 그리스도는 영광에 이르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모습과 사심을 알 수 없다면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욥 19:25).

(2) 베드로가 묘실에서 발견한 물건들의 상태를 고찰하여 보자.

① 그리스도께서는 거기에 수의를 남겨 두시었다. 

.....그가 무슨 옷을 입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지 우리에게 전해진 것은 없다. 그러나 그는 유령이 흔히 그러리라고 상상되는 것처럼 수의를 입고 나타나지는 아니하셨다. 그는 그것들을 한곁에 남겨 놓으셨다.

첫째, 그 이유는 그가 부활하사 다시는 죽으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죽음이 그를 더 이상 지배할 수 없었다(롬 6:9). 나사로는 그의 수의를 걸치고 나왔었다. 왜냐하면 그는 다시 수의를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불사의 생명으로 부활하셨으므로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나오시었다.

둘째, 그 이유는 그가 영광의 옷으로 덧입힘을 얻으려 가시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영광의 옷에 비하면 누더기와 같은 수의를 남겨 두시었다. 하늘의 낙원에서는 지상에서처럼 옷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는 없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승천하던 엘리야선지자도 그의 겉옷을 떨어뜨리고 올라갔던 것이었다.

셋째, 우리가 죄의 죽음에서 의의 생명으로 부활할 때 우리 뒤에다 우리의 수의를 남겨 놓아야 하며 모든 우리의 부패함도 벗어버려야만 한다.

넷째, 그리스도께서는 수의를 우리가 쓸 수 있도록 정돈해서 남겨 놓으셨다. 

.....무덤이 생도들의 침대여야 하므로 주님은 그 침대에 시트를 깔아 놓으셨고 또 성도들을 위하여 그것을 준비해 두시었다. 그리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애곡하는 생존자들로 "그들의 눈물을 씻게 하시기 위하여" 남겨 두시었다.

② 수의는 잘 정돈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 사실은 사람들이 잠들고 있는 동안 누군가 시체를 훔쳐간 것은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무덤을 털어가는 도적들은 옷은 훔쳐가고 시체는 남겨두는 것이 상식적이다. 더구나 옷이 훌륭한 세마포요 새 것인데 시체는 가져가도 옷은 남겨 둘 도적은 없을 것이다(현대 부활론자들이 이런 주장을 한다)(막 15:46). 또한 시체를 가져간다고 하여도 알몸이 된 시체를 가져가기 보다 옷이 입혀진 시체를 가지고 가려 할 것이다. 또한 만일 시체를 훔쳐간 것이 사실이고 그들이 수의를 뒤에 남겨 두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들이 여유만만하게 세마포 옷을 정돈하였으리라고 상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3) 베드로의 용기가 요한을 어떻게 격려하였는가를 살펴 보자. 

---이제 요한도 들어갈 마음이 생겨서 들어간다(8절). 그리고 그도 "들어가 보고 믿었다." 믿었다 함은 시체가 없어졌다는 마리아의 말을 그대로 믿은 것이 아니라(그가 본 것을 믿은 것은 마리아의 힘이 컸던 것은 사실이다) 아직 그의 믿음이 약하고 흔들렸지만 예수께서 다시 사셨다는 것을 믿기 시작하였다.

① 요한은 용기를 내서 베드로를 따라 들어간다. 만일 베드로가 먼저 무덤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가 묘실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는 못하였을 것처럼 여겨진다. 

.....다른 사람들의 용기에 힘입어 자기도 선한 사업을 하는 일에 용기를 얻는다는 것은 좋은 일임을 기억하자. 다른 사람들의 결단과 용기를 보고 장애와 위험에 대한 공포를 벗어버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요한의 재빠름이 베드로를 더 빨리 달리게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의 담대함이 요한으로 담대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두 명은 각자 한 가지만을 수행하는데 그쳤으리라. 베드로에게는 최근 배반자라는 낙인이 찍혀졌고 요한은 베드로와 보조를 같이 하였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의 뒤를 따르는 것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② 그렇지만 요한은 베드로의 믿을 촉발시키는 역할을 수행한 것처럼 보인다. 베드로는 보고 기이히 여겼으나(눅 24:12) 요한은 보고 믿었다. 

.....사고형의 사람이 행동형의 사람보다 신의 진실의 증거를 더 빨리 받아들이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그들이 더디 믿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복음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전해 주고 있다(9절). 아직 그들이 "성경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그들은 그가 "즉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리라"는 성경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생각해 보거나 응용하거나 때 맞게 이해하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구약은 메시야의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가 메시야이심을 믿었다. 또 예수 자신도 그가 구약 성경의 말씀에 따라 다시 부활하실 것을 자주 저희에게 말씀하셨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모든 사실을 적용하여 현재의 상황을 설명할 정도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자.

첫째, 제자들 자신이 처음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기를 얼마나 주저하였는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심이 극복된 후에 그들이 확신을 가지고 부활을 증거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부활에 대한 믿음에 그들이 주저하였다는 사실은 그들의 부활에 관한 믿음이 경솔하게 결정된 것이 아니며 또한 날마다 무조건 믿는 단순한 사람들이 가지는 신앙은 아님을 나타내 주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부활을 통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증진시키고자 하였다면 그들은 부활의 증거의 첫 번째 섬광을 보고 탐욕스럽게 매달렸을 것이고 부활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불러 일으키고 또 그 기대를 지지하며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에 부활에 대한 말씀들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의 희망은 소멸되어 버려서 현재의 사건은 그들에게 기이한 일 정도로밖에는 보여지지 않았고 그들은 전혀 부활과 관련시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처음에 베드로와 요한은 이 사실을 믿는데 너무 소심하였었다. 그러나 후에 이 사건은 그들에게는 가장 확실한 부활의 증거로 여기실 수 있게 되었고 확신있게 부활을 사람들에게 증거하게 되었다. 이 사실들을 통하여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속일지 모르는 정직한 사람은 일 뿐만 아니라 외적인 압력에 의해서 쉽게 넘어가 버리지 않는 주의 깊은 인물들이라는 사실이 나타난다.

둘째, 그들이 서서히 믿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본문에 의하면 그것은 그들이 "성경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HS안에서 성경읽고 기도로 추구하여 깨닫기

.....이 사실은 복음서 기자가 자신의 결점이었음을 수긍하는 말로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예수께서 저희에게 아직 나타나시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던가 "그의 손과 옆구리를 저희에게 보여 주시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성경을 깨닫도록 저희의 마음을 여시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눅 24:44, 45 참조). 왜냐하면 성경 말씀이 "가장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3. 베드로와 요한은 탐구를 계속하지 않고 믿음과 불신앙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단념하고 말았다(10절). 본문에 의하면 "두 제자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이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희랍어 사본에 보면 ‘프로스 헤아우투스(혹은 아우투스)’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나머지 제자들도 현재 같은 숙소를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자기 친구들과 동료들에게로 돌아갔다는 말로 간주할 수 있겠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예루살렘에 각각 자기 집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갔다.

(1) 시체를 훔쳐갈 계획으로 왔다는 혐의를 받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또는 시체가 없어진 지금 그들이 그것을 훔친 것이라는 혐의로 고소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들의 믿음이 증진되는 대신에 저희들은 자기의 안전을 도모하는 데만 급급하였다. 어렵고 위험스러운 시대에는 훌륭한 사람들일지라도 결단력 있게 그들의 사명을 계속 수행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이른 아침에 가장 먼저 무덤을 찾은 막달라마리아는 전심으로 주님의 시신이라도 확보하기를 추구하며 남아있다!!))

(2) 저희가 당황하였고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또는 그들이 본 것에 대하여 모슨 방도를 취할지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용기있게 무덤에 머물지를 못하고 그들은 집으로 가서 하나님이 "이 사실마저 그들에게 계시해 주실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심한다. 이것은 아직도 그들이 연약하다는 증거다.

(3) 아마 나머지 제자들은 함께 거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이 발견한 사실을 알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의논하기 위하여 나머지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아마 그들은 저녁에 모이기로 작정했던 것 같고, 그때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오셨다.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당도하기 전에 천사가 거기 나타나서 돌을 굴려버리고 여인들을 위로해 주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이 말씀은 요한복음의 본문에 대한 말씀이 아니고 마태나 누가의 기록에 대해 언급된 말씀이다. 요한복음과 달리 거기서는 여러 여인들이 무덤에 찾아갔고 거기서 그들은 한 천사를 본다. 그 다음 그들은 제자들에게 달려 갔었다:역주). 또한 제자들이 무덤을 떠나자마자 본문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서 두 천사들을 보게 된다(12절).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에 가서 그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하였으나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옳겠는가?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갔을 때 그 전에도 나타났었고 또 그들이 간 후에도 나타났던 천사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끝까지 추구하는 바 마음-뜻-정성 다하는, 끈질긴 사랑의 진정성과 열정?!))

① 천사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명령과 지시에 따라 마음대로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한 장소에 나타날 수도 있다. 또한 그들은 동시에 어떤 사람에게는 보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민 22:23; 왕하 6:17). 어떻게 그들은 보이다가는 사라지고 또 다시 나타나는지 우리는 알 수 없고 다만 추측이나 해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점는 본문의 이야기로 보아 분명하다.

② 천사들은 볼 수 있는 특권은 그리스도를 일찍부터 그리고 계속하여 찾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제일 먼저 와서 끝까지 머무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다. 그러나 다만 잠깐 들려가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천사들의 모습은 눈에 뜨이지 않는다.

③ 사도들은 천사들로부터 지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은혜의 성령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다(히 2: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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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2)(요 20:11-18)

성 마가는 그리스도께서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고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막 16:9). 그 현현에 대하여 본문에 상세히 언급되고 있다.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의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다.

Ⅰ. 주 예수에 대한 막달라 마리아의 지속적이고도 뜨거운 사랑(11절).

1. 그녀는 베드로와 요한이 간 후에도 무덤에 남아 있었다. 

---왜냐하면 거기 그녀의 주님이 묻히셨기 때문이었고 또 거기서 주님에 대한 무슨 소식을 들을 듯 싶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사랑이 있는 곳에는 그에 대한 계속적인 추종이 있게 되며 그에게 메달리려는 단호한 결심이 있게 마련이라는 점이다. 

.....이 훌륭한 여인은 주님을 그녀가 포기한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 그를 잃어버리고 주님 때문에 무덤 곁에 거하며 주님의 사랑의 위로가 없었으나 그녀는 계속 그를 사랑하였다.

(2) 그리스도를 사귀려는 참된 욕망이 있으면 그를 알려는 온갖 수단도 동원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호세아 6장 2,3절에 "여호와께서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라는 말씀을 참조하라. 본문에서의 마리아처럼 우리가 계속 알려고 한다면 부활의 의미를 발견할 것이다.

2. 그녀는 거기 남아서 울고 있었다. 

---그녀의 눈물은 주님에 대한 그녀의 애정을 웅변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었다. 자기의 모든 것이었던 그리스도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울 만한 이유가 있다. 그녀는 그의 극심했던 고난을 기억하고 울었다. 또한 그의 죽음 때문에 그리고 그녀와 자기 친구들과 마을이 주님을 통하여 은덕을 입었던 것을 잃었으므로 울었다. 또한 그녀는 주님 없이 외로이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을 생각하고 울었고 또한 지금 그의 시체를 그녀가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울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들은 "울면서 그를 찾아야만 한다"(눅 2:48).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 울어야만 한다.

3. 그녀는 눈으로 확인하고 다시 그녀의 사랑을 뜨겁게 하려는 듯 "울면서 구부려 무덤 속을 들여다 보았다." 

---우리가 잃은 것을 찾을 때는 마지막으로 그것을 남겨 두던 곳을 기억해서 반복하여 살펴 보아야 하며 또 그것을 찾으리라는 기대를 가져야 한다. 그녀는 알지는 못하였으나 결국은 용기가 될 만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 줄 믿고 계속 무덤을 들여다 보았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울음이 주님을 찾는데 지장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는 울면서 "구부려 무덤 속을 들여다 보았다."

(2) 무엇을 찾되 구하던 것을 발견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진실한 눈물로써 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Ⅱ. 그녀는 무덤 속에서 두 천사들의 모습을 보았다(12절). 본문의 내용을 고찰하여 보자.

1. 그녀가 본 대상자들의 모습. 

---그들은(바위를 쪼아서 만든 것으로 여겨지는 선반 또는 긴 평상 위에) "앉아 있는 흰옷 입은 두 천사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는 "머리 편에" 하는 "발 편"에 앉아 있었다. 본문에는 다음과 같이 그들에 대하여 기술되고 있다.

(1) 그들의 본성. 그들은 천사들로 이 큰 사건 때문에 보냄을 받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사자들이었다.

① 그들은 인자에게 영예를 돌리기 위하여 또한 그의 부활의 장엄미를 더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다시 오셨으므로 천사들에게 그를 수종할 책임이 주어진 것이다. 마치 그가 태어나실 때도 천사들이 그리하셨듯이 말이다(히 1:6).

② 그들은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다. 

.....슬픔에 잠긴 그들에게 아름다운 말을 전하며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 주므로 그를 만날 준비를 그들에게 시키기 위하여 온 것이었다.

(2) 그들의 수효. "천군들의 떼가" 나타나 찬양한 것이 아니라 "두 명"이 나타났다. 

---증언을 위하여서는 두 명으로도 족하였기 때문이었다. 두 증인의 입에서 나온 말로도 이 세상은 변모될 수 있는 것이다.

(3) 그들의 복장. 그들은 "흰 옷"을 입었다.

① 흰 옷은 그들의 순결과 거룩함을 의미한다. 

.....최상의 인물들도 "천사 앞에 서서"그들과 비교하여 보면 "더러운 옷을 입은 것"처럼 추하게 보인다(슥 3:3). 그러나 천사들은 흠이 없다 하지만 영광을 입은 성도들은 천사처럼 변모되어 "흰 옷을 입으신 그리스도와 함께" 걷게 될 것이다.

② 흰 옷은 그들의 존재의 영광됨과 또한 이 사건의 영광됨을 의미한다. 

.....그들이 입은 옷의 흰색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모습의 밝음을 나타내 준다.

(4) 그들의 자세와 위치. 

.....그들은 그리스도의 무덤에서 휴식을 취하며 앉아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원기회복을 위한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천사들이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하여 자신들을 정립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사들이 무덤으로 들어간 것은 우리에게 무덤을 두려워하지 말도록 가르치기 위한 것이며 또한 우리가 잠시 동안 무덤에 머문다고 하여서 우리의 영생에 지장이 있을까하는 염려를 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믿는 자들에게 무덤이라는 것은 하늘나라로 가는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한다. 

.....또 천사들이 무덤에 들어간 것은 천사들이란 성도들이 죽을 때 그들을 아브라함의 품으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심판날에 "그들의 몸을 일으키기 위하여"(마 24:31) 고용된 존재임을 나타내 주기도 한다. 이들 천상의 파숫군들은(천사들이 "파숫군"으로 칭하여지기도 한다. 단 4:23) 예수의 적들이 세운 파숫군들을 놀라게 하여 쫓아버리고 무덤을 지켰는데 이는 어둠의 세력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내 주고 있다. 즉 어둠의 세력을 패주시키셨음을 나타내 준다. 이 같이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은 가장 뛰어난 정복자들이다. 그들이 서로 마주하여 하나는 예수의 침상 머리 편에 하나님 발 편에 앉은 것은 그리스도의 전신을 그들이 보호한다는 의미를 띠고 있다. 즉 그의 자연적인 육체뿐만 아니라 그의 신비한 몸까지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보호함을 의미한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속죄소 양 끝에 서로 마주하게 하여 세워놓은 두 스랍들을 상기시켜 준다(출 25:18).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위대한 속죄소이시다. 그의 머리 편과 발 편에 두 스랍들이 있어서 이들은 불검으로 우리를 지키지는 않으나 안내하는 사자(使者)가 되어 생명의 길을 우리에게 지시해 준다.

2. 막달라 마리아가 슬퍼하는 이유에 대한 저희의 동정적인 질문(13절). 

---본문에 의하면 그들은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라고 물었다. 이 물음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이 물음에는 그녀의 울음에 대한 비난의 뜻이 담겨 있었다. 

.....즉 "네가 기뻐해야 할 때인데 어찌하여 우느냐?"는 말이다. "네가 어찌하여 낙담하는가"라는 뜻의 말이다.

(2) 이 질문은 천사들이 성도들의 슬픔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가를 보여 주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었다. 

.....천사들은 성도들을 위로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이같이 성도들도 서로 동감하며 동정을 베풂으로 말없는 위로를 베풀 줄 알아야 한다.

(3) 이 질문은 그녀의 애통을 기쁨으로 변모시키며 "그녀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시기 위하여"(시 30:11)한 소식을 전해 주려는 의도 때문에 주어진 것이었다.

3. 그녀는 천사들에게 자신의 현재의 곤경을 슬픔 어린 어조로 설명하였다. 

---그 이유는 "내가 향유를 뿌리고자 하여 와 보니 사람들이 복된 주님의 시신을 가져가 버렸고 또 그들이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한다. 그녀는 2절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했었다. 그녀의 말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을 찾아 볼 수 있다.

(1) 그녀의 믿음의 연약함. 

.....만일 그녀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절대적인 신뢰로 생동하는, 발휘되는 산) 믿음이 있었다면 이 산을 옮기울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자주 불필요하게도 상상에 불과한 곤란 때문에 당황한다. 신앙은 우리에게 이러한 곤경을 참된 유익으로 발견하게 해 준다. 

.....훌륭한 많은 사람들도 그들이 겪고 있는 구름과 어두움에 대하여 불평한다. 그러나 역경은 그들의 영혼을 겸손하게 하며 그들의 죄를 극복하게 하며, 그들이 그리스도를 귀하게 여기게 하는데 필요한 은총의 방법인 것이다.

(2) 그녀의 사랑의 힘.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영혼 속에 그의 사랑의 위로가 되는 증거를 잃어버렸거나 또는 그와 속삭이는 위로의 기회를 잃어버렸거나 또는 그의 말씀을 지킴으로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을 이루지 못할 때면 큰 상처를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갑작스런 천사의 나타남으로 인한 놀람으로 주어진 질문을 기피하지 아니하였다. 또한 나타난 영광스러운 (천사의) 모습 때문에 만족하지도 아니하였다. 천사의 현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슬픔은 한결 같았다. 그러므로 그녀는 여전히 "그들이 주님을 가져갔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모습과 그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미소없는 천사들의 모습이나 저희들의 웃음이 그녀를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녀는 천사들의 출현을 그리스도가 어디 계신지 묻는 기회로 삼았다. 모든 피조물들 그것이 아무리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일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과 우리를 사귀게 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요, 또 그렇게 이용되어야 마땅하다. 

.....천사들은 그녀에게 "네가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하여 그녀는 말한다. "내게는 울 만한 이유가 있나이다. 그들이 나의 주님을 가져갔기 때문입니다"라고 한다. 미가와 같이 "내가 무엇을 더 하리이까? 내가 어찌하여 우느냐고 당신이 물으시나이까? 그것은 나의 사랑하는 자가 가버렸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버림받은 자의 슬픔 그것은 경험한 자 이외에는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녀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위로의 증거와 하늘의 소망을 가졌었으나 이제 그것들을 잃고 어둠 속을 걷게 되었다. 이같이 상처받은 영혼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Ⅲ. 그녀가 아직 천사들과 말하면서 그녀의 사정을 토론할 때 그녀에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다. 

---그들이 그녀에게 무어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녀의 질문에 만족스러운 답변을 주시기 위하여 나타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기 때문이다. 예수에게로 이끌 수 있는 사람은 그분 이외에는 없는 것이다. 이제 마리아는 기쁨으로 그녀의 주님이 계신 곳을 알게 될 것이며 그녀의 오른 편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게 되리라.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그리스도를 뵙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그는 더디 나타나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를 찾는 사람에게 "너희가 헛되이 찾는도다"라고 결코 말씀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네가 바라는 것이 그리스도인가? 네가 그리스도를 뵙게 될 것이다"라고 응답해 주신다.

2. 그리스도는 그를 찾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시되 그들의 기대보다 빨리 나타나신다는 사실이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시신을 보기를 원했고 또 그것이 없어졌음으로 불평하였다. 그러나 보라. 이제 그녀는 다시 사신 주님을 뵈옵게 된 것이다. 이같이 주님은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구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이상의 것으로 응답해 주신다. 그리스도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심에 대하여 다음의 사실들을 생각하여 보자.

(1) 그는 처음에 그녀에게 자신을 숨기셨다.

① 그는 보통 사람처럼 서 계셨다. 그리고 그녀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14절). 

.....그녀는 천사들에게 한 그녀의 호소에 대한 답변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녀의 뒤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 같은 또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천사들과 말을 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그녀가 찾는 바로 그 분이 계셨으나 그녀는 그가 "예수신 줄 알지 못하였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첫째,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되" 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가까이 하신다는 사실이다(시 34:18).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그를 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가 그들로부터 멀리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부지런히 주님을 찾는 사람들은 그를 찾는데 온갖 방법을 다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찾든지 사랑하든지 올인하라!!))

.....마리아는 혹 무엇을 발견할까 하는 기대로 "뒤를 돌아보았다." 몇몇 고대 교부들은 마리아보다 먼저 주님을 발견한 천사들이 일어나 그에게 경배하려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뒤를 돌아보아야 할 필요를 의식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들이 이 같이 대단한 경의를 표하는 분이 누구인지 알기 위하여 뒤를 돌아 보았다고 여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의 말이 옳다면 그녀가 주님을 동산지기로 알았을 리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녀가 뒤를 돌아 본 것은 백방으로 그에 대하여 알아 보려는 그녀의 진지한 소망 때문이었던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 가까이 계시나 그들이 그를 알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 "그녀는 그가 예수신 줄 알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그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타신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그를 무심하게 바라 보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녀의 눈은 염려로 가득 차 있었으므로 그녀는 그를 잘 분간할 수 없었다. 아니면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처럼 "영혼의 눈이 감기어 있었으므로 그를 알지 못하였던 것이리라"(눅 24:16).

② 주님은 그녀에게 평범한 질문을 던지셨다. 그리고 그녀는 그 질문에 따라 그에게 답변하였다(15절).

첫째, 그가 그녀에게 던진 질문은 평범한 질문으로 누구나 물을 수 있는 성질의 질문이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이렇게 일찍이 동산에 무슨 볼 일이 있어서 왔는가? 그리고 왜 그렇게 소란을 떠는가?"라고 하신다. 

.....이 말은 좀 거칠게 말씀된 것같이 느껴진다. 마치 요셉이 자신을 형제들에게 알리기 전에 자기를 낯선 사람처럼 가장하기 위하여 말하였듯이 그는 말씀하시었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하신 말씀인 것처럼 보여진다. "내가 부활하였는데 어찌하여 우느냐?"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는 모든 우리의 슬픔을 진정시키며 흐르는 눈물을 저지시키며 눈물의 근원을 말리울 만한 힘이 간직되어 있다. 다음 사실들을 생각하여 보자.

a.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들의 슬픔을 아시고 "너희가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으신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들의 눈물을 담아서 간직하시며 그의 책에 그들이 애통한 사실들을 기록해 두신다.

b.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들의 염려를 아시고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신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그를 찾는 것을 주님은 본인들로부터 아시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이 누구를 구하는지 그에게 고해야만 한다.

둘째, 그녀가 그에게 한 대답 또한 평범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직설적인 답변을 하지 아니하였다. 

.....그녀의 말투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 "어찌하여 당신이 나를 희롱하나이까? 또한 내 눈물에 대하여 책하시나이까? 당신은 내가 왜 울며 누구를 찾는지를 아시나이다." 

.....그녀는 그가 아리마대요셉이 그의 정원을 가꾸기 위하여 고용한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또한 그가 자기 맡은 일을 하려고 이렇게 일찍 온 줄로 알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다음 문제들을 생각하여 보자.

a. 그녀의 잘못된 이해. 

.....그녀는 우리 주님 예수를 동산지기로 착각하였다. 아마도 그것은 주님이 위엄있게 어찌하여 그녀가 거기에 있는가 물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불운한 세월 속에 고통을 겪는 심령들은 스스로 그리스도를 잘못 알고 그의 섭리와 은혜 내리시는 방법에 대하여 허황된 생각을 갖기가 쉬운 법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b. 그녀의 사랑의 참됨. 

.....그녀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찾는 일에 얼마나 집중되었는가를 살펴 보자. 그녀는 사랑에 열중한 연인이 그러하듯이 만나는 사람마다 "당신은 내 영혼이 사랑하는 그분을 보셨습니까?"라고 질문을 하였다. 

.....그녀는 동산지기에게도 경어를 써서 그를 "주(sir)"라고 부른다. 이것은 그에게서 그녀가 사랑하는 분에 관한 무슨 소식을 얻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에게 주님의 이름을 대지 아니한다. 그 이유는 그가 "옮겨 갔다면" 이 동산지기도 그녀처럼 예수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녀가 누구에 대하여 말하는지 알 수밖에 없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사랑이 강하다는 또 다른 증거는 그를 어디에 두었든지 그의 시신을 옮겨 오려고 한 것을 보아서도 나타난다. 상당한 양의 향료가 첨가된 그의 시체는 그녀가 옮길 엄두도 못낼 만큼 무거운 것이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녀는 그 이상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어떤 장애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녀는 이 동산지기가 불명예스럽게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자의 시체가 그의 주인의 쓰지 아니한 무덤에 묻히는 영예를 누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그가 그런 시체에게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좋지 않은 곳으로 시체를 옮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동산지기의 주인에게 일러서 그로 그 장소를 알아 내게 하겠다고 그에게 협박하지는 아니하였다. 다만 예수의 시체를 모시기 원하는 다른 무덤을 찾아 보겠노라고 말하였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짐처럼 생각하는 곳에 머무실 필요가 없는 것이다.

(2)그리스도는 결국 자신의 정체를 그녀에게 알려 주셨고 놀라운 기쁨으로 몸둘 바를 모르는 그녀에게 그의 부활에 대한 확고한 확신을 넣어 주시었다. 

.....요셉이 결국은 그의 형제들에게 "내가 요셉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도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가 영광을 입으셨음을 말씀하신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① 그리스도께서 눈물로써 그를 찾고 있던 이 훌륭한 여인에게 어떻게 자신을 나타내셨느냐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16절). 

.....본문에 의하면 "예수께서 그녀에게 마리아야"라고 하셨다. 그는 강조적 어투로 또한 그녀에게 친절히 자유롭게 말하기를 원하시었다는 듯이 말씀하시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음성을 바꾸사 동산지기와는 같지 않게 자신이 평소 말씀하시던 식으로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그의 백성들에게 알리시는 방법은 말씀을 통하여서이다. 그의 말씀은 그들의 마음을 향하여 호소하시며 또 입장에 따라서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 속에서 그에게 이름으로 기억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은 그의 은총의 능력 속에서 그들을 이름으로 부르신다(출 33:12). 하나님은 저희에게 그의 아들을 나타내 보여 주시는데 이는 저들로 그를 증거케 하시기 위함이시었다(갈 1:16). 바울이 이와 같은 경우로써 그리스도는 그를 "사울아 사울아!"라고 이름으로 부르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양은 "그의 목소리를 안다"(10:4). 본문에 "마리아야"하고 부르신 말씀은 폭풍을 만난 제자들에게 "나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과 유사한 성격의 말씀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훈과 약속을 우리의 것으로 삼을 때 그의 말씀은 우리에게 복이 된다. "이 교훈과 약속 안에서 그리스도는 나를 부르고 또 내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② 이 놀라운 사실을 그녀가 어떻게 선뜻 받아들였는가를 생각하여 보자.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야. 네가 나를 알 수 있느냐? 너와 내가 어찌 이렇게 낯설게 되었단 말인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연인이 "사랑하는 자의 음성"을 분별하듯이(아 2:8) 즉시 그가 주님이신 줄을 깨달았다. 그녀는 뒤로 돌이켜 "랍오니여" 곧 "나의 선생님"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은 의문형으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하다. "랍오니이신가요? 나의 선생님이란 말입니까? 아니 정말로 선생님이 맞습니까?" 다음 사실들을 생각하여 보자.

첫째, 그녀가 그에게 붙인 경칭(敬稱). 

.....그녀는 그를 "나의 선생님" 곧 ‘디다스칼레’ - 즉 가르치시는 주님이라고 불렀다. 유대인들은 훌륭한 사람들이나 학자들을 "랍비"라고 불렀다. 그런데 "라본"이란 말은 그들에게 있어서 "랍비"보다 더 명예로운 칭호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이 명칭을 택한다. 그리고 "나의 위대한 선생님"이라고 덧붙여 부른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격의없는 대화를 우리와 나누시기를 원하신다고 하여도 우리 편에서는 그가 우리 "주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경건한 두려움"으로 그를 대해야 한다.

둘째, 그녀는 감격어린 어조로 쳐다보고 있었던 그리스도를 이같이 불렀다. 

.....그녀는 천사들로부터 "돌이켜" 예수를 바라 보았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만 붙잡혀 살기 위하여 모든 피조물(그것들이 아무리 밝고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에 대한 집착을 떠나야 한다. 그 어느 것도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자. 또한 그 어느 것도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를 간섭하지 못하게 하자.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생각하였을 때" 그녀는 그에게 말하면서도 마음은 다른 데 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가 그리스도의 음성을 알았을 때 "그녀는 돌이키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를 향하여 돌이키고 기쁨과 환희에 쌓여 "나의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기쁨으로 그를 높여서 부르는지 기억해 두도록 하자. 그녀는 "나의 선생님. 나의 훌륭하신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③ 그리스도께서 그녀에게 앞으로 행한 일을 지시하심(17절). 

.....그것은 "나를 만지지 말라. 그리고 제자들에게 가서 이 소식을 전하라"는 것이었다.

첫째, 그는 그와 친밀히 정을 나누기를 전하는 그녀의 기대를 거부하셨다. 

.....그러므로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신다. 마리아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보고 감격하여서 자신을 잊어버릴 정도다. 또한 그가 앞으로 영광을 입으시리란 것도 잊었고 그를 감격적으로 얼싸안음으로 그녀의 기쁨을 표시하려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이것을 금하시었다.

a. 내가 승천해야 하기 때문에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신다. 

.....그는 제자들에게는 그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를 만져보라고 명하시었다. 또한 그는 여인들에게는 그의 발을 잡고 그에게 경배할 것을 허락하셨다(마 28:9). 그러나 마리아는 그리스도가 나사로처럼 부활하셔서 저희와 계속 생활하시며, 전처럼 자유롭게 저희들과 말씀을 나누리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가정에 입각하여 전에도 흔히 그랬던 것처럼 그의 손을 붙잡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그녀의 이 잘못된 생각을 교정하시기 위하여 그녀가 자기를 잡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셨다. 그녀가 할 일은 그를 믿는 것이고 영광 받으신 분으로 그를 숭배하는 것이었지 전처럼 그와 사귀기를 기대하여서는 아니 되었던 것이다(고후 5:16 참조). 

.....그는 그녀가 정신없이 그의 몸에 접촉하는 것을 금하셨다. 이는 그녀가 이러한 접촉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또 계속되기를 기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자기가 아버지께 승천하신 후 자기와 나누어야 할 영적 사귐과 대화로 인도하시었다. 왜냐하면 그의 부활의 최대의 기쁨이란 이 부활이 승천을 향한 일단계라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리아는 저희들이 오랫 동안 고대하였던 것과 같은 세상의 왕국을 그가 부활하셨으니 세우실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아니다. 이러한 기대를 내게 품지 말아라. 나를 세상에 있게 할 생각으로 나를 붙잡으려고 하지 말라. 내가 아직은 승천하지 못하였으나 승천하게 될 것인데 이 사실을 내 형제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운명하시기 전에와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후에도 그가 떠나 "세상에 있지 아니할 것이라"는 같은 내용의 말씀을 하신다. 그러므로 그들도 예수의 육체적 현현 이상의 높은 곳을 바라보아야 하며 사물의 현상 너머를 볼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b. "나를 만지지 말라. 나를 만지느라고 머물러 있을 시간이 없다. 

.....또한 이것 저것 물을 시간이나 또는 한가하게 기쁨을 나눌 시간이 없다. 이는 내가 아직 승천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즉시 떠나지 않을 터이니 여타의 것들은 다른 틈을 내서 해도 무방하리라.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과업은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니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전력을 다하여 달려가라"는 뜻의 말씀이다. 

.....개인적 욕구 충족보다는 공적 임무를 우선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또한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복된 것이다." 날이 샐 때, 야곱은 천사를 놓아 보내야만 했다. 왜냐하면 야곱이 자기 가족을 돌보아야 할 시기이기 때문이었다. 마리아는 그녀의 선생님과 담화를 나누려고 지체하여서는 아니 되었다. 그녀는 그의 메시지를 전해야 했던 것이다. 이 날은 기쁜 소식이 들려진 날리었기 때문에 그녀는 기쁨에 도취하여 있어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소식을 전해야 했던 것이다(왕하 7:9 참조).

둘째, 그는 그녀에게 무슨 내용의 메시지로 그의 제자들에게 전할 것인가를 지시하였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부활한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그녀가 그를 보았기 때문에 그녀 혼자라도 이 사실을 그들에게 말할 수 있었다) 내가 승천하리라는 사실도 전하라"고 하신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자.

a. 이 메시지를 전달받을 사람. 이 소식을 가지고 "형제들에게 가라"고 하였다. 

.....그는 그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a) 그는 이제 그의 영광을 입으시기 직전에 있으시었고, 또 전보다 더 큰 "권능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로 천사들에 의해 선포되셨다." 

.....그렇지만 그는 제자들을 그의 형제들로 여기신다. 그리고 전보다 더 부드러운 애정을 그들에게 보이신다. 그가 그들을 친구들이라고 부르신 적은 있었으나 형제들이라고 부르신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리스도는 존귀히 되셨으나 교만하지 않으셨다. 그의 높아지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초라한 옛 관계를 멸시하지 아니하셨다.

(b) 제자들은 최근에 그에게 아주 불성실하였다. 

.....그가 염려하였던 대로 "그들 모두 그를 버리고 달아난 뒤에" 지금에서야 저희가 같이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었다. 이러한 정황이었으므로 그는 그들에게 진노의 메시지를 보내야 마땅한 것이었다. 즉 "가서 믿을 수 없는 배신자들에게 내가 저희를 다시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하라. 또 내가 저희와 다시는 상관하지 않겠노라고 말하라"고 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용서하시고 기억치 아니하시고 책망하지 않으신다.

b. 메시지의 전달자. 

.....그것은 "막달라 마리아"였다. 예수께서는 "그녀에게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시었다." 주님은 그녀를 신뢰하셨다. 

.....이러한 신뢰는 그녀가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르고 그의 계신 데를 찾으려 한데 대한 보상이었다. 또한 죽으신 예수를 수종드는 일에 그녀처럼 정성을 쏟지 아니하였고 또 부활하신 예수를 맞이하는 데도 그녀처럼 일찍 서두르지 않은 사도들에 대한 계획적 책망을 위해서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사도들에게 보냄을 받은 사도가 된 것이다.

c. 메시지의 내용.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이 말씀 속에는 두 가지 위로가 완벽하게 표현되어 있다.

(a)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 하나님과도 연쇄적 관계를 가지게 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 

.....그는 빛과 생명과 축복의 끊임이 없는 샘에 대하여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그가 나의 아버지인 동시에 너희의 아버지이시매 나의 하나님인 동시에 너희의 하나님이시다." 이 말이야말로 그리스도나 신자들 사이를 가장 가깝게 표현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2장 11절에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그들은 일치하여 하나이라"고 하였다. 여기 그들을 서로 가깝게 하여 연합시키기 위하여 사후 처리가 놀랍게도 잘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그리스도는 낮아지시고 그리스도인들은 높임을 받는다.

[a] 예수 안에 있을 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믿은 자들의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은 신자들에게 큰 영광이 된다.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그는 영원 무궁토록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우리는 다만 은혜에 의하여 양자로 피택된 것이다. 그러나 이 양자됨으로 우리에게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보장되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신 이유이다. 즉 그의 아버지가 곧 그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는 이제 "아버지 곧 그의 아버지에게 우리를 중재하시기 위하여" 승천하시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우리의 아버지에게" 우리 대신 무엇이고 간구하시리라 희망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 주실 것을 다 같이 바라자.((마땅히 구해야 할 바의 아이테오 바탕위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구함>의 에로타오가 열납됨!!))

[b] 그리스도께서 신자들과 함께 같은 하나님을 섬기기를 기뻐하셨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겸비를 나타내 준다. 

.....그러므로 그는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고 본문에서 말씀하셨다. 즉 나의 하나님이시므로 너희의 하나님이실 수 있다는 말씀이요, 구속자를 지원하시기 위하여 그의 하나님이 되셨듯이 이제 구속받은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는 말씀이다(시 89:26). 

.....새 계약의 총 개요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계약의 확증이요, 또 선두가 되셔서 계약 관계를 자신에게 이루사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으셨다. 

.....신자들은 오직 그를 통하여 그의 영적인 계승자가 되므로 그의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 즉 우리가 신의 본성에 참여하므로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또한 주님이 인간 본성에 참여하시므로 우리의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b) 우리를 위한 사업을 앞으로도 실행하시려고 그리스도가 하늘에 오르셨다는 사실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 

.....그는 "내가 곧 승천할 것인데 이것이 내가 다음 번에 취할 조치이라고 그들에게 전하라"고 하신다. 그가 승천하실 것이라는 말씀의 의도는 아래와 같다.

[a] 제자들에게 그의 육신의 삶이 세상에서 계속 되리라는 기대나 또는 그들이 꿈꾸던 것 같은 이 세상 나라를 그가 세우시리라는 기대를 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경고의 말씀이다. 

....."내가 부활하였으나 그들과 함께 머물지 아니하고 저희를 위하여 하늘 나라로 가실 것임을 그들에게 전하라"는 말씀이다. 이 같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일치하여 영적 생명으로 부활한 사람들은 그들도 부활하여 승천할 것을 미리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그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사 그와 함께 하늘이 앉게 하실 것이다"(엡 2:5, 6). 

.....믿는 사람들로 이 세상이 그들의 집이요, 휴식처라고 생각지 못하게 하자. 그들은 하늘로부터 태어났으므로 하늘에 귀속되어 있다. 그들의 목표는 저 세상이어야만 한다. 내가 승천하니 너희도 위의 것을 구해야 한다는 이 사실이 항상 그들의 마음을 차지해야만 한다.

[b] 그의 승천은 그들뿐만 아니라 "저희의 말을 통하여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씀이 된다. 

.....그는 "그의 아버지 곧 우리 하나님에게 승천하셨다." 이것은 그의 승격을 뜻한다. 그는 자신의 낮추심의 보상으로써 영예와 권세를 받으시기 위하여 승천하셨다. 그는 의기양양하셔서 그를 사랑하는 자들은 그의 승격을 기뻐하리라고 말씀하신다. 

.....그의 승격은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 왜냐하면 그는 정복자로 승천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사로잡힌 자를 인도하여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시 68:18). 그는 "우리를 위한 처소를 예비하시기 위하여" 또 우리를 영접할 준비를 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선두 주자(走者)로 승천하시었다.

..... 이 메시지는 요셉의 형제들이 야곱에게 요셉에 대하여 가고 온 메시지와도 유사하다(창 45:26). 그들은 "요셉이 아직 살아 있나이다. vivit imo, et in senatum venit - 즉 살아서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모든 권세가 그의 수중에 있더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내가 나의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는 말씀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우리도 부활하리라는 약속이 포함된 것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마 22:32)는 말씀을 통하여 죽은 자의 부활을 입증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본문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빙 둘러서 표현하고 계신다. "그가 나의 하나님이심으로 나를 일으키셨으니 이제 그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셨음으로 너희를 일으키실 것이고 영원히 너희의 하나님이 되시리라"고 하신다(계 21:3). 즉 "내가 살았으니 너희 또한 실리라"는 말씀이다. "내가 승천하여 나의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였으니 너희도 너희 하나님되신 그에게 승천할 것이라"는 말이다.

Ⅳ. 막달라 마리아는 그녀가 보고 들은 것을 제자들에게 성실하게 보고하였다(18절). 

---"그녀는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가서 주님을 보았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주의 깊게 주님을 찾는데도 남아서 그녀와 함께 그를 찾지 아니하고 그녀를 남겨 두고 와버렸다. 그런데 이제는 그녀가 그들에게 가서 자기가 그를 발견한 사실을 말하고 그들로 시체를 찾도록 잘못 인도하였었음을 고백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주님의 몸이 산 몸이요, 영광을 입으신 몸임을 발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찾던 것을 발견하였다. 또한 몸소 주님을 뵈었음으로 뛸 듯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기쁨을 즐겁게 전달하였다. 왜냐하면 이 소식이 그들에게 좋은 소식일 것임을 그녀는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쁘게 하실 때 우리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시려는 경륜이 있으시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기가 본 것을 또한 들은 것을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녀는 주님이 사신 것을 보았었다. 이 사실은 "그가 그녀에게 말씀하신 것들"을 메시지로써 제자들에게 전달하라고 하신 사실에서, 또한 그녀가 그 내용을 성실하게 전달한 사실에서 명백히 증명되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달아 아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들의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고 그들이 자기들과 같이 많은 것을 알게 되는 것을 못마땅히 여겨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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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요 20:19-25)

---그리스도의 부활의 절대 확실한 증거는 "그가 친히 사심을 나타내셨다"는 것이다(행 1:3). 본문에는 그가 부활하신 바로 그날에 예수께서 제자들이 모여있는 가운데 나타나신 사실이 설명되고 있다. 

---그는 부활의 소식을 신실하고 진실한 사자(使者)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알리시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그의 사랑을 나타내시고 그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굳건히 하기 위하여 친히 나타나사 부활의 진실성을 규명하기로 원하던 그들에게 온갖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셨다. 

---그들이 그의 부활을 세상에 증거하고 그 증거 위에 교회를 세워야 했기 때문에 그는 저희에게 부활의 소식을 들려 주는 것으로 그치시지 않고 그들 스스로가 그의 사심을 목격하고 증인이 되게 하시었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Ⅰ. 그가 나타나신 장소와 시기. 

---그날은 그가 부활하신 당일로써 유대인의 안식일 다음 날 곧 "주(週)의 첫 날"이었다. 그리고 장소는 제자들의 비밀 집회소로써 거기에는 10명의 제자들과 제자들의 몇몇 친구들이 함께 있었다(눅 24:33).

---우리 주님 예수께서 그의 교회에서 계속 수행되도록 제정하신 세 가지의 보조적 규례들이 있다. 이것은 3가지 일차적 규례 곧 말씀과 성례전과 기도를 보조하고 바르게 시행하게 하기 위한 3가지 보조적 규례들은 주님의 날과 제반 신앙 집회와 목사직(ministry)을 말한다. 이 보조적 규례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정신이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록한 본문 가운데 명시되고 있다. 

---첫 번째 두 규례는 19절에 다른 하나는 21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가 부활하신 직후 사람들 가운데 세워졌다. 바로 이 부활의 날에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가 부활한 날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하찮은 평일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날이지만 그러나 신앙을 지닌 인물들에게는 교회의 전 역사를 걸쳐서 이 날은 가장 뜻깊은 날로 여겨지는 것이다.

1. 본문에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 제자들에 의해 지켜지고 우리 주님 예수에 의하여 용인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을 방문하신 날은 "주의 첫날"이었다. "주의 첫날"과 같은 방식으로 숫자로 날(日)이나 달(月)이나 해(年)를 표시한 곳은(나의 생각으로는) 신약 성서 속에 부활에 관한 기사 외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리고 이 날은 신앙적으로 엄수해야 할 날로써 여러 번 언급되고 있다. 그리스도가 "주의 첫날"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본문(1절)에 특별히 언급되었었지만 여기서(19절) 강조하기 위하여 다시 언급되고 있다. 그는 이 날을 경사스럽게 하시기 위하여 같은 날 저녁에 나타나셨다. 그리고 "주의 첫날임"이 반복하여 강조되고 있다. 

---즉 이 날은 사도들이 기념하기 위하여 정한 것이 아니라(그들은 그때까지 부활에 관하여 의심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첫 방문을 그날에 받게끔 제자들이 함께 있게 하심으로 그날을 영광된 날로 삼으신 것이다. 이 같이 사실상 하나님이 그날을 복 주시고 성별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날에 구속주께서 안식하셨기 때문이었다.

2. 본문에 제자들이 엄수하고 주님 예수께서 승인하신 그리스도인의 집회를 찾아 볼 수 있다. 

---아마 제자들은 일종의 신앙적 훈련 즉 함께 기도하기 위하여 만난 것같이 보인다. 아니면 그들은 주님의 부활에 관해 각각 들은 이야기들을 비교 검토하여 부활의 충분한 증거를 찾을 수 있는지 검토해 보고 또 그들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즉 계속 모일 것인지, 흩어진 것인지를 협의하기 위하여 모인 것같이 보인다.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알기 위하여 또 서로에게 용기를 주고 중대한 고비에 직면하여 적절한 대비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모인 것이다. 

---이 집회는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그들은 감히 공개적으로 특히 집단으로 나타나기를 꺼려하였다. 그들은 집에서 모였다. 그러나 그들이 함께 있는 것이 눈에 뜨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문을 잠구고 모였다. 그리고 아는 사람들 이외에는 아무도 들여 보내지를 아니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대인들이 제자들을 범인으로 기소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자기들을 가리켜 거짓 교훈을 믿고, 그것으로 세상을 현혹시키려 한 자들이었다고 기소할까봐 두려워하였다. 또한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그를 훔쳐간 것"이라는 누명을 자기들이 쓰지나 않을까 하여 두려워하였다. 다음 사실들을 기억하자.

(1)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비록 고난의 시기라 할지라도 "함께 모이기를 폐하지 말아야 한다"(히 10:25). 

.....폭풍우를 만나서 "양떼가 흩어지더라도" 양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다시 모이듯이 모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모임이 구석진 곳으로 쫓기고, 광야로 내몰림을 당하였다는 사실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계 12:14; 잠 28:12).

(2) 하나님의 백성들이 본문의 경우처럼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골방으로 들어가 숨어 문을 닫아걸 수밖에 없었던 것"은 흔히 있던 일이었다. 

.....그들에게 박해가 닥쳐왔다고 그 박해를 피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암혈과 토굴"로 피신하곤 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같이 도망해야 한다는 것은 슬픈 일은 될 수 있을지언정 비난이 될 수는 없다.

Ⅱ.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방문하셔서 행하신 행적과 말씀. 

---그가 그들과 나눈 대화에 대하여 고찰하여 보자. 

---그들이 모여 있을 때 전의 모습대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다. 그는 영광을 이미 받으시기 시작하셨으므로 그의 몸의 광채를 옷(휘장)으로 가리우지 않았다면 그의 변화산에서 변화하셨을 때처럼 제자들은 눈이 부셔서 그를 쳐다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 가운데 나타나사 그의 약속이 이루어진 실례를 보여 주신다. 즉 "나의 이름으로 두세 명이 모인 곳에 내가 그들과 함께 하리라"는 약속을 실현하신 것이다. 그는 비록 "문이 닫혀 있었지만"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렇다고 이 사실이 부활 후 그의 몸이 참 인간의 육신을 입으셨다는 증거를 약화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문은 닫혀 있었지만 그는 소리 없이 문을 여는 방법을 아셨고 그러기에 전에 물 위를 걸으셨을 때처럼 그가 오는 소리를 그들이 듣지 못하게 들어오신 것이다. 즉 그는 참 몸을 입으시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들의 신성한 집회를 비밀리에 가질 수밖에 없다하더라도 어떤 잠긴 문도 그리스도의 오심에 장애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통하여 우리는 다섯 가지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1. 제자들에 대한 그의 친절하고도 낯익은 인사.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그들에게 인사하셨다. 

.....이 말은 친구들이 만날 때 흔히 주고 받는 인사말은 아니었다. 이것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은 온갖 복된 결실을 그들에게 수여하시는 엄숙하고도 특별한 축복의 기원이었다. 평범한 문장에 불과하기는 하나 여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은 "온갖 축복이 너희에게 있기를" 또는 "무슨 일을 통하여서든지 언제나 온갖 평강이 깃들기를!"이라는 뜻이 함축된 기원이다. 

.....그리스도는 유산으로 그들에게 그의 평강을 남겨 주셨다(14:27). 유언자가 죽으므로 유언은 효력을 지니게 된다. 이제 주님은 그의 유언을 입증하고 또 그것을 몸소 집행하시기 위하여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따라서 그는 본문에서 그의 유언을 재빨리 집행하신다. 고로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하셨다. 

.....그가 평강을 말씀하시면 평강은 이루어진다. "그의 말씀이 곧 평강을 창조한다"는 말이다. 그의 제자들에 대한 말씀은 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바라는 말씀이요, 또한 저희 양심의 평강을 기원하는 말씀이다. 즉 "온갖 평강이 너희와 함께 하기를!"이란 말씀이다. 그러나 세상과의 평화가 아니요,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강인 것이다. 

.....그들이 그에 관하여 의심이 가득 차 있을 때 또 자신들의 문제로 두려움에 차 있을 때 그는 "저희 가운데" 갑자기 나타나셨다. 이러한 그의 나타나심으로 그들은 당혹과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저희들의 이러한 술렁거림을 그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으로 진정시킨다.

2. 그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분명하고 부정할 수 없게 나타내심(20절).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1) 그의 부활의 참됨을 그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하여 그가 취하신 방법. 

.....이제 그들은 그가 사신 것을 보았다. 이 삼일 전만해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눈으로 목격하였었다. 그러므로 이제 한 가지 남은 의문점은 그들이 지금 보는 이 살아나신 분이 며칠 전에 죽었던 분과 과연 동일 인물이냐는 점이었다. 이 사실을 입증하는 데는 그의 몸의 상흔을 확인하는 것만큼 정확한 것은 없었다.

① 매우 깊이 파인 상흔(이 상처는 고통이나 괴로움을 의식하지 못하실 때 입으신 것이었다)은 부활하신 후에도 주 예수의 몸에 남아 있었다. 

.....이것은 그의 부활의 진실성을 제자들에게 입증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정복자들은 그들이 입은 상흔을 자랑으로 여기는 법이다. 그리스도가 입으신 상처들은 그가 죽으신 바로 그 분임을 세상에 웅변적으로 입증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상처를 지니신 채로 부활하셨다. 또한 그가 하는 나라에서 영원히 사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중제하실 때도 이 상흔은 호소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상흔을 지니신 채 승천하셨고 보좌의 사이에서 "일찍 죽임을 당하고 새로이 피를 흘리신" 어린 양으로 나타나셨다(계 5:6). 또한 그가 다시 오실 때도 "그를 찌른 자들이 그를 볼 수 있도록" 상흔을 지니신 채 오실 것으로 여겨진다.

② 그는 제자들을 믿게 하기 위하여 이 상처 자국을 그들에게 보이셨다. 

.....그들은 예전의 모습 그대로의 그를 볼 수 있었고 오랫 동안 들어서 익숙해진 바로 그 음성으로 그가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감격에 차서 Sic oculos, sic ille manus, sic ora, ferbat - 즉 바로 그의 자태, 그의 눈과 손이 맞아! 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더 확실한 증거인 상흔까지 볼 수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손바닥에 난 상처를 보여 주시기 위하여 손을 펴 보이셨다. 또는 그는 유모가 그의 어린이에게 하듯 앞가슴을 열어 보이셨다. 이는 옆구리에 생긴 상처를 그들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서였다. 

.....구속자는 영광을 입으셨어도 여전히 그의 모든 신실한 친구들과 추종자들에게 자신의 손을 펼쳐 보이시고 가슴을 열어 보이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스도께서 위로의 성령을 통하여 믿는 자들에게 그의 사랑을 나타내시고 "그가 살았기 때문에 그들도 살리라"는 것을 확신시키고자 하실 때 "그는 그들에게 그의 손과 옆구리를 내보이신다."

(2) 그 상흔을 확인하고 제자들이 받은 인상 및 효과.

① 그들이 주님을 보았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믿음도 굳건하여졌다. 

.....그들은 처음에 유령이나 환상을 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것이 주님 자신임을 알았다. 이 같이 수많은 참된 신앙인들도 그들의 믿음이 연약한 동안은 그들이 받은 위로가 환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하여 두려워한다. 그러나 후에 그들은 은혜를 통하여 그 위로가 실제적이고 가치있는 것임을 발견한다. 이제야 그들은 '이 분이 주님일까?" 묻지 않고 "그가 바로 주님"이라고 확신하였다.

② "제자들이 기뻐하였다." 

.....그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한 예수시라는 확신이 이제 그들에게 기쁨을 불러 일으켰다. "믿고서 그들은 기뻐한다." 복음서 기자는 이 사실을 황홀감과 승리감에 도취하여 기록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제자들이 주님을 보고 그 다음에 춤출 듯 기뻐하였다"는 뜻의 기록을 하였다. "요셉이 아직 살아 있다"는 소식이 "야곱의 기운을 소생시켰다면"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사실은 제자들의 마음에 얼마나 큰 힘이 되었겠는가? 그것은 그들이 죽었다가 살아난 듯한 감격적 사건이었다. 이제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라"던(16:22) 말씀이 성취되었다. 

.....그의 다시 사심이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기었다. 그리스도를 뵈옵는 것은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가 그리스도를 뵈올수록 더욱 우리는 그의 안에서 기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모습대로 그를 대할 그곳"에 이르기까지는 우리의 기쁨은 결코 완성될 수 없으리라.

3. 예수께서 그들을 그의 교회를 세울 대행자로 위임하심.

--- 이 위임은 제자들에게 영예가 되었고, 직분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21절).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위임을 위한 서언. 

.....그 서언으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먼저 번의 인사가 엄숙하게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서언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이다.

① 그가 그들에게 행할 위임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앞의 인사는 그들이 부활의 증거에 대하여 조용히 경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즉, 그들의 공포로 인한 동요를 진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뒤의 인사는 그들의 기쁨으로 들뜬 분위기를 무마시키기 위한 것으로 그들에게 그가 말씀하시는 것을 조용히 듣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② 그들이 용감하게 그들에게 수여된 위임을 수락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임무를 수행하는 데는 상당한 괴로움이 따를 것이 분명하였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들이 그 일에서 영광과 위로를 받도록 계획하셨고 그러기에 그들에게 평화가 될 것이라고 하신다. 기드온도 "너는 안심하라"는 말씀과 함께 그의 사명을 위임받았었다(삿 6:22, 23).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강이시다. 만일 그가 우리와 함께 계시면 평강도 우리의 것이 된다. 이제 그리스도는 세상에 평화를 선포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보내셨다(사 53:7). 

.....그가 그들에게 이 사명을 위임하신 것은 그들의 만족을 위하여서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이 사명을 맡김으로 모든 평화의 아들들에게 전달되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다(눅 10:5, 6).

(2) 위임의 내용. 

.....그것은 거창한 어조로 시작된다. 본문에 의하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셨다.

① 그리스도가 그들을 어떻게 보내셨는가 하는 문제는 이해하기가 용이하다. 

.....그는 그들을 임명하사 세상에서 그의 일을 수행하게 하셨고 인간들 가운데 그의 복음을 전파하고, 그의 나라를 이룩하기 위하여 자기들의 생명까지 내어놓게 하셨다. 그는 그들을 신의 보증으로 인정하고 신의 권능으로 무장하여 보내셨다. 

.....또한 그들을 평화를 체결하기 위한 대사로서, 평화를 선포할 선포자로 보내셨다. 또한 그들을 결혼식에 초대장을 돌릴 하인들로서 보내셨다. 그러기에 그들은 "사도들 곧 보냄을 받은 자들"이라고 불리워졌다.

② 그러나 아버지께서 그를 보내신 것같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보내셨다는 말씀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확실히 그들이 받은 위임과 권능은 그가 받으신 위임과 권능에 비하면 무한히 저열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느 점에서 그들이 받은 위임이 그가 받으셨던 위임과 같은 것일까? 고찰하여 보자.

첫째, 그들의 사명이 그의 사명과 같은 성격의 것이었다. 

.....그들은 그가 물려 주신 것을 인수받아 계속 추진하였다. 그들에게 그가 지니셨던 제사장이나 왕의 임무는 주어지지 아니하였어도 그의 예언자(대언자)로서의 임무는 그들에게도 주어졌던 것이다. 그가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러 보냄을 받은 것처럼 그들도 그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다. 

.....그렇다고 그와 같이 그들이 화해의 중재자로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고 화해를 선포하고 설교하는 자로 보냄을 받은 것이었다. 그가 "다스림을 받고자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요, 다스리고자 보냄을 받으신 것처럼 또한 그의 뜻을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이의 뜻을 이루려 보냄을 받으신 것처럼 또한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기 위하여 보냄을 받으신 것처럼" 그들도 위의 일들을 위하여 보냄을 받으신 것이다. 아버지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을 위하여 보내신 것처럼 그도 그들을 전(全) 세상으로 보내신 것이다.

둘째, 아버지께서 그를 보내실 권한을 가지셨듯이 그도 그들을 보낼 같은 권한을 가지고 계셨다. 

.....즉 힘의 문제에 있어서 양자가 대등하다는 말인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바로 그 권위에 의하여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말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명하여 준다. 그가 주신 위임은 아버지께서 주신 위임과 똑같은 권위가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위임이나 아버지께서 환상 가운데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주신 위임과 그 취지와 목적에 있어서 효력이 동등하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알기 쉬운 말로 베드로와 요한에게 부여하신 위임은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에 의하여 이사야와 에스겔에게 주어진 위임과 대등한 것이었다. 또한 그의 사업을 이룰 수 있도록 중재자에게 부여된 위임이나 중재자가 사도들에게 부여한 위임이 동등한 것이 된다. 그가 자기 사업을 위하여 그 어느 것에도 비길 수 없는 재능을 가지신 것이라면 그들도 그들의 사업을 위하여 이러한 권위와 재능이 수여되었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란 말씀은 그의 권능이 제자들에게서 재현됨을 뜻한다. 

.....그리스도는 중재자로서의 자기에게 주어진 권위에 의하여 그들에게 그의 사역자로서의 권위를 부여하셨다. 곧 그들로 사람들 가운데서 그를 위하여 또 그의 이름 안에서 행동하기를 바라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영접하거나 거절하는 자는 곧 그를 영접하거나 거절하는 것이 되며 이는 결국 그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거나 거절하는 것이 된다(13:20).

4. 위임에 의하여 그들에게 수여된 책임을 감당하기 위하여 그들이 갖출 자격(22절). 

---본문에 의하면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자.

(1) 그가 숨을 내쉬었음이 강조된 것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즉 그의 숨을 내쉼은 그가 그들에게 지금 주시려고 하는 선물에 대하여 그들을 확신시켜 주신다는 뜻과 그 선물로 그들을 감화시키시리라는 뜻을 지닌다. "그는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었다." 즉 자신의 생명의 호흡에 의하여 그가 참으로 살아나셨음을 그들에게 보여 주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에게서 받을 영적 생명과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영적 생명과 능력은 그들 앞에 놓여있는 모든 임무로 그들이 감당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마도 그가 숨을 내쉰 것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하여 하신 것이 아니고 모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신 것같이 보인다. 그러므로 도마가 그들과 함께 있지는 아니하였지만 주의 성령은 그가 어디 있는지를 아시며, 거기도 찾아가 역사하셨을 것이다. 성령께서 엘닷과 메닷이 진에 머물고 회막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있는 곳을 아시고 거기 임하셨듯이 말이다(민 11:26). 

.....그리스도께서 본문에 숨을 내쉰 것은 그가 최초의 인간 창조에 대하여 말씀하려 하셨던 것으로 여겨진다(창 2:7). 그리고 그는 창조의 장본인이며 그의 사역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생명과 능력은 마치 아담과 그의 후손의 육체적 생명이 그러한 것처럼 그로부터 유래되고 그에게 의존되어 있음을 뜻한다. "전능자의 호흡과 생기"가 사람에게 생명을 주어 옛 세계가 시작되었듯이 전능한 구세주의 생기가 그의 사역자들에게 생명을 주셨고 그리하여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 것이다(욥 33:4). 이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① 성령은 "아들로부터 유출된 것으로" 곧 그리스도의 생기(숨)라는 사실이다. 

.....구약에서 성령은 생기에 비교되고 있다(겔 37:9). 그리하여 "오라, 생기야"라고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숨(생기)으로 비교되고 있다. "하나님의 숨"은 그의 진노의 능력을 표현한다(사 11:4; 30:33). 그러나 그리스도의 숨은 그의 은총의 능력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중제에 의하여 진노의 숨이 사랑의 숨으로 변화된 것이다. 

.....우리가 호흡 과정을 통하여 말을 할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말씀이 곧 "성령이요, 생명"이다. 말씀은 성령으로부터 유래되었고 또한 성령은 말씀을 따라 임하여 온다.

② 성령은 그리스도의 선물이라는 사실이다. 

.....사도들은 안수에 의하여 성령을 사람들에게 부여하였다. 그런데 안수한 손은 먼저 기도를 위하여 높이 들려졌던 손이었다. 이 사실은 그들은 이 축복을 간구할 수 있을 뿐이고 중재적인 역할을 감당할 뿐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숨을 내쉼에 의하여 성령을 수여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이 선물의 창조자이시며 그에게서 성령이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구약에 보면 모세는 성령을 줄 수 없었고 하나님이 그것을 주셨다(민 11:17). 그러나 그리스도는 스스로 그것을 주셨다.

(2) 이 상징을 통하여 의미되고 있는 것은 그가 성령을 수여하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너희가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인 성령의 수여로 "며칠 안 되어서" 그들이 받은 성령의 전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까지 그들이 받았던 것보다 많은 성령을 지금 받았다고 볼 수 있겠다. 

.....이 같이 성령의 축복은 점진적으로 주어진다. 이제 예수께서 영광을 입으시기 시작하자, 더 많은 성령이 주어지기 시작한 것이다(7:39 참조). 이 성령의 수여의 의미는 무엇인가 고찰하여 보자.

① 그들이 지금 그가 위임한 임무를 앞으로 수행하게 될 때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성령으로 도우시겠다는 확실한 약속이다. 

....."내가 너희를 보내노니 너희가 가는 곳마다 성령이 역사할 것이라"고 하신다. 이제 그들 앞에 놓인 모든 임무를 수행할 능력을 부여하기 위하여 "주의 성령이 그들에게 임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가 선택하신 사람에게 성령으로 덧입히시며 모든 필요한 능력을 공급하신다.

② 그가 당장에 그들로 성령의 영향력을 경험하게 해 주셨다는데 의미가 있다. 

.....그는 그들에게 그의 부활의 진실성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하여 그의 손과 옆구리를 내보이셨었다. 부활의 현장을 눈으로 목격한 유일한 목격자인 병사들이 거짓 증언을 하는 한 아무리 자명한 것이라 할지라도 증거물만으로는 믿음역사를 불러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성령을 받으라. 그러면 너희 안에 믿음이 생길 것이고 너희의 지각이 열리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 곧 "너희가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을 그는 모든 참된 신앙인들에게 지금도 말씀하신다(엡 1:13). 그리스도가 주신 것을 우리도 받아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과 우리의 전 영혼을 복된 성령의 소생시키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영향에 복종시키도록 하자. 성령의 지시를 받고 그 지시대로 따라 행하자. 또 성령의 능력을 받고 성령의 능력을 이용하자. "성령의 능력을 받으라"는 말씀을 교훈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약속된 말씀의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은 성령을 그들의 길의 안내자로서 그들의 하늘나라의 유업의 전조로써 받게 될 것이다.

5. 금번의 위임을 통하여 그들에게 한 가지 특수한 능력이 주어지고 있다. 그것이 본문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고 있다(23절).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다. 너희에게 맡겨진 능력을 적절히 행사하면 저희의 죄가 저희에게서 사하여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사죄의 위로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즉 그들의 죄가 사해지지 않고 그대로 구속력을 지닌다고 선언하면 죄가 그대로 있으리라. 그러면 죄인들은 죄가 자기에게 그대로 역사함을 알고 슬퍼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죄의 사유는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결과로 수반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비범한 분별의 성령을 받지 못하였다면 그들에게 이러한 권능을 부여하기는 적당치 못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생각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이 은사는 사도들과 첫 번째 복음 전도자들에게 특별히 위임된 은사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된"(행 8:23) 사람들과 그렇지 아니한 사람들을 분별할 수가 있었다. 이 능력에 의하여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저주하여 죽게 하였고 바울은 엘루마는 눈을 멀게 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은 교회나 그 사역자들이 세상에 사는 일개인들 또는 한 집단을 절대 무모하게 심판할 수 있다는 말로 받아들여서는 아니 된다. 다만 교회와 그 사역자들은 사람들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성실한 청지기로 힘껏 일하도록 가르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것이다. 이 원칙에 입각하여 본문의 말씀은 받아들여져야 한다. 

---사도들에게는 사죄를 전하되 예루살렘에서 시작하라는 명령이 주어진다. 예루살렘이 얼마 전 그리스도의 피를 흘리는 죄를 범했음에도 말이다. 그리고 "저희가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 죄를 용서해주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 말씀을 실행하였다(행 2:38; 3:19). 

---그리스도는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하여 부활하시고 그의 복음 전파자들을 보내셔서 사죄가 시작되었고 사면의 법령이 시행되고 있음을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고 바로 이 규범에 의하여 사람들이 심판받을 것을 선포하셨다(12:48; 롬 2:16; 약 2:12). 하나님은 이 심판의 규범을 결코 변경시키시지 않을 것이며 이 규범을 변칙적으로 적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즉 복음서에 의해 사면이 인정되는 사람들은 사면을 받을 것이요, 복음서에 의하여 정죄되는 사람들은 정죄함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복음의 능력은 목회의 영예를 무한히 높혀 주고 또 목회자에게 무한한 용기가 된다. 

---보편적으로 사도들과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죄를 사하거나 그대로 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이것은 모두 다음의 두 가지의 권위있는 원칙에 근거하여 시행되어야 한다.

(1) 건전한 교리의 권위에 입각하여 죄를 사하거나 유보시킬 수 있다. 

.....사역자들에게는 세상에 구원받는 길은 복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전할 권위가 위탁되어 있다. 그리고 하나님도 이 사실을 인정해 주실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드리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어두운 운명이 임하고 말 것이다.

(2) 경건의 생활에 비추어 그렇게 할 수 있다. 

.....즉 복음의 원칙을 특정 개인의 삶에 적용하여 보아서 진위를 가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여러분이 복음의 원칙에 의거하여 여러분과 교제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면 하나님도 그를 받아들이실 것이다. 또한 여러분이 회개치 못한 자를 또한 파문을 일으키고 남을 감염시키는 죄를 지닌 거만한 자로 인정하여 추방시킨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임할 것이다.

Ⅲ. 도마의 불신.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나타나셨다는 소식을 접하였을 때 도마는 그것을 믿지 못하였다.

1. 이 모임에 도마가 침석하지 아니하였다는 사실이 본문에 밝혀지고 있다(24절). 

---본문에서 그는 또한 "열두 제자 중에 하나" 곧 사도들의 무리의 한 명이라고 언급되고 있다. 현재 그들은 열한 명이었지만 본래는 열두 명이었었다. 그리고 후에 다시 열두 명으로 보충되는 것을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다. 종전에 말한 것처럼 그들은 현재 열한 명에 불과하였다. 게다가 그들 중에 한명이 결석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모두 모였던 의미 깊은 날 이전까지는 결코 함께 모이지를 못하였다. 도마가 이 모임에 착석하지 못한 것은 그에게 불행이었다. 그가 참석지 못한 것은 건강이 좋지 않았거나 모임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또는 그의 죄됨과 어리석음 때문에 참석지 못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주님을 만날 이 기회보다는 사업에 몰두하거나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였는지 아니면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감히 올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는 자신의 겁 많은 마음을 자기가 조심성이 많고 자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핑계 대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하간 그는 불참으로 말미암아 그의 주님이 부활하신 것에 대하여 만족함과 동료들과 이로 인한 기쁨을 나누는 만족함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스도인들의 정규적인 엄숙한 집회에 마음대로 빠지는 사람들은 언제 무엇을 잃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 주님이 그들을 방문하셨다는 사실을 제자들이 도마에게 설명함(25절). 

---이 일 후 그들이 그를 보았을 때 그들은 기쁨으로 그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일어났던 모든 일, 특히 주님께서 그들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심으로 만족게 하셨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당시 도마가 그들과 같이 있지는 아니하였지만 그리 먼 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한 번 참석지 못하였다고 해서 영원한 변절자로 정죄하지는 말아야겠다. 도마는 유다와 같지는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의기가 충천하여 이 사실을 말하였을까를 상고하여 보자. 그들은 "우리가 주님을 보았네. 이제껏 그렇게 감격스러웠던 순간은 처음이었어"라고 말하였다.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그들은 도마에게 이 사실을 말하였다.

(1) 그가 없었던 사실을 책망해야겠다는 생각에서 그들은 이 말을 하였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는데 자네는 없어서 섭섭했네."

(2) 주님의 부활을 알려 주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주님을 보았네. 자네도 같이 있어서 그를 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아마 자네도 굉장히 좋아했을 걸세"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서로 상대방을 거룩한 믿음에 세우기 위하여" 애를 썼다. 그들은 불참한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들은 것을 되풀이하여 다시 들려 주었다. 그리고 자기들이 경험한 것을 다시 전해 주었다. 

.....믿음으로 주님을 뵈었고 그의 은혜로우심을 맛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사실을 말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렇다고 자랑이 되지는 말도록 하자.

3. 도마의 반론. 

---그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자신이 없었던 것을 정당화시키려 하였다. "주님이 사신 것을 보았다는 말일랑은 내게 하지 말라. 그대들은 너무 경솔해, 누군가 그대들을 기롱하는 것이 틀림 없지. 나는 그의 손바닥의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으로 만져보고 그의 옆구리의 상처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서는 결코 믿지 않을 작정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지금 그의 말을 전의 그의 말(11:16; 14:5)과 비교하면서 그가 거칠고 침울한 성격으로 비꼬아 말하는 경향이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여하간 이번의 그의 행위에 있어서는 많은 잘못이 있었다.

(1) 도마는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말씀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자주 하신 말씀을 유의하지 않았거나 또는 정당하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실은 주님이 말씀하셨으므로 설혹 그가 주님을 뵈옵지 못하였고 또 아무에게 그런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고 치더라도 "그가 살아나셨음이 확실해"라고 말했어야 옳은 것이었다.

(2) 그는 그의 동료인 제자들의 증언에 대하여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다. 

.....제자들은 지혜와 총명을 겸비한 인물들이었고 그러므로 그들의 말이니 신뢰해야 옳았던 것이다. 그는 그들이 정직한 사람들임을 알았다. 그런데 그들 열 명 모두가 확신을 가지고 일치하여 그의 부활을 증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의 진술이 사실이다"라고 스스로 설득되려 하지 아니하였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택하여 바로 이 사건을 모든 민족들에게 증언하게 하셨다. 그렇지만 그들의 동료의 하나인 도마는 그들이 신뢰할 만한 증인들임을 인정하려 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말을 자기가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여하간 그가 그들에게 의문을 품을 것은 그들이 진실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이번 일에 경솔하였을 것이라는 점에서였다. 그는 그들이 너무 경솔하게 믿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을 두려워하였다.

(3) 그는 그리스도를 시험하였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을 한계가 있는 분으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방법에 의해서 믿으려 했거나 또는 전혀 믿으려고도 아니하였다. 그는 사도들이 보았다고 그에게 말한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 본다거나 그의 옆구리의 상처에 손을 집어넣도록 허락된다는 일은 있을 수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살아있는 몸을 이렇게 마구 다루는 것도 합당치 않은 일로 생각하였다. 그럼에도 도마는 이런 증거라도 있어야 믿을 수 있다고 고집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이 사건을 웃음거리로 넘겨 버림으로 그의 상상을 그럴 듯하게 하려한 것이든지 아니면 전혀 믿지 않으려는 속셈에서 나온 것이었다(마 16:1; 27:42 참조).

(4) 제자들은 그들 앞에서 이루어진 공개적인 장담 앞에서 정말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과 실망을 느꼈다. 

.....도마의 행위는 죄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거침이 되었다. 한 겁쟁이가 많은 사람을 겁쟁이로 만들 듯이 한 불신자 또는 회의론자가 "그 형제들의 마음도 그와 같이 떨리게 만든다"(신 20:8). 

.....도마가 만일 이 죄악을 마음에 품어 두기나 하고 발설하지는 않았다면 그의 잘못은 자기에게는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불신을 단호하게 선포하였으므로 아직 약하고 흔들리는 상태에 있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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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의 불신앙(요 20:26-31)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또 다른 현현에 대한 기사를 보게 된다. 이때는 도마도 이 자리에 참여하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대하게 된다.

Ⅰ. 그 때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오셨을 때였다.

--- "여드레를 지나서," 즉 부활 후 이레 되는 날, 그러므로, 말하자면 "그 주일의 첫날임에 틀림 없다."

1. 그는 얼마 동안 자신의 재현을 지연시키셨다. 

---그것은 그가 제자들과 계속 사귀기 위해 자신이 이전에 사셨던 그러한 모습으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때때로 필요할 때 천사들만이 그리하는 것처럼 이렇게 찾아 오신, 다른 세계에 속한 자로서 자신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서였다. 

---이 여드레 동안, 그리고 지상에 머무신 나머지 시간 동안에 그리스도께서 어디에 계셨는가 하는 것을 묻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또 그것을 규정한다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다. 그가 어디에 계셨던 간에 "천사들이 그를 수종들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의 사역의 시초에 그는 40일 동안 보이지 않는 중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마 4:1, 2). 그리고 이제 그의 영광의 시초에 그는 40일 동안 대부분 보이지 않는 중에 천사들에게 수종받으신 것이다.

2. 그는 그것을 7일간이나 오랫 동안 늦추셨다. 그리고 왜 그렇게 하셨나?...생각해 보라..

(1) 도마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는 제자들의 첫 번 모임을 등한시했었다. 그래서 그에게 앞으로는 은혜의 적절한 때를 더욱 중히 여기도록 가르치기 위하여, 그가 여러날 동안 그런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한 조수를 놓친 자는 상당히 오랫 동안 다른 조수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도마에게는 매우 우울한 주간이었으며 다른 제자들이 기쁨이 충만한 반면, 그는 의기소침하고 불안했었다고 생각될 만한 이유가 우리에게 충분히 있다. 이것은 그 자신과 그 자신의 어리석음에 기인했다.

(2) 나머지 제자들의 믿음과 인내를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주님을 만나본 것에 만족했을 때 그들은 위대한 순간을 이루었었다. "그 때 제자들이 기뻐하더라."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이 여러 날 동안 자기를 보지 못해도 그들이 얻은 근거를 지킬 수 있는지를 시험해 보자 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지나치게 사랑하고 의존하던 그의 신체적 임재로부터 그들을 서서히 떼어 놓으려고 하셨을 것이다.

(3) 일주일의 첫날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날은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며, 거룩한 휴일이요 또 거룩한 집회로써 자기의 교회 안에서 지켜져야 한다는 자기 뜻을 명백히 알리기 위함이었다. 칠일 중 하루는 경건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것은 타락 이전의 오랜 태초로부터의 명령이다. 더우기 메시야 왕국 안에서 일주일의 첫날은 그토록 엄숙한 날이 되어야 하며, 바로 그 날에 그리스도께서 재삼 제자들을 경건한 모임에서 만났다는 것을 암시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가 첫 번째 나타나셨을 때 그들에게 일주일 후 그 날에 다시 함께 모이기를 명하시고 그들을 만날 것을 약속하셨으며, 그리고 역시 40일을 지나는 동안 다른 시간 이외에 일주일의 첫날마다 그들에게 나타나셨을 가능성이 많다. 

.....이 날의 종교적 준수는 그 때부터 교회의 전 시대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 내려 왔다. 그러므로 "이 날은 주님께서 만드신 날이다."

Ⅱ.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이렇게 찾아 오신 장소, 그리고 그 과정. 그것은 예루살렘에서였다. 

---첫 번째와 같이 이 때에도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들이 닫혀 있었다. 거기서 그들은 칠일 간 무교절을 지키기 위해 머물렀르며 무교절은 그 전날 끝났으나, 그들은 일주일의 첫날에 갈릴리로 여행을 떠나려 하지 않고, 그 다음 날까지 머물렀다. 왜냐하면 그 날은 그리스도의 안식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다음을 유의해 보자.

1. 도마가 그들과 함께 있었다. 

---비록 그가 먼저 번에는 스스로 떠나 있었으나 두 번째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가 어떤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될 때는 언제나 그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그 다음 기회를 포착하고자 더욱 더 진지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만일 그러한 손실이 우리의 갈망을 자극한다면 그것은 좋은 징후이나 그 갈망을 식혀 버린다면 그것은 좋지 못한 징후이다. 

---제자들은 도마를 자기들 가운데로 들어오도록 허락했으나, 그들이 한 그대로 그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도록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때까지는 아직 그것이 단지 희미하게 나타났으며 그들은 회의적인 논쟁 속으로 그를 이끌어 들이지 않고 그가 기꺼이 와서 만나 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도마의 만족을 위하여 나타나시지 않고, 그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에 비로소 나타나셨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과 사역자들의 모임에 호의를 보이시며, "그들 가운데"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외에 주님께서는 모든 제자들을 자신이 도마를 책망하시고 또한 온유하게 보살펴 주신 사실에 대한 증인으로 삼으시려고 하셨을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그들 중에 "오사 가운데 서심"으로 그들 모두가 그를 알아 보았다. 

---이것은 그가 전과 같이 이때에도 변함없이 이전에 그 자신을 나타내신 그대로(19절), 자기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님의 겸손을 보라. 하늘 문들이 열려질 준비를 갖추었고, 거기서 그는 무수한 천사들의 경배 가운데 계셨을지 모른다. 그러나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그는 땅 위에 머무셔서 가련한 제자들의 작은 비밀 모임에 찾아 오셨으며, 그들 가운데 계시는 것이다.

3. 그는 전에 하셨던 그대로 그들 모두에게 친근한 모습으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인사하셨다. 

---이것은 공연한 반복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 사람들에게 주신 풍성하고 확실한 평강과 또한 그의 축복의 계속을 의미한다. 그로 인하여 그들은 "실패하지 않고, 매일 아침 새로워지며," 모임마다 새로워지는 것이다.

Ⅲ. 이 모임에서 그리스도와 도마 사이에 오고 간 내용. 

---그가 나머지 제자들에게 상당히 많은 것을 말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지라도 기록된 것은 그것 뿐이다. 다음을 유의하자.

1. 여기에 그리스도의 도마에 대한 은혜스러운 겸손이 있다(27절). 

---주님께서는 도마를 다른 제자들로부터 뽑아내시어 특별히 그에게 자신을 내미셨다. '네가 그렇게 하려고 마음 먹은 대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못자국에 대한 너의 호기심을 최대한으로 만족시키며, 만일 그보다 더 너를 확신케 해 줄 것이 없다면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알게 된다.

(1) 주님께서는 여기에 있는 명백한 언급 중에서 도마가 말했었던 것을 한 마디 한 마디 그대로 응답하심으로 도마의 불신을 은연중에 책망하셨다. 

.....이것은 비록 보이지는 않았을지라도 주님께서는 그것을 들으셨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도마에게 그렇게 말씀하심으로, 도마는 얼굴을 붉히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요약하면 우리의 혀로 불신의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전혀 그런 생각조차 우리 마음에 없을 때라도 그것을 주 예수님을 아신다(시 78:21).

(2) 그의 연약함에 대한 각별한 겸손은 다음 두 가지로 나타난다.

① 그는 자신의 지체가 제한되어지는 괴로움을 겪는다. 

.....위대한 인물들은 자기들보다 열등한 자들에 의해 지배되지 않으며, 특히 자기들의 은혜의 행위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도마와 관계를 끊어 그를 불신 가운데 내버려 두시지 않고, 오히려 그의 헛된 환상에까지 자신을 베풀어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선한 목자로서 "쫓긴 자를 돌아 오게 하며"(겔 34:16) 우리는 이와 같이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한다(롬 15:1, 2).

② 주님께서는 도마에게 그의 손을 자신의 옆구리에 밀어 넣는 것조차 허용하셔서, 그로 인해 도마가 마침내 믿을 수 있다면 자신의 상처가 할켜지는 것도 참고 견디시리라.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기 위해 차라리 잊어버리고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될 만큼 불명예스럽고, 수치스러운 죽음이지만 그 자신의 죽음을 기념하여 지키도록 성례전을 마련하신 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우리의 믿음에 대한 격려가 되는 만큼 자기의 사랑의 증거이기도 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것이 기념되어지도록 명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죽음을 보는 이 성례전에서, 말하자면 우리의 손가락을 그 못자국 속에 넣어 보도록 요청되는 것이다. 그에게로 당신의 손을 내밀어라." 그가 도움과 초청과 자비의 손을 당신에게 뻗치시리라.

.....그리스도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지 않으시면 안 되었던 마지막 말씀은 충격적인 것이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메 기누 아피스토스’ - 즉 너는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라. 마치 불신 속에 유폐된 것처럼, 그때 도마는 굽힐 줄을 몰랐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라"는 이 경고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다. 만일 믿음이 없다면 우리에게 그리스도도 없고, 은혜도 없으며 소망도 없고 기쁨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말하자.

2. 여기에 도마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시인이 있다. 

---그는 이제 자기의 불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절)라고 외친다. 그가 자기의 손가락을 못자국 속에 넣었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29절) 하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한 듯하다. 본 것으로 충분했다. 이제 불신과 씨름한 후에 믿음이 승리자가 되었다.

(1) 도마는 이 때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에 완전히 만족했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박혔던 바로 그 예수께서 아제 사셨고, 이 분이 바로 그분이시다라는 것이다. 그가 믿기에 느리고 더디었던 것이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해 주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부활을 세상에 증거하며 그것에 생명을 걸었던 부활의 증인들은 경솔하게 믿은 사람들이 아니라 매우 신중했고, 또 그들이 요구할 수 있는 최대한의 증거를 보기 전에는 믿기를 보류했었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온다."

(2) 그러므로 도마는 그가 주시요, 하나님이심을 믿었으며 우리도 그렇게 믿어야 한다.

① 우리는 그의 신성, 즉 본 복음서 저자가 처음부터 자기의 논리를 주장해 온 것처럼, 그는 하나님이심과 사람이 하나님을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안 된다(1:1). 

.....우리 거룩한 기독교회의 머리이신 창시자는 필요 불가결한 지혜와 능력과 주권과 하나님의 불변성을 지니고 계신다. 주님은 그것의 창시자일뿐 아니라, 그것을 계속 지속하기 위한 바탕이시며 또한 그것을 공급하기 위한 생명의 원천이시기 때문이다.

② 중보 즉 그는 주시며 한 주이심(고전 8:6; 딤전 2:5). 

.....그는 전권대사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가로 놓인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고, 또 불가피하게 우리의 화근이 되어 왔던 논쟁을 처리하며, 나아가서 우리의 행복에 필수적인 교통을 확립하기 위한 충분한 권위를 부여받으셨다(행 2:36; 롬 14:9 참조).

(3) 도마는 그를 자기의 주시요, 자기의 하나님으로 시인했다. 

.....믿음 안에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이해의 일치와 함께 복음의 조건에 대한 의지의 일치도 있어야 한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그를 명하신 그대로 우리에게 되어지도록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안 된다. Adonai - 즉 나의 주는(나의 바탕이요, 의지) Elohim - 즉 나의 하나님(나의 왕이며 제사장)을 가리켜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를 재판장과 중보자로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선택을 인정하고 그에게 우리 자신을 온전히 의탁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생명력 있는 믿음의 행위이요, 그는 나의 것이다(아 2:16).

(4) 도마가 이것을 공개적으로 고백한 것은 자기의 불신과 의심의 증인이었던 바로 그 사람들 앞에서였다. 

.....그는 그리스도께 그것을 말한다. 그 의미를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는 나의 주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읽지 않으면 안 된다. 혹 그의 형제들에게라면 "이는 나의 주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다" 라고 말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가?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서 다윗과 같이(시 16:2) 그렇게 아뢰지 않으면 안 되며, 그에게 "우리의 증거물"로써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에서 승리하는 자로서, "이는 내 사랑하는 분이시다"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도마는 자기의 모든 힘을 다하여 그리스도를 붙들고, "나의 주시오 나의 하나님"하며 사랑의 열정으로 말하고 있다.

3. 그리스도의 전체적인 판단(29절). 

---"도마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마침내 네가 믿음에 이르게 되어 어쨌던 잘 되었다. 그러나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다음을 보자.

(1) 그리스도께서 도마를 믿는 자로 인정하신다. 

.....비록 더디고 연약할지라도 확실하고 순수하게 믿는 자들은 주 예수를 은혜롭게 받아들이게 된다. 오랫 동안 버티던 자들이 마침내 굴복하면, 주님께서는 곧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다마가 그리스도를 시인하자마자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로하시며 그가 믿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는 것이다.

(2) 주님께서 로마의 이전 불신을 책망하신다. 

.....그는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하고 부끄러워해도 좋았을 것이다.

① 그는 믿기를 너무 망서렸기 때문에 그 자신의 위로에 이르는 데에 그만큼 늦어졌다. 

.....그리스도를 따르게 된 성실한 자들은 좀 더 일찍 주님을 따르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하는 많은 이유들을 보게 된다.

② 도마가 마침내 믿음에 이르게 된 것은 상당한 요동함없이 된 것이 아니다.

..... "너는 만일 내가 산 것을 보지 못했다면 나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 자신의 감각 외에는 어떤 증거도 용납될 수 없으며, 우리 자신이 목격한 것만 믿어야 한다면 모든 대화와 교제는 끊어질 것이다. 이것이 만일 입증의 유일한 방법이어야 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어떻게 전향해야 될 것인가? 그러므로 도마는 이것을 크게 강조하기 위하여 마땅히 책망받은 것이다.

(3) 주님께서는 더 쉬운 조건으로 믿는 자들의 신앙을 칭찬하신다. 

.....믿는 자로서 도마는 진실로 축복받았으나 "보지 못한 자들이 더 복되다." 

.....그것은 믿음의 대상들(이것들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히 11:10; 고후 4:8)을 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동기들(그리스도의 기적들, 특히 부활)을 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들을 보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복이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 보면 옛날 구약 시대 성도들로 간주할 수 있는데, 이들은 그들이 본 그것을 보지 못하였으나 조상들에 약속된 것을 믿고, 또 그 믿음으로 살았다. 또 다른 한편으로 보면 장차 믿게 되는 이방인들로 간주할 수 있는데, 이들은 유대인들과 같이 그리스도를 육체로 보지 못하였다. 이 믿음이 보고 믿는 자들의 믿음보다 더 칭찬할 만하며 갸륵한 것이다. 그 까닭은

① 그것은 믿는 자들의 더 훌륭한 마음 가짐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은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 더 큰 성실성을 그리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보다 큰 마음의 고상함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한 보이는 것에 의존하는 자는 일종의 강압에 의해 자신 속에 있는 훼방을 이겨내야 하지만, 그런 것 없이도 믿는 자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보다 더 고상하다.

② 그것은 하나님 은혜의 능력을 나타내는 더 큰 예증이기 때문이다. 

.....증거가 보다 덜 감각적일수록 믿음의 역사는 그만큼 더 주님의 행사로 여겨진다. 베드로가 믿음으로 축복된 것은 혈과 육이 그것을 알게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마 16:17). 혈과 육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의 신앙보다는 보고 믿는 자들의 신앙에 더 기여한다. 

***라이트푸트(Dr. Lightfoot) 박사는 한 유대 율법 학자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개종자(改宗者) 한 사람이 시내산 앞에 섰던 이스라엘인 수천명보다 더 하나님께 합당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고 율법을 받아들였으나, 한 개종자는 보지 못하고도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Ⅳ. 역사가가 어떤 결론을 내리는 것처럼 이 복음서 저자가 자기의 기록에 대하여 평하는 말(30,31절). 다음을 살펴 보자.

1. 모두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는 다른 많은 일들에 행하여졌으나, 그는 "많은 표적들이 이 책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알려 주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예수님께서 자신의 전 생애 동안 행하신 모든 표적들과 그가 하신 모든 놀라운 말씀들, 또 그가 행하신 모든 놀라운 기적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행하신 표적들로 국한된 듯하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여기서 말하고 있는 다만 이 제자들 앞에서 만이기 때문이다(행 10:41). 주님의 몇몇 현현(顯現)은, 고린도 전서 15장 5-7절에 나타나신 것처럼,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사도행전 1장 3절을 참조하라. 이제 다음을 살펴 보자.

(1) 우리는 여기서 다른 표적들, 많은 다른 것들이 있었다고 하는 이 개략적인 증언을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기 위하여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상세한 기사들에 덧붙여서 그 증거를 매우 크게 강화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록한 자들은 증거물을 긁어 모으거나 그들이 찾아 낼 수 있는 그런 짤막하고 빈약한 증거를 잇대거나, 또 추측으로 그 나머지를 보완하거나 하기에 급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충분하여 남아 도는 증거와 그들이 필요한 이상으로 제시할 수 있는 더 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 다른 표적들이 그들 앞에서 행해진 바로 이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해야 할 전도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 증거를 ex abundanti - 즉 풍성하게 소유해야 했던 것은 필수적이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강력한 위로를 지니고 그것에 생명을 걸고 나아가게 하기 위함이었다.

(2) 우리는 왜 그것들이 모두 기록되지 않았는가라든지, 왜 이것들보다 더 많은 것이라든지, 혹은 이것들 말고 다른 것들이 쓰여지지 않았는가 하는 것을 질문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감동으로 이것을 모은 성령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좋았던 것 같다는 것으로 우리는 족하기 때문이다. 

.....이 기사(記事)가 단지 인간의 작품에 불과했다면, 그것은 논쟁이 된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과 또 그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작성된 긴 논증을 입증하기 위해서 숱한 증언과 구술서(口述書)로 부풀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사이기 때문에 필자들은 거룩한 보증으로 쓰고, 충분한 증거가 된 것을 말함으로써, 기꺼이 가르침 받고자 하는 자들을 확신시켜 주고, 불신 속에서 완악한 자들을 책망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더 많은 것이 기록되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은 신용을 얻기 위하여 말할 만한 모든 것을 제시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그는 믿음을 줄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 기사가 호기심이 많은 자들을 환대하기 위하여 쓰여졌다면, 모든 사건마다 빛을 더하고 또 윤택함으로써, 내용이 더욱 풍부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을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쓰여졌으며, 사람들이 들든지 말든지 간에, 그 목적에 부응하여 충분히 말해졌다.

2. 그는 우리가 여기에서 발견한 것을 기록한 의도 속에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알려 준다(31절).

--- "이런 기사들이 본장과 다음 장에서 주어진 것은 이러한 증거들을,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요, 또 그의 부활에 의해서 능력으로 그렇게 선포된 대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다."

(1) 여기에 복음을 기록한 자들의 의도가 있다. 

.....혹자는 자기들의 기분전환을 위하여 책을 쓰고 또 자기들의 이익이나 칭찬을 바라고 책을 발간하며, 혹자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유모어를 알려 주기 위해서, 또 혹자는 자기들의 세속적인 편리를 위한 기술과 학문을 가르치기 위하여 그렇게 한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들은 그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 대해 어떤 일시적인 유익을 바라지 않고,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천국으로 인도하며, 또한 이를 목적으로 사람들이 믿도록 설복하기 위하여 썼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그들은 가장 적절한 방법을 택했고, 충분한 증거를 뒷받침 받아서 하나님의 계시를 세상에 전한 것이다.

(2) 복음서를 읽거나 듣는 자들의 의무. 그리스도의 도(道)와 주님에 관하여 정해진 기록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다(요일 5:11).

① 여기에서 위대한 복음의 진리는 예수께서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그리스도이심을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이라고 알려 주고 있다.

첫째, 그는 바로 그 그리스도이시니, 곧 메시야라는 칭호 아래 구약의 성도들에게 약속되고 기대되었던 그분이시며, 또한 그 이름의 의미에 따라 왕과 구세주를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그 분이시다.

둘째,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곧 중보자(그때에는 그는 선지자요, 중재자며 입법자였던 모세보다 더 크지 않았었으므로)로서 뿐만 아니라 그의 중보자되심 보다 앞선 자이시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 받고, 또 하나님의 영광으로 칭함받은 신인(神人)이 아니었다면, 그는 구세주의 사업을 행하는 일이나, 또한 구세주의 면류관을 쓰는 일이나 그 어느 것에서도 합당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② 위대한 복음의 축복은 "우리가 그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된다는 믿음"을 우리들이 소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이것은 우리의 믿음을 지시하는 것으로, 그것은 우리 앞에 놓인 생명, 즉 생명의 면류관, 생명 나무를 주목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은 생명, 즉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더불어 맺은 언약 가운데서 제시된 생명은 우리의 기쁨의 충만, 그리고 우리의 모든 섬김과 고난에 대한 풍성한 보상으로서 우리가 기도(企圖)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둘째, 우리의 신앙을 격려하고, 우리를 믿음에 이르도록 초청하기 위한 것이다. 

.....어떤 큰 이익의 가망에 따라서 인간은 오래도록 모험한다. 그리고 복음이 그렇게 일컬어지듯이, "이 생명의 말씀"에 의해서 제시된 것보다 더 큰 이익이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다(행 5:20).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와 더불어 교제하는 가운데 있는 영적 생명과 아울러 그의 묵시와 결실 속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둘 다 포함하는 것이다. 이 양자는 그의 공로와 능력에 의해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는 것이며, 양자가 다 모든 참 믿는 자들에게 파기할 수 없이 확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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