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1.20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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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하나님괴 같으랴!! ..하나님은 믿는, 절대긍정-절대신뢰-절대기쁨으로 하나됨을 사는 내게 절대 만족-절대진리-절대진복이요 영생이심 ]] 

^^피상적인 허망한 색성향미촉의 오감 중독/상대적 일시적 만족감을 초월한 근원적 절대만족(무한 풍성-부요-충만-능력) * 열납하시며 열어주사 누리게 하시는 바 절대기쁨/절대긍정/절대신뢰의 유일무이한 초월적 근원적 진리 샘(길-진리-생명) * 지고지선의 진복=요동없는 초월적 절대 평강의 하나됨/거함/누림/의지-빼어닮음/행복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일시적/파괴적/자멸의 허망함으로 귀결됨  ::: Q불신/배역함의 미혹 도구 :=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 = 5욕(식성수물명)추구 + 5감만족중독(색성향미촉) << Q 말씀안에는 원하는 바, 이 모든 것에 대한 근원적 만족-기쁨-누림의 무한 풍성충만-영원한 공급, 더 나아가 영생이 있음


호세아(서론)

1. 이제 우리는 열두 명의 소선지를 대하게 되었다. 

---일부 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계산함에 있어서 열두 권의 소선지를 합쳐서 한 권으로 계산한다. 이들이 소선지로 호칭되는 이유는 이들의 저작물이 다른 선지자들보다 그 권위와 유용성이 못해서라거나 또는 이들이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눈에 다른 예언자보다 작게 비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다른 예언서보다 짧고 부피가 작기 때문에 그렇게 불릴 뿐이다. 

---우리는 이들 소선지들이 다른 선지들 못지 않게 설교는 많이 했지만, 저술은 그들만큼 많이 하지 않았고 그들의 많은 설교도 기록으로 보존되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수의 우수한 선지들이 전혀 책을 저술하지 않았으며 더러는 단지 소량만 기록했지만 그들도 당대에는 매우 유용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독 교회내에도 비록 저작물로서 후대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기라성같이 혁혁한 인물이 적지 않으며 그들은 저작을 남긴 사람들보다 은사나 은혜나 그 세대에 대한 기여도에 있어 결코 열등하지가 않다. 남긴 기록이 소량에 불과하여 저작자로서 두각을 크게 나타내지 못했지만 다산 작가 못지 않게 귀중한 자도 적지 않다는 말이다. 

---교회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들 열두 권의 소선지서는 에스라 당시에 대회 중에 인사들에 의해 한 권의 예언서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12소선지 중 마지막 세 사람은 박학하고 경건한 인사들의 단체인 대회 중 인사의 구성원이었다고 한다. 

---이들 소선지서는 산산히 흩어진 영감의 기록 중에서 잔존한 것들이다. 골동품 수집가는 fragmenta veterum―즉 고대의 단편도 귀중히 여긴다. 소선지서는 예언의 단편들로서 하나님의 섭리와 교회의 보살핌에 의해 하나도 상실되지 않도록 주의 깊게 수집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의 짧은 서신은 그의 긴 서신과 함께 보존된 것이다. 벤 시락의 아들은 이들 열두 선지자들을 명예롭게 평하여 “야곱을 힘 있게 만든” 사람들이라고 한다(벤시락 지혜서 49:10). 이들 중 아홉 명은 포로기 전에 예언 활동을 했고 마지막 세 사람은 포로 귀환 후에 활동을 했다. 

---이들 예언서의 순서는 책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는데 우리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배열을 따르기로 한다. 호세아를 맨 먼저 두는 데는 모두가 일치하지만 70인 역은 첫 여섯 권을 호세아, 아모스, 미가, 요엘, 오바댜, 요나의 순으로 배열하고 있다. 우리가 그들을 연배대로 배열하려고 한다면 이들 중 일부는 그 확실성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2. 우리 앞에는 호세아의 예언이 펼쳐져 있다. 

---호세아는 이사야보다 약간 앞에 세움을 입었으므로 문서 예언자 중에는 제일 먼저다. 고대인들은 그가 벧세메스 출신으로 잇사갈 지파 소속이라고 말한다. 그는 예언 활동을 매우 오래 계속했다. 유대인들은 그가 90년간 예언했다고 계산한다. 그래서 제롬(Jerome)이 관찰하는 대로 그는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하기 훨씬 전에 그 멸망을 예언했고 살아서 그 멸망을 목격하고 슬퍼했을 뿐만 아니라 그 시기가 지나자 이스라엘을 개선시키려고 했으며 이로써 자매 왕국인 유다에게 경종을 울리려고 했다. 

---이 예언의 목적은 개선하려고 하지 않는 백성에게 대해 죄를 발견케 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려는 데 있다. 어떤 곳은 전후 관련이 없는 잠언처럼 보이며 호세아의 설교라기 보다 오히려 호세아의 금언이라고 불리는 것 같다. 무게 있는 격언은 때때로 수고스러운 담화보다 더 많은 봉사를 한다. 후에티우스(Huetius)는 예레미야서와 에스겔서 가운데 여러 구절이 호세아 선지를 가리키며 그로부터 차용한 것 같다고 관찰한다. 

---호세아는 이들보다 훨씬 전에 활약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7장 34절, 16장 9절, 25장 10절, 그리고 에스겔 26장 13절은 호세아 2장 11절과 같은 발언이며 에스겔 16장 16절 이하는 호세아 2장 8절에서 차용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와 너희 왕 다윗을 섬기리라”(렘 30:8, 9; 겔 34:23)는 약속은 호세아도 말했고(호 3:5) 에스겔 19장 12절은 호세아 13장 15절에서 취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한 선지자는 다른 선지자를 확증하며 확실하게 한다. 이 모든 것은 하나이시고 동일하신 성령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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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호1장

1.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호세아의 아내와 자식들

2.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3.  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하였더니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4.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5.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

6.  고멜이 또 임신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7.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8.  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이스라엘이 회복되리라

10.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11.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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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B]호1장

1.  The word of the LORD which came to Hosea the son of Beeri, during the days of Uzziah, Jotham, Ahaz, [and] Hezekiah, kings of Judah, and during the days of Jeroboam the son of Joash, king of Israel.

2.  When the LORD first spoke through Hosea, the LORD said to Hosea, "Go, take to yourself a wife of harlotry, and [have] children of harlotry; for the land commits flagrant harlotry, forsaking the LORD."

3.  So he went and took Gomer the daughter of Diblaim, and she conceived and bore him a son.

4.  And the LORD said to him, "Name him Jezreel; for yet a little while, and I will punish the house of Jehu for the bloodshed of Jezreel, and I will put an end to the kingdom of the house of Israel.

5.  "And it will come about on that day, that I will break the bow of Israel in the valley of Jezreel."

6.  Then she conceived again and gave birth to a daughter. And the LORD said to him, "Name her Lo-ruhamah, for I will no longer have compassion on the house of Israel, that I should ever forgive them.

7.  "But I will have compassion on the house of Judah and deliver them by the LORD their God, and will not deliver them by bow, sword, battle, horses, or horsemen."

8.  When she had weaned Lo-ruhamah, she conceived and gave birth to a son.

9.  And the LORD said, "Name him Lo-ammi, for you are not My people and I am not your God."

10.  Yet the number of the sons of Israel Will be like the sand of the sea, Which cannot be measured or numbered; And it will come about that, in the place Where it is said to them, "You are not My people," It will be said to them, "[You are] the sons of the living God."

11.  And the sons of Judah and the sons of Israel will be gathered together, And they will appoint for themselves one leader, And they will go up from the land, For great will be the day of Jezre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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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1장 (개요)

하나님의 의사는 처음 세 장에서는 표적과 예표로, 그 다음에는 담화로써 이 예언자에게 나타나며 또 이 선지자를 통해서 백성에게 계시된다. 본 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본서 전체의 표제(1).

2. 그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하라고 명령받은 세부적 교훈이 나온다.

(1) 그는 음란한 아내와 결혼함으로써 하나님을 떠나 음행하는 백성의 죄악을 각성시켜야 했다(2, 3).

(2) 그는 자기 자식들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임하고 있는 파멸을 예고해 주어야 했는데 그의 자식들의 이름은 하나님이 그들과의 관계를 부인하시고 그들을 버리신다는 의미를 나타냈다(4-7, 8, 9).

(3) 그는 아직도 순수한 하나님 예배를 보유하고 있던 유다 왕국에 대해 위로의 말을 베풀고 여호와의 구원을 확신시켜야 했다(7).

(4)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위해 간직하신 큰 자비를 암시해야 했다(10, 11). 왜냐하면 이 예언에는 많은 귀중한 자비의 약속이 진노의 경고와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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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의 예언 시기(호 1:1)

1. 여기에는 선지자의 이름과 별칭이 나온다. 

그는 다른 예언자들처럼 자기 예언의 서두에 자기 소개를 하고 있다. 이것은 자기가 입증하려는 모든 것을 성화(聖化)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는 자기가 기록한 것이 하나님께로서 유래한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한다. 그는 수호하려는 자로서 이 예언에 착수하고 있다. 

그의 이름 호세아나 호쉐아(이것은 여호수아의 원명과 동일하기 때문에)는 구원자를 의미한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구원의 도구가 된다. 신실한 목사들도 그렇다. 그들은 영혼을 죄에서 구출함으로써 많은 영혼을 죽음에서 건지는 데 이바지한다. 

그의 별칭은 벤 브에리 즉 브에리의 아들이다. 이때나 그때나 어떤 사람들은 자기 고향에서 따온 별명으로 통하는데 미가가 모라셋 사람으로, 나훔이 엘고스 사람으로 불리운 것이 그 좋은 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부모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요엘이 브두엘의 아들로, 호세아가 브에리의 아들로 불리운 것이 바로 그 예이다. 

유대인들은 아마 부모의 명성이 혁혁할 때, 그 이름을 차용함으로써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의 아버지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그도 선지자였으리라는 유대인의 생각은 근거가 없다. 브에리는 우물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선지자들이 끊임없이 물을 길어 내와야 할 생명의 샘과 생수를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2. 여기에는 그의 권위와 사명이 나온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 말씀은 그에게 임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권위와 효능을 갖고 호세아에게 임했다. 말씀은 그 자신의 공상이나 상상으로서가 아니라 실물로서 임했다. 하나님은 자기 종 선지자들에게 종종 상상에 의해 자신을 계시하기도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호세아가 "말하고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것이었다. 

사도 바울이 순전히 계시받은 것을 말할 때처럼(살전 4:15), 이 예언은 주의 말씀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항상 구약 중에서 정경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신약의 인용으로써도 확증된다(마 2:15; 9:13; 12:7; 롬 9:25, 26; 벧전 2:10). 여호와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기 때문이다(벧전 1:25).

3. 여기에는 그의 예언 시기에 대한 소상한 설명이 나온다. 그는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 에 예언했다. 

앞에 나온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그리고 뒤에 나올 학개, 스가랴의 경우와는 달리 우리는 그의 일반적 예언 시기만 접할 수 있을 뿐 소상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왕이 한 명밖에 언급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유다왕들을 열거했으므로 이스라엘 왕들을 일일이 언급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이스라엘 왕들은 죄다 악하였으므로 그는 이스라엘 왕들의 이름을 나열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며, 또 그들을 명예롭게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호세아의 예언 시기에 대한 이 설명에서 우리는 다음 몇가지를 추측할 수 있다(여호와의 말씀은 이 시기 전체를 통해 그에게 이따금씩 임했던 것 같다).

(1) 그는 오랫동안 예언 활동을 했던 것 같다. 

그는 매우 젊어서부터 예언을 시작했다. 이것은 원기와 패기 면에서 그에게 이점이 되었다. 또 그는 노령에 이르도록 예언 활동을 했는데 이것은 경험과 권위라는 면에서 그에게 이점이 되었다. 

선한 사업에 이토록 오래 등용되었다는 것은 선지자 자신의 큰 명예였고, 백성들 사이에서 그토록 오래 사역했다는 것은 백성들에게 큰 자비였다. 그는 백성의 사정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자연히 거기에 빨려 들어갔다. 그는 오래도록 백성에게 익숙한 자였고, 따라서 그들에게 보다 도움을 줄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백성들에게서 제대로 환대를 받지 못했던 것 같다. 그들은 그의 혜택을 누리면 누릴수록 그에게 대한 존중심은 점점 감소되었다. 그들은 처음에 그의 젊음을 경멸했고 나중에는 그의 늙음을 멸시했다.

(2) 그는 다양한 상황을 겪었을 것이다. 

이들 왕들 중 일부는 매우 선량했다. 아마 그를 보호하고 격려한 왕도 있었을 것이다. 반면에 악한 왕도 있었다. 

우리는 그런 악한 왕들이 호세아에게 얼굴을 찌푸리며 낙심시켰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동일했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명예와 불명예, 좋은 소문과 나쁜 소문을 각오해야 하며, 그 어느 경우에도 자기의 순전성과 자기 사업을 고수하겠다는 결심을 놓쳐서는 안 된다.

(3) 그는 하나님의 심판이 발효 중에 있을 때 예언을 시작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보다 직접적인 방법으로 죄 많은 백성과 다투셨다. 그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지기 전에 여호와의 손에 빠졌다(삼하 24:14). 왜냐하면 웃시야 시대와 그 당시대인 여로보암 시대에는 두려운 지진이 있었다고 언급되기 때문이다(눅 14:5; 암 1:1). 그리고 그 당시에는 메뚜기의 재앙도 있었다(욜 1:2-4; 암 7:1; 호 4:3). 

말씀을 시행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채찍과 회초리가 보내지며 하나님의 채찍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말씀이 보내지지만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귀를 여시사 훈계와 징계를 받게 하시기까지는 그 어느 것도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4) 그는 왕국이 번영을 구가할 때 이스라엘에서 예언하기 시작했다. 

그가 예언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여로보암 2세 때였다. 우리가 열왕기에서 보는대로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했으며 하나님은 그의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왕하 14:27). 

그럼에도 호세아는 대담하게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그들의 멸망을 예언한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죄의 길에 있는 자들이 세상에서 형통한다는 이유로 아첨받는 것을 묵과해서는 안되며 그런 때조차 그들을 신실하게 책망해야 하고, 번영이 곧 안전은 아니며, 그들이 계속 죄중에서 행한다면 그 번영도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해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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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의 표적(호 1:2-7)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신다" 는 말은 다음 두가지를 가리킬 수 있다.

1. 이 당시에 세움을 입은 일련의 영광스러운 선지자들, 이 때에는 요엘, 아모스, 미가, 요나, 오바댜 그리고 이사야가 살면서 예언 활동을 했다. 

그러나 호세아는 이들 중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한 맨 첫 선지자였다. "여호와의 말씀의 시작은 호세아를 통해서였다" (직역하면 그렇다: 역주). 

우리는 여로보암의 역사(왕하 14:2)에서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이름을 도말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 뒤에 곧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호세아는 그 말을 선포하기 시작한 첫 번째 선지자였다. 그러므로 다른 어는 선지자보다 다소 먼저 이런 불쾌한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그의 임무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2. 아니면 호세아 자신의 예언을 가리킬 수도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백성에게 전하라고 이르신 첫 메시지였다. 그는 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자기가 권위와 명성을 얻으며 백성의 총애를 다소 확보할 때까지 이런 거치른 임무를 면하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 일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선지자로부터 어떤 기대를 할 수 있는지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니, 그는 그들에게 이런 말을 설교해야 할 뿐만 아니라 기록하고 공표하며 그들에 대한 증거로서 기록상 남겨 두어야 했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Ⅰ. 선지자는 말하자면 거울처럼 그들의 죄를 보여주어야 했고 그들의 죄가 심히 악하고 가증스럽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했다. 

선지자는 음란한 아내를 취해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명령을 받는다(2절). 그리고 그는 그대로 실행한다(3절). 그는 디블라임의 딸 고멜이란 평판 나쁜 여인과 결혼한다. 고멜은 미혼녀로 간음을 행한 여인이었다. 만일 기혼녀로 간음했더라면 그녀는 사형을 받았을 것이다. 그녀는 독신으로 추문을 뿌리며 다녔던 것이다. 그런 여인과 결혼한다는 것은 malum in se - 즉 그 자체가 악이라기 보다 malum per accidens - 즉 우발적인 악이었다. 환언하면 그런 결혼은 사려깊지 못하고 점잖지 못하고 편리하지 못한 결혼이었다. 따라서 그런 결혼은 제사장에게 금지되었다. 그러므로 실제로 그런 결혼이 이루어진다면 호세아 선지에게는 괴로움이 될 터였다(아마샤에게는 그 아내가 창녀로 될 것이라는 것이 저주로 경고되었다 암 7:17). 

그러나 하나님이 거룩한 목적에서 명령하셨을 때는 그것이 죄가 되지 않았다. 아니, 하나님이 명령하신 이상 그것은 의무였다. 그는 자기의 명성조차 하나님께 신탁해야 했다. 그러나 대개의 해석자들은 이 결혼이 환상 속에서 행해졌거나 아니면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고대인, 특히 예언자들 사이에 흔히 사용되던 교수 방법이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듯(고전 4:6) 그들은 타인들에게 의미하는 바를 본으로 보였다. 그는 음란한 아내를 취해야 했고 그에게서 자식을 낳아야 했다. 비록 혼인 관계에서 출생했을지라도 모든 사람이 음행의 씨라고 의심할 그런 자식을 낳아야 했다. 독신 때 품행이 난잡했던 사람은 결혼해서도 단정치 못한 경우가 적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호세아야! 이 백성은 음란한 아내와 음란한 자식들이 네게 치욕과 근심과 고민이 되듯 내게 수치와 슬픔과 고민이 된다. 왜냐하면 이 나라가 크게 행음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온갖 악한 사례로써 여호와를 떠났다. 그런데 그들이 특히 여기서 추궁받는 음행은 그들의 우상 숭배였다. 하나님께만 돌려드려야 할 영광을 피조물에게 돌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있어서 마치 아내가 낯선 자의 품에 안기는 것과 마찬가지의 피해와 모욕이 되는 셈이다. 특히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자들의 우상 숭배 행위는 더더욱 그랬다. 그것은 혼인 계약의 파기 행위였다. 그것은 극악하고 추악한 죄였다. 그것은 다른 어는 것보다 마음을 더 혼미케 하고 심령을 많이 빼앗아 가는 행위였다. 우상 숭배는 다른 어느 것보다 악하고 큰 음행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아내가 남편에게 진 의무보다 더 큰 의무 아래 놓여 있다. 그러므로 우상 숭배는 그런 하나님을 떠나는 행위이다. "이 나라가 행음함이니라."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한 것은 여기나 저기서 자행되거나 어떤 특정 인사가 범한 게 아니라 온 나라에 감염된 죄였다. 그것은 국가적 죄요 유행병이었다. 음란한 아내와 그 아내처럼 음란한 자식을 거느린다는 것은 선지자 즉 성인 군자에게 얼마나 역겨운 일이었을까! 그것은 얼마나 심한 인내의 훈련이었으며 만일 그런 아내가 음행을 고집한다면 이혼장을 써 주는 것밖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런 음란한 백성을 거느린다는 것은 얼마나 더 불쾌하셨겠는가? 그의 이름으로 불리우고 그의 전에 한 자리를 차지하는 백성이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 행음하였으니 말해 무엇하랴! 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인내심은 얼마나 크신가! 그들을 일축해 버려야 마땅하지 않으신가! 선지자는 마치 디블라임의 딸 고멜과 결혼해야 마땅한 듯하다. 

고멜은 아마 당시의 유명한 창녀였을 것이다. 이스라엘 나라는 디블라임의 딸 고멜과 같았다. 고멜은 "부패" 를 의미하며 디블라임은 "두 개의 과자" 또는 "무화과 덩어리" 를 뜻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파멸에 근접했고 그들의 사치와 육욕이 그 원인이었음을 나타낸다. 그들은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와 같았다. 그들은 그토록 악했다.

그것은 죄가 풍족의 결과며 파멸은 낭비의 딸임을 시사한다. 어떤 이들은 선지자에게 내린 명령을 이런 의미로 해석한다. "너는 가서 음행의 아내를 취하라. 왜냐하면 설혹 네가 가서 정직하고 정숙한 아내를 취하려고 해도 온 나라와 온 백성이 우상 숭배의 음행에 빠져 있으므로 그런 자를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Ⅱ. 선지자는 말하자면 망원경을 통해 백성들에게 파멸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음녀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의 이름을 통해 그들의 파멸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기 때문이다.

1. 선지자는 자기 첫 아들에게 지어 줄 이름으로 왕가의 몰락을 예고한다.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4절).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가 자기 자녀들에게 예언적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것을 읽었는데(사 7:3; 8:3), 여기서도 같은 경우를 보게 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손(그들은 그래야 했다)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은 또한 하나님의 이산자라는 뜻도 있다. 그들은 목자가 없는 산 위의 양떼 같을 것이다. 그들을 "주권" 이란 뜻의 "이스라엘" 이라고 부르지 말라. 그들은 그 이름의 모든 명예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분산" 이란 의미의 "이스르엘" 이라고 부르라. 왜냐하면 여호와를 떠나는 자들은 끝없이 유리 방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는 그들이 씨앗처럼 뿌려졌으나 이제는 겨와 같이 흩어질 것이다. 이스르엘(Jezreel)은 이스라엘 왕들의 어소 중 하나였는데 아늑한 계곡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성읍이었다. 이 아이가 이스르엘로 불리는 것은 이를 암시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리라" 고 하시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하나님께서 쟁론하시는 대상은 누구인가? 그것은 예후의 집이다. 

현왕 여로보암 2세는 예후 가계에 속했다. 예후의 집은 예후의 죄 때문에 경을 치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종종 선조들의 죄를 쌓아 두셨다가 자손에게 갚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이 쟁론하는 대상은 이스라엘 족속(원의: 집)의 나라이다. 이것은 현재의 왕가 즉 예후 족속을 가리킬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후의 집을 속히 폐하셨던 때문이다.(여로보암의 아들 스가랴가 6개월 만에 폐위됨으로써 예후 가계는 끝났다). 아니면 이것은 이스라엘 나라 전체를 가리킬 수도 있다. 이스라엘은 부패와 사악을 계속하다가 약 칠십 년 후 호세아 왕 때에 막을 내리게 된다. 하나님께는 이것이 "조금 후에" 불과하다. 왕들의 위세와 왕국의 세력도 그들이 만약 계속해서 하나님께 반역한다면 하나님의 멸망시키는 심판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킬 수 없다.

(2) 이 쟁논의 근거는 무엇인가?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리라." 

예후는 이스르엘에서 피를 흘렸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임명을 부여받고 그 명령에 순종하여 아합의 집을 멸망시켰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한 행위를 시인하셨다. "네가 나 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였도다" (왕하 10:30).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4대를 통치하리라는 약속의 시효가 끝나자 여기서 그 피를 예후 집에 갚겠다고 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 동일한 행동에 대해 상도 주시고 벌도 주시는가? 그러나 이 일은 매우 공정했다. 그것은 선한 처사였다. 그것은 아합 집에 내린 의로운 판결의 집행이란 점에서 상이되었다. 

그러나 예후는 이 일을 정당한 방법으로 행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하지 않고 자신의 출세를 기도했으며 하나님의 공의의 집행에 자신의 적개심을 뒤섞었던 것이다. 그는 죄에 대한 혐오감으로가 아니라 죄인에게 대한 악의로써 이 일을 행했다. 왜냐하면 그는 금송아지 숭배를 계속했고 전심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왕하 10:31), 그러므로 예후 자신의 불의의 양이 차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이들과 계산하시게 되었다. 그 회계의 첫째 조항은 아합 가의 피에 대한 것이다(본문에서는 이스르엘의 피라고 불리우고 있다). 첫째되는 조항이었기에 이것은 여타 모든 죄를 대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바아사의 집이 멸문지화를 당했을 때도 그 이유는 그가 여로보암의 집처럼 행하고 그 집을 쳤다는 것이었다(왕상 16:7). 

공의의 집행을 위임받은 자들은 정당한 원리와 정당한 의도에서 행하도록 주선하고 남을 벌하는 죄 가운데서 살지 않도록 관심해야 한다. 이는 그들의 정당한 법 집행도 저 다른 날에 살인으로 치부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3) 쟁논은 얼마나 멀리 진척될 것인가? 이것은 징계가 아니라 멸망이 될 것이다. 

혹자는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리라" 는 말이 유혈에 대한 복수를 의미하지 않고 바로 그 유혈의 반복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내가 아합의 집을 벌했듯이 예후의 집을 벌하리니 이는 예후가 전임자의 벌을 경고로 받아들이지 않고 우상 숭배의 전철을 밟았기 때문이다. 예후의 집이 멸망된 다음에는 내가 이스르엘 족속(집: 흠정역)의 나라를 폐하리라. 비록 지금은 번성하고 있지만 내가 이 나라를 몰락시키리라." 

예후 가문의 끝왕 스가랴의 사후에 열 지파의 왕국은 쇠잔했고 눈에 띄게 축소되었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위해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용사의 힘: 갈데아 주석)을 꺾으리라" 는 것이 경고되고 있다(5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자위능력이나 대적에게 대한 항거 능력을 빼앗으실 것이다. 힘이 실려 있고 손에서 새롭게 된 활은 강성해지는 세력을 암시하는데 반해 절궁(折弓)은 쇠잔해 가는 세력을 나타낸다. 활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꺾어질 것이다. 이스르엘 계곡은 아마 병기고가 있던 장소일 것이다. 아니면 그 골짜기에서 어떤 전투가 벌어지고 이스라엘 나라가 아주 크게 약화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과 쟁논하면 방어할 담이 존재치 못한다는데 주목하자. 하나님이 치러 나오실 때는 강한 활도 곧 부러지며 강한 요새도 함락된다.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그들은 의로우신 하나님이 바로 그 장소에서 갚겠다고 하시던 피를 흘렸다. 이것은 악명 높은 흉악범이 바로 자신의 범행 장소에서 처형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하는 것은 벌을 죄에 상응시키기 위해서이다.

2. 호세아는 자기의 둘째 아이의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전 국민을 버리실 것이라고 예언한다. 첫 아이가 아들인데 반해 이번에는 딸이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아들 딸 모두가 부패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혹자는 이것이 이스라엘의 약화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이 딸의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이 말은 사랑하지 않는 자라고도 번역되며(롬 9:25) 또 긍휼을 얻지 못한 자라고도 번역된다(벧전 2:10). 결국 이것은 한가지 말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족속의 운명을 나타낸다.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리라."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더 이상 긍휼을 베풀지 않으시겠다는 것을 암시한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위해 자기들에 대한 자비와 긍휼을 버리는 자들은 그 자비가 자기들을 버릴 것이며 자기들은 거짓된 헛 것에게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각오할 만한 이유가 있다(요 2:8 참조). 

죄는 이스라엘 족속으로부터도 하나님의 자비를 돌이키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긍휼히 여기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실 때, 그들의 처지는 비참하다. "내가 그들을 완전하게 제해 버릴 것이며, 옮겨 버릴 것이며, 뽑아 버릴 것이라" (한글 개역: 사하지 않을 것이라). 자비의 냇물이 그칠 때 우리는 진노의 물병 밖에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지 않으실 자는 찌꺼기나 쓰레기처럼 제거당할 것이다. 제해 버린다는 말은 때때로 죄사함을 의미하기 때문에 혹자는 이 부분을 "내가 비록 지금까지는 그들을 사하였을지라도 더 이상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리라" 고 해석한다. 하나님께서는 고치기를 싫어하는 백성에게 대해 오래도록 참으셨지만 항상 참으시진 않을 것이다.

또는 "내가 다시는 그들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임이나라." 사유하시는 자비가 부인된다면 여타 모든 자비도 기대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자비는 나머지 모든 자비의 문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것을 위로의 말씀으로 해석한다. "내가 그들을 더 이상 긍휼히 여기지 않을 것이니 내가 그들을 사하기까지 즉 구속주가 시온에 와서 야곱에게서 불경건을 제하기까지 하리라." 갈데아 주석은 "그러나 그들이 만일 회개하면 내가 사하리라" 고 읽는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제 때에 반성하고 돌이키면 하나님께는 사위하심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Ⅲ.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이처럼 이스라엘 족속과 다투시는 동안에도 유다 족속을 위해서는 자비를 쌓아두고 계신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 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기리라."

 비록 어떤 자는 불순종 때문에 추방당해 마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비의 그릇과 기념물이 될 잔존자를 스스로 확보하실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하나님의 공의가 영광을 얻으실 자들도 있으며 자유로운 은혜가 영광을 얻으실 자들도 있다. 일부 사람들이 불신앙으로 꺾어질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종말 때까지 이 세상의 교회를 소유하고 계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이 아닌 유다를 긍휼히 여기시리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배척을 더욱 악화시키며 유다 역시 악을 행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처럼 버리시진 않는다는 것은 유다에게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더 크게 만든다. "내가 저희를 긍휼히 여겨 구원하리라." 우리의 구원은 우리 자신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자비 덕분이란 것을 명심하자.

1. 이것은 의심할 나위도 없이 현세적 구원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혁혁한 방법으로 구원을 베푸셨다. 

그는 이스라엘에게는 은총을 베풀지 않으셨으나 유다에게는 베푸셨다. 앗시리아 군대는 사마리아를 멸망시키고 열 지파를 포로로 끌고 간 뒤 계속해서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하셨던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하룻밤 사이에 앗시리아 진영을 크게 살육하셨고 그들은 즉시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을 얻었으며 칼이나 활로 구원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열 지파가 포로 생활을 계속하며 그 땅은 남에게 소유되어 완전히 사함을 얻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기사 구원하셨다. 그리고 칠십년 뒤에는 그들을 데리고 나오셨으니 이는 힘이나 능으로 되지 않고 여호와의 신으로 된 것이다(슥 4:6). "내가 저희 하나님 여호와 즉 내 자신으로 구원하리라" 

하나님은 그 자신의 힘으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며, 그 일을 자신의 손으로 취급하실 것이다. 그가 떠맡으시는 구원은 확실하다. 그가 역사하신다면 아무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혼자서 행하는 구원은 가장 기뻐받을 만하다. 

그와 같이 여호와께서는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다(신 32:12). 인간이 이룬 구원이 적으면 적을수록 하나님이 이룬 구원은 더 많아지며 더 빛나고 더 향기롭다. "내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그들을 구원하리라" (갈데아 주석은 그렇게 읽는다).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위해 그의 권능으로 구원하리라. 내가 활로 칼로 그들을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1) 그들은 자신을 방어할 활도 칼도 갖지 못할 정도로 쇠퇴할 때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삿 5:8; 삼상 13:22).

(2) 그들은 자신의 힘과 무기를 의지할 수 없게 될 때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시 44:6).

(3) 그들은 활과 칼의 어려움 없이도 쉽사리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사 9:5). "내가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을 구원하리라" (7절). 

하나님은 "저희 하나님" 이라고 부르시는 가운데 열 지파를 꾸짖고 계신다. 이스라엘은 자기 하나님되신 분을 버렸고 하나님께서는 이 때문에 그들을 버리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구원하신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시사해 준다. 그것은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들과 맺으신 언약을 지키며 여호와와 그의 말씀과 예배를 충실히 고수한 데 대한 보상이었던 것이다.

2. 그러나 이것은 또한 유다의 우상 숭배로부터의 구원을 가리킬 수도 있다. 이것은 그들에게 다른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되는 동시에 준비도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한 구원이다. 이것은 그의 은혜의 능력에 의해서만 성취되고 칼이나 활로써는 이루어질 수 없는 구원이다.

이스라엘 왕국이 호세아 아래서 완전히 제거된 때에 유다 왕국은 히스기야 아래서 영광스런 개혁을 하였고, 따라서 보존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서 첫째로는 우상 숭배로부터, 그 다음에는 포로 생활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셨다.

3. 어떤 이들은 이 약속을 메시야의 크신 구원으로 이해한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때가 차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큰 구원을 성취하실 터였다. 그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러 세상에 오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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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약속(호 1:8-11)

여기에 나오는 예고는 다음과 같다.

Ⅰ. 이스라엘 백성의 일시적 배척. 

이것은 호세아가 음란한 아내에게서 낳은 또 다른 아이의 이름으로 나타낸다(8, 9절). 우리는 그 이름이 이런 두려운 징조를 가져온 호세아의 자녀가 전부 다 음란한 자식들이라는 것을 계속 관찰하지 않으면 안된다(2절). 

그의 자녀는 전부가 호세아와 결혼한 음란한 창기에게서 출생하였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파멸이 이스라엘의 죄악의 당연한 산물임을 암시한다. 그들이 먼저 하나님을 반역하지 않았다면 결코 하나님께로부터 배척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라도 먼저 그를 떠나지 않으면 그들을 떠나지 않으신다.

1. 이 아이의 출생. "고멜은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 아이는 그 이름 속에 이스라엘 백성의 전적 배척을 예고하는 전조를 포함하는데 본문은 이 아이의 출생이 지체됨을 주목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한 하나님의 인내심과 극단적 상황으로까지 진행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을 암시한다. 혹자는 고멜의 잉태가 이스라엘 백성의 계속적 행악을 나타낸다고 해석한다. 욕심이 여전히 잉태하여 죄를 낳았다. 그들은 행악을 덧보탰다(갈데아 주석은 그렇게 해석한다). 그들은 음행에 이력이 났고 고집이 났다.

2. 아이의 이름.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라" 는 뜻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더 이상 긍휼히 여기시지 않겠다는 말을 듣고도 이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도리어 자기들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망상에 젖어 으쓱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그런 칭호마저 삭제해 버리고 그들과의 관계를 부인하신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며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나는 너희 것이 안 되겠다(말 뜻은 그렇다). 나는 너희와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겠고 너희 왕, 너희 아버지, 너희 후견자, 보호자가 되지 않겠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않겠다" 는 말은 이런 의미도 된다. 즉 "나는 너희에게 이전의 내가 되지 않겠다. 너희가 우리 하나님은 이러 이러할 것이라고 하던 기대대로의 내가 되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가 만일 내게 충실했더라면 되어 주었을 하나님도 되지 않겠다." 

다음 말씀을 관찰하자. "저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 너희는 내 백성으로서 어울리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너희가 내 백성이라면 마땅히 내 말을 준수하고 청종해야 하는데도 너희는 그러지 않는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어중이 떠중이 잡신의 백성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를 내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겠고 보호하지도 않을 것이며 너희에게 대한 권리 주장을 하지도 않겠다. 나는 너희를 움켜잡은 자들의 손에서 너희를 요구하지도 구출하지도 않겠다. 그들로 너희를 움켜쥐게 하겠다. 너희는 내 것이 아니다. 너희는 나를 너희 하나님으로 삼으려 하지 않고 거짓된 참정자에게 충성을 바치려 한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않겠다. 너희는 내게서 아무런 권리도 이익도 갖지 못하며 아무런 혜택도 기대하지 못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과 그의 은혜 덕분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 시작된 일이다.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겠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는 그를 사랑한다. 

그러나 우리가 언약에서 쫓겨난 것은 순전히 우리 탓이며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위반은 사람 편에 있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누군가를 미워하신다면 그것은 그들이 먼저 하나님을 미워한 때문이다. 

이 일은 그들이 앗수르 땅으로 완전히 끌려가고 그들의 장소가 그들을 더 이상 기억하지 못했을 때 성취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예배를 상실한 때문이다. 그들은 포로 중에 있던 두 지파처럼 선지자들도 파송받지 못했고 약속도 받지 못했다. 아니, 그들은 더 이상 백성이 아니었다. 그들은 끌려간 열방의 민족들과 혼합되어 열방 속에서 사라진 듯하기 때문이다.

Ⅱ. 이스라엘은 쇠잔할 것이나 때가 차면 회복되리라는 것이 예언되고 있다. 여기서는 진노 도중에 전처럼 자비가 기억되고 있다. 배척은 전체적이 되지 않을 것이며 최종적이 되지 않을 것이다(10, 11절).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처럼 될 것이다." 상처를 입힌 바로 그 손이 어떻게 치료하시며, 찢으신 분이 얼마나 친절하게 싸매시는지 관찰하자. 하나님께서는 비록 그의 위협으로 근심을 불러 일으키시지만, 긍휼히 여기실 것이며 영원한 자비로 모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이 약속은 매우 귀중하며 우리에게 유용하다.

1. 혹자는 이 약속이 유대인의 바벨론 포로 귀환에서 성취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때 십 지파 중 다수인들은 유다 족속과 연합하여, 고레스가 선포한 해방의 혜택을 누렸고 흩어졌던 여러 나라에서 무리를 이루어 고국으로 돌아 왔던 것이다. 그들은 스룹바벨을 두목으로 정하고 전에 분명히 두 민족으로 나뉘었던 백성을 하나로 합쳤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자기 백성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배척했던 그 땅에서 자기 선지자를 통해 다시 이들을 자기 자녀로 인정하시고 이들을 위해 나타나시고자 하셨다.

그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예배드리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올 터였다. 따라서 비록 이 약속이 보다 멀리 가리킨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것이 바벨론 포로들의 위로와 후원을 목적으로 하며 또 은혜롭고 경건하게 사용되었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를 갖는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그 나라를 위해 예비하셨던 자비를 전체 국민에게 확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축복이 예비되어 있는 한 그들의 나라는 멸망될 리가 없었다.

2. 혹자는 이들 약속이 후일 올 것으로 기대되는 유대인의 전체적 회심시까지는 완전히 성취되지 않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때는 바다의 모래같이 흩어져 있는 무수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포용하게 될 것이며 복음 교회에 병합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 자기 자녀로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다. 배척의 음울한 표징 아래 놓여있는 그곳에서조차 그들은 그의 백성으로 인정되지 않을 것이다. 유대 박사들은 이 약속이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

3. 복음의 선포와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참여로 그리스도 왕국이 수립되었을 때 이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그렇게 적용하며(롬 9:25, 26) 베드로도 흩어진 유대인에 대해 그렇게 기록한 (벧전 2:10) 때문이다. 여기의 이스라엘은 복음 교회이며 영적 이스라엘(갈 6:16)이다. 모든 신자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발자취를 따르면서 그의 축복을 유업으로 받는 이스라엘이다(롬 4:11, 12). 이제 이 이스라엘에게 대한 약속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1) 그 이스라엘은 크게 많아지고 그 수가 증가할 것이다.

"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다." 비록 이스라엘이 육을 따라서는 감소되어 소수로 되지만 영적 이스라엘은 증가하여 무수하게 될 것이다. 1세기의 기독교나 그 이후의 기독교에서 이 약속은 복음의 선포로 그리스도께 인도된 무수한 사람들을 통해 성취되었다.

모든 이스라엘 지파에서 수천 명의 기독교인이 나오고 다른 열방에서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왔기 때문이다 (계 7:4, 9; 갈 4:27).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많은 무리의 아비라고 부르셨는데 (창 17:5; 22:17),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약속은 이 점에서 완전히 이루어졌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여기서 바닷가의 모래로 비유되는 것은 수효 때문이 아니라고 관찰한다. 즉 바닷가의 모래는 물이 뭍으로 넘치지 못하게 하는 경계가 되듯 참 이스라엘인은 자기가 사는 곳의 방패막이가 되어 심판을 방지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롯이 소돔에 있는 동안 소돔에 대해 어떤 일도 하실 수 없었다.

(2) 하나님께서는 복음 이스라엘과 언약을 새로 맺으실 것이며 구약 교회를 합병시킨 언약만큼 완전하고 충분한 헌장으로써 복음 이스라엘을 자신의 교회로 합치실 것이다. 그리고 그 특권은 훨씬 더 클 것이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너희가 다시 언약 속으로 용납될 것이며 내 백성으로 인정될 것이다." 

버림받은 이방인들은 각기 자기 장소에서 그리고 배척받은 유대인은 자기 땅에서 은총과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열조가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쫓겨난 곳에서 자손들은 신앙으로 말미암아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다. 

백성이 아닌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된 것은 복된 부활이다. 아니, 특권은 확대된다. 전처럼 "너희는 내 백성이라" 고 할 뿐만 아니라 "너희가 나면서부터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고 한다. 이스라엘은 율법 아래서 하나님의 아들 즉 장자였지만 그 때는 어린 자녀 같았다. 이제 복음 아래서는 그들이 장성하여 총명과 자유가 더욱 크게 되었다(갈 4:1).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사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로 모시고 있다는 것은 모든 신자의 말로 다할 수 없는 특권이다. 신자는 은혜와 입양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간주해도 좋다.

[2]신자의 아들됨이 인정되고 인지될 것이다. 그들을 위로하고 만족시키기 위해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고 할 것이다. 아니, 그들의 명예를 위해 그들의 아들됨이 세상 사람이 듣는 데서 선언될 것이다. 

성도는 스스로 불안해하지 말며 남들도 성도를 멸시하게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조만간 그들이 하나님 자녀됨이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며 세상은 그들의 우수성과 하나님이 그들을 귀중히 여기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3]그것은 그들의 위로에 큰 보탬이 될 것이며 그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노여움의 표징 아래 있었는데 바로 그 장소에서 은총의 징표로 존귀하게 될 때 그들의 위로와 명예는 크게 증진할 것이다. 

이것은 믿는 이방인에게도 위로의 말이 된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고도 하나님의 자녀로 용납되며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있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도 된다. 그곳이 비록 땅에서 가장 먼 곳이라 해도, 멀리 있던 그 곳에서,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고 한 그곳에서 자기 나라와 친족을 떠나지 않고도 믿음으로 양자되게 하는 성령을 받을 수 있으며 자기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거할 수 있다. 그들은 양자의 영을 받을 수 있다(롬 8:15).

(3) 불화하던 자들이 행복하게 합류하게 될 것이다(11절).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보이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과 유다 두 나라는 무척이나 불화하여 서로 물고 먹었는데 이들의 결합은 세상에 세워질 그리스도 왕국의 상징이었다. 서로 극히 반목하던 자들이 그리스도의 왕국에 나아오면 서로 양해하게 되며 서로 사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은 복음 시대에 완전히 성취되었다. 갈릴리 사람들은 열 지파 지역에 거주했으며 아마 대부분이 그 후손일 것이다. 그런데 그 갈릴리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따르고 복음을 수용함에 있어 아마 유대인(즉 유다 출신의) 이라고 불리웠을 자들과 충심으로 연합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첫 제자들은 일부는 유대인이었고 일부는 갈릴리 사람들이었다. 복음의 빛으로 축복받은 자들은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출신이었다 (마 4:15). 

유대인과 갈릴리인 사이에는 전혀 우호 관계가 없었지만 그리스도를 믿자마자 복되게 유대를 공고히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전에 서로 품던 원한은 남지 않았다. 아니,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훨씬 더 큰 적의가 쌓여 있었지만, 사마리아인들이 믿게 되었을 때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졌다.(행 8:14). 이와 같이 유다와 이스라엘은 함께 모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제사법의 간막이 벽이 헐릴 때 유대인과 이방인 간에 설립될 훨씬 훌륭한 연합의 예표였다 (엡 2:14-16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셨다(요 11:52; 엡 1:10).

(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영적 이스라엘에게 단결의 구심점이 되실 것이다. 그들의 한 두목(원의: 머리를 세우는 데 일치할 것이다)은 하나님이 정하신 자 즉 그리스도 외에 달리 될 수가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며 오직 하나뿐인 두목이시라는 것을 명심하자. 그는 정치적 몸에 있어서 통치의 우두머리실 뿐만 아니라 생리적 몸에 있어서 생명력의 머리시기도 하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를 우리의 우두머리로 세운 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세우심에 동의하고 그의 안내와 통치에 기꺼이 자신을 위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우두머리로 세운다는 것은 모두 선한 그리스도인들과 일치하고 교제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비록 그리스도인들은 수가 많을 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며 서로 하나가 된다. Qui conveniunt in alqu tertio inter se conveniunt - 즉 제 3자와 일치하는 자들은 서로 일치한다.

(5)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우두머리로 세웠으므로 그들은 그 땅에서부터 올라 올 것이다. 이스라엘 방방곡곡에서 예배드리러 예루살렘으로 올라 왔듯이 모든 곳에서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교회에 연합하기 위해 올라 올 것이다. "지파들이 그리로 올라 가도다" (시 122:4)라는 말은 명백히 이방인의 교회 접근에 대한 예언(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자. 사 2:3)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것은 지역적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10절에는 동일한 장소를 말하고 있으므로) 마음의 변화 곧 영적으로 그리스도께 올라가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은 그 땅에서 올라 올 것이다. 우두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자신을 바친 자들은 이 땅과 거기 속한 것들에게서 애착심을 버리며 위의 것들을 사모하는 자들이다(골 3:1, 2).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요 15:19) 하늘과 교통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록 그곳이 자기들의 고국이지만 그 땅에서 올라 올 것이다. 그들은 어린 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기 위해 그곳에서 나올 것이다. 박학한 포콕(Pocock)박사는 그렇게 해석한다.

(6) 이 모든 일이 일어날 때 "이스르엘의 날은 클 것이다."

비록 "이스르엘의 환난의 날이 크다" 고 하나 (이렇게 이해하는 자도 있다), 이스르엘의 영광의 날도 클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날이 될 것이다. 원수들이 오래도록 자기 날을 누린 뒤에 이것은 이스라엘의 날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기서 이스르엘 곧 하나님의 씨, 거룩한 씨(사 6:13), 그 땅의 재산(신 33:11)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이 씨는 이제 파종되어 흙 속에 묻혀 있다. 그러나 추수기가 오면 그 날은 클 것이다. 구원받을 자가 날로 더하게 되었을 때 교회의 날은 컸다. 그 때 전능자께서는 교회를 위해 큰 일을 행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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