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2.18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마24.예루살렘멸망예언_구주공중재림과 예루살렘보좌심판_무화과나무비유_참생명HS안에깨어동행하는기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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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마24장

===성전이 무너뜨려질 것을 예언하시다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재난의 징조

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가장 큰 환난

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

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20.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23.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26.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7.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28.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

===인자가 오는 것을 보리라

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무화과나무에서 배울 교훈

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35.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3.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48.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49.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50.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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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4장 (개요)

그리스도의 설교는 대개 실제적이었다. 

그러나 본 장에서 우리는 예언적인 설교, 즉 장차 오게 될 일들에 대한 예언을 찾아 볼 수 있다. 어쨌든 이것들이 실제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의도는 제자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과 대화를 지도하시기 위함이며, 따라서 그것은 실제적인 적용으로 결론되어 지고 있다. 

교회는 언제나 일반적인 약속 이외에 특별한 약속을 가지고 있다. 

그 목적은 둘 다 믿는 자들을 지도하고 격려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예언적인 설교를 그의 사역의 끝 부분에 하신 것을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는 마치 계시록이 신약의 맨 나중 책이며 구약의 예언서가 맨 나중엔 놓여진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된 것은 우리들에게 다음의 사실을 암시해 주기 위함이다.

즉 우리는 명백한 진리와 의무에 기초가 잘 되어 있어야 하며, 또한 우리가 캄캄하고 어려운 것들에 몰두하기 전에 먼저 그러한 진리들과 의무들이 잘 소화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릇된 목적을 가지고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함으로써 스스로 큰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본 장은 다음과 같이 분류될 수 있다.

Ⅰ.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동기(1-3).

Ⅱ. 설교 그 자체. 이것을 세분한다면,

1. 특히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 다양한 사건들에 대한 예언. 

지금은 촉진되고 있지만 40년 후에는 성취하게 될 유대 교회와 국가들에 대한 완전한 파멸과 멸망에 대한 서언, 그 부수적인 것 그리고 그 결과. 더 나아가 마지막날에 그리스도께서 오심. 그리고 그것이 모형이요 형상이었던 만물들의 완성(4-31).

2. 제자들로 하여금 이와 같이 크고 무서운 일들을 준비하도록 경각심을 주시기 위하여 이 예언에 대해 실제적인 적용을 함(3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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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예언들(마 24:1-3)

여기에 보면,

Ⅰ. 그리스도께서 "성전"과 또한 거기에서의 공적인 활동을 단념하심. 

그는 앞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말들을 실증하고 계시다. "그는 성전에서 나와 떠나셨다." 

그 표현 방법이 주목할 만하다. 그는 성전에서 나오셔서 거기를 떠나셨다. 즉 마지막 작별을 고하였다. 그는 거기를 떠나신 후 더 이상 그 곳으로 돌아오지 않으셨다. 그 다음에 곧 바로 그 파멸에 대한 예언이 뒤따르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께서 내버리는 집은 참으로 황폐하여 버린 바 된다는 사실이다.

"내가 저희를 떠나는 때에는 저희에게 화가 미치리로다"(호 9:12; 렘 6:8). 지금은 그들의 "이카봇"(Ichabod),즉 "그 영광이 떠났으며, 그 보호자가 떠나버린 것"을 통곡해야 할 때였다. 

이 일이 있은 지 삼일 후에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고 말았다.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떠나셨을 때 모든 것은 "속되고 불결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쫓아내기까지는 먼저 떠나지 않으셨다. 또한 그들이 먼저 그를 거절하기까지는 그들을 거절하지 않으셨다.

Ⅱ.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개인적으로 담화하심. 

그는 성전을 떠나셨지만 열두 제자들을 떠나시지는 아니하였다. 

열두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버린 것이 오히려 더욱 풍성하게 되었던 복음 교회의 종자(씨)들이었다. 

그가 성전을 떠나셨을 때 그의 제자들도 그 곳을 떠나 그에게로 왔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가 계시는 곳에 함께 거하며 또한 그가 떠날 때는함께  떠나가는 것이 좋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공적인 설교를 끝내셨을 때 제자들은 개인적으로 가르침을 받기 위하여 그에게로 왔다. 

왜냐하면 "주님의 은밀한 것은 그를 경외하는 자들과 더불어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무리들에게 비유로 유대 교회의 멸망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며, 여기에서는 늘 하시던 것같이 그의 제자들에게 이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 왔다." 

그 건물들은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었으며, 세상의 기사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을 호화롭게 만들기 위하여 어떤 비용도 아껴지지 않았고 어떤 기술도 아끼는바 되지 않았다. 비록 그것은 솔로몬 성전에는 미치지 못하고 또한 "그 시작도 보잘것없는 것"이기는 하였지만 그 "나중의 형편은 더욱 크게 확대되었던" 것이다. 그 성전은 예물들과 현물들로 풍성하게 꾸며졌으며, 계속적으로 이 성전에 첨가되고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이 일들을 나타내 보여 주었으며 또한 그것들에 대해 주목하실 것을 바랐다. 다시 말하면,

(1) 그들이 그것들에 대해 크게 만족하였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역시 그렇게 느끼시기를 기대하였다. 

그들 제자들은 대부분 그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갈릴리에 살았기 때문에 그것들을 볼 기회가 드물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성전에 대해 넋을 잃을 정도로 찬탄해 마지않았으며, 주님께서도 그들이 "이 모든 영광"(창 31:1)에 대해 했던 것처럼 찬탄하시리라고 생각을 하였다. 

그들은 주님께서 그 성전들을 둘러보심으로써 그의 기분을 전환시키시기를 원하였다(아마도 그는 설교하신 후에 제자들이 보기에 거의 실망한 듯한 우울한 표정을 짓고 계신 듯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선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외적인 허세나 쾌락에 매료되기가 쉬우며, 또한 외적 허세에 매료됨 통해 영적 판단력이 무디어지는 바 하나님의 일들에까지도 (다 잘되고 있는 것처럼)과대 평가하기 쉽다는 사실이다. 

한편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그것들에 대하여 무감각하고 또한 그것들을 하찮은 것으로 여겨야만 한다. 

본래 처음에 그 성전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① 그 영광은 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지고 훼손되었다. 

성전을 거룩케 하는 금을 오히려 성전보다 낫게 여겼던 바리새인들의 사악한 교리는 성전의 모든 장식물들의 아름다움을 손상시키기에 충분하였다.

② 그 영광은 "이 나중 집의 영광"(학 2:9)이었던 그리스도의 임재로 말미암아 무색하게 되고 쓸모 없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 건축물들은 탁월한 영광에 비교해 볼 때 전혀 영광스러운 것이 되지 못하였다.

(2) 제자들은 이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될 것이라는 사실을 듣고 슬퍼하면서 주님으로 하여금 그것에 다시 주목하여 주실 것을 원하였다. 

그들은 마치 그에게 그 판결(선고)을 번복시킬 것을 바라는 것처럼 그 건물들을 본 후 그에게 말하였다. 

"주여, 우리 조상들이 당신을 칭송하였던 곳인 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집을 황폐케 하지 마소서." 

그들은 백성들이 사악하게 될 때에 솔로몬의 성전에 관한 많은 준비들에 대하여 즉 그 백성들이 그렇게 찬미하던 외적인 영광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대하 7:21). 

이 "높은 집"은 죄로 말미암아 낮아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근래에 "고귀한 영혼들"을 보시며 "우셨다"(눅 19:41). 

그러나, 오히려 제자들은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는 울려고 하였다. 

다른 점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이 점에 있어서 "그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같지 아니하시다." 

훌륭한 건물들을 좋아하는 것은 그의 제자들의 영이 연약하고 빈곤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일이었다.

Animo magno nihil magnum - 즉 위대한 사람에게는 위대한 것이 없다(Seneca).

2.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이곳에 있게 될 완전한 파멸과 멸망에 대하여 예언하고 계신다(2절).

믿음의 눈으로 보고 주께 들을 때야 비로소 기독자들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영광도 머잖아 소멸될 것임을 예견하게 되며, 따라서 그것들에 대해 찬탄이나 과대평가 하거나 미련이 남는 것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지금 보는 바, 가장 아름다운 멋들어진 몸이라 해도 머지않아 후패하여 벌레(충)의 음식물이 될 것이며, 가장 아름다운 건물들은 무너져 폐허의 무더기가 될 것이다. 

그 때에도 우리는 그것들을 주목하여 보거나 그렇게 찬탄하면서 보게 될 것인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그들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것들을 보고 자기들처럼 그것들을 찬탄하며 아껴주셨으면 좋을텐테-하고 원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도 그 자신과 같이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무감각해지기를 원하고 계셨다. 따라서 우리 기독자들도 이러한 것들에 대해 마땅히 무감각해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작정을 번복하시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확증하고 계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1) 그는 그것들을 확실한 멸망에 이를것을 말씀하고 계시다. 

즉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즉 내가 말하는 것을 알며 또한 내가 말하는 것을 확증하는 방법을 아는 "내"가 말하노니, 내 말한 것을 들으라. 그것은 그와 같이 될 것이다. "아멘이시오 참된 증인인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에게 위임된 모든 심판, 약속들과 마찬가지로 형벌들도 "그에게는 모두 예(yea)요 아멘이다"(히 6:17, 18).

(2) 그는 그것을 완전한 파멸, 그 자체로 말씀하고 계신다. 

그 성전은 헐벗은 벌거숭이가 되고 약탈당하며 볼품없이 될 뿐만 아니라 분쇄되고 황폐하게 될 것이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둘째 성전의 "건물들"에서 "돌 위에 돌이 첩 놓이는 것"(학 2:15)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 파멸 시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는 것"으로 강조되고 있다. 역사는 우리들에게 이것이 후대에 성취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티토 장군이 예루살렘 성을 탈취하였을 때 그는 성전을 보존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격분한 군인들이 그것을 완전히 파괴해버리는 것을 만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게다가 투르누스 루프스(Turnus Rufus)는 그 성전이 서 있었던 기초를 파헤치는 일까지 자행하였다. 이로써, "시온은 너희로 인하여 밭같이 갊을 당할 것이라"(미 3:12)는 성경 말씀이 성취되었다. 

그 후 배교자인 쥴리안 때에 유대인들은 기독교에 대항하여 그들의 성전을 재건하도록 격려를 받아 부서진 잔해들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새로운 기초를 닦기 위하여 땅을 고르게 하려 하였던 바, 그러한 시도는 땅에서 뿜어 나온 이적적인 불 때문에 좌절되고 말았는데, 이 불은 그들이 공들여 새로 놓은 기초를 모두 다 파괴해 버렸으며 건축하던 자들은 놀라서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성전에 대한 이 최종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예언은 레위직인 제사장직과 의식적인 율법의 기간에 대한 예언을 내포하고 있다.

3. 제자들은 이 판결(선고)의 진리성이나 공평성에 대해 논란을 멈추았고 그것이 일어나게 될 때와 그것이 임박할 때의 표적에 관하여 질문하고 있다(3절).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그들은 어디에서 이 질문을 했는가? 

그들은 "예수께서 감람산 이에 앉으셨을 때" 은밀하게 질문하였다. 아마도 그는 베다니로 가시는 도중 쉬시기 위하여 거기에 앉으셨던 것 같다. 

감람산은 성전을 바로 마주하고 있었으며, 또한 성전으로부터 약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위치이기에 그것을 잘 볼 수 있었다. 

그리스도는 거기에 의자 위에 앉은 재판장처럼 앉아 있었고 그 성전과 성은 그 앞에 피고들처럼 서 있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는 그들을 판결하였다. 

우리는 에스겔 11장 23절에서 주님의 영광이 성전으로부터 감람산으로 옮겨진 것을 읽어 볼 수 있다. 

바로 그 기록된 바와 같이 위대한 영광이신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이 감람산에로 옮겨 앉고 계시다.

(2) 그들은 어떤 것을 질문하였는가?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 여기에는 세 가지 질문이 들어 있다.

① 어떤 사람들은 이 질문들은 하나의 동일한 일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성전의 파멸과 주님재림, 유대 교회와 국가의 기간을 가리키고 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이 때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며(마 16:28) 또한 그 때가 바로 마지막 완성의 때가 될 것이며(왜냐하면 그렇게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세대의 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다. 

만일 그 성전이 황폐해진다면 세상은 능히 존재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랍비들은 성전은 세상을 창조한 일곱 가지 일들 중의 하나라고 늘 말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세상은 성전을 잔존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② 또 어떤 사람은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나이까?" 라는 제자들의 질문이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 끝 날에 있게 될 다른 두 가지 사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는 그리스도의 오심은 그의 복음 왕국을 세우는 것을 말하며, 세상 끝 날은 심판의 날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의 질문이 그리스도께서 지금 예언하신 사건 이상의 것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싶다. 그러나 그들이 미래의 사건에 대해 매우 혼란된 생각을 가졌음이 다른 구절들에 의해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아마도 그들의 이러한 질문에 대해 확고한 의미를 찾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의 대답 가운데서 비록 그의 제자들의 오류를 분명하게 시정하지는 않고 있을지라도(이것은 성령의 부으심에 의해 행해져야만 한다) 그 때의 큰 사건들과 세상 끝 날에 있을 그의 재림에 관하여 그들이 질문한 것 이상으로 주시하고 계시며 또한 그의 교회에게 가르치고 계시다. 

주님께서는 여기에서 무의식적으로 이상의 것들에 대한 내용을 말씀하게 되셨으며 이것에 대하여는 이 설교의 계속인 다음 장에서 분명히 언급하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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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예언들(마 24:4-31)

제자들은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나이까?"라고 때에 관하여 질문을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질문에 대하여 그의 예언이 언제 어느 시에 성취될 것이라고 대답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알 바 아니기"(행 1:7)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라고 물었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하여 완전히 대답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수 있어야"(마 16:3)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예언은 원래 가까이 있는 사건들- 즉 예루살렘의 멸망, 유대 교회와 나라의 기간, 이방인의 부르심, 세상에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는 것 등과 관련되고 있다. 

구약의 예언들이 비록 유대인들의 일들과 그들 나라의 변혁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은 복음 교회와 메시야의 왕국에 대해 확실하게 내다보면서 상징적으로 선포된 것이며 또한 신약에서도 그렇게 해석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것에만 특별히 적용되고 다른 것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처럼 보여지고 있는 예언들도 이와 같이 예루살렘이 멸망의 한 모형으로 예언되었지만 일반적인 심판을 내다보면서 예언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예언들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같이 어떤 구절들은 대개 모형에 대해 적용할 수 있으며 또 어떤 구절들은 원형(原型)에 적용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특히 후자가 원형에 가장 가깝게 지시하고 있다.

JC께서 여기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의구심을 만족시켜 주시기 위함보다는 그들의 주의를 끌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사건들 자체의 구별된 생각을 제시하시기 위함보다는 일어나게 될 그 사건에 대비케 하시기 위함이다. 

이것이 바로 때를 잘 분별하는 것으로써 우리는 이를 갈망해야만 하며 또한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추론할 수 있다. 

또한 이 예언은 또한 교회에 대해서도 그렇게 될 것임을 나타내고 있는데 세상 끝 날에 진정 그렇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을 것이며"(전 1:5, 6, 7, 9) 또한 사건들의 연속과 연결, 그리고 조짐(전조)이 그것들이 일어났던 그것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덕적인 징후들이 그 사건을 가리키는 본 장의 예언대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현명한 사람의 마음과 같은, 시대의 표적에 대한 이러한 의미들은 그 개선책을 알고 있을 것이다.

Ⅰ.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속이는 자들이 나타날 것을 예언하고 계시다. 

그는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들은 이 일이 언제 있겠다는, 그 시기에 대한 대답을 듣기 원하였다. 즉 그 때와 시간의 비밀에 대해 알게 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의구심에 대한 방해물(check)로써 이 말씀을 주신다.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너희 의무에 유의하고 너희는 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는 것에서부터 미혹을 받지 말라." 

자신들에게 속하지 않는 은밀한 일들에 관하여 매우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하는 자들은 대부분 미혹하는 자들에 의해 쉽사리 속는다(살후 2:3). 

제자들은 그들의 고질적인 원수들인 유대인들이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기에, 이제 방심과 나태의 위험속에 빠져들려 하였을 때 "안 된다"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다른 방법으로 더욱 많이 노출되고 있다."  미혹하는 자들은 핍박하는 자보다  교회에 대해 더 위험스러운 대적자들이다.

이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세 번씩이나 "거짓 선지자"의 출현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1. 예루살렘의 파멸에 대한 징후이다. 

참된 선지자들을 죽였던 자들이 거짓 선지자들에 미혹되도록 내버려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참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이 거짓 그리스도와 자칭 메시야라고 하는 자들에 의해 속임을 받고 깨뜨림을 당하도록 내버림을 당한 것은 당연한 처사였었다.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은 그 백성들을 당파나 파벌로 나뉘게 만드는 동기가 되었으며, 이것은 그들의 파멸을 보다 쉽게 가속화시켰다.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잘못된 길로 인도함을 받은 많은 사람들은 심판의 그 양(量)을 채우는 데 기여하였다.

2.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큰 시련이었으며 따라서 "완전한 자들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하여"는 그러한 것들이 그들의 시련의 상태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그들이 위장하였던 허울(외식). 

사탄은 빛의 천사처럼 나타날 때에 가장 해롭게 행동한다. 가장 큰 악(惡)이 종종 가장 훌륭한 선으로 위장 될 때가 있다.

① "거짓 선지자"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11-24절). 

속이는 자는 신적인 영감, 즉 직접적인 사명과 예언의 영을 구실로 내세워 위장하지만 그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이러한 일은 전에도 있었으며(렘 23:16; 겔 13:6), 미리 예언된 것이었다(신 13:3).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여기에서 지적된 미혹하는 자들은 교회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던 교사들과 같은 자들로서 그와 같은 명성을 얻었으나 후에는 그들이 가르쳤던 진리를그러나 배신하고 그릇된 길로 빠지고 마는 자들이었다. 

이러한 것에서 나온 위험은 더욱 클 것이다. 왜냐하면 거의 느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둔지(막사)안에 있는 한 사람의 배신자(스파이)는 밖에 있는 천 명의 공공연한 원수의 군대보다 더 해로운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② "거짓 그리스도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와서"(5절), 그 이름이 자신에게 특별히 해당되는 것처럼 행세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이다. 즉 거짓 그리스도이다"(24절)라고 할 것이다. 

메시야의 나타남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기대하던 때가 있었다. 그들은 그에 대하여, "장차 오게 될 자"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가 정작 오셨을 때 나라의 백성은 그를 거절하였다. 

자신의 이름을 떨치려 했던 자들은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도용하여 자신을 그리스도로 행세하였다.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이 당시와 예루살렘 멸망 사이에 있었던 몇몇 사기군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중 한 사람인 데우다스(Theudas)는 코스피우스 파두스(Cospius Fadus)에 의해 실패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벨릭스(Felix)에 의해, 또 어떤 사람은 베스도(Festus)에 의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도세데우스(Dosetheus)는 자기가 모세에 의해 예언된 그리스도라고 하였다(Origen adversus Celsum). 박수 시몬은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자처하였다(행 8:10). 

후대에도 이러한 행세자(자칭 무엇인 채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일일이 열거한다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 이후 약 100년경에 자신을 "발-코크바"(Ba-cochobas)─즉 별의 아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발-코코바"(Ba-cosba)─즉 거짓의 아들임이 입증되었다. 약 50년 전(약 18세기)에 사바티-레위라는 사람이 터키 왕국에서 메시야로 추대되어 유대인들에 의하여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었는데, 곧 "그의 어리석음이 드러나고 말았다." 폴 리카우트(Paul Rycaut)경의 "역사서"를 보라. 

천주교도 실제로 거짓 그리스도를 추대하였던 바, 교황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그의 대리자로 행세하지만 실상은 그리스도의 모든 직무들을 침범하고 빼앗는 것이며, 그리하여 그와 경쟁자가 되고 또한 그에게 원수가 되고 속이는 자와 적그리스도가 되고 마는 것이다.

③ 이러한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은 각처에서 사람들을 자기들에게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그들이 앞잡이와 첩자들을 거느리려고 한다(23절). 

사회적인 혼란이 크게 일어나서 백성들이 자기들의 눈에 피난처로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붙잡으려고 할 때 사탄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들을 속이려고 할 것이다. 그때에 그들은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말라. 

진실로 그리스도께서는 명성 떨치려 스스로 노력하거나 큰소리로 외치지 않으셨다. 그에 대해 성경의 기록은 "보라, 여기에 있다 ! 보라, 저기에 있다 !"(눅 17:21)고 말해적이 결코 없었다. 그러므로 그에 관하여 어떤 사람이 그와 같이 말한다면, 그것을 시험대상으로 여겨 잘 분별하고 배척하도록 하라. 

종교를 수도원의 생활로 대체하는 은둔자들은 "그가 광야에 있다"고 말한다. 

봉헌된 성체(천주교의 제물 중 하나─역주)를 그리스도로 만드는 사제들은 "그가 벽장에 있다, 즉 골방에 있다(en toi" tameioi". 보라, 그는 이 성골함(성인들의 유물을 모신 곳 ─ 즉 그 형상에 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이 그리스도나 기독교의 독점권을 가진 것처럼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를 어떤 당파나 종파의 것으로 전유(專有)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들과 더불어 세워지고 무너지며, 살고 죽어야만 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보라, 그는 이 교회에 있다, 그 회의에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들 중의 모든 것으로써 여기나 저기에 있지 않으며, "그가 자신의 이름을 거룩하신 장소에서" 그의 백성들을 축복으로써 만나신다.

(2) 이러한 거짓 행세를 확증하기 위해 그들이 제시할 증거.

"그들은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일 것이다"(24절). 

이러한 것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확고히 하기 위한 신적인 표적으로써의 참된 이적들은 아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표적과 기사로써 우리를 미혹케 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옛적에 주어진 그러한 규칙들을 의지해야만 한다(신 13:1-3). 

"만일 표적과 기사가 행해진다고 할지라도" 다른 신을 믿게 하거나 다른 그리스도를 믿도록 유인하려고 하는 그를 따르지 말라. "왜냐하면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증거 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임금"인 사탄에 의해 행해진(하나님께서 이를 인정하신다) "거짓 기사들"(살후 2:9)에 불과하다. 

"그들이 이적을 행할 것이다"라고 쓰여지지 않고 "그들이 큰 표적들을 보일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것들은 하나의 보이기 위한 쇼(show)에 불과하다. 그들은 거짓말로 사람들의 고지식함(쉽사리 믿음)을 속이려 하며 또한 애굽의 마술사들이 요술로 속인 것처럼 속임수나 점(占)으로써 그들의 의식을 미혹케 한다.

(3) 이러한 시도로 말미암아 그들이 이루게 될 성취.

① "그들은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5절). 

또 한번 더 그렇게 할 것이다(11절).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마귀와 그의 하수인들은 초라한 영혼들을 미혹하는 데 있어서 크게 기세를 떨칠는지 모른다.  좁은 문을 찾는 사람은 적지만 큰길로 끌려 들어가는 사람은 많다. 

사람들이 그들의 표적과 기사에 의해 속임을 당하게 될 것이며, 또한 많은 사람들이 압제자로부터의 해방을 원함으로써 그러한 미혹에 빠지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이적이나 많은 무리가 참된 교회의 확실한 표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온 땅은 그 짐승을 이상히 여기기" 때문이다(계 13:3).

② "그들은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24절).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나타낸다.

첫째, 미혹의 세력. 

그 힘은 많은 사람을 끌어갈 것이며(그 흐름은 매우 강할 것이다), 굳게 섰다고 생각하는 자들까지도 이끌어 가버릴 것이다. 사람의 지식이나 은사들, 학식, 저명한 지위, 긴 신앙 고백이 그들을 안전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미혹을 받게 될 것이다. 

영원한 목적에 의한 하나님의 전능하신 은혜 이외에는 아무 것도 능히 보호해 줄 수가 없을 것이다.

둘째, 이러한 위험 가운데서도 택함 받은 자들은 안전함. 

이것은 "할 수만 있으면"이라는 삽입구를 보아 알 수 있는데, 이 구절은 그러한 미혹이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가능치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그 이유는 "선택에 따라 하나님의 목적이 이룰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지키심을 받고"있기 때문이다. 한번 비췸을 받고 타락한 자들(히 6:4, 5, 6)을 미혹할 수는 있지만 택함 받은 자를 미혹케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들이 미혹을 받게 된다면 그의 선택은 실패한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인 바, 이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의롭다 하셨기"(롬 8:30)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주어진(넘기워진) 자들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자들 중 한 사람도 그를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요 10:28). 

그로티우스는 이 구절을 초대 교회의 교인들을 기독교로부터 끌어내는 데 엄청난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그것이 갈렌(Galen)에 의해 격언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인용하고 있다.  갈렌은 매우 어려운 일이나 도덕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나타내려고 할 때 그는 "너는 곧 기독자를 그리스도에게서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4)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미혹하는 자들을 조심할 것을 말씀하신 반복된 경고. 

주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조심하도록(25절) 경고를 하고 계시다. 즉 "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어디에서 공격을 받게 될 것인가에 대해 전해들은 자는 이스라엘의 왕이 했던 것처럼 자신을 구원하게 될 것이다(왕하 6:9, 10).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그리스도의 경고는 우리로 하여금 깨어있도록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또한 그들이 비록 미혹 받는 데서부터 보호하심을 받게 될지라도 그들은 지정된 수단들을 사용함으로써 또한 말씀의 경고에 대해 적절하게 유의함으로써 보호하심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전에 우리들에게 말씀하셨던 그의 말씀들을 믿음으로써 보호하심을 받게 된다.

① 우리는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고 말하는 자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23절). 

우리는 참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또한 그의 영적인 임재가 "그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함께 모인 곳"에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 

그리스도가 땅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너희를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에게로부터 끌어내려는 자들을 믿지 말라. 그것들을 결코 믿지 말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 참된 기독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원수는 공연히 쉽게 믿어 버리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단순한 자는 모든 말을 쉽게 믿어 버리며, 또 모든 외침에 쉽게 뒤 따라 간다. “믿지 말라” ─ 즉 믿는 것을 조심하라.

② 우리는 "그가 광야에 있다," 혹은 "그가 골방에 있다"(26절)고 말하는 자들을 따라 나서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돌팔이 의사나 자처하는 행세자들의 말을 경청하거나, 또는 우리들에게 새 그리스도나 새 복음을 가리키는 자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 

"나가지 말라." 왜냐하면 너희가 따라가면 그들로 말미암아 위태한 지경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로운 길에서 벗어나라. 바람에 흔들리는 자가 되지 말라. 

많은 사람들의 헛된 호기심은 그를 악질적인 배교자로 빠지게 하고 말 것이다. 이러한 때에 너희의 힘은 여전히 남아 있다. 즉 너희의 마음을 은혜로써 강건케 하기 위하여 남아 있는 것이다.

Ⅱ. 그는 그들에게 있을 전쟁과 큰 난리에 대하여 예언하고 계신다(6,7절).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을 때 나라에는 평온함이 있었고 아누스의 전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 이러한 "화평"(눅 12:51)을 "전하기"위함이나 또는 지속시키기 위함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아니, 그의 성과 벽은 고통의 때에도 세워지며 또한 전쟁 때일지라도 그의 사역은 계속될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또한 그가 "그들의 집을 황폐하도록 내버려 둔" 이후로 "그 칼은 그들의 집에서부터 떠나지 않았으며," "여호와의 칼"은 결코 잠잠하지 아니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그 검으로 하여금 외식하는 국가와 그의 진노의 백성을 징계하는 책임을 부여하셨기 때문이다. 그 검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멸망을 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기에 보면,

1. 그 날의 사건에 대한 예언이 있다. 

너희는 이제 머지 않아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게 될 것이다." 

난리(전쟁)가 일어날 때 그들은 듣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전쟁은 어지러히 소리를 내기"(사 9:5) 때문이다.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라! (렘 4:19) "오 내 영혼아, 너는 듣느냐. 이 전쟁의 경보를 !"(사역) 평온한 땅이라 할지라도, 새로운 일들에 대해 관심이 없는 자라고 할지라도 난리의 소문을 듣지 않을 수가 없다. 복음을 거절한 결과가 무엇인지를 보라! 평화의 사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한 자는 전쟁의 사자들의 말을 듣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언약, 즉 그의 새로운 언약에 대해 논쟁한 것을 복수하시려고 칼을 준비하고 계시다.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날 것이다." 즉 유대 나라의 한 부분이나 한 지방이 다른 지방을 대적하여 일어날 것이며, 한 성읍이 다른 성읍을 대적하여 일어날 것이다(대하 15:5, 6). 동일한 지방과 성에서 한 당파나 종파가 다른 당파나 종파를 대적하여 일어날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상대편에 의해 삼킴을 당하게 될 것이며 또한 박살이 나게 될 것이다(사 9:19-21).

2. 그 날의 의무에 대한 서술.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러한 슬픈 소식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마음이 확고히 안정되고 하나님을 믿는 곳에 평화가 유지되고 두려움이 없으며 전재의 불길한 소식이나 난리의 소문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된다. 또한 "병기"들의 시끄러운 소리도 없을 것이다.

‘오라테 메 드로에이스데’ - 즉 소동하거나 동요되지 말라. 아이 밴 여자처럼 놀라움으로 고통하지 말라. (무서워)하지 말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 전쟁이 일어났을 때 마음에 근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유의하고 깨어있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백성들이 고통의 때에 근심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그의 마음에 대적하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 이유에서 근심하지 말아야만 한다.

(1) 왜냐하면 우리는 이것을 기대하도록 명령받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며, 멸망당해야만 한다. 

이로써 하나님의 공의와 구속자의 명예가 나타나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런 일이 있어야만 한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것이며 또한 그 말씀은 적당한 때에 성취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모든 사건들을 관장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의 불변성에 대한 고찰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라도 우리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안심시킬 수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위해 지정된 일을 수행하시는 것에 불과하며 또한 우리의 지나친 근심은 그 지정된 사실에 대하여 해석상의 논쟁을 벌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잠잠히 받아들이도록 하자. 왜냐하면 "이런 일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더 있다가 있을 일을 끝(end)을 위하여 하나님의 계획의 소산물(necessitate decreti)로써 뿐만 아니라 하나의 수단(necessitate medii)으로써" 이런 일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건물이 세워지기 전에 옛집은 허물어져야만 한다(비록 그것이 소음이나 먼지 또는 위험이 없이 행해질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진동하게 될 것들(그것은 좋지 못한 진동이다)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변동되어야만 한다"(히 12:27).

(2)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더 악화될 것을 기대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끝은 아니니라." 

마지막 때는 아니며, 시간이 지속되는 동안 우리는 고통을 각오해야만 하며 더구나 하나의 고통이 끝나면 다른 고통이 시작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고통들의 끝이 아직 이르지 않았다. 유대인의 세력을 꺼꾸러뜨리기 위해 사용된 심판보다 더 큰 심판들이 있어야만 한다. 더 많은 진노의 대접이 쏟아져야만 한다. 지나간 재앙은 단지 하나에 불과하며 장차 와야 할 재앙들이 더 많이 있다. 하나님의 화살통에서 그들을 향하여 쏘아야 할 화살이 더 많이 있다. 그러므로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하거나 근심하려고 하지 말라. 현재의 짐에 깔려 가라앉지 말라. 아직 너희 앞에 있는 것에 부닥치기 위하여 온 힘과 마음을 다하라.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지 말라. 기근과 온역이 닥쳐 올 때 너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인가?" 

만일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도(소식)을 깨닫기 위한"(사 8:19) 초조감에 불과하다면 그것이 "뼈와 살을 건드릴" 때는 어떤 충격을 느끼게 될 것인가? 

만일 우리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다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려고 할 것인가? 

만일 우리가 길 도중에 있는 작은 시냇물을 보고 놀란다면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 하겠느냐?"(렘 12:5)

Ⅲ. 주님께서는 하나님에 의해 즉각적으로 보내어진 다른 심판들-즉 "기근과 온역과 지진"에 대하여 예언하고 계시다. 

기근은 종종 전쟁의 결과이며, 온역은 기근의 결과이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던 세 종류의 심판이었다. 

다윗은 매우 당황하였다. 왜냐하면 어느 것이 가장 나쁜 것이었는지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한꺼번에 백성들에게 쏟아졌을 때 얼마나 무섭게 황폐시켰을 것인가! 전쟁 이외에(그것으로 족한 것이지만), 다음과 같은 재앙이 있게 될 것이다.

1. "기근." 이 말은 "세번째 인봉"이 있을 때 나타난 "검은 말"에 의해 표시되고 있다(계 6:5, 6). 

우리는 그리스도 이후 오래지 않아 유대에 기근이 있었던 것을 찾아 볼 수 있으며, 이것은 매우 심한 것이었다(행 11:28). 그러나 더 심한 기근은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 때 그 곳에 있었다(애 4:9, 10 참조).

2. "온역." "네번째 인봉"이 있을 때 "청황색 말과 거기에 탄 사망"과 "음부"에 의해 표시되었다(계 6:7, 8). 

이것은 무분별하게 마구 멸망시키며 또한 잠시 동안에 무더기를 쌓아 올린다.

3. "처처에 일어나는 지진" 또는 장소마다 일어나는 지진. 

그들이 "웃시야 때"(슥 14:5)있었던 지진에서 피하여 도망하였던 것처럼 그곳에서 도망하는 자들을 따라 이곳 저곳으로 피하여 따라갈 것이다. 

큰 파멸은 종종 최근이나 이전에 있었던 지진으로 말미암아 행해져 왔다. 이 지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또한 더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계시적인 환상에서 주목할 것은 지진이 교회에 대해 유익하였으며 해를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계 6:12, 15; 11:12, 13, 19; 16:17-19 을 비교).

하나님께서 "무섭게 땅을 진동시키실 때"(사 2:21), 지진은 "악인을 그 가운데서 구축하며"(욥 38:13), "만국의 소원(역주:개역 성경에는 보배라고 번역됨)"을 나타내게 한다(학 2:6, 7). 

그러나 여기에서 지진들은 무서운 심판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슬픔의 시작," 즉 wjdivn -즉 해산의 진통의 시작으로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것은 빠르고 맹렬하며, 그러면서도 지루하게 계속된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그는 압도하실 것이며, 그가 분노를 나타내기 "시작하실때"는 "끝까지 하실"(삼상 3:12)것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끝까지 거부한 자들 앞에 놓여 있는 영원한 참상을 내다보게 될 때에 우리는 가장 큰 현세적인 심판에 관하여 참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것들은 슬픔의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도 나쁜 것이기는 하지만 뒤에는 더 나쁜 것이 있다."

Ⅳ. 주님께서는 그의 백성들과 사역자들이 박해를 받게 될 것과 또한 종교적인 일반 적인 배교와 부패가 있을 것을 예언하고 계시다(9,10,12절).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십자가"가 예언하고 있다(9절). 

모든 미래적인 사건들 중에서 비록 우리가 대개 원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이 고난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기근과 온역이 만연하게 될 때, 그들은 그것이 기독자들 때문이라고 전가시킬 것이며 또한 그것을 그들을 박해하는 구실로 삼을 것이다. 

Christianos ad leones- 즉 기독자들을 사자들에게 보내어 그들의 밥이 되게 하라.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처음으로 파송하실 때에 그들이 직면하게 될 어려운 일들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지금까지 그들은 이러한 어려운 일들을 거의 체험하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그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고난받을수록 그것이 더욱 채워질 것이라고 다시 한 번 기억케 하고 계시다(골 1:24).

(1) 그들은 바울처럼 쇠사슬에 매임과 투옥, "비방, 매맞음"을 당함으로써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고후 11:23-25). 

즉 그들은 즉시 죽임을 당하지 않고 "온종일 죽임을 당하며," "종종 실제로 죽임을 당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가 죽음을 맛보도록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의 구경거리가 될 것이다"(고전 4:9, 11).

(2) 그들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교회를 대적하는 원수들은 너무도 잔인하기 때문에 성도들의 피 이외는 그들을 만족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물과 같이 피에 목말라 있으며 그것을 빨아먹으며 쏟을 것이다.

(3) 그들은 주님께서 전에 말씀하셨던 것처럼(마 10:22)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 

세상은 일반적으로 기독자에 대한 적개심과 악의에 차 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에 대해 악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방인들은 기독자들처럼 그들에 의해 혹독한 박해를 받지는 않았다. 기독자들은 온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에게서 미움을 받았으며, 세상의 악의에 대한 공통적인 표적이 되었다.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대우를 받았을 때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 생각해야만 하는가? 그것이 순교자를 만들고 또한 그를 위로하는 이유가 된다. 그들이 이와 같이 미움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고 전파하는 것은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그들을 향하여 분노케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왕국에 떨어진 치명적인 충격과 또한 자신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마귀는 "큰 진노를 가지고 내려왔다."

2. "십자가의 방해물"(10-12절). 

이와 같이 사탄은 힘을 가지고 자신의 일을 수행하려고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마침내 그의 백성과 사역자들의 고난으로부터 자신에게 영광을 가져오실 것이다. 박해의 나쁜 결과들에 대하여 여기에서 세 가지로 예언되었다.

(1) 어떤 사람들의 "배교." 

기독교의 신앙 고백이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기 시작할 때 "많은 사람들이 방해를 받게 될" 것이며, 거기에서 맨 먼저 불화가 생기게 되고 그 다음에는 이탈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에 대해 다투기 시작할 것이며, 그것에 대해 냉담하게 되고 지치게 되며, 마침내는 그것을 배반하게 될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① 의의 길을 알았던 자들이 그 길에서 돌이키는 것은 결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그것이 이상한 일이기는 하지만). 

바울은 종종 처음에는 잘 시작하였으나 어떤 것이 그들로 하여금 방해를 한 탈선자들에 대하여 불평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에게서 나간 것은 참으로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요일 2:19). 우리는 전에 이에 대하여 들은 바 있다.

② 고난의 때는 흔드는(shaking)때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돌밭과 같은 경이자"(마 13:21)들로서 좋은 날씨에는 견디나 폭풍이 불 때에는 넘어져 버리는 자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햇빛이 비칠 때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구름 낀 어두운 날에 이리 저리로 움직이실 것이며 그 중에서 그를 따르는 자들만을 남겨 두실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값싸게 소유할 수 있을 때 또는 안일무사하게 그것과 더불어 잠잘 수 있을 때 자신들의 종교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의 신앙 고백이 그들에게 부담을 준다면 그들은 즉시로 그것을 그만 둘 것이다.

(2) 또 어떤 사람들의 "악의."

 박해가 유행하게 될 때 시기와 적개심, 악의는 감염에 의해 사람의 마음속에 이상하게 퍼지게 된다. 

또한 자비와 온유, 겸손은 특이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며, 이것은 사람을 작은 새와 같이 취급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 때에 "그들은 서로 잡아 줄 것이다." 즉 "자신의 종교를 배반하여 버리는 자들은 거기에 집착되어 있는 자들을 미워하고 배반할 것이다. 그들은 저들에 대하여 우정을 가진 것처럼 행세하였었다." 

배신자들은 대개 가장 잔인하고 낙폭한 박해자들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박해하는 때는 발견하는 때라는 사실이다. 

양의 옷을 입은 이리들은 그 때에 자신의 변장을 벗어버릴 것이며 또한 이리로 본색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서로 잡아 주고 미워할 것이다." 

배교와 미움, 즉 두 가지 최상의 것(진리와 사랑)에 직접적으로 반대가 되기 때문에 가장 사악한 일들이 될 수 있는 두 가지 일들은 그것들이 우세하게 될 때가 가장 위험하다. 

이것은 아마도 유대인들 가운데 있었던 몇 개의 논쟁하는 종파들이 다른 종파에게 행하였던 야만적인 대우에 대해 언급하는 듯하다. 

마치 떡을 먹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삼킨 자들이 "서로를 다 먹어치울 때"까지 이와 같이 서로 물고 뜯도록 내버림을 당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이것은 마태복음 10장 21절에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가까이 있었던 자들이 그들에게 행하였던 악행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장차 형제가 형제를 죽는 데 내어 주며."

(3)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불법이 성하게"되고 사랑이 식어짐(12절).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는 미혹의 때와 성도들이 미움을 받게 되는 박해의 때에는 이러한 일들이 있게 될 것이다.

① 불법이 "성함."

세상에는 언제나 사악함이 있지만 종종 거기에 "불법"이 특별한 방식으로 성하다고 말해진다.  

그것은 평상시보다 불법이 더 많아진 경우이며, 옛 세상과 같이 "모든 육체가 제멋대로 타락한" 경우로서 다시 말하면 그것은 평상시보다 도가 "지나친 것"이요, "포악이 일어나서 죄악의 몽둥이가 되었을 때"(겔 7:11)를 말한다. 

이러한 마치 지옥 같은 상태는 하나님께 대한 모독과 성도들에 대한 적개심에서 출발되는 것처럼 보인다.

② 사랑이 "식어짐." 이것은 전자의 결과이다.

"불법이 성함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여기에 언급된 사랑은 일반적으로 "사랑"안에 모두 총괄되어 있는 참된 경건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사악한 자가 열심히 분기탱천하여 악한 일을 할 때, 신앙을 고백한 자들은 역으로 고백한 바 그들의 신앙의 열정이 시간이 지나면서 움츠러들게 되고 점점 식어가는 일은 너무도 흔히 있는 일이다. [이것은 마치 에베소 교회가 어려운 때에 "첫사랑을 버렸던 것"(계 2:2-4)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신앙의 열정이 현저한 특징은 특별히 형제적인 사랑에서 잘 드러난다 할 수 있다. 

불법, 즉 미혹케 하는 불법이나 핍박하는 불법이 성하게 될 때, 이러한 은혜는 대개 식어지기 마련이다. 

기독자는 상대적으로 예민해져서 서로를 꺼리게 되고 의심하게 되며, 사랑과 관심표명이 감소하며 교제와 교통에서 떠나게 될 뿐만 아니라 거리감이 조성되고 분파가 만들어지며, 그리하여 사랑은 없어지게 되는 경우가 많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 더 한술 더떠서 마귀는 형제들을 그들의 원수대적들에게 한층 더 얄심을 내어 고소할 뿐만 아니라(그들의 원수들은 박해하는 불법을 성하게 만든다), 형제 서로간에 서로 서로에 대해 고소하도록 만든다(이들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식게 한다).

이 사실은 장차 이와 같이 사랑이 매우 식어질 것이라는 시대에 대한 우울한 전망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첫째, 그것은 "모든"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의 사랑에 대한 것이다. 

최악의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성실하고 열심 있는 남은 자를 남겨 두고 계신다. [이는 엘리야 때에 그가 홀로 남아 있다고 생각했을 때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이 사랑은 점차 식어지는 것이지 결코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점점 감소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뿐, 완전히 소멸되어버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뿌리에는 생명이 있으며, 겨울이 지난 후에는 드디어 그 자체가 소생되어 드러나 보일 것이다. 그 연단과정을 통해 얻어진 새로운 성품은 "식어질 수"는 있으되, "낡아지지"는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낡아진다 함은 그것은 점점 시들어져 완전히 없어져 버린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3. 이러한 상황 아래에 놓여 있는 주님의 백성을 후원하기 위하여 이 십자가의 방해물과 연관하여 보충된 위로(13절).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 비록 많은 사람이 방해를 받게 된다고 할지라도 끝까지 견디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대개 그리스도를 위해 훌륭한 일을 하려고 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쳐서 뒤로 쳐지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큰 대의가 그것을 지지하는 자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가라앉게 되거나 또는 그의 이름이 그것을 고백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망각되지나 않을까 하는 사실에 대하여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도 "은혜로 택하심를 따라 남은 자"가 있다(롬 11:5). 이것은 이러한 예언이 관련된 동일한 때에 대하여 언급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멸망에로 떨어진" 자들이 아니라, "영혼이 구원받기 위하여" 믿고 견디는 남은 자들에게 관하여 언급되고 있다. 

그들은 끝까지 견디어야만 한다. 즉 그들의 생명이 끝날 때까지, 그들의 현재 시련 상태가 끝날 때까지 또한 이러한 고난의 시험기간이 끝날 때까지, 비록 그들이 피흘리기까지 참도록 부르심을 받았지만, 마지막 會戰(회전)까지 참고 견뎌내야만 한다.

(2) 그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이와 같이 끝까지 견디며 꾸준히 참는 자들에게 위로를 줄 것이다. 

인내는 거저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면류관을 얻으며, 그것을 쓰게 될 것이다. 

"그들은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의 괴로움에서 구출되어 이 세상에 고통 없이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여기에서 의미하는 것은 영원한 구원을 말한다. 생의 끝까지 견디는 자들은 자신의 믿음과 소망의 결과(end)를 얻게 될 것이며, "영혼의 구원"까지도 얻게 될 것이다(벧전 1:9; 롬 2:7; 계 3:20). 

영광의 면류관은 마침내 견뎌낸 모든 사람들에게 보상으로 주어질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에 대하여 믿음으로 유의함으로써 박해자들과 더불어 궁전에 사는 것보다는 박해받는 자들과 더불어 화형을 받는 것을 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Ⅴ. 그는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될 것을 예언하고 계시다(14절). 

"이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천국 복음". 

이렇게 불리운 것은 그것이 영광의 나라에로 인도하는 은혜의 나라를 계시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천국 복음은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나라를 설립하며, 저 세상에서의 우리들의 나라를 확증 하고 있다.

2. 이 복음은 조만간 온 세상의 모든 피조물에게 전파될 것이며, 또한 모든 민족들도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제자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까지 구원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이 까닭에 방언의 은사는 "성령세례의 첫 열매"가 되었던 것이다.

3. 복음이 전파된 것은 "모든 민족에게 증거하기 위함이다." 

즉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의무와 사랑이 무엇이며, 그들이 하나님에게 받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 보상에 관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신실하게 전파하려 함이다. 

그것은 최종적 구원을 받게 될 것을 굳게 믿고 말씀을 순종하며 전파하는 자들과 또는 JC의 이름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임할 저주를 우스갯소리로 여겨 결코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기록"(요일 5:11)이요, "증거"이다(막 16:6 참조). 그런데 이 사실이 어떻게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가?

(1) 이것은 복음이 예루살렘의 멸망 전에 최소한 그 당시 알려진 세상 전역에 이르기까지 알려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구약 교회는 신약 교회가 훌륭하게 세워지고, 확고한 기반을 가지며, 서서히 그 자태를 드러나기까지 아직 완전히 해체되어서는 안 되었다.  

완전히 타락한 교회라 할지라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면목상으로나마 남아 있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여겨져야 한다. 

보라,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지 40년 안에 복음의 "소리"는 "세상 끝까지 퍼져 나갔다"(롬 10:18).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일루리곤 근처까지 완전하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또한 다른 사도들도 결코 게으르지 않았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에게 대한 극심한 박해는,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떠나 세상 전역으로 흩어지게 함으로써, 결국 "각처로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파하게 하였다"(행 8:1-4). 

진실로 구주JC의 십가가죽으심과 부활, 구주JC이름을 영접함으로써 얻는 구원의 복된 소식이 온 세상에 전파될 때에야 마침내 유대 민족의 종말이 이르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죽임으로써 그 복음을 방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그들에게까지도 오히려 그 복음 능력과 영향력이 미치게 된 것이다. 그들이 염려하던 바로 그대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저를 믿었으며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그들의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버릴 것"(요 11:48)이라고 염려하였던 바 그대로.. 바울은 복음이 "온 세상에 이르렀으며 모든 피조물에게 전파되었다'(골 1:6-23)고 말하고 있다.

(2) 이것은 (추후에도 그리스도의 재림때까지) 시험과 고통, 박해의 때에도 천국 복음이 전파되고 널리 퍼질 것이며, 큰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돌파하여 뚫고 나갈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비록 교회의 원수들이 "(적대감과 분노로 타올라)뜨겁게"되고 많은 친구들이 "(성도 상호간의 사랑이 식어져서)냉정해"진다고 할지라도 그것과 무관하게 복음은 전파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검과 화염으로 멸망하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악을 행하며 아첨에 의해 부패하게 될 때,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은 많은 사람들을 가르침으로써 더욱 큰 공적을 쌓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단 11:32, 33; 빌 1:12, 14 참조).

(3) 여기에서 주요하게 의도된 것처럼 보여지는 것은 세상 날수의 끝은 복음이 그 사역을 다 완수한 "때"가 될 것이며, 그 이전은 아니라는 것이다. 

복음은 너희가 죽을 때에도 여전히 전파되며 또한 그 전파사역은 수행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민족은 처음이든 나중이든 복음을 즐거워하든지 거절하든지 선택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에게 넘겨주게 될"때 "세상 끝이 온다." 

하나님의 비밀이 끝이 나고, 신비스러운 몸이 완성되고, 민족들이 복음에 의해 개종되거나 구원될 때 또는 깨닫거나 잠잠하게 될 때에야 그가 전에 말씀하신(6, 7절) "끝이 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즉 그러한 중개적인 계획이 완성되기 전은 아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이 부르심을 받게되기까지는 계속적으로 존속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함께 모아질 때 즉각적으로 세상은 화염에 싸이게 될 것이다.

Ⅵ. 주님께서는 특별히 유대인들과 그들의 성읍, 성전, 국가에 임하고 있었던 파멸에 대하여 예언하고 계시다(15절 이하). 

여기에서 주님께서는 성전 파멸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관하여 더욱 자세하게 말하고 계시다. 

또한 그가 여기에서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그러한 위대한 사건들과 연관하여 그들의 행동과 위로에 큰 도움을 줄 수가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재난의 몇 가지 단계들을 묘사하고 계시는데, 이것은 흔히 전쟁시에 일어나는 것과 비슷하다.

1. 로마인들은 "멸망의 가증한 것을 거룩한 곳에 두었다."(15절).

(1) 어떤 사람은 이 구절에 나오는 멸망의 가증한 것을 로마 총독이 성전에 세운 어떤 형상이나 동상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형상을 성전에 세워진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몹시 꺼려지는 것, 신성모독이었으며, 그들로 하여금 모반하도록 하는 동기를 제공했고, 결국 모반 결과로 그들은 멸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안디오커스가 하나님의 제단에 세우도록 명하였던 쥬피터 올림푸스의 형상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고 불리웠는데, 역사가들도 여기에 사용된 것과 똑 같은 단어를 사용하였다(마카비 일서 1:54). 

바벨론 포로 이후에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거룩한 곳에 있는 동상보다 더 혐오감을 일으키는 일은 없었다. 

이것은 칼리굴라가 자신의 형상을 거기에 세우려고 했을 때 유대인들이 행했던 거센 반발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칼리굴라의 의도를 저지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치명적인 결과를 야기시켰으며 추후 페트로니우스의 명령으로 그 일은 조정되었다. 

그러나 헤롯은 성전 문에 독수리를 세워 놓았으며,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티토의 동상이 성전에 세워졌다고 한다.

(2)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누가복음 21장 20절에 있는 병행 구절, 즉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에 의해 해석하려고 하였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이요, 가나안은 거룩한 땅이며, 예루살렘 주위에 자리잡고 있는 모리아 산은 성전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그들은 예루살렘성을 특별히 거룩한 땅이라고 생각하였다. 

예루살렘 주위에 있는 성읍들에 로마 군대는 진을 쳤으며, 예루살렘사람들은 그것이 이른 바 바로 멸망케 할 가증한 것이라 여겼다. 원수의 땅은 "너의 미워하는 땅"(사 7:16)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와 같이 적군은 연약하면서도 사악한 백성들에게 "가증한 것"이라고 불리워 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것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그는 구약의 어떤 선지자들보다 메시야와 그의 왕국에 대해 더욱 명백하게 말하였다. 그는 멸망케 하는 가증한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안디오커스에 의해 세워질 것이었다(단 11:31; 12:11).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구절을 천사가 다니엘에게 전한 메시지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단 9:27), 그것은 앞의 가증한 것이 세워지고 난 오랜 후에, 70주야의 끝에 와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가증한 것이 널리 퍼지게 되기 때문에" 또는 난외주의 읽기와 같이 "가증스러운 군대로써"(여기에 있는 예언과 같다) "그는 그것들을 황폐케 할 것이다."

우상숭배자들의 군대가 "가증한 군대들"이라고 불리워질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소동과 폭동 그리고 성전과 성읍에서의 가증스러운 내분과 난동이 최소한 황폐케 하는 가증스러운 것의 한 부분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성읍과 성전의 멸망이 구약에 어떻게 언급되어져 있는가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이러한 다니엘의 예언을 언급하고 계시다. 

구약은 그의 예언을 확증하며 그것에 대한 증오를 제거할 것이다. 그들은 이로부터 그 시간을 추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즉 왕이신 메시야가 잘리고 난 후 곧 그러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멸망을 초래케 한 죄 ─ 즉 메시야와 그 말씀의 확실성을 거절해 버린 것 ─ 는 "이미 결정된 멸망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규칙으로써 그 율법을 확고히 한 것처럼 그는 자신의 예언으로써 구약의 예언들을 확고히 하셨으며 또한 구약과 신약을 동시에 비교하는 것은 매우 유익할 것이다.

여기에 언급되어 있는 것은 대개 어둡고 불분명한 예언이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비망록을 삽입하고 계신다. 

즉 "읽는 자는 깨달을 진저. 즉 다니엘의 예언을 읽는 자는 그것이 머지 않아 예루살렘의 멸망 시에 성취될 것임을 깨닫도록 하여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 성경을 읽는 자들은 성경을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읽는 것은 무익한 것이 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신이 완전하게 깨닫지 못하는 것을 참되게 결코 사용할 수는 없다. 

요한복음 5장 39절과 사도행전 8장 30절을 보라. 이 예언을 다니엘에게 전달하였던 천사는 "그에게 깨달아 알 것"(단 9:25)을 고취시키고 있다. 

우리는 비록 애매 모호한 예언들이라 할지라도 깨닫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위대한 신약의 예언은 "비밀(secret)"이 아닌, "계시"라고 불리우고 있다.((주님말씀의 베일을 벗기다..바로 이것이 계시의 원뜻이다!!)) 이제 "계시된 것들은 

우리들에게 속한 것이며," 따라서 겸손하고 부지런하게 탐구되어야만 한다. 그러한 일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성경에 대하여 "깨달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성경으로 말미암아 "그 때를 깨닫도록"하라(대상 1:32). 살피고 주목하도록 하라(어떤 사람은 그렇게 읽고 있다.) 미혹된 백성들이 품고 있는 헛된 소망에도 불구하고 가증스러운 군대들을 황폐케 될 것임을 확신하도록 하라.

2. 생각 있는 사람이 취하게 될 생존의 수단.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그 때에는 도망가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1) 우리는 이 말씀을 파멸 그 자체에 대한 예언으로 간주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저항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완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라 해도 그것에 정면으로 도전하거나 다투는 것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살아남으려면 오히려 그들은 마지막 수단인 도망치는 방법을 써야만 한다. 이것은 예례미야가 공연한 헛수고라고 강조하며 말하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데, 가지 예루살렘이 갈대아인들에게 포위되었을 때 저항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며 차라리 굴복하고 항복하는 것이 지혜스러운 일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그것을 버티는 것이 얼마나 무익한 일인가를 보여 주기 위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도록 명하고 있다.

(2) 우리는 이 말씀을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지시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것은 자신들의 부귀를 정욕적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자신들의 성읍과 나라의 보존을 위해 싸우고 항쟁하는 자들과 더불어 "동맹"할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로마인들과 대항하여 싸우는 유대인들 가운데는 이러한 다툼을 벌인 일이 있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멸망하기 몇 해 전에 사도는 이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약 4:1-3). 롯이 소돔을 버리고 이스라엘이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을 포기하였듯이, 진행된 섭리에 순응하며 될 수 있는 데로 빨리 성읍을 포기하여야만 한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① 그들이 어디로 도망가야만 할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 즉 유대를 벗어나서 산으로 도망갈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산들이 아니라, 그 나라의 먼 곳에 있는 산들을 말한다. 이러한 곳은 그들의 힘에 의한 것보다는 은밀한 곳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피난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산에 흩어져 있다"(대하 18:16)고 말해진다. 선동적인 유대인들이나 격분에 찬 로마인들 가운데 있는 것보다는 사자굴이나 표범들이 있는 산에 거하는 편이 오히려 안전할 것이다(히 11:38 참조).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임박한 위험이나 멸망의 때에 선하고 정직한 수단들을 사용하여 우리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만일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열어 주신다면 우리는 마땅히 도망가야만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그를 시험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이 알려져 있으며 그의 이름이 위대한 곳인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가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의무의 길에서가 아닌, 위험의 길에서 벗어나가는 동안에 우리는 "쫓겨난 자를 위해 거처"를 마련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사 16:4, 5). 

우리가 가정에 있을 때 안전하지 못하고 멀리 떠나야만 안전하게 될 공공적인 재난 시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로 하여금 도망가도록 하실 것이다. 도망가는 자는 다시 싸울 수가 있다!!!.

② 그들은 어떻게 서둘러야만 하는가?(17, 18절) 

생명에는 즉각적인 위험이 있게 될 것이며, 천벌은 갑자기 파괴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지붕 위에 있는"자는 경고가 있을 때 자신의 휴대품을 찾기 위하여 "집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도망가기 위하여 가장 가까운 길로 가라. 

이와 마찬가지로 "밭에 있게" 될 자는 즉각적으로 도망가며 또한 자신의 옷이나 집에 있는 재물을 가지려고 돌아가지 않는 것이 최상의 방법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자신의 물건을 싸는 데 걸리는 시간이 그의 도망가는 것을 지연시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죽음이 문 앞에 있을 때에 지체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네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은 롯에게 주어진 명령이었다. 비참한 죄악의 상태와 그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될 멸망과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에게로 도망갈 필요성에 대하여 깨닫는 자는 이러한 깨달음이 있고 난 후 그들이 지체함으로 영원히 멸망당하지 않도록 유의해야만 한다.

둘째, 자신의 옷을 가지거나 그밖에 소용되는 물건들을 가져가려고 하는 것은 그에게 짐만 될 뿐이며 그가 도망가는 데 방해가 될 것이다. 

수리아인들은 도망갈 때 자신들의 겉옷들을 다 던져버렸다(왕하 7:15). 

이러한 때에 우리는 아무 것도 구할 수 없지만 "우리의 생명이 노략물처럼 주어진"(렘 45:4, 5)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려야만 한다. "왜냐하면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기 때문이다." 

가장 적게 가진 자는 가장 안전하게 도망갈 수 있다 

Cantabit vacuus coram latrone viator ─ 즉 돈이 없는 여행자는 강도에게 빼앗길 것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옷들과 집들을 잊어버릴 것을 말씀하신 대상은 그의 제자들이었다. 그 제자들은 하늘에 거주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어떤 원수도 탈취할 수 없는 보물과 영구적인 옷을 거기에 가지고 있었다. 

Omnia meamecum porto ─ 즉 나에게 있는 것이 내 재산의 전부이다라고 철학자 비아스(Bias)는 맨 손으로 도망하면서 말하였다. 

마음속에 은혜를 가진 자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모든 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직접적으로 말씀하셨던 열두 제자들 중에서 요한 이외는 그 누구도 살아서 이 비참한 날을 목격한 사람이 없다. 

그들은 산 속에 숨을 필요가 없었지만(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하늘에 숨기셨다), 신앙을 고백하는 그들의 계승자들에게 이 명령을 남겼으며 또한 그것은 그들에게 유익이 되었다. 이는 예루살렘과 유대에 있는 기독자들이 그들에게 다가오는 멸망을 보았을 때 그들은 모두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안전한 "펠라"라는 성읍에 모두 피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이 파괴될 때 죽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기독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유세비우스의 역사책 3권 3장을 보라. 이와 같이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한다"(잠 22:3; 히 11:7). 이 경고는 사사로이 지켜지지 않았다.

마태복음은 예루살렘이 멸망되기 오래 전에 발행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이로 말미암아 유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이 이것을 믿지 않음으로 멸망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장차 오는 진노에 관하여 하셨던 경고를 믿지 않음으로써 영원히 멸망할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

③ 그 때에 이러한 재난은 누구에게 어려운 것이 될 수 있는가?(19절)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이제 막 죽게 되실 상황에서 말씀하신 사건과 동일하다. 즉 "사람들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눅 23:29). 

아이가 없기 때문에 그 아이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되는 자는 행복하다. 그러나 그때에 아이를 밴 자나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자들은 불행하다. 그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욱 비참한 상황에 있게 될 것이다.

첫째, 그들에게 기근은 더욱 쓰라린 것이 될 것이다. 

그때에 그들은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은 것"을 보게 될 것이며 또한 그들 자신들은 재난 때문에 바다의 괴물같이 더욱 잔인하게 될 것이다(애 4:3, 4).

둘째, 그들에게 칼은 가장 무서운 것이 될 것이다. 

그 때에 악한 자의 손에 있는 칼은 성난 맹수보다 더 무서운 것이 될 것이다. 아이를 밴 여자가 성난 정복자에 의해 베임을 당하게 되는 것은 실로 비참한 조산술이 아닐 수 없다(왕하 15:16; 호 13:16; 암 1:13). 또는 "살인자에게 어린아이가 인도되어 오는 것"(호 9:13)도 소름끼치는 일이다.

셋째, 그들에겐 역시 도망가는 것도 매우 괴로운 일이 될 것이다. 

아이를 가진 여자는 서둘러 가거나 앞장서서 갈 수 없다. 젖먹이는 결코 버릴 수 없다. 만일 버린다고 할지라도 "여자가 그 아이에 대한 것을 잊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녀가 아이를 가지고 도망한다면 도망치는 어머니의 걸음은 지체하게 되어 생명이 위태롭게 되며, 간호원이 데리고 도망가다가 떨어져 절름발이가 된 무비보셋의 운명과 같이 위험하게 될 것이다.(삼하 4:4).

④ 이 때에 그들은 어떤 기도를 드려야만 하는가?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20절).

일반적으로 사회적인 고통과 재난의 때에 많이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어울린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우리가 각처에서 고통을 받게 될 때에 때를 맞추어 특별한 방법으로 기도하는 것은 모든 고통에 대하여 위안을 가져다준다. 

너희가 도망가는 것 이외에는 별도리가 없다. 하나님의 섭리는 진행되며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의 진노를 결코 돌이키지 않으실 것이다. 비록 "노아나 다니엘이 그 앞에 서서" 간구한다고 할지라도 결코 그의 진노를 거두시지 않을 것이다. 

"그것으로 족하게 여기고, 그 일에 대하여 더 이상 말하지 말라." 

그러나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도록 노력하라. 또한 너희가 도망가도록 강요당하지 않게 되도록 믿음으로 기도할 수가 없을 때에는 그 환경이 은혜스럽게 명령되도록 기도하라. 즉 그 심판의 대접이 너희에게서 지나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심판의 절정이 너희에게 미치지 못하도록 기도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께서는 사건들의 형세를 처리하시며, 이것은 종종 여러 방법으로 큰 변혁을 일으킨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눈은 그러한 일들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이일 때문에 기도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가 그들에게 그러한 것을 주시려는 의도가 계심을 암시하고 있다. 

일반적인 재난 가운데서 우리는 상황에 따라 베푸시는 긍휼함을 간과해서는 안 되며, 어떤 점에서 그것이 악화되었는가를 알고 이를 인정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과 그들의 친구들을 위하여, 그들이 어쩔 수 없이 도망가게 될 때에 그 일이 가장 편리한 때에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을 명령하고 계신다. 

고통이 먼 거리에서 예상될 때 미리 기도의 재료를 쌓아 두는 것이 좋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들은,

첫째, "그들의 도망하는 일"이,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해야만 한다. 

겨울에는 낮이 짧고 날씨가 추우며, 길이 지저분하기 때문에 특히 전 가족이 여행하기에는 너무도 불편하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겨울 전에 속히 올 것을 재촉하고 있다(딤후 4:21).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몸의 안락은 "주요하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못되지만, "적당하게" 고려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제 무엇을 보내시든지 간에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육체적인 편의를 위하여 기도해야만 하며 또한 그렇게 하도록 명령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몸을 위하시기" 때문이다.

둘째, 그 일이 "안식일"에 일어나게 되지 않도록 기도해야만 한다. 

즉 유대인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안식일에 여행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날에 밀 이삭을 뽑아 먹는 것에 화를 냈던 그들에게 걸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일이 기독교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날에 여행하도록 강요를 받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비참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일의 안식일(일요일)이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된 후에 교회에서 준수되어야만 한다는 그리스도의 의도를 암시하고 있다. 

우리는 유대교회의 어떤 규례에 대해서도 읽어볼 수 없다. 그것들은 순전히 의식적인 것으로써 그리스도께서도 이에 대하여 하등의 관심도 가지지 아니하셨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폐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종종 안식일에 대하여 관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이와 같이 안식일은 일반적으로 여행과 세상의 수고로부터 휴식하는 날로 준수되는 날임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제 4 계명에 대한 주님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안식일에 우리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원수들에게서 도망하는 것과 같이 반드시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을 것이다. "너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간에 안식일에는 도망가지 말도록 하라. 비록 그로 말미암아 죽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대로 머물러 있어라." 

가장 큰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가장 적은 죄라도 범해서는 안 된다. 

이 사실은 선한 사람이 안식일에 하나님께 엄숙하게 봉사하거나 예배하는 것 때문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못하게 된다는 것은 좋지 못하고 불유쾌한 일임을 나타낸다.

우리는 조용하고 안정된 안식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만 하며, 안식일에 행하는 안식일의 일 이외에는 다른 일을 하지 않게 되도록 기도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어떠한 혼란이 없이 주님을 섬길 수 있게 되도록 기도해야만 한다. 

만일 그들이 도망하여 피신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임무를 떠맡게 해 줄 또 다른 안식일의 유익과 위로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임으로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겨울에 도망하는 것은 몸에 별로 유쾌한 일이 되지 못한다. 더구나 안식일에 도망가는 것은 영혼에 대해 유쾌한 일이 되지 못한다. 그것이 이전 안식일을 회상하게 될 때는 더욱 그러하다(시 42:4 참조).

3. 즉각적으로 일어나게 될 큰 고통(21절).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불법의 量(양)이 가득 찼을 때, 하나님의 종들이 갇히고 투옥될 때 그 환난은 임할 것이다. 

롯이 소알로 들어가고 즉각적으로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되기 전에는 어떤 일도 소돔에 일어나지 않았다.

 "그 때에 큰 환난이 있을 것이다." 

성읍에 온역과 기근이 만연해지고 또한 (그보다 더욱 나쁜 것은) 종파와 분파가 생기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자신의 동료들에게 대적하여 검을 들게 될 때 그것이 실로 큰 환난이 아닐 수 없다. 그때에 거기에서는 가련한 여자의 손들이 자신들의 아이들의 가죽을 벗기는 일이 있었다. 성 밖에서는 로마 군인들이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반역한 유대인들에게 특별히 격분하여 그들을 삼켜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쟁은 다윗이 기피할 수 있었던, 세 가지 비참한 심판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전쟁에 의해 멸망을 당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여기에다 기근과 온역이 겁쳐 있었다. 요세푸스가 쓴 "유대인의 전쟁사"에는 어떤 역사책에 있는 것보다도 더 비극적인 구절들이 담겨져 있다.

(1) 그러한 황폐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써 "창세로부터 지금까지도 없는 것이었다." 

많은 성읍들과 나라들이 황폐하였었지만, 이와 같은 황폐는 결코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철부지와 같은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신의 최악의 것을 향하셨다고 생각하지 말게 하라. 그는 보다 큰 가증한 것들을 보시게 될 때 풀무불을 일곱 번이나 아니 그 이상 일곱 번이나 뜨겁게 하실 수 있으며 또 하실 것이다. 

예루살렘을 멸망시킬 때 로마인들은 다른 나라를 쉽게 정복하였던 그들의 조상들의 명예와 위신을 떨어뜨렸다. 또한 유대인들의 고집과 완고함이 환란을 더욱 증가시키는 데 한 몫을 하였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한 예루살렘의 죄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죄였으므로 예루살렘의 멸망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멸망이었음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 고백과 특권에 있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만일 그들이 그러한 특권을 남용하고 거짓된 신앙 고백을 한다면 그의 심판은 더욱 크고 무거운 것이 될 것이다(암 3:2).

(2) 그러한 황폐는 오래 계속이 된다면 참기 어려운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22절). 

그러한 많은 비참한 상태와 이러한 부수적인 일들에서 사망은 의기양양하게 말을 타고 다니기 때문에 도망갈 수가 없을 것이며 대체로 모든 사람이 잘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하나의 칼을 피한 자는 다른 칼에 의해 쓰러지게 될 것이다(사 24:17, 18). 요세푸스는 그 당시에 몇 장소에서 살해당한 사람이 약 200만 명에 이른다고 계산하였다.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 

그는 "모든 영혼이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육체가 멸망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날에 영혼이 구원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시적인 삶이 그렇게 덧없이 희생될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그 삶이 잠시만 더 지속된다면 완전히 끝장이 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러한 두려움 가운데서도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즉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보다 더 감해지는 것이 아니라(왜냐하면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단 9:27), 

만일 그가 그들이 지은 죄에 따라 그들을 처리하신다면 그가 작정하시려고 하신 것보다 더 감해지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마귀를 자신의 목적에 쓰려고 이용하시는 하나님께서 마귀들의 분노를 제한하시지 않았다면 모든 사람을 잘라 버리려고 한 그들의 계획보다도 더 감해지게 될 것이다. 

인간적인 개연성(Probability)에 의해 판단한 자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감해지게 될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① 일반적인 재난의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호의를 선택한 남은 자들에게 나타내신다. 

그 때에 그는 자신의 보석들을 모으실 것이며 또한 잡동사니들과 강포한 자들을 내버리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특별한 보화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재난의 날들을 감소시키심으로써 택함 받은 자들에게 종종 긍휼을 베푸신다. 하기에. 우리의 고통이 오래 계속된다고 불평하기보다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계기로 삼고 회개하며 결단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일반적 재난들이 언제까지나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데 대해 감사하게 될 것이다. 

비록 그 재난들이 우리들에게 불편하고 불유쾌한 것일지라도 우리는 오히려 그것이 최악의 것이 아님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말해야만 한다. 

"우리가 망하지 않는 것은 주님의 긍휼 때문이다.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끝없는 불행인 지옥이 아님을 감사하노라"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그로 인한 고통을 예외없이 함께 당하고 있었던 교회였다. 

하나님께서 그 날들을 감하신 것은 (실지로는) 택함 받은 자를 위함인데, 이는 주님께서 택함 받은 자들과 (원래 뜻하신 바대로) 더 오래 또는 영원히 싸우려 하신다면 그들중 어느누구고 제 아무리 강인한 믿음의 소유자라도 자기 마음이나 손이 불법을 저지를 가능성이 그만큼 더 커지기 때문에 자기 영혼의 실족 가능성이 그만큼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자애로운 아버지요 온유와 친절, 사랑의 연인이신 그리스도는 그것을 차마 볼 수 없으시다. 

또한 이제 주님께서는 다시금 반복하여 경고를 하고 계시는데, 이것은 그들이 거짓 그리스도나 거짓 선지자들(23절 이하)에 의해 미혹 당하지 않도록 주의시키기 위하여 말씀하셨다. 

거짓 선지자들은 예레미야 당시에 있던 거짓 선지자들(렘 14:13; 23:16, 17; 27:16; 28:2)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백성들을 구원하려 말함이라 약속하였지만 실상은 그들의 속내는 사익을 위해 그들을 미혹하려고 하였을 뿐이었다. 

큰 고통의 때는 큰 시험의 때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 때에 이중으로 무장을 해야만 한다. 

만일 그들이 우리들을 로마인들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그들의 말에 혹하여 그 말을 결코 주목하지 말라. 그것은 단지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러한 공염불로 오는 구원이란 기대해서도 안되는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구원자도 결코 기대해서는 안된다.

Ⅶ. 그리스도는 이러한 전대미문의 큰 사건들이 일어날 즈음에 복음이 세상에 순식간에 전파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27, 28절).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이 말씀은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에 있다. 혹 저기 있다"고 말하는 그러한 미혹자들의 독을 제거하는 해독제로써 여기에 언급되어 있다.(눅 17:23, 24 비교). 

그들이 하는 말에 경청하지 말라. 이는 인자의 오심이 번개와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1. 이 말씀은 원래 주님께서 이 세상에 그의 영적인 나라를 세우시러 오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복음이 그 빛과 능력으로 임하였던 그 곳에 인자도 임하셨는데, 이는 "광야"나 "골방"으로 기어들어 왔던(딤후 3:6) 미혹자들이나 거짓 그리스도의 방법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한편 명심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두러움의 영"으로써 임하시지 않고, "능력과 사랑과 온전한 마음의 영으로써" 임하신다는 것이다. 복음은 두 가지 점에서 두드러지게 될 것이다.

(1) 복음의 빠른 전파. 

그것은 번개와 같이 퍼질 것이며, 이와 같이 복음도 전파되고 보급될 것이다. 복음은 빛(요 3:19)이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것같이 돌연히 번쩍이고 사라져 버리는 번개와 같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태양빛이요, 대낮의 빛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은 다음의 4가지 점에서 번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① 복음은 번개와 같이 하늘로부터 오는 빛이다. 

그들로 하여금 가서 "여기에 우리가 있다"(욥 38:35)고 말할 수 있도록 빛을 보내시며 그들을 소집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사람이 아니다. 그것을 지시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욥 37:3). 

사람에게 있어서 그것은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이 발휘되는 자연의 이적 중의 하나이며 또한 그의 오묘한 초월적인 솜씨가 나타내어지는 자연의 신비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것은 위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의 번개가 세계를 비추니"(시 97:4).

② 복음은 번개와 같이 볼 수 있고 눈에 띄는 것이다. 

미혹하는 자들은 빛을 피하여 광야나 골방에서 사탄의 은밀한 계획을 수행하였다.

이 자들은 lucifugae(빛을 피하는 자)라고 불리워졌다. 그러나, 진리는 "해를 입었을"지라도 "광야에 있는 여자"(계 12:1, 6)같이 아무리 구석으로 들어가도록 강요를 받는다 할지라도 결코 후미진 구석을 찾지는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복음을 만인이 보는 데서 공개적으로 전파하셨으며(요 18:2) 또한 그의 제자들도 "구석"이 아닌(행 26:26), "지붕 위"에서 전파하였다(마 10:27). 시편 68편 2절을 보라.

③ 복음은 번개와 같이 갑자기 전파되었고 또한 세상에 놀라움을 가져다주었다. 

유대인들은 참으로 그것에 대한 예언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방인들에게 그것은 전혀 생소한 것이었으며 또한 그들에게 이상한 힘으로써 또한 그들이 전에 알지 못하였던 방식으로 임하였다. 복음은 "흑암중에 나타나 그 권세를 깨뜨리고 흑암을 몰아낸 빛"(마 4:16; 고후 4:6)이었다. 우리는 군대들이 번개에 의하여 파괴된 사실에 대해 읽어 볼 수 있다(삼하 22:15; 시 144:6). 흑암의 권세는 복음의 빛에 의하여 흩어지고 소멸되었다.

④ 복음은 멀리 그리고 넓게 퍼지며, 동편에서부터 올 것이라고 가정하면(그리스도는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오신다고 기록 되어있다. 계 7:2; 사 41:2) 서편에서 비추는 번개와 같이 빠르며 불가항력적이다. 

기독교가 여러 언어들을 가진 먼 거리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세상적인 이익이 전혀 없는 보잘 것 없는 방법으로써 그렇게 많은 반대를 받으면서도 단 시일내에 전파된 것은 그것들을 확증하기 위해 행하여졌던 가장 큰 이적 중의 하나였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백마를 타셨는데, 이는 힘과 속력을 의미하며 또한 "이기시고 또 이기시려고 다니시는 것"(계 6:2)을 의미한다. 복음의 빛은 해와 같이 떠서 해와 같이 진다. 햇빛은 땅의 끝까지 미쳤다(롬 10:18; 시 19:3, 4 비교).

복음이 맞서 정정당당하게 대항하여 싸우기는 했지만, 그 복음은 미혹하는 자들처럼 광야나 골방에 숨겨지지는 아니하였다. 가말리엘의 생각대로 이러한 것으로써 "복음은 무너뜨릴 수 없는, 하나님께로서 난 것"(행 5:38, 39)임을 스스로 증명하였던 것이다. 

허버트(Herber)씨가 그의 "전투하는 교회"라는 저서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그리스도께서 "서편까지 번쩍인다"고 말씀하신 것은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서쪽에 놓여 있는 그러한 나라들로 가장 효과적으로 퍼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빨리 복음의 빛은 이 영국 섬에까지 비추었는가 !  

2세기의 기독교 저술가였던 터틀리안은 그 사실에 주목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즉 Britannorum inaccessa romanls loca, Christo tamen subdita─즉 로마인들에게는 접근하기 어려웠던 영국인의 요새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히 점령당하였다. 이 일을 하신 것은 실로 주님이셨다.

(2) 복음에 관하여 괄목할 만한 또 다른 일은 그것이 전파된 그러한 지역들마다에서 신기하리 만치 승승장구, 성공한 사실이었다. 

복음은 외적으로 충동질하여 무리들을 모으지 않고, 이러한 자연적인 본능과 성향에 의해 무리들을 모았던 것이다. 

이는 육식을 하는 새에게 먹이를 가져다주는 것과 같다. 이는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이기"(28절)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곳에는 영혼들이 그에게로 모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땅에서부터 들어올림을 받으신 것," 즉 그리스도의 전파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어떤 사람은 이러한 것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떠날 것이라고 생각한다)은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라"(창 49:10)는 야곱의 예언대로 "모든 사람을 그에게로 이끌 것"(요 12:32)이었기 때문이다. 이사야 60장 8절을 보라. 독수리는 주검이 있는 곳에 모일 것이다. 왜냐하면 주검은 독수리에게 음식과 진수성찬이 되기 때문이다. 

"살륙 당한 자 있는 곳에는 독수리도 거기 있느니라"(욥 39:30) 독수리는 먹이를 찾는 데 신기하리 만치 명석하고 신속한 육감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또한 독수리는 재빠르게 먹이에로 날아간다(욥 9:26).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영들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는 것을 먹기 위하여 그에게로 효과적으로 매료되어 이끌리게 될 것이다. 

독수리는 먹이 있는 데로 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영혼은 영생의 말씀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독수리들은 그 먹이들 중에서 자신들에게 적합한 것과 적합치 못한 것을 구별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감각들을 지니고 있는 자들은 선한 목자들의 음성과 또한 도적과 강도의 목소리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성도들은 참된 기독자가 있는 곳에 있을 것이며, 거짓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는 있지 아니 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그와의 교제를 따라 모든 은혜스러운 영혼에 행해진 욕망에 적용시킬 수 있다. 

그리스도를 환영하며 그리스도의 규칙을 중시하는 곳을 그의 종들은 선택하게 될 것이다. 은혜의 생생한 원리는 성도들을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살도록 그에게로 이끄는 모든 성도들 안에 있는 일종의 자연적인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2. 어떤 사람은 인자의 오심에 관한 이 구절들은 "예루살렘을 파괴하기 위하여 오시는"(말 3:1, 2, 5)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 건에서 신적인 능력과 공의가 특별히 많이 발휘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그리스도의 오심"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1)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복음은 뒤따라 올 벼락을 경고하며 그 자체가 놀라게 하는 섬광과 같이, 예기치 못한 일이 될 것이다. 

미혹자들은 말하기를, 우리를 구원해 주실 "그리스도를 보라 여기에 계시다"라고 한다. 또는 저기에 자신들이 상상해낸 피조물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알기도 전에 어린양 즉 참 그리스도와 진노가 그들을 사로잡을 것이며 또한 그들은 피하지 못할 것이다.

(2) 복음은 독수리가 주검 있는 곳에로 날아가는 것 같이 당연히 기대되어야만 한다. 

물론 심판의 날에 그것들을 서로 분리가 될 것이지만, 육식을 하고 있는 새가 허허 벌판에 드러나 있는 주검에게로 오는 것처럼 정녕 황폐는 확실하게 임할 것이다.

① 유대인들은 매우 부패하고 타락하였으며, 또한 사악하고 비열하였으므로 그들은 주검(시체)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을 몹시 싫어하였다. 

또한 그들은 당파적이었고 선동적이었으며 여러 면에서 로마인들을 성나게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원한을 자초하였으며 또한 그들에게 먹이로 자청하였던 것이다.

② 로마인들은 독수리와 같았으며 또한 그들의 군대의 표식도 독수리였다. 

갈대아의 군대들은 "마치 식물을 움키려고 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았다"고 언급되고 있다(합 1:8). 신약의 바벨론의 멸망은 육식하는 새들로 하여금 살육당한 자에게로 와서 그것을 뜯어먹고 또한 진수성찬을 차리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계 19:17, 18). 소문난 행악자들이 그들의 눈을 "독수리 새끼에게" 쪼이도록 하였으며(잠 30:17), 유대인들은 쇠사슬에 매달리웠다(렘 7:33; 16:4).

③ 유대인들은 주검(시체)이 스스로 독수리로부터 안전히 지킬 수 없듯이 유대인들로부터 자신들을 안전히 보존할 수가 없었다.

④ 독수리가 먹이를 찾아내듯이 파멸은 유대인들이 어디에 있든지 그들을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백성들이 악을 행함으로써 자신들을 악취가 나고 역겨운 시체로 만들어 버릴 때 하나님께서 독수리들을 보내어 그들을 삼키고 파괴시킬 도리밖에 없다.

3. 이 사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그에게로 모으시는"(살후 2:1) 심판의 날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어떻게 그는 장차 오실 것인가? 

"번개와 같이 오신다." 

그가 "세상에 떠나 아버지에게로 가야 할" 때가 그 때에 임박해 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찾는 자들은 광야나 골방으로 가서는 안되며 또한 그리스도를 보여 주기 위하여 손가락을 가리키며 초청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청종해서도 안 된다. 

그들로 하여금 위를 바라보도록 하라. 왜냐하면 하늘은 그를 담고 있으며, 거기서부터 "우리의 구세주를 기다리기"(빌 3:20) 때문이다. 그는 번개와 같이 "구름 속에서 오실"것이며 또한 그들이 번개불을 향하여 얼굴을 돌리는 것이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모든 눈이 그를 보게 될 것이다"(계 1:7).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모든 세상에 나타나실 것이다. 그날의 빛과 열기에서 피하여 숨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2) 성도들은 어떻게 그에게로 모여질 것인가? 

독수리들이 본능적으로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민첩하게 시체 있는 데로 달려가듯이 성도들도 그에게로 이와 같이 달려갈 것이다. 

성도들은 그들이 영광을 붙잡게 될 때, 천사의 날개 위에서처럼, 독수리의 날개에 엎혀(출 19:4) 옮기우게 될 것이다. "그들은 독수리와 같이 날개치며 올라갈 것이며," 또한 독수리와 같이 그들의 청춘을 새롭게 할 것이다.

Ⅷ. 주님께서는 "때의 마지막"에 있을 그의 재림에 대하여 예언하고 계시다(29-31절). "해가 어두워질 것이며, 등등."

1.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이 예루살렘과 유대 나라의 파멸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해와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는 것은 그 나라의 영광의 쇠퇴, 그 이변 또한 그 황폐에 뒤따르는 일반적인 혼란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큰 살육과 파멸은 구약에서 이와 같이 설명되고 있다(사 13:10; 34:4; 겔 32:7; 욜 2:31 에 있는 것과 같이). 또한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은 성전과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성읍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들은 장차 모두 멸망될 것이다.

"인자의 징조"(30절)는 거기에 있는 주 예수님의 능력과 공의의 두드러진 출현을 의미하고 있는데, 그는 자신들의 피흘린 죄를 그 자신들과 또한 그들의 자손들에게 돌린 자들에게 그 피의 복수를 하실 것이다. "그의 택하신 자"를 모으는 것(31절)은 이 죄와 파멸로부터 남은 자를 구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이 구절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교회의 특별한 원수들의 특징은 그들을 완전히 정복하는 것에 대한 전형적인 예표이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 큰 심판날에 행해질 것은 비유적으로 그러한 파멸들에 대해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 언급들의 의도하는 바 중점에 주의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가 한 가지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는 동안, 반드시 필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 하는 것처럼 이러한 구절들에 긴장된 의미를 붙이는 일이다. 이 구절들은 그것에 대해 명백하게 말하고 있고 다른 성경 구절들과도 일치하고 있는데, 특히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세상 끝에 있을 그의 재림에 관한 질문에 답하고 있을 때 그러하였다. 이 점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서슴없이 말씀하셨다.

이에 대한 유일한 이의(장해물)는 "그의 그날 환난 후에 즉시" 있을 것이라고 말해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는,

(1) 다만 그러한 일들이 크고 확실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크고 확실한 일들이 가까이 임박한 것으로 말하는 것은 예언적인 문체에 흔히 있는 일이다. 

에녹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눈으로 보는 것같이, "보라 주께서 임하셨나니"(유 14)라고 말하였다.

(2) 하나님의 안목에는 "천년이 하루에 불과하다"(벧후 3:8). 

거기에서는 이와 흡사한 일들과 관련하여 이 말씀이 강조되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즉시"라고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날들의 환란에는 예루살렘의 파멸뿐만 아니라 교회가 통과해야 할 그 밖의 다른 모든 환란들도 포함되어 있다. 즉 국가들의 재난에 참예하는 것뿐만 아니라 특별히 그 자체에 속한 환란을 내포하고 있다. 

국가가 전쟁으로 말미암아 찢기게 되고, 교회가 분파나 미혹, 박해로 말미암아 찢기고 있는 동안 우리는 그러한 날들의 환란이 끝났다고 말할 수 없다. 교회의 정체성은 그리스도를 따라 영적 전쟁을 치르고 있는 군대이기에, 지상 교회의 온전한 상태는 늘 깨어 영적 긴장을 늦추지 않고 전투하는 것이며, 우리는 마땅히 그렇게 여겨야만 한다. 그러나 교회의 환란이 끝날 때에 그 전투 상태는 종결이 되며,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남은 부분이 채워질 때 종말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하여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예언되고 있다.

① 그 때에는 피조물들이 크고 놀랍게 변화될 것이며, 특히 "천체"가 그렇게 변화될 것이다(29절).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할 것이다." 

달은 되받아 비추기 때문에 그 본체인 해가 어둡게 된다면, 달도 물론 어두워지게 되고 말 것이다.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면," 별들은 빛을 잃고 사라져 버려 마치 떨어진 것 같이 될 것이다.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첫째, 만물들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큰 변화가 있게 될 것이다. 

하늘들이 넝마 조각처럼 내던져지지 않고 보다 나은 형태로 입혀지기 위해 "의복으로 바꾸어질 때" "만물의 회복이 있게 될 것이다(시 102:26). 하늘들은 "새 하늘"이 있도록 하기 위하여 "큰 소리로 떠나가게" 될 것이다(벧후 3:10-13).

둘째,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변화가 될 것이며, 따라서 모든 세계는 주시를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해와 달은 어두워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놀라운 변화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천체는 이 낮은 세상의 피조물들처럼 쉽게 변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늘의 날들과 또한 해와 달의 지속성은 계속적으로 존재하며 변화하지 않는 것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기 때문이다(시 89:29; 36:37). 그러나 그것들은 이와 같이 들리게 될 것이다.

셋째, 그것은 우주적인 변화가 될 것이다. 

만일 해가 어둡게 되고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게 된다면 지구(땅)는 지하 감옥이 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그 기초는 흔들리게 될 것이다. "백향목 나무가 흔들린다면 전나무도 흔들거리지 않을 수 없다." 

하늘의 별들이 떨어질 때 "영원한 산들이 녹아지고 영구한 언덕이 낮아진다" 해도 결코 놀라지 말라. 자연은 일반적인 충격과 진동을 계속할 것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주께서 만민을 판단하러 오실 때에 주 앞에서" 하늘과 땅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을 방해하지는 못할 것이다(시 96:11, 13). 그것들은 "환란 가운데서의 영광"과 같이 될 것이다.

넷째, "낮과 밤을 주관하도록" 만들어졌던 해와 달과 별들(이것이 첫 지배였다, 창 1:16-18)이 어두워진 것은 "모든 통치와 권위와 능력(그것은 가장 오래되고 유용한 것으로 보여지지만)에서 끌어내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나라가 하나님께 넘겨지며" 그가 "모든 것 중의 모든 것"(고전 15:24, 28)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해는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실 때 어두워졌는데, 이는 그때에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의 심판"(요 12:31), 즉 일반적인 심판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암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섯째, 그 때에 자신을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와 "그의 인격의 분명한 형상"으로 나타내 보이게 될 우리 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현현은 마치 촛불이 대낮의 햇빛에 어두워지는 것처럼 해와 달을 어둡게 할 것이다. 

그것들은 "더 큰 영광을 인하여"(고후 3:10) 영광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게 될 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할 것이다"(사 24:23).

여섯째, 해와 달이 그 때에 어두워지게 되는 것은 그것들에 대한 하등의 필요가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몫을 택한 죄인들에게 모든 위로는 영원히 거부될 것이다. 마치 그것들이 물방울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빛의 광선도 가지고 잇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그의 해를 땅위에 솟아오르게 하시지만, 그 때에는 Interdico tibi sole et luna─즉 내가 해와 달이 빛을 내는 것을 금하노라. 어두움이 그들의 몫이 되어야만 한다. 위에 있는 보화들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에게 이러한 즐거움과 위로의 빛은 해와 달빛의 대신으로 주어지게 될 것이며 또한 해와 달은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우리가 "빛의 근원이요 아버지이신" 분에게로 오게 될 때에 빛의 그릇(해와 달)들은 과연 필요하게 될 것인가?(사 60:19; 계 22:5 참조).

②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30절), 

이 구절에 뒤따라오는 것과 같이,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초림하셨을 때, 그는 상함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다(눅 2:34). 그러나 그의 재림시에는 찬미를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게 될 것이다. 

에스겔은 "표적을 위해 세움을 받은 사람의 아들(인자)"(겔 12:6)이었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들이 그가 오심을 일깨워 주는 선구자에 대한 예언이라고 한다. "그 앞에는 불이 삼키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 것이며"(시 50:3; 왕상 19:11, 12),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오며,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추었도다"(합 3:4). 이 인자의 표적이 깃발로써 표시된 십자가의 표적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옛날 어떤 고대인의 근거 없는 의견에 불과하다. 그 표적은 정녕 "그의 오심에 대한 약속이 어디에 있느뇨?"라고 말하면서 불신과 실망에 차 있게 될 자들에게 분명하게 확신을 주는 표적이 될 것이다.

③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30절).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라(계 1:7 참조). 

땅에 있는 모든 족속들 중의 어떤 사람은 통곡하게 될 것이다. 이는 택함 받은 남은 자들, 즉 모든 족속들 중의 한두 사람이 그들의 구원과 또한 구속자가 가까이 오심을 알고 즐거움으로 머리를 쳐들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오심에 대하여 두려워 떨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조만간에 모든 죄인들은 통곡하는 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회개한 죄인들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경건한 종류의 통곡을 할 것이다. 회개치 않은 죄인들은 그들이 찌른 자(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며," 그들이 지금은 웃고 있지만 앞으로 끝없는 공포와 실망 가운데서 무서운 종류의 통곡과 애곡을 하게 될 것이다.

④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큰 날의 심판은 인자에게 위임되었는데, 이는 그가 우리의 중보자가 되셔서 보상하시려고 하심이다(요 5:22, 27).

둘째, 인자는 그 때에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의 대부분의 현저한 교통은 구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것들은 상호 교류를 하고 있는, 말하자면 medium partici pationis ─ 즉 관계의 개체로써, 땅에서 하늘로 끌어 올려지며, 땅 위에서 증발하여 하늘로 올라간다. 그리스도께서는 구름을 타시고 하늘로 올라 가셨으며 또한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행 1:9, 11).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계 1:7). 

구름은 심판자의 병거(시 104:3)이며, 그의 옷(계 10:1)이며, 그의 궁창(시 18:11)이며, 그의 보좌(계 14:14)이다. 세상이 물로 멸망되었을 때 심판은 구름속에서 왔다. 왜냐하면 하늘의 창문이 열렸기 때문이다. 세상이 불로 멸망하게 될 때에도 이와 같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가진 구름을 타고 가셨다. 그리스도께서 심판 때에 타고 오실 구름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 구름은 위로와 공포를 가져 올 것이다.

셋째, 그는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그의 초림은 미약하고 초라한 것이었다(고후 13:4). 그러나 그의 재림은 그의 인격의 위엄과 그의 오심의 목적에 부합되는 능력과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넷째, 그가 오실 때는 육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자는 다른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심판자가 될 것이며, 죄인들은 이로 말미암아 더욱 혼동할 것이며, 발람이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이 있는 것"(민 24:17)이 아닌 것으로 보였듯이 주님을 바라보기는 하여도 그가 자신들의 주님이 아닌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가 아브라함을 일찍이 보았다"는 사실은 정죄 받은 죄인들의 고통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이 분이 바로 우리가 멸시하고 거절하고 배반한 그 사람인가? 그가 바로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사람인가? 우리의 구세주라고 하시던 분이 우리의 심판자가 되시며 영원히 우리의 원수가 되시는가?" 그 때에 "모든 민족들의 소원"은 그들의 두려움이 될 것이다.

⑤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31절),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천사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의 수행원(시종)이 될 것이다. 

그들은 "그의" 천사들이라고 불리우고 있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이심을 입증하며 또한 "천사들의 주님이 되심"을 나타낸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보살피는 책임을 맡게 될 것이다.

둘째, 이 수행원들은 심판 날에 법정의 관리자로 임명받게 될 것이다. 

그들은 지금 주님에 의해 파송된 "부리는 영들"(히 1:14)이다. 또한 이 때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셋째, 그들의 사역은 큰 나팔 소리로 예고될 것인데, 이는 잠자는 세상을 일깨우고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다(고전 15:52; 살전 4:16). 

시내산에서 율법을 수여하실 때 그 나팔소리는 매우 무서운 것이었다(출 19:13, 16). 하물며 큰 심판 날에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는 얼마나 무서운 것일 것인가 ! 율법에 의하면 나팔소리는 회중을 소집하거나(민 10:2), 하나님을 찬양하거나(시 81:3), 제사를 드리거나(민 10:10), 나팔절을 선포할 때 울려 퍼졌다(레 25:9). 일반적인 회합이 소집되며 하나님께 대한 칭송이 영광스럽게 행해지며, 죄인들이 신적인 공의의 제물로써 떨어지며, 성도들이 영원한 나팔절에 들어가게 될 마지막 날에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은 매우 적합한 일이 될 것이다.

⑥ "그들은 그 택하신 자들을 사방에서 모으리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모든 성도들은 함께 모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첫째, "선택받은 자"만이 모이게 될 것이다. 

즉 남은 자들만이 모이게 될 것인데, 그들은 단지 "부름 받기만"한 많은 사람들에 비하여 그 수효가 매우 적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은 자라는 사실은 그들의 영원한 행복의 근원이 된다. 영원한 사랑의 은사는 영원한 사람의 개념에 뒤따라온다. "주님께서는 자신에게 속한 자들을 알고 계신다."

둘째, 천사들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또한 성도의 친구로서 그들을 함께 장차 사람들을 함께 모으는 일을 맡게 될 것이다.

 "내 종들을 내게로 함께 모으라." 그들에게 "이 사람은 너희의 간구"(habetis fratres)라고 말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택함 받은 자는 그때에 "천사들과 동등할 것이기"(눅 20:36) 때문이다.

셋째, "그들은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모으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는 널리 흩어져 있으며(요 11:52), 각 처와 각 나라에 얼마씩 있다(계 7:9). 그러나 큰 수확(모으는 일)의 때가 이를 때 그들 중 한 사람도 결코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먼 거리에 있는 장소라도 예외 없이 미치게 될 것이다. Undique adcaelos tentundem est viae ─ 즉 하늘은 각처에서 동일하게 접근할 수 있다(마 8:11, 사 43:6; 49: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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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의 비유(마 24:32-51)
Ⅰ. 우리는 그것들을 기대해야만 한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32, 33절). 너희가 들은 바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배우라. 때의 징조들을 세심하게 살펴보아 깨달으며 또한 그것들을 말씀의 예언들과 비교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이에 마땅한 준비를 갖추고, 인자가 문 앞에 와 있음을 예견하도록 하라."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그것이 싹이 나서 꽃을 피우는 것이 여름이 왔다는 전조라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역주:단지 그 사실만을 가리킬 뿐이다). 왜냐하면 하늘에 있는 "황새"와 같이, 땅에 있는 나무도 "자신들의 정해진 시간을 알기" 때문이다. 즉, 아직 제 모습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제 2원인이 그 활동을 개시할 것을 [깨어 기도하며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자에게] 예고함으로써 예언대로 그 진행의 시작과 완성까지도 예측해 볼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언대로 성취하기 시작하실 때 그는 마침내 결말을 내시고야 말 것이다. 자연의 활동과 같이 섭리의 활동에는 어떤 연속성(series)이 있는 바, 때의 징조는 "천기"의 예측(마 16:3)과 비교되며 여기에서는 "地勢(지세)"와 비교되고 있다. 무화과나무가 싹이 돋을 때 우리는 여름이 오는 것을 예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즉각적으로 온 것이 아니고 멀리서 오는 것을 미루어 내다볼 수가 있다.
"가지가 연하여지면" 우리는 여름이 오기 전에 3월의 바람들과 4월의 소나기를 예상할 수가 있다. 어쨌든 우리는 여름이 오고 있구나 확신하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는 복음의 시대가 끝나갈 때 내가 너희에게 말한 바, 이러한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하여 싹이 돋고 꽃이 피는 바 마침내 완성의 날이 올 것임을 깨닫고 기대하도록 하라. 계시된 일들은 반드시 속히 일어나게 될 것이다(계 1:1). 그것들은 지정된 순서를 따라 반드시 일어나게 될 것이다.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는 여기에서, 그것은 일상에서 제자들의 마음이 쏠려있는 바로 그것이며 그들이 찾고 기다리는 것이라고는 말씀하시지는 않고 계시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임박하였느니라'라고 병행 구절(눅 21:31)에 표현되어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의의 나무가 싹이 트고 꽃이 필 때, 하나님의 백성이 주님말씀의 신실성을 약속따라 믿고 그 징조들을 살펴보아 대망하며 합당한 준비를 할 때 그것은 좋은 때에 대한 행복한 전조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것들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시작하시며 먼저 그들이 마음을 준비시킨 다음에 그는 그것을 계속적으로 진행시키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완전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의 날들(곧 일상적 사건들의 날들)에서 그것을(하나님나라 도래의 징조따른 성취되는 바 예언) 소생시키실 것이다."
이제, 여기에 예언된, 우리가 기다리는 사건들에 대해 하나씩 다루어 나가도록 하자.
1.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것들의 확실성을 우리에게 보장하고 계시다(35절).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천지는 이 날까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지속되었으나,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시 102:25, 26; 벧후 3:10).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의 말씀은 천지보다 더욱 확실하고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말씀하셨는가? 그는 그것을 하지 않으실 것인가?" 
우리는 하늘의 기둥이나 땅의 단단한 기초 위에 보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더욱 확고하게 세울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흔들리고 기우뚱거릴 때 또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될 때에도 그리스도의 말씀은 남게 될 것이며 또한 강력하고 힘있게 효력 있게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벧전 1:24, 25). 그리스도의 말씀이 없어지는 것보다는 "천지가 없어지는 것이 더 쉬우리라"(눅 16:17; 사 54:10 비교).
이러한 예언들의 성취가 더딘 것으로 여겨질지 모르며, 중간에 삽입된 사건들이 그것들과 일치하지 않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때문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땅에 떨어진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비록 우리가 말한 시간과 방법대로 성취도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최상의 때인 하나님의 때에, 또한 가장 최선의 방법인 하나님의 방법대로 그 말씀은 정녕코 성취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은 매우 정결하며 따라서 매우 확실하다.
2. 그는 여기에서 그것들의 때에 관하여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계시다(34, 36절). 
[*이 점에 대해서는 박학한 그로티우스가 잘 관찰하였는데, 즉 그에 따르면 “이 일"(34절)과 "그 날과 시간"(36절)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예언을 분명히 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1) "이 일들," 즉 여기에 예언된 [난리들과 미혹하는 일, 박해하는 일들에 관하여] 특히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하여.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34절). 
장차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될 것과 또한 유대교회가 끝장이 나게 되는 것을 살아서 보게 될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상하게 보일 것이기 때문에 그는 엄숙한 강조로써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이에 대한 나의 말, 즉 이러한 일들이 가까이 이르렀다는 사실을 [성령안에서 늘 깨어 기도함으로써 준비하는 자마다]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종종 그 멸망이 가까이 이르렀다는 것과 백성을 더욱 감동시키는 것과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준비하도록 재촉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의 시대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큰 시험과 고통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주의하라!! 자신이 기독자라 하더라도 믿는 마음이 둔하여지고 방심하며 졸고 있는 자들, 곧] 늙은 자들은 아낙 자손이 그들의 마지막 교전을 위해 예비 되어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한다.
(2) "아무도 모르는," 시간에 종말을 고하게 될 "그 날과 그때"에 관하여(36절).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도들의 편지로부터 "그리스도의 날이 가까이 이르렀다"(살후 2:2)는 사실을 추론하였던 "자들"처럼 이 두 가지를 혼동하지 않도록 유의하라(결코 그것은 그렇지 않다).
 "이 세대"와 그 밖의 다른 모든 세대들은 "그 날과 그때"가 오기 전에 다 "없어질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① 장차 오는 심판을 위해 정해진 확실한 날과 시간이 있다. 
그것이 "주님의 날"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변경할 수 없이 고정된 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어떤 심판도 "무기한으로"(sine die) 연기되지는 않는다.
② 그 날과 그때는 큰 비밀이다.
Prudens futuri temporis exitum Calginosa nocte premit Deus.
하늘은 현명하게 사람의 시야에서 가리워져 있네.
어두움은 앞날의 운명을 정하나니, 그들의 씨앗들은 밤의 심연 속에 뿌려 졌어라. ─ Horace ─
"아무도 그 때를 모른다." 
가장 지혜로운 자라도 그들의 명철로도 알지 못하며,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도 어떤 신적인 발견으로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날이 있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 있게 될 것인지에 대하여는 알지 못한다. 
아니, 천사들도 알지 못한다. 지식에 대한 그들의 재능이 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유익한 것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할지라도(그들은 빛의 근원에 살고 있다), 그들이 그 날의 제전에 초대받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그 날이 언제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듣지 못한다. "오직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 주 하나님에게 속한 은밀한 일들" 중의 하나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시간의 불확실성은 깨어 주시하는 자들에게 "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맛"이며, 그들로 하여금 더욱 깨어 있게 한다. 그러나 무관심한 자들에게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죽음의 냄새"이며 또한 그들로 하여금 더욱 무관심하게 만들어 버린다.
Ⅱ. 이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반드시] 일어날 것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방심과 호색에 대한 경고를 찾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비참한 날을 가져다 줄 것이다(37-41절). 
이 구절들에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처럼 졸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를 일깨우고 경성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심판의 개념을 우리들에게 제시되어 있다.
그것은 놀라운 날이 될 것이며 또한 [양과 염소를, 곡식과 가라지를,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를, 처녀로되 슬기로운자와 어리석은 자를] 구별-분리시키는 날이 될 것이다.
1. 그 날은 대홍수가 옛 세상에 대해 놀라움을 주었던 것처럼, 놀라운 날이 될 것이다(37-39절).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서술하려고 의도하시는 것은 인자가 임할 때에 펼쳐질 세상의 정세이다. 
그는 처음에 구원하러 오셨지만 다음에는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그는 "내가 심판하러 왔노라"(요 9:39)고 말씀하셨으며 또한 장차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말씀과 검의 심판이 모두 그에게 위임되어 있다.
여기에 있는 심판은 다음의 심판에 적용할 수 있다.
(1) "일시적인 심판"으로서, 특히 지금 유대 국가와 백성들에게 재촉하고 있었던 심판을 말한다. 
그들은 이에 대해 분명한 경고를 받았고 또한 그것의 전조였던 많은 이적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평안과 안전"(살전 5:3)을 부르짖으면서 무사안일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보라, [AD70년, 제1차 유대-로마전쟁때] 예루살렘은 티토 베스파시안(Titus Vespasian)에 의해 포위되었는데 그 때가 바로 유월절에 환락의 절정에 도달하였을 때였다. 
[단자손은 편안과 안일에 빠져 방심하여 방비가 전혀 없었던 라이스를 불시에 기습 점령하여 멸절시키고 자기들의 영토로 삼았던 바] 라이스 백성들과 같이 그들은, 멸망이 그들에게 임박하였을 때도 무관심하게 생활하였었다(삿 18:7, 27). 
구약과 신약에 있는 바벨론의 멸망은 그들이 [스스로 교만하여 방심하며 흥청망청 날마다 무이도식하며 환락을 즐기며 편안과 안일에 빠져들고]  "내가 영원히 주모가 되리라"(사 47:7-9; 계 18:7)고 말할 때 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앙은 순간적으로 하루만에 임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사람의 불신앙은 하나님의 진노(협박)를 결코 무익한 것으로 만들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2) "영원한 심판"으로. 큰 심판의 심판은 "영원한 심판"으로 불리우고 있다(히 6:2).
에녹으로부터 심판에 대해 유의하도록 경고를 받았지만, 막상 그 심판이 이를 때 많은 사람들에 의해 [주의 재림_심판의 경고는 진정] 무시당하게 될 것이다. 그 날이 가까이 이른 마지막 날에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서,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벧후 3:4; 눅 18:8)라고 말할 것이다.
 지금 있는 세상이 불로 멸망당할 때 그와 같은 일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물이 범람하여 옛 세상이 멸망하였을 때도 이와 같았기 때문이다(벧후 3:6, 7).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멸망이 임박하였을 때 옛 세상의 정세가 어떠하였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① 그들은 육욕적이었고, 세속적이었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을 갔다." 
그들은 살인하고 도적질하고 간음하고 모독하였다고 말해진다(이것들은 그들 중의 가장 사악한 자들의 소름끼치는 죄였다. "땅에는 강포가 가득하였다."). 
그들은 노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세상에 도취되어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관심하였으며, 이것이 그들을 멸망케 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비록 스스로는 기독자라 자평하더라도) 주님의 모든 말씀과 예언에 대해 [사랑하기에 천지에 충만하시며 내주하시는 성령과 하나되어 깨어 동행하며 여쭈며 교통하며 살기를 힘써야 하는 바를 실행하지 않고] 보편적으로 무시해 버리는 것은 이곳 저곳의 산재해 있는 무모한 반종교의 특별한 사례들보다 더 위험한 조짐이라는 사실이다. 
"먹고 마시는 것"은 사람의 목숨을 보존하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이다.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은 인류를 보존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Licitus perimus omnes ─ 즉 이러한 당연한 일들이 때때로 우리를 파멸에 이르도록까지 [허물됨, 곧 무분별하게, 합당한 정도를 넘어서서, 치우쳐] 부당하게 실행되는 것이다.
첫째, 그들은 이 일에 있어서 무분별하였으며, 육욕적인 즐거움과 세상의 유익을 좇아 지나치게 몰두하였다. 
그들은 전적으로 이것들에 흥미를 가졌으며,  그들은 먹고 마시고 취함을 탐닉하였었다. 그들은 마치 "먹고 마시는 것"(사 56:12) 이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는 것처럼 이러한 것들을 자신들의 필수적인 요소로 간주하였다.
둘째, 그들은 이 일에 무분별하였다. 그들은 분명히 경고를 받았던 그 멸망이 문 앞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육신을 즐기기에 오로지 몰두하였다. 
그들은 회개하고 기도해야만 할 때, 먹고 마셨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 "통곡하고 애곡할 것"을 촉구하였지만, 그들은 "쾌락"을 즐겼다.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으며, 후에 이스라엘도 이와 같은 죄를 범하였다(사 22:12, 14). 
특히 그것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던 것은 그들이 일깨움을 받았던 그러한 경고를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내일 죽을 것이니 먹고 마시자. 그것이 짧은 목숨이 될 것이니 더욱 즐기도록 하자." 
사도 야고보는 이것이 예루살렘 멸망 전에 부요한 유대인들의 일상적인 생활로 언급하고 있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해야 할 때 그들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그들의 마음을 살지게 하였다'(약 5:1, 5).
② 그들은 안심하였으며, 무관심하였다. 
"그들은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다"(39줄어듬). 
"깨닫지 못하였다." 참으로 그들은 알지를 못하였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하여 그것에 대해 분명히 경고하지 않았던가?(벧전 3:19, 20)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다. 즉, 믿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알 수 있었지만 알려고 하지 않았다. 
믿지 않았기에 알지 못하고  따라서 참되게 깨닫지 못하기에 회개하지 않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든다.!!...[이처럼 자신의 마음을 그리스도 믿음안에 있는 평강이 아니라 편안과 안일함에 방치함은 육체의정욕-안목의정욕-이생의 자랑, 곧 세상에 있는 것에 중독됨을 야기한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우리가 "우리의 영원한 평화에 속한 일들"에 대해 안 것은, 만일 우리가 그것에 믿음을 합치시키고 이를 개선하려 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이 우리가 그것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되고 말 것이다. 
그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그들의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결혼하는 것"과 연관이 되어 있다. 그 이유를 열거하면,
첫째, 그들은 안심[=육을 따라 편안추구+안일+방심]하였기 때문에 육욕적이 되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사람들이 그러한 것들을 열심히 추구하고 이 세상이 쾌락에 휘말려든 이유는 그들에게 임한 영원성을 깨닫거나 믿거나 생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믿는 기독자인 바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이 곧 결말이 지어져야만 하며 또한 우리가 확실히 오래 살아 남을 것이라는 사실을 올바르게 알았다면 우리의 눈과 마음을 이처럼 그런 것들 위에 두어서는 안 된다.
둘째, 그들은 육욕적이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있었다. 
그들은 먹고 마셨기 때문에 홍수가 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현재 보이는 일에 온통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경고를 받은 보이지 않는 일들을 생각할 시간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세상에 중독된 바 그 마음중심으로부터 방심하여 세상 것에 머물게 했던 것처럼 육욕은 그들을 세상적인 안심과 안일함 속에 잠들게 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홍수가 날 때까지 깨닫지 못하였다."
2. 그들은 홍수가 나리라고 예견하지 못하였지만 홍수가 났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믿음으로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일이 닥친후 나중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쫓아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느낌으로라도 반드시] 알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악한 날의 도래란 모름지기 사람이 그것을 멀리하고 그 마음에 연기하고 방심한다고 해서 더 지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3. 그들은 홍수를 막기에는 너무도 늦은 시간까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은 이것을 적시에 알았더라면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이 재난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안심하는 자들과 비웃는 바, 알일함에 빠져 조소하며 조롱하는 자들에게 심판은 가장 두렵고 놀라운 일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이것을 옛 세상에 적용시킨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즉,
(1) 이러한 상황에서 주님께서는 먹고 마시며 그를 고대하지 않은 자들을 [반드시] 찾아 오실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세상에 중독됨, 곧 안도감과 육욕은 안일과 방심, 방종한 생활을 초래하는 바, 후대의 유행병이 되며, 현재 그것은 만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억하라!!. 반드시 모든 사람이 "졸며 자는 한밤중에 신랑은 온다."
(2) 주님께서는 이러한 권세를 가지고 이러한 목적으로 그들에게 임하실 것이다. 
홍수가 옛 세상의 죄인들을 모조리 남김 없이 쓸어버린 것처럼 그리스도와 그의 다시 오심을 조롱하고 안심하던 죄인들은 "진노의 날이 임할 때 어린양의 진노"에 의하여 쓸어버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 날은 도망갈 수 없는 완전한 파멸의 날이 될 것이다.
4. 그 날은 분리시키는 날이 될 것이다(40, 41절).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이것은 두 가지 면으로 적용될 수 있다.
(1) 우리는 이 말씀을 특별히 첫 복음 전파시에 믿은 자들에게 이루어진 복음의 성취에 적용시킬 수 있다. 그것은 세상을 구분시켰다. 
"어떤 사람은 말해진 일들을 믿었으며," 그리스도에게 데려감을 당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믿지 않았으며 그들의 불신앙 가운데 멸망하도록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 
세상에서 같은 시대, 장소, 재능, 직업, 조건을 가진 자들, 다시 말하면 "같은 매를 갈고 있는 자들," 즉 같은 가족들, 결혼에 의해 같은 고리에 매어있는 자들 중에서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또 다른 사람은 쓰라림 가운데 버려둠을 당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던지러 오신"(눅 12:49, 51) 구별하는 불이다. 그것이 구별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값없는 은혜를 더욱 호의적인 것으로 만들어 준다.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나타내지 않으신다"(요 14:22). 아니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같은 들과 같은 매, 같은 집에 있는 자들에게는 나타내지 않으신다. 
파멸이 예루살렘에 임박하였을 때, 전에 신적인 은혜에 의해 정해진 것을 따라 신적인 섭리에 의해 구별이 되어졌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 있던 모든 기독자들은 하늘의 특별 배려에 의하여 그 재난에서 멸망하는 것으로부터 구원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만일 두 사람이 들에 함께 있었고 그들 중의 한 사람이 기독자였다면 [깨어 구하며 기다린 바] 기독자는 피난처로 데려감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적군의 검에 내버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 
만일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고 그들 중에 한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면, 그가 여자요 불쌍한 여자요, 종이라고 할지라도 [깨어 구하며 기다리는 바] 그녀는 안전한 곳으로 데려감을 당할 것이며, 그러나 다른 사람은 버림을 당할 것이다. 
이와 같이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는 하늘 안에서나 하늘 "아래"에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게 될 것이다"(습 2:3). 
여기에서 유의할 것..., 일반적인 파멸의 때에 구별하여 보호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호의의 표식이며, 또한 그와 같이 인식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만일 수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좌우 편에서 넘어질 때 우리는 안전하다면 즉 다른 사람들이 주위에서 소멸될 때 우리가 소멸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우리가 불에서 꺼낸 타다 남은 나무와 같이 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주님의 자비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큰 자비이다라고.
(2) 우리는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또한 그 날에 행해진 구분에 적용시킬 수 있다. 
주님께서는 전에(31절), 선택함을 받은 자가 "함께 모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렇게 하기 위하여 그들은 이 세상에서 그들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자들로부터 구별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고 계시다. 
구주를 믿기로 하여 영접하고 순종하는 것을 선택하였고 자신을 주께 맡겨 끝까지 참는 바, 선택한 자, 마참내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바 선택받은 사람들은 [재림구주의 영광에로] 데려감을 당할 것이요, 그 밖의 사람들은 영원히 멸망에로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
땅 속에 잠자는 자들은 동일한 무덤 속에 있지만, 그들 중의 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로 데려감을 당할 것이요, 다른 사람은 "수치와 영원한 멸시"에로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단 12:2).
여기에서는 장차 살아 있게 될 사람에게 적용이 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예기치 않은 때에 오셔서 "밭이나 공장에서" 분주하게 일하는 자들을 찾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그들이 영광에로 예비된 긍휼의 그릇인가 혹은 멸망에로 예비 된 그릇인가에 따라서 그대로 되어질 것이다. 
한 사람은 "영원히 주님과 천사들과 함께 있기 위하여 공중에서 그들을 만나도록" 데려감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속한 자를 모을 때 남은 자들을 휩쓸어 가버릴 마귀와 그의 천사들에게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영광에로 데려감을 당할 때 뒤에 남게 될 죄인들에게 더욱 비참한 정죄가 될 것이다. 또한 그 말씀은 주님의 백성들에게 많은 위로를 해 주고 있다.
① 그들은 지금 들에서 일하는 하인이나 매를 가는 하녀들처럼(출 11:5) 세상에서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자들에 불과한가? 
그러나 그들은 그 날에 잊어버리거나 간과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난한 자라고 할지라도 만일 신앙이 부요하다면 "천국의 상속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② 그들은 지금 영광의 상속자들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먼 곳이나 그럴 듯하지 못한 장소들, 즉 "밭이나 공장에"흩어져 있는가? 
그러나 천사들은 그들을 거기에서 찾게 될 것이며(왕위에 앉히려고 할 때 사울이 여러 사람들 속에 숨어 있었던 것처럼), 그들은 거기서부터 찾아 데려갈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큰 변화가 될 것이기 때문에 "변화되었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즉 땅을 갈고 매를 가는 일로부터 하늘로 가게 되는 변화를 가지게 될 것이다.
③ 그들은 지금 하늘로 옮겨가는 데 연약하고 무력한가? 
그들은 롯이 은혜스러운 강압에 의해 소돔에서 데려 감을 당한 것처럼 데려가거나 붙잡힘을 당할 수 있을 것이다(창 19:16). 그리스도께서 한 번 붙잡은 자들을 그는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다.
④ 그들은 지금 다른 사람들과 섞이거나, 또는 같은 습관이나 사회, 직업에서 그들과 결합될 수 있는가? 
이러한 것들때문에 참된 기독자들은 결코 실망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귀중한 자와 사악한 자, 동일한 무더기 속에 있는 금과 찌꺼기, 동일한 마루 속에 있는 밀과 가라지를 구별하는 방법을 알고 계신다.
Ⅲ. 여기에는 그 날이 올 때를 대비하여 신중한 사리분별에 의해 "깨어 준비할 것"을 우리들에게 권고하고 있다(42절 이하).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요구되는 필요한 의무, "깨어 예비하고 있으라"(42, 44절).
(1)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42절).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자신들의 직무를 생각나도록 하기 위하여 항상 깨어 있는 것은 그들이 할 큰 의무요. 관심사라는 사실이다. 
죄악된 상태나 방법이 "잠자는 것," 즉 무감각하고 비활동적(살전 5:6)인 것과 비교되고 있듯이, [믿음으로 주와 연합하고 사랑안에서 성령따라 동행하며 교통하며 순종함의] 은혜스러운 상태나 방법은 "깨어 있는 것"이나 "각성하는 것"과 비교되고 있다. 
우리는 특별히 임종시에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며 깨어 있어야만 한다. "임종 후에는" 우리에게 "큰 날"이 될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때문이다. 또한 세상 끝 날에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오시는, 인류에게 있어서 "큰 날"을 기다려야만 한다. 
깨어 있다는 것은 우리 주님이 장차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가 오실 것을 소원하거나 종종 그의 오심에 대해 생각하는 것, 또한 언제나 그가 오시리라는 것이 확실하고 또 가까이 이르렀으며 그 시간은 불확실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기대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을 기다리며 깨어있는 것은 그가 오셔서 우리를 찾으실 것을 즐거움으로 [진실로] 소망하는 은혜스러운 마음의 기질과 성격을 유지하는 것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그의 오심을 첫 번째로 알아 볼 수 있는 것을 말하며,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즉각적으로 그의 행동에 참예할 수 있으며 그를 만나는 의무를 본격적으로 실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깨어 있는 것은 잠자는 시간인 밤에 [믿는 자가 처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밤"이다. 또한 우리는 항상 깨어 있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2)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힘써 추구하며 그안의 성령과 생명으로 살며,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에 이르기를 힘씀과 동시에 영적 민감성을 발휘함으로써 그 성취를 기다림으로] 예비하고 있지 않는다면 공연히 깨어 있는 것이 되고 만다. 
이러한 일들을 "찾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지런히 힘써야 한다"(벧후 3:11, 14). 
우리는 그때에 우리 주님을 시중들게 될 것이며, 또한 이미 불을 켠 등불을 준비해야만 한다. 
우리는 재판을 받게 될 것이며, 그 때에 우리의 대언자가 이미 지시해 준 대로 간구를 해야만 한다. 
우리는 계산을 해야만 되며, 그 때에 이미 계산된 계산서를 가져야만 한다. 그 때에는 우리가 얻기를 소원한 기업들이 있을 것이며, 우리는 이에 참예하기에 합당하도록 준비해야 한다(골 1:12).
2. 우리로 하여금 그 날을 위해 깨어 있고 또한 부지런히 준비해야할 것을 권면하는 이유가 두 가지 있다.
(1) 우리 주님께서 오시는 시간이 매우 부정확[불명확]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이중적인 권면(42, 44절)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이유이다. 또한 이것은 비교에 의해 설명되어 있다(43절). 그때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우리의 죽는 날"을 알지 못한다(창 27:2).  "언제 숨을 거둘는지는" 대충 알 수 있다("내가 떠날 날이 가까웠도다." 딤후 4:6).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맡겨져 있기 때문에 살 수 있는 (한정된)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깨달아 알지는 못한다. 
우리는 남은 여생, 즉 우리가 얼마 동안 짧게 살게 될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시간은 우리가 예상하는 시간보다는 오히려 더 짧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우리가 심판을 위하여 예비된 그 정한 시간을 어찌 알 수가 있을 것인가 ! 
우리가 이러한 시간들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매일 그 날이 올 때를 고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일년이 계속될 것이라고 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약 4:13). 아니 마치 내일이 자기의 날인 것처럼 내일이 돌아올 것을 자랑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잠 27:1; 눅 12:20).
② 그는 "생각지 않은 때에 오실 것이다"(44절). 
시간은 이와 같이 불분명하지만, 임하는 그 일 자체는 분명하다. 우리는 그가 "언제"올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가 "오시라는" 것은 분명히 확신할 수 있다. 그가 떠나시면서 마지막 남기신 말씀은, "정녕 내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그를 기대하도록 해 준다. 
'내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기대하도록 해 준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항상 대기하고 있도록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지 않은 때에," 즉 준비하거나 예비하고 있지 않은 자들이 생각하고 있지 않은 그 때에(50절) 주님께서는 오실 것이다. 아니 가장 열렬하게 기다리는 자들이 아마도 그가 올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시간에 오실 것이다. 
신랑은 지혜있는 자가 졸 때에 이르렀었다. 우리는 종종 공연히 미혹을 받아 기다리는 특별한 징조나 조짐보다는 꾸준히 그리고 언제나 기다리는 것이 현재의 우리에게 합당한 일이 될 것이다.
③ 이 세상의 자녀들은 이와 같이 그 세대에 있어서 지혜롭다. 
즉 위험이 다가 오는 것을 안다면 그들은 깨어 그것에 대비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사실을 한 실례로써 말씀하고 계시다(43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밤에 이러한 경점(그들은 밤을 사경으로 구분하였는데, 각 경점은 세 시간의 간격을 두고 있다)에 올 것을 알고 또한 그의 집을 덮칠 것을 안다면, 그것이 가장 깊게 잠이 드는 한밤중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일어나서 여러 곳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며 또한 그 도적을 격렬하게 맞이할 준비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언제 꼭" 오시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 그가 "속히 오실"것만을 우리가 알고 있으므로 언제나 항상 깨어 있어야만 한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우리는 각자가 지켜야만 할 집을 가지고 있는데, 그 집은 밖에 노출되어 있으며 그 속에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그 집은 우리 자신의 영혼으로서, 우리는 그 집을 "힘써 지켜야"만 한다.
둘째, 주님의 날은 "밤에 오는 도적과 같이 감짝 놀라게" 임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설마 하며 방심하는 바)그를 가장 적게 고대하는 때를 골라서 그 때에 오신다. 이는 그의 원수들의 승리가 가장 큰 수치로 바꾸어지며 또한 그의 친구들의 두려움이 가장 큰 즐거움으로 변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셋째, 만일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가 졸고 준비하지 않은 것을 보게 될 때에 우리는 우리가 가치 있게 생각하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이는 도적이 부당하게 뺏는 것과 같은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의롭고 법적인 절차를 거쳐 행해질 것이다. 
죽음과 심판은 우리가 범한 돌이킬 수 없는 손상과 전적인 게으름에 대하여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취하여 버리실 것이다. 그러므로 예비하고 있으라. 즉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지혜로운 선한 집주인이 도적이 올 시간을 대비하여 시시각각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과 같이 항시 예비하고 있으라.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만 한다. 이는 우리가 악한 날에 설 뿐만 아니라 정복자 이상으로 약탈자를 분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2) 우리 주님께서 오시는 것은 준비한 자들에게서 행복과 즐거움을 안겨다 줄 것이며, 준비하고 있지 않은 자들에게는 비참과 두려움을 가져다 줄 것이다(45절 이하). 
이 사실은 종들의 주인이 그들과 계산하려 올 때에 선한 종들과 악한 종들의 서로 다른 처지에 의해 묘사되고 있다. 
우리가 그 날에 준비하고 있는지 또는 준비하고 있지 않은지에 따라서 영원히 좋게 될 것인지 또는 나쁘게 될 것인지가 결정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각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기"위하여 오시기 때문이다. 
본 장의 끝에 있는 이 비유는 신앙 고백이나 직무에 있어서 하나님의 종들이 된 모든 기독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특히 이 비유는 사역자들을 경고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말해지고 있는 종은 "청지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① "선한 종"에 관하여. 주님께서는 여기에서 그가 "집의 관리자"가 됨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그렇게 되려면 그 종은 "충성되고 지혜있어야"만 하며 또한 만일 그가 그런 종이라면 그가 영원히 "복이 있는 자"일 것임을 나타내 주고 계시다. 
여기에서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에게 좋은 교훈과 격려를 해 주고 계시다.
첫째, 우리는 여기에서 그 종의 위치와 직무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주인이 집사람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로 임명된 자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의 집사람들이나 가족으로서, 그 교회의 아버지이시며 주인이신 그리스도와 연관을 맺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권속," 즉 그리스도로부터 명령된 가족이다(엡 3:15).
2. 복음 사역자들은 이 집의 "관리자. 안내자, 인도자, 감독자. 청지기"로 직접 임명 받았다. 
복음사역자[말씀 사역자]들은 군주로서가 아니라(그리스도는 이에 대한 권한소송 정지를 신청하셨다), 청지기나 또는 그 밖의 부하 관리들로 임명되어 있다. 
주인이 아닌, 안내자로 즉 새로운 길을 명하는 자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지정하신 길을 보여 주고 그리로 인도하는 자로서 상호간에 친절한 동료요 친구로 임명되어 있다.
그 뜻은 @hgouvmnoi 로써 우리는 "너희를 다스리는"(히 13:17)으로 번역할 수 있다. 새로운 일을 준비하는 자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일을 지시하고 스스로 올바르개 행함으로써 모본을 보이며 동무들도 그렇게 행하도록 재촉하는 "감독자"로 임명되어 있다. 그것은 ejpivskopo" - 즉 감독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임명된 관리자들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그리스도에게서 유래된 것이며, 또한 아무도 그 권세를 그들에게서 취하거나 빼앗을 수 없다. 
그 종은 "주인에 의해 (맡기신 자들을) 다스리도록" 임명된 자이다. 그리스도는 사역자들을 직접 임명하신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수하에 있는 관리자들이며 또한 그에게 예속되어 행동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위한," 그의 나라의 발전을 도모하는 관리자들인 것이다.
3. 복음 사역자들의 하는 일은 청지기로서 그리스도의 집사람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에게 분배된 열쇠를 가지고 있다.
(1) 그들이 하는 일은 "주는 일"이다. 
즉 그들 자신에게 주는 것(사복을 채우는 것, 겔 34:8)이 아니라 주님께서 가져다주신 것을 가족들에게 나누어주며, 그리스도께서 "구입한 것"을 "분배하는" 것이다. 사역자들에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도다(행 20:35)라고 말해지고 있다.
(2) 사역자들의 하는 일은 "양식을 나눠주는 일이다."
 "율법"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할 일이다), 교회에 공급하신 바 주님의 말씀의 그러한 [생명과 성령이 풍성한] 교훈들을 나눠주는 것인데, 그 교훈들은 잘 소화되면 영혼에 대한 양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릇된 교훈의 독을 나누어주어서는 안 되며, 또한 단단하고 무익한 교훈의 돌멩이를 나누어주어서도 안 된다. "건전하고 온전한" 양식을 나누어주어야만 한다.
(3) 양식은 "때를 따라" 나눠주어야만 한다(그것을 할 시간이 있는 동안). 
영원한 것이 올 때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은 너무 늦게 될 것이다. 우리는 "낮이 있을 동안에 일을 해야"만 한다. 또한 "적당한 시간에 때를 맞추어," 즉 그것을 줄 기회가 있을 때 일을 해야만 한다. 또는 정해진 시간에, 때를 따라, 즉 매일 매일의 의무가 요구하는 대로해야만 한다.
둘째, 이러한 직무에 대한 그리스도의 올바른 이행. 선한 종이 이러한 일을 솔선수범하였다면 선한 "청지기"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1. 그는 "충성되기" 때문이다. 
청지기는 충성되어야만 한다(고전 4:2). "신뢰를 받는"자는 신뢰를 줄 수 있어야만 한다. 그 신뢰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들에게서 더 많은 것이 기대된다.
 "사역자들"에게 맡겨진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딤후 1:14). 또한 그들은 모세와 같이 충성스러워야만 한다(히 3:2). 그리스도께서는 "충성스러운" 사역자들만을 귀하게 여기신다(딤전 1:12).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사역자들은 그 자신이 아닌, 그의 주인의 영예를 위해 신실하게 계획을 세우는 자이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말하며, 그 자신의 환상이나 생각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규칙만을 따르며, 그것들만을 지지한다. 가장 비천한 자를 돌보며, 가장 위대한 자를 책망하며, 외모를 취하지 아니한다.
2. 그는 자신의 의무와 그것이 적합한 때를 깨달아 아는 데 지혜롭다. 
마음과 익숙한 손을 가지고 무리들을 필요할 때 인도하는 데 있어서 지혜롭다. 정직만 있으면 능히 선한 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지혜는 "선한 청지기"에게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왜냐하면 지혜는 가르치기에 유익한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는 맡겨진 일을 충실히 수행한다. 
그의 직무가 요구될 때마다 그는 실행을 한다. 목회(사역)는 선한 일이며 또한 그 직무를 맡은 자는 언제나 해야할 것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세상적 안일 속에 방치하거나 세상일에 몰두되어서는 안 되며, 맡겨진 바 그 일을 하지 않은 채로 내버려 두거나 경솔하게 그 일을 타인에게 전가시켜서는 안 되며, 요령 있게 지혜롭고 선하게 잘 실행해야만 한다. 
즉 집사람들에게 합당하게 양식을 나눠주며, 그들 자신의 직무를 기억하며, 자신과 관련이 없는 것에 쓸 데 없는 참견을 하지 않는다. 
그는 주인이 명한 대로 행하며, 그 직무와 관련된 것과 그 간곡한 처지가 요구되는 것을 적절하게 실행한다.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실행"한다. 
퍼킨즈(Perkins)씨는 "여러분은 말씀의 사역자이다"(Minister verbi)라는 것을 모토로 삼았다. "행하라"(Age)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행하라"(Hocage)이다.
4. 그는 주인이 올 때 "이렇게 하는 것"이 발견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1) 그의 일의 항구성. 
그의 주인이 언제 오든지 간에 그는 그 날의 일에 분주하며 부지런한 모습으로 발견되는 것, 즉. 사역자들은 그들의 주인이 [게으름 피우기 위해 사역자 스스로 비워 둔, 남겨둔 바] 그 시간에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빈 시간을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선한 하나님에게 있어서 하나의 자비가 끝나면 또 다른 자비를 베푸실 시작이 되는 것처럼, 선한 사람 즉 선한 사역자는 하나의 의무가 끝나자마자 곧 미리 마음에 지시받고 다한 바 다른 의무를 연이어 시작해야만 한다.  
칼빈은 자신의 사역을 그만 두라는 권고를 받고 성을 내면서 대답하기를, "무엇이라고 ! 당신은 내 주인이 게으른 나를 찾게 되기를 원하는가?"라고 하였다.
(2) 주님이 오실 때까지 자신의 일을 계속하는 것. 
"그 때까지 굳게 잡으라"(계 2:25). "이 일들을 계속하라"(딤전 4:16; 6:14). 끝까지 견디라.
셋째, 이 일로 인하여 충성스런 종된 그에게 주려고 하는 보상 세 가지가 있다.
1. 그는 눈에 띄게 될 것이다. 
이것은, 누가 그 때에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될 것인가? 라는 구절 속에 암시되어 있다. 이것은 이러한 특성에 부합된 사람이 매우 적을 것임을 예상하고 있다. 
이렇게 충성되고 지혜있는 "청지기"는 어쩌면 "천 명 중의 한사람" 정도나 있을지도 모른다. 
현재 자신들의 직무에 있어서 겸손하고 근면하고 성실함으로 이와 같이 눈에 띄는 자들을 그리스도께서는 큰 심판 날에 그들에게 영예를 부여함으로써 더욱 돋보이고 눈에 띄게 하실 것이다.
2. 그는 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그리스도께서 축복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모두 축복을 받은 자이다(계 14:13). 
그러나 충성스러운 청지기로 인정되고 그렇게 하는 것이 발견된 자들에게는 더욱 큰 축복이 준비되어 있다. 
순교자로서 그리스도를 위해 전쟁터에서 고난을 받고 죽은 자들의 영예에 버금가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봉사의 터전에서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추수한 자들의 영예이다.
3. 그는 승진이 주어질 것이다(47절).
 "주인이 이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이러한 암시는 위대한 사람이 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즉 집의 관리를 맡은 청지기가 자신의 직무를 잘 처리한다면 일반적으로 그 집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는 자로 승진되는 법이다. 요셉은 이와 같이 함으로써 보디발의 집에서 승진되었다(창 39:4, 6). 
그러나 이 세상에서 친절한 주인이 그의 가장 모범적인 종에게 부여한 최상의 영예도 세상에서 주 예수님이 그의 충성되고 늘 깨어 있는 종들에게 부여할 큰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비유로 말해진 것은 "내 아버지께서 그를 영화롭게 하리라"는 말씀과 대동소이하다. 
하나님의 종들이 이와 같이 승진될 때에 그들은 그러한 큰 영광을 가질 수 있도록 지혜와 거룩함에 있어서 완전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들이 다스릴 때 그들에게는 아무런 위험이 없게 될 것이다.
② "악한" 종에 관하여,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첫째, 그들에게 대한 묘사(48, 49절). 
거기에서 우리는 그들 자신의 색채로 그려진 비참을 찾아 볼 수 있다. 
피조물들 중에서 가장 사악한 것은 사악한 인간이며, 인간들 중에서 가장 사악한 것은 사악한 기독자요, 그들 중에서 가장 사악한 자는 사악한 교역자이다. Corruptio optimi est pessima ─즉 가장 좋은 것이 썩으면 가장 나쁜 것이 된다. 
예루살렘의 선지자들 가운데 있었던 사악함은 실로 "무서운"것이었다(렘 23:14). 여기에 보면,
1. 그이 악함의 원인.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재림을 불신앙하는 것이다. 
그 사악한 종은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결코 오시지 않을 것이며 교회를 완전히 포기하셨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몇 가지 살펴 볼 것은,
(1)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 있는 종들처럼 입술로 "주여, 주여"라고 부르면서도 마음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아신다.
(2) 그리스도께서 더디 오시는 것은 그의 인내심의 좋은 본보기이지만 악한 사람들은 이를 남용하여 자신의 길을 가는데 마음을 강퍅케 한다. 
그리스도의 오심이 의심스럽게 여겨지고 아득히 먼 일로 여겨질 때 "인생의 마음은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게 되는 것이다"(전 8:11).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서 더디 올 때에 백성들이 그에 대하여 말하였듯이, "우리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노라." 
여기에 더하여 감각적으로 행하는 자들이 그러므로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신을 만들자." 즉 세상을 신으로, 배(bely)를 신으로, 무엇이든지 신으로 만들자 한다.
2. 그 악한 종의 사악함의 특징들. 
그것들은 가장 중요한 죄악들이었다. 그 악한 종은 자신의 정욕과 탐욕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1) 여기에서 그에게 해당되는 죄는 박해이다. 
그는 "동무들을 때리기" 시작하였다. 다음의 사실을 유의하라.
① 집의 청지기라고 할지라도 동무들을 [제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바] 집의 종으로 [천히] 여기지 말며, 따라서 그들은 [상호간에 참된] 동무가 되어야 하고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금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천사가 자신을 요한의 "동무"(형제, 계 19:10)라고 부른다고 한다면 아시아의 교회들의 기독자 한사람 한사람마다를 그의 "형제"(계 1:9)라고 부른다고 해서 놀랄 일은 못된다.
② 악한 종이 그들의 동무들을 때리는 것을 보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은밀한 기독자들이나 충성된 사역자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악한 종이 그들을 때리는 것은, 그들이 그를 비난했거나 또는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경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는 자신들의 양심을 거스리면서까지 그가 말하는 대로 행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 악한 종은 선지자들을 때리는 것이다(렘 18:18). 만일 그 악한 종이 권세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면 혹은 짐승의 머리에 난 열 개의 뿔처럼 그들을 자신의 하는 일에 강제적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면 더욱 심하게 진행될 것이다. 
제사장 바스훌은 예레미야를 때렸고, 그를 착고에 채워 넣었다(렘 20:2). 반역하는 자들은 종종 다른 사람들보다 "살륙죄에 깊이 빠진" 자들이다(호 5:2). 
청지기가 그의 동무들을 때릴 때는 주인의 권위와 그의 이름으로 행한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실지어다"(사 66:5)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러나 그는 장차 반드시 그것이 주인에게 무례한 짓을 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 모독과 부도덕. "그가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49절).
① 그 악한 종은 가장 사악한 친구들과 더불어 교제하고 있으며, 그들과 더불어 교분을 맺고 그들과 친숙하고 있다. 
그는 그들의 꾀를 좇고 그들의 길에 서며, 그들의 자리에 앉고 그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술 취한 자들은 즐겁고 유쾌한 무리들이며, 그 악한 종도 이와 같이 함으로써 그들의 사악함을 더욱 강화시키는 것이다.
② 그는 술 취한 자들과 같이 행동하고 있다. 
첫쩨, "먹고 마시고 취하고 있다." 
누가복음에는 그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종류의 죄악의 출입구이다. 술 취함은 두드러진 죄악이다. 술에 노예가 된 자는 어떤 일에 있어서도 주인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한 자들은 대개 가장 사악하고 부도덕한 사람들이었다. 박해하는 양심들은 그 구실이야 어떤 것이었든지 간에 대개 가장 방탕하고 타락된 양심들이다. "성도들의 피에 취한 자들"이 무엇인들 마시지 못하겠는가? 
그렇다. 이 구절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학식과 언변의 일반적인 은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악하기 짝이 없는 사역자들에 대한 묘사임이 틀림없다. 
또한 어떤 사람에 대해 말했듯이, 강단에서 설교를 잘하기 때문에 그가 나가서도 말한바 그대로 살아내야만 한다는 것은 실로 가엾은 일이 아닐 수 없다(언행이 일치해야 하므로). 또한 그가 강단 밖에서 악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교회안에 다시 들어와서 말씀사역에 종사해야 함을 생각해 본다면 또한 가엾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둘째, 그에게 내려진 판결(50, 51절). 
사악한 사역자들의 입은 옷과 명성이 그들을 정죄에서 지켜 주지는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로마 교회에서 고문관으로부터 면죄를 받았다고 구실을 붙인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재판권으로부터 면책을 요구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법정에서는 자기들끼리만 서로 존대하는 칭호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그의 판결에 동반하게 될 놀라움(50절). 
"그 종의 주인이 이르게 될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꼭 오실 것이라는 생각을 연기시킨다고 해서 그의 오심이 연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가 어떤 망상에 사로잡히든지 간에 그의 주인은 올 것이다. 사람의 불신앙이 위대한 약속이나 두려움을 효과 없는 것으로 만들지 못할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오심은 안도감에 사로잡혀 태만한 죄인들에게, 특히 악한 사역자들에게 가장 두려운 놀라움이 될 것이다. 
"그는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올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말씀의 경고를 무시해 버리며 장차 올 심판에 관한 그들 자신의 양심의 경고를 묵살해 버리는 자는 그 밖의 어떤 경고도 기대할 수 없다. 
이것들은 취하든지 안 취하든지 간에 충분한 법적 경고 없이 갑자기 임하신다고 할지라도 그에게 불공평하다는 말을 할 수는 결코 없다. 보라, 그는 전에 우리에게 말씀을 하시지 않았던가 !
2. 그에 대한 엄격한 판결(51절). 
그것의 공의대로 하는 것에 비하면 그다지 심한 것이 아니다. 그 판결에는 "사망과 정죄"라는 무서운 말들로 감싸진 완전한 멸망이 뒤따르게 된다.
(1) 사망. 
그의 주인은 "그를 엄히 때릴 것이다."
─즉 그는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질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의로운 자의 땅에서 끊어질 것이며, 그를 악한 자로 구별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저주"에 대한 정의로써(신 29:21), 땅만 버리는 나무를 잘라 버리는 것처럼 그를 잘라 버릴 것이다. 아마도 이 말씀은 율법에서 종종 사용된 선고, 즉 "그 목숨이 그의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를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완전한 제거를 의미한다. 
선택된 가지가 더 좋은 줄기에 접붙여지기 위하여 잘리우는 것처럼 사망은 좋은 사람을 잘라 버린다. 그러나 시들은 가지는 불에 던지기 위해 잘리우듯이 사망은 악한 사람을 잘라 버린다. 즉 그의 마음을 전적으로 기울였고 말하자면 한 몸이 되었던 이 세상으로부터 그를 잘라 버리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그 말씀을, "쪼개어 낼 것이라"고 읽을 수 있는데 그 말은 즉 몸과 영혼을 분리시켜, 몸은 벌레들의 먹이로 무덤에로 보내고 또한 영혼은 마귀의 먹이로 지옥에로 보낸다는 것이다. 
죄인은 쪼개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은 임종시에 영혼과 몸이 깨끗이 분리되어 하나는 하나님께로 즐겁게 올라가며, 하나는 흙 속에 버려질 것이다. 
반면에 사악한 사람의 영혼은 임종시에 쪼개어지며, 갈기갈기 찢기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왕'(욥 18:14)이시기 때문이다. 
사악한 종은 스스로 하나님과 세상, 그리스도와 벨리알, 그의 신앙 고백과 그의 정욕을 나누었으며, 따라서 그 가 이와 같이 구분될 것은 당연하다.
(2) 정죄. 
그는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할 것이며" 또한 그 결과 비참한 상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슬피 울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① 저 세상에는 영원히 비참한 장소와 나라가 있다. 
거기에는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 밖에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 아래 놓여 있는 영혼의 시련과 고뇌를 말한다.
② 신적인 선고(판결)는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벌을 받기에 합당하게 된 자들의 몫(율)으로 특정된 구체적 장소나 나라를 지정할 것이다. 
"내 자신의" 주인이라고 말한 자, 그도 이와 같이 자신의 받기에 합당한 율에 처하게 될 것이다. 
지금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는 그 때에 "재판장"이 되실 것이며, 또한 사람의 자녀들의 영원한 상태는 그가 지정하시는 대로 될 것이다. 현세에서 세상을 자신의 몫으로 선택한 자는 저 세상에서 지옥을 그들의 몫으로 가지게 될 것이다. "이는 악인이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니라"(욥 20:29).
③ 지옥은 외식하는 자에게 가장 적합한 장소이다. 
이 사악한 종은 "외식하는 자가 받는 분깃"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외식하는 자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자유 부동산 보유자들(the freeholders)이며, 다른 죄인들은 단지 그들과 동거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비참한 분깃만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저 세상에서의 가장 엄한 형벌을 나타내려고 하실 때 이를 "외식하는 자의 분깃(율)"이라고 부르고 있다. 만일 지옥에 다른 곳보다 더 뜨거운 곳이 있다면(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형상을 가지고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싫어하는 자의 몫이 될 것이다.
④ 악한 사역자들은 저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죄인들(몰론 외식하는 자들까지도)의 받는 율에 처하게 될 것이며, 이는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장 사악한 외식가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피, 즉 그들이 모독함으로써 자신들의 발아래 짓밟아 버린 피와 또한 영혼의 피, 즉 그들이 신실치 못함으로써 자신의 머리 위에 가져 온 피는 그 "고통의 장소"에서 그들에게 견디기 힘든 것이 될 것이다.
"아들아, 이것을 기억하라." 곧 사역자가 다른 죄인들과 같이 망한다면 이것은 그에게 말을 중단시키는 것과 같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자들이 던짐을 받는 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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