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2.19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마25.사랑으로역사하는믿음_자선(구제)베품_명령순종_상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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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마25장

===열 처녀 비유(마음, 말씀-기도, 성령 충만...[겉사람의 후패함과 속사람, 곧 영혼의 날마다 청결한 새로움+넘치는 성령충만은 서로 상관없다!!]졸지 않고 깨어 있어 말씀으로 기도함안에 있는 늘 새롭고 넘치는 성령 항상 공급하심 받고 길진리생명빛 안에 거함으로 이웃에게 항상 나누어줄 성령이 있어야 함)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달란트 비유(보냄받은 이들마다에게 맡기신 바 직분_은사의 달란트를 잘 살펴 알고 [주님뜻에 합하도록]충실하게 활용함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발휘]의 영적 사업 통해 배가시킴의 섬김 통해 회계할 생명열매가 반드시 있음)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인자가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 [선하심_인자하심_진실하신의 하나님 빼어닮음에 있어서 궁극적 선함과 사랑은 결국 날마다 주바라기로 주안에 거함의 결과인, 구제와 자선의 풍성함 여부로 나타날 것]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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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5장 (개요)

본 장(章)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 끝에 관하여 앞 장(章)에서 시작하였던 그의 대화를 계속하고 있으며 또한 결말을 맺고 있다. 

이것은 요한복음 14장 15,16절이 그의 제자들에게 위로를 주었던 것에 비하여, 그의 제자들에게 경고를 주는 고별 설교이었다. 

그들은 시험과 고통이 많은 이 세상에서 이상의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였다. 

이 설교의 내용은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진지하게 일깨우는 경고들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본 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기록되어 있다. 이 비유의 목적은 동일하다. 즉 우리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재림을 주의 깊게 또한 열심히 예비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재림에 관하여는 그의 죽으시기 전(요 14:2)과 그의 승천 시에(행 1:11) 또한 성경을 마치면서(계 22:20) 언급이 되어 있으며, 여기에서와 같이 그의 교회에 대한 마지막 고별사에서 또한 언급되고 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비할 것을 말해 주고 있다.

Ⅰ. 이는 우리가 그 때에 그를 섬기도록 ((항상 깨어 말씀으로 기도함으로써 넘치도록 충만한 성령으로 필요한 이웃에게 생명의 성령을 공급할 수 있어야 함))준비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열 처녀 비유에 나타나 있다(1-13).

Ⅱ. 이는 우리가 그 때에 그와 더불어 계산((보냄받은 자의 삶에 대한 정산))을 할 준비를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세 종의 비유에 나타나 있다(14-30).

Ⅲ. 이는 우리가 그 때에 그에게서 마지막 선고((영생축복, 곧 영광에의 참여냐,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김의 저주냐를 판결))를 받을 준비를 하며, 그것이 영생에로의 선고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마지막 심판의 과정에 대한 보다 분명한 묘사에서 보여지고 있다(31-46). 

이것들은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관심사가 되기 때문에 두려움을 가지고 깊이 생각해야 할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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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처녀의 비유(마 25:1-13)

여기에 보면,

Ⅰ. 대개 "천국" 복음 하에 놓여 있는 일들의 상태, 그리스도의 외적인 나라 그리고 그 통치와 성취에 관하여 서술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비유들 중의 어떤 것은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것처럼 지금 기독자들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 준비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의 비밀이 끝나게 되고 그 나라가 아버지에게 넘겨질 때 그것이 장차 무엇과 같을 것인가를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큰 심판의 날에 준비된 자와 준비되지 못한 자를 향한 그리스도의 통치 관리는 이 비유에 의해 묘사되고 있는데, 그 나라는 그 나라의 백성들을 위하여 설립되고 있으며, 신자들 각인마다 그때에 이 열 처녀와 같이 구별될 것이다.

Ⅱ. 여기에는 [어린양의 혼인잔치로 묘사되는 바] 결혼의 엄숙성이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경우는 유대인들 가운데 종종 행해지는 전통적 풍습인데, 신랑은 밤 늦게 그의 친구들을 동반하여, 들러리들과 함께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 신부의 집으로 가게 된다. 신부와 그 일행은 신랑이 오는 것을 보면 손에 등불을 들고 나가서 큰 즐거움으로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하여 예식과 상례를 갖춘 집으로 그를 집안에 들이고 문을 닫음으로써 잔치가 시작된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이 경우에 신부 들러리의 숫자는 대개 "열 처녀"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최소한 열 사람이 모여야 회합을 갖거나 할례를 행하거나 유월절을 지키거나 결혼식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보아스는 롯과 결혼할 때 "열 사람의 증인"(룻 4:2)을 거느렸다. 이 비유에서,

1. "신랑"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시편 45편과 솔로몬의 아가서, 또한 종종 신약에서 신랑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로써 그의 신부인 교회에 대한 그의 유일무이한 최고의 사랑과 또한 그의 신실하고 신성한 계약을 보증하고 있다. 

믿는 자들은 지금 그리스도와 약혼 관계에 있다(호 2:19). 그러나 엄숙한 결혼식은 대심판날까지 보류되어 있는데, 그 때에 어린양의 아내인 신부는 완전히 자신을 단장하게 될 것이다(계 19:7, 9).

2. 여기의 열처녀들은 신앙을 고백한 자들로서 교회의 한 지체들이다. [실지로, 교회는 왕후로 묘사되는 바 단체적 신부이기에 각인마다 그리스도의 신부, [세상]왕들의 딸, [왕중]왕의 딸, [왕중]왕의 아들들이기도 하다!!..시45참조]

그러나 여기에서는 "[신부된] 그녀의 동무들"(시 45:14)로 묘사되어 있고, 그 밖에는 그녀의 "어린 자녀"로(사 54:1)로, "장식물"(사 49:18)로 묘사되어 있다.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은 "처녀들"(계 14:4)이라고 말해진다. 이것은 그들의 아름다움과 순결성을 나타낸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정결한 처녀들"(고후 11:2)로 드려진다. 

신랑은 [왕중]왕이시다. 그러므로 이 처녀들을 "[(단체적) 왕후로 표현되고 있는 바 교회에 속한]영예의 시녀들"이며, "수를 헤아릴 수 없는"(아 6:8) 처녀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열" 처녀로 말해지고 있다.

3. 이러한 처녀들의 할 일은 신랑을 만나는 일인데, 이는 그들의 의무일 뿐만 아니라 극상의 바램과 행복이기도 하다. 

그들은 신랑이 나타날 때 그를 시중들기 위하여 왔으며 잠시 동안 그를 기다렸다. 여기에서 기독교의 본질을 살펴보도록 하라. 기독자인 우리는,

(1) 영광스러운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며, 그가 그의 성도들에게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오실 때 그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데 참예하는 자임을 고백해야만 한다. 

우리는 영예스러운 종이 그들의 주인에게 하듯이 그를 뒤따라야만 한다(요 12:26). 그 이름을 높이고, 높으신 예수님을 칭송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할 일이다.

4.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재림을 고대하는 자임을 고백해야만 한다.

기독자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믿고 바라보아야 할뿐만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고 갈구해야만 하며 또한 그것과 관련된 우리의 모든 대화의 내용대로 행동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우리의 종교의 모든 선(善)들이 교차되는 중심점이며, 또한 여기에 대해 신적인 생명의 모든 것은 언제나 연관을 맺고 있고 또한 지향하고 있다.

5. 그들의 주요한 임무는 신랑을 수행할 때 손에 등불을 가지는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그를 영화롭게 하며 또한 그를 봉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기독자는 빛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이다. 

복음은 빛이며, 그것을 받은 자는 그것으로 자신을 불붙여야할 뿐만 아니라 "빛을 비추며," "그것을 밝혀야만 한다"(빌 2:15, 16). 이것은 보편적인 것이다.

이 열 처녀에 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살펴 볼 수 있다.

(1) 그들의 다른 특성. 그 증거와 명백성이 제시되고 있다.

① 그들의 특성은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것"(2절)이었다. 

유능한 재판장인 솔로몬은 말하기를,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두움보다 뛰어남 같도다"(전 2:13)라고 하였다. 

사람이 보기에는 사람들 중에서 같은 신앙고백과 교파를 가진 자들 같아 보이더라도  하나님께는 여러 다른 특성을 가진 자들로 보이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신실한 기독자들은 "슬기 있는" 처녀들이요, 외식하는 자들은 "미련한" 처녀들이다. 다른 비유에서 그들은 지혜로운 건축가와 미련한 건축가로 표현되어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들은 지혜 있거나 미련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의 영혼의 일들에 있어서 그러하다는 사실이다. 

참된 종교는 참된 지혜이다. 죄는 미련한 것이다. 특히 외식하는 죄는 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을 속이는 데 지혜있는" 가장 어리석은 자이며 또한 "그들 자신을 의인으로 자처하는"가장 사악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슬기 있는 자와 미련한 자의 수가 동일한 것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을 한다. 즉 그리스도는 참된 믿는 자의 수가 외식하는 자의 수와 같게 되기를 (진실로) 희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혹은 적어도 우리에게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에 관하여 최고가 되기를 희망할 것과 또한 그들에게 관대한 면에서 선입관을 가지고 생각할 것을 가르치려고 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얼마나 관대하게 여기시는가 ! (이것은 대주교 틸톤의 표현이다) 그렇지만 사실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그 문이 좁고 찾는 자가 적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하며,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의 대장 되신 이가 많은 자녀들을 친히 영광에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② 이 특성의 증거는 그들이 수행하였는 바 그 사실에 있었다. 

이것으로써 그들은 판단이 되어지고 있다.

첫째, 미련한 처녀들의 어리석은 점은 그들이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였다"(3절)는 사실이다. 

그들은 마치 신랑을 맞이하려고만 의도한 것처럼 현재 등불을 킬 수 있는, 즉 그것을 나타내 보일 수 있을 정도의 기름만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만일 신랑이 더디 오게 된다면 보충할 수 있는 기름병이나 그릇을 가지지 아니하였다. 이와 같이,

#1. 외식하는 자들은 속에 원칙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손에 신앙고백의 등불을 가지고 있지만, 현재의 봉사와 연단에로 이끌어 주는 데 필수적인 건전한 지식의 줄기와 뿌리 박힌 성벽들과 정해진 결심 등이 그 마음에 없다. 

그들은 외적인 동기의 영향을 받아 행동하지만, 영적인 생활은 피해 버린다. 그들은 창고 없이 개업한 장사군이나 돌밭에 있는 뿌리 없는 씨와 같다고 할 수 있다.

#2. 그들은 장차 오는 것을 전망하거나 준비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재 남에게 보이기 위해 등불을 가지고 있었지만, 후에 쓰기 위하여 기름을 준비하지는 아니하였다. 바로 그렇게, 많은 신자들이 멸망하는 것은 그들이 사리를 잘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바,  그들의 관심은 현재 교제를 하는 이웃들에게 호감을 사는 것일뿐, 그들이 장차 앞에 서게 될 그리스도에게 인정함을 받는 것은 아니다. 

현재 쓸모 있는 것이면 추후에라도 그 어떤 것도 쓸모 있게 될 것으로 생각하는 바, 그들에게 현재 보이지 않은 일들에 관하여 넌지시 말해 보라. 그러면 룻이 그의 사위들에게 농담을 하는 자로 여김을 받은 것 같이 그들에게 그와 같이 여김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개미가 하는 것처럼 후에 것을 위해 준비를 하지 않으며 또한 "장래를 위해 쌓아 두려고"(딤전 6:19)도 하지 아니한다.

둘째, 슬기로운 처녀들은 지혜롭게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다"(4절). 

그들은 속에 좋은 원칙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은 그들의 신앙고백을 유지하고 보존할 수 있는 것이었다.

#1. 마음은 또 하나의 그릇이다. 

이것을 잘 갖추는 것은 지혜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좋은 보고(寶庫)에서부터 좋은 것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뿌리가 썩게 된다면 꽃은 시들게 마련이다.

#2. 은혜는 이 "그릇"에 담아야 할 "기름"이다. 

장막(성소)에는 "불을 켤 수 잇는 기름"(출 25:14)이 항시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의 빛은 선한 행실로써 사람들 앞에 비춰져야만 한다. 

그러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나 하나님과 이웃에게 대한 사랑의 "일편단심의 고정된 능동적인 원칙"이 없다면 그러한 일(빛을 비추는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으며 또한 오래 가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앞에 놓인 것을 바라보면서 종교적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모두 행해야만 한다. 그릇에 기름을 담은 자들은 공히 나름대로 신랑이 아마 더디 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그렇게 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앞을 내다보면서 최악의 때를 대비하여 준비하거나 끈덕지게 계속하기 위해 저축해 두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등불을 계속적으로 타게 하는 이러한 기름은 가장 위대하시고 좋은 "감람유"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공급되는 바, 진리의 규율의 "황금관"(이 관은 환상 가운데 나타나 있으며, 슥 4:2, 3, 12; 요 1:16 에 설명되어 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위에 은혜러라")에 의하여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2) 신랑이 더디게 오는 동안 그들이 저지른 공동적인 허물, "다 졸며 잘쌔"(5절).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① 그 신랑은 더디 왔다. 

즉 그들이 기대했던 것만큼 빨리 오지 않았다. 우리는 자칫하면 우리가 찾는 것이 매우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사도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주의 날이 가까이 이르렀다"고 상상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더디게 오시는 것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아니하다"(합 2:3).  또한, 신랑이 더디 오는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즉 여러 가지 중개 적인 의논과 성취되어야 할 목적들이 있으며 선택받은 자는 모두 불러 모아져야만 하며, 하나님의 참으심이 나타나져야만 하며, 또한 성도들의 인내가 시련 되어져야만 하며, 땅의 추수가 행해져야만 하며, 또한 하늘의 추수도 행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의" 시간보다 더 지체되는 것이지, "적당한" 시간보다 더 지체되시지는 않는다.

② 그가 지체하시는 동안 그를 기다리는 자들은 점점 부주의하게 되고 급기야는 그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잊고 마는 것이다. "그들은 다 졸며 잤다." 

마치 그들은 그를 기다리는 것을 포기한 것처럼 졸며 잤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자가 올 때 그는 믿음을 보지" 못하게 되실 것이다(눅 18:8). 그가 오시는 것이 확실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그 일이 갑자기 이루어질 것이라고 추측한 자들도 그것이 자기들의 기대에 어긋나게 되면 그가 지체하는 것에 근거하여 그 일이 불확실하다고 추측하게 되기 쉽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졸았고, 미련한 처녀들은 잤다고 어떤 사람들은 구분하고 있다. 어쨌든 그들은 모두가 잘못되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불을 계속적으로 켜두었지만 자신들은 계속적으로 깨어 있지 않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너무나 많은 선한 기독자들이 오랫동안 신앙고백만 하고 있는 동안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준비를 점점 게을리 해 버리기가 쉽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마음은 해이해져서 점점 졸게 되며 잠이 든다,  항구여일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되고 열심이 식어지며, 그들의 은혜가 생생하지 못하며,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보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모든 "사랑"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처음" 사랑을 버린 셈이다. 

만일 제자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를 "한 시간" 동안 깨어 주시하는 것이 힘들었다고 한다면 하물며 그를 "일 년" 동안 깨어 기다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 것인가? 슬람미 여자는 말하기를 "나는 졸지만 내 마음은 깨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다음의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그들은 졸았으며 그 후에 자버렸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일말의 부주의와 나태심은 더 큰 것에로 길을 내 준다는 사실이다. 졸기 시작하는 자는 잠을 자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영적인 쇠퇴가 시작되는 것을 두려워하라. 

Venienti occurrite morbo- 즉 병의 첫 증세를 잘 유의하라. 고대인들은 대개 처녀들의 졸며 자는 것을 그들의 죽음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슬기로운 자나 미련한 자나 모두 심판날 이전에 죽었다(시 49:10), 

훼루스(Ferus)도 그와 같이 해석하고 있다. 즉 Antequam aeniat spon년 omnibus obdor miscendum est, hoc est,miriendum- 즉 신랑이 오기 전에 모든 사람은 다 자야만 한다. 즉 죽어야만 한다. 

칼빈도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본문대로 취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3) 신랑을 맞이하라는 놀라운 호출 명령이 그들에게 떨어짐(6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① 그리스도께서는 오래 지체하시지만 결국은 오실 것이다. 

그는 느리게 보이지만 분명하시다. 그가 처음 오셨을 때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던 자들에게는 그가 오랫 동안 지체하셨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때가 찼을 때" 오셨다. 

이와 같이 그의 재림도 오래 지체되는 것같이 보이지만 완전히 망각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원수들은 그가 오래 참으신 것이 그들의 부채를 면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그의 친구들은 자신들의 위로를 알게 될 것이다. 즉 "그 환상이 정해진 시간을 위해 있으며 마침내 그것은 말할 것이며 거짓말하지 않을 것이다." 구원받는 자의 해(年)는 정해져 있으며 그것은 앞으로 올 것이다.

②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가 가장 소홀히 그를 찾으며 우리의 휴식을 가장 포근히 누리고 있을 한밤중에 있을 것이다. 

그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시는 때는  종종 그러한 선한 의도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 때이다. 그의 원수들과 계산하기 위하여 오시는 것은 그들이 그 악한 날을 자기들에게서 멀리 내버리는 때이다. 애굽의 장자가 죽임을 당하고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것은 한밤중이었다(출 12:29). 죽음은 종종 거의 예기치 않을 때 오는 수가 있다. 영혼은 "이 밤에 거두어진다"(눅 12:20).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지배권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자신이 기뻐하시는 때에 오실 것이며 또한 우리의 의무를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그 때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지 않을 것이다.

③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우리는 그를 맞으러 나가야만 한다." 

기독자인 우리는 주 예수님의 모든 행동에 수반해야 하며 또한 그가 외출할 때에도 만나러 가야만 한다. 그가 임종시에 우리에게 오실 때, 우리는 몸밖으로, 즉 세상 밖으로 나가 그가 스스로 우리를 발견하도록 기대하면서 온갖 정성과 힘을 다하여 그를 맞이해야만 한다. 

"그를 맞으러 나오라"는 것은 언제나 준비되어있는 자들, 즉 실제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에게 대한 호출이다.

④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과 그를 만나라고 부르는 것은 "깨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소리가 났다." 그가 처음 오실 때는 그 누구의 관찰(주시)도 전혀 없었으며,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세상에 계셨으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재림은 온 세상이 주시하는 가운데 있게 될 것이다.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게 될 것이다." 하늘로부터 큰 소리가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큰 소리로, 너희 죽은 자들아, 심판 받으러 나오라고 외치시면서 강림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땅에서도 역시 큰 소리가 있을 것인데, 즉 "산과 바위에게 대해 외치는 소리"이다(계 6:16).

(4) 이 호출에 응하여 그들이 취한 태도(7절). 

"이에 그들은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하였다." 즉 심지의 까맣게 탄 부분을 자르고 기름을 담아 넣고 가능한 한 빨리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차렸다. 그런데,

① 슬기로운 처녀들의 경우는 신랑이 오심에 대비하여 실제적으로 잘 준비된 것을 나타내고 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죽음을 대비하여 잘 준비된 자라고 할지라도 막상 그 때가 임박하였을 때는 실제적으로 준비하기 위하여 할 일이 있다. 이와 같이 준비하는 것은 그들이 "평강 가운데서 발견되며"(벧후 3:14), "하고 있는 것이 발견되며"(마 24:46) 또한 "벌거벗은 것으로 발견되지"(고후 5:3)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 날은 발견하고 찾는 날이 될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로 그 날에 우리가 어떻게 발견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해 준다. 그 날이 다가오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진지하게 우리가 죽는 일을 본격적으로 착수해야만 한다. 즉 죄에 대한 우리의 회개를 새롭게 하며 언약에 대해 동의를 하며, 세상에 대해 작별인사를 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의 영혼은 적당히 숨을  쉬면서 하나님에게로 옮겨져야만 한다.

② 미련한 처녀들의 경우는 헛된 신뢰와 그들의 좋은 지위에 대한 헛된 자만, 그리고 저 세상을 위한 준비에 대해 쓸 데 없는 자부심을 가진 것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허울만 가진 호의들(graces)이 사람으로 하여금 생존시에 그에게 행했던 것처럼 임종하게 될 때에도 겉으로 과시하게 하는 데 소용이 될 이라는 사실이다. 외식하는 자의 소망은 죽음 앞에서 순식간에 숨을 거두게 될 때 번쩍거리게 될 것이다.

(5)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이 모자라 당하게 된 고통(8,9절).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나타낸다.

① 외식하는 자들은 죽는 임박에 이르러서야 자신들의 처지가 비참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눈을 열어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시고 또한 그들이 "자신들의 손에 든 거짓말"로 망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시는 것이다.

② 죽음 저편에서와 심판 때에 그들의 처지가 실제로 비참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아름다우면서도 거짓된 신앙 고백이 심판 날에는 그들에게 아무소용이 없게 될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그들의 등불이 꺼져 버렸다. 

외식하는 자의 등불이 종종 이 세상에서 꺼져버릴 때가 많다. 그것은 영으로 시작한 자가 육신으로 마칠 때이며 또한 외식이 공공연하게 배교하는 때(벧후 2:20)이다. 

신앙고백은 시들어지고, 그 신용도가 상실된다. 희망은 없어지고 그 위로는 사라져 버린다. "악한 자의 촛불"은 이처럼 종종 "꺼져 버리는" 것이다(욥 21:17). 그러나 많은 외식하는 자들은 그의 신용을 유지하며 또한 그의 신앙 고백의 위안도 끝까지 지속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거두워 가실 때"는 어떠한가?(욥 27:8) 만일 그의 촛불이 그 "앞"에서 꺼지지 않는다면 그와 더불어" 꺼질 것이다(욥 18:5, 6). 그는 "슬픔 중에 눕게 될 것이다"(사 50:11). 

외식적인 신앙 고백의 유익들은 심판 때까지 사람을 뒤따르지 않을 것이다(마 22,23). 외식하는 자의 소망이 "거미줄 같으며"(욥 8:11 등) 또한 "기운이 끝침 같으며"(욥 11:20) 압살롬을 상수리나무에 매달고 가버린 그의 노새와 같은 것임이 입증될 때 그 등불은 꺼져 버리는 것이다.

둘째, 그들은 등불이 꺼졌을 때 거기에 기름을 넣으려고 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참된 은혜를 모자라게 가진 자는 언젠가 그 부족을 느끼게 되리라는 사실이다. 

평판이 잘 나 있는 신앙 고백은 사람을 멀리 데리고 갈 수는 있지만 속으로 꿰뚫고 데리고 갈 수는 없다. 그것은 이 세상에 있을 때 그를 비출 수 있지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의 습기가 그것을 꺼 버릴 것이다.

셋째, 그들은 자기들의 그릇에 기름을 채우기 위하여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신세를 지려고 하였다.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 육적인 외식가들이 참된 기독자의 상태로 발견되기를 원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사실이다. 

현재 종교의 엄격성을 싫어하는 자들도 죽음과 심판 때에는 그것의 확고한 위로를 소원하게 될 것이다. 외로운 자의 생활을 하지 않은 자들도 외로운 자의 죽음을 맛보려고 할 것이다. 지금 겸손하고 헌신적인 성도들을 멸시하는 자들이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며 또한 지금 "개들"처럼 여기고 있는 그들을 가장 좋은 친구와 은혜자로 여길 때가 올 것이다."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어떤 사람은 이 말을, "우리를 위해 좋게 말해 달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심판자가 각 사람의 참된 성격을 아시는 대 심판날에는 보증인이 필요가 없다. 그들이 "기름을 좀 나눠 달라"고 한 것이 좋지 않은가? 그렇다. 그것은 좋지 않다.

(1) 이 요구는 민감한 필요성에 의해 간청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현재 은혜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자들은 그것이 그들을 구원하며 또한 그들을 거룩케 하고 다스리게 될 때에 그들의 은혜의 필요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2) 그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그들이 때를 맞추어 요구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기름을 주었을 것이다. 시장이 문을 닫았을 때 그것을 살수는 없으며, 소량의 초가 떨어졌을 때 그것을 다시 묶을 수도 없을 것이다.

넷째, 그들은 동료의 기름을 얻으려고 했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들이 이와 같이 선한 사람에게 거절당한 것은 하나님께도 거절당할 것이라는 불길한 징조이다. "슬기로운 자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이 단호한 거절은 원문에는 없지만 번역자가 이를 보충한 것이다. 

이 슬기로운 처녀들은(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이유 없이 강력하게 거절하기보다는 오히려 강력하게 거절하지 않고 이유를 제시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고통 가운데 있는 그들의 이웃들을 도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감히 그 일을 할 수가 없고 또 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해서이다. 

자비는 스스럼없이(at home)발휘되고 있다. 오히려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자는 그들 자신의 은혜(덕)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우리들이 성도들의 교제에 의한 이득을 가지고 있고 또한 타인의 신앙과 기도가 지금 우리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구원받는데 있어서는 우리 자신이 성결케 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게 될 것이다. 

각 사람은 그 자신을 판단할 수 있으며, 따라서 각인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일을 확증하도록"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 날에 그를 분발시킬 수 있는 다른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2. 가장 좋은 은혜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은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가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다. 가장 훌륭한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빌려 올 필요를 느끼지만 어떤 이웃에게도 빌려 줄 것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 

성도들의 공덕과 그 의로움을 전가하는 일에 대해 공상하고 있는 로마 교회는 슬기로운 처녀들이 지혜롭게 그들 자신에게만 충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에는 부족한 기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이 슬기로운 처녀들은 미련한 자들에게 그들의 경솔함을 나무라거나 그들 자신의 예측에 대하여 자만하거나 실망을 주는 제안들을 말함으로써 그들을 괴롭게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처지를 극복할 수 있는 최선의 충고를 하고 있다. 즉 " 차라리 파는 자에게 가라"고.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자신의 영혼 문제에 있어서 어리석게 처리하는 자들은 모욕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동정을 받게 된다. 누가 그대를 차별하겠는가? 사역자들이 하나님과 그들의 영혼에 대해 관심이 없이 보살피다가 임종시에 깨닫게 될 때 또는 진정한 회개가 결코 늦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고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가라고 명령할 때가 바로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늦은 회개가 진실인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들은 마치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미련한 자들에게 말한 것과 같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을 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들은 그 일이 비록 늦기는 하였지만 그들에게 어떻게 할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행해지기 전에 문이 닫힐지 안 닫힐지는 말하기 어려운 모험일 수밖에 없다. 시간이 있을 때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고 말하는 것은 좋은 충고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은혜를 소유하려고 하는 자는 은혜의 수단에 의지해야만 하며 또한 그것들에 유의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이사야서 55장 1절을 보라.

(6) 신랑이 오는 것과 또한 슬기로운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의 상이한 이 모든 특성들의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①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왔다." 

자신이 해야 할 큰 일들을 마지막까지 미루는 자들이 그 때에 그 일을 하 시간이 없게 될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은혜를 얻는 것은 시간을 요하는 일이며, 서둘러서 얻어질 수는 없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있는 영혼이 병상에서 혼미한 가운데서 회개와 기도를 하는 동안 그는 그것을 어디서 시작하고 마칠 것인가와 맨 처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를 거의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즉시 죽음이 임하고 심판이 임하며, 그 일은 하지 않은 채로 내버려질 것이며 또한 그 가련한 죄인은 영원히 버림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기름을 꼭 태워야 할 때에야 사게 되고 은혜를 꼭 써야 할 때에 그것을 구하게 되는 일이 있게 된다. "신랑은 왔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 주 예수님은 대심판날에 신랑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올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친구들을 대동하고 보무 당당하게 오실 것이다. 지금 신랑이 우리에게서 떠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금식하지만"(마 9:15), 그 때에는 우리가 영원한 잔치석에 앉아 있게 될 것이다. 그 때에 신랑은 "그가 있는 곳"(요 17:24)에 있게 하기 위하여 그의 신부를 데리려 오실 것이며 또한 "그의 신부를 기뻐하게 될"(사 62:5)것이다.

②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영원히 영광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결혼식에 참예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가 계시는 곳에 함께 있는 것이며 또한 영원한 휴식과 즐거움과 풍족한 상태에서 그와 더불어 친밀한 교제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둘째,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위해 예비한 자들, 즉 "이것을 이룬 자"(고후 5:5)들만이 장차 하늘나라에 가게 될 것이다.

셋째, 우리가 항상 준비되어 있다면 죽음이나 또는 그리스도가 갑자기 이른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행복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③ "문은 닫혔다." 

이는 마치 들어오도록 허용된 사람이 다 들어왔을 때 흔히 문을 닫아버리는 것과 같다. 문이 닫힌 것은 안에 있는 자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함이다. 

이제 우리 "하나님의 집에 기둥"이 세워졌으므로, "그들은 결코 다시 나가지 못할 것이다"(계 3:12). 

이 아담은 낙원 속에 두어졌으나 그 문이 열려 있었으므로 다시 밖으로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영화롭게 된 성도가 천국 낙원에 두어지게 될 때 그들은 속에 안전히 보호가 되는 것이다.

둘째, 밖에 있는 자들을 내쫓기 위함이다. 

그때에 성도들과 죄인들의 상태는 돌이킬 수 없이 확정이 되며, 닫혀버림을 당하게 될 자들은 영원히 닫혀짐을 당하게 될 것이다. 지금 그 문은 좁지만 열려 있다. 그러나 그 때에는 닫혀지고 잠기게 될 것이며, "고정된(건널 수 없는) 큰 구렁"(역주:부자와 나사로 비유에 나오는 천국과 지옥의 경계)이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마치 노아가 들어갔을 때 방주의 문이 닫힌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노아는 보존되었지만 그 밖의 모든 사람은 결국 버림을 당하였던 것이다.

④ 미련한 처녀들은 "늦게" 왔다(11절).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왔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첫째, 늦을 때에야 비로소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는 마치 "후에 축복을 물려받으려고 했던" 불경스러운 에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과 종교는 그러한 뒤늦은 간청에 의해 영화롭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죄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얕잡아 보면서 형식상 열렬하고 끈질긴 기도, 즉 "주여, 주여"라고 부르짖는 자들도 그 때에는 형식으로나 위선적으로 그렇게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둘째, 위선자들의 헛된 신뢰는 그들이 기대하던 행복과는 전혀 동떨어진 곳으로 그들을 데려 갈 것이다. 

그들은 천국 문에 들어갈 것을 요구하였지만 그 문은 닫히고 말았다. 훌륭한 지위에 대해 매우 자만하면서 하늘로 올라갔지만, 지옥으로 내쳐짐을 당하였다.

⑤ 그들은 에서처럼 "거절을 당하였다"(12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는 모두 "주님을 찾을 수 있을 때 그를 찾아야만" 된다는 사실이다.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라는 요청이 잘 응답될 수 있는 적당한 시시가 있는데, 이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리 것이다"는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그

러나 지금은 너무 늦은 때이다. 그 선고는 엄숙하게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으로 내려지고 있는데, 이 말씀은 그들이 "결코 그의 처소로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분노 가운데서 맹세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그의 단호한 결심을 나타내며 또한 그들로 하여금 말을 듣고 조용히 하도록 하게 하는 것임을 의미하고 있다.

끝으로, 여기에는 이 비유에서 이끌어낸 실제적인 결론이 있다(13절). 

"그런즉 깨어 있으라." 이 말씀은 전에(마 24:42) 기록이 되어 있었으며 또한 여기에서 가장 필요한 경고로써 반복되어 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우리가 할 큰 의무는 깨어 있는 것이다. 

즉 꾸준히 그리고 주의 깊게 우리의 영혼에 관한 일들을 보살펴야만 낳다. 깨어 있으라. 근신하라.

#2.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할 그럴 만한 이유는 우리 주님이 오시는 시기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노라." 

그러므로 매일 매시마다 우리는 예비해야만 하며 일년 중의 어느 날이나 하루의 어느 시점이라도 주의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매일과 "온종일 주님을 경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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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란트 비유(마 25:14-30)

우리는 여기에서 종 세 사람에게 맡겨진 "달란트"에 대한 비유를 찾아 볼 수 있다. 

앞에 있던 비유는 우리가 기대하는 상황에 있음을 나타내어 준데 비하여 이 비유는 우리가 직무를 가지고 일하는 상황에 있음을 나타내어 준다. 

앞의 비유는 늘 준비해야 할 필요성을 나타내 보여 주었지만, 이 비유는 우리의 현재 일과 봉사에 실제적으로 근면해야 할 필요성을 나타내고 있다. 

앞의 비유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을 위해 잘 행하도록 권고를 받았지만 이 비유에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타인의 선을 위해 애쓸 것을 권고받고 있다.

이 비유에서,

1. "주인"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 그리고 특별한 의미에서 교회의 절대 소유자이시며 경영자이시다. 모든 만물은 그의 손에 넘겨진 바 되었다.

2. 그 "종들"은 기독자들이며, 그 자신의 종들이라고 불리워진다.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집에서 태어나 그의 돈으로 매입되었고 그를 찬양하는 데 전념하며 또한 그의 일에 고용되었다. 

아마 여기에서 의도된 바 종들은 보다 직접적으로 그를 섬기며 그에 의해 파송된 "사역자들"이 아닌가 본다. 사도 바울은 종종 그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르고 있다(딤후 2:24 참조).

우리는 이 비유에 서로 대개 세 가지 일들을 살펴 볼 수 있다.

Ⅰ. 이 종들에게 맡겨진 재산. 

그들의 주인은 "그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겼다." 그들에게 일할 것을 맡기고 난 후(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종들을 빈둥거리게 내버려두지 않으시기 위해) 그들을 떠나셨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그리스도의 종들은 그들의 모든 것을 그로부터 받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아무런 가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죄 이외에도 그들이 소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2.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것은 그를 위하여 우리의 일을 하기 위함이다. 

우리의 특권은 우리로 하여금 일할 것을 찾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성령"이 각 사람에게 "나타난 것"은 "같은 유익을 주기" 위함이다.

3.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사용한 것으로 받은 것은 무엇이든 지간에 그 소유권은 그에게 있다. 

우리는 단지 그의 땅을 관리하는 소작인, 즉 "그의 각종 은사의 청지기"에 불과하다(벧전 4:10). 그러면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어떤 경우에 이 재산이 이 종들에게 맡겨졌는가? 

그 주인은 "먼 타국으로 여행을 떠났다"(엡 4:8 참조). 즉,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람들에게 선물로 그의 재산을 (나누어)주셨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①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 가셨을 때 그는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난" 사람과 같으셨다. 즉 그는 (분명한)목적을 가지시고 잠시 동안 떠나가셨다.

② 그가 가셨을 때 그는 자신이 없을 동안에 교회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시는데 힘을 기울이셨다. 

떠나시는 것 때문에 그는 자신의 교회에 진리들과 율법들, 약속들, 그리고 능력들을 맡기셨다. 이러한 것들은 “부탁한 아름다운 것들”(딤전 6:20; 딤후 1:14 에 있는대로), 즉 우리에게 맡겨진 "좋은 것들"이었다. 

그가 그의 성령을 자기 종들에게 보내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진리들을 가르치고 고백할 수 있도록 하며 또한 그러한 율법들을 간직하고 준수하며 그러한 약속들을 향상시키고 적용시키며 일반적이든 특별적이든간에 능력들을 발휘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자기의 소유를 그의 교회에 맡기셨다.

(2) 이 재산은 어떤 비율로 맡겨졌는가?

① 그는 "달란트"를 맡겼다. 

은(銀) 한 달란트는 우리 나라 돈으로 계산하면 약 353파운드 11실링 10.5페니가 된다. 박식가인 비숍 컴버란드(Bishop Cumberland)는 그렇게 계산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의 은사들은 풍부하고 가치가 있으며 그의 피흘려 사신 물건들은 그 값을 헤아릴 수 없으며 또한 그것들 중의 어느 것도 초라한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② 그는 어떤 사람에게는 더 많이 또 어떤 사람에게는 더 적게 주었다. 

즉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또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또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는데 각자의 재능을 따라 그렇게 주었다. 

신적인 섭리가 마음과 몸, 지위, 친척, 취미에 있어서 그 재능에 차이가 있게 하셨을 때 신적인 은혜는 이에 따라서 영적인 은사들을 분배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재능 자체는 그에게로부터 온다. 

몇 가지로 살펴보자.

첫째, 각 사람은 적어도 한 달란트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것은 처음 장사을 시작하려고 하는 초라한 종에게는 결코 적은 자본이 아니다. 

우리 자신의 한 "영혼"이 "한" 달란트이며, 그것은 우리 각자에게 맡겨져 있다. 또한 그것은 일함으로써 찾아 낼 수 있다. 즉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이 사람이 마땅히 할 의무이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그에게 벅차다고 하면 몇 사람이 함께 하도록 하라. 먼저 그의 친근한 이웃들에게 그렇게 하라. 아니, 또는 최소한 그 자신에게 그렇게 하라.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한 자는 공동적인 선(a common good)을 행하는 자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그러한 일에 자신을 추천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자는 다른 이들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호의로 끝나게 될 그러한 습관을 스스로 연습하고 실행함 통해 그 통로로 쓰임 받도록 헌신함으로써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Seneca de Otio Sapient).

둘째, 모든 사람은 똑같이 가지지 아니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동일한 재능과 기회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신 집행자이시며, 자신이 하시고자 하는 대로 "각 사람에게 제각기 나누어주시는 것이다." 

몸의 지체들처럼 어떤 사람은 이런 봉사를 위해, 또 어떤 사람은 저런 봉사를 위해 선택을 받는다. 주인은 이와 같이 그의 사무를 정리하고 나서 "곧장 여행을 떠났다. "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마치 서둘러 떠나시는 자처럼 그의 사도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나서 하늘나라로 올라 가셨다.

Ⅱ. 이 재산에 대한 상이(相異)한 경영과 발전. 

여기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 볼 수 있다(16 - 18절).

1. 두 종은 매우 잘하였다.

(1) 그들은 부지런하고 충성스러웠다. 

"그들은 바로 가서 장사하였다." 그들은 맡겨진 돈을 그 본래의 의도, 즉 물건을 사는 데 투자하여 다시 그것을 회수하는 것을 위하여 사용하였다. 

그들의 주인이 떠나자마자 그들은 즉각적으로 사업에 착수하였다. 모든 기독자들이 가지고 있는 바 해야 할 수많은 일감들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은 그 일을 지체하지 말고 신속히 시작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바로 가서 장사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참된 기독자는 영적인 장사꾼이라는 사실이다. 

장사는 "비밀"이라고 불리워지는 바, "경건의 비밀은 논쟁할 여지없이 큰"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제조업이다. 우리들이 마음에 행해야 할 것이 있고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해 행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실행하는 재정확충사업이다. 덜 가치 있는 것과 더 가치 있는 것은 분명히 지혜롭게 구별되어야만 한다. 즉 "지혜로 하는 장사"(잠 3:15; 마 13:45)이다.

장사꾼은 먼저 자신이 할 장사를 선택하고 그것을 열심히 배우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을 본업으로 삼으며, 그것을 더욱 확장시키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투자하며, 그 밖의 다른 일들은 다 제쳐두며, 그 소득에 의거하여 살아가는 자이다. 

참된 기독자는 맡겨진 바 그 은사와 직분따라 생명에 관계된 일을 할 때 이와 같이 행한다. 우리에게는 장사할 밑천이 없고 다만 우리 주인이 가진 자본을 가지고 관리인으로서 장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타고난 모든 재능들 즉 이성, 재치, 학식은 종교에 도움이 되도록 사용되어져야만 한다. 

영적 측면에서 말하자면 복음의 규율과 그것들을 경청하는 기회, 성경, 사역자들, 안식일들, 성례식들은 그것들이 제정된 목적을 위하여 향상되어져야만 한다. 그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유지가 되며 또한 성령의 은사와 은혜가 수행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달란트(재능)를 가지고 장사하는 것의 올바른 의미이다.

(2) 투자한 바 그들은 모두 성공하였다. 

그들은 자본을 두 배로 늘렸고 잠시 동안에 계속적으로 돈을 모았다. "다섯 달란트"를 가지고 있었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다. 

우리의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하는 것이 언제나 다른 사람의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하는 것보다 성공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성공적이 될 수 있다(사 49:4). 

여기에서 유의할 것... 부지런한 자의 손은 은혜나 위로, 선행의 보화들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종교적인 열심을 냄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엄청나게 많이 있다. 장사하여 남긴 돈은 받은 돈의 비율대로인 사실에 주의해 보도록 하라.

① 하나님께서는 그가 다섯 달란트를 주신 자들에게서 다섯을 더 남게 할 것을 기대하시며 또한 그가 풍성하게 심은 곳에서 더욱 풍성하게 수확하시기를 원하신다. 

더욱 더 큰 은사를 가진 자일수록 큰 자본을 가지고 운영하는 자들처럼 더욱 큰 수고를 해야만 한다.

② 하나님께서는 그가 두 달란트를 주신 자들에게서는 둘을 더 남기게 되기를 원하시며, 이것은 보다 효용 가치가 낮고 적은 자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 

만일 그들이 자신의 재능과 기회를 최대한으로 살려서 선을 행하는 데 전념하였다면 비록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많은 선행을 하지 못하였을지라도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2. 세 번째 사람은 잘못하였다(18절).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다." 이 비유는 셋 중의 한 사람이 불성실한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지만 이 "비유"에 부합되는 사례를 살펴보면 다른 측면에서 오히려 불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살펴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열 문둥병자가 병고침을 받을" 때에 "열"중의 "아홉" 사람은 감사를 표함없이(달란트를 감추어 두었고!!) "한 사람만이 돌아와 감사를 드렸다"(눅 17:17, 18). [주신 바 선물이나 은혜를 깨닫고 합당하게 반응하며 주께 감사드리는 자는 그 은혜의 간증을 통해 참생명의 공급받음, 곧 선순환의 시너지의 생명수강에 참여케 되리라!!]

한 달란트를 가진 자는 (지레짐작으로!!) 불성실하였다. 그 불성실한 종은 (주인이 외계할 때까지도) "한" 달란트 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물론, 의심할 여지없이 다섯 달란트를 가지고 그것들을 모두 땅에 파묻어 버리는 자도 많이 있다. 훌륭한 재능, 훌륭한 장점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을 가지고 좋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우리들에게 깨닫기 원하시는 것은,

(1) 만일 한 달란트만을 가진 자가 (지레짐작하고 스스로를 제한함으로써)그 하나를 파묻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성실한자로 여겨졌다면, 하물며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을 묻어두는 사람에 대하여는 어떻게 여겨질 것인가 ! 

작은 재능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그가 가진 것으로 마땅히 더욱 발전시켜야 할 것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버림을 당했다고 한다면, "가장 훌륭한 장점들을 발아래 짓밟아" 버리는 자가 받게 될 형벌은 얼마나 비참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2) 하나님을 위하여 해야 할 것을 가장 적게 받은 자는 종종 (그래도 그들에게 맡겨진 바) 그들이 해야 할 일을 가장 적게 한다. 

(한 달란트를 가졌다 하거라도)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봉사하는 기회를 가지고 있는데, 그들이 (스스로 생각하여 지레짐작으로 판단한 바, 충분히)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하지 못한 것은 그들의 게으름에 대한 하나의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고 어떤 사람은 생각한다. 즉 그들은 자기들이 하겠다고(모든 가능성안에서 실은 하나님께서 일단 그렇게 제한하여 맡기신 만큼은 할 수 있기에, 자기 스스로 자기 마음에) 말한 것을 행할 수 있는 자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바를 행하려고 하지 않고 그대로 주저앉아 아무 것도 행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변명을 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보는 것이다. 그들에게 보관하도록 맡겨진 것이 한 달란트 밖에 되지 않을 때(라도) 그 하나를 (주인의 의도따라 활용하지 않고, 그냥 땅에 파묻어) 무시해버리는 것은 실제로 그들의 나태함을 한층 더 드러나게 하였던 것 아닐까... "그는 땅을 파고 그 달란트를 감추어 두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도난 당할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잘못 사용하거나 악용하거나 착복하지 않고 "그것을 감추어 두었다." 돈, 그 자체는 똥거름(나의 스승인 Bacon은 늘 그렇게 말하였다)이어서 쌓아 두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퍼뜨려져야만 한다. 

진실로, 누구에게도 좋은 것이 못되는 "쌓아둔 재물"(약 5:3; 전 6:1, 2)을 해 아래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악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영적인 은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을 주어진 목적대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세상적, 또는 영적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을 경건과 자비의 일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는 자들, 또는 능력과 재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살고 있는 장소에서 그것으로 주님나라와 영적 생명, 기독교의 창성을 도모하지 않는 자들, 재능과 선을 행할 수 있는 자들인데도 그리스도의 일보다는 자신들의 일을 더욱 추구하는 게으른 종들인 것이다.

그는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다. 만약에, 그 자신의 소유로서 그 돈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그는 자신이 기뻐하는 대로 행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능력들과 재능들이 어떤 것이든지간에 그것들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며, 우리는 다만 그것들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우리는 그것들의 소유자이신 우리 주님에게 되돌려 주어야만 한다. 

그의 동료 종들이 부지런히 장사하여 성공하였던 사실은 그의 게으름을 한층 더 드러나게 해 주었기에, 그는 그들의 열심에 자극을 받아서 새로운 각오로 사업해야 함이 마땅하지 안았던가?. 다른 사람들은 활동하는데, 우리는 게으름 피워서 안되지 않을까?

Ⅲ. 이러한 향상(진보)에 대한 계산(19절).

1. 재산의 회계기일은 지체되고 있다. 

그들이 계산을 한 것은 "오랜 후"였다. 그 주인이 자신의 문제를 소홀히 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은 "그의 약속에 더디지"(벧후 3:9) 아니하시다. 아니, 그는 "심판을 예비하고 계시다"(벧전 4:5). 그러나 만사는 그 시간과 순서를 따라 행해져야만 한다.

2. 그러나 계산하는 날은 드디어 오고 만다.

 "그 종들의 주인은 그들과 계산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의 다양한 은혜를 받은 청지기는 머지 않아 "그들의 청지기 직분에 대하여 계산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계산해야만 한다. 즉 우리는 자신의 영혼에 대하여 어떤 선한 일을 행하였는가. 우리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특권들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선한 일을 했는가를 계산해야 한다(롬 14:10, 11 참조). 그런데 여기에서 보면,

(1) 충성된 종의 훌륭한 계산을 여기에서 몇 가지로 살펴 볼 수 있다.

① 그 종들은 "계산을 하면서"(20,22절).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또는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또는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라고 말하였다.

첫째,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들은 자기들에게 맡긴 것을 감사하면서 인정하고 있다. 

"주여, 당신은 내게" 이러 이러한 것들을 "주셨나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에 대하여 특별히 생각(재산)을 하는 것, 즉 그가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또한 소득을 따라 알기 위하여 우리가 받은 것을 기억하며 그 한도내에서 궁구하며 잘 연습하여 실행함으로써 불리는 것은 좋은 일이다.

#2. 우리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언급 없이 우리가 향상(진보)된 것이 자신의 소유를 맡기실 때 우리에게 부여하신 명예나 또는 우리 안에 있고 우리에 의해 행해지는 모든 선의 근원인 은혜라고 여겨서는 결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더욱 일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의 봉사를 위하여 더욱 노력해야만 하는 빚을 지는 셈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은 자신들의 신실함의 증거로써 그들이 얻은 것을 내놓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는 자신의 근면함을 나타내 보이 수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너의 행위로써 너의 믿음을 내게 보이라." 선한 자는 "그것을 나타내 보이라"(약 3:13). 만일 우리가 우리의 영적인 장사에 유의를 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에 의해 드러나게 될 것이며 또한 우리의 행위가 우리를 뒤따르게 될 것이다"(계 14:13). 

성도는 대심판날에 자신의 선행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그들의 선행을 말씀하실 것이다(35절). 그러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곧 충성스럽게 자신의 달란트를 더 많이 번 자는 "그리스도의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될 것이라"(요일 2:28-4:17)는 사실이다. 

주목할 것은 "두" 달란트 밖에 가지지 않은 자도 "다섯" 달란트를 가진 자처럼 즐거움으로 자신의 계산을 했다는 사실이다. 

계산하는 날에 우리는 우리의 효용성이 아닌, 우리의 신실성에 따라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성공이 아닌 우리의 진지성에 따라 또한 우리의 기회의 정도가 아닌, 우리의 마음의 외로움에 따라 위안을 받게 될 것이다.

② 주인은 그들의 계산을 받고 이를 시인함(21, 23절).

첫째, 그는 그들을 칭찬하였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인정함을 받은 자들의 근면과 성실은 정녕코 "그가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이다"(벧전 1:7). 

지금 하나님을 인정하고 영화롭게 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머지 않아 인정하시고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그들의 인간됨이 받아들여질 것이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현재 자기의 종들의 성실성을 알고 계신 그분은 심판날에 그것을 증거 하실 것이다. 충성 되이 발견된 자는 그렇게 불리워지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세상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의로운 자들"이라는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성격대로 "착하고 충성된 자"라고 부르실 것이다.

2. 그들이 행한 것은 받아들여질 것이다. "잘 하였도다." 

그리스도께서는 잘한 자들만을 "착한 종들"이라고 부르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꾸준히 계속적으로 잘 함으로써' 이 영광과 명예를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만일 우리가 구한다면 그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선한 일을 잘한다면 "같은 칭찬"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떤 주인들은 까다롭기 때문에 비록 종들이 일을 잘 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결코 칭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때는 자신의 종됨을 겸손히 살펴서, 주인이)꾸짖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히 여겨야만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잘한 그의 종들을 칭찬하실 것이다. 그들이 사람에게서 칭찬을 받았든지 안 받았든지 간에 그는 칭찬을 하실 것이다. 

또한 만일 우리가 우리 주인에게서 좋은 칭찬을 듣는다면, 우리의 동료들이 그 평가한 바를 우리에게 말한다 해도(다소간 폄훼하더라도) 대수로운 일이 되지 못한다. 

만일 그가 "잘 하였도다"고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행복하며 또한 그 때에 사람들에게 판단 받는 것은 하찮은 일이 될 것이다. 진실로 인정 받는 자는 스스로 자신을 칭찬하거나 이웃이 칭찬하는 자가 아나라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자이다.

둘째, 그는 그들을 보상하신다.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들은 단지 말뿐인 칭찬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그들의 모든 일과 사랑의 수고는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보상은 여기에서 두 가지 방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1. 그 비유에 일치되는 표현에서, 즉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내게 맡기리라." 

낮은 지위에 충성된 자를 높은 지위로 승진시키는 것은 왕궁에서나 고관들의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는 자신의 임무를 잘 수행한 그의 종들을 높이시는 주인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그를 영화롭게 한 자들을 위하여 영예를 쌓아 두고 계시다 ─ 즉 "면류관"(딤후 4:8), "보좌"(계 3:21), "나라"(마 25:34)이다. 

이 세상에서 그들은 거지일지 모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통치자가 될 것이다. 의인은 통치권을 가지게 될 것이요. 그리스도의 종들은 모두가 왕들이다.

그 일한 것과 보상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사하는 일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영광을 받게 될 일은 매우 많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받은 임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 행하는 일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즐거움"에 비한다면 한낮 적은 것에 불과하다. 

우리들의 봉사, 우리들의 모든 고난, 우리들의 모든 진보, 우리들이 남에게 한 선행, 우리들이 자신을 위해 얻은 것들을 모두 합친다 할지라도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너무도 적은 일이며 비교할 가치도 없을 것이요 동일한 것이라고 부르기에도 합당치 않을 것이다.

2. 이 비유에서 벗어나 언급된 다른 표현에서,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축복 받은 자의 상태는 즐거움의 상태이다. 

그 이유는 그때에 모든 눈물이 닦아질 뿐만 아니라 모든 위로의 샘이 그들에게 열리며 즐거움의 샘이 터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환상과 실현, 거룩함의 완전성, 그리고 축복 받은 자의 교제가 있는 곳에 완전한 즐거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2) 이 즐거움은 "그들의 주님의 즐거움"이다. 

즉 주님 자신이 구입하여 그들을 위해 예비하신 즐거움이며, 구속자의 슬픔으로 매입된 구속받은 자의 즐거움이다. 

그것은 주님 자신이 가지신 즐거움이며, 그가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을 때"(히 12:2) 바라보셨던 즐거움이다. 

그것은 주님 자신이 샘이 되시고 중심이 되시는 즐거움이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즐거움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최상의 즐거움이 되시는 "주님 안에 있는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집의 청지기"가 충성스럽기는 하였지만 "그의 상속자"로 삼으려고는 하지 않았다(창 15:3).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충성된 종들을 그와 함께 상속자로서 자신의 즐거움에 참예할 것을 허락하고 계시다.

(3) 영광스럽게 된 성도들은 이 즐거움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 

성년이 되었을 때 재산을 물려받는 상속자와 같이 또한 준비된 자가 혼인식에 들아가는 것 같이 그것들을 완전히 소유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 주님의 즐거움은 성령님의 열심을 통해 성도들에게 미치고 있다. 그러나 머지 않아 그들은 그 즐거움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며 영원히 그 가운데 즐거움이 요소들로 있게 될 것이다.

(2) 게으른 종의 악한 계산.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① 자신에 대한 그의 변명(24, 35절). 

그는 단지 "한" 달란트만을 받았지만, 그 하나에 대하여 회계하도록 소환을 당하였다. 

우리가 받은 것이 적다고 해서 그 사실이 계산에서 제외될 수 있는 구실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아무도 그들이 받은 것 이상으로 계산하도록 소환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자신이 받은 것에 대하여 우리는 계산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첫째, 그는 무엇을 신뢰하고 있는가? 

그는 자신이 구상해 낸 변명을 의지하고 자신 있게 계산하러 오고 있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했던 것만큼 많이 만들지는 못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모자라게 하지는 않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면 칭찬은 듣지 못해도 무사히 지나가게 되리라 생각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많은 사람들이 [ 본질적으로 허망하고 무익한 것이기에 결코 인정받지 못할 것인바]  자기딴에는 그럴듯한 변명의 효력을 믿고 안심하면서 심판을 받으러 간다는 사실이다. 

주님 뜻을 위해  자원하는 순종함으로 기꺼이 일하기를 싫어하고 게을리 하는 신자들도 주님의 진리를 위해 많은 수고를 한 자들과 동일하게 처우받게 되기를 소원한다. ...이와 같이 "게으른 자는 선히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잠 26:16). 

이 종은 그의 생각과 속셈대로 무난히 충분히 잘 통과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심하라..

혹시 (전존재로 그 자신의 어떠함을 드러내고 있는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주여, 나는 내 지위를 남용하지 않았고 내 시간을 헛되이 소비하지 않았으며 내 안식일을 욕되게 하거나 선한 사역자와 좋은 설교를 반대하지도 않았나이다. 주여, 나는 결코 내 성경을 조롱하거나 진리에 도전하는데 전력하거나, 어떤 선한 사람을 박해하는 데 힘을 남용하지 않았나이다. 나는 결코 방탕에 빠지거나 또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들을 술취함이나 탐식에 낭비하지 않았으며, 내 지식이 어떤 사람을 해하지도 않았나이다." 

기독자라고 불리우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친 두려움때문에..실지로는 (게으름의 반영인데도 아닌 것처럼 수동적, 피동적, 제한적 범위와 관점에 매여서, 주님의 어떠하심을 반영하지 않고도] 이러한 변명이 통하리라는 계산을 할 수 있다는 가정에 근거하여 ( 실지로는 명령을 거스림인데도 스스로, 스스럼없이!!) 하늘나라 소망을 유지하려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국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라는 말 밖에는 되지 않는다. 마치 더 이상 요구받을 것도 없고 기대될 것도 없는 것처럼.

둘째, 그는 무엇을 고백하고 있는가? 

그는 자신의 달란트를 묻어 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그는 마치 그것이 큰 잘못이 나닌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는 그것을 안전한 곳에 묻어 두어 위험을 방지한 자신의 지혜로움에 대하여 칭찬을 받을 만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자신들이 심판날에 정죄받고 내어쫓기게 될 일들을 가볍게 여겨버리는 것은 사람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그가 스스로 그것이 분명 잘못이라는 것을 마음에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게으른 종은 심판날에 그것을 얼마나 명확하게 드러날 것인지 이 사실은 나타내고 있다. 거기에서는 증거를 찾을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과 혀가 자신들에 대하여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그는 어떻게 변명을 하고 있는가?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나는 두려워하였나이다." 하나님에 대한 선한 생각은 사랑을 낳고, 그 사랑은 우리를 부지런하고 충성스럽게 만드는 것이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굳은 생각은 (절대 긍정, 절대신뢰, 절대기쁨으로 주님께 자신을 열어드림에서 오는 친밀-지식-교통-누림 없이느, 주님에 대한 오도된 지식은 주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오해와 착각, 그분의 열심과 권능의 공급 흐름을 제한함으로써) 두려움을 낳고, 그 두려움은 우리를 게으르고 불성실하게 만들 것이다.

1. 그의 변명은 적(원수)의 감정을 나타내고 있다.

 "내가 알기로는, 당신은 굳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족속이 말한 것과 꼭 같았다. 즉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겔 18:25). 

이와 같이 그의 변명은 오히려 그의 거침돌이 된다. "사람의 어리석음은 그의 길을 왜곡시키며" 또한 그 때에 마치 그것이 그 일들을 개선할 수 있을 것처럼 "그의 마음이 주님을 향하여 대적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분명히 잘못을 저지른 아담과 같이 범죄를 가리는 짓이다. 아담은 자신이 지은 죄를 "당신이 내게 주신 그 여자"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확신 있게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 보라. "당신은 마음이 굳은 사람인 줄로 내가 알았나이다."  ....그가 그러한 사람인 줄을 그는 어떻게 알 수 있었는가? "너희 열조가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느냐?"(렘 2:5)  ....그가 무엇을 우리에게 행하였으며, 무엇에 우리를 괴롭게 하였는가?(미 6:3) 그는 "우리에게 광야나 암흑의 땅"이셨는가?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세상을 지배하셨으며, 사무엘이 말한, "내가 누구를 속였으며, 누구를 압제하였느냐"는 것보다 더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물으시는 것이다.  .... 온 세상이 그가 굳은 주인이 아니시며, "세상은 그의 선하심으로 가득차 있으며" 또한 그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는 분이 아니심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는 악한 자와 감사치 않은 자에게도 해를 비추게 하기고 비를 내리시며, 그들의 마음을 양식과 즐거움으로 채우시는" 분인데 누가 전능하신 자에게 "우리를 떠나소서"라고 말하겠는가? 

사람들의 이러한 반응이 드러내는 바는 다름이 아니라 그 마음이 사악한 자들이 하나님께 던지는 일반적인 비난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죄와 멸망이 마치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야기된 것으로 여기며 그분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에 불과하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받은 바 일반적인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아] 신실하게 향상시킨 자들의 경우에는 특별히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망하게 되는 일은 결코 없다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부족하다 여겨지면 구하라..그러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뿐 아니라 남긴 것조차 종에게 더하여 주셨다!!]

열매 맺지 않은 포도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오래 참아주심으로써] 하신 것 이상으로 더 합당하게 많은 일을 할 수는 없다.

 기억하라, 하나님께서는 벽돌이나 지푸라기는 분명히 거절하신다.  언약안에서 생명삶위해 필요한 것 그 무엇이든지 이미 언약안에서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망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 때문인 것이다.

2. 그의 변명은 다름아닌 노예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내가 두려워하였나이다."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나쁜 감정은 주께 대한 그의 그릇된 개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노예의 영, 곧 (사랑받는, 열납받는 자녀의 영이 아닌) 노예적인 두려움보다 더 하나님에게 무가치한 것이 없으며, 바로 그것이 주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속박과 고통을 가져오며 또한 위대한 계명이 요구하고 있는 온전한 사랑에 정반대가 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에 대한 굳은 생각(오해, 오도된 이해와 지식)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열정적 사랑의 참된 헌신과 자원함으로 그를 섬기지 못하게 하며 그분의 권능을 제한시켜 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며 또한 그를 섬기는 것이 헛된 것이라고 여기는 자들은 그 누구나 진실로 주님과 주님의 나라, 교회에 합당하고 유효한 일을 전혀 할 수가 없을 것이다.

② 이 변명에 대한 그 주인의 대답. 

그의 변명은 실지로는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주인에 의해 오히려 부정되고 반박받고 있다. 아니 그 변명은 무위에 그치고 그 책벌은 그에게로 되돌아오며 그는 이로 말미암아 말문이 막혀버렸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유죄와 정죄에 대해 살펴 볼 수 있다.

첫째, 그에 대한 유죄 선고(26, 27절).  그는 두 가지 일들로 말미암아 유죄 선고를 받고 있다.

1. 게으름. "악하고 게으른 종아."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게으른 종들은 악한 종들이며, 또한 그들의 주인에 의해 그와 같이 여김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일에 게으르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선한 것을 무시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악을 행함으로써 패가하는 자의 형제가 된다"(잠 18:9). 

하나님의 일을 소홀히 하는 자는 마귀의 일에 분주한 자와 거의 다를 바 없다. satis est mali nihil fecisse boni ─ 즉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책망과 비난을 야기한다. 

대충 생각해 버림으로써 합당한 순서와 일을 빠뜨리거나 생략해 버리는 것은 죄이며, 마땅히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 게으름은 사악의 길을 터 준다. 모든 사람이 "더럽게" 된 것은 "선을 행하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시 14:3). 

방비가 허술한 채로, 게다가 집이 비어 있을 때에  그 방심한 틈을 타서 더러운 영이 들어와 점령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들의 문제에 게으른 자는 단지 게으르기만 할뿐만 아니라 더욱 나쁜 일을 하게 된다(딤전 5:13). 사람들이 잠을 잘 그 때에 원수는 가라지를 뿌리는 법이다. 

[네 마음문에 보혈을 바르라...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 성령께서 네 마음의 영에 충만하여 네 양심의 성분을 주님의 성품으로 조성 변화시키시고 보혈로 날마다 씻기심따라 주님말씀안의 성령과 생명, 곧 말씀의 영광 빛이 비췰 때 온전히 반사되어 비치게 하라. 주님의 무한한 열정적 사랑에 인봉되고 충만케 된 바 그분의 사랑의 통로로 자신을 드리라, JC이름이 바로 불의 방어벽 되심을 생생하게 경험함 통해 매순간 주님을 찬양하라!!]

2. 자가 당착(26, 27절).contradiction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나님에 대한 죄인들의 굳은 생각들은 그릇되고 불의한 것으로써 자신들의 죄악과 게으름을 정당화할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그것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죄악을 더욱 악화시키고 첨가시킬 것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이것을 세 가지 면으로 살펴 볼 수 있다.

(1) "내가 그렇게 굳은 사람이라고 (네가) 생각하였다면, 나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더욱 근면하게 주의를 기울여 일했여야 하지 않았느냐?"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면 "두려워서"라도 그렇게 네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느냐?" 

만일 우리의 하나님이 소멸시키는 불이시라면 그것을 생각해서라도 그를 봉사하는 도리를 찾도록 힘쓰자. 혹은 이 말씀은,

(2) "만일 네가 나를 그렇게 굳은 주인이라고 생각하였다면, 그래서 그것을 도난 당하거나 잃어버릴 것을 두려워하여 돈을 가지고 장사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너는 그것을 취리하는 자나 금세공인(gold-smith)에게 맡기거나 은행에 맡겨 둘 수도 있었을 것이며 내가 돌아올 때(다른 달란트처럼) 장사나 무역을 해서 크게 벌지는 못하였을 것이지만 최소한도로 본전과 변리는 받을 수 있도록 해야만 할 것이 아니냐?" 

아마 이러한 것은 그 당시에 흔히 있던 일들처럼 보이며, 우리 주님께서도 이를 인정하고 계시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만일 우리가 (명령받은대로) 할 수 없거나 감히 할 용기가 없어 하지 못한다면 (주님이름에 합당한 일이 무엇인지 주께 여쭈어 보고)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없거나 용기가 없어 하지 못한 것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될 때 그 변명은 하등의 소용이 없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더욱 어렵고 곤란한 봉사를 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이 우리가 보다 쉽고 안전한 봉사를 하지 않은 것을 정당화시킬 수 있겠는가?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있는 것이 더 낫다. 만일 우리가 대담한 계획들에서 용기를 나타내는 데 실패한다고 할지라도 진지한 노력을 함으로써 우리의 선한 뜻을 입증하는데 실패해서는 안 된다. 우리 주인께서는 "작은 일들의 날을 멸시치 아니하실 것"이다. 또한 이 말씀은,

(3)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너에게 있어서 합당한 일이 못된다. 왜냐하면 나는 너에게 씨를 뿌렸으며, 너에게 보관시키고 더욱 불어나게 하려고 맡겼던 그 달란트는 내 돈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계산하는 날에 사악하고 게으른 종들은 변명할 여지없이 완전히 버림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시시한 변명들은 부정되고 반박당할 것이며 모든 입은 닫히게 될 것이다. 지금 자신의 의로움에 근거하여 서 있는 자들은 장차 스스로 한 마디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둘째, 그의 정죄. 그 게으른 종은,

1. 그의 달란트를 빼앗으라는 책벌과 선고를 받고 있다(28, 29절).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으라." 그 달란트는 맨 처음에 절대 소유자인 주인에 의해 분배되었지만, 지금은 심판자인 그에 의하여 회수되었다. 

그는 그 불신실한 종을 형벌하기 위하여 그에게서 이를 빼앗아, 충성된 종을 보상하기 위하여 그에게 이것을 주고 있다. 이 비유의 의미는 그 판결의 동기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곧 "가진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29절). 이것은,

(1) 이 세상에서의 축복으로 간주할 수 있다.

 즉 세상적인 부귀와 재산으로 여길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맡겨진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함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이러한 목적들을 위하여 사용하는 자는 "더욱 풍족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 재물들을 더욱 풍족하게 가지게 될 것이며, 적어도 그것들이나 더 좋은 일에 있어서 더욱 많은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없는 자," 즉 마치 그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그것들을 사용할 능력이 없거나 그것들을 가지고 선을 행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있는 자들 Avaro deest, tan quod habet, quam quod non habet ─ 즉 비참한 사람은 그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도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빼앗김을 당할 것이다." 솔로몬은 이것을 설명하고 있다(잠 11: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은 우리가 가진 것으로 장사하는 것이며, 그 돌아오는 것은 풍부하게 될 것이다. 통에는 밀가루가 가득하고 항아리에는 기름이 그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탐욕스럽고 인색하며 무자비한 자는 그렇게 얻은 그러한 부귀들이 "재난을 인하여 망하게되는 것"(전 5:13, 14)을 보게 될 것이다. 

종종 하나님의 섭리는 이상하리만치 재산을 가지고 선한 일을 하지 않을 자들에게서 그러한 일을 행하는 자에게로 전환시킨다. 그러나 재물들은 "가난한 사람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저축이 된다"(잠 28:8) (잠 13:22; 욥 27:16; 전 2:26 참조)

(2) 우리는 그것을 은혜의 수단(방편)으로 간주할 수 있다. 

자신들이 가진 기회를 열심히 활용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크게 번성케 하실 것이며, "그들 앞에 열린 문을 두실"것이다(계 3:8). 

반면에 (선행 베풀기를 잊었기에) 자신들의 선행 베푼 날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평화에 속한 일들이 자신들의 눈에는 숨겨져 결코 보이지 않게 됨의 경험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실로에 행하신 것을 가서 보라"(렘 7:12).

(3) 우리는 그것을 성령의 일반적인 은사로써 간주할 수 있다. 

이것들을 가지고 또한 그것으로 선행을 베푸는 자는 더욱 풍족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은사들은 실천함으로써 향상되며, 사용함으로써 더욱 빛나게 된다.  주님말씀 순종함 안에서 우리가 행하면 행할수록 더욱 그렇게 될 것이다. 

자신들 속에 있는 은사들을 활용하지 않거나 자신들의 기능을 따라 노력하지 않는 자들은 그들의 은사가 썩고 쇠하여지며, 방치해 둔 불처럼 꺼져갈 것이다. 자신의 영혼 속에 살아 있는 은혜의 원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은 미련한 처녀들의 등불이 기름이 없어 꺼진 것처럼(8절) 그가 가진 일반적인 은사를 빼앗기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의 품에 느슨하게 포개놓은 "게으른 목자"의 팔은 메말라 버리게 될 것이다. 또한 태만하고 고의적으로 감아버린 그의 눈은 완전히 어둡게 되고 말 것이다(슥 11:17).

2. 그는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도록" 하라는 판결을 받고 있다(30절).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그의 특징은 "무익한 종"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게으르고 무익한 종들, 즉 그들이 세상에 온 목적을 전혀 행하지 않으며, 그들의 출생이나 세례의 목적에 부합되는 일을 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영광이나 타인의 선이나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아무런 봉사도 하지 않는 무익한 종들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게으른 종은 육신 가운데 마비가 된 지체이며, 포도원에 있는 열매 맺지 않는 나무이며, 꿀벌들 중에서 게으름 피우는 수벌이며, 아무 데도 쓸모가 없는 자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무익한 종들"이다(눅 17:10). 주님 없이는 우리는 실지로는 " (스스로 완전 충족하신 분이기에) 하나님께 유익하게 할 수 없다"(욥 22:2).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우리 자신들에게는 우리가 유익한 사람이 될 것이 요구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유익 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의 종으로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저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만으로는 족하지 않다. 우리는 주님 뜻따라 마땅한 선을 행하기를 힘써야만 하며, 생명의 열매, 전도함 통해 영생구원의 열매를 맺어야만 한다. 이렇게 행함으로써 하나님께 유익을 주지는 못하지만 그는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요 15:8).

(2) 그에 대한 판결은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는 것"이다. 

충성된 종에게 말씀하셨을 때와 같이 여기에서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 비유에서 벗어나 그와 의미상 연관된 다른 내용을 언급하고 계시는데 그것은 전체의 내용에 대한 중요한 열쇠가 되고 있다. 

왜냐하면 "바깥 어두운 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설교에서 지옥에서 멸망 받을 자의 비참함에 대하여 흔히 사용하시는 완곡어법이기 때문이다.

① 그들의 처지는 매우 비참하다. 

즉 그것은 바깥 어두운 곳이다. 어두움은 불쾌하고 무서운 곳이다. 그것은 애굽의 재앙 중의 하나였다. 지옥에는 "어두운 구덩이"(벧후 2:4)가 있다. 

어두움 속에서 "사람은 일할 수가 없으며," 게으른 종에게는 매우 알맞는 형벌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바깥" 어두운 곳이다. 

즉 천국의 빛에서 "바깥," 충성된 종들이 들어가도록 적용된 그들의 주인의 즐거움에서 "바깥"이다. 다시 말하면 잔치하는 데서 "바깥"이다(마 8:12; 22:13 비교).

② 그들의 처지는 매우 슬프다. 

거기에는 큰 슬픔을 나타내는 "우는 것"과 분노와 성냄을 나타내는 "이를 갊"이 있다. 이것은 게으른 종의 분깃(차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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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심판의 진행 과정(마 25:31-46)

우리는 여기에서 대 심판날에 있을 마지막 심판의 진행 과정에 대한 묘사를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상징적인 몇 개의 구절들이 있다. 즉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이나 또는 심판하는 자와 심판받는 자 사이의 대화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일관하여 이어지고 있는 비유의 실마리(즐거리)가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비유라기보다는 마지막 심판의 설계나 윤곽이라고 불리우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앞의 비유들에 대한 결론적 설명이다. 

또한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찾아 볼 수 있다.

Ⅰ. 심판자가 심판의 자리에 앉음(31절). "인자가 올 때" 

여기에서 몇 가지로 살펴보면,

1. 영원한 복음의 규율에 의해 심판 받게 될 것이다.

고난과 시련의 이 세상에서 그가 행하였던 것을 따라 보상과 보응이 결정되며, 세상에서 각 사람이 영원한 행복이나 비참의 상태에로 판결을 받게 될 심판이 장차 있게 될 것이다.

2. 그 날의 심판 집행은 인자에게 위임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 의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며(행 17:31), 또한 모든 심판이 그에게 위임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날의 심판은 모든 것들 중의 중심이다. 

여기에서도 다른 곳에서와 같이 마지막 심판에 대해 언급이 될 때 그리스도는 "인자"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의 자녀들(인자들)을 심판하기 때문이며(그 자신이 동일한 성품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더욱 완전하게 심판하실 수 있으시다), 

또한 우리 자신의 형상을 취하시고 인자가 되신 그의 놀라운 비하(卑下)가 그날의 그의 승귀와 또한 인간의 성품을 입으신 영광에 의해 보상될 것이다.

3.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출현은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아그립바와 버니게는 "큰 위엄"을 갖추고 심판석에 왔었다(행 25:23). 그러나 그리스도의 위엄은 (원어대로 하면 "큰 환상"이었다) 그 무엇보다 클 것인바, 참된 영광으로 심판 자리에 오실 것이다. 

의의 태양은 그 때에 절정의 영광 가운데서 비추게 될 것이며 또한 지상의 왕 중의 왕은 그의 영광스러운 나라의 부요함과 그의 탁월하신 위엄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며 모든 세상은 성도들이 지금 믿고 있는 바 즉 그는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시라는 사실을 직접 보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그의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서 오실 뿐만 아니라 중보자로서 그 자신의 영광 가운데서 오실 것이다. 비록 그의 초림은 불분명한 검은 구름 아래에서 있었지만 그의 재림은 영광의 밝은 구름 가운데서 있을 것이다. 

기억하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미래 영광에 대해 제자들에게 불어 넣어주셨던 확신은 십자가의 장해물을 제거하는 데 또한 다가오는 치욕과 고난을 극복하는 데  그 무엇보다도 큰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그의 영광 가운데 오실 때 그는 그의 모든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실 것이다. 

이 영광스러운 인격(그리스도)은 수행원이 될 뿐만 아니라 공의의 집행자들인 영광스러운 종자(從者), 즉 그의 수만의 거룩한 자(역주:유 14 참조)를 거느리고 있는 바, 그들은 의식과 봉사를 위해 주님과 함께 올 것이다. 

그들은 법정을 소집하며(살전 4:16), 선택한 자를 모으며(마 24:31), 가라지를 묶으며(마 13:4)), 성도의 영광의 증거가 되며(눅 12:8) 또한 죄인의 불행의 증거가 되기 위하여(계 14:10) 반드시 와야만 한다.

5. 주님께서는 그 때에 그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그는 "지금" 아버지와 함께 그의 하늘보좌 위에 앉아 있다. 

그것은 우리가 담대히 나갈 수 있는 은혜의 보좌이다. 또한 그것은 통치의 보좌이며 그의 조상 다윗의 보좌이다. 그는 그 보좌 위에 앉은 제사장이다. 

그러나 심판하시는 날 "그 때에" 그는 영광의 보좌, 즉 심판의 보좌 위에 앉을 것이다. 

솔로몬의 보좌는 다른 어떤 왕국에도 그러한 보좌는 없었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비하면 거름더미에 지나지 않는다(단 7:9, 10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육체 가운데 계셨을 때 재판장에서 죄수와 같이 심문을 받으셨다. 그러나 재림하실 때 그는 재판장과 같이 보좌에 앉으실 것이다.

Ⅱ. 사람들의 모든 자녀들이 그 앞에 나타남(32절).

 "모든 민족들이 그 앞에 모이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 날의 심판은 보편적인 심판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법정에 반드시 출두해야만 한다. 

태초로부터 세상 끝 날까지 각 시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먼 구석에 있거나 가장 불분명하고 먼 거리에 있는 각처의 사람들, 지구 표면에 살고 있는 한 혈통으로 된 모든 민족들이 그 앞에 소환될 것이다.

Ⅲ. 그 때에 고귀한 자와 사악한 자 사이에 있게 될 구분. 

그는 가라지와 밀이 추수 때에 구별되듯이,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해안가에서 가려지듯이 알곡과 쭉정이가 타작 마당에서 구분되듯이 "각각 구별하실 것이다." 

사악한 자와 경건한 자가 같은 나라, 같은 도시, 같은 교회, 같은 가정에서 함께 모여 살고 있지만, 그들 사이를 분명히 구분할 수는 없다. 이것이 성도들의 연약성을 야기하고 있으며, 죄인들의 외식의 원인이 되고 있다. 두 가지가 하나 속에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 날에 그들은 분명하게 구별될 것이며 영원히 나뉠 것이다.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말 3:18). 

그들은 스스로 이 세상에서 각 사람을 구별할 수는 없으며(고전 5:10), 또 어떤 사람도 그들을 구별할 수가 없다(마 13:29).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속한 자를 아시며 또한 그들을 구분하실 수 있다. 

이 구분은 매우 정확하기 때문에 가장 하찮은 성도라 할지라도 죄인들의 무리 속으로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가장 그럴 듯한 죄인도 성도들의 무리 속에 숨지 못할 것이다(시 1:5). 각 사람은 그 자신의 위치로 가게 될 것이다. 

이것은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별하는 것에 비교되고 있다. 즉 "보라, 내가 양과 양 사이에 심판하노라"(겔 34:27).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목자이시다. 

그는 지금 목자와 같이 그의 양떼를 먹이고 계신다. 그러나 그는 머지 않아 라반이 자기 양떼와 야곱의 양떼를 구별하고 그 사이를 사흘길이 뜨게 하였던 것(창 30:35, 36)처럼 자신에게 속한 것과 속하지 않은 것 사이를 구별하실 것이다.

2. 경건한 자는 양과 같다. 

즉 순진하고 유순하고 참을성이 있고 유용하다. 사악한 자는 그 격이 저급한 염소처럼 맛도 좋지 못하고 제멋대로 행동한다. 

양과 염소는 이 세상에서 하루종일 같은 목장에서 양육되지만 저녁에는 서로 다른 우리로 분리시켜 집어넣는다. 

이와 같이 나눈 다음에 그는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그 왼편에" 둘 것이다(33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오른편에 앉은 자들에게 존경을 나타내듯이 경건한 자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사악한 자는 영원한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단 12:2). 

그는 부자를 오른편에, 가난한 자를 왼편에 둘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또한 학식 있고 고상한 사람은 오른편에, 무식하고 멸시받는 자는 왼편에 둘 것이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다만, 경건한 자는 오른편에 사악한 자는 왼편에 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구분들과 소구분들은 그 때에 모두 폐지될 것이다. 성도와 죄인, 깨끗한 자와 불결한 자의 큰 구분만이 영원히 남게 될 것이며, 또한 사람들의 영원한 상태가 그것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사악한 자는 왼편손으로(left-handed, 의심스러운, 애매한)축복과 부귀, 명예를 취하였는 바 그들의 운명도 그와 같이 될 것이다.

Ⅳ. 각자의 이러한 심판에 대한 진행 과정.

1. 오른편에 있는 경건한 자에 관하여 그들에 대한 재판 심리가 맨 처음에 신속히 처리되고 있다.

그 까닭은 그들로 하여금 사악한 자가 심판을 받을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역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때에 사악한 자들은 하늘나라로 먼저 들어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보면서 더욱 비참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눅 13:28).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오른편의 경건한 자, 그들에게 주어진 "영광." 

즉 그들이 면제를 받을 뿐만 아니라 높임을 받고 보상을 받게 될 판결(34절). "그 임금이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목자(이것은 그가 온유하고 세심하게 보살피는 것을 나타낸다)이신 그가 여기에서는 임금(이것은 그가 판결을 내리실 때의 권위를 나타낸다)이시다. 

이 임금이란 말이 있는 곳에 권세가 있다. 이 선하심에는 두 가지 일들이 포함되어 있다.

① 성도들은 주님의 축복 받은 자로 인정됨.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오라."

첫째, 그는 그들에게 복 받을 자임을 선고하고 있다. 

그가 그들에게 복 받을 자라고 말한 것은 그대로 된다. 율법은 그들의 많은 페이지에 그들을 저주하는 말이 가득 담겨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하고 그들을 위해 축복을 매입하셨으므로 그들에게 축복을 명령하고 계시다.

둘째, "그의 아버지께 복 받을 자." 

그들은 세상에서는 비록 환난, 비난을 받고 저주를 받고 비참을 겪었지만 하나님께는 축복을 받은 자들이다, 

성령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처럼(요 16:14), 아들은 성도들의 구원을 제 1원인이신 아버지에게 일임하심으로써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고 계시다. 

하늘에 속한 것들 안에 있는 모든 축복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흘러나온다(엡 1:3).

셋째, 그는 그들을 "나아 오라"고 부르고 있다. 

실제적으로 이 "오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을 나타낸다. 즉 "내 아버지의 축복에로 어서 오라. 진심으로 환영하여 마지 않는다. 나에게 오라, 영원토록 나와 함께 있기 위하여 오라. 십자가를 참고 나를 따른 너희들아, 나와 함께 면류관을 쓰기 위하여 나아 오라.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는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내 영혼의 사랑을 받는 자이다. 이제 오라. 내 가슴속으로 오라 !" 

오, 이 말씀은 그 날에 성도들의 가슴을 얼마나 기쁨으로 채울 것인가 ! 우리는 지금 은혜의 보좌에로 담대히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영광의 보좌로 담대히 나갈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나라의 절반을 요구할지라도 그 이상으로 줄 것임을 확신으로써 황금으로 된 홀(忽)을 내어 주고 있다. 

이제 성령께서는 말씀 가운데서 "오라"고 하신다. 신부는 기도 가운데서 "오소서"라고 말한다. 

그 결과로 아름다운 교체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행복의 완성은 "그 임금이 나아 오라"고 말할 때 있게 될 것이다.

② 성도들이 아버지의 축복과 나라에로 들어오라는 허락을 받음.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첫째, 그들이 소유하게 될 행복은 매우 크다(부요하다).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그들을 위하여 이러한 행복을 구입하셨고 또한 그 자신이 그것을 소유하고 있으시기 때문이다.

1. 그것은 "나라"이다. 

이것은 지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소유물로 간주되어지며, 가장 큰 부귀와 명예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나라들을 상속받는 자들은 면류관의 모든 영광들을 지니게 되며, 왕궁의 모든 연락을 즐기며, 왕의 특별한 보물 창고들을 관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천국에서 성도들의 더 없는 행복에 대한 희미한 묘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만물의 찌꺼기로 여김을 받은 바, 거지들이나 죄수였던 자들은 그 때에 나라들을 상속받게 될 것이다(시 113:7; 계 2:26, 27).

2. 그것은 "예비 된" 나라이다. 

그 행복은 매우 큰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적인 섭리의 소산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영광의 나라에서 성도들의 환영을 위하여 큰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는 오직 기뻐하심과 사랑하는 생각으로 그들을 위하여 그것을 계획하셨으며, 또한 크신 지혜와 능력으로써 그들을 위해 그것을 준비하셨다. 

아들은 그들을 위해 그것을 구입하셨고, 있는 곳을 예비하시기 위하여 선구자로서 들어가셨다(요 14:2). 

나라를 위해 그들을 예비하고 계신 성령은 실제로 그들을 위해 그것을 준비하고 계시다.

3. 그 나라는 "그들을 위해"예비 되고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나타내고 있다.

(1) 이 행복의 적합성. 

그 행복은 모든 점에 있어서 영혼의 본질적 성품에(본래 하나님의 어떠하심 빼어닮음!!) 매우 어울리는 적합한 것이며 또한 성화된 영혼의 새로운 성품에도 매우 적합한 것이다.

(2) 그것들의 고유성과 그것들에 대한 권리. 

그 나라는 그들만을 위하여 예비 되고 있다. 성령이 말씀하신다.!!

"당신들과 같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내 이름으로 말미암은 당신들 개인적으로 또는 특별히 당신들만을, 성화를 통하여 구원에로 선택된 당신들만을 위하여 예비되고 있다."

4. 그 나라는 "창세로부터" 예비 되고 있다. 

이 행복은 성도들을 위하여 계획되었으며, 또한 그들의 시간이 시작하기 전, 즉 영원전부터 그 행복을 위해 예비되었다(엡 1:4). 

마지막에 있게 될 것도 모두 맨 처음에 의도되었다. 

무한하신 지혜(하나님)는 처음 창조될 때부터 성도들의 영원한 영화에 목표를 두었다. "모든 것은 너희를 위함이다"(고후 4:15). 

또한 그것은 이 행복의 거주지에 대한 준비를 나타내고 있는데, 이 거주지는 창조 사역(창 1:1)의 맨 시초에 있어서 축복 받은 자의 거할 장소였다. 

땅의 기초가 확정되었을 그 때 하늘에서는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욥 1:4-7).

둘째, 그들이 가지게 될 소유권은 매우 좋은 것이며, 그들은 와서 "그것을 상속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상속을 받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어떤 주선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순전히 "하나님의 행위에 의거해서이다." 

하늘의 상속자로 만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우리의 양자 됨을 인하여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이다." 

상속이라는 칭호는 가장 아름답고 확실한 칭호이다. 그것은 가나안 땅을 소유할 것을 암시하고 있는데, 그 땅은 상속에 의해 물려받았으며 50년전(the year of jubilee)보다 더 이상, 더 오랜 후에 양도되지는 않을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성도들은 아버지(하나님)의 정한 때까지 지도를 받고 지배받는 이 시대에 국한된 상속자에 불과하다(갈 4:1, 2). 

그 때에 그들은 지금은 은혜로 말미암아 명칭만을 가지고 있는 것을 완전히 소유하게 될 것이다. "나아 오라." 그리고 그것을 상속받으라.

(2) 이러한 영광의 근거(35, 36절). 

"이는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적인 가치나 탁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선행의 공로로 말미암아 천국의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추정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에게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세상을 지배하시는 동일한 규칙에 의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며, 따라서 그 율법에 순종하는 자들을 보상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의 순종이 단지 한 명복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한 증거로서 언급이 될 것이다. 

이러한 행복은 순종하는 신자들에게 선고가 내려질 것인데 이는 행위와 보상 사이의 균형을 예상하는 quantum meruit ─ 즉 공로의 평가에 의거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입된 하나님의 약속과 또한 확실한 조건과 기한에 의해 보장된 그 약속의 은혜에 의거해서이다. 

구입과 약속으로 명칭이 주어졌지만,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순종이다. 

조건에 의거하여 행위나 유언에 의한 재산권을 그 조건이 수여자의 참 의도대로 수행될 때에 절대적이 된다. 

또한 그때에 그 명칭이 순전히 행위나 유언에 의거하여 설정되었다 하더라도 그 조건을 수행한 것이 증거로 제시되어야만 한다. 

여기에서도 그와 같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를 순종하고 계속적으로 선한 일을 수행하는 자들에게만 영원한 구원의 창시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언급된 선행은 우리가 흔히 일컫는 가난한 자에 대한 자선 행위와 같은 것이다. 즉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히지 않은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품으로써 그렇게 한 자들이다. 

성실한 순종의 한 실례는 다른 나머지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은 일반적으로 역사 하는 믿음이 기독교에서 모든 것들 중의 모든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궁극적인] 네 믿음을 네 행위로 내게 보이라." 

장차 선한 것으로 간주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현재 선한 교제에서 맺어지는 의의 열매는 큰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여기에 묘사된 선행들은 세 가지 일들을 내포하고 있는데, 그것은 모든 구원받은 자들 가운데서 발견되어야만 한다.

① 자기 부정과 세상에 대한 별시. 

세상에 대해 선행을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훌륭한 일은 이 세상에 없다. 

선행을 베풀 수 있는 자금(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가난한 것에 자족하고 즐겁게 여김으로써 그와 동일한 의향을 나타내어야만 한다.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다.

② 우리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 

이것은 두 번째 큰 계명이며, 율법의 완성이며, 영원한 사랑의 세계를 위한 특별한 준비물이다. 

우리는 선을 행하고 나누어줌으로써 이 사랑을 증거 해야만 한다. 

좋은 바램(역주:타인에게 말로만 하는 선행)은 사랑이 없는 조롱거리에 지나지 않는다(약 2:15, 16; 요일 3:17). 

줄 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다른 방법으로 동일한 의향을 나타내 보여야만 한다.

③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가짐. 

여기에서는 그리스도를 인하여, 그를 사랑하고 목표를 둠으로써 가난한 자를 도와주는 것에 대하여 보상이 주어지고 있다. 

"이러한 것"은 특별히 선행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그러한 일을 하게 될 때 우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일을 행하는 자들은 자신의 생계를 위한 일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살아나가도록 돕는 일들도 할 수 있을 것이다(엡 6:5-7). 

그러한 선행들은 그 때에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골 3:17).

"내가 주렸었다." 즉 내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선행을 함으로 원수들의 핍박을 받거나 또는 하나님의 섭리의 일반적인 통치로 말미암아 그렇게 주렸었다. 

이러한 일들에는 의인에게나 악인들에게 있어야 할 단 한가지 경우가 있다. 그런데 너희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하나님의 섭리는 이 세상에서 그의 백성들의 형편을 여러 가지고 배치하시고 처리하신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이 위안을 줄 수 있는 상태에 있다면 어떤 사람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하늘나라의 진수성찬으로 먹는 자들에게 있어서 주리고 목마르게 되며 일용할 양식이 모자라게 되는 것은 별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집에 있는 자가 낯선 나라에서 나그네가 되거나 그리스도를 옷 입은 자가 자신의 몸을 따뜻하게 해 줄 옷이 없다는 것이나 또 다 건강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자가 병든 몸을 가지고 있거나 그리스도께서 자유롭게 하신 자가 감옥에 있는 것도 결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둘째, 우리의 능력에 따라 자비와 자선을 베푸는 것은 구원에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그 날의 심판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보다 더 큰 강조가 그것들에게 주어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우리의 순종의 증거가 되어야만 한다(고후 9:13). 

그러나 긍휼을 나타내 보이지 않는 자들은 긍휼없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는 겸손하게 의로운 자들에 의해 인정되고 있으며, 재판장 자신에 의해 설명되고 있다.

1. 그것은 의로운 자들에 의해 의문시되고 있다(37-39절). 

이것은 그들이 나라를 상속받기를 싫어하거나 또는 그들의 선한 행위들에 대하여 부끄러워하거나 또는 그것들에 관한 자신들의 양심의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다.

(1) 이 표현들은 상징적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자비의 선행들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으며, 특히 그를 인하여 자신의 백성들에게 행해진 선행에 대해 기뻐하신다는 이러한 위대한 진리들을 소개하고 강조하기 위하여 언급되었다. 또는,

(2) 그것들은 영화롭게 된 성도들이 가지게 될 겸손한 찬탄을 나타내는 데 그들은 자신들이 보잘 것 없고 무가치한 자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더욱 높이 칭송을 받으며 또한 풍성하게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나이까?" 

여기에서 유의할 것... 은혜스러운 영혼들은 쉽사리 자신의 선한 행위들에 대하여 비천하게 생각하며, 특히 장차 계시될 영광과 비교할 때 무가치한 자로 여길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뇨?"(사 58:3)라고 말했던 자들의 성격과는 얼마나 먼 것일까? 

천국에 있는 성도들은 무엇이 그들을 이리로 데려 왔는가와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과 그들의 봉사에 대해 그렇게 유의하셨는가를 이상히 여길 것이다. 

나다나엘은 주님에게서 칭찬의 말씀을 듣게 될 때에 얼굴을 붉혔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요 1:47, 48) 

"우리가 어느 때에 주님의 주리신 것을 보았나이까? 우리는 여러 번 고통 중에 있는 가난한 자를 본 일은 있습니다만, 그러나 우리가 언제 당신을 보았나이까?..."(엡 3:20)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계시리라고 우리가 생각하는 곳에 있지 아니하시고 일상에서 우리들 가운데 더 많이 계시다는 사실이다. 

분명히 주님은 그의 말씀과 규율, 사역자들, 그의 성령 또한 그의 가난한 자들에 의해 그들과 함께, 그들안에서 지금 이 곳에 계시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8)

2. 그것은 심판자 자신에 의해 설명되고 있다(40절). 

이 소자, 그들 중 가장 작은 소자, 즉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성도들의 선행들은 그들이 심판날에 나타날 때,

(1) 모든 기억된 바가 될 것이다. 

가장 작은 것, 가장 작은 것 중의 하나라도 간과되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 냉수 한 그릇도 간과되지 않을 것이다.

(2) 그러한 선행들은 그들의 장점으로 간주될 것이며 또한 그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최고의 의미로 해석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연약함을 잘 활용하시듯이 그들의 봉사를 최대한으로 활용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린 자를 먹인 자들과 벗은 자를 입힌 자들에 대하여 어떤 보상을 하셨는가를 여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면 그렇게 행할 자금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건하면서도 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은 버림을 받아야만 하는가? 아니다.

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나 그들 중 가장 작은 자들까지도 그의 형제로 인정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시는 것"(히 2:11)을 수치스럽게 여기거나 망신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영광의 절정에 계실 때 그의 보잘 것 없는 친구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나사로는 친구로서, 형제로서 그의 가슴에 안기었다. 

이와 같이 그는 그들을 시인하실 것이다(마 10:32).

② 그는 그들에게 행해진 긍휼을 그 자신에게 행해진 것으로 여기실 것이다. 

"그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그리스도는 그들을 구제한 부자에게 대함 같이 구제 받은 가난한 자에게 대해서도 동일한 존경을 나타내고 있으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형현과 일상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일을 행하는 그의 백성들의 주장을 지지하시며 또한 그들의 형편에 관심을 가지시며, 그들의 형편을 살펴 재물로 공궤하는 자들을 또한 그 자신이 그들에게서 사랑을 받으시고 인정을 받으신 것으로 여기신다(주님 스스로 꾼 것으로 여기신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리스도 자신이 가난하게 우리들 가운데 계셨다면, 얼마나 우리는 쉽사리 그를 구제할 수 있었을 것인가? 개인적으로 우리는 얼마나 종종 그를 방문할 것인가? 

우리는 자신들의 소유로 그를 섬긴 자들이 가진 명예를 부러워해야만 한다(눅 8:3). 

불쌍한 성도들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가운데서 우리의 자비를 받으실 준비를 하고 계시며, 또한 그들은 그의 여기심을 받게 될 것이다.

2. 여기에는 왼편에 있는 사악한 자들에 관한 진행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그들에게 내려진 선고(41절). 

왼편에 두어진 것은 불명예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는 그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라." 각 말마다 시내산의 2나팔소리와 같이 그 속에 두려움이 있는데, 그것이 커질수록 그 정도는 더욱 비참하게 되고 또한 위로도 없게 되는 것이다.

① 그리스도에게 보다 가까이 있다면, 비록 그의 분노 아래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느 정도 안심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허락이 되지 않고 "나를 떠나라"고 하실 것이다. 이 세상에서 그들은 종종 그리스도에게로 생명과 휴식을 위해 오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부르심에 대해 귀머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로 오려고 하지 않은 자들이 그에게서 떠나라는 명령을 받게 될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모든 선의 근원인 나에게서, 구세주인 나에게서, 그러므로 모든 소망으로부터 떠나라. 나는 너와 더 할 말이 없으며 또한 상대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이 세상에서 그들은 전능하신 자에게 "우리를 떠나소서"라고 말하였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그는 "그들의 허황 된 말을 골라내어" 그들에게 "나를 떠나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이 지옥 중의 지옥이라는 사실이다.

②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떠나야 한다면 그들은 축복의 말이나 적어도 친절하고 동정 어린 말 한 마디를 듣고 해고를 당해야만 하지 않을까? 

아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라"는 말을 들었다. 축복을 상속받기 위하여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려고 하지 않은 자들은 율법을 깨뜨린 저주의 멍에를 지고(갈 3:10) 그를 떠나야만 한다. "그들이 저주를 사랑하였으므로 그와 같이 저주도 그들에게 임할 것이다. 

그러나 의인들은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축복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축복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단지 "저주를 받은 자"라고만 불리워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정죄는 그들 스스로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배반하셨는가? 아니다. 그들이 스스로 배반하였고 저주를 자청하였다(사 50:1).

③ 만일 그들이 저주를 받고 떠나야만 한다면 안락과 휴식의 장소로 들어갈 수 없는가? 

자신들이 버림받은 것을 슬퍼하는 것으로도 그들은 충분히 비참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다. 잃어버림을 당할 뿐만 아니라 감각적인 형벌로 받아야만 한다. 즉 그들은 "불"속으로, 즉 몸이 불에 대이는 것만큼 큰 고통과 그보다 더 큰 고통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이 불은 자신을 땔감으로 만든 범죄한 영혼들과 죄인들의 양심에 대해 고정적으로 예비 된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죄인들은 즉각적으로 그의 손에 떨어진다(히 10:31; 롬 2:8, 9).

④ 만일 불 속으로 들어간다면 그것은 어떤 불빛이나 온화한 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다. 그것은 "예비된 불"이다. 그것은 "이미 설립된"(사 30:33) 고통이다. 죄인들의 정죄는 종종 신적인 능력의 행동이라고 언급이 된다. "그는 지옥으로 내던지실 수 있다." 진노의 그릇으로써 그는 자신의 능력을 알게 하신다. 그것은 "주님의 임재와 그의 능력의 영광으로부터의 파멸"이다. 분노하신 하나님께서 성을 내는 피조물을 어떻게 비참케 하실 수 있는가를 거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⑤ 만일 예비 된 불 속으로 들어간다면 그 지속 기간을 짧게 하든지 단지 "불"속으로만 통과하도록 했으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은 "영원한" 불이 될 것이다. 영혼들을 영원히 붙잡아 두고 삼키는 불은 연료가 부족해서 꺼지지는 않는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불붙여지고 불태워지기 때문에 바람을 더 불어 넣지 않아도 꺼지지는 않는다. 자비와 은혜의 시냇물은 영원히 그 곳으로부터 제외되기 때문에 그것을 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물 한 방울이 혀를 서늘케 하도록 해달하는 요구에 거절되었다고 한다면 물 한 바가지도 이 불을 끄는 데 허락이 되지 않을 것이다.

⑥ 만일 그들이 이러한 영원히 비참한 상태에로 판결이 내려져야만 한다면 거기에서 몇몇 좋은 친구들이 있지 않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을 이 불행 가운데로 데려 오는 데 조력한 그들의 불구대천지 원수들, 즉 "마귀와 그 사자들"밖에는 아무도 없으며 그 원수들은 거기에서 그들에 대해 승리의 개가를 부를 것이다. 

그들은 살아 생전에 마귀를 섬겼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섬긴 자들이 그가 계신 곳으로 데려감을 당한 것처럼, 그들이 마귀가 있는 곳에 있도록 판결을 받은 것도 너무도 당연하다. 마귀(귀신)가 출몰하는 집에 누워있는 것은 소름끼치는 일이다. 그 때에 영원히 그들과 함께 친구로 지낸다는 것은 얼마나 더 무서운 일이 될 것인가?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마귀들의 임금, 즉 그 도당들의 주모자가 하나 있으며 또한 그 나머지들은 그의 나라를 지원하는 대행자들 즉 그의 사자들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자들은 그 날에 용과 그의 사자들을 정복하게 될 것이다(계 12:7, 8).

둘째, 그 불은 천국이 의인을 위해 예비 된 것처럼 사악한 자를 위해 원래부터 예비 된 것이 아니라. "마귀와 그의 사자들"을 위해 근본적으로 의도된 것이었다. 만일 죄인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정욕에 빠짐으로써 사탄과 교제하게 된다면 그들은 마귀와 그의 부하들을 위해 예비 된 비참 가운데 참예하게 된 것을 감사하게 될는지 모른다. 칼빈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즉 저주받은 자의 고통은 그것에서 피할 모든 소망을 끊어버리기 위하여 "마귀와 그의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것"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마귀와 그의 사자들은 이미 그 불구덩이에 투옥된 죄수들이다. 그런데 지상의 벌레들이 도망갈 수 있을까?

(2) 이 판결의 이유가 명시됨. 

하나님의 심판들은 모두가 공정하며 또한 그는 그것들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실 것이다. 그는 재판장 자신이시며, 따라서 "하늘들은 그의 의로움을 선포하실 것이다."

① 그 판결이 근거됨. 

...그들에게 해당되는 모든 죄과는 소홀함(태만)이다. 앞부분에서 종이 정죄받은 것이 그가 자신의 달란트를 낭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묻어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는, "내가 주리거나 목마른 것은 너희가 나에게서 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져가 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나그네 된 것은 너희가 나를 추방하였기 때문이며, 벌거벗은 것은 너희가 내 입은 것을 빼앗아 버렸기 때문이며, 내가 감옥에 갇히운 것은 너희가 나를 거기에 집어넣었기 때문이다"라고는 말씀하시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가 이러한 고통 중에 있을 때 너희는 매우 이기적이었고 너희 자신의 안락과 즐거움을 꾀하였으며, 너희 자신을 위해 수고를 많이 하였고 너희 돈을 나누어주기를 싫어하였기 때문에 너희가 마땅히 나에게 구제하고 원조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였다. 너희는 시온에 편안히 있으면서 요셉의 고통을 인하여 슬퍼하지 않았던 그러한 쾌락주의자들과 다를 바 없다"(암 6:4-6)고 말씀하고 계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자선(구제)에 소홀함(태만)은 멸망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이다.

② 그 죄과는 가난한 자에게 자선을 소홀히 한 것이다. 

...그들이 판결을 받은 것은 그들이 희생의 제사나 번제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 아니라(그들은 이러한 일들을 매우 잘 하였다. 시 50:8) 율법의 중한 것들, 즉 "심판, 자비, 신앙"을 소홀히 하였기 때문이다. 

...암몬 족속과 모압 족속은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지를 당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떡과 물로 이스라엘을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신 23:3, 4).

여기에서 유의할 것..., 가난한 자에게 선행을 베풀지 않는 것은 정죄받는 죄라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보상받을 희망을 가지고 선행을 베풀려고 하지 않는다면 형벌을 두려워해서라도 자극을 받아 선행을 베풀도록 하자. 왜냐하면 "긍휼을 나타내 보이지 않는 자는 긍휼 없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그는 "내가 병들었으나 너희는 나를 치료하지 않았다.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너희는 나를 해방시켜 주지 않았다"(아마도 그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이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너희는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다. 이 일은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죄인들이 대 심판날에 정죄를 받게 되는 것은 자신들의 할 수 있는 선행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긍휼을 베풀지 않은 자에 대한 판결이 그렇게도 무서운 것이라고 한다면 하물며 무자비하게 악을 행하는 자, 즉 박해자에 대한 판결은 얼마나 더 비참한 것이 될 것인가 ! 그런데 이 판결의 이유는,

첫째, 죄인들에 의해 거부가 되었다(44절).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을 보지 않았나이까?" 정죄 받은 죄인들은 그를 지지해 주지 못할 변명이나마 공연히 해 볼 것이다. 그런데

1. 그들의 변명의 태도는 자신들의 현재 조급함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은 조급한 사람들처럼 그 이야기를 갑자기 중단시키고 있다.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벗으신 것을 보았나이까?" 

그들은 자신들의 범죄를 깨달아 알고 또한 심판의 두려움을 참을 수 없었으므로 그 죄과를 반복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이러한 시시한 변명을 늘어놓을 시간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우리가 말하는 대로) "재판에 대한 사소한 불평"에 지나지 않는다.

2. 그들의 변명하고 있는 문제는 그들이 마땅히 알아야만 했었지만 너무 늦은 시기인 지금까지도 그것에 대하여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가난한 기독자들을 업신여기고 박해한 자들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업신여기고 박해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그들은 결코 그에게 모욕을 주려고 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렇게 엄청난 결과가 그로 말미암아 초래될 것을 예기치 못하였다. 

그들은 그것이 단지 가난하고 연약하며 어리석으며 멸시하는 백성들에게 한 것이었다고 생각하였으며, 그들은 그러한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에 대하여 무시를 하면서도 종교적으로는 필요 이상으로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러나 그렇게 행하는 자는 바울처럼 그들의 회심하게 되는 날이나 여기에서와 같이 정죄를 받는 날에 그 사람이 '그들이 핍박한 예수"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그들이 "보소서,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하였나이다"라고 말한다고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느냐?"(잠 24:11, 12).

둘째, 심판자에 의해 입증이 된다. 

그는 그에게 속한 모든 자들에게 그들에게 그를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모두 깨닫게 하실 것이다(유 15). 

이 규칙을 평준으로 삼고 있다(45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께서의 신실한 제자들과 추종자들, 심지어 그들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을 그 자신에게 하지 아니한 것으로 여기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들 가운데서 비난을 받고 핍박을 받으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를 인하여 비난과 핍박을 받으셨으며 또한 "그들의 모든 고통 중에서 그가 고통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들을 건드린 자는 그의 부드러운 눈동자를 건드린 것이 된다.

마지막으로 그는 두 사람에 대한 이러한 선고를 수행하고 계시다(46절). 수행(실천)은 율법의 생명이며, 그리스도께서는 판결을 따라 이들을 수행하실 것이다.

1. "사악한 자는 영벌에 들어가리라." 

그 때에 판결은 급속히 수행될 것이며, 집행유예가 내려지거나 심판을 저지할 시간적 여유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악한 자를 처벌하는 것이 맨 처음에 언급되어 있는 것은 먼저 가라지들이 모아져서 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미래에 있어서 악한 자에 대한 형벌은 영원한 형벌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미래의 상태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죄인들이 그들 자신의 성품을 변화시키거나 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은혜의 날이 낭비되고 은혜의 성령이 거부되고 은혜의 방편들이 남용되고 방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은혜를 부여할 것이라는 것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다.

(2) 사악한 자는 그 형벌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들어가지 않고 빛에서부터 어두움 가운데로 끌어내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범죄에 대한 항거할 수 없는 깨달음과 자비에 대한 마지막 체념을 나타내고 있다.

2. "의인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즉, 그들은 "나라를 상속받게 될"것이다.(34절).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천국은 생명이며, 모든 행복이다.

 영혼의 생명은 육신의 생명이 생기들(the animal sprits)에 의하여 영혼과 결합을 이루는 데서 비롯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에 의하여 하나님과의 연합에서부터 비롯된다. 천적(天的)인 생명인 하나님의 환상과 실현, 그에 대한 완전한 일치, 그와의 즉각적인 연속된 교제로 이루어진다.

(2)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다. 

죽는다고 해서 생명 그 자체를 끝마칠 수는 없고 늙는다고 해서 그 생명의 위로나 그것을 괴롭히는 슬픔을 종지부 찍을 수는 없다. 

이와 같이 생명과 죽음, 선과 악, 축복과 저주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데, 이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의 마지막도 그렇게 될 것이다. 이방인들도 저 세상에서의 선과 악의 다른 상태에 대한 어떤 개념을 가지고 있다.

시세로(Cicero)는 그의 『Tusculan Questions, 1권』에서 소크라테스가 한 말을 인용하고 있다.─ 즉 육신을 떠난 사람들 앞에는 두 개의 길이 놓여 있다. 인간의 사악에 물들고 자신들의 정욕에 빠진 자들은 신들의 모임과 회합으로부터 멀리 그들을 안내해 주는 길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육신에 의해 거의 물들지 않고, 육신이 살아 있는 동안 신들을 모방하였던 의롭고 고결한 자들은 그들이 왔었던 숭고한 존재에로 돌아오는 것이 쉽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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