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4.05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행4.베드로와요한(체포구금_공회의재판_석방),교회의합심기도_성령충만따른교회의 흥왕_유무상통의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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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4장

===베드로와 요한이 공회 앞에 서다

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3.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다

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물건을 서로 통용하다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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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장 (개요)

앞의 두 장을 고찰하면서 우리는 사도들이 행한 많은 훌륭한 일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이 그리스도에게 하듯이 제자들을 비난하고 헐뜯지는 않고 있던 것이었다. 

그들은 처음에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너무도 당황해서 한동안 벙어리처럼 되기라도 했었는가! 

그러나 본문에서 우리는 그들이 아주 잠잠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은 다시 기력을 회복한다. 

그리고 본문에서 우리는 그들과 제자들이 마주 대하는 장면을 대하게 된다. 

복음은 그 시작서부터 반대에 직면하였음을 기억하자.

Ⅰ. 제사장들의 체포 명령으로 베드로와 요한이 잡혀 옥에 갇히다(1-4).

Ⅱ. 산헤드린 회의에서 심문을 받음(5-7).

Ⅲ. 제자들은 용감하게 그르이 행한 일을 공언하고 그들의 박해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한다(8-12).

Ⅳ. 할 말을 잃은 박해자들은 그들을 말 못하게 막고 그들이 다시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협박하고 내보낸다(13-22).

Ⅴ. 제자들은 그들이 경험하였던 은총이 더욱 역사하기를 하나님께 간구한다(23-30).

Ⅵ. 하나님께서는 그가 그들과 함께 하심을 명백히 나타내시므로 그들은 인정하신다(31-33).

Ⅶ. 믿는 자들은 거룩한 사랑으로 마음이 하나가 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여 교회는 더욱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넘친다(3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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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심문을 받음(행 4:1-4)

Ⅰ.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계속하여 사명을 행하였고 그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성령은 목회자와 평신도에게 각각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1. 복음의 전파자인 사도들은 열심히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그들은" 백성들 즉 들을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1절). 

그들이 전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을 주었고 또한 공개적으로 그들은 복음을 말하였다. 

그들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확신을 주고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백성들을 가르쳤다." 

또한 믿는 자들에게는 그들을 위로하고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하여 가르쳤다. 그들은 예수를 통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가르쳤다.

(1) 죽은 자 부활의 교리는 예수 안에서 확실히 입증되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할 첫 번째 사람으로 부활하셨음을 증거하였다(26:23).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근거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였다.

(2) 부활의 교리는 그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보장되었다. 

죽은 자가 부활하므로 미래의 온갖 행복이 주어진다. 

그들은 이 행복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성취된다고 전하였다(빌 3:10, 11). 

그들은 여러 문제를 간섭하지 않았고 그들의 임무에만 전념하여 백성들에게 하늘 나라를 목적으로 그리스도를 유일한 길로써 전하였다(17:18).

2. 듣는 자들은 기쁘게 받아들였다(4절). 

"그 말씀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 

모든 사람이 믿지는 않았으나 많은 사람이 믿었고 우리가 전에 읽은 삼 천을 넘는 "약 5천 명"의 수였다. 

우리는 복음이 어떻게 자리를 잡는지를 볼 수가 있으며 그것은 성령 임재의 결과임을 볼 수 있다. 

전파자들은 박해를 받았지만 말씀은 승리하였다. 교회는 초창기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성장하면서도 때로 고난 당하는 날이 있음을 알아야겠다.

Ⅱ. 제사장들과 그들의 무리가 모이어 제자들을 멸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손은 잠시 묶어둘 수 있었으나 그들의 미음은 조금도 변케할 수 없었다.

1. 사도들을 적대시한 자들은 누구였는가. 

그들은 "제사장"들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제일 먼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적대자 노릇을 하였다. 그들은 임금이 군주체제를 확립하려 하듯이 그들의 제사장직을 수호하려 했고 누구든지 그가 예언자로서 가르치거나 제사장으로 가르침으로 그가 그들의 경쟁자가 된다고 여겨질 때는 참지 못하였다. 

여기에 그들과 함께 "성전 맡은 자"가 참여하였다. 

이 사람은 성전을 지키기 위하여 안토니아 사탑에 자리잡고 있었던 파견대장으로서 로마의 관리였던 것 같다. 

즉 본문에서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공모하여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있다. 

또 "영혼의 존재와 미래를 부인하는 사두개인들"도 제자들을 훼방하는 일에 열심히 참여하였다(Mr. Baxf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슨 이유로 사두개인들이 저돌적으로 제자들이 전파하지 못하도록 열광적으로 저지하며 박해를 하게 되었는지 모두가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미래의 생이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남들이 그런 희망을 갖는 것이 그들에게 무슨 해가 되겠는가? 

그러나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란 해로움을 끼치는 일밖에 할 수 없음을 알자. 

오늘날에도 "마음의 눈이 먼 자는 냉혹한 마음을 지니고 잔인한 손을 벌리는 것이다."

2. 그들은 어떻게 사도들의 가르침에 대적하였는가.

"그들은 제자들의 가르침을 싫어하였다"(2절). 

그들은 복음이 그렇게 공개적으로 담대하게 전파되는 것이 잃었고 사람들이 그 말에 솔깃하여 귀를 기울이는 것도 싫었다. 

그리스도에게 치욕적 죽음을 안겨줌으로써 그들은 그의 제자들이 그를 주인으로 섬긴 것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게 될 것이며 백성들도 그의 가르침을 외면하게 되리라 생각하였으나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그들을 실망시키는 일, 곧 그의 복음이 사라지기는커녕 굳건하여지는 것을 보고 몹시도 그들은 당황하였다. 

"악인이 이를 보고 슬퍼하리이다"라는 말씀과 같다(시 112:10). 

그들은 천사들도 기쁘게 여기며 그러기에 마땅히 그들도 기뻐해야 할 일을 보고 불쾌하게 여겼다. 

그리스도의 나라의 영광이 슬픔으로 여겨지는 자의 비참함이여! 그 나라의 영광이 영원하므로 그들의 슬픔은 영원할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제사장들은 사도들이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를 전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사두개인들은 부활교리를 반대하는 입장이었기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교리가 가르쳐지는 것을 싫어하였다. 

제자들이 미래에 되어질 일에 대하여 말한 그대로 그것이 기적을 동반하며 입증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대제사장들 또한 제자들이 예수이름을 믿는 자마다 죽음에서 장차 부활된다고 하여 예수가 명예롭게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죽은 자의 부활 신앙을 고백하였지만 부활이 예수를 통하여 선포되고 입증되기 보다는 차라리 그 부활 교리를 포기할 마음을 먹었다.

3. 그들이 어느 정도까지 사도들을 박해하였는가(3절). 

"그들은 그들을 체포하였다"(즉 이 말은 그들의 종들과 관료들이 그들의 명대로 하였다는 말이다). 

그리고 다음날 공식적인 절차를 밟기 위하여 "그들을 감금하였다." 

저녁이었으므로 그들을 심문할 수 없었으므로 "다음 날까지" 연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이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점진적으로 적은 시련에서 보다 큰 시련을 맞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시는가를 배우자. 

지금은 그들이 갇히는 정도로 끝나지만 후에는 피를 흘리기까지 항거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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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와 요한이 심문받음(행 4:5-14)

우리는 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전하고 그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였으므로 유대교 법정에서 재판받는 기사를 보게 된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에게나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최상의 봉사였는데 범죄로 고발당하였던 것이다.

Ⅰ. 재판이 시작된다. 

이 사건을 다루기 위해 소집된 특별 재판인 것 같다. 상세히 고찰해 보자.

1. 재판이 시작된 시간(5절). 

그리스도가 그들 앞에서 재판받을 때처럼 밤이 아니고 "아침"이었다. 

아마도 전번 경우처럼 이 고소도 크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인 것 같다. 

마음이 관대해졌다면 얼마나 좋으랴만 다만 내일까지 연기한 데 불과하였다. 

어서 속히 그들은 사도들로 침묵을 지키게 하고 싶었고 공연히 시간을 허비하려 하지 않았다.

2. 장소는 예루살렘이었다(6절). 

예수가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기를 그가 그곳에서, 그들 앞에서 고난을 당한 것처럼 그들도 어려운 일들을 겪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예루살렘에서 구속이 도래하기 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속을 기다렸던가. 

그러나 이제 구속이 임하였는데도 이를 바라지 않는 것은 그들의 죄를 더욱 가중하게 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어찌하여 신실한 도시가 창기의 소굴이 되었는가! (마 23:37) 

예루살렘이 찬란히 빛나며 서 있는 광경 앞에서 예수님은 그 도시를 보시고 우셨던 것이다.

3. 법정의 재판관들.

(1) 그들의 일반적인 특징. 

즉 그들은 "관헌"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었다(5절). 

서기관들은 학식있는 사람들로서 사도들과 변론하려 왔고 그들을 논박하여 일언반구도 못하게 하기를 바랐다. 

관헌들과 장로들은 권세를 잡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사도들이 답변을 못하면 그들이 다시는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근거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만약 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았다면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저지하려던 자들은 세상에 학식이 있는 자들로 서기관들이 모였고 권세있는 자들로 장로들의 법정이었기 때문이다.

(2) 그들 중 몇 사람은 저명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이 박해의 주모자였던 안나스와 가야바였다. 

안나스는 산헤드린 회의 회장이었고 가야바는 대제사장인 동시에(본문에는 안나스가 대제사장으로 불려지고 있지만) "재판정의 원로"였다. 

안나스와 가야바는 일 년 간 서로 교체하여 대제사장직을 맡은 것같이 보여진다. 

이 두 사람은 그리스도를 적대한 주동적 인물이었다. 당시 가야바는 대제사장이었고 안나스도 현재 직책을 지니고 있었다. 

어쨌든 그들은 둘 다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하여 추악한 짓을 하였다. 

본문에 안나스와 가야바에 이어 효한과 알렉산더가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인물 요한은 안나스의 아들로서 여겨지며, 요세푸스에 의하면 알렉산더는 잘 알려진 인물로 묘사된다. 

이외에도 대제사장에게 의지하며 그에게 기대를 갖고 사는 그의 문중들이 다 모여 대제사장이 말하는 것을 지지하고 사도들을 반대하여 투표하려 하였다. 

옳지 않은 것은 아무리 큰 친척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비웃음만 살 뿐이다.

Ⅱ. 죄수들이 법정에 소환되었다(7절).

1. 그들은 법정 앞에 끌려나왔고 "그들을 가운데 세워 놓았다." 

산헤드린 회의 장소는 원형이었고 그러므로 법정에 볼 일이 있는 사람은 그들 가운데 앉거나 섰다(Dr. Lightfoot)(눅 2:46). 

그러므로 "악인들의 모임이 나를 둘러쌌나이다"(시 22:16). "저희가 벌과 같이 나를 에워쌌나이다"(시 118:12)라는 성경 말씀이 응하였다. 

그들은 적에게 둘러싸여 앉히워졌다.

2. 그들이 물은 질문. 그것은 다음과 같다.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를 행하였느냐"고 묻는다(그들은 주님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였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 일을 하느뇨? 마 21:23). 

질문은 계속된다. "누가 너희에게 이러한 교리를 가르치라고 명하였는가. 또 누가 이런 기적을 행하도록 너희에게 권능을 주었는가. 우리가 너희에게 그런 일을 명령도 허락도 안하였으므로 근거를 대라고 요구하는 것이다"라고 힐문한다. 

어떤 이는 생각하기를 이렇게 질문한 것은 기적을 행할 때 어떤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관습에 근거한 것이라 한다(19:13). 

유대 나라의 귀신 쫓는 자들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곤 하였다. 

그러므로 이들 재판자들은 제자들이 병 치료할 때 무슨 이름을 사용하는지 알았고 그들이 설교할 때 전제하는 이름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그들은 사도들이 예수와 그리고 그를 통한 죽은 자의 부활과 병고침을 전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2절). 

그렇지만 그들은 사도들을 괴롭히기 위하여 질문하였고 그들에게서 범죄적인 단서를 잡아내려고 노력하였다.

Ⅲ. 그들이 행한 변명. 

변명한다고 해서 자신들의 결백을 밝히고 안전을 도모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스승 이름을 들어내고 그에게 명예를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주님은 그들이 총독들과 임금들 앞으로 끌려갈 것과 그러므로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그들에게 접근할 수 없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주어지겠고 그것이 "그들에게 찔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막 13:19).

1. 이 변명은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이루어졌다. 

성령은 베드로를 이 사건에 직면하여 전보다 더 강하게 인도하셨다. 

사도들은 자신의 보호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이런 때 어떻게 할 것을 지시하신대로 그리스도를 전하였다. 

또한 이 때에 주시겠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약속대로 성령께서 "그들이 말할 시간에 말할 바를 얻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필요할 때를 아시고 신실하게 우리를 변호하신다(막 13:11).

2. 이 말씀이 주어진 것은 베드로에게였다. 

그는 아직도 사도들의 대변자로서 "백성의 관헌들과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같은 법정의 재판자들에게 스스로를 변명하였다. 

권세를 지닌 그들의 악함을 말함으로 권력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권력을 다시 성찰케 함으로써 그들에게서 악을 제거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관헌과 장로들이니 시대의 징조에 대해 다른 사람보다 많이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또한 너희의 직책상 반대할 것이 아니라 너희가 메시야 나라로 받아들이고 앞장 서야 할 것이 아니냐.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관헌들이요 장로들이므로 너희가 그들을 잘못 인도하여 실수하게 하면 너희가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하리라".

3. 무엇을 변명하였는가. 그것은 변명이라기 보다 엄숙한 선포였다.

(1)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였다는 것이 재판식의 물음에 대한 답변이었다(9, 10절).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만약 우리가 심문을 받고 범죄자로서 답변을 요청하고 그것이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 때문이라면, 이것이 구금의 원인이요 고소할 문제라면, 그리고 그가 무슨 방법으로 누구에 의하여 온전하여졌는가 묻는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답변할 수 있도다. 즉 백성들에게 말한 것으로 되풀이하여 말하겠노라. 이 일에 대하여 모르는 척하는 너희들 또한 너희뿐 아니라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아, 이것을 알라. 이것은 너희 모두가 알아야 할 것이니 존귀하고 권세 있으며 압도적인 이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하여, 즉 너희가 멸시하여 나사렛 예수라 칭하고 너희 관헌과 백성들이 십자가에 못박았으나 하느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시사 가장 높은 존귀와 위엄을 수여하신 바로 그분에 의해 이 사람이 온전하여 너희 앞에 선 것이라. 이는 주 예수의 권능의 표적이라"고 말한다.

① 본문에서 베드로는 그의 무리가 앉은뱅이를 치료하기 위하여 행한 것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것은 선한 일이었다. 그것은 생계 유지를 위해 일할 수 없는 구걸하고 있는 사람에게 친절한 행위였다. 

그것은 또한 성전과 성전으로 예배하러 다니는 사람들을 이 거지가 구걸하는 시끄러운 소리에서 자유롭게 하였으므로 도움을 주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이 선한 행위 때문에 고소되었다면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도다(벧전 2:20; 행 4:14, 16). 

이 일로 인하여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이 오히려 수치를 느껴야 하리라"고 말한다. 

선한 사람이 선행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님을 기억하자.  잘하고도 처벌을 받는 것이 기독교인의 운명이다.

② 그는 이 놀라운 일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찬양과 영광을 돌린다. 

"이 사람이 치료된  것은 우리의 권능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에 의해서니라"라고 말한다. 

사도들은 자신들에 대해서 관심을 불러 일으키거나 법정에서 좋게 보이려고 기적에 의해 자신을 나타내려 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상관 없도다. 다만 주님만이 높임을 받을지어다"라는 태도이었다.

③ 그는 재판석에 앉은 사람들 자신을 고발하여 그들이 예수의 살인자이었다고 한다. "그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았도다. 그런 즉 너희가 무엇이라고 답하리요"라고 말한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해서(그가 목적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들에게 죄에 대해서, 다른 모든 죄 중에서 가장 양심을 찌를 수밖에 없는 죄인 그리스도를 죽게 한 데 대해 확신시키려 한다. 

그들이 행한 바를 인정시키기 위하여 베드로는 한 사실도 빼놓지 않고 그들에게 말한다.

④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를 위해 그리고 그의 박해자들을 향하여 확고한 증거로 내세운다. 

"그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도다. 그들이 그의 생명을 취하였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그에게 생명을 주셨도다. 그러므로 그가 하고자 하는 일에 아무리 반대하여도 소용 없도다"라고 한다.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며 그들이 백성들을 기용하여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그를 훔쳐갔다"고 어리석게 유도한 짓을 부끄러워 말고 시인하라고 한다.

⑤ 그는 이 사실을 방청인들에게도 말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에 의하여 모든 이웃들에게도 이 말이 처져 각양 각색 사람들 즉 높은 자에서 낮은 자에 이르기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이 사실을 알게 하려고 했다. 

즉 이런 말이다. "여기 참석한 모든 사람들아 이 사실을 아시라. 그리고 각자 돌아가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으로 알게 하라. 너희가 이 사실이 전하여지는 것을 막고 억누르려 아무리 애써도 만군의 주 하나님께서 아심으로 온 이스라엘도 이 기적이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졌는데 이 이름은 장식품으로 불리워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한 뜻의 계시로써 그것을 믿음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될 것이라" 말한다.

(2) 그 이름의 권위로, 그들이 행한 이 예수의 이름에 의해서만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다. 

이제 그는 특별한 사례를 떠나서 이 신앙이 그들이 가르치는 교리와 그들이 행한 기적에 의해서 세워지도록 계획된 특수 종파나 파당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이 신앙도 유대인들 가운데 있는 철학자나 이와 같은 부류의 이단과 같이 마음 내키는대로 참석도 하고 떠나기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신앙은 인정되고 확인된 거룩하고 신적인 것으로 설립된 것으로 모든 사람들은 관심을 기울여 복종해야 하며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이름을 믿고 부르는 것은 무관심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①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의 섭리에 따라서 그 이름을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해야 한다(11절).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 즉 교회의 건축자들이 되어야 랄 너희 백성의 관헌들과 이스라엘의 장로들의 버린 돌이라. 교회는 하나님의 건물이기 때문에 마땅히 너희가 교회의 건축자들이 됐어야 할 것이라. 여기 너희에게 머릿돌이 주어졌나니 건물의 튼튼한 기초가 되어 거기 중심 기둥이 세워지고 그 위에 모든 건물 골조가 세워져야 했으나 너희가 이 돌을 버려 없이해 버리고 쓸모없는 돌로 여겨 던져버림으로써 거침돌을 삼았도다. 그러나 이 돌이 이제 머릿돌이 되었도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거부한 이 예수를 세우사 그의 우편에 앉히시고 그를 모퉁이 돌과 머릿돌로 쓰시어 통일을 이루는 중심점이 되게 하시고 능력의 원천으로 삼으셨느니라"라고 말한다. 

베드로가 본문에 이 인용문을 택한 것은 얼마 전에 그의 귄위에 관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질의에 대한 답변으로 그리스도 자신이 이를 사용했기 때문인 것 같다(마 21:42). 

성서는 우리의 영적인 투쟁에서 믿을 만한 무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안내자로 삼아야 한다.

② 우리는 그 이름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므로 감사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 이름을 안식처로 삼지 않고 우리의 도피처와 강한 성으로 삼지 않는다면 우리는 타락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의 없고 우리가 전적으로 구원받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타락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12절).

즉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병든 몸을 고칠 다른 이름이 없듯이 죄진 영혼이 구원받을 다른 이름이 없는 것이다. 

"오직 그로 말미암아,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므로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은 소망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다른 종교는 없다. 모세가 전한 종교도 이제 예수의 가르침이 선포되었으므로 이 신앙으로 돌아오지 않고는 구원이 없는 것이다."

하몬드 박사(Dr. Hammond)도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다음 사실을 더 살펴 보자.

첫째,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중요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즉 진노와 저주에서 피하여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을 다시 회복하는 이것이 늘 마음 가까이 있어야 한다.

둘째, 우리의 구원은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거나 자신의 가치나 능력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을 파괴케 할 수는 있으나 스스로를 구원할 수는 없다.

셋째, 사람들 가운데는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인 척하는 많은 이름들이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여러 종교들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회해와 상호 교통을 이룰 수 있는 것처럼 가장하나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넷째,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이름에 의해서만이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하나님으로부터 바랄 수 있고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 열납된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이름이 지닌 명예로 그 이름만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요, 우리가 하나님에게 말할 때 간구할 유일한 이름인 것이다. 이 이름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하나님께서 이 이름을 선택하셨고 그러기에 이 이름은 우리에게 자유롭게 수여된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인 것이다. 

이 이름은 "하늘로부터" 주어졌다.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위대한 이름일 뿐 아니라 천하에서도 큰 이름이다. 그는 천상계와 지하계에서 모두 권세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 이름은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그러기에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 가운데" 주어졌다. 

우리는 "우리의 의이신 주님"의 이름에 의해 구원받아야 한다. 다른 어떤 이름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다. 

그리스도를 모르고 그에 대한 실제적인 신앙도 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것인가. 

이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빛으로 살 수 있을까는 우리가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은 알아야 한다. 어떤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랑을 받는다해도 그것은 그리스도의 덕택이요 다만 그의 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변함없이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곧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사 45:4)는 말씀의 뜻이다.

Ⅳ. 재판정에서 기소한 조항은 이 변명으로 무의미하게 되었다(13,14절). 

이제 그리스도께서 하신 약속 즉 "그가 그들에게 말과 지혜를 주리니 그들을 고소하는 자가 반박하거나 부정하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성취된 것이다.

1. 그들은 앉은뱅이가 치유된 사실이 좋은 행위인 동시에 기적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치료에 대해 증언하기 위하여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서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을 반증하거나 비난하므로 "논박할 수는 없었다"(14절). 

또 마침 안식일도 아니었었다. 안식일이었다면 그들은 그것을 근거로 말하였을지도 모른다.

2. 그들은 그들의 거만함과 권위로 베드로와 요한을 굴복시킬 수 없었다. 

이 제사장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하여 얼마나 극악하게 피맺힌 원수처럼 여겼는가 하는 것과(이 사실은 그리스도를 위해 얼마나 겁먹은 소심한 마음으로 그를 변호했는가, 특히 베드로 그는 계집종이 두려워 그를 부인까지 하였는데 이제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히 증거하는"(13절) 이 모든 사실을 생각해 볼 때 그들이 사도들을 굴복시키지 못한 것은 앉은뱅이 치료 못지않게 기적이었다. 

아마 그들의 모습이 특이하고 놀랄 만한 어떤 것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관헌들에게 겁을 먹고 나타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 앞에 담대하였다. 

그들의 이마에는 위엄이 서렸고 그들의 눈에는 광채가 있었고 그들 목소리에는 공포를 주지는 않았지만 명령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예언자들처럼 그들의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다"(사 50:7; 겔 3:9).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신실하게 고백하는 사람들의 용기는 흔히 그들에 대한 잔악한 핍박자로 당황케 만든다.

(1) 그들의 놀라움이 커감을 볼 수 있다. 

"본래 학문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그들은 사도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또 스스로 이들에 대하여 물어보고 그들이 천한 출신으로 갈릴리에서 태어나고 나면서부터 어부였고 교육을 받은 것도 무슨 고등 교육의 혜택을 답지도 못하였고 랍비들의 근처에도 접근 못하였음을 알았다. 

그들은 이들이 법정이나 또는 여러 모임에 대해 정통하지도 못하였고 자연철학이나 수학이나 정치학에 대해 그들과 얘기를 나누어 보면 아무 것도 알 지 못함을 쉽게 알 수 있는 그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메시야와 그의 나라에 대해서 말을 시키면 그들은 분명히 증거를 대면서 확신있게 적절하고 유창하게 구약 성서를 알맞게 인용하며 말하였으므로 심판석에 앉은 제일 박식한 재판관도 그들에게 답변할 수도 없었고 도대체 그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무지한 사람들이었고(이디오타이, 4:13) 범인"이었으며 공적인 활동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들이 자랑스럽게 주장을 내세우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말 그대로 "얼간이"(idiots)였다. 그들은 마치 "자연 미물"이나 대하는 것처럼 경멸어린 눈초리로 그들을 보았고 그들에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자유롭게 처신하는 것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2) 그들은 대단히 놀라서 사도들의 말을 막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그들은 "사도들이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성전에서 이들이 예수와 함께 있었던 것을 보았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과거를 돌이켜 그들의 모습을 되살려 보았다. 또한 그들의 종들과 주변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려왔다. 

왜냐하면 이제 도저히 이들을 바보 취급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들은 "사도들이 예수와 함께 있었고" 그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과 그를 수행하며 그에게 훈련을 받았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자 무슨 이유로 그들이 담대해졌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그들의 대담성은 그들이 누구에게 교육을 받았는지를 보여 주고도 남았다. 

"예수와 사귐을 가진 자," 그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자들은 스스로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것임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사도들과 얘기를 나눠본 이들은 "그들이 예수와 함께 있었던 자들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사귐이 사도들을 그토록 거룩하고 신비하며 영적이고 쾌활하게 하였다. 이 사귐이 그들을 세상에서 뛰어나게 했고 다른 은사로 충족케 하였다. 

그들이 변화산에서 얼굴이 빛났던 것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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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전파자로서 베드로와 요한의 각오(행 4:15-22)

본문에서는 공회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의 재판 결과를 수록하고 있다. 

이제 그들은 승리하고 나온다. 그들은 점진적으로 고통에 직면하도록 훈련받도록 되었고 작은 시련으로 보다 큰 시련에 대비시키고자 작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금은 "보행자와 함께 달리는데 불과하지만" 앞으로 그들이 "말과 경주하게 됨"을 볼 수 있을 것이다(렘 12:5).

Ⅰ. 본문에서 이 사건에 대한 배심원들의 논의와 결정. 이에 따른 소송 절차가 다루어진다.

1. 죄수들에게 물러갈 것을 명한다(15절). 

그들은 그들의 양심을 괴롭히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고 사도들로부터 억지 자백을 받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므로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듣지 않으려 했던 말이 본문에 수록되고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그리스도의 적들의 음모는 치밀하였고 그들은 그들의 공회를 주님에게 숨기려는 듯이 깊이 음모의 구멍을 팠다.

2. 이 문제로 논쟁이 제기됨. 

"그들은 서로 의논하였다." 

누구나 마음에있는 말을 자유롭게 털어놓아 이 중대한 사건에 조언을 하고자 했다. 

이제 관헌들이 "주를 대적하여 논의하여, 기름 부음받은 자를 대적하나이다"라는 "성서 말씀이 이루어짐을 보게 된다"(시 2:2). 

"이 사람을 어떻게 할꼬?"라는 의문이 제기된다(16절). 

만약 그들이 확신어린 압도적인 진리에 굴복하였다면 그들이 아래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그들은 사도들을 마땅히 공회 앞자리에 모셔놓고 그들의 가르침을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받고 그들과 함께 사귀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란 흔히, 먼저 마땅히 처리해야 할 일에 대해 선의의 충고를 거부하면서 고집부리는 경우, 때때로 그들 스스로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할지 몰라 당혹감 가운데 빠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일단 자기 마음에 영접하기만 한다면 그에게 아무런 심적 고통이나 불편을 끼치지 않고 기쁨이 되지만, 악하게 "불의"로 그 진리를 "막고" 자기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음으로써 유폐시키려 한다면(롬 1:18) 그 진리는 바로 그런 이에게는, 어떻게 다룰지 몰라 당혹케 하는 부담스러운 돌덩이가 되고만다(슥 12:3).

3. 드디어 그들은 두 가지로 결단하였다.

(1) 사도들을 그들이 행한 그것을 처벌하는 것이 좋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생각과 느낌대로라면 그들을 처벌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만한 용기가 없었는데, 바로 백성들이 사도들을 지지하였고 기적에 대해 환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전에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감히 그리스도에게 손을 대지 못했었던 것처럼 지금은 사도들을 두려움으로 대하였다. 

전에는 구세주를 대적하여 외친 폭도들로 인해 문제가 쉽게 처리되었으나 지금은 그와 정반대의 기세에 있었다. 

이제 그들은 이 "백성들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을 어떻게 처벌할지 무슨 구실을 잡아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사도들을 처벌하는 것이 불의한 일인 줄 내심 알고 있었으므로 한편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기들을 자제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위험스러운 일이라 느꼈기 때문에 또한 백성들에 대한두려움에 제일 압도되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고려하였다. 

"백성들을 두려워"한 이유를 생각해 보자.

① 사람들은 기적이 사실이었음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특기할 만한 기적"이었고(그노스톤 세메이온, 4:16) 그러기에 이미 "알려진 기적"이었다. 

사도들이 이 일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였고, 그리스도 자신이 전에 자주 같은 일을 행하였다는 것이 잘 알려졌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의 구체적인 본보기였고 그의 가르침의 증거였다. 

그것이 위대한 기적으로 그들이 가르친 교리를 확인해 주는 사실이란 것이 "예루살렘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명백히 알려졌다." 

그것이 일반적인 견해였고 더구나 그 기적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인 성전 문 앞에서 일어났었다. 

그러므로 그들 자신도 모든 술책과 기교를 다 동원해서도 그것이 참된 기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들이 그것을 부인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야유를 퍼부었으리라... 

그들은 자기의 양심은 쉽사리 속일 수 있었지만 세상을 속일 수는 없었으니, 복음의 증거는 부인될 수 없는 것이다.

② 그들이 시간을 끌수록 기적이 진실됨을 확신시켜 줄 뿐 아니라 "이루어진 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그 일로 인하여 아직 그리스도를 믿도록 설득되지 않은 사람들도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어진 자비와 그들 지방이 받게 된 명예로 깊은 감화를 받았고 그러므로 그들은 그 인에 대해서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 수밖에 없었다. 

일반 종교를 지닌 사람조차도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데 만약 모든 사람들이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을 영광돌리는 그것을 이유로 제사장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처벌한다면 그들은 백성들에게 인기를 상실하고 하나님과 사람 양쪽의 적으로 간주되어 버림받고 말 것이었다. 

이러므로 그들의 진노는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했고 그들은 말을 잃었다.

(2) 그렇지만 앞으로 그들이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도록 금하는 것이 필요하였다(17,18절). 

그들은 사도들이 말하고 행한 것에서 트집잡을 만한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 전하거나 그들이 행한 일을 계속하지 못하도록 할 필요는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어떻게든지 "그리스도의 도리가 더 이상 퍼지지 못하게 하는데 있었다." 병고친 사실이 염병처럼 퍼지기 시작했으므로 그 전파력을 저지시켜야만 했다. 

우리는 어떻게 악마의 궤교가 천상의 세력에 대항하여 싸우는지를 보게 된다. 하늘에 있는 분이 웃으심이여!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전 세계에 전파되기를 계획하시나 대제사장들은 그리스도가 더 전파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이제 그들은 이 가르침이 더 이상 확장되지 않도록 방해하고 있다.

① 그들은 사도들에게 더 이상 복음을 전파하지 못하게 저지하였다. 

그들은 권위로써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18절) 제정한다(그들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양심의 판단에 따라 예수에게 복종하게 될까 두려워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왜 금해져야 되는지 이유를 제시하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거짓이라거나 위험하다거나 나쁜 조짐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 가르침은 그들의 위선됨과 사특함을 드러내 주었고 그들의 독단적 처사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뜻을 관철시키는 데 있어서 이유를 댈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단지 "우리가 너희에게 엄히 명하노니 이 도리를 공개적으로 가르치지 말며 사적으로 어떤 특정인에게도 이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17절)"고 한다. 

신실한 사역자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고 세상의 빛을 말 아래 두는 행위보다 악마를 기쁘게 하는 일은 없다.

② 그들은 사도들이 전파하면 그들을 엄하게 다루리라고 협박하였다. 즉 대단히 위험할 것이라고 한다. 

이들 재판자들은 사도들이 어기고 행하면 떳떳이 그들에게 욕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요 그러기에 사도들이 언짢은 일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 명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도우실 것과 상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제 이들 제사장들은 복음 전파를 금할 뿐 아니라 극악한 범죄로써 처벌하리라고 협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약속의 참 가치를 바르게 아는 사람들은 그들이 비록 죽인다는 협박을 당한다 할지라도 세상의 위협을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것이다(9:1).

Ⅱ. 제자들은 배심원들의 결단과 그 결단의 선포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들의 임무를 수행할 것을 용기있게 결심함을 본문에서 볼 수 있다(19, 20절). 

베드로와 요한은 서로 서로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머리를 맞대고 논의할 필요가 없었다(그들은 모두 한 분 같은 성령에 의해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즉시로 같은 심정이 되어 함께 답변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와 우리가 누가 옳은지 판단하라.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 보다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은지 너희 스스로 판단해 보라.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사람들 앞에서 말하지 않을 수 없노라. 또한 마음 속에 가득찬 것을 공개하지 않을 수 없노라"고 답변한다. 

간교한 뱀은 그들의 마음속에 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이렇게 속삭였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에 대해 네 양심만 바로 되어 있다면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함으로써 공공연히 약속할 수야 없겠지만, 구태여 결코 말씀전파를 그만 둘 수는 없노라고 관헌들에게 말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러나 사도들은 사자와 같은 용기를 갖고 그들의 박해자의 권위와 악의를 무시하고 떳떳이 대하였다. 

그들은 계속해서 가르칠 결심이란 것을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들이 가르치겠다는 말에는 두 가지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1.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라 한다. 

"너희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전하라 하신다. 그는 우리를 믿고 의탁하셨고 그것을 전하는 데 성실히 충성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과 너희 중에 우리가 누구에게 복종해야 하겠는가!"라고 항변한다. 

본문에서 그들은 자연법에서의 "공인된 정언(定言)" - 즉 인간의 명령에 하나님이 개입하면 하나님의 명령이 우선적이라는 법칙에 호소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만일 어떤 법령이 하나님의 율법에 상치되면 그 법령은 효력을 잃는다는 것이 영국 헌법에 이미 규정되어 있다. 

무한히 지혜로우시고 거룩하시며 우리의 창조자시며 주권자이시고 우리 모두가 그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는 심판자이신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고 나약하고 흔들리기 쉽고 같은 피조물이며 같이 하나님에게 예속된 그 인간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없다. 

우리가 볼 때, 경우가 너무나 분명하고 돌이킬 수 없이 자명하므로 비록 너희가 편견에 사로잡혀 있기는 하지만, 너희에게 그 시비 판단을 맡긴다는 말이다. 

"그래, 하나님이 보시는 데 인간의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 신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 옳은지 너희가 생각해 보라"고 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것이 참으로 옳은 것이다. 

우리가 확신하기는 그의 심판은 진리에 의한 것이요 그러기에 우리도 그것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2. 그것은 그들 양심에서 우러나는 확신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들이 하늘로부터 그리스도의 도리를 전하라는 이 같은 구체적인 명령을 받지 않았다해도 "그들이 보고 들은 바를"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엘리후처럼 그들은 "말이 가득 차고 그들 안에 계신 성령이 그들을 강박하였으므로"말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해야 마음이 시원하였다(욥 32:18, 20).

(1) 그들 내부에서 강렬하면서도 강력한 어떤 힘이 더해지면서 충만해짐을 느꼈다. 

그들에게 얼마나 축복된 변화가 일어났는가! 그 결과 그들은 새 세계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도리를 말하는 사람들은 그 능력을 느낄 수 있으며 그 오묘함을 맛볼 수 있으며 그들의 "뼈 속에서 불"이 붙는 것 같아서(렘 20:9) 깊은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그들은 복음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영혼들에 관심이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지 않고는 그들이 영원한 파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들을 열심히 깨우치고 바른 길을 제시해 주었다. 

"우리가 전하는 것은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일을 보고 들은 사람이 우리밖에 없는데 만일 우리가 전하지 않으면 누가 전하겠는가. 주님에 대한 두려움과 마찬가지로 그의 사랑도 알므로 우리가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뭇 영혼에 대한 사랑이 우리를 강박하도다"(고후 5:11, 14)라고 그들은 말한다.

Ⅲ. 죄수들의 석방(21절). 

"그들은 사도들을 다시 위협하고" 그들이 사도들을 놀라게 한 줄로 여기고 "그들을 놓아 주었다." 

그들은 거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갔던 바,  많은 사람들을 위협하여 그들의 불의한 선고에 복종하도록 하였었다. 

그들은 추방한다고 위협하여서 사람들을 순복하게 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요 9:22).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듯이 사도들도 똑같이 다룰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 판단하였던 것이다. 사도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예수와 늘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도들을 협박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고작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런 후에 그는 "그들을 석방했다."

1. 그들은 "이루어진 일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는 백성들을 감히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들이 사도들을 그 행위대로 처벌한다면 백성들이 자기들을 그 자리에서 끌어낼 것같이 생각되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임명된 정직한 관헌들이 악한 백성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인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는 백성들은 또한 악한 위정자들을 두렵게 함으로써 그들의 악함을 통제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2. 그들이 기적을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 여세나 되었기 때문이었다"(21절).

(1) 그가 "모태에서부터" 앉은뱅이였으므로 기적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3:2). 

그가 나이 먹을수록 그 병은 더욱 깊어졌고 따라서 더욱 고칠 수 없었다. 

성인이 되어 악에 깊이 젖어있던 사람들이 영적 무기력을 치료받고 악습에서 떠난다면 하나님의 은총의 능력이 더욱 증대하지 않겠는가!

(2) 병 고친 사실이 더 확실히 입증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가 치료해 주었던 장님과 같이 그도 직접 자신에 대해서 말하라고 요구받았을 때 그는 "40여세나 되는 성인이었으므로" 스스로 양심에 따라 답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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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의 돌아옴(행 4:23-31)

사도들을 석방하고 나서는 대제사장들이 무엇을 하였는가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없다. 다만 "두 가지가 증언되고 있다."

Ⅰ. 그들이 그들의 형제들 즉 사도들과 동역자들과 그들과 동석한 몇 명의 평신도들에게 돌아갔다(23절). 

본문에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들에게 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그 시간에 사도들을 위해 슬퍼하며 기도했으리라(12:12). 

사도들은 자유롭게 되자마자 그들의 옛 친구에게로 가서 그들의 사귐의 공동체인 교회로 돌아왔다.

1.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의 증인으로 부르시고 무사히 나오도록 돌보시므로 그들에게 많은 명예를 받게 하였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받은 명예에 대해 자랑하지도 않았고 그들의 형제보다 우쭐하게 여기지 않고 "동료들에게 갔다." 

우리에게 다른 사람보다 은사가 많다거나 많이 유익하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 성도들의 모임 가운데서 특권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2. 그들의 적들이 엄하게 그들을 위협하고 그들의 결속을 깨뜨리고 그들이 단합하여 하고 있는 사업에서 손을 떼게 하려 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동료들에게 갔고" 위정자들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석방되면 그들은 그들만의 다락방으로 물러가 거기서 한동안 예배하면서 위로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공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만족을 추구하기 보다 공익을 구하였다.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은 그들 단체 가운데서 공적 지위가 주어지면 그 곳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Ⅱ. 그들의 경위 설명. 

"그들은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들에게 한 말을 다 고하였고" 더하여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들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었고 그들의 재판 결과가 무엇인지를 말하였다. 그들은 다음 같은사실을 그들에게 말하였다.

1. 그들은 그들의 사업을 추진하면서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것인지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인간으로부터는 그들은 공포를 주는 일밖에 바랄 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온갖 격려를 즐길 수 있다. 

인간들은 힘을 다하여 그들을 비방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일을 감당하도록 효율적으로 돌보신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형제들은 그들의 결속과 경험을 더욱 긴밀히 해야 한다(빌 1:4).

2. 그들은 이 사실이 교회 역사에 기록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후손들을 위해서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유익하다고 하였다. 

반대자들에 대해 침묵을 하는 것은 때로는 반대자를 승인하고 증언하는 뜻으로 통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대제사장들의 면전에서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로 살리셨음을" 말하였다. 

이들 반대자들도 같은 무리로 결속되어 있었지만 대놓고 그것을 부인하지 못하였으며 어리석고도 가장 비굴한 방법으로 사도들에게 "어느 누구에게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3. 그들도 이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도와 찬양에 참여해야 하겠다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협력함으로 하나님은 더욱 영광받을 것이요, 교회는 더욱 덕스럽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형제들에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전해야 하며 그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경험을 전하므로 우리가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일에 그들이 우리를 돕도록 해야 한다.

Ⅲ. 이 사건에 대해 그들이 하나님에게 감사기도를 함. 

그들이 제사장들의 흉계가 무의미하게 된 것과 고통자들이 능력있는 용기에 대해 "들었을 때" 그들은 무리들을 함께 모으고 기도하였다. 

"그들은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24절). 

그들 모두가 같은 시간에 같은 말을 했다고 상상할 수는 없다(한 분 같은 성령의 영감에 의해 가능하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목소리를 높여 간구하고" 나머지 사람도 그에 따라 "한 마음으로" 가담한 것 같다. 

그들의 마음이 그와 연합되었으므로 비록 한 사람이 말했지만 그들 모두가 기도한 것이었다. 

한 사람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를 따라 모든 이들이 그들의 마음을 함께 주앞에 쏟았다. 그것은 하나님께 목소리를 높이는 것과 같은 효과를 지닌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생각도 말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보라, "모세가 하나님에게 부르짖을 때" 우리는 그가 한 마디도 말한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이제 하나님께 대한 이 엄숙한 기도를 생각해 보자.

1. 그들은 하나님을 세계의 창조자로서 숭배하였다(24절). 

한 마음으로 따라서 실질적으로는 "한 목소리로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롬 15:6). 

그들은 말하였다. "오! 주여 당신만이 홀로 하나님이시니이다. 당신만이 우리의 주님이요, 최상의 통치자시니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요 인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시지 인간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십니다. 만물의 창조자시오, 인간의 상상이 빚어낸 창조물이 아니오라 당신이야말로 하늘과 땅과 바다와 천상계와 지하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지으신 분이니이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자신을 이방인들과 구별해야 한다. 

그들은 그들이 만든 신들을 예배하나 우리는 우리와 전 세계를 지으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도 신조와 마찬가지로 기도할 때도 이 사실에 대하여 먼저 말함으로써 시작하는 것이 올바르다. 

즉 하나님은 "전능하신 아버지이시며 하늘과 땅과 모든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창조자"이심을 고백하므로 시작해야 한다. 

당시에 사도들은 세계 구속의 신비로운 섭리로 가득했지만 그들은 세계 창조의 역사를 무시하거나 잊지 않았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자연 종교의 진리와 교훈을 소멸시키거나 밀쳐내려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하고 바르게 교정해 주려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 사업을 하며 고통을 받음에 있어서 그들이 만물을 지으시고 그들의 시간을 다스리시며 그들과 관련된 모든 일들을 처리하시며 그들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힘이 되시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을 생각할 때 큰 힘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이에 대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면 그것으로 우리는 위로를 받게 된다.

2. 그들은 메시야 나라가 세상에서 처음시작될 때 이런 반대에 직면하리라는 구약 성서를 살펴 봄으로 섭리에 자신들을 복종시킨다(25,26절).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은 그의 섭리에 있어 어떤(효과있는) 반대에도 부딪치지 않으신다. 

아무도 감히 그와 쟁론을 벌이거나 경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말씀하셨고" 또 기록하게 하셨다. 

본문에 표시된대로 다윗이 시편 이편의 저자이요 아마 일편의 저자이기도 하며 표제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 해도 다른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것은 그의 작품인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의 박해에 대해 놀라지도 말며 도리를 전함에 있어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서 낙심하지도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성서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시편 2편 1,2절에서는 다음 사실이 예언되고 있다.

(1) 이방이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대해 분노하며 그 나라를 세우려는 계획에 대해 노할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러므로 이방신들이 지위를 상실하게 되고 이방의 악이 저지되겠기 때문이다.

(2) 백성들은 메시야와 그의 나라에 대적하며 교사들이 이를 전하지 못하게 하며 그 주제를 못마땅히 여기며 그것에 대한 모든 관심을 일소에 붙이려고 한다. 만일 그들이 허사를 경영한다면 그런 일을 떠나야만 한다.

(3) 세상의 군왕들이 그리스도의 나라에 반대하여 나서리라 한다. 

마치 그들은 그들의 권력이 침해당하는 것을 질투하여 그들의 대권을 수호하려는 듯 반대하고 나선다(그러나 결코 그들이 침해받는 일은 없다). 

신의 섭리에 의해 가장 큰 사랑을 받고 명예를 누리며 그러기에 하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세상의 임금들이 신의 은총에 낯선 자와 원수가 되어 하나님을 제일 반역한다고 한다.

(4) 관원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적한다고 하였다. 

한 몸에 권세를 지닌 군주만이 아니라 여러 관직의 권세자들이 "함께 모여 주님과 그리스도를" 다른 말로는 자연 종교나 계시 종교를 모두 적대하여 모의하고 행동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행위는 무엇이나 자기를 대적하는 것으로 간주하신다. 

기독교는 군왕들과 관원들의 지지와 찬조를 받지 못할 뿐 아니라(그들의 권력이나 재력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기독교를 반대하고 투쟁하여 없애려 한다. 그렇지만 신앙은 결코 소멸당하지 아니한다.

3. 예언된 대로 그리스도에게 악의를 품고 대적한 관원들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다. 

27,28절에서 예언이 성취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예언 성취는 "틀림 없는 사실"이었고 너무나 분명하여 부인될 수 없었다. 

예언 성취는 두 로마의 총독인 헤롯과 빌라도에게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이방인들과(그들의 지휘 하에 있었던 로마 병정들) 이스라엘의 백성들과(유다의 관원들과 그들 지시대로 움직인 군중들)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대적하였다. 어떤 사본들에는  "이 거룩한 성에서"란 말이 삽입되어 있다. 

이 말은 그 어느 곳보다 예수를 환영해야 마땅한 곳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일이 이루기 전에 "당신의 섭리와 뜻대로 결정된 것"을 행하는 데 불과하다고 한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지신 지혜롭고 거룩한 섭리. 

본문에서 예수는 그가 어렸을 때 불려지던 것처럼(눅 2:27,43) "어린 예수"라 불려지고 있는데(역주:영문 흠정판 참조) 그 의미는 그가 높임 받으신 상태에서도 우리를 위해 겸양하게 되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계속해서 마음이 온유하고 낮게 처하신다는 뜻이다. 

그의 최상의 영광 중에도 그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며 어린 예수"이시다. 그러나 그는 "거룩하신 어린 예수이시며" (그러므로 눅 1:35 에는 거룩한 자라 불리워진다) "당신의 거룩한 아기"이신데 그 말은 아들과 종을 동시에 의미하고 있다(파이다 수, 4:27).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구속 역사 속에서 그는 그의 아버지의 종으로 행동하셨다(사 42:1). 

"내가 붙드는 나의 종"이라고 이사야서에서는 불리워진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기름 부으셨고 그의 일 맡을 자격을 주셨으며 그 일에 부르셨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의 그리스도라 불려진다(역주:흠정역 참조, 26절).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기름 부으셨기 때문에 그들이 거를 거스려 분노하며 폭력까지 휘두르게 된 것이다. 

그들은 체념하지도 않고, 그에 못지 않게 그에게 복종하지도 않으려 결심하고 있었다. 

사울은 다윗이 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였기 때문에 다윗을 질투하였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잡으러 왔다(삼하 5:17). 

이제 그리스도에게 기름을 부으신 하나님은 기름부음에 따라 그에게 어떻게 하실까를 결정하셨다. 

그는 구세주가 되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았으므로 그가 죄를 대신하여 희생물이 되어야 할 것이 결정되었다. 

그는 죽으셔야 했다. 그러므로 그는 살해당하셔야 했던 것이다. 스스로 죽으실 수 없었으므로 미리 누구의 손에 의해 죽으셔야 할 것을 결정하셨다. 

또한 이 일은 그를 범죄자와 악인으로 취급할 사람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져야 했다. 그것이 천사들이나 착한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욥이 그랬던 것처럼 죄인의 손에 넘겨져야 했다(16:11). 

다윗이 시므이에게 넘겨져 "저주를 받았던 때"에 (삼하 16:11) "주께서 시므이에게 명하셨다 " 한 것처럼 하나님의 손(God's hand)과 뜻에 의해, "하나님의 손"이라 함은 그의 일을 처리하시는 능력을 의미하는 바 여기서는 그의 목적과 섭리를 위한 집행 능력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흠정역 참조). 

왜냐하면 그에게 말씀하심과 행하심은 우리에게서처럼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집행하심과 뜻하심은 언제나 일치한다. 

"주께서는 무엇이든지 기뻐하시는 것을 그가 행하시기 때문이다." 

^^하몬드 박사(Dr. Hammond)는 "예수의 내어 주심을 결정하신 하나님의 손"이란 구절을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두 염소를 놓고 제비 뽑는 일에 대해 언급된 것이라 말한다(레 16:8). 

그는 손을 들어 주님을 위하여 제비를 뽑고 뽑힌 염소는 즉시로 희생 재물이 되며 이 제비는 주께서 처리하신다고 믿었다(잠 16:33).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손은 이루어져야 할 것을 결정하시며 그 뜻대로 그리스도는 희생물로 처형되셨던 것이다. 

또는 내가 추측하기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손이 결정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행동하시는 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욥기 13장 26절처럼 그의 기록하는 손을 의미하는 것 같다(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는 "진리의 글에 기록된 것이며(단 10:21) 그리스도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시 40:7) 할 때 이 중에 기록된 말씀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을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손이요 그의 손은 그의 뜻하심에 따라 이루시는 것이다. 위임은 그의 손 아래서 행하여진 것이다.

(2) 이 계획을 이루시는 데 악하고 불결한 도구가 이용되어진다. 

비록 "그들 자신은 그렇게 하려고 뜻하지 않았고,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도" 그렇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도 서로 대조적인 헤롯과 빌라도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합세하고 있다. 

그들이 행한 바에 의해 하나님이 그의 목적을 이루신다고 해서 이 일을 행함에 있어서 그들이 품은 악의와 추행이 변명될 수는 없다. 

순교자들의 피를 하나님께서 교회의 씨로 삼으신다고 해서 그들의 피를 흘린 박해자들의 잘못이 용서받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악을 통해 선을 이루신다고 해서 죄가 경감될 수는 없다. 

이 일을 통하여 예수께서 더욱 영광받으셨고 하나님의 비의(秘意)가 완성될 때 또한 그렇게 나타날 것이다.

4. 당시에 일어난 경위에 대한 그들의 간구. 

대적자들이 "함께 모여 그리스도를 대적하였으므로," 그들이 그의 사역자들에게 대적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제자가 주인보다 크지 아니하므로," 더 나은 대우를 바라서도 안 된다. 다만 핍박을 당하므로 그들은 기도한다.

(1) 하나님께서 그들의 원수들의 악의를 기억해 줄 것을 기도한다. 

"주여 저희의 위험함을 하감하소서"는 (29절). 

주께서 시편에서 그들을 바라보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그들을 보옵소서. 그들이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라 말할 때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시 2:4). 말씀하신 것처럼 이루소서라고 기도한다. 

"처녀 딸 시온이 대왕 앗수르 왕의" 무능력한 위협을 "비웃듯이" 하옵소서라 한다(사 37:22). 

그리고 지금(지금이 강조되고 있다) "주여" 저희 원수의 세력의 도전과 위협이 극심하오니 그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의 때를 속히 나타내소서. 

그들은 '히스기야처럼' 하느님에게 그들의 사정을 아뢰며 그에게 무엇을 해 줄 것을 지시하지는 않는다(사 37:17). 

"주여 당신의 눈을 드사 보시옵소서. 주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아시나이다. 그들의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옵소서(시 10:14). 당신께 우리가 간구하오니 그들의 위협을 감찰하소서. 그리하여 그들의 손을 결박하시든가 그들의 마음을 돌려 주옵소서. 그들의 진노가 변하여 당신을 찬양하게 하시고 남는 노는 주께서 금하시옵소서"라 간구한다(시 76:10). 

우리가 부당하게 위협을 받을 때 이를 참고서 우리 사정을 주께 아뢰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므로 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2)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우심으로 그들의 영혼을 보존하사 그들의 사명을 기쁘게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간구한다. 

제사장과 관원들이 합세하여 그들을 훼방하지만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한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우리가 직면하는 고통이 무엇이든지 고통이 우리에게 주는 방해에만 신경을 씀으로 우리의 사명과 임무를 수행함에 기쁨으로 결단성있게 임하지 못하도록까지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함을 기억하자. 

그들의 기도가 "주여 저들의 위협함을 보시어 그들로 놀라게 하시고 저들의 입을 닫히사 수치로 저들의 얼굴을 덮으소서"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며 우리의 입을 여시며 담대함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소서"라고 간구한다. 

그들은 "주여 지금 시기가 위험하오니 우리에게 우리의 임무에서 벗어날 적절한 기회를 주옵소서"라 기도하지 않는다. 

"주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우리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고 사람을 대할 때 두려워 말게 하소서"라고 간구한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① 하나님의 일군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은 누가 마음을 상하게 하든지 담대하게 말하는데 누구의 구애도 받지 말고 "하나님의 모든 뜻을 선포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피하지 말고" 그들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가 말하는 것을 의심하지도 말며 그것을 말하는 데 누구에게 의존해서도 안 된다.

② 하나님은 담대히 그의 말씀을 전하는 자를 만나시며 신의 도움과 힘주심을 바라는 자들은 그 능력에 의존하며 "주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③ 우리의 힘을 약화시키고 우리의 사명을 수행하지 못하게 하려는 원수의 위협은 오히려 우리를 자극하여 더욱 용기있고 결단성있게 사명을 감당하게 해 준다. 그들이 감히 그리스도와 대적해 싸울 수 있겠는가? 부끄러움밖에는 없다. 그를 위하여 싸우는 우리는 비겁하지 말자.

(3) 하나님께 그들이 전하는 도리에 확신을 주기 위하여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그들에게 주실 것을 간구한다. 

"앉은뱅이의 치유로" 복음 전파에 많은 결실을 얻은 그들은 이러한 일이 더욱 일어나 풍성하게 열매 맺기를 간구한다. 

그러므로 "주여 담대함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소서"라 기도한다. 

신실한 사역자들이 그들의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며 신적인 능력이 그들과 함께 한다는 증표 외에 더 큰 힘이 되는 것은 없음을 기억하자. 그들은 이렇게 기도한다.

①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 그의 손을 내밀어" 사람의 육신과 영혼을 "치료"해 주시기를 간구한다. 

말씀을 전하는 일이나(사 65:2) 병고치는 일에서(9:17) 기독자, 그들이 "그들의 손을 내밀면" 헛 일이다.

②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것"과 이 일로 사람들에게 믿음을, 원수들에게는 당황함을 받게 하여 줄 것을 기도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사명에 대한 증거로 기적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그들에게 약속하셨다(막 16:17, 18). 

그럼에도 그들은 이를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 그들이 그 능력을 지녔다 해도 그것이 계속 지속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 자신도 구하므로 그것이 그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그들이 요구하면서 표적이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것을 간구한 것은 그리스도의 명예요 그의 이름이 영광받으심을 의미한다.

Ⅳ. 이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말로써가 아니라 능력으로 나타났다.

1.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표적을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31절). 

그들의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그들이 기도할 때(아마 규칙에 따라서 한 사람씩 연속해서 그들 모두가 기도한 것 같다) 모인 곳이 진동하였다." 

즉 성령이 그들에게 임재하실 때와 같이(2:1, 2) 강하고 힘있는 바람이 있었고 그 때 "집이 흔들린 것처럼" 지금은 그들의 기도하는 집이 흔들렸다. 

그들이 거하는 장소의 진동은 그들에게 경외감을 주고 그들의 기대를 불러 일으키며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이 사실이라고 감지할수 있는 징표를 보이시며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예언의 말씀을 상기케 하려고 의도된 것이다(학 2:7).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는 말씀이다. 

이렇게 함으로 그들이 왜 하나님을 더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며 그러므로 그들이 인간을 덜 두려워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 장소를 진동시키신 그가 그의 종들을 위협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이같이 떨게 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임금들의 영혼을 벌하시며 땅의 군왕들도 떨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 장소가 진동함으로 그들의 신앙은 굳건하여지고 오히려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2. 하나님은 그들에게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고 이것이 그들이 기도한 목적이었다. 

"그들이 전보다 더욱 성령으로 충만하였더라"는 말씀으로 보아 그들의 기도가 수납된 것이 확실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그들은 힘을 얻었을 뿐 아니라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고 인간들의 거만한 외모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성령이 그들에게 "무엇"을 전할 것인지 또 "어떻게" 전해야 되는지 가르치셨다. 

끊임없이 성령의 능력을 옷입은 사람들은 각양의 그들의 섬김에 따라서 새롭게 성령을 공급해 주신다. 

그들은 법정에서도 "성령으로 충만하였고"(8절) 이제 강단에서도 "성령"으로 충만하였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일의 임무가 요구하는 데 따라서 하나님의 은사에 실제적으로 의존하며 살 것을 가르친다. 

우리는 매 새로운 사건마다 "신선한 기름으로 기름부음 받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섭리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도 늘 "그 안에서 살"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모든 "행동"을 해야 한다(17:28).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눅 11:13) 이루어진 실례를 보았다.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것"은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은사가 풍성한 예를 보았다. 그것은 성령이 주어진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것을 소유하고 또 이용하면 이용할수록 더욱 풍성히 가지게 된다.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였을 때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성령의 도우심은 누구에게나 주어지고 언제나 이익이 된다." 

재능은 묻어 두어서는 안 된다. 써야하는 것이다. 

그들은 "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그들을 도우심을" 발견하고 더 이상 그들이 "당황하지 않은 것"을 알았다(사 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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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확장(행 4:32-37)

우리는 본문에서 초대 교회의 형편을 볼 수 있다. 

본문은 참된 초대 교회의 정신과 면모를 보여 주는 아름다운 글이다. 본문은 초대 교회의 순수한 "요람 시대를" 보여 준다.

Ⅰ. 제자들은 진심으로 서로 사랑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그들 가운데 어떤 분열이나 반목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은 얼마나 보기에 아름다운가!(32절)

1. 예루살렘. 악의를 품은 제사장들의 영향이 가장 강렬한 그곳에서 믿는 무리들은 있었다. 

어떤 날은 "삼천 명"이나 개종하였고 또 다른 날은 "오천 명"이나 개종하였으며 이외에도 "매일 교인 수가 증가하였다." 

그들 모두가 세례를 받고 믿음을 고백한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사도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전하도록 용기를 주신 같은 성령이 그들에게 신앙을 고백할 용기도 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증가는 교회의 영광이요 그들의 질보다는 믿는 무리의 수가 우선함을 기억하자. 

뭇 심령들이 교회의 품으로 구름 떼같이 몰려들고 "비둘기가 그 보금자리로 날아 오는 것같이" 모여들 때 교회는 빛을 발하고 그 빛을 비추이는 것이다(사 60:1, 8).

2. "그들은 모두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 

나이가 다르고 성격이 다르며 자란 환경이 다르고 믿기 전에는 서로 완전히 낯선 사람들이 많이 모였지만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났을 때 그들은 오랜 지기(知己)나 되는 것처럼 친하게 사귀었다. 

아마 그들은 회심하기 이전에는 유대인의 여러 분파에 각기 속해 있었을 것이고 또는 사회적인 문제로 불화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모든 문제들은 잊혀졌고 한 쪽으로 제쳐놓고 그리스도 신앙으로 하나가 되었으며 "주님과 하나가 되자. 그들은 또한 거룩한 사랑으로 서로 하나가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시며 제자들에게 남기신 교훈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과, 운명하시며 그들을 위해 하신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라고 한 기도의 축복스런 결실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각기 주거지에 따라서 각각 사역자를 모시고 여러 곳에서 예배함으로 또는 몇몇 교우가 집단을 이룸으로 여러 부류로 나뉘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무슨 질투나 불평 때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한 마음 한 뜻"이었고 다른 회중의 모임까지 자기 모임에 속한 사람처럼 참으로 사랑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성령의 역사의 결실이었고 그러므로 "그 때에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성령을 "부으시리니"란 말씀이 반복된다고 낙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매일 성령의 임재가 필요한 것이다.

Ⅱ. 사역자들은 큰 권능을 얻어 계속해서 그들의 사명을 수행했다(33절).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그들이 전한 도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 

사실상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 확신을 위해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적절한 결론과 함께 알맞게 설명해 주므로 기독교인의 모든 의무와 특권과 위로를 요약해 주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르게 이해하고 이용함으로 우리는 커다란 신앙의 신비를 깨닫게 된다. 

사도들이 부활을 증거하는 데 있어서 받은 큰 권능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1. 그들이 이 교리를 전파할 때 가진 용기와 담력을 말한다. 

그들이 가만히 소심하게 전한 것이 아니라 부활의 진리에 대해 자신들이 아주 만족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되기를 열렬하게 바라는 심정으로 생기있고 단호하게 전하였다.

2. 또는 그들의 교리를 확고히 하기 위해 임재된 기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큰 권능의 역사하심으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증거하였고" 하나님 자신이 기적의 역사 속에서 "증거하셨다."

Ⅲ. 우리 주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그들과 그들의 모든 행위를 밝게 하셨다. 

본문에 보면 사도들뿐 아니라 모든 믿는 사람들이 "큰 은혜"를 입었다(카리스 메갈레, 4:33). 즉 비범하고도 장엄한 그러한 은혜가 그들 "모두에게" 주어졌다.

1.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풍성한 은혜를 부으셨다. 

큰 권능과 함께 그들에게 큰 은사를 주심으로 그들의 위대한 사역에 자격을 부여하셨다. 이 은사는 그들에게 위로부터 임한 것이었다.

2. 그들이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에 이 은사의 명백한 결심이 있었다. 

그들의 언행이 자랑스런 결과를 가져왔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귀하게" 여겨지는 사랑을 받았다.

3. 어떤 이는 그들이 백성들에게서 받은 사랑도 포함한다. 

누구나 제자들에게서 아름다움과 뛰어남을 보았고 그리고 그들을 존경하였다.

Ⅳ. 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너그러웠고 이 세상에 대해서는 미련이 없었다. 

이것도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은사의 증거이며 그들로 하여금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한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1. 그들은 소유권을 포기하였다. 

실상 소유권은 어린이들이 알고 질투를 느끼며 세상 사람들이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라반은 자랑스럽게 "네게 보이는 것이 다 나의 것이라"(창 31:43) 했고 나발도 "나의 떡과 나의 물"이라고 말하였다(삼상 25:11). 

그러나 예수를 믿는 자들은 저 세상에서 얻을 유업을 바라봄으로 세상 소유는 안중에도 없었다. 

"제 제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32절). 

그들이 재산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에 무관심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것을 자랑과 허영으로 신뢰함으로 그들의 것이라 부르지 않았다.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고 또 계속해서 그를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내어 주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무엇이든 그들의 것이라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죄밖에는 아무 것도 우리 것이라 부를 것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의 것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으므로 그를 위해 써야하며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가 가진 것을 그의 것이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특별히 자기의 것임을 주장하지는 않았다는 뜻). 

왜냐하면 그들은 "기꺼이 나누어 주려하였고" 식사를 자기들만 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와 그의 가족이 쓰고 남을 것은 그와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다. 

재산을 가진 자들은 열심히 모으려 하지 않고 기꺼이 나눠 주었고 때로 자신은 궁색하면서도 형제들을 도왔다. 

이 세상의 부에 대해서 마음이 태평하였으므로 그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된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내 것"(meum) "네 것"(tuum)으로 꼭 시비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자기 것을 지키려하고 또 더 긁어 모으려는 데 전쟁과 싸움은 생긴다.

2. 그들은 구제에 풍부하였다. 

실상 그들은 모든 것을 공유하였다. "그들 중에는 핍절한 자가 없었으니," 

이는 그들 모두의 경비에 대해 주의 깊은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34절). 

그들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할 때 사회를 통해 구제를 받던 사람들은 이 구제를 물리치고 교회가 그들을 돌보았다.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리고 또한 이들을 부양할 수 있는 몇 사람의 부자도 있었다. 

또한 하나님의 은사는 그들로 하여금 기꺼이 구제하게 하셨다. 

많이 거둔 자도 그들의 여분의 것으로 적게 거둔 자에게 주었으므로 넘치지 않았고 적게 거둔 자도 이와 같이 부족함이 없었다(고후 8:14, 15). 

복음은 "모든 것을 같이 소유하게 한다." 

이는 가난한 자가 부자의 것을 약탈하는 것이 허용된다는 뜻이 아니라 부자가 가난한 자를 구제하도록 말씀하고 있다는 뜻이다.

3.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재산을 팔아 구제 기금으로 내놓았다. 

"밭과 집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팔았다"(34절) 

^^라이트푸트박사(Dr. Lightfoot)는 그 해가 50년마다 돌아오는 유대인의 안식년이라고 추정한다(그들이 1400년 전 가나안에 정착한 지 28회째 되는). 

따라서 그 해에 산 것은 다음 안식년까지 돌려 주지 않아도 됨으로 땅값이 비쌌고 따라서 땅을 팔아서 많은 돈이 모였을 것이라고 한다.

(1) 그들이 모은 돈으로 무엇을 했는지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그것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고" 사도들이 합당하게 여기는 대로 처리할 수 있게 하였다. 

사도들도 별다른 지원이 없었으므로 그것으로 생활을 한 것 같다. 

사도들이 금전을 그들의 발 앞에 두게 한 것은 세상 재물에 대한 그들의 거룩한 경멸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금전을 자기의 수중이나 품 안에 두는 것보다 발 아래 두는 것이 더 합당하게 생각하다. 

거기다 놓아둠으로 저장하지 않아도 되었고 몇 몇 책임자에 의하여 "필요한 사람들에게 분배해 줄 수가 있었다." 

공적 구제를 행하는 데는 세심한 베려가 필요하다.

① 그것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즉 연로한 자나 어린 아이, 병약한 자, 신체 불구자 정신박약자, 창의성이나 활동성의 결여자, 백치, 파산자, 억압받는 자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스스로 충분할 만큼 생활비를 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위에서 말한 사람들 외에 정말 도움이 필요한 데도 그들을 도울 아무 친척도 없는 사람들 또한 무엇보다 덕행과 "선한 양심을 지키기 위해" 결핍 가운데 생활하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희사된 것을 적절하게 분배하여 돌보았다.

② 그것은 편파성 없이 그가 "필요로 하는 대로 누구에게나" 주어졌다. 

재판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제에 있어서도  동등하게 필요를 느끼는 자들에게는 동등하게 도움이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은 법칙이다. 

말 그대로 구제는 필요에 따라 선택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2) 본문에 구제에 뛰어난 한 사람의 이름이 특별히 기록되어 있다. 그는 후에 바울의 동역자가 된 바나바였다.

① 그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36절). 

그의 이름은 "요셉"이었고 "레위 족속"에 속하였다. 흩어진 유대인들 가운데는 레위인들이 있어서 그들의 회당에서 드리는 예배를 인도하고 자기 족속의 의무에 따라 "그들에게 주님에 대해 가르쳤던 것 같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구브로 출신이었다. 그의 부모들은 유대인들이었지만 거기서 정착하였었다. 

그가 그들과 연합한 후 사도들이 그의 이름을 바꾸어 주었음을 생각해 보자. 

아마 그는 70명의 제자중 하나이고 많은 은사를 받음에 따라 저명하여지고 따라서 사도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그의 가치를 인정하는 표시로 그에게 바나바라고 명명한 것이리라. 

"바나바는 예언의 아들"이란 뜻으로 그가 비범한 예언의 은사를 받은 것 같다. 

그러나(Grotius는 말하기를) 헬라계의 유대인들은 "기도하는 것"을 paravklhsi" 라 하였고 그 말을 빌리면 "교훈의 아들" 즉 병 고치고 교화시키는 데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 예는 11장22-24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또 "위로의 아들"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즉 성령의 위로 안에서 즐겨 행한 사람 또는 늘 유쾌한 기독교인이란 뜻에서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일에 관대하였을 것이다. 

또는 주의 백성을 위로하며 상처받고 고통당하는 마음에 평안을 심어 주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란 뜻에서일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사도들 가운데 Boanerges(우뢰의 아들)(막 3:17)라 불리우는 사람이 둘 있다. 

그런데 여기 그들과 위로의 아들이 함께 하게 된다. 

각 사람마다 은사를 지니고 있다. 다른 은사를 혹평하지 말고 서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한 사람은 상처를 찾아내고 또 다른 사람은 그것을 치료하고 싸메게 하자.

② 그의 구제와 기금 모금에 대단히 관대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사실은 그가 후에 하나님의 교회를 섬김에 있어서 특히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함에 있어서 뛰어났기 때문에 기록되어 있다. 

이방인의 전도자가 되었다고 해서 그의 동족에게 어떤 악감정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본문에 보면 그의 자선행위가 유대인 중에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도 혜택을 주고 있다. 

또는 본문을 기록한 것은 규범적 행위로써 타인의 본을 삼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그가 태어난 곳이 구브로인지 지금 살고 있는 유대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곳에 땅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개인의 어떤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재산이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의 것임을 아는 참 레위인으로써 그의 땅의 유업을 멸시하였고 그것들에 대한 아무런 애착없이 구제에 쓰기 위해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아래 두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복음 전도자로 선택된 사람은 이 세상 일에 매이지 말아야 한다. 

그는 사도들의 발 아래 판 돈을 가져다 놓았을 때 조금도 마음의 안정을 잃지 않았고 그 후 성령께서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불러세우라" 말씀하시므로(행 13:2) 사실상 사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사도를 사도로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으므로 보상으로 그 자신이 사도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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