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4.06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행7.스데반의설교_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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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7장

===스데반이 설교하다

1.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2.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5.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6.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7.  또 이르시되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그들이 나와서 이 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8.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

9.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10.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11.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이 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12.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13.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14.  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15.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16.  세겜으로 옮겨져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

17.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1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19.  그가 우리 족속에게 교활한 방법을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20.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21.  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23.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24.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25.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26.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해시키려 하여 이르되 너희는 형제인데 어찌 서로 해치느냐 하니

27.  그 동무를 해치는 사람이 모세를 밀어뜨려 이르되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28.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29.  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30.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31.  모세가 그 광경을 보고 놀랍게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가 있어

32.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더라

33.  주께서 이르시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34.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35.  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

36.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37.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39.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40.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41.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42.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43.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44.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45.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스데반이 순교하다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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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7장 (개요)

우리 주님 예수께서 그의 사도들을 그를 위한 섬김과 고난에 참여하도록 부르셨을 때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되리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특히 스데반과 바울에게서 성취되었다. 이들 둘 다 사도들에 비해서 늦게 개종하였다. 그렇지만 그들 모두 섬김과 고난의 서막을 장식하였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찬미를 돌려 보내기 위하여 그들은 자주 결박당하였다. 본장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번째 순교자인 스데반의 순교를 대하게 된다. 그는 고귀한 군대의 앞장을 섰다. 그러므로 그의 고난과 죽음은 그가 겪은 것처럼 모든 사람들을 죽기까지 항거하도록 방향을 제시하고 격려하는 데 다른 사람들에 비해 크게 기여하였다.

Ⅰ. 공회 앞에서 자신을 변호함. 그가 고소를 당한 조항에 답하여 성전이 파괴될 것과 의식적인 율법의 규례를 고쳐야 한다고 말한 것이 하나님에 대한 모독도 될 수 없으며 그의 이름의 영광됨을 손상하지도 않는 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1. 그는 구약 역사를 재음미하므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나 의식적인 율법에만 자신의 섭리를 제한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고찰함으로 이 사실을 밝히려 하였다. 또한 유대 백성이 언제나 반항적인 백성이었기 때문에 그가 그의 약속을 이행하시리라고 기대할 이유도 없는 것이며 그들은 그들의 선택의 특권을 상실하였다고 말한다. 또한 거룩한 성전과 율법은 장차 올 좋은 것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이 모든 것들이 더 나은 것들로 대치되리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들에 대한 모욕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1-50).

2. 그런 다음 그는 예수를 박해하고 심판한 자들에게도 이 같은 결과가 주어진다는 것을 그들의 사악함을 날카롭게 파헤침으로 입증하였다. 바로 이 악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성전과 그들 국가의 파멸이 자초되었고 이러한 사실은 그들에게는 참고 들을 수 없는 일이었다(51-53).

Ⅱ. 그들이 그를 돌로 쳐서 죽임. 그의 참을성 있고 평안하고 경건한 죽음에 임하는 태도에 대하여(5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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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이 설교하다

1.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2.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5.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6.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7.  또 이르시되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그들이 나와서 이 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8.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

9.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10.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11.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이 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12.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13.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14.  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15.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16.  세겜으로 옮겨져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


스데반의 설교(2)(행 7:1-16)

이제 스데반은 신성 모독죄로 고소를 받아 대 공의회 앞에 죄인으로 선다. 

앞의 장에서 그에 대한 증언을 우리는 고찰하였다. 그것은 그가 모세와 하나님을 거스려 모독적인 언사를 썼다는 것이었다. 

즉 그가 직접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거룩한 성전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였다는 죄목으로 그는 그렇게 치죄되었다. 본문을 관찰하여 보자.

Ⅰ. 대제사장이 그에게 스스로 답변할 것을 요구한다(1절). 

대제사장이 회의의 의장이었고 따라서 회의의 대표적인 발언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법정 앞에선 그대여! 그대는 그대를 고소하는 증언을 들었을 것이다. 이 고소에 대하여 답해 보라. 이것이 사실인가? 그래 전에 이러한 취지로 말한 적이 있는가? 만약 그리하였다면 그러한 말들을 이제 취소하겠는가, 아니면 계속 그 주장을 고집하겠는가? 이제 죄를 짓겠는가, 죄를 짓지 않겠는가?" 

이렇게 하므로 그들은 공정을 기하는 것처럼 보이려 하였으나 그럼에도 그는 아주 거만스럽게 말한 것처럼 보인다. 

대제사장은 이미 자기 나름대로의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다면 스데반이 아무런 말을 하여도 즉 아무리 자기의 입장을 옳다고 하거나 설명하여도 신성 모독자로 치죄될 것은 확실한 사실이었다.

Ⅱ. 스데반이 자기를 변호하기 시작한다. 

그 내용은 아주 긴 것이었으나 그는 적절한 시기에 얘기를 중단하고 곧 중요 쟁점을 지적하였다. 

아마 그의 적들이 그에게 할 말을 다 하도록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면 그 내용은 더욱 길어졌을 것이리라.

1. 이 설교를 보아 그는 성경에 정통한, 그러므로 모든 훌륭한 말씀과 행적을 철저히 알고 있는 사람으로 보여진다. 

그는 성서 내용을 말하고 있는데 이 내용들은 그의 취지에 꼭 알맞는 것이었다. 물론 그는 성서를 보면서 말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하였다." 그렇다고 그에게 새로운 사실이 계시되있거나 유대 민족들에 대한 하나님의 숨겨진 뜻이나 섭리가 그에게 알려져 이 말씀에 비추어 그를 반박하고 있는 자들을 정죄할 수 있도록 되어진 것도 아니었다. 

다만 성령이 충만하므로 성령이 그로 하여금 구약 성서를 기억하게 하셨고 이 성서를 그들을 정죄하기 위해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그에게 가르쳐 주셨을 뿐이었다. 스데반이 그랬던 것처럼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은 성서도 [참되게 밝히] 환하게 알게 될 것이다.

2. 그는 70인 역 성서를 인용하고 있다. 이 사실로 보아 그는 그들의 회당에서 70인 역을 사용하였던 헬라파 유대인들 중에 하나였던 것 같다. 그가 70인역을 사용하기 때문에 설교는 자연히 히브리 원문 성서와는 여러 가지 차이가 생기었다. 그렇다고 재판정의 법관들이 그 내용을 정정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스데반이 어떻게 70인역을 사용하는 지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또 그가 그렇게 말하였다고 성경의 영적 권위가 저긎하서나 쇠락한 것도 아니었다. 다소의 차이가 문제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법조항이 법 자체는 아니다"라는 격언을 상기할 때 이 문제는 이해된다(법 조항보다 법 정신이 중요하다는 뜻, 역주). 

스데반은 창세기 끝에 나타나는 교회의 역사를 술회함으로 설교를 시작한다.

(1) 설교 서론.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라고 그는 설교를 시작한다. 

그는 아첨이라기 보다는 존경하는 뜻으로 그들을 이렇게 칭하였다. 이것은 또한 그 역시 그들에게 정중히 대우받기를 바랐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는 일반인들에게는 인도적으로 대우받기를 바랐고 부형들에게는 가족과 같이 대우받기를 바란다. 

그들은 그를 유대인에 대한 배교자 또는 그들의 적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데반은 이들의 그러한 선입견을 바꾸려고 '여러분 부형들'이라고 부른다. 이렇게하여 그들이 그를 적대시하지만 자신을 그들 중 하나와 같이 보도록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들으시요'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이미 그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듣기를 간청한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이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을 그곳에 비추어 보려하지 않으므로 말씀이 자신들에게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2) 설교 본문. 이 본문은(부주의하게 읽는 이들은 어떻게 보일는지 모르나) 듣는 사람들의 귀나 즐겁게 하려는 만담도 아니며 옛 이야기도 아니므로 그들의 기분전환이나 시키려는 의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설교는 적절하고도 의도적인 내용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이 생각하듯이 성전과 율법을 존귀히 여기시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려 했다. 

성전이 세워지고 정식 율법이 발표되기 오래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교회를 나타내셨고 마찬가지로 그는 그들이 자기들이 사는 시대에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보이셨던 것이다.

① 그는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실에서 시작한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에 대하여 신실하시며 그가 구약 교회의 아버지이심을 보여 주려고 한다. 이 사실은 창세기 12장 1절 이하에서 설명되고 있고 느헤미야 9장 7, 8절에서도 언급된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우상을 섬기는 나라로써 갈대아인의 땅(4절) 메소포타미아였다(2절). 

하나님께서는 그를 긍휼히 여기사 단번에 원거리를 이주하지 않도록 두 번에 걸쳐 이주할 것을 명하신다. 

처음에 그는 갈대아 땅에서 부르시어 가나안과의 중간 지점인 하란에 머물게 하시었다(창 11:31). 그리고 5년 후 그의 부친이 죽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거할 땅 가나안으로 가도록 명하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실 때 그는 아브라함과 담화하시려고 영광의 하나님으로(2절) 직접 나타나신 것같이 보인다. 그후 그는 하실 말씀이 있을 때마다 영광의 하나님으로서 자신을 나타내시지 않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첫째, 아브라함의 소명에서 다음 같은 사실을 배울 수 있다.

1. 이스라엘 사람들이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의 인도하심을 받았듯이 우리도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섭리의 지시를 따라야겠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자기 마음대로 이사하였다 기록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가 거할 땅으로 가라 명하셨다 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지도에 순종했을 뿐이었다.

2.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계약을 맺으신 백성을 이 세상의 자녀들로부터 구별하신다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들은 때 맞추어서 그들의 고향 국가, 민족에게서 불리움을 받는다. 그들은 세상에 너무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아무리 귀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는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서 초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 주시마고 하였던 보다 좋은 나라인 하늘 나라를 하나님이 주실 것을 신뢰해야 한다. 절대적인 믿음과 복종이 있을 때 하나님의 선택은 따라오는 것이다.

둘째, 스데반의 경우에는 어떠하였는지를 알아 보자.

1. 그들은 스데반을 하나님에 대한 모독자요 유대교의 배교자로 고발하였다. 

그러므로 스데반은 그도 아브라함의 아들로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 이라고 부를 권리가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그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예배자임을 나타내려고 본문에서 하나님을 "영광의 하나님"이라 부른다. 그는 또한 그가 하나님의 계시를 소유하였으며, 그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유대교회가 세워지고 조직되었음을 제시한다.

2. 그들은 자기들이 할례받았음을 자랑하였다. 

그러므로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고 그와 사귐이 있은 후에야 할례를 받게 되었음을 제시한다. 8절에 와서야 비로소 할례가 행하여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방법의 논증으로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았음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그가 할례받지 않았을 때에 의롭다 여김을 받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도 같은 논법을 보게 된다.

3. 그들은 거룩한 땅에 대한 강열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거룩한 땅이라 함은 가나안 전 영토를 의미하는 것으로 가나안 땅은 "거룩한 땅 임마누엘의 영토"라 불리워졌었다. 또한 성전의 파괴는 거룩한 땅의 멸망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제 스데반은 그들에게 가나안 땅에 대하여 자랑할 이유가 없다고 역설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든다.

(1) "너희가 본래 너희 조상들이 다른 신들을 섬기던 갈대아 우르 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수 23:2)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땅의 첫 번째 주인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차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혈혈단신으로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불렀노라(사 51:1, 2)라고 권고하는 말씀이 생략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즉 초라했던 첫 출발을 생각하고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었으며 그러므로 영원히 자기들을 자랑할 것이 없음을 말한다. "동방에서 사람을 일으키며 의로 불러서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한 분은" 하나님이었다(사 41:2). 그러므로 그의 자손이 타락하면 하나님께서 이 거룩한 처소를 멸하시고 다른 백성을 자기 앞에 세우실 것임을 깨닫게 하고자 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빚진 자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곳은 멀리 메소포타미아에서였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가나안에 오기 전 아니 하란에도 당도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이 땅(가나안 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된다고 말한다. 약속의 자손을 먼 동방에서 이끌어내신 것이 하나님이었다면 또한 그가 원하실 때에 그 반대편인 서방에서라도 약속의 자손을 이끌어 오실 수 있다고 말한다.

(3) 또한 "하나님께서 서둘러서 아브라함을 가나안땅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수년 동안 그로 하여금 도중에서 소일하게 하시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이 땅"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신 것이 아니며 이 땅을 그의 영광으로 삼지도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행복을 땅에다 제한시키지 않으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땅이 멸망하리라"는 말은 모독이 될 수도 없으며 배신도 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②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불리움을 받은 후의 오랫 동안 그와 그의 자손들의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 대하여 논함. 

정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이 땅을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었다(5절).

첫째, 그러나 아직도 아브라함에게는 자손이 없었고 그 후 여러 해가 지나도 사라는 잉태하지 못하였다.

둘째, 아브라함 자신이 이 땅의 나그네였고 방랑자였다. 

하나님은 그에게 "여기서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셨다." 그는 여기서 낯선 땅에 온 사람처럼 살았으며 항상 이사를 다녔으며 그의 것이라고 부를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셋째, 그의 후손도 오랫 동안 그 땅을 소유할 수가 없었다. 

"사백 년 후에" 그들이 돌아와서 "이 땅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셨으나 그 당시까지는 아니었었다(7절).

넷째, 그들이 그 땅을 소유로 얻기까지에는 많은 곤경과 어려움에 직면해야만 했었다. 

그들은 노예 생활을 하였고 낯선 땅에서 불행하게 살았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광야에서 방황한 것이 죄에 대한 형벌이었던 것처럼 특별한 죄에 대한 처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게 된 어떤 이유 설명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이 정하신 바였고 그러므로 그것은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삭이 출생한 날부터 계산하여 "사백 년이 끝날 때에 내가 그들을 종으로 삼고 있는 나라를 심판하리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주고 있다.

1.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일은 이미 계획되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아브라함이 어떤 유산도 없었고 후사도 없었을 때이지만 그는 이 두 가지를 가지게 될 것이라 약속되었었다. 전자는 약속의 땅이요, 후자는 약속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믿음에 의해서 이 두 가지를 이미 소유했던 것이다.

2. 하나님의 약속은 때로 더디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확실히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약속들은 우리가 바라는 것처럼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적절한 시기에 성취된다.

3. 하나님의 백성이 일시적으로 곤경 속에 있을지라도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출하시고 그들을 압제하던 자들을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참으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스데반이 이 말씀을 전한 목적을 생각하여 보자.

(1) 유대 민족은 그들이 열심히 긍지를 지키려 하였던 데 비해서 초창기에는 보잘 것 없었음을 깨닫게 하고자 한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불리움을 받았듯이 유대 지파들과 그들의 지도자들도 애굽의 종살이에서 놓여났던 것이며 그 때에 그들은 "모든 민족 중에 수효가 가장 적었다"(신 7:7).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 범죄할 때 그들은 파멸하고 만다. 그들이 멸망한다고 세계가 멸망하고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폐하여지는 것은 아니다. 애굽에서 유대 민족을 구원하신 그가 신명기 28장 68절에서 경고하셨듯이 다시 그들은 애굽으로 끌어가실 수도 있다. 또한 그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는 분이다.

(2)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이 수행되는 데 오랜 시간이 경과하였고 또 본문에서 지적된 바대로 많은 난관이 있었다면 이 내용은 표면적인 진리보다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 시도하고 있다. 

즉 약속에 의해서 전달되었고 확신된 그 땅은 보다 나은 땅 즉 하늘 나라를 말함이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도 이 말씀을 통하여 족장들이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며……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을 히브리서 11장 10, 11절에서 논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땅이 멸망하리라" 하신 말씀은 결코 모독적인 것은 아니다. 동시에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우리를 하늘에 있는 가나안복지로 인도할 것이며 그 나라를 소유하게 하실" 것인데 이에 비하면 지상의 가나안 땅은 그 모형과 상징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한다.

③ 아브라함의 가족을 세우시고 그 위에 신의 은총을 주심. 그리고 아브라함 가족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의 배려, 이 내용은 창세기 12장 이후의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의 하나님이 되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이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와 그의 후손이 할례를 받을 것을 지정하셨다(창 17:9, 10). 하나님은 그에게 할례의 계약을 맺으셨다. 할례의 계약은 곧 인치심을 말한다.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태어나자 팔일만에 그에게 할례를 베풀었고(8절) 이러므로 이삭은 하나님의 율법으로 다스려지고 신의 약속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왜냐하면 할례는 하나님과 인간에게 똑같이 계약의 인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편에서는 - 내가 너희에게 "모든 것에 풍성한" 하나님이 되리라는 것이요 인간 편에서는 - "내 앞에서 행하며 완전할지어다"라는 이중의 뜻을 지닌다. 그런 다음 아브라함의 자손을 여호와 섬기는 자손으로 삼기 위하여 실질적인 배려가 있고 나서야 이스라엘 자손은 번식하기 시작하였다. 즉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열두 형제를 나으니" 이들이 각 지파의 조상이 된 것이다.

둘째, 아버지의 집에서 귀염둥이요 복덩이였던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학대를 당한다. 

그들은 요셉의 꿈 때문에 그를 싫어하여 애굽에 요셉을 팔았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들은 일찍부터 그들 가운데 다른 이보다 탁월하고 뛰어난 사람들을 못마땅히 여겼다. 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적개심이 그 한 예인 것이다. 예수는 요셉과 같이 "그의 형제들 가운데 나사렛 사람이었다."

셋째, 하나님은 요셉을 그의 곤경 가운데서 돌아보사 그와 함께 하셨다(창 39:2, 21). 

하나님은 성령으로 역사하시사 요셉의 마음에는 위로를 주셨고 또 그와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그에게 호감을 갖도록 역사하셨다. 끝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그를 그의 곤경에서 놓아 주시사 바로로 하여금 요셉을 애굽의 제이인자로 삼게 하셨다(시 105:20-22). 이러므로 그는 애굽 사람들 가운데서 높이 발탁되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반석과 목자가 되었다"(창 49:24).

넷째,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심한 기근이 그로 하여금 가나안을 떠나게 하였다(극심한 곤경을 초래케 한). 

이 기근으로 "우리의 조상들은 가나안 땅에서 생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11절). "비옥하였던 토지가 황무지로 변하였다." 그러나 애굽에는 곡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바로 야곱 자신의 아들의 지혜로써 저장된 것으로써) 야곱은 "먼저 두 번째 갔을 때 첫 번에는 자신을 그들에게 알리지 않았던 요셉이 자기가 그들의 동생임을 그들에게 알렸고 마침내 바로에게도 그들이 요셉의 형제로서 그에게 의지하려 왔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13절). 바로의 허락을 받아 "요셉은 그의 아버지 야곱을 모든 그의 친척과 가족과 함께 애굽으로 초대하였다. 이들의 수효가 75명이었다(14절). 창세기에서는 그들이 70명이라 기록되었다(창 46:27). 그러나 70인 역에서 75명으로 되었고 스데반과 누가는 이 성경을 근거한 것 같다(눅 3:36). 아마도 70인 역에서는 히브리 원문에는 기록되지 않은 가나안 사람들을 합치었기 때문인 것 같다. 어떤 이들은 75명을 다음과 같이 산출한다. 즉 먼저 애굽에 있었던 요셉과 그의 아들들을 제외하고(이렇게 하면 64명이 되는데) 여기다 열한 족장의 아들들을 포함시킨 것이라 보기도 한다.

다섯째,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애굽에서 죽었다(15절). 그러나 그들은 옮겨져 가나안 땅에 장사지냈다(16절). 여기서 상당히 곤란한 문제가 발생한다. 즉 "세겜으로 옮기어 장사되었다"고 기록되었는데 창세기 50장 13절에는 야곱이 세겜 땅에 장사된 것이 아니라 헤브론 근처 아브라함과 이삭이 장사된 막벨라 동굴에 장사되었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요셉의 유골이 세겜에 장사된 것은 확실하다(수 24:32). 이런 사실로 미뤄 보다 (기록된 바는 없지만) 다른 모든 족장들의 유골도 그와 함께 옮기어졌으리라는 것이다. 모든 족장들이 각자 요셉이 행한 것과 같이 유언했을 것이고 따라서 본문은 야곱 자신이라기 보다 그의 자손의 장사에 대한 말씀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하겠다. 그러나 세겜에 있는 무덤은 야곱이 산 것이고(창 33:19) 이에 대하여 여호수아 24장 32절에도 기록되고 있다. 그런데 본문에는 이를 아브라함이 샀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이떻게 된 것인가. ^^휘트비 박사(Dr. Whitbby)의 해석이 올바른 것 같다. 그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그와 우리의 조상들이 거기서 죽었고 다시(우리 조상들이) 세겜으로 옮겨와 야곱이 아브라함이 창세기 23장 16절에 기록된 만큼의 돈을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었다"는 것이다(어쩌면 거기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묻히었을 것이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즉 다른 족장들을 말함인데 "세겜의 조상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무덤에 장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스데반이 이 말씀을 전한 취지가 무엇인가 생각하여 보자.

1. 스데반은 유대인들에게 여기서도 유대 민족의 보잘 것 없는 출발을 깨닫게 하려고 한다. 

그것은 자기 민족에 대한 그들의 교만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그들이 아무 것도 아니었던 상태에서 일어나 지금에 이른 것은 은총의 기적이었다. 그들은 소수의 무리로 출발하여 이제 큰 민족이 되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자기들을 불러 세운 취지를 망각한다면 그들에게는 파멸밖에는 없는 것이다. 예언자들도 자주 그들이 애굽에서 인도되어져 나왔음을 상기시키려 하였다. 그 이유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경홀히 여기는 죄를 범했기 때문이었다. 본문에서 이를 상기시키고자 한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경홀히 여기는 죄를 범했기 때문이었다.

2. 스데반은 그들에게 그들 지파의 족장들이 그들 형제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아버린 죄악을 상기시킨다. 

이와 같은 악한 정신이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자들을 향하여 아직도 역사하고 있는 것이다.

3. 그들이 그토록 열렬히 사랑하는 거룩한 땅을 그들의 조상도 오랫 동안 소유할 수 없었다는 것과 또 이 땅에서 기근과 큰 고난을 겪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상기시키려 한다. 그러므로 오랫 동안 죄로 감염되었던 이 땅이 결국 멸망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고 한다.

4. 가나안 땅에 묻히기를 간절히 바랐던 족장들의 믿음은 그들이 하늘 나라를 바랐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 주었다고 한다. 그들을 하늘 나라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예수 자신의 계획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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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1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19.  그가 우리 족속에게 교활한 방법을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20.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21.  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23.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24.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25.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26.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해시키려 하여 이르되 너희는 형제인데 어찌 서로 해치느냐 하니

27.  그 동무를 해치는 사람이 모세를 밀어뜨려 이르되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28.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29.  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스데반의 설교(3)(행 7:17-29)

본문에서도 스데반은 계속하여 말한다.

Ⅰ.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의 놀랄 만한 증대. 

그들이 잠간 동안에 가족에서 한 국민으로 성장한 것은 놀라운 섭리의 결과였다.

1. 그것은 약속의 시간이 가까워져서 이루어졌다. 

즉 때가 되서야 그들은 한 민족으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아브라함과 계약하신 후 첫 215년 간에 계약의 백성들이 늘어난 것은 70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후기의 215년 간에는 싸울 수 있는 장정만 60만으로 늘어났다. 시기가 아주 가까워져서 때로 섭리의 역사(役事)가 신속하여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느리다고 낙심하지 말자. 하나님께서는 보람없이 지나가 버린 듯한 세월을 보상하시는 방법을 아신다. "구속의 해(年)가 가까워질 때" 그는 하루에도 갑절의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다.

2. 애굽에 있을 동안 그들은 박해를 받았고 가혹하게 다스림을 받았다. 

그들의 생활이 말할 수 없이 어려울 때 그들은 자녀가 없었다고 전하여지기를 바랐을 것으로 생각될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들은 결혼하였고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시리라 믿었던 것이다. 과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축복하셨고 그들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때때로 수난당하던 시기는 교회에 있어 성장의 시기이기도 하였다.

Ⅱ. 거기서 그들이 직면한 극심한 고통(18, 19절). 

애굽인들은 유대인들의 수효가 늘어나는 것을 보고 그들의 짐을 더욱 가중시켰다. 스데반은 이 사실 속에서 다음 같은 세 가지 교훈을 발견한다.

1. 애굽인들의 배은 망덕. 

유대인들은 "요셉을 알지 못하는 다른 왕"에게 압제를 받았다. 이 왕은 요셉이 애굽을 위하여 행한 위대한 업적을 고려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생각할 수 있었다면 요셉의 친척들과 가족에게 이같이 나쁜 대우를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훌륭한 백성을 괴롭힌 애굽인들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었다. 실상 유대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와 장소에 축복이었던 것이다.

2. 애굽인들의 악랄한 정책과 수단. 

"그들이 우리 족속에게 궤계를 써서" "오라 우리가 현명하게 이들을 다루자"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을 보호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오직 그것은 자기들에게 진노만을 쌓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의 형제들을 궤계로 또 무자비하게 다루는 것이 자신들을 위한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큰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알아야겠다.

3. 그들의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잔학성. 

애굽인들은 유대인들을 효과적으로 근절시키려는 목적으로 "어린이들의 생명을 빼앗고 그들을 추방하였다." 유대 민족의 어린 자손들을 살해하는 것이 초창기에 있는 민족을 멸절시키는 데 당연한 방법처럼 여겨졌다. 이제 스데반은 이 사실도 청중들에게 알리기를 원한 것 같다. 즉 그들의 출발이 아주 보잘 것 없었다는 사실과 또한(애굽에서 어린이들을 죽게 내버렸다는 입장에서 볼 때) 유아의 추방은 얼마나 외롭고 무기력한 처지였었는가를 말해 주고자 한 것 같다(겔 16:4). 그런데 얼마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돌보심을 받았던가. 그들은 착취당하였었고 아무 가지도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초창기에 있는 기독교인의 교회를 향하여 하는 일이 불경하고 불공평한 처사임을 생각해야 된다고 촉구한다. 애굽인들이 초창기의 유대 교회를 박해한 것이 무익했던 것처럼 그들의 행위도 무익하고 뜻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대들은 우리를 악하게 대우하고 개종자들을 박해함으로 현명하게 처신하는 것으로 생각하도다. 그러나 그대들이 하는 것은 애굽인들이 어린 아이들을 추방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곧 이런 일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함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대들이 악의를 가지고 대하더라도 증가하고 번성할 것이다."

Ⅲ. 모세를 그들의 해방자로 세우심. 

스데반은 모세를 모독하는 말을 하였다고 해서 고발당하였다. 이 고소에 답변하여 그는 모세를 매우 찬양한다.

1. 모세는 이스라엘에 대한 박해가 가장 가혹하였을 때 특히 그 출생한 아이를 죽이는 가장 가혹한 시기에 태어났다. 

"그 때에 모세가 났다"(20절). 그리고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곧(우리 주님께서 베들레헴이서 겪으셨던 것처럼) 피의 법령에 희생이 될 위험에 직면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갈 길이 암담하고 그들의 곤혹이 가장 극심하였을 때 그의 백성의 구속을 준비하셨다.

2. "그는 극히 아름다웠다." 

태어나자마자 그의 얼굴은 빛나기 시작하였다. 영광의 하나님의 복된 약속이 그에게 둘리어진 것 같았다. 그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웠다.' 그는 태 속에서부터 성별되었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여겨졌다. 거룩함에서 우러나는 아름다움이야 말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가치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는 젖먹이였을 때 그의 인자한 양친에 의해 잘 보존되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그들은 그를 석달 동안 자기 집에서 양육하였다." 그 다음 그는 섭리에 따라 "바로의 공주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그녀는 그를 데려다 그녀의 아들처럼 양육하였다"(21절). 하나님은 그가 특별히 들어 쓰시고자 하는 자들을 위하여 특별한 보호를 베푸신다. 그러면 그가 어린 모세만 이렇게 보호하였는가? 그는(4:27 에서 불리운 대로) 거룩한 아기 예수를 "그를 대적하기 위해 모인 적들로부터" 더욱 안전하게 보호하시었다.

4. 그는 대학자가 되었다(22절). 

그는 "애굽의 학술을 다 배워 세련된 문장으로써 특히 철학과 점성학과 상형문자에 관한 학문(이것이 그들로 우상 숭배하는 데 기여한 것 같다) 등 모든 분야에 능하였다. 궁중에서 교육을 받은 모세는 최고의 서적과 교사들과 벗들에 의하여 모든 예술과 학문에서 자신을 연마할 기회를 얻었고 또한 학문에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애굽의 점술사들의 불법적인 학문과 실험에 대해서도 정통하였으나 그의 조상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데까지 이르지는 아니하였음을 우리는 추론하여 볼 수 있다. 이러한 지식은 그들을 격퇴시키는 데 필요한 것이었다.

5. 그는 애굽 나라의 수상이 되었다. 

이 사실은 "그가 말과 행사가 다 능하더라"는 말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비록 그가 의사 표시하는 데 있어서 능숙하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하더라도 그는 놀랄 만치 조리있게 말하고 따라서 그가 말한 것은 모든 사람의 수긍을 얻었다. 그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고 논리가 정연하였다. 업무처리에 있어서도 용기와 품행과 그 능란함에 그와 비교될 자가 없었다. 이같이 그는 모든 분야에 있어서 인간의 협조를 준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신적인 예지가 그에게 없었다면 그가 이렇게 철저히 갖추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스데반은 그를 박해하는 자들의 악의에 찬 고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들만큼 모세에 대하여 고귀하고 고매한 사상을 가지고 있음을 명백히 하였다.

Ⅳ.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 위한 모세의 계획. 

이 계획을 이스라엘 백성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 점을 스데반은 대단히 강조하였고 내용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출 2:11-15). 사도 바울에 의해서도 이 내용은 강조되고 있다(히 11:24-26). 히브리서에서 이것은 거룩한 자기 부정의 행위로 표현되고 있으나 본문에서는 그가 소명받은 공적 사명를 위하여 계획된 서막 또는 출발점으로 소개되고 있다(23절). 애굽 정부의 고관으로 한창 활동할 때 즉 "나이 사십이 되매(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역사하사)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므로" 그들에게 다소 도움이 될까 하여 나가 보았다. 여기서 그는 자신을 공적인 성격을 띤 공적(公的)인 인물로서 나타내었다.

1. 이스라엘의 구속자로서 활동함. 

그는 압제받는 이스라엘인의 복수를 함으로 본을 보였다. 그는 이스라엘인을 학대하는 애굽인을 쳐죽였다(24절).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그 고통받는 자에 대하여 마음이 움직였다. 그는 비위를 행하는 자에게 의분을 느꼈다. 이는 공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점이다. 그는 "압제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죽이었다." 만약 그가 평민(平民)이었다면 법적으로 이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사명이 하늘에서부터 위탁된 것을 알았다. "저는 그 형제들이"(그는 이들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즉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그 민족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리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으리라 믿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 생각하였다." 만약 그가 신적 권위의 상징으로서의 신적 능력을 옷입지 않았다면 그의 심적 상태나 또는 육신의 힘으로써는 그가 행한 바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만약 이스라엘인들이 때의 징조를 이해할 수만 있었더라면 이 사실을 구속의 날이 동터오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다." 이스라엘인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계획으로 여기질 못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모세를 그들의 해방자로 선언하는 나팔 소리요 기치를 높이 드는 일이었다.

2. 이스라엘의 재판관으로서 활동함. 

이 사실을 그는 다음날 다투고 있는 두 명의 히브리인의 문제를 중재함으로 그 본을 보였다. 이 사건을 통해서도 그는 자신이 공적인 인물임을 분명히 했다(26절). "그들이 다툴 때에 그가 나타나서" 위엄과 권위를 띠고서"그들을 즉시 화목시키려 하였다." 마치 히브리인의 왕자가 국민들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듯이 "가로되 너희는 형제라" 뿐만 아니라 조상도 신앙도 같았다. 그런데 "어찌 서로 해하느냐?"라고 책망한다. 왜냐하면 그는(대부분의 다툼이 그러하듯이) 양칙에 모두 잘못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화목하고 우의를 되찾으려면 서로 양보하고 이해해야만 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구속자로서의 모세는 애굽인을 죽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재판관이요 율법 수여자로서의 그는 철퇴로써가 아니라 황금홀(笏)로써 그들을 다스렸다. 그는 그들이 다툴 때 그들을 죽이거나 살해하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우수한 법률을 제시하여 그들의 불화를 해결하려 하였고 어려운 문제는 그에게 호소하도록 출애굽기 18장 16절에서 지시한다. 그러나 더 많은 잘못을 저지른 한 히브리 사람이 "모세를 밀어뜨리면서" 그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책망은 바르고 또 타이르는 부드러운 것이었으나 오히려 이 히브리인은 그의 얼굴에 주먹을 들이대듯이 모세를 힐난한다. "누가 너를 관헌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거만하고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타인의 간섭과 제지를 참지 못한다. 이러한 이스라엘인들은 구속을 받고 그들의 구속자에 의하여 이성으로 다스림을 받기 보다는 작업 감독자에 의하여 채찍으로 다스려지는 것이 효과있는 일이었다. 잘못을 저지른 자는 그에게 주어진 책망에 격분하여 모세가 그의 민족을 위하여 애굽인을 죽인 의로운 행동을 책망하였다. 모세를 그들이 받아들이기만 하였다면 그는 보다 위대한 일을 그들을 위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네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 하느냐"(28절)라고 항변한다. 모세의 거사는 애굽인들을 무시하여버린 쾌거였고 이스라엘에게는 사랑의 행위요 구원의 행위였다. 그러나 그는 모세를 범죄자로 고소하며 이를 들어서 그를 협박하였다. 이로 인하여 "모세는 미디안 땅으로 도주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40년이 지날 때까지 이스라엘 해방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미디안에 나그네로 정착하여 이드로의 딸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29절).

이제 스데반이 이 사실을 말한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여 보자.

1. 유대인들은 스데반이 모세를 모독하였다고 고발하였다. 

이에 답변하여 그는 그들의 조상들이 모세에게 행한 불의로운 일을 들어 그들에게 응수한다. 이 사실에 대하여 그들은 모세를 높이는 일에 열심인 척하면서 이 문제를 끄집어 내어 논쟁하는 대신 자신들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겸손해야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를 숭배하는 것처럼 가장했던 것이다.

2. 유대인들은 스데반이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변증한다는 이유로 박해하였다. 

그의 변증에 반대하는 그들은 모세와 그의 율법을 내세웠다. 그러나 스데반은 "너희가 스스로 조심하라"고 타이른다.

(1) "너희가 너희 조상들이 행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왕과 구세주로 세우신 분을 거역하여 거스리지 않도록 하라. 만약 너희가 빛 앞에서 고의로 너희 눈을 감지 아니한다면 하나님께서 이 예수를 통하여 애굽에서 겪었던 것보다 더 극심한 노예 상태에서 너희를 해방시키려 하심을 이해하였으리라. 그러므로 그를 저버리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를 너희의 통치자와 재판관으로 삼도록 하라"고 주의를 준다.

(2) "너희가 너희 조상들이 행한 것처럼 행하지 않도록 하라. 이 때문에 그들은 당연하게도 노예로서 죽고 만 것이다. 이스라엘의 해방은 그 후 40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도다. 이 사실을 교훈으로 삼도록 하라. 너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는 이방인에게 전파될 것이요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므로 너희 운명이 이미 결정되었도다"(마 23:38, 39)라고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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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31.  모세가 그 광경을 보고 놀랍게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가 있어

32.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더라

33.  주께서 이르시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34.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35.  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

36.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37.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39.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40.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41.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스데반의 설교(4)(행 7:30-41)

본문에서도 스데반은 모세의 이야기를 계속한다. 

누구든지 그의 말을 듣고 그가 모세를 모독하였는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실상 이 이상 모세를 극찬할 수는 없는 정도였다. 본문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Ⅰ. 그가 가시나무떨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본 환상(30절).

"40년이 차매"(그동안 모세는 미디안에서 생매장 당한 것과 같은 생활을 하였고 이제는 늙어서 지난날이나 추억하며 생활해야 할 연령에 도달하였다) 이 때가 돼서야 모세가 행한 모든 일들이 신의 능력과 약속의 결과임을 나타났다(이 사실은 이삭이 약속의 자손이었으나 그의 양친이 출산할 수 없는 나이에 태어난 것과 흡사하였다). 이제 80세가 되어서야 40년간의 자기 부정에 대한 보상으로 출생했던 때의 영광스러운 위치로 돌아가게 되었다. 다음 사실을 생각하여 보자.

1.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신 곳은 "시내산 광야"였다(30절). 

하나님이 거기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그 곳은 거룩한 땅이 되었다(33절). 

스데반은 이 사실을 지적함으로 성전이 거룩한 처소라고 교만에 빠져서 그곳 외에서는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는 것처럼 여기는 유대인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려 하였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만나시고 자신을 나타내신 곳은 멀리 시내 광야의 알 수 없는 무명의 장소에서였다. 그들은 하나님이 무슨 장소에 국한되신 것처럼 생각함으로써 자기기만에 빠져 있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사 거기서 홀가분하게 그들에게 말씀할 수도 있는 것이다.

2. 그에게 나타나신 방법.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셨다(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시기 때문이다). 

이제 가시나무 떨기는 타기 쉬운 것이었지만 그것은 타지 않았다. 이 사실은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의 상태를 상징하는 것이었다(가기서 이스라엘은 시련의 불꽃 가운데서 지났지만 타버리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성육(成肉) 즉 신성과 인성의 결합의 모형으로 볼 수 있다.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의 불꽃과 같은 것이었다.

3. 모세가 이 사실에 접하게 된 경위.

(1) "모세는 그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겼다"(31절). 

그것은 그가 애굽에서 배운 모든 학식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처음에 그는 호기심이 생겨 그것을 살펴 보았다. 

"내가 비켜서서 이 놀라운 광경을 보리라" 한다. 그러나 그가 가까이 갈수록 그는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2) "그가 무서워 떨며 감히 알아보지 못하였다." 

즉 그 모습을 세심히 관찰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곧 그것이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기이한 현상이 아니라 "여호와의 사자였고" 다름 아닌 "계악의 사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그를 두렵게 하였다. 

스데반은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였다고 고발당하였다(6:11). 그들은 모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신으로 받들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통하여 그도 "인간이요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임이 나타난다. 특히 신적 엄위와 영광이 나타난 것을 보고 두려워한 것을 보면 그렇다.

Ⅱ. 모세가 하나님의 계약이 선포되는 것을 들음(32). 

"주의 소리가 그에게 임하였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으로써 나기 때문이다. 그 소리는 다음과 같았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1. "나는 전에 있었던 바와 같이 지금도 변함없는 하나님이라" 는 뜻이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내가 너에게 하나님이 되리라." 즉 모든 것에 풍족한 하나님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제도 그 계약은 충만한 능력이 있어 취소되거나 잊혀질 수 없도다. 전과 같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이제 내가 그 약속을 나타내겠노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온갖 은총과 자비는 아브라함과의 계약에 근거한 것이요 이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2. "나는 지금 있던 대로 영원히 변함없이 있으리라"는 뜻이다. 

만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죽음이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계약을 폐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면(그 사실이 모세의 때에 나타난 것처럼) 어떠한 것도 계약을 폐기하지 못하며 그는 영원히 하나님이 될 것이다.

(1) 먼저 이제는 죽어 몸에서 분리된 그들의 영혼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마태복음 22장 31, 32절에서 이 말씀에 의지하여 미래에 되어질 일을 입증하셨다. 

아브라함이 죽었으나 하나님을 그의 하나님이라 아직도 부르니 그런고로 아브라함이 아직 살았노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는 그 약속을 만족할 정도로 완벽하게 성취하시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저 세상에서 그가 약속을 이루어 주실 것을 뜻하는 것이다. 

복음에 의해서 새롭게 부각된 것이 이 생명과 불멸이다. 이에 대하여 사두개인들은 완고하게도 부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수호하고 복음을 전하려 노력하는 사람들은 모세를 모독한다기 보다 모세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는 사람들이다. 

모세가 가시나무떨기에서 경험한 것이 하나님이 스스로 보여 주신 이 영광스러운 현현이었다.

(2) 그들의 자손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신 그 하나님은 그들의 자손들에게 친절을 베푸신다. 즉 그들은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들이 된 것이다(롬 11:28; 신 7:8). 

그러므로 복음 전도자들은 이 계약을 전파해야 한다. 그 계약은 곧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이요" "이 약속에 의지하여" "12지파"에 속한 무리들은 "계속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장차 이루어질 약속을 바라는 것이다(26:6, 7). 

그런데 이제 그들이 성전과 율법을 수호한다는 명색 아래 율법이 있기 오래 전이며 성전이 건축되기도 전에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 즉 그의 영적인 자손들과 맺은 계약을 어기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히 계속 찬양되고 우리가 영광받는 것은 영원히 침묵할 때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아니라, 약속에 따라 우리의 구원이 되신다. 

그러므로 율법을 범한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것은 스스로 약속을 모독하는 짓이요, 약속 가운데 포함된 그들이 입을 수 있는 온갖 자비를 포기하는 것이다.

Ⅲ.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해내는 사명을 위탁하심. 

유대인들은 모세를 들어서 그리스도를 대적하였고 스데반을 모세 모독자라고 고발하였다. 실상 그가 그들처럼 모세를 모독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스데반은 이곳에서 이스라엘의 구속자로서의 모세를 그리스도의 참된 모형으로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선포하신 후 다음과 같이 모세에게 명령하였다.

1. 모세로 하여금 정숙한 자세를 갖도록 명하셨다. 

"네 발의 신을 벗으라." 

천박하고 냉담하며 잡다한 생각을 품고 거룩한 것에 접근하지 말라는 뜻이다. 전도서 5장 1절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로 기록되었다. "저급하고 무모하게 하나님께 나아가려 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나아가라"는 말씀이다.

2. 모세에게 특별한 사명을 감당할 것을 요구하셨다. 

그가 계명을 받아들이고자 할 때 그에게 임무가 주어졌다. 하나님은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을 그의 나라에서 내보내 줄 것을 모세에게 명하셨다. 34절에서 이 요구는 더욱 강조된다. 다음 사실을 생각하여 보자.

(1) 하나님께서 그들의 고통과 신음을 돌아보심. 

"내가 정녕히 그들의 고통을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들었나니"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가 당하는 고통과 그의 박해받는 백성들의 탄식 소리를 연민을 가지고 살피신다. 그리고 그의 긍휼히 여기심에서 구속은시작된다.

(2) 그가 모세의 손에 의하여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려고 작정하심. 

"내가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 분이지만 본문에서는 그들을 구원하러 내려오셨다는 표현을 사용하신다. 그 이유는 이 해방이 그리스도가 하신 구속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또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으니 먼저 올라가신 이가 내려오셨도다" 함과 같다. 모세는 꼭 있어야만 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시방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34절)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셨다면 그가 책임지시며 성공하게 하신다.

Ⅳ. 이 사명을 이루려는 모세의 활약. 

이 점에서 그는 메시야의 예표였다. 본문에서 스데반은 다시 그들이 모세로 그들을 해방시켜 준 대리자로서 영광을 돌리는 것 같으나 그에 대하여 경솔하였던 점들과 그들이 그에게 가한 모욕과 그들이 그의 통치를 거부한 점들을 지적한다.

1.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멸시한 그를 영예롭게 하셨다(35절). 

"그들이 거절하던 그 모세를[그의 친절한 제의와 훌륭한 직책을 그들은 코웃음치며 거절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레위의 아들이여 그대가 분수에 지나치도다. 누가 너를 치리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느뇨"라 하였다(한글 개역과 다소 다름) 민 16 : 3]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시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천사의 손을 의탁하사 또는 그를 지키며 수호한 천사의 손을 의탁하사 그가 흠없는 구속자가 되도록 보내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제 스데반은 이 사실을 들어 그들이 조상들이 모세에게 행한 것처럼 "이 예수를 거절하였다"는 사실을 공회에 알게 한다. 

그들 예수에게 말하기를 "누가 너를 예언자왕 왕으로 삼았는가?" "누가 이 권한을 네게 주었는가?"라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예수를 사도들이 전에 언급하였던 것처럼(5:30, 31) "왕과 구세주로 치리자와 구속자로" 세우셨던 것이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써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4:11) 함과 같다.

2. 하나님께서는 비록 그들이 그를 거부하였지만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호의를 나타내시고 더 나아가 그들을 도우셨다.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그들 돕기를 거절하셔야, 이를 싫어하셔야 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하지 않으셨다. 또한 그들을 책망하시지도 않았다(36절). 

"그는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신 후 그들을 인도해내셨다"(이 일은 그들에게 필요할 때마다 구속이 완성되기까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이와 같이 스데반은 모세를 모독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모세를 구약 교회를 이루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영광된 그릇으로 찬양한다. 모세를 그릇이라고 말하였다고 해서 또 그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볼 때 빛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고 그의 영예가 손상되는 것을 결코 아니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이 아직도 예수에게 마음을 열지는 않았지만 계속 전한다. 그는 두려움 없이 그들이 그의 친절을 받아들이고 그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기를 바랐다.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 번은 모세를 거부하였지만 모세를 통하여 구속 받은 것처럼 되기를 바랐다.

Ⅴ. 그리스도와 그의 은총에 대한 모세의 예언(37절). 

그는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을 뿐 아니라(그리스도의 날을 실제로 예견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모세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였다(37절).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이 사실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가장큰 영광 중 하나였다(실상 이것은 다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위대한 예언자가 세계에 임하리라는 것을 알리셨고 그에 대한 그들의 기대를 불러일으켰고 그들이 그를 영접하도록 촉구하였다. 

모세가 애굽에서 그들을 이끌어 낸 사실을 말할 때 그의 명예를 높이는 뜻에서 출6 :26에 "이 모세라" 하였듯이 본문에서도 "이 모세라" 기록되고 있다. 

그러면 스데반이 의도하였던 취지는 무엇인가? 그는 예수께서 의례적인 율법의 관습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주장함으로써 스데반 자신이 참으로 시도하고자 한 것은 모세를 모독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보여 줌으로 모세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경의를 표하였다. 모세의 예언이 맞은 것은 명백하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가리켜 말한 대로 "그들이 모세를 믿었다면 그도 믿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요 5:46).

1.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세는 그들에게 말하였다. 

즉 때가 차면 그들이 그들 가운데 일어난 예언자 즉 그 민족의 한 사람을 맞이하게 될 것인데 그는 모세와 같은 사람이 될 것이라 하였다(신 18:15, 18) - 즉 그와 마찬가지로 통치자요 구속자며 재판관이요 율법수여자로서이다 - 그러므로 이 그리스도는 모세가 전하여 준 관례를 바꿀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더 나은 계약의 중보자로서" 보다 나은 희망을 주신다.

2. 스데반은 모세의 말한대로, 그들에게 이 예언자에게 순종할 것과 그의 교훈을 받아들이며 그가 그들의 율례를 변화시킨 것을 수긍하고 만사에 그에게 복종할 것을 당부하였다. 즉 다음과 같이 말했으리라. 

"이것이야말로 너희가 모세와 그의 율법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최대의 경의이도다. 모세가 너희는 그를 들으라 말하지 않았던가. 이 책임은 그리스도께서 변형되실 때 하늘에서 들린 음성을 통하여 반복하여 증거되었고 그리스도께서 이 때에 침묵하심으로 이 사실을 승인하셨도다"라고 하였다(마 17:5).

Ⅵ.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계속 행한 탁월한 공헌. 

이 후 그는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도구로 쓰여졌다(38절). 이 점에서 그는 또한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는 모세가 선포한 율례를 바꿀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라고 할 만큼 흠이 없다는 점에서 모세를 훨씬 앞선다 하겠다. 이 직책은 모세의 영예가 되었다.

1. 그가 "광야 교회에 거하였다"는 사실이 그의 영예가 되었다. 

그는 사십 년 동안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주재하였다. 즉 여수룬의 왕이었다(신 33:5). 

본문에서 이스라엘 회막은 "광야 교회"라고 불리웠다. 왜냐하면 그곳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정권 아래 하나님의 헌장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하나님의 계시로써 축복된 거룩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이 교회는 그들이 가나안에 거할 때처럼 완전히 이루어진 교회는 아니었지만 광야의 교회도 교회는 교회였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각자가 옳다고 생각되는 대로 행하였다."(신 12:8, 9). 

모세가 이 교회에 있게 된 것은 그의 영예였다. 만일 모세가 그곳에 있으면서 교회를 위하여 중재하지 않았다면 여러 번 그 교회는 해체되었을 것이 틀림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광야에 있었던 교회보다 더 훌륭하고 영광된 교회의 회장이시오 인도자이다. 그리고 모세가 광야 교회에서 행했던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는 교회의 생명과 정신으로써 활약하신다.

2. "그가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 또한 그의 영예였다. 

그는 2회에 걸쳐 사십 일 동안 거룩한 산에서 우리의 지도자인 계약의 천사 미가엘과 함께 거하였다. 모세는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영원으로부터 행하였던 것은 그의 능력밖의 일이었다. 이 말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모세는 광야 교회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내산에서 그에게 말하였던 천사와 함께였었다." 즉 시내산에서 말한 천사란 타오르는 가시떨기나무에서 말하던 천사를 뜻한다. 이는 곧 시내산에서 있게 되리라는 말씀과 같다(30절). 이 천사가 그 앞에서 행하며 그를 인도하였고 그렇지 않았으면 그가 이스라엘을 인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하여는 "내가 네 앞서 사자를 보내리니"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출 23:20). 또한 출애굽기 33장 2절에도 이러한 말씀이 있다. 또한 신명기 20장 16절도 참조하라. 

그는 천사와 함께 교회에 있었다. 그 천사, 곧 사자가 없이 모세는 교회에서 아무런 봉사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신이 광야 교회에 있었던 바로 그 사자이셨으며 그러므로 그는 모세를 능가하는 권위를 지니셨다.

3. "그가 생명의 도를 받아 이스라엘에게 주었다"는 것이 모세의 영예였다. 

그는 십계명뿐 아니라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것들을 말하라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다른 교훈들도 전달하였다.

(1)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며 변함없는 도(道)요 확실한 권위와 당위성을 지닌 도이다. 

이 말씀은 도로써 이해될 수밖에 없으니 이를 통하여 모든 쟁론이 조정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도"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이며 귀먹고 눈먼 이방 우상들의 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다

모세의 율법이 생명을 줄 수 없다. 오직 그것은 생명으로 안내하는 길이다. "너희가 생명을 얻으려면 계명을 지키라" 함과 같다.

(3) 모세는 이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으나 백성들에게는 신탁(oracles)으로 해석하여 전하지 않고 "그가 처음 하나님께 받은 대로" 전하였다.

(4)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의 도를 그는 진실하게 백성에게 전하여 준행하고 보존되도록 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도가 위탁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제일 큰 특전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전달된 것은 모세를 통해서였다. 

하늘에서의 떡을 모세가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님과 같이 하늘로부터의 율법도 그가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었다(요 6:23). 오직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주었다. 그러므로 그의 종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율례를 전해 주신 그분이 그가 원하실 때는 그의 아들 예수를 통하여 율례를 변경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예수는 모세가 주었던 것보다 더 좋은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전해 주시었다.

Ⅶ. 이러한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모세를 경멸함. 모세를 거스려 말했다고 스데반을 고소한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행한 잘못에 대해 답변할 수 있어야 했다. 오히려 그들은 조상들의 전철을 밟고 있었다.

1.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 하여 그를 거절하였다"(39절). 

그들은 그에게 불평을 했고 폭동을 일으켰으며 그의 명령에 복종할 것을 거절하였고 때로 그에게 돌을 던졌다. 실로 모세는 그들에게 뛰어난 율법을 주었으니 "그것은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음이"(히 10:1) 이를 통하여 명백히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였고" 모세의 인도 아래서 그들이 맛보게 된 만나와 그들이 가나안에 가서 맛보게 될 우유와 꿀보다 애굽의 마늘과 양파를 더 좋아하였기 때문이다. 

모세에 대한 이러한 은밀한 불평은 그들의 친애굽주의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실상 이것은 애굽으로 향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미 마음으로는 애굽으로 향하고 있었다. 

외관상으로만 신앙 고백을 하는 것같이 보이므로 가나안으로 전진하는 것처럼 위장하는 많은 사람들은 롯의 아내가 소돔을 바라보았던 것같이 그들의 마음은 동시에 애굽으로 향하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버림받은 자로 여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제 만약 모세가 그들에게 준 율례가 그들을 변화시킬 수 없었다면 그리스도께서 그 율례를 바꾸시고 보다 영적으로 예배하는 길을 소개하고자 하심이 기이한 것은 아니다.

2. 모세 대신이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로써 모세를 대단히 격하하게 하였다. 그들이 송아지를 만든 것은 다음과 같은 생각 즉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겠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우리가 금송아지를 만들자." 

그들은 마치 송아지가 모세의 부재를 충분히 보충할 것으로 또한 그들 앞에서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이 주어졌던 그때 당시에도 "송아지를 만들고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만든 새로운 신이 너무도 자랑스러워서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 악기를 두드렸다."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율법으로는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상당한 부분이 있음이 들어난다. 그러므로 이 율법이 보다 나은 손길을 통하여 완벽해지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율법에 행한 바를 그가 전하였다고 그가 모세의 모독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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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43.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44.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45.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스데반의 설교(5)(행 7:42-50)

본 단원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Ⅰ. 스데반은 그들의 조상들의 우상 문제를 들어 그들을 비난한다. 그들이 일찍부터 하나님을 버리고 금송아지를 섬긴 벌로써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던 것이다. 이 처형은 죄에 대한 처벌중 가장 슬픈 것이었다.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에 대하여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타락한 마음을 주시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이 우상과 연합하고" 금송아지와 결탁한 뒤 또한 바알브올(모압인들의 신, 그 예배하는 대는 관능적인 의식이 따른다. 역주)을 섬긴지 오래지 않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려두라"고 말씀하셨다. 즉 그들 뜻대로 살게 하라는 뜻이다. 이제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다." 스데반은 그들에게 어떤 어려운 일이 있을지라도 이렇게 행하지 말 것을 특별히 경고한다. 그리고 그들이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치우쳐 그리로 행할 때는 "그가 그들을 자기의 마음의 욕망대로 행하게 버려두시고" 그의 제한된 은총마저 거두시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의사대로 행하였고 과거 어떤 백성도 결코 행하지 아니하였던 정도로 수치스럽게 우상에 몰두하였다. 신명기 4장 19절을 예레미야 8정2절과 비교해 보라. 이를 위하여 그는 아모스 5장 25절을 인용한다. 그가 구약 예언서를 인용하여 그들 자신의 성격과 운명에 대해서 말한 것은 그들을 불쾌하게 하지 않으려는 배려에서였다. 아모스 예언자도 그들을 다음과 같이 책망한다.

1. 그들이 광야에서 그들의 하나님에게 제사드리지 않은 것을 책망한다(42절).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아니었다. 이 모든 시기를 통하여서 하나님에게 희생을 드리는 것은 사면되었었다. 불과 이 년이 지난 다음에 그들은 유월절마저 지키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을 강요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제사드리는 것을 사면했는데 이제 우상에게 희생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과 원수를 맺는 일이 얼마나 나빴던 것을 상기시킨다. 또한 이 사실은 모세가 그들에게 전하여 준 율례에 대한 그들의 열심을 막아버렸던 것이다. 이제 이 율례를 가짐으로 오는 두려움이 "이 예수를 통하여" 변하였다. 그들이 이 율례를 전해 받은 즉시로부터 사십 년 동안 이 율례는 전혀 소용없는 것처럼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2. 그들이 가나안에 도착한 후 다른 신들에게 제사드린 것을 책망한다(43절). "너희가 몰록의 장막을 받들었음이여" 몰록은 암몬자손의 우상이었다. 이 우상에게 그들은 야만스럽게도 그들의 자녀들을 희생으로 바쳤다. 이 행위는 그들 자신과 친척들의 대단한 공포와 슬픔을 수반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므로" 이 비합리적인 우상 숭배에까지 그들이 도달하였던 것이다. 역대하 32장 3절을 참조하라. 확실히 백성들은 이제껏 겪어보지 못했던 가장 무서운 기만에 빠졌던 것이고 불순종의 자녀들을 사탄의 권세에 넘겨 준 가장 큰 실례였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이 사실이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 "너희가 몰록의 장막을 받들었음이여 너희가 그것에게 복종하였도다. 또한 너희 신 레판의 별을 예배하였음이여" 어떤 사람들은 몰록이 태양을 뜻하듯이 레판은 달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또 어떤 이들은 그것을 토성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시리아어와 페르샤어에서 토성이 렘판(Remphan)으로 불리워지기 때문이다. 70년 역은 토성을 보다 더 잘 알려진 이름인 기윤(Chiun)이라고 부르고 있다(Chiun:암 5:26 에서 유래된 말, 아모스는 이 용어를 예언자 시대에 유행하던 토성 숭배를 나타내는 말로써 쓰고 있다. 역자 주). 그들은 달에게 있는 은빛 달무리와 같이 별로 상징하는 형상들을 가지고 있었고 본문에서는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라고 불리워졌다. 라이트푸트 박사(Dr. Lightfoot)는 그들이 모든 성운(星雲)과 위성을 포함한 별이 총총히 빛나는 궁창을 표현하는 형상을 만들어 가졌으며 이것들을 렘판(Rimphun)이라고 불렀으며 이 렘판은 천체와 같은 "천상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상을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로 보잘 것 없는 것이나 그렇지만 금송아지보다는 낫다고 하겠다. 바로 이러한 우상 때문에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는 경고가 주어진다. 아모스 시대의 바벨론은 다메섹을 건너 동쪽 지역에 있는 바벨론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열 지파들 포로로 잡히어간 사실을 잘 아는 스데반은 이 내용을 변경한다. 이들 열 지파는 "바벨론 너머 고잔 강가와 메대의 여러 도시로 사로잡혀 갔던 것이다(왕하 17:6)(한글 개역과는 다소 다름 - 역주). 그러므로 스데반은 그들이 이 땅이 멸망할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기이히 여기지 말기를 권한다. 왜냐하면 이 사실은 구약의 예언자들에 의해 수없이 경고되었기 때문이요, 이 선지자들은 악한 통치자들 이외에는 어떤 사람들에게도 모독자라고 고발당하지 않았음을 말하려 한다. 예레미야에 대한 소송 사건에서 미가 선지자에 대한설명은 없지만 "시온이 밭같이 경작함을 당하리라"는 미가의 예언이 인용되고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렘 26:18, 19).

Ⅱ. 스데반은 그가 성전에 대하여 말한 내용에 대한 그들의 고소에 특별히 답변을 하고 있다. 즉 "그가 거룩한 곳에 대하여 모독적인 말을 하였다"는 고소에 답변한다(44-50절). 그는 예수께서 이 성전을 허물 수 있을 것임을 말하였으므로 고소당하였다. 스데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대체 내가 무슨 못할 말을 했는가?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은 이 성전의 영광에 제약받지 않는다 하였으며 성전은 비록 진토에 묻혀버리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은 변함없이 보존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1. "우리의 조상이 광야 즉 가나안으로 가는 도상에 있을 때는 고정된 예배 장소가 없었도다. 또한 오래 전의 족장들은 그들의 장막에 인접한 노천(-Sud dio) 제단에서 하나님께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렸도다. 처음에 성전없이 예배하였던 그가 최상의 예배를 드렸으며 구약 교회의 사장 순수한 형태를 이루었듯이 이 성전이 허물어지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의 어떤 손색도 없이 그러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2. 최초의 성전은 이동식의 보잘 것 없는 장막이었다. 이 장막은 단명(短命)하였고 장기적 사용을 위해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 성전이 비록 돌로 지어졌다고 하지만 장막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다 나은 장소로 어째서 옮길 수 없단 말인가? 장막이 성전으로 바꾸인 것이 하나님께 불명예가 아니라 명예가 된 것처럼 이제 외형적인 성전이 영적인 성전으로 바꾸일 수 있는 것이며 결국은 이 영적인 성전도 영원한 성전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3. 그때의 장막은 "증언의 장막" 또는 증거의 장막이었으며 "현재까지의 상징"이며(히 9:9) "장차 올 좋은 것들의 상징이며 주께서 하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닌 참 장막의 상징이다"(히 8:2). 장막과 성전이 장차 하늘에 있게 될 하나님의 성전과(계 11:19) 땅위에서의 그리스도의 계약과(요 1:14) 그리스도의 몸의 성전에 대한 증거를 위해 세워졌다는 것은 곧 장막과 성전의 영광이었다.

4. 이 장막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모세가 산에서 본 양식에 따라서" 지어졌으며 이 사실은 명백히 장차 좋은 것들을 말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 건설이 하늘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 의미와 취지도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손으로 만들지 않은 다른 장막을 세우기 위하여 손으로 만든 이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연 그 영광이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이 다른 장막을 짓는 것에 대하여 선포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요(막 14:58) 스데반인 것이다.

5. 이 장막은 처음에는 광야에 세워졌다. 그것은 너희의 이 나라(너희가 성전은 꼭 여기에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하는)에서 처음 생긴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 즉 그것을 처음 세운 사람들 다음의 우리 조상들을 통하여 이방인의 소유였던 가나안 땅으로 도입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조상들 앞에서 내어 쫓았던" 저주받은 민족들의 소유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방인의 소유가 되었던 이 지방에서 그가 외형적인 장막을 지으셨다면 하나님께서 왜 그의 영적인 성전을 세우실 수가 없겠는가? 그 장막은 "여호수아" - 이는 곧 "예수"라고도 부르는데 - 와 함께 온 사람들에 의해 도입되었던 것이다. 여호수아와 예수를 구분하기 위해서 또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본문과 히브리서 4장 3절은 각각 여호수아와 예수라고 읽혀져야 한다. 희랍어로는 "예수"라고 불리워야 하나 본문에서는 히브리어대로 여호수아라 부른 것은 무언중에 암시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즉 구약의 여호수아가 바로 그 전형적인 장막을 도입했던 것같이 신약의 여호수아(예수를 의미:역자 주)는 이방인들의 땅에 참된 장막을 가져왔다는 뜻이라 하겠다.

6. 이 장막은 여러 세대 동안 즉 성전 건축을 생각하기 전인 "다윗의 시대에까지" 약 사백 년 동안 계속되었다(45절).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또 이 은혜를 더욱 사모하여서 하나님께 한 성전을 지어드리려 하였다. 그러므로 이 성전이 계속 정착된 장막이 되며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 즉 세키나(Shichinah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언어로 처소란 뜻, 역자 주) 또는 야곱의 하나님의 임재를 기념하는 곳이 되기를 바랐다(46절).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사람들 가운데 세워질 하나님의 나라의 이익을 위하여 솔선수범하여 앞장 선다.

7.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토록 열심인 이러한 성전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다윗이 성전 짓기를 바랐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금지하셨다(삼하 7:7). 그러므로 성전을 지은 것은 그가 아니라 그의 아들 솔로몬이었다. 그가 여러 해 지난 후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지었다. 다윗은 어떤 성전도 건축되기 이전이었지만 우리가 그의 시편에서 읽을 수 있는 바와 같이 공중 예배에서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를 보았던 것이다.

8.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손으로 지은 성전이 그의 즐거움이 될 수도 없고 그의 휴식이나 기쁨을 이루는 데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함을 선포하셨다. 솔로몬은 성전을 봉헌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심"을 인정하였다. 하나님은 성전을 필요로 여기시지도 않으시며 성전을 통하여 유익을 바라시지도 않으며 성전들에 구속되실 수도 없다. 모든 세계가 그의 성전이며 그 안에 어디든지 그는 계시며 어느 때 하나님께서는 성전에서 자기를 들어 내셨는가? 참으로 이방의 거짓된 신들에게는 손으로 만든 전이 필요하다. 그들은 손으로 만든 신들이기 때문이다(41절). 그리고 그들은 자기 신전 이외에는 자기를 나타낼 다른 처소가 없다. 그러나 유일하시고 참되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은 성전이 필요 없다. 왜냐하면 그가 거하시는 "하늘이 그의 보좌요" 그가 다스리시는 "땅이 그의 발등상"이기 때문이다(49,50절). 그러므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즉 내가 거하는 이 전과 비교할 때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인식할 처소가 어디뇨?" 도대체 어찌하여 내가 대답할 또는 나 자신을 계시할 집이 필요하겠는가?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이것들이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그의 신성을 보인다"(롬 1:20). 세계가 인류에게 이같이 자신을 나타내므로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자들이 핑계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계가 하나님께서 자기를 나타내시는 그의 성전인 것같이 세계는 또한 하나님께서 예배 받으실 그의 전인 것이다. 땅이 그의 영광으로 가득 찼고 따라서 그의 성전이듯이(사 6:3) 땅은 또한 그에 대한 찬양으로 차 있으며 또 차야 되는 것이다(히 3:3). 그리고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시 67:7). 이러한 까닭에 땅이 그의 성전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떻게 여기든지간에 "예수께서 이 전을 허시고" 모든 민족들이 무릎 꿇게 될 다른 성전을 세우신다고 말한 것은 문제될 여지도 없는 것이다. 또한 스데반이 본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성귀를 숙고해 보면 그것이 기이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인용문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의 외적 형태를 하나님께서 비교적 경멸하심을 나타내고 있고 따라서 이 말씀은 명백히 불신앙적인 유대인들을 거절하시는 말씀이요 죄를 회개하는 심령으로 교회에 들어온 이방인들을 환영하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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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스데반의 설교⑹(행 7:51-53)

Ⅰ. 그들의 조상들과 같이 그들도 완고하고 고집이 세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교화하고 변혁시키려는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달라지지 못하였다. 그들은 조상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섭리에 대하여 아주 완고하였다.

1. 그들은 "목이 곧았다"(51절). 그러므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쉽고 가벼운 그의 멍에를 그들의 목에 메려 하지도 않았고 끌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멍에에 익숙하지 않은 황소"와 같았다. 또한 그들은 그들의 머리를 하나님에게까지 숙이려 하지 않았고 그에게 경의를 표하지도 않았으며 그 앞에서 스스로 겸손하지도 않았다. 곧은 목은 거만하고 반항적인 강퍅한 마음과 같은 말로 수그러지지 않으려는 자세이다. 이것이 유대민족의 일반적 특성이었다(출 32:9; 33:3, 5; 34:9; 신 9:6, 13; 31:27; 겔 2:4).

2. 그들은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다." 그들의 마음과 귀는 그들의 몸이 할례의 표시를 통하여 하나님께 헌신되었음을 고백하듯이 하나님께 봉헌되지도 드려지지도 아니하였다. "명칭과 외관상으로는 너희가 할례받은 유대인이나 마음과 귀로는 아직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이로다. 그리하여 이들 이방인들보다 더 너희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도다(렘 9:26). 너희가 통제되지 않을 욕망과 타락의 세력 아래 있도다. 이 세력들이 너희 귀로 하나님의 음성을 청종치 않게 하는도다"라는 뜻의 말이다. 그은 "육적 몸을 벗는" 곧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지 못하였다(골 2:11).

Ⅱ.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과 같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변화시키고자 하시는 방법에 감화를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 방법들을 거스려 격분하며 분을 품었다.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리는도다."

1. 그들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말씀된 성령에 항거하였다. 그들은 성령을 반대하였고 정면으로 충돌하였고 증오하고 비웃었다. 특히 본문의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는 설명을 통하여 이것을 의미하고자 한 서처럼 보인다. 성령의 영감을 통하여 말씀한 사람들을 박해하고 말 못하게 함으로 그들은 성령에 저항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조상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세우신 예언자들 가운데 계시는 성령에 항거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같은 성령으로 말씀하며 구약의 예언자들이 지녔던 것보다 더 큰 분량의 은사를 받은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사역자들에게 항거하였다. 오히려 그 도가 심하였다.

2. 그들은 자기 양심의 갈등을 통하여 성령을 거스렸고 또 양심의 증언과 지시에 순응하지 않았다. 옛 세계에서와 같이(하나님을 모르던 시대를 말함:역자 주) 하나님의 성령은 그들과 씨름하셨으나 헛된 것이었다. 그들은 성령을 거스렸고 그들의 확신과는 반하여 양심의 부패와 짝하여 빛에게 도전하였다. 우리의 죄된 마음 속에는 언제나 성령에 거스리는 욕망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때가 차면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의 마음에는 이러한 반항이 정복되고 그 세력을 잃게 된다. 싸움 후에는 그리스도의 보좌가 영혼 속에 세워지며 성령을 거스려 자기를 높이려는 모든 생각을 성령에 사로잡히는 것이다(고후 10:4, 5). 그러므로 이 변화를 가능케 하는 은총은 "거역할 수 없는" 것이라기 보다 "승리로 이끄는" 것이라 부름이 마땅한 것이라 하겠다.

3. 그들은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한 것같이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었다"(3:14, 15; 5:30), 그들은 유다를 매수하여 그리스도를 배반케 만들었고 같은 방법으로 빌라도가 그를 정죄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의 배신자요 살인자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의 내림을 예언하였던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참 자손이었다. 그를 살해하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그 당시에 살았다면 같은 짓을 저질렀을 것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구세주께서 말씀하였듯이 모든 선지자들의 피의 죄값을 그들 자신이 쓰게 된 것이다. 바로 하나님 자신의 아들에게도 경의를 표하지 않은 그들이 예언자들의 말씀을 어떻게 중히 여기겠는가?

Ⅲ.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과 같이 하나님의 계시를 경멸하였고 그 계시의 인도와 지배를 받지 아니하였다. 이것이 그들의 죄를 한층 악화시키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율법을 주셨듯이 그가 그들에게 그의 복음을 주신 것도 헛 것이 되고 말았다.

1. 그들의 조상들은 율법을 받고도 그것을 지키지 않았다(53절). 하나님께서는 그의 율법의 위대한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그것은 그가 그들에게 율법을 처음 전하신 직후였다. 하지만 율법은 아직도 그들에게 이상하고 낯선 것으로 취급되며 그것에 관심을 갖게 할 방도도 없는 것이다. 본문에는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라고 기록되었다. 왜냐하면 천사들이 천둥과 번개와 나팔소리 속에서 율법을 수여하는 장엄한 의식에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을 "천사들로 말미암아 베푸신 것"이라 기록되었다(갈 3:19).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시기 위하여 "일만 성도" 가운데서 오신다 기록되었고(신 33:2) 그것은 "천사들이 하신 약속"이었다(히 2:2). 이 사실은 율법과 그 율법 수여자에게 영예가 되며 이 두 대상에 대한 우리의 존경을 더하게 한다. 그러나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는 자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중대한 시기에 즉시 그것이 파손되게 하였던 것이다.

2. 그들은 이제 천사들이 아니라 성령이 전한 복음을 받았다. 그것은 나팔 소리와 함께 전해진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기묘한 방언의 은사와 함께 주어졌다. 그렇지만 R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 전의 조상들에게 주어졌던 것 이상의 가장 분명한 시위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으려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율법이거나 복음을 통해서이건 간에 하나님을 따르지 않으려고 결심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데반이 더욱 할 말이 많았을 것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허용하였더라면 다 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악하고 몰지각한 인간들이었다. 스데반이 상대한 무리들은 이와 같았기 때문에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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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이 순교하다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의 순교(행 7:54-60)

본문에서 우리는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의 죽음을 보게 된다. 

이 이야기 속에는 박해자들의 미친 듯한 분노의 생생한 실례와(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일에 불리움을 받았다면 이런 박해도 각오해야 한다) 박해받는 일에 부름받은 자들의 용기와 위로에 대한 생생한 실례를 볼 수 있다. 

여기 뜨겁고 어두운 지옥이 있고 동시에 밝고 빛나는 하늘이 있다. 이 두 요소는 꽃잎이 서로 아름다움을 돋보이듯이 서로를 돋보이게 한다. 

본문에는 그의 사건을 놓고 의회에서 투표하였다는 말이 없다. 권력에 의해서 그는 정죄되었고 율법에 의거하여 신성 모독자로 정죄되어 돌로 쳐죽이도록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확실히 공회의 지시없이 군중들이 폭력으로 그를 살해한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본문의 사건은 관례적인 사형 집행의 예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 그는 대 회의 자리에서 끌려나왔고 먼저 증인들이 그 손을 그에게 얹었다.

우리는 본문에서 스데반의 적들과 박해자들의 말할 수 없는 정신적 낭패와 스데반의 영혼의 놀랄 만한 평정을 찾아 볼 수 있다.

Ⅰ. 먼저 스데반의 박해자들의 타락한 힘을 살펴 보자 - 그 완벽한 악의는 일망타진되었던 악마가 놓여난 것 같았다. 

사람들은 악마의 화신이 되었고 독사의 새끼들같이 독을 뿜어내고 있었다.

1.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렸다(54절). 

본문의 "찔리다"란 단어는 히브리서 11장 37절에서도 사용되고 있는데 거기서는 "톱으로 켜는 것"이라 번역되었다. 그들은 순교자들이 육체로 겪고 있는 고통을 마음으로 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스데반이 설득시키려 하였던 변론의 완벽함에 대답을 못하므로 대단히 분개하였다. 그들은 항거할 만한 근거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들은 2장 37절의 사람들과 같이 슬픔으로 마음이 찔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5장 33절의 무리들과 같이 미칠 듯한 분노로 마음이 찔리었다. 

스데반은 바울이 디도서 1장 13절에서 " 엄히"라고 표현하였듯이 그들을 준열하게 책망하였다. 이 증거에 의해 그들의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과 반대하는 자들은 참으로 스스로 괴로워하는 자들이라 하겠다. 하나님과 원수되는 일은 마음이 찔리는 일이요 믿음과 사랑은 마음을 치료한다. 그들은 말하기 전에 "천사와 같이 보이던 그가" 천사와 같이 또는 하늘로부터 온 사자와 같이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가 얘기를 끝맺지도 않아서 그들의 고소가 용감한 호소에 무참히 짓밟히는 데 절망하여 "그물에 걸린 영양같이 여호와의 분노로 가득 차게" 되었다(사 51:20). 그렇지만 그들은 꺾이려 하지 않았다.

2. 저들은 "그를 향하여 이를 갈았다." 이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그에 대한 악랄한 적의와 분노. 

욥도 그의 원수에 대하여 불평하기를 "그가 욥을 향해 이를 갈도다"라고 하였다(욥 16:9). 본문의 말씀은 욥기 31장 31절의 "이제 우리가 그의 고기를 먹게 되었도다"라는 뜻과 같다(한글 개역과 다소 다름. 역자 주). 그들은 개들이 그 적을 향하여 이를 드러내듯 "그를 향하여 이를 갈았다." 

그러므로 바울이 할례받은 자들을 경고하여 이르기를 "개들을 삼기라"고 하였다(빌 3:2). 사람들이 성도에게 적의를 품음으로 그은 사나운 짐승들로 변한다.

(2) 그들 내부에 있는 깊은 원한. 

그들은 그에게 신의 능력과 임재의 명백한 표시가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초조하였다. 그 사실은 그들의 마음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악인은 이를 보고 한하여 이를 갈고 소멸하리니 악인의 소욕은 멸망하리로다"(시 112:10). 이를 간다는 것은 흔히 저주받는 것에 대한 공포와 고통을 표현하는데 사용된다. 

악마의 악의를 품고 있는 자들에게는 동시에 일종의 지옥의 고통이 주어진다.

3. "저희가 큰 소리를 질렀다"(57절). 

이렇게 함으로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화나게 하고 흥분케 하였으며 자신들과 또는 타인들의 양심의 소리를 안 들으려고 하였다. 스데반이 "내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노라"고 말하였을 때 그가 말하는 것을 듣지 않기 위해 그들은 큰 소리를 질렀다. 

의로운 동기(動機) 특히 기독교 신앙으로 인한 의(義)를 소음으로 막으려고 하는 기도(企圖)는 흔히 있는 일이다. 이성을 결하고 있는 것은 소요뿐이다. "우매한 자들을 지배하는 자들의 소리가 지혜있는 자의 말을 잠잠케 하도다" 함과 같다. 그들은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생사의 대결에 직면하여 그들의 정신과 기백을 분기시키려고 외치듯이 큰 소리를 질렀다.

4. "그들은 귀를 막았다." 

이것은 그들 자신의 소요가 시끄러워서 취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의 모욕을 참고 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이후에 인자가 영광 중에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5, 66)(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역자 주)고 말씀하셨을 때 가야바가 그의 옷을 찢었던 것과 같이 본문에서 스데반이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라고 말하였을 때 이들도 "그들의 귀를 막았다." 옷을 찢은 것이나 귀를 막는 행동은 말하는 것을 참고 들을 수 없다는 행동적 표현이었다. 그러면 그들이 귀를 막는 행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1) 그들이 고집스러운 교만의 명백한 실례였다. 

그들은 그들을 설득하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결심하였다. 그들이 듣지 않으려는 것을 예언자들은 흔히 불평하였다. 그들은 "술사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귀머거리 독사 같았다"(시 58:4, 5)(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역자 주).

(2) 옳은 것에 대한 완고함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포기하신 치명적인 징조이다. 

그들은 그들의 귀를 막았고 하나님은 그의 의로운 심판을 따라서 그들을 완고케 하신다. 이것이 당시 불신적인 유대인들이 저지른 짓이었다. "이 백성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그들의 귀로 둔하게 하라"고 기록됨과 같다. 이것이 바로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말한 스데반이 본 그들의 특성이었다.

5. "저희가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즉 백성들과 백성의 장로들과 제판관과 형집행인, 증인, 구경군, 이 모두가 짐승이 그 먹이를 덮치듯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가 그들 앞에서 달아날 염려가 없었지만 그들은 격렬하고 성급하게 그에게 달려들었다. 또한 이 악한 일에 그들은 모두 이의가 없었다. 그들은 모두가 하나가 되어 "일심으로" 달려들었다. 그렇게 하여 그를 버 주려 하였고 당황케하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들은 그가 이 창황함 속에서도 침착하게 즐기고 있었던 영혼의 평정과 위로를 시기하였다. 그들은 그의 평정을 깨뜨리려고 가진 수단을 다하였다.

6. 그들은 스데반이 예루살렘에 살 가치가 없는 사람인 것처럼 아니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는 사람처럼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쳤다." 

표면적으로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집행한다고 하였다(레 24:16).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는 것이 그 율법의 내용이었다. 이와 같이 그들은 그리스도도 처형하였다. 지금의 이 공회가 그리스도에게 신성모독죄를 선고하였다. 그러나 그가 보다 더 신성을 모독했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들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처형되기를 바랐다. 하나님께서는 성서의 말씀을 이루시려하여 그것을 그대로 다스리셨다. 그들이 형을 집행하던 그때의 분노가 지금도 그대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를 성 밖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그를 모든 사람들의 오물처럼 또는 저주받은 사람처럼 취급하였다. 

그에게 반대 증언을 한 사람들은 형집행의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이런 자를 죽임에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백성이 손을 댈지니라"(신 27:7)는 율법에 따라 형을 집행하였다. 특히 신성 모독의 경우에 그러하였다(레 24:14; 신 13:9). 이와 같이 그들은 그들의 증언을 확인하였다. 

사람을 돌로 치는 일은 까다로운 직업이었다. 증인들은 일하는데 옷이 거추장스럽지 않게 하려고 상의를 벗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비극적 광경을 만족하게 바라보던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 여기서 사울의 이름이 처음 언급되고 있다. 

우리는 그 이름이 바울로 바뀌고 그가 박해자에서 전도자로 변하게 될 때 그 이름을 더 잘 알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는 스데반의 죽음에 증인이 되었던 작은 사건을 후에 회고하며 반성하였다(22:20). "내가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키나이다."

Ⅱ. 스데반에게 역사하던 은총의 힘과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안에서 역사하시던 놀라운 모습을 보게 한다. 

그의 박해자들이 사탄으로 가득 찬 것과 같이 그도 보통 때보다 더욱 "성령으로 충만하였다." 이는 그 날에 있을 전투에 대비하여 신선한 기름을 부음으로 더욱 강건케 하기 위함이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는 말씀이 이 사실을 설명해 준다. 

그가 집사직에 피택되었을 때 그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 불리웠다(6:5). 이제 순교의 사명을 받은 지금도 그는 같은 특징을 지녔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활동하는 것이나 그를 위해 고통을 받는 것이나 무슨 일이고 적응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위하여 어려운 직책을 맡기시는 사람들에게 그는 그들을 성령으로 채우시므로 이 직무를 감당케 하고 안연히 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신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이 풍성할수록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위로도 더욱 풍성하여 "어떤 것이라도 그들을 변하게 하지 못한다." 

본문에서 이 위태로운 순간에 복된 순교자와 복된 예수님 사이에 이루어지는 뛰어난 교제를 보게 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하루 종일 죽임을 당하고 도살당할 양처럼 취급받는 다 해도 이런 것들이 그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가 그들을 덜 사랑하시겠는가? 그들이 그리스도를 덜 사랑하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 이 사실을 발견하게 돈다. 그러면 하나씩 생각하여 보자.

1. 그리스도께서 은혜 가운데 스데반에게 나타나심. 

이는 고통 가운데 있는 그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요, 그의 영예이기도 하였다. 그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그를 향하여 이를 갈고 그를 먹으려 하였을 때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았고 이로써 그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의 충만함을 느꼈다. 이 나타나심은 그의 용기를 격려하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에 걸쳐 모든 고통당하는 하나님의 종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1) 그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보았다"(55절).

① 이같이 하여 그는 그의 박해자들의 세력과 분노를 자극하였고 그것은 이사야 37장 22절의 시온의 딸들이 그리하였듯이 그들에게는 멸시와 비웃음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악의와 잔학한 마음으로 가득 차서 그를 주목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늘을 바라다보며 그들을 전혀 개의치도 않았으며 그 앞에 보이는 영원한 생명에 도취되어서 현재의 경각에 달린 육신의 생명에는 무관심하였다. 

그는 그의 주변을 살펴 보면서 그에게 닫친 위험을 보고 또 탈출할 생각을 하는 대신에 그는 하늘만을 바라다 보았다. 거기서 그의 도움은 오며 따라서 거기에 피할 것이 있었다. 

비록 그들이 사방으로 에워쌌지만 그들이 그의 하늘과의 고통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나님과 하늘 나라를 믿는 마음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하며 사람으로 인한 두려움을 이기게 함을 기억하자. 우리가 그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한 우리는 "우리의 창조주 여호와"를 잊고 만다(사 51:13).

② 이같이 그는 그의 고통을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예로 바꾸었고 고통을 하늘에 신원하였다(주여 내가 당신으로 인하여 이 고통을 겪나이다). 

또한 그리스도가 그의 몸 안에서 영광받으시길 간절히 바랐다. 자기를 기꺼이 하나님에게 드린 사람처럼 드려질 준비를 갖추기 위하여 그는 하늘을 주목하여 바라보았다.

③ 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그의 영혼을 그에게까지 높이었고 경건한 절규는 그가 이 시련을 마음의 동요없이 극복하도록 하나님께 지혜와 은총을 간구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 가운데 가를 찾는 그의 종들과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는 오직 같이 하실 것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만 같이 하신다. 그는 그들에게 가까이 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그들이 부르짖을 때"만 이루어진다. "무슨 고통이 있는가. 그러면 기도하라."

④ 이같이 그는 하늘 나라에서 깨어나기를 바랐다. 

그는 그의 박해자들의 분노가 곧 그를 그곳으로 보내 줄 것을 알았다. 임종시의 성도가 오직 하늘만을 주목하여 바라보는 것은 좋은 일이다. 

"저곳이 죽음이 나를 데려다 줄 더 좋은 곳일세.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는가?"

⑤ 이같이 하여 그는 그가 성령이 충만함을 나타냈다. 

왜냐하면 은혜의 성령이 거하시고 역사하시며 다스리시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성령은 영혼의 눈을 높이 들게 하신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하늘 나라에 그들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주목하여 그곳을 바라본다.

⑥ 이같이 하여 그는 이와 함께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받을 자세를 스스로 갖추었다. 

만약 우리가 하늘의 음성을 원한다면 주목하여 하늘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2)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왜냐하면 그가 이 영광을 보여 주기 위하여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56절). 

어떤 이들은 스데반의 시력이 강하여졌다고 생각한다. 초자연적인 힘을 통하여 시야는 그 자연적인 한계를 넘어섰고 그러므로 그는 모세의 시야가 확대되므로 전 가나안 땅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처럼 비록 무한의 거리였지만 삼층천을 바라보았을 것이라고 본다. 

다른 이들은 그것을 이사야나 에스겔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눈 앞에 현현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한 계시록 21장 2절의 말씀처럼 하늘이 마치 그에게 내려온 것과 같았다. 

하늘이 열리고 그가 가게 될 행복의 영광을 보여 주므로 그는 그것을 바라보며 그와 같이 위대한 죽음을 기꺼이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고 바라보면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하늘이 열리고 하늘의 장막이 찢겨지며 우리를 위하여 준비된 가장 거룩한 새로운 삶의 길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하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 문제 해결을 위하여 열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에게 힘하며 우리의 기도와 찬양이 그에게 상달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서에 나타내시고 있는 정도의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도 있으며 이 정경은 우리를 죽음과 고통의 모든 고통을 극복하게 하여 줄 것이다.

(3) 그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고"(55절) "인자"의 모습도 보았다(56절). 

우리 인간의 본성을 하늘에서도 지니시고 거기서도 몸을 입으신 사람의 아들 예수는 육신의 눈 앞에서도 자신을 보이셨고 그러므로 스데반은 그를 보았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는 천사들이 동반되었다. 이사야의 환상에서 셰키나(Shechina), 또는 하나님의 임재에는 스랍들이 수종을 들었고 에스겔의 환상에서는 그룹들이 수종을 들었는데 이 둘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의 사역자인 천사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본문에는 본래 천사들은 보좌와 어린 양을 옹위하는 것이지만 천사에 대한 언급이 없다. 천사들 대신 스데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를 본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의 대중재자이시며 그는 거룩한 천사들의 활동보다 더욱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가장 밝게 비춘다. 거기서 그의 은총이 빛나기 때문이며 그것은 그의 영과 중에서 가장 찬란한 빛이다. 하나님께서는 주변에 수백 만의 천사가 옹위하고 있을 때보다 예수께서 그의 우편에 서 계실 때 더욱 영광스럽게 나타난다.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에까지 높임을 받은 증거가 본문에 있다. 

사도들은 그가 승천하는 것도 보았으나 그가 앉아 계신 것은 보지 못하였다. "구름이 그를 가리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그를 본 사람이 있는가? 스데반이 거기 계신 예수를 보았고 그 광경에 깊이 만족하였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는 그의 초월적인 위엄과 그의 통치권, 그의 무한한 능력과 그의 우주적인 힘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로부터 받으시며 우리에 관하여 하시는 모든 것은 이 예수를 통해서이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오른손이기 때문이다.

② 일반적으로 그는 거기 "앉아 계신 것"으로 믿어졌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가 거기 서 계신 것을 보았다. 이것은 예수께서 평상시보다 그의 고통받는 종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는 박해자들에 대한 스데반의 입장을 변명하는 심판관으로서 계신다.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슥 2:13). 또는 "그 처소에서 나와서 벌하실 것이라"(사 26:21) 함과 같다. 

그는 그를 영접하여 면류관을 씌울 준비를 하고 서 계신다. 잠시 동안이면 그가 맛볼 기쁨을 보여 주고자 서 계시는 것이다.

③ 그가 서 계신 것은 스데반의 용기를 북돋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가 그를 위하심을 알았으므로 누가 그를 대적한다 하여도 문제가 없었다. 

주 예수께서 고통당하고 계실 때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힘을 도왔다. 그러나 스데반에게는 그리스도 자신이 몸소 나타나셨다. 

죽음에 직면한 성도나 고통당하는 성도들에게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는 것처럼 위로가 되고 힘을 주는 것은 없다. 

믿음으로 예수께서 거기 계신 것을 알게 하신 하나님에게 영광이 있으라.

(4) 그는 예수에 관하여 본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였다(56절). 

"보라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노라." 이 일이 스데반에게 용기를 주었다면 그들에게는 적어도 믿어지거나 하늘이 그토록 사랑하는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경고가 되었어야 마땅했다. 그러므로 그가 본 것을 선포한 것은 그들이 듣고 기뻐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만약 그들 중 얼마가 이 사실을 듣고 화를 냈다하여도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이 박해하였던 예수를 돌이켜 생각해 보고 그를 믿는 것이 당연했었다.

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스데반의 경건한 태도. 

하나님의 영광이 그에게 나타났다고 그는 기도할 때 우쭐하지 않고 더욱 열심히 간구하였다. "저희가 스데반을 돌로 치니 부르짖어 말하였다"(59절). 그는 하나님을 불렀고 그 사실은 그가 자신이 참 이스라엘 자손임을 나타낸 것이었지만 그들은 하늘에 관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대적하여 싸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가를 고려하지도 않고서 서로 다투어 그를 돌로 쳤다.

 그들이 그에게 돌을 던졌지만 그는 하나님을 불렀다. 부당하게 사람들에게 미움을 당하고 핍박을 받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그들이 의지할 하나님을, 즉 부를 때에 모든 요구에 넉넉하게 응답하실 하나님을 모셨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본문에서 행한 것처럼 사람들은 그들의 귀를 막는다(57절). 그러나 하나님은 들어 주신다. 이제 스데반은 도시에서 내쫓기었으나 하나님으로부터는 추방당하지 아니하였다. 

이제 그는 세상을 하직하려는 순간에 있었고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불렀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 기도하다가 죽는 일은 좋은 일임을 기억하자. 그 다음 우리는 도움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우리가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힘과 우리가 행하지 못할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기도 이외에는 이러한 도움과 힘을 얻는 방법은 없는 것이다. 

스데반은 죽는 순간에 두 마디의 짧은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었다. 그리고 이 순간에 기도는 그의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1) 그는 먼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한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제 그리스도께서 직접 스데반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셨다. 우리는 본문에서 중재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손에 우리 영혼을 의탁하는 법을 배웠다. 그를 통하여 우리는 아버지께 재추천을 받는다. 스데반은 예수께서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부른다. "영광 받으실 예수님, 이제 나를 위하여 준비하신 일을 행하소서. 당신은 당신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그 뜻을 이루고자 거기 서 계시나이다. 당신의 품속에 나의 영혼을 거두소서." 다음의 사실들을 생각하여 보자.

① 영혼이 곧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큰 관심사인 삶과 죽음은 우리 영혼에 관한 것이어야만 한다. 스데반의 육신은 비참하게도 깨지고 그 형상이 사라져버렸고 돌 소나기 속에 묻혀버려 땅 위의 장막집은 무참히 짓밟히었다. 그러나 이 육신이야 어떻게 되든지 그는 말한다. 

"주여 나의 영혼을 안전케 하소서." 나의 가난한 영혼이 살찌고 잘 입어야 된다는 사실이요 육신은 고통을 당하지만 영혼은 평안히 거하도록 되는 것이어야 하겠다. 그리고 우리가 죽을 때 육신은 깨진 질그릇(이 안에 거할 때는 아무 즐거움도 없는 질그릇)처럼 버려질지라도 영혼은 영광의 그릇으로 나타나야하며 육체는 패하겠지만 하나님은 그 마음과 운명의 힘이 되셔야 됨을 위하여 염려해야 한다.

②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가 간구할 하나님이시다. 

그 안에 우리는 삶과 죽음을 의탁하고 위로를 받는다. 본문에서 스데반은 기도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간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모든 인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자 할 때에라도 아들에게 영광돌리기를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가 자신을 의탁할 수 있는 분이다. 그만이 우리가 마지막 날을 대비하여 그에게 맡긴 바를 이루실 수 있다. 우리가 죽게 될 때에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긴요하다. 왜냐하면 그의 지시없이 저 세상으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삶이고 그에게로부터 받은 것 없이 죽는 순간에 위로받을 수는 없다.

③ 임종시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을 받으시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중대한 일이다. 

또한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된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임종시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을 받으시겠는가 하는 점에 관하여 염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그들을 거절하고 내쫓으신다면 그들이 어디로 가겠는가? 그들이 우는 사자의 먹이가 되는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우리 영혼을 매일 의탁하여 다스려짐을 받고 성화되도록 해야 하고 하늘 나라를 위하여 준비해야 한다. 이 외에 그리스도가 우리 영혼을 받으실 방도는 없다. 그리고 만일 살아있는 동안 이 일에 우리가 관심을 갖는다면 우리가 영원한 집에 거하게 될 것이란 사실은 임종시 우리의 위로가 될 것이다.

(2) 그는 그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한다(60절).

① 먼저 그가 기도하던 때의 상황을 살펴 보자.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기도한 동기로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숙연하게 된다.

첫째, 그는 "무릎을 꿇었는데" 이는 기도에 임하는 그의 겸손한 자세였다.

둘째, 그는 "큰 소리를 부르짖었는데" 이것은 그의 끈질긴 요구를 뜻한다. 

그런데 왜 그는 자신을 위하여 기도할 때보다 박해자를 위한 기도에서 겸손을 보이고 또 끈질기게 요구하였는가? 그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할 때 진심으로 기도하였으리라는 것을 의심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에 와서 그가 이와 같은 외적인 표현을 할 필요가 있었는가? 그러나 그 이유는 이 기도가 그의 적들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기도가 타락한 본성을 지닌 자들을 위한 기도였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태도의 진지한 증거를 보여 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② 이제 기도 자체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여기서 그는 죽음당하신 주님의 본을 따르고 있다. 주님도 그의 박해자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라 기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의 뒤를 따라 고통을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본을 보여 주었다. 기도는 설교의 효과가 있다. 스데반을 돌로 치는 자들에게 이러한 효과가 있었다. 그는 그들이 그가 기도하려고 한다는 것도 알게 하려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가 무엇이라고 기도하는 것을 알게 하고 배우게 하려고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첫째, 그들이 저지른 행위는 커다란 범죄였다. 

만일 신의 자비와 은총이 그들을 변호하지 않고 책임을 묻는다면 그들에게는 영원한 낭패가 되고 말 것이었다.

둘째, 그에 대한 그들의 악의와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을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하느님께서 자기 대신 그들에게 보복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대신 조금도 그들의 죄로 돌리지 말도록 진심으로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이 죄에 대한 비극적인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죄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들이 심판받는 날이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로 하여금 이 사실을 알게 하려하였다. 그들이 이성을 회복한 후 그들은 그들을 그렇게 쉽게 용서한 그를 죽인 것을 결코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으리라.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고 정직한 자의 생명을 찾느니라"한 잠언 29장 10절의 말씀과 같다.

셋째, 죄는 비록 극악한 것이었지만 그들이 회개할 때 용서받을 수 있음을 기도를 통하여 찾아 볼 수 있다. 

만약 그들이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하나님은 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있으시다. 성오스틴(St. Austi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스데반이 기도하는 내용을 바울이 들었을까? 아마 들었을 것이고 당시에는 그것을 비웃었을 것이다(즉 그는 그의 기도를 듣고 비웃었다). 그러나 그는 그 기도의 은혜를 보았어 더욱 훌륭하게 전도자가 되었던 것이다."

3. 그의 임종.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이 말을 마치고 죽음이 엄습하였다는 뜻이다. 선한 사람에게 죽음은 잠에 불과함을 기억하자. 그것은 영혼의 잠이 아니라(스데반은 영혼을 그리스도의 손에 의탁하였다) 육신의 잠이었다. 그것은 모든 인생들의 슬픔과 수고로부터의 휴식이다. 그것은 또한 수고와 고통으로부터의 완전한 쉼이다. 스데반도 여늬 사람들처럼 쉽사리 죽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잠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는 잠자리에 드는 사람처럼 평온한 심정으로 죽음에 하였다. 그는 눈을 감고 잠들었다. 다음 사실을 상기하자. 

그는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잠이 들었다. 이 사실을 보면 그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서는 편안히 죽을 수 없는 것처럼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우리도 죽을 때 모든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품고 평안히 죽을 수 있도록 격려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평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우리 인생의 태양이 진노의 저편으로 넘어가게 하지 말자. 그는 잠들었다. 라틴어 성경에서는 그가 "주 안에서" 즉 그의 사랑의 품에서 잠들었다고 덧붙였다. 그가 만약 이같이 잠들었다면 그는 잘 자리라. 그리고 부활의 아침에 다시 깨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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