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4.07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행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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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1장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하다

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3.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4.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5.  이르되 내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어 내 앞에까지 드리워지거늘

6.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7.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8.  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9.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

10.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11.  마침 세 사람이 내가 유숙한 집 앞에 서 있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12.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13.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14.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안디옥 교회

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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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1장 (개요)

본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고 있다.

Ⅰ. 베드로가 고넬료와 그의 친구들을 교회로 받아들인 행위에 대하여 변명할 필요가 생김. 

그는 그가 받는 비난에 대하여 형제들 가운데 이유를 밝힌다. 그리고 그의 변명을 듣자 모두가 베드로의 입장을 이해하게 됨(1-18).

Ⅱ. 안디옥과 그 근방에서 복음이 성공적으로 전파됨(19-21).

Ⅲ. 안디옥에서 시작된 선한 사업이 처음에는 바나바에 의하여 그 후에는 바나바와 합세한 바울의 사역에 의하여 계속 수행됨.

또한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이 처음으로 거기 있는 제자들에게 주어졌다(22-26).

Ⅳ. 기근이 닥쳐올 것이 예언됨. 

그리고 이 기근에 대처하여 이방인 개종자들 가운데서 유대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한 대책이 마련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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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변명(행 11:1-18)

고넬료에게 복음이 전파된 사실은 우리 가련한 이방의 죄인들이 생각할 때 대단히 기쁘고 감사할 만한 사건이었다. 

흑암에 앉은 우리에게도 빛이 비추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사실은 유대의 비신앙인들뿐만 아니라 신자들에게도 대단히 놀라운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였고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살펴 보는 것도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발견하게 된다.

Ⅰ. 예루살렘과 그 근처에 있는 교회들에게 이 소식이 즉시 전달되었다. 

가이사랴는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기에 그들은 곧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떤 이는 선의로 어떤 이는 악의로 이 소문을 사방으로 퍼뜨렸다. 

그러므로 사도 자신이 예루살렘에 당도하기 이전에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다." 

그들이 받아들인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써 막연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바로 확실히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신의 계시의 함축이며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이 이름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할 수 있기 때문이다"(계 19:13). 

이방 나라들로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불법이라고 여겨졌던 바로 그 이방인들까지도 교회 공동체에 가입되었다. 즉 그들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 이 사실은

1.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도 전파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기대했던 것 이상의 명예를 그들에게 안겨 주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 기쁜 사실이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받은 자들, 특히 유대인신자에게는 달갑게 여겨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심하라, 특히 이와 같은 거만과 고집된 편견이 신적인 진리를 가장 명백히 발견할 수 없도록 방해한다는 것이다.((이것은 육을 따름이다!!))

2. 불신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에 복종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며 이것은  유대의 신자들이 기대한 그 이상의 역사를 이방인들 가운에 일으켜 놓았으나, 유대의 신자들은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면 아무런 유익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하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방인들도 구원얻는 복음을 받아들일 것에 대한 증거 말씀들은 이방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구약에서 대부분 인용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복음을 먼저 믿은 유대의 신자들은 이방인들은 신앙 생활을 하려는 마음도 없는 것으로 간주하였던 것 같고, 또한 복음을 듣고 감명을 받으리라고 감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방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조심하라, 우리가 하고자 하면 곧 복음에 순종하게 되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선행을 베풀다가 곧 좌절하는 경향이 우리에게도 있음을 기억하자.

Ⅱ. 이런 잘못을 유대 신자들이 범한다(2, 3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할례받은 신자들, 이들은 아직 여전히 할례에 대한 경의를 품은 자들이었는데, 베드로를 "힐난하였다." 

그들은 그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은 것을" 범법으로 규정하였고, 따라서 베드로의 사도권을 몰수하지 않는다면 사도직의 명예가 더럽혀진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를 교회 재판에 회부하려 하였다. 

그들은 베드로가 오류를 결코 범하지 않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며, 또 교회의 우두머리로서 그가 모든 것을 결정하며 그가 아무에게도 구애받지 않는다고 여기지도 않았다(구교의 교황절 대무오설을 전제한 논리인 것 같다:역자 주).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교회를 독점하고 교회와 그 수여하는 바, 은총의 유익함에 다른 사람을 참여치 못하게 하는 것은 교회에 있어서 큰 불찰이며 손실을 끼쳐 주는 것이다. 

재물을 탐하여 몰두하는 자들처럼 교회에도 교회의 재산을 축적하는 데만 정신을 쏟는 편협한 인간들이 있는 바, 이들은 세상에 자기들밖에 없는 것으로 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백성에 대한 잘못된 사랑때문에 니느웨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을 싫어하고, 그러는 자신을 합리화한 요나와 같은 정신의 소유자들인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공공연한 적들뿐만 아니라, 또 입장을 같이하는 친구들에 의해서도) 자신들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적절한 선을 행하고 그 결과도 좋은 그런 문제로도 비난을 받고 공격을 당할 수도 있음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처럼 여겨서는 안된다. 

다만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떳떳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형제들이 무어라고 하든지간에 베드로처럼 동요되지 않고 유유자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열의와 용기가 있는 사람들은 사려깊은 척하지만 실상은 냉혹하고 무관심한 자들로부터 비난을 들을 각오를 해야만 한다. 

도량이 넓고 관대하며 자애로운 정신을 지닌 사람이라고 스스로 느껴지더라도 거만하고 편협한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각오를 단단히 해야만 한다. 

대개 비난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란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사 65:5)고 말하는 법이다.

Ⅲ. 베드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다시는 논쟁이나 변명이 필요 없도록 자신도 정당화시키고 그들도 만족하리 만큼 충분히 이 문제에 대하여 설명하였다(4절). "그는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였다." 

그는 이 문제를 그들에게 조리있게 설명함으로 그들 스스로 그가 잘못된 여부를 판단하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이 모든 되어진 일은 하나님 자신의 역사였지 그의 행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1. 그는 그들이 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그 자초지종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그들이 그와 논쟁하려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찬성하고 그를 격려하리라고 생각하였다. 이 겸손한 태도야말로 우리가 비난을 받을 때 자중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너그러이 용서할 수 있어야 될 좋은 근거이다. 

만일 우리가 미리 어째서 비난을 받게 되었는가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그 안에 숨겨진 원인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우리로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의심스러운 짓 하는 것을 보게 될 때에는, 섣부르게 그들과 논쟁하는 대신에 그들에게 무슨 근거로 그렇게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물을 기회를 얻지 못하였을 때는 할 수 있는 한 긍정적으로 스스로 이해하려고 하며 경솔히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2. 그는 기꺼이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또 그들을 설득하는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였다. 

그는 자기가 수석 사도라는 것을 먼저 내세우지도 않았다. 

그는 자칭 그의 계승자들이 주장하는 절대 주권 사상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또한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이 아무 거리낌이 없는 것이니 그들이 이 문제로 공연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에게 만족한 답변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가 이방인들에 관하여 마음에 품고 있던 희망에 대해서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였다. 

또한 그가 왜 그들과 같았던 전의 감정을 버렸는가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사람들의 마음에 처음에는 좋지 않게 보이며 또 잘못인 것같이 여겨지는 이러한 행동들을 분명히 우리 자신과 우리의 형제들에게 밝힐 의무를 우리 모두는 가지고 있으며, 그렇게 밝힘으로써 형제의 길을 막고 있는 거침돌을 제거해야 한다. 

이제 베드로가 자신을 변호하려고 무엇이라고 호소하였는가를 살펴 보자.

(1) 그는 환상을 통하여 의식적인 율법이 구분하던 구별을 더 이상 계속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는 우리가 앞서 10장 9절 이하에서 보았던 환상을 말한다(5, 6절). 

10장에서는 보자기가 "땅에 드리웠다"하였는데 그는 본문에서 "내 앞에까지 드리웠다"고 한다. 이 장면은 특히 그 내용이 그를 교훈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의 모든 자기 계시를 우리에게 보이시며 그 사실들을 믿어서 우리 자신에게 적용케 하심으로 인간의 자녀들에게도 알리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장면이 본문에서는 추가된다. 그것은 보자기가 그 앞에 내려왔을 때에 "그가 주목하여 보고 생각하였다"는 내용이다(6절) (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역자 주). 만약 우리가 신적인 사물에 대한 지식에 이르려면 우리의 마음을 이 일에 전념하여 깊이 그 내용을 고찰해야만 한다. 그는 그들에게 양심의 거리낌으로 그가  묻지도 않았는데 무슨 종류의 고기든지 구별하지 말고 먹으라는 명령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7절). 

창세기 9장 3절에 보면 인간이 고기를 먹도록 허용된 것은 홍수 이후였던 것 같다. 이 허락은 후에 의식적인 율법에 의하여 제한되었다. 그런데 이제 그 제한이 해제되고 무제한으로 다시 허용되었다. 

우리에게서 육체적인 쾌락을 완전히 몰수하고 제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계획은 결코 아니다. 다만 우리가 절제하고 자제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없어지는 것보다 영생을 주는 양식을 얻기 위함인 것이다. 그도 할례받은 신자들처럼 이방인들과 사귄다거나 이방인들의 호화로운 식탁에 초대받는 것을 싫어하였으므로 그에게 허용된 자유를 처음엔 거절하였다고 말한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8절). 

그러나 그는 하늘로부터 "사정이 변경되었다는 말씀을 듣는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전에 더러웠던 사람들과 사물들을 정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이제 그도 이것들을 속되다 할 수 없게 되었고 선택한 백성이 끼여들기에는 부적당한 것으로 그들을 바라보지도 말아야 했다(9절). 

이같이 하나님께서 그 대상을 질적으로 변화시키셨으므로 그가 생각을 바꾸는 것이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현실적인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우리는 당시의 주어지는 주님의 예지에 따라 합당하게 행동해야 한다. 정황이 전혀 바뀌었는데도 선입견에 사로잡혀서 더 나은 발견들을 수용하려 하지 않고 배척해서는 결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까지도 우리에게 친히 나타내 주신다(빌 3:15). 

그리고 베드로는 자기가 본 것이 망상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키려고 이 사건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음을 말한다(10절). 

잡아 먹으라는 같은 명령이 같은 이유 때문에 세 번 주어졌다. 즉 하나님이 깨끗하게 그리하여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는 명령이 두  번, 세 번 반복되었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이 신적인 환상이었음을 그에게  더욱 확신시키려고 그것은 공중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내려온 장소인 "하늘로 다시 올라갔다."

(2) 그는 고넬료가 보낸 사자를 따라가라는 성령의 특별한 지시를 받았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는 사자들이 그에게 온 시간이 그가 환상을 본 직후였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말함으로 그 환상이 이 사건에 대한 그의 행동을 촉구한 것임을 알리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것만으로 그의 길을 지시하는 것이 불충분할까 염려하여 성령께서 친히 "아무 의심 말고" 가이사랴에서 그에게 온 사람들과 "함께 가라"고 그에게 명령하셨다(11, 12절).  동행하는 사람도 또 그가 찾아가는 사람도 이방인들이었지만 그들과 함께 가는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도록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3) 그가 세례를 받은 몇 명의 형제들을 함께 수행시키므로 그들도 그와 같이 의심치 않게 되도록 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이들은 그가 욥바에서 데리고 간 사람들로서 그의 입장을 변호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로 보아 그가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사건을 예견하여 주의깊이 행동하였음을 보게 된다. 그는 독자적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조언을 받아들여 행동하였고 성급히 하지 않고 신중히 행동하였다.

(4) 고넬료도 베드로가 본 것과 같은 환상을 보았고 그를 통하여 베드로를 청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을 말하였다(13절).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고 말하였음을 보고하였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늘 나라와 교통하며 서로 자기들의 경험을 형제들까리 비교하고 교환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서로 서로 신앙을 더 확실히, 굳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 자신이 본 환상의 의미대로 고넬료에게 성령께서 지시하시는 환상이 나타났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확신을 가질 수 있었고 고넬료는 베드로의 환상 얘기를 듣고 또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본문에는 10장에서 보다 천사가 고넬료에게 말한 내용이 추가되고 있다(10:6, 32). 10장에서 "베드로를 청하라 그러면 그가 너에게 마땅히 어떻게 해야할 것을 말하리라"고 되어 있다(한글 개역에는 그가 너에게 마땅히 어떻게 해야할 것을 말하리라는 내용이 빠져 있음:역자 주). 그러나 본문에는 다음과 같다.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14절). 그러므로 그를 초청하는 일에 너는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또 그것을 말할 수 없는 유익이 될 것이다"라고 한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① 복음의 말씀은 우리가 그것에 의하여 구원을 얻게 되는 말씀이다. 

단순히 복음을 듣고 읽음으로써가 아니라 말씀을 믿고 복종함으로 우리가 영원한 구원을 받는다. 복음은 구원을 제시하며 구원이 무엇인가를 보여 준다. 복음의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준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복음에 기록된 방법을 따르면 확실히 진노와 저주에서 구원을 받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②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들의 가족까지도 구원으로 인도한다. 

"너와 네 온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너와 네 자녀가 계약을 얻게 되며 구원의 방법을 취득할 것이다. 너의 집이 구원의 은혜에 동참할 것인데 그들이 믿음으로 너와 같이 네 집의 가장 천한 종까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도다"(눅 19:9)라고 말씀한다. 

지금까지 구원은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었다. 그러나 이제 구원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들에게도 임한다(4:22). 

복음을 듣고 믿어 얻는 바 앵생의 약속과 특권과 구원의 수단이 이제까지는 유대 민족에게만 충족하게 임하였으나 이제는 실상 모든 민족에게 충분하고도 만족하게 이루어졌다.

(5) 더 이상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도록 한 사건은 청종하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강림한 것임을 말한다. 

이것이 완벽한 증거가 되었다. 즉 이방인들을 성도의 공동체로 영접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이다.

① 이 사실은 명백하고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15절).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아마 그는 자기가 무할례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를 의심하면서도 그는 복음을 전하고 싶은 은밀한 충동을 느꼈던 것 같다) "성령이 저희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뚜렷한 증거를 보이며 임하는지라. 이에 어떤 허위도 그 안에 없었노라"고 말한다. 

이같이 하나님은 이루어진 사실을 입증하셨고 자신이 그들을 시인하셨음을 선포하셨다. 그의 설교는 확실히 성령이 부여한 것이 틀림 없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과 변론할 때도 성령의 임재를 전제한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 3:2)

② 베드로는 이 자리에서 주님이 그들을 떠나시며 남기신 말씀을 상기하였다(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16절)하신 말씀이었다. 이 말씀은 명백히 다음 사실을 의미한다.

첫째, 성령은 그리스도의 선물이요 그의 약속의 성취요 결과라는 것이다. 

그 크신 약속은 그가 하늘 나라에 가실 때 그들에게 남기신 약속이었다. 그러므로 이 은사가 그에게서 온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것도 그의 행위요 역사였다. 이는 그의 입으로 약속되었고 이제 그의 손으로 성취되었다. 이것은 그의 가호하심의 징표였다.

둘째, 성령의 은사는 곧 일종의 세례이기도 하였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요, 이것은 세례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는 것보다 더 나은 세례였다.

③ 이제 주께서 말씀하신 약속과 지금 논의되고 있는 은사를 비교하면서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 즉 이 사람들이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의 여부는 그리스도 자신에 의하여 결정지어질 문제라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17절). 

"그런즉 하나님께서 우리가 주 예수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 베푸신 자들을 물로 세례 주는 것을 내가 거절하겠느뇨? 내가 하나님이 그들에게 의미있는 일을 베푸신 그 표적을 부인하겠느뇨? 내가 누구라고 그렇게 하겠는가? 천만에 하나님을 대적하다니 내가 신의 뜻을 거역하며 또는 하늘의 경륜을 반대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이제 그 어느누구라도 하나님께 반역하던 심령들이 회개하고 세례받는 것을 방해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복음을 듣고 믿어 회개한 자들이 세례받는 것을 방해하려는 이들은 너무 이기적이어서 하나님 자신이 분발하여 교통하시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의 공동체에서 제거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 다름없다. 이 일은 하나님에게 합당하지 못한 것이다.

Ⅳ. 베드로의 이 문제에 대한 설명에 그들은 만족히 여겼고 만사는 잘되었다. 

여호수아 22장 30절 이하에서 [발생한 오해, 즉]이스라엘의 두 지파와 반 지파가 자기들끼리 요단강변에 제단을 세운 참 의도와 뜻을 비느하스와 이스라엘의 장노들에게 설명하였을 때 논쟁이 해결되고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을 즐겁게 여긴 것과 같은 경우였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한 사람에게 인신공격을 퍼부었는데 후에 그들의 입장이 부당하고 근거없는 것이 분명한데도 고집을 꺾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는 이와는 다르게 이 형제들은 비록 할례는 받았고 또 의견과 입장을 달리 했지만 그들이 모든 사실을 들었을 때 아래와 같이 행동하였다.

1. 그들은 비난을 멈추었다. 

그들은 평정을 유지했고 베드로가 행한 것에 대하여 더 이상 공박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일을 행한 분이 하나님이란 것을 알게 되자 논쟁을 멈추었다. 

유대인으로서의 자신들의 품격에 대하여 자부심이 강했던 이들은 이방인들에게도 그들과 함께 동등하게 권한을 부여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자부심을 꺾으려 하심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이제 스바냐 3장 11절의 "너로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니라"는 예언이 성취되었다.

2. 그들은 돌이켜 베드로와 그 일행들을 칭송하였다. 

그들은 베드로와 논쟁을 그치고 화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사역을 통하여 행하신 일에 대하여 그들의 입을 열어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잘못이 교정된 데 대하여 감사하였다.

또한 하나님께서 불쌍한 이방인들에게 자기들보다 더 자비를 베풀어 주신 데 대하여 감사해서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그의 종들을 그들에게 보내심으로 이방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허락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그의 성령을 주셔서 회개의 은혜도 허락하셨다. 

그가 가시는 곳에서 위로자가 되시는 성령은 먼저 죄를 깨달아 알게 하시며 죄에 대해서 슬퍼하게 하시며 그 다음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에게서 기쁨을 얻게 하신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참된 회개는 생명에 이르게 한다. 

그것은 영적인 삶으로 인도한다. 참으로 그들의 죄를 회개하는 모든 사람들은 새로운 삶, 거룩하고 신적인 천국 생활을 땅 위에서 실현함으로 그것을 분명히 나타내어야 한다. 

회개함으로써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은 마땅히 앞으로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삶은 새롭게 다시 시작되는 것이요, 이것이 영생에 이르는 삶이다. 

참으로 회개하는 모든 사람들은 살 것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얻게 되고 이것이 곧 생명이며 또한 생명 이상의 축복이다. 

그들은 죄가 용서받았다는 확신으로 위로를 받을 것이요, 참된 영생을 얻게 되며 결국은 그 기쁨을 맛보게 된다.

(2)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회개를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은혜이며 또 우리 안에서 회개가 역사하게 하는 것도 그의 능력있는 은사이다.

그가 "우리에게서 강퍅한 마음을 제거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 또한 "하나님께 드릴 희생은 상한 심령인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이 양을 준비하신다.

(3)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고자 할 때는 언제나 회개케 하신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확실한 용서의 위로를 얻고 이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평화를 갖는 데에, 또한 저 세상에서 하나님을 뵈옵고 누릴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준비가 되기 때문이다.

(4)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를 존귀하게 하사 "이스라엘로 회개케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5:31), 이방인에게도 그런 기회를 주셨음을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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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 안디옥에 전파됨(행 11:19-26)

본문에서 우리는 안디옥에 교회가 개척되고 발전하는 모습을 접하게 된다. 

안디옥은 시리아의 수도로써 로마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로마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도성이었다. 

안디옥 주교가 로마 알렉산드리아 주교 다음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성은 구약에서 하맛(하맛어귀) 또는 리블라라고 칭해지던 곳에 있었다. 

이 역사책의 저자인 누가와 그가 쓰는 대상인 데오빌로도 안디옥 출신인 것같이 보여진다. 

이곳에서 바울이 유명해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안디옥 출신이란 사실이 더욱 그로 하여금 안디옥에서의 복음 전도의 성공을 특기하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이제 안디옥 교회에 대하여 고찰하여 보자.

Ⅰ. 거기에는 박해로 인하여 예루살렘에서 흩어진 첫 복음 증거자들이 있었다. 

이 박해는 약 5, 6년 전의 일로써(어떤 이들이 추정하는 대로) 스데반이 죽을 때 일어났던 것이었다(19절). 

그 때에 그들이 "베니게와" 그 밖의 여러 곳에서 "도를 전하였다." 

Q께서는 그들이 박해를 당하게 하심으로 그들을 세계 도처로 흩으셨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위한 씨앗으로 숨겨져 많은 열매를 맺게 하고자 하심이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상처를 입었던 바, 이로 인하여 선을 이루고자 한 때문이다. 

이는 마치 야곱이 레위 지파에게("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창 49:8) 한 저주가 변하여 축복이 된 것과 같다. 

원수들은 그들을 흩어지게 함으로 지리멸렬하게 만들려고 하였지만 그리스도는 그들을 흩으시되 그들을 들어 쓰시고자 하신다. 

이같이 인간의 노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한다. 다음 사실을 생각하자.

1. "환난을 피하여 도주한 자들은" 그렇다고 그들의 사명도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당분간 그들은 고난을 기피하였지만 아직 사명까지 기피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은 전보다 더 좋은 일터에서 일하게 된다. 

복음 전도자들을 박해하였던 사람들은 박해를 통해서 그들이 이방 세계에 복음 전하는 것을 막으려 하였지만, 박해 받은 그들이 여러지역에 흩어지면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오히려 복음을 더 급속하고 빠르게 확산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그런 사태를 생각지도 못하였었다." 이 성에서 박해를 당한 사람들은 다른 성으로 도주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함께 신앙도 가지고 갔다. 

그러므로 그들은 복음으로 위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로 전파하였다. 

이래서 그들이 피한 것은 고통을 두려워해서가 아니요 자신들을 위험에서 보호함으로 더욱 사명을 수행하고자 한 것임이 나타나게 되었다.

2. 그들은 "여호와께서 기쁘하심으로 그들의 범사에 잘 되게 하심을" 알게 되자 더욱 힘을 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들은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에서 복음 전파가 성공하자 가나안 지경을 벗어나서 베니게와 구브로와 시리아로 전도 여행을 떠났다. 

그들이 멀리 여행할수록 적들에게 자신을 노출하는 것이 되었지만, 그들은 여행을 계속하였다. Plus ultra - 즉 좀 더 멀리 가자는 것이 그들의 표어였다. 

그들은 이같이 선한 사업을 하며, 주님을 받드는 아름다운 일을 함에 있어서 고통도 달게 받았고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3. 그들은 각처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였다." 

유대인들은 곳곳마다 회당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회당에서 유대인들을 만나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아직도 그들은 이방인들도 같은 상속자이며 한 몸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유대인으로 귀화하여 교회에 입교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불신자로 남아 있어야 했다.

4. 그들은 특별히 안디옥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전념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본문에서는 이들을 헬라인이라고 칭하고 있다(저자는 한글 개역 본문에 있는 헬라인을 이방인으로서의 헬라인으로 보지 않는다. 한글 개역 주 난을 보면 "어떤 사본에는 헬라파 유대인에게도라고 하였는데 저자는 그 사본의 입장을 따르는 것 같다. 즉 유대인에게 만이라도 하고 다시 헬라인에게도 전한다고 하면 문맥이 불일치하는 점도 있다. 그러나 "성서 주해나" 제롬의 단권 주석을 참고하면 본문을 이방의 헬라인으로 그대로 해석하고 있다. 참고하기 바란다:역자 주). 

전도자들 중 대부분이 유대와 예루살렘 출신들이었으나, 몇 명 즉 바나바나(4:36) 시몬(막 15:21) 같은 사람은 구브로와 구레네 태생의 유대인들로서 교육만 예루살렘에서 받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헬라파 유대인들이었으므로 자기들과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안디옥에 있는 그들에게 전력을 기울였다. 

라이트푸트 박사(Dr. Lightfoot)는 거기서 헬라파 유대인들도 그냥 "헬라인" 또는 "그리스인"이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안디옥에서 그들은 자치권과 참정권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안디옥은 시리아에 있는 헬라인의 도성과 같았었다고 한다. 그들에게 이들은 주 예수를 전하였다. 주 예수가 계속 그들의 전도의 주제였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이밖에 무엇을 전하겠는가. 다만 그리스도 -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 그분만 전해야 하리라.

5. 그들은 복음 전하는 일에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21절).

(1) 그들의 전도에는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하였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셨다"고 했는데 어떤 이는 이 말씀을 그들의 가르침을 증명하기 위해 주어진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한다. 

이 일에 주께서 "그들과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막 16:20)고 한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또 이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다"(히 2:4)고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 말씀을 듣는 이들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사 그들의 마음을 여신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루디아의 마음이 이렇게 되어서 열렸었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명철한 이해를 주시므로 그들의 뜻을 굽히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게 되었고 그것이 일어난 날이야말로 능력의 날이었다. 

이때에 자원자들이 주 예수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었다(시 110:3).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니" 

그들은 사람들의 귀에밖에는 전할 수 없었지만 그가 그 말씀을 듣는 이들의 마음과 양심에까지 이르게 하셨다. 

주의 손이 말씀에 함께 하사 듣는 이들의 마음에 이 말씀을 새기게 될 때 주의 말씀은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여호와의 팔이" 그 말씀과 함께 "나타날 때"(사 53:1)또 하나님께서 "강한 손으로 알게 하실 때"(사 8:11) 사람들은 복음서에 기록된 것을 믿게 된다. 

이들은 사도들이 아니라 평범한 사역자들이었다. 그렇지만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니 그들은 기적을 행하였다.

(2) 선한 사업이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왔다." 즉 그들이 수고한 외적인 악조건을 생각할 때 기대한 것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돌아왔다는 말이다. 

각종 부류의 사람들이 다 몰려들어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이제 모든 변화가 일어났는가 생각하여 보자.

① 그들이 믿었다. 

그들은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에 관하여 복음서에 기록하신 기록에 순종하였다.

② 그들이 "주께로 돌아온 것이" 그들의 믿음의 증거가 되었다. 

그들은 참 하나님만을 섬기는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우상 숭배에서 주께 돌아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의 의에 대한 신뢰에서 돌아서 믿음으로 얻은 의인 그리스도의 의에만 오직 의지하였다. 

그들은 태만하고 부주의한 육적인 삶의 태도를 버리고 거룩하며 영적이며 신의 뜻에 합당한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겉치레와 외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던 데서 돌이켜 "신령과 진실로" 그에게 예배하였다. 

그들은 주 예수께 돌아왔고 예수께서 그들의 모든 것이 되었다. 이것이 그들에게 임한 회개의 역사였다. 

그리고 이 역사는 우리 모두에게도 임해야 한다. 이것은 그들의 신앙의 결과였다. 성실하게 믿는 모든 사람들은 주께로 돌아오게 된다. 

우리가 아무리 믿는 체하여도 우리가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정성껏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참으로 믿는다고 할 수는 없다.

Ⅱ. 이렇게 하여 안디옥에서 시작한 선한 사업은 계속 수행되어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렇게 하여 개척된 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의 사역으로 더욱 성장하여 활기에 넘치는 교회가 되었다. 바나바와 사울은 다른 전도자들이 세운 기초 위에 건물을 세운 사람들이었고 다른 전도자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한"자들이었다(요 4:37, 38).

1.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가 거기 새로 출범한 교회를 양육하고 복음 전도자들과 신자들의 힘이 되며 그리스도로 인하여 거기 있는 교회가 명성을 얻도록 그곳에 바나바를 보냈다.

(1) 사도들은 안디옥도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22절).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주변의 지방에서 복음 사업이 어떻게 계속되는가를 늘 탐문하였다. 아마 그들은 여러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과 서신 왕래를 계속하였던 것 같다. 그러므로 안디옥에서 많은 수효의 사람들이 회심하였다는 소문이 곧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전달된 것 같다. 교회에서 중직을 맡고 있는 사람들은 연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2) 그들은 안디옥 교회에 바나바를 급히 파송하였다. 그들은 그가 가서 이들의 희망찬 시작을 돕고 격려해 주기를 바랐다. 그들은 그를 사절로서 또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로서 안디옥에 복음이 전파된 것을 축하하려고 보냈다. 복음이 그곳에 전파된 사실은 전하는 자나 듣는 자들에게 다 같은 기쁨이 되었고 그러므로 그들은 함께 기뻐하였다. 그는 멀리 안디옥까지 가야만 했다. 그것은 먼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멀어도 그는 기꺼이 공적인 사명을 위하여 여행을 착수하였다. 아마도 바나바는 이런 사명에 특별한 재질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활동하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이 고향에서 선행하기를 좋아하듯이 그는 멀리 떠나 활동하는 것을 좋아한 것 같다. 다른 형제들은 이사갈의 장막에서 즐거워하였으나 스블론이 나가기를 즐거워하였듯이 바나바도 이런 정신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그의 재능이 이러하였으므로 그가 이 일에 종사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였다. 하나님은 각자의 임무에 따라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신다.

(3) 바나바는 복음이 정착된 것과 그와 같은 고향 사람들인 구브로 사람들이(바나바는 구브로 출신이었다. 4:36) 복음 전파에 수고하는 것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였다(23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안디옥 사람들을 향하신 선하신 뜻과 그들 가운데 행하신 그의 역사의 증거를 보고 "기뻐하였다." 그는 한동안 그들을 유의 관찰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공중 예배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 대화에서 또 그들의 가족에서 그는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거하는 것을 보았다.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고 있는 곳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은사가 나타날 때는 그 은사를 소유해야 한다. 어떤 일에서든지 거기 선한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해야 하고 그 은혜를 주신 데 대하여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은혜로 말미암은 위로를 받아야하며 그것을 우리의 기쁨으로 여겨야 한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볼 때 기뻐해야 하며 더구나 우리가 기대치 않던 곳에서 그것을 발견할 때 더욱 기뻐해야 한다.

(4) 바나바는 그들의 신앙을 견고히 하고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의 신앙을 확고하게 하는 일을 하였다. 그는 ‘파레칼레이’(11:23) - 즉 그들을 교훈하였다. 바나바의 이름도 해석하면 이와 같은 뜻을 지니고 있었다(4:36). 즉 바나바는 ‘휘오스 파라크레세이’ - 즉 교훈의 아들이었다. 교훈하는 일은 이처럼 그의 재능이었으므로 그는 그 일에 주력하였다. 로마서 12장 8절에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할 것이라"고 한 말씀과 같다. 또 그의 이름을 다르게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인데 이름이 뜻하는 바와 같이 그는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위로하며 권고하였다"(AV에는 "위로하며"가 더 삽입되어 있음:역자 주). 그가 그들 가운데 시작된 선한 사업을 기뻐한 것만치 그는 더욱 진지하게 그들과 함께 거하면서 역사하기 시작한 선한 일을 추진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위로할 사람들에게서 위로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바나바는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였고 그러므로 더욱 정성껏 그들에게 복음 증거하는 일에 힘을 다하였다.

①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였다." "주님께 전향한 사람들은" 그를 따르다가 낙심하거나 기진하고 피곤하지 않도록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한다." 주 예수께 붙어 있는 것은 그를 의지하는 삶을 사는 것이며 그에게 봉헌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그를 붙잡아야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붙잡힘을 당해야 "주님과 그의 능력있는 역사 안에서 견고히 서 있을 수 있다."

② 전심으로 지력을 동원하여 확고하게 그리고 결사적인 각오를 가지고 그에게 매달려야 한다. 좋은 땅에 세워져야 하며 또 그 기초 위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시 108:1). 우리의 영혼이 주님의 영에 굳게 결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룻처럼 "나를" 그에게서 "떠나도록 강권하지 마옵소서"라든지 또는 "그를 따르는 일을 그만두고 돌아서라 하지 마옵소서"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5) 본문에는 그의 훌륭한 품성이 소개되고 있다. 그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으로 이 기회에 그의 그러한 성품이 입증되었다.

① 그는 자기가 상냥하고 부드러우며 예의바른 성격의 소유자임을 이 기회에 나타냈고 또한 친절하며 남을 가르칠 수 있음을 나타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착한 사람" 즉 착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주의 사역자들은 외부에 있는 사람들의 칭송을 통하여 자신과 그의 가르침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착한 사람 즉 구제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준 것을 보아 이를 알 수 있다(4:37).

② 이 사실로 보아 그에게 성령의 은사와 은혜가 풍성히 주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그가 "성령이 충만하고 주님의 영으로 인한 능력이 충만하지" 않았다면 그가 아무리 본래 착한 성격을 타고 태어났어도 이 직책을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③ 그는 믿음 즉 기독교 신앙이 충만하였으므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그는 믿음의 은혜가 충만하였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열매가 풍성하였다. 그는 건전한 신앙의 소유자였고 그런고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되기를 강권하였다.

(6) 그는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굳게 세울 뿐만 아니라 밖에 있는 사람들을 인도해 들이므로 선한 일에 도구가 되었다.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고 하였고 그러므로 교회가 더하여갔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왔지만 아직도 돌아와야 할 사람들은 많았다. "말씀대로 하였지만 아직 할 일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2. 바나바가 가서 사울을 데려다가 안디옥에서의 복음 전파 사업에 그를 참여시켰다. 우리가 사울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들었던 소식은 예루살렘에서 그를 죽이고자 하였을 때 그가 자기 태어난 곳인 다소로 갔다는 사실이었다. 그 후에 그는 거기서 계속 머물면서 선한 사업을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제 바나바가 그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아보고 안디옥에서 일할 수 있다. 기회가 있다는 것과 그가 와서 거기서 함께 얼마동안 머물기를 요청하기 위하여 다소로 여행하였다(25, 26절). 여기서도 바나바가 두 가지 점에서 착한 종류의 사람인 것이 나타난다.

(1) 그가 은둔해 있는 사람을 들어 활동적이고 유용한 사람으로 인도하는 데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제자들이 그를 경계하였을 때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에게 사울을 소개한 것도 바로 그였고 사울을 쫓겨간 시골 구석에서 보다 넓은 일터로 끌어낸 것도 바로 그였다. 말 아래 있는 등불을 가져다가 동경 위에 세우는 것은 참으로 축복된 일이다.

(2) 그는 사울을 안디옥에 데려다가 "설교자"(14:12)로 삼았다. 아마도 사울은 더욱 인기있는 설교자가 된 것 같고 그가 이같이 빛을 발하므로 바나바는 여기서 인기가 떨어진 것 같다. 그러나 바나바는 일이 공적인 사업을 위한 것이었을 때 그가 인기가 떨어지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였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한 사업을 이루고자 하실 때 다른 사람들이 더 큰 능력과 보다 광범한 기회를 지녔고 또한 우리보다 더 좋은 일을 많이 한다면 우리는 이를 기쁘게 여겨야 한다. 바나바는 사울을 안디옥에 데려오는 것이 자기에게는 손해였지만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것보다 그리스도의 것을 구하도록 가르치기 위하여 기쁘게 그렇게 하였다.

3. 우리는 본문에서 더 많은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1) 그들이 안디옥 교회에서 어떤 봉사를 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사울과 바나바는 일 년 동안 계속 있으면서 그들의 신앙을 위한 집회에 참석하였고 복음을 전하였다(26절). 다음 사실들을 생각해 보자.

① 신도들은 자주 모였다. 기독교인들의 신앙적인 집회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명예와 또한 그의 제자들이 위로를 받고 유익함을 얻게 하기 위하여 제정하신 것이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주 "회막 앞에서" 모였다. 이제 집회처는 무수히 늘어났다. 그러나 비록 여러 가지 곤경과 난관이 있더라도 그들은 함께 모여야만 한다.

② 교역자들은 이 집회의 주인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집회들 - 이 집회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또한 그로부터 그의 지휘 아래 이루어지는 것인데 -을 주관하며 소송을 처리하며 또는 봉사하는 일을 한다.

③ 백성들은 가르치는 것은 교역자들이 집회를 주관할 때 그들이 해야할 임무의 하나다. 그들은 기도와 찬양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백성들의 중재자이며 또한 성서를 펴서 백성들에게 주님에 대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자이다.

④ 교역자들에게 많은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다. 그것은 마치 더 많은 고기를 잡기 위하여 거대한 고기떼가 몰려있는 곳에 복음의 그물을 던지는 것과 같다.

⑤ 설교는 교회 밖의 사람들을 믿게 하고 회개시키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교화하기 위한 것도 되는 것이다. 제도화된 교회는 교사가 필요한 것이다.

(2) 안디옥 교회에 주어진 영예는 어떤 것이었는가?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칭함으로써 자기들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하여 스스로 그런 칭호를 붙인 것 같다. 이 칭호가 교회나 또는 교역자들의 엄숙한 선언을 통해 정해진 것인지 또는 그들이 기도하고 설교하면서 자주 사용해서 무의식적으로 그 이름이 거기서 생겨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두 위대한 인물들이 거기 오래 머물러 있으면서 많은 무리들의 추종을 받고 어떤 반대에도 직면하지 않은 사실과 기독교인의 집회가 그 어느 곳보다 흥성하였고 더욱 늘어난 것을 보면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거기서 처음 기독교인이란 칭호가 생긴 것 같다. 안디옥 교회가 다른 모든 교회들을 다스리는 모교회가 될 수 있었다면 오히려 로마보다는 안디옥이 중요성이 크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들의 이름을 포기한 사람들이 "제자들 또는 생도들"이라고 불리워졌는데 이는 그리스도 아래서 양육되어 그들이 그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후 그들은 기독교인이라 불리워졌다.

① 이같이 되어서 그들의 적들이 기독교인들에게 붙인 불명예스러운 칭호가 점차 사용되지 않게 된 것 같다. 교회의 원수들은 기독교인들을 "나사렛 이단"이라고 불렀고(24:5) 정당한 명칭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편견을 갖게 하려고 하였다. 이 편벽된 생각을 제거시키기 위하여 기독교인들은 스스로 명칭을 정하였고 그러므로 기독교의 적들도 바르게 그들을 호칭할 수밖에 없도록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② 이렇게 해서 개종 전에 유대인 또는 이방인이라는 명칭 때문에 구분되던 그들이 개종 후에는 한 가지 같은 명칭으로 호칭되게 되었다. 이러므로 전에 그들을 구분 짓던 명칭을 잊게 하는데 그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고 또 전의 구분된 명분을 교회에까지 끌고 들어와 문제를 삼게되지 않도록 되었으며 그러므로 양속의 자손들이 교회로 쉽게 들어올 수가 있게 되었다. 이제 아무도 "나는 유대인이었노라"라든가 또는 "나는 이방인이었노라" 말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양자가 모두 "나는 기독교인이외다"라고 말해야만 하도록 되었다.

③ 이와 같이 그들은 주님께 영광돌리기 위하여 노력을 하였고 그들이 그에게 속해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플라톤의 생도들이 자기들을 플라토니스트라고 부르던 것처럼 또는 다른 위대한 사람들의 제자들이 그들을 선생의 후예임을 호칭함으로 자랑스럽게 여겼듯이 그들도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우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그들은 그들의 명칭을 그의 이름인 "예수"라는 데서 취하지 않고 그의 직능을 나타내는 칭호인"그리스도" 즉 "기름부음 받은 자"란 명칭에서 그들의 명칭을 만들었다. 이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의 호칭을 통하여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전 세계에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그것을 위하여 살고 또 그 때문에 죽기도 하는 진리임을 선포하였다. 그들의 적들은 이 칭호를 욕된 것으로 만들어 그들이 죄를 지은 것으로 규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그것을 통하여 영광을 돌렸다. "이로써 내가 낮아진다 할지라도 내가 더 낮아지리이다"라고 그들은 겸손해하였다.

④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그들을 맡겼다. 그리고 그들이 그에게 수납되었다. 그들은 "기름부음 받은 자"아신 그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하여 자신들도 "기름부음 받은 자"가 되었다(요일 2:20, 27). 그리고 고린도 후서 1장 21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온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라고 그들은 고백하였다.

⑤ 이같이 해서 그들은 자신들을 보존하였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 이름을 고백하도록 하였고 또한 그리스도의 법도에 복종할 강력하고도 영속적인 책임을 부과하였고 그리스도의 본을 받으며 또 그리스도의 영예를 위하여 전적으로 자신을 드려 "그에게 존귀와 찬양을 돌리도록 하였다." 우리도 기독교인인가? 그렇다면 우리도 모든 일에 있어서 기독교인답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인이란 존귀한 이름을 욕보일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 알렉산더대왕이, 겁쟁이로서 알려진 자기와 같은 이름을 지닌 한 병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Aut nomen, aut mores muta - 즉 너의 이름을 바꾸든가 너의 태도를 바꾸든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런 말을 듣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들이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가듯이 다른 사람들도 기독교인임을 고려하여 그들에게 우리의 자세를 바르게 가져야 한다. 기독교인은 마음에 품은 모든 일에 그럴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가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라는 이름 때문에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에게 속해있기 때문인 것이다.

⑥ 이렇게 되어서 "성령 말씀이 성취되었다." 복음적인 교회에 관하여 이사야 62장 2절에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라" 예언되었었다. 그 말씀대로 이루어졌다. 또한 타락하고 쇠퇴하여가는 유대 교회에 대하여는 "주 여호와 내가 너를 죽이고 내 종들은 다른 이름으로 칭하리라"(사 5:15)함과 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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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에서의 바나바(행 11:27-30)

우리 주님 예수께서 "승천하셨을 때 그는 사람들에게 은사를 주셨다." 그는 "사도나 전도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예언자들에게 부어 주셨다." 이 예언자들은 성령을 통하여 장차 이루어질 일들을 예견하고 또 예언하였다. 이 예언은 기독교의 진리를 확고히 하는 데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왜냐하면 이들 예언자들이 예언한 모든 일들이 이루어짐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사실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신 18:22; 렘 28:9)], 교회에 대단한 유익을 끼쳤고 교회를 이끌어가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이제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Ⅰ. 이러한 예언자들 몇 명이 안디옥을 방문하였다(27절). "그 때에" 즉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에 살고 있던 해에 "선지자들이 예수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렀다." 이들의 수가 몇인지도 알 수는 없고 또한 나중에 "안디옥 교회에서"(13:1) 알게 된 몇 명의 선지자들을 제외하고는 그들이 누구인지도 확실하지도 않다.

1.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왔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전처럼 존경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어느 정도로 그들의 사명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은 그들이 다른 곳으로 가야할 시기라고 생각하였다. 예루살렘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그들을 농락하는 것으로 악명 높았으므로 이제 이들 예언자들까지 빼앗기게 된 것이다.

2. 그들은 안디옥에 왔다. 이는 그들이 교회가 발전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러므로 거기서 그들이 어떤 봉사를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또한 그것을 다스릴 수도 있어야 한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인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왔고 그들이 그 교훈을 잘 받아들이자 그리스도가 약속한 것처럼 "장차 되어질 일을 그들에게 보여 주기 위하여" 그들에게 예언자들의 보냄을 받았다(요 16:13). 적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일이 맡기어진다. 또한 성서의 예언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은 성서의 교훈을 잘 복종할 줄 아는 것이라 하겠다.

Ⅱ. "아가보"라고 하는 이들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기근이 다가온다는 특별한 예언을 하였다. 우리는 그가 바울이 갇히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음을 다시 읽게 된다(21:10, 11). 본문에 그가 일어났다 하였다. 아마도 그들의 어떤 집회처에서였던 것 같다. 거기서 그는 예언을 하였다(28절).

1. 그러면 그가 예언한 것은 무엇때문이었는가? 그가 말한 것은 자신에 대한 것이나 또는 자기의 환상을 말한 것이나 점성술적인 예언을 한 것도 아니었다. 또는 현재 일어나는 일의 결과를 추정하려고도 아니하였다. "그는 성령으로 천하가 크게 흉년이 들  것을 예언하였다." 요셉이 그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바로의 꿈을 해득하고 애굽의 기근을 예고하였고 마찬가지로 아합 때에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기근을 예언한 것과 같았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그의 비밀을 나타내신다.

2. 예언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기후의 불순 때문에 "천하가 크게 흉년이 들어" 곡식이 귀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이 빵이 없어서 굶어죽으리라는 것이었다. 특징 지역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천하가 즉 그들이 자랑으로 여기는 로마제국전체가 흉년을 당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 전의 알렉산더처럼 그들은 자기들의 나라를 "천하"라고 불렀다. 그리스도께서는 "기근이 있을 것을" 일괄적으로 예언하셨다(마 24:7; 막 8:8; 눅 21:11). 그러나 아가보는 이제 임박한 특정 기근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3. 기근의 도래. "기근은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일어났다." 그것은 그의 통치 이년 째에서 시작하여 적어도 사년되는 해까지 계속하였다. 요세푸스를 포함한 몇 명의 역사가들이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생명의 떡이신 주님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절하고 풍성한 만나를 싫어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양식인 빵을 없이하여 기근으로 그들에게 벌을 내리셨다. 이같이 하나님은 공의로 다스리신다. 그들이 하나님께 열매 맺지 못하자 하나님은 땅이 그들에게 열매 맺지 못하도록 하였다.

Ⅲ. 그들은 이 예언에 잘 대처하였다. 기근이 임박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애굽인들처럼 곡식을 비축하지 않고 기독교인답게 구제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도왔다. 구제야말로 우리 자신의 고통과 결핍에 대한 최선의 준비책이다.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시 41:1, 2)라고 약속되었고 또한 시편 37편 19, 21절에는 "자비를 베풀고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들은 환난 때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리라"고 약속되었다. 또한 누가복음 12장 33절을 보면 곤혹한 때를 대비하는 가장 좋은 준비는 이 약속을 믿고 선을 행하며 서로 돕는 데 있다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절약하는 것이 최선의 대응책이라고 본다. 그러나 성서는 "무슨 재앙이 이 땅에 임할는지 알지 못하므로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인색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준비 방법이라고 한다(전 12:2).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그들이 결정한 내용. "제사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였다"(29절).

(1) 그들이 구제의 대상으로 추천받은 사람들은 "유대에 사는 형제들이다." 비록 우리가 기회있는 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여야 하지만" 우리는 믿음의 권속들에게 특별한 배려를 기울여야 한다(갈 6:10). 가난한 사람들은 누구도 무시되어서는 안 되지만 특히 하나님의 백성 중 가난한 사람들은 돌보아져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에서의 첫 번 구제를 통하여 배웠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구제를 계속하였으므로 "핍절한 사람이 없었다"(4:34). 그러나 예루살렘에서의 성도들의 교제는 안디옥까지 확장되어 안디옥 교회는 그들이 형제라고 부르는 유대에 있는 가난한 자의 구제를 위하여서 구제품을 준비한다. 유대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금품을 보내는 것은 흩어진 유대인들이 흔히 하던 일이었던 것 같다. 유대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그들은 구제품을 수집하였다[툴리(Tully)는 그의 시대에서도 이러한 일이 있었음을 말한다]. 유대에는 다른 지방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므로 혹 부자가 있다해도 그들이 가난한 자들의 기아를 면케 할 수는 없었다. 유대에 기근이 닫친 이유는 "그곳에 사는 자들의 불의로" 전에는 비옥하였던 땅이 토박하게 되었든지 아니면 다른 민족들과 교역이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또한 우리는 그 지방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대다수가 가난하였음을 상상할 수 있다(마 11:5 에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하였다). 그리고 이들 가난한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할 때 그들은 가난한 자의 명부에서 제외되고 따라서 공적인 구제를 받지 않아도 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땅에 기근이 임하면 그들이 곤경을 당할 것은 뻔한 일이요, 또한 그들 중 한 사람이 굶어 죽기라도 하면 기독교 신앙에 대단한 욕이 될 것은 분명하였다. 그러므로 기근이 다가옴을 알자, 미리 배려를 하여 그들에게 비축해 둘 곡식을 보낸 것이었다. 왜냐하면 기근이 닥칠 때까지 구제를 지연하고 있다가 때가 늦을까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2) 제자들은 이 일에 합의를 보았다.  즉 "각각 그 힘대로" 이 선한 사업에 협조하기로 하였다. 한편 다른 나라들에 있는 해외의 유대인들은 상업으로 돈을 벌었고 또 이들 부유한 유대인들 중 많은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풍부한 재산은 멀리 떨어져 있는 "그들의 가난한 형제들의 곤경을 돌아보는 데"이용되었다. 왜냐하면 우리 가운데 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멀리 있는 자들도 돌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애로운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것을 잘 거래하는 상인과 같다. 그리고 상인들은 멀리 떨어진 나라까지 물품을 보내어 거래를 하듯이 우리도 구제를 필요로 하는 먼 데 있는 사람들에게도 구제를 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요청을 받을 때 우리는 앞장서서 이를 행해야 한다. "그들 각 사람은 각각 능력에 따라" 그와 그의 가족을 부양하고 남은 것을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데 따라서" 많이 또는 적게 무엇이고 "보내기로 작정하였다." "우리의 힘에 따라"라고 말할 때 그 기준이 어디 있는지 우리는 스스로 판단해야만 한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바른 판다나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2. 그들이 행한 것. 그들은 그들이 결정한 대로 행하였다(30절). 그들이 "이를 실행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즉 그들은 말로만 하지 않고 실행에 옮긴다. 이런 종류의 선행이 작성되고 추진되지만 실행되기는 어렵고 따라서 무위로 끝나기가 쉽다. 그러나 이 계획은 추진되어 물품이 모이었고 그들이 충분하다고 생각될 만큼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에서도 한시의 틈도 없었지만 "그들을 예루살렘에 보내어 거기 장로들에게 물품을 전달하기로 결정하였다."

(1) 그들은 "유대 교회에 있는 장로들" 즉 지방 교회 감독자며 사역자인 그들에게 보냈다. 왜냐하면 분배해 주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그 결과가 다를 것이므로 받는 자들의 필요에 따라서 장로들이 직접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2) 이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보냈다. 그들은 아마 예루살렘에 갈 기회가 있기를 바랐던 것 같고 그랬기에 기꺼이 이 일을 담당하였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 당시에 이레이트(Irates) 왕이 예루살렘의 각료들에게 개인적인 구제품을 보냈다고 하였다. 아디아베니의 여왕 헬레나(Helena)가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그곳과 인접 지방에서 기아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구브로와 알렉산드리아에 식량을 요청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라이트푸트 박사(,Dr. Lightfoot)는 바울이 무아경지에 들어간 시기를 바울이 고린도 후서를 쓰기 14년 전으로 계산한다(고후 12:1, 2). 그에 의하면 이 구제품과 헌금을 가지고 그가 예루살렘으로 여행한 때가 그가 황홀경에 들어갔던 때라고 본다. 즉 이 때에 그는 성전에서 무아의 경지를 체험하였고(이 사실을 22:17 에서 말하고 있다) 또한 이 무아경지에서 그는 "삼층천의 말할 수 없는 환희를 맛보았다."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이방인에게" 보내실 것을 말씀하였고 따라서 그는 곧 안디옥으로 돌아왔을 것이라고 라이트푸트(Lightfoot)박사는 본다. 복음의 사역자들이 특별한 경우에 교회 구제품을 전하는 사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 비난될 수는 없다. 하지만 계속 구제 문제에 몰두한다면 더 중대한 문제를 경솔히 취급하는 것이 될 것이다. 복음 사역자들은 기도하고 말씀전하는 일에 자신들을 드려야 함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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