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1.28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마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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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마5장

===복이 있는 사람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소금이요 빛이라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예수와 율법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노하지 말라

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간음하지 말라

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맹세하지 말라

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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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개요)

이 장(章)(5장)과 다음에 오는 두 장(6, 7장)은 산 위에서 행해진 저 유명한 산상 설교이다. 이 설교는 우리 주님이 복음서 가운데서 행하신 설교 중 가장 길고 완전히 연속된 설교이다. 

산상 설교는 실제적인 설교이다. 이곳에는 기독교인이 믿어야 할 신조에 대하여 많이 취급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행해야 될 사항에 대해 전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설교를 이런 것으로 시작하였었다. 왜냐하면 사람이 그의 뜻을 행하려면 그 교훈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1, 2절에서 이 설교가 행해진 상황이 설명된 후, 곧 이어 설교가 나오는데 그 의도는 우리의 머리를 관념으로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을 지도하고 통제하기 위함이다.

Ⅰ. 그는 축복을 목표(end)로서 제안하며, 또한 가히 역설이라고 불리워질 수 있는 팔복(3-12)에서, 축복 받을 자격이 있는 자들(헛된 세상의 견해와는 매우 다름)의 특성을 제시한다.

Ⅱ. 그는 그 방법(way)으로서 의무를 명령하고 있으며, 그 의무의 일정한 규칙을 우리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1. 그들의 신분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도록 명령하고 있다 

─- 그들은 땅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다(13-16).

2. 그들이 해야 할 것을 이해하도록 명령하고 있다 

─- 그들은 도덕법에 의해 지배되는 자들이다.

(1) 그는 율법을 일반적으로 시인하고, 그것을 우리의 규율로 삼을 것을 추천하고 있다(17-20).

(2) 그는 여러 가지 오류를 구체적으로 수정하고, 나아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그릇되게 해석하였던 강퍅하고 조잡한 부패(악습)를 개혁하고 있다. 또한 반드시 설명되거나 주장되어야 했던 여러 부분들에 대해 확실한 해석을 내리고 있다(20). 특별히 여기에는,

1>살인을 급하고 있는 제6계명에 대한 설명과(21-26),

2>간음을 금하는 제7계명에 대한 설명과(27-32),

3>제3계명에 대한 설명과(33-37),

4>복수의 법에 대한 설명(38-42),

5> 형제 사랑의 법에 대한 설명(43-48)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율법이 영적인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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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마 5:1-2)

여기에는 이 설교의 일반적인 개요가 기록되어 있다.

Ⅰ. "설교자"는 설교자들의 왕이시요, 그의 교회의 위대한 예언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이셨으니, 그는 "세상의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 

예언자들과 세례 요한은 "능력 있게" 설교를 하였으나, 그리스도는 "이들을 훨씬 능가하였다." 그는 영원하신 지혜자로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으며," 그의 뜻을 완전히 아셨다(요 1:18). 

우리는 앞 장 바로 끝 부분에서 볼 수 있었던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병 고치심은 이 산상 설교를 위해 준비한 것이며, 또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신적 능력과 선을 행하신 자로부터 가르침을 받도록 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아마도 이 설교는 그가 갈릴리에서 두루 말씀하셨던 설교들을 요약하거나 열거한 것인 듯 하다. 그의 설교 본문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다. 

이 설교는 그 본문의 전반부로서 판단과 실천에서 "회개하거나 개혁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 준다. 

그는 여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말 3:7)라는 질문에 답하여, "어떻게 할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그는 이 본문의 후반부에 대하여 설교하였는데, 그때에 그는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천국이 무엇과 같은가를(13:)보여 주었다.

Ⅱ. 이 산상 설교를 하신 "장소"는 갈릴리에 있는 산이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우리 주 예수님은 잘 갖추어진 곳에서 설교하시지 못하였다. 즉 그에게는 설교하기에 편리한 장소가 없었으며, 더욱이 "그의 머리를 둘 곳도 없으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온갖 지위와 명예, 안락을 누렸지만 그들은 율법을 그릇되게 와전시켰다. 그러나 진리의 위대한 스승이신 우리 주님은 광야에로 내몰아졌으며, "산"보다 더 좋은 강단을 찾을 수 없었다. 

이 산은 "거룩한 산"이나 "시온 산"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평범한 산이었다. 이러한 산에서 설교하신 것은 구약의 율법 시대에서와 같이 어떤 장소만이 특별히 거룩하지는 않으며, 만일 그것이 적절하고 편리한 곳이라면 "어디서나" 기도하고 전파해야만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해석하셨던 이 설교를 산에서 하신 것은 율법이 "산"에서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것은 기독교 율법의 엄숙한 선포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차이는 있다. 즉 "율법이 주어졌을 때" 주님은 "산"위에 "내려 오셨으나," 지금은 "올라 가셨다." 그 때에는 "천둥과 번개로" 말씀하셨으나 지금은 고요하고 조용한 소리로 말씀하셨다. 그 때에는 사람들이 멀리 떨어져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지금은 가까이 오도록 초청을 받고 있다. 아, 이 얼마나 축복스러운 변화인가! 

만일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이 확실히 그의 영광이라면 복음의 영광은 모든 것을 능가하는 영광이다. 왜냐하면 "은혜와 진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기" 때문이다(고후 3:7; 히 12:16 등). 

"그들이 열국 백성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 갈릴리의 두 지파인 스볼론과 잇사갈에 대해 예언되었으며, 또한 우리는 이 "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리는 법을 배우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 산은  그리스도가 계시는 산, "여호와의 산"이었고 여기에서 그는 우리에게 "그의 길을 가르치셨다."

Ⅲ. "청중"은 그에게 나아왔던 제자들이었다. 

마가복음 31장 3절 누가복음 6장 1절에 보면 그의 부르심을 받고 나아온 제자들이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병만을 고치려고 그를 따랐던 사람들과는 달리 사랑하는 마음과 배우려는 열의를 가지고 그를 따랐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기꺼이 가르침을 받으려고 했고(그는 온유한 자에게 그의 길을 가르친 것이다), 또한 그가 가르치신 것(이것은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다)을 알려고 했고 또한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 일들에 대해 분명하고 확실한 지식을 가져야만 했다. 

이 설교에 기술된 의무들은 천국의 은전(恩典)을 받으려는 희망을 가지고 "그곳에 들어가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 성실히 수행되었다. 

그러나 비록 이 설교가 제자들에게 행해진 것이라 할지라도 역시 "많은 무리들"도 청종하였다. 왜냐하면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랐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시내 산에서와 같이"(출 19:12) 백성들을 멀리 떨어지게 했던 일은 이 "산"에서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에게 말씀드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가 이 설교를 말씀하신 것은 "무리들"을 목표로 삼았다. 그가 기적들을 행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무리들이 그에게로 모여들었을 때 그는 그렇게 많은 무리들에게 가르칠 절호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많은 물고기가 있는 곳에 얼마를 잡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복음의 그물을 던지는 것은 신실한 교역자들에게 좋은 격려가 된다.

 "무리들"의 광경은 설교자로 하여금 생기를 북돋아 주는데 이것은 그 자신이 칭찬을 얻으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을 주려는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라야 한다.

Ⅳ. 그의 설교의 "엄숙성"은 "앉으시니"란 말에 암시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종종 이야기체로 많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설교는 고정된 설교였다(카디산토스 아우투, 그가 앉으시니). 그는 청중들이 가장 잘 들을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하였다. 

그는 심판자가 입법자처럼 앉으셨다. 이것은 진지하고 침착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이 언급되고 청종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가 "앉으신"것은 "성경 말씀이 성취되려고 하기 위함이며"(말 3:3), "그는 연단사(금이나 은 등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처럼 앉아서 "찌꺼기, 즉 레위의 후손들의 부패한 교훈들을 정결케 하실 것이다. 

"그는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다"(시 9:4). 왜냐하면 "그가 말씀하셨던 말씀이 우리를 심판할 것이기" 때문이다.

"입을 열어"란 구절은 욥기 3장 1절에서와 같이 히브리적인 완곡어법(婉曲語法)에 지니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이 설교의 엄숙성을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즉 모인 군중에 너무도 많았으므로 그는 목청을 돋우어 평상시보다 더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그의 종들과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으며, "그들의 입을 여셨다"(겔 3:27; 24:27; 33:22). 그러나 이제 그는 그 자신이 직접 "입을 열어," 자유스럽게 "권세 있는 자와 같이" 말씀하셨다. 

고대 교부들 중의 한 사람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즉 그리스도는 "입을 여시지 않고"가르치신 경우가 허다하다. 다시 말하면 그의 거룩하고 모범이 되는 생활로 "가르치신 것이다." 아니, 그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함으로써" 가르치셨으나 이제는 "그의 입을 열고 가르치심으로써" 성경이 말씀한 예언이 이루어졌던 것이다(잠 8:1, 2, 6). 

지혜가 부르짖지 아니하느냐?─높은 곳의 꼭대기에서 부르짖지 아니하느냐? 또한 "그의 입술을 여는 것은 바른 일들이 될 것이다." 

그는 약속을 따라서 그들을 가르치셨으니(사 54:13),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는 "학자의 혀"와(사 50:4) "주 여호와의 신"을 가지셨다(사 61:1). 

"그가 그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그들이 마땅히 미워해야 할 악과 그들이 마땅히 거처해야 할 선이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사색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성향과 우리의 대화의 경향을 조절하기 위한 것이다. 

복음의 때는 개혁(개심)의 때이다(히 9:10). 복음으로 우리는 개심 되어야 하며, 선하고 나아져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진리"는 "경건함에 속한 진리"이다(딛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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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마 5:3-12)

그리스도는 그의 설교를 축복의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우대하신 대제사장"으로서, "축복된 멜기세덱"으로서,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축복 받을" 자로서(창 12:3), "우리를 축복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기(행 3:26)" 때문이다. 

그는 우리를 위해 축복을 마련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축복을 부어 주시고 선언하시기 위해 오셨으며, 또한 여기에서 그는 그것을 "권세 있는 자와 같이," "축복(심지어 영원한 생명까지도)을 명령하실 수 있는" 자와 같이 하시며, 그 축복은 선한 사람에게 거듭 약속되었다. 

그가 그들에게 행복을 선포하신 사실이 그들을 실제로 행복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가 축복하신 자들은 참으로 복되기 때문이다. 

구약은 저주로 끝마쳤으나(말 4:6), 복음은 축복으로 시작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축복을 물려받기 위하여 지금까지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여기에서 진술하고 있는 각(各) 축복은 이중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

첫째, 참으로 행복한 자로 간주되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들의 특성은 무엇인가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둘째, 그런 특성을 가진 사람에게 주어진 약속된 그 참 행복은 무엇인가를 보이고 있다. 그것의 실현은 그들을 참으로 행복하게 만들 것이다.

1. 이것은 맹목적이고 육욕적인 세상의 파멸적인 오해들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축복은 사람들이 얻으려고 갈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시 4:6).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목적을 오해하고 행복에 대해 그릇된 개념을 품고 있다. 그 때문에 그들이 잘못된 길에 빠지는 것은 그리 이상할 것이 없다(당연하다). 즉 그들은 스스로 미혹된 길로 들어서며, 비참을 자초하는 것이다. 

흔히 "복된 사람"이란 세상에서 부요하고 위대하고 영예스러운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환락 속에서 나날을 보내며 쾌락 속에서 해를 넘기는 자들을 "복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살찐 것을 먹고 달콤한 것을 마시며 고자세로 으시대거나 머리를 조아려 경배하는 사람을 "복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의도나 목적, 목표도 이와 같다. 그들은 "탐리하는 자를 축복하며"(시 10:3), 그들은 "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이 근본적인 오류를 고치시고 새로운 전제를 제시하고 축복과 복된 사람(이것은 편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역설적으로 보이며 구원의 조명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진리와 확실성의 규율과 교훈─이것으로 우리는 머지않아 심판을 받아야 한다─이 된다)에 대한 전혀 다른 개념을 우리들에게 제시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것이 그리스도의 교훈의 시작이 된다면 기독자의 행위의 시작은 그의 행복의 척도를 그러한 격언에 취하는 것이 되어야만 하며 이에 따라서 그의 행동을 지도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

2. 이것은 그의 복음이 은사와 은혜, 안락과 유용성에서 탁월하게 뛰어난 자들만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시킴으로써 복음을 받는 연약하고 가난한 자들로 하여금 실망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음이 하나님께 대하여 올바른 자,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그 나라의 영예와 특권에서 보면 행복하였다.

3. 그것은 영혼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초대하고 그의 법을 그들의 마음속에 새기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축복을 사람들이 해산할 마지막 무렵에 말씀하시지 않고 그가 더 계속하려는 설교에 대해 그들로 하여금 준비케 하려고 맨 처음에 말씀하신 것은, 율법의 축복과 저주가 선포되었던 그리심산과 에발산(신 27:12 등)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기억하게 함이다.  "거기에서는" 저주가 표현되었고 축복은 암시되었으나, "여기에서는" 축복이 표현되었고 저주는 암시되었다. 이 양자에서 "생명과 죽음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 

그러나 율법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죽음의 지배로 나타났으나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좋은 것만을 소유하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내는 생명의 섭리로 나타나 있다. 

또한 그의 손으로 행하신(마 4:23, 24) 은혜스러운 치료를 보고 이제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스러운 말씀"을 들었던 자들은 그가 시종일관하였고 사랑과 친절을 베풀었다고 말할 것이다.

4.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협정에 대한 항목들을 설정하고 종합하기 위한 것이다. 

신적 계시의 범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과 우리가 그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한다. 

여기에 설명된 것보다 더 적은 말로 완전히 설명된 곳은 하나도 없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믿어야 될 복음이다. 

이 특성들과 일치되지 않거나 이 약속에 의거하지 않은 것은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행복으로 인도하는 길이 여기에 알려져 있으며 "큰길"(대로, 사 35:8)을 이루고 있다. 또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이것은, 우리가 그에게서, 그에 의해서, 씨와 열매, 곧 요구된 은혜와 약속된 영광을 모두 받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의 손을 통합이 없이는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사이를 아무 것도 지나갈 수 없다.

우리 주님은 여기에서 복된 사람이 가지는 여덟 가지 특성을 우리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기독자의 주요한 은혜들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들 각 부분은 현재의 축복을 선포하고 있다. 즉 "~자는 복이 있나니"이다. 또한 각 부분에는 미래적인 축복이 약속되어 있으며, 이것은 위탁된 은혜와 의무의 특질을 알맞게 하기 위하여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러면 과연 복 있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그 대답은 다음과 같다.

Ⅰ. "심령이 가난한 자..poor in spirit"는 복이 있다(3절). 

겁 많은 심령(poorspiritedness, 역주:심령이 가난한 - poor in spirit와 비슷한 단어로 구성되어 있음)은 사람들을 축복 받는 것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는 바, 죄와 덫 ─ 비겁과 천박한 두려움, 인간의 정욕에 대한 자발적인 굴복을 초래케 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심령의 가난함은 영혼의 은혜스러운 경향성이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지기 위하여 자신을 비우게 되는 것이다.

1. "심령이 가난함"이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다면  세상적 부유함을 기꺼이 비워내는 바, 만족스러운 가난에 처함,  다시 말하면 그것이 비천하고 형편없이 낮은 조건일 때라도 우리의 마음을 그 조건에 단마음으로 적응시킴으로써 자신의 분깃으로 삼음이다. 

세상에는 가난하지만 영적으로는 교만하고 불평하며 운명을 탓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거듭난 기독자로서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면 기꺼이 우리의 빈곤에 자신을 적응시켜야 하며, "비천에 처할 줄도"(빌 4:12) 알아야만 한다. 

우리에게 가난을 명령하시는 바 지고지선의 하나님의 지혜를 전적으로 신뢰함안에서 그 명령을 달게 순종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만족스럽게 여기며 그 불편들은 계속적으로 참아야 하며,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해야 하며, 그것을 최선의 것으로 여길 필요가 있다. 

그것은 모든 세상적인 부귀에 무관심하는 것이며, 우리의 마음을 그것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번영-부요한 상태에서조차도 우리에게 닥쳐올 수 있는 손실들과 실망을 즐겁게 참는 것이다. 그것은 특별히 가난을 서약하지만 국가들의 부귀를 독점하는 로마 교회에 있는 자들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제공한 것을 팽개쳐 버림으로써 교만과 위선으로 자신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세상에서는 비록 부요하다고 할지라도 "심령은 가난"해야만 하며, 즉 가난한자의 위치에까지 겸손함으로 낮아져서 그들의 연약함을  만지며  함께 체휼함으로써 우리 또한  가난을 기대하고 준비해야만 한다. 

결코 가난에 처하는 것을 과도하게 두려워하여 안달하거나 그것을 억지로 회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가난이 특별히 선한 양심을 지키기 위해 우리들에게 임할 때 우리는 그것을 환영해야만 한다(히 10:34). 욥은 "심령이 가난한 자"였으므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취해갔을 때"도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2. "심령이 가난한"이란 우리 자신의 영적관점에서 본다면 겸비함, 곧  비천함의 자각이요 동의요 바로 스스로 비천한 자로 여기며 그 위치에 자처함이다. 

그것은 곧 기독자 된 우리가 현재, 다른 이들이 보기에 어떤 사람이든지,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무엇에 종사하고 있든지 와 전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임재앞에서(CORAM DEO) 진실로 자신을 nothing, 비천한 자로 여김이다. 

가난한 사람이란 구약에서는 안락한 생활을 하는 자나 교만한 자와는 정반대되는, 겸손하고 자신을 부정하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사람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의견으로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어린아이와 같으며 연약하고 어리석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시인하며 전적으로 의지하는 태도이다(18:4; 19:14).

그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했으나 그들은 [거듭난 영적 존재로서 마땅한 필요를 깨달음-곧 그리스도생명이 기독자에게 가장 최우선이요 절대적임-이 결여되어 있음, 곧 진실의 측면에서는] 자신이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였다(계 3:17). 

즉 그들은 "[모든 각양 은혜와 은사로 충만케 됨, 곧 참생명그리스도 빼어닮음이 그 특징인 바] 정신적으로는  [ 참생명그리스도의 결핍으로 인해] 가난"했지만(영적 시야가 가리워져서 자각하지 못함으로써) "심령은  [ 참으로 애석하게도, 원수의 기만술책에 속아 넘어가서   육적 자긍함과 자부심으로 가득채워 허망함으로써 영원참생명그리스도의 전적인 필요와 충만을 거절함에 따라] 부요"하였던 것이다. 

한편 바울은 은사와 은혜면에서 있어서 매우 탁월하여 "정신적으로는" 부요하였지만 "심령은 [오직 참생명그리스도로 가득파도록, 비워 내어드림으로써] 가난하였으며," 자신을 "사도들 중 가장 작은 자"나 모든 성도들 중 제일 못난 자, 그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자로 여겼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지극히 멸시받기에 합당한 자로 보며, 남을  자신보다 가치 있게 여기며, 자신을 그들보다 낮은 자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선을 행하기에는 전혀 자격없는 값싸고 비열/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자로 기꺼이 자처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위대하시며 우리는 비천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며, 그는 거룩하시고 우리는 죄스러우며 그는  모든 것이고 우리는 하등의 보잘 것 없는, 아무 것도 아닌 자로 여기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그 앞에서, 그의 능력있는 손 아래에서 겸손히 낮추는 것이다.

3. "심령이 가난한"이란 우리 자신의 의로움과 능력은 결코 신뢰하지 않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참된 칭의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의지할 수 있으며, 우리의 성화를 위해 그리스도의 영광과 은혜를 의존할 수 있는 것이다. 

세리가 가난한 죄인에게 긍휼을 부르짖었던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곧 이 "심령의 가난함"인 것이다. 

그저 말로만 인정하는 가식적인 위장이 아니라 진실로 전존재를 기울여 주님께 매달려 구하여 얻는 바, 자신의 영적 실제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 통해, 영적 자부심조차 남김없이 소멸되어 사그러짐안에서만 참된 기독자는  진정 자신을 가난하다. nothing이라고 불러야만 한다. 왜냐하면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부족하며, 언제나 하나님의 문에서 구걸하며, 언제나 그의 집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1) 이 심령의 가난함은 기독자의 은혜들 중에서 맨 처음에 두어졌다. 

철학자들은 겸손(비천)을 그들 중의 덕 중의 하나로 취급하지도 않았지만 그리스도는 그것을 맨 처음에 두고 있다.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자기를 부인함]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처음으로 배우는 과목이며, 심령의 가난함은 첫째 복이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다. 그 밖의 모든 축복들의 기초는 겸손(비천), 그 위에 놓여져 있다. 높이 세우려는 자는 낮게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영혼으로 들어가는 복음적 은혜를 위한 맨 처음의 두드러진 준비이다. 그것은 씨를 받아드리는 데 알맞는 토양을 마련하는 것이다. "피곤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이며,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쉼을 얻게 될 것이다.

(2) 그들은 "복이 있다." 

그들은 현재 이 세상에서도 그러하다. 하나님은 그들을 은혜 스럽게 여기신다. 그들은 그의 작은 자이며 그들의 천사들을 가지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더욱 더 은혜를 주시며, 그들은 최고의 안전한 생을 영위하며 편안함을 가지며, 그 어떤 것도 그들을 잘못되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교만한 영혼은 언제나 불안하다.

(3)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라." 

"은혜"의 왕국은 이와 같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만이 "가난한 자의 모임"(시 74:19)이라고 불리우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원이 되기에 적합하다. "영광"의 왕국은 그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이와 같이 그들 자신에 겸손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낮추실 때 낮추시는 분께 기쁨으로 응하는 자는 이와 같이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 

크고 높은 심령들은 "세상의 왕국"의 영광을 취하지만 겸손하고 온유하고 순종하는 영혼들은 "하늘의 왕국"을 얻는다.  

그러나 한편, 비록 부자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부귀를 가지고 선을 베푸는 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하늘 나라"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장차 올 때를 위하여" 좋은 담보물을 이와 같이 쌓아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행을 할 수 있는 자금을 가지지 않는 가난한 자라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물론 동일한 행복이 유용하게 부요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충분히 가난한 자들에게 약속되어 있다. 만일 내가 만족하게 그를 위하여 돈을 쓸 수 없으며 부족하다면 그것도 보상받게 될 것이다. 또한 그때에 우리는 좋은 주인을 섬기지 않겠는가?

Ⅱ.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4절). 

이것은 또 다른 이상한 축복으로서 앞의 축복에 적절히 뒤따르고 있다. 가난한 자는 애통하는 데 익숙해 있으며, 가난한 자는 은혜스럽게 애통한다. 

우리는 자칫하면 "즐거운 자"가 복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위대한 애통자이셨던 그리스도는 "애통하는 자"가 "복"되다고 말씀하신다. 

축복과는 적대/정반대가 되는 애통, 즉 죄악스러운 애통도 있다. 그것은 "세상적인/세상의 슬픔"이다.  다시 말하자면 영적인 사건에 대한 (해석을 잘못함으로써 야기되는 바) 절망적인 울적함과 세속적인 사건에 대한 슬픈 고뇌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축복에 도움이 되는 이른바 자연스런 애통이 있는데,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역사 한다. 그리고 그 축복은 우리의 애통의 원인인 그 고난을 성화 시켜 준다. 그러나 또한 은혜스러운 애통이 있는데, 이것은 축복을 받기에 적합한 것으로서 습관적인 진지함이며, 환락을 억제하는 마음, 실제적인 슬픔이다.

1. 우리 자신의 죄를 위한 참회의 애통. 

이것은 "경건한 슬픔," 하나님께 속한 근심이며, 그리스도를 염두에 두고 죄에 대해 슬퍼하는 것이다(슥 12:10). 

그들은 하나님의 애통하는 자들로서 회개의 생활을 하며 그들의 성품의 타락성과 실제적인 많은 범죄들과 자신들에게서 하나님이 물러서 버린 것에 대하여 애통한다. 또한 타인의 죄에 대해 애통하며, "그들의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운다"(겔 9:4).

2. 타인의 고통을 위해 동정하는 애통.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자들의 애통은 "경건한 대회를 인하여," "시온의 파괴를 인하여" 슬퍼하는 것이다(습 3:18; 시 137:1). 특히 그들은 "예루살렘"을 보면서 우신 그리스도와 같이 멸망하는 영혼들에 대해 동정심을 가지고 바라보며 그들에 대해 "애곡하는" 것이다.

이제 이 은혜스러운 애통자들은,

(1) "복이 있다." 

헛되고 죄스러운 "웃음"을 짖지만 그 마음은 슬플 수 있는 것처럼 은혜스러운 애통은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진정한 즐거움, 은밀한 만족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복이 있는"것은 "슬픔의 사람"이었으며 종종 우셨다는 것 이외에는 웃으셨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그리스도와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헛된 환락을 수반하는 많은 유혹들에 대항할 수 있는 무장을 갖추고 있으며, 도장이 찍어진 용서와 정해진 평화의 위로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

(2) "저희는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비록 그들이 즉시 위로를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위로를 위하여 많은 준비가 되어 있다. 영광이 그들을 위해 심기워진다. 확실히 그들은 나사로(눅 16:25)와 같이 하늘에서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늘의 행복은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위로 받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기쁨"이며, 완전한 즐거움이며 영원한 만족이다." 

그것은 이 "경건한 슬픔"에 의해 그들을 위해 준비된 자들에게 갑절이나 즐거운 것이 될 것이다. 천국은 참으로 애통하는 자들이 가는 천국이 될 것이다. 

그것은 즐거움의 수확, 즉 눈물로 씨를 뿌린 것에 대한 댓가가 될 것이다(시 126:5, 6). 즐거움의 산은 우리들의 눈물의 골짜기를 통해 그 대로가 놓여있다(사 66:10 참조).

Ⅲ.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5절). 

온유한 자란 고요히 자신을 하나님과 그의 말씀, 그의 홀(笏)에 복종하는 자며, 그의 지시를 따르고 그의 의도에 응하며, "모든 사람에게 온유"한 자이다(딛 3:2). 

또한 그는 성내지 않고 그것을 자제하고 참을 수 있는 자며, 침착하거나 부드러운 답변을 하는 자며, 해야할 경우가 있을 때는 예의범절을 벗어나지 않고 그들의 불쾌함을 나타낼 수 있는 자며, 다른 사람이 뜨거울 때 차가와 질 수 있는 자이다. 

또 그들이 다른 모든 것을 견지하기 어려운 때에라도 인내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꾸준히 견지하는 자이다. 

온유한 자란 거의 성을 내지 않는 자이며, 또한 분을 낼지라도 쉽사리 그것을 가라앉히는 자이며, 자기의 원리를 지켜 한 번 복수하기보다는 오히려 스무 번 용서해 줄 수 있는 자이다.

이러한 온유한 자는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다고 이곳에 표현되어 있다.

1. 그들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된 예수님과 같기 때문이며, 특히 그들은 그에게서 배우고 있다(마 11:29). 그들은 진노의 주님이시지만 광포는 없으신 하나님 자신과 같다. 

그들이 "복된 것"은, 그들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친구들과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최고로 안전하고 방해받지 않는 즐거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관계나 조건, 단체에도 어울리며, 살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2. "저희는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은 시편 37편 11절에서 인용된 것이다. 이것은 신약에서 현세적인 약속을 나타낸 거의 유일한 표현이다. 이 경건의 가지는 특별한 방법으로 "금생의 약속"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조롱 받고 모욕을 당하는 온유함은 이 세상에서도 우리의 건강과 부귀, 위안, 안전을 촉진하는 실제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온유하고" 침착한 자는 완고하고 난폭한 사람에 비하면 최고로 편안한 생을 살아가는 것으로 진술되고 있다. 혹은 "저희는(하늘 나라의 상징) 땅(가나안 땅, 원문은 "땅"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음)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늘 위의 모든 축복과 땅 아래 모든 축복은 온유한 자의 것이다.

Ⅳ.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6절). 

어떤 사람은 이것을 이 세상에서의 압제자 편에서의 악한 권력 행사때문에 야기된  외적인 가난과 낮은 상태에 처해 있음을 계속 말해 주는 실례로서 이해하고 있다. 

물론, 외적 측면에서 볼 때, 그런 처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손상과 피해를 입게 할 뿐 아니라 정당한 대우를 받으려 해도 소용없게 만든다. 그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압제자 편에서의 권력 때문이므로 그들은 의를 소유할 수 없다. 그들은 단지 평등한 것을 바라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자들에 의해 부정되고 있다. 이것은 또한 우울한 경우인 것이 틀림없다!

그런 반면에,  만일 그들이 선한 양심을 위하여 또한 선한 양심으로 이러한 어려움을 겪는다면 참으로 "복이 있다." 그들로 하여금 되어진 정의와 권리의 처지를 살피시고, 이윽고 압제자들로부터 가난한 자들을 구원해 내실 하나님을 바라고 희망을 가지게 하자(시 103:6). 

주님임재의식으로 선한 양심을 끝까지 견지하면서 압제를 끝까지 참고 견디며 그들의 송사를 하나님께 조용히 아뢰는 자들은 적절한 시기에 그가 그들에게 나타내어 보일 지혜와 친절에서 충분히 만족함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러한 욕구들은 은혜스러운 것으로서 모두가 영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영혼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며 신적 은혜의 선물들을 위해 자격을 부여한다.

1. "의"가 여기에서 모든 영적인 축복의 상징으로 나와 있다(시 24:5; 마 6:33 참조). 

영적 축복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다. 또한 우리에게 그 의를 전가함으로 말미암아 전달되고 획득되며, 하나님의 신실함에 의해 확인된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그리스도를 가지는 것,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로움"이 되는 것, "새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기 위하여 "의로움으로 새로워진 온전한 새 사람"을 입는 것, 그리스도와 그 약속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것이 곧 "의"이다.  기독자가  전존재를 올인하여 추구하는 것이 마땅한 바, 그리스도는 참으로 "우리에게, 우리의 의, 우리의 빼어닮음 그 자체"가 되신다.

2. 우리는 이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또한 실제로 그것들을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찾듯이 먹고 마시는 것 이외에는 만족될 수 있으며, 비록 다른 것은 부족하여도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자와 같이 찾아야만 한다. 

우리는 영적인 축복들을 진지하고 끈질기게 갈구해야 한다. "나에게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죽겠나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쓰레기요 찌꺼기요, 불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주시옵소서. 비록 내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했다 할지라도 이것으로 족하겠나이다."

"주리고 목마른 것"은 종종 다시 일어나고 새로운 만족을 필요로 하는 욕구이다. 그러므로 이 거룩한 욕구는 어떤 일이 이루어진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용서가 행해지고 매일의 생생한 은혜의 공급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영혼은 마치 몸이 흡족한 음식을 요구하듯이 의(義)의 음식, 곧 그날에 필요한 일을 하기 위한 은혜의 음식이 필요한 것이다. 

"주리고 목마른 자"는 양식을 위해 수고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축복을 바라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지정된 수단을 사용하여 그것들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하몬드(Hammond) 박사는 실천 교리 문답서 에서 "주린 것과 목마른 것"을 구별하고 있다. 즉 "주림"이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음식을 바라는 욕구로서, "성화 시키는 의"이며, "목마름"이란 원기를 돋우기 위해 마실 것을 바라는 욕구로서 의롭게 하는 "의(義)"요, 우리가 용서받았다는 의식이다.

이와 같이 영적인 축복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그러한 욕구에 있어서 "복되며," 그러한 축복들로 "채움을 받게 될 것이다."

(1) 그들은 그러한 욕구들에 있어서 "복되다." 

비록 은혜의 모든 욕구가 은혜는 아니지만(거짓의, 의미한 욕구는 아니다) 이와 같은 욕구는 은혜이다. 그것은 "좋은" 어떤 것의 "증거"이며 "나은" 어떤 것의 "보증"이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원하는 욕구이며 그는 그 자신의 손의 일을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다. 따라서 만족케 하며 속이지 않는 올바른 대상에 희망을 건 사람이나 "땅에 티끌을 탐내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2) 그들은 그러한 축복들로 "채워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완전히 만족하도록 주실 것이다. "영혼을 채울 수" 있는 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며, 그의 은혜와 호의는 그 의로운 욕구에 어울리는 것이다. 또한 그는 그들 자신의 공허를 의식하고는 그런 자들에게 "은혜 위에 은혜로" 채워 주실 것이다. 

그는 "주리는 자를 배불리시며"(눅 1:53), 그들을 "만족케 하신다"(렘 31:25). 하늘의 행복은 확실히 그 영혼을 채울 것이다. 그들의 의는 완전케 될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형상도 또한 완성될 것이다.

Ⅴ.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7절). 

이것은 그 나머지와 같이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긍휼이 여기는 자는 현명한 사람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또한 부요한 자로도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을 "복되다"고 선포하신다. "그리스도의 긍휼의 깊이를 참되게 경험한 자로서,. 이제 긍휼히 여김 받기에 합당한 자에게 마음을 열어] "긍휼히 여기는 자"는 비천 가운데 있는 사람을 동정-동감-동참하여 돕고 구제하려는 자애롭고 경건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다. 

윤택하거나 인색하지 않는 수단(자금)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오히려 참으로 "긍휼히 여기는"자가 될 수 있음에 주의하자. 우리는 자신의 고통을 꾸준히 참을 뿐만 아니라 기독자의 동정으로 우리 이웃의 고통에 동참해야만 한다.

 긍휼은 나타내져야 하며(욥 6:14), "긍휼의 동정심"을 옷 입어야 한다. 이로써 고통 중에 신음하는 자들을 최선을 다하여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무지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가르쳐야 하며, 부주의한 자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을 경고해야 한다. 죄의 상태에 있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태로운 지경에서 건져내어야" 한다(역주. 슥 3:2). 

우리는 우울하고 슬픔 가운데 있는 자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을 위로해야 한다(욥 16:5). 궁핍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의 쓸 것을 공급해 주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것을 거절한다면 그것이 어떤 구실이든지 우리는 "우리의 긍휼의 동정심을 닫아 버리는"것이다(약 1:15, 16; 요일 3:17).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줌으로써 네 영혼을 건져내라"(사 58:7, 10). 아니, "선한 사람은 그의 짐승에게도 자비스럽다."

이제 긍휼히 여기는 자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1. 그들은 "복이 있다." 

구약 성서에도 이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시 41:1). 

이로 비추어 볼 때 그들은 선이 그분이 영광인 하나님과 비슷하다. 그분이 "긍휼히 여기는 자"인 것처럼 "긍휼히 여김"으로서 우리는 어느 정도 "그 분이 완전하신 것 같이 완전하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이며, 우리 자신에게도 만족감을 줄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쓰이는 도구가 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즐거움 중의 하나는 "선행을 베푸는" 기쁨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는 이 말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즉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 , 복음서에서는 이 말씀을 찾아볼 수 없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2. "저희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즉 그들이 긍휼을 필요로 할 때 "사람의" 긍휼을 얻게 될 것이다(우리는 언제 급속히 친절을 필요로 할 때가 올지 모른다. 그러므로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 

그러나 특별히 "하나님의" 긍휼을 얻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실 것이다"(시 18:25). 

가장 자비하고 긍휼한 자는 "공로"가 있는 것처럼 꾸밀 수 없으며 긍휼을 행하는 일에 급히 서둘러야만 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의 "알뜰한" 긍휼(6:14), "공급하시는 긍휼"(잠 19:17), "생존케 하시는 긍휼"(시 41:2), 그날에 주의 긍휼(딤후 1:18)을 얻게 될 것이다. 아니, 그들은 "그들을 위해 예비된 나라를 물려받게 될 것이다"(마 25:34, 35). 

한편 "긍휼을 나타내 보이지 않는 자"는 "긍휼없는 심판"(지옥불의 심판)을 받게 돌 것이다.

Ⅵ.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이것은 모든 복들 중에서 가장 포괄적인 복이다. 여기에는 성결과 행복이 완전하게 묘사되어 있고 병행되어 있다.

1. 여기에는 복된 자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특성"이 있다. 즉 그들은 "마음이 청결한 자"이다. 참된 종교는 청결한 마음에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내적으로 청결한 자는 그 자신이 "청결하고 깨끗한" 종교의 세력 아래에 있음을 나타내 보인다. 참된 기독교는 마음, 즉 "마음의 청결"에 놓여 있다. 즉 "마음의 악을 씻어버림"에 있다(렘 4:14). 

우리는 하나님께 깨끗한 "손"뿐만 아니라 청결한 마음을 들어 올려야 한다(시 24:4, 5; 딤전 1:5). 마음은 "혼합"에 반대되는, 순전함으로써 "청결"해야한다. 즉 잘 하려고 노력하는 정직한 마음이어야 한다. 

이 청결함이란 "부패"와 "불결"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섞인 것이 없는" 포도주와 "진흙탕 물이 섞이지 않는" 순수한 물과 같은 것이다. 

"육적인 정욕," 모든 불결한 생각과 욕망으로부터 마음을 "청결"하게 보존해야 한다. 또한 "세상적인 정욕"에서 청결하게 지켜야 한다. 탐욕은 "부정 이득"으로 불리운다. 또한 영육의 모든 더러움에서, "마음에서 나오고 사람을 더럽히는" 모든 것에서 청결하게 지켜야 한다. 

마음은 "신앙으로 청결케 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에게 정결한 처녀로 나타나며 보존되어야 한다. "내 속에 이러한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오 하나님!"

2. 여기에는 복된 자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위로"가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1) 하나님을 "보는 것"은 영혼의 행복의 완성이다. 

"그를 보는 것"은 우리가 신앙으로 현재 상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땅위에 있는 천국"이다. 또한 우리가 미래 상태에서 그를 보는 것은 "하늘에 있는 천국"이다. 

그가 "계신 그대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더 이상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보지 않는 것, 또한 우리와 같이 그를 보며, 그를 보고 즐거워하는 것, 그를 보고 그와 같이 되며, 그 형상에 만족하는 것(시 17:15), 영원히 그를 보며 그를 결코 잊지 않는 것─이것이 천국의 행복이다.

(2)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행복은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만 약속되어 있다. 

"청결한 자"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볼 수" 없으며 불결한 자에게는 경사가 되지 못할 것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앞에서 불결한 영혼은 어떤 즐거움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가" 그들의 불법을 차마 간과할 수 없는 것처럼 "그들도" 그의 청결함을  기뻐하시기에 방관할 수 없으시다. 또한 불결한 것은 그 어떤 것도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청결한 자," 참으로 성화 된 자는 누구든지 그들에게 어울리는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으로만 만족할 수 있다. 신적 은혜는 항상 그것을 바라는 자에게 함께 할 것이다.

Ⅶ.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9절). 

위로부터 온 지혜는 먼저 "청결"하고 그 다음에 "화평한 것"이다. 복된 자는 하나님께는 "청결하고," 사람들에게는 "화평한" 자이다. 왜냐하면 양자에 관련하여 양심은 "허물없이" 보존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1. "화평스러운 성품"을 지닌 사람이다. 

"거짓말을 꾸미는 것"이 거짓에 탐닉된 것인 것처럼, "화평케 하는 것"은 화평에 대해 강하고 진지한 애정을 지니는 것이다. "나는 화평을 원하노라"(시 120:7). 

화평케 하는 것은 평화를 사랑하고 바라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우리의 본령(本領)내에 있는 것이며 침착하기를 노력하는 것이다.

2. "화평스러운 친교"를 지닌 사람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부지런하게 친교가 깨어지지 않도록 화평을 유지하는 것이며, 만일 그것이 깨어졌을 때는 다시 화평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신이 화평의 제안에 귀를 기울이며 그것들을 타인에게 하려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형제와 이웃 사이의 거리감을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합치시켜 분쟁을 조정시키며, "갈라진 틈을 보수하는 자"이다. 

"화평케 하는 것"은 때로 "감사받지 못하는 일"이 될 때가 있다. 분쟁을 못하게 하는 것이 화평케 하는 자가 할 일이다. 또한 "양 편 뺨을 함께 맞는 것"이 그의 직무이다. 그러나 그것은 선한 직분이며 우리는 그 일을 하는 데 앞장서야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것은 최선을 다해 불화한 자들을 화목케 하고 그들의 직무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기독자의 사랑을 권면해야 하는 교역자에 대한 교훈으로 특별히 의도되었다고 한다.

(1) 이와 같은 사람들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화평을 유지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참으로 봉사함에 의해 그 자신이 충만한 즐거움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범죄 행위를 파괴"하고 "땅 위에 화평"을 선포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던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고 있다.

(2) "저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그러하다는 것은 그들 자신들에게 증거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아들로 삼을 것이며 거기에서 그들은 그를 닮게 될 것이다. 그는 화평의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은 화평의 왕이다. 양자의 성령은 화평의 성령이시다. 

하나님은 그 자신이 우리 모두와 화목하신다고 선포하셨으므로 그는 서로에 대하여 적대하며 화해할 줄 모르는 자들을 그의 자녀로 삼지 않을 것이다.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면 화평을 깨뜨리는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이로 보건데 그리스도는 불과 검, 형벌적인 율법으로 그의 종교가 전파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또한 완고한 성미나 난폭한 기질을 가진 사람을 그의 제자로 삼으려 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이 세상의 아들은 혼란한 틈을 타서 이득을 취하는 것(to fish in troubled waters)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화평케 하며 늘 평온함을 지니는 자이다.

Ⅷ.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 

이것은 모든 복들 중에서 가장 역설적인 복이며 기독교에 독특한 복이다. 따라서 이 복은 맨 나중에 놓여졌고 다른 복들과는 다르게 10절-12절에 더 확대시켜 강조하고 있다. 

이 복은 바로의 꿈처럼 이중적이다. 왜냐하면 거의 신뢰될 수 없지만 "그 일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후반부에는 사람이 바꿔져 있다. "너희─곧 나의 제자들, 즉각적인 추종자들은 복이 있다. 덕에 있어서 뛰어난 너희는 이것과 더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너희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어려움과 고통을 당할 것을 생각해야 한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자.

1. 핍박받은 성도들의 경우가 언급됨. 그것은 어려운 경우이며, 매우 비참한 것이다.

(1) 그들은 맹수에게 쫓기듯이 핍박받았고 내쫓김을 당하였으며 학대를 받아야만 했다. 

기독자는 마치 "이리의 머리를 가진 자"(사회에서 버림받은 법의 방치자처럼)가 되었는데 그를 발견하면 누구든지 죽일 수 있었다. 

그들은 "만물의 찌꺼기"와 같이 버림을 받았다. 그들은 벌금형을 받았고, 투옥을 당하였고, 추방되고, 지위를 빼앗겼으며 모든 신분과 명예에서 쫓겨났다. 또한 매맞고 고문을 당하고 고통을 받았으며 언제나 도살한 양과 같이 취급되었다. 

이것은 "의인 아벨"의 때로부터 거룩한 후손에 대항하는 뱀의 후손의 사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히 11:35).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기독자는 그 이상의 핍박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우리는 그것을 이상히 여겨서는 안 된다(요 3:13). 그는 우리에게 모본을 남겨 주셨다.

(2) 그들은 "거짓으로 그들을 거스려 하는 모든 악한 말로 대적"을 당하였다. 

가증스러운 자로 묘사하기 위해 그들에게, 개별적 사람들에게, 총체적으로 의인의 세대에 별명과 비난의 칭호가 붙여졌다. 

때로는 그들을 경시하고 업신여김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짓밟힘을 당하게 했으며, 때로 그들을 만만찮게 함으로써 강력하게 공격을 당하게 했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일로 힐문과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시 35:11; 렘 20:18; 행 17:6, 7). 

그들에게 다른 불행을 끼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 자들도 이런 것은 할 수 있었다. 핍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은 그들에 대한 자신들의 야만적인 처신을 스스로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이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곰가죽으로 뒤집어쓰지만 않았더라면 그들은 이들을 괴롭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저들을 먼저 가장 나쁜 사람으로 말해놓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최악의 잔인한 처신을 그들에게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너희를 거스리고 핍박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성도들을 "거스리는 것"은 그들을 "핍박하는 것"이며, 머지 않아서 그들의 "강팍한 말"(유 15)과 "희롱"(히 11:36)은 심판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거짓으로 모든 악한 말을" 너희에게 할 것이다. 때로는 증인으로 "심판의 자리" 앞에서 때로는 "잔치석상에 위선적인 조롱자들과 함께" 비웃는 자의 자리에서 거짓으로 악한 말을 할 것이다. 

그들은 "취한 자의 노래"이다. 때로는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한 것처럼 정면으로, 또한 예레미야의 원수들이 했던 것처럼 그들의 배후에서 훼방하고 거스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자들에 대해 부당하게 가해졌던 것처럼 그렇게 험악하고 무서운 악은 일찍이 없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3) 이 모든 것은 "의를 위함"이다.(10절). 또한 "나를 인함"이다(11절).

 "의를 위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는"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의(義)의 역사와 거의 밀접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의에 대한 원수는 그리스도의 원수이기도 하다. 그들은 "의를 위해"고난을 받으며, 그들의 양심을 거스려 범죄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고난을 받으며, 선행을 하기 위해 고난을 당한다.

 박해자들이 어떤 구실을 붙이든 간에 그들의 적의를 품는 목표물은 바로 경건의 능력이다. 중상을 받고 미움과 박해를 당하는 것은 실제로 그리스도이다. 

"당신을 인하여 내가 비난을 견디었나이다"(시 69:9; 롬 8:36).

2. 고난받는 성도에 대한 위로가 주어져 있음.

(1) 그들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그들의 생애에서 "나쁜 것들"을 받으며(눅 16:25), 좋은 이유로 그것들을 받고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복이 있는" 것은 그것이 그들에게는 영예(행 5:41)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선을 베푸는 기회이며 또한 은혜의 특별한 위로와 찾아오심, 그의 임재를 체험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고후 1:5; 단 3:25; 롬 8:29, 36).

(2) 그들은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천국은 저희의 것이다." 

그들은 현재 그것에 대한 확고한 칭호를 가지고 있으며 장차 경험할 것을 미리 맛보고 있는 것이며 머지 않아 그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고난들에는 엄격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상을 받을 만한 것이 없지만 여기에서는 "상"이 약속되어 있다(12절).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도다." 

이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행한 것 이상으로 매우 큰 것이다. 그것은 "하늘에서" 이며, 미래적이며,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안전하게 보존되며, 위험이나 사기, 폭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은 그를 "위해" 버리는 자(비록 그것이 생명이라고 할지라도)들은 마침내 그에 "의해" 잃지 않는 것을 마련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천국은 마침내 우리가 살아나가는 인생 여정에서 직면한 모든 어려움을 충분히 보상해 줄 것이다.

온 시대에 걸쳐서 고난받는 성도들로 하여금 그 고난과 핍박을 견딜 수 있게 한 것은 "그들 앞에 놓여진 이 즐거움"이었다.

(3)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으니라(12절). 

그들은 탁월성에 있어서 너희보다 뛰어나 있었으며, 또한 시간적으로도 너희 전에 있었으며 이는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약 5:10)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들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박해를 받았고 능욕을 당하였다. 

너희는 너희 자신에 의한 방법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사야는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말한다.(사 28:10)고 조롱을 받았는가? 엘리사는 그의 대머리 때문이었는가? 모든 선지자들이 이렇게 취급되었는가? 그러므로 그것을 이상한 일이라고 놀라지 말라. 그것을 어려운 일이라고 불평하지 말라.

 고난의 길이 다져진 길임을 아는 것은 위안이 되며, 이러한 지도자들은 뒤쫓아가는 것은 영광이다. 그들이 고난을 극복하는데 충분했던 은혜는 너희에게 불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 원수들은 옛적에 주님의 사자들을 조롱하였던 자들의 후손이요 계승자이다"(대하 36:16; 마 3:31; 행 7:52).

(4) 그러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12). 

일반적인 고통 아래에서처럼 이러한 고난을 당했을 때 그저 참고 만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즐거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의 영예와 위엄, 즐거움과 유익이 그것의 고통과 수치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난받는 일에 "자만심"을 가져서는 안 되며(그것은 모든 것을 수포로 만든다), 바울과 같이 그것들을 "기쁨으로"당해야 한다(고후 12:10). 또한 그리스도는 우리보다 "앞서 계시며," 우리 보다 "뒤에 계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므로써 그 고난들을 기쁨으로 감수해야 한다(벧전 4: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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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된 자의 직분(마 5:13-16)

그리스도는 근래에 그의 제자들을 부르셨고, 그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을 말씀하셨다. 여기에서는 더 나아가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Ⅰ.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이 말씀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그들에게 격려와 용기를 북돋아 줄 것이며, 비록 멸시를 받을지라도 그들은 실제로 세상에 축복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이와 같이 고난을 받기 때문에 더욱 그러해야 한다. 

그들보다 앞서 간 선지자들은 가나안 땅의 소금이었다. 그러나 사도들은 "온 세상의 소금"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전 세계로 나가야"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실망이 되는 일은 그들의 "수가 적었고 힘이 약했다"는 사실이다. "온 세상"과 같이 넓은 지역에서 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만일 그들이 군대의 무력이나 칼의 힘으로 일하려 했다면 그것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소금과 같이 조용히 일하였으며, 한줌의 소금은 그 맛을 널리 확산시킬 수 있었다. 그들은 널리 퍼져서 누룩과 같이 서서히, 불가항력적으로 일하였던 것이다.

복음의 교훈은 "소금"과 같다. 그것은 꿰뚫으며, "빠르며," "능력 있는"것이다(히 4:12). 그것은 "마음"을 찌른다(행 2:37). 그

것은 청결케 하며, 맛있게 하며, 부패를 방지한다. 성경 말씀에 보면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라는 구절이 있다(고후 2:14). 이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없이는 모든 학문이 맛이 없기 때문이다. 

영원한 언약은 "소금의 언약"으로 불리운다(민 18:19). 복음은 영원한 복음이다. 소금은 모든 제사에 사용된다(레 2:13). 또한 에스겔의 신비스러운 성전에서도 마찬가지이다(겔 43:24).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소금이 되라는 복음의 교리를 배웠고 또한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소금으로서 가르치는 사명을 받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기독자는, 특히 교역자들은 세상의 소금이라는 사실이다.

1. 만일 그들이 마땅히 되어야 할 사람들이 된다면 그들은 "좋은 소금"이다. 다시 말하면 희고 작으며 작게 쪼개진 것이나 그러면서도 매우 유용하고 필수적인 것이다. 

플리니(Pliny)는 말하기를, Sine sale, vita humana non potest degere ─ 즉 소금이 없이 인간의 생명이 지탱될 수 없다고 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자신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복음으로 맛을 낸다. 즉 은혜의 소금으로 맛을 내는 것이다. 지식이나 감정, 말이나 행동, 이 모든 것들은 은혜로 고르게 되어야 한다(골 4:6). "너희 속에 소금을 두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확산시킬 수 없다(막 9:50).

(2) 그들은 타인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그들은 선해야(be good)만 될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해야(do good)만 한다. 또한 그들 자신의 현세적인 흥미를 만족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이 복음의 맛과 향기로 그들을 변형되기 위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슬며시 들어가야만 한다.

(3) 그들은 세상에 대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무지와 사막에 놓여 있는 인류는 섞어 가는 맛없는 다량의 음식물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파송함으로써 그들의 생과 교훈을 통하여 그들을 지식과 은혜로 맛을 내게 하며 그리하여 하나님과 천사들, 또한 신적인 일들을 맛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합당케 하기 위함인 것이다.

(4) 그들은 어떻게 처신해야만 되었는가? 

그들은 무더기로 쌓여 있어서는 안 되었고, 언제나 예루살렘에 함께 계속적으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소금으로서 음식물에 이곳 저곳에 알알이 흩어져야 한다.

 마치 레위인들이 이스라엘에 흩어져 있었으나 그들이 사는 곳에서는 그들의 맛을 전할 수 있었던 것과 같다. 

어떤 사람들은 소금이 우리에게로 굴러 떨어지면 그것은 어리석게도 불길한 징조로 칭하나, 실상은 이 소금이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실제로 흉조라는 점을 주시한다.

2. 그들이 이러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들은 "그 맛을 잃어버린 소금"과 같다. 

만일 다른 사람들에게 맛을 내어야만 하는 너희들이 맛이 없고, 영적인 생활이 결핍되고, 기운이 없다면, 또는 만일 기독자가 그렇다면, 특히 교역자가 그렇다면 그의 처지는 매우 처참하다. 왜냐하면,

(1) 그는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소금은 "맛 없는 음식물"을 맛나게 한다. 그러나 "맛 없는 소금"에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기독교는 사람에게 맛을 낼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이러한 신앙고백을 채택하고 그것을 계속적으로 행하면서도 맛이 없고 하찮으며 품위 없고 김이 빠진 상태에 머문다면, 어떠한 교훈도 어떠한 수단도 그로 하여금 맛을 내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기독교가 하지 않으면 그 어느 것도 맛을 내게 하는 이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2) 그는 "무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무 쓸데도 없다." 도대체 맛없는 소금이 소용될 곳이 어디 있는가? 이성 없는 사람과 같이 그것은 은혜 없는 기독자와 같을 것이다. 

사악한 사람은 피조물들 중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다. 사악한 기독자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다. 사악한 교역자는 기독자들 중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다.

(3) 그의 운명은 결국 파멸과 거절이기 때문이다. 

그는 "밖에 버리움"을 받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와 신자의 교제로부터 내어 쫓김을 당하는데, 그는 이들에게 오점과 부담이 된다.

 또한 그는 "사람들에게 짓밝힘을 받게 될" 것이다. 그가 비난받았던 자들과 그들 자신이 짓밟힐 수밖에 없는 자들의 수치와 거절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Ⅱ.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14절). 

이것도 역시 전자와 같이 그들이 유용한 자임을 나타낸다(sole et sale nihil utilius─즉 태양이나 소금보다 더 유용한 것은 없다). 그러나 더 영광스러움을 나타낸다. 

모든 기독자는 "주 안에서 빛"이며(엡 5:8), "빛들로 나타내어야"한다(빌 2:15). 

그러나 교역자들은 특별한 방법으로 나타내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부르고 있으며(요 8:12), 또한 그들은 "그와 함께 역사하는 동역자들"이며, 그들에게는 그의 어떤 명예가 주어져 있다. 

참으로 "빛은 좋은 것"이며, 고마운 것이다. 세계(창조)의 첫날의 빛은 그러하였고, 그 때에 빛은 "흑암에서 빛을 내었다." 각 날의 새벽빛도 그러하며, 또한 복음도 그러하며, 또한 지각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던지는 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은 흑암에 처해 있었고,"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을 세상에서 빛을 내도록 들어 올리셨다. 또한 그들은 그렇게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에게서 그들의 빛을 차용하고 빌린 것이다.

이 비유는 여기에서 두 가지 일로 설명되고 있다.

1. "세상의 빛"인 그들은 탁월하고 눈에 띄며, 많은 사람들의 주시를 받고 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 특히 봉사에 있어서 솔선수범하며 열심 있는 자들은 두드러지게 되며, 횃불처럼 주목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징조"(사 8:18)와 "예표"(슥 3:8)의 사람이다. 그들의 모든 이웃들은 그들을 주시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칭찬하고 추천하며 그들을 즐거워하며 그들을 모방하려고 노력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시기하고 미워하며 비난하며 그들을 상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을 주시하는 자들" 때문에 "신중하게 행동해야만"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많이 "주시를 받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부르시기 전에는 무명의 사람들이었으나, 그가 그들에게 부여한 특성이 그들로 하여금 위대하게 했다. 

그들은 복음의 전파자로서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그것 때문에 어떤 사람들에 의해 비난받았지만 그들은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았고 보좌로 나아갔으며 재판장이 되었다(눅 22:30).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당신을 높이는 자를 높일 것이기 때문이다.

2. "세상의 빛"인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기로 되어 있다(15절). 그러므로,

(1) 그들은 등불로서 "두어질"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촛불들에 불을 켰으므로 그들은 말 아래 두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지금과 같이 언제나 갈릴리의 동네들이나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만 제한되지 않을 것이며 모든 세상에로 보냄을 받게 될 것이다. 

교회는 촛대, 즉 황금 촛대이며, 이곳에는 그들의 빛이 멀리 퍼지도록 이러한 빛들이 놓여져 있다. 

복음은 매우 강한 빛이요. 그 자체의 많은 증거가 수반되는데, 즉 "산 위에 있는 동네처럼 숨기우지 못하며," 즉 그것에 거스려 자신들의 눈을 고의적으로 닫지 않은 자 들에게는 이 빛이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 그것에로 가까이 접근하려는 자들과 그것이 있는 곳에로 나아오는 모든 자들에게 "빛을 비출 것이다." 

그 빛을 받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들 탓이다. 그들이 그 빛을 집안에 들이지 않으려 하며, 부지런하고 공정하게 그 빛에 대해 알아보려 하지 않고 오히려 나쁜 편견만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2) 그들은 등불처럼 "비추어야"한다.

① 그들은 그들의 "선한 전파"에 의해 그들이 가진 지식을 타인을 위하여 전파해야만 한다. 그것을 "말 아래' 두지 않고 널리 펼쳐야만 한다. 

달란트를 안 쓰고 처박아 두어서는 안 되며 그것으로 장사를 해야만 한다(역주:눅 19:20).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 자신을 비밀과 모호 속에 감추어 두거나 명상이나 겸손, 자기 보존의 우선 아래 숨겨서는 안 되며, "그들이 은사를 받은 것 같이 똑같이 일을 집행해야만" 한다(눅 12:3).

② 그들의 "선한 생활"에 의해 그들은 "켜서 빛을 비추어야만"한다(요 5:35). 

그들의 모든 대화에서 그들이 참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임을 증거 해야만 한다(약 3:13). 그들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지도하며 소생시키고 위로해야만 한다(욥 29:11).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어떻게" 우리의 빛을 비출 것인가?

─사람들이 "볼 수"있고 시인할 수 있는 이러한 "선행들"을 행함으로써, 좋은 소식을 그들에게 전하여 기독교에 대해 좋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빛을 비추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덕을 세울 수 있도록 선행을 베풀어야 하며, 자기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은밀히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 사이에 놓여있는 것은 우리 자신에 간직되어야만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연히 공개되고 드러나는 것은 우리의 신앙 고백과 일치되는 것이 되도록 힘써 노력해야 하며 칭찬할 만한 것이 되어야만 한다(빌 4:8). 

우리들의 주위에 있는 자들은, 종교는 단지 공공연한 이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또한 우리는 신앙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신앙의 능력 아래에 거한다는 사실을 확신하도록 우리의 선한 말들을 "듣고," 우리의 선한 행위를 "보아야"한다.

둘째, 우리는 어떤 "목적"으로 빛을 비우어야만 하는가?

─"너희의 선행을 보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고(이것은 바리새인들이 목표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그들의 모든 선행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종교 안에서 행하는 모든 일에서 목표로 삼아야 하는 큰 일이라는 사실이다(벧전 4:11). 

이 중심에서 우리의 모든 행동의 선(線)은 만나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노력해야만 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영광 돌리도록 모든 일을 다해야만 한다.

우리의 선행은 다른 사람들에게,

1. "칭찬의 구실"이 되는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 속에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보며 그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람들에게 이러한 능력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

2. "경건에 대한 동기"가 된다. 

"그들로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기독교의 진리와 탁월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며, 거룩한 경쟁의식에 의해 너희의 선행을 본받으려고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스럽게 하도록 해야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성도의 거룩하고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대화는 죄인들의 회심을 더욱 촉진케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종교에 생소한 자들은 이것으로써 그것(종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수 있다. 모범을 보임으로써 가르치는 것이다. 즉 모범은 스승이다. 

종교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이것에 의해 종교에 친숙해질 수 있으며, 따라서 경건한 대화에는 마음을 사로잡는 효력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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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완성(마 5:17-20)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신 사람들─그들을 위해 그의 제자들에게 이러한 교훈을 가르치셨다─제자들은 그들의 종교에 있어서,

1. "구약 성경"을 "규례"로 삼고 있었던 자들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그들이 정당함을 보여 주고 있다.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모범"으로 삼고 있었던 자들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그들이 잘못임을 보여 주고 있다. 왜냐하면,

Ⅰ. 그리스도께서 제정하려고 오셨던 규칙은 "구약 성경"과 정확히 일치되었는데, 여기에서는 구약 성경을 "율법과 선지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선지자들"은 율법에 대한 주해자였으며, 둘 다 함께 그리스도께서 유대교에 있어서 보좌 위에 기초한 신앙과 행위의 규범으로 설정되었으며, 여기에서 그는 이것을 계속 왕좌적인 지위로 유지하고 있다.

1. 그는 "구약 성경"을 말소하거나 약화하는 생각을 배격하고 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1) "율법이나 선지자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경건한 유대인들은 내가 그것들을 파괴하려고 온 줄로 두려워 말라." 

그리스도께서 설립하려고 오신 이 나라는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신봉하고 그 능력과 순결성을 체험했던 성경의 명예를 손상시킬 것이라는 경계심 때문에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에 대해 편견을 가지지 말라. 아니, 그리스도께서는 율법과 선지자에 대해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라.

(2) "율법과 선지자에 대해 불평을 가지고 또한 그 멍에에 지친 참람한 유대인들은 내가 그것들을 파괴하려고 온 것으로 생각지 말라." 

육적인 자유 사상가들은 메시야가 그들을 신적 십계명중 제 2계명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신적인 약속들을 확실케 하며, 그들을 행복케 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살도록 내버려두기 위해 온 것으로 생각지 말라. 

그리스도는 자연법이나 도덕법에 의해 금지된 것을 명령하시지 않으며, 율법이 부과한 것을 금지하시지도 않는다. 그가 잘못을 고치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이다. "내가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영혼의 구세주는 "마귀의 역사"나 하나님께로 오지 않은 것만을 파괴하는 분이며, 우리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서 받은 탁월한 명령을 파괴하러 오시지는 않았다. 아니, 그는 그것들을 "완성하시기" 위해 오셨다. 다시 말하면,

① 그는 율법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하여 오셨다. 왜냐하면 그는 "율법 아래에 나셨다"(갈 4:4). 

그는 모든 점에서 율법에 순종하셨고, 그의 양친을 영화롭게 하였고, 안식일을 거룩케 하였으며, 기도하시고 구제하셨으며,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행하셨으며, 완전히 순종하셨고 어떤 일에서도 율법을 깨뜨리시지 않았다.

② 그는 율법의 약속들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실현하기 위해 오셨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그를 증거 했다. 

은혜의 언약은 내용상으로 보면, 그때와 지금이나 동일하다. 즉 그 증보자는 오직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③ 그는 율법의 모형에 부합시키기 위해 오셨다.

 따라서(Tillotson이 표현한 대로) 그는 [다만, 생명을  고양하기위해 굴레로 작용하는 바] 의식적인 법을 "헛되게" 만드시지 않고, "유효하게" 만드셨으며, 그 자신을 그러한 모든 그림자들의 본체로 나타내셨다.

④ 그는 율법과 선지자의 결핍을 채움으로써 그것을 완성하고 완전케 하기 위하여 오셨다. "완성하다"(플레로사이, 5:17)는 말은 적절히 이를 나타내고 있다. 

만일 우리가 율법을 이전에 약간의 물을 담았던 그릇으로 간주한다면 그리스도는 그 물을 부어버리려 오시지 않고 그 어구까지 채우기 위해 오셨던 것이다. 

또한 처음에는 굵은 선으로 대충 윤관만 그렸던 그림에 비유한다면, 그리스도는 그 그림을 완성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추가 사항과 해설을 덧붙임으로써 율법과 선지자를 개선하셨다.

⑤ 그는 동일한 목적을 수행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기독자의 원리는 유대교의 주요 목적과 상반되거나 거의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최고 수준에까지 진척시킨 것이다. 

복음은 "개혁의 때"이며(히 9:10),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개선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것을 온전하게 세우는 것이다.

2. 그는 구약의 영원성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구약을 폐지하려고 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결코 폐지될 수 없다고 강조하셨다(18절).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멘이요, 신실한 증인인 내가 엄숙히 그것을 선포하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즉 시간이 더 이상 계속되지 않고 보상의 불변 상태가 모든 법칙들을 대신할 때에, 율법의 일점 일획, 즉 가장 적고 최소한 세목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천지는 장차 합치될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에 떨어지거나 헛되이 되기보다는 천지에 있는 모든 만물이 파멸과 혼란 속으로 휘감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율법이나 복음의 말씀이나를 막론하고 "영원히 지속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율법에 관한 한, 아무리 적은 것으로 간주되는 일점이나 일획이라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고 주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속하고 그의 인장이 박힌 것이라면, 그것이 비록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보존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법칙들은 그 자체들이 매우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으며, 이를 격언에 반영시키고 있다. Apices juris non sunt jura - 즉 "법의 극지향점은 법이 아니다"라고,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율법의 일점과 일획을 지키시고 유지하실 것이다.

3. 그는 조심스럽게 율법을 지킬 것을 제자들에게 맡기고 있으며, 그들에게 그것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것의 위험성을 보여주고 있다(19절).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는 자들," 즉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의 중한 것을 무시하며 또 그렇게 하도록 사람을 가르치며, 그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헛된 것으로 만드는(마 15:3) 자들은,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선생이라는 칭찬을 받았지만 그리스도의 나라에서는 선생으로 고용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처럼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들" 즉, 이로서 그들 자신이 바리새인들보다 "구약 성경"에 더 친근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들은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받는다 해도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계명에는 다른 것에 비해 보다 적은 것이 있다. 

절대적으로 적은 것은 없지만 비교적으로 그렇다. 유대인들은 새의 보금자리에 관한 계명과 같은 것은 지극히 적은 계명으로 간주하였다(신 22:6, 7). 그렇지만 이러한 지극히 적은 계명도 매우 크고 괄목할 만한 의미와 취지를 가지고 있었다.

(2) 하나님의 계명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취소하는 것은 교훈이나 실천에 있어서 위험스러운 일이다.

 또한 그것들을 깨뜨리는 것, 즉 "그 범위를 축소"하거나 "그것들의 의무를 약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렇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십계명들 중의 어느 하나라도 취소하는 것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대담하게 치는 것이므로 그대로 지나쳐 버릴 수 없다. 그것은 율법을 범하는 이상의 어떤 것이며, 율법을 헛것으로 만드는 것이다(시 119:126).

(3) 이러한 부패가 더욱 퍼지면 퍼질수록 그들은 더욱 나쁘게 되는 것이다. 

계명을 깨뜨리는 것은 건방진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와 같이 가르치는 것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이것은 분명히 그 당시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그들 나름대로의 주석에 의해 본문을 개악(改惡)하고 외곡시켰던 자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진지한 경건과 종교의 핵심을 성경의 그릇된 해석에 의해 파멸시키려는 견해는 그것들이 주장될 때 사악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질 때는 더욱 나쁘다.

그렇게 하는 자는 "천국에서," 즉 영광의 나라에서 "작다"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그는 결코 그곳에로 오지 못할 것이며, 영원히 배척을 받을 것이다. 오히려 복음적 교회에 있어서 그러할 것이다. 그는 그 안에서 선생의 위엄을 받을 가치가 없으므로 그 일원으로도 간주될 수 없다.  이러한 거짓들을 가르치는 선지자는 그 나라에서 꼬리가 될 것이다(시 9:15). 

진리가 그 자신의 증거로 드러날 때 이와 같이 타락한 선생들은 바리새인과 같이 칭찬을 받는다 하더라도 현명하거나 선한 사람으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다. 

교역자들로 하여금 율법을 부패시키는 것보다 더 보잘 것 없고 비천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말 2:8, 11). 

죄를 경시하거나 조장하는 자들, 또한 종교상의 엄격함이나 진지한 헌신에 대해 경멸하거나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자들은 교회의 찌꺼기들이다. 

그러나 한편 그들의 생활과 교훈으로 실제적인 종교의 순수성과 엄격성을 진작시키려고 노력하는 자들이나 선한 것을 행하고 가르치는 자는 참으로 영예스러운 자이며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큰 자로 여겨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가르친 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은 그들이 한 손으로 세운 것을 다른 손으로 무너뜨리는 자들이요, 스스로 거짓을 말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종교는 망상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으로부터 말하며 그들이 설교한 대로 사는 자는 참으로 위대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도 그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삼상 :30). 그리고 이후에 그들은 "우리 아버지의 나라에서 계명성들"과 같이 빛나게 될 것이다.

Ⅱ. 그리스도께서 이 규칙에 의해 세우려고 오셨던 의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의 그것보다 더 나은 것이라야만 한다(20절). 

이것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을 종료의 최고봉에 도달한 사람으로 여겼던 자들에게는 이상한 교훈이었다. 서기관들은 가장 뛰어난 율법 선생이었고, 또한 바리새인들은 가장 유명한 율법 교사들이었다. 그들은 둘 다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며(마 23:2),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으므로 그들은 율법에 가장 일치된 자로 여겨졌으며, 사람들은 그들과 같이 선한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스스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않으면 천국에 결코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큰 놀라움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그것을 엄숙하게 단언하고 있다. 즉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이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에 대해 적대하는 원수들이었으며, 큰 핍박자들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칭찬 받을 만한 일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되어야만 한다. 

그들은 금식과 기도, 구제를 많이 하였으며, 또한 착실하게 의례상의 약속들을 준수하였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임무로 삼았으며, 그들은 사람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그들에 대해 늘 배려를 아끼지 않았으므로, 두 사람이 천국에 간다고 하면 그 중 하나는 바리새인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여기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그가 세우려 온 종교는 사악한 것을 몰아낼 뿐만 아니라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선보다 나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보다 더 많이 행해야만 하고 더 나아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율법에는 편파적"이었으며, 또한 율법의 규례적인 부분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주적"이어야만 하며 목사에게 십일조를 바치는 것으로 만족하게 여겨서는 안 되며,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들은 겉모양에만 신경을 쓰지만 우리는 "내적인" 경건을 자각해야만 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칭찬과 칭송"을 목표로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합당한 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들은 종교에서 행한 것에 대해 자만하고 그것을 "의"로 신뢰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모든 것을 행했을 때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고 말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의"만 신뢰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보다 더 낫게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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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에 대하여(마 5:21-26)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원리들, 즉 모세와 선지자들이 여전히 율법과 예언서의 지배자였으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 지배자는 아니라는 사실들을 규정하심으로서, 어떤 특별한 실례에서 율법을 해설하거나, 그러한 주해자들이 율법에 해설을 붙였던 퇴폐한 주해로부터 율법을 계속적으로 변호하고 있다. 

또한 훈계에 대하여는 보다 분명하게 하고 우리로 그 훈계를 완전히 지키게 하려고 한 설명적인 규례를 덧붙임으로써 그 훈계의 폭과 엄격성과 그 영적인 본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구절들에서 그는 제6계명의 참된 의도와 완전한 한계를 따라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Ⅰ. 여기에는 "그 명령 자체"가 규정되어 있다(12절). 

"우리는 그것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율법을 알고," 모세의 글을 그들의 회당에서 각 안식일에 읽었던 자들에게 말씀하고 있다. 

너희는 "살인치 말라"는 명령이 "그들에 의해," 또는 난외에 있는 것처럼 "옛적의 그들에게," 즉 너희의 조상들에게 말해진 것이었다고 들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율법은 새로이 갑자기 솟아난 법들이 아니라 옛 시대의 그들에게 전달된 법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것들은 고대법이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 결코 낡아빠진 것이거나 쓸모 없이 되어가는 구식의 것이 아니다. 도덕법은 자연법이나 선악에 대한 영원한 규율들과 전제들, 즉 영원한 지성(Mind)의 올바름과 일치하고 있다.

 "살인," 즉 자살을 하든지 다른 사람을 죽이든지 간에 간접적으로나 직접적으로 또는 그것에 공모함으로 생기는 모든 살인이 금지되어 있다. 하나님의 율법, 즉 생명의 하나님은 우리의 생을 보호하는 울타리이다. 그것은 노아의 규례 중 하나였다.(창 9:5, 6).

Ⅱ. 유대인 교사들이 만족했던 이 계명의 주석. 

이에 대한 그들의 주석은,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고의적인 살인자는 공의의 칼로 심판을 받기 쉬우며 우연한 살인자는 도피성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재판소는 그들의 주요 도시들의 문어귀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재판장들은 대개 23인이었으며 살인자들을 심문하고 정죄하고 처형하였다. 그러므로 살인한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이 계명에 대한 그들의 주석은 전적으로 잘못이었다. 그 이유는,

1. 그것은 제 6계명은 단지 외부적이며, 살인 행위 이상의 것을 금하지 않았고 "전쟁과 다툼이 나오는" 내적인 정욕에 대한 억제가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적인 법이 단지 죄악 된 행동만을 금지하였고 죄악 된 생각을 금지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유대인 교사들의 실로 "근본적인 오류"(prwton yeudo")였다. 

그들은 율법의 "문자에 신뢰를 두려고" 하였으며, 그것의 영적 의미를 탐구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바울은 바리새인이었지만 제10계명의 실마리를 통해서 신적 은혜가 모든 율법의 영적인 본성에 대한 지식을 그에게 주입해 주기까지는 율법의 영적 의미를 탐구하지 않았다.(롬 7:7, 14).

2. 그들의 또 다른 오류는, 이 율법이 단지 그들에게 "정치적이고 시정적(市政的)으로" 주어진 것이고 또한 그들의 법정에 필요한 규칙서로 의도된 것이며, 그 이상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마치 그들만이 율법의 백성인 것처럼 행세했으며, 율법의 지혜도 그들과 더불어 사라져야 하는 것처럼 오해하였다.

Ⅲ. 이 계명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석. 

이 계명에 대한 그의 주석에 의하면 우리는 이후에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그 계명은 범위가 매우 넓으며," 육신의 뜻이나 사람의 뜻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다.

1.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성급한 분노는 마음속으로 살인하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22절).

 "누구든지 이유 없이 형제에게 노하는 자"는 제 6계명을 깨뜨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형제"라고 언급된 사람은 그것이 비록 우리보다 비천한 사람들, 예를 들면 어린아이나 종들이라 할지라도 이에 포함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한 혈통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분노는 자연적인 격정이다. 물론 분노가 정당하고 칭찬할 만한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유 없이 분노할 때는 "죄악"이다. 

eijkh'("이유 없이" - 역주: 어떤 사본에는 없으며, 우리말 개역성경에는 이 말이 번역되지 않음)라는 단어는 sine causa, sine effectu et sine modo(이유 없이, 어떤 좋은 효력 없이, 경감 없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분노가 죄악일 때는,

(1) 어떤 정당한 도전 없이 성을 내는 경우인데, 아무런 이유 없이 정당한 이유 없이, 또는 크고 어울리는 이유 없이 성을 내는 것을 말한다. 

어쩔 도리가 없는 것, 쉽사리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거나 사소한 것인 경우, 쉽사리 범죄 할 수 있거나 자신에게 성을 내어서는 안 되는 경우에 어린아이나 종에 대해 성을 내는 것이 이에 속한다. 

또한 우리가 근거 없는 추측에 근거하여 성을 내거나 말할 가치가 없는 사소한 모욕에 대해 분노하는 경우를 말한다.

(2) 어떠한 좋은 목적 없이 단지 우리의 권위를 나타내거나 야수적인 격정을 만족시키기 위해, 또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원한을 알도록 하거나 복수를 위해 감정을 폭발시키고 분노하는 것은 헛된 일이며 상하게 하는 일이다. 

한편 우리가 분노할 때는 언제나 범법자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도록 깨우치거나 다시는 그러한 일을 하지 못하도록 저지시키는 경우에 한해야 한다. 즉 우리 자신을 정결케 하거나(고후 7:11) 다른 사람들을 경고하는 경우이다.

(3) 적당한 범위 이상으로 분노할 때, 우리가 격분하고 난폭하고 무분별하게 화를 낼 때, 우리가 불쾌하게 여기는 자들을 해하려고 성을 낼 때는 죄악이 된다. 

이것은 제 6계명을 범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분노를 내는 자는 그가 할 수만 있다면 살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살인을 향해 한 발자국 발을 들여 놓았기 때문이다. 가인이 그의 동생을 죽인 것은 분노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살의가 비롯되는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살인자이다.(마 15:19).

2. 그는 그들에게, 형제에게 무례한 말을 하는 것은 즉 형제를 "라가"나 "미련한 자"라고 부르는 것은 혀로 살인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것이 온유함이나 좋은 목적을 위해 행해질 때는, 즉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허영과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려고 하는 것은 죄악이 아니다. 

야고보는 "오 어리석은 사람아," 바울은 "너 어리석은 자여," 그리스도는 "오 어리석고 마음이 더딘 사람아"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책망과 무례한 말이 분노나 악의에서 비롯될 때는 지옥에서 켜진 지옥불의 연기이며 동일한 특성 아래 떨어지는 것이다.

(1) "라가"는 조롱하는 말이며, 교만에서 비롯된다. 즉 "너 머리가 텅빈 친구여"이다. 

이 말은 솔로몬이 "망령된 자"(잠 21:24)라고 부르는 자에 해당되며, 우리의 형제를 짓밟으며, 그를 개와 같이 멸시하는 것이며,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요 7:49).

(2) "미련한 자"라는 것은 악의적인 말이며, 미움에서 비롯된다. 

그를 비천하고 명예스럽지 못한 자로 여길 뿐만 아니라, 사악하고 사랑 받지 못할 자로 여기는 것이다. "너 사악한 사람아, 무뢰한아 !" 

전자는 분별없이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성서 언어에서) 은혜 없이 말하는 것이다. 비난이 그의 영적인 상태에 영향을 주면 줄수록 그것은 더욱 악화되는 것이다. 

전자는 우리의 형제에 대한 오만한 모욕이며, 이것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그를 악의적으로 비난하며 정죄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 6 계명을 범하는 일이다. 

악의적인 중상과 비난은 " 혀 아래에 있는 독"으로서 은밀하고 서서히 죽인다. "독한 말"은 갑자기 상처를 내는 "화살"과 같으며 (시 64:3). 뼈 속에 있는 검과 같다. 

생명보다 더 좋은 우리 이웃의 이름은 이로 말미암아 손상을 받고 말살되는 것이다. 이웃에게 악의를 품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었다면 그의 생명을 해치려고 한 것과 같다.

3. 그는 그들에게, 그들이 이 죄를 아무리 가볍게 여겨왔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과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게 될 것이다. 

그를 "라가"라고 부르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될 것이다." 즉 이스라엘인을 욕설한 것에 대해 산헤드린에 의해 형벌을 받게될 것이다. "미련한 욕설한 것에 대해 산헤드린에 의해 형벌을 받게될 것이다.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 즉 불경스러운 놈, 지옥의 자식이라고 말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박학자인 휘트비(Whitby)박사도 이와 같이 생각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유대인들의 여러 법정에서 사용된 형벌에 대한 암시에서 그리스도는 성급한 분노의 죄는 그 진척의 정도에 따라 사람을 낮고 높은 형벌에 처하게 하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유대인들은 3가지의 사형법을 말하고 있었는데 어느 것이나 위의 방법보다 더 악한 것이었다. ① 교수형은 재판에 의해 부과되었다. ② 돌로 치는 형은 산헤드린 공의회에 의해, ③ 화형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사용되었고,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에서"집행되었다. 

그러므로 성급한 분노와 비난할 만한 말은 저주스러운 죄임을 말해 준다. 그러나 어떤 것은 다른 것들 보다 더 죄스럽다. 따라서 더 큰 정죄와 그들을 위해 예비 된 쓰라린 형벌이 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가장 두려운 형벌이 무엇인가를 보여줌으로써 가장 사악한 죄가 어느 것인지를 보여 주고 있다.

Ⅳ. 이상의 모든 사실에 미루어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추론되고 있다 .

즉 우리는 조심스럽게 우리의 모든 형제들과 더불어 기독자의 사랑과 화평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것이며, 만일 이것을 범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 일의 본질에 따라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고 그의 용서를 빌며 배상을 하고 말이나 행위로 잘못 행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한다.

우리는 이 일을 두 가지 이유에서 급히 행해야 한다.

1. 왜냐하면 이 일이 행해지지 않으면 거룩한 의식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전적으로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23, 24절). 

여기서 가정된 경우는, "너의 형제가 너를 대적하여 실제로나 그의 판단에 네가 그를 손상시키거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네가 피해를 입은 당사자라면 제물 드리는 것을 연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내가 조금이라도 남을 거스렸다면 속히 그 일을 해야 한다. 그를 용서하고(막 11:25), 그 손상을 용서하는 것 이외에는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그러나 만일 다툼이 네 편에서 시작되었다면 또한 잘못이 먼저나 후에나 너에게 있었다면, 그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너"와 싸웠다면 "네 예물을 제단에 드리기 전에," 다시 말하면 기도와 찬양, 말씀을 청종하는 것, 예식 등에서 엄숙히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에 "가서 형제와 화목해야 한다."

(1) 우리가 어떤 종교적인 실행에 착수하고 있을 때 진지한 반성과 자기 성찰의 기회를 가지는 것이 좋다. 

"우리가 제단에 예물을 드릴 때"는 기억되어야 할 많은 일들이 있다. 우리가 이전에 "형제를 거스린 일이 있었다면" 우리는 진지하게 되고 싶어지며 따라서 자신을 문책하게 되기 때문이다.

(2) 종교적인 행위는 우리가 분노 가운데 이를 행하였다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시기와 악의, 무정은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죄악이므로 그들이 탁월하다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그 어느 것도 그를 기쁘시게 할 수는 없다.(딤전 2:8), 분노 중에 드리는 기도는 쓰디쓴 것이다(사 1:15; 58:4).

(3) 사랑과 자비는 "모든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보다 더 나으므로" 하나님은 예물이 드려지기 전에 죄를 지은 형제와 화목하실 것이다. 

우리가 범죄 아래 있고 다투는 데 분주하면, 하나님은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오히려 그대로 두기를 좋아하시는 것이다.

(4) 비록 우리가 형제와 계속적인 다툼에 의해 하나님과 교제를 가지는 데 합당치 않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의무를 생략하거나 무시하는 데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예물을 제단 앞에 두라. 그렇지 않으면 간 후에 다시 돌아오지 않으려는 시험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그들이 교회나 집회에 오지 못하는 이유로 삼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이웃과 불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구의 허물인가?

어떤 죄가 다른 죄를 결코 변명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범죄를 이중으로 만들 것이다. 

자비의 결핍은 경건의 결핍을 정당화시킬 수 없다. 어려움은 쉽게 잊혀질 수 있다(극복될 수 있다).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 자들을 우리는 용서해야 한다. 우리는 사화를 해야 하며,. 최소한 다정히 대해야 하며, 우정을 새롭게 하려고 원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록 화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그리고 오라. 와서 네 예물을 드리라." 그러면 그 예물이 받아들여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낮 동안 태양으로 하여금 우리의 분노 위로 지도록 하지 말라"(역주:해가 질 때까지 노를 품지 말라는 뜻). 왜냐하면 우리가 자기 전에 기도하러 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안식일에는 우리의 분노 위로 태양이 떠오르게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날은 기도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2. 왜냐하면 이 일이 행해지지 않으면 우리는 더 어려운 위험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25, 26절). 

우리가 화합을 위해 서둘러 행하지 않는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1) 현세적인 이유에서, 

만일 우리가 형제의 몸이나 물건, 명성에 있어서 그를 손상시켰고 이로 말미암아 그 형제가 이러한 손해들을 보상시키기 위해 어떤 행동을 유발시킨다고 한다면 겸손한 순종과 올바르고 화평스러운 배상에 의해 그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지혜요 우리 가족에 대한 의무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법으로 그것을 도로 찾을 것이요 종내 우리를 감옥에로 집어넣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타협하고 사화하는 것이 계속 버티는 것보다 낫다. 왜냐하면 법과 다투는 것은 무익하며, 그것에 의해 짓구겨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재산과 직위를 잃는 것은 맨 처음에 약간 숙임으로써 화평하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을, 끝까지 자기의 허물을 고집하였기 때문이다. 보증할 경우에 솔로몬이 충고한 것을 보면, "너는 곧 가서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여 스스로 구원하라"(잠 6:1-5).

타협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율법은 희생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지만 우리의 이익을 방해하는 자들에게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공의를 행해야만 한다.

 "타협하라. 그리고 너의 원수와 급히 사과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는 네 자신의 완고함으로 말미암아 격노하게 되며, 끝까지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려 할 것이며, 그가 맨 처음에 완화(감소)시키려 했던 계획을 취소할 것이기 때문이다." 

감옥은 그들 자신의 교만이나 방탕, 그들 자신의 고집이나 어리석음에 의해 투옥된 자들에게 불편한 장소이다.

(2) 영적인 이유에서, 

"가라, 그리고 네 형제와 화목하라. 그에게 공평 정대하게 대하라. 그와 친숙하라. 왜냐하면 다툼이 계속되는 경우에는, 네 예물을 제단에 가져오는 것이 적합치 않고 주님의 상으로 나아오는 것이 합당치 않은 것처럼, 죽기에도 적합지 않다.  만일 네가 죄 가운데 계속 생활한다면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갑자기 채어감을 당할 위험성이 있다. 그의 심판을 너는 피하거나 제외시킬 수 없다. 만일 그 불법이 네 책임이 된다면 영원히 틀리게(망하게) 되는 것이다." 

지옥은 악의와 무자비 가운데 살다 죽은자들과 "당을 짓는 자"(롬 2:8)들을 위한 감옥이다. 그 감옥에서 구출되거나 도피할 수는 영원히 없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는 큰 임무에 적용될 수 있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다음과 같다.

① 위대하신 하나님은 모든 죄인들에게 대적자(ajntivdiko" - 율법 대적자)이다. 

그는 그들과 분쟁하셨고 거스리는 행동을 하셨다.

② 우리가 "화평을 이루도록" 그와 "타협하는 것," 즉 그와 친분을 맺는 것은 우리가 할 중대한 일이다(욥 22:21; 고후 5:20).

③ "우리가 길에 있을 때 급히" 이 일을 하는 것은 지혜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즉 "우리가 길에 있을 때"이 일을 행해야 한다. 죽은 후에는 너무 늦어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행하기 전에는 네 눈을 감고 졸지 말아야 한다.

④ 하나님과 적대의 상태에서 계속 머무는 자는 그의 공의의 구류와 그의 분노의 무서운 소송에 계속적으로 처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심판자이며,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은 그에게 넘겨질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심판은 아들에게 위탁되기" 때문이다. 구세주를 거절한 자는 심판자에게서 피할 수 없다(계 6:16, 17). 

어린양이 사자가 될 때 이와 같이 주 예수께 인계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천사들은 관리자이며,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죄인들을 넘겨 줄 것이다.(마 13:41, 42). 

마귀들도 그와 같은 일을 하며, 모든 불신자에게 대한 집행자로서 " 죽음의 권세"를 가지고 있다(히 2:14). 지옥은 하나님과 적대 행위를 계속하는 자가 던짐을 받게 될 감옥이다(벧후 2:4).

⑤ 저주받은 죄인들은 영원히 거기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들은 호리라도 남김 없이 다 갚기 전에는 떠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영원토록 그대로 있지도 않을 것이다. 신적 공의는 결코 만족된 적이 없지만 앞으로 영원히 만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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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음, 이혼에 대하여(마 5:27-32)

여기에는 율법을 제정한 동일한 손(hand)에 의해 주어진 제7계명에 대한 해석이 있다. 따라서 이것은 가장 적절한 해석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전자에 뒤따르는 부정(不貞)에 대한 율법이다. "전자"가 죄악된 열정에 대한 금지 사항이라면, "후자"는 죄악된 욕망에 대한 금지 사항이다. 둘 다 언제나 이성과 양심의 지배 아래에 있어야만 하며, 만일 이에 빠질 때는 치명적이 된다.

Ⅰ. 여기에 규정된 계명은 "간음치 말라"는 것이다(17절). 

여기에는 불결한 모든 행동과 그 욕망에 대한 금지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계명에 대해 그들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기를, 이것은 간음의 행동 이상으로 확대시킬 수 없다(간음을 직접 행한 그 행동만을 간음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또한 "불법이 마음에만 관계되고" 그 이상은 아니라면 하나님은 그것을 유의하시지 않으시며 중시하시지도 않는다(시 66:18)고 추측하였으며, 따라서 그들은 "간음자가 아니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눅 18:11).

Ⅱ. 여기에서는 3가지 일들에서 이 계명의 엄격성이 설명되어 있다. 

이것은 언제나 장로들의 유전에 의해 지배되었거나 그들이 가르쳤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명령(신탁)으로 여겼던 자들에게는 새롭고도 낯선 것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1. 여기에서는 "마음의 간음," 즉 간음의 행동으로는 진행되지 않았던 음란한 생각이나 성벽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아마 이러한 것들이 영혼에게 끼치는 불결(이것은 여기에서 매우 분명히 강조되고 있다)은 제7계명에 내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물로 옷을 빨거나 옷을 씻었던" 율법 하의 많은 결례(역주:청결하게 하는 의식)에 내포되고 의도되어 있을 것이다. 

"여자(여기의 여자는 다른 남자의 아내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모든 여자가 여기에 포함됨)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28절). 이 계명은 간음의 행동을 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 그들에 대한 모든 욕망, 금지된 대상을 열망하는 모든 것을 금하고 있다.

 "욕심"(약 1:15)은 죄의 시초이며, 죄를 향한 잘못된 발걸음이다. 사소한 욕망이라고 할지라도 이것이 장성하면 죄의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욕심을 지닌 마음이 행동하는 것이 곧 죄이다. 죄를 짓는 것은 형편이 좋은 기회가 그 결정적인 촉매제가 된다. 

"정신이 타락된다"(Adultera mens est─Ovid). 정욕은 좌초(파선)되거나 치우친 양심이다. 치우친 양심이란 죄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음이며, 좌초된 양심은 그것이 말하는 것에 설득되지 않음이다.

(2) 그것들을 향한 모든 접근들을 금하고 있다. 

즉 금지된 열매에 대한 안목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것을 금하고 있다. 내가 색정을 일으킬 수 있도록 그 목적으로 바라볼 뿐만 아니라 내가 색정을 일으킬 때까지 바라보거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바라보는 것을 금하고 있다. 

눈은 이 종류의 많은 사악의 입구와 출구이다. 요셉의 여주인(창 39:7), 삼손(삿 16:1), 다윗(삼하 11:2)이 증거 한다.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벧후 2:14)라는 말씀이 있다.

우리는 눈꺼풀을 왜 가지고 있는가? 부패한 것에 눈을 돌리지 않거나 그 더러운 인상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닌가! 이것은 역시 정욕을 일으키는 그 밖의 감각들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과실을 유혹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금지되었다면 하물며 불결한 대화나 음탕한 희롱, 이 지옥불의 연료와 풀무가 어찌 금지되지 않으랴! 

이 규례들은 청결한 마음에 울타리를 치는 것이다(8절). 또한 만일 보는 것이 욕망이 된다면 남에게 보이려고 하거나 색욕을 일으키게 할 목적으로 몸을 치장하고 장식하며 남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것은 마치 이세벨과 같은데, 그녀는 "눈은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으로 내다보았다." 왕하 9:30)도 역시 범죄이다. 

범죄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범죄를 하도록 유혹하는 것은 마귀이다.

2. 이렇게 보는 것이나 희롱하는 것은 영혼에 대해 매우 위험하고 파괴적이므로 범죄하여 죄 가운데서 영원히 멸망하는 것보다 이러한 범죄를 저지르게 하는 눈과 손을 잃는 것이 더 낫다. 

이 교훈에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다(29, 30절). 

타락한 본성은 이 말씀에 의해 지배받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마음의 간음을 금지하는 사항에 대해 곧 반대를 제기할 것이다. 

즉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지킬 수 있겠느냐? 혈과 육은 쾌감을 가지고 아름다운 여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런 대상에 대한 정욕과 희롱하고픈 마음을 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이러한 구실은 이성으로는 제어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감찰하시는)  주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물리쳐야 하며, 바로 이런 식으로 여기서 논박되고 있는 것이다.

(1) 여기에는 육적인 정욕을 금지시키기 위해 가혹한 시행이 서술되어 있다. 

금지된 대상을 음탕한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또는 "실족하게 만든다면," 음란한 희롱에 의해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또는 "실족하게 만든다면" 위에서 구실을 붙인 것처럼 눈과 손을 지배하는 것이 참으로 불가능하다면 또한 이러한 사악한 행위에 매우 익숙해졌으므로 그것들을 억제할 수 없다면, 만일 그것들을 억제시킬 다른 방법이 없다면(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의 은혜를 통하여 억제시키는 방법이 있다), 그것들로 말미암아 영혼을 파멸시키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보다 차라리 보다 영예스럽고 유용한 "오른 눈"과 "오른 손"이라도 할지라도 "그 눈을 빼고," "그 손을 짜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또한 만일 이것도 복종해야 한다면─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우리는 "몸을 제어하고, 복종시키기" 위해 그만큼 더 단호한 결심을 해야 될 것이다.

"오른 손을 찍어버리거나 오른 눈을 빼어버리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금욕이나 자기 부정의 생활을 하는 것, 

우리 자신의 마음을 끊임없이 살피거나 정욕이나 타락의 마음이 처음 솟아오를 때 이를 단호히 억누르는 것, 

죄의 기회를 피하는 것, 

그것의 시초에 억제하는 것, 

비록 이전에는 매우 즐거웠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덫이 될 자들의 사귐을 정중히 거절하는 것, 

우리가 그것들이 우리에게 대한 시험임을 알 때 해치는 길에서 벗어나, 정당한 방법을 사용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것, 

하나님께 그의 은혜를 구하고 매일과 같이 그 은혜에 의존하는 것, 

우리가 "육신의 정욕"을 채우지 않도록 "성령 안에서 걷는 것," 

----이러한 것들이 "오른 손을 찍어 버리거나 오른 눈을 빼어 내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마도 이것들은 혈과 육에는 매우 거슬리는 것일 것이다. 이것은 또 옛 사람의 파멸을 말한다.

(2) 이런 말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논법은 아주 놀라운 것이다(29절). 

또한 그것은 동일한 말로 반복되고 있다(30절). 왜냐하면 우리는 이러한 귀에 거슬리는 일들은 듣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사 30:10). 

비록 그것이 가장 귀중한 눈이나 손이든지 "네 지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① 복음의 사역자가 지옥과 저주에 대해 전파하는 것은 부적당하다. 

아니, 그는 마땅히 그것을 "전파해야"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자신이 그것을 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장차 임박할 진노"에 대해 경고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뢰에 신실치 못한 것이 된다.

② "두려워함으로 구원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어떤 죄들이 있다. 

특별히 "육적인 정욕"이 그러한 것인데, 이는 "천성이 야수적인 짐승들"을 저지할 수는 없지만 놀라게 함으로 저지할 수 있는 것처럼 또한 금지된 나무(선악과)에서 자신을 지킬 수는 없지만 "화염검"(그룹)으로 지킬 수 있는 것과 같다.

③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정하거나" 또는 "육적인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려는 시험을 받을 때 우리는 "유황불이 타는 불 못"에 영원히 있게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를 마땅히 생각해야 한다. 

그러한 자들은 지옥이 어떤 곳인가를 알거나 믿지 않는 자들이며,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비열하고 야수적인 욕망의 만족을 부인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불 가운데서 영원히 멸망되기를 자초하려고 할 것이다.

④ 지옥에는 육체에 대한 고통이 있을 것이다. "온 몸이 지옥에 던지움을 받게 될 것이요," 온몸의 각 부분에 고통이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에 대한 어떤 돌보심(치료)을 가진다면 그것은 "불결한 정욕에서가 아닌, 성화와 영예에서"일 것이다.

⑤ 혈과 육에 대해 가장 불쾌한 그러한 의무들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유익한 것이다." 우리 주님은 그가 우리의 이익이 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 않으신다.

3. 남자가 싫어하기 때문에 자기의 아내와 이혼하거나, 간음이 아닌 어떤 이유 때문에 이혼하는 것(유대인 가운데서는 묵인되고 실행되었다)은 간음에 문호를 개방하는 것 같이 제7계명을 범하는 것이다(31, 32절).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살펴보자.

(1) 이 사실은 이제 이혼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또 일렀으되"[그는 앞에서와 같이 "옛 사람에게 말한바"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러한 것들처럼 규례는 아니었고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이해하기를 원했던 것으로서(마 19:7) 단지 허락에 불과하였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다." 

즉 그가 격노할 때에 나온 말로 이혼을 한다고 생각지 말라. 증인의 입회하에 법적인 증빙에 의해 심사숙고하여 그것을 하도록 하라." 만일 그가 부부의 결속을 취소한다면 그것을 엄숙히 하도록 하라." 

이와 같이 율법은 성급하고 경솔한 이혼을 금하고 있다. 아마 맨 처음 기록문서가 유대인 가운데서 그렇게 일반적이 아니었을 때 이혼은 아주 드물게 행해진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것은 매우 일반화되어 버렸고, 이혼에 대한 정당한 사유가 있을 때에는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이러한 지시가 어떤 이유에서는 그것을 허락하는 것으로 해석하게 된 것이다(마 19:3).

(2) 이 사실은 우리 주님에 의해 어떻게 수정되고 고쳐졌는가? 

그는 결혼에 대한 규례를 그 원래적인 제정에까지 소급시키고 있다. "그들 둘은 한 몸이 될지니라." 즉 쉽게 떨어지지 말지니라. 

그러므로 이혼은 결혼 계약을 깨뜨린 간음의 경우 외에는 허용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다른 이유 때문에 자기 아내를 내어버리는 자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한 그녀가 이와 같이 이혼되었을 때 그녀와 결혼하게 될 자에게도 간음케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범죄 하도록 시험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거나 그들을 그 안에 남겨 두는 자들, 또는 그들을 그것에 접하게 하는 자는 그들로 하여금 범죄케 할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이것은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는" 유일한 길이다(시 5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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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세에 대하여(마 5:33-37)

여기에는 제3계명에 대한 주석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올바르게 이해해야만 되는 계명이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음으로써" 이 계명을 깨뜨리는 자가 자신을 결백하다고 주장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죄 없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 계명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Ⅰ. 거짓 맹세나 위증, 서약 위반 등이 금지되고 있음은 널리 인정되는 사실이다(33절). 이것은 옛 사람에게 말해진 것이며, 제3계명의 참된 의도와 의미이기도 하다.

 "너희는 하나님의 이름(우리가 맹세로 하는 것처럼)을 망령되거나 거짓으로 사용하거나 취하지 말라." 그는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한다"(시 24:4)). 

거짓 맹세는 하나님께 대한 불경건과 사람에 대한 불법의 혼란으로서,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신적 진노를 매우 받기 쉽도록 하는 것으로 직각(直覺)으로 (by the lignt of nature) 정죄 된 죄악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러한 죄에 대해 필연적으로 임하기 때문에 맹세의 형태는 일반적으로 증오나 저주로 돌려졌다. 

맹세는 마치 "하나님은 나에게 이러 이러하게 행하소서"라고 하는 것 같다. 우리가 "하나님이여 나를 이렇게 도우소서"하는 것과 같다. 

만일 내가 거짓으로 맹세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결코 도움을 얻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 따라서 민족들의 동의에 의해서,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저주를 가져온 셈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자기들의 거짓에 대한 증인으로 엄숙히 내세운다면, 필경 하나님은 그때 그들을 저주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밖의 다른 구절, 즉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민 30:2)가 첨가되어 있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의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하나님이 당사자가 되는 약속, 즉 하나님과 맺은 맹세를 의미한다. 

이것은 어김없이 보상되어야 한다(전 5:4, 5).

2. 우리의 형제와 맺은 약속으로서 하나님이 증인이 되며 우리의 진지성에 호소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를 목표로, 그를 인하여 "주께 지켜야"한다. 왜냐하면 맹세로 약속한 확증에 의해 우리는 주님께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확증한 약속을 깨뜨린다면 우리는 사람에게만 "거짓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거짓말 한 것"이 된다.

Ⅱ. 여기에 첨가된 것은, 이 계명이 거짓 맹세를 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급하고 불필요한 모든 맹세를 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34절, 약 5:12 절과 비교하라). 모든 맹세가 다 죄악은 아니다. 만일 우리가 올바르게 맹세한다면 그것은 종교적 예배의 일부분이 되며, 그 맹세로서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 수 있는 것"이다(신 6:13; 10:20; 사 45:23; 렘 4:2 을 보라). 

우리는 바울이 필요한 경우에 이와 같은 엄숙함으로 그가 말했던 것을 확증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고후 1:23). 우리는 의심스럽거나 불확실한 일의 진실성을 서약(맹세)함으로 확실한 일의 진실성을 다짐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거짓 맹세를 한다면 더 큰 지식이나 높은 법정에 탄원하며, 의로우신 재판장의 보복을 비는 것이다.

이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의향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아야"한다. 

그러나 우리가 정당하게 맹세를 해야 할 때, 우리의 형제에 대해 공의를 베풀거나 자비를 행할 때, 국가와 관계될 때 행하는 맹세는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히 6:16)이 된다. 

우리는 맹세함을 당할 수는 있지만 맹세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분쟁을 조정 받을 수도 있고 또한 분쟁을 해결할 의무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 자신의 세상적인 이익을 위해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는 안 된다.

2. 우리는 일상 대화에서 경솔하고 불손하게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거룩하므로 항상 진지해야 하는 하늘의 영광스러운 위엄에 어리석은 호소를 하는 것은 매우 큰 죄악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거룩한 일들 중의 하나에 대한 큰 모독이다. 

그것은 구실이나 변명이 없는 죄이며,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적의가 지배하는 사악한 마음의 표식이다. "주의 원수는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고 있나이다."

3.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보다 더 특별히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약속의 맹세를 특별한 방법으로 피해야만 한다. 

확증적인 맹세의 영향은 우리가 신실하게 그 진리와 그 모든 진리를 발견했을 때 즉시 끝난다. 그러나 약속의 맹세는 오랫동안 묶이며, 시험의 권세와 같이 기습에 의해 깨어지기 쉬우므로 큰 필요성 이외에는 사용되지 않는다. 

자주 맹세하는 것은 기독자의 위신과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이다. 기독자는 모름지기 자신들이 행하는 침착한 말이 그들의 엄숙한 맹세와 같이 성스러운 것이 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들의 신용이 널리 인정되어야만 한다.

4. 우리는 어떠한 피조물로도 맹세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정중함(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때문에 이것으로 맹세하지 않고 "하늘이나 땅"등으로 맹세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스도는 이것을 여기에서 금하고 있으며(34절), 우리가 맹세할 수 있는 대상은 도무지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 대상들은 만물들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여하간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로 맹세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으로 맹세하는 것이므로 위험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말뚝에 놓여진 것은 피조물의 진리이다. 그것은 증거의 수단이 될 수는 없지만 "최고의 진리"(summum veturn)이신 하나님께는 그와 같이 간주된다. 예를 든다면 다음과 같다.

(1) "하늘로도 말라."

 "하늘이 있다는 사실이 확실한 것처럼 이것은 진리이다." "왜냐하면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곳에 거주하시며 보좌 위에 앉은 왕과 같이 특별한 방법으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이것은 윗 세상의 분리할 수 없는 위엄이므로 너는 "하늘로 맹세할 수 없다." 만일 하늘로 맹세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자신으로 맹세하는 것이 된다.

(2)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그는 이 아랫 세상의 활동들을 지배하신다. 그가 하늘을 다스리는 것처럼 땅을 지배하신다. 비록 그의 발 아래 있지만 땅은 그의 눈과 보호 아래 있으며, 그에게 속해있다(시 24:1). "땅은 여호와의 것이다." 그러므로 땅으로 맹세하는 것은 그 소유자로 맹세하는 것이다.

(3)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이 존경한 나머지, 맹세하는데 그곳보다 더 성스러운 곳을 들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예루살렘은 단지 땅의 일부분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 이외에 그와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는 큰 임금의 성(시 48:2), 곧 하나님의 성"(시 46:4)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그 성과 관계되어 있으며, 예루살렘으로 맹세할 때마다 하나님과 연관된다.

(4) "네 머리로도 말라." 

그것이 비록 네 가까이 있거나, 너의 필수적인 부분이지만 그것은 네 것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만드셨고 그것의 모든 원동력과 힘을 조성하셨기 때문이다. 

한편 네 자신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너는 "네 머리로 맹세"할 수 없다. 만일 네가 머리로 맹세한다면 그것은 "네 머리의 생명," 또한 그것을 "들어올리는 자"와 맹세하는 것이 된다(시 3:3).

5. 그러므로 모든 교제에 있어서 우리는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37절)로 대답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일반적인 대화에서 우리가 확증할 때는 "옳다," 그렇다라고만 말해야 한다. 확증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두 번 중복해서 "옳다, 옳다," 참으로 그렇다라고만 말해야 한다. 

"진실로 진실로"는 우리 주님의 "옳다, 옳다"였다.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가 부정할 때는 "아니라"고만 말하자. 부정을 반복해야만 할 때는 "아니라, 아니라"고 말하자. 우리의 신임이 알려진다면 그것이 신용을 얻기에 충분할 것이다. 또한 만일 그것이 의문시될 때 맹세나 저주함으로 우리가 말한 것을 강화하는 것은 이를 더욱 의심케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모독적인 맹세를 취소할 수 있는 자는 거짓말에 부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현저하다. 비록 그것이 맹세의 불법 행위에 상당하지는 않지만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쫓아 나느니라." 

그것은 "악한 자(마귀)에게서 나온다" (ejk tou' Diabolou', 고대 사본에는 이렇게 되어있다). 그것은 사람의 타락한 성품, 격정과 격렬, 마음속에 세력을 떨치는 허무와 성물(聖物)에 대한 멸시에서 비롯된다. 또한 그것은 사람들 안에 있는 사악함에서 비롯된다. "모든 사람들은 거짓말장이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러한 주장을 내걸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를 불신하며 그들이 없이는 신뢰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기독자는 그들 종교의 신용을 위하여 악 그 자체를 피해야 할뿐만 아니라 "악으로 쫓아나는 것"이나 그 "모양을 가지고 있는" 것을 피해야 한다. 그것은 사악한 원인에서 비롯되는 사악한 일로 의심될 수 있을 것이다. 맹세란 의술이요, 의술이란 질병을 전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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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저항에 대하여(마 5:38-42)

기 구절들에는 복수법이 해설되어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폐지되고 있다. 이에 대해 살펴보면,

Ⅰ. 남을 손상시켰을 때 "구약은 어떻게 하라고 했는가?" 

여기에서는 단지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로 되어있다. 이것은 이전에 이혼에 대한 명령에서 "또 일렀으되"나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라는 구절과 다르다. 

이 계명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계명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필요에 따라 이를 정당한 것으로 주장하였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동일한 구절이 출애굽기 21장 24절, 레위기 24장 20절, 신명기 19장 21절에 있다. 이 모든 구절들에서 보면 그런 일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고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롬 13:4)인 재판관들이 할 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한 손으로 남에게 손해를 주는 것에 두려움을 주고 또 다른 손으로 그들에게 해독을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 손발을 끊어버리는 경우에 가하는 형벌에 관하여 유대의 재판장들에게 지시한 것이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적절한 것보다 더 큰 형벌에 대해 주장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것은 "눈에는 생명, 이에는 손발"(역주:눈은 생명으로, 이는 손발)이 아니며 그 비율을 말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벌금은 돈으로 보상될 수 있다고 암시되어 있다(민 35:31). 왜냐하면 "살인죄를 범한 고살자의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손발을 짜를 자들"을 위해 금전상의 이해가 허용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동정심이 없었던 냉정한 어떤 유대인 교사들은 이러한 보복은 사사로이 그들 자신에 의해서도 시행되어져야 한다는 것과 그들을 용서하거나 배상을 받아들이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로마 통치자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어 그들의 사법적인 법이 밑바닥에 떨어진 지금까지도 그들은 여전히 거칠거나 가혹하게 보였던 어떤 것에는 매우 열심이었다.

지금까지도 땅의 선하고 건전한 법을 따라 악행자의 두려움과 눌린 자의 변호를 위해 공의의 검을 사용하는 것은 통치자에게 대한 명령으로서 유효하게 사용되고 있다.

Ⅱ. 손상을 입혔을 경우에 "신약은 이에 대해 어떻게 교훈하고 있는가?" 

그 자신이 할 일은 불평이나 투덜거리지 말고 자기에게 가해진 "손상을 용서하는" 것이며, 공적인 선에는 반드시 필요한 그것에 대한 형벌을 더 이상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이 계율은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그의 멍에의 유순함과 일치된다.

1. 우리는 복수심에 불타서는 안 된다(39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즉 너희에게 손상을 입히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여기에서는 우리에게 악한 공격를 해오는 것에 대해 반항하는 것을 일반적이고도 명백하게 금지시키고 있다.

이것은 "권력을 잡고 있는 자들에게 거스리는 것"(롬 13:2)을 금지시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보호의 법이나 우리가 가족에 대한 배려를 폐지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우리의 안전에 꼭 필요하다면 "악을 피하거나" 그것에 "대항할 수"있다. 그러나 우리는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되며, 원한을 품거나 보복하거나 우리를 불친절하게 대하는 자들에게 앙갚음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들을 용서함으로써 초연해야 한다(잠 20:22; 24:29; 25:21, 22; 롬 12:17).

복수법은 사랑의 법과 일치되어야 한다. 만일 누가 우리를 상하게 한다면 이를 갚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의 진노하심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때로는 대리자의 손을 통해 화평을 도모하는 일도 있다. 우리가 형제와 더불어 싸울 때 그가 먼저 시작했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의 잘못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다툼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가 두 번째 타력을 가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손상을 입었을 때 그것은 우리가 그에게 타격을 가하는 정당한 이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용서함으로 우리들 자신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임을 보여 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3가지 일들에 대해 상술함으로써, 기독자가 그들을 괴롭히고 있는 자들과 다투지 말고,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굴복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1) "빰을 치는 것"은 내 몸에 손상을 입히는 행위이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다시 말하면 칠 뿐만 아니라 모욕과 냉대를 하거든(고후 11:20), 만일 사람이 분노와 조소로 너를 학대한다면 "왼편도 돌려 대라." 즉 "그 상해에 복수하는 대신에 다른 편을 준비하라. 그리고 그것을 끝까지 참아라. 

그가 하는 것처럼 지지 않고 되쏘아 붙이지 말라. 그를 대적하거나 거스리지 말라. 만일 공중의 화평을 위해 그가 행동을 삼가도록 서약시키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그것을 통치자(치안 판사)에게 맡겨라. 

그러나 네 편에서는 그것을 지나가 버리거나 더 이상 유의하지 않는 것이 대개 가장 현명한 방법이 될 것이다. 뼈가 뿌려지거나 큰 손상을 입지 않았다면 그것을 용서하고 잊어 버려라. 

만일 교만한 바보가 너를 나쁘게 생각하거나 비웃는다면 모든 현명한 사람들은 그것을 인하여 너를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로 높게 생각하며 존경을 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심판자였으나 그의 뺨을 쳤던 자를 때리지 않았다"(미 5:1).

다른 사람이 나쁜 생각을 가지고 언젠가 우리에게 같은 모욕을 주었다면, 사실상 그것이 우리가 "다른 뺨을 내 돌리는 것"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으로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지 말고, 우리가 할 일 계속 하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과 그의 섭리에 맡기도록 하자.

하나의 피해를 복수하면 또 하나의 피해를 입게 될 경우라도, 그것을 용서하면 다른 또 하나의 피해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저항하면 더욱 격노할 자들도 혹 그들에게 순복해 주면 스스로 굴복하고 마는 자도 있다.(잠 25:22). 

어쨌든 우리에 대한 보상은 그리스도의 손에 달려 있으니, 그는 우리가 이렇게 꾸준히 견디는 수치를 영원한 영광으로 갚아 주신 것이다. 비록 그것이 직접적으로 타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양심 때문에 또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조용히 참아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때문일 것이다.

(2) "속옷의 손실"은 내 재물을 손상시키는 행위이다.(40절).

그것은 어려운 경우이다. 큰 손상에 대해 법적인 소송이 행해지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비록 재판관이 의롭고 신중하다고 할지라도 맹세나 서약에 아무런 도덕 관념이 없는 사악한 사람이 법적인 절차에 의해 등뒤로 속옷을 강제로 벗기는 일은 능하다.

"그 일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전 5:8). 그러나 이 경우에는 보복의 방법에 의해 소송하기 위해 가는 것보다, 반소장(狀)을 나타내 보이는 것보다, 너희의 확실한 옳음을 변명하려고 끝까지 버티는 것보다, "네 겉옷까지도 그에게 주도록 하라." 

만일 그 사건이 우리의 가족들에게 두드러지게 손상을 입히지 않고 손실된 작은 것이라면 화평을 위해 그것에 순응하는 것이 좋다. "법적 소송에 의해 그것을 찾는 데 소비되는 것 보다 다른 겉옷을 사는 편이 더 비용이 적게 들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네가 공정한 수단에 의해 그것을 얻을 수 없다면 그에게 그것을 넘겨주는 것이 더 낫다."

(3) 억지로 오리를 가는 것은 내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41절).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를 위해 심부름을 가게 하거든 또는 그를 시중하게 하거든, 그것을 꺼려하지 말고 그와 다투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와 십리를 동행하라." 

"내가 강제로 그것을 하도록 시킴을 받지 않았다면 그것을 하려고 했는데 나는 강요되는 것을 싫어한단 말이야"라고 말하지 말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툼이 일어날 것이니까"라고 말해야 한다.  네 자신의 교만과 보복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그를 섬기는 것이 더 낫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가르치기를 , 현자(賢者)의 제자들이나 법률을 연구하는 생도는 공공적인 사무를 보기 위해 돌아다니는 데는 다른 사람들처럼 왕의 관리들에 의해 제자를 받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제자들로 하여금 이 특권을 주장하도록 하지 않았으며, 권세들을 거스리기 보다는 그들의 요구에 응하라고 하였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기독자는 소송하는 것을 좋아해서는 안 된다. 사소한 손상은 허용되어야 하며, 그것에 대해 유의를 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 손상이 우리로 하여금 배상금을 요구케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좋은 목적을 위하거나 보복의 생각 없이 행해져야 한다. 

비록 우리가 손해를 입히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을 정중하고 상냥하게 대해야 하며 또한 그들에게 순응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혈기와 육신은 이러한 모욕을 도저히 그대로 지나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이것을 기억케 하라. 즉 "혈기와 육신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물려받지 못할 것이라"고.

1. 우리는 자비롭고 관대해야만 한다(42절). 

우리의 이웃을 헤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데까지 선행을 베풀려고 노력해야 한다.

(1) 우리는 주려고 해야 한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라. 만일 네가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가난한 자의 요구를 너에게 구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라." 참된 자선의 대상이 나타난다면 즉시로 베풀어야 한다.

 "일곱 몫을 주어라. 또한 여덟 몫까지도 주어라." 그러나 우리의 자선은 "공의(분별있게)로 행해져야 한다"(시 112:5). 그렇게 함으로써 꼭 받아야만 하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줄 것을 게으르고 무가치한 자에게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바, 곧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라는 말씀을 우리의 가난한 형제들에게 말해야 한다.

(2) 우리는 빌려주려고 해야 한다. 

이것은 때로 주는 것만큼의 큰 자선이 된다. 단지 그들을 현재의 급박한 사정에서 구출해줄 뿐만 아니라 빌리는 자에게 배려와 산업과 정직을 베푸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에게 먹을 것이나 장사할 것을 위해 빌리려는 자에게서 돌이키지 말라." 

다른 사람들이 너에게 이러한 요구를 하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을 피하지 말라. 또한 그들을 떨쳐 버리려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으려고 하지 말라. 또한 "빌리려는" 자에게 용이하게 접근하라. 비록 그가 수줍어하고 그의 처지를 알리거나 호의를 구하려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Exorabor antequam rogor; honestis precibus occurram - 즉 너는 그의 필요와 요구를 알고 그에게 친절을 베풀라(내가 탄원하기 전에 나는 이기게 될 것이다. 나는 합당한 간구를 기대할 것이다. Seneca, De Vita Beata). 

이와 같이 선행에 앞장서는 것은 우리에게 합당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부르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경청하시며, 또한 "그의 선(善)의 축복으로" 우리를 이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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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 사랑에 대하여(마 5:43-48)

여기에는 끝으로 둘째 돌비에 새겨진 가장 근본적인 법칙, 즉 율법의 완성이었던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대한 주석이 있다.

Ⅰ. 여기에서 이 율법이 유대인 교사들에 의해 어떻게 와전되었는가를 살펴 보라(43절). 

하나님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이웃"을 단지 그들 자신의 마을이나 국가, 종교에 소속된 자들만을 일컫는다고 이해하였다. 또한 그들이 기꺼이 자신들의 친구로 여겼던 자들만을 "이웃"으로 알았다. 

그러나 이것은 최악의 것은 아니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에서부터 그들은 하나님께서 결코 의도하시지 않았던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을 추론하려고 하였다. 또한 그들은 누구든지 자기들이 원하기만 하면 원수로 여겼고 그렇게 함으로써 비록 율법에는 그와 정반대로 나타나 있었지만(출 23:4, 5; 신 23:7)자신들의 유전에 의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계명을 공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너는 에돔인이나 애굽인을 미워하지 말라." 비록 이 민족들이 어느 민족들에 못지 않게 이스라엘에게는 더욱 원수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정하여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을 멸망시키려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또한 그들과 더불어 동맹을 맺지 말라고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렇게 해야할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즉, 이스라엘을 위해 통로를 비우기 위한 것과 그들이 이러한 가나안 족속들에게 "유혹 당하지 않도록"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들이 그들 자신의 원수들을 미워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은 매우 비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방의 도덕적 철학은 이것을 허락하였다.

Nemini nocere nisi prius lacesitum injuria, De Offic- 즉 이전에 손해를 입히지 않았다면 누구도 손상하지 말 것은 시세로의 규범이다. 

인간의 타락된 감정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지원을 받거나 "계명을 이용하는 데"에 얼마나 약삭 빠른가를 보라.

Ⅱ. 이 계명은 다른 한 교훈을 우리들에게 가르치시는 주 예수님의 명령에 의해 얼마나 명백하게 되어져 있는가를 살펴보자. 

즉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느니, 나 곧 큰 평화의 조성자, 총체적인 화목자가 되려고 왔고 너희가 원수를 사랑하라"(44절). 

비록 사람이 이전에 나쁜 사람이고 또한 우리를 매우 멸시하는 태도로 대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종족과 동족에게 대한 사랑의 큰 빚을 면제할 수는 없다. 

우리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자에게 손상을 입히려는 경향을 가지나 적어도 선하게 대하려는 데는 매우 냉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의 근저에 있는 것은 뽑혀져야 하는 쓰라림의 뿌리이며, 은혜가 정복해야 할 타락한 성품의 찌꺼기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기독자들의 큰 의무이다. 우리는 공개적으로 사악하고 모독하는 자에게 만족감을 가질 수 없으며, 또한 우리가 사기적이라고 아는 자에게 신뢰감을 둘 수 없으며,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본성을 존경해야 하며 "모든 사람을 영예롭게" 해야 한다.

우리는 원수들에게까지도 즐거움으로 유의해야만 한다. 비록 그들이 우리의 원수들이라 할지라도 현명함과 선한 기질, 학식, 도덕적인 덕, 친절함, 신앙 고백으로 대해야 하며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동정심과 선의(善意)를 가져야 한다.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교훈 되고 있다.

1. 우리는 그들에 대해 좋게 "말해야" 한다. 

즉 "너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역주:우리말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음). 우리가 그들에게 말할 때 우리는 그들의 욕설을 정중하고 다정스러운 말로 대답해야만 하며, "욕설을 욕설로 대항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배후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칭찬할 만한 것을 들어 칭찬해야 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그들에 대해 모든 좋은 것을 말할 때 더 이상 어떤 것을 말하려고 나서지 말아야 한다(벧전 3:9 을 보라). 

혀가 "친절의 법칙"인 자들은 그들에게 나쁜 말을 하는 자들에게 좋은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2. 우리는 그들에게 좋은 일을 행해야 한다.

 "너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라. 그리하면 그것이 좋은 말보다 더 나은 사랑의 증거가 될 것이다. 너희가 할 수 있는 모든 참된 친절함을 그들에게 베풀려고 하라. 또한 그들의 신체와 부귀, 이름, 가족들에 있어서 그것을 행하는 기회에 대해 즐거워하라. 특히 그들의 영혼에 대해 선행을 베풀라." 

***대 주교 크랜머(Crammer)에 대해, 그를 친구로 만드는 방법은 그에게 나쁜 짓을 행하는 것이었다고 말해졌다. 그는 자기에게 불친절하였던 자들을 많이 도왔다.

3. 우리는 "그들의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 "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1) 가장 탁월한 성도들이 사악한 사람들에 의해 미움과 저주와 핍박을 받은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그와 같이 취급을 받았다.

(2) 우리가 이러한 대우를 당할 때는 언제나 우리를 이와 같이 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우리가 계명과 그리스도의 모범에 일치함을 보여 주는 기회로 삼아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그들에 대한 사랑을 달리 입증할 수가 없다면, 우리는 이 방법을 아무런 겉치레 없이 할 수 있으며 우리의 본심을 속이지 않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실 것과 그들이 우리를 거스리는 일 때문에 잘 안 되는 일이 없도록, 또한 우리와 화평하게 지낸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그렇게 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플루타크(Plutarch)는 그의 저서 『라코니크 아포프테굼』에서 아리스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클레오메네스에게 "선한 왕이 행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고 물었을 때 그는 대답하기를, "친구에게는 선으로, 원수에게는 악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의 친구에게는 선을 베풀고 우리의 원수를 친구로 삼는 것"은 얼마나 더 좋은 일인가. 이것은 원수의 머리 위에 숯불을 올려놓는 것"이다.

이 "원수 사랑에 대한 명령"(이것은 매우 거칠게 들린다)을 시행하기 위해 두 가지 이유가 여기에 제시되어 있다. 우리가 그것을 해야만 하는 것은,

① 우리가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과 같게 되기" 위함이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임을 증명할 수가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보다 나은 복사를 본받아 쓸 수 있을까?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신다"(45절).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다음과 같다.

(1) "해와 비"는 세상에 대한 큰 축복이며,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

 빛을 비취는 "해"는 그의 것이며, 비는 그에 의해 내려진다. 그들은 진로를 따라서나 우연히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부터 온다.

(2) 공통적(일반적)인 자비는 하나님의 선하심의 실예와 증거로 평가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이것들에서 그 자신이 인류(그들은 이러한 은혜가 없이는 매우 비천할 것이며, 전적으로 가장 보잘 것 없는 자가 될 것이다)의 세상에 인자스러운 은인이심을 보여 주시고 있다.

(3) 이러한 일반 섭리의 선물은 "악인"이나 "선인," "불의한 자"나 "의로운 자"에게 공평하게 베풀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것에 의해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을 알 수 없고, "우리 안에"있는 것에 의해 알 수 잇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머리 위에 태양이 비취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의(義)의 태양이 떠오르는 것에 의해 알 수 있다.

(4) 가장 악한 사람은 비록 그들이 그것들을 남용하고 그 자신의 무기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지만 다른 사람들과 공통으로 이 세상의 위로에 참여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내와 자비의 놀라운 본보기이다.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 해가 애굽인에게 비취는 것을 금하셨는데, 그 때에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이 사는 곳에만 빛이 비췸을 보았다." 하나님은 매일 이러한 구분을 하실 수 있으셨다.

(5) 하나님을 반역하는 사악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함의 선물은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행을 베풀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특별히 생각한다면 비록 우리 안에는 하나님께 적의를 지닌 육적인 마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의 자비에 참여할 수 있다. 

(6) 그러한 자들만이 특별히 하나님, 특히 그의 선하심을 본받으려고 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될 것이다.

② 우리는 여기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행하게 하기 위함이다"(46, 47).

(1) "세리도 그들의 친구를 사랑한다." 

본성이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하게 한다. 관심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지시한다. 우리들에게 선행을 하는 자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은 인간성의 공통적인 일부분이며, 그것은 유대인이 미워하거나 멸시하였던자들까지도 최고의 좋은 증거를 나타내 보일 수 있었다. 

세리들은 좋은 평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위치에 자기들을 도왔던 자들에게 감사하였으며, 그들이 의존하였던 자들에게 공손하였다. 

우리가 그들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것을 행함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섬기며, 우리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는 것이다. 그것이 단지 우리의 자연적인 경향과 세상적인 관심에 지나지 않고 하나님과 무관한 것이라면 우리가 받을 상급이 무엇이겠는가?

(2)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보다 낫기 위하여 우리의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능가해야 한다면 하물며 세리를 능가하지 않을 수 있으랴. 기독교는 인간성 이상의 어떤 것임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진지한 질문을 해야 하며, 종종 마음에 명심해야만 한다. "우리가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가 더 나은 일을 하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는 남보다 더 알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말하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더 고백하며, 약속하였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더 많이 행하셨다. 그러므로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서 보다 더 많이 우리에게서 기대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은 다른 사람보다 우리와 더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어떤 점에서 우리는 이 세상의 자녀의 비율 이상으로 살고 있는가? 우리는 육적이 아닌가? 우리는 기독자의 특징 이하의 사람처럼 행하고 있지 않은가? 특별히 여기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더 행해야만 할 것은, 각 사람이 선을 선으로 돌릴 때 우리는 악을 선으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보다 고상한 원리를 말할 것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동하는 것보다 더 높은 규칙에 일치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형제에게 문안하며, 그들 자신의 당파나 또는 진로와 의견이 같은 자들을 포옹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존경을 그와 같이 제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의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우리가 세리의 덕행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면 기독자의 상을 기대할 수 없다." 그들 자신이 남보다 더 많은 상을 기대하는 자는 모름지기 "남보다 더 행하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3) 우리의 구세주는 이러한 주제를 이 권고, 즉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절)는 말씀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1. 일반적으로 그러한 모든 일들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그 점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아들로서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기독자의 의무는 은혜와 거룩에 있어서 완전을 열망하고 목표하고 지향해 나가는 것(빌 3:12-14)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거기에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모범에 우리 자신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해야만 한다(벧전 1:15, 16).

2. 앞서도 말했듯이 특히 "우리의 원수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눅 6:36 을 보라). 

"손상을 용서해주며, 나그네를 환대하며,"악하고 감사치 않는 자에게 선을 베푸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이다. 또한 그렇게 할 때 우리도 그와 같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관대하심에 대해 "많은 빚, 전적으로 진 빚"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그것(하나님의 관대하심)을 본받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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