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1.29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마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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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마6장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외식으로 금식하지 말라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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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장 (개요)

그리스도는 앞장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와전된 교리나 견해들, 특히 율법에 대한 그들 나름대로의 주석(그들의 누룩으로 불리웠다. 마 16:12)에 대항하여 그의 제자들을 무장시키고 난 후, 본 장에 들어와서는 그들의 와전된 행위, 즉 두 가지 죄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죄란 비록 그들의 교리에 있어서 그들이 옳지는 않았을지도 그들의 교제에 있어서 그들이 널분명히 두드러지게 범죄하였고, 그들을 칭찬하는 자에게 자기들의 행실을 본받을 것을 권하기까지 한 것으로서,  곧 외식과 속된 마음이라는 죄였다. 그것은 죄 중의 죄요, 특히 신앙 고백자들이 깨어 조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죄들은 정욕을 통해 세상에 들어온 보다 큰 타락을 피한 자들까지도 가장 쉽사리 공격하는 죄이므로, 가장 위험한 죄악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경고를 받고 있는 것은,

Ⅰ. 외식에 대하여. 우리는 외식가처럼 되어서는 안 되며 또는 외식가들처럼 행해서는 안 된다.

1. 구제에 있어서(1-4)

2. 기도에 있어서(5-8). 

.....여기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하고, 어떻게 기도해야할 것인가에 대해 교훈 되고 있다(9-13). 또한 기도에서 용서하는 것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14, 15)

3. 금식에 있어서(16-18)

Ⅱ. 세속적인 것에 대하여

1. 속된 것을 선택하는 것, 그것은 외식가들이 짓는 멸망할 죄이다(19-24).

2. 우리의 속된 염려에 있어서, 그것은 많은 선한 기독자들을 불안케 하는 죄이다(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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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 생활(마 6:1-4)

우리는 마음의 죄, 즉 마음의 간음이나 마음의 살인에 있어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아야만 하는 것처럼, 사람의 칭찬이 아닌, 하나님의 시인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마음의 종교를 유지하거나 보존시키는 것 또는 내적이고 중요한 원리에서 행하는 것에 있어서 그들보다 나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누룩이었던 외식과 또한 그들의 교리에 대하여 경계를 해야 한다(눅 12:1)

"구제나 기도, 금식은 세 가지 위대한 기독자의 의무이다"

─아랍인들은 율법의 세 가지 기초라고 말한다. 그것들에 의해 우리의 세 가지 주요한 관심으로 하나님께 경의를 표하며 봉사를 하는 것이다. 

"기도"에 의해 우리의 "영혼"으로, "금식"에 의해 우리의 "신체"로, "구제"에 의해 우리의 "재산"으로 드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우리는 "악에서 떠나야 할"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하고," 그것을 훌륭히 해야 하며 또한 "영구히 머무르게"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구절들에서 구제시 외식에 대한 경고를 받고 있다. "그것에 대해 주의하라." 그것에 대해 조심하라고 경고를 받은 것은 그것이 죄임을 암시한다.

1. 우리는 그렇게 할 "큰 위험 속에" 있다. 그것은 미묘한 죄이다. 

허영은 때때로  인식하기도 전에 우리의 행위에 슬며시 끼어들어간다. 제자들은 그들이 많은 기적적인 일들을 행했던 능력이나 또는 그들을 칭찬하는 자들과 멸시하는 자들과 사는 생활에 의해 그것을 하도록 시험받았을지도 모른다. 이 양자는 육적으로 남에게 그럴 듯하게 보이기를 몹시 바라는 시험이다.

2. 우리가 그러한 것을 하도록 "큰 위험 속에" 놓여져 있다는 사실은 죄이다. 

외식을 주의하라. 왜냐하면 외식이 너희를 지배한다면 그것이 너희를 파멸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귀중한 연고상자를 못쓰게 하는 죽은 파리이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일이 상정되고 있다.

Ⅰ. "구제를 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이 그들의 능력을 따라서 많이 해야 하는 큰 의무이다. 그것은 자연법이나 모세의 율법에 의해 기술되고 있으며, 선지자들에 의해 크게 강조되고 있다.

여러 고대 사본은 여기에 있는 "너희의 구제" (th;n ejlehmosuvnhn uJmw'n)를 "너희의 의"(th;n dikaiosuvnhn uJmw'n)로 읽고 있다. 왜냐하면 "구제"는 "의(義)"이기 때문이다(시 112:9; 잠 10:2). 

유대인들은 "가난한 자를 위한 상자"를 "의(義)의 상자"라고 불렀다. 가난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그들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이라고 말해진다(잠 3:27).

구제 의무는 외식가들의 자만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들에 의해 남용되었기 때문에 덜 필요하거나 두드러지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만일 미신적인 교황제 신봉자들이 자비의 행위에 공포를 두었다면, 그것이 이러한 선한 행위에는 도무지 불모지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욕심 많은 개신교 신자들에 대한 변명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의 구제 행위는 하늘에 갈 수 있는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 없이는 하늘 나라에 갈 수 없다는 것도 역시 사실이다. 

구제는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약 1:27)이며, 큰 심판 날에 시금석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그의 제자들이 "구제를 베푸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승인하고 있으며 그는 하지 않는 자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Ⅱ. 구제에는 큰 보상이 뒤따르지만 만일 그것이 외식에 치우친다면 그 상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것은 현세적인 일들속에서 때로 보상을 받는데, "풍족함으로"(잠 11:24; 25, 19:17), "궁핍하지 않게"(잠 28:27; 시 37:21, 25), "고통에서 구출"(시 41:1, 2)하시며, "영화와 좋은" 이름을 얻게 될 것이다(시 112:9). 어쨌든 그것은 의로운 자가 부활할 때(눅 14:14) "영원한 부귀"로 보상받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1. 이 의무에 대해 "외식가들의 행위"는 어떠하였는가? 

그들은 실로 구제를 행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해 순종이나 사람에 대한 사랑의 원리에서가 아니라 자만과 허영에서 이 일을 하였다. 또한 가난한 자에 대한 동정심에서가 아니라 순전히 겉치레를 위하여 구제를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좋은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자신들의 행위를 과시함으로써 그들이 주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의도를 따라 그들은 구제를 "회당과 거리에서"하였는데, 그곳에는 그들이 구제하는 너그러움 때문에 칭찬을 보냈으며, 그들의 가증스러운 교만을 분별하지 못하였던 무지한 군중의 무리가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회당에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 헌금을 모았으며 대부분의 거지들은 거리나 큰 길가에 늘 몰려 다녔으며, 이러한 공공 장소를 택하여 그들은 구제를 하였던 것 같다.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구제를 하는 것이 부당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우리를 보도록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히려 덜 주목되는 자선의 대상을 찾아야 한다. 외식가들은 자기 집에서 구제한다고 할지라도 적선 받을 거지들을 불러 모운다는 구실 아래 "나팔을 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의 자선을 널리 선포하고 주목을 끌며 이야기를 주제로 삼게 하려고 함이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이것에 내린 판결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즉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언뜻보면 이것은 약속처럼 보인다. 즉 만일 그들이 보상을 받는다면 충분히 받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 안에 있는 두 단어는 이 말을 경고로 만든다.

(1) 그것은 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상이다.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약속한 상이 아니라, 그들이 그들 자신에게 약속한 상으로서 보잘 것 없는 상이다. 그들은 그 일을 "사람에게 보이려고"했으며, 또한 사람의 눈에 "띄게"되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속였던 "자신의 미혹을 선택하였으며," 또한 그들이 선택한 것을 가질 것이다. 

육적인 신앙 고백자들은 승진과 영예 부귀를 위한 기복적 하나님으로 규정하며 그들은 그러한 것들로 배를 채울 것이다(시 17:14). 그러나 그들로 하여금 더 이상 기대하지 않도록 하라. 이러한 것들은 그들의 위로(눅 6:24)이며 그들의 좋은 것(눅 16:25)이며, 또한 그들은 이러한 보상으로 끝나게 것이다.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않았느냐? 네가 이와 같이 결정한 바를 지켜나가는 것이 계약인 것이다."

(2) 그것은 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의 상"이며, 그들은 그것을 "받고 있다." 

장차 그들을 위해 예비 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것으로 짐작하는 모든 것을 지금 받고 있으며, 여기에서 받고 있다. 그러므로 장차 받을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 "상을 받았느니라"(아페쿠신 톤 미스돈, 6:2)는 "완전히 영수한 것"을 의미한다. 

경건한 자가 이 세상에서 받는 상은 "지불금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후에는 더 많이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외식하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상을 "모두" 받았으며, 장차 받을 것은 하나도 없게 될 것이다. 그들 스스로가 그것을 결정한 것이다. 세상은 성도들을 위해 아무 것도 "예비"하지 못하였으며, 돈을 마구 허비한다. 그것은 위선하는 자들에게 지불되며 그들의 몫이 된다.

2. 구제에 대한 "우리 주님의 규범"은 무엇인가?(3, 4절) 

그 자신이 이러한 겸손의 본보기이신 주 예수님은 이를 수행할 때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제자들에게 강조하고 있다. "너희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것은 아마 그들이 성전으로 들어갈 때 임의대로 헌금을 던지게 되어 있는 통행의 "오른 편"에 있는 고르반, 즉 가난한 사람을 위한 헌금궤를 암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오른손"으로 그 속에 예물을 넣었다. 또한 "오른손"으로 구제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준비와 결심을 암시한다. 그것을 어색하고 잘못된 의도로 하지 말고 기민하게 하라. "오른손"은 가난한 자를 돕거나 그들을 들어올리거나 그들을 위해 쓰거나 그들의 아픈 상처를 싸매거나 그 밖의 다른 방법으로 그들에게 주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네 오른손이 가난한 자에게 친절을 베풀었다고 할지라도 그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할 수 있는 대로 그것을 숨기라. 꾸준히 그것을 혼자 지키라. 그것이 좋은 행위이므로 행하라. 그것이 너에게 좋은 이름을 제공하기 때문에 하지 말라." In omiburmfjsep factis, re, non teste, moveamur, Cic. de Fin ─ 즉 우리의 모든 행동에 있어서 그 대상과의 관련 때문에 영향을 받아야 한다. 관찰자 때문에 행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암시하고 있다.

(1) 우리가 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도록 해서는 안 된다. 

아니,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우리의 왼손" 곁에서 있는 사람도 모르게 해야 한다. 그들이 알게 하는 대신에 가능하면 그들에게서 감추도록 하라. 그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숨길뿐만 아니라 스스로 간직하며 더 이상 나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2) 우리는 자신이 한 것을 너무 많이 주목해서는 안 된다. 

왼손은 우리들의 지체 중 한 부분이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선행에 대해 우리들 자신 안에서 너무 많이 주시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우리 자신을 칭찬하거나 찬탄해서는 안 된다. 자만심과 자족감, 우리 자신의 모습을 경탄하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 허영과 겉치레와 같이 위험스러운 자만의 부분들이다. "우리가 주의 주리신 것과 목마르신 것을 보았나이까?"(역주:마 25:37)

3. 구제할 때에 "이와 같이 진지하고 겸손한 자들에게 대한 약속"이 무엇인가?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그들을 "보실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선행에 대해 최소로 주목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 대해 최고로 주목하신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행한 잘못들을 우리가 듣지 않은 것처럼 그냥 용서하고 넘겨버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행해진 잘못을 경청하듯이(시 38:14, 15), 우리가  베푼 선행에 유의하지 않고 속히 입어버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의해 행해진 선행을 보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것"은 외식하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이 되지만 진실한 기독자들에게는 위로가 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관찰과 칭찬뿐만 아니라, 보상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 "그 자신이 공개적으로 너에게 보상할 것이다." 구제할 때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자는 스스로를 주인이신 그에게 넘겨 줄 따름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외식하는 자들은 그림자를 붙잡지만 의로운 사람은 실체를 손에 넣는다. "그가 상 주실 것이며, 그 자신이 주시는 이가 되실 것이라"(히 11:6). 얼마나 그것이 강조적으로 표현되어 있는가를 살펴 보라. 그만이 그것을 친절하게 보충하실 수 있다. 아니, 그는 자신이 "큰 상급"(창 15:1)이 되실 것이다. 

그는 자기 종에게 꼭 그가 벌어들인 것만 주며 그 이상은 주지 않는 주인과 같이 주시지 않으며, 자기를 봉사하는 아들에게 아낌없이 풍족하게 더 주는 아버지와 같이 상을 주실 것이다. 아니, 그는 현 시대에서가 아니라면 큰 심판 날에 "공개적으로" 보상할 것이다. "그 때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공공연한 칭찬을 받을 것"이며,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게 될 것이다. 만일 행위가 공개적이 아니라면 보상은 공개적이 될 것이며 그것은 더 좋은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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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생활(마 6:5-8)

"기도"할 때 우리는 "구제"할 때보다 더 즉각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진지하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여기에  특별히 강조되어 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5절), 이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이 "기도"하는 것을 당연한 사실로 여기고 있다. 바울은 개종하자마자 "기도하였다." 

너희는 기도하지 않고 살아 있는 기독자보다는 숨쉬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을 찾기가 더 쉬울 것이다. 기도가 없으면 은혜도 없다. "이제,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또한 저희가 행하는 대로 하지 말라"(2절). 

수단과 행동에서 외식자와 같이 행하지 않으려는 자는 그들의 기분과 성향에서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되지 말아야 한다. 그는 누구를 지적하시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히 드러나 있다(마 23:13). 그리스도는 특히 여기에서 외식하는 자를 서기관과 바리새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기도할 때 두 가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것에 대해 여기에서 경고되고 있는데, 즉 헛된 영광(5, 6절)과 중언부언(7, 8절)이다.

Ⅰ. 우리는 "기도할 때 자만하거나 허영스러운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사람의 칭찬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1. "외식하는 자들의 방법과 행위"는 무엇이었는가? 

그들이 기도하는 모든 행위는 그 주요 목적이 이웃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려는 것이었고, 이로서 자신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그들이 기도할 때 "윗 쪽으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만일 그것이 정당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영혼이 올라가는 것이다), 그때에 그들의 눈은 그들의 미끼로서 이 세상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다음의 일을 살펴보자.

(1) 그들이 기도하기 위해 택했던 "장소"는 어떤 곳이었는가? 

그들은 "회당"에서 기도하였다. 회당은 개인적인 기도를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공중적인 기도에는 실로 적합한 장소이다. 그들은 이로서 그들의 모인 장소를 영예롭게 하려는 것처럼 꾸몄지만, 실상은 자신들을 영화롭게 하려는 속셈을 가졌다. 

그들은 "거리의 어귀," 즉 넓은 거리(단어의 의미가 그러하다)에서 종종 기도하였다. 그들은 마치 경건한 충동에 의해 서둘러 이쪽으로 온 것 같이 보였지만 실을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하기 위함이었다. 두 거리가 만나는 이곳에는 양쪽에서 함께 내다보일 뿐만 아니라 이곳을 돌아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들을 바라볼 수 있었으며, 또한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도 있었다.

(2) 그들이 기도할 때 사용했던 "자세." 그들은 서서 기도하였다. 이것은 합당하고 적절한 기도 자세였다(막 11:25 , "서서 기도할 때에"). 그러나 무릎을 끓는 것은 더 겸손하고 정중한 자세이다(눅 22:41; 행 7:60; 엡 3:14). 

그들이 서서 기도하는 것은 교만과 자신감을 나타내려는 기미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눅 18:11). "바리새인들은 서서 기도하였다."

(3) 그들이 공공적인 장소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그만"은 두 가지 일에서 표현되고 있다.

① 그들은 거기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들은 그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려고 할 때 또한 그들을 주시하는 기회가 주어질 때 기도하기를 좋아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선행을 공개적으로 행해져야 할 경우가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보고 칭찬하게 될 경우가 있다. 그러나 범죄가 되고 위험스럽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좋아하고 기꺼이 하려고 할 때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만한 기질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②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거리에 서서 기도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칭찬과 갈채를 얻기 위하여 기도했으며, 또한 과부와 고아들의 재산을 자기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이와 같은 기도를 하였다(누가 이렇게 열심있게 기도하는 사람을 믿지 않을 것일까?). 더욱이 그들은 아무 스스럼없이 그것들을 마구 탈취하였을 것이다(마 23:13). 또한 실제로 그들은 백성을 노예로 삼기 위하여 자기들의 공공연한 음모를 수행하였던 것이다.

(4) 이 모든 것의 "결과"는 "그들이 자기 상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봉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기대했던 모든 상을 다 받아 버린 것이다. 그것은 실로 보잘 것 없는 보상이다. 만일 우리의 주인이 "잘하였도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동료 하인에 대해 좋은 말을 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가 사람의 칭찬을 많이 들으면 들을수록 그만큼 하나님의 상은 적어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거리에서 기도했으며 또 그렇게 되었다. 그들에게 그 일을 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일 수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이 성실로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칭찬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사람이 아니며 그에게서 응답을 기대할 수도 없다. 그들은 우리의 재판장이 아니며, 우리와 똑 같은 먼지와 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 사이를 통과하는 것은 보이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회당에서 예배를 볼 때는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는 자들"(사 58:4)처럼 우리의 개인적인 기도를 두드러지게 하려는 모든 일을 피해야만 한다. 공중적인 장소는 개인적으로 경건한 기도를 드리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2. 이것에 반대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도"는 무엇인가? 

겸손과 성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가장 큰 두 가지 교훈이다. "너는 기도할 때에‥‥하라"(6절). 특별히 네 스스로, 네 혼자서 기도하라. 개인적인 기도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이 반드시 필요로 하는 의무와 행위로 생각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자.

(1) 이에 관하여 여기에 주어진 명령(지시).

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하지 말고 그 대신에 "네 골방." 즉 개인적이고 외진 장소에 "들어가라." 

이삭은 들판으로 갔고(창 24:63), 그리스도는 산으로 가셨으며, 베드로는 지붕 위로 올라갔다. 만일 그것이 목적에 부합된다면 기도는 하는 장소에 의해 응답 여부가 결정되지는 않는다. 

은밀한 기도는 우리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그렇게 함으로써 겉치레를 피하기 위하여 외진 곳에서 수행된다. 또한 방해받지 않음으로써 산만해지지 않고 또한 들리지 않음으로써 보다 큰 자유를 활용하기 위하여 은밀한 곳에서 수행된다. 

우리는 아무리 해도 남의 눈에 띄게 선행을 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리하여 남들의 칭찬을 받는 처지에 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자만심을 채우기 위해 그런 처지를 좋아한다면, 그것이 죄요 위험이 되는 것이다.

②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그 대신에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나에게, 나에게 기도하라"(슥 7:5, 6).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보다는 오히려 사람에게 기도하였다. 그들의 기도의 형식이 어떻든 간에 그 의도는 사람의 칭찬을 구걸하거나 그들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 기도하라. 그것으로 만족하라. 기꺼이 경청하고 응답하려고 하시며, 너를 동정하고 도와주며 구원해 주시려는 네 아버지이신 그에게 기도하라. 은밀한 곳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은밀한 기도를 할 때 우리는 모든 장소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 밖의 아무도 골방에 없을 때 거기에 계신다. 특히 네가 "그를 부를 때" 네 곁에 계시는 곳이 골방이다. "은밀한" 기도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께 그의 우주적인 존재의 영광을 돌리며(행 17:24), 그 위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2) 이에 대해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격려.

① 네 아버지는 "은밀한 중에 보신다." 

아무도 너를 칭찬하지 않고 너를 바라보지 않을 때에도, 그의 눈은 너를 받아들이기 위해 너를 주시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다니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내가 보았노라"고 말씀하셨다(요 1:48). 그는 어떤 거리, 어떤 집에서 기도하는 바울을 보셨다(행 9:11). 하나님이 모르시는 비밀이나 일이 있을 수 없다. 그는 그것을 주목하고 계신다.

② 그는 "공개적으로 갚으실 것이다"(한글 성경과 다소 다름). 

그들은 공개적으로 행한 자기 상을 받았다. 너는 그것을 은밀한 중에 행한 네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상"이라고 불리웠다. 그러나 "빛"으로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는다. 

구걸에는 무슨 공로가 있을 수 있는가? 그 상은 공개될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영예스럽게 소유하게 될 것이다. 공개적인 상은 외식하는 자들이 즐겨하는 상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위해 기다리는 인내심을 가지지 못하였다. 때로 은밀한 기도는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대한 주목할 만한 응답에 의해 공개적으로 보상을 받기도 한다. 그것은 그들의 원수들의 양심에 하나님의 기도하는 사람들을 나타낸다. 

어쨌든 큰 심판 날에는 공개적인 보상이 있을 것이며, 그때에는 기도하는 사람들이 큰 중재자(간구자)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모든 동네 사람들 앞에서" 자기 상을 이미 받았으며, 그것은 "섬광이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상이다." 참된 기독자는 그들의 상을 "모든 세계"와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받게 될 것인데, 그 상은 "영광의 심히 중한 것"(큰 영광)이 될 것이다.

Ⅱ. 우리는 기도할 때 "중언부언"해서는 안 된다(7, 8절). 

기도의 생명이 "영혼을 고양(高揚)시키며 마음을 쏟아 붓는 것"이기는 하지만 기도할 때는 말이 필요하며 특히 공동 기도에는 말을 해야 한다. 아마도 주님께서는 여기에서 특히 공동 기도에 대해 말씀하신 것 같다. 왜냐하면 앞에서는 "너는 기도할 때에"라고 했지만 여기에서는 "너희가 기도할 때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다음에 뒤따라오는 주기도문은 공동 기도이다. 

공동 기도를 할 때 다른 사람들의 입의 역할을 대신하는 자는 대개 말이나 표현에 있어서 겉치레를 하려는 시험을 받게 된다. 이것에 대해 여기에 경고되어 있다. 즉 혼자 있거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거나 "중언부언하지 말라." 바리새인들은 이것에 영향을 받아 "길게 기도하였으며"(마 23:14), 그들의 모든 관심사는 기도를 길게 하는 것이었다.

1. 여기에서 책망되고 정죄 된 "잘못"이 무엇인가? 

그것은 기도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단지 입만을 놀려대는 것이며, 영혼의 예배가 아닌 입술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여기에서 두 가지 단어, 곧 "중언부언" (Battologva)과 "많은 말"(Poluvlogiva)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1) "중언부언" ─ 같은 말의 중복(tautology), 말을 더듬거림(battology), 마치 battus, sub illirmfjsep montibus erant, erant sub montiburmfjsep illis 등과 같이 아무런 뜻도 없이 제멋대로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인데, 이것은 바보가 군말을 지껄이는 것과 같다. 즉 "우매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자기 뒷일을 말 할 자가 누구이냐?"(전 10:14) 

이것은 대화할 때 버릇없고 매스꺼운 말이다. 하물며 하나님과 이야기할 때는 얼마나 더 하겠느냐. 여기에서 정죄 되고 있는 것은 기도할 때 되풀이하는 모든 반복을 총칭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공연한 반복(중언부언)이다. 

그리스도 자신도 일상적인 열심과 성의를 넘어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눅 22:44). 다니엘도 마찬가지였다(단 9:18, 19). 또한 같은 말을 매우 아름답게 반복한 곳도 있다(시 136:). 우리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일으키기 위해 같은 말을 사용할 수 있다.

교황제 옹호자들처럼 염주로 "아베 마리아"나 "우리 아버지"(paternosters)를 아무런 뜻도 없이 계속적으로 되풀이하는 미신적인 반복이나, 같은 일에 대해 무미건조하게 되풀이하여 언급하는 것, 단지 기도를 오래 끌며 기도하는 것, 실제로는 아무런 느낌도 없으면서 자신의 감정이나 애정을 과시해 보이려는 것 ─ 이러한 것들이 여기에 정죄 된 중언부언이다. 우리가 많이 말하려 할지라도 적절하게 많이 말할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과 모든 현명한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든다.

(2) "많이 말하는 것"은 기도할 때 장황하게 꾸미는 태도로서 자만이나 미신에서 비롯되며, 또한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 의해 알려지고 설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로서 어리석음과 무례함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들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오래 하는 기도가 모두 금지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온 밤을 새며 기도하셨다(눅 6:12). 솔로몬의 기도는 긴 기도였다. 우리의 용건이나 감정이 특별하다면 때로 오래할 필요가 있다. 마치 오래 기도해야만 하나님을 더 즐겁게 하며 효과가 있는 것처럼 오래 기도하는 것만이 여기에서 정죄되었을 따름이다. 

정죄 되는 기도는 "많이 하는 기도"가 아니다. 아니, 우리는 "항상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그러나 많이 "말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오류는 우리가 단지 기도를 "말할 때" 범할 수 있으며, "기도할 때"는 범할 위험성이 없다. 이 경고는 솔로몬에 의해 표현되어 있는데, 즉 "말을 적게 하라"(전 5:2). 다시 말하면 사려 깊고 신중하게 말하라.

"너는 말씀을 가지라"(호 14:2). "말을 택하라"(욥 9:14). 또한 마음에 또한 처음 생각을 모두 말하지는 말라.

2. 이러한 기도를 하지 말라는 이유가 무엇인가?

(1) 이것은 "이방인들이 하는"방법이다.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神)을 예배하는 것같이 기독자가 그들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기독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이방인은 자연의 빛에 의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예배의 대상에 관한 그들의 상상에 있어서 헛되게 되어버렸으며, 그들이 예배하는 태도나 특히 여기에 있는 실예에서 그렇게 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전혀 그들과 같은 분으로 생각하였으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말한 것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하여 또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도록 하기 위하여 그에게 많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마치 하나님은 연약하고 무지하며 간구하기가 매우 어려운 분인 것처럼 생각하였다. 그래서 바알의 제사장들은 아침부터 거의 저녁까지, "오 바알이여, 응답하소서. 오 바알이여, 응답하소서"라고 중언부언하면서 발악을 했다. 그들은 공연한 간구를 드렸다. 그러나 엘리야는 간단한 기도를 드림으로써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장작을 쌓은 것을 불사르게 하고 물을 말리게 하였다(왕상 18:26, 36). 기도할 때 아무리 입술을 놀린다 해도, 그것이 전부라면 헛수고가 되고 말 것이다.

(2) "네 방법을 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께서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이렇게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기도할 때 필요가 없다고 하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도에 의해 네가 그를 필요로 한다는 것과 그를 신뢰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또한 그의 약속을 간구하기를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의 사정을 털어놓으며 네 마음을 그 앞에 쏟아 놓아라. 그리고 그것을 그에게 남겨두라."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 보자.

① 우리가 기도드리는 대상인 하나님은 창조와 계약에 의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그러므로 그에게 대한 우리의 요청은 용이하고 자연스러우며 꾸밈이 없어야 한다. 

어린 자녀는 그들의 부모에게 어떤 것을 요구할 때 말을 길게 할 필요가 없다. "아빠, 아빠"하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사랑과 존경과 신뢰로서 그에게 다가가자. 그리고 그때에 그들은 많은 말들을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양자의 영에 의해 "아바, 아버지"라고 올바르게 말하라고 가르쳐지고 있다.

② 그는 우리 자신보다 우리의 처지와 필요를 더 잘 아시는 아버지이시다. "그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아신다." 

그의 눈은 자기 백성의 필요를 관찰하시기 위해 세상의 이곳 저곳으로 움직이고 있다(대하 16:9). 또한 그는 종종 "우리가 부르기 전"에 응답하시며(사 65:24), "우리가 요구한 것 이상으로" 주신다(엡 3:20). 만일 그가 자기 백성에게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주시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그것이 그들에게 필요가 없거나 그들에게 좋지 않은 것임을 하나님께서 잘 아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보다 더 우리의 사정을 잘 판단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처지를 나타내는 데 말을 길게 하거나 많이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 말할 수 있는 것보다 그것을 더 잘 아신다. 그는 단지 그것을 "우리에게서" 아신다(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것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그에게 말씀드릴 때 우리는 그에게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나이다"(시 38:9)라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하거나 길게 하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지는 않으신다. 가장 능력 있는 간구는 "말할 수 없는 탄식"(롬 8:26)으로 하는 기도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명령을 내려서는 안 되며 요청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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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본(주기도문)(마 6:9-15)

그리스도께서 잘못된 것을 책망하셨을 때 그는 더 잘 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책망은 교훈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여기에서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을 문장으로 나타냄으로써 우리의 연약함을 돕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9절). 유대인들은 이 기도의 의무에 잘못된 많은 변조들을 몰래 삽입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의 내용과 방법을 알려 주기 위하여 새로운 규범서를 제시할 필요성을 느끼셨다. 그는 기도를 한 모형으로, 우리기도의 몇 가지 특별한 것들을 요약 내지는 그 내용으로 잘 사용될 수 있도록 한 문장으로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마치 이 주기도문이 다른 기도를 드리는 데 꼭 필요한 것처럼 이 형식에만 언제나 얽매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와 같이, 이러한 말들로, 이런 취지로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누가복음에 있는 것은 이와 다르다. 이 주기도문이 사도들에 의해 사용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그 후에 하고 있듯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지도 않았다. 여기에서는 성령이 부어졌을 때 도래하였던 나라가 임하시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없이 주기도문을 한 모형으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좋다. 주기도문은 성도들의 교제의 간구이며 휘트비(Whitby) 박사의 말에 의하면 적어도 3세기 이후에서부터는 모든 교회에서 사용되어 왔다.

그것은 주님의 기도이며, 그가 만드시고 지정하신 기도이다. 그것은 매우 간명하면서도 알기 쉬우며, 기도에 약한 우리의 약점을 동정하여 주신 것이다. 그 내용은 정선되고 필수적인 것이며, 그 방법은 교훈적이며, 그 표현은 간결하다. 주기도문은 짧지만 많은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그 의미와 뜻을 익히 알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주기도문은 사려분별이나 중언부언 없이 사용되는 것 이상으로 마음에 들도록 사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주기도문(모든 기도도 실제로 마찬가지이지만)은 땅에서 하늘로 보내는 편지이다. 편지의 제명(題銘)을 보면 수취인은 "우리의 아버지," 장소는 "하늘나라," 그 다음에는 몇 가지 요구 사항을 적은 내용, 맺는 말은 "나라가 아버지께 있사옵니다." 보증인(印)은 "아멘"이다. 만일 여러분이 원한다면 날짜는 "오늘이다."

다음과 같이 주기도문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Ⅰ. "머리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의 용건에 이르기 전, "우리 아버지여"라고. 우리는 그 용건을 말하려는 사람에게 엄숙한 인사를 드려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가 한 일원이며, 서로가 교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하나님께만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성도들이나 천사들에게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를 잘 모르며, 우리가 기도에서 드리는 영예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한 우리가 기대하는 은혜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인사하며, 그에게 붙일 수 있는 근사한 이름보다는 자애스러운 칭호가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기 때문이다.

1. 우리는 "우리 아버지"이신 그에게 말해야 한다. 또한 그를 그렇게 불러야 한다. 

그는 창조에 의해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인 아버지가 되신다(말 2:10; 행 17:28). 그는 특별한 방법으로 양자와 중생에 의해 성도들에게도 아버지가 되신다(엡 1:5; 갈 4:6). 또한 그것은 말할 수 없는 특권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에서 그를 바라보아야 하며, 그에 대한 좋은 생각을 유지해야 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보다 하나님과 내 자신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는 기도할 때 대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만일 그가 우리의 아버지이라면 그는 연약함과 부족함 가운데 있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것이며(시 103:13), 우리를 아끼실 것이며(말 3:17), 비록 부족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행동에 만족하며, 우리에게 좋은 것은 어느 것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우리에게 좋은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다. 눅 11:11-13). 

우리는 아버지이신 그에게 담대히 나아가며, "아버지와 양자의 영으로 더불어 대언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회개할 때 우리는 탕자가 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로 보아야 한다(눅 15:18; 렘 3:19). 

은혜와 평화, 아들의 유업과 축복을 구할 때, 우리는 화목하지 못하고 복수하는 심판자로서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며 은혜스러우며 화목한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에게 나아간다는 사실은 격려가 된다(렘 3:4).

2. 우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다." 

각처에 있는 것처럼 하늘에도 계시다. 하늘은 그를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하늘과 그 밖에 도처에 그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보좌이기 때문이다(시 103:19). 그것은 믿는 자들에게 은혜의 보좌이다. 

우리는 그곳으로 우리의 기도를 향해야 한다. 왜냐하면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는 지금 하늘에 계시기 때문이다(히 8:1). 하늘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영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기도로 대화하는 것은 영적이어야 한다. 하늘은 높은 곳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세상 위로 들어 올려져야 하며, 또한 우리의 마음을 들어 올려야 한다(시 5:1). 하늘은 완전히 정결한 장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끗한 손을 들어 올려야 하며, 거룩한 분이시요, 거룩한 장소에 거주하시는(레 10:3) 그의 이름을 거룩케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하늘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의 자녀를 보신다(시 33:13, 14). 또한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를 보시는 그의 눈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는 우리의 부족함과 무거운 짐, 소원, 연약함에 대해 완전하고도 분명하게 알고 계시다. 하늘은 그의 조망(眺望)의 궁창일 뿐만 아니라 "권능의 궁창"이기도 하다(시 150:1).

그는 기꺼이 우리를 돕고자 하시는 아버지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도울 수 있으며, 우리가 구하면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일을 우리를 위해 하실 수 있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다. 

그는 우리의 필요를 그것으로 채우신다. 왜냐하면 모든 좋은 선물은 위에서부터 온다. 그는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함을 가지고 그에게 올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경심을 가지고 그에게 나아가야 한다(전 5:2). 따라서 우리의 모든 기도는 기독자인 우리의 큰 목적이 되는 것과 일치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일치해야만 한다. 우리의 모든 대화의 목표이신 하나님과 하늘은 모든 기도에서 특별히 주시되어야만 한다. 즉 우리가 모두 향하는 중심이 있는 것이다.

Ⅱ. "간구." 여섯 조목이 있다. 

절반에 있는 세 조목은 보다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영광에 연관되어 있고, 후반에 있는 세조목은 우리 자신의 현세적인 관심과 영적인 관심에 연관되어 있다. 십계명에서와 마찬가지로, (전반 네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후반 여섯 계명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가르치고 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방법은 먼저 "하나님의 왕국과 그의 의"를 찾을 것을 가르치며, 그 다음에 "다른 일들이 부가되기를" 희망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1.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다른 곳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sanctified)라고 번역된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고어인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hallowed)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것은 단지 사람들이 주기도문에서 이 말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 말에서,

(1)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린다. 

그것은 간구가 아닌, 예배(찬미)로서 간주될 수 있다. 이것은 "주님께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소서. 영화롭게 하옵소서"와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의 모든 완전성의 위대함이나 영광이다. 

우리는 기도를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서 시작해야 하며, 우리가 그에게서 자비와 은혜를 받으려고 기대하기 전에 그가 먼저 섬김을 받아야 하며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합당하다. 먼저 그의 완전함을 찬양하자. 그 다음에 그 완전함의 유익을 소유하자.

(2)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고정한다. 

그것은 목적된 바른 목표이다. 또한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시는 것은 우리의 모든 간구에 있어서 주요하고도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다른 모든 간구는 이것에 부속적이고 종속적인 것이 되어야만 한다. 

"아버지여 나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내 죄를 용서하심으로서 당신을 영화롭게 하소서." 등 모든 것은 그에게 속하며, 그로 말미암기 때문에 모든 것은 그를 향해 있어야 하며 그를 위해 있어야 한다. 기도할 때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대개 하나님을 향애, 하나님께 대해 실행되어야만 한다. 바리새인들은 그들 자신의 이름을 그들의 기도의 주요한 목적으로 삼았다(5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우리의 모든 간구에 있어서 이것을 중점에 두어야 하며 그것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하시옵고, 나에게도 그리 하소서. 그렇게 하는 것이 당신의 영광을 위하는 것에 한해서만 행하옵소서."

(3)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 즉 하나님 자신이 알게 하신 모든 것에서 우리와 다른 사람, 특히 그 자신에 의해 거룩히 여김을 받고 영화스럽게 되어야할 것을 바라고 기도한다.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이 아버지로서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서 영화스럽게 여김을 받도록 하시옵소서. 당신의 선하심과 지고하심, 위엄과 자비를 영화스럽게 하옵소서.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왜냐하면 당신의 이름은 거룩하시기 때문이옵니다. 우리의 타락한 이름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주여, 당신의 위대한 이름에 무엇을 행할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스럽게 되기를 기도할 때에는,

① 우리가 필연적인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그 자신의 "이름을 거룩케 하실"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열방 중에서 높힘을 받으리라"(시 49:10).

② 우리는 확신하는 바가 주어지도록 기도한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기도하실 때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을 거룩케 하시옵소서"라고 하셨으며, 그것은 즉시 응답되었다. "내가 그것을 영화롭게 하였고, 또한 다시 영화롭게 할 것이다."

2. "나라가 임하옵시며." 

이 간구는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그 당시 전파하였던 교리에 대한 언급으로서, 이것은 전에 세례 요한이 전파하였고 또한 후에 그리스도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전파하도록 보낸 메시지였다. 즉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다.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의 나라, 즉 메시야의 왕국이 가까웠으니, 그것이 임하도록 기도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는 우리가 듣는 말을 기도로 돌려야 하며, 우리의 마음은 그것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내가 정녕 속히 오리라"고 약속하셨는데, 우리는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대답해야 한다. 

교역자들은 말씀에 대해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라"고 전파할 때에 그들은 "아버지여,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한 것을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약속들은 기도를 폐지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고무시키고 격려하기 위하여 주어진다. 또한 약속의 성취가 가까이 있거나 문 곁에 있을 때 하늘나라가 가까이 이르렀을 때 우리는 더욱 진지하게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마치 다니엘이 이스라엘의 구출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을 때 그는 그때가 가까이 이르렀다고 이해하였다(단 9:2; 눅 19:11 을 보라).

"그로 하여금 그의 나라를 다스리게 하시며, 그의 구속이 번창케 하시며, 그의 메시야가 오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케 하시옵소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일상적인 기도였다(휘트비 박사, ex Vitringa).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옵시며, 복음이 모든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게 하옵소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에 관해 말씀하신 기록에 찬동(서명)케 하시며, 그를 그들의 구세주와 통치자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복음적인 교회들의 범위가 넓어지게 하시며,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로 되게 하시며 모든 사람들이 그것에 충족되며 그들의 특성에 합당하게 살도록 하옵소서."

3.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실 때 우리와 다른 사람이 그 나라의 모든 법률과 규칙에 순종하게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것에 의해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드러나도록 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것에 의해 그 뜻이 "하늘나라"로 오는 것이 드러나도록 하며, 그것이 "지상 천국"을 도입케 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왕이라고 부르면서도 그의 뜻을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단지 유명무실한 이름뿐인 왕으로 만들게 될 것이다. 그가 우리를 지배하도록 기도하고 난 후 우리는 모든 일들에서 그의 지배를 받게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자.

(1) 기도할 것은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이다. 

"주여, 나와 내 것으로 당신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시옵소서(삼상 3:18). 나에 관한 당신의 모든 계획이 이루어질 것을 당신에게 말씀드리며 만족하나이다."  바로 이런 의미로 그리스도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였다. "나로 하여금 당신을 즐겁게 하는 바를 행할 수 있게 하옵시며, 당신의 뜻에 대한 바른 지식과 그것에 합당한 순종에 필요한 은혜를 주시옵소서. 당신의 뜻이 나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성실하게 행해지게 하옵소서. 우리가 하는 일에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거나(ut nihil nostrum displiceat Deo)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불쾌함이 되지 않도록(ut nihil Del displiceat nobis) 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뜻이나 육신과 마음의 뜻, 또는 사람의 뜻(벧전 4:2), 더욱이 사탄의 뜻(요 8:44)이 행해지지 않게 하옵소서"

(2) 그것의 모형은 하나님의 뜻이 휴식과 즐거움의 장소인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우리의 시련과 시험의 장소(이곳에서 우리의 행위가 행해져야 하며 혹은 결코 행해지지 않을 것이다)인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준수함으로서 더욱 천국과 같이 되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이 땅은 사탄의 뜻이 우세하였기 때문에 거의 지옥과 같이 되어 버렸다). 또한 성도들이 그들의 헌신과 순종에 있어서 더욱 거룩한 천사들과 같이 되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우리가 "땅 아래"(under the earth)에 있지 않고 "땅 위에"(on the earth)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침묵 속으로 내려가 버린 죽은 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자"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4.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 

왜냐하면 우리의 자연적인 존재(생명)는 이 세상에서 영적인 행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 뜻을 구한 후에는 이 세상의 현실적인 생명에 필요한 양식과 즐거움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바로 이것,  날마다 소용되는 양식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우리의 남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일용한 양식", 가까운 날을 위한 양식을 그에게 구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장차 올 때를 위한 양식, 또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조건에 맞는(잠 30:8) "우리의 생존을 위한 양식," 우리의 지위와 신분에 따라 "우리와 우리의 가족에게 편리한 양식"을 구해야 한다.

여기에 있는 모든 단어는 그 안에 교훈을 가지고 있다.

(1) 우리는 "양식"을 구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온건과 절제를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진미(珍味)나 여분의 양식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맛은 좋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건강에 유익한 것을 구한다.

(2) 우리는 "우리의" 양식을 구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정직과 근면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부터 양식을 구하지 않으며, 또한 "속이고 취한 식물"(잠 20:17)이나 "2을리 얻은 양식"(잠 31:27)이 아닌, 정직하게 얻은 양식을 구하는 것이다.

(3) 우리는 우리의 "일용한" 양식을 구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내일을 염려하지 말고"(34절) 그날 벌어 그날 지내는 자로서 하나님의 섭리에 꾸준히 신뢰해야 한다.

(4) 우리는 하나님께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비는 것이다. 

그것을 팔거나 빌려 달라는 것이 아니라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일용한 양식"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한다.

(5) 우리는 기도하기를, "그것을 우리들에게 주시옵소서. 나에게만 아니라 나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게도 주시옵소서." 

이것은 우리에게 자비와 또한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대한 동정심을 가르쳐 준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우리의 가족들과 함께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우리와 우리 집안 식구들은 함께 먹고 있으며 따라서 함께 기도해야 한다.

(6)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오늘" 우리에게 주실 것을 기도한다. 

이것은 우리의 몸의 결핍이 새로워지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영혼의 소원이 새롭게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날이 더디오느니 만큼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 날마다 기도해야 하며, 우리는 양식 없이 한 날을 잘 지낼 수 있는 것처럼 기도 없이도 잘 지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5.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것은 전자와 연결되어 있다. "또한 사하여 주옵시고"는, 우리의 죄가 용서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생활의 위로나 양식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우리의 일용한 양식"은 만일 우리의 죄가 용서받지 못한다면 "도살한 어린 양"으로 키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가 일용한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에 못지 않게 일용한 "사죄"를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씻음 받는 자"는 "그의 발"을 씻어야 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1) "간구"가 있다. "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의 죄(빚), 당신에게 대한 죄를 용서하신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① 우리의 죄는 우리의 빚이다. 

피조물인 우리는 창조자에게 대한 빚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것에서 면제되기를 기도하지 않으며, 그것을 갚지 않으면 형벌의 빚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 쉽다. 율법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형벌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빚을 진 자는 소송을 당하기 쉽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죄인은 율법에 대해 빚진 자이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②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에게 대한 마음의 소원과 기도는 매일 행해져야 하며, 그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용서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또한 형벌에 대한 책임이 취소되고 무효가 될 수 있도록 또한 우리가 "정죄에 이르게 되지 않도록, 또한 면제되고 그 위로를 가질 수 있게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를 청구하여 얻을 때 우리가 신뢰를 두어야 할 큰 증거는 우리의 죄에 대한 방면(면제)을 떠맡으신 우리의 보증인(오히려 행동에 대한 담보인)이신 주 예수님의 죽음에 의하여 사람의 죄를 위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셨던 속죄(satisfaction)이다.

(2) 이 간구를 강조하기 위한 논거. 

즉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이다. 이것은 공로의 빙거가 아니라 은혜의 빙거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을 거스리는 죄의 용서를 위해 그에게 이르는 자들은 그들을 거스린 자들을 용서하는 것에 대해 자각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주기도문을 말할 때 그들 자신을 저주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의무는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하는 것"이다. 돈의 빚에 관하여 우리는 그들 자신이나 가족을 파산하지 않고는 그 빚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자들에게 그 빚을 달라고 강요할 때에 가혹하거나 엄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것은 상해(傷害)의 빚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에게 빚진 자들은 "우리에게 죄를 범하고," "우리를 때리는 자이며"(마 5:39, 40), 법의 엄격성에 호소하여 벌받아야 할 자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욕과 우리에게 행해진 허물을 참고 견디며, 용서하고 잊어버려야 한다. 이것은 용서와 평화를 위한 조건(자격)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북돋아 준다. 만일 우리에게 이러한 은혜스러운 성벽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생기며, 따라서 그 자신 안에 두드러지고 초월적으로 있는 완전성이다. 그것은 그가 용서의 조건을 우리에게 작동함으로써 우리를 용서하신 증거일 것이다.

6.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 간구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고 있다.

(1) 소극적으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죄의 하물이 옮겨지기를 기도하고 난 후에 우리가 다시 어리석음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시험을 받지 않게 되도록 기도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죄에로 유혹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주여, 사탄을 우리에게로 풀지 마소서. 울부짖는 사자를 잡아매소서. 왜냐하면 그는 간교하고 사득하기 때문입니다. 주여, 우리를 자신에게 내버려두지 마소서. 왜냐하면 우리는 매우 약하기 때문입니다(시 19:13). 주여, 우리 앞에 거침돌이나 덫을 두지 마시고, 또한 넘어질 수 있는 환경에 있게 마소서"이다. 

시험은 기도로서 대항해야 한다. 왜냐하면 첫째로 시험은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며, 둘째로 우리는 시험에 의해 정복되고 이에 뒤따르는 죄와 슬픔을 맛볼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2) 적극적으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악한 자에게서", 마귀 즉 시험하는 자에게서 구하옵소서. 

"우리가 마귀에게 공격당하지 않도록, 또한 그러한 공격에 의해 정복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주옵소서." 또는 "악한 일," 즉 사악한 것들 중 가장 나쁜 죄에서, 또는 사악에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사악한 일이나 사탄이 사람을 유혹하고 그들을 빠뜨리는 사악한 일에서 구하옵소서. "주여, 우리를 세상의 악, 정욕을 통해 세상에 있는 부패에서 구하옵소서. 세상에 있는 여러 상태의 악에서, 죽음의 악에서, 죄악인 사망의 쏘는 것에서 우리를 구하옵소서.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악한 마음에서 구하시며, 악한 자들이 우리에게 거침이 되지 않고 또한 우리가 그들에게 미끼가 되지 않도록 그들에게서 우리를 구하옵소서."

Ⅲ. 결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어떤 사람은 이것을 다윗의 송영과 결부시키고 있다. "여호와여, 광대하심이 주의 것이로소이다"(대상 29:11). 주기도문의 송영은,

1. 앞서 언급한 간구를 강조하기 위한 청원의 형식이다. 

하나님을 움직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 변백한 말을 입에 채우며(욥 23:4), 기도로 하나님께 간청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믿음을 격려하고, 열심을 일으키기 위해 또한 그 둘을 증명하기 위해 그에게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인 것이다. 

그런데 기도에 있어서 가장 좋은 호소 제목은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거나 또한 그가 그 자신에 대해 알려 주신 것에서 취한 것들이다. 우리는 우리의 청원의 성질과 또 그 탄원의 절박성 때문에 하나님과 겨루어 씨름해야 한다.

여기에 있는 청원은 첫번 조목의 세 가지 간구와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나라가 임하옵시며(나라가 당신의 것이옵니다), 뜻이 이루어지며(권세가 당신의 것이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영광이 당신의 것이옵니다)." 또한 우리 자신의 특별한 임무에 관하여 이러한 것들은 격려가 된다.

"나라가 당신에게 있사옵나이다. 당신을 세상을 지배하시며 성도를 보호하시나이다. 당신을 그 일을 자발적으로 하시옵니다." 하나님은 왕과 같이 베풀고 구원하신다. 

"권세가 당신에게 있사옵니다. 그 나라를 유지하고 보존시키며, 당신의 백성에게 당신의 모든 좋은 약속을 맺기 위해 권세가 당신에게 있사옵니다."

 "영광이 당신에게 있사옵니다." 성도의 기도에 응답하여 성도들에게 주어지고 또 그들을 위해 행해지는 모든 것들의 목표인 "영광이 주의 것이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찬양"이 주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도에 있어서 위로와 거룩한 신뢰의 주제이다.

2. 이 송영은 칭찬과 감사의 형이다. 

하나님께 대한 최고의 간구는 그에 대한 칭송이다. 그것은 더욱 자비를 얻는 방법이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받기에 합당케 한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모든 청원에 있어서 칭송은 괄목할 만한 몫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합당하다. 왜냐하면 칭송은 "성도들에게 합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평하고 평등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드리는 것은 그가 그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 아니라(그는 천사의 세계에 의해 칭찬을 받는다), 그것을 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할 때 그의 계획에 순응함으로써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은 우리가 할 의무이다.

 칭송은 하늘 나라의 일이며 행복이다. 장차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는 자는 누구든지 현재 그들의 하늘나라를 시작해야만 한다.

 이 송영이 얼마나 완전한 것인가를 살펴 보라. "나라와 권세와 영광," 이 모든 것이 당신에게 있사옵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을 여러 가지 말로 찬양하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하다는 사실이다. 참된 성도는 자기가 하나님에 대해 결코 충분히 영광스럽게 말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말씨가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그것이 "영원히"라는 말이다. 하나님에게 "영원히"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그것은 영원히 마땅하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요, 또한 위에 있는 천사들과 성도들로 더불어 영원히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진지한 소원을 암시하기도 한다(시 51:14).

끝으로, 여기에서는 이 모든 것들에 우리의 "아멘"(그렇게 되시기를)을 첨가하라고 교훈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멘"은 허락이다. 그의 "명령"은 그것이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아멘"은 요약된 소원일 뿐이다. 

그렇게 말함은, "그렇게 되어지이다"라는 뜻이다. 우리가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은 들어주시리라는 우리의 소원과 확신의 증거이다. 

"아멘"은 앞서한 모든 간구에 연관된다. 따라서 우리의 연약함에 대한 동정에서,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종결함으로써, 세부적인 말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과 실언했던 것을 총괄적으로 함께 모을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가 유쾌한 마음으로 경건한 의무를 마칠 수 있기 위해서는 다소 온화하고 힘있게 그 의무들을 결론짓는 것이 좋다. 

옛적에 선한 사람들은 모든 기도의 끝에 크게 "아멘"이라고 말하였다. 만일 그것이 사도가 지시하는 것과 같이(고전 14:16) 이해심을 가지고 올바르게 행해진다면 그것은 칭찬할 만한 관습이 된다.

주기도문에 있는 간구의 대부분은 유대인들의 기도에서 또는 그 기도와 같은 취지로 일반적으로 사용되어 오던 말이다. 

그러나 여섯 번째 간구에 있는 구절들, 즉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 주님은 여기에서 그것을 첨가한 이유를 보여 주고 있다. 즉 비록 그럴 만한 충분한 근거는 있었지만 그 시대의 사람들의 까다로움과 소송하기 좋아함, 심술궂음에 대한 어떤 개인적인 비난에서가 아니라 이 일 자체의 필요성과 중요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할 때 우리에게 손상을 입힌 자를 우리가 용서하는 것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신다. 따라서 우리가 사죄를 위해 기도할 때는 우리 자신이 그 의무를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속박되기 위해서 그 의무에 대한 우리의 자각을 언급해야만 한다. 그 비유를 보아(마 18:23-25). 이기적인 성품은 이것에 순응하기를 싫어하며, 따라서 여기에 비난되고 있다(14, 15).

1. 약속에 있어서.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실 것이다." 

이것이 요구되는 유일한 조건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회개와 신앙, 새로운 순종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로 다른 미덕이 작용하고 있는 곳에는 남을 용서하는 미덕도 있게 되는 것처럼, 이 미덕은 우리들의 다른 미덕의 진지성에 대한 좋은 증거가 될 것이다. 

그의 형제를 향하여 가엾게 여기는 자는 이로서 그가 그의 하나님을 향해 회개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주기도문에서 "빚"이라고 불리운 것이 여기에서는 "과실," 즉 손상의  "  빚 " 우리의 육체나 물건, 명성에 있어서 우리에게 향한 잘못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과실"은 허물(paravptwma, 거침, 미끄러짐, 넘어짐)을 경감시켜서 하는 말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에게 행해진 손상을 보다 경감해서 말하고 이해해 주는 말로 칭찬하는 것은 곧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데 대한 좋은 증거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런 일을 "큰 죄"라고 부르지 않고 "과실"이라고 부르며, 고의적인 손상이 아닌 우연한 실수라고 부른다. "그것은 우연한 착오로다"(창 43:12). 

그러므로 그 결과를 선용하라. 우리는 용서받기를 원하는 한 남을 용서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의를 품거나 보복을 계획해서는 안 되며, 우리의 형제가 우리에게 행한 손상을 나무라거나 그에게 일어나는 어떤 상해를 기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를 돕고 그에게 선행을 하려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하며, 또한 그가 회개하고 다시 친구가 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이전과 같이 그와 더불어 허물없이 친숙하게 되어야 한다.

2. 경고에 있어서.

 "너희가 너희를 손상시킨 자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희가 그 밖의 다른 필수적인 조건을 가지지 못하고, 또한 사죄 받기에는 전혀 부적합하다는 불길한 징조인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아버지라고 부르며 또한 아버지로서 너희에게 합당한 은혜를 베푸시는 너희 아버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만일 너희가 다른 장점들은 많이 가지고 있지만 용서하는 것이 크게 부족하다면 너희는 사죄의 위로를 기대할 수 없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 자비를 찾으려고 하는 자들은 모름지기 그들의 형제들에게 자비를 보여 주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에게 "분노와 다툼이 없이"(딤전 2:8) 거룩한 손을 들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은혜의 손을 펼 것을 기대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분노 가운데서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분노 가운데서 응답하실 것이다. "분노 가운데 행해진 기도는 쓸개에 기록된다"는 말이 있다. 유순함을 잊지 말라!!

우리가 한 데나리온의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에게 빚진 1만 달란트의 빚을 용서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위대한 화평 조성자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해"할 뿐만 아니라 서로가 화목하기 위함이며, 이것에서 우리는 그를 쫓아야만 한다. 

그리스도가 여기에서 강조한 것을 경시하려는 것은 그릇된 가정이며 위험스러운 오만이다. 사람의 걱정이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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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 생활(마 6:16-18)

여기에는 앞의 구제와 기도 때와 같이 금식할 때 위선에 대해 경고를 주고 있다.

Ⅰ. 여기에는 종교적인 금식이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요구되는 의무라는 것이 추측되고 있는데, 그때는 하나님이 그의 섭리에 있어서 제자로 불리우거나 어떤 사건에 대한 그들 자신의 영혼의 처지가 그것을 요구하는 때이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마 9:15). 

여기에서 금식이 맨 나중에 두어진 것은 그 자신을 위해 의무라기 보다는 오히려 다른 의무를 위해 우리에게 배치된 수단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구제와 금식의 생명과 정수로서 양자 사이에 들어간다.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경건한 유대인들 가운데 일반적으로 사용된 자발적인 헌금과 같이 특별한 사람들이 그들 자신에 대해 규정을 내린 것과 같은 개인적인 금식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하루를, 또 어떤 사람은 이틀이나 매주를 금식하였다. 이 날에는 그들은 해질 때까지 먹지 않았으며, 그때는 매우 삼가서 이 일을 했다. 그리스도께서 책망하신 것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는 바리새인들의 금식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그들의 자랑이었다(눅 18:12).

금식은 칭찬할 만한 행동이며, 기독자들이 일반적으로 이들을 멸시하는 것은 슬퍼해야 한다. 안나는 많이 많이 금식하였으며(눅 2:37), 고넬료도 금식하고 기도하였다(행 10:30). 초대 교회 기독자들은 많이 금식하였다(행 13:3). 

경건을 위한 개인적인 금식은  당연한 것으로 상정되고 있다(고전 7:5). 금식은 자기 부정의 행동이요 육신의 고행이며, 우리 자신에 대한 거룩한 보복이며, 하나님의 손 아래 놓이는 겸손이다. 

최고로 성장한 기독자는 이로써 그들은 자랑할 것이 없으므로 일용한 양식에 대해 하등의 가치가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금식은 육체와 그 욕망을 억제하며, 마치 풍족한 빵이 우리를 졸립게 만드는 것처럼 우리를 경건의 연습에 있어서 보다 더 생기 있게 만들기 위하여 필요한 수단이다. 바울은 "종종 금식하였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몸을 제어하고 복종시켰던 것이다."

Ⅱ. 우리가 금식의 상을 잃지 않도록 "위선하는 자들"이 하는 것처럼 이 일을 행치 말라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억지로 이 의무를 수행하면 할수록 그 상은 더욱 잃게 마련이다. 그런데,

1. "위선하는 자들"은 그들이 금식의 생명이요 정수인 영혼의 회개나 겸손이 없으면서도 금식하느라고 가장하였다. 

그들의 겸손은 흉내만 내는 가짜 금식이었고 본체가 없는 한낮 겉치레와 그림자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실제의 자기보다 더 겸손을 가장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에게 더 큰 무례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를 속이려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이며 그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것을 금식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다(사 58:5). 육체적인 연습이 그것의 전부라면 유익이 적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나 그 자신에 대한 금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2. 그들은 그들의 금식을 널리 선포하였고, 그들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과 더불어 금식하는 날임을 주시하도록 하기 위해 이 일을 행하였다. 

이러한 금식 날에 그들은 골방에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거리에 나타났다. 그들은 풀이 죽은 시늉을 했으며, 우울한 표정, 더디고 엄숙한 걸음걸이를 취하였다. 그들은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얼마나 자주 금식하는가를 알도록 함으로써 그들을 열심 있고, 고행하는 사람으로 칭송하도록 하기 위하여 철저히 자신들을 위장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감각적인 죄악인 바 그자신들의 쾌락을 어느 정도 억누른 사람이, 영적인 죄악이며 역시 위험스러운 자신들의 교만에 의해 파멸 당할 것이라는 사실은 슬픈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그들은 역시 "자기 상," 즉 그들이 열심히 바라는 사람의 칭찬과 갈채를 "이미 받아버린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받았고," 그냥 그것이 전부이다.

Ⅲ. 개인적인 금식은 어떻게 행해야할 것인가가 교훈 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개인적으로 지켜야 한다(17, 18절). 그는 우리가 얼마나 자주 금식할 것인가에 대해 언급하시지 않고 있다. 환경이 서로 다르며, 그 때마다 지혜가 할 바를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씀 안에 있는 성령은 그것을 마음 안에 있는 성령에게 맡겨 두었다. 

그러나 유의해야 할 것은 너희가 이 의무를 이행할 때는 언제든지 네 자신을 하나님께 입증해 보이려고 노력해야 하며 결코 사람들의 칭찬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겸손은 언제나 우리의 겸허(겸비)에 수반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금식의 실제성에 대한 어떤 것을 약화시키려고 가르치시지는 않는다. 그는 "소량의 음식을 먹고 적게 마시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니, "몸으로 고통을 받게 하라. 그러나 그것을 나타내려고 하지 말라. 평상시의 모습과 태도, 복장을 하라. 네 몸의 음식을 삼가는 동안 다른 사람, 아니 가장 가까이 있는 자에게 그것을 보이려고 하지 말라. 네 기도를 감추기 위해 평상시 하는 것처럼, 유쾌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그리하면 마지막 날에 칭찬을 잃어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에게서 칭찬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칭찬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금식은 의무의 내심인 영혼의 겸손(시 35:13)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너의 주요한 관심이 되게 하라. 그리고 네 겉모양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 하지 말라. 만일 우리가 경건한 마음으로 금식을 하며, 겸손하며 우리의 증거를 위해 하나님의 전능에 신뢰를 두며 우리의 상을 위해 선하심을 믿는다면, 그가 "은밀한 중에 보셨다"는 것과 "공개적으로 상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경건한 금식은 올바르게 지켜지기만 한다면 영원한 금식으로 머지않아 보상받게 될 것이다. 개인적인 금식을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려면 사람의 칭찬(우리는 이것을 받을 목적으로 금식해서는 안 된다)과 또한 비난(그것을 두려워하여 금식하기를 꺼려해서는 안 된다)에 자신을 죽은 자로 만들어야 한다. 보라, 다윗의 금식은 도리어 그에게 욕이 되어 돌아왔었다...그러나, 주께서 옳다 인정하셨다!!(시 6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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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보물과 하늘의 보물(마 6:19-24)

세속적인 마음은 다른 징후만큼 일반적이고도 치명적인 위선의 한 징후이다. 

사탄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그럴 듯한 신앙 고백의 미명 아래, 그 어떤 죄보다도 바로 이러한 죄를 통해서 영혼을 더 확실하고 굳게 붙잡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사람의 칭찬"을 열망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나서 그 다음으로 세상의 부귀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위선하는 자들처럼 되지 않기 위하여, 그들이 행하는 것처럼 행하지 않기 위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이 범하는 근본적인 잘못은 "자기 상"을 위해 세상을 택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재물과 목표, 주인을 선택함에 있어서 위선과 세속적인 것에 유의해야 한다.

Ⅰ. 우리는 "우리가 쌓아둔 재물"을 선택함에 있어서 유의해야 한다. 

누구든지 사람은 "재물"과 몫을  [ 이 땅에서 필요한 분복=헬레크로서 주신바 되었기에 ]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이것에 마음을 두고 미래를 위해 의지한다. 그것은 "좋은 것"이라 솔로몬은 강조하고 있다(전 2:3). 

사람은 가장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 다른 일들에 무엇보다도 만족과 신뢰를 두는 것을 가지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의 재산을 탈취하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여기에는,

1. "현세적으로 보이는 것"을 우리의 최선의 것으로 삼는 것과 우리의 행복을 이것에 두는 것에 대해 "선하고 좋은 경고"를 하고 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으니, 지금도 동일한 선한 마음을 유지하도록 하라. 

"보화"는 그 자체가 적어도 우리 의견으로는 값지고 귀한 무엇이 풍부함을 말하며, 후에 크게 도움이 되는 그런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 보물을 쌓아 두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면

(1)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최고의 것으로 여기거나 또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이나 우리에게 가장 쓸모 있는 것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우리는 라반의 아들들이 했던 것처럼 그것들을 영광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그들은 "뛰어난 영광"에 비하여 아무 영광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인정해야 한다.

(2) 우리는 탐심하는 자들과 같이 이러한 일들의 풍부함에 대해 욕심을 내거나 더욱 이것들을 붙잡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3) 우리는 장차 올 때에 우리의 안전과 공급을 위해 이것들에게 신뢰를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황금에게, "너는 내 소망"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4)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가 필요로 하고 원하는 모든 것이나 되는 것처럼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적은 것에도 만족해야 하며, 모든 것을 가져야만 만족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의 "위로"(눅 6:24)나 "좋은 것"(눅 16:25)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후손"을 위해서 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세상에서 "우리의 자신들"을 위해 쌓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 우리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위해 쌓아 두는 것"은 우리의 것이다. 

현명하게 선택하는 것은 당신에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네가 스스로 선택하며, 선택한대로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우리의 능력이 얼마나 되며, 우리가 얼마나 존속되는가를 알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땅에 보물을 쌓으려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2. 여기에는 우리가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을 우리의 "보물"로 여겨서는 안 되는 "이유"가 제시되어 있는데, 그것은 잃어버리거나 녹슬기 쉽기 때문이다.

(1) 안에서의 부패 때문에.

 "땅 위에 있는" 보물에는 "좀과 동록"이 해친다. 

만일 "보물"이 좋은 옷이라면 가장 안전하다고 할 때에 "좀"이 해쳐버리기 때문에 결국 서서히 못쓰게 되고 말 것이다. 

만일 그것이 창고를 가득 채운 사람처럼(눅 12:16, 17) 곡식이나 그 밖의 먹을 것이라면 "녹"(우리는 그렇게 읽는다)이 그것을 "해칠" 것이다. brw'si" ─ 즉 먹는 것, 사람에 의해 먹히는 것인데, 이는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기" 때문이다(전 5:11). 즉 쥐나 해충에 의해 먹히게 된다. 

만나 그 자체는 벌레를 번식시키며 또한 그것은 곰팡이 냄새가 나게 되고 케케묵은 것이 되며, 침해를 당하고 더럽게 되며 못쓰게 된다. 열매는 곧 썩게 된다. 

또한 만일 우리가 그것을 은이나 금으로 이해한다면 그것들은 색이 변하고 서서히 파괴된다. 그것들은 더욱 쓸모 없이 되며 보존하기 어렵게 된다(약 5:2, 3). 

"좀이나 동록"은 그 자체가 금속이나 옷 속에서 배양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세상적인 부귀는 부패하고 녹 쓸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시들게 되며, 없어지고 만다.

(2) 밖에의 강포(폭력) 때문에.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모든 폭력의 손은 "보물"이 놓여있는 집을 겨냥할 것이며 어떤 것도 안전하게 쌓아두지 못하며, 그것을 빼앗길지도 모른다. Numquam ego fortunae credidi, etiam si videretur pacem agere; omniailla quae in me indulgentissime conferebat, pecuniam, honores, gloriam, eo loco posui, unde posset ea, sine metu meo, repetere. Seneca, Consol, ad Helv. ─

즉 나는 운명의 여신이 자비롭게 보인다 할지라도 결코 그녀에게 신뢰를 둔 적이 없다. 그녀의 호의가 베푼 은혜가 어떤 것이라도, 그것이 부귀나 명예, 영광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그것들에 대해 마음이 없으므로, 나에게 아무런 경종을 울리지 않고도 그것들을 취소하는 것은 그녀의 힘에 달려 있다. 쉽게 도난 당할 것을 우리의 "보물"로 삼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일이다.

3. 여기에는 다른 세상의 즐거움과 영광(그것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좋은 것")이 되게 하며 그것들에 우리의 행복을 두게 하는 "좋은 계획"이 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다음과 같다.

(1) 이 땅에 있는 것처럼 확실하게 "하늘에도 보물"이 있다. 

하늘에 있는 보화만이 오직 유일한 참된 보물이며 그들이 완전하게 성화 될 때 성화 된 자가 참으로 도달될 수 있는 하나님의 오른손 곁에 있는 부귀와 영광과 즐거움이다.

(2) 그러한 "보물"에 우리의 "보물을 쌓아 두는 것"은 우리의 지혜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생명에 대한 우리의 칭호를 확실케 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 그것을 우리의 행복으로 신뢰하는 것,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하늘 나라의 것과 비교될 가치가 없는 것으로 하찮게 여기는 것은 우리의 지혜이다. 

우리는 이러한 행복이 있다는 것을 확고히 믿고 이것에 만족하고 결심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이 그러한 "보물들"을 우리의 것으로 삼는다면 그것들은 쌓아지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안전하게 지킬 것을 신뢰할 수 있다. 

그쪽으로 우리의 모든 계획을 세우고, 우리의 모든 소원을 그리고 넓히자. 

그쪽으로 우리의 최고의 노력과 애정을 앞서 보내자. 

우리에게 짐이 되고 우리를 더럽히며 침몰케 하기 쉬운 이 세상의 현금으로 무거운 짐을 지지 말고 가장 안전한 곳에 쌓아 두자. 

그 약속들은 참된 모든 성도들이 그들의 "보물을 하늘나라"의 것으로 바꾸고 장차 그것을 지불 받을 수 있는 수표이다. 따라서 우리는 확실케 될 것을 확실케 해야 한다.

(3) 우리의 "보물"을 안전한 "하늘나라"에 쌓아 둔다는 것은 우리에게 격려가 된다. 

그 자체가 녹 쓸거나 없어지지 않을 것이며 "좀이나 동록"이 그것을 부패시키지 못할 것이다. 또한 억지로나 속임수에 의해 그것을 빼앗기지도 않을 것이다.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그것은 무상의 행복이요 무한의 즐거움이며, "부패되지 않는 기업"이다.

4. 여기에는 우리가 이와 같이 선택해야 하는 "선한 이유"와 또 우리가 그렇게 행했다는 증거가 있다(21절).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땅이든지 하늘이든지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보물"을 선택함에 있어서 올바르고 지혜로울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질, 또한 결과적으로 우리의 생활의 진로는 그것에 따라서 육적이나 영적, 지상적이나 천적(天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늘이 자석을 따르듯이, 해바라기가 태양을 좇아가듯이 "마음"은 "보물"을 따르기 마련이다. "보물이 있는 곳"에 가치와 평가가 있으며, 사랑과 애정이 있다(골 3:2).
우리의 소원과 추구가 가는 곳에 목적과 의도가 돌려진다. 모든 것은 그와 같이 행해진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우리가 그것에 어긋나지 않도록 우리의 관심과 두려움이 있다.
그것에 관하여 우리는 대개 갈망한다.  거기에 우리의 희망과 신뢰가 있으며(잠 18:10, 11), 우리의 즐거움과 기쁨이 있을 것이며(시 119:111), 우리의 생각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내적인" 생각이 있을 것이며, "자유롭고 고정되고 빈번하며 친근한" 생각이 있게 될 것이다.
"마음"은 하나님의 당연한 권리(잠 23:26)이며, 그가 그것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의 "보물"'이 그와 더불어 쌓어져야 하며, 그때에 우리의 영혼은 그에게로 올려질 것이다.
"보물"을 쌓아두는 데 대한 이 명령은 매우 적절하게 앞서의 경고, 즉 "사람에게 보이려고" 경건한 일을 행하려 하지 말라는 경고에 적용될 수 있다.
우리의 "보물"은 우리의 구제와 기도, 금식이요 또한 그로 인한 하늘 상급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이러한 일들을 다만 사람들의 칭찬을 얻기 위하여 행하였다면, 우리는 이 "보물을 땅에" 쌓아 두는 것이요 또한 사람의 손에 맡기는 것이며 그것에 대해 더 이상의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다.
이렇게 행하는 것은 진실로 어리석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도 열망하는 "사랑들의 칭찬"은 부패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곧 녹이 쓸고 좀이 먹고 쓸모 없이 되고 말 것이다.  우매(愚昧)는 죽은 파리와 같이 곧 그것을 부패케 할 것이다(전 10:1).  중상과 비방은"구멍을 뚫고 그것을 훔쳐가는 도적들이다."  그와 같이 우리는 우리의 선행의 모든 "보물"을 잃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헛되어 달리며 공연히 수고한 셈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그것들을 행함에 있어서 우리의 의도를 잘못 두었기 때문이다.
위선적인 봉사는 하늘에 아무 것도 쌓아 두지 못한다(사 58:3). 사곡한 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하나님이 이 영혼을 취하실 때에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욥 27:8).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용납하심을 목표하고 진리안에서 기도하고 금식하며 구제한다면 우리는 그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게 될 것이다. "기념책에 기록된다"(말 3:16).
기념책에 기록되므로 그들은 거기에서 상을 받게 될 것이며 또한 우리는 죽음과 무덤 저편에서 위로를 가지고 그들을 다시 만날 것이다. 외식하는 자들은 "땅"에 기록되지만(렘 17:13), 하나님의 신실한 자들은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다(눅 10:20).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보물은 "하늘에 있는 보물"이며, 이것은 썩거나 도적 당할 수 없다. 하나님의 "선행"은 영원히 불변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와 같이 우리의 "보물"을 그와 더불어 쌓아 둔다면, 우리의 "마음"도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어느 곳이 더 나을까?
Ⅱ.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목표"를 선택함에 있어서 위선과 세속적인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에 관한 우리의 관심은 사람이 가지는 두 종류의 눈에 의해 표현되고 있는데, 즉 그것은 "성한 눈"과 "나쁜 눈"이다(22, 23절).
여기에 있는 표현은 간결하기 때문에 약간 모호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다양하게 해석해야 한다. "몸의 등불은 눈이다." 이것은 분명하다. "눈"은 발견하고 지시한다. "세상의 등불"은 "몸의 등불"이 없이는 우리에게 거의 쓸모가 없다.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눈의 등불"이다. 여기에서 "몸"에 있는 "눈"에 비교되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
1. 만일 "눈," 즉 "마음"(어떤 사람은 이렇게 해석함)이"성하면"─ aJplou'" ─ "값없고 자비로운"이란 뜻이다(이 단어는 종종 그렇게 해석된다. 롬 12:8; 고후 8:2; 9:11, 13 . 약 1:5 과 같이 "선한 눈"이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 잠 22:9).
만일 마음이 선과 자비에 감동을 받아 그곳으로 향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자의 행동, 곧 모든 생활은 "빛으로 충만"하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약 1:27)인 기독자의 증거와 실례로 가득찰 것이며, "사람들 앞에서 빛을 비추는" 선행의 빛으로 가득찰 것이다.
그러나 "만일 마음이 나쁘며," 탐욕스럽고 강퍅하고 움켜쥐며 인색하다면(이러한 마음의 기질은 종종 "나쁜 눈"으로 표현되고 있다, 마 20:15; 막 7:22; 잠 23:6, 7), "몸이 어두울 것이며," 모든 생활이 이방인과 같고 비기독자와 같이 될 것이다. "궤휼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지만, 고명한 자는 고명한 일을 도모한다(사 32:5-8)."
"만일 우리 안에 있는 등불," 우리를 선한 것에로 인도해야 할 그러한 영향력이 "어두우면," 만일 이러한 것들이 더러워지고 세속적이 된다면, 만일 사람 안에 선한 성품이나 친절한 성품이 없다면 사람의 부패나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냐!"
이 의미는 문맥과 일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구제를 베푸는 데 있어서 너그럽게 함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어야"한다. 또한 그것은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해야 한다(눅 12:33; 고후 9:7). 그러나 병행 구절에 나와 있는 "몸의 등불"이란 말들을 보면 전혀 그러한 경우에 들어맞지 않는다(눅 11:34). 따라서 본문에 있는 일관성 때문에 위와 같은 해석이 이 말의 본의라고 결정할 수는 없다.
2. "눈" 즉 "이해"(어떤 사람은 그렇게 읽는다)이다.
 "몸"에 대한 "눈"과 같이, 사람의 행동을 안내하고 지도하는 영혼의 또 다른 기능인 실천적인 판단, 양심을 말한다.
 "만일 이 눈이 성하면," 즉 만일 그 눈이 특히 "보물을 쌓아 두는 일"에 있어서 참되고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면, 은혜와 위로의 등불로 가득찰 감정과 행동을 올바르게 안내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 눈이 나쁘면," 즉, 부패한다면 인도하는 대신에 내부의 능력은 그것에 의해 인도되고 매수되고 치우치게 된다.
만일 이 눈 곧 판단하는 양심이 잘못되고 진리에서 벗어나서 오해와 착각으로 인해 오도된다면 마음과 생활은 "어두움으로 가득찰"것이며 모든 대화는 타락될 것이다. "무지각한 자"는 "흑암 중에 왕래한다"고 말해진다(시 82:5).
 "주님의 촛대"가 되어야 하는 사람의 영이 "도깨비불"(ignis fatuus, 헛된 기대, 현혹시키는 것)이 되는 것은 슬픈 일이며, 또한 "백성의 지도자," 단체의 지도자가 " 다스림 받는 단체나 백성을 미혹케 하는"것은 슬픈 일이다. 왜냐하면 그때에 "인도를 받는 자는 멸망을 당하기" 때문이다(사 9:16).
실제적인 재판에 있어서 오류는 피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는 것"이라고 불리운다(사 5:20). 그러므로 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하려고 애써야 하며, 우리의 눈에 안약을 발라야 할 필요가 있다.
3. "눈"은 즉 "목적과 의도"이다.
"눈"에 의해 우리는 목표를 정하며, 겨냥해 쏠려는 표적과 가려는 목적을 세우며, 목표로 삼아 이에 따라 우리의 행동을 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경건하게 행하는 모든 일에는 우리의 "눈"에 두고 있는 뭔가가 있다. 그런데 "만일 우리의 눈이 성하면," 즉 만일 우리가 진지하게 목표를 삼는다면, 올바른 목적을 정하고 그들을 향해 올바르게 움직인다면, 만일 우리가 순전히 그리고 유일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삼는다면, 그의 영광과 은혜를 구하고 모든 것을 전적으로 그에게로 향한다면, 그때에 "그 눈은 성한 것이다."
바울이 "내게서 사는 것은 그리스도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러하였다. 이런 문제에 옳다면 "온 몸이 밝을 것이다." 즉 모든 행동은 규칙적이며 은혜스럽게 될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들에게 위로를 주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 눈이 나쁘면," 만일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하거나 그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사람의 칭찬을 받으려고 치우친다면, 또는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스럽게 한다고 공언하면서도 우리 자신을 영화롭게 하려고 하며, "그리스도의 일을 추구한다"는 구실 아래 우리 자신의 일을 추구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모든 것을 못쓰게 하며, 모든 생활은 왜곡되고 휘청거릴 것이며, 또한 모든 기초는 흔들려 빗나갈 것이며, 그 상부 건물에는 "혼돈과 온갖 사악한 일"만이 있게 될 것이다.
원주에서 중심이 아닌 다른 점으로 선을 긋는다면 그것들은 가로지르게 될 것이다. "만일 네 안에 있는 등불이" 희미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어둡다"면 그것은 근본적인 잘못이며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파멸을 안겨다 줄 것이다.
목적이 행동을 구체화시킨다. 우리가 목적에 있어서 올바른 것, 즉 "일시적"이 아닌 "영원한 것"을 우리의 목표로 삼는 것이 종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후 4:18).
외식하는 자는 한 쪽을 보면서 다른 쪽으로 노젓는 사공과 같지만, 참된 기독자는 여행의 목표를 눈에 담고 있는 여행자와 같다.
외식하는 자는 아래에 있는 미끼를 노려보며 적당한 기회가 있을 때 내려오려는 솔개와 같이 높이 날아다니지만, 참된 기독자는 아래에 있는 것들을 잊어버리고 보다 더 높이 나르는 종달새와 같다.
Ⅲ.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주인을 선택함에 있어서도 위선과 세속적 마음을 조심해야 한다(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다."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은 "성한(영문에는, "단일한")눈"과 정반대이다. 왜냐하면 "눈"은 주인의 손을 바라기 때문이다(시 123:1, 2).
우리 주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갈라지려 하거나, "땅의 보물"과 "하늘의 보물"을 함께 가지려 하거나 하나님과 사람을 동시에 기쁘게 하려는 사람들의 속임수를 드러내고 있다.
왜 그렇게 할 수 없는가?라고 외식하는 자는 말하고 있다. 제2의 방책을 강구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닌가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들의 종교적인 봉사를 자기들의 비종교적인 관심사로 만들려고 한다. 그리하여, 두 방법(길)을 이용하려고 원하는 것이다.
거짓 어머니는 어린아이를 둘로 가르려고 했다. 사마리아인들은 하나님과 우상을 혼합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은 일은 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것"은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딤전 6:5). 여기에는,
1. 규정된 일반적인 격률이 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하물며 두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다)는 것은 유대인들 가운데 있던 한 격언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두 주인의 명령은 언젠가 서로 상반되거나 모순될 것이며, 그들의 입장이 대립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주인"이 함께 간다면, 종은 두 주인을 따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갈라설 때는, 너희는 그 종이 누구에게 속해 잇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두 주인을 올바로 사랑하거나 주목하거나 집착할 수 없다. 만일 이 주인이면 저 주인은 안 되며, 혹 이것이나 저것을 미워하거나 경시해야 할 것이다. 이 진리는 일반적인 경우에 있어서도 분명하다.
2. 이 격률이 눈 앞의 관심사에 적용되어 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재물"(Mammon)은 수리아어로서 "유익"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세상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가 자신에게 "유익"이라고 여기는 것은 모두(빌 3:7) "재물"이다. "세상에 있는 것들(코스모스 바이오스 : Cosmos Bios...그 삼위TRIAD인 바),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재물"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배"가 그들의 "재물"이며 그들은 그것을 섬긴다(빌 3:19).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들의 안일과 잠, 쾌락, 오락이 "재물"이 된다(잠 6:9).  어떤 사람에게는 세상적인 부귀(약 4:13)가 또 어떤 사람에게는 명예와 좋아하는 물건이 "재물"이 된다.
사람들의 칭찬과 갈채는 바리새인의 "재물"이었다. 한 마디로 자기 자신, 즉 세상의 삼위가 한 곳으로 집중되는 일체성,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자아는 하나님과 겸하여 섬겨질 수 없는 "재물"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섬겨진다면 하나님과는 경쟁되거나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해서는 안 된다." 또는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우리는 둘 다 사랑하거나"(요일 2:15; 약 4:4), 함께 붙잡거나, 둘을 섬기거나, 순종하거나, 따라가거나, 신뢰하거나 의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둘은 서로가 모순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 아들아, 나에게 네 마음을 달라"고 말씀하시지만 "재물"은 "아니, 그것을 내게 달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네가 가진 이러한 것들에 만족하라"고 말씀하지만 "재물"은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붙잡으라. Rem, rem, quocunque mode rem─ 즉 돈, 돈,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돈을 붙잡으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네가 하는 모든 거래에 있어서 속이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라. 정직하고 공평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재물"은 "만일 네가 필요하다면 네 아버지도 속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비를 베풀라"고 말씀하시지만, "재물"은 "네 자신을 주장하라. 내세우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유의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지만, "재물"은 "모든 것에 유의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시지만, "재물"은 "세상 사람들처럼 그 날을 사용하라."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재물"의 명령하는 바는 일치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둘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과 바알 사이를 머뭇거리지 말고 내가 섬길 자를 오늘 선택하도록"하라. 그리고 너의 선택에 의해 거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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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세상)의 염려와 하늘의 염려(도우심)(마 6:25-34)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보물"과 그 마음이 "세상"에 있다는 나쁜 징조인 바, 이 세상의 사물들에 관하여 불안하고 괴로워하며 믿지 못하여 염려하는 죄보다 더욱 자세하고 진지하게 그의 제자들에게 경고하고, 또 더욱 다양한 논증으로서 경계시켰던 죄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그는 자세하게 그 죄를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는,
Ⅰ. 규정된 금지가 있다.
이 세상의 일들에 관해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주 예수님의 권고와 명령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는 우리의 율법 수여자와 우리 마음의 지배자로서 이것을 말씀하시며, 우리의 위로자와 우리의 즐거움의 조력자로 말씀하신다.
그가 말씀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네 목숨을 위하여, 네 몸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25절).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하지 말라"(31절). "염려하지 말라").
외식과 마찬가지로 세상적인 염려에 대해 세 번씩이나 반복하고 있으며, 이것은 공연한 반복(중언부언)이 아니다. 동일한 취지에서 "교훈에 교훈을," 점층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염려는 "우리를 쉽사리 공격하는 죄"이다. 이것은 염려 없이 사는 것이 그리스도를 얼마나 즐겁게 하며, 또 우리가 얼마나 깊이 관심해야 할 일인가를 나타낸다.
세상에 관한 염려로 자신들의 마음을 나누거나 부숴뜨려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제자들에게 대한 주 예수님의 반복된 명령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사물들에 관한 "보살핌"도 있는데 그것은 정당한 의무이기도 하며, 덕스러운 여인이 해야 하는 것으로 추천되고 있다(잠 27:23). 이 단어는 교회에 대한 바울의 염려나 영혼의 상태에 대한 디모데의 염려에 사용되고 있다(고후 11:28; 빌 2:20).
그러나 여기에서 금지되고 있는 "염려"는,
1. 불안하게 하고 고통을 주는 "염려"이다.
따라서 마음을 이리저리로 분주하게 재촉하며 불안 속에서 망설이게 한다.
또한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즐거움을 혼란시키고 그 안에 있는 우리의 소망을 좌절케 하며, 잠을 깨우며 우리 자신과 친구의 기쁨,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쁨을 방해한다.
2. 불신적이고 믿지 못하는 "염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속한 자를 위하여 선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생명"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 즉 양식과 덮개를 마련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맛좋은 진미가 아니라 필요한 것을 주신다고 하셨다. 그는 결코 "그들은 진수성찬을 먹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정녕 그들은 먹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장차 올 때를 위한 과도한 염려나 그러한 양식의 결핍에 대한 두려움은 이러한 양속에 대한 불신과 신적 섭리의 지혜와 선함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다. 또한 그것은 악한 것이기도 하다.
현재의 생존에 관하여 우리는 그것을 얻는 데 있어서 정당한 수단을 사용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시험하게 된다.
우리는 부르심에 부지런해야 하며, 우리가 가진 용돈을 배당함에 있어서 현명해야 하며, 또한 "일용한 양식"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또한 만일 그 밖의 모든 수단이 실패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줄 수 있는 자들의 구원을 요구할 수 있고 요구해야만 한다. "빌어 멀자니 부끄럽구나"(눅 16:3)라고 말했던 사람은 "부수러기로 배불리려는 사람"(21절)과 마찬가지로 최선의 사람은 못되었다.
그러나 장래에 대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때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어떻게 줄 것인가를 아시는 하나님께 대한 질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편안히 안주하게 하자! 은혜스러운 태평은 세상의 수고와는 반대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잠과 같다(시 127:2). 여기에 있는 주의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네 목숨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목숨은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최대 관심사이다. "그는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을 그의 목숨을 위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
① 네 목숨의 의 "연장"에 관해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께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목숨을 "연장시키거나 단축시키도록" 말씀드리라. "내 때는 네 손에 있다." 그것들은 "선한손 안에 있다."
② 이 목숨의 "평안"에 관해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께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이생을 쓰라리게 하거나 달콤하게 하시도록 말씀드리라.
우리는 이 목숨의 필연적인 양식, 즉 "음식"과 "옷"에 관하여 염려하지 말자. 하나님은 이것을 약속하였으며, 따라서 우리는 더욱 확신 있게 기대할 수 있다.
 "무엇을 먹을까?"라고 말하지 말라. 이것은 안절부절 못하거나 거의 실망하는 사람이하는 말이다. 비록 많은 선한 사람들이 적은 것을 기대하지만, 그러나 현재의 양식은 적게나마 주어진다.
(2) "내일," 즉 앞으로 오는 미래를 위해 "염려하지 말라."
다음 해에 어떻게 살 것인가, 늙었을 때 어떻게 살 것인가, 뒤에 남겨둘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 우리는 내일에 대해 "자만"해서도 안 되지만 내일이나 내일의 사건을 위해 "염려"해서도 안 된다.
Ⅱ. 이 금지를 강조하는 이유와 논의.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그리스도의 명령은 실상 우리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는 우리의 영혼의 평안과도 무관하게도 불안과 불신에서 오는 염려라고 하는 이 어리석은 죄를 억제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죄에 얼마나 관심이 깊으며, 그의 "자비를 바라는 자들"을 그가 얼마나 "기뻐하시는"가를 보여 주기 위하여 그 명령은 더욱 강력한 논의로 뒷받침되고 있다.
만일 지혜가 우리를 지배하기만 한다면 정녕 우리는 이 가시에서 해방될 것이다.
근심스러운 생각을 없이하고 제거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우리들에게 "위로하는" 생각을 제시함으로 위로로 채워지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한 염려를 단념하거나 그것을 우리 자신이 부끄럽게 여기기 위해 우리의 마음으로 애쓰는 것은 값있는 수고일 것이다. 그런 염려는 올바른 지혜를 가지면 약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단지 능동적인 신앙에 의해서이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25절).
그렇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현재 일에 참된 가치를 두려고 했던 자들에게 말씀하시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들을 만드셨고 공급하시며 그것들로 우리를 부양하시기 때문이다. 현실이 스스로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의 할 것은,
(1) 우리의 "목숨"은 우리의 "생계"보다 더 큰 축복이라는 사실이다.
목숨이 생계 없이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목숨이나 몸보다 못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 음식이나 옷은 장식이나 쾌락을 위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것에 대해 염려하기 쉽기 때문이다.
음식이나 옷은 목숨을 위한 것이며 그 "목적"은 "수단"보다 더 고상하고 탁월하다. 맛있는 음식이나 화려한 옷은 "땅"에서 비롯되지만, 목숨은 "하나님의 숨"에서 비롯된다.
목숨은 "사람들의 등불"이다. 음식은 그 등불을 밝히게 하는 "기름"이다. 그러므로 부귀와 빈곤의 차이는 아주 하찮은 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중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그들이 똑같은 수준에서 있으며, 단지 하찮은 문제에 있어서만 서로 다를 뿐이기 때문이다.
(2) 이것은 우리에게 "음식"과 "옷"을 위해 하나님을 신뢰할 것과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들에 관한 복잡한 모든 염려에서 안심할 것을 격려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목숨과 몸을 주셨다. 그것은 능력의 행동이었고 은혜의 행동이었으며 우리의 염려 없이 행해졌다. 그것을 행하셨던 그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못할 것인가?─그가 못할 것이 무엇인가?
만일 우리가 몸이나 그 목숨보다 더 나은 우리의 영혼과 영원성에 관해 염려를 한다면 우리는 보다 못한 음식과 옷을 우리에게 마련해 줄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우리의 목숨을 유지시키셨다. 그는 우리를 보호하셨고 생존케 하셨다. 우리가 직면한 악에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는 자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좋은 것"으로 공급해 주실 것이다.
만일 그가 우리를 죽이거나 굶주리게 하시려고 했다면 우리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자주 "우리에 관한 책임을 그의 천사들에게 부여하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2.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여기에는 섭리에 의거한 기능을 따라서 보다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에서 취한 논의가 있다. 타락한 인간은 "공중의 새"들에게 공부를 위해 보내어졌으며, 그 새들이 인간을 "가르쳐야만"했다! (욥 12:7, 8)
(1) "공중의 새"를 눈여겨 보라.
그리고 "음식"을 위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우라(26절). 그리고 "무엇을 먹을까" 불안해하지 말라.
① 그들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를 살펴 보라.
그들을 눈여겨보고 교훈을 받으라. 새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그것들은 수 없이 많으며 몹시 굶주리는 새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편리한 음식으로 부양되고 있다.
겨울에도 먹을 것이 없어 죽는 새는 거의 없다. 그들을 먹일 양식은 해마다 모자라지 않는다. 새는 사람에게 봉사를 거의 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의 배려나 염려를 받지도 않는다. 사람은 종종 그것들을 잡아먹기는 하지만 기르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것들이 어떻게 길러지는가를 알지 못하며, 그것들 중에 어떤 것은 가장 악천후에 가장 잘 길러진다고 한다.
"그것들을 기르시는 분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이시다." 그는 네가 잘 길들인 짐승을 아는 것보다 더 "산의 모든 야생 조류들을 아신다"(시 50:11). 참새가 곡식을 먹기 위해 땅에 앉는 것은 모든 보잘 것 없는 피조물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특별히 유의할 것은 이 새들은 그들 자신의 어떤 염려나 계획 없이 길러진다는 사실이다. "그것들은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개미나 벌은 실로 그렇게 하며, 그것들은 지혜와 근면의 실예로서 우리에게 제시된다. 그러나 공중의 새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들 스스로가 미래를 위해 양식을 마련하지 않으며 날마다 먹을 것이 시시때때로 공급된다. 그들의 "눈"은 "모든 육체를 위해 음식을 마련하시는" 위대하고 선한 집주인이신 "하나님을 호위한다"(문안드린다).
② 하나님을 믿는 데 있어서 너희의 격려를 위해 이것을 활용하라.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그렇다. 확실히 너희는 그러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늘의 "상속인"은 하늘의 "새들"보다 더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보다 더 고상하고 탁월한 존재이며 신앙에 의해 그들은 더 높인 날아다닌다. 그들은 "하늘의 새들보다" 더 나은 특성과 교육을 가지고 있으며 "보다 현명"하다(욥 35:11).
비록 이 세상의 자녀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알지 못한다면 학과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 만큼도 지혜롭지 못할 것이다(렘 8:7). 그것들은 열린 창공을 날아다니지만 너는 하나님께 더욱 친근하고 가까이 가는 것이다.
그분은 그들을 지으신 자시요, 주님이시요, 소유자이시요, 주인이시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이외에 그는 너희의 아버지이시며, 그의 견지에서 "너희는 많은 새들보다 더 가치가 있다." 너는 그의 자녀요 장지이다. 그런데 자기의 새를 먹이시는 분은 정녕 그의 어린아이들을 굶기시지 않을 것이다. 새들은 너희 아버지의 섭리를 믿는다. 그런데 너희는 믿지 않으려는가? 섭리를 믿기 때문에 새들은 내일을 위해 염려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새들은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영위한다. 새들은 "가지에서 노래를 부른다"(시 104:12). 또한 온힘을 다하여 그들의 창조자를 찬미한다.
만일 우리가 믿음에 의하여 새들과 같이 내일에 대해 염려를 갖지 않았다면 우리는 새들과 길이 즐겁게 노래 불러야 한다. 왜냐하면 어느 것보다 더 우리의 기쁨을 손상케 하며 우리의 찬미를 침묵케 하며 우리의 즐거움을 좌절시키는 것은 세상적인 염려이기 때문이다.
(2) "백합화"를 눈여겨 보라.
그리고 "옷"을 위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우라.
"우리가 무엇을 입을까?"라는 것은 우리의 염려의 또 다른 부분이다. 무엇으로 우리를 가릴까, 무엇으로 따뜻하게 할까? 그밖에도 많이 있다. 위대하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하여 무엇으로 꾸밀까? 우리는 옷을 다양하고 맵시 있게 입으려고 많은 염려를 하기 때문에 일용할 양식만큼 종종 이 염려가 생각되고 있다.
그런데 이 염려를 덜기 위하여 "들의 백합화를 생각"하도록 하자. 그것들을 "눈여겨 볼 뿐만" 아니라(모든 눈이 즐거움으로 그렇게 한다) 그것들을 "생각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만일 우리가 생각하기만 한다면 우리가 매일 볼 수 있는 것에서 배울 수 있는 많은 좋은 것이 있다(잠 6:6; 24:32).
① 백합화는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그것들은 한낮 "들풀"에 지나지 않는다. 백합화는 비록 그 색깔에 의해 구별되기는 하지만 역시 "풀"에 불과하다. 따라서 "모든 육체는 풀과 같다."
비록 어떤 사람은 몸과 마음의 타고난 재능에 있어서 백합과 같으며, 많은 칭찬을 받지만 여전히 그것들은 풀이다. 다시 말하면 본질과 구조에 있어서 풀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 동일한 수준에 위치한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다"(벧전 1:24). 이 풀은 "오늘 있다가 내일은 아궁이에 던짐을 받는다." 얼마 있으면 "우리를 알고 있는" 장소는 "우리를 더 이상 알지" 못할 것이다. 무덤은 우리가 장차 던지우게 될 아궁이 이며, 우리는 거기에서 불 속의 풀과 같이 소멸될 것이다(시 49:14).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입을까?라고 내일을 위해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나타내고 있다. 왜냐하면 내일 우리가 수의(시체에 입히는 옷)를 입게 될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② 백합화는 얼마나 "걱정을 하지 않는가"를 생각해 보라.
 "그것들은"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옷을 얻기 위하여 "수고하지 않는다." 종들처럼 제복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여자들이 하는 것처럼 옷을 만들기 위해 "길쌈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이 때문에 이 세상의 적당한 직무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라는 것이 아니다. "손으로 솜뭉치를 들고 손가락으로 가락을 잡고 베로 옷을 지어 파는 것'은 덕스러운 여자의 미덕이다(잠 31:19, 24). 게으름은 그를 "신뢰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시험한다."
그러나 하등적인 피조물을 위해 그들이 수고하지 않아도 양식을 마련하시는 그가 우리의 의무로 삼았던 우리의 수고를 축복함으로써 우리를 위해 더욱 양식을 마련해 주실 것이다. 만일 우리가 병 때문에 "수고나 길쌈"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으로 공급하실 수 있다.
③ 백합화는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가를 생각해 보라.
 "어떻게 자라는가," "무엇으로부터 자라는가"를 생각해 보라. 백합화나 튤립의 뿌리는 다른 구근(球根)과 같이 겨울에는 땅 속에 묻히지만 봄이 돌아오면 그 뿌리는 점차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합화와 같이" 자라게 될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약속되고 있다(호 14:5).
또 그들이 무엇을 향해 "자라나는가"를 생각해 보라. 얼마간은 눈에 띄지 않다가도 백합화는 매우 화려하고 피어나기 때문에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으니라."
솔로몬의 성장(盛裝)은 매우 훌륭하고 우아하였다. 여러 왕과 방백들의 특별한 보물을 헌납 받는 솔로몬은 최고의 옷으로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었다. 특히 전성기에는 그의 영광이 극도에 달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를 가장 아름다운 옷으로 입힌다고 할지라도 백합화의 아름다움에는 미치지 못하며, 튤립의 화단은 그를 무색케 한다. 그러므로 백합화에 의해 압도되었던 솔로몬의 "영광"보다 아무 것에 의해서도 압도되지 않았던 솔로몬의 "지혜"(우리가 있는 곳에서 의무를 행하는 지혜)를 열망하도록 하자. 지식과 덕이 사람의 완전성이니, 아름다움이나 더욱이 훌륭한 옷은 인간을 완성시키지 못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에서 "들풀을 입히신다"고 말해진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피조물들의 모든 탁월성은 그것들의 샘이요,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온다. 말에게 힘을 부여하시고 백합화에 아름다움을 주시는 분은 바로 그분이시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그대로 우리에게 나타나 있다.
④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얼마나 교훈적인가를 생각해 보라(30절).
첫째, "좋은 옷"에 관하여.
이것은 우리에게 전혀 그것을 위해 염려하지 말 것과 그것을 탐하지 말 것과 그것에 대해 자만하지 말 것과 옷 입는 것을 장심품으로 삼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다. 결국 백합화는 이것에 대한 염려에 있어서 우리보다 나은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이 입는 것만큼 아름답게 치장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과 더불어 경쟁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의 치장은 곧 쇠퇴할 것이며 우리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것들은 "오늘 시들고" 내일은 쓰레기처럼 "아궁이에 던짐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자랑하는 옷은 닳아 헤어지며 그 광택은 곧 없어지며 그 색깔은 바래지며 그 모양은 낡은 것이 되며 잠시 후에 그 옷은 헤어지게 될 것이다. 사람은 그의 모든 화려함에 있어서 이와 같으며(사 40:6, 7), 특히 부자는 더욱 그러하다(약 1:10).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둘째, "필요한 옷"에 관하여. 이것은 그것에 대한 염려를 하나님께 던질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여호와 이레(여호와는 준비하신다, 배려하신다) 백합화를 입히시는 분에게 너희가 입을 것을 마련해 주실 것이라는 신뢰를 두라.
그가 이러한 훌륭한 옷을 풀에게 주신다고 하면 하물며 그 자신의 자녀에게 어울리는 옷을 주시지 않겠는가! 그들을 따뜻하게 할 옷들을 "남풍으로 하여 땅이 고요할 때" 뿐만 아니라 "북풍으로 하여 그가 그것들을 동요시킬 때"도 주실 것이다(욥 37:17).
그는 더욱 너희를 입히실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보다 고상한 피조물이요 보다 탁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그와 같이 수명이 짧은 들풀을 입히신다면 하물며 불멸을 위해 만들어진 너희를 더욱 입히시지 않으랴! 니느웨의 자손들이라 할지라도 박넝쿨보다 더 낫다(욘 4:10, 11). 하물며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시온의 아들들이랴 ! 그가 그들에게 부여한 칭호, 즉 "믿음이 적은 자들아"에 대해 살펴 보라.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첫째, 비록 그것이 연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참된 신앙에 대한 격려로 간주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신적인 염려와 적당한 공급의 약속에 대한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위대한 신앙은 칭찬 받게 될 것이며 위대한 일들을 산출할 것이지만, 적은 신앙도 거절당하지 않고 음식과 의복을 공급받게 될 것이다. "건전한" 신자들은 비록 그들이 "강한"신자는 아니라 할지라도 온갖 공급을 받을 것이다. 가정에 있는 어린 아기들은 성장한 자들처럼 먹여지고 옷 입혀질 것이며, 또한 특별한 염려와 보살핌으로 그렇게 될 것이다.
나는 어린아이와 마른나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사 56:3, 5). 왜냐하면 비록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너를 생각하시기" 때문이다.
둘째, "믿음이 적은 자들아"는 그것이 참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연약한 신앙에 대한 비난이다(마 14:31). 그것은 우리의 모든 지나친 염려와 생각의 근저에 있는 것을 나타낸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의 연약성과 우리 안에 있는 불신앙의 잔여물에 기인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보다 더 신앙을 가진다면 덜 염려하게 될 것이다.
셋째, 그러므로 "너희 중에 누가," 너희들 중에 가장 지혜로운 자나 가장 강한 자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27절)
"그 키"를 어떤 사람은 "그 나이"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한 규빗의 단위는 키를 상징하고 있으며, 가장 긴 생애도 손 넓이에 지나지 않는다 했다(시 39:5).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보자.
(1) 우리가 현재의 키에 도달한 것은 우리 자신의 염려나 생각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손 넓이만큼의 어린 아기는 육척의 성인으로 자라났다. 그런데 그 누가 이 키에 한 규빗이라도 더 하겠는가? 그 자신의 예상이나 계획에 의해 할 수 없다.
사람은 그가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에 의해 어떻게 자랐는가를 알지 못한다. 이제 우리의 몸을 만들고 그들을 이러한 크기로 만드신 그분은 정녕 그들의 쓸 것과 먹을 것을 위해 염려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적인 힘과 키의 증가에서 인정되며 필요한 모든 양식을 위해 신뢰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몸을 위해 마음을 둔다는 사실을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자라나는 시기는 생각이 없고 염려가 없는 시기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라고 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은 배려로 기르시는 그가 어찌 우리의 모든 것을 준비하시지 않겠는가?
(2) 우리는 자신이 원한다고 할지라도 현재 우리의 키를 변경시킬 수 없다.
낮은 키를 가진 사람이 키를 더하기 위해 그 자신을 어지럽게 하거나 잠을 깨거나 그의 머리를 때리거나 또는 계속적으로 어떻게 하면 한 자라도 더 크게 할 수 있는가를 염려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우스운 일인가! 결국 그는 자신이 그것을 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며 그러므로 현재의 그대로에 만족하고 인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의 키는 모두가 일정하지 않으며 서로의 키가 차이 있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못되며 크게 생각할 것도 못된다. 우리가 우리의 육체적인 키에 관련하여 생각해 본 것처럼 역시 우리의 세상 재물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을 해야 한다.
① 우리는 자신의 키를 한 치라도 더하려고 욕심내는 것에 못지 않게 이 세상 부귀의 풍성함에 욕심을 내어서는 안 된다.
조금씩 자라는 것으로 충분하다. 갑자기 한치가 커지면 그 사람은 주체스럽고 부담스럽게 될 따름이다.
② 우리는 우리의 키에 만족하는 것처럼 우리의 재산에 대해 만족해야 한다.
우리는 편리한 것을 불편한 것과 비교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불가피한 일을 쾌히 행해야만 한다. 개선될 수 없는 것은 최선으로 삼아져야 한다. 우리는 섭리의 처분을 수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치 삭개오가 나무 위로 올라가 자신의 키를 돋운 것처럼 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의 불편함을 잠자코 받아들여 그것들에 순응하며 자신을 돋우어 불편을 덜어야만 할 것이다.
4.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32절).
세상에 관한 염려는 "이방인적인" 죄이며, "기독자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방인들은 이러한 일들을 구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나은 것들"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 대해 열심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나은 세상에 대해서는 낮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러한 것들을 염려와 근심으로 갈구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 없이 이 세상에 사는" 자들이며 그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우상을 경외하고 예배를 드리지만 구원과 양식을 위해 그들을 신뢰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며 따라서 그들은 염려로 가득차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자에게 있어서는 수치스러운 일이다. 기독자는 보다 더 고상한 원리 위에 세워져 있으며, 또한 섭리자가 계신다는 것과 또 현재의 생명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약속이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을 신뢰하고 세상을 멸시하는 것을 가르치며, 그래야 할 이유를 가르쳐 주고 있는 그런 신앙을 공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자가 이방인들이 행하는 것처럼 행하고 자신들의 머리와 마음을 이러한 것들로 채우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5.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32절).
즉 이러한 필수적인 것들, 다시 말하면 음식과 옷이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 그는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의 필요성을 아신다.
비록 그는 하늘에 있지만 땅에 있는 자녀들의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를 주시하신다. "내가 네 궁핍을 아노라"(계 2:9).
너희는 만일 이러한 좋은 친구가 너희의 궁핍과 곤란을 알기만 한다면 곧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너희의 하나님은 그들을 아신다. 또한 그는 너희를 사랑하시며 긍휼히 여기시는 너희의 아버지이시며 너희를 도우려고 하신다.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는 너희의 필요를 공급할 필요한 자금(수단)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모든 불안한 생각과 염려를 버리라. 네 아버지에게 가라. 그리고 그에게 말씀드려라. "그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 그는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요 21:5)고 말씀하신다. 네가 가지고 있는가의 여부를 그에게 고하라. 그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는 그것을 우리로부터 아시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개할 때에는 우리의 공급을 위해 그의 지혜와 능력, 선하심에 기꺼이 임하도록 하자. 그러므로 우리는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던짐으로써 그것에서 편안함을 얻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해 염려하시는 분은 바로 그이시기 때문이다(벧전 5:7). 우리가 야단법석을 떨어야 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그가 염려하신다면 왜 우리가 염려해야만 하는가?
6.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33절). 여기에 "염려"의 죄에 대한 이중적인 논법이 있다. 네 목숨, 즉 네 몸의 목숨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 왜냐하면,
(1) 너희는 너희의 영원한 목숨, 영원한 목숨에 대해 염려해야 할 보다 크고 나은 일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필요한 것"으로서(눅 10:42) 너희는 그것에 대해 염려해야 하며 또한 그것은 일반적으로 세상적인 염려가 마음에 가득차 있는 사람들에게서 무시되고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우리 자신의 구원을 성취하는 데 보다 더 유의를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하거나 세상에 있는 재산을 성취하려는 것에는 덜 염려를 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의 영혼에 대한 염려야말로 세상을 위한 염려에 대해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이다.
(2) 너희는 이 세상의 필수품을 얻는 데 있어서 그것들에 대해 안달하고 염려하고 초조해 하는 것보다 더 확실하고 용이하며 안전하며 간명한 방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방법이란 곧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고," 자진하여 종교를 네 임무로 삼는 것이다. 이것은 굶게 만드는 방법이라고만 하지 말라. 아니다! 이 방법이야말로 땅에서도 잘 공급받는 방법이다. 2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① 요구된 큰 의무.
그것은 우리의 모든 의무의 총합이요 본질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신앙을 너희의 최대의 주요한 관심사로 생각하라."
우리가 할 일을 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바라고 추구하고 목표로 삼는 것이다. 이 단어는 그 속에 새 계약의 구성에 대한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비록 우리가 도달되지 못하고" 여러 많은 일들에서 실패하고 미치지 못한다 할지라도 성실한 추구(신중한 관심과 진지한 갈구)는 받아들여진다. 여기에서 살펴볼 것은,
첫째, 이 찾는 것의 대상(목적)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이다.
우리는 하늘 나라를 우리의 목표로, 거룩한 성을 우리의 방법으로 삼고 유의해야 한다. "은혜와 영광의 나라의 위로를 너희의 더 없는 행복으로 구하라. 하늘나라를 목표로 삼으라. 그것을 향하여 돌진하라. 그것을 확실케 하려고 노력하라. 이 영광과 영예, 불멸을 추구하라. 땅과 땅의 즐거움에 앞서 하늘 나라와 그 축복을 선택하라."
우리가 그것을 하늘 나라로 만들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종교를 경멸해서는 안 된다. 이 나라의 "행복"을 가지고 그 "그 의"를 추구해야만 한다. 그 의는 "하나님의 의," 즉 그가 우리 "인에" 또한 "우리에 의해"역사 되기를 요구하는 "의"로서, 이와 같은 의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한다. 우리는 "화평함과 거룩함을 쫓아야"한다(히 12:14).
둘째, 찾는 순서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너희 자신의 영혼과 다른 세상을 위한 염려가 다른 모든 염려에 대신하도록 하라. 이 세상의 목숨에 대한 모든 관심사를 장차 올 생명의 것에 예속시키도록 하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들보다 그리스도의 일들을 더 추구해야 한다. 만일 그들이 이전에 경쟁을 했다면, 우리는 어디에 우선권을 주려고 했는가를 기억해야 한다. "이 일들을 먼저 구하라. 너의 날에 먼저 구하라. 청춘의 아침을 하나님께 드려라. 지혜는 일찌기 추구되어야 한다. 종교적이 되는 것은 때를 맞추어 시작하는 것이 좋다. 먼저 이것을 매일 구하라. 하나님에 대해 눈를 떠라." 가장 필요한 것을 먼저 행하는 것을 우리의 원리로 삼으라. 그로 하여금 첫 번(the First)이 되시게 하고 첫번을 가지시도록 하라.
② 부가된 은혜스러운 약속. "이 모든 것," 즉 생활의 필수품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더 많이 주어지게 될"것이다. 이와 같이 그것은 여분으로 있는 것이다. 너희는 열심히 찾은 것, 즉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찾게 될 것이다. 이 이외에도 너희는 덤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마치 물건을 사는 자가 덤으로(into bargain) 주어진 종이와 포장 끈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경건은 금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8), 솔로몬은 지혜를 구하였더니 그것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부가되었다(대하 1:11, 12). 이 세상에서 편안히 먹을 것을 얻게 되는 최상의 방법은 다른 세계에 대해 전념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이 진리를 굳건히 믿기만 한다면, 오 우리의 마음과 생활에 얼마나 축복된 변화를 일으킬 것인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는 것은 그 일을 올바른 목적을 가지고 시작한 것이 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확신케 하려고 열심히 노력한다면 여호와 이레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다고 여기시는 것이나 우리가 원하지 않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더욱 많이 마련해 주실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목표인 "우리 기업의 분량"을 위해 그를 신뢰하였는가? 또는 그것에의 과정에서 "우리의 컵의 분량"을 위해 그를 믿지 않을 것인가?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결국 가나안으로 인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광야를 통해 떠맡겨진 자기들의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오, 우리가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들에 대해 더 염려한다면 보이는 일시적인 것에 대해 덜 염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또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창 45:20, 23).
7.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34절).
우리는 미래의 사건에 대해 지나치게 동요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매일과 같이 그 자신의 염려와 고통의 무거운 짐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교훈 되고 있다.
(1) 내일을 위해 "염려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만일 궁핍과 고생이 한 날과 더불어 새로워진다면 이와 같이 새로워진 도움과 준비가 있을 것이다. "긍휼"은 "아침마다 새롭다"(애 3:22, 23).
성도는 "매일 정수대로(스 3:4) 아침마다 그들의 팔이 되시며 신선한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시는 친구를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그는 그를 언제나 신뢰하는 자기 백성을 지키신다. 그러므로 그것을 내일의 힘에게 맡기고, 내일의 일꾼이 하게 하고, 내일의 짐꾼이 지도록 하자.
내일과 내일의 일은 우리 없이도 준비될 것이다. 우리는 왜 이미 현명하게 배려된 것을 위해 이와 같이 염려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것은 신중한 예견과 그에 따를 준비를 금지시키는 말이 아니다. 어쩌면 결코 닥치지도 않거나 닥치더라도 쉽사리 견딜 수 있을 일에 대한 곤란이나 역경, 또는 그 피해를 미리 생각하여 안달하고 불안에 떠는 것을 금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의미는, 현재의 의무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자," 그리고는 "하나님께 결과를 일임시키자," " 한날의 일을 그 날에 하자," 그리고는 "내일로 하여금 그에 따르는 일을 가져오도록 하자"는 것이다.
(2) 내일을 위한 염려는 부유케 되려는 자들이 빠지는 "어리석고 해를 끼치는 정욕들" 중의 하나이며, 그들이 자신을 찌르는 "많은 근심들" 중의 하나이다.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오늘은 그것에 수반하는 많은 근심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예견"함으로써 무거운 짐을 "축척"할 필요가 없으며 오늘의 괴로움에 첨가시키기 위해 내일의 괴로움에서부터 혼란을 차용해 올 필요도 없다.
내일의 괴로움이 어떤 것일까, 어떻게 될 것인가는 불확실하며, 그것들이 올 때 염려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다른 날에 속한 염려와 근심(이것은 장차 그것들이 올 때 결코 가벼워지지는 않을 것이다)으로 오늘 스스로 자신에 대해 염려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섭리하시는 분이 조금씩 견디라고 현명하게 명령한 것을 단번에 끌어내리려고 하지 말자. 이 모든 사실의 결론은, 주님의 제자들은 그들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며, 그들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이 그들에게 허락하신 고난의 결과보다도 자기들이 생각한 고난 때문에 생을 더 어둡고 불쾌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주님 뜻이요. 명령이라는 것이다.
일상적인 기도에 의해 우리는 매일의 고통을 참을 수 있는 능력을 조달할 수 있으며, 그것들에 수반되는 시험에 대해 우리를 무장시킬 수 있으며, 그때에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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