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2.04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마11.JC의자기증거(메시야_요한<엘리야>구약시대종언).침노당하는천국_복음믿음회개_책망심판/JC영접통한참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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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마11장

1.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세례 요한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회개하지 아니하는 도시들

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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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장 (개요)

11장(章)의 내용을 구분한다면,

Ⅰ. 복음 전파의 위대한 사역에 있어서 우리 주 예수님의 지칠 줄 모르는 근면성(1).

Ⅱ. 그가 메시야이심에 관하여 요한의 제자들과 대화하심(2-6).

Ⅲ. 그리스도가 세례 요한에게 대해 가지신 영예스러운 증거(7-15).

Ⅳ. 일반적인 세대의 슬픈 참상을 말하고 또한 요한과 자신의 사역의 성공과 관련된 특별한 신분에 대해 언급함(16-24).

Ⅴ. 복음의 위대한 비밀을 계시함에 있어서 현명하고 은혜스러운 방법을 사용하심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림(25, 26).

Ⅵ. 가난한 자들로 하여금 그에게 와서 지배를 받고 가르침과 구원을 받으라는 그의 은혜스러운 부르심과 초대(27-30).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가 있는 이 11장(章)보다도 더 우리를 경고하기 위해 복음적 화(woes)의 두려움과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 복음적 은혜의 고상함을 서술한 곳은 아무데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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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주하신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마 11:1-6)

어떤 사람은 이 장(章)의 첫 절을 앞 장(10장)과 연결시켜 그 끝 절이라고 하지만 적절하지 않다.

1.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앞장에서 전하셨던 [제자]임명식 설교는 여기에서 그들에게 대한 명령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의 위임은 명령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복음 전파는 그들에게 허락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명령으로 주어졌다. 복음전파 명령, 그것은 그들의 임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도록 규정된 것이다"(고전 9:16). 

그가 그들에게 하셨던 약속은 이 명령들 속에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은혜의 언약은 "그가 명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시 105:8). 

그는 "명령하기를 마치시고"(명령을 끝장내신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교훈은 완전하신 교훈이다. 그의 일을 끝까지 해내신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2.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을 마치신 후 "거기서 떠나셨다." 

(**매튜헨리의 개인적 부가적 해석 : 

그가 제자들을 "떠날 때"까지 제자들은 그들의 선생을 남겨두고 떠나기를 매우 싫어했으리라.. 

마치 보모가 손을 뗄 때에야 어린아이는 비로소 자기 힘으로 걸어다니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처럼..이제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자신이 함께 있지 않아도 그들 스스로가 자립하고 일하는 방법을 가르치시려고 하였다. ..하기에, 그리스도께서 잠시 동안이나마 그들을 떠나가심은 "제자들을 위하여 마땅한" 것이었다. 

그가 그들을 떠나신 것은, 그가 오랫동안 떠나 있을 때를 위해 준비시키려 하심이며 또한 성령의 도우심에 의해 그들 자신의 손이 "그들에게 충분하도록"(신 33:7 , 그들 스스로가 자립할 수 있도록. 역주) 하시기 위함이요, 또한 그들이 언제나 어린아이가 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그런데 그들의 보냄받은 바 사명을 독자적으로 수행했다는 [후속]기록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은 멀리, 아마도 그들은 유대 지방으로 가서(왜냐하면 이로부터 갈릴리에서 복음이 대부분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교훈을 전파하고, 그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곧 돌아와 여전히 그를 즉각적으로 의존하였으며 그에게서 오랫동안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이와 같이 그들은 위대한 사역을 위해 점차적으로 훈련을 받았던 것이다.)

3. 그리스도는 "가르치시고 전파하시려고" 동네로 가셨는데, 이 동네는 그가 앞서 "이적을 행함으로써"(마 10:1-8) 백성들의 기대를 불러일으키며 그의 환영을 준비시키기 위하여 제자들을 임명[파송]하셨던 곳이다. 이와 같이 하여 "주의 길은 예비 되었다." 

요한은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함으로써 이 길을 준비하였으나 그는 "이적을 행하지는 않았다," 

그리스도와 제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확증을 위하여 "이적을 행하였다." 

[이는 회개와 믿음을 도욱 고양시키는 바] 회개와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하늘 나라의 축복을 위해 백성들을 준비시킨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이적을 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실 때에 그는 마치 이적을 행하는 권한이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보다 더 영예스러운 것처럼 말씀하셨으나 그것은 단지 이 일을 하는 순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생각해 보라,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은 "육신을 구원하는 일"이지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래 목적인 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전파할 것을 명령하셨으며(마 10:7), 또한 그 자신이 전파하는 것을 결코 포기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자신의 안락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동네의 안위를 위하여 일하도록 그들을 보내셨으며 그들을 독려하고 고용하는데 매우 분주하셨다. 

자신들이 편안하려고 게으름을 부리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만 멍에를 씌우는 자는 실로 그리스도에 합당치 못한 자들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주님의 사역에 있어서 일군들이 늘어나고 많아지는 그것을 게으름과 태만에 빠지는 구실로 삼아서는 결코 안되며, 그럴수록 더욱더 자극받고 격려받아서 우리의 사역에 힘쓰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이 분주하면 할수록 우리도 분주해져야 하며, 비록 수가 적더라도 많은 일이 거기에서 행해져야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는 인구가 많은 "동네"로 전파하러 가셨다는 사실이다. 

그는 고기가 많이 있는 곳에 복음의 그물을 던지셨다. 

지혜는 "동네들"(잠 1:21)과 "동네 어귀에서"(잠 8:13) 부르짖는 바, 비록 지도층들은 그리스도를 경시했지만 처음 제공(first, offer 유대인들은 복음의 순서에 있어서 처음이었다-역주)의 특권을 가졌던 "유대인의 성읍에서"  지혜의 말씀은 소리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전파하신 것에 대하여 우리는 들은 바 없으나, 아마도 그 내용과 목적은 그의 산상보훈과 동일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앞서 4장 12절에서 그리스도가 요한의 고난에 대해 들으셨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제,  여기에는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에게 보내었던 메시지와 그것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이 기록되었다(2-6절).

이제 우리는 감옥에 있는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에 대해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들으니라." 

의심할 여지없이 요한은 그것들에 대해 듣는 것을 기뻐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신랑의 참된 친구였기 때문이다(요 3:29). 

하나의 유용한 도구가 일을 못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것 대신에 많은 사람들을 들어 올리시는 방법을 알고 계시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비록 요한은 감옥에 있었지만 천국 복음의 전파는 계속적으로 수행되었으며, 이것은 쇠사슬에 얽매인 그에게 고통을 덜어주며 큰 위로를 주었으리라.

하나님의 백성이 고통 중에 있을 때 "그리스도의 하신 일에 대해 듣는 것"보다 더 큰 위로를 주는 것은 없다. 

특별히 그들 자신의 영혼 속에서 그것들을 체험하는 것 이상의 위로는 그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감옥을 궁전으로 바꾼다. 

그리스도는 여하한 방법을 써서라도 양심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그의 사랑의 암시를 나타내실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즐거움으로 그것들을 대해 경청하였다.

"보지 못하고" 듣기만 해서도 "믿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그의 제자들 중 두 사람을 그에게 보내었다. 

그 제자들과 그리스도 사이에 오고간 대화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Ⅰ.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행한 질문.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 

이것은 심각하고 중요한 질문이다. "당신은 약속된 메시야입니까? 당신은 그리스도입니까? 말씀해 주십시요."

1. 메시야가 오셔야만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메시야라는 칭호는 구약의 성도들에게 잘 알려진 이름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시 118:26)이다. 그는 지금 와 계시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기다려야 할 그의 또 다른 도래(재림-역주)가 있다.

2. 그들의 말하는 바 암시하고 있는 것. "만일 당신이 오실 그이가 아니라면 그들은 "또 다른 사람을 기다리려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는 오실 그이를 기다리는 데 지쳐서는 안 되며 또한 그를 즐거워하게 될 때까지는 더 이상 그를 기다릴 수 없다고 말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조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성급하지말라!!] 비록 그가 지체하시더라도 기다리라. 장차 오실 그이는 우리의 때에는 아닐 수도 있으나 반드시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들이 암시한 것은, 만일 당신이 바로 오시기로 약속된 그분이라는 확증을 주신다면, 그들은 의심없이 만족할 것이며 다른 사람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4. 따라서 그들은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라고 물었다. 

세례 요한은 그의 입장에 대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요 1:20)고 말하였다. 그런데,

(1)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세례 요한은 그 자신의 만족을 위하여 이 질문을 전달했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가 그리스도에게 대해 고상한 증거를 가졌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요 1:34)과 하나님의 어린 양(29절)으로 선포하였다. 

또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자"(33절), "하나님에게서 보내심을 받은 자"(요 3:34)라고 선포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가 오랫동안 약속되고 기대되었던 메시야라는 사실이 보다 더 분명하고 완전하게 확증되기를 바랐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그리스도와 또한 그에 의한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확증되는 것은 여러모로 좋은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그가 자신을 세상에 나타낼 때에 가지게 될 것이라고 기대되었던 바, 외적인 화려함과 능력을 가지지 않고 나타나셨다. 

요한의 제자들은 바로 이것에 걸려 넘어졌으며, 아마 요한도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질문의 밑바탕에 있는 이러한 의도를 감지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다. 

대중화된 오류에 대해 그냥 참고 견디며 넘어가는 것은 아무리 선량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려운 일이다.

(2) 요한의 의심은 [아마도]그의 현재 환경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는 죄수였으며 아마 시험을 받아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을 것이다. 

만일 예수가 메시야라면, 어찌하여 그의 친구요 선구자인 내가 이러한 고통 가운데 끌려오도록 가만 내버려 두었을까? 이 감옥 속에서 그토록 오래 고통을 받도록 내버려 둘 뿐만 아니라 나를 찾지도 않고 누구를 보내어 안부도 묻지 않으며, 또한 감옥 생활을 위로하거나 돕지도 않는구나? 라고─. 

의심할 여지없이 주 예수께서 감옥에 있는 요한에게로 가시지 않은 것은 적절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즉 그들 사이에 어떤 계약(compact)이 있는 것처럼 보여지지 않게 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이런 속뜻을 모르기에 그의 이러한 행동이야말로 자기를 무시한 것이라고 해석하였을 수도 있다. 

아마도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그의 신앙에 큰 충격을 주었던 것 같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① 참된 신앙이 있는 곳에는 [때때로] 불신앙의 혼합물이 있는 법이다. (섣불리 신앙으로 추정하여 도매금으로 넘겨버리지 말고 세밀히 검증해 보라!!)

최고라고 해서 언제나 강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② 특히 오랫동안 [ 그 어떤 것이 걸림이 되어]믿어지지 못할 때는, 그리스도를 위한 곤란일지라도 종종 견디기 무척 힘든 [신앙의] 시련이 될 수 있다.

③ 선한 사람에게 남아있는 불신앙(remaining unbelief)의 뿌리는 종종 시험 때에 드러나 심지를 건드리며, 확고히 서 있다고 생각되었던 근본적인 진리에 대해서조차 의문을 제기한다. "주님께서 영원히 내어버리실까?" 

우리는, 요한의 신앙이 이 시련에 있어서 실패하지 않았던 바, 다만 그 신앙이 확증되고 확인되기를 소원하였을 뿐이기를 [정말] 바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최고의 성도들조자 그들의 신앙을 더 강화하거나 불신앙의 유혹에서 보호함을 얻기 위하여 그들의 얻을 수 있는 최선의 도움들을 필요로 했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은 믿었지만 여전히 표적을 구하였으며(창 15:6, 8), 기드온도 그러하였다(삿 6:36, 37). 그러나,

(3)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그리스도에게 보내어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은 그 자신의 만족을 위함이라기 보다는 그 제자들의 만족을 위한 것이라고 여긴다.) 비록 그는 죄수였지만 그의 제자들은 늘 그의 곁에 있으면서 그를 보살폈으며 그의 교훈을 받을 준비를 하였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들은 그를 사랑했으며 그를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① 그들은 지식이 박약하고 신앙이 흔들렸으며 가르침과 확증이 필요하였다. 

어쨌든 그들은 [분명히] 이 일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그들의" 선생에 대해 [이렇게 대접받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는]열렬한 질투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우리의" 선생님에 대해서도 질투심을 가졌던 것이다. 

요한의 제자,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상대적으로]요한을[요한이 내는 빛을] 어둡게 하였으며, 그들은 그리스도가 요한과 그들을 거스려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였던 때이후로 그들 자신의 선생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선한 사람은 그들의 관계로 인해 그릇된 편견을 가지기 쉬운 법이다. 

이제 세례요한은 [명백하게]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하였으며, 그들로 하여금 그 자신이 만족했던 것처럼 만족케 되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강한 자는 마땅히 약한 자의 연약함을 생각해야만 하며, 최선을 다하여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도와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세례 요한과 같이 우리 자신이 스스로 도울 수 없을 때에는 참되게 도울 수 있는 자들에게 보내어야 한다. "네가 돌이킨 후에는 네 형제를 굳게 하라."

② 세례 요한은 마치 초급학교에서 대학교로 보내는 것 같이 그의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예견하고 자신의 보호권을 넘겨주어야 할 예수님과 더욱 친근히 사귀도록 그의 제자들을 보내려 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JC사역자의 마땅한 임무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참 목표 되시는 JC에게로 나아갈 것을 명령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교리를 참되고 정확하게 알려고 하는 자는 이해시키려 오신 그분께 자신을 의탁해야만 한다. 

이에 더하여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자는 모름지기 JC를 더 듣고 더 잘알고 깨우치려 하는 적극적, 긍정적으로 추구하는 호기심을 가져야만 한다.

Ⅱ. 여기에는 이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이 기록되어 있다.(4-6절). 

그가 "너에게 말한 내가 곧 그이라"고 [다른데서]말씀하심과 같이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언급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적인 대답이었다.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곰곰히 살펴보아]복음 진리의 확증적인 증거들을 해석하도록 하실 것이며 지식을 캐는 수고를 하도록 하실 것이다.

1. 그는 요한에게 전해야 할 것, 곧 그들이 듣고 본 것을 지적하고 계시다. 

이는 그들 자신들의 입으로 [직접 보고 들은] 그것들을 보다 완전하게 전하여 확증시키도록 하기 위함이다. 세례요한, 그에게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사실 그대로]고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의 지각은 [허망한 것들에 대해 오도됨을 허용함이 아니라] 참되고 마땅하고 적절한 대상들에 대해 바르고 참되게 쓰이도록 동원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지각은 분명한 목적들에서 사용되어야만 한다는 뜻-역주). 그러므로 성체성사[ 성체성사때 쓰이는 떡과 포도주에 jc가 실제로 임재한다, 곧 JC가 <상징이나 은유로서가 아니라>실지로 존재한다는 설 = JC임재의 현존, 화체설...이것은 우상숭배의 오류와 그 확장으로(묵주, 면죄부..) 이끌려지고 있음에 주의하라.]에 대한 천주교의 교리는 [사실 그대로 일어난 것을 직접 보고 , 그 의미를 직접 듣는 바를 믿어 ,그안으로 믿어들어가서 발휘되는 영혼의 초월적, 영적 믿음이 JC를 믿는 참된 믿음 = 내주하시는 JC께서 원하시면 JC이름을 믿는 이를 통해 이적을 일으키기도 하신다!!]"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대로의" 진리와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가 (직접)듣고 본"일에 대하여 언급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1)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적의 능력에 대해 본 것을 가서 요한에게 말하라. 

너희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여 어떻게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걷는가를"알고 있다. 

그리스도의 이적은 공개적으로 또한 모든 사람이 주시하는 가운데서 행해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매우 세심하고 정밀한 조사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서슴치 않고 하려고 했다-역주). ─ 즉 진리는 은폐를 찾지 않는다.

① 그것들은 "신적 능력의 행동"으로 간주되고 있다. 

자연의 하나님이 아니시면 이와 같이 자연의 능력을 지배하거나 능가할 수 없다. 

"소경의 눈을 열게 하는 것"은 특별히 하나님의 특권으로 언급되고 있다(시 146:8). 

그러므로 이적은 하늘의 넓은 인장이며, 그것들이 찍혀진 교훈은 하나님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능력은 그의 진리와 결코 모순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거짓으로 그의 인장(이적)을 둘 것이라고 생각될 수도 없다. 

어쨌든 "거짓된 이적 기사"는 "거짓 교훈"의 증거가 되지만, "참된 이적"은 신적인 위임을 입증한다. 

그리스도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이며 또한 그의 교훈은 "그를 보낸 자의 것"이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② 그것들은 "신적 예언의 성취"로 간주되었다. 

우리의 하나님은 오실 것이며 그 때에는 "소경의 눈이 열일 것이라"고 미리 예언되었다(사 35:5, 6).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의 사역들이 선지자의 말들과 일치가 된다면(그들이 한 것이 분명한 것처럼),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고대하였던 바 "보상을 가지고 오실" 분이심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분이야말로 그렇게 많이 소원하였던 바로 그이시다.

(2) "너희는" 그의 이적을 수반하고 있는 "복음 전파에 대해 들은바"를 그에게 고하라. 

신앙은 비록 보는 것에 의해 확증되지만 들음에서부터 비롯된다.

① "가난한 자가 복음을 전파한다"고 그에게 고하라. (*어떤 사람은 이와 같이 읽고 있다.)

그리스도가 그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고용했던 사람은 세상의 특권을 전혀 가지지 못한 가난한 사람이었다.(그러므로 신적 능력에 의하여 수행되지 못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을 것이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신적 사명을 입증한다.

②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고하라. 

그리스도의 청중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멸시하고 업신여기며, "랍비들"이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던(그 이유는 그들이 보수를 지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들이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대개 "왕이나 군주들"에게 파송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의 무리들"에게 전파하였다. "가련한 양들이 그를 청종할 것이라"(슥 11:11)고 예언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가난한 자에 대한 그리스도의 겸손과 연민은 그가 바로 우리 하나님의 온유하신 자비를 세상에 가져오실 자임은 입증한다.

"다윗의 후손"은 '가난한 자의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되었다(시 72:2, 4, 12, 13). 

또한 우리는 이에 대하여 "가난한 자"란 "세상의 가난한 자"라기 보다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이해할 수 있으며, 따라서 성경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다. 

즉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사 61:1). 

그의 교훈의 참으로 복음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냈다는 사실의 증거이다. 

그것은 죄를 통회하고 참으로 겸손해진 자, 또한 자신을 부정하는 데 참으로 겸손한 자에게 좋은 소식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저축된 자비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신 자들에게 적용된다.

③ "가난한 자가 복음을 받고," 그로 말미암아 부르심을 받는다고 고하라. 

그들은 복음화 되었으며, 복음을 듣고 환영했으며, 복음에 의해 발효되었고 옥토에 심기워졌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복음의 놀라운 효능은 그 신적인 기원(근원)의 증거라는 사실이다. 

선지자들은 "가난한 자"에 대해 불평하기를, 그들은 "주의 길을 알지 못하였다"고 하였다(렘 5:4). 

그들은 가난한 자에게 아무런 선행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들의 버릇없는(소박한) 마음속으로 길을 만들었다.

2. 그는 "그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은 자"에게 "축복"을 선언하셨다(6절). 

그리스도의 사명에 대한 이러한 증거는 매우 분명하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그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거나 그를 넘어지게 하지 않는(이 단어의 뜻이 이와 같다) 자는 그의 교훈을 받지 않을 수 없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에게 복된 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1) 무지하고 지각 없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요지를 거절함으로써 어떤 환경에서 범죄하기 쉬운 일들(그리스도 안에 있는 일들-역주)이 많이 있다. 

그의 초라한 현현, 나사렛에서의 교육, 그의 가난한 생애, 그의 추종자들의 상스러움, 그에 대한 위대한 사람들의 멸시, 그의 교훈의 엄격함, 그것이 혈육에 미치는 모순, 그의 이름을 고백하는 자에 대한 핍박 등.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을 볼 수 없는 자들로 하여금 그에게로 접근치 못하게 하는 방해물들이다. 

따라서 그는 이스라엘에서도(눅 2:34) "비방을 위해 세움을 받은 자"가 되셨으며, "거치는 반석"(벧전 2:8)이 되셨다.

(2) 이러한 편견 및 범죄들을 극복하는 자는 행복하다. "그들은 복 있는 자들이다." 

이 표현이 암시하고 있는 바는, 이러한 편견들을 극복하는 일은 힘든 일이며 또한 그것들을 극복하지 않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들의 신앙이 더욱 "칭찬 받고 영예를 받으며 영광스럽게" 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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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제자들과 대화하심(마 11:7-15)

여기에는 우리 주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하여 하신 칭찬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셰례요한, 그의 명예와 사역을 되살리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 어떤 사람은 아마 세례 요한이 보낸 질문으로부터 그가 연약하고 흔들리며 세례요한 답지 못한 그 어떤 점을 찾아내려 애썼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요한에 대해 이러한 특장점과 칭찬을 열거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런지 모른다. 

우리의 형제들에 대한 질투심과 악의를 없애고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그의 특장점을 들어 그를 칭찬하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의무이다. 

우리는 형제들의 연약한 어떤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 오히려 격려받고 칭찬들을 만한 점들에 대하여 잘 말해 줌으로써, 그들에게 합당한 "그들의 손의 열매"(fruit of their hands)를 줄 필요가 있다. 

세례 요한은 그가 왕성하게 활동하고 그리스도는 조용히 물러나 계셨을 때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였다. 

이제, 그리스도는 공중 앞에 나타나셨고 요한은 구름 속에 가려진 이때에 그는 요한에 대해 [분명히]증거하셨다. 

확고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자는, 주위의 현재 상황이나 분위기가 좋지 않더라도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의 신임과 칭찬을 돕기 위하여 그것을 이용해야만 한다. 이것은 영예를 받을 만한 사람에게 영예를 주는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영예롭게 하기 위해 그 자신을 낮추었으며(요 3:29, 30; 마 3:11), 그리스도가 모든 것(Ail)이 되시도록 하기 위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것(nothing)으로 여겼다. 그런데 지금 그리스도는 그에 대해 이러한 특징을 말씀하심으로써 그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자는 높여질 것이요, 그리스도를 영예롭게 하는 자는 그가 영예롭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 앞에서 그를 시인하는 자를 그는 이 세상에서도 때로 "사람들 앞에서도" 시인하실 것이다. 

요한은 이제 "그의 증거를 마쳤으며" 지금은 그리스도가 그를 칭찬하심으로써 영예롭게 하고 계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는 그의 종들이 "자기들의 일을 다 마쳤을 때" 그들을 위한 칭찬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요 12:26).

이제 요한에 대한 이러한 칭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기로 하자.

Ⅰ. 그리스도는 요한의 제자들이 듣는 데에서만 그에 대해 이와 같이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떠나고 난 직후에도 칭찬하셨다(눅 7:24). 

그는 요한에게 아첨을 하기 위해서나 또는 그에게 알리기 위해 이러한 칭찬들을 하신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하여 그들에게 합당한 칭찬을 해야만 하기는 하지만, 아첨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그들을 거만케 할 위험이 있을 때에는 피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다른 일에 있어서는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고 할지라도 그 자신의 칭찬에 대해서는 잘 견딜 수 없는 법이다. 

교만은 다른 사람이나 자신에게 먹여서는 안 될 썩은 체액(體液)이다.

Ⅱ. 그리스도께서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은 그를 칭찬하기 위함일 뿐만 아니라 백성의 이익을 위한 것이니, 즉 한때는 잘 봉사하였으나 지금은 낯설게 잊혀져 버린(다른 일도 그렇지만) 요한의 사역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게 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잠시동안 행하였으며, "일시 그의 빛에 즐거워하였다"(요 5:35). 

"그런데 이제 생각해 보라.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이 질문을 너희 자신에게 하라."

1. 요한은 "광야에서"복음을 전파하였다. 

그곳은 "멀고 불편한 장소였지만 사람들은 이곳으로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만일 선생들이 구석으로 옮긴다면, 그들 없이 있는 것 보다 그를 따라가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만일 그의 설교가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들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면 정녕 그것을 유의하여 회상할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말씀을 듣기 위해 헤치고 나가는 것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것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유익은 더욱 많아질 것이다.

2. 그들은 그를 보려고 그에게로 나갔다. 

그들이 나간 것은 그의 가르침으로 자신들의 영혼을 만족케 하려함보다는 그의 인격의 특출한 외모로 자신들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깨닫기 위한 것보다는 단지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 말씀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은 배우고 가르침을 받기 위함보다는 보고 보여지기 위하여 그에게로 온 것이다. 

구원에 대해 현명하게 되기 위함보다는 말할 꺼리를 가지기 위하여 온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이 사실을 적용하고 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그 말씀회합에 참석한 자마다 추후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며 그 진보가 어떠하냐는 주님의 질문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설교가 행해질 때 관심과 집중을 흐뜨려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가장 큰 관심은 바로 그때부터 기울여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머지않아 그들은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너희는 이러한 때에 이 예배에 무슨 목적으로 왔느냐? 무엇이 너희를 그곳으로 데려왔느냐? 단순히 습관이었느냐? 혹은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고 진정 참되고 좋은 것,JC를 얻으려는 갈망으로 왔었느냐? 너희는 거기에서 무엇을 가져왔느냐? 어떤 지식, 은혜, 위로? 너희는 과연 무엇을 보려고 갔었느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가 말씀을 읽고 들으려 갈 때는 진실로 우리가 올바르게 갈망한 바로 그것을, 목표한 것을 추구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Ⅲ. 요한에 대한 칭찬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들은 그리스도의 질문에 무엇을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리스도는 말씀하셨다. "나는 세례 요한이 어떤 사람인가를 말하려고 한다".

1. "그는 강직하고 결단적인 사람이며 바람에 날리는 갈대는 아니다. 너희는 그를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는 그러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의 생활 원칙이나 대화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의 불변함과 항구적인 지속성은 주목할 만하다." 

"갈대와 같이 연약한 사람은 갈대와 같이 요동될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심령이 강하였다"(엡 4:14). 

민중의 칭찬하는 바람이 상쾌하게 기분좋게 불었을 때나, 헤롯의 분노하는 폭풍이 맹렬하고 거세게 불었을 때나, 세례 요한은 이러한 날씨에 늘 동일하였다. 

그리스도에게 대한 그의 증거는 "갈대," 즉 표리부동한 사람의 증거가 아니였다. 

그의 증거의 불변성은 요1:20에 나타나 있는데, 즉 "그는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말하였으며" 후에도 그것을 변치 않았다(요 3:28). 

그러므로 그의 제자들을 통해 제기한 바 그 질문은 그가 이전에 말하였던 진리에 대한 의심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사람들은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왜냐하면 그는 갈대와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주께서 맡기신 바, 요동치 않는 믿음의 굳센 심지로 주님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사람들의 경우, 오래 계속할지라도 그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남에게 비웃음을 사거나 또는 사람들의 찡그린 얼굴을 두려워하는 일은 좀체로 없다는 사실이다.

2. 그는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이었고 이 세상에 대하여 "죽은'사람이었다.

"그가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었느냐? 만일 그렇다면 너희는 그를 보기 위하여 광야로 가지 않고 왕궁으로 갔을 것이다. 너희는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두른 자를 보려고 갔다. 그의 모습과 습관은 세상의 모든 허세와 쾌락에 대해 죽었음을 나타내 보여주었다. 그의 옷은 그가 살았던 광야와 어울렸으며, 그는 거기에서 회개의 교훈을 전파하였다. 너희는 왕궁의 쾌락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이 사람이 감옥의 공포에 질려서 마음이 변하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예수가 메시야인지의 여부를 질문하게 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고행으로 일생을 살았던 사람이 경우, 닥쳐온 어떤 핍박을 못이겨서 그들의 종교로부터 추방된 일은 거의 없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는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람이 "있기는 있다"(there are). 그들은 왕궁에 있다. 

사람들이 자기의 개성과 상황에 맞는 외모를 취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설교자는 마부와 같이 보여지도록 해서는 안 되며, 일반 서민은 왕궁에서 입는 부드러운 옷에 대해 탐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자신의 분수에 맞추어 사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요한은 조잡하고 불유쾌하게 보였지만 그들은 떼를 지어 그에게로 몰려왔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존재를 기울여 경청하던 첫 열심에 대해 기억을 되살림으로써 우리의 현재 사역을 촉구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스스로를 돌아봄으로써 우리는 많은 일들을 "헛되게"하였으며, "헛된 달음질을" 하였으며, "헛되게" 수고하였다는 말을 듣게 되지 않도록 하자.

3. 그는 요한의 직무와 사역에 대하여 최고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것은 어떤 개인적인 기증이나 권한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한 명예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완전한 칭찬이라고 할 수 있다.

(1) 그는 "선지자"였으며, 아니 "선지자보다 더 큰 자였다?(9절). 

그러므로 그는 요한이야말로 모든 선지자들이 증거 하였던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다고 말씀하셨다. 

세례 요한은 그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선지자" 즉 위대한 선지자가 아니라 메시야 그 자신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리스도(매우 유능한 심판자)께서는 그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는 "선지자보다 더 큰 자"였다고 하셨다. 

세례요한, 그 자신은 그리스도보다 낮은 자라고 시인하였으며, 그리스도는 그가 다른 모든 선지자들보다 더 나은 자라고 시인하셨다. 

그리스도의 선구자가 왕이 아닌 선지자였던 것은 메시야 왕국이 지상적인 능력에 놓여 있지 않음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러나 그의 직접적인 선구자는 "구약의 선지자"보다 더 나은 "우월한 선지자"였던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 그들은 모두 "효과적으로"행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보다 더욱 탁월하였다. 

그들은 멀리서 "그리스도의 날"을 보았으며, 그들의 비전(vision)은 오랜 후의 것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그날의 여명을 보았으며, 태양이 떠오른 것을 보았으며, 백성들 가운데서 있던 자로서 그들에게 메시야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였지만 요한은 그를 직접 드러내어 지적하였다. 

그들은 "처녀가 잉태할 것이라"고 말하였지만, 그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말하였다.

(2) 그는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예언되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10절). "기록된 자가 바로 이 사람이라." 

그는 다른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보다 더 위대하였다. 

말라기는 요한에 관하여 예언하기를,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너희에게 보내리라"고 하셨다.

"구약"의 선지자가 말하였고 썼던 그리스도의 어떤 영예가 그에게 두어졌다. 이 영예는 그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모든 성도들마다에게 주어진 바, 모든 성도들이 가진 것이었다. 

요한이 그리스도의 선구자였던 것은 모든 선지자들보다 더 나은 우선권이었다. 

그는 큰 사명을 가지고 파송된 "사자"였다. 그는 "천 가운데 하나"인 사자인데, 그의 영예는 그가 누구의 사자인가에서부터 유래되었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파송된, "하나님의 아들" 앞에 파송된 "나의 사자"이다. 

그의 임무는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와 비참함, 그리고 구세주의 필요성을 발견함으로써 구세주를 영접하도록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요한은 이것을 그에 대하여 말하였고(요 1:23), 지금 그리스도는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는 이렇게 하심으로써 메시야의 길을 만드는 요한의 사역을 영예롭게 하실 뿐만 아니라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에 유의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하나님의 섭리의 많은 아름다움이 그들의 상호적인 연결과 결합, 그리고 그들의 상호적인 언급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요한의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보다 뛰어났던 것은 그가 그리스도 앞에 직접적으로 행하였다는 사실에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갈수록 더욱 영예스러운 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3)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다"(11절).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가치의 정도에 따라서 그들을 평가하시는 방법을 알고 계셨으며, 세례 요한을 앞서간 모든 사람들보다 앞에, 일반적인 출생에 의해 "여자에게서 태어났던" 모든 사람들 앞에 두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의 봉사를 위해 일으켜 세우시고 부르셨던 모든 사람들 중에 세례 요한은 가장 탁월한 사람이었다(심지어 모세보다도). 

왜냐하면 그는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사죄의 복음교리를 전파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 중 어느 것보다도 하늘로부터의 이적적인 계시들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강림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그의 사역에서 큰 성공을 하였다. 거의 모든 나라가 그에게로 몰려왔다. 

그 누구도 요한이 행하였던 것만큼 큰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그렇게 고귀한 사명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환영하라는 외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세상에서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많은 사람들이 여자에게서 태어났지만,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을 그들 앞에 두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위대함은 겉모습이나 외적인 호화로움에 의해 측정되지 않으며, 또한 위대한 성도가 위대한 사람이며 세례 요한과 같이 "주님이 보시기에 위대한" 사람이 위대한 축복을 받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요한에 대한 이 최고의 칭찬은 놀라운 제한을 가지고 있는데, 곧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이다.

① "영광"의 천국에서 요한은 "위대하고 선한" 사람이었지만, 이직도 그는 연약함과 불완전의 상태에 있었다. 

그러므로 영화롭게 된 성도나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에 미치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천국에서는 영광의 정도가 있는데, 즉 어떤 사람도 거기에서 다른 사람보다 못산다는 사실이다. 

모든 그릇들이 한 가지로 완전하지는 하지만, 그 크기나 용량은 똑 같지 않은 것이다.

둘째,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라도 세상에 있는 자보다 더 "크며" 더 알고 사랑하며 하나님을 더 찬송하며 그에게서 더 많이 받는다는 사실이다.

지상에 있는 성도는 탁월한 자들(시 16:3)이다. 그러나 천국에 있는 자는 더욱 탁월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최고의 사람이 "천사보다 못하며"(시 8:5) 또한 [천국에서는]아무리 작은 자라도 우리로 하여금 "약한 자가 다윗같이 될"(슥 12:8) 축복된 상태를 갈구하게 했던 "천사와 동등이 되는"것이다.

② 여기에 있는 "천국"에 의하여 "은혜의 왕국," 즉 그 능력과 순수함의 완전성에 있어서 복음적인 섭리가 더욱 잘 이해되는 것이다. 

천국에서 "작은 자" (mikrovtero")가 "요한보다 더 크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이 요한보다 더 나이 어린 예수님 자신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은 언제나 그 자신에 대해 낮추어 말씀하였고, 나이가 요한보다 적으며, 또 어떤 사람 보기에는 요한보다 못했던 예수님 자신이라고 본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으나, 요한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 

또한 그것은 세례 요한이 말하였던,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다"(요 1:15)는 것과 일치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신약"의 사도들과 복음사역자들=전도자들, 즉 복음적인 선지자로 이해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들과 요한과의 비교는 그들의 개인적인 성결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직무와 관계된 것이다. 

요한은 오시는(comming)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그러나 신약의 사도들과 사역자들, 그들은 오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요한은 복음의 날(gospel-day)이 동틀 무렵에 왔으며 이로 말미암아 선구자격인 선지자로 높여졌다. 

그러나 그는 그날의 정오가 되기 전에, 베일이 벗겨지기 전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있기 전에, 성령의 부으심이 있기 전에 데려감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보다 큰 발견을 하였고 보다 큰 대사로 고용된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 중 극히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더 큰" 것이다.

요한은 이적을 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도들은 많은 이적을 행하였다. 

이러한 우월성의 근거는 "신약"의 섭리가 "구약"의 섭리보다 더 우월하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신약의 사역자들은 더욱 크다. 왜냐하면 그들의 임무가 큰 것이기 때문이다(고후 3:6 등).

요한은 그의 교단에서는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가 처해 있는 세대가 허락하는 데까지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지극히 높은 교단에서 가장 작은 자도 최하의 교단에서 가장 큰 자보다 더 우월한 법이다". 

산 위에 있는 난쟁이는 골짜기에 있는 거인보다 더 멀리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사람들의 위대함은 그들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현현에서 비롯되고 일컬어진다는 사실이다. 

가장 좋은 사람은 그렇게 되기를[JC의 현현을] 기뻐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이유는, 우리의 몫(lot)이 "천국의 때에" 빛과 사랑의 특권에로 던지움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다면," 특권이 크면 클수록 그 심판도 더욱 커질 것이다.

(4) 세례 요한에 대한 큰 칭찬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을 인정하셨으며 또한 그 사역을 얼음을 깨뜨리기 위해 놀랍도록 성공적이 되게 하셨으며, 사람들이 "천국"을 예비하는데 있어서 유용하도록 만드셨다. 

"세례 요한"이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지금(2년 이상은 아니었음)까지 많은 선행이 베풀어졌다. 

그 행동은 중심자(the Centre)이신 그리스도에게 접근되었을 때 매우 빨랐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는데"(biavzetai, vim patitur), 이는 마치 군대가 폭풍우처럼 쳐들어가 성을 빼앗는 것 같은 폭력이며, 사람들이 집으로 몰려가 "억지로 그것을 취하는 것 같은" 폭력이다. 

우리는 병행 구절인 누가복음 16장 16절에서 이러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때 이후로 "하나님 나라는 전파되고 있으며 모든 사람은 그리로 들어가고 있다." 

많은 무리들이 요한의 사역에 의해 인도되었으며 또한 그의 제자들이 되었다.

또한 그것은,

① "있을법 하지 않은" 큰 무리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바 이 왕국을 차지하려고 싸우는 자들은 이것에 대한 권리나 칭호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이들은 마치 우리의 법이 "그릇되고 강압적인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 같이 침입자 또는 불법적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처럼 보였던 것이다. 

"나라의 자손들"(이스라엘-역주)이 이곳에서 추방될 때 "동과 서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으며, 그때에 "천국은 침노를 당하는 것이다." 

이 구절과 마태복음 21장 31, 32절을 비교하라. 

세리들과 창녀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거절하였던 요한을 믿었으며, 그리하여 그들 앞에서 천국에 들어갔으며, 그들이 우습게 조롱하는 동안 "그것을 취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가 우리보다 더 앞에 있는 자(또는 더 나은 자-역주)보다 먼저 천국에 가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나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 초기 때부터의 복음에 대한 칭찬이었는데 이 복음은 매우 가망이 없는 사람들을 거룩하게 만들었다.

② "끈질긴" 무리였다. 

이 폭력(맹렬)은 요한의 사역을 따랐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힘과 활기, 그리고 진지한 노력과 추구를 의미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그것에 참석하려고 그렇게 멀리서 오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들에게 하늘 나라를 자신들의 종교(또는 경건-역주)로 삼으려고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열심과 열정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천국으로 들어가려고 애쓰는"는 모름지기 "들어가기를 힘써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천국은 거룩한 침노를 당하고 있다. 

자아는 부인되어야 하며 마음의 경향과 편견, 구조와 기질은 개조되어야만 한다. 

어려운 봉사를 해야 하며, 어려운 고난을 당해야 한다. 

또한 타락한 본성을 제어하는 힘이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이러한 상을 얻기 위하여, 또한 안팎에서 오는 이러한 반대를 극복하기 위하여 달리고 씨름하며 괴로움을 당해야만 한다. 

"침노하는 자는 그것을 강압적으로 취하는 것이다." 

큰 구원에 대해 관심을 가지려고 하는 자는 강한 욕구를 가지고 그것을 향해 실천하게 되며, "여하튼"(upon any term) 그것을 가지게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은 그것들이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축복이 없이는 그 붙잡은 것을 놓지 않을 것이다(창 32:26). 

자신들의 부르심과 선택을 확실하게 만들려는 자는 근면해야만 한다. 

하늘 나라는 비웃는 자들을 안락하게 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라 수고한 자를 편히 쉬게 하려고 의도되었다. 

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천국에서 내어쫓는 "성난 투쟁"으로가 아니라 그들을 그곳으로 밀어 넣으려는 "거룩한 다툼"으로써 보다 큰 수효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복된 광경이다!

(5) 요한의 사역은 추정된 대로 "복음의 시작"이었다(막 1:1; 행 1:22). 

이것은 여기에서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① 요한에게서부터 구약 시대는 없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직임은 매우 오랫동안 완전하고 효과 있게 지속되었지만 그때부터 기울기 시작하였다. 

모세 율법의 채무가 그리스도의 죽음때까지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구약의 발견물은 "임박한 천국"의 보다 분명한 현현에 의해 폐지되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복음의 빛"(자연의 빛과 같이)은 그 "법"에 우선하였으며, 그 법에 대한 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예언들은 그것의 교훈에 앞서 끝을 맺게 되었다(interficiens가 아니라 finis perficiens-"지속기간의 끝이 아니라 완성의 끝").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선지자의 율법은 요한까지 예언하였다"고 말씀하실 때, 그는,

첫째, 구약의 빛이 어떻게 세워졌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있다. 

그것은 비록 어둡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대해 말하셨던 "율법과 선지자(선지서-역주) 안에" 세워졌다. 

"율법"은 "선지자"와 마찬가지로 장차 오실 그에 관하여 예언한 것으로 언급된다. 

그리스도는 "모세"에서 시작하셨다(눅 24:27). 

그리스도는 보다 더 명료한 선지자들의 음성에 의하여 예언된 것과 마찬가지로 모세의 사역의 벙어리 시늉에 의하여 예언되었다.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우리는 구약의 예언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신약의 교훈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신약의 교훈을 확인하고 설명하기 위하여 구약의 예언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히 1:1). 두 그룹과 같이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율법은 모세에 의해 오래 전에 주어졌다. 

그리고 요한 이전 3백년 동안에는 선지자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둘 다 "요한까지 예언한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는 율법이 아직도 준수되었고 모세와 선지서가 여전히 읽혀졌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성경은 비록 그 저자가 죽었지만 이때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세와 선지자는 죽었다. 사도와 복음전파자들도 죽었다(슥 1:5).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다"(벧전 1:25). 

성경은 그 저자들이 흙 속에서 잠잠하지만 "명백하게 말하고"있다.

둘째, 이 빛은 어떻게 "치워졌는가?" 

그가 "그들은 요한까지 예언하였다"고 말씀하실 때에 그가 의미하는 바는 즉 그들의 영광이 더 탁월하였던 영광에 의해 무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예언은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는 요한의 증거에 의해 폐지되었다.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도 새벽의 여명은 촛불들로 하여금 희미하게 빛나게 한다.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은 요한이 "그가 오신다"고 말하였을 때 이미 낡은 것이 되고 말았다.

② 그에게서 신약 시대는 동트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오리라 한 선지자였기' 때문이다(14절). 요한은 두 계약(구약과 신약-역주)을 연결시킨 고리와 같았다. 

마치 노아가  즉 두 세상을 연결하는 고리인 것처럼 그는  즉 두 계약을 연결하는 고리였다. 

구약의 결론적인 예언은 "보라,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를 보내리라"(말 4:5, 6)였다. 

그러한 말들은 요한까지 예언하였다. 그리고 그 때에 역사가 바뀌었으므로 그들은 예언하기를 그쳤다.

첫째,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이 신약의 엘리야라는 사실을 위대한 진리로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엘리야는 ─ 즉 그 자신의 인격에 있어서 육적인 유대인들이 기대하였던 것과 같지 않다. 

그는 그것을 부인하였다(요 1:21). 

그러나 엘리야의 영과 능력으로 오실 자는(눅 1:17) 성질과 대화에 있어서 그를 닮을 것이며, 또한 그는 두려움으로 회개를 촉구할 것이며, 특히 예언되어 있는 것처럼 그는 아비들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돌이키실 것이다."

둘째, 그는 이것을 진리로 말씀하시고 계시는데, 이 진리는 그 기대가 현세적인 왕국에 고정되어 있는 자들이 쉽사리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일지"의 여부를 의심하고 있다.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든지 안 받아들이든지 그것은 진리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편견, 즉 그들의 생각에도 어긋난(이것은 그들의 마관에 대해서도 결코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위대한 진리를 거꾸로 받아들인 사실에 대해 책망을 하였다. 

"만일 너희가 그를 받아들인다면, 요한의 사역을 약속된 엘리야의 사역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너희를 돌이키게 하고 주님을 위해 예비시키는 엘리야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복음 진리는 그들이 받아들였던 것과 같이 생명이나 죽음의 향기(savour)이다. 

그리스도와 요한에 관한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는 구세주(Saviour)이시며 세례 요한은 엘리야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주 예수님은 주의하라는 엄숙한 요구를 하심으로써 이 담화를 그치고 있다.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이 일에 주의하도록 하라. 만일 세례 요한이 예언된 엘리야라면 정녕코 여기에는 이미 착수된(on foot) 위대한 혁명이 있으며, 메시야 왕국이 가까이 있으며, 세계는 머지않아 행복한 변화에 놀라게 될 것이다. 너희는 이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며, 따라서 너희는 내가 말한 것을 경청해야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의 일들은 중대하고도 공통적인 관심사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이 암시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가 이미 우리에게 주셨던 기능들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과 그것을 개선해 나가는 것뿐이다. 

그는 귀를 가진 자에게는 들을 것을, 이성을 가진 자들에게는 그들의 이성을 사용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무지한 것은 그들의 능력이 결핍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듣지 못하는 것은, 전혀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와 같이 그들의 "귀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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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세례 요한(마 11:16-24)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과 그의 사역에 대해 칭찬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갑자기 이를 멈추고, 요한과 그의 사역에 대한 칭찬, 또한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의 사역에 대해 헛되이(in vain) 경청하기를 즐거워하던 자들을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쏘고 있다. 

우리는 그가 그 세대를 "그들의 비교한 것"을 살펴볼 수 있으며(16-19절), 또한 그가 예로 든 특별한 장소들(고라신, 두로와 시돈 등-역주)을 "그들과 비교한 것"을 살펴 볼 수 있다(20-24절).

Ⅰ. 그 세대를 그 당시의 유대 백성으로 비유하였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천국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대부분은 불신앙과 완고함을 계속적으로 지녔다. 

요한은 위대하고 선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처해야만 했던 세대는 말할 수 없이 황폐하였고 무미건조하였으며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그러한 세대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좋은 사역자들이 거주하는 때와 장소들의 척박함은 그들의 아름다움을 위해 금박을 부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다.  

노아의 칭찬할만한 점은 그가 "그의 세대에 의로운 자"였다는 것이다. 

요한을 칭찬하시고 난 후 그리스도는 자기들 가운데 사역하였던 바 그의 사역에 의해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하였던 자들을 향해 정죄하고 계신다. 

사역자가 칭찬 받을 만한 가치가 더욱 크면 클수록, 그를 업신여기는 백성들은 비난을 받을 만한 가치가 더욱 더 크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따라서 그것은 정산하는 날에 발견될 것이다.

우리 주 예수님은 이것을 비유로 나타내시고 계시는데, 그러나 그는 마치 이 세대를 묘사하기에 적절한 비유를 찾지 못한 것처럼 말씀하고 계시다. 

즉 "내가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여기에서 유의할 것.... 좋은 설교를 하지만 그것을 결코 좋게 받아들이려하지 않는 죄를 범하는 그들보다 더 어리석은 자들은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무엇과 같은가"를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유사점(비유)은 유대인 어린아이들이 놀 때에 행하는 일반적인 습관에서 취해진 것인데, 이 어린아이들은 흔히 그렇듯 어른들이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즐거워하거나 슬퍼하는" 모습을 모방하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가 장난이므로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 세대에 대한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반응도 이것 이상은 아니었다. 

그는 특별히 자만심을 빠져 있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비유하여 반영시키고 계시다. 

따라서 그들을 낮추시려 그는 그들을 어린아이에, 그들의 행동을 어린이들의 놀이에 비유하고 있다.

이 비유는 다음의 5가지 관점을 살펴봄으로써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1. 하늘의 하나님은 가난한 영혼들의 회심과 구원을 위하여 여러 가지 적절한 수단과 방법들을 사용하신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시키려" 하시며, 따라서 구원을 위하여 돌이키려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거침돌을 남겨 두시지 않는다. 

그가 목표하시는 가장 큰 일은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기 위하여 우리의 "뜻"을 "녹여 사그러지게 하는"일이다. 

또한 이를 위하여 그는 스스로 발견하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 

그는 그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고 계시는데, 이 방법들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동일한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것들 가운데서 이 모든 것을 동일한 목적으로 수행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비유에서 우리에게 대한 그의 "피리," 우리에게 대한 그의 "애곡"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그는 반응하는 자마다 구원의 소망을 주는 복음의 귀중한 약속을 주시려 "우리에게 피리를 불었으며," 또한 엄청난 바, 자기의 죄를 자각하여 깨닫고 놀라게 함 통해 그에게로 이끌기 위해, 가차없이 적용될 율법의 두렵고도 무서운 멸절의 위협때문에 시달릴 인생을 향하여 애곡하였다. 

그는 은혜스럽고 자비스러운 섭리(배려) 가운데서 "우리를 향하여" 피리를 불었으며, 비참하고 괴롭히는 섭리에서 "우리를 향하여" 애곡을 하셨다. 

그리고 한편은 또 한편에 서로 상충되는 것으로 두셨다.

하나님은 그의 사역자들에게 "그들의 목소리"를 바꿀 것을 가르쳤다(갈 4:20). 

때로는 "시내산"에서 우뢰로 말씀하셨고, 때로는 "시온산"에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이 비유의 설명에서는 그 시대에 두 개의 큰 빛이었던 요한과 그리스도의 사역의 상이한 성향(temper)이 잘 나타나 있다.

(1) 한편으로,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애곡하면서" 왔으며,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아니하였다. 

사람들과 친밀하게 대화하지도 않고 무리 가운데서 통상적으로 먹지도 않았다. 

오직 혼자서. "주식"이 메뚜기와 석청이었던 광야에 있는 독방에서 기거하며 먹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그들에게 영향력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엄격하고 고행적인 생활이 그가 전파하였던 교훈과 매우 일치하였기 때문이다. 

그 대화가 그의 교훈과 일치하는 교역자는 십중팔구(most likely)선을 행하는 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역자의 설교라고 해서 언제나 효과가 있는 법은 아니다.

(2) 또 한편으로, "인자는 와서 먹고 마셨으며,"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그들을 향하여 피리를 불으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과 친밀하게 대화하셨으며, 어떤 특별한 엄격함이나 준엄함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그는 친절하고 접근하기 용이하였으며, 어떤 사람들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았고 또한 요한의 유보(留保)에 의해 영향을 받지 못하였던 자들을 구원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시험하기 위하여 종종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함께 잔치에 참석하신 일도 있었다. 

요한의 찡그린 얼굴에 의해 놀라지 않았던 자는 그리스도의 미소에 의해 이끌려질 것이다. 

그에게부터 사도 바울은 "여러 사람들에게 여러 모양이 되는"(고전 9:22)비결을 배웠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님은 요한이 그를 비난하지 않았던 것 이상으로, 결코 그의 임의대로 요한을 비난하지는 않았다(그들의 행동이 다르기는 했지만). 

비록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의 선함에 있어서 깨끗지 못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의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역사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같으시다"(고전 12:6). 

또한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하심인 것이다"(7절). 

특별히 살펴 볼 것....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은 바나바(위로의 아들들)이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신다"(고전 12:11).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한쪽을 비난해서는 안 되며 서로가 존중하고 존귀히 여기며 칭찬해야 마땅하다. 또한 이를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다양한 성향(性向)을 가진 사람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취급하시려고 노력하시는데, 이는 죄인들로 하여금 융통성이 있고 변명할 것이 없도록 하심으로써 그 결과가 어떤 것이든간에 그 자신이 영화롭게 되기 위함이다.

2.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회심을 위해 취하신 다양한 방법들은 때로 열매를 맺지 못하며 효과가 없기도 한다..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애곡도 하지 않았다. 너희는 어느 방법으로도 감동을 받지 않았다." 

크고 보편적인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해, 의약품에서와 같이 반드시 효력을 발생하리라는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특별한 수단이 강구되며, 또한 반드시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전제하에 그 수단은 수행된다(의역). 

그런데 만일 사람들이 법들에 의해 통제되지 않거나 약속한 바 초대에 응하지 않거나 그 어떤 경고나 위협으로도 깨우침받기를 거부한다면, "가장 큰" 일들에 의해 각성되거나 "가장 고상한" 일들에 의해 이끌리거나 "가장 두려운" 일들에 의해 놀라거나 "가장 분명한" 일들에 의해 깨닫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만일 그들이 성경이나, 이성, 경험, 섭리, 양심, 관심의 목소리를 경청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떤 일이 행해질 수 있는가? 

"풀무를 맹렬히 불면 그 불에 납이 살라져서 단련하는 자의 일이 헛되게 되느니라. 사람들이 그들을 내어버린 은이라 칭하게 될 것이다"(렘 6:29, 30).

사역자가 헛되이 수고하게 되는데(사 49:4), 하물며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은 그 손실이 얼마나 크겠는가 !(고후 6:1)

여기에서 유의할 것.... 세상에서 최고의 설교자의 최고의 설교가 그 소망하였던 목표에 이르지 못하는 일은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신실한 사역자들이 그들의 수고에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을 때에도 그들에게 어떤 위안을 준다는 사실이다. "누가 우리의 전한 것을 믿었느냐?" 

만일 "살육자의 피로부터, 용맹한자의 기름으로부터" 그리스도와 요한, 곧 위대한 사령관의 활이 빗나가서 종종 헛되이 돌아왔다면(삼하 1:22), 만일 우리의 전파한 것이 그러하였음이 발견된다고 해서 결코 놀라지 말라. 우리는 마른 뼈들에 대한 매우 적은 목적이라도 이루어 질 것은 대해 예측할 수 있기에...

3. 일반적으로 은혜의 수단에 의해 유익을 얻지 못하는 이들이란 본래 사악한 자들이며 기꺼이 그러한 수단을 사용했던 교역자들을 공격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선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말씀과 그 말씀의 신실한 전파자들에 대항하여 편견과 분열을 일으키고 조장시킴으로써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상처를 다른 사람들에게 입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뒤쫓거나 순응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그와 맞서게 되며 그와는 정반대로 걸어갈 것이다. "이 세대"가 그와 같이 행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요한을 믿으려고 결심하지 않았으며, 또한 최고의 사람들을 위하여 그것을 그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그리스도와 요한)을 학대하였으며 가장 나쁜 자들로 오도하며 그렇게 취급하였다.

(1) 세례 요한에게 대하여 그들은 "귀신이 들렸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의 엄격함과 침묵(또는 유보)을 우울증이나 또는 사탄을 가진 어떠한 정도로 돌려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왜 그를 유의해야만 되는가? 그는 환상에 가득 차 있고 광적인 상상력에 사로잡힌 불쌍한 우울증 환자이다."

(2)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그들은 그의 자유롭고 친절한 대화를 사치와 쾌락의 사악한 습관으로 돌리고 말았다.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로다." 

이보다 더 불쾌하고 비위에 거슬리는 비난은 없다. ...배반한 아들에 대한 비난은 "방탕하고 술에 잠긴 자라"(신 21:20)는 것이었었다. 

이보다 더 그릇되고 불의한 비난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았으며"(롬 15:3), 또한 그리스도가 사셨던 것처럼 자기부인, 고행 세상에 대한 멸시의 생활을 하였던 사람은 일찍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흠 없으시고 죄인들과는 분리되신" 분이 여기에서는 죄인들과 동류로, 또한 그들에 의해 오염된 자로 표현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가장 흠 없는 무죄성과 가장 특출한 탁월성이 언제나 "혀의 비난을 막는" 울타리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아니, 좋은 목적을 가지고 가장 잘 교화시킨 사람들의 최고 선물과 행위들이 오히려 비난의 구실이 될 수도 있다. 

우리의 가장 훌륭한 행동이 다윗의 금식과 같이(시 69:10) 우리에 대한 가장 나쁜 비난의 구실이 될 수도 있다. 

그리스도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 즉 그 둘이 가졌던 친구들 중에 최고의 친구였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진리이다. 

왜냐하면 그는 "죄인들," 큰 죄인들(심지어 죄인들의 괴수까지도)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칭찬이며, 영원히 그의 칭찬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 그를 비난하였던 저들은 그 유익을 상실하고 말았다.

4. 은혜의 방편 아래 있으면서도 사람들이 이렇게 열매를 맺지 못하고 사악하게 된 원인은 그들이 "장터에 앉아 있는 어린아이와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린아이와 같이 어리석고, 고집이 세고, 조심성이 없고, 놀기를 좋아하였다.

"그들이 앉아 있는 시장"이란 어떤 사람에게는 게으름의 장소(마 20:3)이며,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세상적인 사업의 장소(약 4:13)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시장은 시끄럽고 오락을 즐기는 장소이다. 

그러므로 만일 사람들에게 그들이 왜 은혜의 방편에 의해 그렇게 유익을 못 얻게 되는가를 묻는다면, 그것은 그들이 게으르고 경박하며, 수고하기를 좋아하지 않은 때문임을 알게 될 것이다. 

아니면 그들의 머리와 손, 그리고 마음들이 세상으로 가득차 있으며, "말씀을 막고" 끝내는 그들의 영혼을 막는 염려(겔 33:31; 암 8:5)로 가득차 있기 때문임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은 진지한 모든 것에서부터 그들 자신의 생각들을 돌리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와 같이 "시장에" 있으며, 거기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이러한 것들에서 휴식을 취하며, 거기에 아예 눌러앉아 거주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다.

5. 비록 은혜의 방편들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대부분에 의해 경시되고 업신여김을 받기는 하지만 그러나 아직도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그들 자신의 영혼들의 선함(the good)에로 그들을 개선해 나가며 또한 그들의 목적을 이루는 남은 자가 있다. 

"그러나 지혜는 그 행한 일로(어떤 사본에는 "자녀들로"KJV는 이것을 취함)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그리스도는 "지혜"이시다. "지혜의 보화들이 그 속에 감추어져 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자녀들"이다(히 2:13). 

복음은 "지혜"이다. 그것은 "위로부터 오는 지혜"이다. 참된 신자들은 그것에 의해 거듭나게 되며 역시 위로부터 나게 된다. 

그들은 현명한 "자녀들"로서, 그들 스스로와 그들의 참된 관심에 있어서 현명하다. "장터에 앉은 어리석은 아이들과 같지" 않다.

이러한 "지혜의 자녀들은 지혜를 옳다"고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목적에 순응하며, 그 의도에 응답하며 그것이 취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에 의해 적절하게 영향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방법들을 취하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지혜를 입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복음 7장 29절에서 설명되고 있다. 

"세리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으면서," 후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을 의롭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은혜의 방편들의 성취는 어리석게 그를 비난하는 자들과 대항하여 이 방편들을 선택할 때 하나님의 지혜를 의롭다고 하는 것이다. 

의사의 질서를 준행하는 모든 환자들의 치유는 그 의사의 지혜를 옳다고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복음이 다른 사람에게라 할지라도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롬 1:16).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요, "거침돌"이 되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리우는"(고전 1:23, 24) 자들에게 있을 때, 그리하여 그들이 십자가의 지식을 그들의 최고 야심(고전 2:2)으로, 또한 그 십자가의 효능을 그들의 영광의 면류관(갈 6:14)으로 삼을 때, 바로 여기에 "자녀들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는 지혜"가 있는 것이다.

"지혜의 자녀들"은 세상에 있는 "지혜"의 증인들이다(사 43:10). 

또한 그들은 지금 "성도들에 의해 옳다 함"을 받는 "지혜"가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받게 될 그 날에 증인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살후 1:10). 

어떤 사람의 불신앙은 거짓말을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비난할 것이나, 다른 사람의 신앙이 그리스도는 참되며 "지혜롭다"(고전 1:10)는 표징을 보여 줌으로써 그를 영예롭게 할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행하든지 행하지 않든지 그것은 행해질 것이다.

하나님의 공평과 그의 "지혜"는 "그가 말씀하실 때, 그가 판단하실 때 옳다 함을 받게 될 것이다."

자,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그 "세대"에 대해 하신 설명이다. 그 "세대에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며" 똑 같은 양상이 계속적으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그때에 있었던 것이 그 이후에도 계속 있어 왔으며 지금도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더라"(행 28:24).

Ⅱ. 그리스도께서 대부분 이야기하셨던 특별한 "장소들"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그 "세대"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을, 그는 그들에게 인상을 주기 위하여 특별히 그러한 "장소들"에 적용시켰다. 

"그 때에 그는 그들을 책망하시기 시작하였다"(20절). 

그는 오래 전에 그들에게 전파하시기 시작하셨다(4:17).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책망하기 시작"하지는 않으셨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고상한 방법이 처음 사용되었을 때까지 거칠고 불쾌한 방법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책망을 하려고" 하시지는 않는다. 그는 죄인들이 완고하게 그것을 그에게서 억지로 빼앗기까지는 "책망하시지 않는다." 

"지혜"는 먼저 초청을 한다. 그러나 "그 지혜의 초청이 업신여김을 당할 때 지혜는 책망하는 것이다"(잠 1:20, 24). 

그러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방법대로 행하지 않기때문에 바야흐로 책망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그들에게 부과된 죄. 

즉 도덕법에 거스리는 어떤 죄가 아니라(그때에는 구원시키려는 복음의 탓으로 호소할 것이다), 치유하는 법인 복음에 거스리는 죄(그것은 완악한 것이다)를 말한다. 

그가 가장 수치스럽고 불쾌한 것으로 그들을 책망하고 비난했던 죄는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고의적인 완악함은 복음을 즐거워하는 많은 무리들의 가장 큰 정죄(저주스러운 죄)이며, 이 죄는(다른 것 이상으로)죄인들이 영원히 책망 받는 죄라는 사실이다.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 또한 사도들이 전파하였던 가장 위대한 교훈은 회개였다. 

"피리 부는 것"과 "애곡 하는 것"에서 의도된 가장 큰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마음과 길을 바꾸며 그들의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자기가 "하늘로부터 오신 선생"임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신앙들을 가지고 있었다)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들의 신앙은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거나 그들의 생활을 개조시킬 만큼 우세하지 못하였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다른 죄에 대하여 책망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이시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을" 때, 그는 그들이 "고침 받기를" 거절한 것으로써 "그들을 책망하셨다." 

그가 그러한 것으로 그들을 "책망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책망하고, 마침내 그러한 것들이 절망적이며 도저히 치유할 수 없는 어리석은 일임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2. 죄의 악화. 

그 고을들은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었다. 왜냐하면 언젠가 그의 주요한 거주지가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어떤 장소는 다른 장소들보다 더욱 많은 분량과 능력, 순수함으로 은혜의 방편들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신 집행자이시며, 또한 그의 모든 처리에 있어서 자연의 하나님과 공통적이고 구별된 은혜의 하나님으로서 행동하신다. 

그리스도의 권능에 의하여 그의 교훈을 받아들이게 될 뿐만 아니라 그의 율법을 순종하게 되어져야만 한다. 

육체의 질병에 대한 치유는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의 영혼에 대한 치유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러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가 회개하기 위해 강한 동기를 가지면 가질수록 완악함은 더욱 극심해질 것이며, 그 계산은 더욱 엄격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서 "행하신 권능,"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은혜스러운 일들(우리는 이것들에 의해 "회개에 이르게" 되었다. 롬 2:4)에 대해 그렇게 간주하시기 때문이다.

(1) 고라신과 벳새다는 여기에서 실례로 보여지고 있는데(21, 22절), 그들에게는 각각의 "화"(woe)가 주어져 있다.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그리스도는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 

그러나 만일 그 축복이 업신여김을 받게 된다면 그는 화를 예비하시는데, 이 화는 다른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두려운 화이다. 

이 두 고을은 "갈릴리 바다"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데 고라신은 동편에, 벳새다는 서편에 있으며, 부요하고 인구가 많은 장소들이다. 

후에 벳새다는 분봉왕 빌립에 의하여 시(市)로 승격되었다. 

그리스도는 이곳에서 적어도 세 사람을 그의 제자로 삼으셨다. 이와 같이 이 장소들은 은혜를 많이 받은 장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방문(즉 징벌, visitation)의 날들"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화 가운데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 화는 그들에게 매우 임박하여 있음으로 그들은 그 후 곧 쇠퇴해졌으며 초라하고 미천한 고을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죄는 도시들을 치명적으로 파괴시키며, 그리스도의 말씀은 확실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고라신과 벳새다는 여기에서 두로와 시돈(구약에서 많이 읽을 수 있는 해안도시. 파멸되었으나 다시 번성하기 시작하였다)과 비교되었다. 

이 고을들은 갈릴리에 인접하여 있었으나 우상 숭배와 그 밖의 사악한 일들 때문에 유대인 가운데서는 악명이 높았다. 

그리스도는 종종 "두로와 시돈 지방"(마 15:21)으로 가셨다. 

그러나 결코 두로와 시돈에는 가시지 않았다. 만일 그가 이곳으로 간다면 유대인들은 그것을 매우 좋지 않게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들을 깨닫게 하고 겸손하도록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여기에서 보여 주시고 계시다.

① 두로와 시돈은 고라신과 벳새다만큼 사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들에게 동일한 말씀이 전파되었다면, 또한 동일한 이적이 베풀어졌다면 그들은 니느웨가 "베옷과 재에" 앉아 회개했던 것처럼 "오래 전에 회개하였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아시는 그리스도는, 만일 그가 그들에게 가서 살며 복음을 전파하였다면 그가 계셨던 곳보다 거기에서 더욱 많은 선행을 베푸셨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다. 

그러나 그가 얼마동안 계셨던 곳에 계속 머무신 것은 비록 그의 사역자들이 원하였던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을 지라도 그들이 하는 것을 격려하기 위함이시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서도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쉽게 인도된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게 되는 동일한 은혜의 방편 아래 앉아 있으며, 또한 그것들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영향을 받게 될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이미 은혜의 방편들을 충분하게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완고함을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이 될 것이다(겔 3:6, 7 . 역주:예를 들면, 이방인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은혜의 방편들을 받아들였다면 벌써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복음을 거절한 유대인의 완악함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이 될 것이라는 뜻). 

우리의 회개는 더디고 늦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회개는 빨랐을 것이다. 

그들은 오래 전에 회개하였을 것이다. 우리의 회개는 보잘 것 없고 천박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회개는 "베옷과 재" 가운데서 하는 심각하고 진지한 것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신적인 주권에 대해 두려운 경탄으로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은혜의 수단을 받아들여 회개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죄 가운데서 당연하게(justly)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이다(역주:모든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당연히 멸망 받게 되어있다. 그러나 회개한 사람은 그 영혼이 구원받는다. 매튜 헨리의 요지는 이런 뜻일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빚진 자"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② 그러므로 두로와 시돈은 고라신과 벳새다처럼 그렇게 비참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며, 그들보다 "심판 날에 견디기가 쉬울 것이다"(22절).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심판 날에" 사람들의 자녀들의 최후 상태가 틀림없고 바꿀 수 없는 판결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행복이나 불행, 각 사람의 여러 정도가 결정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원한 심판"이라고 불리운다(히 6:2).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한 상태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둘째, 그 심판날에는 시험(probation)의 상태에서 받아들여졌던 은혜의 모든 방편들이 확실하게 설명될 것이며, 우리가 얼마나 나빴는가 뿐만 아니라, 그것이 우리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얼마나 더 나았는가에 대해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사 5:3, 4).

셋째, 망하는 모든 자들의 악평이 참을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에 대해 가장 완전하고 분명하게 발견했지만 아직도 회개하지 않은 자들의 악평은 무엇보다도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이다. 

복음의 빛과 소리는 "신적 은혜"의 부요함을 얻기 위하여 또는 (만일 그 은혜가 경시된다면) "신적인 진노"의 보다 풍부한 유출(eff usion)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그 기능을 개시하며 그것을 보고 듣는 모든 능력을 확대시킨다. 

자책이 지옥과 같은 고통이 된다면, 천국을 얻는 이러한 좋은 기회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실로 지옥이 필요하다. "아들아, 이것을 기억하라."

(2) 가버나움은 여기에서 강조적으로 정죄하고 있는데(23절), "그리고 너 가버나움아, 네 손을 들고 네 판결을 들으라." 

가버나움은 이스라엘의 모든 고을들 중에서 그리스도께서 가장 일상적으로 머무신 곳으로서 이로 말미암아 존귀하게 되었다. 

그곳은 옛 실로와 같이 그의 이름을 두기 위하여 선택한 장소였으며, 또한 실로와 같이 취급되었다(렘 7:12, 14).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이적은 "매일의 양식이었으며, 따라서 옛 만나와 같이 하찮은 것으로 여김을 받았고 보잘 것 없는 떡으로 불리워졌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은혜에 대한 아름답고 위안을 주는 강의를 헛되이 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여기에서 그들에게 진노에 대한 두려운 강의를 하고 계신다. 전자(은혜)를 듣지 않으려는 자는 후자(진노)를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가버나움의 판결이,

① 절대적으로 내려진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하늘에까지 높아지려는" 너희는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능력과 순수함에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는 이로써 "하늘에까지 높아지게" 된다. 

그들은 그 속에 현재적인 큰 존귀와 영원적인 큰 유익을 소유하게 된다. 그들은 "하늘"에로 들어올려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아직도 "세상에" 붙잡혀 있다면 아마 그들은 그들이 "하늘로" 들어올림을 받지 않은 것에 대하여 감사할는지 모른다.

둘째, 악용된(abased) 복음의 유익과 진보는 죄인들로 하여금 지옥으로 더욱 낮아지게 할 것이다. 

우리의 외적인 특권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과는 거의 상관이 없으므로, 만일 우리의 마음과 생활들이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한낮 기대에 불과하고 말 것이다. 절벽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곳에서 떨어지는 것은 더욱 치명적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두려워하자."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자. 욥기 20장 6, 7절을 보라.

② 우리는 여기에서 가버나움이 소돔의 운명과 비교된 것을 볼 수 있다. 

소돔은 아마 어떤 도시들보다 죄와 멸망이 더욱 두드러졌던 도시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첫째, 가버나움에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다면 그들은 구원을 받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이러한 이적들이 그들처럼 사악한 소돔에서 행하여졌다면, 그들은 회개하였을 것이며 "그 성은 오늘까지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그것이 지금에는 파괴시키는 공의(destroying justice.)의 기념물이 되었지만(유 7절), 목숨을 아끼는 자비의 기념물로 남이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참된 회개에 의하여 아무리 큰 죄도 용서받게 될 것이며, 소돔도 제외되지 않았던 큰 멸망이 미연에 방지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천사는 소돔에 파송되었다. 그러나 그 성은(오늘까지-역주) 그대로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곳으로 보내심을 받았다면 그 성은(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장차 올 세상은 "천사들에게 예속(복종)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예속된다"(히 2:5)는 사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좋은 일인가! 

롯이 만일 이적을 행하였다면 "농담하였던 자"로 취급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둘째, 그러므로 소돔의 멸망이 심판 날에는 가버나움의 멸망보다 덜할 것이다. 

소돔은 그런 심판을 받아야 될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러나 가버나움이 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죄는 범하지 않았다. 

만일 복음이 "죽음의 맛"(a savour of death 또는 "죽음의 냄새"), 즉 죽이는 냄새를 가지고 있다면, 가버나움에서는 이중적으로 그와 같을 것이다. 

그것은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고후 2:16), 그러므로 큰 사망의 냄새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자들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그의 복음을 환영하지 않는 모든 장소들에 대해 동일한 말씀을 하셨다(마 10:15). "소돔땅이 너(가버나움)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기록된 말씀을 지금 손에 가지고 있는 우리들, 전파된 복음과 주어진 복음의 규례들을 가지고 있고 성령의 세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고라신과 벳새다에 못지 않은 특권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심판 날에는 이에 준하여 판결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공평하게 말한다면 이 시대의 신앙 고백자들은 그들이 하늘을 가든지 지옥으로 가든지간에 이러한 장소들에 대하여 가장 큰 빚을 지고 있다. 

만일 하늘로 가는 신앙 고백자들이라면, 그들은 그들을 그리로 데려가는 그러한 부요한 수단들을 위해 신적인 자비에대해 가장 큰 빚을 진 자들이며, 또한 지옥으로 가는 신앙 고백자들이라면, 그들은 그들로 하여금 그리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그러한 부요한 수단들을 위해 신적인 공의에 대해 가장 큰 빚을 진 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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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초청(마 11:25-30)

이 구절들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늘을 우러러보시면서 구속 언약의 주권과 안전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이 세상을 둘러보시면서 이러한 선물들(역주:28, 29절의 선물들)이 장차 주어지게 될 모든 어린아이들에게 은혜 계약의 특권과 유익들을 제시(제공)하고 있다.

Ⅰ. 그리스도는 화제를 돌려 여기에서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어진(계시된)" 복음의 신비함을 가진 그들(어린 아이)에게 대한 하나님의 호의를 인하여 그에게 감사하고 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25절), 

그 자신이 하신 말씀 이외에는 어떠한 말씀도 앞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여기에 "대답"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것이 앞에 진술된 우울한 숙고(consideration)에 대해 위로를 주는 대답이며 또한 그것들과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지독한 고을들의 범죄와 멸망은 의심할 여지없이 주 예수님에게는 슬픈 일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향해 우셨던 것처럼(눅 19:41)그들을 향해 우실 수밖에 없으셨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생각하심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것을 더욱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그는 그러한 것을 감사로 돌리고 있다. 

이것은 즉 비록 "어린 아이"일지라도 복음에 관한 일들이 "계시되는 남은 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이스라엘은 모여지지 않았지만 그는 영화롭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의 주위에서 실망할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을 때 하나님을 우러러봄으로써 용기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행복에 대하여 얼마나 무관심한가를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현명하고 신실한 하나님께서 어쨌든 그 자신의 이익(이해 관계)을 효과적으로 확고히 하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위로가 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감사하나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감사"는 어둡고 불안한 생각들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며 또한 그것들을 잠잠케 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찬송가는 낙심한 영혼들에 대한 특효가 있는 강심제이며, 우울증을 치료하는 것을 협조할 것이다. 

우리가 슬픔과 두려움의 암시들에 대해 준비된 답변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가 호소할 수 있는 말은 "오 아버지여, 내가 감사하나이다." 

그것보다 더 나쁘게 되지 않았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그런데 그리스도의 이러한 감사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 볼 수 있다.

1. 그가 하나님께 대해 붙이신 칭호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다음의 사실들에 유의하라.

(1) 기도와 마찬가지로 찬송에 의해 하나님께로 접근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자비를 구하거나 또는 우리가 받은 자비에 대해 감사를 드릴 때에는, 그를 하나님으로 바라보고 그 관계를 굳게 고수하는 것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다. 

자비를 아버지의 사랑의 표식으로, 아버지의 손의 선물로 받아들여질 때, 그때에는 그 자비가 갑절로 은혜롭게 되고, 찬양의 마음을 샘솟게 할 것이다.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2). 

"아버지여, 기도하오니"와 같이 "아버지여, 감사합니다"라고 감사드리며 말씀드리는 것은 어린아이들에게 합당하다.

(2)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 나아올 때 우리는 그가 "천지의 주재이심"을 동시에 기억해야만 한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들의 주권자이신 그에게로 존경심을 가지고 나아오도록 하며, 또한 우리가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실 수 있으신 그에게로 신뢰를 가지고 나아오도록 한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사악함에서 방어하도록 하며 모든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공급하게 하신다.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에게서(멜기세덱 안에서) 오래 전부터 "하나님"을 소유주로써, "천지의 주재"로 찬미해왔다. 

우리는 시내에서 자비에 대한 감사를 드릴 때 샘 안에 있는 풍족함에 대하여 그에게 영광을 드려야만 한다.

2. 그가 감사 드린 일.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이것"(These things), 그는 어떤 일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복음의 큰 일들, 즉 "우리의 평화에 속한 일들"(눅 19:42)을 의미하고 계시다. 

그가 이렇게 "이것들"에 관하여 강조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그것들이 그를 채웠던 일들이었고 또한 우리를 채워야 할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밖의 다른 모든 일들은 "이것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1) 영원한 복음의 위대한 것들(things)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 즉 학식이 뛰어나고 세상적인 수단에 탁월한 자들에게는 숨겨져 왔으며 또 숨겨지고 있다. 

위대한 학자나 위대한 정치가들 중 어떤 사람은 복음의 비밀에는 매우 낯선 위대한 나그네였다. 

"이 세상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고전 1:21). 아니,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에 (딤전 6:20) 의해 복음을 반대하는 일도 있다.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일에 가장 익숙한 자는 흔히 영적인 일을 거의 체험하지 못하는 법이다. 

사람들은 자연의 신비나 상태(state)의 신비에 깊숙이 빠질 수는 있다. 그러나 천국의 능력에 대한 체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천국의 신비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또 오해하는 것이다.

(2) 세상의 "현명하고 슬기로운 자들"이 복음의 신비의 둘레에 있는 어두움 속에 있는 동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 아이"들은 그것들에 대한 "거룩케 하는 구원의 지식"을 가진다.

"당신은 그것들을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다 이와 같은 사람들로서, 보잘 것 없는 태생이며 하찮은 교육을 받은 자들이다. 

학자도 아니요, 예술가도 아니요, 무식하고 무지한 자들이었다(행 4:13). 

지혜의 오묘는 이와 같으며(욥 11:6), 이것을 "어린아이와 젖먹이"에게 알게 하신 것은 "그들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시고(시 8:2) 이로써 하나님의 "찬송이 완전케 되게 하려" 하심이다. 

세상의 학식 있는 자는 복음의 전도자로 선택받지 못하였지만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고전 2:6, 8, 10)은 택함을 받았다.

(3) "슬기로운 자"요 "어린 아이" 사이의 이러한 차이는 하나님 자신이 만드신다.

①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신"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들에게 직분과 학식,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이해력을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이에 대하여 자만하며 거기에 만족하며 더 이상 찾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공평하게 지혜와 제시의 성령을 그들에게 주시지 않으셨다. 

비록 그들이 복된 소식의 소리를 듣는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그들에게 한낮 "이상한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들의 무지와 오류의 창시자는 아니시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그들 자신에게 내버려두시며 그들의 죄는 그들의 형벌이 되는 것이다. 

또한 주님은 그 안에서 의로우시다. 요한복음 12장 39, 40절, 로마서 11장 7,8절, 사도행전 28장 26, 27절을 보라. 

만일 그들이 가진 지혜와 슬기를 가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다면 그는 그들에게 이러한 좋은 것들에 대한 지식을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것들을 가지고 자기들의 욕망을 채웠으므로 하나님은 "이러한 이해력을 그들의 마음에서" 숨기셨다.

② "그것들을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나타난 일은 우리의 자손(어린아이들)에게 속하며(신 29:29), 또한 그는 그들에게 이러한 것들을 받을 수 있는 "이해력"과 그것들에 대한 생각을 주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약 4:6).

(4) 이 세대는 신적인 지배를 받게 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는 이것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26절)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이러한 일들에서의 그의 뜻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즉 "옳소이다"라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자신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그가 기뻐하시는 방법을 취하시도록 하며 또한 그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가 기뻐하시는 수단을 사용하시도록 하자.

그의 은혜는 그의 자신의 것이며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주시기도 하시고 보류하기도 하신다. 

우리는 왜 어부인 베드로는 사도가 되었지만,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인 니고데모는, 그도 역시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사도가 되지 않았는지에 대해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그의 제자들이 듣는데서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이와 같이 존귀하게 되고 구별되어진 것은 그들 자신의 어떤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기쁘신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는 그것들을 구분하셨다.

(5) 신적 은혜를 베푸는 이러한 방법은 우리 주 예수님에 의해 인정된 것처럼 감사함으로 우리에 의해 인정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만 하는 이유는,

① "이러한 일들이 계시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숨겨진 비밀이 나타내어진 것이다. 그것들은 소수의 사람들에 나타내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세상에 널리 선포되어 있다.

② 그것들이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어지기" 때문이다. 

온유하고 겸손한 자는 이 구원으로 아름답게 되어진다. 또한 이러한 영예는 세상이 염려시하는 자들에게 두어진다.

③ "이것들이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 숨겨진 것은 어린아이들에게 대한 자비를 크게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다. 

구별된 은혜는 가장 정중하다. 

욥이 "주의 이름"을 "주실 때"와 같이 "취해질 때"도 찬미한 것(욥기 1:21 -역주)처럼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낼 때"와 마찬가지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겨질"때도 찬미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비참한 것은 아닌 것처럼, 그것은 자아가 낮추어지고 교만한 생각이 끌어 내져지고 모든 육체가 잠잠케 되고 신적 능력과 지혜가 더욱 빛나게 되는 방법이다. 고린도전서 1장 27, 31절을 보라.

Ⅱ.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의 유익함을 은혜스럽게 제공하고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어진" 것들이다(25절 등).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우리의 주의를 이러한 부르심과 초청에 집중하도록 명령하기 위하여 또한 그것에 순응하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이것들(부르심과 초청)을 안내하는 엄숙한 서문이다. 

우리가 "우리 앞에 두어진 이러한 소망"에로 피난을 위해 날아갈 때 "강한 위로"를 얻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그의 권위를 앞세우고 있으며 그의 신임장을 제출하고 있다. 우리는 그가 이러한 것을 베풀기 위해 권한을 부여받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27절).

(1) 그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사명.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다."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는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일하시다. 

그러나 중보자로서의 그는 그의 능력과 영광을 아버지께로부터 받고 있다. 또한 "모든 심판은 그에게 맡겨졌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또한 패역한 세계에 평화와 행복을 주기 위하여 그가 적합하다고 생각하였던 이러한 조건들(terms) 에 의거하여 권한을 위임받고 있다. 

그는 이러한 큰 임무(affairs)를 협의하고 확립하기 위하여 거룩케 되셨으며 또한 유일한 전권대사로 인쳐졌다.

이것을 위하여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능력"을 가지셨으며(마 28:18), 모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요 17:2)와 심판을 행하시는 권위(요 5:22, 27)를 가지셨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게 하는 데 용기를 북돋아준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에게로 온 것을 받으시고 또 요구하는 것을 주시기 위하여 "모든 것이 주재이신" 분에게서 위임을 받으셨으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목적으로 그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모든 능력 모든 보화들이 그의 손안에 있다. 

아버지는 그의 모든 것을 주 예수님의 손에 넘겨주셨다. 

우리의 모든 것을 그에게 넘겨드리고 그 일이 수행되도록 하자. 하나님은 그를 우리에게 손을 두시는 위대한 심판인(Referee)과 판결자(Daysman)로 삼으셨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이 불행한 논쟁을 그치게 하기 위하여 그의 판결(언급)에 동의하고 주 예수님의 조정(중재)에 순응하는 일이며 또한 그의 판결을 고수하기 위하여 계약을 맺는 일이다.

(2) 그와 아버지 사이의 친밀성.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29절). 

이 말씀은 보다 더 큰 만족과 풍성한 것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전권대사들은 그들이 제출할 위임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교제가 있을 때 사용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가르침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님은 그의 임무를 위하여 권세뿐만 아니라 능력도 가지고 계셨다. 

우리의 큰 구속 사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는 주요하게 관계된 당사자들이다.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슥 6:13).

그러므로 그들이 이 일에 있어서 서로 잘 이해하셨다는 사실, 즉 다시 말하면 성부는 성자를 아셨고 성자는 성부를 아셨으며 또한 양자를 완전하게 아셨으므로[우리는 이것을 성부와 성자 사이의 상호적인 자각(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일의 결정(settling)에 있어서는 어떠한 오류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확증을 시키는 데 큰 격려가 되어야만 한다. 

종종 사람들 가운데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약을 전복하거나 강구된 조처를 파기하는 경우가 있다. 

성자는 영원 전부터 "아버지의 품속에 있었다." 

그는  secretioribus(숨겨진 계획)이셨다. 그는 "그가 데리고 있는 자로서 그 곁에 계셨다."(잠 8:30). 그러므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으며," 그는 더 첨부하기를,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27절)고 하셨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① 사람들의 행복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요," 이성적인 존재들의 완전성이다.

② 하나님과 더불어 친교를 맺으려는 자는 모름지기 그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의탁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영광의 지식의 빛은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빛나기 때문이다(고후 4:6). 

우리는 아담이 범죄한 이래로 우리가 가진 하나님의 모든 계시들, 즉 아버지의 뜻과 사랑을 인하여 그리스도에게 감사를 드려야만 할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스러운 인간 사이의 교제는 위안을 주는 교제가 아니다. 

그러나 중보자 안에 있는, 중보자에 인한 교제는 위안을 주는 교제이다(요 14:6).

2. 여기에는 우리들에게 제공되는 기증물(offer)과 그것을 받아들이라는 초청장이 있다. 

그렇게 엄숙한 서문 후에 우리는 매우 큰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신실한 말씀"이며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말씀"이다. 

또한 우리가 "구원받게 될 수 있는 말씀"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구원받도록, 그것을 위하여 그의 지배와 가르침을 받도록 우리의 제사장이시며 왕, 선지자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초대를 받고 있다.

(1) 우리는 우리의 휴식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로 나아와야만 하며, 또한 그 안에서 휴식을 얻어야 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28절).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

① 초청 받은 사람들의 특성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었다.

이것은 피곤하신 그에게 적합한 말씀이다(사 50:4). 견딜 수 없는 멍에였으며 장로들의 유전에 의해 더욱 견딜 수 없는 멍에가 되었던(눅 11:46) 의식적인 법의 무거운 짐에 대해 불평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에게로 오도록 하라. 그리하면 그들은 편안함을 얻게 될 것이다. 

그가 오신 것은 그의 교회를 이러한 멍에에서 자유케하기 위함이며, 그러한 육적 계율들의 부담을 없애 주고 또한 보다 순수하고 영적인 예배 방법을 소개해 주기 위함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죄의 짐, 즉 범죄와 그 능력에 대해 깨닫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짐인 죄를 깨닫고 그 아래에서 신음하는 자들은, 또한 그들만이 그리스도 안에 쉬도록 초청함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들 자신의 죄의 사악함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하여 영혼 가운데서 깊이 뉘우치는 자들이다. 

또한 그들은 실제로 그들의 죄에 대해 병든 자들이며 세상과 육신의 고역에 지친 자들이다. 

또한 그들은 죄 때문에 자신들의 상태가 슬프고 위험하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이며, 또한 에브라임(렘 31:18-20)과 탕자(눅 15:17), 세리(눅 18:17),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자들(행 2:37), 바울(행 9:4; 6, 9), 간수(행 16:29, 30)처럼 그것을 괴로워하고 두려워한 자들이다. 

이것은 사죄와 평안에 대한 필수적인 준비이다. 

보혜사는 먼저 깨닫게 해야만 한다(요 16:8). 내가 찢어질 그 때에 고침을 받게 될 것이다.

② 초청은 "내게로 오라"이다. 

우리가 지닌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의 위대성의 영광스러운 현현은 우리를 놀라게 할지 모르지만 여기에서는 우리가 "그 황금홀"의 끝 부분을 만질 수 있고 또한 살 수 있도록 그가 어떻게 그것을 잡고 계신가를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에게 오는 것"은 피곤하고 "무거운 짐을 진"죄인들의 의무이며 권리라는 사실이다. 

그를 반대하거나 그와 불화하는 모든 것들을 다 버림으로써 우리는 그를 의사(physician)요 대언자로서 받아들여야 하며 우리 자신들을 그의 행위와 지배에 완전히 맡겨야만 한다. 

그에 의하여, 그 자신의 방법대로, 그 자신의 조건에 의거하여 구원함을 받도록 기꺼이 자신을 포기해야만 한다. 

"와서," "무거운 짐진 것"을 그에게 "맡기라."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오라." 이것이 복음의 부르심이다.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목마른 자들아 나아오라."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오라."

③ 오는 자들에게 약속된 축복은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노아(그 이름의 뜻은 "휴식"이다)이시다. 

왜냐하면 "이 동일하신 분이 우리를 쉬게 하실"것이기 때문이다(창 5:29; 8:9). 

참으로 "휴식은 좋은 것이다"(창 49:15). 특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는 그러하다(전 5:12). 

예수 그리스도는 휴식을 위하여 살아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에게로 나아오는 피곤한 영혼들에게 확실하게 보장된 휴식을 주실 것이다. 

이 "휴식"은 죄의 두려움에서 떠나 잘 기초가 된 양심의 평안 속에서 누리는 휴식이며, 죄의 능력에서 떠나 영혼의 정상적인 질서와 그 적절한 지배 속에서 누리는 휴식이며 또한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영혼의 만족함이다(시 11:6, 7). 

이 휴식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남아있는 안식"(히 4:9)으로써, 은혜 가운데서 시작하여 영광 가운데서 완성되는 휴식이다.

(2) 우리는 우리의 지배자이신 그리스도에게 나와서 그에게 자신을 맡겨야만 한다(20절). 

"나의 멍에를 메라." 

이것은 전자와 동일한 보조를 맞추어 가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의 보좌 위에 왕과 구세주, 제사장"으로 높여지기 때문이다. 

그가 약속하신 "휴식"은 죄의 고역으로부터의 해방으로써, 하나님의 봉사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우리가 그에게 마땅히 해야할 의무에 대한 책임으로 할 것은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를 위해 "면류관"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우리의 목을 위한 "멍에"를 가지고 계시며 또한 우리는 그가 기대하시는 이러한 "멍에"를 "메고"끌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피곤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멍에를 지우는 것"은 설상가상으로 "고통받는 자들에게 더욱 고통을" 부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의 정당성(pertinency)은 "나의"(my)라는 말속에 들어있다. 

"너희는 너희로 하여금 피곤케 만드는 멍에 아래에 있다. 너희는 그것을 떨쳐 버리고, 너희를 편하게 해 줄 나의 멍에를 시험해 보라." 

종들은 "멍에 아래에"(딤전 6:1) 놓여 있거나, 또는 예속(왕상 12:10 역주: 본문에는 멍에로 되어 있음)되어 있다고 말해진다. 

그리스도의 "멍에를 진다"는 것은 자신들을 그의 종과 예속물의 관계에 두는 것이며, 그의 모든 명령에 의식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이에 준한 행동을 하는 것이며 또한 그의 모든 처분에 즐거움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순종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주님께 복종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멍에"이며, 그가 지시하신 "멍에"이다. 그 "멍에"는 그가 우리 앞에서 끄신 멍에이다. 

왜냐하면 "그는 순종을 배우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기" 때문이다(롬 8:26). 

"멍에"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만일 짐승이 끈다면 "멍에"는 그를 도울 것이다. 

그리스도의 명령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모든 것(all in our favour)이다. 우리는 이끌기 위하여 이 멍에를 메어야만 한다. 

우리는 일하도록 멍에가 메어져 있다. 그러므로 부지런해야 한다. 

우리는 복종하도록 멍에가 메어져 있다. 그러므로 겸손하고 참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동료종(fellow-servants)과 함께 멍에가 메어져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교제를 계속해 나가야만 한다. 

"현명한 사람의 말은" 이와 같이 멍에를 멘 자들에게 "염소와 같다."

그런데 이 말씀은 우리의 교훈 중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가치가 있다(30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① 그리스도의 명령들의 "멍에"는 쉬운 멍에이다. 

그것은 crhstov"하다. 즉 "쉬울" 뿐만 아니라 은혜스러운 것이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뜻이 그와 같다. 그것은 고상하고 유쾌한 것이다. 

그 속(명령들의 멍에)에는 순종하는 목에 상처를 내는 것(스쳐서 벗겨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또한 다치게 하는 것도 없다. 

그 반대로 우리를 더욱 상쾌하게 한다. 그것은 사랑과 이어지는 "멍에"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명령들의 성질은 이와 같이 그 자체가 매우 적당하고, 우리에게는 매우 유익한 것이며, 한 마디로 그 성질을 종합할 수 있다. 

그것은 아름다운 말, 즉 사랑이다.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도움은 매우 능력이 있고 그 격려는 매우 적절하며, 또한 의무의 길에서 발견되는(역주:의무를 행할 때 알게 되는) 그 위로는 매우 강하기 때문에 우리는 참으로 그것이 즐거움의 "멍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멍에는 새로운 성품을 가진 자에게는 쉬운 것이며, "이해하는 자"에게는 매우 쉬운 멍에이다(잠 14:6) 

그 멍에는 맨 처음에 조금 어려울지 모르지만 후에는 쉬운 멍에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늘의 소망은 그 멍에를 "쉽게" 만들 것이다.

②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짐"은 매우 "가벼운 짐"이다. 

 짐은 사람인 우리에게 닥쳐오는 그리스도로부터의(from) 고통, 또는 기독자인 우리에게 닥쳐오는 그리스도를 위한(for) 고통이라고 볼 수 있는데, 특히 후자를 의미한다. 

이 "짐"은 그 자체가 "즐거운 것"이 아니라 "비참한 것"이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이 고통에 대해 잘 알았는데, 그는 이것을 "환난의 경한 것"(고후 4:17)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사 43:2)나 그리스도의 동정(사 63:9; 단 3:25), 특별히 성령의 도우심과 위로(고후 1:5)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가볍고 쉽게" 만든다. 

고통이 많아지고 오래 지속될수록 위로도 많아지고 오래 지속된다.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난관을 극복하게 하며 또한 우리가 일을 하거나 고난을 받게 될 때 직면하게 되는 실망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자.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잃게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에 의해" 잃어지지 않을 것이다.

(3) 우리는 우리의 선생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와야 하며, 또한 그에게 배워야만 한다(29절). 

그리스도는 큰 학교를 세우셨으며 우리를 그의 문하생으로 초청하셨다. 

우리는 들어가서 그의 학생이 되어야만 하며, 날마다 그가 그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 가르치는 교훈의 말씀을 경청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가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많은 대화를 가져야 하며 그것을 모든 경우에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가 행하신 것에 순응해야 하며 또 반드시 나타나 그의 발자취를 따라야만 한다(벧전 2:21). 

어떤 사람은 다음의 말씀, 즉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를 우리가 그리스도의 실례로부터 배우도록 요구된 특별한 과목으로 삼고 있다. 

우리는 그에게서 "온유하고 겸손한 것"을 배워야만 하며 또한 그에게 합당치 못하도록 하는 우리의 교만과 정욕을 억제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배우기"(엡 4:20) 위하여 "그리스도에 대해 배워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는 선생이시요 교제이시며, 안내자이시요, 길이시며,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 배워야"만 하는 두 가지 이유가 제시되어 있다.

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그러므로 너희를 가르치기에 합당하다.

첫째, 그는 "온유하시며," 또한 다른 사람들이 성을 내게 될 "무지한 자들에게 대하여 동정심"을 가시실 수 있다. 

유능한 많은 선생들은 열정적이고 성급하기 때문에 우둔하고 더딘 사람에게는 크게 실망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러한 것을 참고 그들의 이해심을 열어 주는 방법을 알고 계신다. 열두 제자들을 향한 그의 태도는 이러한 것의 본보기였다. 

그는 그들에게 온유하고 온화하였으며 또한 실망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셨다. 

비록 그들이 부주의하고 곧잘 잊어버린다 할지라도 결코 그들의 어리석음을 탓하시지는 않으셨다.

둘째, "그는 마음이 겸손하시다." 

그는 보잘 것 없는 문하생들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풋내기들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셨다. 

그는 제자들을 궁전이나 학교가 아닌, 해변에서 선택하셨다. 

그는 첫째 원리, 즉 어린 아기에게 우유와 같은 이러한 것들을 가르치셨다. 

그는 가장 하찮은 자격에 자신을 낮추고 계신다. 그는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셨다(호 11:3). 그와 같이 가르칠 자가 누구냐? 

우리가 이러한 선생님에게 배운다는 사실은 격려가 된다. 

이러한 겸손과 온유는 선생으로서의 그에게 대한 자격이었던 것처럼 그것은 그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는 자들의 최고의 자격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은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시 25:9).

② "너희의 마음이 쉼을 얻을 것이다." 

이 약속은 예레미야 6장 16절에서 인용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두 계약 사이의 조화를 보여 주시기 위하여 선지자의 글로 나타내시는 것을 좋아하셨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마음의 쉼(Rest for the soul)은 가장 바람직한 쉼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마음으로 하여금 "편안히 쉬게"하는 것이다.

둘째, "마음이 쉼"을 얻는 오직 유일한 방법과 확실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발 곁에 앉아 그의 말씀을 경청하는 일이다. 

의무의 방법이 곧 쉼의 방법이다. 

"이해"(understanding)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Knowledge) 안에서 "쉼"을 얻게 되며, 또한 모든 피조물들을 거치면서 헛되이 찾았던 지혜(욥 28:12)를 복음에서 발견함으로써 충족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진리는 우리의 마음을 내어 맡겨볼 만한 것들이다. 

고통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쉼을 얻게 될 것이며, 또한 그 속에 그들에게 풍족함과 고요함, 확신을 영원히 주시는 것을 직면하게(알게)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만족들은 천국에서 완성하고 영속될 것이다. 

우리는 그 천국에서 하나님을 뵙고 즉각적으로 즐거워할 것이며 그가 계신 그대로를 보게 될 것이며 우리의 하나님이신 그를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쉼(rest)은 그리스도에 대해 배운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자, 이것이 복음적인 부르심과 선물(제공물, offer)의 종합이며 본질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 마디의 말씀으로 주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고 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 대하여 여러 번 말씀하셨던 것과 일치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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