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4.28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롬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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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0장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믿음과 들음과 그리스도의 말씀

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20.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21.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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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0장 (개요)

유대인들의 특수한 교회 형태의 해체, 의식율법의 폐기에 의한 이 정치 기구의 배척, 그에 수반되는 모든 기구의 기능정지, 제사장 제도의 철폐, 성전의 불태움, 그들의 나라와 민족의 해체, 그리고 그 자리에 이방 민족 가운데서 들어서는 보편적 교회 형태, 이 모든 것이 과거지사로 된 우리들에게는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질지 모르지만 이 모든 것이 진행되고 있던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 곧 유대인들이 얼마나 수세기에 걸쳐서 고고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총애를 누리고 있었으며 이방인 세계가 그동안 내내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 있었는가를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이게 얼마나 충격적이요 기적적이며 이해하기 힘든 신비로 보였는지 모른다. 

사도는 전 장에 이어 본장과 다음 장에서 이것을 설명하고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부가적 언급, 곁으로 흐르는 얘기가 여러 가지 있어서 본론을 다소 어지럽히는 감이 없지 않다. 

본장을 나는 다음 두 가지로 대별하겠다.

Ⅰ. 불신 유대인들이 결합되어 있는 율법의 의와 복음에 제시된 신앙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점(1-11)

Ⅱ.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차이가 없고 오직 칭의와 하나님의 영접에 있어서 복음은 이 양자를 동일한 입장에서 서게 한다는 점(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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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대한 바울의 강론(2)(롬 10:1-11)

본장의 이 부분에서 사도의 목적은 율법의 의와 신앙의 의 사이의 큰 차이와 율법의 의에 비해 신앙의 의가 그지없이 탁월함을 보여 주어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도록 유도하고 설득하려는 데 있다. 

곧 그리스도의 복음진리를 거부한 자들의 어리석음과 죄를 들어 내 보여 주고 하나님께서 그런 거부자들을 배척하시는 게 정당하다는 걸 보여 주려는 것이다.

Ⅰ. 바울은 여기서 유대인들에 대한 애착과 그 이유를 고백하고 있는데(1,2절) 그의 소원과 증거가 여기에 잘 나타나 있다.

1. 잘 되기를 바라는 소원(1절)이다. 

이들이 구원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곧 그들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멸망과 파괴로부터 구원 받을 뿐 아니라 그들의 머리위로 넘실거리는 영원한 진로로부터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 말은 그들이 [전파되는 복음을 듣고 마음에]확신을 받으면 [그리스도께]돌아설 수도 있다는 뜻을 내포한다. 이들이 불신앙 가운데 구원받기를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비록 이들에게 [일종의 거리낌이요 낯설게 느껴지는 바]불합리한 것을 전파해 왔지만 그는 아직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아무도 멸망치 않기"를 바라시는(벧후 3:9), 곧 죄인들이 죽는 걸 바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같이 자비롭다. 

우리 자신이 구원이 해결되었으면 마음으로 타인의 영혼의 구원을 진심으로 소원하며 기원하려 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다. 

이것을 그는 자신의 "마음에 원하는 바와……구하는 바"라고 얘기하고 있다. 이 말이 암시하는 몇 가지를 살펴 보자.

(1) 그의 소원의 강도와 진실성. 

그것은 "그의 마음의 원하는 바"였다. 입술로만 반지르하게 떠들어대는 형식적인 얘기가 아니라 진정한 소원이었다. 이것이 그의 기도 이전에 오는 점을 유의하자. 

기도의 정수는 마음의 소원이다. 시큰둥한 소원에는 거절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온갖 기도마다에 있어서 우리의 영혼의 [생생한!! 생명의]숨결을 불어 넣어야 한다.

(2) 하나님께 이 소원을 올리는 일. 

그것은 자기 마음의 소원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그의 기도였다. 마음에 소원이 있을지라도 이것이 하나님께 제출되지 않으면 기도가 될 수 없다. 

바라고 소원하는 것, 그것만으로는 기도가 아니다.

2. 자신이 잘되었으면 하는 소원의 이유로서 제시되는 유리한 증거(2절).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다." 

불신 유대인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바울에게 둘도 없는 지독한 원수들이지만 그러나 그는 진실에 입각해서 이들을 좋게 평가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못된 원수라도 선하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를 저주하는 자들도 우리에게는 일종의 축복이다. 

사랑은 남을 최상으로 여기며 그들의 말과 행동을 높이 평가해 주라고 가르친다. 악인들에게 있어서도 칭찬할 만한 점이 있으면 이걸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다". 

그들이 복음에 반대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믿는 율법에 대한 존경 때문이다. 맹목적으로 오도된 열심이란 있기 마련이다. 

그리스도의 백성과 사역자들을 박해하고 내쫓으면서 "여호와에게 영광이 있기를"(사 66:5)하고 떠들던 유대인들이 바로 그런 경우다. 

아니 이들은 그들을 죽여 놓고도 하나님께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요 16:2).

Ⅱ. 여기에 불신 유대인들이 죄책을 갖는 치명적인 잘못이 있으니 이것이 그들의 멸망이었다. 

그들의 열심은 "바른 지식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새번역).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들이 그렇게도 열성을 부리는 율법을 주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약속된 메시아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이것은 일단 끝장을 고백했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종교와 새로운 예배 방법을 도입하셨으니 옛 것은 자리를 물러나는 게 마땅하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셨으니 그의 메시아됨에 대해서 더 없이 확실하게 증거해 보여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를 알려거나 소유하려 들지 않고 환한 빛에 눈을 감아버린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율법에 대한 열성은 맹목적이었다. 

이것을 그는 3절에서도 계속해서 입증하고 있다.

1. 그들의 불신앙의 성격.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곧 복음의 조건에 순응하지 않았으니 복음에 제시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갖는 칭의의 배려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불신앙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불복종이요 무죄라고 선언하는 복음의 선포에 대한 도전이다. 

"복종치 아니하였다." 

참 신앙에 있어서는 복종이 절실히 요구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첫 교훈은 우리 자신들의 부정(否定) [=자기 부인...심령의 가난함을 인정, 곧, 자기주장, 자기애착, 자기 의, 자기자산들을 죽은것으로 여김/내려놓음...하나님의 그리스도없이는 I'm Nothing임을 인정하며 주님을 절대적으로 추구하여 그분을 사랑하고 순복하며 누림]이었다. 

교만한 마음이 값없이 거저 오는 은혜를 보고 만족해 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없다. 

우리는 "빈민"으로서(sub forma pauperis) 뭘 간청하기를 [본능적으로]싫어하기 마련이다.

2. 그들의 불신앙의 두 가지 원인.

(1) 하나님의 의에 대한 무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몰지각함]

이들은 죄를 싫어하시고 처벌하며 그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를 이해하지도 믿지도 고려해 보지도 않았다. 

곧 우리들이 그분 앞에 나서려면 어떠한 의를 덧입고 나가야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다. 

그랬더라면 스스로 하나님의 공의를 보상하겠다는 생각에서 복음의 제안을 도전하거나 스스로의 행위에 의한 칭의를 기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제 지정되고 계시된 하나님의 칭의-방법을 모르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들이 이것을 몰랐던 것은 이걸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발견될까봐 아예 눈을 감아 버리고 어두움이 좋아 거기에 묻혀버린 것이다.

(2) 그들 자신의 의에 대한 교만한 기만. 

"자기 의를 세우려고," 곧 자신들의 계략과 수단, 자신들의 행위와 의식 율법 준수에서 얻어지는 의인 것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공로는 바라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자신들의 실천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데 입고 나타날 의를 이루기에 충분하다고 그것에만 의존하였다. 

이들은 바울과 함께 이것에 대한 의존을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 자신의 의가 아니라"(빌 3:9 , 새 번역). 

이 교만한 예를 또 우리는 바리새인에게서 볼 수 있다(눅 18:10, 11:14 비교).

Ⅲ. 그는 여기서 이 실수의 어리석음을 보여 주고 있으니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셨고 영원한 의를 들여 오셨는데도 아직도 율법에 의한 의만 구하고 있으니 얼마나 모순된 것인지 모르겠다.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1. 복음에 대한 율법의 보조 역할(4절). 

"그리스도는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니라." 

율법의 목적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데려다 주는 것이었다. 도덕법의 임무는 상처를 더듬어 찾아내는 것이요 의식법은 이 치료의 그림자 역할을 하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이 양자에 종지부를 찍으셨다(고후 3:7 참조; 갈 3:23, 24 비교). 율법의 소용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가리켜 보여 주는 데 있다.

(1) 그리스도는 의식 율법의 마지막이다. 

그가 그것의 완성이기에 그는 그것의 마침표다. 실체가 오면 그림자는 사라지기 마련이다. 

구약 시대에 제정된 제물, 예물, 결례는 모두 그리스도를 상징으로 보여 주며 그를 가리켜 보여 주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죄를 없이할 수 없다는 그 무능력이 단번에 드림으로 죄를 없이할 수 있는 제물의 필요성을 스스로 발견한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율법이 할 수 없던 일을 해내셨으며(8:3) 율법의 위대한 목적을[그 궁극을!!] 달성하셨다는 점에서 그는 도덕법의 마지막이다. 

율법의 목적은 사람들을 완전 순종에로 이끌어 거기서 의를 획득하는 것이다. [=율법 안에서 참생명 그리스도, 율법의 제정자시요 그 실체이신 분에게로, 믿어 들어가 대망하게 함]

이것이 이제는 죄의 권세와 본성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불가능하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는 이 율법의 종지부다. 

율법이 폐한 것도 아니요 율법 시달자의 의도가 좌절된 것도 아니며 오직 우리의 율법 불이행에 대해 책임을 지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이루신 완전 보상에 의해서 그 목적이 달성된 것이요 우리는 칭의의 다른 길에 접어 들게 된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의를 위한 곧 칭의를 가져오려는 율법의 목적 달성 그 자체다. 그러나 그것은 "믿는 온갖 사람에게만" 통용되는 말이다. 

우리가 믿는 순간 곧 복음의 조건에 우리가 동의하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상에 관련이 지어지며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해 의롭게 되는 것이다.

2. 율법에 대한 복음의 우월성. 그는 양자의 구조적 차이점을 들어 입증하고 있다.

(1) 율법에서 오는 의는 무엇인가? 

이것을 그는 5절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 강령은 "행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하는 식이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보다 더 낫고, 보다 더 유효한 의를 가리켜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관계를 떠나서 율법 자체만을 놓고 볼 때 (불신 유대인들의 태도가 바로 이것이었다.) 거기에는 저 완전한 순종이 아니고서는 인간을 의롭게 해줄 충분한 의가 전혀 없다. 

이것을 위해 그는 성경을 인용하고 있다(레 18:5).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갈라디아서 3장 12절도 보자.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살 것이다." 

이 얼마나 즐거운 소식인가! 즐거워하라. 가나안 땅에서 뿐 아니라 그 가나안이 모형으로 보여주고 상징하는 저 하늘 나라에서 살 것이다. 

예상된 행동은 완전하고 무흠해야 하며 한오라기의 불이행이나 거역도 있어서는 안 된다. 

시내 산에서 주어진 율법으로 말하면 비록 그것이 순수한 행위 언약은 아니었다 해도(그렇다면 당시 구원 받을 사람이 누가 있었겠는가?), 그래도 그것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이끌고 은혜를 환영하게 하는 일이 있어서 더욱 효과적이도록 하려고 거기에는 행위 언약의 엄격성과 공포가 섞여 있는 것이다. 

이제는 유대인들이, 새로운 생명의 길이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서도 어려울 뿐 아니라 인간 본성의 타락으로 인하여 불가능하게 된 이 방식에 의한 칭의와 구원에 아직도 집착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우매가 아닌가?

(2) 믿음에서 오는 의는 무엇인가?(6절 이하) 

이것을 그는 "둘째 율법"인 신명기에 있는 모세의 말을 인용해서 묘사하고 있는데 거기보면 첫 번째 율법 주신 데보다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계시가 더욱 명확히 들어나 있다. 

그는 이것을 신명기 33장 11-14절에서 인용하며 다음 몇 가지 사항을 보여 주고 있다.

① 그것은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칭의와 구원의 길 그 자체에는 우리를 암담하게 하는 그런 불가사의나 매듭이나 극복키 어려운 난제가 담겨 있는게 아니라 글자 그대로 고속도로다(사 35:8). 

그것을 찾아 어디로 올라갈 필요도 - 그것은 하늘 높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찾아 어디로 내려갈 필요도 - 그것은 땅속 깊숙히 있는 것이 아니기에- 없다.

첫째, 우리는 거기 있는 기록을 들여다 보고 신의 경륜의 비밀을 조사하려고 하늘에 올라갈 필요가 없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거기서 모셔 오기 위해 그리로 올라가지 않고도 또 그에게 특사를 보내지 않고도 의롭게 되고 구원받을 수 있다.

둘째, 우리는 무덤에서, 곧 죽은 자의 상태에서 그리스도를 모셔 오려고 깊숙히 내려갈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음부(아•R손)에 내려가셨다는 게 죽은 자의 상태에 들어 가셨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니 요나의 비유를 빗대어 말하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계셨던 것도, 그리고 지금은 하늘에 계시다는 것도 모두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들을 환상적인 난제를 가지고 괴롭히고 어리둥절하게 할 필요가 없으며 또 그리스도의 구원의 방법이 비실제적이요 계시의 목적이 단지 우리를 흥미진진하게 하는 것밖에 안 되는 따위의 해괴망측하고 육적인 생각을 만들어 내서는 안된다. 정말이지 구원은 우리들에게서 수억 만리 던 곳에 비치된 무엇이 아니다.

② 그것은 아주 간단하고 쉽다. 

"말씀이 네게 가까워" 

흔히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 보자, 그리스도를 영접하자, 그리스도에게서 영양을 섭취하자고 말하는 것은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나 음부에 있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말하는 게 아니라, 약속에 들어 있는 그리스도, 말씀에 계시되고 제시된 그리스도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그대에게 가까이 있다는 건 말씀이 그대에게 가까이 있다는 말이니 정말 그렇다. 

"말씀이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이것을 이해하고 믿고 그대의 것으로 하는 데 있어 어려운 게 하나도 없다. 그대가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네 속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바로 여기서 그대의 증거를 찾아야지 하늘 기록에서 뒤질 필요가 없다. 

"그것이 네 입에 있고"(그렇게 되도록 하겠노라고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사 59:21), "네 마음에 있다"(렘 31:33). 

우리를 위한 조치는 이미 모두 우리들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내려 오셨으니 우리는 그를 모시러 올라갈 필요가 없다. 

그는 이미 음부에서 일어 나셨으니 그를 어떻게 올라 오시도록 할 것인가 하고 수다를 떨 필요가 없다. 이제 할 일은 하나도 없다. 남은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일뿐이다. 

우리 마음과 입을 살피는 것 이것뿐이다. 

율법 시대에 살던 자들은 스스로 모든 걸 해내야 했다.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이미 이 일의 대부분이 성취되었음을 발견하고 있다. 곧 의와 구원이 아주 간단명료하게 지름길에 놓여 있으며, 아니 우리 문전에 와 있는 것이다. 

말씀이 우리에게 가까이 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입에 있다는 말은 우리가 그것을 날마다 읽는다는 말이요 그것이 우리 마음에 있다는 말은 우리가 그것을 날마다 생각하고 있다는, 아니 생각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곧 믿음의 말씀이라." 

복음과 그 약속이다. 그것이 믿음의 말씀이라고 불려지는 것은 그것이 언제고 상대하는 믿음의 대상 곧 우리가 믿는 말씀이기 때문이요, 그것이 믿음의 교훈으로서 믿음을 명령하고 믿음을 칭의의 위대한 조건으로 삼기 때문이요, 그것이 믿음을 가져 오고 이루는 일상적인 방편이기 때문이다. 

이 믿음의 말씀이란 무엇인가? 그 강령이 곧 복음의 요약이 간단명료하게 9,19절에 나타나 있다. 몇 가지 살펴보자.

첫쨰, 우리에게 약속되어 진 것. 

"네가……구원을 얻으리라." 

복음이 보여 주며 제시하는 것은 구원이니 죄책과 진노에서의 구원이요, 영혼의 구원이요, 영원한 구원이니 그 원 저자는 그리스도시니 끝까지 구세주이시다.

둘째, 어떠한 조건 하에서인가.

1. 두 가지 구원의 조건이 요구되고 있다.

(1)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공공연하게 그를 우리의 왕과 구주로 모시고 관계를 유지하며 이 세상의 유혹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내 것으로 하며 사시사철 그의 곁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시인하는 문제를 대단히 강조하셨다(마 10:32, 33). 

이것은 많은 은혜의 소산이요 자기 부정,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세상에 대한 경멸, 굳은 용기와 각오를 분명히 선을 그어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이 더더욱 힘들고 귀했던 것은 초대 교회 당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고백은 곧 부동산, 명예, 지위, 자유, 생명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귀히 여기는 모든 것을 몰수당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2)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며."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그건 한낱 비웃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고백의 뿌리는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계시에 남김없는 동의에 묻혀 있어야 한다. 

특별히 그의 부활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기본 조항이요, 그것으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선포되었으며 하나님께서 그의 보상을 만족한 것으로 받아들이셨다는 완전한 증거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2. 보다 상세한 설명이(10절) 

이번에는 앞뒤가 바뀌어 따르고 있다. 왜냐하면 먼저 마음의 고백이 있어야 입의 고백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1) 믿음에 관해서 : "마음으로 믿어". 

이것은 이해의 동의를 벗어나 의지의 동의로서 내면적이요 마음을 다하는 진실하고 강력한 동의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게 아니면 믿음이 아니다. 이것이 "의에 이르는 것"이다. 여기에 칭의의 의가 있고 성화의 의가 있는 것이다. 

믿음은 양자에 다 걸리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칭의의 조건이자(5:1) 우리의 성화의 뿌리요 샘이니 거기서부터 시작되고 그것에 이해서 진행되는 것이다(행 15:9).

(2) 고백에 관해서, "입으로 시인하여." 

이것은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요(15:6) 박해받을 때 타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길을 내 것으로 삼고 고백하는 것이다. 

주께서 우리의 입을 만드셨기 때문에(출 4:11) 입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건 당연하니 특별히 어려운 때에 당신의 백성에게 "구재와 지혜"를 주시마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눅 21:15). 온갖 입이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받을 영광의 일부이기도 하다(빌 2:11). 

이것이 "구원에 이르게"하는 것은 그것이 그 약속 조건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마 10:32). 

믿음에 의한 칭의가 구원에 대한 우리의 자격의 기초가 되지만 우리는 시인하므로 이 기초 위에 집을 지으며 우리 것으로 된 그것을 마침내 완전 소유할 수 있게 된다. 

결론적으로 구원의 간략한 조건이 여기 들어 있는 것이다. 

자신을 영혼과 몸을 다 해 하나님께 드리고 바치는 데 있어서 마음으로 믿는 가운데 우리 영혼을 드리며 입으로 고백하여 우리의 몸을 드리는 것이다. 

이 것을 행하라. 그러면 그대가 살 것이다. 여기에(11절) 그는 이사야 28장 16절을 인용하고 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우 카타이스퀸데세타이).

① 그런 사람은 그가 신뢰하는 그리스도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으로 믿는 사람이 입으로 고백하는 걸 부끄러워할 리 없다. 사람들도 하여금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하는 것은 죄악스런 수치다(막 8:38). 

믿는 자는 서두르지 않는다. 믿는 자는 그가 본분을 다하는 길에서 마주치는 어려움을 피해 달아나려고 서두르지 않으며 멸시받는 종교를 수치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②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소망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의 목표에 있어서 실망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부끄러워해서 안된 건 우리의 임무요, 또 그걸 수치로 여기지 않게 될 것이라는 건 우리의 특권이다. 

주 예수에게 맘 푹 놓고 쉬는 믿음을 가진 자는 그걸 후회할 건덕지가 결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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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전파의 중요성(롬 10:12-21)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아무런 구별이 없고 모두가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시는 면에 있어서는 동일한 입장에 놓여 있다는 첫 몇 마디에서 우리는 사도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헬라인이 따로 없고 유대인이 따로 없다(골 3:11).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유대인이라 해서, 또는 그들이 헬라인이라 해서 구원하고 배척하시는 게 아니라 양자를 모두 복음의 조건으로 받아 들이신다. 

"차별이 없음이라." 

이것을 입증하려고 다음 두 가지 이론을 내세우고 있다.

Ⅰ. 곧 하나님은 모두에게 동일하다는 점.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모든 사람에게 부여하시도다." 

유대인에게는 특별히 더 친절한 하나님이 따로 있고 이방인에게는 덜 친절한 하나님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는 모두에게 동일하시니 만민에게 한 아버지이시다. 

당신께서 자신의 이름을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신 여호와 곧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선포하셨을 때 이미 그는 자신의 유대인과의 관계뿐 아니라 그를 찾는 모든 피조물과도 어떤 관계에 있으며 또 앞으로 어떠한 관계에 있을 것인가를 이미 암시하셨다. 

선하실 뿐 아니라 부요하시니 선에 있어서 풍요하시다. 이걸 가지고 그는 만민을 먹여 살리시니 언제고 거저 주시는 것이다. 그럴 능력과 의사가 하나님께 다 있다. 그 자체로서 부요할 뿐 아니라 우리를 상대로 부요하시니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그의 은총을 후하고 풍성하게 베푸시는 것이다. 

이 풍요를 우리의 것으로 수확하려면 우리편에서 뭔가가 이뤄져야 하는데 그건 최소한의 일로서 그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된다. 

그는 이 일로 만민에게서 요청을 받을 것이니(겔 36:37) 물을 가치가 없는 건 소유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기도로 빼내기만 하면 된다.

Ⅱ. 약속은 모두에게 동일하다는 점(13절). 

"누구든지……부르는 자는," 

예외없이 이사람 저 사람 다 부르기만 하면 된다. 유대인과 헬라인 양자에게 미치는 약속의 이러한 범위, 곧 무차별한 범위는 이미 선지자에 이해서 예언된 바이기에 놀랄게 못된다는 식이다(욜 2:32). 주의이름을 부르는 것이 실질적인 신앙의 전부로 여기서 묘사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이라면 기도의 생명 말고 뭐가 따로 있겠는가? 

이것은 그분에 대한 우리의 의존, 그분에게 대한 우리의 전반적인 헌신,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을 믿는 가운데 바라는 것을 내포한다. 

이렇게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저 주십시오 하고 갖는 것이다. 이보다 뭘 따로 더 갖겠는가?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1.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어야 했던 필요성(14, 15절). 

이 점이 유대인들이 바울을 상대로 못마땅해 하던 것이니 그는 이방인들의 사도로서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왜 이들을 앞서 말한 약속의 영역으로 이끌어 들여야만 했던가 하는 점을 밝히고 있으니 유대인들이 시기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1)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걸 믿기 전에는 그들이 기도로 그 이름을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지 않는가? 기도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신앙의 은혜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것 없이는 올바로 기도할 수 없으며 기도해 봐야 받아 주시지도 않는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는 믿어야 한다(히 11:6). 그들이 참 하나님을 믿기 전까지는 그들의 부르짖음은 '오 바알이여 우리를 들으소서!' 하는 식이었다.

(2)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우리가 게시를 받거나 동의하기 전에 어떠한 모양으로든 그게 미리 알려져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걸 타고나지는 않았다. 듣는다는 데는 읽는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으니 이 읽음은 곧 믿는다는 것과도 같은 말이다. 

왜냐하면 읽음을 통해서 많은 사람이 믿음에 이르기 때문이다(요 20:31).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요." 

그러나 여기서는 그저 들음만이 내용을 받아들이는 일상적이요 자연스런 방법으로 묘사되어 있다.

(3)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불가능한 얘기가 아닌가? 누군가가 있어서 뭘 믿으라고 외쳐야 하는 것이다. 

설교자와 청중은 상호 연관관계에 있으니 서로가 서로에게서 기쁨을 찾을 때 큰 축복이 따른다. 

곧 듣는 자는 외치는 자의 수완과 성실성에서 외치는 자는 듣는 자의 의욕과 순종에서 서로 기쁨을 찾아야 한다.

(4)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곧 위임을 받고 그 일에 자격을 구비하지 않았으면 전파할 수 없다는 얘기다. 

대사가 본국 임금의 신임장과 훈령없이 어떻게 대사로서 행동을 취할 수 있겠는가? 

이 말은 정상적인 사역을 하려면 거기에 따르는 정상적인 사명과 임명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역자들을 보내는 이는 하나님이다. 그분이 추수의 주님이시기에 우리는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마 9:38) 하고 그분에게 기도해야 마땅하다. 

그분만이 인간들로 하여금 이 사역에 적합하도록 자격을 구비케 하시고 그 일에 맘을 쓰는 정성을 주신다. 

그러나 이 자격과 적성 문제는 각자 개인의 판단에 내맡겨져서는 안 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성질상 교회의 필요한 질서 유지를 위해 이 직책에 오래 있어서 그 지혜와 능력이 인정을 받은 유능한 자들의 판단에 맡겨져야 한다. 

물론 이들은 이 사역에의 자격과 적성을 갖춘 자들을 가려내어 대를 잇게 함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이 만대에 걸쳐 존속되고 그의 보좌가 천상에서처럼 빛나게 한다는 사명감을 갖춘 자들이어야 한다. 이렇게 따로 세워진 자들은, 보냄을 받은 자들이기에 전파할 수도 있겠지만 전파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2. 복음 전파를 받은 자들에게 있어서 그 복음은 얼마나 반갑겠는가? 

이들에게는 이 복음이 구원의 길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15절). 

여기에 그는 이사야 52장 7절을 인용하고 있다. 유사 성구는 나훔 1장 15절이다. 

이것은 모형상으로는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 구원이라는 즐거운 소식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우리의 구원이라는 좋은 소식, 곧 복음을 내다 보고 있다. 

몇 가지 살펴 보자.

(1) 복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평화의 복음"이다(흠정역에는 "좋은 소식" 바로 앞에 "평화의 복음"이라는 말이 들어 있음, 역자주).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의 말씀이다. 

"땅에서는 ……평화로다"(눅 2:4). 

아니면 여기의 평화라는 말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모든 좋은 것에 대한 총칭으로 사용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좋은 소식"(좋은 것에 대한 반가운 소식, 흠정역)이라는 말이 뒤이어 나오고 있다. 복음의 내용은 정말 좋은 것들이니, 아니 최선의 것들이다. 

이런 것을 전하는 소식이야말로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즐거운 소식이니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온 최고 수준의뉴스가 아닐 수 없다.

(2) 사역자들의 임무는 무엇인가. 

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것"이요 "평화를 전도하는 것"(원문은 이렇다)이며 좋은 소식을 전도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온갖 설교자는 전도자다. 

그는 소식을 전달하는 사자일 뿐 아니라 대사이다. 맨 처음 복음 설교자들은 천사들이었다(눅 2:13 이하).

(3) 따라서 이들이 인간들에게 얼마나 반가운 존재들이겠는가: 

"아름답도다……발이여." 

대환영이라는 뜻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발에 입맞추고 그의 발을 부둥켜안음으로 그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표현했다(마 28:9).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 보내실 때 그는 그들의 발을 씻으셨다. 

평화의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발(언어 행동 ...언행심사)이 아름다워야 한다. 사역자들의 성결한 생활이야말로 그들의 발의 아름다움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의 말을 듣는 자들의 눈에 "아름답구나!" 하는 걸 보여 줘야 하는 것이다. 메시지를 환영하는 자들이 그 메시지를 가져 오는 자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살전 5:12, 13).

3. 그는 여러 곳에서 복음이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을 들어 야기 될 반론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다(16절),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새번역). 

유대인 모두가, 이방인 모두가 순종한 것은 아니다. 양측의 절대 다수가 불신과 불순종 가운데 남아 있는 실정이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그걸 알고 믿을 뿐 아니라 순종하라는 의미에서다. 탁상공론 의 집대성이 아니라 실천준칙이라는 얘기다. 

이렇게 복음이 먹혀 들어가지 않을 것도 이미 선지자가 내다 본 그대로다.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사 53:1) 

아주 극소수만이 믿었다, 그게 얼마나 성실한 전파요 모두에게 얼마나 영접을 받아야 마땅한 것인가를 생각하면, 아직도 불신 가운데 머물러 있는 절대다수를 생각하면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에게 있어서 복음을 전파하는데 믿어 주지 않는 것보다 더 슬프고 불쾌한 일은 없다. 이런 우울한 심경에서는 하나님께 나아가 불평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 

"주여, 누가 믿었나이까?" 이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1) 전파된 말씀은 믿음을 일으키는 정상적인 수단이다. 

"그러므로"는 "그렇지만"(a[ra)으로 보는 게 좋다. 듣는 자들 가운데 믿지 않는 자들이 많지만 그러나 믿는 자들은 맨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이것은 앞서 말한 것에 대한 요약이다(14절).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의 말씀"이라고도 하니 그것이 믿음을 낳고 키워 주는 것이다. 

"들음"(믿음을 일으키는 들음)은 "그리스도(하나님, 흠정역)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것은 [성령으로] 달콤한 인간의 지혜의 말을 들음이니 그걸 하나님 말씀으로 듣는 것이다.

(2) 그러나 복음 전파를 듣고도 믿지 않는 자들은 그걸로 해서 핑계할 수 없게 되었으니 자신들의 파멸에 대해 자신들에게 감사해야 할 뿐이다(18절에서 끝절까지).

① 이방인들은 이것을 들었다(18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최소한도 복음은 다 들었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다." 시끄러운 소리뿐 아니라 "말씀"(이에 대한 보다 명료한 소식) 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사도들이 받은 위임은 이런 식이다. "너희는 온 세상에 이르러 모든 피조물에게 전파하며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이들은 지칠 줄 모르는 근면과 놀라운 성과로 이 임무를 수행하였다. 바울의 전도 영역을 참조하시라(15:19). 

이 지구의 끝 가운데 하나인 이 영국이라는 섬 나라에도 그리스도 승천 후 몇 년 안 있어서 복음의 소리뿐 아니라 말씀이 와 닿았지 않은가. 

이런 이유 때문에 맨 처음 사도들에게 방언의 은사가 풍성히 쏟아졌었다(행 2장). 

여기의 말씀은 분명히 시편 19편 4절을 비유하는 것이니 거기에 보면 하나님의 모든 보이는 창조물들이 온 세상에 창조주의능력과 신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구약 시대에 주께서는 창조의 사역을 공포하시는 데 있어서 해와 달과 별을 사용하셨듯 오늘날 온 세상에 구속의 사역을 공포하시는 데 있어서는 복음 사역자들의 전도를 사용하신다. 그러기에 복음 사역자들을 가리켜 "별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② 유대인들도 이걸 들었다(19-21절). 

이들 역시 얼마나 핑계할 수 없는가 하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는 구약을 두 군데 인용하고 있다. 

이방인들을 불러 들였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이들은 모세와 이사야을 통해 이걸 알고 있었음직하다.

첫째, 그 하나는 신명기 32장 21절에서 인용되고 있다. 

"내가……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유대인들 자기들에게도 그것이 제공되었을 뿐 아니라 이방인들이 그걸 받아들이며, 그 받아들임으로 혜택이 오는 걸 보고서 배가 아팠다. 이들은 거절했다. 

"너희에게 먼저"(행 3:26) 사도들이 가는 곳곳마다 유대인이 먼저요 이방인은 나중이었다. 한쪽이 안 들으면 다른 쪽은 들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제 여기서 그들의 시기가 발동했다. 이들은 마치 탕자 비유에서 맏형처럼(눅 15장) 탕자 이방인이 돌아 오자 베푸는 영접과 잔치를 시기질투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방인들은 "백성이 아닌 자"와 "미련한 백성"으로 묘사되고 있으니 하나님을 내세우는 백성이 아니라는 뜻이다. 

세상의 지혜와 슬기가 어떠하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는 미련한 백성이요 끝에 가서 그렇게 판명되고 말 것이다. 

이방 세계의 상태가 바로 이러했지만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리스도가 이들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되셨다. 

이방인들이 이처럼 은총에 들어가게 되는 꼴을 본 유대인들의 안달을 우리는 사도행전 13장 45절: 17장 5, 13절 그리고 특별히 사도행전 22장 22절에서 읽을 수 있다. 

유대인들이 이처럼 분노하게 되는 것은 이들이 악하다는 걸 드러내는 예에 불과하다. 이것이 신명기에서는 위협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인간의 죄 그 자체로 스스로 그 자신을 처벌하게 하신다. 

자기 자신의 욕정을 따름으로 주의 맹렬한 분노로 내버려 두어진 것보다 더 큰 재앙을 받은 사람은 없다.(롬1장 참조...내어 버려두사..)

둘째, 다른 성귀는 이사야 65장 1,2절에서 인용된 것이니 여기서 이사야는 아주 대담하게 자기 동족의 배척을 그렇게도 간단 명료하게 얘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성실하다는 판단을 받으려는 자는 용감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고 작정한 사람은 인간을 불쾌하게 하는 걸 겁내서는 안 된다. 

이사야의 용감하고 간단한 말의 내용을 살펴 보자.

1. 이방인 영접과 환대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예방적인 은혜와 은총(20절).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구하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하는 처방은 우리에게는 통용되는 준칙이지만 구하지도 않은 자들에게서 종종 발견되어지는 하나님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의 은혜는 자신의 것이요 그에게 속한 자들을 가려내는 은혜이니 그는 이걸 주권을 행사하는 방향에서 주기도 하시고 빼앗아 가기도 하신다. 

이 은혜야말로 우리에게 그의 선하심이라는 더없이 풍성한 축복을 안겨다 주는 것이다. 

그들은 그를 찾거나 요구하는 데 있어서 너무도 거리가 먼 나머지 거짓된 허무에 빠져 벙어리 우상을 섬기고 있을 때 하나님은 이처럼 자신을 이방인들에게 드러내셨으니 곧 그들 가운데 복음의 빛을 보내셨다. 

우리들의 상황이 바로 이러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그를 찾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시작하시어 자신을 우리들에게 나타내시지 않았던가?

이 시기야말로 사랑의 때가 아닌가? 우리가 길이길이 감사한 마음으로 기억해야 할 때가 아닌가? 

우리는 그를 찾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시작하시어 자신을 우리들에게 나타내시지 않았던가? 

이 시기야말로 사랑의 때가 아니었으며 우리가 길이길이 감사한 마음으로 기억해야 할 때가 아닌가?

2. 이스라엘이 공정한 제시와 애정적인 초청에도 불구하고 버티는 그들의 고집과 사악(21절).

(1)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크나큰 선하심.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① 그의 제시. "내 손을 벌렸노라." 

구원과 생명을 놓고 더 없는 성실과 진지한 태도로, 모든 애정의 표시를 다 하며 이들에게 행복을 제시해 보여 주고 더 없는 증거로 이들을 설득하며 이들과 담판하였다는 얘기다. 

손을 편다는 말은 들어 달라는 표시요(행 26:1) 받아 달라는 표시다(잠 1:24).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손을 펴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화해의 표로써 "손을 벌렸노라." 곧 악수하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것이다. 우리는 손만 내밀면 된다(대하 30:8).

② 이 제시에 따르는 그의 인내. "종일" 

성질부리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도 이 정도면 알아 줄 만하다. 그는 자비로우시기 위해 기다리신다. 하나님의 인내의 시기가 날(또는 낮, day)로 표현되어 있다. 

일하기에 적합한 낮이다. 그러나 그것은 낮으로 제한되어 있다. 이것이 다하면 밤이 온다. 하나님께서 참기는 오래 참으시지만 그러나 언제까지고 참으시는 건 아니다.

(2) 그분에 대한 그들이 악. 이들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이었다. 

이사야서에는 한 마디 히브리어로 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두 마디로 잘 설명되고 있다. 

곧 그 소명에(부르심에) 불순종할 뿐 아니라 그걸 가지고 다투며 거역하는 것이니 이거야말로 더더욱 악독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좋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대부분 거기에 할말이 없다는 걸 인정하고 들어가는데 유대인들은 그걸 믿지도, 거기에 머물지도 않고 더 나아가 반박하고 모독적인 말을 퍼부었다. 하나님의 인내가 이들에게는 불순종을 자극하는 부작용을 일으켜 더 더욱 죄악스럽게 만들었지만 저들의 불순종은 오히려 하나님의 인내의 영광을 돋보이게 하고 더더욱 은혜로운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의 선하심이 인간의 사악에 압도되지 않는 것은 자비의 기적이요 인간에게 있어서 그 사악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압도된다는 건 사악의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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