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4.28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롬11
첨부파일 :

롬11장

===이스라엘의 남은 자

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3.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7.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9.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10.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이방인의 구원

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3.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이스라엘의 구원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28.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30.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

로마서 11장 (개요)

사도는 유대인들의 배척과 그들의 조상을 상대로 한 약속을 조화시키고 나서 본장에서는 계속 그 배척의 가혹성을 누그러뜨리고 그걸 전반적 신의 선하심과 조화시키는 방향에서 노력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하는 말로 요약할 수 있겠다. 

따라서 사도는 이 반론에 대한 대답을 두 가지 면에서 제시하고 있다.

Ⅰ. 그는 그의 진노와 섞여 있는 자비가 무엇인가를 광범위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1-32).

Ⅱ. 그는 여기서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주권을 결론으로 제시하며 그를 찬양하는 것으로 본장과 본 주제를 마치고 있다(33-36).

=======

유대인과 이방인의 상태(롬 11:1-32)

사도는 여기서 유대 민족을 저버리는 신의 행위에 대해서 일어날 수도 있는 반론을 스스로 제기하고 있다(1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이 배척이 전부요 최종적인가?  이들은 모조리 영원한 파멸과 진노에 영영 방치되고 말 것인가? 

이 선고는 예외가 없으며 상고가 더 이상 불가능한 것인가? 이제 더 이상 자신에게 특수한 민족을 두시지 않을 것인가? 

이에 반해 그는 언뜻 보기에 가혹해 보이는 여기에, 계속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가 담겨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특별히 세 가지 면에서 그렇다.

1. 유대인들 가운데 버림을 받은 사람이 많지만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다.

2. 유대인이라는 몸이 버림 받았지만 이방인들이 대신 들어 왔다.

3. 유대인들이 현재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때가 차면 그들은 그의 교회로 다시 들어와야 한다.

Ⅰ. 유대인들이 대부분 내버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한 전제 조건을 그는 "그럴 수 없느니라"로 시작하고 있다. 

이런 얼토당치 않은 제안을 수락하실 리 없다는 얘기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 간에 구별을 지어 놓으셨다.

1. 믿는 유대인들 중에 선택받은 남은 백성이 있었으니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와 생명을 얻은 자들이다(1-7절). 

이들은 그가 "미리 아신"자들이니 창세 이전부터 사랑으로 생각하고 있던 자들이다. 이처럼 그는 예지하신 자들을 예정하신다. 

여기에 구별의 근거가 있다. 이들은 "택하심을 입은 자"(선택, 흠정역)라 불려지고 있다. 

곧 하나님께서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선택하는 사랑으로 구별되고 위엄을 갖춘 자들이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선택" 곧 하나님께서만 고르신 자들이다.

(1) 그는 자신도 그 중에 하나였음을 얘기하고 있다. 

"나도 이스라엘 인이요." 

이 말은 마치 "모든 유대인이 배척을 받았다면 나의 주장도 무효화하고 나도 배척받는 게 아닌가?"하는 식이다. 바울은 선택받은 그릇이었다(행 9:15). 그러면서도 그는 "아브라함의 씨"였으니 특별히 모든 이스라엘 지파 중에 가장 보잘 것 없고 어린 베냐민 지파였다.

(2) 이것은 엘리야의 시대에 있어서 그랬듯이 오늘날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당시만 해도 선택받은 남은 자의 숫자는 우리의 생각 밖으로 훨씬 많고 컸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은혜와 은총이 그 백성의 남은 자에게 국한되고 제한되는 것도 이상할 것 없다는 얘기다.

 엘리야의 시대에도 그랬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의 위대한 개혁자 엘리야를 "엘리야 전기에서" 살펴 보자.

① 이스라엘에 관한 그의 실수. 

아합 시대 이스라엘의 배도가 너무도 광범하게 만연되어 있어서 그는 자기자신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남겨 둔 하나밖에 없는 성실한 존재로 여겼다. 그는 열왕기 상 19장 14절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옮기고 있다.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이스라엘에게 불리한 대언을 하다, 흠정역). 

이상한 대언이다. 사도행전 25장 24절에도 "모든 유대 사람이……내게 소송을 걸어 왔다"(에네튀콘 모이)는 식으로 (엔튕카노)을 번역했듯이 이 문장을 우리는 "그가 이스라엘을 상대로 하나님에게 소송을 제기하다"(엔튕카네이 토 데오 카타 투 이스라엘)는 식으로 읽을 수도 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상대하며 그와 교제를 가지며 그와 함께 토론을 벌리는 것이다. 

엘리야는 "간절히 기도했다"(기도하는 가운데 기도했다. prayed in praying)는 말이 있다(약 5:17).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기도하는 가운데 기도하며 이 임무를 하나님을 상대로 고소하는 사람들처럼 충실히 수행해야 할 것이다. 

이제 엘리야는 기도하는 가운데 자기 말고는 이스라엘에 믿는 자가 하나도 없는 걸로 얘기하고 있다. 

때때로 신앙이 이처럼 저조할 때가 있으며 그 모습이 사라져버린 것만 같아 제 아무리 어질고 관찰력 있는 자라도 포기해 버리고 마는 때도 있다.

엘리야의 시대가 바로 이랬다. 한 나라의 모습은 그 세력과 대중의 방향에서 드러난다. 당시 이스라엘의 세력은 박해하는 세력이었다.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을 헐어버렸고……내 목숨도 찾나이다." 

당시 이스라엘의 대중은 우상 숭배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나만 남았는데" 이처럼 하나님께 성실했던 극소수마저 우상 숭배의 도가니 속에 휩쓸렸을 뿐 아니라 박해자들의 횡포로 박살이 난 채 모서리에 몰리고 만 것이다.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느니라"(잠 28:12). "주의 제단을 헐어버렸고," 곧 제단을 방관한 채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아니라 파헤쳐 버린 것이다. 

바알을 위한 제단이 우뚝우뚝 세워지는 판에 하나님의 제단이 헐리는 건 당연하다. 

그들의 우상 숭배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를 어찌 방치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에게 불리한" 대언의 기도가 나온 것이다. 

이것은 마치, "주여, 이제 이 백성이 멸망받을 적기가 아닙니까? 내팽개쳐야 마땅한 게 아닙니까? 당신의 큰 이름을 생각해서라도 이밖에 달리 무슨 도리가 있겠습니까?" 하는 식이다. 

어떤 개인이나 국가나 하나님의 백성, 특별히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기도가 그들을 불리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처럼 슬픈 일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조만간 기도하는 백성의 명분을 들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② 이 실수를 하나님께서 바로 잡아 주심(4절). "내가……남겨 두었다."

첫째, 사실 하나님의 교회는 어질고 선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상태에 있다. 

이들은 사실은 그렇지도 않은데 성급하게 절망적인 것으로 결론짓는 데만 급급하다.

둘째, 전반적인 배도의 시대에도 그들의 정직을 지키는 남은 자는 그 숫자의 다소에 관계 없이 언제고 남아 있는 법이다. 

모두가 한 길로만 가는 것은 아니다.

셋째, 전반적인 배도의 시대에 정직하게 사는 남은 자가 있는데 이 때 이 남은 자를 자기에게 남겨 두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들에게 내버려 뒀으면 이들도 나머지와 함께 휩쓸려 가고 말았을 것이다. 이들과 나머지 사이에 구별을 두는 것은 그의 값없이 주시는 막강한 은혜다. "칠천," 이 숫자는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를 증거해 보여 주는 만만찮은 숫자이지만 이스라엘의 대다수를 생각하면 아주 작은 숫자이니 마치 추수를 마친 포도원의 포도 이삭과 같은 존재다. 

그리스도의 양무리는 아주 작은 숫자이지만 마지막 날에 함께 모이면 헤일 수 없는 숫자가 될 것이다(계 7:9). 

이 남은 자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자들이니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지배적인 죄였다. 

궁중, 성읍, 산 속 할 것 없이 바알이 상승세였으며 대중은 바알에게 경의를 표했다. 

정직에 대한 최선의 증거는 우리가 사는 시대와 처소를 휩쓰는 타락으로부터의 자유이니 강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데 있다. 

이런 자들을 하나님께서 자기의 신실한 증거자로 삼으실 것이니 곧 "현재 가지고 있는" 진리를 증거하는 데 용감한 자들이다(벧후 1:12). 

다들 바알에게 무릎을 꿇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소박한 외고집은 대개의 경우 진실성의 표상이다.

③ 이 예를 오늘의 상황에 적용함.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5-7절),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상대로 하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과거에 그랬으면 지금도 마찬가지다. 엘리야 시대의 남은 자가 있었으면 지금도 마찬가지다. 

구약시대, 곧 은혜의 표시가 덜 분명하고 성령의 은사가 덜 풍부하던 당시에 남은 자가 있었다면 복음 시대, 곧 구원을 가져 오고 더욱 환하게 돋보이는 하나님의 은혜의 시대에는 더 더욱 많을 것이다. 

"남은 자"란 대다수가 불신 가운데 고집을 부리고 있을 때 믿은 극소수의 유대인들이다. 

이자들을 가리켜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라 부르고 있다. 

이들은 은혜와 영광의 그릇이 되게끔 신의 영원한 사랑의 경륜 가운데 선택받은 자들이다. 그가 예정하신 자들을 그는 부르셨다. 

이들과 저들의 구별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면, 물론 그렇지만("내가 나를 위하여……남겨 두었다"), 그렇다면 그건 틀림없이 선택에 따른 것임에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그의 자신이 의지의 경륜에 따라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제 이 남은 자를 살펴 보자.

첫째, 이들의 기원은 어딘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이니(6절) 행위를 배제하는 은혜다. 

이쪽저쪽의 구별이 처음 시작하는 영원한 선택, 이것은 순전히 은혜, 거저 주시는 은혜대로 된 것이요 행했거나 앞으로 행할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그랬더라면 그건 "은혜"가 아닐 것이다. 

그게 완전히 거저 오는 게 아니라면 적절한 의미에서 은혜라고 볼 수 없다. 선택은 순전히 그의 선하고 기뻐하시는 뜻에 따른 것이다(엡 1:5). 

바울의 마음도 얼마나 하나님의 거칠 것 없는 은혜에 심취했으면 얘기를 하다 말고 도중에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하고 곁길로 나가는 얘기를 하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칭의 문제에 있어서 행위에 반대되는 믿음이 여기에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우리의 칭의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은 있어도 우리의 선택을 위한 그 은혜를 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둘째, 남은 자가 얻는 것(7절).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곧 하나님에게서 칭의와 용납을 얻지 못하고(9:31)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다".  

이 남은 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고 이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그 옛날 친절이 기억되는 것이다. 

믿는 자의 남은 자를 가리켜 "선택받은 자"라 하지 않고 "선택"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들의 모든 소망과 행복의 유일한 기초가 바로 이 선택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의 경륜 가운데 점찍어 둔 자들이요 선택이다. 곧 하나님의 총아(choice)다. 

선택받은 남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이 이 정도다. 그러나

2.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7절). 

일부는 선택을 받고 부름을 받아 그 부름이 유효하게 되지만 나머지는 그들의 불신 가운데 멸망하도록 내버려진 것이다. 

아니 이들은 그들을 더 낫게 해 줄 그것에 의해서 더 악화되고 만 것이다. 

복음이 믿는 자들에게는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르게 하는 것이지만 불신자들에게는 죽음에서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것이다. 

똑같은 태양인데 밀납을 녹이기도 하고 진흙을 굳게도 한다. 

시므온도 아기 예수가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는 자가 될 것을 내다 보았다(눅 2:34). 

"눈이 멀어졌다"(흠정역)라는 말을 더러는 "완고해졌다"(에포로데산)(새번역)고 읽는 이도 있다. 

이들은 인두로 지져진 상태라서 무감각하고 단단해져 버렸다. 은혜의 빛을 볼 수도 그 촉감을 느낄 수도 없게 되고 만 것이다. 눈멈과 완고는 영의 무감각과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동일한 표현이다. 이들은 자기들의 눈을 감아 버리고 보지 않겠다는 심산이다. 이것이 그들의 죄였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럴 바에야 그들의 눈을 멀게 해버리자는 셈으로 의로운 판단 가운데 보지 못하게 해버리신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벌이다.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는 얘기가 나올 것 같아서 그는 구약에서 이런 사례 둘을 들고 나온다.

(1) 이사야의 경우, 그는 당시 이런 심판을 얘기해 준 사람이다(사 29:10; 6:9). 

"혼미한 심령," 이것은 그들의 임무와 관심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정쩡한 상태다. 

졸려서 잠자고 있기에 무슨 말을 하건 무슨 짓이 벌어지건 무감각한 상태다. 

이들은 그 상태가 좋아 계속 거기 머물러 있기로 작정한 자들이요 깨워 주지 말았으면 하는 자들이다. 

혼미한 심령이란 말의 설명이 뒤따르고 있으니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라는 말이다. 

이들에게 기능이 있었으나 평화에 관한 일에 있어서는 이 기능을 사용하지 못했었으니 얼빠진 상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보긴 보았으나 그를 믿지 않았으며 그의 말을 듣기는 들었으나 그걸 받아 들이지 않았으니 이들의 봄이나 들음이 다 허사다. 

보지 않고 듣지 않은거나 매일반이다. 모든 심판 가운데서 가장 소란을 덜 피우지만 가장 깊은 상처를 주는 건 영적인 심판이다. 

"오늘날까지," 이사야 이후로 계속 이 완고하게 하는 일이 진행되어 오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들 가운데 얼마는 눈이 멀고 무감각하게 되고 말았다. 

아니면 복음의 첫 번 전파 이후로부터 쭉 하는 식으로 볼 수도 있다. 진리에 대한 더할 수 없이 확실한 증거, 더할 수 없이 강력한 전파, 더할 수 없이 유리한 제시, 그리스도 자신과 사도들로부터의 더할 수 없이 명확한 부름,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오늘날까지 눈 먼 상태다. 

오늘날 더불어 우리가 살고 있는 대중도 마찬가지다. 이들 역시 완고하고 눈이 멀어졌으니 고집과 불신앙은 그들의 원하는 저주대로 대를 이어 계승되고 있다. "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2) 다윗의 경우(9, 10절). 

이것은 시편 69편 22,23절에서 인용한 것으로 거기 보면 다윗이 자기 백성 유대인들에게서 나오는 그리스도의 고통을, 특별히 "초로 마시웠다"는 말을(21절)하는데 이것은 마태복음 27장 48에서 실제로 성취되고 있다. 

여기서 다윗은 더 없는 모욕과 악의의 표현으로 "저희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소서"하는 저주를 퍼붓고 있다. 

바로 이것을 사도는 당시 유대인들의 눈멈과 그들이 복음을 상대로 저지른 과오와 그 결과 따르는 완고함에 적용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원수들에 대해 불리하게 기원하는 다른 기도를 이해할 수 있다. 

이 모든 기도는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의 공공연하고 완고한 원수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는 것들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는 그의 기도는 마땅히 그렇게 되고 말 것이라는 예언이지 성난 개인의 험담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그의 판단에 있어서 의롭게 되시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다음 몇 가지를 말하고 있다.

① 그들의 위로의 파멸. 

"저희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소서." 

그들에게 안전한 것이 덫이 되어버리라는 얘기다. 하나님의 저주는 고기를 독약으로 변화시키고 만다. 

"너희의복을 저주하리라"(말 2:2)는 것과 똑같은 경고다. 그들의 식탁이 올무가 된다는 건 죄와 비참의 계기가 된다는 뜻이다. 그들을 살찌게 해야 할 그 음식이 그들의 목을 메이게 하여 질식시키고 만다.

② 그들의 능력과 기능의 파괴(10절). 

이들의 눈은 어두워졌고 그들의 허리는 굽어졌으니 더 이상 올바른 길을 갈래야 갈 수 없게 되고 만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거국적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배척한 이후로 그들의 정치가 뒤범벅이 되고 자신들의 의도가 곁길로 줄달음질치며 로마인들에 의한 파멸을 재촉할 뿐이었다. 

이들은 마치 노예와 구부러져 있어서 주위 민족들이 올라 타고 다니며 부려 먹기에 안성마춤이었다. 

아니면 우리는 이걸 그들의 허리가 육적인 것과 세상적인 마음씨에로 구부러져 있다는 식으로 영적 이해를 펼 수도 있다. 

- 즉 그들은 지상의 일에 마음을 쓴다. 이것이 바로 그 백성들 가운데 현재 남아 있는 자들의 상태이니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세상적이요 고의적이요 맹목적이며 욕심꾸러기요 악한 민족도 없다. 이들은 아직도 이 저주의 세력 아래 눌려살고 있다. 

우리가 세상적인 마음씨에 허리를 구부리고 있다면 그건 우리의 눈이 침침해졌다는 징조다.

Ⅱ. 이 유대인 배척을 또 화나게 하는 것은 이들이 내버려지고 비교회화되고 마는 사이에 이방인들이 받아 들여졌다는 점이다(11-14절). 

이것을 그는 이방인에게 일종의 경고로서 제시하며 말하고 있다(17-22절).

1. 유대인 배척이 이방인 영접의 소지가 되었다. 

유대인들의 떠남이 불쌍한 이방인들의 잔치가 된 것이다(11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그들이 멸망하기 위해서 넘어졌는가, 흠정역) 

하나님께서 이들을 배척하고 내쫓으신 데는 그들의 파멸 이외에 다른 목적은 없었단 말인가? 

으레껏 하나님의 지혜와 의, 선하심에 관계되는 말이면 그러하듯이 그는 여기서도 소스라쳐 외치고 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렀다". 

설령 그들이 넘어지지 않고 서 있었어도 다른 방법으로도 구원이 이방인에게 올 수 있었지만 신의 정하심에 따라 유대인이 복음을 거절한 뒤에야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어진 것이다. 

그래서 비유에 이런 말씀이 있다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마 22:8, 9; 눅 14:21), 역사적으로도 마찬가지다(행 13:46).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사도행전 18장 6절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교회를 두시고 결혼식에는 축하객으로 채우시니 이 사람이 안 오면 저 사람이 오기 마련이다. 

안 그러면 왜 청하셨겠는가? 유대인들이 거절하므로 이 초청은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간 것이다. 

무한한 지혜자께서 어떻게 흑암에서 빛을, 악에서 선을, 대식가의 입에서 고기를, 강자에게서 달콤한 걸 앗아가시는 가를 눈여겨 보라. 

똑같은 의미로 그는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12절)하고 말한다. 그만큼 더욱 이방인의 세계로 복음의 길을 재촉했다는 얘기다. 

복음은 그것이 머무는 곳의 무진장한 보화다. 수 천 수 만의 금은보다 더 나은 것이 복음이다. 

또는 이방인의 부요라는 말을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믿었다는 말로 풀이할 수도 있다. 참된 신자들은 하나님의 보석이다.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된다"는 (15절) 말도 똑같은 의미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가 이방인들을 향한 총애의 터전을 닦은 셈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계셔셔 "세상을 화목하게"하셨다(고후 5:19).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특수한 선민이었지만 그들의 불신앙을 기화로 그들을 공공연하게 거부하시고 거절하셨으니 이것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께서 특수한 선민이라는 제약을 벗어나 자기를 두려워 섬기며 의를 이루는 민족에게는 그게 어느 민족이든 받아들이시겠다는 걸 보여 주시려는 목적에서다(행 10:34, 35).

2. 유대인 대신에 이방인을 대치하는 이 교회에서 사도는 다음 몇 가지를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1) 같은 유대인으로서 이들에게 복음의 제시를 받아 들일 것을 권고하며 자극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은총을 베푸신 목적이니 유대인으로 하여금 질투하게 하려는 것이다(11절). 

따라서 그는 이 점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14절). 

"이는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하여," 

"이방인들이 복음의 모든 위로와 특권을 빼앗아 가버려도 좋단 말인가? 우리는 우리의 배도를 회개하고 여기에 참여하지 않겠는가? 우리도 이방인들처럼 믿어 순종하고 용서받아 구원받지 않겠는가?" 이러한 질투심의 발로는 에서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창 28:6-9). 

우리 영혼에게 있어서 선의의 경쟁은 있을 수 있다. 왜 우리도 남들처럼 성결하고 행복하지 못할 이유가 뭔가? 

이 경쟁에는 중상 모략이 필요 없다. 교회의 방과 새 언약의 은혜와 위로는 우리 모두를 충족시키고도 남기 때문이다. 

축복은 그걸 받아 누리는 수가 많다고 해서 그만큼 감소되는 게 아니다.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바울의 임무가 영혼 구원이었는데도 자기로서 기껏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얼마뿐이었다. 

그처럼 유능한 전도자, 그처럼 성령의 힘을 입은 웅변가요 달필가(達筆家)였건만 그가 만남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얼마밖에 구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목회자들은 자기들이 얼마의 영혼이라도 구원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면 그들의 고통이 충분히 보상받은 것으로 여길 줄 알아야 한다.

(2) 이방인의 사도로서 그는 그들에게 경고를 아끼지 않는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여러분 로마 교우들이여, 유대인의 타락으로 여러분들에게 오는 구원의 부요함에 대해 들었지만 그걸 잃지 않도록 조심하시라." 

바울이 이것을 말하는 것은 그가 이방 민족 가운데서 교회를 심고 물주게끔 그들의 믿음을 위해 임명받은 이방인의 사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의 특별한 사명의 목적이었다(행 22:21).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행 9:15 참조). 

그를 임명한 의도도 마찬가지였다(갈 2:9; 행 13:2 비교). 

우리는 우리 책임하에 있는 자들에게 잘하도록 특별히 관심을 크게 쏟아야 한다.  우리 자신의 업무를 특별히 유의해야 한다. 

주께서 은사와 은혜에 있어서 다른 모든 사도들을 능가하는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신 것은 불쌍한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한 예다. 이방 세계는 광대한 지역으로 그 속에서 진행되어질 임무 자체가 바울같이 유능하고 열성적이며 용감한 일군을 필요로 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특별한 일에 적합하다고 생각되어지는 자를 부르시어 그 일을 감당하도록 해 주신다.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당시 이 직분을 천하게 여긴 자들이 있었으니 그 직분 때문에 그를 또한 천히 여긴 셈이다. 

유대인들이 자기를 상대로 그처럼 성화가 대단한 것은 그가 이방인의 사도였기 때문이다(행 22:21, 22). 

그러나 그 직분 때문에 모든 유대인의 분노와 악의의 표적이 되어도 그는 그걸 더 나쁘게 여겨 본 일이 없다. 

세상이 천하게 보고 멸시하는 일이지만 그리스도의 일과 그의 봉사를 영광으로 여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 사랑의 표시다. 

목회직은 "영광스런"직분이다. 목회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대사들이요 하나님의 신비를 맡은 청지기로서 그들의 일 그 자체만 가지고도 충분히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내 직분"은 "나의 목회"(텐 디아코니안 무, 11:13)라는 뜻이다. 나의 지배력, 통솔력이 아니라 나의 봉사인 것이다. 

바울이 그처럼 애착을 가졌던 것은 사도로서의 위엄이나 세력이 아니라 사도로서의 임무와 일이었다. 

이제 그는 배척받은 유대인들을 놓고 이방인들에게 두 가지 권고를 하고 있다.

①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을 존경하며 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할 것, 이것은 그들이 회개함으로 교회에 따르는 혜택을 얘기하는 데 내포되어 있다(12, 15절). 

그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얻은 생명과 같은 것인 만큼 불쌍한 유대인들을 모욕하거나 그들을 상대로 승승장구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딱하게 여기고 그들의 안전과 다시 회개할 것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② 그들도 유대인처럼 헛발 디뎌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할 것(17-22절).

첫째,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옴으로 가지게 된 특권. 

이들은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지듯이 접붙임을 받았다(17절). 이것은 참감람나무를 돌감람나무에 접붙이는 농부들과 반대되는 방법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교회에 접붙여진 자들이 열매를 맺지 못해 아무 쓸모도 없음을 발견하신 것이다. 

인간은 나무를 고치려고 접붙이지만 하나님은 가지를 고치기 위해 접붙인다.

1. 하나님의 교회는 감람나무니 곧 풍성히 열매 맺는 감람나무요(시 52:8; 호 14:6) 하나님과 인간 모두의 영광을 위한 알찬 열매다(삿 9:9).

2. 교회밖에 있는 자들은 돌감람나무처럼 쓸모가 없을 뿐 아니라 기껏 맺는 것이래야 씁쓸하고 맛 없는 것뿐이다. "본성이 야생종"인 것이다(24절). 

이것이 바로 불쌍한 이방인의 상태였으니 교회의 특권과 진정한 성화를 필요로 하는 상태다. 

따라서 우리 모두의 상태가 본성상 거친 것은 자연스런 상태다.

3. 회개는 야생가지를 참감람나무에 접붙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둥치에서 끊겨지고 새로운 뿌리에 접붙여져야 한다.

4.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진 자들은 그 감람나무의 뿌리와 영양을 같이하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도 적용될 수 있다. 살아 있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사람은 모두 그 뿌리의 가지로써 그에게 참여하며 그의 충만한 가운데서 받아 누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가견적 교회 곧 유대인들이 물러나고 이방인들이 들어선 교회의 구성원을 두고 얘기하고 있으니 "그들 중에"(아우토이스) 곧 끊겨져 나간 자들 대신에 들어 선 자들이다. 

교회에 접붙여진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누리던 동일한 특권을 누리게 되었으니 "뿌리의 진액"을 함께 나누게 되었다. 감람나무는 보이는 교회요(렘 11:16) 이 나무의 뿌리는 아브라함이었으니 전달의 뿌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집행의 뿌리였으니 그에게서 계약이 처음으로 엄숙하게 맺어졌다. 

이제 믿는 이방인들이 이 뿌리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요(눅 19:9)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였기 때문이다(갈 3:14). 

감람나무의 동일한 진액, 동일한 본질, 동일한 보호, 살아있는 신탁의 말씀, 구원의 방편, 계속적인 목회, 제도적인 교훈, 그리고 어린 묘목의 처소인 교회, 이 모든 것이 이방인에게는 거부되었다. 누가 감히 상상할 수 있겠는가.

둘째, 이 특권을 남용하지 말라는 경고.

1. "교만하지 말라(18절).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유대인들을 소망없는 백성으로 깔아 뭉개지 말고 끊어져 나간 가지된 자들을[=불신 유대인들] 모욕하지 말며 더욱이 아직 남아 있는 가지된 자들을[=그리스도안에 남아 있는 믿는 유대인들] 그렇게 대우하지 말아라".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로 하여금 교만하라는 게 아니라 감사하라는 것이다. 

믿음의 법은 우리들 자신에 관한 것이건 타인을 비방하는 것이건 어떠한 형태의 자랑도 배제한다. 

"말하지 말라(19절). 곧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함이라고. 그러니까 네가 그들보다 하나님의 손에서 혜택을 받고 더 높은 은총을 받는다고 생각치 말라." 

"그러나 기억하라.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한다는 것을.  네가 접붙여졌지만 그래도 뿌리에 의해 지탱되는 가지에 불과하다. 아니 본성에 거슬려(24절) 참감람나무에 데려온 접붙여진 가지다. 스스로 태어 난게 아니라 은혜의 행위로 공권(公權)을 부여받고 귀화한 것이다. 유대 교회의 뿌리인 아브라함이 그대에게 신세를 지고 입고 있는게 아니라 오히려 계약 수탁자요 만민의 아버지인 그에게 은혜를 입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한다는 것을 아시라."

2. "마음을 놓지 말라(20절).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네 자신의 힘과 현재 서 있는 상태를 과신하지 마시라." 

성결한 두려움이야말로 교만한 마음씨를 막는 훌륭한 방부제다. 이처럼 언제고 두려워하는 자는 행복하도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안 지키지는 않을까 하는 따위의 염려는 마시라. 문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거짓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히 4:1). 이제 로마 교회가 영원히 보존될 것으로 자랑하지만 그러나 사도는 이제 유아기에 있고 정직한 상태에 있는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 자랑과 그밖에 어떠한 형태의 주장이든 엄격히 경고하고 있다. 

무엇을 "두려워하라"는 말인가? "아, 이 사람들아, 그들처럼 권리 상실을 당하지 않고, 그대가 현재 누리는 특권을 그들처럼 앗기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이다." 

타인에게 떨어지는 재앙은 우리에게 좋은 경고가 되어야 한다. "가서"(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하신 말씀이다) "내가" 실로에서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 

이제 우리 모든 하나님의 교회는 가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무엇을 행하셨으며 그들이 재앙의 날에 어떻게 되었는가를 보고 예루살렘의 죄를 조심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가지는 특권의 특허권은 그들과 그들 후손에게 일정 기간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 특권을 어떻게 잘 보존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1) "그들은 어떻게 끊어지게 되었는가.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게 아니라 믿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대권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 

그렇다면 믿음에 의해 오래 지탱했던 교회도 그러한 멸망의 불신 상태에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끊었을 뿐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이 불신앙으로 자기들을 끊고 말았다. 

이것은 자신들의 자업자득일 뿐 아니라 그들의 분리의 형식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이제 너도 그들이 쓰러 넘어진 똑같은 연약함과 타락에 걸려 넘어질 수 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원 가지들"(21절)이었으니 아브라함의 언약과 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태어난 자들이요 약속을 받고 태어난 자들이며 일종의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지만 그러나 이들이 불신앙에 빠졌을 때 하나님은 이들도 아끼지 않으셨다. 

당연한 권리도, 오랜 관습도, 그들의 조상들의 신앙도 이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지 못했다. 

그렇게 애걸복걸했지만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주장해 봤자 허사였다(마 3:9; 요 8:33). 

사실 처음에는 그들에게 포도원을 관리하도록 맡겨졌으나 그들은 이걸 벌로서 몰수당하고 말았다(마 21:41, 43). 

이것을 가리켜 "준엄"(새번역)이라고 말한다(22절). 

하나님께서는 의를 반듯한 선에, 심판을 저울추에 놓으시고 그들의 죄에 따라 갚아 주신다. 

준엄이라는 말은 들리는 말인데 여기 말고 다른 데서 또 이처럼 하나님이 가혹하다는 성경을 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여기서는 이 말이 유대인들의 비교회화(化)에 적용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가장 가깝다고 주장해 온 자들이 그를 반역하면 더 없이 준엄하시다(암 3:2). 인내와 특권이 오용되면 최상의 진노로 뒤바뀌는 것이다. 모든 심판 가운데서 영적 심판이 가장 가혹한 것으로 바로 이걸 그는 여기서 말하고 있다(8절).

(2) "너희 접붙여진 자들이여 그들의 서 있는 상태는 어떠한가." 

물론 유대인의 배척을 놓고 그렇게 자랑하고 뽐내는 특정한 몇 사람이 있겠지만 바울은 여기서 이방인 일반을 두고 얘기한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자."

① 그대는 어떠한 수단으로 서 있는가. 

"믿음으로"다. 곧 의존케 하는 은혜요. 하늘에서 힘을 가져 오는 믿음에 의해서다. 

그대는 자신이 자랑으로 여길 만한 자신의 힘으로 서 있는 게 아니다. 그대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가 만드는 그 모습 그대로일 뿐이다. 

이 은혜로 말하면 당신 자신의 것이니 맘대로 주시기도 하고 앗아가시기도 하는 것이다. 

그들을 폐망시킨 것은 불신앙이요 그대가 선 것은 신앙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 역시 저들보다 더 확고하게 붙잡을 뭣이 없고 그들보다 더 확고한 기초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② "어떠한 조건으로 서 있는가(22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곧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일치하여 의존해 있기만 하면, 그게 부족해서 유대인이 넘어졌지만 말이다, 그대의 관심을 신의 은총에 두고, 계속해서 그를 기쁘게 해 드리는 길을 모색하고 그를 화나게 하는 일을 겁내고 두려워한다면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우리 임무의 강령과 우리 행복의 조건은 하나님의 사랑 속에 머무는 것이다. "여호와와 그의 인자하심을 두려워하라"(호 3:5).

Ⅲ. 이 유대인 배척론에 또 다른 조건이 있으니 곧 지금은 그들이 내쫓겨 있지만 그 배척은 최종적인 것이 아니요 때가 차면 그들이 다시 불려 들여질 것이다. 그들이 영원히 버림을 받은 게 아니라 진노 가운데 자비가 되살아나는 것이다.

1. 유대인의 이 개종이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가.

(1) 그것은 그들의 충만함이다(12절). 

곧 그들을 다시 교회에 덧붙이는 것이요 그들의 배척으로 공석이 된 자리를 되찾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곧 세상에 있는 교회)을 빛, 능력 그리고 아름다움으로 부요하게 하는 것이다.

(2) 그것은 그들을 영접하는 것이다. 

한 영혼의 회개는 그 영혼의 용납을 의미하듯이 한 민족의 회개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이 다시 은총, 교회, 및 사랑으로 끌여 들여질 것이니 그들이 오기를 학수고대하며 손을 펼치고 있는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 올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생명"을 얻는 것과 같을 것이니 너무도 뜻밖이요 놀라운 것이지만 그런 만큼 더 더욱 반갑고 환영받을 만한 것이다. 

유대인들의 개종은 교회에 큰 기쁨을 가져 올 것이다(눅 15:32 참조). "죽었다가 살았기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3) 그것은 그들이 다시 "접붙임을 얻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23절). 

곧 그들이 끊어져 나갔던 교회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다시 접붙여진 것은 뿌리의 진액을 받듯이 참으로 교회에 접붙여진 영혼은 살리는 뿌리되는 그리스도에게서 생명, 힘 그리고 은혜를 공급받게 된다. 

곧 이들은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는"것이다(24절). 

곧 전에 그렇게 뛰어난 구성원이었던 그 교회로 접붙임을 받는 것이니 그렇게도 오랫동안 향유하다가 그만 불신앙 때문에 상실하게 되고만 그 가견적 교회의 특권을 회복할 것이다.

(4) 그것은 "온 이스라엘의 구원"(26절)이다. 

참 회개를 우리는 구원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그건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이다(행 2:47). 

이들을 교회에 덧붙이는 것은 이들의 구원을 의미한다. "구원을 얻으리라"는 원문은 현재 시세로 "구원을 받고,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회개의 일이 진행되는 곳에는 구원의 일이 진행되고 있다.

2. 이 개종의 근거와 우리가 그걸 내다 보아야 할 이유.

(1) 첫 열매와 뿌리의 성결 때문이다(16절). 

어떤 이들은 이 첫 열매라는 말을 그리스도의 신앙에 이미 개종하여 교회에 받아 들여진 자들로 보고 있으니 곧 하나님께 바쳐진 첫 열매로서 더 풍성하고 성결한 추수의 담보라는 얘기다. 시작이 좋으면 결과도 좋게 마련이다. 

이미 들어와 있는 자를 말고 다른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할 이유가 뭔가? 

또 어떤 사람들은 첫 열매라는 말을 뿌리와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조상들에게서 유대인들이 나왔으며 그들에게 맨 우두머리 수탁자로서 언약이 맡겨졌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 조상은 유대인들의 뿌리였으니 민족 전체로써 뿐 아니라 교회 전체로써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이들이 성결했다면, 이들이 교회와 언약 가운데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이 백성의 몸인 "떡덩이"와 그 지체되는 "가지들"에게 친절을 베풀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겠는가. 

유대인들은 어떻게 보면 성결한 조상을 둔 성결한 민족이다(출 19:6). 이제 이러한 성결한 민족이 전면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내쫓기고 만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것은 신자들의 후손은 그들이 불신앙으로 스스로 자기들을 내던지기까지는 가견적 교회의 테두리 안에, 언약의 모서리에 머뭇거리고 있다는 걸 입증한다. 왜냐하면 "뿌리가 거룩한 즉 가지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특성은 몰라도 상대적인 특권은 남아 있는 것이다. 어진 사람이 어진 아들을 낳을 수는 없어도 자유인은 자유로운 아들을 낳는 것이다. 

은혜가 혈통을 이어 흐르진 않지만 외적인 특권은 (그게 잃어지기 전까지는)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흐르는 것이다. 

이 한사(限嗣) 상속권의 제한을 해제할 날에 이들이 여기에 어떻게 응할 것이며 교회에서 신자들의 후손을 어떻게 쫓아내며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아브라함의 축복이 임하지 않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눈여겨 보시라. 

유대 가지들이 성결하다고 하는 것은 그 뿌리가 그렇기 때문이다. 더 분명한 말을 하자면(28절)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들이다. 

조상들에 대한 이 사랑에 이미 그들의 교회국가로서의 첫 기초가 놓인 셈이다(신 4:37).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사랑하신고로 그 후손 너를 택하셨다." 

동일한 사랑이 그들의 특권을 회복시킬 것은 아직도 옛 사랑과 인자가 기억되어지고 있으며 그들은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늘상 쓰시는 은혜의 방법이다. 

조상들 때문에 그 자손들에게 베푸는 이 친절을 그래서 "하나님의 친절"(삼하 9:3, 7)이라 부르고 있다. 

복음에 있어서는(곧 현세대에 있어서는) 저희들이 "너희를 인하여" 곧 그들이 그렇게도 반감을 사고 있는 이방인들 때문에 그 친절에 원수로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되살아날 것이다. 이에 대한 약속을 살펴 보라(레 26:42). 아비의 죄악은 3, 4대에 그치지만 그 자비는 수천 대까지 이른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경건한 조상 덕분에 잘될 것이다. 이래서 교회가 그들 자신의 "감람나무"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이게 그들의 오랜 소유였던 만큼 옛정을 생각해서 이들에게 다시 자리가 펴질 것을 바라는 게 우리로서는 당연하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이기에 앞으로도 다시 그렇게 될 것이다. 

몇몇 사람과 몇몇 세대는 불신앙으로 떨어져 나가겠지만 민족적인 교회로서는 아직 그 잔재가 남아 있으며 현재는 당분간 연장 되었지만 앞으로는 다시 회복될 것이다.

(2)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다(23절). 

"이는 저희를 접붙일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영혼들의 개종은 전능한 능력의 일이요 이들 영혼이 더없이 완고하고 눈멀고 고집스러워 보여도 하나님께서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다는 데, 오랫동안 내팽개쳐지고 시들어버린 거기에 접을 붙여 주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데 우리의 위로가 있다. 

강력한 무장을 한 사람이 집을 지킬지라도 하나님은 그보다 더 강력하시니 그분만이 그를 무장해제시킬 수 있다. 그들의 회복의 조건은 신앙이다.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이제 남은 것은 저 크나큰 장애물인 불신앙을 제거하는 일밖에 남은 게 없으며 하나님께서만 이 일을 해내실 수 있으니 그보다 못한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이 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일으켜 세운 그 힘이다(엡 1:19, 20). 

그렇지 않고서야 이 마른 뼈가 살아나겠는가?

(3) 이방인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 예방적이요 구별하는 은혜를 몸소 체험한 자들은 여기에서 용기를 얻어 남들도 이걸 받도록 희망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주의 주장이다(24절). 

"본래 돌감람나무였던 그대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다면 하물며 원가지였던 이들이야말로 신의 용납에 더욱 가깝지 않을 것인가?" 

여기에는 배척받은 유대인들의 상황을 보고 멸시와 승리감에 도취되어 그들을 짓밟던 저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무례를 견제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 

이것은 마치 이런 식이다. "그들의 상황이 나쁘다 나쁘다 해도 너희들의 회개 이전의 상황보다는 악화되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그 상황이 지금의 너희 것과 같이 좋아지지 말라는 법은 어디 있는가?" 이것이 그의 주장이다(30, 31절) : 

"너희가 전에 순종치 아니하더니……". 하나님에게 자비를 입은 자들은 종종 과거의 우리들의 상태와 그리고 과거에 이 자비를 어떻게 받았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는 게 좋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아직도 불신앙 가운데 처해 있는 자들에 대한 저주를 누그러뜨릴 수 있으며 그들을 위해 빨리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방인들의 소명을 유대인들의 불신앙과 관련해서 다루고 있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느니라. 그렇다면 너희가 얻은 긍휼을 통해 그들은 더 큰 긍휼을 얻을게 아닌가. 만약에 그게 악에서 선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그들의 촛불이 꺼진 데서 너희 촛불이 켜진 것이라면 너희의 계속 켜져 있는 촛불이야말로, 하나님의 때가 차면 그들의 촛불을 다시 켜는 데 얼마나 큰 수단이 되겠는가?"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곧 너희가 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너희에게 신세를 지게 하려는 뜻에서다. 

믿는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을 위해 최선을 아끼지 않으리라는 걸 그는 기정사실로 보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야벳을 설득하셨을 때 야벳이 셈을 설득하려고 갖은 애를 쓰는거나 마찬가지다. 

진정한 은혜는 독점을 싫어한다. 자비를 입은 자들은 그들의 자비를 통해 남들도 그걸 얻도록 스스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4) 이것을 지적해 보여 주는 구약의 약속과 예언 때문이다. 

그는 아주 특유한 것을 이사야 59장 20, 21절에서 인용하고 있다(26절). 여기서 몇 가지를 살펴 보자.

①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약속 :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예수 그리스도가 위대한 구원자라는 말은 그만큼 인류가 비참하고 위험한 상태에 빠져 있다는 얘기다. 

이사야에 보면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는 걸로 묘사되어 있다. 

거기에는 구속자로 여기서는 구원자로 묘사되어 있는데 그는 값을 지불하고 되찾는 방법을 통해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이사야에는 그가 아직 시온에 올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은 선지자가 예언하는 시점에서 볼 때 그가 아직 세상에 오기 전이요 시온은 그의 총본부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가 오셔서 마침내 그의 처소를 잡으셨다. 

그러나 사도가 이 편지를 쓸 때는 이미 그가 왔고 시온에 있었기 때문에 "시온에서" 나오는 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바로 거기서부터 영원한 복음을 통해 온 민족에게 물길을 대는 생수의 흐름이 발원한 것이다.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사 2:3; 눅 24:47 참조).

② 이 오심의 목적.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띈 임무는 이 불경건을 돌이키는 것, 사죄의 자비를 얻어 이 죄책을 돌이키는 것, 새 은혜를 퍼부어 그 세력을 돌이키는 것, 그래서 그의 백성을 그들의 죄악에서 구원하는 것(마 1:21), 우리를 우리의 죄악에서 떼어 놓는 것, 그래서 죄가 더 이상 우리의 파멸이 안되고 우리의 왕노릇을 못하게 하는 데 있다. 

특별히 야곱에게서 이것을 돌이키게 하는 것이니 바로 이 점 때문에 그가 이 본문을 인용하고 있다. 

곧 하나님께서 야곱의 후손을 위해 의도하신 위대한 친절의 증거로서 이걸 인용하는 것이다. 

그들에게서 불경건을 없애 주는 것, 그들과 그들의 모든 행복을 갈라지게 하는 장본인을 없애 주는 것, 죄악을 없애 주고 모든 선의 길을 예비해 주는 것, 이보다 더한 친절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면서 주시기로 한 축복이니 이걸 맨 먼저 유대인들에게 주어(행 3:26) 이들이 그들의 죄악에서 떠나게 하는 것이었다. 이사야에 보면 이렇다.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이제 시온에 있는 누가 이 약속된 구원의 혜택을 받고 거기에 참여하겠는가는 명백하다. 

그들의 죄를 떠나 하나님에게 돌이키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는 구속자로서 다가오지만 죄악에 그대로 남아 있는 자들에게는 복수자로서 나타난다(신 30:2, 3 참조). 

죄에서 돌아서는 자들만이 시온의 참시민으로(엡 2:19) 정통 야곱 족속으로(시 24:4, 6) 소유될 것이다. 

이 둘을 종합해 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곧 죄에서 돌아서는 자가 아니고서는 그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와 관련이 없으며 그리스도의 은혜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그 어느 누구도 죄에서 돌아설 수 없다. 

"내 언약이 이것이라." 

곧 구원자가 그들에게 오실 것이요 나의 영이 그들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이것이다(사 59:21). 

이스라엘에 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의도가 언약의 본질인 만큼 거짓말할 줄 모르는 하나님께서 여기에 충실하시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언약의 자손"이다(행 3:25). 

사도는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데 이것이 이사야 27장 9절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고 아니면 바로 앞에 있는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킨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죄의 사면이 새 언약의 모든 축복을 받는 기초로 제시되고 있다(히 8:12). 

"내가……긍휼이 여기고." 

이 모든 것에서 그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위해 이 풍성한 약속의 범위를 다 채울 수 있는 자비를 가득히 준비하고 계시다는 결론을 짓고 있다. 이것을 그의 다음과 같은 진리로 입증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후회가 마음의 변화라면 하나님은 언제고 한마음이기에 후회가 있을 수 없으며 감히 누가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 

더러는 이 말이 방법의 변화로 이해되기도 하는데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이런 뜻이다. 

곧 선택에 기초한 하나님의 저 사랑의 불변성이다. 이 은사와 부르심은 불변하다. 당신이 그처럼 사랑하는 자는 끝까지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다는 말도 있고("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창 6:6) 인간에게 영광과 능력을 주신 걸 후회하셨다는 말도 있지만("내가 사울을 세워 왕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삼상 15:11) 그러나 인간에게 은혜 주신 것을, 후회하셨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이 은사와 소명은 후회가 없는 것이다.

3. 이 개종의 시기와 범위. 

그는 이것을 신비(25절)라 부르고 있다. 지금으로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에 전반적으로 고집불통처럼 보이는 저 백성의 상태를 보면 누구도 그들이 다 개종할 것인가 하는 걸 점칠 수 없는 수수께끼인 것이다. 

이방인의 개종도 신비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엡 3:6, 9). 배척받은 유대인의 현재 상황이 당시 이방인처럼 악화되어 있다는 얘기다. 

회개의 일은 신비 속에서 진행되어 왔다. 그는 이제 이방인들이 이 신비를 터득하고 겸손하라는 권고를 하고 있다.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곧 너희의 교회 회원 자격을 가지고 너무 들뜨지 말고 유대인들을 짓밟지 말라는 얘기다. 무지야말로 우리의 기만의 원인이다.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는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1) 그들의 현재 상태.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25절). 

여기에 위로가 있는 것이다. 일부가, 아니 대다수 쪽의 일부가 눈 먼 상태에 있다 해도 평화에 관한 일을 보는 남은 자가 아직 있다는 점이다(7, 8절).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불신 가운데, 흠정역) "가두어 두심은"(32절)하는 말씀도 같은 뜻이다. 

곧 이들을 감옥에 가두듯이 그들의 마음의 욕정에 내맡겨 버리신 것이다. 가둬둔다는 말은 정죄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갈 3:22). 

이들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 불신앙 때문에 정죄받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숫제 믿으려 하지를 않는다. 

"그렇다면 좋다"하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네 소원을 들어주지"하고 그들은 고의적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통치에 순종하는 걸 거절하였으니 이 거절이 하늘 법정에 기록되어 이들에게 불리하게 결론 지어진 것이다.

(2) 이 복된 변화가 언제 올 것인가. 

그것은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들어 올"때이니 복음이 그 의도한 성공을 거두고 이방세계에 퍼져 나갔을 때다(5:12 비교). 

하나님께서 이방인 가운데서 그의 전 업무를 마치실 때까지 유대인들은 어둠 속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것이니 그 다음에야 이들의 차례가 올 것이다. 

이것이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요 방법이다. 

교회가 이방인으로 가득 찰 때까진 유대인의 개종을 위한 사태가 무르익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불러 들여도 그게 그들을 필요로 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후한 은혜 때문이라는 점이 들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3) 그것의 범위.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26절).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32절). 

어느 일개인이 아니라 민족 전체가 구원을 받는다. 그것은 그들이 그 특수한 언약 관계에 다시 들어와 제사장직, 성전, 의식을 되찾는다는 게 아니다(여기에 대한 종지부는 이미 찍혔다).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참 메시아를 믿어 기독교회에 병합되고 위대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이방인과 어울리는 한 양무리가 되기 위해서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언제 성취되는냐 하는 것이다.

① 어떤 이들은 이것이 이미 실현되었다고 본다. 

로마인들에 의한 예루살렘의 함락 이전 기간, 그 이후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불신을 절감하고 그리스도인의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그 함락때 수 백만이 죽은 걸 생각하면 살아 남은 자들 가운데 대다수가 그리스도인들이요 이들이 기독교회에 들어 왔고 아주 근소한 숫자만이 계속 고집을 부렸다고 결론 지을 수도 있다. 

수 세기 동안 유대에는 기독교 지역과 그 사역자들 그리고 교회가 있어서 종교의 명맥을 유지해 왔다. 

그리고 이 업무의 대부분이 이방인의 대대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사도들의 사역 말기쯤에 이뤄졌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②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말세에 가서 성취될 것으로 본다. 

그들의 특유한 이름, 습관, 종교에 있어서 타 민족과 구별되고 아직도 지중해 연안 여러 나라에 수 없이 흩어져 있는 이들 유대인들이 성령께서 말씀을 가지고 역사하실 때 그들의 죄를 뉘우치고 대대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영접하며 기독교회에 합병될 것이다. 

이렇게 되어야 그들의 힘과 아름다움이 더욱 빛날 것이다. 아! 누가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실 때 살아 있을까?

----------

신의 주권(롬 11:33-36)

사도는 본장 전체를 통해 유대인의 배척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조화시키고 나서 결론 부분에 이르러 이 모든 일에 있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지혜와 주권을 감사해하며 찬송하고 있다. 

깊은 애정과 경외에 찬 사도의 찬양을 들어 보자.

Ⅰ. 신의 경륜의 비밀. 

깊도다!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이상과 같은 처사가 아니 일반적으로 얘기해서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복음의 신비 전체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곧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의 구속을 모색하고 진행하는 그의 지혜와 지식의 사례가 얼마든지 있으니 정말 천사들마저도 알고자 넘겨 보는 깊음이 아닐 수 없다(벧전 1:12). 

더욱이 이 구속의 방법과 이유, 의도 그리고 그 방향을 설명한다는 건 인간의 이해를 당황케 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바울로 말하면 어느 미미한 인간보다 더 하나님의 나라의 신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당황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고 있으며 그 밑바닥을 들여다 볼 수없어 벼랑 맨 꼭대기에 겸손히 주저 앉아 그 깊음을 칭송하고 있다. 

이처럼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자가 제 아무리 잘 안다해도 자신의 무력과 근시안을 통감할 뿐이요 그들의 모든 탐구와 그에 따른 업적이 있을지라도 아직도 흑암의 상태에 머무는 정도이기에 그들의 말을 조리있게 이어 나갈 수가 없다. 

"찬송이 주에게는 침묵이로소이다"(시 65:1). "부요의 깊음"(새번역), 

인간의 부요는 어느 것을 막론하고 얄팍한 것이라서 그 바닥을 쉽사리 간파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부요는 깊다(시 36:6).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신의 경륜에는 깊이 뿐 아니라 부요가 있으니 이 말은 귀하고 값어치 있는 것이 풍성하다는 뜻이니 신의 경륜의 차원은 완전무결하게 짜임새가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깊음과 높이만 있는 게 아니라 "넓이와 길이"(엡 3:18) 그리고 초월적인 지식이 담겨 있다(19절).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 

당신께서 만사를 현재, 과거, 그리고 미래의 모든 일을 한 눈으로 선명하게 들여다 보고 계시는 것, 만사가 그분 앞에서는 발가벗은 채 드러나 보이는 것, 이것이 그의 "지식"이다. 

만사를 그의 영광을 향해 조정하고 처리하며 다스리시는 것,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의목적과 경륜을 성취하는 것, 이것이 그의 "지혜"다. 

그리고 이 양자의 광대무변한 범위는 우리의 측량을 능가하는 그러한 깊이라서 우리가 이걸 생각할라치면 자신을 잃고 만다.  

이러한 "지식은 내게 너무 기이하나이다"(시 139:6 ; 비교 5:17).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한 것이며," 

곧 그의 경륜과 뜻은 측량할 수가 없으며 "그의 길"도, 곧 이 경륜과 뜻의 집행도 마찬가지다. 

그의 목적하신 바를 우리로선 알 도리가 없다. 수레바퀴가 한참 굴라가고 섭리가 역사하기 시작해도 우리는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으니 "찾지 못할 것이로다." 

이것은 신의 경륜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인 결론을 송두리째 뒤엎을 뿐 아니라 우리의 호기심에 찬 탐색에 모조리 제동을 거는 것이다. 

비밀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신 29:29). 하나님의 길은 바다 속에 있다(시 77:19 ; 비교 욥 23:8, 9; 시 97:2). 

그가 하시는 일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요 13:7). 우리는 하나님의 과정을 이해할 수 없으며 찾아 나선다 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욥 5:9; 9:10). 그의 입의 판단과 우리의 본분의 길은 감사하게도 분명하고 쉽다. 그것은 고속도로다. 

그러나 그의 손의 판단과 그의 섭리의 길은 어둡고 신비스러우니 우리로서는 알려고 넘나들어 볼 것이 아니라 조용히 있어 찬송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만이다. 

사도는 이것을 특별히 이상한 계기, 물론 적당한 시기에 유대인을 다시 불러 들이는 목적이 뒤따르지만, 유대인 배척과 이방인 환대를 말하면서 얘기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버리고 어떤 사람은 얻는 것, 이것은 정말 이상한 처사로서 인간의 생각을 벗어나는 것들이다. 

그게 옳습니다, 아버지여, 그게 당신 보시기에 아름다웠기 때문이죠. 

이거야말로 헤아릴 수 없는 방법이니 여기에 우리는 "오, 깊음이여! 헤아릴 수 없구나!(아넥시크니아스토이, 추적할 수 없다, 11:33)"하고 탄복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뒤에 발자국이나 흔적을, 오솔길을 남겨 두시지 않으니 그의 섭리의 길은 매일 아침 새롭다. 

똑같은 길을 가므로 뒤쫓아 오게 하는 분이 아니다."우리가 그에게 대하여 들은 것도 심히 세미한 소리뿐이니라"(욥 26:1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34절) 

어느 피조물이 있어 그의 각료회의 일원이 되었으며 그리스도처럼 아버지의 품에 있었던가? 

어느 누구에게 그의 경륜을 알려 주셨으며 그의 섭리를 보고 그가 취하시는 길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인간과 하나님,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에는 너무도 광활한 간격과 불균형이 가로 놓여 있기에 그런 긴밀성과 친밀성이 전혀 배제되고 마는 것이다. 

사도의 도전도 마찬가지다(고전 2: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그러나 그는 곧 이어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하고 덧붙이고 있으니 이것은 그의 영을 지닌 참된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행복에 필요한 만큼의 하나님의 마음은 충분히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주의 마음을 아는 그분이 그를 드러내셨다(요 1:18). 따라서 우리가 주의 마음을 모른다 해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녔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여호와의 친밀함"(비밀, 흠정역) "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시 25:14)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비교 요 15:15)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그에게는 특별 보좌관이 필요없다. 그는 무한히 지혜롭기 때문이다. 또 그 어느 피조물도 그의 보좌관이 될 자격을 갖춘 사람이 없다.  

그건 마치 태양을 향해 촛불을 하나 켜는 거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말은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이하"(사 40:13, 14)의 성경을 두고 하는 말 같다. 

창조의 작업을 두고 하나님께서 욥에게 도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욥 38장). 

이것은 그의 섭리의 모든 방법에 다 통용되는 말이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이 세상을 어떻게 운영하십시오 하고 말하거나 가르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Ⅱ. 신의 경륜의 주권. 

이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이다. 

당신께서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이요 그 일에 설명을 붙일 필요가 없다(욥 23:13; 33:13). 

그래도 그에게는 불의가 전혀 없다. 이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1. 그는 어느 누구든지 하나님이 자기에게 빚쟁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으면 해보라고 도전한다(35절). 

"누가 주께 먼저 드렸느냐?"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고 입증할 자가 누구인가? 

우리가 그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든, 그에게 어떤 헌신을 비치든 우리는 이 점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그러한 주장을 막는 유일한 것이다(대상 29:14).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모든 임무는 답례가 아니라 원주인에게의 반환에 불과하다. 

어느 누가 하나님이 자기의 빚쟁이라고 입증할 수 있다면 사도는 여기서 그 지불을 즉시 따르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 갚으심을 받겠느뇨?"(그것이 그에게 다시 보상될 것이다, 흠정역)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그 어느 누구도 자기를 상대로 했을 때 손해보지 않게 할 것이며 또 어느 누구도 감히 그런 요구를 하거나 입증하려고 하지 않아야겠다. 이것이 여기에 인용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유대인의 항의소동을 묵살시키려는 목적.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서 그들의 가견적 교회 특권을 빼앗아 가신 것은 자기 자신의 것을 가져가신 것뿐이다. 

자기 것을 가지고 자기 좋은 대로 사용할 수 없겠는가?

(2) 이방인의 모독적인 언동을 묵살하려는 목적.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보내시고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은혜와 지혜를 그들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를 입었건, 그들이 그걸 빚 갚으라는 듯이 도전해 왔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선한 뜻에 따른 것뿐이다.

2. 그는 하나님의 주권에서 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 있다(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곧 하나님이 전부다(all in all). 천하 만사가(특별히 우리의 구원과 평화에 관한 일은)창조를 통해 주에게서 나오고 섭리적인 영향을 토해 주로 말미암으니 이는 마지막에 있어 주에게로 돌아가기 위해서다. 만사의 근원과 바탕으로서의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전달자인 신인(God-man)으로서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뤄지며 최종목표인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셋은 그의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모든 원인을 나타내고 있으니 그에게서 나오고(of him)라는 말은 그가 첫 유효원인이라는 뜻이요 그를 통해서(through)라는 말은 그가 최고 지배의 원인이란 뜻이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모든 걸 자기를 위해 지으셨기 때문이다(계 4:11). 

만사가 그에게서 나오고 그를 통해 이뤄진다면 만사가 그에 돌아가고 그를 위해 이뤄질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것은 필연적인 순환이니 강물이 바다에서 흘러와 당시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다(전 1:7).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만사를 행하는 것이 필연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은 마침내는 모든 게, 싫든 좋든, 그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짤막한 송영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첫 원인으로서의 하나님의 보편적 동인(agency), 주권적인 지배자, 그리고 최종적인 목표, 이것은 우리의 칭송의 본질이어야 한다. 

그의 모든 일은 그를 객관적으로 찬양하지만 그의 성도들은 적극적으로 그에게 찬양을 돌려야 한다. 

모든 피조물이 찬양거리로 만든 이 모든 것을 성도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시 145:10). 

바울은 인간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을 광범위하게 그리고 정확한 급소를 찌르며 얘기했지만 그러나 이 모든 끝에 그는 신의 주권을 들고 나오며 여기에 모든 문제가 최종적인 결재를 받아야 하며 여기에서 우리의 마음이 안전하게 쉼을 얻어야 한다고 결론 짓는다. 

이것이 학문적인 논쟁의 방법은 아닐지 모르지만 기독교적인 논쟁의 방법인 것이다. 

그 전제야 뭐든 결론은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경륜과 행위를 얘기할 때는 우리의 이론을 경외로 가득찬 찬양으로 끝맺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이 신비를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잘 들여다  보는 영화된 성도들이라도 논쟁을 논쟁으로 끌지 않고 영원에의 찬송으로 이어 나갔다

이전글 : 롬10
다음글 : 롬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