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4.28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롬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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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5장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라

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5.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8.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9.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10.  또 이르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11.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12.  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

1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15.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19.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21.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의 로마 방문 계획

22.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25.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28.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29.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3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31.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32.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33.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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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5장 (개요)

다소 사소한 문제에 대한 상호간의 관용에 대한 앞 장의 얘기를 본장에서 결론짓고 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이처럼 의견의 차이, 애정의 거리가 생겼을 때의 이 열기를 식히고 보다 침착한 상태를 되찾기 위해 훈계에 훈계가 필요하다. 

사도는 못을 박아도 튼튼하게 박기 위해 그의 망치질을 계속하는 가운데 그의 주제를 계속 끌고 있다. 

본장에서 우리는 다음 몇 가지를 살필 수 있다.

Ⅰ. 그들에 대한 그의 교훈.

Ⅱ. 그들을 위한 그의 기도.

Ⅲ. 그들에게 편지 쓰는 이유.

Ⅳ. 자기 자신과 자기 일에 대한 설명.

Ⅴ. 그들을 만나려는 목적.

Ⅵ. 자신을 위한 기도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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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과 자기 부정(롬 15:1-4)

사도는 여기서 두 가지 교훈과 그것을 강조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강한 그리스도인이 약한 그리스도인을 생각하고 공손히 대할 것을 권하고 있다.

Ⅰ. 우리는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한다"(1절). 

우리는 모두 약점이 있다. 그러나 연약한 자들은 더욱 그러하니 지식과 은혜에 약한 자들이다. 곧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등불이다. 

우리는 이들을 깔아 뭉갤 것이 아니라 격려하고 약점을 같이 나눠야 한다. 

혹 그들이 약하기 때문에 우리를 판단하고 단죄하며 악평한다 해도 우리는 이들을 참고 동정해야지 그들에 대한 우리의 애정이 식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약점을, 그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지 않는가!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약한 제자들을 참아 주시고 관대하게 대하셨다. 

우리는 그들의 약점을 참아 주고 기회 닿는 대로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 주고 이들의 힘을 북돋아 줘야 한다. 이것이 서로의 짐을 져 주는 것이다.

Ⅱ.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지 말고 우리 이웃을 기쁘게 해야 한다(1, 2절). 

우리는 우리의 형제의 연약과 약점을 생각해서 우리만의 기분만 심중에 두어서는 안된다.

1.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들을 기쁘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사소한 욕망이나 갈증을 다 채우려 들지 말아야겠다. 때로는 자제하는 게 좋다. 

그러다 보면 남들이 우리를 향해 더 잘 참아 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기분만 달래다보면 아도니야처럼 버릇 없게 되고 말 것이다. 

여기서 맨 먼저 배워야 할 교훈은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다(마 16:24).

2.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형제들을 기쁘게 해야 한다. 

기독교의 목적은 영혼을 누그러뜨리고 부드럽게 하여 고분고분하게 호의를 베푸는 법을 가르치는 데 있다. 

어떠한 종류의 것이든, 정욕의 노예가 되지 않고 우리 형제들의 필요와 약점을 돌봐 주는 것이다. 

곧 할 수 있는 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우리가 상대하는 사람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호감이 가도록 힘써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유(이것은 우리의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타인의 유익, 그리고 덕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를 우리를 기쁘게 하기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되고 우리 이웃을 기쁘게 하도록 해야 한다. 

기독자들이 서로 상대방을 물고 뜯으며 훼방하는 열심을 가지고 서로를 기쁘게 하려고 힘쓴다면 얼마나 화기애애하고 살기 좋은 사회가 될 것인가! 

"이웃을 기쁘게 하되," 

모든 면에 있어서 다 이웃을 기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무제한한 규칙이 아니다. 

각사람마다 그의 "선을 이루고", 곧 그의 영혼의 선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하라는 말이다. 

이웃의 사악한 뜻을 도와 기쁘게 하거나 악한 방법으로 기분을 달래 주거나 그의 꾀임에 동조하거나 그에게 죄가 돌아가게 내버려 두는 일등은 우리 이웃의 영혼을 파멸로 이끄는 방향에서 기쁘게 해 주는 야비한 방법이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그러지 말고 그의 선을 위해 그를 기쁘게 해줘야 한다. 

세속적인 선(이익)을 바라고 그의 밥이 되라는 게 아니라 그의 영적 선을 위해 그를 기쁘게 해 주라는 얘기다.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의 유익뿐 아니라 타인의 유익을 위해서도, 곧 서로 호감을 보이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 하기 위해 그러라는 얘기다. 

돌이 서로 밀착되어 있으면 밀착되어 있을수록 서로 잘 맞대어 있게 마련이요 그만큼 그 건물은 튼튼하게 마련이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들어 보자.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우리 주 예수의 자아부정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이기심을 막는 최선의 논리다.

(1)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일을 돌보지 않으셨다. 

그는 자신의 세상적 명예, 안일, 안전, 쾌락을 돌보지 않으셨다. 

그는 자기 머리 둘 곳도 없었으며 남의 손에 살았으며 왕이 되는 것도 싫어하셨으며 무엇보다도 "주님, 몸을 아끼소서"하는 말을 싫어하셨다.

자신의 뜻을 추구하지 않으셨으며(요 5:3) 자기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으며 자기에 대한 죄인들의 반박을 참으셨으며 스스로 괴로워하셨으며(요 11:33) 자신의 명예를 추구하지 않으셨으니 한 마디로 자신을 텅비우시고 자기 명성을 생각치 않으셨다. 

이것도 모두 우리를 위한 것이니 우리에게 의를 가져 오고 우리에게 모범이 되시려는 뜻에서였다. 

그의 전 생애는 자기를 부정하는 삶이었으며 스스로 불쾌한 길을 걸어간 삶이었다. 그는 약자들의 약점을 담당하셨다(히 4:15).

(2) 여기에 성경의 성취가 있다.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이것은 시편 69편 9절에서 인용한 것으로 전반부는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켰나이다"(요 2:17) 후반부는 여기에 인용되고 있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으며 그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고통을 예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이 여기 인용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기쁘게 하기는커녕 자신을 불쾌하게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의 임무 전반이 그에게 힘겨운 일이요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라, 그는 그 일을 기꺼워하셨다. 

그의 타고난 성향의 만족을 억제하고 부정하셨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안이와 쾌락보다는 우리의 유익을 앞서 생각하신 것이다. 

이것을 인용하는 이유는 성경을 가지고 입증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의 영의 일을 설명하는데 있어 성령의 말씀보다 더 좋은 게 또 있겠는가?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①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비방의 수모. 

하나님에게 어떠한 불명예가 돌아가든 그건 주 예수에게 고통이었다. 

그는 백성의 마음의 견고함을 보고 슬퍼하셨으며 죄악의 도시를 슬픔과 눈물로 바라보셨다. 

성도들의 핍박을 바로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시며 괴로워하신 그리스도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더 할 수 없는 분노를 참으셨으며 그의 받으신 고통에도 많은 비난이 따랐다.

② 그리스도께서 속량하시려고 돌아가신 이 비방의 죄.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 

온갖 죄는 일종의 하나님에 대한 비방으로 특별히 고의적인 죄가 그러하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죄 속량의 희생 제물, 속죄물이 되셨을 때 이 비방의 죄책이 그에게 떨어졌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나무 위에서 달리셨을 때 이 모든 죄악이 마치 담보물처럼 그에게 떨어졌다. 

"내게 그 저주를 내리소서." 이것은 더할 수 없는 최대의 자기 비하다. 

그의 무한한 순결과 거룩, 아버지의 그에 대한 무한한 사랑, 아버지의 영광에 대한 그의 영원한 관심을 생각하면 이보다 더 곧 죄가 되어 우리를 위한 저주가 되고 하나님의 비방을 몸소 당하는 것보다 더 불리한 일은 없을 것이다. 

특별히 그가 자신을 누구를 위해 이처럼 낮추셨는가, 곧 그의 원수요 배반자들이다. 그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벧전 3:18). 

이것이 우리가 약자들의 약점을 나눠져야 할 이유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해서 안 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요 우리가 약자들의 약점을 나눠 줘야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을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죄책을 담당하셨으며 거기서 오는 저주를 받으셨지만 우리는 거기서 오는 아주 작은 몫을 담당하라는 것뿐이다. 

그는 악한 자들의 뻔뻔스런 죄를 담당하셨지만 우리는 양자들의 약점을 참고 견디라는 것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무한히 행복하시기에 우리나 우리의 봉사가 필요 없는 그분이, 곧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는 것도 과분이 아니며, 자기 자신의 일만 돌보고 우리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아니 우리를 위해 아픔을 당할 필요가 없는 그러한 분이, 자신을 기쁘게 하시지 않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겸손하지 않고 자기를 부정하지 않을 수 있으며 서로 지체가 되는 자들의 일을 먼저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3) 그러므로 우리도 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① 그리스도, 곧 그의 자아부정과 고통에 관해 기록한 것은 "우리의 교훈을 위해서"다. 

그가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부정하셨다면 우리도 감사한 마음에서 아니 그의 형상을 닮기 위해서 우리를 부정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행적과 말씀의 모범은 우리더러 본받으라고 기록되어 있다.

②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진 것은 일반적으로 우리의 교훈을 위해서다. 

다윗이 일인칭으로 얘기한 것을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고 있다. 

이것이 성경을 악용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을까 봐 그는 곧 바로 모든 구약은(신약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교훈을 위해 기록된 것이요 개별적으로 해석할게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구약 성도들에게 일어났던 일은 일종의 예표로서 그들에게 일어났으며 구약 곳곳에 보면 이것이 성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상규(常規)로서 기록되어 있다. 그것이 "기록된" 것은 우리가 늘상 사용하고 혜택을 입도록 하려는 뜻에서다.

첫째, 우리의 교훈을 위해서다. 

성경에는 배울 점이 무궁무진하며 이 샘에서 파낸 것만이 최선의 교육이다. 성경에 정통한 사람만이 최고의 교육을 받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뿐 아니라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배우도록 힘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돌을 굴러내는 일뿐 아니라 물을 긷는 데 있어서도  - 대부분의 우물은 깊기 때문이다 -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비판적인 강론보다는 실제적인 관찰이 더 필요하다.

둘째,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영원한 생명을 그 목적으로 하는 소망이 성경 연구의 목적으로 계시되어 있다. 

성경이 기록된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뭘 어떻게 , 어떤 근거로 소망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에 특별한 친구라는 점을 배울 수 있다. 

이 소망을 얻는 방법은 "인내와 성경의 위로를 통해서"다. 인내와 위로라는 말에는 고통과 슬픔이라는 말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다. 

이게 성도들의 이 세상에서의 운명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내하고 위로받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우리 영혼의 생명되는 소망의 친구들이다. 인내는 체험을 가져 오고 체험은 부끄럽게 하지 않는 소망을 가져온다(5:3-5). 

고통 가운데서 더 인내하면 인내할수록 우리는 이 고통을 통해 소망으로 앞을 내다 볼 수 있으니 조급해하는 것보다 소망에 파괴적인 것은 없다. 

그리고 "성경의 안위" 곧 하나님 말씀에서 발원하는 위로(이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고 위한 위로다)는 소망의 대지주요 손에 쥐어진 담보물이다. 

보혜사로서의 성령은 우리 유업의 담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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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통일(1)(롬 15:5-6)

사도는 두 가지 교훈을 제시하고, 더 나아가기 전에 지금까지 말한 것이 그대로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충성된 사역자들은 그들은 설교에 기도의 물을 뿌릴 줄 안다. 왜냐하면 누가 씨를 뿌리는 그걸 수확하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귀에다 대고 말하는 건 우리의 일이지만 마음 속 깊숙이 말하는 건 하나님만의 대권이다.

Ⅰ. 하나님에 대한 명칭.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 

곧 그가 모든 성도의 인내와 안위의 원저지요 원천이라는 얘기다. 

그분만이 인내의 은혜를 주시고 안위의 하나님으로서 그 인내를 확증해 주시고 유지시켜 주신다. 

왜냐하면 성령의 위로는 신자들을 북돋아 주고 모든 난관에서 격려하고 즐겁게 해 주기 때문이다. 

사도는 사랑과 통일의 영을 부어 달라고 기도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을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다. 곧

1. 우리를 참고 견디시며 위로하는 하나님으로서 부르고 있으니 그런 하나님은 우리가 뭘 잘못하는가 하는 것만 눈여겨 보지 않고 낙심해 하는 자들을 곧장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이다. 

이것은 우리도 이처럼 형제들에게 사랑을 증거하고 서로 참고 위로 하는 가운데 통일성을 유지하라는 의미에서다.

2. 또한 우리에게 인내와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미 성경의 인내와 위로에 대해서는 말한 바 있으므로(4절) 여기서는 하나님을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 인내와 위로는 마치 수도관과 같은 성경을 통해서 저수지 되는 하나님에게서 흘러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위로와 인내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만큼 더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조급해하고 투정대며 짜증내는 우울한 기질보다 화평을 잘 깨뜨리는 것도 없다.

Ⅱ. 하나님에게 자비를 그는 구하고 있다.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분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1.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화평의 기초는 한 마음, 같은 판단, 같은 애정에 있다. 

"동일한 것을 마음 먹는 것"(토 아우토 프로네인, 15:5) 곧 모든 의견차의 계기가 제거되고 모든 분쟁이 거둬지는 것이다.

2. 이 한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이어야 한다. 

곧 그리스도의 교훈, 사랑의 법칙, 그리스도의 모범에 일치한 것이어야 한다. 

아니면 "그리스도가 네 통일의 중심이 되게 하라. 진리에 있어서 일치할 것이지 오류에 있어서 하나가 되지 말라." 

그들의 힘과 능력을 짐승에게 바친 자들의 마음은 저주받을 일치와 조화를 이루는 경우가 있다(계 17:13). 

이것은 그리스도를 본받은 한 마음이 아니라 바벨탑을 쌓는 자들처럼 반역에 있어서 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었다(창 11:6). 

우리의 기도는 먼저 진리에 입각해야 하고 다음에 화평을 이루는 것이어야 한다. 

위에서부터 오는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한마음이다.

3.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그리스도인들 간에 한 마음을 품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이것은 아주 귀한 선물이니 이를 위해 우리는 전심으로 구하는 기도를 아끼지 않아야겠다. 

그는 "영혼들의 아버지"로서 인간의 마음을 똑같이 지으셨으며(시 33:15) 구하는 자에게 이해력을 열어 주시며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애정을 북돋아 주시며 사랑의 은혜를, 아니 사랑의 영을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지상에서도 이뤄질 것을 기도하라고 배웠다. 

저 하늘에서는 그 뜻이 한 마음으로 찬양하고 봉사하는 천사들에게서 이뤄지고 있으니  우리 성도들도 그렇게 되도록 열심히 바라고 기도해야겠다.

Ⅲ. 그의 소원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것이다(6절). 

이것은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는 그의 탄원이자 그들에게는 그것을 추구하라는 부탁이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으뜸가는 기원은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소서"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한 마음을 지녀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되

1.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게 하려는 목적에서다. 

그리스도인들이 매사에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니 곧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될 때만이 홀로 한 분이요 그 이름도 하나이신 하나님의 영광에 큰 도움이 된다. 

입만 하나되는 것 가지고는 부족하고 마음이 하나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마음을 들여다 보시기 때문이다. 

마음이 하나되지 못한 곳에 입이 하나 될 리 없으며 이 둘이 서로 하나 되지 않는 곳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리 만무하다. 

하나님의 진리를 고백하고 그의 이름을 찬양하는 일에 있어서 한 입이어야 하고 거룩한 성회에서 한 소리 한 합창이 나와야 한다. 

서로 물고 뜯으며 다투는 일에 있어서 한 입이어서는 안 된다.

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한다. 이것은 신약의 방법이다. 

하나님은 이제 복음의 법칙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자신을 계시하신 그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받으셔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통일성은"하나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영광스럽게 해드리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통일성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통일을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걸 바라고 그걸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침을 받고 있다. 

곧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는 것"(요 17:21)이다. 성도들의 통일성에 대한 아름다운 표현이다. 

뒤이어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소서" 하는 말씀이 따르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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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통일(2)(롬 15:7-12)

사도는 여기서 다시 그리스도인들에게의 권고를 시작하고 있다. 

여기서(7절) 말하는 것은 전술한 바의 반복이지만 사도의 마음이 얼마나 거기에 집착되어 있는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 그는 이러 되풀이하고 있다. 

"힘 닿는 대로 서로 받아들여 우정을 나누고 같이 행동하라." 

그는 앞에서 강한 자들에게 약한 자를 받아들이라고 권고하더니(14:1) 여기서는 "서로 받으라"고 권고한다. 

왜냐하면 강한 그리스도인의 교만이 약한 자를 부끄럽게 하고 약한 그리스도인의 편견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는 때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곁길로 가는 처사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부둥켜 안고 받아들어야 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자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형제애로 받아들여야 한다. 

네 형제들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핍박을 받고 멸시 받아도, 그들을 받아들이는 게 비방과 위험을 가져와도, 하찮은 율법 문제에 있어서 의견 차이가 있어도 서로 사사로운 감정 대립이 있더라도 이 모든 것을 접어 두고 "너희도 서로 받으라." 

그는 우리가 서로를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를 그리스도의 우리에 대한 공손한 사랑에서 찾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이보다 더 함축적인 논리가 있을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는 사랑을 베푸셨는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인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겠는가? 

그는 우리를 받아들이는데 그처럼 적극적이었는데 우리는 우리 형제들을 받아들이는데 소극적이겠는가? 

그리스도는 우리를 더 할 수 없이 밀접한 관계로 받아들이셨으니 곧 그의 우리로, 그의 가족으로, 양자로, 우정의 계약 관계로, 아니 자신과 혼인 계약 관계로 받아들이셨다. 

우리가 이방인이요 원수로서 탕자 노릇을 하고 있을 때 그는 우리를 받아 자기와 우정과 교제를 나누게 하셨다. 

"하나님께 영광"(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이란 말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심과(이것은 우리의 귀감이다), 우리끼리 서로 받아들임 (이것은 그 귀감에 따른 우리의 실천이어야 한다)이 포함되어 있다.

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받으셨다. 

그리스도의 우리 영접 목적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오는 세상에서 영화롭게 되기 위해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셨을 때 마음에 두셨던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그 영광의 향유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영원한 영광에로 부르심을 받았다(요 17:24). 

그가 우리를 받아 데려 가는 곳은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행복에로요, 그가 우리는 받아들이는 목적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모든 경우에 이런 목적이 같이 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겠다.

Ⅱ.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서로를 받아들여야겠다. 

우리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최대 목표여야 하는데 이것을 가져 오는 것은 신앙을 가진 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한 것이 따로 없다.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6절). 

이전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투쟁거리는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였다. 

이제 이런 차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고 이방인 양자를 어떻게 받아들이셨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그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둘은 하나이니 "한 새 사람"(엡 2:14-16)이다. 이제 그것은 하나의 규칙이다. 

"제삼자(JC)안에서의 각자가JC와 일치할 때, 그리스도안에서 서로 일치한다."...이것을 명심하고 기억하라!! (먼저 간접성 통해 직접상을 이룬다!!)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며 위대한 통일의 중심체인 [에너지의 근원이시며 모든 에너지를 끌어들이는 만유와 만물의 중심]그리스도 안에서 일치하는 자들은 서로 간에 잘 일치할 수 있는 것이다. 

JC와 기독교 안에서의 유대인과 이방인의 연합은 바울의 마음을 너무도 압도하는 것이기에 좀 더 이에 대한 설명과 해석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1. 그는 유대인들을 받아들이셨다(8절).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원래 유대이던 자들, 비록 약해져 있지만 그들의 옛 유대주의의 명성을 지키고 있는 그들을 욕하거나 깔보지 말라.

(1) 예수 그리스도는 "할례의 수종자" 였기 때문이다. 

그가 "수종자" 곧 종 ‘디아코논’이었다는 점은 그의 뛰어난 공손의 예(example)를 증명해 주는 것으로 그 수종 자체를 영광스럽게 해 준다. 

그러나 그가 할례의 수종자로 몸소 할례를 받으시고 율법 아래 처하게 되셨으며 똑같이 할례받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바로 이 점이 겉보기와는 달리 유대인을 무시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민족들과 함께 행동하셨으며 그들을 축복하셨으며 스스로를 "이스라엘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곧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보냄을 받은 것(히 2:16) 여기셨으며 말하자면 인류 전체를 대표하는 그들에 의해서 붙잡힌 바 되셨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들을 우선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을 그후 사도들이 확대하였지만 말이다.

(2) 그가 이렇게 되신 이유는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그가 전파한 것은 진리였다. 그는 이 세상에 이 진리를 증거하러 오셨기 때문이다(요 18:37). 그리고 본인 자신이 진리였다(요 14:6).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왔다는 말은 Q께서 후손들을 위해 마련해 놓으셨다고 조상들에게 약속한 특별 은혜에 대한 약속을 실현시키러 오셨다는 말이다. 그들 유대인들이 이처럼 특출하게 된 것은 유대인들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 때문이다. 

곧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에 신실하시다는 걸 입증해 보여 주시기 위해서다."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려고 이다. 

약속에 대한 최선의 확증은 그것에 대한 실천이다. 

아브라함의 후손 안에서 모든 민족이 축복을 받고, 살로가 유대인들 발 밑에서 나오며 이스라엘에게서 주권자가 나오며 시온에서 율법이 나온다는 등등의 모든 약속이 이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이 약속을 무력케 하고 이 백성을 치명적으로 멸망시키는 과도기적인 심리현상들이 중간에 있었으나 왕되신 메시야께서 때가 차서 할례의 수종자로 오시게 되자 모든 약속이 확증되고 이 약속들의 진실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왜냐하면 신구약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요 아멘이기 때문이다.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이라는 말을 구약 시대에는 희미하게 집행되었으나 이제 복음 아래서 밝히 드러난 은혜 언약의 전체로 이해할 때 이 언약을 확증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명이었다(단 9:27). 그는 언약의 피를 흘림으로 이것을 확증하셨다.

(1) 이방인들을 받아들여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주의해 보라.

이것이 곧 교회의 일이요 하늘에서 받을 삯이다. 

그리스도의 또 다른 위대한 목적은 이방인들도 마찬가지로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 안에서 유대인과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어떤 그리스도인이 그가 전에 이방인이었다 해서 그를 못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좋은 이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그를 받아들이셨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들의 회개가 표시되어 있다.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심이라."

① 그들에게도 찬양할 합당한 이유가 있으니 곧 하나님의 자비다. 

이방 세계가 처해 있던 비참하고 통탄스러운 상태를 곰곰히 살펴 생각하면 이들을 받아들이는 문제가 유대인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큰 은혜의 행위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이들은 "로루하마" 곧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 자요 "로암미" 곧 내 백성이 아닌 자였다(호 1:6, 9; 2:23). 

어떠한 백성에게든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가장 큰 자비는 이들을 하나님 자신과의 언약 관계로 받아드려 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② 그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할 마음이 생길 것이다. 

회개치 않은 죄인들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하고는 전혀 무관하다. 

그러나 회개케하는 은혜는 한 영혼에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언행의 성품을 낳는다. 

오래 전부터 그의 영광을 욕되게 하던 이방인들에게서 영광의 추수를 하기로 계획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2) 여기에 드러난 성경의 성취.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은 자비뿐 아니라 진리였다. 

이들에게는 유대인들 조상에게처럼 직접 약속이 주어진 것은 없지만 그들의 소명, 교회에로의 불러들임에 대한 예언은 많이 있다. 

이 중에 일부를 여기서 소개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그걸 믿으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곧 구약을 인용한 사도바울은 그들의 이방인들에 대한 증오감을 누그러뜨리고 알력 당사자들을 회개하도록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①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될 것이라는 것이 예언되어 있다.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리다(9절). 곧 당신의 이름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알려지고 소유되며 복음의 은혜와 사랑이 찬송되리로다." 

이것은 시 18 : 49에서 인용된 것이다. "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리다." 

하나님의 이름을 감사히 부르고 찬송하는 일이야말로 남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찬양하도록 이끄는 비결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그의 형제들에게 선포하는 것을 가리켜 "회중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는 것"(시 22:22)으로 말하고 있다. 

이 말을 다윗이 말로 이해하면 그건 그가 노년에 죽어가면서 말한 것이니 다윗 자신이 이방인을 상대로 얘기한 것일 수는 없다. 

그러나 다윗의 시편이 하나님의 찬양과 영광을 위해 이방인들 가운데서 읽혀지고 노래되어질 때 다윗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노래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이스라엘의 애송 시인이 이제는 이방인의 애송시인으로 된 것이다. 회개의 은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윗의 시편을 사랑하게 만든다. 

이 시편들을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모든 찬양하는 성도들의 마음에 그의 영이 믿음을 통해 내주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누구라도 이방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감사하며 주께 찬송드린다면 그것은 그 사람 자신이 아니라 그들 속에 거하는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마찬가지로 이제는 내가 찬양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찬양하시는 것이다....[[HS께서 부르시는 찬양-기도와 합하라, 그분의 말씀을 말하라!!]]

② 이방인들이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할 것이라"는 것이 예언되어 있다(10절). 이것은 모세의 노래를 인용한 것이다(신 32:43). 

그의 백성으로 편입된 자들은 그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다. 

어떠한 백성의 기쁨도 그들 가운데 복음이 능력 가운데 오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에게 편견을 가진 저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기쁜 잔치에 자기들외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마음의 즐거움에 타인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이방인들은] 참예할 수 없다는 게 그들이 지론이기 때문이다(잠 14:10). 

그러나 휘장이 내려졌기에 이방인들은 이 백성과 함께 기쁨을 나누도록 환영받고 있다. 

일단 교회로 들어온 이상 그들은 그 고통을 같이 나누며 환란과 인내의 동참자가 되고 이것을 보상하는 의미에서 이들은 또한 기쁨에도 동참하게 된다.

③ 이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리라는 것이 예언되어 있다(11절).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라." 이것은 시편 117편 1절의 인용이다. 

회개의 은혜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케 만들어 놓으니 찬양할 건덕지를 풍성하게 제공하며 그럴 마음을 준다. 

이방인들은 수 세기에 걸쳐서 나무와 돌로 만든 우상을 찬양해 왔으나 이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다윗은 영으로 내다 보고 얘기하고 있다. 

모든 민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요청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④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것이 예언되어 있다. 이것은 이사야 11장 10절의 인용이다.

첫째, 이방인의 왕으로서의 그리스도. 

여기서는 그를 가리켜 "이세의 뿌리"라고 부르고 있으니 다윗 족속의 생명과 힘이 되는 가지라는 얘기다(사 11:1 비교).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주였지만 그러나 그는 또한 다윗의 자손이었다(마 22:45). 그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기 때문이다(계 22:16).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자격으로서는 다윗의 뿌리요 인간으로서는 다윗의 자손이었다.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 이것이 선지자의 상징적인 표현을 설명한다. 그는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셔서 높임을 받은 것은 이방인들을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둘째, 이방인들의 의지의 대상. "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이방인들이 그를 신뢰 할 것이다). 

신앙은 영혼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며 그에게의 의존이다.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 오리니"하고 이사야 선지는 덧붙이고 있다. 

신앙의 비결은 우선 그리스도에게 돌아서서 그를 구주로 받아들이며 그 구원 능력을 확신하고 그를 신뢰하는 데 있다. 

그를 아는 자들은 그를 신뢰할 것이다. 아니면 이 돌아서서 찾는다는 일은 신뢰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기도로 열심히 그를 구하며 노력하는 것이다. 신뢰는 어머니요 노력은 그 딸이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이처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통일되었는데 서로의 사랑 안에서는 통일되지 못할 이유가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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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의 하나님(롬 15:13)

여기서는 하나님을 소망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으니 전자와 마찬가지로(5, 6절) 영적 축복을 갈구하는 기도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바라고 기도해야 할 최선의 축복이 아리 수 없다.

Ⅰ. 그는 하나님을 "소망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사명에 맞는 하나님의 명칭, 속성을 기도할 때 내세울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그 일에 대한 우리의 신앙이 북돋아진다. 

기도의 마디 마디는 일종의 탄원이어야 한다. 이처럼 대의명분이 섰으면 이에 대한 대책이 입에 가득 채워져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소망이 서 있는 기초요 이 소망을 몸소 일으켜 세우는 건축자이시니 그는 이 소망의 대상이자 원저자이시다. 

하나님께 붙잡혀 있지 않는 소망과 그가 우리 속에서 일하지 않는 소망은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우리를 속일 뿐이다. 

우리에게는 이 둘이 다 있다(시 119:49).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 할 때 그건 우리의 소망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이요, "주께서 나로 소망이 있게 하셨나이다"할 때 그건 우리의 소망의 저작자로서의 하나님이다(벧전 1:3).

Ⅱ. 그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구하고 있다.

1.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기쁨과 평강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성하는 두 요소다(14:17).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과 양심의 평강은 모두 우리의 칭의 받은 의식에서 생기는 것이다(5:1, 2). 

우리 마음 속의 기쁨과 평강은 우리 형제들과의 통일성과 연대성을 한층 증진시키기 마련이다.

(1) 이 기쁨과 강은 충만하다. 

육적인 기쁨은 영혼을 들뜨게 할 뿐 그것을 충만하게 하지는 못한다. 그러기에 웃으면서도 마음은 씁쓸하다는 말이 나온다. 

참된 하늘의 기쁨은 영혼을 가득 채우는 것으로 그 자체에 만족이 따르고 있으며 영혼의 무한하고 의로운 욕망을 다 채워 주고도 남는다. 

이렇게 하나님은 지쳐 있는 영혼을 만족시켜 주시는 것이다. 

이 기쁨을 가진 영혼은 이것이 아니면 가질 생각을 않으며 이걸 더  갖고자하며 영광 가운데 이걸 완성하려 들 뿐이다(시 4:6, 7; 36:8; 63:5; 65:4).

(2) 이 기쁨을 얻는 방법

① 기도. 

우리는 이것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영적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 준다.

② 믿음. 

이것이 그 방편이다. 환상의 결과는 헛되고 일시적인 기쁨 뿐이요 참된 기쁨은 믿음의 결과다.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우리에게 기쁨과 평강이 그렇게도 부족한 것은 우리 신앙의 연약성 때문이다. 오직 믿기만 하라. 그리스도의 선하심을 믿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고 언약의 약속을 믿고 하늘의 기쁨과 영광을 믿으라. 

믿음만이 이 모든 것의 본질과 증거가 되도록 하라. 그 결과는 필연코 기쁨과 평강이다. "모든"기쁨과 평강이란 말을 주목하라. 

모든 종류의 참된 기쁨과 평강이 따를 것이다.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우리의 욕심이 커져야 한다. 

하나님 안에서 움츠러들 필요가 없다면 왜 스스로 움츠러 들고 있는가? 모든 기쁨을 구하라. 그대 입을 활짝 열어 놓으라. 그가 채워 주시리라.

2.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신자들의 기쁨과 평강은 먼저 그들의 소망에서 나온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그들을 위해 준비해 놓은 것에 비하면 형편없이 적다. 

따라서 그들의 소망이 크면 클수록 그들의 소유-누림도 그만큼 커진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큰 것을 소망하고 또 이 소망을 확신할 때 우리의 소망은 넘치기 마련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소망이 풍성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런 일로 부끄러움은 당하지 않는다. 이것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가능하다. 

은혜를 일으키는 똑같은 전지한 능력이 이 소망을 낳고 또 보강하는 것이다. 우리 힘만으로는 그걸 따라 잡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소망이 있고 또 그것이 풍성한 곳에서 복된 성령에게 모든 영광이 돌려져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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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의 칭찬(롬 15:14-16)

Ⅰ. 그는 이들 그리스도인들을 더 할 수 없이 칭찬하고 있다. 그는 이 서신을 시작하면서 그들을 칭찬하고 나섰다(1:8).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중간에 그들을 너무도 심하게 꾸중하였기에 이제 그들을 누그러뜨리고 친구로서 헤어지기 위해 서론에서와 같이 칭찬으로 결론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웅변가와 같은 방식이다. 그것은 하잘 것 없는 아첨과 입발림이 아닌, 그들의 가치와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난 올바른 평가다. 우리는 타인에게 있는 장점과 칭찬할 만한 점을 관찰해서 칭찬하는 데 있어 적극적이어야겠다. 

이것이 그들이 현 세상에서 누리는 덕과 효용성에 대한 보상이자 타인들로 하여금 거룩한 선의의 경쟁에 나서게끔 하는 가치를 지닌다. 

로마인들이 그만한 판단력과 정직의 사람인 바울에게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이들의 영예에 관계되는 일이다. 

그는 속임을 당하기엔 너무 재줏군이요 아첨을 하기엔 너무 정직한 인물이다. 

물론, 바울은 이들과 직접 교류해서 알게 된 앎이 있는 게 아니고 소문으로만 들었지만 이들의 장점을 확신하고 있다고 말한다. 

때때로 남의 말을 그대로 믿을 정도로 너무 단순해서도 안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믿지 않을 정도로 회의적이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남의 선을 적극적으로 믿어줄 줄 알아야 한다. 이런 경우에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믿으며(이런 경우에서처럼 가능성이 강할 때는) 확신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잘못을 저지르는건 오히려 안전하다. 그들의 칭찬거리를 살펴 보자.

1. 그들은 "선함이 가득했다." 

그러기에 그들은 더욱 사도의 글을 좋게 받아들이며 그걸 친절로 여기며 그걸 실천할 수 있었으리라.

특별히 의견차이의 치유와 그들의 통일에 관한 권유에 있어서 그러하다. 

서로 잘 이해하고 서로 좋은 생각을 품는 것이야말로 분쟁의 실마리를 푸는 해결책이다.

2. "모든 지식이 차서." 

선함과 지식을 동시에 다 갖추다니! 정말 희귀한 일치. 새로운 인간의 머리와 마음의 뛰어난 일치다. 

모든 지식 곧 그들의 영원한 평화에 관계된 모든 지식을 로마의 믿는이들은 다 갖추고 있었다.

3. "능히 서로 권하는 자." 

또 다른 특별 은사가 꼭 필요한데 곧 지혜로운 화술의 은사다. 선함과 지식을 갖춘 자는 가진 것을 남들에게 효용이 되도록 전달할 줄 알아야 한다. 

여러 은사에 뛰어난 너희들은 나의 교훈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다 하는 식이다. 

충성된 사역자들이 그들의 일보다 자기 교우들의 은사와 은혜가 뛰어나게 좋은 걸 보는 것은 큰 위로다. 

교우들이 서로 자기들끼리 권고할 수 있고 또 자발적이라면 얼마나 기쁘겠는가! 모든 주의 백성이 선지자라면 좋지 않겠는가. 

그러나 누구에게나 관계되는 일을 [자기의 전력을 다해] 열심히 하는 사람은 없기에(every body's work is nobody's work.).

Ⅱ. 그는 자기 소관이 아닌 걸 쓸데없이 간섭하고 있지 않다는 걸 분명히 하고 있다(15절). 

그는 그들에게 아주 깊은 애정을 가지고 얘기하고 있다. "내 형제들아"(14절) 하는 말 다음에 또 "형제들아"(15절) 하는 밀이 잇따르고 있다. 

자신이 공손할 줄 알 뿐 아니라 남에게도 그걸 가르쳐 주고 있다. 

그가 그들을 가리켜 모두 그의 형제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에게 서로 사랑하도록 가르치기 위해서다. 

그가 더욱 정중하게 쓰지 않을 수 없던 것은 로마인들은 궁정에 가까이 살기에 그만큼 예절바른 시민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는 바울은 여기서는 문체를 공손하게 함으로 그들을 기쁘게 해 주려고 한 것이다. 

그가 "어떤 부분에서는 매우 담대하게"(새번역) (톨메로테론 아포 메루스, 15:15)쓴 것을 인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뻔뻔스럽고 주제넘게 보일지도 모르게 글을 썼다는 얘기다 . 그러나

1.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그들의 기역을 되살리려는 의미에서 그렇게 한 것뿐이다.

"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바울의 겸손한 태도를 보라. 그처럼 지식에 뛰어난 그이지만 그들이 모르는 걸 말하는 게 아니고 그들이 이전에 다른 사람에게서 교훈받은 것을 다시 기억나게 하는 정도에 그친다는 식이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다(벧후 1:12; 3:1) 

흔히들 우리들은 목사는 전에부터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 이상의 새로운 걸 말해 주지 않기 때문에 들으나마나 라는 식으로 변명한다.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는 그걸 좀 더 명확히 알고 그걸 되살려 기억할 필요는 없는가?

2. 그는 그것을 이방인들의 사도로서 그렇게 하였다. 

곧 그의 직분에 일치하는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곧 사도직, 1:5) 인하여……곧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는 것"이다(16절).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이 직분을 맡겨 주신 것을 아주 큰 은총이자 영광으로 알았다(1:13). 

이제 그에게 주어진 은혜 때문에 그는 자신을 이방인들 사회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기 위해서다. 

그리스도께서 주기 위해 받으셨듯이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매장해서는 안 될 재능이 각각 있게 마련이다. 지위고하, 직분여하를 막론하고 각자의 임무가 있게 마련이다. 

사역자들은 자기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종종 되새길 필요가 있다. 

"너는 말씀의 종이다. 그 일만 전담하라." 하는 게 퍼긴즈의 모토였다. 바울은 사역자였다.

(1) 누구의 사역자였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일군"이었다(고전 4:1).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인이요 우리는 그의 소유로서 그를 섬길 뿐이다.

(2) 누구를 위해서인가? 

이방인들을 위해서다. 하나님은 그를 그렇게 임명하셨다(행 22:21). 이것은 베드로와 바울이 동의한 그대로다(갈 2:7-9). 

이 로마인들은 이방인들이었다. 그러기에 "나는 주제넘게 나서거나 너희를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거기에 임명을 받은 자다. 너희들이 내가 오만불손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의 임무가 그 보증이요 나를 입증해 줄 것이다"하는 식으로 얘기하고 있다.

(3) 그가 맡은 임무. 

"하나님의 복음." 곧 "거룩한 것에 대해서 일하는 것"(히에루르군타 유앙게리온, 15:16)이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는 것이니 레위 제사직보다 훨씬 영적이요 뛰어난 것이다.

(4) 무슨 목적을 위해선가.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곧 이방인들의 회개로 그의 이름에 돌아오는 영광을 하나님이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하나님에게 인정받을 일을 위해 노력했다. 

이방인들의 회개에 대한 표현을 살펴 보자. 

그것은 "이방인들의 봉납"(프로스포라 톤 에드논, 15:16)이니 여기서 이방인들은 제사장이든가 아니면 제물이든가 둘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① 기도와 찬송, 그리고 다를 신앙의 행위를 봉납하는 제사장.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거룩한 민족으로 제사장의 나라로 군림해 왔지만 그러나 이제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에게 제사장이 되었으니(계 5:10)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성별된 믿음에로 개종한 덕분이다. 이것은 다 성경을 이루려는 뜻에서 그렇게 되었다.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로 드리리니"(말 1:11). 회개한 이방인들이 "가까와졌다"는 (엡 2:13) 말이 있는데 이것은 제사장이 되었다는 완곡한 표현이다.

②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바울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니 산 제물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이다(12:1). 

성화된 영혼은 그리스도의 제단에서 사랑의 불꽃 속에 하나님께 바쳐진다. 

바울은 그의 전도를 통해 하나님의 이방 백성을 모으되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였다.

"보소서 나와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진 받아들일 만한 제물이다. 바울이 그들에게 전도하고 이들을 가르쳐 왔지만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제물이게끔 만든 것은 그들의 성화였으니 곧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끔 만든 것은 그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일이었다. 

성화받지 않은 자들은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이 될 수 없다. 

거룩하지 못한 것이 거룩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리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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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의 수고(롬 15:17-21)

사도는 여기서 자신과 자신의 일에 대해서 약간 설명하고 있다. 

그는 그의 임무와 사도직을 언급한 뒤에 더 나아가 자기 직분의 효과를 밝히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 이루신 놀라운 업적을 얘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또한 로마에 있는 교회를 격려하기 위해서다. 

기독교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너희들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곧 우상 숭배에 젖은 수 많은 사람들과 비교하면 극소수에 지나지 않지만 이리저리 다 뒤져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오 인내에 동참하는 자가 많다는 걸 알려 주기 위해서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대한 위대한 확증이니 이상하게도 그것이 성공하며 복음의 어리석음을 통해 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순종에 사로잡히고 만다는 증거다. 

따라서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헛된 자랑이 아니라 거룩하고 은혜로운 자랑이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자랑이다. 

이처럼 그는 그의 모든 자랑의 중심을 그리스도에게 두고 있으면서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고전 1:31).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시 115:1). 

그리고 이 자랑은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다. 영혼의 회개야말로 하나님의 일이요 바울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결코 육신의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하는 말을"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즐거워하노라"하는 식으로 보고 싶다. 

이것은 고린도후서 1장 12절, 빌립보서 3장 3절에서도 사용된 똑 같은 말로서 할례받은 자들의 특성이 "즐거워하는 것"(카우코메노이, 2744)으로 묘사되어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라는 말은 하나님에게 드려진 서들, 곧 이방인들의 산 제물이다(16절). 

바울은 이들이 그의 사역의 범위와 효과를 두고 자기와 함께 기뻐해 주기를 바랬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리스도의 능력과 성령의 효과적인 역사를 그 전부로 드는 일을 잊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나로 말미암아…… 역사 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니"(18절). 

그는 무턱대고 자랑만 하는 것도 아니요 남의 일을 자기 일이라고 우겨대는 것도 아니다. 

성실한 사람은 제아무리 유혹을 받아도 거짓말을 감히 하려들지 않으며  제아무리 당황해도 참되려고 노력한다. 

그의 자신에 대한 얘기를 살펴 보자.

Ⅰ. 그의 일에 대한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열심. 

그는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한" 자다.

1. 그의 전도 지역은 넓다. 

곧 "예루살렘으로부터," 거기서부터 율법이 빛을 비취는 등불로 번져 나갔다.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예루살렘에서 수 백 마일 거리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의 여행기록이 있다. 거기에 보면 이방사도로 보내심을 받은 후에(행 13) 실루기아, 구브로, 밤빌리아, 비시디아 그리고 루가오니아에서(행 13, 14) 열심히 일하고서 수리아, 길리기아, 버가, 갈라디아, 무시아, 드로아를 여행하며 후에 마게도냐를 거쳐 유럽 전 지역으로 불려 다니는 걸 볼 수 있다(행 15, 16). 

그 후에 또 그는 데살로니가, 베레아, 아덴, 고린도, 에베소 및 인근 지역에서 바삐 일하는 걸 볼 수 있다. 

이 나라들의 광활함과 거리를 아는 사람은 바울이 적극적인 사람이요 건장한 사람으로서 경주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일루리곤은 헝가리 국경 지역에 있는 스클라보니아(Sclavonia)다. 어떤이들은 이걸 불가리아로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남부 파노니아(Pannonia)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예루살렘에서 무척 멀리 떨어진 지역이다. 

혹자는 바울이 그렇게 많은 일을 한꺼번에 다 감당하다니, 아마 그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거라고 의심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하고 그는 대답한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음의 진리와 말뜻을 충분히 설명했으며 하나님의 전체 경륜을 선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노라(행 20:27).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을 보류한 것은 하나도 없도다" 하고, ‘페플레로케나이 투 유앙겔리온’(15:19)의 원 뜻은 "복음을 채웠다"이다. 

이것은 마치 한번에 당신그물에 고기가 가득차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복음으로 가득차게 해 줬다는 얘기다. 

복음이 이르는 곳에는 그게 어느 곳이든 이처럼 변화가 일어나는데 곧 그 장소를 가득 채우고 만다. 

다른 지식은 헛되고 마음을 공허하게 하지만 복음의 지식은 가득가득 채우는 것이다.

2. 그는 전에 복음을 들어 보지 못한 지역에서 전도하였다(20, 21절). 

그는 여러 곳에서 묵은 땅을 갈아 엎고 머리돌을 놓았으니 대대로 우상 숭배와 마술만이 성행하던 지역에 기독교를 소개 한 것이다. 

바울은 개척자였다. 그러기에 그는 그의 일에 있어서 어려움과 낙심은 더 더욱 컸다. 

유대에서 전도한 사람들은 이방사도인 바울에 비해 훨씬 일이 쉬웠다. 이들은 남의 수고에 동참하는 자들이었다(요 4:38). 

본래 바울은 무서운 사람이기에 무서운 일을 하도록 부름받았다. 

가르치는 자가 많았지만 그 중에도 바울은 큰아버지 격이었으니 물 주는 자가 많지만 그는 위대한 파종자였다. 

그렇다. 그는 이방 세계에 무장한 힘센 사람의 궁전에 처음 공격을 가한 사람이니 처음으로 사탄의 이익에 공격을 가한 것이다. 

이러한 공격을 여러 곳에서 그는 가했으며 또 그것 때문에 많은 고생도 한 사람이다. 그는 이것을 그의 사도직의 증거로서 언급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도의 직분은 밖에 있는 자들을 불러들여 새 예루살렘의 기초를 놓는데 있었기 때문이다(계 21:14). 

바울이 전에 사람이 일한 곳에서 전혀 전도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아니라 어두움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유익을 가져 오는걸  주업무로 삼았다는 얘기다. 그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려 들지" 않았으니 이는 그렇게 해서 자기 사도직을 부정하고 그를 헐뜯으려는 자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 이사야 52장 15절을 인용하고 있다.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이것이 바울의 전도를 더욱 돋보이게 한 것이다. 

빛이 일단 들어와 그게 퍼지는 것보다는 어둠에서 빛으로 바뀌는 그 순간이 더 밝아 보이는 법이다. 

일반적으로 복음의 최고 성과는 그 초기 단계에 있다. 그 후에는 사람들이 설교면역(sermon-proof)/무감동증에 걸리고 만다.

Ⅱ. 그의 일로 거둔 최대성과. 그것은 "이방인을 순종하게"하는 효력있는 일이었다. 

복음의 목적은 사람들을 "순종하게" 하는 것이니 그것은 믿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해야 할 율법이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그의 모든 여행 중에 생각한 것이다. 곧 자신의 부나 명예가 아니라(그랬더라면 그는 그의 목적을 상실하고 말았을 것이다) 영혼의 회심과 구원이다. 

이것에만 그의 마음은 쏠려 있었으며 여기서 다시 한번 이에 대한 해산의 고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일이 어떻게 이뤄졌는가?

1. 그리스도께서 모두 하셨다. 

그는 "내가 일한 것"이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나로 말미암아…… 역사하신 것"이라 말하고 있다(18절). 

우리가 무슨 선을 행하든 그것을 행하는 자는 우리가 아니라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그리스도다.

일 자체도 그의 것이요 힘도 그의 것이니 그가 전부요 우리의 모든 일을 그가 일하신다(빌 2:13; 사 26:12). 

바울은 모든 찬양이 그리스도에게 올라가도록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2. 바울은 적극적인 도구였다. 

"말과 일로" 이 말은 그의 전도와 그의 전도를 확증하기 위한 기적으로 볼 수도 있고, 그의 전도와 생활로 볼 수도 있다. 

말과 일이 겸비한 사역자들, 곧 행위로 저기가 전파하는 진리의 능력을 보여 줄 수 있는 자들이야말로 영혼 구원을 쉽게 해낼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이니 그는 가르치고 행하는 일을 동시에 시작하셨다(행 1:1). 

“표적과 기사를 통해”, 이말은 표적과 기사의 힘으로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 표적과 기사가 말씀 전파를 효과적이게 하고 있는 데 이것은 원래 확신케 하는 지정된 수단이요 복음 시대를 여는 신의 날인이다(막 16:17, 18).

3. "성령의 능력"이 이 일을 효과적으로 해냈으며 이상 모든 일에 성공의 면류관을 씌워 준 것이다(19절).

(1) 다른 사도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서 이 기적을 행하게 하신 성령의 능력. 기적은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일이다(행 1:8). 

그러므로 기적을 멸시하는 것은 성령 모독죄라 부르고 있다.

(2)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본 자들의 마음에 작용하는 성령의 능력. 

이 능력으로 어떤 자들에게는 이 수단이 효과적일 수 있고 다른 자들에게는 효과를 거두지 못하기도 한다. 

이렇게 구별을 두는 것은 성령의 일이다. 

바울도 그 개인으로 말하면 그 모든 능력과 표적을 가진 막강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영의 능력이 그의 수고와 함께 하지 않았더라면 한 영혼도 순종하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저 큰 산을 들어 스룹바벨 앞에 평지로 만든 것은 만군의 여호와의 영이었다. 이것은 연약한 사역자들에게 큰 격려가 아닐 수 없다. 

바울에게 작용한 동일한 전능의 영은 종종 약한 힘을 완전하게 하며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에게 찬송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게 복음 전파에서 얻은 성공을 그는 여기서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회개한 민족은 바로 그의 기쁨이요 즐거움의 면류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이것을 지적해서 말하는 것은 그들 또한 그와 함께 즐거워할 뿐 아니라 그가 그들에게 쓰는 진리를 더욱 잘 받아들이며 그리스도께서 받아들인 자기를 그들이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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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교우들을 만나고 싶은 욕망(롬 15:22-29)

사도는 여기서 로마 교우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목적을 피력하고 있다. 

내용상으로는 친구를 방문하겠다는 보통 얘기지만 그 표현상으로 보면 아주 우아하고 품위가 있으며  교훈적이라서 본받을 만하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보통 대화도 가나안의 언어로 얘기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보통 대화에 은혜로운 면이 엿보일 때 우리는 어느 편 나라에 속하고 있는가를 나타내 보여 주는 셈이다. 

로마에서도 바울의 동행을 몹시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친구도 많고 원수도 많은 사람이었다. 

궂은 소리, 좋은 소리를 다 들어온 그다. 물론 로마인들도 그의 평판을 듣고 있었기에 고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방인의 사도가 이방인 세계의 수도인 로마에 이방인이 될 리가 있겠는가? 

이 점에 있어서 그는 그가 속히 가지 못한 점을 사과하고 어서 빨리 갈 것을 약속하면서 당장 가지 못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Ⅰ.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점을 사과하고 있다.

1. 그는 성도들을 만나고 싶은 욕망이 간절하다는 점을 얘기하고 있다. 

그의 욕망은 휘황찬란한 로마시를 구경하자는 것도, 황제의 궁전을 구경하겠다는 것도, 당대의 현인들과 철인들을 만나 대화를 나루고 싶다는 것도(바울같은 학자로서는 능히 욕심낼 만한 대화였지만)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가려는" 것(22절) 이었으나 곧 로마의 가난하고 멸시받는 성도들, 세상의 증오의 대상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의 사랑을 받는 이들을 만나 보려는 것이었다. 

바로 이 사람들과 바울은 그렇게도 교제를 갖고자 한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그가 기뻐하는 뛰어난 백성들이었다(시 16:3). 

그들은 모든 교회보다도 믿음과 성결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그처럼 덕성이 뛰어난 사람들이기에 바울은 그처럼 만나 보고자 했던 것이다. 

바울은 이 바램을 수 년간 품고 있었으나 실현을 보지 못했다. 하나님의 섭리는 지혜롭게도 인간의 뜻과 욕망을 위에서 다스린다. 

하나님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는 종들도 이처럼 맘 먹었던 게 다 성취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자는 모두 마음속 욕망이 다 채워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음의 참소망 성취는 이룬 것과 마찬가지다(시 37:4).

2. 그가 일찍이 가지 못한 이유는 다른 데서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다른 지역에서의 수고 때문에 여러 번 "막혔다." 하나님께서 다른 지역에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기에 거기 일로 바빴다는 얘기다.

(1) 하나님의 은혜로운 자비는 그의 종들의 생각이 아니라 자신의 뜻에 따라 그들의 운명을 좌우한다. 

바울이 거리낌 받은 경우는 많다. 어떤 때는 사탄의 방해를 받기도 하고(살전 2:18) 어떤 때는 성령의 제지를 받기도 하고(행 16:7) 여기서는 다른 일로 일이 꼬이고 있다. 

목적 설정은 인간에게 있지만 그 일처리는 하나님에게 있다(잠 16:9; 19:21; 렘 10:23). 

사역자들과 그 동료 친구들은 목적을 세우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둘을 다 지배하며 그들의 여정, 방해물, 확정 문제는 자시니 좋으실대로 처리하신다. 

그리스도의 손에 빛은 쥐어져 있으며 그가 비취고 싶은 곳으로 그 빛을 발하실 뿐이다. 

복음은 우연하게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경륜에 따라 오는 것이다.

(2) 그의 시간과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곳에 집중할 줄 아는 바울의 지혜. 바울이 자신의 안이와 명예 그리고 부만을 생각했더라면  제아무리 큰 일이라도 로마로 가려는 그의 발길을 멈추지 못하게 했을 것이요, 오히려 그리로 재촉하였을 것이요, 거기서 그는 대접을 받고 덜 고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일보다 그리스도의 일을 앞세웠기에 잠간 쉬며 로마에 가는 것보다는 교회 파종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로마 교우들은 건강했으며 병들고 죽어가는 다른 지역만큼 의사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남녀 구별할 것 없이 영원 속으로 빠져 들어가며 그들의 영혼이 죽어가는 판에 자기의 사소한 영달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추수할 때가 되어 들판이 무르익었는데 이런 기회는 한 번 놓치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가련한 영혼들의 부르짖는 소리가 너무도 크게 압박해 오기에 그는 바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절실한 문제부터 우선적으로 처리할 줄 아는 우리가 되어야겠다. 

불필요한 것보다 필요한 것을 앞세우라는 게 참된 은혜의 가르침이다(눅 10:41, 42). 

그리고 보다 절실한 것을 그보다 못한 것보다 앞세우는 게 그리스도인의 지혜다. 바울의 이유는 대강 이 정도다. 

우리는 친구들이 꼭 필요한 일을 하기 때문에 별로 필요치도 않는 방문과 찬사를 보내오지 않는다고 해서 욕하지 말아야겠다. 

경중을 가려서 우리를 부정할 줄도 알아야겠다.

Ⅱ. 그는 속히 그들을 만나 볼 것을 약속한다(23, 24, 29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곧 그가 당시 머물고 있던 그 나라 대부분이 다소간에 복음의 누룩으로 발효되었고 대도시에 교회가 다 세워졌으며 바울이 시작한 일을 동역자들이 안정되어 처리해 나가고 있으므로 그는 거기서 할 일이 거의 없었다. 

복음의 수레를 해안으로 몰아 그리스를 정복하고 난 그 모든 또 다른 그리스가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던 참이요, 바울은 자기 일을 다 마쳤지만 그걸로 쉬지 않고 더 많은 일거리를 찾아 후한 일을 하고저 모색한 사람이다.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일군의 상이 아닐 수 없다.

1. 그의 방문 예정 계획. 

그는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이들을 만나 볼 계획이었다. 이걸로 보건데 그는 스페인에 기독교를 뿌리기 위해 그리로 갈 계획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앞으로 당할 일의 어려움과 위험, 장소의 멀고 가까움, 여행의 위험, 이 모든 곳에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그의 거룩한 열정의 불길을 끄지 못했다. 이 불이 그를 삼키고 만 셈이요 자신은 자아를 망각한 상태다. 

그러나 그는 스페인 여행을 끝내 마쳤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이 계획이 다른 목적과 마찬가지로 제자를 받았다고 보는 주석가들이 많다. 

그는 마침내 로마에 오기는 왔지만 죄수의 몸으로 왔으며 2년 동안 거기서  옥살이를 했다. 그러나 그 후 어디로 갔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의 옥중 서신을 살펴보면 스페인 쪽이 아니라 동쪽으로 가고 싶다는 의중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이여, 복음의 빛을 스페인에 비취겠다는 그대의 생각이 훌륭하도다. 그럴 마음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도다(대하 6:8). 

하나님의 은혜는 진실한 의도는 받아들이지만 하나님의 지혜의 섭리는 그 실천을 금지하는 수가 종종 있다. 

어떻튼 우리는 선한 주인을 섬기고 있지 않는가?(고후 8:12) 이제 그는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그들을 만나 보고자 했다. 

우리는 짧은 인생 동안에 할 우리의 일을 계획하는 게 현명하다. 그의 말투는 다분히 회의적이다. 

"너희를 보기를 바람이라." "그러기로 결심했노라"가 아니라 "그러기를 바란다"는 얘기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계획과 약속을 신의 섭리에 복종시킬 줄 알아야 한다. 

내일 일을 모르는 우리요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우리이기 때문이다(잠 27:1; 약 4:13-15).

2. 그의 여행 목적.

(1) 그가 그들에게 바랐던 것. 

그는 그들이 자기를 스페인까지 바래다 주기를 원했다. 그것은 무슨 왕들이 받는 시종이 아니라 친구로서 받은 사랑의 보살핌이었다. 

당시 스페인으로 말하면 로마제국의 한 속국으로서 로마인들이 이곳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으므로 바울이 그곳으로 여행하는 것을 도울 수 있었다. 

그가 원한 것은 그들이 가는 길만 바래다 주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계획을 촉진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울에 대한 존경뿐 아니라 바울이 가서 전도하려는 불쌍한 스페인 백성들의 영혼에 대한 관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온갖 선한 일, 특별히 구령사법에 있어서는 그걸 촉진시키고 조장하는 일에 온 정성을 다 쏟아야 한다. 

그 일을 담당하는 사역자들에게는 일이 쉽도록 해주고 불쌍한 영혼들에게는 일잉 성공적으로 잘되기를 모색 해야한다.

(2) 그가 그들에게서 원했던 점.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얻는 것"이다. 

바울이 바랐던 것은 그들과의 교제와 동행이었다. 성도들 간의 좋은 교제는 아주 바람직하고 즐겁다. 

바울 자신으로 말하면 스스로 지식과 은혜에 뛰어난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과의 사귐을 좋은 교제로 보고 바라며 기뻐하는 것이다. 철은 철을 단련하듯이 사람의 친구도 마찬가지다. 그는 그들과의 교제로 만족을 얻기 위해서 그들과 머물겠다는 뜻을 비치고 있다. 

그냥 만나만 보고 훌훌 떠나는 식이 아니다. 그는 그들과의 교제가 너무도 즐거운 것이기에 그걸 다 자기의 것으로 삼을 수는 없고 다만 얼마 정도만이라도 만족을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식이다. 

그리스도인의 사회는 제대로 운영되고 개선되기만 한다면 이 지상에서의 천국이니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에게로 우리 모두가 집결될 것이라는 보증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약간"(아포 메루스 - 일부분)이다. 우리 성도들이 이 지상에서 누리는 교제는 부분적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로만 만족을 얻을 뿐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비교하면 부분적이니 그것만이 완전한 것이요 우리의 영혼을 온전히 만족시켜 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저 세상 성도들과 누릴 교제와 비교하면 부분적이다. 

우리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성도들과 자리를 함께 할 때 우리의 모임은 완전하게 되며 그 교제는 만족을 주는 것이 될 것이다.

(3) 그가 그들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에게서 바랐던 것(29절). 

그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것을 기대했다. 그가 "그들에게서 기대했던 것"은 회의적이었다. 

"너희와 교제하여……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고 보내줌을 바람이라." 

바울은 제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과신하지 않는 걸 배웠다. 이 사람들은 후에 그가 필요로 할 때 그를 실망시키고 만 사람들이다(딤후 4: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었다." 

로마 사람들 그 어느 누구도 그의 편을 들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서 떠날 것을 가르치신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에게서 기대하는 것은 확신있게 말하고 있다. 

그가 갈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모르고 있었지만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내가 너희에게 갈 때에…… 갈 줄을 아노라." 

인간에게서는 제아무리 적게 기대해도 나쁠 게 없지만 하나님께는 제아무리 많이 기대해도 나쁠 게 없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를 그들에게 데려다 주시며 그들에게 축복의 도구가 되어 복음의 축복으로 가득 채우게 하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로마서 1장 11절과 비교해 보라. "무선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그리스도의 복음의 축복이야말로 최선의 것이요 가장 바람직한 축복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자기가 올 때 무슨 큰 것을 기대하게 해 놓고는 그것은 곧 복음의 축복, 신령한 축복, 신령한 지식, 신령한 은혜 그리고 신령한 위로라고 지적해 말하고 있다. 

교인들과 사역자들이 다같이 이런 축복을 받고 있다면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복음의 축복은 오늘 우리가 질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는 보화다. 

사역자들은 이 축복을 줄 준비가 되어 있고 교인들은 이걸 받을 준비가 다 갖추어 있을 때 쌍방은 모두 행복하기 마련이다. 

복음은 가지고 있지만 복음의 축복은 갖지 않았기에 그걸 헛되이 가지고 있는 자들이 많다. 

복음을 우리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이 축복하시기 전에는 그건 무용하다. 따라서 이 축복과 그 충만함을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본분이다.

Ⅲ. 그는 당장 그들을 만나러 갈 수 없는 이유를 들고 있으니 곧 급한 대로 예루살렘 여행이 있기 때문이다(25-28절). 

그의 변명이 사실이라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 그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교회의 위문금을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전해 주러 가는 심부름꾼이었다.

1. 위문금에 대해서. 그가 이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로마 교우들도 능력에 따라서 이와 같은 일을 하도록 자극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든 예는 아주 감동적이며 바울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동정을 구하는 데 있어서 재간이 있었다.

(1) 의연금을 받을 대상. 

"예루살렘 성도 아직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26절). 성도들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자들을 세상이 보고 짜증내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다. 따라서 부요가 최선의 것은 아니며 가난이 그 저주는 아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이 특별히 다른 성도들보다 더 가난했던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다시 그 백성들의 생활 수준이 다가올 성전 멸망과 함께 점점 형편 없어져가고 있었거나 아니면 클라우디우스 시저 당시 특별한 유대 지방에 가뭄이 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가난한 자들을 부르셨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상처를 더 크게 당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행전 11장 28-30절에 언급된 기부금의 계기였다. 아니면 당시 예루살렘 성도들이 가장 심한 박해를 당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모든 백성들 가운데서 불신 유대인들의 횡포와 악의가 극심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더할 수 없는 분노를 당하고 있었다(살전 2:16). 

히브리 교우들도 마찬가지로 자기들의 재산을 약탈당했으며(히 10:34) 그걸 생각해서 이 기부금이 마련되었다. 

예루살렘 성도들은 거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들이 이처럼 후하게 그들의 온정을 베푸는 것은 우리도 거리 여하를 막론하고 능력과 계기가 마련 되는대로 믿음의 가정들에게 우리의 사랑의 손길을 뻗치도록 가르쳐 주려는 뜻에서다.

개별적인 빈곤한 가정이 우리 주위에 있을 때는 교회가 각개 교회의 가난한 가정을 돌보는 게 마땅하지만(가난한 자들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다) 공공적인 빈곤의 문제가 등장할 때는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막론하고, 태양이 그 햇살을 내보내고 어진 여인이 "간곤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미듯이"(잠 31:20) 온정의 손길을 뻗치는 게 마땅하다.

(2) 그것을 모은 사람들. 

"마게도냐(그 중에도 빌립보인들)와 아가야(그 중에도 고린도인들) 사람들"로서 기독교에 개종한지 얼마 안되는 초창기의 두 활발했던 교회다. 

이 말은 복음을 처음 받아들인 자들이 그 후 사람들보다 더 후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간에 첫 사랑이 식으면 얼마 안 있어 흐지부지되고 말 듯이 말이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가난하고 궁핍했을 때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부유했던 것 같다. 

무한한 지혜자는 이쪽 사람들에게 없는 걸 저쪽 사람들은 갖게 하여 서로가 의존하며 지내게끔 질서를 세우셨다. 

"기쁘게" 이것은 그들이 강요를 받아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즐거이 선한 일을 행하는 데 기쁨을 아는 자들이라는 얘기다. 

하나님은 기뻐 바치는 자를 사랑하신다.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이 때 동정금의 원뜻은 성도들의 교제와 우정표시로서의 "연락"(코이노니안 티나, 15:26)이란 뜻이 있다. 

이것은 마치 우리 몸의 지체들이 서로를 위해 돕고 보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들 간에 오고가는 모든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연대성의 입증과 예라야 한다. 

한 때는 예루살렘 성도들이 구제의 손길을 뻗치면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아래 바치고 그리스화한 유대 과부들에게 날마다 접대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하던 때도 있었다(행 6:1 이하).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 천칭(天秤)의 접시를 뒤바꿔 놓으시고 반대로 이 돌을 궁핍하게 하셨기에 그리스 유대인들이 이제는 그들에게 친절하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자는 자비를 얻을 것이라는 말씀은 진리다. 

우리는 우리의 가진 소유를 나눠 가질 줄 알아야 한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3) 그 이유(27절).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구제를 가리켜 의라고 말하고 있는 데도 있다(시 112:9). 우리는 우리 재물의 청지기에 불과하기에 주민께서 처분하라고 부르실 때는 거기에 써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이방인들은 특별히 유대인들의 신세를 지고 있기에 그들에게 친절해야만 한다. 

육신으로는 이스라엘의 둥치에서 그리스도가 나셔서 이방인들을 환하게 비추게 되었으며 똑같은 둥치에서 선지자들, 사도들 가리고 복음의 첫 전파자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신탁을 위임받았다는 의미에서 유대인들은 도서관 책임자다.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왔으며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왔다." 

그들의 정치적 교회국가가 해체된 것은 이방인들을 불러들이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해서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의 영적 축복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구원의 복음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다. 여기 ‘레이투르게사이’(15:27)의 원뜻은 "거룩한 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사랑과 구제의 일에 있어서 양심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이것을 기뻐 받으시는 것이다. 

바울이 이걸 언급하는 이유는 이들에게 설득시키려는 의미에서다. 마찬가지로 다른 이방 교회에도 똑같은 의미를 갖는다.

2. 이 일에 있어서의 바울의 임무. 

본인 자신으로서의 무일푼이었다. 은이나 금이 없이 친구들이 친절에 의지해 살고 있던 그다. 

그러나 그는 남들을 자극하고 그들이 모은 걸 수집하고 전달함으로 "성도들을 섬겼다"(25절). 

많은 종류의 선행이 그걸 주도하고 발동을 거는 적극적인 사람의 부족으로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는 수가 많다. 

바울의 이번 이런 일은 그의 전도 사업을 소홀히 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식탁일을 보기 위해 하나님 말씀을 그만 두는 바울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제금 전달하는 이외에도 그는 그곳 교회를 방문하여 그들의 신앙을 확고하게 해 주는 임무를 안고 가기 때문이다. 

이번 일은 그에게 맡겨진 임무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그는 그 일에도 성실하다는 말을 듣고자 한 것이다(갈 2: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바울은 마치 우리 주님이 그러하셨듯이 모든 면에 있어서 선을 행하려고 힘쓴 사람이니 사람들이 영혼뿐 아니라 몸도 마찬가지였다. 

성도들은 섬기는 일은 사역자들이 해야 할 선한 일이지 그들의 체면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사도는 다른 일을 하기 전에 이 일을 착수한 것이다(28절).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인친) 후에." 

그는 구제금을 가리켜 열매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의의 한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는 자의 마음 바닥에서 우러나와서 받는 자들의 혜택과 위로를 가져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인침은 그의 세심성을 뜻한다. 

공공으로 구제한 것은 고스란히, 착복하지 말고, 내는 자들의 소원에 따라 쓰여져야 마땅하다. 

바울은 이 문제 처리에 있어서도 성실하게 나오고 있다. 사역자들 역시 본받을 만한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어떤 면에 있어서나 책잡히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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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교회의 기도 부탁(롬 15:30-33)

Ⅰ. 로마 교우들에게 자기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간절히 부탁하고 있다(30-32절).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지만 그는 미약하기 짝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여러 서신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그들을 위해서 많이 기도했다. 따라서 그는 그들이 이 친절을 되돌려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서로 주고 받는 기도야말로 사랑을 주고 받는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의인들의 열렬한 기도가 효과가 있다는 걸 입증해 보여 주기 위해서 그는 이런 부탁을 하고 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걸 잊어서는 안 되겠다.

1. 왜 그들이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그는 아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와 직접 안면이 있어 밀접한 것도 아니기에 그를 잊어버리지나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이 나의 주인이요 나는 그의 일을 하려는 참이다. 이 일의 성패에 그의 영광이 달렸으므로 너희가 그분을 생각한다면 날 위해 기도해다오. 너희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를 소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분을 봐서라도 날 위해 기도해다오."

(2)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믿는 자들의 마음에서 일하고 있는 사랑을 증거하는 뜻에서 날 위해 기도해다오. 우리가 서로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성령에 의해서 서로 나누는 교제를 위해서라도 나를 위해 기도해다오. 네가 성령의 사랑을 체험했고 그 사랑을 성령에게 되갚으려 한다면 이 친절을 베푸는 일에 인색하지 말아라."

2. 그들이 어떻게 그를 위해 기도할 것인가. "너희가 힘을 같이 하여"

(1) 너희가 기도에 힘을 같이 하라. 

우리는 온 정성을 다해 정기적으로, 믿음으로, 그리고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야곱처럼 하나님을 상대로 겨뤄야 하며 엘라야처럼 기도하는 가운데 기도해야 하며(약 5:17) 하나님을 붙잡도록 열심을 내야 한다(사 64:7). 

곧 우리 자신을 위해서 뿐 아니라 친구들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형제들에 대한 사랑은 그들의 필요 사항을 우리의 것으로 여기게끔 되어야 한다.

(2) 너희가 나와 함께 힘쓰라. 

그들에게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했을 때 자기는 기도하지 않고 가만히 있겠다는 식이 아니다. 

"나와 힘을 같이 하자. 날마다 나는 나의 일과 친구들의 일로 하나님과 씨름하고 있으니 나와 함께 힘을 같이하자." 

그들도 똑같이 노를 열심히 저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바울과 이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기도에 있어서는 하나가 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이 그의 은혜의 보좌 아래서는 같이 모일 수 있는 것이다.

3. 그들이 그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제목. 

그는 세부적인 사항을 제시한다. 우리는 자신들과 친구들을 위해 기도할 때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황금홀을 펴시며 물으신다. 

"내가 너에게 뭘 해 주기를 바라느냐"고. 그는 우리의 상태와 요구사항을 철저하게 알고 계시지만 우리에게서 들어서 알고자 하시는 것이다. 

사도는 여기서 세 가지 일에 관련시켜 말하고 있다.

(1) 그가 당하는 위험.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당시 바울의 가장 혹독한 원수는 불신 유대인들이었다. 이번 여행에 있어서 그들의 방해공작이 예상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그가 여기서 빠져 나올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야했다. 우리는 박해를 받지 않도록 기도할 수 있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 

이런 기도는 바울을 여러 번 구출하는 형태로 응답되어졌다(행 21, 22, 23 , 24장)

(2) 그의 섬기는 일,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이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위험이 있었는가? 가난한 자에게 돈이 싫을 수도 있는가? 그러했다. 이걸 걱정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기 때문에 불신 유대인들은 그를 멸시했다. 이것은 그들의 잘못이다. 

그래서 믿는 자들도 그를 부끄러워했다. 이것은 이들의 약점이다. 

그는 "받을테면 받고 안 받을테면 그만 두라지"하는 식이 아니라 "이것이 받아들여지도록 기도하자"하는 식이다. 

우리 원수들의 악의를 견제해 주십사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게 당연하듯이 우리 형제들의 선의가 지탱되고 증대하기를 기도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나님은 이쪽 저쪽 사람의 마음을 다 쥐고 계시기 때문이다.

(3) 그들에게로의 여정. 

그를 위한 기도에 열심을 내게 하기 위해서 그는 그들과 관계된 얘기를 꺼내고 있다. 

"내가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32절). 

지금의 예루살렘 여행 계획이 성공하지 못하면 로마 계획도 불안하게 되는 판이었다. 

첫째 방문에서 일이 제대로 안 될 경우 다음 방문에서도 기쁨이 적을 것을 내다 보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다오 하는 얘기가 나온 것이다. 

우리의 모든 기쁨은 하나님의 뜻에 달렸다. 피조물의 위로는 모는 면에 있어서 창조주의 처분대로 따를 뿐이다.

Ⅱ. 여기에 그들을 위한 사도의 기도가 또 있다(33절).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만군의 여호와, 전쟁의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이요 평화의 원저자요 애호가시다. 

여기서 이럴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그들 가운에 분쟁이 있기 때문에 평화롭게 지내라는 뜻에서다. 

하나님께서 평화의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는 평화의 사람들이 되도록 하자. 

구약 시대의 축복은 "평화가 너에게 있기를" 하는 식이었지만 이제는 "평화의 하나님이 너에게 함께 하시길"하는 식이다. 

원천(源泉)이 있는 자들에게는 물줄기가 끊칠 날이 없다.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곧 약한 자나 강한 자 모두에게다. 이들 모두를 하나로 묶기 위해서 그는 이들 모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에 있어서 연합된 자들은 서로의 사랑에 있어서 연합되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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