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5.07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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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4장

===세상과 벗하지 말라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5.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서로 비방하지 말라

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허탄한 생각을 경고하다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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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4장 (개요)

 이장은 우리들에게 다음의 것들을 생각하게 해 준다.

Ⅰ. 전 장에서 언급한 내용 이외의 논쟁의 원인들을 경계할 것(1-5).

Ⅱ. 우리는 이 세상과의 친밀한 관계를 포기하고 전적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순종시키고 복종할 것(4-10).

Ⅲ. 남에게 대한 비방이나 성급한 판단을 조심스럽게 피하여야 한다(11,12).

Ⅳ.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섭리를 항상 마음에 두고 최고의 복종을 나타내도록 해야 한다(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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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과 분쟁의 원인(약 4:1-10)

3장에서 서로 간의 다툼과 논쟁의 원천이 되는 시기심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4장에서는 세상적인 것을 바라는 욕망과 또 세상적인 연락과 교제에 지나친 가치를 두어 마침내 부끄러운 지경에 이르는 것에 대하여 설명한다.

Ⅰ. 야고보는 유대인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의 서로 다투는 것과 그 다툼의 원인이 되고 있는 세상적인 욕망에 대하여 꾸짖고 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1절).  유대인들은 대단히 선동적인 백성이어서 로마인들과 자주 다투었고 반면에 대단히 논쟁을 좋아하고 또 파당적이어서 자기네들 사이에서도 때때로 싸움이 일어나곤 했다.  야고보가 이 서신에서 그 잘못과 악덕을 꾸짖고 있는 부패한 그리스도인들 중에 대부분이 말다툼을 일삼고 있었던 것 같다.  여기서 야고보는 그들의 싸움과 다툼이(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들의 조국을 위한 열심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그들 속에 가득찬 정욕으로부터 기인한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겉으로 하나님께 대한 열심과 경건함이 있는 척하면서 그 속에 숨기고 가리운 것들을 인간의 교만과 악덕과 탐심과 야욕과 복수심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유대 민족은 그들이 완전히 멸망되기 전까지 로마의 권력과 많은 투쟁을 벌려왔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까지 불필요한 분규를 자주 일으켰고, 그들의 공통의 적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에 대해 서로 다른 방법을 주장함으로써 분파와 파당을 짓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하여 그들이 논쟁을 일으킨 문제가 선한 목적을 위한 것이었을 때에도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좋지 못한 원칙으로부터 나온 것이 되고 말았다.

1. 그들의 세속적인 육적인 욕망이 그들 속에 싸움과 다툼을 일으켰고, 또 그것을 주도해 나갔다.  그러나 여기서 이 욕망들이 정복되어야 할 것을 충분히 나타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세상적인 욕망이 내적으로는 싸움을 일으키고, 외적으로는 다툼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격렬한 정열과 욕구는 먼저 그 지체 내에서 싸움을 일으키고, 그 다음엔 상호간에 불화를 조성한다.  양심과 부패함 사이에 다툼이 있고 부패함 상호간에 싸움이 있으며, 그들 자신 안에서 일어난 이 논쟁에서부터 그들 상호간에 다툼이 일어난다.  이것을 개인의 경우에 적용해 볼 때, 우리의 친척들과 또 이웃간의 싸움과 다툼이 우리의 내부에서 싸우고 있는 욕망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권력과 지배에 대한 욕망과 쾌락과 부에 대한 욕망들 중에서 하나 혹은 그 이상이 연합되어 이 세상의 모든 다툼과 논쟁을 일으킨다.  이처럼 모든 싸움과 다툼이 우리 마음의 부패에서부터 시작되므로 그러한 다툼을 고치는 올바른 방법은 뿌리에 도끼를 가져다 놓고 있다가 우리속에 다툼이 일어날 때 그 욕망을 억제시키는 것이다.

2. 이러한 욕망들은 이제 그들이 맛보게 될 실망을 깨닫고 없어져야 한다.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2절) 너희는 너희 자신을 위하여 큰 것을 욕심내고, 또 그것을 로마인을 이기거나, 너희 중의 상대방을 억압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너희는 또 너희의 열렬한 소망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를 타도해 버림으로써 너희 자신의 만족할 만한 행복과 쾌락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엾게도 너희가 이런 세속적인 욕망에 대한 견해에 사로잡혀 서로 상대방을 죽이는 행위를 하고 있는 동안 너희는 모든 노력을 소모하고 있으며, "너희 자신이 충혈당하고 있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욕심은 결국 실망으로 끝나게 되며, 설사 그 바라는 것을 얻었다 할지라도 마음이 가라앉거나 만족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기록된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란 말은 우리가 구하는 행복은 결코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여기서, 세속적이고 육적인 욕망들은 우리의 마음에 만족을 허락지 않는 병적인 요소임을 주시해야 한다.

3. 죄된 욕망과 성향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열심의 발생과 기도를 배척한다.  즉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 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2절).  너희가 싸우나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희 구하는 바를 허락하실 것인지를 너희가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의논하지 않고 또한 너희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며 너희의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알려드리지 않고 다만 너희 자신의 부패한 견해와 성향을 따라서 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계속적인 실망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4. 그밖에도 너희의 욕망은 너희의 기도를 해치고 또 너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그 기도를 하나님 보시기에 역겨운 것이 되게 한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3절).  이 말씀은 나타내 주는 바와 같이 "아마 때때로 너희가 대적자를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할지도 모르나, 그것은 너희가 얻은 유익을 더욱 계발시켜 너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믿음과 경건을 더 촉진시키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다만 그 승리와 기도를 통하여 교만과 공허함과 사치와 그리고 정욕만을 나타낼 뿐이다.  너희는 권세와 풍요함과 관능과 정욕적인 번영 속에 살지를 원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처럼 야비하고 천한 목적으로 살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처럼 야비하고 천한 목적으로 인하여 너희의 기도를 부끄럽게 만들고 하나님께 불명예를 끼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너희 기도가 이루어질 리가 없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세상적인 일을 다루고 있는 방법과 그 일의 성취를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게 우리의 목표가 올바른 가를 보는 법을 배우자.  인간이 세상적인 일에 종사하여 살 때에(그들이 무역가나 농부라고 가정을 해보자) 하나님께 그 일이 번영하기를 기도하나, 그 기도의 응답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잘못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구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자기들의 직업과 맡은 일은 수행하는데 성공을 얻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들의 가진 것으로 선을 행하려고 함이 아니고, 그들의 정욕을 위하여 사용하기 위하여, 즉 좀더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으며, 좀더 좋은 옷을 입을 수가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결국 그들의 교만과 공허한 마음과 정욕만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인 것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의 것을 얻기를 원한다면, 하나님 안에서는 그런 모든 것을 부인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하여 무엇을 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하는 그것을 주시든지, 아니면 그것 없이도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며, 또한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것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우리 모두가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우리의 기도가 성취되지 못하는 것은 잘못 구하기 때문인 것으로써, 우리가 올바른 목적과 올바른 방법으로 구하지 않았거나 또는 믿음과 열성으로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신앙과 열의가 없이 냉냉한 기도는 거절되기를 바라는 기도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기도가 은혜 가운데서 나온 말이 아니고 우리의 욕망으로부터 나온 말일 때 그 기도는 응답이 없는 공허한 것이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Ⅱ. 우리는 이 세상과 더불어 모든 죄악된 교제를 피하라는 훌륭한 경고의 말씀을 여기서 읽을 수 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4절)  세상과 벗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여기서 간음하는 여자들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들에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불신하기 때문이다.  탐욕은 보통 우상 숭배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간음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우리가 헌신하여 결혼한 그 분을 저버리고 다른 것과 결합하는 것이다.  세상에 마음을 둔 사람에게는 이러한 낙인이 찍혀 잇고,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적의를 나타낸다.  사람은 이 생에서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세상에 두고 자기 행복을 거기서 찾으려 하는 사람은, 또 자기 자신과 세상이 한 덩어리가 되어 세상과 우호관계를 끊기 위한 아무 일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적이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왕좌 위에 세상을 올려놓은 것은 하나님께 대한 구조적인 반역과 배반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라"(4절).  누구든지 이러한 원리 위에서 행동하며 세상이 주는 만족으로 미소 지으며 세상과 계속하여 벗하여 사귀는 자는 그의 영혼과 행동으로 오직 그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됨을 나타낼 뿐이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그러므로 불의하고 우상 숭배적 사랑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섬기는데부터 싸움과 다툼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하여 적의를 품고 있는 자에게 평화가 깃들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우고도 번영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의 영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깊이 생각해 보라.  그러면 너희는 자신을 세상과 벗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의 영은 이 세상이 그렇듯이 너를 질투케 하고 악한 생각으로 가득차게 한다.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인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5절).  인간 본래의 마음에 대하여 성경이 가르쳐 주기를 인간의 마음에 계획하는 모든 생각은 항상 악할 뿐이라고 하였다(창 6:5).  본래적으로 부패함은 시기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경향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다.  본래부터 인간에게 있는 영은 항상 악한 생각을 하나씩 둘씩 만들어 나가고, 그 생각과 대화하게 하며 우리로 하여금 소유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게 만든다.  화려함과 쾌락을 사랑하며 그러한 것을 얻기 위하여 싸우고 다투게 되는 것은 세상과 더불어 짝한 결과로부터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이 일치됨이 없이 진정한 우정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다툼을 피하기 위해 그들이 좀더 고결한 원리에 의하여 행동하고 있는 것과 좀더 고결한 영이 그들 속에 거하고 계심을 보여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에 있는 것들이 사는 방법과 행동대로 우리가 살고 행동하는 그 이상의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세상의 영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색한 사람이 되게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관대한 사람으로 만든다.  세상의 영은 우리들에게 우리 자신과 그 환상을 성취하기 위하여 재물을 축적하고 계획을 세우게 만들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의 필요와 안락에 관심 갖게 해 주며 우리의 능력에 따라 우리 모두 선을 위하여 행동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의 영과 반대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친구가 되기를 소망한다면, 선을 행하여야 한다.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는 본래부터 우리 안에 거하는 영혼을 바르게 하고 치료하며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시는 곳에, 이 세상의 영과는 전혀 다른 새 영을 또한 주신다.

Ⅲ.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교만과 겸손의 차이를 구별하시는 것에 대하여 배운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6절).  이 말씀은 구약의 말씀인데, 시편에는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을 낮추시리이다"(시 18:27)라고 하였고 또한 잠언에는,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면서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잠 3:34)라고 하였다.  여기서 두 가지의 것을 관찰해 보자.

1. 교만은 치욕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물리치신다.  ‘안티탓세타이’(498)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교만을 대적하여 치신다는 것이다.  한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배신자요 원소요, 그리고 그의 면류관에 위엄에 대한 반역자로서 알려지는 것보다 더 큰 불명예는 없을 것이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께 대항하는데, 그의 지식에 하나님의 진리에 대적하며 그의 의지로써 하나님의 법도에 대적하며, 또한 그의 열정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거만한 자를 대적하시는 것은 하나도 놀라운 일이 못된다.  교만한 영혼들이여! "하나님께 그대들을 대적하리라"는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원수로 삼은 사람들의 비참한 상태를 누가 설명할 수 있을까?  그들의 마음이 교만으로 가득찬 것처럼 그 얼굴이(조만간에)수치로 가득차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시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 마음에서 교만을 멀리하여야 한다.

2.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들에게 영광과 도움을 주신다.  은혜는 불명예에 반대되는 것으로써 영광스러운 것이며,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주신다.  또한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곳에는 다른 모든 은혜들도 함께 주실 터인데, 6절의 시초에 기록된 대로 "더욱 큰 은혜를"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참 은혜를 주실 때에는 언제나 풍성하게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가진 것을 옳게 사용하기 때문에 더 많이 받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더욱 큰 은혜를 주시는데, 이는 겸손한 자들은 은혜가 필요함을 알고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며, 또 얻은 후에는 감사할 줄 알기 때문이다.  겸손한 자는 분명히 많은 은혜를 받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Ⅳ.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전적으로 순종하여야 할 것을 여기서 배운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7절).  그리스도인은 세상과의 교제를 끊고, 본래적인 인간의 마음속에 만연하고 있는 교만과 시기를 경계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가운데 영광을 돌리는 법을 은혜로써 배워야 한다.  "너희는 너희를 다스리는 자에게 의무감으로 순종하듯 하나님께 순종하여 너희의 벗에게 사랑과 이해로 대하듯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또 너희의 지식을 하나님의 진리에 복종시키며, 너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즉 하나님의 계율과 섭리의 뜻에 복종시켜라."  우리는 종이므로 순종해야만 하되 두려움으로 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순종해야만 한다.  그것은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양심의 요구에 따라서 행하는 순종이어야 한다.  "너희가 얼마나 많은 순종의 의무를 지고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복종하여라.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다스림으로 해서 너희에게 해를 주시지 아니하고 오히려 유익을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하여 사탄은 열심히 싸움을 걸어오므로 우리는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하여 꾸준히 경계하고 투쟁하여야 한다.  만일 사탄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대한 유순한 복종이 재난을 가져올 것이라고 하며, 멸시와 불행을 당할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사탄의 공포의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만일 사탄이 하나님께 대한 복종이 우리의 쉬운 생활과 세상에서의 승진에 방해가 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이 교만과 게으름의 유혹에 대항하여야 한다.  만일 사탄이 우리의 불행과 고통과 환난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의 섭리에 있다고 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사탄의 지시를 따라 이것들을 기피하도록 유혹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분노케 만드는 이 같은 도전에 대항하여 맞서야 한다.  악을 행케 하는 지혜를 따라 우리 자신이 좀먹어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와 같은 일들을 통하여 마귀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다만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7절).  만일 우리가 비열하게도 유혹에 굴복하면, 마귀는 계속해서 우리의 뒤를 좇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는 우리들로부터 도망가 버릴 것이다.  결심은 유혹으로부터 문을 닫고 빗장을 단단히 걸게 해 준다.

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 복종적인 자세를 가지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배우게 된다(8-10절).

1.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8절).  배신한 마음은 하나님의 발 아래 가져와져야 하고, 하나님과 대화라고 교제하는 생활로부터 멀리 떨어진 영혼은 하나님과 사귐을 갖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요구하시는 일상 예배와 규율과 모든 의무안에서 하나님과 가까이하라."

2. "손을 깨끗이 하라"(8절).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오는 자는 반드시 손을 정결케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고 하면서 우리의 손을 피와 뇌물과, 모든 불의하고 잔인한 일과 죄의 더러움으로부터 깨끗이 지킬 것을 권고한다.  죄의 종이 된 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  믿음과 회개와 거듭남으로 손을 정결케 해야지,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도와 헌신으로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모든 노력이 다 헛되고 말 것이다.

3. 두 가지 생각을 지닌 마음은 반드시 정결케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세상사이에 멈추어서 있는 사람은 본문에서 두 마음을 품은 자라고 표현되었다.  마음을 정결케 하는 것은 신실하며 하나의 목적과 하나의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며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추구하기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위선은 마음이 부정한 것이므로, 하나님께 올바르게 순종하고자 하는 자는 손을 깨끗이 함과 같이 마음을 정결케 하여야 한다.

4.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9절).  하나님께서 무슨 환난을 주시든지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시기를 원하는 것으로 알고 그을 때 그것을 멸시하지 말고 오직 슬퍼하라.  또 환난당한 자들을 동정하고 함께 슬퍼하며, 하나님의 교회가 당하는 재난을 슬퍼하라.  너희 자신의 죄와 타인들의 죄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라.  다투고 분열할 때가 애통하여야 할 때이고 또한 다툼을 일으키는 죄를 위하여 슬퍼해야 한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이 말씀은 우리가 당면하게 될 슬픔의 예언이거나 또는 그 심각성에 대한 경고일 것이다.  인간들을 슬픔을 싫어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슬픔을 가져다 주실 것이다.  진정으로 웃을 자가 없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야고보가 대상으로 하고 있는 무관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경고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일이 최악의 상태에 이르기 전에 미리 주의를 받았으므로, 공허한 환락과 육적인 쾌락을 버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슬퍼하고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이다.

5. "주 앞에서 낮추라"(10절).  "영혼의 내면적 활동이 이미 지적된 바와 같이 슬픔, 환난 등 외부적으로 표현된 것에 적합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라."  여기서 요구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영혼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바라시는 바 영혼의 겸손이다.  "겸손한 마음으로 악한 행위를 저지른 것을 슬퍼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선을 행하라.  이것이 자신을 낮추라는 말의 의미이다."

Ⅵ. 야고보는 여기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갈 것을 권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8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10절).  의무감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비하심으로 그들을 가까이 이끌어 주실 것이다.  믿음과 신실과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의 구원을 위하여 너희에게 가까이 오실 것이다.  만일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에 밀접한 교제가 없다면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높이실 것이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불쾌하실 것을 알고 참으로 회개하고 겸손해진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주는 유익을 곧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 중에서 들어올리시며, 고통당하는 우리 영혼을 지켜 주시고 위로하여 주실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안전하고 영광스럽게 하시며 우리의 길을 하늘나라로 향하게 하셔서, 우리의 마음과 애착을 이 세상보다 더 높은 곳에 두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케 하며(사 57:15),  가난한 자의 소원을 들으시고(시 10:17), 마침내는 그들을 영광으로 들어올리실 것이다.  영광에 앞서 있어야 할 것은 겸손이다.  이 땅에서 가장 겸손함에 대한 보상은 하늘나라에 있는 최고의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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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방과 오만에 대한 경고(약 4:11-17)

본문에서

Ⅰ. 우리는 악한 말을 하는데 죄에 대한 경고를 듣는다.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11절).  ‘카탈랄레이테’ ─ 즉 남을 해치고 상하게 하는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잘못을 하였을지라도 우리가 그 일에 대한 증인으로 불림을 받지 않았으면 그들을 비방해서는 안 된다.  그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이 필요한 때가 종종 오는 법이다.  타인의 잘못이 분명하든지 분명치 않던지 간에 그 잘못을 드러내는 일에 신중해야 한다.  우리의 입술은 진리와 정의의 법을 따를 뿐만 아니라 친절의 법도 따라야 한다.  솔로몬은 덕있는 여인에게 필요한 것에 대하여 "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 그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하며"(잠 31:26)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는 말씀은,

1. 너희가 서로 형제이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여기서 형제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다음과 같이 논리를 성립시킨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형제가 되기 때문에 서로를 더럽히고 명예를 훼손시키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서로 형제라는 말로써 사랑스러운 관계가 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좋은 말을 할 수 없을 때에는 전혀 말하지 않는 것이 악한 말을 하는 것보다 더 낫다.  우리는 남의 비밀을 폭로하여 그 잘못을 세상에 알리는 일을 즐겨해서는 안 된다.  또한 실제의 잘못보다 더 과장하여 말한다든지 심지어 무죄한 사람에 대해서가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이런 행위는 우리와 똑같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 안에서 미움과 박해를 당케 할뿐이며, 결국 우리 자신도 그들과 같은 처지에서 흥하거나 망해야 한다.  "너희가 서로 형제임을 명심하라."

2. 이러한 행위는 율법을 판단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그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11절).  모세의 율법에 보면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고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레 19:16)고 하였다.  또 그리스도의 법을 보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고 기록되어 있다.  위의 두 구절의 본 뜻은 인간의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상하게 하는 혀가 이웃을 비방할 때에, 그것은 곧 하나님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계명을 정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파괴하는 행위는 사실상 그것이 너무 엄격하며 우리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짊어져 준 것처럼 나쁘게 말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여기서 야고보가 대상으로 삼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서로간에 자주 의견의 대립을 보였는데, 그 이유는 아무래도 좋은 일들(롬 14장에서 볼 수 있는 고기 먹는 문제 등과 같은)에 대한 견해의 차이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 야고보 사도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율법이 아무래도 좋도록 허락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자기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기의 형제를 욕하고 비난하는 자는 율법이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율법을 욕하고 비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지정해 놓지 않은 것을 자기 맘대로 주장하여 형제와 다투고 비난하는 사람은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한 법칙이 아닌 것처럼 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귀중함을 손상시키고 잇는 것이다.  율법을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왜냐하면 주의 율법은 완전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율법을 파괴한다면 그 율법으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만일 그가 율법을 파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판단하지 말자."  율법을 파괴하는 일은 흉악한 죄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율법을 따라 행하여야 하는 우리의 처지를 망각시키고, 마치 우리가 율법의 심판자인 것처럼 율법 위에 군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여기에 경계된 죄를 범하는 사람은 율법에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고 율법을 판단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 소관이 아닌 일과 직책에 관여하며, 마침내 그 외람됨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할 것이 분명하다.  율법을 판단하는 일에 가장 앞선 자는, 일반적으로 그 율법을 순종함에 가장 실패한 자이다.

3. 율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은 인간을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분이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12절).  왕들과 나라들로 법을 제정하고 또 그 법을 복종함에서 제외되기는 하지만, 그 중에서도 하나님은 최고의 법을 복종함에서 제외되기는 하지만, 그 중에서도 하나님은 최고의 입법자로서 양심의 법을 주시는 분이시며 절대적으로 복종을 받으실 오직 한 분이시다.  법을 제정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권리는 논의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법을 시행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지만" 그 외의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율법을 준수하는 자에게는 보상을 주시며, 율법을 거역하는 자에게는 벌을 내리실 수 있는 충분한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구원하시고, 또 그 영혼을 영원히 복되게 하실 수도 있으며, 반면에 영혼을 죽이신 후 지옥에 던져 넣으실 수도 있는 분이다.  그러므로 가장 위대하신 입법자로서 그를 두려워하고 순종해야 하며, 모든 심판은 그분에게만 위탁되어져야 한다.  오직 한 분이신 입법자가 계신고로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다스리는 법을 어느 한 인간이나 인간 집단이 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침해될 수 없는 하나님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야고보 사도는 앞에서 많이 선생되려고 하는 것을 경고했듯이 여기서는 많이 심판자가 되려고 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우리는 형제를 지시하거나 또는 욕하지 말아야 하겠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 모두를 다스릴 수 있는 법이므로 그 자체로써 충분하며, 더 이상의 법을 제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사상이나 견해를 가지고 자기 주위를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입법자는 오직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Ⅱ.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의 생명이 계속 되리라는 외람된 확신과 또 매사에 성공하리라는 자신에 대한 경고를 듣는다(13,14절).  야고보는 율법을 판단하고 비방하는 자들을 책망하면서 이제는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는 자들을 책망한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며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13절).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말과 행실을 신중히 검토해 보면 실수로 인하여 많은 악을 계속해서 저지르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야고보 당시에도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하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를 부인하는 태도였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들을 관찰할 수 있다.

1. 세속적이고 자기 머리를 신뢰하는 인간들이 그들이 세운 계획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얼마나 쉬운가!  누구든지 세상적인 것에 집착하게 되면, 그것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 일에 깊숙이 빠져들도록 만드는 이상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어떤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거센 의도와 열심을 주의하여 견제하여야 한다.

2. 인간들이 자기 마음속에 이전부터 마음먹고 계속하여 오는 일에는 세속적인 큰 행복이 들어 있다.  그들의 머릿속은 장차 무엇을 할 것인가, 또 무엇이 될 것인가, 그리고 이제 곧 즐기게 될 것에 대한 아름다운 환상으로 가득차 있으나, 그들은 그것이 언제 이루어질 것이며, 그것이 그들 자신에게 무슨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확실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3. 하나님의 섭리하심과 관계없이 미래에 대하여 화려한 기대를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 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그들이 말하기를)라는 말은 그 당시에 커다란 교통의 요지였던 안디옥이나 다메섹 그 도시를 중의 하나에 꼭 도착하게 되리라는 확실한 보장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중도에 무슨 일이 생겨서 못가게 되거나 아니면 다른 곳으로 이끌려 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 실날같은 생명을 잃기도 했었을 것이다.  실제로 여행을 떠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고, 자기들이 목적한 도시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곳에 갈 수 있었다고 가정해 볼 때, 그들이 거기에서 무엇을 하여 머무를 수가 있었겠는가!  무슨 일이 생겨서 그대로 다시 되돌아가거나 그곳에서 호출을 당하고 체류 기간이 단축되기도 했을 것이다.  또는 그들이 그 목적한 곳에 충분히 머무를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곳에서의 장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아마도 그 도시에서 앓아 누울지도 모르며, 장사하려고 기대하고 있었던 사람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 도시에 갈 수 있었고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했다 할지라도 이익이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이익을 남긴다는 것은 기껏 노력해 봤자 불확실한 것이며 오히려 이익되기 보다는 손해보는 장사이기가 쉽다.  그러므로 이생의 모든 특성과 덧없음과 불확실성을 감안하여 미래의 생에 대하여 헛되고 외람된 확신으로 계획하는 일들을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모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14절).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우신고로 인간들로 하여금 미래에 관하여 예측하지 못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인간이 살 동안의 일조차도 미리 알 수 없도록 하셨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려고 하며 또 장차 되고자 하는 계획들을 가지고 있으나 수없이 많은 일들이 생겨나서 우리의 계획을 방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 자체가 마치 잠시 보이기는 하나, 손으로 잡을 수 없고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도 없으며, 또 곧 사라지고 마는 안개와 같으므로 삶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내일 해가 뜨고 지는 시각을 알 수는 있으나 언제 안개가 흩어져 버릴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인생은 마치 이 안개의 흩어짐과 같은 것이다.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인생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또 다른 세상에서 계속 될 삶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이 너무나 불확실한 것이므로, 우리는 장차 올 세상을 위하여 준비하고 모든 것을 저장해 두는데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Ⅲ.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우리가 의존되어 있음을 항상 명심하여 우리의 모든 행동과 기쁨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주의해야 할 것을 배운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도 하리라 할것이거늘…"(15절).  이제까지 잘못을 범한 자들을 책망하던 야고보는 이제 그들이 장차 되어야 할 모습과 좀 더 나은 행실을 행하여야 할 것을 가르쳐 준다.  "너희는 항상 마음 가운데 생각하며 특히 너희의 정해진 기도 시간과 헌신의 시간에 입으로 고백하기를 만일 주께서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고 우리의 소유하시며 축복하여 주신다면, 우리가 장수하고 주의 축복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고백은 경솔하거나 습관적인 표현으로가 아니고, 깊이 생각하는 중에 고백하는 것이어야 하고, 그 고백 속에 경건됨과 신중함이 깃들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이렇게 신중하고 경건되게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백이 우리 자신을 향해서 말해져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다.  희랍인들은 모든 일을 시작할때에 ‘쉰 데오’ - 즉 하나님의 허락하심과 축복이 함께 하시길! 라고 말했다 한다.

1.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15절), 우리가 우리의 수명이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하심에 달려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만큼 살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환경속에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께 순종해야만 한다.  그리고,

2. "주의 뜻이면 이것 저것을 주관하에 달려 있다.  우리의 머리 속은 여러 가지 염려와 계략으로 가득차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가족들과 친구들을 위하여 이것 저것을 하려고 계획을 세울지라도 때때로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방안들을 가로막아 버리고 모든 계획들을 혼란 가운데 던져 버린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동방안과 행동에 대한 모든 주관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위탁되어져야 한다.  우리의 모든 계획과 행동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의존되어야 할 것이다.

Ⅳ. 우리는 여기서 헛된 자만심을 피하고, 그것을 과소평가할것이 아니라 매우 악한 것으로 경계해야 할 것을 배운다.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16절).  이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올바로 주시하지 않은채, 이 세상에서 장수하며 많은 재물과 번영을 얻게 될 것을 스스로 자부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일들을 실제 이루어진 일들처럼 자랑한다.  이런 기쁨은 세상 사람들의 기쁨으로써 그들은 그들의 성공을 자랑하나, 때로는 장차 성공하게 될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단지 계획만으로도 자랑하곤 한다.  사람들이 그들의 허영과 외람됨에서부터 연유된 것들만으로 자랑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사도는 말하기를)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실로 어리석은 것일뿐더러 해로운 것이다.  인간들이 그들 앞에 제시된 겸손한 의무에 충실하지 않고(8-10절),  오히려 세상적인 것들과 그들이 열망하고 있는 계획만을 자랑하게 될 때에 이는 악한 일이다.  이와 같은 허탄한 자랑은 하나님편에서 볼 때 대단히 큰 죄이며, 인간 자신들에게도 커다란 실망을 가져다 줄 것이고, 결국에 가서는 파멸을 초래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고, 또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달려 있음을 알며 이 하나님이 우리와 계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고 기뻐할 때, 이 기쁨은 선한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섭리는 모든 일이 우리의 유익을 이루도록 함께 역사하지만, 그러나 만약 우리가 우리의 허망한 확신과 외람된 자만으로 즐거워한다면, 그것은 악한 일이다.  모든 현명하고 선한 사람들은 이러한 악을 주의 깊게 경계하여야 한다.

Ⅴ. 우리는 여기서, 모든 행동에 있어서 우리의 확신을 따라서 행동할 것과 또 하나님을 대할 때나 인간을 대할 때나 항상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에 모순된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하여 배운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17절).  알고도 행하지 않은 것은 더욱 악한 죄이며, 그 죄는 증언할 증인을 가진 죄이다.  인간이 자기의 양심을 거스리는 죄를 범할 때,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리한 증인을 가지는 죄에 해당된다.  다음을 명심하라.

1. 이 구절은 바로 전 절에 분명히 나타난 "만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이것 저것을 하리라"란 말씀과 직접 연결되어져 있다.  그들은 곧이어 말하기를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이야 분명한 일이 아닌가! 그리고 또, 우리들 모두의 생명과 호흡과 가진 모든 것이 전능하신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았을 때 이것은 더욱 더 큰 죄가 된다는 사실이다.

2. 태만함과 범죄 행위와 마찬가지로 심판에 이르는 죄가 된다.  행하여야 할 것을 알면서도 선을 행하지 않은 자와 행해서는 안 될 것을 알면서도 악을 행한자는 둘 다 마찬가지로 정죄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양심이 바로 알아야 할 것을 알게 하고, 또 그 지식에 따라 충실하고 끈기있게 복종해 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의 양심이 우리 자신을 정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본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보는 바대로 행하지 않을 때, 우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요 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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