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5.07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딛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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딛1장

===인사

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3.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4.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그레데에서 해야 할 디도의 사역

5.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6.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8.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9.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10.  ○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할례파 가운데 특히 그러하니

11.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도다

12.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13.  이 증언이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14.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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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서(서론)

디도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은 디모데에서와 성격이 상당히 유사하다. 

두 사람 다 마찬가지로 바울에 의하여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었으며 또한 수고와 고난 받음에 바울과 함께한 사람들이었고 또한 그들 둘 다 전도자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직분은 사도들이 세운 교회에 물을 주고 그들에게 부족한 점들을 채워 주는 일이었다. 

그들은 부(副)사도였다(uice-apostle). 말하자면 그들은 사도들이 했던 것처럼 주의 일을 행하는 사람들이였다. 다만 그들은 대게 사도들의 지시를 받아서 행동하였다. 

그러나 사도들의 명령은 전체적이거나 독단적인 것이 아니었고 복음 전도자들의 신중성고 분별력에 처분을 맡기는 식의 권면이었다(고전 16:10, 12). 

우리는 여러 곳에서 디도에 관하여 그의 이름과 특성 또는 활동적인 능력에 대하여 읽을 수 있다. 

디도는 헬라인이였다(갈 2:3). 바울은 디도를 “나의 아들”(딛 1:4), “나의 형제”(고후 2:13). “동역자”, “친구” 또는 “조력자”(고후 8:23), 또는 “자신과 똑같은 심령을 가지고 같은 길을 가는 자”라고 불렀다. 

디도는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에 올라갔었고 또 고린도 교회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교회에 대해 특별히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후 8:16). 

바울이 고린도인에게 보낸 두번째 서신은 디도의 손에 의해 전하여졌다. 그리고 첫번 편지도 그에 의하여 전하여졌던 것으로 보인다(고후 8:16-18, 23; 9:2-4; 12:18). 

디도는 바울과 함께 로마에 있었으나 그 후에 달마디아로 갔다(딤후 4:10). 그가 달마디아로 떠난 후의 행적에 대하여서는 성경에 아무런 기록도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성경에는 디도가 감독으로 한 곳에 상주하였다는 기록도 없다. 만약 당시 디도가 감독의 지위를 가졌다면 그가 가장 수고하였던 고린도 교회가 그에게 최대의 적임지였을 것이다. 

에게해(Aegean Sea)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그레데라는 큰 섬 안에(현재는 갠디아라고 불리며 옛날에는 그 섬에는 100개 정도의 많은 도시들이 있으므로 헥카톰폴리스라고 불렸다) 복음이 이미 전해져 있었다. 

바울과 디도는 그들의 전도 여행 중에 이 곳에 전도하며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은 다른 많은 이방인의 모든 교회를 돌보아야 했으므로 이 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마도 바울은 디도를 이 곳에 남겨놓아 그 곳에서 시작된 복음 사역을 수행케 하였던 것 같으며 또한 디도는 이 곳에서 그 어느 곳에서 보다 어려움을 당하였으므로 바울은 디도에게 이 편지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편지는 바울이 디도 개인을 위하여 쓴 것이라기 보다는 성도들을 위해 쓴 것으로 디도의 노력을 사도의 권고와 권위로 지지함으로 성도들이 디도의 가르침을 보다 소중히 여기고 효과적으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함이었다. 

디도는 각 성에 좋은 장로들을 세우는 일을 하며 합당치 않고 부자격한 거짓 선생들을 거절하고 내어 쫓아야 했으며 올바른 교훈을 가르치고 그들이 해야 할 모든 종류의 의무를 가르쳐야 했으며 그리스도를 통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인간의 구원에 대해 설명해 주어야 했고 동시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대하여 영생의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계속 선한 사업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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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표제

 오늘날 알려진 최고(最古)의 헬라어 사본들에서 이 편지서의 표제는 단순히 “디도에게” 로 되어 있다. 

바울이 처음에 이 글을 썼을 때에는 하나의 개인적인 서간(書簡)으로 썼으므로, 그 편지 자체에는 형식적인 표제가 붙어 있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

 2. 저자

 다른 목회 서신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현대의 비평적인 학자들은 이 편지서의 저자가 바울이라고 하는 편지서 자체의 주장(딛 1:1)을 일반적으로 의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편지서 자체의 주장과 언명을 전혀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3. 역사적 배경

 이 편지서는 당시에 그레데 섬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목회에 종사하고 있던 디도에게 보내진 편지이다. 

이 큰 섬은 지중해안에 있는 것으로서 그 길이가 258㎞요, 너비가 11㎞에서 56㎞나 된다. 그 섬의 총 면적은 8,285㎢이다. 

섬의 북쪽에는 협착하지만 비옥한 해안 평야가 연안 산맥으로 뻗어 있으며, 그 뒤에는 그보다 좀 더 높은 또 하나의 산맥이 놓여 있고, 그 뒤에는 세번째의 산맥이 뻗어 있다. 

이 산들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은 프실로리티(Psiloriti)산으로서 그 높이는 해발 2,458m 이다. 이 산이 바로 고대의 희랍 전설에서 이교의 주신 제우스가 탄생했다고 하는 고대의 이다(Ida) 산이다.

 B.C. 2천년 대에 그레데는 이른바 미노스 문명이라고 일컫는 고대 문명의 중심지였다. 이 문명은 메소포타미아의 문명 및 애굽의 문명과 필적할 만한 것이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거기에 반전설(半傳說)적인 왕이 살았는데 그의 이름이 미노스였다. 그 왕은 너무나 크고도 놀랍도록 복잡한 하나의 미궁을 건축하였다고 전해진다. 바로 이 미궁으로 인하여 저 유명한 테세우스(Theseus)와 미노타우로스(Minotaur)의 전설이 생겨나게 되었다. 미노스 왕은 강력한 함대를 구축하고 광범위한 해상 제국을 건설하였으며, 질서 정연하고 정교한, 그러면서도 관료적인 체제를 보여주는 번문욕례(煩文縟禮-규칙, 예절, 절차등이 지나치게 형식적이어서 번거롭고 까다로움)와도 같은 법률 조직을 입안하여 실시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레데인들은 고도로 발달된 문자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레데가 그것의 문명의 도달했다가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이 바로 B.C. 1400년 경의 미노스 왕 시대였다. 그때 이후로 그레데는 고대의 미노스 시대에 누리던 그 비길 데 없는 위치로 두번 다시 오르지 못하였다. 

한 때 부하고 강하고 고도로 발달되었던 탓으로 그레데는 후기에 와서 아시아의 예술과 학문들이 유럽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마침내 그레데 섬은 헬라인들의 식민지가 되었고, 그리하여 헬라 문화사의 비교적 전성기 얼마 동안에 그 섬은 두드러지게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스도교의 최초기의 여러 해 동안에 그레데인들은 부정직과 무신용으로 널리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딛 1:12). 

이 섬은 B.C. 1세기 동안에 해적들의 본부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이윽고 해적들은 소탕되었고, B.C. 67년에 그 섬은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그 후로도 그레데인들은 외국 군대에서 용병으로 계속 복무하였다.

디도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이 편지서에 기록된 그에 관한 개인적인 언급들은 피상적인 것이고, 사도행전에서는 그의 이름이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 그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갈라디아서 2:1-3에서인데 거기서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 총회에 참석할 때 디도가 안디옥으로부터 그와 동반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곳에서 디도는 이교로부터 개종한 무할례자로서 이방인들의 할례에 관한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하나의 실험 대상이 되었다. 얼마 후에 그는 바울을 대신하여 고린도에 갔고(고후 8:16, 17; 12:17, 18), 거기서 그는 고린도후서 2장과 7장에서 그토록 솔직하게 토의된 어려운 문제들을 성공적으로 취급하였다. 그는 또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한 모금 운동을 시작하였다(고후 8:6-10).

 바울은 그를 신임할 만한 사람이요, 믿음직한 십자가의 군사로 생각하였고(고후 12:18), 그를 형제(고후 2:13), 동무, 동역자(고후 8:23)라고 일컬었다. 

이 편지서에서 그는 디도를 믿음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다(딛 1:4). 신약에서 디도가 마지막으로 언급된 곳에서 그는 달마디아 곧 오늘날의 유고슬라비아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딤후 4:10). 4세기의 교회 역사가(歷史家) 유세비우스는 디도를 그레데 섬의 감독으로 칭하고 있다.

 4. 주제

 바울이 디도를 그레데 섬에 떨어뜨려 두었다는 사실 이외에(딛 1:5) 이 편지가 기록된 정확한 경위와 형편을 다시 알아내기란 불가능하다. 

바울은 세나, 아볼로, 아데마 및 두기고 등과 일단이 되어 여행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딛 3:12-15). 세나와 아볼로는 이제 막 여행을 출발하려고 하는데, 그 여행은 그레데를 경유하는 여행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에게 이 편지를 디도에게 전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디도는 니고볼리에서 바울과 합류하여 겨울을 보내기로 되어 있었다. 

디도에게 보내진 이 편지서는 바울의 제1차 투옥과 제2차 투옥 사이, 즉 B.C. 65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편지의 내용으로 볼 때, 그레데의 여러 곳에 많은 그리스도인 무리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교회 조직은 아직 불완전한 상태에 있었고, 반쯤 개종한 유대인들로 추측되는 거짓 교사들로 인하여 이제 막 문제가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이 거짓 교사들은 신화와 족보와 율법을 매우 크게 강조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모한 논쟁으로써 자기 자신들과 다른 교인들의 많은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있었다. 

디도는 이러한 문제들을 바로잡을 책임이 있었고, 바울은 그에게 권면과 격려를 보낸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최근에 개종한 그레데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참된 그리스도인 믿음과 생활에 굳게 서도록 하는 일에 디도를 도와 줄 권면을 주고자 특별히 유의하고 있다. 

따라서 이 편지는 매우 실제적이다. 바울은 보다 철저하고 형식을 갖춘 교회 조직을 갖도록 권면하고, 교회의 장로들의 자질에 대하여 디도에게 조언한다. 

바울과 디도에게 그레데인들의 악명높은 거짓됨과 게으름을 상기시켜 주고 또한 그곳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에 의하여 방해를 받아온 사실을 일깨워 준다. 

특히 바울은 예식적인 부정(不淨)에 대한 강조는 조만간 양심 자체를 부정하게 만들어 버릴 위험이 있음을 뚜렷이 지적하고 있다. 

사람들의 마음이 대수롭지 않은 종교적인 일들에 골몰하다 보면, 참으로 중요한 도덕성과 고결성에 관한 문제들이 등한시되거나 무시되는 일이 매우 빈번하다. 이렇게 되면 종교는 한낱 형식과 공론상의 문제로 추락하고 만다.

 여기서 바울이 크게 강조하는 바는 그레데의 그리스도인들이 존귀하고 순결하며 그들의 모든 생활에서 철저하게 정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 중의 다수가 그 당시 종의 신분이었음이 분명한데, 그들은 종으로서도 순종하고 정직한 생애를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어떤 것이든 간에, 그의 생활은 모범적이어야만 한다.

 이 편지의 절정에서 바울은 디도에게, 그리고 그를 통하여 그레데인들에게,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는 선한 행위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긍휼의 은사로 주어지는 것임을 상기시켜 준다.

 이 그레데의 형제들에게 아직도 남아있는 이교적 유산과 유대화 교사들에 의하여 야기된 정신적 혼란에 대하여 들어서 알게 된 바울은 이 편지를 통하여 특별히 그러한 문제들을 다루게 되었다. 그의 권면은 명백하고 확실하다. 그는 그곳 사람들과 그들의 인간적인 행동 유형들을 잘 이해하고 있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오늘날의 모든 설교자들이 소유하고자 애써야 할 정확함과 예리함을 나타내고 있다.

 5. 개요

Ⅰ. 인사 1:1-4

Ⅱ. 디도에게 주는 교훈 1:5-3:3

     1. 감독의 장립(將立) 1:5-12

     2. 거짓 교사들의 활동을 경계함 1:13-16

     3. 건전한 교리는 품성의 고결함을 증진시켜 줌 2:1-15

       (1) 늙은 남자들의 품성의 증거 2:2

       (2) 늙은 여자들의 품성의 증거 2:3

       (3) 젊은 여자들의 품성의 증거 2:4, 5

       (4) 젊은 남자들의 품성의 증거 2:6

       (5) 복음 사역자로서의 디도의 성품의 증거 2:7, 8

       (6) 그리스도인 종들의 품성의 증거 2:9, 10

       (7)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고결함을 소유케 하는 자극제가 됨 2:11-15

       (8) 공민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책임 3:1-3

Ⅲ.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의 산물임 3:4-7

     1.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비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얻음 3:4, 5

     2.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거룩하게 됨 3:5, 6

     3. 그리스도인들은 영생의 특권을 얻은 후사들임 3:7

Ⅳ. 그리스도인 품성의 탁월성이 나타나야 함 3:8-11

     1.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일들에 앞장서야 함 3:8

     2. 그리스도인들은 쓸데없는 활동들을 피해야 함 3:9-11

Ⅴ. 개인적인 사항에 대한 언급과 축도 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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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서 1장 (개요)

제 1장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다.

Ⅰ. 이 서신의 서문. 이 서문에는 이 편지가 누구에 의하여 쓰여져서 누구에게 보내졌는가가 설명되고 있다. 또한 사도 바울의 인사말과 그에게 모든 축복이 있을 것을 소원함. 바울의 디도를 위한 기도가 있다(1-4).

Ⅱ. 디도를 그레데셈에 떨어져 남겨둔 목적을 설명함으로 본론이 시작된다(5).

Ⅲ. 그리고 선한 목자와 악한 목자의 차이에 대하여 설명하였다(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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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딛 1:1-4)

위의 본문은 본서의 서문으로서 다음의 사실을 보여 준다.

Ⅰ. 저자는 바울이다.  이 이름은 그가 이방인의 사도라는 뜻에서 붙인 로마식 이름이었다(행 13:9, 46, 47).  목회자는 자기의 맡은 바 직분을 보다 잘 완수하기 위하여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절하였고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후 "사울"이란 유대식 이름은 성경에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로마식 이름인 "바울"이란 이름만이 나옴을 보게 된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은"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하나님과 관계와 또한 그의 직분을 알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종"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평범한 개인이나 그리스도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목회자를 의미하는 것이다(롬 1:9).  이것은 고귀한 명예이다.  즉 천사들이 받는 영광인 것이다.  그리고 천사들에게 이러한 영광이 주어지는 이유는 그들이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영적인 존재들로써 결국은 구원의 유산을 받을 사람들을 섬기라고 파견된 일군들이기 때문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복음 사역자들도 천사들과 동일한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목회자로서는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묘사되고 있다.  즉 주님을 대면하였고 또 주님으로부터 가르침을 직접 받은 사람으로부터 가르침을 직접 받은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가장 높은 직책이란 곧 종의 직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기독교를 전하기 위하여 택함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를 역시 하나님의 종들이었다.  그들은 자연 종교의 진리들이나 의무들과 일치하지 않는 어떤 다른 이론을 제시하지 않았다.  사도들이 전파한 기독교는 자연 종교의 원리들을 더 분명히 하고 강화시키는 한편 더욱 발전시키고 또한 타락하고 배반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더해 주기 위한 종교였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하나님의 뽑으신 사람들의 믿음을 도와주기 위하여" 하나님의 종이 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교훈은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선택받은 모든 사람들의 믿음과 일치하는 것이었을 뿐아니라 또한 그들의 신앙과 꼭 같은 그것을 전달하고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이 있음을 명심하자(벧전 1:2).  또한 성령님께서는 영생에로 택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적절한 귀중한 믿음을 부여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러므로 이르기를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셨다"고 하였다(살후 2:13, 14).  믿음이란 성화의 첫째 원리이다.  본문에 보면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을 깨우쳐 주기 위하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다른 곳에서 복음을 "복음 진리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거룩한 믿음은 오류에 빠지기 쉬운 이성이나 상상의 견해에 근거를 두지 않고 무오한 진리 말씀 자체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즉 이 진리는 경건한 본성과 경건한 경향을 가지고 있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며 또한 그 자체가 순수하고 또한 믿는 자들의 심령을 정결케 하는 진리인 것이다.  바로 이 진리의 말씀에 근거하여 교훈과 또는 영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가 아닌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참된 경건과 실천적인 신앙을 왜곡하는 영들이나 교훈 또는 불결한 영들이나 교훈은 하나님에게서 유래된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모든 복음 진리는 경건에 속해 있는데 즉 하나님을 존경하고 두려워하며 그에게 복종하도록 가르치고 도와 준다.  이 진리는 알아야 되는 동시에 고백되어야 하는 진리이다.  즉 이 진리는 말씀과 실천으로 병행되어야 한다(빌 2:15, 16).  그러므로 이르기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 10:10)고 했다.  진리를 안다고 하나 불의한 사람들을 실상 진리를 알지도 못하고 또 믿지도 않는 사람들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지식과 믿음에로 인도하며 경건에 속한 진리를 알게 하고 고백하게 하는 것은 복음 사역의 큰 목적인 것이다.  목회자들의 가르침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 안에서 믿음과 확신을 가지게 하는데 그 목적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본문에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고 하였다(2절).  이것은 복음의 다음 번 목표이다.  즉 복음은 믿음을 생기게 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소망을 생기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즉 사람들의 생각과 관심을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게 하여 하늘 나라와 위의 일들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 복음의 또다른 목표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경건은 영생으로 인도하여 주며 영생에 대한 소망과 확고한 기대를 가져다 준다.  왜냐하면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고 속임수가 없는 분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명예이다.  또한 이 사실은 그의 신실한 약속에 전 소망을 두고 있는 믿는 자들의 위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런 약속을 하실 수 있었을까?  어떤 이들은 본문의 약속을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뜻 가운데 그것을 계획하셨으며 그러기에 그것은 태초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본문의 ‘프로 크로논 아이오니온’(1:2)을 약속의 희미한 윤곽만 제시되었던(창 3:15) 아득한 옛날 또는 여러 해 전이라는 뜻으로 본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도들에게 주신 영생이 약속의 확실성과 그 약속이 오래 전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즉 오래 전에 이미 약속하셨던 것이다.  복음이 이같이 일찍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복음의 탁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복음을 귀히 여겨야 하며 또한 우리 이전 사람들이 받지 못한 이 특권을 우리는 누릴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너희 눈은 봄으로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 복음을 오래 전에 약속하셨고(3절)뿐만 아니라 그가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는데도" 만약 복음을 멸시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격렬한 심판을 받아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으리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옛적에 희미하게 윤곽만 제시하셨던 그의 약속을 "때가 되자" 자기 말씀을 전도로 더 명백히 나타내셨는데도 이 복음을 멸시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심판을 받아 마땅하리라는 말이다.  이제 어떤 사람들이 "전도의 어리석음"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존대를 받게 되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전파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이제 바울은 본문에서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고 하였다.  목회는 하나의 위임이다.  아무도 이 명예를 스스로 취할 수 없고 오직 위임된 자만이 지닐 수 있는 것이다.  명령을 받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말씀을 전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전서 9장 16절에 말하기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 하였다.  전도하지 않는 목회자는 누구도 사도의 견습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본문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3절)라고 했다.  전도는 구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일이다.  "구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회개하였을 때 그에게 복음을 전해 준 분이 바로 그리스도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주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동일 인물에 대한 다른 호칭으로 본문은 곧 그리스도의 신성을 밝혀 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행 9:15, 17; 22:10, 14, 15 참조).  그리고 다시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복음을 위탁하셨던 것이다(행 22:17-21).  그러므로 본문의 구주 하나님은 그리스도이시다.  또한 이 "구주 하나님"이란 말씀에서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일치된 역사를 찾아 볼 수 있다.  즉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하여 아들에 의해 구원하신다는 것과 또한 목회자를 보냄에 있어서는 삼위가 다같이 역사하신다는 것을 보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근거하지 않고 인간의 부름에 의존하려는 것은 무익한 일인 것이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일할 수 있도록 능력을 공급하시며 그 일을 하려는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고 권위를 주시며 직분을 수행하기 위한 기회를 주신다.

Ⅱ. 이 서신의 수신자.

1. 수신자의 이름이 명시되고 있다.  그는 희랍인 "디도"였다.  그럼에도 그는 믿음과 복음 사역에로 불리움을 받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요 능력이 충만한 것임을 명심하자.  그러므로 그의 은총은 이방의 혈통과 이방 교육을 받은 사람도 드셔서 가치있게 쓰시는 것이다.

2. 바울이 수신자와 맺고 있는 영적인 유대 관계가 설명되었다.  본문에 바울은 디도에게 "내 아들아"라고 하였다.  이것을 혈육의 관계를 말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관계를 일컫는 것이다.  바울은 또한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고 하였다.  목회자들은 자기가 회개시킨 사람들의 영적인 아버지가 된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후에도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며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본문에서 바울은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아들에게"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가 말한 믿음이란 모든 시대 사람들에게 공통된 것이며, 진리에 대한 믿음이며, 생명을 얻게 하여 주는 믿음이었다.  이 구절은 디도를 위선자들과 거짓 선생들로부터 구별하고 또 그레데인들로 디도를 마치 바울 자신처럼 존경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었다.  즉 디도의 믿음과 생활과 하늘 나라에 대한 교훈을 곧 바울 자신 것과 진배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바울은 자기에게 이토록 귀한 디도에게 서신을 썼던 것이다.

Ⅲ. 디도에 대한 모든 축복을 빌어 주는 기도와 인사.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4절)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알 수 있다.

1. 기원한 축복의 내용.  그것은 "은혜와 자비와 평강이었다."  "은혜"란 하나님의 거져 주시는 은총이며 또한 하나님께 용납 받는 것이다.  "자비"는 그 은총의 열매로써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이며 죄로 인한 모든 슬픔으로부터 현재와 미래에 자유하게 되는 것이다.  "평강"은 자비의 긍정적인 결과이며 열매이다.  즉 이 평강이란 우리 평강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평화하는 것을 말하며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과 또 우리 자신들과 평화하는 것을 말한다.  이 평화는 내적 또는 외적 평화를 다 의미하는 것으로 현재와 영원 안에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모든 좋은 것을 말한다.  은혜가 모든 축복의 근원임을 명심하자.  자비와 평강과 모든 선한 것은 이 은혜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의 은총 안에 들어가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2. 축복의 공급자.  먼저 바울은 축복의 근원으로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인 "하나님 아버지"를 말하였다.  모든 축복과 모든 위로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와진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으므로 모든 만물의 아버지가 되신다.  또한 그는 우리를 양자로 삼으시고 중생케 하는 선한 일을 하셨으므로 모든 선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다.  그다음 바울은 축복과 위로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또 얻게 해 주는 길과 수단이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를 말하였다.  모든 것은 아버지로부터 오되 아들을 통하여 온다.  이 아들은 본성으로 주님이시다.  즉 모든 것들의 상속자이시며 또한 구속자가 되시며 주를 따르는 무리들을 명하시고 다스리시는 머리이시다.  모든 만물은 주의 발 아래 있다.  우리는 포로와 같이 주께 잡힌 바 되었으며 또 주께 두려움으로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  이 아들은 또한 예수이며 그리스도이다.  즉 기름 부음 받은 구세주이며 특별히 우리의 구세주이신 것이다.  그리스도로서 그는 믿는 사람들의 죄와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여 하늘 나라와 행복으로 인도하신다.  여기서 본서신의 서문이 끝나고 본문이 취급되는데 본문은 디도를 그레데 성에 두고 온 목적을 설명함으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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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들의 임명(딛 1:5)

여기서 디도를 남기고 온 목적을 읽을 수 있다.

Ⅰ. 넓은 뜻에서의 이유. 이에 대하여 본문은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5절)라고 하였다.  이런 일이 복음 전도자가 맡은 일이다(디도가 바로 이런 복음 전도자였다).  즉 복음 전도자의 일이란 사도들이 세운 교회에 물을 주는 일이며(고전 3:6).  사도들이 시작해 놓은 일을 더욱 발전시키고 완성시키는 것이다.  본문의 ‘에피디오르도세’는 일들을 하나씩 바로 잡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디도는 바울이 그레데에서 너무나 짧은 기일 동안 머물렀던고로 그가 충분히 안정시키지 못하였던 것들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남겨졌던 것이다.  다음을 유의하자.

1.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한 바울의 근면.  그는 한 곳에서 복음이 정착되면 곧 다른 곳으로 서둘러 떠났다.  바울은 이방인과 야만인들에게 빚진 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모든 사람들 가운데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수고하였다.

2. 바울의 신실함과 신중함.  바울은 자가기 떠나온 어느 곳에든지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시작한 일을 계속하여 어린 교회를 돌볼 수 있는 관리인을 남겨 두었다.

3. 바울의 겸손.  바울은 자기가 도움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자기가 도움을 받되 자기와 같이 높은 계열에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또 자기와 같이 큰 은사와 능력을 받지도 않은 사람에게 도움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와 같이 함으로써 복음이 전파되며 모든 영혼을 위하여 유익을 줄 수만 있다면 그는 복음 전하는 데 있어 다름 사람들의 협조도 기꺼이 받고자 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4. 비록 디도가 사도들보다는 지위가 낮은 직분이였으나 특별한 장소에서 봉사하는 일반적인 안정된 목사들이나 감독들보다는 우위에 있는 직분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디도는 이와 같이 필요한 장소에 일반 목회자를 세우고 또 처음에 세워진 교회를 정착시켜 놓고는 마찬가지로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보다 고차적인 의미에서의 전도자였다.  디도는 보편적인 교회의 목회자였을 뿐 아니라(이는 모든 다른 사역자들도 그러하다) Catholic minsiter - 즉 보편적인 목회자이기도 하였다.  다른 사역자들 즉 임지가 정해있는 사역자들에게는 제한적인 권한만이 수여되어 있었다.  즉 그들은 자기들에게 부여된 임지만을 관할하는 권한밖에 없었다.  그러나 디도와 같은 복음 전도자들에게는 부차적인 권한도 수여되어 있었다.  즉 그들은 어느 교회에 가서나 그들의 사역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그 교회로부터 생활비의 공개를 주장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디도와 같은 "제2의 행위자이며 실천자인"복음 전도자는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할 수 있었으며 교회의 생계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복음 전도자들은 실제로 자기가 맡은 교구 내에서는 어디든지 갈 수 있었으며 그 지역 안의 다는 전도자나 목회자들을 지휘하고 교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사도는 사도대로, 복음 전도자는 복음 전도자로 고정되지 않고 순회 전도하는 방식으로 일할 수 있었다.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고전 16:10).  디도는 이곳 크레타에 단지 우연히 그것도 잠시 도안 머물렀었다.  바울은 그가 못다 한 일을 모두 마칠 것을 원하였다.  그리고 그가 겨울을 나려는 나코폴리스로 올 것을 바랐다.  그후 디도는 고린도로 파견되었고 로마에서는 바울과 함께 머물려 있었고 거기서 다시 달마디아로 보내졌다.  이것이 성서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디도의 마지막 행적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디도가 한 곳에 머물려 있는 고정된 목회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디도는 크레타를 떠났다.  그리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바울이나 디도가 이곳에서 가졌던 권력은 어떤 것인가? 그들이 정치인들의 권력을 침범한 것은 아닌가?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은 정치적인 권력에 참견하려 온 것이 아니었다.  "누가 너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눅 12:14).  그들의 일은 확신과 설득에 의하여 이루어진 영적인 사업이었으며, 정치적 권력자들의 권세를 방해하거나 간섭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안정되도록 하고 강화시켜 주는 것이었다.  "필요한 것은"그러한 정치적인 권력의 근원이나 산물이 아니라, 거룩하고 영적인 성직수임(聖職受任)과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왕이 되서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얻은  약속일 뿐이었다.  이것을 정착시키기 위하여 디도를 크레타에 남겨 두었다.  교회를 일으키고 그것을 완전하도록 키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유의하자.  바울 자신도 여기서 수고하였으나 아직도 모자라는 것이 있었다.  확실한 형태가 잡히지 않은 형편에서 모든 것이 그 테두리 안에 들어가 올바른 모양으로 만들어 주고 그런 후엔 서로 굳게 뭉치게 해 주기 위해선 깍기도 하고 맞추기도 하는 많은 수고가 필요하였다.  가장 좋은 것이 부패하기 쉬우며 고장나기 쉬운 것이다.  목회자들은 나쁜 것을 교정하고 부족한 것을 공급하여 줌으로 이런 일을 막는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대체로 이런 일이 크레타에서 디도가 할 일이었다.

Ⅱ. 특별지시.  "각 성에서 장로들을 세우게 하라." 즉 나이 많이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분별력 있고 경험있는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목회자들을 뽑으라는 말이다.  만약 연한이 오래 되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처신과 태도에 있어서 신중하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면 된다.  보통 큰 도시나 성읍에서처럼 충분한 숫자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곳에서 틀림없이 이대로 시행할 것이지만, 비록 작은 마을이라고 할지라도 그곳에 장로로서의 자격을 갖춘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경우엔 그대로 시행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선택된 장로들은 교회의 모든 일반적인 사무를 담당하고 돌볼 책임을 지게 되었다.  교회를 다스리고 가르고 교회에 대한 목회자의 모든 직분과 의무를 수행하여야 했다.  때로는 교회 안에서 성직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장로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있다.  그래서 사도들도 장로들이었다(벧전 5:1).  그러나 여기에선 일반적으로 한곳에 머물러 있는 목회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은 "주 안에서 교회를 다스리고 말씀과 교훈을 위하여 수고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여기 1장 전체를 통해 서술하고 있는 직분을 감당하는 자들이다.  이 장로라는 말은 어느 면에서 성직자와 같은 의미로 씌였으며 제사장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이 제사장이란 명칭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왕이나 제사장으로" 세움을 받고(iJereuv"의 의미이며 presbuvtero"가 아니다) 기도와 찬송과 현금을 드리는 영적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식으로 암시적 혹은 형식적인 방법이 아니고는 복음을 따르는 자들에겐 붙여지지 않았던 명칭이다.  "우리는 믿는 도리의 대제사장이신"(히 3:1) 그리스도 이외에는 복음 아래 제사장을 세울 수 없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희생 제물로 드렸으며, 그로 인해 우리를 위하여 중재하시기 위하여 영원히 살아 계신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볼 수 있는 장로는 형식적이든 실지로든 희생을 드리는 직분을 맡은 전통적인 의미의 제사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복음 전도자로서 그리스도의 성례를 "베풀고 성령께서 그들을 교회의 감독자로 세우셨으니 하나님의 교회를 기르는 일"을 할 뿐이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확고하고 안정된 목회가 이루어지지 않는 교회는 불안전하고 부족한 교회이다.

2. 일정한 숫자의 신도들이 모이는 곳에는 장로를 선택하여 세워야 한다.  교회 안에서 그들의 계속적인 존재는 최초 서약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케 될 때까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연결하여 한 몸을 이루어 충만한 분량에 이르러 굳게 서게 될 때까지 "신도들을 완전케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키워 나가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은혜의 분량을 측정케 되는 것이다(엡 4:12, 13).  이 일은 이 세상의 끝날까지 수행해야 할 일이며 그 일을 위해 필요하고 약속된 방법도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를 마련하신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야 함이 마땅하잖은가! 이로 인하여 유익함을 얻는 사람들의 감사가 얼마나 클까! 이것이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간절히 이것을 구할 것인가! "추수하는 주에게 추수할 일군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  믿음은 듣는 데서 얻어지며" 또한 들음으로써 믿음을 보존하고 유지하며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무지와 혼란과 선한 것의 부패와 악의 증가는 가르치고 자극을 주는 목회자 부족함으로써 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이유 때문에 "디도는 크레타에 떨어뜨려 부족한 일을 바로 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서 장로들을 세우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디도가 이 일을 수행하는데 있어 ad libilum - 즉 멋대로 즉, 자신의 의지나 기분에 따라 할 것이 아니고 오직 사도의 지시를 따라서 행할 일이었다.

Ⅲ. 디도의 행동 법칙.  "나의 명한 대로" 그가 이제 상기시키려고 명령한 내용은 디도 자신 뿐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익한 말이었으므로 디도외에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말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도들은 디도가 사도에 명령과 권위로 보증 받고 지원 받아 그 일을 수행하였다는 사실을 성도들이 보고 알게 됨으로 디도에게 기꺼이 순종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율법 시대에는 모든 일이 시내산에서 보여 준 모세의 규례대로 수행되었던 것같이, 복음의 시대에는 모든 일이 그리스도의 지시에 따라,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흠없이 지도를 받고 있는, 대표되는 목회자들의 지시에 따라 수행되어야만 한다.  인간적인 습관이나 창작물을 하나님의 교회 안에 끌여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말씀의 일반적인 규례를 따라서 조심성 있게 처리하여야 할 것이다.  아무도 교회의 질서와 훈련, 믿음과 예배의 본질에 관한 것이 무엇이든 변경할 수 없다.  복음 전도자도 소명받은 일이 아니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하물며 다른 사람들에 있어서랴.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며 직분을 임명하며 그 질서를 세우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며 그의 뜻에 맞겨야 할 일이다.  명한 대로 여기서 그가 명하였던 장로들의 자질과 성품을 암시하고 있다.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서 장도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네게 특별히 지적하여 그 일에 대하여 전에도 말했지만 다시 한 번 설명하고자 하노라."  바울은 6절에서 9절까지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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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의 자격(딛 1:6-16)

바울은 여기서 디도에게 장로 장립에 대하여, 장로로 세워야 할 사람과 세워선 안 될 사람을 지적하여 지시하고 있다.

Ⅰ. 장로로 세워야 할 사람들.  그는 장로들의 자질과 덕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들의 생활과 태도를 보아,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을 보아 전자는 6,7절과 8절에, 후자는 9절에 기록되어 있다.

1. 그들의 생활과 태도에 비추어 본 자질

(1) 보다 일반적인 면에서는 "책망받을 만한 것이 없고" 이것은 절대로 잘못이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다.  "살아 있으면서도 죄가 없는 사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전혀 비난 만한 것이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 또한 있기 어려운 일이다.  그리스도와 주의 사도들조차도 비난을 받았다.  비난받을 만한 잘못은 없었으면서도 그리스도에게서는 비난받으실 만한 점이 분명히 하나도 없다.  또한 주의 사도들도 적대자들이 비난하는 그런 사람들은 아니었다.  다만 이 구절은 의미하는 바 장로는 못된 성격의 노예가 되어선 안 되며 "밖에 있는 사람들로부터도" 좋은 평을 얻어야 할 것이라는 뜻이다.  창피하고 추문을 일으킬 만한 죄를 지어 성직에 대해 비난을 퍼붓게 해서도 안 된다.  장로는 그러한 사람이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2) 좀더 특별한 의미에서.

① 장로의 가족 관계.  장로 자신의 인격에 있어서도 혼인의 순결을 지킨 자라야만 한다.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아내 없는 남편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처음부터 그러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결혼은 성직이나 소명에 방해가 되지 않은 성스런 예식인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고전 9:5)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혼인을 금하라"하는 것은 적 그리스도 교회의 거짓 교훈 중의 하나이다(딤전 4:3).  그러나 목회자가 반드시 결혼을 해야만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말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뜻이며(유대인들 가운데서도 사소한 이유로 이런 생활을 하는 예가 허다하였다) 또는 여러 아내를 거스리지 말라는 뜻이다.  한 아내와의 결혼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없다면 아예 결혼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단지 결혼을 하였으며 오직 한 아내만 가질 것이며, 그 당시의 죄악된 풍습에 따라 족장들의 흉내를 낸다고 여러 아내를 데리고 살지 말라는 것이다.  족장들의 흉내를 낸다고 여러 아내를 데리고 살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 주께서는 그런 악한 습관을 버리도록 가르치셨던 것이다.  일부다처는 어떤 의미에서든 창피한 일이다.  합법적인 아내와 함께 창녀와 첩을 데리고 사는 격이다.  그러한 죄나 방탕하고 호색하는 처신을 한 사람은 거룩한 직분을 맡기는 데서 제외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녀들에 대하여, "믿는 자녀를" 두어야 한다.  순종하고 선하며 참 그리스도인의 믿음으로 양육되어 그 믿음에 따라서 살며 부모는 최선을 다해 이렇게 키우도록 애써야 한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고집대로 하난 기회를 주기까지 두어선 안 된다.  이 일을 소홀히 하면 전혀 죄없는 사람이 엉뚱한 비난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러한 비난을 받을 만한 낌새가 있는가 주의해 살펴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자녀들이 신앙 깊고 순종하고 근면하다는 것은 그들을 그렇게 가르치고 훈계해 온 부모들이 얼마나 신앙이 깊고 근면하였다는 나타내 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  그리고 사소한 일에 충실하였다는 것이 그에게 더 큰 일, 하나님의 교회를 다스리고 이끌어 갈 임무를 자신있게 맡길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와 같은 자질의 근본은 그의 직분의 성격을 통해 알게 된다(7절).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받을 것이 없고" 앞에서는 장로라고 불리운 것이 7절에서는 감독이라고 불리고 있다.  마치 그들 위에는 그곳에 고정적으로 머무를 더 높은 직위의 사람이 없던 것 같다.  디도가 여기서 맡은 일은, 이전에 언급되었던 바와 마찬가지로 일시적인 것으로 그가 잠시 머무는 동안에만 할 성질의 것이었다.  장로를 세우고 직분을 맡긴 다음 디도는 바울이 하나님의 청지기가 감독이라고 불렀던 장로들의 손에(성서에 나타난 바로는) 모든 일을 맡겨 놓고 떠났다.  성서의 어떤 기록에도 그레데에서 디도의 일을 계승한 후계자가 누구인지를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이 장로나 감독들에게 그들의 양떼를 지키고 다스리며 먹이는 모든 임무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들 가운데 신앙 생활을 유지하고 집행하는데 있어, 그리고 다음 세대에 그 임무를 계승시키는 일에 있어 그들은 어떤 권세도 필요치 않았다.  이제 양떼를 돌보며 그들의 본이 될 감독자로서 하나님의 집안 일을 돌보고 집 안에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야 하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여기서 장로와 감독이 비난받는 일이 없고 단정하고 선한 성품을 지녀야만 하는 까닭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 생활은 곤경에 처하게 되고, 그들의 사업은 방해를 받으며, 그들이 안전하게 돌봐야 할 영혼들이 간섭받게 되고 위험에 직면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은 분명한 이치가 아닌가! 이상으로 가족과 관계되는 감독자 혹은 장로들의 자질을 살펴 보았다.

② 장로 자신이 갖추어야 하는 인격적인 요소들.  첫째, 소극적 입장에서 볼 때 감독은 "제 고집대로" 일을 처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제 고집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넓게 적용되는 말이다.  즉 남의 의견은 배제하고 자기 고집, 자기 자질이나 능력에 대한 자만, 자기애, 자기 집착, 모든 일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  또는 자기 신뢰 혹은 의지, 자기 추구, 남의 말은 거들떠 보지도 않음, 자기 식으로만 고집 부리는 완고, 교만, 고집불통, 나팔(자기 양떼를 돌보는 값으로 다윗 왕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기를 거부한 구두쇠 양떼 주인. 삼상 25:2 참조. 역주)같은 구두쇠, 이 모든 것을 뜻한다.  이상은 주해자가 본문의 뜻을 확대시켜서 생각해 뜻한다.  이처럼 물들지 않고 누구에게든 구하며, 조언을 받으며, 다른 사람들의 마음과 뜻에 합당하다면 될 수 있는 한 그것에 기꺼이 양보함으로 오히려 중요한 것을 얻게 되는 것이야말로 목회자의 영광이다.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메 오르길론’ - 즉 조급히 성내는 성질의 갖지 않았으며, 너무 빨리, 쉽게 반발하고 화내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자신의 거친 성격이나 걷잡을 수 없는 열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교회를 다스린다는 것은 참으로 부당한 것이다.  목회자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고 관대하며 인내하여야 할 것이다.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목회자가 주정뱅이라거나 "술을 좋아하여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폭음하는" 것보다 더한 불명예가 없을 것이다.  술을 이용하되 하나님의 선하신 다른 창조물과 마찬가지로 적당히 유효 적절히 사용하는 것은 금할 일이 아니다.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충고하였다.  그러나 술을 과음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수치가 되는 것이며 특히 목회자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술은 정신을 빼앗아가며" 인간을 짐승으로 만든다.  사도는 이것을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여기엔 과다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전까지는 쉽게 과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막판까지 너무 가까이 가지 않았나 경계해야 할 것이다.  "구타하지 아니하며" 무엇에든 싸울 듯한, 다투기 좋아하는 태도는 다투지 아니하며, 잔인함과 불필요한 거친 행동으로 복수를 하거나 해를 주기 위하여 타인을 구타하여서는 안 된다.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디모데전서 3장 3절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정욕에 속한 것들을 탐하지 아니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 말은 그들에게 필요한 양식과 평안을 위하여 자기들의 일한 대가를 거부하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소득을 자기들의 가장 중요한 제일 목표로 삼지 말 것과 세상적인 눈으로 성직을 받거나 수행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말이다.  자신은 이것에 욕심을 가지면서 자기 자신과 남의 눈을 다른 세상을 보도록 지시하는 목회자만큼 어색한 것도 없다.  그것은 "더러운 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더러운 것을 탐욕스럽게 좇거나 무절제하게 좋아하여 영혼을 타락하게 만들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마치 그것을 선하며 정당하게 사용하기 보다는 다른 식으로라도 어쨌든 구할 만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좇는다.  감독의 자격을 주는 규정으로 이러한 부정적인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둘째, 적극적인 면에서.  "나그네를 대접하며" 그것은 감독이 더러운 것을 탐하지 않으며, 오히려 최고의 목적으로 가진 바를 다른 사람에게 자비로운 선을 베푸는데 방해가 될 정도로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쌓아 놓지 않는다는 증거가 된다.  "나그네를 맞아들이고 대접하는 것"(말의 뜻 그대로)은 중요하고도 필요한 사랑의 직무의 하나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아 안전을 위하여 이리저리 떠돌아 다닐 때, 오늘날과 같이  순례자들은 위한 자선 기관이 없었을 때, 신도들도 그러한 용도에 쓸 만한 여유있는 시설이 없을 때,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하나님께 선을 행하는 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능력과 기회를 따라서 그렇게 행하려는 마음과 실천은 선한 직분을 수행하는 좋은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선한 사람과 선한 일을 좋아하며" 목회자는 이 두 가지 일에 있어서 본을 보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았으며 그들의 폭넓은 경건성의 증거가 된다.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 특히 믿음의 집에서 직분을 맡은 사람은 더욱 더 그렇게 하라."  이들은 이 땅에서 뛰어난 사람들이며 그들 가운데 모든 우리의 기쁨이 있는 것이다.  "엄격하고 근신하며" 이 단어가 뜻하는 바 그대로이다.  목회자가 목회에서 뿐아니라 자기 개인의 인격 수양과 처신에 있어서 필요한 은혜이다.  목회자는 지혜로운 청치기가 되어야 하며, 경솔하며 어리석고 무모한 청지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누가 자기의 열정과 욕망을 잘 다스릴 수 있는 것일까.  의로우며 한 시민으로서의 사회 생활에서 의로우며, 도덕적으로 선하며, 분배에 있어 각자 자기 분량대로 정당히 돌아가게 해야 한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는 "거룩해야 한다." 목회자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며, 영적이며 하늘에 속한 것을 말하여야 할 것이다.  "절제하며" 이것은 "강하게 되리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말로써 자기의 욕망과 정열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뜻이며 또는 합법적인 사물에서도 선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욕망과 정열을 묶어놓을 수 있다는 말이다.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이 보다 더 목회자에게 어울리는 것은 없을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는 근신하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거룩하며,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는 의롭고 정당하게 대하라는 것이다.  이상으로 목회자의 생활과 태도에 있어서는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 하여서는 안 되는 일과 꼭 해야 할 일을 고찰하여 목회자의 자격을 살펴 보았다.

2. 교훈에 대하여,

(1) 디도의 의무.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주님의 은혜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키라." 그가 받은 교훈에 따라 거기에 굳게 서라.  그리스도의 교훈을 자기의 믿음과 직분에 있어서 또 다른 사람을 훈계할 때도 굳게 지켜야 할 것이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① 성경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하고 무오한 말씀이다.  "아멘이며, 진실하고 신실한 증거가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이 그것을 쓰는 필자를 인도하였다.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은 성령에 의하여 감동을 받은 것같이 말하였다."

② 목회자 가르침이나 삶에 있어서 신앙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세워 나가야 한다.  "내가 믿음을 지켰으니"하고 바울은 고백하였다(딤후 4:7).  또한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하였다.  이것이 그의 신앙이었다(행 20:27).

(2) 목표.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다른 사람들을 진실된 신앙으로 이끌어야 하며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설득해야 한다.  목회자 자신이 신실한 말씀과 바른 교훈에 확고히 서지 못하고 불확실하거나 불안하다면 바른 교훈을 지키지 못하며 진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시키고 가르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목회자의 중요한 임무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의 의무를 알고자 행하며, 하는 이를 권면하며, 반대하는 이들을 설득시켜야 하는 일인데 그 두 가지는 "모두 바른 교훈"을 따라야 한다.  즉 합리적인 교훈방법으로 성경의 보기와 증거를 들어서 행하여야 할 것이다.  성경은 무모한 진리의 말씀으로써 모든 사람이 그 말씀에 의해 결정하며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이 바울이 디도에게 세워도 될 장로의 자격이다.

Ⅱ. 디도가 피하여야 할 사람들.  이와 다른 성격의 소유자들.  이들에 대해 언급한 것은 목회자의 자격에 대하여 말하며, 목회자는 이러 이러한 자들이어야 한다고 설명한 이유가 되고 있다.  그들 가운데 거짓 교사와 그 추종자들에 대한 언급을 10 - 마지막 절에서 하고 있다.

1. 거짓 교사들.

(1) 거짓 교사들에 대한 묘사.  그들은 "복종치 아니하며" 완고하고 권력에의 욕심이 있으며, 고집이 세고, 다루기 힘들며, 교회 안의 질서나 훈련에 자신을 복종시켜 순응하지 못하며, 바른 교훈과 선한 다스림을 견뎌내지 못하는 자들이다.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그들은 스스로 지혜로운 것같이 꾸미나 실지로는 어리석은 자들이며, 실수와 오류를 즐겨하여 그 안에 빠지는 말쟁이들로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와 꼭 같은 오류로 빠지도록 고심하고 부지런히 애쓰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많다.  "특히 그들은 할례당 가운데서 심하니" 개종한 것처럼 꾸미나 특히 유대인들 중에서 아직도 유대교와 기독교를 뒤섞어서 은근히 혼란을 꾸미는 자들이 많은 것이다.  이러한 자들은 거짓 교사들이다.

(2) 그들에 대하여 어떻게 대할 것인가(11절).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니라" 외적인 권세로 하는 것이 아니라(디도에겐 그런 권세가 없을 뿐 아니라 이것은 복음적인 방법이 아니다) 그들에게 설득과 논박을 통하여 그들의 오류를 지적함으로써 "잠시라도 그들에게 설 곳 주어선 안 돈다." 교회의 평화를 깨뜨리고 다른 교회까지 어지럽힐 정도로 완강히 고집하는 경우엔, 오류를 바로잡고 많은 희생을 막을 마지막 수단으로 책망을 해 주어야 한다.  충실한 목회자는 반드시 평소에 교란자들을 막아야 한다.  "그들의 잘못이 밝혀져 더 이상 끌어나갈 수 없도록 해야 한다."

(3)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

① 거짓 교사들의 치명적인 해로움.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즉, 할례의 필요성, 모세 율법의 준수 등등).  그리하여 복음과 인간의 영혼을 멸망시키는 것이다.  몇 사람뿐 아니라 한 집의 가족 전체를 파멸로 이끄는 것이다.  사도들이 세상을 온통 엎드러진 것을 비난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 못되나, 이 거짓 교사들이 많은 사람들을 진실된 신앙으로부터 파멸로 이끌어 내는 일은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런자들의 입은 봉해져야 한다.  다음 사실을 볼 때 그 이유는 더욱 분명해진다.

② 거짓 선생들이 그런 일을 행하는 근본 목적.  더러운 이익을 얻기 위하여 신앙이라는 구실을 가지고 속된 이익을 얻고자 일하는 것이다.  "돈을 사랑함은 일만 악의 근원이니라." 그런 자들은 성서의 교훈과 가르침으로 대항하고 논박하고 부끄러움을 줌이 마땅하다.  이상으로 거짓 교사들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Ⅲ. 그들의 백성과 추종자들에 대하여 이미 옛 선지자로 그들에 대해 증거한 바 있었다.

1. 증인(12절).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 다시 말해 이 증거는 유대인이나 그리이스 에피메니데의 증거가 아니고 그레데인의 것으로 그레데인은 비방하려고 한 것 같지는 않고 다만 알리고자 한 것 같다.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 그들의 시인들이나 신의 신탁을 기록하던 자들을 뜻한 것 같다.  이들도 때로는 백성들의 악함을 증언하였다.  그리이스인 가운데는 아루투스(Aratus), 에피메니데스(Epimenides) 등등이 있었으며, 로마에는 호레이스(Horace)와 쥬브날(Juvenal), 페르시우스(Persius) 등이 있었다.  그들은 여러 가지의 악덕에 대하여 매끈한 문장으로 풍자하였다.

2. 증언의 내용 ‘크레데스 아에이 프슛타이 카카 데리아 가스테로스 아르가이’ - 즉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 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쟁이이다.  속담에도 그레데인들은 거짓말과 속임수에 능한 자들이란 불명예를 받고 있다.  그레데인들의 놀음을 한다는 말은 ‘크레티제인’ - 즉 거짓말하다와 같은 뜻이다.  그리고 그들의 간교한 해로움과 야만적인 본성 때문에 약한 짐승으로 비교되었으며 그들의 게으름과 관능적인 욕망으로 정직한 거래를 통하여 살며 일을 하기 보다는 먹기에 더 집착한다는 뜻에서 배만 위하는 게으름쟁이라고 불렀다.  다음 사실을 유의하자.  여기에 이방인들이 책망을 받은 창피한 악덕은 그리스도인들이 피해야 할 것들이다.  거짓과 인격의 간교함과 냉혹함, 동물적이고 관능적인 습관, 또한 게으름과 나태함, 이런 것들은 누구 보더라도 심판받아야 할 죄인 것이다.  그레데인들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자기 선지자에게 책망 받았다.

3. 사도 자신의 입증(13절).  이 증언은 사실인 것이다.  바울도 그러한 비난의 근거들을 너무도 많이 보아 알고 있었다.  다른 민족보다 더 악에 기울 수 있는 기질을 지닌 민족들이 있다.  그레데인들은 여기 표현되어 있는 그대로 태만하고 성질이 못되고 거짓되고 불성실하여 사도 자신도 이름 입증하고 있다.

4. 그들은 다루는 법.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바울이 디모데에게 서신을 보낼 때는 온유함으로 대하라고 훈계하였다.  그러나 디도에게 보낸 서신에서는 그레데인을 엄히 꾸짖으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 명령이 차이가 까닭은 디모데와 디도의 성격이 서로 차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디모데의 성격은 보다 날카로워 남들을 책망할 때엔 흥분하기 쉬운 기질이므로 남들을 책망할 때 좀더 온유할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디도는 그보다는 온순하였으므로 바울은 그에게 자극을 주어 엄히 꾸짖을 것을 명하였다.  아니면 오히려 그들이 당면한 상황과 다룰 사람들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디모데가 대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좀 정중하고 친절한 사람들이므로 부드럽게 타이르라 할 것이고, 디도가 대하는 사람들은 거칠고 훈련받지 못한 자들이었으므로 엄히 꾸짖어야만 했다.  그들의 혼란은 점점 더 많고 커지며, 부끄러움이나 겸손함이 없이 저지르고 있었으므로 그에 따라서 다루어야 했다.  책망하는 데도 죄에 따라 차이를 두어야 한다.  어떤 죄는 그 질이 더 크고 독성이 심해 물들기 더 쉽고 대담하고 거리낌없는 것이어서 하나님께 더 큰 불명예를 입히고 인간을 더욱 상하게 하기도 한다.  죄인들도 구별하여 책망하여야 한다.  어떤 죄인은 부드럽고 순종하는 성격으로 너그럽게 대하면 효과가 있는 반면, 너무 지나치게 거칠고 심한 꾸지람을 하면 오히려 실망하여 절망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반면에 어떤 죄인은 고집이 세고 돌같이 날카로운 질책을 통해서만 창피와 가책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책망을 효과있게 하기 위해선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 될 것인가.  그 성격과 품행에 따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유 1:22, 23).  그레데인들의 죄와 오류는 크고 다양하고 습관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을 엄히 꾸짖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을 사용함에 있어서 잘못 해석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5. 책망의 목적.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14절).  즉 그레인들이 지금까지 지니고 있었던 악한 기질과 태도에서 진심으로 변화하였다는 것을 보요 줄 수 있도록 유대인이 전통이나 바리새인들의 미신에 끌리거나 거들떠 보지도 않도록(그러나 많은 개종자들은 이것에 기꺼이 매이려 하고 있었다) 되기 위함이다.  유대인의 전통이나 바리새인의 미신은 그레데인으로 하여금 복음과 진리의 말씀을 거부하게 할 뿐 아니라 복음의 참되고 올바른 진리를 거부하게 한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가장 날카롭게 책망하는 것은 책망받는 사람에게 좋은 결과가 맺혀지질 목적하여야 한다.  그들은 악의와 미움과 적으로 대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으로 대해야 할 것이다.  책망받는 자의 교만과 욕망을, 못된 야망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죄 허물을 회개하고 교정하도록 해야 한다.

(2) 믿음 안에서 더러움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며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영혼이 건강하고 넘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가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은 교인의 의무를 기쁜 마음으로 인내할 마음의 준비를 마련해 준다.

(3) 믿음 안의 너그러움에 이를 수 있는 특별한 길은 사람들의 허탄한 이야기와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딤전 1: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다." 또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딤전 4:7).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 인간들의 매력이나 궁리는 진리와 경건성에 배치되는 것이다.  유대인의 예배 의식도 처음에는 거룩한 약속으로 시작되었으나 그 본질이 사라지고, 시간에 따르게 되어, 진리와 함께 서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진리, 참된 복음의 진리인 영적 예배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 아래 드리는 육적인 제물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영적 예배를 세우신 것이다.

(4) 진리를 떠나 그리스도를 버리고 모세를 취하며, 복음의 영적 예배를 떠나 율법의 육적 규율에 매이고, 참된 하나님의 직분과 교훈을 떠나서 인간적인 직분과 약속에 매이는 것은 무서운 심판의 조건이 된다.  "어리석도다 갈리디아 사람들아(바울은 갈라디아 인들에게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1, 3).  이상으로 타락하고 악한 그레데인들을 엄히 꾸짖어야 할 목적을 보여 주었다.  그렇게 꾸짖으므로 해서 그들이 바른 교훈에 귀를 기울이며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인간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6. 그는 그 이유를 율법 준수로부터 복음에 의해 얻는 자유와 그리스도인의 율법 안에 유대인적인 정신의 악함과 해로움을 들어 마지막 두절에 설명하고 있다.  선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것이 신앙안에 건전한 것이되며 따라서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  고기와 술같은 것들은 율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으나(아직도 이대로 지키려는 자들이 있었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이런 계약의 없으니 "모든 것이 깨끗하다."  그러나(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그들은 합당하고 선한 것을 그릇 사용하여 죄로 바꾸어 놓았고, 다른 사람들이 향기를 취하는 곳에서 그들은 독을 취하였다.  그들의 능력을 이끄는 심령과 양심은 타락하였으므로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오점 투성이가 되기 마련이다.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잠 15:8), 또한 악한 자의 형통함이 다 죄니라"(잠 21:4).  형통함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 의해 이루어질 때 죄가 되는 것이다.  마음과 정신의 혼탁함의 손의 모든 수고를 망쳐 놓는다.  이와 같은 유대 풍습 추종자(편의상 이렇게 부른다)들이라 할지라도 그들도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 그리스도, 생활 속의 정의에 대해 올바른 말을 하고 있는데 이처럼 심한 비난을 해야만 하는가?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이기 때문이다(16절).  입으로는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거나 자기의 삶과 태도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부인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그들의 말과 행실은 일치하지 못하고 있다.  "백성이 모이는 것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겔 33:31).  "저희가 가중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바울은 디도에게 엄히 꾸짖으라고 훈계하면서 그 자신도 그들을 날카롭게 꾸짖고 있다.  그는 그들을 엄하게 꾸짖고 있으나 이것은 그들의 형편에 따라 그들에게 필요한 이상은 책망을 하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볼 수 있다.  ‘브델뤼크토이’(1:16)-즉 가중한 자요 하나님과 선한 사람은 마땅히 그들의 눈을 더러운 것에서부터 돌려야 한다.  복종치 아니하는-‘아페이데이스’ - 믿음이 없으며 설득할 수 없는, 그들도 갖가지 일은 할 수 있을 것이나, 믿음의 순종으로도, 명령받은 바로는, 조금이라도 시키는 것은 하지 않는 자이다.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 무슨 일을 올바르게 처리할 수 있는 판단이나 능력도 없는 자들이다." 위선자들의 참담한 상황을 보라.  경건의 모습은 갖추고 있으나 행할 만한 능력이 없는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남에게 비난하는 이런 말들이 우리 자신들에게 씌워지지 않도록 주의하자.  그리하여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떠나 불신자의 악한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여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도록 노력하자(빌 1: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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