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5.07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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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1장

===인사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2.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거짓 교사들에게 내릴 심판

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5.  ○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8.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비방하는도다

9.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10.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11.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12.  그들은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13.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14.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훈계와 권면

17.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18.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19.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

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22.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23.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축복

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25.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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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서론)

본 서신은(몇 개의 다른 서신과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혹은 공교회적인 서신이라고 일컬어지는데 그 까닭은 본서는 어느 특정한 개인 혹은 가정이나 교회에 보내진 것이 아니라, 유대교 또한 이교도로부터 기독교로 개종한 당시의 전체 기독교 사회에 보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서는 기독교가 존속하는 한 교회 안에서 영구적이며 지속적인 특별한 유용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본서의 일반적인 목적은 우리가 앞에서 이미 언급한 베드로후서 2장의 목적과 동일한 것이므로 여기에서 다시금 재론한 필요가 없을 것이다. 

본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미혹자들과 그들의 유혹에 대해 경계하도록 하며 따뜻한 사랑과 진리(확실하고도 중요한 진리)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고취하고 있다. 

더구나 경건하게 이루어진 가장 밀접한 성도의 교제 가운데 이루어진 자비 또는 진실한 편견 없는 형제애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와 떼어낼 수 없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필히 고수해야 하며 정통하고 떠나지 말아야 할 진리는 두 가지의 특별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예수 안에 있는 진리다”(엡 4:21). 

또한 그 진리는 “경건함에 속한”(딛 1:1) 진리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그는 우리에게 복음을 나타내 보이셨고, 자신이 복음의 중요한 주체가 되신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할 수 있는 대로 그의 인격과 성품 그리고 사명을 배워서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해 무관심하면서도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변명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의 원천으로부터 오직 모든 구원에 필요한 지식을 이끌어 낼 수 있음을 알고 있다. 

한편 진리는 경건한 교훈이다. 인간의 부패된 정욕을 찬동하는 어떠한 교훈도 하나님께 속한 것일 수 없다. 

인간의 더라운 정욕이 원하는 대로 자신을 변명하도록 내버려 두라. 사람들이 영혼에 대해 위협적인 죄가 교회에 나타났다. “종들은 잠들었고 가라지는 뿌려졌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이 그러하듯이 악한 가라지들이 성행하는 동시에 사도들이 그들에 대해 논박을 가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조심토록 경고하였다. 

만일 우리가 당시에 살았다고 하면 우리들은 충분히 미혹하는 자들의 시험과 술책을 방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들은 충분히 그들의 증언과 경고를 가지고 있다. 

만일 우리들이 그들의 기록을 멀리하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들이 그들과 함께 살았고 그들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었다 하더라도 우리들은 그들의 말을 믿거나 또는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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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 1장 (개요)

본 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Ⅰ. 본서 저자에 대한 소개와 교회의 성격 및 복된 무리들의 축복과 특권(1,2).

Ⅱ. 본서의 목적(3).

Ⅲ. 사악한 자들의 출현과 그들의 성격(4).

Ⅳ.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 탈출시 불평을 토했던 불신앙적인 무리들과 타락한 천사 및 소돔과 고모라의 죄와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이를 통한 교훈(5-7).

Ⅴ. 사도가 경고하고 있는 미혹자들에 관한 비유와 설명(8-13).

Ⅵ. 장래 심판에 대한 에녹의 예언과 묘사의 인용(14,15).

Ⅶ. 미혹자들에 대한 부언과 일찍이 예언된 바를 보여 줌으로써 순진한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쉬운 죄에 대한 경고(16-19).

Ⅷ. 믿음의 인내, 열심있는 기도와 하나님 사랑의 고수 및 영생의 소망에 대한 권고(20,21).

Ⅸ. 그릇 행하는 자들에 대한 취급 방법(22,23).

Ⅹ. 마지막 두 절을 통한 놀라운 송영(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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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과 축복(유 1:1-2)

아래와 같은 서언 또는 자기 소개를 찾아 볼 수 있다.

Ⅰ. 본서의 저자인 유다(Jude, Judas 또는 Judah)에 대한 기술. 그의 이름은 그의 조상들 중 한 사람인 야곱의 아들 유다와 동일한 이름이었다. 비록 유다가 야곱의 첫 아들이 아니었을지라도 가장 유력한 자로서 그를 통해 메시야가 태어났다. 분명히 이 이름은 가치 있고, 훌륭하며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1. 한편 그는 악한 자의 이름과도 통하였다. 즉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주님의 배역자(가룟이란 성을 가진) 유다와 동일하다. 이 동일한 이름들은 가장 훌륭한 사람과 또한 가장 악한 사람들에게도 공동으로 사용되었다. 훌륭한 사람들의 이름을 따라 이름을 짓는 것이 유익할 수도 있으나, 우리들의 부모가 원하는 종류의 사람이 과연될 수 있는지는 그 이름만 가지고는 미리 추측할 수는 없다.

2. 그러나 본서에 나타난 유다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가룟 유다와 마찬가지로 그는 한 사람의 사도였다. 그러나 그는 가룟 유다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진실한 제자요 추종자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이었고, 가룟 유다는 그리스도의 배역자요 살인자였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전자와 후자간에 뚜렷한 구분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맨톤(Dr. Manton) 박사는 이에 언급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은 그의 신실하고 쓸 만한 종들의 훌륭한 이름을 지켜 주신다"고 하였다. 어찌 자신의 이름과 또 다른 이들의 명성과 유용성을 예사로 볼 수 있겠는가? 사도는 가장 존귀한 칭호로 생각하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처하고 있다. 아무리 강하고 홍왕할지라도 세상의 왕이 되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진실하고 유용한 종이 되는 일이 얼마나 더욱 존귀한 것인가? 그는 육신에 따라 그리스도에게 육적인 것을 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곧 이러한 것을 떨쳐버리고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에 더 큰 영광을 삼게 된다. 여기에서 잠간 아래의 몇 가지 점을 유의해 보자.

(1) 육신을 따라 그리스도의 혈족이 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이 되는 것이 보다 큰 영광이 된다. 그리스도의 선조들과 아울러 많은 친족들이 멸망하였다. 즉 그들의 멸망은 인간 예수에 대한 본능적 애정의 결핍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후손과 친족들로 하여금 참되고 모범적인 사랑에 대해 질투심을 자극케 하는 그들 자신 안에 있는 불신과 완고함 때문이다. 노아의 아들들은 당시 홍수 심판으로부터 방주 안에서 구원함을 받았을지라도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의 물결이 그들을 삼키었고, 또한 영원한 불의 심판으로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그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만이 그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자는 그리스도의 가장 가까운 혈연적 친족보다 더 영광되고 유익하게 그리스도와 친족 관계를 이루고 있는 자이다. 마태복음 12잘 48-50절의 말씀을 상고해 보자.

(2) 여기에서 사도 유다는 그리스도의 왕국의 사도요, 권위 있는 사명자일지라도 자신을 종으로 자처함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이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영광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그들이 사도가 된 이후에도 종이었다. 그들은 피차간 혹은 자기에게 맡기어진 무리들에 대해 그리스도의 봉사자로 절대로 지배적인 오만한 태도를 가지지 아니했다. 사랑하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은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자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자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5-27). 그는 "야고보의 형제"라고 자처했다. 야고보는 요세푸스(Josephus)가 예루살렘성의 비극적인 멸망에 대해 묘사하면서 언급한 바가 있는 옛날식의 "예루살렘의 초대 감독이었던" 사람이다. 결정적으로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우리의 유다는 이 야고보의 형제들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이러한 야고보의 형제됨을 무한한 영광으로 나타내고 있다. 우리도 연령과 은사와 은혜와 신분에 있어서 우리들보다 우위에 있는 자들을 존경해야 한다. 그들을 시기하거나 또는 아첨해서도 안 되며 그들이 그릇 행하고 있다고 생각될 경우 무조건 그들을 표방해서도 안 된다. 사도 바울은 책망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을 때 동료 사도인 베드로에 대한 최고의 존경과 사랑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면책하였다(갈 2:11).

Ⅱ. 여기에서 본 서신이 어떤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모든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나는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사랑"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는 것은 우리의 판단이나 의견으로 할 수 없으며, 정당하게 해낼 수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말한다. 왜냐하면 남을 판단하거나 남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우리는 그 사람의 나타나 있지 않는 면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남의 비밀이나 혹은 숨겨진 사실을 판단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판단의 결과가 선을 이루기 보다 항상 일찍이 염려했던 바 우리의 경솔하고도 불합리한 열심히 보다 큰 해를 초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나가 추수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곡간에 넣으리라 하리라"(마 13:29, 30). 그리스도는 때가 이르면 적당한 도구로써 곡식과 가라지를 구분하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결과가 나타나게 될 때까지는 각 사람에게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임을 생각해야 한다. 즉 형제들의 부끄러운 성품을 폭로하거나 꾸며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일은 사랑에 대한 사도 바울의 탁월한 묘사를 가장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결과가 된다(고전 13장). 만일 우리가 이러한 일을 계속 오늘날 감행한다고 하면 교회는 시기와 다툼, 요란과 모든 악한 일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약 3:16). 사도는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진실하게 믿음을 고백하고,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와 지체가 되는 성도로 이루어진 교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인 자들을 부르심을 받은 성도라고 칭하고 있는 것 같다. 즉 진실한 신자는 명확히 신앙을 고백한 자들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악한 영과 그 악한 영의 성품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즉 세상을 초월하여 보다 높고 훌륭한 것들과 하늘나라와 불가시적이며 영원한 것들로 인도함을 받은 자들이며, 죄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공허로부터 풍성함으로, 또한 누추함에서 거룩함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목적과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또 미리 정해진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다음 같은 특성을 얻게 되었다.

1. 성결함을(역주: 우리말 성경에는 사랑함이라 번역됨) 얻었다.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성결함을 얻었다." 성결함은 대개 성령의 역사로 성서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에 관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성령으로써 성결하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들은 성결함을 받고 또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벧후 1:4). 그 이유는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히 12:14). 여기에서 성결함이란 우리 자신이 이루는 역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만일 누가 성결해졌다면 그들은 아들과 성령이 제외되지 않은 가운데서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성결케 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와 부패함은 우리의 것이다. 우리의 성결과 정화는 하나님과 그의 은혜에 속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불의함으로 멸망하게 된다면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며 만일 우리가 성결케 되고 영화롭게 된다면 모든 존귀와 영광을 하나님께 오직 하나님에게만 돌려야 한다. 이에 관해 명백하고 뚜렷한 설명을 가하기는 쉽지 않으나 우리들은 이 진리의 어떤 면은 다른 것에 충분히 일치시키기 어렵다는 이유로 엄연한 진리를 부정하거나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우리는 매일매시 모순된 자신을 발견케 되지만 우리가 서 있는 위치에서 조금도 이탈해서는 안 된다.

2. 부르심을 입고 성결함을 얻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키심을 입게 된다. 우리의 영혼 안에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신 하나님은 또한 그 역사를 수행하시고 온전케 하신다. 그가 시작한 일은 또한 그가 마치신다. 즉 우리들은 변덕스러우나 그는 꾸준하시다. "여호와께서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지라.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시 138:8).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나 이미 받은 은혜의 선물만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보전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모든 합당한 수단을 동원하며 우리 자신을 보존키 위해 인내로써 그를 오직 그만을 신뢰하여야 한다.

(1) 신자들은 지옥문에서 떠나 천국의 영광에 이르기까지 지키심을 얻는다.

(2) 그들은 그리스도 안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피난처"와 "힘"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지키심"을 받는다.

Ⅲ.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서 더욱 많을지어다." 이 말씀은 사도의 축원을 나타내고 있다. 긍휼과 평강과 사랑으로부터 우리의 모든 위로와 이생의 참된 기쁨과 보다 귀한 것에 대한 소망이 흘러 넘치게 된다.

1.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또는 가지기를 바라는 모든 선한 것의 원천과 근원이 된다. 긍휼은 가련한 자에게만 아니라, 죄있는 자에게도 요구된다.

2. 긍휼 다음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평강"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가 아니고서는 어떠한 참되고도 영원한 평강은 있을 수 없다.

3. 긍휼로부터 평강이 비롯되는 것처럼 평강으로부터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에 대한 우리의 "사랑" 그리고 우리들의 형제애가 넘치게 된다. 적은 것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성도들에게 사도는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더욱 넘치기를 기원하고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모든 은혜와 넘치는 은사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항상 준비하고 계신다. 만일 우리들이 이를 제한시킨다고 하면 우리가 그를 제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제한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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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문안(유 1:3-7)

Ⅰ. 뒤늦게 개종한 유대인과 이방인과 이방인들에게 본 서신을 기록하여 보낸 사도의 의도를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악명 높은 반대자들에 의한 교묘한 유혹이나 비인도적인 핍박이 성행할지라도 공개적으로 담대하게 신앙을 고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본서를 기록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믿고 고백하며 전하고 만족해 할 수 있는 참된 기독교 신앙인지를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즉 사람들을 차별하며 경건한 복음주의자와 사도들의 영감이 충만한 서신보다 후대에 이루어진 어떤 이질적인 것이 아닌지를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아래와 같다.

1. 복음적인 구원은 진지한 구도자의 태도를 가지고 그 복음을 대하는 모든 인류에게 주어지는 일반적인 구원이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16). 확실히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이루신다. 그는 인간들이 어떤 일을 행할지라도 허황된 말로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도 이 놀라운 선물과 초청으로부터 제외될 수 없다. 그러나 완악하고 회개치 않은 자들은 스스로가 결과적으로 자신을 제외시킨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생명수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주어진다. 이는 강자에게만 아니라 약자에게도 주어진다. 알기 어렵고 행하기 어려운 감추어져 있는 계명 때문에 실망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나님의 계명은 감추어져 있으나 그의 언약은 알기 쉬운 것이다. "모든 선량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평범한 지휘관을 만나며 동일한 성령에 의하여 힘을 얻고, 같은 계율에 의해 인도함을 받음으로 거기에서 귀한 보화와 평범한 기업에 대한 소망을 얻게 된다." 영광스러운 구원은 확실히 우리 앞에 놓여 현재 여기에서 알 필요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들이 현재 품고 있는 희망과 기대 이상의 것들임은 확실하다.

2. 이 일반으로 얻는 구원은 모든 성도들의 신앙의 주체가 된다. 이 구원에 대한 교훈은 그들 모두가 참으로 만족할 만한 것이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딤전 1:15). 믿음의 도는 일시에 혹은 단번에 성도들에게 주신 것이요, 이 믿음에 아무나 더할 수도 뺄 수도 있으며 변경할 수도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살며 만족한다. 만일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간다면 우리들은 함정에 빠지거나 미혹에 걸릴 위험에 이르게 된다.

3. 모든 사도들과 복음주의자들이 우리에게 이 일반적인 구원에 대한 기록을 남겨 주었다. 이 사실은 주의 깊게 "서신을 읽는 자"에게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이 주로 자기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주장하기 위해 서신을 기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의도는 전혀 그들에게 없었던 것이다. 이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일반적인 구원의 혜택을 얻도록 하기 위해 믿고 행하기에 필요한 성령의 감동으로 이루어진 바를 우리에게 충분히 선포한 것이 틀림이 없다.

4. 일반적인 구원을 전하고 기록한 자들은 그것을 훌륭히 행하도록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그들은 어떠한 값을 지불하지 아니하고는 또한 수고와 생각을 드리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에게나 그의 백성들을 위해 헌신할 수 없었다(삼하 24:4). 이것은 하나님을 불손하게 대하며 사람을 부당하게 다루는 일이 된다. 사도는 비록 영감을 받았을지라도 일반적인 구원을 기록하는데 모든 정성을 기울였다. 단지 사람들에게 말로만 가르치고 기록하는데 힘을 쓰지 않는다. 성경을 사용하기는 하나 그 말씀을 해석하고 응용하는 데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하면 마지막 결과는 어떠하겠는가? 거룩한 것을 말하는 자들은 항상 가장 큰 존경심과 조심성과 진실성을 가지고 말해야만 한다.

5. 이 일반적인 구원의 도를 받는 자들은 진정으로 싸워야 한다. "광적"이 아니라 "진지한" 자세로 싸워야 한다. 믿음을 위해 싸우는 자들은 법대로 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수고도 헛될 것이며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다(딤후 2:5).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약 1:20). 진리에 대해 거짓을 말하는 것은 나쁜 일이며 진리에 대한 질책은 더욱 좋지 않은 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인 자들은 그 진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싸울 것인가? 우리는 사도들과 같이 싸워야 한다. 즉 우리들이 주장하는 바 믿음에 대한 기본적인 주장을 당장에 수락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괴롭히지 아니하며 인내로써 대해야 한다.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요소를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엡 4:14). 바울은 많은 싸움으로 복음을 증거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곧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말하였노라"(살전 2:2)라고 말하고 있다. 오직 이는 진실과 정성어린 열심히 그리고 그가 전한 바에 성공이 있기를 기대하면서 이룬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싸움을 이해하려면 사도의 싸움의 대상이 누구이며, 이런 경우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바 부언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Ⅱ. 이런 점에 관한 사도의 기록 목적. 악한 풍습이 좋은 법을 만들 듯이 위험한 실수가 종종 귀중한 진리의 방어를 위한 정당한 근거를 제공한다. 여기서 아래의 몇 가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불신앙적인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교회의 평화에 대한 크나큰 적수가 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부인하거나 모독하며 교회의 평화를 파괴하는 자들은 여기에서 불신앙적인 사람들로 나타나 있다. 가장 바람직한, 참으로 경건한 사람만이 평화 속에서 진리를 소유할 수 있다. 축복은 오직 경건한 사람들에게서만 기대될 수 있는 것이다. 경건치 않은 사람들은 주저와 의혹과 분열과 불화를 조장하며 단순히 자신의 이기적이며 야망적이며 탐욕적인 목적만을 이루기 위해 힘쓰며 애쓰는 자들이다. 이것은 지난날의 모든 교회의 크나큰 병폐로 되어 왔고, 세상이 존속하는 한 이러한 사람들과 이러한 행실로부터 온전히 초연할 수 있는 시대는 없으며, 앞으로도 없지 아니할까 하는 우려가 앞선다. 이 점을 주시해 보라. 교회로부터 우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없어도 그리스도로부터 우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즉 지배적인 불신과 경건치 아니함을 이름이다. 이러한 경향을 지닌 특별한 파당이나 사람들의 생각과 특히 자주 일어나는 바와 같이 가장 작은 흔적도 없이 행하는 불신과 경건치 아니한 행실을 증오해야 한다. 경건치 않은 자들은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이요, 하나님과 양심에 관한 관심이 전혀 없는 자들이다. 우리들이 경건하고 결과적으로 피해야 할 자들은 악을 행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태만의 죄, 예를 들어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억제하는 자, 또는 그들의 사명일지라도 그들이 받기로 되어 있는 호의와 이익을 상실할까 두려워 부한 자를 비난하지 못하는 자,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행하는데 게으른 자들"이다.

2. 경건치 않은 자들의 "가장 나쁜 점은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함을 역이용하여 죄를 범하는데 보다 담대하며 사람들의 죄를 없이하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진 복음적인 은혜가 넓고 충만함으로 오히려 몰인정한 마음으로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놀라운 은혜 아래서 자신의 힘을 키우며, 그 죄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출해내는데 가장 큰 수단이 되는 은혜를 무관심함으로 은혜를 역이용하는 일은 죄인들의 가장 부도덕하며 악한 데로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자들은 결과적으로 "주 하나님과 주 기 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된다." 즉 그들은 자연 종교와 동시에 계시 종교를 부인하게 된다." 그들은 "유일하신 주 하나님을 부인함으로써" 자연 종교의 기반에 타격을 주려 했으며, 동시에 "주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써" 계시 종교의 모든 조직을 뒤엎으려 한다. 계시 종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크신 계획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바도 바로 이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은 결과적으로 주 하나님을 부인하기에 이른다. 계시 종교를 부인하는 일은 결과적으로 자연 종교를 뒤엎는 일이 된다. 그 이유는 계시 종교와 자연 종교는 상호간 존폐관계에 놓여 있으며, 빛과 힘을 불러낼 수 있는 상호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복음 가운데 살고 있는 현대 자연신론자들은 하나님에 대해 이 문제를 심중히 생각하며 자연 종교의 모든 원리와 임무를 원만히 따를 것을 고백하면서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무인가를 주의 깊게, 또한 부지런히 인내를 가지고 시험하고 있다. 계시 종교와 자연 종교에 있어서 어느 일방적인 데만 치우쳐서는 정확한 해답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중 하나를 수락한다든가 또는 다른 하나는 거부하는 일은 불합리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특별히 이러한 경우에 보다 그럴듯한 방법일지라도 일방적인 방법은 양자를 모두 수락하거나 혹은 모두 거부하는 일이 보다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4.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자들은 이 판결을 받기로 되어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가장 위대하며 보다 완전한 구원에 역행하여 죄를 범한다. 아무런 예외도 없이 죄를 감행하려다 이러한 죄로 죽음을 초래케 된 상처와 질고를 지닌 자들은 그 형태가 어떠한 것으로 나타나던지간에 옛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되어 있다. 그러나 만일 번역자들이 ‘팔라이 프로게그람메노이’(1:4)-즉 옛적부터 미리 기록된 말을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으로 이 판결을 받게 된 사람들로 간주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다면, 어디에 손해가 있었는가? 단순한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최강의 힘의 소유자들일지라도 깊이 관여할 수 없고, 많은 손실과 해를 당하지 않고 감수할 수 없는 비난에 대한 어둡고 의혹적이며 혼돈케 하는 사상으로도 침해를 당하지 아니했다. 이러한 미혹하는 자들과 사악한 자들이 일어날 것과 모든 사람들로 그들을 대항해 싸울 준비를 갖추도록 경고가 영감받은 저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5. 가만히 들어온 자들과 같이 믿음을 약화시키며 저버린 자들을 대항하여 믿음을 위해 열심히 싸워야 한다. 그러나 종종 보다 악한 것이 약하고 무리한 사람들에 의해 또는 스스로 그들의 추종자와 숭배자들에 대해 떳떳하다고 생각하는 가만히 들어온 자들에 의하여 더욱 조장되어진다. 분명히 진실하고 겸손한 목회자들은 교우들의 기쁨과 평강과 위로를 더해 주는 자들이다. 즉 그들은 단순히 "성도들의 믿음의 주관자가 아니다." 믿음을 타락시키려는 자들이 누구든지간에 우리는 그들과 대항해 힘써 싸워야 한다. 진리에 속한 우리들을 약탈해 가려는 사탄의 수법과 계략이 더욱 다양하고 교묘할수록 사람들과 집단 혹은 정서면에 해를 주며 상처를 입히는 일이 없도록 항상 주의하는 가운데 더욱 견고히 진리를 고수하도록 해야 한다.

Ⅲ. 사도는 믿음을 고백하고 그 고백한 믿음이 거짓임이 드러난 자들에 대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경고를 하고 있다(5-7절). 여기서는 경고의 대상자들을 일깨워 두려움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한 지난날 죄인들에게 내리신 심판에 대한 기록이 있다. 하나님의 심판은 범법자들에 대한 불쾌한 감정에서 자기보다 "다른 이들을 경고하기 위함"이다. 더구나 현재로는 그 심판을 모면한 자들을 불쾌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하고자"함이다. 이미 안 것을 다시 우리로 기억케 함이다. 그러므로 신앙과 원리에 대한 교훈이 글로써 명백히 또는 가장 평이하게 표현되어 이를 대하는 자는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되어 있을지라도 교회 안에는 뚜렷이 제정된 전도의 필요성이 항상 남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목적과 의도에 대한 각별하고도 자신만만한 어떤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아니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만일 성서가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토록 명확히 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러한 지속적인 전도의 필요성이 어디 있겠는가? "집에 머물러 성서를 말하고 읽음으로 만족하지 아니한가? 영감을 받은 사도는 여기에서 충분히 이에 대한 답변을 하고 있다. 설교는 매시마다 새로운 자이나 이전에 듣지 못한 바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다. 다시 생각나게 하며, 잊어버린 것을 기억나게 하고 우리의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결과적으로 결단에 이르게 함으로 우리의 삶이 우리의 믿음에 부합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있을지라도 아직 보다 명확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알았으나 유감스럽게도 잃어버린 것들이 많이 있다. 이것은 다시 새롭게 기억하는 일이 필요하며,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기억나게 해야 할 자들은 무엇인가?

1. 광야에서의 불신앙적인 이스라엘백성의 멸망(5장). 바울도 이 사실을 고린도 사람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고전 10장). 고린도전서 10장 1-10절의 말씀은 "마치 성서는 항상 서서 자체가 최상의 주석인 것같이, 본 유다서 5절에 대한 가장 훌륭한 설명이 된다. " 놀라운 기적으로 애굽으로부터 인도함을 받은 후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멸망을 당한 이상 누구도 그들의 특권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롬 11:20).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 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 까 함이라"(히 4:1). 그들은 많은 기적을 통해 날마다의 식량 문제를 해결받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은 불신앙으로 멸망당했다. 우리들은 그들보다 우월하다. 그들의 불신앙적인 죄를 우리의 거울로 삼아 항상 주의하자.

2. 우리는 여기서 타락한 천사를 기억하게 된다(6절). "자기의 처소를 떠난" 천사들의 무리가 많다. 우주의 최고 주관자가 그들에게 위탁하고 부여된 신분과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나은 대접을 그들은 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자기 사명에 만족치 않는 자들과 같이). 그들은 "섬기는 자"의 직임으로 "지배자"가 되기를 원했으며 결과적으로 그들의 지배자(하나님)가 곧 그들을 섬기는 자, 그들이 오직 바라는 것만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타락의 직접적인 원인과 동기가 되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자신의 신분을 떠나 하나님, 그들의 창조자 곧 지배가 이신 주 하나님을 반역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높고 귀한 그들을 아끼지 아니하셨고, 그들을 존중하지 아니하셨다. 현명하고 선량한 왕자가 이기적이며 기만적인 신하를 내어쫓듯이 하나님은 그들을 내어쫓으셨다. 보다 현명하고 어진 지상의 왕자들이 그러하듯이 하나님은 그들의 의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무지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은 전능자에 대해 도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 너무나 냉혹하셨다. 그는 그들을 지옥으로 던져 버리셨다. 본래의 위치에서 창조자와 그의 뜻을 따라 그의 종이 되기를 원치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끌려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갇힌 바 된다. " 여기서 타락한 천사들의 상태를 알아보자. 하나님의 능력과 공의에 "묶여" 큰 날의 심판까지 "결박되어" 있다. 마치 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소망이 있다는 듯이 무서운 흑암 속에서 하나님을 대항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빛과 자유는 동시에 일어나며 결박과 흑암은 얼마나 그럴 듯이 서로가 부합되며 일치되는 것인가! 한 때 천사로서 최상의 신분에 있던 마귀들은 갇힌 바 되었다. 여기에서 앞으로 다가올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타락한 천사들은 "큰날의 심판까지 가두어져 있다. " 인간은 그 심판의 날을 피할 수 있을까? 분명히 인간은 그날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독자들은 이 사실을 언제나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그들의 결박은 영원한 것이다. 이는 그들 자신이 이 결박을 풀 수도 또한 피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결박에 단단히 묶여 있게 된다. 하나님의 계명과 공의와 진노가 바로 타락한 천사들이 단단히 묶이게 될 그 결박인 것이다. 이를 듣고 두려워하라. 죽을죄로 싸여 있는 인간들이여!

3. 사도는 여기에서 또다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연상케 하고 있다(7절).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5개 도시(penta polis)의 멸망을 암시한 것으로써 저주받을 자들의 비참한 현상을 불과 유황으로 타오르는 연못으로 나타냈다. 그들은 가장 무서운 죄를 지었다. 일반적으로 일컬어지고 생각되는 정도의 죄가 아니라 가장 증오하고 미워할 만한 죄였다. 그들의 멸망은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주의하고 이를 피하도록 하기 위해"(벧전 2:11),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특별한 경고다. 이러한 정욕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불로써 소돔 사람들을 집어삼키게 만들었다. 지금 그들은 "영원한 불의 심판으로 고통을 받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경계의 채찍이 그들에게 임한 것처럼 당신들에게도 이러한 것이 임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고 그들의 죄를 모방하지 않도록 하라. 그때와 같이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거룩하고 의로우시며 온전하신 존재이시다. 순간적인 세상의 쾌락이 영원한 불의 심판으로부터 오는 당신의 고통을 감할 수가 있겠는가?"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시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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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고한 신앙 고백자들(유 1:8-15)

여기서 사도는 경건한 신앙 고백과 아울러 간계로써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미혹하는 자들에 대해 비난을 하고 있다. 미혹은 꿈이요, 모든 더러움의 시작과 동기가 됨으로 그는 미혹자들을 "더러운 꿈꾸는 자들"이라고 부른다. "죄는 더러움이다. " 죄는 하나님 보시기에 더럽고 추한 것을 인간들에게 남기며 그들 자신이 보기에도 추하게 자신을 만들고, 뿐만 아니라 그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에도 그들은 추한 존재가 되고 만다. "이 추한 꿈을 꾸는 이들은 지상에서 어리석은 환상에 머물게 되며, 드디어는 지옥에 빠진다. " 그들의 성격과 길과 목적을 가지고 우리들을 위한 충분한 경고로 삼자. 그것들은 멸망과 비참의 동기가 됨을 기억하자.

Ⅰ. 미혹자들에 대한 묘사.

1. 그들은 "육체를 더럽히고 있다. " 육체는 바로 처소를 말한다. 이는 종종 격화된 경우에는 매우 추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추한 것들이 육체 안에서나 육체에 반해서 행해졌을지라도 영혼을 더럽히며 불구를 만들고, 또한 상처를 입히게 한다.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고린도 후서 7장 1절에서 우리는 육과 영의 더러움을 발견하게 되며, 이 둘은 각기 다른 종류의 것이나 인간을 더럽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그들은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사실"임을 잊고(롬 13:1), 혼돈된 마음과 선동적인 태도로써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한다. 하나님은 "아무도 훼방하지 말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딛 3:2). 따라서 우리들 위에 하나님이 권위로 세우신 관리들을 비난하고 훼방할 때는 훼방의 죄를 더욱 크게 증진시키는 것이 된다. 그들을 비난하고 훼방하는 일은 하나님 자신을 훼방하는 것과 같다. 만일 우리들이 신앙적인 면에서 세상에 있어서 권위의 당위성을 이해하고 있다면, 이런 훼방자들은 양심적인 권위를 무시하고 비웃으며, 그 권위를 파괴하기를 원하는 자들임을 알게 된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의 법을 무시하듯 하나님의 거룩한 뜻의 계시는 얼마간 그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계시는 믿음과 행실의 표준이 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계시에 대한 설명을 하고 그 계시의 의미를 주위 사람에게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이 본서의 의미를 설명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은 바로 여기에서 언급된 영광을 의미하고 있다고 말한다. "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시 105:15)고 한 시편 기자의 말을 빌어 설명한다. 진실한 신앙을 고백하며 살아온 우리들은 훼방을 받아 왔다. 우리들의 마음에 맞고 우리에게 참되고 고상한 유익을 주며, 우리의 최대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종교일지라도 언제나 그 종교의 대적들에 의해 반대를 받게 된다. "이 파에 대해서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 하더라"(행 28:22).

이 경우에 있어서 "천사장 미가엘"의 예를 들고 있다(9절). 대개 주석가들은 "모세의 시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당황하게 된다. 마귀는 유대인을 유혹해서 새로운 우상을 숭배하도록 하기 위해 모세의 시체를 공개적으로 장례를 치르게 하고 그의 시체가 매장된 장소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지게 했다고 어떤 사람은 생각한다. 스코트 박사(Dr. Scott)는 교회가 신약 성서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일컬어지는 것같이 모세의 시체는 유대 교회를 의미하며 그의 죽음은 유대교의 멸망을 의미한다고 했다. 또 다른 해석도 있으나 여기서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겠다. 이 싸움이 대단히 치열했음에도 천사장 미가엘은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않는 가운데" 승리할 수 있었다. "훼방의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왜 훼방하는 말을 하지 않았을까? 이는 마귀가 두려워서가 아니다. 이러한 논쟁에는 하나님이 격분하시게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꾸짖으심만을 바랬다. 그는 상대방을 욕하거나 조롱하지 않은 가운데 하나님의 대적이나 인간과의 기술적인 논쟁을 시도했다. 모든 논쟁가들에게 대한 지침은 논쟁 중 훼방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진리는 거짓말이나 독설로부터의 어떠한 도움도 요구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미가엘은 이미 마귀에 대해 훼방의 무기를 사용하기는 너무 곤란하였음을 알았기 때문에 마귀에 대해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민수기 20장 7-14절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고 본다. 사탄은 그 당시 모세가 불리한 형편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 미가엘은 이에 대해 담대하게 모세를 변호하는 입장에 서서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 천사장 미가엘은 마귀와 더불어 논박하는 입장에 서고자 하지 않았으며 특별한 문제에 대한 토의를 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는 모세가 자기의 동료 청지기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모세가 마귀에 의하여 모욕당하기를 원치 아니했다. 그는 분개한 가운데 이렇게 외쳤다.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이 말은 예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신 것과 같다(마 4:10). 모세는 고관대작으로서 크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과 칭찬을 받던 사람이었다. 이렇게 높고 고귀한 모세가 사악한 악령에 의하여 악한 취급을 받고 있다고 것은 천사장 미가엘로서는 더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마귀와 그의 추종자들로 인한 비난이 그토록 혹심한 이상 하나님 편에 있는 자를 우리가 지키고 변호해야만 한다고 교훈을 얻게 된다. 높은 위치에 있는 자들의 행위에 있어서 나타나는 과오마다 비난을 가하는 자들은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라는 말을 들어 마땅하다. 경건한 책망은 경솔한 죄인들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3.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한다"(10절). 신앙과 경건을 훼방하는 자들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을 함에도 불구하고 훼방하는 것이다. " 만일 그들이 신앙과 경건에 대해 알고 있다면 그것들에 대해 좋게 이야기할 것이다. 그 이유는 신앙에 대해서는 진실로 선하고 탁월한 것만이 논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건전한 신앙 고백자들에 대해 부당한 또는 정반대의 증언을 하는 일은 참으로 유감된 일이다. 신앙적인 생활은 가장 안전하고 복되며 기쁘고 보람된 삶이다. 한 가지 더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은 대개가 자신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과 사실에 대해 훼방하기 쉽다. 만일 그들이 좀더 잘 알고 있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중상하는 혀로부터 고통을 면할 수 있었을까? 한편 은둔은 정당한 비난으로부터 도피구를 찾게 만든다.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비록 불가능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자연 종교의 기본 원리에 대해 드러나게 또는 은밀한 가운데 상반되지 않는 생활을 함으로 기독교에 대한 완고한 대적을 발견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의 날 모든 것이 나타나 보이게 될 그날에" 낱낱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비록 그들은 종종 자기 자신을 모든 인간들 중에 가장 현명하고 재치있는 것으로 자랑하지만 사도는 그들을 "이성없는 짐승"으로 비유하고 있다.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이 사실은 본능적인 이성과 양심 안에 나타나 있고, 보다 명백하고 공개적이며 하겠고 실한 사실이다. 그들은 본능으로 아는 지식으로 자신을 멸망시키고 격하시키며 추하게 만든다. 그들의 허물이 어떠한 것이든지간에 그 허물은 그들의 이해나 인식에 따른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의지와 무질서한 기호와 허세에 있다. 그들이 억제하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완고하게 증가시킨 사악한 허세에 대항하여 싸울 수만 있다면 그들은 보다 나은 행동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4. 11절에서 사도는 가인을 그들의 추종자로 나타내며 12절과 13절에서는 하나님과 내세에 대해 무관심하고 불신하는 자들을 무신론적이며 이교적인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단순히 세속적 이익만을 추구하며, 후세에 이루어질 것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고 탐욕과 욕심의 사람들이며, 또한 고라와 달려감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반역했다. 사도는 그들에 대한 언급을 계속하고 있다.

(1) "저희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 애찬의 암초요" 애찬(아가파이스, love feast)은 옛사람들에 의해 많이 언급되어졌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성도 가운데 용납되었으며, 그들 가운데 더러운 암초로 남아 있었다. 신앙과 일치하지 못하고 상반되는 마음과 생활을 하면서 신앙을 고백하며 신앙적인 공동체의 일원으로 함께 연합되어 있는 일보다 더 치욕적인 것은 없다. "저희가 곧 암초다. " 조금도 예외없이 이렇게 흠투성이인 자들이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많이 범람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 때가 이르면 쭉정이와 함께 알곡을 거두는 때가 되면 인간의 우둔하고 경솔한 방법으로가 아닌 하나님 자신의 방법에 의하여 암초를 제거하실 것이다. 우리들이 바라고 기대하는 하늘나라에는 이러한 불합리하고 무질서한 일들은 없을 것이다.

(2) "저희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틀림없이 그들은 심한 탐식가들이다. 그들의 풍미와 풍성함으로 자신의 식욕만을 촉진시킨다. 그들은 "네가 만일 탐식자여든 네 목에 칼을 둘 것이니라"(잠 23:2)고 한 솔로몬의 경고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보통 먹고 마실 때도 경건한 조심이 요청되거든 하물며 잔치석상에서는 더하다. 그리고 보통 식사시는 큰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는 일이라도 잔치석상에서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잔치석상에서는 우리 자신을 지키는데 무력하며 더구나 다른 사람을 지켜 주는 데는 더욱 무력함을 알아야 한다. 음식이 풍성한 잔치는 위태로운 함정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3) "저희는 물없는 구름이요, "따라서 가뭄에 비를 약속하나 그 약속을 이행치 못한다. 이는 형식적인 신앙 고백자들을 이름이다. 많은 것을 약속하나 종국에는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이른봄에 핀 꽃과 같다. "바람이 부는 대로 불려 다니는 구름" 같은 저희들은 기초없는 신앙 고백자들이요 모든 유혹자들의 미끼가 되고 있다. 저희들이 알고 있는 것은 전혀 없음에도 저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바가 없다는 사실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와 겸손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바가 적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된다면 세상은 얼마나 더욱 나아지게 될 것인가!

(4) "저희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저희는 하나님의 포도원에 심기워진 나무들이다. 그러나 아무 열매도 맺지 못했다. 주시해 보아야 할 점은 바로 이것이다. 시들어진 나무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어떠한 종류의 열매도 맺을 수 없다.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게" 됨은 맘으로 유감스러운 일인데 일반적으로 이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본문은 이로써 "두 번 죽음을 당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보통 인간의 죽음은 일회적인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고 본다. 죽음이란 우리 모두에게 정해진 바임에도 불구하고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보다 높은 단계로 우리를 중생케 하기까지는 일회적인 사실도 수락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면 여기에 나타난 두 번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저희는 저희의 본능적이며 타락한 상태에서 한번 죽었다. 그러나 저희는 마치 사람이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듯 기독교 신앙을 고백할 때에 다시 회복된 듯 보였다. 그러나 저희의 뚜렷한 위선적인 증거가 드러나므로 또 한 번 다시 죽었다. 그럴 듯 하게 보이기는 했어도 실상은 그들 안에 생명적인 요소는 없다. 마치 더 이상 열매를 기대할 수 없을 때 죽은 나무를 다루듯 이런 나무는 "뿌리까지 뽑아 버리게" 된다. 그들은 "죽고 죽고 또 죽는다. 어찌 땅만 허비할 수 있겠는가?" 아궁이에 던져 버릴 수밖에 없다.

(5) "저희는 거칠은 바다의 물결이다. " 거칠고 시끄럽고 요란하기만 하며 아무 의미도 뜻도 없다. 저희는 보다 훌륭한 판단력과 조용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불쾌한 감정을 자극하는 수치의 거품을 뿜어낸다고 "종국에는 자신의 크나큰 수치와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된다. "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시 25:20, 21)라고 한 시편 기자의 기도는 항상 선량한 사람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만일 지금에 있어서 정직이 하찮은 것이라면 악한 것은 앞으로 얼마 안 있어 하찮은 것이 될 것이다. 거치른 파도는 항해하는 선객들에게 두려움이 된다. 그러나 그들이 항구에 도착해서는 마치 그 파도가 사라지듯이 모두 잊혀지게 된다. 파도의 소리와 위협은 길이 사라지게 된다.

(6) 움직임이 안정되지 못한 "유리하는 별들"은 항상 제 위치를 지키고 있는 별들처럼 고정된 코스를 지키지 못하고, 자리를 변동하므로 사람들은 그 별의 위치를 찾으려고 때로 법석을 떨게 된다. 이 유리하는 별은 항상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함으로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없는 거짓 선생들에 대한 살아 있는 상징이다. 적어도 어떤 중요한 일에 있어서 어떤 점은 필히 견고하게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케 된다. 이는 유한 적인 우리 인간에 비해 절대 무오적인 혹은 허위적인 것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 종교와 정치에 있어서도 가장 큰 논쟁으로 대두되는 것은 민중들에게 마음의 크나큰 고뇌와 고통을 주거나 혹은 거칠고 과격한 감정의 폭발과 자극을 주는 일없이 지혜롭고 선량하여 정직하고 개인의 유익을 꾀하지 않는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확실한 "인내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Ⅱ. 악한 사람들의 최후의 운명은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암흑에 들어갈 자들"이라고 선포되어 있다. 거짓 선생들은 현세와 내세에 있어서 최악의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 이러한 심판을 받을 자는 실수로 정확한 진리가 아닌 것을 전한 사람이 아니라, 어물어물하며 거짓을 위장하고, 그들에게 미끼를 주어 사로잡고, 그들로 이를 삼기 위하여(벧후 2:3) 사람들을 곁길로 이끄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으로 충분하다. 영원히 캄캄한 흑암이란 무서운 표현으로써 거짓 선생들에게 임할 무서운 심판을 나타낼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며 인간의 영혼을 저버리는 자들"에 대해 지나친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표현이 목자들이나 평신도들을 일깨워 주지 못한다면 나는 보다 나은 방법을 알아 낼 길이 없다.

에녹의 예언(14, 15절)에 대한 언급은 성경 중 어느 다른 부분에서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예언이 있었음을 성서는 말하고 있다. 성서의 정확한 원문은 특히 사실에 관련된 것일 경우 우리가 믿어야 할 것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된다. 그러나 믿음에 관한 즉 필요 불가결한 구원의 믿음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다른 방법을 쓰신다. 신약 성경 안에는 여러 번 반복해서 성령이 어떤 일을 하시며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강조하기 위해 모든 기독 신앙의 기본적인 조항이 제정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에녹의 예언은 유대교회의 전통으로 보존되어 왔다고 말한다. 다른 이들은 사도 유다가 직접으로 이 예언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고 말한다. 여하간 옛날 구약 시대로부터 전래되었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이에 관한 고대 예언이 있었음은 확실하다. 이는 신약 성경에 나타난 신조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이점을 유의해 보자.

1. 심판을 위한 그리스도의 강림은 족장 시대의 중반 초기에 이르러 이미 예언되었다. 그러므로 심판을 위한 그리스도의 강림은 일반적으로 수락되고 인정되어진 진리로 전래되었다. "주께서 천사들과 온전한 의인들을 포함한 거룩한 무리들을 이끌고 강림하실 것이다. " 그리스도께서 이 많은 무리들과 함께 강림하실 그 때는 얼마나 영화로운 순간일까? 그는 가장 크고 놀라운 목적 수행을 위해 즉 "모든 무리에게 심판을 내리기 위해" 그의 수행원들과 함께 강림하시리라는 말을 들어 왔다.

2. 오래 전부터 그의 강림은 곧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언되었다. "보라. 주께서 오리라." 곧 임하시리라.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평안히 맞이할 준비를 갖추고 있지 못할 때 임하실 것이다. 그의 강림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1) 악한 자를 "심판하기 위해" 강림하신다.

(2) 그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강림하신다.

이런 점을 기억해 두자. 그리스도는 예고와 시험과 확신 없이는 아무도 징계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확신은 그들로 하여금 침묵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들은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한 어떠한 구실과 변명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모든 입은 닥쳐도 될 것이며, 심판자와 그의 판결은 공평무사하다는 인정과 박수갈채를 받을 것이며, 대담하고 허울 좋은 탄원을 위한 소망도 상실한 채 범인들은 침묵하고 있게 될 것이다. 형무소 안에서 죄수간에 주고받는 재판에 대한 비웃음과 그리고 법정에서의 그들의 형편과는 크나큰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15절과 "경건치 않은"이란 말이 여러 번 나온다. "경건치 않은 자," "경건치 않은 죄인," "경건치 않은 행위," "경건치 않은 일"이라고 해서 4번이나 반복되며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현대인들에게는 경건이나 불경건이란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며, 그러한 말을 비웃고 조롱하기 일쑤다. 심판날에 가서는 사명 수행과 아울러 태만죄도 다루어져야 한다. 근거없이 행하는 혹독한 말은 큰날의 심판을 자처하게 된다. 우리 모두 그때를 기억하자. 선량한 옛 청교도 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만일 당신이 종교 분리 주의자(혹은 이교도)를 때려눕힌다면 하나님은 참다운 성도의 피흘림을 보게 되며, 당신이 그것에 대해 어떻게 대하는 가를 지켜보신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실수였다라고 사자 앞에서 말하기에는 너무나 늦다(전 5:6). 여기에서 나는 영감의 충만된 저자의 표현을 설명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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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권(유 1:16-25)

Ⅰ. 사도는 여기에서 악한 사람들과 미혹하는 자들의 성격을 좀더 언급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16절). 이 점을 유의하자. 원망하며 불만을 토하는데 빠져 급급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가장 나쁜 성품으로 이끌어 간다. 이런 자들은 대부분 약한 사람이며 사악한 무리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법리에 대해, 또한 사람들과 그들의 행위에 대해 원망한다. 그들은 모든 것이 못마땅한 듯이 모든 일에 분노를 품으며, 세상에서 그들의 형편과 처지에 대해 만족해하는 일이 없다. 그들은 "정욕대로 행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뜻과 기호와 도락이 곧 그들 자신의 규범과 법이 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바는 자신의 죄악된 기호만을 즐기는 자들은 통제할 수 없는 자신의 정욕에 매어 사는 자들이란 사실이다.

Ⅱ. 사도는 본서의 수신자들을 위한 주의와 권고를 계속한다(17-23절).

1. 그는 이전에 받은 바 경고를 기억하라고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1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에 의하여 예언된 교회 안에 이미 나타났고 경고된 바 미혹하는 자들을 보고 이상히 여기지 말라"라고 한 바를 기억하라! 이러한 것으로 흔들리거나 넘어지지 않고 오히려 믿음에 굳게 서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점을 유의하도록 하자.

(1) 권고하는 자들은 권고받는 사람들을 진실로 사랑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 주어야 한다. 통렬한 말이나 어법은 어떤 사람도 설득하거나 권고할 수 없을 것이다.

(2) 영감을 받은 자들에 의한 말과 기록을 기억하고 숙고하게 되면 이 말씀은 위험한 죄로부터 보존함을 얻게 하는 최선의 수단이 된다. 사람들이 하나님 자신보다 더 훌륭한 말을 할 수 있도록 배우기까지는 영감을 받은 사람들로 인해 주어진 말씀만이 죽음으로부터 인간을 보존케 하는 최선의 수단이 될 것이다.

(3) 죄와 박해가 교회 안에 성행할지라도 분을 내어서는 안 된다. 이것에 대해서는 이미 예언된 바가 있다. 우리는 성취된 그리스도의 인격과 교훈과 십자가를 우러러보아야 한다(딤전 4:1; 딤후 3:1; 벧후 3:3 참고). 말세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징조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모든 혼란 속에서도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를 보존하시며 그의 약속을 아름답게 이루시며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마 16:16)).

(4) 신앙이 조롱을 당하며 핍박을 당하면 당할수록 우리는 그 신앙을 더욱 견고히 붙들고 고수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시련 가운데 우리는 더욱 견고히 서야 하며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살후 2:2).

2. 사도는 추악한 성품에 대한 묘사로써 미혹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다. 즉 "이들은 당을 짓는 자"들이다(19절).

(1) 육욕주의자들은 가장 나쁜 분리주의자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경건치 못한 생활과 사악한 행실로 자신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로부터 분리시켜 마귀와 세상과 육신으로 옮기게 한다. 이것은 의견이나 혹은 치리와 예배의 양식과 형태를 구실로 하여 보이는 교회로부터 분리해 나가는 것보다 더욱 나쁜 일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마치 분리파로 불리워지는 것 이상에 다른 아무 것도 저주받을 죄가 없는 낙후자에 대해서는 크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비난을 가하고 있으나 전자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2) 육에 속한 사람들은 성령이 없다. 성령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거룩한 성령에 속하였는데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요," 그에게 속하지 않는 자다(롬 8:9).

(3) 더욱 악한 자들이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는 보다 나은 우리 자신을 보여 주도록 힘써야 한다. 바쁜 사람과 그의 추종자들이 사람들을 당황케 하면 할수록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키며, 깨끗한 양심으로 믿음의 비밀을 지킴으로" 우리는 바른 교훈과 선한 행실을 더욱 더 열심히 지켜야 한다(딛 1:9; 딤전 3:9).

3. 사도는 계속 진리와 거룩함에 거할 것을 권고한다.

(1)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20절), 신앙 고백을 견고히 지키는 길은 경건한 믿음을 사수하는데 있다. 건전한 믿음 위에 우리의 기초를 세우고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거룩한 믿음 위에 서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집에 어떠한 재료를 써야 할까를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해야지 나무나 룰 또는 짚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전 3:12). 바른 원칙과 규칙적인 행실은 맹렬한 시련 중에도 시금석으로 남게 된다. 그러나 만일 보다 저질의 비금속을 섞는다면, 아무리 우리가 순수한 자리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손상을 입게 된다. 또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대부분 우리들의 역사는 소멸되고 말 것이다. 또한 만일 우리가 자신을 기피한 다 하더라도 사면에 불이 붙은 집과 같이 크나큰 위험과 곤란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2) "성령으로 기도하며,"

① 기도는 믿음의 유모다.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는" 길은 끊임없는 기도를 계속하는 일이다"(롬 12:12).

② "성령 안에서 기도할 때에" 우리의 기도는 가장 큰 효험을 얻게 된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라 함은 그의 인도와 지도 아래 그의 말씀을 따라 믿음과 열심과 계속적인 인내로 간청함을 뜻한다. 이러한 기도가 성령으로 하는 기도이다.

(3)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21절),

① "당신 안에 생기가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원하거든 계속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유지하라."

②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 당신과 당신이 즐기며 아끼고 사랑하는 것에 몰두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하나님과의 사랑을 계속 유지하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길을 떠나지 않도록 하라."

(4) "긍휼히 여기라."

① 영생은 오직 긍휼로 인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긍휼은 우리의 유일한 바램이요 공로가 아니다. 만일 공로로 인한다면 그 공로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요청할 수도 없었고, 바랄 수도 없었던 것을 우리로 받을 수 있도록 한 눈의 공로를 인한 것이다.

② 이는 우리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공로를 통해서만 아니고, 구속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로 인함이다. 하늘나라에 가는 모든 사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난 갈 수 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이 말씀은 10절의 말씀과 비교해서 생각할 수 있다.

③ 영생에 대한 신앙적인 대망은 죄의 유혹에 대한 무장을 갖추게 한다(벧후 3:14). 소망에 대한 살아있는 믿음은 우리의 더러운 정욕을 제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4. 사도 유다는 죄지은 형제들을 어떻게 취급할까를 지시하고 있다. "어떤 자를 긍휼히 여기라"(22,23절). 이것을 유의하자.

(1) 위태로운 죄와 유해한 행실로부터 구원함을 얻도록 사람들을 마귀의 올무로부터 구해내기 위한 모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유지하는 자가 아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의 위치에서 "형제들을 위한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 가인과 같은 자만이 이 의무를 저버리게 될 것이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 우리는 서로가 주시하며 성실하고도 조심스럽게 서로를 책망하고 모든 이에게 모범을 보이도록 힘써야 한다.

(2) 이러한 일은 "차별을 두는 긍휼을 베풀므로써" 이루어져야 한다. 어떻게 이러한 일을 이룰 수 있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약한 자와 고의적인 자를 구분해야 한다.

① 어떤 자들을 "긍휼히 여기며" 친절히 대하고 그들을 "온유한 심령으로 되돌아오게 하며" 공연히 그들과 그들의 행동을 혹독하게 비난하지 말 것이며, 그들에 대해 교만하고 불손한 태도를 가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들에게 진실한 회개의 희망적인 증거가 명확하게 나타나 보일 때 그들과 화해하며 이전에 그들이 우리에게 가졌던 우정을 확인하는 일에 있어서 옹졸하거나 주저하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셨다면 어찌 우리가 용서할 수 없겠는가? 비록 우리나 그들이 용서를 올바르게 또는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우리의 용서를 필요로 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용서를 무제한으로 필요로 하게 된다.

② 그들에게 "주의 엄위하심을 말해 주면서 어떤 자를 두려움으로 구원하라." "그들로 하여금 죄로부터 뛰쳐나오도록 도와 주라. 그리고 지옥과 그들에게 임할 심판을 전해 주라." 그러나 여기에서 기본적으로 중요히 암시되어 있는 바, 보다 정당하고 엄한 책망을 함에 있어서까지도 그 심각함이 어떠하겠는가? "바로 앞에서 언급한 것보다 더욱 통렬한 예가 요구되는 경우에라도 경솔하고 지각없는 취급으로 말미암아 바로 잡거나 견고하게 하지 못하므로 당신의 선한 의지와 정직한 의도를 설되게 하는 일이 없더록 주의하라!" 우리들은 대개 순수한 것이 확실하다든지, 옳다고 생각되는 경우에 종종 지나치게 행하기 쉬운 경향이 있다. 가장 나쁜 것은 우리들의 태만으로 더욱 강퍅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공연하게 또는 경솔하고도 극단적인 자극을 주는 일이 아니다.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며"란 말은 악이 있거나 그 악이 나타나는 데서부터 항상 먼거리를 유지하며, 다른 이들도 그렇게 하도록 유도하고 이끌어 주라는 의미이다. 악으로 인도하는 모든 것이나, 악의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야 한다(살전 5:22).

Ⅲ. 사도는 크신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의 장엄한 송영으로 이 서신을 맺고 있다(24,25절).

1. 우리가 지금까지 언급한 주제나 논증이 어떠한 것이었든지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표시만이 본서의 결론을 맺는데 가장 적합한 것이다.

2. 우리를 "거침없게 하시며 하나님의 영광 앞에 흠없이 우리를 서게 하심"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으시며, 또한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죄를 짖지 아니한 자들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피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게 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게 된다. " 이런 점을 유의하자.

(1) 주의 영광은 머지 않아 나타나게 될 것이다. 지금은 주의 영광은 멀리 있는 것으로 보며, 내다보지만 그러나 그의 영광은 임할 것이며, 밝히 드러나 보이게 될 것이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계 1:7),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이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그를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위로와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과 놀램으로 대면하게 될 것이다(벧전 1:8 참조).

(2) 주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모든 진실한 성도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칭찬과 인정과 상급을 얻기 위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아들에게 주어진 자요, 그에게 주어진 자 중 어떤 사람, 어느 한 영혼도 잃어버리지 않고, 그가 그의 나라를 그의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 그의 아버지 곧 우리 아버지께 바칠 때에 그들을 온전히 거룩하고 복되게 나타내실 것이다(요 6:39; 17:12; 고전 15:24).

(3) 성도들이 흠없이 나타나게 될 때 그것은 놀라운 기쁨이 될 것이다. 아! 지금 우리의 죄는 우리 안에 공포와 의심과 비애를 가득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우리가 진실하기만 하다면 우리의 사랑하는 구주께서 우리를 흠없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죄가 없는 곳에는 슬픔이 없으며, 온전한 거룩함이 있는 곳에 온전한 기쁨이 있게 된다. 확실히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고 또한 이루시게 될 하나님은 본문에 묘사된 바 "영광과 위엄과 권세를" 만세 전부터 이제와 저세에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이렇게 이루어질 사실에 대해 사도와 더불어 우리의 모든 마음을 걸어도 좋을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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