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5.27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신망애.항기쉬기범감.평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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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hea;(157, 아헤브) 

사랑하다 love, 좋아하다 like, 사랑스러운 lovely

동사 아헤브는 '사랑하다, 좋아하다'를 의미하며, 그 의미의 강도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무한한 애정에서부터 게으른 대식가의 육체적인 식욕에까지 이른다. 이 동사는 칼 어간의 모든 법(mood)과 니팔 분사형, 그리고 피엘 분사형으로 나온다. 16회의 피엘형은 강의적인 것이 아니라 대개 부정한 '연인' lover을 가리킨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00회 이상 나온다.

구약성경에서 사랑은 그 사람을 강요하여 그가 좋게, 또는 올바르게 평가하거나 인정하는 사물이나 사람에게로 이끌어 가는 자발적인 힘이다. 

--사람은 이 사랑의 힘에 제어를 받아 자기 자신을 주거나 혹은 사랑의 원인이 되는 대상을 확고히 붙잡거나 혹은 즐거움을 주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사랑은 내적 인격에 심은 영혼의 불가해한 힘이다. 

--사람이 사랑의 대상을 올바로 인정하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한다(신 6:5). 

사랑과 미움은 생의 양극이다(전 3:8, 전 9:6). 사랑은 인간 상호간의 사랑, 하나님의 인간과의 사랑, 사물에 대한 사랑 등을 나타낸다.

(a)  이 단어는 남녀의 사랑에 대해 사용되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하나님과 관계, 그리고 남녀의 성적 관계를 시사해 준다.

이 남녀의 사랑은 이성(sexes) 상호간의 생명력 넘치는 충동을 의미한다. 

선지자 예레미야(렘 2:25)나 호세아(호 3:1, 호 4:18), 그리고 에스겔(겔 16:37)은 사랑의 성적(sexual) 측면을 매우 진하게 묘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단어는 남녀의 연애나 열애(창 29:18이하, 창 34:3, 삿 16:4), 합법적인 부부의 행복한 사랑(창 24:67, 삼상 1:5)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창조의 기사는 성의 구별과 부부간의 사랑이 생을 풍요하게 하는 은사임을 설득력 있게 이해시켜 준다(창 2:18이하).

그러나 이 사랑은 성적 사랑의 범위를 포함하지만 그것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헌신적 사랑과 생활의 충실함이 합쳐져 있다. 

구약의 초기 기록에 의하면 이러한 사랑은 일부다처나 일처다부 사상과 부합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은 충실(참조: 창 20:13, 삿 14:16, 삿 16:4-5, 겔 16:8, 겔 23:17, 호 3:1), 상호의존(참조: 창 24:67), 책임(참조: 삼하 13:1, 삼하 13:4, 삼하 13:15)과 같은 인간 사랑의 다른 측면을 제외하고 성적인 것에 집중하는 위험을 이해시켜 준다(The interpertreter's D.B).」

더 나아가서 아가서는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라고 열정적인 사랑의 강력한 힘을 찬양까지 한다. 이 노래는 성적(남녀) 사랑의 기이함과 적극적인 힘을 찬양하지만 그 찬양에는 그 사랑이 근거를 두고 있는 상호의존과 신앙심(헌신)을 강조하고 있다(참조: 아 2:16, 아 3:1-8, 아 7:10, 아 8:6-7). 

아가서에서 사랑을 묘사할 때 거의 대부분 아헵(아가파오)과 아하바(아가페)를 사용했다. 

그러나 여자가 남자를 부른 칭호는 도드(d/D , 1730, 사랑하는 자)를 사용했다.

이러한 [전존재 기울여 내어주며 헌신하는]사랑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암논과 다말의 이야기는 성충동의 야수성, 즉 대상자와 성적 관계를 가지려는 무절제한 요구를 보여준다(삼하 13:1-22). 

[아헤브, 아가페]사랑은 성애 또는 성욕적인 영역에서조차 세상이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근원, 곧 마귀로부터 기인한 원시적 부정적 힘인 미움을 부인함으로 맞서는 적극적인 능력이다. 

이 이야기는 이 두 가지 충동의 야수성도 투명하게 보여준다(삼하 13:1-22). 

결혼이나 부부 생활은 상대에 대한 사랑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 

삼손의 신부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치 아니하는도다"라는 히스테릭한 말에서(삿 14:16, 참조: 삿 16:15, 창 29:31, 창 29:33) 동일한 요소가 표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심지어 법까지도 사랑과 미움의 성욕적 증상에 관여하고 있다(신 21:15이하, 신 22:31이하, 신 24:1이하).

아헤브가 '사랑의 행위를 하다'(일반적으로 이것은 야다<알다>나 샤카브<~와 함께 눕다>로 표현된다)라는 뜻을 가지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그러나 왕상 11:1에서 이 단어는 이러한 부가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참조, 렘 2:25).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바를 기록할 때, 이러한 의미를 사용하였다: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호 3:1). 이 단어의 이런 의미는, 이 동사가 사역동사의 어간(분사로서)으로 나올 때 현저하게 나타난다.

(b)  이 단어는 부모와 자식, 가족간의 사랑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사랑했으며(창 22:2), 리브가는 아들 야곱을 사랑했다(창 25:28). 

야곱은 요셉과 베냐민을 사랑했다(창 37:3, 창 44:20). 

잠언은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경계하느니라"고 했다(잠 13:24).

또한 이 단어는 며느리의 시어머니를 향한 사랑과 같은 가족간의 사랑을 표현한다(룻 4:15).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은 어느 곳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부모를 존중하고 존경하며 또 부모에게 복종해야 한다.

참고 - 창 47:29에 보면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인애(헤세드: 친절, 자비)란 단어를 사용하여 자기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기를 요청했다. 

이것이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족속이나 가족의 유대는 이스라엘에서 매우 강하였다. 그러므로 '근친' 관계의 중요한 요소인 사랑에 대하여 놀랄 일이 아니다. 

그것은 룻 3:10에서 이성 곧 남녀 사랑과 관련되어 있다. 그곳에서 인애(헤세드: 친절, 자비)는 남녀 사랑의 개시와 가까운 친족에 대한 충실, 이 둘을 포함하고 있다.」

성경은 가족적 사랑이 너무 선택적일 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다(창 25:28). 그 결과로 야곱과 에서가 서로 반목하고 미워하게 되었다. 

요셉에 대한 야곱의 편애로 인하여 다른 아들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하게 되었다(창 37:4). 배타적인 사랑은 증오가 들어올 수 있는 지점이 될 수 있다. 이는 사랑이 헌신적일 뿐만 아니라 책임을 다 해야 하기 때문이다.

(c)  아헤브은 때때로 종이 그 주인의 지배하에 남아 있기를 원하는 주인에 대한 특별하고도 강한 애착심을 나타낸다. 

출 21:5에 보면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라고 한다. 

아마 여기에는 가족애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아들이 그의 아버지를 사랑하듯이 종이 그의 주인을 사랑한다(신 15:16). 

이러한 의미가 강조되는 구절로는 삼상 16:21이 있는데 여기에는 사울이 다윗을 크게 사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을 사랑하고(삼상 18:16) 심히 존경하게 되어 그의 모든 행동들을 경탄으로 바라보았다.

(d)  이 단어는 친구의 특별한 애착을 나타낸다. 

다윗과 요나단 사이의 사랑은(삼상 18:1, 삼상 18:3, 삼상 20:17) 여인의 사랑보다 더 깊은 우정의 차원이었다 -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삼하 1:26).

(e)  아헵은 정치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솔로몬이 기름 부음을 받고 그 부친을 이어 왕이 되었다 함을 두로 왕 히람이 듣고 그 신복을 솔로몬에게 보내었으니 이는 히람이 평일에 다윗을 사랑하였음이라"(왕상 5:1). 

다윗에 대한 히람의 "사랑"은 두 사람 사이의 국제적인 우호 관계나 화해 정책을 예증하는 것이다. 

후자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그것이 그가 지극히 충성스러웠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f)  더 나아가 이 사랑은 사회적 공동 생활의 근본과 규범으로 나타난다 -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 19:18). 

이러한 면에서 사랑은 이웃을 위한, 그리고 이웃을 향한 헌신이며, 이웃을 형제로서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웃이 당연히 받아야 할 대우를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특히 외국인(레 19:34)과 가난한 자(레 25:35)와 고아의 권리와 관련된 사회적 법률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이웃 사랑은 단순한 친절이나 호의로 해석할 수 없다. 이것은 편협한 배타주의를 배제한다. - 바로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웃이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적(enemy)으로 생각되는 것 같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의미한다.

그 이유로 신 22:1-4이 동포를 도울 의무를 부과하는 것인 반면, 출 23:4-5은 특별히 이 의무를 적대적인 사람에게 적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웃은 동료일 수도 있고 적일 수도 있으므로, 그는 사랑의 대상이지 법적 제한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개인은 법적 개인보다 우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형태에서 출 23:4이하의 요구와 아마도 한층 더 높은 수준인 잠 25:21에 있는 기본적 진술("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은 원수를 향한 성향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으나 한 특별한 방식의 행위의 의무를 지우는 것으로서,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적으로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요셉은 그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선으로 악을 갚는 그런 실례를 보여준다(창 50:19).

물론 구약성경에는 이러한 원수를 사랑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시 109편과 잠 14:20 및 적대 국가들에게 향한 일반적인 태도는 이에 대한 예증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해 부과된 윤리적인 요구의 고결함은 여전히 존재한다.

(g)  이 단어는 구체적인 것이나 추상적인 것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기름(잠 21:17), 은과 풍부(전 5:10), 뇌물(사 1:23)을 사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악(시 52:3-5), 사망(잠 8:3), 허사(시 4:2-3), 거짓 맹세(슥 8:17)를 사랑했다. 

또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시 119:47), 율법(시 119:97), 증거(시 119:119), 법(119:159), 그리고 그들은 선(암 5:15), 진실과 화평(슥 8:19), 구원(시 40:16-17)을 사랑했다.

(h)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기를 "사랑하라"고 명하셨다(신 6:5). 

그리고 시편에는 이 계명에 대한 순종의 증거들이 포함되어 있다(시 116:1, 시 145:20). 

반대로 하나님은 사람들, 특히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신 4:37, 사 43:4, 말 1:2). 

주님은 또한 시온의 문들(시 87:2), 정의와 공의(시 33:5), 성전(말 2:11)과 같은 것들을 "사랑하신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한다(수 22:5). 예레미야는 이 백성이 방황하기를 좋아한다고 질책하였다(렘 14:10).

(i)  이 분사형들은 종종 '친구' friend로 변역되곤 한다. 

대하 20:7에 보면, 아브라함은 주의 "벗"이라고 한다.

(j)  위에서 지적하였듯이 피엘형 분사를 번역한 영어 단어 "lover" (연인)는 종종 매춘을 암시하는 경멸적인 뜻을 함축하고 있다. 

선지자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등은 이스라엘의 부정한 관계를 언급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한다. 호 2:7, 호 9:12, 겔 16:33, 겔 16:36-37, 렘 22:20, 렘 22:22, 렘 30:14, 애 1:19, 슥 13:6 등). (참조: R. L. Alden; Nelson's ED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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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539, 아만) 확실하게 하다, 지지하다, 충실하다, 믿다

아만(동사)은 기본어근이며 '확실하게 하다, comfirm, 지지하다, 기르다 support, 충실하다, 신실하다, 성실하다 be faithful, 믿다, 신뢰하다 believe, trust'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10회 나오며, 칼, 니팔, 히필형으로 사용되었다.

성경 교리에서 매우 중요한 이 단어의 개념은, 이 단어에 대한 많은 대중적 개념과 대조 구별되는 '믿음'(faith)의 성경적 의미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제공해 준다. 이 어근의 의미는 핵심에는 '확실성'(certainty)의 개념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히 11:1 나타나 있는 신약성경의 믿음에 대한 정의에 의해서 확증된다.

이 어근의 기본적인 개념은 '확고함'(firmness)이나 '확실성'(certainty)이다.

1. 칼형에서 이 단어는 '지지하다, 기르다'를 의미한다.

왕하 18:16에서 이 단어는 '버팀 기둥'을 묘사한다. 에 2:7에서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자기 딸같이 양육했다. 민 11:12에서 "양육하는 아비", 룻4:16에서 아기의 "양육자"를 묘사한다.

2. 히필형에서 이 단어는 '확실하게 하다' 혹은 '~에 대해 확신하다', '보증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런 점에서, 히필 동사 변화에서의 이 단어는 '믿다'를 의미하며, 성경에서의 믿음은 '보증' assurance, '확실성' certainty으로서, 이는 믿음을 있음직하고, 아마도 참되긴 하지만 확실치 않은 어떤 것으로 보는 현대의 개념과 대조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로부터 이 단어는 '확립된 사람' 혹은 '굳혀진 사람' 즉 '충성된 자'(삼하 20:19, 시 12:1, 시 31:23)라는 수동적인 의미로 사용된 칼의 수동 분사형으로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3. 니팔형에서 '확립(확정)되다'를 의미한다(삼하 7:16, 대상 17:2, 대상 17:3, 대하 6:17, 사 7:9).

'신실하다, 충실하다, 확실하다, 신뢰할만 하다'를 의미하며, 분사형에서 신자들을 나타낸다(민 12:7, 삼상 2:35, 느 9:8). 이 어형은 또한 모든 확실성의 근거가 되는 것, 즉 하나님 자신(신 7:9), 그리고 그의 언약(시 89:28)을 묘사하는데도 사용된다.

'믿음'과 '견고한 것' 사이의 관게에 관한 흥미있는 한 가지 실례는 사 7:9에서 발견된다: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라도 육십 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아하스는 만일 그가 믿지(히필형) 않는다면, 그가 견고히 서지(니팔형) 못한다. 즉 믿음이 없이는 그가 안정되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런 파생어들도 확실성과 신빙성에 대한 똑같은 개념을 반영해 준다. 파생어 아멘(진실로 verily)은 신약성경에서 아멘이란 말로 받아들여져서 오늘날의 영어 단어 'amen'이 되었다. 예수님은 어떤 문제의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하셨다(마 5:18, 마 5:26 등). 이 히브리어 어형과 헬라어 어형은 기도와 찬양송의 끝에 온다(시 41:13, 시 106:48, 딤후 4:18, 계 20:20 등). 이것은 우리의 기도에서 이렇게 사용된 이 용어가 우리가 기도드리는 주님에 대한 확신을 표현하는 것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참조: J. B. Scott;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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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j'y:(3176, 야할) 기다리다, 기대하다, 바라다

야할(동사)은 기본어근이며, '기다리다, 기대하다 wait, 바라다, 희망을 하다 hop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0회 나오며, '니팔, 피엘, 히필형으로 사용되었다. 70인역본에서 이 단어는 '바라다 hope'를 뜻하는 엘피조와 에펠피조로 번역한다.

야할은 니팔형으로 사용된 세 가지 용례들에서, '짧은 기간동안 기다리다'라는 단순한 개념을 지닌다. 예를 들면 노아는 비둘기를 보내기까지 "또 칠일을 기다렸다"(창 8:12). 겔 19:5에서는 "암 사자가 기다리다가 소망이 끊어진 줄을 알고 그 새끼 하나를 또 취하여 젊은 사자가 되게 하니"라고 했다.

이 개념은 또한 피엘형(욥 14:14)과 히필형(삼상 13:8)으로도 표현된다.

그렇지만 야할은 신자들에게 있어 '믿음, 신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결국 '인내심 강한 기다림'을 야기시키는 '기대' expectation, '소망' hope에 대해 사용되었다. 기대의 의미는 긍정적인 것이다. 즉 미래에 좋은 일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겔 13:6은 백성들이 거짓 선지자들의 공언에 의지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적절한 예이다: "사람으로 그 말이 굳게 이루기를 바라게 하거니와". 이 문구는 문자적으로 '그들이 그들의 말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속임으로, 그들이 스스로 속아 실제로 어떤 성취를 기대하고 있다.

시 71:14에서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라고 한다. 야할이 좋은 것을 나타낼 때, 70인역본에서 주로 '엘피조' 즉 '바라다'로 번역되었다.

이 야할(바라다 hope)은 고통을 없애주는 상상의 진정시키는 소망도 아니며(희랍 개념에서처럼) 불확실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야할(바라다 hope)은 의인에게 있어 기대의 확고한 근거이다. 이렇게 이것은 하나님께로 향해있다. 시편기자는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히브리어 헤세드)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시 130:7, 참조: 시 131:3)고 명령한다.

절망의 때에,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격려한다(시 42:5, H6, 또한 시 42:11, H12, 시 43:5).

그렇지만 이런 확신에 찬 기대에 대해서는, 욥이 "그가 나를 죽이신다 하더라도 내가 그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고 외치는 대목보다 더 잘 증거해 주는 것은 없다(욥 13:15). 그렇지만 ASV와 RSV는 이 구절을 "보라 그가 나를 죽일 것이니 나는 소망이 없다"(한글개역 -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라고 번역한다. 이것은 70인역본과 다른 역본들에 의해 뒷받침되는 케레(Qere) 대신 마소라본문의 케딥(Kethib) 독법을 따른 것이다. 이 경우에 욥의 성급함은 그가 여호와를 '인내하면서 기다리기를' 거부하였음을 나타내 준다: "내가 무슨 기력이 있관대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관대 오히려 참겠느냐"(욥 6:11).

그렇지만 야할(바라다 hope)은 바타흐(신뢰하다 trust)나 카와(기다리다 wait for, 바라다 hope for)와 의미가 비슷한 동의어이다. 예를 들면 미 7:7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마지막 어구는 죄가 심판 당할 때, 하나님의 미래 행동에 대한 의인들의 확신을 분명하게 나타내 준다. 그러나 더욱이 이 절은 믿음의 근거이신 여호와 자신만을 숙고할 뿐만 아니라 그의 하나님의 구원 활동도 숙고하고 있다. 짧게 말해서, 바랄 것은 인간의 상상에서 생겨난 어떤 요구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과 그가 이루도록 제안하실 모든 것이다. 우리는 롬 8:28-29에 표현된 바와 같이, 기독교인의 확신을 상기하게 된다. 즉 경건한 사람은 확신에 차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할 것이다. 예를 들면, "주를 경외하는 자가 나를 보고 기뻐할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연고니이다"(시 119:74).

시편기자는 주의 규례(시 119:43), 주의 말씀(시 119:81, 시 119:114, 시 119:147, 시 130:5)을 바란다고 고백한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적 사랑에 대해서도 확신할 것이다. 예를 들면,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헤세드)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시 33:18),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애 3:21),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애 3:24) 등이다.

"소망"은 현재 문제로부터의 구원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종말론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궁극적인 구원을 "바라는 것"은 모든 고난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전능한 도움을 약속하신 사 51:5을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내 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섬들이 구원자의 오심을 앙망하는 것은 그가 그들을 구속하시고 구원할 능력 있다는 소망의 믿음을 소유하고 있음을 말해준다(참조: G. RAWLINSON).

미 7:7에서는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야할 즉 "바라보나니"는 간절한 믿음으로 구원의 하나님을 기다릴 것인데, 하나님이 지체하신다 해도 이 믿음은 무너지지 아니할 것이다. 믿음이 있으면 소망도 있는 것이다(참조: W. J. DEANE).

(참조: P. R. GILCHRIST;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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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y:(3372, 야레) 두려워하다, 무서워하다, 경외하다

야레(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두려워하다, 무서워하다, 경외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330회 나오며, 칼, 니팔, 피엘형으로 사용되었다.

야레의 성경적 용법은 다섯 가지 의미의 영역을 가진다.

(1)  두려움의 감정,

(2)  감정적인 반응에 강조점을 두지 않는, 악에 대한 지적인 예상,

(3)  존경이나 경외,

(4)  의로운 행동이나 경건,

(5)  형식적인 종교적 예배.

(a)  칼형에서 감정적인 반응으로서의 두려움에 관한 전형적인 예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시내산의 불을 보고 유대인들이 두려워 한 것(신 5:5), 유대인들이 블레셋인들의 동원 소식을 듣고서 미스바에서 두려워한 것이다(삼상 7:7).

다른 예들은 반드시 감정적 반응을 지적할 필요가 없는 악에 대한 예상을 더 강조한다. 다윗이 아기스 궁전에서, 그의 명성이 그에게 위험이 되었다고 생각한 그 인식은(삼상 21:13,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 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자기 가족이 자기 자신에게서 빼앗겨질지도 모른다는 야곱의 예상과 부합하는 하나의 실례이다: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말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창 31:31).

이 두 용법은 위로의 어구나 인사말로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부정 명령을 사용할 때 고려된다(예: 창 50:19, 창 50:20). 이런 경우에 야레는 하나 혹은 그 이상이 동의어들과 병행하여 자주 사용된다(예: 하타트: 타락하다, 아라츠: 놀라다). 이와 비슷한 주제는 안전을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정의하는 것이다(예: 시 56:4).

앞에 기록되어 있는 세 번째 용법의 예들은 많이 있다. 이런 존경은 어떤 사람의 부모(레 19:3), 거룩한 곳(레 26:2), 하나님(시 112:1),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시 86:11)에 기인한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하박국의 "두려움"(합 3:2)과 욥의 고난을 바라보는 그의 친구들의 두려움은(욥 6:21) 이런 종류의 두려움으로 간주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몇몇 구절들에서, "두려움"과 그에 상응하는 삶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므로 실제의 동의어 개념들이다(레 19:14, 레 25:17, 왕하 17:34, 신 17:19). "두려워하다"를 의로운 삶을 뜻하는 실제적인 동의어로 보는 이 용법이 - 앞에 나오는 어떤 의미로든지 간에 - 의로운 삶을 산출해 내는 동기로서의 "두려움"을 고찰하는 데에 생겼다는 사실은 그럴듯하다. 이런 실제적이고 능동적인 두려움은 애굽 산파들이 그들의 두려워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은 그런 종류의 두려움이다(출 1:17, 출 1:21). 이런 종류의 두려움은 율법을 읽음으로써 가장 적절하게 알게 되었다(신 31:11-12). 되풀이하여, 강조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관련된 인간의 의로운 행동은 나그네나 체류자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다(예: 신 10:18-20, 참조: 신 25:18).

형식적인 종교적 예배로서의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가장 분명한 예는, 제사 예배에 대해서는 여호와를 "두려워" 하지만(참조: 왕하 17:32-34), 그의 율법에 의로운 순종을 하였는가의 측면에서는 여호와를 "두려워" 하지 않은 북 왕국의 종교 혼합주의자들을 묘사하는 데에 나온다. 신 14:22, 신 14:23에 언급된 형식적 제사 요소들은, 이것이 배워지는 그런 종류의 두려움임을 이 문맥에서 시사해 준다. 앞의 논의와 수 22장의 문맥에 비춰볼 때, RSV가 이 구절에서 '두려움' fear을 '예배' worship로 번역한 것은 아마도 옳을 것이다(신 22:25).

'두려워하는 것'이 '열성가나 추종자임'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는 몇몇 구절들이 있다. 이 용법은 앞의 네 번째 용법이나 다섯번째 용법을 반영해주는 것 같다. 추정되는 동사의 예들은 욥 1:9과 대하 6:33에서 발견된다.

여러 종류의 두려움이 여러가지 인간의 행위(삼상 7:7, 삼상 15:24)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행동(출 14:31, 수 4:23, 수 4:24, 삼상 4:7, 삼상 4:9), 심판(사 59:18, 사 59:19),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신 4:10)에 의해 야기될 수 있다.

(b)  니팔형에서 이 단어는 수동적으로 '두려워하게 되다, 경외하게 되다'를 의미한다(시 130:4).

니팔 분사형은 '무서운' terrible, '두려운, 경외하는 awesome, 혹은 '무서워하게 하는' terrifying과 같은 것들을 묘사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었다. 이것은 '두렵게 되다'의 니팔분사형의 동명사적 특성의 좋은 예이다(GKC, 116e). 이것은 장소(창 28:17), 하나님(출 15:11), 하나님의 이름(신 28:58), 하나님의 행위(출 34:10), 백성(사 18:2), 그리고 주의 날(욜 2:31, H3:4)을 묘사한다.

(c)  피엘형에서 이 단어는 '두려워하게 하다, 무섭게 하다'를 의미한다(삼하 14:15, 느 6:9, 느 6:14, 느 6:19, 대하 32:18).(참조: A. BOWLING;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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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vsti"(4102, 피스티스) 믿음 faith.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피스티스(Hes., Hdt.이래)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a)  피스티스는 '신뢰, 확신, 확실성, 확고한 확신'을 의미한다.

(b)  피스티스는 사람이 가지는 확신 뿐만 아니라 사람이 향유하는 확신, 즉 '신뢰할 수 있음, 의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차이가 있을지라도 확실성이나 신뢰성과 관련되어 있다.

(c)  피스티스는 신뢰의 가능성, 의지할 수 있는 것을 보장하는 '보증, 증명, 증거, 신실성'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피스티스는 70인역본에서 약 55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에무나(경고, 충실, 성실, 확고부동의 믿음)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피스티스는 신약성경에서 약 23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피스티스는 '신실성, 신뢰성'을 의미한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롬 3:3; 딛 2:10; 갈 5:22; 살후 1:48.

(b)  피스티스는 '엄숙한 약속, 서약'을 나타낸다: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딤전 5:12).

(c)  피스티스는 '증거, 보증'을 의미한다: 행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딤후 4:7.

(d)  피스티스는 '신뢰, 확신, 믿음'을 나타낸다.

① 하나님에 대하여, 막 11:22; 벧전 1:21; 히 6:1; 살전 1:8; 롬 4:5; 롬 4:9; 롬 4:11-롬 4:13; 롬 4:16; 롬 4:19이하 등.

② 그리스도에 대하여, 마 8:10; 마 9:2; 마 9:22; 마 9:29; 마 15:28; 막 2:5; 마 4:40; 마 5:34; 마 10:52; 눅 5:20; 눅 7:9; 눅 7:50; 눅 8:25; 눅 8:48; 눅 17:19; 눅 18:42. 롬 3:23; 롬 3:26; 갈 2:16; 갈 2:20; 갈 3:22; 엡 3:12; 빌 3:9; 약 2:1; 계 14:12.

(e)  피스티스는 '신앙의 내용, 교리'를 나타낸다: 유 1:3, 유 1:20; 롬 1:5; 갈 1:23; 갈 3:23이하; 딤전 1:19; 딤전 4:1, 딤전 4:6; 딤전 6:10; 딤후 2:18; 롬 12:6; 딤후 4:7.

(참조: Walter Bauer; A.Weiser; O.Mich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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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jlpiv"(1680, 엘피스) 소망 hope, 기대 expectation.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엘피스(Homer 이래)는 엘포(ejlpw: 바라다, 기대하다)에서 유래했으며, '기대, 희망, 소망'을 의미한다.

(a)  일반헬라어에서 엘피스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소망'(hope)이라는 단어와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흉사(두려움)나 길사(소망)에 관계없이 모든 종류의 미래사에 대한 예상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단어이기 때문이다. '좋은, 밝은, 기쁜'과 같은 형용사와 더불어 소망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기도 했다.

(b)  플라톤은 인간 존재는 단순히 현재를 수용하고 과거를 회상하는 것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간에 미래에 대한 기대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한다. 소망(희망)은 미래에 대한 주관적 계획이다. 엘피스는 좋은 소망에 대해서도 종종 사용되었다. 헬라인들에게 있어 소망은 절망 가운데 위로를 뜻했다. 그러나 이 소망은, 이 소망의 근거를 학문적 탐구에 두었던 현자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만적이고 불확실한 것이 되기도 한다.

(c)  플라톤에게 있어서, 소망 안에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을 향한 충동이다. 소망은 현재의 삶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신비종교는 사후의 복된 삶에 대한 약속과 더불어 소망에 기초하며, 소망은 믿음과 진리 그리고 에로스와 더불어 진정한 삶을 이루는 요소들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신비종교들이 약속하는 신격화와 불멸은 인간의 허무한 몽상이었다.

(d)  세상적인 소망도 중요하다. 제우스는 소망을 주며, 아우구스투스는 옛 소망을 완성하며 새 소망에 불을 붙인 자로 찬양을 받는다. 그렇지만 스토아 학자들은 소망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예를들어 에픽테투스는 이 어군을 기대의 의미로만 사용하고 소망은 미래에 대한 주관적인 계획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멀리해 버린다(R.Baltmann).

2. 70인역본의 용법 

엘피스는 70인역본에서 약 100회 이상 나오며, 17개의 히브리어를 번역하는데, 주로 히브리어 바타흐 어군, 티크와를 번역한다. 엘피스는 70인역본에서 '소망, 신뢰, 안전'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엘피스는 신약성경에서 53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엘피스의 의미.

신약성경에서 엘피스(및 동족어)는 헛된 기대나 두려운 예상을 전혀 나타내지 않고 항상 어떤 좋은 것에 대한 기대를 나타낸다. 수많은 구절들에서 엘피스는 인간의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 소망이 지향하고 있는 구원의 객관적인 유익을 나타낸다(갈 5:5; 골 1:5; 딛 2:13). 이 동사나 명사가 수식 없이 독립적으로 사용되는 곳에서는 대개 종말론적 성취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롬 8:24; 롬 12:12; 롬 15:13; 엡 2:12 등).

신약성경의 모든 증거들은 약속된 그리스도의 도래를 통해 구약성경의 소망이라는 특유한 표현으로 상황이 근본적으로 변경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구속자 안에서 세상의 구원의 날은 하나님의 위대한 "오늘"로 나타났다. 전에는 미래였던 것이 이제 구속자 안에서 믿음으로 인하여 현재가 되었으니 곧 의롭다 함이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그의 자녀라는 관계요, 성령님의 내재하심이요, 이스라엘과 열방의 신자들로 구성되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된 것이다. 구원의 현존은 요한복음에서 실현된 종말론 가운데 가장 강하게 강조된다. 따라서 엘피스(elpis)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에 나오지 않는다. 새로운 상황 때문에 신약의 소망은 내용과 근거에 있어서 모두 새 형태를 취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그리스도를 기다린다.

(b)  소망은 믿음과 사랑과 함께 기독교인의 기본 요소를 형성한다(살전 1:3; 고전 13:13). 이 요소들 중 어떤 한 요소라도 다른 두 요소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이는 소망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만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소망이 없으면 믿음 자체도 공허하고 무익한 것일 뿐이다(참조: 고전 15:14, 고전 15:17).

이 때문에 이것은 산 소망이라는 중생으로 묘사될 수 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3).

엡 2:12에 의하면 이전에 우리는 세상에서 소망이 없었다. 물론 이방에도 형이상학적인 미래에 관한 사상이 있었으나 죽음의 공포로부터 안위와 해방을 주는 소망에 대한 사상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가진 것이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

(c)  소망의 본질적 특징은 세가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① 소망의 내용-소망은 절대로 자기 중심적이 아니고 항상 그리스도와 하나님 중심적이다. 그 본질은 개인의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우주적인 왕의 통치로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는 "만유의 주가" 되시는 것이다(참조: 고전 15:28). 부활은 엔 사르키(en sarki: 육체 안에)나 또는 카타 사르카(kata sarka: 육체를 따라)로 생명을 되찾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통하여 엔 프뉴마티(en pneumati: 성령 안에서)와 카타 프뉴마(kata pneuma: 성령을 따라)로 받은 생명의 완성이다(참조: 롬 8장). 왜냐하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기" 때문이다(참조: 고전 15:45). 엘피스의 범위에 있어서 그 내용은 구원(살전 5:8)의 (갈 5:5)썩지 않는 몸으로 부활(; 참조: 고전 15:22이하), 영생(딛 1:2; 딛 3:7),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의 형상과 닮게 됨(참조: 요일 3:2이하), 하나님의 영광(롬 5:2; 골 1:27; 참조: 고후 3:12)으로 정의된다.

② 소망의 근거-이 소망은 선행(율법 Law)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신 역사에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망"으로 지정된다: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딤전 1:1),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

그리스도께서는 소망의 사회에 있어서 외인이 아니다. 그는 신자들이 복음 안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다시 사신 주님으로 인정하는 분이며, 그들이 그 분의 임재를 성령을 통해 알고 있는 분이다. 곧 그들의 소망은 "강림하신 그 분의 미래"에 있는 것이다(Kreck).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은사로 주심과 함께 우리가 기독교 사회로 전향함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까지 주신다(참조: 롬 8:32).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우리 모두도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참조: 고전 15:20이하). 이 도래하신 자는 높임을 받으신 분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들을 그 분께 양도하셨고 또한 이 분을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참조: 엡 1:22).

③ 은사로서의 소망의 본질-엘피스 아가데(좋은 소망)로서 소망은 믿음과 마찬가지로 성부의 은혜의 선물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살후 2:16).

따라서 소망은 우리가 부름을 받는 구원의 메시지를 통해 전달된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골 1:23).

부르심에서 소망의 목표는 그 풍성함 가운데 밝혀진다: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엡 1:18).

그리고 소망은 이미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하나되게 한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 4:4).

성령의 능력을 통해 우리는 넘치는 소망을 받는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왜냐하면 성령님께서는 처음 익은 열매로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참조: 롬 8:23). 성령이 신자들 안에 거하심은 신자의 부활에 대한 보증이다.(참조:롬 8:11).

(d)  기독교인들의 소망의 특성들.

① 소망은 항상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확실하며 확고한 기대이다. 소망은 재림의 최전면에 있는 그 긴박성과 심판들에 대해 못 본채 하지 않고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도성을 바라본다.

롬 4:18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람"으로 표현되었다. 즉 미래에 대해 인간의 판단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는 것과는 반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 그에게 주어진 소망을 굳게 세웠다는 것이다.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교회는 고통 중에 있는 모든 크티시스(피조물)와 동일한 것을 느끼며 몸의 구속을 소망한다(롬 8:20 - 롬 8:23).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들이 실현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기독교인은 소망 가운데 영광을 돌린다. 곧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여 찬송한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

② 소망은 우리 구주되신 주님에 대한 인내와 훈련과 확신에 찬 기다림과 기대이다. 소망을 가진 자들은 위로를 받고 확신을 갖는다(살후 2:16). 롬 5:4; 살전 1:13; 히 6:11의 주요한 강조점은 끈기있는 인내이다. 반면에 빌 2:20; 히 3:6; 벧전 1:21에서 소망은 확고한 확신의 요소를 지닌다. 소망은 개인의 깨끗함의 동기가 된다(요일 3:3). 소망은 우리가 흔들림이 없이 소망에 대한 우리의 고백을 든든히 붙잡을 것과(히 10:23), 우리에게 우리의 소망에 대해 설명해주기를 요청하는 그 어느 누구에게라도 대답할 준비를 갖출 것을 요구한다(벧전 3:15). 그러나 마지막으로 신약성경의 소망은 즐거운 기다림이라는 것이다(롬 12:12). 소망은 용기와 힘을 주며 마치 투구가 머리를 보호하는 것과 같이 속사람을 보호한다(살전 5:8). 닻을 내릴 때 배가 안전한 것과 같이 우리의 생활은 성소로 들어가신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 그리스도에게 우리를 묶어두는 소망에 의해서 안전하게 된다(히 6:18이하).

(e)  바울은 골 1:4, 골 1:5에서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 살전 2:19에서 "우리의 소망", 고후 1:7에서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에 대해 언급한다. 이 모두 그리스도와 관련된 소망이다.(참조: Walter Bauer; R.Baltmann; E.Hoff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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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gavph(26, 아가페) 사랑 love.

1. 성경 외의 용법. 

명사 아가페는 아가파오(ajgapavw, 25: 사랑하다)에서 유래한 후기 헬라어이며, 성경 외의 문헌에서는 단 한번 발견되는데, 바로 여신 이시스(Isis)에게 아가페라는 칭호가 붙여졌다(P.Oxy. 1380, 109; A. D. 2세기).--> 아가파오(ajgapavw, 25)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아가페는 70인역본에서 19회 나오며 아하바(160: 사랑)의 역어로 사용되어 연애(삼하 13:5), 남녀의 사랑(렘 2:2)에 대하여 주로 사용되었으며, 아가서에서 주로 나타난다(아 2:4 이하; 3:5, 10; 5:8; 7:6; 8:4 이하).

70인역본이 의미가 복잡한 에로스보다는 오히려 보다 단순한 단어인 아가페를 사용하는 것도, 인간의 모든 사상, 감정, 행위 그리고 예배가 하나님의 선행 작용에 대한 하나의 반응이기 때문이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아가페는 신약성경에서 116회 나오며, '사랑, 애정, 호의, 자비심'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아가페는 인간의 사랑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① 고전 8:1; 고전 13:4-고전 13:8; 빌 1:9; 롬 13:10; 마 24:12; 롬 12:9; 고후 6:6; 딤전 1:5; 요일 4:16; 고전 13:1-고전 13:3; 빌 2:2; 고전 14:1; 딤전 6:11; 딤후 2:22; 골 3:14; 벧후 1:7; 골 1:8; 살전 1:3; 고후 8:8; 히 10:24; 빌 2:1; 벧전 5:14; 몬 1:7; 롬 14:5; 엡 5:2; 골 4:21; 엡 4:15; 고전 16:14; 엡 3:17; 엡 4:2; 골 2:2; 살전 5:13; 엡 4:16; 갈 5:13; 갈 5:6; 몬 1:9; 살전 3:6; 살전 5:8; 딤전 1:14; 딤후 1:13; 몬 1:5; 엡 6:23; 딤전 2:15; 딤전 4:12; 딤전 6:11; 딤후 2:22; 딤후 3:10; 딛 2:2; 계 2:19; 고전 13:13; 골 1:4 이하; 살전 1:3; 살전 5:8; 딤후 1:7; 롬 12:9; 고전 6:6; 벧전 4:8; 갈 5:22; 롬 15:30; 골 1:8; 살후 2:10; 엡 1:15; 골 1:4; 살전 3:12; 살후 1:3; 고후 2:4; 고후 2:8; 벧전 4:8; 요 13:35; 고후 8:7; 고전 15:24.

② 하나님을 향한 사랑. 눅 11:42; 요 5:42; 요일 2:15; 요일 3:17; 요일 4:12; 요일 5:3; 살후 3:5; 고후 7:1; 히 6:10.

(b)  아가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요일 4:9; 요일 4:16; 롬 5:8; 요일 3:1; 엡 1:4이하; 엡 2:4; 고후 13:13; 요일 4:7; 고후 13:11; 요일 4:8; 요 15:9; 요 15:10; 요 15:13; 롬 8:35; 고후 5:14; 엡 3:19.

②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 요 15:10; 요 17:26; 골 1:13.

(c)  아가페는 초대교회에서, 친교의 입맞춤이라는 형태로 표현되었다. 이 입맞춤은 회중 예배시, 하나의 정규적 순서였었다(예: 롬 16:16; "거룩하게 입 맞춤으로"[엔 휠레마티 하기오]). 벧전 5:14에서 "사랑의 입맞춤"(엔 휠레마티 아가페스)이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사실상 이 의식(rite)의 상세한 사항들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d)  유 1:12에서 복수 아가파이스는 "애찬"(love-feasts)을 의미한다: "저희는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의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이 애찬은 '초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예배와 관련하여 형제적인 사랑을 북돋우고 표현하기 위해' 함께한 식사를 말한다. 이단자들은 애찬에 참석하는 것을 자기네의 탐욕과 부도덕을 증진시키는 기회로 삼았으며, 심지어 고린도 교회는 이단자들로 인하여 분열되어 파당이 생기고 술취한 자들의 난장판이 되기도 하였다(고전 11:17-고전 11:22).(D. R. Rose).

[아가페는 초대 교회 의식들 중의 하나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단지 암시적으로 나타나 있을 뿐이다. 고전 11:17이하는 성찬식이 평상의 식사와 함께, 후에 "애찬"(love feast, 아가페)이 주의 만찬 자체로부터 분리되었으며, 그 본연의 위치에서 거행되었다(참조: 유 12; 벧후 2:13; Ign. Smy. 8:3; Clem. Alex., Paedogogus 2, 1).

그 차이점은, 설교가 행해지는 예배나 성찬식 예배의 중심이 기쁨에 찬 신앙의 선포였던 반면, 공동 식사의 주요한 의의는 그들이 아가페 속에서 함께 나눈 특별한 친교의 실시에 있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분명히 이와 같은 예배는 신도들이 사회적 자선 행위를 통해 자기들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참조: 행 6:1이하).

(W. Gunther; H.-G. Link, TBZNT)]

(e)  아가페의 헬라어 의미는 대등한 사람들간의 존경과 호의이다. 기독교의 아가페는 하나님과 그의 자비 앞에서는 모두 똑같이 가치없음을 자각함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사랑(caritas)의 정신에 의해 형제들에 대한 태도와 교제가 결정된다. 따라서 이 새로운 형제애는 에로스로 인해 타락하고, 승화된 에로스에 의해 스스로를 초월하려고 헛되이 시도하는 세상 안에서 성장하여 간다. 바꾸어 말하면 바라지 않고 주는 사랑을 아는 교회가 성장한다. 감각과 초감각이 혼합된 신비적 사교들이 아 뮈스테리아 아가페스(사랑의 비밀)의 맑고 깨끗함 앞에 굴복한다.(E. Stauffer).

초대 교회에서 형제들과 자매들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던 여러가지 이름들은, 아가페(agape)에 기초를 둔 이 새 공동체가 그들 스스로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이해했다는 증거이다.(W. Gunther, H.-G. Link).(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 Stauffer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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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 그리스어에는 사랑에 대한 네 가지 단어가 있었다. 이 네 단어는 네 종류의 사랑을 나타냈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다고 생각한다. 

1) 에로스( Έρως)라는 그리스어는 '성적인 사랑'(sexual love)이다. 그

리스 문화에서 이 단어는 '육체의 성적인 욕구를 만족시킬려는 정욕적이고 육적인 충동을 나타낸다'(sensual, carnal impulse to satisfy or gratify the sexual desires of flesh). 

에로스(eros)라는 단어는 에라오(erao)라는 단어와 같은 어근을 가진다. 에라오는 '요구하고, 구하고, 수요한다'(ask, beg, demand)의 뜻이 있다. 그래서 에로스는 주는 형태의 사랑이 아니라, 성적인 것을 요구하는 사랑이다. 그것은 주어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킬려는 육적인 요구의 사랑이다.특이한 것은 신약 성경에는 이 에로스라는 단어가 한 단어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 문화에 있어서도 에로스 사랑은 성적인 충족을 위한 저급하고, 낮고, 천한 사랑을 나타낸다. 

신약 성경에 있어서는 우정이나 형제애나 남여 사랑에 있어서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에 집중하는 아가페 사랑을 가질 것을 모든 신자들에게 권면한다. 왜냐하면 에로스는 '자기-만족, 자기-추구, 자기-즐거움의 성적인 욕망'(a self-satisfying, self-gratifying, self-seeking, self-pleasing type of sexual appetite)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2) 스테르고(στέργω)

스테르고 사랑은 '부모와 자녀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과 혹은 가족 구성원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the love that exists between parents and children or the love that exists between members of a family)을 의미한다. 한 학자는 가끔 말했다. 

"스테르고라는 단어는 통치자에 대한 백성의 사랑이나 혹은 주인에 대한 개의 사랑을 묘사한다"(the word stergo portrayed the love of a nation for its ruler or even the love of a dog for its master). 결과적으로 스테르고의 참 뜻은 헌신이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말세의 징조로 한국어 성경에서는 "무정하며"로 번역되어 있으나(디모데후서 3장 3절), 원어의 뜻은 스테르고의 부정의 접두어가 붙어 있어서 "가족의 사랑이 없으며"이다. 말세에는 가정이 깨어지고 가족의 사랑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3) 필레오(φιλέω)

필레오는 남자 친구와 여자 친구 사이에 느껴지는 애정이나, 두 친구가 나누는 친분을 나타낸다. 그것은 두 사람 이상이 느끼는 잘 어울리고 맞는 개념이다. 

필레오가 우정을 표현하지만 아가페와 같은 최고의 사랑은 아니다. 필레오는 여러 합성어가 있다.

예를 든다면 필라델피아(philadelphia:brotherly love), 인류애(philanthrophia),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philosophia:philosophy) 등이다. 

4) 아가페(αγάπη)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하여 신약 성경에서 사용한 단어이다. 

아가페 사랑은 더 높고 더 훌륭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최고의 사랑인 것이다. 이 아가페 사랑을 번역하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다. 

'아가페 사랑은 한 개인이 한 물건이나 사람의 가치를 보고, 인식하고, 이해하고, 귀중히 여겨서, 관찰자가 그 물체나 사람을 아주 존경하고, 경외하고, 숭배하고, 경이롭고 그리고 진실로 귀중하게 여길 때에 일어난다.'(Agape occurs when an individual sees, recognizes, understands, or appreciates the value of an object or a person, causing the viewer to behold this object or person in great esteem , awe, admiration, wonder, and sincere appreciation.) 

관찰자의 마음에 큰 존경심이 일어나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을 거절할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류를 보실 때에 비록 타락한 상태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을 너무나 귀중히 여기고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구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온 세상 사람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요한복음 3장 16절). "이처럼 사랑하사"의 사랑은 아가페이다. 

아가페 사랑은 너무 사랑하여 멀리, 넓게, 높이, 깊이에 있어서 제한이 없다. 필요하면 아가페 사랑은 깊이 사랑하는 물건이나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아가페 사랑은 최고의 사랑이다. 에로스는 자기를 구하는 사랑(a self-seeking love)이며, 스테르고의 사랑은 자기 가족에게만 제한된 사랑이고, 필레오 사랑은 상호 만족에 기초한 사랑이다.

아가페 사랑은 아무 조건이 없다. 그것은 무엇을 얻을까를 찾지 않고 무엇을 줄까를 찾는다. 아가페 사랑은 보답에 관계 없이 사랑하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이런 사랑이다. 인간이 죄에 빠져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할 수 없을 때에 어떤 사랑의 응답도 기대하지 않고 인간을 사랑하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면은 사랑의 보답을 받지 않아도 상처나 절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의 보답을 위하여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일서 3장 16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희생했으니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우리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한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위와 진실로 사랑하라"(요한일서 3장 18절)고 가르쳤다.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서 "사랑을 추구하라"고 권면했는데, 여기에서 '추구'한다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디오코'(dioko)인데, 사냥하는 사람이 사냥하는 동물을 잡을 때까지 끝까지 따라가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다. 뜨겁게 추구하는(to hotly pursue) 것을 의미한다. 

이기적이고, 제한적이고, 조건적인 사랑은 세상에서 많이 볼 수 있으나,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최고의 사랑은 아닌 것이다. 성경은 최고의 사랑인 아가페 사랑을 열심히 추구하며, 목숨을 걸고 실천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참고:SPARKLING GEMS FROM THE GREEK by Rick Ren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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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ivrw(5463, 카이로) 기뻐하다 be glad, 즐거워 하다 rejoic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카이로(Homer이래로)는 '기뻐하다, 즐거워 하다'를 의미하며,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기뻐하는 것을 나타낸다. 현재 명령법은 인사말로 자주 나타난다. 즉 카이레(단수)와 카이레테(복수)는 "안녕하십니까?" "안녕히" Hail!라는 인사말로 사용되었다. 카이레는 무엇보다 신들에게 대한 인사말로 사용되었다. 서신의 서두에서 부정사 형태인 카이레인이 가끔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동사 레게이가 보충되어야 한다(참조: Funk § 480). 즉 "…문안을 [드리다]"([…says] greetings!). 똑같은 관용 어구가 축배를 들 때도 사용되며(즉, "건강을 빌면서!" good health!) 헤어질 때도 사용된다(즉 "안녕히 계십시오[가십시오]!" Farewell!).

2. 70인역본의 용법 

카이로는 70인역본에서 약 80여회 나오며, 주로 '기뻐하다, 기쁘다'를 뜻하는 길, 사마흐, 시스와 '기쁨, 즐거움'을 뜻하는 사메아흐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그러한 의미를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카이로는 신약성경에 74회 나오며, 이 동사와 명사 카라(carav, 5479)는 특히, 그리스도를 통한 종말론적 완성 및 그리스도 안에 존재함과 그리스도 안의 소망을 언급한 곳에 현저히 나타난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선포인 신약성경 메시지 전체가 기쁨의 메시지(→복음 Gospel)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a)  카이로는 인사말로 사용되었다. 부정사 카이레인을 써서 인사한 경우는 행 15:23; 행 23:26; 약 1:1의 편지의 서두에서만 나타난다. 요이 1:10에서 신자들은 이단에 속한 자들에게 카이레인을 하지 말라고 한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여기서 수신자들은 이단 교리를 전하는 자들의 악한 행위에 완전히 연루되지 않도록, 그들을 영접하지도 인사하지도 말라는 경고를 받고 있다.

마 28:9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친숙한 일상적 인사말 카이레테를 사용하여 제자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있다: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마 26:49에서 배반자 유다는 예수님께 인사했다: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안녕과 행복을 소원하는 그 인사의 이면에는 무서운 음모를 감추고 있다.

마 27:29에서는 예수님께 대하여 유대인의 왕(이스라엘)이라고 조롱적 인사를 던지고 있다: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 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들이 이렇게 인사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고 그 말을 하였으나, 주님이 당연히 받으셔야 할 인사였으니만큼, 그 속에는 하나의 반어적(反語的) 의미가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눅 1:28에서 마리아는 카이레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잇따른 메시지에 놀랐다.

(b)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오심과 사역은 기쁨을 가져왔다. 카이로는 잃어 버린 것을 찾았을 때(눅 15:5이하; 마 18:13), 자기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알았을 때(눅 10:20), 구세주의 선구자가 났을 때(눅 1:14), 그의 탄생의 별을 보았을 때(마 2:10),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눅 13:17; 눅 19:6), 기뻐하는 것을 표현한다.

눅 19:37이하(참조: 눅 18:43)에서 예수님께서 입성할 때의 사람들의 분위기는 예수님의 승천 후에 제자들의 분위기처럼 기쁨의 분위기였다: "이미 감람 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마 5:12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핍박을 받을 때도 기뻐해야 한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예수님이 하나의 공격의 대상이 되고, 그를 뒤따르는 자들의 길이 고난과 핍박에 이르게 된다 할지라도, 기쁨에 찬 구원의 확신은 상실되지 않아야 한다(눅 6:23).

눅 22:5에서 유다가 당국자들과 예수님을 넘겨 주기로 합의했을 때 그들이 기뻐했다: "저희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눅 23:8에서 수난의 때에 헤롯이 예수님을 만나보고 기뻐했다: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c)  사도행전에서는 교회의 불가항력적, 전세계적 확장에 대한 기쁨이 반복적으로 표현된다. 먼저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과 핍박을 받음에 대한 사도 Apostle들의 기쁨이 있다(행 5:41; 마 5:11이하). 박해가 복음의 승리적 진행을 정지시킬 수 없다. 이방인을 끌어 모은데 대한 기쁨도 있다(행 11:23; 행 13:48; 행 15:3).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고, 그들이 세례(침례)를 받았을 때, 거기에 해당된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였다(행 8:8, 행 8:39; 행 15:31).

(d)  요한의 기록에서 중요한 것은 충만한 기쁨이다. 요 3;29에서 세례(침례) 요한은, "신랑" 즉 약속된 하늘의 진리의 계시자로 인하여 지금 기쁨이 충만해 있다(참조: 마 9:14이하, 병행구, 막 2:18이하; 눅 5:33이하). 종말론적 시간은 이미 도래하였다. 요 4:35 전후 문맥을 보면 이 때는 계속적인 파종과 수확기가 병존하는 시기이고(요 4:35이하),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역을 이미 성취하고 계신다(요 4:34). 요 8:56에 보면,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아브라함도, 수확이 시작되는 이 때를 보며 즐거워 하는 일에 동참하였다. 여기에서 카이로는 기다리는 기쁨이고 아갈라오마이는 성취된 기쁨이다.

요 16:20이하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죽음을 자기의 제자들이 기뻐해야 한다고 설명하신다. 왜냐하면 죽음은 승리요 발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슬픔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부활이 그 슬픔을 기쁨으로 어떻게 바꾸게 될 것인지를 보여준다. 요 14:27이하에서 기쁨을 평화와 연결시키는 것은 기쁨의 종말론적인 성격을 만들어 낸다.

요 11:15에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때 거기 있지 않은 것을 기뻐하셨다. 그 이유를 설명하신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요이 1:4; 요삼 1:3에서 사도 요한은 믿음의 형제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기뻐했다.

계 11:10에서 카이로는 악한 즐거움을 나타낸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계 19:7에서 성도들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의 때가 되었기 때문에 즐거워 한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e)  바울 서신들은 기독교인의 기쁨은 슬픔과 고통과 근심 가운데서만이 얻을 수 있다는 역설적 의미를 증거하고 있다. 진실로 이와 같은 사실은 이 기쁨의 능력을 확실히 증명해 주는 것이다.

① 이러한 기쁨의 원천은 단순한 지상적, 인간적 기쁨 너머에 있다. 그것은 주 안에 있는 기쁨이며, 따라서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계속하여 기쁨의 존재를 상기시켜 주고, 그 기쁨을 표현하라고 권면하고 있다(빌 3:1; 빌 4:4; 빌 4:10; 롬 12:12; 고후 6:10).

빌 1:15이하; 빌 1:18에서 바울은 동기에 상관하지 않고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기뻐하였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바울은 놀라운 비이기적 자세를 유지했다. 그는 어떤 자들이 그들 자신의 명성을 얻기 위해 전파하고 있는 것을 알았으나 이 전도자들의 동기에 상관없이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것을 기뻐하였다. 믿음과 그것의 결과적 기쁨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오지 않기 때문에, 좋지 못한 동기에 의해 그리스도가 전파된 때 조차도, 바울은 확신과 기쁨을 지닐 수가 있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운 사역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이다(빌 1:15-18).

②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기쁨을 들립시스(고통, 고난, 박해, 환난)와 직접적으로 대조시키고 있다.

바울이 편지를 기록할 때, 들립시스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고후 2:4), 엔 퀴리오, 즉 "주 안에" 있는 기쁨인(빌 3:1) 자기의 기쁨을 모두가 함께 나눠 갖도록 하기 위해(고후 2:3) 썼다고 하였다. 고린도인들의 삶은 수동적 자포자기 상태 또는 사망을 낳는 세상 근심(고후 7:9이하)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결한 믿음의 기쁨에 의해 지배를 받아야 했다. 바울은 그들을 이전에 엄히 책망했었으나, 그의 권면이 결국 유익한 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그들에 대하여 다시 안심하게 되었다(고후 7:13).

③ 바울은 빌립보서를 쓸 때 감옥에 있었다. 당시에는 아직 자기의 재판의 결과를 알 수 없었고, 분명히 외로움을 느끼었을 것이다(빌 2:20이하). 그리고 충성스런 복음 전파도 위기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빌 1:15이하; 빌 2:21). 또 다시 들립시스가 있었으며(골 1:24), 이것이 근심의 원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와 계속적인 기쁨의 근거 역시 있었다. 즉 그것은 빌립보인들이 복음에 참여함으로 인한 감사(빌 1:5)와 그리스도가 계속 전파됨으로 인한 기쁨이었다(빌 1:18). 그리스도와 복음에 의해 속박을 당한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자기와 함께 기뻐하라고(빌 2;17이하), 또 염려를 버리라고(빌 4:6), 나아가서는 성령의 교제 안에서 한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다. 비록 바울에게 근심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이 있고, 그가 곧 죽게 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가 그의 몸에서 존귀하게 되는 한(빌 1:20), 그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

이처럼 빌립보서의 기쁨은 계속적이고 "도전적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쓰는" 기쁨이다(K.Barth).(참조: 빌 2:17; 빌 4:4).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힘은 그 자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지칠 줄 모르는 기도를 통해 생성된다(빌 4:6; 참조: 살전 5:16; 골 1:11). 그것은 복음의 세계적 확산에서(살전 3:9; 골 2:5), 그리고 복음을 전한 교회들의 왕성한 성장에게 그 힘을 얻는다(빌 4:10; 참조: 살전 2: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은 주 안에서의 기쁨이다(빌 4:4).

④ 벧전 4:13에서 카이로는 고난과 영광에 관련되어 나타난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롬 12:15에서 관용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으로부터의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타인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게 해 준다. 다른 한편 고전 7:30; 고후 6:10에서 카이로는 우리에게, 현재의 기쁨과 슬픔은 이 생(生)에만 속할 뿐이며 우리의 궁극적 몫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참조: H.Conzelmann; E.Beyreuther; G.Finkenr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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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dialeivptw"(89, 아디알레이프토스) 끊임 없이 unceasingly, 계속적으로 constantly.

1. 일반 헬라어 문헌의 용법 

부사 아디알레이프토스는 '끊임 없이, 중단 없이, 계속적으로'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부사 아디알레이프토스는 70인역본에서 6회, 외경에서만 나온다(마카베오일서 12:11; 마카베오이서 3:26; 9:4; 13:12; 15:7; 마카베오삼서 6:33).

3. 신약성경의 용법 

부사 아디알레이프토스는 신약성경에서 4회, 바울 서신에만 나타난다.

롬 1:9에서 아디알레이프토스는 로마인 기독교인들을 위한 바울의 중보를 묘사한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살전 1:3에서 아디알레이프토스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위한 중보 기도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또한 바울은 살전 2:13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반응에 대하여 쉬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한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그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한다. 이와같이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 나타나는 모든 문맥들은, 타인들을 위한 끊임없는 관심을, 특히 기도와 찬양 중의 관심을 표현한다.

(참조: J.H.Thayer; C.Br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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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seuvcomai(4336, 프로슈코마이) 기도하다 pray.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프로슈코마이(Aeschyl., Hdt. 이래)는 프로스(prov", 4314: ~를 향하여, ~에서)와 유코마이(eu[comai, 2172: 기도하다)에서 유래했으며, '기도하다, 간청하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프로슈코마이는 70인역본에서 약 100회 이상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팔랄(기도하다, 중재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창 20:7; 창 20:17; 삼상 1:10; 삼상 1:12; 삼상 1:26 이하; 느 1:4; 느 1:6; 사 16:12; 렘 7:6 등), 그리고 테필라(기도, 시 109:4), 아타르(간청, 출 10:17; 삿 13:8), 나팔(엎어지다, 넘어지다, 단 6:11; 에스드라이서 6:10)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프로슈코마이는 신약성경에서 84회 나오며, '기도를 드리다, 기도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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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jcaristevw(2168, 유카리스테오) 감사하다 thank.

1. 고전 헬라어 문헌 

동사 유카리스테오는 유카리스티아에서 유래했으며,

(a)  '감사하다'(주전 4세기 Demosthenes; 384-22 주전]로 부터).

(b)  '감사를 드리다'  (주전 2세기 Polybius 로부터). 물론 이러한 단어들은 비문들 속에서 자주 발견된다.

2. 70인 역본의 용법 

동사 유카리스테오는 70 인역본의 외경에서 6 번 나온다. 마카베오이서 12:31에서 마카베오 일당에 속한 사람들은 어떤 이교도들이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베풀어준 친절에 대해 감사한다. 외경 에스더서(Ad. Est.)16:4에서 어떤 관리들은 자기들에게 은혜를 베푼 페르시아 왕에게 갚아야 할 감사를 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이유들로는 대적들에 의한 압제와 박해로부터의 구원(마카베오이서 1:11, 마카베오삼서 7:16), 승리하게 하심(마케베오이서 10:7) 때문이다. 지혜서 18:2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악용한 자들에 대하여 앙갚음을 하지 않게 하여 주심을 감사하는 거룩한 백성들의 감사가 기록되어 있다. 유딧 8:25에는 어떤 역경과 불우한 환경과 사정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고 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유카리스테오는 신약성경에서 38회 나오며, 거의 독점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단지 2회만(눅 7:l6; 롬 16:41) 사람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영적 행동을 뜻하는 문맥으로 이해된다.

(a) 유카리스테오는 바울서신의 서론 부분에 매우 흔히 나온다. 아무리 그 서신에 충고와 비판을 뒤이어 기록할지라도, 사도 바울은 자주 그의 수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서언적 인사말을 쓴다. 즉 그들의 믿음과 그로 인해 "온 세상에" 전파된 결과(롬 1:8), 교회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고전 1:4), 믿음과 실천적인 사랑 사이의 조화(엡 1:15 이하; 골 1:3 이하, 살전 1:3, 몬 1:4 이하), 복음 안에서의 성도의 교제(빌 1:5), 견고한 믿음(살전 1:2 이하), 하나님께서 택하신 일(살후 2:13)  등이다. 바울이 격식을 갖추려는 것이 아니라 점차 그 서신의 주제로 이끌어 가기 위해 자신의 감사함을 삽입해 넣었다는 사실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b)  바울은 신학적 논증에서 자기 자신을 언급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기도 한다(고전 1:14; 고전 14:18; 참조: 행 28:15). 대조적으로,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을 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아니한다(롬 1:21).

(c)  감사는 끊임없는 의무이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20; 고후 1:11; 골 1:12; 골 3:17; 살전 5:18).

(d)  눅 18:11 이하(자기 만족적인 바리새인들)과 요 11:41 이하(나사로 무덤 앞에 선 예수님의)에 감사 기도가 나온다. 이 단어가 고전 14:16 이하에선 방언으로 드리는 감사기도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e)  바울은 서신의 서론 이외에서도 자주 일반적이며 특별한 은사들에 대한 감사를 언급한다. 예를 들면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음에 대해 (골 1:12), 성도들이 사람에 의해 설교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임에 대해(살전 2:13), 방언의 은사에 대해(고전 14:18) 감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 14:18에서 바울은 독자들의 관심을 교회의 진실한 성장과 일치에 가지도록 하기 위해 그의 감사함을 말할 때 얕보는 듯한 의미의 표현을 쓰고 있다.

(f)  마 15:36과 병행구절 막 8:6에서 예수님께서 음식을 위하여 감사하셨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한 후에 않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바울은 유대인의 습관과 예수님의 본을 따라 음식 앞에서의 감사 기도에 대하여 말한다. 이 관습은 기독교 공동체에서 일반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사도는 음식과 관련된 논증에서도 감사기도를 언급한다. 이 기도는 고전 10:30에서 깊이 생각할 문제이다. 우상들에 바친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한 논의에서 바울은 그가 감사한 것에 대해 왜 비난을 받는가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한다.

(g)  유카리스테오는 또한 주의 만찬(Lord's Supper) 의식을 언급하는 말에 나온다. 예를 들면 눅 22:19에서 떡과 포도주와 함께, 고전 11:24에서 단지 떡과 함께(그러나 25 절의 "또한 이와같이"란 말 속에 포도주가 포함된 것이다), 막 14:23과 마 26:26 (그러나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란 말은 상당어구로 사용된 것이다)에서만이 포도주와 함께 언급된다. 그러므로 2세기 동안에 유카리스티아(eujcaristiva, 2169)란 말은 전체적인 성만찬 예배를 의미하는 일반적인 명칭이 되었다.

(h)  유카리스테오는 요계시록의 찬가 가운데 감사의 찬송을 의미하기도 한다(계  11:17 이하). 감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천적 존재의 영광송에 속하는 것이다.

(참조: Walter Bauer; J.H.Thayer; H.-H,Es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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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vri"(5485, 카리스) 은혜 grace, 호의, 친절 favour.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카리스(Homer 이래)는 기본어이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a)  이 단어는 '사람들 중에 복리를 가져오는 것'을 의미하며, 카라(carav, 5479)는 이 복리에 대한 개인적 경험이나 표현을 의미한다.

(b)  이 단어는 (a)의 기본 의미에서 여러가지 의미가 파생되었으며, '은혜, 호의, 아름다움(미), 미덕, 사은, 감사, 사의, 친절, 즐거움, 호의의 표현, 돌봄, 감사의 빚, 보답'을 의미한다.

(c)  이 단어는 속격과 함께 사용될 때, '~을 위하여, ~에 대한 고려를 해서'를 의미한다.

(d)  아이스킬루스는 신들의 호의에 카리스를 사용했다. 플라톤의 문헌들에서 카리스는 '좋은 선물, 좋은 뜻, 호의, 기쁨, 기쁘게 하는 것, 감사' 등의 뜻을 가진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카리스는 70인역본에서 약 190회 나오며 여러 히브리어로 사용되었으며, 그 중 헨이 가장 자주 나오며(61회), 대개 '호의, 좋아함, 의향, 기호', 드물게 '매력, 아름다움, 애교'를 의미한다(시 45:2). 그리고 이 단어는 라촌(만족스러운 것, 사람들 사이에서, 잠 10:32; 사람이 하나님께 구하는 은총, 잠 11:27; 사람이 '하나님께 얻는 은총'), 헤세드(은총, 에 2:9; 에 2:17), 라함(우애감, 단 1:9; 동정, 창 43:14), 토브(선한 것, 잠 18:22), 게둘라(영예의 표시, 에 6:3)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카리스는 신약성경에서 15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누가의 기록.

① 카리스는 비종교적인 행 24:27; 행 25:3; 행 25:9 등에 나타나며, 좀 더 분명하게는 행 2:47; 행 4:33에 나타난다.

② 구약성경의 영향이 눅 1:30; 행 7:46; 행 7:10; 눅 2:40; 눅 2:52; 눅 6:32 이하의 종교적인 용법에서 나타난다.

③ 카리스는 눅 4:22; 행 14:3에서 복음의 특성을 설명해 준다.

이 단어는 행 6:8에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묘사한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행 11:23에서는 교회 성장에 있어서 카리스의 지도적인 역할을 볼 수 있다: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행 14:26; 행 15:40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한다.

행 15:11은 권고 형식의 본문에 나타나는 바울 사상의 표현이다: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b)  바울 서신.

① 카리스는 바울의 중심 개념으로서 인사말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롬 1:7; 살전 5:28 등).

② 바울에게 있어서는 카리스는 독특하게 구원 사건의 구조를 설명해 준다. 

---기본적인 사상은 값없이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카리스가 하나님의 속성만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구체화되고(갈 2:21) 복음으로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 

은혜는 죄인들에게 나타났고(롬 3:23-24) 구원의 전부이며(고후 6:1) 모든 신자들이 받은 것이다(고전 1:4).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된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과 더불어 신자들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롬 3:24 이하). 

이것은 구원의 방법으로서 율법을 배제하는 것이다(롬 4:16). 

---은혜는 칭의의 기반이며, 그것에서 나타나게 된다(롬 5:20-21). 

그래서 은혜는 어떤 의미에서 일종의 상태이다(갈 5:2). 

---또한 은혜는 항상 선물이다. 은혜는 충분하다(고전 1:29). 

우리는 더 요구하거나 더 얻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은혜에는 확신적 요소가 들어있기는 하나 거짓 확신이 아니므로 자랑할만한 여지가 없다(고전 1:29; 참조: 갈 5:4).

③ 죄를 극복하는데 있어서 은혜의 작용은 그 능력을 보여준다(롬 5:20-21). 

---은혜와 죄와는 구조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은혜는 숙명적인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하신 자들에게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롬 11:5-6). 

---은혜는 교회 안에서, 보기로 바울의 모금에서(고후 8장)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은혜의 목적은 모든 선행을 하는데 있으며(고후 9:8), 그렇기 때문에 선행을 요구하는 것이지만(고후 6:1), 자원하여 순종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할 뿐이다. 

---은혜는 방종을 허용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이론이다. 

바울은 롬 6:1에서 그런 단순한 생각을 책망하고 있다.

④ 바울의 사도직은 롬 1:23 등에서 특별한 은혜이다. 

사도직이 바울에게 주어진 것과(롬 12:3), 그것을 수행하는 것은 은혜였다(고후 1:12). 교회를 방문하는 것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은혜였다(고후 1:15).

⑤ 골 1:6에서 카리스는 복음을 뜻한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골 4:6에서 '매력'을 의미한다: "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엡 1:6-7에서 카리스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호의"를 의미한다: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특히 엡 2:5 이하가 바울적 특색이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엡 3:2; 엡 3:7-8도 마찬가지다. 엡 4:7; 엡 4:29에서 "주다"라는 단어와 함께 쓰는 것은 상투적인 표현이다.

⑥ 목회서신에서 카리스는 딤전 1:12에서 '감사'를 의미한다: "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딤후 2:1에서 직분의 '은혜'를 나타낸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딤후 1:9에서 은혜가 나타났다는 본문을 통해서 은혜와 행위를 대조시키고 있다(참조: 딛 2:11).

---딛 3:4 이하에서 선하심이나 자비 등의 용어가 같은 뜻을 가진 단어들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행위와의 대조를 보는데 이번에는 세례(침례)를 받는데서 나타난 은혜를 언급하고 있다(딛 3:5 이하).

---딤전 1:14에서 믿음, 사랑, 그리고 소망 대신 은혜(카리스)를 둔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c)  히 4:16에서 카리스와 엘레오스(e[leo", 1656: 자비, 동정, 불쌍히 여김)를 사용한다(참조: 딤전 1:2). 

그리스도는 은혜를 구현하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은혜를 받는다(히 7:25).

히 2:9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은혜로 고난 받으셨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히 10:29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또는 피)은 계약과 은혜를 결합하였다. 은혜와 제사에 쓰인 고기를 대조시키는 것은 히 13:9에서 계약에 대한 반대 명제를 언급한 것의 일부분이다.

히 12:15에서 우리가 은혜에서 떨어지지 말아야 할 것을 언급한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d)  베드로전서에서 고난은 은혜로 이해되고 있다(벧전 2:19-20). 

벧후 3:18은 카리스를 그노시스(지식)에 관련시킨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약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e)  요한의 기록.

카리스는 요이 1:2과 계 1:4; 계 22:21의 인사말에 나온다.

요 1:14; 요 1:16-17에서 은혜는 율법과 반대되고, 진리와 완전함에 결합되어 나타나는 로고스의 계시의 결과를 언급한다. 그럼으로써 이 단어의 독특한 의미가 드러나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 (참조: H. -H. Esser; H. Conzel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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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jrhvnh(1515, 에이레네) 평화, 복지, 번영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에이레네의 기본 개념은 본래 사람들 사이의 관계(relationship)나 태도(attitude)를 의미하지 않고 상태(state), 즉 '평화의 때', 또는 '평화의 상태'를 의미하며, 처음에는 순전히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상태에서의 한 막간(a interlude)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 단어는 전쟁에 반대되는 것, 혹은 전쟁의 종식으로부터 결과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평화는 복된 번영을 가져 오도록 법과 질서가 유지되는 상태이다. "에이레네"는 평화의 상태이며, 평화의 상태에서 땅과 백성을 위한 복이 흘러나온다. 필레몬(Philemon)은 이를 최고의 선(supreme good)으로 격찬했다.

에이레네는 평화 조약이나 평화의 타결과 관련이 있다. 에이레네는 또한 소란, 소요의 정반대를 의미할 수 있다. 에이레네는 평화적인(온화한) 태도, 즉 적의가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에픽테투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의 스토아 철학자들의 작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에이레네는 영적 평안이나 마음의 평안이라는 의미를 띠고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단어는 이들의 저작에 그리 자주 사용되지 않았다.

특별한 언급으로, 아우구스투(Augustus)가 지중해 세계를 지배한 에이레네를 들 수 있다. 이 시대에서 구속(redemption)을 동경하는 강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황금시대라고 불리워진 이 평화의 상태는 로마 황제가 군대의 힘으로 성취한 법적 또는 정치적 안정이다(Toerster, TDNT).

2. 구약성경 및 70인역본의 용법 

1. 구약성경 및 70인역본의 용법 및 의미들

(a)  구약성경에서 에이레네는 250회 이상 나오는 히브리어 단어 샬롬의 역어로 사용된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이에 대하여 예외적인 경우들은 대체로 왕래 및 문안 인사에 관련된 구절들이다. 예컨대 창 26:31; 창 43:23이 이러한 예이다.

그러나 렘 20:10; 사 48:22; 57:21은 이러한 경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외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예외적인 구절에서는 소테리아(구원, 구출), 카이레인(기쁨, 안녕)등을 역어로 사용되었다.

약 15개의 구절에서 에이레네는 안식, 평온, 안전, 염려 없음, 믿음직스러움 등의 광범위한 의미 영역을 포괄하는, 히브리어의 여러 가지 단어들에 해당하는 역어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대상 4:40에서는 '…로부터 안식을 얻다'를 뜻하는 샤카트(히2453)의 역어로, 욥 11:18; 잠 3:23; 사 14:30; 겔 34:27; 38:8, 11, 14; 39:6, 26에서는 '믿을만함, 안전, 염려없음'을 뜻하는 베타흐(히233a)의 역어로, 삼하 3:24에서는 '가다, 걷다'를 뜻하는 할라크(히498)의 역어로, 사 29:24에서는 '이해'를 뜻하는 레카흐(히1124a)의 역어로, 그리고 잠 17:1; 호 2:18에서는 '평온, 안락'을 뜻하는 샬와(히2392d)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또한 에이레네를 역어로 사용하고 있는 몇몇 구절들은 해당 히브리어 단어가 모호하거나 없다: 에 4:16; 미 2:4; 사 32:4; 겔 34:29; 잠언 8:18.

(b)  70인역본은 히브리어 단어들, 주로 샬롬의 역어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 히브리어의 의미들이 이 헬라어의 의미에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70인역본의 용법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헬라어는 새로운 풍부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샬롬과 70인역본의 에이레네를 살펴보면, 에이레네의 여러 가지 의미를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평화 peace'라는 좁은 의미로 제한시켜서는 안된다.  그것은 모든 가능한 형태의 악(evil)과 대조되는, 가장 넓은 의미의 '안녕, 복리' well-being를 의미한다. 만남이나 편지에서(삼하 18:29; 삿 19:20; 단 4:1), 작별 인사에서(삿 18:6; 삼상 20:42) 다른 사람들에게 안녕을 빌며, 대화에서 다른 사람에 관한 안녕을 구한다(삼상16:5).  사람들은 문안 인사를 한다 : "문안하고".

왕하 9:17이하에서와 같이 어떤 사람이 오는 이유에 대한 질문이 있는데, 곧 "평안이냐"는 '도전적인 목적이냐 화평한 목적이냐'라는 질문이다.

왕상 2:13에서 밧세바가 아도니아를 맞이 하면서 "화평한 목적으로 왔는냐"(너의 옴이 화평이냐)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그녀가 그에게 그의 방문이 '좋은 일'을 뜻하는지를 실제로 묻고 있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에이레네를 '행운이나 형통'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는데, 불경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적용되고 있다. 의인은 악인의 이런 형통을 봄으로 시험을 받기도 한다(시 73:3). 그러나 이 형통은 외적인 것에 불과하며, 진정한 형통이 아니다(사 48:22).

사 57:18; 시 38:3에서는 육체의 건강을 의미한다.

집회서 38:8에서 의사가 가져오는 에이레네, 즉 건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전장에서 무사히 안전하게 돌아오는 사람은 건강을 보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수 10:21; 왕상 22:17; 대하 19:1; 시 55:18).

또 이 단어는 '만족이나 흡족함' satisfaction을 의미하였는데, 이별에 관하여(창 26:29; 출 18:23; 사 55:12), 잠자리에 드는 것에 관하여(시 4:8), 죽음에 관하여(창 15:15; 렘 34:5)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에이레네는 단순히 안식이나 마음의 평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폭력이나 재난으로 압도당하지 않은 인간의 전상태로서, 폭력을 당하거나 변사의 정반대를 의미한다(참조: 왕상2:6).

또한 살펴볼 가치가 있는 것은 사 29:24의 내용이다: "원망하던 자도 교훈을 받으라"(70인역-말더듬는 혀들은 평화를 말하는 것을 배울 것이다). 이 구절에는 히브리어 샬롬이 없지만 에이레네가 나온다. 이 문맥에서 에이레네는 그들이 올바르게(에이레네) 말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사야 32:4에서도 이와 유사한 의미를 나타낸다.

이 단어는 더욱 보편적으로, 전쟁과 대조되는 평화를 의미한다. 잠 17:1; 호세아 20:18("평안히 눕게하리라")과 사 14:30("평안히 눕게 하려니와")에서 이 의미로 에이레네가 샬롬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잠언에서는 다투는 가정과 대조되는 평화로운 가정의 안락을 의미하며, 호세아와 이사야에서는 이 단어는 평화의 때를 의미한다.

대상 22:9에서 평화의 상태를 의미한다: "내가 저의 생전에 평안과 안정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히스기야는 평화가 그의 시대에는 계속된다는 기대를 가졌기 때문에 이사야의 중대한 예언을 경솔히 취급했다. 여기에는 번영을 누리는 그룹, 예를들면 국가의 번영이라는 의미도 지닌다.

에이레네는 전 3:8에 전쟁과 대조시킨 "평화"와, 그리고 렘 29:7에 "성읍의 평안", 38:4에 "백성의 평안" 등에서 "평안을 구한다"는 표현에서와 같이 "평화의 상태"보다 더 근본적인 것, 즉 평화 =백성의 안녕에 관련된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샬롬/ 에이레네는 상태보다 오히려 관계를 암시한다.

많은 구절에서 이 단어는 이러한 의미를 가지는데, 국가나 그룹 간의(왕상 5:12; 삿 4:17; 왕상 5:4; 대상 12:18), 개인 간의(슥 6:13) 우호적 관계를 의미한다.

신 20:10에 '한 백성에 평화를 선언'하는 것은 한 백성의 관계의 수용을 의미하며(참조: 삿 21:13), 그 안으로 들어가는 자들은 평화의 사신들이다(사 33:7).

이 단어는 시편 35:27에서 외적 형통이나 성공에 더하여 인간의 전적인 안녕(well-being)을 의미할 수 있다: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그의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여기서 형통과 안녕은 선(good)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시편 122:8에서 시인은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70인역본에는 '내가 참으로 너를 위하여(에 관하여) 평화를 말했다'고 번역되어 있다. '너를 위하여'는 '예루살렘을 위하여'이다.

시인은 바로 앞에서 이미 안녕과 형통을 원했다. 환언하면 이 용어는 여기서 확고한 '형통'이라는 의미에서 '선(good)'이라는 더 넓은 의미로 쉽게 이동한다.

따라서 잠 3:17에서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고 말한다. 70인역본은 '그녀의 길은 옳은 길이요 그녀의 모든 첩경은 평화에 있느니라'고 번역했다.

시 34:14은 도덕적 선을 의미한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그를) 따를지어다."

슥 8:19에서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말 2:6에서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들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70인역본은 '그가 그의 길을 에이레네로 똑 바르게하여 내 앞에서 행하게 하며…'라고 번역했다.

잠 12:20에서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궤휼이 있고 화평을 논하는(조장하는) 자들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 70인역본은 '에이레네를 원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리라'고 번역했다. 이러한 구절에서 '에이레네'는 도덕적 선을 의미한다.

(c)  이 단어는 두람(J. I. Durham)에 의하면, '완전, 완성, 성공, 성취'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샬롬은 '완전'이란 개념은 민 6:24이하에 나오는 축복의 절정을 이루는 대목에 나타난다. 여기에서 이 개념은 다른 모든 축복들을 요약하고 있으며, 여호와의 임재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축복은 모세가 여호와로부터 받아 아론과 그의 자손들에게 이스라엘을 축복하는데 사용하도록 전한 것이다(민 6:22 이하). 이 축복의 내용은,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이다(민 6:24이하).

여기에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7)는 구절이 첨가되었다. 두람은 이 구절을 주석하기를 '샬롬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오직 그가 임재하실 때에만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축복 속에 샬롬이 사용된 것을 볼 때에도 샬롬은 제의 용어로서 사용되었으며, 여러 가지 번역본이나 많은 주석가들이 일반적으로 이 말에 부여해 온 것보다 횔씬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다 확실하게 믿게 된다. 왜냐하면 민 6:24-26 에 나오는 샬롬은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고(바라크) 지킴을 받으며(샤마르) 은혜를 받는(하난) 사람, 하나님의 임재 속에 이 두가지 상태로 있는 사람, 즉 충족되고, 그리하여 온전하게 된 사람을 묘사하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실로 이러한 사람은 신약성경의 주의 말씀에 부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또 두람은 '샬롬은 구약성경에서 자주 포괄적으로 본 성취 또는 완성, 실제로 사람이 혼자 힘으로 가장 좋은 환경에서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성공이라도 훨씬 능가하는, 삶과 정신에 있어서의 완성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된다'라고 주장한다(창 15:15; 29:6; 37:14; 43:27이하.; 출 18:7,23; 민 25:12; 신 23:7; 삿 18:15; 삼상 17;18, 22; 20:7; 25:6; 삼하 11:7; 18:28이하; 왕상 22:27이하; 왕하 22:20; 사 45:7; 48:18; 53:5; 54:10, 13; 57:2,19; 59:8; 60:17; 66:12; 말 2:5이하.).

특히 이 점은 왕하 22:20에 나오는, 요시야가 열조에게 돌아가리라는 여호와의 약속에서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여기에서 요시야가 평안히(in peace, KSB) 열조에게 돌아간다는 식의 해석보다는, 그는 '성공하여 in success', 즉 그의 소명을 완성하고 흡족한 마음으로 열조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래서는 항목을 만들어 에이레네의 의미를 설명한다.

2.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에이레네

이 단어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서, 선, 좋은 것, 구원을 의미한다. 샬롬/ 에이레네와 연합된 좋은 것은 그것들을 위한 기도에서든, 그것들이 나타날 때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하든, 자연적으로 이스라엘에서 항상 하나님과 관련시키었다.

기드온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샬롬'이라고 불렀다. 이 매우 오래된 고대 표현에 대한 분명한 해석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이 고백의 위대한 의미에는 경건한 자들이 후에 많은 다른 상황에서 말하고자한, 특별히 구약의 기도에서 표현된 것과 같은 모든 것을 그 근본에 포함하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평화를 만드시며(욥 25:2), 또한 우리에게 평화를 약속하시며, 그의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내리시며, 그의 종들의 형통을 원하신다(시 35:27; 참조: 147:14), "다윗과 그 집에는 여호와로 말미암은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왕상 2:33).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시 122:6).

샬롬은 진실로 여호와로부터 오며, 완전히 충족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신념은 시편 85편에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다. 기자는 기도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가 그 백성, 그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 영광이 우리 땅에 거하리이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입맞추었으며"(85:8-10).

이 사상의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성향은 완전한 지상적 평화의 동기로 생각된다. 여기서 우리는 샬롬이라는 말의 구약의 용법의 최고점을 본다.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그 땅에서 그의 백성에게 샬롬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레26:6). 이 문맥은 확고한 복이 뜻하는 것, 즉 원수들과 야수들로부터 평화를 아주 분명히 보여 준다. 이것은 특별한 의미에서 일종의 구원이다. 그것은 약속의 땅에서 안식과 평온이며, 그러므로 신명기 기자는 독특한 용어 메구하(안식)를 표현한 것이다(신 12:9). 이렇게 그들은 예언적 약속의 바로 가까이에 있다.

에이레네는 이 시대나 구원 시대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게 되었다. 이 단어가 어떤 생활 영역에서나 하나님이 주신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구약신앙의 특성이다. 사 46:7에서 그 일반적인 기사를 볼 수 있다: "나는 평안도 짓고 환란도 창조하니". 이 경우에는 앞에서 언급한 레위기 26:3이하의 축복과, 그리고 민 6:26의 축복("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도 포괄한다.

때때로 에이레네의 정확한 내용을 말하기란 불가능하지만, 한편 그것이 항상 인간을 위한 선한 것이며, 거기에 그의 안녕이나 구원이 놓여있는 것이다. '에이레네'는 이런 의미에서 선한 것이며 구원이다.

이러한 구원을 의미하는 구절들을 더 들어보면, 렘 29:11에서 하나님은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시 119:165에서 율법을 사랑하는 자들의 큰 평화는 율법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들이 당하는 장애물과 대조된다. 여기에 평화는 내적 구원이며 파멸이 아니다.

따라서 집회서 1:18에서 에이레네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증진되고 '기에이아 야세오스'(건강한 치유, 완전한 건강)와 연결되어 있다(참조: 사 9:7). 시 35:8과 9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평화는 구원이며, 이 문장에서 평화와 구원이 연결되어 있다.

이 구원은 렘 16:5에서 하나님의 구원이라 부른다: "나의 평강". 애 3:17에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떠나게 하니"라는 말은 "내가 복(아가다: 선, 선한것)을 잊어버렸음이여"라는 말로 해석되어야 한다. 여기서 평강은 선한 것이며, 곧 구원이다. 이 평화에 참여한다는 것은 거기에 포함된 구원의 은총을 누린다는 것을 뜻하는 반면, 평화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그 모든 복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평화를 거두어 가시면 어쩔 수 없이 애통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히브리인들은 때때로 이러한 동맹이나 협정에 대해 베리트(언약)를 사용했으며, 따라서 샬롬은 베리트와 관련하여 나타난다. 이 두 단어의 관계는 너무 강하므로, 이런 문맥에서 샬롬은 일종의 공식 용어가 된 것같다.

이 사상은 샬롬의 관계가 언약에서 두 당사자에 의해 인쳐진다는 것이다(수 9:15; 왕상 5:12). 환언하면, 언약은 '샬롬'의 관계를 개시하는 것이다. '샬롬'의 관계는 언약의 결과이다. 여호와의 이스라엘과의 화평의 언약을 나타내는, 이러한 구절들에서 '샬롬'은 실질적 안녕이 아니라 언약을 맺은 자들의 성향에 의존하는 평화의 관계를 의미하는 동시에 구원을 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누하스와 평화의 언약(민 25:12; 집회서 45:24), 레위와 평화의 언약(말 2:5), 다윗과 평화의 언약(겔 34:25; 37:26)은 구원의 언약이다.

사 54:10에서 여호와께서는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신다(Rad, TDNT).

3. 종말론적 기대의 한 요소로서 샬롬/ 에이레네

샬롬은 종말론적 기대의 한 요소이다. 영원한 평화의 최종적 상태에 대한 대망은 선지서들과 다른 성문서들에서 일관하게 표현하는 구약 종말론의 한 요소이다.

이 널리 퍼진, 다방면에 걸친 이 대망의 사실은 샬롬이라는 단어가 관계하고 있는 구절들에서 항상 발견되지 않을지라도 언급되고 있다.

낙원의 상태의 회복이 예언될 때(사 11:10이하; 호 2:20이하; 암 9:31), 하나님의 주관하에 국제적인 평화가 예언될 때(사 2:2이하), 혹은 평화의 때가 도래하는 마지막 시대의 한 겸손한 평화의 왕에 대한 기대를 말할 때(슥 9:9이하), 샬롬이라는 단어가 이런 중심적인 종말론적 구절에 사용되지 않거나 슥 9:10에서와 같이 오직 많은 다른 것들 곁에 사용될지라도, 우리는 가능한 한 가장 넓은 의미의 샬롬에 관한 예언적인 선포를 듣게 된다.

따라서 그 단어가 실제로 발견되는 구절들에 대해 어떤 보다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사 9:5에 메시야 아이의 이름들에서 그 최종 이름 샬롬 사르(평화의 왕)는 의미의 중요성에 있어서 선행하는 다른 이름들과 다를 바 없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사명(commission)을 지닌 분(사 9:1-6)으로서의 메시야는 도래하는 메시야 왕국의 평화의 보증인(guarantor)과 보호자이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사 9:7의 가장 중요한 기사에서 다시 다윗의 보좌와 결부된 구원을 위해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미 5:5에서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시다"라는 표현은 이 전체 예언의 본질을 요약한 것이다.

피조된 세상은 지금은 그것이 저지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고 있고 스스로 분열하고 있지만, 결국은 다시 온전하게 될 것인데(사 11:6-9; 29:17-24; 6:1-9), 그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다(사 65:17-19; 참조: 계 21:1-4).

평화에 관한 언약의 갱신에 관련된 메시지는 우주적이고 영속적인 평화에 관한 약속으로 발전되었으며, 이 구원의 날의 도래는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사 61:1, 2)로서 평화의 나라의 담지자요 설립자인 평강의 왕(사 9:5,6)에 자주 결부되었다.

흥미있는 점은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모든 풍부한 의미를 지니는 데도 불구하고 어느 곳에서도 특별히 내적인 평화의 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참으로 그것이 개인보다 오히려 그룹에 대해 사용되는 구절들이 더 많다.

개인에 대한 용법의 전형적인 보기로서, 애 3:17을 들 수 있다: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잊어버렸음이여". 그러나 여기에 샬롬도 감추인 내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외적 안녕의 형태로 나타낸다. 그룹과 관련된 대부분의 보기에서 샬롬은 분명히 외적으로 드러내보일 수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Rad, TDNT).

샬롬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열망에 관련된 사회적 차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순전히 개인적인 영역을 훨씬 넘어서는 공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샬롬이 체다카(의, 사 48:18; 시 86:10)와, 그리고 미쉬파트(재판, 슥 8:16)의 실제적 이상과, 나아가 심지어는 페쿠다(관리, 사 60:17)와 밀접히 관련된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이것은 또한 가장 보편적인 용례에서 이 단어는 개인적 개념어라기 보다는 사회적 개념어임을 시사한다(H. Beck, C. Brown , DNTT).

4. 예언자의 메시지로서의 샬롬/ 에이레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에서 에스겔까지의 소선지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이 선포한 구원의 메시지를 강렬하게 대항했다. 수세기를 통해 계속된 이 투쟁에서 모든 사람의 주의를 끈 표어는 샬롬(평화)이다. 참으로 전문 용어 인나베 레샬롬(그는 평화를 예언한다)은 이와 관련하여 나타난다(렘 28:9).

샬롬은 어떤 선지자 서클의 정점이었으며, 따라서 이 용어는 두 파당 사이의 심한 투쟁의 중심이 되었다. 문제는 이미 구원의 선지자들을 반대한 미가야의 입장에서 보여졌다. 그러나 이 용어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왕상 22:5이하).

미가는 몇몇 대항자들과 싸웠는데 그들을 이득을 얻기 위하여 예언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들은 이득이 있는 한, 구원을 선포할 것이다: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 도다…"(미 3:5이하).

예레미야는 그 치열한 투쟁에 투신하여 선지자들로부터 가장 강렬한 저항을 받았다. 큰 고통 중에서 예레미야는 샬롬 에메트(영원한 구원)를 약속하는 예루살렘의 운명이 무엇인지를 말한다(렘 14:13이하).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렘 28장에서 예레미야와 이런 선지자들 간의 극적인 교전의 이야기를 읽는다. 예레미야와 하나냐 간의 문제의 요점은 샬롬(평화)이냐, 라아(환란)이냐 이다.

최종적으로, 에스겔은 거짓 선지자들이 구원이 없는데도 샬롬 하존(구원의 이상)을 본다고 하며 백성을 잘못 인도했다고 동일한 항의를 했다(겔 13:16이하). 여기서 "이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 본다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니라…"며, 대항한다.

거짓 선지자들의 문제는 샬롬의 문제를 넘어가며, 이 문맥에서 추적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의심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선포한 샬롬이 신화적 개념으로 옷 입은 궁국적 종말론적 평화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실제적 정치적 평화, 즉 모든 중대한 정치적 문제가 잘 해결되어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보장하는 평화 가운데서 살 수 있다는 약속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마치 예레미야가 처음에 이 견해를 함께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다음에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게서 평강을 빼았으셨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렘 16:5).

거짓 선지자들의 프슈도스(yeu'do", 5579: 허위, 거짓말)는 그들이 샬롬을 예언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와 에스겔도 다른 상황들에서 이것을 예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백성의 죄를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절박한 심판에 관하여 어두운 정치적 장면을 해석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로서는 대응 표어 에인 샬롬(평강이 없다)이란 표어를 만들었다(렘 6:14; 8:11; 12:12; 30:5; 겔 13:10,16).

거짓 선지자들의 샬롬과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에인 샬롬 간의 싸움은 강도를 더하여 갔으며, 그러나 주전 597년과 586의 예루살렘의 정복과 멸망으로, 어떤 긴장 완화가 있게 되고, 구원을 예언했던 거짓 선지자들은 철저히 불신을 당했다. 이제는 새롭고 더 큰 의미에서 샬롬의 약속은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예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사로잡힌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악이 아니라 구원을 생각하신다는 놀라운 기사를 기록한다(렘 29:11). 여기에서 우리는 예레미야서에 있는 후기 구원 예언의 근거를 본다. 다른 나라들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가져올 구원을 보고 떨 것이다(렘 33:9). 동일한 주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맺은 평화의 언약에 대한 에스겔의 절정에 달한 메시지에 다시 등장한다(겔 24:25; 37:26이하).

샬롬에 대한 싸움은 이사야의 마지막 장들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서 샬롬은 벌써 선지자의 입장의 어떤 중요한 양상을 보여주는 표어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이 예언의 충분하고 장엄한 요지의 하나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들의 샬롬은 강과 같이 흘러내렸을 것이고 그들의 체다카(의)는 바다의 물결과 같이 되었을 것이다(사 48:18). 여기서 이 평행 관계는 이 용어가 지금 한 영적 의미를 받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유사하게 사 54:13에서 예루살렘 자손에게 약속한 구원의 복은 체다카(의)의 복과 결부되어 있다. '샬롬'과 '체다카'의 동일한 결합은 하나님의 새 도성에 대한 예언적 표현에서 나타난다: "내가…화평을 세워 관원을 삼으며 의를 세워 감독을 삼으리니 다시는 강포한 일이 네 땅에 들리지 않을 것이요 황폐와 파멸이 네 경내에 다시 없을 것이며 네가 네 성벽을 구원이라 네 성문을 찬송이라 칭할 것이라"(사 60:17-18).

사 32:17에 의하면 샬롬은 의의 결과이다: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이 시적 예언에는 '샬롬'이 더욱 실제적 의미로, '카보드'(영광)와 연결되어 있는 사 66:12에서 다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가능한 가장 풍부한 음조를 발하는 것이 있다.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아름다운 소리로 "먼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사 57:19)고 한 것과 같이 평화는 풍부한 기대를 표현하는 용어지만, 더욱 정확한 신학적 용어로 해석되지 않은 용어이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어떤 모호함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러한 많은 측면적 용어를 잘 사용하지 못하는 번역자들은 때때로 이러한 구절들에서 샬롬이 그의 회복된 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이상, 더욱 현실적인 '안녕, 복리 well-being'를, 더욱 분명한 '평화 peace'를, 신학적으로 더욱 포괄적인 '구원 salvation'을 사용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3. 랍비들, 위경 등 유대 문헌의 용법 

1. 랍비들의 문헌

(a)  랍비 문헌에서 평화라는 개념 전체에 깔려 있는 것은 여호와의 샬롬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와 그리고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모두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샬롬은 인사말로서 만날 때('샤알 베샬롬', 안녕을 구하거나 비는 말)나 작별할 때(안녕히 가라) 상대의 안녕을 구하는 것이다. 살롬으로 인사하고 인사에 답한다.

또한 샬롬은 '순조(順調), 안녕, 안전'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pBer, 60에는 임신 6개월 부터 9개월 까지 순조로운 출산(순산)을 위해 기도한 것과 아이의 가고 오는 길에서의 보호,곧 안전을 위한 언급이 있다. 그리고 '휴식이나 안식'이란 의미로도 나타난다. 샬롬은 유대인의 무덤비에서 '안녕이나 구원'이란 의미로 기록되었다.

(b)  랍비 문헌에서도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샬롬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벨론의 18개의 간구는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기원하는데 그 최종 간구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과 평화가 임하기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샬롬은 베레카(복, 지복)와 병행되고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비록 유대인들 간에 메시야 시대의 평화의 개념에 대하여 견해차가 있었지만, 평화는 의인의 몫이며,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메시야 시대의 지복(Blessings)의 총화이다. 이사야 52:7은 이것에 대하여 언급한다.

(c)  샬롬은 또한 사람들(개인들, 가정, 단체, 국가들) 간의 투쟁의 반대어이다. 따라서 사람들 간의 화평케 하는 것에 대해 자주 강조한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다. pea.,1.1에 의하면 이것은 그 열매들을 즐기는 것들 중에 하나이다. 학자들의 역할은 세상에 평화를 증진시키는 일이며(Ber 64a), 엘리야는 와서 세상에 평화를 먼저 확립한다(Eduy. 8:7). 예배에서 평화를 위한 기원으로 끝맺지 않은 축도나 기도가 없다(Lev. R. 9:9). '샬롬'은 하나님의 이름들 중 하나이다(Shab. 10b; 2:1, 4b).  UK. 3:12에 '거룩한 자여, 그는 찬양을 받으리로다. 그 안에 평화보다 더 가치있는 어떤 복을 간직하고 있는 그릇이 없도다'라고 말한다.

Rabban Simeon b. Gamaliel의 기록에 '세 가지, 즉 진리와 심판과 평화로 말미암아 세계가 보존된다'고 하였다(Avot 1:18). 이 기록에 의거하여 탈무드(Talmud)는 '만일 심판이 집행되면 진리가 지지를 받고 평화가 증진되기' 때문에 그 세 가지는 사실상 하나라고 선언한다(TJ, Ta'an. 4:2, 68a). 탈무드 랍비들의 최고 이상은 평화이기 때문에 그들은 할 수만 있으면 평화를 위하여 정의나 심판을 유보하거나 제외하였다.

힐렐(Hillel)에 있어서 아론은 평화를 추구하는 자의 한 모델이다(Ab,.1,12; ckawh, Str.B,.1.217). S.NU(42.6:26)에는 이방인들이나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의 죄가 있을지라도 그들이 평화하는 한 사탄이 그들을 해칠 수 없다고 한다. 랍비들은 호 4:17을 해석하여 '이스라엘이 우상들과 연합되어 있을지라도 평화가 그 안에 우세하고 있는 한 그대로 두라'고 가르친다(Gen. R.38:6).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진리의 엄격한 노선에서 벗어나는 것도 허락되었으며(Yer. 65b), 탈무드는 민 5:23에 관련하여 '만일 남편과 아내 사이에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신성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이름을 지울 수 있다면, 전세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참으로 더욱 많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랍비들은 성경 자체와 모순하여 어떻게 사람들 간의 평화를 지지하는지를 설명한다(CKAWH,Slav. En. 52:11-13).

이것은 이웃의 '샬롬', 곧 구원을 구하는 문제가 아니라 다툼의 종식이라는 의미의 [샬롬]을 구하는 문제이다. 아마도 이것은 불일치나 불화가 메시야의 도래를 방해한다는 사상에 의한 것같다. 랍비들의 기록은 시기, 다툼, 불화가 하나님의 뜻에 반대가 된다는 강한 신조를 명시하고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바로 세상의 존속은 평화에 의존한다(Ab., 1,18). 물론 하늘에 있는 것들 역시 불화할지라도 그렇다는 것이다(참조, 골1:20).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하여 구약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샬롬'의 용법을 도입하게 한다. 다마스커스 문서는 하나님이 모든 육체와 다투고 있다는 사실로 시작한다. 이 다툼은 평화를 이루는 장막을 만들기까지 널리 펴져 나간다. 우상숭배와 같은 죄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반목을 조성하지만(Lv. r.,7 on 6:2), 제단의 돌들은 그들 간의 평화를 조성한다M. Ex., 29 등). 하나님과 사람 간의 평화와 다툼은 사람이 두 가지, 곧 긍정적으로와 부정적으로 행동하는 상호관계를 포함한다.

(d)  앞에서 살펴본 바, 샬롬은 유대인이 대망하던 구원의 핵심 바로 그것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평화를 추구하고( Rabbi Hille1, Aboth I:I2. SBI 217)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세우는 것은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었다. 랍비들의 가르침에서 평화롭게 하는 자의 역할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그것과 유사한데, 이 점에서 랍비 유대주의는 신약성경의 '새 계명'과 비슷하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근본 동기는 이유에 대한 적극적인 사랑이라기보다는 샬롬을 방해할런지도 모르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적용되는 것은 또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이리하여 평화라는 개념은 사람이 행한 것과 행하지 않은 것 모두를 한층 중요하게 생각하는 새로운 차원을 얻게 된다. 이러한 평화에 대한 개념은 구약 시대 이후 발전한 새로운 용법에 큰 영향을 주었다.

2. 위경, 요셉푸스, 필로

(a)  위경에서 종교적 용법을 고찰해 보면, Test ⅩⅡ에서 '평화의 천사'라는 말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에이레네는 Test. L. 18:4와 D. 5:9,11에서와 같이 전쟁의 중단으로 표현된 구원을 의미하지만(Test. Jud. 22:1이하) 그것은 구원의 효과를 내지 못한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Test. ⅩⅡ와 특별히 Eth. En에서 평화의 반대는 랍비들의 견해와 같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또는 인류와 투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다.  Eth. En에 의하면 불경건한 자에게는 긍휼과 평화가 없고(5:15), 하늘의 타락한 수호 천사들에게는 평화도 없고 용서도 없지만(12:5), 반면에 의인에게는 평화가 약속되어 있다.

그러나 Eth. En. 1:17이하에 의하면, 평화는 심판의 유보 또는 비집행이며, 따라서 평화는 용서와 심판자의 긍휼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지만 평화는 또한 빛과도 연결되어 있어서 긍정적인 의미를 함축하며, 구원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의 평화는 '평안히 내버려 두었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열 두 족장의 유훈에서 평화는 재판을 유보하는 것, 즉 범법자를 동정하여 유예해 주는 것, 혹은 적어도 그에 대한 형벌의 집행을 유예하는 것을 의미한다.  위경에서 평화는 또한 인간들 사이의 일치나 화합을 의미하기도 한다(Foerster, TDNT;  H.Beck, C. Bro wn, DNTT).

(b)  요세푸스는 구약성경과 랍비들의 용법을 철저하게 따른다(Ant. 1, 179; 11, 216; 8, 405; War 2, 135).

(c)  필로는 언어학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헬라 전승을 따른다. 그에게 있어서 에이레네는 정치적 평화와 욕망의 싸움과 대조로, 오직 하나님께만 속하고(Heinemann,413ff), 하나님으로부터만 찾아 얻을 수 있는 내면적 안식인 마음의 평안을 의미한다(Vit. Mos., 1, 304). 그렇다고 해서 평화의 외면적이고 객관적으로 입증이 가능한 상태를 가리키는 측면과 무관하지 않다. 내면적, 외면적으로 싸움과 평화는 그룹을 이룬다. 내면적 싸움이 가장 나쁘며, 그것이 모든 악의 근원이다.  필로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역시 내면적 평화를 유혹과 탐욕에 대한 승리로 간주하였다(Jos. 57). 이디오피아어 에녹서 52:11은 '평화와 사랑을 가져오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 선언하고 있다(Foerster, TDNT).

3. 쿰란 문서

쿰란 공동체는 변절한 이스라엘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1QS 8:4-9; CD 1:4과 해당 구절) 자신을 구원 받은 자들의 종말론적 공동체라고 생각하였다. 이 공동체의 성원들은 이미 종말론적 평화를 향유하는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그들의 문헌에서는 영원한 평화(IQS 2:4), 평화의 넘치는 풍요( IQS 4:7), 끝이 없는 평화(IQH 7:l5), 지속적인 평화(IQH 15:16), 제한 없는 평화(IQH 18:30) 등에 관한 구절이 나온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아직도 투쟁의 와중에 있다(CD 4:13 및 그 밖의 해당 구절에서는 벨리알과 이스라엘 및 미가엘의 싸움이 언급되고 있고, IQM 1:9 이하에서는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의 싸움이 언급되어 있다).

평화의 도래는 재난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IQH 1:17). 구원은 구원을 받을 사람들이 불 붙는 용광로 속에서 연단을 받은 후에라야만 참된 것으로 인정 받는다(IQM 17:1). 하나님은 이미 영원 무궁한 평화의 언약(구원)을 생명의 바늘로 새겨 놓으셨다(IQM I2:3). 이러한 평화는 더 이상 거절을 당하지 않으며(IQH 9:11), 구원의 복으로 충만한 피난처가 된다(IQH 9:33). 평화는 구원과 행복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평화'(IQM 3:5; 4:14)와 '하나님의 기쁨'은 하나님의 백성이 안전한 그들의 고향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암호이다(1QM 3:11).

4. 신약성경의 용법 

1. 서론

에이레네는 신약성경에 92회 사용되었으며, 요한 1서를 제외한 신약의 모든 성경에 나온다. 복음서에 25회(마 4회, 막 1회, 눅 14회, 요 6회), 사도행전에 7회, 바울 서신에 47회, 야고보서에 3회, 베드로서에 5회, 유다서에 1회, 요한서신과 계시록에 4회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에이레네의 변화 또는 발전된 의미를 모두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단어는 형태와 내용에 있어서 70인역본과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전통을 착실히 따르고 있다. 그리고 랍비 문헌의 샬롬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추가로 고전 헬라어 문헌에 나타난 의미들이 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의 의미는 인사와 그리고 유사한 표현에서 안녕(well-being)이나 구원(salvation)이란 의미를 가진다.

마 5:34(눅 7:50)와 약 2:16에서 작별 인사로, 눅 10:5; (눅 24:36); 요 20:19; 요 20:21; 요 20:26에서 도착 인사로 사용되었으며, 당시 팔레스틴에서 유행한 인사를 번역한 것이다.

행 16:36에서 누가가 로마 간수의 인사말로 "평안히 가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그는 분명히 그 인사말을 70인역본에서 취했으며, 새 언약의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인사말이라고 생각했다.

사도 바울 역시 항상 그의 편지서들에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라는 인사말을 사용했다.

계 1:4에도 동일한 인사말이 나온다. 이것은 히브리인과 아람인의 인사와 같은 것이다.

디모데전·후서, 요한이서, 그리고 유다서에서는 자비를 뜻하는 말과 함께 사용되었으며, 평화는 또한 예를 들어 벧전 5:14; 요삼 1:15에서처럼 끝맺는 인사말에 나온다. 구약성경의 평안히 가라와 비슷한 말이 행 15:33과 고전 16: 11에 나오며, 눅 2:9에 나오는 시므온의 말도 이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안전(security)이란 의미의 에이레네는 눅 11:21에서 찾아볼 수 있다(참조: 살전 5:3). 고전 14:33에서는 구약성경의 영향이 한층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서 에이레네는 무질서의 정반대이며, 교회 안의 무질서에 반대되는 상태를 나타낸다. 행 14:2.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의 주요 의미는 분명히 헬라적인 의미가 아니라 보다 깊은 의미에서의 구원이다. 에이레네는 인간 간의 일치 또는 조화를 나타내며(행 7:26; 갈 5:22; 엡 4:3; 약 3:18; 참조: 벧전 3:11), 하나님과의 화평도 의미한다.

에이레네는 행 12:20; 행 24:2; 마 10:34; 계 5:4에서는 전쟁과 반대되는 평화에 대해 사용되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영혼의 평안에 대해 사용하는데(참조: 롬 15:13), 이런 용법은 매우 드문 헬라의 용법이다.

눅 14:32에서는 평화의 조건을 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인사하는 것을 뜻하는 아람어투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문맥상으로는 존경과 무조건적 복종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그 용법상 세 가지 중요한 개념을 지니고 있다. - ⑴ 안식의 느낌으로서의 평화,  ⑵ 하나님과의 화해의 상태로서의 평화, ⑶ 그리고 종말론적 구원으로서의 평화이다. 이 중 마지막 의미가 기본적인 것이다.

2.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 만물의 정상적인 상태로서의 에이레네

고전 14:33에서 바울에게 있어 에이레네는 고린도 교회에서 생각을 예언함으로 야기된 어지러움(혼란스런 상태)과 반대되는 정상적인 상태이다.

영감을 주시는 하나님은 어지러움(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평화의 하나님이시다. 영감은 다툼과 혼란을 위한 구실을 허용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시기와 분쟁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가 아니다. 여기서 지적하는 원리는 이적(miracles)이 법의 위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법을 위반하는 편이 아니라 법을 지키므로 결과하는 평화, 곧 질서의 편이다. 이 질서의 평화는 진정한 교회의 정상적 상태인 것이다(고전 12:2; 약 3:16과 비교).

평화는 공동 예배(고전 14:33)와, 사도와 그의 협동자들 간의 교제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 의미에서 에이레네가 분명히, 강조적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주목을 끄는 내부와 외부 사이의 관계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건강한 또는 정상적인 상태는 하나님에 의해 영혼이나 인류에 제한되지 않고 전 우주에 미치는 것이다(참조: 1corinthians, ICC; V. Hasler, EDNT; Foerster, TDNT).

3. 인간의 종말론적 구원으로서의 에이레네

(a)  여기에서 출발점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 특별히 종말론적인 구원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구약성경의 샬롬이다.

눅 1:79에 사가랴의 찬송에서 에이레네는 대망한 종말론적 구원이다.

눅 2:14에 천사의 찬송에서 에이레네는 사람들 중에 평화나 하나님과 평화 뿐만이 아니라 이제 땅으로 온 구원을 가리킨다.

눅 19:42에 "평화에 관한 일"과 눅 19:38에 "하늘의 평화"도 구원이다.

계 12:10과 계 19:1에 "구원(소테리아)은 에이레네와 동일한 것이며, 그 의미는 (요한계시록에서 소테리아와 동일한) 에이레네가 하늘에 있고 하늘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적 사건으로 온다. 히 13:20은 이것을 "평강의 하나님"과 "양의 큰 목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자"를 동일시 함으로써 넌지시 암시한다.

히 7:2은 그리스도의 전형으로서의 멜기세덱은 살렘 왕, 곧 평화의 왕이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구원은 평화의 복음으로 선포된다(엡 6:15; 참조: 행 10:36; 엡 2:17).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이다(요 14:27). 세상은 오직 [샬롬]을 원하며, 그리스도는 자기가 확보한 구원을 주신다.

예수님은 관습적인 작별인사를 사용하셨으며(막 5:34; 병행구, 눅 7:50),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평안의 인사(이 집에 평안이 있을 찌어다)를 가르쳐 주셨다. 제자들이 어느 집에든지 들어갈 때 하는 인사는 소원이 아니다.  그 평안은 그대로 거절하거나 받거나 해야 하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만일 거절하면 참으로 그 평안은 제자들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눅 10:5이하; 마 10:13). 이스라엘의 마지막 세대는 최종적 선택을 직면하고 있다. 평화의 인사 형태에 동반하는 구원의 말없이 어느 성읍이나 집에도 들어갈 수 없다. 이 인사를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평화의 아들'이 되지만 이 인사를 거절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으로부터 영원히 제외되어 있는 것이다(V. Hasler, EDNT).

그리고 편지서들(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빌 1:2; 살전 1:1; 몬1:3)과 계시록(계 1:5)에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라는 인사 또는 축도의 말은 특수한 의미를 지닌다. 유대인의 축복 공식문은 '긍휼과 평화'이다(2bar. 78:2). 바울은 이 축복문에서 '긍휼' 대신 '은혜'를 취하여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있기를 원하노라)"라고 축복한다.

그는 "은혜와 평강"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시키므로, 예배 의식을 따랐다. 이 축복으로 그는 그의 독자들에게 주님의 구원의 은사를 수여하는 것이다.

그는 이 은사를 고전 1:4-고전 1:9의 서언에서 더욱 정확히 묘사하며, 갈 1:4에서 그 축복을 이어 부언하고 있다. 후자에서 카리스(은혜)는 희생제사의 방식으로 설명되어 있고, 에이레네는 악한 현세대로부터 구원 받는 해방의 과정으로 설명되어 있다. 사도 요한이 그의 계시록 서언에서 독자들에게 한 축복도 바울의 축복이 의미하는 바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 구원을 구해야 한다: 히 12:14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경고한다. 이 문구에서 에이레넨 메타(개역, 더불어 화평함)는 다른 사람들과 일치나 화합을 의미하지 않는다. 저는 다리가 고침을 받을 수 있는 우리의 발을 위한 곧은 길을 만들라는 권고 후에 모든 사람과 교제하여 구원을 구하라는 명령이 뒤따른다.

이 구원은 골 3:5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이다.

이 구원은 빌 4:7에서 사람을 보호하는 능력이다.

어떤 학자들은 6절에 비추어 이것이 불안에 반대되는 평안감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그것은 신자가 보호받는 왕국이다. 비록 인간 관계 속에서 이 구원이 때때로 사람의 외적인 일들과 동일하지 않으며, 심한 적대적인 경험으로 인도할지라도 그렇다(마 10:34이하).

(b)  이런 구절들에서 에이레네는 실질적으로 조에(생명)와 병행하며, 바울은 롬 8:6에서 평안과 생명을 동일하게 취급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바울은 육신의 노력은 사망, 영의 노력은 에이레네로 인도한다고 말한다. 그는 7절의 첫 부분에 근거를 둔다. 육신의 노력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며 오직 사망으로 인도한다. 조에(생명)와 다나토스(사망)가 종말론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일 존재 양식인 것과 같이 조에(생명)는 그와 병행하는 에이레네와 함께 있다.

에이레네(= 샬롬 = 구원)는 최종적 성취의 상태이며, 새로운 피조물의 정상적 상태이다. 이와 같은 특징은 벧후 3:14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안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엔 에이레네) 나타나기를 힘쓰라."

여기에서 에이레네는 기본적인 내적 성벽이나 내적인 평안도, 하나님의 은혜도 아니며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형성된 심신의 회복과는 별도로, 상상할 수 없는 완전한 복지(안녕)나 정상 상태를 암시한다.

이 의미에서 바울의 더욱 친숙한 인사는 때때로 데오스 테스 에이레네스(평화의 하나님)로 말한다. 이 묘사는 바울이 평화의 하나님을 기대한 것과 확고하게 연결되어 있다.

평화의 내용은 문맥에서 결정될 수 있다. 롬 16:20에서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고 말했는데, 이 사탄의 파멸은 구원의 일부이다. 평강(화)의 하나님('데오스 테스 에이레네스')이란 말은 하나님이 평화와 지복을 시행할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탄을 멸하실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벧후 3:14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정도의 구원과 복지(안녕)의 절대적인 내용은 살전 5:23에 나타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에 흠이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에이레네는 바로 '영적 번영'이 아니라 전인간, 곧 영혼과 몸의 구원이다. 동일한 의미는 히 13:20이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에이레네는 카리스(은혜)의 결과인 영혼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인간의 구원을 의미한다.

구약성경과 랍비적 용법에 근거해서, 에이레네는 이와같이 가장 심오하고 포괄적인 의미를 요구한다. 에이레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전인(whole man)의 종말론적 구원이다. 그것은 확실한 성취의 상태로서 카이네 크티시스(새로운 피조물)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 의미에서 구원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계시되었다(참조: Foerster, TDNT; H.Beck, C.Brown, DNTT; V.Hasler, EDNT 등).

4. 하나님과의 화평으로서의 에이레네

신약성경에서 에이레네는 하나님과의 평화의 관계에 대하여 드물게 사용되었다. 그 첫 언급은 엡 2:14-엡 2:17이다. 바울은 사 57:19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러므로 구원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용어가 15절에 나타날 때 그 반대어 에크드라(증오, 적의; 개역, 원수된 것)에 대하여 어떤 해석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적의를, 어떤 해석자들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의를 의미한다고 한다.

만일 율법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고 이스라엘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이 두 가지 역할을 알지 못한다면 이 구절들을 거의 올바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율법으로 말마암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대와, 또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적대가 일어난다. 사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그리고 율법을 위하여 그들 자신들을 이방인들로부터 분리하고 이방인들을 원수로 생각해야 했으며, 이방인들은 그런 유대인을 적대적으로 대했다.

따라서 14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에이레네)이시라"는 포괄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폐하셨을 때, 두 가지 무질서 곧 사람들 중에 무질서와 하나님에 대한 무질서를 파기하셨다.

이 에이레네는 하나님과의 평화와 인류 중에 평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질서, 모든 관계의 회복(healing)을 의미한다. 그래서 15절에 에크드라(원수된 것)란 표현도 일반적인 의미를 가진다. 15절에 "화평하게 하시고"와 16절에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도 역시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크드라와 에이레네는 여기서 인종 안에서 많은 서로 다른 형태를 취하는 객관적 상태들이다.

만일 하나님과 평화가 이 구절에서 에이레네의 일부이라면 롬 5:1에서 에이레네는 그 유일한 의미를 나타낸다. "하나님으로 더불어"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이 언급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적한다. 이것은 롬 5:10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원수들이며, 하나님이 그들과 화해하셨다는 사실에 동의한다(참조, 엡 2:16). 그래서 다음 평화는 사람이 변경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상호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의 사역을 하심으로써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게 되는 관계이다.

5. 인간의 상호 평화로서의 에이레네

롬 14:17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한다. 그는 강한 자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먹고 마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서 의와 평화와 희락의 통치로 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희락(카라)"은 15절의 "근심하게 되"(뤼페이타이)어서는 안되는 것을 보여 주며, 의(디카이오쉬네)는 여하한 사람의 양심도 침해 당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생각나게 한다. 평화(에이레네)는 하나님의 나라에는 어떠한 종류의 질병이나 악이나 불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계속하여 이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봉사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하여 "평화에 관한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는 권고를 한다. 여기에 에이레네는 오이코도메(덕을 세움)와 병행하는 것이며, 그것은 분명히 상호 간의 평화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17절에서 에이레네는 이것보다 더 큰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은 성령 안에서 건강을 증진시키는 어떤 것의 창조, 즉 '에이레네'를 함축한다. 그렇지만 실제적으로 로마에 있는 교회에 적용하면, 이 건강을 증진시키는 일은 의심 없이 평화이다.

우리는 고전 7:15의 난해한 말에 동일한 사상의 어떤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화평 중에서 너를 부르셨느니라". 바울이 만일 이방인 배우자가 결혼을 파하려고 하면 기독교인 배우자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주님께서 이혼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과 모순되는 것같이 보인다: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이것은 오직 주님의 말씀, 곧 우리는 이러한 경우에 노예들과 같이 구속받지 않는다는 말씀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15절에서 우리는 제한(restriction)이 아니라 이유(reason)를 가진다. 여기에 '데'는 '그러나 but'가 아니라 '오히려 rather'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부름에 대한 언급은 바로 앞에 말한 것을 위한 근거를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히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언급된 개인적 경우를 넘어가서, 하나님이 우리를 평화로(혹은 평화를 위하여) 부르신 것을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말하는 근거를 확립한다. 따라서 '에이레네'는 마지 못해서 유지하는 결혼 생활의 불화에 대한 반대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죄가 의도한 정상에 대한 파괴 상태와 정반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물의 건강한 상태, 정상적 상태를 함축한다. 당신이 배우자와 불화할 때 그를 구원하는 것이 당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해 보라. 구원과 그 결과인 화합의 복이 당신의 가정에 임할 것이다. 인간의 상호 간의 평화도 이 정상적 상태에 포함되어 있다. 다음 절(16절)은 '가르'로 시작한다. 여기서 '그러면, 그렇다면'이란 의미를 지닌다. : "(그렇다면)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딤후 2:22은 확실히 우리가 내적 경건(신앙심)으로 평화를 조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메타가 에이레네에 관계하지 않고 '…와 함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체 안에서 에이레네는 '구원을 가져 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당연하다. 한편 그것은 확실히 싸우고 있는 변론(제테세이스)을 한번 보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23절).

다음 구절들에서는 단순히 사람들 사이의 일치나 화합(concord)을 의미한다. 엡 4:3: "화평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약 3:18 :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의가 자라나는 씨는 화평케 하는 자들이 화평으로 뿌리게 되는 것이다. 시기(젤로스)와 다툼(에리데이아)은 '에이레네'의 정반대이다. 벧전 3:11에서 시 34편에서 인용하여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라는 말을 무슨 의미로 사용했는지 정확히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의미는 아마도 일치와 화합(참조, 9절)일 것이다(참조: Foerster, TDNT).

6. 영혼의 평화로서의 에이레네

롬 15:13에서 이 단어는 영혼의 평화를 의미한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그러나 이 단어가 어떻게 이 의미를 취하게 되었는지를, 즉 정상적 상태에 대한 신약성경의 이 단어의 일반적 용법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평강의 하나님"이란 말이 외적 생명에 관한 의미를 함축하는 것과 같이, 그리고 에이레네가 인간의 전존재의 정상적 상태 - 카라(기쁨)와 불가분리적인 상태인 구원 - 을 인간 안에 창조하신다.

여기에서 에이레네의 개념은 스토아 철학의 소극적인 갈레네(고요함, 평온)와 다르다. 이 평화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세상으로부터 은둔도 아니고 영적 세계나 시비적 명상에로의 경건한 도피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삶을 살아가면서 영원을 찾을 때에 이미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는 기쁨이 충만한 확신이다(참조: Foerster, TDNT; H.Beck, C.Brown, DNTT). 이러한 영혼의 평화는 히브리어 샬롬의 특징도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평화는 독특하게 기독교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리고 영혼 또는 마음의 평화에 관한 문맥들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롬 8:6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라는 구절과 갈 5:22의 성령의 열매들 중 하나로서 "화평"은 이러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전자에서 에이레네는 생명인 구원을 뜻하고, 후자에서 사람들 간의 일치, 조화를 뜻하지만 내적, 영혼의 평화도 포함하고 있다(참조: 롬 14:17, [인간 상호 평화로서의 에이레네] 항목).

빌 4:7에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골 3:15에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평강",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이 다스리는 영역으로서 마음과 생각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 구원하는 능력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마음 또는 영혼이 평화를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참조: Walter Bauer; H.Beck; C.Brown; W.Foerster; G.Von.R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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