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7.03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온유_겸손 : 거룩하신 하나님 보시기에.말씀에 비춰보아 회개하고 따름으로.말씀 적용함으로. 상호 섬김 용납 축복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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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 : 나는 날마다 죽노라. I'm Nothing NoBody in Myself, but everything in Christ

영존-완전-전지전능하신 창조주, 지고지선의 아버지-연인-머리이신 분의 피조물-둘로스의 참된 자각안에서 주님만을 신뢰하며 자기[자기의 뜻-주장-자랑-애착-선호 등]를 내려놓고 비워 내어드려, 전적으로 주님의 모든 공급과 말씀을 의지하며 죽기까지 복종함으로써 섬김의 사랑 이룸...(( 절대적인 사랑에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 필요충분조건이요 참생명, 모든 의미요 최고가치로 삼는데서 떠나, 상대화시키고 스스로 자행자제하여 하나님, 곧 그분의 말씀을 거역하고 떠남으로 인해 경험한 바, 하나님의 모든 복락누림 상실의 함정을 깨닫고 사랑겨운 주 말씀의 절대적 거울 앞에 심령의 가난함과 애통함으로 회개하며 깨어 구하며, 십자가 사랑으로 다시 거듭나게 하신 자로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고 말씀과 성령 의지하며 죽기까지 붙들고 의지-소망-앙망-견인-복종함의 태도.

##온유 :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Living by(through, of) Christ (God's Word)

변화무쌍하며 일시적, 유한한 육신-세상-마귀의 어떤 유혹/위협이나 압박-시험-조롱-참소 등 모든 도전에도 스스로 선택결정-자행자제함 없이 [주님이름 불러 의지하기에,요동하지 않고, 주님이 바라시는 지고지선의 진복, 곧 구원영생을 위해...일절 오래참음과 관용으로 아가페따라 말씀을 살아냄] .....주께 묻고 듣는 바, 오직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절대적 최고가치외 규범으로 삼고 여겨 존숭하며 하나되어 행함, 친히 창조하신 모든 만물과 만유를 섬기며 통치하시는 주님 마음의 어떠하심(자비-은혜-긍휼-인내/관용-인자와 진실하심) 살펴 알아드리며 그에따라 하나되어 일편단심-일심으로 행하며 복종함으로써 섬김..


===[온유]======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12:3)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판단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시76:9)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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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의 히브리어는 <아나브-עזו>.... 온유는 [온화, 친절, 동정, 인내, 곧 자비와 긍휼, 관용과 겸손 자체인]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실행하는 그 심령을 의미....곧,  하나님의 뜻 앞에 종(둘로스)된 자신을 철저히 낮추는 그 마음,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찾고 추구하며 붙들어 하나됨으로 행하는 그 태도, 단지 [주위의 그 어떠한 자극과 도발에 대해서] 분노와 혈기를 내지 않는 그러한 모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뛰어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내시는 바 주님 마음의 심정과 뜻 앞에 순복하며, 그 심정을 알아드리는 태도이다. 

온유를 뜻하는 <아나브>는 “대답하다”의 단어인 <아나>에서 유래하였으며, 대답하는 자란 곧 [둘로스] Servant를 의미... 주인 앞에서 [피조물의 자각을 가지고 자신을 낮추는 겸비와 겸손으로 허리를 동인 둘로스로서의] 그 태도가 <온유>로서, 하나님의 뜻과 주권 앞에 순복하는 그 태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온유>안에 투영되어 있다.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영혼이 온유한 자,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마침내 건지실 것이며, 온유한 영혼의 편에 서실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심령이 그 안에 살아서 움직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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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n:[;(6035, 아나우) 가난한, 고통 받는, 겸손한, 온유한

아나우(형용사)는 아나(hn:[; , 6031)에서 유래했으며, '가난한, 고통 받는, 비천한, 겸손한, 유순한, 온유한'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9회 나온다.

---형용사 아나우는 고난의 목적인 경건한 자의 도덕적, 영적 상태를 강조한다. 

여기에서 고난의 목적은 이 상태가 세상적 행복과 풍요보다는 오히려 고난 받는 삶과 결부됨을 암시한다.

---아나우는 고난의 의도적인 결과, 즉 겸손을 뜻한다. 

모세에 대한 묘사에서 그러한 사람은 거만하게 자랑치 아니하며(민 12:3) 단지 그의 처지를 그대로 말하는 자이다. 즉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자이다(참조: 행 20:19에서의 바울의 말).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모세는 하나님과 가장 완전하게 관계를 맺었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이러한 태도는 축복 받은 것으로 찬양되며, 요망되는 태도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고난을 주실 때 의도하신 목적이 바로 이것이며 그들은 이 목적을 향하여 고난을 견디어야만 하는 것이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과분한 호의)를 받음으로(잠 3:34) 하나님을 그들의 구원자로 여기며, 경험으로 안다. 

그들은 하나님이 찬양 받으실 때 기뻐하고, 하나님을 찾으며(시 69:32, H3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킨다(습 2:3).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며(시 37:11) 그의 인도하심을 받는다(시 25:9). 

따라서 그들은 교만한 자들보다 더 나은 존재로 칭찬 받는다(잠 16:19). 

그들은 사악한 자들(시 37:11) 및 조롱하는 자와 대조된다(잠 3:34). 

이사야(사 61:1)는 이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여기에서는 "마음이 상한 자"와 병행된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인정하심을 인식하고 있으며 종말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실 것을 확신하고 있다(시 76:9, H10, 시 147:6, 시 149:4).

---유월절의 무교병을 고난의 떡이라고 부르는 것은 흥미롭다(신 16:3). 

이 떡은 고난의 궁극적인(때때로 당연한) 원인인 죄(시 25:18)와 죄의 속박(특히 애굽에서의 고난)과 하나님의 구원하심(애 3:19)을 상기시키는 물질이기 때문이다.(참조: L. J. COPPES;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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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u?"(4239, 프라위스) 온유한, 친절한, 겸손한, 동정심(인정) 많은.

1. 고전 헬라어 문헌 

프라위스는 호머 시대로부터 사용된 단어로서 어원상으로는 고트어의 프뤼온(사랑하다), 프리온드스(친구) 등과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온화한, 온유한, 즐거운'을 의미한다.

프라위스 단어군에서 나온 단어들은

(a)   사물에 관해서는 '진정시키는, 온화한' (예: 진정제, 온화한 말),

(b)   동물에 관해서는 '길들인' 또는 '유순한'(길들인 유순한 짐승), 짐승을 길들이거나 짐승이 화나거나 흥분할 때 달래거나 진정(안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c)   사람에 관해서는 분노, 난폭, 매정, 잔인하지 않고 '온화한, 친절한, 온유한', 그리고 '즐거운',

(d)   행동이나 감정 혹은 징계와 같은 것들의 '친밀한, 친절한, 관대한'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들은 적에게서는 인정 사정 없는 가혹한 행위가 예상되는 것과 반대로 친구에게서 예상되는 어떤 성질을 가리킨다.

---이 파라위스 단어군과 에피에이케스(ejpieikhv", 1933) 단어군의 개념, 이 개념은 모두 억제되지 않는 분노, 가혹함, 야수성 그리고 이기심과 반대된다. 

이 개념은 고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 즉 모욕을 받고도 화를 내지 않는 현인, 재판에 임하여 인정 많은 재판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자비로운 왕 등이 지닌 성격의 특징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 단어들은 이상적 통치자에 관한 묘사나 고위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찬사 속에 자주 등장한다. 헬라 및 헬라 철학에서 이 개념은 높은 가치를 지닌 사회적 미덕이자 이상을 표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개념을 정열과 무감정의 양극단 사이에 있는 복된 중용의 덕이라고 생각하였다 (F.Hauck/S.Schulz).

2. 70인역본의 용법 

프라위스는 70인역본에서 모두 l9회 사용되었으며, 그 중 3회는 히브리어 아니(억압받는, 가난한, 괴로움 당하는, 비천한, 낮은, 겸손한)의 역어와 아나우(가난한, 겸손한, 온유한)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는 아니가 21회, 아나우가 65회 나오는데, 프토코스, 페네스, 타페이노스, 그리고 프라위스 어군 등으로 번역하였다는 사실은 이 히브리 단어들이 광범위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서 나누어 번역할 특별한 신학적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가난한 자란 토지 재산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부당하게 억압당하고, 권리를 빼앗기고, 하나님께서 물려주신 풍성한 유업을 수탈당했다. 그들의 가난은 상속권 박탈과 불법적인 손에 의한 것이지 그 사람 자신의 잘못에 의하여 비롯된 것이 아님이 이 단어(아니)가 재산이 아니라 폭력과 대조되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그들은 불법적인 착취의 희생물인 경우가 많았다(욥 24:4; 참조: 사 32:7; 시 37:14). ..........일반적으로 아니는 무방비 상태인 사람, 권리가 없는 사람, 억눌린 사람, 속임을 당하고 착취당하고 비천한 사람을 의미한다(참조:시편 9편과 10편).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아니의 편이시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심판자께서 그들을 보호하시며, 그들은 오직 이 사실을 신뢰하며, 이에 소망을 두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권리 없는 자들의 하나님인 까닭에, 동료 인간들에게서는 자비를 얻지 못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위로하시며 구원하신다(시 l49:4; 시34:2; 욥 36:15; 참조: 사 29:19). 

마침내는 지금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것을 뒤엎으실 것이다(사 26:6). 

그들은 땅을 차지하고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한다(시37:11). 

여호와는 그들을 붙드시고(시 147:6). 공의로 지도하고 그 도를 가르치신다(시 25:9).

---민 12:3에 보면,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다". 

온유는 지도자의 중요한 자격 중 하나이다. 

집회서 3:8에서 "훌륭하게 되면 될수록 더욱 더 겸손하라 주의 은총을 받으리라" 하였고, 

집회서 10:14 에서 "주님께서는 군주들을 그 권좌에서 몰아내시고 그 자리에 온유한 사람들을 앉히신다". 

욜 3:11에서는 프라위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없다. 선지자는 성전(聖戰)을 위해 부르고 있다. 평화의 도구가 전쟁의 무기로 바뀌워져야 하고 온유한 자가 용사들이 되어야 한다. 

온유한자가 땅을 차지하고 다스린다.

---앞에 살펴본 바와 같이 아니 및 특히 아나우는 사회적으로 억압당하고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는 의미로부터 깊은 곤궁과 곤란속에서 겸손하게 여호와의 도움만을 바라보는 사람 또는 그렇게 함으로써 도움을 얻은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다(습 3:12; 참조: 습 2:3; 사 41:17; 49:13; 66:2).

쿰란 문서에서 이 단어들은 일반적으로 공동체의 구성원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쿰란에 있던 가난한 자들의 공동체는 사유재산의 포기를 질서의 한 규칙으로 정했으며, 종말론적인 구원을 기대하는, 조직이 잘된 공동체 생활을 이룩하였다(ptwcov", 4434 프토코스).

---슥 9:9에서 아니/프라위스는 메시야에게 주어진 영광의 칭호로 사용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적으로 보잘것 없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동물을 타셨을 때 그 길은 가난한 자와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에게로 향하셨다(역사의 초기에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은 나귀를 타고 다녔지만(삿 5:10; 삿 10:4; 삿 12:14; 삼하 16:2), 후에는 말이 권력가진 자들에게 걸맞는 탈것이 되었다(그러나 슥 9:10에 나오는 병마에 대한 저주를 주목하라, 사 2:7; 사 31:1을 참조). 나귀는 평화를 위해 오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탈것이었다(J.G.Baldwin).

---아니의 의미는 슥 9:9을 비롯한 수많은 구절에서 변화되어 있다. 

즉 70인역본은 이 단어를 프라위스로 번역함으로써 보다 수동적인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단어를 능동적이며 윤리적 의미를 가진 헬라어 단어로 바꾸어 놓았다. ....문자 그대로 결핍을 의미하는 단어가 온유나 겸손 따위의 찬양할만한 미덕으로 변화되었다. 

그것은 그 이상 그 단어의 비밀을, 그 영적 의미를,(다른 모든 것이 구비 충족되어도 참생명-영원생명-영생의 말씀-주 없이는 절대결핍 상태, 곧 참된 삶이 아님을!!)  헬라어가 보다 분명하게 나타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프라위스는 신약성경에서 마태복음에 3회, 베드로전서에 한번 나온다.

(a)   프라위스는 마 5:5에 나오는 세번째 축복, 즉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는 축복 선언에 나타난다. 

일반 헬라어의 용법에 따르면, 프라위스 곧 온유한 자는 본능과 충동, 격동 등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훈련된 인격자이다. 

이 단어의 통상적 용법은 인간에 대한 태도를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온유의 그리스도교적 개념은 이러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훨씬 더 깊은 것이다.

특히 [주님, 곧 말씀 앞에서, 그 말씀하시는 분의 어떠하심의 거울앞에 비추어 보아]자신을 평가 절하하고 부당하게 대우하며 해롭게 하는 자들에 대한 [일절 오래참음-고요-평정 유지함의] 마음의 성향 및 행동을 묘사하는 것이다. 

신약성경 히브리 역본에서 마 5:3에 "가난한 자"와 여기에 "온유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다같이 아니이다. 

이것은 "온유한 자"는 "가난한 자"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아니는 '가난한, 억압받는, 괴로움 당하는, 비천한, 낮은, 겸손한'을 뜻하는데, 제 1복에서는 자신의 문제인 "가난한"이란 의미가 더 강조되어 있고, 여기서는 타자(他者)와 관계에서 자신의 문제인 '억압받는, 괴로움을 당하는, 겸손한'이란 의미가 더 강조되어 있다. 

따라서 온유는 나 자신에 대한 자세인 동시에 타자, 곧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관계에서 나의 자세의 표현이다.((그는 살아 생동하는 말씀안에 거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성령을 통해 약속하신 바 하늘나라를 이미 믿고 살고 누린다!!)) 

그리고 동사 클레로노메오(klhronomevw, 2816)는 70인역본의 신 4:1; 신 16:20 및 시 68:36에서 이스라엘의 땅을 소유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구절에서 의미하는 것은 새로운 약속의 땅을 소유하는 것, 또는 상속받는 것이다. 

신명기 기자에게 복종과 의로움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조건인 것처럼, 축복선언에 나오는 바, 가르침에 겸손히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새로운 땅으로 들어가는 조건이다. 

이 구절은 시 37:11의 그것과 같은 주제를 말하고 있다. 

이 시편의 주제는 축복 선언 전체의 주제와 매우 유사하며, 다위비드 힐은 쿰란 종단은 이 시편을 그들의 메시야적 공동체의 확립을 통하여 성취될 과정에 관한 예언으로 채택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한다(4 QpPs 37; 참조: Op.cit , 112).

이 축복선언은 지금 억눌리고 멸시 당하며, 마치 가나안 정복 이전의 이스라엘처럼, 자기 것이라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장래에 하나님의 땅의 통치의 상속인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동시에 그것은 예수님 자신에 관한 암시적 언급이기도 하다.

벧전 3:4에서 프라위스는 기독교 사랑의 구체적 표현인 미덕의 목록에 나온다.

(b)   프라위스는 마 11:29; 마 21:5에서 예수님과 관련하여 나타난다. 온유는 그리스도의 통치의 표시이다. 

정치적 메시야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져오기 위하여 힘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따라서 그는 사람들이 메시야 왕으로 예측하지 않는 형태로 자기를 모든 기대에서 어긋나게 처신하셨다. 즉 투구와 갑옷을 입고 군마를 타고 무장하여 무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지상에서의 주님의 사역은 힘이나 전쟁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구원을 가져오는 왕의 사역이었다(슥 9:9). 

하지만 마 11:29 은 그 배후에 셈적 사고를 가지고 있으므로(참조:사 42:2 이하; 사 53:1 이하;슥 9:9 ), 이 구절에 프라위스는 히브리적 의미에서의 아니를 암시하고 있으며, 따라서 메시야의 인간적인 빈궁함을 강조한다. 

루터는 메시야를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방도도 없고 궁극적으로는 갖가지 불의에 수난을 당했던 '거지-왕'(Begger-King)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통치하고 통치 방법은 온유이다. (참조: F.Hauck/S.Schulz; W.Bau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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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

삶 가운데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함..... 피조물의 자각안에서 자기(주장-의-애착-선호 등 ) 내려놓음 [=JC십자가를 통해 육신세상마귀가 나에 대해, 내가 그것들에 대해 처리됨] + 모든 주도권을 주께  내어드림 + 전적인 의지/복종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빌 2: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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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peinofrosuvnh(5012, 타페이노프로쉬네) 마음의 낮음 lowliness of mind, 겸손 humility.  ---바로, 팔복의 첫째 심령의 가난함!!!

tapeinovfrwn 타페이노프론..겸손한 마음을 가진

1. 일반 헬라어 및 70인역본 

명사 타페이노프로쉬네는 형용사 타페이노프론에서 유래했으며, 이 명사와 형용사는 1세기와 2세기의 세속적 헬라어 문학작품에 나타나며(Josephus, Plutark, Epictetus), '비열하게 생각하는 것, 나쁘게 생각하는 것, 잘못 마음먹는 것, 마음이 약한 것, 비굴한 마음을 가지는 것' 등, 품위를 떨어뜨리는 의미로 언제나 사용되었다. 

그러나 70인역본과 신약성경에서는 영적 의미, 곧  긍정적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70인역본에서 잠 29:23<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에 형용사 타페이노프론이 단 한번 사용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영적, 좋은 의미로 심령이 '겸손한' 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2. 신약성경의 용법 

신약성경에서 형용사 타페이노프론이 1회, 명사 타페이노프로쉬네가 7회 사용되었으며, '마음을 낮추는 것, 다른 사람의 가치를 <말씀하시는 하나님앞에서 말씀을 따라, 경청하고 살피시며 일절 오래참음으로 도우시는 주님이 그러하시듯, 존중하고 귀히 여겨 인정하며 용납하며 기다려주며, 축복하며>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 겸손'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a)  형용사 타페이노프론은 벧전 3:8에 한번만 나온다: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b)  행 20:19에서 사도로서의 자신의 일에 대한 바울의 생각을,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이라는 말로써 충실히 전해주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분쟁(행 20:20)과 부도덕(행 20:2lc 이하)의 영적 미성숙함으로 드러난 바를, <비난이나 가십거리로 삼음이 아니라 자신이 바로 그런 자였기에 그런 열매가 영적 미성숙 현상이 드러났음을 깨닫고 자신의 실패로 여겨 회개하며 아파하며 중보하고>자신의 실패를 통하여 그를 겸손하게 하심 속에서, 그리고 분쟁과 마음의 두려움(참조: 고후 7:5 이하; 사 49:13)으로 낮추어진 자들을 [깨닫고 돌이켜 주님을 추구하는 자들을 오히려]안위하심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인식한다

사역을 하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어려움들 속에서 바울은 오실 주님이 우리의 낮은 몸을 변화시켜 주님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만드시리라는 소망을 의지하였다.(참조: 빌 3:21).

(c)  겸손에 대한 바울의 권면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모범에 근거한다. 

엡 4:2(1절 참조)과 골 3:12(l절 참조)은 교회를 하나되게 하고 결속시키도록 섬길 용의를 가지라고 분부한다. 

전자에서 "겸손"으로 행하라고 권한다. 후자에서는 "겸손…으로 옷입으라"고 권한다.

겸손은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그리고 그로 하여금 자신을 비워 종이 되게 한 겸손한 마음이다. 그러므로 겸손은 연합을 이루는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모든 불화의 뒤에는 교만이 숨어있는 반면에, 조화를 이루는 가장 귀중한 한 가지 비결은 바로 겸손이다. 이 사실을 경험을 통하여 증명하기란 어렵지 않다. 

우리가 쉽게 본능적으로 좋아하여 사이 좋게 지낼 수 있는 사람들이란,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존경을 우리에게 돌리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우리가 쉽게 본능적으로 싫어하게 되는 사람들이란 바로 우리를 하찮은 존재로 취급하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허영은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의 주된 요소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존경하려고 억지로 무리하게 애쓰는 대신에(이것은 교만이다), 본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본질적인 가치를 인정하면서 [체질이 서로 다르게 지어진 바, 시작은 서로 다르지만 하나님 말씀안에서 추구하는 바 마침내 JC 닮게 하실 것을 소망하고 상호 축복함으로써]그들의 인격을 존중해 준다면 이것이야말로 겸손이다. 이런 겸손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에서 한층 더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J.R.W.Sott).

벧전 5:5에는 겸손을 옷 입는다는 은유가 나온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여". 

여기서 [겸손]으로 허리를 동여 상호 권면하는 것은 실제로 겸손한 마음으로 겸손을 실천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섬기며, 그들로부터 명령을 받고 그들의 요구에 맞게 행동함에 있어서 겸손을 나타내라는 것이다. 겸손히 섬기는 일을 옷 입는 것처럼 하라는 것이다.

빌 2:3에서는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한다. 

이것은 겸손으로 가장한 비열한 굴종에 대한 호소가 아니다. [자기얼굴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모르는 단점을 가지고 있으며, 또 내가 가지지 못한 장점을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진정한 자아 평가를 할 것을 요망한 것이다(John A.Knight).

(d)  골 2:18에서 그는 일부러 겸손한 척하고, 천사를 숭배하며, 금욕주의를 따르는 적대자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는 매번 타페이노프로쉬네를 사용하고 있다.

(참조: H.H.Esser; W.Grund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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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 손 Humility-앤드류 머레이(Andew Murray) 저. 

저자 앤드류 머레이는 1928년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났고 9세에 영국의 아버딘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 십대에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후 네덜란드의 우크레흐트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20세 되던 해에 남아프리카 부롬폰테인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었습니다. 볼체스터, 케이프타운, 웰링턴에서도 다년간 목회를 하였고 그 밖에 선교, 교육 분야에 정통한 인재였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이 책 외에도 수많은 경건 서적들을 남겼는데 심오함과 평이함, 실제성을 두루 갖춘 그의 책들을 읽고 영적인 도움을 얻은 사람의 수는 헤아릴수도 없을 것입니다. 

토기장이에서는 이번호부터 비록 짧지만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을 번역하여 실고자 합니다. 이 책은 이미 전 총신대학교 학장을 지내신 김희보 목사님께서 1977년에 번역, 출간하셨지만 이 책은 원서의 완역이 아니고 번역본의 어법과 어휘 등이 현대 젊은이들에게 익숙치 않은 것들이 많기 때문에 비록 형편없는 실력이지만 기도하는 마음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졸역이라는 비난은 면치 못하겠지만 저자가 말하는대로 지극히 아름다운 겸손이 우리의 삶 가운데 은혜와 같이 넘쳐 흐르기를 바라는 마음 가득합니다.

제 1 장 피조물의 영광인 겸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의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더라."(계 4:10,11)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에게는 한가지 목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인간을 자신의 영광과 완전함에 참여하는 존재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은 세상에 자신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을 보이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 안에 자신을 계시하고자 하셨고, 그리고 그 피조물을 통해서 세상에 자신을 계시하고자 하셨습니다. 피조물과의 인격적 교제를 통해 하나님 자신의 선(goodness)과 영광(glory)을 나타내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스스로 선과 영광을 소유할 수 있거나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어떤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선(goodness)과 영광(glory)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주권적으로 주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분이시며,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분입니다. 그 모든 만물은 하나님 안에 존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영원토록 동일한 것이고 그 관계는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진실하게 능력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언제나 진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임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영원한 축복과 행복을 위하여 현재는 물론 영원토록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빈 그릇과 같이 비우는 일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시고 자신의 능력과 선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삶은 그저 한 순간만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겸손은 삶 가운데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가능한 영역입니다. 

본질적인 면에서 볼 때 겸손은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의무인 동시에 최고의 축복입니다. 겸손이야말로 모든 축복의 뿌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것과 더불어 겸손의 상실은 모든 죄와 악의 뿌리가 됩니다. 

교만으로 말미암아 지금은 이미 타락해 버린 천사들은 자기 만족을 추구하고 불순종했기 때문에 빛으로부터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뱀이 교만-그의 교만함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의 독을 우리의 최초의 부모라 할 수 있는 아담과 하와를 향하여 내쉴 때, 그들 또한 그들의 높은 지위를 잃고 멸망으로 내던져졌습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넘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늘 위에서나 땅 아래서나 교만과 자기를 높이는 것은 지옥의 저주에 들어가는 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로 다시금 인간이 하나님과 원래의 진실한 관계를 누리기 위해 상실된 겸손을 회복시킬 만한 수단은 아무 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겸손을 회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겸손을 가져다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 겸손의 영광에 참여케 하셨고, 겸손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늘에 계신 분이었으나 자신을 낮추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주님은 하늘에서도 겸손을 소유하셨고, 그가 이 땅으로 내려온 것도 그분의 성품이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은 이 땅 위에 겸손을 가져다 주셨고 "자신을 낮추사 죽기까지 복종"(빌 2:8)하셨던 것입니다. 

겸손으로 인하여 그의 죽음은 가장 귀한 것이 되었고, 또 그 겸손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구원은 단지 생명과 죽음의 관계를 넘어서 예수님 자신의 근본적인 속성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우리가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데 토양과 뿌리를 제공하는 것이고, 그의 구속의 역사를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완전한 겸손의 삶으로 인간의 운명을 담당하셨고 그의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셨습니다. 그의 겸손이 곧 우리의 구원이고, 그의 구원이 곧 우리의 겸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죄악에서 옮기웠다는 증표를 지녀야 할 뿐 아니라, 원래의 상태(original sin)를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맺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 모두는 겸손을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할 수도 없고, 성령의 은혜와 능력도 경험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이러한 것이 없이는 신앙이나 사랑 가운데 거할 수도 없고, 기쁨과 삶을 살아갈 힘도 얻을 수가 없게 됩니다. 겸손이야말로 은혜가 뿌리내리는 유일한 토양입니다. 

우리의 모든 흠과 부족함들은 우리에게 겸손함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겸손은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도록 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관계에 있어 근본된 뿌리가 됩니다. 오직 겸손만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태도를 갖게 하고, 하나님을 모든 일을 행하시는 분으로 인정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성적(reason)인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이성으로 인해 우리가 실재의 본성과 하나님의 명령의 명백한 필요를 알아갈수록 우리가 더욱더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순종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는 그동안 교회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겸손의 본질과 중요성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인간인 우리가 스스로 취하여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부으시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것이 되시고 우리가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소중히 간직해야 할 귀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은 그의 의지와 뜻과 정성을 다해 겸손해야 하며 하나님의 생명과 영광이 그에게 역사하여 채워지도록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겸손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위치를 내어 드리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거룩함을 추구했던 초대 교회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겸손은 뛰어난 신앙을 나타내 주는 표증이었습니다. 

그러나 종종 겸손에 대해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교회의 가르침과 모본에 있어 겸손에 정당하게 부여되어야 할 중요성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이 진리-겸손-를 소홀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천사들과 예수님 그리고 하늘에 있는 성도들이 거룩한 자가도될 수 있도록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바로 겸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징표는 겸손이라고 할 수 있고, 인간이 축복을 받는 비결 또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모든 우선권을 내어 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심에서 우러난 온유와 겸손이야말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주님의 온유와 겸손에 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으면서도 스스로 주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 견해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겸손은 절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특별한 소망과 기도, 믿음과 그 믿음의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해보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겸손에 관하여 매우 강조하시면서 자주 가르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겸손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이 책을 시작하면서 교만은 우리의 본성이며, 교만만큼 더럽고 다루기 어려워서 우리의 통찰을 흐리는 것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합시다. 

이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잠잠히 그리고 끝까지 기다립시다. 그러면 우리 자신이 겸손을 얻기에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겸손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채워질 때까지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하여 공부합시다. 

우리가 교만으로 인해 넘어지고 지쳐서 더이상 우리의 힘으로는 그 교만을 떨쳐 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놀라운 생명의 은혜를 한없이 부어 주실 것을 믿고 나아갑시다.

제 2 장

구속의 비밀인 겸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빌 2:5,7-8)

어떤 나무든지 근본된 뿌리를 따라 자라게 마련입니다. 즉 그 나무가 존재하는 모든 기간동안 나무의 씨가 처음 가졌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그의 후손인 우리 인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는 이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의 필요성과 본질을 잘 설명해 줍니다.

옛 뱀-그는 교만으로 인해 하늘에서 쫓겨난 천사로서 그의 본성은 교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이 하와의 귀에 유혹의 말을 속삭일 때, 그의 말들은 지옥의 독을 품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 뱀의 말을 듣고,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분별할 수 있다고 하는 욕심에 넘어 갔을 때 지옥의 독이 그녀의 영혼과 생명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교만이라고 하는 독은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 줄 축복받은 겸손과 하나님에 대한 의지(dependence)를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그녀 자신은 물론 그녀에게서 말미암을 모든 후손은 죄로 인하여 부패하게 되었고, 교만이라고 하는 사단의 독에 의해 인간의 본성이 끔찍한 죄와 저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이 겪고 있는 이 모든 불행은 우리 인간들 모두 안에 잠재해 있는 교만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나라들간의 모든 전쟁과 피흘림, 모든 이기주의와 고통, 모든 욕망과 시기, 그리고 모든 상한 마음과 아픔의 삶, 매일 겪는 불행들은 모두 교만의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한 것도 바로 이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으로 인해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구속(redemption)입니다. 

우리 가운데 들어오 교만의 본성과 권세를 알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그리스도의 구속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우리의 삶에 던져 놓은 교만의 권세는 원래는 지옥에 속해 있던 것이며, 모든 영역을 통하여 막강한 권세로 우리의 매일의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사람들은 그것으로 그 권세로 인해 고통스러워 하고, 두려워 하며, 때로는 투쟁하기도 하며, 그것을 멀리 쫓아 내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만의 권세가 어디서, 그리고 누구에게서 기인하는지를 여전히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교만으로 인해 무척 고통스러워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그 교만을 극복할 수 있을지를 알지 못합니다.

교만은 우리의 내적인 삶에서 뿐만 아니라 외적인 삶에 있어서도 강한 영적인 권세를 갖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교만을 고백해야 하고, 통회해야 하며 교만이 사단에게서 말미암은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교만을 극복하여 떨쳐 버리도록 인도할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의 구속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놀라운 영적 권세 아래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이기심과 교만에 대한 부질없는 싸움은 교만의 뒤에 감추어진 어두움의 권세와 싸우는 것처럼 그렇게 부질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우리에게서 말미암지 않은 권세와 생명을 깨닫고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단과 그가 심어 놓은 교만을 떨쳐 버리기 위해 하나님의 어린양이 부으시는 하늘에 속한 겸손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죄의 권세를 알기 위해 "첫째 아담"과 그의 타락을 보았던 것처럼 또한 우리는 교만했던 자신을 극복하여, 또다시 교만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겸손의 생명을 주시는 "둘째 아담"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에게서 생명을 얻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정확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골 2:7)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게 하심"(골 2:19)으로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굳게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 즉 인간의 본성을 입고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구속은 우리가 서고 자라야 할 뿌리입니다. 

그 생명은 이 땅 위에서 사역하시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능력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한가지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고, 오늘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그 생명을 연구하고 알며, 더 나아가 그 생명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우리가 전인격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서 소유하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인가를 올바로 이해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이 그분을 그리스도가 되게 하는지를 잘 이해하여야 하며, 그리고 또 우리의 구속주가 되신 그리스도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성품이 무엇인가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이러한 물음에 대해 답은 오직 '겸손' 그 한가지뿐입니다. 자신을 비우고 인간이 되신 성육신이야말로 하늘에 속한 겸손이 아니라 무엇이겠습니까? 

종의 형상을 입고 오신 이 땅에서의 그의 삶은 겸손이 아니라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자기를 낯추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야말로 진정한 속죄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하늘로 올리우심과 그 영광은 보좌 앞과 영광의 관을 쓰신 주님께 마땅히 올려져야 할 겸손의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겸손히 행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가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서 이 땅위에서 살아가신 것, 그리고 그가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과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시어 보좌 위에 앉히신 모든 것이 그의 겸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본성을 입으신 하나님의 겸손인 것입니다. 

주님은 죄를 이기고 우리를 구원하시며 섬기기 위해 온유와 친절함으로 옷입으셨고 영원한 사랑으로 자신을 겸손케 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겸손케하심이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의 보혜사와 종이 되게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보혜사이고 종이시며, 앞으로도 겸손의 표상이 되실 것입니다. 

보좌 위에 앉으셔서까지도 주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겸손이 나무의 뿌리라고 한다면, 겸손의 본질이 모든 가지와 잎, 그리고 열매에서 나타아냐 할 것입니다. 

겸손이 예수님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의 전부이고 가장 요한 것이며 속죄의 비밀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영적인 삶을 유지하는 힘 또한 우리 안에 그 겸손의 은혜를 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찬양하는 것은 바로 그의 겸손 때문이며, 우리가 주님께 구하는 것도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은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늘 겸손으로 사셨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일에 소홀히 했을 때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력하고 열매가 없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스도인들이 겸손을 구하지 않을 때 구원의 기쁨이 식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자신을 죽기까지 복종하는 겸손을 구해야 합니다. 

겸손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사람들의 영광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겸손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전부가 되시도록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고 주님만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기쁨보다도 겸손을 구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임하는 것을 환영한다면, 그 때에야 비로소 교회가 세상을 이길 소망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인 우리들에게서 하나님의 어린양의 온유함과 자신을 낮추심이 얼마나 나타나고 있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그들의 필요와 느낌, 연약함들에 대해 무관심한가를 생각해십시오. 

또한 정직과 고결함이라는 이름 하에 우리가 얼마나 많이 우리의 이웃들을 성급하게 판단하고 정죄하는지, 그리고 쉽게 화를 내고 그들의 마음에 쓴뿌리를 주며 이간질하는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모든 것들은 교만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교만은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사단에게서 오는 교만은 거의 모든 곳에서 살며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만일 성도인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겸손에 영원토록 입도함을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오! 내 안에 예수님의 겸손이 가득차 있고, 우리의 삶에 예수님의 겸손이 넘쳐 흐른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 보여졌던 그러한 겸손이 없음을 정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우리가 교만하여서 겸손이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께 겸손을 구할 때에야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이 진정으로 어떠한 것인지를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

성도여!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우십시오. 

겸손이야말로 구속의 근저에 감춰진 비밀입니다. 

날마다 더욱더 이 겸손에 깊이 잠기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심을 전심으로 믿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곧 우리가 겸손함을 배워 갖추도록 우리의 온 삶을 주님께 내어 맡기십시다. 

구원이 그러하듯이 겸손 또한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제 3 장

예수님의 삶에 나타난 겸손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주님의 내면 생활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종종 자신과 아버지(God the Father)와의 관계를 말씀하셨고, 자신이 인도함을 받는 근원과 행하는 권세에 대해 자신이 영적으로 자각하고 있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비록 성경에 '겸손'이라고 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하여도 주님의 겸손하심이 성경에 드러나 있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미 겸손이라고 하는 이 은혜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버리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의 전부가 되시도록 삶 전체를 그분께 내어 드리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땅에서는 인간이셨던 예수님에게서 완전한 복종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존귀와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8:14)라는 말씀이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자주 가르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대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빌 2:8-9)을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아버지와 자신과의 관계를 말씀하시면서 계속 자신을 가리켜 "아니요"(not, nothing)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음을 주의깊게 살펴보십시오. 

그리스도와 자신의 관계를 "내가 아니요"(not I)라고 표현했던 바울의 표현은 사실은 예수님께서 자신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가리켜 여러번 말씀하시던 표현이었습니다.

"아들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나니"(요 5:19)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요 5:41)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요 6:38)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요 7:16)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요 7:28)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 8:42)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요 8:50)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요 14:10)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요 14:24)

우리는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진정한 뿌리가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위의 말씀들을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분의 위대한 능력의 구속의 역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떠하셨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고 지금도 교통하시는 구속의 본질과 생명력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아무것도 아니었고 오직 하나님만이 전부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 안에서-그리스도 안에서-아버지께서 역사하시도록 그의 모든 의지와 능력을 전부 아버지께 내어 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 사역과 가르침을 통하여 자신의 능력과 의지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내가 한 것이 아니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 나는 아버지께서 역사하시도록 내 자신을 내어드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고 복종하는 철저한 자기 부인만이 완전한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길이란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드렸지만 결국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의 겸손을 존귀하게 하사 그의 영광의 오른손으로 그리스도를 높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낯추셨고, 항상 하나님이 그 앞에 계셨으므로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또한 아셨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겸손이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을 복종하여, 주위의 사람들이 그에게 어떠한 태도를 보이더라도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시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더욱 영향력을 끼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온 영과 뜻과 성품이 겸손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 은혜에 동참할 수 있는 자로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도 겸손의 은혜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단지 하나님께서 가득 채우시도록 비워져 있는 그릇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구주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고 진정한 자기 부정인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소욕은 어느 한 순간이라도 허용되어서는 안되며, 모든 소욕을 버리고 예수님께 늘 순응해야 합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이 전부가 되시도록 우리 스스로 우리 속에 무엇인가를 채우지 않고 아무것도 행치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겸손의 뿌리와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겸손이 그렇게 피상적이고 무력한 것은 우리가 겸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이요, 진정한 겸손을 찾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온유하고 겸손했는지를 배워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겸손이 어디에서 나며, 또 그 힘이 어디에서 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하고 의지해야 하는 것, 그리고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생각하며 우리 임의대로 행치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지식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나누어주신 그 생명은 우리의 죄와 우리 자아를 죽임으로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얻어지는 생명이 너무나 높은 곳에 있는 것이어서 우리가 다다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러한 이유 때문에 더욱 그 생명을 얻고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안에 거하시는 분이 바로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겸손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그 생명을 얻기를 원하신다면 만유의 주되시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거룩한 지식의 비밀을 알고자 노력하십시오. 

이 비밀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을 나타내시도록 예수님께서 자신을 단지 빈 그릇으로, 통로로 내어드리는 바로 그 사실입니다. 

이 일에는 모든 만물이 증인이며, 모든 사람 특히 하나님늬 모든 자녀들이 그 증인입니다. 

모든 덕과 은혜의 근원, 그리고 모든 신앙과 진정한 예배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스스로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은혜를 주시도록 겸손히 하나님께 머리를 숙여 경배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그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순간적으로 떠오른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겸손은 그의 전 삶 속에 가득차 있던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가 아버지와 가졌던 관계와 마찬가지로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사랑하셨던 인간들을 위한 하나님의 종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예수님은 사람들의 종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의 역사를 이루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한번도 자신의 존귀하게 되는 것을 구하지 않으셨고, 그의 능력을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역사하시도록 삶을 내어드렸습니다.

형제여! 자매여! 당신은 겸손의 옷을 입으셨습니까? 

당신의 매일 매일의 삶을 살펴 보십시오. 

예수님께 물어보십시오. 친구들과 세상을 향해서도 물어 보십시오. 

그리고당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겸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드리십시오. 

이전까지 결코 맛보지 못했던 하늘의 축복이 겸손을 통하여 우리 안에 임할 것입니다.

제 4 장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타난 겸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마 11:29)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마 20:27-28)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삶에 나타난 겸손을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 속에서 그의 마음이 겸손으로 가득차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어떻게 겸손이 나타나는지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잘 살펴보면 그는 사람들이, 특히 그의 제자들이 자신과 같이 겸손한 자가 되기를 얼마나 원하셨던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겸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들을 단순히 인용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의깊게 그 말씀들을 살펴 볼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간절하게 겸손에 관한 것들을 가르치셨는지 그 이유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들을 살펴보는 것이 겸손에 관한 그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사역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살펴보십시오. 

산상수훈 중 팔복에 관한 설교에서 그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3, 5)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처음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문이 무엇인지를 밝히 알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천국은 주어지는 것이며, 또한 마음이 온유하여 자신의 욕심을 따라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땅이 기업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축복은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겸손은 이땅의 삶에서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축복을 얻는 비결인 것입니다.

2.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29)

예수님은 자신을 선생이라 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그에게서 배우고 본받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은 온유와 겸손이었습니다. 

우리는 오직 온유와 겸손 가운데서우리 영혼의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겸손은 우리에게 있어 진정한 구원의 요소인 것입니다.

3.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가장 큰 자가 될 것인가를 놓고 심한 말다툼을 벌였습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예수님께 묻기로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중에 세워 놓으시고 말씀하시기를, "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3-4)고 하셨습니다. 

천국에서 큰 자라 칭함을 받는 자의 특징은 과연 무엇일까요? 

답은 오직 하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천국에서 얻는 가장 큰 영광과 천국에서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 그리고 은혜 중에 가장 놀라운 은혜는 바로 겸손입니다.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가장 큰 자니라."(눅 9:48)

4. 세베대의 아들들이 예수님께 와서 천국에서 누가 주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을 것인가를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이 아버지의 손에 달려 있으며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질문을 하거나 요구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겸손의 세례를 받을 준비된 잔이 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겸손은 천국에서 오신 그리스도의 진정한 증표이며, 겸손은 천국에서도 우리의 영광을 재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가장 겸손한 자가 하나님께 가장 가까운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 안에서는 겸손한 자가 가장 존귀한 자입니다.

5. 군중들과 제자들을 향해 바리새인들의 높은 지위를 탐하는 것에 관해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한 번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리라."(마 23:11)고 말씀하셨습니다. 겸손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사닥다리입니다.

6. 또 다른 경우를 봅시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청함을 받아 가셨을 때, 상좌에 앉으려는 사람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눅 14: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 

이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이 높임을 받는 비결입니다.

7. 바리새인들과 세리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은 누가복음 18:14에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성전에서 예배할 때나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서 깊고 진실한 겸손을 충만치 못한 모든 것은 무가치한 것들입니다.

8.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계명의 권위와 모범, 그리고 예수님의 모든 생각들과 순종하신 모습들을 볼 때 겸손은 제자도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요소임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9. 최후 만찬 석상에서조차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자인가의 문제를 놓고 다투었습니다.(눅 22:26-27)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 우리를 위하여 열어 놓으신 길은 겸손에 의한 길이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능력도 바로 겸손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모든 사람의 종이 되게 하는 것은 바로 겸손에 의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교회에서 겸손에 관한 설교를 거의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겸손을 삶으로 행하는 사람도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자신에게 겸손이 부족함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 통곡하는 자의 기도도 별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의 겸손을 따르는 사람의 수가 적다고 하여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고 따르기 위해 열심으로 기도하고 노력하는 사람조차 찾을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겸손을 찾아 볼 수가 없음은 우리 모두가 안타까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모든 성도가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신실한 청지기와 참된 종의 특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신실한 종은 주인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며, 어떻게 하면 주인을 기쁘시게 할까를 깊이 생각을 합니다. 

또한 신실한 종은 자신의 것이 아닌 주인의 번성함과 존귀, 행복을 즐거워 합니다.

 언제나 그런 신실한 종들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종이라는 이름은 곧 영광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의 섬김으로 인해 우리에게 영적인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죄와 이기심으로부터의 자유가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겸손의 다른 면에 관하여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서로가 서로를 섬기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 진리를 마음 속에 받아들일 때, 주님의 그 섬김의 능력이 우리의 삶 속에 축복의 영향력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죄와 이기심으로부터의 새롭고 완전한 자유인 것입니다. 

겸손으로 인한 자유는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교만이 완전하게 뿌리 뽑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아무것도 아니고, 그것은 곧 피조물의 영광이며, 예수님의 정신이며, 하늘의 기쁨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심지어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조차 도 섬겨야 하는 섬김의 도를 전심으로 받아 들일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러한 섬김의 도 위에 서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성화(sanctification)이고, 새로운 마음으로 겸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라고 하는 예수님과 더불어 은혜를 나누고,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눈다면, 너무 낮은 자리라 하여 처하지 못할 자리는 없을 것이며, 또 아무리 머리를 굽히고 굽혀도 지나친 일이 아닐 것입니다.

형제여! 자매여! 여기 지극히 높은 영적인 삶에 이르는 길이 있습니다. 

낮은 자의 자리에 거하십시오, 할 수만 있다면 더 낮은 자의 자리에 거하십시오! 

이것이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되어 주님의 보좌의 우편과 좌편에 앉기를 원했던 그의 제자들에게 늘 하신 말씀입니다. 

높아지고자 구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종이 되고자 노력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함 분이십니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이, 우리가 자신을 낮추고 마음을 비운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과 능력을 우리 마음 속에 흘려 보내 주셔서 우리를 높이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겸손해지고자 노력해야 하고, 그렇게 겸손한 자가 높아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하난님께서는 놀라운 능력과 사랑으로 겸손한 자를 높이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겸손과 온유가 우리에게서 고상함과 대담함, 그리고 남자다운 용기를 앗아갈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겸손이 가장 고상한 성품임을 믿어야 합니다. 

만일 겸손이야말로 천국의 왕이 보여준 하늘의 정신이며, 진정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올바로 이해하게 된다면 그들은 자신을 겸손케 하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고자 할 것입니다. 

겸손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기쁨과 영광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그분의 능력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통로입니다.

온유하시고 겸손하셨던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겸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때까지 그 말씀을 계속 묵상합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약속해 보여 주신 것들을 반드시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는 것과 자신의 성품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실 것을 믿읍시다. 

온유하시며 겸손하신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에게 들어와 거하실 것입니다.

제 5 장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보여지는 겸손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주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 것이니라"(눅 22:26)

우리는 예수님의 인격과 가르침에 나타난 겸손을 공부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택하여 세우신 열두명의 동역자들에게서 보여지는 겸손을 살펴 보도록 합시다. 

겸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제자들과 그리스도를 비교해 본다면 겸손이 어떠한 것인가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그들에게 있어 오순절 사건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였는가를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사단이 인간에게 불어 넣은 교만에 대해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겸손에 우리도 실제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가르침을 인용하면서 제자들이 얼마나 겸손이라는 은혜를 누리지 못했음을 몇몇 기록을 통해 보았습니다. 

한번은 그들이 그들 중에 누가 가장 큰 자인가 하고 말다툼을 벌였습니다. 그러는 중에 또 한번은 세베대의 아들들이 그들의 어머니와 함께 예수님께 나아와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들 중 하나는 우편에, 나머지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후 최후의 만찬석상에서도 그들중 누가 과연 우두머리인가를 놓고 말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주님 앞에서 항상 겸손함을 갖추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라고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폭풍우가 치는 가운데서 주님 앞에 나와 엎드려 경배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끔씩 보여지는 겸손의 모습들이 그들의 고질적인 습관들을 버리게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들의 고질적인 습관이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겸손에 관하여 제자들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겸손의 중요한 의미들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첫째, 우리는 열정적이고 활동적으로 사역을 하지만 겸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안타까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에게는 늘 예수님 곁에 있고 싶은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었고, 그를 사랑했으며 그가 가르치는 모든 계명에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날 때에도 그들만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 죽을 각오도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모습들의 이면에는 그들 자신조차도 의식하지 못했던 어두움의 권세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들 안에 자리잡고 있던 어두움의 권세는 구세주되신 예수님의 권능을 전파하기 위해 증인들이 되기 전에 제거되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들은 많지만 정작 겸손의 은혜가 결핍된 교수와 목회자, 사역자, 그리고 선교사와 교사들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전달해주는 통로로 쓰임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닥쳐올 때 그들에게는 겸손의 은혜를 지키려는 노력이 미미해서 그 특징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겸손은 가장 중요하고 높은 은혜 가운데 하나라는 교훈을 확인시켜 줍니다. 

겸손은 가장 얻기 어려운 것 중에 하나이고, 우선적으로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겸손은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임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실 때에만 능력 가운데 얻을 수 있는 은혜인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외적인 가르침과 개인적인 노력으로는 교만을 이길 수도 없으며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갖출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의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가르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11:29)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겸손 뿐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리새인과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써 놀라운 겸손으로 사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깊은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막10:45),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7)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그들도 자신의 본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시에는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최후의 만찬석에서도 제자들 사이에는 그들 중 가장 큰 자가 누구인가에 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확실히 그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굳게 다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헛수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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