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7.13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알다.기노스코.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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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야다..기노스코]

ginwvskw(1097, 기노스코) 알다 know, 이해하다 understand.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기노스코(Homer 이래)는 기본 어근 그노(gnw)에서 형성된 단어이며, 다음의 의미를 지닌다.

(a)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사물이나 사람 또는 상황을 감각으로, 특히 시각으로 '알아차리다, 지각하다, 인식하다'를 의미한다. 

호머(Homer, Od.)애서 보는 것과 기노스코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경험의 세계에서 그렇게 인지되었던 것을 마음 속에 지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 단어는 또한 '경험하다, 배우다, 알게 되다'를 의미한다. 즉 경험된 것이 그것을 경험한 사람에게 알려진다.

(b)  이 단어는 '구별/식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그 유사한 것이나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 있는 어떤 현상에 대한 경험이나 인지가 이런 일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Homer, Il).

(c)  이 단어는 '인격적으로 알다'(Heracl., Frag.), '이해하다'(Homer, Od.), '알다'(친밀함이 인격적 지식을 가져온다). '~와 알고 지내다, ~와 친하다, 숙달되다, 노련하다'(Plato, Rep.)를 의미한다.

(d)  이 단어는 '판별/판단/결심/결정/실행하다'(Democr. Fr., Demosth).

(e)  형사 법원이나 민사 법원의 판결은 주어진 사실의 비중에 의거하여 내려지기 때문에 이 판결들은 기노스코의 수동형으로 표현되어 '재판을 받다, 판결을 받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f)  이 단어는 "아는 사이나 친밀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육체적으로) '알다', 즉 '~와 성적인 관계를 가지다'라는 헬라 용법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아마도 이 용법의 배후에는 헬라어 아닌 다른 언어에서 차용한 단어의 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의 어근이 라틴어 기그네레([아이를]  낳다)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 왔다(참조: H. Leisgang, Die Gnosis).

(g)  이 단어는 '확인하다, 입증하다, 확증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철학적 지식의 목적은 보는 것인데 이는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이 세상의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영원하고도 실질적인 것을 보는 것이다. 

이 확인은 원래 관찰로 말미암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노스코는 '통찰력을 얻다, 알아차리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통찰력의 대상은 궁극적으로 종교의 영역에 속할 것이다(Herach., Frag. 5).(참조: E. D. Schmitz; Bultmann).

2. 70인역본의 용법. 

기노스코는 70인역본에서 약 800회 이상 나오며, 히브리어 야다(알다)와 그 어형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라아(보다), 하자(보다), 샤마(듣다) 등 13개 단어의 역어로도 사용되었다. 

헬라의 일반적인 태도와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에서도 지식은 감각을 통해서 획득된다. 

이미 알려진 것은 감각으로 나타나야 하며 그 자체는 그렇게 알려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듣는 것(듣다)과 보는 것(보다)에 관한 동사가 아는 것에 관한 동사와 병행되어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예: 출 16:6 이하; 신 33:9; 삼상 14:38; 사 41:20). 

이것으로 우리는 70인역본이 라아(삿 2:7)와 하자(사 26:11)와 샤마(느 4:15)의 역어로 기노스코를 사용한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헬라와 히브리 사상에서 아는 것에 관한 개념들은 대체로 일치하며 이 두 경우에 감각을 통하여 얻는 경험이 기본적인 것이다.

(a)  70인역본에서 야다/ 기노스코는 '알아채다, 인지하다, 경험하다, 관찰하다'를 의미한다(예: 창 3:7; 창 41:31; 삿 16:20; 전 8:5; 사 47:8; 호 5:3).

(b)  야다/ 기노스코는 '구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선악을 아는 것"(창 3:5; 창 3:22)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이다. ((여기에서 선악을 안다 함은 참생명과 사랑[선]의 경험을 통해   그와  반대되는  악의 정체를  파악하였으되 악을 거절하지 않고,  악을 선택-수용하고 경험하여 [그 악함을] 경험하여 안다[행악하였다]는 뜻으로서 선악의 구별, 그 다음에 일어나는 선택의지의  발휘로 인한것임에 주의하라!!] .... 좋고 흉한 것을 구별하는 것은 필요하다(삼상 19:36). :::  사려분별하여 취선기악[선을 택하고 악은 버림]으로 나아가라!!

어린 아이는 왼손과 오른손을 구별하지 못하며(욘 4:11) 또 선과 악도 구별하지 못한다(사 7:15). 

후자의 구절의 문맥과 사 8:4에 나오는 이와 비슷한 언명은 이 언급이, 어린 아이는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을 구별할 줄 모른다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 주는 것 같다.

좋고 흉한 것, 좌우와 같은 것에 대해 관찰하는 것은 결국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이 된다.

(c)  야다/ 기노스코는 '배워서 알다' know by learning라는 의미를 지닌다(잠 30:3).

(d)  이 분사는 사냥(창 25:27), 학문(사 29:11-13), 애곡(암 5:16), 바다를 항해하는 일(대하 8:18),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일(삼상 16:16)에 능함을 묘사하는 어구에 나온다.

(e)  야다/ 기노스코는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한다.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창 29:5; 출 1:8; 삼하 3:25). 푸알 분사형은 '친척'(왕하 10:11 등)과 '아는 사람'(욥 19:14; 룻 2:1 등)을 지칭한다.

(f)  야다/ 기노스코는 '관계하다, 관심을 가지다'(시 1:6; 시 37:18; 시 119:79), '~와 관계를 맺고 싶다'(예: 신 33:9). 

신학적인 문맥에서 자주 이 단어가 적절한 지식을 얻지 못해서 결국 관심의 결여를 초래하고 마는 것에 대한 문제로 나온다(예: 렘 8:7; 시 95:10).

(g)  야다/ 기노스코는 '성적 관계를 가지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았다"고 하는 유명한 완곡 어법과 그 병행구들(창 4:1; 창 19:8; 민 31:17; 민 31:35; 삿 11:39; 삿 21:11; 왕상 1:4; 삼상 1:19)에서 남녀 쌍방의 성적인 관계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남색(창 19:5; 삿 19:22)이나 강간(삿 19:25)과 같은 성적 도착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h)  야다/ 기노스코는 '다른 사람과 인격적이며 친숙한 관계를 맺다'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름으로, 대면하여 모세를 아신다(출 33:17; 신 34:10).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이나(렘 1:5) 어떤 민족을(암 3:2) 아실 때 하나님께서 그를 선정하시거나 선택하신다(참조: 민 16:5 70인역본). 

선택으로 이해되는 이 지식은 은혜롭고 자애로운 것이지만 이것은 인격적인 응답을 요구한다.

(i)  야다/ 기노스코는 일반적인 문제에 대한 지식 외에도, 다른 신들을 아는 것이든(신 13:3; 신 13:7; 신 13:14) 여호와를 아는 것이든(삼상 2:12; 삼상 3:7) 간에,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렘 10:25) 선지자들에 의하면,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렘 4:22). 

애굽의 재앙은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애굽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 보내졌다(출 10:2 등). 

그는 그가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사 60:16) 그들을 파멸시키시고(겔 6:7) 회복시키실 것이다. 

특히 선지자 에스겔은 위협할 때,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는 어구를 사용한다(겔 6:7; 겔 6:10; 겔 6:13; 겔 6:14; 겔 7:4; 겔 7:9;겔 7:27 등).

(j)  요약하면 희랍인들이 초연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또한 사물의 형이상학적 본질에 사변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반해, 구약성경은 지식을 끊임없이 인격적인 만남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구약성경이 하나님과 창조에 관해서 언급한 것을 보고서, 우리가 이 언급들을 존재론적 추론으로 여겨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는 믿음의 선포로 간주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역사적 과거와 약속된 미래 즉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존재하고 있는 이 지상의 영역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찾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예배와 행동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과 요구를 식별할 수 있었던 것이다.(참조: E. D. Schmitz; Bultmann).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기노스코는 신약성경에서 221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기노스코의 용법은 헬라의 용법과 구약성경의 용법과 매우 유사하다.

(a)  '느끼다, 간파하다'(막 5:29; 눅 8:46),

(b)  '주목하다, 알아 차리다'(막 8:17; 막 12:12; 마 26:10; 고후 2:4; 요 5:42; 요 8:27),

(c)  '인정하다, 인지하다' recognize(눅 7:39; 마 12:15; 마 22:18; 갈 3:7; 약 2:20; 요 4:1; 요 5:6; 요 6:15),

(d)  '듣다, (들어서)알다'(막 5:43; 막 15:45; 눅 9:11; 행 17:13; 행 17:19; 빌 1:12; 빌 2:19; 요 11:57; 요 12:9; 마 10:26과 병행구; 행 9:24; 빌 4:5).

(e)  '확증하다, 확실히 하다, 확인하다' confirm(막 6:38; 막 13:28 이하; 눅 1:18; 고전 4:19; 고후 13:6; 요 4:53; 요 7:51).

(f)  ① 알아채고 있다(의식)라는 의미에서 '알다' know(마 24:50와 병행구; 눅 2:43; 눅 16:4; 히 10:34; 계 3:3; 요 2:24 이하; 요 7:27; 요일 3:20).

② 또한 익히 앎이나 아는 사이라는 의미에서 '알다'(마 25:24; 눅 12:47 이하; 눅 16:15; 행 1:7; 롬 2:18; 롬 7:1; 고전 5:16; 요 1:48; 요 7:49).

③ 그리고 이해라는 의미에서 '알다'(눅 18:34; 행 8:30; 고전 14:9; 요 3:10).

(g)  '구별하다, 분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고전 14:7,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h)  '~하는 방법을 알다' know how to.

마 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i)  경험을 통하여 '알다, 깨닫다' find out(요 13:58; 요 15:18; 요 19:4; 요일 2:3; 요일 2:5).

(j)  '~와 관계를 맺다'

① 마 1:25; 눅 1:34에서 성적인 관계에 대해 사용되었다.

② 마 7:23에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나는 너희와 전혀 관계를 맺지 않았다'라는 의미이다.

③ 고후 5:21에서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그가 죄에 대해 지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 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이란 선언이 범죄 행위와 반어법을 나타내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④ 롬 7:7에서도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라는 문구는 '율법이 없었다면 인간인 나는 죄와 본질적인 관계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의역할 수 있다.

⑤ 고후 5:16에서 '~와 관계가 있다, ~와 관계를 맺다, 개인적으로 알다'를 나타낸다. 이 구절의 의미는 많은 논쟁의 주제가 된다. 상반절에는 오이다멘("우리가 아노니")이 나오며, 하반절에는 기노스코가 에그노카멘("우리가 알았노니")과 기노스코멘("우리가 아노니")의 형태로 나온다.

(k)  고전 5:11-21에서 바울은 자기를 개인적으로 공격하며 사도직을 공격하는 적대자들과의 논쟁에 관련되어 있다. 그들은 바울에게는 사도라고 확증할만한 눈에 보이는 영적인 특성, 예를 들면 무아지경의 현상들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고전 5:13). 그들은 그를 자기 자신만을 칭찬하는 '허풍선이'라고 비난했던 것 같다. 바울은 고전 5:11("우리가 ... 사람을 권하노니")과 고전 5:12("우리가 ...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에서 그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 바울의 변호 중에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그래서 상상된, 눈에 보이는 영적인 특성을 가진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하는 언급도 부분적으로 들어있다(고전 5:14 이하).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본 성령과 능력의 분명한 증거에 따라서 지금부터-모든 가치의 전도, 즉 시대의 전환점을 의미하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사건 이후로-"우리가 ...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못하노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고전 5:14). 이것이 얼마나 명백한 것인가를 나타내기 위해 바울은 모든 사람이 분명히 알 수 있는 언명을 고전 5:16 하반절에 삽입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즉 그와 그렇게 관계하지 않고 오직 우리가 섬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만 관계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주이시며, 그가 주님이시라는 것은 외면상으로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과 사도라고 하는 그의 주장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던 것 외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외적인 판단과 일반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준에 예속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오직 새로운 피조물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외적 현상에 의한(엔 프로소포, 고전 5:12) 판단을 포함하여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도다"(고전 5:17). 이 논쟁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이 고후 5:16에서 그가 지상의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았다는 것을 확증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서 이것은 역사적 예수님의 의미와 관계를 띠고 있지 않은 것이다.

(l)  기노스코는 '인정하다, 알아주다'를 의미한다.

① 고전 4:19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가 갈 때 교만한 자의 말이나 그들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즉 중요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② 계 3:9에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높임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이방인?) 기독 교회에 와 보면 부활하신 이가 그들을 사랑하심을 인정하게 되리라고 약속하셨다(계 2:23). 이렇게 하심으로서 그는 유대인의 종말론적 소망을 뒤짚어 놓으셨다(참조: E. Lohmeyer).

③ 롬 7:1에서 "법을 아는", 롬 2:18; 행 22:14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와 같은 문구들은 단순히 이론적인 지식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적용되어 인간의 순종을 요구한다는 것에 대한 인지를 암시한다.

④ 요 7:29에서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라고 한 바리새인들의 말은 일반 백성들에 대한 잘 다듬어진 랍비 학자들의 비웃음을 반영해 주는 것이다(참조: SBⅡ 494-521). 이것은 일반 백성들이 실제로 율법을 알아 율법에 순종했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추종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을 기록하면서 요한은 여기서 율법이 바로 그들 자신을 지적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무의식적으로 비꼬는 것이다(참조: 요 7:42; 요 5:29 이하; 요 11:49 이하). 요 7:51에서는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고 반박하고 있다.

⑤ 롬 1:21에서 하나님을 알았던 자들의 생각이 허망하여졌다는 말은 헬라 사상의 견지에서 모순된 것으로 보였음에 틀림없다. 그들의 허망함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결과다(참조: 지혜서 13:1).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반드시 그에 합당한 찬미와 감사를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거부한 이교도들은 이 지식을 단순한 지적인 활동으로 격하시켰으며 그들이 지혜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상 어리석음일 뿐이었다(롬 1:22 이하). 이교도들이 분명히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하더라도, 그들이 하나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들은 핑계할 수 없게 되었다(갈 4:9; 요 1:10; 고전 1:21; 갈 4:8).

⑥ 엡 5:5; 약 1:3; 약 5:20 등에서 지식에 관한 명령과 권유는 이 은사를 붙잡아 변화하는 생활 상황에서 이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라는 요구인 것이다.

⑦ 눅 10:11에서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인정해야 한다. 행 2:36에서 "이스라엘의 집"은 오순절 사건에 비추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마 24:43의 비유에 나오는 명령문도 참조하라.

⑧ 고후 8:9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즉 "부요하게 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을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하게"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실제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에 대해 언급한다. 우리는 이것을 리쯔만(Lietzmann)이 해석한 것처럼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관대하심의 본이시다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H. Lietzmann, An die Korinther).

(m)  기노스코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선택하시는 지식을 언급하는데 사용되었다.

-딤후 2:19(민 16:5을 인용함),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찌어다 하였느니라".

-고전 8: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

-갈 4: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여기에서 하나님의 지식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똑같이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모든 행동을 포함한다. 이 지식은 영원히 하나님의 피조물에게 유효한 것이며 죄와 불순종에 대한 승리이다. 롬 10:2은 이에 대한 일종의 상대 구절이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을 위한 유대인의 열심을 인정하긴 하지만 이것이 카타 에피그노신("[참된] 지식을 좋은 것")은 아니다(참조: Arndt, 291). "이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보다 깊이 통찰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결핍되어 있는 지식은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지식과 인지이다"(E. Gaugher, Der Brief an die Romer).

(n)  기노스코는 어떤 구절에서 신학적이고 이론적인 지식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① 마 13:11(참조: 막 4:11TR)은 오직 제자들에게만 허락된 "천국의 비밀"에 관한 감추어진 지식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지식이 그들을 그 외의 경우에는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는 비유의 권위 있는 해석가가 되게 했다.

롬 6:6에서는 신학적인 진리에 관한 지식, 예를 들면 세례에 관한 특별한 가르침에 대한 지식까지도 삶으로 나타내는 순종을 그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지식의 명백한 목적은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에 있는 것이다.( R. Bultmann; E. D. Schmitz).

※ 영지주의와 논쟁에서 나타난 용법 등.

신약성경 시대에는 자기들이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전 1:18-2:16; 고전 13:12 이하; 골 2:8; 딤전 4:7; 딤전 6:20).

신약성경 기자들은 자주 사도적 케뤼그마(khvrugma, 2782: 선포, 전도)에 대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순례 설교자들과 충돌하곤 했다. 디모데는 이른바 거짓된 지식(그노시스)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도록 명백히 경고받고 있다(참조: 딤전 6:20).

계 2:24에는 "사단의 깊은 것"을 배웠다고 주장했던 적대자들이 언급되어 있다. 이 기자는 풍자적이면서 올바른 비평적인 판단을 가지고 "하나님의 깊은 것"을 배웠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에 항변했던 것 같다(E. Lohmeyer).

(a)  바울 서신.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주장하는 지식은 이처럼 바울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 8:2). 이것은 고전 15:34과 비교될 수 있는데, 여기에서 바울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아그노시안 ... 데우)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바울은 그가 지식으로 이해한 것을 설명하라는 강요를 받은 것이다. 그는 지식을 이미 알려져 있는 것으로서 오직 수동적으로만 표현할 수 밖에 없음을 알았다(갈 4:9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이라는 어구를 첨가시킴으로서 인간이 능동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 사상을 시정했다). 이미 알려져 있는 이러한 것은 인간이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이전의 어떤 능동적인 이해와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상응하는 것이다(고전 8:3). 하나님에 대한 완전하고도 참된 지식은 오히려 종말론적 약속과 기대의 일부이다(고전 13:12). 바울은 육을 입고 지상에 오신 존재를 간단히 무시해 버림으로써, 하나님에 의해 알려진 것과 인간이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일치시키는 영지주의자들의 에스카톤(목적)에 대한 환상적 기대를 완전히 거부했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우리를 이미 알고 계셨다는 것을 전적으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노스데나이(하나님에 의해 알려진 것)는 선택을 포함하고 있다(참조: G. Bornkamm). 제 아무리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에서 자신을 계시하심으로서 전달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주신 영이다(참조: 고후 4:6). 에스카톤 이전에는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빌 3:10; 참조: 골 2:1 이하). 그러나 그리스도는 신학적인 사색을 통해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에 의해서 만나지게 될 때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주로 고백하게 될 때 알려진다(빌 3:8). 이러한 고백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된다. 이러한 고백이 없는 곳에서 지식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고전 14:38).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 Love은 하나님에 의해 아시는 바가 되는 것이다(고전 8:3).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복종과, 죄의 주권으로부터의 해방(참조: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0, 참조: 롬 6:3)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는데 열심히 봉사하는 곳에서 구체화되는데, 한편으로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의 약속된 부활에 이르려한다(빌 3:10). 참된 지식은 하나님께서 사도의 증거를 통해 어느 곳에서나 나타내셨던 지식이다(고후 2:14). 이것은 최종적으로 완성된 지식은 아니다. 지금 이 지식은 단편적일 뿐이지만(고전 13:12) 완성을 기대한다. 바울이 몬 1:6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지식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영지주의자들은 교만하여 이 지식에 대한 어떠한 것도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내가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풍자적으로 요구했다(고전 14:37). 이 모든 점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의 논법이 본질적으로 구약성경적 지식 개념의 범위 안에 머물러 있음이 분명하다. 동시에 그는 이 개념을 종말론적으로 확대하여 완성시켰다.

(b)  요한의 기록.

지식이 예수님과 요한 자신의, 그리고 요 10:14 이하에서는 예수님(아들)과 하나님(아버지) 사이의 상호 내적인 친교를 나타낼 수도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영지주의적 배경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레미야스(J. Jeremias)는 불트만(R. Bultmann)이 그의 저서(The Gospel of John, 1971, 380 이하)에서 주장한 것처럼, 이것이 헬라의 신비주의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셈족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식을 친교로 묘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알고 있는 자, 즉 지식을 전달하는 하나님의 사자와 완전한 초월자로 알려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동등성에 의거한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영지주의적, 이원론적 대조는 세상이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진리의 영"(요 14:17)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언명에 의하여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미움을 받은 것은(요 15:18; 요 16:2)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제거할 수 없는 구별의 결과로 이해되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마찬가지로 계시의 목소리도 하나님이 아닌 마귀를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자들에 의해서 그렇게 인식되어질 수 없다(참조: 요 8:42-43). 반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분에 대한 지식을 포함하며, 영생과도 동일시되었다(요 17:3). 구원을 가지고 오는 이 지식은 외부로부터의 부르심, 즉 이해력, 말하자면 진리 되신 분을 아는 능력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도래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참조: 요 5:20).

지식에 관한 요한의 언어와 요한의 견해가 영지주의의 용어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만약 우리가 기독교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자들과 이 메시지를 반대한 사람들이 이 메시지를 표현하는 형태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의 목적은 영지주의자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들의 언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 영지주의자와 직면하여 자기 자신의 무기를 가지고 그를 공박했다. 이것이 복음을 신화로 만들거나 요한을 영지주의자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었으나(참조: 요 1:18), 하나님은 그의 보내심을 받은 자, 즉 그 아들에게서 알려지게 될 것이다(눅 10:22). 그는 육체가 되셨던 로고스(말씀)이시다(참조: 요 1:14; 요일 1:1-4).

예수님을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 14:9; 요 12:45). 그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도 알 것인데, 그 이유는 이 사람이 그를 이미 알았고 또한 보았기 때문이다(요 14:7). 따라서 하나님과의 교제는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만 행해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 교제가 예수님의 하나님과의 교제에 상당하기 때문이다(요 10:15). 이 두 가지 수준의 교제는 기노스코로 표현된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람들 사이에 나누는 교제는 서로를 아는 지식에 의해서 효과적인 교제가 되지만, 이 교제가 영지주의에서와 같이 인간을 신격화시키거나 인간을 이 세상과 역사에서 완전히 제거시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요한에게 있어서 지식은 한 분이신 하나님과 역사적인 통로를 통해서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그 형태를 취한다. 자기 아들을 보내심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요 17:23; 참조: 요일 4:19 이하)과 세상에 대한(참조: 요 3:16)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아들은 자기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의 척도에 따라 자기의 백성들을 사랑하셨다(참조: 요 15:9; 요 17:26). 따라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의 지식은 역사의 영역 안에서 사랑으로 표현된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아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아버지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입증하셨듯이(요 14:31), 그를 아는 자도 하나님의 명령, 무엇보다도 자기 형제를 사랑하라는(요일 4:7 이하; 요일 2:7-11) 명령을 지킴으로서(요일 2:3 이하), 또한 죄를 짓지 아니함으로써(요일 3:6), 자기의 지식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노스코는 두 가지로 적용된다. 첫째로, 이 지식은 아들의 보내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을 의미하며(요 17:8; 요일 3:6), 둘째로는 선포된 메시지에 복종하는 것으로도 묘사되는 이 지식에 기초한 사랑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요일 4:6). 이러한 지식은 이미 지금 여기에서 영원한 생명 Life이 되었는데(요 17:3)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에서 유래된 역사 속에 있는 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요한의 개념은 영지주의의 개념과 고의적인 정반대적인 것으로 두드러진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믿음과 지식을 똑같은 수준 위에 두는 것도 적어도 지식과 대조시켜 믿음을 낮게 평가한 영지주의에 대한 논박의 일부분이다. 요 17:3이 영생을 지식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지만 요 3:36은 믿음에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베드로의 고백에 관한 요한의 견해에서(요 6:69) 우리는 믿음을 지식에 종속하는 제일 첫 단계로 보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으나, 요일 4:16에서는 이 순서가 "알고 믿었노니"로 되어 있다.

오직 자기 자신의 구원에만 관심을 가지는 영지주의의 자기 만족은 형제 사랑(요 13:35)과 단합(요 17:21 이하)에서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과는 반대된다. 더욱이 이 배후에 있는 궁극적인 목표는 아들이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세상이 믿게 되고 또한 이 계시가 온 세계에 알려지게 될 때에만 달성될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우주(창조)와 구원에 대한 영지주의의 이원론을 요한이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영지주의자에게 있어서 이러한 이원론은 극복될 수 없는 것인데, 그 이유는 이 이원론은 우주적인 타락 이전에 이미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지주의의 견해에 따르면 우주는 완전히 그리고 치명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구원 받을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참조: 요 1:1 이하; 요일 2:14).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 대한 증오로 표현되는 알지 못하는 것은 나타난 계시를 믿지 않는 결과이며(요 8:42 이하) 이것은 결과적으로 죄를 초래한다(참조: E. Kasemann). "만약 '유대인들'이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그들이 참으로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도 이 지식을 심화시키고 풍요롭게 하는데 관심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만 들으려고 할 뿐, 새로운 것을 들어 그들이 전에 알고 있던 모든 것과 그와 아울러 이런 지식의 상태 곧 자기에 대한 그들 자신의 이해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는 들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왜 들을 수 없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이 영역에서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것과 어떤 것을 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이며 동일하다는 점에 대한 이해 부족을 나타내어 줄 뿐이다"(R. Bultmann). 지식과 믿음에로의 부름은 이렇게 세상을 위해서도 남아 있다. 아들을 보내심으로 나타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제 실제적인 것으로 나타나서 실재의 새로운 차원을 연 것이다.

요한의 어휘가 영지주의와 명백히 유사성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의 주제는 영지주의의 신화적 사변보다는 구약성경의 전승에 나오는 지식의 개념과 훨씬 더 가깝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분명하다.(참조: E. D. Schmi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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