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7.25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마5장.단어들.[전체주의적 반헌법적 유사법안]평등법/차별금지법/건강가정기본법개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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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 성령. 바람, 호흡, 생명, 영, pneu'ma(4151, 프뉴마)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프뉴마(Aeschyl., Hdt. 이래)는 프네오(pnevw, 4154: 바람이 '불다', 숨쉬다)에서 유래했으며, 다음의 의미를 지닌다.

(a)  '바람'. 이 단어의 어근은 공기의 기류로서의 역할을 하는 활력을 의미한다. 이 어근의 의미를 근거로 하여 프뉴마는 첫째로 바람을 의미한다. 이 바람은 폭풍, 일반적인 바람, 미풍, 심지어는 수증기일 수도 있다. 바람은 기후, 건강, 성격에 영향을 미치며, 자연적인 것으로도 간주되고 신적인 것으로도 간주된다.

(b)  '호흡'. 프뉴마는 숨을 쉬는 호흡을 의미한다. 여기서 호흡은 콧김을 내뿜는 것에서부터 헐떡이는 호흡에 이르기까지를 포함한다. 프뉴마는 시적으로 사용될 때는 피리 등을 불므로 인간의 호흡이 내는 소리를 의미한다.

(c)  '생명'. 호흡은 생명의 표시이다. 프뉴마는 생명의 호흡이라는 개념에 의해 생명이나 생물을 의미한다.

(d)  '영혼'. 프뉴마는 생명의 원리로서 프쉬케(yuchv, 5590: 영혼)와 매우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프뉴마는 생명을 지니고 있을 때는 몸 안에 제약되어 있고, 마지막 숨과 더불어 몸을 떠나 천상의 영역으로 돌아간다.

(e)  전이된 의미로 '영'. 프뉴마는 전이된 의미로 상호간의 관계에서 오가는 영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된다. 따라서 이 단어는 한 성읍의 정신이나, 신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영향력이나, 다양한 형태의 자극을 의미하기도 한다.

(f)  예언적인 '영'. 예언과 예언적인 시에서 프뉴마는 자극시키고 열심을 내게 하며, 채워주고, 영감을 주는 영이다(참조: 제사장들, 시인들, 선지자들). 프뉴마는 또한 고상한 웅변술의 언어, 연사의 사로잡는 힘 등을 가리킬 수도 있다.

(g)  신적인 '영'. 근본적이며 통제할 수 없는 프뉴마는 신적인 것으로 생각한다(예: 종교 음악에서). 그러나 헬라 세계에는 인격적인 성령의 개념이 없다. 신적인 영은 내재적인 것이다.

(h)  신과 '영'. 스토아주의에서 프뉴마는 우주적 능력이나 실체이다. 따라서 프뉴마는 신 자체의 존재나 현현을 의미한다.

(i)  프뉴마의 의미의 비헬라적 발달. 유대교의 영향과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아 프뉴마는 두 가지 의미로 발전되었다. 한편으로 프뉴마는 자연으로부터 단절되어, 적극적인 우주론적 또는 구원론적 영이나 신으로 의인화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프뉴마는 주술사들이 선하게 또는 악하게 조작하는 악마적인 주술적 세력을 뜻하게 되었다.

2.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프뉴마는 신약성경에서 379회 나오며,

(a)  '바람',

(b)  '숨, 호흡, 생기',

(c)  '영, 영혼', 육체에 생기를 불어 넣는 생명의 원리.

(d)  '육체를 떠난 인간의 영혼',

(e)  '인간보다 높고 하나님보다 낮은 영',

(f)  '귀신이나 더러운 영',

(g)  '성령'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참조: F. Hauk;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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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빈곤한, 구걸하는. ptwcov"(4434, 프토코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프토코스(Homer 이래)는 프톳소(ptwvssw: 두려워하여 '움츠려들다, 쭈그리다, 웅크리다')에서 유래했으며, 따라서 프토코스는

(a)  본래 '쭈그리고 움츠려드는 사람의'란 의미였다. 자주 비참한 가운데 헤멘다는 개념을 포함한다. 이 의미에서

(b)  이 단어는 '거지 신세로 전락한, 구걸하는, 자선을 구하는, 거지처럼 가난한, 가난한, 천한'이란 의미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 형용사는 거지(beggar)를 뜻하는 명사로 더 많이 사용된다.

프토코스는  거지가 될 만큼 가난하여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서, 자신의 재산으로 살 수가 없어 손수 일하여 벌어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페네스(pevnh", 3993)와는 다르다.

(c)  이 단어는 일반 세속 헬라어에서 '빈약한, 적합하지 않은, 부족한, 무력한, 무엇을 양보하는'이라는 비유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거직들은 대개 일하려 하지 않고 타인의 것을 얻어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재산을 상실하여 큰 불행에서 방황하는 거지처럼 가난한 사람들도 있다. 후자는 동정을 받기도 했지만 일반적인 거지는 멸시를 받았다.

거지는 적은 선물을 받았으나 구제하는 것은 종교적인 입장에서도 결코 미덕으로 여기지 않았다. 때때로 호머는 나그네와 거지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며(Od., 6, 207), 신들이 비천한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했으나 가난한 자가 특별한 신의 보호 아래 있다는 관념은 헬라 세계에서는 전혀 생소한 것이다. 헬라 세계에서 가난한 자를 위한 구호 체제가 없었다. 자선은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유익하게 하는 봉사이다.

초기 헬라의 사고에서는 가난이 종교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난하다는 것이 인간에게, 신 앞에 특별히 설 수 있게 한다든지, 신의 특별한 보호 아래 있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회적인 곤경에서 가난한 자는 신의 도움을 불러 일으키지 못한다.

후기 헬라 철학에서는 몇몇 학자들에 의하여 가난이 덕을 위한 알맞은 전제 조건으로 간주되었다. 삶의 최고의 목표는 가난을 포함하여, 모든 물질적인 상태에 있어서 절제하여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형용사 프토코스는 70인역본에서 다섯 개의 히브리어 역어로 약 100회 나온다.

(a)  아니(억압 받는, 가난한, 비천한, 낮은; 예: 레 19:10; 삼하 22:28; 욥 29:12; 시 10:9; 시 12:5; 사 3:14 이하)는 37회 사용된다. 이 단어는 억압 받는 가난한 자와 관련되어 있다. 억압하는 자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는 곳에서는 일반적으로 사회적인 입장에서의 가난한 자들, 즉 토지가 없는 자들과 동의어가 된다. 이와 같은 가난은 상속권 박탈과 불법적인 손해에 의한 것이지, 그 사람 자신의 잘못에 의하여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은 이 단어가 재산이 아니라 폭력과 대조되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여호와, 이스라엘의 심판자께서 이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시며, 가난한 자들은 오직 이 사실을 신뢰하며, 이에 소망을 두고 있는 것이다.

(b)  달(낮은, 연약한, 가난한, 얇은)은 22회 사용되며, 특히 암2:7; 암 4:1; 암 5:11; 암 8:4; 암 8:6와 시 72:13; 시 82:3; 시 113:1과 잠 19:4; 잠 19:17; 잠 28:3; 잠 28:8; 잠 28:15에 나온다. 달은 신체적으로 '약하다'는 뜻을 나타낸다. 후기로 오면서 사회 계급의 가장 낮은 지위, 즉 가난하고 궁핍하며 하찮은 소작농민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c)  라쉬(결핍한, 가난한)는 11회 사용된다. 이 단어는 순수하게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의미에서 '가난한, 궁한, 결핍한'을 뜻한다. 이 단어는 지혜 문학에서 선호하는 말이다. 잠언에서는 특별히 부유함과 대조되는 말로 사용되었다(예: 잠 13:8; 잠 14:20; 잠 17:5; 잠 19:7; 잠 19:22; 잠 22:2; 잠 22:7; 잠 28:6; 잠 28:27).

(d)  에브욘(결핍한, 궁한, 가난한)은 11회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프토코스의 관례적인 의미에 가장 가까운 단어로서, 의연금을 구하고자 애쓰는 사람, 거지를 의미한다. 그 다음에는 일반적으로 매우 가난하고 집이 없는 자에 대한 말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영적 빈곤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나 웨 에브욘(가난과 궁핍)이라는 연결구는 기도하는 자의 태도를 암시하는 말이다(7회, 시 35:10; 시 86:1).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에게 속한 자이며,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탄원하러 나오는 자이다.

프토코스로 번역된 히브리어들을 살펴보면, 70인역본에서 나오는 프토코스가 그 단어의 의미를, 특히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종교적인 면으로 확대시켰음을 확인케 된다. 특히 프토코스는 70인역본에서 에브욘의 의미를 따라서 주로

① 단순히 물질적 의미에서 '가난한 자',

② 아무 힘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억압을 당하는 사람, 그래서 사회적으로 보호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③ 하나님 앞에 영적 상태로서 영적 빈곤이나 고통 중에서 오직 하나님만 확신하고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의존해 있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참조: C. Brown).

3.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프토코스는 신약성경에서 34회 나오며, 대개 복음서에 나온다(24회).

(a)  복음서의 프토코스.

1) 프토코스는 문자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① 막 10:21에서 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묻는 부자에게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말씀하셨다(병행구 눅 18:22). 병행구 마 19:21에서는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라는 조건을 붙여 언급하신다.

② 막 12:41 이하에서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적은 연보가 부자의 많은 연보보다 가치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쌔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이 과부는 그가 가진 전부 또는 마지막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의 삶의 보장을 믿음으로 기대한다.

③ 막 14:7에서 예수님은 수난으로 다가가는 사건 중에서만 구제가 부차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막 14: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병행구 마 26:11; 요 12:8). 예수님과 함께 계시는 동안은 축제 기간이다(참조: 막 2:18-20). 이 때가 이제 마지막에 달했을 때 행한 여자의 행위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더하여 그녀의 행위는 일종의 예언자적 표징 행위의 성격을 갖는다. 예수님의 죽임을 당해서 무덤에 장사될 것이다. 그리고 이 여인은 이 죽은 사람에게 행하는 마지막 의식을 행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앞으로는 이것을 받으실 수 없다(참조: 막 16:1-6). 이 여인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음으로서 이 의식을 미리 행한다. 그런데 이 때에는 죽기로 예정된 자에게 사랑에서 나오는 엄청난 행위를 베풀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이 문제였다(참조: E. Bammel).

2) 예수님은 축복의 말씀에서 가난한 자에 대해 말씀하셨다.

① 예수님은 첫번째 축복의 말씀에서 가난한 자에 대해 말씀하셨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눅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마 5:3에서 예수님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는데, 눅 6:20에서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의 말씀은 언뜻 보면 외적 지상적 빈곤 상태에 대한 찬사와 축복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런 물질적 가난이 미덕이고 복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아첨하고 부자들을 통렬히 매도하는 세속적 민중 선동자가 아니다. 외적인 가난이 만일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향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복이다. 그러나 종종 나타나는 듯이 가난이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만든다면 그 가난은 복이 아니다. 그리고 가난이 그 가난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든다면 그것도 복이 아니다. 이런 일은 훨씬 빈번하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외적 가난이 좋은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자연인들에 대해 말할 때 가난한 자는 부자보다 천국에 더 가까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가난에 아무런 미덕이나 유익이 없다. 빈궁이 영성(靈性)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가난"은 외적 가난을 의미하지 않는다.

누가복음 6장 전체를 살펴보면 우리 주님은 "가난"이란 말을 세속심에 지배를 받지 않고 있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며 따라서 부귀에 의존하지 말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 부귀에 의존하는 정신은 정죄받은 정신이다. 많은 부자들이 세속심에 사로잡혀 세상의 부귀를 탐내고 의지하는 것과 같이 많은 가난한 자들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단지 외적으로 가난한 자라 하여 "복되도다"라고 할 수 없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심지가 약하거나 소심한 자, 다른 사람들보다 일반적으로 무능무지한 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외식하는 심령 곧 일부러 겸손하는 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심령이 가난한 것, 이 영적 가난은 자신의 결핍, 연약, 공허, 하나님에 대한 의존성, 죄악 등을 분명히 알아서 자신을 겸손하게, 정당하게 평가하여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이다.

② 마 11:5(병행구 눅 7:22),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여기서 예수님은 사 61:1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신다. 주님의 행위는 가난한 자에게, 즉 구원을 갈망하는 자에게 대한 복음의 선포에서 그 정점을 이룬다.

3) ① 누가는 사 61:1에서 따온 인용문을 하나의 예정표로서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기록하였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눅 4:18).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낭독한 글 가운데에 나온다.

② 누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주님 자신을 식사에 초대한 자에게 갚을 것이 전혀 없는 가난한 자들과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하셨다: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눅 14:13). 그리고 그에게 그렇게 행한 것에 대하여 종말론적 보상을 약속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들은 큰 잔치에 들어갈 제일 첫번째 대리 손님들이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눅 14:21). 누가복음에서는 가난이라는 이 주요한 주제가 부자에 대한 날카로운 공격과 연관이 되어 있다(참조: 눅 6:24).

③ 나사로(문자적 의미는 '하나님이 도우신다')가 하나님이 즐겨 맞으시는 가난한 자의 전형이다: "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눅 16:20; 눅 16:22). 자신에게 부여된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한 익명의 부자는 하나님에 의해 정죄 받는 자들의 전형이다(참조: 눅 12:13-21).

④ 눅 19:8에서 삭개오가 회개한 후에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었을 때, 은헤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은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에게 나타났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H. H. Esser).

(b)  바울 서신의 프토코스

바울 서신은 다음 두 가지 측면을 뚜렷이 나타낸다. 한편으로 바울은 프토코스를 드물게 사용한다(4회). 바울이 그의 회중 내부의 사회적 갈등을 언급할 때는 다른 단어들을 사용한다(롬 12:7 이하; 고후 8:14; 갈 6:10).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의 제거를 칭송할 때(참조: 갈 3:27 이하)나 이것을 요구할 때(참조: 골 3:11), 부와 가난 사이의 차별을 언급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이 단어가 나타나는 4-5개의 본문들은 핵심 구절로서 특별히 다룰 필요가 있다.

① 갈 2:10과 롬 15:26은 실질적으로 관련이 있는데, 이 두 곳에서 연보의 수령자, 즉 바울이 힘써 장려하고, 다른 곳에서도 언급하는 모금의 수혜자들은 "가난한 자들" 혹은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로 불리운다. 바울은 사도 회의에서 내린 결정과 연관하여, 그가 맡은 임무 즉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것을 언급한다(갈 2:10).

이것은 성전세를 대신하는 기독교의 제도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오히려 예루살렘에서 비개종자들까지도 행한 자발적인 선물과 유사하다. 바울이 이것을 의무로서 요구한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행 24:16 이하에서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기부금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일부 주어졌으며, 초대 교회에 광범위한 고난을 경감시키고자 계획된 것이었다.

롬 15:27에서 비록 하기오이(성도들)가 공동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여겨서는 안되지만 마찬가지로 하기오이가 프토코이(가난한 자들)에 적용되지도 않는다. 갈 2:10은 예루살렘에서 유래한 관용문구를 인용하고 있는 것 같다.

② 갈 4:9에서 바울은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을 언급하는데, 갈라디아인들이 다시금 이것에 희생될 위험이 있었다. 스토이케이온(stoicei'on, 4747: 원리, 초보)은 분명히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논쟁에서 사용된 용어이다. 아스데네 카이 프토카("약하고 천한")도 마찬가지이며, 이 문구는 이방 신들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부정하지 않으나 그 신들의 능력이 약하고 그 활동이 비열하다고 묘사한다. 유대의 율법 교사의 요구를 따르는 것은 이방의 미신으로 회귀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유대 절기의 규정들은 갈 4:9-10에서 이방의 점성 미신의 행불행 사상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③ 고후 6:3 이하의 바울의 자기 변호 끝부분에서 사도의 삶과 사역의 본질을 묘사하는 7가지 역설 중 마지막의 바로 앞에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고후 6:10)라는 언급이 나온다. 바울은 사도들이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영적으로는 크게 부요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④ 끝으로 생각해보면 바울은 보통 프토코스를 이전 전승에서 혹은 실제의 상황에서 취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가난의 문제를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다루는 단계를 제시한다. 그 노선은 너무 종말론적인 것이 강해서 이 용어가 신학적 가치 전환의 주된 관심사나 주제가 되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가난에 대한 신학적 가치 변동도 없다. 바울은 프토코스를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명칭으로서 사용하지 않았으며, 또한 프토케이아(ptwceiva, 4432: 가난)도 그리스도의 삶을 위한 비유적 용어도 아니다.

(c)  야고보서의 프토코스.

야고보서에서 프토코스는 약 2:2; 약 2:3; 약 2:5; 약 2:6에 나온다.

① 야고보는 부자들의 태도를 대중 앞에서, 교회 예배에서 강하게 공격한다.

-약 2:2,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 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약 2: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약 2: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②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여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동등하게 존중할 것을 요구하신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약 2:5).

야고보는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베푼 긍휼은 마지막 심판에서 심판의 기준이 된다(참조: 약 2:13; 마 25:31-45)는 입장을 근거로 하여 주장한다.

(d)  요한계시록의 프토코스.

① 계 2:9에서 서머나 교회의 영적 부요함이 교회의 물질적 빈곤과 대조되어 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② 계 3:17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가장된 영적 부요는 가난으로 밝혀진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③ 계 13:16에서는 모든 사회적 경제적 계급, 가난한 자나 부요한 자나 모두가 깊은 심연(abyss)에서 나온 짐승의 최면술에 어떻게 사로 잡히는가를 묘사한다: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C. Brown).(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C. Brown; H. H. Esser; E. Bamm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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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다. 슬퍼하다 penqevw(3996, 펜데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펜데오(Homer 이래)는 펜도스(pevnqo", 3997)에서 유래했으며, '슬퍼하다, 애도하다, 애통하다'를 의미하며, 흔히 죽은 자를 위해 슬퍼하거나 애통하는 것을 나타낸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펜데오는 70인역본에서 약 60회 나오며, 주로 아발(애통하다)을 번역한다. 
이 단어는 대부분의 경우, 이미 닥친 또는 임박한 불행 때문에 우는 행위를 내포하고 있다. 재앙을 만난 또는 맞게 될 지구, 땅, 도시의 일부분에 대하여 상징적으로 사용되었다(참조: 사 3:26; 사 24:4; 사 33:9; 렘 4:28; 렘 23:10; 애 2:8; 호 4:3). 
어떤 개인의 죽음을 애도함(왕하 14:2; 대상 7:22), 후회(느 8:9),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동안 겪은 슬픔에(왕하 13:27; 왕하 19:1)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 밖에도 펜데오는 사 16:8; 사 19:8; 사 24:4, 사 24:7; 사 33:9에서 히브리어 아말(약하다, 약해지다, 기운이 빠지다, 번민하다)을 번역하며, 이것은 이 단어가 때때로 애통의 심리적·신체적 효과를 묘사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창 23:2과 창 50:3에서 펜데오는 히브리어 바카(울다)를 나타내며, 시 78:63[77:63]에서는 할랄(찬양하다)을 번역한다. 
렘 23:10에서 펜데오는 누드(두근거리다 또는 떨다, 그러므로 슬픔의 감정을 나타내다), 
겔 31:15에서는 카다르(스스로를 어둡게 하다, 즉 애통하다)를 번역한다. 
이상에서 볼 때, 펜데오는 후회의 외적 표현을 비롯한 슬픔의 여러가지 의미를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펜데오는 신약성경에서 1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a)  펜데오는 마 9:15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슬퍼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막 16:10에서 펜데오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바울은,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는 것을 그가 알게 될 때 자기가 겪게 될 근심에 대하여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후 12:21).
(b)  마 5:4에서 펜데오는 영적 가난에 대하여 애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영적 상태와 회개와 관련된 슬픔이다.
눅 6:25에서 펜데오는 지금 웃는 사람들이 나중에는 울게 되리라는 내용 중에서 웃다의 반대어로 나온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지금 죄를 뉘우치지 않음으로 해서 나중에 그 댓가를 받게 될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c)  계 18:11; 계 18:15; 계 18:19에서 바벨론에 임한 심판을 보고, 바벨론과 무역하던 사람들이 울고 애통한다. 
이들의 반응을 묘사한 곳에는 이들의 부의 원천인 바벨론이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로 인하여 느끼는 깊은 상실감이 깃들여져 있다.
⒟ 바울과 야고보가 사용한 펜데오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슬픔 또는 회개라는 관점에서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고전 5:2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들 중에 있는 비도덕적인 것들에 대하여 취한 태도를 묘사하는데 펜데오를 사용했다. 그는 현재 그들의 태도를 "교만"하다고 말하면서, 그들이 그러한 상황에 대하여 "통한히 여겨야" 한다고 지적한다.
야고보는 약 4:9(참조: 약 4:8-약 4:10)에서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낮추는 일환으로서 "[애통하며] 울라"고 권고한다. 이러한 마음 자세를 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높여주실 것이다. (참조: Walter Bauer; J.H.Thayer; T.McComisk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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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고/권면/격려하다(=위로 받다).소환하다, 초청하다, 권하다, 훈계하다, 격려하다, 애원하다, 간구하다.

 parakalevw(3870, 파라칼레오) 

1. 고전 헬라어의 용법 

동사 파라칼레오는 파라(parav, 3844: ~곁에)와 칼레오(kalevw, 2564: 부르다)에서 유래했으며, '자기 곁으로 부르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파라칼레오는 '~로 부르다'를 의미한다(Xenopho.등). 사람을 불러 들이는 것, 도움을 요청하는 것, 초대하는 것, 불러 모으는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b)  파라칼레오는 '간청하다'를 의미한다(Epict. Diss등). 아들이 어머니에게 자기와 화해하기를 간청하는 것, 신들에 대한 기원으로, 어떤 일에 대해 신께 간청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요구할 때 그 요구는 제안이다. 이 경우에 요구하는 것은 권고에 가깝다.

(c)  파라칼레오는 '권고(면)하다, 격려하다'를 의미하며 또한 어떤 계획을 위하여, 예를 들면 복수의 계획을 위하여 설득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d)  파라칼레오는 '위로하다'를 의미한다. 슬픔의 때에 친절한 격려에서 위로로 나아간다(참조: O.Schmitz).

2. 70인역본의 용법 

파라칼레오는 70인역본에서 약 130회 이상 나오며, 15개의 히브리어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나 대부분 나함(특히 니팔형과 피엘형으로)을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파라칼레오는 나함을 대신할 수 있다.

(a)  나함은 '애석해하다', '가엾게 여기다'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시 135:14에서 "여호와께서 그 종들을 긍휼히 여기시리로다"(참조: 신 32:36). 삿 2:18에서 "그들이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리키셨다"(동정하셨다)에 나타난다.

(b)  나함은 '위로하다'를 의미한다. 시 119:50에서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창 37:35에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c)  파라칼레오가 다른 히브리 동의어를 나타내어 사용되는 곳에서는 역시 '격려하다', '강하게 하다'(신 3;28; 욥 4:3), '미혹시키다'(신 13:6), 또는 '인도하다'(출 15:3)라는 의미를 나타낸다(참조: G.Braumann).

3. 신약성경의 용법 

파라칼레오는 신약성경에서 109회 나오며, ⒜ 파라칼레오는 '소환하다, 초청하다, 구하다, 간청하다' ⒝ '권면하다' ⒞ '위로하다, 격려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a)  파라칼레오는 '부르다(소환하다), 초청하다, 구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행 28:2에서 파라칼레오는 '(자기에게로) 부르다, 소환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토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비가 오고 날이 차매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행 28:14에서 파라칼레오는 '초청하다'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거기서 형제를 만나 저희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유하다가 로마로 가니라".

행 16:9이하; 행 8:31; 행 13:42에서도 유사하게 전도나 선교 사역에 대한 요청을 나타낸다.

공관복음의 모든 전통적 입장에서 파라칼레오는 '구하다', '간구하다'를 의미한다. 이 용법은 사람들이 도움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께 간구한 구절에서 나타난다(눅 7:4; 마 8:5; 막 5:12; 마 8:31; 눅 8:32; 또한 눅 15:28; 마 18:29).

마 26:53에서 파라칼레오는 예수님 자신에 대해 말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b)  파라칼레오는 '권면(고)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권면은 초대 기독교 예언자들의 과제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권면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과 성령의 능력으로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파라칼레오는 사도의 설교에서 구원을 간청하는 선포에 대해 사용되었다.

"하나님이 우리로"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전도자의 권면의 말씀에 역사하시는 최고의 권위의 힘이다.

고후 6:1에서도 파라칼레오는 이러한 힘을 가진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따라서 바울은 특별한 근거를 권면에 두었다. 그는 자기 글을 읽는 자들에게 직접적인 도덕적 훈게를 하지 않고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한다. 곧 사도 바울은 자신의 훈계를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롬 12: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고전 1:10),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고후 10:1) 중재된 것으로 생각한다. 동일한 개념이 살전 4:1과 살후 3:12의 우리가 주 "안에서" 권하다의 배후에 있다(빌 4:2). 행 15:32에서 선지자 유다와 실라가 형제들을 권면했다고 말한다. 권면은 교회 생활에 있어서 거의 고정적인 부분이다(참조: 행 16:40). 바울은 빌립보인들에게 서로 권면하라고 격려한다(빌 2:1). 무엇보다도 바울은 교회를 권면하기 위해 디모데를 파송한다(살전 3:2; 참조: 롬 12:18). 가장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이와 같이 입증된 권면의 사역은 아마도 바울 서신들의 종말 부분에서 특별히 발견되는 삽입구절들의 배경일 것이다(Sitz im Leben). 바울은 초대 교회의 이 전형적인 관습을 따라 이 공동체를 권면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보았다(살전 4:1; 빌 4:2; 롬 12:1).

이 생에 있어서 기독교인의 바른 행동은 강도 높게 요구되는 것이다. 지금이 바로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중요한 때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 유다, 실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바르게 → 행하라 Walk고 사람들을 권면하는 것이다(참조: 눅 3:18; 행 15:32). 그들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남아있다 Remain, 행 11:12), 이 믿음에 계속 거하라(행 14:22), 그리고 스스로를 구원하라(행 2:40)고 경고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현 시기를 확실히 이해함에 대한 필요성은 엡 4:1, 목회서신들, 히브리서, 그리고 베드로전서 "합당하게 행하라" 또는 이와 비슷한 권고로 더욱 발전한다.

(c)  파라칼레오는 '위로하다, 안위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바울은 고통 가운데 있는 교회들을 위로하는 것에 관해 관심을 갖는다(골 2:16; 골 2:17).

고후 1:3이하에서 바울은 환난과 고난과 사망에 대한 위로를 말한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4).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들과 자신의 고난들을 동일시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안위에 참여하는 것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노선은 사도 바울의 고난과 안위의 경험을 독자들의 상황에 적용함으로 더욱 발전한다. 고후 7:6(고후 7:4이하)에서 환난과 안위에 대한 주제가 다시 한번 나온다. 이 때에 바울은 디도에 의해서 또한 그가 고린도의 상황에 대하여 말해야 하는 바에 의하여 위로를 받는다(살전 3:7).

마 5:4에 나오는 애통하는 자에게 약속된 위로는 눅 6:24에 나오는 부요한 자에게 약속된 화와 비교된다. 마태에 의하면(바울에 있어서와 같이), 고난은 하나님의 위로로 총족된다. 누가는 양자택일을 제시한다. 곧 이생에 있어서 부유한 자는 내생에 있을 하나님의 위로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눅 16:25). 위로는 하나님의 불변성에 근거하며, 이 불변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의 불변성이다(살후 2:16; 살후 2:17).

(참조: O. Schmitz; G. Brau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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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친절한, 겸손한, 동정심(인정) 많은. prau?"(4239, 프라위스) 

1. 고전 헬라어 문헌 

프라위스는 호머 시대로부터 사용된 단어로서 어원상으로는 고트어의 프뤼온(사랑하다), 프리온드스(친구) 등과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온화한, 온유한, 즐거운'을 의미한다.

프라위스 단어군에서 나온 단어들은

(a)   사물에 관해서는 '진정시키는, 온화한' (예: 진정제, 온화한 말),

(b)   동물에 관해서는 '길들인' 또는 '유순한'(길들인 유순한 짐승), 짐승을 길들이거나 짐승이 화나거나 흥분할 때 달래거나 진정(안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c)   사람에 관해서는 분노, 난폭, 매정, 잔인하지 않고 '온화한, 친절한, 온유한', 그리고 '즐거운',

(d)   행동이나 감정 혹은 징계와 같은 것들의 '친밀한, 친절한, 관대한'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들은 적에게서는 인정 사정 없는 가혹한 행위가 예상되는 것과 반대로 친구에게서 예상되는 어떤 성질을 가리킨다.

이 파라위스 단어군과 에피에이케스(ejpieikhv", 1933) 단어군의 개념, 이 개념은 모두 억제되지 않는 분노, 가혹함, 야수성 그리고 이기심과 반대된다. 이 개념은 고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 즉 모욕을 받고도 화를 내지 않는 현인, 재판에 임하여 인정 많은 재판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자비로운 왕 등이 지닌 성격의 특징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 단어들은 이상적 통치자에 관한 묘사나 고위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찬사 속에 자주 등장한다.

헬라 및 헬라 철학에서 이 개념은 높은 가치를 지닌 사회적 미덕이자 이상을 표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개념을 정열과 무감정의 양극단 사이에 있는 복된 중용의 덕이라고 생각하였다 (F.Hauck/S.Schulz).

2. 70인역본의 용법 

프라위스는 70인역본에서 모두 l9회 사용되었으며, 그 중 3회는 히브리어 아니(억압받는, 가난한, 괴로움 당하는, 비천한, 낮은, 겸손한)의 역어와 아나우(가난한, 겸손한, 온유한)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는 아니가 21회, 아나우가 65회 나오는데, 프토코스, 페네스, 타페이노스, 그리고 프라위스 어군 등으로 번역하였다는 사실은 이 히브리 단어들이 광범위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서 나누어 번역할 특별한 신학적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가난한 자란 토지 재산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부당하게 억압당하고, 권리를 빼앗기고, 하나님께서 물려주신 풍성한 유업을 수탈당했다. 그들의 가난은 상속권 박탈과 불법적인 손에 의한 것이지 그 사람 자신의 잘못에 의하여 비롯된 것이 아님이 이 단어(아니)가 재산이 아니라 폭력과 대조되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그들은 불법적인 착취의 희생물인 경우가 많았다(욥 24:4; 참조: 사 32:7; 시 37:14). 일반적으로 아니는 무방비 상태인 사람, 권리가 없는 사람, 억눌린 사람, 속임을 당하고 착취당하고 비천한 사람을 의미한다(참조:시편 9편과 10편).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아니의 편이시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심판자께서 그들을 보호하시며, 그들은 오직 이 사실을 신뢰하며, 이에 소망을 두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권리 없는 자들의 하나님인 까닭에, 동료 인간들에게서는 자비를 얻지 못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위로하시며 구원하신다(시 l49:4; 시34:2; 욥 36:15; 참조: 사 29:19). 마침내는 지금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것을 뒤엎으실 것이다(사 26:6). 그들은 땅을 차지하고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한다(시37:11). 여호와는 그들을 붙으시고(시 147:6). 공의로 지도하고 그 도를 가르치신다(시 25:9).

민 12:3에 보면,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다". 온유는 지도자의 중요한 자격 중 하나이다. 집회서 3:8에서 "훌륭하게 되면 될수록 더욱 더 겸손하라 주의 은총을 받으리라" 하였고, 집회서 10:14 에서 "주님께서는 군주들을 그 권좌에서 몰아내시고 그 자리에 온유한 사람들을 앉히신다". 욜 3:11에서는 프라위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없다. 선지자는 성전(聖戰)을 위해 부르고 있다. 평화의 도구가 전쟁의 무기로 바뀌워져야 하고 온유한 자가 용사들이 되어야 한다. 온유한자가 땅을 차지하고 다스린다.

앞에 살펴본 바와 같이 아니 및 특히 아나우는 사회적으로 억압당하고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는 의미로부터 깊은 곤궁과 곤란속에서 겸손하게 여호와의 도움만을 바라보는 사람 또는 그렇게 함으로써 도움을 얻은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다(습 3:12; 참조: 습 2:3; 사 41:17; 49:13; 66:2).

쿰란 문서에서 이 단어들은 일반적으로 공동체의 구성원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쿰란에 있던 가난한 자들의 공동체는 사유재산의 포기를 질서의 한 규칙으로 정했으며, 종말론적인 구원을 기대하는, 조직이 잘된 공동체 생활을 이룩하였다(ptwcov", 4434 프토코스).

슥 9:9에서 아니/프라위스는 메시야에게 주어진 영광의 칭호로 사용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적으로 보잘것 없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동물을 타셨을 때 그 길은 가난한 자와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에게로 향하셨다(역사의 초기에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은 나귀를 타고 다녔지만(삿 5:10; 삿 10:4; 삿 12:14; 삼하 16:2), 후에는 말이 권력가진 자들에게 걸맞는 탈것이 되었다(그러나 슥 9:10에 나오는 병마에 대한 저주를 주목하라, 사 2:7; 사 31:1을 참조). 나귀는 평화를 위해 오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탈것이었다(J.G.Baldwin).

아니의 의미는 슥 9:9을 비롯한 수많은 구절에서 변화되어 있다. 즉 70인역본은 이 단어를 프라위스로 번역함으로써 보다 수동적인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단어를 능동적이며 윤리적 의미를 가진 헬라어 단어로 바꾸어 놓았다. 문자 그대로 결핍을 의미하는 단어가 온유나 겸손 따위의 찬양할만한 미덕으로 변화되었다. 그것은 그 이상 그 단어의 비밀을 헬라어가 보다 분명하게 나타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프라위스는 신약성경에서 마태복음에 3회, 베드로전서에 한번 나온다.

(a)   프라위스는 마 5:5에 나오는 세번째 축복, 즉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는 축복 선언에 나타난다. 일반 헬라어의 용법에 따르면, 프라위스 곧 온유한 자는 본능과 충동, 격동 등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훈련된 인격자이다. 이 단어의 통상적 용법은 인간에 대한 태도, 특히 자신을 평가 절하하고 부당하게 대우하며 해롭게 하는 자들에 대한 마음의 성향 및 행동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온유의 그리스도교적 개념은 이러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훨씬 더 깊은 것이다.

신약성경 히브리 역본에서 마 5:3에 "가난한 자"와 여기에 "온유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다같이 아니이다. 이것은 "온유한 자"는 "가난한 자"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아니는 '가난한, 억압받는, 괴로움 당하는, 비천한, 낮은, 겸손한'을 뜻하는데, 제 1복에서는 자신의 문제인 "가난한"이란 의미가 더 강조되어 있고, 여기서는 타자(他者)와 관계에서 자신의 문제인 '억압받는, 괴로움을 당하는, 겸손한'이란 의미가 더 강조되어 있다. 따라서 온유는 나 자신에 대한 자세인 동시에 타자, 곧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관계에서 나의 자세의 표현이다.

그리고 동사 클레로노메오(klhronomevw, 2816)는 70인역본의 신 4:1; 신 16:20 및 시 68:36에서 이스라엘의 땅을 소유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구절에서 의미하는 것은 새로운 약속의 땅을 소유하는 것, 또는 상속받는 것이다. 신명기 기자에게 복종과 의로움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조건인 것처럼, 축복선언에 나오는 가르침에 겸손히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새로운 땅으로 들어가는 조건이다. 이 구절은 시 37:11의 그것과 같은 주제를 말하고 있다. 이 시편의 주제는 축복 선언 전체의 주제와 매우 유사하며, 다위비드 힐은 쿰란 종단은 이 시편을 그들의 메시야적 공동체의 확립을 통하여 성취될 과정에 관한 예언으로 채택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한다(4 QpPs 37; 참조: Op.cit , 112).

이 축복선언은 지금 억눌리고 멸시 당하며, 마치 가나안 정복 이전의 이스라엘처럼, 자기 것이라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장래에 하나님의 땅의 통치의 상속인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동시에 그것은 예수님 자신에 관한 암시적 언급이기도 하다.

벧전 3:4에서 프라위스는 기독교 사랑의 구체적 표현인 미덕의 목록에 나온다.

(b)   프라위스는 마 11:29; 마 21:5에서 예수님과 관련하여 나타난다. 온유는 그리스도의 통치의 표시이다. 정치적 메시야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져오기 위하여 힘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따라서 그는 사람들이 메시야 왕으로 예측하지 않는 형태로 자기를 모든 기대에서 어긋나게 처신하셨다. 즉 투구와 갑옷을 입고 군마를 타고 무장하여 무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지상에서의 주님의 사역은 힘이나 전쟁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구원을 가져오는 왕의 사역이었다(슥 9:9). 하지만 마 11:29 은 그 배후에 셈적 사고를 가지고 있으므로(참조:사 42:2 이하; 사 53:1 이하;슥 9:9 ), 이 구절에 프라위스는 히브리적 의미에서의 아니를 암시하고 있으며, 따라서 메시야의 인간적인 빈궁함을 강조한다. 루터는 메시야를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방도도 없고 궁극적으로는 갖가지 불의에 수난을 당했던 '거지-왕'(Begger-King)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로 통치하고 통치 방법은 온유이다.(참조: F.Hauck/S.Schulz; W.Bau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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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움,dikaiosuvnh(1343, 디카이오쉬네) 

명사 디카이오쉬네(Theognis. Hdt. 이래)는 디카이오스(divkaio", 1342: 의로운)에서 유래했으며, 의로운 사람의 덕, 자질, 상태를 나타낸다. 

70인역본에서 히브리어 체테크(올바름, 공정함, 의로움)의 역어로 자주, 헤세드(선함, 친절, 긍휼)의 역어로 드물게 사용되었다.

명사 디카이오쉬네는 신약성경에서 9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넓은 의미에서, '그의 의무를 이행하는 자의 상태, 의로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조건'

① 일반적으로: "의의 말씀", 인간이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 받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길(way)에 관한 교훈, 히 5:13;

"의의 왕", 하나님께서 시인하신 왕, 그의 백성을 하나님께 용납되게 하는 왕, 히 7:2;

② '삶의 성실, 미덕, 순결, 정직, 생각, 느낌, 행동이 올바름': 마 3:15; 마 5:6, 마 5:10; 마 6:20; 마 6:1; 행 13:10; 행 24:25; 롬 6:13, 롬 6:16, 롬 6:18-20; 롬 8:10; 고후 6:7, 고후 6:14; 고후 11:15; 엡 5:9; 엡 6:14; 빌 1:11; 딤전 6:11; 딤후 2:22; 딤후 3:16; 딤후 4:8; 딛 3:5; 히 1:9; 히 12:11; 약 3:18; 벧전 3:14; 벧후 2:5, 벧후 2:21; 벧후 3:13,

"의의 도로", 의의 길로 행하는, 즉 정직한, 의로운 사람, 마 21:32;

"그의 의를 구하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 마 6:33; 약 1:20;

'자선'에서 나타나는 의에 대해: 고후 9:9.

"의와 성결"로 연결되어 나오는 경우, - 눅 1:75; 엡 4:24, - 전자는 인간에게 향한 옳은 행동을, 후자는 하나님께 향한 경건을 나타낸다.

의를 행하는 것, 의롭게 사는 것: 요일 2:29; 요일 3:7; 요일 3:10.

의를 행하는 것, 행 10:35; 히 11:33; 의를 위해 사는 것, 의를 위해 생명을 바치다, 벧전 2:24;

옳은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완전하게 수행하다, 마 3:15.

디카이오쉬네가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할 때는, 그의 완전 무결한 도덕성, 고결성, 죄 없으심을 나타낸다: 요 16:8, 요 16:10;

하나님에게 사용될 때는 그의 '거룩성'을 나타낸다: 롬 3:5, 롬 3:25이하.

③ 바울 문헌에서 헤 디카이오쉬네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며 유대인과 유대 기독교인의 견해에 대립된다.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특히 다음의 사실들이 주목되어야 한다: 한 민족으로서의 유대인과 그들 가운데서 기도교도로 개종하게 된 매우 많은 유대인들은, 모세 율법의 요구사항에 부합하는 행위를 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다 - 마치 공로의 방식으로 - 고 생각하며, 또한 그리하여 영원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율법은 그 가르침 모두에 완전히 복종할 것을 요구하며, 그러한 복종을 이행하지 않는 자들을 정죄한다(갈 3:10, 갈 3:12). 이런 식의 복종은 유대인도 이방인도(롬 1:24-롬11:1) 그 누구도 이행할 수가 없다(롬 3:10) - 이방인에게는 모세 율법 대신 그들의 마음에 새겨진 타고난 올바른 법이 있다(롬 2:14이하).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 즉 그의 독생자 그리스도를 인간의 죄를 속하는 희생제물로 죽게 내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그의 은총과 선한 뜻을 입증하셨고, 그리하여 인간이 마치 죄를 짓지 않은 양 구원을 소망할 수 있게 한 그 사랑을 선포한다. 그러나 이 소망을 얻는 길은 오로지 믿음을 통하는 것 뿐이라고 가르친다. 이 믿음으로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고 보증된 하나님의 그 은총을 전유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믿음을 인간에게 디카이오쉬네로 간주하여 주는 것이다; 디카이오쉬네는 '한 죄인이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은총을 받아들이는 그 믿음을 통하여 그 죄인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 용납(열납)될 수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이런 의미에서 디카이오쉬네는 롬 4:5이하, 롬 4:11; 롬 5:17, 롬 5:21; 롬 9:30이하; 롬 14:17; 고전 1:30; 갈 5:5에서 수식어구 없이 사용된다. 하나님으로 인한 의,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신 것, 롬 1:17; 롬 3:21; 롬 10:3.

이 단어가 함축적으로 사용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상태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낸다, 롬 10:4;

추상적인 것으로 구체적인 것을 나타내는 용법에서는,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신 자들을 뜻한다. 고후 5:2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롬 3:22; "믿음으로 된 의", 믿음으로 얻어지는, 믿음에서 나타나는 의, 롬 4:11, 롬 4:13; "하나님께로서 난 의", 즉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의, 하나님으로 인하는 의, 빌 3:9(내가 가진 의는 믿음에 기초한 의라는 것이다).

"믿음에서 난 의", 롬 9:30; 롬 10:6; "내가 가진 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 빌 3:9; "믿음을 좇는 의", 롬 9:30; 롬 10:6; "내가 가진 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 빌 3:9; "믿음을 쫓는 의", 믿음에 따르는, 믿음에 합당한, 히 11:7(그러나 히브리서에서의 '믿음'의 개념은 바울 문헌에서보다 더 폭 넓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가 없이는 의가 존재할 수 없는 분으로서, 의의 창시자로서로 불리운다, 고전 1:30.

"의를 이루기 위하여", 결과로서 의에 이르기 위하여, 의를 얻기 위하여, 롬 10:4, 롬 10:10.

믿음은 사람에게 의로 간주된다, 즉 의는 믿음에서 기인하고, 믿음에서 인정된다: 롬 4:3, 롬 4:6, 롬 4:9, 롬 4:22; 갈 3:6; 약 2:23.

"의의 직분", 고후 3:9. 믿음에서 생겨난 "의", 즉 율법 순종의 결과로 생각되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상태와 반대된다, 롬 5:5이하;

율법에 의존하는, 즉 율법에 대한 가상적 복종에 의존하는 의, 빌 3:6;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위로 스스로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의, 롬 10:3; 빌 3:9;

(b)  더 접근된 의미에서 '공의, 정의', 혹은 '각 개인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시는 미덕',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에게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공평하게 부여하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이라고 한다. 벧후 1:1.

법률상의 정의, 롬 9:28; "공의로 심판", 행 17:31; 계 19:11.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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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리다 hunger. peinavw(3983, 페이나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a)  동사 페이나오(Homer 이래로)는 '굶주리다'를 의미하며, 전의된 의미로는 '열열히 어떤 것을 열심히 욕구한다'(생의 필요로서)를 의미한다(Xenoph. Sym., 4, 36등). 페이나오(와 딥사오 diyavw, 1372; 딥소스 divyo", 1373; 리논 livnon, 3043)의 의미 영역은 단지 욕구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고, 지적인 그리고 영적인 생활에까지 확대되었다(Plato와 Xenophon이후). 이 단어들은 사람이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것, 예컨대 자유, 명예, 명성, 부, 칭송, 깨달음 따위에 대한 열정적인 갈구를 표현한다. 이러한 욕망은 때로 굶주림과 목마름을 하나로 묶음으로써 더욱 강력하게 표현되기도 한다.

고대 종교에서 신들을 예배하는 중요한 이유는 땅위 풍부한 양식의 공급을 보장받기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정복 후에 풍요의 신 바알을 되풀이하여 채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고대인들은 흉년과 기근을 신들의 진노의 탓으로 여겼다.

(b)  고대에서 자기가 통치하는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하는 것은 통치자의 책무였다(예: 애굽의 바로). 통치자들은 식량을 공급하여 사람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때문에 헬라 세계에서 신과 같은 영예를 누렸다.

(c)  헬라의 철학자들은 대개가 육체의 욕구에 얽매이지 말라고 그들의 추종자들에게 가르쳤다. 그래서 스토아철학자들은 금욕생활을 실천함으로써 인생의 파란많은 우여곡절로부터 자신을 해방하고자 노력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은 육체(이것은 신으로부터 멀어진 물질계에 속한다)를 부정함으로써 세상과의 감각적 접촉을 끊으려고 하였다.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영적 세계에 도달하기 위함이다(참조: L. Goppelt; W. Bauder).

2. 70인역본 및 유대교의 용법 

(a)  페이나오는 70인역본에서 약 47회 나오며, 거의 대부분 히브리어 라에브(굶주리다)의 역어로서 사용되었다(창 41:55; 삼하 17:29; 시 34:10; 잠 19:15; 사 8:21등). 그리고 아예프(피로하다, 기진하다, 지치다, 신 25:18; 사 5:27; 사 28:12), 야에프(피로하다, 기진하다)의 역어로서도 사용되었다(사 40:28, 사 40:29, 사 40:31).

(b)  필로(Philo)의 작품에는 헬라적 요소와 유대적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한편으로 그는 영혼을 만족시킨다는 보다 중요한 문제에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하여 절제와 신체 단련이 필요하다고 권면한다(Spec. Leg. 2, 201). 다른 한편, 그는 굶주림을 가리켜 "모든 악들 중에서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이라고 불렀다(Spec. Leg. 2, 201; 참조: TDNT Ⅵ 14).

(c)  랍비 유대교에서, 굶주림과 목마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약속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고, 겨우 율법을 보다 잘 지키기 위한 동기로서만 작용한다(예: Pss. Sol. 5:1-12; 10:1-6; 13:7-10). 랍비들은 여전히 곤궁의 때를 벌로서 내려진 불행으로 또는 기껏해야 정결케 하기 위한 불행 정도로만 이해하였는데, 사람들은 선한 일로 이 불행에 대처하고자 하였다(참조: SBⅡ 643이하; Ⅳ 536-558).(참조: W. Bauder; L. Goppelt)

3. 신약성경의 용법 

페이나오는 신약성경에서 23회 나오며, 문자적,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a)  공관복음.

① 페이나오는 예수님의 육체적 굶주림에 대해 사용되었다. 마 4:2; 눅 4:2에서 페이나오는 40일간 금식하시고 난 후의 예수님의 주림을 묘사한다: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마 4:2).

예수님 자신이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친히 자기의 사역을 인하여 굶주림을 겪으셨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광야의 시련을 통하여 가르침받는 신앙을 지지하셨다(신 8:3). 예수님이 굶주렸을 때 마귀의 시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를 이용하여 기적을 행하고 그렇게해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라는 것이었다. 이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만 굳게 시험을 견뎌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기 때문이다(마 4:4; 눅 4:4; 신 8:3).

마 21:18이하, 병행구 막 11:12이하에서 페이나오는 이른 아침에 길 갈 때의 예수님의 굶주림을 표현한다: "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예수님은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주림을 채워주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고 이렇게 함으로써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모든 사람에게 어떻게 저주가 내려질 것인지에 관하여 비유적으로 보여주셨다.

② 페이나오는 사명 감당을 위해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의 굶주림에 대해 사용되었다. 마 12:1이하(병행구, 막 2:23이하; 눅 6:1이하)에서 페이나오는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굶주려 이삭을 잘라먹은 행위를 두둔한 말씀에 나온다.

③ 페이나오는 장래의 새로운 질서에서 가난한 자, 곧 굶주린 자의 전도와 관련하여 나타난다. 눅 1:53(시 107:9)에서 페이나오는 오시는 메시야를 통하여 역사의 진노와 인간 생활에 이루어질 강력한 전도를 노래한 대목에 나타난다: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눅 6:21에서도 동일한 약속을 하고 있다: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신자는, 마치 자기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굶주림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현재의 사물의 질서는 타락한 세상의 질서이다. 장래의 새로운 질서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곤궁한 자의 편에 서서 행동하실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오실 날을 내다보면서, 그들을 가리켜 이미 복 받은 사람들이라고 부르신다. 그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구원 때의 선물을 주실 것이다. 현재의 세상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고, 따라서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만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의 굶주림이 없게될 것이다(눅 6:21). 하지만, 지금의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에게는 어떤 약속도 없다. 오히려, 그들은 슬퍼하고 울게 될 것이라고 위협을 받고 있다(눅 6:25). 이와 같이 누가복음에 나오는 축복 및 저주 선언(눅 6:21, 눅 6:25)은 가난한 자가 지금 겪고 있는 굶주림과 수탈을, 지금 잘 먹고 부유하게 사는 사람들이 겪게 될 장래의 굶주림과 대비시키고 있는데, 가난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장래의 구원에 관한 약속이 주어지고, 지금 부유한 자들에게는 약속이 없는 저주가 선언되고 있다.

눅 1:51-눅 1:53에서 신섭리의 중요한 특징은 인간들 중에 일어나는 운명의 변동이다. 하나님의 섭리적 심판권에 있는 자들은 교만한 자, 세력있는 자, 부자들이다. 하나님의 자비의 은총권에 있는 자들은 비천한 자, 주린 자들이다.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을 생각지 않은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강한 팔로 깨뜨림을 당할 것이며, 가난한 자와 낮은 자를 학대하는 권세있는 자들은 진실로 미천한 자들이 높은 것들에 오르는 동안 권세와 높은 지위를 박탈당하며, 주리는 자, 곧 자신의 필요를 깨닫고 영적 양식을 갈망하는 자들은 축복을 받을 것이나 스스로 만족히 여기며 교만하는 부자들은 마음의 공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물에게 부여할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을 호사로 딩구는 자에게 주지 않을 것이다.

이 새로운 질서는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④ 마 5:16에 나오는 페이나오를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해석한다.

유대교의 율법주의의 독선(self-righteousness)과는 대조적으로, "의에 주림"은 하나님에 대한 절실한 요구와 그에 따른 갈망을 의미한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주린 사람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기대하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이다(마 6:33). 그들에게 약속된 주림의 충족은 예수님의 오심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게다가 다른 모든 것이 그들의 소유가 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⑤ 마 25:35, 마 25:37; 마 25:42에 의하면 굶주림(페이나오)은 사랑을 실천할 좋은 기회이다. 타인의 굶주림과 목마름을 충족시켜 주는 일은 자비로운 행위들 중의 하나로 평가되는데, 이 자비 행위는 세상 심판 때에 판단 기준으로 설정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리고 목마른 사람으로 자신을 숨기고, 즉 "곤궁의 옷으로 가장하고",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마 25:37, 마 25:42).

(b)  ① 롬 12:20에서 이 자비의 행위는 심지어 자기의 원수에게도 베풀어야 한다고 명한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그러나 고전 11:21, 고전 11:34에서 페이나오는 열광주의자들이 무시한 빈궁한 자에 대해 사용되었다. 고린도 교회에서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였을 때, 열광주의자들은 몰인정하게도 그들 가운데 있는 주린 사람들에게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② 빌 4:12에서 페이나오는 바울이 자족하는 비결을 말하는 대목에 나온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굶주림은 반드시 하나님의 미움을 받는 자의 징표는 아니다. 그것이 고통을 주기는 하겠지만,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지는 못한다(롬 8:35).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금욕주의나 높은 지식에 의거하여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c)  요한의 기록에서 굶주림은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요 6:35에서 페이나오는 결코 주리지 않은 삶에 대해 사용되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뜻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께서는 주림이 충족되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 곧 생명을 주시는 자와의 접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주림과 목마름의 충족에 관한 이 모든 말씀에서 약속된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에서만 완전히 주어질 것이다.

계 7:16에 의하면, 그 때에는 지상에서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요구들이 끝나버릴 것이다: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참조: 계 21:6; 계 22:17=사 49:10; 사 55:1; 눅 1:53; 눅 6:21 병행구 마 5:6).

(참조: L. Goppelt; W. Bau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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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르다 thirst. diyavw(1372, 딥사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딥사오(호머 이래로)는 딥사(divya: 목마름)에서 유래했으며, '목마르다'를 의미한다. → peinavw, 3983 페이나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딥사오는 70인역본에서 약 40회 나오며, 7개의 히브리어형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주로 차메(목마르다)와 그 파생어들(목마른, 갈한[건조한] 땅)을 번역하고 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딥사오는 신약성경에서 16회 나오며, 그 중 9회가 요한 문서에 나온다.

(a)  문자적 의미.

요 19:29: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그의 사역을 완수하시기 전 최종적 원기 회복의 요구를 표현한다.

마 25:35, 마 25:37에서 목마른 자는 실제적 사랑의 대상이다. → 타인의 굶주림과 목마름을 충족 시켜주는 일은 자비로운 행위들 중의 하나로 평가되는데, 이 자비 행위는 세상 심판 때에 판단 기준으로 설정될 것이다.

롬 12:20(=잠 25:21이하)에서 이 자비의 행위는 심지어 자기의 원수에게도 베풀어져야 한다. 또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리고 목마른 사람으로 자신을 숨기고, 즉 "곤궁의 옷으로 가장하고"(Matthias Claudius; 참조: 행 11:28이하),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마 25:37, 마 25:42).

고전 4:11에서 목마름은 부름받은 사도가 당한 많은 고난들 중의 하나였다: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b)  비유적 의미.

마 5:6에서 영적 선한 것을 강렬하게 갈망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요한문서에서의 굶주림과 목마름은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자연적인 목마름(요 4:13)은 대체로 생명에 대한 갈망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그 갈망이 충족되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 곧 생명을 주시는 자와의 접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 갈망을 포착하여 사용하고 계신다(요 4:14이하; 요 6:35, "나는 생명의 떡이다"; 출 16:3이하를 암시하는 요 7:37). 그러나 주림과 목마름의 충족에 관한 이 모든 말씀에서 약속된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에서만 완전히 주어질 것이다. 그때에는 지상에서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요구들이 끝나버릴 것이다(계 7:16; 계 21:6; 계22:17= 사49:10; 사 55:1; 참조: 눅 1:53; 눅 6:21 병행구 마 5:6). (참조: J. Behm;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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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부르다, 베불리다, 먹이다, 살찌게 하다. cortavzw(5526, 코르타조)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코르타조(Hesiod. 이래)는 코르토스(covrto", 5528: 사육장, 식량, 먹이, 풀)에서 유래했으며,

(a)  '~에 풀이나 건초를 먹이다, 음식으로 채워주다(배부르게 하다), 살찌게 하다'

(b)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다, 만족시키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코르타조는 70인역본에서 14회 나오며, 오직 히브리어 사바(실컷 먹어 물리다 to be sated with)를 번역한다. 기본 개념은 음식으로 만족하는 것(시 37:19; 시 59:15; 시 132:15), 토지가 비로 만족하는 것(욥 38:27), 나무들이 진액으로 만족하는 것(시 104:13), 그리고 땅이 하나님의 행사의 결과로 만족하는 것(시 104:13)을 나타낸다. 두 경우에서는 환멸감이 표현되나(렘 5:7; 애 3:15; 애 3:29), 보다 종종 깊은 만족감은 단순한 음식으로 인한 만족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보고 아는 만족을 나타낸다(시 17:15; 시 81:16; 시 107:9).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코르타조는 신약성경에서 16회 나오며, 주로 사복음서에 나오며, 빌립보서, 야고보서, 요한계시록에 각 1회 나온다.

(a)  코르타조는 4천명과 5천명을 먹이신 기사들에서와 같이 거의 일정 불변하게 '먹다' 또는 '음식으로 배부르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마 14:20; 마 15:33; 막 6:42; 막 8:4; 막 8:8; 눅 9:17; 요 6:26). 복음서 기자들은 모두 70인역본의 시편들에 나오는 코르타조의 의미를 취하여 무리들이 먹었을 뿐만이 아니라 만족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b)  예수님께서도 팔복의 말씀에서 보다 깊은 의미에서 같은 약속을 하신다.

①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② 눅 6:21,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c)  예수님은 그의 선교의 사명과 관련하여 이 단어를 사용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 7:27).

(d)  빌 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e)  눅 16:21에서 거지 나사로에 관하여 사용되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f)  눅 15:16에서 탕자에 관하여 사용되었다: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g)  약 2:16에서 형식적인 구제에 관하여 사용되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h)  계 19:2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 원수들을 멸망시키고 그 후 그들의 시체를 새의 먹이로 남겨둔다. 기자는 겔 39:17-20의 명백한 예언에 입각하고 있다.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J. G. Baldw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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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기는, 자비로운, 동정적인. ejlehvmwn(1655, 엘레에몬)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엘레에몬(Homer 이래)은 엘레에오(ejleevw, 1653: 불쌍히 여기다, 자비나 동정을 베풀다)에서 유래했으며, '동정심이 있는, 자비로운'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형용사 엘레에몬은 70인역본에서 약 30회 나오며, 히브리어 한눈(2587: 호의적인, 자비로움)의 역어로 '자비로운'이나 '은혜로운'(출 22:26; 대하 30:9; 느 9:17; 시 111:4)을, 헤셋(2617a: 선함, 친절, 경건, 긍휼)의 역어로 '인자한'(잠 11:17; 잠 20:6)을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엘레에몬은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고전 헬라어 용법과 같이 사용되었다.

(a)  히 2:17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사용되었으며, 그의 '자비스러운' 성격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b)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구절에서 그 동기는 명백히 하나님의 자비이며, 긍휼히 여기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진다. 이 구절에서 동사는 수동태가 사용되어 그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간접적으로 나타낸다.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R. Bult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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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heart. kardiva(2588, 카르디아)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카르디아(Homer 이래로)는 '마음'을 의미하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본래 생리학적으로, 사람이나 짐승의 신체의 중심기관으로서의 마음에 대하여 사용되었다(Homer, Aesch., Plat., Aristoph. 등)

(b)  비유적으로 도덕적, 지적 생명의 자리로서의 마음, 즉

① 감정과 열정의 자리(분노, 용기나 비겁, 기쁨이나 슬픔, 사랑과 미움 같은 것을 나타낸다),

② 생각이나 상상력의 자리,

③ 의지와 결심의 자리를 의미한다.(종교적-도덕적 행동결정 실행의 근거)

(c)  또 다른 비유적 용법으로, 자연에 관한 특별한 의미로 사용될 때 '나무의 심'과 '식물의 종자' the seed of plants 였다. 또한 카르디아는 핵심 즉(인간, 동물, 식물의) 가장 깊숙한 부분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도 지녔다.

이 단어는 더 이상 단순히 신체의 중심부를 지칭하는 말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의 지적, 영적 중심부를 지칭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카르디아는 70인역본에서 약 800회 이상 나오며, 주로 마음을 뜻하는 레브와 레밥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70인역본에서 카르디아는 감정적인 생활, 지적인 생활, 의지적인 생활 및 종교적 생활을 포괄한 인간 생활의 중심이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카르디아는 신약성경에서 148회 나오며, 공관복음서에 47회, 요한복음에 6회, 사도행전에 17회, 바울서신에 52회, 공동서신에 13회, 히브리서에 10회, 계시록에 3회 사용되었다.

(a)  카르디아가 신체의 중심기관이며, 육체적 활력의 자리라는 사상은 눅 21:3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행 14:17의 시적 표현("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과 약 5:5에만 나타난다:"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참조: 삼상 21:7; 시 101:5; 시 103:15).

(b)  카르디아는 인간의 내부 생명과 영혼의 모든 힘과 기능의 근원과 자리이다.

① 카르디아는 느낌과 감정, 욕망, 정욕의 자리이다. 기쁨(행 2:26; 요 16:22; 행 14:17), 고통과 슬픔(요 16:6; 요 14:1; 요 14:27; 롬 9:2; 고후 2:4; 행 2:27; 행 7:54; 행 21:13; 눅 4:18), 사랑(고후 7:3; 고후 6:11; 빌 1:7), 욕망(롬 10:1; 눅 24:32), 정욕(약 3:14; 마 5:28; 마 6:21 등).

② 카르디아는 이해와 사고와 반성의 자리이다.

마 12:34(과 병행구),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라"

막 7:21(과 병행구),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눅 1: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눅 2: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눅 9:47,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행 8:22,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고전 2: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눅 2:19; 눅 2:51,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마 9: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막 11: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마 24:48(과 병행구),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롬 10: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계 18:7,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눅 24: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③ 카르디아는 의지와 결정의 자리이다.

고후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행 11:23,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전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전 7:37, "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할 권리가 있어서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눅 21:14,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행 5: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계 17:17,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행 5: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골 4:8, "내가 저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낸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엡 6:22,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저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따라서 카르디아는 인간의 외부와 대조하여 인간의 내부 전체를 대표한다.

살전 2: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고후 5: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막 7:6(과 병행구),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 15: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롬 10:8, "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고후 6:11,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롬 2: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행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행 4:32,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골 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요일 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벧전 3:4,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④ 카르디아는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종교적 중심지이며, 종교적 생활의 뿌리이며 도덕적 행위를 결정하는 곳이다(예: 눅 16:15; 롬 5:5; 롬 8:27; 엡 3:17; 히 8:10; 벧후 1:19; 죄인의 마음, 막 7:21; 요 12:40; 엡 4:18; 약 1:26; 구속받은 자의 마음, 마 11:29; 딤전 1:5; 살전 3:13; 골 3:22; 벧전 3:15; 약 4:8, 등).

(c)  "땅의 내부"라는 의미는 마 12:40에서 나온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참조: Walter Bauer ; T.Sorg ; J.Be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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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결한, 깨끗한 clean, 순결한 pure. kaqarov"(2513, 카다로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카다로스(Homer 이래)는 어원이 불분명하다.

(a)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본래 뤼파로스(rJuparov", 4508: 불결한, 더러운)에 반대되는 물리적인 의미에서 '깨끗한'(예: 맑고 깨끗한 물, Eur. Hippolytus).

(b)  플레레스(plhvrh", 4134: 가득찬)에 반대되는 것으로, 사이에 끼인 것 없이 자유로운이라는 의미에서 '깨끗한'.

(c)  아카다르토스(ajkavqarto", 169: 불결한)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의식적으로 깨끗한'.

(d)  종교적인 의미의 '도덕적으로 순결한'을 의미한다.

* 헬라어에는 '순결, 정결'을 의미하는 두 개의 형용사, 즉 하그노스(aJgnov", 53)와 카다로스(kaqarov", 2513)가 있다. 하그노스는 본래 '거룩한'을 의미하는 어떤 어근과 관계가 있는 말로 신이나 그와 관련되어 있는 사물이나 사람(제사 물건이나 제사 직원)에게 속해 있는 질적인 '거룩함'이나 '순결함'을 의미한다. 이보다 더욱 일반적인 용어로는 카다로스와 이 단어의 동족어들이 있는데, 이 단어들은 사람이나 사물의 제의적, 육체적 혹은 도덕적 청결을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두 어근으로부터 나온 단어들이 특히 제한되어 대개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a)  카다로스는 70인역본에서 약160회 나오며 18개의 히브리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가장 많이 타오르(의식적으로 '깨끗한, 순결한')를 번역한다. 그리고 카다로스는 나키(순결한, 결백한, 욥 4:7), 자카크(밝다, 순결하다, 결백하다, 욥15:15)를 번역한다.

(b)  구약성경. 출산이나 죽음과의 접촉으로 인한 부정(레 12장; 민 19:11)은 부정을 가져오는 적극적인 힘이다. 이방 제의와 관련된 것이나 여호와께 적대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부정한 것이다. 어떤 동물들은 의식적으로 부적당한 것으로 간주된다(참조: 레 11장; 신 14:7이하). 물론 위생학이 어떤 역할을 한다(레 11:29 - 레 11:30).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에 강조점이 주어지므로 정결의 개념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발달한다. 씻음, 희생 제사 등에 의한 정결 의식은 잃어버린 정결을 회복시켜주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출 19:10; 민 8:15). 하나님의 거룩함은 도덕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제의적 정결은 도덕적 정결을 상징하는 것이다. 선지자들은 제의적 개념들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지만 순전히 제의적인 개념들을 응징할 정도로까지 정결의 도덕적 측면을 강조한다.

(c)  후기 유대교에서 일부 집단들은 이와 정반대의 극단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나 헬레니즘 유대교(참조: Philo)는 고대의 제의적 개념을 강력하게 영적화 한다. 정결에 대한 제의 규칙들은 지지된다. 그러나 그러한 규칙들의 의미는 기본적으로는 상징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도덕적 순결이다(F.Hauck)

3. 신약성경의 용법 

카다로스는 신약성경에서 2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카다로스는 물리적 정결을 나타낸다. 이 의미는 전통적 견해를 따르는 구절들에 나타난다. 즉 물리적으로 정결한 것은,

① 히 10:22에서 제의적 목적에 적합한 것이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② 마 23:26에서 의식적 목적에 적합한 것이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③ 마 27:59에서 일반적인 존경의 목적에 적합한 것이다: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④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진술들은 유대교와 매우 밀접하다(계 21:18; 계 21:23; 계 15:6; 계 19:8; 계 19:14). 정결한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기에 적합하며, 부정한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눌 수 없다(참조: 계 21:27).

(b)  카다로스는 제의적 정결과 깨끗함을 나타낸다.

① 롬 14:20에 의하면 기독교 공동체에서 음식을 금하는 것에 대한 논쟁에서 바울은 기본적으로, 일반적으로 만물의 종교적 정결을 주장한다: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② 딛 1: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바울이 그의 통찰력에 근거하여 공동체의 규정을 세운 목회 서신에서 만물이 창조로 깨끗하다는 원리는 종교적으로 깨끗한 자들, 즉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그들의 전 삶을 영위하는 구원 공동체의 회중에게 적용하는 것으로 공식화된다. 그들의 내적 존재가 더러워져 있는 이교도들과 불신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하지 않으며, 하나님께도 부적합하다. 그렇다면 순결은 사람 안에 있는 것이지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서는 사물에 따른 부정이나 순수하게 제의적 부정의 개념은 나타나지 않는다. 도덕적 영적 정결의 개념이 그러한 개념을 초월하며 대신한다.

(c)  카다로스는 도덕적 순결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① 눅 11:41(참조: 마 23:25이하)에서 예수님의 판단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찾는 의식적이나 제의적 정결은, 그것이 오직 외적인 것들에만 고려한 것이므로, 전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공동체에서 요구하는 순결은 본질적으로 도덕적이며 인격적인 것이다. 이것은 마음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에 반대되는 어떠한 것도 수용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헌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② 약 1:27에서 순수한 신앙심은 실천적 사랑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③ 벧전 1:22의 일반적 권고에서 믿음의 순종으로 영혼을 깨끗게 하고 순결한 마음에서 나는 사랑을 할 것을 요구한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 목회서신은 딤전 1:5; 딤후 2:22에서 순결한 마음에 대하여 말하고, 딤전 3:9; 딤후 1:3에서 선한 양심에 대하여 말한다. 즉 과거의 죄에서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께 전심으로 헌신하는 신자들의 내적 생명에 대하여 말한다. 이 말은 하나님께 돌아온 순전함과 아무 거리낌이 없는 양심의 내적 통일을 표현한다: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행 18:6),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행20:26).

⑤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주제다. 요 15:3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연합을 통해 깨끗해진다: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이러한 깨끗함은 말씀으로 말미암는다(참조: 요 17:14이하).

요 13:10이하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행위는 세례(침례)를 가리키는 상징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의 용서 가운데 그리스도의 사랑의 봉사를 나타내는 본보기를 제공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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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케 하는 자. eijrhnopoiov"(1518, 에이레노포이오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에이레노포이오스(Xen., Hell.)는 에이레네(eijrhvnh, 1515: 평화)와 포이에오(poievw, 4160: 만들다, 행하다)에서 유래했으며, '화해시키는 (자), 화평하게 하는 (자)'를 의미한다.

랍비들은 화해를 사랑하는 일을 칭찬하며, 필로는 하나님을 화평케하는 자로 부른다. 그러나 또한 에이레노포이오스는 무력으로 평화를 이룩하는 강력한 통치자들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2.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에이레노포이오스는 신약성경에서 마 5:9에 한번 나온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서는 일반적인 안녕이나 하나님과 평화가 아니고 인간의 화합을 증진시키는 사람들에게 복이 선언된다. 하나님은 저들이 자기를 닮았기 때문에 그들을 자녀라고 부른다.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W. Foer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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컫다, 부르다, 이름 짓다, 초대하다. kalevw(2564, 칼레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칼레오(Homer 이래)는 '부르다' call라는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a)  칼레오는 사람을 호명하는 경우이든(Homer, Il.) 어떤 사람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경우든 간에, '이름을 붙이다(짓다, 명명하다)를 의미한다. 수동 분사 칼루메노스(Hdt., 6, 61)가 인명이나 지명에 사용될 때는 '불리워지는' called, '소위' so called를 의미한다. 이름은 사람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므로 수동 부정사 칼레이스다이는 사실상 에이나이(ei+'nai, 1511: to be)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예: Homer, Od.).

(b)  '초대하다' invite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어떤 집으로 초대하다, 어떤 연회에 초대하다(Homer, Od.) 등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분사형 클레토스는 '초대받은, 환영받은, 손님'(Homer, Od., 17, 386)을 의미한다. 그 초대 자체가 특별한 영예가 되었을 경우, 이 단어는 '선택된'이라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Homer, Il).

(c)  칼레오마이는 증인들 또는 어떤 사람의 적을 법정 앞에 '소환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Dem., Xen., Hell.).

(d)  칼레오는 매우 드물게 신의 부름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것은 신비 종교(예: 이시스의 신비 종교) 및 70인역본과 특히 신약성경의 용법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것들로부터 칼레오는 '요구하다'(Herm., 119B Ⅲ, 10 이하), '위탁(위임)하다'(CPR 18, 9)라는 의미를 띠게 되었다.

(e)  헬라 사회가 '부름' calling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몰랐기 때문에 거기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소명' vocation의 개념이 없다. 직업에 있어서 사람이 하는 행동은, 에르곤(일하다), 포노스(짐), 에팡겔리아(동의, 약속), 프라그마(행위, 일), 테크네(기술), 스케시스(상황, 조건, 상태) 또는 탁시스(순서, 질서) 등으로 불렸다. 육체 노동에 대한 일반적인 용어가 모색되기도 했지만 '소명' vocation 의식은 사제들에게만 국한, 남아 있었으며 지적인 일이나 행정 업무에 헌신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의식이 어느 정도 존재하였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칼레오는 70인역본에서 약 300회 나오며, 거의 대부분 히브리어 카라(부르다, 불러내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칼레오는 '이름을 짓다, 명명하다'라는 의미로 매우 자주 사용되었다. 사물의 이름을 짓는 것(예: 창 1:5; 창 1:8 이하, 낮, 밤, 하늘, 땅; 창 2:19, 짐승들) 혹은 사람의 이름을 명명할 경우(예 창 25:26, 야곱; 창 29:32-35; 창 30:6-24, 야곱의 아들들), 도성(예: 삼하 5:9, 다윗의 성), 또는 특성, 속성에 이름을 붙이는 경우(예: 사 35:8에서는 길, 출 12:16에서는 어떤 날을 거룩하다고 부른다; 사 56:7에서는 성전이 "기도의 집"으로 불림) 등이다. 유대 사람들이 "여호와의 제사장"(사 61:6)이나 또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호 1:10)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종들을 "다른 이름"(사 65:15)으로 칭한다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새로운 존재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b)  칼레오는 '선포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 61:2과 렘 34:17에서 면제년 선포에 관해 사용되었다.

(c)  칼레오는 '부른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① 예를 들면 부모가 자녀를 부르는 것(창 24:58), 통치자가 신하를 부르는 것(출 1:18; 삿 12:1), 모세가 장로들을 부르는 것(출 12:21; 출 19:7) 등이다. 이러한 부름은 항상 명령이지 단순한 초청은 결코 아니었다(욥 13:22). 이러한 부름에는 상대가 듣고 대답해 주기를 바라는 요망이 들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사 65:12).

② 그는 기근(시 105[104]:16)과 칼(렘 25:29)을 부르신다.

③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는 것을 표현한다. 이 경우 인간은 그 부름에 응답하기 전에 그가 들은 부름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성소에서 조차 이 부름에 준비되어 있지 못하여 이 부름과 여타의 음성을 얼마나 구별하기 어려운가 하는 것이 사무엘의 부름의 기사에 극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삼상 3:4-10). 단지 하나님의 부름이 인간에게 어떤 요구를 하신다는 것 때문에 이 세상 주권자들의 요구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엘리야[왕하 1:3, 9]와 모세[출 3:4; 출 5:2]). 이 부름 때문에 종종 하나님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기도 할 것이다.(참조: L. Coenen).

3. 신약성경의 용법. 

칼레오는 신약성경에서 14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칼레오는 ① 목적의 대격과 서술 대격을 수반할 때는 '~라고 부르다, 이름 부르다. 명명하다, 이름 짓다(붙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마 10:25; 마 22:43; 마 22:45; 마 23:9; 눅 1:29; 눅 20:44(=마 22:45), 행 14:12; 롬 4:17; 롬 9:25(=호 2:25), 히 2:11; 벧전 3:6; 마 1:21; 마 1:23(=사 7:14); 마 1:25.

눅 6:46에서는 대격과 호격이 뒤따른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 어찌하여...".

특별히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름을 지어주시는 경우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과(눅 1:31)과 요한(눅 1:13)의 이름을 지어주심으로써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그들의 삶을 그가 주관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신다(L. Conen).

② 수동태로 '불리워지다, 일컬음을 받다, 명명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마 2:23; 마 5:9; 마 21:13; 마 23:7; 마 23;8; 마 23:10; 마 27:8; 막 11:17; 눅 1:32; 눅 1:35; 눅 1:36; 눅 1:60; 눅 1:12; 눅 1:76; 눅 2:4; 눅 2:21; 눅 2:23; 눅 6:15; 눅 7:11; 눅 8:2; 눅 9:10; 눅 10:39; 눅 15:19; 눅 15:21; 눅 19:2; 눅 19:29; 눅 21:37; 눅 22:25; 눅 23:33; 요 1:42; 행 1:12; 행 1:19; 행 1:23; 행 3:11; 행 7:58; 눅 8:10; 행 9:11; 행 10:1; 행 13:1; 행 15:22; 행 15:37; 행 27:8; 행 28:14; 행 28:16; 행 28:1; 롬 9:26; 고전 15:9; 히 3:13; 약 2:23; 요일 3:1; 계 1:9; 계 11:8; 계 12:9; 계 16:16; 계 19:11; 계 19:13.

(b)  칼레오는 '~에 부르다, 초대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마 2:7; 마 20:8; 마 22:3; 마 22:4; 마 22:8; 마 22:9; 마 25:14; 막 3:31; 눅 7:39; 눅 14:7; 눅 14:8; 눅 14:9; 눅 14:10; 눅 14:12; 눅 14:13; 눅 14:16; 눅 14:17; 눅 14:24; 눅 19:13; 요 2:2; 요 10:3; 행 4:18; 행 24:2; 고전 10:27.

(c)  복음서의 몇몇 구절과 바울 서신에서 자주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부르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부르신다(마 2:15).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부르신다(마 4:21; 병행구 막 1:20). 예수님은 죄인들을 불러 회개케 하신다(마 9:13; 병행구 막 2:27; 눅 5:32). 하나님은 우리를 그 자신에게로 즉 구원으로 부르신다(롬 8:30).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부르셨다(롬 9:7; 히 11:18).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모두 부르셨다(롬 9:24).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불러 그의 아들과 교제케 하신다(고전 1:9).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평안(고전 7:15), 은혜(갈 1:6), 자유(갈 5:13), 그의 나라와 영광(살전 2:12), 거룩(살전 4:7; 참조: 살전 2:13-14), 영생(딤전 6:12), 빛(벧전 2:9)으로 부르시며, 그와 동시에 고난에 참여하도록(벧전 2:20-21) 부르시기도 하신다. 그리스도 자신도 부름을 받았다(히 5:4).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았는데(히 11:8),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예표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며(계 19:9), 단순히 "부름받은 자"로 기술할 수도 있다(계 9:15).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사람들을 부르시는 것은 하나님의 역할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부름에 대한 적절한 응답은 믿음이다. 이 믿음에는 제자가 되는 것 뿐만 아니라 구원의 축복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용어의 배후에는 심판과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전체 사역이 있다. 이러한 부름은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부르시거나 복음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진다(살후 2:14). 따라서 이 단어가 이러한 용법으로 사용될 때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전문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참조: K. L. Schmi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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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하다 persecute. 뒤쫓다 run after, 추구하다 pursue,  diwvkw(1377, 디오코)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디오코(Homer 이래)는 디오(divw: 도망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a)  '재촉하다'라는 의미에서 ① '빨리 움직이게 하다(탈 것, 마차), 여행하다, 타고가다, 저어가다' 또는 더욱 일반적으로 '서두르다, 급히가다', ② '박해하다, 쫓아내다, 고소하다'

(b)  '열심히 따르다'라는 의미에서 ① '어떤 사람을 뒤쫓다, 추적하다', 자신을 어떤 자에게 '소속시키다', ② 비유적으로 주의나 대의를 '열심히 추구하다' 또는 '장려하다', 어떤 것을 '성취하려고 노력하다, 얻으려고 애쓰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디오코는 70인역본에서 약 110회 나오며 여러 히브리어 단어들을 번역하지만 주로 히브리어 라다프(추적하다)를 번역한다. 이 단어는 본래 적군에 의해(출 15:9), 또는 적의를 가진 사람에 의해(창 31:23) 추격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 단어는 목표를 향해 노력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어서 70인역본에서는 관계, 즉 예를 들면 사회정의(신 16:20), 평화(시 34:14),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존경이라는 뜻에서의 정의 등을 추구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박해하다'라는 의미도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디오코는 신약성경에서 4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디오코는 눅 17:23에서 '서두르거나 급히 가다'를 나타낸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

빌 3:12에서도 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것 같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b)  디오코는 가장 보편적으로 종교적 의미, '박해하다, 쫓아내다'를 나타낸다.

① 특히 하나님의 사자들이 박해를 받았다. 마 5:12에 의하면 이미 선지자들이 경험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행 7:52에서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라고 말한다.

②예수님께서 박해를 받으셨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요 5:16).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자는 역시 핍박을 받는다(마 10:23; 마 23:34). 이 관계는 요 15:20에서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한 때 교회의 박해자였던 바울은(고전 15:9; 갈 1:13, 갈 1:23; 빌 3:6) 영광의 주님이 그를 주님의 사자로 만든 후 그 자신이 박해를 겪었다(갈 5:11). 딤후 3:12에서 바울은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은 항상 박해가 관련될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③ 박해는 시험이다. 박해를 피하는 것은 전하는 말씀을 타락시키는 위험을 초래한다(갈6:12). 기독교 신자들은 핍박을 받는 동안 그들의 신앙을 지키는데 특히 도전을 받는다. 그들은 축복의 말로 박해자의 증오를 맞아야 했다(롬 12:14; 마 5:44).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특히 핍박 속에서 그리스도의 도움과 힘과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고후 4:7이하). 바울은 핍박 속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핍박을 감당함으로써 사도의 본보기를 보였다(고전 4:12).

눅 21:12; 갈 5:11; 딤후 3:12에서 박해는 시험(test)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③ 그러므로 박해는 특권이다. 박해를 받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 편에 있다는 표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5:10이하).

(c)  디오코는 고전 헬라어의 마지막 의미 '추구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롬 9:30-롬 9:31에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달리 의를 추구하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친절한 대접(롬 12:13), 상호 간의 평화(롬 14:19; 벧전 3:11; 히 12:14), 거룩함, 사랑(고전 14:1), 선을 행하는 것(살전 5:15), 의(딤전 6:11; 딤후 2:22) 등은 기독교 신자들이 추구하는 것들이다. (참조: J.H.Thayer; A.Oepke; G.E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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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하다.꾸짖다, 비난하다, ojneidivzw(3679, 오네이디조)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오네이디조(Homer 이래)는 오네이도스(o[neido", 3681: 치욕, 불명예)에서 유래했으며, '꾸짖다' uphraid, '욕하다' revil, 어떤 자에 대해 '비난하다', 어떤 것에 대해 '불평을 제기하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오네이디조는 70인역본에서 약 55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하라프(2778: 비난하다, 꾸짖다)의 피엘형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꾸짖다, 비난하다'(삿 8:5; 시 44:17 등), '모욕하다'(삼상 17:10, 25, 36 등)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오네이디조는 신약성경에서 9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마 11:20에서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은 마을에 대해 책망할 권세를 가지고 계심을 나타낸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b)  그러나 막 15:32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욕을 받으셨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찌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c)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예수님을 인하여 욕을 받게 될 것이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마 5:11; 병행구 눅 6:12).

(d)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욕을 받으면 복을 받게 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e)  약 1:5에 보면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꾸짖지 않으시고 주시는 관대한 분이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f)  롬 15:3에서 시69:9을 인용하면서 이기심이 없는 모델로서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g)  마 27:44에서 십자가상의 강도들이 그들과 함께 못박히신 예수님을 욕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h)  막 16:14에서 예수님은 자기의 부활에 대한 증거를 믿지 않는 제자들을 꾸짖었다: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J. Schnei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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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하다 lie, 거짓말로 속이다 deceive by lying. yeuvdomai(5574, 프슈도마이) 

1. 고전 헬라어 문헌 

동사 프슈도 또는 중간태 프슈도마이는 어근 프세드(yed)에서 유래했으며, '거짓말하다, 거짓말로 속이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역본 

동사 프슈도 또는 프슈도마이는 70인 역본 구약성경에서 26 여회 나오며, 주로 '부정하다 deny, 부인하다 disclaim, 남몰래 행동하다 act secretively, 속이다 deceive, 거짓말하다 lie'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카하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프슈도마이는 신약성경에서 12회 고전 헬라어의 용법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신약성경은 프슈도 어군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하나님의 진리에 관한 구약성경의 증언을 다루고 있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딛 1:2)이시다. 하나님의 진리는 헬라 사람들이 알레데이아(ajlhvqeia, 225)라는 말로써 이해하듯이 존재의 정체를 밝힘으로써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께서 역사 안에서 하신 자신의 약속을 신실히 지키시는 것에서 나타나는 진실됨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 계율의 불가변성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맹세로 보증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8).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이 진리의 근원인 까닭에, 바울은 최후의 수단으로 하나님은 자기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아신다고 하는 주장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변호할 수 있었다(고후 11:31; 갈 1:20).

(b)  진리와 거짓이라는 대립 개념은 예수님의 제자와 그의 적(敵)을 구별하는 결정 요소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진리의 말씀에 대한 복종과 불복종에서도 작용한다. 윤리적 문제로서의 거짓말은 언쟁이나 음란과는 같은 차원에 있지 않다. 이러한 것은 지상에 발붙이고 있는 사람의 불완전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따라서 끊임없이 성화되어야 할 성격의 것이다. 그러나 거짓말은 사랑과 같이, 거짓의 권세에 지배되느냐 아니면 사랑의 권세에 지배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인간 조건의 기본적인 한 국면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행 5:3; 행 5:4은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프슈도마이는 두 번 나타나며, "거짓말로 속인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아나니아의 죄는 그가 자기 재산을 일부를 빼돌렸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자기 재산을 자기 뜻대로 처분할 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죄는 사실은 재산의 일부를 자기를 위하여 떼어 놓았으면서도 재산을 모두 교회에 내어 놓았다고 말함으로써 그것을 속이고 하나님께 거짓을 말하였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행 5:4).

요한일서에서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잘못 평가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교인의 신앙고백과 생활의 불일치는 양편 모두를 거짓된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교제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계속해서 어둠 속을 걷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프슈도마이, 곧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요일 1:6). 다음 요일 2:4; 요일 4:20도 참조하라.

이와 같은 경우에 기독교인의 말과 행동은 모두 거짓이 되며, 따라서 그에게서 하나님의 진리를 배제하게 된다. 여기에서도 역시, 요한일서에서 거짓말은 도덕적 범죄일 뿐 아니라 하나님 없는 실존의 표현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골로새서에 나오는 훈계가 거짓을 버리고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할 때에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개별적인 단점으로서의 거짓말이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골 3:9; 참조: 엡 4:25). 이 계명이 기독교인에게 요구되는 이유는, 기독교인은 "옛 사람"(엡 4:22; 골 3:9)을 벗어버렸고 "새 사람"(골 3:lO; 엡 4:24)을 입을 것이며, 따라서 거짓말하기를 그치는 경지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도 거짓말을 특수한 개념으로 이해한다. 요한복음 및 요한일서에서 그러하듯이 요한계시록에서도 거짓말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것이라는 함축적 의미가 들어있다. 그래서 스스로 유대인임을 내세우면서 거짓말을 하는 빌라델비아의 유대인들은 "사단의 회"라고 묘사되었던 것이다(계 3:9). (참조: U.Becker; H.G.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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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하다 be glad, 즐거워 하다 rejoice. caivrw(5463, 카이로)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카이로(Homer이래로)는 '기뻐하다, 즐거워 하다'를 의미하며,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기뻐하는 것을 나타낸다. 현재 명령법은 인사말로 자주 나타난다. 즉 카이레(단수)와 카이레테(복수)는 "안녕하십니까?" "안녕히" Hail!라는 인사말로 사용되었다. 카이레는 무엇보다 신들에게 대한 인사말로 사용되었다. 서신의 서두에서 부정사 형태인 카이레인이 가끔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동사 레게이가 보충되어야 한다(참조: Funk § 480). 즉 "…문안을 [드리다]"([…says] greetings!). 똑같은 관용 어구가 축배를 들 때도 사용되며(즉, "건강을 빌면서!" good health!) 헤어질 때도 사용된다(즉 "안녕히 계십시오[가십시오]!" Farewell!).

2. 70인역본의 용법 

카이로는 70인역본에서 약 80여회 나오며, 주로 '기뻐하다, 기쁘다'를 뜻하는 길, 사마흐, 시스와 '기쁨, 즐거움'을 뜻하는 사메아흐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그러한 의미를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카이로는 신약성경에 74회 나오며, 이 동사와 명사 카라(carav, 5479)는 특히, 그리스도를 통한 종말론적 완성 및 그리스도 안에 존재함과 그리스도 안의 소망을 언급한 곳에 현저히 나타난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선포인 신약성경 메시지 전체가 기쁨의 메시지(→복음 Gospel)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a)  카이로는 인사말로 사용되었다. 부정사 카이레인을 써서 인사한 경우는 행 15:23; 행 23:26; 약 1:1의 편지의 서두에서만 나타난다. 요이 1:10에서 신자들은 이단에 속한 자들에게 카이레인을 하지 말라고 한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여기서 수신자들은 이단 교리를 전하는 자들의 악한 행위에 완전히 연루되지 않도록, 그들을 영접하지도 인사하지도 말라는 경고를 받고 있다.

마 28:9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친숙한 일상적 인사말 카이레테를 사용하여 제자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있다: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마 26:49에서 배반자 유다는 예수님께 인사했다: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안녕과 행복을 소원하는 그 인사의 이면에는 무서운 음모를 감추고 있다.

마 27:29에서는 예수님께 대하여 유대인의 왕(이스라엘)이라고 조롱적 인사를 던지고 있다: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 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들이 이렇게 인사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고 그 말을 하였으나, 주님이 당연히 받으셔야 할 인사였으니만큼, 그 속에는 하나의 반어적(反語的) 의미가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눅 1:28에서 마리아는 카이레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잇따른 메시지에 놀랐다.

(b)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오심과 사역은 기쁨을 가져왔다. 카이로는 잃어 버린 것을 찾았을 때(눅 15:5이하; 마 18:13), 자기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알았을 때(눅 10:20), 구세주의 선구자가 났을 때(눅 1:14), 그의 탄생의 별을 보았을 때(마 2:10),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눅 13:17; 눅 19:6), 기뻐하는 것을 표현한다.

눅 19:37이하(참조: 눅 18:43)에서 예수님께서 입성할 때의 사람들의 분위기는 예수님의 승천 후에 제자들의 분위기처럼 기쁨의 분위기였다: "이미 감람 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마 5:12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핍박을 받을 때도 기뻐해야 한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예수님이 하나의 공격의 대상이 되고, 그를 뒤따르는 자들의 길이 고난과 핍박에 이르게 된다 할지라도, 기쁨에 찬 구원의 확신은 상실되지 않아야 한다(눅 6:23).

눅 22:5에서 유다가 당국자들과 예수님을 넘겨 주기로 합의했을 때 그들이 기뻐했다: "저희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눅 23:8에서 수난의 때에 헤롯이 예수님을 만나보고 기뻐했다: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c)  사도행전에서는 교회의 불가항력적, 전세계적 확장에 대한 기쁨이 반복적으로 표현된다. 먼저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과 핍박을 받음에 대한 사도 Apostle들의 기쁨이 있다(행 5:41; 마 5:11이하). 박해가 복음의 승리적 진행을 정지시킬 수 없다. 이방인을 끌어 모은데 대한 기쁨도 있다(행 11:23; 행 13:48; 행 15:3).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고, 그들이 세례(침례)를 받았을 때, 거기에 해당된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였다(행 8:8, 행 8:39; 행 15:31).

(d)  요한의 기록에서 중요한 것은 충만한 기쁨이다. 요 3;29에서 세례(침례) 요한은, "신랑" 즉 약속된 하늘의 진리의 계시자로 인하여 지금 기쁨이 충만해 있다(참조: 마 9:14이하, 병행구, 막 2:18이하; 눅 5:33이하). 종말론적 시간은 이미 도래하였다. 요 4:35 전후 문맥을 보면 이 때는 계속적인 파종과 수확기가 병존하는 시기이고(요 4:35이하),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역을 이미 성취하고 계신다(요 4:34). 요 8:56에 보면,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아브라함도, 수확이 시작되는 이 때를 보며 즐거워 하는 일에 동참하였다. 여기에서 카이로는 기다리는 기쁨이고 아갈라오마이는 성취된 기쁨이다.

요 16:20이하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죽음을 자기의 제자들이 기뻐해야 한다고 설명하신다. 왜냐하면 죽음은 승리요 발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슬픔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부활이 그 슬픔을 기쁨으로 어떻게 바꾸게 될 것인지를 보여준다. 요 14:27이하에서 기쁨을 평화와 연결시키는 것은 기쁨의 종말론적인 성격을 만들어 낸다.

요 11:15에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때 거기 있지 않은 것을 기뻐하셨다. 그 이유를 설명하신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요이 1:4; 요삼 1:3에서 사도 요한은 믿음의 형제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기뻐했다.

계 11:10에서 카이로는 악한 즐거움을 나타낸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계 19:7에서 성도들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의 때가 되었기 때문에 즐거워 한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e)  바울 서신들은 기독교인의 기쁨은 슬픔과 고통과 근심 가운데서만이 얻을 수 있다는 역설적 의미를 증거하고 있다. 진실로 이와 같은 사실은 이 기쁨의 능력을 확실히 증명해 주는 것이다.

① 이러한 기쁨의 원천은 단순한 지상적, 인간적 기쁨 너머에 있다. 그것은 주 안에 있는 기쁨이며, 따라서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계속하여 기쁨의 존재를 상기시켜 주고, 그 기쁨을 표현하라고 권면하고 있다(빌 3:1; 빌 4:4; 빌 4:10; 롬 12:12; 고후 6:10).

빌 1:15이하; 빌 1:18에서 바울은 동기에 상관하지 않고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기뻐하였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바울은 놀라운 비이기적 자세를 유지했다. 그는 어떤 자들이 그들 자신의 명성을 얻기 위해 전파하고 있는 것을 알았으나 이 전도자들의 동기에 상관없이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것을 기뻐하였다. 믿음과 그것의 결과적 기쁨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오지 않기 때문에, 좋지 못한 동기에 의해 그리스도가 전파된 때 조차도, 바울은 확신과 기쁨을 지닐 수가 있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운 사역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이다(빌 1:15-18).

②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기쁨을 들립시스(고통, 고난, 박해, 환난)와 직접적으로 대조시키고 있다.

바울이 편지를 기록할 때, 들립시스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고후 2:4), 엔 퀴리오, 즉 "주 안에" 있는 기쁨인(빌 3:1) 자기의 기쁨을 모두가 함께 나눠 갖도록 하기 위해(고후 2:3) 썼다고 하였다. 고린도인들의 삶은 수동적 자포자기 상태 또는 사망을 낳는 세상 근심(고후 7:9이하)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결한 믿음의 기쁨에 의해 지배를 받아야 했다. 바울은 그들을 이전에 엄히 책망했었으나, 그의 권면이 결국 유익한 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그들에 대하여 다시 안심하게 되었다(고후 7:13).

③ 바울은 빌립보서를 쓸 때 감옥에 있었다. 당시에는 아직 자기의 재판의 결과를 알 수 없었고, 분명히 외로움을 느끼었을 것이다(빌 2:20이하). 그리고 충성스런 복음 전파도 위기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빌 1:15이하; 빌 2:21). 또 다시 들립시스가 있었으며(골 1:24), 이것이 근심의 원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와 계속적인 기쁨의 근거 역시 있었다. 즉 그것은 빌립보인들이 복음에 참여함으로 인한 감사(빌 1:5)와 그리스도가 계속 전파됨으로 인한 기쁨이었다(빌 1:18). 그리스도와 복음에 의해 속박을 당한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자기와 함께 기뻐하라고(빌 2;17이하), 또 염려를 버리라고(빌 4:6), 나아가서는 성령의 교제 안에서 한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다. 비록 바울에게 근심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이 있고, 그가 곧 죽게 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가 그의 몸에서 존귀하게 되는 한(빌 1:20), 그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

이처럼 빌립보서의 기쁨은 계속적이고 "도전적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쓰는" 기쁨이다(K.Barth).(참조: 빌 2:17; 빌 4:4).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힘은 그 자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지칠 줄 모르는 기도를 통해 생성된다(빌 4:6; 참조: 살전 5:16; 골 1:11). 그것은 복음의 세계적 확산에서(살전 3:9; 골 2:5), 그리고 복음을 전한 교회들의 왕성한 성장에게 그 힘을 얻는다(빌 4:10; 참조: 살전 2: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은 주 안에서의 기쁨이다(빌 4:4).

④ 벧전 4:13에서 카이로는 고난과 영광에 관련되어 나타난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롬 12:15에서 관용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으로부터의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타인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게 해 준다. 다른 한편 고전 7:30; 고후 6:10에서 카이로는 우리에게, 현재의 기쁨과 슬픔은 이 생(生)에만 속할 뿐이며 우리의 궁극적 몫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참조: H.Conzelmann; E.Beyreuther; G.Finkenr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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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워하다, 크게 기뻐하다. 기뻐하다, ajgalliavw(21, 아갈리아오마이) 

1.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아갈리아오마이와 그 명사형 아갈리아시스는 70인역본, 신약성경 및 이들에 의 존하고 있는 유대와 기독교 저술가들의 저서에만 발견된다. 이 단어들은 세속 헬라어 아갈로와 아갈로마이 (호머 이래)에서 비릇된 후기 어형들이다. 아갈로는 `숭배하다, 경외하다, 존경하다, 영광스럽게하다'(Plato,  Aristotle ). 아갈로마이는 어떤 것을 '과시(자랑)하다'(Herodotus), `즐기다, 어떤 것에서 기쁨을 맛보다'(Homer), '황홀해하다, 크게 기뻐하다'(Herodotus)는 의미로 나타난다. 이것은 인간 전체를 사로잡는, 인간의 근본적 기쁨의 감정이다. 그리고 아갈로마이는 제의적, 아마도 황홀한 축제적 기쁨이다(Eur.Ba.157; Tro. 452).

신약성경에는 인간의 기쁨과 행복을 뜻하고 그 특성을 표현하는 세 개의 주요 단어들이 있다. 카이로는 신체적 안락과 안녕이 기쁨의 토대를 이룬다. 그러므로 이 동사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 헤질 때 주고 받는 인사로 사용한다. 이러한 인사는 건강 및 안녕을 바라는 표현이며,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이 자기에게 있어 주기를 바란다. 유프라이노는 기쁨의 주관적 강정을 가리킨다.

아갈리아오마이는 기쁨과 만족의 외적 표현 및 공적 예배에서 맛보는 환희를 가리킨다. 이 단어는 `몹시(크게) 기뻐하다, 기뻐날뛰다'를 의미한다.

2. 70인 역본과 유대교의 용법 

(a)  70인 역본에서 아갈리아오마이와 아갈리아시스는, 길(기뻐하다, 기뻐함) 과 라난(기뻐 소리지르다)의 역어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이 단어들은 과거와 현재에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축하하고 찬양하는 제의적 축제의 기쁨을 가리킨다(예:시32:11). 이 단어들의 의미는 곧 공적 예배의 범주를 넘어 확대되었다. 아갈리아오마이는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며 기뻐하는 공동적, 개인적 태도 둘다 표현하게 되었다(참조: 시9:l4; l6:9; 21:l; 31:7; 35:27; 92:4).

이 기쁨은 과거의 하나님의 구원 체험에 대한 표현이며, 나아가서는 미래에도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대해 주실 것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것이다. 이것을 여호와께서 이미 보증하신 것으로 믿는 것이다(참조: 합3:18).

공적 예배의 기본 행위는 그대로 존속하지만 하니님의 전능한 행위에 대한 말없는 증거들. 즉 하늘과 땅과 산과 섬들과 같은 피조 세계까지도 기쁨에 싸여있으며, 이것들 모두 기쁨에 동참하거나 기뻐하리는 부름을 받고 있다(시l9:5; 89:12; 96:11; 97편 등). 하나님 자신도 이 기쁨에 동참하신다(사65:19). 바벨론 포로 기간과 그 후의 선지자들에 의하여, 비참한 상황에서 조차도 일어니게 되는, 자기 하니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기쁨은, 궁극적 구원에 대한 예견적 감사와 메시야에 대한 기쁨을 포함하는데까지 확대되었다(사61장). 히브리인들의 감사와 찬양의 태

도가 가장 심원한 표현에까지 도달한 것은 바로 이러한 종말론적 영항에서 였다. 마침내 아갈리아오마이는 종말론적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제의적 축제의 전형이 되는 마지막 때의 기쁨을 의미한다(참조:시96:11이하; 97:8; 126:2,5; 사25:9).

(b)  과거와 현재와 종말론적 미매에 있어서의 하니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지극히 큰 기쁨은 그후에도 계속 이어져 내려와 랍비 신학과 랍비들의 유대주의 신앙의 특색을 이루게 되었다(SB Ⅳ 2, 85 이하). 유대인의 전(全) 삶의 목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다. 기쁨은 이처럼 `하늘의 어떤 함창단의 선을과도 같은 유대 백성의 극적인 역사'를 수반하였으며, 예배식에서 그들의 신앙 생활의 주된 요소가 되었다`(E. Stauffer, Jerusalem  und Rom, 1957. l02).

(c)  랍비 유대교와는 대조적으로, 쿰란 공동체에서는 구원의 날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찬송과 기도를 통해(특히 감사 두루마리[1QH]와 공동체 규정[1QS]의 끝 부분[10:1l]에서) 자비로써 그들에게 구원을 주시고 비밀들(Secrets )에 대한 통찰력을 부여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였다.

3. 신약성경과 초대 교회의 용법 

신약성경에서 아갈리아오마이는 11회 사용되었다. 이 단어들은 신약성경에서도 70인 역본의 용법과 같이 사용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있다. 즉 구약성경에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계속하여 도와 주셨고 또 지금도 여전히 돕고 계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확고한 신뢰로부터 지극한 기쁨이 일어난다. 메시야 도래시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지막 구원 행위로써 모든 궁핍과 고통을 제거하실 것이다.

반면 신약성경에서는 이 기쁨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 구원 시대를 지금 이미 열으시고,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이 구원을 영광스럽게 완성하실 하나님께로 향해 있다. 하나님의 구원은 항상 알리아-( )의 주제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행위는 기쁨의 주제이다.

(a)  복음서에는 예수의 탄생 전에도 기쁨에 관한 기사가 있다. 주의 선구자가 태어났을 때 사가랴는 기뻐 노래하였으며(누가1:14), 엘리사벳의 태 속에 있는 아이조차도 기쁨에 동참하였다(누가1:44). 예수께서는 세례(침례) 요한의 빛 가운데서 잠시 즐거워하였던 경건한 이스라엘인들에 대해 언급하셨다(요한5:35). 찬양의 노래에서 마리아는 자기가 하니님의 구원 목표에서의 한 위치를 부여받았다는 사실로 기뻐하였다(누가1:47).

(b)  예수께서는 구원을 친히 가져오신 분으로서, 인간들에게 기뻐하라고 요청하셨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이 기쁨에 동참하셨다. 팔복은 다음과 같은 권고로 끝을 맺는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태5:l2; 참조: 누가6:23) 구원의 때가 가까왔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영적으로 기뻐하셨다(누가10:21).

그러나 동시에 이 구원이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나고, 구원에는 심판도 포함되기 때문에 지혜있는 자들에게는 숨겨졌다(누가 10:21; 참조: 마태11:25). 아브라함(온전하게된 의인들 중의 한 사람, 히브리(12:23)도 구원의 때를 보고 기뻐하였다. 초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사역으로 인한 마지막 날의 택함받은 자로 자신들을 간주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장래의 재림을 기쁨의 근원으로 삼았으며, 또한 다윗의 기쁨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였다 (행전2:26; 베드로가 시편16:10을 인용한 부분).

(c)  빌립보의 간수도 온 가족과 더불어 기뻐하였다(에칼리아사토). 그도 역시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고, 믿음과 세례(침례)를 통하여 마지막 날의 구원받은 공동체에 소속되었기 때문이다(행전16:34).

(d)  떡을 나누는, 종교 의식시의 식사에서 초대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보면서 기쁨으로 찬미하였다. 그들은 기쁨으로 찬미하였다. 그들은 기쁨으로(엔 아갈리아세) 성찬 예식을 거행하였다(행전2:46; 참조: J.Jeremiasa the Eucharistric  Words of Jeeus, 1966, 254).

(e)  베드로전서에서는 마지막 날의 고난에 개의치 말라고 교회에 권고하고 있다. 왜냐히면, 세상 끝날에 나타날 기쁨과 견주어 볼 때, 고난은 증요하지 않기 때문이다.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날 때 우리는 기뻐할 것이다(벧전1:6,8; 4:13).

(f)  요한계시록에서 세상 끝날에 다음과 같이 외치는 한 음성이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라고 신자들을 권고하고 있다(계시록19:7).

바울 서신에는 이 단어가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때때로 카우카스다이(자랑하다)를 그 대신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g)  과거를 포함하며 또한 미래를 가리키는 축제적인 기쁨(festive  joy)는 이처 럼 신약 교회와 교회에 소속된 기독교인 개개인의 독특한 자세가 되었다. 마치 종말의 잔치(eschatological banquet,; 참조: 계시록19:7-9) 때와도 같이, 교회의 공적 예배는 기쁨으로 층만해 있었다. 기쁨은 과거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구원을 통해 경험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현재에 겅험하며 미래에도 경험하 리라 확신한다. 이와같이 바라볼 때 현재의 고난도 감소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러한 고통이 우리를 무겁게 안박할 때조차도 우리에게는 역설적으로 기뻐할 수 있는 훌륭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쁨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인격에 근거를 두고 있다. 부활하시고 지금 현재 살아 계시며 장자 오실 주님이야말로  바로 우리의 모든 기쁨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신약의 이러한 아가리아는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대한 종말론적 기쁨을 표현한다.(E.Beyreuther; Bult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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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대가, 품삯, 임금, 보상 misqov"(3408, 미스도스) 

1.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미스도스(Homer 이래)는

(a)  '일에 대한 보수',

(b)  '사례금'이나 '요금'(예술가, 과학자, 신학자, 시인, 연극자, 의사에게 지불하는 것),

(c)  '봉금'(군인들),

(d)  '임대료'(토지나 집세),

(e)  '사례금'(사제들),

(f)  '비용, 경비',

(g)  '신랑의 지불금',

(h)  하나님이나 사람이 주는 '상',

(i)  '형벌'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미스도스는 70인역본에서 약 7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샤칼의 어군을 번역했고, '급료, 임금, 보수, 보상, 선물'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미스도스는 신약성경에서 29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미스도스는 '일의 보수'라는 문자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눅 10:7: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딤전 5: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마 20: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약 5:4에서 인격화 된 품삯을 언급한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행 1: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벧후 2:15: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벧후 2:13: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유 1:11: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b)  미스도스는 '보답, 보상, 상'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수고와 노력으로부터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열매에 대해 사용되었다(요 4:36; 고전 9:18).

미스도스는 하나님의 보상에 대해 사용되었다.

① 계 22:12에서 보상과 형벌, 양자 모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② 선한 행위와 노력에 대해 하나님이 수여하시거나 하실 보상에 대해, 마 5:12; 마 6:2; 마 6:5; 마 6:16; 마 10:41이하; 막 9:41; 눅 6:23; 눅 6:35; 고전 3:8; 고전 3:14; 요이 1:8; 계 11:18; 마 5:46; 고전 9:17; 마 6:1.

(c)  미스도스는 '형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벧후 2:13).(참조: Walter Bauer; J.H.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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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예언자 prophet, 선포자 proclaimer. profhvth"(4396, 프로페테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프로페테스(Pind., Hdt. 이래)는 항상 종교적인 뜻을 함축하고 있는 어간 페(말하다, 선포하다)와 시간의 부사로서 '앞에, 미리, 사전에, 앞당겨'를 뜻하는 접두어 '프로'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이것은 예언하는 사람, 미리 말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 헬라 사상에서 예언자는 요약하면 신탁에 의하여 고용된 사람이며, 직접적인 영감으로 또는 소리나 징조를 해석함으로, 조언을 구하는 자에게 신들의 뜻을 선포하는 자이다.

신탁 예언자들의 실례로 텔피 신전의 프로페테스 집단이 있다. 델피의 무녀(Pythia)는 땅 위에 나 있는 구멍 위 삼각 제단 위에 앉아 있었다. 이곳으로부터 연기의 형태를 띤 "신탁의 영(프뉴마 만티콘)이 올라오며 그녀에게 영감을 준다. 이것은 월계수 잎(아폴로의 나무)을 씹음으로서 더욱 고조된다. 예언적 광란 상태로 흥분되고 다음에 신이 그를 통해 말하는 프로페테스(여자 예언자)가 된다. 그래서 그녀는 글롯솔랄리아와 유사한 수수께끼 같은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터뜨리게 된다.

프로페테스는 난해하게 언급된 말들의 해석자로서 역할을 담당한다. 프로페테스는 델피의 무녀가 그러했던 것처럼 흥분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판별력을 행사한다. 델피의 무녀는 아마 암호들로 말할 것이지만 프로페테스는 이 암호들의 형태를 제시하고, 조언을 구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전달한다. 신탁의 신 아폴로는 제우스의 참된 만티스(선견자)이며, 대변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디오스 프로페테스라고 부른다. 시인들, 애굽의 상류 계급의 사람들, '질문을 유도하는 자들, 철학을 가르치는 자들, 과학의 전문가들' 등이 프로페테스라는 명칭을 지니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프로페테스는 70인역본에서 약 300회 이상 나오며 거의 대부분 히브리어 나비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히브리어 나비는 '대변인, 말하는 자, 선지자(예언자)'를 뜻한다.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의 기능에 대하여 학자들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받은 계시들을 말하는 것(무아경 상태에서),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다음 그것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강조점은 나비를 통한 하나님과의 의사 소통의 받아들임이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프로페테스는 신약성경에 약 144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신약성경에서의 프로페테스의 의미.

신약성경은 선지자를 신적으로 영감을 받은 메시지의 성경적 선포자로 이해한다. 벧후 2:16에서 발람을 선지자로 언급하며(참조: 민 22:18; 민 24:1), 단 한번 이방인 그레데의 시인 에피메니데스는 신적인 것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미래의 사건들을 예언할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된 선지자로 불리운 것이다(딛 1:12). 성경의 선지자는 성령이 그에게 전달한 계시 때문에 미래에 대한 특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성경적 선지자는 미래를 예언할 수 있고(행 11:28), 사람의 과거를 알 수 있으며(요 4:19), 그가 만나는 자들의 마음을 통찰할 수 있다(눅 7:39). 이러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술사나 점장이가 아니다.

선지자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자이다. 구약 선지자들의 메시지가 책들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프로페테스는 선지자들의 기록을 의미하기도 한다(눅 24:27; 눅 24:44; 행 8:28; 행 12:15; 행 24:14; 행 28:23; 행 7:42; 요 6:45; 행 13:40). 혹은 그들의 책에 진술된 가르침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마 5:17; 마 7:12; 마 22:40; 눅 16:29; 눅 16:31; 행 26:27).

(b)  구약성경의 선지자들.

① 구약 선지자들이 신약성경에 언급되어 있다. 이사야(마 3:3; 마 4:14; 마 8:17; 마 12:17; 마 13:14; 마 15:7; 막 1:2; 막 7:6; 눅 3:4; 눅 4:17; 요 1:23; 요 12:38; 행 8:28, 행 8:30; 행 28:25), 또한 사무엘(행 13:20), 다윗(행 2:30), 에녹(유 14절), 엘리사(눅 4:27), 예레미야(마 2:17), 다니엘(마 24:15), 요엘(행 2:16), 요나(마 12:39), 호세아(마 2:15), 아모스(행 7:42; 행 15:15), 미가(마 2:5), 하박국(행 13:40), 스가랴(마 21:4)에 관한 구절들 및 벧후 2:16의 발람 등이다.

② 구약 선지자들은 구약성경에서처럼("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입'으로 묘사되었다(행 3:18; 행 3:21; 렘 15:19). 마태는 이 공식 문구로 이를 표현한다: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마 1:22; 마 2:15). 하나님이 마 2:17; 마 2:23 등에서도 수동적인 구문 뒤에 계신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자이시며, 선지자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다(롬 1:1이하). 혹자는 베드로전서에서 하나님과 하나인 선재하시는 주님을 가리키기 위해, 선지자들 안에서 활동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언급한 벧전 1:11을 지적한다(참조: A.T.Hanson).

히 1:1에 의하면 하나님은 엔 토이스 프로페타이스("선지자들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다. 여기서는 방편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베(be)에서 유추하여 엔(en)이 사용되었으며, 선지자가 하나님의 하나의 방편으로서, 공개적 선포자로 묘사되어 있다.

벧후 1:21에서 선지자들은 성령의 도구들이다. 벧전 1:11에서 선재하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마 13:35은 아마 동일한 결과에 관한 것이며, 또한 요 12:38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이미 사 53:1의 유대인들의 불신에 대하여 불만을 표현하셨다.

③ 구약 선지자들은 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을 앞서 선포한 자들이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2).

모든 예언은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요 1:45; 행 3:24), 그가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을 성취하신다(고후 1:20).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출생(마 1:23), 애굽에서의 귀환(마 2:15), 침례 요한의 사역(막 1:2), 부활의 이면(눅 18:3이하), 오순절(행 2:16), 재림(벧후 3:2), 심판(유 14 - 유 15절) 및 새로운 질서(행 3:21)를 예언한다. 이스라엘에 의한 배척도 역시 예언된다(막 7:6). 수난과 부활이 그들의 메시지의 핵심이다(마 26:56; 눅 24:44이하). 단지 하나님 혹은 성령만이 예언적 약속을 사도적 복음이 되게 하는(롬 1:1-롬 1:2) 예언의 참된 이해를 제공한다. 바울은 모세와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만을 말한다(행 26:22-행 26:23). 예언적 말씀들은 그들 자신들의 시대와 관련된 것이지만(참조: 마 2:15; 호 11:1; 호 2:17-호 2:18과 렘 31:15; 막 7:6과 사 29:13), 신약은 성취의 조명을 받아 그 묘사에서 예언을 바라본다.

④ 구약 선지자들은 신약을 위하여 미래 사건들을 예언하는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의 기록자들에 의하면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의 진리를 지지하는 권위자들이다(참조: 막 11:17; 요 6:45). 선지자들의 말은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자들이었고(행 7:42), 하나님이 성전에 거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증거한다(행 7:48).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용서를 선포한다(행 10:43). 그들은 이방인들의 교회 영입을 정당화 시킨다(행 15:15). 안디옥에서 바울은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유대인들에게 경고했다(행 13:40).

⑤ 신약성경은 종종 선지자들이 박해와 처형 당함에 대해 언급한다(마 23:31; 마 23:37의 격언, 병행구, 눅 13:34). 행 7:52에는 선지자들의 살해를 통하여 예수님의 죽음에까지 윤곽을 그려놓았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순교가 선지자의 개념에 절대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마 23:35). 예수님은 배척받은 선지자들의 선에 서 있는 자로서 자기 자신을 내 놓으셨다. 이들에 대한 배척은 바로 악의 최고조를 기록한 것이었으며,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이끌어 들인 것이다. 예수님은 또한 의를 위하여 죽임을 당한 자를 중에서 정점에 이른 인물이었다(마 23:35; 눅 11:51). 아벨(창 4장)이 그 첫 번째 인물이었다.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는 구약성경 정경의 마지막 책 끝 가까이에 나온다(대하 24:20이하). 이 스가랴는 베레갸의 아들인 스가랴와 동일 인물일 수도 있다(슥 1:1). 제자들은 이 점에서 선지자들의 후예들이다(마 5:12; 참조: 약 5:10).

(c)  세례(침례) 요한.

요한은 신약성경에서 줄곧 선지자라 불리운다(막 11:32; 마 11:9; 눅 1:76; 요 1:25). 이것은 그가 심판과 회개에 관한 보다 과격한 예언적 설교를 주도하여 나갔다는 사실에 의하여 정당화된다(암 9:7이하; 미 3:12; 렘 7:3이하; 렘 26:1이하). 그의 설교는 도덕적인 개선과 유태인들의 종교적인 자만을 겨냥하여 행해졌다. 그의 세례(침례)는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 개종자의 세례(침례)도, 혹은 쿰란 공동체에서 행하여지던 세례(침례)도 아니었으며, 개심의 증거이며 구원의 인(印)이라 할, 종말론적인 회개의 성례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요한이, 구원의 시대를 가지고 올 것으로 기대되었던 종말론적인 선지자로 여겨졌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이러한(그릇된) 견해를 막으면서, 그를 종말론적인 선구자(참조: 마 3:1이하; 마 11:11이하; 마 14:2이하; 마 16:14; 마 17:13; 막 6:25; 막 8:28; 눅 7:20; 눅 7:33; 눅 9:19), 혹은 예수님의 "증인"(요 1:6이하)으로 묘사된다. 그는 자신의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의 세례에서 기독교의 세례를 지적한다(O.Cullmann; J.Jeremias; C.H.H.Scobie; W.Wink). 예수님은 요한이 선지자 이상의 사람이라고 말씀하신다(마 11:9).

(d)  예수 그리스도.

신약성경에서는 이따금씩 예수님을 선지자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부르는 것은 백성이거나(막 6:15; 마 21:11등), 혹은 사마리아 여인(요 4:19)과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요 9:17)과 같은 개인들이다. 제자들은 예수 안에서 선지자의 모습을 본다(눅 24:19; 행 3:22).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자기 자신을 직접적으로 선지자로 묘사하지 않았다. 자신을 지명한 것이라 할 눅 13:33은 그리 큰 비중을 차지 할만 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아마 속담을 인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선지자들보다 더욱 위대하다(마 12:41). 왜냐하면 그는 구원을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져왔기 때문이다(벧전 1:10이하; 눅 10:24). 그리스도는 신 18:15의 의미에서의 그 선지자로서 소개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참조: 행 3:22이하; 행 7:37이하; 마 2:1 - 마 2:23; 마 4:1 - 마 4:11; 마 5:1이하; 요 6:14; 요 7:40).

(e)  사도 시대에 그리스도인들 중에 나타난 선지자들, 마 10:41; 마 23:34; 행 15:32; 고전 14:29; 고전 14:37; 계 22:6; 계 22:9.

그들이 사도들과 결합되어 나타난다, 눅 11:49; 고전 12:28, 고전 12:29; 엡 2:20; 엡 3:4; 엡 4:11; 계 18:20.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위한 최선의 것을 분별하고 행하였다. 행 13:1 이하.

그들은 어떤 미래의 사건을 예언하였다, 행 11:27이하; 행 21:10 이하.

예언하는 자의 영은 예언자에게 속하여 있기 때문에 성령의 자극이 그들의 자아통제를 손상시키지 않는다. 고전 14:32.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에서 성령에 갑자기 붙잡혀서 성령이 그들에게 가르치는 것들과 청중들을 가르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책망하고 죄를 깨닫게 하고 고무시키는 힘을 가진 그러한 것들을, 황홀 상태에서도 지성적인 언어로 발설한다, 고전 14:3; 고전 14:24.

(참조: Walter Bauer; J.H Thayer; C.Brown; G.Friedr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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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의 마음  : 특히 (회심하여) 거듭난 자의 마음[말씀과 HS따라 사는, 성령과 연합한 하나된 영으로서, 말씀안에서 말씀과 생명의 성령으로부터 부활생명을 공급받아 사는, 회복된 영의 새자아 = 영적 자아...living soul, living being] = 속사람 = 마음에 숨은 사람---
[벧전3:4]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 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4 But let it be the hidden man of the heart, in that which is not corruptible, even the ornament of a meek and quiet spirit, which is in the sight of God of great price.
[엡3:16]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16 that He would grant you, according to the riches of His glory,  to be strengthened with power through His Spirit in the inner man,)
-----구약의 마음----------
[[ bb;le(3824, 레바브) 내부인간, 마음, 정신, 의지]]
레바브는 신 30:14에서와 같이 겉 사람과 대조되는 속 사람에 대하여 사용될 수도 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으리라"(신 30:14, 참조: 욜 2:13),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레바브는 종종 강조를 위해 '영혼' soul과 함께 사용되기도 한다: "또 마음을 다하고 '영혼' soul(한글개역 -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대하 15:12,참ㅁ조: 대하 15:15).
레바브(명남)는 레브(ble , 3820)와 동일하며, '내부 인간, 마음, 정신, 이해력, 의지'를 의미한다. → 3820 레브를 보라. 
[[마음, 정신, 의지  내부 인간,  ble(3820, 레브) = 레바브]]
레브(명남)는 레바브(bb;le , 3824)의 한 형태이며, '내부인간, 마음 heart, 정신 mind, 이해력 understanding, 의지 will'를 의미한다.
레브의 실제적인 의미는 내부기관과 유사 신체기관(가슴--심장)을 말하지만, 추상적인 의미에서 "마음"은 인간내부의 총체 혹은 영적인 본질에 대한 가장 풍부한 성경 용어가 되고 있다. 
성경 문학에서 이 단어는 성경에서 실제로 인간의 모든 영적 기능이 "마음"에서 기인되기 때문에 기능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용어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영적인 인격 기능에 대한 가장 빈번한 용례이다. 본 항목에서 3820레브와 3824레바브를 다룬다.
구약성경에서 레브는 약 600회, 레바브는 약 250회 나온다. 율법서, 예언서, 시편은 종종 '마음'에 대해 언급한다. 
이 단어의 어근은 아카드어, 앗시리아어, 이집트어, 우가릿어, 아람어, 아랍어, 후기 성경 히브리어에도 나온다. 상응하는 아람어 명사는 다니엘서에 7회 나온다.
'마음' heart은 창 6:5의 사람에 관한 언급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창 6:6에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레브( )가 사용되었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레브는 몸의 기관을 가리키기도 한다: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 판결 흉패를 '가슴' heart에 붙여..."(출 28:29), "요압이...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압살롬의 '심장' heart을 찌르니..."(삼하 18:14), "내 '심장' heart이 뛰고..."(시 38:10).
레브는 어떤 것의 내부나 한가운데를 가리키기도 한다: "...큰 물이 바다 '가운데' in the heart 엉기니이다"(출 15:8), "...그 산에 불이 붙어 화염이 충천하고..."(신 4:11, KJV는 '하늘 한가운데' in the midest of heaven, RSV는 to the heart of heaven),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잠 23:34).
레바브는 신 30:14에서와 같이 겉 사람과 대조되는 속 사람에 대하여 사용될 수도 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으리라"(신 30:14, 참조: 욜 2:13),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레바브는 종종 강조를 위해 '영혼' soul과 함께 [온마음의 용도로]사용되기도 한다: "또 마음을 다하고 '영혼' soul(한글개역 -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대하 15:12, 참ㅁ조: 대하 15:15).
네페쉬(영혼, 생명, 자아)는 KJV에서 15회, '마음'으로 번역된다. 모든 경우에 이 단어는 '속사람'을 나타낸다: "대저 그 마음(네페쉬)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 23:7).
레브는 그 사람 자체 혹은 그 사람의 인격에 대해 사용되기도 한다: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기를..."(창 17:17),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라"(전 1:16).
레브는 또한 이런 의미로 하나님의 인격적, 관계적 마음에 대해서 사용된다: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렘 3:15).
욕망이나 뜻, 성벽(성품-인격), 의지의 자리를 '마음'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출 7:14), "무릇 마음에 원하는 자는 그것을 가져다가..."(출 35:5, 참조: 출 35:21, 출 35:29),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시 86:12).
레브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 의미로 사용된다: "정녕히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렘 32:4).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어울릴 때 그들은 동의한다고 한다: "내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과 같이 네 마음도 그러하냐"(왕하 10:15). 대하 24:4의 "요아스가 여호와의 전을 중수할 뜻을 두고..."에서 '뜻을 두고'는 히브리어로 '마음에 품다'라는 뜻이다.
'마음'은 감정의 자리로 생각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출 4:14, 참조: 삼상 2:1). 그래서 즐거운 마음(삿 16:25), 겁내는 마음(사 35:4), 떨리는 마음(삼상 4:13)들이 있다.
'마음'은 지식과 지혜의 자리로 간주되며 '정신, 지성'의 동의어로 생각되기도 한다. '마음'이 '알다'라는 동사와 함께 나올 때 종종 이런 의미를 나타낸다: "너는...마음에 생각하고..."(신 8:5, NASB는 '너는...마음으로 알고'), "그러나 깨닫는(아는) 마음과...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신 29:4, KJV, RSV, 'mind').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참조: 왕상 4:29). 기억은 마음의 활동이다: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욥 22:22).
'마음'은 양심과 도덕적 특성의 자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와 우리 주위의 세상의 계시에 어떻게 응답하는가? 욥이 대답한다: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욥 27:6). 이에 반하여, "다윗이...그 마음에 자책하고"(삼하 24:10). 마음은 인간 행위의 근원이다: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창 20:5, 참조: 창 20:6). 다윗은 '정직한 마음'으로 행하였고 히스기야는 '전심'으로 행했다.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한"(시 24:4)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레브는 반항과 교만의 자리를 나타내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 8:21)고 말씀하셨다. 두로왕도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다: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도다..."(겔 28:2). 그들은 모두 "죄가 마음 판에 새겨진"(렘 17:1) 유다와 같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지배하신다. 인간의 자연 그대로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놓여 있다: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그러므로 죄인들은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시 51:10),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시 86:11). 또한 다윗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대상 29:17)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승인을 구한다: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시 62:2).
'마음'은 인간의 내적인 존재, 곧 그 자신을 대표한다. 마음은 그 자체로서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다(잠 4:4). 사람의 모든 생각, 욕망, 말, 행동들은 그의 내부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렘 17:9). 사람이 자기 자신의 방식대로 행하기를 계속할 때, 그의 '마음'은 점점 더 완고해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여(마음의 부정함을 제거시켜) 그들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도록 하실 것이다(신 30:6). (참조: NEDOT;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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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0 : 39]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 9 But we are not of them who draw back unto perdition; but of them that believe to the saving of the soul.)
----[신약의 영혼 개념]-------
영혼, 목숨, 생명. yuchv(5590, 프쉬케) 
명사 프쉬케(Homer 이래)는 프쉬코(yuvcw, 5594: 숨쉬다, 바람 불다)에서 유래했으며, 70인역본에서 매우 많이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네페쉬, 때로는 레브와 레바브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영혼, 목숨, 생명'을 의미하며, 다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a)  지상의 외적, 육체적, '생명',
①'목숨, 생명력, 영혼(soul)', 계 8:7; 눅 12:20; 행 2:20; 계 6:9; 계 20:4.
② '지상의 목숨, 생명', 마 2:20; 롬 11:3; 마 20:28; 막 10:45; 요 10:11; 요 10:15; 요 10:17; 요일 1:3; 빌 2:30; 계 12:11; 행 20:24; 행 27:10; 롬 16:4 등.
(b)  지상의 인간의 내적 생명의 좌소와 중심으로서 '영혼, 혼'.
① 사치스런 생활의 '욕구', 눅 12:19; 계 18:14.
② 감정과 정서, 마 26:38; 막 14:44; 요 12:27; 눅 1:46; 눅 2:35; 요 10:24; 행 14:2; 행 14:22; 롬 2:9; 살전 2:8; 히 12:30; 벧후 2:8 등.
(c)  지상 생활을 초월하는 생명의 좌소와 중심인 '영, 영혼',
① '하나님에 의해 제공되는 도움들을 올바로 사용함으로 자기의 가장 높은 목표에 도달하여 영원한 지복을 획득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 그러한 한도 내에서의, (인간) 영혼',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계획된 도덕적 존재로서 간주되는 영혼': 요삼 1:2;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히 13:17;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 벧전 2:11; "영혼의 감독되신", 벧전 2:25; 약 1:21;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약 5:20; "영혼의 구원", 벧전 1:9; 벧전 1:22; 벧전 4:19.
② '육체와는 다르며 죽음에 의해서도 해체되지 않는 본질로서의 영혼': 마 10:28; 육체로부터 해방된 영혼, 육체에서 이탈된 영혼, 행 2:31; 계 6:9; 계 20:4.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구약에서의 영혼 개념]-------
숨쉬는 존재, 영혼, 숨쉬는 존재, 생명 등  vp,n<(5315, 네페쉬) 
네페쉬(명여)는 '숨쉬다, 원기를 회복하다'를 뜻하는 동사 나파쉬(vp'n: , 5314)에서 유래한 명사이며, '숨쉬는 것이나 호흡하는 존재(피조물), 영혼, 생명' 등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750회 나온다.
(a)  네페쉬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간에 육체를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어떤 경우에서(창 36:6) 소마(몸 body)로 번역되어질 수 있다. 
네페쉬가 프쉬케로 번역되어 지면 프쉬케는 '넓은 의미에 있어서 인간의 생명적인 것을 의미하며'(G.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1, 1962, 153), 다른 말로는 살아 있는 것을 뜻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살아 있는 혼'이라는 말을 읽게 된다(창 1:20, RSV, living creatures). 죽어가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밖으로 불어내거나(AV 'gives up the ghost' 영혼을 포기한다. 참조: 렘 15:9), 혹은 영혼을 쏟아 붓는다(애 2:12). 
영혼은 죽는 자에게서 떠난다(창 35:18). 그러나 영혼(즉 생명)은 육체로 되돌아 올 수 있다(왕상 17:21). '영혼은 영혼으로'라는 것은 '생명은 생명으로'라는 것을 의미한다(출 21:23). 생명의 좌소로서의 피(Blood)는 실질적으로 '네페쉬'나 프쉬케와 동일할 수 있다(창 9:4 이하, 레 17:11, 레 17:14, 신 12:23). (G. Harder).
(b)  "생물"(네페쉬 하이야)는 창 1:20에서 물에 사는 생명체 피조물에 대해 창 1:24에서는 땅에 사는 동물에 대해, 창 2:7에서는 사람(개역: "생령")에 대해, 창 9:10에서는 새들과 땅에 사는 동물에 대해, 창 9:16에서는 사람과 동물에 사용되었다. 
동일한 용어가 '모든 생물', 그리고 '사람'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런 경우에 네페쉬 하이야라는 용어는 생명을 가지고 호흡하는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일 용어 '네페쉬 하이야'가 모든 생물에 사용되었다고 해서 모든 생물이 우리 인간과 같은 혼이나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분명히 네페쉬의 기능과 능력에 있어서 곤충과 물고기의 네페쉬와 소, 말 등의 네페쉬와 사람의 네페쉬가 다른 것이다. 기계의 가치와 능력에 따라 장착되는 동력이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있다.
특히 인간적 존재는 본래부터 충동, 욕구, 소망, 의지를 포함하기 때문에 네페쉬는 그런 의미들로도 사용되었으며, 한 개인의 생명을 의미한다. 소생시키고 회복시키는 대상으로서 네페쉬는 영혼(soul)이라는 개념과 생명 life이라는 개념을 모두 포함한다(R. V. Harris의 구약원어사전).
동물의 네페쉬와 사람의 네페쉬가 다른 것은 우선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대한 기사가 밝혀준다. 사람은 창조될 때 동물들과는 달리 생명의 숨(니셰마트 하임, 생명의 숨)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다. 그래서 '네페쉬 하이야'가 된 것이다. 이는 사람의 네페쉬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과 창조 의지에 의해 창조된 동물의 네페쉬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의 네페쉬와 동물의 네페쉬의 차이를 밝혀주는 또 하나의 성구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전 3:19-21을 보면 "19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것이 헛됨이로다 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 누가 알랴"
전 3:19에서 단지 한 사건, 즉 죽음이 사람과 짐승에게 똑 같이 찾아온다는 것, 전 3:20에서 '단 한 곳으로 간다는 것은 일종의 무덤을 가리킨다.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인간이건 짐승이건 간에 예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전 3:21에서 사람의 네페쉬와 동물의 네페쉬가 돌아가는 곳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전도서에서는 루아흐[영]가 사용되었지만 문맥상 네페쉬[혼]를 의미한다). 
일부 학자들이 전 3:21을 회의적으로 해석하지만 매우 분명하고 명확한 어투로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간다'고 말한다. 이 사실을 누가 알겠는가? 오직 하나님 선만이 아신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자는 이 사실을 안다. 그러면 솔로몬도 알고 있었다.
(c)  네페쉬는 자아 생명의 민감한 부분으로서 감정, 사랑(Cant. 1:7), 갈망(시 63:1), 기쁨(시 86:4)의 좌소를 의미한다. 이것은 어떤 것을 더 숙고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영혼'은 그 생명의 운동과 감정의 여러가지 표현을 나타낸다. 영혼은 인간의 내적 능력을 결합한 요소이다. 따라서 "너의 영혼을 다하여"라는 말이 성립된다(신 13:3). 
영혼의 내부에서 음식에 대한 욕망(신 12:20, 신 12:21), 육체의 욕망(렘 2:24), 살인과 복수에 대한 갈망(시 27:12)이 거주하고 있다. 
영혼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즉 그것은 울고(시 119:28), 눈물을 흘리며(욥 30:16), "오래" 참는다(욥 6:11). 
그러나 지식과 이해(시 139:14), 생각(삼상 20:4)과 기억(애 3:20)도 마찬가지로 영혼에 자리잡고 있다. 
"영혼"은 전 인격 곧 인간의 전 자아의 총체로서 "영혼"은 의미상 "나 자신" 또는 "네 자신"과 동일시 될 수 있을 정도이다(삼상 18:1). 창 2:7에서 네페쉬는 '사람' person, 혹은 '존재' being를 의미한다.
살아있는 피조물 역시 혼(soul)으로 묘사되어 질 수 있다. 
집합적 의미에서의 살아있는 모든 것, 곧 모든 생물들(레 11:10). 율법에서 영혼(soul)이라는 말은 특별한 법규와 관련된 당사자를 의미한다(레 4:2, 레 5:1, 레 5:2, 레 5:4, 레 5:15). 
사람들을 계수할 때 영혼들(souls)이라고 계수한다(출 1:5, 신 10:22). 
구약성경이 죽은 사람을 가리켜 그 사람의 영혼이라 말하며 따라서 이러한 표현으로써 죽은 시체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영혼이 몸과는 별개라는 개념 또는 죽을 때 영혼이 몸에서 분리된다는 개념에 구약성경이 전혀 친숙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해 주고 있다(민 6:6). (G. Ha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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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8 평등법 반대·철회 위해 1000만 성도 깨어나야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총회장 소강석 목사)가 평등법은 동성애나 주체사상을 비판하거나, 또는 다른 종교에 구원이 없다고 외치면 차별로 여겨 고소가 가능하다면서 이를 위해 평등법 반대·철회를 위한 기도회를 개최했다고 기독일보가 전했다.
전주 양정교회에서 26일 열린 ‘평등법 반대·철회를 위한 총회 대책회의 및 기도회’에는 서헌제 교수(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조영길 변호사(법무법인 아이엔에스)가 발제자로 나서 평등법의 위험성을 알리고 평등법과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지 못하도록 1000만 성도가 깨어나 기도를 멈추지 말자고 제언했다.
==서헌제 교수, 차별금지법 반헌법적 요소… 동성애, 김일성 주체사상 비판하면 제재 가능
먼저 서헌제 교수는 “현재 국회에서 여당은 상임위원장 배분을 놓고 야당과 합의하자는 대신, 여당이 제시한 입법을 완료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 가운데 이상민 의원이 발의한 평등법안이 기습 통과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어 “평등법 찬성론자들은 소수자를 다수의 차별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며 법 제정을 강조한다. 기독교는 이런 기치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주님께서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며 당신께서 직접 실천하셨고 우리 기독교인들도 본받아 복지시설을 설립해 사회의 소수자를 품어왔다. 기독교가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이유는 반헌법적 요소 때문”이라며 “동성애뿐만 아니라 종교, 사상, 소수자 등에 대한 차별금지 조항이 우려된다. 대한민국 정체성을 부인하는 김일성 주체사상, 이단 사이비 등을 비판하면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라며 평등법의 제재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평등법, 다른 종교 구원 없다는 기독교 차별로 여겨… 최대 억 단위까지 배상금 물수 있어
서 교수는 “기독교는 길이신 예수님만을 통해서 구원받는다고 설교하고 가르친다. 그런데 종교다원주의를 바탕으로 한 평등법은 다른 종교에 구원이 없다고 외치는 기독교 복음을 차별로 여긴다”며 “그렇게 되면 기독교는 독선적이라는 비판에서 끝나지 않는다. 모멸감을 느꼈다며 평등법을 통해 고소가 가능토록 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슬람의 폭력성, 이단 사이비 등을 비판하면 괴롭힘을 이유로 인권위에 진정이 들어갈 수 있고, 해당 설교에 대한 시정권고가 들어갈 것이다. 이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복음 설교를 하게 된다면, 평등법을 근거로 500만 원 상당의 징벌적 손해배상이 가해질 것”이라며 “소송당한 사람들은 차별하지 않았음을 증명해야 한다. 대부분 설교들이 온라인을 통해 중계될 텐데, 만일 수백 명이 반동성애 설교를 대상으로 집단 손해배상을 제기하면 최대 억 단위까지 배상금을 물릴 수 있다. 국가에서 변호인단 지원도 해주니 ‘묻지마 소송’이 특정 목사나 교회들을 상대로 제기된다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헌법상 종교의 자유는 자신이 믿는 교리를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고, 나아가 다른 사상에 대한 비판도 가능하게끔 했다. 주요 교단이 이단 사이비에 대해서 정당한 근거를 제시해 비판해도 종교의 자유 안에서 보장 받는다”며 “이에 따라 기독교사학들도 채플학점 이수를 졸업 요건으로 제시해 기독교교육을 이행해왔다. 지난 숭실대 판례에서도 대법원은 종교교육의 자유가 학생의 채플수업 거부권보다 앞선다고 판시한 바 있다. 평등법이 통과되면 기독교 교육이 차별사유로 돼 거액의 손해배상금을 물어줄 수 있다”고 했다.
==조영길 변호사, 차금법 제정된 영미… 영미 교단들 동성애 합법화 앞장서
이어서 조영길 변호사는 “실제 평등법, 차별금지법이 제정된 영미 국가에선 주요 교단들이 동성애 합법화에 앞장섰다. 이에 따라 게이·레즈비언 목사들이 나올 수 있다. 동성애를 가증히 여기신 하나님의 진리를 강단에서 설교하지 못하게 된다”며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이들을 향해 양의 옷을 입었지만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말씀하셨다. 차별금지법도 겉과 속이 다르다”고 했다.
조 변호사는 “평등법 및 차별금지법은 겉은 약자 보호라는 그럴듯한 복음정신을 표방하지만 실제 속은 탈동성애, 동성애 폐해성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표현의 자유를 박탈하는 악법”이라며 “평등법 4조 2항은 차별금지 사유를 모든 영역에까지 적용시켰다. 사적 영역 곧 가정까지 적용될 수 있다. 차별금지 사유엔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뿐만 아니라 종교, 사상 등도 포함된다”고 했다.
==동성애 비판에 법적제재… 자유민주주의 표현의 자유에 반해
또한 “평등법 4조 4항에는 괴롭힘을 차별로 본다고도 했다. 평등법의 차별금지 사유 21가지에는 정당한 사유와 부당한 사유가 섞여 있다. 장애, 인종 등이 세계인권선언에도 포함된 것과 달리, 동성애 등 성적지향은 포함되지 않았다”며 “동성애 비판이라는 가치관 표현에 괴롭힘을 이유로 법적 제재를 가한다면 자유민주주의가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에 반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은 다양한 사상을 보장하는 사상의 자유 이론이다. 평등법 및 차별금지법이 동성애 비판을 법으로 제재한다면 이는 전체주의적 법안이다. 우리의 신앙, 양심, 학문, 언론, 표현의 자유를 노략질하고 노예로 만들 것”이라며 “해당 법안은 고용, 시설, 방송, 교육, 서비스 영역 등에도 적용돼 유튜브에서의 반동성애 설교도 불가할 수 있다. 교회에서 동성애자 목사의 채용 불가, 동성애 비판 설교 등도 법의 제재를 받을 수 있고, 공교육에서의 반동성애 교육도 하지 못할 수 있다”고 했다.
==자유 노략질 하는 평등법… 1000만 성도 깨어나면 막을 수 있을 것
조 변호사는 “평등법 및 차별금지법의 반성경성에 대해 우리 성도들부터 깨워내자. 우리의 자유를 노략질하는 평등법 및 차별금지법에 대해 전국 1000만 성도들이 반대하고 전국 5000만 국민들을 깨워낸다면 반드시 평등법 및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지 못할 것이다. 이런 기도회를 멈추지 말고 계속하자”고 했다.
총회장 소강석 목사는 “영국 안드레이 윌리엄스 변호사는 영국교회가 차별금지법을 막지 못한 까닭은 교회가 연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등법이라는 미명하에 교회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우리 교회도 사상전과 문화전에 뛰어들어 이러한 잘못된 평등법 및 차별금지법 입법 흐름을 막고 유사한 법이 발의돼 통과되지 못하도록 막자”고 했다.
==크리스천 퍼스펙티브
우리나라 기독교계와 시민단체들은 차별금지법과 평등법에 대한 반대목소리를 끊임없이 외쳐왔다.
‘청년 진평연’(공동대표 김광수·김선규, 진정한 평등을 바라며 나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청년연합)이 지난 6월 30일 오전 서울 국회 앞에서 가지회견을 갖고 지난해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에 대해 “대한민국은 헌법과 법률을 통해 차별금지법의 23가지 차별 금지 사안 중 ‘성별정체성, 성적지향’ 두 가지 사안 외에 대해서는 이미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마치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통과돼야만 나머지 21가지 사안이 보호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테러리스트의 인질극과 같다”고 비판했다. 또 최근 발의된 평등법안에 대해서는 “‘차별금지법’의 유사품”이라며 ‘성적지향 및 성별정체성’을 입법화하기 위해, 나머지 21가지 사안을 끼워팔기 하는 파렴치한 시도를 이제는 중단하라”고 했다.
바른인권여성연합(상임대표 이봉화, 이하 여성연합)도 7월 7일 ‘차별금지법안’과 ‘평등에 관한 법률안’(평등법안)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국회는 여성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차별금지법 또는 평등법 제정 시도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또한 ‘사회정의를 바라는 전국교수모임’(정교모)는 7월 19일 “자유민주주의를 전체주의 체제로 바꾸려는 평등법과 차별금지법을 강력히 반대한다!”는 제목의 성명을 통해 “평등법(안)과 차별금지법(안)은 평등과 차별금지라는 이름으로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자유를 심각히 침해하고, 윤리와 도덕을 파괴하며, 정당한 자유경쟁을 차별로 간주하고 있다”며 “현란한 언어전술로 국민을 기만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전체주의 체제로 바꾸려는 평등법과 차별금지법을 즉각 철회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했다.
이뿐아니라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총회장 신정호 목사), 한국교회교단장회의에서도 평등법 제정을 반대하고 법률안 철회를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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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9 與의원 ‘건강가정기본법’ 개정 추진 논란//혼인·혈연·입양으로 이루어지는 ‘가족’ 개념 삭제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뤄진 사회의 기본단위인 '가족' 개념을 삭제하면서 가족의 형태를 이유로 하는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의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과 관련해 논란이 일고 있다. 
1인가구 폭증 등 사회변화를 반영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동성혼 가족 허용 등 전통적 가족 개념의 붕괴를 초래해 사회 혼란과 갈등을 유발할 우려가 크다는 지적도 많다.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과 정춘숙 의원은 지난해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을 각각 대표발의했다. 
개정안은 가족을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뤄진 사회의 기본단위'라고 정의한 현행 제3조 1호 등을 삭제하고, '가족의 형태를 이유로 차별받지 아니한다'는 내용을 추가하는 것이 골자다. 개정안은 이번 달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논의될 예정이다.
남 의원 등은 "2004년 건강가정기본법 제정 이후 가족규모 축소, 가족형태 다양화 등 급속한 가족환경 변화를 반영하기 위한 것"이라며 "특히 현행법이 '건강가정'을 위한 지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가족형태별 지원 필요성 및 민주적이고 평등한 가족관계의 중요성 등 가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어, 현행법의 제명을 '가족정책기본법'으로 변경하고 기본이념 등을 정비함으로써 다양한 가족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예방하고 평등한 가족관계를 강조하며 지원을 강화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족 형태를 이유로 하는 차별 금지’내용 담아
건강가정기본법은 2004년 가족지원정책을 강화해 건강가정 구현에 기여할 목적으로 제정됐으며, 같은 법 6조는 '국가는 건강가정사업과 관련되는 다른 법률을 제정 또는 개정하는 경우에는 이 법에 부합되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전통적 가족 개념 폐지에 따른 사회적 혼란과 갈등이 극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족에 대한 현행 정의 규정이 사라지면, 1인 가구 및 동거가구 뿐만 아니라 생계를 같이 하고 있는 사실혼관계, 일부다처제 구성원도 다양한 가족의 형태 중 하나라고 주장할 소지가 있으며 이들이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기 위한 소송을 진행할 수 있는 법적 근거로 활용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1인가구 폭증 등 사회변화 반영” 목소리 있지만 동성혼 가족 허용 등 전통적 가족개념 붕괴 우려
지난 달 27일 국회 국민동의 청원에는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 반대에 관한 청원'이 올라와 5일까지 6만6000여 명의 동의를 받은 상태다. 30일간 10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으면 소관 상임위가 심사해야 한다.
법무부도 '가족' 정의 규정을 삭제하는 것에 대해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국회 국민동의 청원에 “개정안 반대” 6만명 넘어
국회 여성가족위 검토보고서에 따르면, 법무부는 개정안이 '건강가정', '가정' 용어를 삭제하고 '가족'으로 대체한 경우가 많으므로 '가족'의 정의 규정을 두어 의미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으며, 정의 규정 삭제 대신 '가족'의 범위를 폭넓게 정의하는 것만으로도 개정 목적 달성이 가능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음선필 홍익대 법학과 교수는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이 가족의 정의 규정을 삭제하려는 이유는 이에 따라 다른 법률의 규율 대상 및 내용, 적용범위 등이 결정되기 때문"이라며 "사실혼 등에 일정한 법적 보호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현행 법체계에서도 해당 관계에 대한 보호 규정이 있기 때문에 법적 보호가 필요하다면 관계 법령 개정으로도 해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법무부도 “가족 정의규정 삭제는 신중 검토 필요”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종전처럼 가족의 정의 규정이 있으면 동성커플, 동성혼 가족이 가족에 포함될 수 없으나, 개정안에 따르면 동성혼 부부도 가족에 포함될 수 있다"며 "차별금지 조항과 결합하면 동성혼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한다는 것이 법문화되는 결론이 돼 법적으로 동성혼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는 것이 성문화되는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변호사는 "개정안은 1인가구, 비혼가구 등이 늘어난다는 점 등을 이유로 민법상 법률혼주의의 원칙을 깨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며 "예외를 포섭하기 위해 원칙을 바꿔버리는 것인데, 이로인해 생길 수 있는 혼란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안이 없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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