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05.27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MB아1-15_1: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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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아가서 소개 (아 1:1)(Introduction to the Song of Solomon)

I. 소개

A. 이 단원에서, 우리는 아가서에 대한 소개와 아가서를 해석하는 원칙들에 대해 다루게 될텐데, 이것은 아가서의 큰 그림(전체)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길잡이’를 제공해 줄 것이다.

B. 솔로몬 왕은 대략 주전 900년경, 그가 아직 영적으로 타락(우상숭배)하기 전이었던 시기에,전체 8 장에 이르는 이 사랑의 노래(아가서)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왕상 11:3-4).

C. 아가서는 크게 두 단락으로 나뉘어 진다. 아가서 1-4 장, 그리고 5-8 장.

1. 전반부 4 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의 신부’로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의 ‘기업(유업)’을 누리고 즐기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또한, 신부를 향한 하나님의 갈망을 강조한다.

2. 후반부 4 장은, 신부 안에서 누리는 ‘예수님의 기업(유업)’에 초점을 두고 있다.

우리가 주님께 구하는 것도 있지만, 주님도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이 있다. 

주님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길 원하신다(막 12:30). 

아가서의 초점은 책의 중간지점에서 완전히 변하게 된다(전환점: 아 4:16 - 5:1).

D. 아가서에는 예수님에 대한 계시가 8 가지 정도 나온다.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이 8 가지 예수님의 모습에 신부는 다양하게 반응하게 된다. 

예수님의 8 가지 모습은 다음과 같다: 돌보시는 목자(아 1:8), 사랑이 가득한 아버지(아 1:12-2:6), 통치하는 왕(아 2:8-9), 안전한(신뢰의) 구세주(아 3:6-8), 거룩하고 열정적인 신랑(아 4:1-15), 고난의 종(아 5:2), 위엄의 하나님(아 5:10-16), ‘소멸의 불’이신 질투의 하나님(아 8:6-7).

II. 아가서에 대한 사명과 여정

A. 1988년 7월, 주님은 귀에 들리는 육성으로 내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어느 날, 사무실에서 우연히 아가서 8:6<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을 읽고 묵상하면서 난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예수님, 주의 ‘사랑의 인’으로 제 마음에 인쳐 주세요.” 그 순간, 나는 아주 특별하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고, 이 본문을 요한복음 17:26<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과 연결시켜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향한 그 사랑을 제 심령에도 심어 주시고, 제 마음을 주의 불로 인쳐 주세요.”

B. 주님은 아가서 8:6-7< *6.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7.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을 전세계의 그리스도의 지체에게 전할 수 있는 특별한 은혜를 내게 부어 주실 거라 말씀하셨으며, 내 모든 사역이 이 주제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C. 그 날, 아가서를 한번 다 읽고 나서, 난 당황스러웠다. 

그렇지만, 주님이 주신 사명이기에, 아가서에 대한 이해나 즐거움도 없이, 믿음으로 아가서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아가서에 대한 주석들을 많이 섭렵하면서 이제는 약 150 권이 넘는 아가서 주석들을 소장하게 되었다. 

내가 권하고 싶은 것은, 아가서에 나오는 상징적인 용어들에 너무 겁먹지 말라는 것이다.

D. ‘신랑 예수님’을 만나면서, 나는 곧 아가서 연구의 기쁨과 즐거움, 주님의 사랑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다.

III. 연구 목적: 요한복음 17:26 의 말씀을 성취해 나가는 삶

A. 예수님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믿는 우리 각자의 마음에 <동일하게>부어주실 것을 기도하셨다.

아가서의 공부 목적은,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만큼, 우리가 예수님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케 되는 것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26)

B. 아가서는 세대를 초월하는 사랑의 노래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향한 열정을 키울 수 있는지를 하나님의 방법을 통해 보여준다. 

아가서는 하나님을 향한 성숙한 사랑을 키우는 데 필요한 ‘핵심 원칙들’과 ‘실제적 현실들’을 다룬다.

1. 올바른 아가서의 이해를 통해, 우리는 삶 가운데 하나님이 특별히 다루시는 문제들을 찾는 데 도움을 얻을 뿐만 아니라, 인생의 다양한 여정가운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잘 분별할 수 있는 훈련을 받게 된다.

2. 인생 전반에 걸쳐, 우리는 아가서에 나오는 ‘시험’과 ‘축복’의 연속을 반복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아가서에 나오는 두 종류의 계절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나 자신도 아가서를 보며, 같은 ‘계절’을 여러번 반복하게 됨을 보게 된다.

IV. 아가서 해석 방법

A. 자연적 해석: 솔로몬 왕과 그의 신부, 술람미 여인의 러브 스토리로, 이 관점은 부부의 사랑의 아름다움을 높여주는 성경적 원칙들을 강조한다. 

이 해석은, 특별히 지난 100  여년간 사랑을 받아왔으며, 많은 주석들이 배출되어 왔다. 

자연적 러브스토리로 아가서를 해석할 때, 보통, 두 가지의 기본 줄거리를 가진다.

1. 먼저, 잘 생기고 부유한 솔로몬 왕의 구애를 받으며, 점차적으로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술람미 여인의 이야기

2. 둘째, 마을(수넴)에 사는 가난한 목동 소년을 깊이 사랑하는 거룩한 술람미 여인의 이야기. 

마을을 지나던 솔로몬 왕은, 마침, 포도원에서 일하고 있던 여인을 주목하게 되고, 곧 그 여인의 아름다운 외모에 반하게 된다. 

왕은 가난한 목동을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그렇지만, 솔로몬 왕의 부와 능력의 유혹에도, 여인은 가난한 목동 소년을 향한 일편단심을 지키게 된다.

B. 영적 해석: 이 관점은 자연적 남녀의 사랑 이야기 뒤에 숨겨져 있는 ‘영적 진리’를 보는 상징적 해석으로, 연구 과정 전반에 걸쳐 우리가 사용할 접근 방식이다.

1. 아가서는 부부의 사랑으로, 그리고,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의 사랑의 여정으로 상징적 해석을 적용할 수 있다.

2. 우리는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아가서를 읽어야 한다.

이 해석은 지난 3000 년동안 (솔로몬이 이 책을 쓴 후로부터) 주류를 이뤄왔으며, 중세시대(12세기부터 16세기)에도 주로 사용되었던 해석이다.

V. 아가서를 통해 높임 받으시는 예수님

A.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자신에 관한 성경본문들을 모두 말씀하시면서 (눅24:27), 구약 성경 39 권을 하나하나 인용하셨다.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B.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씌여 졌으며(딤후 3:16), 성령님은 하시는 모든 일에 예수님을 높이신다(요 16:14). 

성령님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으로 사람들을 충만케 하기 위해, 무서울 정도의 충성심과 질투심을 갖고 계신다(요 17:26).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4) 

C. 성령님은 예수님과 깊은 우정을 나누신다. 그들은 영원 전부터 함께 하셨으며, 서로를 향한 깊은 사랑도 영원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성경의 주제가 되지 않는 책을 성령님께서 감동하여 쓰게 하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VI. 영적 해석: 3 가지의 주된 접근방식

A. 아가서의 영적 해석에 있어, 예수님을 높이는 3 가지 주된 접근방법이 있다. 

이 해석의 주 목적은, 하나님을 향한, 그리고 사람들을 향한 사랑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서로 약간씩 차이가 있어도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자라게 해주는 해석들을 우리는 환영한다.

B. 첫번째 접근은 아가서를 ‘예수님과 나’의 관계로 해석,

‘거룩한 열정’을 우리가 소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영적 원칙들을 제공해 준다. 우리는 이 접근방식을 채택하여 진행할 것이다.

C. 두번째, 예수님과 역사에 걸쳐있는 일반적인 주님의 ‘전체 교회’의 관계로 해석.

D. 세번째, 신랑 하나님과 그분의 신부인 ‘이스라엘’의 관계로 해석(롐 2:2; 호 2:16-20; 겔 16:8-14, 20-21, 32, 38; 사 54:5-6). 

구약시대 서기관과 오늘날의 유대 랍비들이 주로 채택하는 접근 방식이다.

VII.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모두 주님의 신부다.

A. 신학적으로 말하면, 이 땅에 사는 신자들은 모두 예수님께 ‘약혼’된 자들이다. 

유대 전통에서, 약혼한 커플은 법적으로 결혼한 것과 같아, 만일 약혼을 파기할 경우, 이혼 절차를 거쳐야 했다.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약혼시킴)이로다(고후 11:2)

B. 결혼의 완성은 ‘다가오는 시대’에 일어난다 (계 19:7).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계 19:7)

C. 우리가 인용하는 주님의 신부는 성숙한 사랑을 지닌 모든 자들을 포함한다.

D. 그리스도의 신부는, 성숙한 사랑이 충만했던 역사상의 모든 교회라고 나는 믿는다. 

부활을 통해, 성령님은 모든 교회안에 하나님 역사의 완성을 가져오실 것이다. 다시말해, 모든 자들은 성숙한 신부로 예수님과 관계하게 될 것이다.

E. 첫째, 신부가 소유하게 되는 성숙함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완성하신 일의 ‘궁극적 열매’다.

31⋯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3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 (롬8:31-35)

F. 두 번째, 천국에는 신분계층이 존재하지 아니하며, 오직 마음이 하나된 사람들만이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인 것처럼, 주님의 백성들이 서로 하나 되기를 기도하셨다.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주님의 백성들에게도 부어 주실 것을 기도하셨다.

21 그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 26내가(예수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 (요 17:21, 26)

G. 셋째, 우리는 영광중에 계신 주님을 보게될 때, 예수님과 같이 변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다가오는 시대에 모든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권능이 풀어지게 될 것이다.

2⋯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요일 3:2)

H. 넷째, ‘신부’의 부르심은 신부에게 완전히 마음이 빼앗기신 하나님을 통해 확증된다.

하나님의 마음은 그분의 백성들에게 사로잡혀 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성숙한 자들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구속받은 모든 자들에게 마음이 빼앗겨 있으시다. 

예수님의 빼앗긴 마음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더해 지거나 감해지지 않는다.

9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아 4:9)

I. 요약: 신부의 성숙함을 위한 기초는,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예수님의 역사와 예수님의 중보, 주 영광에 대한 계시, 그리고 우리에게 빼앗긴 하나님의 마음에 있다.

VIII. 아가서 주요 등장인물

A. 솔로몬왕: 영적 해석에서, 그는 만왕의 왕이시며, 승리하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B. 술람미 여인: 영적 해석에서, 그녀는 그리스도의 신부를 나타낸다. 그녀는 어린 소녀에서, 점차 왕이신 예수님과 성숙한 동역을 하게 되는 ‘신부’로 소개된다. 

‘술람미’라는 단어는 딱 한번 나온다(아 6:13). 그녀는 수넴(이스라엘 북쪽)에 살았다.

C. 예루살렘 여자(딸)들: 영적 해석에서, 이들은 믿음은 있지만, 영적으로 아직 미(성)숙한 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술람미 여인을 보며, 왕이신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된다. 

이들이 역사적으로 실제 존재한 사람들인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그러나, 여기서는 영적으로 미숙한 자들을 의인화한다).

IX. 전도서와 아가서 비교

A. 솔로몬은 3 권의 책을 저술했다: 잠언, 전도서, 아가서. 보통, 유대인 선조들은 솔로몬 성전을 비유 삼아 이 책들을 인용하곤 했다.

1. 잠언을 성전의 바깥 뜰에 비유했다. .

2. 전도서를 성전의 안쪽 뜰에 비유했다.

3. 아가서를 성전안에 있는 지성소에 비유했다

B. 전도서에서, 솔로몬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썼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삶은 ‘헛되다’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환경과 조건가운데 살아도 인간은 만족함을 누리지 못한다. 

전도서는, 하나님 안에 안식을 찾기 전까지 방황하며 떠돌수 밖에 없는 인간의 삶을 말해준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한 같이 보여도 하나님의 실재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실제로 실속없는 빈 껍데기, 빈 깡통, 빈 강정과도 같은 존재다.

C. 아가서는 주위 환경, 처한 환경과는 전혀 상관없이 얻을 수 있는 삶의 기쁨을 보여준다.

아가서에서 성령님은 우리 삶의 목표인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를 초청하신다. 

아가서는, 우리의 ‘소멸하는 열정’이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일 때,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충만케 될 수 있는 지를 조명해 준다. 

인생의 극한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의 영은 하나님 안에 살아 숨쉬며 살아갈 수 있다.

D. 전도서는,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아무리 훌륭한 성공을 이뤘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공이 아니면, 궁극적으로 그 성공은 전혀 가치가 없다는 진리를 가르쳐준다. 전도서를 올바로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영혼을 깨우는 뜨거운 열정으로 아가서 1:5 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다시말해, 전도서는 아가서의 여정을 예비해주는 책이다.

E. 전도서에서 말하는 세상 철학은 “인생을 즐기려면, 세상의 경험을 더 쌓으며, 자신을 주장하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러나, 아가서는 겸손과 순종,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함으로 삶의 충만함을 누리라고 말해준다.

F. 전도서는, ‘세상적 성공’을 꿈꾸는 것에 대한 헛됨을 말해주나, 아가서는, ‘하늘(천국)의 성공’을 꿈꾸는 데서 오는 영적 기쁨을 말해준다.

X. 솔로몬의 아가 (THE CANTICLES):일련의 노래들

A. 아가서는, 솔로몬의 아가(the Canticles)라고도 불린다. 라틴어 명사인 “canticum”은 “노래”를, ‘Canticles’는 ‘일련의 노래들’을 의미한다.

B. 불가타역 라틴어 성서는, 4 세기경 제롬(Jerome) 이라는 사람이 대중화를 위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성경으로 유명하다.

C. 불가타역 성서에, 아가서는 ‘the Canticles’ 로 불린다. 다음의 인용들은 같은 의미로 통한다: Cant. 4:9, 또는 아 4:9.

XI. 비유적 해석(알레고리)

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룻하고 26오직 위에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3-26)

A. 비유적 해석(알레고리)은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사용되어 왔다. 하갈과 사라 이야기를 바울은 “비유”를 사용해서 해석한 적이 있다.

B. 갈라디아서 4:21-31에서 사도 바울은 사라와 하갈의 이야기를 “비유”적으로 사용했다.

1. 사도바울이 사용한 비유는 알렉산드리안들이 사용한 비유(1세기 필로와, 3,4 세기 오리게네스와 크리소스톰)와 큰 차이를 보인다.

2. 알렉산드리안들은 역사적 정황과 의미를 무시한 채 비유를 사용했다.

3. 고전 9:9-10 에서, 사도바울은 “망을 씌운 소의 입”(신 25:4)을 비유적으로 해석하면서, 재정 후원을 받는 전임 사역자들(복음의 일꾼들)에게 적용했다.

C. 알레고리(비유)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를 두지 않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 허구 이야기다. 대표적인 예로, 나니아 연대기를 들을 수 있다.

D. 알레고리는, 사람 또는 어떤 대상을 통해 상징적으로 진리를 표현하는 문학 형식이다. 알레고리는 진리를 쉽게 설명해 주기 위해 사용된다.

E. 일반적으로, 우리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하며, 또한, 역사적 문맥에 맞춰야 한다. 

다른 부여 설명을 하지 않는 한, 우리는 성경을 이렇게 접근한다(갈 4:24; 요 15:1-6; 계 11:8; 사 5:1-7; 호 2:1-14; 겔 16; 단 7:2 - 8, 16).

F. 알레고리(비유)를, 신약성경 전체의 명확한 진리구축을 위해서만 사용한다면, 비유적 해석은 우리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게 될 것이다

===2장 가장 위대한 예언적 노래안에 계신 예수님 만나기 (Encountering Jesus in the Greatest Prophetic Song)

I. 가장 위대한 예언적 노래

A. 아가서는 구속의 역사가운데 가장 위대한 노래다.

솔로몬의 아가라(아 1:1)

B. 솔로몬은 재능을 겸비한 왕성한 작사, 작곡가로, 약 1005 개의 노래를 지었다(왕상 4:32).

그 중, 아가서는 최고의 노래로 꼽힌다. 그렇기에, 성령님께서 이 노래를 ‘노래들 중의 노래’로 이름을 짓게 감동을 주셨다. 더 위대한 노래가 없기에, 최고의 명예를 가진 노래로 명명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이요, 주의 주, 거룩의 거룩(지성소)과 같은 분인 것처럼, 궁극적으로 최상급의 표현인 것이다.

C. 마지막 때 성도들은 적그리스도의 분노를 이기고 승리하면서,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가 있는 주님의 보좌 주위에 서게 될 것이다. 그들은 순교를 당하면서 까지 주님을 사랑한 ‘헌신적 사랑’의 승리자들이다. 그들은 두 종류의 노래를 부르게 되는 데, 하나는 ‘모세의 노래’요, 다른 하나는 ‘어린 양의 노래’다.

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계 15:2-3)

1. 모세의 노래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출 15:1-21; 신 31:30-32:47).

2. 예수님은 ‘어린양의 노래’라 불리는 노래를 갖고 계신다. 예수님의 노래는 가장 위대한 노래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성경에서 ‘어린양의 아내’로 소개된다(계 19:7- 9; 21:9).

D. ‘어린양의 노래’와 최고가 되는 ‘노래들 중의 노래(아가서)’가 동일한 노래일 수도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E. 주님이 재림하시는 세대에는 아가서에 대한 큰 관심이 있게 될 것이다.

F. 성령께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아가서를 선포하고, 노래하며, 노래를 짓고, 아가서로 기도하는 사람들을 지금도 세우고 계신다.

G. 아가서에서 영감을 받아 찬양을 짓는 사람들에게 실용적인 충고 한가지 해주고 싶다.

아가서 내용의 뜻을 해석하지 않고, 본문에 나오는 언어를 그대로 사용해서 노래를 짓는 사람들이 있다. 그 언어가 지니고 있는 상징적인 뜻을 이해 할 때 덕을 세울 수 있게 되므로, 그 언어와 함께 뜻을 노래에 담아 전하도록 하라.

H. 아가서의 아주 작은 부분을 가지고 노래를 지으라고 제안하고 싶다. 아가서는 성경에서 가장 긴 노래로, “집약된” 형식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아가서 한 두 구절만을 사용, 발전시켜 노래를 지을 것을 권한다.

I. 하나님께 새 노래를 드릴 예언적 싱어들이여 일어나라! 주님앞에 이 부르심을 감당하며 나아갈 작사,작곡가들이여 일어나라!

II. 아가서의 네가지 특징

A. 우리는 전심으로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마 22:37). 우리의 마음은 마치 다면체를 가진 ‘다이아몬드’와 같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하고도, 시적인 애정표현을 통해 가장 감동을 받는 ‘내면’이 있다. 아가서는 예수님이 “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는 지에 대한 ‘감성적인 부분’을 강조한다. 우리가 다양하면서도 깊은 감정을 소유한 것은, 하나님이 그러한 감정들을 소유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B. 아가서의 4 가지의 특징은 사실 성경의 많은 본문에서 발견된다. 아가서의 독특함은 이러한 진리를 담고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특징들이 집약적으로 집중되어 있다는 데 있다.

1. 첫째,백성들을 향한 예수님의 열정적 사랑과 기쁨에 대한 계시다.

2. 둘째, 예수님의 아름다움, 특별히 ‘신랑이신 왕’ 예수님에 대한 계시다.

3. 세째, 우리의 연약함이 드러나는 가운데서도, 예수님께서 보시는 우리의 아름다움에 대한 계시다. 하나님이 당신을 어떻게 바라보시는 지를 알고 싶다면, 아가서를 공부하라. 

4. 네째, 예수님과의 사랑에 깊이 빠져 들어가며, 성숙한 동역을 위해 필요한 원칙들이다.

C. 감정적, 성(性)적인 상처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주님의 교회는 이 계시들로 더욱 무장해야 한다. 예수님은 그분의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매혹시키길 원하시며,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움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기 원하신다. 아가서는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계시를 비춰주는 일종의 ‘광선’과 도 같아, 예수님의 마음과 열망을 조명해준다.

III. 3 종류의 기업(유업) – 시 2:11-12

A. 다윗왕은 하나님이 주시는 세 종류의 유업을, 하나님 앞에 ‘떨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아들께 ‘입맞추는’ 백성이 되는 것으로 기술했다. 이 구절은 ‘성숙한 신부’의 모습을 가장 훌륭하게 표현해 주는 본문중의 하나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10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시2:8-12)

B. 다윗은 여기서 구속(redemption)의 세가지 측면을 보여준다.

1. 떨며 – 우리는 예수님의 영원한 위엄과 광채를 보며 떨게된다.

2. 즐거워하며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게 되는 우리의 정체성과, 십자가가 주는 합법적인 유익과 축복을 보며 즐거워하고 기뻐한다.

3. 입맞추라 – 우리는 상징적으로 “그 아들에게 입맞춘다.” 다시 말하면, 거룩한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한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구속의 감정적, 열정적 차원을 볼 수 있다.

C. 이 세가지 구속의 측면을 특별히 강조하는 성경본문이 세 군데 있다.

1. 요한 계시록: 하나님 앞에 우리를 떨게 하는 위엄적, 영원적 측면 

2.로마서: 십자가의 유익을 누리고 기쁘게 하는 법적, 실제적 측면 

3.아가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권능을 부여해주는 열정적, 감정적 측면

D. 마틴 루터는 구속의 ‘법적인 측면만 강조했을 뿐, 열정적, 감정적 측면은 회피했다.

IV. 아가서를 예수님과의 사랑의 대화와 기도로 바꾸기

A.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갈급하고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장기적으로 아가서를 통한 ‘사랑의 묵상’에 동참해야 한다. 아가서를 통한 성령님의 목적중의 하나는,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우시는 것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6)

B. 아가서가 주는 유익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아가서를 예수님과의 지속적인 ‘사랑의 대화,’ ‘사랑의 기도’로 바꾸어야 한다. 단순히, 아가서를 일반 성경공부 하듯 하게 되면, 아가서가 주는 유익을 충분히 누릴 수 없다는 말이다. 아가서를 통해 심령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아가서의 언어가 우리의 기도 생활과 생각 속에 반드시 들어와야 한다.

C. 아가서를 접근할 때, 단순한 성경 연구를 하는 듯한 ‘학구적’ 학습자세를 가져서는 안된다.

지식을 넓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유명한 식당을 가는데, 단순히 메뉴판만을 연구하러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메뉴판은 맛있는 음식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만 하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단순히 ‘아가서의 감정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이 우리의 심령을 가득 채우도록 만들어야 한다.

D. 개인적으로, 내게는 ‘나의 구절들’이라고 할 수 있는 구절들이 아가서 안에 10개 정도 있다.

초창기 때에는, 엽서에 그 구절들을 적어 운전하거나 걸으면서 읽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예수님께 그 구절들을 속삭였다. 예를 들면,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이 내게 입맞추게 하소서”라든지, “성령님, 나를 지탱해 주시고, 새롭게 하소서”(아 1:2; 2:5)

E. 아가서를 읽어 나가면서, 특별히 중요한 구절들을 하나님께 기도로 다시 올려 드리라고 제안하고 싶다. 이렇게 함으로, 우리는 아가서를 ‘도약대’ 삼아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알고 체험하게 될 것이다.

V. 예수님 만나기: 아가서 일지 작성, 묵상하며 읽기

A. 우리는 성경을 묵상하는 데 관련된 진리들을 보통 두가지 종류로 정의한다. 

첫째는, 하나님, 우리 자신, 또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우리가 “믿게”도와주는 진리들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도와주는 진리들이다.

B. 다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도와주는 성경묵상법 두가지다.

1. 먼저, 우리가 읽는 성경 본문에 나와있는 진리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리고, 구체적인 방법으로 “예수님, 감사합니다”를 포함한 대화로 그 진리를 바꾼다.

a. 예를 들어, “네가 나의 마음을 빼앗았구나”(아 4:9)를 읽을때, 다음과 같이 기도하면서, 진리에 감사 드린다. “예수님, 제가 주님의 마음을 빼앗았다는 것을 감사 드립니다.”

b. 예를 들면, 예수님이 신부에게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아 4:10)라고 말하실 때, “주님을 향한 제 사랑이 이 세상의 포도주(영광과 즐거움)보다 낫다고 높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이라고 기도하며 답한다.

10 ⋯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아4:10)

2. 두 번째, 그 진리에 대한 확신을 위해 이해를 구한다. 그 진리의 권능을 알고 느끼게 되도록 계시를 풀어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라(엡 1:17).

a. 예를 들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를 읽을 때, “예수님, 제가 어떻게 예수님의 마음을 빼앗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세요”라고 기도하며, 마음속에 계시가 임할 것을 구하라.

b. 예를 들면,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를 예수님이 신부에게 말씀하시는 구절을 읽을때, “ ‘주님을 향한 제 사랑이 주님께 이 세상의 그 어떤 포도주보다 낫다’라는 진리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세요”라고 기도하며, 이해를 구한다.

C. 다음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도록 도와주는 진리 묵상법 2 가지다.

1. 먼저, 우리는 성경본문에 나온 방법으로 예수님께 순종하는 데 헌신한다.

구체적으로 그 진리의 말씀에 대해 (본문에서 주는 특정한 권면에 따라) 그분께 순종하고자 하는 의도와 헌신을 선포하며 하나님과의 간단한 대화로 바꾼다.

a. 예를 들면, 예수님이 신부에게 “주님을 따르기 위해 순종하며 일어나, 안락의 지대에서 떠나자”(대가를 치르는 순종; 아 2:10)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 안락의 지대에서 벗어나, 대가가 따른다 할지라도 순종하며, 고난의 산에서 주님을 만나겠습니다” 라고 진리에 순종하는 헌신의 마음으로 답한다(아 4:6)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 2:10)

b. 예를 들면, 예수님이 “샘물이 더럽혀지지 않은 잠근 정원(동산)”(왕의 정원은 일반(대중) 정원과는 다르게 보통 잠겨(봉해져) 있었다. 이것은 잠근 정원과 같이 예수님만을 위해 온전히 준비된 순결한 마음의 소유를 가리킨다)과 같이 신부의 마음을 칭찬하실 때, “예수님, 제 마음은 어떠한 타협에도 굴하지 않도록 잠겨져 있습니다. 저는 온전히 주님의 것입니다.” 라고 기도하면서, 그 진리에 순종하는 헌신의 마음으로 답한다.

12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봉한 샘이 로구나(아 4:12)

2. 두 번째, 구절에 나와있는 진리에 순종할 수 있도록 주님의 권능을 구한다. 그 구절에 있는 권면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라.

a. 예를 들면, 주님께서 신부에게 “순종하며 일어나 주님과 함께 산으로 따라갈 것”을 권면하실 때, 우리는 “예수님, 제게 권능을 입혀주사 주님께 순종하며, 나의 안락의 지대에서 일어나(벗어나) 고난의 산에서 주님을 만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며 성령의 도움을 구한다.

b. 예를 들면, 주님께서 “잠근 동산”과 같은 신부의 마음을 칭찬하실 때, 우리는 “예수님, 제게 권능을 주사 어떠한 타협에도 절대 굴하지 않는, 오직 주님만을 위한 잠근 동산(마음)으로 살게 도와주세요”라고 도움을 구한다.

VI. 일지작성의 필요성

A. 아가서를 “묵상”하며 읽어 나갈 때에 떠오르는 생각, 기도, 묵상들을 공책에 적어라.

주님이 당신에게 주시고자 하는 진리들을 붙잡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는 연습을 통해, 이 장대한 아가서를 예수님과의 영광스런 대화, 기도로 바꾸는 데 큰 도움을 얻게 될 것이다.

B. 인내를 가지고, 천천히, 조용히 읽으면서 생각들을 적어보라. 성령님이 계시를 더욱 부어 주시고, 순종을 더욱 강력하게 하시고, 마음을 온유케 하시는 역사를 보며 당신은 놀라게 될 것이다.

VII. 아가서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계시 8 가지

A. 아가서에는 예수님에 대한 8 가지 계시가 들어있다. 

이 계시들은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8가지 측면을 보여준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그 분의 이름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때마다, 각각 다른 모습들을 보여주신다. 이 8 가지 예수님의 모습 하나하나는 우리와 그분의 관계의 독특한 측면을 나타내기에, 우리 안에 각각 다른 반응들을 창출하게 된다.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이 8 가지 계시 하나 하나는 신부안에 각각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B. 이사야는 예수님의 이름을 4 가지로 선포했었다.  

그는: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사 9:6).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사 9:6)

C. 이사야가 언급한 예수님의 4 가지 이름을, 에스겔 1:10; 계 4:7 에 나오는 고위급 천사(생물들)들의 4 가지 얼굴과 결합할 수 있다. 에스겔과 요한 계시록은 네 얼굴을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바로, 사람, 사자, 송아지(또는 소), 그리고 날아가는 독수리의 얼굴을 묘사하고 있다.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세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네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계 4:7)

그 얼굴들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겔 1:10)

D. 주님의 8 가지 얼굴은 다음과 같다: 

모사(목양)하는 목자(아 1:8), 

사랑이 가득한 아버지(아1:12 - 2:6), 

통치하는 왕(아 2:8-9), 

신뢰의 구세주(아 3:6-8), 

열정적 신랑(아 4:1-15), 

고난의 종(아 5:2), 

위엄의 하나님(아 5:10-16)과, 

‘소멸하는 불’이신 질투의 하나님(아 8:6-7).

E. 소의 얼굴 : 모사(목양)하는 목자, 그리고 고난의 종 (아 1: 8-11, 5:2-7)

1. 모사(목양)하는 목자는, 목자로 신부를 섬긴다(아 1:7-11).

2. 고난의 종은 주님의 짐을 함께 짊어지도록 신부를 초청한다(아 5:2-7).

F. 사자의 얼굴: 통치하는 왕, 신뢰의 구세주 또는 평강의 왕(아 2:8-9, 3:6-11)

1. 통치하는 왕(아 2:8-9)은 모든 산들과 장애물들을 이기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

2. 안전한(신뢰의) 구세주(아 3:6-11)는 평강과 안보를 가져다 주는 왕이다.

G. 사람의 얼굴: 사랑이 가득한 아버지, 그리고, 열정적인 신랑 (아 1:12-16; 4:1-15)

1. 사랑이 가득한 아버지는 잔치 상에서 신부에게 기쁨을 부어주신다(아 1:12-2:7; 눅15:20).

2. ‘열정적인 신랑’은 아가서의 핵심 계시로(아 4:1-15; 6:4-5), 신랑의 모습을 두 종류로 표현한다: 예언적인 신랑의 마음 (아 4:1-5), 빼앗긴 신랑의 마음 (아 4:8-15).

H. 독수리의 얼굴: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소멸하는 불이신 질투의 하나님 (아 5:10-16; 8:6-7)

1. 위엄의 하나님(아 5:10-16)은 광채와 경외를 설명할 때 나타난다.

2. 질투의 하나님의 ‘소멸하는 불’(아 8:6-7; 신 4:24)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사랑에서 나타난다.

===3장 거룩한 입맞춤: 주의 말씀으로 변화됨(신부의 영성) (The Divine Kiss: Transformed by the Word (Bridal Paradigm))

I. 소개

2 내게 (주의 말씀으로)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아 1:2)

A. 신부의 영성(패러다임)이란 무엇인가? 패러다임이란 관점이나 견해를 말한다.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패러다임’이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본다. 1988년 7월, ‘신랑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소중한 신부의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패러다임으로 주님은 나를 인도하기 시작하셨다. 그로부터, 나는 이미 친숙한 성경본문들 안에서도 새롭게 주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B. 아가서의 지배적 주제는 ‘신부를 향한 왕의 마음과 애정’이다. 

‘하나님의 마음’이란 주제를 공부하고 묵상할 때, 우리는 아가서를 최우선 순위에 두어야 한다. ‘건강한 마음’을 소유하는 데 아가서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고, 바라보시는 지를 바로 알게 되면, 우리는 변화하게 될 것이다. 이 계시를 갖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달아나지 않고, 하나님 품으로 달려가게 될 것이다. 이 계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 확신을 갖고 살게, 또한, 연약함 가운데서도 우리의 심령을 주님께 열 수 있게 도와준다. 사실, 많은 진실한 사람들이 죄책감과, 굳게 닫힌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는게 현실이다.

C. 주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데, 그 사랑이 어떠한 ‘홍수’에 의해서도 꺼지거나 엄몰되서는 안된다. 

사람들 대부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버리거나, 아예 소진된 마음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아가서의 진리는 닫힌 심령을 ‘하나님의 불’로 열어주게 될 것이다.

너는 나(예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 사랑(우리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7이 사랑은 많은 물(핍박, 죄, 정죄, 압박, 등)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아 8:6-7)

II. 하나님 말씀의 입맞춤

A. 이 단원의 초점은 거룩한 하나님 말씀의 ‘입맞춤’을 이해하는 것이다. 전체 8 장에 이르는 이 사랑의 노래는 ‘거룩한 입맞춤’의 함축적 의미를 전개시켜 준다. 바로, 이것이 신부의 삶의 주제다.

2 내게 (주의 말씀으로) 입맞추기를 원하니 ⋯(아 1:2)

B. 성경에는 다양한 종류의 ‘입맞춤’이 나온다. 예를 들면, 친구의 볼에 하는 입맞춤, 종이 발에 하는 입맞춤 등등. 입술에 하는 입맞춤은 부부의 거룩한 사랑, 친밀감을 말한다.

C. 술람미 여인은 왕에게 입맞춤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다. 우리의 심령은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통해서만 살 수 있다.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실 때, 예수님은 신명기 8:3 을 인용하셨다(마 4:4). 지난 3000년 동안, 랍비들은 이 구절에 나오는 “입맞춤”을 “토라의 입맞춤”으로 해석해왔다.

3⋯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D. ‘거룩한 입맞춤’은 하나님과의 친밀감/친밀함을 나타내는 비유다.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심령의 영역을 넓히시고, 주님께 사랑을 드릴 수 있도록 우리를 만지시는 하나님의 손(능력)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이 입맞춤은 예수님과 더 깊은 교제로 우리를 인도하려는 하나님의 초청을 말한다. 주님의 입맞춤은, 주의 사랑으로 우리의 심령을 온유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우리에게 계시로 풀어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예수님 입에 입맞추는 것으로 해석 해서는 절대 안된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의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씀의 입맞춤”을 관능적, 감각적으로 보는 해석을 모두 부정한다.

E. 아가서는 아름다운 부부의 사랑을 찬양하며, ‘신랑’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한 통찰력을 부여해 주기 위해 씌여졌다. 

성령의 모든 가르침은 우리가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동기를 부여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드러내지 않는 주제를 성령의 감동으로 쓰게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4)

F. 하나님의 말씀에는 인간 관계술과 사역 방법, 아웃리치를 위한 사도적 전략(사도행전)과 같은 다양한 주제들도 많이 다루고 있다. 

물론, 이러한 방법들과 통찰력들을 얻고 자라는 데 있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가치를 부여 해준다. 그러나, 아 1:2 에서 신부가 부르짓는 기도는, 특별히, 주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그 사랑을 받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다.

G. 아가서에는 하나님과의 친밀감/친밀함을 나타내는 비유가 세가지 있는 데, 거룩한 입맞춤(아 1:2)과 거룩한 인(아 8:6), 그리고 거룩한 품으심(아 2:5; 8:4)이다.

H. 신부의 여정은, 주님 말씀의 입맞춤에 대한 열망으로 시작되어, 거룩한 질투의 사랑을 소유하신 예수님을 극적으로 만나면서 끝을 맺게 된다(아 8:6-7). 

예수님은 신부에게 오셔서, 아가서의 ‘궁극적’ 성숙의 표현인 ‘거룩한 질투의 사랑’을 신부의 마음에 ‘인(seal)’치신다.

III. 거룩한 입맞춤: 신부의 가장 큰 소원

A. 술람미 여인은 왕에게 직접 요청한 것이 아니라, 왕보다 더 높은 권위를 지닌 분에게 요청한다. 여인이 말하길, “(그로- 영어역) 내게⋯” (아 1:2). 여인은, 개인적으로 왕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분께 요청한 것이다.

B. 솔로몬은 하나님과의 경험을 상기시키는 방법으로 이 사랑의 노래를 써 나간다.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하나님은 솔로몬을 시험하기 위해 꿈에 나타나셨다(대하 1장; 왕상 3장). 주님은 솔로몬에게 가장 원하는 소원 하나를 들어 주겠다면서 그를 시험하셨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길 수 있는 초자연적인 지혜와 지식을 구했다.

7 이 밤에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10 주는 이제 내게 지혜와 지식을 주사 이 백성 앞에서 출입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많은 주의 백성을 누가 능히 재판하리이까 11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이르시되 이런 마음이 네게 있어서 부나 재물이나 존영이나 원수의 생명 멸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장수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너로 치리하게 한 내 백성을 재판하기 위하여 지혜와 지식을 구하였으니 12 그러므로 내가 네게 지혜와 지식을 주고 부와 재물과 존영도 주리니 너의 전의 왕들이 이 같음이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이 같음이 없으리라(대하 1:7-12)

C. 유사한 방법으로, 주님은 교회가 주님의 뜻을 구할 것을 말씀하셨다. 

주님의 신부로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가운데 서서 우리의 가장 큰 소원을 구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외쳐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주의 말씀으로 제게 입맞추게 해 주세요.”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심령 안에 주실 수 있는 ‘가장 깊은 것들’을 구해야 한다.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21:22) 23 ⋯누구든지 ⋯ 그 말하는 것이 이룰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막 11:23)

13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3-14)

D.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원하는 것을 구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시험 하신다.

하나님 아버지께 구할 수 있는 신부의 최고의 요청은 ‘거룩한 주 말씀의 입맞춤’이다. 신부는 이 세상의 권력이나, 명성, 안락보다 이것을 더 간절히 바란다. 이렇게, 최고의 소원이 하나님 말씀의 입맞춤인 사람들을 하나님은 일으키고 계신다. 사실, 우리의 필요를 구하자면 참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부수적인 것이다. 가장 위대한 믿음의 기도는, 마음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는 기도다.

IV. 하나님 말씀의 입맞춤을 위한 간구(부르짖음)의 세가지 특징

A. 먼저, 이것은 모든 열방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성령님이 어디로 인도하시는가를 표현하는 위대한 ‘예언적’ 부르짖음이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재림전에 교회안에 ‘첫 계명을 최우선 순위’로 회복시키실 것이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백성들의 마음을 ‘할례’시켜,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실 것이라 모세에게 약속하셨다. 그 때에, 주님의 교회는 신부의 사랑으로 외치게 될 것이다, “오시옵소서, 예수님!”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 30:6)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계 22:17)

B. 두 번째, 이것은 시간과 영원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존재 이유’를 찾으려는 ‘철학적’ 부르짖음이다. 

궁극적인 삶의 목적과 의미는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경험하는 데 있다. 절대 실패하지 않는 성공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사랑 받는다는 것을 알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연인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면, 우리는 진정 성공한 자들이다.

C. 세번째, 이것은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 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심리적’ 부르짖음이다. 

진정한 행복을 경험하고 만족하며 사는 삶의 비밀에 대한 해법을 준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실재가 되도록, 또,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우리는 창조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지 않을 때, 우리의 삶에서 감정과 마음의 균형은 깨지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좇지 않을 때, 그것은 온전한 삶이 될 수 없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좇지 않고서는 온전한 삶을 살 수 없게 창조된 것이다. 생명을 다해 좇을 대상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리스도 지체안에 많은 사람들이 ‘영적 권태’로 고통받고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좇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V. 믿는 자들이 누리는 두 종류의 영적 안식

A. 죄사함(용서)의 안식: 

예수님 안에서 값없이 받은 선물로, 온전히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경험한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완성하신 일로 죄사함을 받고, 안식한다.

B. 친밀감의 안식: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좇을때 경험하게 된다. 삶의 최고의 목적이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누리는 것이라고 결론 내리기 전까지 우리는 진정한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 

성 어거스틴(서기 354-430년)은 다음과 같이 썼다.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찾기 전까지 인간은 안식을 얻지 못한다.” 우리는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할 때만이 인생의 궁극적 목적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야 말로,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에게 평강과 행복을 가져다 주는 인생의 최고 목적이다. 죄사함의 확신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목적과 행복을 찾으려 애쓴다. 이것은 단순히 천국에 들어 가느냐, 못 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 땅에 우리가 왜 존재하며, 또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C. 우리 마음의 한 구석에는 친밀감이 주는 안식에서만이 충족될 수 있는, 하나님이 형성하신

공백이 있다. 

삶에서 이런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될 때, 우리는 성적 속박이나, 중독, 쓴뿌리 등에 더 쉽게 빠질 수 있는 취약점을 가지게 된다.

VI. 한 분의 청중(AUDIENCE OF ONE)앞에 사는 삶

A. 비엔나의 웅장한 콘서트 홀에서 처음으로 연주하게 된 한 콘서트 피아니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수 천명의 청중앞에서 그의 첫 콘서트를 마쳤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긴 기립 박수를 보냈다. 

얼마 후, 그는 한 기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기나긴 박수 갈채를 받았을 때,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이었다고 느끼셨습니까?” 콘서트 피아니스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 때, 기쁘기는 했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모두 제자리에 앉았을때, 꼭대기 발코니 끝에 앉아 계시던 지긋한 나이의 노인분이 제게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그 때가 제 삶의 최고의 순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지난 30년 동안 저를 가르치셨던 스승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제게 한 번 고개를 끄덕이시는 것이 제게는 수천명이 보내는 박수 갈채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B. 우리는 ‘한 분의 청중’ 앞에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주님으로 부터 받는 고개 끄덕임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마음에 위대한 능력을 부여해준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받는 그 어떠한 인정보다도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VII. 실제 적용: 하나님 말씀의 입맞춤을 구하라

A. 하나님 말씀의 입맞춤을 부르짖는다는 것은, 한 분의 청중앞에 사는 것과도 같은 실재를 말한다.

B. 하나님이 주실 가장 깊은 것들을 받을 마음의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도하고 묵상하며 읽어 나갈 때,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입맞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C. 시험이 닦쳐올 때, 우리는 주님앞에 이 진리를 고백해야 한다.

 “이 죄에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제게 입맞추게 해주세요. 저는 하나님 말씀의 입맞춤을 받아야만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 정체성을 말해주기 때문 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잘못 대할 때, 다음과 같이 선포해야 한다. “나는 세상적인 명성과 명예를 위해 살지않는다. 나는 하나님 말씀의 입맞춤을 위해 산다.

===4장 아가서 줄거리 개요 (An Overview of the Storyline in the Song of Solomon)

I. 아가서: 거룩한 입맞춤 & 신부의 삶의 비전 (아 1:2-4)

A. 아가서의 주제는 예수님과 깊은 친밀감을 누리고, 주님과 성숙한 동역으로 달음질 하는 신부의 영적 여정이다. 

신부는 하나님 말씀의 입맞춤을 심령에 경험하면서, 이 두가지 실재 가운데 성숙하게 된다.

2 내게 (말씀으로)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너는 나를 인도하라(친밀감)! 우리가 (사역에) 너를 따라 달려 가리라 (아 1:2-4)

B. 아가서는 크게 두 단락으로 나뉜다. 

아가서의 전반부인 1- 4 장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기업(유업)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후반부인 5-8 장은 우리 안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기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II. 하나님 은혜의 역설로 시작되는 신부의 여정 (아 1:5-11)

5⋯내가 비록 (심령이) 검으나 (하나님께는) 아름다우니⋯ 6 나의 포도원(마음)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아 1:5-6)

A. 믿음의 역설이란, 심령은 비록 검으나, 우리는 하나님께 아름답고 사랑스럽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이 두가지 진리를 다 알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우리의 죄성만을(검은 심령), 또, 어떤 이들은 우리의 아름다운 존재성만을(그리스도 안에서 사랑받음) 강조하는 경우가 있다.

B. 연약함에도, 우리가 하나님앞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데에는 4 가지 이유가 있다.

1. 하나님의 인격: 

주님은 그분의 백성들을 향한 온유한 사랑으로 충만하시며, 그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 보신다. 아름다움은 바라보는 자의 눈에 있다.

2. 의의 선물: 

우리는 값없는 선물로 예수님의 ‘의(rightousness)’의 아름다움을 받았다.

21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3. 자원하는 심령: 

거듭날 때, 성령님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진실한 마음과, 자원하는 순종의 심령을 우리에게 나눠주셨다.

15 너희는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4. 우리의 영원한 부르심: 

우리는 영원토록 예수님의 신부로 살게 된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을 이미 보고 계신다. 수십억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성숙한 신부로 온전히 순종하게 될 우리의 모습을 보신다.

C. 신부에게는 예수님을 더욱 열망하는 절규가 있다. 

신부는 주님이 심령을 채워주시기를 갈망한다.

7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 (아 1:7)

D. 예수님은 신부를 향해 온유한 마음을 나타내시며, 신부의 진실함을 재확신시켜 주신다 (아 1:8-11).

8 ⋯여인 중에 (가장 아름다운) 어여쁜 자야⋯ (아 1:8)

III. 하나님의 아름다움 안에 있는 신부의 정체성 (아 1:12 - 2:7)

A. 신부는 예수님의 아름다움과 주님을 알아가는 기쁨에 대한 계시를 갖고 있다(시 27:4).

16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아름답고), 화창하다(시 1:16)

B. 신부는 하나님의 눈에 ‘아름다운 장미’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

1 나는 샤론의 수선화(장미)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아 2:1)

C.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주님의 역사의 ‘그늘’ 아래서 안식하는 신부에게 예수님은 기쁨을 부어 주신다. 

신부는 주님의 상에서 먹고, 탁월한 주님의 리더십 ‘깃발’ 아래 거하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최고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바로 이 부분 즈음에서, 신부는 ‘사랑앓이’를 하게 된다. 여기서, 신부의 삶의 목표는 ‘영적 행복’이다. 영적 행복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최절정이 된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신부의 목표는 모든 희생과 대가를 치르더라도 ‘주님의 기업’이 되고자 하는 삶으로 바뀌게 된다.

3⋯ 내가 그 그늘 (십자가에서 완성된 일로 안식하며)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4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리더십)로구나 5너희는 ⋯내 힘을 돕고 ⋯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 (아 2:3-5)

IV. 안락의 지대(COMFORT ZONE)에 오는 도전(아 2:8-17)

8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9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10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14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17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때에 돌아와서 ⋯(아2:8-17)

A. 여기서, 예수님은 산들을 아주 쉽게 달리고 넘어오는 모습, 즉, ‘지상 최대 명령(the Great Comission)’을 성취하기 위해 역사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신다. 

산들은 (인간적인, 악한) ‘장애물들’을 말한다. 예수님은 모든 장애물들을 쉽게 정복하는 능력을 갖고 계신다. 그러나, 아직, 신부는 주님의 ‘그늘’ 아래 앉아, 주님의 잔치상에서 ‘사과’를 즐기는 데에만 익숙해 있다(아 2:3-5).

B. 본문에서, 신부는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고, 예수님 홀로 산으로 되돌아 가라고 말한다(아2:17). 여기서 오는 고통스런 신부의 타협은 반항이 아닌, ‘미숙함과 두려움’ 으로 생기게 된 것이다. 온전한 순종에는 ‘고통과 대가’가 따르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주님을 사랑하지만,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 없다고 생각한다.

V. 하나님의 사랑스런 훈육(DISCIPLINE)을 경험하게 되는 신부(아 3:1-5)

1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2 이에 내가 일어나서 ⋯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4 ⋯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 놓지 아니하였노라 (아 3:1-4)

A. 예수님이 모습을 감추시면서, 신부는 하나님의 훈육을 경험하게 된다. 

아가서 2 장의 달콤함은 이제 사라져 버렸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훈육하신다(히 12:5-12). 사랑의 훈육은 우리를 ‘교정’하시기 위한 것이지, 하나님이 우리를 거절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것에서 우리의 손가락을 ‘떼어놓을 것’이라 약속하신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신부’로 동역하는 데 있어 부족하게 되는 것을 허락치 않으신다.

B. 이 후에, 신부는 주님께 순종하기 위해 자신의 ‘안락의 지대’를 떠나 곧 ‘일어나게’ 된다(아3:2). 신부의 순종을 보신 예수님은 신부에게 다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시게 된다 (아 3:4).

VI. “안전한(SAFE)의 구세주” 예수님에 대한 계시를 얻게 되는 신부(아 3:6-11)

주님은 ‘100 % 순종하기에 신뢰할 수 있는 분, 예수님’으로 모습을 드러내신다. 신부는 “100%” 순종할 때만이 자신이 삶의 안전지대임에 거할 수 있음을 믿게 된다. 예수님과 함께 ‘물위를 걷는 것’이 주님 없이 ‘홀로 배에 머무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다는 뜻이다.

VII. 신랑 하나님의 예언적 마음(아 4:1-8)

1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름답고)도 어여쁘다 ⋯(아 4:1)

A. 왕은 술람미 여인이 자신에게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그는 그 여인의 삶에 피어나는 8 가지 미덕들을 기술한다(아 4:1-5). 예수님은 예언적으로 신부의 “싹트는 미덕들”을 선포하신다. 예수님은 신부에게 아직 없는 미덕들을 이미 있는 것처럼 선포하신다(롬 4:17). 예수님은 신부의 실패뿐만 아니라, 신부의 열망의 절규 또한 보시기 때문이다. 매일 겪는 육의 싸움뿐만 아니라, 영혼의 부르짖음을 보시고 우리를 정의하신다.

B. ‘온전히 헌신하는 삶’은 성숙한 사역을 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기본이다(아 4:6).

처음에 신부는 ‘산’으로 부르시는 예수님의 초청을 거절했다(아 2:9-10). 그러나, 이제 바뀐 영적 계절에서 신부는 주님을 따라 산으로 가겠다는 헌신을 하게 된다. 신부는 이제 순종의 ‘시작단계’에 접어들은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신부는 점차 성숙해지게 된다.

6⋯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아 4:6)

VIII. 신랑 하나님의 빼앗긴 마음 (아 4:9 - 5:1)

A. 왕은 ‘신랑’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마음은 신부를 향한 열망에 사로잡혀 있다. 예수님은 신부를 향해 뜨거운 열정을 품고 계신다.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계시는 신부가 십자가를 온전히 질 수 있도록 무장시켜 준다(아 4:9). 예수님은 신부의 성품을 보시며, 기쁨을 나타내신다(아 4:10-11).

9⋯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번 보는 것⋯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10⋯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아4:9-10)

B. 예수님은 신부의 순결함 7 가지를 말씀하신다(아 4:12-15). 

왕의 정원(동산)은 오직 왕만 출입할 수 있는 개인 소유지로, 더러운 물이 있는 일반 정원(동산)과는 달랐다. 우리는 순결함을 위한 갈망을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12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 로구나(아 4:12)

C. 신부의 ‘동산(정원)’은, 하나님 앞에 사는 신부의 ‘마음’을 말한다. 

신부는 삶에 하나님의 향기가 배가 되기를 원한다. 북풍은 겨울에 부는 바람으로, 살을 파고드는 듯한 차가운 바람을 말한다. 남풍은 여름에 부는 따스하고 상쾌한 바람을 말한다. 신부는 더 이상 하나님의 시험(연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신부는 예수님이 그녀 안에 있는 그분의 기업(유업)을 누리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의 사랑하는 자여, 주님의 정원(동산)에 임하시옵소서”라고 간절히 부르짖는다.

16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아 4:16)

D. 전반부 4 장에서, 신부는 자신의 유업(그녀의 정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반부 4장에서는, 자신 안에 있는 예수님의 유업이 신부의 초점이 되었다. 

이제부터, 신부의 ‘마음’은 자신의 동산이 아닌, 예수님의 동산(정원)이 되었다. 이제, 신부는 자신의 삶을 새롭게 정의하게 되며, 예수님은 “나의”라는 소유격을 아홉번이나 사용하시게 된다.

1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나의) 향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나의)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아 5:1)

IX. 성숙을 위한 궁극적 시험 두가지 (아 5:2-8)

2⋯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아 5:2)

A. 예수님은 길고도 고독한 밤을 보낸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의 십자가를 끌어 안으셨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의 슬픔과 고난을 가진 분으로 신부에게 다가오셔서(아 5:2), 고난에 함께 동참할 것을 권하신다(빌 3:10).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 3:10)

B. 예수님은 신부에게 “겟세마네의 모습으로 네게 임하도록 문을 열어다오”라고 요청하신다. 

예수님은 신부의 성공과 행복을 위한 ‘디딤돌’을 넘어, 신부의 삶의 목표가 되길 원하신다.

C. 신부는 자신의 ‘더러운 옷’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은혜로 자신의 발을 씻겠다는 순종을 보인다(아 5:3). 

이제 신부에게는 예수님을 100% 순종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래서, 차가운 ‘북풍’을 요구했던 것이다(아 4:16). 신부는 예수님의 사랑이 그리워, 그 자리에서 즉시 일어나게 된다. 신부의 마음에는 ‘몰약’이 있는데, 이것은 죽기까지 예수님을 좇겠다는 ‘헌신’을 말한다.

4 내 마음이 동하여서 5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 빗장에 듣는구나(아 5:4-5)

D. 신부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 첫번째 시험을 치르게 된다(아 5:6). 

이 시험은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누리고자 하는 신부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예수님의 부재는 아가서에 두 번 나온다(아 3:1). 그러나, 이번에는 (아 3:1-2 처럼) 신부의 불순종과는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신부의 성숙한 순종을 위한 시험인 것이다. 

중세시대 설교가들 중에는 이 계절을 “영혼의 어둔 밤(dark night of soul)”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6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아 5:6)

E. 두번째, 신부는 자신의 사역이 사라지는 시험을 맞게 된다(아 5:7). 

파수꾼과 리더들은 신부를 치고, 상처를 주며, ‘신부의 옷(영적 커버링)’을 취해버려, 신부가 더 이상 사역을 할 수 없게 끔 만들어 버린다. 신부의 사역은 이제 없어져 버렸다. 이제 신부는 어떤 반응을 보이며 주님께 나아가게 될까?

7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아 5:7)

F. 주님은 신부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그렇게 간절히 원하는 것들을 못 얻는다 할지라도 나의 것이 되겠니? 나의 임재를 느낄 수 없어도 나의 것이라 고백하겠니? 주위환경이나 상황이 네게 실망을 안겨준다 해도 나를 사랑하고 신뢰하겠니?” 신부는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저는 모든 사랑을 다바쳐 주님의 것입니다.” 신부는 겸손함으로 (영적으로 더 미숙한) 예루살렘의 여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아5:8)

G. 요약: 예수님은 자신이 계신 곳, ‘겟세마네’로 신부를 부르셨다. 신부는 순종하며 응답한다. 

예수님은 신부의 삶의 비전, 즉, 주님께 가까이 가고 주님과 함께 달려가는 삶을 위해 두 종류의 시험(연단)을 신부에게 주신다(아 1:2-4).

2 내게 (말씀으로)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4 너는 나를 인도하라(친밀감) 우리가 너를 따라 (사역에 함께) 달려 가리라(아1: 2-4)

X. 두가지 시험에 대한 신부의 반응 (아 5:9 - 6:5)

A. 예루살렘 여자들은 신부에게 질문을 하게 되는 데, 쉽게 의역하면 이렇다.

 “네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길래 우리에게 주님을 찾아달라고 부탁하니? 주님은 너를 버렸어. 너로 부터 임재를 거둬가셨단 말야(6절), 그리고, 봐봐! 지도자들이 네 사역을 빼았고, 네게 상처 주는데 주님은 뭐하시니? 가만 놔두시잖아”(아 5:7).

9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아 5:9)

B. 신부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면서, 예수님의 광대한 아름다움을 10 가지로 설명한다(아 5:10-16). 

본문은,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선포해 주는 성경 본문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본문 중의 하나다.

10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눈부신)⋯만 사람에 뛰어난다 11 머리는 정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 같이 검구나 12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13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 14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듯 하구나15 다리는 정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같고 형상은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16 입은 심히 다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일다(아 5:10-16)

XI. 시험의 계절을 잘 마친 신부를 칭찬하시는 예수님(아 6:4-10)

A. 신부의 두가지 시험은 이제 끝났다. 

예수님은 신부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다시 쏟아 붓으시면서, 신부의 아름다움을 칭찬하시면서 오랜 침묵을 깨뜨리신다. 예수님은 신부가 디르사(북 이스라엘의 수도)와 같이 아름다우며, 예루살렘(이스라엘의 영적, 정치적 수도)과 같이 사랑스럽다고 선포하신다. 

예수님은 신부가 깃발을 높이 든 ‘승리의 군대’와 같이 놀랍다고 선포하신다. 고대의 군대는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깃발을 높이 휘날리며 행진했다. 신부는 가장 큰 마음의 적(자신과의 싸움에서)을 이긴 것이다.

4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아 6:4)

B. 예수님을 향한 신부의 아낌없는 사랑에 주님은 “정복”당하시게 된다. 

주님을 향한 신부의 헌신의 ‘눈’이 왕이신 주님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킨 것이다. 지옥의 모든 군대도 예수님을 정복할 수 없지만, 시험 당할 때에도 주님을 향해 진실한 마음을 지킨 신부의 눈은 주님의 마음을 “정복”하게 된다.

5 네 눈이 나를 놀래니(정복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아 6:5)

C. 예수님은 신부의 성숙함과 헌신을 칭찬하신다 (아 6:5-7)

D. 왕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궁정안에서 신부의 귀중함과 영광을 설명하신다. 

예수님의 하늘궁정에는 수없이 많은 스랍들, 체룹들, 천사장들, 천사들이 예수님을 섬기고 있다.

8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9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 뿐이로구나 그는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아 6:8-9)

E. 성령님은 신부의 영광의 면류관을 말씀하신다 (아 6:10).

10 아침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 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아 6:10)

XII. 핍박받는 신부를 변호(아 6:11-7:9).

A. ‘주님 앞에 아름다운 신부’라는 정체성의 계시를 가지고 살게 되면서, 신부는 핍박받게 된다. 

그러나, 모든 교회(아 6:11)를 섬기고자 하는 성숙한 사랑과 헌신이 신부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게 된다(아 6:12).

B. 그 가운데, 신부는 교회안에 몇몇 사람들로 부터는 진실한, 좋은 반응을 얻기도 하지만(아 6:13), 동시에, 어떤 사람들로 부터는 적대 반응도 받게된다(아 6:13).

13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14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아 6:11-14)

C. 그러나, 영적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과(아 7:1-5), 예수님은 신부를 차례로 변호해 주게 된다(아 7:6-9)

XIII. 예수님과 성숙한 동역을 이루는 신부(아 7:9-8:4).

신부는 순종을 통해, 예수님과 ‘성숙한 신부’의 동역을 하게 된다(아 7:9-10). 신부는 더 큰 능력을 구하는 ‘중보기도’에도 신부적 동역을 표현한다(아 7:11-13). 신부는 ‘사역’ 하는 가운데서도 사람들앞에 담대하게 주님과의 동역을 표현한다(아 8:1-2). 신부는 주님과의 온전한 ‘연합’을 위해 ‘신부의 동역’을 표현한다 (아 8:3-4).

XIV. 성숙한 사랑의 인(아 8:5-7)

예수님은, 신부가 마음에 ‘거룩한 불의 인(seal)’을 받고, 거룩한 질투의 사랑으로 주님과 함께 살아가도록 신부를 초청하신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기에, 그 불을 신부의 마음에 나눠주고 싶어 하신다. 이 불은 우리의 마음을 인치는 주님의 ‘초자연적 사랑’이다. 이 거룩한 ‘인’은, 사랑의 불을 꺼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권능을 부여 해준다.

XV. 신부의 마지막 중보기도와 계시(아 8:8-14)

A. 신부는 교회(아 8:8-9)와, 예수님의 재림(아 8:14)을 위해 중보한다. 

아가서 8:8-9 에서, 교회를 향한 신부의 ‘사도적’ 열정을 엿볼 수 있다.

B. 아가서 8:10 에서, 신부는 자신이 ‘성벽’(동기), ‘망대’(양육할 수 있는 초자연적 능력), 그리고 ‘화평을 얻은 자’(마음의 장애물이 제게됨)와 같다는 확신을 같게된다.

C. 아가서 8:11-12 에서, 신부는 사람들 눈치를 보지 않고 주님 앞에 사는 능력과 즐거움을 표현한다. 

신부는 ‘하나님 앞에 사는 삶’에 대한 계시를 가지고, 자신의 가치를 ‘영원(Eternity)’이란 뿌리에 두게된다(아 8:11). 신부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적 성숙함’에 대한 계시를 갖게 된다(아 8:12).

D. 예수님은 신부에게 ‘마지막 위임’(아 8:13-14)을 부여 하시고, 신부는 긴박함으로 중보하게 된다.

13 너 동산에 거한 자야 (주님의 신부) 동무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나(예수)로 듣게 하려무나 14 나의 사랑하는 자야 (예수님)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아 8:13-14)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계 22:17)

===5장 세상의 포도주 보다 나은 하나님의 사랑 (아 1:2) (God’s Love is Better than the Wine of this World)

I. 복습: 하나님 말씀의 입맞춤에 대한 이해

내게 (말씀으로)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아 1:2)

A. 신부는 왕보다 더 큰 권세를 가진 분께 간구한다. 

“그로 하여금⋯(영어역)” 다시말해, 신부는 직접 왕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분께 요청한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주님의 말씀으로 제게 입맞추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게 은혜를 부어 달라는 믿음의 기도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우리의 삶의 최우선 순위이기 때문이다.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7-38)

B.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말한다. 

지난 3000 년동안, 랍비들은 이 구절에 있는 “입맞춤”을 “토라의 입맞춤”으로 해석해 왔다.

3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 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 (신 8:3)

C. 아가서의 주제는 ‘하나님 말씀의 입맞춤’이 심령 깊은 곳까지 임하기를 간구하는 신부의 부르짖음으로, 가장 깊고도 친밀하게 주님의 말씀을 경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님의 말씀은 신부를 향한 왕이신 예수님의 감정을 보여주며,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 3 가지를 깨워준다 (하나님께 받는 사랑, 하나님을 향한 사랑, 다른 이들에게 흘러나가는 사랑).

II. 하나님 은혜안에 있는 탁월한 즐거움

A. 주님의 말씀의 입맞춤을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면서, 신부는 간구하는 이유를 설명하게 된다. 

신부는 삼위일체의 제 2 격이신 예수님께 직접 이렇게 말한다, “주님의 사랑(애정)이 포도주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애정을 경험하는 것이 이 타락한 세상의 포도주(즐거움)를 경험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2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아 1:2)

B. 신부는 포도주를 상징적으로 사용하는 데, 이것은 포도주가 사람의 “기분을 들뜨게” 하기 때문이다. 

혼인에서 사용되는 포도주는 “세상의 축하주”를 상징한다. 포도주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기쁨’의 술이다. 이것은 세상의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사람들을 ‘취하게’ 만드는 것들을 말한다.

1. 하나님의 축복을 말하는 “선한 포도주”가 있는가 하면, 죄악을 말하는 “악한 포도주”도 존재한다. 

신부는 “주의 사랑이 죄악 보다 더 낫습니다”라는 것을 넘어선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주의 사랑이 죄악보다 나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신부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 것이다, “주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들보다도 더 나은 것입니다.”

2. 우리가 사는 환경가운데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선한 축복들 중에는 물질의 축복, 인간관계의 축복, 건강의 축복, 사역의 축복 등등이 있다. 

여기에 나온 ‘포도주’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 시대에)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경험을 말한다.

C. 하나님이 주시는 세상적 축복들도 좋지만, 그런 것들에만 우리의 마음이 쏠려서는 안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깊은 사랑보다는 물질이나 명성에서만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한다. 환경적인 축복만을 경험한 사람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점차 식어지게되게 된다(계 2:4-5).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 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 2:3-5)

D. 신부는 삶에서 복음의 “탁월한 즐거움”이 가지는 우선순위를 소개한다. 

이것은 신부의 ‘삶의 신학’과 ‘거룩의 추구’를 드러낸다.

2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아 1:2)..2⋯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더 기쁨을 주는 구나 (아 1:2, NIV 역)

E. “더 나은,” “보다 우월한,” 또는 “더 기쁨을 주는”은 하나님 마음(애정)에 대한 계시를 가지고 자라나는 데서 오는 ‘탁월한 즐거움(기쁨)’을 지적한다. 

이 탁월한 즐거움들은 ‘열등한 죄의 즐거움’과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은 열등한 죄의 즐거움으로 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해, 더 강력하면서도 탁월한 즐거움을 경험하게 하신다.

F. 예수님의 리더십아래 축하해야 하는 즐거움의 종류는 다양하다. 

즐거움에는 육적, 감정적, 정신적 즐거움들이 있다. 이것들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실 때, 영적으로, 육적으로, 정신적으로 굶주리게,또는 갈급하게 만드셨다. 우리 모두는 ‘행복’을 열망하며, 즐거움을 깊이 갈망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즐거움 자체가 죄악은 아니다. 불의한 데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죄악인 것이다.

G. 우리를 가까이 인도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주의 영광을 반영하는 ‘7 가지의 열망’을 우리 안에 창조하셨다. 모든 사람이 이 열망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열망들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영을 어떻게 만드셨는지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각각의 열망은 하나님의 인격을 반영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에, 이 열망들을 소유한다. 우리가 기쁨을 느끼는 것은 주님이 기쁨으로 가득찬 분이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행복을 느끼는 것은 주님이 행복을 느끼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7 가지 갈망” – 순전한 나드, 참조).

H. 이 인간의 7가지 열망들을 나열해 본다.

우리를 즐거워하신다는 확증을 얻고 싶은 열망, 매력적이고 싶은 열망, 아름답게 되고 싶은 열망, 위대하게 되고 싶은 열망, 부끄럼없이 친밀감을 누리고 싶은 열망, 마음을 다하고 열정적이고 싶은 열망, 깊고도 영원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은 열망. 

I. 이 열망들은 하나님이 전략적으로 우리 안에 넣으신 갈망들이기 때문에,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음식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안에 ‘굶주림’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분의 즐거움으로 우리를 만족시키시는 이유는, 우리안에 즐거움을 위한 ‘굶주림’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기쁨과 고통, 아픔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이 열망들 하나하나 모두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로 인도한다. 하지만, 원수도 이 갈망들을 사용해 우리를 흑암으로 인도하려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찾지 않으면, 이 열망들은 우리에게 허무함과 고통, 슬픔, 그리고 불만족만을 안겨주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공간”을 우리 안에 만드셨다.

J. 사단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즐거움을 모방하여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든다.

죄는 ‘순간적’인 즐거움을 준다. 의무감으로 죄를 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죄를 짓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보다 더 우월한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유혹의 힘은,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보다 죄가 더 큰 만족을 줄 거라는 ‘거짓 약속’을 주기 때문에, ‘죄의 유혹’, 또는 ‘유혹의 욕심’이라 불린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 엡 4:22)

13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히 3:13)

K.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은 ‘영적’ 즐거움이다. 

신랑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영적 즐거움의 ‘절정’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을 ‘취하게’ 만들며, ‘사랑앓이’를 하게 만든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의 삶으로 초청하시는 것은, 삶의 즐거움을 없애는 시험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다. 거룩함은 지루하고 따분한 고역이 아니라, 완전하고 영원한 즐거움으로의 초대다.

11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 16:11)

L. 신부는 아가서를 통해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탁월한 즐거움’이라는 주제를 전개한다.

3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아 2:3)

M. 복음의 충만한 진리를 맛보기 전까지는 죄가 최고의 즐거움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성령님이 주시는 ‘탁월한 즐거움’은, 열등한 죄의 즐거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세대에 첫계명을 최우선 순위로 회복시키고, 거룩한 백성들을 소유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주요 전략은, ‘탁월한 복음의 즐거움’을 맛보게 하시는 것이다.

N. 마지막 때 성도들은 주님의 위대함을 보며 예수님에 대한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며, ‘적그리스도’를 이기고 승리하게 될 것이다. 

순교자들은 ‘사랑의 승자들’이다. 유혹과 핍박가운데서도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끝까지 지킨 자들이기 때문이다.

또 내가 보니 … 짐승(적그리스도)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 (계 15:2-3)

O.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 경험하게 될 때,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은 ‘유혹과 핍박의 물’에 꺼지거나 엄몰될 수 없다는 부분이 아가서 후반부에 나온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때, 그 사랑이 ‘죄책감’이나 ‘타협’이라는 ‘홍수’에 꺼지거나 엄몰되서는 않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이 ‘엄몰’되어, 능력을 상실한 채, 꺼진 심령으로 살아간다.

7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찌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아 8:7)

P. 바울은, 이 시대의 모든 특권을 능가하는 경험이 바로 예수님을 경험하는 것이라 말했다.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8)

Q. 연인에게 주어지는 상급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연인은 일꾼보다 같은 일을 갑절로 해내면서도 ‘더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이외에는 그 어떠한 보상도 원치 않는다. 

일꾼이 연인이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 업무 목록표를 아예 던져 버리고 쳐다 보지도 않을 것이다! 연인은 스스로 자원하기 때문에 따로 목록표를 일일히 체크할 필요가 없다. 나는 주변에서 이렇게 가끔씩 일꾼이 연인으로 바뀌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 데,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다.

R. 우리는 남은 인생동안 힘을 다하며 다음의 질문에 현명하게 답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의 삶에 있어 다른 ‘축복들의 포도주’보다 얼마나 더 나은가?”

III. 애정에 근거한 순종: 예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며 순종하는 동기

A. “애정에 근거한 순종”은 예수님의 사랑(애정)을 경험하면서 흘러나오는 순종이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받은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강력한 순종의 형태로 ‘가장 깊고도 지속적인 순종’의 결과를 낳는다. ‘사랑앓이’를 하는 사람은 사랑을 위해 그 어떠한 고난도 다 감수하게 되기 때문이다.

B. “믿음의 순종,” 또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한 상태에서 드리는 순종도 필요하다.

하나님 말씀에 잘 나와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고 할 지라도 우리는 계속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C. “두려움에 근거한 순종,” 또는 “수치심에 근거한 순종”은 부끄러움을 당할것 같은 두려움, 또는 부정적인 대가를 치를 것 같은 두려움에서 흘러나오는 순종이다. 

이것도 성경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대가를 치를 것 같은 두려움이 죄를 저항하는 동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다시말해, 순종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접근 방법은 아니라는 뜻이다.

D.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대가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죄를 저항하는 데 더 효과적인 동기를 부여해준다. 

그 이유는? 죄의 순간적인 즐거움을 누리고 싶은 유혹이 징계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강력하기 때문이다. 

 죄의 대가에 대한 두려움은 죄를 짓고 싶은 우리의 마음을 억누르지 못한다. 오히려, 이 두려움은 우리가 더 다양하고 은밀한 방법으로 죄를 짓게 만든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그것이 주는 ‘쾌락’을 즐기기 때문이다. 우리의 심령이 굶주림에도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할 때 우리는 죄를 짓게 된다. ‘거룩한 삶’을 위한 우리의 씨름은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살려는 상황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E.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고아에게 멋진 바다가 보이는 리조트 호텔에 머물면서 별미를 즐기고 깨끗한 침대에서 잘 수 있는 휴가 티켓(쿠폰)을 준다고 상상해보자. 그런데, 그 아이가 비와 추위를 피하며 움추리고 자는 판자상자 밑에다 그 티켓을 그냥 아무데나 내던져 놓았다고 가정해 보자. 리조트 호텔과 멋진 바다를 즐기기는 커녕, 그 소년은 계속해서 이곳 저곳 쓰레기통을 뒤적거리며 썩은 음식만 먹고 살게 될 것이다.

F. 미국에서 유명한 크리스챤 작가였던 씨에스 루이스(C. S. Lewis)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앞에 영원한 기쁨이 주어졌음에도, 우리는 술과 섹스, 야망으로 어리석은 짓을 하는 냉담한 피조물이다. 우리는 이 무지한 아이와 같이 빈민가를 전전긍긍하며 쓰레기 같은 삶을 살기를 원한다. 멋진 바닷가에서 보낼 수 있는 휴가를 받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G. 우리는 죄의 유혹을 받을 때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 사실은 그것이 ‘썩은 음식’인데도 우리를 만족시켜 줄 것 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즐거움은 우리앞에 놓인 ‘잔치상’으로, 죄의 헛된 즐거움을 찾는 우리를 건져낼 수 있는 ‘영적 즐거움’의 잔치상이다. 죄의 심령을 자유케 하는 방법은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은 죄가 주는 그 어떠한 즐거움도 초월하는 ‘탁월한’ 즐거움이다.

H. 그 동안 사람들이 거룩한 삶을 소개할 때, 죄의 대가에 대한 끝도 없는 ‘위협들과 경고들’을 주는 부정적 방법으로 소개해 왔다. 

하나님 말씀은 의도적으로 악한 반항(대적)에 대한 대가를 보여준다. 성경은 ‘하지말라’ 는 금지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이러한 율법과 규칙들이 우리의 심령을 초자연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I. 다수의 목회자들과 리더들은 사람들에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들의 목록을 지키게 하기위해, 수치심과 두려움을 사용하는 접근방식을 택한다. 

하지만, 결국은 순간적인 죄의 즐거움에 대한 유혹이 장기간 치르게 될 대가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강력하게 되어있다. 물론, 계속해서 죄의 대가들을 제시해야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특별한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죄로 인한 사회적, 영적 대가를 경고해 준다고 해서 그들이 포르노와 탐욕, 거짓말과 간음등을 멈추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J. 애굽의 왕자였던 모세는 부와 권력을 갖추는 육적 즐거움을 경험했었지만, 결국 그것 보다 더 ‘큰 부’를 택하게 된다. 

애굽보다 더 즐겁고 아름다우며, 초자연적으로 끌리면서, 모든 것을 만족시켜 주는 특별한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모세와 같이 ‘거룩함의 즐거움’을 탐구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영혼을 만족 시켜주는 분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믿음으로 모세는 …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부)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히 11:24-26)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8:18)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 4:17)

IV. 하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A.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애정)만큼 주의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3 번이나 강조하셨다(요 14-17 장). 

이 진리 하나만으로, 우리 모두에게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총애를 받는 자”로 바라볼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요 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 17:23)

이는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26)

B. 우리의 소중함과 가치를 말해주는 궁극적 성명문은 바로,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애정)만큼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C.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정도’만이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느끼시는 지를 가늠할 수 있는 정확한 ‘척도’가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깊은 갈망과 즐거움, 기쁨과 열망을 담은 강력한 실재다. 하나님의 사랑은 열정이 메마르고 차가운 종교적 개념이 절대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정도가 함축하고 있는 방대한 의미를 잠시 숙고해보자. 이러한 진리가 언급된 적은 없었다.

D. 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바다와 같은 사랑의 신비란! 복음이란 방대한 바다와 같은 거룩한 사랑안에 사는 삶으로의 초대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만큼 우리가 그 사랑을 받게 될 때, 하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즐거움을 알게 될 것이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 (엡 3:17-19)

E. 예수님의 제자들은 진실한 마음을 지니기는 했지만, 아직 영적으로 미숙한 자들이었다.

예수님은 그 날밤, 제자들이 자신을 배반할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아셨음에도, 그 연약한 자들(제자들)에게 사랑을 확증시켜 주는 말씀을 하셨다(마 26:31). 제자들은 엄청난 죄책감과 수치심을 겪게 될 참이었다. 그 날밤, 예수님을 배반할 제자들, 미숙하고 어릴뿐만 아니라, 야망이 가득찬 제자들을 보시면서도,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열정은 전혀 식지 않았다. 그 상황가운데서도 그들에게 평안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이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느끼시는 지를 알려 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은 잘 알고 계셨다. 인간을 감동시키는 계시들 중 가장 강력한 계시가 바로 이 계시이다.

F.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한 당신의 사랑에 대한 계시를 주셔서, 죄책감과 실망, 유혹과 핍박, 그리고 장래의 사역에서 받게 될 압력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그들을 준비 시키셨다.

G. 바리새인들과 로마인들이 세례요한과 예수님을 죽이면서 승리한 것처럼 보였을 때, 제자들은 실망감으로 억장이 무너질 거라는 것을 예수님은 미리 알고 계셨다.

‘예수와 그 제자들의 복음 운동’은 마치 끝난 것처럼 보였다. 가까운 장래에 그들은 고문 받고 투옥될 판이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과연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실 수 있을까?

H. ‘유혹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최선의 방법은 하나님을 즐기고 기뻐하는 것이다. 

죄를 이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주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낫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 즉,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이것을 경험하기 위해서, 아가서를 경건의 기도로 바꾸어야 한다.

I.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는 진리의 말씀들의 묵상을 삶의 우선순위로 삼아야한다. ‘마음의 건강’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연약함이 드러나는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고 느끼시는 지를 바로 알게 될 때, 우리는 가장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 계시는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 계시는 주님의 사랑안에 확신을 갖게 해주며, 연약함 가운데서도 주님께 우리의 심령을 열게 해 준다. 사실, 수많은 진실한 신자들이 죄책감과 굳게 닫힌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다.

J. 내가 저술한 책중에 ‘예수님을 향한 열정’이란 책이 있는데,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많이 받는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향한 열정을 더 갖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마음에 임해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능력을 주사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게 되기를 바라시는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먼저 자신을 드러내신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즐기고, 좇는) 것은 주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즐기시고, 좇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요일 4:19)

===6장 탁월한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 (아 1:2) (God’s Superior Love: How God Feels about Us)

I. 복습: 하나님의 은혜 안에 누리는 탁월한 즐거움들

A. 신부는 하나님 말씀이 주는 “우월적 즐거움”을 언급했다. 

이것은 ‘거룩’에 관한 신부의 신학을 나타낸다. 

신부는 ‘하나님의 마음(애정)’에 대한 계시에서 오는 우월적 즐거움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께로 인도하는 열망들, 즉, 우리 안에 주의 영광을 반영하는 일곱가지의 열망들을 창조하셨다.

2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아 1:2)

B. 이 단원에서, 우리는 “포도주보다 나은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7 가지 원칙을 알아 볼 예정이다. 

우리의 연약함이 드러나는 가운데서도 뜨겁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애정(마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기본 원칙들이다(전체 8 장의 사랑의 노래인 아가서는 신부의 여정을 통해 이 원칙들을 발전시킨다). 

천국에 가있는 성도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현재 이 땅에 살고 있는 연약하고 상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실거라고 믿는 일은 사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요일 3:1)

C. 하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아들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만큼 그분의 백성들을 사랑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9)

아버지께서 ⋯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3)

D.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II. 기본 전제: 영적 미성숙은 대적(반항)이 아니다

A. 하나님을 향한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주님은 여러 감정을 느끼신다. 

어떤 이들은 그들을 향해 하나님이 화가 나셨는지, 슬퍼하시는지, 기뻐하시는지 알지도 못한 채, 혼란한 심정으로 살아간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인해 기뻐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화가 나셨을 거라 생각하며, 헛된 죄책감 속에 살기를 우리는 원치 않을 것이다. 또, 그와는 반대로, 우리가 타협하는 부분을 주님이 슬퍼하심에도, 주님이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기뻐하실 거라 확신하며 사는 것도 원치 않을 것이다.

B. 우리는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의’와 ‘은총’을 받는다(롬 3:21-31).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진실한 회개가 필요하다.

C. 회개란, 신앙 여정의 매 계절마다, 우리가 “아는 만큼의 빛”에 따라 죄로 부터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심령의 태도 변화를 말한다. 

회개란, 흑암을 따르던 것을 깨고, 우리의 말과 생각, 행동이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D. 그러나, 영적 미숙은 대적과는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두가지를 혼동한다. 

때때로, 이 두가지가 겉으로 같아 보이는 것 같지만, 마음의 근원은 서로 다른 데서 비롯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도 보시지만, 행동보다는 마음의 중심을 더 중요하게 보신다.

E. 예수님을 진정 사랑하는 ‘연인’은 자원하는 심령으로 순종하려 한다. 

아직 성숙하지는 않지만 진실한 마음을 지닌 사람은 주님이 빛으로 조명하시는 ‘실패(타협)의 영역’을 회개한다. 그러나, 대적하려는 사람은 즉각적인 순종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께 “NO”라고 대답한다. 그와 더불어, 머릿 속에 생각하고 있던 죄를 짓는 사람은 이미 계획된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에, 영적 미숙함 가운데 잘 모르고 짓는 사람의 죄보다 하나님께는 훨씬 더 심각한 죄가 된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F.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우리의 회개와 순종,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약하고, 금방 깨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는 진실한 것이라는 것이다. 

연약한 사랑은 절대 거짓 사랑이 아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그분을 향한 우리의 연약한 사랑까지도 소중하게 여기신다.

G. 그러나,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하려는 마음은 성숙한 순종을 달성한 것과는 다르다.

온전한 순종을 위해 달음질하는 것과, 달성하는 것은 다르다는 말이다. 주님은 우리가 죄를 회개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를 기뻐하신다. 물론, 우리의 순종이 성숙해 지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소요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 사랑한다고 해서 금방 성숙해 지는 것은 아니다.

H. 죄를 지었을 때, 우리는 그 죄를 속히 회개하고, ‘죄와의 전쟁을 선포’함으로 주님께 우리의 진실성을 보여야 한다. 

물론, 진실로 회개했다 하더라도 “또다시 죄를 짓지 않는 완전한” 삶을 부여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영적 미숙함을 주를 대적하는 것으로 치부하지는 말라.

I. 위선자란, 자신이 말한 것에 대해 좇을 의지나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자를 가리킨다.

비록 연약(미성숙)하지만 싸워나가는 자는, 아예 포기하여 가망성을 잃은 위선자(대적자)와는 다르다.

J. 하나님은 순종하기를 바라는 우리의 진정한 갈망과 부르짖음을 기뻐하신다.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진정한 갈망은 죄를 이기는 ‘승리의 초석’이 된다. 이러한 갈망을 갖게되는 것도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역사다.

K. 하나님은 대적과 영적 미숙을 혼동하지 않으신다. 

(구약 율법은 정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을 구분했다: 진흙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양과 돼지). 정한 동물, 부정한 동물의 예는 이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양(정한 동물)과 돼지(부정한 동물) 둘 다 진흙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L. 이것을 혼동하여 사람들에게 가르치면, 그들을 죄책감에 빠뜨릴 수 있게 되며, 그들의 믿음에 상처를 입힐 수도 있게 된다. 결과적으로, 성령의 깨달음으로 확신을 얻어 하나님 안에 더 깊이 가게 하는 결과와는 다른 정반대의 결과를 낳게 된다.

M. 주님은 ‘제자들의 영적 미숙함’을 ‘바리새인들의 대적’과 아주 다르게 보셨다. 

다윗의 죄가 사울의 죄보다 더 심각한 것처럼 보였음에도,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이 끊이지 않았다. .....이유는? 죄를 지었을 때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도 마음이 아팠다. 다윗은 자신의 죄가 드러나는 것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사울은 죄를 지었을 때, 자신의 죄가 드러나고 잡힐 때까지 계속 죄를 지으려 했다. 실제로는 계속 대적하면서 겉으로만 외적 회개를 보였던 것이다(삼상 15:22-23).

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시 23:6)

N. 하나님의 자비로 회개한 후, 곧바로 우리는 다시 ‘일등 시민’으로 하나님과 새출발 할 수 있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정, 의의 선물, 그리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려는 진정한 마음의 부르짖음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

O. 진정으로 회개한 후, “지움 버튼”을 누르면 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대가를 치르셨기에, 우리는 주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앞에 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삶에 존재하는 죄의 ‘견고한 진’들의 생성절차와 근원을 찾아 “지움버튼”을 누르는 것(내적 치유, 축사 사역-역자주)과는 매우 다르다.

P.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연인’이다. 

죄책감은 우리의 행동이 틀렸다고 지적한다. 수치심은 우리의 인간됨이 틀렸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질문을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려 고투하는 죄의 노예인가 아니면, 죄와 씨름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연인인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실패를 보고 자신을 정의한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역사로 인해, 우리는 아무리 악한 일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더 나은 자들이다 .

III. 원칙 #1: 하나님은 불신자들도 사랑하시고 축복하신다

A. 불신자들이 하나님에게 전혀 무관심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대적할 때도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신다(마 5:45).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B. 하나님은 악한 자들도 축복하신다. 그러나, 주님이 축복하신다고 해서, 주님이 그들의 죄악을 인정하신다는 뜻은 아니다.

45⋯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

C. 하나님은 대적하는 자들에게 진노하시며, 회개치 않는 자들을 용서하지 않으신다(에서, 사울, 등등).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IV. 원칙 #2: 하나님은 미숙한 성도들도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신다

A. 하나님은 불신자도 사랑하신다. 그러나, 오직 믿는 자들만을 즐거워 하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회개하는 순간부터 우리를 기뻐하신다. 우리가 영적 성숙을 달성하기 아주 오래전 부터, 주님은 우리의 진정한 회개를 통한 성장과정을 보시면서 우리를 향하여 미소를 지으신다.

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5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7⋯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4-7)

B. 예수님은 탕자들이 회개하는 날, 그들을 향해 긍휼한 마음을 보이신다. 

가장 값비싼 의복을 그 아들에게 입히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에 대한 즐거움과 기쁨을 나타내셨다(눅 15:22). 물론, 회개하며 돌아온 탕자는 아직 미숙할 뿐만 아니라, 삶의 많은 영역에서 변화가 필요하다.

내가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죄를 얻었사오니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 15:18-22)

C. 하나님은 우리의 미(성)숙함 가운데서도 우리를 기뻐 하신다. 주님은 다윗이 회개한 날 그를 기뻐하셨다.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 하셨도다(시 18:19)

D.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우리의 최선의 노력에도 금이 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연약할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스러운 존재다.

5 내가 비록 (마음이) 검으나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아름다우니 ⋯ (아 1:5)

E. 예수님은 역사상 그 어떤 인물보다도 ‘즐거움의 기름부음’으로 사셨던 분이다. 

즐거움은 주님 마음 속 가장 중심에 자리 잡은 감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분노로 가득차신 분, 또는 슬픔에 잠긴 분만으로 잘못 생각하며 관계한다.

9⋯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주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히 1:9)

F.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뻐하신다. 

우리가 진정 회개하며 살 때, (우리의 연약함가운데서도) 주님은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확신을 우리가 갖게 되길 바라신다. 이 확신을 가지고 살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달아나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가게 될 것이다.

⋯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믹 7:18)

24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롐9:24)

G.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할 때마다 다시 “일등시민”으로 살 수 있도록 새출발을 허락하신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 3:22-23)

H. 하나님은 우리보다 우리의 연약함을 더 잘 알고 기억하신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만큼의 징벌을 가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서도 우리를 향한 주님의 감정(사랑의 마음)을 바꾸지 않으신다.

10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4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10-14)

I. 요약: 하나님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특정 영역의 죄를 다루시는 동안에도, 일반적으로 우리의 삶을 보시며, 미소 지으신다. 

우리 안에 있는 미숙한 영역들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전체를 정의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정, 의의 선물, 그리고 예수님께 순종하려는 마음의 부르짖음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야한다.

V. 원칙 #3: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즐거움과 기쁨은 무조건적 승인이 아니다

A.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은 그분이 우리 안에 변화가 필요한 영역들을 그대로 간과하신다는 의미를 말하지는 아니다.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즐거움과 기쁨은 모든 것을 인정하고 허락하는 것과는 다르다. 주님은 잘못된 영역들을 교정하신다. 주님의 계획은 우리 안에 ‘사랑(거룩함)’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 하는 것이다.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히 12:10)

B. 하나님은 회개치 않는 성도들을 일정기간 온유함으로 인내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승낙’으로 혼동해서는 않된다. 

예수님은 두아디라에 있던 이세벨과 그 제자들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22⋯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재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계 2:21-22)

11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전 8:11)

C. 우리가 주님 앞에 죄를 정직하고 온전하게 직면하려 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사랑을 덜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 스스로에게 여러 면에서 손실을 입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즐거움과 계시의 영, 거룩한 친교와 영원한 상급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을 최소화 시켜 버리게 된다.

D. 우리를 회개로 인도하실 때, 하나님은 사랑으로 오래 참으시고 인내하신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롬 2:4)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 7 모든 것을 참으며 ⋯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VI. 원칙 #4: 하나님의 훈육은 거절이 아니다

A. 하나님의 교정은 우리를 거절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시는 ‘사랑의 증표’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 하시지만, 교정받는 자를 기뻐하신다.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잠 3:12)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 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히 12:6)

B. 예수님은 회개가 필요한 자들을 책망하셔도,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신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계 3:19)

C. 교정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아직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장기간 같은 죄를 계속 짓는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그 죄를 계속 짓게 놔두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교정하신다는 것은 아직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증표이다(롬 1:24-2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롬 1:24)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D.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할 때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37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저희 (이스라엘)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치 아니하였음이로다 38 오직 하나님은 자비하심으로 죄악을 사하사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 진노를 여러번 돌이키시며 그 분을 다 발하지 아니하셨으니 39 저희는 육체 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시 78:37-39)

VII. 원칙 #5: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짓는 백성들의 죄를 보고 슬퍼하신다

A. 요한 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은 ‘미적지근’한 신앙을 가진 자들을 입에서 토해 내실 거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은 버린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보시며, 아파하고 슬퍼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6)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 (엡 4:30)

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살전 5:19)

B. 하나님은 교정받는 자들을 보시며 가슴 아파 하시지만, 계속해서 그들을 사랑스럽게 보신다.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 그 사랑과 그 긍휼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사 63:9)

⋯내 마음의 사랑하는 것을 그 대적의 손에 붙였노니 (롐 12:7)

C. 우리가 죄를 온전히 대면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덜 사랑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에게 여러 면에서 손실을 입히게 된다. 

구원의 즐거움과 계시의 영,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과 다른 이들과의 친교, 그리고 영원한 상급을 받는 능력을 최소화 시켜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성된 순종과 하나님을 정직하게 구하는 삶을 통해서만이, 이 시대와 다가오는 시대에 우리의 최고의 부르심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게

된다.

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살후 1:11)

D. 우리를 향한 사랑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열심과 거룩한 질투를 보이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마음을 다하는 순종의 삶을 우리가 살게 되기를 하나님은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신다. 주님이 열렬히 주장하시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 더욱 깊은 관계를 가지며 놀랄만큼 성숙하게 되는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줄로 생각하느뇨 (야 4:5)

VIII. 원칙 #6: 영적 훈련들이 하나님의 은총(FAVOR), 호의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A. 영적 훈련(기도, 금식, 묵상 등)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을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게 도와준다. 

이 훈련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으로, 우리 신앙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훈련들이다. 그렇지만, 영적 훈련들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더 큰 은총(favor)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능력은 “활활 타오르는 하나님 임재의 모닥불”안에 있는 것이지, 그 앞에 갖다놓는 우리의 ‘차가운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다.

B.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정도에 따라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과의 관계를 사모하는 만큼 주님은 은혜를 부어주신다(마 5:6). 

다시말해, 우리의 ‘영적 갈급함’에 따라 주님이 은혜를 부어 주시면서 주님은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를 더 소중히 여기신다(갈 6:8).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지금과 같이 순종하는 성도를 10 억년이 지나도 똑같이 기뻐하고, 즐거워 하신다(말 3:6).

IX. 원칙#7: 영적 성숙을 통해 주님께 더 사랑받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들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을 더 얻게 된다.

A. 하나님은 모두를 사랑하시지만, 성숙한 자에게 더 많은 능력을 위임하신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정하신 만큼의 능력을 결정하신다. 달란트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마 25:15). 그러나, 순종은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도와준다.

B. 사역이나 비지니스에서, 더 뛰어난 능력이나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께 더 사랑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숙해 짐에 따라 하나님은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위임하실 것이다.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다. 

참고로, 성령의 은사들은 믿음을 통해 얻는 것이지(행 3:11-12; 갈 3:5), 영적 훈련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영적 성숙은 기름부음으로 사역하는 영역에 대한 사단의 반격으로 부터 우리자신을 더 보호해 주게 된다(눅 14:30-32). 

성령의 능력을 더 깊이 체험함에 따라 다음의 네 가지도 증가하게 된다(하나님의 열심, 사단의 분노, 사람들의 요구, 감정의 수용력)

===7장 (상) 예수님의 향기 (아 1:3) (The Fragrance of Jesus)

I. 복습: 타락한 세상의 포도주보다 나은 예수님의 사랑

A. 아가서의 주제는 ‘하나님 말씀의 입맞춤’이 심령 가장 깊은 곳까지 감동시켜 주기를 바라는 신부의 부르짖음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깊이, 가장 친밀한 방법으로 경험하고자 하는 신부의 부르짖음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은 신부를 향한 왕의 마음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3 가지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깨워준다 (하나님에게 받는 사랑, 하나님에게 드리는 사랑, 타인에게 흘러나가는 사랑)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아 1:2).

B. 신부는 예수님을 만나고 경험하는 ‘우월적 즐거움’을 경험한다. 

주님의 사랑(애정)은 (이 타락한 세상의 포도주인) 죄의 열등한 즐거움보다 “더 낫다,” 또는 “더 즐겁다”(NIV역).

C. “애정에 근거한 순종” 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애정을 경험하고 다시 그 사랑을 주님께 되돌려 드리는 ‘사랑의 교환’을 통해 흘러나오는 순종으로, 가장 강력한 순종의 형태다.

결과적으로, 가장 깊고 지속적인 순종을 낳게 된다. ‘사랑앓이를 하는 자’는 그 사랑을 위해서 모든 고난을 감수하기 때문이다.

D. “의무에 근거한 순종”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면서 의무감으로 하는 순종이다.

이런 상태에서도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E. “두려움에 근거한 순종,”또는 “수치심에 근거한 순종”은 부끄러움을 당할 것 같은 두려움 내지는 부정적 대가를 치를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하는 순종이다. 

이것도 성경적이기는 하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죄의 유혹을 물리치는 데에는 매우 비효과적인 방법이다.

II. 아름다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주)를 사랑하는구나(아 1:3)

A. 장미의 향기는 그 내부의 속성에서 나온다. 마찬가지로, 아가서에 나오는 왕의 향기는 ‘내면의 삶’, 또는 ‘생각과 감정들’을 상징적으로 말한다. 

‘하나님의 향기’는 그분의 마음과 생각, 특별히, 그분의 백성들을 향한 애정을 말한다. 주님의 신부는 달콤한 하나님의 사랑의 향기를 즐긴다. 주님의 향기를 맡게 될 때, 우리는 마음까지 강력하게 흔들리게 된다. 볼 수 있고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향기가 지닌 엄청난 영향력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B.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향기’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 그렇지만, 문자 그대로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하나님 보좌 주위에 날리는 향기는 분명히 굉장한 것이다. 하늘 전체가 하나님의 다양한 향기들을 영원토록 음미하게 될 것이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후 2:14)

C. 아가서에서는 신부의 사랑을 말하고 있기에 ‘향기’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신부는 “주의 향기로 나의 마음이 동하나이다”라고 말한다. 만약, 과학자가 하나님께 감격을 고백하려 했다면 다음과 같은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주님께서 명철하심으로 나의 마음이 동하나이다”

D. 신부가 “예수님의 아름다운 향기(주님의 품성)로 인해”라고 고백하는 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역사의 실재를 담고 있다.

E. 먼저, 하나님은 ‘예수의 이름’을 쏟아 내실 것이다. 

의역하면, 하나님은 열방가운데 예수의 이름을 드러내고 높이실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한 이름’만을 높이기로 결심하셨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삶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향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이 결국 온 땅에 걸쳐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신부는 잘 알고 있다.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9-10)

1. 하나님이 예수의 이름을 쏟아 내실때, 공개적으로 주님의 아름다움, 또는 주님의 성품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은 온 땅을 예수의 이름으로 가득 채우시면서 그 이름을 지극히 높이실 것이다.

14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합 2:14)

2. 하나님은 ‘예수님을 아는 지식’으로 교회를 채우시면서 그 이름을 쏟아 내실 것이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엡 4:11-13)

F. 두 번째, 예수의 이름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드러날 때, 우리는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다.

III.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쏟아질 때 우리는 예수님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된다

A.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의 이름이 지닌 아름다움을 교회에 쏟아내거나 드러내실 때, 교회는 예수님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아름다움’이 모든 성도들(처녀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사랑하게 만든다는 것을 신부는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은 ‘아름다운 향기’와도 같다. 그 이름의 비밀, 아름다움과 기이함은 우리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3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아 1:3)

B. 아가서에 나오는 ‘처녀들’은 예루살렘의 여자들(딸들)을 말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아직 미성숙한 성도들로, 아가서에 걸쳐 계속 예수님을 찾지만 신부만큼 주님께 헌신하지는 못하는 사람들이다. 주님의 모든 교회는 이 땅에서 그 충만함에 이르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예수님을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C.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을 신부는 잘 알고있다. 

우리를 효과적으로 변혁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향기로운 이름” 하나뿐이다. 예수의 이름이 상한 심령과 영적으로 둔감한 자를 하나님을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자로 바꿀 수 있는 “향기로운 이름”이라는 것을 믿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서라도 그 이름을 더욱 알려고 할 것이다. 오직 예수만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2 그 날에(마지막 때에) 여호와의 싹(예수)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사 2:4)

D. 하나님이 하나님을 우리의 심령에 드러내실 때, 우리 마음은 들뜨게 된다. 

이보다 더 강력하고도 즐거운 일은 없다. 예수님을 더 잘 알게 된다는 것은 그분을 더 사랑하고 즐기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 받게 될 때,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열심도 더 뜨거워지게 된다. 바로 이것 때문에,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버리고, 고난을 견딜 수 있었다.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빌 3:8)

E.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성품)을 선포하심으로 우리의 심령을 깨우시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신다.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만큼,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아낌없는 사랑(애정)만큼,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기업’이요, ‘부르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영광스런 특권은 없다. 신부는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6)

F. “최고의 심리학자”이신 예수님은 사람의 심리에 대한 통찰력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죄사함을 더 많이 받은 자가, 더 받은 만큼 더 많이 사랑하게 된다라고.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G. ‘하나님은 잔인무도한 아버지다’라고 사단은 사람들을 설득하며 하나님을 참소한다.

사단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거절한다는 속임수를 통해, 연약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달아나게 만든다.

H. 신앙인의 삶은 하나님께 사랑받고 귀여움 받는 삶이다. 이것은 세상의 즐거움이나 명성, 부유함보다도 더 생동력 넘치는 기쁨을 우리에게 주는 삶이다. 

하나님의 마음(감정)을 직접 맛보는 경험이 주는 강력함을 신부는 잘 알고 있다.

I. ‘하나님의 애정에 대한 계시’는 우리 안에 교만이나 종교적 율법주의와는 다른 정반대의 결과를 낳게 된다. 

교만 대신 감사의 마음을 주며, 주님을 향한 사랑을 갱신해 주어, 신앙생활이 단순한 종교적 활동이나 종교적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게 도와준다.

J. 저술한 책들 중에 ‘예수님을 향한 열정’이라는 책이 있는데, 사람들에게 자주 이런 질문을 받는다, “예수님을 향한 열정을 어떻게 하면 키울 수 있을까요?” 

답은 아주 단순하고도 간단하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정을 이해하면 된다. 하나님의 열망에 대한 계시를 갖게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열망하고 갈망하게 되는 권능을 입게 된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원한다면, 당신을 향한 주님의 사랑(애정)을 나타내는 진리들로 심령을 채우라!

K. 온 땅은 이미 예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으로 가득차 있다. 우리는 계시의 영을 통해 세상 모든 곳에 자연을 통해 펼쳐저 있는 하나님의 향기, 또는 영광을 볼 수 있다.

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3)

L. 계시의 영으로 살았던 다윗은 하늘을 바라 볼 때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4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 19:1-4)

M. 아가서 전체에 걸쳐 하나님의 향기는 신부에게 점차적으로 전달된다. 

하나님의 향기는 곧 신부의 향기가 된다. 아가서의 전환점은 아가서 4:16 이다. 신부는 ‘마음의 정원’에 ‘바람’이 불어 하나님의 향기가 전달되기를 기도하면서,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싶어한다.

우리는 아가서를 통해, 하나님의 향기가 신부에게 전달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신부는 하나님의 향기를 분별하며, 그 향기들은 점진적으로 신부에게 전달된다.

16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아 4:16)

IV. 달콤한 하나님의 인격의 향기 – 5 가지의 동사

A. 예수님은 달콤한 하나님 아버지의 애정과 성품의 향기를 강조하셨다(눅 15:20). 

이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감정을 가장 종합적이면서도 간략하게 요약해 놓은 본문중의 하나이다. 우리를 바라 보시고, 사랑의 마음을 품으시며, 달려오사, 안으시고, 입맞추시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 15:20)

B.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를 보았다 – 그분의 백성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눈

C.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를 보고 측은히 여기셨다 – 그분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온유한 마음

D.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에게 달려가셨다 – 그분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행동과 개시

E.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를 안으셨다 – 그분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애정

F.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에게 입맞추셨다 – 그분의 백성과 가까이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열망

V. 신앙생활에 적용

A. 먼저, 우리는 아가서의 진리들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지성을 채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유명한 레스토랑에 단지 메뉴만 연구하기 위해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보석을 감정하듯, 아가서를 감정하는 ‘감정가’가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이다. 심령을 아가서로 가득 채워야 한다!

B. 둘째, 배운 것들을 다시 하나님께 고백할 때, 계시가 임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 영적인 배고픔과 정직한 심령을 가지고, 아가서를 오랜시간 음미하는 마음으로 묵상 해야 한다.

아가서가 주는 유익을 충분히 누리기 위해서는, 아가서 내용 하나하나를 예수님과의 지속적인 애정과 기도의 대화로 바꾸어야 한다. 기도의 대화로 바꾸는 단계 없이 아가서를 공부 하는 것은 비효과적이다. 심령의 변화를 위해서는, 먼저 아가서의 언어가 우리의 기도 생활과 생각 가운데 깊이 들어와야 한다.

C. 개인적으로 내게는 깊이 자리잡은 아가서의 구절들이 약 10 개 정도 된다. 

초창기에는, 운전이나 산책할 때 보기 위해 구절들을 엽서에 써서 다니기도 했다. 

이 구절들을 이용해서 예수님께 천천히 속삭이곤 했다. 예를 들면,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주의 말씀으로 내게 입맞추게 해주세요,” “성령님, 나를 지탱시키시고, 새롭게 해 주세요” (아1:2; 2:5).

D. 주님의 사랑이 ‘타락한 세상의 포도주’보다 낫다고 고백해 보라. 주님의 아름다운 향기(하나님의 성품)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만든다고 선포해보라.

E. 시간을 들여 일지를 작성하되, 아가서를 “기도하면서 읽을”때에 떠오르는 생각들, 기도들, 묵상들을 기록하도록 하라. 주님이 당신 마음에 주시는 진리들을 붙잡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7장 (하) 아가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향기 (The Perfume of God in the Song of Solomon)

I. 아가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향기

A. 아가서 1:3 에서, 신부는 주님의 마음이 ‘아름다운 향기’같다고 지적하면서, 예수님의 향기의 실재를 보게된다.

B. 아가서 1:13-14 에서, 신부는 몰약의 향낭과 고벨화 송이, 다발과 군집과 같이 풍부하게 아가서 1 장 3 절의 향기를 세분화하여 전개시킨다(아 8:14)

C. 아가서 2:3 에서, 예수님은 (아가서 8:5 과 같이) 상쾌하게 하는 ‘사과의 향기’를 가지셨다.

D. 아가서 2:12-13 에서, 예수님은 신부에게 구애하기 위해 자신의 향기를 드러내신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향기로 신부에게 구애하신다. 그리고, 신부는 ‘산’으로 갈 결심을 하게된다.

E. 아가서 3:6 에서, 예수님은 몰약과 유향과 각종 향품(석류는 아가서 2:3, 5의 사과안에 함축되어 있다)과 백향목(아가서 3:9; 8:9에 함축되어 있음)의 향기와 같다.

F. 아가서 4:6 에서, 신부는 몰약의 산과 유황의 동산(아가서 8:14 의 증표)에서 오는 고난에 참예하게 된다.

G. 아가서 5:13 에서, 예수님의 향기는, 향기로운 꽃밭과 풀언덕과도 같은 뺨과,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아 2:12-13 무화과와 포도와 같은 향)이 뚝뚝 떨어지는 입술에서도 발견된다.

II. 아가서에 나오는 신부의 향기

A. 향기로운 산에 머물렀던 결과로, 신부는 향기에 흠뻑 젖게된다(아 8:14).

B. 아가서 1:12 에서, 신부는 자신에게 부여된 향기를 처음으로 감지하게 된다.

C. 아가서 2:1 에서, 신부의 정체성은 예수님의 향기(백합화 /수선화) 안에 있다

D. 아가서 2:2 에서, 신부의 향기를 확증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E. 아가서 2:16; 4:5; 6:3 과 7:2에서, 신부는 백합화와 같다

F. 아가서 4:3 에서, 성도의 향기는 석류(아 6:7)와 같다.

G. 아가서 8:13 의 정원(동산) (아 2:16; 6:3,11; 7:2, 12-13)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포도원은 정원, 골짜기, 호두, 포도, 석류(아 7:12), 합환채(아 7:13 ), 그리고 다른 실과를 모두 포함한다.

===8장 신부의 삶의 비전 (아 1:4) (The Bride’s Life Vision)

I. 소개

A. 이 단원에서 신부는 자신의 영적 목표와 삶의 비전을 제시한다(아 1:4).

4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 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아 1:4)

B. 복습: 아가서 1:2-4 의 구절은 아가서의 주제와 신학을 ‘거룩한 열정을 위한 과정’으로 요약한다. 

예수님의 사랑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낫다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신부는 ‘하나님 말씀의 입맞춤’을 부르짓는다. 신부는 아름다운 예수님의 향기의 실재와 효과를 선포하고 나서, 예수님과의 친밀감을 갈망하며, 은혜를 받아 주님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를 섬기며 달음질 하고자 하는 삶의 비전을 선언한다.

C. 아가서 1:2-4 에서, 신부는 세가지를 말한다

1. 아가서 1:2 초반부에, 신부는 하나님 아버지께 말한다. 

“주의 말씀으로 당신의 아들이 내게 입맞추게 해 주세요”

2. 아가서 1:2 후반부부터 4 절까지, 신부는 예수님께 고백한다. 

“주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낫습니다. 주의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주의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주를 사랑하나이다.” 신부는 예수님과의 친밀감을 갈망하며, 주의 은혜로 사역을 주님과 함께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3. 아가서 1:4 후반에, 신부는 같이 충실하게 달려가는 다른 이들과 함께 예수님께 고백한다.

II. 신부의 열심을 나타내는 표현: 삶의 비전 2 가지

A. 신부는 두 가지 삶의 비전 또는 자신의 목표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형태로 표출한다. 삶의 비전이란 가정, 직장, 사역에 관련된 단기적, 장기적 목표를 말한다. NAS 성경역본은 “주를 따라 가도록 나를 인도하소서”라고 번역하고 있다.

4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 가리라(아 1:4)

B. 신부는 “예수님, 나를 인도해 주세요”라고 기도한다. 

이것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헌신적 예배자로서, 깊은 친밀감을 느끼기 위해 하나님의 마음에 가까이 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기도이다.

37⋯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

C. 신부는 “우리가 주를 따라 달려가리라”라고 기도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과 그분의 백성들이 함께 달려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가까이 인도하심은 단수형이지만, 주님과 함께 달려감은 복수형이다. 

신부는 예수님과 주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동역하며 사람들을 섬기고자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달려간다’는 것은 긍휼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섬기는 삶을 대변한다. 이것은 행위가 뒤따르는 순종이며, 타인을 돌보며, 행하는 믿음의 삶이다. 

우리는 그 속도를 정하시는 예수님 뒤에 서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며 달려간다.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9)

D. 균형잡힌 신앙의 삶은, ‘예수님을 향한 열정’과 ‘사람들을 향한 긍휼’을 갖는 삶이다.

신앙생활하는 일생동안 우리는 “가까이 인도받는 것” 그리고 “달려가는”사이에서 오는 지속적 갈등을 겪게 된다. 

초기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친밀감 없이 사역에 ‘달음질’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1. 달려가는 가운데, 충돌과 거절, 핍박은 생기기 마련. 

그래서, 아가서 1:5-7 에 나오는 처녀들처럼, 많은 이들은 얼마가지 않아 ‘영적 탈진’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그와는 정반대로, 달려가는 사역의 비전도 없이, 주님께 가까이 나아 가는 것에만 집중하기도 한다.

2. 친밀감을 위해 주님께로 “가까이 인도받기를 원하는” 신부의 기도를 예수님이 응답하실 때, 이 본문에서 신부는 사역에 “달려가는 일”을 일시적으로 거부하게 된다(아 2:8-13). 

그래서 처음에 신부는 영적 균형을 잃어 버리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체 8 장의 아가서를 통해, 신부의 삶의 비전에 대한 이 두 가지의 기도를 응답하시면서 신부를 인도해 가신다.

E.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영적 계절과 시기에 맞게 친밀감의 인도를 받으며, 동시에 달려가야 한다. 

친밀감을 위해 주님께 가까이 나아 가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 그렇다고, 사역에 바삐 쫓겨 달려가기만 하는 것은 더더욱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영적 계절에 따라 어느 한쪽을 더 강조하시기도 하신다. 그렇지만, 그 계절에 있더라도 다른 한 쪽을 절대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참고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계절에 한 쪽면을 더 강조하신다면, 특별히, 주님과의 친밀감의 계절에 거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의 판단하는 말이나 시선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안에 깊이 거하라고 충고해 주고 싶다.

F. 하나님 나라의 일반적인 질서는 먼저 친밀감의 인도를 받으면서 예수님과의 밀접한 관계에서 흘러넘치는 힘으로 사역을 감당하며 달려가는 것이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번째 계명을 통해 권능을 받게되면, 둘째 계명인 타인을 관계하고 섬기는 일을 더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신부의 두가지 삶의 비전은 바로 ‘큰 계명’(마 22:37-40)과 ‘지상 최대 명령’(마 28:19-20)을 담고 있다. 우리의 삶의 비전은 반드시 이 두가지, “친밀감과 달려감”의 측면을 항상 담고있어야 한다.

G. 나는 개인적으로 18 세때, 삶의 비전을 갖게 되었다. 

삶의 비전은 직업이나, 가정환경, 부유함 등과는 상관없이 성립된다. 나는 하나님의 헌신적인 예배자가 되고, 사람들을 흑암에서 건져내는 기름부음받은 자가 되어,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두가지 큰 계명(마 22:37-39)을 성취하리라 결단했다. 

나는 하나님의 헌신적인 예배자로, 또, 사람들을 흑암에서 건져내는 기름부음받은 자로 살기위해, 성경을 배우고, 성령안에 거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했다.

18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 (잠 29:18)

18비전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거니와 (잠 29:18, NKJV역)

H. 초점이 있는 삶은 삶의 모든 영역, 즉, 우리의 신앙생활(기도, 금식, 성경공부 등); 인간관계(가족, 친구 등); 직업(일터의 부르심); 사역(교회안과 밖); 재정 (소득, 지출, 헌금, 저축, 투자); 몸(운동, 건강, 음식 등); 그리고 나머지 (레크리에이션, 휴가, 놀이, 문화생활, 스포츠 등)과 같은 삶의 주요 영역들마다 삶의 목표가 있는 총체적 삶의 비전을 갖는다.

I.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 단기적, 장기적 목표(단기적 목표는 3 개월에서 3년, 장기적 목표는 10년 이상되는 것)를 세워 행하는 행동계획(액션 플랜)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 각 행동계획에 맞는 스케줄을 만들어, 주어진 시간을 우선 순위화하며 초점을 두고 살아야 한다.

III. 열정의 성장: 침궁의 경험

4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 가리라⋯ (아 1:4)

A. ‘왕의 침궁’은 신부의 ‘침궁’이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은밀한 삶’을 개발해 나가는 시간들을 말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우리를 가까이 인도하신 ‘은밀한 삶의 간증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침궁’에서의 시간들을 통해, 속사람이 형성되고 자라나게 된다. 이러한 시간들을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으로 구애하시고, 경고하시며, 약속을 주시며, 대면하셔서 우리가 성령안에 자라나게 하신다. 

왕의 침궁은 장래의 소명을 우리가 힘차게 주님과 함께 이뤄 나갈수 있도록 주님이 우리의 속사람을 빚으시는 시간이다. 이것은 곧, 우리가 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순종할 수 있게 준비시켜 주는 시간을 의미한다.

B. 어린 신부는 주님 곁으로 가까이 인도해 달라고 부탁했고, 예수님은 신부를 침궁으로 인도하사 그 기도를 응답해 주셨다. 주님은 신부를 ‘침궁’으로 인도하신다.

4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갔으니(아 2:4)

C. 예수님은 어깨에 잃었던 양을 데리고 오는 은혜의 목자를 ‘선한 목자’로 평하셨다.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눅 15:5)

D. 침궁의 경험은, 성령 안에서 아주 특별한 경험(새로운 계시와 만남, 나누어주심)을 허락하심으로, 우리를 주께로 가까이 인도하시는 시간들을 말한다. 

예수를 믿은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나는 이런 “침궁의 경험”을 두번이나 경험하면서 놀라게 되었다. 성령에 대한 이해나 갈급함도 없었을 때였기 때문이다. 

1972년 2월에 난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되었으며, 1978년 10 월에는 내가 소원한 기도도 아니었는데,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보는 환상을 경험한 적이 있다.

IV. 열성의 확실성: 예언적 확증

A. 신부는 예루살렘의 여자들(딸들)에게 담대함과 믿음의 확신으로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하고 기뻐하라, 삶의 모든 계절가운데 주님의 사랑을 잊지 말라.”

이 고백은 삶의 다양한 계절을 통과 하는 여정가운데 신부가 확고하게 붙잡는 결단의 신앙고백이었다.

4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 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애정)이 포도주에서 지남(을 기억하리라)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아 1:4)

B.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세가지 면에서 주님의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한다. 

먼저, 죄책감에 사로 잡히지 말고,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 부어주시는 주님의 온유한 자비를 기억하며 기뻐해야 한다. 

둘째, 죄의 ‘포도주’보다 월등하신 주님의 아름다움과 감동적인 사랑을 기억하며 기뻐해야 한다. 

셋째, 고난과 연단의 시기에도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주님의 리더십을 기억하며 기뻐해야 한다.

11⋯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5:11)

C. 절망과 연단의 시기 가운데서 고백하는 이 신앙고백은 선하신 하나님을 선포하고, 마귀의 속임수를 공포하는 ‘영적 전쟁의 표현’이 된다. 이 신앙고백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의 모습을 미리 보여준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고백들을 장차 올 위대한 혼인 날에 하게 될 것이다.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계 19:7)

V. 주의 사랑을 기억할 때, 우리가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A. 선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교회가 예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기억할 때, 세가지 차원의 하나님의 사랑으로 심령을 깨우게 된다(하나님께 받는 사랑, 하나님을 향한 사랑, 타인에게 흘러 넘치는 사랑). 신부는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잘 알고 있다.

4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아 1:4)

B. 신부는 ‘침궁의 경험’을 통해 받은 열성을 어떻게 유지하는 지 보여준다. 침궁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안에 격려와 확신을 얻는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을 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 때 받은 말씀에 우리가 순종함으로써, 우리가 받은 은혜들을 기억하며, 거기에 맞게 행동하고 살아야 하는 책임이 주어지게 된다.

C. 흑암이 우리의 마음을 맹렬히 공격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영적전쟁에 임해야 한다. 

침궁의 경험을 통해 얻은 은혜들을 하나라도 잃어 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늘 갱신하고 새롭게 해야 한다.

D. 즐거움에는 두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고난속에서도 우리의 신앙고백을 지키며 요동치 않는 믿음을 갖는데서 오는 즐거움이다. 다른 한가지는, 우리 안에서 자연적으로 솟구쳐 올라오는 즐거움이다. 신부는 여기서 이 두가지 즐거움을 다 고백하고 있다.

E. 믿음에서 오는 즐거움은 언제나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의 말씀의 주파수에 맞춰 살야야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기쁘게 살아갈 수 있다.

1. 삶의 고난속에서 걱정과 염려에 빠져들지 말고, 우리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뻐하고, 주님의 사랑의 리더십을 고백해야 한다. ‘깊고 어둔 밤중’의 현실 속에서도 우리는 주님의 침궁에서 받았던 계시와 은혜들을 기억해야 한다.

4⋯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리더십)로구나(아 2:4)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2. 유혹이 다가올 때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며, 주님의 사랑과 약속이 타락한 ‘세상의 포도주’보다 낫다고 고백하라!

믿음으로 모세는⋯25 도리어 ⋯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 11:20-30)

3. ‘죄와의 싸움’에서 패배하게 될 때에도, 죄책감 속에 휩싸이지 말고, 온유한 주님의 자비를 믿으며 주님의 사랑을 고백해야 한다. 원수의 참소를 절대 용납해서는 안된다. 

사단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을 거절한다고 믿게 하여, 많은 연약한 자들을 주님으로 부터 도망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F. 고난과 유혹, 실패가운데, 우리는 주님의 선하심과 영원하신 주님의 자비(인자하심)를 선포해야 한다(대상 16:34, 41; 대하 5:13; 7:3, 6; 20:21; 스 3:11; 롐 33:11; 시 52:1; 100:5; 106:1; 107:1; 117:2; 118:1-4, 29; 138).

11 서로 찬송가를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주는 선하시므로 그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에스라 3:11)

===9장 심령은 검으나 하나님께 사랑스런(아름다운) 존재 (아 1:5) (Dark in Heart but Lovely to God)

I. 우리의 신앙 여정은 은혜의 역설로 시작된다: 검으나 아름다운 존재

5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심령이) 검으나 (하나님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 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 (아 1:5-6)

A. 신부의 신앙 여정은 (아 1:5) 이 본문에 나오는 두 종류의 대조되는 신앙고백과 같이, 대부분 사람들에게 찾아오게 되는 ‘영적 위기’로 시작되는데, 나는 이것을 “은혜의 역설”이라 부른다. 

신부는 자신의 죄성을 발견하면서도 자신이 하나님께 사랑스런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신부가 죄성을 가진 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사랑스런 존재라는 진리를 신부로 하여금 보게 하신다. 이런 어린 신부는 순수하고 진실하지만 아직까지 연약한 자들을 가리킨다.

B. 우리의 죄성을 더 깊이 깨닫게 될 때에도 우리가 여전히 주님께 사랑스런 존재라는 진리를 인식하는 일은 우리의 영적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작업이다. 

이 두가지의 진리를 우리 안에 넣을때, 우리는 확신과 감사 가운데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더 자라게 될 것이다.

1. 그리스도의 지체 가운데에는, ‘시커먼’ 우리의 마음, 즉, 우리가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에만 집중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께 사랑스런 존재라는 진리를 강조하지 않고, 우리의 악함 만을 강조하게 되면, 주님 앞에 담대히 서는 확신을 파괴하게 되며, 수치심에 이끌리는 삶을 낳게된다. 이러한 사람은 진정한 회개를 한 후에도, 수치심으로 인해 예수님과의 관계가 감정적으로 마비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2. 사람들은 각각 자신에게 주어진 양 만큼의 ‘빛’가운데 걷는다. 하나님께서 충만한 빛 가운데 거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때 그때 주어진 만큼의 충만한 빛 가운데 살아야 한다. 우리가 그 빛 가운데 걸어갈 때, 하나님은 더 환한 빛을 우리의 삶에 비추실 것이며, 그로인해, 전에는 보지 못했던 우리 안에 존재하는 어둠의 영역들을 보게 하실 것이다. 

아무리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려 노력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사랑은 금이가고 깨지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 진실로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연약함 때문에 자신들이 부르심에 합당한 자가 아닐 거라는 생각과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미숙할 때에도 인자하신 분이시다.

C. 예레미아는 인간의 죄악의 깊이와 거짓에 대한 계시를 가지고 있었다. 

죄를 범할 수 있는 영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죄의 영역의 깊이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이미 땅 속 깊이 보이지 않는 곳에 갈라져 있는 단층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죄의 영역들은 ‘표면 아래’ 우리 심령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렘17:9)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엡4:2)

D. 성숙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죄인중의 괴수’라 표현한 바 있다. 

이것은 그가 그릇된 겸손으로 과장하고자 한 말이 아니었다. 더 많은 하나님의 빛을 심령안에 품고 살게 되면 될수록, 우리는 우리안에 숨겨져 있는 ‘흑암’의 영역들을 더 잘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15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5)

E. 비록 우리 존재성의 전부를 나타내는 진리는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의 연약한 육체를 인정하는 것은 인간이란 존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기 이전에,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죄악의 깊이를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신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죄를 지금 발견했다고 해서,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지금 발견하시는 게 아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을 선포하실 때에도, 주님은 우리의 죄성을 너무나도 잘 아신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죄의 무게를 너무나 잘 아시면서도, 우리를 아낌없이 사랑하기로 헌신한 분이시다.

F. 죄를 짓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놀라기도 한다. 그래서, 슬픔에 잠길 수도 있다.

‘나도 이런 죄를 지은 나 자신에 대해 놀랐는데, 하나님은 얼마나 놀라셨을까’라고 생각하게 된다.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셨으니, 하나님이 이제 나와의 관계를 재고하지는 않으실까,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으실까’라는 두려움을 갖게된다.

G. 그러나, 지속적인 영적 성숙을 거듭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검은 마음’을 발견하면서도, 하나님께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동기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우리의 약속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주님의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관심을 끌기 위해 관계하는 것을 주님은 원치 않으신다. 

나는 오랜세월 동안 자신들의 ‘검은 마음’에만 치중하는 주변 사람들을 안타깝게 지켜 보아왔다. 이들은 회개도 지나칠 정도로 진실하게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H. 그들은 “포도주보다 나은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 순수하고 진실하지만 하나님 앞에 닫힌 심령을 가지고 산다. 

이렇게 닫힌 심령은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러니, 제발 저를 용서해 주시고,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맹세합니다”라고 고백한다. 다시말해, 주님을 예배하면서도 주님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협상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우리에게 나눠주시는 아름다움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져야 한다. 이를 통해 “나는 검으나, 아름다운 자입니다. 연약해서 죄를 짓지만, 주님이 나로 인해 마음이 빼앗기셨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고백은 우리에게 강력한 확신을 주게 된다. 우리가 죄에 걸려 넘어질 때, 도망가지 않고 하나님 품으로 달려갈 수 있게 권능을 부여해 주기 때문이다.

II. 연약함 가운데서도 우리가 하나님께 아름다운 이유 4 가지

A. 의의 선물: 

우리의 사랑스러움은 ‘의의 선물’을 받는데서, 또는 예수님이 소유하신 아름다운 ‘의의 옷’을 받았다는 데서 온다. 죄성을 가진 인간이 하나님께 아름다운 것은, 인간 스스로 선하거나 어떤 행위를 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홀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역사로 인한 것이다.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 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5:17-21)

B. 자원의 심령(순종의 마음): 거듭날 때, 성령님은 우리 안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원의 심령”을 불어 넣으신다. 

행동으로 순종을 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마음으로 순종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의 마음’은 주님께 아름답고 귀한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요동은 ‘자원하는 심령’이라고 하는 성령님의 역사다. 다윗은 자원하는 심령으로 주님께 붙듬받게 되기를 기도했다.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 51:12)

41… 마음(심령)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마 26:41)

C. 하나님의 성품: 우리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다양한 감정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애정과 열정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잘 보여준다. 아름다움은 바라보는 자의 눈에 있다. 우리를 사랑과 열정으로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아름다운것이다. 하나님이 평상시에 분노의 감정으로 사는 분이시라면, 우리에게 자원하는 심령이 있다고 해서 주님 보시기에 아름답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를 바라 보시는 주님의 관점은 주님의 마음에서 흘러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시느냐에 따라 아름다움의 대상이 결정되게 된다. 만약, 다른 사람이 주님처럼 우리의 깊은 속까지 다 안다면, 우리를 보며 아름답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은 사람의 관점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7…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능력)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16:7)

7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 55:7-9)

D. 영원한 신부의 부르심: 

하나님은, 주님의 은혜로 예수님과 함께 보좌에 앉아 10 억년 동안(영원토록) 살게 될 ‘신부의 모습’을 우리안에 보신다. 주님의 영원한 신부. 이 부르심이 하나님이 보시는 우리의 존재 가치를 말해주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III. 베드로의 초창기 싸움: 검으나 아름다우니, 연약하지만 자원하는 심령(마 26:41)

A.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주님을 부인하게 될거라고 경고하셨다(눅 22:31-34).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구속받은 자가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방법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심령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것에 대한 것이다.

41 …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마 26:41)

B. 베드로는 자신의 “연약한 육신”으로 걸려 넘어졌지만, “자원하는 심령”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열망했다. 예수님은 밤이 늦어 피곤한 육체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마음에 있는 일반적인 죄성을 가리켜 말씀하셨다.

C. 우리의 연약한 육신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이 질문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질문이다. 믿음의 위기가 이 이슈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IV. 주님을 부인하고 자신의 실패에 절망한 베드로

A. 베드로가 다시 물고기를 잡으러 간 이유를 아는가? 

예수님의 죽음 후 바로(십자가의 사건 8 일후) 사도들의 재정난을 돕기위해 다시 자신의 직업전선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가롯 유다가 훔친 돈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밤을 맞으며 고기를 잡았다는 사실은 베드로가 여가를 즐기기 위해 낚시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요 21:3)

B. 베드로는 하나님이 주신 ‘사도적 리더십’의 역할을 포기하고 자신의 집안 사업으로 돌아간 것이다. 자신의 본래 직업으로 돌아간 것이다. 

예수님의 사도(제자)로 부름받기 전 성공적으로 잘 나가던 자신의 직업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어린 여종의 압력에도 견디지 못해 불충을 보인 자가 어찌 일생동안 예수님께 충성할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도로서 충성해야 하는 압력을 받으며 사느니, 차라리 편하게 어부로 살면서 하나님께 충성하는 게 낫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C. 베드로는 사도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면서 자신의 실패에 상처 받았고, 예수님을 실망시켜 드렸다는 실패감에 사로잡혔다. 주님을 다시 볼 면목이 없었다. 우리도 이런 상황에서, 주님께 달려가기 보다는, 도망가거나 떠나버리게 될 것이다.

D. 죄의 육신을 발견하는 위기 속에서, 어떤 이들은 실패감 속에 사로잡혀 고통을 겪으며, 자신들이 하나님이 주신 부르심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게 될 거라 단정지어 버린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고귀한 비전을 가진 자들도 자신의 부족함을 많이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계속 실패를 맛보느니, 차라리 자신의 비전과 부르심을 아예 포기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다시 말해, 자신들의 비전을 낮춰 고통이나 실패를 느끼지 않으려는 것이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고귀한 비전’을 가지면서 실패의 고통을 겪기보다는, 차라리 주님과 “이등 시민의 관계”를 가지며 안주하며 사는 것이 더 쉬워 보이기 때문이다.

E. 그런 사람들은 주님과의 이등 시민의 관계에 적응하면서 거기에 익숙해 지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주님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런 수치심 속에 살면서 하나님과 관계할 면목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진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우리가 부끄럼을 가지고 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F.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화가 나고, 실망하셨을 뿐만 아니라, 슬퍼하시면서 심지어는 짜증 나셨을 거라는 상상도 하게 된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는 순종과 예수님께 헌신하는 삶을 포기하고 죄책감속에 살게 된다.

G.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똑같은 질문을 세번이나 반복 하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 (요 21:15-17)

H. 하나님이 질문을 던지실 때는, 주님이 모르는 정보를 얻으려 하시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에게 질문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주님은 베드로 자신이 스스로에 대한 정보를 발견하게 되기를 원하셨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주님은 이미 알고 계셨다. 주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안에 확신을 갖게 되기를 바라셨다. 주님을 부인하기 전에 가졌던 예전의 관계로 다시 돌아가자고 그를 부르신 것이다. 주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드러내고 계셨다.

I. 주님은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한단다. 8 일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네게 육신이 약하나 자원하는 심령을 가졌다고 말했잖니. 네 육신이 연약하다는 것을 네가 깨닫지는 못했지만, 네게는 자원하는 심령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단다. 너는 내게 순종하려는 ‘심령’을 가지고 있단다. 네가 걸려 넘어지기 전에 나는 네 안에 그 심령을 보았단다. 내가 너를 바라볼 때, 연약한 육신뿐만 아니라, 나를 향한 진실한 사랑도 본단다. 베드로야, 내가 너를 제자로 불렀을 때 네 안에 보았던 자원하는 심령을 난 지금도 여전히 본단다.”

J. 예수님은 우리 보다 우리안에 있는 자원의 심령(순종의 마음)을 훨씬 많이 보신다. 

이 본문에서, 주님은, 세번 부인하면서 쌓여버린 베드로의 수치심을 철저히 깨부수고 계셨으며, 세번의 문답을 통해 베드로의 영혼을 온전히 씻겨 내셨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하나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기를 원하셨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확신을 회복하면서 베드로의 수치심은 완전히 깨어져 버렸다.

V. 영적 승리의 3 단계

A. 첫 단계,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의도: 

영적 승리를 위한 첫번째 단계는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진정한 열망을 갖는 것이다. 

순종하고자 하는 의도는 성숙한 순종을 실제적으로 달성한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순종의 의도가 영적 승리의 첫걸음이 된다.

순종하고자 하는 진정한 갈망을 주시는 분은 (마귀도, 우리의 육신도 아닌) 성령님이다.

우리의 삶을 측정하고 정의하는 부분적인 하나님의 방법도 바로 이러한 의도들을 통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고 기뻐 하신다. 스스로 달성한 업적만을 보며 자신들의 삶을 측정하는 사람들은 죄책감에 빠지기 쉽다.

B. 두번째 단계는, 부분적인 돌파구를 마련. 그러나, 아직도 계속되는 싸움은 존재한다:

전반적으로 승리의 삶을 살지만, 아직 특정 영역에서 육신과의 싸움을 계속한다 (롬 8:2-13; 갈 5:16-17).

C. 세번째 단계는, 변화된 갈망과 함께 중대한 돌파구를 경험한다: 

우리의 갈망이 극적으로 변화되면서, 특정 영역에서의 죄와의 씨름이 거의 사라지게 된다(롬 6:14-23).

VI. 거룩한 열정으로 가는 여정은 두 가지의 계시로 시작된다.

5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심령이) 검으나 (하나님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찌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6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찌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아 1:5-6).

A. 어린 신부가 아 1:5 에서 직면한 영적 위기는 베드로가 겪었던 위기와 유사하다.

1. 검은 마음 (죄의 정욕): 우리의 연약한 육신은 하나님께 검다.

2. 하나님께 아름다우니 (예수님께 진실로 순종하려는 마음): 우리의 자원하는 심령은 하나님께 아름답다(사랑스럽다).

B. 아가서에 걸쳐, 신부는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품고 자라날 수 있는 영적 원칙들을 가르쳐준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영적으로 아직 미숙한 자들을 말한다.

C. 게달의 검은 장막은 ‘검고 어둔 육신’을 말한다. 

게달의 장막은 야생 염소들의 검은 가죽으로 만들어 검은 색을 띤 장막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 비유를 쉽게 이해했다.

D. 솔로몬의 휘장은 성막안 성소에 있던 휘장이었다. 

솔로몬의 휘장은 신부의 삶에 있는 ‘내적 은혜의 역사’를 말한다. 이 휘장의 아름다움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며, 오직 성소에 들어가는 제사장들만이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다.

E. 신부는 말한다, “겉은 검은 장막 같을지라도, 안은 성소안에 있는 솔로몬의 휘장과 같이 아름답습니다.” 

신부의 겉모습 만을 보며 사람들은 게달의 검은 장막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적으로 하나님은 솔로몬의 빛나는 휘장과 같은 신부의 모습을 보신다.

F. 신부는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 ”라고 말한다. 

솔로몬의 책, 잠언서에서 솔로몬은 “태양 아래 사는 삶”을 자주 언급했다. 이것은 ‘이 땅에서 사는 삶’을 의미한다.

신부는 태양아래, 또는 ‘죄의 연약함 가운데 태어나 사는 삶’에서 받게되는 영향력을 말하고 있다. 아담아래 태어난 모든 사람이 그렇듯, 이 땅에서 사는 삶이 신부에게 크게 영향을 끼치며, 신부를 검게 만든 것이다.

G. 신부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흘겨보며 “너는 마음이 검잖아” 라고 고개를 흔들며 수치심을 부추기지 말라고 부탁한다. 

신부는 “그래, 나도 사람이기에 이 타락한 세상에서 죄를 지으며 살았어.”라고 대답한다.

H. 신부는 그들에게 자신을 흘겨보지 말라고 부탁한다(6절). 

신부는 이미 자신의 검은 마음에 압도되어 있기 때문이다.

VII.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A. 많은 사람들이 진실로 회개하면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역사와 자원의 심령을 주신 성령의 역사를 통해 자신들이 하나님께 아름다운 존재라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

B. 그런가 하면, 자신들이 하나님께 아름답다는 진리만을 붙들고, 진정한 회개나 마음을 다하는 삶을 구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선포하며 염치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

C. 이슈는 자신의 죄성을 발견했을 때,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연약한 육신과 검은 마음을 발견했다면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 이 영적 위기를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우리 신앙생활의 성공을 좌우한다.

D.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위기에 처할 때, 하나님께 밉보였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으로 부터 멀리 달아나 버린다. 이들은 베드로가 저지른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이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수치심(수치심의 견고한 진)에 휩싸여 살게된다.

E. 그러나, 수치심의 삶은 죄의 삶을 가져오게 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 앞에 추한 자라 느낀다면, 추한 자의 삶을 살게된다. 주님은 우리가 ‘이등 시민’으로 강등하기를 자처하며 살기를 원치 않으신다. 

이 땅에서 가장 강력한 여인의 삶이란 어떠한 삶인가? 자신이 깨끗하고 고귀하며,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며 사는 여인의 삶이다. 이런 여인은 끈질긴 사랑을 갖고 사는 강력한 여인이 된다. 주님은 “하나님은 나를 순결하게 보시며, 나를 사모하시고, 고귀히 여기시며, 좇으시고, 나를 기뻐하십니다”라고 느끼는 주님의 신부를 그리스도 지체안에 세우고 계신다

===10장 신앙(영적)의 위기로 시작되는 신부의 여정 (아 1:5-11) (Her Journey Begins With Spiritual Crisis)

I. 여정의 시작: 은혜의 역설:

“검으나, 아름다우니 ”

5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심령이) 검으나 (하나님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6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 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 (아 1:5-6)

A. 신부의 영적 여정은 아가서 1:5 에 나오는 신앙고백처럼, 순수하고 진실한 신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영적 위기로 시작된다. 나는 이것을 “은혜의 역설”이라고 표현한다.

왜냐하면, 신부가 자신의 죄를 발견함과 동시에, 자신이 하나님께 아름다운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우리의 죄성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아름다운 우리의 모습도 보게 하신다. 순수하고 진실하지만, 아직 연약한 신자의 모습이다.

B. 연약함 가운데서도, 우리가 하나님께 아름다운 이유에는 4 가지가 있다. 

첫째, 우리는 ‘의의 선물’을 받았기에 하나님께 아름답다(사랑스럽다) (고후 5:17-21). 

둘째, 거듭날 때, 성령님은 우리 안에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심령’을 넣으신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요동 하나하나 모두 ‘자원의 심령’ 이라고 하는 성령님의 역사다(시 51:12; 마 26:41). 

세째,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때문에 우리는 아름답다. 즉, 하나님의 애정과 열정은 곧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감정을 말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바라보는 자의 눈에 있다. 하나님은 대상을 바라볼 때 우리와 전혀 다르게 보신다(삼상 16:7; 사 55:7-9). 

네째,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 보실 때, 우리의 영원한 부르심인 그리스도의 신부로 보신다.

C.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영적 승리의 3 단계를 올바로 알아야 한다. 

먼저,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진정한 의도가 바로 승리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두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부분적인 돌파구를 마련하지만, 아직 계속되는 싸움속에 산다. 전반적으로 승리의 삶을 누리지만, 특정 영역에서 육신과의 싸움을 계속한다(갈 5:16-17). 

마지막으로 세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변화된 열망을 통해 결정적인 돌파구를 마련한다(롬 6:14-23).

II. 신부의 영적 위기: 거절감과 수치

6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 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마음)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7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에수)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 (아 1:6-7)

A. 신부는, 아가서 1:6-7 에서, 영적 위기로 인해 받는 5 가지 압박을 기술한다. 

실패로 인해 주위 사람들은 그녀를 흘겨보고, 화난 오빠들에게는 거절당하고, 다른 이들의 포도원은 지키지만, 자신의 포도원(마음)은 예수님을 향한 신선한 사랑을 유지하지 못해 멀리서 예수님을 섬기게 되는 수치심 속에 살게 된다.

B. 신부는 자신의 오빠들을 ‘어미의 아들들’이라 표현한다. 

아가서 전체에 걸쳐 (아 1:6;3:4,11; 8:2, 5), ‘어미’는 교회를 뜻한다. 성령의 역사가운데 우리는 교회를 통해 거듭나게 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과 여러 성경 기자들은 교회와 지도자들, 그리고 새 예루살렘을 ‘어미’라 표현했다(갈 4:19, 26; 살전 2:6-7).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어미요 형제라(마 12:46-50)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아버지요, 교회는 어머니로 표현된다.

교회의 근본이신 예수님은 ‘여인의 씨앗’을 통해 태어나셨다(창 3:15). 구속받은 이스라엘은 인자(Son of Man)이신 예수를 낳은 ‘어미’로 대표 되었다 (계 12:5).

C. 그 아들들은 신부의 열성에 화가 났다. 

이 아들들은 늙고 ‘영적으로 무딘’ 율법주의적 또는 종교적 지도자들로, 영적으로 열성인 젊은이들을 좋아 하지 않는다. 이유는? 

첫째, 열성적인 사람들은 영적으로 무딘(율법주의에 사로잡힌 이들은 영적 열성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영적 깨달음을 가져다 준다. 

둘째, 절제하지 않는 열성과 그들의 교만이 영적으로 무딘 지도자들을 종종 화나게 만든다. 그렇기에, 우리의 열성은 지혜와 겸손으로 다듬어 져야 한다. 이제 막 새롭게 예수님을 향한 열성에 불이 붙은 자들은 자기의 생각과 교만에 빠져들어, 다른 이들에게 자기처럼 전심으로 살아야 한다고 부담을 주게 된다. 결과적으로, 자기 교만에 빠져, 자신 처럼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는 자들을 정죄하는 우를 범하게 되기도 한다.

D. 그녀의 열성을 이용해, 화난 아들들은 포도원들을 그녀에게 떠맡기며 과도하게 일을 부과하고 학대한다. 

그 속에서 그녀는 영적으로 탈진해 버리게 된다. 영적 탈진은 과도한 일보다는 성령과의 교통없이 일하는 ‘종교적 멍에’에서 더 크게 오게 된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주목을 받으려는 심정으로 과도하게 많은 책임을 떠맡는 것이 영적탈진의 주 원인이 된다.

E. 어린 신부는 다른 이들의 포도원은 지켰으나, 정작 자신의 포도원(마음)을 지키지 못했다.

하나님 앞에 살면서 갖는 우리의 최우선적 책임은 ‘인격적인 예수님과의 동행’이다. 

원래, 신부가 가장 바랬던 소원은 ‘하나님 말씀의 입맞춤’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의 포도원, 즉, ‘마음의 정원(동산)’이 영적 냉랭함과, 죄, 그리고 수치심이라는 ‘잡초’로 인해 숨을 쉬지 못하게 되었다. 자신의 포도원을 돌본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키워 나가면서 그분의 뜻을 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6⋯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아 1:6)

F. 신부는 멀리서 예수님을 섬기는 아픔을 겪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주님을 섬기면서 성령과의 교통이 없을 때 일어난다. 마치 멀리서 얼굴을 가리운 채, 목자(예수님)를 섬기는 여인과 같은 신세가 된 것이다.

7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예수)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아 1:7)

1. 고대에, 여인들은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들과 일할 경우 얼굴을 베일로 가리웠다.

“왜 예전처럼 주님께 더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리서 주님을 섬겨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 합니까?” 이것은 너무나도 사랑하는 목자(예수님)를 멀리서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신부의 아픔을 말한다.

2. 신부는 주님이 계는 곳에 함께 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달콤한 교제를 잃어 버리게 된 것이다. 

계속해서, 신부는 하나님 말씀의 입맞춤, 그리고 주님과의 ‘침궁’의 친밀한 경험을 열망한다.

III.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고자 하는 신부의 필사적 절규

7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예수)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아 1:7)

A. 영적 위기 속에서도, 신부는 필사적인 기도를 하며 부르 짖는다. 신부는 주의 말씀의 입맞춤과 침궁의 경험을 기억한다. 신부는 ‘위대한 목자(예수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양떼 먹이는 곳을 알려주세요.” 이 부르짖음은 우리가 연약함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사랑스럽다라는 확신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1. 신부는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으로 부르짖는다.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내게 고하라.” 

신부는 주를 향한 자신의 연약한 사랑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연약한 사랑이 거짓 사랑은 아니다. 신부는 여전히 하나님의 진정한 연인이다. 원수가 참소하며 신부를 속이려 해도, 신부는 전혀 가망이 없는 위선자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신부는 자신의 연약한 사랑이 신앙의 위기와 영적 무감각 속에서도 진실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2. 신부는 “가망없는 이 위선자에게 고하소서”라고 말하지 않았다. 신부는 “내가 하나님의 연인이라는 것을 난 잘 압니다”라고 외친다. 

이것은 베드로의 고백과 비슷하다. “주님, 내가 주를 배반했어도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B. 신부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갈증에 목말라 한다. 

이 갈증은 더 큰 사역이나 승진도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 신부는 주님이 양떼를 먹이시는 곳을 알기 원한다. 이것은 “나를 주곁으로 가까이 인도하소서”라고 하는 신부의 기도 표현이다.

C. 양은 배가 부르면, 정오나 날이 한창 더울 때 눕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단순히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만을 원하시지는 않는다. 주님과의 친교를 통해, ‘한창 더운 날’, 즉, 삶에서 받는 압력들 속에서도 주님안에 안식하게 되기를 바라신다. 양은 배가 부를 때에만 정오에 눕게 된다.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시 23:2)

D. 신부는 목자의 언어를 사용해 기도한다. “이 한창 더운 낮 시간에 어디서 나를 만족시켜 주시렵니까?” 신부는 정오에 안식하기를, 즉, 예수님으로 다시 만족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른 이들이 나를 지금까지 먹였는데, 이제는 주님이 나를 먹이시기를 원합니다. 주님, 내 영혼의 갈증을 어디서 만족시켜 주시렵니까?”

E. 우리가 이러한 기도를 하게 되기를 예수님은 간절히 바라신다. 

주님은 우리가 포기하거나, 영적으로 무감각한 삶에 굴복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주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가망없는 ‘위선자’나, ‘부적합한 자’로 취급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예전처럼 내 심령을 먹이시옵소서. 내가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었나이다. 멀리서 주를 섬기고 있습니다. 나의 포도원에는 잡초들이 자라나고 있어요. 많은 것들이 잘못 되어가고 있습니다. 실패를 보면서, 사람들은 내게 화를 냅니다. 내가 사랑하는 주님을 다시 만나기 원합니다” 라고 우리가 외칠 때, 주님은 기뻐하신다. 모든 대가를 치르더 라도, 하나님과의 ‘친밀감의 불’이 다시 자신을 소멸하게 되기를 신부는 바라고 있다. 주님이 다시 영적으로 자신을 먹여 주시기를 원한다. 이것은 ‘첫사랑’을 회복하고 싶은 신부의 부르짖음이다.

IV. 예수님의 영광스런 대답 7 가지

여인 중에 어여쁜 (가장 아름다운)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아 1:8)

A. 신부의 필사적인 기도를 들으신(아 1:7) 예수님은 신부에게 대답하신다(아 1:8-11). 

주님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7 가지로 말씀해 주신다. 

먼저, 주님은 신부가 주님께 아름답다는 확증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응답(8절)과 함께 사랑의 확증(아 1:9-11)을 세 부분으로 나눠 말씀하신다. 그리고 나서, 신부는 주님께 깊은 감사를 표한다(아 1:12).

‘거룩한 열정’을 위한 신학적 필수 요소가 예수님의 대답 안에서 발견된다. 이 부분에서 예수님은 신부에게 자신의 첫번째 모습을 보여주신다. 연약함 가운데서도 영적으로 정진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실제적으로 제시해 주시는 ‘모사’(wonderful counselor), 또는, 목자로서의 모습을 보여 주신다.

B. 예수님은 신부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여인중에 어여쁜 자야”(fairest of women).‘fair’이란 단어는 대부분의 성경번역에서 ‘아름다운, 어여쁜’(beautiful)으로 번역되어 있다 (NAS/NIV 역). ‘여인중에 가장 아름다운 자야’(O most beautiful of women)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네 (마음의) 동산에 잡초가 자라고, 멀리서 나를 섬기지만, 나를 사랑하는 네 마음의 부르짖음을 내가 안단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주님 안에 소유한 신부의 아름다움으로 신부의 마음을 구애하고 계신다.

C. 예수님은 “네가 아직 모르고 있었다면 사실은…”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대답에 사실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게 된다. 왜냐면, 이런 경우 우리는 보통 주님의 책망을 기다리기 때문이다.그러나, 우리 자신의 ‘동산’(마음)을 잘 돌보지 않고 멀리서 주님을 섬긴다는 사실을 주님은 너무도 잘 아신다.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주님은 우리가 가장 아름다운 자들이라 말씀하신다.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실패의 구덩이 속에 있을 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아름답다고 말씀하신다. 

화난 아들들에게는 밉게 보여도, 주님은 우리를 가장 아름답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스스로를 자책하고 경멸해도, 우리는 주님께 가장 아름다운 존재다. 수치심과 거절감을 느끼던 신부에게 주님은 그렇게 대답하셨다.

D. 예수님은 신부를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 부르신다. 

이 세상의 모든 종류의 ‘여인들,’ 즉, 예수님을 경멸하는 ‘거짓 종교들’과 비교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성숙한 사도들과 비교하신 것이 아니다.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예수님에게 무관심한 50-60 억의 사람들과 비교해 우리를 보신다. 우리는 ‘의의 선물’을 받은 자들로,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섬기며 사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눈에 이들보다 더 아름다운 존재는 없다.

E. 아가서 1:4 후반부에서, 신부는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다음을 가르쳐 줬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리라.” 

신부의 연약함을 주님이 어떻게 보시는 지를 말씀해 주시면서 신부가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게끔 하셨다. 영적 위기속에서, 주님은 먼저 우리를 “가장 아름다운 자”라고 인자하게 부르신 다음,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가르쳐 주신다.

F. 주님이 양떼를 먹이시고 친밀한 관계를 세우시는 곳에 대해 예수님은 세가지로 대답하신다. 주님은 ‘그리스도 지체의 삶’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신다. 이 세가지 대답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가장 강력한 유혹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지체 안에 거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 지 말해준다.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아 1:8)

1. 지체의 삶에 헌신(8절): ‘부정(不淨)의 고립’을 거절한다

2. 섬김의 사역에 헌신(8절): ‘부정(unsanctified)의 나태함’을 거절한다

3. 영적 권위에 헌신(8절): ‘부정의 독립’을 거절한다

G. 주님 곁으로 가까이 나아 가는 것은 개인적 친밀감을 말하기 때문에 ‘단수형’을 사용한다. 그렇지만, 달려가는 것은 사역을 말하기에 ‘복수형(우리)’을 사용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동역하며 함께 달음질 하는 데 있어, 고립이나 나태함, 독립적 정신으로 하길 원치 않으신다.

H. 첫째, 우리는 부정적 고립을 거절하며, ‘지체의 삶’에 헌신해야 한다(아 1:8). 

주님은 신부가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갈 것’을, 즉, 지체의 교제에 동참할 것을 말씀하신다.

‘양떼의 발자취’는 모든 양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장소를 말한다. 주님은 신부에게 지체가 동행하는 곳을 따라가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지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렴, 너를 판단하고 학대하는 화난 아들들에게 너무 과민반응할 필요가 없단다”라고 말씀하신다. 

지체로부터 자신을 고립 시키는 것은, 하나님을 찾으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거절감과 쓴뿌리, 그리고 수치심에서 나온 것이다. 마귀는 우리를 고립시켜 파괴하기를 원한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 (히 10:25)

I. 둘째, 우리는 부정적 나태함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맡기신 책임을 다해야 한다(아 1:8).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어린 양떼를 먹여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어린 자들, 또는 양떼들을 먹이는 책임을 다할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모습을 더 드러내실 것이다.

J. 세째, 우리는 부정의 독립을 거부하며, 영적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아 1:8). 

신부는 진정한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지체를 섬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위임하신 목자들(리더들)을 향해 우리가 ‘열린 마음’을 가지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세운, 또는 세우실 리더가 완벽한 리더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계신다. 하지만, 이렇게 완벽하지 못한 리더들과 관계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더 깊이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불완전한 목자들을 통해 우리를 훈련시키시며, 우리 안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이슈들을 드러내신다.

이들의 부족함이나 흠을 보게 될 때, 과연 우리가 배우는 자세로 그들의 장막 곁에 남아 있을 것인가에 대한 시험도 받게 된다. 그러나, 순종은 겸손이며, 권위에 대한 열린 마음을 말한다.

K. 요약: 예수님의 세가지 대답은 지체 안에 머물면서 오는 세가지의 주된 유혹(시험)을 다루고 있다. 

첫번째 시험은 우리가 화난 아들들에게 거절받고, 학대받고, 죄로 인한 수치심을 느낄 때, 쓴 뿌리를 가지고 고립하고 싶은 유혹이다. 이것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가 지체안에 머무는 것이다. 

둘째는, 이기적인 마음과 두려움에 대한 유혹(시험)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어린 자들을 돌보기를 원하신다. 타인을 섬길 때, 우리는 예수님을 가장 잘 발견하게 된다. 

세째는 영적 권위를 따르지 않으려는 유혹(시험)이다.

V. 신부의 진심을 재확인 시켜 주시는 주님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10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11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아 1:9-11)

A. 아 1:9-10 에서, 주님은 신부를 세가지에 비유하신다. 하나님 앞에 신부가 소유한 진실한 마음과 자원의 심령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지를 재확인시켜 주신다. 

먼저, 주님은 신부를 ‘내 사랑아’라고 부르시며 말씀하신다. 사랑으로 신부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B. 의의 삶을 살면서 예수님을 따르려는 진실하고도 강력한 신부의 바램을 하나님은 잘 아신다. 신부는 ‘바로의 병거의 준마’와 같다.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아 1:9)

1. 준마는 말이다. 말은 힘과 강인함을 상징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義)’로 가지게 되는 신부의 힘을 말한다. 바로의 준마들은 당시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말들로, 잘 조련된, 노련한 말들이었다. 주님은 신부의 힘을 이 준마들에 비유하셨다.

2. “바로의 병거 가운데” 라는 표현은, 이 말들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면서 강인한 전투용 말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애굽의 말들은 당대에 가장 유명한 말들이었다. 바로는 세상에서 가장 고도로 숙련되고 조련된 말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바로는 그 말들 중에서도 가장 최고의 말들을 뽑아 자신의 병거를 끌게 했다. 바로의 병거를 끄는 준마들은 최고 중의 최고였다. 거대한 마구간에 수 천마리의 말들을 사육하면서 바로 자신의 병거에 준마를 사용했다. 

솔로몬 왕은 그 당시 세계 최고 갑부로서, 바로의 수많은 말들을 사들였다. 솔로몬 왕은 바로의 말들을 살 수 있는 몇몇 안되는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C. 우리의 마음은 주님께 끌린다. 주님은 그분의 영으로 우리의 심령을 만지신다. 

예수님을 향한 신부의 진실한 헌신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은 신부의 마음을 만져 주신다.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11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아 1:10-11)

1. 아가서 전체에 걸쳐, 뺨은 감정을 말한다. 뺨(또는 얼굴)은 분노나 기쁨같은 사람의 감정, 심리상태를 드러낸다. 사람의 뺨을 통해, 그 사람이 기쁜 지, 화가 났는지, 슬픈 지를 파악할 수 있다. 사람의 감정은 뺨을 통해 표현된다.

2. ‘장식용 사슬(땋은 머리털)’은 물건을 아름답게 만드는 예술가의 노련한 작업을 통해 탄생된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름답게 만드시는 예술가이시다(사 61:3). 주님은 우리의 정욕이나 분노를 다 아시지만, 예수님을 향해 자라나는 우리의 열정 또한 보신다. “네 마음이 아름답구나, 내 아들에게 순종하는 ‘자원의 심령’을 네 안에 아름답게 작업 해왔단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은 감동하신다.

D.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룩한 권위에 복종하는 마음과 예수님께 순종하려는 결단의 의지를 보신다.

10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11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아 1:10-11)

1. ‘목’은 상징적으로 ‘의지’를 말한다. 

성경은 목이 ‘뻣뻣한’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은 고집센, 또는 반항적인 사람들을 뜻한다. 목은 ‘거룩한 복종’을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목을 사용해 고개를 원하는 방향으로 돌린다. 전쟁에서 승리할 때, 정복한 장군은 패배한 왕의 목을 위에서 발로 누르게 되는 데, 이것은 굴복하라는 것을 뜻했다.

2. ‘금사슬’은 왕족의 권위을 말한다. 

오직 왕족만이 금사슬을 소유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왕 이외에 금사슬을 구입할 수 있는 사람이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금사슬은 귀하면서도 값비싼 물건이었기에, 오직 왕족들만이 금사슬을 차고 다녔다. 특별히, 왕의 상징이 새겨진 금사슬은 왕자가 마을들을 지날 때, 왕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차고 다녔던 귀중품이었다.

VI. 우리(삼위일체의 하나님) 안에 시작하신 것을 마치리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약속

11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장식)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아 1:11)

A. ‘금장식’은 ‘거룩한 인품’을 말한다. 

신부는 정금과 같은 인품으로, 그리스도와 같이 될 것이다. 이것은 ‘불의 연단’을 통해 정결케 된 자들을 말한다(말 3:1-4). ‘은박’은 ‘주님의 구속’을 말한다. 신부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구속’을 가져다 주는 데 사용될 것이다. 사람들을 속박에서 건져내기 위해 신부는 주님께 양육받게 될 것이다.

B. “우리가 너를 위하여 ⋯ 만들리라”는, 신부안에 시작하신 역사를 주님께서 완성하시겠다는 ‘거룩한 약속’이다. 

주님은 7 절에 “나를 어디서 먹이실 겁니까?”라는 신부의 질문에 대답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은 신부에게 특별히 역사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신다.

정금과 같은 거룩한 인품을 택하는 자(금)가 되도록, 또 사람들을 속박에서 건져내는 ‘은’이 되도록 주님은 신부를 양육하실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걸려 넘어지는 삶의 영역에서도 승리하게 될 거라는 약속을 주시며, 사람들을 건져내는 구속역사의 ‘요원’으로 우리를 사용하실 거라 말씀 하신다

===11장 신부의 패러다임(영성): 기초 진리(아 1:12-17)(The Bridal Paradigm: Foundational Truths)

I. 아가서 복습과 개관 1:5-17

A. 신부는 예수님께 묻는다, “저를 어디서 먹이시렵니까?”(아 1:7). 

주님은 신부의 아름다움을 선포하며 7 가지로 대답하신다(아 1:8). 그리고는, 세가지 교육(아 1:8)과 세가지 사랑의 확증(아 1:9-11)을 주신다.

B. 주의 상에서 먹이시는 예수님께 신부는 세가지로 응답한다(아 1:12-14). 

신부는 마음이 어두워 자신의 ‘포도원’을 잘 돌보지 못하는 연약함을 드러내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사랑안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13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14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아 1:12-14)

C. 신부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이 보시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계시를 더 많이 받게 되면서(아 1:15) 5 가지로 주님께 응답한다. 

신부는 멋진 예수님(아름다운 하나님), 사랑하는 자(나의 사랑하는 자), 자신에게 쉼을 주시며, 영원한 영광으로 삶을 인도하시고, 기뻐하시는 예수님을 보게 된다(아 1:16-17).

II. 십자가에 대한 묵상: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가 누리는 유익(아 1:13)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아 1:13)

A. 신부는 십자가를 통해 받은 유익과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를 받게된다(롬 3-8).

B. 몰약은 인도, 아라비아와 동아프리카에서 다양한 나무와 관목에 의해 생산되는 향기로운 고무질 점성의 삼출물이다. 몰약은 값비싼 용품으로,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향수를 만들고(잠 7:17), 거룩한 기름부음의 오일로 분향을 태우며(출 30:23), 또 사람을 장사 지내는 데 사용되었다(요 19:39-40). 몰약은 아주 쓴 맛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동방 박사들이 드린 선물중의 하나가 몰약이었는 데, 이것은 그분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예고한 것이었다(마 2:11). 십자가에서 몰약을 받으신 예수님(막 15:23). 이것은 죽음을 받아들이시는 주님의 의지를 뜻한다(시 45:8).

C. 몰약은 향품이지만, 육신의 죽음을 받아 들이는 고통스런 실재를 말한다.

D. 에스더의 단장이 나오는 본문을 보면, 단장의 한 과정으로 몰약과 다양한 향수로 목욕하는 절차가 포함되어 있던 것을 볼 수 있다(에 2:12). 몰약은 아가서에 8 번에 걸쳐 나온다(아1:13; 3:6;4:6, 14; 5:1, 5, 13).

E. 고대에 일부 부유층 여성들은 몰약이 담긴 커다란 목걸이를 그대로 목에 건 상태로 잠을 잤다. 몰약의 향기가 밤새도록 방을 가득 채우게 하기 위해서 였다.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에게 이 값비싼 선물을 선사했다.

F. 신부는 밤새도록 마음에 남아있는 ‘몰약 향낭’같은 예수님을 선포했다. 

십자가는 왕이신 예수님께서 그의 신부에게 주신 너무나도 값진 선물이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주님의 “아낌없는 사랑의 헌신"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의 인내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은 우리가 주님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계시해 주는 사건이다.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과 고난의 인내를 통해 우리의 소중함을 배울수 있다. 우리가 존재하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소중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1 장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사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시고, 우리와 영원한 관계를 누리기 위한 길을 여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주님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그대로 전달하는 사건이다.

G. 몰약은 ‘밤새도록’ 신부의 마음에 남아있다. 

‘밤’은 신부의 일편단심과 함께, 유혹과 시험의 밤을 말한다. 몰약은 항상 신부의 마음 안에 남아있다.

H. 우리는 우리 죄를 위해 죽임 당하신 어린양을 보며, 영원토록 그 감격을 금치 못하게 될 것이다(계 5:8-12). 주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우리가 진실로 깨닫게 될 때, 영원토록 우리는 주님에 대한 경외심과 감사함으로 넘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 (목)에 걸쳐진 ‘몰약향낭’이신 예수님을 영원히 만나게 될 것이다.

I. 우리는 밤낮으로 마음에 ‘몰약향낭’을 담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를 묵상할 때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한다(아 1:4). 가장 순종적이며, 가장 깊은 예배의 마음을 지닌 사람들을 보면 역시 십자가를 가장 많이 묵상한다. 십자가는 그들의 지속적인 묵상과 고백의 주제이다. ‘십자가에 대한 묵상’은 우리 삶이 다하는 날까지 계속 이어져야 한다. 만약 십자가가 삶에서 고루해 졌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III. 예수님의 아름다움과 기쁨에 대한 계시(아 1:14)

A. 신부에게 예수님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고벨화 송이’ 같다. 

고벨은 향기로운 꽃을 지닌 관목이다. 주님의 마음에 대한 계시를 지닌 자들에게 예수님은 고벨화 송이 같은 분이다. 우리 주님은 종교가 거짓으로 선포하는 것처럼, 부담되고 고루한 하나님이 아니시다.

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아 1:14)

B. 예수님의 명령들은 부담을 주는 명령들이 아니며, 그분의 멍에는 진리만 바로 이해하면 쉬운 것이다.

3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30)

C. 예수님의 성품은 만발한 꽃들의 ‘송이(다발)’와 같다. 

꽃 한송이가 아니라 송이(다발)인 것이다. 이것은 주님이 소유하신 다양하고 풍성한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엔게디 포도원은 당시 풍성한 향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예수님은 모든 것들을 초월하는 아름다운 향기를 갖고 계신다.

16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일다(아 5:16)

D. 우리는 ‘만발한 고벨화 송이’와 같은 예수님의 진리를 세상에 알려야 한다. 

이 진리를 바로 이해하게 되면, 사람들은 더 쉽게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게 될 것이다. 우리는 크신 인자함을 지니신 ‘아름다운 하나님’에 대해 설교해야 한다. 주님은 좋은 소식(복음)으로 우리를 ‘취하게’ 만드시는 향기롭고 달콤한 하나님이시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최소화하느뇨) (롬2:4)

IV. 왕의 상에서 잔치를 즐기는 신부: 향기롭게 올라가는 신부의 경배(예배) (아 1:12)

A.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잔치상을 준비하셔서(고전 10:21), 십자가를 통해 영의 양식을 먹게 하시고, 의의 선물(고후 5:21)을 통해 영적인 축복을 누리게 하신다. 

신부는 그 상에 앉아 예수님과 함께 구원에 대한 ‘진리의 양식’을 먹게 된다. 이 진리를 통해 신부는 향기처럼 올라가는 경배(예배)를 주님께 드리게 된다. 이 진리는 집에 돌아와 아버지의 상에 함께 앉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탕자의 비유’와 병행되는 진리이다(눅 15:20-28). 

예수님에 대한 두번째 계시는 ‘사랑이 가득한 아버지’이다.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아 1:12)

B. ‘나도기름(향수)’의 향기와 같이 신부의 경배는 하나님께 올라간다. 

이 감송(나도)은 이름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나도(감송)는 인도가 근원지인 동양식물로, 값비싼 향유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C. 예수님이 주시는 양식을 통해, ‘영적 향유’와 같은 경배가 우리 안에서 솟아나게 된다.

D. 주님의 상에서 주시는 양식에 우리가 초점을 맞출 때, 우리 안에 깊은 곳에서 부터 솟아 오르는 향기와 같은 예배를 주님은 기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향기’이다. 그리고, 이 향기는 감사와 사랑이 충만한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된다.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 2:14-16)

E. 누가복음 7 장에 보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달려 들어간 한 창녀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는 주님 발 앞에 향유옥합을 깨뜨린다. 그 방을 가득 채운 향기는 예수님을 향한 그녀의 사랑을 담은 향기였다.

F. 원수의 목전에서도 우리는 우리에게 베푸신 주의 상에 놓인 양식들을 즐길 수 있고 즐겨야 한다. 왕의 상에 있는 영적 양식으로 우리 자신의 심령을 채우지 않으면, 우리는 수치심과 죄책감에 짓눌려 ‘영적인 아사’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내 잔이 넘치나이다 6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 23:5-6)

G. 우리는 ‘예수님의 의’로 하나님 앞에 서는 자들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후 5:21).

우리는 죄의 심판으로부터 자유한 자들로, 살아있는 자들과 같이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산제사로 드려야한다. “주의 의로 나를 살게 하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고백하며, 우리 자신을 주께 드려야한다. 죄책감에 휩싸여 빌빌기는 ‘거지’처럼 주님께 나아가지 말라.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13⋯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롬 6:11-13)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H. 당신에게는 어떤 향기가 하나님께 올라가고 있는가? 확신과 감사의 향기가 올라가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내 맘이 검다”에만 치중하여, “난 하나님께 사랑스럽다”라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며 산다. 그러나,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 사랑합니다,” “나를 사랑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저도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며 살 때, 우리의 향기로운 예배(경배)가 주님께 상달되게 될 것이다.

I. 예수님은 모든 원수를 물리치고 승리하신 위대한 왕이시다. 

왕이신 예수님은 사랑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주님은 통치하는 왕이시기에, 그분의 모든 계획이 우리의 삶에서 성취될 것이라는 신뢰를 우리는 가져야 한다. 우리를 향하여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다름아닌,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왕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사랑으로 결단한 것을 성취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 가장 위대한 왕이시기 때문에, 주님의 모든 계획은 성취되게 되어 있다.

J. 신부의 세가지 반응 요약 (아 1:12-14): 

첫째, 신부는 왕의 상에서 영적 양식을 먹으며, 나도기름의 향기와 같이 올라가는 자연스러운 경배와 예배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된다(아1:12). 

둘째, 신부는,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자신을 위해 예수님이 ‘몰약’인 십자가의 죽음을 담당하시면서 성취하신 역사를 지속적으로 묵상하면서 영적 공급과 축복을 누리게 된다(아 1:13). 

세째, 신부는 주님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맛보게 된다(아1:13).

V. 신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안에 있는 신부의 아름다움에 대한 계시(아1:15)

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아름답고) 어여쁘다(아름답다) ⋯(아 1:15) 15 Behold, you are beautiful⋯My love ⋯ (아 1:15,NAS/NIV역)

A. 이 본문에서, 우리는 신부의 패러다임에 대한 2 가지 근본진리를 엿볼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지니게 되는 신부의 아름다움과, 두번째는 ‘내 사랑’이라고 신부를 부르시는 주님의 애정에 대한 계시다. 신부는 영적 미숙함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사랑안에 확신을 갖는 모습을 보여왔다(아 1:12-14). 이 근본 진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지닌 아름다움에 대한 진리를 더 많이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양육시켜 준다.

B.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계절 내내 하나님께 아름다운 존재이다. 

첫째, 우리의 사랑스러움은 ‘의의 선물’을 통해 온다(고후 5:17-21). 

둘째, 거듭날때, 성령님은 우리안에 하나님께 ‘순종’ 할 수 있는 자원의 심령을 넣으셨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작은 순종의 마음도 ‘자원하는 심령’이라고 하는 성령의 역사다(시 51:12; 마 26:41). 세째, 우리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이 지니신 마음들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인자한 사랑과 열정은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의 눈을 보여준다. 아름다움은 바라보는 자의 눈에 있다. 대상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관점은 사람의 관점과 매우 다르다 (삼상  16:7; 사 55:7-9). 

네째,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영원한 부르심을 통해 보신다.

C. 예수님은 믿는 자 한사람 한사람을 ‘내 사랑’이라고 부르신다. 

예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다 사랑하시고, 또, 우리의 마음을 좇기로 결심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다, “나는 주님이 사랑하는 제자요, 주님의 총애를 받는 자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요 15:9)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 (요 21:20)

D. 아름다운 하나님의 은혜을 통해 내가 사랑 받고, 아름다운 존재라고 느낄 때, 우리의 마음은 벅차오르게 된다. 

“예수님 때문에, 난 연약함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아름다운 존재입니다”라는 확신을 고백하게 될 때, 우리는 영적으로 가장 신속한 성장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신부는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라고 가르친다.

4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것을 기억하리라) (아 1:4)

E. 신부의 여정은 두 가지의 신앙고백으로 시작 되는데(아 1:5), 난 이것을 ‘은혜의 역설’이라 부른다. 신부는 죄성을 가진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면서도, 하나님께 자신이 아름다운 존재라는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계시가 없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를 발견할 때, 우리 자신이 더럽고 추한 존재로만 느껴지게 된다. 우리가 추한 존재라고만 생각하고 살면, 우리는 추한 일들을 계속 반복하며 살게 될 것이다. 자신이 더럽다고 느끼는 사람은 말 그대로 더럽게 살게 된다. 그러나, 미숙하지만 자신이 주님께 아름다운 또,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도망가지 않고 주님께 달려가게 된다.

F.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될수록, 우리는 다른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도 더 알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지닌 아름다움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신다. 

복잡한 인간 관계의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해 사로잡힌 하나님의 마음(아 4:9)을 보면서 그분의 사랑을 기억해야 한다(아 1:4).

G. 복습: 도입부분에서, 신부는 “나는 마음이 검으나 하나님께 사랑스러우니(아름다우니)”(아1:5)라고 고백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는 어여쁘다(아름답다), 내사랑, 네 두뺨은 사랑스럽구나”라고 대꾸하셨다(아 1:8,1:9,10). 그 후, 신부는 아름다운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아 1:12-14). 또다시 맞장구를 치듯, 주님은 신부에게 “아름답다”라고 거듭 강조하신다(아 1:15).

VI. 비둘기의 눈을 가진 신부

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아름답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아 1:15)

A. 성경에서, 비둘기는 보통 ‘성령’을 상징한다. 여기서는 몇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B. 일편단심: 비둘기는 주변 시야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오직 정면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에 전혀 방해받지 않는다. 쉽게 말해, 비둘기의 눈을 소유한다는 것은 ‘좋은 눈(한 마음을 품는 것)’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 6:22)

C. 충실함: 비둘기는 평생 한 짝만을 두고 산다. 짝이 죽으면, 다른 짝을 찾지 않는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충실함을 말한다. (참고- 배우자가 죽어 재혼하는 것을 불충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D. 15 절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 앞에 나는 아름답다’라는 계시를 가진 신부는 그에 힘입어 더 커다란 비전을 지니게 된다.

E. ‘비둘기의 눈’을 가진 궁극적인 분은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은 한 마음을 품으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충실하신 분이시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령님께 ‘비둘기의 눈’을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F. 관점: 우리는 성령님의 관점으로 예수님과 우리 삶을 보아야 한다. 

고벨화 송이와 같으신 예수님, 향기롭고 아름다운 예수님을 보며, 일편단심으로 주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지켜, 모든 정죄를 거부하고 주님 앞에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VII. 신부의 경배와 믿음: 다섯가지 응답

16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멋있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17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아 1:16-17)

A. 하나님께 사랑 받는 아름다운 존재라는 계시(아 1:15)와 비둘기의 눈에 대한 계시를 받게 된 신부는 기쁨으로 예수님께 화답한다. 

신부는 예수님을 ‘어여쁜 자(아름다운 하나님)’, ‘사랑하는 자’, ‘삶을 안식과 평강으로 인도하는 분’, ‘다가오는 시대에는 영원한 영광으로 인도하시는 분’, ‘화창한(즐거우신) 분’으로 고백한다.

B. 신부는 예수님께 고백한다, 

“나의 사랑하는자, 당신은 멋지십니다.” 다시말해, “당신은 아름다운 하나님입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한다.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보면 볼 수록, 또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면 할 수록, 신부는 하나님과의 동행에서 더 큰 영적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16절). 아가서 2:3-5 은 이것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아름다운 분, 즐거운(화창한) 분으로 보게 될 때, ‘온전한 순종’이라는 말을 더 쉽게 납득할 수 있게 된다.

C. 우리가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의 사랑안에 거할 때, 하나님과의 동행이 기쁘고 즐거우며 충만한 기쁨을 누리는 동행이 될 거라는 약속을 주님은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는 주님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이 기쁨을 누릴 수 있다(아 1:12-17). 주위 환경과 상황이 어려울 지라도, 우리는 이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 15:9-11)

VIII. 예수님의 사랑안에 거하는 신부: 안식과 확신, 그리고 영광(아 1:16-17)

16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17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아 1:16-17)

A. 예수님의 사랑안에 거하면서, 신부는 풍성한 안식과 삶의 확신을 회복하게 된다(아 1:16).

신부는 ‘비옥한 침상,’ 또는 ‘푸른 침상’에서 안식하고 있다. ‘푸른 땅’은 때때로 ‘비옥한 땅’, 또는 풍성한 성장을 주는 땅을 의미한다. 주님의 침상은 호화롭고, 푸르르며, 생명이 가득찬 침상이다. 광야(바싹 메마른 땅)와는 대조된다. 이 비옥한 침상과 같이, 우리의 확신은 풍성함으로 넘쳐야 한다.

B. 주님의 침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갖게 되는 안식과 확신을 두가지로 말해준다.

1. 죄사함(용서)의 안식: 

예수님 안에 값없는 선물로 죄사함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안식할 수 있다. 십자가를 통한 죄사함으로 우리는 안식한다(고후 5:17).

2. 친밀감의 안식: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추구하면서 안식을 누린다. 삶의 제일의 목적이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누리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이 친밀감의 안식을 온전히 누릴 수 없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예수님의 리더십에 순종하는 지혜를 담고 있다. 

성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찾지 않는 한, 인간은 결코 안식을 누릴 수 없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우리의 모든 것을 걸 때만이, 우리는 인생의 궁극적 목적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죄사함의 확신만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지막 날 후회없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기 위해, 아직도 삶의 목적을 찾는데 고군분투하고 있다.

C.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설 때에, 우리는 정죄의 두려움도, 후회의 두려움도 없어야 한다.

신부의 패러다임으로 살면, 교회가 우리를 종교적이라고, 또는 세상이 우리를 어리석다고 손가락질 할 지라도, 우리는 주님께 순종하는 지혜와 하나님을 향한 사랑 안에 확신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된다.

D.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과 관계하며, 아름다움과 능력이 가득찬 집에서 살게 될 것이다.

신부는 “침상”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것은 오직 ‘구원’이라는 깊은 연합을 통해 나온 표현이다(고전 6:17).

E. 신부는 그들의 ‘집’이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아 1:17).

들보와 석가래는 집의 뼈대 구조를 잡아준다. 집의 뼈대 구조는 겉에서 보이지 않는다. 백향목과 잣나무는 솔로몬 시대 당시, 건물의 목재로 사용 되었는데, 뛰어난 내구성과, 아름답고 향기로운 목재로 매우 값비싼 나무였다. 백향목과 잣나무는 솔로몬 성전을 짓는데 사용되어, 그 구조의 부패를 오랫동안 막아 주었다. 성전에 쓰인 목재는 ‘인류’를 상징한다.

F. 하나님은 영원한 집을 짓고 계신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거할 처소는 강하고 영원하며 내구성이 매우 뛰어난 처소이다. 예수님이 인간의 형상으로 오셨기에, 주님의 신부를 위한 영원한 처소를 마련하실 수 있게 되었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지으신 집은 튼튼한 집이요,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아름다운 집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만드신 아름답고 튼튼한 집에서 영원토록 예수님과 함께 거하게 될 것이다. 신부는 그 집을 ‘우리의 집,’ 또는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거하는 처소라 고백하고 있다.

19 ⋯너희가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5 너희도 ⋯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벧전 2:5)

===12장 하나님의 사랑안에 있는 신부의 정체성(아 2:1-7) (The Bride’s Identity in God’s Love)

I. 신부의 영적 정체성: 두가지 고백

A.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에게 ‘영원한 동반자’를 기업으로 주겠다고 약속하셨다(엡 5:31- 32; 계 19:7-9). 

예수님과 함께 동일한 ‘사랑의 멍에’를 자원적으로 지려는 신부야말로 예수님이 창세전부터 학수고대하며 기다리신 최고의 상급이다. 

하나님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시는 재산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 우리의 사랑을 얻기 위해 예수님은 죽음을 감당하셨다. 우리가 창조되고 구속받은 이유도 ‘주님의 기업’으로 마음을 다해 예수님을 사랑함으로써 주님께 기쁨과 즐거움을 드리기 위함이다.

B. 여기서, 신부는 온전히 예수님을 사랑하고픈 아름다운 ‘장미’, 온전히 주님께 순종하기를 바라는 정결한 ‘백합화’로 그려진다. 

주님은 먼저, ‘주님의 의’로 신부를 아름답고 정결케 하시고, 성령을 통해 신부 안에서 일하신다. 신부는 ‘장미’이다. 여기서 장미와 백합화는 신부를 말한다. 예수님은 그 다음 구절에 신부를 ‘백합화’에 비유하신다(아 2:2).

나는 사론의 수선화(장미)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아 2:1)

C. 신부는 시적 표현을 사용해 ‘예수님의 기업’인 자신의 정체성을 선포한다. 

하나님이 사모하는 정결한 신부의 모습을 반영하기 위해, 신부는 이 두가지 고백을 사용하는 데, 이 계시는 아가서 1:12-17 에 나타난 근본 진리를 따른다. 

신부의 첫번째 고백은 “나는 검으나, 아름다우니”였다(아1:5). 신부는 연약함 가운데서도 자신이 하나님께 아름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고백후에, 예수님은 신부의 아름다움을 다시 확증시켜 주셨다(아 1:8, 15).

D. 장미는 그 색과, 아름다움, 그리고 향기때문에 ‘꽃의 수장’으로 선택되었다. 

‘샤론의 수선화(장미)’는 하나님께서 광야를 얼마나 아름답게 바꿔 놓으실 지를 설명하는데 사용 되기도 했다(사 35:1-2).

E. 신부는 자신이 ‘주님의 마음을 사로잡고 취하게 만드는 장미’, 즉 ‘예수님의 기업’이라는 진리를 알게 된다. 

주님이 사모하는 상급은 딱 한 가지다.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에게 약속한 ‘기업’인 우리가 형용할 수 없을만큼 ‘아름답게’ 되는 것이다. “저는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께 약속한 바로 그 기업입니다”라고 주님께 고백할 때, 우리의 심령은 변화를 거듭하게 될 것이다.

F. 우리는 “나는 하나님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약속하신 기업이다”라는 계시를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사, ‘예수님을 위한 장미’가 되게 하시기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하셨기 때문이다.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엡 1:17-19)

G. 신부는 자신을 ‘어둔 골짜기에서 자란 정결한 백합화’로 본다. 백합화는 ‘정결’을 뜻한다.

‘골짜기’는 비천하고 어둔, 이 타락한 세상을 말한다.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의 ‘골짜기’에 한 송이의 백합화를 두셨다. 주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의의 선물로 정결케 되어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백성들로, 주님께는 매우 특별한 존재이다. 물론, 신부는 여전히 ‘검은 심령’을 가지고 살지만 말이다(아 1:5).

H.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순결한 자들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 세상에 가득한 ‘가시들’과 같은 ‘거짓 종교들’ 가운데 거하는 ‘정결한 백합화’이다. 진실한 교회는 하나님 안에 우리의 ‘생득권’인 정결함을 가지고 온전히 살아 가도록 힘쓰는 교회이다.

I. 하나님이 우리를 아름답게 보시는 데에는 네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우리는 의의 선물을 받았다 (고후 5:17-21). 

둘째, 우리는 거듭날때 자원하는 심령을 받았다(요일 3:9; 마 26:41).

세째, 하나님의 성품, 즉, 주님이 일반적으로 우리를 향하여 어떤 감정을 가지고 사시는 지에 따라 결정된다(사 55:7-9). 

네째, 하나님은 수십억년 동안(영원토록) 예수님의 신부로 살게 될 우리의 부르심을 통해 보신다.

1. 우리는 의의 선물로 정결케 된 ‘순결한 처녀’와 같다(고후 11:2-3). 

이 정체성은 거룩함을 위한 여정에 꼭 필요한 마음가짐으로, 우리 삶의 성공여부를 가름하는 데 있어 매우 중대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죄책감를 거부하고 이 진리위에 굳게 서야 한다.

2. 주님이 간절히 사모하는 대상은 바로 우리들이다. 

주님은 우리를 영원한 동반자, 주님의 신부로 택하셨다. 이 진리는 우리 존재의 궁극적인 가치를 깨닫는 데에 꼭 필요한 진리이다. 거절감을 거부하며, 우리는 하나님이 간절히 바라는 대상이라는 진리위에 굳게 서야 한다.

J.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있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바로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가치/성공)을 찾을 수 있게 된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는 ‘나는 하나님께 사랑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진리가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이며, (하나님/타인을) 사랑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나는 성공한 사람이다.”

K. 주님은 우리를 ‘장미’, ‘백합화’로 선포하신다. 

이 진리는 우리 안에 있는 수치심과 실패감, 열등감을 제거해 주며, 우리 삶의 진정한 성공을 재정의 해준다.

L.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과 성공을, 달성한 업적이나 사회적인 영향력을 통해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이 사모하는 존재’라는 진리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통해 찾아야 한다. 

실패의 두려움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나를 간절히 사모하시고, 나도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라는 진리위에 서야 한다.

M.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감과 변화, 그리고 계시가 얼마나 자랐는 지를 보면서 삶의 성공여부를 측정해야 한다. 

세상의 정의가 아닌, 하나님의 정의에 따라 성공여부를 가려야 한다.

N. 많은 크리스챤들이 세상적 성공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다. 그래서, 실패감 속에 목표와 목적을 상실한 채로 살아간다. 

우리는 결코 세상적인 성공을 모방할 필요도 없으며, 세상적인 견해들에 압박을 받을 필요도 없다.

O. 주님을 향한 아주 조그마한 (순종의) 마음의 움직임도 귀하게 보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권능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주님은 우리 안에 주님을 향한 미세한 마음의 요동도 기억하시고, 칭찬하며, 상 주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조금씩 가꾸어 나가는 우리의 노력을 주님은 매우 높게 평가하신다. 사도 바울이 지녔던 열정의 능력은, 바로 하나님이 그(의 마음)를 너무나도 잘 아신다는 계시에서 비롯된 것이다.

11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고후 5:11)

P. 이 계시를 가지고 살아가려는 신부의 모습이 신앙 여정 말머리에 나와 있다. 

아가서 8 장까지는 아직 멀었다는 것을 참조하라. 이 계시는 우리의 신앙여정을 시작하는 데 있어 귀한 초석이 된다.

Q. 우리는 하나님께 ‘매우 특별한 존재’이다. 참고: 하나님의 목적에는 오직 한송이의 장미와 한송이의 백합화만이 있다.

II. 신부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확신시켜 주시는 예수님 (아 2:2)

A. 예수님은 신부를 ‘정결한 백합화’로 귀하게 여긴다고 선포 하시면서, 신부의 고백을 확신시켜 주신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아 2:2)

B. ‘가시’는 죄를 뜻한다. 가시는 아담의 죄, 곧 그 저주의 결과로 나왔기 때문이다. (히 6:8)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 낼 것이라 (창 3:17-18)

III. 예수님의 특별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이해하게되는 신부(아 2:3)

A. 신부는 뛰어난 영광을 가지신 예수님을 ‘수풀가운데 사과나무’ 같다고 선포한다.

다시말해, 이 땅의 모든 남자들 중에, 예수님 홀로 우리의 마음을 상쾌하게 해주는 ‘사과나무’라는 것이다.

3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아 2:3)

B. ‘사과 나무’는 ‘시원케 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5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아 2:5)

C. 신부는 이 땅에서 자신을 가장 상쾌하게 해주는 사람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2 왕(예수님)은 인생(인자들)보다 아름다와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영히 복을 주시도다 (시 45:2)

16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다 (아 5:16)

D. ‘숲의 나무들(수풀)’은 다른 나무들보다 우뚝솟은 나무들로, 이 땅에 있는 위대한 사람들을 말한다.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이 모든 교만자와 거만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여 그들로 낮아지게 하고 13 또 레바논의 높고 높은 모든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 나무와 (사 2:12-13)

10⋯내가 본즉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데 고가 높더니 11(네브갓네르사르 통치때)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14 그(천사)가 소리 질러 외쳐서 이처럼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고 ⋯ (단 4:10-14)

IV. 예수님 안에 누리는 영적 안식과 즐거움(아 2:3-4)

A. 주님의 상에서 양식을 먹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그늘’ 아래 안식한다. 

우리가 성취한 업적을 보면서는 우리가 안식할 수 없다. 우리의 그늘이 아닌, 주님의 그늘 아래 안식해야 한다. 우리에게 그늘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나무는 ‘주님의 나무’ 밖에 없다. ‘새롭게 되는 심령’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우리 자신의 외적 성숙도를 보면서 하나님과 관계하려 한다면 우리는 결코 새롭게 될 수 없다.

3⋯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아 2:3)

B. 우리는 예수님의 잔치 상에서 말씀을 먹으며 커다란 기쁨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커다란 기쁨”과 “달콤한 실과”를 경험하고 간증하는 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축복이며 기업이다.

C. ‘달콤한 실과’는 아름다운 신랑이요, 왕이신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주님 말씀에 대한 계시에서 오는 열매를 말한다. 

죽어버린 종교, 잔인한 종교들은 우리의 ‘입맛’을 쓰게 한다. 지속적인 영적 성숙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기본이다. 수십년에 걸친 지속적 영적 성장을 위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겨야 한다.

D. 우리는 하나님 말씀이 주는 ‘뛰어난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를 기뻐하시는 주님’에 대한 진리, 그리고, ‘주님을 기뻐하는 능력’으로 말씀에 대한 계시를 얻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다. 이 기쁨으로 우리는 수많은 고난과 역경들을 극복할 수 있다.

E. 신부는 “어디서 양떼를 먹이십니까?”라고 주님께 물었다(아 1:7). 

주님은 왕의 상에서 신부를 먹이셨다(아 1:12). 신부는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의 양식을 먹었다. 신부는 그 상에서 아가서 1:12 -2:3 에 나오는 진리들로 풍성한 잔치를 벌이고 있다.

F. 우리는 원수(죄, 실망, 고난 등등)의 목전에서도 주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한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시 23:5)

G.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잔치 상’에 초대받았다. 

이 잔치의 완성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서 성취된다(계 19:7). 성찬(식)상도 상징적으로 이것을 가리킨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포도주의 집” 또는, ‘하나님의 포도주가 흐르는 곳’으로 해석한다. 향연이 벌어지는 포도주의 집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맘껏 즐기는 곳을 의미한다.

4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아 2:4)

H. 주님의 상이 있는 잔치 집, 즉, 주님의 사랑을 맘껏 즐기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왕은 신부를 침궁으로 인도했다(아 1:4). 예수님은 길을 헤매이는 자, 잃어버린 자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다(눅 15:3). 안타깝게도, 길을 잃고 헤매이는 하나님의 양들 중에는 이 진리를 거부하고 잘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I. 예수님은 잔치집을 “주님의 사랑을 축하”하는 자리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갖고 계신다. 

이 상으로 우리를 이끌기 위해, 주님은 긍정적, 부정적 방법을 모두 동원하신다. 주님은 우리 안에 사랑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하시는 ‘질투’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달콤한 말씀을 통해, 꿈이나 환상을 통해, 또는, 새로운 우정의 기쁨을 통해 우리는 자발적으로 주님의 리더십을 따르며 주님의 상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문들을 닫으시고 우리의 계획들을 좌절 시키셔서, 우리를 꼼짝달싹 못하게 훈련시키시며 주님의 상으로 인도하기도 하신다.

V. 신부의 삶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깃발: 사랑의 리더십 (아 2:4)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 (아 2:4)

A. 예수님의 현명한 리더십, 사랑의 리더십은 우리에게 확신을 심어준다. 

고대의 군대는 특정한 기, 또는 깃발을 들고 대대적 행진을 벌였다. 작은 단위의 소부대들도 자신들의 깃발을 가지고 있었다 .

B. 우리 삶 위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깃발’은 ‘사랑의 리더십’으로, 삶의 여러가지 면에서 나타난다. 

먼저, 이 깃발은 하나님의 자비로 갖게되는 ‘확신’을 말한다. 우리가 실패할 때, 주님이 주시는 깃발은 절대 거절감이 아니다. 우리는 “실패할 때도 나는 하나님께 사랑 받는 자입니다”라고 당당히 고백해야 한다. 

둘째, 이 깃발은 우리 삶의 부정적인 환경도 뒤엎으시사,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실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말한다(롬 8:28). 우리를 향한 주님의 깃발을 절대 무시해서는 않는다. 

세째, 이 깃발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죄가 주는 ‘거짓된 위안’이 아니다.

C.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다. 

“예수님은 나의 실패와 고통 속에서도 나를 새롭게 하시며, 유혹과 삶의 압박 가운데서도 ‘지혜롭고 사랑스런 리더십’이라는 깃발을 내 위에 세우시는 ‘사과나무’입니다.”

VI. 하나님과 더 깊은 친밀감을 누리고 싶어하는 신부의 절규(아 2:5)

A. 신부는 하나님과 더 깊은 친밀감을 누리고 싶어 부르짖는다. 

아 1:12-2:4 의 뜻을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갈증이 더 증가되게 된다. 주님은 “나를 인도하소서”(아 1:4)라는 신부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5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아 2:5)

B. ‘사과’가 시원케 하시는 예수님을 말하는 것처럼, 마른 포도인 ‘건포도’는 성령의 역사를 말한다. 포도는 상징적으로 ‘성령의 포도주’를 말한다. 다시말해, 신부는 “성령을 더 부어 주셔서 나를 도우시고, 예수님이 더 내게 임하셔서 나를 시원케하소서”라고 부르짖고 있다.

C. 신부는 이 땅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경험’을 누리고 싶은 삶의 비전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앓이’를 하며 사는 것을 너무도 기뻐하신다. 신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가, 그녀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경험하고 싶어하는 고통스러울 만큼의 ‘배고픔(목마름)’을 창출해 냈다. 이것을 일단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동행에 있어 예전의 “평범했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 ‘예수님의 사랑’ 속에 푹 빠져 들게 되기 때문이다.

D. 영적 사랑앓이의 두가지 측면.

1. “사랑의 감정들”

- 신부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력하게 체험하게 되고, 하나님을 향한 강력한 사랑으로 권능 입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느낌을 좋아한다.

2. “영적 굶주림의 고통들” 

– 하나님이 우리 안에 성령님과 온전히 동행하도록 새로운 비전을 일깨워 주실 때, 그것을 쉽게 충족시켜 주시지는 않는다. 그것을 통해 생기는 배고픔은, 고통스럽고도 절박하며, 심지어는 뼈를 깎는 듯한 고통까지 느낄 정도의 굶주림이다. ‘사랑앓이’의 해법은 오직 인내 밖에 없다. 우리에게 절박한 굶주림의 고통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증거를 나타낸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3-4)

VII. 하나님의 품으심 경험하기 (아 2:6)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게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아 2:6)

A. 신부는 자신의 삶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두가지 활동을 잘 알고 있다. 

이 두가지 활동은 하나님의 ‘왼손과 오른손’을 말한다.

B. 하나님의 ‘왼손’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활동과 역사를 말한다. 

왼손은 머리 밑에 감춰져 있기에 볼 수가 없다. 주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많은 영역들 가운데 일하신다. 축복과 공급, 보호를 위해 많은 것들을 묶어 놓기도 하시고, 풀기도 하신다.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전혀 알 수도 없는 여러 문제들과 고통으로 부터 우리를 건져주시기도 하신다. 예를 들면, 여러 가지 사고위험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기도 하시며, 보이지 않게 우리의 장래의 배우자를 예비하시기도 하신다.

C. 하나님의 ‘오른손’은 보이는 하나님의 활동과 역사를 말한다. 

솔로몬이 신부앞에 서서 신부를 안으려는 모습을 생각해 보자. 신부는 솔로몬을 보고,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느끼고 분별할 수 있는 하나님의 “달콤한”임재의 경험을 말한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 오른 손의 역사를 통해, 우리의 마음이 부드럽게 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VIII. 전략적인 영적 계절에 우리를 보호하시는 성령님(아 2:7)

7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아 2:7)

A.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성령님은 때때로 전략적인 계절들을 위임하신다. 

이 계절 가운데, 성령님은 ‘주님의 마음에 대한 새롭고 깊은 계시’를 우리 안에 확립하고자 하신다. 하지만, 이렇게 삶의 한 계절을 구별하여 하나님과 말씀안에 깊이 들어가야 하는 필요성을 많은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사도 요한을 한 번 보라. 그는 인봉책을 먹도록, 다시말해,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도록 지시를 받았던 것을 볼 수 있다(계 10:9-11).

B. 이 계절동안 성령님은, 신부 안에 주를 향한 사랑앓이를 일깨우고, 말씀에 깊이 들어 갈 수 있도록 이끄시려는 계획을 갖고 계신다. 신부는 예수님의 그늘 아래 안식하며, 잔치상에 있는 ‘사과와 포도’로 자신의 영적 필요를 충족시킨다.

C. 이 계절동안 성령님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생각과 판단으로 신부를 깨우거나 방해하지 말아 줄 것을 정중하게 부탁하신다. 영적 계절이 바뀔 때가 되면 예수님이 알아서 직접 우리를 깨우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에 대한 신뢰를 가져야 한다. 아 2:8 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성령님의 다양한 활동과, 하나님이 위임하시는 계절들을 잘 분별하지 못하는 신자들을 말한다.

D. 솔로몬은 ‘노루와 들사슴’으로 그들에게 부탁한다(아 2:7).

‘노루’와 ‘들사슴’은, 이 영적 계절에 머물고 있는 어린 신부를 사람들이 온유하고, 민감하게 대해야 함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 

노루나 사슴은 쉽게 놀라는 동물이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것들에 쉽게 시선을 빼앗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영적 계절에 있는 사람들을 온유함과 민감함을 가지고 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인식해야 한다.

E. 이것에 대한 좋은 예는 베다니 마리아의 이야기다. 

동서분주하며 주의산만했던 마르다. 동생 마리아를 자기와 같이 만들려던 마르다를 예수님은 교정하신다(눅 10:38-42).

마리아는 주님 발아래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아낌없는 사랑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며 순종해 나가는 부르심을 신중하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했다고 나온다(42절). 우리도 이 ‘좋은 편’을 택해야 한다. 우리 대신 결정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수님은 ‘주의 발아래 앉는 것’(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 주님과의 깊은 사랑의 관계를 누리는 것-역자주)의 중요성을 강조하시기 위해, 그것을 ‘필요한 한가지’와 삶의 ‘좋은’ 길이라고 표현하셨다. 이것을 통해, 여러가지 논쟁의 여지가 될 수 있는 부분에 ‘종지부’를 찍으신 것이다. 마리아의 결정은 우리의 영원한 부르심을 함축적으로 말해준다.

F. “내 사랑이 원하기 전까지”에서, ‘내 사랑’은 히브리어로 그것, 그, 또는, 그녀로 해석될 수 있다. 

미국 NAS 성경역본은 이 구절을 “그녀가 원하기 전까지는 사랑을 깨우지 말라”라고 정확히 번역하고 있다. “그것이 원하기 전까지는”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가’라고 번역하면, 예루살렘 여자들이 주님을 깨우는 결과가 되는데, 주님은 노루나 들사슴 같이 쉽게 놀라거나, 보호받아야 하는 분이 아니다. 방해받지 말아야 할 사람은 어린 신부다. 아가서 전체를 통해, 예수님은 이 구절을 세번 반복하신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까지 깨우지 말라”(아 2:7; 3:5; 8:4). 8장 4절에서는 “그녀를 방해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8장에 나오는 구절에서도, 주님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신부를 품으신다. 그러나, “노루나 들사슴”이라는 표현은 생략하신다. 그것은, 신부가 성숙하게 되어, 예전처럼 쉽게 놀라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엡 4:14).

G. 삶을 사는 동안, 성령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영적 계절을 부여 하시는데, 이것을 사계절에 비유할 수 있다. 

‘봄’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새로운 진리(계시, 도전, 초청, 등)의 씨앗을 심으신다. 봄은 모든 것이 다시 새롭게 시작되는 계절로 우리를 흥분시킨다.

‘여름’은 심겨진 진리의 씨앗들과 경험들을 가꾸는(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가지를 치는) 계절이다. 성장의 계절이지만, 뜨거운 태양아래 많은 수고가 요구되는 계절이기도 하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다. 우리의 수고를 통해 열매가 무르익고, 다른 이들이 함께 그 유익을 누리는 축하와 잔치의 계절이다. 

마지막으로, ‘겨울’은 죽음의 계절이다. 추수가 끝난 후, 겨울이 오면 모든 것이 죽게된다. 그러나, 겨울은 다음 해의 추수를 위해 땅이 준비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13장 도전받는 안락의 지대 (아 2:8 -17) (Challenging the Comfort Zone)

I. 신부의 정체성과 인생의 목적: 예수님의 기업이 되는 것

A. 신부는 이제 자신의 영적 정체성과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기업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은 의무적 순종, 그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원하신다. 다시말해, 순종을 사모하고, 주님을 사랑하며 자원하는 심령을 가진 ‘영원한 동반자(신부)’를 갈망하신다.

B. 하나님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시는 재산은 인간이 소유한 ‘사랑의 마음’이다. 

예수님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원치 않으신다. 예수님은 인간을 구속하시고, 인간의 사랑을 얻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C. 예수님은 각 사람을 향한 특정한 계획과 목적을 갖고 계신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잔치상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다. 다시말해,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축하하며 잔치하기 위함이다. 우리 삶을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리더십의 목표(우리를 향한 깃발)는 그 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나눠 주시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하는 부르심이 있다(아 1:2,4).

4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 (아 2:4)

D. 신부가 사랑앓이를 하고 있기에, 신부의 삶에서 예수님의 리더십은 더 큰 효력을 발휘한다.

신부는 예수님을 향한 더 큰 갈급함으로 부르짖는다.

5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아 2:5)

E. 성령님은 사람들에게, 사과나무 그들 아래 혼인 잔치상에 앉아 있는 신부를 방해하지 말아 줄것을 정중히 부탁하셨다. 그러나, 이제는 시간이 흘러, 신부를 새로운 계절로 이끄시기 위해, 직접 신부를 깨우시게 된다.

7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방해하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아 2:7)

II. 아가서 2:8-17 개관

A. 이 본문은 술람미 여인의 삶에 주목할 만한 ‘전환점’의 시작을 기록하고 있다. 

아가서 4-8 장에 나오는 신부의 깊은 헌신은 바로, 이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계시를 통해 생기게 된다. 여기서, 예수님은 열방을 다스리는 ‘주권적인 왕’의 모습을 신부에게 보여주신다(아가서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세번째 계시). 신부는 지금까지 예수님을 양떼 먹이시는 ‘목자’(아 1:7-11)로, 잔치 상에서 사랑으로 포도와 사과를 먹이시는 ‘사랑이 가득한 아버지’로(아 1:12)만 알아왔다. 이제, 신부는 모든 ‘산들(장애물)’을 쉽게 뛰어 넘어 오시는 ‘왕’이신 예수님, 즉, 새로운 면모를 가지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된다.

B. 아가서 1:4 에서 술람미 여인은 “나를 인도하소서, 우리가 주를 따라 달려가리라”라고 기도했다. 

신부의 두번째 영적 위기는 예수님이 “함께 달려가자”라고 소개하시는 새로운 계절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신부는 자신의 두려움을 발견하며, 두번째 위기를 맞게 된다.

첫번째 신앙의 위기는 자신의 ‘죄성’을 발견한 아가서 1:5-7 였다.

C. 예수님은 신부에게, 머물고 있는 ‘안락의 지대’를 떠나 함께 깊이 동역하자고 신부를 초청하신다. 그러나, 신부는 두려움 때문에 순종을 거부하고, 예수님 혼자 돌아 가시라고 응답하게 된다(아 2:17).

D. 자신의 삶 위의 주님의 깃발(목적)이 사랑이며, 그 사랑을 주님이 나눠주신다고 고백하던 신부를 예수님은 시험하시게 된다. 

여기서, 신부의 딜레마는 예수님의 리더십이 선하다는 것을 과연 믿을 수 있겠는가라는 점이다. 다시말해, 예수님을 따르고 순종할 때 엄청난 대가와 고통이 따른다 할 지라도, 주님께 백퍼센트 순종할만큼 주님의 리더십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이다.

III. 신부에게 주권적 왕의 모습을 드러내시는 예수님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9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아 2:8-9)

A. 술람미 여인은 ‘주권적 왕’이신 예수님에 대한 계시를 얻게 된다. 

신부는 ‘높은 산’, 즉, 고난의 산들을 쉽게 정복하시는 “열방의 주,” 예수님을 보게 된다. 여기서, 신부는 산들을 쉽게 정복하며 뛰어 넘는 ‘노루와 어린 사슴’과 같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있다. 노루나 사슴에게는 무한한 에너지로 산을 쉽게 질주하며 오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B. 왕이신 예수님은 모든 흑암의 세력과 정사들을 물리치셨다(엡 1:22). 

예수님은 모든 장애물(육적인 것과 악한 것)들을 다 이기셨다. 우리는 ‘역경의 산들’에게 옮기우라고 명령할 수 있다. 산보다 높이가 낮은 언덕은, 삶에 직면하는 ‘작은 어려움들’을 말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 11:23)

C. 스룹바벨은 그 앞에 놓인 역경의 산들에게 ‘은혜’를 외쳐야 했다.

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은혜),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슥 4:7)

D. 신부는 ‘사랑하는 자’의 음성을 인식한다.  

안락의 지대를 벗어나 위험한 ‘산들’로 함께 가자고 부르실 때, 예수님은 사랑과 인자함으로 말씀 하신다. 신부는 예수님을 가리킬 때마다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부른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언급할 때도 신부는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표현한다. 

아가서에서, 예수님은 신부를 부를 때마다 애정을 표현하는 “내 사랑,” 또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어여쁜 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신다. “내 사랑”이라는 표현은 아가서에 22 번이나 나오며, “사랑하는 자”라는 표현도 22 번이나 나온다.

IV. 안전, 보호의 벽

9⋯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 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아 2:9)

A. 이 구절에서는, 서서 행동을 취할 준비가 되어 있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밟으시고 승리하사, 안식하며 앉아 계신 모습으로 나오신다(시 110:1). 그러나, 스데반이 순교를 당할 때, 주님은 일어선 채로 그를 맞으셨다(행 7:55). 예수님이 일어서 계실 때에 강력한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

B. 예수님은 ‘벽 뒤에 서서’ 아무것도 모르고 앉아 있는 술람미 여인의 집을 엿보신다. 

요한 계시록에서 우리는 문 밖에 서서 라오디게아 교회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계 3:20).

C. 신부는 그 벽을 “우리의”벽이라 기술하고 있다. 

주님이 신부를 깨우시기 전(아 2:7)까지, 주님의 상에서 방해받지 않고 머무르게 해 준 성령의 역사가 함께 있었기에, 그 벽은 ‘자신의’ 벽이 아니라, ‘우리의’ 벽인 것이다.

D. 예수님이 ‘창문 틈 사이’로 신부를 엿보는 것은, 신부를 구애하여 더 깊은 주님과의 관계로 인도하기 위한 시적 표현이다.

V. 깊은 동역을 위해 안락지대 밖으로 신부를 불러내시는 예수님

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 2:10)

A. 예수님은 신부와 깊은 동역을 할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예수님은 신부에게, 안락한 지대에서 나와, 함께 이 타락한 세상의 산들을 정복하자고 신부를 불러내신다. 예수님은 열방을 주께 복종시키는 데 신부가 함께 동역할 것을 신부에게 위임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마 28:19)

B. 예수님은 ‘온전한 믿음’과 ‘순종의 산’이라는 도전을 우리에게 주신다. 

이 높은 산들은 우리의 안전과 안락에 도전을 주는 산들로, 어려운 과제와 관계를 수용해야 하는 도전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신부는 그 위험과 ‘높은 산들’의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예수님의 그늘 아래 앉아, 사과를 즐기며 안식하기만을 바란다(아 2:3).

C. 신부는 ‘행하는 믿음’과, 영적 전투의 ‘위험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존 윔버는 “믿음이란 ‘RISK’(위험감수)란 글자를 대변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믿음(하나님 안에서의 확신)이 곧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D. 신부의 고민은 “안락의 지대에서 나와 예수님과 함께 그 위험을 감행하는 것이 과연 안전한가?”이다. 주님께 100 퍼센트 순종하는 ‘도박’을 감행할 것인가? 육의 생각으로는, 배 밖에 나와 물위에 주님과 함께 있는 것보다 차라리 혼자 배 안에 머무는 것이 더 안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살면서 실제적으로 지녀야 할 진리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 예수님과의 성숙한 동역을 경험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안락의 지대’를 떠나야 한다.

“안락한 지대에 머무르는 기독교”로도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을 지는 모르나, 주님과의 깊은 동역은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를 깊은 동역으로 이끄시기 위해 예수님은 아가서 2:8-10 에서 7 가지 동사를 사용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오시고, 뛰어 넘으시고, 건너시고, 서시고, 보시고, 엿보시고, 말씀하신다.

VI. 추수를 위한 예언적 징조

A. 예수님은 추수(열매)의 때가 찼다고 말씀하시면서 술람미 여인을 격려하신다.

11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12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13무화과 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가자 (아 2:11-13)

B. 추수의 계절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시며, 주님은 ‘때의 징조’를 강조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신부는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C. 주님은 ‘지난 겨울’에 보여주셨던 신실함을 우리에게 다시 상기시켜 주신다. 

겨울은 차가운 비가 내리는 ‘어두운’ 계절이다. 겉으로 볼 때, 거의 모든 것이 죽은 듯한 ‘고난’의 계절이다. “삶의 고비를 과연 넘길 수 있을까?”라는 의문 속에서, 주님은 우리의 삶을 향한 깃발이 ‘사랑’이라는 것을 재증명해 주신다. 예수님은 ‘지난 날’에 보여주셨던 주님의 개입하심과 신실함을 지금 다시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실지도 모른다. “겨울도 지나고 차가운 비는 그쳤어도, 네 마음은 내 안에 아직도 살아 있잖니!” 예수님은 신부가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도록 도와주신다(아 1:4). 이것은 아가서의 핵심 내용중의 하나이다.

D. 예수님이 과거 고난의 시기에 신실함으로 우리와 함께 하셨다면, 다가오는 시련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고난의 산’으로 올라갈 때, 예수님이 우리를 혼자 내버려 두실 거라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 우리는 ‘벽’ 뒤에 숨을 필요가 없다.

E. 예수님은 다가오는 추수의 예언적 징조를 강조 하시면서 미래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추수의 징조들을 보며 격려받아야 한다. 이 징조들은 곧 ‘풍성한 수확’이 있게 될 거라는 것을 보증해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수의 징조들을 보면서, 우리는 곧 준비해야 한다는 긴박성을 느껴야 한다. 세월을 낭비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F. 예수님은 추수의 때가 가까웠다고 지적하시면서 제자들을 격려하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어업을 내려 놓았다. 그 후 3 년이 지나기도 전에, 사도행전의 부흥이 터졌고, 그것은 곧 예루살렘의 부흥으로 이어졌다. 예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제자들에게 필수 조건이었다.

35⋯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요 4:35)

G. 예수님은 추수의 징조를 지적하신다. 

포도나무에 꽃이피는 것을 보면, 포도수확의 때가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확연히 드러나는 “부흥의 꽃”이 현재 열방에 피어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목도할 수 있다.

H. 이스라엘에는 추수의 때가 되면 산비둘기의 소리가 들린다. 

무화과 나무는 무르익기 전에 푸르른 무화과 열매를 맺는다. 잔잔한 포도의 향기는 수확이 가까왔음을 알린다.

I. ‘노래할 때가 되었다’는 것은 추수의 시작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부흥이 우리 앞에 임박해 왔다. 이 ‘노래’는 전세계적으로 기도의 집이 세워지고, 수많은 무리가 스테이디움에 모여서 수일간 찬양하고 예배(세계 기도의 날:Global day of Prayer, 더 콜:The Call 등등) 하면서 이미 시작되고 있다.

J. 예수님은 신부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아름다운) 자”라고 인자하게 부르시며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신부가 주님의 부탁을 거절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시지만, 신부가 자신의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을 때(아 1:7-8)에도 그랬듯이, 주님께는 아직도 신부가 아름다운 존재이다. 주님께 우리가 사랑받고 아름답다고 느낄 때, 우리는 더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동기를 갖을 수 있게 된다. 주님은 절대 화난 비난의 소리로 말씀하시지 않는다.

13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아름다운) 자야 일어나서 함께가자(아 2:13)

VII.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인자하신 하나님 앞에 안전하다

14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아 2:14)

A. 우리가 두려움과 씨름할 때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인자한 사랑을 드러내신다. 

신부를 “나의 비둘기”라고 부르시면서, 신부의 진실함을 확증시켜 주신다. 비둘기는 순결함과 충성을 말한다. 성령님은 ‘순결한 비둘기’로 그려진다. 주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신부에게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잘 알고 계신다. 예수님은 아 2:17 에서 신부가 타협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지만, 그럼에도 “나의 비둘기야”라고 신부를 부르셨고, “교활한 독사”라 하지 않으셨다.

B. ‘바위의 틈’과 ‘낭떠러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안전을 누린다. 

바위의 틈은 완성된 ‘십자가의 역사’를 말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으며, 연약함 가운데서도 확신을 갖고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서야한다.

C. 모세시대에 예수님은 ‘신령한 반석’이셨고, 현재는 ‘교회의 반석’이시다.

4⋯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전 10:4)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8)

D. 하나님은 모세를 (산의 넓은 지대에) 반석 틈에 숨기사, 하나님의 얼굴과 영광을 봄으로 죽게 되는 위험으로부터 그를 보호하셨다.

20 또 가라사대 네가(모세)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위에 섰으라 22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출 33:20-22)

E. 바위(반석)의 틈에 숨는 것은 일종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었다. 

바위의 ‘틈’은 십자가에서 창에 찔려 ‘상처받은’ 예수님의 옆구리를 의미한다. 우리는 이 ‘반석의 틈’, 또는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하게 되었다.

F. “낭떠러지의 은밀한 곳”은 예수님의 ‘부활의 비밀’을 말한다.

인자가 하나님께로 올라간 바로 그 궁극적인 은밀한 장소를 말한다. 낭떠러지는 밑에서 위로 보면, 마치 야곱의 사다리(창 28:12-17)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위로 쭉 벋어 있다. 

“낭떠러지의 은밀한 곳”은 킹제임스 역에 “계단의 은밀한 곳,” NAS 역에는 “가파른 길의 은밀한 곳”으로 번역되어 있다.

G. 우리가 연약할 때에도, 반석의 틈과 낭떠러지의 은밀한 곳, 즉, 부활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장소에 서서 주님을 경배하게 되기를 예수님은 원하신다. 우리는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당당히 서야한다.

H. 연약할 때 주님의 도움을 구하면서도, 경배와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의 얼굴을 보고 우리의 음성을 듣기 원하신다. 

우리는 그 속에서 위선자가 된 듯한 두려움을 훨훨 떨쳐버리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죄와 씨름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음성을 듣기 싫어하시고, 우리를 밉게 보실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죄책감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달아나는 것을 원치 않으시며, 사랑의 확신으로 주님께 달려가길 원하신다.

14⋯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아 2:14)

I.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주님을 세번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이것은 베드로 안에 있던 두려움, 그리고 그의 연약한 육신에 기인한 것이었다.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마 26:34, 41)

J. 예수님은 베드로가 그날 밤 넘어지게 될 거라는 사실을 다 아셨음에도, 그의 자원하는 심령을 보셨다. 

본질적으로, 예수님은 “베드로야 내게 기도하렴. 내가 네 음성을 듣고 싶구나. 내가 너를 도와주고 싶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K. 주님은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께 응답하는 심령을 기뻐 하신다. 

아직 성숙하지는 않아도, 주님은 우리를 기뻐하신다. 예수님이 신부를 ‘어여쁘다(아름답다)’라고 부르실 때에도, 신부는 여전히 ‘나무아래’와, ‘벽’ 뒤에 있다. 예수님은 주님께 순종하려는 우리의 진심을 잘 아신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의 사랑이 성숙한 신부와 같이 성숙해지게 되리라는 것도 주님은 잘 아신다(아 4:7).

VIII. 타협에서 해방되는 기도

A. 신부의 얼굴을 보고, 음성을 듣기 원하시는 예수님의 권고에 신부는 SOS 요청을 보낸다.

자신의 삶에 존재하는 타협의 ‘작은 여우들’을 잡아달라고 예수님께 부르짖는다. 

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아 2:15)

B. 여우는 밤을 이용해 포도원을 망쳐놓는 교활한 동물이다. 대낮에 공격하는 사자만큼 담대하지는 않다. 그러나, 작고 빠르며, 교활하기 때문에 여우를 붙잡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C. 우리 마음의 포도원 안에 있는 “작은 여우들”은 두려움과 죄의 생각들, 태도, 말, 그리고 시간과 물질을 계속 헛되게 사용하는 작은 타협들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안락의 지대를 ‘떠나는 것을’ 두려워 하는 신부의 마음을 가리킨다.

D. 마음의 포도원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장소’다. 

‘영글지 않은 포도’는, 아직 미성숙한 신부의 삶을 말한다. 아가서 1:6 와는 다르게, 이제 신부는 자신의 ‘포도원’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작은 여우들은 신부의 열매들을 계속 파괴하려 한다.

E. 신부에게는 하나님 안에 깊이 들어 가고픈 열망들이 있다. 

신부는 사랑앓이를 하는 자신에게 주님이 오셔서 힘을 돕고, 시원케 하시기를 갈망하고 있다(아 2:5). 그러나, 신부안에는 성령의 역사를 막는 작은 영역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하나님 안에 깊이 들어 가는 것을 막는 작은 타협의 영역들의 심각성을 신부는 잘 알고 있다.

F. 우리는, 부끄러운 죄를 단순히 피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더 충만함을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포도원이 ‘성숙한 열매’로 가득차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섬김과 겸손과는 반대되는 불건전한 말의 사용, 정결치 못한 생각과 태도들은 주님과의 친밀감을 파괴하는 ‘작은 여우들’이다. 예수님은 신부를 안락의 지대 밖으로 불러내시지만, 아직도 ‘작은 여우들’은 신부의 포도원을 파괴하고 있다.

G. 신부는 “여우를 잡아주세요”라고 주님께 기도한다. 

다시말해, 우리는 그 여우를 잡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삶에서 이 작은 여우들의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에, 신부는 계속해서 주님께 도움을 요청한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요청을 멸시치 않고, 기꺼이 도와주시는 분이시다. 아멘!

IX. 예수님을 향한 신부의 진실한 사랑 고백

16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아 2:16)

A. 여기서 신부는 자신의 ‘영적 정체성’을 고백한다. 

자신이 ‘하나님의 연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죄와 씨름할 때도, 우리는 하나님의 진정한 연인이며,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진리를 절대 놓쳐서는 안된다.

우리의 얼굴은 여전히 하나님께 아름다우며, 우리의 음성은 주님께 여전히 달콤하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에 절대 상처받지 않으신다.

B. 신부는 예수님을 ‘나의 사랑하는 자’로 표현하면서, “난 주의 것”이라고 선포한다. 

이것을 통해, 신부의 마음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주권이 결국 신부의 삶에 나타나게 된다.

신부의 마음은 주의 것, 즉, 주님께 속했다. 하나님을 향한 신부의 사랑은 실패속에서도 표현된다. 죄와 씨름한다고 해서, 주님께 버림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부는 ‘가망없는 위선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부의 당당함은 줄어들지 않는다. 신부는, “주님은 내 것이며, 나는 주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저는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라고 고백한다. 지금까지 신부의 여정을 볼 때, 신부는 순수하고 진실하긴 하지만, 아직 성숙하지는 않다.

C. 신부는 여러번 예수님께 자신을 ‘먹여달라’고 부탁한다(아 1:7, 12; 2:4-5). 

예수님은 대가가 요구되는 ‘백합화 가운데’, 즉, 신부의 순종과 정결함이 거하는 곳에서 신부를 먹이시고자 한다. 백합화는 정결함(아 2:1-2; 5:3, 13; 6:2-3)을 말한다. 신부의 삶의 목적은, 작은 여우들을 잡으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정결한 백합화’같이 사는 것이다 (아 2:1-2). 신부는 이것을 잘 알고 있다.

D. 아가서 2:1 “나는 골짜기의 백합화요”에서, 백합화는 ‘단수형’으로, 주님 안에서 발견한 신부 자신의 정체성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백합화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어, 자신처럼 예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말한다.

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회중가운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고전 15:33-34)

X. 신부의 고통스런 타협

A. ‘산’으로 주님과 함께 가자는 예수님의 명령에 신부는 주저하며(아 2:13), 일어나지 않았다.

주님께 “혼자 노루와 같이 산으로 돌아가세요”라고만 대답한다. 반항이 아니라, 미숙함으로 인한 ‘두려움’때문에 불순종하게 된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 (아 2:17)

B. 슬픔에 깊이 잠긴 신부는, 예수님이 아 2:8 의 ‘노루’와 같이 가셔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참고로, 아가서 끝 부분에서, 신부는 예수님께 다시 ‘노루와 어린 사슴처럼 오세요’라고 기도한다(아 8:14).

C. 자신 안에 존재하는 ‘어두운 그림자’를 신부는 인정한다. 

어두운 그림자는 아직 빛에 온전히 드러나지 않은 ‘삶의 영역들’이다. 아침에 해(빛)가 뜨면서 날은 밝게 된다. 이제는 신부의 삶에 있는 어둔 그림자나 ‘회색의 영역들’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때가 왔다.

D. 날이 밝아 새 빛이 자신에게 비출 때까지, 신부는 예수님께 혼자 돌아 가라고 말한다.

E. 아가서 4:6 에 이르러, 신부는 산으로 함께 가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결국 순종하며 일어나게 된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신부의 삶에 있는 “두려움의 여우”를 잡으시면서 신부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고상한 곳’에서 아낌없는 사랑으로 헌신하는 ‘신부’로 주님과 동역하며 살도록 창조되었다.

F. 타협이 자신의 포도원의 열매를 파괴하는, 다시말해,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막는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신부는 잘 알고 있다. 신부의 응답에, 예수님은 홀로 돌아가 한 계절동안 잠시 모습을 감추시게 된다. 주님을 따라가지 않으려는 우리의 결정을 예수님은 존중하신다. 우리가 누리는 예수님과의 관계는 ‘자원적인 사랑’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G. 옛 히브리어 단어 베데르(Bether)는 “분리”를 뜻한다. 

그래서, 어떤 성경 번역서들은 ‘베데르’ 대신, “분리”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산’은 분리를 가져오는 장애물이다. 신부는 예수님이 “분리를 가져오는 산들”로 가실 때, 주님과 분리(이별)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아가서 3:1에서, 주님은 신부가 회개하고 돌아와 다시 순종을 부르짖을 때까지 신부에게서 모습을 감추신다(아 3:2).

H. 자신이 연약해도,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신부는 잘 알고 있다.

신부는 계속해서 주님을 “내가 사랑하는 예수”라고 부른다.

XI. 영적 진보에 열쇠가 되는 네가지 고백

A. 아가서에 4 번 반복되는 구절이 있다. 

성숙의 진보를 알기 위해 이 구절들을 점검해 보는 일은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다.

B. 아가서는 ‘자기 중심의 단계’에서 ‘하나님 중심의 단계’로 바뀌어 가는 신부의 영적 진보를 네 번에 걸친 신부의 고백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아가서 전체에 걸쳐, 신부는 네 번 정도 영적인 변화를 거듭하며, 자신의 경험을 재정의하게 된다. 

이기적인 사람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성숙한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전략적인 부분에 나오는 신부의 고백들을 통해, 우리는 아가서에 나오는 신부의 ‘성숙의 여정’을 함께 따라가 볼 수 있다. 이 고백들은 영적으로 진보해 가는 신부의 성숙함을 보여준다.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전환되는 신부의 고백들을 참조하라(아 1:14; 2:16; 6:3; 7:10). 

초기에는, 예수님을 즐기는 자신의 기쁨에만 신부가 집중하고 있었다. 신부는 ‘자신이 주님께 어떤 존재인지’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한 채, ‘주님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만을 표현하며 그 기쁨을 누렸다. 그렇지만, 아 2:16 과 6:3, 그리고 7:10 에서, 신부는 자신이 예수님께 어떤 존재인지를 표현하기 위해, 같은 문장을 순서만 바꿔 고백하게 된다. 예수님은 신부의 기업이다.

C. 처음에, 신부는 자신의 영적 기쁨과 즐거움에만 초점을 맞춘다.

 예수님은 이러한 신부의 시작을 너그러이 받아 들이신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랑받으며, 주님 안에 누리는 자신의 기업이 존재한다는 데에만 집중하며, 자신이 ‘주님의 기업’이라는 정체성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13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아 1:13-14)

D. 두 번째 고백에서 신부는 “주님은 나의 것, 주님은 제게 속하셨어요. 하지만, 이제 나도 주님께 속했다는 것을 알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신부는 이제 자신의 삶에 새롭게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 자신이 ‘주님의 기업’이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직 성숙에는 관심이 없다.

16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아 2:16)

E. 세번째 고백에서 신부는 아 2:16 에 나온 말을 그대로 사용한다. 

한 가지 다른 점은 문장의 순서를 바꾸었다는 것이다. 신부는 “나는 주님께 속하였고, 주님이 제게 속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주님은 제게 속하셨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것입니다”라고 고백한다. 이 세번째 영적 진보는 동일한 두 진리를 말하고 있지만, 두번째 고백과 그 순서가 뒤바뀐다. 다시말해, 신부는 “주님의 계획이 먼저입니다, 나의 계획은 두번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관심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신부를 통해 주님이 누리는 기업이 이제 신부의 첫번째 관심사가 되었다. 주님을 통해 누리는 신부의 기업도 필요하지만, 그것은 이차적인 것이 되었다.

3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아 6:3)

F. 최종적인 네번째 고백에서 신부는, “나는 주님께 속했고, 나의 관심사는 이제 오직 주님이 바라시는 것에만 있어요. 주님이 나를 사모하신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내가 100%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하고 싶어요. 주님은 나의 모든 것을 소유하십니다. 주님의 관심사가 저의 관심사입니다.”

10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아 7:10)

===14장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훈육 (아 3:1-5) (God’s Loving Discipline)

I. 아가서 2:8-17 복습

A. 술람미 여인은 ‘산들’을 정복하신 “만유의 주,” 또는 주권적 왕이신 예수님에 대한 계시를 새롭게 받았다. 

주님은 모든 산들(장애물들)을 승승장구하며 뛰어넘어 오는 노루와 같다.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9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숫사슴)과도 같아서(아2:8-9)

B. 예수님은 일어나 함께 ‘산(고귀한 곳)’으로 가자고 신부를 부르신다. 

더 큰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는 새 과제를 신부가 떠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안정과 안락에 도전이 온 것이다. 술람미 여인이 예수님께 드렸던 첫 기도는 “나를 인도하소서! 우리가 당신을 따라 달려가리라”였다(아 1:4). 

예수님은 신부가 ‘안락’의 지대에서 나와 성령의 인도로 ‘도전의 지대’로 나아가 주님과 더 깊은 동역을 맛볼 수 있도록 초청하신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 2:10)

C. 그러나, 이 부르심에 신부는 순종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 혼자 산으로 돌아가시라고 대답한다. 신부에게 아직 두려움(반항이 아닌 영적 미성숙)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침에 새날(새벽)이 밝아 새 빛이 비추게 될 때, 신부의 삶의 어둔 영역들은 사라지게 된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트고) 그림자가 갈때에(때까지)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아 2:17)

II. 아가서 3:1-5 개관

A. 신부의 불순종에 대해 주님은 임재를 거둬 가시는 ‘사랑의 훈육’을 주신다. 

신부에게 화가 나서가 아니라, ‘질투’의 하나님이신 주님은, 신부가 주님이 귀히 여기는 것을 함께 나눌 수 있을 만큼 성숙하게 되어 더 깊은 동역을 감당하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B.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신부, 성숙한 신부가 되는 데에 부족하게 되는 것을 허락치 않으신다. 그래서, 주님은 스스로를 속박하는 것들을 우리가 손안에 쥐고 있으면 떼어 놓으신다. 

순종의 대가는 크다. 하지만, 불순종의 대가는 더욱 크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성령의 리더십에 불순종하는 대가는 더 심각하다는 뜻이다.

C. 주님이 사랑하는 자에게서 임재를 거둬가시는 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성령의 리더십을 받아들이지 않는 ‘타협’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경각시켜 주기 위함이다.

둘째로, 우리를 겸손케 하사 우리에게 주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한 깊은 ‘목마름’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시기 위함이다.

D.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주님의 ‘열심과 질투’로 나타난다는 확신을 가져야한다.

질투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음을 다하여 순종하며 사는 삶’을 요구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열심으로,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며 성숙하게 만들 수 있는 도구를 사용하신다.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줄로 생각하느뇨(야 4:5)

III. 하나님의 훈육은 거절이 아니다

A. 아가서의 메세지는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진리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을 인정하신다라는 뜻은 아니다. 주님은 주님이 인정하지 않는 우리의 삶의 영역을 교정하시면서, 우리 안에 ‘사랑(거룩함)’을 방해하는 모든 ‘방해물들’을 제거하려 하신다.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를 훈육하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히 12:10)

B. 우리를 훈육하실 때, 주님은 그분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우리의 삶의 영역들을 보여 주신다.

이것은 주님이 ‘인격체로서 우리를 기뻐하시지 않는가?’와는 다른 문제다. 다시말해, 하나님은 인격체로서 우리를 경멸치 않으시면서, 우리의 잘못된 행동이나 영역에 불쾌함을 드러내실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교정을 어떤 사람들은 거절감으로 잘 못 받아들이는 실수를 범하지만, 하나님의 교정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된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실 뿐, 훈육받는 자를 기뻐하신다(히 12:6).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교정)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교정)함 같이 하시느니라(잠 3:12)

C. 회개가 필요한 주의 성도들을 책망 하시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그들을 계속 사랑하신다.

책망하시고 회개로 이끄시는 것은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결국 그들이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을 수 있도록 초청하시는 것이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1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 (계 3:19, 21)

D. 훈육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며, 아직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증거다.

장기간 죄를 “계속 범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그 죄에 내버려 두셨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훈육하신다는 것은 아직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증거가 된다(롬 1:24-2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롬 1:24)

32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E. 훈육받는 자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시면서, 하나님은 그들을 계속 깊이 사랑하신다.

9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사63:9)

7 내 마음의 사랑하는 것을 그 대적의 손에 붙였노니(롐 12:7)

F. 죄를 정직하고 온전하게 직면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덜 사랑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면에서 손실을 입게 된다. 구원의 즐거움과 계시의 영, 거룩한 친교의 경험과 영원의 상급을 받는 능력을 최소화 시켜 버리게 된다.

G. 회개치 않는 자들을 주님은 한 동안 인자함로 인내하신다. 주님의 인내를 ‘승인하는 것’으로 혼동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이세벨과 그 제자들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셨다.

21 또 내가 그(이세벨) 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22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재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계 2:21-22)

H. 회개로 이끄시는 하나님은 ‘사랑의 인내’를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롬 2:4)

IV. 신부에게서 임재를 거둬가시는 하나님

A. 신부는 하나님을 찾지만, 만날 수 없는 경험을 하게된다. 신부에게는 새로운 경험이다.

왜냐하면, 아가서 1-2 장에서는 주님을 찾을 때마다 너무나도 달콤한 그분의 임재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2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아 3:1-2)

B. 신앙 생활을 하면서 찾아오는 ‘밤’에는 4 종류가 있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주님을 찾아야 한다.

1. 한 밤 중: 주님을 알고자 하는 절박함으로 한 밤중에도 주님을 찾게 된다.

2. 환란의 밤: 사울을 피해 달아난 다윗, 감옥에 갇혔던 요셉과 같이, 환란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이 거짓이 아니라는 믿음을 붙잡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3. 유혹(시험)의 밤: 실패와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계속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4. 영혼의 어둔 밤: 불순종으로 잠시 거둬진 하나님의 임재를 표현하기 위해, 중세시대 사람들은 ‘영혼의 어둔 밤’(아 5:6)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C. 신부가 있어야 할 곳은 ‘안락한 침상’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할 ‘산’이다. 

여기서 신부는 ‘우리의 침상’(아 1:16; 3:7)이 아닌, ‘나의 침상’에 있었다. 주님과의 동역이 깨진 것이다.

D. ‘자신과의 싸움’ 속에서도, 신부는 예수님을 사랑한다. 

순종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가망 없는 위선자’는 절대 아니다. 아직, 삶의 모든 영역에서 승리를 다 거두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계속 예수님을 “내가 사랑하는 분”으로 부를 수 있다. 때때로, 우리는 정복할 수 없을 것 같은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는 산’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산’이라 부른다. 산들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다. 골짜기에 거할 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연인’이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아3:1)

E. 과거(아 2:3-5)에 했던 것처럼, 신부는 익숙한 영적 훈련인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계속 찾지만, 주님의 임재를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된다. 

주님이 신부에게 새로운 차원의(더 깊은) 순종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단순한 기도와 금식이 순종을 대신해 줄 수는 없다.

4 기드온과 그 좇은 자 삼백 명이 요단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따르며(삿8:4)

F. 주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한다 할찌라도,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주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임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해야 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야 4:8)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4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 (시 24:3-4)

G. 얼굴을 숨기실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분발하여 주님을 붙잡기를 요구하신다.

7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라(사 64:7)

H. 예레미아 20:7 원칙: 젊은시절, 예레미아는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 선지자 예레미아는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레미아의 말을 듣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이 사건후, 예레미아는 더 이상 예언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지만, 하나님의 불은 그 안에서 더 깊이 타오르게 되었다. 

“주님을 사랑하게 만드셨기에, 이제 저는 주님과 연결된 그 끈끈한 ‘사랑의 줄’을 놓을 수 없어요.” 아가서 1-2 장에서, 주님은 신부의 마음을 사랑의 끈으로 하나님과 연결 시키셨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 8 ⋯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9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롐 20:7-9)

V. 기도하며 순종하는 신부

2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3성중의 행순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아 3:2-3)

A. 이제 술람미 여인은 아가서 2:10 에서 들은 명령에 순종하며 일어나게 된다. 

예수님은 임재를 잠시 거둬 가시면서 우리가 주의 얼굴을 정직하게 찾게 하시며, 우리를 두려움과 불신, 그리고 타협에서 끌어내 주신다. 우리가 순종하며 일어나 주님께 나아가기 전까지 주님은 모습을 감추신다. 우리에게 유일하게 안전한 장소는, 믿음과 순종으로 일어나 주님과 동역하는 곳이다.

B. 주님의 부재로 아픔을 겪은 신부는 침상에서 일어나 ‘안락의 지대’를 떠나게 된다.

예수님이 모습을 감추시는 것은, 그것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열망을 끄집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이다. 주의 임재없이는 살 수 없는 신부의 마음을 예수님은 잘 아신다.

달콤했던 예전의 계절을 떠올리면서, 하나님을 향한 신부의 갈급함은 이제 절박함으로 변하게 된다. 그래서, 신부는 기도하면서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 기도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며, 적극적인 순종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C. 신부는 일어나 사람들이 활동하는 ‘도시의 거리와 광장’을 돌아다닌다. 

이곳은 안락한 침상과 안전한 벽(아 1:16; 2:9) 바깥에 있는 장소로, 위험과 싸움, 그리고 더 치열한 영적 전투가 존재하는 곳이다.

D. 야곱은 밤이 맞도록 하나님과 씨름했다(창 32:24-30). 

하나님을 만날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야곱은 돌파구가 생길 때까지 하나님과 씨름한 ‘기도의 표상’이다.

호세아는 야곱을 가리켜 ‘눈물과 간구로 정직하게 하나님을 구한 자’로 표현했다(호 12:2-6).

E. 마이클 썰리번트라는 내 친구가 한 번은 꿈을 꾸었는데, 자기 아들과 씨름하면서, 아들에게 일부러 져주는 꿈이었다고 한다. 

그 꿈에서 아들은 함박 미소를 지으며, “내가 아빠를 이겼다!”라고 외쳤고, 아들과 씨름하는 아빠는 즐거워 했다. 그 꿈을 통해, 주님이 내 친구에게 말씀하신 것은, “너와 씨름하면서 네게 져주는 게 나에게는 큰 기쁨이란다” 였다. 우리가 주님과 씨름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이 씨름을 통해,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 안에 자라나게 하신다.

VI. 신부의 순종으로 모습을 다시 나타내시는 예수님

4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아 3:4)

A. 순종하며 주님을 찾으러 일어났을 때, 신부는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된다. 

우리의 작은 열심에도 바로 응답하시는 예수님은 애정으로 똘똘 뭉치신 분이시다. 모습을 오래 감추지 않으신다. 주님과의 씨름에서 우리가 이기기를 바라신다!

B. 영적 갈급함의 원칙. 삶을 사는 데 꼭 필요한 것이 하나님 말씀 안에 있다면, 우리는 정해진 때에 그것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일 없어도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는 것이라면, 없는 상태로 살게 될 것이다. 다시말해, 하나님 뜻대로 살기위해 꼭 필요한 것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정해진 때에 그것을 받게 될 것이다.

C. 우리는 영적 권태와 죄악, 그리고 불신속에 살 필요가 없다. 

이러한 ‘산들’ 앞에서도, 즉, 이런 삶의 영역속에서도 우리는 예수님께 하나씩 순종해 나가는 기름부음의 삶을 경험할 수 있다(겔 36:26).

D. 고통스런 영적 싸움의 계절을 겪은 신부는 이제 예수님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결단한다.

그리고, 남은 아가서의 여정동안 신부는 “주님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E. 영적 ‘소용돌이’의 시기는, 우리 안에 “거룩한 침노”의 열매를 낳기도 하여, 예수님을 꼭 붙잡게 하며, 우리 삶에 타협이 다시는 자리잡지 못하도록 도와준다(마 11:12). 

이제, 신부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위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굳은 결단을 내리게 된다.

F. 순종하고자 하는 술람미 여인의 결단은 자신이 가장 힘들어 하는 장소(어미의 집)까지 포함한다.

4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아 3:4)

G. 신부는 예수님의 기름부음 받은 ‘대사’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택한 도구로, 신부는 순종을 통해서만 주님이 함께 하실 장소들에 가서 예수님을 전한다. 

아가서의 끝 부분에 신부는 모든 족속에게 예수님을 전하게 된다(아 8:2).

H. 어미는 ‘교회’를 상징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라 (마12:46-50) 주님은 말씀하셨다. 어미인 이스라엘은 ‘구속받은 자들’을 낳았다(계 12:5, 17). 또한, 예수님을 전하기 가장 어려운 곳(사람들)은 종종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지들이다.

I. 가장 가까운 관계가 가족이기에, 어떤 이들에게는 예수님을 전하기 가장 어려운 장소가 바로 자기 식구들이다. 

선지자는 자신의 집에서 존경받지 못한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을 ‘자신(어미)의 집’으로 데리고 온다는 것은, 일어나라고 명한 주님께 순종하는 신부의 결단의 행동이 어디에 까지 미칠수 있는 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J. 그 외에도, 집은 자그마한 장소를 뜻한다. 

비행기를 타고 멀리 선교를 가야 사역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사역은 우리 가정이나 이웃에서 부터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VII. 전략적인 영적 계절에 우리를 보호하시는 성령님 (아 2:7)

7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방해하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아 2:7)

A. 이 구절을 말씀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주님은 우리에게 ‘전략적인 계절’을 부여하신다. 

다양한 영적 계절들을 통해, 주님의 마음에 대한 새롭고 깊은 계시들을 우리 안에 확립하고 싶어 하시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 계절에서 성령님은, 신부가 주님의 잔치집(아 2:3-5)에서 사과와 포도를 먹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들어 갈 때, 예수님을 향한 사랑앓이를 신부안에 깨우는 계획을 갖고 계신다. 다양한 영적 계절들을 지내면서 하나님 안에, 그리고 그 말씀안에 깊이 들어가도록 삶을 투자해야 하는 필요성을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다. 사도 요한은 요한 계시록에서 말씀의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즉, 더 깊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계 10:9-11).

B. ‘예루살렘 여자’들은 성령의 다양한 운행과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다양한 계절들을 ‘분별치 못하는’ 신자들을 대표한다. 

성령님은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그들 자신들의 의견이나 판단으로, 현재 부여받은 영적 계절을 신부의 마음으로 지내고자 헌신된 자들을 혼란케 하거나 방해하지 말라고 정중히 부탁하신다. 

아가서 2:8 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새로운 계절이 오면 자연스럽게 직접 개입하실 예수님을 신뢰할 수 있다. 이 구절에서 성령님은 성령에 ‘둔감한 자들’에게 말씀하신다 - 주님의 상에 앉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도움으로 힘을 얻고, 새롭게 되는 계절 안에 있는 신부를 방해하지 말라고.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와는 정반대로 산다. 하나님을 더 찾기 보다는, 사역의 활동만을 넓히려 한다.

C. 솔로몬은 ‘노루와 들사슴’으로 그들에게 부탁했다(아 2:7). 

‘노루나 사슴으로’ 라는 표현은, 이 계절에 거하는 어린 신부를 온유함과 민감함으로 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노루나 들사슴은 본래 예민한 동물이기 때문에 쉽게 놀란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거하지 못하고, 쉽게 다른 데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다른 영적 계절에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때, 우리는 ‘영적 민감성’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

D. “내가 사랑하는 자(it)가 원하기 전까지는,”의 구절에서 ‘내 사랑하는 자’는 히브리어에서 it(그것), he(남성), 또는 she(여성)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미국 NAS 역은 이 구절을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다. “내 사랑하는 자(그녀)가 원하기 전까지는 깨우지 마라”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이 “그(He)”로 번역 되었다면, 주님을 가리키는 말이 되는 데, ‘예루살렘 여자들이 주님을 깨운다?’ 주님은 누가 깨울 필요가 없는 분이며, 노루와 같이 보호 받을 필요도 없는 분이다. ‘주의산만’이 되지 않게 보호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신부’이기 때문이다.

E. 예수님은 “내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까지는 깨우지 말라”라는 구를 아가서에 걸쳐 3 번 말씀하신다(아 2:7; 3:5; 8:4). 

아가서 8:4 에도, 주님은 이 구를 그대로 사용하신다. “그녀를 방해하지 마라.”  

여기서도, 역시 주님은 신부를 안아주신다. 하지만, 이번에는 “노루와 들사슴으로”라는 표현을 생략하신다. 미숙하여 쉽게 요동하는 신부가 더이상 아니기 때문이다(엡 4:14).

F. 신부가 준비되기 전까지는 굳이 일어나야 하는 ‘부담’을 주지 말라는 성령님의 부탁이다.

G. 주님 안에서의 우리의 존재와, 부르심의 여정은 개인마다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와는 다른 여정을 가진 신부에게 혼란을 안겨주지 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주의 영적 훈육을 약화시키는 ‘거짓 자비와 위안’으로 신부가 이 계절에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을 주님은 바라시지 않기 때문이다

===15장 안전한 예수님의 리더십에 대한 계시 (아 3:6-11) (Revelation of Jesus' Safe Leadership)

I. 아가서 2:8 - 3:5 복습

A. 술람미 여인은 산들(장애물들)을 정복하신 “만유의 주,” 또는 ‘왕’이신 예수님에 대한 계시를 새롭게 얻었다. 

예수님은 모든 장애물들을 쉽게 정복하며 넘어 오는 ‘노루’와도 같으시다.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아 2:8)

B. 예수님은 신부가 주님을 더 깊이 경험하도록 ‘안락의 지대’에서 성령이 새롭게 이끄시는 곳으로 신부를 불러 내신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 2:10)

C. 신부는 ‘일어나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지 않았고, 오히려 예수님 홀로 산으로 돌아가시라고 말한다. 신부 안에는 아직 ‘두려움(반항이 아닌, 영적 미숙)’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 (아 2:17)

D. ‘일어나라’는 부르심에 우리가 순종하지 않을 때, 예수님과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긴다.

영적 계절을 지나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차원의(더 깊은)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실 때가 있는데, 그것에 바로 순종하지 않으면, 일단 주님과의 관계는 멀어지게 된다. 

성령 안에 우리가 오늘 더 성숙해지기를 바란다면, 어제 드렸던 순종으로는 부족하다. 

성령님은 계속해서 주님의 빛을 우리 안에 증가 시키면서, 거기에 따른 책임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거기에 응답하지 않으면, 주님은 임재를 거둬가시고, 우리가 주님을 찾게 만드신다.

E. 이제 하나님의 임재는 술람미 여인에게서 떠났다. 하나님을 찾지만, 만나지 못한다.

예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아픔을 신부는 겪게 된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2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F. 우리가 불순종할 때, 예수님은 임재를 거둬가셔서 우리가 주님을 느낄 수 없게 하는 ‘사랑의 훈육’을 베푸신다. 

우리에게 화가 나신 것이 아니라, 거룩한 질투로 인해 우리에게 더 깊은 동역을 바라는 마음으로 훈육을 베푸신다.

G.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예수님이 바라시는 충만함에 우리가 못미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주님은 우리의 ‘영적 웰빙(건강)’을 돌보신다. 그래서,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속박들’을 떼어 주시려 한다. 물론, 순종의 대가는 크다. 그러나, 불순종의 대가는 더 심각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이 임재를 거둬가시는 것은, ‘성령의 리더십’을 받아들이지 않는 타협의 심각성을 우리에게 자각시켜, 성령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그 어떤 것도 다시는 허락하지 않겠다는 결단을 우리 스스로 내리게 하시기 위함이다.

H. 우리를 훈육하실 때, 주님은 ‘불쾌’하게 여기시는 우리의 삶의 영역들을 보여주신다.

안타깝게도, 주님의 교정을 거절감으로 잘못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주님의 교정은 ‘사랑의 증표’이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실 뿐, 훈육받는 자를 기뻐하신다(히12:6).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교정)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잠 3:12)

II. 아가서 3:6-11 개요

A. 이 본문에는 예수님에 대한 네번째 계시가 나온다. 

예수님은 신부에게 신뢰할 수 있는 ‘안전한 구세주’의 모습을 드러내신다. 다시 말하면, 신부는 ‘이 타락한 세상의 광야’에서 우리를 인도해 내시는 예수님의 안전한 리더십에 대한 계시를 얻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환란을 전혀 겪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감사, 신뢰와 사랑이 자라날 수 있는 ‘은혜의 장소’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신부가 이 계시를 얻게 된 시기는 주님을 다시 “붙잡았을” 때 였다(아 3:4).

B. 우리 심령이 안전하게 거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장애물의 산들’을 직면하면서 백퍼센트의 순종과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시는 ‘신랑’이요, ‘왕’이신 예수님에 대한 계시 안에 있다. 이 계시는 ‘대환란(the Great Tribulation)’을 통과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본질적인 계시가 될 것이다.

C. 성령님은 신부에게 질문(아 3:6)을 던지시면서, 두 가지 권면의 답을 제공해 주신다. 

먼저, 예수님의 리더십아래 우리가 얼마나 안전한 지를 보여주기 위해 왕의 호위대를 나타내는 ‘군사적 용어’를 사용하신다(아 3:7-8). 

둘째, 왕의 ‘혼인 행차’를 통해 주님의 안전한 리더십을 보여주신다(아 3:9-10). 우리 구원의 최정점은 예수님을 우리의 ‘신랑이신 왕’으로 알게되는 것이다(아 3:11).

D. 마귀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신뢰할 만한 지도자가 아니라고 거짓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안전한 리더십에 대한 계시는, 신부가 아가서 4-8 장의 여정을 두려워 하지 않고 깊은 헌신으로 헤쳐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는 초석이 된다.

III. 탐색의 질문을 던지시는 성령님(아 3:6)

6 연기 기둥과도 같고 몰약과 유향과 장사의 여러가지 향품으로 향기롭게도 하고 (이 타락한 세상의)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고 (아 3:6)

A. 이 구절의 질문을 누가 던지는 지에 대해서는 특별히 교리적으로 뒷받침할 수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영적 해석으로 보면, 예수님을 대신해서 ‘무명의 인물’로 등장하시는 성령님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인고”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질문이 아가서에 세번정도 나온다(아 3:6; 6:10; 8:5). 

세번 중 두번은, 질문을 하는 분이 성령님임을 명확히 보여준다(아 6:10; 8:5). 

이것으로 유추해 볼 때,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성령님이 말씀하시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해 보인다.

B. 질문자가 신부로 보이진 않는다. 

왜냐하면, 아 3:11에, 말하는 사람이 혼인을 “그의” 혼인이라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부였다면, 그 혼인을 “우리의” 혼인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아마도, 성령님이 이 메세지를 신부의 입을 통해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C. 성령님은, 십자가의 고난, 부활, 승천후, 영원한 성에 왕(9절)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지적하는 질문을 하신다. 혼동을 야기하는 질문이 아니라, 놀라움과 경외심을 유발하는 질문으로, ‘그리스도의 위엄과 놀라우심’을 지적하고 있다. 구약 제사 제도에 나온 언어를 사용해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다.

D. 예수님은 이 타락한 시대의 ‘거친들(광야)’를 승리하며 나오셨다. 

40년의 이스라엘 광야 여정은, 이 타락한 세상에서 ‘약속의 땅’으로 가며 다양한 영적 싸움을 겪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가서 8:5 에서, 신부는 ‘사랑하는 자 예수님’을 의지하며 거친들 (광야)에서 올라온다.

E. 하나님의 영광으로 승천하신 예수님은 ‘연기 기둥’으로 표현된다(출 19:18; 사 6:4; 계 8:4).

성막의 용어에서, ‘연기’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킨다. 희생 번제물의 연기가 하나님께 분향(아름다운 향기)으로 올라간 것 처럼, 하나님의 불로 예수님의 희생이 ‘연기 기둥’과 같이 올라가는 것이다.

8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 (계 15:8)

F.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몰약과 유향, 그리고 각종 상인의 향품이 향기를 토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몰약은 예수님의 ‘죽음’을 말한다. 고대에, 몰약은 장사 지낼 때 사용하는 향품으로 매우 값이 비쌌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그 몸에 몰약을 덮으셨다.

G. 유향은 예수님의 향기로운 ‘중보기도’(히 7:25)를 말한다. 

구약에 대제사장이 유향으로 지성소에 들어갔던 것처럼, 예수님도 중보기도로 채워진 ‘향’으로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신다. 하늘 제단에 있는 금대접의 향은 ‘우리의 기도’를 말한다(계 5:8; 8:3-5).

H. 상인의 향품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헌신’을 말한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팔아 ‘아름다운 진주(주님의 신부)’를 얻은 상인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상인은 향품을 취급(사고 파는)하기 때문에 늘 향이 몸에 배어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깊은 헌신으로 모든 것을 다 팔은 ‘향품장사’이시다.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상인)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마 13:45-46)

I. 우리를 위해 고통 당하신 예수님께서 하물며 우리를 돌보고 보호해 주시지 않겠는가?

주님의 성육신과 죽음(6절)은 우리를 향한 마음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우리 삶의 광야의 여정동안, 주님은 그분의 죽음(몰약)과 중보기도(유향)를 통해 우리를 죄와 흑암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안락의 지대를 떠나는 ‘위험’을 기꺼이 감행할 수 있다. 주님은 우리에게 완전히 헌신된 분이시기 때문이다(상인의 향품).

31⋯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1-32)

IV. 우리를 보호하시는 성령님의 사역 (아 3:7-8)

7 이는 솔로몬의 연이라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인이 옹위하였는데 8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을 인하여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아 3:7-8)

A.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누리는 보호와 안정을, 이 본문에 나오는 왕의 호위대의 모습을 통해 엿볼 수 있다.

B. 아가서에서, 솔로몬 왕은 왕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솔로몬의 ‘연’, 또는 가마(9절)는 왕의 혼인 행차(행렬)에 사용된 ‘병거’였다. 왕의 호위대가 그 병거를 어깨에 매고 행차했다. 솔로몬의 연(가마)은 광야 여정을 지나는 신부가 주님 곁에 앉아 보호를 받으며 지낼 수 있는 ‘안전한 처소’다. 솔로몬의 연(가마)은 수넴(신부의 고향)에서 신부를 데리고 광야를 거쳐 예루살렘 궁으로 들어온다. 고향 사람들은 멀리서 거대 행렬이 내품는, 구름과도 같이 흩날리는 먼지를 보며 왕의 행차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전신갑주로 무장한 용맹한 군인들이 호위하는 왕의 행차를 난생 처음 목격하고 있다.

C. 솔로몬의 연은 “복음의 연,” 또는 ‘혼인의 병거’를 말한다. 

이 연은 타락한 세상의 광야를 정복하며 승천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것이다. 모든 원수들을 다 물리치신 예수님께서 그 병거에 안식하고 계신다(시 110:1-3; 엡 1:20-22).

그(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 (엡1:20-21)

D. 이 ‘병거’ 안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혀 졌으며, 또한 주님과 함께 좌정하게 될 것이다(계 3:21).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6)

E. “복음의 연”은 광야의 여정을 지나는 우리 심령의 ‘안전도모’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한다. 이 복음의 병거는, 왕옆에 앉은 신부로 이 시대의 ‘광야’를 지나는 우리를 죄와 사단으로 부터 보호해주며 호위해 준다.

F. 광야를 지나는 동안 적으로 부터 신부를 보호해 주기위해, 솔로몬은 병거 주위에 60명의 용맹한 전사들을 붙여 놓았다. 이것은 ‘영적 전투’를 말한다. 당시, 전투 전문가인 용맹한 전사들을 60 명씩이나 거느릴 수 있었던 사람은 왕밖에 없었다.

G. 병거를 보호하는 ‘호위대’는, ‘성령님의 보전과 보호사역’을 군사용어를 통해 말한 것이다.

솔로몬의 호위대는 막강한 성령님의 보호를, 60 인의 용맹한 전사들은 완전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보여준다. 솔로몬은 계속 “성막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참고로, 모세의 성막은 60 개의 기둥이 지탱해 주었다.

H. 솔로몬의 용사들은 (그 땅에서 태어난) “이스라엘 태생 남자들”로, 유사시 도망가 버리는 직업 군인, 또는 해외 용병들과는 대조되었다. 이스라엘 태생 전사들은 왕의 병거를 끝까지 방어하는 충성심과 용기를 지닌 자들이었다.

I. 병거에 앉아 있는 한, 신부는 적의 매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전투 전문가인 용맹스런 전사들이 호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수는 우리를 매복하려 한다. 60 명의 용맹스런 전사들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보호하고 돌보시며, 성령님은 우리 삶의 여정동안 늘 우리곁에 계신다.

J. 이 전사들은 모두 “검을 가지고,” 검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아는 사람들로 “전투 전문가”들이다. 다시말해, 초보자가 아닌 숙련된 전사들이다. 이들은 늘 허벅지(허리)에 검을 차고 있어, 한순간의 명령에도 금방 검을 빼어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이다. 자는 동안 검을 빼놓는 전사들이 아니며, 흑암의 세력과 원수의 공격이 오는 두려운 밤을 언제나 대비해 근면하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전사들이었다(엡 6:12).

8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을 인하여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아 3:8)

K. 성령님은 사단의 모든 계획을 알고 계신 전투 전문가다(엡 6:10-12). 

성령님은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도구들을 사용하신다. 예를 들면, 우리에게 예언적인 꿈을 주시고, 삶에 어떤 문을 열거나 닫으시고, 사람들을 통해 우리를 중보 기도하게 하시며, 천사를 보내시고, 성령의 은사들을 풀어주시고, 말씀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애정을 보여주시고, 안전으로 인도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타내신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보호하심은 열정적이고 능숙하며, 신실하다.

L. 주님은 우리가 자포자기 하거나, 주님으로 부터 멀어지는 것을 막으실 수 있다. 

우리가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기본적인 성경원칙의 선(기준) 안에만 거한다면, 주님께서 처리할 수 없는 죄는 아무 것도 없다.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영광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자 (유 24절)

V. 우리의 심령에 커다란 안정을 가져다 주는 사랑스런 예수님의 구원 (아 3:9-10)

솔로몬왕이 레바논 나무로 자기의 연을 만들었는데 10 그 기둥은 은이요 바닥은 금이요 자리는 자색 담이라 그 안에는 예루살렘 여자들의 사랑이 입혔구나 (아 3:9-10)

A. 우리의 안전은 왕의 혼인 행차 용어로 표현된다(아 3:9-10). 

복음의 연(7절)은 가마로 표현된다. 왕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가마’를 제공하신다. 솔로몬은 이 가마를 직접 제작했다.

B. 솔로몬은 왕비를 나를 수 있는 병거를 “직접 제작”하였다. 스스로 설계한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안식할 가마를 직접 제작하셨다. 다시말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에 머무르지 않고 직접 인간의 형상을 입고 이 땅에 내려 오셨다.

C. 복음의 연(가마)은 레바논의 목재로 만들어 졌다. 

성막에 쓰인 목재들은 도금처리가 되었다. 나무는 ‘인류’를 말하며, 금은 ‘신성’을 말한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는 솔로몬의 성전을 짓는데 사용되었다. 레바논 나무는 당시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향기로우며, 내구성이 강해 가장 비싼 목재였다. ‘복음’의 연은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 중, 가장 강력하면서도 가장 큰 대가를 치룬 육체(예수님)를 통해 만들어 졌다. 예수님은 온전한 인간의 형상으로 이 땅에 오셨다.

D. ‘복음의 가마’는 은과 금으로 만들어 졌다. 

은은 ‘구속’을 말하며, 금은 ‘거룩한(divine) 성품’을 말한다. 은기둥은 가마의 앉는 자리 주변 가로대였다. 가마를 받쳐주는 바닥 지지대는 금으로 만들어졌다. “지지한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가로대”를 말한다. 지지대가 금으로 만들어 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권능으로 우리가 보호받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부는 그 영광의 좌석에서 벗어날 필요가 없다.

E. 보라색(자주색)인 ‘복음의 좌석’은 왕족과 하나님의 권위(권세)를 말한다. 

원수가 우리를 괴롭히려 할 때, 복음은 우리 삶에 ‘예수님의 권세’를 풀어준다.

F. 가마(복음)의 내부 벽걸이 융단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짜여져 있다. 

실내는 예루살렘 여자들, 즉, 연약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정열적인 사랑으로 장식되어 있다. 복음의 내부, 즉, 복음의 ‘내적 역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인자함으로 대하신다.

G. 복음의 동기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다. 

“사랑으로 포장된” 복음이며,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애정이다. 복음의 병거 내부 안감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포장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님 사이의 사랑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만 실행된다. “나를 향한 주님의 깃발은 사랑”이라고 신부는 앞서 고백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것들은 사랑으로 ‘포장’되어 있다. 이 계시는, 우리 안에 주님과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준다. 하나님의 사랑을 올바로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심령의 안정을 누리게 된다.

H. 킹제임스역(KJV)는 “예루살렘 여자들을 ‘향한’”으로 올바로 번역했으며, 뉴킹제임스 역(NKJV)은 “예루살렘 여자들에 ‘의한’”으로 잘못 번역되어 있다. 복음은 예루살렘 여자들을 “향한”사랑으로 포장된 것이지, 그들에 “의해” 포장된 것이 아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것은, 예루살렘 여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지, 예수님을 향한 예루살렘 여자들의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VI. 모든 교회를 신부의 패러다임(영성)으로 권고하시는 성령님

시온의 여자들아 나와서 솔로몬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 모친의 씌운 면류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으로 (아 3:11)

A. 우리의 부르심은 예수님을 ‘신랑이신 왕’으로 바라보는 것이다(히 12:2; 빌 3:8; 사 33:17).

우리는 혼인날에 모든 권세로 면류관을 쓰실, 왕이신 예수님을 묵상해야 한다. 면류관을 쓰신 예수님을 볼 때, 우리는 ‘산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아 2:8-13).

B. ‘어미’는 교회를 상징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라 말씀하셨다(마 12:46-50). 우리가 거듭날 때, 주님이 사용하신 도구는 교인들의 증거였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 교회는 우리의 어미로 언급된다.

C. 예수님에게는 다양한 종류의 면류관이 있다. 

혼인 면류관은 타국을 정복해서 얻는 승리의 면류관과는 다르다. 혼인 면류관은 특별히 구별된 면류관이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슬픔에 잠기셨지만, 장차 올 새로운 기쁨의 날의 도래를 알고 계셨다. 이 면류관은 역사 속에 구속받은 자들의 구원이 축척된 면류관이다.  

사랑의 면류관을 주님께 드리고,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사람들의 무리가운데 거하는 것보다 더 존엄한 일은 없다. 우리의 위대함과 존엄성은, 성령의 권능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기름부음으로 살면서, 주님께 사랑의 면류관을 씌워드리는 데에 있다. 그 날에, 우리는 자원하는 사랑으로 주님 앞에 면류관을 던지게 될 텐데, 우리는 이것을 통해 우리의 삶을 정의할 수 있다.

D. “모친에(모친이-역자주) 씌운 면류관.” 

인간적인 표현을 사용하자면, 주님의 왕권에 우리가 자원적인 사랑으로 응답할 때, 교회는 왕이신 예수님께 면류관을 씌우게 된다. 마음을 다하여 예수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개인적으로 신랑이신 왕, 예수님께 면류관을 씌운다. 예수님이 바라시는 면류관도 바로 이것이다. ‘예루살렘 여자들’이 자신들의 부르심을 올바로 보게 될 때, ‘시온의 딸들(여자들)’로 살 수 있게 된다. 주님의 혼인날은 요한 계시록 19:6-8 에 기록되어 있다. 그 날에 우리는 모든 것을 주님께 온전히 드리게 될 것이다.

E. 다가오는 웨딩(결혼식)을 기다리는 예수님의 심정을 아는가? 너무도 기뻐하신다. 이 혼인은 다른 나라와의 정치적 동맹을 위한 정략결혼이 아니다. 물론, 강제결혼은 더군다나 아니다. (자원의 사랑을 통한 아름다운 결혼이다 - 역자주)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사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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