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06.03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잠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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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하나님 의지, 의, 교만, 노 억제

1-4절, 계획, 심령, 행사, 악인

[1절] 마음의 경영(마아라크 )[준비(KJV), 계획(NASB, NIV)]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마음의 계획은 사람에게 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기 위해 그 일에 관한 생각들을 정돈하고 그 일을 준비하고 계획한다.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몫이다. 우리는 생각 없이, 계획이나 준비 없이 무슨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든지 잘 준비하고 계획해서 해야 한다.

그러나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부터 난다. ‘말의 응답’이란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아뢰는 기도의 응답을 가리킬 것이다. 사람의 계획한 바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이루어질 수 있다. 잠언 16:9도,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말하며, 잠언 19:21도,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주권적 섭리를 믿는다. 시편 115:3, “오직 우리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시편 135:6,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로마서 11:36, “이는 만물[모든 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2절]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심령’이라는 원어(루코스 )는 ‘영들’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사람 속에 여러 영들이 있다는 뜻이 아니고 영의 여러 활동들 즉 생각과 감정과 의향 등의 활동들을 의미할 것이다. ‘감찰한다’는 원어(타칸)는 ‘시험한다, 평가한다’는 뜻이다(BDB). 영어성경들은 ‘저울에 단다’(weigh)라는 말로 번역하였다(KJV, NASB, NIV).

사람은 모든 행위를 자신이 보기에 깨끗하게 해야 한다. 자기 보기에 깨끗지 못한 행위가 있으면, 그것을 즉시 철저히 회개하고 고쳐야 한다.

사도 바울은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말하였다(고전 4:3-4).

그러나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 모두 깨끗하여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심령, 곧 우리 영혼의 활동들을 감찰하시고 시험하시고 저울에 달아보신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드러난 행위만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숨은 마음까지, 곧 그의 마음의 생각과 감정과 의향, 또 행동의 동기까지 살피시고 그것이 과연 깨끗하고 선한지, 혹은 불결하고 악한지 시험하고 평가하신다. 시편 7:9,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예레미야 17: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요한계시록 2:23,“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3절]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행사’는 우리가 하는 일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영적인 일과 육적인 일, 개인적인 일과 가정적인 일을 다 포함한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맡긴다’는 원어(갈랄 )는 ‘[돌을 굴리듯이] 굴린다’는 뜻이다. 우리는 무슨 일을 혼자 염려하지 말고 또 조급하게 생각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자이시며 우리는 지혜와 능력이 매우 제한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주권자 하나님을 믿는 자는 교만하지도 않고 또 낙심하지도 않는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시편 37:5는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리라”고 비슷한 교훈을 주며, 시편 55:22는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고 말한다. 베드로전서 5:7도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돌보심]이니라”고 말한다.

본문은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말한다. ‘너의 경영하는 것’이라는 원어(마크쉐보세카)는 ‘너의 생각들 혹은 계획들’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우리의 행할 일들을 하나님께 맡기면 우리의 계획한 바들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방해거리들을 막아주시고 이루어 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등한히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모든 일은 사람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이루어짐을 깨달아야 한다.

[4절]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다. ‘지으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최초에 세상의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것과 그 후에 모든 일들을 섭리하시는 것을 다 포함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섭리의 손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이다.

‘그 씌움에 적당하게’라는 원어(라마아네후 )는 ‘그를 위하여’라는 뜻이다. 근래의 영어성경들(NASB, NIV)은 ‘그 자체의 목적을 위하여’라고 번역하였다. 모든 일은 그 자체의 목적이 있다. 그러나 옛날 영어성경(KJV)은 ‘그 자신을 위하여’라고 번역하였다. 라틴 벌겟역은, “하나님의 모든 일은 이 목적을 위하나니, 곧 그것들이 그를 순종하게 함이니라”고 번역하였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로마서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본문은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악한 날을 위해 지으셨느니라]”고 말한다. ‘악한 날’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가리킬 것이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심판 날에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다.

앗수르나 바벨론 나라가 그러하였다. 가룟 유다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마태복음 26:24, “인자(人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마음의 계획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난다. 우리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짐을 믿고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일을 계획하고 행해야 한다. 그가 돕지 않으시면 아무 일도 이룰 수 없다.

둘째로,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 모두 깨끗해도 하나님께서는 심령을 감찰하신다. 우리는 사람의 심령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고 우리의 행위뿐 아니라 심령을 깨끗하고 바르게 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의 행사를 하나님께 맡기면 우리의 경영하는 것이 이룰 것이다. 우리는 무슨 일을 행할 때 내가 무엇을 이룰 것처럼 교만하지도 말고 또 내가 무엇을 할 수 없다고 낙망하거나 낙심하지도 말고, 오직 우리의 모든 일을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 맡기고 담대히 행해야 한다.

넷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 자신을 위해 지으셨고 악인도 악한 날을 위해 지으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과 우리 개인과 인류 역사를 섭리하시는 뜻과 목적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모든 악을 버리고 그의 계명에 복종하며 살아가야 한다.

5-8절, 교만, 대속, 선행, 의의 소득

[5절]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야드 레야드 )[정녕](KB, NASB, NIV) 벌을 면치 못하리라.

교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높이는 것이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지 않는다. 교만은 근원적인 죄악이다. 그것은 마귀의 죄이다. 사도 바울은 장로의 자격에 대해 말하면서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라고 말하였다(딤전 3:6). 사람이 왜 교만하게 되는가?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영원자존하신 하나님이심과 천지만물의 창조주 되심과 위대하심과 전지전능하심과 거룩하심과 선하심을 모르고 또 자신의 피조물 됨과 죄악됨과 연약함과 무능함과 허무함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미워하신다. 잠언 6:16-17은,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6, 7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 . .”라고 말했고, 잠언 8:13은,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고 말했다. 교만은, 피조물이며 죄인인 사람에게 합당치 않은 큰 죄악이다.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라는 원어는 ‘정녕’이라는 뜻으로 본다. 잠언11:21도 그런 뜻으로 본다.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정녕] 벌을 면치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으리라.” 교만한 자는 정녕 하나님의 벌을 받을 것이다. 잠언 16:18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하며, 잠언 18:12도,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라고 말한다. 교만한 사람은 마귀와 함께 지옥에 던지우는, 하나님의 판결과 벌을 피할 수 없다.

[6절] 인자(仁慈)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인자(仁慈)와 진리로 인해 죄악이 속하게 된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이치를 보인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로 우리를 구속(救贖)하셨다. 우리가 죄사함 받은 것은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 때문이었고 그의 신실한 구원 약속과 그 이행 때문이었다. 디모데후서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인자와 진실은 구원 얻은 성도에게도 필요한 덕이다. 인자와 진실은 구원 얻은 성도의 표이다. 성도의 선하고 진실한 행위는 구원을 위한 공로는 아니지만, 회개의 열매와 구원 얻은 증거이며 영생에 이르는 과정이다. 형제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진실한 죄의 고백과 청산은 구원 얻은 성도에게 필요한 덕이다. 주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고(마 6:12),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하셨다(마 18:35). 사도 요한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했다(요일 1:7).

또 사람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악에서 떠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공의로 죄악을 징벌하시는 심판자이시다. 살아계신 공의의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자마다 악에서 떠나게 될 것이다. 죄를 미워하시고 공의롭고 엄정하게 벌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는 성도라면 어떻게 모든 죄를 떠나지 않고 거기에 머물겠는가?

[7절]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사람의 행위는 그의 마음, 즉 그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서 나온다. 사람의 마음이 그의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의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경우는 그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할 때, 즉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대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바르고 선하고 진실하게 생각하고 행할 때이다. 반면에,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거슬러 불의하고 악하고 거짓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성령을 근심시키게 되며(엡 4:30) 하나님의 노를 일으키게 된다(롬 1:18).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뜻이다. 사람이 선을 행하면 대다수의 사람들과 화목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그의 원수들, 즉 그를 시기하고 미워하며 해하려 하였던 자들까지도 그와 화목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성경에 몇 가지 예들이 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했으나 꿈에 하나님의 책망과 경고를 받고 그를 돌려보내었고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은 천 개를 주며 화해하였고(창 20장), 또 얼마 후에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하며 하나님께 맹세하고 서로 언약을 맺었다(창 21:22-23). 아비멜렉은 이삭 때에도 그와 맹세하며 서로 언약을 맺었다(창 26:26-33). 또 야곱의 외삼촌 라반은 야곱을 해하려고 쫓아왔으나 꿈에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 그를 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서로 해하지 않기로 맹세하며 그와 더불어 언약하였다(창 31:51-55).

[8절]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사람의 가치는 그 소득의 많음에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경건과 인격성과 도덕성으로 그의 가치를 평가하신다.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사람의 죄(罪)와 의(義)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썩는 양식인 돈을 많이 버는 데 주된 관심을 두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죄 짓지 않고 그의 계명대로, 즉 성경 교훈대로 경건하게, 바르고 정직하게, 선하게 사는 데 주된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복이 없다.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자갈]가 가득하게 될 것이다(잠 20:17).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사 48:22). 불의로 치부(致富)하는 자는 자고새[메추라기 종류]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될 것이다(렘 17:11).

사람이 사는 데 돈은 필요하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그 필요를 아시고 그것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새들에게 먹을 것을 주셔서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들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신다(마 6장).

우리에게 물질적 유여나 풍요가 필요하다면 그는 그것을 주실 수 있고 또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마 6:33). 물론, 우리는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 말고 자기의 재능과 적성에 맞는 직업을 택하고 일을 배우고 또 게으르지 말고 그 직업과 일에 충실해야 한다.

땀 흘려 일하는 것은 인생의 의무이며 아름다운 일이다(창 3:19).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마음이 교만한 자들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며 정녕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연약하고 죄악된 피조물임을 알고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해야 한다.

둘째로, 인자(仁慈)와 진리로 죄악이 속하게 되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에서 떠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은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로 이루어진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버리고 인자하며 진실해야 한다.

셋째로, 사람의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의 원수라도 그와 함께 화목케 하신다. 우리는 선한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하고 그럴 때 우리의 원수라도 우리와 화목케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 사는 동안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오직 선하게만 살아야 한다.

넷째로,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낫다. 우리는 이 세상이 장차 멸망할 장망성임을 알고, 불의의 이익을 탐하지 말고 사치와 허영과 낭비를 멀리하고, 오직 천국만 소망하며, 의로운 소득을 구하며 근면하며 검소 절약하며 절제하며 자족해야 한다.

9-12절, 계획, 재판, 공정, 공의

[9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는 (야킨 의 히필형)[준비하는, 지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사람은 자기의 길, 즉 어떤 일의 과정을 계획한다. 일의 종류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일을 즉흥적으로나 대충하지 않고 지혜와 지식을 사용하여 철저하게, 꼼꼼하게 잘 계획하고 준비해야 한다. 그것은 사람편에서 사람이 해야 할 몫이다.

그러나 사람의 걸음을 지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모든 일을 섭리하시는 자, 곧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우리의 모든 계획한 일들을 이루는 하루 하루의 과정과 전체의 과정은 다 그의 손 안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앞길을 열기도 하시고 닫기도 하시며, 평탄하게도 하시고 어렵게도 하신다. 이사야 45:7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친히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도,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0:29).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섭리하시고 지도하시는 방향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우리의 유익을 위하는 방향이다. 우리의 목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해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시 23:3).

하나님의 주 관심은 우리의 거룩과 의와 선이다. 로마서 8:28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선’은 우리의 영적 성장 곧 우리의 성화(聖化)를 가리킨다고 본다.

[10절] 하나님의 말씀이 왕의 입술에 있은즉, 재판할 때에 그 입이 그릇하지 아니하리라[말지니라](NASB, NIV).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원어(케셈 )는 ‘신적 판결’(oracle)이라는 뜻이다(BDB).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기록하신 법에 따른 공의로운 판결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정부나 법원같은 제도를 두신 것은 세상을 너무 부도덕하고 무질서하게 버려두지 않으시려는 하나님의 일반적 은총의 일이다. 세상의 왕들이라도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과 선한 법을 따라 공의를 집행하여 선을 장려하고 악을 징벌한다. 모든 통치자들은 다 그러해야 한다.

로마서 13:1-5,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거스름]이니 거스리는[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베드로전서 2:13-15,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襃獎)[칭찬]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1절] 공평한 간칭(杆秤)과 명칭(皿秤)은 여호와의 것이요 주머니 속의 추돌들도 다 그의 지으신 것이니라.

간칭(杆秤)과 명칭(皿秤)은 저울들을 말한다. 저울에는, 지렛대 양쪽에 같은 무게를 매닮으로 수평을 이루게 하는 맞저울(천칭)과, 접시에 올려놓아 수평을 이루게 하는 접시저울이 있고, 그 외에, 대 저울, 스프링식 저울, 오늘날에는 디지털 저울 등이 있다.

공정한 저울은 하나님의 것이며 저울에 쓰는 추돌도 그의 지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정한 저울을 인정하시고 기뻐하신다. 그는 우리에게 상거래에서 공정한 저울들을 쓰라고 명하셨다. 레위기 19:35-36,“너희는 재판에든지 도량형에든지 불의를 행치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그는 속이는 저울을 미워하신다. 잠언 11:1,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잠언 20:10, 23, “한결 같지 않은 저울추와 말[되]은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한결 같지 않은 저울추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니라.”

성도는 장사를 할 때, 사업을 할 때, 모든 종류의 금전 거래에서, 또 학생은 시험을 칠 때, 속이지 말고 공정하게, 정직하고 진실하게 행해야 한다. 사람은 더러운 이익을 구해서는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성도는 모든 인간 관계에서도 공정해야 한다. 우리는 상대방을 과대평가하지도 말고 과소평가하지도 말고 사실 그래도 평가해야 하며 잘못된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지 말고 시기와 질투심을 버리고 남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오해하지 말아야 하며, 또 자기의 위치를 잘 지켜야 한다.

[12절] 악을 행하는 것은 왕[왕들]의 미워할 바니 이는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

‘악’은 하나님의 법이나 양심의 법을 어기는 것, 즉 우상숭배, 불효, 살인, 미움, 음란, 도적질, 거짓말 등이다. 왕은 나라의 통치자로 나라의 도덕 질서와 평안과 안보의 책임을 가진 자이다. 왕은 백성이 악을 행하는 것을 미워해야 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을 징벌해야 한다. 그것이 왕이 행해야 할 의무이며, 또 왕의 보좌, 즉 그의 왕권, 오늘날 말로 그 정권은 공의의 시행으로 말미암아 굳게 선다. 죄와 불의와 부도덕은 나라를 쇠약케 하며 멸망시키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의와 도덕성은 나라를 견고케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세우시기때문이며 또 백성들도 의로운 왕을 따르며 양심적으로 그를 대항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로운 왕은 대다수의 백성의 지지를 받을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나라에나 소수의 악한 무리는 있겠지만, 그들의 불평과 대항이 나라를 크게 흔들지는 못할 것이다.

구약시대의 역사를 보면, 왕들이 의를 구하며 백성들이 의를 따르면 그 나라는 평안하고 견고했다. 예를 들어, 다윗은 경건하며 모든 백성에게 공(公)과 의(義)를 행했고(삼하 8:15),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位)가 영원히 견고하리라”고 말씀하셨다(삼하 7:16). 다윗 때에는 나라에 평안과 강성함이 있었다. 그러나 왕들과 백성들이 악을 행하면 전쟁이 일어났고 기근과 전염병이 찾아왔으며 반란과 반역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악한 나라들은 오래가지 않아 쇠하여지고 멸망하였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범사에 섭리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모든 일을 맡기고 살며 어떤 일을 계획할 때에도 하나님의 선한 지도하심을 믿고 기도하고 받아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왕의 입에 있으므로 재판할 때에 그릇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통치자들은 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심어주신 법, 즉 양심의 법에 따라 공의를 시행해야 한다. 우리는, 비록 통치자가 아닐지라도, 우리의 처한 현실에서 양심에 따라 공의를 실행해야 한다.

셋째로, 공평한 저울은 하나님의 것이요 주머니 속의 추들도 다 그의 지으신 것이다. 우리는 장사나 사업에서, 또 그 외의 모든 금전 거래에서, 또한 모든 인간관계에서, 범사에 공정하고 정직하고 진실해야 한다.

넷째로, 악을 행하는 것은 통치자가 미워해야 하며 이렇게 할 때 그의 통치권이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설 것이다. 공의로 통치할 때 그 정권이 굳게 선다. 우리는 우리나라가, 비록 세속 국가이지만, 공의가 서고 도덕성이 있는 나라가 되어 평안과 강성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

13-16절, 의, 왕의 분노와 기쁨, 지혜

[13절] 의로운 입술은 왕들의 기뻐하는 것이요 정직히 말하는 자는 그들의 사랑을 입느니라.

의로운 입술은 진리를 말하는 입술이다. 그것은 선을 선이라고 말하고 악을 악이라고 말하는 입술이며, 선을 악이라 하든지 악을 선이라 하지 않는 입술이다. 불의한 자들은 불의한 입술, 거짓된 입술을 가지고 있고, 악과 타협하고 악인들의 비위를 맞추며 아첨하고 아부하며, 또 정작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함으로 악에 동조한다. 그러나 의인은 선과 악을 분명하게 말하고, 비롯 까닭 없이 남을 논단하지는 않으나 하나님의 계명에 근거하여 남에게 진실한 충고를 준다.

왕들은 의로운 입술을 기뻐하고 정직히 말하는 자를 사랑한다. 불의한 말, 거짓된 말은 나라에 도덕적 혼란을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옳고 그름의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것은 때때로 왕에게 거짓된 위로와 격려를 줄 수 있으나 그것도 아무 유익이 없다. 왕이 잘못된 정치를 할 때는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을 해줄 수 있어야 왕이 자신의 정책을 고치고 나라를 바르게 다스릴 수 있다. 왕에 대한 부정적 말이라 하더라도 결국에는 나라에 유익이 될 것이다.

의롭고 정직한 말은 나라의 도덕성을 위해 꼭 필요하기 때문에, 왕들은 그런 말을 하는 자들을 사랑한다. 나라의 도덕성은 나라의 평안과 번영을 위해 꼭 필요하다. 의롭고 정직한 말을 하는 자들로 인해 나라의 도덕성이 향상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복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의롭고 정직한 말을 하는 자들은 나라를 번영케 하는, 나라의 충신들인 셈이다. 오늘날 직장 생활을 하는 성도들도 의롭고 정직한 말을 할 때 결국에는 윗사람들의 기쁨과 사랑을 받을 것이다.

[14절] 왕의 진노는 살륙[죽음]의 사자와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쉬게 하리라.

왕의 진노는 죽음의 사자와 같다. 통치의 권세를 가진 왕이 진노하면 죽음의 사자같이 무섭다. 왕은 불의와 악을 볼 때 진노하며, 그가 노하면 악인을 죽일 수도 있다. 그에게 그런 권세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만왕의 왕이시다. 그는 악인을 심판하시고 징벌하시는 두려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시대에 강포해진 세상 사람들을 홍수로 멸하셨고 또 소돔과 고모라 성의 음란했던 사람들을 유황불비로 멸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의 날에 모든 악인들에게 진노하시고 그들을 지옥 불못에 던지실 것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왕의 진노를 쉬게 할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겸손히 그의 계명들을 행하는 자이다. ‘쉬게 한다’는 원어(킵페르 )는 ‘덮는다, [감정을] 누그러뜨린다’는 뜻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진노한 왕의 진노를 가라앉힐 수 있다. 그는 왕 앞에서 바르고 지혜롭고 선한 말을 겸손히 그러나 담대하게 아룀으로써 왕의 노를 누그러뜨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도 그러하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에 머물고 모세가 40일간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가 하나님과 교통하며 율법을 받고 언약의 두 돌판을 가지고 내려왔을 때, 산 아래서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섬기며 즐거이 뛰놀았다. 그 광경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셨고 그들을 다 멸하려 하셨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라고 간구함으로써 하나님의 노를 누그러뜨리며 돌이키게 하였다(출 32:10-14).

[15절] 왕의 희색(喜色)(오르 페네 )[얼굴의 빛]에 생명이 있나니 그 은택(레초노 )[그의 호의(KJV, NASB, NIV), 그의 기쁨]이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과 같으니라.

왕의 얼굴의 빛은 밝고 기쁜 얼굴빛을 가리킨다고 본다. 왕의 진노는 ‘죽음의 사자’ 같지만, 왕의 기쁜 얼굴빛은 생명을 줄 것이다. 근심과 분노는 자신도, 남도 죽게 한다. 왕의 근심과 진노는 백성의 마음에 근심과 죽음의 공포를 줄 것이다. 그러나 평안과 기쁨은 자신도, 남도 살게 한다. 기쁨은 살맛을 나게 하며 삶의 활력을 불러일으킨다. 왕의 평안과 기쁨은 백성에게 생기를 줄 것이다.

또한 본문은 왕의 호의가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과 같다고 말한다. ‘늦은 비’는 봄비, 즉 봄에 곡식을 여물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하고 유익한 비를 가리킨다. 유대 땅에는 가을에 비가 내린 후 곡식을 파종하는데, 그 비를 ‘이른 비’라고 부른다. 그것은 곡식의 파종을 위하여 땅을 부드럽게 하는데 필요하다. 봄에는 곡식을 여물게 하는 데 필요한 봄비가 내리는데, 그것을 ‘늦은 비’라고 부른다. 사람이 기쁘면 다른 이에게 좋은 영향을 주듯이, 왕도 기쁘면 백성에게 그럴 것이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도 그러하시다. 그가 노하시면 우리에게 죽음뿐일 것이지만, 그가 기뻐하시면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이 넘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뻐하셨고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셨다. 스바냐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심에서 비롯되었다.

[16절]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

금과 은, 곧 돈은 세상 사는 데 많은 유익이 있다. 돈이 있어야 필요한 음식도 사먹을 수 있고 필요한 옷도 살 수 있고 필요한 집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돈은 환난 날에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지 못한다. 돈은 우리의 죽음과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우리에게 마음의 참 평안도 주지 못하며, 우리의 몸의 건강도 보장해 주지 못한다. 부자가 다 평안하거나 건강한 것이 아니다. 돈은 특히 영생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지혜와 명철은 이것저것을 다 얻게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죄 문제의 해결을 얻게 하며 심령의 평안을 얻게 한다. 그것은 행복의 매우 큰 요소이다. 그것은 또 몸의 건강을 얻게 하며 경제의 안정도 얻게 한다. 하나님께서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영육의 좋은 것들을 다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3:13-18은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은을 얻는 것보다 나으며 지혜가 진주보다 귀하며 그 오른편에 장수가 있고 그 왼편에 부요와 존귀가 있으며 그 길은 즐거움의 길이요 평안의 길이며 또 그것을 얻는 자에게 생명나무, 즉 영생을 준다고 말했다.

지혜는 하나님을 모시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하나님과 화목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지혜를 가진 자는 하나님의 복을 누린다. 하나님께서는 만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지혜는 곧 경건함이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하였다(딤전 4:8). 경건의 유익은 무엇보다 영생이지만, 현세의 육신적인 일들, 즉 건강과 경제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 보장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의로운 입술은 왕들의 기뻐하는 것이요 정직히 말하는 자는 그들의 사랑을 입는다. 우리는 정직하고 선하고 덕스러운 말로 남에게 유익을 주고 윗사람의 기쁨과 사랑을 입어야 한다.

둘째로, 왕의 진노는 죽음의 사자와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쉬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지혜자가 되어 사람의 노뿐 아니라, 또한 감히 하나님의 노를 가라앉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왕의 얼굴 빛에 생명이 있으며 그의 호의는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과 같다. 우리는 우리를 기뻐하시고 은혜로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그의 의와 기쁨과 그의 호의 안에 항상 거해야 한다.

넷째로, 지혜와 명철을 얻는 것은 금은을 얻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의와 선을 힘써 행함으로써 금은보다 더 나은 지혜와 명철을 늘 풍성히 얻어야 한다.

17-20절, 악을 떠남, 교만, 겸손, 말씀

[17절]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大路)니 그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하느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정직한 사람은 악을 떠나는 삶을 산다. ‘악’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며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다. 잠언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그러므로 정직한 자는 악을 행치 않고 멀리하며 하나님의 법을 떠나지 않고 지킨다.

또 자기의 길을 지키는 자, 곧 죄를 안 지으려고 조심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기를 힘쓰는 자는 자기 영혼을 보전한다. 사람이 죄를 짓고 악을 행하면, 영혼의 평안을 잃고 고통을 당하고 생명을 잃고 영원히 죽게 될 것이다. 악인의 길은 넓고 평탄해 보여도, 실상 평안이 없고 하나님의 징벌 때문에 고생이 많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멀리하고 의를 행하면, 영혼이 평안을 누리며 영생에 이를 것이다. 로마서 2:6-8,“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예수님 믿고 구원 얻고 영생할 성도의 삶은 의롭고 거룩한 삶이다.

[18절]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이 말씀은 사람이 교만하면 패망이 뒤따르고 거만한 마음을 가지면 넘어짐이 뒤따른다는 뜻이다. 교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높이고 남을 낮추어 생각하는 마음이다. 교만은 죄악들 중에 근본적인 악이다. 그것은 모든 악의 근원인 마귀의 죄이다(딤전 3:6).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피조물 됨과 죄악됨을 알지 못할 때 교만해진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자는 겸손해진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말씀드릴 때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라고 말하였고(창 18:27),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말하였고(사 6:5), 베드로는 주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다(눅 5:8). 또 사람은 성도라 하더라도 그가 현재 누리는 영육의 모든 좋은 것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지 못할 때에 교만해진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라고 말하였다(고전 4:7).

교만한 사람은 결국 망하고 만다.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매우 미워하신다.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죄악들 중에 첫 번째가 교만이다(잠 6:16). 잠언 8:13은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고 말한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였다”라고 교만하게 말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왕위에서 내려앉게 하셨다(단 4:30-33). 교만은 멸망의 길이다.

[19절] 겸손한 자와 함께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사람에게 친구의 영향은 크다. 물론,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면 교만한 자들 가운데서도 교만의 악을 깨닫고 겸손한 길로 나갈 수도 있지만, 사람은 보통 친구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는다(잠 13:20).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이 스스로를 강하게 하면 무슨 일을 해낼 것같고, 사람이 겸손하면 유약하고 무슨 일을 해낼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실상 겸손한 자와 함께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낫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교만을 미워하시고 교만한 자를 징벌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잠언 3: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벧전 5:5; 약 4:6에 인용됨).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그러므로 성도는 교만한 자들과 사귀지 말아야 한다. 시편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사도 바울은 악한 자와의 교제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고 말했다(고전 15:33). 성도는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시편 131편 저자는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라고 말하였고(시 131:1), 또 사도 바울은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고 말했다(롬 12:16).

[20절]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9)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의지하는 자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는 자는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할 것이다. ‘좋은 것’과 ‘복’은 심리적 평안, 육신적 건강, 물질적 여유, 환경적 평안 등을 다 포함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고 그의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영육의 복을 얻을 것이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실패는 그들이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마귀의 말을 따른 데 있었다. 노아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와 동행하였는데(창 5:21-24; 6:9),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났다. 모세는 하나<9)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라는 구절(Vg, NASB, NIV)은 ‘일을 지혜롭게 행하는 자’로 번역하기도 한다(LXX, KJV). 그러나 전자의 번역이 낫다.>님과 대면하여 대화하였던 자이었다(민 12:6-8).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항상 들었고 그 뜻대로 행하였다. 그들은 다 복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고 말씀하셨다(수 1:7-8). 시편 1편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밤낮으로 묵상하는 자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하며 그 행사가 다 형통할 것이라고 말했다(시 1:2-3). 시편 119:165도,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 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라고 말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大路)이며 그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 영혼을 보전한다. 성도는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며 죄 짓지 말고 의를 행해야 한다. 신약 성도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지켜야 한다(요일 3:23).

둘째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이다. 우리는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교만하면 멸망한다. 겸손은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것을 잘 유지하는 길이다. 우리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워야 한다.

셋째로, 겸손한 자와 함께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낫다.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겸손한 자들과 사귀고,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교만한 자들과 사귀지 말아야 한다.

넷째로,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으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며 그의 말씀인 성경에 주의하고 그것을 항상 읽고 듣고 배우고 연구하고 묵상하며 힘써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복된 길이며 큰 평안의 길이며 영원한 생명의 길이다.

21-24절, 지혜, 명철, 지식, 선한 말

[21절] 마음이 지혜로운 자가 명철하다 일컬음을 받고 입이 선한 자가 (남의) 학식[지식]을 더하게 하느니라.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자이며 그는 명철하다 일컬음을 받는다. ‘명철하다’는 원어(나본)는 ‘사려 깊다, 분별력이 있다’는 뜻이다. 어리석은 자는 생각이 깊지 못하고 분별력이 없어 자주 실수하고 범죄하지만,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사려 깊고 분별력이 있어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한다.

또 입이 선한 자는 지식을 더하게 한다. 본문은 지혜로운 자와 입이 선한 자를 같은 부류로 여긴다. ‘선하다’는 원어(메세크)는 ‘달콤함’이라는 뜻이다. ‘입이 선한 자’라는 말은 즐거움을 주는 말, 은혜로운 말을 하는 입을 가리킨다. ‘학식’이라는 원어(레카크 )는 ‘지식’이라는 말인데, 이것은 듣는 사람의 지식뿐 아니라, 말하는 이의 전달 능력 즉 설득력을 의미한다고 본다(BDB). 한 권위 있는 영어성경은 “말의 달콤함은 설득력을 증가시킨다”라고 번역하였다(NASB).

선하고 은혜로운 말을 하는 입은 듣는 이의 지식을 더하게 할 것이다. 어리석은 자의 말은 남에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해를 주지만, 지혜로운 자의 말과 남에게 은혜를 주는 말은 듣는 이의 지식을 더하게 할 것이다. 잠언 10:21은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고 말하였다. 또 선하고 은혜로운 말은 말하는 사람의 전달 능력 즉 설득력도 더하게 할 것이다. 그의 말은 좋은 설득력을 가질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들을 때 닫힌 마음을 열고 잘 듣게 될 것이다.

[22절] 명철한 자에게는 그 명철이 생명의 샘이 되거니와 미련한 자에게 는 그 미련한 것이 징계가 되느니라.

명철한 자에게는 그의 명철이 생명의 샘이 된다. 명철한 자는 지혜로운 자를 가리킨다. ‘명철하다’는 원어(사칼 )는 ‘사려 깊다’는 뜻이다. 잠언에서 이 말은 ‘명철하다’는 또 다른 말(빈 )이나 ‘지혜롭다’는 말과 동의어로 쓰인다. ‘생명의 샘’은 생명수를 길을 수 있는 곳이다. 생명수는 생명을 주는 유익한 교훈을 가리킨다. 어리석은 자는 죄를 짓고 죽음에 이른다. 그러나 지혜와 명철은 생명에 이르는 교훈을 준다. 그 교훈은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고, 심령의 평안과 기쁨을 주고, 몸에 건강과 힘도 주고, 마침내 우리로 영생에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잠언 3:18은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고 말하며, 잠언 4:23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한다. 또 잠언 11:30은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고 말한다. 지혜는 의에 이르고, 의는 생명에 이른다.

그러나 미련한 자에게는 그 미련한 것이 징계가 된다(NIV). 미련한 자들에게서는 미련함만 나온다. ‘미련함’은 사람이 자기 본분을 버리고 여러 가지 죄악에 빠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미련한 말들과 행위들에 대해 징계하실 것이다. 미련함은 미련한 자 자신에게 해가 되고 결국 영육의 죽음에 이른다. 그것은 심령의 어두움과 고통, 몸의 쇠약과 질병을 가져오고, 마침내 죽음과 지옥 형벌에 이르게 한다.

[23절]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 입을 슬기롭게 하고(야스킬 ; 히필형)[사려 깊게 하고, 분별력을 주고](BDB, KJV, NASB) 또 그 입술에 지식을 더하느니라.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계명대로 사는 자이다. 지혜로 운 자의 마음은 자신의 입을 슬기롭게, 사려 깊게 한다. 그것은 그에게 분별력을 준다. 그는 범사에 바르고 선하고 덕스러운 말을 할 것이다. 또 그것은 그의 입술에 지식을 더한다.

잠언의 다른 곳들에 보면, 의인의 입은 지혜를 내고(잠 10:31), 여러 사람들을 교육한다(잠 10:21). 또 지혜자의 혀는 양약 같고(잠 12:18), 지식을 선히 베풀고(잠 15:2), 그 입술은 지식을 전파한다(잠 15:7). 이것은 남을 위해서도 그러하지만, 자신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반면에, 지혜 없는 자 곧 미련한 자는 이웃을 멸시하고(잠 11:12),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며(잠 12:18), 그의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하고(잠12:23), 미련한 것을 나타내고(잠 13:16), 그 입은 미련한 것을 쏟으며(잠 15:2), 또 지식을 전하지 못한다(잠 15:7, 원문의 뜻). 

다시 정리하면, 지혜를 가진 사람은 지혜로운 말, 바른 말, 선한 말, 덕스러운 말을 하고, 지식 곧 의의 지식, 선한 지식, 덕스러운 지식을 더하고, 자신과 남들에게 유익을 주지만, 지혜가 없는 사람 곧 미련한 사람은 미련한 말, 악한 말, 거짓된 말, 덕스럽지 못한 말을 하고, 자신의 무지와 죄악을 더하고, 자신과 남들에게 해를 끼친다.

[24절]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선한 말’이라는 원어(이므레 노암 )는 ‘기쁘고 즐거운 말, 사랑스러운 말’이라는 뜻이다. 기쁘고 즐겁고 사랑스러운 말은 꿀송이같고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된다. 잠언 4:22는 지혜의 말이 그것을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몸의 건강이 된다고 말하였고, 잠언 12:18은 지혜로운 자의 혀가 양약 같다고 말하였다.

죄는 근심과 걱정, 불안과 염려, 두려움을 만들고, 그것은 슬픈 말 불쾌한 말, 싫은 말을 하게 만들고, 그런 말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함을 주지만, 기쁘고 즐겁고 사랑스러운 말은 꿀송이 같고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될 것이다. 그런 말들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 도, 다른 이들의 몸과 마음에도 유익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고 말하였고(롬 15:2), 에베소서에서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말했고(엡 4:29), 또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권면했다(살전 5:14).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선한 말의 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쁘고 즐겁고 사랑스런 말씀이다. 그러므로 시편 119편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즐거움이며(24, 77, 92절), 곤란 중에 위로이며(50절), 그 맛이 꿀보다 더 달며(103절), 그래서 그는 그 말씀을 종일 묵상하고 (97절), 새벽 전에 바랐고 야경이 깊기 전에 깨어 묵상하였고(147-148절), 정금보다 더 사랑하였다고 고백하였다(127절). 실상, 우리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기쁨의 하나님이시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이며 (갈 5:22) 천국은 의와 평안과 기쁨이 충만한 나라이다(롬 14:17).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명철하다 일컬음을 받고 입이 선한 자는 지식을 더하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이 지혜롭고 사려 깊고 분별력 있는 자가 되고, 또 다른 이들에게 지식을 주고 즐거움을 주는 설득력 있는 말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명철한 자에게는 그 명철이 생명의 샘이 되지만, 미련한 자에게는 그 미련한 것이 징계가 된다. 우리는 미련하여 징계를 받고 멸망에 이르는 자가 되지 말고, 명철한 자가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려야 한다. 그것은 성경을 가까이 하고 죄짓지 말고 의와 선을 행함으로 가능하다.

셋째로,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 입을 슬기롭게 하고 그 입술에 지식을 더한다. 우리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 말을 슬기롭게, 사려 깊고 분별력 있게 하고 날마다 지식이 더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바르고 선하고 덕스러운 말을 하는 자는 다른 이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유익을 줄 것이다.

넷째로, 선한 말, 기쁘고 즐겁고 사랑스러운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된다. 우리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고 위로가 되는 꿀보다 더 단 성경말씀을 사랑하는 자가 되고 또 선한 말 즉 기쁘고 즐겁고 사랑스러운 말을 해서 남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25-28절, 사망의 길, 노동, 불량함, 패려함

[25절]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잠언 14:12에도 동일한 말씀이 나온다. 이 교훈의 말씀이 중요하기 때문에 반복하여 기록되었을 것이다. 사람은 도덕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사람의 양심도 사람의 죄성 때문에 도덕 기준이 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심지어 사람의 보기에 바른 길이 종종 사망의 길인 경우가 있다.

사사 시대의 특징은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것이었다(삿 17:6; 21:25). 그러나 그 시대는 우상숭배와 음란의 풍조가 가득한 영적으로 매우 어두운 시대이었다(삿 18, 19장). 오늘날 교회 안에는 자유주의 신학과 종교다원주의 사상, 황금만능주의, 쾌락주의의 풍조가 많이 들어와 있다. 어떤 교회들은 낙태와 동성애도 용납하고 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악들이다. 심지어 부모를 공경하고 자기 일에 충실하고 다른 사람에게 친절해도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고 돈을 최고 가치로 여기고 음란하고 거짓말하면 그것은 사망의 길이다. 사람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삶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과 그의 말씀 곧 성경이다. 십계명은 의의 기준이며 우리의 생활 규범이다. 그 도덕법은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변하지 않으며 사람의 양심에도 부합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칙이다. 세상 사람들의 다양한 인생관은 사망에 이르는 넓은 길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 예수님을 믿고 성경의 교훈대로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우리는 사망의 길로 가지 말고 성경에 교훈된 생명의 길로 가야 한다.

[26절] 노력하는 자는 식욕을 인하여 애쓰나니 이는 그 입이 자기를 독촉함이니라.

사람은 자신을 위해 수고하며 그가 번 돈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는 다. 노동이나 식욕은 사람의 정상적 활동이며 욕구이다. 사람은 부지런히 일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종신토록 수고하고 얼굴에 땀이 흘러야 땅의 소산을 먹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3:17,19). 농사, 목축, 고기잡이, 장사를 비롯해 오늘날 다양한 직업들이, 또 여성의 집안 일도 다 수고로운 일이다. 욥기 7:1은 인생의 삶이 힘든 노동 같다고 말하였고 시편 90:10은 사람의 일평생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했다. 사람은 일하기 위해 먹고, 먹기 위해 일한다. 물론, 일하는 즐거움과 먹는 즐거움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복이다.

사람은 근면해야 한다. 게으름은 악이다. 사람이 게으르면 가난해지고 궁핍해진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교훈하였고(살전 4:11) 또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하였다(살후 3:10).

그러나 사람이 세상에서 하는 이 모든 수고로운 삶은 실상 헛된 일이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이라고 표현하셨고 그것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곧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을 위해 일하라고 말씀하셨다(요 6:27, 29). 그것은 영혼 구원과 성화(聖化), 전도와 교회 건립과 확장, 또 이를 위해 하나님께 헌신하고 봉사하는 일 등을 가리키셨다고 본다.

[27절] 불량한 자(이쉬 벨리야알 )[벨리알의 사람, 악한 자, 무가치한 자]는 악을 꾀하며 그 입술에는 맹렬한 불같은 것이 있느니라.

‘악’이라는 원어(라아 )는 도덕적인 악뿐 아니라, 일반적인 해(害) 즉 정신적, 심리적인 해와 물질적, 육신적 해를 다 포함한다. ‘꾀한다’(plot)(NIV)는 원어(카라 )는 ‘[우물이나 함정 등을] 판다, 파낸다(dig up)(KJV, NASB), 탐구하다’는 뜻이다.

무가치한 자는 악을 꾀하며 궁리한다. 선한 자는 선한 일을 생각하고 선한 일을 행하지만, 악한 자는 악한 일을 생각하고 악한 일을 행한다. 또 무가치한 자의 입술에는 맹렬한 불같은 것이 있다. ‘불같은 것’이란, 미움, 시기, 질투, 욕심에서 나오는, 교만하고 남을 멸시하는, 독한 감정으로 하는 말과 행동을 가리킬 것이다.

주께서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하셨고(마 12:34-35),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비방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5:19). 사도 바울은 악한 사람들의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고 말하였고(롬 3:13-14), 또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고 하였다(엡 4:31). 또 야고보는,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거슬러]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고 말하였다(약 3:14-16). 우리는 심령을 깨끗하게 해야 하고 악한 마음과 말과 행위를 버려야 한다.

[28절] 패려한(타푸코스 )[정로를 벗어난, 비뚤어진, 패역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장이[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패려한 자 곧 마음이 비뚤어진 자는 마음이 교만하며 하나님의 율법과 바른 교훈을 대적하고 자기 중심적이고 남에 대한 이해심이 없다.

그것은 인격의 큰 결함이다. 그런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 우리는 마음이 순진하고 반듯해야 하고 선악 판단이 분명해야 한다.

잠언 13:10은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말한다. 또 야고보는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욕심]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라고 말하였다(약 4:1-2). 사람의 마음이 온유겸손하고 남에 대한 이해와 배려와 사랑이 있고, 또 오래 참는 마음이 있으면, 서로간에 다툼이 생길 여지가 없을 것이다.

또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한다. 사람이 말이 많으면 실수가 생긴다. 잠언 10:19,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특히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을 잘 하는 것은 인격적 결함이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악들 6, 7가지 중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가 포함되어 있다(잠 6:19). 사람 사이의 이간은 한 사람에게 한 말과 다른 사람에게 한 말이 서로 다를 때, 또 상대방에게 무엇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그릇된 오해를 충동질할 때 생긴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남을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고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라고 교훈하였다(엡 4:31-32).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보기에 바른 것 같으나 사망의 길인 길로 걷지 말고 하나님의 보시기에 바른 길인 생명의 길로 걸어야 한다. 그 길은 신구약성경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주로 믿고 성경 교훈대로 바르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둘째로, 노력하는 자는 식욕을 인하여 애쓴다. 그것은 그 입이 자기를 독촉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게으르지 말고 자기의 일에 근면해야 한다. 일하는 즐거움과 먹는 즐거움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복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실상 다 헛된 일들이다. 우리는 이런 일들보다 하나님의 일, 곧 믿음과 성화, 전도와 교회 건립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한다.

셋째로, 불량한 자는 악을 꾀하며 그 입술에는 맹렬한 불같은 것이 있다. 우리는 악한 심령으로 남을 해치는 악을 꾀하거나 남을 비방하거나 저주하지 말고 모든 악을 버려야 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바르고 선한 것을 말하고 행해야 한다. 그것은 영생에 이르는 자들의 정로(正路)이다.

넷째로, 마음이 비뚤어진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한다. 우리는 비뚤어진 심령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까닭 없이 다투거나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말을 해서 사람들 간에 이간질을 하지 말고, 선하고 순진한 마음과 바른 인격이 되어 선악 판단을 바르게 하고 온유 겸손하고 남을 사랑하고 배려하며 화목하며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

29-33절, 강포, 백발, 노를 참음, 작정

[29절] 강포한 사람은 그 이웃을 꾀어 불선한 길로 인도하느니라.

강포하고 난폭한 자는 그 이웃을 꾀어 선하지 않은 길 곧 불의하고 악한 길로 인도한다. 우리는 난폭한 자가 되거나 남을 악한 길로 이끄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시편 15:1-5는,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거할 자는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 . .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 . .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이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난폭한 자와 친구가 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사람의 교제는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선한 자와 교제하면 선한 영향을 받고 악한 자와 교제하면 악한 영향을 받는다. 시편 1:1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말했다. 잠언 13:20은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도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고 말했다(고전 15:33).

[30절] 눈을 감는 자[그의 눈을 찌푸리는 자]는 패역한 일을 도모하며 입술을 닫는 자[그의 입술을 움츠리는 자]는 악한 일을 이루느니라.

눈은 마음의 거울이다. 교만하고 패역한 사람은 그의 교만과 패역함이 그의 눈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잠언 6:16-17은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6, 7가지를 말할 때 ‘교만한 눈’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사람의 악하고 교만한 마음은 그의 눈, 특히 그의 찌푸린 눈으로 나타난다.

또 악한 사람의 입도 그의 악한 마음을 드러낸다. 입은 사람의 인격을 나타낸다. 주께서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하셨다(마 12:35).

사도 바울은, 악한 자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고 말하였다(롬 3:13-14). 사람의 악하고 패역한 마음은 그의 찌푸리는 눈과 움추리는 그의 입술 모양으로 나타난다.

[31절]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 장수(長壽)를 약속하셨다. 출애굽기 20:12,“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잠언 3:16은, 지혜의 우편 손에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 부귀가 있다고 말한다. 반대로, 성경은 악인에게 단명(短命)을 경고하였다. 다윗은, “하나님이여, 주께서 저희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저희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라고 말하였다(시 55:23).

그러므로 흰머리는 영화의 면류관이며 그것은 의로운 길에서 얻는 다. 잠언 20:29는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고 말한다. 물론, 의인들의 백발만 복되다. 사람이 악을 행하면서 장수하는 것은 결코 영화의 면류관이 아니며 그것은 오히려 큰 불행이다. 왜냐하면 그는 더 많은 죄를 지을 것이며 그의 죄의 벌은 더 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인이 오래 사는 것은 복되며, 의로운 길에서 얻는 그 백발은 참으로 영광의 면류관이다.

의인들의 백발은 지혜의 표이다. 그의 지혜는 많은 실패와 성공 속에서 얻은 지혜이다. 또 그 백발은 성화의 표이다. 인생의 일생은 성화의 과정이다. 또 그 백발은 봉사 사역의 표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많이 봉사한 표이다. 또 그 백발은 그의 행복의 표이기도 하다. 성도의 삶은 복되다. 그러므로 경건한 노인은 공경의 대상이 될 만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너는 센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말씀하셨다(레 19:32).

[32절]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용사’나 ‘성을 빼앗는 자’는 체력이 있고 전투 기술과 능력도 있고 지혜와 용기도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노하기를 더디하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그런 용사나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 자기의 감정을 통제하고 절제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는 뜻이다. 인격의 훈련이 되지 않은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 감정대로 말하며 행동하고 화도 쉽게 내며 또 실수하고 범죄한다.

자기의 감정을 통제하는 인격의 가치는 매우 크다. 그것은 영적으로 성숙한 어른의 모습이다.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또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고 말했고(고전 13:4, 7), 성령의 열매들로 오래 참음과 온유와 절제를 꼽았다(갈 5:22-23). 또 그는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했다(엡 4:31-32). 야고보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고 말하였다(약 1:19-20).

[33절]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제비뽑기는 옛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찾는 한 방법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범죄한 아간을 찾아낼 때 제비뽑기를 사용했고(수 7:14),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분배할 때도 제비뽑기를 사용했다(수 18:10). 또 사도들은 사도 한 명을 보선할 때 제비뽑기를 사용했다(행 1:26).

세상 사람들도 종종 제비뽑기를 사용하였다. 요나가 탄 배의 선장은 풍랑의 원인을 찾을 때 제비뽑기를 사용하였고(욘 1:7), 악한 하만의 동료들은 모르드개와 유다인들을 몰살시킬 날을 정할 때 제비뽑기를 하였다(에 3:7). 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로마 군병들도 그의 옷을 나눠 가지려고 할 때에 제비뽑기를 하였다(마 27:35).

사람이 제비를 뽑지만,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다. ‘일을 작정하기’라는 원어(콜 미슈파토 )는 ‘그 모든 결정’이라는 뜻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사람의 뜻이나 우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작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자연법칙도 사용하시고 우연한 일이나 사람의 결심이나 회의의 결정도 사용하신다. 그러나 그는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행하시는]” 자이시다(엡 1:11). 시편 115:3, “오직 우리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강포한 사람은 그의 이웃을 꾀어 선하지 않고 악한 길로 인도한다. 우리는 강포한 자가 되지 말고 선하고 온유한 자가 되어야 하고 또 선하고 온유한 자들과만 교제해야 한다.

둘째로, 눈을 찌푸리는 자는 패역한 일을 도모하며 입술을 움츠리는 자는 악한 일을 이룬다. 사람의 눈빛이나 입은 그의 마음의 반영이다. 우리는 눈을 찌푸리거나 입술을 움츠리는 자가 되지 말고, 우리의 눈빛이 선하며 우리의 입이 선하고 덕스러운 말을 하는 입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노인들의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며 의로운 길에서 얻는다. 그러므로 노인들은 백발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비록 그것이 죄는 아니겠지만, 나이든 사람들은 머리털에 검정색 물을 들일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의롭게 살면서 영화의 면류관인 백발을 가지는 것을 기쁘게 생각해야 한다. 또 젊은이들은 노인들의 백발을 존경해야 한다.

넷째로,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 온유하고 절제하며 자기 감정을 통제하고 노하기를 더디하며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다섯째로, 사람들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게으르지 말고 해야 할 일들을 다해야 하지만, 우리의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작정대로와 그의 섭리대로 됨을 알아야 한다.

===17장: 화목, 용서, 말 절제

1-4절, 화목, 슬기로운 종, 연단, 악인

[1절]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솰와 )[조용한 것, 평혁 안한 것]이 육선(肉饍)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른 떡 한 조각만 있다’는 말은 고기나 우유나 과일이 없는 가난한 가정을 표현한다. ‘화목하는 것’이라는 원어는 ‘조용함, 평안함’이라는 뜻이다. 다투는 가정에는 시끄러움이 있으나 서로 사랑하고 화목한 곳에는 조용함과 평안함이 있다. 그것은 행복한 가정의 모습이다.

‘육선(肉饍)’이라는 원어(지브케 )는 ‘제물들’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구약의 율법의 규정대로, 화목제물의 일부분을 하나님께 화제(火祭)로 드리고 또 일부분을 제사장에게 돌린 후에, 나머지는 제사 드린 자들이 먹는 것을 가리킨다. 제물들이 집에 가득하다는 말은 물질적으로 유여하고 식탁에 고기가 있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물질적 여유가 있는 집이라도 다툼과 시끄러움이 있으면 행복하지 못하다.

가정의 행복은 돈의 많음에 있지 않고 가족들 간에 서로 사랑하는 조용하고 평안한 삶에 있다. 잠언 15:17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낫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적 부를 구하지 말고(딤전 6:9-10) 오히려 평안함과 자족하는 마음을 구해야 한다. 골로새서 3:15, “그리스도의 평강[평안]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디모데전서 6:7-8,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2절] 슬기로운 종은 주인의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그 아들들 중에서 유업을 나눠 얻으리라.

종들 가운데는 슬기로운 종이 있고 미련한 종이 있다. 미련한 종은 주인의 뜻을 알지 못하고 게으르고 이기적이고 성질도 말씨도 나쁘지만, 슬기로운 종은 주인의 뜻을 알고 부지런하며 충성되고 헌신적이며 말씨도 좋을 것이다.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은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이다. 그런 자는 부모에게 수치가 된다.

슬기로운 종은 주인의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을 다스릴 것이다. 주인은 그가 신임하는 그의 충성된 종에게 자기 아들을 맡기며 그에게 상당한 권한을 주어 아들을 다스리게 하며, 그 종은 주인의 기쁘고 선한 뜻을 받들어 아들을 충실하게 교육하며 돌볼 것이다.

또 슬기로운 종은 그 아들들10) 중에서 유업을 얻을 것이다. 그 아들들 가운데서 유업을 나눠 얻는다는 말은, 주인이 그 종을 자기 아들들 중의 하나처럼 사랑하고 귀히 여긴다는 뜻이다. 마치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의 종 시바에게 그 주인의 소유를 주었듯이(삼하 16:4), 그 주인은 자기 아들들에게 줄 기업의 일부를 그 종에게 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목사들과 교회 직분자들은 그의 종들이다. 교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주실 기업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때를 따라 집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눠주라고 교훈하셨다(마 24:45). 미련한 종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게으르고 악하지만, 슬기로운 종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부지런하고 충성될 것이다.

[3절]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바칸 )[검토하시느니라, 시험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검토하시고 시험하신다. 사람은 마음이 중요하다. 악한 자는 악한 마음으로 악을 생각하고 행하며, 선한 자는 선한 마음으로 선을 생각하고 행한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의 마음<10) ‘아들들’이라는 원어(아킴 )는 문자적으로는 ‘형제들’이라는 뜻이지만(KJV, NASB, NIV), 문맥적으로 주인의 아들들을 가리킨다고 본다.>은 심히 부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17:9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하였다.

중생(거듭남)은 마음의 변화이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하여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겔 36:26).

바울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했다(엡 4:22-24). 성화(聖化)는 마음의 계속적 변화이다. 에베소서 4:23에,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는 원어(아나네우스다이 ajnaneou'sqai)(현재부정사)는 진행적, 반복적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성화에 관계된다. 용광로가 원광을 제련하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한 금과 은을 만들어내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여 악성과 악습을 제거하고 깨끗하고 선하고 좋은 인격을 만드신다. 그것이 성화이다. 성화는 마음의 변화이다. 그것은 점진적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을 항상 긍정적으로 받고 그 현실 속에서 마음의 단련과 변화를 받아 조금씩이라도 성화를 이루어가야 한다. 다윗은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라고 기도하였다(시 26:2).

[4절] 악을 행하는 자는 궤사한(아웬 )[거짓된(KJV), 악한(BDB, NASB, NIV)] 입술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에 귀를 기울이느니라.

거짓과 악은 잘 통한다. 사람의 악은 마귀의 거짓말에서 비롯되었다(창 3장). 그 후, 거짓은 사람의 본성의 죄악성의 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렘 17:9). 예수께서도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훼방 등의 악들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5:19).

거짓과 악은 서로 통한다. 악은 정당성이 없으므로 속여야 행할 수 있고 거짓말은 주로 악을 행하기 위해 한다.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이 있지만, 그것도 거짓말 자체는 악이라고 보인다. 그러므로 선의의 거짓말도 안 해야 한다. 목적이 좋으면 수단도 좋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의를 명하실 때 거짓말하지 말 것도 명하셨다. 십계명의 제9계명은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고 말했다(엡 4:25). 거짓말은 지옥 갈 죄이다. 주께서는 요한계시록에서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말씀하셨다(계 21:8). 또 요한계시록 끝부분은 거짓말하는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새 예루살렘 성 밖에 있을 것도 분명히 증거하였다(계 21:27; 22:15).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도 말고 듣지도 말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肉饍)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낫다. 천국을 소망하는 우리는 부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이 세상 사는 동안 먹을것과 입을 것으로 자족하며 서로 사랑함과 평안한 마음을 귀하게 여기며 지켜야 한다.

둘째로, 슬기로운 종은 주인의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을 다스리며 또 그 아들들 중에서 유업을 나눠 얻는다. 우리는 이 세상 사는 동안에 온 우주의 창조자와 주인이신 하나님께 욕을 돌리지 않고 영광을 돌리며 그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지혜롭고 충성된 종들과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지만, 여호와께서는 마음을 연단하신다. 우리는 이 세상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훈과 단련을 통해 교만한 마음이 겸손하게 되고 더러운 마음이 깨끗하게 되고 악한 마음이 착하게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이 성화이다.

넷째로, 악을 행하는 자는 거짓된 입술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에 귀를 기울인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악을 행치 말고 거짓말을 하지 말고 또 악하고 거짓된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말아야 한다.

5-8절, 조롱, 손자, 거짓말, 선물

[5절]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님을 멸시하는 자이다. 잠언 14:31도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라고 말했다. 가난한 자를 조롱하고 학대하는 자가 왜 그를 지으신 자 곧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되는가? 왜냐하면 첫째로 가난한 자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빈부가 섞여 살며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이시다(잠 22:2). 둘째로 가난한 자의 환경여건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환경여건은, 창조주이시며 섭리자이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주신 것이다. 셋째로, 부자들의 물질적 유여함도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역대상 29:14에서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고 고백하였고, 사도 바울은 교만하고 자랑하는 고린도교인들에게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라고 책망하듯이 말하였다(고전 4:7).

우리는 다른 사람이 재앙 받는 것을 기뻐하지 말아야 한다. 잠언 24:17,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다른 사람이 재앙 받는 것을 기뻐하는 자는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도 그와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이며, 자신이 재앙을 받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 때문이며, 자신에게 어떤 의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우리는 구주 예수님을 믿을 수도 없었고 의와 선을 행할 수도 없다.

[6절]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다. 손자들은 노인들에게 세상에서 기쁨과 낙이며 자랑거리다. 노인이, 경건하고 훌륭한 손자들을 많이 가진 것은 하나님의 복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 수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시고 그 몸의 소생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출 20:6; 신 28:4).

그러므로 시편 112:1-2는,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말하였고, 시편 127:3은,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고 말하였다. 또 시편 128:3-4는,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라고 말하였다. 노인에게 경건하고 지혜롭고 착한 손자와 손녀가 많고 그들이 교회와 사회의 훌륭한 인물들이 되는 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복이다.

또 아버지는 자식의 영광이다. 많은 자녀들에게는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가 세상에서 최고일 것이지만, 특히 그 부모가 복될 때 부모는 그들의 영광이 될 것이다. 부모는 언제 복된 자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화를 이루어 좋은 인격자가 되고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았을 때이다. 즉 자녀들은 부모의 훌륭한 인격과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도우심과 기도 응답과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을 체험하는 것을 볼 때, 그들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특히 부모가 교회에 기둥같은 성도와 일꾼이 되고 성도들과 직분자들의 좋은 본이 될 때, 자녀들은 부모의 그런 모습을 보고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7절] 분외의 말을 하는 것도 미련한 자에게 합당치 아니하거든 하물며 거짓말을 하는 것이 존귀한 자에게 합당하겠느냐?

‘분외의 말’이라는 원어(세팟 예세르 )는 ‘훌륭한 말’(KJV, NASB), ‘경우에 맞는 말’(Vg)이라는 뜻이든지, 혹은 ‘과도한 말,’ ‘거만한 말’(BDB, NIV)이라는 뜻이라고 보인다. 미련한 자는 훌륭한 말이나 경우에 맞는 말을 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고, 과도한 말이나 거만한 말을 하는 것도 사람으로서 합당치 않다.

하물며, 거짓말을 하는 것이 존귀한 자에게 합당하겠는가? 합당치 않다. ‘존귀한 자’는 왕이나 방백 등을 가리키며, 또 예수님 믿고 하나님의 자녀와 왕 같은 제사장이 된(요 1:12; 벧전 2:9) 신약 성도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된 혀와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을 미워하신다(잠 6:16-19).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며(요 8:44), 또 거짓말하는 자는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계 21:8). 그러므로 존귀한 자에게는 거짓말이 합당치 않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이어야 했고(출 18:21, 24), 또 신약교회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딤전 3:8). 교회 직분자들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성도도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진실은 하나님의 백성의 증표이며 인간 관계의 모든 신임의 기초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이해 관계를 떠나 항상 진실을 말해야 한다.

[8절] 뇌물[혹은 ‘선물’]은 임자(베알라우 )[그것의 소유자]의 보기에 보석 같은즉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케 하느니라.

‘뇌물’이라는 원어(쇼카드 )는 ‘뇌물’이라는 뜻으로 많이 쓰이나, ‘선물’이라는 뜻도 있고 그렇게 쓰인 예들도 있다(BDB, KB).11) 옛날 영어성경은 ‘선물’(KJV)이라고 번역했다. 선물과 뇌물은 비슷하다. 그 차이는 단지 그 의도에 있다. 선물은 순수한 사랑과 감사의 표이지만, 뇌물은 무엇을 얻고자 하는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이다. 선물은 그것을 소유한 자에게 보석과 같아서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케 한다.

선물은 어느 때든지 효과가 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닫힌 마음을 연다. 잠언 18:16, “선물은 그 사람의 길을 너그럽게 하며 또 존귀한 자의 앞으로 그를 인도하느니라.” 잠언 19:6,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을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 잠언 21:14,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느니라.” 신약성경에도 교회의 감독 곧 장로의 자격 요건들 중에 한가지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었다(딤전 3:2). 선을 베푸는 것은 남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것과 같다.

뇌물도 효과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뇌물은 불의를 조장하고 도덕적 해이를 가져오고 사회를 부패시킨다. 악한 재판관은 사람에게서 뇌물을 받고 판결을 그릇되게 한다(잠 17:23). 이스라엘 사회가 부패했을 때, 뇌물이 성행했다. 이사야 1:23,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고 말씀하셨고(출 23:8), 또 시편 15:5는 하나님의 장막에 거할 자는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않는 자라고 말하였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남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벌을 면치 못할 자이다. 우리는 가난한 자를 조롱하지 말고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멸시하지 말아야 한다. 또 재앙 당한 자를 기뻐하여 벌을 받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버지는 자식의 영광이다. 우리는 우리의 육적 자녀들과 영적 자녀들이 번창하고 복 받기를 기도하며, 또 그들에게 신앙적, 인격적 본이 되고 복의 본도 되기를 소원해야 한다.

셋째로, 미련한 자가 훌륭한 말을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고 거만한 말을 하는 것도 합당치 않고 존귀한 자가 거짓말하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성도로서 모든 거짓말을 멀리하고 항상 진실한 말만 해야 한다.

넷째로, 선물은 그 주인 보기에 보석 같아서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케 한다. 선물은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닫힌 마음을 여는 효과가 있지만, 뇌물은 하나님 앞에서 죄이므로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아야 한다.

9-12절, 용서, 총명, 반역, 미련함

[9절]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자이다. 잠언 10:12도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말했다.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줄 수 있다. 사도 베드로도,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했다(벧전 4:8).

우리에게 사랑이 있으면, 우리는 남의 허물을 덮어줄 수 있고 용서할 수 있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잘못을 행한 자들이 와서 잘못했다고 말하면 하루에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8:22). 우리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며 모든 것을 참는 것이라고 말하였고(고전 13:4, 7), 또 교훈하기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하였다(엡 4:31-32).

그러나 형제의 허물을 거듭하여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이다. 우리는 이웃의 잘못을 한번 용서하면 그것을 거듭해서 말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사하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않으신다(렘 31:34). 우리는 하나님의 이 사랑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이웃의 잘못을 거듭 말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10절] 한 마디로 총명한 자를 경계(게아라 )[책망](BDB)하는 것이 매 백 개로[혹은 ‘백 대’]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이느니라.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치 않는 자이다. 그는 교만하고 반항적이고 불평 원망하고 항상 남의 탓만 하고 바른 책망을 진지하게 받지 않는다. 그에게는 백 대의 매도 별 효과가 없다. 이런 사실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잘 증거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여러 번 징계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범죄했다. 그것은 사람의 타고난 본성의 죄악성 곧 전적 부패성을 잘 나타낸다.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알고 남의 권면을 듣지 않는다(잠 12:15; 13:1). 그러므로 잠언 27:22는,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혜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다. 그는 온유하고 겸손한 자이며 책망을 들을 때 겸손히 받고 진지하게 자신을 반성하며 고친다. 잠언 12:15는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는다고 말했다. 그는 부모나 선생에게 매를 맞을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한마디의 책망이 효력이 있고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지혜자가 되는 것이 필요하고 중요하다. 우리는 어떻게 지혜자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심령에 변화를 받아 하나님을 참으로 알고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데 있다. 잠언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11절]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쓰나니 그러므로 그에게 잔인한 사자가 보냄을 입으리라.

‘반역’은 하나님이나 왕이나 윗사람을 대적하는 행위이다.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쓴다. 왜 그런가? 그는 교만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크게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무시한다. 그는 세상이나 사회나 단체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윗사람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불평하고 원망하며 대적하고 반항한다.

모세 시대에 레위 지파 사람 고라는 동료들과 함께 당을 지어 유명한 족장 250명과 함께 하나님의 종 모세를 대적했다. 그는 모세가 이스라엘 총회 위에 자신을 높인다고 비난했다. 그는 온 회중을 회막문에 모아 놓고 모세를 대적하였다(민 16:1-3, 19). 신약성경 유다서에 보면, 초대교회의 거짓 교사들도 그러하였다. 그들은 교만하여 하나님께서 교회에 합법적으로 세우신 목사와 장로들을 무시하고 교회의 일들에 대해 원망하고 불평하였고 당을 지어 교회를 어지럽히고 하나님의 일들을 방해하였다(유 8, 16, 19).

선한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온유하고 겸손하며 순종하고 질서를 지킨다. 그들은 윗사람을 존중하고 복종하며 동료들을 사랑하고, 자신들이 속한 단체를 잘 세워보려 한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 세우신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해 순복하며 왕을 공경하라고 말했고(벧전 2:13-14, 17),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성도들을 다스리며 권면하는 자들을 가장 귀히 여기라고 교훈했다(살전 5:12-13). 또 히브리서13:17은,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말했다.

본문은 “그러므로 그에게[악한 자에게] 잔인한 사자가 보냄을 입으리라”고 말한다. 모세를 대적하였던 고라와 그 동료들과 그 가족들은 땅이 갈라져 산 채로 땅 속에 묻히어 멸망하였다(민 16:31-33).

[12절]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콤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

새끼 빼앗긴 암콤은 성질이 나서 매우 난폭한 상태에 있을 것이다. 미련한 자는 그보다 더하다는 것이다. 즉 미련한 자는 심히 난폭하고 거칠며 이성적 판단이나 이해심이나 자제심이 없어 보이는 자이다.

사람은 참으로 미련하고 악하다. 사람들이 서로 위하고 서로 사랑하며 조용히, 평온하게 살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이 세상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공의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이웃에게 악을 행하고 매우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다. 있는 자는 없는 자를 무시하고 없는 자는 있는 자를 적대시한다. 서로 속이고 속으며 서로 죽이고 죽는다. 세상은 치열한 생존경쟁의 싸움터이다. 사람들은 남을 짓밟고 부와 권세를 얻으려 하며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는 불법과 비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때때로 짐승보다도 못하다. 헤롯 대왕은 자기 왕위의 안전을 위해 베들레헴 부근의 두 살 이하의 모든 어린 아기들을 학살했다(마 2:16). 이것은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잡아먹는 동물세계보다도 더한 일이며, 이런 일이 인류역사에는 종종 있었다. 20세기의 2차 세계대전기간, 독일의 나치 정권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는 유대인 멸종정책을 폈고 약 6백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하였다. 또 러시아에서 시작된 공산주의 혁명은 오늘까지 세계적으로 약 1억명의 사람을 죽였다고 추정된다. 그 가운데는 이북에서 일어난 학살과 처형들도 포함된다.

지혜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을 따라 이웃을 사랑하는 자이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않는다. 지혜자는 많이 배우고 많이 가졌을지라도 많이 배우지 못하고 많이 가지지 못한 자들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배려하고 어려운 이웃을 돌아본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남의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실천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그들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는 너그러운자가 되고, 그들의 실수를 거듭 말하는 사랑 없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한 마디로 총명한 자를 책망하는 것이 매 백 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인다. 우리는 교훈과 징계을 주거나 받기 전에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먼저 지혜자가 되는 것이 필요함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대로 사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셋째로,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쓰므로 잔인한 사자가 그에게 보내진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을 따라 세상이나 사회나 단체의 질서를 지키고 하나님께서 합법적으로 세우신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결코 반역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그런 자들과 동류도 되지 말아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콤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난폭한 미련한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선을 행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13-16절, 악, 다툼, 오판, 미련함

[13절]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사람이 악으로 선을 갚는 것은 참으로 악한 일이다. 그것은 배갑절의 악이다. 사람이 남에게 악을 행하는 것도 악한 일인데, 자기에게 선을 베푼 자에게 악으로 갚는 것은 얼마나 큰 악인가! 하나님께서는 그런 악에 대한 보응으로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않게 하실 것이다. 사사 시대에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을 도와 기드온의 아들들인 그의 형제 70명을 죽이게 하였는데, 3년 후에 하나님께서는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이 서로 싸워 아비멜렉과 많은 세겜 사람들을 죽게 하셨다(삿 9장). 또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배려로 7살에 왕이 되었던 유다 왕 요아스는 자기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준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성전 뜰에서 돌로 쳐죽이게 했는데, 1년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가 아람 군대의 침입으로 인하여 크게 부상을 입게 하셨고 신하들의 모반으로 침상에서 죽임을 당케 하셨다(대하 24장). 하나님의 보응들이었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가 악으로 악을 갚는 것도 금하셨고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교훈하셨다. 마태복음 5: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마태복음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사도 바울도 같은 교훈을 했다. 로마서 12: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로마서 12:20-21,“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 . .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러한 행위는 지옥 가야 마땅했던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본받는 일이다.

[14절]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

작은 싸움에서 큰 싸움이 나오며 사소한 다툼이 큰 다툼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담뱃불이 대형 산불로 번지기도 한다. 1914년 세르비아의 한 암살자가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프란시스 페르디난드를 쏘아 죽인 사건이 1차 세계대전의 시작점이 되었고 4년간의 전쟁으로 전세계적으로 군인들만 약 천만명이 죽었다고 한다.

다툼은 육신적 죄악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19-20에서 사람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육체의 일들을 열거하면서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 등을 말하였다.

야고보도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은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가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라고 말했고(약 3:14-15) 또 사람의 다툼은 육신적 욕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약 4:1-2).

물론, 진리의 싸움이 있다. 그러나 비록 근본적 진리들에 있어서는 일치가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양보할 수 없으며 끝까지 싸워야 하고, 또 중요한 진리들에 있어서도 겸손과 인내로 토론하고 변론함으로 일치된 생각에 이르기를 힘써야 하지만, 사소한, 지엽적, 혹은 불확실한 문제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의 견해들을 존중하고 서로 관용해야 하며 무익한 논쟁이나 변론을 피해야 한다(딤후 2:23-24).

그러므로 진리의 싸움 외에는 싸움을 피하는 것이 지혜이다. 그러려면 겸손과 관용, 인내와 양보가 필요하다.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이 서로 다투었을 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말함으로 양보의 정신을 발휘했다(창13장). 우리는 항상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전 1:10).

[15절]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악인을 의롭다고 하는 것은 양심 즉 도덕적 분별력이 흐린 것이며 판단이 잘못된 것이다. 사람은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질 때 그러하기 쉽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자기 가족이나 친한 친구의 잘못을 옹호하기 쉽다. 그러나 바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 유다왕 아사는 우상숭배하는 모친을 정죄하여 그의 태후의 직위를 폐하였다(왕상 15:13). 그것은 잘한 일이었다. 또 악한 자를 의롭다고 하는 자는 본인도 악한 자일 가능성이 많다. 악한 생각과 판단은 악에서 나온다. 실상, 악인을 의롭다고 칭찬하는 것은, 그로 회개치 못하게 하는 일이요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 영혼을 죽이는 것이다.

또한 의인을 악하다고 하는 것도 매우 악한 일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악평하며 비방하였다. 엘리야는 거짓 선지자들과 850 대 1의 싸움을 싸워야 했고(왕상 18:19), 미가야는 거짓 선지자들과 400 대 1의 싸움을 싸워야 했다(왕상 22:6). 예레미야도 거짓 선지자 들과 싸웠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악하다고 비방하였고 그를 정죄하여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시게 했다. 율법주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악하고 속이는 자, 돈이나 탐하는 자라고 비난하고 정죄했다.

그러나 악인을 의롭다고 하든지 의인을 악하다고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받을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사랑하시는 자를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매우 미워하시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지극히 작은 종 하나에게 베푼 호의가 주께 베푼 것이요 그를 해친 것이 주를 해친 것이다(마 25:31-46).

[16절] 미련한 자는 무지하거늘 손에 값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 함은 어찜인고.

미련한 자는 무지하다. 그는 진리를 깨닫는 마음이나 사모하는 마음이 없다. 그러나 본문은 “미련한 자가 손에 값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한다”고 말한다. 미련한 자는 진리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나 사모함이 없으면서도 때로는 세상적인 욕심 때문에나 형식적으로나 외식적으로 지혜를 돈으로 사려 한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마술쟁이 시몬은 주의 사도들이 안수함으로 사람들이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주며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라고 말하였다(행 8:18-19).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그에게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고 책망하였다(행 8:20, 22).

돈은 자신이 지혜를 얻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되기는 할 것이다. 돈이 있으면 시간의 여유를 조금 가질 수 있고 성경책이나 신앙적 서적들을 살 수 있고 구제와 선행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돈으로 지혜를 살 수는 없다. 지혜는 돈을 가지고 얻을 수 없다. 실상, 지혜는 돈이 없어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일은 돈이 드는 일이 아니다. 천국은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이다. “여호와께서는 지혜를 주신다”(잠 2:6). 우리는 성경을 읽고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지혜를 얻을 수 있고 많이 얻을 수 있다. 야고보서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악으로 선을 갚는 악한 자가 되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도 악으로 갚는 대신에 선을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둘째로,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 기 전에 시비를 그쳐야 한다. 우리는 꼭 필요한 진리의 선한 싸움 외에는 가급적 싸움을 피하고, 겸손과 관용, 인내와 양보의 덕을 가져야 한다.

셋째로,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는다. 우리는 바른 분별력으로 의와 불의를 판단해야 한다.

넷째로, 미련한 자는 무지하면서도 손에 값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지혜를 사모하여 얻어야 한다.

17-20절, 친구, 보증, 다툼, 패역

[17절]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

좋은 친구는 언제나 상대를 사랑한다. 그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같이(눅 10:33-35) 어려움 당한 이웃을 위하여 시간과 물질을 아끼지 않는다. 주께서는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랑이 참 사랑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우리가 그의 명령대로 서로 사랑하면 그의 친구라고 말씀하셨다(요 15:13-14). 우리는 주의 말씀대로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참 사랑으로 형제와 친구를 사랑해야 한다.

형제는 위급한 때에 도움이 된다.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은 서로 형제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셨다(마 28:10). 예수님 믿고 구원 얻은 성도들은 참된 사랑을 가지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 사망에서 생명 안으로 들어온 것을 알지만, 형제를 미워하면 아직 사망 가운데 사는 사람이라고 말했고, 또 주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으므로 우리도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며 또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을 도와야 한다고 말하였다(요일 3:14-17).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전 13:5). 참 사랑은 형제가 위급한 일을 당했을 때 그를 돕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시날 왕과 그 연합군에게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서 기르고 훈련시킨 자들 318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가서 그들을 밤에 쳤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즉 약 240킬로미터 이상을 쫓아가서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조카 롯을 찾아왔다(창 14:14-16). 그런 것이 참된 사랑이다.

[18절] 지혜 없는(카사르 레브 )[마음 없는, 생각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토케아 카프 )[손바닥을 치고, 보증하고](BDB) 그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

손바닥을 치는 것은 옛날부터 보증하는 행위이었던 것 같다. 욥기17:3, “청컨대 보증물을 주시고 친히 나의 보주(保主)가 되옵소서. 주 외에 나로 더불어 손을 칠 자가 누구리이까?” 잠언 6:1,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손바닥을 쳤으면].” 잠언 22:26, “너는 사람으로 더불어 손을 잡지[손바닥을 치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

남의 빚 보증을 서는 자는 지혜가 없다. 지혜로운 자는 남의 빚 보증을 서지 않지만, 지혜 없는 자는 남의 빚 보증을 선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바이었다. IMF 때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연대보증 때문에 집을 잃거나 물질적 큰 손실을 입었다. 빚 보증을 서는 것이 지혜 없는 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빚 보증은 상대방이 무슨 사정이 생겼을 때 대신 돈을 갚을 만한 충분한 물질적 여유가 있는 경우에든지, 아니면 보증한 금액만큼을 잃어버릴 각오를 할 경우에만 서야 할 일일 것이다. 그런 경우가 아닌데 이웃을 위해 빚 보증을 서는 것은 명예심이나 모험심에 불과하고 이웃의 빚을 떠맡아 큰 낭패를 입게 될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어리석은 일이다.

[19절]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요12)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이다. ‘죄과’라는 원어(페솨)는 ‘죄’ 혹은 ‘[율법을] 어김’이라는 뜻이다(BDB).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교만하며 교만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가장 근본적인 죄악이다. 그러나 온유하고 겸손한 자는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을 지키며 서로 다투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 다투지 <12) “죄과를 좋아하는 자는 다툼을 좋아하는 자니라”(NASB)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본문처럼 번역하는 것(KJV, NIV)이 문맥상 나아 보인다.> 말고 관용하기를 원하신다. 

주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야고보는 말하기를,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거슬러]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라고 했다(약 3:13-18).

또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이다. ‘자기 문을 높이는 자’라는 말은 자기 집을 돋보이게 하는 자, 즉 교만하고 자랑하는 자를 가리킨 것이라고 본다. 그런 사람은 파괴 혹은 멸망을 구하는 자이다.

사람이 교만하면 멸망하고 만다. 잠언 16:18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했다.

[20절] 마음이 사특한(익케쉬 )[정도에서 벗어난, 패역한, 비뚤어진]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

마음이 비뚤어진 자는 복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잠언 11:20, “마음이 패려한(익케쉬 i)[비뚤어진, 패역한] 자는 여호와의 미움을 받아도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성도는 마음이 정직하고 순진하며 온유하고 선해야 하며 나다나엘같이 그 속에 간사함이 없는 자이어야 한다(요 1:47).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는 정직하며 의로운 자이어야 한다(시 15:1-2). 성경은 우리가 과거에 유혹의 욕심을 따라 죄악된 습관을 따라 살았으나, 이제는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엡 4:22-24).

또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진다. ‘패역하다’는 말도 ‘사특하다’는 말과 비슷하다. 사람이 마음이 패역하면 말도 그렇다. 그는 윗사람이나 동료에 대해 기본적 예절을 갖춘 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이웃에 대해 이해심이 없고 남을 비방하는 말을 쉽게 할 것이다. 그는 재앙에 빠진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기 때문이다. 사람의 복과 재앙은 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10:31은 “의인의 입은 지혜를 내어도 패역한 혀는 베임을 당할 것이니라”고 말한다.

성도의 선한 인격은 그의 말로 나타난다. 시편 15:3은 하나님의 집에 거할 자는 그 혀로 남을 비방하거나 헐뜯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교훈하였다(엡 4:29).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않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해 났다. 우리는 세상 사는 동안 좋은 친구가 되고 좋은 형제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특히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서로 형제와 친구가 된 줄 알고 서로를 위하고 위급한 때 돕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지혜 없는 자는 남의 빚 보증이 된다. 잠언 22:26은 “너는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우리가 상대방의 진심을 알기 어렵고 또 아무도 사람의 미래의 경제여건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로,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를 좋아하는 자요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이다. 우리는 교만과 다투는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온유하고 겸손하고 관용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온유와 겸손으로 서로 사랑하며 우애하는 것이다.

넷째로, 마음이 비뚤어진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진다. 우리는 마음의 비뚤어짐과 혀의 패역함을 버리고, 정직하고 순진하고 온유하고 선한 마음을 가지고 선하고 덕스러운 말을 해야 한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서 재앙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복을 얻을 것이다.

21-24절, 미련함, 즐거움, 뇌물, 지혜

[21절] 미련한 자를 낳는 자는 근심을 당하나니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느니라.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경외치 않고 그의 뜻을 알지 못하고 그 뜻에 순종치 않는 자이다. 그는 불경건하고 부도덕하고 악하다.

사람의 미련함은 타고난 것이다.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며 그러므로 다 미련하다. 육으로 난 상태만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가 없다. 사람의 영혼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 3:5).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여 치료 불가능하다(렘 17:9).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없듯이, 악에 익숙한 인생은 참된 선을 행할 수 없다(렘 13:23).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또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교훈으로 경건과 도덕성을 얻게 되고 또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다(잠 1:7; 9:10). 그러나 미련한 자를 낳은 자는 근심이 많으며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다. 미련한 자녀는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이웃을 해롭게 하기 때문이다. 잠언 10:1,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 잠언 17:25,“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 잠언 19:13,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재앙이요.”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부모에게 유익이 될 수 있다. 부모는 자녀들의 미련함이 자신들의 부족임을 깨닫고 회개할 때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며 늦게나 마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게 될 것이다.

[22절]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다. 양약은 병을 치료하거나 건강의 회복에 좋은 약이다. 마음의 즐거움은 바로 그런 약과 같다. 그러므로 오늘날 웃음 치료라는 말이 있고 억지로라도 웃으라는 조언도 있다.

사람의 참된 기쁨과 즐거움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사람의 참 기쁨과 즐거움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얻을 수 있다. 인생의 참 기쁨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참 기쁨의 근원이시다. 사람들에게 있는 슬픔과 근심은 죄로부터 왔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1:28).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안과 기쁨이다(롬 14:17).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안을 포함한다(갈5:22). 천국에는 더 이상 눈물과 고통이 없을 것이다(계 21:3-4).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한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바이다. 심령의 근심이나 스트레스가 몸의 건강을 해친다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오늘날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질병인 우울증은 환경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주된 원인으로 생각되고 있다. 인생의 삶은 수고와 슬픔의 삶이다.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증거하였다(시 90:10). 주께서도 인생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라고 증거하셨다(마 11:28). 인생의 삶이 수고롭고 슬픔과 근심이 많은 까닭은 죄 때문이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사 57:21). 또 심령의 근심과 염려는 사람의 뼈로 마르게 하고 몸의 건강을 해치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심령의 참된 안정과 평안을 주실 수 있다. 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얻은 성도들은 주 안에서 참된 평안을 얻었고 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게 되었다.

[23절]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

뇌물은 목적이 순수하지 않은 선물을 가리킨다. ‘사람의 품에서’라는 말은 뇌물이 은밀히 전달되는 것을 묘사한다. 뇌물은 다른 사람 보기에 떳떳하지 못하고 양심에 거리끼므로 은밀히 주고받는다. 특히 뇌물은 재판관의 판결을 굽게 한다. 출애굽기 23:8,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신명기 16:19,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공의는 재판관에게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요구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하신 것이다. 레위기 19:35-36, “너희는 재판에든지 도량형에든지 불의를 행치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시편 15:1-2,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시편 106:3,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사람은 왜 불의의 길로 가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 때문이다. 잠언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잠언 16:6,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또 사람은 돈과 명예와 권세 등 세상의 욕심 때문에 불의의 길로 간다. 아간은 아름다운 외투와 금과 은을 탐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고(수7:21), 가룟 유다는 은 30개 때문에 주님을 배신하였다(마 26:15). 

[24절] 지혜는 명철한 자의 앞에 있거늘 미련한 자는 눈을 땅끝에 두느니라.

지혜는 명철한 자의 앞에 있다. ‘명철한 자’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깨달음을 가진 자를 가리킨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모두 명철한 자이다. 지혜는 그들의 가까이에 있다. 명철한 자는 지혜를 앞에 두고 그것을 사용하고 생활의 지침으로 삼는다. 지혜는 그의 신중한 얼굴표정에서도 보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혜의 근원이시며,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다(잠 9:10; 시 111:10).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이 하신다. 신명기 4: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 시편 25:14,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또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은 지혜의 말씀이다. 성경을 가까이 하는 자는 늘 지혜롭게 살 것이다.

신명기 4:6, “너희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시편 119:98-100은 성경말씀을 늘 가까이하고 묵상함으로 원수보다, 스승보다, 노인보다 지혜롭고 명철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눈을 땅끝에 둔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지혜를 먼데서 찾는다.

그는 지혜가 없다. 그는 자신의 현재의 생활에 충실하기보다 이루지 못할 허영과 탐욕을 품고 항상 불만스러운 얼굴로 살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미련한 자를 낳은 부모는 근심이 많고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다. 우리는 미련한 자녀가 되지 말고 또 우리 자녀가 미련하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그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둘째로,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지만,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한다. 우리는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살므로써 늘 평안함과 기쁨과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 참 성도는 행복자이다.

셋째로,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한다. 우리는 뇌물을 주지도 받지도 말고 항상 의롭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넷째로, 지혜는 명철한 자의 앞에 있지만 미련한 자는 눈을 땅끝에 둔다. 우리는 거짓과 허영과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만 경외하고 섬기며 그에게 기도하고 그의 말씀을 묵상하고 믿고 순종하는 지혜자가 되어야 한다.

25-28절, 미련함, 의인을 벌함, 말을 아낌

[25절]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

미련한 아들은 불경건한 자 곧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이며 그 결과, 그의 인격성이나 도덕성에 결함을 가진 자이다. 우리의 자녀들이 미련하여 불경건하고 부도덕하며 성경 읽고 기도할 줄 모르고 교회생활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죄 가운데 산다면, 그들은 평안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몸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며 가정과 가족들에게 문제가 생기며 사업이나 직장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장차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부모에게, 특히 경건한 부모에게 마음의 고통이 될 것이다. 다윗의 아들 암논은 이복 여동생 다말을 강간하였고, 몇 년 후 다말의 오빠 압살롬은 암논을 살해했다(삼하13장). 압살롬은 또 그 후에 아버지를 대항하는 반역자가 되었다(삼하15장). 그들은 다 아버지 다윗에게 고통을 준 미련한 아들들이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자녀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바르고 선하게 살 때 하나님의 복을 받아 평안하고 형통한 삶을 누리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레 26장, 신 28장).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행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며 목사들도 그러할 것이다.

사도 요한은 교인들이 진리 안에서 행함을 볼 때 심히 기뻐했다(요이,요삼). 이와 같이, 만일 우리의 자녀들이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면, 그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평안과 형통의 복된 삶을 누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몸의 건강과 물질적 안정과 여유와 가정적인 행복을 주실 것이다. 또 그것은 부모에게 기쁨이 될 것이다.

[26절] 의인을 벌하는 것과 귀인을 정직하다고 때리는 것이 선치 못하니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의를 명하시고 의를 장려하신다. 그러므로 의인의 의나 귀인의 정직함은 우리가 칭찬하고 기뻐하고 본받아야 할 일이다. 그러나 악인들은 그렇지 못하고 악한 세상은 그렇지 못하여 의인을 벌하고 귀인을 정직하다고 때리는 일들이 있다. 성경은 그런 예들을 증거한다.

이스라엘 왕 아합 때,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한 선지자 미가야의 뺨을 쳤고, 아합 왕은 그를 옥에 가두고 고생의 떡을 먹고 고생의 물을 마시게 했다(왕상 22:24, 27). 유다 왕 요아스는 자기를 왕위에 오르게 한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그 말씀을 듣지 않고 무리와 함께 꾀하고 그를 성전 뜰 안에서 돌로 쳐죽였다(대하 24:21). 므낫세 왕은 무죄한 자들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가에서부터 저 가까지 가득하게 하였다(왕하 21:16). 악한 유다 방백들은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토굴옥 어두캄캄한 방에 가두었다(렘 37:15-16).

신약시대에도, 악한 유다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였다. 구리 장색 알렉산더는 사도 바울에게 해를 많이 끼쳤다(딤후 4:14). 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는 사도 요한을 영접하지 않았고 악한 말로 그를 부당하게 비난하였고 또 그것도 부족하여 형제들을 영접하지도 않고 영접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쫓기까지 하였다(요삼 9-10). 이런 일들은 다 악한 일이다. 악인을 의로운 자처럼 용납하며 의인을 악한 자처럼 징벌하는 것은 다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악한 일이다(잠 17:15).

[27절]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

‘성품이 안존하다’는 원어(카르 루아크 ')는 ‘심령이 냉철하다, 침착하다’는 뜻이다. 원문은 “지식이 있는 자는 말을 아끼고 명철한 자는 심령이 침착하니라”고 번역할 수 있다(KJV).

지식이 있는 자는 말을 아끼고 그래서 말의 실수를 피하거나 줄인다. 말이 많으면 말의 실수도 많게 된다. 그러므로 잠언 10:19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말하고, 잠언 20:19는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고 말한다. 야고보는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교훈하였고(약 1:19), 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하였다(약 3:2).

명철한 자는 심령이 침착하다. 그는 심령이 조급하지 않고 경솔하지 않고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다. 그는 침착한 말, 바른 말, 덕스러운 말을 한다. 잠언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잠언 18:13,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잠언 29:20,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또 지혜자는 유익한 말만 한다. 그러므로 잠언 10:20-21은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고 말하였고, 잠언 12:18은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고 말하였다.

[28절]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기우고 그 입술을 닫히 면 슬기로운 자로 여기우느니라.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를 경외치 않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인 선을 행치 않는 자이다. 미련한 자는 그의 말로 그의 미련이 드러나므로 차라리 말을 하지 않고 잠잠한 것이 낫다.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기우고 그 입술을 닫히면 슬기로운 자로 여기울 것이다. 우리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말은 사람의 인격의 표현이다. 주 예수께서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하셨다(마 12:35). 영적으로 성숙하고 온전한 사람은 말에 온전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야고보서에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하였다(약 3:2).

지혜자는 덕스러운 말을 한다. 성도는 사람 앞에서 그를 충고하고 뒤에서 그를 위해 기도한다. 잠언 27:5-6은,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말했다(엡 4:29).

그러나 미련한 자는 악한 말을 한다. 그는 남을 비난하는 말을 잘 한다. 성도는 사람 앞에서 그를 충고하고 뒤에서 그를 위해 기도하는 반면, 미련한 악인은 사람 앞에서 친절히 인사하고 뒤에서 그를 비난한다. 그는 덕스럽지 못하고 남의 인격과 명예에 파괴적인 말을 한다.

남을 악하게 비난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된다. 우리는 지혜로운 자녀가 되고 또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으로 우리 자녀들을 지혜로운 자녀로 키워야 한다. 또 우리는 다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으로 하나님의 지혜로운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의인을 벌하는 것과 귀인을 정직하다고 때리는 것이 선치 못하다. 우리는 의인을 칭찬하고 본받고, 악인을 책망하고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아야 한다(요삼 11).

셋째로, 지식이 있는 자는 말을 아끼고 명철한 자는 심령이 침착하다. 우리는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가 되지 말고 말을 아끼는 자가 되어야 하고, 또 심령의 조급함과 경솔함을 버리고 침착함을 지켜야 한다.

넷째로,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기우고 그 입술을 닫히면 슬기로운 자로 여기운다. 우리는 말하기를 더디해야 한다.

===18장: 게으름, 겸손, 신중함, 아내

1-4절, 스스로 나뉨, 미련함, 악함, 지혜

[1절]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뉜다’는 말은 ‘진리 문제로 나뉘는 일 외에’라고 읽어야 한다고 본다. 성경은 진리 문제에 관해서는 상대와 교제를 끊으라고 교훈한다. 로마서 16:17, “너희 교훈[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스려[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거절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6, “규모 없이[무질서하게]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그러나 진리 문제가 아니고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 즉 상대방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화목하고 일치단합하고 협동하지 않고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이다. 그는 교만한 마음과 명예욕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겸손한 사람은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협동하고 화합을 이루지만, 교만한 사람은 상대를 무시하고 시기 질투하며 화평과 질서를 깨뜨리고 다투고 분열한다.

본문은 “[그는]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한다”고 말한다. 자기의 욕심을 따르는 자는 모든 지혜를 대항하여 싸운다. 지혜의 말은 성결과 화평, 관용과 양순을 교훈한다. 야고보서 3:17-18은,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라고 교훈한다. 그러나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는 이런 지혜의 말을 듣지 않고 상대를 대적하고 배척한다.

[2절]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

명철은 하나님의 지혜이며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인 성경 교훈이다. 그 내용은 경건과 의와 선에 대한 가르침과 깨달음이다. 그런데 미련한 자는 그러한 명철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나 복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한다. 시편 1:2, “[복 있는 자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그러므로 시편 119편 저자는 하나님 말씀을 금은보다 더 귀히 여겼고(시 119:72) 꿀보다 더 달게 여겼다(시 119:103). 솔로몬은 “내 아들아, 내 지혜에 주의하며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이라”(잠 5:1)고 말했는데, 그의 지혜는 경건함과 선함에 대한 교훈이다.

본문은 또, 미련한 자는 자기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한다고 말한다.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며(잠 12:15) 자기 미련한 것을 나타내며(잠 13:16) 그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는다(잠 15:2). 성도는 성경에 명확히 계시되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자기 의사만 주장치 말아야 한다. 그런 주장은 교만과 독선일 수 있다. 사람의 의견은 바를 수도 있으나 잘못될 경우도 있다. 우리는 이성과 양심에 비추어 잘못된 생각은 언제든지 고치거나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른 이의 의견을 존중하며 들어야 한다. 그것이 겸손과 사랑이다. 특히, 경건한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이므로 그의 의견은 바르고 좋은 것이 많을 것이다.

독선과 확신은 다르며 확실히 구별되어야 한다. 독선은 성경과 이성과 양심에 맞지 않는데도 자기 의견만 옳다고 계속 주장하는 것이지만, 확신은 성경과 이성과 양심에 맞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이다.

[3절] 악한 자가 이를 때에는 멸시도 따라오고 부끄러운 것이 이를 때에 는 능욕도 함께 오느니라.

사람은, 비록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한 경험과 죄악된 성질을 가진 죄악된 존재이지만, 양심이 있기 때문에 악한 자를 멸시하고 비난한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재판자로서 악인들에 대해 공의의 징벌을 내리심으로 그들로 수치를 당케 하신다.

이런 일들은 인간 사회에서 얼마든지 있으나 성경에도 많은 예들이 있다. 예를 들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아버지를 대항해 반역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는 듯했으나 마침내 상수리나무에 그 머리털이 감겨 매달렸고 요압의 창날에 비참히 죽임을 당하였다(삼하 18장). 다윗의 모사 아히도벨도 반역자 압살롬과 협력해 다윗을 대적하였으나(삼하15:31), 그의 모략이 시행되지 못하자 판세를 예견하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는 가련한 최후를 맞이했다(삼하 17:23). 유다 왕 여호람은 이스라엘 왕 아합의 집의 길로 행하며 악을 행하였고 자기의 모든 아우들과 이스라엘 백성 몇 사람을 칼로 죽였는데, 그때 에돔이 배반하였고 립나도 배반했으며, 그의 몸에는 창자에 고치지 못하는 중병이 들었고 2년 만에 그 창자가 빠져나와 죽었고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다고 성경은 기록하였다(대하 21장).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은 30을 받고 주님을 배신했으나, 주께서 정죄되심을 보고 그 일을 후회하여 그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마 27:3-5). 악인들의 최후는 비참하고 수치스러웠다.

[4절]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

‘명철한’이라는 말은 원문에 없는 것을 번역자들이 보충한 것이므로 우리 말 성경에 작은 글씨로 되어 있다. 명철한 자의 입뿐 아니라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의 말은 다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는 때때로 다른 사람의 말에 담긴 뜻을 다 알기 어렵다.

의인의 말도, 악인의 말도 그러하다. 또 사람의 말은 풍성하기도 하다. 사람의 말은 해도 해도 끝없이 나온다. 사람의 말은 사람의 마음의 표현인데, 사람은 자기 마음을 다 표현하지 않고 일부만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은 그의 말로 일부분 표현되고 어느 정도 드러나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더욱이, 악인은 자기 마음을 정반대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는 마음으로는 상대를 미워하면서도 말로는 위하는 것처럼 한다. 그것은 물론 거짓이요 위선이다. 이와 같이 사람의 마음은 다 알 수 없다.

본문은 “지혜의 샘은 솟쳐 흐르는 내와 같다”고 말한다. ‘지혜의 샘’은 지혜가 물처럼 나오는 샘을 묘사한다. ‘솟쳐 흐르는 냇물’은 그 샘이 흘러 넘쳐 시내가 되어 메마름이 없고 다함이 없고 그침이 없이 풍성하게 흘러 내려감을 나타낸다. 지혜의 책인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이 그러하다. 주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고(요 4:14), 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성령을 가리켰다(요 7:37-39).

성도는 성경말씀과 성령의 감동으로 풍성한 지혜를 얻는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는 자기 욕심을 따르는 자이며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는 자이다. 우리는 진리 문제 외에는 다투지 말고 서로 화목하며 선한 일에 협력해야 한다.

둘째로,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않고 자기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한다. 우리는 성경적 지혜의 교훈을 기뻐하고, 성경에 교훈되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자기 의견뿐 아니라, 다른 이의 의견도 존중해야 한다.

셋째로, 악한 자가 이를 때에는 멸시도 따라오고 부끄러운 것이 이를 때에는 능욕도 함께 온다. 경건하고 선하게 사는 자는 가치 있는 자이며 존귀와 영광을 얻지만, 악하게 사는 자는 멸시와 수치를 당할 것이다.

넷째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쳐 흐르는 내와 같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성령 충만함으로써 풍성한 지혜를 얻어 그 지혜로 바르게 살아가고 다른 이들에게도 유익을 끼쳐야 한다.

5-8절, 공정, 미련한 말, 남의 말

[5절] 악인을 두호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레핫토스 )[옆으로 밀치는 것, 밀어 제치는 것]은 선하지 아니하니라.

악인을 악인으로 평가하지 않고 두호하는 것, 예를 들어 자신과의 친분 관계나 이해 관계 등의 이유로 악인을 용납하고 옹호하는 것은 선한 일이 아니고 악한 일이다. 또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 즉 그를 인정하지 않고 옆으로 밀치듯이 하는 것도 그러하다.

잠언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잠언 24:23-25,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주는 것이 옳지 못하니라. 무릇 악인더러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요 국민에게 미움을 받으려니와 오직 그를 견책하는 자는 기쁨을 얻을 것이요 또 좋은 복을 받으리라.” 잠언 28:4,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이사야 5:23, “[화 있을진저,] 그들은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를 빼앗는도다.”

우리는 선악을 바르게 분별하고 판단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우리의 양심이 깨끗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양심이 때가 끼듯이 더러워지거나 무디어지거나 심지어 마비되지 않고, 깨끗하고 선한 상태로 유지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는 물질욕이나 명예욕이 없어야 한다. 우리는 특히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만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은 우리의 삶의 발걸음에 빛이 되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기준이 된다.

[6절]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경외하지 않고 섬길 줄 모르며 그의 뜻을 행하지 않는 자이다. 그는 죄 가운데 살며 불경건하고 교만하며 사랑이 없고 남을 미워하고 거짓되고 또 흔히 게으르고 자기 일에 충실치 않으며 남의 일에 참견하며 남을 논단한다.

미련한 자의 입의 말은 교만하고 악하며 욕심이 있고 거짓되며 무례하고 무질서하고 불평하고 거역하는 말이다. 거기에서는 싸움과 다툼과 분쟁이 생긴다. 반면에, 지혜로운 자의 말은 겸손하고 선하며 사랑이 있고 남을 배려하고 예절이 있고 감사하며 진실하고 질서를 지키는 말이다. 거기에는 화목이 있고 덕을 세우고 일치단합이 있다.

본문은 미련한 자의 입이 매를 자청한다고 말한다. 잠언에는 비슷한 구절들이 더 있다. 잠언 10:13, “명철한 자의 입술에는 지혜가 있어도 지혜 없는 자의 등을 위하여는 채찍이 있느니라.” 잠언 19:29,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 잠언 26:3,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자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미련한 자녀에게는 부모의 매가 있고 미련한 종에게는 주인의 매가 있고 미련한 학생에게는 선생의 매가 있다. 그러므로 잠언 22:15는,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고 말했다. 사람의 매뿐 아니라, 하나님의 매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미련한 자의 악행에 대해 공의롭고 공평한 징벌을 내리신다. 미련한 자의 미련한 행위는 하나님의 매를 불러온다.

[7절]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행치 않는 자이다. 미련한 자의 입의 말은 교만한 말, 불신앙적인 말, 부정적인 말, 불평하는 말, 거역하는 말, 미워하는 말, 무례한 말, 비방하는 말, 더러운 말, 거짓된 말 등 죄악된 말이다.

미련한 자의 입의 말은 그의 멸망이 된다. 미련한 자의 말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고 그 죄는 그를 죽게 만들고 멸망시키는 것이다. 시편1: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누가복음 13: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항상 원망하고 불평하며 하나님과 모세를 거역했다. 그들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두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냈을 때,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정탐꾼들은 부정적 보고를 했다. 백성은 그 보고를 듣고 소리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통곡했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려 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셔서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는 자가 되고 마침내 다 죽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민 14:1-4, 30-33).

본문은 또 미련한 자의 입술은 그의 영혼에 그물이 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자는 의롭고 선한 말을 하므로 마귀의 올무에 걸리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막아주시고 그를 지켜 주신다. 그러나 미련한 자의 말, 곧 그 말의 실수와 범죄는 죄의 올무, 마귀의 올무, 멸망의 올무가 되어 더 큰 죄를 짓게 하고 마침내 멸망에 이른다.

[8절]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성경에서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라는 말은 나쁜 뜻으로 쓰인다. 잠언 20:19는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라고 말한다. 사람이 두루 다니며 한담하다 보면 남의 말도 하게 되고, 쓸데없이 남의 말을 하다 보면 그의 흠을 말하고 흉이나 보고 심지어 그의 비밀까지 말하게 된다. 그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간다. 그런 말은 선하고 유익한 것이 아닌 데도 사람들은 그런 말을 잘 잊어버리지도 않고 잘 기억한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부패성과 연약성을 잘 나타낸다. 우리는 차라리 성경 읽기와 연구하기, 그리고 성경 암송에 힘쓰고, 또 전도와 봉사에 힘써야 할 것이다.

성도의 삶은 각자 자기의 일에 충실하고 또 하나님의 일, 곧 전도와 봉사에 힘쓰는 것이다. 자기의 일에 충실하고 하나님의 일, 곧 전도와 봉사에 힘쓰는 성도는 남의 일에 간섭하고 참견할 시간이 없다.

우리는 남의 말을 하지 말고 특히 남을 비방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모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출 23:1). 잠언20:19는,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고 말한다. 베드로전서 2:1은,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였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악인을 두호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않다. 우리는 모든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하며 선하고 깨끗한 양심을 지키고 항상 의와 불의, 선과 악을 바르게 분별하고 판단해 악인을 두호하거나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악한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한다. 우리는 교만하고 악하고 거역하고 다투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고, 겸손하고 사랑하고 감사하고 덕스러운 말을 하는 지혜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의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된다. 우리는 멸망에 이르는 말을 하거나 죄의 올무, 마귀의 올무, 죽음과 패망의 올무에 걸리게 하는 말을 하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항상 정직하고 선하고 덕스럽고 진실한 말을 해야 한다.

넷째로,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간다. 우리는 각자 자기 일에 충실하고 하나님의 일, 즉 전도와 봉사의 일에 힘쓰고,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거나 듣기를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 남의 말 하기나 남의 말 듣기를 좋아하는 것은 선한 일이 아니다.

9-12절, 나태, 하나님의 이름, 재물, 겸손

[9절] 자기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패가[멸망]하는 자의 형제니라.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게을러서는 안 된다. 학생은 자기의 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직장인은 자기의 일을 부지런히 하지 않고 윗사람의 눈가림만 해서는 안 된다. 결혼한 여인들은 자기 남편을 잘 돕지 않고 아이들을 잘 키우지 않고 자기 집안 살림의 일을 잘하지 않고 밖으로 나도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패가(敗家)하는 자이다. ‘패가하는 자’라는 원어(바알 마쉬키스 )는 ‘멸망하는 자’라는 뜻이다(BDB, NASB, NIV). 게으른 학생은 진학에 실패할 것이고, 게으른 직장인은 해고될 것이다. 게으른 부인은 가정의 경제를 파탄시켜 심지어 부부가 이혼하고 아이들이 고아원으로 보내지기도 할 것이다.

성도는 자기의 일을 부지런히 행해야 한다. 야곱은 하란에서 20년간 외삼촌 라반의 밑에서 일하면서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다고 고백했다(창 31:40).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 일할 때 주인이 그를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맡길 정도로 정직하고 부지런한 자이었다(창39:3, 6). 다윗은 아비의 양을 지킬 때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충성된 목동이었다(삼상 17:34-35).

잠언 31장에 보면, 현숙한 여인은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그 집 사람에게 식물을 나눠주며 여종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 그 집안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않는 자라고 묘사되어 있다(잠 31:13, 15, 27).

[10절]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사람의 이름은 그의 인격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의 신성(神性) 곧 하나님 자신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이다.

다윗은 시편 18편에서 여호와께서 그의 반석, 그의 요새, 그를 건지시는 자, 그의 하나님, 그의 피할 바위, 그의 방패, 그의 구원의 뿔, 그의 산성이시라고 고백하였다(2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원수들이 결코 정복할 수 없는 망대이시다. 하나님보다 힘센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하나님을 이길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본문은 의인이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견고한 망대 안으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는다고 표현한다.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가리킨다. 의인은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품 안으로 달려간다. ‘달려간다’는 말은 의지하고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특히 어렵고 위험한 일들을 만났을 때, 사탄과 악령들과 악인들의 공격이 있을 때, 또는 무서운 질병이나 경제적 어려움, 예기치 못한 큰 사고 등을 당했을 때 그렇게 한다. 다윗은 시편 61:3에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이다”라고 고백했다.

의인은 하나님 안에 피할 때 안전함을 얻는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시다. 그는 모든 원수들을 막아주시고 물리쳐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 주신다. 시편 91편 저자는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라고 말하였다(1-7절).

[11절]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같이 여기느니라.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나 높은 성벽과 같다. 부자는 재물을 그의 견고한 성이나 높은 성벽같이 의지한다. 사람은 무지하므로 하나님 대신에 재물을 의지하기 쉬우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구원 얻기 어렵다. 재물은 경건에 장애물이 된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말씀하셨다(마 19:23-24).

실상, 재물은 사람에게 견고한 성과 높은 성벽이 되지 못한다. 재물은 환난 날에 무익하다. 재물은 사람에게 갑자기 닥치는 무서운 질병이나 전쟁이나 기근이나 대형사고를 막을 수 없다. 잠언 11:4,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스바냐 1:18은,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였고, 에스겔7:19도, “그들이 그 은을 거리에 던지며 그 금을 오예물[더러운 것]같이 여기리니 이는 여호와 내가 진노를 베푸는 날에 그 은과 금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며 능히 그 심령을 족하게 하거나 그 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오직 죄악에 빠치는 것이 됨이로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성도는 재물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재물을 사랑하는 자는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가 자라지 못함과 같다(눅 8:14). 디모데전서6:10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한다. 차라리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께 대해 더 부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고 말하였다(약 2:5).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그는 우리의 견고한 망대이시다(잠 18:10).[12절]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마음의 교만은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 마음이다. 사람은 왜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가? 그것은 자신이 세상의 것, 즉 돈이나 미모나 학력이나 사회적 신분이나 권세 등을 남보다 더 가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자신이 남보다 하나님을 더 잘 믿고 남들보다 더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영적 교만 때문에도 그러하다고 본다. 교만은 마귀의 죄이며 마귀적인 죄이다. 사람의 마음의 병, 인격의 병 중 가장 중한 병은 교만한 마음이라는 병이다.

사람은 마음이 교만하면 망한다. 잠언 16:18도,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했다. 왜 사람이 교만하면 망하는가? 하나님께서 그를 물리치시고 넘어뜨리시기 때문이다.

교만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6, 7가지의 악들 중 첫 번째 악이다(잠6:16-17).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5:5는,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람이 겸손하면 존귀케 된다. 잠언 15:33도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말한다. 주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고(마 20:26-27), 또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다(마 23:12). 사도 베드로도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말했다(벧전5:6).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들어 쓰시며 영광을 받으신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자기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멸망하는 자의 형제이다. 우리는 각자 자기 일을 열심히, 부지런히 하는 좋은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성화와 교회 봉사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가정이나 직업의 일에 있어서도 부지런한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는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를 하나님께 의탁하며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같이 여긴 다. 그러나 우리는 재물의 헛됨을 알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넷째로,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이다. 우리는 교만하지 말고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겸손해야 승리한다.

13-16절, 대답, 병, 지식, 선물

[13절]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것은 미련한 일이다. 그것은 성급하고 경솔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의 부족한 생각과 판단으로 상대방을 오해하기 쉽고 잘못 판단하고 잘못 말하기 쉽고 잘못 정죄하기 쉽다. 그러므로 잠언 18:17은 “송사에 원고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 피고가 와서 밝히느니라”고 말하였다.

남에 대한 잘못된 판단과 말은 남의 마음과 명예를 손상시키는 큰 잘못이다. 사람이 그런 잘못을 범하면 피해를 입은 자들에게 수치와 욕을 당하게 될 것이다. 성급한 말은 결국 자기에게 해가 되는 미련한 일이다. 그러므로 잠언 29:20은,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고 말하였다.

지혜자는 다르게 처신해야 한다. 지혜자는 우선 남의 말을 듣는 것 부터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좋은 말, 바른 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쁜 말, 잘못된 말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악을 잘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평소에 상대방의 인격의 됨됨이를 잘 살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가 시험에 빠지지 않으려면, 좋은 사람의 말은 들어도, 나쁜 사람의 말은 듣지 않는 것이 좋다. 또 우리는 남의 말들을 들어도 다 믿지 말아야 한다. 잠언 14:15는,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그 행동을 삼가느니라”고 말한다.

또 우리는 듣기는 속히 해도 말하기는 더디해야 한다. 그것이 지혜다. 잠언 15:28은,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고 말하고, 야고보서 1:19는,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말한다.

[14절]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병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첫째, 자연적 원인들이 있다. 사람이 일을 너무 많이 하면 몸살이 나기 쉽고, 추우면 감기 걸리기 쉽다. 불결한 곳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면, 병균에 감염되기 쉽고, 나이가 들면 심신이 자연히 약해진다. 둘째, 징벌적 원인이 있다. 신명기 28장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징벌로 여러 병들을 주실 것을 경고하였다(20-29절). 셋째, 인격훈련적 원인이 있다. 욥이 당한 고난이 그런 것이었다(욥 2:3). 그러나 사람은 고난을 통해 믿음이 강해지고 겸손해지며 거룩하고 깨끗해진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롬 8:28).

병을 이기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도 여러 요소가 있다. 

첫째는 신체단련과 보양이다. 그것을 위해 적절한 노동, 운동, 수면, 보약이 유익하다. 

둘째는 병균을 죽이거나 그것의 활동을 억제하는 약을 복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약은 몸의 다른 부분에 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적당히 사용하는 것이 좋다. 

셋째는 심령의 평안과 건강이다. “사람은 심령으로 그 병을 견디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누가 그것을 일으키겠느냐?” 슬픔과 분노와 불안 등의 감정은 몸에 병이 되므로 버려야 한다. 장수의 상식은, ① 규칙적 식사와 소식(小食), ② 적당한 노동, 운동, 수면, ③ 마음의 평안이다. 심령의 평안과 건강은 병을 이기는 중요한 방법이다. 

넷째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것은 병을 이기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모든 노력이 유익이 없다.

[15절]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느니라.

어리석은 자는 지식을 거절하지만, 지혜로운 자와 명철한 자는 지식을 구하며 얻는다. 참 지혜와 지식은 성경 안에 있다. 어리석은 자는 참 지혜와 지식의 창고인 성경을 읽기나 성경말씀 듣기를 거절한다.

그는 교만과 물욕(物慾)과 명예욕 등의 욕심들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세상적인 가치관, 즉 경건한 삶에 대해 무지하고 도덕성을 중시하지 않고 돈이 최고이며 돈이면 다 되었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어리석음은 무지(無知)로 나타나고 그것이 불경건과 불의의 죄로 나타나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는 것이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땅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고 지적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호 4:1, 6). 성경은 악인들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라고 표현한다(고전 15:34; 갈4:8; 살전 4:5).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실 것이다(살후 1:7-8).

그러나 지혜로운 자와 명철한 자는 지식을 사모하며 얻는다. 그는 지식의 창고인 성경책을 주야로 읽고 듣기를 사모하며 배우며 묵상하기를 힘쓴다. 지혜와 명철은 지식으로 나타나고 그것은 경건과 의로 나타나고 그 결과 평안과 형통과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말했고, 하나님께서는 “나는 . . .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셨다(호 6:3, 6).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다(요 17:3). 또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한다(벧후 3:18).

[16절] 선물(맛탄 )은 그 사람의 길을 너그럽게 하며[넓게 열며] 또 존귀한 자의 앞으로 그를 인도하느니라.

선물은 사랑과 관심의 표시거나 존경과 감사의 표시이다. 선물은 남을 대접하는 것이며 좋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기적인 사람은 남에게 선물을 주지 않을 것이다. 나쁜 사람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뇌물을 줄지 모르나, 대가 없는 선물은 주지 않을 것이다.

남을 대접하는 것은 성경에 교훈된 삶이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은 신명기 15장 같은 구약 율법에 강조된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다. 사도 바울도,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교훈하였다(롬 12:13). 또 그는 감독의 자격에 대해 말하면서 감독은 ‘나그네를 대접하는 자’이어야 한다고 말하였다(딤전 3:2). 

선물의 효과는 크다. 사람의 선물은 그를 위해 길을 넓게 열 것이다. 그래서 잠언 17:8은 “뇌물(쇼카드 )[혹은 ‘선물’]은 임자의 보기에 보석 같은즉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케 하느니라”고 말하며, 잠언 19:6은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을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고 말한다. 사람이 선물을 잘 하는 것은 그의 좋은 성품, 너그럽고 선한 성품을 증거하는 것이고 그는 마침내 존귀한 자들 앞으로 인도함을 받을 것이다.

특히 구제의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풍성한 복을 받을 것이다. 잠언 11:25는,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고 말하였다. 주께서는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4). 사도 바울은 자신을 위해 선물을 보낸 빌립보 교인들에게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말했다(빌 4:19).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한다. 남에 대한 잘못된 판단과 말은 남의 마음과 명예를 손상시키는 잘못이다. 우리는 무슨 일이나 신중하게 대답해야 한다.

둘째로,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길 것이나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는가? 우리는 가급적 슬픔이나 분노를 품지 말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평안하며 심령이 강건함으로 몸의 병도 이겨야 한다.

셋째로,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한다. 우리는 지식을 거절하고 세상 욕심대로 사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성경을 묵상함으로써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

넷째로, 선물은 사람의 길을 너그럽게 하며 존귀한 자의 앞으로 그를 인도한다. 우리는 어려운 이웃을 대접하기를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잠언 18장: 게으름, 겸손, 신중함, 아내

17-20절, 송사, 제비뽑기, 노, 말

[17절] 송사에 원고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 피고가 와서 밝히느니라.

‘그 피고’라는 원어(레에후 )는 ‘그 이웃’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서로 이해관계가 얽힌 다툼이 있다. 그런 다툼은 때때로 법정에까지 나아간다. 우리가 간혹 뉴스에서 보는 대로 서로 간의 법정 다툼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그것은 사람들이 모든 일을 진실하게 말하지 않고 속이기 때문이다.

이런 다툼에서 원고의 말, 즉 첫 번째 사람(원문) 혹은 한 쪽 사람의 주장만 들으면 그가 바른 것 같다. 그러나 피고 혹은 그 이웃이 와서 모든 문제를 밝힌다. ‘그 이웃’이라는 표현은 그 이웃이 피고의 자격으로나 혹은 증인의 자격으로 와서 밝힌다는 뜻일 것이다. ‘밝힌다’는 말은 그가 원고의 주장에 거짓된 부분, 근거 없고 추측적인 부분, 과장된 부분, 치명적 잘못 등을 지적함으로써 밝힌다는 뜻이다.

무슨 일을 판단할 때, 한쪽 말만 들어서는 부족하다. 무슨 일이든지 두 사람의 말, 즉 양쪽 말을 다 듣고 그 둘을 비교해보면, 그 문제에 대한 바른 판단을 더 쉽고 분명하게 내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판단할 때, 한쪽 말만 듣고 쉽게 판단하지 말고 최종적 판단을 보류하고, 다른 한쪽의 말을 들은 후 최종적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부족함이 없는 바르고 온전한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일에 있어서 바른 판단 기준은 무엇인가? 바른 판단은 첫째로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 둘째로, 그것은 이성과 양심에 근거해야 한다. 셋째로, 그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18절] 제비뽑는 것은 다툼을 그치게 하여 강한 자 사이에 해결케 하느니라.

무슨 일에서 아무 때나 제비뽑기를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제비뽑기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 잘잘못이 분명할 때는 이성과 양심과 하나님의 법에 의거해 판단해야지 제비뽑기를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선악의 문제가 아닐 때, 특히 두 개 이상의 주장들이 다 선하고 그것들을 주장하는 자들의 태도가 다 진지하고 확고하며 강경할 때, 그래서 그것들 중의 하나를 택하기 어려울 때, 제비뽑기가 필요할 것이다.

제비뽑기는 유익이 많다. 본문의 말씀과 같이, 제비뽑는 것은 다툼을 그치게 하고 강한 자들 사이에 문제를 해결케 할 것이다. 그것은 다툼이 되는 두 개의 생각과 의견들 중 하나를 택하는 방법이 된다. 성경에는 제비뽑기의 예들이 많다. 선지자 요나가 탔던 다시스로 가는 배의 선장은 선원들과 승객들 중에서 제비를 뽑게 함으로써 풍랑의 원인을 찾았다(욘 1:7). 에스더서에 보면, 악한 신하 하만의 동료들은 유대인들을 죽일 날을 정할 때에 제비를 뽑았다(에 3:7). 몇 개의 날들 중 하나를 택하는 방법으로 제비뽑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마태복음 27:35에 보면,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눠가졌다.

제비뽑기는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며 그의 선택을 구하는 방법이며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이었다. 잠언 16:33은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고 말한다. 속죄일에 두 염소중 아사셀 염소를 택할 때 제비뽑기를 했다(레 16:8). 여호수아는 범죄한 아간을 찾아낼 때 그리고 가나안 땅을 분배할 때 제비뽑기를 하였다(수 7:14; 18:10). 또 신약시대에 사도들도 가룟 유다 대신 한 명의 사도를 보충해 세우고자 했을 때 제비뽑기를 하였다(행 1:26).

[19절]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

노엽게 한 형제란 화가 나고 감정이 상한 형제라는 뜻이다. ‘화목하기가’라는 작은 글씨는 원문에 없는 말을 보충한다. 본문은 노엽게 한형제의 생각이나 마음을 얻기나 설득하기가, 그래서 그와 화해하기가 심히 어렵다는 뜻이다.

사람의 이성의 확고한 판단이나 굳어진 감정은 변경시키기가 매우 어렵다. 물론 정당성을 가진 경우도 있겠으나, 때로는 생각의 편협함과 잘못 때문에, 그의 감정도, 그의 행위도 그렇게 된다고 본다. 나는 한 청년이, 화나면 열쇠나 물건을 집어던지는 아내의 습관 때문에 그녀가 간청함에도 불구하고 이혼하였고 1년 후에 그 이혼을 후회하고 다시 아내와 재결합하기를 소원했으나 그 아내의 생각과 감정이 이미 굳어져 화합되지 못함을 보았다. 사람의 감정과 마음이 그러하다.

본문은, 감정이 상한 사람과 화목하기란 견고한 성을 취하는 것보다 어렵고 산성 문빗장을 여는 것같이 어렵다고 말한다. 물론 견고한 성을 정복할 수 있고 산성의 문빗장을 열 수 있지만, 그것은 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희생을 치루어야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나이 든 노인이 열쇠를 잃어버린 집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과 비슷하다. 열쇠만 있으면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자기 집이라도 열쇠가 없으면 문 앞에서 여러 시간을 서성이며 열쇠전문가가 오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며 열쇠 전문가가 와서도 한참 만에야 겨우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화목하기 어려운 사람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님께서 그를 변화시켜 주실 때까지 기도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20절]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

입에서 나오는 열매나 그 입술에서 나는 것은 그의 말을 가리킨다. 악한 사람의 입에서는 불신앙, 불평, 미움, 비방, 희롱, 음란, 상스러운 농담, 거짓말 등 악한 말들이 나온다. 이런 것들은 입에서 나오는 선한 열매가 아니다. 입술의 선한 열매는 바르고 선한 말,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고 덕을 세우는 선하고 은혜로운 말(엡 4:29), 감사하는 말(엡 5:4),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권면하며 충고하는 말(살전 5:11, 14)을 가리킨다. 이런 것들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선한 열매들이다.

본문은 사람이 입에서 나오는 이런 선한 열매들로 인해 배가 부르고 만족하게 된다고 표현한다. 말은 힘이 있다. 말은 남에게 유익을 끼치는 동시에 자신에게도 기쁨과 평안과 유익을 준다. 옛말에,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은 말의 유익을 두고 한 말이다.

바르고 선한 말은 말의 내용이 그래야 한다. 주께서 사람들 앞에서 바르고 은혜로운 말씀을 하셨고(눅 4:22) 그에게 은혜와 진리가 넘쳐흘렀듯이(요 1:16),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에 맞는 바르고 선한 말을 할 때 자신에게도 기쁨이 있고 남에게도 유익을 줄 것이다.

또 바르고 선한 말을 듣는 사람의 마음가짐도 좋아야 한다. 우리는 바른 말을 들을 귀(마 13:9), 할례 받은 귀와 마음(신 29:4)이 있어야 하며, 또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이라도 어떤 이들은 그것에서 흠 잡을 거리만 찾았으나 많은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즐거이 들었다(막 12:37). 그러므로 잠언 27:7은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고 말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송사에 원고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 피고[이웃]가 와서 밝힌다. 우리는 한쪽 말만 듣고 성급히 판단하는 자가 되지 말고, 양쪽 말을 다 들은 후 신중하고 바르게 판단해야 한다.

둘째로, 제비뽑는 것은 다툼을 그치게 하여 강한 자 사이에 해결케 한다. 우리는 분명한 문제에 대해서는 이성과 양심과 성경말씀으로 판단해야 하며 그런 경우 예, 아니오가 분명해야 하지만, 선택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고, 그럴 경우, 제비뽑기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한 방법이다.

셋째로,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다. 우리는 상대의 상한 감정이 굳어지기 전에 푸는 지혜가 있어야 하고, 또 화목하기 어려운 사람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님께서 그를 변화시켜 주실 때까지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넷째로,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배가 부르게 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만족하게 된다. 우리는 남에게 상함과 낙망을 주는 말을 하지 말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 바르고 선하고 덕스럽고 위로와 격려를 주는 말을 하고, 또 남의 선한 충고를 듣는 겸손한 마음도 가져야 한다.

21-24절, 혀의 권세, 아내, 가난, 친구

[21절]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사람의 혀는 권세가 있다. 말은 다른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사람의 말은 때때로 다른 사람을 살린다. 위로와 격려의 말은 낙심한 사람에게 힘이 나게 하며, 충고의 말은 그의 잘못을 반성하고 고치게 한다. 사무엘상 25장에 보면, 완고하고 미련했던 나발의 아내아비가일은 노한 다윗이 그의 집을 치려 한 것을 지혜롭고 겸손한 말로 막았다. 복음을 전하는 입은 죄로 인해 죽을 영혼들을 살리는 힘이 있다. 복음은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그러나 사람의 말은 때때로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독한 비난의 말은 남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하고 그의 명예를 크게 훼손시킨다. 그것은 상대방을 죽이는 말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에는 실제로 그런 말로 인해 상대방이 마음이 크게 상하여 진짜 자기 목숨을 끊는 일도 있다. 또 악하고 거짓된 비방은 무고한 사람을 매장시키기도 한다.

사람의 악한 말은 상대를 죽일 뿐 아니라, 자신도 멸망으로 이끈다. 주께서는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2:37). 사도 바울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했으나(롬 10:9-10), 반대로 우리의 입으로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고 부정하는 자는 자신의 멸망을 증거한 셈이 된다(마 10:33; 막 8:38). 이와 같이, 사람은 자기의 혀의 열매, 즉 자신의 말의 열매를 먹는다. 선한 말은 자신을 복되게 하지만, 악한 말은 자신과 남들을 멸망시킨다.

[22절]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

고대 번역들(LXX, Syr, Vg, Targmss)은 ‘아내’를 ‘좋은 아내’라고 번역하였다. 좋은 아내는 복이다. 어떤 아내가 좋은 아내인가? 

첫째, 남편을 잘 돕는 아내이다.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만드실 때 남자를 돕는 자로 만드셨다. 그는 “사람의 독처(獨處)하는[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돕는 자]을 지으리라”고 말씀하셨다(창 2:18). 그러므로 그가 여자를 창조하신 의도대로 남편을 잘 돕는 아내가 좋은 아내이다. 

둘째, 지혜롭고 덕스러운 아내이다. 잠언 12:4,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남편]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남편]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 ‘어질다’는 원어(카일 )는 ‘힘있다, 덕스럽다(virtuous)’라는 뜻이다. 어진 아내란 지혜와 덕이 있는 아내를 가리킨다. 

셋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좋은 아내이다. 잠언 31:30은,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넷째, 순종하는 아내가 좋은 아내이다. 사도 바울은,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고 말했다(엡 5:22).

좋은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이다. 잠언 31:10,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 좋은 아내는 그 남편을 잘 도우며 그에게 선을 행하며(잠 31:12)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를 위로 격려하며 필요할 때 그에게 조언을 주기 때문에 복이다. 좋은 아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다. 잠언 19:14,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23절] 가난한 자는 간절한 말로 구하여도 부자는 엄한 말로(앗조스 )[사납게, 거칠게](BDB, KJV, NASB, NIV) 대답하느니라.

가난한 자는 슬프다. 우리는 가급적 가난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잠언 30:8에 보면, 아굴은 성령의 감동 가운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가난은 좋은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복 주셔서 그로 가난하지 않게 하신다. 신명기 28:12,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寶庫)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의지하는 양식을 끊으실 것이며 먹어도 배부르지 않게 하실 것이지만(레 26:26),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의식주의 필요를 넉넉히 주실 것이다(마 6:33). 그러나 우리는 물질적 부요가 있을 때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잠언 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욥은 부자이었지만 자기의 종들의 사정을 멸시치 않았고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지 않았으며 고아를 기르고 과부를 인도하였고 의복 없는 자에게 덮을 것을 주었고 나그네를 대접하고 자기 집에 머물게 하였다고 말하였다(욥 31:13-23).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부자들에게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 . .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고 교훈하였다(딤전 6:17-18).

[24절]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

옛날 영어성경(KJV)은 고대역본들(Syr, Targ, Vg)을 따라서 “친구들을 가진 자는 친절해야 하나니”라고 번역하지만, 한글개역성경은 히브리어 전통본문을 따른다(NASB, NIV). 본문은 친구가 많은 것이 유익이 없고 도리어 해를 당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뜻 같다.

친구는 두 종류가 있다. 나쁜 친구와 좋은 친구이다. 나쁜 친구는 해를 끼치는 친구이다. 예를 들면, 자기 이익만 구하다가 어려울 때, 위급할 때 떠나가는 이기적인 친구나, 죄 짓게 하는 친구가 그렇다. 사무엘하 13장에 보면, 다윗 왕의 아들 암논에게 요나답이라는 심히 간교한 친구가 있었다. 그는 암논이 그의 이복형제 압살롬의 여동생, 곧 자기의 이복누이 다말을 연애하는 것을 알고 그에게 잘못된 조언을 했다.

암논은 요나답의 조언대로 다말을 강간했고 그 일로 다말의 오빠 압살롬은 암논을 살해했고 다윗의 집에는 큰 불행과 고통이 되었다. 고린도전서 15: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그러나 좋은 친구는 형제보다도 친밀하다. 소년 다윗이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블레셋 장수 거인 골리앗과 대결해 이기자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그를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였다. 사무엘상 18:1,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요나단은 사울의 칼을 피해 도망 다니는 다윗을 만나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위로하고 격려했다(삼상 23:16). 사랑이 있는 친구는 좋은 친구이다. 잠언 17:17,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처럼,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줄 정도의 사랑을 가진 사람은 참 좋은 친구이다(요15:13-14). 그런 친구는 상대에게 바른 충고도 할 것이다(잠 27:6).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으며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다. 우리는 말을 조심하며 사람을 살리고 유익케 하는 선하고 덕스러운 말만 해야 한다.

둘째로, 좋은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결혼과 가정의 은혜와 복을 구하며 얻어야 한다.

셋째로, 가난한 자는 간절한 말로 구하여도 부자는 엄한 말로 대답한다. 우리는 물질적 여유를 가질 때 이웃과 나누는 자가 되어야 한다.

넷째로,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지만,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다. 우리는 참된 믿음과 사랑이 있는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19장: 노, 아내, 구제, 인자(仁慈)

1-4절, 완전함, 지식, 미련함, 재물

[1절] 성실히(베숨모 )[완전하게] 행하는 가난한 자는 입술이 패려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

완전하게 행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명에 맞는 도덕적 완전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도덕적 완전을 명하신다. 노아는 당세에 완전한 자(타밈 )이었고(창 6:9), 욥도 순전한[완전한] 자(탐 )이었다(욥 1:1). 

사도 바울은 성도의 성화의 모범인 감독의 자격요건을 언급했었다.  첫째로, ‘책망할 것이 없는 자’ 즉 완전한 자라고 말했다(딤전 3:2). 완전하게 행하는 자는 비록 가난할지라도 가치 있는 삶을 사는 자이다. 사람의 가치는 돈의 많음에 있지 않다. 가난한 자는 가치가 적거나 가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돈이 많음은 사람의 가치에 무엇을 더해 주지 못한다. 사람의 가치는 실상 그의 경건성과 도덕성에 있다. 경건과 의는 사람이 사람으로서 추구해야 할 첫 번째 덕목이다.

본문은 완전히 행하는 자를 입술이 패려하고 미련한 자와 비교한다. 입술이 패려한 자는 선하고 덕스러운 말을 하지 않고 바르지 않은 말, 악하고 불순종적인 말, 불평하고 원망하는 말, 거짓된 말을 하는 자이다. 그는 미련한 자이다. 그는 믿음이 없으며 도덕적으로 선하지 않은 자이다. 말은 사람의 인격의 표현이다.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온전한 인격자이다(약 3:2). 주께서는 사람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며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말을,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말을 낸다고 말씀하셨다(마 12:34-35). 우리는 비록 물질적으로는 가난할지라도 도덕적으로 바르고 온전한 자가 되어야 한다.

[2절] 지식 없는 소원(네페쉬 )[영혼]은 선치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그릇하느니라[범죄하느니라]....옛날 영어성경(KJV), “영혼은 지식이 없으면 좋지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범죄하느니라.” 

영혼은 지식이 없으면 좋지 못하다. 사람은 밥만 먹고사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단지 육신의 감정과 욕구에 따라 사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영혼을 가진 존재이다. 영혼은 지식이 필요하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대한 지식, 사람의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지식, 경건과 의와 선에 대한 지식, 죄와 구원과 내세에 대한 지식 등이 필요하다. 물론, 참 지식은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느껴지고 행위로 나타난다.

호세아 4:6에서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고, 호세아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말하였고(호 6:3), 또 하나님께서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셨다(호 6:6). 사람의 영혼에게는 참된 지식이 필요하다.

본문은 발이 급한 사람은 범죄한다고 말한다. 발이 급한 자는 부지런한 자를 말하지 않고, 행동이 생각보다 앞서는 성급한 자를 말한다. 그런 자는 미련하다. 잠언 29:20은,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고 말했다. 발이 급한 자는 실수하고 범죄한다. 또 그런 자는 궁핍케 된다. 잠언 21:5,“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성도는 범사에 조급하지 말고, 지식을 가지고 신중히 생각하고 바르게 판단한 후에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3절]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본문은 미련한 자의 이중적 범죄를 증거한다. 하나는 자기 길을 굽게 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다.

미련한 자는 자기 길을 굽게 한다. 길은 행위를 가리킨다. 미련한 자는 인생의 정로인 의의 길에서 벗어난다. 그의 삶은 비뚤어진 삶, 탈선된 삶, 곧 불의한 삶이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교만하고 그의 계명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대로 살지 않고 자기 생각과 주관과 고집대로 사는 자기중심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자이다.

미련한 자는 또한 그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한다. 사람의 행위는 그의 마음에서 나온다. 하나님을 원망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그를 무시하며 그에게 감사하지 않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하나님을 사랑치 않고 미워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불경건이다. 사람은 경건해야 선을 행하는 법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치 않으면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불경건과 불의는 하나님 없는 죄인들의 모습이다.

원망과 불평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에서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통과할 때, 이전에 애굽 땅에서 떡을 배불리 먹던 때와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를 기억하며 원망하며 불평하였다(출 15:2-3; 17:3). 또 그들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에 열두 명의 정탐꾼을 보내고 그들 중 열 명의 불신앙적 보고를 들었을 때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하며 믿지 않고 밤새도록 통곡하여 원망하였다(민 14:1-2, 11).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과 멸망을 기억하고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고 교훈하였다(고전 10:10).

[4절]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

넓은 의미에서 친구란 친하게 지내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그보다 더 친밀하게 어릴 때부터 한 가정에서 자란 형제가 있고, 사귄 지 오래 된 친구도 있다.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한 가족인 영적, 신앙적 형제들인 교우(敎友)들이 있다.

돈이 있으면 친구들도 많아진다. 잠언 14:20도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고 말한다. 세상의 친구들은 물질적 이해관계를 가진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가난하면 친구가 떨어진다. 돈이 떨어지면 친구도 떨어진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이다. 또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다. 아이들도 어릴 때부터 부잣집 아이와 친구가 되려 하는 것 같다. 세상에서 순수한 친구는 찾아보기 어려워지는 것 같다. 그러나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 신앙적 친구는 물질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친구여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정이다.

주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2:50). 그는 또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3:8). 사도 바울도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가 족]이라”고 말하였다(엡 2:19). 신앙적 친구는 바른 교훈 안에서 서로 권면하고 위로하고 책망도 할 수 있는 친구, 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위로해줄 수 있는 친구이다. 바울은,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권하였다(살전 5:14).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완전하게 행하는 가난한 자는 입술이 패려하고 미련한 자보다 낫다. 우리는 사람의 가치가 돈의 많음에 있지 않고 경건과 도덕성에 있음을 알고 경건하고 바르고만 살아야 한다.

둘째로, 지식 없는 영혼은 선하지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범죄한다. 우리는 지식을 귀히 여기며 성경을 읽고 배우고 묵상하기를 힘써야 하고 또 범사에 바른 지식을 가지고 신중히 생각한 후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셋째로, 사람은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범사에 그를 인정하고 그에게 감사하며 그를 경외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여 의의 길, 선한 길을 걸어야 한다.

넷째로,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진다. 우리는 물질적 이익을 위해 친구가 되지 말고, 그런 것을 초월하고 신앙적 권면과 위로를 주고 서로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친구가 되어야 한다.

5-8절, 거짓말, 선물, 가난, 지혜

[5절]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도 피치 못하리라.

거짓 증인은 보통 자기의 이익을 구하며 남에게 악을 행하는 자이다. 그는 남의 명예를 훼손하고 남의 재산에 손해를 끼치고 남의 생명을 해한다. 거짓말은 하나님 앞에 큰 악이다. 그것은 십계명의 제9계명을 어기는 죄악이다. 잠언 6:16-19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6, 7가지의 죄들 중 ‘거짓된 혀’와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을 들었다.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신명기 19:16-21에 보면, 위증즉 거짓 증거하는 자에 대해 그 일을 자세히 조사해 확인되면 그가 그 형제에게 행하려 했던 그대로 그에게 행하라고 명령되었고 또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니라”고 말하였다. 공의의 보응을 명한 것이다. 거짓말은 지옥 갈 죄악이며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죄악이다. 요한계시록 21:8은 모든 거짓말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하였고, 요한계시록 21:27은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하였고, 22:15도 거짓말 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천국 밖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선의의 거짓말도 하지 않는 것이 옳다. 거짓은 큰 죄악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고 마귀의 속성이다. 사람의 본성 속에는 태어날 때부터 거짓된 속성이 있다. 예레미야 17:9에서 하나님께서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거짓을 의식적으로 경계하고 배척해야 한다. 거짓이 습관이 되지 않게 하고 자기 합리화에 사용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선의의 거짓말에 익숙하면 보통 거짓말도 잘하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은 거짓말하는 습관이 생기고 중요한 거짓말도 하기 쉬울 것이다.

[6절]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을 주기를 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

‘너그러운’이라는 원어(나디브 )는 ‘존귀한, 고상한, 너그러운’ 이라는 뜻을 가진다(BDB). 이 말은 사회적 신분 뿐만 아니라, 인격의 고상함과 너그러움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자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다. 또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친구가 되려 하는 사람이 많다.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도 단지 물질적 여유를 가진 자가 아니고 마음의 선함과 너그러움을 가진 자를 가리킨다.

사람이 물질적 여유를 가지고 사회적 신분이 높은 것은 복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서 사람이 그의 계명을 순종하면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신 28:13). 성경의 훌륭한 인물들 중에는 그런 자들이 있었다. 의로운 욥은 동방에서 가장 큰 자이었고(욥1:3), 요셉은 애굽의 총리(창 41:43)가 되었고,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삼하 5:4-5)이, 다니엘은 메데 파사의 총리가 되었다(단 6:1-2).

그러나 마음과 인격이 천박하지 않고 고상한 것은 더 값지고 복되다. 천박하지 않고 고상함이란 불경건하거나 죄악되거나 이기적이거나 인색하거나 인정 없는 것이 아니고,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너그럽고 남을 배려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장로의 자격으로 ‘아담함’(코스미오스 kovsmio") 즉 ‘품행이 좋음, 존경할 만함’을 들었고, 집사의 자격과 또 장로와 집사의 아내들의 자격으로 ‘단정함’(셈노스 semnov")즉 ‘고상함, 존경할 만함’을 들었다(딤전 3:2, 8, 11). 모세는 온유했다(민 12:3). 사도 바울도 온유함과 너그러움과 관용을 교훈했고(빌 4:5), 또 주의 종들이 온유해야 한다고 말했다(딤후 2:24).

[7절] 가난한 자는 그 [모든]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

가난한 자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거처할 곳이 없는 자이다. 가난한 자는 그 모든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는다. 예외는 있겠지만 대체로 그렇다는 것이다. 가난한 자의 설움이다. 가난한 것도 슬픈데, 모든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으니 더욱 슬플 것이다.

본문은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고 말한다. 한 집에서 자라며 한 밥상에서 밥을 먹던 형제들도 그를 미워하는데, 친구들이야 오죽하랴! 그들은 따라가며 말을 붙이려 해도 상대도 해주지 않고 가버린다. 사람들은 대체로 사람의 가치를 돈의 많음으로 판단한다. 심지어 교인들도 그러하다. 그래서 야고보는 교인들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고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고 박대하지 말라고 교훈하였다(약 2:1-5). 성도는 하나님의 징계로 일시적으로 가난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물질적 필요를 공급해주신다. 그는 성도들에게 물질적 여유를 약속하셨다. 그는 신명기 28장에서 계명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물질적 복을 약속하셨다(1-6절). 예수께서도 “너희는 먼저 그의[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성도가 부자가 되는 것을 사모해서는 안 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떠나지 아니하시며 필요한 돈을 주실 것은 분명하다(히 13:5).

[8절]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

‘지혜’라는 원어(레브 )는 ‘마음’이라는 말로서 바른 마음과 바른 생각을 가리킨다. 사람은 생각이 반듯해야 말도 바르게 하고 행동도 바르게 할 수 있다. 바른 생각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는 생각이며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선한 생각이며, 그것이 곧 지혜이다.

본문은 ‘지혜를 얻는 자’라는 표현을 한다. ‘얻는 자’라는 말은 바른 마음과 생각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님을 보인다. 사람의 본성은 악하고 무지하여 그릇된 길로 잘 빠진다. 바른 마음과 바른 생각은 하나님의 은혜로, 또 자신이 사모하여 얻게 된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 예배에 잘 참석하여 말씀을 힘써 듣고 배우는 자는 지혜를 얻을 것이다.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한다. 무지함은 불경건하고 악한 행실을 낳고 마음의 병과 환경적 황폐와 영육의 멸망을 가져올 것이지만, 지혜는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행실을 낳고 평안과 강건함과 영생을 가져올 것이다. 잠언 1:32-33,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 잠언 8:35-36, “대저 나[지혜]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지혜]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지혜]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성경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딤후 3:15).

본문은 또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고 말한다. 명철은 바른 깨달음이며 그것은 성경에 근거한 바른 생각과 교훈에서 나온다.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는다. 그 복은 평안, 형통, 건강, 물질적인 여유 등을 포함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영생의 복을 가리킨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며 거짓말을 내는 자도 피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거짓말을 배격하고 선의의 거짓말도 하지 말고 거짓말이 습관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

둘째로,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을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된다. 우리는 마음과 인격이 고상한 자, 즉 온유하고 너그럽고 존경할 만한 덕을 지닌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가난한 자는 그 모든 형제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아니하겠느냐?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계명을 순종함으로 돈의 여유를 얻고 주위의 가난한 자들을 돕는 자가 되어야 한다.

넷째로,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는다. 우리는 성경말씀의 바른 교훈에서 지혜를 얻어야 한다.......지고지선의 진복 누림이란 <사랑과 생명이신> 주 하나님 경외함, 곧 그분의 임재 안에서 주와 하나된 올바른 언행심사의 삶!!

9-12절, 거짓말, 분수, 절제, 왕

[9절]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하나님, 진실의 하나님이시다. 이사야 65:16,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요한복음 14: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한복음 17:17,“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신약성경에는 ‘진실로’(아멘 ajmh;n)라는 말이 152회 나오고, 요한복음에만 51회나 나온다.

성경은 진실한 증인들의 증거이다. 기독교는 진실한 증거 위에 세워져 있다. 요한복음 21: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증인들이라고 불렸다. 사도행전 1:8,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내 증인’이라는 말은 나의 참된 증인, 나의 진실한 증인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실하며 진실한 말만 하라고 명하신다. 에베소서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거짓은 마귀의 죄요 마귀의 속성이다.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다(요 8:44).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거짓을 버리고 오직 진실을 말해야 한다.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는 망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제9계명에서 거짓 증거를 정죄하셨다. 잠언 6:16-19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것 6, 7가지 중에 ‘거짓된 혀,’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을 들었다. 요한계시록은,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지옥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하였고(계 21:8), 또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새 예루살렘 성 밖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계 22:15).

[10절] 미련한 자가 사치하는 것이 적당치 못하거든 하물며 종이 방백을 다스림이랴.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교만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죄만 짓는 자이다. ‘사치하는 것’이라는 원어(타아누그 )는 ‘사치, 연락(宴樂), 기쁨’이라는 뜻이다(BDB). 지혜로운 자는 세상의 헛됨과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조심하며 살려 하지만, 미련한 자는 그런 깨달음이 없이 사치하고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산다.

미련한 자가 사치하며 즐거워하는 것이 적당치 못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 것이 헛된 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자기 앞에 있어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또 자기의 분수를 모르고 자신을 해이하게 하고 교만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미련한 일이다.

미련한 자에게 필요한 것은 실상 사치와 연락이 아니고, 세상의 헛됨과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알고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것이다.

본문은 또 “하물며 종이 방백을 다스림이랴”라고 말한다. 방백이 종을 다스리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지만, 종이 방백을 다스리는 것은 비정상적인 일이다.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님께서 한 사회를 심판하실 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종이 방백을 다스리는 것은 매우 비정상적인 일이며 또 종은 방백들을 잘 다스리지도 못할 것이다.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을 다스리는 자는 지혜와 지식과 능력이 필요하다. 또 다스리는 자는 건전한 생각과 판단력, 도덕성과 사랑, 말의 덕스러움, 용기와 담력, 단호함 등의 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스림은 하나님의 은사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 중 하나이다(고전 12:28; 롬 12:4-8).

[11절]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은 사람의 지혜와 슬기이다. 우리는 왜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필요한가? 그것은 말이나 행동으로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또한 다른 이의 부족을 긍휼히 여기고 그가 깨닫고 고치기를 기다리기 위해서, 또 자신의 부족도 생각하는 기회가 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참는 훈련, 관용하는 훈련, 너그러움을 실천하는 훈련이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신다. 출애굽기 34:6,“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 로라.” 민수기 14:18,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느헤미야 9:17, “주는 사유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저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그 외에, 시편 86:15; 103:8; 145:8; 요엘 2:13 등에도 같은 말씀이 있다. 그러나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잠언 16:32는,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말하였다.

본문은 또한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고 말한다. 잠언 10:12는,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운다고 말했다. 남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옥 갈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셨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주셨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교훈하기를,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했다(엡 4:32).

[12절] 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고 그의 은택은 풀 위에 이슬 같으니라.

왕은 힘과 권세를 가진 주권자이다. 사자는 먹이를 잡은 후에 찢고 삼키려 할 때 부르짖는다. 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다. 사울 왕은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과 공모(共謀)했다고 오해하여 도엑을 명하여 하나님의 제사장 85명을 죽이게 하였다(삼상 22장). 파사 왕 아하수에로는 잔치 자리에 오라는 남편의 명을 어겼다고 진노하여 자기 아내인 왕후 와스디를 당장 왕후의 직에서 폐하였다(에 1, 2장).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진노는 더욱 크고 두렵다. 노아의 시대에 온 세상이 부패하고 강포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온 세상을 심판하시고 멸하셨다. 소돔 고모라 성이 심히 부패하고 음란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유황불비를 내려서 멸망시키셨다. 가나안 땅의 일곱 족속들이 우상숭배와 음란으로 심히 부패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땅의 거민을 다 멸하라고 명하셨다.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 나라라 할지라도 그들이 우상숭배하며 부도덕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멸망시키셨다. 예레미야는 유다 멸망 때의 하나님의 진노를 눈물로 증거하였다(애 2:1-3). 오늘날도 세상은 세속주의, 쾌락주의, 음란의 큰 죄악 때문에 마침내 불심판을 당할 것이며 악인들은 최종적으로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다(벧후 3:7; 계 21:8).

본문은 “그의 은택은 풀 위에 이슬 같으니라”고 말한다. 들의 풀은 새벽 이슬로 생기를 얻어 파릇파릇해진다. 백성들은 왕의 은택과 호의로 좋은 것을 얻는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택과 호의로 온갖 복된 것들을 누린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의 해방과 홍해의 기적,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에서의 물 등 하나님의 귀한 은택들을 받아 누렸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는 망할 것이다. 우리는 결코 거짓말하는 자가 되지 말고 우리 속의 거짓의 요소를 내쫓고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미련한 자가 사치하는 것이 적당하지 못하며 종이 방백을 다스림은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사치하지 말고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

셋째로, 노하기를 더디함이 사람의 슬기이며 허물을 용서함이 자기의 영광이다. 우리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남의 허물을 용서해야 한다.

넷째로, 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고 그의 은택은 풀의 이슬 같다. 우리는 하나님 경외하고 계명 순종함으로 그 은택 안에 살아야 한다.

13-16절, 미련함, 슬기로움, 게으름, 계명 준수

[13절]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

잠언에서, 미련한 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죄만 짓고 게으르고 방탕한 아들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할 때, 또 부모의 바른 교훈과 본이 없을 때, 또는 부모의 바른 교훈을 받아도 고의로 그것을 거절하고 대항할 때, 미련한 아들이 된다. 미련한 사람은 부모의 경건한 교훈과 훈계를 멸시한다(잠 1:7).

미련한 아들은 그의 아버지에게 재앙이다. ‘재앙’이라는 원어(하오스 )는 ‘멸망’이라는 뜻이다(BDB, NASB, NIV). 아들은 부모의 대를 잇는 자요 부모의 기업이다. 자녀가 잘되면 부모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되고 영광과 복이 되지만, 자녀가 잘못되면 부모에게 근심과 슬픔이 되고 수치와 멸망이 된다. 잠언 17:21, “미련한 자를 낳는 자는 근심을 당하나니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느니라.” 잠언 17:25,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다. 잠언 27:15, “다투는 부녀는 비 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라.” 아내는 겸손치 않고 교만하고 욕심이 많고 이해심이 부족할 때 남편과 잘 다툴 것이다.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은 끊임없이 남편을 괴롭게 하는 것을 말한다. 잠언 12:4,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남편]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잠언 21:9,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 25:24에도). 잠언 21:19,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다투는 아내는 아내의 역할에 역행하는 여자이다. 아내의 역할은 남편을 돕는 것인데, 좋은 돕는 자가 되려면, 비록 특별한 경우 겸손히 조언을 줄 수 있겠으나, 대체로 남편의 뜻에 순종해야 할 것이다.

[14절]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 로서 말미암느니라.

부모는 자기의 집이나 재산을 자녀들에게 상속해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슬기로운 아내를 얻어 줄 수는 없다. 슬기로운 아내란 하나님을 경외하며 늘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선하고 덕스러운 자이다. 그는 죄악된 것을 버리며 온순하며 단정하고 순종하며 부지런하다.

성경은 슬기로운 여인을 칭찬하며 권장한다. 잠언 12:4, “어진[현숙한]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 잠언 14:1,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잠언 31:10,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그는 사람을 예비하시고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지혜와 총명을 주신다. 그는 모든 좋은 것을 다 주실 수 있고 또 주신다. 그는 슬기로운 아내도 주실 수 있고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18:22도, “[좋은]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고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좋은 아내를 주실 것이다. 좋은 아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고난도 때때로 유익하다. 사람은 고난을 통하여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회개케 되고 경건과 순종의 훈련을 받고 회복의 은혜를 얻는다. 시편 119:67, 71,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성도들에게는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

[15절]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懈怠)한[나태한, 게으른]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게으름은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한다. 게으름은 자기 할 일을 등한히 하는 것, 시간을 낭비하는 것, 놀고 먹으려 하는 것을 가리키며, 그런 사람은 몸이 아프지도 않은데 하루에 8시간 이상 잠을 잘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6:9는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라고 말한다.

나태한 자는 주릴 것이다. 잠언 6:10-11,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잠언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잠언 13:4,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 잠언 18:9, “자기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니라.” 

사람이 게으르면 가난해지게 되고 마침내 파산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부지런해야 한다. 성도는 잠도 적당히 자야 하고 자기 일을 정직하게, 부지런하게 하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로마서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에베소서 5:15-16,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성도는 놀고 먹으려 해서는 안 된다. 데살로니가후서 3: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부지런하게 사는 자는 몸도 건강해지고 물질적 여유도 얻을 것이다.

[16절]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지키거니와 그 행실을 삼가지 아니하는(보제 데라카우 )[그 길을 멸시하는] 자는 죽으리라.13)

하나님의 계명은 사람의 바른 길, 선한 길을 지시한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곧 의와 선을 행하는 것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 <13) ‘죽으리라’는 원어는 유마스 [죽임을 당하리라](Syr, Vg)라고 쓰여 있으나(케팁), 전통적인 마소라 학자들은 야무스 ( )[죽으리라](Targ)라고 읽었다(케레). 그러나 쓰여진(케팁) 대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안에서 의를 행하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려 한다.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지키는 것이다. 그는 죽지 않고 살 것이다. 의롭게 살았던 노아는 홍수로 멸망하는 세상에서 방주로 구원을 받았다. 믿음과 순종의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른 이들이 다 광야에서 죽고 멸망할 때, 멸망치 않고 살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 행실을 삼가지 않는 자, 즉 그 길을 멸시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그 길’은 그가 가야 할 길,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사람의 바른 길을 가리킨다. 그 길을 멸시하는 것은 어그러진 길로 가고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곧 죄이다.

그 길을 멸시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에스겔 18:20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고 말하며, 로마서 8:13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했다. 의는 생명에 이르고 죄는 죽음에 이른다. 소돔 고모라 사람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멸시하다가 다 망하였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광야에서, 또 가나안 땅에서, 악을 행하다가 다 망하였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다. 우리는 미련한 아들이나 다투는 아내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과 기도의 생활 속에서, 또 각자 자기 의무를 다함으로써 우리 가정을 복된 가정으로 만들어야 한다.

둘째로,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 우리는 죄를 멀리하고 믿음과 순종으로 살아 하나님의 은혜로 슬기로운 아내가 되고 또 딸들을 슬기롭게 잘 키워야 한다.

셋째로, 게으름은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니 나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다. 우리는 영적인 의무들과 육적인 의무들을 부지런히 행해야 한다.

넷째로,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지키나 그 길을 멸시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

17-20절, 구제, 자녀 징계, 노함, 훈계

[17절]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꾸어드리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구제하는 뜻을 포함한다. 가난한 자를 동정하고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께 돈을 꾸어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잠언 14:31은,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고 말하였고, 잠언 17:5는,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고 말했다.

더욱이, 구제의 대상이 신자인 경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에게 있으니 더욱 그렇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시면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고(마 10:40), 또 그는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너희가 여기 내 형제[믿는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5:40).

본문은 가난한 자에게 한 구제와 선행을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고 말한다. 시편 37:26,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잠언 11: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마태복음 6:3-4,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드러나게] 갚으시리라.” 사도 바울도,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主)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안다”고 말하였다(엡 6:8).

[18절] 네가 네 아들에게 소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고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

성도는 그의 자녀를 의지하지는 않아야 하지만, 그의 자녀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는 있다. 성도는 그의 자녀가 경건하고 선한 인격자가 되어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복된 가정을 이루고 사람답게 살기를 소망한다. 성도는 그의 자녀의 심령이 완고하여 도저히 고치기 어렵다고 판단되기 전까지 그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본문은 “네가 네 아들에게 소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라”고 말한다. 자녀의 잘못을 버려두는 것은 그를 사랑함이 아니고 실상 그를 미워하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의 잘못을 책망하며 상당한 벌을 주어야 한다. 잠언 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언 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언23:13-14,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잠언 29:15, 17,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그러나 본문은, “그를 죽일 마음은 두지 말라”고 한다. 부모가 자녀를 죽일 권한은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다. 교육의 목적은 죽이려는 것이 아니고 살리려는 것이다. 교육은 주로 말로 하는 것이며 징계는 약간만 해야 한다.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징계해서는 안 된다. 에베소서 6:4,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골로새서3: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19절]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벌을 받을 것이라. 네가 그를 건져 주면 다시 건져 주게 되리라.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것은 지나치게, 과도하게 노하는 것을 말한다.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반복해서 실수하기 쉽고 그러므로 한두 번 용서해주어도 결국 비슷한 실수를 반복해 벌을 받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미련한 아들이나 미련한 종의 모습이다. 사람이 이성과 양심과, 성경의 교훈을 따르면 바른 판단을 하고 바른 행동을 할 것이지만, 맹렬한 노, 즉 심히 상한 감정으로 행하면 그릇된 판단을 하고 그릇된 말과 행동을 하여 정죄를 당하고 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노하기를 더디하라고 교훈한다. 특히, 잠언은 그런 교훈을 많이 했다. 잠언 14:29,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잠언15:1,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잠언 15:18,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잠언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 19:11,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잠언 22:24-25, “노(怒)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칠까 두려움이니라.” 잠언 29:22,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하여 하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전도서 7:9,“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怒)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야고보서 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20절] 너는 권고(에차 )[충고, 권면]를 들으며 훈계(무사르 )[교훈, 경고, 징계, 책망]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

성경말씀에는 교훈과 권면, 경고와 책망의 내용이 많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말했다(딤후 3:16). 하나님의 말씀은 포괄적 의미에서 교훈의 말씀이고 경고와 책망도 있고 바르게 하는 것도 있고 위로도 있고 마침내 의로운 인격과 삶에 이르게 한다.

본문은 ‘들으며’ ‘받으라’고 말한다. 교만한 자, 닫힌 마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받지 않는다. 그는 말의 꼬투리나 잡으려 하고 말을 들어도 거역한다. 그는 길가에 뿌려진 씨와 같다. 길가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들을 때 깨달음이 없고 그 말씀을 배척하는 자를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좋은 밭에 떨어진 씨는 말씀을 받을 때 겸손하게, 단 마음으로,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는다. 우리는 칭찬과 위로의 말만 좋아하지 말고 충고와 책망의 말도 잘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본문은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고 말한다. ‘필경은’ 이라는 원어(베아카리세카 )는 ‘너의 말년에’라는 뜻이다(BDB). 비록 우리가 과거에 지혜가 없었고 지금 지혜가 부족할지라도, 우리가 권면과 훈계를 받으면 후에는 지혜가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를 얻는 길은 성경을 읽고 듣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119편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원수보다, 스승보다, 노인보다 지혜롭게 되었다고 고백하였고(98-100절), 야고보는 지혜 얻기를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했다(약 1:5).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 곧 구제하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드리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 선행을 갚아주실 것이다. 선행과 구제는 하나님의 뜻이며 그가 복 주시는 일이다.

둘째로, 아들에게 소망을 가진 부모라면 그를 징계하고 죽일 마음은 두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녀를 교훈하되 격노케 하지 말고 근실히 징계해야 한다. 자녀가 잘되는 것은 우리의 행복이다.

셋째로,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벌을 받을 것이며 그를 건져주어 도 다시 건져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오래 참고 노하기를 더디해야 한다.

넷째로, 권면을 들으며 훈계를 받는 사람은 훗날에 지혜롭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많이 읽고 듣고 많이 기도함으로 지혜를 얻어야 한다.

21-24절, 마음의 계획, 인자함, 경외함, 게으름

[21절]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사람은 살아가면서 마음으로 많은 계획을 세운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즉흥적으로 하지 말고 세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이 무슨 일을 계획한다고 그 일이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예상치 못하는 여러 장애물들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으로 세운 여러 계획들 중에 하나님의 뜻에 합한 선한 것들만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우리의 어떤 계획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16:1은,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 말했고, 또 잠언16:9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말했다.

물론 어떤 때에는 사람의 악한 계획도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가룟 유다는 3년 동안 따르며 섬겼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은 30 때문에 배반했고 유대 지도자들은 계획한 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으시게 했다. 그러나 그런 경우들도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 되었다. 세상의 모든 택자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 이루어졌고, 또 그가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의 신성(神性)과 속죄사역이 확증되었다. 잠언 16:4는,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는 사람들의 악한 일들까지도 섭리하셔서 그의 선한 뜻을 이루신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2절] 사람은 그 인자함으로 남에게 사모함을 받느니라.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사람은 그 인자함으로 남에게 사모함을 받는다. ‘남에게 사모함을 받는다’는 원어(타아와 )는 ‘사모함을 받는 것, 영광(ornament)’(BDB) 혹은 ‘사모하는 것, 사모할 만한 것’(KJV, NASB, NIV)이라는 뜻이다. 인자함은 사람의 좋은 인격성의 대표적인 덕이다. 그것은 친절하고 호의적이며 너그럽고 남을 불쌍히 여기고 인정이 있음을 말한다.

그것에 반대되는 성품은 무정하고 냉정하고 이해심이 없고 무관심하고 이기적이며 거칠고 가혹하며 너무 비평적인 것이다. 사람의 인격의 고상함과 아름다움은 그의 인자한 성품에 있다.

또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낫다. 거짓말은 심히 나쁜 것이다. 그것은 모든 악의 시작이다. 에덴 동산에서 뱀은 거짓말로 하와를 범죄케 했다. 사탄의 거짓말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함을 부정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이단 사상이 들어오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무너진다. 거짓말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회개는 죄의 진실한 고백에서 시작된다. 거짓말하는 자는 사람간에도 참 친구가 될 수 없다. 거짓말하는 자는 가난한 자보다도 못한 자이다. 사람이 가난한 것은 악이 아니지만, 거짓말하는 것은 큰 악이다.

우리는 인자함과 진실함을 가져야 한다. 이 두 덕성은 사람들에게 매우 귀하고 중요한 성품이다. 잠언 3:3-4는,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말하였고, 또 미가 6:8은,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23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의 창조자요 섭리자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자이시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사람이 알아야 할 첫 번째 지식이며 사람이 행해야 할 첫 번째의 마땅한 의무이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세상에 살면서 창조자요 섭리자인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가장 큰 무지요 가장 큰 불행이며 죄악이다.

피조물인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며 섬겨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뿐 아니라, 또한 큰 유익이 있는 일이다. 

첫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한다. 사람이 죽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과 법도를 어기고 범죄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고 결코 죽지 않으신다. 하나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 영원한 생명의 복을 누린다. 다윗은 시편 36:9에서 생명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2:13에서 “내 백성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렸다”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7:3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는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둘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평안을 얻는 길이다. 평안은 마음의 평안, 몸의 건강, 물질적 여유, 환경적 평안을 다 포함한다. ‘[족하게] 지낸다’는 원어(린 )는 ‘밤을 지낸다, 거한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심신의 만족함으로 밤을 지내며 쉬며 평안히 거할 것이며, 또 재앙을 만나지 않을 것이다(사 48:17-18; 딤전 4:8). [24절]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14)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14) ‘넣는다’는 원어(타만 )는 ‘감추다, 숨기다’는 뜻이다. ‘그릇’이라는 원어(찰라캇 )는, 헬라어 70인역이나 유대인 주석가들은 ‘품’(bosom)으로, 또 주후 2세기의 헬라어역들(아퀼라역, 시마쿠스역)은 ‘겨드랑이’로 번역하였고, 옛날 영어성경(KJV)도 ‘품’으로 번역했으나, 권위 있는 히브리어사전들(BDB, KB)에 의하면, 그 단어는 ‘그릇’이라는 뜻이며 현대영어성경들(NASB, NIV)은 ‘그릇’으로 번역하였다.

게으른 사람은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려 하지 않는다. 먹을 것이 앞에 있어도 먹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점점 일하기를 싫어하는 것 같고 음식 만들고 집안일 하는 것도 번거롭게 여기는 것 같다. 잠언 12:27은,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게으름을 책망하신다. 우리는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게으른 자는 가난해지고 그 부리는 자에게 고통이 되고 남에게 부림을 받는다. 잠언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잠언 19:15,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나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잠언 10:26,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 잠언 12:24,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 데살로니가후서 3:10, 12,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작정을 믿으며 그의 뜻 이루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사람은 그 인자함으로 남에게 사모함을 받으며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낫다. 우리는 인자하며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않는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하는 것은 사람의 마땅한 일이며 평안과 건강과 영생의 길이다.

넷째로,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 한다. 우리는 믿는 일이나 세상일에나 부지런한 자가 되어야 한다.

25-29절, 견책, 불효, 지식, 공의, 채찍

[25절] 거만한 자를 때리라. 그리하면 어리석은 자도 경성하리라. 명철한 자를 견책하라. 그리하면 그가 지식을 얻으리라.

잠언 21:11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다. “거만한 자가 벌을 받으면 어리석은 자는 경성하겠고 지혜로운 자가 교훈을 받으면 지식이 더하리라.” 본문은 세 종류의 사람들을 들어 징계의 유익에 대해 말한다.

첫째로, 거만한 자(레츠 )는 남을 조롱하고 비웃는 자를 말한다. 그는 마음이 악으로 굳어진 자이다. 본문은 그런 사람을 때리라고 말한다. 잠언 9:7-8은,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을 잡히느니라.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고 말했으나, 그것은 개인적인 책망을 하지 말라는 교훈이며, 본문에서 거만한 자를 때리라는 교훈은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사회에서의 공적 징벌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적 권징에 해당된다. 거만한 자는 징벌을 받아야 한다.

둘째로, 어리석은 자(페시 )는 단순하고 순진한 자를 가리킨다. 그는 분별력이 없어 시시비비를 가리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말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자이다. 그러나 그는 거만한 자가 징계받는 것을 볼 때 두려움을 갖고 악을 피하며 조심하게 될 것이다.

셋째로, 명철한 자(나본 )는 깨달음을 가진 자를 가리킨다. 그런 자도 책망받을 잘못이나 실수를 할 때가 있겠으나, 그는 책망을 받을 때 지식을 얻는다. 그는 매가 아니고 말로 해도 자신의 부족을 고칠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9:8-9는,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고 말했다.

[26절]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쫓아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부르는 자식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하셨다(출 20:12). 성경은 부모뿐 아니라, 세상의 통치자나 선생이나 노인들을 존중하고 공경하라고 가르친다. 사람은 부모를 공경하고, 죄 되는 일이 아닌 한 순종해야 한다. 나쁜 자녀는 부모를 구박하고 쫓아내며, 나쁜 국민은 나라의 통치자들을 무시하고 반란을 일으키며, 나쁜 학생은 선생을 무시하고 대항한다. 또 나쁜 교인들은 인도자들을 무시하고 거역하고 배척한다.

본문은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쫓아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부르는 자식이니라”고 말한다. 사람은 행한 대로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선을 행하는 자에게 존귀와 영광을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 수치와 욕을 주신다.

부모를 구박하고 쫓아내는 것은 매우 큰 죄로 간주된다. 구약 율법은 부모를 치거나 저주하는 자를 죽이라고 명한다(출 21:15, 17). 신명기 21:18-21은 부모의 말을 순종치 않고 그 책망을 듣지 않고 술 취하고 방탕하고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을 성읍 장로들에게 말해 성읍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이고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렇게 악을 제하게 하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로 듣고 두려워하게 하라고 하였다. 또 잠언30:17은,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말하였다.

[27절]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15)

‘내 아들아’라는 말은 많은 사랑과 관심을 나타낸다. ‘지식의 말씀에 서 떠나게 하는 교훈’이란 바르고 선한 지식과 멀어지게 하는 잘못된 교훈을 가리킨다. 참 교훈은 바르고 선한 지식을 주는 유익한 교훈이지만,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은 유익이 없는 교훈이다. 그 <15) 근래의 영어성경들(NASB, NIV)은 이 본문을, “내 아들아, 교훈을 듣지말라. 그러면 네가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되리라”고 번역하지만, 옛날 영어성경(KJV)과 한글개역 본문이 원문의 뜻이라고 본다.>것은 사람을 파멸시키는 거짓 교사들의 교훈이다.

주께서는 말세에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다고 예언하셨다(마 24:11). 사도 바울은 그들이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을 전하며 다른 영을 받게 하는 자들이며(고후 11:4), 사탄의 일꾼들이며(고후 11:14-15), 또 그들의 사상은 저주받을 사상이며(갈 1:8),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이며(딤전 4:1), 바른 교훈과 진리에서 떠난 허탄한 이야기들이라고 표현하였다(딤후 4:3-4). 사도 요한도 그것은 하나님의 영의 교훈이 아니라고 말하였다(요일 4:1).

우리는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들을 듣지 말아야 한다. 무지한 교훈을 들으면 생각과 지식이 잘못되어 잘못된 말과 행동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 과거에는 들었을지라도 앞으로는 듣지 말아야 하고, 또 지금까지 듣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듣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오직 바른 교훈, 곧 역사적 기독교 신앙에 합한 성경적 교훈만 들어야 한다. 디모데후서 1: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

[28절] 망령된 증인은 공의를 업신여기고 악인의 입은 죄악을 삼키느니라.

‘망령된’이라는 원어(벨리야알 )는 ‘무가치한, 사악한, 비열한’이라는 뜻이다. 망령된 증인은 공의를 업신여긴다. 진실한 증인은 사실을 증거하며, 진실을 생명같이 여기며,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며, 시시비비를 가린다. 그러나 사악하고 비열한 증인은 진실을 업신여기고, 성경적으로, 이성적으로, 양심적으로 옳은 것을 무시한다.

또 악인의 입은 죄악을 삼킨다. 악인의 입은 악한 사람의 말을 가리킨다. 죄악을 ‘삼킨다’(빌라 )는 표현은 죄악을 취하고 택하고 행한다는 뜻이다(BDB). 악한 증인은 공의를 업신여길 뿐 아니라, 죄악된 말, 즉 부정하고 불법한 말, 옳지 않고 정당치 않은 말, 또 완전한 거짓말이든지 반쯤 거짓말이든지 간에 거짓된 말을 잘한다. 그러나 사람의 말 한마디는 참으로 중요하다. 사람의 예와 아니오 한마디가 다른 사람을 무죄자로 만들기도 하고 유죄자로 만들기도 한다. 사람의 살고 죽는 것이 말 한마디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고(출 20:16), 또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모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셨다(출 23:1-3). 주 예수께서도,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2:36-37).

[29절]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

‘거만한 자’는 마음이 높아서 남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자, 남의 충고를 듣기 싫어하는 자, 자기의 실수를 인정치 않는 자이다. 그와 반대로, 온유하고 겸손한 자는 자신의 부족을 아는 자, 남의 충고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남의 충고를 겸손히 듣는 자, 언제든지 자기 실수를 인정하고 고치려 하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온유하고 겸손하고 선한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주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케실 )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거만하고 악한 자를 가리킨다. 잠언에 보면, 그는 참된 지식을 미워하고(잠 1:22) 명철을 기뻐하지 않으며(잠 18:1) 악을 행하는 것으로 낙을 삼는 자이다(잠10:23). 그의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하고(잠 12:23) 그 입은 미련한 것을 쏟으며(잠 15:2) 그는 미련한 것을 먹고산다(잠 15:14).

본문은 심판이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며 채찍이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라고 말한다. 거만한 자와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세상에서도 벌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지만, 결코 죄인을 죄 없다 하지 않으신다(출 34:6-7). 그러나 온유하고 겸손한 자는 잘못이 있어도 용서를 받는다. 왜냐하면 그는 남의 충고와 책망을 달게 듣고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려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부족과 실수가 없는 자는 없다. 단지, 그것을 인정하고 고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거만한 자를 때리면 어리석은 자도 경성할 것이며, 명철한 자를 견책하면 그가 지식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죄인이었음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함으로 지혜롭고 명철한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아버지를 구박하고 어머니를 쫓아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부르는 자식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계명이고 인간 사회의 질서를 위한 매우 중요한 기본적인 규칙이다. 또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장수와 평안과 형통의 복이 약속된 복된 일이다.

셋째로, 우리는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과 같이, 말들의 홍수에 사는 우리는 듣는 것을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바르고 선한 성경적 교훈은 유익을 주지만, 바르지 못한 교훈들은 유익 대신에 큰 해를 준다. 그것들은 사람들을 멸망으로 이끈다.

넷째로, 망령된 증인은 공의를 업신여기고 악인의 입은 죄악을 삼킨다. 우리는 공의를 업신여기는 망령된 증인, 죄악을 내뱉는 악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실만을 증거하는 진실한 증인이 되어야 하고 선과 의를 생명같이 여겨야 하고 죄악을 묵인하거나 내뱉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로,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해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해 예비된 것이다. 우리는 거만하고 악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공의로우신 재판관이신 하나님께서는 교만과 악을 반드시 벌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겸손하고 선한 자가 되어야 한다.

===20장: 술, 잠, 말

1-4절, 술, 왕의 진노, 다툼, 게으름

[1절]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무릇 이에 미혹되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느니라.

성경시대에 술은 주로 ‘포도주’(야인 )이다. 물론 ‘독주’(쉐카르)도 있었다. 본문은 포도주나 독주가 사람을 거만케 하고 떠들게 하는 유익이 없는 음식이라고 말한다. ‘거만케 하는 것’이라는 원어(레츠 )는 ‘경멸케 하는 것’(BDB), ‘조소케 하는 것’(NASB, NIV)이라는 뜻이다. 술은 사람의 기분을 들뜨게 만들며 남을 경멸하고 조소하게 하고 허풍과 허세를 부리게 만든다.

술에 미혹되는 자는 지혜가 없다. ‘미혹되는 자’라는 원어(쇼게 )는 ‘취하는 자’(NASB), ‘곁길로 가는 자’(NIV)라는 뜻이다(BDB). 성경이 술을 한두 잔 마시는 것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고 술 취하는 것을 정죄하는 것이지만, 사람이 술 취하면 이성과 양심의 통제력을 잃어버리고 실수하고 범죄하게 되기 때문에 술을 경계하는 것이다.

의인 노아라도 술취함으로 그 장막에서 벌거벗는 실수를 하였고(창9:20-27), 의로운 롯도 술취함으로 근친상간의 부끄러운 죄를 범했다(창 19:30-38). 실상, 술은 유익이 별로 없다. 술은 사람으로 실수하며 범죄케 하고 자기 몸에 해를 주며 개인과 가정에 경제적 손실을 가져오게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고 교훈하였고(엡5:18), 감독과 집사의 자격으로 ‘술을 즐기지 않음’과 ‘술에 인박이지 않음’을 들었고(딤전 3:3, 8; 딛 1:7), 또 늙은 여자들에게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라”고 교훈하였다(딛 2:3). 또 그는 술 취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하였다(고전 6:9-10; 갈 5:19-21).

[2절] 왕의 진노는 사자의 부르짖음 같으니 그를 노하게 하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해하는[잃게 하는] 것이니라.

왕의 진노는 사자의 부르짖음[으르렁거림]과 같다. 왕은 한 나라의 주권자요 우두머리이다. ‘진노’라는 원어(에마 )는 ‘두려움’이라는 뜻이다. 왕은 두려운 자이다. 그가 진노하면 백성이 두려워할 것이다. 왕이 언제 진노하는가? 백성이나 신하들이 악을 행하거나 거짓되이 행할 때, 특히 반역을 꾀할 때 그러할 것이다. 동물의 왕인 사자의 부르짖음이 짐승들에게 두려움을 주듯이, 왕이 진노하면 백성들, 특히 악하고 거짓된 자들과 반역자들이 크게 두려워할 것이다.

본문은 또, “그를 노하게 하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질서를 명하셨다. 자녀가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해야 한다. 특히, 왕은 칼을 가진 자이다. 그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할 수 있는 자이다. 그러므로 백성이 왕을 대적하고 노하게 하는 것은 자기 생명을 잃게 하는 어리석은 일이다.

하물며, 만왕의 왕이시며 온 우주의 대주재자이신 하나님께서 노하시면 어떠하겠는가. 나훔 1:2, 6은,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거스르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도다”라고 말하였다. 로마서 1:18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하고 불의한 자들에게 진노하신다.

[3절]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사람들은 교만 때문에 다툰다. 잠언 13:10,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또, 사람들은 욕심 때문에, 즉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육신적 사랑의 욕심 때문에 다툰다. 잠언 28:25, “마음이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야고보서 4:1-2,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또, 사람들은 미움 때문에 다툰다.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이상과 같이, 인간적, 세상적 동기들에서 나온 다툼들은 악한 일이며 아무 유익이 없다.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킨다.

본문은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온유와 겸손의 덕을 가질 때, 또 세상적인 욕심을 버릴 때, 또 이웃에 대한 참 사랑을 가질 때 다툼을 멀리할 수 있다. 참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다. 성도는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고 사랑할 수 있다.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의 지혜요 그의 영광이다. 모세는 모든 사람보다 온유한 자이었다(민 12:3). 예수께서는 온유하시다. 그는 친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성령의 인도하심의 열매는 사랑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함이다(갈 5:22-23). 교회의 직분자들은 온유하고 다투지 말아야 한다. 디모데전서 3:3, (장로의 자격) “오직 관용하며[온유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디모데후서 2:24,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4절]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

‘가을에’라는 원어(메코레프 )는, ‘추위 때문에’(KJV)라는 뜻보다, ‘가을이 지난 후’(NASB) 혹은 ‘추수가 지난 후’(BDB)라는 뜻이라고 본다. 유대 땅에는 가을에, 씨를 뿌리기에 적합한 이른비가 내리고 그런 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린다. 밭을 가는 것은 땀을 흘리는 수고로운 일이다. 게으른 자는 일해야 할 시기에 일하지 않는다. 잠언 10:5는, “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나 추수 때에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니라”고 말하고, 잠언 19:24는,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고 말하였다.

본문은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수고하여 심은 것이 없으니 거두고 기뻐할 것이 없다. 세상 일은 무슨 일이든지 부지런하게 행해야 유익하고 소득도 생긴다. 잠언 10:4,“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잠언 13:4,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 잠언 19:15,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나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신앙생활의 일도 비슷하다. 로마서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사람이 경건의 훈련에 힘쓰고 성경 읽고 기도하기에 힘쓰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선을 행하면 인격이 변화되고 덕성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릴 것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4:8에서,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말하였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며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요 무릇 이에 미혹되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다. 완전금주(禁酒)는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유익하고 좋은 전통이다.

둘째로, 왕의 진노는 사자의 부르짖음 같으며 그를 노하게 하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한다. 우리는 통치자들을 공경하고 복종해야 한다.

셋째로,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킨다. 우리는 다툼을 멀리하고 온유와 겸손으로 행해야 한다.

넷째로,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않으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범사에 부지런한 자가 되어야 한다.

5-8절, 모략, 충성, 의인, 왕의 눈

[5절]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계획, 생각]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

‘모략’이라는 원어(에차 )는 ‘의논, 계획’이라는 뜻이다.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계획을 세우고 행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계획을 잘 세워 일을 성취시킨다. 잠언 11:14, “도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잠언 15:22,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파하고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잠언 20:18, “무릇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 모략을 베풀고 전쟁할지니라.” 잠언 24:6,“너는 모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느니라.”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 있는 생각과 계획은 깊은 물과 같다. 그것은 감추어 있어 쉽게 생각해내기 어렵다. 잠언 18:4,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 깊은 물을 길으려면 두레박과 긴 줄과 약간의 요령이 필요하다.

본문은,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고 말한다. 명철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혜와 총명을 얻은 자이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필요한 지혜와 명철을 주신다. 성령께서는 지혜와 총명의 영이시며 모략(에차 )의 영이시다. 이사야 11:2,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나며 의와 선과 거룩의 길을 행할 때 더욱 총명을 얻는다. 명철한 자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좋은 계획을 생각해낸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맑은 정신, 깨닫는 지혜, 바른 판단력, 지혜롭고 사려 깊은 생각들을 주셔서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있었던 요셉과 다니엘이 그러하였다(창 41:38; 단 4:9; 5:11).

[6절] 많은 사람은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남에게 선을 베풀고 구제하고 긍휼과 사랑을 베푸는 것을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은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자기의 선함과 인자함을 자랑하려고 한다. 그것은 자신의 선함과 구제 행위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고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외식적 선(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주께서는 외식적 선행을 경계하셨다. 마태복음 6:1-4,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구제]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드러나게] 갚으시리라.” 또 주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과 위선을 책망하셨다(마 23:23-28).

본문은 또,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라고 말한다. ‘충성된 자’는 생각과 말과 행실이 일치하는 자, 참된 믿음이 있고 또 믿을 만한 자를 가리킨다. 성령의 열매들 중 하나는 충성이다(갈 5:22).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는 사도 바울과 생각과 뜻을 같이해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은 충성된 일꾼이었다(빌 2:20, 30). 사도요한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권면하였다(요일 3:18). 그러나 이렇게 선한 행위로 자신을 증거하는 충성된 성도와 일꾼은 드문 것 같다.

[7절]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

‘완전히’라는 원어(베숨모 )는 ‘그의 완전함에’라는 의미이다. 구약에서 ‘완전함’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진심으로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 도덕적으로 큰 흠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완전하게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행하는 자이다. 그는 십계명을 힘써 지킨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성경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바르고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산다. 노아는 완전한 자이었고(창 6:9) 욥도 그러했다(욥1:1). 다니엘도 흠이 없는 자이었다(단 6:4). 또 그런 사람은 범죄했을 때 즉시 회개한다. 구약시대에는 사람이 회개할 때 번제와 화목제와 속죄제를 하나님께 드렸지만, 신약시대에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씻음을 받는다.

본문은, “완전하게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고 말한다. 부모의 신앙과 선행은 자신들에게뿐 아니라, 또한 그들의 자손들에게도 복이 된다. 출애굽기 20:5-6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미워하고 그의 계명을 어기는 자에게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3, 4대까지 죄를 갚으시지만,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수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신명기 28:4,18도 하나님께서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자녀에게 복을 주실 것이나, 그의 계명을 어기는 자에게는 자녀에게 화를 내리실 것이라고 말했다. 시편 37:25-26은,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라고 말했다.

[8절] 심판 자리에 앉은 왕은 그 눈으로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하느니라.

왕은 심판 자리에 앉은 자이다.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을 때,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말하였다(왕상 3:9). 왕은 재판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다윗 같은 경건하고 의로운 왕은 백성들을 바르게 다스림으로써 공의를 세웠다. 사무엘하 8:15,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공(公)과 의(義)를 행할새.” 심판 자리에 앉은 왕은 그 눈으로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한다. ‘그의 눈으로’라는 말은 ‘그의 의로운 관찰과 통찰과 판단의 눈으로, 고의적인 악을 분별하고 미워하는 눈으로’라는 뜻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의로운 재판장은 의와 불의, 선과 악을 분별하고 모든 악을 징벌하며 흩어지게 한다. 악은 그 앞에 설 수 없고 다 흩어지고 만다.

하나님께서는 왕중왕, 즉 왕들 중 왕이시며 공의로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통치자이시며 온 세상의 재판장이시다. 시편 7: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의로운 왕으로 오셨다. 예레미야 23: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요한계시록 19:11,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사람이 악을 버려야 할 이유는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에 있는 모든 악인을 다 엄히, 즉 그의 엄격한 공의로 징벌하시고 멸하실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사람의 마음의 계획은 깊은 물 같으나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낸다. 우리는 명철한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많은 사람은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지만, 충성된 자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은밀히 선을 행하고 범사에 충성해야 한다.

셋째로, 완전하게 행하는 자가 의인이며 그 후손에게 복이 있다. 예수님을 믿고 죄를 떠나고 의와 선을 행하는 자들과 그 자녀들은 복되다.

넷째로, 심판 자리에 앉은 왕은 그 눈으로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 재판관들을 두려워하고 모든 악을 버려야 한다.

9-12절, 정결, 정직, 행동, 귀와 눈

[9절] 내가 내 마음을 정(淨)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

사람은 부족한 존재이다. 마음이 완전히 깨끗한 자는 없고 죄에서 완전히 떠나 있는 자도 없다. 사람은 누구나 죄성과 연약성을 가지고 있고 실수와 연약함이 있다. 사람의 본성은 전적으로 부패되어 있고 무능력해져 있다. 그러므로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고백했다(시 51:5).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씀하셨고(렘 17:9), 또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렘 13:23).

사람은 중생하고 구원 얻은 후에도 본성의 죄성을 가지고 있다. 로마서 7:18-19, 25,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우리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밖에 없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의(義)이시다. 또 우리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에만 죄를 이길 수 있다. 로마서 8:13-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갈라디아서 5:16,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0절] 한결 같지 않은 저울추와 말[큰 통]은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원문을 직역하면, “돌과 돌, 에바와 에바, 이 둘은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니라.” 옛날에는 돌을 저울추로 사용했다. 에바는 큰 통이다. 1에바는 약 22리터이며, 우리나라에서 예전에 쓰던 말보다 좀더 큰 단위이다. 우리나라의 1말(10되)은 약 18리터이다. ‘돌과 돌, 에바와 에바’라는 표현은 서로 다른 저울추와 말을 뜻한다고 본다. 그것은 저울추를 속이고 말을 속이는 것, 즉 공정치 않은 상거래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서 우리가 공정한 상거래를 할 것을 명하셨다. 레위기 19:35-36, “너희는 재판에든지 도량형에든지 불의를 행치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신명기 25:13-15, “너는 주머니에 같지 않은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같지 않은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오직 십분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십분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잠언도 이 진리를 강조한다. 잠언 11:1,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잠언 16:11, “공평한 간칭과 명칭은 여호와의 것이요 주머니 속의 추돌들도 다 그의 지으신 것이니라.” 잠언 20:23, “한결 같지 않은 저울추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니라.”

그러나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사회에는 정직하지 않게 장사하는 자들이 많았던 것 같다. 아모스 8:5, “[그들이] 에바를 작게 하여[하며] 세겔을 크게 하며 거짓 저울로 속이며.” 미가 6:10, “악인의 집에 오히려. . .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가 있느냐?” 에스겔 45:10, “너희는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밧을 쓸지니.”

[11절] 비록 아이라도 그 동작으로 자기의 품행의 청결하며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

사람은 도덕적 존재이기 때문에, 어린아이라도 자신의 행위의 정직과 깨끗함을 드러내며 자신이 잘못이 없고 거짓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어린아이에게도 양심과 도덕적 분별력이 있고 이성적 판단이 있기때문이다. 물론, 어떤 아이는 가정에서 바른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성격이 비뚤어져서 말과 행실이 나쁘고 부모에게 또 사회에 대해 반항하기도 하지만, 믿음의 가정의 아이들 속에는 상당한 도덕성이 있다.

어린아이들에게도 도덕성이 있고 자신의 정결함과 정직함을 나타냄을 볼 수 있다. 하물며 어른인 우리, 더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죄씻음과 새 생명을 얻은 성도인 우리는 얼마나 더 도덕적인 삶, 얼마나 더 깨끗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인격적 미성숙자인 어린아이들도 그렇다면, 어른이며 성도인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는가?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사람은 도덕적 존재이지만, 타락한 인간 본성 속에는 죄악된 성질이 있고 그 죄악성의 중심에 욕심이 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1:15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고 말했다. 사람의 욕심은 육신의 정욕, 물질적 탐욕 즉 돈에 대한 사랑, 그리고 남보다 위에 서려는 명예욕을 포함한다. 이런 욕심에서 미움, 시기,질투,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속임, 거짓말 등의 온갖 죄악이 나온다. 사회의 죄악은 대체로 아이들의 탓이 아니고 어른들의 탓이다. 어른들은 도덕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지만, 그 책임을 저버리고 온갖 죄를 범한다. 심지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조차도 아이들에게 도덕적 모범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12절]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의 지으신 것이니라.

우리는 우리의 눈과 귀를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우리의 시력과 청력 지켜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또 우리에게 마음의 눈과 마음의 귀도 주셨다. 주께서는 무리에게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다(마 13:9). 그것은 마음의 귀를 가리켰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심령의 눈과 귀를 열기도 하시고 닫기도 하신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에베소 교인들의 마음의 눈을 밝히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했다(엡 1:17-19).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의 눈과 귀를 항상 열어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눈과 귀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므로, 우리는 이 기관들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용도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 우리의 눈은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책이나 유익한 책들은 보아야 하지만, 허탄하거나 우리의 심령을 더럽히는 죄악된 그림이나 글들은 보지 말아야 한다. 또 우리의 귀는 듣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말씀, 성경적 설교, 유익한 말들은 들어야 하지만, 이단사설, 잘못된 교훈들, 거짓말, 헛소문, 죄악되고 허탄한 잡담은 듣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눈과 우리의 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의 모든 부분을 다 보시고 다 들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시편 94:9,“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말과 행위를 보시고 들으시고 판단하시고 선악간에 보응하신다. 그는 우리의 선행을 보시고 기뻐하시고 복을 주시며, 또한 우리의 악행을 보시고 슬퍼하시고 벌을 주신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내가 내 마음을 정결하게 했다, 내 죄를 깨끗하게 했다고 말할 자는 없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주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만 의지하고 성령의 인도하심만 구해야 한다.

둘째로, 한결 같지 않은 저울추와 말은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 우리는 상거래뿐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진실하고 정직하게 행해야 한다.

셋째로, 아이라도 그 동작으로 자기의 품행의 청결하며 정직한 여부를 나타낸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은 경건하고 바르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넷째로,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의 지으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을 보시고 들으심을 알고, 그것들을 지켜주시기를 기도하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하게만 사용해야 한다.

13-16절, 잠, 거짓말, 지식의 입술, 빚 보증

[13절]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네 눈을 뜨라. 그리하면 양식에 족하리라.

잠은 사람의 휴식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다. 잠에는 피로 회복의 비밀이 있다. 몸 건강의 한 중요한 방법은 잠을 충분히 자는 것이다. 수면 시간은 사람의 체질과 건강상태에 따라 또 하루의 일의 성격과 양에 따라 다를 것이지만, 최소 5시간 이상 8시간 미만일 것이다. 수면 부족은 병의 원인이 되므로 잠은 충분히 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잠자기를 좋아해서는 안 된다. 잠을 너무 많이 자는 것은 게으름의 표가 된다. 게으른 자는 잠자기를 좋아하고 그 결과로 가난해진다. 사람은 사업도, 직장도, 집안 일도, 공부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잠을 줄이고 자기의 일에 부지런해야 한다.

잠언 6:6-11,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잠언 19:15,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나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영적으로도 그러하다. 성도는 영적인 잠을 자서는 안 된다. 성도가 돈과 세상과 쾌락을 사랑하는 영적인 잠을 자면 믿음을 잃고 심령이 병들고 약해진다.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교회에 모이기를 힘써야 하고 세월을 아끼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의와 선을 실천해야 한다(엡 5:15-17).

[14절] 사는 자가 물건이 좋지 못하다, 좋지 못하다 하다가 돌아간 후에는 자랑하느니라.

물건을 살 때 물건이 좋지 못하다, 좋지 못하다고 말하다가 돌아간 후에 자랑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보통 생활방식이다. 그들은 어떤 물건을 살 때 물건값을 깎아 보려고 그 물건이 좋지 못하다고 거짓말을 쉽게 하고 나중에 자랑하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적인 이익을 위해 스스로 모순된 말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거짓말이다. 사람들은 자기 유익을 위해 이런 거짓말을 쉽게 한다.

그러나 성도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성도는 물질적 유익 중심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는 좋은 것은 좋다고 말하고 안 좋은 것은 안 좋다고 말해야 한다. 물건을 파는 사람도 정직하고 진실하게 팔고, 물건을 사는 사람도 그것을 진실하게 평가하고 말하며 사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사는 성도는 세상 사람들처럼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성도는 범사에 진실하게 행해야 하고 또 사랑을 따라 행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고 말했다(엡 4:25). 또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랑의 성격에 대해 교훈했다. 그는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말했다(고전 13:5-6). 우리는 진실하게 행하고 또 사랑을 따라 행해야 한다.

[15절]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페니님 )[산호](BDB, KB)도 많거니와 지혜로운 입술(시프세 다아스 )[지식의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니라.

‘지식의 입술’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지식을 말하며 지식을 전하는 입술이라는 뜻이다. 본문은 지식의 가치에 대해 말한다. 지식의 가치는 금과 진주나 산호보다 더욱 크다. 바른 지식은 참으로 보배이다. 그러므로 잠언 8:10은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고 말한다.

바른 지식이 무엇인가? 바른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을 말한다. 그것은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시고 우주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며, 그의 창조 세계에 대한 지식이며, 범죄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심판과 구원에 대한 지식이며, 신약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람으로 오신 것과 그의 기적 행하심과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루신 대속 사역과 그의 부활과 승천과 재림과,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음과, 죽은 영혼이 다시 살아남과, 성화와, 죽은 자들의 부활, 천국과 영생, 구원 얻은 성도들의 연합인 교회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경건하고 겸손하고 바르고 선하고 덕스럽고 진실하게 살아야 하는 것 등에 관한 지식이다. 즉 교리와 윤리의 지식이다. 그것이 성경의 내용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이 지식과 이 지식에 따른 인격성과 도덕성의 가치는 금과 은과 보석의 가치, 곧 이 세상의 물질적 가치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크다.

[16절] 타인(자르 )[낯선 자]을 위하여 보증이 된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16)의 보증이 된 자는 그 몸을 볼모잡힐지니라.

잠언 27:13도 동일한 말씀이다. 이 교훈이 중요하므로 두 번 기록했다고 본다. 본문은 낯선 자를 위해 보증이 되면, 그 옷도 빼앗기고 그 몸도 종이 된다는 뜻이다. 즉 사람은 잘못된 보증을 서면 큰 손실과 낭패를 당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제할 마음과 힘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남의 보증이 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갚을 힘이나 마음이 없으면서 남의 보증이 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동이다.

잠언 6:1-5, “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16) ‘외인들’이라는 원어(노크리얌 )는 전통(마소라)본문에 ‘낯선 자들’(노크림 )(Syr, Vg, NASB)이라고 쓰여 있으나(케팁) ‘낯선 여자,즉 음녀’(노크리야 )(Targ, KJV, NIV)라고 읽기도 한다(케레).> 잡히게 되었느니라. 내 아들아, 네가 네 이웃의 손에 빠졌은즉 이같이 하라. 너는 곧 가서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여 스스로 구원하되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고 노루가 사냥군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잠언 11:15,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 잠언17:18,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 잠언 22:26-27, “너는 사람으로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 만일 갚을 것이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 네가 어찌 그리하겠느냐?” 

남을 위해 재정 보증, 빚 보증을 서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지혜자는 그런 보증을 피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아야 가난하게 되지 않고 우리의 눈을 떠야 양식이 족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세상 일, 즉 직업의 일에도 충실해야 하고, 신앙생활의 일, 즉 성경 읽고 기도하며 공적 예배를 드리고 의와 선을 행하는 일에도 충실해야 한다.

둘째로, 사는 자는 물건이 좋지 못하다고 하다가 돌아간 후에는 자랑한다. 그러나 자기의 유익만 생각하고 상황 따라 쉽게 거짓말하는 것은 성도다운 행위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 바르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든지 쉽게 거짓말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로, 세상에는 금도 있고 진주도 많지만 지식의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이다. 우리는 지식의 가치를 깨닫고, 금은 보화를 구하지 말고 참된 지식을 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바르게 알아야 하고 또 구원과 현세의 삶과 내세에 대해서도 바르게 알아야 한다.

넷째로, 낯선 자를 위해 보증이 된 자는 큰 손실과 낭패를 당한다.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수는 있어도, 나중에 받기 위해 단순히 빌려 주는 것이나, 남을 위해, 그것도 잘 알지 못하는 자를 위해, 더욱이 자신이 갚을 힘도 없으면서 빚 보증을 서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17-20절, 속임, 의논, 한담, 불효

[17절] 속이고 취한 식물(레켐 솨케르 )[거짓의 떡]은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카차츠 )[자갈](BDB, KJV, NASB, NIV)가 가득하게 되리라.

거짓의 떡이란 모든 부당하고 불의한 소득, 예를 들어, 사기를 쳐 번돈, 점원이 물건이나 돈을 훔치는 것, 공금 횡령, 공적인 물건을 사적으로 쓰는 것, 돈을 빌리고 안 갚는 것, 헌금을 훔치는 것 등을 가리킨다. 그것은 더러운 이익, 불의하고 거짓된 이익이다.

성경은 장로의 자격을 가르칠 때 “더러운 이(利)[이익]를 탐하지 아니하는 자”라고 말하였고(딛 1:7), 또 집사의 자격도 “더러운 이(利)를 탐하지 아니하는 자”라고 말했다(딤전 3:8). 사도 베드로도 장로들에게 교훈하기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利)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라”고 말하였다(벧전 5:2).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 듯하다. 더러운 이익, 불의한 이익은 당장에는 이익이 되는 듯하다(잠 9:17). 그런 돈으로 좋은 음식도 먹고 좋은 옷도 사고 좋은 차와 집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에는 그 입에 자갈이 가득하게 되리라”고 본문은 말한다.

‘후에는’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징벌하실 때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얼마 동안 참으신다. 그 기간은 사람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기간이다. 그러나 얼마 후 입에 자갈이 가득하게 될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을 나타낸다. 사람이 의와 선을 행하면 평안을 누릴 것이지만, 불의와 거짓과 악을 행하면 재앙을 당할 것이다.

[18절] 무릇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 모략을 베풀고(비사크불로스)[(좋은) 조언을 받아] 전쟁할지니라.

‘경영’은 어떤 일을 구상하고 계획하는 것이다. ‘의논함’은 어떤 일의 목표와 진행 과정에 대해, 또 주의할 점에 대해 그 방면에 지식과 경험이 있거나 지혜와 선한 판단력이 있는 자들의 의견과 조언을 듣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에 먼저 그것을 구상하고 계획해야 하며, 또 그것을 위하여 지혜로운 의견과 조언이 필요하다. 지혜롭고 좋은 조언은 하나님의 말씀에 맞고 이성적 판단과 경험에서 나온 조언을 가리킨다. 진학이나 취직, 결혼 등 개인의 진로와 가정의 일과 사업의 일 같은 세상일이나 교회 일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잠언 15:22는,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파하고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고 말하였고, 또 잠언 11:14는, “도략[조언]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고 말했다.

특히 전쟁을 할 때 그러하다. 전쟁은 단지 군사력의 싸움이 아니고 무엇보다 머리 싸움이다. 그래서 본문은 “모략을 베풀고 전쟁할지니라”고 말한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지혜와 경험이 있는 참모들의 좋은 조언이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잠언 24:6은, “너는 모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느니라”고 말하였다.

영적 전쟁인 성도의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다. 그 전쟁에서 승리하려 면 성도는 좋은 조언이 필요하다. 그 조언은 성경책에 있다. 또 그들의 실제의 삶 속에서 성경의 조언을 시험하고 확인한 경건한 성도의 간증도 좋은 조언이 될 것이다. 좋은 조언은 승리의 삶에 도움이 된다.

[19절]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각 사람은 자기 일에 충실해야지 남의 집에 두루 다니는 것은 좋지 않다. ‘한담하는 자’는 말을 많이 하는 자, 말쟁이, 수다쟁이를 가리킨다. 사람이 남의 집에 두루 다니며 말을 많이 하게 되면 남을 비방하며 남의 험담이나 하고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자가 되기 쉽다. 그런 사람은 입이 가벼운 자이며 인격에 결함을 가진 자이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게 된다. 남의 비밀이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를 원치 않는 일, 자신의 약점이나 실수, 수치스런 일 등을 가리킨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사람은 입이 가벼우므로 남의 비밀을 누설하게 된다. 그것은 남의 인격과 명예를 해치는 나쁜 일이다. 사람은 교만한 마음이 있을 때 또 사랑과 화목의 마음이 부족할 때 그런 잘못을 한다.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로마서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화목]하라.”

그러므로 본문은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라고 말한다. ‘입술을 벌린 자’는 수다쟁이를 가리킨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을 자제하는 자가 되라고 교훈한다. 잠언 10:19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말한다. 말을 자제하는 것이 지혜이다. 성도가 수다쟁이와 사귀지 말아야 할 이유는 자신도 나쁜 영향을 받아 입이 가볍고 결함 있는 인격이 되어 남을 비난하는 죄에 동참하기 쉽기 때문이며, 또 어느 날 자신의 숨겨진 약점들도 그에 의해 다른 이들에게 알려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20절] 자기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그 등불이 유암[어두움] 중에 꺼짐을 당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의 제5계명에서 부모 공경을 명하셨다. 출애굽기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사도 바울은 부모 순종에 대해 교훈하였다. 에베소서 6: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그러므로 부모를 무시하고 욕하고 저주하고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이며 큰 죄를 범하는 자이다.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그 등불이 어두움 중에 꺼짐을 당할 것이다. ‘등불’은 번영과 형통, 곧 행복을 가리킨다. 제5계명의 말씀대로,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는 땅에서 잘되고 장수할 것이지만, 부모를 거역하고 저주하는 자녀는 자신의 행복을 빼앗길 것이다. 

악인의 등불은 꺼질 것이다. 잠언 13:9,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 잠언 24:20,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불효는 악한 일이며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다. 

부모 공경은 하나님의 뜻이요 명령이며, 부모를 저주하거나 치는 것은 사형에 처할 큰 죄악이다. 출애굽기 21:17,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출애굽기 21:15,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또 하나님께서는, 부모의 말을 순종하지 않고 그 책망을 듣지 않는 완악하고 술취하며 방탕한 사람을 성문앞에 성읍 장로들 앞으로 끌어내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이라고 모세를 통해 신명기 21장에서 명령하셨다(신 21:18-21). 또 잠언 30:17은,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말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속이고 취한 음식은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의 입에 자갈이 가득할 것이다. 우리는 더러운 이익을 구하지 말고 정직하고 진실하게 번 돈으로 살아야 한다. 잠언 16:8,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사람이 불의하게 번 돈은 그에게 결코 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화가 된다.

둘째로, 사람의 무슨 계획이든지 의논함으로 성취하기 때문에 전쟁을 하기 전에 전략적 토의를 많이 하고 전쟁해야 한다. 세상일들에서 경험자들의 좋은 조언을 듣는 것은 그 일들을 성공적으로 이루는 데 매우 필요하다. 특히 신앙생활에는 성경의 교훈과 조언과 권면이 매우 필요하다.

셋째로,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므로 우리는 그런 자와 사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자기 일에 충실해야 하고 가급적 다른 사람에 대한 말을 하지 말고 그런 자와 사귀지도 말아야 한다.

넷째로,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그 등불이 어두움중에 꺼질 것이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은 부모를 저주하는 자가 되지 말고 공경하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21-24절, 기업, 보복, 진실, 걸음

[21절]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하느니라.

‘처음에’라는 말은 어떤 일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때를 가리킨다. ‘속히 잡은’이라는 원어(메보켈렛 )는 쓰여진 본문대로 는(케팁) ‘탐욕으로 얻은’(BDB)이라는 뜻이다. ‘처음에 탐욕으로 얻은 산업’이란, 처음부터 정직하게 노력하여 이룬 산업이 아니고 탐욕을 가지고 불의한 방법으로 얻은 산업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을 보관하고 연구하고 사본을 만들었던 서기관들(이들을 마소라 학자들이라고 부름)은 이 단어를 ‘성급히 얻은’이라는 말(메보헬렛 )로 읽으라고 제안했다(케레). 그것이 고대 역본들(LXX, Syr, Targ, Vg)의 본문의 뜻이다. 주요 영어성경들(KJV, NASB,NIV)과 한글개역성경도 고대 역본들을 따랐다. ‘처음에 성급히 얻은 산업’이란, 처음부터 차근히 수고하며 이룬 산업이 아니고, 크게 수고하지 않고 우연하게, 쉽게 얻은 산업이라는 뜻일 것이다.

본문은, 처음부터 탐욕으로 얻은 산업 혹은 처음부터 우연히 쉽게 얻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시작은 그가 무엇을 얻은 것 같았으나, 결말이 복되지 않다는 뜻이다. 본문의 뜻이 어느 쪽이든지 다 뜻이 통한다. 처음부터 탐욕으로 얻은, 불의하게 얻은 산업은 결말이 복되지 않을 것이다. 잠언 10:2,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 도.” 잠언 13:11, “망령되이[헛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가느니라.” 잠언 20:17,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자갈]가 가득하게 되리라.” 혹은, 우연히 쉽게 얻은 산업도 역시 결말이 복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땀 흘려 얻은 산업이라야 복되다. 그런 산업이라야 잘 보존되고 관리될 것이다.

[22절]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본문은 개인적으로 보복하지 말라고 말한다. 주 예수께서도,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고 말씀하셨고, 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다(마 5:39, 44). 사도 바울도 로마서 12:17에서,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교훈하였고, 사도 베드로도 베드로전서 3:9에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고 교훈하였다.

우리는 하나님만 기다리며 바라고 의지해야 한다. 원수를 우리에게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주권적으로 섭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만 유지한다면, 하나님께서 는 원수의 악한 계획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우리로 이기게 하실 것이다. 신명기 32:35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보수(報酬)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때에 갚으리로다”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19에서,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교훈하였다. 경건한 다니엘은 하나님의 바로 이런 놀라운 구원을 체험한 자이었다(단 6:26-27).

물론, 우리는 교회적 권징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주께서는 교회적 권징과 절교(絶交)가 절차에 따라 이루어져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마18:15-19). 사도 바울도, 악을 행하며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교회에서 제명시키라고 말했고(고전 5:11-13), 바른 교훈을 순종치 않고 무질서하게 행하는 자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명하였다(살전 3:6, 14-15).

[23절] 한결 같지 않은 저울추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니라.

‘한결 같지 않은 저울추’는 장사하는 사람이 정상적인 저울추 외에 가지고 있는 저울추를 가리킨다. 그것은 속이는 저울에 사용될 것이다.

한결 같지 않은 저울추와 속이는 저울은 불의와 부정직과 속임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요 악한 것이다.

사람은 왜 불의하고 부정직하며 속이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 함이 없고 자기의 이익을 구하는 데만 생각과 마음을 두기 때문이다. 그것은 육신적, 세상적 욕심에서 나오고 또 거짓되고 악한 마음에서 나온다. 사람은 욕심과 악한 마음 때문에 다른 사람을 속인다.

하나님께서는 의롭고 정직한 삶을 명하셨다. 의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것이다(신 6:25). 의는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이며 그의 형상의 내용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의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미가 6:8,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사람은 생각과 판단, 말과 행동이 어떤 상황에서도 공의롭고 진실해야 한다. 특히 구원 얻은 성도들은 그러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 이해 관계나 감정에 따라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에베소서 4:22-24,“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5:8-9,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성령](전통사본)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로마서 6:13,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24절]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사람의 걸음은 사람의 행위와 삶을 가리킨다. 사람의 걸음이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는 말은 사람의 행위와 삶이 하나님의 작정대로 되고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와 간섭과 도우심 속에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잠언 16:9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말한다.그러므로 본문은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라고 말한다. ‘자기의 길’은 자신의 현재의 삶의 과정뿐 아니라, 미래의 과정도 가리킨다. 사람은 특히 자신의 앞길, 즉 자신의 미래가 평안할지, 잘되고 형통할지, 그렇지 않으면 고통과 고난이 있을지, 재앙이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잠언 16:1은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 말했다.

야곱은 자기 아내들 곧 외삼촌 라반의 딸들에게,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셨도다”라고 말하였다(창 31:6-7).

요셉은 형들이 자기를 애굽에 팔았으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제들과 친족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신 것이 며, 또 하나님께서 자신을 바로의 아비[보호자]를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와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다고 말하였다(창 45:3-8).

에스더서에 보면, 파사 왕 아하수에로의 가장 높은 신하인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고 유다 민족을 몰살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하나님께서는 모르드개와 유다 민족을 살리시고 하만을 죽게 하셨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 혹은 탐욕으로 얻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정당하게, 땀 흘리며 돈을 벌어야 하고 무슨 일이든지 먼저 지식과 경험을 쌓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보복하지 말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구원을 믿고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해야 한다.

셋째로, 한결 같지 않은 저울추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항상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넷째로, 사람의 걸음은 하나님께로서 말미암으며 사람은 자신의 미래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오직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만 경외하고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정직하게 살고 그의 계명들만 순종해야 한다.

25-27절, 성급한 서원, 지혜로운 왕, 영혼

[25절] 함부로[성급히] 이 물건을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물[올무]이 되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떤 물건을 거룩하다고 말하고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거나 하나님께 무엇을 서원하기 전에, 먼저 그것에 관해 깊이 생각하고 살피고 조사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잠언 29:20은,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고 말했고, 잠언 15:28은,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서원 혹은 서약한 것은 잘못된 내용이라도 지켜야 한다. 성경은 자신에게 해로운 서원이라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시편15:4, “[하나님의 성산(聖山)에 거할 자는]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 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전도서 5:4-6,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과 언약을 맺고 맹세했기 때문에 그들을 죽이지 못하였다. 그 일을 인해 이스라엘 회중은 족장들을 원망하기도 했다(수 9:14-15, 18). 사사 입다는 암몬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그의 집 문에서 나와 그를 영접하는 자를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약한 대로 자기 외동딸을 번제로 드렸다(삿 11:31-35).

[26절] 지혜로운 왕은 악인을 키질하며 타작하는 바퀴로 그 위에 굴리느니라.

‘지혜로운 왕’은 백성을 다스리는 통치자의 직무를 잘 수행하는 왕이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공의와 선을 실천하며 백성을 다스린다.

그는 그의 나라에서 악한 자들을 키질하고 타작하는 바퀴로 그들 위에 굴린다. ‘키질한다’는 말은 의인과 악인을 나눈다는 뜻이다. 타작하는 바퀴로 악인들 위에 굴리는 것도, 농부가 타작할 때 바퀴로 곡식 껍질을 부수고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듯이, 악인들의 악함을 응징하고 그들을 사회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을 말한다. 악이 제거되면 왕국은 평안하고 견고해질 것이다. 잠언 25:5,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 위(位)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

세속 국가는 의와 선이 시행됨으로 견고해진다. 의는 나라를 견고케 하고 영화롭게 한다. 잠언 29:4, “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 잠언 14:34,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 또 의의 내용이 사랑이므로, 선과 사랑의 실천도 나라를 견고하게 만든다. 잠언 20:28,“왕은 인자(仁慈)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 위(位)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 잠언 29:14,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원통함을 풀어주면] 그 위(位)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 모습인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불의와 미움이 있을 때 분쟁하지만, 의와 사랑이 있을 때 견고하게 세워질 것이다. 지혜로운 왕이 나라 안에서 악인들을 분리시키고 제거하듯이, 지혜로운 목사와 장로들은 교회 안에서 악인들을 권면하고 책망하며 회개치 않을 때 징벌한다. 그럴 때 교회는 든든히 설 것이다.

[27절]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영혼’이라는 원어(네솨마 )는 ‘호흡’이라는 뜻이며 본문에서는 생명의 호흡인 ‘영’을 가리켰다고 본다(BDB, KJV, NASB). 

사람의 영 혹은 심령은 하나님의 등불이다. 본문에서 ‘등불’은 지식의 빛을 가리키는 것 같다. 사람의 영은 마음의 눈이라 불린다. 마태복음 6:23,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에베소서 1:18,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사람의 영은 사람의 깊은 속을 살핀다. 고린도전서 2: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육신의 눈은 사람의 겉만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깊은 마음은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 사람의 깊은 생각과 감정과 의향은 그의 가족이나 친구라도 잘 알 수 없다. 오직 자신의 영만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의 눈이 밝아야 한다. 사람은 범죄하면 그 영의 눈이 어두워지고 죄를 회개하면 눈이 밝아진다. 사도행전 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요한계시록 3:17-18,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성급히 이 물건을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올무가 된다. 우리는 서원할 때 신중해야 하며 또 하나님 앞에서 서원한 것은 반드시 지키도록 해야 한다.

둘째로, 지혜로운 왕은 악인을 키질하며 타작하는 바퀴로 그 위에 굴린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혜로운 왕이시다. 그는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악인을 제하시고 의로 교회를 굳게 세우신다.

셋째로, 사람의 영은 여호와의 등불이며 그의 깊은 속을 살핀다. 우리는 영의 눈이 밝아 우리의 깊은 속을 살펴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향을 점검하고 항상 바르게 행해야 한다.

28-30절, 왕위, 사람의 영화, 매

[28절] 왕은 인자(仁慈)와 진리[진실]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 위(位)[왕위]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

왕은 백성의 인도자와 치리자로서 백성을 잘 인도하고 다스리는 것이 그 주된 임무이며 또 외세(外勢)의 침입을 잘 막아야 한다. 인자(仁慈, 케세드 )는 남에게 선을 베풀고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특히 약하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울함을 당하는 자를 돌아보는 마음이다. 또 진실(에메스 )은 겉과 속이 같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처음과 끝이 같고 믿을 만한 것을 가리킨다.

왕의 인자와 진실은 자신을 보호하고 또 그의 왕위를 견고케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왕을 지키시고 백성도 그 왕을 인정하고 그를 사랑하고 두려워하고 그를 복종하고 따르기 때문이다. 잠언 16:12는, “악을 행하는 것은 왕의 미워할 바니 이는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고 말하였다. 공의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인데, 하나님의 계명은, 주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요약하면 사랑이므로 (마 22:36-39), 결국 이 구절도 본문과 같은 뜻이다.

이상적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다. 교회의 치리자된 목사와 장로들도, 그리고 모든 성도들도 그러해야 한다.

잠언 3:3-4,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부패한 이스라엘 사회에는 인애[인자]와 진실이 없었고 거짓과 강포가 충만했고(호 4:1-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인자를 요구하셨다(호 6:6; 미 6:8).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롬 13:8) 빛[성령]의 열매는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다(엡 5:9).

[29절]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

젊은 자의 영화는 그의 힘과 체력이다. 군대의 젊은 병사들의 체력은 그 나라의 군사력의 중요한 요소이다. 또 젊은 운동선수들의 체력는 그 나라의 자랑이다. 그러므로 올림픽 경기는 국가들 간의 친선을 도모하는 경기이지만, 어떤 경기에서 이길 때 그 나라 전체의 기쁨과 자랑이 되며 영광이 된다. 축구, 야구, 태권도, 역도, 마라톤 등도 그러하다. 또 건설현장 등에서 볼 수 있는 젊은 노동자들의 체력은 그들의 영광이다. 사람은 체력이 있어야 무슨 일이든지 잘 해낼 수 있고 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도 많이 할 수 있다.

본문은 또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라고 말한다. 흰 머리털은 인생을 오래 살았다는 표시이며 인생의 고난을 많이 경험하였다는 인생 경륜의 표시이기도 하며 또 영광의 천국에 가까웠다는 표이기도 하다. 노인들의 백발은 검은 물을 들여 감출 만큼 부끄러워하고 싫어할 것이 아니다. 백발은 노인들의 영광이다. 그러므로 잠언 16:31은,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고 말했다.

장수(長壽)는 하나님의 복 중의 하나이다. 신명기 4:40,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없이 오래 살리라.” 신명기 5:3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잠언 10:27,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연세는 짧아지느니라.” 그러므로 장수(長壽)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며, 백발은 장수에 수반되는 영광스러운 표이다.

[30절]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하나니 매는 사람의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

자녀를 위한 엄한 징계와 체벌은 효과가 있다. 사람을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한다. 매는 사람 속에 깊이 들어간다. 그러므로 잠언22:15는,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고 말하였다. 어린아이라도 타고난 죄성과 미련함이 있기 때문에, 징계의 채찍을 통해 그 죄성과 미련함이 제거될 것이다. 또 잠언 23:13-14는,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지옥]에서 구원하리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 징계하는 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부모의 징계의 매는 자녀 교육에 꼭 필요하고 유익하다. 사랑으로 드는 엄한 매는 확실히 효과가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징계의 매도 사람의 구원과 성화(聖化)에 매우 유익하다. 성도는 징계의 매를 통해 성화를 이루어 간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간증하였고(시 119:67), 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말했다(시 119:71).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 말하기를, “저희 [인간 부모]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연단 받은] 자에게는 의의 평강[평안]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했다(히 12:10-11). 징계는 어른들에게나 아이들에게나 다 유익하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왕은 인자(仁慈)와 진실로 자신을 보호하고 그 왕위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해진다. 목사와 장로들과 또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은 다 인자함과 진실함의 덕을 가져야 한다.

둘째로,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다. 우리의 자녀들이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라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 복이다. 또 우리는 노년기의 백발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감사해야 한다. 

셋째로,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하니 매는 사람 속에 깊이 들어간다. 자녀 교육에서 매는 중요하다. 그것은 자녀에게 유익하여 그에게서 악을 없이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도 싫어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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