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06.15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마지막때관련성경장들150..은사_우상_절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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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때에 대한 150개 장(1) - 마이크 비클


이 문서에서 우리는 마지막 때를 주제로 하는 성경의150개 장을 살펴본다. 

본문의 (51%이상) 대부분이 마지막 때의 어떤 면에 초점을 두고 있는 장들만을 골랐다. 

사복음서의 89장은 우리의 구속의 값을 지불하기 위해 오신 초림의 시점에서의 예수님의 마음과 권능에 대한 기록이다. 

150장은 이 땅을 다스리기 위해 오시는 재림의 시점에서의 예수님의 마음과 권능에 대한 기록이다. 

150장은 똑같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똑같은 성령 안에서 역사하시는 똑같은 예수님을 계시한다. 

성경의 많은 장들은 거의 두 배나 초림보다는 재림을 언급하고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에 대한 이 성경의 영광스러운150개 장에 대해 무지해서는 안 된다. 

주께서 다시 오시는 세대는 분명히 성경에서 가장 많이 설명하고 있는 세대이다. 예수님은 그분이 태어나신 세대보다 바로 이 세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씀하셨다. 역사상 가장 극적인 시대에 그분의 신부가 사랑으로 승리하도록 준비시키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다.

이 문서에서는 이 150개 장에 묘사된 마지막 때의 핵심적인 특징들을 간결하게 설명해 놓았다.

 첨언하자면 150개보다 더 많은 장들이 있지만 거기에는 주요 내용이 마지막 때인지에 대해 논쟁의 소지가 있다. 

분명하게 하기위해 우리는 150장으로만 한정하여 다듬었다. 

마지막 때에 대한 어떤 예언들은 이중적 성취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이중적 지칭(dual reference)의 법칙이라고 불린다. 

즉 예언된 것이 과거에 부분적으로 일어났지만 아직 완전하게 성취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주 빈번하게, 부정적인 예언의 완전한 성취는 대환난에 이뤄질 것이고, 긍정적인 예언의 성취는 천년왕국에서 이뤄질 것이다. 

예를 들면, 눅4:18에서 예수님은 초림에 대하여 사61:1-3 을 지칭하셨다. 그러나 이사야 61장의 모든 세부 사항이 예수님의 초림때에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것들은 그분이 재림하시고 천년 왕국으로써 이 땅에 대한 그분의 충만한 통치를 확립하실 때 성취될 것이다.

구약의 많은 예언들은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지만, 주께서 재림하시는 세대에는 완전하게 성취될 것이다. 

종종 부분적 성취는 세대의 끝에 충만하게 성취될 것에 대한 예언적인 그림으로 기능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적용이 가능한 경우마다 역사상 그 예언이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던 것을 분명하게 지칭하여 설명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예언들이 세대의 끝에 완전하게 성취되기 전, 역사상 그 어느 때에라도 모든 신자들에게 영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도 언급해두는 것이 중요하겠다.  


☆신약

===마태복음 13장: 예수님은 먼저 이사야 6장에서 설명된 이스라엘에 대한 부분적인 심판을 언급하신다. 그리고 나서 연속되는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왕국의 특징을 설명하신다. 이 비유들에 기저가 되는 주제는 재림 이후에 하나님의 왕국이 충만하게 나타나게 되리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24장: 마가복음 13장; 누가복음 17장; 누가복음 21장: 이 4가지 병행 장들에서 예수님의 강조점은 재림 직전에 있을 대환난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그분은 AD 70년에 로마 군대에 의해 이스라엘이 포위되며 성전이 함락 (마24:2)될 것을 예언하셨다. 이 비극은 세대의 끝에 있을 예루살렘의 포위를 예시하는 것이다(욜3:2,12; 습3:8; 슥12:2-3; 14:2; 계16:14). 이 4 개의 장에 있는 여러 세부 사항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AD 70년의 사건을 넘어서서 세대의 끝에 일어날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대환난의 시기를 역사상 최악의 때라고 설명하셨다(마24:21). 하나님은 전 인류가 물리적으로 죽지 않게 하시기 위해 이 시간의 틀을 3년 반으로 줄이신다(마24:22). 예수님은 이 시간이 단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땅에 덫과 같이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21:35). 대환난은 AD 70년에 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던 것과 2차 세계 대전에 50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던 것을 포함하여 역사상의 모든 위기들을 능가할 것이다. AD 70년이나 2차 세계 대전도 인류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지는 않았었다. 예수님은, 적그리스도의 우상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전세계적 숭배 의식과 짐승의 표와 함께(계13:13-18), 멸망의 가증한 것을 보기 전에는 이 환난의 때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24:15). 이러한 모든 세부 사항은 로마에 대항하여 유대인들이 봉기하던 때(AD 66-70)에 성취되지는 않았다.

===마태복음 25장: 이 장은 마태복음 24장의 주제와 이어지는 것이다. 세대의 끝에 있을 사건들은 마지막 때의 교회가 어떻게 이 시간을 준비하게 될 것인가를 설명하는 가운데 드러난다 (마 25:1-20). 그리고 나서 재림 후에 즉각적으로 나라들을 심판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간다(마25:31-46).

===고린도전서 15장: 이것은 성경에서 부활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문단이다.  24-28절에서 바울은 천년왕국에서 예수님의 통치를 설명한다. 35-49절에서 그는 부활한 몸의 영광을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50-55절에서 바울은 재림 즉시에 절대 죽지 않게 되고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으로 옮겨지는 신자들의 세대의 신비를 말한다.

===고린도후서 5장: 바울은 부활한 몸과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가르친다.

===데살로니가전서 4-5장: 바울은 재림 때에 교회의 휴거와 죽은 자의 부활을 설명한다(살전 4:15-18). 그리고 나서 바울은 신자들에게 깨어있으라고 격려한다(살전5:1-10). 그는 예수께서 오실 때에 거룩하고 흠 없게 되기를 기도하면서 끝맺고 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예수님이 그의 권능의 천사들과 함께 오셔서 복음의 원수에 보수하시는(사66:15) 영광의 날을 묘사하고 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재림이 있기 전에 배교하는 일이 일어나고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 곧 적그리스도가 일어날 것이다. 미래에 그리스도인의 배교는 너무나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고, 이것이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바울의 주된 표지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디모데후서 3장: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를 죄와 속임이 가득해지게 되는 사회적 도덕의 쇠퇴로서 설명한다.

===디모데후서 4장: 마지막 때에 많은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대신 그들은 은혜에 대한 거짓된 교훈의 맥락에서 정욕적 삶의 방식을 지지하는 거짓 스승들을 많이 둘 것이다. 많은 이들이 진리에서 벗어날 것이다. 바울은 이 짧은 장에 3번이나 그리스도의 재림을 지칭하고 있다 (1, 8, 18절).

===베드로후서 3장: 베드로는 주의 날의 마지막 단계와 불로써 땅이 정결하게 될 것을 설명한다.

===요한계시록 5장: 아버지의 계획은 예수님을 사람이시며 왕이신 분으로 온 땅 위에 높이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손에서 책을 취하신다. 그 책은 이 땅의 주요한 움직임 그리고 그것을 정결케 하기 위한 계획들을 나타낸다.

===요한계시록 6장: 어둠의 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난다.

===요한계시록 7장: 하나님은 심판과 타협으로부터 그의 백성을 지켜주시기로 약속하신다.

===요한계시록 8-9장: 적그리스도의 왕국을 대적하여 나팔 심판이 임한다.

===요한계시록 10장: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속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 예언적인 메시지를 주시고 지식(understanding)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요엘은 마지막 때에 성령님의 역동적인 부어주심을 예언했다.

===요한계시록 11장: 두 증인은 놀라운 권능을 가진 예언자들이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12장: 요한은 환난기 동안 하늘에서 전쟁이 터지고 사단이 땅으로 쫓겨 내려올 것을 설명한다.

===요한계시록 13장: 요한은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의 활동을 설명한다.

===요한계시록 14장: 하나님은 144,000명의 유대인 신자들을 세우실 것이다. 요한계시록 14:6-16에서 4가지 핵심 예언적 선포가 나온다. 하나님은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심판하시기로 약속하신다.

===요한계시록 15-16장: 진노의 일곱 대접이 쏟아진다. 진노의 대접은 애굽에서 모세가 바로를 향해 풀어 놓았던 질병들(출7-12)을 상기시킨다.

===요한계시록 17-18장: 하나님은 바벨론, 즉 많은 자들이 악을 따르게 하며 성도들을 핍박하는 전세계적 악의 경제, 종교 네트워크를 멸망시키실 것이다.

===요한계시록 19장: 예수님은 적그리스도를 이기시며 아마겟돈 전쟁을 종결하시고 용사와 왕으로서 예루살렘을 향해 행진하신다.

===요한계시록 20장: 예수님이 천년왕국을 세우시고 사단은 쫓겨나 감옥에 들어간다. 천년왕국이 임한 후에 불신자들에 대한 거대한 백보좌 심판이 온다.

===요한계시록 21-22장: 신자들이 영원히 거하게 될 장소로서 새 예루살렘을 설명한다.


☆모세 오경: 구약의 첫 다섯 권

===창세기: 창세기의 종말론적 적용은 이 문서의 뒷부분에 나오는 ‘아브라함 언약’ 아래에 나열되어 있다.

===레위기 26장: 이 장에는 이스라엘의 순종에 대한 축복과 불순종에 대한 경고의 약속이 들어있다. 이 장은 역사상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는데, 바벨론 포로기(BC 586년)와 예루살렘 멸망 (AD 70년)을 통해서 가장 두드러진다. 레위기 26:14-39에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한 7가지 심판이 나오는데, 그것은 “너희의 세력으로 말미암은 교만을 꺾으시기(19절)”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을 향한 군사적 침입과 강습은 어떠한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도 아직 실행되지 않았다.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이 자신의 죄를 자복하기 전(레26:40; 호5:15)에 이 일이 완전하게 실행될 것이다.

===민수기 23-24장: 이 장들에는 발람이 모압 왕, 발락에게 주는 4가지 예언적인 신탁이 나온다. 다윗과 기타 이스라엘 왕들이 대적을 패배시켰을 때 이 예언적 신탁 중에서 일부가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이 신탁은 천년왕국 때에 몇몇 나라들이 최종적으로 멸망 당하면서 온전하게 성취될 것이다. 예수님은 야곱으로부터 떠오르는 별과 이스라엘의 지팡이로서 이스라엘에 적대적인 나라들을 깨뜨리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신명기 28-30장: 이스라엘의 순종에 대한 축복의 약속과 불순종에 대한 경고가 나온다. 신명기 28:15-68에 나오는 몇몇 저주는 바벨론(BC 586년)과 로마(AD 67-70년)의 침공 시에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파괴당하면서 보여지게 된다. 이러한 저주들의 세부 사항들과 완전한 성취는 대환난 기간에 이뤄질 것이다. 축복의 완전한 성취는 천년왕국에서 이뤄질 것이다.

===신명기 32장: 모세의 노래는 요한계시록 15:3에서 유리 바다에서 불려진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불충성에 대한 주님의 리더십 그리고 이스라엘을 구속하며 온 땅을 축복하시려는 주님의 계획을 설명하는 노래이다. 하나님은 어리석은 백성, 이방인(21절)들로써 이스라엘이 시기 나게(61-21절) 하실 것이다. 그 후에 주님은 이스라엘을 그 대적으로부터 궁극적인 구원을 이루시면서 죽은 자들이 살아나며 상한 자들이 낫게 될 것이다 (39-42절). 이것은 이방인이 이스라엘과 함께 즐거워하게 만들 것이다(43절).


※ 시편

===시편2편: 다윗은 예수님에 대한 열방들의 분노를 예언하고 있고, 이것은 대환난의 기간 동안 아마겟돈 전쟁 시에 분명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 시편에서 나오는 열방들의 분노는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핍박을 받았던 시기에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행4:28-31).

===시편 14: 시편 기자는 가증스러운 죄에 내던져진 사람들로 표현되는 죄악의 관영함에 대해 예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타락하며 압제 당하는 시간에 일어날 것이다.

===시편 24편: 재림의 때에 이 땅의 왕들을 이기신 후에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실 때에, 예수님께서 거룩한 곳에 올라서실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어둠의 권세를 이기시고 하늘의 궁정으로 승천하셨을 때, 그리고 역사 상 경건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로 올라갔을 때,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시편45편: 이 사랑의 노래는 아마겟돈 전쟁에서 대적들과 싸우시고 천년왕국 기간 동안 온 땅에 진리, 온유, 공의를 확립하실 예수님을 묘사한다.

===시편 46편: 이 시편은 대환난의 기간 중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확신을 묘사한다.  마지막 때의 두려운 사건들 가운데서 우리는 이 시편을 묵상하게 된다. 이 노래의 직접적인 상황은 다윗 왕이 원수를 이기고 승리하여 이스라엘 왕국에 평화가 따라온 것에 연관되어 있다.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8-9절에 언급된 전쟁을 완전하게 종결하실 것이다. 에스겔 47장에 나오는 천년 왕국의 강은 시편46:4에 그려진다.

===시편 47편: 이 시편의 3절은 천년 왕국 기간에 예수님을 그리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문단을 언약궤가 큰 기쁨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삼하 6장)을 표현한다고 보기도 한다.

===시편 48편: 천년 왕국 기간 동안, 인간의 왕들은 예루살렘 바깥에 모여서 경외감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왕들은 공포에 휩싸이게 되고, 예수님의 영광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두려운 위엄 앞에서 도망칠 것이다(시48:5).

===시편 50편: 천년 왕국의 예루살렘으로부터 빛이 뿜어져 나올 것을 묘사한다.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또한 나타난다.

===시편 53편: 다윗은 다시 한번 가증한 죄에 넘겨진 사람들로 표현되는 죄악의 관영함을 예언한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타락하고 핍박 당하는 시기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시편 58편: 마지막 때에 악인에 대한 예수님의 심판, 그리고 의인에 대한 상급이 묘사된다.

===시편 67편: 예수님은 땅의 모든 나라를 구원하시며 이끄시기 위해 능력을 나타내실 것이다.

===시편 68편: 다윗은 재림의 과정에서 원수들을 흩으시고 포로를 자유케 하시면서 광야를 행진하시는 예수님을 묘사한다. 다윗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백성의 위대한 구원(24-35절)을 예시하기 위해 출애굽과 시내산(4, 11-19절)의 비유를 차용한다.

===시편 72편: 이것은 온 땅에 충만한 예수님의 통치를 묘사하는데, 모든 자들이 충만하게 공급받게 되며 열방은 영광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이것은 또한 다윗의 노년에 왕좌를 계승하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솔로몬이 실제로 드린 기도이다. 이것은 오직 더 큰 다윗으로서 예수님께서 통치하시는 때에서야 완전하게, 폭넓게 드러날 것이다.

===시편 75편: 요한계시록 14장에 보여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노의 충만한 잔이 이 시편에서 선언된다.

===시편 79편: 대환난의 때(계11:1-2)에 구원을 간구하는 이스라엘의 기도가 이 시편에 나온다. 이 사건들 중에 어떤 것은 부분적으로 BC 586년에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가 되던 때와 4세기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의 학살 때에 이루어졌다.

===시편 80편: 대환난 때에 이스라엘의 고통과 구원을 위한 중보가 이 시편의 주제이다. 부분적으로 얼마나 성취되었는가에 대해 학자들 간에 일치되는 바가 없다.

===시편 83편: 대환난의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10 개국의 연맹으로부터 구원을 위해 기도한다. 이 애가는 이스라엘의 역사상 일어났던 반유대주의(anti-Semitism)에 적용된다. 이것은 바벨론 귀환, 앗수르 귀환,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 등에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시편 85편: 이것은 이 세대의 끝에서, 주님께서 “모든” 진노를 옮기셨을 때 이스라엘의 귀환에 대한 예언적인 기도이다. 앗수르 침공과 바벨론 포로기에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시편 87편: 이 문단이 궁극적으로 말하는 것은 천년 왕국 기간 동안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시온에 속한(거듭난) 유대인과 예루살렘의 영광이다. 여기에 나오는 등록은 히브리서12:23에 묘사된 것처럼 거듭난 유대인들이 하늘의 예루살렘(히12:23)에 등록되는 것을 지칭한다.

===시편93: 예수님은 능력의 옷을 입으시고, 승리의 용사이자 왕이신 여호와로 나타나신다. 여기서 마지막 때에 예수님의 승리가 그려지며 이 땅은 견고하게 세워진다.

===시편 96편: 재림 때에 온 땅이 떨며 예수님 앞에 경배할 것이다. 새 노래로 노래하는 것은 성경에 9번 나온다(시33; 40; 96; 98; 144; 149; 사42; 계5; 14). 시 40편을 뺀다면, 이 노래의 범위는 모두 전 지구적이다. 예수님께서 온 땅의 심판자로 오시며 모든 사람들과 창조물이 그렇게 한다. 새 노래(사42:10; 계5:8-14)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새로운 것, 즉 예수님을 여호와로 보편적으로 알게 되며 결국 성도가 그분과 함께 온 땅을 다스리게 될 것을 선포한다.

===시편 99편: 예수님께서 천년 왕국을 다스리실 때 모든 열방이 그분을 경배하게 될 것이다.

===시편 102편: 이스라엘이 쇠락하지만 장차 천년 왕국에서 회복될 것을 보여준다.

===시편 110편: 이 문단이 궁극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천년 왕국에서 예수님의 통치와 마지막 때에 열방에 대한 심판이다. 이 시편은 부활 이후 교회를 통해 나타나는 예수님의 사역으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시편 110편은 신약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약의 문단이다. 이것은 6번(마22:44; 막12:36; 눅20:42; 행2:34; 히1:13; 10:13) 직접 인용되었고,  총 25번 직간접적으로 언급되었다. 시편 110편의 두 가지 주된 주제는 왕 그리고 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의 영원한 사역이다. 시편 110편에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두 가지 법령을 말씀하신다. 첫째, 아버지께서 영원한 왕으로서 예수님을 자기와 함께 앉도록 초청하신다(1절). 그 후, 그분은 예수님에게 영원한 제사장으로서의 영적인 책임감을 위임하신다(4절).

===시편 118편: 이것이 충만하게 나타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재림 때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이다. 이 시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실 때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22, 25-26절). 예수님은 이 시편을 마23:39에 언급하시면서 지도자들이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선언하기 전까지는 예루살렘에 들어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시11:26, 마23:39).

===시편 147편: 예수님은 재림 후에 예루살렘을 다시 세우시며 열방으로부터 그의 백성을 모으신다.

===시편 149편: 이스라엘은 예수님과 동역하며 땅의 나라들에 심판이 시행되게 한다


------------마지막 때에 대한 150개 장(2) - 마이크 비클


※ 구약의 대선지자들

===이사야 2장: 예수님은 천년왕국에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열방을 다스리실 것이다.

===이사야 4장: 천년 왕국은 여호와의 싹으로서 예수님의 통치 아래 있을 것이다(렘23:5; 33:15; 슥3:8; 6:12).

===이사야 5장: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은 이 세대의 끝에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BC 721년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통해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을 때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이사야 9장: 재림의 기간 동안,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침공하는 적그리스도를 물리치실 것이다. 이 문단은 이사야 시대에 앗수르왕 산헤립이 침공할 때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그 시기에 이 문단의 세부 사항이 완전하게 성취된 것은 아니었다. “불의 섶같이 살라지는” 군인들의 신과 옷으로 인해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이 더해지는” 것과 같은 시간(9:3-4)은 존재하지 않았었다. 약속된 아기가 다윗의 왕좌에 앉아 나라를 굳게 세우며 정의와 공의로 온 땅 위에 왕국을 세우시는 것(9:7)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윗의 왕좌는 메시야 통치의 지상적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

===이사야 11장: 예수님은 천년왕국을 다스리시며 악한 나라들을 심판하신다.

===이사야 12장: 이사야 11장에 묘사된 대로 예수님께서 적그리스도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하시고 천년왕국을 시작하신 후에 이스라엘은 이 예언적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다. 11-12장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모으시고 회복하신 후에 시온에서부터 온 땅으로 뻗어가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영광스러운 그림을 보여준다.

===이사야 13장: 이사야는 세대의 끝에 있을 바벨론의 패망을 묘사한다. 유다에 대한 바벨론의 압제(BC 605-539)는 BC 539년에 바사가 바벨론을 물리치면서 종결되었다. 바벨론은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50마일 남쪽)에서 다시 재건되고 확립될 것이다. 그것은 적그리스도를 위한 사령부들 가운데 하나로서 회복되고 사용될 것이다. 바벨론은 전세계적인 사단적 종교 경제 네트워크의 센터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사13-14; 렘50-51; 계17-18). 예레미야 50-51장에서 바벨론에 대해 예언된 심판은 갑작스러운 그리고 영구적인 멸망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아직까지 충만하게 일어나지 않았다.

===이사야 14장: 사단과 적그리스도의 궁극적인 패배는 세대의 끝에 일어난다. 요한계시록 19:20에 기록된 대로 오직 적그리스도와 그의 운명은 무덤도 묘도 없는 바벨론 왕에 대한 묘사와 일치한다(18-20). 그는 산 채로 불 못에 던져질 것이다. 이 예언은 BC 539년에 바사에 의해 시행된 바벨론에 대한 심판에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아사야 18장: 아마겟돈에서 적그리스도의 군대가 예수님께 패배할 때, 하나님께서 구스(에티오피아) 땅의 편에 서셔서 적그리스도를 대항하여 움직이실 것을 약속하신다(18:4-6). 다니엘11:42-43에서 적그리스도는 구스와 애굽을 침공할 것이다. 주님은 예수님의 재림 기간 동안 애굽(사19장)과 구스(사18장)를 구원하실 것이다. 7절은 “그 때”를 세대의 끝으로 묘사한다. 구스와 앗수르는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해 예물을 가지고 올 것이다.

===이사야 19장: 예수님의 재림 시에 이집트에 국가적인 부흥이 있을 것이다 (19:18-22). 애굽과 앗수르에 대한 세부 사항, 즉 애굽과 앗수르가 서로를 섬기며 경제적, 정치적 조화(대로)를 이루어, 애굽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앗수르는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이 되며, 이스라엘이 예수님의 기업이 되는 것은 역사적으로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이것은 재림 후에 성취될 것이다.

===이사야 21장: 세대의 끝에 바벨론의 마지막 패망이 일어나고 이 예언이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 이 문단은 BC 529년에 바벨론의 멸망 기간 동안 부분적으로 성취되었고 유대인의 귀환으로 인해 기쁜 소식이 되었다. 귀환은 자유케 되어 땅에 돌아오고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이사야 24장: 이것은 대환난과 천년 왕국 기간 동안 우주적인 심판을 묘사한다. 21절은 이 땅의 왕들에 대한 심판을 의미한다.

===이사야 25장: 이사야는 천년 왕국을 묘사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연회를 베푸시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며, 죽은 자의 부활에 의해 죽음이 영구적으로 제거되는 일을 포함한다.

===이사야 26-27장: 유다의 노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것이며 부활에 대한 언급(26:19)을 포함한다. 이사야 27:12은 세대의 끝에 앗수르와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이 모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사야 28장: 이 예언의 온전한 성취는 이스라엘이 적그리스도와 동맹을 맺고 소위 죽음의 언약으로 들어갈 때 이루어질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재림 전 3년 반 동안 이 언약을 깨뜨리게 되고 그 후에 예루살렘을 짓밟게 될 것이다(18절). 이것은 이스라엘이 이사야 시절에 앗수르 군대의 침략에 맞서서 애굽과 언약을 맺었을 때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예수님은 이사야28:16-17에서 보는 것처럼 재림 때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다(마21:42; 막12:10; 눅20:17; 행4:11; 롬9:33).

===이사야 29장: 이사야는 세대의 끝에 있을 이스라엘의 심판과 회복을 예언한다(14절, 17-24절).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포위되게 하시고 열방이 침략하게 하실 것이다(사29:1-7; 욜3:2; 습3:8; 슥12:2-3; 14:2). 이 문단은 산헤립의 군대가 초자연적으로 멸망했을 때에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사39장).

===이사야 30장: 이스라엘의 완전한 반역과 심판(6절)은 궁극적으로 마지막 때에 주께서 회복시켜주시기 직전까지 성취될 것이며, 앗수르라 불리는 적그리스도를 심판하실 것이다.

===이사야 31장: 마지막 때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회개와 적그리스도로부터의 구원이 묘사된다. 7절의 국가적 회개는 이스라엘 역사상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부분적인 성취는 히스기야가 시행한 개혁에서 이루어졌다.

===이사야 32-33장: 앗수르 군대의 패배는 예언적으로 대환난 기간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시는 때를 묘사한다. 많은 유대 도시들이 BC 701년 전투에서 소화되었다.

===이사야 34장: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때의 심판과 예수님의 재림때 에돔의 멸망이 예언되었다.

===이사야 35장: 이사야는 천년왕국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땅의 치유를 묘사한다. 바벨론 귀환 시에 부분적으로 성취되었지만, 10절에서 보는 대로 영영한 희락이 오고 슬픔이 사라지는 것이 성취되어야 한다. 5-6절의 생리적인(physiological) 회복은 예수님의 사역과 사도들의 교회 안에서 성취되었다. 재림 시에 이스라엘은 온전한 생태적인(ecological) 회복(1, 2, 7절)과 구원(4절)을 보게 될 것이다.

===이사야 40장: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과 예수님의 재림을 볼 것이다. 예언적인 메신저들이 종말론적인 영광이 이 땅에 임하는 것에 대해 열방을 준비시키도록 세워질 것이다. 이 예언은 예수님의 초림 시에 세례 요한의 선두주자적인 사역으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요한의 사역으로 “모든” 육체가 주님의 영광을 다 함께 보지(5절) 않았으므로 요한은 부분적인 성취였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이사야 41장: 이스라엘은 세대의 끝에서 온전하게 치료되고 회복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택하심을 굳게 하시고, 확실하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압제한 모든 나라들을 패배시키실 것이다. 바로 그 때 예수님께서 온 땅의 하나님으로 높여지실 것이다.

===이사야 42장: 하나님의 공의가 전세계적인 예배 운동과 함께 예수님의 재림 시에 온 땅을 채울 것이다(10-12절). 이 문단은 예수님의 초림 시에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이사야 43장: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열방으로부터 온전히 구속하시고, 세대의 끝에 그 백성들을 그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이사야 44장: 주님은 이 세대의 끝에서 그분의 영을 이스라엘에 부으실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환경적으로 회복되는 국가적인 부흥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예수님은 전지구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속자, 온 땅의 왕으로 알려지실 것이다.

===이사야 47장: 바벨론에 대한 이 예언은 BC 529년에 성취되었다(단5장). 그러나 그것은 이사야 13장, 예레미야 50-51장, 요한계시록 17-18장에 묘사된 것과 같이, 마지막 때의 바벨론의 패망에 대한 예언적인 그림이다.

===이사야 48장: 대환난은 이스라엘을 시험하고 연단하는 의미(10절)이며, 예수님은 이 세대의 끝에서 그분의 기업(그분의 영광)을 갖게 되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분노를 돌이키셔서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절되지 않게 하신다.

===이사야 49장: 이사야는 마지막 때에 예수님께서 갇힌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하신 후 천년 왕국에서의 그분의 전세계적인 리더십을 묘사한다. 이 문단은 예수님의 초림 때에 처음 성취되었다(고후6:2).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땅 끝까지 이르는 때에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이다(6절).

===이사야 53장: 세대의 끝에서 이스라엘은 국가적으로 이런 고백을 드릴 것이다. 이 예언은 부분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행8:32-37)과 예수님의 치유 사역(마8:14-17)에서 성취되었다.

===이사야 56장: 재림 후에 예루살렘의 기도의 집이 그려진다. 이 예언은 사도행전에서 보는 것처럼 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는 사도적 사역에 의해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이사야 59장: 이사야는 실제 역사뿐 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온전히 나타나는 세대 끝(18절)에서 이스라엘의 반역과 부정(14-15절)을 묘사한다. 그 시기에 예수님은 죄와 압제자(적그리스도)로부터 시온을 구원하시기(17-20절) 위해 오시면서 적들과 전쟁을 하실 것이다.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은 열방 중에 공의를 세우시는 위대한 중보자이시다.

===이사야 60장: 하나님의 축복이 천년 왕국의 이스라엘에게 머물러 있으며, 열방은 이스라엘에게 물질을 가지고 올 것이다.

===이사야 61장: 예수님께서 천년 왕국에서 열방을 회복하신다. 이사야 61:1은 예수님의 초림 때에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이사야 62장: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이 땅에서 영적/정치적 수도가 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예루살렘이 온전케 되기를 간구하는 중보자(파수꾼)을 세우시기로 약속하셨다.

===이사야 63장: 예수님은 재림 때에 땅의 왕들과 전쟁을 일으키실 것이다. 예수님은 에돔(현대의 요르단)을 지나서 예루살렘으로 행진해 오실 것이다. 요한은 요한계시록 19:11-21에서 예수님께서 땅의 왕들과 전쟁을 하실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이 구절을 참조하였다.

===이사야 64장: 이 장은 이사야가 이사야 63장에서 에돔을 지나 오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재림을 위해 드리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오시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천상의 영역이 눈에 보이도록 열리는 것, 하늘로부터 내리는 불, 지진을 포함한다. 대적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언약 백성에 대한 자비가 이 문단에서 강조된다.

===이사야 65-66장: 천년 왕국과 그 이후에 하나님의 백성은 깊은 기쁨을 가지고 있다.

===예레미야 30장: 예레미야는 대환난 때(3-8절)와 “끝날(the latter days)”(24절)의 이스라엘을 묘사한다. 이 장의 후반부는 이스라엘이 대적들로부터 완전하게 보호를 받게 되는 때와 포로에서 돌아와 평강 가운데 예배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BC537년에 바벨론 포로 귀환 때와 이스라엘이 1948년 재건되었을 때에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여기에 나열된 약속들은 천년 왕국에서 완전하게 성취될 것이다.

===예레미야 31장: 30장에 시작된 이스라엘의 마지막 때의 구원과 회복이 묘사된다. 특별히 “에브라임”을 징벌하신 후에 주시는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다. 이것은 예레미야 사역 때까지 100년 이상 이스라엘로부터 분리되어 잊혀져 있었던 10개의 북쪽 지파들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시고, 흩어졌던 지파들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이며, 그 백성이 다시 연합되는 때에 큰 축복과 번영을 주실 것이다. 이 일은 모든 이스라엘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세워진 “새 언약”(31-34절)을 받아들인 후에 일어나게 된다.

===예레미야 33장: 이스라엘과 유다가 모든 열방 앞에서 존귀하게 되는 천년 왕국 때에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들이 충만하게 이뤄질 것이다.

===예레미야 50-51장: 바벨론의 패망은 궁극적으로 재림의 기간 동안 성취될 것이다. BC 539년 바사 군대에 의한 바벨론의 패망은 예레미야50장의 부분적인 성취였다. 그러나 이 예언의 많은 구체적인 세부 사항들은 그 때 성취되지 않았다. 요한은 미래에 있을 바벨론 심판의 언급으로서 예레미야 51장을 인용하였다. 그러므로 이 두 문단에는 바벨론이 주님에 의해 급격하게 압제 당하고 격렬하게 심판 받게 되리라는 미래의 시나리오를 지칭하는 예언적 선포가 여러 군데 있다.

===에스겔 5장: 역사상 가장 큰 기근(겔9; 단12:1; 마24:21)이 세대의 끝에 일어나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 예언은 BC 586년에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이 중요한 구절은 이 장 전체가 세대의 끝에 있을 예루살렘의 마지막 파괴에 연결되게 한다.

===에스겔 11장: 세대 끝에 있게 될 이스라엘의 회복은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그 땅으로 돌아와 메시야 앞에 모이는 날(14-20절)에 일어나게 된다. 이것은 바벨론 포로 때와 1948년에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마지막 때에 대한 150개 장(3) - 마이크 비클


===에스겔 20장: 에스겔은 이스라엘이 크게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게 될 것으로 묘사한다(신28-30장, 겔20:33-44).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모으실 때 그들을 정화하시고 깨끗하게 하시며 회복하실 것이다.

===에스겔 34장: 재림 후에 예수님은 목자가 되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열방으로부터 약속의 땅으로 모으시며 번성케 하실 것이다 (신30:1-10; 겔34:11-31). 여기에 나오는 축복은 에덴 동산을 생각나게 한다(사11:6-9).

===에스겔 36장: 천년 왕국에서 이 예언이 온전하게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에스겔 37장: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생명이 갑자기 들어오는 마른 뼈의 골짜기로 상징화되었다. 모든 소망이 끊어진 후에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이 나타나고 이스라엘은 회복되고 통일될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일어날 것이다.

===에스겔 38-39장: 아마겟돈 전쟁(계19:17-21)에서 적그리스도와 그의 군대가 파괴되는 것을 묘사한다. 곡은 적그리스도의 예언적 이름이다. 이스라엘의 승리와 회복은 예수님의 재림의 시간에 일어나는 것으로 그려진다.

===에스겔 40-48장: 천년 왕국의 성전이 예루살렘에 세워질 것이다. 에스겔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신 후에 있을 희생과 제사를 요약한다. 어떤 이는 이러한 제사를 속죄를 위한 제사와 혼동한다. 그러나 죄를 위한 제사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폐하여졌기(히8:5,13; 9:9, 24; 10:1) 때문에 더 이상 그런 피의 제사는 필요하지 않다. 이 제사들은 예수님의 죽음 이전처럼 대리적인 것이 아니라 기념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성찬을 하는 것처럼 십자가를 기억하며 회상하게 하는 것이다. 에스겔은 다가올 것에 대한 확신으로 백성들을 격려하기 위해 미래 성전의 건축 세부와 측량을 관찰하도록 위임되었다.

===다니엘 2장: 느부갓네살의 꿈에 대한 다니엘의 해석은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연속적인 4개의 고대 왕국을 의미하는 큰 신상에 대한 것이었다. 4번째 세계 제국은 고대 로마와 적그리스도가 통치하는 미래의 “재건된” 로마이다. 손대지 않은 돌은 예수님의 재림과 그의 메시야 통치를 상징한다.

===다니엘 7장: 이것은 연속적인 4개의 고대 왕국(바벨론, 메대, 바사, 헬라, 로마)를 상징하는 4 짐승과 세대의 끝에 나타나게 될 적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다니엘의 환상이다. 다니엘은 옛적부터 계신 이이신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열방에 대한 권세를 주시며, 재림 때에 실행될 적그리스도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시는 하늘의 법정을 본다. 고대 로마는 다니엘 7장에 나오는 네 번째 짐승을 “거의” 성취하였다. “아직 남아 있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모이는 10개국으로 구성된 로마가 재건되면서 성취될 것이다.

===다니엘 8장: 다니엘이 여기서 예언한 것은 우리가 알듯이 자연적 역사의 마지막에 온전하게 성취될 것이다(17, 26절).  이 환상은 메대-바사와 헬라(알렉산더 대제)가 일어나는 것을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다니엘8:9-14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의 예루살렘 공격을 묘사한다(9절). 23-25절의 적그리스도에 대한 다니엘의 예언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에 의해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다니엘 9장: 다니엘은 외국에 포로된 상황으로부터 유대 민족이 구원되기를 기도한 것을 기록한다. 이 기도는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 의해 다시 사용될 것이다. 가브리엘 천사는 다니엘에게 유대인들이 곧 바벨론 포로에서 벗어나게 될 것을 재확인시킴으로써 다니엘의 기도에 반응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유대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시키는 70년에 대한 예언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예언에서 “이레”라는 단어는(7일이 아니라) 7년을 뜻한다. 그래서 70이레는 490년과 같다. 처음 69이레 즉 483년이 지난 후 메시야, 예수님께서 “끊어져 없어졌”을 때 하나님의 달력에 “휴지”가 찍힌다. 70이레째에, 즉 자연적 역사의 마지막 7년에 적그리스도 즉 “장차 올 한 왕”은 이스라엘과 열방과 평화 조약을 맺을 것이다(27절 ). 첫 69이레(483년)는 아마도 BC445년에서부터 AD32년까지 성취되었다.

===다니엘11장: 이것은 성경에서 가장 자세한 예언이 적힌 장이다. 이것은 알렉산더 대제와 그의 제국으로부터 나오는 4개의 왕국의 등장을 묘사한다. 21절에 시작하여 다니엘은 마지막 때의 적그리스도의 예표인 안티오쿠스 에피파네 4세를 묘사한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와 그의 이스라엘 공격과 적그리스도 사이에는 많은 병행이 존재한다. 다니엘 11:36-45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와 비교하지 않고 적그리스도를 매우 자세하고 직접적으로 묘사한다.

===다니엘 12장: 이것은 역사상 이스라엘의 가장 큰 환난을 묘사한다. 이 환난은 3년 반(한 때, 두 때, 반 때)동안 지속될 것이다.


☆구약의 소선지자들

===호세아1장: 이스라엘의 회복은 하나님의 심판이 다 지난 후에 세대의 끝에 임하게 될것이다.

===호세아 2장: 이스라엘은 주님을 신랑으로 알게 되면서 천년 왕국을 시작할 것이다 (16절).

===호세아 3장: 이스라엘은 후일에 주님을 경외하게 될 것이다. “그 후에”라는 단어(5절)는 시간을 알려 준다. 여기서 나오는 사건들은 세대의 끝에 이스라엘이 완전하게 회복되는 시간 직전에 일어날 것이다.

===호세아 5:15-6:3: 큰 환난의 때에 유대 민족이 그들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게 될 때까지, 주님은 “내 곳”에 머물러 계실 것이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이스라엘을 고치시며 부흥케 하실 것이다.

===호세아 14장: 세대의 끝에 이스라엘은 주님께 돌아올 것이며 배교로부터 고침을 받을 것이다.

===요엘 2장: 적그리스도는 대환난의 때에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침공할 것이다(2절). 이러한 위기는 전례 없는 성령의 부어주심 하에서 일어날 것이다. 두 구절이 마지막 때에 대한 해석이 요구된다. 첫째, 2절에서 침공하는 군대는 인간 역사상 가장 잔혹한 군대(적그리스도의 군대)이다. 그리고 28절에서 “그 후에”는 이 군대가 세대 끝에 있을 하나님의 회복에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엘2:1-11은 BC 607년, 597년, 586년에 바벨론의 세 번의 침공으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요엘 3장: 아마겟돈 전쟁의 군사적 충돌 때문에 열방이 이스라엘로 모여들 것이고 예루살렘을 포위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물리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구속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아모스 8장: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은 BC 721년 앗수르가 북쪽의 10지파를 정복하고 강제 이송시켰을 때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BC 701년 산헤립의 침공과 바벨론의 3번의 공격(BC 607년, 597년, 586년)도 또한 부분적인 성취이다. AD 70년 로마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와 AD 137년 예루살렘이 파괴되었을 때에 이 심판은 다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이 장의 완전한 성취는 5번째 대접의 심판(계16:10)으로 묘사된 것처럼 해가 대낮에 져서 땅이 캄캄해지기 전까지(9절)는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아모스 9장: 주님은 다윗의 장막을 다시 회복하실 것이고 열방에 흩어졌던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다시 모으실 것이다. 그들은 다시 그 땅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오바댜 1장: 주님은 열방에 진노를 부으실 것이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다.

===미가2장: 세워진 패역한 지도자들에 대해 주님이 응답하시면서, 이스라엘은 길을 열어주시는(break through) 주님으로 인해서 회복될 것이다. 미가의 시대에 있었던 패역함은 말세의 “고통하는 때”를 반영한다(딤후3장). 이 문단은 패역함이 나타나는 모든 세대에 대해 적용될 수 있는 예언적인 경고이지만, 특별히 이스라엘과 열방에 공의가 온전하게 임하는 때를 지칭한다.

===미가 4장: 미가는 메시야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열방을 평강으로 다스리는 때를 묘사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대 끝에서 그분에게 대항하는 나라들을 “타작”하신 후에 이뤄지게 된다. 미가는 자기 시대에 이스라엘에게 말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바벨론 포로 상황으로부터 구원받게 만드는 무서운 사건들(9-10절)에 대해 백성들이 반응하게 될 것을 예측하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연관되어 있는 “해산의 고통”은 BC 536년에 바벨론으로부터 귀환하는 것보다 훨씬 큰 구원을 묘사하는 것이다.

===미가 5장: 메시야는 적그리스도를 이기신 후에 그의 백성을 다스리며 돌보실 것이다. 베들레헴으로부터 나온 다스리는 자는 예수님이시다(2절). 이스라엘에 대한 예수님의 구원도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승리(5-6절)는 미가의 시대에 주님의 천사가 예루살렘에서 앗수르 왕 산헤립을 물리쳤을 때(사37:36) 부분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열방 가운데 유대인들이 흩어져 있는 그 어디에서나 이스라엘의 적들이 “멸절”되는 일은 세대의 끝에 일어날 것이다(7-9절).

===미가 7장: 부흥과 구원에 대한 미가의 기도는 세대의 끝에 완전하게 응답될 것이다. 이 문단은 모세가 출애굽 때에 한 것과 같은 기적으로 예수님께서 그 백성을 돌보시는 때, 즉 대환난의 끝에서 이스라엘이 다시 모이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15절). 결과적으로 열방은 군사적인 힘에 대해 수치를 느끼게 될 것이고, 두려움으로 떨며 주님 앞에 오게 될 것이다(16-17절).

===나훔 1장: 주님께서 적그리스도(악을 꾀하는 자)와 악한 나라의 동맹(계14: 10; 15:1)을 종결하시면서 불 같은 진노를 완전하게 보이실 것이다. 이 예언은 BC 612년에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바벨론과 메대에 의해 함락당했을 때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앗수르 왕 산헤립(악을 꾀하는 자)은 그의 신들의 성전에서 살해당했다(왕하 19:36-37). 이 예언은 악한 자들이 더 이상 이스라엘로 통행하지 않는 때(15절), 즉 세대의 끝에서야 완전하게 성취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BC 612년 이후에도 여러 차례 침공 당했다. 예수님께서 적그리스도를 이기시고 천년왕국을 세우시고 난 후에야 이스라엘은 영구적인 안보를 가지게 될 것이다.

===하박국 2장: 악한 자들과 교만한 자들은 “사망 같아서 족한 줄 모른다”고 묘사되어 있다(5절). 이것은 주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 대적하도록 열국을 모으는 적그리스도 안에서 최고조로 성취될 것이다. 바벨론과 그 뒤에 바사가 열방을 강탈했을 때 이것이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이 예언이 완전히 성취되려면 악한 자가 열국을 자기에게로 모으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5절). 바벨론이 이 예언의 그림이기는 하지만 모든 세부 사항을 성취하지는 않았다. 바벨론은 모든 나라들을 모으지 못했고 오직 소수만을 모았다. 적그리스도는 모든 나라를 모으며 어느 정도 압제할 것이다(시2:1-3; 계13:14-17, 16:13-14, 17:12-14).

===하박국 3장: 하박국은 예수님의 재림의 과정을 보고 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에서 적그리스도와 그의 군대들에게 심판을 실행하신다.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행진하시며 그 길에서 대적하는 나라들을 멸망시키셨을 때, 이 일에 대한 예언적인 전조가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광채가 불 기둥의 빛과 같았고, 홍해를 가르셨을 때 그분은 “바다 사이로 걸으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마른 땅으로 인도하셨고, 여호수아를 위해 태양을 멈추게 하셨다. 그러나 이 문단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7번째 대접(겔 38:22; 슥14:12-18; 계16:21) 에 묘사된 것처럼 “역병이 그 앞에서 행하는 (5절)” 때에야 성취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역병은 이스라엘 군대 앞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재림의 때에 예수님은 분노로 열국을 밟으실 것이다(합3:13; 계19:15). 8절에 “주께서 말을 타시며”는 계19:11-14에서 백마를 탄 하늘의 군대와 함께 백마를 타신 예수님께서 오시는 때에 성취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그들에게는 병거가 없었지만 하늘의 군대는 병거가 있을 것이다(왕하 6:17).

===스바냐 1장: 사람, 짐승, 새, 물고기를 멸하는 심판이 묘사되고 있다 (3절). 이것은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멸망시켰을 때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예수님께서 반역하는 나라들을 심판하시는 대환난과 재림 때까지는 완전하게 성취되지는 않을 것이다.

===스바냐 2장: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은 세대의 끝,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신들 가운데 높여지시는 때에 일어날 것이다. 언급되어 있는 모든 지정학적인 지역들은 정도에 따라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예를 들어, 니느웨와 앗수르 왕국은 BC 612년에 멸망 당했다. 그러나 주민이 없어지고 영원히 황폐하게 되는 것과 같이 심각하지는 않았다. 이스라엘을 둘러싼 지역들 위에 이러한 심판들이 최종적으로 격렬하게 임하는 것은 마지막 때에 성취될 것이다.

===스바냐 3장: 하나님께서 천년 왕국 때에 모든 악한 나라들을 멸망시키시며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것이다 (8-20절). 이 예언은 BC 721년에 앗수르가 북쪽 10개 지파를 정복하고 강제 이주시켰을 때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유다는 BC 701년 앗수르왕 산헤립이 침공하고, 바벨론이 3번(BC 606년, 597년, 586년) 침공하였을 때 이 심판을 부분적으로 받았다. 느헤미야 때에 이스라엘이 이 땅으로 귀환하고 성전을 재건했을 때(BC 445년)에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불에 살라지고(8절), 다시는 나라로서 교만하지 않게 되며(11절),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않는(15절) 일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들은 예수님의 재림 하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스가랴 1장: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적들을 치실 것이고, 번영을 주시며, 예루살렘을 재건하실 것이다. 이것은 스룹바벨(BC 536년)과 느헤미야(BC 444년) 하에서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17절에 나오는 풍부와 평강은 그 때 오지 않았다. AD 70년 2번째 멸망 때까지 이스라엘은 외세에 복종하고 있었다. 땅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대부분의 약속은 국가적 회개에 달려있다 (슥12:10-14). 이러한 조건은 BC 536년의 귀환과 1948년의 이스라엘 재건에도 충족되지 않았다.

===스가랴 2장: 주님은 천년왕국 때에 예루살렘에 전례 없는 인구 증가와 경제적 풍요를 주실 것이다. 그분은 예루살렘에 명백한 임재를 두실 것이다. 주님은 이스라엘을 압제한 나라들을 심하게 다루실 것이다. 이 문단의 부분적 성취는 헤롯 대제 시대와 1948년 이후 이스라엘이 경험한 제한적인 번영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간들에 있었던 인구 증가와 번영은 여기에 나온 것보다 훨씬 더 제한적이다. 더욱이 이스라엘 거주자는 항상 적으로부터의 두려움을 직면해야 했다.

===스가랴 3장: 하나님의 자비는 이스라엘의 죄의 깊이보다 더 크다. 주님께서 메시야 사역으로 나라 전체를 완전하게 깨끗하게 하시고 그분 앞에 서는 제사장의 권위를 회복하실 것이다. 제사장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의 권위는 완전하게 회복될 것이다.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시대(BC 516년)에 하나님은 그들의 죄의 깊이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게 성전과 제사장 사역을 회복시키셨다. 이스라엘의 국가적 구원은 예수님의 속죄 사역을 국가적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다(슥3:9; 12:10, 참고-롬10:12; 11:26).

===스가랴 4장: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사역을 마지막 때에 불타며 빛을 내는 등잔대로서, 특별히 두 증인의 사역(계11:3-6),  열방에 영광의 증인으로 회복하실 것이다.  성전이 재건되었던 스룹바벨의 시대에 제사장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의 사역은 부분적으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백한 임재는 재건된 성전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스가랴 5장: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의 모든 악을 심판하시고 제거하심으로써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을 정화하실 것이다. 대조적으로 악은 시날 땅(바벨론)으로 왕성하게 돌아올 것이다. BC 536년 귀환한 후에 이스라엘은 공공연한 우상 숭배로부터 깨끗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보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죄는 완전하게 다뤄지지는 않았다. 이 예언은 고대 바벨론이 쇠퇴해 가던 때(BC 519년)에 주어진 것이지만 악이 거할 장소로서 이 도시가 미래에 재건될 것을 알려준다(계17-18장).

===스가랴 6장: 주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대적을 심판하실 것이며 예수님을 온 땅의 왕으로 세우실 것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시고 거기서 온 땅을 다스리실 것이다.

===스가랴 8장: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토지적으로, 물리적으로, 재정적으로, 모든 방향으로 이스라엘을 온전하게 회복하실 것이다. 예루살렘이 온 땅에 전세계적인 예배 센터가 되게 하실 것이다. 느헤미야 시대(BC 444년) 이후로 AD 70년 패망까지 얼마 간의 번영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스가랴 9장: 평강의 왕으로서 예수님께서 미래의 모든 전쟁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며, 그분의 리더십 아래에서 평강과 번영을 예루살렘으로부터 전세계로 세우실 것이다. 이 예언은 알렉산더 대제의 정복(BC 332년)과 적그리스도의 표상인 안티오쿠스 에피파네 4세 시대에 예루살렘이 받은 구원을 통해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이 문단은 이스라엘이 다시는 압제자의 손에 수난 당하지 않게 될 때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이다(8절).

===스가랴 10장: 이것은 예수님의 리더십 아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대적이 파괴당하는 것을 묘사한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구원하시고 땅을 되돌려 주실 때에 엄청난 인구 증가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1948년 이래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스가랴 12장: 마지막 때에 땅의 열국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황폐하게 하겠지만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며, 국가적 회개의 날에 온 마음으로 주님께 돌아올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실 것이다.

===스가랴 13장: 유대 민족의 2/3가 죽고 1/3이 구원받게 되는 대환난 이후에 이스라엘에 큰 정결함이 임할 것이다.

===스가랴 14장: 열국이 예루살렘을 대적하며 모일 때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편에 서서 싸우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실 것이다. 회복된 예루살렘으로부터 생명수가 흘러 나가 땅에 생명을 줄 것이다. 예루살렘은 주님께 거룩한 세계적 예배 센터로서 세워질 것이다.

===말라기 3장: 주님께서 선두주자 사역을 일으키셔서 그분의 백성들과 나라들을 예수님의 재림을 위해 준비시키실 것이다. 이 예언은 예수님의 초림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 요한에게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마11:10, 막1:2, 눅7:27). 요한의 사역은 말라기가 이 장에서 묘사한 것 같은 궁극적인 심판이나 이스라엘의 정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말라기 4장: 말라기는 예수님의 재림 전에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는 궁극적인 선두주자로서 엘리야가 올 것을 묘사한다.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왔던 세례 요한의 사역에서 이것이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눅1:17).


----------------마지막 때에 대한 150개 장(4) - 마이크 비클

☆아브라함 언약
아브라함 그리고 이스라엘과의 하나님의 언약은 주로 5개의 문단에서 보여진다: 창세기12:1-3; 13:14-17; 15:4-21; 17:1-21; 22:15-18). 그 언약은 야곱과 하나님 사이에서 재확인된다 (창26:1-4; 28:10-14; 35:9-12; 48:3-4).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나라가 되게 하시며(창12: 2; 13:16;   15:4-5; 17:6), 그의 육적 자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영원히 차지하게 될 것(창12:7; 13:14015, 17; 15:7; 17:8)이라고 약속하신다. 이것은 온 땅에 큰 축복을 주게 된다(창12:3; 22:18; 28:1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이스라엘 족속)에게 가나안 땅을 영영히 주시겠다고 영원한 언약으로 약속하신 것은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이 절대 멸망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스라엘이 국가로서 멸망하게 된다면, 그들은 그 땅을 영원히 소유하지 못하며, 아브라함 언약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아브라함 언약은 이미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큰 부와 축복으로 그의 일생을 축복하셨고(창24:1, 35), 그의 이름을 열방 중에서 창대하게 하셨으며, 수많은 육적 자손을 주셨다. 400년의 노예 기간 후에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주셨고, 그들은 구별되는 인류학적 종족 그룹으로서 멸망되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위대한 축복이 땅의 모든 나라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에게 영원한 소유로 주셨다.

☆다윗 언약 - 
다윗 언약은 사무엘하 7:11-16과 역대상 17:10-15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언약을 언급하는 문단들이 여러 군데 있다(삼하23:5; 대하7:18; 시89:3-4, 28-29, 34-37; 렘33:19-26). 하나님은 다윗에게 영원한 혈통, 영원한 보좌와 나라를 약속하셨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의 보좌에 영원히 좌정하실 것이다. 다윗의 왕국은 물리적인 이스라엘 땅과 백성들이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아버지 우편에 앉으셔서 이미 왕권의 통치와 권위를 실행하고 계시지만, 성경은 또한 예수님께서 장차 이 땅에 자연적 왕국을 다스리심으로써 다윗과의 언약을 지키실 것을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예언적 역사에서 중요한 시간들
BC 721년: 이스라엘 10개 지파가 사르곤 통치 하의 앗수르에 의해 이스라엘로부터 강제 이송 당한다. 그들은 그 땅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구약에 나오는 앗수르 통치자들은 디글랏 빌레셀(왕하 15-16장), 살만에셀(왕하 17-18장), 산헤립(왕하18-19장; 대하 32장; 사36-37장), 사르곤 (사20장)이다.
BC 701년: 산헤립 통치 하에 앗수르는 히스기야의 통치 기간 중에 유다(남쪽 왕국)를 침입하지만 예루살렘을 차지하는데 실패한다 (왕하18-19장, 대하32:1-23; 사9:1).
BC 612년: 나훔이 예언한 것처럼 앗수르는 멸망 당하고 수도 니느웨는 쇠락한다. 바벨론이 중동에서 새로운 강대국이 된다.
BC 606년: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은 예루살렘이 침입하여 많은 유대인을 포로로 잡아간다.
BC 597년: 느브갓네살은 예루살렘과 성전을 약탈하고 10000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으로 끌고 가 감옥에 가둔다.
BC 586년: 예루살렘이 느브갓네살에 의해 재차 침입 당하고 성전은 파괴된다. 그는 더 많은 포로를 바벨론으로 잡아간다. 디아스포라, 하나님의 백성의 흩어짐이 시작된다 (신28:41, 29, 64; 렘25:9, 12; 22:7; 27:6; 43:10; 합1:5-7).
BC 539년: 바벨론 제국이 고레스 통치 하의 바사에 의해 멸망당한다.
BC 536년: 고레스 왕의 허락으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다. 스룹바벨은 5000명의 유대인들을 이끌고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새로운 성전을 건축한다 (대하36:22; 사44:24-45:4).
BC 520년, 516년: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 사역 가운데 성전 건축이 마무리된다.
BC 175-165년: 시라아의 통치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가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BC 167년 유대인들이 그의 억압 통치로부터 독립을 얻어 BC 136년 로마 원로원에게 하나의 왕국으로 알려지기까지 지속된다. 이스라엘은 BC 37년에 로마 통치 아래 들어가기까지 100년간 독립을 유지한다.
AD 70년: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것처럼 로마는 예루살렘과 성전을 불태운다(마24장; 막13장; 눅21장).
AD 135년: 예루살렘은 헤드리안의 통치 하의 로마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다. 580000명의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하고, 유대인들은 그 도시로부터 추방을 당한다.
1940년대: 6백만의 유대인들이 나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1948년: 이스라엘이 다시 한 나라로서 재건된다.
1967년: 6일 전쟁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수복한다.
70년의 사건은 마지막 때에 대한 예언들을 성취하지 않았다.
AD 70년의 사건은 마지막 때에 대한 예언들을 성취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대환난이 역사상 가장 잔혹한 시간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그것은 다른 어떤 때의 모든 위기를 능가할 것이다. 혹자는 이것을 상징으로 축소시키거나 이것이 AD 70년에 완전히 성취된 것으로 봄으로써 이 예언을 최소화하려고 한다. 대환난은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3년 반으로 줄이시고 모든 인류가 물리적으로 죽지 않게 하신다(마24:21-22). 
AD 70년에 100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고, 2차 세계대전에서 5000만 명이 죽었다. AD 70년이나 2차 세계 대전도 대환난과 같이 인류의 생존자체를 위협하지는 않았으며 역사상 최악의 시간도 아니었다. AD 70년의 사건은 확실히 대환난의 예표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성경에 나오는 대환난의 세부 사항들을 대부분 성취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전례 없는 숫자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게 만드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세워진 후에야 대환난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계6:8; 9:15). 요한계시록 13:11-18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에 관한 세부 사항들은 말하는 우상, 짐승의 표, 머리 상처가 치유되는 것, 전세계적으로 강요되는 적그리스도 숭배, 거짓 예언자를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세부 사항들 중에 그 어느 것도 로마에 대항하는 유대 반란(AD 66-70년)에 성취되지 않았다. 
AD 70년(AD 73년 마새다 함락) 위기 때 예루살렘과 두 번째 성전이 파괴당했다. 그리고 나서 바르 코크바(Bar Kochba) 반역 때(AD 132-135년), 로마에 대항하여 유대인들이 봉기했지만 500000명이 죽고 1000개의 마을이 파괴되었다. 이스라엘은 강제 추방을 당했고(디아스포라), 예루살렘은 다시 세워져서 앨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로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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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나타남, 곧 교회 섬김의 은사 분류==
[[우선적 필요.1.]]....지혜의 말씀[우리의 분깃, Q에 의해 예정된, Q이 깊은 것들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 : 이상과 계시를 통하여 주시는 우리의 영에 속한 것..1:24, 30, 2:6-10)..처음엔 사도와 선지자들에게 주어졌음.]...지식의 말씀[Q과 주님에 대한 것들, 영적인 것들에 관한 일반 지식을 나누어 주는 말씀 : 가르침 위한, 우리의 이해에 속한 것...하나님의 어떠하심과 하시는 일에 관한 말씀--주로 교사들에게 주어졌음]....예언 : <주>Q을 위하여 말하고 Q을 말함, Q을 말해냄 + <부>미래를 예고하여 말함[이는 기적적 능력에 속함] ....
[[우선적 필요.2]] 믿음(산을 옮기는 믿음)...기적적 능력의 일들[병고침(기적적인 치유)...능력의 일들 역사함(죽은 자 일으킴..도르가)]......영분별[딤전4:1, 요일4:1-3..생명안에서 성숙함을 요구]
[[우선적 필요.3]]....방언 말함[영의 비밀을 말함 인해 영의 기도로 이어짐 : 하나님과 교통함의 영의 성숙-강화 촉발]/방언 통역함[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적기에 공급 가능]
[[우선적 필요.그 외]]....그 외에도 성령의 나타남에는 (사도들을) 돕는자들, 다스림-이상들을 봄(28), 꿈을 꿈(행2:18). 표적과 기사들(히2:4), 기적적 행동들(막16:17-18...5가지 :: *17.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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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은 거듭난 사람의 영의 말이자 영의 기도이다..(고전14:1~5)
1. 방언(헬, 글로싸)이란 무엇일까요?
최근  방언무용론자 내지는 방언폐기론자들은 방언은 헛소리며 귀신의 장난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방언은 전부 다 외국어로서의 방언이다, 그리고 고린도교회 방언은 이상한 소리로서 성령이 주신 은사도 아니며, 표적으로서 주어진 외국어도 아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고전14장을 헬라어에서 직역했다고 말하면서, 개역성경의 번역은 잘못 번역한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들의 주장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그러할까요? 어떤 견해를 주장하고 어떤 견해를 따라가든지는 본인이 결정할 일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정말 알기를 갈망하는 자들을 위해서 방언이 진짜 무엇인지를 제대로 말할 필요가 있다고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은 성경이 말하는 방언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정말 성경에서는 방언을 무엇이라고 정의하고 있을까요?
2. 성경에서 방언(글로싸)에 대한 첫번째 언급은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에서였습니다.
[막16:17] "믿는(믿었던)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장차]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들]을 [장차] 쫓아내며 새 방언[들]을 [장차] 말하며(발설할 것이며)(막16:17)". 또 승천하시기 전, 예수께서는 이미 자신을 믿고 있는 제자들에게 위로부터 능력으로 옷입혀지기를 기다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눅24:49). 그러자 그들은 [외적인] 성령세례를 기다리면서 간절히 기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결국 열흘후에 거듭난 그들의 입에서 터져나온 것이 바로 방언(글로싸)였습니다.
그들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방언들, 글로싸이스)로 말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행2:4).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약속으로서의 "새 방언"(막16:17)과 첫번째로 터져나왔던 "방언"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전부다 "글로싸"(복수는 '글로싸이스')라는 단어라는 것에 주목해 봐야 할 것인데, 왜냐하면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전14장에 나오는 방언이 서로 다른 방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은 [외국어로 말함의 의미로서 방언, 곧 디렉토]이었고, 고전14장에 나오는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서 [자기 임의대로 나온 헛소리...글로싸]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터져나왔던 방언 곧 예수님을 믿고 있는 120명 사람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기도할 때에, 그들의 입에서 터져나왔던 방언도 "글로싸"이며, 고전14장에 나오는 방언도 동일하게 전부다 "글로싸"라고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온 방언을 외국어(헬, 디아렠토)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주장입니다.
이 문제는 다음에 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고전14장에서 방언(글로싸)를 어떤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을까요?
3. 사도바울은 고전14장에서 방언을 딱 2가지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고전14:2에 나오고, 또 하나는 고전14:14~15에 나옵니다.
1>먼저, 첫째로, 고전14:2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저14:2).
이 말씀에 의하면, 방언은 말하는 은사의 하나로서, 이미 [거듭난] 사람이 영으로 비밀들을 발설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방언무용론자 내지 방언폐기론자들은 이 본문을 다음과 같이 왜곡하여 말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 말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잘못 되었기에] 알아듣는 자가 없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방언은 [거듭난] 사람이 영으로 비밀들을 발설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그리고 둘째로, 고전14:14~15의 말씀에 의하면, 방언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사도바울은 방언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만일 [계속해서] 방언(글로싸)로 기도한다면, 나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마음을 열매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장차] 영으로 기도할 것이다. 그런데 역시 마음으로 기도할 것이다. 나는 영으로 [장차] 찬송할 것이다. 그런데 역시 나는 마음으로 [장차] 찬송할 것이다(고전14:14~15)."
그렇습니다. 방언은 영이 말하는 언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이 드리는 기도입니다. 거듭난 사람의 영이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도 드려야 하지만, 영으로 드리는 기도도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으로 드리는 기도인 방언은 자기를 건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전14:4).
그렇다면, 왜 바울은 방언을 기도라고 말하지 않고, 방언을 영이 드리는 기도이면서 동시에 영이 말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일까요?
4. 방언을 영이 하는 말이자 영이 드리는 기도라고 한 것은 다 그 뜻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실제 방언을 통역해서 들어보면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데, 방언은 영이 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영이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방언통역이란 남이 하는 방언을 내가 [영으로] 알아듣고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말해내는 은사입니다.
어떤 사람은 남이 하는 방언이 자신의 말(한국어)로 들려서 통역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직독직해하듯 남이 하는 방언을 동시에 자신의 말(한국어)로 알아듣고 통역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것이든 남이 하는 방언을 내가 알아듣고 나 자신도 모르지만 자기의 말로 말해내는 것은 성령께서 주신 은사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방언으로 말하고 있는 상대방의 정보를 전혀 알고 있지 못하면서 즉시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영이 하는 말 곧 영이 비밀들을 말한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인가요?
그것은 그 사람이 거듭날 때에 들어오신 그리스도인 성령님께서 그 사람의 영에게 과연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는지 비밀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으로 들어오신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무엇을 원하는지를 들려주는 비밀들을 말해내는 것이 방언의 한 부분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자신의 영이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방언입니다.
그러나 방언은 내가 마음(혼의 지성)으로 드리는 기도와는 다릅니다. 마음은 전혀 알지 못하는 것도 영은 벌써 알고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의 말이나 영의 기도인 방언은 앞으로 되어질 미래의 일들을 말하고 있기도 하고 그것에 대해 기도하고 있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요16:13에서 사람 속에 들어오신 보혜사 성령께서 장래의 일을 너희에게 알려주신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사람의 영에게 알려주어, 사람이 영이 말하는 방언인 것입니다.
그 측면에서 볼 때 방언은 일종의 예언인 것이긴 하지만, 다만 예언의 은사를 더하여 받아야, 자신의 방언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자신이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은사는 방언에 더하여 자신이 말한 방언을 자신이 알아듣는 은사요, 방언통역은 남이 하는 방언을 내가 알아듣는 은사입니다.
그렇다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인 방언을 계속해야 하는 것인가요?
5. 그렇습니다. 방언은 계속해서 말해야 합니다.
사도바울도 자기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방언(글로싸)을 더 말하는 것을 감사했으며(고전14:18),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금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고전14:39). 그리고 고린도교회 성도들 모두가 다 방언으로 말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고전14:5).
특별히 고전14:5에서는 예언을 말하기 위하여는 방언을 계속해서 말해야 한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예언이나 방언통역은 방언을 하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은사들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바울은 방언은 자기를 건축한다고 분명하게 언급했습니다(고전14:4). 자기를 세워주고 건축하는 것에는 방언만큼 유익한 은사는 없습니다.
다만, 고린도교회처럼 무분별하게 예배시간에 방언을 말함으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것을 조심하라고 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영적인 것들로서 더욱 더 큰 은사들 곧 방언과 예언을 계속해서 사모하라고 명령했습니다(고전12:31,14:1).
그러니 방언을 말하는 것을 금지해서는 아니 됩니다.
방언을 말함으로 자신을 건축하며, 자신의 미래를 개척해가며, 자신의 미래를 든든히 세워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은총을 빕니다.(동탄명성.정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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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 기도하기를 멈추지 말라(고전14:14~18)
방언의 기본은 무엇일까?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인가 아니면 외국어방언인가? 그리고 방언기도는 꼭 해야 하는 기도인가 아니면 안 해도 되는 기도인가?
이것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오늘은 방언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고, 방언으로 기도하게 되면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방언이 어떤 것인지부터 정리해보기로 하자.
방언에 대한 사전적인 의미는 지방말이다. 즉 방언이란 어떤 지방에서 쓰는 언어라고도 하며, 다른 뜻으로는 사투리라고도 하다.
하지만 세번째로 방언은 신약 시대에 성령(聖靈)을 받은 신자가 하는, 뜻을 알 수 없는 말이라고 나와 있다.
오늘 우리가 언급하려는 것은 지방언어(외국어)도 아니요, 사투리도 아니다.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 그것을 언급하고자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은 우선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사다. 곧 값없이 주시는 성령의 선물인 것이다(고전12:10~11).
그리고 이것은 많은 은사들 가운데에 언어의 은사인 것을 알 수 있다(행2:4).
사실 믿는 자들에게는 성령께서 그 사람의 영 안에 내주하신다. 이 때에 사람의 영은 소생함을 얻는다. 왜냐하면 그순간 하나님의 생명이 그 사람의 영에게 공급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것은 영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사실 감지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래서 그때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어떤 선물을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의 영이 말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2:4에 보면, 믿는 자들에게 성령께서 오셔서 처음으로 선물을 주실 때, 그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방언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또한 자신의 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써 비밀기도라고도 했다(고전14:2,14).
그러므로 방언기도는 마음(이성, mind)으로 드리는 기도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기도다.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때로는 이기적인 욕심이 들어갈 수가 있고, 때로는 악한 마음이 끼어들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영으로 드리는 기도인 방언은 [선행되는 철저한 회개로 말미암아]그런 것이 전혀 들어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성령의 도움으로 내 영이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는 하나님께 100%상달되는 기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혹 당신이 방언을 통역해 본다면, 방언기도에는 단 한 가지도 나쁜 기도나 악한 기도가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맨 처음으로 지구상에 나타난 방언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예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으로 '새 방언(글로싸)'을 말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하셨다(막16:17). 여기서 '새로운'이라는 단어는 질적으로 새로운이라는 헬라어 단어('카이노스')이다.
즉 이전에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언어를 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맨 처음에 지구상에 나타난 방언은 단지 외국어방언뿐이었다고 축소하여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사도행전 2장에 마가다락방에 모인 성도들이 외국어방언을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날 마가다락방에 모딘 120명이 했던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기본이었다. 그리고 더불어 외국어 방언도 나타났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  사도행전 2장을 다시 읽어보자. 우선 단어부터 보자. 그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나타났던 방언은 사도바울이 고전14장에서 말했던 그 방언과 똑같은 단어다. 이름하여 '글로싸(tongue)'라는 것이다. 예루살렘교회이든지 고린도교회이든지 둘 다 '글로싸'라는 방언을 한 것이다.
그런데 오순절날 마가다락방에 모인 자들이 행한 방언들을 들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일이 발생했다.
왜냐하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서 로마의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다가 오순절을 지키러 왔는데, 그날 자기가 태어난 곳의 지방방언을 들었기 때문이다.
마가다락방에 모인 자들은 거의 다 갈릴리 촌사람들이었지만 15개국의 지방언어(디아레크토=speech)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날 외국어방언만이 터져나왔다고 보아서는 아니 된다. 그 때 두번째로 그 사람들이 말한 방언을 들었던 또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들이 아침부터 새 포도주에 취한 것이 아닌가?(행2:13)"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날 터져나온 방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기본적인 것이었고, 그 가운데에는 외국어방언도 같이 섞여나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날은 왜 외국어방언까지 함께 터져나온 것일까? 그것은 순전히 선교적인 차원에서 일어난 일 같아 보인다. 
왜냐하면 그날 모두가 다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만 말했더라면 아마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그들을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순절날을 제외하고 외국어방언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오순절 이후 방언을 선물로 받은 곳을 전부 조사해 보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 즉 '글로싸'를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고넬료 가정에 모인 이방인들이 그랬고(행10:46),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그랬고(행19:6),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랬다(고전14:2,4,5,6,13,14,19,22,23,26,27,39). 방언의 기본은 외국어방언이 아니라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사람이 알아 들을 수 없는 방언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방언으로 기도하게 될 때 우리는 과연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있을까?
그것은 약 4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방언기도는 하나님만 알아듣는 비밀기도로서, 귀신들까지 벌벌 떨게 만들어 놓는 권세 있는 기도가 되기 때문이다(고전14:2).
사실 사람이 기도를 드리게 되면, 세 가지 영적 존재가 그 기도를 듣게 된다. 하나는 사람이 듣고, 하나는 천사들이 듣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듣는다.
그런데 이때 귀신들도 함께 듣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언어로 기도하게 되면 귀신 중에 성령의 흉내를 내고 그에게 접근하여 그를 타락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알아듣는 비밀기도이기 때문에, 귀신들도 알아듣지를 못한다.
쉽게 말해 귀신들도 자신이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니 그냥 떠나가는 것이다. 귀신을 축사했는데 잘 나가지 않을 때가 있는가? 그럼 방언으로 2~3시간 기도하고 축사해보라. 효과가 다를 것이다.
둘째, 방언기도는 영적인 비밀을 많이 깨닫게 해주는 기도가 되기 때문이다(고전14:26, 갈1:11~12).
방언기도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완전한 기도다. 방언기도를 해 보라. 그때부터 자신의 영은 하나님과 긴밀하게 접촉하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자기에게 나타나기 시작하며, 예수님께서 들려준 말씀의 의미도 서서이 깨닫게 된다. 이것을 '계시'라고 하고 '성령의 조명하심'이라고 한다.
마치 모세가 하나님과 접촉했을 때, 그의 얼굴이 해같이 빛난 것처럼, 우리가 방언기도로 하나님과 접촉하다보면, 누구에게 배우지 않았어도 하늘의 영적인 비밀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그랬다. 그는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지는 못한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서신들 속에는 놀라운 영적 비밀들로 가득 차 있다. 특히 부활, 율법과 복음을 상관관계, 예수그리스도의 재림 등에 관한 말씀들을 보면 그저 놀랍기만 하다.
그럼, 대체 바울은 배우지도 아니했지만 어디서 그런 것들을 알 수 있었던 것일까? 그 해답은 고전14:18에 나와 있다. 개인적으로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방언을 더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놀라운 영적인 비밀들을 깨닫고는 그의 서신서들에 그것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는 방언통역까지도 했으리라 생각된다. 오늘날에도 방언을 통역해보면 수많은 영적 진리들을 깨닫게 되는 것과 같다.
셋째, 그리고 지속적인 방언기도는 성령충만을 지속시켜 주는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행2:4).
처음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가다락방에 모여서 부르짖어 기도했다. 성령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다.
그때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이어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다. 그리고는 두려움을 떨치고 밖에 나가 담대히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다. 오순절날 그들이 방언을 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오늘날에도 방언기도를 많이할수록 성령충만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방언기도는 성령께서 계속해서 도와주시는 영의 기도로서 성령을 접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방언기도는 마음(곧 지각있는 지성<이성>, mind)으로 드리는 기도의 한계를 극복해 주기 때문이다(고전14:14~15).
사실 마음으로 기도드리게 되면 감정이 섞여 들어가 정말 하나님의 뜻만을 추구하는 기도를 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방언기도는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영이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에 [먼저, 돌이켜 회개함이 항상 선행된다면!!] 불순물이 전혀 섞여 들어가지 않는다. 영이 드리는 기도에는 이처럼 악한 기도가 전혀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방언기도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의 작은 분량을 뛰어넘게도 해 준다.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2~3시간이면 끝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언기도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계속 이어서 기도할 수 있고, 그 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또 마음으로 드림으로 빠진 기도도 보충하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은 과연,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는 자인가? 그렇다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
방언이 초대교회 이후 그쳤다느니 귀신방언이니 하는 말에 결코 흔들리지 말라. 방언은 분명 개인에게 매우 유익한 은사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은사를 잘 활용하여, 귀신들의 세력을 이겨냈다. 그래서 그는 정말 변질되지 않는 순수한 복음을 끝까지 전파할 수 있었고, 배우지 않았지만 방언을 통해서 직접 받은 계시를 가지고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다.((아마도 그리스도로부터 온 계시라 함은 지혜의 말씀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가 함께 작동됨에 기인한 것 아닐까?)) 그리고 복음전파시 수많은 어려움과 역경과 맞딱뜨렸지만 방언기도로 속사람의 강건함을 유지할 수 있었고 성령충만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그런 것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방언기도, 우습게 보지 말라. 개인의 영혼에 매우 유익한 것이다.
특히 목회자들에게는 매우 유익한 것이다. 비록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말하는것은 아니지만 목회자들에게 방언기도는 필수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당신이 지금 말하고 있는 방언이 혹 부르짖어 간절히 회개한 다음에 받은 정상적인 방언이라면 그 기도를 멈추지 말라.
방언기도는 우리 주님이 오실 때까지 우리의 영혼이 유익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방언을 통역할 수 있다면 그것은 교회공동체를 위해서도 큰 유익이 된다. 그러니 방언기도를 멈추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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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언사역이 따로 필요한가?(마11:12~13)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언사역이 따로 필요할까요? 분명히 따로 필요하다고 여기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분들은 어떤 성경구절을 근거로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일까요?(고전14:1~4,22) 그것은 고전14장에 나오는 말씀들입니다.
[고전14:1-4] *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고전14: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고전14: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씀에 마음이 꽂히신 분들은 예언하기를 사모해야 하는구나 하고 그냥 믿어버립니다.
물론 오늘날까지도 예언사역이 없어진 것은 결코 아니지요, 여전히 예언사역이 존재합니다.
예언사역은 사실 신령한 은사에 속하기에 누구에게서나 분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지식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을 말해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예언사역이 교회 가운데 어떤 위치를 차지해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말을 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방언 말하기를 추구하기보다는 기왕이면 예언하기를 사모하라. 왜냐하면 방언은 아무도 알아듣는 자 없기 때문에 답답하겠지만 예언을 말하게 되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를 아니까, 그것을 통해서 오히려 사람의 덕이 세워지며 권면하게 되고 위로하며 책망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배우게 하기 때문에 더 유익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한 마디로 방언만을 추구하기보다는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방언의 뜻을 스스로 알아들음의] 예언하기를 더 사모하라는 뜻이 더 강하겠다 생각합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사람이 구원을 얻는 데에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믿음에 있다는 논리와도 비슷한 이치입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이미 고전13장에서 예언이나 방언같은 은사라 할지라도 전부 부분적인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고전13:9).
그리고 그것은 어렸을 적에 어린아이들이 기뻐하는 것과 같음으로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그러한 일을 자신은 버렸다고 했습니다(고전13:11).
[미래 사건을 미리 말함으로서의] 예언사역이 분명히 존재하기는 존재하지만 이것에 올인했다가는 매우 위험할 수도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신령한 은사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속일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예언사역을 추구하다보면 잘못 되어질 위험성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3. 예언사역을 추구하다보면 잘못 되어지는 것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1>첫째,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성령의 주된 사역을 거꾸로 역전시킬 위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오순절성령강림이전에 성령께서는 분명히 예언케 하고, 능력을 행하게 하고, 환상을 보게하고, 꿈을 꾸게도 하며 해석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다 오순절이후 내주하시는 성령 이전의 사역들을 가리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사실 성령께서 믿는 이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영역을 획기적으로 바꾸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죽으시기 하루 전날 마가다락방에서 주신 말씀(요14~16장)에 고스란히 나와 있기도 합니다.
일명 "다락방강화"라는 말씀인데요, 여기에 보면, 예수께서 믿는 자들 속에 보내주실 보혜사 성령이 하실 역할에 대해 분명하게 했습니다. 그것은 "그분은 사람들 속에 계시게 될 진리의 영(요14:17)"으로서, "그분은 보혜사(돕는 자)로서 내(예수님)가 너희(제자들)에게 말했던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며, 혹 배우지 않았던 내용이라고 가르쳐 주실 것이다(요14:26)". 그리고 "뿐만 아니라 보혜사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으로서 이 세상에 와서 나(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증언하게 될 것이다(요15:26)"
그렇습니다. 오순절 이후, 사람의 마음 속에 내주시는 보혜사 성령의 주된 역할은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알려주는 일이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셨던 말씀을 정확히 생각나게 하고 깨우쳐 주어 거짓된 가르침들에게 속지 않게 해주시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령의 은사사역은 성령의 주된 역할이 아니라 부수적인 역할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들은 사실 신령한 은사들을 조금이나마 믿는 자들에게 경험하게 함으로,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고 지금도 그분이 살아서 역사하시는구나 알려주는 정도입니다. 그것은 보조적인 역할인 것이지 주된 사역이 아닙니다.
---2>둘째, 은사들은 좇아가다 보면,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최고로 알고 좇아가기보다는 자신보다 더 큰 은사자를 좇아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 오로지 말씀과 경배에 최우선시 함으로써 치우치지 않음이 중요한데, 특정인에 대해 현재 상태와 미래를 내다 보는 예언적 적용, 곧 심리적 조종에까지 이를 수 있는 바, 지식의 말씀의 은사의 오남용이 특히 그러한 것 같습니다]
따라서, 예배에 참석한 자들은 어서 속히 설교(메시지)가 끝나서 예언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경륜을 뒤집는 행위입니다.
혹 예수님과 성령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는 가운데 은사나 능력을 추구하게되면 어떤 불상사도 나타나게 됩니다.
예언사역을 하다보면, 누군가가 틀림없이 더 큰 은사와 더 큰 능력이 요구하게 될 때, 대부분의 은사자들은 귀신이 주는 더 큰 영적인 은사와 능력의 유혹을 그만 뿌리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예언자의 말을 더 크게 보고 그것을 자기자신의 중심에 두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미혹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일생을 예언에 매이게 하여 움짝달싹을 못하게 올가미와 같은 역할을 해 버립니다. 그러면 예수님보다 은사자를 더 높게 될 뿐입니다.
---3>셋째, 이러한 신령한 은사를 받은 자들이 감사하다고 돈을 주다보면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어도 곧 금전적인 거래가 일어나는 통로가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주신 신령한 은사를 값없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쌍방간의 거래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나 능력을 사용하거나 그것의 도움을 받을 때에는 각별한 주의와 분별력이 요구됩니다.
그러하면, 예언사역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4. 예수님께서는 예언사역에 관하여 많이 말씀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예언사역을 하는 자들을 매우 조심하라(주의하라)고 누차 경고하셨습니다. 왜냐하면 
--1>첫째, 구약적인 예언사역은 당신이 오셔서 완성하심으로 종료되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의 날들로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선지자들과 율법은 요한까지 예언하였다(마11:12~13)"
다시 말해 구약의 예언사역은 예수님을 위하여 존재했는데, 이제 그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고 완성할 것이니 더이상 구약적인 예언사역은  끝났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적인 예언사역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첫째로는 메시야가 누군지를 예언하는 일이었고, 둘째로는 회개를 촉구하는 선포였습니다. 메시야가 오긴 왔는데 그분이 메시야이신 것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수천년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의 입술을 통해 메시야에 대해 예언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십계명의 불순종에 대한 징계에서 벗어나게 되며 천국에도 들어갈 수 있기에 회개를 촉구한 것입니다.
하지만 구약의 예언들은 세례요한을 마지막주자로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구약의 예언들을 예수님께서 성취하시고 완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순성 성령강림 이후 [미래적인 일들을 미리 말하는] 예언사역은 종결되었다고 보는 것은 대체로 맞습니다만.
물론 성령께서는 전지하심으로 미래의 일들을 말씀하실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 그것을 말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그렇게 큰 무게를 가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일례를 든다면,  바울이 예루살렘 올라가면서 누군가가 띠로 묶는다고 예언했어도 사도바울은 [영분별을 통해] 그 예언을 무시하고 복음전파 사명 완수를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곳에서는, 즉 바울은 살전5:20에서, "예언을 멸시치 말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19~22)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고전14:29) ---예언을 멸시하지 말아야 함과 동시에, 모든 예언은 반드시 분별을 통해 취사선택 되어져야 함을 기억하라.  ....예언을 멸시하여, 예언을 모조리 믿지 않거나, 반대로 예언을 분별없이 모두 다 받아들이는 극단, 곧 양극단으로 빠져서는 절대 안 되며 올바른 예언/예언자의 특징은 겸손이 그 특징임을 주의하라...
--2>둘째, 마지막 때가 될수록 거짓선지자들이 일어나 미혹할 텐데,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지만 결국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들어있어 영혼을 갈취할 것이라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마7:15,24:11).
그리고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이라도 쏙 넘어갈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마24:24). 그리고
--3>셋째, 요14~16장의 마가의 다락방 강화에서 경륜적으로 볼 때 구약적인 예언사역은 사그러져 가게 될 것인데, 보혜사로 오시는 성령의 주된 사역은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알려주고, 예수님께서 들려주셨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오늘날 [미래를 말하는] 예언사역은 오히려 말하는 자나 듣는 자나 모두에게 영분별이 필요한 극히 조심해야 할 사역이라고 판단하면 되실 것 같습니다.
5.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오늘날 믿는 이들은 성령사역 중에서 은사와 능력같은 초자연적인 사역들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여서는 아니 됩니다.
무엇보다도 균형이 중요합니다. 영적 유익을 위한 균형을 말합니다. 단지 은사와 능력만을 추구하려고 하는 것은 더욱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물론, 사도바울이 고전14장에 했던 말은 방언하려면 차라리 예언을 하려고 하라 말했습니다.
하지만 경륜상으로 볼 때 구약적인 [미래를 말하는] 예언사역을 확실히 종료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마11:12~13).
그렇다고 해서 예언의 은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분명 아닙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계19:10)고도 계시록에서 말하고 있지요.
하지만 사람은 연약하여 자신이 알지 못하는 내용을 듣게 되면, 그만 거기에 얽매여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 내주시는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회개하고 천국을 침노하여 천국을 들어가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성령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마귀적인 것인지] 분별하는 영분별의 은사 역시 필요합니다.. 사도바울은 예언을 말하라고 했지만 사실 예언을 [그대로] 받으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예언사역은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자기보다 신령한 자에게 예언을 받으려고 노력하고 있고, 성령의 주된 사역을 하지 않고 오히려 일시적으로 주어진 신비한 현상에 몰두하려고 할 뿐입니다.
아닙니다. 그러면 결국 돈을 낭비하게 되고, 시간만 낭비하게 될 뿐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들은 날마다 회개하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여 주님 오실 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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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 우리 시대의 가장 거대한 우상1)[존 쿠퍼(칼빈신학교 철학교수)]
==전체적 조망
십계명 첫 번째 계명은 우리에게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촉구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돈 둘 다를 동시에 섬기지 말라고 경고 하셨다 (마 6:24). 바울은 아테네의 수없이 많은 우상들을 보고 (행 17:16-23) 창조주 대신 피조물을 섬기는 것을 금했다 (롬 1:23-25). 이러한 책망과 경고는 시간과 문화를 초월하여 의미가 있다. 특별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더욱 더 말이다.
이 시대는 너무나 많은 우상들을 섬기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와 권력, 자유, 과학, 기술, 문화, 스포츠, 성 등을 자신의 신으로 섬기고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우상을 섬기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이러한 것들에 탐닉할 때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가장 거대한 우상은 바로 즐거움 혹은 흥밋거리를 찾아 헤매는 것일 듯싶다.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 최대한 시간을 쓰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과 죽음에서 유일한 낙이요 위로”라고 생각한다. 이런 삶을 추구하는 방식을 전문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쾌락주의 혹은 향락주의 (hedonism)이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방법으로 쾌락주의로부터 멀어지길 노력했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더 사랑할 때도 있었고, 세상이나 우리 자신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기도 했다. 심지어 성경이 말하는 우상숭배 금지에 대한 경고에 크게 개의치 않는 무감각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과연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이런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며, 쾌락주의와 향락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향해 그리스도를 통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
==즐거움 그리고 이 시대의 우상들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바울이 기록한 로마와 아테네에서의 우상숭배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스 로마 종교에서는 제우스가 모든 선과 즐거움, 전쟁, 사랑, 권력, 운, 자연 등을 통치하는 가장 위대한 신이라고 믿었다. 현대 세속 문화도 여전히 이러한 요소들을 섬기고 있다. 다신론자들처럼, 우리도 권력, 과학, 기술, 사회적 지위, 음식, 성, 문화, 스포츠, 레져 등을 우상화하여 섬긴다. 간단히 표현해서 우리는 결국 “즐거움”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인류 문화는 종교, 전통, 사회, 권력, 부, 지식, 명예 등을 가장 높은 가치로 여겼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사회를 사는 우리는 우리의 “기분”에 주로 집중하여 가치 평가를 한다. 가능하면 좌절이나 슬픔 혹은 지루함 없이, 즐겁고, 기분 좋고, 쾌락을 즐기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 우리에게 있어 무언가가 가치 있게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얼마나 건강하고, 선하고, 진실 되고, 아름다운가가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내가 그것을 좋아 하는가 싫어하는가가 가장 중요한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 버린 것이다. 즉, 우리의 감정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이다. 광고업자들이나 정치인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우리의 감정을 조정하려든다. 부모 노릇을 한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자기 자신이 행복하다는 감정을 갖도록 해주는 노력의 일환이다. 우리는 주말을 위해 일하고 여가를 즐긴다. “마침내 금요일이다!” (TGIF!)를 외치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취향대로 즐기세요!” (역자 주: 버거킹 광고 슬로건, Have it your way!) 같은 패스트푸드점 광고는 시대의 정신을 대변한다. 과소비 없이는 경제가 휘청거리고, 우리의 욕구는 광고에 의해 조종당한다. 제멋대로 사는 것을 높은 가치로 여긴다. 맞춤 생산하는 커피나 햄버거, 개인적 취향이 듬뿍 담긴 재생 곡 목록, 온라인 데이팅 서비스, 그리고 각종 교회 성장 전략 등등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우리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 노력한 결과이다. 이 시대의 모든 문화는 마치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사는 삶이 제대로 된 삶인 듯 잔뜩 환상을 불어 넣고 있다. 만약 이 시대의 문화들이 우리를 만족 시키지 못한다면, 컴퓨터나 마약류 등이 그 빈자리를 채울 것이다.
쾌락주의는 단순히 음식, 성, 그 외 사고 싶은 물건들로 그 범위가 제한되지 않는다. 우리의 모든 삶의 부분 부분이 바로 쾌락의 원천이다. 특별히 우리는 종교, 도덕, 정치, 관계, 일 등을 통해 즐거움을 찾으려고 한다. 쾌락주의는 단순히 특정 사회 계층에만 국한되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예술품 감정가, 질 높은 음식만 찾아다니는 미식가 등도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만족될 때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즐거움과 쾌락을 추구하며 사는 이들을 보면서 부러워하기도 한다. 때때로 사회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 중에는 즐거움과 공공선을 헷갈리기도 한다. 비만병은 단순히 육체적 문제를 지칭 한다기 보다는 사회 전반에 걸친 탐닉의 이야기에 대한 메타포일 수 있다. 온갖 종류의 즐거움에 탐닉하는 모습은 마치 우리의 가슴과 영혼과 생각이 비만병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모습과도 같다.
미국 독립 선언문에 보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의 목적이다. 만약 쾌락주의가 말하듯 행복이 단순히 기분이 좋은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될 것이고 모든 가치와 의무들은 그것에 의해 판단되고 통제될 것이다. 그러므로 쾌락주의는 세계관이요 가치관이다. 이러한 쾌락주의는 종교와 도덕에도 깊게 침투한다.
종교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건전하고,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도록 우리를 고취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쾌락주의에 전도된 예배는 항상 즐거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성령의 임재는 감정이 느끼는 바와 상관있다. 예배 찬양은 우리의 구미를 맞춘다. 지루한 예배를 만들지 않기 위해 예배 중의 무질서함도 어느 정도 용납된다. 복음 전도 시 죄와 회개의 이야기보다는 구원의 유익에 대해서만 집중한다. 십자가 없는 종교적 약속, 바로 이러한 종교적 행복감에만 탐닉하고 있는 것이다. 영성 훈련을 위해서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지 않는다. 그냥 가끔씩 가벼운 운동 하듯 영성 훈련을 한다. 만약 아이들이 교회나 교리교육에 큰 흥미를 느끼지 않거나 귀찮아 할 때는 그냥 쉽게 포기해 버리고 한 마디 던진다: “꼭 필요한 일에만 전력투구하라” (Pick your battles). 이것은 개혁주의 전통에 있는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다양한 기독교 전통의 모든 교회들도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 문화가 종교를 변화시키고 있다. 종교는 문화에 굴복 당하고 있다.
즐거움과 쾌락은 도덕적 가치도 형성한다. 쾌락주의는 남들을 해치지 않는 이상, 원하는 대로 행복을 찾아 누릴 권리가 있다고 가르친다. 또한 우리 자신에게만 이기적으로 즐거움을 선사하지 말고, 남들에게도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라고 외친다. 감정 이입된 공감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즐거워할 때 자신도 즐거워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만약 우리가 남들을 즐겁게 해주었을 때 그들도 나에게 똑같이 해줘야 한다는 심리도 가지고 있다. 황금율 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그렇게 하듯 남들에게도 행복을 위한 똑같은 기회와 자유를 줘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우리 사회에 도덕적 포괄주의를 선사한다.
성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바로 그 예이다. 모든 사람은 성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 쾌락주의적 원리에 의해 성을 해석하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모든 어른들은 자신의 성적 만족을 위해 노력함에 있어서 자유를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 하에서는 결국 모든 종류의 합의된 성관계 (예를 들면, 이성간의 관계, 동성애, 직업여성과의 관계, 혼전 관계 등)는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이 도출되기 마련이다. 반대로 미성년자와의 성관계, 자발적이지 않은 관계, 혹은 불륜 관계 등은 반드시 거부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도덕과 윤리 그 자체를 버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결국 기독교적 윤리 대신에 쾌락주의만을 인정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는 연민” 혹은 “무조건적 사랑”에 근거하여 일부 크리스챤들은 성윤리를 진보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엔 반드시 그에 맞는 세계관이 심사숙고 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우상숭배
성경에 의하면,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행위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공기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듯, 하나님과의 관계도 하나님을 닮은 인간에는 반드시 필요하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멀어짐과 동시에 그들의 “빈 공간”의 문은 열렸다. 하나님이 없는 이 빈 공간은 아무리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가 않았다. 
우리는 이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 대신에 다른 것으로 채워 넣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치 폐로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이 부질 없는 짓을  했고, 공기 대신에 독가스를 마시는 것과 같이 무모했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심지어 이름 없는 신에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목격하기에 이른다 (행 17:16-23).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무슨 짓을 하는지에 대해 똑똑히 목격했다. 
창조주 대신 피조물을 섬기고, 심지어 동물이나 새나 파충류를 섬기기도 하고 (롬 1:25), 음식 (빌 3:19), 돈, 자기 자신, 그리고 즐거움 (딤후 3:2-4)을 섬기기도 한다. 
그러므로 쾌락주의 우상은 오늘날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를 앗아가고, 인간의 삶의 질을 황폐화시킬 뿐 아니라, 우상화 되는 모든 것들을 왜곡시킨다. 
쾌락주의는 원래 없던 즐거움을 진정한 즐거움이라고 속이고, 원래 줄 수 있는 기쁨보다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다고 과장할 뿐 아니라, 삶의 모든 부분을 왜곡시킨다. 이러한 쾌락주의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우상숭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것을 갚지 못함을 통해 하나님을 우리에게서 빼앗아버린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순종해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창조주대신 피조물에게 경배한다면, 우리는 결국 피조물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받아야 할 영광과 존경을 우상들이 대신 받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 제목을 응답해 줄 능력이 없는 우상들에게 뭔가를 기대하며 섬긴다. 
이사야서 44:6-20은 나무에게 신적 권위를 부여하는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을 말해주고 있다. 
나무의 반쪽은 땔감으로 쓰고 있으면서 나머지 반쪽에게는 신이라고 부르며 섬기는 것이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심지어는 우리가 만든 것을 신이라 부르고 그것들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우상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우상들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국 우상숭배는 자기기만일 뿐이다. 시간 낭비일 뿐이며, 우리에게 아무런 축복을 주지 못하는 것들에게 우리의 정력만 낭비할 뿐이다. 
결국 우상을 통해 충족되지 못한 공허감을 달래기 위해서 우리는 더욱 더 다른 것에 우상숭배를 하는 어리석은 사이클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상숭배는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방편이 되지 못한다. 쾌락주의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성경적 지혜 그리고 즐거움의 경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과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함과 아름다움을 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음식, 사랑, 성, 가족, 사회, 자연, 문화, 일, 여가, 쉼 등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선한 즐거움의 원천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선하고 옳은가를 판단할 수 있는 지각을 주셨고,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능력도 주셨다. 우리는 맛과 기분,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의 감정도 느낄 줄 아는 지각을 지녔다. 우리는 신성에 대한 느낌/인식 (sensus divinitatus)까지도 가지고 있다.
인간의 경험 속에서 성경적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 단순하고 순간적인 쾌락은 우리가 늘 바라던 지속적인 즐거움과는 거리가 있다. 음식이나 성, 음악, 스포츠, 돈, 사랑, 성공 등은 우리에게 기껏해야 짧은 즐거움을 줄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욕구는 끝이 없고 절대 만족이 없다. 한번 느낀 쾌락은 또 금방 싫증난다. 나이가 먹어갈수록 혹은 몸이 아플수록 즐거움에 대한 욕구는 줄어간다. 플레이보이지의 휴 헤프너가 과연 아흔살이 되어서도 계속 즐기면 살 수 있을까? 삶은 즐겁지만, 과연 죽음까지도 즐거울까? 영원토록 지속되는 즐거운 삶은 하나님으로부터만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어떤 피조물도 이러한 즐거움을 주지는 못한다.
타락한 인간이 느끼는 즐거움은 자주 우리 자신을 속인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암이 있는 사람은 암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여전히 즐거운 인생을 살 수 있다. 몸을 해롭게 하는 음식들도 맛만 좋다면 몸이 망가지든 상관없이 즐겁게 먹는다. 우리의 몸과 영혼을 죽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분만 좋다면 그냥 즐긴다. 어떤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또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진실은 반대일수도 있다. 때때로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을 하더라도 전혀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은 채 살기도 한다. 죄가 우리의 몸과 영혼을 다 장악하고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우리의 감정은 우리의 삶을 이끌만한 능력이 없다.
우리의 삶의 목적을 단순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행복과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행복과 즐거움은 그러므로 우리 삶의 목적이라기보다는 목적을 성취하는 과정에 발생되는 결과물이다. 만약 행복과 즐거움을 최우선 순위로 둔다면 결국 이것은 하나님의 의도와 정면 배치되는 결과를 낳는다. 건강보다 순간적인 쾌락을 우선시한다면 당연히 건강은 안 좋아지게 될 것이고 이는 결국 즐겁지 못한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만들 것이다. 만약 단순히 스스로의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 남에게 잘 대해준다면 이것 역시 결국에는 자신 자신을 망치게 된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가 단순히 하나님께 그 섬김에 대한 보답을 받기 위함이라면 이것은 결국 하나님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에 해가 될 것이다. 쾌락주의는 결국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종류의 유익들, 즉 결혼의 유익, 혹은 가정, 교육, 정의, 도덕, 종교의 유익을 위태하게 만들 것이다. 쾌락주의는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이 아니다. 쾌락주의는 스스로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소비하게 만들어 결국 건전한 자연, 사회, 경제, 도덕의 근간을 흔들리게 할 것이다.
==크리스챤 삶의 즐거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우상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죄악 된 본성과 싸우고 있으며, 진실 되지 않은 즐거움에 대한 욕구로 갈등하고 있다. 성경 속 인물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상을 섬기고 싶은 유혹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다. 비록 크리스챤들은 세속적인 쾌락 그 자체를 우상화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즐거움에 대한 욕구는 하나님의 뜻과 배치될 때가 많다. 우리는 즐거운 경험을 위해서 많은 시간과 물질을 들인다. 우리는 때때로 잘못된 방법으로 즐거움에 대한 욕구를 만족하려 한다. 그러다 보면 과연 무엇이 진정한 즐거움인지에 대해 망각할 때가 많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결국 영적인 게으름을 동반하며, 참된 청지기직을 수행하기에 힘들게 만든다. 하나님 나라를 찾는다는 목표는 실패하게 된다.
이토록 심하게 쾌락을 탐닉하는 사회 속에 사는 크리스챤들은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을 영위하도록 애써야 한다. 때때로 극단적인 쾌락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건전한 즐거움도 필요할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것이 건전한 즐거움인지에 대해 취사선택하는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금욕주의가 능사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은 말하길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로 인해 평생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역시 교훈하길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진정한 위로와 행복의 원천이 된다고 한다. 진정한 기쁨과 행복은 바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그의 선한 기쁨과 영광을 누리는 “샬롬”의 상태이다. 이러한 즐거움을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가족, 교회, 그리고 공공의 장소에까지 널리 퍼트려야 한다. 이를 통해 쾌락주의에 빠져 허우적대는 우리 이웃들이 진정한 행복이란 쾌락을 숭배하는 것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시편 37편 4절이 교훈하듯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의 방법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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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언의 영 = 예언의 은사를 나눠주시는 성령]]
“대언의 영”이란 무엇인가(계 19:10....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예수께서 친히 증거하신 말씀. 곧 그분의 삶과 가르침) 예언의 영이라 )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계 19:10).//[AMP]10 Then I fell down at his feet to worship him, but he [stopped me and] said to me, “You must not do that; I am a fellow servant with you and your brothers and sisters who have and hold the testimony of Jesus. Worship God [alone]. For the testimony of Jesus is the spirit of prophecy [His life and teaching are the heart of prophecy].”
성경에 단 한 번 나오는 용어인 “대언[예언]의 영”을 계시자 요한은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가? “대언의 영”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충만케 되어야 할 성령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성령이 주시는 바 특정한 선물[대언=예언]을 가리키는가? 더욱이 요한계시록 19:10에서 “예수의 증거”는 왜 “대언의 영”이라 불리는가?
==“대언의 영”의 의미:
“대언의 영”이란 표현은 요한계시록 19:10에서만 한 번 나타나는데, 요한계시록 어디에도 그것에 대한 설명이 없다. 이렇게 설명이 주어지지 않은 이유는 분명 요한계시록의 원래 수신자였던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표현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언의 선물을 나눠주시는 성령을 가리키는 말로 이 표현을 이해하고 있었다.
랍비 유대주의는 “거룩한 영”, “하나님의 영”, “여호와의 영”과 같은 구약의 표현들과 “대언의 영”을 대등하게 여겼다. 이렇게 여긴 것은 구약의 아람어 번역(<타르굼>)에 자주 나오는 그 표현에서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아람어 번역의 창세기 41:38은 요셉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와 같이 여호와 앞에서 나온 예언[대언]의 영에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또한 아람어 번역의 민수기 27:18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예언[대언]의 영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1세기 독자들에게 “대언의 영”이란 표현은 하나님에 의해 계시되어 위탁된 기별(메세지)을 선포하기 위해서 선지자[예언자]라 불리는 특정한 사람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을 의미했다. 
다시 말하면, “대언의 영”은 선지자들에게 감동과 능력을 부여하여 하나님의 기별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도록 하신 성령을 가리킨다(참조 벧후 1:21).
==“예수의 증거”의 의미:
본문은 “대언의 영”과 “예수의 증거”를 동등하게 본다. 헬라어로 “예수의 증거”라는 표현은 예수에 관해 증거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따라서 <새미국역>은 이 구절을 “예수를 증거함”(계 12:17)으로 번역한다.
또는 이 구절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의 봉사를 통해서 그리고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승천 후에 대언[예언]의 영을 받은 그분의 종인 선지자들을 통해서(참조 벧후 1:11, 12) 예수님 자신이 하신 증거를 가리킬 수도 있다.
요한계시록의 문맥에서는 후자의 의미가 적절한 것 같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어 역본에는 “예수의 증거”라고 되어 있다(<영어표준역>, <제임스왕역>, <새국제역>, <새미국표준역> 등).
요한계시록 1:2, 9; 12:17; 20:4에서 “예수의 증거”라는 표현은 매 경우마다 “하나님의 말씀” 또는 “하나님의 계명”이라는 구절과 평행하게 대칭으로 나온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고,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예수의 증거”는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을 말한다.
요한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을 가리키고, “예수의 증거”는 복음서 및 베드로나 바울 같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9:10은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 곧 인간에게 예언의 선물을 부여하시는 성령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증거”라는 구절이 나오는 문맥이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는 진술의 의미를 푸는 열쇠이다.
“예수의 증거”는 참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기별이 자신의 생각이 아님을 나타낸다. 오히려 그것은 “대언의 영”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증거로서 교회에 보낸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그것이 “대언의 영”이라고 지칭된 것은 선지자들에게 감동과 능력을 주어 그리스도의 말씀을 하게 하시고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수의 증거”를 전달하도록 하신 분이 성령이기 때문이다(참조 벧후 1:20, 21).
“예수의(에 의해 전달된) 증언 또는 증거는 대언의 영이다. 이 난외주는 예수의 증거를 가진 형제들을 구체적으로 예언자로서의 영감을 소유한 자로 규정한다. 예수의 증거는 사실상 ‘예수가 증거함’이라는 뜻이다(22:20). 그것은 그리스도인 선지자들을 감동케 함 통해 드러낸 예수의 자기 계시이다”(James Moffatt, “The Revelation of St. John the Divine,” The Expositor’s Greek Testament, ed., W. R. Nicoll, 5 vols.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1980], 5:465). --- 당시 안디옥교회에는 이미 일단의 선지자들이 있었음에 유의하라.. (행 13:1)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교회에 있는 예언의 은사: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9:10은 교회에서 선지자들이 특별한 무리로 구별된 자들이라는 신약의 분명한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한다.
“대언의 영”은 교회 내에 있는 모든 신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하나님께서 선지자적 봉사로 부르신 자들만을 지칭한다.
이 사실은 요한계시록 22:9에서 특별히 강조된다.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9:10에서 요한이 말한 “형제”는 대언의 영을 통해서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다. 이런 이해는 요한계시록 22:6에서 다시 확인된다.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계시자 요한은 이 성경절에서 자신도 선지자들 중 하나(자기 이전에 바울 같은)라고 주장한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계시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또한 그는 이상 중에서 천사를 통해서 자신에게 전달된 “예수의 증거”를 전한다(계 1:2).
그러나 계시자 요한이 자신을 마지막 선지자라고 여기진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는 선지자적 봉사가 1세기 후에도 교회 내에서 계속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지적한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 시대를 통하여 개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것이지만, 요한계시록 12:17은 마지막 시대의 하나님의 남은 무리의 특징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의 증거” 곧 대언의 영[예언의 은사]을 가진 것임을 분명하게 말한다.
다시 말해서, 마지막 시대에 있을 남은 교회는 다시 한 번 요한의 시대처럼 교회 내에서 역사하는 예언의 은사를 갖게 될 것이다.((예언의 은사를 받은 이들마다 기적/능력과 함께 성령의 열매 맺음이 나탄나게 될 것  -- 성령의 열매로 분별할 수 있다))
==결론:
요한계시록 19:10(참조 22:6, 9)은 이 지구 역사의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에 대한 보증 및 옛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선지자라 불리는 자들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도에 대한 보증을 준다.
그러나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을 불신실한 자들과 구분지어 주는 것은 그들 가운데 역사하는 예언의 은사의 나타남만이 아니라 그 예언의 메세지 내용(기별)을 신실하게 따라 순종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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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절(하누카)유래와 크리스마스(성탄절)-신년맞이..Merry Christmas and Happy New Year
==배경 : 수전절(하누카)은 ‘봉헌(dedication)’이라는 단어에서 비롯되었으며 알렉산더대왕 사후에 시리아 지역을 통치했던 셀류쿠스 왕조(Selucid Dynasty)의 안티오커스 4세(Antichus IV)에 의하여 더럽혀졌던 성전을 하스몬(맛다디아의 선조 이름) 왕조의 마카비(맛다디아의 아들 유다의 별칭)가 재탈환하게 되었을 때 성전 봉헌을 축하하면서 생겨난 명절입니다.
==경과 :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제국이 넷으로 나뉘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북쪽의 셀류쿠스 왕조와 남쪽의 톨레미(Ptolemy)왕조 사이에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처음 100년간(주전 320-200) 톨레미 왕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주전 218년에 있었던 라피아(Raphia) 전투를 기점으로 톨레미 왕조의 세력은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주전 200년에 있었던 페네이온(Paneion) 전투에서 톨레미 왕조가 패하고 이스라엘은 셀류쿠스 왕조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셀류쿠스 왕조의 이스라엘 핍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뒤따랐습니다. 특히 안티오커스 에피파테스(Antiochus Epiphnes)는 유대인의 모든 성전 제사 행위를 금지시키고, 안식일과 할례를 금했을 뿐 아니라 이러한 법을 어긴 사람은 사형에 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룹바벨 성전을 헬라화된 성전으로 만들면서 제단에 돼지를 죽여 바치면서 성전을 더렵혔습니다. 또한 제우스 신상을 성전에 세우도록 하였으며 유대인들에게 제우스 신에게 절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바로 그 때 모딘(Modin)이라는 예루살렘 북서쪽 25km 떨어진 작은 마을의 제사장이었던 맛다디아라는 사람이 셀류쿠스 왕조의 명을 어기고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며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모았습니다. 그 당시 안디오쿠스 에피파테스는 이스라엘 전국을 돌면서 제우스 신상에 절하도록 강요하였는데 이에 반대하는 모딘 마을의 제사장 맛다디아는 아들 다섯 명(요한, 시몬, 유다 마카비, 엘리아살, 요나단)과 함께 [하스몬가로 불리고 있었음] 이방 제단을 부수고 반란을 일으켜 셀류쿠스왕조에 대한 투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마카비 혁명의 시작임] 이 때 많은 하시딤(경건한 자들)이 맛다디아에게 합류하였으며 맛다디아는 혁명 초기인 첫해 주전 166년에 사망하게 됩니다. (마카비상 2:70).
한편, 하시딤전사들은 자신들을 방어할 능력이 충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안식일 준수 계명을 지키느라고 안식일에 급습한 셀류코스 준대에 대량학살당하는 일이 있고 난 후 비로소 <여러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한번의 안식일은 어겨도 허용한다>는 관례가 새로 생겨나게 됩니다.
아버지 맛다디아의 사후 5형제중 가장 탁월한 영도자로서 추대된 유다 마카비가 혁명을 이끌 영도자로 추대되는데, 상대적으로 숫적 열세인 마카비구혁명군은 셀류쿠스와의 전쟁을 위해 산으로 들어가서 지리적 잇점을 최대한 살리는 게릴라 전투방식으로 대항하는 전술을 채택하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 적은 숫자로도 많은 수의 군대를 예기치 못하게 급습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리게 됩니다.
한편, 셀류코스 왕조는 헬라제국 내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새로운 경쟁자들이 나타남으로써 상대적으로 혁명제압 맟 반유대 법령 실행에 대해 관심과 대책을 집중할 수 가 없게 되었고, 이 틈을 타서 유다 마카비는 예루살렘 성문까지 진군해 들어가게 됩니다. 이로써 이 사건을 마카비(Maccabee) 전쟁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그 결과 하스모니안(Hasmonian.....하스모나이는 맛다디아의 선조의 이름)이라는 독립 국가가 탄생되었던 것입니다.
.....저들은 먼저 이방인에 의해 철저히 오염된 성전을 깨끗하게 정화 작업을 실시했습니다. 부정한 돼지 피에 의해 더럽혀진 제단을 허물고 새로운 돌로 제단을 쌓았으며 금관과 금 방패를 만들어 새롭게 성전에 배치하고 부서진 문들을 재건하였습니다.
.....한편, 당시에 성전 안의 등대 불을 밝히는데 쓰이는 거룩한 기름은 대제사장의 인증을 받아야만 쓰일 수 있었는데, 당시 쓸 수 있는 기름 양은 고작 하루치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새롭게 제조하여 사용하려면 적어도 8일간 더 기다려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믿음으로 등잔대에 불을 밝히게 되는데, 상상못할 기적이 일어납니다.. 등대 기름이 부족하여 다 떨어져야 마땅한데도 무려 8일간이나 등불이 계속 켜 져 있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엔 새로 제조-인증 기름을 사용하게 되었음을 두말 할 나위가 없습니다.
종래 성전의 등잔대(등대...메노라 등잔대)의 가지는 총7개 였지만..... 그 후로는 하누카<수전절> 때 만큼은 그 기적을 기념하여  9개의 가지를 가진 새로운 등잔대(하누카 등잔대)를 만들어 향을 피우고 새롭게 성전을 봉헌하였습니다. 주전 164년 12월 25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수전절은 12월 25일을 시작으로 만8일간<즉 9일>준수됩니다. 수전절(하누카)에는 유대인 가정마다 9가지로 된 하누카 촛불을 밝힙니다.
수전절이 시작되는 그슬르월은 양력으로 12월입니다. 수전절과 크리스마스의 날짜가 너무나 일치하고 있는 듯 보일 겁니다!!!
@@수전절, 성탄절 관계성.
... 수전절 날짜와 크리스마스 날짜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크리스마스가 수전절에서 유래되었다고 일각에서 말하기도 합니다. 
수전절때 촛불을 발히듯이 크리스마스 역시 촛불을 밝힙니다. 이는 빛되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임의로 정한 것이라면>왜 교회는 12월 25일을 예수님의 생일로 정했을까가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유대인의 명절인 수전절을 크리스마스로 대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기는 합니다만...물론, 예수님께서 12월에 태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보는 것은 세상의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탄생하신 그 때즈음, 목자들이 들에 나가 밤새 양을 쳤다고 기록했는데...세상적인 상식으로는 들에서 양을 치던 그 때가 12월이었다고 색각하는 것이 들어맞지 않는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여기에 매우 중요한 반론이 있습니다 : 베들레헴은 산지 마을이며 예루살렘에서 매우 가깝지요.... 하기에, 예루살렘성전에 쓰일 양들을 미리 선별하여 방목하는 데 이를 위해 지키는 목자들이 함께 있었음....유대 광야의 높은 지대인 미드바르는 겨울철에도 상대적으로 온화하여(평균기온 12-14도) 양과 염소를 방목할 수 있다고 합니다]].....<참조>미쉬나(오랜동안 구전으로 내려오던 전승들을 200년경에 편 한 유대 문헌)에 따르면 일반 양들은 아무곳에서나 방목하지 못하게 하였으나, 성전에 희생제물로 바쳐질 양들만 방목을 하도록 하였다(Baba Qamma 7: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베들레헴에서 기르던 양들은 대부분 성전에 바쳐질 희생제물들이었다(Shekalim 7:4) . 따라서 이 양들은 들에서 방목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목자들이 치던 양들은 바로 희생제물로 바쳐질 특별한 양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 드려질 양들을 치는 사람들이었음으로 특별히 성별된 사람들이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 목자들은 보통 말하듯이 가난해서 밤에도 양을 돌보아야 했던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성별된 목자들이었던 것이다.
*****Old City 중심******
@예루살렘성의 주변산들 : **남쪽은 시온산, **성전산(마카비 성전산과 헤롯 성전산이 훌다게이트로 연결됨), **성전산의 동쪽은<기드론시내 건너> 감람산
@예루살렘성의 성벽문들 : **동북쪽 성벽<양문 = 사자문 = 스데반문 :: 현재는 무슬림지역에 해당> **남쪽성벽 : <시온문...아르메니안 구역> <분문>  **서쪽성벽<욥바문> **북쪽성벽<새문....기독교인지역..북서,> <다메섹문> <헤롯문..북동>
@@예루살렘 성전 경내와 주변부 :
##황금문<=미문(2개), 성전 동문, 실은 성전의 북동모서리를 마주함...닫아둠>: 성전뜰로 진입하면[남쪽, 북쪽,동쪽뜰 : 이방인의 뜰..남쪽의 성전뜰 입구(더블게이트, 트리플게이트), 북쪽 노던게이트 통해 진입가능]-->즉, 미문((동쪽, 성전경내 진입 입구)를 지나면 [<수종드는>여인의 뜰과 방들]-->[이스라엘의 뜰] 제단...[성전 남쪽: 제사장의 뜰]-->[계단]-->성소-->지성소
##성전경계 출입문들, 행각들 : **서쪽 <워렌 게이트, 바클레이트 게이트> **남쪽<더블게이트, 트리플게이트> 동쪽 <수산게이트=황금문> **북쪽<노던 게이트>
=== 남쪽 성전 경계벽면 : <왕의 행각...그 아래층에 산헤드린 건물..더블게이트 트리플게이트를 통해 진입 > **성전 경내남서 모서리 :  <성전 꼭대기> ......**성전 동쪽 경계 벽면 : 솔로몬의 행각 **북서쪽 경계<내부:빌라도관저>//경계 외곽부 : <안토니오 요새> 성전 서쪽경계벽의 남부 일부만 AD73.티토가 남긴 것이 통곡의 벽임
=== 빌라도 관저에서 성전경계 북문을 통해 나오면 서쪽 골고다까지 이어지는 십자가의 길 나옴.
< 성전경계 북동쪽 외곽 성벽에 양문 위치.(=스데반문=사자문>.. 양문을 지나 진입하면 베데스다 연못<제물로 사용될 양들을 씻겼으며 윗샘, 아랫샘에서 나오는 물로 구성 되었음(어떤 이들은 빗물저장고로 보기도 함)> + 행각 5개<환자들을 위한>
@@예루살렘성 주변 골짜기 : **동쪽 기드론 골짜기(기드론 시내가 흐르고, 기드론 시내 남부에는 기혼샘 위치....히스기야 당시 유일한 용출샘인 기혼샘은 성밖에 있었는데 여기 기혼샘에서 부터 시온산 남쪽의 실로암연못까지 553미터의 물길을 만들어서 앗수르 산헤립왕의 침공을 대비해 만들어서 성내로 물공급을 원활하게 하었음, 위쪽 향하는 지류는 막았고 아래쪽<남서향>지류를 이용했음), **서쪽<소렉 골짜기>과 남쪽 힌놈의 골짜기
[[대략적 위치 인식]]성전산 남쪽에 시온산, 그 남쪽에 실로암연못이 위치함 다메섹문 근처에서 시작하여 시온문을 넘어서까지 Old City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거친 협곡(rugged ravine : 치즈장이의 협곡 일명 중앙협곡...시온산과 모리아산(=성전산) 분리경계로 삼기도 했음)이 남부-서부의 힌놈골짜기와,  동쪽의 기드론 골짜기와 만나게 됨<기드론골짜기는 성전 동쪽에 있으나 성전지역을 벗어나면서는 남서방향으로 휘어져서 힌놈의 골짜기, 중앙 협곡과 만나고 있음..남서쪽으로 휘어지는 곳부터 골짜기 교차점까지 그 중간에 기혼샘이 있고 기드론 골짜기 교차점 인근에 실로암 연못이 있음>
**예루살렘주변 골짜기 : 서쪽 소렉골짜기(해변길로 이어짐) 동쪽 기드론골짜기(랍바 암몬, 왕의 대로로 이어짐....실로암과 엔로겔 사이에서 중앙협곡<치즈장이 협곡>, 힌놈의 골짜기와 만난 후 쿰란까지 이어짐).
..소렉골짜기와 기드론골짜기 사이 지역들로는 예루살렘 북쪽 Ammunition hill.(광활한 평지지형), Old city의 성전산과 시온산이 중심이 되고, 그 북쪽으로는 벧엘과 나불로스, 남쪽에는 베들레헴과 헤브론 지역으로 이어짐.
....기드론 골짜기에 속하는 지역골짜기 병칭들 : *1>불의 골짜기<유대광야 인접지역 Wadi Nar=valley of fire...곡식말리는 곳. 경작지> *2>마리아의 골짜기 *3>겟세마네 골짜기 *4>여호사밧 골짜기<심판의 골짜기..압살롬의 무덤과 스가랴의 무덤 위치> *5>기드론 골짜기<실로아흐 골짜기, 스가랴가 말한 산들의 골짜기,  불의 골짜기로 별칭하기도 함..기혼샘을 보통 실로완이라 불렀음...아셀지파지역(쿰란)까지 이르게 된다고 기록됨>
***유대의 절기들***
**[[유대력 일자 + 3개월 = 대강의 태양력 일자로 보면 될 것]]
....전통적인 유대의 3대 절기는 유월절/무교절 -- 칠칠절 -- 초막절임, 여기에 마카비 독립전쟁 승리후 수전절(하누카)이 추가됨
^^BC1446-1/15<유대력> : 라암셋 출발<유월절 다음날인 무교절 둘째날> --> ^^홍해 도하는 츨발후 제6일째(유대력1/21일 밤, 태양력4/21) 밤 : 향후의 안식일<무교절 마지막날>에 해당) --> ^^제7일째 : 초실절(홍해도하/육지상륙 완료 = 신약의 부활절...유대력 1/22일(태양력 4/22일경)....첫수확물<보리>을 드림) --> ^^칠칠절 : 초실절 후 49일째 = 신약의 오순절....초실절 후 7주 경과시점 ...유대력 3/11일( 태양력 6/11일)경--> ^^초막절(유대력 7/15~7/22<태양력 10/15~10/22일경>) -->[추가된 절기] ^^수전절 : 태양력 12/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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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닉 유대인들과 역사학자들은> 예수님 탄생일은 초막절 기간이라고 보고 있으며, 예수님이 누이셨다는 구유는 실은 <야곱이 에델에 쳤던 장막, 또는 짐승 우리(숙곳)>이라고 보는것이 합당하다는 의견을 보인다. ....사가랴가 속한 ‘아비야의 계열’은 8번째 반열에 속한다(대상24:10).  이 제사장들의 직무의 시작은 유대력으로 한 해의 시작인 봄, 곧 ‘니산월 안식일(4월경)’에 시작했다.  각 계열이 1주간 봉사하므로 8번째인 아비야의 계열은 ‘시반월’인 6월 경에 성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그 시기에 잉태된 것이다.  그로부터 10개월 후는 그 다음해 4월 곧 니산월 즈음이 된다. 이 때가 ‘유월절 ’기간인 것이다. 세례 요한이 유월절 즈음에 탄생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유월절에 ‘세데르’라고 하는 만찬을 먹으며 4개의 포도주 잔을 준비하여 마셨다. 이것은 ‘출애굽’에서 하나님이 이루신 4가지 과정으로 해석되는 구원의 역사를 기념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섯 번째 잔을 따로 두고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것이 ‘엘리야’다. 유대인들에게 엘리야는 메시아의 오심을 알리는 전령사였다.  그가 오면 메시아의 때가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예수님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마17:10)라고 물은 것이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치밀하게 연구하는 이들이다. 만일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면 반드시 그 앞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리라 한 엘리야가 그(요한)니라”(마17:11,12)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유대인들이 ‘유월절’마다 잔을 준비하고 긴절히 기다리던 ‘엘리야’였다. 그는 반드시 규례를 따라서 유월절 기간에 태어나야 했다. 예수님은 요한보다 6개월 후에 태어났음을 누가는 알려주고 있다(눅1:26). 그래서, 예수님 탄생일은 세례 요한이 태어난 4월(유월절 기간)에서 6개월이 지나면 정확히 10월 즈음, ‘초막절’기간인 것이다.....더욱 확실한 증거가 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에 천사들이 들에서 양을 지키던 목자들에게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2:10)고 했다. ‘큰 기쁨의 소식’은 유대인들에게 초막절과 깊이 연관이 되는 것이다.  모든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계시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초막절에 태어나셨고 유월절에 어린 양으로서 정확히 죽으셨으며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셨다. 이제 나팔절에 재림의 소식을 나타내실 것이다.  이 절기들 중에 ‘가장 큰 기쁨의 소식’을 알리는 때는 ‘초막절’이다.

[[유월절 만찬(세데르)_4잔의 포도주_엘리야 의자]]
*1>성결의 잔....첫째 잔으로, 이 잔을 받아 놓고서 손을 씻고, 파슬리를 소금물에 두번 찍어 먹은 다음 유월절의 4가지 질문(*1)누룩 없는 맛짜<무교병> 먹는 이유*2)쓴 나물 먹는 이유 *3)소금물에 두번 찍어 먹는 이유 *4)기대어 앉아 먹는 이유)에 대해 대답한 후에, 성결의 잔을 마신다.
*2>재앙의 잔... 둘째 잔으로, 출애굽 당시 10가지 재앙<피--개구리-이-파리, 가축돌림병-종양-우박-메뚜기-흑암-장자의 죽음)을 하나하나 소리쳐 외치면서 그 때마다 새끼손가락에 포도주를 찍은 후 흔들어 털어버린 다음, 양고기 대신 삶은 달걀을 먹은 후 재앙의 잔을 마신다.
*3>속죄의 잔.....셋째 잔으로, 주님의 피흘리셨음을 기억하라 하신 그 피의 잔인데, "아피 코멘"이라는 반쪽 낸 맛짜(무교병)을 다시 찾아 놓은 후에 마신다.
-----유대인들은 첫째 잔을 받고 쓴 나물을 소금물에 찍어 먹으면서, 주머니 속의 <성부-성자-성령을 각각 의미하는> 세 개의 무교병 가운데 중간 것을 꺼내어 반으로 잘라서 흰 세마포 속에 감추었다가, 세 번째 포도주 잔을 받으면서 어린 아이들에게 찾게 하여 값을 주고 사서 모두 나눠 먹는데, 바로 이<잘라져서 흰 세마포 속에 감추었다가 다시 찹아 돈을 주고 다시 사서 먹는>무교병을 "아피 코멘(the coming one)"이라고 말한다.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이 3개의 맛짜가 성부-성자-성령을 의미하며 그 중에 가운데 것, 곧 잘려져서 흰 세마포에 감추어 놓았던 맛짜가 바로 주님의 십자가 고통(bread of affliction : pierced and striped) 거쳐 죽어 장사지낸 바 되심을, 다시 찾는 일은 부활하심, 그것을 값 주고 다시 사서 먹는 그 모든 과정을 구주의 대속적 십자가 죽음-->부활-->구주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고 주와 함께 부활하여 그분의 부활 생명으로 살아난 우리는 그분을 누릴 수 있는 주님의 것으로 다시 찾은 바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말한다.....이것이 주께서 유월절 만찬을 하시면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력ㅎ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6-28)" 하신 것이기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언약의 백성들 외에는 참여하지 못한다 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진행하는 순서는 넷째 잔을 가득 따라 놓고  <엘리야를 초청하는 것>으로, 집의 문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열어놓고 빈 의자<= 엘리야 의자>를 갖다 놓고 <문밖에 와 있을> 엘리야 이름 부름으로써 엘리야가 찾아 와 주기를 고대함을 표현한다.(출생8일만에 행하는 할례식에도 이 "엘리야 의자" 의식을 거행한다) ...변화산에서 내려오면서 베드로-요한-야고보 3제자들이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여쭈었을 때, 주께서는 이들이 기다리는 엘리야가 세례요한임을 분명히 몀시적으로 드러내어 말씀하셨다.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실 것이 세례 요한인 줄 깨달으니라(마17:10-13)"
*4>찬송의 잔....그 다음에, 넷째 잔을 마신 후 시136편<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를 (1절씩 번갈아 여자 선창-남자 후창) 읽고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를 외치며 헤어지게 된다.
===
[[유월절 세데르 순서]]..위와는 약간 다른 부분이 있음.
1. 유월절 준비로 없애야 할 것 
집안을 샅샅이 뒤져 누룩이 들어간 음식과 식재료를 제거한다. 
집 안에 숨겨두지 않고 유월절 전에 다 먹어치우거나 버려야 한다. (이스라엘에 살면 유대교인들이 유월절에 적합하지 않은 음식들을 이방인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집안 청소를 깨끗이 하며 곰팡이와 더러운 것들을 제거한다.
2. 준비해야 할 것:
-마짜(무교병): 마짜를 구할 수 없다면, 직접 굽는 것도 좋다. 구워먹는 마짜가 더 맛있다고 한다. 빵이 주식인 유대인들이 누룩 들어간 빵을 먹지 않고 무교절 일주일간 빵 대신에 무교병만 먹는다.
-양 다리: 양 다리를 구하기 쉽지 않거나 간소화 하기 위해 닭다리로 하기도...
-쓴 나물
-포도주 혹은 포도쥬스: 축복의 4컵을 마시기 위해 1인당 반 병 정도의 양 준비
-삶은 계란
-소금물: 쓴 나물을 찍어먹는 용도
-물 그릇: 손 씻는 용도
-대야: 세족식을 할 경우
-하로셋: 마짜와 함께 먹는 음식으로 사과, 꿀, 호두(넛 종류)를 잘게 다지고 계피 가루, 포도주, 꿀을 넣어 섞음
-초와 촛대
((세데르 순서:))
세데르 시작 전, 남은 누룩이 없는지 찾아서 처리한다. (우리 마음을 살펴 죄를 찾아 회개한다:고전5:7-8)
1. 쇼파르(수양의 뿔)를 분다- 유월절 절기를 선포
2. 촛불을 밝힌다(엄마 혹은 여자가 밝힌다)
3. 출애굽기 12:12-20을 읽는다.
>>4. 첫번째 잔- 성별의 잔을 따른다.
이번처럼 토요일 저녁에 유월절이 될 경우, 창1:31-2:3을 읽고, 감사 기도하고 마신다.
5. 손 씻기: purification and holiness. 이 때 예슈아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가장이나 호스트가 예슈아의 마음으로 발을 씻겨주면 매우 아름다운 시간이 될 것 같다.
6. 카르파스: 파슬리, 상추, 냉이 등을 들고 소금물에 두 번 찍어서 먹는다.
==두 번 찍는 이유는 육신으로 태어나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셔서 홍해의 소금과 물을 지나 새로운 백성으로 태어나게 하셨다.
7. 야하쯔: Breaking the Matza
마짜를 담는 두 개의 주머니가 있다. 하나는 세 개의 마짜(성부, 성자, 성령)가 같이 들어있는 주머니이고, 하나는 예슈아를 의미하는 두번 째 마짜를 부숴서 그 절반을 담는 아피코만 주머니다. 아피코만을 린넨에 싸서 주머니에 넣은 뒤 그것을 잘 숨겨둔다.(예슈아가 장사된 것 상징)
8. 마기드(The bread of Affliction):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당했던 고난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조상들과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감사한다.
>>9. 두번 째 잔: The cup of Instruction/Remembrance
두 번째 잔에 포두주를 따른다(손가락이 포도주에 닿을 정도로 따라 놓고 마시지 않는다). 요셉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홍해를 건너기까지 스토리 텔링. 모세의 노래(출15장)를 노래 혹은 낭송한다.
10. 네 가지 질문: 오늘 밤은 다른 밤들과 왜 다른가요? (이스라엘에선 노래로 한다)
1) 오늘 밤 왜 마짜(무교병)를 먹어야 하나요?
2) 오늘 밤 왜 쓴 나물을 먹어야 하나요?
3) 왜 소금물에 두 번 찍어 먹어야 하나요?)
4) 오늘 밤 왜 우리는 기대서 먹나요?
대답:
1) 출12:21-27, 39의 내용을 요약하여 대답해준다.
2) 우리의 전 주인에게 종 되었던 이집트에서 겪었던 속박, 쓴 고통을 상기시키는 의미로 쓴 나물을 먹는다.
3) 눈물로 거듭나고, 홍해를 건너며 거듭났기 때문에 두 번 찍어먹는다.
4) 노예로서 살 때 서서 급하게 먹고 다시 일터로 나가야 했었는데 이제 자유인이 되었으니 자유를 누리며 편안하게 기대서 먹는다.
11. 자녀를 가르치라(성경에서 명한 것에 근거해 탈무드는 아래와 같이 지침을 주었다)
-지혜로운 자녀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과 규칙들의 의미는 무엇인가요?....그들에겐 유월절에 관한 율법의 말씀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잘 설명해준다.
-악한 자녀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이런 의식이 '당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의식에서 제외되고자 하는 의도)....그들에겐 거칠게 대답해줘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기 위함인데 네가 이집트에 있었다면 여호와께서 우리를 노예에서 해방하실 때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순한 자녀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이건 다 무엇에 관한 거예요?....그들에겐 단순하게, 하나님께서 그분의 전능하신 손으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건져내셨다고 대답한다.
-무엇을 질문해야 할지 모르는 아이에겐, 주님께서 이집트에서 노예였던 우리를 건져내셨던 것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준다.
12. 열 재앙:
10가지 재앙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하나의 재앙을 말할 때마다 자신의 컵에 손가락을 넣어 포도주를 찍어서 접시에 털며 재앙의 이름을 이야기한다.
13.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했음을 선포하는 글이 있다. 노래로도 한다. 주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각자의 말로 선포하는 것도 좋겠다.
14. 유월절의 3가지 심볼에 대해 설명
-양다리: 우리를0위해 제물 되신 어린 양 예슈아를 상징/ 여호와의 강한 팔 상징
-마짜: 누룩 없는 빵으로, 채찍 맞은 흔적, 고난, 겸손, 부풀려지지 않은 것은 죄와 교만이 없는 예슈아를 상징.
사53장의 예슈아-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
-쓴 나물: 노예됨을 상징. 죄의 노예됨은 우리를 죽음으로 이끌어가고, 우리는 구세주가 필요함을 깨닫게 한다. 예슈아께서 우리를 위해 값을 지불하신 것에 대해 감사
-삶은 달걀: 여호와께 저항한 바로의 마음의 강퍅함 상징,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강퍅해지지 말아야 한다.
-하로셋: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들었던 벽돌을 상징. 달콤하고 맛있는 하로셋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기쁘고 달콤하게 여기는 것을 상징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 것이 세상의 즐거움보다 좋음을 안다.
15. 유월절 식사 준비: 유월절의 모든 음식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나타낸다.
시편 136편을 읽는다. 매 구절마다 여자가 앞부분, 남자가 뒷부분(그 인자하심이~) 읽는다.
두번 째 잔을 마신다.
시편 113,114편 읽는다.
16. 라하쯔(washing and blessing): 손을 씻고 감사 기도
17. 모찌 마짜: 예슈아를 상징하는 두번 째 마짜(남은 절반)를 떼어 한 조각씩 나누어 갖고 감사기도하고 먹는다.
또 한 조각 떼어 예슈아께서 배반 당하신 것을 기억하며 쓴 나물에 찍어 먹는다.
18. 코라흐: 마짜 두 조각을 취하여 쓴 나물과 하로셋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다. 유월절에는 쓴 것과 단 것이 섞여 있는데, 노예 생활은 고통스러웠지만 구속은 달콤했던 것을 상징한다.
19. 저녁 식사
아피코만을 숨기고 식사 후 아이들이 숨겨진 아피코만을 찾도록 한다. 찾아낸 아이에게 은 동전을 준다. ....은은 구속을 의미한다. 식사를 마친다. 찾은 아피코만을 한 조각씩 나눠 갖는데, 이것은 장사되었던 예슈아의 부활을 상징한다. 기도한 뒤에 먹는다. ....예슈아의 죽음, 장사, 부활을 기억하며 그분의 몸을 먹는 것이며, 그 맛이 우리 입 안에 오래도록 남아 있게 하기 위해서 이것을 마지막으로 다른 것은 먹지 않는다.
>>20. 세번 째 잔: The cup of Redemption. 따라 놓고 마시지 않는다.
눅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감사기도 후 마신다.
>>21. 네번 째 잔: The cup of Elijah
엘리야의 잔을 가득 채워놓고, 아이 한 명이 엘리야가 왔는지 보러 간다. 문을 열고 엘리야를 부른다. 내년을 기다린다.
22. 시편 115-118편 읽는다.
23. 하나님 아버지를 송축하며 감사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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