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06.27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하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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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완전수는 5와 3이지요.... 그런데, 지성소 안의 증거궤 크기는 장광고가 각각 2.5-1.5-2.5로서, 완전수의 반쪽입니다.

...주 예수님은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온전한 증거궤이시나, 믿는 우리를 위해 기쁨으로 겸손히 증거궤의 반쪽의 위치를 취하여 낮은 자로 오시고, 주님의 반쪽 증거궤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타락한 죄인, 곧 인성과 신성을 잃어버린 바로 그 죄인을 대속할 수 있는 오직 유일한 자격 갖춘 대속 제물로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그리스도를, 그분의 십자가 대속의 보혈을, 그분의 내주하시는 성령을 믿는이를 회복시키십니다...

...주님의 대속은 믿는이에게 구주 믿음 인해 본래의 증거궤의 반쪽으로서의 자격 회복을 열어주십니다. 온전한 인성과 신성 면에서의 주님의 짝됨 이루는 것이 믿는이의 지고지선의 진복임을 시사하시며, 그 길을 제시해 주시고 모든 것을 열어 공급해 주심으로 끝까지 책임지고 이끌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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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전 세계 인구가 70억 명이 넘은 지 오래다. 이 중 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하나님은 예외 없이 모든 사람 안에 각자의 가장 고유한(unique) 존재 이유(mission)를 두셨다. 

그것을 사명(미션) 혹은 부르심(Calling, 소명)이라고 한다. 

자신이 이땅에 왜 존재하는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성공한 다른 사람의 방식을 추구하는 것은 모든 면에서 낭비다. 내 사명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사명을 좇아 살 때 인생의 마지막 순간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산 것에 대한 후회가 몰려올 것이다.

요셉은 30세에 애굽 총리가 되어 110세에 죽는다. 그 80년 동안을 애굽의 바로 왕 궁궐에서 산다. 반면 모세는 40세에 궁궐을 떠나 80년 동안을 광야에서 산다. 

같은 80년인데 요셉은 왕의 궁궐에서, 모세는 광야에서 그 시간을 보낸다. 

모세는 요셉의 성공을 잘 알고 있었다. 만일 모세가 요셉을 자신의 롤(role) 모델로 삼아 40세 되는 해에 요셉과 똑같이 바로 왕궁에서 살기로 고집했다면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빗나가고 말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낙망하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 후 베드로의 남겨진 부르심에 대해 언급하신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한복음 21:18)”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거의 즉각적으로 자기 옆에 있던 요한에 대해 예수님께 되묻는다.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요한복음 21:21)”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통해 자기 죽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요한의 결과가 궁금했다. 그래서 자신의 삶과 요한의 삶을 비교하고 싶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요한복음 21:22)"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요한이 90살을 살든 900살을 살든 상관하지 말고 예수님만을 따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요한은 요한만의 삶이 있고, 너는 너만의 삶이 있다! 비교하지 말아라!

베드로와 요한이 각자 너무나도 특별하고 고유한 인생이 있듯 우리 역시 한 사람 한 사람 너무나도 특별하고 고유한 자신만의 삶이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은 결코 비교 영역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뿐이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모두가 같다. 베드로도, 요한도, 우리도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똑같다. 하지만 어떻게 따르는 지는 사람마다 특별하고 고유한 방식이 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완벽하고도 멋진 최상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신뢰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꾸 다른 사람의 삶과 나를 비교하게 된다. 

내 입술로 주님을 신뢰한다고 고백할지라도 세상이 추구하는 방식과 다른 사람의 멋진 삶을 따라가려 한다면 이것은 결국 내 인생을 향해 계획을 세우신 하나님을 교묘히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거듭난 크리스천의 성공은 사람과 세상이 평가하는 외면적 결과에 있지 않다. 

하나님이 세우신 자신만의 특별하고 고유한 존재 이유를 발견하여 그에 정렬된 삶을 사는가에 달려 있다. 인생은 유한하다. 소중한 자원은 소중한 일에 써야 한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 것인가, 나의 인생을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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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어두운 숲의 한 지점으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어떤 길도 없다.

길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길이다. 당신 자신의 길이 아니다.

만일 다른 누군가의 길을 따라간다면, 당신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지 못할 것이다.

You enter the forest at the darkest point, where there is no path.

Where there is a way or path, it is someone else’s path. You are not on your own path.

If you follow someone else’s way, you are not going to realize your potential.

– 조지프 캠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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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ll &Synchronize[WHO]누구를 볼 것인가(기도)

Outline&Observe [WHAT]무엇을 말씀하시나(관찰/해석)

Align&Auther[HOW]어떻게 살아낼것인가(적용)

Reflect&Respond[Why, What For]왜 사는가(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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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AW-WHO AM I] 나는 누구인가?....DAY 1 –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기독교의 본질은 ‘나’는 이미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못박혔음을 믿고 거듭난 자 안에 내주하시는 예수님의 생명이 예수님의 그 영이 내 모든 것을 변화시키도록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자기실현이 아닌 자기부인(Self-Denial)을 추구합니다.

@1.KEY QUESTION...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에 진지하게 고민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크리스천에게 있어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의 답을 구하는 과정이 왜 세상과 다릅니까? **당신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의는 무엇인가요? **크리스천에게 있어 정체성의 핵심이 그리스도의 영에 있다는 사실과 '나는 누구인가?'를 아는 것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나는 누구인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질문입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이라면 이 질문에 답하기 전 먼저 답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를 가장 잘 아시며, 나를 향한 최상의 계획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에게 있어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의 답을 구하는 과정은 세상과 다릅니다. 

가장 큰 차이는 세상은 내가 살아있음을 전제로 ‘나’를 찾으려 하지만 크리스천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가 전제라는 것입니다. 

즉,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심을 믿는 것이 크리스천의 전제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나’를 찾는 것이 먼저가 아닌 내 안에 살고 계신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 먼저임을 뜻합니다. 

크리스천은 바로 그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나’를 찾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크리스천에게 있어 ‘나는 누구인가?’는 자기계발이 아닌 자기부인(Self-Denial)의 문제입니다. 

내가 보는 ‘나’, 내 주변 사람이 보는 ‘나’, 세상이 보는 ‘나’는 ‘나’의 일부를 드러낼지 모르지만 ‘나’에 관한 온전한 진실은 아닙니다. 

언제나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기 때문이죠. 오직 나를 창조하신 아버지 하나님이 보고 계신 ‘나’만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나’에 관한 진실입니다. 

크리스천에게 있어 ‘나는 누구인가?’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어 ‘자기부인’이 왜 중요한가는 아버지 하나님이 지금 이 순간도 십자가의 프리즘을 통해 나를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의 정의는 무엇이고 크리스천의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1.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기독교(基督敎, Christianity)의 ‘기독(基督)’은 중국에서 ‘그리스도’를 한자로 음역(音譯)한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곧 그리스도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을 오늘날 크리스천이라고 부르며 성경은 이를 그리스도인(사도행전11:26)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인’은 헬라어로 ‘크리스티아노스’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로마서 8:9)”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즉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자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거죠. 얼마나 명확한 정의입니까? 

바울은 ‘교회 출석을 얼마나 잘하는가? QT, 기도생활, 새벽예배를 거르지 않고 열심히 하는가? 교회 봉사, 전도, 선교에 헌신적인가?’ 등을 그리스도인의 기준으로 정의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가 없는가’였습니다. 바울은 왜 그렇게 정의했을까요?

하나님은 영입니다. 영은 영으로만 소통할 수 있습니다. 내 이성과 감정과 의지적 노력으로 소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소통하려면 마땅히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자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겁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결국 자신 안에 내주하는 그리스도의 영을 인정하고, 인식하고, 존중하여 그 영을 따르는 자입니다.

교회를 출석하고, 예배에 빠지지 않고, 금식하고, 기도하고, 헌신하고, 전도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려 노력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정의를 이해하지 못한 겁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어떤 자격을 갖추려는 노력은 율법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교회 출석, 예배, 금식, 기도, 헌신, 전도 등은 그리스도인 안에 내주하는 영의 인도 하심을 온전히 따른 결과여야 합니다. 그 자체가 결코 그리스도인의 자격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며, 그 영을 온전히 따르는 것을 배워갈 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성화입니다.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2:11~12)”

이 세상의 일들을 이해하려면 이성과 지성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만 가능합니다. 

바로 그 영을 통해야만 하나님이 보고 계신 것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 ‘나’를 알기 위해서도 내 정체성의 근원인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이런저런 교리를 믿어야 한다, 이런저런 가르침을 지켜야 한다, 이런저런 봉사와 헌신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믿는 것,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지 그 내용을 믿고 행한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2. 거듭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영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3)”

거듭난 자에게만 그리스도의 영이 있습니다. ‘거듭나다’를 ‘다시 태어나다(born again)’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헬라어로는 ‘위로부터 태어나다(born from above)’를 뜻하는 ‘겐나오 아노덴’을 사용합니다

즉, 육신적으로는 하늘 ‘아래에서’ 태어났지만, 영적으로는 하늘 ‘위로부터’ 완전히 새롭게(카이노스) 태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몸은 땅에 있지만 내 진짜 존재는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즉 존재 자체가 이전과 완전히 다른 ‘하늘에 속한, 영에 속한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죠.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로마서 8:14)”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자가 그리스도인이며,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신분과 상관없이 영적으로 위로부터 태어나 하늘 시민권을 가진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역시 이 땅에서 사람의 아들로 사시는 동안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3. 그리스도인은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고 그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영적 존재입니다. 

우리는 거룩하게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 참 영적이다’란 말을 사용하곤 하는데요. 

사실 성경에서 ‘영적’이란 것은 겉으로 드러난 외면적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주하는 영을 인식하고, 인정하고, 그 영의 인도함을 받는 것을 ‘영적(헬라어 – 프뉴마티코스, SpiritControlled)’이라 합니다. 

내 안에 너무나 실재(實在)하시는 그 영을 인식하고, 그 영의 영향을 받는 것. 이것이 영적인 삶입니다. 

외면적 거룩 보다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영의 영향을 받느냐입니다. 우리의 거룩은 영의 영향을 받은 결과여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을 성도(聖徒, 거룩한 무리)라 부를 수 있는 겁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관계죠. 종교적 의식보다 중요한 것은 영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겁니다. 

친밀한 인격적 교제가 종교 활동보다 먼저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데 필요한 것은 인문학적, 철학적 성찰이 아닙니다. 피조물은 자신을 스스로 정의할 수 없습니다. 관계 가운데 나를 지으시고 친히 부르신 자를 아는 것이 소명과 정체성을 깨닫는 첫 단추입니다. 

크리스천에게 있어 ‘나를 아는 것’은 단순히 자기계발 영역일 수 없습니다. 

자기를 발전시키는 자기실현이 아닌, 자기를 무너뜨리는 자기부인(self-denial)에 초점을 맞춘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꽃핍니다. 

그제야 참된 교제로 이끌며,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을 알 수 있도록 돕는 그리스도의 영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역설적이지만, 나는 죽고 예수가 사는 것. 이것이 크리스천의 핵심 정체성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기다움’은 결국 ‘그리스도다움’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스도의 영이 있고, 그 영의 인도함을 받으며, 그 영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그 영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그 영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은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하루 이렇게 기도해보면 어떨까요?

주님. 나를 알기 전에 나를 창조하신 주님을 먼저 알기 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임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나를 발견하기 전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먼저 발견하기를 소원합니다.

나의 정체성을 무엇이 있는가, 무엇을 이뤘는가, 무엇을 가졌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에서 찾게 하소서.

내가 거듭나는 순간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고, 그 영의 인도함을 받으며, 그 영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그 영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그 영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은 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임을 선포합니다.

주님이 주신 감동을 함께 기도하면 어떨까요? 성령을 의지하여 내게 주신 울림을 쓰고, 나눌 때 기름부음은 배가됩니다. 저마다의 기도가 주의 영으로 합쳐져 주님앞에 가장 귀한 향으로 올라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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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무엇을 하는 지가 당신이 누구인지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누구인지가 당신이 무엇을 할지를 결정합니다.

What you do doesn’t determine who you are; 

who you are determines what you do. – 닐 앤더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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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2 – 나는 ‘카이노스’ 피조물입니다

@2, KEY QUESTION...

**나의 존재 가치를 어디에서 찾습니까? 돈? 일? 자녀? 명분? 명예? 성공?  **내가 너무나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잃을 때 어떤 감정을 경험합니까?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과 나의 정체성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하나님은 나를 향한 정체성의 근간을 어디에 두고 계실까요?

===나는 누구인가?

내가 믿고 있는 ‘나’는 얼마나 정확할까요? 내 주변 사람들이 믿고 있는 ‘나’는 또 얼마나 정확할까요? 우리는 얼마나 정확하지 않은 믿음 위에 ‘나’ 자신을 세우고 절망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1. 내가 의지하던 소중한 것을 잃을 때 나는 누구입니까?

한 세일즈맨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 하는 좋은 기업에 근무하고 있었죠. 실적도 탁월하고 그에 따른 연봉도 높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소개하면서 어느 기업의 어떤 세일즈를 담당한다고 얘기할 때면 언제나 자신감이 묻어났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사람과 인맥을 쌓고자 모여들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고자 창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이런 회사에서 이런 일을 한다고 하면 모여들던 사람들이 더는 자신과 자기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을 보고 절망감을 느낍니다. 새로 창업한 일에 열정을 기울였지만 안타깝게 그동안 모아둔 자산을 다 날린 채 모든 일을 내려놓게 됐습니다. 예전의 자신감과 패기는 다 사라진 채 심한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누구나 선망하던 기업의 평판과 탁월한 실적에 따른 평가를 자기 자신의 가치로 여겼던 이 사람에게 근원을 뒀던 모든 배경이 사라지자 정체성의 혼란이 온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일들은 삶의 현장에서 너무나 많이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이 훌륭한 기업을 다니고,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면 바로 그 기업과 그 일의 평판이 자신의 평판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자식에게 자신의 모든 공을 들인 어떤 사람은 자식에게서 자기 자신과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의미를 두던 대상이 사라지거나 손상되는 경우 심각한 혼란을 겪습니다. 이유는 정체성의 근간을 잘못 뒀기 때문입니다. 근간에 문제가 생기자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하는 겁니다.

외모에 자신 있는 어떤 사람은 외모에서 자기 가치를 찾으려 합니다. 예를 들어 외모를 너무나 중요하게 생각하던 사람이 불의의 사고로 신체 일부가 심하게 훼손되면 우울증에 빠집니다. 자신에게 있어 외모가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어떤 부모는 평생 자식만 바라보며 살았는데 그 자식이 등을 돌릴 경우 자기 자신을 잃은 것 같은 슬픔에 빠집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자식에게 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전문성 덕분에 세상의 인정을 받던 어떤 사람이 시대가 변하여 그 전문성을 더는 사용할 수 없게 되고 아무도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할 때 자존감이 바닥을 향합니다. 자신의 가치를 자신의 전문성에 뒀었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을 뜻하는 영어 단어 아이덴티티(identity)의 어원적 의미는 ‘똑같음, 동일함(sameness)’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이디(ID, identity의 약자)는 자기 자신과 ‘동일함’을 나타내는 고유 식별자를 뜻하죠. 이런 어원 배경을 보면 사람은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려는, 의미를 찾으려는 대상을 정하여 그 대상에서 안정감을 찾고, 정체성의 근간으로 삼으려는 것을 봅니다. 이력서에서 자기 자신을 소개할 때 인정 받을 만한 경력을 기술하는 것은 그것을 내 삶의 일부로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그것을 통해 인정받고 싶다는 것은 그것이 어느 정도 정체성의 근간

임을 뜻합니다.

내가 정체성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간단한 방법은, 내가 의미를 두고 나와 동일하게 여기던 그 대상이 사라질 때도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2. 크리스천의 정체성은 세상과 어떻게 다릅니까?

우리의 감각이 그렇게 느끼는지와 상관없이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는 거듭나기 전과 거듭난 후가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이전의 존재가 그대로 있는 가운데 다시 태어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전의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위로부터’ 완전히 다른 ‘영적인 존재’로 태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새로운’을 뜻하는 영어 단어는 new 하나이지만, 헬라어에는 ‘네오스’와 ‘카이노스’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깨끗하게 세차하여 완전히 ‘새로운’ 자동차 같다고 할 때는 ‘네오스’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자동차가 너무 오래되어 ‘새로운’ 자동차를 구매했다고 할 때는 ‘카이노스’를 사용합니다. 즉, 본질은 그대로 있는 가운데 새로워진 것은 ‘네오스’이고 본질 자체가 바뀐 완전히 새로운 것은 ‘카이노스’입니다. 

이런 배경을 갖고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을 다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까? 거듭났습니까? 그렇다면 내 느낌과 상관없이 내 영은 ‘카이노스’ 적으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겉 사람은 바뀐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본질 자체는 완전히 새롭게 바뀐 것입니다. 말씀이 그렇게 증거하고 있으니까요. 

이것은 느낌의 영역이 아닙니다. 진리에 근거한 믿음의 영역입니다. 이 믿음이 없으므로 많은 크리스천이 거듭나 카이노스 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영적 정체성을 갖게 됐음에도 여전히 육신의 정체성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이전에는 외모, 직업, 자식, 전문성, 경력, 가정 배경, 스펙 등에 자신의 의미를 두고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거듭난 순간 하나님은 나의 옛 자아를 보시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졌는가(have), 무엇을 이뤘는가(do)를 절대 보시지 않습니다. 

옛 자아가 가진 그 어떤 자격으로도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히 새로워진 나의 존재(be)를 보실 뿐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향한 정체성의 근간을 어디에 두고 계실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나’와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시(identity)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인(CHRISTian)’입니다. 이것이 내 정체성의 근간이요 핵심입니다. 

피조물인 ‘나’와 세상 사람이 보는 ‘나’가 아닌 창조주 하나님이 보시는 ‘나’가 바로 진정한 나의 정체성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외모, 직업, 전문성 등 외적 조건을 잃어버린다고 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지 않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다른 곳에 두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께 두기 때문입니다. 

나의 옛 정체성의 근간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제 나의 정체성은 내 안에 살고 계신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이 영적 정체성이 명확하면 명확할수록 외부 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바라보고 한 걸음씩 뚜벅뚜벅 담대히 전진해 나갈 뿐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마침내 나를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변화시킬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이렇게 기도해보면 어떨까요?

사랑의 주님. 나도 모르는 가운데 의미를 두고, 소중히 생각하고, 나의 일부로 생각하며 살았던 모든 것이 내 정체성의 근간일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던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나의 진정한 정체성의 근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내가 거듭난 순간 이전 외모, 직업, 전문성, 경력, 배경, 스펙 등을 전혀 보시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나를 보시는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위로부터 카이노스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임을 선포합니다. 

하나님 자녀에 합당한 정체성의 혁신이 일어나게 하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 몰라 외부 조건의 영향을 받으며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부으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인지 더 알게 하소서. 

오직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 바라보며 한 걸음씩 뚜벅뚜벅 걸어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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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은 하나님을 바꿀 수도, 그리스도 안에서 확보된 우리 정체성과 신분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그러기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진리를 왜곡시키는 것을 가장 중요한 전략으로 삼습니다....만일 사탄의 전략이 성공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정체성을 모른 채 살아갈 것입니다.   The major strategy of Satan is to distort the character of God and the truth of who we are. ..He can’t change God and he can’t do anything to change our identity and position in Christ....If, however, he can get us to believe a lie, we will live as though our identity in Christ isn’t true. – 닐 앤더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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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3 – 나는 하나님의 ‘명작(MASTERPIECE)’입니다
하나님이 받아들인 나를 내가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거역이요 불신입니다. 세상이 당신을 어떻게 평가하든,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만큼, 하나님이 당신에 관해 믿으시는 것만큼,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피 흘리신 것만큼의 가치가 있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3. KEY QUESTION...
*시간의 제한이 없으신, 능력의 제한이 없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자녀를 창조하실 때 어떤 마음으로 창조하실까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허투루 만드실까요?
*시간과 상황에 따라 수시로 바뀌는 '나'에 관한 세상의 평가가 아닌, 말씀이 증거하는 '나'는 어떤 존재일까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실 만큼 주님께 내가 가치있는 자라는 진리 역시 받아들이는 것임을 믿으십니까?
세상은 내가 가진 것으로, 내가 이룬 것으로 나를 판단합니다. 세상의 인정을 받을만하면 자존감이 높아지고 그렇지 않으면 자존감이 낮아집니다. 
스스로 괜찮은 사람임을 입증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때로는 옷으로, 때로는 자동차로, 때로는 자신의 전문성으로, 때로는 자신의 도덕성으로, 때로는 자신의 성과로 자신을 입증하려 합니다. 
자존감이 낮을수록 자신을 입증할 자격 갖추는 것에 힘을 쏟습니다.
크리스천 역시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육신 안에 남아 있는 옛 속성으로 인해 세상이 정한 기준에 영향을 받습니다. 
세상을 향해 나가면 나갈수록 끊임없이 자신을 입증하기 위해 피곤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그런 기준으로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절대 성경에서 말하는 기준이 아닙니다. 나와 세상이 정의한 ‘나’가 나의 정체성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나’가 진정한 나의 정체성이죠. 하나님은 나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하셨습니다. 
나와 세상의 정의와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통해 나를 보시는 하나님의 눈에 나는 최고의 명작(名作, masterpiece)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명작(名作, masterpiece)입니다. 오래전 우리를 위해 계획하셨던 그 좋은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완전히 새롭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2:10)  For we are God’s masterpiece. He has created us anew in ”
내가 이 땅에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이미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 가운데 특별한 일을 하도록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이 일은 세상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하나님이 결정하신 것입니다.  Christ Jesus, so we can do the good things he planned for us long ago. (NLT)
"네가 엄마의 배속에 생기기도 전에 나는 너를 선택했다.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특별한 일을 위해 나는 너를 구분하였다. (예레미야 1:5) Before I made you in your mother’s womb, I chose you. Before you were born, I set you apart for a special work.(NCV)”
이 일은 세상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하나님이 결정하신 것입니다.((그분은 마음에 결정한 바로 그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Faithful and True"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기 전 주님 보시기에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로 자녀 삼아 당신의 가족이 될 것을 미리 결정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원이셨고 그것은 주님의 큰 기쁨이었습니다. (에베소서 1:4~5) Even before he made the world, God loved us and chose us in Christ to be holy and without fault in his eyes. God decided in advance to adopt us into his own family by bringing us to himself through Jesus Christ. This is what he wanted to do, and it gave him great pleasure. (NLT)”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도 전 주님은 당신의 눈으로 나를 보셨고, 나를 향한 주님의 아름다운 생각을 모두 기록하셨습니다. 
내 인생의 하루가 시작되기도 전 이미 모든 순간을 설계하신 분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하든 그 선택과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 일을 이루려는 생각의 수가 바다의 모래보다 많으신 분입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주님은 나를 보셨습니다. 내 인생의 모든 날이 주님의 책에 기록되었습니다. 나의 한 날이 시작되기도 전에 삶의 모든 순간을 설계하셨습니다. 나를 향한 주님의 생각이 얼마나 소중한지요. 그 생각의 수가 모래 알갱이보다 많아 감히 셀 수 도 없습니다. 내가 깰 때도 주님은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십니다. (시편 139:16~18) You saw me before I was born. Every day of my life was recorded in your book. Every moment was laid out before a single day had passed. How precious are your thoughts about me, O God. They cannot be numbered! I can’t even count them; they outnumber the grains of sand! And when I wake up, you are still with me! (NLT)”
전 세계 인구 가운데 나를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그중에서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또 그중에서 내 일거수일투족에 진심으로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내 고민, 내 생각, 내 외로움, 내 잠재성을 알아주는 사람은 또 몇 명이나 될까요? 1년 365일 24시간 나만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나에 관해 얼마나 알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 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 합니다. 심지어 나 자신도 나를 잘 모르죠. 
하지만 단 한 분,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아시고 내 일거수일투족과 내 모든 생각에 관심을 기울이시며, 나의 모든 것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가장 사소한 것에서부터 감추고 싶은 것까지 심지어 내가 모르는 것까지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이시며 나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편 139:1~4)”
나는 내 머리털이 몇 개인지 셀 수도, 알 수도 없지만, 주님은 몇 개가 빠졌든 내 머리털을 실시간으로 다 세고 계신 분입니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마태복음 10:30~31)”
이 세상 인구가 72억 명이 넘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에게서 눈을 떼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시편121:3~6)”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생각하십니다. 그냥 평범한 생각이 아니라 나를 위한 가장 좋은 계획을 생각하십니다. 재앙이 아니라 미래와 희망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예레미야 29:11)”
이 땅의 많은 크리스천이 자신의 현재 상황만 보고 자신을 너무 낮게 평가합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 심한 열등감을 느끼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가장 귀한 존재로 받아들인 나를 내가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거역이요 불신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과 똑같은 삶 살기를 내게 기대하셨다면 나를 이 땅 가운데 존재하게 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필요하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만드실 이유가 없습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깨닫지 못할지라도 존재하게 하신 분의 명확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나만의 특별하고도 고유한 존재 이유가 있음을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지금 발견하지 못했다 해서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 존재 이유를 세상이 가르쳐줄 수는 없습니다. 오직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나는 하나님께 특별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나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만큼, 하나님이 나에 관해 믿으시는 것만큼, 하나님이 나를 위해 피 흘리신 것만큼 가치가 있는 존재입니다.
===오늘 하루 이렇게 기도해보면 어떨까요?
주님. 당신이 바라보시는 ‘나’가 진정한 나의 정체성임을 믿습니다. 주님은 나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하셨습니다. 나와 세상의 정의와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통해 나를 보시는 하나님의 눈에 나는 최고의 명작(名作, masterpiece)임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내 눈을 열어 당신이 감탄하고 계신 나의 모습에 눈뜨게 하소서.
주님. 말씀 안에 나를 향한 너무나 소중한 생각들을 얼마나 많이 담아 두셨던지요. 세상의 영향을 받으며 낮은 자존감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도 나를 향한 말씀 안에 있는 진리는 단 한 순간도 바뀌지 않았음을 인해 감사합니다. 주님. 말씀 안에서 나를 향한 당신의 보배로운 생각을 발견하게 하소서.
주님이 가장 귀한 존재로 받아들인 나를 내가 거절하는 우를 범하지 않게 하소서. 내가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게 하신 주님의 명확한 이유가 있음을 믿습니다. 내가 지금 발견하지 못했다 해서 이 이유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이 이유는 결코 세상이 가르쳐줄 수 없습니다. 주님. 당신의 영을 통해 가르쳐 주소서. 알게 하소서.
주님이 주신 감동을 함께 기도하면 어떨까요? 성령을 의지하여 내게 주신 울림을 쓰고, 나눌 때 기름부음은 배가됩니다. 저마다의 기도가 주의 영으로 합쳐져 주님 앞에 가장 귀한 향으로 올라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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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어두운 음성이 계속해서 말합니다. ‘나는 정말 별로야, 잘하는 것이라고는 없다니까…나라는 사람은 한쪽으로 제쳐지고, 잊히고, 거절당하고, 버려지는 게 당연해.’...이런 ‘자기 거절’은 영적인 삶에 있어 가장 큰 적입니다.  왜냐하면 ‘내 사랑하는 자(Beloved)’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과 반대되기 때문입니다....‘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Beloved)’임을 깨닫는 것이 우리 존재의 가장 중요한 핵심 진리입니다. – 헨리 J.M. 나우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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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4 – 나는 하나님의 ‘포이에마’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골리앗과 같은 거인마저 쓰러뜨릴 수 있는 승리자로 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이렇게 되도록 밀어 붙이십니다. 모든 원수의 거짓말에 귀를 닫고 하나님이 보고 계신 그대로 자기 자신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을 풍성하게 할 만한 오직 당신만의 고유함을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God sees you as a giant killer. He sees you as victorious; He pushes you to try. Close your ears to the enemy’s lies and see yourself as God sees you. God wishes to use your uniqueness to enrich the body of Christ. – 빅토리아 보이슨 –
@4. KEY QUESTION
*시가 소설이나 산문과는 어떻게 다릅니까? 하나님은 왜 나를 '시'에 비유하셨을까요?
*온 우주 만물 중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유일한 피조물은 누구입니까? 이 사실과 최고의 명작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내가 진짜 명작인지, 진품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2:10)  For we are his workmanship, created in Christ Jesus unto good works, which God hath before ordained that we should walk in them.(KJV) For we are God’s masterpiece. He has created us anew in Christ Jesus, so we can do the good things he planned for us long ago. (NLT)”
KJV(King James Version)는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 사용한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를 ‘작업자의 탁월한 솜씨(we are his workmanship)’로, NLT(New Living Translation)는 ‘하나님의 걸작품(we are God’s masterpiece)’으로 각각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workmanship’과 ‘masterpiece’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포이에마(poiema)’입니다. ‘시(詩)’를 의미하는 영어단어 ‘포임(poem)’은 바로 이 ‘포이에마(poiema)’에서 왔습니다.
1. 하나님은 우리를 ‘한 편의 시’로 지으셨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작품에 영혼을 담습니다.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수없이 문장을 다듬습니다. 
자기 생각을 가장 잘 나타낼 아름답고 적합한 단어를 선택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시는 소설이나 일반 산문과는 다릅니다. 
시인은 꼭 필요한 최소한의 단어만으로 자기 생각을 나타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에는 시인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단어들이 꼭 필요한 자리에 있습니다. 불필요한 단어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가들의 시에서 시인이 선택한 단어보다 더 적절한 단어를 생각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성경은 바로 내가 하나님의 ‘포이에마’요 한 편의 ‘시(詩)’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내 인생의 시를 지으신 시인이시죠. 오직 내 인생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나타낼 ‘나’만을 향한 특별한 단어를 선택하셔서 시로 표현하셨습니다. 
얼마나 멋진 하나님인가요? 불필요한 단어들이 없습니다. 선택한 단어보다 더 적절한 단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언어를 붙들고 계시며 말씀(WORD) 그 자체이신 위대한 시인이신 주님의 작품(masterpiece)입니다. 
주님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 모든 작품의 구상과 단어의 선택을 끝내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향한 이 ‘시’를 주님의 책에 다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주님은 나를 보셨습니다. 내 인생의 모든 날이 주님의 책에 기록되었습니다. 나의 한 날이 시작되기도 전에 삶의 모든 순간을 설계하셨습니다. 나를 향한 주님의 생각이 얼마나 소중한지요. 그 생각의 수가 모래 알갱이보다 많아 감히 셀 수도 없습니다. 내가 깰 때에도 주님은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십니다.(시편 139:16~18) You saw me before I was born. Every day of my life was recorded in your book. Every moment was laid out before a single day had passed. How precious are your thoughts about me, O God. They cannot be numbered! I can’t even count them; they outnumber the grains of sand! And when I wake up, you are still with me! (NLT)” 
새로 태어날 아기를 생각하며 한 땀 한 땀 옷을 짓는 엄마의 마음으로, 하나님은 내 모든 세포와 형질과 기질과 특질과 재능에 이르는 나의 물리적 정신적 영적 모든 것을 세밀하고도 입체적으로 만드셨습니다.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시편 139:13 下, 개역개정)”
시편 139편 13절 하반절 말씀의 ‘만드셨나이다’의 히브리어 원어는 ‘싸카크’입니다. 이 단어의 여러 사전적 정의 중 하나는 ‘여러 실을 함께 엮어 짜 맞추다(to weave together)’입니다. 이 원어적 느낌을 반영한 NLT 버전의 번역을 우리 말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은 내 모태에서 날실과 씨실로 직물을 엮듯 나를 지으셨습니다. (시편 139:13 下) You knit me together in my mother’s womb. (NLT)”
2. 이 세상 하나뿐인 특별한 명작(名作,MASTERPIECE)
유명한 작가든 아니든 만일 진정성과 생명을 담았다면 그것은 대중의 평가와 상관없이 작가의 예술품입니다. 
만일 그 예술품에 작가의 탁월한 기술과 지혜와 의도와 숨결이 들어 있고, 세대와 세대를 거쳐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의 공감과 인정과 찬
사를 받는다면 그것을 명작(名作, masterpiece)이라고 부릅니다.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영혼 없이 제조한 것을 예술품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공산품일 수 없습니다. 복사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 올 한 올 날실과 씨실로 촘촘히 엮듯 우리의 영적 DNA에 자신의 작품을 수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탁월한 기술과 지혜와 의도와 숨결이 들어 있는 이 세상 단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명작(名作,masterpiece)입니다.
‘명작’ 즉, ‘포이에마’에 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려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포이에마)라’가 나오는 에베소서 2장 10절 전체 맥락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엡 2:3~5) ”
에베소서 2장 4절은 10절 이전에 큰 전환점을 이루는 부분입니다. 한글 성경은 이것을 잘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헬라어 원어는 4절 처음을 ‘그러나(but)’로 시작합니다. 대부분의 영어 버전도 그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But because of his great love for us, God, who is rich in mercy (엡 2:4, NIV)”
우리는 전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그 위대한 사랑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살리셨을 뿐만 아니라 일으키시고, 일으키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보좌에 앉히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지금도 [(혹자는) 팽창하고 있다고 결론 짓기도 하는] 온 우주를 포함하여 모든 피조물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것은 오직 ‘거듭난 크리스천’뿐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온 우주가운데 그리스도의 영을 담은 유일한 피조물이라니요. 
작가의 생명이 담긴 작품을 예술품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 모든 피조물 중 오직 거듭난 크리스천만이 위대한 작가의 생명을 담은 유일한 예술품입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예술품과는 완전 거리가 먼 허물과 죄로 죽은 자였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세상을 따라가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모든 믿는 자에게 당신의 생명을 나눠주셨습니다. 
거듭나는 순간 우리는 온 우주를 포함하여 단 하나밖에 없는 작가의 유일한 작품(명작, 포이에마)이 됩니다.
3. 십자가, 당신이 최고의 명작인 이유
명작에 감춰진 스토리를 공부하다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작가의 이야기를 알게 되면 전율과 숭고한 마음이 듭니다. 
세상의 작품도 이러한데 하물며 하나님의 작품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바쳐 ‘나’를 명작이 되게 하신 겁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실 때 우리는 위로부터 완벽하게 본질 자체가 다른 새로운(카이노스) 영적 존재로 거듭났습니다(겐나오아노덴).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내 느낌과 상관없이 영적으로 완전히 새 것이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피조물’이야 말로 온 우주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하나님의 최고의 명작(名作, masterpiece)이요 포이에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카이노스)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카이노스)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이 위대한 영적 명작이 진품인지는 세상의 기준으로 절대 분별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보기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미련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감정은 명품의 진가와 상관없습니다. 
영적인 것은 오직 영적으로만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명품의 진가는 거듭난 영 안에 감춰져 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감춰진 것이 드러나기 시작할 때 세상은 작가이신 하나님의 지혜와 솜씨에 감탄을 금하지 못할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거듭난 영을 가진 그리스도인인 ‘나’를 그리스도의 신부요 교회라고 말합니다. 
아가서는 그리스도의 신부를 명작 중의 명작으로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세상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이자 전략입니다. 
전체 퍼즐의 한 조각과 같은 각각의 개별적인 교회는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날줄과 씨줄처럼 촘촘히 엮여 그리스도의 전체 몸을 이루는 최고의 명작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개별로도 완벽한 명작이요, 연결된 전체로도 완벽한 명작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그림입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입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비밀입니까? 
당신은 이 영광스러운 작품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오직 하나뿐인 ‘한 조각(a piece)의 명작(masterpiece)’입니다.
===오늘 하루 이렇게 기도해보면 어떨까요?
오 너무나 위대한 예술가이신 나의 아버지 하나님. 한 편의 시로 나를 엮으시기 위해 시인과 같이 깊이 생각에 잠기신 가운데 하나하나의 단어를 선택하듯 나를 위한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결코 불필요한 것은 있게 하시지 않았을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명작으로 만드신 인생을 복사본처럼 살지 않도록 하소서.
전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를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이 그 위대한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살리셨을 뿐만 아니라 일으키시고, 일으키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보좌에 앉히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지금도 팽창하고 있는 온 우주를 포함하여 모든 피조물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것은 오직 ‘거듭난 크리스천’뿐이란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럽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담고 있는 나의 가치에 눈뜨게 하소서.
내 안에 감춰진 명작의 진가를 세상은 결코 감별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전체 몸을 구상하며 나를 명작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내가 바로 이 영광스러운 주님의 작품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오직 하나뿐인 ‘한 조각(a piece)의 명작(masterpiece)’임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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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귀한 존재여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으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귀한 존재입니다.  God does not love us because we are valuable. We are valuable because he loves us. – 풀턴 존 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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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5 – 나는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입니다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 다른 소리에 귀를 기울여 길을 잃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고 싶다면 훈련된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영적인 삶에서 훈련이란 삶의 모든 영역이 다른 것들로 가득 차지 못 하게 막는 의식적인 노력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활동하실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을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 데이비드 마티스 –
@5. KEY QUESTION
*내가 생각하는 '좋은 일'의 정의는 무엇인가요?
*왜 예수님은 아무 일도 하지도, 돕지도 않고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만 듣던 마리아를 향해 '좋은 일'을 택하였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왜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일까요?
*하나님 기준에 맞는 '좋은 일'은 하는 것의 문제가 아닌 위치의 문제라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모든 사람은 본능적인 욕구를 갖고 태어납니다. 배고프면 먹고 싶고, 졸리면 자고 싶습니다. 
이런 생리적, 생존적 욕구 외에 경제적 안정과 같은 좀 더 높은 단계의 욕구도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낮은 단계의 욕구가 채워지면 그다음 단계의 욕구를 추구하기 마련입니다. 사람의 만족은 끝이 없습니다.
매슬로우는 이런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정리했습니다. 그중 가장 높은 단계는 자신의 잠재성을 끊임없이 계발하여 ‘자기(自己)’를 ‘실현(實現)’하려는 욕구입니다.
세상은 욕구를 충족시키며 자기 존재를 입증하고 실현하려는 상향성(上向性)을 추구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역설적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自己)’를 ‘부인(否認)’하려는 하향성(下向性)을 추구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어리석게’ 보이는 이유입니다.
1. 자기실현이 아닌 자기부인의 길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이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또한 그런 영에 속한 것들은 오직 영적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에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고린도전서2:14) The unbeliever does not receive the things of the Spirit of God, for they are foolishness to him. And he cannot understand them, because they are spiritually discerned.(NET)”
세상이 추구하는 삶의 목적은 결국 자기실현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세상에 속한 크리스천에게 자기를 먼저 부인하고 따르라고 도전하십니다. 
십자가를 통한 자기 부활만이 진짜 거듭난 자기(명작, masterpiece – 포이에마)를 찾아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과 세상이 ‘자기’를 실현하는 방법을 혼동하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길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그것을 ‘선한 일 (good works)’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 (good works)’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에베소서 2:10 上, 개역개정)”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 (good works)’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실현하는 삶을 선한 일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선한 일을 자신의 소견(所見)에 옳은 대로 해석하고 취합니다. 
인본주의적 신앙이 없어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선한 일’은 무엇일까요?
2.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 받았습니다 <이것은 증거궤의 반쪽됨 온전히 이룸으로써, 증거궤의 반쪽이신 구주와 하나됨 그 자체가 아닐까요>....하나님 안에서 머무르며, 구주께서 이르신(이르시는) 말씀 먹고마심으로 그 안의 (살리는) 영과 생명 공급받음 통해 늘 새로운 구주의 열정으로, 날마다 새로운 그리스도의 생명 충만 안의 성숙해 감 이루는, 그의 몸과 영적 하나됨의 수고, 연합/동행 통해 주님 뜻 바로 그대로 이룸의 아가토스!!
‘선한, 좋은 (good)’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가토스’고 또 하나는 ‘칼로스’입니다. 
똑같이 선하고, 좋고, 아름다운 것을 뜻하는 단어지만 ‘아가토스’는 보다 내면적인 것에, ‘칼로스’는 좀 더 외면적인 것에 대해 사용합니다. 
그러면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 사용한 ‘선한(good)’은 헬라어로 무엇일까요? ‘아가토스’입니다. 
‘아가토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토브’를 사용하는데요. 하나님은 이 ‘토브’란 단어를 언제 가장 먼저 사용하셨을까요?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토브)… (창세기 1:4)”
위 창세기 말씀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하신 것은 창조의 결과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즉 ‘아가토스’도 그렇고 ‘토브’도 마찬가지인데, 사람의 기준에서 ‘좋고 선한 것’이 아니라 드러난 결과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과 뜻에 일치해야만 ‘좋고 선한 것’입니다. 사람이 아닌, ((지고지선-최상의 창조주-주권적 섭리자-지혜의 근원)) 하나님께서 ‘좋게’ 보는 것, 그것이 바로 ‘선한 일(good works)’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 아무리 선한 비즈니스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감동할 만한 탁월한 결과라 할지라도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선한 일’이 아닙니다. 반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관심도 두지 않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 일치한다면 그것은 ‘선한 일’입니다. 
우리는 자기 소견에 맞는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은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일치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어진 존재입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아가토스)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0 :42)”
‘마르다와 마리아의 비유’는 이 선한 것의 의미를 좀 더 정확하게 알려줍니다. 
마르다는 아름다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섬겼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분명 마르다는 선한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가토스’가 의미하는 선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반면 마리아는 마르다의 원망을 샀습니다. 마르다를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마리아는 사람이 아닌 주님의 관점에서 ‘선한(아가토스) 일’을 했습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은 아무도 십자가를 앞둔 주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소견에 옳은 ‘좋은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사람들의 눈총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앞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주님의 기준에 옳은 ‘좋은 일’을 했습니다. 
그 선한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갈증을 해갈시켰습니다. 주님의 편에서 ‘아가토스’한 일을 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예비하신 ‘선한 일’을 따라서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goodness, 아가토수네-아가토스의 명사형)과 충성과…(갈라디아서 5:22)”
양선은 성령의 9가지 열매 중 하나입니다. 열매는 노력의 결과일 수 없습니다. 내적으로 충만해진 생명이 밖으로 드러난 결과가 열매죠.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을 때 열매를 맺습니다. 가지의 노력이 아닌 나무의 생명이 흐른 결과로 맺혀지는 겁니다. 
갈라디아서는 선한 일, 즉 ‘좋은 것(양선, goodness)’의 근원이 우리 노력이 아님을 알려줍니다.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기준에 맞는 ‘선한 일’을 하려면 성령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열매인 ‘좋은 것(양선)’을 맺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선한 일’에 관해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2:10, 개역개정) For we are His workmanship, created in Christ Jesus for good works, which God prepared beforehand that we should walk in them. (NKJV)”
‘전에 예비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로에토이마조’입니다. 
이 단어의 어근 ‘헤토이마조’는 아래와 같은 뜻이 있습니다. <헤토이마조, 왕의 여정과 관련하여 길을 평탄케 하고 왕이 지나갈 수 있도록 왕 앞서 사람을 보내는 동양의 관습에서 의미가 만들어짐 .hetoimazo : drawn from the oriental custom of sending on before kings on their journeys persons to level the roads and make them passable.>
베드로는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베드로전서 2:9)”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 왕권(kingship)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sonship)입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대사(大使)입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기 위해 지음을 받았습니다. 
대사는 자기 생각에 옳은 좋은 일을 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나라의 기준에 맞는 좋은 일을 합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은 이 ‘선한 일’을 가리켜 ‘전에 예비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이 선한 일을 위해 노력하는 영역이 아님을 뜻합니다. 이미 ‘전에 예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셨다’는 것은 ‘헤토이마조’란 원어 의미를 통해 볼 때, 왕의 자녀인 우리를 세상에 보낼 때 왕이 지나갈 수 있도록 이미 앞서 길을 평탄케 하시고 모든 것을 준비시켜 놓으셨음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미 평탄케 되어 있는 이 길을 걷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10절은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즉 왕 같은 제사장인 우리가 지나갈 수 있도록 이미 평탄케 예비하신 그 길 가운데서 걷게 하려 (we should walk in them…) 라고 기록합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2:10, 개역개정) …God prepared beforehand that we should walk in them. (NKJV)”
아버지 하나님이 왕의 자녀를 위해 창세 전에 이미 길을 다 평탄케 하시고 준비해 놓으신 길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 길은 감각의 영역이 아닙니다. 진리에 근거한 믿음의 영역입니다. 믿는 자만이 이 길을 발견할 수 있고, 산지를 취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참된 의미에서 본다면, <주님 보시기에> 최우선적 선결요건은) 선한 일은 하는 것의 문제가 아닌, (믿는이로서 내가) 바른 위치<+ 바른 각도 :: 곧 생명-빛-영-진리이신,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연합한 하나됨> 안에 있느냐의 문제입니다...(매일 주님 말씀 누림으로써 주와 동행함 안에서 <그 길은 참되게 인식-행함 가능하다> 
애벌레는 노력해서 나비가 되지 않습니다. 생명 안에 있으면 때가 차매 나비가 됩니다. 가지가 나무의 생명에 붙어 있기만 하면 때가 차매 열매를 맺는 겁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기만 하면 때가 차매 선한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일을 위해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있는 자에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 이렇게 기도해보면 어떨까요?
주님. 십자가를 통한 자기 부활만이 진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나’를 발견하는 길임을 고백합니다. 세상이 자기실현을 향한 상향성의 길을 추구할 때, 자기부인을 통한 십자가의 자리로 내려가 나비처럼 부활하기 원합니다. 내가 애벌레가 아니었음을, 나비였음을 깨닫는 자기부인의 과정을 통과하게 하소서.
내가 살아있을 때, 내가 보기에 옳은 선한 일을 추구했습니다. 십자가를 앞둔 주님의 마음을 아무도 헤아리지 못한 가운데 분주히 선한 일을 하려 했던 마르다의 우를 범하지 않게 하소서.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주님의 마음에 연결되어 주님이 원하시는 그 일을 하는 선한 자가 되게 하소서.
주님.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자입니다. 바로 이 일이 하나님께서 이미 전에 완벽하게 예비해두신 것임을 믿습니다. 왕의 자녀를 위해 미리 평탄케 하시고 다 준비해 놓으신 그 길을 걷는 것이 곧 선한 일임을 깨닫게 하소서. 선한 일은 무엇인가 하는 것의 문제가 아닌, 주님이 마련하신 생명의 길 위에 있어야 하는 문제임을 알게 하시고 일이 아닌 생명에 초점을 맞추는 자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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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아가토스)을 이루느니라 – 로마서 8:26~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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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6 – 나는 ‘영적 귀소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무엇을 향하나요.. 홈홈 스위트홈..그것은 나온 바 본향인 하나님 품, 하나님의 어떠하심의 증거궤가 있는 지성소, 하늘의 새 예루살렘이지요!!..주님의 짝 됨!!)
하나님은 선택, 예정, 신적 주권과 같은 신비를 우리가 다 이해하도록 강요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런 진리를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눈을 들어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깊은 경외감을 품고 “오 주님, 당신이 아십니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런 진리는 깊고도 오묘한 전지하신 하나님만의 영역입니다.  
이 부분을 깊이 연구하여 신학자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결코 참된 성도를 만드는 것은 아닐 겁니다. – A. W. 토저 –
@6. KEY QUESTION
*모든 생명이 본능을 갖고 있다면, 영생은 어떤 본능을 갖고 있을까요?
*자연 안에 귀소본능이 존재한다면, 영적인 영역에도 귀소본능이 존재할까요?
*나비는 날기 위해 노력해서 나비가 되는 걸까요 아니면 나비이기 때문에 결국 날게 되는 걸까요?
1. 거듭난 이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생명, 조에
헬라어에는 ‘생명’을 뜻하는 두 개의 단어가 있는데요. 육신의 부모로부터 얻은 생명을 ‘비오스(bios)’라 부릅니다. 명확한 끝이 있는 생명이죠. 
반면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조에(zoe)’라 부릅니다. 끝이 없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진정 ‘거듭난’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조에(zoe)’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조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요한복음 3:16에 나온 영생의 생명은 ‘비오스’가 아닌 ‘조에’입니다. 영생은 세상을 끝내고 천국을 가야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천국)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너희 안에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고, 거듭난 자는 그 즉시 ‘영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듭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거듭났다’란 말은 원어 적으로 ‘위(하늘)로부터 태어나다(born from above – 겐나오 아노덴)’란 뜻입니다. 이것은 기존의 생명(비오스)과 ‘본질’ 자체가 완전히 다른(카이노스) 생명(조에)을 갖게 됐다는 말입니다.
거듭난 크리스천은 자신의 천연적 생명이 아닌 하나님의 생명(조에)으로 살아야 합니다. 모든 영적인 삶의 근원은 이 하나님의 생명 위에 있습니다. 
이 조에로 인해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카이노스 피조물이 되었고, 하나님의 명작이자 포이에마가 되었고, 아가토스의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 모든 생명은 자기 자신이 되려는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개의 생명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본능(本能)입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가 본능에 따라 빨고, 자고, 웁니다. 아이들은 일부러 가르쳐주지 않아도 두려움이나 아름다움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표현합니다. 
이처럼 거듭난 사람이든 아니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먹고 싶고, 자고 싶고, 자기를 실현하고 싶은 본능(本能)을 갖고 있습니다.
사전은 이 본능을 ‘경험이나 교육에 의한 것이 아닌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생물의 능력’이라고 정의합니다. 
올챙이는 개구리가 되려는 본능이 있고, 애벌레는 나비가 되려는 본능이 있고, 도토리는 떡갈나무가 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이처럼 자기 자신이 되려는 본능을 가진 겁니다. 한 개의 도토리 씨앗 안에는 수천 수만 가지의 상황과 환경의 변화에 대응해 결국 떡갈나무가 되게 하는 놀라운 본능이 숨어 있습니다.
철학에서는 이것을 ‘엔텔레키(Entelechy)’라 부릅니다. ‘~안에 목적을 갖고 있다’란 뜻인데요.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모든 생명과 존재 안에는 나름의 고유한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이 동인(動因)이 되어 결과에 이르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만물 안에 깃든 하나님의 섭리를 부지불식간에 알고 있었던 셈이죠. 
하나님은 이처럼 모든 생명 안에 자신의 목적과 뜻을 두셨습니다. 목적만이 아니라 그 목적을 이룰 능력까지 심어 놓으셨습니다. 이를 가장 잘 설명하는 영어 단어는 ‘데스터니(Destiny)’입니다. 한글로는 ‘운명(運命)’이라고 번역하지만 ‘운명’이란 단어는 ‘하나님이 모든 생명 안에 목적과 그 목적을 이루게 할 능력을 두셨다’는 의미를 살리기엔 부족함이 있는 듯 합니다. 그래서 이곳에선 그냥 ‘데스터니(Destiny)’를 그대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3.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 영적 귀소본능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 이 본능(Destiny) 안에는 ‘내면의 부르심’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연어는 바다로 나가 수년을 살다 때가 되면 내비게이션이나 지도도 없이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정확히 돌아와 알을 낳고 생을 마감합니다. 
연어가 자신의 본능(Destiny) 안에 있는 ‘내면의 부름(Calling)’을 듣고 반응할 때 자기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Destination)에 정확히 도착합니다. 
그래서 데스터니(Destiny)와 목적지를 의미하는 데스터네이션(Destination)은 어근이 같은 겁니다.
내면의 부름, 즉 소명(Calling)은 머리와 피부색을 결정하는 유전자만큼이나 내재한 천성입니다. 
만일 이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살아간다면 평생을 자기 안의 ‘떡갈나무’를 잊은 채 ‘도토리’로 살다 끝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들어가기 전 자기 자신을 ‘메뚜기’로 여긴 것과 같습니다. 자신안에 있는 ‘거인’을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이죠.
우리는 전화벨이 울리면 그 소리에 반응합니다. 사람들이 요청하면 그 요청에 반응합니다. 세상의 수많은 요구에 부응하고 반응하려 애씁니다. 이것은 모두 외면의 소리입니다. 직접적인 외적 자극에 반응을 안 보일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인생은 수많은 부름(Calling)에 대한 반응으로 이루어진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연에 속한 생물이 본능(Destiny)의 소리에 순종하며 사는 것과 달리 사람은 자신의 생명 안에 담긴 내면의 부름(Calling)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영적 귀소본능’을 거역하며 살아갑니다. 죄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4. DESTINY, 영적 귀소본능을 따르는 삶
72억 인구 중 DNA가 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온 우주에서 유일한 존재인 ‘나’는 거듭난 ‘영’을 갖고 있습니다.((나는 영적 존재, 영과 생명을,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있는 영과 생명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이것의 온전한 공급닫음 위해 주님은 <하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의 영, 그 안에는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 위대한 걸작품(masterpiece, 포이에마)으로서의 데스터니(Destiny..주 빼어닮음, 주께로의, 주와 하나됨 회복 위한 부르심 Calling.구심성..내주하시는 성령-교회-주 품 안으로 부르심) 씨앗이 들어 있습니다. 이 데스티니를 향해 가는 동안 , 주님은 나만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선한 일<이것이 바로 믿는이 각자의 삶자리로 나아가 거기에서 이루도록 명하신 바 사명!!.Mission..원심성>을 맡기셔서 그 <맡기신 사명 통해 나의 고유한> 데스티니를 가장 빛나게 하십니다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그 일’이 있고, 나는 바로 ‘그 일’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것을 사명(Mission) 또는 존재 이유라 부르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그 일’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이미 예비하신 ‘선한 일‘을 하는 겁니다.
나비는 날기 위해 노력해서 나비가 되는 게 아닙니다. 나비이기 때문에 결국 나는거죠. 나는 것은 그 생명 안에 이미 들어있는 겁니다. 노력하는 게 아닙니다. 사과가 빨갛고 새콤하고 달기 때문에 사과인 게 아닙니다. 사과이기 때문에 결국 빨갛고 새콤하고 달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하느냐(to do)’에 따라 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구이기(to be)’ 때문에 결국 ‘그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 부름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 안에 감춰진 보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내면의 소리(Calling)에 귀를 기울이고 반응하려 할 때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에 반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난 사람에게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 영적 귀소본능입니다.
===오늘 하루 이렇게 기도해보면 어떨까요?
내가 위로부터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내 안에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인 조에가 있음으로 인해 감사합니다. 이 조에로 인해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카이노스 피조물이 되었고, 하나님의 명작이자 포이에마가 되었고, 아가토스의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게 하시고 이 조에 안에 있는 영원 궁한 잠재성에 눈뜨게 하소서.
모든 생명에 본능이 있듯, 내가 거듭나 새로 얻은 하나님의 생명 안에 나를 나 되게 하는 하늘의 본능이 있음을 믿습니다. 세상의 요구에 반응하며 살아가던 인생에서 조에를 통해 흘러나오는 내면의 부르심과 요구에 귀를 기울이며 주님이 정하신 길 위에 올라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의 데스터니(Destiny)안에 정해진 데스터네이션(Destination)으로 가게 하소서.
무엇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던 삶임을 고백합니다. 나비가 날기 위해 노력해서 나비가 된 게 아님을 다시 떠올립니다. 나는 것이 그 나비의 생명 안에 이미 있었던 것처럼, 나의 영원한 생명 안에 진정 나를 나 되게 하는 속성이 이미 들어 있음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내가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소서. 내 안에 이미 진짜 내가 있음을, 또한 그 나에 걸맞은 속성이 모두 들어 있음을 알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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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다비드상은 16세기 이탈리아에서 미켈란젤로에 의해 28개월 이상 걸려 만들어진 것입니다. 어느 날 미켈란젤로가 훗날 다비드가 될 대리석을 붙들고 열심히 작업 중이었습니다. 그때 그 근처를 지나던 한 아이가 와서 왜 그렇게 힘들게 돌덩어리를 두드리느냐고 물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말했습니다. ‘이 돌덩어리 안에는 이미 천사가 들어있단다. 난 묶여 있던 천사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중이지.’ The statue of David is a gigantic statue sculpted over 28 months by Michelangelo in sixteen century Italy.  One day, while Michelangelo was working on this marble that would become David,  a young child came by where he was working. They young boy asked Michelangelo why he was working so hard hitting the rock.  Michelangelo said to him, ‘Young boy, there is an angel inside of this rock and I am setting him free.’ – 크리스 와이드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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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사랑하시는 것만큼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다. 첫 번째 시험은 무엇이었나?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태복음 4:3)”
첫 번째 시험이 무엇인지 모두가 잘 안다.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이다. 맞다. 하지만 표면으로 드러난 시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마귀는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시험하기 전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란 말을 먼저 했다. 
마귀가 표면적인 유혹을 통해 실제로는 예수님의 정체성(identity)을 공격한 것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사명(Mission)을 다른 말로 존재 이유라 한다.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내가 이 땅에 왜 존재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온 우주에서 유일하게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이 땅에 존재하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마귀가 두려워 하는 자는 하나님이 이 땅에 나를 두신 목적을 아는 자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때 마귀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가장 먼저 공격하고 싶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델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예수님이 걸으시며 겪은 과정을 그대로 겪을 것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떨기 나무 가운데 부르셨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남은 삶을 헌신했다. 
우리 역시 인생의 어느 순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자각하는 순간을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부르심을 자각하면 남은 삶은 그 부르심에 헌신하게 되어 있다. 부르심의 자각 위에 서는 순간 마귀는 가장 먼저 ‘능력’을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을 검증할 것이다. 
돌을 떡으로 바꾸는 ‘능력’이 시험의 첫 번째 공격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인지 여부가 그저 지식일 뿐인가 아니면 생명에서 나온 것인가를 가장 먼저 검증할 것이다. 마귀의 두 번째 시험도 구조는 동일했다.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마태복음4:6)”
사명에 있어 능력(DO)이 먼저가 아니다. 정체성(BE)이 항상 먼저다. 정체성이 흔들릴 때 탁월한 능력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모든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셨다. 그 비결은 무엇인가? 바로 앞 장에 정체성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단서가 나온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3:16~17)”
예수님이 세례받으시는 장면이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한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순간인가? 이때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사역에 발판이 되는 한 소리를 듣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렇다. 예수님이 십자가 사명을 이룰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이 아버지의 사랑이 모든 정체성의 근간이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충만히 받고 자란 아이는 건강하다. 
시련을 이겨내고 사명을 이루게 하는 힘은 능력이 아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지식이 아닌 생명으로 깨닫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한 성정(性情)을 입고 모든 시험을 이겼다. 죽음마저 이기셨다. 죽음을 넘어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역은 이 사랑 위에 세워야 한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 사랑을 알았다. 이 사랑이 모든 사역의 근간인 것을 아셨다. 
그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직전 유언처럼 아버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장면이 요한복음 17장에 나온다.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을까?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한복음 17:23) I in them and you in me. May they be brought to complete unity to let the world know that you sent me and have loved them even as you have loved me. (NIV)”
이 기도의 핵심은 무엇인가?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시는 것과 완전히 똑같이(even as) 그들을 사랑하고 계심을 세상으로 알게 하소서"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실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것만큼 사랑하신다(God loves me as much as He loves Jesus / NLT 버전 참고).  
내가 얼마나 헌신하는가, 얼마나 착한 일을 많이 하는가, 얼마나 예배를 잘 드리는가, 얼마나 절제를 잘하는가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받아주시는가? 하나님이 예수님을 받아주시는 것만큼 받아주신다. 
내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교활한가, 얼마나 게으르고 탐심이 가득한가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나를 받아주신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그렇다면 나도 그만큼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얼마나 받아주시는가? 그렇다면 나도 그만큼 받아주신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어떠함을 바라보지만, 하나님은 나를 덮고 계신 그리스도의 어떠함을 보신다. 
어떤 순간에도 거절하시지 않을 것이란 확신과 진정한 사랑 위에 설 때 사람은 성장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것만큼 나를 사랑한다. 
세상은 외적 자격 조건을 따진다. 하지만 아버지 하나님은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신다. 내가 어디에 있든 그 사랑이 나를 마침내 찾아낼 것이다. 
그 어떤 것도 나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 아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신 아버지가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려 한다. 
아버지 하나님의 이 뜨거운 사랑에 눈뜰 때 비로소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깨닫는 것만큼 나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이 사랑 위에 정체성이 뿌리내릴 때 진정한 사역이 세워진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없으리라 (로마서 8:35, 38~39)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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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말한다: 좀 더 생산적으로! 좀 더 열심히! 좀 더 야망을 품고!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잠잠히 있으라! 그리고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편 46:10) Everyone says: Be productive! Be busy! Be ambitious!  God says: Be still and know I am God. (Psalms 46:10) – 맥스 루캐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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