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4.05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행2.오순절날성령강림.베드로의설교.예루살렘교회시작_그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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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2장


==[[Anointing,기름부음 받음]]위에서 부어주시고(참되게 믿는 모든이마다, 주님 뜻따라 주 예수님의 증인으로 땅끝까지 나아감의 승인이요 신호탄 되신, 주님의 경륜 이룰바, 경륜적 성령 부어주셨음!!..오직 말씀과 기도로!!, 지속적으로 자신을 넘치도록 채우시는 그분께 완전히 사로잡힐 것!!) 동시에 (영생의 생명샘이요 생명의 강 원천이신, Q 자녀 됨의 인침과 보증이신 분) 내주하시는 기름부음이신 주 성령님을 절대 의지함==

[대하6:42..여호와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서 얼굴을 돌이키지 마옵시고 주의 종 다윗에게 베푸신 은총을 기억하옵소서]

[시28:8...여호와는 저희의 힘이시요 그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산성이시로다]

[시132:17... 내가 거기서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라  내가 내 기름 부은 자를 위하여 등을 예비하였도다]

[요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히브리어 <마사흐חשמ<는 기름 붓다 바르다의 의미....  메시야Messiah 구원자라는 단어가 <마사흐חשמ<에서 파생되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메시야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종을 의미하니,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시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기름 부으심 없이는 아무 것도 하시지 않으셨다.  그 기름 부으심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으로부터 흘러 나왔다. 

.....기름 부으심Anointing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함께 하시는 것을 의미하며 성령의 능력과 충만함이 흘러 넘치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구약의 모든 선지서의 주제는 오실 Messiah에 초점 맞춰져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헬라어 그리스도<크리스토스Χριστός>는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 곧 왕 선지자 제사장의 모든 직분을 가지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실 것이요  성령께서 계속 기름 부으시기를 원하실 것이다.  

.....성령께서 늘 함께 하시겠지만 그 기름 부으심을 사모해야 하리니, 예수께서 구속 사역을 감당하실 때에도 성령의 특별한 기름 부으심으로 일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의 능력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부터 오는 것이요,  성령의 Anointing이 함께 하실 때 인생의 방향과 지경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메시아는 히브리어 '마쉬아흐(mashiach, מָשִׁיחַ)'에 해당하는 아람어 '메시하(מְשִׁיחָא)'의 음역으로,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 마쉬아흐는 '기름을 붓다'라는 뜻의 동사 '마솨흐(mashach, מָשַׁח)'에서 파생된 단어임...

***요20:22에서, 부활하신 구주께서 제자들 가운데 오셔서 "후우-"하고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으라"하시며 분배해주심따라 그 분배하시는 성령을 "아멘"으로 받음 인해 내주하여 친히 사시기 시작하신 부활 생명 능력의 성령님은 결코 마르지 않고 영생에 이르도록 솟구치는 영생의 생명샘물이시기에 임마누엘 주님 자신이시라, 결코 떠나지도-버리시지도-포기하시지도 않으실 것...한편, 행2:1-4에 기록되었듯이 오순절 날, 위로부터 부어주사 "불의 혀가 갈라지는 것처럼" 강림하여 거듭난 참 믿는이마다에게 각각 그 머리 위에 임하심은 성령께서 친히 머리시며 남편, 주인이자 주님으로서 "각자가 참되게 주관적 경험 통해 살아낸 바 그리스도 그 자체이신 복음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명하시는 그대로 순종하며] 전파하여 건네주는 권능의 증인됨을 확증함인 것...***

[성령, 삼위일체 Q]....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체현(embodiment...Q 영광의 형상 체현)이시요 성령은 그 능력의 표현이심....JC께서 Q영광의 빛이라면, 성령은 그 온기이심......아드님께서 성육신 하시는 그 때에 불가분리 관계이신 아버지와, 성령과 함께 그분 안에 오셔서, 인생-십자가죽음-장사 됨-부활-승천 과정을 거치시며, 이제 신성과 참 인성 가지신 그리스도는 삼층천보좌에 계시지만, 동시에 거듭난 우리의 영에 그리스도의 영 = 예수의 영 = 삼위일체 Q의 영, 곧 모든 과정을 친히 거치신 그 영(성령)오셔서 거듭난 우리의 영에 내주하여 계심으로써 모든 차원과 영역을 아우르며 완전케 하시는 임마누엘로서 ((완전히 하나 되어 녹아들어가셔서)) 함께 살고 계시며, 동시에 특별한 기름부으심으로써 일하고 계신다.

///<구약의 표현> 하나님의 영, the Spirit of God (창1:2) ---> 여호와(주 여호와)의 영, The Spirit of the Lord GOD, the spirit of the LORD :사11:2, 61:1 

///<신약의 표현> 성령(the Holy ghost, Holy Spirit)으로 잉태된 .(마1:18), 예수께서 성령(the Holy Ghost)의 충만함을 (눅4:1) 성령(the Holy ghost)으로 세례를(행1:8)......성령the Spirit이 비둘기 같이..(요1 : 32)....생명 주는 그 영., 생명 주는(살리다. 생명을 주다, 활기있게 하다, 서두르게 하다..) 것은 그 영(요6:63....it is "the Spirit who gives life").......하나님의 영 the Spirit of God , 그리스도의 영the Spirit of Christ(롬8:9) 성령이 친히the Spirit itself..(롬8:16) .... 주는 (그) 영이시니, 주의 (그) 영이 있는곳에는(고후3:17):: the Spirit of the Lord.... 성령이the Holy Ghost (행16:6), 예수의 영이( the Spirit ...행16:7) 성령과 신부:the Spirit and the bride(계22:17)  

====> 하나님의 영 ---여호와의 영---성령---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예수 그리스도의 영) --- 주의 영(또는 주 영, Lord the Spirit) ---그 영(rhe Spirit)

....

==충만(Fullness)==

가득하게 차 있다는 말이 헬라어로는 ‘플레로마’(pleroma)이며 ‘새 것으로 보충하여 낡은 것을 온전하게 하는 것’(마9:16; 막2:21),‘ 채워서 양을 완성시키는 것’(막6:43)이란 의미로 쓰였다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요1:16)라고 표현하여 그리스도의 완전성,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속성의 충족성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바울서신서에는 충만이란 단어가 기독론적인 구절들에서 중요하게 언급된다. 바울은 충만이란 단어를 ‘완성’(고전10:26; 롬15:29), ‘성취’(롬13:10), ‘시간적인 전체’(갈4:4), ‘숫자적인 전체’(롬11:25) 등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바울은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1:19)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자신의 완전한 계시를 말해주고 있다. 

또한 바울은“ 그(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2:9)라고 하여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의 완전성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골로새 성도들을 향해 “너희도 그(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골2:10)라고 쓰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성장과 성숙에 필요한 모든 것은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연합을 통해 이미 성도 자신의 것이 되었다는 말이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교회를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고 묘사했고(엡1:23)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기도하였다(엡3:19). 

그리고 바울은 신자들이 서로 사랑하고 섬길 때, 하나님은 각 사람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를 수 있도록 개인과 사회 안에서 일하시는 분임을 말해주고 있다(엡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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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나미스(δύναμις) : 권능==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권능’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뒤나미스’ (δύναμις)는 ‘할 수 있다, 가능하다, 힘이 있다’는 뜻의 ‘뒤나마이’(δύναμαι)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강한 힘, 이적적인 능력, 전능한 일’이란 의미이다.

보통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의미로 알려져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능력(δύναμις)을 얻기위해 기도하곤 한다.   

그러나 이 단어가 쓰여진 용례를 보면 숨겨진 속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령(말씀)이 임하면 [= 여호와의 입의 혀, 곧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로 옷입음!!...^^성령은 (사랑하는 아들-기뻐하는자인) 참생명의 아들 나사렛예수에게 [일편단심-단일시선으로 한 곳만 바라보며 날아감이 그 특징인]비둘기 형체로 임했던바^^ 말씀을 그대로 살아내며 말해낼 수 있는 자격-권위-곧 권세를 소유케 되고, 참되게 살아낸 바] 그 능력의 말씀을 증거-전파하며 그 능력과 함께 넘겨줌의 권능(δύναμις)을 받은바 되었기에 당연히  말씀의 증인이 된다함이니.(행1:8)...그 대표적인 예를,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그러한 권능(δύναμις)이 어디서 났는지 사람들이 놀라고(마13:54, 막6:2),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δύναμις)이 충만하여 성령으로 말하며(행6:10)…에서 볼 수 있게 된다.

‘권세’ (엑수시아 : ἐξουσία)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품고 살아낼 수 있는 (참생명 하나님,그분이 낳은 참생명 받은, 그분 빼어닮은 자녀로서의) 권위-권한-자격-명분-물려받은 능력’이라고 말한다면,  ‘권능’ (뒤나미스 : δύναμις)은 ‘자녀가 살아낸 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전파하며 그 능력과 함께 넘겨주는 = 주님 자신을 공급하는 그 영, 성령의 능력(= Testimony of JESUS is the SPIRIT of prophecy)’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헬라어 ‘뒤나미스’(δύναμις)가  히브리어로는 ‘코아흐’(כח)라고 하는데 이를 파자하면  ‘완성된 진리로서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생명(참 생명 조에)을 넘겨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데서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출9:16).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말씀)을 온 천하에 전파되도록 하기 위해 모세를 세우면서 능력(כח, δύναμις)을 보여주신다.  

모세가 받은 능력은 다름 아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능력(뒤나미스)이었다....그러므로 성령(말씀)이 임했다는 것은 타락한 옛사람인 나의 말(율법)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품을 수 있는[=살아낼 수 있는] 권세(ἐξουσία..엑수시아...권위와 권한, 자격. 대의명분)가 임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나아가 받고 살아내는 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전파함 통해 하나님 자신을 넘겨주는 능력(δύναμις...뒤나미스..권능)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말 뜻과 초점을 명확히 할 바!!)) 능력(δύναμις)행함이란,  눈에 보이고 육신을 만족케하는 [전파자 스스로의 의지로] 기사와 이적을 행하는  의미에서의 행함이 아니라(!!...이것은 모든 것 다 아시는 주께서 친히 하시는 것이니!! 친히 베푸실바 그분의 때와 필요를 따라 행하시도록, 통로된 그대는 다만 마음으로 고하고 중보/중재하라)  오히려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전해준다는 의미에서의 행함을 말하는 것이며 그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로 살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날마다 능력(δύναμις) 행함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영혼에게 주시는 능력! <코아흐-כוח<와 <오즈עזֹ<.  @@

[빌4:11....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시81:1... 우리 능력 되신 하나님께 높이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께 즐거이 소리할찌어다]

[고후13:4....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능력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로는 <코아흐כוח <또는 <오즈עזֹ<....<코아흐כוח<는 하나님을 앙망하는 영혼에게 주시는 능력을 의미하며, 이는 수동적인(수동적으로 끌려가던) 인생에서 (임마누엘 그리스도 예수님으로 인해!!) 능동적으로 일어서는 그 힘을 뜻한다.... 힘-권세-능력-권능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한편,  <오즈עזֹ<에는 힘과 보호라는 뜻이 있기에 완전한 방패요 요새와 안식처/피난처(새 힘과 능력 채움받음)를 의미하는데, 그 어느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여호와의 불 방어벽으로 둘러 보호하며 지키시는 극히 안전한 피난처를 뜻한다 

........곧, 하나님을 앙망 하는 자에게 주시는 능력이 <코아흐כוח<와 <오즈עזֹ<인 것이니, 곧 흔들어 깨워 일으켜 일어나게 하여 세워주시고 부축하고 주님의 부활생명 능력 공급하시고, 친히 인도-돌파하시며 이끌어 구주 하나님 JC의 이름으로 다시 새로이 생명길 행하도록 일어날 수 있는 힘!!,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그 능력으로 인생의 길을 열 수 있는 힘을 공급하신다 함이니.......동시에, 임마누엘 주께서 하나되어 몸의 머리로서 나아가시기에 그 어떠한 위험과 위협 앞에서도 굴함 없이 담대하게 용감하게 하나님의 능하신 손으로 보호 하시는 그 힘을 경험하게 하실 것이다....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는 영혼에게 오늘도 일하고 계시니...여호와를 앙망하는 영혼들을 위해서 그 능력을 보여 주실 것이요...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일어서게 하실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친히 능력 근원으로서 믿는이마다에게 능력 주시기에!!

[(나는비록약하나주예수는강하다)고후13:4-9...*4.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Q께절대기꺼이순종하심으로써)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5.너희는 믿음(=the Faith)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6.우리가 버림 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7.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 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8.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9.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4 For even though He was crucified in weakness [yielding Himself], yet He lives [resurrected] by the power of God [His Father]. For we too are weak in Him [as He was humanly weak], yet we are alive and well [in fellowship] with Him because of the power of God directed toward you.  5 Test and evaluate yourselves to see whether you are in the faith and living your lives as [committed] believers. Examine yourselves [not me]! Or do you not recognize this about yourselves [by an ongoing experience] that Jesus Christ is in you—unless indeed you fail the test and are rejected as counterfeit? 6 But I hope you will acknowledge that we do not fail the test nor are we to be rejected. 7 But I pray to God that you may do nothing wrong. Not so that we [and our teaching] may appear to be approved, but that you may continue doing what is right, even though we [by comparison] may seem to have failed. 8 For we can do nothing against the truth, but only for the truth [and the gospel—the good news of salvation]. 9 We are glad when we are weak [since God’s power comes freely through us], but you [by comparison] are strong. We also pray for this, that you be made complete [fully restored, growing and maturing in godly character and spirit—pleasing your heavenly Father by the life you liv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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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세력, 능력, 역량.....δύναμις (Dynamis)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뒤나미스(Homer. 이래)는 뒤나마이(duvnamai, 1410)에서 유래했으며,

(a)  ① '능력, 힘, 세력'

② '가능성, 할 수 있음'

③ 신체적, 지적, 영적 '힘, 능력'을 의미한다.

(b)  호머 이래로 자주 발견되는 뒤나미스는 '성취할만한 능력, 체력'을 의미하며, '군대, 전투력', 그리고 '정치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깊이 사고하는 헬라 철학자들과 의학자들은 그 개념을 체력과 정신력에 의존하는 생존하고 활동하고자 하는 힘 혹은 능력이라는 그 말의 본래 의미로 사용하였다.

뒤나미스는 자연의 영역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면 그 말은 더위와 추위의 기세, 식물들과 자연 요소들을 치유하는 능력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헬라 시대에 그 말은 형이상학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포시도니우스(Posidonius)는 기본적인 원소에서 생명체의 원리를 보았다.

스토아 학자들은 사방에 퍼져있는 창조적인 힘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였다(Alexander of Aphrodisiensis).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자로 찬양하였으며 인간들이 거룩한 힘과 합해짐으로써 구원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Corp. Herm., Poimandres, I, 26).

사람들은 특히 마술을 통해서 초자연적인 능력들을 공유하고자 하였다(I amblichus, De Mysteriis 2, 1). 병든 사람들은 아스클레피우스(Asclepius) 신의 능력의 실연으로 말미암아 치료 받고자 하였다(P. Oxy).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뒤나미스는 70인역본에서 약 600회 나오며, 주로 하일(138회)과 차바(113회)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일반적으로 '군사력'을 의미한다.

뒤나미스는 또한 통치자의 힘, 천국 그리고 하나님의 힘에 대해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뒤나미스는 신약성경에서 11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그리스도의 사실.

신약성경의 모든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의 힘에 관한 개념도 그리스도의 사실에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 사실은 분명히 언제나 하나님의 힘과 관련되는 구약성경의 메시야관과 관련되어 있다(참조: 사 9:5; 사 11:2; 시 110:2; 마 5:5). 이 힘은 주로 왕적인 능력이지만 예언적인 힘도 포함되어 있다(참조: 미 3:8; 행 7:22[모세]; 눅 1:17[세례(침례)요한]).

신약성경에서는 예언적인 면이 매우 두드러진다(참조: 눅 24:19).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힘을 부여받은 선지자 이상의 존재이다; 그의 전 존재는 특별히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결정된 유일 무이한 것이다. 이것은 동정녀 잉태 기사에서 성령과 지존자의 능력의 병행에서 표현된다. 형식을 묘사하려는 어떤 시도도 행해지지 않았다. 성육신은 정상적인 발생 과정을 초월하는 잉태와 더불어 시작된다. 그리스도 탄생 때 독특하고 특별한 능력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가 붙여진다(눅 1:35). 이런 사실에 의거해 볼 때,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에서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지닌 자이다(눅 4:14, 눅 4:36). 하나님의 본질이 힘이므로, 힘의 부여는 성령의 선물과 결부되며, 성령의 선물은 그리스도에게 그의 권세(엑수시아)를 전달해 준다. - 이 권세는 그가 귀신을 쫓아내거나 병자를 고칠 때 행사할 수 있는 능력(뒤나미스)을 지니는 권세이다(눅 5:17; 눅 6:19; 눅 8:46). 이런 이유로, 그의 제자들이 증거한 바는 하나님께서 성령과 권능으로 예수님께 기름 부으셨다는 것이다(행 10:38). 그가 행한 일들도 뒤나메이스(복수)라고 불리워질 수 있다(막 6:2; 눅 19:37; 또한 행 2:22). 이 일들은 그 당시 세계에서 행한 비슷한 능력의 행동들과 다음의 세 가지 면에서 다르다:

① 이 일들은 마술과 관련이 없다.

② 이 일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말씀으로 행해지는데,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가 역사 속으로 들어와서 적대 세력의 지배를 전복시킨다.

③ 이 일들은 이 일을 행하시는 분에 대한 믿음과 이 일들이 행해지는 사람들의 믿음을 전제하며, 따라서 인격적인 관계가 요구된다(마 13:58; 참조: 막 9:14이하). 믿음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 믿음에는 능력이 있다(막 9:23). 왜냐하면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능한 일들은 놀라움과 찬양을 불러 일으키며(마 13:54; 눅 19:37), 헤롯에게서는 양심의 불안을 불러 일으킨 것 같다.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 하더라"(마 14:2).

요한복음은 뒤나메이스를 사용하지 않고, 엑수시아나 세메이온과 함께 동사 뒤나스다이를 사용함으로써, 강조점을 행동에서 능력으로 전이시킨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 충만한 메시야적인 능력에서 행해진 세메이아는 독특한 행동들이다. 예수님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즉 그가 아버지와 교제함으로써 하나님의 권능을 지니기 때문에 그것들을 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는 뒤나미스라는 말이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예수님의 메시야 활동은 아들의 보내심에,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뜻의 통일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은 아버지 없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요 5:19, 요 5:30, 뒤나타이). 그리고 그의 기적들은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드러내는 징표이다(요 3:2; 요 9:16; 요 10;21, 항상 뒤나타이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반대로 인간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실재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어둠의 세계 속에 감금되어 있기 때문이다(요 3:3; 요 8:43; 요 14:17, 우 뒤나타이). 그들은 오직 선택(요 6:44)과 거듭남(요 3:5)을 통해서 해방될 수 있다.

요한에게서 볼 수 있는 특별한 특징은

① 뒤나스다이에 유일무이한 그리스도 사건이 있다는 점.

② 이 사건 속에 있는 권능은 새 시대를 여는 하나님의 권능이라는 점이다. 

이 권능은 십자가 사건과 부활에서 특별하게 나타난다.

그리스도 자신의 부활은 마 22:29에 나오는 그의 말씀을 뒷바침해 준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행 2:24에서 베드로는 이 부활의 권능을 매우 인상깊게 부정적인 표현으로 나타낸다: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죽음의 권세는 깨뜨려졌다. 하나님의 권능이 예수님께서 권능의 행동을 하도록 그에게 능력을 부여해 준 것처럼 또한 예수님께서 새 생명을 가지도록 능력을 부여해 준다.

바울은 고전 6:14("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과 고후 13:4("성구삽입")에서 이 점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된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전파한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부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며 그에게 권능 그 자체가 부여된 것도 아니다; 부활로 말미암아 그가 소유하게 된 것은 성육신의 외적인 약함과 대조되는 완전한 능력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만약 그리스도가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불리운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능력을 의인화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 안에서 승리적으로 작용하며 그것을 목적지에까지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에서 이 능력은 파괴될 수 없는 생명의 능력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권능은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의 도달 범위를 넘어 선다. 

이 능력으로 아들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이 세상을 다스린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요한계시록에서 이 능력은 영광과 동일시된다: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것 같더라"(계 1:16).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은 능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계 5:12).

그리스도의 백성들은 그가 그의 일을 완성하고 다른 모든 세력들을 굴복시켜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확립하실(*빌 3:21) 능력을 가지고 오시기를 기다린다: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막 9:1). 

이 오심은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는 그의 능력있는 천사들을 동반하신 것이다: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살후 1:7).

(b)  하나님의 능력, 악마적인 세력들, 그리고 구원의 능력.

① 그리스도 사건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빛을 던져준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따라서 이것은 부여된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눔으로써, 이 능력을 부여받는다. 

따라서 그의 능력은 구약성경에서처럼, 종말론적 사건의 역사적인 능력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그리스도 사건에서 나타난다(마 22:29; 참조: 히 11:19). 

하나님은 그의 전능하신 통치에 의해 뒤나토스가 된다(참조: 눅 1:49). 

그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참조: 마 19:26). 

믿음으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만물은 그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분명하게 선언한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 1:20).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마 6:13; 계 4:11 등에서처럼, 구약성경의 송영을 받아들인다. 

계 11:17-18과 계 12:10의 송영은, 그리스도 사건에서 하나님 능력이 이미 나타났듯이, 하나님의 능력이 적대적 세력들을 멸망시키고 세상을 완전하게 하시리하는 고백을 암시하고 있다.

② 그리스도 사건은 또한 악마적인 세력을 이해하는데 새로운 빛을 비춰준다. 

신약성경은 이 세력들을 인정한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마 24:29). 

이 세력들은 우주적 세력인 동시에 천사적인 세력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그 힘을 잃어버렸으며 그의 재림 때 공개적으로 그 힘을 박탈당할 것이다. 

이 두 사건들 사이에는 긴장이 있다. 신자들의 새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유래한 것이며 그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엡 1:20-21; 롬 8:38, 롬 8:39), 이 세력들은 제거된다. 

그렇지만 그들은 여전히 싸우며(계 13: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결국 복종하게 될 것이다: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 15:24). 

적그리스도는 능력을 가지고 나타나서 거짓을 퍼뜨릴 것이다; 그리스도의 오심만이 다시 그를 최종적으로 멸망시킬 것이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살후 2:9).

③ 그리스도의 사역 또한 구원의 능력에 관한 질문에 새로운 답을 준다. 

제자들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 묻자, 그리스도는 구원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만이 구원하실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참조: 마 19:26).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인간의 무능력을 날카롭게 강조한다. 우리의 약함 때문에, 율법조차도 죄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롬 8:3).

히브리서는 제사에서 똑같은 무능력을 발견하고 있다(*히 10:1, 히 10:11).

요 3:3에서 언급되듯이, 만약 거듭나지 아니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줄 알지 못함이로다"(요 8:43).

만약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신다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올 수가 없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하나님만이 구원할 능력을 지니시며, 그는 예수님 안에 그의 권능을 나타내신다(롬 1:16; 고전 1:18). 이 능력은 신비적인 입교식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구원을 지시해 주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도의 능력이다. 

이것은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부터 해방시키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우리를 옮김으로써, 구원을 부여해 준다. 이것은 그리스도 사건의 구원 행동, 즉 역사 안에서 행한 하나님의 능한 행동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는 벧후 1:3-4에서만, 즉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고 우리에게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들을 주신다고 할 때만 역동적인 개념보다는 실질적인 개념을 엿볼 수 있다.

(c)  제자들의 능력.

전파는 하나님의 뒤나미스로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계속하며,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부여 받았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실 때(눅 9:1), 능력으로 그들을 무장 시켰다. 이 능력은 악마의 힘을 이긴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 10:19). 

제자들은 믿음으로만 이 능력을 가질 수 있다(참조: 막 9:14이하). 이것은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 자신의 임재의 능력이다(눅 24:48; 눅 24:49; 행 1:8). 능력으로 설교하고 병을 고치게 하는 특별한 능력의 부여가 오순절에 일어났다(행 4:7이하, 행 4:33; 행 6:8, 행 6:10).

바울의 사역은 표적과 기사의 능력에 의해, 즉 성령의 능력에 의해 효력을 발한다: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롬 15:19).

뒤나메이스는 사도직의 표시이다(갈 3:5; 살전 1:5). 그러나 이 능력은 그리스도의 임재 방식뿐만 아니라 신자의 존재 방식으로서의 성령의 능력이다. 

사도들은 십자가의 증인들이다; 그들은 외적으로는 약하나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파하며, 따라서 청중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거하게 된다(참조: 고전 2;1이하). 

뒤나미스는 메시지의 형식이 아닌 메시지의 내용과 관련된다. 전파의 목표는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임재를 나타내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바울이 사역자가 된 것도 똑같은 능력에 의해서이다: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엡 3:7). 

고전 5:3-4에서처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능력은 또한 사법적인 것일 수도 있다: "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여기에서는 만일 신자들이 사단에게 넘겨지지 않는다면, 사단은 신자들을 제어할 힘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과 심지어 사단에게 넘겨질 경우에도 그 목적은 여전히 구원에 있다는 사실이 주목되어야 한다. 

사도 자신의 삶과 사역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은 끊임없이 능력을 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빌 4:13; 딤전 1;12; 딤후 4:17). 이 강화하는 것은 원조의 형태를 취하며, 따라서 마나(mana)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종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의 견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d)  공동체의 능력.

하나님의 구원 능력에 의거하는 공동체가 바울의 목표이다(참조: 고전 2:1이하). 

신자들은 "주 안에" 있을 때 강할 것이다(참조: 엡 6:10). 

사단의 세력에서 구출되었지만, 여전히 위험에 싸여있는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들을 보호하고 보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보호 받는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벧전 1:5). 

이 사도의 기도는 그들이 하나님의 큰 능력을 누리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9), 

혹은 그들이 모든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 1:11).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 이 능력은 그들의 부름과 영광스런 기업에 대한 소망을 만들어 낸다. 기독교인들이 참고 인내하려면 이 능력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보전할 뿐만 아니라 변화시키는 힘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에게는 소망이 넘친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속 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됨으로 그들은 포괄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서 성장한다(참조: 엡 3:14이하).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을 가진다(참조: 요일 4:7). 

모든 선한 결의와 믿음의 일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성취될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살후 1:11). 

공동체의 구성원들도 뒤나미스를 행하는 영적인 은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 12:10). 

더구나 공동체에서 역사하는 능력은 궁극적으로 부활의 능력이다: "3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저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후 13:3-4). 

하나님은 주님을 일으키셨으며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다: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 6:14). 

비천한 몸이 영광의 몸으로 변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근거한다(빌 3:21). 어느 누구도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손에서 잡아챌 수 없다(요 10:28-29).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부활의 능력 - 그의 백성을 위해 새롭고 영원한 생명을 창출해내는 능하신 행동 - 을 알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다. 이것은 진정한 뒤나미스의 원천이다.

(e)  능력과 약함.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 존재의 약하고 부패하기 쉬운 영역에서 역사한다. 따라서 이것은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알려진다. 

십자가의 도는 외적인 약함 속에 감추어져 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참조: 고후 13:4). 

그러나 하나님의 약함이 인간의 강함보다 더 강하다(고전 1:25). 

바울은 이런 사실을 그의 사도 직무의 모든 약함 속에서 인식하게 되었다(고후 12:9-10; 참조: 빌 4:13). 

이 초월적인 능력은 비겁의 영이 아닌 능력과 사랑과 자제(딤후 1:7)의 영을 주시는 하나님께 속한다(고후 4:7). 

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데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이 약함은 그리스도의 임재의 보증(증거) - 바울은 이 증거에서 자아로부터 해방과 하나님에 대한 의지를 발견하다. - 이다. 

약함 속에서 강해진다는 법칙에 따라 하나님의 부활 능력은 복음의 사역자에게 있어서나 그리스도교 공동체 전체에게 있어서나 더욱 더 풍성하게 역사한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능력안에 있어")'는 사도와 모든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믿음의 실재를 표현해 준다(고후 6:7). (참조: W. Grund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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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라”(눅1:35).]

 “임하다”로 번역된 ‘에페르코마이’(ἐπέρχομαι)는 도착하다, 또는 공격하여 굴복시키다(11:22) 라는 뜻으로도 번역됩니다. 

에피(정확하게) + 에르코마이(오다)로 구성된 합성어로, 마치 핀 포인트 공격으로 정확하게 공격하여 굴복시킨다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나의 어떤 부분이 문제가 있는지 그곳을 핀 포인트 공격하듯이 ‘에페르코마이’하십니다. 뻗대지 마십시오. 

내가 주님 앞에 파산되어 두 손들고 굴복할 때, 오히려 주님의 능력이 그림자처럼 나를 감싸 안으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임하다, 오다, 가다, 접근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에페르코마이(Homer 이래)는 에피(ejpiv, 1909)와 엘코마이(e[rcomai, 2064)에서 유래했으며,

(a)  '~에 이르다,- 에 오다, 가까이 다가오다'를 의미하며, 말하는 자가 나타나거나 나오는 것, 때가 오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비유적으로 '만나다, ~에 닥치다, ~을 엄습하다'를 의미하며, 어떤 사건이 사람에게 닥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b)  '적대적 의도를 가지고 오다, 공격하다, 비난하다', 비유적으로, 어떤 것을 '착수하다, 일을 맡다'를 의미한다. 

파피루스에서 (a) '접근하다', (b)  어떤 사람에 대하여 '힘으로 대항해 나가다'. (c)  '불법으로 침입하다'. (d)  '예정이다, 하기로 되어 있다'(성취에 대하여). (e)  '보도의 타당성을 논의하다'. (f)  '요구 사항을 가지고 어떤 사람을 압박하다', 아무에게 '주장하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에페르코마이는 70인역본에서 약 150회 이상 나오며, 24개의 히브리어 단어 및 어군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재앙을 가져오는 혹은 보다 드물게, 축복을 가져오는 일, 사건, 상황 등에 대해 사용되었다. 

사 32:15에서 성령이 위로부터 '부어 주시는 것', 사 41:22; 사 41:23에서 멸하는 것 등을 표현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에페르코마이는 신약성경에서 9회 나오며, 다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a)  에페르코마이는 '~에 오다, 이르다, 도착하다'를 의미한다.

① 행 14:19에서 보편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② 시간에 대하여, '다가오다, 가깝다, 미래이다'. 엡 2:7에서 형언할 수 없이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장차 올 시대에 나타날 것이다.

(b)  에페르코마이는 '~을 엄습하다', (갑자기) '닥치다'를 의미한다.

① 고생이 임하는 것에 대해, 약 5:1; 눅 21:26.

② 재난, 불행이 갑자기 닥치는 것에 대해, 눅 21:35; 행 8:24; 행 13:40.

③ 성령이 임하여 역사하는 것에 대해, 눅 1:35; 행 1:8.

④ 적이 급습하거나 공격하는 것에 대해, 눅 11:22.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J. Schneider). 

===라카흐, 취하다 = 붙잡다, 품다==주님의 임하심(에페르코마이)를 붙들라!!

예수 그리스도께 붙잡히다 (빌립보서 3:12...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내가 이 모든 것을 다 얻었다거나 다 이루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다만 놀랍게도 나를 붙드신 그리스도를 붙잡으려고 내 길을 갈 뿐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 모든 것을 다 얻지도 못하고 이루지도 못했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일까요? 아마 위에서 말한 모든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부활의 능력을 깨닫는 것,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과 교제하는 것이지요. 바울에게 있어서 신앙 생활이란 끊임없이 자라가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12절 후반부의 해석이 좀 어렵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는 말이 좀 모호하지요?  메시지는 '그리스도'를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번역했고, 어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부활의 권능을 깨닫고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붙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했지요. 구원의 완성이나 복음 전파의 사명을 잡기 위해 달려간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해석이 되었던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바울을 붙잡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점이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것이지요. 아마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사랑을 다 이루시고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자라가야 할 부분이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의무라기 보다는 특권입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며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니까요.

우리는 구원을 이미 얻었고, 또한 이루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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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빌2:5-8...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취하다  붙들다"의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는 <라카흐חקל<입니다 .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은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택하시고 역사하셔서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시고 이끄시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누렸던 은혜입니다. ... "이끌다  취하다  인도하다  데려가다"의 뜻과 함께 "결혼하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으로 택하셔서 <결혼>의 의미처럼 함께 하시며 동행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결코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깊이 동행하시며 품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큰 은혜로 돕는 것을 의미합니다. ... "아내로 삼았다"의 뜻으로도 사용합니다 <라카흐חקל<는 강권적이며 주권적인 행동입니다 적극적인 개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정도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사람을 <라카흐חקל<의 은혜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영혼들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고 싶어하시는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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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7) 

성령께서 임하시면 능력을 받습니다. 능력은 헬라어로 <두나미스-δυναμις>입니다. "가능하게 하다, 큰 힘으로 성취하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권능을 주시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반드시 기억할 것은!!] 영육간에 묶인 것을 풀리며, 질병들이 떠나가며, 치유와 능력의 역사가 성령의 능력으로 일어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두나미스 δυναμις> 곧, 성령의 능력을 구할 때가 많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다양한 능력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따라서 다르게 부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두나미스-δυναμις)>의 원래의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전달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권능이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영혼들에게 전하려고 할 때, 성령께서는 권능가운데 일하실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은 곧, 말씀의 능력에서 오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믿고,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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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엑수시아...권위. 속 자격....그 자격대로 실행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바로 뒤나미스이다..)를 주셨으니]

@@@엑수시아ἐξουσία와 뒤나미스δύναμις

[개역(개정)]판 신약에서 ‘권위’, ‘권세’, ‘권능’ 등의 원어를 살펴보면 ‘엑수시아ἐξουσία’이거나 ‘뒤나미스δύναμις’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엑수시아ἐξουσία’는  주어진 신분과  자격에 합당한, 허용된 어떤 권한- 권세-권리 등의 뜻이고((예를 들면,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품고 살아내며 전할 수 있는 자격, 곧 권세를 자연스럽게 갖는다!!)) , ‘뒤나미스δύναμις’는 실제적으로 발효되는  효능, ((즉, 전하고 말한 그대로 이루어지는 힘과 능력)) 그 자체이므로 이 두 낱말은 잘 구분하는 것이 필요한데 [개역(개정)]은 ‘권위’, ‘권능’, ‘권세’ 등을 일관성없이 사용하여 번역하였기 때문에 읽을 때 어려움이 있다. 

일차적인 원인은 번역자가 두 낱말의 의미 차이를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한 데 있겠지만(신학적인 이유), 

그 한자어들이 자체적으로 갖고 있는 불분명성도 그 못지 않은 원인을 제공했다고 본다(어휘 자체의 문제).

한자 ‘權(권)’은 ‘자격’, ‘판단/판정’ 등의 뜻을 갖고 있어서 이 한 음절만으로 ‘엑수시아ἐξουσία’를 나타낼 수 있다. 

[개역개정]에서는 달라졌지만 [개역]에서는 그 예들을 찾을 수 있다.

//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 9:21; 개역개정은 ‘권한’) //

//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고전 9:4-6; 개역개정은 ‘권리’) //

//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히 13:11; 개역개정은 ‘권한’) //

여기에 ‘힘’의 뜻을 갖는 ‘威(위)’, ‘勢(세)’, ‘能(능)’ 등이 붙어서 ‘권위’, ‘권세’, ‘권능’이 되었으니 이 낱말들은 출생부터 구별되어야 할 두 개념이 붙어 있는 말이다. 이런 낱말들을 사용하여서 구분하여 나타내야 할 말들의 대응어로 삼는 것은 처음부터 문제를 안고 시작하는 것이다.

미리 요약하면, ‘엑수시아ἐξουσία’의 번역에는 ‘권위’나 ‘권세’보다는 차라리 ‘권리’나 ‘권한’이 나아 보이고 아예 ‘자격’으로 옮기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개정]역에서는 ‘권리’나 ‘권한’을 비교적 더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미흡하다. 

‘뒤나미스δύναμις’의 주 대응어는 ‘권능’이나 ‘권세’로 볼 수 있는데 어감상 오해의 소지가 좀 줄어들겠지만 이 역시 ‘능력’이나 ‘힘’으로 번역하면 좋을 것 같다.

1. ‘엑수시아ἐξουσία’는 위에 언급한 것처럼 자격, 영역, 소속, 원천 등의 뜻을 가진 것으로 이해하면 좋겠다. = 어떤 일/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을 때 엑수시아가 있는 것이다. 

위에 보인 것처럼 ‘권리’나 ‘권한’으로 옮기는 것이 좋고 영어로는 authority, right, capacity 등이 적당하다.  ‘권능’으로 번역하는 것은 거의 오역이라고 본다. 

몇 본문들을 살펴본다. 본문은 모두 [개정개역]이다.

(본문1)//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마 9:6) //...여기 ‘권능’은 오역으로 볼 수밖에 없다. ‘힘’이나 ‘능력’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중이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병행본문은 ‘권세’로 옮겨서 좀 낫지만 두 경우 다 권리나 자격으로 번역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막 2:10) //

(본문2)//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마 9:8) //

본문1에서 마태복음의 이어지는 이 본문의 ‘권능’ 역시 마찬가지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아니라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자격’이 사람에게 주어진 것을 말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본문3)//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 10:1) //

이 본문도 마찬가지다. 얼른 생각하면 뒤나미스δύναμις가 어울릴 것 같은 자리인데 엑수시아ἐξουσία가 사용되었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축사와 신유의 ‘능력’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격’을 주신다.

아래는 ‘권위’ 또는 ‘권세’로 번역한 예들이다. 다행히 문맥이 뜻을 붙들고 있다.

//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마 21:23) //

//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

//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3) //

//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계 2:26) //

2.‘뒤나미스δύναμις’는 실제로 나타난/나타나는 힘이며, 그래서 어떤 상태나 위치를 변경시킬 수 있는 크고 작은 능력이다. 

그런 뜻으로 사용되지 않을 때에는 힘이나 능력을 실제로 소유하거나 발휘할 수 있는 존재나 인격을 가리킨다.

‘권능’으로 자주 번역되지만 다른 낱말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능력’이나 ‘힘’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영역은 power, might, strength, ability 등으로 옮기는데 복음서에서는 자주 miracle로 번역한다. 유의어로는 κράτος, ἰσχύς, ἐνέργεια 등이 있는데 다른 기회로 미룬다.

(본문1)//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13) //

이 ‘권세’는 애매한 번역이다. ‘능력’ 또는 ‘힘’으로 옮기는 것이 낫다.

 가이사가 갖고 있는 힘이 실제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이 갖고 계신 힘이 실제적이고 진짜 힘이라고 교회가 고백하는 것이 이 송영의 의미이다.

(본문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 //

이 본문의 ‘능력’은 뒤나미스δύναμις의 뜻을 잘 드러낸 번역이다. 뒤나미스는 실제로 작용하거나 작용할 수 있는 힘이다. 

사두개인이 믿든 믿지 않든 부활의 능력이 아버지께 있다. 아버지께 있는 부활의 능력이 실제적인 능력이므로 부활도 실재다.

(본문3)//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마 25:15) //

이 ‘재능’ 역시 뒤나미스δύναμις의 번역어이다. 대부분의 영역은 ability로 번역하였고 SLT는 power로 번역하였다. 주인이 종에게 달란트를 맡길 때는 그 달란트를 다룰 수 있는 ‘능력’따라 맡긴다.

(본문4)//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

이 ‘권능’은 증인이 될 수 있는 ‘자격/권위’가 아니라 증인이 되는 ‘힘’이다. 

제자가 될 자격/권위 – 엑수시아ἐξουσία – 는 주께로부터 받고 제자가 증인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은 성령으로부터 받는다. 성령께서 주시는 증인 능력은 실제적인 능력이다.

아래는 다소 다른 낱말이 사용된 경우들이다

//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 πύλη’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 

//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κατεξουσιάζω’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마 2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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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받고 물에서 나오실 때 하늘로부터 성령 임하심/한량없이 기름부으심은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의 개시의 신호탄이었듯이, 오순절날 제자들에게 성령의 임하심/기름 부으심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의 증인으로서 생명 사역 개시요, 곧 그리스도의 몸, 주님의 교회의 건축-확장-증대의 신호탄이 되었다===
[눅4: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마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행2:23...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임하다" 를 뜻하는 헬라어는 <에펠코마이ἔρχομαι>입니다   ..."오다, 나타나다"를 뜻하고 있습니다.  ... "위에"를 의미하는 <에피έπί>와 오다 함께 가다 들어 오다를 뜻하는 <엘코마이ἔρχομαι>가  합성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에펠코마이ἔρχομαι>가 두 번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서 오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간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요엘서에서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실 것이라는 언약이 사도행전에서 <에펠코마이ἔρχομαι>를 통해서 응답되었습니다
<에펠코마이ἔρχομαι>는 [아버지께서 JC이름으로 보내시는 성령님, 믿는이 안에 영원히 내주하시는 생명수 샘이요 생명수 강이신 분, 바로 그] 성령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것입니다.  
사도베드로가 깨달은 바는 누구든지 주님, 곧 전파되는 복음 말씀을 전심으로 받고, 참되게  주 예수를 믿고 자기 죄를 회개하고 JC를 그 자신의 구주와 하나님으로 영접하는 자마다 성령께서 자신을 부어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바로 그 자리에서!! ....성령의 임하심을 보고 고넬료와 그의 가족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음을 봅니다.(행10:44-48) 
... 성령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격적으로 받아 들일 때(모든 거리낌-어색함..속상함..생각나는 모든 아픔과 조와 악..이 모든 것을 JC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여 고백함으로써!!)  성령으로, 그분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뻐 하시는대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영적인 깊은 교제를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영혼들에게 함께 하시는 축복합니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십니다.  <나>같은 죄인을 찾아 주시고 만나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어 주시는 은혜입니다.  믿음으로 마음을 열고 사모하는 영혼에게 부어 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은혜가 놀라울 것입니다.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 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깊은 교제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지고지선의 영복-지복직관의 기쁨에 참여함을 참되게 깨닫고 기뻐하는 그 사람에게는 이미 주님의 보좌가 있는 삼층천이 ((그분의 풍성-부요-충만 안에서 허락하신 바, 전파되는 말씀, 곧 JC를 증거하는 말씀을 증인의 입에 넣어주심따라 즉각적인 확증함이신 성령님의 능력과 힘을, 그 부어주심-공급하심 위해!!)) 열려져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다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15.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25.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6.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믿는 사람이 모든 물건을 통용하다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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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2.---

===The Day of Pentecost

1 When the day of [a]Pentecost had come, they were all together in one place, 

2 and suddenly a sound came from heaven like a rushing violent wind, and it filled the whole house where they were sitting. 

3 There appeared to them tongues resembling fire, which were being distributed [among them], and they rested on each one of them [as each person received the Holy Spirit]. 

4 And they were all filled [that is, diffused throughout their being] with the Holy Spirit and began to speak in other [b]tongues (different languages), as the Spirit was giving them the ability to speak out [clearly and appropriately].

5 Now there were Jews living in Jerusalem, devout and God-fearing men from every nation under heaven. 

6 And when this sound was heard, a crowd gathered, and they were bewildered because each one was hearing those in the upper room speaking in his own language or dialect. 

7 They were completely astonished, saying, “Look! Are not all of these who are speaking Galileans? 

8 Then how is it that each of us hears in our own language or native dialect? 

9 [Among us there are] Parthians, Medes and Elamites, and people of Mesopotamia, Judea and Cappadocia, Pontus and [c]Asia [Minor], 

10 Phrygia and Pamphylia, Egypt and the districts of Libya around Cyrene, and the visitors from Rome, both Jews and proselytes (Gentile converts to Judaism), 

11 Cretans and Arabs—we all hear them speaking in our [native] tongues about the mighty works of God!” 

12 And they were beside themselves with amazement and were greatly perplexed, saying one to another, “What could this mean?” 

13 But others were laughing and joking and ridiculing them, saying, “They are full of sweet wine and are drunk!”

===Peter’s Sermon

14 But Peter, standing with the eleven, raised his voice and addressed them: “Men of Judea and all you who live in Jerusalem, let this be explained to you; listen closely and pay attention to what I have to say. 

15 These people are not drunk, as you assume, since it is [only] the third hour of the day (9:00 a.m.); 

16 but this is [the beginning of] what was spoken of through the prophet Joel:

17 ‘And it shall be in the last days,’ says God,  ‘That I will pour out My Spirit upon all mankind;  And your sons and your daughters shall prophesy,  And your young men shall see [divinely prompted] visions,  And your old men shall dream [divinely prompted] dreams;

18 Even on My bond-servants, both men and women,  I will in those days pour out My Spirit And they shall prophesy.

19 ‘And I will bring about wonders in the sky above  And signs (attesting miracles) on the earth below, Blood and fire and smoking vapor.

20 ‘The sun shall be turned into darkness And the moon into blood, Before the great and glorious day of the Lord comes.

21 ‘And it shall be that everyone who calls upon the name of the Lord [invoking, adoring, and worshiping the Lord Jesus] shall be saved (rescued spiritually).’

22 “Men of Israel, listen to these words: Jesus of Nazareth, a Man accredited and pointed out and attested to you by God with [the power to perform] miracles and wonders and signs which God worked through Him in your [very] midst, just as you yourselves know— 

23 this Man, when handed over [to the Roman authorities] according to the predetermined decision and foreknowledge of God, you nailed to a cross and put to death by the hands of lawless and godless men. 

24 But God raised Him up, releasing Him and bringing an end to the agony of death, since it was impossible for Him to be held in death’s power. 25 For David says of Him, ‘I saw the Lord constantly before me;  For He is at my right hand, so that I will not be shaken [from my state of security].

26 ‘Therefore my heart rejoiced and my tongue exulted exceedingly;  Moreover my flesh also will live in hope [that is, will encamp in anticipation of the resurrection];

27  ‘For You will not forsake me and abandon my soul to Hades (the realm of the dead),  Nor let Your Holy One undergo decay [after death].

28 ‘You have made known to me the ways of life;  You will fill me [infusing my soul] with joy with Your presence.’

29 “Brothers, I may confidently and freely say to you regarding the patriarch David that he both died and was buried, and his tomb is with us to this day. 

30 And so, being a prophet and knowing fully that God had sworn to him with an oath that He would seat one of his descendants on his throne, 

31 he foresaw and spoke [prophetically] of the resurrection of the Christ (the Messiah, the Anointed), that He was not abandoned [in death] to Hades (the realm of the dead), nor did His body undergo decay. 

32 God raised this Jesus [bodily from the dead], and of that [fact] we are all witnesses. 

33 Therefore having been exalted [d]to the right hand of God, and having received from the Father the promise of the Holy Spirit, He has poured out this [blessing] which you both see and hear. 

34 For David did not ascend into the heavens, yet he himself says, ‘The Lord [the Father] said to my [e]Lord [the Son], “Sit at My right hand,

35 Until I make Your enemies a [f]footstool for Your feet.”’

36 Therefore let all the house of Israel recognize beyond all doubt that God has made Him both Lord and Christ (Messiah, Anointed)—this Jesus whom you crucified.”

===The Ingathering

37 Now when they heard this, they were cut to the heart [with remorse and anxiety], and they said to Peter and the rest of the apostles, “Brothers, what are we to do?” 

38 And Peter said to them, “Repent [change your old way of thinking, turn from your sinful ways, accept and follow Jesus as the Messiah] and be baptized, each of you, in the name of Jesus Christ because of the forgiveness of your sins; and you will receive the gift of the Holy Spirit. 

39 For the promise [of the Holy Spirit] is for you and your children and for all who are far away [including the Gentiles], as many as the Lord our God calls to Himself.” 

40 And Peter solemnly testified and continued to admonish and urge them with many more words, saying, “[g]Be saved from this crooked and unjust generation!” 

41 So then, those who accepted his message were baptized; and on that day about [h]3,000 souls were added [to the body of believers]. 

42 They were continually and faithfully devoting themselves to the instruction of the apostles, and to fellowship, to [i]eating meals together and to prayers.

43 A sense of awe was felt by [j]everyone, and many wonders and signs (attesting miracles) were taking place through the apostles. 

44 And all those who had believed [in Jesus as Savior] [k]were together and had all things in common [considering their possessions to belong to the group as a whole]. 

45 And they began selling their property and possessions and were sharing the proceeds with all [the other believers], as anyone had need. 

46 Day after day they met in the temple [area] continuing with one mind, and breaking bread in various private homes. They were eating their meals together with joy and generous hearts, 

47 praising God continually, and having favor with all the people. And the Lord kept adding to their number daily those who were being saved.

===Footnotes

Acts 2:1 Pentecost (Feast of Weeks) was observed at the time of the grain harvest and the offering of the first fruits, and was one of the three great annual Jewish festivals, along with Passover and the Feast of Tabernacles (Booths). Just as Jesus’ sacrifice was the fulfillment of Passover, the coming of the Holy Spirit was the fulfillment of Pentecost.

Acts 2:4 Or languages, the Greek can have either meaning.

Acts 2:9 Modern Turkey.

Acts 2:33 Or by.

Acts 2:34 In Ps 110:1 Heb Adonai.

Acts 2:35 The earthly kingdoms will be subjugated at the inauguration of the kingdom of Christ.

Acts 2:40 Or Escape.

Acts 2:41 There were about 100,000 to 120,000 people in Jerusalem at this time, and even more at these festivals.

Acts 2:42 Lit the breaking of bread.

Acts 2:43 Lit every soul. 

Acts 2:44 One early ms does not contain were and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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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장 (개요)

(가장 가까운 시기에 이루어진 약속일지라도) 메시야에 대한 약속과 그의 오심 사이에는 여러 세대의 간격이 있다. 

그러나 성령에 대한 약속과 그의 오심 사이의 간격은 몇 날에 불과하였다. 

기다리는 그 동안에 사도들은 비록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파할 명령을 받았지만 마치 장벽에 부딪친 듯이 숨어 있으며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장(章)에서는 성령의 바람이 그들을 일깨우므로 즉시 나아가 전파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Ⅰ. 성령이 사도들에게 임함. 오순절에 이들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1-4).

Ⅱ. 사방에서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일어난 변론(5-13).

Ⅲ. 이때에 베드로가 그들에게 한 설교. 

그는 이 성령의 역사가 구약 약속의 성취였음을 보여 준다(14-21). 

이 사실들의 증거하는 바(성령이 역사하심)들은

 JC가 메시야되심을 증거해 주는 증표로써 이미 그의 부활로 인해 입증되었으며(22-32) 

또한 이 사실은 그가 하늘로 승천한 증거요 결과임을 보여 준다(33-36).

Ⅳ. 이 설교의 결과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으로 개종하여 교인의 수가 증가됨(37-41).

Ⅴ. 초대교인들의 뛰어난 경건과 구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 명백한 증거와 그들에게 주어진 능력(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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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임하시다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순절(1)(행 2:1-4)

이곳에서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임한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다.

Ⅰ. 이 일이 일어난 시기와 장소. 

이 문제는 사건의 확실성을 밝히기 위하여 특별히 명기되고 있다.

1. 그 때는 "오순절 날이 이르러서였다." 

이 날은 아빕월 16일 즉 유월절 다음 날로 요제(搖祭)로 단을 가져온 다음 날 곧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에서 "세어서 7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난 다음 날이었다(레 23:15). 

"이 날이 이미 이르렀다" 함은 전 날이 지나고 새 날이 이르렀음을 뜻하는 것이다.

(1) 성령께서는 큰 명절에 임하셨다. 

이 날이야말로 유다 각 지방에서 온 사람들과 또한 세계 각처에서 온 개종자들로 예루살렘은 가득 차게 되고 그러므로 이 일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곧 사방으로 퍼져 모든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어서 전에 유월절 명절 때와 같이 이 유대인의 명절로 복음 사업을 전하고 확장하는 일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2) 이 오순절 명절은 시내산에서의 율법 전수를 기념하기 위해 지켜졌던 것으로 이를 계기로 유대교가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라이트푸트 박사는 이 명절이 1447년째의 명절이라고 생각한다. 

때맞추어 성령이 불과 방언으로 오순절 명절에 임함으로 한 국가가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던 것이다.

(3) 이 오순절 명절은 바로 "일요일. 곧 주의 날, 기독교인의 안식일"이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일요일은 더욱 명예롭게 되었고 그 날을 기독교인의 안식일로써 더욱 공고하게 하였다. 

"이 날은 주께서 제정하신 날로써" 같은 일요일에 일어난 두 축복된 사건 즉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임재로써 교회에서 기념되며 큰 의의를 지니는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도 이 날을 "주의 날"로 격식을 갖추어 지킴을 정당화시켜 주며 이 날을 거룩하게 함으로 하나님에게 이 두 큰 축복에 대하여 특별히 찬양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나는 매 주일마다 이 두 사건은 우리의 기도와 찬양을 통해 기념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교회에서는 부활절과 성령 강림절을 맞아 1년에 한 번씩만 이 사건을 기념하고 있지 않는가. 

아니다! 우리는 깊은 열정을 갖고 이 날들을 기념해야 마땅할 것이다.

2. 그 때는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을 때였다." 

그 장소가 성전에서였는지 공중예배에 참석하던 곳에서였는지(눅 24:53) 그들이 주로 함께 있었던 다락방에서였든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예루살렘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곳이야말로 하나님이 선택한 곳이, 거기에 그의 이름을 두신 곳이요, 예언에 이르기를 주의 말씀이 여기서 모든 민족에게로 전파되리라 기록된 곳이기 때문이다(사 2:3). 

또한 이곳은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그들을 만나시며 축복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세상에 제일 큰 축복을 이곳에서 만난 무리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는 상상할 수 없는 치욕을 받으셨지만 하나님은 아직도 이 명예를 예루살렘이 누리게 하셨고 장소 때문에 실망하거나 어떤 장소를 편견을 가지고 생각하지 말 것을 가르치신다. 하나님은 각처에 남은 자를 두시며 예루살렘에도 남은 자를 두신다. 

이곳에서 제자들은 그리 넓지도 않은 오직 한 곳에 모여 있었다. 또한 그들은 모두 한마음이었다. 

그들이 주님과 함께 있을 때 얼마나 자주 그들은 "누가 위대한가 하는 문제로 다투었었던가!" 그러나 이제 이러한 모든 싸움은 종식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이 다투었다는 기사를 볼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나타나 그들을 향해 숨을 쉬셨을 때 이미 그들이 받았던 성령은 어느 정도, 이러한 경쟁이 자리잡고 있는 잘못을 정하게 되고 거룩한 사랑이 자리잡았던 것이다. 그들은 평상시보다 늦게까지 함께 더욱 기도에 힘썼다(1:14). 그리고 이 기도는 그들로 하여금 더욱 서로 사랑하게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은총을 베풀어 그들에게 성령의 선물을 준비하셨고 이 성령의 비둘기는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곳에 임하시지 않고 수면과 같이 잔잔한 곳에 임하신다. 

어떻게 우리는 성령께서 "높은 곳에서 임해 오심을 경험"할 수 있을까? 

한 마음이 되도록 하자. 제자들이 그러했듯이 비록 감정과 취미는 다르더라도 일치하여 서로 사랑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형제들이 연합하여 함께 모인 곳에 주님은 축복하시기 때문이다."

Ⅱ.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신 방법.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주 구름속에서 강림하신다. 첫계약을 맺으실 때도 그랬고 후에 성전에 임하실 때도 그러하였다. 

구름이 가리우는 것은 인간 통치의 어두움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구름에 가리워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얼마나 우리가 천상계에 대하여 어두운가 하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성령은 구름 속에서 강림하지는 않으셨다. 오히려 성령은 인간의 마음을 가리우는 구름을 흩으시고 세상에 빛을 주셨던 것이다.

1. 큰 사건에 대한 기대를 불러 일으킨 바람 같은 큰 소리.

(1) 그 소리는 여늬 바람처럼 점차 발생하지 않고 "갑자기" 강하게 임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빨리 임하였고 함께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까지 놀라게 했으며 일종의 종교적 활동속에서 일어났다.

(2) 그것은 "하늘로부터 들린 우레와 같은 소리였다"(계 6:1). 

하나님께서 "바람을 그 곳간에서 내시도다"(시 135:7). 또는 "바람을 그의 장중에 모았다" 기록되어 있다(잠 30:4). 

바로 그분에게서 이 소리는 "너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는 외치는 자의 소리와 같이 임하였다.

(3) 그것은 바람 소리였다. 

성령의 역사는 바람과 같은 것이다(요 3:8).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생명의 성령이 마른 뼈에 임하실 때 예언자는 "생기에게 대언하라"는 말씀을 듣게 된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겔 37:9)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임하실 때 바람 가운데 임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바람은 그로 하여금 "세미한 소리" 가운데서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하게 한 준비 과정이었다(왕상 19:11, 12)  "여호와의 길은 회리바람과 광풍에 있고"(나 1:3) 회리 바람 속에서 그는 욥에게 말씀하셨다.

(4) 그것은 "돌진하는 강한 바람이 온다." 

그것은 마치 그 앞의 모든 것을 위압하듯이 아주 강렬하였고 큰 소리와 동시에 놀라운 위력으로 임하였다. 

이것은 인간들의 마음에, 또한 세상에 미치는 하나님의 성령의 위력있는 작용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 온갖 망상을 몰아내게 되는 것이다."

(5) 그것은 그들의 방에만 충만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에 충만하였다." 

어떤 이들이 요나를 사로잡았던 바람이 그가 탄 배만 강습하였다고 생각하듯(욘 1:4), 동방박사의 별이 아기가 누운 집 위에서 멈추었던 것처럼, 이 현상은 특정 집에 한정하여 일어났지만 이 초자연적인 사건은 전 시내를 경악케 하였다. 

이 일을 눈으로 본 사람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물으려 하였다. 

집을 충만케 한 바람은 제자들에게 두려움을 주었고 그들로 하여금 존경받게 하였으며 성령을 받는 데 필요한 기틀을 마련케 하였다. 

이 성령에 대한 확신이 위로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 축복스러운 바람의 거친 일격은 영혼으로 하여금 부드럽고 상냥한 미풍 속에서 임할 성령을 기다리도록 준비시키고 있다.

2. 그들이 받을 선물을 보여 주는 표적. 

그들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을 보았으며 성령을 상징하는 이 불이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임하였던 것처럼 그들 각자에게 임하였다. 

^^하몬드 박사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들 모두를 비치는 불꽃 같은 것이 나타났다. 다음 그것은 흩어져 혀의 형태를 이루고 각 사람 머리 위에 머물렀고 그 후 방언이 시작된 것이다." 

초의 불꽃을 보면 혀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자연주의자들은 유성(流星)을 가리켜 맹열한 불꽃이 아닌 부드러운 불꽃이라고 부른다. 

여기 나오는 불꽃이 이러한 형태의 것이었다.

(1) 제자들 자신의 신앙을 확고히 하고 다른 사람을 확신케 한 외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표적이 있었다. 

이와 같이 구약의 예언자들도 표적으로 그들의 첫 사명을 확고히 하였고 그러므로 모든 이스라엘 사람은 그들이 예언자로 세워졌음을 알 수 있었다.

(2) 주어진 표적은 불이었다. 

이는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한 바 "그가 불과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리라" 하심의 성취였다. 즉 불로 임하는 성령이었다. 

그들은 오순절 명절을 맞이하여 시내산에서 율법을 전수받은 일을 기념하고 있었다. 

이 율법은 화염 속에서 전수되었으므로 불 같은 말씀(law)이라 불렀고 복음도 이와 같은 것이다.

에스겔은 "타오르는 숯불 속에서 그의 사명을 확고히 했고"(겔 1:13) 이사야도 그의 입술에 닿은 "숯불"로 그의 사명을 새롭게 하였다(사 6:7). 

불 같은 성령은 마음을 녹이며 불순물을 분리하여 태우며 심령에 경건과 열렬한 사랑을 일깨워 준다. 

이렇게 하여 영적 희생 제물은 제단 불에서와 같이 봉헌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지상에 보내기 위해 오신 것은 바로 이 불이었다(눅 12:40).

(3) 이 불은 갈라진 혀의 형태로 나타났다. 

성령의 역사는 다양하다. 방언도 성령의 역사의 하나로 성령의 은사를 들어내는 첫 열매로 발탁되었다. 이 표적이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① 이 불꽃은 혀의 모습이었다. 

이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고 이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는 세상에 그의 뜻을 전하시고, 성령을 제자들에게 주시므로 그들에게 지식을 부여할 뿐 아니라 그들이 아는 것을 세상에 공포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하신다는 뜻이다.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것이 성령의 경륜인 것이다."

② 또한 혀 같은 불꽃이 여러 가지로 갈라졌다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천체의 빛을 경륜을 따라 땅 위에 나누어 주셨다고 말씀하신 것처럼(신 4:19) 모든 민족들에게 골고루 그의 은혜를 알게 하신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혀 같은 불꽃이 갈라졌으나 그들은 계속 한 마음으로 뭉쳐있었다. 

표현은 가지각색이라도 참된 사람은 일치를 이루기 때문이다. 

^^라이트푸트 박사는 바벨에서 언어의 분산은 불법자에 대한 추방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오직 하나님만이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던 언어를 망각하였을 때 그들은 완전히 하나님과 신앙에 대한 지식을 잃어버리고 우상 숭배로 전락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약 이 천년 후에 이르러서 다시 언어를 분산하시므로 모든 나라들이 하나님을 알도록 되기를 다시 바라시는 하나님이다.

(4) 이 불꽃이 얼마 동안 그들에게 임하였는데 이는 성령의 상주를 의미한다. 

구약의 예언적 은사는 간헐적으로 때때로 수여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표적은 사라진다해도 늘 성령의 은사를 소유하였다. 

이 불꽃이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으로 옮겨갔는지 사람 수효대로 불꽃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때가 이미 낮이었으므로 이 불꽃들은 낮에 보일 만큼 강하고 밝은 불꽃이었다는 사실이다.

Ⅲ. 은혜 체험의 직접적인 결과.

1. "그들은 전"보다 더욱 풍성하고 힘있게 "성령으로 충만하였다." 

그들은 성령의 은사로 충만하였으며 전보다 더욱 성령의 성별하시는 능력 아래서 이 세상과는 별개로 거룩하고 완전하며 영적인 사람들이 되었고 저 세상과 더욱 가까워졌다. 

그들은 무엇보다 성령의 위로로 충만하였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늘 나라에 대한 소망 가운데서 더욱 더 기뻐하였으며 이 소망으로 인해 그들의 슬픔과 두려움은 온전히 사라졌다. 

또한 이곳에서 명백한 증거를 통하여 특별히 강조하는 사실은 그들이 성령의 은사로 충만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복음을 확장시키기 위하여 기적적인 능력을 입게 되었고 120명의 제자가 동시에 같은 "성령에 충만하였다." 

즉 70명의 제자 또한 사도적 인물들이었고 같은 사역에 동참하였으며 나머지 모든 사람도 복음을 전파하였던 것이다. 

기록된 바(엡 4:8, 11) "그리스도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이 말씀은 행 2:33 을 뜻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는데 사도들뿐 아니라(12사도) 또한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에게 (70명의 제자와 순회 설교자들) 그리고 후에 생기게 된 직책으로 한 교회에만 머무는 "목사"와 "교사"들에게도 주시었다. 

여기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함은 함께 있던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이었다(1절; 1:14, 15).

2. 그들은 당시의 상용어 아랍어 외에 다른 나라 말을 배운 적은 없었지만 "여러 나라 말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일상어를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그들을 이끄시는 대로 또는 "말하게 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그의 성호를 찬양하였다. 

그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경귀) 즉 기억해 둘 만한 본질적이고도 무게있는 말을 하였다. 

그들은(바벨에서 흩어졌던 여러 부족들처럼) 한 사람이 한 개의 언어만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또한 그들은 바벨탑을 세운 사람들과는 달리(창 11:7) 자신의 경우만을 이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여기 저기서 아무 언어나 마구 구사하거나 의미없는 말을 중얼거린 것이 아니라 마치 모국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유효적절하게 유창하게 말하였다. 

왜냐하면 기적으로 생기는 것은 무엇이나 최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전 생각이나 사고를 통해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말하도록 하심에 따라" 말하였고 성령은 그들에게 여러 언어를 주셨을 뿐 아니라 무엇을 말할 것도 알려 주셨다.

(1) 이때의 기적은 굉장한 것이었다(이 기적도 대부분의 복음서의 기적이 그러한 것처럼). 마음에 일어난 기적이었고 마음 안에서 말씀은 세워졌다. 

그들은 자기들 언어뿐 아니라 이 일을 촉진케 하였을지도 모르는 어떤 외국어도 배우지 않았다. 아니 나타난대로 뿐이라면 이런 언어를 듣지도 못하였고 생각도 못하였었다. 

그들은 학자나 여행가도 아니였고 책이나 회화를 통해 다른 나라 말을 배울 기회조차 없었다. 

참으로 베드로까지는 자신의 사용하던 말로 앞에 나와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연설가도 아니었고 특별히 이해가 남달리 빠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말을 더듬는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하게 된다"(사 32:4). 

모세가 "나는 말이 둔한 자"라고 불평하였을 때 하나님은 "내가 너의 입을 지키며 아론이 너의 대언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하나님은 그의 대언자에게 더 큰 힘을 부여하셨고 인간의 입술을 새롭게 지으셨다.

(2) 이 기적은 참된 성경적 봉사를 위해 유효적절하고 꼭 필요한 기적이었다. 

제자들이 사용한 언어는 히브리 말의 방언인 시리아어(갈대아어, 아람어)였다. 

그들은 구약을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에 쓰여진 본래의 히브리어를, 또한 신약을 이해하기 위해서 신약에 쓰여진 본래의 희랍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했다. 

즉, 방언의 은사가 꼭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이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을" 사명이 부여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곤란한 문제가 생긴다. 즉 어떻게 그들이 모든 민족들이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여러 나라 말을 구사할 수 있었느냐는 문제다. 

사람들은 생활하면서 자기들의 언어를 배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각 민족에게 권위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음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각 각 듣는 사람들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재능을 부여하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이보다 위대한 일을 하리라"한 신약 속의 성취인 것처럼 보여진다(요 14:12).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때 이 기적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치유의 기적보다 더 위대한 기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스도 자신은 다른 나라 말을 하시지 않았고 그가 제자들과 함께 계실 동안은 제자들이 말할 수 있게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 일은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첫 결과였다. 

틸롯손(Tillotson)대 감독은 이렇게 생각한다. 즉 만일 불신자가 기독교로 개종하는 일이 정직한 마음을 지닌 자들에 의해 진지하고도 과감하게 수립되려면 지금도 하나님께서 최초로 복음이 전파되던 때 역사하셨던 것처럼 모든 적절한 도우심으로 이러한 계획을 비범하게 도우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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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오순절(2)(행 2:5-13)

본문에서는 제자들에게 갑자기 부여된 이 특별한 은사가 발생된 경위를 공개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Ⅰ. 이제 예루살렘에 있었던 거대한 무리가 모였는데 이는 평소의 오순절 명절의 집회를 훨씬 상회하였던 것 같다. 

"그 때에 경건한 유다인이 예루살렘에 우거하였는데" 

이들은 신앙에 관심이 있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으며 그들 중 얼마는 "개정한 의인들로서" 할례를 받고 유대교인으로 입적하였고 다른 일부는 마음으로만 개종한 자들로서 우상을 버리고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자신을 드린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당시에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의 얼마는 흩어진 유대인이던 개종한 사람이며, "천하 각국으로부터"온 사람들이었다. 

천하 각국이란 표현은 과장된 표현으로 당시 알려진 부분적인 세계에서 온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런던이나 또는 당시의 두로와 같은 곳이 각 곳에서 온 무역상인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듯이 당시의 예루살렘은 종교적인 목적으로 각 처에서 사람들이 모였다.

1. 그러면 이 나그네들이 떠나온 나라들은 어떤 나라들인가(9-11절). 

우선은 동쪽 지방에서 온 사람들로 "바대인, 메대인, 엘람인" 그리고 셈의 후예인 "메소포타미아 거민들"이었다. 

다음에 유다도 기록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유대 지방의 언어가 제자들이 말하던 언어와 같은 것이지만 전에 지자들은 북방 사투리로 말하였으나 ("너희가 갈릴리인이 아니냐, 너희 언어가 이를 입증하도다.") 그러나 이제 제자들이 말한 것은 유다 본 지방 사람들과 같은 표준어였다. 

다음이 가바도기아 본토 그리고 본문에서는 "아시아"라고 칭하여지고 있다. 프로폰티스에서 온 거민들이었다. 이 지방들은 베드로가 편지할 때 흩어진 나그네들이라고 쓴 사람들이 거하는 지방이었다(벧전 1:1). 

다음이 서쪽에 있는 야벳의 후예들이 사는 "브리기아 밤빌리아"의 주민들이었고 또한 "로마에서 온 나그네"들도 있었다. 

다음에는 서쪽으로 애굽과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아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그레데 섬에서 온 사람, 아라비아 사막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본래 유대인으로 이 지방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거나 또는 그 지방 토착민으로서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들이었다. 

^^휘트비 박사(Dr. Whitby)는 당시의 필로나 조세푸스 같은 유대 학자들의 말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 유대 학자들은 유대인을 가리켜 "세계 도처에 흩어져 살며 세계 어느 국민이건 그 중에 유대인이 살지않는 곳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2. 그러면 당시에 이 모든 유대인들과 개종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이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는가? 

그들이 예루살렘에 우거하였다는 말을 볼 때 그들이 오순절 명절을 맞아 일시 방문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들은 이곳에 거주를 정하고 지냈는데 그 이유는 당시에 메시야가 나타나리라는 일반의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니엘이 예언한 마지막 주(역주:세계 역사를 10주로 나누어 7주로 인간의 역사는 끝나고 8주째 메시야 통치가 시작된다고 봄. 당시 이 마지막 7주가 끝났다는 통속적 종말론)가 이제 막 끝났고 유다의 통치권이 상실되었으므로 일반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즉시 나타나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눅 19:11). 

이런 이유로 가장 열성있고 경건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우거하며 그들이 메시야 왕국에 제일 먼저 참여하여 그 나라의 축복을 나누어 받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Ⅱ. 제자들이 각국에서 온 나그네들의 말로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의 그들의 놀라움. 

제자들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여러 지방의 사람들이 모여들기 전에 이미 여러 언어를 말하였던 것 같다. 

이 사실이 널리 알려졌으므로 많은 무리들 특히 여러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든 것이고 이들이야말로 예루살렘 주민들보다 더 놀라운 일에 깊은 감동을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1. 그들은 말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본국어밖에 모르는 갈릴리 사람들임을 알았다(7절). 

그들은 그들에게서 무슨 학식이나 예의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천한 인간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약하고 어리석은 것을 택하시어 현명하고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 그리스도도 갈릴리인으로 취급받았고 그의 제자들이야말로 무식하고 무지한 갈릴리인들이었던 것이다.

2. 그들은 제자들이 조리있게 그들의 언어로 말하고(이들 나그네들이야 말로 이 일에 가장 적절한 판단자들이었다.) 본국 사람들이라도 그들보다 더 이상 정확하고 유창하게 말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은 어찜이뇨"(3절). 즉 "우리가 그들 중 몇 명이 우리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도다"라는 말이다. 

바대인은 그들 중 하나가 바대말로 말하는 것을 들었고 메대인은 메대어로 말하는 것을 들었고 그 밖의 다른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다(11절).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그들 자신의 언어는 예루살렘에서 통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아마도 멸시까지 당한 것 같다. 그러므로 낯선 땅에 간 나그네에게는 당연한 일로써 그들이 자기 나라 말을 듣는 것이 놀랍고도 기쁜 사실이었다.

(1) 그들이 들은 사도들의 강론은 "놀라운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였다(하나님의 큰일). 

사도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리고 그로 말미암는 구원과 은총의 복음에 대하여 말한 것 같다. 

그리고 이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큰 일이었고 우리의 눈에 기이한 일이었다."

(2) 그들은 이들이 이 위대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 일들에 관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을 들었다. 

이들은 "듣는 사람이 사용하는 말을 따라서" 또는 그들이 요구하는 언어로써 거침없이 말하였다.

 물론 이들 나그네들은 예루살렘에 여러 번 왕래하였으므로 상당히 유대어를 습득하였고 그러므로 제자들이 유대어로 말한다 해도 그 뜻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방언을 쓴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이 사건은 상당히 기이한 일이었고 그러므로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방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기 때문이다(고전 14:22).

② 이 사건은 또한 이방인에 대한 명백한 호의를 표시하는 것으로 이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예배가 더 이상 유대인에게 제한되지 않으며 지방적 방벽은 무너졌다는 표시로 모인 사람들의 호감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사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업적에 대한 거룩한 말씀은 "각 나라 말로" 보존되어야 하고 읽혀져야 하며 본국어로 예배가 집행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명백히 가르쳐 주고 있다.

3. 그들은 놀랐고 그 일을 기이한 사건으로 여겼다(12절). 

"그들이 다 놀랐다"함은 맑은 정신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들은 이 일의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당혹감을 느꼈고 또한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 왕국 실현의 징조일까 의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 묻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즉 이 어쩐 일이냐. 확실히 이 사건은 보통 사건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이 사마들은 하늘에서 온 사자로 여겨졌고 그러므로 가시덤불 곁에 섰던 모세처럼 그들은 "옆에 서서 이 기이한 광경을 바라보았다."

Ⅲ. 유다와 예루살렘 본토 사람들의 조롱. 아들은 아마도 늘 성령을 거스리던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저들이 새 술 또는 달콤한 술에 취하였다"고 비웃었다. 그들은 명절을 맞아 너무 많이 마셨다고 그들은 말했다(13절). 

물론 이를 조롱한 사람들은 그들이 만취하였으므로 배운 적도 없는 언어로 말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실상 본토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들이 말한 말이 참으로 다른 민족의 말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고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어리석은 자들이나 주정뱅이들이 읊조리는 것 같은 의미없는 넋두리로 여겼다. 

그들은 전에 그리스도의 기적 속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를 믿지 않고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엉뚱하게 해석하였다(마 9:34). 

마찬가지로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 속에 역사하는 성령의 음성을 믿지 못하고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고 돌려버린다. 

그들이 세상의 주인이신 주님을 술주정군이라 불렀다면 그이 청직이인 제자들을 주정군이라 칭한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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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15.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25.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6.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예루살렘에서 행한 베드로의 설교(1)(행 2:14-36)

우리는 베드로가 그 자리에서 직접 행한 설교인 본문말씀에서 성령의 첫 열매를 보게 된다. 

그는 낯선 말로써 이민족(異民族)을 대상으로 설교하지 않고(우리는 그가 놀라면서 이 "어쩐 일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유대인들에게와 조롱을 하는 자들에게 당시 통용되던 언어로 설교하였다. 

그는 그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 후(15절) "유대인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설교를 시작한다(14절). 

한편 다른 제자들은 계속해서 각 나라 말로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는(그를 주변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하여 말하였으리라는 것은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다. 

하루에 "삼천 명"이나 회개하고 교인 수가 급증한 것은 베드로 혼자 설교해서 얻어진 결과가 아니라 120명의 제자 모두의 노력의 결과였다. 

그러나 오직 베드로의 설교만 기재되어 있고 이 설교는 그가 철저히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이 되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겁을 집어먹고 그리스도를 부정하였던 자가 이제는 용감하게 그를 고백하고 있다.

Ⅰ. 그의 서언. 

이 서언을 통하여 그는 청중들이 귀를 기울여 주기를 간청한다. 베드로와 "열 한 사도"는 앞으로 그들이 무엇을 전할 것인가를 토의하여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베드로는 일어서서" 자기가 취하지 않았음을 입증하므로 얘기를 시작하였으며 열한 사도도 그들 차례가 되자 토의한 내용과 같은 취지의 말씀을 전하였다. 

큰 권위를 가지고 열 두 사도들은 서서 비웃는 유대인들을 향해 외쳤고 모욕을 일삼으며 반박하는 무리와 마주쳤다. 

그러나 아무런 편견이 없는 다른 나라에게 온 개종자들에게는 70명의 제자가 그들의 나라 말로 전하도록 맡겨졌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그리스도의 사역자들 가운데도 능력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그들을 검과 창으로 핍박하려는 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불리움을 받았고 이보다 못한 재능의 소유자들조차도 뒤로 물러나서 포도원지기나 하인이 되는 것으로 체념하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에 채택된 것이다. 

이제 베드로는 자기가 전하는 것에 대해 확신과 열정을 가지고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그는 "유대지방에 사는 사람들" ‘안드레스 이유다이오이’(2:14) - 즉 유대인들만 대상으로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풀이될 수 있다. 

"너희들 특히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전에는 너희가 알지 못하여 예수를 죽이는 일에 참여하였으나 이제는 너희들이 알아야 할 시기가 이르렀으니 이 일을 너희들로 알게 하리라. 또한 너희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멀리하게 한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아니라 너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 이제 나와 스승은 돌아가시고 너희들이 경솔히 여기던 그이 말씀은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되었도다. 그러나 그가 이제 우리로 하여금 너희들에게 말하게 하시니 우리의 말을 들으라"란 뜻이다.

Ⅱ. 그들의 모욕적인 중상에 대한 그의 답변(15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제 방언으로 전하고 있는 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지각있게 전하고 있으며 그들이 무엇을 말할 것인지 잘 알며 그들이 전함에 따라서 강론을 통해 하나님의 큰 일을 알게 하려는 것이라. 때가 제 삼시니 (우리의 시간으로 아침 아홉시) 너희들 생각처럼 취한 것이 아니라"라는 말이다. 

안식일이나 뜻깊은 명절에는 제 삼시 이전에 유대인들은 먹거나 마시지 아니하였다. 

일반적으로 "취하는 자는 밤에 취하고" 아침에는 맑은 정신이었다. 

아침에 술을 드는 자는 참으로 주정뱅이로서 "깨자마자 즉시 술을 가하는" 지들은 것이다(잠 23:35).

Ⅲ. 놀라운 성령의 역사에 대한 설명. 

이 말씀은 그들로 깨우쳐 그리스도의 신앙을 갖게 하기 위하여 또한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기 위하여 전해진 것이다. 

그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 즉 이 성령의 역사는 성경의 응함이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하심의 결과임을 말해 주고 있고 또한 이 두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1. 이 성령의 역사는 메시야 왕국에 대한 구약 예언의 성취요 따라서 그 나라가 임박하였다는 증거이며 또한 다른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것이다. 

그는 예언자 요엘의 예언을 상세히 다룬다(요엘 2:28). 

"베드로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말하였지만" 성서를 무시하거나 자신을 성서 위에 위치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오히려 그는 강론하며 많은 구약 성서를 인용하였고, 성서에 호소하고, 성서를 통해, 그가 말하려 하는 것을 입증하고자 하였다. 

신학이 결코 성서 위에 있을 수 없으며 또한 성령이 성서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성령은 성서 이해를 돕고 성서를 입증해 준다.

(1) 베드로의 인용문(17-21절). 

"본문은 마지막 날" 즉 복음의 시대에 대하여 말해 준다. 

복음의 시대를 "마지막 날"이라 칭하는 것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사람들 가운데 임하였기 때문이요, 또한 이 복음은 하나님의 마지막 은총의 임재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것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다만 이 은총이 끝날때까지 계속되기만을 바라면 되는 것이다. 

또한 "마지막 날에"라 함은 구약 시대의 예언이 끝난 한참 후를 말하기도 하며 또는 20절에 말씀된 대로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임한 백성들의 마지막 날이요, 유대 나라의 멸망 전 날을 뜻하기도 한다. 

즉 베드로의 의도는 이러한 것이다. "그 날은 예언되고 약속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너희는 기다려야 했다. 너희는 이 날이 임함을 두려워 말며 그 날을 대망하며 영접하라. 그 날을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지 말라"는 뜻이다. 

사도 베드로는 전문(全文)을 인용하고 있는데 성서에 의존하는 일은 좋은 일이다. 인용문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예언되고 있다.

① 전에 없던 성령의 은사가 하늘로부터 풍성하고 광범위하게 임하리라는 것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였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주의 선한 신을 주사 저희를 가르치신다"(느 9:20)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 유대인 뿐 아니라 "내 영으로 모든 육체" 즉 이방인에게까지 부어 주실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11장 17절에 나타난 대로 아직 이 말씀의 뜻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였다. 

"모든 육체 위에"라는 말씀은 또는 인간의 여러 계층을 뜻한다고 볼 수도 있다. 

유대 학자들은 이 말씀에 대해 가르쳤던 바는 성령이 이스라엘 자손 중 현자나 부자에게만 임한다는 뜻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이 규정한 제도에 구속받지 않는다는 뜻으로 가르쳤었다.

② 그들 가운데 임하는 영(靈)은 예언의 영일 것이라 한다. 

이 영으로 인해 그들은 장차 올 일을 예언할 수 있으며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다." 

이 능력은 성(性)의 구별없이 주어질 것이다. "너희 아들"뿐 아니라 "딸들도 예언할 것이다." 

또한 연령의 구분없이 주어진다.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이렇게 전해진 신의 계시는 교회에 전달된다. 또한 신분의 차이도 없다. 즉 "남종과 여종이 성령을 받고 예언할 것이다"(18절). 

또는 남종과 여종이란 말은 하나님이 자기의 남종. 여종이라고 남녀를 가리킨 일반적인 말도 된다. 

구약에서 예언자 시대가 시작되기 전에 "예언자들의 학교"가 있었고 그 전에는 "예언의 영"이 다스리는 직에 종사하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에게 임하였었다. 

그러나 이제 메시야의 왕국은 순전히 영적인 것으로 예언자의 학교에서 육성되지 않은 자들을 포함하여 낮고 천한 사람들에게도 부어질 것이다.

"너희 딸과 여종들"(17, 18절)이란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1장 14절에 기록된 "여인"들을 기억하게 되는데 이들은 남자들과 같이 특별한 성령의 은사를 받았던 것이다. 

보라, 복음 전도자인 빌립은 "예언하는 네 명의 딸"이 있었고(22:9) 고린도 교회 여인들에게 예언과 방언의 은사가 넘침을 보게 된 바울은 공적으로 여인으로서 모든 일에 있어서 신중함 없이 이러한 은사를 [함부로] 방만하게 표현하는 것을 경계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고전 14:26, 34)

③ 그들이 예언한 가장 중요한 것은 심판이 유대 민족에 임한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눅 19:41) 그가 골고다로 가실 때(눅 23:29) 이 심판에 대한 예언을 그리스도 자신도 중요하게 다루셨다(마 24 :). 

이 심판은 입증된 바와 같이 복음을 멸시하고 반대하는 자들을 처형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임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은총의 능력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놀라운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그의 진노의 병에서 쏟아지는 진노 아래 넘어지고 쓰러질 것이며, 굴복하지 않는 자들은 꺾일 것이다.

첫째, 그리스도 사후 40년만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파멸이 여기서는 "주의 영화롭고 큰 날"이라고 불리워진다. 

그 이유는 이 때야말로 모세의 경세가 끝나는 최종 시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레위의 제사장직과 형식적인 율법은 영원히 폐기되었다. 

이 같은 황폐가 이전에도 이후에도 어느 곳에서고 있을 일이 없었다. 이 날은 "주의 날"이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사역자를 박해한 백성에게 그가 복수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 해(年)는 또한 "보상의 해"이다.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모든 성자와 순교자들의 피에 대해서 보상하는 해인 것이다(마 23:35). 

그것은 작은 심판의 날이요 "영화로운 날"이었다. 

요엘서에서 이 날은 "무서운 날"이라 칭했다. 이 때는 지상의 인간들의 날이기 때문에 "무서운 날"이었으나 여기서 ‘에피파네’(2:20, 70인역) "영화롭고 빛나는 날"이라 함은 이 날이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 날은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가 나타나시는 주현절이었다(마 24:30). 

유대인의 멸망은 그들이 증오하고 박해하였던 기독교인의 해방을 뜻하며 그러므로 당시의 예언자들은 고통받는 기독교인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그 날에 대하여 이르기를 "주께서 가까우셨으니, 주의 재림이 가까웠으니, 심판이 문 밖에 이르렀으니"(약 5:8, 9) 등으로 묘사되고 있다.

둘째, 무서운 파멸의 전조가 예고되고 있다.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조세푸스는 그의 저서 유대 전사에서 전쟁 앞서 일어났던 경이로운 기사들과 무서운 천둥과 번개와 지진에 대하여 전해 주고 있다. 

타는 뜻한 혜성이 일년간이나 도시 위에서 불타고있어 화용검이 시가지를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며 밝은 빛이 마치 대낮처럼 한밤중에 성전과 제단 위에서 비치었다고 한다. 

라이트 푸트(Dr. Lightfoot)박사는 이 귀절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다. 즉 "하나님의 아들의 피"와 본문에 나타난 성령의 불과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에 나타난 구름과 또 그리스도께서 수난당하실 때 "해가 변하고 달이 피같이 됨은" 불신자들에게 그들에게 임할 심판에 대해 준비하도록 주어진 경고였다고 본다. 

또한 이 전조들은 종국적인 파멸을 초래케 한 이전의 여러 심판에 적용될 수도 있다. 

19절 하반절의 피는 유다와 이웃 국가들 즉 사마리아인과 시리아인과 희랍인과의 전쟁에서 강 같이 흐른 피를 지적하는 것이요, 또한 끊임없는 내란과 난동으로 무수한 피가 흘렀던 것이다. 나가는 자에게도 들어오는 자에게도 평안은 없었다. 

또한 여기서 예언된 "불과 연기"는 문자 그대로 그들의 도시와 마을과 회당과 결국은 성전까지 불타게 됨을 뜻하였다. 

마찬가지로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된다"는 말은 그들의 국가와 문화와 종교의 붕괴 즉 모든 빛의 괴멸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셋째, 주의 백성은 특별히 보호될 것이 약속되고 있다(21절). 

"누구든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되며"(고전 1:2 에서 이 말씀은 참 기독교인에 대한 묘사로 사용된다) 영원한 구원의 징표가 될 심판을 피하게 될 것이다. 

갈대아인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할 때 "주의 진노의 날"에 보호함을 받은 남은 자가 있었으며 로마인의 공격으로 인한 예루살렘 파괴 때에도 한 명의 기독교인도 죽지 않았다. 순전한 경건으로 자신을 구별한 사람들은 특별한 보호를 받기 위해 구별될 것이다. 

구원받게 될 남은 자는 다음과 같은 사람임을 주목하자. 그들은 기도하는 사람이다. 

즉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요" 이 말은 자신의 공로와 의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요 온전히 하나님의 자비로움으로 구원받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이 하나님의 자비는 기도에 의해 간구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들의 강한 성은 그들이 부르는 주의 이름"인 것이다.

(2) 이 예언을 당시 일어난 사건과 연결지음(16절).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나" 이 사건은 바로 이 예언의 완벽한 성취라는 것이다.

이 사건이야말로 성령이 모든 육체에 임하리라는 예언의 성취요 더 이상 다른 어떤 메시야를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메시야는 하늘에 지금도 계시며 땅 위의 그의 교회를 다스리시고 중재하시며 따라서 약속에 의해 주어진 변호자이며 위로자이신 은혜의 성령은 같은 약속에 따라, 끝날 때까지 계속 지상의 교회에 계시며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해서, 또 교인 하나 하나를 위해서, 평범한 수단으로, 또는 특별한 섭리로, 성서와 사역자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이다.

2. 성령의 임재는 그리스도의 선물로써 그의 부활과 승천의 결과요 그 증거이다. 

베드로는 처음 설교를 시작할 때 성령의 은사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전하였다. 그런데 이제 본문에서 그는 다른 서두(序頭)를 꺼낸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22절). 너희가 말씀을 들을 수 있음은 그의 자비하심 때문이요, 그러므로 말씀을 듣는 것은 너희들의 의무라"라고 시작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은 칭송할 만한 말씀이었던 것이다.

(1) 그리스도의 생애를 요약하고 있다. 

베드로는 주님을 당시 잘 알려진 명칭인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다. 

그는 "너희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하여 증거한 분"으로 (이 사실만으로도 그에 대한 비난은 있을 수 없는데) 부당하게 인간들에게 비난과 정죄를 당하셨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서 증거하신 분임에는 틀림 없는 것이라 한다. 

하나님은 그에게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으로 그의 가르침의 참됨을 입증해 주셨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 구별된 사람이었다."  

하몬드 박사(Dr. Hammond)는 본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분은 너희들 가운데 뛰어나신 분이니 그에 관한 나의 말을 들으라. 이분은 너희들 가운데 보냄을 받아 너희들의 나라에 영광된 빛이 되셨나니 바로 너희들이 어떻게 그가 권능과 기사와 표적과 초월적인 역사로 유명해지셨는지 증인이라. 이 모든 행적은 하나님이 그를 통해 하신 일로써 이 분이 받은 신의 능력으로 행하였고 이 행적에 늘 하나님은 함께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아무도 이러한 일을 행할 수 없느니라." 

그러면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행하신 기적에 대하여 무엇을 강조하는지 알아 보자.

① 그들도 그리스도의 기사와 이적을 부인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은 바로 너희들이 아는 대로 너희들 가운데서 즉 여러분의 마을과 도시와 모인 장소에서 행하여진 것이라. 너희들이 그의 기적의 목격자가 아니요? 그 일에 반박할 만한 증거가 있으면 제출해 보라."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행적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것으로 제시한다.

② 그리스도의 능력있는 행사로 얻어지는 결론은 반박의 여지가 없는 것임을 말해 준다. 

논리정연한 이론은 증거물처럼 강한 호소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말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기적을 행했고 하나님이 확실히 그를 증거하셨다면 그리스도가 자신에 대하여 선포하신 대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의 구세주인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의 하나님은 결코 거짓으로 약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2) 그의 죽음과 고통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불과 수주 전에 일어난 것으로 그들이 증인이었다. 또한 이 일은 그 자체로 가장 큰 기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증거한 분이 스스로를 포기하신 것처럼 여겨졌고 또한 사람들 가운데서 증거되셨음에도 그들은 그리스도를 포기하였던 것이다. 

23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고통의 신비를 설명해 준다.

① 그의 죽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그리고 이 일은 놀라운 은사요 지혜로운 행위이다. "그는 그를 죽음에 넘기우셨을 뿐 아니라" 포기하시고 인간에게 주셨다. 

이 사실은 로마서 8장 32절에서 설명되고 있다. "그는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 아들을 내어 주셨으니."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이 증거하신 자로 이 사실을 반박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그의 지혜에 의해서 거룩한 목적을 위해 그는 내어 준바 되었기 때문이다. 이 거룩한 목적에 그리스도 자신이 참여하시어 그들로 이 목적으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공의가 충족되어 죄인이 구원받으며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는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가 고통받으시고 죽으심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되어졌을 뿐 아니라 변경할 수 없는 영원한 뜻으로써의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그리스도의 결심에 이한" 것이었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화해를 이룩하신 것이다.

"아버지여 당신의 뜻대로 되어지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소서." 

즉 하나님의 목적 그것을 성취케 하려는 것이 고통과 죽음이 뜻하는 내용이란 말이다.

② 그의 죽음은 인간들이 저지른 일이었다. 

이 행위는 그들의 엄청난 죄와 어리석음의 소치였다. 하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이 입증된 분을 박해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스려 싸우는 것과 같았다. 

또한 지상에서 가장 축복된 자를 박해하는 것은 그들이 받을 자비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만일 그들의 행위가 그들의 도덕적인 타락에서 비롯된 자발적인 행위였다면 즉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이 일을 계획하시지도 않고 이 일을 통해 어떤 이익을 취하려 하신 것도 아니라면 그들의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너희의 손은 악하여 그것으로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것이다." 

아마도 이곳에 있는 자들 가운데는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못박으소서." 외친 사람도 있고 살인에 협조하고 선동한 자도 있다는 것을 베드로는 잘 알았다. 이 일은 공회의 투표로 또한 많은 무리의 동조하는 외침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민족적인 행위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즉 다수에 의하여 공개적으로 행하여진 일의 책임은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는 말은 틀림 없는 사실인 것이다. 

베드로는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도 그들이 방문한 나라의 일부로 취급함으로써 더욱 효과적으로 그들에게 믿음과 회개를 불러 일으키려 했음에 틀림 없다. 이것이야말로 죄악에서 구분되고 죄악을 막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3) 부활의 성취를 증거해 준다. 

그의 부활은 죽음의 치욕을 말끔히 일소하였다(24절).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키사" 즉 그를 "죽음"에 넘기우신 하나님이 그를 "죽음에서" 자유케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른 어떤 기적과 이적"보다 더 놀라운 방법으로 그를 뛰어난 자로 시인하신 것이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강조하여 주장하고 있다.

① 베드로는 그의 부활에 대하여 묘사한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서 매여 있을 수 있었음이라." 

본문에 사용된 qavnato"(죽음의 고통)는 "해산의 고통"을 나타내는 말로도 쓰이며 따라서 어떤 이는 이를 해석하여 그의 영혼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극에 다다른 "고통과 괴로움"을 뜻한다고 보았다. 

예수께서 죽으시며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을 때 하나님은 "영혼의 해산하는 고통과 같은 극한적인 고통에서 그를 풀어 주셨던 것이다." 

고드윈박사(Dr. Godwin)는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시편 88편의 저자 헤만이 자기의 영혼이 살육당한 자들 가운데 누워있을 때의 느낀 두려움에 대하여 노래할 때의(시 88:5, 15) 그 두려움에 그리스도도 사로잡히시었다. 그러나 그는 강한 분이었으므로 이 두려움을 극복하셨는데 이것이 그의 부활이었다(실로 한 영혼을 영적인 고뇌의 깊이에서 건져내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그의 영혼이 지옥에 있을 수 없으시며 곧 말씀하기를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신 그의의 몸의 부활을 말해 주고 있다. 그의 능력있는 부활은 곧 영혼과 몸의 부활이었던 것이다." 

또 라이트푸트 박사(Dr. Lightfoot)는 다른 의미로 해석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일으키신 것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과 관련된 것으로 그의 부활로 인하여 모든 죽음의 권세는 깨지고 또한 그의 백성에게 가해진 고통은 사라졌다. 그는 죽음을 소멸하시고 죽음의 본질을 바꾸시었다. 참으로 그는 더 이상 죽음에 사로잡혀 있을 수 없으므로 죽음이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이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에 대한 말씀이라는 데는 대부분 의견이 일치된다(Mr. Boxter가 말한 것처럼). 영혼과 육체의 분리로써의 죽음은 적극적 죄악으로 인해 받는 비참한 처형상태는 아니라도 일종의 금주형인 것이다. 

하몬드박사(Dr. Hammond)는 70인역의 시편 18편 4절에서 매임(구속)이란 말을 사용하며 이것을 본문에서 사도들이 인용함으로써 해방과 구속의 은유를 잘 조화시키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채무 때문에 갇히시고 죽음의 속박을 받으셨다. 그러나 신의 공의가 충족되어졌으므로 그는 어느 누구의 권리 주장이나 무력에 의해 죽음의 구속을 받으시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그는 자신 안에 자신의 세력 안에 생명을 지니고 있으시며 그가 죽음의 왕을 정복하셨기 때문이다.

②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일을 입증한다(32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즉 우리 사도와 다른 우리의 동료는 그가 죽으시기 전에 그를 친하게 알았고 부활하신 후 친히 그와 대화를 나누었으며 "그와 먹고 마셨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예수의 적들이 그를 훔쳐간 것이 그들이라고 고소를 당하였음에도 이 사건에 대한 재치있고 성실하며 용기있는 증인이 되게 하려는 목적으로 "성령이 그들에게 임재하시므로 권능을 받았던 것이다."

③ 베드로는 이 일이 성서의 성취임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스도가 썩음을 당하기 전에 다시 부활하리라고 성서가 말하였기 때문에 죽음과 무덤의 "권세가 그를 사로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윗은 이 일에 대하여 증거해 주고 있다"(25절). 

베드로가 인용한 성서가 다윗에 대한 말씀으로서(시 16:8-11) 부분적인 뜻으로는 다윗을 선지자로 간주하였기 때문이지만 이 말씀은 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고 다윗은 그의 모형이라 하겠다.

첫째, 많은 구약 본문이 인용되고 있다(25-28절). 

왜냐하면 이 모든 말씀이 그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며 본문은 이 사실을 우리에게 증거해 주고 있다.

① 우리 주 예수는 그의 모든 사업을 그의 아버지에게 계속하여 귀결시킨다.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였음이여" 

예수의 최상의 목적은 그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었다. 

그는 그의 고통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대단히 유익함을 알았으므로 이를 자기의 기쁨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가 행하시고 고통받으신 모든 삶을 통하여 늘 그 앞에 이 목적이 뚜렷이 설정되어 있었고 늘 이 사실을 바라보셨으며 이러한 전망을 바라고 그는 참고 모든 일을 수행하셨던 것이다(요 13:31, 32; 17:4, 5).

② 아버지께서 늘 함께 계시며 그에게 늘 능력이 따른다는 사실을 그리스도는 확신하셨다. 

"그가 나의 오른 팔을 붙드시사 강건하게 하시며 인도하시며 지지하시므로 내가 어떤 곤경에 부딪친다 할지라도 요동치 않으며 내게 주어진일을 끝까지 지키리라"는 것이 예수의 확신이었다. 이 사실은 전부터 약속된 구원의 계약에 속한 것이었다(시 89:21).

"내 손이 저와 함께하여 견고히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있게 하리로다." 이 약속이 있으므로 그는 그의 사업이 실패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오른 손을 지키시면 우리는 요동치 않을 것이다.

③ 그가 겪으신 슬픔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 예수는 기쁨으로 그의 사업을 수행하셨다. 

"내가 요동치 않으므로 만족함은 주님의 즐거움이 나의 수중에서 더욱 증대됨이라.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로 즐거워하였으며 슬픔에 대한 생각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리라"는 것이 예수의 태도였다. 

우리 주 예수님에겐 "그의 사업의 목적"을 바라보시며 이 사업이 영화롭게 성취되리라는 확신은 끊임없는 기쁨이 되었다. 

그는 너무나도 그의 사업을 기쁘게 여기셨으므로 계획에 비해 결과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생각하므로 마음이 즐거웠다. 

"그는 성령으로 기뻐하셨다"(눅 10:21). 본문 말씀에 의하면 "내 입술로 즐거워하였다." 시편 본문을 보면 "내 영광도 즐거워한다." 

이 말씀들을 종합하면 이러한 의미이다. [참생명의 지혜를 짓는 것이 마땅한 바]우리의 입술은 우리의 영광이요 말하는 일은 우리에게 명예가 되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찬양함에 이용될 때 이에서 더 큰 영광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입술이 즐거워하였으니" 그가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고통을 받으러 나아가실 때 "찬미하셨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④ 그는 고통과 죽음의 결과가 행복으로 이루어지리라는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셨다. 

바로 이러한 생각 때문에 그는 고통을 용기와 기쁨으로 극복하셨던 것이다. 

그는 몸을 벗게 되셨으나 "육체는 편안히 쉴 것"을 아셨으며 몸은 무덤에 장사될지라도 거기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다음과 같은 소망과 확신을 주심을 바랐다. [다 이루었다...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

가. 영혼이 육체에서 계속 분리되어 있지 않으리라는 확신이다. 

그 이유는 인간 영혼이 육신에 거할 수 없게 된 이유 외에도 사실상 죽음을 정복하신 분에게 계속해서 죽음이 승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실지라"(하데스는 "보이지 않는"곳을 의미한다). "

그러나 잠시 고통을 받고 거기서 옮겨지시겠지만 주께서 명하실 때까지 거기 머물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다른 영혼에게 하듯이 그를 "음부에 가두실 수는 없는 것임을" 예수는 아셨다.

나. 몸이 무덤에 거하게 되나 잠시 동안일 것이다.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즉 육신이 계속 죽은 상태로 있어 썩어 냄새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은 죽은지 사흘만에 [썩기전에!]다시 생명이 돌아왔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성별된 거룩한 자"였다. 그가 죽으신 것은 "그의 피로 세상을 정하게 하"셔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썩음을 당하지 않으실 것인데 그 이유는 그의 죽음이 하나님에게는 "달콤한 향기"였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은 희생에 관한 율법에서 이미 그 유형(類型)이 이루어졌다. 

"희생에 드린 고기 중 먹을 수 있는 부분은 제3일까지만 보존할지니" 그것이 부패하여 썩을까 함이었다(레 17:15-18).

다. 그의 죽음과 고통은 그 뿐 아니라 모든 그를 믿는 사람에게 영원한 불멸의 시작이 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나로 하여금 세상이 이 길을 알게하시려 생명의 길을 여셨음이라"는 뜻의 말씀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스스로 생명을 버리고 다시 얻게 할 권세를 주셨으며" 그에게 생명의 길을 보이셨다. 

"그에게 사망의 문이 나타났고 사망의 그늘진 문을 보았을 뿐 아니라"(욥 38:17) 이 사망의 문을 통과하심은 인간의 구원을 이루려 하심이었다.

라. 그의 모든 슬픔과 고통은 완전하고 영원한 복락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주께서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그를 기다리는 보상은, 이제 완전한 기쁨이었고 하나님 앞에서 그의 사업을 이루고 그리스도와 그로 인하여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웃음으로 아버지는 그를 맞으셨고 "창조하실 때처럼"그가 승천하실 때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셨다. 

이것은 또한 우리 "주님의 기쁨"이요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이 맛보게 될 것이요, 그 안에서 그들 모두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둘째, 주로 부활과 관련시켜서 본문을 주석하고 있다. 

그는 겸손하게 그들을 "형제"들이라고 칭하고 있다(29절). 즉 이 말은 이러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너희는 사람이므로 이성을 지녔을 것이라. 너희들은 다 같은 형제이므로 너희의 친족이며 그렇기에 진심으로 너희에게 관심이 있으시며 너희가 잘되기를 바라시던 분의 말씀을 선대해야 될 것이다. 자 나로 하여금 자유롭게 우리 조상 다윗에 관하여 말하도록 허용해 달라. 또한 다윗이 스스로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하고 말한 것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라고 말한다 해서 내게 무슨 흑심이 있는 것이 아님을 알라." 

여기서 다윗을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왕가의 조상이었기 때문이요 당대에 걸출한 인물이었으므로 그의 이름과 추억은 대단히 귀중하게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의 시를 읽을 때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① 베드로는 다윗이 "자신에 대하여"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있고 그 안에 그의 뼈가 누워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무도 그가 부활하였으리라 여긴 사람은 없으므로 "썩음을 당치 않으리라" 하심은 자신에 대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윗이 부패했으리라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13장 35-37절에서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자였지만" 자신을 가리켜 말한대로 죽음과 장례에 있어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왕상 2:2).

② 그러므로 확실히 그는 한 "예언자로서" 앞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하여 전에 예언자들이 증거한 메시야의 고통과 고통 뒤에 올 "영광"을 말하였던 것이다. 

다윗이 시편에서 메시야에 대해 말하였다는 것을 베드로 본문에서 명백히 보여 주고 있다.

가. 다윗은 메시야가 그의 후손에서 나올 것을 알았다(30절).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나님이 그에게 한 자손을 약속하시사 "그의 나라의 보좌가 영원히 견고케 되리라"고 말씀하셨다(삼하 7:12). 

또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다"(시 132:11) 하였고 주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겠다" 약속하셨다(눅 1:32).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다윗의 후손 중에서 메시야가 탄생할 것을 알았다. 

즉 "육체에 의하면" 그의 인성을 따라 다윗의 후손이 되지만 "영에 의하면" 그의 신성을 따라 그는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그의 주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의 조상에게 약속되었던 메시야가 그의 후손이 되며 계승자가 되고 그의 왕좌의 후계자가 되리라 맹세하셨으며 이를 다윗이 시편을 기록할 때 그 가운데 나타내셨던 것이다.

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후손이 되심"(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칠 때 그의 몸 가운데 레위가 씨앗으로써 있었다고 전해지는 것처럼). 

다윗이 시편을 기록할 때 그의 몸 가운데 있었다. 

한 분은 다윗 자신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그의 몸 안에 있던 거의 후손을 지칭하는 것이었고 이 후손으로 말미암아 그의 가족과 나라가 안전하고 영원하리라는 것을 지시하는 내용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의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있지 않겠고 그의 육체가 썩음을 당치 않으리라"라고 한 말씀은 의심없이 그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31절).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성경에 기록된대로 다시 사셨으니 우리가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는 말씀을 기억하고서 지나가자.

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해서도 잠간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처럼 다윗이 죽었다가 부활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몸으로 "하늘에 승천할" 수도 없다고 한다(34절). 

더 나아가 다윗이 부활에 대하여 말한 것은 바른 그리스도의 부활이란 것을 입증하기 위해 베드로는 부활 후 그리스도의 영광을 말해 주는 다른 시편을 인용하고 있다. 이 시편에서 다윗은 분명 다른 사람 즉 그의 주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시 110:1). 

"주께서 나의 주께 말씀하시기를 [그가 죽음에서 그를 일으키실 때] 너는 내 우편 곧 가장 높은 위엄에 앉아 거기서 다스리라. 애정과 은총에 의하여 약속된 나라의 통치를 너에게 맡기리니 내가 네 원수로 또는 친구로 너의 발등상되게 하기까지 거기서 왕으로 앉으리라"(35절). 

확실히 그리스도는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그러므로 다윗이 시편 16편에서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이지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다윗이 무덤에서 일어났다는 말도 없고 그가 하늘로 승천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4)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적용시킨다.

① 본문은 특별한 은사가 나타난 현재의 놀라운 성령의 임재의 뜻을 설명해 준다. 

그들 중의 몇 명은 "이 어쩐 일이냐?"(12절)라고 묻고 있다. 베드로는 이런 그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하나님의 우편으로 높임을 받으시고 능력과 권위로 거기에 앉으신 이 예수는 다시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임하시었소. 그가 승천하여 뵈옵는 아버지께 성령의 약속을 받은 그는 자기가 받은 것을 주시고(시 68:18) 이제 이 사실을 보고 듣는 당신들에게 나누어 주실 것이요, 왜냐하면 예수가 영광받으셨을 때 성령이 주어진 것이지 그 전에 성령이 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요(요 7:39). 당신들은 우리가 전혀 배우지도 않은 언어로 말하는 것을 보고 들었소." 

군중들은 그들의 음성과 언어가 변한 것처럼 그들의 얼굴 모습도 변하였음을 보았으리라. 

이제 이것은 성령으로 주어진 것으로 성령의 임재는 곧 그리스도가 영광받으신 증거였다. 

그는 이 성령의 선물을 아버지로부터 받았고 또한 교회에 나누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중재자 또는 하나님과 교회 사이에 중간 역할을 하는 분이라고 명백히 증거할 수 있는 것이다.

첫째, "성령의 은사"는 신성한 약속의 수행이었다. 

본문에서는 "약속된 성령"이라 칭하고 있는바,  신성한 능력자는 우리에게 많은, 대단히 귀중한 "약속"을 주셨다. 

그러나 성령을 주시마한 약속은 메시야를 보내 주신다는 약속처럼 가장 뛰어난 약속인 것이다. 

이 약속은 모든 약속을 포함하는 약속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구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하심은(눅 11:13) 그가 온갖 좋은 것들을 그들에게 주신다는 뜻이다(마 7:11). 

그리스도께서는 "약속된 성령" 즉 약속하신 성령의 은사를 받으셨고 또한 이 성령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다. 

"모든 사람에게 이 약속은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이요 믿음에의 응답인 것이다."

둘째, 성령의 선물은 앞으로 주시게 될 온갖 신성한 아름다운 축복을 약속하는 보증이 된다.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은 더 위대한 일의 전조에 불과한 것이었다.

② 이 말씀을 통하여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메시야시요 세상의 구주임을 모든 사람들이 믿어야 한다는 것을 입증하려 한다. 

베드로는 그의 설교를 이렇게 끝낸다. 즉 그는 모든 문제의 결론으로써 "모든 사람으로 진리를 깨닫도록 선동한다"(36절). 

그러므로 이 진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히 확증되었음을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아야 하며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음을" 선포할 책임을 우리는 위임받은 것이다. 

사도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실 때까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경고하심을 받았었다(마 16:20; 17:9). 

그러나 이제 이 사실은 모든 이스라엘에게 지붕 꼭대기에서 선포되어야만 하며 들을 귀 있는 자에게 듣도록 저희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불확실한 일이 아니라 확고부동한 진리이다. 그들은 이 사실을 확신있게 알아야 하며 그것이 신실한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다.

첫째, "그들이 못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영광되게 하시려 계획하신 분, 그의 신성한 사명에 대하여 많은 증거를 제시한 분을 사기꾼으로 몰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한 것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들어내주는 사실인 것이다. 

그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이 사실은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확대케 하였으며,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오명을 가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영화롭게 하셨고 그들이 그에게 가한 무례는 오히려 그의 영광을 빛나게 하였다.

둘째,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를 영화롭게 하시되 그를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시기까지 하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말씀은 그가 "만유의 주"시며 [찬탈자가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이심"을 의미한다. 

그는 다른 많은 주를 모신 "이방인에게도 같은 주님이시며 유대인에게는" 그는 모든 직능을 포함한 "메시야이시다." 

갈대아역(譯) 성서에서는 그를 왕 "메시야"라 불렀고 또 천사가 다니엘에게 그를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라 부른다(단 9:25). 

우리가 믿는 예수,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 분은" 우리가 충성해야 할 분이며 주와 그리스도로서 그에게 보호를 기대할 수 있는 분이란 사실이 복음서의 위대한 진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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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예루살렘에서 행한 베드로의 설교(2)(행 2:37-41)

우리는 성령이 임재(믿는 이의 영에 임하사 내주하심)하므로 복음 전파자들에게 끼쳐진 놀라운 효과를 보아왔다. 

베드로는 그의 모든 생애 중에 지금 행한 것처럼 온전하고 명쾌하고 능력있게 설교한 적은 없었다. 

이제 우리는 성령이 임재하므로 복음을 듣는 사람들에게 파급된 다른 복된 결실을 고찰해 보도록 하자. 

이 신성한 메시지의 첫 전파 결과 그 말씀 속에는 신성한 능력이 같이 하고 있고 하나님을 통하여 기적이 이루어졌음이 나타났다. 

즉시 수천 명이 믿음을 갖게 되었으니 그것은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셨기 때문이었다"(시 110:2). 

우리는 처음 전도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오게 됨을 본문에서 보게 된다. 

본문 말은 "이기고 또 이기는" 구원의 병거를 탄, 높임을 받으신 구세주를 와서 보라고 권한다(계 6:2).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처음 설교를 시작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되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역사하는 은총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주님의 성령"을 통해 이루어짐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성령이 역사하시는 방법을 고찰해 보자.

Ⅰ. 그들은 놀라며 증거의 타당성을 믿고 진지하게 묻는다(37절). 

그들은 베드로가 말한 것을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파하실 때처럼 중간에서 방해하지 않고 참을성있게 끝까지 "들은 후(그들이 말씀에 귀를 귀울이게 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유익한 일이었다) 마음이 찔려" 당황하기도 하고 호기심도 생기어 전도자들에게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묻는다. 

마음이 완고한 자들에게 이같이 갑자기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그들은 유대인들로서 그들이 믿는 종교가 그들을 충분히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성장하였고 더구나 이 예수가 무력하게도 치욕 속에서 처형당하는 것을 최근에 보았고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그는 사기꾼이라고 얘기를 들은 바도 있었다. 

베드로도 그의 죽음에 한 몫 했었던 자였으며, 이제 그들에게 도전하듯이 마치 그들을 격분케 하려는 자 같았지만, 명백히 성서에 근거한 이 설교를 그로부터 들었을 때 그들의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1. 이 설교는 그들로 하여금 고통스럽게 하였다. "저희는 마음에 찔림을 느꼈다." 

우리는 순교자 스데반을 향해 분노로 그들의 "마음이 찔려"(cut to the heart) 이를 가는 자들에 대하여 알고 있다(7:54).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한 자신들에 대한 분노로 "마음의 찔림"을 받았다(prick to the heart). 

그들을 반박한 베드로는 이제 그들의 양심을 일깨웠고 골수까지 그들을 찔렀다. 

그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은 후 그 말씀은 "뼈까지 파고 드는 칼날이 있어" 그들이 그리스도를 찔렀던 것처럼 그들을 관통하였다. 

죄인의 눈이 열릴 때 죄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이 찔림을 받아" 내적인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것이야말로 "마음을 찢는 것이요"(요엘 2:13),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인 것이다(시 51:17). 

진정으로 죄를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이를 부끄러워하며 그 결과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슴을 찔리우는 일은 치명적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기를 이 고통으로 인한 마음의 동요로, 나는 죽었다고 하였다(롬 7:9). 즉 "자신에 대한 자랑과 신뢰가 나를 실패케 하였도다"란 말이다.

2. 이 설교는 그들에게 의문을 던져 주었다. 마음이 찔림을 받자 마음에 가득찬 것이 말로 표현된 것이리라.

(1) 그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털어논 사람은 누구였는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그리고 서로 서로 그들의 입장을 고백하였다. 

사도들로 말미암아 그들은 깨달았기에 또한 그들은 그들과 상의함으로 위로받기를 바랐다. 

그들은 사도들의 비난에 찬 말에 대하여 그들을 정당화시기 위하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호소하지 않고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사도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른다(29절). 그것은 명예로운 호칭이라기 보다는 우정과 사랑의 표현이었다. 

"당신들도 같은 사람 아니요, 인도적 정신으로 대해 주시오. 당신들도 같은 형제들이니 우리들 형제애를 가지고 대해 주시오." 

목회자는 영적인 의사임을 기억하자. 그들은 양심에 상처를 입은 자들에 관하여 생각해야 한다. 

평신도들에게 같은 인간으로서 형제로서 그들의 영혼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처럼 다루어 주는 교역자들과 자유롭게 사귐을 가진다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2) 그들이 한 말.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탄식이었다.

① 그들은 난처한 입장에 직면하여 무엇을 해야할지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말하였다. 

그들은 깜짝 놀라서 "우리가 못 박은 바로 그 예수가 주 그리스도시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 우리 모두가 범죄하였구나!"라고 말하였다.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먼저 깨닫지 않고 우리는 행복해질 수 없음을 기억하자. 

우리 자신이 파멸될 위기에 처해 있음을 발견할 때 우리의 존재가 영원을 얻을 희망이 생겨나는 것이다.

② 그들은 막다른 골목에 직면한 사람처럼 말하였다. 

그들은 즉시 무엇을 지시받든지 그것을 행하리라고 결심하였다. 

그들에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고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기 위해 그들의 확신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연기할 수도 없었다. 

다만 지금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비참함을 면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될 것인지 알고 싶어하였다. 

죄를 깨달은 사람은 평화와 사죄의 방법으로 기꺼이 알려고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9:6; 16:30).

Ⅱ.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그들의 행할 것과 그렇게 함으로 그들이 무엇을 얻게 되는가를 요약 지시해 준다(38,39절). 

깨달은 죄인에 대하여 우리는 용기를 넣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상처를 싸매 주어야 하는 것이다(겔 34:16). 

그들에게 그들의 정황이 비극적일지라도 절망적인 것은 아니며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만 한다.

1. 베드로는 그들이 행해야 할 과정을 알려 준다.

(1) "회개하라"고 지시하였다. 

회개는 파선 후에 만난 널빤지와 같은 것이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를 죽임으로 저지른 이 무서운 죄를 깨달으시요(한 채권자가 빛갚을 것을 요구하므로 다른 모든 빚까지 밝혀진 가련한 파산자처럼). 이 큰 죄를 회개함으로써 다른 모든 죄까지 깨닫고 죄로 인한 통회의 눈물을 흘리시오." 

이것이야말로 세례 요한이나 그리스도가 설교한 것과 같은 권고였다. 

성령이 임재한 지금도 "회개하라 회개하라. 너희 마음과 길을 돌이키고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라"는 말씀는 계속 외쳐진다.

(2)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권고한다. 즉 다음과 같은 말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굳게 믿고 그의 은총과 섭리에 순종하며 또한 공개적으로 믿음을 고백한 후 세례를 받음으로 신앙 안에 거할 것을 약속하고 불신을 버리고 그리스도와 그의 거룩한 종교로 돌아오라"는 말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받아야만 한다. 그들은 예언자들에 의하여 전해진 아버지와 성령을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예수의 이름을 믿어야 하며 그가 그리스도이심과 선조들에게 약속된 메시야이심을 믿어야 한다. 

또한, 이러한 말씀이다. "예수를 왕으로 섬기시오 세례를 받아서 그에게 충성을 서약하시오, 그를 예언자로 받아들여서 그의 말을 들으시오. 그를 제사장으로 받들어 속죄함을 받으시오." 

이같은 내용이 이 말씀을 통해 강조되고 있다. 그들은 그의 의를 힘입어 사죄하심을 받기 위하여 "그의 이름으로" 세례받아야 했던 것이다.

(3) 이 사실은 각 사람 하나 하나에게 강조되었다. 

"너희 각자가," 즉 다음과 같은 말씀이다. - 여러분 가운데 더 큰 죄를 지은 사람일지라도 회개하고 믿기만 하면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것이요, 또한 여러분 가운데 그들이 훌륭한 성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회개하고 믿고 세례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요, 여러분의 수가 아무리 많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은총은 충만하며 이 은사는 각 사람에게 합당한 것이요, 모세 시대의 옛 이스라엘은 당시 회개는 민족적인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이스라엘 족속 전체가 "구름과 바다를 통과할 때"(고전 10:1, 2) 모세에게 세례를 받았던 것이요, 그러나 이제는 "각자 하나 하나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이 큰 일의 참여해야 하는 것이요"(골 1:28)라는 말씀으로 볼 수 있다.

2. 베드로는 그들에게 결단할 용기를 준다.

(1) "죄 사유함"을 얻기 위하여 해야 될 것이라 한다. 

다음과 같은 말이다. "죄를 회개하고 파멸을 피하시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세례를 받으면 여러분들이 모세의 율법이 이룰 수 없는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될 것이요, 이것을 목적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면 이를 여러분은 얻게 될 것이요. 주의 성만찬에서 포도주가 죄 사유를 위한 그리스도의 보혈의 새로운 계약인 것처럼, 세례는 죄 사유를 위한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계약인 것이요. 성결케 됨을 받으시오. 그러면 정하게 되리이다"라는 말씀이다.

(2) 그들도 사도들처럼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해 준다. 이 축복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의 말씀이다. "여러분 중 얼마는 우리와 같이 특수한 은사를 받을 것이며 만약 여러분 모두가 믿음과 회개에 성실하면 내적인 은사와 위로를 체험하게 될 것이며 약속된 성령으로 인침을 받을 것이요"라고 말한다. 

죄 사유하심을 받은 자는 누구나 "성령의 은사를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자. 의롭다 여김을 받은 자는 모두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3) 그들의 자손도 옛 계약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계약을 표면적으로만 보장해 주는 명칭을 지니려고 노력할 것이라 본다. 

그러나 그들에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에게 와서 측량할 수 없는 축복을 받으시오. 죄사유함과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는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요"(39절)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의 말씀,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내리며"(사 44:3) 또한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사 59:21)는 말씀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그는 "내가 너와 네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창 17:7). 

그러므로 모든 이스라엘 자손은 난지 팔일만에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 한 사람에게만 약속이 수여된다면 자손들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묻는 것이 당연하다. "자녀들은 버림을 받는 것인가, 아니면 그의 부모에 따라서 구원받는가? 

베드로는 약속에 의해서 결단코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각 사람 하나 하나에게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위대한 약속은 지금부터 영원히 여러분과 자손에게 주는 약속이요"라고 설명한다.

(4) 그 약속이 지금은 전과 같이 그들 자손들에게만 국한되지만 앞으로는 그 축복은 세계 만민을 위해서 계획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브라함의 축복은 이방인에게도 주어지므로 모든 사람의 자손에게도 미친다 말할 수 있다(갈 3:14). 

이 약속은 오랫 동안 이스라엘에게만 속한 것이었다(롬 9:4). 

그러나 이제 그것은 "먼 데 사람" 곧 멀리 있는 이방 나라들에게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한 가지 제약이 있다면은 그리스도의 사귐의 공동체 안에서 "주 우리 하나님을 부르는 자에게"만 이 축복은 해당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름은 먼 데 사람에게까지 다만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도 주어짐을 기억하자.

Ⅲ. 위와 같이 지시한 후 필요한 주의를 줌(40절). 

"여러 말로" 복음의 진리를 확증한다. 그리고 복음이 주는 의무를 훈계한다. 

베드로의 말씀이 역사하기 시작하자 다만 그를 따랐다. 그는 많은 내용을 간결하게 말했고(38,39절)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대로 그 말에는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에 유익한 이러한 말씀들을 들을 때 우리는 더욱 말씀을 간절하게 사모하게 된다. 

그가 말한 것들 가운데(특히 강조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 패역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하라. 이 세대에서 자유롭게 되어라"는 말씀인 것 같다. 

불신 유대인들이야말로 편벽되고 거만한 패역한 세대였다.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을 거스려 행하고(살전 2:15) 죄와 결합하여 파멸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과 같이 교훈하고 있다.

1. 자신을 파멸에서 구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힘쓰고 이러한 일에 관계하지 말며(기독교인들이 하듯이) "이런 모든 것들을 피하라"고 권고한다. 

이러한 말씀이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시오. 그리하면 여러분도 같이 죄를 행하였던 자들이 멸망할 때 멸망을 면하게 될 것이요"라고 권한다. 

"오! 나의 영혼을 죄인들과 같이 하지 말게 하시며"라는 뜻의 말씀이다.

2. 그들과 함께 계속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그들처럼 불신앙 가운데 머물러 있지 말라고 한다. 

"자신을 구하라"는 말씀은 "이 패역한 세대에서" 자기를 구별하라는 말이며 완고한 이 민족처럼 마음을 강퍅하게 말라는 말씀이다. 

그들과 같이 재앙을 받지 않기 위해 죄에도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 

악인으로부터 우리를 구별하는 길은 그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밖에 없다. 

이 결과 그들이 우리를 적개심을 가지고 대할지 모르지만 그 길만이 우리를 그들로부터 구하는 방법이다. 

그들이 우리를 괴롭힌다고 하여도 탁류에 휩쓸려 내려가며 위험을 당하는 것보다 탁류를 역류하여 헤엄치는 고통이 나은 것이다. 

죄를 회개하고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린 사람은 악인들과의 모든 사회적인 친분관계를 끊어버리므로 성실성을 입증해야 한다. 

"악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날지어다"라는 말씀이야말로 우리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결단케하는 두려운 말씀의 하나이다(시 119:115). 

우리는 그들로부터 자신을 구해야 한다. 거룩한 두려움을 품고 이것들을 피하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파멸시키려고 계획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며 전염병에 감염된 집을 멀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Ⅳ. 성공적인 결과(41절). 

성령은 말씀으로 임하여 놀라운 일을 이룩하였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일어난 경이로운 일의 목격자였으나 자신의 힘으로 회개할 수 없었던 이들의 가르침을 받고 변하였다. 

이것이야말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다.

1. 그들은 말씀을 받아들였다. 

다만 우리가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면 말씀은 우리에게 유익하다. 그들은 그 증거를 확신하였고 제공된 증거를 받아들였다.

2. 그들은 기쁘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헤롯은 말로 기쁘게 듣기만 하였으나 이 사람들은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비록 그 말씀이 그들로 겸손한 인생으로 변화를 준 것뿐이었고 동족들의 적대감만 불러 일으켰을 뿐이지만 그들은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3. 그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였으며 그리스도께서 설립하신 거룩한 예식에 참여하므로 제자들 가운데 들게 되었다(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당장 나타난 진리였기 때문에). 

베드로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말했지만 그들이 세례받음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세례의 격식인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실상 세례를 베푼 것이라고 생각할 만한 근거가 있는 것이다. 

교인으로서의 계명의 약속을 받은 사람은 교인에게 주어지는 세례로 마땅히 받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4. 그러므로 "그 날에" 제자의 수가 "삼 천이나" 더하였다. 

성령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방언으로 전파하였고 그들의 손으로는 세례를 주었다. 

바야흐로 곡식을 거두어 드릴 분주한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말씀으로 삼천 명이나 회개시킨 일은 떡 몇 조각으로 사 오천 명을 먹인 사건보다 더 "놀라운 것"이었다. 

요셉이 애굽에서 죽은 후 이스라엘 자손이 증대하기 시작하였었던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삼천 명"이라고 그랬는데(이 말씀은 창 4:21 에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는 말씀과 창 46:27 에 70명과 같이 여자와 어린이가 포함된 수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세례받은 사람들이 남자들만이라는 뜻이 아니라 어린이들과 종까지 포함해서 세례받은 인원이 "삼천이나 되었더라"는 뜻이다. 

이렇게 제자들의 수가 "더하여졌다." 그리스도에서 연합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제자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때 그의 백성도 우리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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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믿는 사람이 모든 물건을 통용하다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제자들의 친교(행 2:42-47)

우리는 흔히 초대 교회에 대해 말하고 초대 교회와 그 역사에 현실을 비추어 본다. 

본문에서 우리는 "참 초대 교회의" 아주 "초창기"의 역사, 아직 젖먹이의 상태이기 때문에 더욱 "순결 무흠"한 기록을 대하게 된다.

Ⅰ. 그들은 성례를 준수하였고 모든 경건과 섬기는 일에 풍성하였다. 

그의 능력을 믿는 기독교라면 인간으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지정하신 여러 방법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일을 추진해야 한다.

1. 그들은 "말씀 전파하는 일"에 계속하여 부지런히 참여하였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간직하고" 그것을 잃어버리지 아니하였다. 

기록된 그대로 그들은 "부단히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훈을 받아들였다. 세례를 받으므로" 그들은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훈련을 받았고 또 기꺼이 가르침을 받으려 했다. 

그들의 이름을 그리스도에게 드릴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들를 수 있도록 떳떳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그를 명예롭게 하는 것이며 우리를 가장 거룩한 믿음 안에서 세우게 되는 것이다.

2. 그들은 성도의 교제를 계속하였다. 

그들은 서로 교제하며(42절)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46절). 그들은 서로 우애있게 대할 뿐만 아니라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많은 시간을 함께 지냈다. 그들이 "패역한 세상을" 멀리 하였다고 그들이 은둔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 아주 친근하게 사귀며 사정을 털어놓고 의논하였다. 

한 사람의 제자가 있는 곳에 마치 "같은 깃털을 가진 새들이 같이 모이는 것같이" 다른 제자들도 있었다. 

이들 교인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였는지를 생각해 보자. 그들은 서로 관심을 가졌고 동정하였으며 진심으로 상대방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그들은 예배를 통하여 서로 사귀었다. 그들은 "성전에서" 만났다. 

성전은 그들의 만남의 장소였으니 하나님과의 연합된 사귐은 우리가 나눌 수 있는 최상의 교제였기 때문이었다(요일 1:3).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그들은 매일 성전에 모였다. 

안식일에나 명절뿐 아니라 그 외의 다른 날도 매일 모였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우리의 매일의 일과가 되어야 한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주 공중 예배를 드릴수록 좋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시몬의 문(門)인 교회를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해야하는 것이다.

(2) 그들은 "다 함께 모였다." 

불화나 다툼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사랑만이 존재하였다. 그리고 열심히 공중예배에 참석하였다. 

그들은 성전 뜰에서 유대인을 만나기로 하였지만 교인들은 그들끼리의 약속에 의해서 별도로 예배를 드렸다.

3. 그들은 자주 모여서 주의 만찬을 행하였다. 

그들의 십자가에 못박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그를 의지하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처럼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하여 "계속하여 떡을 나누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잊을 수 없었기에 이 기념 예식을 계속하여 준행하였던 것이다. 

이 예식이야말로 그리스도가 설립하셨고 오는 세대의 모든 교회에 전수되어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서로 집을 방문하여"(카트 오이곤, 2:46)) 떡을 나누었고 기독교인의 특정한 제도로써 성전에서만 성만찬을 나누는 것은 적당치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개인 집에서 이 예식을 집행하되 형편을 참작하여 개종한 기독교인의 가정을 택하여 그곳으로 이웃들이 모였다. 

이렇게 그들은 작은 회당 또는 가정 교회 즉 그 안에 교회가 있는 집에서 돌아가며 모여 Q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서로 만난 사람들끼리 성찬식을 행하였다.

4. 그들은 "기도"에 힘썼다. 

성령이 임재한 후에도 그를 기다리던 때처럼 기도에 힘썼다. 기도는 우리가 죽어서 영원한 찬양 속에 흡수될 때까지는 결코 제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떡을 나누는 시간은 말씀 전파와 기도" 중간에 행하여졌다. 성만찬은 양자에 모두 관계하며 양쪽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주의 만찬은 시각적인 설교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확약해 준다. 또한 이 만찬은 기도하도록 용기를 주며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올리운다는 엄숙한 표현인 것이다.

5. 그들은 감사하는 일에 풍성하였고 힘써 "하나님을 찬양하였다"(47절). 

감사와 찬양은 모든 기도에 필수적이며 부수적인 것은 아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찬양해야 할 것이다.

Ⅱ.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친절하였다. 

그들은 경건하였을 뿐 아니라 자애로 넘쳤다. 거룩한 예식에 함께 참여하므로 서로 마음이 연합되었고 서로 사랑하였다.

1. 그들은 자주 모여서 성도의 교제를 나누었다(44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하였다." 

그렇다고 수천 명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아니었다(이것은 비실제적이다). 

^^라이트푸트 박사(Dr. Lightfoot)가 설명하는 것과 같이 그들의 언어나 국적에 따라 또는 다른 연합제를 이루어서 여러 그룹으로 나누어서 함께 모였다. 

그러므로 함께 모였다는 말은 그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분리되었다는 뜻이요 같은 신앙의무를 고백하고 행함에 뜻을 같이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함께 모였다고 전해지는 것이다*. 그들은 함께 모여 상호간의 사랑을 증대시켰다.

2. 그들은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다. "

그들은(옛날의 스파르타인들처럼) 서로 친하기 위하여 절제하고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기 위해 "공동으로 식사한" 것 같다. 그들은 함께 식사하였다. 

풍성하게 식사할 수 있는 사람이 적게 먹으므로 더 부자가 되려는 유혹을 절제하였고 빈곤한 사람은 보다 많이 식사하므로 결핍과 빈곤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서로 많은 관심이 있었고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 도우려는 준비가 되어 있었으므로 사랑의 도리를 따라 그들이 "모든 것을 서로 통용하였다"고 말한 것 같다. 상대방에게 구하면 얻을 수 있으므로 그들은 서로 상대방이 가진 것을 탐내지 않았다.

3. 그들은 늘 기쁨이 충만하였고, 서로 나누어 쓰는 일에 대단히 관대하였다. 

그들의 종교적 절기에서의 행사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신앙적 행사는("집집마다 돌아가며 떡을 나누었듯이") 공동 식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식사하였다." 

이렇게 함으로 이미 그들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식탁"이 인간에게 주는 위로를 맛보았고 이 일은 두 가지 면에서 그들에게 유익하였다.

(1) 식사는 그들을 즐겁게 했고 그들의 마음을 거룩한 기쁨으로 채웠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용납하셨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기쁨으로 떡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셨다." 

아무도 독실한 기독교인이 누리는 즐거움을 소유할 사람은 세상에 없다. 

이 사실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참 기독교인은 언제나 마음에 즐거움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2) 식사는 그들이 가난한 형제들에게도 자유롭게 대할 수 있게 하였고 자선을 행할 마음의 여유까지 생기게 하였다. 

그들은 "순전한 마음"(아펠로테티 카르디아스) 즉 "너그러운 마음으로" 식사하였다. 

그들은 결코 식사를 홀로 들지 않았고 마지 못해서가 아니라 조그마한 거리낌도 없이 가난한 사람들을 식사에 초대하였다. 

기독교인들은 마음이 트이고 구제에 인색하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심으셨고 그러기에 풍성히 거두기를 원하시는 것처럼 모든 선한 사업에 풍성하게 심어야 함을 기억하자.

4. 그들은 구제기금을 모았다(45절). 

그들은 그들의 "재산과 소유"를 팔았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밭과 집을 팔았고 또 다른 이는 가축이나 집의 가구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형제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었다. 이 일은(Mr. Baxter의 말처럼) 그들의 재산을 없이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기심을 없게 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진심을 시험하시기 위하여 "너의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하신 명령을 지키려 한 것 같다. 

그러나 이 유무상통은 시대와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모든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재산을 팔고 구제를 위하여 돈을 나누어 주라는 식의 계속적인 구속력을 가진 법칙으로 제정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이 후에 쓰여진 바울 서신도 빈부의 격차에 대하여 말하고 있고 "가난한 자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다"고 그리스도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자는 그들의 재산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이익금으로 선한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모든 재산을 팔아 단번에 나누어 주어 버린다면 그들이 선한 일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

(1) 베드로가 아나니아에게 "네 임의로 할 수가 없었더냐?"(5:4)라고 한 말씀에서 나타나듯이 이 일을 꼭 해야 한다는 신의 명령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소유에 대한 무관심, 저 세상에 대한 확신, 형제에 대한 사랑, 가난한 사람에 대한 연민, 기독교를 확장시키려는 그들의 열성, 성장도중에 있는 기독교에 대한 배려 등은 세상에 내놓을 만한 자랑거리였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였고 오로지 말씀 전하는 일과 기도에만 전력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조치가 있어야만 하였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장막을 건설할 때 쓰고 남아 더 이상 가져 오는 것을 금한 것과 같은 그러한 특수한 관대함이었다(출 36:5, 6).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시는 대로 봉헌하면 된다. 

그렇지만 본문과 같이 특별한 경우에는 "그들의 힘에 넘치게" 한 사람들은 칭송받을 만한 것이다(고후 8:3).

(2) 이 일을 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다. 

그런데 이들 중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은 유대 나라가 곧 멸망할 것과 이 나라에 사는 사람의 재산과 소유도 끝나리라는 것을 믿었으므로 이에 대한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대해 당시에 요구된 봉사를 위해서 그들은 가진 것을 팔았던 것이다.

Ⅲ.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시고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표적을 그들에게 주셨다(43절). 

"사도들로 인하여 여러 종류의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 그들의 가르침을 확신케 하였고 그 가르침이 하나님께서 나온 것임을 입증해 주었다. 

기적을 행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놀랍게도 그들 가운데 있었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거할 수 있었고 이는 마치 그리스도가 적은 음식으로 수천 명을 먹인 것과 같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후자가 자연 안에서 일어난 기적에 의한 것처럼 전자는(사람들이 그들의 재산을 팔도록 하게 하신) 은총의 기적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주께서 그들에게 기적을 행할 능력을 주신 것이 그가 그들에게 주신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 하게 하시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기적을 행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의 수를 증가시키므로 그들의 노력을 격려하셨다. 

인간을 교회에 모으는 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며 그 결과를 보는 것은 사역자나 평신도들에게 대단한 위로가 된다.

Ⅳ. 외부에서 이를 지켜본 사람들도 감화를 받았다.

1.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두려워하였고" 존경하였다(43절). 

"사람마다 두려워하였다." 즉 사도들에 의해 행해진 "표적과 기사를" 본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이 임하였고 그들이 당연히 존경할 것을 안 하므로 그들 국가에 파멸이 초래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곁에 서있던 사람들은 해롯이 요한을 두려워한 것처럼 그들을 경원하였다. 

그들은 "서기관들의 예복이 장터에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모으듯이 외적인 존경을 받을 만한 외관상의 두드러진 것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참으로 명예로운 영적 은사로 충만하였고 이 은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내적인 숭배심을 품게 하였다. 

두려움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다. 백성들의 영혼은 제자들의 두려움을 일으키는 설교와 생활에 의해 묘하게 감화를 받았다.

2.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좋아하였다"(우리는 바리새인이나 제사장처럼). 

그들을 미워하고 경멸한 사람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대부분의 평민들은 그들에게 호감을 가졌다. 

제자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외치며 밀려드는 폭도"들에 의해 사납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셨고 그러기에 언뜻 생각되기는 그의 가르침이나 추종자들이 더 이상 군중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본문에서 우리는 "그들이 제자들을 좋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전에 그들이 그리스도를 박해한 것은 제사장들의 술책에 의해 강요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들어난다. 

이제 그들은 본래의 마음과 정신으로 돌아왔다. 꾸밈없는 경건과 자애는 존경을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자.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불신자들에게 좋은 전도가 된다. 본문 ‘에콘테스 카린 프로스 홀론 톤 라온’(2:47) - 즉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자애를 베풀었다 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즉 그들은 자선을 자기 교단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모두에게 베풀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더욱 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3. 그들은 제자들과 "신앙을 같이 하였다." 

첫날처럼 많이는 오지 않았지만 그 중 얼마는 매일 와서 "구원받은 사람처럼" 행하였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언제든지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며 그리스도에게로 온 사람들은 세례로 인한 거룩한 계약과 다른 여러 의식으로 인한 거룩한 교제 안에서 교회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호크마==
=====2:1
오순절 날이 - '오순절'이란 말에는 원래 '제50'의 뜻이 있다. 
이 날은 유월절 주간의 안식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에 지키는 유대인의 3대 절기(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 신 16 : 1, 10, 13)의 하나이다(레 23 : 15, 16). 
오순절은 유월절 기간 동안처음 익은 보리 곡식단을 제단에 드린 날로부터 시작하여 밀 추수로 끝나는 49일(7주)간이 추수 기간 다음 날이기 때문에 '칠칠절'이라고도 한다(출 34 : 22 ; 신 16 :10).
또한 이 날은 처음 수확한 밀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제사를 드리는 절기이므로 '맥추절'(출23 : 16) 혹은 '초실절'(출 34 : 22)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1세기경부터 오순절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 것을 기념하는 명절로 여겨지게 되었는데(Jubilees 1 : 1 , 6 : 17 ; TB Pesachim 68b ; Midrash Tanchuma 26c) 출 19:1에 암시된 연대를 추론해 볼 때 율법을 받은 날이 오순절날임이 분명하다. 
이 절기는 대개 유대력 시반(Sivan)월 16일에 해당되는데 현재의 태양력으로는 5월말이나 6월 초순이 된다. 이 날에 흩어져 사는 모든 유대인들은 예루살롑에 와서 처음 익은 모맥(牟麥)으로 떡을 만들어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다. 유월절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예표하는 것이라면 오순절은 신약 시대에 교회의 시작으로 영적 의미를 지닌다.
이미 이르매(* , 쉼플레루스다이)- 이 말의 원뜻은 '가득 채우다'(눅 8:23) 또는'(시간이) 거의 닥쳤다'라는 뜻으로 본절에서는'오순절 날이거의 가까워'라는 의미이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앞에서 언급뒤 3대절기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 절기들을 지켰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미루어보아 많은 사람들이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을 것이며 예수의 제자들은 그 혼잡을 피할 뿐만 아니라 예수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한곳에 모였을 것이다. 
한 곳에 모인 사람은 열두 사도들과 1:13,15에 언급된 무리들을 포함하여 상당수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로 볼 수 있다(Alfor, R. C. H. Lenski). 그러나 그들이 모인 장소에 대해 본절에서는 확실히 언급하지 않는다. 1:13에서는 '다락'으로만 언급되어 있으나 12:12에서는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 언급되고 있다. 만일 본절과 1:13 및 12:12의 장소가 서로 일치한다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마가의 다락방'이란 표현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 모인 모든 무리들은 주님의 명령(1 : 4)을 따라 열심으로 기도하면서 성령 강림을 기다렸던 것이다.
=====2:2
홀연히 하늘로 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 2-4절에는 성령 강림이 세가지 징표(徵表)로 나타난 것으로 기록한다. 곧'바람'과 '불'(마 3 : 11, 12)과 '방언'인데 이것들은 모두 유대인들이 전통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나타내는 표시로 여겨졌다. 
본 구절에는'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로 성령의 임재가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바람'이 성령의 임재하심에 대한 징표로서 나타난 것은 어원적으로 볼 때 '영'(* , 프뉴마)이라는 단어가 '바람'(* , 프노에)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연관은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중생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도 발견된다(요 3 : 8). 또한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바람'으로 표시한 곳이 많이 있는 것을 볼 때(왕상 19 : 11 ; 시 104 : 4) 이 연관이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사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바람 같은'이라 했기 때문에 바람과 성령이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는 성령의 능력과 그의 오심의 충만함을 가리키는 것이다(Stanley D. Toussaint). 뿐만아니라 이 말은 제자들이 지금까지 체험하였던것보다 더 친밀하고 인격적이며 강력한 방법으로 성령께서 임재(臨在)하셨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Richard N. Longenecker).
저희 앉은 온집에 가득하며 - '온 집'은 헬라어 본문상으로 '그 온 집'을 말한다. 이것은 이미 한 번 언급된 집을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1 : 13, 15 등에서 말한 집을 지시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 '집'을 혹자가 주장하듯이 성전의 집(성전 안에는 30개의 홀이 있었음)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Bengel, Bruce) 세심한 관찰력과 주의력을 지닌 의사인 누가가 '성전'(* , 히에론)이란 말을 왜 언급하지 않았겠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따라서 이 '집'은 앞서 언급한(1 : 13, 15) '그 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Alford , Knowling, Hervey, Toussaint).
=====2: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 '불의 혀'는 성령의 임재를 묘사한다. 
이와 괸련하며 구약에서 여러 번 하나님의 임재를 불로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다(출 3 : 2-5; 13 :21 ; 24 : 17 ; 40 : 38). 복음서에서 세례 요한은 성령의 오심을 불과 밀접하게 관련시켜 말하고 있다(마3 : 11 ;눅 3 :16). 여기서 '불의 혀'란 실제로 불이 타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불'은 구약 시대에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상징한다(Blaiklock, Ralph Earle). 그뿐아니라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기도 한다(창 19 : 24 ; 레 10 : 2 ; 민 16 : 35 ; 왕하 1 : 9-12 ; 사 47 : 14).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 커다란 불덩어리 같은 것이 불의 혀같이 나타나서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임했다. 이것은 약속된 주의 성령이(1 : 4 ; 요 14 : 16-21,26 ; 15 : 26, 27 ; 16 : 7-15) '각 사람' 위에 임했다는 사실로 요엘 선지자의 예언(욜2: 28-32)과 예수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었음을 보여 준다. 
구약의 옛 언약하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는 특수한 목적을 위해서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한정(限定)되었으나(민 11 : 26-19 ; 삼상 10 : 6-12) 이제는 예수를 믿는 모든 무리 가운데 성령이 임하셨다. 이는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각양 은사에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될 것을 암시한다.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 성령의 충만함은 성령 세례와는 다른 것이다. 
성령의 충만은 여러 번 되풀이 될 수 있어서 구원의 때 뿐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 일어날 수 있다(4 : 8, 31 ; 6 : 3,5 ; 9 : 17 ; 13 : 9,52). 그러나 성령의 세례는 구원의 순간에 모든 믿는 자들에게 단회적(one for all)으로 일어난다. 
그러면 성령의 충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울의 경우 그의 서신에서 성령의 충만에 대해 꼭 한 번만(엡5 : 18) 언급하고 있다. 심지어 그가 성령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다루는, 이른 바 성령장이라고 할 수 있는 롬8장 에서도 성령 충만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특이한 현상이라 할수 있는데 바울은 오히려 성령의 인도나 지배(롬8 : 5, 9, 11, 14 참조)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뿐이다. 따라서 그는 성령의 인도나 지배를 받는 상태를 성령의 충만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내주하신 성령(롬 8 : 9 ; 고전12: 3)의 지배와 인도함을 받는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공간적으로 성령이 채워지거나 다시 들어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 하나님은 바벧탑의 사건을 통해서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그들을 흩어버리셨다(창11 : 1-9). 제자들이 성령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게 된 이 사건은 혼잡케 되었던 언어가 다시 회복된 것으로서 새시대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주님의 부활의 소식이 우주적으로 확산(擴散)될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메이어(Meyer)외에 많은 비평학자들은 오순절 체험이 비역사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본절과 같은 이적을 저자가 미화시킨 것으로 주장한다(Bauer, Schnekenburger. De Wette). 이러한 주장은 근본적으로 본서의 역사성을 부정하고 누가의 의도적 편집에 의한 것으로 았던 편견에서 비롯되었다. 이 견해를 따르게 되면 결국 본서가 바울이라는 인물을 부각시키고 미화시키기 위한 전기biography)에 불과하며 결코 영감 받은 책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게 된다. 따라서 비평주의자들의 견해는 이런 면에서 배격되어야 한다. 
한편 이 구절에서 성령의 세례를 말하지 않고 오히려 성령의 충만을 말하지만 이미 1 : 5에서 성령의 세례를 예언했고 또 11 : 15, 16에서는 성령 세례가 오순절에 일어났다고 회고하고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오순절에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의 사건이 거의 동시적으로 발생했음을 암시한다. 우리는 이 사건이 교회가 세워지기 위한 처음의 특수한 상황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제자들에게 성령세례의 증거는 방언이었다. 그들은 성령을 받고 자신들이 아직 배운 바가 없는 언어(외국어)로 말하기 시작했고, 다른 여러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했다. 이것들은 성령이 그의 경륜에 찬 사역을 이루시기 위하여 강림한 증거들일 뿐 일반적이며 영속적인 은사는 아니다.=====2:5
그 때에 - 이 시점은 (1)유대인의 명절인 오순절을 지칭할 수 있고 (2)성령 강림의 때를 의미할 수 있다. 여기서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경건한 유대인이 - 누가가 '경건한'(* , 율라베스)이란 뜻 으로 사용한 이 말은 신약에서 유대인들에게만 사용되고 있다(8 : 2 ; 22 : 12 ;눅 2:25). 유대인들은 본래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경건하게 살아보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경건한 유대인'이란 표현은 이방인들을 가리켜 경건하다고 할 때(10 : 2) 사용되었던 말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 이 표현은 오순절과 그 규례(민 28 : 26-31)를 지키기 위해 모인 유대인 중에서 율법을 잘 준수(遵守)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 유대인 중 다수가 바벧론에 의해 남쪽 유다가 멸망당한 후(B. C. 586) 각국에서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 약 1 : 1 ; 벧전 1: 1)였다. 한편 '우거하다'(* , 카토이쿤테스)는 말은 보통 한곳에 머물러 사는것을 뜻한다. 특히 헬라어 본문의 9절에서 각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가리킬 때 이 말이 사용된것을 볼 때. 어떤 사람은 예루살렘에 거주했던것으로 짐작할 수도 있다(De Wette). 그러나 8-11절의 내용이 외국에 거주하던 '디아스포라'를 암시하므로 오순절의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온 나그네였을 것이다(Meyer, Alfoed, Knowling, H. Marshall).
=====2:6
이 소리가 나매 - 이 소리는 바람 소리(2절)인지, 방언으로 말하는 소리(4절)인지 주석가들 간에 견해가 각기 다르다. 그러나 ' 소리 '를 뜻하는 헬라어 '포네'(* )가 보통 인간의 소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후자가 더 타당하다(Black, Marshall, Lake, Neil, Bruce).
큰 무리가 모여 - 이는 4절의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소리를 듣고 큰 무리가 모여들었던 것을 뜻한다(Robertson). 이로 보아 제자들이 머물러 기도헹던 장소가 예루살렘 성 안에서 많은 사람이 붐비는 장소에 위치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 '듣고'(* , 에쿠온)란 미완료시상으로서 무리들이 소리를 들은 시각이 한참 방언하고 있을 때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제자들이 방언이 다락방에서 처음으로 일어났고 주변의 골목과 안뜰에서 계속 일어났으며 마지막에는 예루살렘 성전 경계 지역까지 퍼져 나갔던것을 암시하여 주고 있는 듯하다(Richard N. Longenecker). 따라서 제자들의 방언은 잠시 동안이 아니라 상당히 오랜 시간 지속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방언'(* , 디알려토스)은 '자신들의 언어'(NIV, NASB), 곧 외국어들이란 의미요 고전 14장에 언급된 성령의 은사(恩賜)인 방언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각 사람은 자신들이 거주하던 나라의 언어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던 것이다.
=====2:7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 '놀라'(* , 여시스탄토)란 말의 원뜻은 '어떤 장소에서 떠난다'는 뜻인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놀라움을 의미한다. 또 '기이히 여겨'(* , 에다우마존)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그 놀라움이 점점 커져서 어떤 사건이 뜻하는 바를 어떻게 설명할지 몰라서 당황하는 표현이다. 그들은 방언을 말하는 제자들이 갈릴리사람(1 : 11)인데다가 또 배우지 못한 자들이면서도 그와 같이 자신들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 심히 놀란 것이다.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 이 첫째 질문은 제자들의 출신에 관한 것이다. 갈릴리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뛰어난 언어 구사력(驅使力)이 없는 무식한 자들로 여겨졌으므로 나다나엘도 빌립에게 갈릴리에 속한 동네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요1 : 46).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이 다른 나라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모여든 사람들은 놀라움을 표시할 수 밖에 없었다.
=====2:8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것 - '각 사람의 난 곳'은 9-11절에 기록되어 있는 곳을 가리킨다.
=====2: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 - 이사람들은 유대의 동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 지역은 과거 앗수르인들이 북쪽 이스라엘의 열 지파로부터 포로로 잡혀온 자들을 이주시켰던 지역으로(왕하 17 : 6) 가장 먼저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들이 생겨난 곳이었다. 그 후에도 느부갓네살 시대에 유다의 포로들로 말미암아 그 수는 더욱 증가되었다(단 1 : 1, 2) 그들은 나중에 바사 왕국이 쇠퇴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팔레스틴으로 귀환(歸還)하지 않고 살던 곳에 머물렀다. 이 지명에 대해서는 서론 지도 '1세기의 근동' 을 참조하라. 한편 여기서 '우리'는 바대와 메대 그리고 엘람이란 곳에 사는유대인들인지 아니면 그곳에 살면서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인지 분병하지 않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곳에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 추정한다(Bruce, Ralph Earle, Hervey, W. Neil). 그러나 10절 하반절의 진술로 미루어 보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뿐 아니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도 포함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 메소보다미아 - 티그리스 강과 유브라데 강 사이의지대로 비옥한 초생달 지역(Crescent)으로 잘알려져 있다. 유대인들은 그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바벧론 제국에 의해 B. C. 589년 이후에 포로로 잡혀가서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1세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메소보다미아와 그 인접지역에 정착해 살던 유대인들에 대해 많은 것들을 언급하였다.
=====2: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 아시아와 가바도기아의 중간에 위치한 로마의 행정 구역이었다.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 유대인들은 B. C. 6세기초엽부터 계속 애굽에 거주해 왔다. 예수 당시 애굽에는 유대인이 백만 명 가량 살았는데 알렉산드리아의 다섯 구역 중에 두 구역의 전 주민이 유대인이었다고 한다(Philo, on Flaccus 6, 8). 애굽의 톨레미 1세(Ptolemy )는 그의 왕권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하여 많은 유대인들을 구레네에 정착시켰는 그때에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의 여러 지방에 유대인들이 흩어져 살게 되었다(6 : 9 ; 11 : 20 ; 13 : 1).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은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와 동격(同格)으로 봐야 할 것이다(R. C. H. Lenski). B. C.2세기 경에 로마에는 유대인 거주지역이 있을 정도로 많은 유대인이 있었다. 본문의 사람들은 B. C. 62년에 폼페이(Pompeii)에 의해 포로로 잡혀왔다가 후에 자유케 되었던 자들로 볼수 있다. 
본절에서 로마에서 왔던 사람들 중에 나면서 부터 유대인들이었던 사람과 이방인 개종자들이 '둘다'(NVI와 NASB 는 both를 사용함)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로마에서 이방인들을 개종시키는 유대인의 활동이 상당히 활발했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 이란 곧 재종자로 말하는데 유대인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고 그들의 의식을 준수한다는 점에서 유대인들과 교제를 누리도록 허용된 이방인을 가리킨다.
=====2: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 그레데는 발칸 반도 남방의 섬이고 아라비아는 홍해에서 유브라데에 이르는 지역, 곧 시리아와 팔레스틴 동쪽 지방에 있는 나바티안 왕국(the Nabataean)을 가리킨다. 
누가는 지금까지 15개국(또는 지방)에서 살던 유대인 또는 이방인 개종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였던 것을 일일이 열거했다. 서론의 지도를 통하여 보는 바처럼 열거된 그 나라들은 당시 지중해를 중심한 근동과 유럽지역에까지 획장되어 있었다. 이것은 앞으로 복음이 이처럼 세계 각국에 각 나라의 말로 전파될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4절 ; 창 11 : 1-9 참조).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 이 말은 8절에서 말했던 것을 다시 강조한 말이다. 그 강조점 소유격 '우리의' 란 말에 있다(R.H.Lenski). '우리'가 각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 모두를 지칭하므로, 본절에서는 그들이 속한 지역의 방언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의'란 소유격이 첨가되었다.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 여기에서 말한 '하나님의 큰일을'(* , 타 메갈레이아 투데우)이란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은 특별한 사실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하셨던 구원의 전 사역에 관한 것을 말한다(H.Bavinck). 사도들은 성령이 부어지자마자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나님의 큰 일'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은 사도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사 이 큰 일을 깨닫고 자랑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러한 이적(異蹟)은 이미 예수가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던 것으로(요 16 : 13. 14) 본절에 특별히 언급되어 약속의 성취를 보여준다.
=====2:12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 '의혹하여'라는 말은 '완전히 당황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디아포레오'(* )의 미완료형으로 신약성경에서 누가만 사용한 독특한 용어다(5 : 24 ; 10 : 17 ; 눅 9 : 7 ).이 동사의 시제가 암시하듯이 그들은 계속해서 놀라고 당황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어찐 일이냐 하며 - 모여든 무리들은 사도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의심을 가진 사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긍정적인 관심을 보인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 조롱하는 어떤 이들이 있었음을 볼 때 부정적인 시각을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13
또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 '어떤 이들'이 9-11절에 언급된 사람들을 가리키는지 또는 그외 다른사람들을 가리키는지 명확지 않다.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팔레스틴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도 그 곳에 많이 왔을 것이다(14절). 따라서 누가는 조롱한 자들이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라 방언하는 소리를 들은 불특정인임을 지칭하기 위해 단순히 '어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 바울이 아덴에서 죽은 자의 부활을 주제로 전도하는 것을 듣고 기롱한 사람들이 있었다(17:32). 또한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으로 말하면 '미쳤다'고 생각할 위험이 있다(고건 14 :23). 이처럼 '자연인은 저들의 무지와 수치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초자연적인 사실을 자연적인 원인으로 돌리는 법이다'(Bengel). 
한편 '새 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글류코스'(* )로 '감미로운'을 뜻하는 '글뤼퀴스'(* )에서 파생된 용어다. 본래 '글류코스'는 발효(醱酵)되지 않은 포도즙을 의미했다. 본절에서는 아마 발효되기 시작한 감미로운 포도즙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2:15
제 삼시니...취한 것이 아니라 - 유대인들은 낮의 시간,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를 열 둘로 나누었다. 제 삼시란 아침 9시로 유대인들의 기도 시간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 시간에 술을 마시지 않았다(살전 5 : 7).1세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 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제 4시까지는 식사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2:16
이는 곧 선지와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 이 구절은 요엘의 예언(욜2 : 28-32)이 성취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베드로는 요엘서의 예언 부분들을 상세하게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가 없이 그 예언 성취 자체에만 모든 강조점을 두고 있다. 또한 베드로는 신약의 모든 저자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한 전형적인 인용의 기본 형태, 곧 '이것이...이다'(* ,투토에스틴)라는 방법을 따라 요엘서를 인용하고 있다.
=====2:17
하나님이 가라시대 - 베드로 자신이 인용한 구절들의 중요성과 엄숙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명백히 하기 위하여 이말을 사용했다. 본 구절 이후에 인용된 구절들이 약 800여 년 전에 주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라사대' 란 동사를 현재형으로 표현한 것은 그 예언이 불변(不變)의 진리임을 보여주고 있다.
말세에 - 욜 2:28의 맛소라 본문(MT. ; 욜 3:1)이는 '이후"(* , 아하 레이 켄)로, 70인역(LXX ; 욜 3:1)에는 '이(일)후'(* , 메타 타우타)로 표기되었으나 베드로는 "말세'라는 표현으로 대체시켰다. 유대인들의 말세란 엄밀히 말해서 메시야가 오시는 때를 가리킨다(사 2 : 2 ; 미 4 :1). 베드로가 이 말을 오순절날에 임한 성령 강림과 관련하여 사용한 것을 볼때 이 말은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까지를 지칭하는 종말 개념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종말 개념은 신약 시대에 와서 생겨난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내가 내 영으로 - 이 말은 원래 '내 영으로부터'(* ,아포 투 프뉴마토스무)란 의미로 70인역(욜 3 : 1)의 인용구다. 이는 성령을 각 사람에게 부어 주실 것을 가리킨다(딛 3 : 6).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 "모든 육체'란 '모든 사람'을 뜻한다. 모든 사람이 흩어진 유대인들만 가리킨다는 견해(Knowling) 가 있으나 이는 타당하지 않다. 그 이유는 본서의 전체적인 문맥에 비추어볼 때(10 : 45참조) 오순절 성령 강림이 복음의 우주적인 확산을 상징하는 사건일 뿐 아니라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준다는 말은 이후에 있게 될 성령의 보편적인 강령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모든 육체란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Meyer).지금까지 성령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위해서 유대 지역에서 제한적(制限的)으로 활동하셨으나 오순절 이후부터는 온 세상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셨다.
너희의 자녀들은...꿈을 꾸리라 - '예언', '환상', '꿈'은 모두 구약 시대에 어떤 특수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계시 방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오순절을 기점으로 하여 모든 사람이 누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신약 시대에서는 모든 사람이 성령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는 모든 사람이 믿음을 통하여 성령을 부여받으며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오순절 성령 강림이야말로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이며 그것은 모든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Grosheide).
=====2:18
남종과 여종 - '종'에 해당하는 엘라어 '둘로스'(* )는 히브리어 '에베드'(* )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이말은 구약에서 '사환'(使喚)을 의미하는 '타아르"(* )와는 달리 주인의 재산 일부로서 간주된 '노예'(slave)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둘로스'는 주인에게 충성과 헌신을 다해야 했다. 본절에서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성도를 가리킨다. 
예언할 것이요.- 이 표현이 요앨서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 베드로가 앞 부분과 문장구조를 맞추기 위해 삽입시킨 것으로 추정된다.그래서 베자 사본(D)과 터툴리안(Tertullian)은 이 단어를 생략했다.
=====2:19
기사와...징조를...피와 불과 연기론다 - 혹자는 본 구절과 다음 구절에 묘사된 자연계의 기사와 표적들이 베드로가 설교할 당시의 상황에서는 무리들에게 더욱 호소력있게 작용될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예수를 통하여 여러가지 초자연적인 기사가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잠시 해가 어두워진 사실을 예루살렘 사람들이 목격한 지 불과 7주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F. F. Bruce) 
따라서 이러한 기사와 징조는 '여호와의 날'의 도래에 대한 표시이며 이 날은 심판의 날 곧 "마지막 날'인 동시에 보다 직접적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는(초대 교회 당시를 포함한) 모든 날들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성경 본문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볼 때(눅21 : 25 - 28) 오히려 본절의 표현은 마지막 날 있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묘사로 이해됨이 무난하다. 
한편 '기사'와 '징조"란 다같이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를 표시하는데 전자는 주로 하나님의 이적적 권능(wonders)을 나타내고 후자는 장래 일어날 일이다.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표시(sign)을 가리킨다. 이 '기사'와 '징조'는 '피와 불과 연기'라는 구체적인 표현으로 설명되고 있다.
=====2: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 '영화로운'(* , 에피파네)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하여 사용된(살후2 : 8 ; 딤전 6 : 14 ; 딤후4 : 1 ; 딛 2 : 13) '나타나심'( 8 ,에피파네이아)과 동일한 어근을 갖는다. 따라서 본구절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표현으로서(고존 1 : 8 ; 고후 1 : 14 ; 빌 1 : 10 ; 살전 5 : 2) 심판과 동시에 구원이 완성되는 날을 말한다. 이 '주의 날'은 구약에서도(사 13 : 10 ; 암 8 : 9 등)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 이러한 표현은 예수께서도 세상의 종말과 관련해서 언급하신(마 24 : 29)것이다.
=====2:21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 사람이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기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여기서 '부른다'는 표현을 '기도'로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오히려 본절에서 '부른다'는 표현은 '믿는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롬 10 : 13, 14).
=====2:23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 '정하신'(* , 호리스메네)이란 '고정되어진, 결정되어진'의 의미로 하나님의 뜻을 영원 속에 두었다는 말이다. 이는 하나님이 영원 속에서 예수를 통한 구원 계획을 가지셨다는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은 인간에의해서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유대인의 악한 행위가 하나님의 영원 전에 세우신 계획을 바꿀수 없었던 것이다. 
내어준 바 되었거늘 - '내어준바'(* , 에크도톤)는 동사적 형용사로서 수동분사와 같은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이에 대해 혹자는 이 표현이 유다에 의하여 내어준 바 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한다(Robertson). 그러나 오혀려 본절에서 베드로는 내어준 자에 단순히 유다만 포함시키지 않고 예수에 대해 거짓 증거하고 조롱했던 유대인들도 포함시키고 있는듯하다.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 이 표현은 팔레스틴의 로마 당국자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유대 당국자들에 의하여 선동(煽動)되는 그대로 실행하였던 자들이다(Richard N. Longenecker). 유대교 문헌에서는 이방인들이 '악한자들'(고전9 : 21)로서 종종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고의로 죄를 짓는다거나 또는 단순히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못한 자들이라는 이유때문이었다. 못박아 죽였으나 - 독자들은 그곳에 모인 자들 모두가 예수를 못박아 죽인 것처럼 베드로가 표현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죽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그렇게 표현한 것은 예수를 죽음에 내어주어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개개인의 죄가 아니라 유대 민족 전체의 죄였기 때문이다.
=====2: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 본문에서는 예수의 부활이 법 없는 자들의 어떤 행동과는 전적으로 무관하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엡 1: 19,20)을 따라 되어진 일임을 밝혀주고 있다. 예수의 부활은 본서에서 핵심되는 주제이다(32절 ; 3 : 15 ; 4 : 10 ; 5 : 30 ; 10 : 40 ; 13 : 30-34, 37 ; 17 : 31 ; 26: 23) 여기에서 '사망의 고통'은 히브리어의 배경에 의하면 사냥꾼들이 포획하기 위하여 놓은 덫과 같은 '죽음의 덫', 혹은 '매는 줄'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나 죄가 없으시므로(히 4 : 15 ; 9 : 28 ; 벧전 2 : 21 ; 요일 3 : 5) 그 사망의 올무에 매여 있지는 않으셨다. 그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것이다(고전 15 : 4-6).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수 없었음이라 - 이 구절은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말이다(요 20:9). 사망조차 예수 위에 왕노릇 할수 없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베드로는 예수가 항나님의 아들되신 권위를 입증하고자 했다.
=====2:25-28
베드로는 자신의 주장을 확증하기 위하여 구약의 시편(16: 8-11)을 인용한다.
이는 자신이 8절에서 예수에 대하여 말한 바를 성경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시 16: 8-11은 대표적인 메시야 예언에 대한 기록 중 하나로서 메시야의 부활(復活)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이 예언의 말씀을 들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가 바로 메시야인 것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베드로의 이와같은 논중은 예수 자신에 의하여 세워진 해석에 기초하고(막12: 35-47 참조), 부활 이후의 기독교 전통에도 부합되며, 또한 그 당시에 일반적으로 인용되었던 미드라쉬의 제반 해석 방법과도 일치되게끔 표현된 하나의 논증이다(Richard N. Longenecker). 이 부분의 각절 주석은 본서의 시편 주석을 참조하라.
=====2:29
형제들아 - 이 말은 헬라어 본문에 따라 직역하면 '사람 형제들아'라는 말이다. 이는 '유대인들아'(14절)라는 말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아'(22절)라는 말보다 친근감 있는 표현이다. 베드로는 이제까지 인용한 구약의 맡씀에 대한 결론을 말하려고 공손히 청중들의 주의를 끌고있다. 
내가 조상 다윗에 대혀여 담대히 말할수 있노니 - 여기에서 "말할 수 있노니'란 헬라어 본문에 따르면 '말하게 허락하면'의 뜻이다. 흠정역(KJV)에서는 이를 잘 반영하여 '나로 말하게하라'(Let me speak)고 번역했다. 
여기서 베드로는 '조상 다윗에 대하여' 말할 때 자신이 청중들과 형제로서, 이스라엘의 왕통의 선조로서 존경받는 다윗에 대해 말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는 공손한 태도를 나타냈다.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 다윗의 묘는 실로암 못 남쪽에 있었는데(Bruce) 현재는 예루살렘 마가의 기념교회 가까운곳에 다윗의 무덤으로알려진 유대교의 성지가 있다고 전해진다. 다윗은 이처럼 죽어서 그 무덤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기 때문에 앞서 인용한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을을 당치 않게 하실 것'이란 구절은 자신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었음이 분명하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다윗의 묘는 여러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중에 하나는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에 의해 3,000달란트의 돈이 도난당했으며 그후 헤롯에 의해 다른 방도 도굴(盜掘)되어 더 많은 돈이 도난당했다고 전해진다.
=====2:30
그는 선지자라 - 다윗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메시야에 대해 예언했기 때문에 선지자였다(삼하23:2;마 22:43). 비록 구약에서 그가 예언하는 무리 중에 포함되어 예언한 적은없으나 자신의 후손 중에서 메시야가 나올 것을 미리 알고 예언했으므로 영감받은 선지자 중 하나로 여겨질 수 있다.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하심을 알고 -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처음 하신 약속은 삼하 7:11-16에 기록되어 있다. 그 본문에서 언급된 것처럼 '맹세'에 관한 표현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 89:3,35에서는 '내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나의 거룩함으로 맹세하였은즉...', 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말씀들은 하나님 자신의 신실성과 거룩함에 근거하여 영원 불변한 서약으로 맹세하신것을 알수 있다.
=====2:31
미리 보는 고로...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 이 구절은 이미 인용된(27절) 시 16:10에 대한 해석이다. '미리 본다'는 것은 선지자로서 계시와 영감을 가지고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선지자는 예언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를 단순히 예언자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다윗은 장래에 될 일을 미리보고 예언한 예언자이면서 영감받은 시(詩)를 많이 써서 하나님을 찬양한 선지자였다. 다만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언과 관련된 다윗의 선지자의 기능이 강조되고 있다.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 베드로는 이미 22절에서 '예수'를 언급했으며 그 다음부터 예수에 대해 적용된 예언을 설명했으므로 본절에서 '이(사람을)'(* ,투톤)라는 표현을 사용할수 있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를 사용함으로써 다윗에 의해 예언된 메시야가 바로 '예수'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베드로는 자연스럽게 예수의 부활이 예언의 성취임과 역사적 사실임을 강조했다. 
우리가 다 이일에 증인이로다 - 본 구절의 헬라어 본문에 관계대명사 '후'(* )가 사용되어 해석상의 문제를 야기 시킨다. 즉 본 구절은 이 관계대명사의 선행사(先行詞)가 무엇이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1)하나님 : 이에 따라 본문을 직역하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증인이다.' 벵겔(Bengel)같은 학자들이 이해석을 지지한다. (2)앞절 전체 :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를 받는 것으로 이해하여 개역 성경처럼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Meyer, Lenski, Bruce, Ralph Earle). 대부분의 영역 성경도 이 번역을 취한다. (3) 예수 : '우리 모두가 예수의 증인이다' 란 의미가 된다(Alford, Knowling).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의 부활을 강조하여 설교하고 있으므로 '예수'와 '하나님'을 선행사로 취하는 것보다 앞절 전체를 선행사로 보는것이 가장 무난하다. 따라서 베드로는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모든자들이 부활에 대한 증인임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사도들의 중심 메시지였고, 그들은 본절 외에 네 차례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들이라고 강조했다(3 : 15 ; 5 : 32 ; 10 : 39-41 ; 13 : 30,31). 그들은 자기들이 보고 들은것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 여기에서 '오른손으로"란 하나님의 전능과 그의 권능을 상징하는 말이지(엡 1 : 20 ; 히 1 : 3 ; 8 : 1 ; 10 : 12 ; 12 : 2 벧전 3 : 22 비교) 승천한 예수의 위치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다. 물론 허비(Hervey)는 '오른손으로'를 '오른편에'로 해석하여 예수가 승천하여 하나님의보좌 우편에 계시는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여격이 장소로의 의미보다는 방법의 의미를 나타내므로 타당하지 않다. 한편 '높이시매'라는 말은(3 :13 ; 빌 2 : 9)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과 승천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영광스러움을 내포하는 말이다. 이것은 신학적인 용어로 예수의 승귀(昇貴)라 칭한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 예수가 약속하신 성령(1 : 5 ; 요 14 : 16 ; 16 : 13)을 아버지께 받아서 보내는 권능을 얻었다'(1 : 8 ; 요 14 : 26 ; 15 : 26 ; 16 : 7)는 표현은 성경의 곳곳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처럼 성령은 성부께로부터 나와서 성자를 통해 오시는 것이다. 여기서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는 종교 회의의 결정이 비롯되었다(니케아 신조).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 무리들이 보고 들은 것은 성령이 임했을 때 일어났던 현상에 대한 것으로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3절)과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2절)와 백이십 명이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4절)을 가리킨다. 
부어주셨느니라 - (* ,여세케엔). 이 말은 '에크케오'(* ,쏟아버리다)의 부정과거형으로 예수께서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셨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이 말은 선지자 요엘에 의하여 사용되어진 표현으로(17절) 그의 예언이 여기에서 성취되었음을 의미한다.
=====2: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 그는 죽어서 장사되었고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당시에 그의 무덤은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었다.그리고 그의 육체는 무덤에서 썩었고 승천하지못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지금 인용할 이 시는 다윗 자신에 적용시킬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하여 이야기할 것이었다. 
주께서 내주에게 - 이 구절은 시 110 : 1의 인용으로 후기 유대교 시대에 유대교 해석자들이 난해한 문제로삼았던 구절이다. 문제는 '내 주'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문제인데 몇몇 고대의 랍비들은 이 시편을 아브라함과 관련지어 해석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다윗과 관련지어 해석했으며 심지어는 히스기야 왕과 관련지어 해석할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기원후 약 7년이 될 때까지 랍비 문헌에서 이 시편 110편이 메시야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 확실한 중거도 없다(D. M. Hay)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시 110: 1을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여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適用)시킨 적이 있다(마 22:41-46 ; 막 12 : 35-37 ; 눅 20 : 41-44). 베드로는 이 시편이 메시야에 대한 예언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언급했다.
=====2:35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 바울이 '모든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2 :10)라고 가르친 적이 있듯이 '발등상 된다"는것은 항복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시 110 : 1 주석을 참조하라.
=====2:36
그런즉 이스리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 베드로는 본문에 이르러 예수를 주와 메시야로 선포하여 자기 설교의 절정이자 결론에 도달했다. '온 이스라엘'(* ' ,파스 오이코스 이스라엘)이란 문자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모든 집'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매우 강조적인 표현으로 이스라엘 전 민족 또는 종교적 공동체를 가리킨다.
너희가 십자기에 못박은...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 예수는 자신의 메시야 직분을 공생애를 통하여 죽기까지하심으로 완전히 성취하셨고 또한 하나님에 의해 부활하셨으며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므로 '주와 그리스도'란 칭호가 그에게 참으로 합당한 것이다. 또한 이 칭호가 그에게 합당한 이유는 신약의 다른 여러 곳에 나타나는 기독론적인 진술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롬 1 : 4 ; 빌 2 : 9-11 ; 히 3 : 14 ; 요일 5 : 6). 특별히 이 '주와 그리스도'라 는 칭호는 바로 베드로의 메시지의 제목이요 초대 교회 신앙 고백의 내용이었다(롬 10 : 9 ; 고전 12 : 3). 한편 여기서 그리스도에 적용되는 주(* , 퀴리오스)는 아마 구약의 여호와와 일치되는 표현이다. 즉 34절에 인용된 '주께서'가 시 110 : 1에서 '여호와께서'로 언급되었으며 70인역(LXX)에서 '퀴리오스'로 번역되었다. 또한 '여호와'란 표현을 70인역은 거의 대부분 '퀴리오스'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베드로는 구약의 '여호와'와 '예수'를 상호관련시키고 있는듯 하다(Stanley D. Taussaint). 또한 베드로는 설교 속에서 '주'란 표현을 예수와 하나님께 동시에 적용시키고 있다(21,34,39절). 그러므로 여기에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대한 강조적인 표현이라 할수 있겠다. 이 ' 주와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최고의 능력과 영광으로 유대 민족을 로마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모든 민족 위에 높여주는 정치적인 위대한 통치자로서의 주와 그리스도, 곧 메시야를 기대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그들은 예수가 자신들의 메시야 사상과 부합되지 않게 가르치며 활동하는 것으로 생각했기에 '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이다.
=====2: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 '찔려'(* , 카테뉘게산)라는 동사는 '때리다' 혹은 '격하게 찔러 관통하다','실신시키다'의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격심한 마음의 염려와 양심의 가책이 엉켜진 매우 심각한 고통을 의미한다. 호머(Homer)는 '발굽으로 땅을 옴푹 패게 한다'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 내면적 의미를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아무튼 무리들이 '마음에 찔렸다'는 것은 양심의 가책과 더불어 이성적인 죄책감(罪責感)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음을 의미한다(Alexander). 
이처럼 제자들 속에 역사하신 성령은 예수의 예언대로(요 16 : 8-11) 그들의 죄를 책망하는 일을 행하신 것이다. 무리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경청하고 나서 저희의 유일한 소망이며 오랫동안 고대하던 그 메시야를 스스로 배척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는 것을 깨닫자 몸서리치도록 놀라며 '마음에 찔린' 것이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 - 베자사본과 몇몇 서방 본문들에는 '다른 사도들'이란 말에서 '다른'이란 형용사가 생략되어 있는데 이것은 베드로를 사도들과 특별하게 구별하기위한 의도적인 생략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다른'이란 표현이 삽입되면 베드로와 같은 사도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생략될 경우 베드로가 사도들보다 우월한 어떤 권위를 지닌 인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누가가 강조하고있는 것은 초대 교회 안에서의 사도들의 주도권이지 베드로 자신의 주도권이 아니다(Richard N.Longenecker). 사실상 누가는 그의 복음서와 본서에서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베드로를 사도들 가운데서 으뜸되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도들의 대변자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우리가 어이할꼬 - 이 물음은 필사적(必死的인 부르짖음이었다(16 : 30). 바울도 회개할 때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22 : 10).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애통하면서 사도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 것이다. 또한 그들은 이제 성령의 지시를 기다리는 겸손한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회개하다'는 마음의 완전한 변화와 죄의 고백을 뜻한다. 마음의 변화란 전인격에 대한 것으로 죄와 불신에서 떠나 그리스도에게 향하는 인격 그리고 신앙과그리스도를 통한 성결로 나아가는 인격에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회개의 메시지는 본서에 여러 번 반복되었다(3 : 19 ; 5 : 31 ; 8 : 22 ; 11 : 18 ; 13 : 24 ; 17 : 30 : 19 : 4 ; 20 : 21 ; 26 : 20).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 이 말은'너희들 한 명 한 명이 각각 세례를 받으라'는 뜻으로 여기에서 맡하는 세례는 유대교에서 시행해왔던 회개와 사과의 외적 상징으로서의 물세례(13 : 24 ; 18 : 25 ; 19 : 3 ;막 1 : 4)와는 판이하게 구별되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말한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일 뿐아니라 성령을 받는 일과 관련된 세례이기 때문이다. 한편 '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은 나머지 부분과 연관해서 여러 견해가 나올 수 있다. (1)회개와 세례가 사죄의 요인(要因)이 된다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세례가 필수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성경의 진술과 일치하지 않는다. 성경은 어디서나 죄사함 곧 구원은 오직 믿음에 기초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3 : 16 ;롬 4 : 1-17 ;11 : 6 ; 갈 3 : 8-9 ; 엡 2 : 8, 9). (2) 죄사함의 근거로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이 구절에서 사용되는 전치사(* ,에이스)는 '근거하여'라고 번역된다. 따라서 이 구절을 번역하면 '세례를 받으라...너의 죄사함의 근거로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근거하여'란 의미보다 '의도나 방향'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3) '각각...세례를 받고'의 구절을 삽입구로 취하는 견해이다. 따라서 이 견해에 의하면 '회개하여, 죄사함을 얻으라'고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진다('회개하다'는 동사가 복수이고 '너희 죄사함을 받으라'의 '너희'도 복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석상의 난제를 피하기 위해 헬라어 본문을 의도적으로 변경할 필요가 없다. 본문을 직역하면 '죄사함을 위하여'란 의미를 지니며 대부분의 영역 성경도 이렇게 번역한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본절에서 단순히 '세례 받으라'는의미로 설명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말을 강조하여 이 이름과 세례를 연관시켰기때문이다. 즉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세례와는 질적으로 다른 예수의 이름에 의미가 구분된다. (1) '그리고' 이 의미는 '카이'의 일반적인 용법이며 본절에서도 '그리고'로 번역될 수 있다. 이렇게 번역될 경우 본구절과 앞구절은 단순히 대등적일 뿐 인과 관계가 없다.(2)'그리하면' : 이 의미는 '카이'의 특별한 용법이다. 이 번역을 취하면 앞 구절과 본 구절은 인과관계에 놓이게 된다. 즉 회개와 죄사함을 위한 세례가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는 조건이 된다. 그런데 앞 문장이 명령문이므로 여기서 "카이'는 두번째 의미로 번역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성령을 선물로 - 한편 '성령을 선물로'란 표현을 직역하면 '성령의 선물'(the gift of the Holy Soirit, NIV ;성령의 은사들)과 구별되어야 한다. 전자는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께서 보내신 성령 자체이시며, 후자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며 그 유익을 위하여 각 사람 에게 나눠주시는(고전 12 :11)성령의 은사들을 말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개역성경처럼 번역되는 편이 타당하다.
=====2:39
이 약속 - 이것은 예수께서 하신 약속이며(1 : 4) 또한 선지자 요엘이 예언한 약속으로서(욜2 : 28-32)죄사함과 성령의 은사(38절)를 포함한 것이다.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 베드로는 이 약속이 자기 설교를 듣는 청중들(너희)과 그들의 자녀들(너희 자녀) 그리고 모든 먼 지방(나라)에 있는 자들(모든 먼 데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이 구절에서'모든 먼 데 사람'이라는 표현을 장차 태어날 유대 자손들에 대한 언급으로 보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먼 데'(* , 마크란)라는 단어가 70인역 (LXX)에서나 신약의 어느 곳에서도 시간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용어는자연히 공간적(空間的)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Richard N. Lingenecker). 그러나 이렇게 해석할 때 '먼 데'라는 말이 절대적으로 디아스포라에게만 해당되는 것인지(Meyer, Wendt)이 이방인도 포함한 것인지(Bengel, Alford, Alexander, Knowling)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나 유대인과 이방인이 조금의 차별도 없이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 것을 고려할 때 베드로가 여기에서 유대인만 지칭하고 이방인을 제의시켰다고는 볼 수 없다. 특히 '너희'란 표현속에는 팔레스틴에 거주하는 유대인들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및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포함되므로 '먼 데 사람'은 유대교 밖에 있는 이방인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따라서 누가는 본문의 '먼 데'라는 말을 22 : 21에서와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2:40
또 여러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 '여러 말' 이란 누가가 본문에서 기록한 것보다 더 많은 말을 베드로가 하였다는것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확증하며'(* ,디아마르틔로마이)란 동사와 '권하여'(* , 파라칼레오)란 동사에 접두어(prefix) 로 덧붙여진 전치사들(* , '디아' * , '파라')은 본래적 의미에서 파생되었으나 강조적으로 사용된다. 곧 이 전치사들은 마르튀레오(* , '증거하다'), 칼레오(* , '부르다')라는 원형 동사에 강의적(强意的)인 의미를 부여해 준다(R.N.Lonfenecker).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 당시의 세대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를 거역하고 십자가에 못박았기에(눅 11 : 29 ; 17 :25)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눅 9 : 41)요 '악한 세대'(마 16: 4; 17: 17)였다. 패역한 세대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은 구약에서도 보편적으로 인정되었다(창 7 :22;19 : 24).그러나 그러한 불신앙 가운데서도 유대인들이 회개한다면 그들은 그 세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마21 :41 - 44 ; 22 : 7 ; 23 : 24 - 24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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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 이 말은 모든 사람을 포함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말이다. 이는 베드로의 '말'(* , 톤로곤)에 찬동하여 수긍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 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 혹자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확성기(擴聲器)도 없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을수 없으며 또한 그 당시의 예루살렘 인구가 통틀어 25,000-30,000명에 불과했으므로 3,000명의 회개 사실을 부정했다(Haenchen). 이에 대해 롱게네커(Richard N.Longenecker)는 다음 두 가지 근거로 그 견해를 반박했다. (1) 그는 크라이슬러(B. C. Crisler)가 팔레스틴 지방에서 실험한 결과를 따른다. 즉 그는 팔레스틴에서는 설교자가 어떤 위치에 있을 때 소리의 반항음에 의해 수많은 무리가 들을 수 있는 설교를 할 수 있었다고 진술했다. 아마 예수도 이러한 지리적 입지를 고려해서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할 수 있었을 것이다. (2)그는 '더하더라'는 동사가 미완료 과거형으로 사용된 점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것은 더해지는 수가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설교의 결과로서 더해지는 과정이 계속 있었음을의미한다. 즉 3,000명의 대중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한꺼번에 반응했다는 의미가 아님을 보여준다. 따라서 3,000이라는 수효 자체는 부정될 수 없다. 
한편 본 구절에서 3,000명이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도 학자에 따라 문제시 된다. 왜냐하면 3,000명이나 되는 사람이 세례를 받을수 있는 곳은 요단강뿐인데 베드로의 설교 장소는 예루살렘으로서 그 만큼의 수효가 세례 받기에는 적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난제는 다음 두 가지로 해결될 수 있다.(1) 3,000명이 일시에 세례 받은 것이 아니라 분산되어 12제자에 의해 지속적으로 셰례받았을 것이다(H. Marshall, W. Neil). 즉 제자의 수가 점점 더해진 것처럼 세례도 점진적으로 제자들에 의해 행해졌을 것이다.(2) 여기서 세례를 침례로 이해할 필요는 없으며 굳이 약식 세례로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 3,000명이 예수의 이름을 믿게 된 것을 누가는 보다 실감나는 표현인 '세례'로 언급했을것이다.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 여기에서 '사도의 가르침'은 헬라어 본문에 따르면 문자적으로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번역된다. 
여기서 '사도'는 복수형이지만 '가르침"은 단수형이다. 이것은 사도들이 주께서 허락하신 권위를 가지고 각기 주어진 바 임무대로 가르침에 전력했지만 그 교훈의 통일성(統一性)을 유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이 가르친 내용은 예수님의 말씀들(20 : 35)과 행하신 일들이었다.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여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 여기에서 '교제'와 '떡을 떼며 기도하기'사이에 '그리고'란 접속사가 생략되었으므로 이는 떡을 떼며 기도하는 것이 교제와 동격인 것을 보여준다. 교제(* , 코이노니아)에 있어서 희생적인 사랑의 정신으로 이웃에게 봉사하며 물질적으로 도와 주는 것과 영혼의 교통 곧 기도하는 일은(Bruce) 필수적이라 하겠다. 또한 떡을 뗀다는 것은 성찬과 애찬을 동시에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46절 ; 20 : 7 ; 고전 10 : 16 ; 11 : 23-25). 그런데 46절에서 '떡을 떼는것'과 '음식을 먹는 것"이 서로 구분되어 언급되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본 구절에서 떡을 떼는 것은 예수께서 제정하시고 제자들로 하여 기념하라고 명령하신 '성찬'(눅 22 : 19)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전혀 힘쓰니라"는동사는 미완료과거형으로 어떤 행동 방침에 전심전력을 다하여 지속적(持續的)으로 교제했음을 의미한다(1 : 14 ; 6 : 4 ; 8 : 13 ; 롬 12 : 12 ; 13 : 6 ; 골 4 : 2). 그리고 이 말은 제자들이 '교제'를 매우 중요시했음을 암시한다.
=====2:43
사람마다 두려워 하는데 - '사람마다"라는 말은 44절의 '믿는 사람'과 대비되는데 여기서는 예루살렘의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 대한 수사법상 과장된 표현이다. 
본 구절의 직접적인 의미는 '모든 혼에게 두려움이 되고 있더라'로 공포가 아니라 존경심과 경외심에서 비롯된 두려움을 의미한다(막 4 : 41 ; 벧전 1 : 17). 
사도들로 인혀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 기사와 표적들은 그들이 사도라는 것을 확실히 증명해 보였다(고후 12 : 12 ; 히 2 : 3-5). 이러한 증명을 위해 사도들은 성령을 통하여 표적과 기사들을 많이 행했다(4 : 30 ; 5 : 12 ; 6 : 8 ; 8 : 6, 13 ; 14 : 3 ; 15 : 12). 그것들은 예수께서 지상에있을 때 행하신 기적들이 하나님 나라의 표적들이었던 것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 그들이 각자의 가정을 버리고 한 공동체 생활을 구성한것은 아니었다. 여기에서 '있어'란 미완료 과거형으로 신자들이 늘 함께 모이고 있었다는 것을보여준다. 그들은 이전에는 구약의 규례를 준수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모였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함께 모이게 되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은 여러 가지 외적인 요인들을 극복하고 그들을 하나의 몸으로 결속(結束)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영적 백성으로 참된 교제를 했음을 의미한다. 
구약시대에 '언약'(* , 브리트) 언약을 맺는 당사자 곧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결속을 의미했다. 예수를 통한 신약의 공동체도 그 언약에 기초하여 예수 안에 있음으로써 하나님과 결속될뿐 아니라 공동체간에 또한 공동체를 구성하는각 개인간에 영적 결속이 이루어졌다. 
한편 여기에 언급된 사람들이 오순절 성령이 강림했을때 성령을 체험했던 사람들만을 가리키는지 성도의 수에 가입된 3,000명도 포함되는지 분명하지 않다. 아마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한 사람외에 예루살렘에 거주하면서 예수를 믿게 된 자들이 교제에 참여하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외국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은 오순절 절기 행사가 끝난 후 자기들이 거주하던 나라로 돌아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 상호간에 이루어진 영적인 일치는 서로 필요한 물건을 공유하는 생활의 형태로 표출되었다.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는 것은 공산주의와 같은 방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물건을 서로 통용하려고 했고, 모든 재산을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공동의 유익을 위하여 내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공동체는 또한 토마스 모어(Thomas More)와 캄파넬라(Campanella)가 꿈꾸던 이상향과도 다르다. 이들에게는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는 성령이 빠져 있으며 사랑도 강조되지 않는다. 이들의 이상향은 원시 시대의 공동체 생활과 유사한 반면, 성령에 의한 공동체는 철저히 사랑이라는 원리와 언약이라는 결속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유지된다는 점에서 뚜렷이 구별된다.
=====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 여기서 묘사된 유무 상통(有無相通)의 현상은 오직 성령의 하나되심을 따라 이루어진 특이한 현상을 보여주는 일례라 하겠다. 
이러한 현상은 성령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신 예루살렘 교회에 한정되었고 그외 다른지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이것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큰 일을 하도록 하셨는가 를 보여주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특이한 현상이라 하겠다. 특히 예루살렘 공동체는 바울을 통해 이루어진 이방인 공동체와 이 점에서 구별된다. 이방인 공동체에서는 결코 유무 상통의 흔적이 발견되지않고 오히려 사유 재산이 인정되었다(고전 11 : 21, 22).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 성령을 받은 초기 예루살렘 성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이는 유대 전통과 관습에따라 행동함으로 그들의 신앙을 표현하였다. 이는 아직까지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아무 불화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는 성전과 성전 바깥뜰 동편에 있는 솔로몬 행각이었다(3:11; 5: 12). 그들은 거기서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예배와 찬양을 드린 것이다. 그러면서 또한 성전에 오는 유대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도 제자들은 성전에서 모임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비록 그들이 계속해서 모이기를 힘썼지만 전적으로 유대인들의 방식과는 달랐다. 유대인 들은 대부분 율법의 형식과 그에 따른 관습에 의해 모였으며 제사를 드렸으나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성령에 의해 자발적(自發的)이요, 기쁨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모였다(5 : 41 ;8 : 8 ; 11 : 23 ; 12 : 14 ; 13 : 48,52 ; 14: 17 ; 15 : 3, 31 ; 16 : 34 ; 21 : 17).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 여기서 누가는 성전에서의 모임과 집에서의 모임이 구분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본 구절의 '집에서'가 헬라어 본문에서 매우 애매한 표현으로 언급되어 있다. 즉 이 말의 헬라어 '카트 오이콘(* )에서 전치사 '카타'(* )를 어떤 의미로 취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의미상 차이가 생긴다.(1) 다른 집으로'로 번역될 수있다(KJV). (2) 선택의 의미 ; '어떤 집들 중에 한 집에서'란 의미를 나타내게 된다. (3)장소의 의미 ; '집에서'란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런데 '오이콘"은 단수이면서 관사가 없다. 이 말은 떡을 떼는 집이 특별하게 정해져 있지 않음을 시사한다. 따라서(1)의 번역이 가장 타당하지만 의미상 RSV 나 NIV 처럼 '그들의 집에서'(in their homes)라는 번역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 말이 ' 그들 각자의 집에서' 란 의미로 표현된다면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여기서 떡을 떼는 것은 각 가정에서 음식을 먹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성찬과 애찬의 의미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넓은 공간이 있는 집을 택해서 하루씩 돌아가면서 모였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기쁨이 넘쳐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며 모임을 갖고 음식을 나누면서 교제를 나누었다.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 이미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최고의 축복을 발견했으므로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찬미는 자발적인 마음의 표현이었다. '하나님을 찬미한다'는 표현은 누가가 즐겨 사용한 표현으로서 신약성경에서 9번 언급된 중에 누가가 7번 사용했다(본절 ; 3 : 8, 9 ; 눅2 : 13,20 ; 19 : 37 ; 24 :53 ; 롬 15 : 11).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 이와 같은 초대 교회의 분위기는 총독이었던 플리니우스(Plinius)가 트랴안(Trajan)황제에게 보낸 서신에서 잘 나타나있다. 즉 그는 박해로 인해 비밀리에 모이는 기독교 공동체를 은밀히 조사해 본 후 '그들은 법이상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보고함으로써 초대 교회 기독교인들의 영적, 윤리적 삶이 칭송받을 만했음을 로마의 정치가로서 입증시켜주었다. 
이처럼 성령 충만한 성도는 세상의 법을 초월해서 살게 되므로 온 백성의 칭송(稱頌)을받을 수 있다. 반면에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백성에게 욕을 당한다.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 이 구절에서 '주께서'란 말이 헬라어 본문에서 첫머리에 나타나는데 이것은 단순히 문법상의 이유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는 사람을 더하게 하시는 분이 예수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또한 '구원받는 사람을'이란 말도 반복을 나타내는 수동태 분사로서 구원의 주체가 예수인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더하게 하시니라'(* , 프로세티데이 )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계속 더하게하셨다'는 의미이다. 이 말에 대하여는 41절 주석을 참조하라. 누가는 지금까지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생성을 기록하면서 그것이 성공적이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누가의 이러한 강조는 단지 성령 강림의 역사에 대한 첫 전주곡에 불과한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후로 계속되어질 누가의 기록은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복음이 예루살롑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확장되는 승리의 찬가들로 가득차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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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에서는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이 기도에 힘쓰며 복음 사역을 준비하는 모습을 다루었거니와 본장에는 오순절이 이르매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는 놀라운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성령의 강림(降臨)으로 인하여 제자들의 본격적인 전도사역이 시작된 것이다. 본장의 내용을 상고하기 위하여 다음 사항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1) 구조적 특징. 본서의 내용을 인물(人物) 중심으로 나눈다면, 베드로를 주역(主役)으로 한 전반부(1-12장)와 바울을 주역으로 한 후반부(13-28장)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전반부는 '베드로행전'으로, 후반부는 '바울행전'으로 칭할 수도 있다.
그런데 본서의 이 두 부분은 내용상 평행 구조를 이룬다. 즉 본장에는 성령의 강림하심과(1-4절) 베드로의 설교가 이어지고 있으며(14-40절) 3장에는 앉은뱅이를 고치는 베드로의 이적이 소개되고 있으며(3:1-10). 뿐만 아니라 4장 이후에는 베드로의 전도사역이 계속해서 소개되고 있으며 10장에서 고넬료 가(家)를 전도하는 데서 베드로의 전도 사역이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12장에 이르러서는 베드로의 투옥(投獄)과 탈옥(脫獄)으로 끝을 맺고 있으며 베드로의 최후에 관한 특별한 언급이 없이 갑자기 상황이 바뀌어 버린다(12장).
이와 유사한 구조가 후반부에서도 진행된다. 즉 성령께서 나타나 바울과 바나바를 이방 선교자로 세우시며(13:1-3) 유대인들을 향하여 바울이 설교하며(13:16-40) 또한 앉은뱅이를 고치는 이적을 행한다(14:8-13). 본서의 후반부는 바울의 투옥으로 끝나며 역시 바울의 최후에 관한 별다른 언급 없이 이야기가 중단된다.
그러나 전반부와 후반부 모두 복음 전파의 성공에 관한 보고(報告)로 각각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다(12:24;28:30,31). 저자는 유대인을 위한 사도의 대표자로 베드로를, 이방인을 위한 사도의 대표자로 바울을 부각시키고 있는 바, 이 두 사람은 한 성령의 지도(指導) 아래 동일한 사역을 감당한 것이라 하겠다.
(2) 베드로와 예수. 본서에 등장하는 중요한 세 인물이 있다면 베드로와 스데반, 그리고 바울일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이 세사람이 예수의 제자로서 그들의 스승과 일치하는 점이 많다는 사실이다. 특히 본장에서 베드로는 예수의 수제자였던만큼 예수의 공생애에서 사역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예수께서 공생애 초기에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성령을 체험하였거니와(눅 3:21)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도 사역을 시작하기 전 오순절에 성령을 체험하였으며(1-4절),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첫 설교와 함께 공생애를 시작하셨듯이(눅 4:16-30) 베드로도 예루살렘에서 첫 설교를 시발점으로 그의 복음 사역을 시작하고 있다(14-40절).
또한 베드로가 중풍병자를 고친 이적이나(3:1-10) 죽은 다비다를 살린 사건 (9:36-43)은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들과 병행을 이룬다(눅 5:17-26;7:11-17). 그밖에도 예수께서 백부장의 초대를 받으셨던 것처럼(눅 7:1-10) 베드로도 백부장 고넬료의 초청을 받았으며(10:22), 예수께서 이방인들과 접촉한 이유로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당하셨듯이(눅 7:36-50) 베드로도 같은 비판을 받았다(11:1-9).
이 같은 병행 기사(記事)를 통하여 저자 누가는 예수의 부활과 승천 이후 복음 사역이 그의 제자 베드로에 의하여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표명(表明)하고자 하였다.
(3) 성령 시대의 시작.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에 견줄만한 특이한 사건으로서 구약의 성부(聖父) 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한 성자(聖子) 시대에 이은 성령(聖靈) 시대의 시작을 의미한다. 제3위(位)이신 성령 시대로 접어드는 문턱에서 성령 강림 사건은 매우 의의있는 사건이었으며 어떤 한 개인의 주관적인 체험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공개적으로 체험한 사건이었다.
성령 시대란 교회 안에 성령께서 임하여 활동하시는 새로운 시대이다. 특히 새 시대를 여는 획기적인 사건으로서의 방언 현상은 온 인류의 화해(和解)의 상징으로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사도들을 통하여 계속 진행될 것임을 암시한다.
한편 본장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단락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 사건을 다루고 있고(1-13절) 둘째 단락에는 성령 강림에 이어지는 베드로의 설교가 수록되어 있으며(14-41절) 마지막 단락에는 성령 강림 이후에 변화된 교회 분위기가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42-47절).
1. 오순절 성령 강림(2:1-13)
본서는 성령의 역사(役事)를 그린 책이라고 할 수 있는 바, 예수의 승천 후 약속대로 보내어진 성령 강림의 역사와 그의 활동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본장에 소개되는 첫 기독교 오순절(The First Pentecost)에 일어난 성령 강림 사건은 신약성경에서 매우 독특한 사건으로 유일회적 현상으로 나타난다. 다음 세 가지 항목을 통하여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1) 사건의 역사적 배경. 본문은 예수께서 약속하신 바, 성령을 기다리며(1:4,5)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120문도(門徒)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이다. 여기에서 성령이 오순절에 강림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오순절'은 유월절 다음날부터 계산하여 50일째 되는 날로서 구약성경에서는 '맥추절'(출 23:16), '칠칠절'(출 34:22;신 16:10), 또는 '처음 익은 열매드리는 날'(민 28:26)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이 때가 보리를 수확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오순절 절기를 지킴으로써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의 첫 수확을 상기(想起)시키며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순절은 새로운 삶의 출발을 의미하는 날이었던 것처럼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교회 시대의 새로운 장(場)을 여는 뜻깊은 사건이었던 것이다.
한편 예루살렘은 절기를 지키려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 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으며 성대한 축제가 벌어졌거니와 바로 이때 성령 강림의 사건이 일어났으니 성령 강림은 교회 역사상 가장 기쁜 사건이었다.
(2) 성령 강림의 현상. 본문의 오순절 사건은 구약의 시내산 사건(출 16-25장)과 그 현상에 있어서 병행을 이룬다. 즉 성령이 강림하는 모습은 율법이 시내산에서 공포(公布)되는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본문에는 성령이 임할 때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나타났다고 표현되어 있다. 시내산 현현(The Sinai Theophany) 사건에서는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로 인하여 온 산이 진동하고 연기가 자욱했으며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 강림하셨다고 묘사되어 있다(출19:16-30).
또한 이 두 사건에서 공통되는 특징은 백성들이 혼연 일체(渾然一體)가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받았고 기독교 공동체는 방언을 받았다.
이 같은 현상들은 구약과 신약에서 각기 신의 현현을 나타내는 유일회적인 독특한 현상으로서 모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3) 성령 강림의 결과. 성령이 교회에 나타나면서 일어난 첫 결과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방언이라는 것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 전혀 배우지도 않은 각 나라의 말, 즉 외국어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전혀 들어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상상조차 하지못한 다른 나라의 말이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모든 인간의 언어 장벽(言語障壁)이 무너져 버렸으니 비록 이는 일시적인 현상이기는 했지만 성령만이 하실 수 있는 참으로 놀라운 기적적 사건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첫 기독교 오순절에 특이하게 일어났던 일로서 그 이후에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며,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방언(고전 12:4)은 오순절의 방언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여하튼 오순절 성령 강림의 결과로 일어난 방언은 성령의 능력을 증명해 주는 것으로서 당시 예수의 승천으로 인하여 불안해 하던 제자들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는 기폭제(起爆劑)가 되었다. 그들은 이 놀라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을 가로 막고 있는 모든 장벽들이 무너지고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어야 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 오순절 성령 강림의 의미.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구속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에 버금가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교회사의 큰 분수령을 이루었던 본사건의 구속사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오순절과 그리스도.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신 분은 그리스도시다.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던 자기와 대조시켜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이'로 묘사한바 있다(요 1:33). 그런데 이 예언은 오순절에 내린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하여 성취되었다. 따라서 오순절의 진의(眞意)는 그리스도 사역의 성취라는 시각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베드로도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성령의 오심을 설명하였고, 바울도 그리스도를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해석하면서 성령의 오심을 기독론적 시각으로 보았다(고전 15:45). 오순절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며 승귀하신 그리스도의 불가시적(不可視的) 현림(現臨)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의 은사 역시 교회에 주시는 그리스도 자신의 은사라고 할 수 있다.
(2) 오순절과 교회. 오순절은 하나님의 새 언약 공동체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설립한 날이었다. 오순절에 내린 성령은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이자 하나님의 성전인 그리스도의 몸을 세웠던 것이다(고전 3:16;엡 2:22). 구속사 속에서 이처럼 결정적이고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 오순절 성령 강림은 또다시 되풀이 될 수 없는 유일회적 사건이다.
(3) 오순절과 성도. 오순절 성령 강림은 그 의미나 성격상 구속사적으로 일회적 사건이기 때문에 오늘날 성도들은 그것과 동일한 사건을 체험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놀랍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순간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며, 성경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 속에서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게 된다(고전12:13;엡 3:16,17,19).
* 사도행전의 방언과 서신의 방언 비교 연구. 오순절에 일어난 특이한 사건은 방언의 이적에 있다. 이 방언의 이적은 인간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육적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사건이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본문에 소개된 방언은 역사상 유일회적인 사건이었던 바, 오순절 이후에 나타난 방언과는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본주제 강해에서는 본서의 방언과 바울 서신의 방언을 도표를 통하여 비교해 보고자 한다.
2.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2:14-41)
오순절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든 유대인들은 제자들의 방언을 듣고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였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는 자신들에게 임한 성령의 역사와 외적으로 나타난 방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담대하게 그들 앞에 서서 설교하였다. 본문은 본서에 수록되어 있는 베드로의 아홉 개의 설교(1:16-22;2:14-41;3:12-26;4:8-12;5:29-32;8:20-25;10:34-43;11:5-17;15:7-11) 중 두번째의 것이다. 본문에 나타난 베드로의 설교를 상고하기 위하여 다음 항목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설교의 구조. 본서에 나타난 베드로의 설교들은 구조면에서나 내용면에서 거의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바울의 설교들과도 비슷한 점이 많은 것이 나타난다. 이는 본서가 변증적이며 선교적인 의도에서 기록된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에 베드로가 행한 오순절 설교의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다른 설교들과도 마찬가지로 직접적 담화로 시작되고 있으며(14a;3:12a;4:8a;13:16b ;14:15a;17:22a), 주의를 기울이라는 호소가 이어지며(14b;4:10a;10:37a;13:16b) 청중들의 오해를 지적하고 있다(15,16절;3:12b;4:9;5:29;14:15a;17:22,23). 다음에는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으며(17-21절;3:13a;5:30,31;17:24a) 기독론적 메시지가 등장한다(22-28절;3:13-15;4:10:5:30;10:37-42;13:27-31). 기독론적 메시지는 구약성경을 통해 다시 증명되고(25-31,34,35절;3:18,21-29;4:11;10:43;13:33-37) 마지막으로 회개에 대한 권면과 구원의 선포로 끝을 맺는다(37-40절;3:19;4:12;5:31;10:43;13:38,39;14:1 5;17:30).
(2) 중심 메시지. 당시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구약성경을 인용하였다.
본문에서도 베드로는 선지자의 말을(욜 2:28-32)을 통하여 오순절 사건의 진의(眞意)를 설명하였다. 즉 성령의 강림의 역사는 말세(末世), 즉 메시야 시대에 일어나는 징조(徵兆)이며 누구든지 메시야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겠거니와 이는 구약성경에 이미 약속된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의 참 메시야되심을 증언하였다.
사도들이 행한 설교의 핵심은 '예수의 메시야되심'이었던 바, 본문에도 독특한 기독론적 케리그마(Kerygma)가 등장한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는 것'이 바로 기독론적 케리그마의 핵심이다. 그는 시편의 말씀(시16:8-11;110:1)을 근거(根據)로 본격적인 기독론을 전개하였다. 즉 하나님이 다윗에게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의 왕위에 앉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삼하 7:12,13;시89;4;132:11)을 다윗이 시편에서 메시야의 부활을 예언한 것과 동일한 것으로 보고, 하나님이 예수를 살리셨으므로 예수는 곧 메시야라는 결론이다. 이러한 기독론적 케리그마가 당시 사도들이 행한 설교의 중심 메시지가 된 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설교의 결과.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의 설교는 단번에 3천 명이 회개하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이는 성령 강림 이후에 일어난 최초의 회개 운동으로서 성령의 능력이 과시된 사건이었다. 베드로의 설교에 감화(感化)된 무리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아 탄식하였거니와 이에 베드로는 회개를 촉구하고 그들에게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은 것과 그리하여 패역한 세대(世代)에서 구원을 받을 것을 명하였다. 회개하여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된다는 약속(38절)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하신 말씀으로서 베드로의 설교에는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의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무리들 중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있었을 것이며 그들은 모두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받아야 할 자들이었던 것이다. 3천 명이나 회개한 본문의 사건은 성령 안에서 민족과 계급과 성(性)의 모든 담이 헐리고 하나가 됨으로써 모든 성도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새로운 시대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 그리스도의 승귀(昇貴) 신분. 그리스도의 승귀 신분이란 그리스도께서 가장 낮은 인간의 위치로 비하(卑下)하셔서 구속 사역을 수행하신 후 다시 신적인 위치로 돌아가심을 뜻하는 바, 본 주제 강해에서는 다음 네 가지 항목을 통하여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1) 부활.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 요소가 되는 부활(고전 15:14)은 이미 구약성경과 (시 16:10) 예수 자신에 의해서도 예언되었다(마 16:21;20:17-19;막 8:31,32). 예수의 부활은 기전설, 시체 도난설, 착각설 등으로, 또한 부활의 목격은 환상설, 강령설 등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구약성경과 예수 자신의 예언일뿐 아니라 사복음서 저자들의 증언(마 28:1,9;눅 24:13;요 20:19-29;고전 15:6-8) 및 죽음을 불사하고 부활을 증거한 사도들을 통해서도 충분히 입증된다. 예수의 부활은 성도의 부활의 표징이 되었으며(롬 6:4;8:11;빌 3:12), 예수의 부활로 인하여 성도의 구원의 길이 열려지게 되었다(롬 4:25;5:11;벧전 1:3,4).
(2) 승천. 이는 예수의 예언(요 6:62;14:2,12:16:5;20;17)과 누가의 증언(1:9-11;눅24:50,51) 및 사도 바울의 증언(엡 1:20;4:10;딤전 3:16)으로 확실한 보증을 받는 바, 성경에 기록된 문자 그대로의 유형적(有形的) 승천이었다(1:9-11;계 1:7). 그리스도의 승천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가) 원래 신의 처소인 하늘로 올라가신 것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명한다.  (나) 구속 사역의 온전한 완성을 보여준다.  (다) 그리스도의 왕국이 궁극적으로 하늘에서 이루어질 것을 보여준다(요 18:36).  (라) 하나님 앞에서 대언자가 되셔서(요일 2:1) 대제사장적 사역으로 하나님과 성도 사이를 화목하게 한다.  (마) 구원 사역을 위한 성령을 보내시기 위해 승천하셨다(요 16:7).  (바) 성도들이 장차 누리게 될 영광을 보여준다(요 17:24;엡 2:6).  (사) 성도들이 장차 거할 처소를 예비한다(요 14:2,3).  (3)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 이는 예수의 예언(마 26:64)과 베드로(2:35,36;5:31;벧전 3:22)와 바울(엡 1:20) 및 요한의 증언(계 22:1)으로 확실시되는데 장소적인 의미로 해석되서는 안 되며 하나님으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위임받은 상태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성령을 보내어 진리를 깨닫게 하는 선지자적 사역과(마 10:19,20;요 14:26)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적 사역(히7:11,12;8:1,2,6;10:19-22;요일 2:1) 및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왕적 사역(엡 1:20-22;빌 2:9-11)을 수행하신다.
(4) 재림.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령 강림과 분명히 구분되는 것으로서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양상(樣相)을 인격적이며 유형적이며 영광스러운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고전 1:7;4:5;빌 3:20;골 3:4;계 1:17). 재림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가) 인간의 부활을 위하여(요 5:28,29).  (나) 성도의 공중 들림을 위하여(살전 4:15-17).  (다) 성도의 상급을 위하여(딤후 4:8).  (라) 심판을 위하여(마 24:36-51).
3. 초대 교회의 생활 모습(2:42-27)
본문은 초대 교회의 원형(原形)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성령 강림 사건 이후 초대 교인들의 생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사도들의 가르침,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하나가 된 공동체였다. 초대 교회 공동체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자.
(1) 교제하는 공동체. 
초대 교회의 특징을 들자면 첫째로 교제하는 공동체였다고 할 수 있다. 저자 누가는 성령으로 하나가 된 초대 교회 공동 생활의 특징을 묘사하기를,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사귀며 기도하는 일에만 힘썼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여 떡을 떼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먼저 그들이 서로 사귀며 떡을 떼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한몸된 것을 상징하는 이웃간의 영적(靈的) 교제를 의미하고, 기도하며 찬양하는 일에 주력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풍성히 나누었음을 뜻한다. 초대 교회는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올바로 가지려고 애쓰는 공동체였다.
(2) 나누는 공동체. 
초대 교회의 생활에 있어서 두번째로 중요한 모습은 그들이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사용했으며 소유를 팔아 사람의 필요대로 나누어 주는 생활을 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경제관(經濟觀)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가를 계시하고 있다.
예수께서도 부자 청년과의 대화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것을 명령하셨고(막 10:21),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실제로 사유 재산 없이 가룟 유다가 관리하는 공동 기금으로 생활하였다(요 12:6). 초대 교회는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을 본받아 재산과 물건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이 같은 행동은 교회의 요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자발적(自發的)인 사랑의 행위였다. 이로써 초대 교회는 함께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였음을 알 수 있다. 초대 교회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이러한 나눔의 정신을 십분 발휘하여 곤경에 처한 이웃들을 도왔다는 기록들이 앞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롬 15:25,26;고전 16:1-4). 본장에 나타난 경제적 교훈은 구약의 율법과도 일치하는 것이며(신 15:4,5), 사도 바울도 받는 것 보다 나누어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권면함으로써(20:33-35)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경제관을 제시하였다.
(3) 선교하는 공동체. 
끝으로 초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일에 힘쓰는 공동체였다. 저자는 본서 전체를 통하여 건전한 교회상(敎會像)을 제시하고 있는 바, 바람직한 교회는 예수의 구원 사업을 계승하여 선교하는 교회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가 그러했고 베드로, 스데반, 빌립, 바울 등의 사도들이 선교에 일생을 바쳤으며, 안디옥 교회를 위시한 이방 교회들도 선교하는 교회였다. 성령의 강림을 체험함 자의 증거는 바로 복음 전파의 삶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거니와 저자는 이러한 설교를 통해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초대 교회가 날로 부흥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47절), 이러한 강조는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것이다(6:7;9:21;12:24;16:5;19:20).
본장을 통하여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다음과 같으니, 성령 강림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계속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여 인류 구원의 도구로 삼으셨고 마침내 메시야신 예수를 보내셨으며 그의 부활, 승천 후 성령을 보내사 사도들로 하여금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우주적 사업에 동참하는 길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영혼 구원에 힘쓰는 교회, 즉 선교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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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에스겔 37장 1∼10절 = [[성령과 성령의 충만함]]
1.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영
성령은 성경 전체의 첫 사건부터 등장하신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은 삼위일체하나님의 한 인격체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함께 천지창조에 동참하신다. 
성경은 창조사역에 참여하시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의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창1: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1:2는 성령을 “하나님의영(xwr루아흐)”으로 소개한다. ‘루아흐’는 ‘호흡,숨,바람,영(靈)’으로 해석된다 .
‘하나님의 루아흐’가 창조 이전의 무질서하고 아무것도 없고 어둠이 깊은 상황에 나타나 그위에서 “운행하셨다.” 창세기1:2의 “운행하시니라”는 히브리어로 ‘라하프’(@xr)인데, 이는 ‘날개를 퍼드덕 거리다, 떨리다, 너풀거리다, 품에 품다’ 등으로 해석 된다. 창세기 1:2의 동사 ‘라하프’는 신명기 32:11에서 독수리가 ‘새끼 위에 너풀거리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신32:11...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따라서 ‘하나님의 루아흐’ 가 ‘운행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무질서하고 공허하고 어둠이 깊은 창조 이전의 상태에 나타나셔서 퍼드덕거리며 움직인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루아흐’는 이렇게 퍼드덕거리시며 움직이시면서 창조에 참여하신 것이다.
2.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성령의 충만
구약성경에서 성령을 히브리어로 ‘루아흐’로 표현하고 있다면, 신약성경은 성령을 헬라어 ‘프뉴마’(pneu'ma)로 기술한다. 주전3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이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 역(Septuagint)에서 창세기1:2의 ‘하나님의 루아흐’는 ‘하나님의 프뉴마’(pneu'ma qeou')로 번역되었다. 
신약성경 기자는 칠십인역의 번역을 따라 히브리어 ‘루아흐’를 헬라어 ‘프뉴마’로 번역했다. ‘프뉴마’는 ‘프네오’(pnevw)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것인데, ‘프네오’는 ‘바람이 불다,숨을 쉬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구약성경이 성령의 창조사역으로 시작되었다면, 신약성경은 성령으로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잉태된 것으로 시작된다. 
‘루아흐’로 표기된 하나님의 성령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 처럼, 이제는 프뉴마’로 표기된 하나님의 동일한 성령이 마리아의 몸에서 예수님을 잉태한 것이다.
[마1:18..예수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으로 사역하셨고(눅4:1),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분으로 인식되었다(마3:11).
신약시대의 성령의 나타나심의 두드러진 특징은 성령이 ‘충만함’으로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에게 임했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성령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충만함으로 사람들 속에 들어가 거주하지 않으셨다.. 하나님나라의 사역에 필요한 경우 하나님은 구약시대의 예언자들과 사사들에게 성령을 보내셨다. 
구약성경은 성령이 충만함으로 그들 속에 내주하셨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성령의 충만함’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면서 성령의 임재와 관련하여 신약시대의 차별성을 적극적으로 피력한다.
누가복음 1~2장은 예수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하여 예수님의 초림을 준비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했음을 증언한다. 특별히 세례요한, 그의 어머니 엘리사벳, 그의 아버지 스가랴는 모두‘ 성령 충만함’을 받은 사람으로 나타난다.
[눅1:15..이(세례요한)는 그가 주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눅1:41...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눅1:67..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여기서 “충만함”에 사용된 헬라어 원형은 ‘플레도’(plhvqw)이며, ‘채우다, 가득하다, 충만하다, 충만함을 입다, 충만함을 받다’ 등으로 해석 된다. 
이 동사는 ‘핌플레미’(pivmplhmi)로도 표기할 수 있으며,‘핌플레미’는‘완전히 채우다, 충족되다, 정신적으로 충만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도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pneu'mato" aJgivou plhvrh",눅4:1) 광야에서 사십일을 금식하셨다고 기록한다. 
여기서“ 충만함을 입어”에 해당하는 형용사‘ 플레레스’(plhvrh")는 세례 요한과 그의 부모의 성령 충만함을 표현했던 ‘플레도’(plhvqw)에서 유래한 말이다. 
누가는 위의 세 사람처럼 예수님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사역하셨음을 증언한다. 사실 예수님은 성령 충만을 위해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그 자체로 성령 충만 하신 성자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예수님에게 임했음을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증언한다.
[눅3:21-22...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kai; katabh'nai to;pneu'ma to; a{gion swmatikw'/ ei[dei wJsei;peristera;n ejpjaujtovn)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누가의 증거에서 특이한 것은 하나님의 ‘루아흐’, 곧 ‘프뉴마’가 ‘비둘기 같은 형체로 ’내려오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비둘기같은”, 곧 ‘호세이페리스테란’(wJsei;peristera;n)이라는 용어는 창세기1:2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루아흐’가 새와 같이 “수면 위에 운행하신” 것을 연상하게 한다.
“형체로”를 가리키는 헬라어 ‘소마티코에이데이’(swmatikw'/ ei[dei)라는 표현은 성령이 구체적이며 외형적인 모양으로 내려오셨다는 것을 말한다. ‘소마티코스’(swmatikov")는 ‘몸, 신체, 육체, 형체’의 뜻을 가진 ‘소마’(sw'ma)에서 유래한 단어로 ‘몸의, 신체의, 육체적인, 형체의’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에이도스’(ei'jdo")는 ‘보이는 것, 외모, 용모’ 등의 뜻으로 영어로는 ‘the external or outward appearance’로 번역 된다.
누가복음3:22의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에서 사용된 동사는 ‘카타바이노’(katabaivnw)이다. 이것은‘위에서 내려오다, 떨어지다’라는 뜻이다. 
누가는 성령이 비둘기처럼 보이는 ‘구체적인 몸의 형체로’ 예수님에게 내려오신 것을 증거하고 있다.
3.교회가 받은 성령 충만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자신은 하늘의 하나님께로 갈 것이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대신해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있게 할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성령이 이제 제자들과 함께 할 것이며 제자들 속에 들어와 거주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요14:17...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o{ti par j uJmi'n mevnei) 또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kai; ejn uJmi'n e[stai)]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par j uJmi'n mevnei)에서 “거하심이요”(mevnei)의 헬라어 원형은 ‘메노’(mevnw)이며 ‘머물다, 기류하다, 오래 지속하다, 남아 있다,영속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고, 영어로는‘to dwell’로번역 된다. 성령은“너희와 함께”(par jj uJmi'n) 영원히 거주하시며, 성령은 ‘엔휘민’(ejn uJmi'n) 곧 ‘너희 안에’(in you) 지속적으로‘ 계실 것임’을 ‘에이미’(eijmiv)의 미래형 ‘에소마이’(e[somai)로 설명하셨다. 예수님은 신약시대의 제자들에게, 구약시대와는 달리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내실 ‘루아흐’, 곧 ‘프뉴마’는 그들 속에 남아 지속적으로 머무실 것임을 증언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승천 후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예고대로 성령이내려오셨다. 
오순절에 성령은 바람으로 다락방에 가득하게 임재하셨고, 성령의 불이기도 하는 제자들 각 사람에게 머물러있음으로, 제자들은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행2:3-4...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ejkavqisen te ejfj e{na ejkaston aujtw'n)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kai; ejplhvsqhsan a{pante" pneuvmato" aJgivou)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3절의“임하여 있더니”(ejkavqisen)의 원형은 ‘카디조’(kaqivzw)이며, ‘앉게 하다,앉다 ,머물다, 계속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성령의 불이 지속적으로 각사람에게 내렸음을 의미한다. 성령의 불이 지속적으로 내림으로, 제자들은 각자 성령이‘충만하게 채워짐을 받았다’(ejplhvsqhsan).
===구약시대의 성령충만
하나님의 ‘루아흐’, 곧 성령은 구약시대에도 당연하게 활동하셨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함께 주도적으로 참여하셨습니다. 
성령은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했습니다. 성경의 역사에서 제일 먼저 ‘루아흐’가 함께 했던 사람은 꿈의 사람 요셉입니다.
요셉이 이집트의 박사들과 술사들도 해결하지 못한 꿈 해몽에 탁월한 지혜를 보이자 이집트의 왕은 요셉을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창41:38...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여기서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은 문자적으로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루아흐가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루아흐’가 요셉 안에 있어 요셉으로 하여금 자신과 다른이들의 꿈을 정확하게 해석하게 했던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요셉처럼 ‘루아흐’, 곧 성령이 임재를 경험한 인물들이 여럿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그안에 루아흐가 머무는 자’로 인정하셨습니다(민27:18). 여호와의 ‘루아흐’는 사사들에게도 임하셨습니다. 기드온에게 임하셨고(삿6:34), 입다에게 임하셨고(사11:29),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셨습니다(삿14:6,19; 15:14). 심지어는 사울에게도 ‘루아흐’가 크게 임하셨습니다.
[삼상10:6..네게(사울)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하나님의 ‘루아흐’, 곧 성령이 임하시기를...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보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자기 백성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기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성령을 받아 성령과 동행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성령과 동행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사람이 되시기를...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위에서 언급된 사람들 안에 ‘루아흐’가 지속적으로 머물렀다거나 충만하게 채워졌다는 표현이 구약성경에 나타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삼손은 전쟁 중에는 ‘루아흐’의 임재를 경험하지만, 전쟁이 끝나면 육의 사람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기생의 집에 출입하고(삿16:1), 블레셋 여인 들릴라를 사랑하다가(삿16:4) 원수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했습니다(삿16:21).사울 왕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자 여호와의 ‘루아흐’는 그를 떠나갔습니다.
[삼상16:14...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성령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이 떠나지 않으시게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성령은 모든 사람에게 역사하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를 맺지 않고 죄의 열매를 맺게 되면, 성령은 그 사람을 떠나십니다. 기도와 말씀 안에서 성령과 늘 동행하십시오. 성령의 지시하심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성령에게 온전히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성령이 여러분을 떠나지 않으실 것이며, 결국엔 여러분이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약시대에 문자적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기록된 사람은 유일하게 출애굽기에 나오는 브살렐입니다. 
그는 유다지파 훌의 손자이며 우리의 아들이었습니다(출31:2). 
하나님은 그에게 하나님의 ‘루아흐’를 충만하게 채우셔서, 그로 하여금 특출한 지혜와 재능으로 하나님의 성막에 사용할 법궤와 속죄소와 제단과 번제단 등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출32:3...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가지 재주로].
[출35:31..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여기서 “충만하게 하여”는 ‘말레/말라’(alm)라는 동사를 사용했는데, ‘가득하다, 채우다, 충만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영인 ‘루아흐’가 브살렐에게 충만하게 채워져,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가 되는 성막의 거룩한 기구들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의 성막과 기구들은 신약시대에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모형들이었습니다. 브살렐은 ‘성령의 충만함’을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예수그리스도를 섬길 때 주시는 은혜입니다. 브살렐이 법궤와 속죄소, 번제단을만들면서 오실 메시아, 곧 예수그리스도를 증언했다면, 여러분은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증언하시기를... 여러분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다윗의 회개-“성령을 거두지 마소서”
다윗도 구약시대에 성령의 충만을 받은 것으로 인정되는 사람입니다. 사무엘이 다윗의 형들을 제외하고 그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에 하나님의 ‘루아흐’, 곧 성령이 그에게 크게 임했습니다(삼상16:13). 
문자적으로 다윗이 성령의 충만함을받 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브살렐의 경우 처럼 다윗도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었다는 점에서 그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다윗이 성령의 감동으로 시편110:1에서 그리스도를 주로고백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다윗이 성령충만을 받았다는 것을 뒷받침해 줍니다.
[마22:43-44..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은 44절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에서 첫 번째 주님은 하나님을,두 번째 주님은 메시아를 지칭했습니다. 
다윗은 여기서 종말의 때에 하나님께서 원수를 메시아의 발 아래 밟히게 하실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루아흐’가 자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다고 고백합니다.[삼하23: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브살렐이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성막의 중요한 기구들을 만들었다면, 다윗은 ‘루아흐’의 감동으로 솔로몬이 지을 성전의 설계도를 그렸습니다(대상28:12). 
구약성경의 성전이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음을 생각한다면, 브살렐처럼 다윗도 성전의 설계도를 그리면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령에 크게 감동된 다윗이 자신의 부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성적으로 범하였습니다(삼하11장).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 되었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그를 책망하자, 다윗은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삼하12장). 
다윗은 자신의 흉악한 죄악을 회개하는 기도문을 시편51편으로 기록했습니다. 
이 기도문에서 다윗은 자신의 죄를 사해 주실 것을 간구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루아흐’를 거두지 마시기를 간절히 요청합니다.
[시51:11....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성령을 받은 사람도 때로 연약하여 범죄할 때가 있습니다. 삶에 죄악이 나타났을 때,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는 으리 모두 되시기를.... 죄를 철저히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성령은  떠나십니다. 성령이 떠나면 하나님의 사람은 죽음의 길을 가게 됩니다. 아직성령이 남아 계실 때에 깨닫게 하시는 모든 죄악마다 철저히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다윗처럼, 성령을 거두지 마시기를 간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회개를 받으시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정결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의 회개와 간구를 들으시고 성령을 거두어 가지 않으시기를....
===에스겔의 환상-마른 뼈들의 소생
구약시대에 ‘루아흐’는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에게 필요할 때에 임재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 성령의 임재가 나타난 적은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루아흐’가 보편적으로 사람들에게 임하시지 않으셨고, 오히려 성전과 성전의 법궤가 ‘루아흐’가 지속적으로 임재하시는 장소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주전586년에 성전이 파괴되고 유다왕국이 멸망을 당한 후에,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루아흐’를 하나님의 백성에게 보내시겠다고말씀하셨습니다.1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씻기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루아흐’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순히 ‘루아흐’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의 ‘루아흐’를 ‘너희 속에 두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겔36:26-27...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합니다...거듭난 미의 마음조차 그리스도로 대치됨!!인 것입니다)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불순종과 거역의)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주 섬기는, 순종함, 곧 Q 경외함의!!)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37:14ㅁ...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위의 에스겔36:26~27과 37:14의 “두고”에 동일하게 사용된 히브리어는 동사‘나탄’(!tn)입니다. 이 말은 ‘주다, 두다, 저장하다, 만들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루아흐’가 이스라엘 백성 속에 들어가 거하게 하시겠다는 뜻으로 ‘나탄’동사를 사용하셨습니다. 
영어성경(KJV,NIV)은 ‘나탄’을 ‘to put’으로 번역하여 ‘루아흐’를 ‘그들 속에 넣으신다’의 의미로 풀었습니다.
하나님은 ‘루아흐’를 이스라엘 백성속에 넣으신다는 예언의 말씀을 에스겔에게 환상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37:1~10).
하나님의 ‘루아흐’가 에스겔을 한 골짜기 가운데로 인도했고, 에스겔은 심하게 말라 있는 뼈들이 그 골짜기에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37:1~2).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그 마른 뼈들을 향해 대언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 대언의 말씀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겔37:5~6,9~10.....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마른뼈들의 골짜기에 나타난 “생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어 는사실 ‘루아흐’입니다. 
‘루아흐’는‘호흡, 바람, 영’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말성경은 에스겔37:1~10의 ‘루아흐’를 ‘하나님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라는 의미로 “생기”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루아흐’는 현상적으로는 ‘바람’이지만 내용적으로는 하나님의 ‘루아흐’, 곧 성령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위에서 본 것처럼 36:26~27과 37:14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루아흐’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넣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에스겔37:6은 36:26~27,37:14와 같이 ‘나탄’을 사용하여 ‘루아흐를 넣을 것이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37:5와 10은 보다 적극적으로 ‘들어가다’(to enter)라는 뜻을 가진 ‘보’(awb)를 사용하여,‘루아흐가 그들에게 들어갔다’고 증언합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표현입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루아흐’가 선택된 자들에게 ((잠시)) 임재했습니다. 그러나‘루아흐’를 넣었다거나 ‘루아흐’가 들어갔다는 ((영구적인 임재 표현으로서의))표현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물리적으로 하나님의 ‘루아흐’를 [재창조함 받은!!]이스라엘 백성에게 들어가게 하시겠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루아흐’가 인간의 육체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심을 의미합니다. 
에스겔이 보았던 마른뼈들의 환상은 하나님의 ‘루아흐’가 바람처럼 사방에서 불어와 죽은이스라엘 백성에게 실제로 들어감으로, 죽었던 그들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에스겔36~37장에 예언된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하나님의 ‘루아흐’가 여러분에게 들어가 여러분의 죽은 영과 혼과 육을 살리셨습니까? 
지금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속에 들어와 여러분과 함께살고 계십니까? 그 성령을 분명히 인식하고 느끼고 믿고 의지하고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람이 실재하는 것 처럼, 불이 실재하는 것 처럼, 성령도 실재하셔서 여러분 속에 들어와 거주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는, 그리고 그 성령과 함께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에스겔37장의 마른 뼈들의 소생의 예언은 구약시대에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루아흐’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어가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군대로 다시 일어서는 가시적인 사건은 구약시대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신약시대가 열릴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에서 살아나게 하는 성령강림의 사건은 없었고, 이스라엘은 제국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사역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될 것을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 후 제자들이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드디어 에스겔의 예언과 환상이 성취되었습니다. 
다 죽었던 예수님의 제자들, 마치 마른 뼈들처럼 죽어 있던 그들에게 성령의 바람이 불어왔고 성령의 불이 떨어졌습니다.
[행2:2-4..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에스겔이 보았던 마른뼈들의 골짜기에 바람이 불어왔던 것처럼, 영적으로 죽어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여 있던 다락방에 하늘로부터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하나님의 ‘루아흐’가 마른뼈들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의 불이 제자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유대인들이 방언으로 말하는 다락방의 제자들을 술에 취한 것이라는 조롱하는 것에 대하여, 자신들이 방언을 한 것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며, 이것은 선지자 요엘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설교했습니다.
[행2:16-17..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ejkcew' ajpo;tou' pneuvmatov" mou ejpi;pa'san savrka)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요엘은 마지막 때가 되면 하나님이 자신의 ‘루아흐’, 곧 ‘프뉴마’를 “모든 육체에”(evpi;pa'san savrka) 부어 주실 것임을 예언했습니다. 
여기서 ‘육체’는 헬라어로 ‘사륵스’(savrx)인데 ‘고기, 살, 육체, 물질’ 등을 의미합니다. 
요엘은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자신의 ‘루아흐’를 육체를 지닌 인간에게 불어 넣어 주실 것을 예언한 것이며, 이것은 바로 사도행전2장의 다락방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에스겔과 요엘의 예언대로 하나님은 실패와 낙담 가운데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으셨습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그들의 ‘사륵스’, 곧 “육체”에 하나님의‘ 루아흐’, 곧 ‘성령’을 부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루아흐’가 그들의 ‘사륵스’에 충만하게 채워지자, 그들은일어나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 
다 죽어가던, 시체같고 마른뼈들과 같았던 그들이 다시 살아 일어나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에스겔이 예언했던 “큰 군대”(겔37:10)가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시대에 다시 하나님의 ‘루아흐’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바람으로 불어오고, 불로 나타나 믿음의 사람들에게 충만하게 들어오기를..  
성령이 하나님의 영의 실체로 믿는자들의 육체 속으로 들어오기를 사모합시다. 성령이 여러분의 육체에 실체로 들어가시기를.. 
사도행전2장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것처럼, 이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육체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영의 몸으로 들어오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하여 이땅의 교회와 성도가 마지막 시대의 모든 유혹과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의 군대로 하나님께 승리의 영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히13:5-6===
......유대의 율법 아래서는 속죄 제물로 드려진 것은 먹을 수 없고 유대인들이 장막 생활을 할 때는 야영지 밖에서 또 그들이 성에 거할때는 성문 밖에서 속죄물을 다 태워야만 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들어 그들이 여전히 율법의 지배 아래 있고자 한다면 복음의 제단에서도 먹을 수 없음을 말하였다.  왜냐하면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제물은 큰 속죄물이신 그리스도께서 제공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역주: 율법에 의해서는 속죄 제물을 먹을 수 없으므로 따라서 그것을 따르는 자들은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도 먹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복음 잔치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결실로써 이 희생물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이 잔치에 참여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속죄물의 원형이 되시며 그 자신의 피로써 그의 백성들을 신성하게 하시며 순결하게 해 주시기 위하여 그는 자신을 유형과 일치하게 나타내 보이시려고 영문 밖에서 죽음을 당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겸손하심을 나타내는 충격적인 표본이다.  그는 인간의 속죄를 위해 하나님께 대하여 또 인간 사회에 대하여 불결한 존재나 되는 것처럼 영문 밖에서 처형되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죄(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귀중한 대가를 치루셨다)는 모든 하늘의 시민권과 이 세상의 시민권까지 박탈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또 이 사실은 죄인의 모든 사회에 문제거리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바울은 지금까지 레위 율법을 따르는 것이(율법자체의 규례에 의해) 인간들로 기독교의 제단에 참여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을 논한 후 다음과 같이 이 논리를 활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논하였다.
.....바울은 위의 논증을 활용하여 히브리인들에게 적절한 충고를 하였다(13-15).  
첫째, 바울은 "그런즉 우리는……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고 하였다.  
즉 그가 부르실 때 율법의 의식과 죄와 세속, 우리 자신의 육체를 떠나서 그에게 나아가자는 말이다.  
둘째, 바울은 기꺼이 "그리스도의 능욕을 지도록"하자고 하였다.  
즉 우리 자신을 만물의 찌꺼기로써 곧 살 가치도 없고 평범한 죽음을 죽을 가치도 없는 존재로 기꺼이 생각하자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러한 능욕을 당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러한 능욕께서 바로 이러한 능욕을 당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러한 능욕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같이 능욕을 감수해야 하는 더 큰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든지 또는 죽음을 당하므로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끌려 나오게 되든지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며 또 이 세상은 "우리가 거할 영구한 도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죄와 죄인들과 죽음이 우리를 이 세상에 오래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라도 믿음으로써 주께 나아가서, 이 세상이 우리에게 줄 수 없는 안식과 안정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해야 할 것이다.  
셋째, 바울은 이 복음의 제단을 바르게 사용하자고 하였다.  
즉 그리스도께서 이 제단을 섬기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제사장으로 삼으셨으니 이에 부끄럽지 않게 이 제단의 특권에 참여할 뿐 아니라 이 제단의 의무도 바르게 이행하자는 말이다.  
.....우리는 이 제단에 희생 제물을 가져와야 한다.  또한 우리의 대제사장 앞에 가져와 그를 통하여 제물을 하나님께 봉헌해야 한다(15,16절).  
우리가 이 제단에 가져와 드려야 하는 제물은 무엇인가?  물론 이제 다른 속죄 제물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큰 속죄의 제물로 드려지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물을 승인하는 승인의 제사만 드리면 된다.  승인의 제사란 어떤 것인가?
a. 그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제사이다.  
우리는 이 제사를 하나님께 끊임없이 드려야 한다.  찬미의 제사 속에는 감사와 찬미와 기도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제사는 "우리 입술의 열매"이다.  우리는 거짓 없는 입술로 하나님께 찬미를 드려야 한다.  찬미는 오직 하나님께로 만들어져야 하며 천사나 성도나 그 밖의 피조물에게 행하여 져서는 안된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이 찬미 받으실 수가 있으시다.  
찬미의 제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희생과 중재의 공로를 의지하여 드려져야 한다.
b. 그것은 그리스도인다운 사랑과 자선을 베푸는 제사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16절)고 하였다.  
우리는 우리 능력대로 사람들의 영혼과 육체의 필요한 것을 공급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입술과 말로써 제사 드리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선행의 제사를 드리도록 해야 한다.  
위와 같은 여러 가지 제사를 제단 위에 드릴 때에, 우리 자신의 선한 행위의 공로에 의지하지 말고 우리 대제사장 예수의 공로에 의지하여 드려야 한다.  
우리가 이와 같은 제사를 드릴 때에 즉 찬미와 자선의 제사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주 기뻐하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제사를 받으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제사 드리는 자들을 열납하시고 축복해 주실 것이다.
[히13:5-6......*1.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2.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3.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4.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5.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6.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7.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8.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9.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10.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11.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5.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17.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18.○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19.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20.○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1.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수1:5-9...... *2.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4.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5.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6.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시37:22-29..*1.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2.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3.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4.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5.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6.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7.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8.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9.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10.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11.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12.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그를 향하여 그의 이를 가는도다   *13.그러나 주께서 그를 비웃으시리니 그의 날이 다가옴을 보심이로다   *14..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겨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15.그들의 칼은 오히려 그들의 양심을 찌르고 그들의 활은 부러지리로다   *16.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보다 낫도다   *17.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18. 여호와께서 온전한 자의 날을 아시나니 그들의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19. 그들은 환난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할 것이나   *20. 악인들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들은 어린 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가 되어 없어지리로다   *21.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22.주의 복을 받은 자들은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들은 끊어지리로다   *23.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24.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25.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26.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27.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28.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29.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서 영원히 살리로다   *30.의인의 입은 지혜로우며 그의 혀는 정의를 말하며   *31..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32.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으나   *33.여호와는 그를 악인의 손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재판 때에도 정죄하지 아니하시리로다   *34.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보리로다   *35.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래의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이 무성함과 같으나   *36.내가 지나갈 때에 그는 없어졌나니 내가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였도다   *37.온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모든 화평한 자의 미래는 평안이로다   *38.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미래는 끊어질 것이나   *39.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난 때에 그들의 요새이시로다   *40.여호와께서 그들을 도와 건지시되 악인들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까닭이로다]
[고후4:5....*1.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3.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13.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14.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5.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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