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3.24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눅6.안식일경건생명사랑구원.12사도.영생의8복_화.Q의선대자비관용_원수박해자사랑축복중보공급도움회개.믿는말씀실행.
첨부파일 :

눅6장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다

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2.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5.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다

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8.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10.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11.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열두 제자를 사도로 택하시다

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14.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15.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17.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18.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19.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복과 화를 선포하시다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원수를 사랑하라

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9.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30.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37.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네 눈 속에 있는 들보

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43.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45.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듣고 행하는 자와 행하지 아니하는 자

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말씀을 이해--해석--깨달아--그 빛에 비춰보아 회개하였고, 이에 적용-결단하였다면 생명/사랑의 성령따라 실행하라... 실행함 없이는 적용-결단이 아닌 것이니!!

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48.  [쓰임에 합당한 쓸모 있는, 잘 지은]집을 짓되 [목숨 걸고!! 주 이름 부르며 전존재 기울이며 힘써!!.약속하신 그분, .JC 만나도록!!...40일간 철야하며 주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참 신앙을!! 실행해보라]깊이 파고 주추(세울 집 기둥의 기초)를 반석(암반)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그리스도의 집 그 기둥은 십자가..암반과 바위이신 그리스도를 만남 인해 그분과 연결되어 하나 되어야 하며, 이 때 십자가 기둥은 담지자/그릇이라, 영생의 말씀이자 생명의 성령과 보혈로 인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에까지 이르도록 그 거룩함의 온전-완전-순전함은 증장-확대될 것이요, 하나되신 그분의 열정의 그릇인바 그분을 그대로 공급함의 통로가 됨..

49.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

[NASB]제6장

1.  Now it came about that on a [certain] Sabbath He was passing through [some] grainfields; and His disciples were picking and eating the heads [of grain,] rubbing them in their hands.

2.  But some of the Pharisees said, "Why do you do what is not lawful on the Sabbath?"

3.  And Jesus answering them said, "Have you not even read what David did when he was hungry, he and those who were with him,

4.  how he entered the house of God, and took and ate the consecrated bread which is not lawful for any to eat except the priests alone, and gave it to his companions? "

5.  And He was saying to them, "The Son of Man is Lord of the Sabbath."

6.  And it came about on another Sabbath, that He entered the synagogue and was teaching; and there was a man there whose right hand was withered.

7.  And the scribes and the Pharisees were watching Him closely, [to see] if He healed on the Sabbath, in order that they might find [reason] to accuse Him.

8.  But He knew what they were thinking, and He said to the man with the withered hand, "Rise and come forward!" And he rose and came forward.

9.  And Jesus said to them, "I ask you, is it lawful on the Sabbath to do good, or to do harm, to save a life, or to destroy it?"

10.  And after looking around at them all, He said to him, "Stretch out your hand!" And he did [so;] and his hand was restored.

11.  But they themselves were filled with rage, and discussed together what they might do to Jesus.

12.  And it was at this time that He went off to the mountain to pray, and He spent the whole night in prayer to God.

13.  And when day came, He called His disciples to Him; and chose twelve of them, whom He also named as apostles:

14.  Simon, whom He also named Peter, and Andrew his brother; and James and John; and Philip and Bartholomew;

15.  and Matthew and Thomas; James [the son] of Alphaeus, and Simon who was called the Zealot;

16.  Judas [the son] of James, and Judas Iscariot, who became a traitor.

17.  And He descended with them, and stood on a level place; and [there was] a great multitude of His disciples, and a great throng of people from all Judea and Jerusalem and the coastal region of Tyre and Sidon,

18.  who had come to hear Him, and to be healed of their diseases; and those who were troubled with unclean spirits were being cured.

19.  And all the multitude were trying to touch Him, for power was coming from Him and healing [them] all.

20.  And turning His gaze on His disciples, He [began] to say, "Blessed [are] you [who are] poor, for yours is the kingdom of God.

21.  "Blessed [are] you who hunger now, for you shall be satisfied. Blessed [are] you who weep now, for you shall laugh.

22.  "Blessed are you when men hate you, and ostracize you, and cast insults at you, and spurn your name as evil, for the sake of the Son of Man.

23.  "Be glad in that day, and leap [for joy,] for behold, your reward is great in heaven; for in the same way their fathers used to treat the prophets.

24.  "But woe to you who are rich, for you are receiving your comfort in full.

25.  "Woe to you who are well-fed now, for you shall be hungry. Woe [to you] who laugh now, for you shall mourn and weep.

26.  "Woe [to you] when all men speak well of you, for in the same way their fathers used to treat the false prophets.

27.  "But I say to you who hear, love your enemies, do good to those who hate you,

28.  bless those who curse you, pray for those who mistreat you.

29.  "Whoever hits you on the cheek, offer him the other also; and whoever takes away your coat, do not withhold your shirt from him either.

30.  "Give to everyone who asks of you, and whoever takes away what is yours, do not demand it back.

31.  "And just as you want people to treat you, treat them in the same way.

32.  "And if you love those who love you, what credit is [that] to you? For even sinners love those who love them.

33.  "And if you do good to those who do good to you, what credit is [that] to you? For even sinners do the same.

34.  "And if you lend to those from whom you expect to receive, what credit is [that] to you? Even sinners lend to sinners, in order to receive back the same [amount.]

35.  "But love your enemies, and do good, and lend, expecting nothing in return; and your reward will be great, and you will be sons of the Most High; for He Himself is kind to ungrateful and evil [men.]

36.  "Be merciful, just as your Father is merciful.

37.  "And do not judge and you will not be judged; and do not condemn, and you will not be condemned; pardon, and you will be pardoned.

38.  "Give, and it will be given to you; good measure, pressed down, shaken together, running over, they will pour into your lap. For by your standard of measure it will be measured to you in return."

39.  And He also spoke a parable to them: "A blind man cannot guide a blind man, can he? Will they not both fall into a pit?

40.  "A pupil is not above his teacher; but everyone, after he has been fully trained, will be like his teacher.

41.  "And why do you look at the speck that is in your brother's eye, but do not notice the log that is in your own eye?

42.  "Or how can you say to your brother, 'Brother, let me take out the speck that is in your eye,' when you yourself do not see the log that is in your own eye? You hypocrite, first take the log out of your own eye, and then you will see clearly to take out the speck that is in your brother's eye.

43.  "For there is no good tree which produces bad fruit; nor, on the other hand, a bad tree which produces good fruit.

44.  "For each tree is known by its own fruit. For men do not gather figs from thorns, nor do they pick grapes from a briar bush.

45.  "The good man out of the good treasure of his heart brings forth what is good; and the evil [man] out of the evil [treasure] brings forth what is evil; for his mouth speaks from that which fills his heart.

46.  "And why do you call Me, 'Lord, Lord,' and do not do what I say?

47.  "Everyone who comes to Me, and hears My words, and acts upon them, I will show you whom he is like:

48.  he is like a man building a house, who dug deep and laid a foundation upon the rock; and when a flood rose, the torrent burst against that house and could not shake it, because it had been well built. 

49.  "But the one who has heard, and has not acted [accordingly,] is like a man who built a house upon the ground without any foundation; and the torrent burst against it and immediately it collapsed, and the ruin of that house was great."

======

누가복음 6장 (개요)

본 장(章)에는 도덕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설명이 나온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파괴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성취하고 복음으로써 율법을 보충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Ⅰ. 여기에는 안식일에 행하는 일이라도 필수적이고 자비를 위한 일이면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변증이 나온다. 

전자는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른 자기 제자들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고 후자는 안식일에 손마른 자를 치유한 자신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다(1-11).

Ⅱ. 그리스도께서 은밀히 기도하기 위해 물러나심(12).

Ⅲ. 열 두 사도를 부르심(13-16).

Ⅳ. 각가지 병에 걸린 많은 무리가 간청하자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고쳐 주심(17-19).

Ⅴ. 제자와 무리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사람에게 대한 의무를 교훈하시면서 베푸신 그의 설교(20-49).

========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다

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2.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5.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다

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8.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10.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11.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안식일에 적합한 자비 행위(눅 6:1-11)

마태와 마가복음에서는 이 두 기사를 따로 따로 기록하였었다.(마 12:1; 막 2:23; 3:1) 

ㅕ기에서는 이 두 기사가 한데 취급되고 있는 것은 양자가 시간적 차이를 두고 발생하였더라도 안식일에 대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오해를 바로 잡아 주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몸의 안식에 보다 큰 강조점을 두었고 율법을 제공하신 분이 의도하는 것보다 더 큰 엄격성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Ⅰ.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제자들을 옳다고 인정하신다. 

그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자신들을 위해 꼭 해야만 할 일을 하였다. 

그것은 바로 시장할 때 밀 이삭을 자른 일이었다. 

딴 복음서 기자는 날짜를 기록하고 있지 않으나 본 기사에는 날짜가 나온다(흠정역에는 "첫 안식일이 지난 둘 째 안식일에"로 되어 있음, 역주). 

이 일은 첫째 다음의 둘째 안식일에 있었다. 

휘트비(Whitby) 박사가 생각하듯 이것은 무교절 제2일 뒤 첫째 안식일임이 분명하다. 그들은 이 무교절일로부터 계산하여 7주 후를 오순절로 지켰다. 

이런 상황의 묘사는 그 안식일에 특별한 어떤 영예가 걸린 것으로 생각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죄는 더욱 가중된다고 여겼을 것이다.

또는 이것은 그 때가 만물을 바친 뒤 첫째 안식일이므로 단지 곡식이 거의 여물어가는 시기임을 암시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언제든지 특히 안식일에는 음식에 까다롭거나 별미를 찾아서는 안 되며 극히 손쉽게 얻은 것이라도 먹고 감사해야 하였다. 

제자들은 이삭을 잘라 먹었다(1절). 

그들의 식량이 된 것은 아주 소량이었고 그나마도 맛없는 것이었다.

2. 자신은 극악무도한 죄를 범하면서도 극히 무죄하고 악의 없는 남의 행동을 혹평하는 데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자가 허다한 법이하다(2절).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다고 하면서 언쟁을 벌였다. 

그러면서도 딴 모든 날보다 안식일에 더 맛있는 음식을 먹는게 그들의 소행이었다.

3.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제자들이 부당한 비난을 받으면 그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실 것이며 사람들이 그들에게 하지 못할 일이라고 말하는 많은 일로서도 그들을 인정하시고 용납하실 것이다. 

사람들이 우리의 재판관이 되지 못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언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4. 의식에 관한 약속은 꼭 필요한 경우 면제될 수도 있다. 

제사장의 전용물인 진설병도 다윗이 섭리에 의해 궁지에 다달아서 먹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을 때는 예외적으로 그에게 허락되었던 것이다(3, 4절). 

하나님 자신이 정하신 규례도 이처럼 보다 큰 선을 위해서 방치되었다면 인간의 전통이야 말해 무엇하랴 !

5. 안식일이라 하더라도 특별히 꼭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용인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자유를 방종으로 바꾸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양보와 겸양을 오용하여 그 날의 일을 손상시키는 경우가 없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안식일에 필수적인 일은 해도 좋다고 허락하셨지만 그 날이 자신의 날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기억해 주기를 바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날을 주님께 대한 봉사와 주님을 존귀케 하는 데 보내야만 한다(5절).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구속주의 나라에서는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게 된다. 어떤 점에서 안식일의 성격은 변경되었다. 

안식일이 과거에는 창조주를 영화롭게 하는 날이었듯이(렘 16:14, 15) 주의 날은 주로 구속주를 영화롭게 하도록 성수 된다. 

이것을 상징하여 안식일은 주일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그렇다고 해서 옛 이름을 망각하라는 것은 아니다. 주인은 여전히 안식의 날이므로) 새 날 즉 주(週)의 첫째 날로 옮겨지게도 될 것이다.

Ⅱ.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에 타인을 위해 자선 행위를 하시는 가운데 자기를 옳다고 하신다. 

1.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으로 들어가셨다. 

기회 있는 대로 경건한 집회를 통해 안식일을 성별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임을 명심하자. 안식일에는 성회가 있어야 하며 우리는 아주 충분한 이유가 없는 한 우리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된다.

2. 안식일에 그는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교훈을 주고받는 것은 안식일과 회당에 매우 어울리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온갖 기회를 이용하셔서 가르치셨다. 제자들뿐만 아니라 무리들도 가르치셨다.

3. 그리스도의 환자는 그의 말씀을 듣는 자 중 하나였다. 

그 오른손이 마른 사람은 그리스도께 배우려고 왔다. 그가 그리스도께 고침을 받으리란 기대감을 품고 왔는지의 여부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치유함을 얻고자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기꺼이 배우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그리스도의 훌륭한 교훈을 듣고 그의 영화로우신 기적을 목격한 자 중에는 오로지 그를 흠잡으려는 의도만 지닌 채 온 자도 더러 있었다.(7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도량이 큰 논적답지 않게 예수께 따끔한 경고도 해 주지 않았다. 

즉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실 때 그들은 그것을 제 4 계명의 위반으로 해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도리상 정당한 경고를 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고(여지껏 아무도 그 같은 치유를 함 적이 없으므로) 따라서 정죄받을 성질의 일이 아니었던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야비하게도 사자가 먹이를 노려보듯 그가 안식일에 병을고치는지 엿보았으니 이는 예수님을 송사할 빙거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전격적으로 기소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은혜로운 의도를 대항할 줄을 뻔히 아시는 자들의 면전에서 자기의 은혜로운 목적을 시인하는 것을 부끄러이 여기시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으셨다(8절). 

그는 그들의 잘못과 그들의 의도를 아시고 병자의 믿음과 대담함을 시험하시기 위하여 일어나라고 그에게 명하셨다.

5. 예수께서는 자기의 논쟁자들에게 친히 호소하셨다. 

그는 안식일에 사람의 선행을 금하는 것이 제 4 계명의 의도인지 아닌지 그들의 자연스런 양심의 확신에다 대고 호소하셨다. 

더욱이 그들이 손수 할 일로 찾아내고 기회를 얻으며 다른 때로 미룰 수 없는 선행인 경우에는 말이다(9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으냐?" 

핍박하는 자들만큼 엉터리이고 비이성적인 악인도 없다. 

그들은 선을 행하는 대신 사람들에게 악을 행하려고 궁리하는 자들이다.

6. 그는 불쌍한 자를 치유하시사 한 마디의 말씀으로 그의 바른 쪽 손을 즉시 사용할 수 있도록 회복시키셨다. 

그는 자기의 대적들이 그 일에 성낼 것이며 그것을 기화로 자기를 칠 것이란 사실도 아셨다(10절). 

우리는 억압받는다고 해서 우리의 의무나 유용성으로부터 물러나는 일이 없도록 하자.

7. 그리스도의 대적들은 이 일로써 그에게 대한 적개심이 더욱 불타 올랐다(11절). 

그들은 이 기적을 통해서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란 깨우침을 얻어야 마땅했다. 그들은 인류의 은인 되신 그를 사랑하게 되었어야 마땅했다. 

그러기는 고사하고 그들은 분기(원의:미침)가 가득하였고 그를 놀라게 하여 선을 행하지 못하게 하거나 백성의 애호가 증가하는 것을 저지하는 데 실패할까봐 조바심이 났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성이 났고 민중에게 성이 났으며 자기 자신에게 성이 났다. 분노는 잠시 마치는 것이며, 악의는 오래 미치는 것이다. 

무력한 악의는 특히 실망을 주는 악의이다. 이들의 악의가 바로 그러했다. 

그의 기적 행사를 막을 수 없게 되자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였으며 그를 거꾸러뜨릴 딴 방도가 없는지 모의하였다. 

우리는 인간의 아들이 이와 같은 행동을 할만큼 악하며 하나님의 아들은 그것을 견딜 만큼 참을성이 있다는 데 경악함직도 하다.

-----

===열두 제자를 사도로 택하시다

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14.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15.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17.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18.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19.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열 두 사도를 택하심(눅 6:12-19)

이 문단에서 우리는 은밀한 중에 계신 우리 주 예수와 "자기 가족" 중에 계신 주님과 "공중(公衆)"속에 계신 주님을 만나게 된다

. 이 세 가지 행동 속에서 그는 한결같이 그 답게 행하신다.

Ⅰ. 우리는 "은밀한" 중에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주님을 발견하게 된다(12절). 

누가복음 기자는 그리스도께서 자주 한적한 곳으로 물러 나셨다는 것을 주목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에게 은밀한 중에 드리는 기도의 본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우리는 은밀한 기도를 통해 날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기도가 없이는 영혼이 잘 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자기 대적들이 분기가 가득하여 자기의 처치 방법으로써 의논하고 있던 " 그 때에" 그는 "기도하러" 가셨다. 

이는 다윗의 예표에 응하고자 하심이었다.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시 109:4).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그는 "홀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는 "산으로 가사 기도하셨다." 산에서는 그아무런 소요나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홀로 있을 때보다 고독한 때는 없다. 그는 은밀한 것을 원하여 산으로 가셨다. 

그러므로 그는 아마 남이 잘 찾아오는 곳에는 가려고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2. 그는 혼자서 "오래도록"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그는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다." 

우리는 골방에서 반시간만 기도에 소비해도 많다고 생각하는데 주님께서는 밤새도록 계속해서 명상하시고 은밀히 기도하셨다.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서 할 일이 매우 많으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을 크게 기뻐해야 한다. 

이 두 가지 때문에 우리는 오랫동안 기도에 몰두하게 되는 때도 있다.

Ⅱ.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직계 수행원들을 지명하시고 "자기 가족"으로 삼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들은 그의 가르치심을 변함없이 듣는 고정 청취자가 되고 기적의 목격자가 될 터였다. 그들은 나중에 "사도"로 파송 될 자였다. 

그들은 세상에 나가는 그리스도의 사자로서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상에 심을 자들이었다(13절).

그가 "밤이 맞도록 기도를 계속하고" 나서 "날이 밝았을 때는" 누구나 그가 휴식을 취하시고 잠깐 잠을 처하실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그는 누구나 일어나는 때가 되자 곧 "제자들을 부르셨다."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큰 관심사는 시간을 놓치지 않도록 하는 게 아니라 한 가지 선한 의무의 끝냄을 또 다른 선한 의무의 시작으로 삼는 것이어야만 한다.

사역자들은 평범한 "의식" 보다는 "기도"로써 성직에 위임되어야 한다.

사도의 수는 열 두명이었다. 여기에는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사도의 이름을 대하는 것은 세 번째인 데 그 배열 순서는 각기 다르다. 

이것은 목회자와 기독교인들에게 우선 순위에 예민하지 말며 우위를 인정하기에 인색하지 말고 더욱이 우선권을 받아들이는 데는 보다 인색하고 남보다 우위에서는 일은 눈여겨 볼만한 가치가 없는 일로 간주하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다. 

마가복음에서는 다대오라고 불리던 자가 마태복음에서는 별명이 다대오라고 하는 레뷰스(Lebbeus)로 불리웠고(우리 성서와 다름) 누가복음서는 야고보의 형제(우리 성서,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 불리우고 있다. 

이 유다는 유다 서신의 필자와 동일인이기도 하다. 마태와 마가복음에서는 가나안인이라고 불리던 시몬이 여기서는 젤롯(zealots:열혈당원의 뜻)이라 하는 시몬으로 불리우고 있다. 이 명칭은 아마 신앙에 대한 그의 크나큰 열심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열두 명의 이름에 대해서는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신복들에게, 대해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신복들이여, 항상 당신의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왕상 10:8)라고 한 것 같이 우리도 그렇게 말할 만하다. 

이들만큼 특권을 받은 자도 없었다. 단 그들 중 하나는 마귀가 들어 있었고 배반자로 판명되게 된다(16절). 

그러나 그를 택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속지 않으셨다.

Ⅲ. 우리는 "공중"속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며" 병고치시는 주님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시간을 할애하신 두 가지 큰 사업이었다(17절). 

그는 열 두 제자와 함께 산에서 내려 오셔서 평지에 서셨다. 

그는 자기에게 호소하러 온 자들을 즉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곧 그 주위에는 제자의 무리가 모여들었다. 그들은 늘 그리스도를 시종하던 자들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는 많은 무리도 즉시 모여들었다. 이들은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으로부터 뒤섞여서 온 혼합 군중이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님이 계신 갈릴리 지역까지는 수십 마일의 거리였다. 

그들에게는 예루살렘에 유명한 랍비 곧 크게 이름을 떨치고 세도가 당당한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러 온 것이다. 또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자들도 있었다. 

거기에 살던 자들은 대개 상인이었다. 그들은 가나안인들과 어깨를 맞대고 사는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 심취한 자들이 꽤나 있었다. 그토록 모든 지역에 산재한 자들이었다. 여기 저기에 하나씩 퍼져 있다가 모여든 것이다.

1.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왔고," 예수는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다." 

가까이에서 훌륭한 설교를 듣지 못하는 자들은 설교 듣지 않고 지내느니보다 멀리 여행해서라도 듣는 게 더욱 낫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러 먼 길을 가는 멋과 이를 위해 딴 사업의 길에서 나오는 것이 그 만큼 가치 있는 일이다.

2. 그들은 예수께 "병고침을" 얻으려고 왔으며 예수께서는 그들을 "낫게 하셨다." 

어떤 자는 신체적 고통을 당하고 있었고 또 다른 자는 마음의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어떤 자는 병을 가지고 있었고 또 딴 사람들은 귀신이 들려 있었다. 

전자와 후자는 다 JC께 나옴으로써 고침을 받았으니 그는 병과 마귀를 제어할 능력이 있으셨고 원인뿐만 아니라 결과도 지배할 능력을 갖고 계셨다(17, 18절). 

아니, 호소할 만한 특별한 질병이 없던 자들도 예수께로부터 나오는 능력(막 5:30)을 맛보고 그것이 자기들의 신체적 건강과 원기를 크게 회복시키고 아주 공고히 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썼던" 때문이다(19절). 병든자 뿐만 아니라 건강한 자도 그랬다. 그들은 전부 예수님 때문에 이모저모로 더 낫게 되었다.

그는 "모든 사람을 낫게 하셨다." 고침을 받을 필요가 전혀 없는 자가 누가 있는가? JC께서는 은혜가 충만하며 그에게는 낫게 하는 능력이 있으시다. 

그 능력은 그로부터 즉시 나오려고 하며 그것은 모든 자에게 충분하며 각자에게 충분하다.

--------

===복과 화를 선포하시다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축복과 화(눅 6:20-26)...재정[財政]이란 재물을 다스림, 곧 그 취득에 있어서 스스로 일하되 [주뜻 구함으로써] 공의-정직-성실-근면함으로 , 그 사용에 있어서 [주 뜻 구함으로써] 드리고-나누며-베풀며-누림임을 기억하라!!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실천적 담화가 시작된다. 

이 말씀은 본 장(章) 끝까지 계속되며 그 대부분은 산상 수훈에 나온 것이다(마 5, 7장). 혹자는 이 설교가 다른 장소와 시간에 행해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 꼭 같은 것을 설교하신 딴 사례도 있고 또 각기 다른 때 동일한 취지로 말씀하신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설교는 산상 수훈을 복음서 기자가 단축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 나오는 것 또한 단축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시작과 결론은 대동소이하다. 마태나 누가에도 백부장의 하인을 치유하신 기사가 곧 뒤따라 나오는데, 그것은 긴요한 게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게 된다.

Ⅰ. 세상 사람은 "불쌍하게" 여기지만 "고난받는 성도"는 "복된" 사람이라고 축복이 선포되고 있다(20절). 

예수께서는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셨다. 열 두 제자뿐만 아니라 제자의 허다한 무리도 보셨다(17절). 

그는 그들을 향하여 말씀하셨다. 평지에서 병든 자들을 고치신 뒤 그는 말씀을 선포하시기 위하여 다시 산으로 올라 가셨다. 

그는 권세 있는 자답게 거기에 앉으셨다. 그들은 그리고 그에게 나아왔고(마 5:1) 그는 그들을 향해 말씀을 하셨으며, 그 말씀을 그들에게 적용하셨고 말씀을 그들 자신에게 적용하는 방법도 가르쳐 주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그 말씀을 진리로서 공언하셨으므로 그는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덧붙여 말씀하셨다. 

복음의 교훈을 스스로 취하여 그 교훈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모든 신자들은 복음의 약속을 스스로 취하여 그것을 먹고 살아갈 수 있다. 

본문에 나타난 대로 이 말씀에는 특히 제자들이 JC를 따르자면 만나게 될 곤경과 난관을 빗대어서 그들을 격려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1. "너희는 가난하다. 너희는 모든 것을 버려 두고 나를 쫓았으며 나와 함께 연보로 살아가기에 만족하는 자들이다. 너희는 나를 섬기면서 결코 세상 영달을 기대하지 않는 자들이다. 너희는 빈궁한 사람처럼 열심히 일해야 하며 모질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의 가난 속에서 [기억하라 주께서 계획하신 바, 빈궁함 그 안에서 반드시 추구하여 발견할 바 하나님 그분 자신과 하나님나라의 모든 위로와 은혜, 기쁨과 영광 참여함!!] 복이 있다. 빈궁이 너희의 행복에는 손톱만치의 피해도 입히지 못할 것이다. 아니, 너희는 그 가난 때문에 복이 있다. 너희의 모든 손실은 풍부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가 너희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모든 위로와 은혜가 너희의 것이 되며 후일 하나님 나라의 모든 기쁨과 영광도 너희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희 것이 될 것이다. 아니 그것은 너희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난한 자는 믿음에 부요하기 때문이다(약 2:5).

2. "너희는 지금 주린 자이다(21절). 너희는 남들처럼 배불리 먹지 못하고 있다(렘 5:7). 너희는 흔히 굶주린 채 일어나는 수가 많다. 너희의 식사는 그토록 부족하다. 또는 너희는 일에 너무나 열중하다 보니 떡 먹을 시간도 없다. 너희는 한 때의 식사를 밀 이삭 몇 알로 때우고도 기뻐한다. 너희는 이 세상에서 이토록 굶주린다. 그러나 저 세상에서는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요, 더 이상 주리지도 아니하며 더 이상 갈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3. "너희는 이제 울고 있으며 눈물 흘리는 경우도 빈번하다. 그 눈물은 회개의 눈물이요 동정의 눈물이다. 너희는 시온에서 애곡하는 자의 무리이다. 그러나 너희는 복이 있다. 너희의 현재 슬픔은 너희의 미래 기쁨을 결코 침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미래의 기쁨에 대한 예비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너희는 승리를 보류해 두고 있다. 너희는 눈물로 씨를 뿌리고 있을 뿐이지만 곧 기쁨으로 거두게 될 것이다(시 126:5, 6).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지금 근심하고 있는 자들(고후 7:11)은 스스로를 위해 위로를 저축하고 있는 자들이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께서 저들을 위해 위로를 쌓아 두고 계신다. 그리고 그 입이 웃음으로, 그 입술이 즐거운 소리로 채워지게 될 날이 오고 있다'(욥 8:21).

4. "너희는 이제 세상의 악의를 맞닥뜨리게 된다. 너희는 악의에 찬 세상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너희에게 온갖 야비한 취급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받들기 때문이다. 너희는 악한 자들이 너희를 미워하리라고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너희의 가르침과 삶은 악인을 정죄하고 그들의 유죄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기성]교회의 권력을 수중에 장악하고 있는 자들은 너희를 멀리하고(제외하고, 구별한다는 뜻도 있음) 너희 스스로 분리되도록 압력을 가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너희가 스스로를 구별한다고 하여 너희를 파문시키고 극히 불명예스런 비난을 너희에게 퍼부을 것이다. 그들은 너희를 말썽 많고 어쩔 도리 없는 범법자라고 하여 너희에게 파문을 선언할 것이다. 그들은 극히 화려한 위의(威儀)를 갖추어 하늘에 고하는 장면은 일대 장관을 이룰 것이다. 이는 너희에게 대한 파문이 하늘에서 인준된다는 것을 세상 사람과 너희들까지도 믿게 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그들은 너희로 남에게 보기 싫은 존재가 되게 하며 너희자신에게는 두려움이 되게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들이 너희를 회당에서조차 쫓아낼 것이다." 라는 게 바로 ‘아포리스소신 휘마스’란 말씀의 고유한 뜻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렇게 할 권세가 없는 자라도 자기 힘 자라는 데까지는 자기들의 악의를 어떻게 해서든지 나타내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희를 욕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너희가 전혀 죄가 없는데도 극히 억울한 죄명을 덮어 씌워 욕할 것이며 너희에게 합당하지 않은 오명을 덮어씌울 것이다. 그들은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것이며, 크리스챤이라 하여 사도라 하여 너희 이름을 내버릴 것이다. 그들은 이들 이름을 보기 싫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 8복의 해설이다(마 5:10-12). 

"이와 같은 취급은 가혹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너희가 이런 대우를 받을 때는 복이 있다. 이런 것은 너희 행복을 삭감하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크게 증가시켜 주는 것이 될 것이다. 자기 주군을 섬기느라 전쟁에 종군하는 것이 용사의 큰 명예가 되듯 그런 것은 너희가 명예가 된다. 그러므로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23절). 그것을 참을 뿐만 아니라, 의기양양해 하라."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이로써 너희는 은혜의 나라에서는 신분이 아주 높게 된다. 너희는 너희 이전에 있던 선지자들과 마찬가지의 대접을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희는 그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그것을 기뻐해야 옳다. 그것은 너희가 그들과 동일한 영과 동일한 발걸음으로 행하며 동일한 일에 종사하고 그들과 꼭 같은 사역에 고용되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너희는 이로 인하여 영광의 나라에서 풍부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한 너희 봉사뿐만 아니라 너희가 받는 고난도 하나하나 계산되어질 것이다.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천국의 영광이 이 모든 어려움을 풍성하게 상쇄할 것이라는 충분한 확신 속에서 너희 고난을 과감하게 맞이하라. 그래서 너희가 그리스도를 위해 손실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결국에 가서는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결코 손실자가 아니라 궁극적 승리자가 될 것이다."

Ⅱ. "형통하는 죄인들에게는" 비록 세상이 그들을 부러워한다고 하더라도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화가" 통고되고 있다. 

마태복음에는 이것이 나와 있지 않다. 앞에 나온 복과 비교되는 이들 화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가장 잘 설명되는 것 같이 보여진다. 

나사로는 이제 가난하고 주리고 우는 자의 축복을 다 소유하였다. 왜냐하면 그런 자들에게 약속된 모든 것은 아브라함의 품에서 그에게 다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자는 여기에 나오는 화가 적용되는 자의 특징을 모두 갖추었으므로 이 화를 다 받았다.

1. 부요한 자에게는 화가 있다. 

그들은 재물을 신뢰하는 자요. 이 세상 재산을 풍족히 소유하는 자며 그 재물로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에게 화로다 ! 그들은 자기 위로를 이미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행복을 거기 두었고 그것을 분깃으로 취하고 싶어했다(24절). 그들은 생시에 자기의 복된 것을 받았다. 그것은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가장 좋은 것이었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성싶은 모든 아름다운 것이었다. 

"부요한 너희는 미소짓는 세상에 마음을 두고, '영혼아, 재물에 둘러 쌓였으니 평안히 쉬라. 이것은 나의 영원한 안식처니라. 내가 여기에 거하리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에 들어 있다. 그렇다면 너희에게 화로다."

(1) 이 세상의 사물을 자기 위로로 삼는 것은 육욕에 눈먼 세상 속물들의 미련함이다. 

그런 사물은 저희의 편의를 위해서만 의도된 것일 따름이다. 그들은 그런 것을 가지고 즐거워하며 자랑하며 지상의 천국으로 삼는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로가 시시한 것이고 보잘 것 없는 것이다.

(2) 그들이 자기 위로가 되는 재물과 헤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그들의 불행이다. 

그들은 이 사실을 알고 두려움으로 여겨야 한다. 그들은 이들 세상 사물과 이별하게 될 때 그들의 모든 위안에는 끝장이 오며 그것은 최종적인 종말이다. 

그들에게는 영원한 불행과 고통 이외에 남아 있는 거라곤 아무 것도 없다.

2. 배부른 자들에게는 화가 있다(25절). 

그들은 포식하도록 배가 부른 자이며 마음의 소원보다 많은 소득이 있는 자이다(시 73:7). 그들은 이 세상의 숨기운 재물로 배를 채우게 된 자들이다(시 17:14 , 우리 성서와 다름). 그들은 이런 것들을 풍족한 것도 없고 더 이상 바라지도 않는 자들이다(계 3:17). "이미 너희는 배부르며 이미 부요 하다"(고전 4:8).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없이도 스스로 배부른 자이다. 그런 자에게는 화로다. 그들은 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도 뻐기고 자랑하던 모든 것을 빼앗기고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들이 자기를 배부르게 해 준다고 생각하던 것들을 남기고 떠나 갈 때에는 저희가 옮겨가는 저 세상이 결코 충족시켜 주지 못할 욕망과 소원만 가지고 가게 될 것이다. 

그들이 이토록 배불러 하는 이 모든 감각적 즐거움은 지옥에서는 거절되고 천국에서는 그 위치를 빼앗기게 될 것이다.

3. 이제 웃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 

그들은 [관능적 육욕을 따라]즐거워하는 기질을 늘 갖고 있으며 기뻐할 세상의 일이 늘 있는 자이다. 

그들은 세상적이고 육욕적인 것 외에는 달리 기쁨을 모르며, 순전히 근심을 추방시키는 세상적 관능적 즐거움에 탐닉하는 것 말고는 이 세상의 낙을 달리 취급할 줄 모르는 자이다. 

그들은 심지어 자기 마음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경건한 근심도 몰아내 버리고 언제나 바보의 웃음만 즐기는 자들이다. 

그런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웃는 것은 단지 이제뿐이며 잠시 동안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곧 애곡하며 울게 될 것이고 딴 세상에서 영원히 애통하고 울게 될 것이다. 

그 세상에는 오직 우는 것과 통곡하는 것과 끝없고 쉬임 없고 돌이킬 수 없는 슬픔만 있을 뿐이다.

4. 모든 사람이 칭찬해 주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 

그들은 사람들의 칭찬과 박수 갈채를 얻는 것을 최대의 관심사와 유일의 관심사로 삼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과 하나님의 열납하심보다 인간들의 칭찬을 더 귀하게 여기는 자들이다(26절). 

"너희에게 화가 있도다. 너희가 아무도 불쾌하지 않을 말로만 설교하면 그것은 너희가 맡은 바 신뢰와 사람들의 영혼에 대해 신실하지 않았다는 악한 표적이 될 것이다. 너희 일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말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마땅히 해야 할 말을 선포한다면 너희는 결코 칭찬이 아닌 비난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악한 길로 행하는 너희 조상들에게 아첨하고 그들에게 부드러운 말로(사 30:10) 예언한 거짓 선지자들은 사랑을 받고 칭찬을 받았다. 너희가 만일 그들과 마찬가지로 환호를 받는다면 그들처럼 거짓되이 행했다는 혐의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

우리는 선하고 지혜로운 자들의 인정을 받고 싶어해야 하는 동시에 사람들이 우리에게 대해 하는 말에도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에 있는 우매자의 비난을 무시해야 할뿐만 아니라 그들의 칭찬도 무시해야만 한다.

---------

===원수를 사랑하라

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9.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30.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공의와 자비에 대한 권면(눅 6:27-36)

이 말씀은 마태복음 말씀과 부합된다(마 5:38-48). 

"내가 너희 듣는 자에게 이르노라. 제자들뿐만 아니라 듣는 너희들 모두에게도 말하노라. 이것은 보편적 관심의 교훈이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그리스도께 부지런히 귀를 기울이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며 그 말씀은 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Ⅰ. 우리는 모든 자에게 마땅히 지불해야 할 것을 갚으며 모든 거래에 있어서 정직하고 공정해야 한다(31절).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은 바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이다." 

이성을 가진 우리는 정의감에서든 자비심에서든 남이 우리에게 행해 주었으면 하고 기대하는 것이 있다. 

서로 처지가 뒤바뀐 경우라면 이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현재 상태에서 바로 그것을 남에게 행해 줘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마음 자리에 우리 마음을 두어야 한다(욥 16:4). 

그런 뒤 우리 자신이 당연한 것으로 바라고 기대하는 그대로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구조해야 하는 것이다.

Ⅱ. 우리는 필요로 하는 자에게 자유로이 주어야 한다(30절).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라. 자선을 베풀기에 알맞은 대상이면 누구에게든지 주라. 네게 남아돌아서 공급할 여력이 있거든 부족한 자에게 주라. 스스로 도울 능력이 없는 자와 도울 능력 있는 친척을 갖지 못한 자에게 구제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제자들로 하여금 즉시 나눠주고 기꺼이 전달하게 하고자 하셨다. 

보통 일에서는 그들의 능력대로, 비상한 일에서는 그들의 능력을 벗어나서라도 그렇게 하도록 하셨다.

Ⅲ. 우리는 어쩌다 우리에게 피해를 입힌 자들을 용서하는 데 관대해야 한다.

1. 우리는 우리의 권리가 부정될 때 권리의 주장에 극단적이어서는 안 된다. 

"억지로든 속여서든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어떤 폭력에 의한 수단으로 네 속옷 가져가는 것도 금하지 말라(29절).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싸우느니 그에게 그것도 주라. 그리고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라. 빌려가거나 물품을 외상으로 가져가는 자에게 억지로 그것을 요구하지 말아라(하몬드 박사는 그렇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섭리에 의해 그런 지불 불능자가 생겼다면 법을 이용하여 그를 고소하지 말며 목을 잡느니보다(마 18:28) 차라리 손해를 보라. 사람이 네 빚을 지고 달아나며 네 물품을 갖고 도망을 치더라도 너는 당황하거나 분해하지 말라."

2.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해도 보복하는 데 엄해서는 안 된다.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고소하거나 영장을 신청하러 보내거나 법정에 호소하는 대신 저 뺨도 돌려 대라. 즉 이로써 네가 또 다른 뺨을 점잖게 맞아야 하는 위험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묵살해버려라. 그런 경우에는 흔히 사람들은 법에 호소하는 데 대한 변명으로 위신을 내세우는 법이다. 누가 네 뺨을 때리거든 그에 응수하여 곧장 한 주먹 날리기보다 그에게서 또 한 대 더 맞을 채비를 갖추라. 네 일을 신원하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모욕을 받더라도 가만히 앉아 있으라." 우리가 이같이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실 것이다(시 3:7). 그들도 하나님께 속한 자이다. 

하나님은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다"고 말씀하셨다(롬 12:19). 우리가 복수하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면, 그는 바로 이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 주실 것이다.

3. 아니,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선을 행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구주가 이 성구 가운데서 가르치시고자 하시는 주된 목표이다. 

그는 자기 종교에 특유한 율법과 그 율법을 완성시키는 하나의 가지로서 이것을 가르치려고 하신다.

(1) 우리는 우리의 가해자에게 친절해야 한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해야 하며 그들에게 선의를 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들에게 선을 행해야 하며 어느 누구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형편이 우리의 선행을 요구하고 우리에게 선행할 능력이 있다면 그들에게 어떤 선한 직분이라도 행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기회만 있다면 우리의 원수들에게 아무런 악의를 품고 있지 않으면, 복수를 하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적극적 행위로써 나타내 주어야 한다. 

원수가 우리를 저주하며 비방하며 잘못되기를 비는가? 그들이 말이나 행동으로 우리를 학대하는가? 그들이 우리를 형편없는 존재나 미운 존재로 만들려고 애쓰는가? 그러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축복하고 좋게 말하며 그들이 잘 되도록 기원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특히 그들이 영혼이 잘 되기를 빌며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자가 되자. 이 말씀은 반복되고 있다(35절).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라." 

이 어려운 의미를 우리에게 권장하기 위해 그것은 관대한 일로 묘사되며 도달할 자가 거의 없는 목표로 제시되고 있다. 

우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비범한 데라곤 조금도 없는 일이며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특유한 일도 아니다.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에는 자기 부정이라고는 추호도 없다. 

그것은 타락된 상태에 있는 본성을 따르는 일에 불과하며 본성에 대해 아무런 압력도 가하지 않고도 되는 일이다. 

우리가 바라는 대로 말하고 행하는 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덕분이 아니다. 

우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고 그들의 친절에 답례한다면 그것은 관습과 체면과 의리의 원칙에서 나오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칭찬 받을 일이 무엇이뇨?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에 무슨 명예가 되며 그의 이름에 명성을 쌓게 할 것이 무엇이냐?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치심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는 죄인들도 꼭 같은 일을 행한다. 그러나 보다 훌륭하고 혁혁한 일을 행하며 너희 이웃을 능가하는 일을 행하는게 너희한테 어울린다. 너희는 의당 죄인이 행할 수 없고 그들의 원리가 추종할 수 없는 일을 행해야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다. 너희는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한다." 

칭찬은 우리에게 돌아올게 아니다. 우리는 이름과 찬미를 인하여 우리 하나님께 드려진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칭찬은 그가 받으실 것이다.

(2) 우리는 어떤 이득도 기대할 수 없는 자들에게도 친절해야 한다.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 주라"(35절). 

이 말씀은 부자는 가난한 자가 꼭 필요한 것을 마련할 수 있도록 소액의 돈이라도 빌려주라는 것을 의미한다. 

가난한 자들과 그 가족이 일용할 양식을 구입하거나 그들이 감옥에 가지 않도록 빌려주라는 뜻이다. 

그런 경우 우리는 빌려 준 돈에 대한 이자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빌려주어야 한다. 

우리가 물건을 구입하거나 장사하기 위해 돈을 채용해 가는 자에게서 이자를 요구하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그러나 가난한 자에게는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의무는 여기서 끝나진 않는다. 우리는 빌려주는 것을 떼먹을 염려가 있는 자에게도 빌려주어야 한다. 즉 너무 가난해서 우리에게 상환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자한테도 빌려주어야 한다. 

이 교훈은 모세의 율법(신 15:7-10)으로 가장 잘 설명이 될 것이다. 이 율법에는 면제년이 임박해 있더라도 가난한 형제에게 그 요구하는 대로 꾸어줄 것이 의무로 규정되어 있다. 이런 관대한 자비심에는 두 가지 동기가 있다.

① 그것은 우리의 이익을 늘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상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35절). 땅에서 진정한 자비의 원리에서 구제하거나 투자하거나 빌려주거나 잃은 것은 저 세상에서 우리에게 보증될 것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이득이 될 것이다. 

"너희는 상환을 받을 뿐만 아니라 상을 받을 것이며, 큰상을 받게 될 것이다. 너희는 '오라. 복된 자여 ! 천국을 유업으로 받으라'는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

② 그것은 우리의 명예를 높여 줄 것이다. 

우리는 이 일로 선하신 중에 계신 하나님을 닮게 될 것이다. 선하다는 것은 최대의 영광이다.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될 것이며 그에게 자기와 같다는 이유로 그의 자녀로서 인정받게 될 것이다."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인자하신 하나님께서는 극히 악한 자에게도 일반 섭리의 선물을 주신다. 날마다 자기를 격노케 하고 자기에게 반역하며 바로 그 은사를 악용하여 자신에게 수치를 돌리는 극악한 자에게도 보통 섭리의 혜택을 누리게 하신다. 

여기에서 그는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36절)고 추론하신다. 

이것은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는 말씀의 설명이다. 

마태복음의 이 말씀은 "그의 극히 광명하고 온전하신 일들로 너희 아버지를 모방하라"는 말씀이다. 

악한 자와 은혜를 모르는 자들에게까지 자비하신 하나님처럼 자비한 자들은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 같이 온전한 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행위가 무한히 부족하긴 하지만 은혜로써 그 행위를 기뻐 받으신다. 

자선은 온전하게 매는 띠라고 불리운다(골 3:14). 이것은 우리가 우리 형제들에게 자비로울 것을 강력히 책임지운다. 우리를 해롭게 하던 자들에게까지도 자비로우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타인에게 자비로우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자비로우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에도 악하고 은혜를 모르는 자가 아닌가 ! 우리가 불로 소멸되지 않는 것은 그의 자비 때문인 것이다.

----

37.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네 눈 속에 있는 들보

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43.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45.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듣고 행하는 자와 행하지 아니하는 자

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48.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49.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공의와 성실(눅 6:37-49)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모든 말씀은 마태복음에도 나온 것이다. 

그 중 일부는 7장에 나왔고 다른 것들은 그외 딴 데 나와 있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흔히 사용하시던 말씀이다. 

단지 언급되는 것만이 필요할 뿐이었고, 그들을 적용하기란 쉬운 일이었다. 

그로티우스(Grotius)는 우리가 일관성을 찾아 여기에서 너무 비판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이 말씀들은 솔로몬의 잠언의 비유처럼 주옥같은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Ⅰ. 우리는 남을 비평하는 데 매우 공평해야 한다. 

우리들 자신도 조금은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을 비판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비판을 받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을 정죄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37절).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견디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는 자비를 남에게 행하라(고전 13:7). 그러면 남들도 그런 자비를 네게 베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비판하지 않으실 것이며, 정죄하지도 않으실 것이다. 하물며 사람이랴 !" 

딴 사람들의 이름에 자비로운 자들은 남들도 자기들 이름에 자비롭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Ⅱ. 우리가 주고 용서하는 심령이면 그 혜택을 거두게 될 것이다.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우리가 우리에게 입힌 피해를 입힌 딴 사람을 용서해 주면 남들도 우리의 실수를 용서해 줄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면 하나님께서도 당신께 죄지은 우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관대한 일을 도모하는 관대한 자를 결코 잊지 않으실 것이다(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에서 너희에게 그것을 보상해 주실 것이다. 남에게 준 것은 하나님께 빌려 준 것이다. 

그는 그걸 잊으실 만큼 불의치 아니하사(히 6:10) 그것을 다시 갚아 주신다. 사람들이 그것을 너희에게 안겨 주며 돌려 줄 것이다. 

하나님은 흔히 인간을 자기 도구로 사용하신다. 그러나 인간을 복수의 도구로만 사용치 않으시고 상 주시는 공의의 도구로도 사용하신다. 

우리가 남이 궁핍할 때 정당한 방법으로 구제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궁핍할 때 남의 마음을 움직이사 우리를 구제하게 하시며 후히 주게 하시며,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게 하실 것이다. 

풍성히 씨뿌리는 자는 풍성히 거둘 것이다. 하나님께 보상을 받는 자는 풍성한 보상을 받는다.

Ⅲ. 우리는 남에게 해 주는 대로 우리도 그렇게 받을 것으로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다." 

남을 가혹하게 다루는 자는 아도니베섹처럼(삿 1:7) 하나님은 의로우시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들은 남이 자기들에게 학대하면 마찬가지의 앙갚음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데 감사를 느껴야 한다.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남에게 친절히 대하는 자들은 기회 닿는 대로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친절히 행할 친구를 일으키시리라고 희망할 이유가 충분하다. 

비록 섭리가 항상 이 규칙을 따르지는 않더라도 보편적으로는 우리의 모든 가혹한 행위를 막고 모든 자선 행위를 권장하기에 충분할 정도로는 이 규칙에 의거한다. 더군다나 완전하고 정확한 보상은 저 세상을 위해 예비 되어 있는 것이다.

Ⅳ. 무지하고 그릇된 자의 안내를 자청하는 자들은 같이 멸망하기 쉽다(39절).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자만심과 편견과 아집(我執)으로 눈먼 바리새인들이 소경 된 백성을 정도로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이 딴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

이 세상의 여론과 세상 경로와 관습에 이끌리는 자는 스스로 눈먼 자이며, 소경에서 인도함을 받는 자여서 흑암에 앉아 있는 세상과 함께 멸망할 것이다. 

무지하게 모험심으로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는(출 23:2) 자들은 소경을 따라 많은 자를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로 나가는 자이다.

Ⅴ.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들의 선생이 받는 것보다 나은 대우를 기대할 수가 없다(40절).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받은 것보다 많은 명예와 즐거움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세상적 화려함이나 장엄함을 노려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는 이런 것을 결코 바라지 않으셨고 오히려 거절하셨다. 또 그리스도께서 떠맡지 않으시려던 세상 권력을 좋아해서도 안 된다. 

스스로 온전한 자라는 걸 나타내고 싶은 자, 즉 확실히 제자라고 믿는 자라면 누구나 자기 선생과 같아야 한다. 

선생이 그러한 것처럼 세상과 세상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죽어야 한다. 

그 선생이 그런 것 같이 수고와 자기 부정의 삶을 살며 모든 자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구부려 수고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행해야 한다. 

그리하면 그는 완전한 제자가 될 것이다.

Ⅵ. 남을 책망하고 개선시키기 위해 그들을 떠맡는 자는 자신이 결백하고 무해하며 책망 당할 일이 없는 자인지 살펴보는 데 관심 해야 한다(41, 42절).

1. 자기 잘못은 깨닫지 못하면서 남의 잘못을 혹평하는 자는 매우 그릇된 호의를 가진 자이다.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할 정도로 무감각하면서 눈의 티 같은 남의 작은 잘못을 캐낼 만큼 눈치 빠르다고 자부한다는 것은 이만저만 억설이 아니다.

2. 개선시키려는 자선을 집안에서부터 시작하지 않는 자는 남을 개선하도록 도와주기에는 전혀 적당하지 못한 자이다. 

네 자신의 눈 속에 들보를 두고서도 어떻게 네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겠다고 나설 수 있느냐? 그것은 선한 눈뿐만 아니라 선한 손도 필요로 하는 일이다.

3. 타인의 영혼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기 자신의 영혼에 대해 걱정하는 자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 형제의 눈에서 띠를 빼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럴려면 우리는 자신부터 먼저 착수함으로써 그런 자격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을 개선함으로써 솔선수범한 그 영향력으로 남의 개선에 이바지할 수가 있다.

Ⅶ. 우리는 사람들의 말과 행실이 그들의 인간 됨에 따라 나온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들의 언행은 그들의 마음과 그들의 원칙 그대로를 반영하는 것이다.

1. 마음은 나무이고 말과 행동은 나무의 종류대로 열린 열매이다(43, 44절). 

사람이 참으로 선한 사람이고 그 마음에 은혜의 원리를 가진 사람이며 영혼의 주관과 경향이 하나님과 천국을 향해 기울어져 있는 자라면 설사 그 열매가 풍성하지 못하고 열매 중 일부는 못쓰게 되고 그가 때로는 겨울 나무 같다손치더라도 그는 못된 열매를 맺지 않는 자이다. 

비록 그가 네게 마땅히 해야 할 선을 다 행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구체적 사례에서 네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 

설사 그라 나쁜 품행을 개선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좋은 행실을 못되게 타락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맺는 열매가 "썩은" 열매이고, 그의 신앙적 태도가 마음과 행실을 타락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그의 말이 악하며, 그가 음주자나 간음자나 맹세자나 거짓말쟁이이며, 어떤 사례로 부정하고 천륜에 어긋나는 자이면 그의 열매는 못된 열매이고, 그렇다면 그런 자는 "좋은 나무"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다. 

반면에 못된 나무는 푸른 잎은 낼지언정 좋은 열매는 맺지 못한다. 왜냐하면 가시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며 찔레에서 포도를 얻지 못하는 때문이다. 

너희는 원한다면 가시나무에 무화과를 붙이고 찔레에 포도를 얹어 둘 수 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그것이 그 나무의 자연의 산물도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너희는 악한 성품의 소유자로부터 선한 행위를 기대할 수가 없다. 따라서 너희는 열매가 좋으면 나무도 좋은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마음을 바로 알아 맞출 순 없더라도 그 행위가 경건하고 거룩하며 규칙적이면 그것은 하나님께 의로운 행위일 것이라고 온정 어린 생각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알기 때문이다. 악한 자는 악한 것을 말한다(한글 개역 성서: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사 32:6). 

현대의 경험자도 이런 점에서 "악은 악인에게서 나온다"(삼상 24:13)는 고대의 잠언에 수긍한다.

2. 마음은 곳간이다. 

말과 행실은 그 곳간의 지출이거나 거기서 나오는 산물이다(45절). 우리는 이 말씀을 마태복음 12장 34, 35절에서 읽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이 마음속에서 왕노릇하는 자를 선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것은 마음에 쌓은 선이다(쌓은 것이란 말은 창고와 보물의 뜻도 있다) 

그것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며 타인의 복리를 위해 소비할 수 있는 좋은 재화를 제공해 준다. 사람은 그런 선한 창고에서 선을 꺼낼 수가 있다. 

그러나 세상과 육에 대한 사랑이 왕노릇하는 곳에는 마음에 악한 것이 쌓여 있어서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끊임없이 악한 것을 낸다. 

너희는 항아리에서 떠내 봐야 그 속에 든 것이 술인지 물인지 알 수 있듯이(요 2:8)나오는 것으로 마음에 있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사람들이 보통 입으로 말하며 재미와 즐거움을 느끼며 말하는 것은 대개 마음에서 가장 깊고 높은 데 있는 것과 일치한다.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 이는 땅에 속한 자이다(요 3:31 참조). 

그러나 선한 사람이 악한 말을 흘릴 리가 없고, 악한 자가 나쁜 목적으로 선한 말을 악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개는 마음과 말이 일치하는 법이다. 말이 헛되냐 성실하냐에 따라 마음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것뿐만 아니라 그 가득한 것으로도 우리 마음을 채우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Ⅷ.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우리는 그것을 행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에게 대한 관계를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며, 우리는 그에게 순종하는 것을 본분으로 삼아야 한다.

1. 우리가 정작 그리스도의 뜻에 순응하는 일과 그리스도의 나라의 세력에 이바지하는 일을 본분으로 삼지 않으면서 마치 그의 명령에 전적으로 복종하고 그를 섬기는 일에 헌신하기라도 하는 듯이 주여, 주여하고 부르기만 한다면 그것은 그에게 모욕을 가하는 일이다. 

우리는 걸핏하면 주여 주여하고 부르면서도 우리 마음의 길과 우리가 보기에 좋은 대로 행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비웃으면서 말한 자들처럼 그리스도를 조롱할 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기도에서 그를 주여, 주여하고 부르는가 ? (마 7:21, 22 비교) 

자기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않는 자의 기도는 가증히 여김을 받게 될 것이다.

2. 우리가 형식적인 신앙 고백으로 구원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아도 천국에 이르게 될 줄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 된다. 

그리스도는 이것을 비유로 설명하시는데(47-49절), 그것이 나타내 주는 바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자기 영혼이나 영원을 위해 틀림없는 작업을 하는 자들이란 바로 이런 자이다. 

즉 제자로서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의 말씀을 순종할 뿐만 아니라, 그의 말씀을 행하는 자가 곧 그 사람이다. 

그는 매사에 자기의 거룩한 신앙의 확립된 규례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자이다. 

이런 자들만이 연단 받을 때에 소용이 될 수 있는 올바른 경로를 취하는 자이다. 

그들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그들은 반석 위에 집 짓는 자들처럼 신앙 생활에서 수고하는 자이다. 

그들은 낮은 데서 시작하는 자이다. 그들은 깊이 파는 자이다. 그들은 소망의 주초를 그리스도께 둔다. 

그리스도는 만세의 반석이시며 어떤 사람도 딴 주초를 놓을 수 없다. 이들은 나중을 위해 준비하는 자이다. 그들은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고 있는 자이다. 

그들은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고 장차 올 영원한 시간을 위해 좋은 주초를 예비하는 것이다(딤전 6:19). 

이렇게 하는 자야말로 자기를 위해 잘 행하는 자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그들은 시험과 박해의 시기에도 자기의 온전성을 지키게 될 것이다. 

남들은 자기들의 견실함을 버리고 실족하게 되는 때에도 이들은 여호와 안에서 굳게 설 것이다.

② 그들은 최대의 고난 속에서도 위로와 평화와 소망과 기쁨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환난의 폭풍과 물결도 그들을 흔들지 못할 것은 그들이 반석 곧 그런 것보다 더 높은 반석을 딛고 서 있는 까닭이다.

③ 그들은 영원한 복리를 확보해 두고 있다. 

죽음과 심판에서도 그들은 안전하다. 순종하는 신도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된다. 그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게 될 것이다.

(2) 그리스도의 말씀을 단지 듣기만 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는 자들은 치명적 실망을 예비하고 있을 따름이다.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자기 의무를 알면서 그 의무에 대해 태만한채 살아가는 자)는 주초 없이 집을 짓는 자와 같다. 

그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근거와 기초는 동의어임, 역주) 소망에 즐거워한다. 

그러나 그의 소망은 그가 극히 그 위로를 필요로 하고 유종의 미를 기대할 때 그에게 실망이 될 것이다. 

탁류가 그 집에 맹렬히 부딪칠 때 그 집은 떠내려가고 만다. 그 집 밑에 있는 모래가 씻겨가 버리면 그 집은 곧 무너진다. 

외식하는 사특한 자가 비록 소득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취해 가실 때에는 그의 소망이 바로 이와 같다. 

그의 소망은 거미줄과 같고 유령과 같다.

===

@@알패오의 아들.(작은) 야고보

● 세 명의 야고보

주 예수의 주변에는 야고보라고 불린 사람이 세 명 있었다. 

한 명은 요한의 형제이며 세베대의 아들인 큰 야고보이다. 다음은 알패오의 아들인 작은 야고보이다. 다른 한 명은 예수의 형제 야고보이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의 어머니는 마리아이며, 그의 형제는 요세 또는 요셉이다(막 15:40, 마 27:56). 

그가 '작은 야고보'라 불려진 것은 세베대의 아들인 큰 야고보에 비해 나이가 아래든가 아니면 몸집이 작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한복음에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의 이름이 나온다(19:25). 

이 마리아를 마태복음 27장의 '야고보와 요셉<요세>의 어머니 마리아'(56절)와 비교해 보면, 마리아의 남편 알패오는 글로바와 같은 인물로 볼 수 있다(눅 24:18).

에우세비오스는 '교회사'에서 헤게시푸스의 증언이라 하며, 마리아의 남편 글로바는 예수의 아버지 요셉의 형제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이 옳다면 형제는 한결같이 마리아라는 이름의 아내와 살았고, 자식의 이름은 야고보와 요세, 이들은 같은 인물이라 볼 수도 있고 형제 사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에 와서 다대오, 다대오 유다가 알패오의 아들임을 밝히는 주장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다대오 유다를 유다서의 저자라고도 인정하기도 한다. ---또한 알패오의 아들 중 시므온은 예루살렘교회의 2대 감독이었음도 확인되었다....따라서 알패오(=글로바.....그의 아내는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로 기록하고 있다)의 아들들로는 레위 마태, 다대오 유다, <작은> 야고보, 요셉<요세>, 시므온 등이고, 이중에 3명이 예수의 제자였다!!>

(그러나 발레시우스는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요셉의 아내 마리아는 자매이며, 예수와 작은 야고보는 외가쪽 사촌 형제라고 하며 헤게시푸스의 주장을 정정하고 있다. 그러나 자매가 꼭같이 마리아라는 이름이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다.)

(주후 2세기의 교부 크리소스토모스는 세리 마태의 아버지 이름이 알패오이며(막 2:14), 작은 야고보의 아버지 이름도 알패오인 점으로 미루어, 마태와 야고보는 형제이며 직업도 같은 세리 출신이라고 주장하였다.  ---만일 이 주장이 옳다면 열두 사도 중에는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마태와 작은 야고보 등 세 쌍의 형제가 있었던 것이 된다. 더욱이 세리인 형제가 모두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마태와 작은 야고보가 형제였다면, 작은 야고보는 도대체 언제 주 예수의 부름을 받아 제자가 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마태가 세관에서 예수의 부름을 받을 때에도 그리고 마태가 잔치를 할 때에도 작은 야고보에 관해서 복음서는 침묵하고 있다.

● 예수의 형제 야고보와의 관계

[이론적 모순이 있는 가톨릭의 견해] 가톨릭 교회에서는 예로부터 작은 야고보와 예수의 형제 야고보는 같은 인물로 보고 있다. 그들의 어머니 이름이 같은 마리아이며, 또 형제도 같은 요세이며, 무엇보다도 그 이름은 똑같은 야고보라는 점을 근거로 내세운다.---그러나 한 야고보의 아버지 이름은 요셉이고, 다른 야고보의 아버지 이름은 알패오인 문제는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가톨릭 교회에서는 그들의 아버지 이름이 둘로써, 요셉은 곧 알패오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문제점이 있다. 

[예수의 형제, 주의 형제 야고보....예루살렘교회의 초대 감독]

예수의 형제 야고보는 사도들과 행동을 같이 하였고(행 1:14),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으며(갈 2:12), 사도회의의 의장이었고(행 15:13), 교회의 기둥이었다(갈 2:9).

-----------

그러나 주의 형제 야고보를 열두 사도 중 한 명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같은 인물로 보는 것은 잘못된 추측이다. 

그 근거로 [주의 형제 야고보에 대해 특정된 바]다음과 같은 항목들을 내세울 수 있다.

첫째, 형제 야고보는 예수의 생전에 신도가 아니었다(요 7:5). 둘째, 그는 예수를 미쳤다고 했다(막  3:21). 셋째, 사도의 자격 곧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행 1:21~22)에 어긋난다.

주의 형제 야고보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였다(고전 15:7). 따라서 주의 형제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인 작은 야고보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의 죽음....제일 먼저 순교한 제자 ]

역사가 헤게시푸스에 따르면, 예수의 형제 야고보는 율법을 엄격히 지키고 경건한 생활을 하여 여러 사람으로부터 '의인 야고보'라고 일컬어지며 한 몸에 존경을 받았다. 

평소에 기독교를 적대시하던 대제사장 안나스는 주후 62년 유월절 때 로마 총독이 예루살렘에 없는 틈을 타 모략으로 야고보를 잡아들였다. 안나스는 심문도 하지 않고 야고보를 성전 건물 꼭대기에서 밀어 떨어뜨리고 나서 돌로 쳐 죽였다.

야고보는 죽으면서 "아버지 하나님, 원하오니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기도하였다. 

그 때 건달꾼 한 명이 달려와 몽둥이로 야고보의 머리를 때렸다. 야고보는 형제인 주 예수를 위하여 장렬하게 순교하였다(에우세비오스 '교회사').

● 또 다른 주장 - 마태의 형제

윌리엄 바클리는 그의 '예수의 제자들'에서 교부 크리소스토모스의 주장에 일부 동의하고 있다. 

즉, 마태와 야고보의 아버지 이름이 같은 알패오라는 점에서 그들은 형제였다. 그러나 마태의 직업과는 달리 야고보는 세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도 명단에는 네 명씩 세 그룹으로 나뉘어 그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상위 그룹 네 명이 베드로, 안드레, 큰 야고보, 요한이며, 하위 그룹 네 명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 가룟 유다 등이다.

이 하위 그룹 네 명은 사상적으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광신적인 애국심으로 맺어져 있었다. 따라서 이 네 사도는 한 때 열심당에 속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에 관해 바클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마태와 야고보는 형제지만 사상적으로 완전히 대립적이었다. 

마태는 헤롯 안디바의 앞잡이로서, 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행정 기관의 세리가 되었다. 

<작은>야고보는 예로부터의 전통에 고집하여 보수적인 국수파로서, 로마에 협력하는 모든 사람들을 원수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마태와 야고보 형제는 서로 매국노 또는 테러분자라고 욕하며 등지고 살았다. 

따라서 작은 야고보가 세관에 없었던 것도 그리고 마태의 잔치에 참석하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고 바클리는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서로 미워하며 등지고 살던 형제를 주 예수께서 함께 불러 사도로 세우셨다는 것은 얼마나 감동적인 사건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의 주님이시며 화해의 주님이시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 16).

잊혀진 예수의 사도, 작은 야고보

성경에는 알패오의 아들인 작은 야고보가 예수의 열두 제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항 외에는 아무런 기록도 없다.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작은 야고보가 어떤 인물이었으며 어떤 활동을 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추측하건대 작은 야고보도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때로는 좌절도 하고 실망하기도 했을 것이다. 

또한 주 예수의 크신 능력을 보고 놀라면서 용기 있게 주 예수와 더불어 삼 년 동안 지냈을 것이다.

작은 야고보는 전혀 눈에 띄지 않는 존재로 예수를 따랐다. 그렇지만 예수의 인격에 끌려 끝까지 예수를 따랐다. 

그는 예수를 베드로가 고백한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며, 자기의 고집은 모두 버리고 끝까지 주 예수를 따랐다.

어느 성서학자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가리켜 "잊혀진 예수의 사도"라고 부른 바 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열두 사도 중 '작은 야고보'라는 이름 그대로 "지극히 작은 자" 가운데 한 명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작은 야고보는 수제자 베드로처럼 예수를 모른다고 말한 일이 없다. 더구나 금전을 맡았던 가룟 유다처럼 주 예수를 배반하려는 생각은 터럭만큼도 가진 적이 없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앞에 나서는 일 없이 예수를 따랐다.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과 같이 정치적인 야망을 가진 일도 없었다. 도마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를 의심한 일도 없었다.

예수의 제자가 된 이후로는 성격도 온화해져서 동료인 사도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은 적도 없었다. 작은 야고보는 처음부터 끝까지 "작은 일에 충성한" 모범적인 사도였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페르시아에서 전도하다가 이교도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하기도 하고, 산 채로 톱질을 당해 순교했다 하기도 한다. ---예수의 승천이후 시리아에 가서 시리아 교회를 세웠고 후에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전도를 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돌로 맞아 죽음에 처하나 그의 목숨이 끊어지지 핞자 톱으로 그의 몸을 켜서 죽였다고 알려지며, 유해는 처음에 예루살렘에 묻혀 있다가 후에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가 AD572년 로마로 옮겨져서, 그 매장지는 "성 빌립과 성 야고보 교회"라 하였다가 "거룩한 사도의 교회(The Church of the Holy Apostle)로 바꾸게 됨.

-------

작은 야고보 <낙타 무릎> 기도의 제자..

:::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비교해서, *1>나이가 적거나, *2>키가 작았거나, *3>영향력이 작아서 거의 활동이 드러나지 않았음 

::: 제자들 중 지극히 작은 자의 표상, 소외된 자, 연약한 자, 연소한 자의 대표로 언급됨...주님을 충실하게 섬기는 무명의 기독자들의 대표처럼 인식되고 있음

::: 초대교회 문서에는 <젤롯당>시몬, 다대오<유다>, 가룟유다외 더불어 열심당이 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막2:14>에서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통해 레위 마태<세리 마태>와 형제지간임을 축측할 수 있다....레위 마태는 어찌 보면<로마제국의 앞잡이인 세리로 살았었기에 당당히 내세울 수 없는, 내다 논 자식 취급 받았을 수도 있다) 

::::유세비우스, 또는 요세푸스<초대교회 역사가>는 야고보에 대해 말하기를, "그는 한 때 훌륭한 애국자였고 후에는 매우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는 금욕적인 자기 수양에 그 누구보다도 힘썼던 제자였다. 12제자 중에서 가장 기도를 많이 한 제자가 이 작은 야고보였다.제자들이 떠들고 서로 나서려 할 때에도 작은 야고보는 구석에서 항상 기도해서 그의 무릎이 굽어졌기에 그는 낙타무릎이라 불리어졌다. 예수의 제자 중에서 기장 열심히 주를 따르며, 가장 예수를 닮은 이가 바로 작은 야고보였다"

===

@@ [예수를 만난 사람들] (11) 열심당원 시몬

● "유일한 지배자이신 하나님"

예수의 열두 사도 중 두 명의 시몬이 있다. 한 명은 요나의 아들 시몬 베드로이고, 다른 한 명은 열심당원 시몬이다. 열심당원 시몬은 신약성서에서 단지 사도 명단에만 올라 있을 뿐이다.

 열심당(Zealot)에 관해서는 예수와 거의 같은 시대에 활동한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AD37 ~ 100쯤)가 그의 저서 '유대 고대지(古代誌)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엣세네파 등 3개 학파외에 열심당을 '유대인의 제4 학파'라고 부르고 있다.

"열심당의 창시자는 갈릴리의 유다이다. 그 신조는 바리새인과 같다. 그러나 자유에 대하여 더할 나위 없는 애착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은 유일한 지배자이며 주님이다'라는 신앙을 주장하였다."

열심당원 중 극단주의자를 시카리(암살자)라 불렀다. 그들은 무리를 지은 강도로서 반달 모양의 단검을 사용하였다. 그들의 단검은 로마의 '시카'라는 낫과 비슷하게 생겼다. 이 무기로 수많은 사람을 암살하였다.

"열심당원은 죽음을 우습게 여겼고, 친척이나 친구를 죽이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목숨이 끊어져도 하나님 말고는 누구도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 굳은 결의는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다."

역사적으로 볼 때 열심당의 정신적 선구자는 마카베오이다. 그의 뜨거운 종교적 열의가  검을  들게  하였고,  주전  2세기에 이교도를 유대 땅에서 몰아내었다. 이 마카베오의  이상은  로마가  팔레스틴을 정복하여 유대인을 지배하게 되면서 부활하였다.

열심당은 주후 6년에 있은 로마의 호적 조사  때  반란을  일으켰다.  갈릴리의  유다가 그 첫 지도자였다(행 5:37). 유다가 죽은  후에도  그들의  독립  운동은  계속되었다.

열심당원은 당면한 원수 로마 군대를 팔레스틴에서 몰아내고, 로마의 지배로부터 유다를 해방시키며, 로마의 국기를 예루살렘의 게양대에서 내려 찢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았다. 그 목적은 때가 이르면 메시아의 힘으로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확신하였다.

● 열심당과 예수의 제자들

예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후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를 가리켜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하였다. 그 선지자는 두말할 것 없이 메시아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 6:15).

열심당원이었던 시몬은 일찍부터 자기들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메시아는 바로 예수라고 생각하였다. 아마 그는 예수를 조국의 독립 운동에 이용하기 위하여 예수의 제자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성서학자 오스카 쿨만의 저서 '예수 시대의 혁명가들'에 따르면, 예수 주위에는 열심당원과 같은 사상을 품고 있는 제자들이 모여 있었다. 열심당원 시몬 외에도 다음 제자들이 그 계열에 속한다고 하였다. ...가룟(이스카리옷)이란 말이 라틴어 시카리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우선 가룟 유다,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던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주 예수께서 보아너게(우레의 아들)라는 별명을 지어준 요한과 야고보 형제.....복음서에 베드로가 검을 가지고 있다가 겟세마네에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른 일이라든가, 세베대의 아들들이 주 예수의 좌우편 자리를 원했던 일이라든가, 제자들이 그 나라에서 누가 가장 높은가 하는 문제로 말다툼을 한 일 따위는 모두 열심당원과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신학자 아이슬러는 심지어 예수 자신이 열심당에 속하는 혁명가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비약한 추측이다. 주 예수는 빌라도에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 하나님 나라의 투사 시몬

열심당원 시몬은 처음에 종교에서 동떨어져 정치적이 된 메시아 사상의 소유자로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시몬은 처음에 열심당원으로서 다음과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만군의 주 여호와에 대해 열심인 광신도. ...둘째, 율법에 대해 열심인 엄격한 율법주의자. ...셋째, 애국심에 불타서 조국 독립에 대해 열심인 국수주의자. ...넷째, 이방인 배척에 열심인 극단적인 배타주의자. ...다섯째, 과격한 수단을 쓰는 일에 열심인 폭력주의자. ...여섯째. 게릴라 전술에 열심인 테러리스트.

열두 사도 중 한 명으로 부름 받은 열심당 시몬은 주 예수와 밤낮 함께 행동하며 비로소 예수를 이해하게 되었다. 고결한 인격의 소유자인 예수는 사랑의 왕국에 합당한 국민을 만들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의 피로써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시려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시몬은 자기 인격도 사상도 날로 변화하는 것을 느꼈다. 주 예수의 말씀이 자나 깨나 머릿속에 맴돌며 마음에 자리잡고 있었다. 시몬은 주 예수를 통해 지금까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충격을 느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8~42).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애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시몬은 자기의 인격도 사상도 완전히 변하여 다른 사람이 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시몬은 '열심당원'이라는 이름 그대로 모든 것에 대해 열심이었다. 단지 열심의 대상이 육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바뀌었을 따름이었다.

첫째, 하나님에 대하여 열심이었다. ...둘째,  복음에 대하여 열심이었다. ... 셋째,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수립을 위해 열심이었다.... 넷째, 하나님의 적대자인 사탄과의 전투에 열심이었다. ...다섯째, 죄에서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 열심이었다. ...그리고 여섯째로 영적인 투쟁을 위해서는 자기 목숨도 아끼지 않고 내놓았다.

열심당원 시몬은 하나님 나라의 투사가 되었다. 예수의 제자가 된 그는 폭력주의를 부정하고, 주 예수의 희생적인 사랑을 따랐다. 이제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단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 영광스러운 순교자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떠나가신 후 주의 사도들은 한결같이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떠나 해외 전도를 하였다. 시몬은 애굽과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 등 넓은 지역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예순 살의 나이를 갓 넘긴 무렵 머나먼 이방에서 슬픈 소식을 들었다.

일찍이 자기가 속해 있던 열심당원들이 벤 엘리아살 야일의 인솔 아래 겨우 천여 명의 소수 병력으로 막강한 로마 군대에 맞서 싸운다는 소식이었다. 그들은 사해를 눈 아래 굽어보는 마사다 요새에서 농성한다고 했다.

그들을 토벌하는 로마군 사령관은 플라비우스 실바로서, 그가 거느리는 토벌군은 제10군단 1만5천 명이었다. 마사다의 열심당원들은 3년 동안 버티다가 주후 73년 4월에 거의 전원이 장렬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

열심당원이었던 젊은 날의 시몬은 사람을 죽이는 일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그릇된 혁명가였고 테러리스트였다. 따라서 시몬이 주 예수의 부름을 받아 제자가 되지 않았었다면, 아마 마사다에서 로마군과 싸우는 혁명가 중 한 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새롭게 거듭난 시몬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새로  다짐하였다. 일찍이 열심당원이었던 시몬은 그 후에도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복음을  들고  중동  지역을  바쁘게 순회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열심당원 시몬은 페르시아 지역을 전도하며 이교도들의 박해를 받았다. 때로는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고, 몽둥이로 매를 맞아 거의 죽을 뻔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몬은 굴복하지 않고 수아닐이라는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수아닐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이교도에게 붙잡혀 톱으로 허리를 잘려 순교하였다. 가톨릭은 10월 28일, 동방교회는 5월 10일이 열심당원 시몬의 기념일이다.

------------

⑪ 열 두 제자. 열심당 시몬.(눅 06:12~16)

이스라엘의 지명을 소재로 한 유명한 영화가 있는데 제목이 마사다(사해 바다의 서남쪽 높은 언덕 위에 있음)입니다. 마사다를 배경으로 한 영화로서 예수님 이후 이스라엘은 로마의 강압적인 통치 아래서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많은 유대인이 로마에 잡혀갑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수난 속에서 세력 없음을 한탄하며 최후까지 로마 군병들과 싸우겠다고 결심하고 남아 있는 셀롯인, 즉 열심당원은 마사다라는 높은 산까지 올라갑니다. 그곳에는 헤롯 궁정의 잔해가 남아 있고, 피난처도 있으며, 또 비가 오면 빗물을 담아서 모아 둘 수 있는 천연석으로 된 상당히 큰 못도 있습니다. 메마른 사막 지대의 높은 산 위에 올라서 로마에 항복하기를 거부하고 그들과 싸우는 것은 이미 패배라는 기정사실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들과 싸우는 것은 민족의 자존심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사다에 모인 열심당원이 마지막까지 항쟁을 하나 더는 버틸 수가 없는 처지에 이릅니다. 그러자 열심당원은 로마 군병들이 그곳으로 올라오기 전 약 천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치욕의 굴욕을 당하는 것보다 집단 자결을 택합니다.

로마에 끝까지 굽힐 수 없다는 자존심의 절개를 고백한 셈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징집이 되어 군인이 되는 서약을 이곳 마사다에서 행합니다. 그리고 마사다에는 관광용품을 많이 파는데 어느 물품이든지 마사다는 결코 다시는 함락되지 않을 것이다. 라는 글이 쓰여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제자 시몬에 대한 수식어를 보면 셀롯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열심당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국가의 독립을 바라는 열망을 품고 산 제자 시몬은 어떤 사람인지 열두 제자 열한 번째 시간을 강론하면서 살펴보겠습니다.

 1. 시몬(Σίμων)이 소속하였던 셀롯의 성격

15 마태와 도마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누가는 셀롯(Ζηλωτής) 시몬이라고 기록한 데 비해 마태와 마가는 가나안인(Κανανίτης) 시몬이라고 기록합니다(마 10:04; 막 03:18). 그러면 셀롯과 가나안인 이 두 용어는 어떤 뜻이며 그 상관관계가 무엇인지를 우선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 등 기존 3대 파에다 또 하나의 강력 단체인 셀롯파가 등장하여 4파로 활동하였습니다. 

셀롯의 기원은 흔히 말하는 신구약 중간 시대에 해당하는 B. C 167년경 구국운동을 하는 마카비 형제를 중심으로 뭉쳐진 단체에서부터 유래합니다. 그러나 이 단체가 당과 같은 모임으로 등장한 때는 가다라 출신 유다(행 05:37)가 구레뇨 총독의 국세 조사에 저항하기(A. D. 6) 위해 조직한 집단 때부터입니다.

헬라어 용어인 셀롯인은 열광하다, 열심을 내다 뜻의 아람어 가나안인(Κανανίτης)에서 유래한 형용사 용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나안을 거의 지명으로 오해하였습니다. 그래서 마태나 마가가 기록한 가나안인 시몬을 지명으로 이해하여 가나안 지방 출신의 시몬이라고 가르쳤다는 말입니다. 

셀롯이나 가나안인, 같은 단체 이름입니다. 시몬에 셀롯인 혹 가나안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이 극단주의 열심당원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이 열심당원은 이스라엘을 무력으로 침략하는 국가들에 대한 주요 요인들을 암살하며, 또 민족의 독립이나 자주성을 방해하는 사람을 제거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런 극단주의의 노선은 자기 민족이라도 로마에 친숙한 경향을 보이면 과감하게 제거하였는데 주된 표적이 헤롯 당원이었습니다. 결국, 정파라기보다는 테러 단체 쪽에 더 가깝습니다.

이들은 죽음을 가볍게 여겼고, 친척이나 친구를 죽이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으며, 순교의 현장에서도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섬겼으며 우상의 요소들은 전혀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열심당에 가입하려면 불타는 격정과 절대 헌신의 결단이 있어야 하며 이런 결단에 조금이라도 모자라면 가입이 거부됩니다. 왜냐하면, 이 단체는 비밀 결사대로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것을 목표로 투철한 헌신과 열정을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몬이 열심당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그의 배경과 성격과 기질이 어느 정도인지 다소 짐작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들 단체는 배교자가 나오면 날카로운 검으로 죽였으며, 율법을 지키는 일에도 특별한 열심을 가졌습니다.

이들은 십계명 중 제1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고집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뿐만 아니라 동족끼리도 율법을 훼방건 계명을 범하는 자를 만나면 율법 수호 차원에서 공격하였습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그 어떤 신도 섬길 수 없고 그 어떤 외부인도 이스라엘을 통치할 수 없다는 믿음의 소신이 과격단체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일은 로마의 통치를 인정하는 일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배신과 우상숭배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열심당원은 이교도와 유대 범법자들 그리고 세리들을 처단하는 일에는 폭력과 무력을 서슴없이 사용하였는데 이런 일을 애국이라고 여겼습니다.

 2. 제자로 부름을 받은 후에 시몬의 모습

행 01:06 그들이 모였을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사도로 부름을 받은 제자들 다수가 삼 년 동안에 주님과 나눈 대화들이 복음서에 소개됩니다. 그런데 셀롯 시몬에 대해서는 공개된 기록이 없습니다. 셀롯이라는 출신 성분으로 보아 최소한 제자들끼리 다투었다는 기록이라도 나올 법한데 전혀 그런 내용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야고보와 요한, 가룟, 유다 등이 제각기 시기하고 다투었다는 말은 몇 차례 나옵니다. 그래서 전혀 성경에 등장하지 않고 있음을 놓고 성경학자들이 시몬에 대하여 성경에 한 번도 안 나타나는 제자. 이렇게 별명을 붙였습니다.

열심당원 출신이니 다른 제자들과 관계에서 충분히 격한 감정으로 다투었을 법도 하잖습니까? 그런데도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입이 대단히 무거운 사람인 것 같습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까? 성경은 침묵하지만 그래도 시몬이 어느 부분에서 한 번쯤은 한 말이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의 행한 일들이 있는지를 한 번 추적해 보겠습니다. 복음서 외에 제자들의 행적이라면 주로 사도행전 전반부(01~12장)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특히 01장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01장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까지 예수님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제자들의 행적에 대하여 이름을 소상히 밝히는데 행 01:06 절에서 예수님께 이스라엘의 독립에 관한 질문을 한 제자 이름을 무명으로 처리합니다. 

매우 감각 있는 질문자가 누구인지 무척 궁금합니다.

일단 여기에서 제자들의 전직과 심리상태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합법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열심당 계열 출신이 4명이나 됩니다. 작은 야고보, 유다 다대오, 시몬, 가룟 유다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못다 이룬 민족 해방의 꿈을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줄 믿고 제자단에 가입하였습니다.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정치의 메시아 왕국 꿈을 접어야 했으니 이때 그들의 심정이 얼마나 허탈했겠습니까? 

이에 실망한 제자들은 무너진 허탈감으로 인해 옛 직업을 따라 흩어졌으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에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신앙의 전열을 가다듬으며 이제는 주님께서 정치 메시아로서 곧 이스라엘을 해방하는 극적인 선포를 하실 것이라 믿고 그 순간을 기다립니다.

드디어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01:04). 

그러자 제자 중의 하나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까?

여기서 사도행전에 기록된 제자들의 명단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등 열한 명이 마가의 다락방에 있습니다(행 01:13).

지금 마가의 다락방에 다른 제자들은 몰라도 열심당 출신 시몬이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의외의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세상의 모든 꿈이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다시 옛 가나안인 생활로 돌아가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일에 집중하고 있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시몬이 이 자리에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옛꿈을 다시 실현하기 위한 기회로 알고 참여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사도행전 01:04 절 주님 말씀에 대한 06절의 질문자는 아무래도 출신 성분과 성격상 시몬 외에 다른 사람이 있겠습니까? 

만일 시몬이 아닌 다른 제자가 이런 질문을 하였다면 사도행전의 누가가 굳이 무명으로 처리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06절 질문자가 시몬이기에 생각이 깊은 누가는 열심당 출신 시몬의 활동과 혹 있을지도 모르는 앞날의 신변 보호를 위해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근거로는 사도행전을 받는 수신자가 데오빌로라는 로마에서도 유력한 신분을 지닌 인사입니다(눅 01:03; 행 01:01). 

이 사도행전이 이방인 데오빌로에게 보내어졌는데 만일 신앙인이 아닌 로마인에게 읽힌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래서 누가는 가나안인 시몬의 신변에 아무래도 위협이 따를 가능성이 있으므로 무명으로 처리한 것 같은 뉘앙스를 받게 됩니다.

 3. 예수님을 만난 이후 시몬의 생애

ἰχθύς. Ἰησοῦς Χριστὸς Θεοῦ Υἱὸς Σωτήρ

셀롯인 시몬, 가나안인 시몬 그가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 성경은 일절 침묵합니다. 공적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주후 1세기 이후에 열두 제자들의 행적이 전해지는 문서에 의하면 아주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제자마다 특성을 따른 그림들입니다. 

특별히 가나안인 시몬에 대해서는 성경 위에 물고기를 그려 놓고 그 옆에 시몬이 서 있는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물고기는 초대교회의 시절 그리스도인임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오순절 성령님 강림 사건 이후 어떤 제자보다도 이 시몬이 복음 전하는 일에 그의 생애를 열정으로 바쳤다는 증거를 이 그림으로 확인합니다.

오늘날에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묘사할 때에 이 물고기를 상징으로 표현하는 경우를 볼 수 있으며 자동차에도 이 물고기(ἰχθύς. Ἰησοῦς Χριστὸς Θεοῦ Υἱὸς Σωτήρ)를 붙이고 다닙니다.

셀롯인 시몬, 그가 주님의 부름을 받기 전에는 자신의 열정으로 이스라엘이 독립되기를 원했지만, 오순절 날 성령강림 사건 이후부터 세상을 살아가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은혜를 받으니 달라지더라 이 말입니다. 

자신이 꿈꾸며 쟁취하려던 이스라엘의 독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 즉 영혼 구원을 위한 생각이 더 중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가슴에 품은 뜻보다는 주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 나가는 일이야말로 주님의 가장 기뻐하시는 뜻임을 알고 삶의 축을 복음의 나라로 옮겼습니다. 

세상을 복음의 눈으로 바라보니 이전에 알지 못했던 사랑의 마음이 싹이 텄는데 그 예를 제자 중 마태와 관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세리 마태와 셀롯 시몬, 이들 두 사람이 정말 공존할 수 있는 관계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마태는 세리로 로마제국에 팔린 사람이고 시몬은 로마를 증오하는 사람이며, 시몬은 열렬한 애국자임에 비해 마태는 로마주의의 매국노입니다. 이 두 제자는 서로 다른 여건에서 만났기 때문에 분명히 마태는 시몬이 속해 있는 셀롯인의 암살대상자 명단 즉 블랙리스트 상위에 자리 잡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하여 이 두 사람은 자신의 모든 문제를 내려놓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뜻을 모았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깊은 불화를 치유할 능력이며 시몬과 마태의 회복된 관계를 통해서 그 복음의 화해 능력이 증명되었습니다.

가나안인 시몬 이 사람이 한때는 민족에 대한 대단한 열정이 끓어오르는 삶을 살았지만, 예수님을 메시아로서 만나고 난 후에는 그 끓어오르는 열정을 복음에 바치며 살았습니다. 계속 전해오는 문서에 의하면 시몬은 소아시아에서 전도하였고, 그 후에 북아프리카의 이집트에서 전도를 많이 하였고, 그다음에는 흑해 지역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고, 나중에는 영국의 런던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고 합니다.

역사상 지난 세기 세계로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나라가 어느 나라입니까? 영국입니다. 바로 이 영국인의 가슴에 복음의 불을 붙였던 자가 시몬입니다. 그 후 시몬은 영국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발걸음을 페르시아의 수아닐로 옮겨 복음을 전하다 폭도들의 습격을 받고 잡혀서 마침내 톱으로 켜는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셀롯인 혹 가나안인이라는 이 단어 속에서 조국의 독립을 열심히 부르짖던 열광의 시몬의 모습이 떠오릅니까? 

이스라엘 민족의 전통과 종교를 강력히 지지하던 국수주의(國粹主義) 정치 단체인 셀롯 소속의 시몬, 그는 자기의 야망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켰습니다.

우리에게도 시몬과 같은 이러한 변화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열심당 시몬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 그리고 제자로 삼아라. 

그리고 생각이 다르고 이데올로기가 다르다 할지라도 사랑하라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삶을 따르는 자이기에 그렇게 복음의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비판적 지식인이었던 셀롯당 시몬,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열심당이 되다!

예수님의 제자를 계속 만납니다. 오늘 시몬을 만납니다!

예수님의 제자 이름을 기록한 성경 중  시몬- 베드로가 아닌 시몬에 대한 부분을 좀 자세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지난번 개역성경에 익숙해있던 분들은 조금 다른 것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마태10:2-4]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나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마가3: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1)가나나인 시몬 이며 -> 1) 아람어에서 온말로 열심당이라는 뜻이다.

(공동번역) [막3:18]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마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 알패오의아들 야고보, 타대오, 혁명당원 시몬,

[누가6:15]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사도행전1:13]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Σίμωνα τὸν Καναναῖον 카나나이오스( 열심당 熱心黨 Zelotes), 아람어 원형은 '카나나'(qan'ana-열심)

가나안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열혈당원이라는 뜻이었던 가나나인, 시몬 그는 열혈애국 독립당원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이스라엘이 로마에 의해 식민지 통치를 당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시대에 이스라엘을 이끌던 종교적 집단으로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등이 있었고 로마에 반대하는 저항적 정치집단으로는 시몬이 속한 셀롯(열심당)등과 시카리파 등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강한 셀롯파(Zelotes-열심당熱心黨)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서적으로 친숙한 독립단체였습니다.

가나안이라는 명칭 카나나이오스(Kananaios)의 아람어 원형은 '카나나'qan'ana '열심'이라는 뜻입니다. 

셀롯당이 생기게 된 배경은 마카비(마카베오) 전쟁 때부터로 보입니다.

주전(B.C)主前 167년 당시 유대인들을 잔학하게 핍박하던 그리이스(헬라)의 지배자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났던 제사장 맛다디아의 다섯 아들들은 유대의 종교적, 정치적인 독립을 쟁취하고자 독립운동을 일으킵니다. 그 중 장남인 유다 마카베오가 정치및 종교 지도자가 되어 약 100년 가까운 실질적 독립을 누리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후 B.C. 63년경 그리이스를 정복한 로마군의 공격으로 마카베오 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이스라엘을 정복한 이후인 신약시대에도 셀롯당은 정치적 저항을 계속했습니다.

성경도 조심스럽게 그 부분을 잠깐 언급하고 있는데 민란을 꾸몄다는 바라바[마27:16][막15:7]나 사도행전 5장의 가말리엘의 발언에서 나타나는 '드다'와 '갈릴리 유다'(행5:36,37)는 아마도 열혈당의 지도급 인사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하기 전 마지막까지 로마군에 저항하여 싸웠던 이스라엘의 마사다의 저항도 셀롯당이 주도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시몬은 열혈애국 독립단원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정치적 도래를 기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독립의 소원을 가진 열렬한 정치적 행동주의자였고 로마 제국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과연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어떻게 성취되는 것일까? 시몬의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시대적 현실의 정치 상황 속에서 고민하는 또 한사람도 있었습니다.  젤롯당과는 또 다른 독립 단체에 속한 가룟(이스카리옷 Iscariot)유다의 고민도 같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가룟 유다라고 부를 때의 가룟은 아마도 가룟사람(가룟이라는 지명으로는 나타나지 않고 구약성경에 그리욧이라고 세 번 나타남-[수15:25][렘48:24][암2:2] 이라는 뜻이겠는데 그것이 지역이름이 아니라는 주장이 더 많습니다.

즉 가룟이라는 단어는 지역 이름이 아니라 젤롯당처럼 정치적 당파의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즉 당시 시카리(The Sicarii)라고 불렸던 집단(이 명칭은 단검을 지닌 자를 의미하는 라틴어 시카리우스 Sicarius에서 유래된 명칭으로서 자객을 의미)에 소속되었기에 Ἰσκαριώθ  Judas Iscariot 이스카리옷 이라고 불렸다는 것입니다.

시몬과 유다, 그들은 그런 의미에서 사상적 배경이 조금 복잡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까요? 

왜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제자로 뽑았을까요? 화합에 분명히 방해가  될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을텐데요. 그러나 다른 논의가 필요없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누구는 안되고 누구눈 되고가 근본적으로 아니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이 문제되지 않으셨습니다. 품어서 만들어가셨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처럼 본인이 실패하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시몬은 왜 예수님의 곁에 끝까지 있었을까요?

지식인이었을 내면의 고민은 얼마나 컸을까요? 같은 동료 중에는 옛날 같으면 대적 1호였을 매국노 세리 마태가 있었습니다. 시몬의 내적 갈등이 컸을 것입니다. 어쩌면 남들이 웃을 때에도 속으로는 딴 생각이 가득했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사랑?

<사랑>이 과연 전쟁의 역사로 얼룩진 이 세상의 모든 살륙과 폭력을 이겨내는 힘이 될 수 있을까요? 셀롯인 시몬의 고민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비판적 지식인었던 시몬은 그것을 다 인정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왜? 젤롯당 시몬은 예수님을 떠나지 못했을까요?

그 무력해 보이는 ‘사랑, 사랑, 용서, 용서…’를 날마다 외치는 이 꿈꾸는 어린아이같은 집단을 왜 떠나지 못했을까요? 

우리는 셀롯인 시몬의 변화의 과정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여러분은 왜 예수님을 떠나지 않으시고 여기까지 오신 것인가요?

<어느 분의 간증, 평생의 신앙적 방황!!>

완전한 제자가 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뛰쳐나갈 용기도 없이 살아왔습니다!

우리의 경험을 비추어 추측합니다!

예수님 - 그 위대한 순수함, 그 뜨거운 사랑, 영혼 깊은 곳에 호소하는 그 위대한 사랑을 만났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 그의 삶에 강력한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미처 생각지 못한 세계였을 것입니다.  

시몬에게...그 사랑과 기적은, 예수님의 눈물과 고뇌는 시몬의 교만한 생각을 여지없이 부수는 무서운 저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상처받은 이들을 껴안아 함께 울어 주시고, 죄 많은 세월을 덮어 용서해 주시고, 외롭고 병든 이들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눌리고, 아픈 자, 그들과 함께 삶을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영혼 깊은 곳을 두드리는 무엇인가 있었습니다. 젤롯당 시몬은 이 신비를 부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도 그 신비와 감격을 따라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신앙이란 무엇인가요?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그에게 우리의 삶을 비치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삶과 구원의 역사가 부정할 수 없는 강력한 도전으로 우리의 가치관을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 없이도 잘 살아왔고, 지금도 잘 사는 것 같지만, 그러나 나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다른 사람 어찌든지 내가 선택되고 부름받고,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젤롯당 시몬이 제자가 될 때, 시몬은 생각하기를 제 뜻대로 되었다고 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밤을 세우고 기도하셨다고 성서는 증언합니다.(누가복음 6:12) 

우리의 선택도 그러합니다. 우연히 교회에 나왔거나, 심심해서 와보았거나, 어릴 때부터 멋모르고 믿었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래서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미 우리는 예수님의 밤을 세우시는 간절한 기도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젤롯당 시몬처럼 때때로 아직도 갈등하고, 의심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주님은 위대한 사랑으로 우리를 만들어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나중 북아프리카와 (어거스틴 거기에서 탄생), 지금의 소련지방인 흑해 근처등에서 세상의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하며 전도여행을 하다가 위대한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오늘 나를 부르신 예수님을 다시 한번 마음에 모시고 싶습니다. 과연 그는 나에게 있어 누구시며, 나는 또 예수님께 있어서 누구인지 정직한 고뇌를 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고백하는 이 시간 되기를 원합니다!

======

시몬(히브리어: שמעון)은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스라엘의 민족주의 정당인 혁명당원(zelotes)이었다고 한다. 이름의 뜻은 ‘응답하셨다’ 또는 ‘들으심’이다. 로마 가톨릭교회에 의해 지정된 축일은 10월 28일이며, 동방 정교회에 의해 지정된 축일은 5월 10일이다. 흔히 톱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행적

시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전설에 따르면, 알패오와 클레오파스의 마리아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소야고보와 형제지간이라고 한다.

성서에 따르면, 시몬은 가나안에서 태어나 자랐으며(마태 10,4), 사도가 되기 전에는 바리새 파로 구성된 극단적인 유대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열심당의 일원이었으며, 마카베오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유대인 해방을 부르짖었다. 

그래서 로마인들과 그들에게 순종하는 동족 유대인들에 대해서 동료들과 함께 약탈과 살인 등 테러와 비슷한 공격을 저질렀다. 

또한 열심당은 장차 예언에 따라 메시아가 이 땅 위에 강림하면 군대를 이끌고 로마 제국을 몰아내 조국을 해방시켜 주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초라한 행색을 한 예수를 결코 자신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결국 두 세력은 극과 극으로서 충돌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그들과 동료였던 시몬은 예수의 설교와 기적을 듣고 본 후 감화되어 열심당에서 탈퇴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다. 

예수 또한 성실하거나 피동적으로 순종만 하는 사람들만 제자로 맞아들이기보다는 각양각색의 다양한 사람들을 포섭하고자 했기에 자신에게 오는 시몬을 받아들였다. 

또한 로마 제국에 순종했던 과거를 가진 마태오와 로마 제국에 반대했던 극단주의자 시몬을 모두 자신의 제자로 맞아들임을 통해서 서로 상반된 이념으로 인해 빚어지는 갈등을 중재하고 조정하고자 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이집트에서 설교하다가 유다 타데오와 함께 페르시아 지역으로 가서 포교 활동을 벌였는데, 예수에 대해 설교한 뒤 그 곳의 신상을 파괴하였다. 

그러자 그 속에서 악마가 튀어나왔다. 자신들이 여태껏 섬겨왔던 신상이 부서지자 흥분한 이교도들은 그들에게 달려들어 포박한 후 죽였는데, 시몬은 기둥에 거꾸로 매달려 사타구니에서부터 머리까지 톱으로 육신이 두 동강이 나는 형벌을 당하여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제자도(弟子道 Discipleship)-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열심당-셀롯당 시몬

[마태10:2-4]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마가3: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이며

[누가6:15] 마태와 도마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사도행전1:13]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예수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이스라엘이 로마에 의해 식민지 통치를 당하던 시절이었고 이시대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등의 종교적 성격을 가진 집단과 정치적 성격을 가진 집단 셀롯(열심당)등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강한 셀롯파(Zelotes-열심당熱心黨]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서적으로 친숙한 독립단체였습니다. 

이 명칭의 아람어 원형은 '카나나'(qan'ana-열심, 시기함)이며,. 카나나이오스(Kananaios)이 단어의 원형인 '카나'는 '시기하다'라는 뜻으로서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이 시몬을 <가나안인>이라고 부른 것은 가나안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열심당>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셀롯당이 생기게 된 배경은 마카비 전쟁 때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전(BC)主前 167년 당시 유대인들을 잔학하게 핍박하던 그리이스(헬라)의 지배자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났던 제사장 맛다디아의 다섯 아들들이 유대의 종교적, 정치적인 독립을 쟁취하고자 독립운동을 일으켰고 장남인 유다 마카베오가 지도자로 계승되어 약 100년 가까운 실질적 독립을 누리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B.C. 63년경 로마군의 정복으로 마카베오 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정복한 이후인 신약시대에도 꾸준히 셀롯당은 정치적 저항을 계속했고 사도행전은 공회원인 교법사 가말리엘의 행5:34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이 셀롯인들의 저항을 암시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행5:36]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행5: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에 대신 풀려난‘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 유명한 죄수[마27:16][막15:7] 바라바도 이 열심당의 두목급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하기 전 마지막까지 로마군에 저항하여 싸웠던 이스라엘의 마사다의 저항은 셀롯당이 주도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당시 시대는 이 셀롯당의 저항을 필요로 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격파들이 주도한 셀롯인들이 정치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완전히 백성들의 공감을 샀던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견해도 많습니다. 과연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어떤 것을 통해서 오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이 셀롯인 시몬의 고민이었고 그리고 또 다른 독립운동 단체에 속한 가룟 (이스카리옷 Iscariot]-> 유다의 고민이었을 것입니다. <▶ 시카리(The Sicarii)-시카리라고 불렸던 집단(이 명칭은 단검을 지닌 자를 의미하는 라틴어 시카리우스 Sicarius에서 유래된 명칭으로서 자객을 의미한다. >

성경이 말하는 가룟 유다의 가룟은 지명이라고 생각하지만 구약에 한번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가나안인 시몬과 함께 가룟유다도 시카리에 속했던 정치적 성향의 인물이라고 보는 것이 학자들의 관점입니다.

셀롯인 시몬은 시몬 베드로처럼 어부였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전승이 전해집니다. 

별명 그대로 그는 독립의 소원을 가진 열렬한 정치적 행동주의자였고 로마 제국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어떻게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까요? 성경은 그 자세한 과정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젤롯당 시몬도 가롯 유다처럼 예수님을 혁명가로 생각하고 따랐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보다는 이 집단을 이용해서 정치적인 야망을 이루어보려고 제자로 지원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세상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을 초월한”( In the world, but beyond the world)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의 나라의 근본은 이익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투쟁이 아니라 평화였고 증오나 대립이 아니라 사랑과 화해였습니다.

이 무력해보이는 <사랑>이 과연 전쟁의 역사로 얼룩진 이 세상의 모든 살륙과 폭력을 이겨내는 힘이 될 수 있을까요? 셀롯인 시몬의 고민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셀롯인 시몬의 변화의 과정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시몬은 목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독특한 예수님의 사랑의 말씀에 모두가 젖어들고 있었습니다. 

명예욕이 강한 집념의 요한도 점점 달라지고 있었고 베드로도 점점 변화하고 있었고 매국노 세리출신 마태도 변하고 있었고 생각이 깊은 바돌로매도 달라지고 있었고 의심 많고 논리적인 도마도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셀롯당 시몬은 비슷한 출신인‘가룟’유다와 가장 많은 얘기를 했을 것 같습니다. 이미 가룟 유다는 배신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막상 유다처럼 배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에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의 시몬의 내적 결단이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실 때에 밤이 맞도록-밤을 새면서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을 선택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셀롯이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셀롯인 시몬은 내면의 치열한 싸움과 고민과 결단을 통해 그리고 성령충만의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세계관과 구원관과 그리고 영혼 사랑을 깨닫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열심당이라는 그 이름은 이제 예수그리스도의 제자직 - 사랑을 전하고 하늘나라를 전하는 열심으로 바뀌었습니다. 

뒤늦게 발동이 걸렸지만 그러나 그는 갈수록 신앙을 위한 젤롯당이 되었고 진실한 제자의 길을 수행한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제자 다대오와 함께 지금의 이란 지방에서 선교하다가 톱으로 순교당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고민 많았던 그의 생애는 거룩한 사랑의 생애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우리도 많은 고민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생애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 (고전15:57 -58)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살전5:9-10)

=======

@@다대오, 알패오의 아들 유다 다대오

==========

유다 타대오(Θαδδαῖος, ? - 62년)는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다대오’로, 누가복음(6:16)과 사도행전(1:13)에는 유다로 기록돼 있다. 유다는 ‘존경받는’ 또는 ‘찬미하리’라는 뜻이며, 타대오는 ‘마음이 크고 넓다’는 뜻이다. 

[알패오의 아들 중 한사람으로 보고 있다!!!]. 소(小)야고보와는 형제 관계로서, 이스카리옷 유다와는 다른 사람이다. 그리스도교의 성인으로서, 축일은 10월 28일이다. 상징물은 책과 곤봉·배이다. 회화에서는 같이 순교한 시몬과 함께 있는 모습으로 종종 표현된다.

누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는 그를 유다라고 부르고 있지만(누가 6,16; 사도 1,13), 마태오 복음서와 요한 복음서에서는 그를 타대오라고 부른다. 신약성서에서는 그에 관한 언급은 유일하게 사도들의 이름을 나열할 때 뿐인데, 총 4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최후의 만찬 당시 유다 타대오는 예수를 향해 “주님, 주님께서 왜 세상에는 나타내 보이지 않으시고 저희에게만 나타내 보이시려고 하십니까?” 라고 물어보기도 하였다(요한 14,22).

전승에 의하면, 성령 강림 이후 유다 타대오는 시몬과 함께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복음을 전파하였고, 페르시아 제국 지역으로 가서 포교 활동을 벌였는데, 예수에 대해 설교한 뒤 그 곳의 신상을 파괴하였다. 그러자 그 속에서 악마가 튀어나왔다. 자신들이 여태껏 섬겨왔던 신상이 부서지자 분노한 현지인들은 그들에게 달려들어 포박한 후 죽였는데, 순교의 모습은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도 하고 활에 맞아 순교했다고도 한다. 현지인들은 다대오와 시몬이 3500여 명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매장됐다고 전해진다.[1]

-------다대오 유다: 가룟인 아닌 사도 (요 14:21-24) 

[들어가는 말]

다대오 유다에 대한 성경의 유일한 기록은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4장입니다. 열두 제자 이름을 말할 때 외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딱 한 번, 여기에만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이 다대오 유다라는 제자에 대해 어떻게 소개합니까? ‘가룟인 아닌 유다’라고 합니다. 가룟 지방 출신이 아닌 유다라는 말입니다.

열두 제자 중에는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또 한 명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가룟 유다입니다. 성경은 가룟 유다와 다대오 유다를 구분하기 위해 ‘가룟인 아닌 유다’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다라는 이름은 본래 ‘찬양’(praise)이라는 뜻으로 굉장히 좋은 이름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 이후로는 이 이름을 쓰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유대인들을 제외한 기독교 영향권 아래서는 이 이름을 쓰는 사람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다대오 유다 이야기가 성경에 딱 한 번 나오기 때문에, 성경학자들은 ‘유일하게 등장하는 제자’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겼던 제자’, ‘전혀 두드러지지 않았던 제자’, 또는 ‘가룟 유다와 이름이 같았던 제자’라고 소개하기도 합니다. 이 가룟인 아닌 사도 다대오 유다에 대해서 몇 가지만 생각해보려 합니다.

1.   다대오 유다의 인물 됨

그가 어떤 사람이었을지, 우리는 성경에 있는 짤막한 단서를 통해서 이 사람의 인물됨에 관한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세 이름으로 소개된 제자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유명한 성경학자였던 제롬(Jerome, 히에로니무스)은 성경을 처음 라틴어로 번역했던 사람입니다. 제롬은 다대오 유다에 대해 연구하면서 그를 ‘세 이름을 가진 남자’라고 소개했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10:3과 마가복음 3:18의 열두 제자 리스트에서는 그를 ‘다대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누가가 쓴 두 책인 누가복음 6:16과 사도행전 1:13에서는 ‘다대오’가 아니라 ‘유다’라고 나오고, 그것도 그냥 ‘유다’가 아닌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유다’가 본명이고, ‘다대오’는 별명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래 ‘다대오’라는 말은 ‘찬양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 ‘도다’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이 이름이나 저 이름이나 ‘찬양’이라는 뜻을 가진 사람입니다.

2)  따뜻한 마음을 가진 제자

마태복음 10장 3절을 보면 그의 이름이 “다대오”라고 나와 있는데, 새번역을 보면 주가 달려서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레배오’ 또는 ‘다대오라고 부르는 레베오’라고 되어 있습니다.

‘레배오(Lebbaeus)’라는 말은 ‘가슴’을 뜻하는 단어 ‘렛’에서 유래한 말이며, 그러니까 ‘아주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 ‘레배오’가 그의 별명내지 애칭이었다면, 이것은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는 아주 따뜻한 가슴을 가진, 매우 다정다감한 제자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유일하게 다대오 유다가 한 말이 나오는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본문에서 그가 예수님 앞에 나아와 무슨 질문을 합니까?

“가룟 유다가 아닌 다른 유다가 물었다. ‘주님, 주님께서 우리에게는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22절, 새번역)

요한복음 14장이 유명한 이유는 유명한 구절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이 말씀을 듣고 빌립이 요청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은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식으로 대화가 흘러가다가 성령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시고, 갔다가 다시 오겠다고도 하시며, 결정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드러낼 것이다.” (21절, 새)

이 말씀을 듣고 나서 가룟인 아닌 유다, 즉 다대오 유다가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 우리에게는 자신을 그렇게 드러내 보여주시면서, 세상 다른 사람들에게는 드러내지 않으십니까?” 이것은 ‘주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면, 이 사실을 우리만 알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는 의미로 던진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대오 유다는 자기가 만나서 알게 되었으며 또한 지금 따르고 있는 이 예수님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믿고, 따랐으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질문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다대오 유다는 매우 진지한 선교적 관심과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넓은 마음을 가진 제자였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전도를 해야 합니까? 왜 VIP 분들을 섬기며 주님께 인도하려고 애씁니까? 이렇게 좋으신 주님, 무엇보다 유일한 구원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만 알고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너무 좋은데 어떻게 나만 알고 있고 남들에게 전하지 않겠습니까? 써보고 아주 좋은 물건이 있으면 남들에게 다 알리고 싶어 하는데, 생명의 주님을 왜 알리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3)  이름값을 한 제자

‘유다’의 뜻은 찬양이라고 했는데, 요즘 한국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주님을 찬양한다’는 의미로 자녀 이름을 ‘주찬’이나 ‘찬양’이나 ‘찬미’로 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름은 그렇지만 전혀 찬양과 상관없이 산다면, 정말 어울리지 않는 이름입니다. 이름값을 못하는 셈입니다.

하지만 유다는 이름값을 한 제자였습니다. A. B. 브루스(Alexander B. Bruce)라는 성경학자가 <열두 제자의 훈련>이라는 책을 쓰면서 다대오 유다에 관한 전승을 하나 소개했는데, 열두 제자에게 각각 어울리는 모습을 생각하다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같은 이름을 가진 유다가 예수님에 대해서 불평하며 팔아먹었을 때, 또 다른 이름을 가진 유다는 찬양하고 있었다.”

똑같이 유다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두 제자의 삶의 양식은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한 사람의 유다가 불평하고 있었을 때, 다른 유다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높여드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매우 긍정적인 제자였습니다. 그는 감사와 찬양을 생활화하면서 찬양의 라이프 스타일을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입술로 찬양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코로나 사태 때문에 예배당에서 마음껏 소리 높여 찬양을 할 수 없는 것이 참으로 아쉬운 점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 자체가 찬양이 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환경에 있든지, 주님을 찬양하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2.   다대오 유다의 사역과 죽음

성경은 그의 사역과 죽음에 관해서 전혀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의 전승을 따라 그것을 알 수밖에 없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처음에 다대오 유다는 유대 땅을 떠나 시리아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메섹(다마스쿠스)이 있던 바로 지금의 시리아입니다.

그러다 좀 더 나아가 유프라테스 강 근처에 가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터키 쪽인 에데사 지역까지 진출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지금의 이란과 이라크 지역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말년에는 주로 아르메니아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가 아르메니아에 갔을 때 그곳 사람들이 복음에 커다란 반응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다대오 유다의 사역의 놀라운 영향력은 에데사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에데사가 지금은 터키의 한 변방 마을에 불과하지만 당시에는 번성했던 도시였습니다. 다대오 유다는 그러한 에데사에 가서 그곳 왕이던 ‘아부가르’의 병을 치료해주었습니다.

종종 치유의 기적이 복음 선교의 문을 활짝 열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이때가 그런 때였습니다. 아부가르 왕이 치유를 받자 부족 전체가 주님 앞에 돌아오면서 그 소문이 아르메니아에 전달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르메니아 지역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급속도로 전해졌습니다.

아르메니아는 과거에 동구권, 소련에 속해 있었던 나라지만 AD 300년대 초에 전 국가적으로 복음이 전파되어 복음화 된, 최초의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기 전에 이미 복음화 되어 있었다는 기록을 교회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대오 유다는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다시 시리아로 되돌아가 전도하지만, 시리아에서 칼에 맞아 숨지게 됩니다. 그는 숨지면서도 이름처럼 하나님을 찬양하다가 자기의 생명을 주님 앞에 드린 것으로 교회의 전승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3.   다대오 유다의 질문에 대한 대답

이제는 다대오 유다가 던졌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의 질문이 무엇이었습니까?

“왜 우리에게는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시면서 세상에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십니까? 더 많은 사람들, 주님을 알아야 할 세상 사람들에게는 왜 주님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리하면 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요, 내 아버지와 나는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한다. 너희가 듣고 있는 이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3-24절, 새)

무슨 말씀입니까? 함께 살면서 그에게 당신을 나타내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계시하시는 주님, 그 주님을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은 그분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도 같은 질문을 가진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적을 체험하고, 또 어떤 사람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는데, 왜 나에게는 주님이 안 나타십니까?’ 이러한 질문에 주님은 지금도 똑같은 대답을 하실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내 말을 순종하여 지키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내가 나 자신을 나타내 보여줄 것이다.”

우리가 왜 주님을 경험하지 못합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순종하지 않습니까?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이고,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4.   다대오 유다가 남긴 교훈

그는 어떤 인생을 살았습니까? 그는 세 가지 종류의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세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1)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인생을 살았던 제자

그는 자신을 위해서만 살지 않고 남을 배려했던 사람, 그래서 주님의 교훈을 들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주님을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나타내 보여 줄 것인지 이타적인 동기를 가지고 인생을 살았던 제자가 바로 다대오 유다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  긍정적인 눈으로 인생을 바라보았던 제자

똑같은 삶의 환경에 처해 있을 때에도, 한 사람은 아주 부정적인 반면, 또 한 사람은 매우 긍정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물이 반쯤 차 있는 컵을 보고, 어떤 사람은 ‘반밖에 안 찼네.’라고 말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반이나 차 있네.’라고 말합니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반면, 어떤 사람은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우리가 환경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다대오 유다는 항상 남을 배려하며 인생을 긍정적으로 살았던 제자였습니다. 우리도 이 제자와 동일한 발자취를 닮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3)  사랑에 이끌린 인생을 살았던 제자

“주님께서 우리에게는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한 다대오 유다의 질문은 ‘어떻게 주님을 볼 수 있습니까?’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그의 질문에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를 사랑하면 된다.’

다대오 유다는 바로 그 주님의 사랑 안에 거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보내시는 곳으로 기꺼이 나아가, 복음을 기다리던 수많은 민족들을 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졌습니다.

우리도 나만을 위해서 사는 이기적인 인생이 아니라 다대오 유다처럼 따뜻한 가슴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하고 돌보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부정적인 시각이 아니라 긍정적인 시각, 하나님의 시각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설 때 잘했다고 칭찬받는 주님의 착하고 신실한 종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다대오(마 10:3)는 복음서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역사가 에우세비오의 '교회사'에 무척 무게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에뎃사 왕 아브라가스가 불치의 병을 앓으며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 왕은 헬라인 아나니아스와 다른 몇 명을 예수에게 보내었다.

그들은 빌립에게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요 12:21)하고 청했다.

아브가라스 왕의 사자들은 예수에게 왕의 편지를 전했다. 그 편지에는 에뎃사로 오셔서 자기 병을 고쳐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에 대해 주 예수는 정중하게 거절하는 답신을 보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주 예수는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여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마지막 분부에 따라 여러 나라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떠났다. 에뎃사에 간 사람은 다대오였다.

그는 그 곳에서 주 예수의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마태와 마가는 그를 다대오라고만 기록하였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는 "가룟인이 아닌 유다"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옛 사본에는 "다대오라는 레위" 또는 "레위라는 다대오"(마 10:3)라고 기록되어 있어 같은 사람으로 보고 있다. 

마태복음의 사도 명단에 다대오로 적혀 있는 예수의 제자는 "진심으로" 또는 "사랑 받은 사람"이라는 뜻으로서 본명이 아니다.

"친근하다"는 뜻인 레위도 본명이 아닌 애칭이다. 

마태와 마가가 다대오라고 그 이름을 적은 예수의 제자를 누가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6:16)라고도 기록하고 있다.

헬라어로 아들은 형제라고도 번역할 수 있기 때문에 "야고보의 형제 유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일부 성서학자들은 "야고보의 형제 유다"라는 해석을 따라 마태 13장 55절의 유다와 같은 인물로 본다. 즉, 그는 주 예수의 형제이며, 신약성서 중 '유다서'의 저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단지 이름이 같다 해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근거가 약하다. 

사도 명단에는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제자가 두 명 있다. 유다라는 이름의 뜻은 "그를 찬미하자" 또는 "그를 기억하자"라는 신앙적인 것으로서, 유대인 중에는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참으로 많다. 더욱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유다 지파는 명문이다.

두 명의 유다 중 한 명은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이기 때문에 요한은 다대오를 "가룟인 아닌 유다"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히브리인은 관습적으로 둘 또는 세 개의 이름을 썼기 때문에 다대오가 유다거나 레위거나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오리게네스는 주장하였다.

● "주여 세상에  자기를 나타내소서"

이 다대오 곧 가룟 유다 아닌 야고보의 아들 유다에 관한 기록은 요한복음에 단 한 군데만 나온다. 그것은 주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나누시며 고별 설교를 하실 때였다.

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라"고 하신 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요 14: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 14:23~24).

주 예수는 말씀에 복종하는 것과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그것을 행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주 예수는 자기를 나타내려 하시지 않았다.

● 에뎃사의 선교사 다대오

에우세비오스에 따르면 - 다대오는 에뎃사에 가서 아브가라스 왕을 만났다. 왕은 다대오에게 "당신은 예전에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 내 병을 고칠 사람을 보내겠다고 약속한 바로 그 사람이오?"하고 물었다. 

다대오는 그렇다고 말하며 왕이 만일 주 예수를 믿는다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왕은 "나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다"하고 신앙을 고백한 후 말을 이었다.

"만일 로마 군인이 내 앞을 막지 않는다면, 나는 군대를 이끌고 유대 땅에 가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을 멸하고 싶소."

다대오는 "우리 주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돌아가셨습니다"고 하였다. 그리고 왕에게 안수하여 그의 병을 말씀하게 고쳐 주었다.

아브가라스 왕의 황태자 아브다스도 오래 병상에 누워 있던 참이었으나, 다대오의 안수 기도를 받고 건강을 찾았다. 그 외에 에뎃사의 모든 병자는 전부 다대오의 기도로 병이 나았다.

열렬한 신앙인이 된 아브가라스 왕은 다대오에게 두루마리를 내밀며 읽어 보라고 하였다. 그것은 예수께서 아나니아스를 통해 아브가라스 왕에게 보낸 답신이었다.

"아브가라스 왕이여, 나를 보지 않고 믿는 당신은 복된 사람이오. 나를 본 사람은 나를 믿지 않고, 나를 보지 못한 사람이 나를 믿고 영생을 얻게 된다고 예언되어 있기 때문이오. 왕께서 나를 에셋사로 초대하셨으나, 나는 여기에서 내게 맡겨진 일을 다해야 하며, 내 사명을 다한 후에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에게 돌아가야 하오."

주 예수의 편지에는 때가 되면 자기의 제자 한 명을 대신 보내겠다는 말이 이어졌다.

"아아 아브가라스 왕이여, 내가 당신에게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오. 뒷날 내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간 뒤 내 제자 중 한 명을 왕에게 보내겠소. 그 제자가 왕의 병을 고칠 뿐 아니라 그 곳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것이오."

● 주 예수의 순교자 다대오

에우세비오스는 '교회사' 안에 시리아어에서 번역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며, 에뎃사에서 다대오가 행한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아브가라스 왕은 다대오에게 "구주 예수에 관해 자세히 말씀해 주시오"하고 청하였다. 다대오는 "내일 에뎃사 시민 전부를 광장에 모이게 해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다음날 아침 다대오는 에뎃사 시민들에게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주 예수의 강림에 관하여, 예수의 사명에 관하여,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에 관하여, 주 예수의 능력에 관하여, 주께서 세계에 선포하신 복음에 관하여, 예수의 새로운 설교 방법에 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또한 고난의 종이신 예수에 관하여, 그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에 관하여, 하나님과 본체이시면서 종이 되신 것에 관하여, 주 예수는 죽으신 후 하데스(음부)에 내려가 죽음의 장벽을 깨뜨리신 일에 관하여,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사실에 관하여, 오랫동안 하데스에서 잠자던 수많은 사람들이 깨어나 새 삶을 얻게 된 사실에 관하여 힘이 차고 넘치는 열정으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에게로 올라가신 사실과, 하늘의 영광 가운데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사실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영광과 능력을 가지시고 다시 오시게 되신다는 사실을 설교하였다. 

다대오의 설교에 감동한 아브가라스 왕은 궁정 보물 창고에서 많은 보물을 가져오게 하여 다대오에게 주며 말했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다대오는 "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자기의 소유를 모두 버리고 주님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왕이 주시는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하고 거절하였다.

"이 재물을 어떻게 해야 내 병을 고쳐주고 영생을 주신 주 예수의 뜻에 합당한 것이 되겠습니까?"

"주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전설에 따르면 다대오는 에뎃사에서 떠나 앗시리아와 페르시아에서 전도하다가, 페르시아에서 몽둥이에 맞아 순교하였다.

다대오의 상징물은 돛배와 책과 몽둥이이며, 그의 기념일은 10월 28일이다

----------이름은 없었으나 이름값을 한’제자 다대오

[마태10:2-4]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마가3: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이며

[누가6:15] 마태와 도마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눅6:16] 및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및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사도행전1:13]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성경에 유일하게 나타난 다대오-유다의 질문-요한복음 14장 22-23절]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제자 다대오는 세가지 이름을 가진 제자로 알려져있습니다. 하나는 유다요 하나는 다대오요 하나는 원문사본에 따라 생략되기도 한 레베오입니다. (마태복음 10:3-4)

3 Fivlippo" kai; Barqolomai'o", Qwma'" kai; Matqai'o" oJ telwvnh", !Iavkwbo" oJ tou' @Alfaivou kai; Lebbai'o" o ejpiklhqei;" Qaddaii'o" 4 Sivmwn oJ Kananivth" kai; !Iouvda" !Iskariwvth" oJ kai; paradou;" aujtovn.

♥ 킹 제임스 성경번역 (KJV케이제이뷔)에도 레베오가 있으나 우리말 성경에는 레베오는 빠져있습니다..

▶ Matt.10:3 Philip, and Bartholomew; Thomas, and Matthew the publican; James [the son] of Alphaeus, and Lebbaeus, whose surname was Thaddaeus;

<참고> 킹 제임스 버전 성경 (KJV 케이제이뷔)

▶K.J.V. (King James Version) 성경= 흠정역(欽定譯=Autorized Version)성경은 <♣ 흠정(欽定)이란 말은 "왕이 몸소 제정함"이란 뜻> 1604년 영국의 왕 제임스 1세(재위기간-1685∼1688)가 1604년 당시 54명의 최고의 성서학계의 석학들로 번역위원들을 위촉하여 1611년에 드디어 발간된 최고 권위의 성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대오의 다른 이름인 [유다]는 <찬양>이라는 뜻이요 [다대오]는 <사랑받는다>는 뜻이요 [레비야스]라는 말은 본래 히브리어의 명사[렛]에서 나온 것으로 <가슴>이라는 뜻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가슴은 깊은 마음이나 심성을 가리킬 때 쓰이는 단어였습니다..

다대오가 성경에 나타난 것은 그 명단외에 단 한번입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의 그 저녁 다대오는 왜 예수님은 그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려하지 않으시는 지 묻습니다. 그는 질문을 할만한 용기와 지적 추구심과 열정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4:22-23)

“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다대오의 질문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세상에 이름을 떨치라는 의도였을까?

다대오의 질문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명예욕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선교적 열정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거룩한 영향력의 확보에 대한 질문으로 보기도 합니다.

신앙은 인기주의도 아니요 사람의 인정에 만족을 얻거나 명예를 구걸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독교 신앙은 내 자신의 변화와 함께 세상의 변화를 분명히 목적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가 알려지지 않고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기 어렵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에 이름을 떨친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이라면 그 도구로서 당연히 유명해지고 영향력이 많아지는 것은 거룩한 도구가 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정치, 사회, 모든 분야에서 당연히 거룩한 영향력과 힘이 있는 집단이 되어야합니다. 평화를 위하여 그리고 복음전파를 위하여 널리 알려져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매스컴 선교, 출판 선교 등은 거룩한 나라의 확장의 도구로서 당연히 개발되고 알려져야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적극적으로 홍보하며 공격적으로 우리 자신을 알리는 것은 중요한 선교의 사명이 됩니다.

다대오의 질문은 이런 거시적(巨視的) 선교 시각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기독교인들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그 은혜 가운데 사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세상에 그 거룩한 영향력을 확보하는 철저한 제자의 삶을 요구하셨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에 따른 열매를 요한복음 15장에서 강조하십니다. 전도의 열매, 선교의 열매를 주님은 분명히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그 질문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사랑이었고 하나님 안에 있음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다대오는 이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는 자가 되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다대오는 시리아로, 아라비아로, 페르시아로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했고 아르메니아는 A.D. 301년에 벌써 그 나라가 기독교화될 만큼 복음으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 시리아라는 곳에서 칼을 맞아 마지막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이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합니다.

다대오의 다른 이름인 [유다]는 <찬양>이라는 뜻이요 [다대오]는 <사랑받는다>는 뜻이요 [레비야스]라는 말은 본래 히브리어의 명사[렛]에서 나온 것으로 <가슴>이라는 뜻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름 그대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를 돌리고 사랑을 받으며 사랑을 나누며 그리고 가슴 깊은 영혼의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구원사역에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습니다.

널리 알려져야한다고 주장했던 다대오는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은 알려지지 않아도 예수님의 이름은 널리 알린 진실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다대오는 결과적으로는 "이름은 없었으나 이름 값을 하고 간 제자, 이름 없이 빛도없이 주님을 섬긴 제자, 유명하지 않았으나 필요했던 제자로 살았습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도 다대오처럼 이름은 없어도 이름 값을 하고 유명하지 않았도 하나님의 나라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제자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살전5:9-10)

---------

===주님의 진리와 사랑을 따라간  제자  유다(다대오)  사도 ( 마태복음 10:2-4)
제자 중에 같은 이름이 셋이나 있습니다. 시몬, 야고보, 그리고 오늘의 유다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유다(다대오)를  배신자 유다와 조심스럽게 구별하느라고 "가롯 유다가 아닌 유다가.."(요 14:22)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복음에서는 다른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kjv 영어번역에 보면 마10:3절에서 다대오를 레비어스(lebbaeus)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마가는 그냥 “다대오"(막 3:18)라는 이름만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를 그대로 유다라고 했습니다.(눅 6:16/행 1:13) 결국 “다대오, 레비어스, 유다”라는 세 가지 이름이 동일인임을 알게 됩니다.
초대 교부 가운데 제롬(Jerom)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처음으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유명한 학자입니다. 그는 다대오라는 제자에 관해서 "세 이름을 가진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성경에 열 두 제자의 명단이 언급되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이 사람이 등장한 예는 꼭 한 번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사람에게 별명을 붙이면서 "성경에 꼭 한 번만 나타난 제자"라는 표현을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한 번 나타난 것을 보면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작은 야고보보다는 나은 편입니다. 이제 다대오의 성품과 그의 인격에 대해서 함께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그는 선교적 관심이 남달랐던 제자였습니다.
다대오 유다에 대한 기록이 한 번 나오는 곳이 바로 요한복음 14:22-23입니다.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가룟인이 아닌 유다가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시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우리에게는 나타내 주시면서 세상 사람들에게는 왜 안 나타내시려 합니까?"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질문 내용은 "예수님께서 정말 메시야라는 사실을 제자들인 우리에게는 말씀해 주시고, 증거도 보여 주시고, 확신시켜 주셨으면서도 세상을 향해서는 주님 자신을 왜 나타내지 않으십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주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빨리 세상에 알리셔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도록 해야 하지 않습니까?"라는 일종의 선교적 관심을 지닌 질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오는 놀라운 교훈과 진리를 자기만 독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 사실이 알려지기를 원하는 선교적 차원으로서 포용력이 넓은 제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좋은 소식은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기를 원해야 합니다. 내가 받는 은혜, 내가 받은 축복을 다른 사람들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가슴에 뜨겁게 타오를 때 선교가 되는 것입니다.
다대오 유다의 마음에는 주님과 같이 다니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한 제자였던 유다는 이 귀한 말씀, 너무나 좋은 주님의 사랑을 많은 사람들이 누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마음을 가지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받은 사람은 꼭 성경을 열심히 읽으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은혜를 받고 있습니까? 그것을 많이 사람이 경험하고 그 은혜를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다대오 유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사랑이 많았던 제자입니다.
원래 본명이 유다였던 이 제자가 왜 다대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요? 아마 이 다대오라는 이름은 다른 제자들이 붙여준 별명이었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와 구별 짓기 위하여 붙여준 별명입니다. 그런데 그 별명이 이 유다의 성품이나 인물됨을 설명할 수 있는 단서가 됩니다. 어떤 사람의 별명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별명이라는 것은 내 습관이나 취미, 그리고 사람됨이나 특성을 알려 주는 중요한 단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별명에 담겨진 것은 다대오라는 말의 뜻은 "사랑스러운"이라는 뜻입니다.
또 하나의 별명인 레비어스라는 말은 본래 히브리어의 명사[렛]에서 나온 것으로 "가슴"이라는 뜻입니다. 이 가슴은 어떤 깊은 마음이나, 심성을 가리킬 때 쓰여지는 단어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성격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또 사랑을 주며 그리고 깊이 있고 조용한 자신의 어떤 가슴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가 있었던 이미지를 가진 제자라는 것을 우리에게 연상시켜 줍니다.
성경외의 다른 자료 문서을 통해서 간접적인 제자들의 모습을 알 수가 있는데 다대오 유다는 모든 제자들의 사랑과 인정을 가장 많이 받았던 그러면서도 다른 제자들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고 언제나 조용히 자기의 할 일을 하던 제자였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한 신학자는 이 인물 연구를 하면서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서 요한이 “적극적인 사랑의 사도”라면, 이 유다는 “조용한 사랑의 사도”라고 말했습니다. 유다는 떠들썩하지 않지만 조용히 자리를 지키면서 제자들을 화목하게 만들었고, 불평과 원망대신에 자기의 할 일을 꼬박꼬박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초대 교인들은 호칭 문화가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의사인 누가]를 부를 때 그 이름 앞에 애칭을 붙여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라고 불렀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다를 부를 때에 제자의 이름을 그냥 부르지 않고 “다대오 유다, 즉 사랑받고 있었던 유다”로 불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유다, 사랑하는 유다여"라고 문서들은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사랑을 받았다고 해서 앞에 나와서 설친 사실도 없고, 여전히 조용하게 자기분수를 지키면서, 그러나 자기의 몫을 다하고 있었던 제자였습니다. 이름이 없었지만 고요하고 우리 모두에게 애정을 받을 수 있었던 참 좋은 제자가 바로 유다 다대오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추리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다대오 유다는 찬양을 하는 제자였습니다.
초대의 어떤 교부가 기록한 책 가운데서 아주 흥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성경만큼 신빙성 있는 그런 문서는 아니지만 좋은 단서로 채택될 수는 있는 그 문서에 보면 단편적으로 열 두 제자의 인물 비교를 하는 장면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유다는 가룟 유다와 여러 면에서 대조를 이루고 있었던 제자이다. 또 가룟 유다가 불평을 하고 있었을 때에 이 사람은 찬양하고 있었다." 가룟 유다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씻기기 위하여 값 비싼 옥합을 깨드렸을 때에 그 기름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데 썼으면 얼마나 좋겠는가라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그 곁에서 유다 다대오는 찬송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 제자들이 떠들썩하면서 소리 지르고 흥분할 때도 유다 다대오는 말없이 고요하게 한 구석에 있었던 제자입니다. 제자들이 분쟁을 일으키고 아우성을 칠 때도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던 제자가 바로 유다 다대오입니다. 모든 제자들이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었을 때 조용히 한 옆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있었던 제자가 바로 다대오라는 것입니다. 유다라는 말의 뜻은 "찬양"입니다. 그 이름의 뜻에 맞게 항상 찬양을 하면서 기쁨과 감사, 그리고 충만한 사랑의 가슴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은혜를 끼치는 조용한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좋은 이름을 가졌으면서도 이름값을 하지 못했으나, 다대오 유다는 정말 이름값을 했던 제자입니다.
다대오에게는 특기가 없습니다. 어떤 굉장한 업적을 이루었다는 이야기도 성경에는 없습니다. 또 다른 제자들을 인도할 만한 지도자의 역할을 한 것도 아닙니다. 또 다른 제자를 전도하는 일 가운데 앞장을 섰던 제자도 아닙니다. 많은 제자들에게서 주의를 끌만한 두드러진 인물이나 개성 있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JC은 이 사람을 열 두 제자 중에 한 제자로 선택하셨을까?
예수님은 인격의 질적인 특성 때문에 유다 다대오라는 제자가 주님의 제자들 가운데도 필요하다고 주님이 판단하셨기 때문에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대오의 삶을 보면 항상 복음을 많은 사람들이 듣고서 나같이 은혜를 받고 항상 감사와 찬양으로 살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슴에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다른 제자들과 달리 남을 세워주고 인정해주는 복된 제자였습니다. 남의 단점을 보지 않고 오히려 장점을 보면서 긍정적으로 사는 제자였습니다. 아마 다대오 유다는 leader의 역할보다 follower의 역할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따르는 자입니다. 스승 되시는 주님을 따라가서 그를 배우는 것이 제자입니다. 다대오 유다 같은 사람은 가장 따르는 자의 모범이 되는 사람입니다.
미국 교회에 보면 어떤 사람은 평생 부목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직분으로 평생을 늙어 가면서도 그냥 기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부목사들은 그 직분을 원목이 되기 전의 실습과정 정도로 여기는 것입니다. 머리 역할을 하려고만 하면 누가 손의 일을 하며, 누가 발의 역할을 하고 누가 심장의 역할을 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이 모든 직분이 다 필요한 것입니다. 머리는 하나만 있으면 족합니다. 저는 이 문화 비평가의 말이 어쩌면 그렇게도 한국 교인들에게 필요한말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 정말 필요한 사람은 어쩌면 더 많은 베드로보다도 더 많은 유다 다대오일지도 모릅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를 섬기는 더 많은 제자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편 일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표면에서 일할 사람은 하고, 숨어서 일할 사람은 숨어서 일해야 하며 저마다 자기의 위치를 지키고 주의 이름만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나라만 확장될 수 있다면 그냥 기쁘고 그리고 감사하고 행복해 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도를 구하는 우리에게 유다 다대오와 같은 아름다운 주의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시도록 기도하십시다.
다대오 유다는 시리아로, 아라비아로, 페르시아로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특별히 가장 많은 활동을 한 중심지는 아르메니아입니다. 그 도시에서 그는 정말 놀랍고 눈부실만한 선교 활동을 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바돌로매라는 제자와 둘이서 동역하면서 A.D. 301년에 벌써 그 나라가 기독교화 될 만큼 복음으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는 다시 해외 선교를 나갔다가, 시리아라는 곳에서 칼을 맞아 마지막 순교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배우는 자는 가르치는 자의 모든 것을 다 흉내를 내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흉내를 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테니스를 배울 때 가르치는 선생의 자세를 흉내 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그 자세가 나의 자세가 될 수 있을 때 실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세에서 응용할 수 있는 실력까지 생기는 것입니다.
주님의 삶을 흉내내십시오. 주님의 인격을 흉내 내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세상에 주님의 생애에 대한 기록을 성경으로 남겨 주셨습니다. 바울은 내가 주님을 본받는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하신 이유도 열심히 흉내를 내라는 것입니다. 자기 고집, 자기 주장을 버리고 주님의 사신 그 길을 열심히 따라가며 흉내를 내다보면 어느 날 나의 인격과 성품, 그리고 운명이 변화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사도 마태....뜻 : 야훼의 선물....알패오의 아들,

레위지파의 후손인 알패오의 아들로 태어났다.((알패오가 예수의 작은 아버지라면 오히려 유다지파인데...그렇다면 레위는 아명으로 봄이 더 타당할듯하다!!) 본래 이름이 [레위]("연합하다"라는 뜻)인 그의 그 이름 대로 세상과 야합하여 생활하였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 특별히 많았던 그는 선민으로서의 긍지를 갖기 보다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현실 주의자이기도 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창녀와 죄인들과 같이 가장 천대를 받는 부류였던 세리가 되어 부당한 방법으로 돈을 모으기에 급급했던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인생이 반전되는 상황을 맞는다.

야훼 신앙을 버리고 메시아에 대한 소망마저 등진 철저한 죄인으로 살던 세리의 신분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함으로써 영광스런 주님의 제자로 변화된 것이다. 

로마 황제의 창고를 채우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가버나움의 세관에 앉아 동족의 고혈을 짜내는데 조금의 가책도 느끼지 않던 [레위]가 이제는 회개한 죄인 [마태]로서의 새 인생을 시작하였다.

이전까지 그를 주장하던 육신의 안목과 가치관이 주 안에서 새롭게 변화되자 세상재물에 쏟았던 그의 열심은 주님께로 전환되었다. 불의하게 착복하여 쌓아 두었던 재물로 큰 잔치를 벌여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자들에게 자신이 받은 구원을 증거하며 주님께로 인도하는 이웃사랑을 실천하였다.

또한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며 생명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사도로서의 훈련을 쌓아갔다. 

그러나 성령세례를 받기 이전의 인간의 열심은 주님이 받으시는 고난의 자리를 회피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던 마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오순절날 성령 세례를 받은 후에야 비로소 사도직분을 감당할 수 있었다.

성령이 충만하여진 마태는 천국복음을 전하며 스스로를 낮추고 예수그리스도만을 높이는 충성된 청지기가 되었다. 

또한 유대인들을 위해 [마태복음]을 기록하여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사랑의 빛을 갚는 헌신된 삶을 살았다.

주안에서 참으로 진실하고 정직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마태는 스스로를 "세리 마태"라고 일컬음으로써 은혜받은자의 겸손을 보여주기도했다. 

세상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비천하게 사는 세리에서 목숨을 바 치기까지 복음전파에 힘을 기울이는 사도로 발돋음한 마태의 생애는오늘날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인생의 새 재표를 제시해 주고 있다.

또한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을들려 줌으로써 생명의 길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고 있다. 

세상의 썩은 재물을 포기하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상급을 바라본 마태의 이름은 믿는 자들만이 들어갈 새 예루살렘의 기초석에 새겨지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요한계시록 21: 14 참조)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주 앞에서 낮추는 자를 하늘 나라의 큰 자로 높이시는 것이다.

--------사복음서-레위 마태-마태복음의 저자..자신을 낮춘 겸손함의 증거

###알패오의 아들로 보는 견해가 가장 많다... 다른 견해로는 원래 알패오의 아들이 아니라 레위 지파였을 것으로 보기 함......그렇다면, 알패오<글로바>가 유다지파인 예수의 작은 아버지라는 견해는 이상하다?.....그렇다면, 다만 세리 직업을 가진 마태의 별도의 이름이 <다대오가 다대오 유다인 것처럼!!>레위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봐야 할 듯 하다.....이것은 정말 놀랍다...알패오 가족들은 레위 마태가 어린 시절 이름<레위>란 그의 이름값을 못하고 오히려 세리 직업을 가졌다고 내논 자식 취급한 것은 아니었을까..??...주님은 그를 제자로 부르시고 <마태>란 이름을 붙여 주셨다.

오늘날 많은 진보 측 신학자들은 복음서 저자 문제에 있어서 익명(匿名)을 주장한다. 물론 발신인과 수신인이 분명한 서신서들과 비교할 때(참고, 롬 1:1, 7) 복음서의 저자는 밖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경우는 다른 복음서와 비교할 때 분명히 차이가 난다.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에 의하면(막 2:13~14) 예수께서는 바닷가에서 나가서 세관에 앉아 있던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부른다. ((그렇다면 예수의 작은 아버지, 알패오의 아들들은 레위 마태, 다대오 유다, 작은 야고보그외에 요셉<요세>, 시므온<예루살렘교회2대 감독> 5형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열두 제자의 목록에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는 없고, 대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마태가 있을 뿐이다(막 3:18). 이것은 누가복음 역시 마찬가지다(눅 5:27~28, 6:15). 그렇다면 마가복음 혹은 누가복음만 받아 읽은 이들은 세리 레위와 사도 마태를 연결시킬 수 있는 그 어떤 근거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와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마태는 그 부름 기사에서 레위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아예 처음부터 ‘마태’라는 이름을 적고 있다(마 9:9).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서 열두 사도의 목록에서는 마태라는 이름 앞에 ‘세리’라는 직업명을 함께 적고 있다(10:3). 이것은 최초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읽을 때 혹 있을 수 있는 오해의 여지를 해소하기 위한 조치라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바로 이런 조치는 저자가 마태임을 시사하는 증거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사도의 목록에서 이름 앞에 ‘세리’라는 직업명을 덧붙인 것도 예사롭지 않다. 사실 유대 사회에서 세리는 우리나라의 일제시대 때의 친일파처럼 로마 제국의 앞잡이로서 수치스러운 직업이었고, 따라서 이방인과 (종교적) 죄인처럼 취급되었다(마 5:46, 18:17). 이러한 치욕스런 직업명을 교회의 기둥격인 사도 앞에(참고, 갈 2:9) 붙인다는 것은 본인이 아니고는 감히 시도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또한 저자가 세리 마태임을 가리키는 유력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한편, 마태가 여기서 자신의 이름 앞에 세리라는 부끄러운 과거를 감추지 않은 것은 자신을 낮추고자 하는 겸손함의 증거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마가/누가복음과 마태복음 사이의 이런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레위를 마태가 속한 지파(支派) 명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즉, ‘레위 지파 사람 마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이해되지 않는 것이 어찌 성전에서 거룩한 직무를 맡아 수행하기로 되어 있는, 레위 지파인 마태가 그와는 정반대되는 직업인 세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어떤 이들은 1세기 당시 성전 봉사의 일자리가 모두 채워져서, 마태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타락하여 세리가 되었다고 하지만, 근거 없는 주장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마가, 누가복음의 레위라는 이름은 마태의 또 다른 이름으로서, 세리였던 레위 마태가 주님의 부름을 받아 사도가 되었고, 또 그에 의해 어거스틴의 말처럼 신약에서 ‘가장 완전한 복음서’인 마태복음을 기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정말 놀랍다...알패오의 가족들은 레위 마태가 어린 시절 이름<레위>란 그의 이름값을 못하고 오히려 세리 직업을 가졌다고 내논 자식 취급한 것은 아니었을까..??...주님은 그를 제자로 부르시고 <마태>란 이름을 붙여 주셨다.

---------------

(마 9: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막 2:13-14)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눅 5:27-28)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 공통내용? 예수께서 지나가시다가 마태(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고 “나를 따르라”하니 그가 일어나 따랐다.

▹ 차이점? 이름이 다르고 마지막 내용이 다르다.

→ 이름-마태(마태라 하는 사람이) 마가(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누가(레위라 하는 세리가)

→ 마태(헬라식 이름) 레위(히브리식 이름)

→ ‘레위’가 본명이고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의미로 그가 예수를 만난 후 받은 이름이다.

cf. 마가는 레위가 예수의 제자가 된 이후에는 주로 ‘마태’(막3:18)이라고 불렀다.    

▹ 세관(τελώ́νιον 텔로니온) - 운임이나 통행료를 받는 집, 또는 세금을 받는 징수원이 거하는 조그만 사무실이나 징수 창구

▹ 세리에 관하여

- 리비(Livy 59BC-17AC, 로마 역사가) “세리가 있는 곳에는 법이 존재하지 않았고, 돈을 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 로마는 거대한 제국의 운영과 군사적인 재정을 지원할 강력한 세금정책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동원된 사람이 바로 세리였다.

- 로마시대의 세리는 입찰을 통해 세금을 거둬드릴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은 사람이었다.

- 그 결과 지방단체의 관리와 로마의원들과 세리간에 공모가 있게 되었다.

- 예수 시대의 아우구스투스황제(27BC-14AD)와 티베리우스황제(14AD-37AD)의 재위기간에는 심각한 불만이 제기되면서 국민개개인의 재산에 근거한 1%세금을 부과하는 개인세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과는 1%이상 부과하도록 지방관리는 세리를 활용하게 되었다.

→ 이러한 세리들의 활동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세리라는 직업에 대해 치를 떨게 되었고, 세리는 죄인과 같은 의미로 인식되었다.

* 유대인으로 당시 세리의 사회적 종교적 위치

1. 그들은 사회적으로 멸시를 받았다. 로마의 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돈을 갈취하는 半관리적 입장 때문에 세리는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인물로 받아들여져서 유대인들 사이에서 멸시 받다.

2. 종교적인 배척을 받았다. 이방의 돈을 취급하고 이방인들과 관계를 갖는 일을 함으로서 유대인의 율법에 명시된 정결규례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3. 비록 사람들의 질시는 받았으나 로마에 의해 보호를 받으며 안정적인 직업과 세리로서 누릴 수 있는 부귀가 있었다.

→ 이런 유대인의 시각에서 볼 때 예수께서 세리인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일은 지극히 불경건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cf. 말씀의 특징-말씀에는 레위의 감정과 마음과 생각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결단이 느껴지는 그의 행동만 나온다.

-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마), 또 지나가시다가(막),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눅)

→ 예수께서는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움직이시고 계신다.

-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마),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막),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눅)

→ 보시고(θεά́ομαι 데아오마이) 일반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응시하며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 앉아 있은 것을(κά́θημαι 카데마이) 여기서는 현재분사로 계속의 의미를 갖고 있다.

* 예수께서 보신 레위의 모습은 어땠을까?

1. 그는 동서로 도로가 이어지는 교통 요충지였던 가버나움에 설치된 세관에서 일하였고, 도로세 교통세 관세를 징수하는 세리였다.

2. 예수께서는 전도하러 다니시던 중 몇 번 그 길을 지나가셨을 것이고 레위를 주의깊게 보시고 계셨다.

cf. 일반적으로 세리는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만 직업적으로는 매국노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Q. 그럼 그런 감정적인 대우를 받고 있던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 세관에 앉아 있으면서 레위는 어떤 마음일까?

1. 레위는 예수께서 세관에 앉아 있고 부르신 순간에도 그 자리에 있는 성실함을 보인다. 그 성실함은 세리로서의 부유함을 누렸을 것이다.

2. 그는 세리의 삶을 선택했다. 그것은 세리로 살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 즐겁지 않은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 “나를 따르라” 하시니

→ 레위를 지켜 보시던 예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다. 예수께서는 레위의 내면과 성실함에서 무엇을 보셨을까? 따를 만한 사람으로 느끼셔서 따르라 했을까?

Q. 우리를 지켜보실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어떤 마음을 보실까?

- 일어나 따르니라(마 막)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눅)

→ 버리다(καταλεί́πω 카탈레이포) 떠나다 남겨두다 소홀히하다

Q. ‘모든 것을 버리고’? 과연 무엇이 그를 그렇게 할 수 있게 했을까? 무엇이 그가 메시야를 따르게 했을까?

→ 레위는 예수의 부르심에 자신의 생업과 모든 것을 남겨두고 예수를 따른다. 자신이 메시야의 제자로서 살아갈 것을 선택하였다. 즉 레위는 겉을 버리고 속(삶의 기준, 메시야)를 선택했다.

Q. 우리도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 적이 있는가?

* 메시야를 따른 레위의 마음은 어떨까? 즐겁다. 왜? 이어지는 말씀이 예수와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식사를 한다.

(마 9: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정리]

세상을 나쁜 이미지와 시선을 살아가야 하는 세리, 그가 메시야의 부르심에 응답한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며 즐거이 따른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버리며 예수를 따르는가?

---------사도 마태오

마태(히브리어: מתי, 고대 그리스어: Ματθαῖος, 한국어 음역: 마태, 가톨릭: 마태오, 개역성경: 마태)는 사도,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에서는 마태 복음을 쓴 저자로 인식되고 있다. 로마 가톨릭에서 지정한 축일은 9월 21일이며, 동방 정교회에서 지정한 축일은 11월 16일이다. 성공회에서도 종교개혁이전의 신앙전통을 존중하여, 마태를 수호성인으로 기념하나 개신교에서는 성인으로 기념하지 않는다.

>회심

마태는 갈릴리 태생으로, 요한 복음서(마가복음서) 2장 14절, 루카 복음서(누가복음서) 5장 27절의 두 군데서 그를 레위(Levi)라고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성명은 ‘레위 마태’일 것으로 추측된다. 

레위 지파의 후손인(?...알패오가 예수의 작은 아버지라면, .예수와 같은 유다지파였다고 본다면, 레위란 이름은 아명이었을 듯하다) 알패오의 아들(요한 2,14)로서, 처음에는 가파르나움에서 로마 제국을 위해 같은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걷는 세리로 일하였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 특별히 강했던 그는 선민으로서의 긍지를 갖기보다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창녀외 죄인과 같이 천대받는 부류였던 세리가 되어 부당한 방법으로 돈을 걷어들여 모으기에 급급했던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고 그의 제자가 되어 인생이 바뀌게 되었다. 

복음주의 신학자 김회권 교수(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는 《청년설교》(복있는 사람)에서 마태의 회심을 진정한 만족을 주시는 분과의 만남으로 그린다. 이전까지 그가 믿던 가치관이 예수를 만나게 되면서 재물에서 만족을 얻으려는 사람에서 예수께서 전하시는 하나님나라 복음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새롭게 변화되자 세상의 재물에 쏟았던 그의 마음은 예수에게로 전이되었다. 로마제국의 하수인으로 일하면서 불의하게 모은 재물로 큰 잔치를 벌여 자신의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자신이 받은 구원을 증거하며 예수를 소개하는 전도를 하였다. 이에 대해 작가 김동리는 사반의 십자가에서 마태가 예수와 이야기하면서 위로받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예수와 사회적 소외자들과의 연대를 읽었다.

>사도

또한 예수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며 같이 생활하면서 사도로서의 훈련을 쌓아갔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를 버리고 도망치는 한계를 드러냈다. 나중에 마태오는 부활한 예수를 만나고 오순절 날 성령의 세례를 받은 후에야 비로소 사도로서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전승에 따르면 마태는 유대를 순회하며 전도하다가 동방으로 갔으며, 로마 순교록에는 그가 에티오피아에서 순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전승에 의하면 페르시아 지역에서 순교했다고도 한다. 그의 유해는 처음에 에티오피아로부터 페스툼으로, 다시 10세기에 이탈리아의 살레르노로 옮겨졌다.

===

@@사도 도마(요20:19-31)
●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사람이었던 도마는 갈릴리 출신 어부로 ‘디두모’라고도 불렸다.
‘도마’는 히브리식 이름이고 ‘디두모’는 헬라식 이름인데, 둘 다 뜻은 ‘쌍둥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도마는 쌍둥이였던 모양인데, 그가 형제 쌍둥인지 자매 쌍둥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어떤 학자들은 마태와 쌍둥이였을 것이라고 추측하나 불확실하다. 성경에는 그의 부모나 그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록도 전혀 없다.
뿐만 아니라 만일 요한복음에 기록된 도마와 관련된 내용이 없었다면, 그는 단지 이름만 소개된 제자였을 것이다.

공관복음(마10:3, 막3:18, 눅6:15)과 사도행전(행1:13)에는 단지 이름만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요한복음에 있는 내용 덕분이다.
● 도마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오늘날까지도 그는 ‘의심 많은 제자 도마’로 알려져 있다. 어떻게 해서 도마는 이같은 인물로 평가되고 있을까? 그리고 그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정당한 것인가?

먼저 요한복음에 소개된 도마와 관련된 내용들을 살펴보자.
1) 요11장에 보면,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신 예수님은 베다니로 나사로를 도우려 가자고 하신다.
그 당시의 상황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대인의 궤계가 임박해 있고 실상 얼마 전에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곳에 가신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가지 못하게 말렸다.

그런데,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도마는  나서서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한다.
도마의 이러한 반응은 어떤 의미였을까? 이것이 용기였을까 아니면 운명론자들이 갖는 염세주의적 기질에서 나온 것일까?

만일 예수께서 신변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유대 땅으로 건너가시려 하자 스승과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하겠다는 비장한 결의의 표현으로 본다면, 도마는 단순하고 의협심 강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도마도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면, 유대땅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 다소 자포자기의 의미를 지닌,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예수께서 가시자고 하니, 모든 것 다 운명에 맡기고 올라가자.”라는 의미로도 들린다.

신학자들이 이 구절에 대해 여러 각도로 해설을 해 놓았지만, 분명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고 있다.
2) 두 번째로 도마가 등장하는 장면은, 요14장인데, 유월절 전날 밤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큰 위로의 말씀을 하신다. (요14:1-4 읽기)
그러자 도마는 질문을 한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 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도마는 그 길을 알아야 한다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도 예수님께 질문한다.
도마는 이미 앞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가르침을 듣지 못했단 말인가? 그는 귀머거리인가?

그는 주님께서 배신을 당하심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그분의 가르침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도마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세상 왕국을 꿈꾸고 있었다.

예수께서 떠나 가셔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실 때, 그들은 실제로 예수님이 어떤 다른 도시에 가시는 것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서 왕으로 기름부으심을 받고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하리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질문한다. “우리는 당신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 길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요13장에서 베드로도 질문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13:36)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점에서 볼 때 그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었던 것을 잘 믿지 못하는 깨달음이 둔한 자였는가? 아니면, 자신이 이해되지 않을 때는 알 때까지 끝까지 파고드는 사람이었는가?
3) 세 번째 등장은 요한복음 20장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데, ‘의심많은 제자 도마’로 우리에게 알려진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십자가 사건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첫번째 주일날]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나중에 그가 와 서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자기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는 완고하게 그 사실을 믿으려 들지 않는다.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한다.
성경은 왜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도마와 같은 상황에 있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했겠는가? 도마는 부활의 증거를 믿기 전에 부활하신 자를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껴야만 했다.

도마는 진지하고 심각했다. 그는 실제로 예수님을 다시 보기를 원하였고, 그분이 죽지 않으셨음을 알기 원했다.

의심과 실망 가운데 있던 도마는 7일동안 제자들과 함께 머물러 있으면서 그들이 말한 것이 실제로 사실이었나를 알기 원했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을 만나 주시는데 일주일이 지체되었다. 그동안 도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다른 제자들에게는 기대와 소망이 넘치는 즐거운 일주일이었지만 도마에게는 근심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일주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어야 함을 느꼈으므로 그 무리들과 함께 있었다.
4) 네 번째 등장은 요한복음 20장에서 바로 이어지는 장면이다.

그 후 여드레를 지나서[즉, 두번째 주일날] 갑자기 예수님이 제자들의 한 가운데 다시 나타나셨을 때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도마도 다른 제자들과 함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때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의 손을 직접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을 직접 넣어보라고 하신다. 그리고 도마에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도마는 무릎을 꿇으며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한다.

이에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라는 말씀으로 이전에 도마가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은 데 대한 꾸지람을 하신다.
예수님은 도마가 말하는 것과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마 한 사람에게까지 찾아와 주셨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때로는 지체하시며, 때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개인과 가정, 교회를 방문하신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영혼을 가치 있게 보신다. 이에 도마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하게 된다.
우리에게 도마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알려주는 요한은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도마를 잘 알고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그들은 같은 동네에서 자랐고 직업도 같았다. 또한 제자들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동안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에 도마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요한은 특별히 도마를 지칭하여 말하고 있다.
도마에 대해 변함없이 묘사되고 있는 특징은 우울하고 의심 잘하는 그의 성격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이런 경험은 예사로이 할 수 있다. 그는 결코 성경에서 언급하는 “사악한 불신의 마음”을 지닌 자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휘몰아치는 의심과 싸웠으며 그런 의심들을 과감히 물리쳐서 자신의 의지를 주님 앞에 드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가 으례 도마를 생각할 때면 “의심 많은 도마”라는 상념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기록들이 그러하고 또한 주석가들도 “도마는 우리가 의심하지 않을 것까지도 의심하는 자”라고 예사로 논평을 해 왔기 때문이다.
성경의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도마는 성격상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들을 지니고 있었고, 특히 누구와 함께 융화되기 어려웠다. 그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다보니 갈등을 일으키고 다른 이들과 쉽게 융화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분명히 기질상 쾌활하거나 명랑하기보다는 다소 우울한 성격이었을 것이다. 그는 인생을 냉담하게 혹은 절망적으로 보는 염세주의적인 기질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의심과 질문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의심이 많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사고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대충대충 넘어가지 않고 확실하게 하려는 삶의 자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강한 의지와 용기를 지닌 인물이었을 것 같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변하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선생님인 예수님에 대해서는 신실한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고난에 도전하고 정면으로 역경을 돌파하고 시련을 이겨내려는 의지가 있었던 도마는 분명히 용기 있는 제자였다. 

제자들 가운데서도 스승에게 질문을 한다는 것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이다. 질문이 없는 조직이나 공동체는 퇴보하거나 실패하기 쉽다. 

도마는 어렴풋한 생각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의문을 가지고 그대로 지나갈 수는 없었다. 올바른 지식과 인식을 얻고 전달하는 완전한 방법은 바른 질문에 있다.  도마의 오랜 의심은 드디어 강한 믿음으로 변했다. 그의 의심만큼 신앙도 깊어졌다. 

사실 우리는 끊임없이 교회와 신앙, 그리고 자신의 삶에 계속 질문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질문이 없으면 발전도 없다.
● 이후 도마는 주님을 위해 능력 있게 사용되었다.
염세주의적이고 의심에 가득 찬 제자였던 도마가 열정적인 선교사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바벨론과 페르시아(이란)에 교회를 설립했고 나아가 인도에도 교회를 설립하고 복음을 전파했다.

전승에 의하면, 도마는 인도에서 선교하다 순교하였으며, 인도 마라폴에 묻혔다.

그곳에 끼친 그의 영향력은 여러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오늘날 세상에 속속 드러나고 있다.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보고서야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도마를 향해 예수님은 보고 믿는 믿음도 좋으나 ‘보지 않고 믿는 믿음’ 이 더 복되다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성도들 중에도 도마와 같이 ‘내가 예수님을 한 번 보고, 혹 이적을 한 번 체험해 보면 더 잘 믿을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임을 기억하여, 우리 성도들은 보지 못하는 중에도 믿음으로 복된 믿음을 소유하는 자들이 되자.
뿐만 아니라, 주님 앞에서 분명한 신앙고백을 한 도마가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된 삶을 담대하게 살았던 것처럼, 비록 우리 자신 역시 부족하고 어리석은 인생들이지만,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분명히 확증하고 점검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증인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이전글 : 눅5.베드로야고보요한부르심.나병치유.중풍병치유_친구들의믿음따른죄사함선포.레위부르심.회개로거듭난영적새생명살기
다음글 : 눅7.가버나움백부장의종.,나인성과부아들.질문하는요한_JC의칭찬_미혹외식완고패역조롱냉담배척불신자.눈물로향유부은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