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3.23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눅4.시험받으심.나사렛의배척.가버나움의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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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광야 : 사해 북동쪽 13km지점의 여리고(그  남쪽에 사해가 있음), 사해 북서해안의 쿰란--엔게디--마사다 지역으로 이어지는 요르단 열곡 라인과 여리고에서  남서서 방향으로 30km 떨어진 위치의 예루살렘-->남남서 10km 지점의 베들레헴-->남남서 지점20km의 헤브론으로 이루어진 유대 산지 라인 사이의 폭 25km 전체길이 96km정도의 메마른 광야지역 (여리고 바로 아래 서쪽근방에 있는 아골골짜기~예루살렘선은 유다지파 북쪽 경계를 이루었었는데,  유대광야 북단은 여리고~예루살렘 라인, 남단은 사해남부, 즉 엔게디와  그 남부 마사다 지역으로 볼 수 있음..시험산은 여리고 인근 서북서 방향에 위치)


눅4장

===시험을 받으시다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10.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다

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나사렛에서 배척을 받으시다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사61장..*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4.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옛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5.  외인은 서서 너희 양 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6.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

7.  너희가 수치 대신에 보상을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몫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그들의 땅에서 갑절이나 얻고 영원한 기쁨이 있으리라

8.  무릇 나 여호와는 정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것이라

9.  그들의 자손을 뭇 나라 가운데에, 그들의 후손을 만민 가운데에 알리리니 무릇 이를 보는 자가 그들은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

1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11.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 같이 주 여호와께서 공의와 찬송을 모든 나라 앞에 솟아나게 하시리라]

......[사11;1-5...*1.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시다

31.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37.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온갖 병자들을 고치시다

38.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40.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4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복음을 전하러 떠나시다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44.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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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4장 (개요)

그리스도는 이제 막 세례를 받았고, 하늘로부터 온 음성과 그 위에 머문 성령을 통해서 인정을 받았다. 

본 장(章)에서는 다음 내용을 보게 된다.

Ⅰ. 빈 들에 나가 시험을 받음으로써 공적 사역에 나설 준비를 더욱 갖추게 된다. 

이것은 이미 본 대로 마태복음의 기록과 똑 같다(1-13).

Ⅱ. 갈릴리에서 공적 업무를 시작하신다(14,15). 자세히 구분하면,

1. 그가 자라난 나사렛에서 시작한다(16-30). 

이 기사는 마태복음에는 없는 것이다.

2 가버나움에서 활동하신다. 

그의 설교는 탄복을 받게 되고(31,32),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다(33-37). 

또 열병에 걸린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 준다(38, 39). 

그리고 병든 자와 귀신들린 다른 많은 자들을 고쳐 나아가다(40, 41). 

그 후 갈릴리의 다른 도성에 사시면서 같은 일은 하신다(4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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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받는 예수(눅 4:1-13)

앞 장(章)의 마지막 말은 예수는 "아담의 자손"이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그가 "여인의 후손"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약속에 따라서, 그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하고, 온갖 시험을 통해서 악마를 물리치고 좌절시키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악마는 단 한 가지의 시험으로 우리의 첫 조상들은 거꾸러뜨린 적이 있는 자이다. 

이리하여 전쟁의 초반부터 그리스도는 그에게 앙갚음을 했고, 정복자를 다시 정복해 버렸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유혹 기사 속에서 이런 것을 관찰할 수 있다.

Ⅰ. 그는 시험을 위해 "준비해"있었고, 또 "적합했다." 

그에게 시련을 계획하신 그분은 또한 그에 따른 힘도 부여하셨다. 

우리는 비록 우리 앞에 어떤 사태가 다가오고 있으며,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모르지만, 그리스도는 알고 있었다. 

따라서 거기에 맞게 예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도 예비하신다. 우리도 거기에 따라 능력을 받으려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1. 그는 "성령에 충만해" 있었다. 

성령이 "비둘기처럼" 그 위에 "강림"했던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위대한 은사의 방편, 곧 성령의 은총과 위로를 이전 보다 더 많이 받게 되었다.

"성령으로 충만해" 지는 자가 최강의 유혹을 이기는 최선의 무장을 한 자이다.

2. 그는 이제 막 "요단 강에서 돌아왔다." 

그곳은 그가 세례 받은 곳이요, 하늘로부터 오는 음성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라는 인정을 받은 곳이다. 

그리고는 이 전투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가장 즐거운 교제를 누렸고, 하나님의 가장 뚜렷한 은혜를 입은 때에라도, 사탄은 우리에게 다가서며(가장 값비싼 배가 해적의 목표물이다). 더욱이 하나님이 그런 일을 허락까지 하신다는 사실을 각오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총의 권능이 빛나게 되는 법이다.

3.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광야로" 갔다. 즉 선한 영의 인도를 받아서 갔다. 

그 성령은 그리스도가 참피온인 양 그 전장으로 내어 몰았다. 그것은 분명코 이기리라고 확신되는 그 적을 무찌르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가 "광야로 끌려" 갔다는 사실은

(1) 유혹자에게 이점을 "주었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그리스도가 홀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런 친구도 없게 된다. 

유혹(시험)의 시간에는 친구들의 기도와 조언이 있다면, 그가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홀로 거하는 자에게 화 있도다 ! 

"그는 사탄에게 이점을 줄 "수도 있었다." 그는 자기의 장점을 잘 알고 있는 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약점을 알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2)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광야에서 40일 간 금식하는 데에 "유리했다." 

아니 그 동안 줄곧 적당한 명상에 잠길 수 있었을 것이며, 자기 자신의 과업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자기의 모든 시간을 직접 하나님과의 친밀한 대화에 썼다. 산에 있던 모세가 아무런 방해 없이, 중단 없이 교제했던 것과 같다. 

그리스도가 육체로 계셨던 생애 전체 중에서, 이 기간이 아마 거룩한 완전과 신성한 생활에 가장 가까웠던 시기로 보인다. 

이로써 그는 사탄의 고발을 대비했고, 나아가 그것에 대해 무장을 했다.

4. 그는 금식을 계속했다(2절).

"이 모든 날 동안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않았다"고 했다. 

이 금식은 전혀 기적 같은 것이다. 마치 모세나 엘리야의 금식과도 같았다. 그것은 그들처럼 그도 "하나님이 보낸" 예언자처럼 보이게 했다. 

아마 그 금식장소는 모세나 엘리야가 금식했던 호렙의 광야였을 것이다.

그는 "광야"로 물러가심으로써 "세상"에는 전혀 집착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모습을 보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금식은 "몸"에 전혀 애착이 없다는 사실을 보인 것이다. 

그리고 사탄은 이처럼 "세상"과 "육체"에 대해서 해방되었거나 죽은 자들은 쉽게 범접하지 못한다. 

우리가 "몸은 제어"하여 복종시키면 시킬수록, 사탄은 그만큼 우리에게 대해서 불리해지는 법이다.

Ⅱ. 그리스도는 차례 차례로 시험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매번 유혹자의 의도를 꺾으셨고, 보다 큰 승리자가 되셨다. "40일" 동안 그는 "악마의 시험을" 받았다(2절). 

그 시험은 어떤 내적 암시에 의한 시험이 아니었다. 이 세상의 군주가 그리스도 안에다 무엇인가를 주입하여 역사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외부적인 속삭임, 아마 첫 조상들을 유혹할 때처럼 어쩌면 뱀의 모양을 하고 나타난 유혹의 소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40일이 끝나자. 유혹자는 그에게 다가와서 친근한 사이인 양 가장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주렸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2절). 

아마 그때 우리 주 예수는 나무들을 둘러보기 시작했으며, 어떤 먹을 만 한 게 없나 하고 살폈을 것이다. 

바로 이때를 이용하여 악마는 그리스도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1. "아버지의" 돌보심을 "불신하게끔" 유혹했다. 

그래서 "제 발로 서라"고 유혹했다. 즉 아버지께서 그에게 지정하시지 않은 방식으로라도 빨리 스스로 식량을 조달하라고 했다(3절).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마치 하늘에서 선포되는 음성과도 같았다. "이 돌에게 떡이 되라고 명하라."

(1) "내가 네게 할 일을 일러주겠다. 하나님이 네 아버지라면, 너를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가 네게 먹을 것을 주려고 까마귀나 천사를 보내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니라."

우리가 우리 스스로 조리사가 되려 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의지하지도 않은 채 스스로의 예상으로 생활해 나가려 하고, "우리 손의 권능과 권세로" 건강을 누리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이미 그것은 사탄의 유혹(시험)이라고 여기고 거부해야 한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의 독립을 꿈꾸게 하는 것이 사탄의 계획이다.

(2) "나는 네게 그것을 해 보라고 도전한다. 할 수 있다면 말이다. 할 수 없다면, 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말하리라." 

얼마 전 세례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돌들을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자녀로 만드실 수 있느니라". 그것이 이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네가 돌로 떡을 만들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권능은 네게 없는 것이다. 더욱이 이렇게 필요한 때에, 작은 일을 못한단 말인가 !"

하나님도 친히 이처럼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다. "그(하나님)가 우리에게 양식을 줄 수 있을까? 그가 우리에게 떡을 줄 수 있을까?"(시 78:19, 20)

①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시험에 굴복하지 않으셨다. 

그는 "돌을 떡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배가 고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첫째, 사탄이 명하는 것을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 악마의 주군 사이에 무슨 맹약이라도 있었는 듯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믿는 우리는 "악마에게 틈을 타게 하는"(엡 4:27)일은 결코 하지 말아야 한다.

기적은 믿는 이의 그 신앙의 참됨의 확증을 위해 [주께로부터 확인으로 주어지는 바] 일어나게 되는 법이다. 

악마는 [극도로 교활하기에 신앙이 있는 위장하지만 참 열매가 없고, 잘 검증해 본다면 악마에게는 주께서]확증해 주실 아무런 신앙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그(사탄)를 위해서는" [결코] 기적을 행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보라,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는" (요 20:30) 자기의 표적을 보이셨다. 

특히 물을 포도주 만드는 "처음 기적"을 행하셨고, 그것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를 믿고 신뢰하며 붙드는 믿음을 더 한층 굳세게 해 주었을 것이다(요 2:11). 

그러나 여기 광야에서는 [극악하고 교활한] 사탄에게는 아무 것도 가르칠 것이 없었다.

둘째, 그리스도는 [아버지로부터 온 바] 자기의 교리를 증명하기 위해서 기적을 행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파하기" 까지는 기적을 행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셋째, 그는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서는 기적을 행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적어도 "굶주림"을 못 견디는 자로는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기를 기쁘게" 하러 온 것이 아니라 "고통을 받으러"온 것이다. 특히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을 대신 지러온 것이다. 

때문에 그는 [전적으로 그를 믿고 의지하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 그 필요를 따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을 베푸시는 바]자기 친구들의 위신과 편의를 위해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들려 했으나, 자신의 "궁핍"을 해결하기 위해서 "돌을 떡으로" 만드는 일을 해 서 "자기를 즐겁게"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넷째,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증거를 차후로 보류하고 싶었다. 

또한 차라리 사탄에게는 약자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조소를 받을망정, 사탄에게 설득되어 부당한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자라고 원수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또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라고 했을 때에도 내려 올 수는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니, 그것은 그가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다섯째, 자기 아버지(하나님)를 불신하는 것으로 보이거나 하나님과 "유리된 행동" 혹은 자기의 현재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따위의 일을 조금이라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기" 때문에(히 2:17 참조), 하나님의 다른 아들들처럼,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그의 약속에 의지하여, 또 하나님이 광야로서 먹을 것을 보내 주실 것이라든가 "인도하사 거할 성으로" 보내시리라는 것(시 107:5-7)을 신뢰하면서 살고자 했다. 

그러면서 비록 배가 고프지만, 지나간 40일 동안처럼 하나님이 자기를 부지해 주시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② 그는 그 요구에 말씀으로 답변했다. 

"기록되었느니라..."(4절). 

이것은 그가 예언자적 직능에 임하면서 하신, 기록된 첫 마디 말이다. 그것이 바로 구약 성서의 인용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탄이라도 거부할 수 없는, 확고한 성서의 권위를 주장하고 지지해주기 위해 그가 오셨다는 사실을 밝혀 주는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께는 무한한 말씀이 있고, 전파할 자신의 교리와 또한 세워야 할 종교가 있었지만, 그 말씀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모세와 예언자들의 저작을 자신의 규율로 삼으셨듯, 오늘날 믿는 우리에게도 사탄과 그의 유혹에는 기록된 성경 말씀으로 대항할 것을 권유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검"이다. 또 그 말씀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방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 안에서 권능을" 얻어, "그 권능 안에서 나가고" 들어오며, 우리의 영적 상태가 어떠하든 "기록된 바"를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말씀은 바로 우리를 "교훈하고" "우리를 유익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인용한 성경 본문은 신명기 8장 3절의 인용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돌을 떡으로 만들 필요가 없느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서처럼, 내게도 영양을 위해서라면 만나를 보내 주실 수 있느니라.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곧 하나님께서 인생들의 삶을 위해서 지시해 주시는 모든 것에 의해서 살 수 있느니라."

그리스도는 이 40일 동안 어떻게 살았으며, 어떻게 평안히 살았을 것인가? 

"떡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즉 그 말씀에 대한 명상과 교제에 의해서, 그 말씀 속에 또 그 말씀을 통해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지냈다. 

그는 다시 "배가 고프기" 시작했지만, 역시 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가 있었다.

하나님은 일상적인 방식 외에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식량을 조달해 주신다. 

그러므로 어느 때든지 그를 불신해서는 안 되며, 언제든지 의무를 지키는 가운데 그를 의지해야 한다.

식사가 모자라면, 하나님은 식욕을 제거하시든가 "파멸과 기근을 비웃을 수 있는" 그런 강인한 인내력을 주실 수 있다(욥 5:22). 

또는 "채소와 물"을 "왕의 진미보다" 더 영양가 있게도 하실 수 있다(단 1:12, 13). 

또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무화과나무가 꽃피지 않은"때에도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할" 수 있게도 하실 수 있다(합 3:17). 

떡을 만들 밀가루와 기름이 마지막으로 조금 남아 있었을 뿐이었으나 자신과 아들은 [선지자엘리야의 약속을 그대로 믿은 바, 3년반 기근의 때에도 밀가루와 기름이 늘 새로이 채워져서 끼니를 거름이 없이] 식사를 할 수 있었던 사르밧과부는 참으로 실제적인 신앙인이었다.

2. 사탄은 "자기에게서" 나라를 "인수 받으라"고 유혹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서 그 나라를 물려받을 수 있었고, 또 "아버지에게 절해야" 했던 것이다(5-7절).

누가복음 기자는 이 유혹을 두 번째에 놓았으나, 마태는 제일 마지막에 놓았다. 아마 실제로는 마지막에 있었던 유혹으로 보인다. 

그러나 누가는 이 시험에 대단히 관심이 컸다. 그것이 그 시험이 가장 속 검고 강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문제를 서둘러 취급한 것이다.

악마가 우리의 첫 조상들을 유혹할 때에, 그들에게 그 금단의 열매가, 먼저 "먹기에 좋다 :: 먹음직스럽다 :: 육신의 정욕"고 제안했고, 그 다음에는 "눈에 즐겁다 : 지혜롭게 할만큼 모양도 탐스럽다 :: 안목의 정욕"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두 가지의 매력에 다 넘어가고 말았다. 사탄은 여기서 먼저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유혹했다. 떡은 먹기에 좋은 것이다. 

그 다음에는 세상 나라들과 그 영광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보기에 즐거운"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시험에서 그리스도는 사탄을 물리쳤다. 아마 누가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순서를 바꾸었을 것이다.

이제 다음 사실들을 관찰해 보자.

(1) 사탄이 그리스도를 이겨 자기의 부하로 만들고, 자기의 파견으로 자기의 나라를 인수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 시험을 어떻게 "이끌어 나갔는가"를 보자.

① 사탄은 그에게 "순식간에 세상 모든 나라들"의 전경을 찬란하게 제시했다. 

그것이야말로 사탄이 가장 환상(fancy)에 충족할 것이요, "참된" 세계처럼 보이는 그런 광경이다. 

사탄은 자기의 목적을 보다 쉽게 달성하기 위해 "그를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이 시험 다음에는 그리스도가 요단 강 건너편에 가 계신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혹자는 사탄이 데리고 간 산은 비스가 산꼭대기라고 본다. 

(그 곳은 모세가 가나안을 바라보았던 곳이다.)

그러나 공중 권세의 왕인 악마가 여기서 우리 구주께 제시한 것은 하나의 환상(phantasm)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누가가 여기서 주목하고 있는 그 주위 사정을 보아 밝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사람이 만일 어느 한 나라의 전경을 본다고 할지라도, 제대로 보자면 먼저 이쪽을 보고 그후 돌아서서 저쪽을 보면서 두리번거려야 하기 때문인 까닭이다. 

이처럼 악마는 우리 구주를 거짓으로써 속일 수 있으리라고 여겼으며, 그리고 악마 자신이 그에게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함으로써 자기(악마)가 그 모든 나라를 "그(그리스도)에게 줄"수 있다는 생각을 불어넣으려 했던 것이다.

② 사탄은 이 나라들을 "그에게 모두 넘겨주겠다"고, 즉 나라들과 그 나라들의 "영광"을 마음대로 처분할 권능을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자기가 원하는 자에게" 줄 수 있다고 하는 대담한 제안을 했다(6절). 

(*혹자는  악마가 자기를 빛의 천사로 가장했으며, 나아가 나라들을 주관하도록 파송된 천사 중의 하나처럼 다른 모든 천사들을 싸워 물리쳤으므로, 자기가 그 모든 처분권을 "넘겨받았으며," Q의 이름으로 그 나라들을 그리스도에게 줄 것인데, 그것은 나라들이 그에게 돌아가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는 이런 조건을 제시함으로써 방해물을 놓았다, 즉 그리스도가 스스로 그(악마)에게 "무릎을 꿇어 그에게 경배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선한 천사라면 감히 업두도 못낼 그런 요구였다. 선한 천사라면 이보다 더 위대한 것을 보여주었더라도 그런 요구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계 19:10; 22:9 을 보라. 그러나 그가 사탄이기 때문에 이런 권능을 주장했다고 본다.)

실상,그 권능은 "주님이" 그에게 넘겨 준 것이 아니라, 세상 나라들의 왕들과 그 백성이 넘겨 준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권력과 영광을 악마에게 넘겨주었다(엡 2:2). 따라서 악마는 "이 세상의 신"이라고 불리운다. 또 "이 세상 임금"이라고도 불리운다.

"이방인들을 자기의 유업"으로 받으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이미 Q맣씀으로 약속되어 있는 사실이다(시 2:8). 

[이것에 대해 불만가득한] 악마는 말한다. "왜 그러냐? 이방인들은 나의 것이요, 나의 백성이요, 내 숭배자들이다. 그렇지만 [네가 나에게 경배하기만 한다면 다툴 필요없이]그들을 너 그리스도에게 주겠다. 내가 그들을 네게 주겠다. 다른 사람들이 네 앞에서 그리하듯이 그들은 내가 네게 준 보상이라고 말하자(호 2:12). 그리고 나에 의해서, 나로부터, 내 밑에서 그들을 가지며 장악하기로 동의하라."

③ 악마는 그리스도에게 충성과 경배를 요구했다. 

"네가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7절).

첫째, 그는 그리스도가 자기를 경배하게 하려 했다. 

하나님을 경배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나란히 악마를 경배하라는 것이다. 악마는 그리스도가 단 한 번만이라도 자기의 동역자가 되어 준다면, 둘도 없는 충신이 되어 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가 계약하기를 바랐다. 

즉 약속에 따라서, 그리스도가 이 세상 나라들의 소유권을 잡을 때에, 그 나라 안의 종교를 변경시키지 말고, 지금까지 해 온 그대로 세상 민족들에게 "악마에게 제사하는"(고전 10:20) 것을 묵인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마귀 숭배(demon-woship)를 존속시켜 주기만 하면, 원하는 대로 그 나라들의 모든 권력과 영광을 넘겨주리라는 것이었다.

보라. [자의로]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취하려는 자들은 모두 사탄의 노예가 되리라. 

사탄은 [일단, 단지 한번만이라도] 사람들의 마음과 애착과 경배를 갖기만 하면, [세상사람들의]그 모든 것도 가질 수 있게 되고, 불복종의 "자식들에게" 역사 할 수 있다. 그 때에는 실상 사탄이 "그들을 삼킬" 것이기 때문이다.

(2) 우리 주 예수는 이 시험을 어떻게 물리쳤는가? 

그는 단호하게, 크게 혐오하여 거부했다(8절).

"너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난 참을 수가 없노라. 뭐라고 ! 내가 받들려고 온 하나님, 그 하나님의 원수를 경배하라고 ! 내가 구원하러 온 사람들, 그 인간들의 원수를 오히려 경배하란 말이냐? 아니다 난 도무지 그럴 수 없느니라." 

이와 같은 유혹에는 이유를 따져서는 안 된다. 즉각적으로 거부해야 한다.

JC는 말씀 한 마디로 당장 사탄의 뒤통수를 쳤다.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을 예배하라 하였느니라." 

또 그럴 뿐만 아니라 "그분만" 경배하고, "다른" 자를 경배하지 말라고 했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사탄을 경배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아버지가 자기에게 "넘겨 준 세상 나라"들을 차지하게 되면  그 나라들 속에 있는 악마 예배를 더 이상 묵인하지도 않을 것이다. 

절대 그럴 수 없다. 그의 복음이 가는 곳은 어디에서나, 악마 예배가 좌절되고 괴멸되리라. 

그리스도는 결코 사탄과 협잡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다신론"과 "우상 숭배"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세워지면, 결단코 무너져야만 한다. 

사람은 사탄의 권세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되며, 악마 예배에서 떠나 오직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 예배로 돌아서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인간들 중에서 재수립할 위대한 하나님의 신법(神法)이요, 그의 거룩한 종교가 사람들을 복종하게 할 그 법이다. 

즉 "하나님만 섬기고 예배해야 한다"는 법이다. 

따라서 어떤 피조물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든 - 그것이 성도이든 천사이든, 동정녀 마리아 일지라도 - 그들은 그리스도의 뜻을 정면으로 도전한 자들이요, 다시금 이방 종교로 돌아간 자들이다.

3. 악마는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를 믿는다는 구실 밑에 그리스도를 자살자로 만들려고 유혹했다. 

그런 보호는 정당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관찰하자.

(1) 이 시험에서 악마가 노린 것은 무엇인가?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 내리라"(9절).

① 그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위한 새로운 증거를 요구했다. 

마치 그의 아버지가 하늘로부터 나온 음성으로, 또 그 위에 성령이 강림함으로써 보여 준 증거는 불충한 듯이 말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입증한 방법이 가장 합당한 방법이 못되기라도 한 듯이, 하나님의 명예를 깎아내리는 그런 것을 요구한 것이다. 

또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성령의 내재하심을 불신하라는 주장이었다. 

성령의 내재야말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또 가장 중대하게 그리스도에게 증거해 주는 자료였다(히 1:8, 9).

② 악마는 이 사실을 세상에다 알리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보라고 그리스도에게 요구했다. 

사실상 악마는 JC가 Q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입증된 곳은 "어두컴컴한 한 구석"에서였고, 요한의 세례를 받던 평민들 속에서 되어진 일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성전 꼭대기에서," 즉 성전 예배에 참례하는 높은 자들 중에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이제 증거 한다면, 그리고 그 증거로 거기서 뛰어내리고도 다치지 않게 된다면, 그리스도는 즉각 모든 사람들에게 하늘로부터 온 사신임이 인정되어지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이생의 자랑이다!!]

이처럼 사탄은 그리스도 자신의 궁리를 통해 스스로 영예롭게 만들고(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준 방법을 모독하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자신을 드러내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요한의 세례를 받고 회개여 JC에게 귀의한 자들에게 더욱 모습을 드러내어 이땅의 하나님나라인 복음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계획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리는 제사장들에게보다는 그 회개자들에게 더 잘 수용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③ 아마 악마는 자기가 그리스도를 넘어뜨릴 수 없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피해는 끼칠 수 있으리라고 다소 희망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가 스스로 자신의 몸을 던져 버린다면, 그 추락은 그의 죽음이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악마는 보기 좋게 그리스도를 이탈시킨 셈이 된다.

(2) 악마는 이 시험을 더욱 후원하고 강화시켰다. 

"기록된바....."라고 제안을 했다(10절). 그리스도가 성서를 인용하여 악마를 대항했다. 그리고 악마는 그리스도와 대등하게 되고자 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처럼 역시 성서를 인용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려 했다. 

성서를 왜곡시키고, 성스런 저작들을 최악의 일로 이용해 먹는 것은 이단자들이나 유혹자들에게는 통상적으로 있어 왔던 일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하나님)가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를 명할"것이요, 그래서 "그들이 손으로 받들어 주리라." 

이제 그리스도는 성전의 첨탑에 올라가 있다. 따라서 천사들의 그러한 수종을 기대하기에는 안성마춤이었으리라. 

그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성전"은 그가 들어가 있기에 적합한 장소이기 때문이다(2:46). 

그리고 태양 아래 있는 모든 장소가 끊임없이 천사들의 수호를 받고 있다 할진대, 성전은 반드시 천사의 감시하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시 68:17). 

하나님은 천사들의 보호를 약속하시사, 우리로 하나님을 믿고 시험하지 말 용기를 주셨다.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는 한은 천사들의 수종도 함께 약속된다. 그러나 그 이상일 수는 없다. 

"네가 네 길이 있는 땅에 다닐 때에는 그들이 너를 지킬 것이다. 그러나 네가 공중을 나르겠다는 망상은 하지 않을 때에 한해서이다." [[오직 말씀과 HS을 따르라, 자의적인 순교의 유혹에 결코 넘어가지 않도록 하라!!]]

(3) 악마는 이 시험에서 어떻게 패배당했는가?(12절) 

그리스도는 신명기 6장 16절을 인용했다. 거기에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즉 하나님은 이미 충분히 주었는데도, 하나님의 계시의 증거가 될 표적을 구하는 시험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런 시험을 했다. 

즉 그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했다." 그 때 그들을 하나님이 "바위에서 물을 내 주셨도다." "그러나 고기까지 줄 수야 있겠는가?"라고 말했던 것이다.

여기서의 그리스도도 만일 "하나님은 실로 내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약속을 주시고, 성령을 보내 주셨다. 성령은 더 큰 자이다. 그러나 그가 이제 나를 위해 자기 천사들을 명할 수도 있겠는가? 이들은 더 작은 자들이다"라고 했더라면, 죄를 짓는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Ⅲ. 이 투쟁의 결과와 문제점은 무엇이었는가?(13절) 

승리를 거둔 우리 구주는 자기의 터전을 지켰고, 정복자(우리 조상을 정복한 자 - 악마를 이름. 역주)를 격퇴시켰다. 

그 자신에게서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서도 격퇴시켰다.

1. 악마는 자기의 화살통을 다 비워 버렸다. 

그리스도는 악마가 자기에게 도전하여 말로나 행동으로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하도록 기회를 주었다. 

악마에게 온갖 발악을 다 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악마는 패배 당했다. 

그리스도는 시험받으심으로써 모든 시험이 종식되기까지 수단을 받으셨는가? 

또한 우리도 우리에게 할당된 "유혹(시험)의 시간"이 지나가기까지 말씀과 HS안에서 우리들의 온갖 시련을 이길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져서는 안 되겠는가?

2. 그러나 그는 전투를 중지했다. 악마가 "그를 떠나갔다"고 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공격한다는 일이 소득 없는 짓임을 알았다. 그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맹렬한 창을 던졌지만, "그에게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다. 

그리스도에게는 눈먼 곳이나 어디 한 곳 허점이 없었다. 그러므로 결국 사탄은 그 사건을 포기하고 말았다. 

우리가 악마를 대항하면 악마가 우리를 떠나 달아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약 4:7 참조).

3. 그러나 악마는 계속 그리스도에게 대한 적의를 가지고 있었고, 다시 공격하리란 결의를 품고 떠났다. 

악마도 단지 "얼마 동안" ‘아크리 카이루’ 즉 한동안까지만 떠났다. 

즉 다시금 해방되어 그에게 도전할 수 있는 시기가 올 때지만 떠난 것이요, 그 때는 "유혹자"(시험하는 자)로서가 아니다. 

유혹자는 그를 "죄짓도록" 이끈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치려한다. 그것이 악마가 지금 목적하고 있는 바요, 완전히 패하고 만 지점이다. 

그 때에는 "박해자"로서 등장하여 유다와 그 밖의 다른 악의 도구들 - 이들은 악마가 부리는 자들이다 -을 통하여 그를 "고난받도록" 만들고, "그의 발뒤꿈치가 상하도록" 만든다. 이것이 이미 옛날에 악마에게 허락된 일(창 3:5)이다. 그러나 그 사건이 물론 "그(악마) 자신의 머리"를 깨뜨리는 사건이 된다. 

악마가 "지금은 떠났다." 그리스도께서 "흑암의 권세"를 부르는 시간이 오면(22:53), 그 때는 다시 이 세상 임금이 "오리라"(요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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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회당 안의 예수(눅 4:14-30)

그리스도는 악령을 쳐부수고 난 뒤, 성령의 강한 힘과 능력을 힘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악마의 고발을 스스로 방어하신 그는 이제 공세적 "행동을" 개시하여, 말씀 전파와 기적을 통해서 악마에게 공격을 가한다. 

그것은 악마가 저항하거나 격퇴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다음을 관찰해 보자.

Ⅰ. 그의 전파에 대한 일반적 서술과 "갈릴리에서" 접하게 된 사건 - 갈릴리는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이다 - 에 대해 살피자. 

그리스도가 거기에서 자기의 사역을 개시했다는 것은 그의 겸비의 일례이다.

1. 그러나 그는 "성령의 권능으로"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그의 예언자적 직능의 시행을 위한 자질을 갖추어 주었던 바로 그 성령이 다시금 그를 그곳으로 강하게 인도해 갔다. 

그는 사람들이 불러주도록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 안에 빛과 생명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2. 거기에 간 그는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즉 공중 예배당이었다. 

거기서는 그들이 성전에서처럼 의식적 예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경건적인 도덕 행위, 즉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응용하며, 기도와 찬송을 드리며, 교인 훈련을 받기 위해 모였다. 

바벨론 유배 사건 이후로는 이런 일이 더욱 잦았다. 그때에는 의식을 갖춘 예배가 거의 사라져 버린 때였던 것이다.

3. 그는 마치 위대한 명성을 지니고 있는 자처럼 가르쳤다. 

"그에 대한 소문(명성)이 사방에 퍼졌다"(14절). 그리고 그것은 좋은 소문이었다. 그는 "뭇 사람에게서 칭송을 받았다"(15절). 

모두가 그를 경모했고 환성으로 영접했다. 그들은 생전에 그런 설교를 들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우선 그는 아무런 멸시나 반대에 부딪치지 않았다. 모두가 그를 "칭송했다." 그리고 아직은 그를 헐뜯는 자들이 없었다.

Ⅱ. 나사렛, 곧 그가 자라난 마음에서 전파한 일에 대해서 보자. 

그는 거기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 그리고 그가 거기서 어떻게 "전파하셨고," 어떻게 "박해"를 받았는지를 알게 된다.

1. 그는 거기서 전파했다. 그 점에 대해서 살펴보자.

(1) 기회를 어떻게 잡았는가? 

"그는" 다른 지역에서 명성을 얻고 난 연후에 "나사렛으로 갔다." 

그러므로 동향인들이 가할 경멸이나 편견이 최소한으로 줄어들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갔다. 거기서 그를 기회를 잡아 전파했다.

① "회당" 곧 적절한 장소에서 전파했다. 

그가 사적 인물로 있을 때 늘 참례하는 것을 "자기의 규례(관습)로" 삼던 바로 그곳이다(16절). 

우리는 기회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중 예배에 참례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이제 자기의 공적 직무를 띠고 거기서 전파했다. 거기에는 많은 고기들이 있었다. 이 지혜로운 어부는 자기의 그물을 거기에 던졌다.

② 안식일, 곧 경건심이 있는 유대인들이 세상 노동을 떠난 단순한 의식적 휴식으로가 아니라, 하나님 예배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시간을 보내는 아주 적절한 시기에 전파했다. 마치 그들이 옛적에 "월삭"과 "안식일"에 예언자 학교에 모이곤 했던 습관과 같은 것이었다.

안식일에 엄숙한 집회를 열어 지키는 것은 좋은 일임을 기억하라.

(2) 그는 그곳을 방문했다.

① 그는 성경 말씀을 "읽으려고 섰다." 

그들의 회당에는 매 안식일마다 7명의 낭독자가 있었다. 첫째는 제사장이요, 둘째는 레위인이요, 다른 다섯은 그 회당에 소속된 일반 이스라엘인이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끔씩 다른 회당에서도 말씀을 "전파"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자기가 소속되어 있던 나사렛 회당을 제외하고는 "성경을 읽었다"는 기사를 보지 못한다.

이제 그는 아마 종종 해 오던 대로 자기의 직무를 거행했다. 그는 예언서 중에서 한 과를 읽었다(행 13:15).

경건한 집회에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매우 합당한 일임을 명심하자. 

그리고 그리스도 자신도 자기가 그런 일에 부려지는 것을 위신 손상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하자.

② 회당 지도자나 20절에 언급되어 있는 그 사역자가 "이사야서를 그에게 주었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 있어서는 아무런 방해자도 없었고 당연한 인정을 받았다. 그날 읽을 성경의 제2과는 이사야서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사야서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3) 그는 그 본문을 설교했다. 

그는 "읽으려고 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일"을 존중하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에스라가 율법서를 폈을 때, "모든 사람이 일어섰다"(느 8:5). 이제 그리스도도 예언서를 읽으려 할 때 그렇게 하신 것이다.

이제 그 책이 "그에게 건네"지자,

① 그는 그것을 "폈다"(열었다). 

구약 성서는 어느 의미에서 보면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것을 열기까지는, 줄곧 "닫혀"있는 것이다(사 29:11). 

"그 책을 받아 봉인을 떼기에" 합당한 자는 "죽임당한 여린 양"이었다. 

그는 그 책을 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② 그는 차례를 따라 "그 날"에 읽기로 지정된 곳을 "찾았다." 

물론 그가 그 차례를 지켜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즉시 그곳을 찾아서 읽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자기의 본문으로 취했다. 그리하여 그의 본문은 이사야 61장 1, 2절에서 취한 것이 되었다. 그 본문은 여기에 자세히 인용되어 있다(18, 19절).

그 날에 그 본문이 읽을 순서가 된 데에는, 섭리의 역사가 있었다. 

그 부분은 아주 분명히 메시야를 말해 주고 있었고, 더욱이 메시야를 증거해 주는 성경을 "매 안식일마다" 읽는 "예언자들의 음성"을 듣고도(행 13:27) "그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용서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시사해 주는 곳이었다. 

그 본문은 그리스도의 과업을 충실히 설명해 주고 있고, 또한 그가 세상에 와서 할 일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이런 사실을 주목하자.

첫째, 그는 그 일을 위한 자격을 어떻게 구비했는가? 

그것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했다"는 것이었다. 

성령의 온갖 은사와 은총이 그에게 부여되었는데, 다른 예언자들에게서처럼 한도껏 부여된 것이 아니라 무한히 부여된 것이다(요 3:34). 

이제 그는 "성령의 권능으로" 들어갔다(14절).

둘째, 그는 어떻게 위임받았는가? 

"그가 내게 기름 부으시고,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의 비상한 자격이 위임장이 되었다. 

그가 "기름부음 받았다"는 것은 그가 그 일을 수행하기에 적합할뿐더러 그 일에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을 무슨 일로 "지정하시면," 그 일을 위해 그는 그들에게 "기름 부으신다." 

"그가 나를 보내셨으므로, 그는 또한 성령을 보내시사 나와 동행케 하셨다."

셋째, 그의 과업은 무엇인가 ! 그가 자격을 갖추고 위임을 받은 것은,

1. 위대한 "예언자"가 되기 위해서이다. 

그는 "전파하기 위해서 기름부음 받았다." 그것이 3번이나 여기에 언급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이제 개시한 일이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그는 누구에게 전파했는가? "가난한 자들"에게이다. 

즉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에게이다. 유대 학자들은 그들을 경멸하고, 그들을 가르치는 일을 거절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이다. 죄로 인하여 참으로 애통하는 자들에게 온유하고 겸손한 자들에게이다. 

그들에게 복음과 그 은총이 영접될 것이요, 그들은 그것을 받으리라(마 11:5).

(2) "무엇을" "전파"했는가? 

한 마디로 하면 "복음"을 전파했다. 그는 ‘유앙겔리사스다이(2097)’ ─즉 복음화하기 위해서 보냄 받았다. 

그들에게 전파할 뿐만 아니라, 그 전파가 효력을 내게 하기 위해서 왔다. 

복음을 그들의 귀에만이 아니라 마음에다가도 전하여, 그들이 복음으로 재주형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세 가지를 전파했다.

① "포로된 자들에게 해방"이다. 

복음은 애굽이나 바벨론에 있던 이스라엘에게처럼 자유의 선포이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죄인들은 죄책의 속박에서 해방되고, 그의 성령과 은총에 의해서 부패의 굴레에서 해방된다. 

그것이야말로 죄악의 굴레에서의 해방이다. 

그 해방은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머리로 삼고자 하며 기꺼이 그의 지배를 받으려는 모든 사람이 향유할 수 있다.

② "눈먼 자들에게 시력의 회복"이다. 

그는 복음의 말씀으로 "암흑에" 앉은 자들에게 "빛"을 주기 위해서 왔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은총의 권능으로 "눈먼" 자들에게는 시력을 주기 위해서 왔다. 

이방인들은 물론이요 중생하지 못한 모든 자들은 삼손이나 시드기야 처럼 "속박"을 받고 있는 자일 뿐만 아니라 "눈먼" 자들이다. 

그는 자기가 우리들에게 "안약"이 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러 왔다. 그 약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약이다. 

"주여, 우리의 눈을 뜨게 하옵소서"라는 것이 우리의 기도라면, 그의 응답은 "너의 시력을 받으라"하는 것이 될 것이다.

③ "주의 은혜의 해"의 선포이다(19절). 

그는 사람들이 거역하고 있던 그 Q이 그들과 화해하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새로운 조건으로 그들을 "용납"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려 주려고 왔다. 

또한 아직도 그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수락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리려 왔다. 지금이야말로 "사람들에게는 자비"의 때이다.

이 구절은 "면제(석방)"년(年)을 비유한 것이거나 "희년"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 해는 종들에게는 "은혜의(용납될 수 있는)해였다. 그 때가 되면 그들은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었다. 

빚진 자들에게 대한 모든 가혹한 행위도 모두 중지된다. 땅을 저당 잡혔던 자들은 땅을 다시 돌려 받게 된다.

그리스도는 "희년의" 나팔을 불려고 왔다. 그리고 "그 즐거운 소리"를 듣는 자들에게는 축복이 있다(시 89:15). 

그 때는 은혜의 때이다. 구원의 날이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는 위대한 "의원"이 되려고 왔다. 

"상한 심령을 고치고," 위로하며, 고통 받는 양심을 어루만져 주고, 죄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겸비해진 자들에게 평화를 주며, 죄로 인하여 닥칠 하나님이 진노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평안을 주며, 죄책과 부패의 짐으로 고심하며, 지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안식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 왔다.

3. 위대한 "구속자(救贖者)"가 되기 위해 왔다. 

고레스왕이 포로 된 바벨론의 유대인들에게 했듯이, 그리스도는 포로 된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할 뿐만 아니라(그는 "누구든 원하는 자는" 고향 이스라엘로 "올라가도 좋다"고 선언했다), 상처 입은 자들에게 자유를 준다. 

그는 그의 영에 의해서 마음을 "움직이시고" 주어진 자유를 사용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다." 

이것은 옛날처럼 "하나님의 감동을" 받지 않은 자들에게는 불가능하다(스 1:5).

그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빚진 자요 죄수들인 가난한(불상한) 죄인들을 해방시키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왔다. 

예언자들은 자유를 선포할 수 있을 뿐이지만, 권위 있는 자로서, 또 "죄를 용서해 주는 지상의 권능을" 가진 자로서 그는 "자유케 하려고" 왔다. 

그러므로 이 구절이 여기에 부가되어 있는 것이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이 사실을 이렇게 생각한다. 유대인들이 성경 낭독자들에게 허용한 자유에 따르면, 성경을 읽는 중에 성경과 성경을 비교하고, 그 본문을 해설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도 이사야 58장 6절에다 이런 것을 추가했다. 이사야서에 보면, "억눌린 자를 자유롭게 가게 하라"는 것이 은혜의 해에 해야 할 의무로 되어 있고, 이 구절은 칠십인역이 사용한 구절과 꼭 같은 것이다.)

(4) 그리스도가 이 본문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킨 사례가 나와 있다(21절). 

그는 말씀을 읽은 다음, "책을 말았다(덮었다)." 그리고는 그 일을 맡은 "사역자" 즉 "서기"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앉았다". 이것은 유대 교사들의 관습을 따른 것이다. 그는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다"(마 26:55).

이제 이렇게 그의 설교를 "시작했다."

"오늘 이 성경이 당신들의 귀에서 이루어졌다. 이것, 곧 이사야가 예언의 방식으로 기록했고, 이제 역사의 방식으로 너희에게 읽어 준 바이니라." 

그것이 이제 그리스도의 공적 사역이 시작됨으로써 실현되기 시작된 것이다. 

"이제." 그들이 다른 지역에서 그가 베푼 그의 설교와 기적에 관해 들은 그 보도에서 이루어졌다. 

"이제," 바로 그들의 회당에서 그들에게 들려준 그 설교에서 이루어졌다. 

JC는 계속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데에 대한 그의 가르침 속에서 어떻게 이 성경이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을 세밀히 가르쳐 주었을 공산이 아주 크다. 

나아가 자유와 시력과 치유를 선포한 그의 전파에서, 그리고 "주의 은혜의 해"가 주는 모든 축복에서 이루어졌다고 알려 주었을 것이다.

그의 입에서는 그밖에도 다른 많은 은혜로운 말씀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것은 그 "시작"에 불과하다. 

그리스도는 종종 긴 설교를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긴 설교에 대한 간략한 기록이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

"이날 이 성경이 이루어졌느니라"는 이 말씀은 새로운 도입이 되기에 충분하다.

다음 사실들을 명심하자.

① 메시야에게서 실현되어야 할 구약 성서의 모든 말씀은 주 예수에게서 완전히 성취되었다. 

이 사실은 바로 이분이 "오실 그분"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입증해 준다.

②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성경의 실현"을 관찰해 내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하나님의 역사(役事)는 그의 은밀한 말씀의 성취일 뿐만 아니라, 계시된 그의 말씀의 성취이기도 하다. 

그리고 성경과 하나님의(이루어진)섭리를 서로 견주어 보는 것은 그 양자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 준다.

(5) 청중들의 "주목"과 "칭송"이 나와 있다.

① 그들이 "주목(注目)"했다(20절).

"회당에 있는 모든 자들의 눈(아마 그들은 대단히 많았을 것이다)이 그를 주목했다." 

그들은 최근에 그에 관해 많은 소문을 들었으므로, 그가 할 말에 큰 기대를 가지고 온 것이다. 

사역자의 말을 들으며 눈으로 주목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눈이 마음에 감동을 주듯이, 역시 마음은 눈을 따라가고, 눈에 따라서 고정되기도 하고 방황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나아가 우리도 지금부터 그 사역자를 통해서, 그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주목하는 법을 배우자. 

"내 주께서 그의 종들에게 무어라 하셨는가?"

② 그들의 "감탄"(22절)이 있다. 

"그들이 모두 그를 증거 했다." 

즉 그가 감탄할 만큼 말을 잘하고, 요령 있게 한다고 증거 했다. 

그들은 모두 그에게 칭찬을 보냈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겼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에 의하면, 그들은 "그를 믿지 않았다." [선입견을 버리지 못하였기에 단지 길가밭>돌밭상태를 초래했다!!]

훌륭한 사역자들과 훌륭한 설교를 보고 들으면서 감탄은 하나 그들 자신은 결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자.

살펴보자.

첫째, 그들이 무엇에 감탄했는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이었다. 

"은혜로운 말," 좋은 말, 인정에 넘치는 말이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은혜로운 말"이란 것을 명심하자. 

'그의 입술에" 은혜가 "부어지기" 때문에(시 45:2), 그의 입술에서 은혜의(은혜로운)말이 나온다. 

그리고 이 은혜로운 말은 "기이히 여기게"된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경이로운 것이요, 그는 그의 은혜, 그의 은혜로운 말, 그리고 그 말에 동반되는 그 권능에 있어서 경이롭다. 

그가 우리와 같이 은혜를 모르는 천한 자들에게 그가 그처럼 "은혜로운 말"을 했다는 것은 실로 기이한(경이로운)일이다.

둘째, 이 경이감을 더욱 증가시킨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그의 출생(기원)을 생각했다는 점이다.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러므로 그의 출신이나 교육이라야 하찮은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어떤 자들은 그의 "은혜로운 말"을 더욱 더 기이히 여기게 되었을 것이고, 그 사람은 필경 Q께 대해 배워야 할 자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들은 아무도 하나님을 가르칠 수가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또 어떤 자들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들이 그의 은혜로운 말에 대해 가졌던 경이감을 고쳐먹고는, "실제로는" 그 말에 아무 것도 기이할 것이 없으며, 어떻든 그는 "요셉의 아들"임에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그렇게 비천한 자에게서 어떻게 위대하고 중대한, 가치 있는 것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6) 그리스도는 자기의 청중들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을 반대를 미리 알았다.

관찰해 볼 것이 있다.

① 그 반대는 무엇인가?

"너희는 반드시 '의원아, 네 자신을 고치라'고 말할 것이다(23절).[[속칭, 니나 잘하세요!!]] 너희는 내가 요셉의 아들, 곧 너희 이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다른 지역에서 행한 것과 같이 너희에게도 기적을 행하기를 기대할 것이다. 마치 사람이 의원에게 그가 유능하다면, 자기 자신은 물론 자기 가족들과 동포들도 고쳐야 하리라고 기대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가 베푼 기적의 대다수는 "치유" 기적이다 ─ "그렇다면 왜 네 자신의 고향에서는 다른 마을에서처럼 병자들을 치료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 기적들은 사람들의 불신앙을 치료하는 것이었다─"왜 불신앙이란 병은 치료하지 않는가? 그게 정말 중대한 병이라면, 다른 마을의 불신앙처럼 네 고향인들의 불신앙도 치료해야 하지 않겠는가? 가버나움에서 행한 것으로 우리가 들은 모든 것 ─ 소문이 많이 나 있었다 ─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하라."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말"을 기뻐했다. 그것은 그들이 그의 "기이한 일"을 베푸는 서론이 될 것을 기대했기 때문일 뿐이다. 

그들은 자기들 중의 절름발이, 소경, 병자, 또 문둥이들이 치유되고 도움을 입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래야 그들의 마음의 부담이 가벼워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염두에 둔 주요 목표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은 자기 마을도 다른 마을처럼 기적의 무대가 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마을에서보다는 바로 이 마을에 그리스도가 일단의 기적을 베풀어서 안 될 일이 있는가? 

그리고 다른 어떤 마을보다도 그의 이웃들과 귀인들이 그 기적의 혜택을 받아서 안 될 일이 있겠는가?

② 그가 취한 행동에 대한 이 반대에 그는 어떻게 대처했는가?

첫째, 그는 왜 자기가 자기의 본부를 나사렛에다 정하려 하지 않는지, 그 평이하고 실증적인 이유를 들었다. 

"예언자들이 고향에서는 환영을 못 받는다"는 것, 최소한 좋은 대우도 못 받으며, 다른 마을에서처럼 효과도 없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경험은 이 진리를 확증해 주고 있다. 

예언자들이 자비의 전갈이나 기적을 가지고 고향에 파송되어 왔지만, 그들의 출신과 교육 내역을 알고 있는 고향 사람들은 극소수만이 "그것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했다. 

(*하몬드(Hammond) 박사도 그렇게 말한다. 친근성이 경멸을 낳는다. 또 우리는 우리가 늘 교제해 오던 자들을 하찮게 생각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사적 인간"으로 있을 때 잘 알려진 자들이 "예언자"가 되면 예언자의 당연한 예우를 좀처럼 받지 못한다. 실제로는 아무리 우수하더라도 "국산"보다는 "멀리서 가져온"것, "값비싼 것"이 정평을 받는다. 이것은 사람이란 그 이웃에 대해서 질투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질투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들은 언제나 자기들은 "열등한"길을 가는데 남들이 "우월한" 길을 가면 배가 아픈 법이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는 나사렛에서 기적을 행하려 하지도 않았고 어떤 비상한 일을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에게 대해 뿌리 깊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째, 구약성서 중의 가장 이름난 두 예언자들의 적절한 본을 이야기해 줌으로써 대응했다. 

그들은 자기 동포들에게보다는 외국인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쪽을 택한 자들이요, 그것도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분명코) 그러했다.

1. 엘리야는 "시돈의 한 성읍, 사렙다 과부"의 생계를 돌봐 주었다. 

그녀는 이스라엘 공동체에 대해서는 하나의 비방자였던 자이다. 그 때 "그 땅에는 기근이" 있었다(25, 26절). 

이 이야기는 열왕기 상 17장 9절 이하에 나온다. 여기에 보면, 하늘이 "3년 6개월" 동안 닫혀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열왕기상 18장에는, "엘리야가 제 3년에" 아합 왕에게 나아갔고, 그 때 그 땅에는 "비가 왔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가뭄이든지 제 3년이 아니라,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의 집에 유숙한 지 3년째 되는 해였다. 

이로써 하나님은 당신이 "그 아들의 아버지"요 "과부들의 재판장"임을 보이셨듯이, 또한 모든 사람에게, 이방인들에게도 자비를 풍성히 주시는 자임을 보이시려 했던 것이다.

2. 엘리사는 나아만이란 아람 사람의 문둥병을 고쳐 주었다. 

나아만은 아람 사람이요, 이스라엘에게는 이방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원수였던 자였다(27절). 

"엘리사의 시절에는 이스라엘에(도) 많은 문둥이가 있었다." 

특히 4 문둥이가 있었는데, 그들은 아람인들의 사마리아 포위가 철수되자 그 소식을 황급히 알린 자들이요, 아람인들의 막사에서 노획한 것들을 가지고 사마리아를 부유하게 해주었던 자들이요, 이 때 그 성읍에 엘리사 자신도 갇혀 있었던 터였다. 그리고 이것은 역시 그의 예언의 성취이기도 했었다(왕하 7:1, 3 참조). 

그러나 엘리사가 그들을 고쳐 주었다는 소식은 들을 수 없다. 즉 그들이 한 수고나 전해 준 좋은 소식에도 아무런 보답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도 이 아람 문둥이만은 고쳐 준 것이다. 신앙을 가진 자들이 아니고는 아무도 치료를 위해서 예언자를 찾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자신도 가끔씩 이스라엘인보다 더 큰 믿음을 가진 이방인들을 접하곤 했다. 

그리고 그가 여기서 그 두 사례를 언급한 것은, 자기는 어떤 사적인 이유 때문에 기적의 호의를 베풀지는 않으며, 단지 하나님의 지혜로운 지시에 따라서만 베푼다는 것을 밝히신 것이다. 

그리고 아마 나사렛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의원아, 네 자신을 고쳐라"고 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리야나 엘리사에게도 으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기 고향에서는 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인들에게 기적을 행하셨고, 반면에 이 위대한 예언자들은 이방인들에게 기적을 행하였다. 

성도들의 본이, 나쁜 행동을 좋게 만들어 주지는 못하지만, 성미 까다로운 사람들의 비난에서 떠나 자유롭게 선행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2. 그는 어떻게 나사렛에서 "핍박받았는가?"

(1) 그가 하나님은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서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 그들을 노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해졌다"(28절). 그들이 "모두" 그렇게 되었다. 이것은 22절 이후 커다란 변화이다. 

그 때는 그들이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겼었다." 

이와 같이 군중의 견해와 기호는 불확실한 것이요 변덕이 심하다. 

그들이 만일 자기들이 기이히 여긴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말에다가 신앙을 배합했더라면, 그의 나중 말씀은 그들에게 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귀만 즐겁게 하고" 더 이상 진전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 말이 "그들의 귀에 거슬리게 되었다." 그들의 부패된 본성을 자극시킨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요셉의 아들임을 알고 있는데도 그 자신을 위대한 예언자들과 비교하며, 자기들은 모든 사람들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던 저 부패한 시절의 사람들과 비교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특히 그들을 노하게 한 것은, 유대인들은 한 번도 생각지 못했는데, Q은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다소간의 자비를 베푸셨다고 그가 암시한 사실이다(행 22:21). 

그들의 신앙심 깊었던 조상들은 이방인들이 교회로 들어오게 되는 일(다윗의 시와 이사야의 예언 중에는 이에 대한 많은 증언이 있다)로 기뻐했었다. 

이 타락한 인간들은, 자기들이 그 계약을 상실해 버린 지금에 와서, 다른 사람들이 그 계약에 들어서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까지도 증오하고 있는 것이다.

(2) 그들은 당장 그리스도를 죽일 기도를 할만큼 심히 화가 났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활동 벽두에 당한 가혹한 시련이었고, 그가 "자기 백성에게 왔을"때 통상 접대 받는 일의 한 전조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① 그들은 그에게 대한 소란을 일으키고 "일어나서," 그의 설교를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예배까지 망쳐놓았다. 

그들은 그 회당 예배가 마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던 때문이다.

② 그들은 "그를 마을 밖으로 쫓아내었다." 

그는 그토록 오랜 기간을 그곳에 정착하고 살았었지만, 이제 와서는 자기들과 함께 거주할 자격이 없는 존재라고 여긴 때문이다. 

마치 그가 만물의 찌꺼기밖에 안 되는 양, 그들은 구주와 또 구원 자체를 자기들에게서 쫓아내고 만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다가 그들을 죽여버렸더라면 얼마나 마땅했으랴 ! 그러나 이 날은 그의 인내의 시간이었다.

③ 그들은 "그들 낭떠러지로 끌고 갔다." 그것은 "그를 밀쳐 내리치고자" 함이었다. 마치 살려 두기에 부적합한 자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가 오랫동안 자기들과 같이 살 때 이미 아무런 해로운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의 생활이 얼마나 빛나는 생활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으며 - 또 그들은 그에 대한 많은 소문은 들어왔었고, 지금은 자기들도 "그의 은혜로운 말을 감탄하고" 있었지만 - 또 그는 정당하게 자기를 해명하고 이야기할 여유를 허락 받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민중 봉기 또는 차라리 광란에 빠져서 그를 급히 쫓아내고, 지극히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려 든 것이다. 

때때로 그들은 그가 한 "선행"(요 10:22) 때문에 돌로 쳐 죽이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들이 그에게서 선행을 실행하는 모습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이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악한 자들의 종국에는 폭력이 돋아나게 마련이다.

(3) 그러나 그는 도망했다. 아직은 그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저희 가운데로"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고 "지나갔다." 

하나님께서 소돔인들이나 아람인들의 눈을 멀게 하였듯이, 그가 그들의 눈을 멀게 했든지, 아니면 그들의 손을 묶어 두었거나 혼란을 일으켜, 자기들이 뭘 계획하고 있었는지를 모르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제 막 시작된 그의 사업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그의 때가 오지 않았다. 그 때가 오면 그는 아낌없이 자기를 포기할 것이다.

그들은 그를 자기들에게서 "몰아내었고," 그는 "자기의 길을 갔다." 그는 나사렛 사람들을 모으고 싶었으나, 그들이 "원치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집은 "황폐하게 버려지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나사렛 예수임이 하나의 치욕거리임을 말해 주기 위해 부가된 기사이다. 즉 나사렛이란 아무런 선한 것도 기대할 수 없는 곳이요, 또한 아주 악하고 거치른 곳이며 그에게 "불친절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가 나사렛 사람들의 존경을 크게 받지 못한 사실 속에는 섭리가 깃들어 있어. 그들이 그를 존경한다는 것은 그와 그의 옛 친지들의 공모 사건으로 보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그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지만," 그를 영접하는 사람들도 세상에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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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를 쫓아내는 예수(눅 4:31-44)

그리스도는 나사렛에서 추방되자, 갈릴리의 다른 한 마을 가버나움으로 갔다. 

우리가 이 대목에서 보는 그의 설교와 기적에 대한 기사는 앞에서 이미 본 것이다(막 1:21 이하).

Ⅰ. 그의 설교를 살펴보자. "그가 안식일에 그들을 가르치셨다"고 했다(31절). 

하나님의 한 규례인, 선포되는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리고 그 일이야말로 "안식일"에 적합한 일이다. 

그리스도의 설교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다(32절). 그들이 "그의 가르치심(doctrine)에 놀랐다." 

그가 하는 모든 말에는 무게가 있었고, 그것을 통해서 듣는 자들에게 놀라운 발견이 있게 된 것이다. 그 가르침 자체가 놀라운 것이었다. 

그 가르침이 어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지도 못한 자에게서 나와서 놀라운 것만은 아니다. "그의 말씀에 권능이 있었다." 

그 말씀 속에는 강력한 호소력이 있었고, 살아 있는 권능이 그 말씀과 동반되어 사람의 의식에 와 닿았다. 

그러므로 "성령과 권능의 증거로" 한 바울의 가르침도 그 자체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스스로 입증해 준다.

Ⅱ. 그의 기적을 살펴보자.

1. 특히 두 가지의 구체적 기적을 살펴보자. 그 기적들은 그리스도가

(1) 인간 세계에서와 사람의 영혼의 세계에 있어서, "사탄의 통제자"요 "정복자"임을 보여 준다. 

그는 자기의 권능으로 사탄이 점령하고 있는 그 사람의 몸에서 사탄을 추방시켰다. "그는 악마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이다.

관찰해 볼 것이 있다.

① 악마는 "더러운 귀신(영)"이다. 

그의 본성은 직접 순결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영과 대립되며, 최초의 상태에서 타락해 버린 것이다.

② 이 부정한 영은 사람들 속에서 활동한다. 

그 때에는 사람들의 몸 속에서 활동했듯이, 역시 사람들의 영혼(soul) 속에서도 활동한다.

③ 사탄의 권능과 역사(役事)에 크게 짓눌려 있는 자들도 "회당에" 갈 수 있고, 하나님 예배에 참예 할 수 있다.

④ 악마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요, "거룩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믿는다."

⑤ 그들은 믿고 "떤다," 더러운 영은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기"(히 10:27) 때문이요, 그리스도께서 이제 자기를 멸하러 오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정한 영들은 끊임없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⑥ 악마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다." 

또 상관 있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리스도는 천사들의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⑦ 그리스도는 그 악마를 제재했다. 

"그는 꾸짖어" 가로되 "잠잠하라"고 했다. 이 말씀은 "권능이 있는" 말이었다. ‘피모데티(5392) ─ "재갈을 물렸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악마에게 침묵을 명했을 뿐만 아니라,그의 입을 닫아버렸고, 자기의 듯으로는 떠들고 싶어도 떠들지 못하도록 만드셨다.

⑧ 사탄의 권세를 꺾으심으로써, 정복된 그 대적은 자기의 악의를 드러내었고, 정복자 그리스도는 은혜가 넘치는 사랑을 보이셨다. 여기서

첫째, 악마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공개했다. 

그 때 악마는 마치 그 사람을 가루로 만들어 버릴 듯이, 맹렬한 분노로 "그 사람을 무리 중에서 넘어뜨렸다." 그러나

둘째, 그리스도는 자기가 악마를 떠나게 함과 동시에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이별의 타격과 고통도 주지 않은 채 고이 떠나게 함으로써, 악마를 다스리는 권능을 가지고 계심을 보이셨다. 

사탄은 자기가 "멸할" 수 없는 자들에게는 할 수 있는 한 "상처"를 주려 한다. 

그러나 그도 그리스도가 허락한 한도 이상으로 피해를 끼칠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위안이 된다. 

아니, 악마가 사람들에게 어떤 실제적인 피해를 끼치지는 못하리라. 그는 "나왔다." 그리고 "그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 즉 악마가 그 가엾은 사람을 얼마나 심하게 쓰러뜨렸든지, 사람들은 그가 박살나는 줄로 알았으나, 그 사람은 순간적으로 완전히 건강해졌다.

⑨ 악마를 제어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널리 인정되고 경모를 받았다(36절). 

아무도 이 기적의 진실성을 의심치 않았다. 그것은 논란의 여지없이 명백했고, 그 영광을 감소시킬 만한 제안도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놀라서, '이 어떠한 말씀인고 !' 하더라" 고 했기 때문이다. 

거짓으로 악마를 쫓아내는 듯이 가장하는 자들은 악마를 달래는, 많은 주술이나 주문으로 그런 일을 했다. 그래서 말하자면 잠시 그를 잠들게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권위와 권능으로" 악마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 권위와 권능이야말로 그들이 방해하거나 저항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공증의 권능을 잡은 임금"도 그리스도의 종이요, 그 앞에서 두려워 떨게 된다.

⑩ 이 사건도 다른 사건들처럼 그리스도에게 명성을 주었다. 그래서 그의 소문이 사방으로 퍼졌다. 

오늘날은 많은 사람들이 경홀히 여기지만 이러한 그의 권능을 당시의 그들은 자기들의 눈으로 목격했고(그리고 그들은 바보들도 아니었거니와 비상한 투시력을 가진 자들도 아니었다), 그리고는 찬양했으며, 그 사건은 그리스도를 지극히 영예롭게 하는 것으로 여겼다(37절). 

이 사건으로 인해서 "예수의 소문이" 전보다 더 멀리 "퍼져 나갔다." 즉 "그 근처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공무에 처음으로 들어섰던 사람들은 그를 많이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나중에는 신기한 사물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감탄이 메말라 버리게 되었다.

(2)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이 "병 고쳐주는 자"임을 드러내셨다. 

앞에서는 인간의 비극의 뿌리, 마귀에게 공격을 가했다. 그 뿌리는 사탄의 적개심이요, 그것이 모든 불행의 근원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나무의 가장 무성한 가지들, 인생에 지극히 흔한 참상─ 그것은 육체의 질병이다─을 공격하신다. 

그러한 질병은 죄와 더불어 사람에게 들어온 것이요,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그 죄 때문에 당하는 가장 일반적이요 구체적인 징벌이며, 그것은 많지도 않은 우리의 날을 "근심으로 가득 차게" 하는 구실을 한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는 그러한 질병의 자리를 제거해 버리기 위해 오셨고, 그 의도를 말해 주는 사건으로서 그가 지상에 오셨을 때 이와 같은 기적을 통해서 자기의 교리를 확증하는 방식을 택했으며, 그 기적이란 다름 아니라 질병 그 자체까지도 제거해 버리는 기적이었다.

몸의 모든 질병 중에서도 "열병" 이상으로 어른들에게 흔하고도 치명적인 것은 없다. 그 병은 갑자기 와서, 갑자기 사람들의 생애를 잘라버린다. 

즉 그 병은 때때로 "유행하여," 순식간에 "수 천 명을 죽인다."

이제그리스도가 말씀 한 마디로 열병을 치료한 사실을 보게 된다. 장소는 시몬의 집이요, 그 환자는 시몬의 장모였다(38, 39절).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① 그리스도는 그를 환대하는 자들에게 훌륭한 대가를 지불해 주는 손님이다.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마음과 집으로 영접하려는 자들은 그것 때문에 아무런 손해도보지 않는다. 그는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오시기 때문이다.

② 그리스도께서 방문하신 가정에도 질병이 방문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특별한(구별되는) 은혜를 축복 받는 집안"에도 현생의 인간이 부닥치는 "공동 재난"이 닥칠 수 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을 앓고" 있었다. "주여, 보소서. 당신이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③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때로는 남들보다 더 가혹한 고통에 시달릴 수 있다. 

그의 장모는 "중한 열병에 붙들렸다." 

즉 아주 고통이 심하고 열이 높으며 무서운 열병에 걸렸다. 아마 열병이 머리를 덮쳐서, 정신착난에 빠졌었을 것이다.

④ 나이가 많다고 질병에서 면제되지는 못한다. 

아마 베드로의 장모는 "나이가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열병"에 걸렸다.

⑤ 우리의 친척들이 아플 때는, 그 때마다 우리는 신앙과 기도로써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야 한다.

"그들은 그녀를 위해 그리스도께 구했다." 또한 신앙의 기도는 병을 물리치리라는 특정한 약속이 주어져 있다.

⑥ 그리스도는 자기의 백성들이 병들어 고생하고 있을 때에, 그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일어나 그녀에게로 갔다." 그는 그녀에게 관심이 많았고, 그녀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⑦ 그리스도께는 육체의 질병을 통어하는 절대권을 지니고 계셨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가 질병을 꾸짖으셨다." 한 마디 말씀으로써 질병에게 나가라고 명했고, 그러자 "그것은 그녀를 떠났다." 

그리스도는 질병을 보고서, "가라"고 말씀하셨고, 그러자 병은 갔다. "오라"하면 온다. 그리고 그는 아무리 큰 열병에게라도 지금도 "꾸짖을" 수 있다.

⑧ 즉각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치유가 기적임을 입증했다. 

"즉시 그녀가 일어났다"고 했다.

⑨ 그리스도께서 병에서 회복시켜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곳에는, 그가 그 생명이 참으로 새로운 생명이 되어서, 이전보다도 그의 사업과 그의 영광을 위해 그 삶을 쓰게 되기를 원하시고 기대하신다. 질병이 꾸짖음을 당하고, 우리가 참상에서 일어나게 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의 삶을 시작해야 하는 법이다.

⑩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인하여 그리스도의 것이 된 모든 자들을 받들어 섬길 준비도 또한 갖추어야 한다. 

그녀는 "그들에게 수종들었다." 즉 자기를 고쳐 준 "그분"에게만이 아니라 "그녀를 위해 그에게 구했던" 그들에게도 수종들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기도해 준 자들에게 고마움을 표할 길을 모색해야 한다.

2. 그리스도께서 행한, 그와 같은 종류의 다른 많은 기적들을 일괄해서 말한 기사가 나와 있다.

(1) 그는 "많은 병든 자들을 고쳐 주셨다." 

즉 그에게 자기 자신들을 내맡긴 모든 자들을 예외 없이 모두 고쳐 주셨다. "그리고 그때에" 해가 지고 있었다.(40절). 

그 날, 안식일 저녁에는 회당에서 시간을 보냈다. 

안식일 전체를 통해서 해야 할 일을 하며, 해질 때까지라도 이런 저런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래서 안식일과 그 날의 업무를 "즐거움"이라 부르는 자들처럼 하는게 좋다.

그리스도는 "병든 모든 자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고쳐 주셨다. 또 그들이 "각색 병"을 앓고 있었지만 모두 고쳐 주셨다. 

따라서 그를 어떤 한 가지 병만을 고치는 전문의로 여길 여지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그에게는 모든 질병을 고치는 약이 있다.

그가 병 고칠 때 쓴 표적이란 "자기 손"을 병자에게 "놓는 것"이었다. 

그들을 위해서 손을 쳐든 것이 아니다. 그는 권위를 가진 자처럼 고쳤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권능으로 치유했다. 

그리고 그는 그 후 성령을 부여하기 위해서 사용할 때 쓰는 그 표적을 영예롭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2) 그는 또한 악마 들린 많은 자들을 고쳐 주셨다(41절). 

마귀들에게서 고백이 터져 나왔다. 마귀들은, "당신(주)은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나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 말은 격노와 분함에 못 이겨 "소리친" 것이었다. 그것은 고문으로 나온 고백이었다. 따라서 신빙할 수 없는 고백이었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고는 "저희들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가 그리스도신 줄을 앎이더라." 

즉 그가 그들을 정복해 버렸으며, 아무런 협약도 맺지 않았음이 논의의 여지없이 밝히 드러나게 생긴 것이다.

3. 그는 가버나움을 떠나신다(42, 43절)

(1) 그는 잠시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셨다." 그가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은 잠시간 뿐이었다. 

그것은 "작은 것이 그를 섬겼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는 "작은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코 안일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한적한 곳으로 가신" 것은 "낮이었다." 그것은 계속하여 은둔 생활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때때로 "하나님과 더불어만" 있기 위해서였다. 

공무에 무척 바쁜 사람들도 그런 시간을 가져야 하며, 또 그러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일은 볼품없이 되고 말며, 그들 자신도 "그렇게 외로이" 있는 때가 아니면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2) 그는 다시금 "집합" 장소로 "돌아갔다." 

그것은 거기서 자기의 할 일을 하기 위해서이다. "한적한 곳"이 "은거"하기에는 편리하겠지만, "유숙하기에 편리한 곳"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려고" 이 세상에 보냄 받은 것이 아니며, 더욱이 우리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만도 아니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 세대를 위해 선을 행하려고 보냄 받은 것이다.

① 그에게 가버나움에 머물러 달라는 간청이 들어왔다.

" 그 무리"는 예수를 지극히 좋아했다. 그것은 분명코 그가 그들에게 회개의 설교를 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의 병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그를 찾았다." 어디로 갔는지 물었다. 그가 간 곳이 "한적한(황량한) 곳"이었지만, 그들은 "그에게로 가서 만났다." 

한적한 곳이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있으면 한적하지 않다. 그들은 "그가 자기들에게서 떠나지 말라고 만류했다". 

따라서 그가 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초대를 받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옛부터 알고 있던 나사렛의 이웃들은 그를 쫓아내었다. 그러나 새로 안 이 친구들은 자기들에게 머물러 달라고 열성이었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자기들을 쫓아내는 자들이 있다고 하여 낙심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기들과 자기들의 설교로 맞아들이는 자들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복음의 빛을 어느 한 곳에 고착시키는 것이 아니라, "퍼지게" 하는 쪽을 택했다. 

따라서 아무도 자기들이 다른 교회에 비해 "모(母)교회"라고 자칭할 수 없게 한 것이다. 

그가 가버나움에서 환영을 받았고, 또 거기서 많은 선을 베풀었지만, 그는 "다른 마을에서도 역시 복음을 전파하도록 보내심을 받았다." 

가버나움은 그의 체류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 

복음의 혜택을 맛보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도 그 은혜를 누리게 되기를 기뻐해야 하며, 결코 "독점"을 꿈꾸어서는 안 된다. 

또 한 장소에서 "쫓겨나지" 않은 사역자들이라도 더 큰 쓰임을 생각하고 다른 지역으로 "쫓겨날" 수도 있다.

그리스도가 가버나움 회당에서 헛되이 전파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거기에 머무르려 하지 않고, "갈릴리의 여러 회당에서 전파했다"(44절). 

즉 선한 것은 저절로 퍼져나간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어느 한 장소나 사람에게 매이지 않고, 그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나 그들과 함께 계시는데, 그 사실이야말로 우리에게는 축복이다. 그리스도교의회당에서처럼 "이방인의 갈릴리"에서도 그의 특수한 임재가 같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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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마==
누가복음 4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ㅇ예수께서...성령에게 이끌리시며 - 이 구절은 3:22에 연결된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이 구절은 구약성경과 연결하여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제시해 준다. 
예수는 '40일 동안 광야'에 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랑(wander)했던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모세가 산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40일간 있었던 사실을 생각나게 한다(신 9:9).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호 11:1)로 비유한다면 즉,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집단적 개념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인적 또는 단일적 개념으로 받아들였을 때 그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셨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예수를 광야로 인도했다. 전자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시험하셨으나 여기서는 사단이 그의 아들을 시험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시험을 받았을 때 실패하고 말았지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는 그 시험을 이기셨다. 그 이후로도 이스라엘은 수많은 시험 가운데서 거의 매번 시험에 져 엄청난 죄악들을 범했지만 예수는 광야에서의 몇차례의 시험 뿐만 아니라 공생애 기간 내내 많은 시험들을 당하셨지만 그 모든 시험에서 승리하셨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출생, 똑같은 유년기, 똑같은 청년기, 장년기를 거치면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다(히 4:15). 바로 이런 흠없고 순전(純全)한 어린 양 같은 예수께서 온갖 시험을 이기시면서 우리 인류의 죄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신 것이다. 
한편 누가가 성령의 사역과 활동을 강조하는 것은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구절에서도 그 사실이 명확해진다. 3:22에서 성령이 예수께 강림하시고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 앞에 공식적(公式的)으로 모습을 드러내 메시야적 사역을 시작하신 것을 언급했다. 여기서 우리는 세세하게 언급하지 않았다하더라도 세례식 이후에 예수께서는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그 인도하심에 따라 활동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예수께서 시험을 받는 것 역시 이 가운데 성령의 개입하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은 예수에게 있어 행동 동기였고, 그 이후 사도들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 폭발적 복음운동의 주요 동인(動因)이었다(행 2:4;10:44;13:4).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오든 날에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ㅇ마귀에게(디아볼루) - '마귀' 또는 '사단'을 나타내는 이 단어는 '비방자', '고자질장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70인역(LXX)은 비난자나 적이나 유혹자로서 마귀를 지칭하는데도 이 단어를 사용한다(대상 21:1;슥 3:1). 한편 이와 유사한 내용의 단어로 '사타나스'('대적자', '적')를 들수 있는데 이는 히브리어 사탄에서 유래하였다(삼상29:4). 이 두 단어는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 번갈아 가며 나타난다. 반면에 바울은 대개 '사타나스'를 사용하며 평행구절인 막 1:13도 '사타나스'를 사용하고 있다. 
사단이 세상의 왕이요 신이다(6절;고후 4:4). 그러한 존재로서 사단은 하나님의 것인 영광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구속받지 못한 자들은 사단의 통치 아래 있게 되며(마  6:13;막 3:27;요 6:70;8:44;행13:10;26:18;골 1:13) 그들이 하는 일은 '디아볼로스'의 일이다(요일 3:8). 결국 사단의 목적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갈라놓는 것이며 사단의 궁극적 무기는 사망이다(히2:14). 그러나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의 왕국이 마귀의 왕국을 멸망시키게 되고 결국 사단은 하늘로부터 쫓겨나게되며(10:18;요 12:31;계 12:9) 그 결과 사단은 더이상 비방자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한편 사단과의 싸움은 그리스도의 공동체(共同體)를 상대로 계속된다(고전 7:5;엡 4:27).
ㅇ시험 - 우리는 여기서 성경에 나타난 세 가지 종류의 시험을 구별해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것이다. 왜냐하면 개역성경은 이 세 가지의 경우를 구분하여 따로 기록하지 않고 모두 '시험'이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사단은 사람들을 '시험'(temptation)한다. 다시 말해서 사단은 사람들이 악을 행하도록 유혹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같은 시험을 하시지도 않으며 그 자신이 그런 방법에 의해서 시험을 받으시지도 않는다(약 1:13). 게다가 모든 시험(temptation)이 직접 사단으로부터 온다고 말할수도 없다. 왜냐하면 가끔 시험은 우리 자신의 그릇된 마음에서 비롯되기도 하기 때문이다(약1:14, 15). (2) 사람들은 하나님께 신앙과 어긋나는 그릇된 요구들을 하므로 하나님을 시험(test)할 수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이와 같은 실수를 범했다. 그리고 예수가 신 6:16을 인용한 의도도 아마 그 사실을 암시하고 있을 것이다(12절). (3)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trial)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백성들을 시험(trial)하신다(신 8:2). 이스라엘 사람들과 예수가 광야에서 경험한 것 가운데는 위의 세 가지 종류의 시험이 포함되어있다. 인생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율법의 준행(遵行) 여부'를 보시려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셨다(출 16:4). 한편 사단의 시험에 마주쳤을 때 예수는 하나님이 자기를 가리켜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3:22)고 하신 말씀이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즉, 예수는 구약 성경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시험을 이겨내셨던 것이다.
ㅇ주리신지라 - 본 구절이 보도하는 바는 예수께서 금식을 하는 40일 동안 전혀 배고픔을 느끼지않았다거나 또는 배고픔에 대해 전혀 자유했었다(Shurmann)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계속 주리신 가운데 극도의 배고픈 고통을 느끼고 있을 때 마귀가 유혹을 해왔다는 것이다. 즉 마귀는 예수의 배고픔이 극에 달한 것을 알고는 그 배고픔을 더윽 자극하여 먹는 것으로 예수를 유혹하려고 했던 것이다.
3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ㅇ마귀가...떡덩이가 되게 하라 - 여기서 사단이 떡덩이를 언급한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주신 것을 연상시킨다(출 16:31). 그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면 그들에게 만나를 내려주던 것과 같은 이적을 베풀어 주리라 기대했었다(요 6:30). 결국 사단이 예수에게 이와 같은 시험을 했던 것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을 증명하는 어떤 일을 행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촉구의 목적은 예수의 메시야성에 관한 객관적 증거를 보려는 것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도록 부추기는테 있었다. 즉, 이 사단의 간악한 시험 배후에는 하나님과 예수의 사이를 와해(瓦解)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예수가 수행할 메시야적 사명을 방해하려는 사악하고도 교활한 간계가 숨어있는 것이다. 결국 애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유혹을 이겨내는데, 사단의 유혹에 대한 예수의 태도가 그 사실을 더욱 확실히 입증해 준다(I.H. Marshall).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ㅇ예수께서...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 마귀의 시험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신 8:3에서 인용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광야를 40년 동안 유랑하게 하신 것은 그들을 낮추시며 그들을 시험하사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고 하신'것이다(신 8:2).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만나를 주신 이유는 그들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준수함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신 8:3).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동안에 예수는 줄곧 신실했다. 예수께서 보여준 행동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했을때 그들이 행동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예수께서 마귀에게 답변한 내용은 예수의 마음이 분열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말씀에 철두철미 순종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그는 우리가 시험받을 때 모범이 되는 것이다(히 4:14-16;5:80. 
한편 극도의 굶주림 가운데서도 끝까지 신실하심을 갖고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신 예수는 떡부스러기 하나를 취하시는 것조차도 인류 구속을 위해 거부하시며 오히려 자기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내어 주셨다(22:19;요 6:48-51). 따라서 우리는 시험 당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통해 우리를 향하신 그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알 수 있다.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ㅇ마귀가...천하 민국을 보이며 - 이 두번째 시험을 굳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세상 권세에 대한 정치적 시험이라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배신하게끔 한다는 점에서 다른 두 시험과 동일한 맥락을 갖는다. 여기서 누가는 '마귀가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라고 기록해 어디로 올라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평행구절인 마 4:8은 '산'이라고 기록하여, 모세가 느보산에 올라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장면을 연상시킨다(신 34:1-3). 그러나 혹자(I. H. Marshall)는 '산'이라는 표현이 상징적 (象徵的)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이나 육신의 몸을 입고 계신 예수께서 모든 나라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산이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기때문이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 일이 심리적이고 환상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예수께서는 실지로 시험을 받기 위해서 모든 세상을 구석구석 직접 눈으로 보아야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마귀가 예수를 이끌고 올라간 곳이 산이든 아니든 천하 만국을 보기위해서 설정된 장소였다는 정도로 보면 무난할것이다.   
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ㅇ이 모든 권세와...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 이러한 사단의 주장은 일리가 있는 것이다. 인류의 타락 이후 이 세상은 사단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사단은 이 세상에 대한 통치권, 소유권, 양도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단의 그러한 권한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메시야는 조만간 모든 '권세와 영광'을 되찾게 될 것이며, 또한 온전한 공의와 사랑으로써 모든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마귀는 예수께 세상 전체를 소유하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마귀의 주장에 대해서 예수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시며 그렇다고 마귀의 주장을 인정하시지도않는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궁극적 지배권은 여전히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사단의 뜻에 의해 좌지우지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단은 하나님을 정면으로 모독하는 행위인 우상 숭배를 조건부로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시험은 성도들의 일상 생활 가운데서도 크고 작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세상이냐 신앙적 진리냐 혹은 사단이냐 하나님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적 상황에서 우리는 세상만국의 권세를 초개처럼 버리시는 예수의 단호한 결단을 기억하고 본받아야 할 것이다(마 6:24).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ㅇ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 마귀가 요구하는 절은 단순한 인사형식이 아니라 '완전한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들을 마귀에게 내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예수가 마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우리들의 구원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1) 죄를 범하는 결과가 되므로 우리를 위하여 온전한 희생 제물로 자신을 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2) 성경은 메시야가 먼저 고난을 받고 그 다음에야 '영광에 들어간다'(24:26)고 가르친다. (3) 마귀는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을 방해한다. 따라서 이 시험은 예수가 왕국을 즉시에 받으므로 십자가를 피하게 하여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挫折)시키려는 것이었다.
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ㅇ주 너의 하나님...그를 섬기라 - 예수께서 시험을 이기신 방법은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를 제시해 준다. 예수는 사단을 대적함에 있어 신 6:13을 인용하심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한 마지막 아담(고전 15:45), 곧 완전한 인간으로서 마귀를 대적했다. 즉 예수는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섬겨야 한다고 응답하신 것이다. 이렇듯 예수가 구약에서 인용한 말씀들은 마귀를 대적하는데 더없이 훌륭한 무기였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항상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시려는 그리스도와(요 5:30;6:38) 항상 그 뜻을 대적케 하려는 사단의(창 3:1) 대조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ㅇ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뛰어내리라 - 마귀는 세번째 시험을 위해서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간다. 그런데 마태는 이 시험을 두번째로 제시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마지막에 기록하고 있다(마 4:5-7). 이것은 누가가 예루살렘 성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험이 의도하는 바는 예수의 자기 과시욕을 부추켜 그러한 저급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하나님을 이용하게끔하려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꼭대기'라는 말의 헬라어 '프테뤼기온'은 '날개'라는 뜻의 '프테류스'에서 온말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요세푸스(Jos, Antiq. 15, P. 411)에 의하면 이는 성전 바깥뜰 남쪽에 있는 주광을 뜻한다고 한다. (2) 예레미야스(J. Jeremias)에 따르면 이는 성전문 위로 가로지르는 인방(lintel)이라고 한다. (3) 게르하드슨(B. Gerhardson, Testing Gods son, P.54)에 따르면 시 91:4(LXX은 제 90편)의 '프테뤼가스'(날개들)와 본문 9절의 '프테뤼기온'(꼭대기) 사이에는 일종의 언어 유희가 있다고 하며 이를 일종의 성전을 보호해 주는 장소로 이해하고 있다. 이중 어떠한 견해를 취해본 구절을 이해하든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결국 마귀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이끌고 갔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랍비 문헌에 보면 메시야가 성전의 꼭대기에 나타날 것이라는 언급이 있다. 따라서 비록 랍비문헌에는 뛰어내린다는 언급은 없지만 마귀는 그러한 배경에서 이 시험을 예수께 제기했을 가능성도 있다.
10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ㅇ하나님이...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 이 시험에서 마귀는 성경 본문의 내용과 상관없이 구약성경들을 잘못되게 인용한다(시 91:11, 12). 그러기에 우리는 단지 어떤 성경구절들을 인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전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와 같은 마귀의 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을 막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런데 마귀는 시91:11, 12을 인용하면서 고의적으로 '네 모든 길에'라는 구절을 빼버렸다. 게다가 여기에 인용된 시편은 택한 백성을 환란과 어려움 속에서 인도해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한 것이지 하나님을 시험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섭리를 방해하는 일이나 충동적으로 위험에 뛰어드는 일을 용서하시지 않으시고 엄히 징계하신다고 가르쳤지만(신 6:16;18:20;사 45:9) 마귀는 이런 진리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않았다. 오늘날에도 마귀는 성도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순수한 신앙을 변색시키기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적용하게 만들고 거짓 종들을 통해 그 말씀을 왜곡시킨다(마 22:29;고후 2:17). 사실 세계 도처에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는 허다한 이단들은 성경을 그들의 경전으로 내세우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다만 문제는 이 성경 말씀을 자신의 거짓된 사상을 세우고 은폐시키려는 목적에서 아전 인수(我田 引水)격으로 짜맞춘다는데 있는 것이다.
11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ㅇ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 예수의 대답은 다시 성경의 인용으로 주어진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맛사에서 물의 부족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시험했을 때(출17:1-7)를 배경으로 하는 신 6:16을 인용한 것이다. 만약 예수가 마귀의 시험에 응한다면 단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나님께 그릇된 표적을 구하는 셈이 되어 하나님을 격분(激忿)케 하는 결과가 된다. 결국 여기에서도 마귀는 하나님과 예수와의 신실한 관계를 공격하고 있다. 세 차례에 걸친 사단의 시험에 대한 결론적 말씀이라 할 수 있는 본절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예수의 굳은 결의를 보여준다.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ㅇ미귀가...떠나니라 - 사단은 모든 공격에서 참패를 당했으며 갖은 방법을 다하였으나 실패했다. 결국 마귀는 얼마 동안 예수의 곁을 떠났다. 콘첼만(Conzelmann)은 이 '얼마 동안'(until an opportune time, NIV)의 기간을 22:3까지라고 이야기한다. 즉 22:3에서 마귀가 다시 나타나 예수의 수난을 야기시키나 그 전까지는 사단이 역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Conzelmann, Theology of Luke, P. 38). 그러나 브라운(Brown)은 본서를 살펴보면 사단이 예수의 전생애 동안에 역사했다고 주장한다(Schuyler  Brown, Apostasy and Perseverance). 예수의 공생애가 유대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적대자들의 핍박으로 일관되었고 이러한 핍박이 궁극적로는 사단에 의해 사주되었음을 고려해 볼 때, 이중 두번째 견해가 더 타당한 듯하다. 사단의 시험에 대한 예수의 승리가 가져다 주는 의미는 실로 크다. 결국 사단과의 싸움에서 얻은 승리는 곧 예수의 복음 사명이 최종적 성취를 보게되리라는 점을 암시하는 복선적 역할도 하기때문이다. 예수께 있어서의 사단과의 싸움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함이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인 것이다. 한편 누가는 시험이 끝난후에 천사들이 예수를 수종들었다는 것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마 4:11;막 1:13). 이것은 각 제자간의 저작 목적에 따른 시각 차이이겠으나 누가는 예수께서 홀로 힘든 시험을 이겨내신 사실을 보다 강조해 보이고자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4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ㅇ성령의 권능으로...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 저자 누가는 철저하리 만큼 성령에 대해서 강조한다. 예수가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한 사실(3:21, 22)과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금식하며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일(1절) 등에서 누가는 성령의 역할을 두드러지게 부각(浮刻) 시킨다. 그런데 이 곳에서도 누가는 재차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바 예수께서 새로운 사역의 단계에 들어가기 전에 그가 성령의 권능으로 무장되었음을 재삼 언급한다. 이러한 언급은 누가의 독특한 특징으로 본서(10:21)와 사도행전(행 1:8;10:38) 등에서 자주 나타난다. 
우리는 1장에서 4장까지 오면서 예수의 잉태에서 사역의 시작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개입했던 성령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었다. 이제 예수의 능력이 성령의 권능을 통해 가시적으로 나타나 그의 명성이 널리 퍼지고 있다. 누가는 예수의 사역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보였던 몇몇반응들(22, 28, 32,36, 42절) 중에서 우선 예수에 대한 소식이 퍼져 나갔다는 것을 언급한다. 한편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갈릴리로 돌아가신 이유를 그가 요한의 투옥 사실을 들으셨기때문이라고 기록하였다(마 4:12;막 1:14).
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ㅇ가르치시매...칭송을 받으시더라 - 누가는 여기서 예수가 무엇을 가르쳤는지 그 내용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그는 예수가 성령의 권능으로 가르쳤고 그 가르침으로 사람들이 예수를 칭송했다고만 전할 뿐이다. 예수께서 이처럼 칭송을 받은 이유는 그의 가르침에 생동력, 권위, 논리 정연함, 실제적 적용, 흥미, 진리 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31, 32절;마 7:28, 29).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몰려온 무리들의 칭송이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열심으로 찾아왔지만 예수의 가르침이 그들의 선입견과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자 그들은 반대로 비판적 태도를 취하거나 심지어 적대적 행위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모습은 본장에도 기록되어 있다(28, 29절). 한편 '가르치는' 것은 예수의 사역에 있어 골격을 이루며(마4:23;9:35;11:1), 그 가르침의 주요 내용은 하나님과 예수자신에 관한 계시(마 6:32,33;요 14:6) 및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17:20, 21;마 21:31) 등으로 요약된다. 복음서에는 병자 치유등을 위시한 예수의 놀라운 이적들이 독자들을 압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적들도 예수의 메시야되심과 메시야의 여러 교훈의 진정성을 뒷받하는 증거로서의 역할을 하는 데에 그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ㅇ예수께서...자기 규례(規例)대로 - '그가 자라나신 곳'은 예수가 자신의 고향에 있었음을 강조하는 누가의 표현이다. 예수가 회당을 방문한 것은 예수의 어렸을 때부터의 습관이다. 누가는 예수가 '자기 규례대로' 곧 '전에 하던대로' 회당에 참석했음을 시사함으로써 유대인의 경건 생활을 준행하였음을 강조한다. 이와같은 누가의 강조는 예수께서 이처럼 유대인의 경건 생활을 준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철저하게 배척당했다는 사실을 크게 부각시키고있다.
ㅇ회당에 들어가사 - 유대에서는 5세가 되면 회당에 가는 것이 허락되고 13세가 되면 회당에 출석하는 것이 유대인 율법생활의 일부분이다. 
유대인들의 회당 의식은 성경에 나타난 바 없지만 유대 전통에 따르게 되면 그들은 회당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개인 기도를 한다. 그 다음 '쉐마'(신 6:4-9;11:13-21)를 고백하고 열 여덟개의  간구로 이루어진 소위 18기도문을 낭송한다. 그후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성경을 낭독하게 되는데 보통 모세오경이 중심된 고정된 성구집(lectionary)의 구절을 읽는다. 성경은 몇사람이 교대로 읽는데 아람어로 돌아가면서 읽는 경우도 있다. 성경 낭독 후 기도를하고 설교를 하게 된다. 그러나 설교는 설교할 만한 사람이 있을 경우에만 하게 된다(행 13:15). 
한편 성경을 낭독할 사람은 선정(選定)되었는데 본문에서 예수께서 자진해서 성경을 낭독하였는지 아니면 그전에 비공식적인 요청이 있었는지는 언급이 없다(W.Schrage, TDNT VII, 798-841).
ㅇ성경을 읽으려고 - 예수의 가르침은 성경으로 시작되어 성경으로 끝난다. 이는 그가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참 메시야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처럼 예수는 구약 말씀, 특히 율법 자체에 대해서는 결코 거부감을 나타내신 적이 없다. 다만 예수는 율법의 자귀자체에 얽메이지 않고 그 율법 규례들 속에 함축된 정신을 밝히 드러냄으로써 사람들에게 진실로 요구되는 생명력 있는 교훈을 베푸신 것이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ㅇ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찾으시니 - 저자 누가는 예수 자신이 사 61장을 선택해서 읽었는지 아니면 그 구절들이 그 날 안식일에 읽혀지도록 이미 정해져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드리거늘'(에피디도미)이란 말을 예수가 특정한 책을 요구하고 그 책을 사람들이 넘겨주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리고 '찾으시니'에 해당하는 '휴렌'은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뜻보다는 예수의 의도적 발견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보아도 무난하다.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ㅇ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자유케 하고 - 예수께서 낭독하신 사 61:1, 2의 말씀은 예수의 두가지 사역 곧 선지자적 사역과 메시야적 사역을 증거하고 있다. 먼저 예수는 신 18:15, 18에 예언된 바로 '그 선지자'(the prophet)로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이심을 증거한다. 그리고 둘째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곧 메시야로서(단 9:24) 영적으로 눈멀고 포로된 자들을 죄악에서 건져내어 자유케 하시기 위해오신 분임을 증거한다(6:20, 21;7:18-23). 본문의 '임하셨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리세'는 '기름붓다', '기름바르다'의 뜻을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께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기름부음 받았다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제사장(출 28:41), 선지자(왕상 19:16), 왕(삼상 10:1)들이 기름부음을 받았듯이 예수께서도 기름부음 받으신 분으로서 이러한 직분을 모두 수행하실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사야 예언의 주인공이신 예수께서는 (1) 성령을 받은 자이며 (2) 복음의 선포자이며 (3)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메시야의 사명을 감당하는 분이신 것이다. 
한편 '가난한 자'란 순수한 은혜와 자비만을 얻기 위하여 마음을 열어 놓은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예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하늘나라를 소유케 하실 것을 가리킨다(마 5:3). 그리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이란 일차적으로 유대 백성이 바빌론에서 귀환(歸還)할 것을 가리켰지만 궁극적으로 메시야께서 온 인류를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해방시킬 것을 의미한다. 또한 '눈먼 자에게 다시보게'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눈먼 자에게 시력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눌린 자에게 자유를'이란 표현은 죄의 노예가 되어 세상의 근심과 걱정에 얽매이며 고통받는 자에게 예수께서 영혼의 평안과 자유를 주실 것을 가리킨다.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하심이라 하였더라
ㅇ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 '주의 은혜의 해'는 레 25:8-55에 나타나는 '희년'(year of iubilee) 곧 여호와께서 매 50년마다 빚진 자들의 빚이 탕감되고 노예들이 해방되고 땅의 경작을 쉬게 하고 모든 거민들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정하신 해방의 해를 뜻한다. 나아가 이 해방의 해는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인 은혜로 죄와 죄의 결과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역사(歷史)의 시기를 가리킨다. 바로 이와 같은 시기는 메시야가 선도할 새로운 시대를 의미한다. 이와같이 예수께서 이사야의 이 놀라운 말씀을 인용하신 것은 그가 당신의 사명을 똑똑히 인식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한편 이사야서의 인용 부분인 본문을 누가는 결국 예수의 사역에 대한 표제적(標題的)인 표현으로 제시하고 있다. 선지자이며 메시야로서 예수는 성령의 능력으로 사회의 소외자들, 가난한 자들 및 이방인들을 포함한 온 인류를 위해 봉사하실 것이다.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ㅇ책을 덮어...주목하여 보더라 - 읽기를 마치신 예수는 성경 두루마리를 말아서 그것을 '맡은 자'에게 건네주셨다. 여기서 '맡은 자'(attendant)는 헬라어로 '휘페레테스'인데 흔히 '섬기는 자', '배 젓는 자'를 말한다. 이 '맡은 자'의 직책은 매우 다양한데, 이들은 성경 두루마리를 관리하고 회당을 청소한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성일을 선언하는 은나팔을 불며 주중에는 어린아이들에게 율법을 가르친다. 이들이 관리하는 성경 두루마리는 보통 함이나 궤에 보관된다. 
한편 낭독자가 성경두루마리를 '맡은 자'에게 넘겨주고 나면 낭독자는 자리에 앉게 된다. 랍비적 전통에 따르면 앉는 것은 가르침의 시작이다. 낭독자는 그 자리에 앉아 낭독한 구절에 관한 교훈적 강론을 하게 된다. 여기서 예수의 강론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은 호의로 시작해서 결국은 적대감으로 끝이 나고 만다.
21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ㅇ오늘날 - '오늘날'을 나타내는 헬라어 '세메론'은 다분히 긴박감을 띤 표현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에 해당하는 '하루'라는 의미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허용된 일정기간'이라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이 '오늘날'은 다음의 세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본문에서도 말했듯이 사 61:1, 2의 예언이 성취된 그날 곧 이사야의 예언대로 실제로 메시야가 오셔서 회당 사람들이 그 메시야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듣고있는 그 날로 볼 수 있으며 둘째, 그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과 동시대인들이 맞게 되는 시대로 생각해 볼 수 있고 셋째, 나아가 하나님의 복음을 접하는 모든 시대 곧 시시각각 새롭게 다가오는 모든 시대를 뜻한다고 볼 수있다. 결국 오늘날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생생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모든 날인 바 지나간 과거가 아닌 오늘 완성되는 '주의 은혜의 해'(19절)를 뜻하는 것이다. 실로 '오늘'이야말로 구원받을 날이요 하나님 앞에서 결단을 내려야 할 날인 것이다.
22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ㅇ그를 증거하고..요셉의 이들이 아니냐 - '증거하고'에 해당하는 '에마르튀룬'은 '칭찬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speak well of, NIV).  따라서 우리는 회당에서 말씀을 들은 청중들이 예수의 강론에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냈음을 알수 있다. 덧붙여서 예수의 '은혜로운 말'에 대한 청중들의 이러한 반응은 이후로도 예수가 말씀을 증거하는 곳에서 계속해서 나타난다(20:26). 청중들이 기이하게 여긴 것은 예수의 외모나 행동을 통해서 나온 것이아니라 '은혜로운 말씀'에 기인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처음에 긍정적반응을 보인 청중들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는 부분에서 적대적인 태도로 돌변한다는 점이다. 본문은 청중들이 왜 적대적이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다. 아마도 같은 동네 나사렛에서 목수 요셉의 아들로 자라 이토록 엄청난 주장을 하는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에게서 너무도 당돌한 느낌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이 간다. 즉 사람들은 예수의 인간적인 면, 즉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사실만 염두에 둘 뿐 그가 바로 메시야라는 사실은 믿지 않았다. 따라서 예수를 기이히 여기며 칭찬하던 분위기가 쑥덕공론과 의심과 불신의 분위기로 돌변하여 급격하고도 과격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났다.
2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ㅇ의원아 너를 고치라 - 본래 이는 '남을 돕는다고 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을 돕는것이 바른 순서'라는 의미의 속담으로서 의사인 누가에게는 친숙한 것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속담은 예수께서 메시야되심을 입증하기 위해 가버나움과 기타 등지에서 행하신 이적들을 여기 나사렛에서도 행하여야 한다는 사람들의 시험기 깃든 요청을 예언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회당에서 그의 강론을 들은 나사렛사람들이 나타낼 반응을 미리 간파하고 계신 셈이다. 예수는 그의 사역 기간중 계속해서 표적을 보이라는 요구들을 받곤 했다(11:16, 29). 하지만 그는 단순히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기 위한 목적에서 이적을 행하시지는 않는다.
24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ㅇ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A 아멘 레고  휘민)  - 이 말은 엄숙한 단언을 내리고자 할 때 사용된것으로 누가복음에서 여섯 차례 사용되었다(12:37;18:17등). 
'진실로'에 해당하는 '아멘'이라는 말은 구약에서 각 개인과 공동체에 관련되어 사용되었는데 (1) 하나님의 뜻에따라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다(왕상 1:36) (2) 하나님의 위협이나 저주가 내림을 확증하다(민 5:22) (3) 송영에 답하여 하나님께 대한 찬양에 참여하다는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결국 (1) '아멘'은 예배시의 환호로서 적극적 응답을 의미하며(계 5:14) (2) 기도와  송영에서(갈 1:5;엡 3:21;딤전 1:17) 아멘은 그 기도와 송영의 내용에 대한 온전한 공감을 나타내 준다.
여기서처럼 예수가 아멘을 자기 자신의 말씀 앞에 둘 때, 그 목적은 그 말씀의 진정성과 타당성을 강조하는데 있다.
ㅇ선지자가 고향에서...없느니라 - 이 속담 자체는 큰 일을 성취한 사람이 자기 고향에서는 오히려 냉대받는다는 의미로 쓰였다. 왜냐하면 대개 사람들은 시기와 질투심으로 인해 타인의 탁월성을 객관적으로 인정해 주기를 꺼려하며 자신의 평범한 수준으로 타인을 격하시키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속담을 자신에게 적용하신것은 자신이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받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지만, 나아가 한층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한다. 즉, 예수는 자기 자신의 민족에게 배척당한 선지자들의 계보(系譜)에 속한다는 것이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ㅇ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본 구절은 '...위에'를 나타내는 '에피'의 축소형 '에피'와 '진리'를 나타내는 '알레데이아'로 서두가 구성되어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리의 근거 위에서 말하노니'라고 다시 번역할수 있다. 이것은 이어지는 구약상의 두 가지 실례가 나사렛 사람들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확증해준다. 
나사렛 사람들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행한 일들에 대해서 잘 알고있고  또 그것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오직 이방인 과부와 수리아 사람 나아만에게만 하나님의 은혜를 베푼 일이 자신들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Lenski).
26 엘리야가 그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ㅇ엘리야가...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 왕상 17:8-24에 나타난 내용이다. 3년 6개월동안 이스라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을 때 온땅에 흉년이 들어 그 상황은 매우 참담했었다. 더욱이 뚜렷한 생계 대책을 마련하기 어려웠던 과부들의 생활상은 매우 극심해 그들 중 대부분이 굶주림에 허덕였다. 그런데 이때 엘리야는 가뭄에 고생하며 굶주려 있는 이스라엘의 많은 과부들을 남겨두고 베니게의 큰 도시 시돈에있는 작은 마을 사렙다에 사는 이방인 과부를 찾아가 그 집을 구원하였다. 
그런데 예수는 엘리야가 단독적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룬 일이라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 한편 사렙다의 과부에게 베풀어진 자비는 예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치유해주신 경우와 유사하다(막 7:26-30).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ㅇ엘리사 때에...수리아 사람 나아만뿐 - 왕하 5:14의 내용이다. 엘리사의 경우도 엘리야의 경우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때에 이스라엘의 다른 많은 문둥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수리아의 장수 나아만만이 깨끗함을 얻었다. 이 역시 하나님이 엘리사를 통해서 이방인에게 베푸신 은혜라고 예수는 명백히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예수의 가르침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었던 구속사의 새시대가 도래하였음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것이다. 즉 민족이나 국가를 초월하여서 진실되게 '예수께로 나오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게되었음을 의미한다(마 8:11;요 6:37).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해되지만, 당시 배타적 선민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었던 유대인들에게는 일대 충격이고 도전이었다. 이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예수로 말미암아 처음 선포된것이 아니라 구약 속에 이미 태동되어 있었던 구속사의 한 주제였다(사 43:5, 6;49:12;59:19;말 1:11;미 4:1, 2;슥8:20-23). 한편 나아만 장군의 치유사건은 예수께서 로마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경우와 유사하다(7:1-10).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ㅇ회당에...분이 가득하여 - 예수의 말씀이 선민 의식에 가득차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모욕과도 같은 언사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회당은 일시에 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예수의 말씀을 청종하고 겸손한 태도로 자신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시길 간구해야 할 청중들은 냉소적이고 불신에 찬 태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맹목적인 증오와 분노의 태도로 돌변한다.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ㅇ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 분노가 극에 달하면 살의(殺意)를 띠게 된다. 처음엔 호의적인 태도로 말씀을 듣던 청중들이 어느새 폭도가 되었다. 이는 예수를 향하여 호산나 찬양을 외치던 군중들이 종국에 가서는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치는 적대 무리로 돌변하는 장면과 대비해 보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한편 나사렛은 갈릴리 구릉의 남쪽 경사면의 낭떠러지 위에 위치하였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이 낭떠러지에서 밀어 떨어뜨림으로써 오히려 그들의 배척과 살해 행위를 정당화하려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께서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외쳤기 때문에 예수가 민족 반역죄를 범한 것으로 몰아 유태 전통상 반역자를 처단하는 형벌 제도인(대하 25:12) 벼랑에서 아래로 사람을 밀쳐 죽이는 형벌을 집행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후에 십자가의 형장으로 갈 때와 마찬가지로 이성을 잃은 무리가 자신을 마을 밖으로 몰아내는 것을 묵묵히 허락하셨다.
30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ㅇ예수께서...지나서 가시니라 - 아직은 예수께서 죽음을 맞이하실 때가 아니었다. 
본문은 예수께서 그 죽음의 상황을 어떻게 모면하셨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므로 그 상황에서 예수가 어떤 기적적인 탈출을 시도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저자 누가는 단지 무리가운데로 걸어서 지나 가셨다고 전한다. '가시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에포류에토'는 미완료 시제로 사용되어 '예수께서 가시고자 하시는 길로 계속 가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분이 어떻게 죽음의 위기를 넘겼던간에 우리는 여기서 죽음의 난관에 봉착(逢着)해서도 그 뜻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사역에 충실하며 복음의 사역을 위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예수를 보게 된다. 또한 선교 활동 초기부터 난관에 부딪혀도 의연하게 대처하는 그의 모습에서 이후에 지속적으로 봉착하게 될 어려움을 지혜롭게 해결해 나가시리라는 예측도 가능케 한다. 아울러 사역 초기에 당한 어려움을 통해 그가 십자가에 달릴 때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인가도 감지하게 된다. 
한편 나사렛에서의 쓰라린 경험을 갖고 예수는 가버나움으로 행로를 잡는다. 이에 대해 플루머(Plummer)는 예수가 이후 다시는 나사렛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31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ㅇ갈릴리 가버나움 동네 - 나사렛 북동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 갈릴리 연안에 위치한 도시로 예수께서 광범위한 사역을 수행하신 곳이다(마 8:5, 14;요 6:55-59). 예수의 수많은 이적을 목격하고서도 회개치 않음으로인해 가버나움에는 장차 화가 임할것이 예언되기도 했다(마 11:23).
ㅇ내려오사 - 이 표현은 갈릴리 바다가 지중해의 수면보다 약 200m 정도가 낮기 때문에 높은 곳에 위치한 나사렛에서 해변의 평지에 이르는 길이 내리받이 경사였음을 보여준다.
ㅇ가르치시매(엔 디다스콘) - 본 구절의 원문 표현은  완곡한 미완료 시제로서 그 뜻이 '가르치고 있는 중이었다'가 된다. 이는 예수께서 회당에 참석하여 가르치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음을 암시한다(33, 38절;막 1:21). 
한편 우리는 31-41절에서 예수의 사역이 하루종일 쉴틈없이 진행되었음알 수 있다. 예수는 오전에 회당에 들어가서 권세있는 말씀으로 교훈을 베푸시고 귀신을 축출하셨으며, 오후에는  시몬의 집을 방문하여 그의 장모를 치유해 주셨다. 그리고 해가 진 이후로부터 밤 늦도록까지는 몰려든 수많은 병자들을 일일이 치유하시느라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32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
ㅇ권세가 있음이러라 - 마가복음 평행절(막 1:21, 22)은 예수의 가르침이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전한다. 랍비 정도도 못되는 사람이 독특한 권위로써 가르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다수의 랍비들은 그들의 선임자들의 견해를 다시 인용함으로써 자신들의 가르침을 누적된 전승(tradition)의 기초 위에 세웠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은 랍비들의 가르침과는 판이하게 달랐고 그 가르침 자체에 독자적인 권능이 담겨 있었다. 이렇듯 예수의 말씀 전파는 그의 생애 전체를 통하여 항상 권세와 능력을 수반하고 있다(36절).
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가로되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ㅇ더러운 귀신들린 - 귀신 '들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코'는 '가지다', '소유하다', '잡다'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귀신들린 상태에 관해서는 성경에서 자주 언급할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간혹 목격되는 바이다. 이 상태는 '전혀 이질적인 타인격이 사람 속에 들어와서 그 사람의 영혼과 육신을 지배하는 상태'라고 정의내려질 수 있다. 따라서 귀신들린 자가 귀신이 되는 것이아니라 다만 그 귀신에 의해 인격이 지배당하게됨을 의미한다. 
귀신이 어떤 특정한 사람의 죽은혼인 것처럼 나타날 때가 있지만 이는 속임수에 불과한다. 인간의 영혼이 귀신의 형태로 활동한다는 것은 비성경적 견해이기 때문이다. 
한편 귀신들린 자의 상황은 완전히 미친 상태, 병걸린상태, 혹은 귀신을 빙자한 주술적 능력을 지닌상태 등이다. 귀신은 세상 끝날까지 잠시 동안은 인간보다 영적 능력이 더 우월한 상태로서 인간을 괴롭힐 수 있지만,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써 귀신을 추방하고 정복할 능력과 특권을 지니고 있다(약4:7). 그런데 축사 신학에서 주의할 사항은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귀신을 쫓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이름으로만 귀신이 축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에아) - 이는 놀라움이나 두려움, 분노 등을 표현하는 감탄사이며 본 문장에서는 악마적인 무서운 비명을 나타낸다.
ㅇ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수사적 용구인 본 구절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나이까', '왜 방해하시나이까' 등의 의미이다. 즉 예수의 출현으로 인해 귀신의 입지가 위협을 받게 되자 그 긴장과 불안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귀신들은 그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臨在)하여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의 존재 거점의 근거를 잃어버려 두려움에 떨게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나라의 특성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분의 권위 아래 사단의 어두운 지배와 군림이 사라지는 곳이다. 따라서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상징되어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에는 사단이 떨며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ㅇ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여러 가지 것들이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증거해 주는 경우가  종종 나타난다. 
귀신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말은 예수의 신성을 인식한 것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귀신은 마 8:29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막 5:7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말하고 있다. 한편 이 말은 '더러운 귀신'이라는 말과도 대조를 이룬다.
3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우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ㅇ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 예수께서는 귀신이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침묵할 것을 명령하신다. 우리는 여기서 때가 이르기 전에 자신의 정체를 알리는 것을 금하는 예수의 행동 가운데 그 첫번째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함구령을 거듭내리신(마 8:4;막 1:34) 이유는 다음 몇가지로 짐작된다. (1) 정해진 때가 이르기 전에 대적들과의 불필요한 충돌에 직면하게 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예수의 사역이 확대되어감에 따라 당신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점점 늘어갔으며  더욱이 예수의 교훈은 전통적인 유대교의 가르침을 초월한 내용이 많았다. 따라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날이 갈수록 예수께 대한 의혹과 경계의 눈초리를 나타내었다. (2) 호의적인 무리들의 잘못된 메시야관을 경계하시기 위함이었다. 당시 예수를 따랐던 자들은 거의가 육신상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몰려들었으며, 그 중에는 예수를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줄 위대한 민족적 영도자(領導者) 곧 정치적 메시야로 여기고 추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3) 예수는 자신이 입으로 증거되기 이전에 당신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신령한 권능으로 인해 자연히 증거되기를 원하셨다. 더욱이 본문의경우 예수는 굳이 더러운 귀신의 입을 빌어 당신의 신분을 중거케하기를 원치 않으셨음이 분명하다.
ㅇ넘어뜨리고...상하지 아니한지라 - 예수의 행동은 소위 전문적인 '악령 추방'(exorcism)이 아니었는데 그것은 그가 어떤 주문을 외운다거나 다른 이의 권위를 끌어들이지 않은데서 알 수 있다. 대신 예수는 단 한마디 명령하는 말씀으로써 귀신을 내어 쫓았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말씀이 얼마나 권세있는 것인가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듯이 예수께서도 당신의 말씀으로써 죽은자를 살려내기도 하시는 등(8:49-56) 인간의 어떤 불가능도 가능케 하신 것이다.
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ㅇ다 놀라 - 이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담보스'는  두려움이  섞인 놀라움을 뜻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말씀과 권세와 능력에 대한 놀라움이다. 귀신을 축출하는 이례적인 사건을 통한 예수의 신적능력을 경험한 군중들은 예수에게서 범접(犯接) 할 수 없는 권위를 보게 된다. 물론 당시 사회에서는 귀신을 달래거나 위로하는 주문과 주술적 행위를 통하여 일시적 또는 거짓으로 악령추방이 행해지기도 했지만 이러한 행위는 단순히 환자를 잠시 잠들게 하는 것 뿐으로 오히려 또 다른 귀신의 힘을 비는 경우도 있어 귀신들린 사람으로 하여금 악순환을 되풀이 하게 했다. 그러나 예수는 주문이나 주술적 행위가 아닌 일방적인 명령을 귀신에게 던졌다. 그것은 하늘의 권세와 능력으로 말미암은 불가항력적인 명령이었다.
37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ㅇ소문이...퍼지니라(여세포류에토  에코스)  - '퍼지니라'를 나타내는 '여세포류에토'는 원형 '여포류오마이'의 미완료 중간태로서 '계속 퍼져나가고 있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리고 '소문'을 나타내는 '에코스'에서 영어의 '메아리'를 나타내는 '에코'(echo)가 파생되었다. '에코스'는 해변가의 파도 소리를 나타내는데 사용되던 단어이다. 즉, 예수의 소문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폭넓게 퍼져 나갔다는 것을 말해준다. 실제로 예수의 권능과 말씀을 가버나움 회당에서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들은 가는 곳곳마다 이 경험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38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ㅇ시몬의 장모 - 저자 누가는 이전까지 베드로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이 본서를 기록하다가 본 구절에서 갑자기 아무런 소개없이 베드로를 언급한다. 그것은 누가가 본 복음서를 기록할 시기는 이미 초대교회 시대였기 때문에  선교활동을 통해 베드로의 이름이 온 교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이곳에서 갑자기 그의 이름을 언급해도 별 다른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같다. 한편 본 구절과 고전 9:5은 베드로가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음을 말해준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부인의 이름은 컨콜디아(Concordia)나, 또는 펄페튜아(Perpetua)였다고 한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그녀가 베드로보다 일찍이 순교당하였다고 전한다.
ㅇ중한 열병 - 문자적 의미로는 '높은 열병'(high fever)이다. 누가가  이런 표현을 사용한것으로 보아 그는 열병의 정도를 구별하는 데 있어서 고대의 의학적 관습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누가가 전문 의사였음을 차증해준다.
ㅇ붙들린지라(쉬네코메네) - 이 동사는 헬라 의학 저술에서 흔히 사용이되는 동사로 의학 전문 용어이며 '어려움을 겪다', '억눌리다'는 뜻인 '쉬네코'의 미완료 과거 수동태로서 열병이 계속되었음을 시사한다. 아마 시몬의 장모는 만성병(慢性病)에 시달린 듯하며 당시에는 매우 중태였던 것 같다. 베드로의 장모의 중병이 그 가정에 위기를 가져왔지만, 그 위기 상황은 또한 예수가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ㅇ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 원문상으로는 예수께서 환자의 머리 곁에 서서 허리를 굽혀 진단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는 주술적 행위나 무당의 무속적 행위에 의해서 질병을 치료하시는 것이 아니라 의학적 판단에 의거한 정확한 진단과 완전하고도 즉각적인 치료를 하신다.
ㅇ열병을 꾸짖으신대 - 본 구절을 두고서 혹자는 이 열병의 배후에는 악한 귀신이 자리한 것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늘과 홍해를 꾸짖으셨다고 해서(욥 26:11;시 106:9) 하늘과 홍해 뒤에 귀신의 영향력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열병을 꾸짖었다'는 표현은 열병을 내모는 행위 자체를 더욱 생생히 부각시키기 위해 열병을 의인화시키거나 아니면 누가가 예수의 말에 힘이 있었음을 강조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있다.
ㅇ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 만성 질병이었던 열병은  사람을  탈진(脫盡)시키고 매우 심약하게 만드나 환자는 치료 즉시 일어나 시중을 든다. 이는 예수의 치유 권능이 즉각적이고도 완전한 효력을 나타내었음을 잘 보여준다. 한편 병상에서 일어난 환자가 예수 일행을 위해 수종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우리의 영적 의무에도 적용해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새로이 영적 건강을 회복하게 된 사람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위한 봉사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해 질 적에 각색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ㅇ해질 적에 - 해가 지기를 기다려 환자들이 예수께 몰려든 것은 안식일 때문이었다. 안식일에는 어떠한 노동 행위도 용납되지 않았기에 환자를 운반하는 일이나 치료 행위를 행하는 것 역시 금지되어 있었다. 때문에 안식일에 발이 묶여 환자들은 예수께 올 수 없었던 것이다. 유대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녘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이다(창 2:2, 3;출 34:21).
ㅇ손을 얹으사 - 원래 안수란 첫째, 제사드리는자가 희생당할 동물에게 손을  얹음으로써 자신의 죄악을 전가시키거나(출 20:15, 19) 둘째, 신성모독자를 돌로 칠 때 신성모독의 말을 들은 증인들이 자신들에게 임한 더러워진 인격, 죄악등을 전가시키거나 (레 24:14) 셋째, 병을 고치는 역사를 행할 때 예수님 혹은 사도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그 병자들에게 전가시키거나(막 6:5;행28:8) 넷째, 사도들이 사도적인 권위로써 성령이 임하지 않은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안수함으로써 그들도 성령 안에서 한몸이 되었음을 외형적으로 나타내는(행 8:18, 19) 등의 이유에서 사용되었다. 결국 안수란 공통적으로 무엇인가를 전가시킨다는 의미가있다. 이중 본문에서는 세번째의 의미로 사용된바 이러한 예는 예수 뿐만 아니라 여러 사도들의 경우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므로본문에서 예수께서 안수하심으로 병을 고치신 행위는 어떤 마술적인 요법이 아니라 단지 그분의 능력이 그 환자에게 전가됨을 외형적으로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본 구절에서 예수께서 환자들에게 손을 얹은 것은 예수가 치유능력의 근원이라는 것과 그가 병자들 개개인에게 자상하신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4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ㅇ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 더러운 귀신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예수의 정체를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신앙고백적 차원이 아니며 다만 예수 앞에서 그들의 패배와 예수의 권능을 인정하는 말로 이해된다. 
한편 간악한 귀신들조차 예수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과 무리들은 그를 믿지 않았다는 사실은 서로 역설적(逆說的)인 대조를 이룬다. 복음서 기자들은 다양한 사람들, 심지어 불신자들이나 귀신들까지도 예수의 정체를 직접 혹은 간접으로 증거하고 있는데 이는 복음서들이 확고히 하고자 하는 사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지지해 주는 폭넓은 증거 구실을 한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분명히 별개의 사실임을 알 수 있다.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ㅇ한적한 곳에 가시니 - 평행 구절 막 1:35에서는 예수께서 아직 동이 트기 전에 기도하셨다고 전한다. 
예수께서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시는 모습은 단순히 쉽게 스쳐 지나가기 쉬운 장면이지만 여기에 예수의 사역의 비결이있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눈여겨 보지않았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정작 혼신의 힘을 다하여 기도해야 할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의 늪으로 빠져들고 말았다(22:39-46). 예수는 언제나 기도를 하며 자신의 사역을 준비하고 하나님과의 다함없는 교제를 나누었을 것이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ㅇ하나님의 나라 - 이는 예수께서 전하신 말씀의 핵심적인 주제이다(8:1;9:2).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죄인들을 흑암의 세력으로부터 구해내어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시기 위함이었다(골 1:13).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 문제를 해결하고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속한 것으로 오해함으로써 왕이신 예수께 대해서도 오해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 세상을 초월하여 존재하며 예수의 사역이 있는 곳에 함께 있었다(마 12:28).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의 통치가 미치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막 1:15 주제 강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참조하라.
ㅇ전하여야 하리니 - '...해야 한다'(데이)는 말은 예수 사역의 필연성과 긴박성을 강조하기 위해 누차 사용되었다(2:49;13:33;24:7, 26, 44).
44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ㅇ갈릴리(테스유다이아스) - 본 구절은 학자들 간에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 이는 사본에 따라서 각각 '갈릴리'나 또는 '유대'로 표기되고 있기 때문인데 특히 '유대'라고 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본문이 계속해서 예수의 갈릴리 사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NIV 난외(欄外)에서는 '유대인들의 땅'(the land of the Jews)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누가가 의도하고자 했던 것을 전달해 주려는 것 같다. 즉 '땅'(land)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의 고향인 팔레스틴 전부를 의미하는 말로 전통적으로 생각되었다. 누가도 역시 이런 의미에서 '유대'(Judea)라는 말을 사용했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런 광의(廣義)에서 '유대'라는 말을 쓰면 그 속에서 갈릴리가 자연스럽게 포함되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 않는 셈이다. 
어쨌든 예수의 이 첫번째 전도 여행 기간은 대략 4, 5개월 정도로 추측된다. 또한 당시 갈릴리 지방에는 15,000명 이상의 주민이 거주하는 큰 마을이 200개 정도나 있었고 전체 인구수는 3백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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