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07.13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시26.인자JC.단련.완전온전순전무흠결백성실.주임재앞에서.코람데오..as12.기도24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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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26.다윗의 시===시1편암송!![결코되었다함 없사오니..]...내주의보혈은186. [누가주를따라459][주와같이길가는것430]..주품에..살피소서오늘내마음을..나의입술의모든말과.내주님없이는못살아.날마다숨쉬는순간마다. 두손들고찬양합니다.


@@점흠티주름 하나 없는 양심의 영적거울(하나님의 어떠하심,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조성되고 새겨진)에 거듭난 바 자신을 비추어보아 회개함 = 손과 발을 씻음 

....사랑받기에  합당하신 분, 하나님께  일편단심의 믿음으로 나아가, 직관적 영적 민감성 (맑고 밝고 가볍고 명료함, 고요하고 안정됨,  늘 새롭고 기이하고 놀라운  황홀하고 매혹적인  안아주심 안의 부드럽고 달콤상냥 다정다감, 흐뭇하고 기쁘며 사랑스러움, 그 평안) 따라 교통하며 섬김-거함-누림-맛봄-감격-감사-경배함@@


*1.내가 나의 완전함에(integrity..정직함...톰:완전무결성실)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마아드...비틀거리다/흔들리다/요동-실족하다.waver-slip)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rely on..믿음...바타흐,신뢰/의지/확고부동/견고하다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입증-변호하다, 오늘!!..샤파트,,재판/판결하다, 다스리다,통치하다)

*2.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examine..바한..검사/시험/입증하다) 시험하사(try..나사 : 시험하다) 내 뜻(킬야..mind,콩팥=심중/중심/속마음)과 내 양심을(심령.heart.. 레브.속사람..마음/심령-정신/이해력-의지) 단련하소서(test..차라프..정련/정제/연단하다)

*3.주의 인자하심이(헤세드)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에메트) 중에 행하여

*4.허망한(샤우...공허/허무한, 헛되고 거짓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알람..[[본뜻을]감추다..위선적인)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5.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6.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닉카욘) 손을 씻고(라하츠..씻다/목욕하다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

*7.감사의(토다) 소리를 들려 주고(샤마)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사파르)

*8.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아헤브..사랑하다/좋아하다)

*9.내 영혼을(네페쉬) 죄인과(핫타)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10.그들의 손에 사악함이(짐마)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 뇌물이(샤하드) 가득하오나

*11.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파다..구속/속량/구원하다)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하난...긍휼히여기다.자비/호의베풀다)

*12.내 발이 평탄한(미쇼르..평지/평원, 올곧고 정직함)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바라크)

-------[[AMP]]------

Protestation of Integrity and Prayer for Protection. A Psalm of David. 26

1 Vindicate me, O Lord, for I have walked in my integrity; I have [relied on and] trusted [confidently] in the Lord without wavering and I shall not slip.

2 Examine me, O Lord, and try me; Test my heart and my mind.

3 For Your lovingkindness is before my eyes, And I have walked [faithfully] in Your truth.

4 I do not sit with deceitful or unethical or worthless men, Nor seek companionship with pretenders (self-righteous hypocrites).

5 I hate the company of evildoers, And will not sit with the wicked.

6 I will wash my hands in innocence, And I will go about Your altar, O Lord,

7 That I may proclaim with the voice of thanksgiving And declare all Your wonders.

8 O Lord, I love the habitation of Your house  And the place where Your glory dwells.

9 Do not sweep my soul away with sinners, Nor [sweep away] my life with men of bloodshed,

10 In whose hands is a wicked scheme, And whose right hand is full of bribes.

11 But as for me, I shall walk in my integrity; Redeem me and be merciful and gracious to me.

12  My foot stands on a level place; In the congregations I will bless the Lord.

--------NKJV--------

1.Vindicate me, O Lord, For I have walked in my integrity. I have also trusted in the Lord; I shall not slip.

2 Examine me, O Lord, and [a]prove me; Try my mind and my heart.

3 For Your lovingkindness is before my eyes, And I have walked in Your truth.

4 I have not sat with idolatrous mortals, Nor will I go in with hypocrites.

5 I have hated the assembly of evildoers, And will not sit with the wicked.

6 I will wash my hands in innocence; So I will go about Your altar, O Lord,

7 That I may proclaim with the voice of thanksgiving, And tell of all Your wondrous works.

8 Lord, I have loved the habitation of Your house, And the place [b]where Your glory dwells.

9 Do[c] not gather my soul with sinners, Nor my life with bloodthirsty men,

10 In whose hands is a sinister scheme, And whose right hand is full of bribes.

11 But as for me, I will walk in my integrity; Redeem me and be merciful to me.

12 My foot stands in an even place; In the congregations I will bless the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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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26.[개요]

경건한 다윗은 이 시편에서 자신을 엄숙한 법정의 피고석에 세우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앞에서 그의 나라 이스라엘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앞에서 그 자신의 양심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이자리에서 자신의 완전함을 살펴 고려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으며(1-2),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진술하고 있다.

1.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에 대한 끊임없는 주시(3). 

2. 죄와 죄인들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4-5). 

3. 하나님의 임재의식에 대한 신실한 사모와 관심(6-8). 자신의 완전함을 증명하고 난 후,     

(1) 그는 악인의 마땅한 파멸을 호소하고 있다(9-10).....   

(2) 자신의 완전함을 굳게 지키려는 결의와 하나님께 대한 소망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 그 자신을 완전히 맡기고 있다(11-12).

바로 이 시편을 노래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 위해 마땅히 해야할 바는 무엇이며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를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가르치며 권면해야 한다. 

다윗과 같이 주님의 전적인 임마누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사는, 이런 자세를 끝까지 견지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양심을 편하게 하고 거기서 동일한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박식한 아미랄두스(Amyraldus)는, 이 시편은 다윗이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예언의 영에 의해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시사하고 있다. 즉 다윗이 그리스도의 흠 없는 결백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은 충분한, 그리고 현저한 진실이었으며, 그것은 오직 그에 대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

따라서 우리는 이 시편을 노래함에 있어서 이를 그리스도의 어떠함에 적용시킬 수 있으며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된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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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깊은 호소(시 26:1-5)

다윗이 이 시편을 사울과 그의 무리들에게 핍박당했을 때 지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사울과 그의 무리는 그들의 부당한 분노를 위장하기 위해 그를 매우 악한 자로 거짓 모함해서 허위로 그럴듯한 구실을 만들어 덮어씌웠고, 많은 중죄와 경범죄로 그를 그릇되게 정죄했고, 그를 곯리기 위해 들짐승의 가죽까지 그에게 입히기도 했다. 

보라, 어떤 한 사람이 스스로를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돌아보고 자신이 결백하다고 자인하더라도, 자신의 결백 그 자체는 외부로부터 날아드는 비방의 화살로부터 양심을 지켜줄 수는 있을지라도 세상의 평판까지 지켜주지는 못한다. 

여기에서 그는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당하셨고, 그의 추종자들도 모든 악으로부터 그릇되게 비방당하리라는 것을 예고하셨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고 있다. 

이런 경우에 다윗이 어떻게 행하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Ⅰ. 그는 하나님의 의로운 판결에 호소하고 있다(1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나와 나의 고소자들을, 박해자와 불쌍한 죄수를 판단하소서. 나를 영예롭게 구출하시고, 나를 그릇되게 고소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소서.” 

이스라엘의 최고 재판장이었던 사울이 그의 대적이었으므로 사울과 그의 논쟁에서 그가 호소할 수 있는 자는 하나님밖에 없었다. 그가 하나님의 감정을 상하게 해드린 것에 대해 그는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143:2). 내 허물을 기억지 마소서(25:7)” 하고 간구하면서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사울의 감정을 상하게 한 것에 관해서는 43편 1절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판단에 호소하나 자신을 위해 판단해 주실 것을 요청하고 있다.

또는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그는 죄에 대한 책망을 스스로 정당화할 수 없다. 자신의 죄악이 중대해 하나님께서 무한하신 긍휼로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면 멸망하리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위선에 대한 책망에 관해서는 그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고, 은혜의 언약 방침에 따라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할 수 있는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기를 바랄 수 있다. 거룩한 욥도 그가 죄를 범한 것을 시인하면서도 자신의 완전함을 굳게 지키고 있다. 

억울하게 비난당하는 자들에게는 조만간에 그들의 결백을 밝혀주실 의로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위로가 되며, 믿음에 진실한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성실을 목격하고 계신다는 사실이 위로가 된다.

Ⅱ. 그는 하나님의 정확한 조사를 부탁하고 있다(2절). “여호와여”, 금이 정량인가를 달아보듯이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소서.” 

하나님은 각 사람의 진실된 성품을 알고 계신다. 왜냐하면 그는 마음의 생각과 뜻을 아시고 모든 위장까지도 꿰뚫어보시기 때문이다. 

다윗은 “여호와여, 나를 살피소서” 하고 기도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아시는 것을 매우 기뻐했으며, 하나님께서 본래의 그를 발견하시고 온 세상에 드러내실 것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하나님께 대한 그의 헌신과 왕에 대한 그의 충성이(그는 이 두 가지 면에서 위선자로 의심받고 있었다) 매우 진실된 것이었으므로, 그는 누구나 그 마음을 뚫어볼 수 있도록 그의 마음에 유리문이 있기를 바랐다.

Ⅲ. 그는 그의 성실함을 엄숙히 표명하고 있다(1절).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따라서 나의 이야기는 내 고백과 일치하고, 그 이야기의 한 부분은 바로 고백의 한 부분이 되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우리가 우리의 완전함에 행했음을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말이 꾸밈없고 경건한 성실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우리가 입증할 수 없는 한 우리의 완전함을 자랑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는 여기에서 자신의 완전함에 대해 여러 가지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그가 오명을 벗게 되리라는 확신과(“그러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그를 그 높은 위에서 떨어뜨리고, 그의 믿음을 흔들리게 하며, 그의 이름을 더럽히고, 그가 면류관을 쓰는 것을 막으려고 모의하는 자들이(62:4) 이기지 못하게 되리라는 확신과 함께 여호와를 그의 의로우신 재판장으로 의지하도록 격려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의로운 송사를 옹호하시고 변호해 주실 것이다. 믿음에 성실한 자들은 하나님께 의지해 요동치 않을 것이다. 즉 그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1. 그는 하나님과 그의 은혜를 항상 주시했다(3절).

(1)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그의 목적과 으뜸 되는 선으로 지향했다.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우리가 믿음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원칙에서, 그를 모든 존재의 최고자와 가장 훌륭한 친구와 은인으로 여기는 그에 대한 선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리고 우리에게 특별히 선하심을 베푸신다는 것을 평생 동안 체험해 온 것에 대한 감사함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성실함의 좋은 증거가 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우리의 귀감으로서 우리 목전에 두고, “열심으로 선을 행하는” 자로서(벧전 3:13) 그것을 따르려 한다면─우리가 그것을 우리 의무에 대한 큰 약속과 격려로서 우리 목전에 두고, 하나님의 은총을 빼앗길 일을 행함을 두려워하고 온힘을 기울여 그의 사랑 안에 거하려 한다면─이것은 우리의 완전함에 대한 좋은 증거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보존하려 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2)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규범으로 삼아 그것으로 스스로를 다스렸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였나이다. 즉 주의 법도대로 행하였나이다. 이는 주의 법도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입각한 그의 진리와 법도대로 살아가는 자들은 그의 인자하심의 혜택을 기대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그가 선함과 인자함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진리와 성실함에 관한 면에서도 하나님의 본을 따랐다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손들로서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은 분명히 올바르게 행한다.

2. 그는 흑암의 헛된 일들이나 그런 일을 하는 자들과는 교제하지 않았다(4-5절). 

이것에 의해, 그가 왕의 충성된 신하로서 그의 정부에 불만을 품고 있는 자들과는, 즉 “그를 멸시한 벨리알의 아들들”(삼상 10:27)과는 결코 사귀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그는 그들의 음모에 가담하거나 불의를 계획하는 자들과 손을 잡지 않았다. 또한 마음으로 왕을 저주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그의 충성의 증거였으며, 믿음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거나 믿음의 권세에 대해 공공연한 대적이 되고 그릇된 친구들이 되는 자들과는 결코 사귀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나쁜 동료들을 피하는 데 큰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우리의 무죄함을 나타내는 좋은 증거가 되며, 그것을 고수하는 좋은 방법이 된다.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보자.

(1) 이런 그의 확인은 그가 여지껏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음을 회고하고, 또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리라 함을 예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내가 저희와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저희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선한 행실이 하나님의 힘 가운데 그것을 끝까지 지키고 취소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수반한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 완전함의 증거가 된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우리의 선한 결심으로 인해 우리의 선한 행실이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다면, 우리는 그 사실에서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다.

(2) 그는 악한 자들뿐만 아니라 허망한 자들의 무리도 멀리했다. 

그들은 환락과 쾌락에 완전히 탐닉된 자들로서 견실하거나 신실된 면은 조금도 갖고 있지 않은 자들이었다. 

선한 자는 철저한 사악함뿐만 아니라, 허망함에 대한 감염을 막아낼 준비도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무리들은 그 어떤 사람들에게보다도 선한 자에게 더욱 해롭다.

(3) 간사한 자들의 무리는 그 어느 것과 마찬가지로 위험하므로, 경건할 뿐만 아니라 신중하게 그들을 피해야 한다. 

행악자들은 함정으로 유혹하고자 생각하는 자들에게 우정을 가장하고 자신의 거짓됨을 숨긴다. “그들이 교묘히 말할지라도 그들을 믿지 말라.”

(4) 때로 그가 악한 자들의 무리 속에 있는 것을 피할 수 없을지라도 그는 “저희와 동행치” 아니하려 했다. 

그런 자들을 그의 동료로 택하거나 그들과 사귀고 대화할 기회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가 우연히 그들과 마주친 적은 있었을지라도 약속 아래 동행하려 하지는 않았다. 혹은 그들과 우연히 한 모임에 있었을지라도 그들과 같이 앉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오래 머물러 있으려 하지도 않았다. 업무상 필요한 이상으로 그 무리 가운데 있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은 자”들과(1:1) 합세하지 않았고, 그들처럼 말하거나 행하지도 않았다. 또한 그들과 함께 해를 끼칠 수단이나 방법을 꾀하지 않았고, 또한 그들과 함께 심판대에 앉아 의로운 자들을 정죄하지도 않았다.

(5) 우리는 우리의 행실에서 악한 무리들을 피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원칙과 마음에서도 그것을 미워해야 한다. 

다윗은 여기에서 “내가 그것을 피했나이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내가 그것을 미워하였나이다”(139:22) 하고도 말하고 있다.

(6) 행악자의 모임, 그 집단, 그들의 공모는 선한 백성들이 특별히 미워하는 것이다. 

“나는 악인의 회중(ecclesiam malignantium)을 미워해 왔습니다.” 통속 라틴어에서는 이렇게 풀이해 놓고 있다. 

선한 사람들은 협력해 서로를 더 선하게 만들고 선을 더 많이 행할 수 있게 되는 반면에, 악한 자는 도당을 만듦으로써 서로를 더 나쁘게 만들고 더욱 큰 해를 끼친다.

이 모든 일에서 다윗은, 비록 죄인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선을 행하기 위해 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먹었을지라도 거룩하고 악의가 없으며 더럽혀지지는 않았던, 

또한 죄인들과는, 특히 위선자들인 바리새인들과는 분리되었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고 있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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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의식 가운데 있는 기쁨(시 26:6-12)

Ⅰ. 다윗은 그의 완전함을 더욱 증거하는 것으로서 그가 하나님의 규례를 진심으로 사모했던 것과 그에 대해 꾸준한 관심을 기울여온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즐거움을 얻었던 것을 언급하고 있다. 

사곡한 자들과 위선자들도, 교만한 바리새인들이 회개하는 세리와 함께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갔던 것과 같이 실제로 하나님의 규례를 행하는 모습으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6-8절), 우리가 그것을 수행한다면 성실함을 나타내는 좋은 표지가 될 것이다.

1. 그는 거룩한 규례를 준비하는 데 매우 배려 깊었고 성실했다. “내가 무죄함으로 손을 씻으리이다.” 

그는 죄인들의 모임을 멀리했을 뿐만 아니라, 죄의 더러움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켰다. 그리고 그의 눈은 하나님의 제단을 두루 다니는 자들 가운데 두었다. 

“나는 씻고, 그리고 나서 제단을 두루 다니겠나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내가 환영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후에야 먹고”(고전 11:28), 그리하여 준비하게 되는 내용과 같다. 이것은 다음의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1) 습관적인 준비. 

“내가 무죄함으로 손을 씻으리이다. 즉 내가 모든 죄를 경계하고, 양심을 더럽히고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그 죽은 일들로부터 내 양심을 깨끗하게 지키겠나이다”(24:3-4 참조).

(2) 실제적인 준비. 

이것은 제사장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 씻는 규례를 시사하고 있다(출 30:20-21). 다윗은 제사장은 아니었을지라도, 모든 경배자들이 그러해야 하는 것과 같이, 제사장들이 명령을 받고 있는 그 그림자의 실체를 보고자 했다. 

거룩한 규례를 준비함에 우리는 부정이나 사곡함에 대한 책망으로부터 우리를 깨끗이 하고, 그것에 대한 우리의 결백함을 표명할(그것은 “손을 씻는” 것으로써 의미되고 있다...신 21:6)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회개를 새롭게 함으로써, 그리고 양심을 깨끗이 하고 평정케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보혈에 새롭게 의지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지닌 죄악의 오점을 제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씻음을 받는(즉 의롭게 된 상태에 있는) 자는 이처럼 “발을 씻고”(요 13:10), 손을 씻을 필요가 있다. 즉 무죄함으로 그들 자신을 씻을 필요가 있다.... 회개하는 자는 거의 무죄하다(pene innocens)..... 그리고 용서받는 자는 지극히 무죄하므로 그의 죄가 그에게 불리하도록 언급되지 않을 것이다.

2. 그는 그 의식에 매우 근면했고 정중하게 참가했다. 

“내가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리이다” 하는 말은 제사장들의 관례를 시사하고 있다. 제사장은 제물이 바쳐지는 동안 제단을 두루 돌아다녔고, 마찬가지로 제물을 바친 자도 어느 정도 떨어져 그렇게 했을 것인데, 이것은 행해지는 것을 열심히 주목하고 봉사를 충실하게 수행함을 암시하고 있다. “내가 두루 다니리이다. 내가 그것을 행하는 자들 가운데, 그들이 가장 많이 모인 가운데 있으리이다.” 

존귀한 자며, 사업가이며, 용사인 다윗은 군중과 함께 하나님의 제단에 참여하는 것이 그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이라고 생각지 않았고, 그 규례의 참석을 위해 시간을 낼 수 있었다.

(1)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의 은총에 전념하며 틀림없이 하나님의 제단을 섬길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제단이시다. 그러나 그 제단은 유대인들이 먹었던 유대 교회의 제단과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먹으며 그로 말미암아 “사는” 제단이다(히 13:10).

(2) 하나님의 제단을 두루 다니는 것을 보는 것과 그것을 두루 다니는 자들 가운데 있는 우리 자신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3. 하나님의 규례에 참여함에,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삼았고 그에 대한 감사의 찬미와 숭배에 전념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는 곳으로서(8절) 그 경배하는 장소를 주목했다. 따라서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을, 하나님의 모든 기이한 일들에 대한 감사의 소리를 널리 알리는 것을 자기의 일로 삼았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일들은 우리의 감사를 요구하는 것으로서 모두 기이한 일이며, 그것은 우리의 경탄을 요한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를 찬미하도록 촉구하기 위해 그것을 알리고 그것에 대해 말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깨달은 자로서 감사의 소리로 그것을 행해야 하며,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총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정해야 한다.

4. 그는 기쁨을 갖고 하나님과 그의 제도에 대한 참된 애정에서 나온 원칙에 의해 이것을 행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는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 

“여호와여, 주는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즉 주의 백성들 가운데 임하심을 나타내시고 그들의 경의를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성막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아시나이다”(8절). 

다윗은 때로 핍박으로 인해 우상 숭배자들의 나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는 일을 방해받았다. 

그에게 그런 굴레를 씌워놓은 핍박자들은 그것을 그의 죄로 책망했을 것이다(삼상 20:27 참조). 그러나 그는 “여호와여, 비록 내가 주의 집에 거할 수 없다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사랑합니다. 나의 마음은 그곳에 있으며 내가 그곳에 있지 못하다는 사실은 나를 매우 괴롭히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식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 의식 가운데에서 그가 자신을 나타내시므로 그들은 그를 영화롭게 할 기회를 얻는다. “따라서” 그들은 그것을 사랑한다. 

우리 주 예수는 그의 아버지의 영광을 사랑했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을 그의 일로 삼았다. 그는 그의 집에, 사람들 가운데 있는 그의 교회에 거하는 것을 사랑하셨고, 그의 집을 짓고 봉헌하는 것을 사랑하셨으며, 또 그것을 위해 그 자신을 바쳤다.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사랑하고 그에게 접근하는 것을 기뻐하는 자들은 그것이 끊임없는 즐거움이며, 그들의 완전함에 대한 충분한 증거이고, 그들의 끝없는 지복에 대한 충분한 증거임을 발견한다.

Ⅱ. 다윗은 그의 완전함을 증명한 후에 그가 악인의 운명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나님을 향한 겸손한 확신을 갖고(이런 자들은 마음으로 자기를 정죄하지 않는다) 진지하게 간구하고 있다(9-10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거두지 마소서.”

1. 다윗은 여기에서 이 죄인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는 이들이 비참한 상태에 있는 것으로서, 이 세상에 있는 그의 어느 대적에게도 그보다 더 나쁜 상태를 바랄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비참한 상태에 있는 것으로서 묘사했다. 

“그들은 살인자로서 피를 갈구하며, 중대한 살인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재앙을 행하며 재앙은 항상 그들의 손에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사악한 행위에 의해 얻을지라도(그 오른손에 의를 악용해 얻은 뇌물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형편에 더 보탬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2. 그는 그들과 같은 운명을 갖는 것을 무서워하고 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결코 그들을 사랑하지도 또한 사귀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저 세상에서 그들과 운명을 같이하지 않게 되기를 믿음으로 간구할 수 있었다. 

우리 영혼은 그것을 주셨고 또다시 그것을 요구하실 하나님께로 되돌아갈 것이다(욥 34:14 참조). 

이 사실에 의해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그때에 성도들과 모일 것인가 아니면 죄인들과 함께 모일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고, 충실된 자의 영혼처럼 영원히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일 것인가(삼상 25:29), 아니면 불사르게 될 가라지의 단 속에 묶일 것인가(마 13:30)를 깊이 생각하게 된다.

죽음은 우리를 우리의 백성들에게로 모은다. 즉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 백성 된 자들에게, 우리가 택해 사귀는 자들에게, 우리가 더불어 운명을 같이하는 자들에게로 죽음은 우리를 모아들일 것이며, 우리는 그들과 함께 영원까지 운명을 같이해야 한다. 발람은 의로운 자로서 죽기를 원했다. 다윗은 악인으로서 죽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와 같이 이 두 사람과 같은 마음을 품고 그것에 따라 행하려 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행복할 것이다. 

쾌락을 추구하는 죄인들의 동료가 되지 않으려 하고,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으려 하지 않는 자들은, 그들의 비참함을 나누는 동료가 되지 않고, 그들의 떨림의 잔을 마시지 않게 되기를 믿음으로 간구할 수 있다.

Ⅲ. 다윗은 거룩하고 겸손한 확신을 갖고 그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에 의탁하고 있다(11-12절).

1.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그의 의무를 지키겠다는 것을 약속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하든간에,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다.” 

우리가 완전함을 따라 행했다는 양심의 증거가 우리에게 위안을 줄 때, 우리는 그것을 지속시키리라는 결심을 굳게 해야 한다.

2. 그는 그에게 그렇게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고, 위안을 줄 거룩한 은혜를 간구하고 있다.

 “나를 대적들의 손에서 구속하시고, 살아 있을 때나 죽어갈 때나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가 우리의 완전함에 대해 아무리 자신을 갖고 있더라도 우리는 계속 하나님의 긍휼과 그리스도께서 이루어놓으신 위대한 구원에 의지해야 하며, 그 혜택을 간구해야 한다.

3. 그는 자신의 확고함을 기뻐하고 있다.

 “내 발이 평탄한 데 섰사오니, 그곳에서 나는 흔들거리거나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경건함에 대한 확고한 결심을 가지고 있어 세상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자로서, 그리고 하나님과 그의 은혜 안에 있는 그의 위로가 확고해 세상의 고난과 환난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자로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4. 그는 계속 하나님을 찬미할 것을, 그리고 찬미할 만한 일을 마련하고 찬미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니며, 비록 그가 당시에 공적인 규례에서 추방당했을지라도 그의 백성들의 회중에서 하나님을 송축할 기회를 다시 가질 것을 그 자신에게 약속하고 있다. 행악의 회중을 미워하는 자들은 의인의 회중에 참가하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미할 것이다. 그리고 선한 무리들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런 일이 더 많을수록 더욱 좋으며, 더욱더 천국과 비슷해질 것이다.


===assum======

1) 복부초음파 표준영상의 범위=========================================

가) 일반(12개)...[늑간하] 담낭-BD-우간>우간-간정맥(우간횡)....[심와부횡](좌간횡)IVC-PV-좌간>....[심와부 종]..췌두-체-미부-좌간....[우계늑부사]담낭장축)-문맥-EHBD>(약간좌상방이동)EHBD-PV......[우늑간]우간+우신>(약간상방)우간+담낭>.....[좌늑간]좌신>(약간하방)비장-췌미-좌간 으로 순서를 진행

 

[간좌엽]의 종스캔(1), 간좌엽의 횡스캔(2)--, [간우엽]의 횡스캔(3)--, [간정맥]의 늑간하 스캔(4), 간우엽의 상부(5)<늑간하>--, 간우엽의 늑간스캔(6), 우간하부와 우측신장피질의 관상면 스캔(7), [담낭]의 장축(8)<늑교>, [비장]의 장축스캔(9), 췌장두부의 횡스캔(10), 췌장체부·미부의 횡스캔(11), 간외담관의 종스캔(12)<늑교상>,


나. 판독소견서 작성..1) 등록번호, 성명, 생년월일/나이, 성별, 검사명, 검사일시, 검사와 판독한 의사(면허번호), 검사소견, 결론, 판독일시, 의료기관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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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디스크 굽기 및 복사]...Sono와 연동되는 PC의 Sono View를 미리 띄우고, 환자등록후 저장, 단계별검사가 끝날때마다 저장해 주면 연동PC로 이동됨!!

1.Sono View 띄워진 창에서 OPEN선택(좌상부)-->C:선택(리스트 나옴)환자선택하면 하단부에 이미지 뜸--->이것은 D:로 BACK UP 

2.D:를 열어보면  나오게 되어 있는 ㅁ IMAGE DICOMDIR URANOS를 선택 

3.((이제는 E:에 공디스크를 넣은 후)) E:로 복사(먼저 자동포맷되고 진행됨)해 준 다음, D: 의 3가지항목을 반드시 지워주어야 한다... 


[이미지재전송방법]

1.전송받을 PC의 SonoViewPro On..

2.SONO on상태에서  Sono View버튼 누른다

3.SONO 모니터화면상 좌상단 OPEN을 누른다

4.전송할 환자의 ID 및 이름 입력해서 검색버튼 누른다(리스트 나옴)

5.리스트에서 환자선택 반전시킨후 SEND 버튼 클릭

6.하단에 이미지가 업로드되면 SONO선택후 SEND버튼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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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rayer24365.org/ 기도24365


@@오직 복음을 전하여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라”....“정부의 초법적 박해 이기는 건 복음으로의 회귀”...2020 국민미션포럼…‘위드(with) 코로나’ 시대, 초대교회 신앙으로 ‘리셋’하자(7/9)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 1:17-18)

==너희가 내 길을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치우치게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하여금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여 우리 조상들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말라기 2:9-10)

 

-----은혜의 하나님, 한국교회가 코로나19로 예전처럼 모여 예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소모임과 찬양까지 못 하게 된 비상상황을 돌아보아 주소서. 더군다나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이 제정되면 동성애를 죄라고 설교할 때 처벌받게 되는 사면초가에서 건져주시길 간구합니다. 주님, 국민미션포럼을 통해 몇몇 교회 목회자들이 십자가가 아닌 성공을 따랐음을 회개하며 십자가 복음으로 돌아서야 함을 외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때 한국교회가 이 땅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된 것을 직시하게 하시고, 성경대로 복음을 믿고 순종하지 않았음을 회개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한국교회가 초대교회처럼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여 목숨 다해 복음을 전하는 믿음의 증인으로 세워지길 기도합니다. 

===========

------[고전1:17-31]---------

*17.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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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전도 방법과 그 성공(고전 1:17-31)

Ⅰ. 바울이  복음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방법.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며 "(17절)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2:4) 

웅변의 유창함과 헬라인이 자랑하고 사도를 반대하는 자들이 전하는 철학적인 섬세한 말로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아니하며  진리의 힘이 아닌 예술의 힘으로 성공이 이루워지지 않도록, 십자가에서 못박힌 그리스도의 소박한 교리가 아니고 강한 웅변으로  복음이 전하여져서 십자가의 명예가 감소되지 않도록 바울은 복음을 전했다. 

바울은  가마리엘 문하에서 유대의 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함에 있어 서 그의 학문을 버렸다. 

그는 소박한 언어로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를 전했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간의 구주이며 구원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의 통치와 율법을  복종해야 함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진리는 기교적인 옷이 필요 없다. 

그것은 자체 의 빛으로 빛나며 신령한 권위로 세상에 퍼지며 인간의 도움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로  전파된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소박한 전도가 이방인의 웅변과 철학보다 더  능력이 있었다.

Ⅱ. 이런 전도의 여러 효과들. 

멸망하는 자에게는 그것은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18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23,24절).

1. 십자가의 도=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 거리낌이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들은 대망하는 메시야가 현세의 위대한 왕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므로 그렇게나 볼  모양이 없고 그렇게나 저주스러운  죽음을 한 사람을 그들의 왕이나  구속자로 고백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를 경멸하고 저주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고 십자가에서 죽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의 기적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 하였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22절)(마 12:28).

2.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를 비웃고 사도의  말을 경멸하였다. 그들은 지혜를 찾았다. 그들은 지혜와 독서를 한 사람이고 예술과  학문을 연마하고 여러세기 동안 지식과 학문의 근원이 되어왔다. 

십자가의 소박한 진리가 그들의 구미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허영을 채우지 못하고 호기심과 변론을 만족 시키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십자가를 경멸하였다.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는 자에  의하여 구원을 받으라고! 저주를 받고 비천하며 천한 생활을 하고 모욕적인 죽음을  당한 사람을 믿으라니 어처구니 없구나! 이것은 인간의 이성과 학문의 교만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교리를 받아들이고 그런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우매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교만과 고집 가운데서 멸망하도록 되어  있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십자가의 교리에 적용되고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신비를 알게 된 사람들임을 명심하자.

Ⅲ. 구약의 예언과 같이 인간의 지혜를 이긴 십자가의 승리를 볼 수 있다(사 19:14). 

" 내가 지혜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지혜있는 자가  어디 있으며 선비가 어디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 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19,20절). 

이 세상의 가치있는 학문이 그리스도교의 계시와 십자가의 영광스러운 승리에 의하여 부끄럽게 되고 무색케 되었다. 

이방인의 정치가와 철학자, 유대인의 랍비와 박사들, 자연의 비밀을 탐구하는 자들, 이들이  모두 난처하게 되었다. 

이 진리는 가장 훌륭한 정치가와 철학자와 유대인이나 헬라인 의 현학자들을 초월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할 때 그의 고유한 길을  택하셨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21절). 

세상의 뽐내는 학문이 이 세상을 하나님께 접근시키지 못한다. 그들의 지혜에도 불구하고 무지가 넘치고 있으며 불의가 차 있다. 

인간은 자기의 지식으로 뽐내나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세상적인 판단으로 보면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 하신다.

1. 전도의 내용이 세상적으로 현명한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우리가 살고 그의 저주를 통해서 우리가 축복을 받고 그의 정죄를 받아 우리가 의롭게  되는 바, 바로 그 믿음으로 사는 생활이, 자만으로 눈이 어둡고 편견과 이성과 철학의 교만으로 차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다.

2.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그들에게는 역시 어리석은 일이었다. 

지혜와 웅변으로 유명한 사람이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데 채용되지 않았다. 오히려 평범하고 무식한 것 같아보이는 몇 사람의 어부들이 부름을 받고 이 사명을 위하여 보내졌다. 

이들은 세계 만민을 제자로 삼도록 위임을 받았다. 이들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식을 세상에 전파할 그릇이었다. 

세상사람들이 보기에는 이들에게는 첫눈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 같은 장엄함과 숭고함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학문과 지혜로 뽐내는 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처지를 보고 복음을 경멸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롭다"(25절). 

허영의 사람들이 비난하는 신령한 행동의 방법이 그 들의 모든 학문과 지혜보다 더 진실하고 확고하며 성공적인 지혜를 가지고 있다. "형제들아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26절). 

기독교의 형편을 주시하라. 학문과 권력과 명예로운 가문의 사람들을 부르지 않았다. 우리의 종교는 외부적으로 볼  때 비천하고 연약하다.

(1) 세상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복음의 사역을 위하여 선택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철학자나 웅변가나 정치가나 부나 권력이나 흥미있는 사람을 선택하여 은혜와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시지 않았다. 

지혜와 학문이 많은 사람이 복음의 성공을 위하여 기여하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육으로 지혜있는 사람을 택하지 않았다. 능력있는 사람이나 귀족도 아니다. 인간들은 이들이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데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과 세상의 연약한 것들과 세상의 비천한 것들과 비천하고 낮은 신분과 교양이 없는 사람들을 택하여 복음의 전도자와 교회의 설립자로 만드신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좋은 판단자이 시기에 무슨 기구나 조치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적합 할까를 아신다.

(2) 유명한 신분이나 인격자가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 

전도자가  가난하고 미약했던 것같이 예수를 믿는 사람도 그러했다. 지혜있는 자나 권력이 있는 자나 귀족이 십자가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의 처음 기독교인은 연약하고 어리석고 비천했다. 

지식 수준이 낮고 재산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신령한 지혜가 얼마나 좋으며 복음의 성공을 위해서 좋은 길이 없던가!

Ⅳ. 모든 일이 얼마나 잘 되었나의 설명을 들어보자.

1. 인간의 교만과 허영을 타파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세상의 어리석은 일을 택하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다. 

학문이 없는 사람을 택하사 학문이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들며, 세상의 연약한 것들을 취하사 능력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비천한 계급과 환경에 있는 자들을 택하사 세상 임금의 권력과 권위를 부끄럽게 하였다.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을 폐하려 하시었다." 즉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이방인들을 회개시켜 유대인들의 피상적 제사를 폐지하고 유대인들이 저지른 세상을 경시하는 잘못을  꺽으셨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없는 것들로 말했다. 이리하여 에스더 위경에서 그  여자는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없는" 자들에게 왕권을 주시지 마옵소서(에스더 위경 14:11).  에스드라(Esdras)는 그의 외경에서 "이방인을 없는자들로"말한다(에스드라 후서 6:56, 57).

바울이 아브라함을 "하나님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이 하나님은 없는 것 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하였다. 

복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의 교 만을 꺾기에 알맞고 헬라인의 자랑하는 학문을 부끄럽게 하며 유대인들이 자기를 귀 하게 여기고 이방인들을 무시하는 제도를 멸하신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 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29절). 자랑할 여지가 없다. 

오직 성령!!, 신령한 지혜만이 구원의 방법을 계획한다. 신령한 은혜만이 그것을 계시하고 알린다. 이 두가지 점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이다. 교리와 발견이 인간의 모든 예술과 권위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펴져나갔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교만을 덮고 부끄럽게 하셨다. 복음의 섭리는 인간 을 겸손하게 하는 계획이다.

2.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기독교의 실체와 생활에는 능력과 영광이 있다.

비록 사역자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였으며 신자들이 비천한 계급이지만 주의 손이  전도자에게 함께 하였다. 그래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하였다. 

그리스도는 사역 자와 교인들에게 위대함과  영광이었다. 우리가 가진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구속함이 되셨다." 이것은 우리가 필요한 전부이다. 

우리의 지식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지혜가 되었다. 우리는 죄가 있고 정의에 복종해야  한다. 그는 우리의 의로움이 되고 우리의 구속과 희생이다. 우리는 타락하고 부패했다. 그는 우리의 거룩함이 되었다. 이것이 영적 생활의 원천이다. 

이 진리가 성령에 의하여 머리이신 그이로부터 각 지체에게 전달되었다. 우리는 속박되었으나 그는 우리의 구속이 되고 우리의 구주요 해방자다. 아래 점을 주시해 보자. ....그리스도가 의로 주어지는 어떠한 영혼도 거룩하게 된다. 죄의 능력에서 해방하지 않고서는 죄의 벌에서 벗어나게 하시지 않는다. 마침내 그리스도는 완전한 구속자가 되시고 영혼을 죄에서 해방하고 육체를 무덤의 속박에서  풀어 준다. 이 모든 계획은 "모든  육체가 주안에서 자랑하도록 함이다"(31절). ....주안에서 영광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겸손해야 하고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높임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전체의 계획이다.


========말2:1-9====

*1.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2.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라

*3.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4.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5.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6.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7.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거늘

*8.너희는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거스르게 하는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깨뜨렸느니라

*9.너희가 내 길을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치우치게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하여금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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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직(말 2:1-9)

앞 장에서 이야기된 것이 제사장들에게 지시되었다(1:6). 즉 "만군의 주가 네게 말하기를,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라는 것이었다. 

앞 장에서 그들에게 책망된 죄는, 저들이 제물에 대하여 범죄한 것이다. 그들은 백성들이 가져온 제물을 바침으로써 조금은 변명이 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들이 마땅이 그랬어야 할 만큼 선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제사장들의 잘못이 아니라, 백성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앞에서 책망된 타락에 대해 여기서는 근원을 캐고 있다. 

즉 제사장의 잘못은 백성들의 선생으로서, 율법의 해설자, 산 신탁으로서의 죄책이었다. 이것은 아직도 복음 사역자들의 손에 남아있는 역할의 일부이다(비록 제사장들처럼 그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아니지만, 율법에 있어서의 제사장들과 마찬가지로 목사와 교사로 택함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권면이 특별히 그들에게 관계되어 있다. 

만일 제사장들이 백성들에게 보다 참되고 합당하게 가르쳤더라면, 백성들은 보다 합당한 제물을 가져왔을 것이므로 그것은 제사장들의 탓으로 돌려야 한다. "너희 제사장들아! 순전히 너희에게 이르노라(1절). 즉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선하신 뜻과 그를 올바르게 섬기는 길을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했던 자들이니라." 교회의 치리자들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으며, 하나님께 대하여 책임이 있음을 알자. 명령을 내리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계명을 주고 있다. 아니, "너는 내가 너희에게 보낸 명령을 알게 할 것이다" (4절). 저들은 그 일에 대해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

1. 각성과 개혁을 위해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너희는 그 효험에 의해서 그 근원을 알게 될 것인데, 그 효험은 무엇을 행하는가에 따라서 오리라." 

----우리들 안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초래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일을 우리에게 하셨다는 것과 그것은 "하나님의 사자" 인 "말라기" 의 말이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일반적으로 모두에게가 아니라 특별히 우리에게 보내진 말씀임을 알게 되리라.

2. 또는 저들에게 선언된 경고가 성취됨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댓가로, 이 계명을 보낸 것을 너희가 알게 될 것이며, 그것은 헛된 것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는 것이다. 이러한 명령은 제사장들에게 내려진 것이다. 그들에게 보내졌음을 그들이 알아야 한다. 다음에서 그 책망의 특별한 방식을 살피자.

Ⅰ. 여기에 그 거룩한 백성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이 인용된다. 그 언약은 그들의 행위에 대한 위임이었으며, 그들의 영광의 특권이었다. "만군의 여호와" 가 저들에게 계명을 보낸 것은 이 언약을 세우기 위함이셨다(4절). 

----그의 언약은 "그가 명한 말씀" 이다(시 105:8). 여호와는 그 명령을 다시 세우기 위하여 당시에 선지자를 보내셨는데, 그 계명은 그들이 모독했다고 해서 삭제될 수 없는 것이었다. 레위족은 자기 족속(특별히 아론의 후손)에게 하나님이 베푸신 영광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내려 준 영광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라(5절). "내 언약은 생명과 평강이다." 온 이스라엘 족속과 맺은 특별한 언약 외에 단 한 족속과 맺은 제사직에 대한 언약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봉사해야 하는 언약이며, 그러한 조건 속에서 제사직의 모든 특권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이었다. 즉 아론의 족속은 제사장족이 되고, 하나님의 존귀와 예배를 위해 구별된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이 특별한 나라, 곧 "제사장의 민족" 이었던 것과 같다. 그들은 자기 나라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견지해야 했듯이 이스라엘은 열방에서 그의 이름을 견지해야 했다. 각기 정도는 다르나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게 되어 있었다(2절). 하나님은 비천한 종들인 그들과 언약하셨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역사를 행하게 하셨으며, 그 행위 속에서 그들을 받아들일 약속을 하셨다. 이것이 "생명과 평강의 언약" 이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영혼에 생명과 평화를 가져다 주는 신앙의 도움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즉 죽은 자에게는 생명을, 억눌린 자에게 화평을 가져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충실하고 양심적으로 자기의 직무를 행하는 제사장들에게는 이 언약이 생명과 평안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저들은 모든 악으로부터 안전한 평화를 누릴 것이며, 모든 선의 정수를 포함하는 생명을 누리게 되리라.

----여기서 말한 제사장직 언약은 영적인 제사장은 신자들 모두가 함께 누리는 참된 은혜의 언약이다. 그 언약은 생명과 화평의 언약이다. 그 언약은 영원한 화평과 영원한 생명을 모든 신자에게 확신케 하는 것이며, 이 세상과 장차 온 세상에까지 모든 행복을 보증하는 것이다.

이 언약은 레위족이 다른 족속과 구별되어지고, 다른 족속처럼 계수되지 아니할 때에, 레위 지파 전체와 맺은 것으로, 백성들 중에 택하여, "증거의 장막에 지목되었을 적에" (민 1:49, 50), 하나님께서 "레위인은 내 백성이 되리라" (민 3:12)고 말씀하신 그때에 맺어진 것이다. 그 언약은 아론과 맺은 것인데, 그당시 그와 그의 후손은 "제사장의 직능으로 여호와를 섬기라" 고 택함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론은 "여호와의 성도" 라고 불리웠다(출 28:1). 그 언약은 특별한 기회에 아론의 후손인 비느하스와 그 종족에게 맺어졌던 것이다(민 15:12, 13). 거기서도 제사직의 언약은 여기서처럼 "화평의 언약" 이라 불려졌다. 왜냐하면 그 언약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화평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생명과 평강의 엄청난 축복은 하나님께서 그와 레위와 아론과 비느하스에게 주신 언약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과 그 자손에게 생명과 평강을 약속하셨으며,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유익과 유용성을 위한 이런 은덕으로 그들에게 영광을 부여하신 것이다. 저들은 그리스도 자신이 하신 것처럼(시 68:18) 남에게 주기 위해 받을 것이다. 이제는 이 언약의 내용을 좀 더 살피자.

1. 언약의 근거. "두려움으로 그는 나를 경외하였다." "그리고 나의 이름 앞에서 두려워" 하였기 때문이다. 

---레위족은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떨림과 그 이름에 대한 존경심에서 남다른 모범을 보였다. 그들이 금송아지 숭배자에 대하여 아주 용감하게 대했을 때, 그 열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이러한 축복을 베푸셨으며, 그들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일에 초대하셨다(출 32:26). 비느하스도 역시 하나님의 법도와 두려움에서 열심을 다해 하나님을 섬겼다. 역병이 있게 되자, 그는 "시므리와 고스비니" 를 찔러 죽였다(시 106:30, 31).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만이 "생명과 평강" 의 언약의 유익을 바랄 수 있음을 명심하자. 하나님께 대해 열심의 증거를 보이는 자는 어렵지 않게 기독교 제사장 직분의 영광스러운 특권으로 보상될 것이다. 혹자는 이 일을 허락으로 생각지 않고, 조건으로 이해할 것이다. "그가 나를 두려워 할 것이라는 조건에서, 내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과 평강을 주셨다면, 그분은 우리가 그분 앞에서 경외하기를 원하신다.

2. 이 언약으로 인해서 제사장들에게 맡기어진 영광을 살펴보자(7절). 그들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使者)이며" 생명과 평강, 언약의 사자가 된 것이다. 언약의 중재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평화 협정을 주선하기 위해 고용된 심부름꾼, 혹은 대사로서이다. 

---제사장들은 살아 있는 신탁에 따라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백성들에게 대해서는 "하나님의 입" 이었다. 바로 이것이 레위인이 해야 했던 직무였다. 오직 하나님께 대한 열심으로 해서 레위인은 "그의 형제나 자식을 알지 아니했으므로, 저들은 야곱에게 하나님의 법도를 가르칠 것이다" (신 33:9, 10).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보냄을 받는 것과 사자로서 하나님의 종으로 고용된다는 것은 영광스런 일임을 주목하자. 이때부터 저들은 사자(천사)라는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학개는 "여호와의 사자" 로 불리웠다.

아래의 사항이 저들의 직무였다.

(1) 사역자의 직무는 무엇인가? "제사장은 지식을 입술에 간직해야" 하며, 그 지식을 백성들로부터 취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백성들에게 전해야 한다. 

---제사장은 반드시 지혜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일에 익숙치 못하고 그 일을 준비하지 못한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새 것과 옛 것을 창고에서 꺼내 놓는 훌륭한 청지기가 되기 위하여, 지혜를 쌓아야 하며, 쌓은 지식을 잊지 않고 지속시켜야 했다. 그들은 머리만이 아니라 입술에 지혜를 간직해야 하며, 간직할 뿐만 아니라, 준비하고 혀 끝에 간직하여, 경우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의 입에 전해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명철을 가진 자의 입술이 많은 사람을 지혜로 먹이는 것" 을 본다(잠 10:31, 21).

(2) 백성들의 의무는 무엇인가? "백성들은 제사장의 입술에서 율법을 구할 것이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사자인 제사장들의 말씀을 듣고, 청종할 뿐만 아니라, 그 말씀에 관해서 묻기도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 말씀을 더 잘 알게 되며, 그 말씀에 대한 오해를 미리 방지하게 되며, 고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여호와의 뜻이 무엇인지" 알며, 확실하고 분명하게 아는 데 깊이 관심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데 열심을 내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관해 물어야 한다. 즉 "주님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라고 말이다. 

---우리는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문제를 의논해야 할 뿐만 아니라 (" 율법과 증거에 대하여") 하나님의 사자에게 반드시 의뢰해야 한다. 우리가 육신과 재산의 일로 의사나 법률가와 의논하는 것처럼, 영혼의 문제는 하나님의 사자에게 가르침과 권면을 받기 원해야 한다.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법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자에게까지도 하나님의 법도를 의례히 알려 주고 하나님의 법을 알려고 하도록 해야 한다(잘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반대하는 사람에게도 가르쳐야 한다. 딤후 2:25). 들을 뿐만 아니라 질문하는 것도 저들의 의무이다. "파수꾼이여 밤이 어찌되었느냐?" "네가 물으려든, 물으라" (사 21:8, 11, 12 참조).

---백성들은 제사장의 입술에서 위안만을 찾을 것이 아니라, 반드시 거기에서 율법도 구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의무의 길에 서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의무가 위로의 통로임을 알게 될 것이다.

Ⅱ. 제사장의 직무에 있어서, 많은 선조들이 보여 준 기억할 만한 충성과 열심의 기념비가 있다. 

이것은 곧 이 같은 선례를 망각하고 그처럼 영광스러운 선조의 위험에서 타락하는 것은 저들의 죄가 그만큼 가중한 것임을 언급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에게 가까이 했던 자들에게 내렸던 하나님의 현존의 모든 증거를 취소하는 하나님이 의롭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제 경건한 제사장들이 얼마나 훌륭했는가를 살펴보자(6절). 그들이 밟아야 했을 그 발자취가 얼마나 훌륭했으며, 그들과 함께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 즉 그가 행한 바가 얼마나 위대한가 보자.

1. 그는 대단히 선량했다. 그는 성서 말씀에 강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그의 입에 진리의 법이 있어서," 그의 입에서 그 법을 묻는 자들에게 사용되었다. 

---그의 모든 율법 해설에는 다소간 진리의 법이 나타났다. 그가 말한 모든 것은 법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그 법으로 다른 사람을 치리했다. 그는 권위있는 자(그의 모든 말은 법이었다)처럼 말했고, 청렴결백한 지혜를 가진 사람처럼 말하였다. 그 말하는 것은 "진리의 법" 이었으며, 진리는 곧 법이었고, 사람들을 명령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진리로써 통치하신다. "진리의 법" 이 그의 입술에 있었다. 그의 견해는 곧 훌륭한 법이었다. "그의 입술에 부정한 것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만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거나, 자기 목적에 이용하거나 자신을 즐겁게 하거나, 문의하러온 사람들을 기쁘게 하지 않았다. 언제나 율법이 말하는 것을 말했다. 그는, 랍비처럼 깨끗한 것을 불결하다 하고, 부정한 것을 깨끗하다고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은 그의 가르침과 같았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에게 이런 영예로운 증거(testimony)를 허락하신다. 그는 나와 함께 평화와 공평 가운데 걸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그와 함께 동행하였다. 그의 마음가짐과 생활의 면모는 그의 가르침과 고백에 일치했다. 그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살았으며, 그를 찬양하는 것을 자기의 끊임없는 관심으로 삼았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걷도록 택함받았던 제사장답게 살았다(삼상 2:30). 그의 말은 조용하였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겸손하였으며," 자비심을 일으키는 자였으며, 사람들 중에 모범이 되었다. 그는 화평 중에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스스로 화평할 수 있었고, 또 화평케 하는 자이었다. 또한 그의 말은 정직하였다. 그는 어떠한 잘못도 행하지 않았으며 모든 사람들이 해야 할 양심의 의무를 일깨웠다. 그는 공평과 정직함으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였다. 우리가 평화를 위해서 평등의 법칙을 어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정의와 일치하는 한,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 

---"위로부터 온 지혜는 먼저 온전하고, 그 다음에 화평케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 가운데서 제사장들은 양떼의 모범이 되도록 화평과 공평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에 관심해야 한다.

2. 그가 무슨 선한 일을 했는가를 보자. 그는 그 직무에 대한 목적을 수행하였다. 즉 그는 "많은 사람을 부정함에서 돌이키게 했다." 

---그는 선한 일을 하는 것을 자기의 직무로 삼았으며, 하나님은 그의 놀라운 성공으로 그의 수고에 면류관을 씌우셨다. 그는 많은 영혼을 사방으로부터 구하는 일에 도왔다. 하늘에는 일찍이 그들이 알고 있었던 많은 보화가 있다. 목회자는 죄인의 회개를 위하여 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한편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지닌 자 중에서도 회개하는 일이 필요하며, 죄악에서 돌아서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저들이 이런 일에 도구로서 사용된다면, 이 일을 영광으로 여겨야 하며, 자기의 수고에 대한 후한 보답으로 여겨야 한다. 인간을 자기의 은혜로서 죄에서 돌이킬 수 있는 자는 오직 하나님뿐이다.

Ⅲ. 당시의 제사장들에게 내린 준엄한 책망이 있다. 그들은 자기들 앞에 있던 법과 모범을 어겼다. 그들의 많은 구체적 죄목들은 전 장(前章)에서 보았다. 우리는 수많은 타락이 제사장들의 불충실과 부주의에 의해서 있었고, 안식일 모독, 하나님의 전(殿)에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것, 잡혼 등이 당시에 유대 교회에로 기어 들어오게 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느 8장). 그들에게 내려진 책망이 일반적인 말로 나와 있다.

1. 저들은 법칙을 범하였다. "너희는 바른 길에서 떠났다" (8절). 

---너희는 하나님이 명한 바른 길에서 떠났으며, 경건한 선조들이 걸었던 길에서 떠나갔다. 직무를 맡은 자들이 백성들을 빗나가도록 인도할 때, 그것은 백성들에게 불행이다. "너희는 내 도를 지키지 아니했다. 너희 자신 지키지 아니하였을 뿐 아니라 내 백성들로 그것을 지키게 해야 될 직무를 행치 않았다" (9절)고 하였다.

2. 저들은 신뢰를 배신하였다. "너희는 레위의 언약을 범하였다. 

---언약의 큰 뜻을 거역했으며, 백성들을 좌절시켰다. 너희는 마치 너희 직무가 너희 자신을 살찌게 하며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서만 있으며, 결코 하나님의 영광이나 인간 영혼의 선함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닌 양,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것이 레위의 언약을 부패케 하는 것이다. 그 일은 직무의 목적을 악이용한 것이며, 통제해야 할 그런 육적인 세속 일을 하는 자들을 돕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은 언약의 유익을 상실케 되었으며, 저들 자신도 타락하게 되었다. 저들은 언약을 "헛된 것으로 만들었으며," 저들에게 물려 준 생명과 평화를 잃었다. 

---우리가 양심에 따라 살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세우신 약속을 이행하리라고 기대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저들이 책망받는 저들의 죄는 바로 "율법을 편벽되게" 했다는 것이다(9절). 저들에게 주어진 율법 가운데서 저들은 자기의 의무를 골라서 선택하곤 했다. 그들은 이렇듯 자기들의 기호에 따라 의무를 지키기도 하고 안지키기도 했다. 하나님께 대하여 올바른 마음을 소유한 자들은 "주님의 모든 계명을 존경하는" 반면에, 이것은 위선자의 소행이다.

---또는 그들은 율법을 백성들에게 전가시켰다. 여기서 그들은 "얼굴을 알았다" (원문은 그런 뜻이다). 저들은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저들은 원한이 있는 자에게는 협잡하고 자기와 안면이 있는 자에게는 친절히 대하고자 율법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적용하였다. 저들은 자기의 마음을 이끌게 하는 이해나 마음의 기울어짐에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는 날카롭게 대할 죄를 묵인했다. 

---하나님은 율법을 세움에 있어서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는다." 또 율법을 이행하지 않는 자에 대한 심판에서도 그러하다. 그분은 "가난한 자보다 부자를 더 눈여기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리나 교훈을 전함에 있어서 사람들의 외모를 본다면, 그 제사장과 사역자들은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다(딤전 5:21 참조).

3. 저들은 마땅히 구원했어야 했을 사람의 영혼에다 많은 해악을 끼쳤다. "너희가 많은 자들로 율법에 거치게 하였도다." 

---그것을 범함으로써 "율법에 빠졌" (난외의 주와 같이)을 뿐만 아니라, 가르침과 제사장들의 모범에서 용기를 얻어서, 고의로 "율법에서 넘어졌다." 마치 율법이 죄의 일꾼이 된 것이다. 이래서 "홉니와 비느하스" 저들의 사악함으로 인해서 "여호와의 희생 제물을 가증스럽게" 만들었다(삼상 2:17). 

---하나님의 율법이 "거침돌" 이 되며, 그리스도의 복음이 "죽음에 이르는 냄새" 가 되고, 그리스도 자신이 "걸림돌" 이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다. 사악한 생활을 하는 신앙인들 이상으로 이런 일에 더 이바지하는 것은 없다. 그런 자들 때문에 "신앙은 모두 장난이라" 는 말이 나오게 된다. 이것은 정말로 "걸림돌" 이다.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 이유는 없지만, "이런 죄를 짓게 하는 자들에게 화 있으라."

4. 저들이 섭리와 말씀으로 공히 징계에 놓였을 때도, 저들은 "듣지 않을 것이다." 즉 "유의하려 하지 않아서"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저들은 죄를 조금이라도 부끄러워하거나 슬퍼하지 않았기에, 저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진노는 저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였다. 우리가 마음에 간직하지 않으며 감동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우리가 듣는 말씀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없다. 

---"너희가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다." 회개와 개심으로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려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마음에 두어야 하며,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알려지는 모든 일을 찬미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려하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의 영예를 찬탈하는 일은 나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과 그를 영화롭게 하는 임무를 받은 사역자들이 하니님께 대항해 버티는 것은 더욱 사악한 일이다.

Ⅳ. 여기에 하니님께서 신성모독과 모욕을 일삼는 제사장들에게 내리신 심판의 기록이 있다.

1. 제사장들은 저들의 즐거움을 잃었다(2절). "나는 이미 네 복을 저주하였다." 

---제사장들은 그들의 일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얻지 못했으며, 선한 일을 하면서도 만족을 얻을 수 없었다. 저들은 제사장으로서 백성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기를 기원했으나, 하나님은 지금까지 "아멘" 이라 말하던 것을 저주로 바꾸셨다. 마치 발람의 저주를 축복으로 변하게 하셨던 것과 같다. 더럽혀진 백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도움을 받을 수가 없으며, 타락한 제사장들도 역시 백성에게 복을 빌어 줄 수가 없다. 그런 자들은 모두 그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된다. 저들은 보상받을 위로도 없다.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내린 축복을 저들이 그릇되이 씀으로서 복이 저주로 변하였기 때문이다. 저들은 저들에게 주어진 책망을 마음에 두지 않음으로써 저들 자신을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런 존재로 만들었다.

2. 저들은 저들의 신용을 잃었다(9절). "그러므로 나도 너희를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다." 

---저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는, 그도 저들을 귀하게 하셨고, 명성을 옹호해 주셨다. 저들이 "화평과 공평 가운데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의무를" 지키는 동안은, 저들이 백성들의 사랑과 존경심을 얻었다. 모든 사람이 그들에게 존경심과 가치를 부여해 주었다. 저들은 정말로 존경받는 사역자나 제사장의 모습을 하였다. 그러나 저들이 하나님의 법도를 버리고 레위의 언약을 더럽혔을 때는, 그로 인해서 일반 백성의 눈에도 비천하고 악하게 보였다. 사람들은 질서를 존중하면 할수록, 불경건한 자들을 더욱 미워하게 된다. 저들의 소행과 나쁜 행위가 이런 경향을 재촉한다. 하나님 자신은 그 사건 속에서 자기의 손길을 인정하시며, 그들 위에 내린 심판이 정당한 것이 되게 하실 뿐 아니라 그 심판의 목적도 달성하실 것이다. 저들은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그의 상과 과일을 더럽게 만들었다" (1:12). 그런고로 하나님은 정당하게도 저들을 경멸하셨고 저들을 더럽게 만드셨다. 저들이 스스로를 드러내 보였으므로, 하나님도 저들을 드러내 보이셨다. 죄가 어느 사람에게나 견책을 사지만, 제사장들에게는 특히 더하다. 더럽혀지고 사악하고 추한 제사장들은 이 땅 위에서 가장 비천한 짐승과도 같다.

Ⅴ. 여기에 그들에게 내려진 진노의 선고가 있다. 이 예언자는 이것부터 시작한다(2,3절). 

"만약 너희가 하나님을 마음에 둔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돌이켜지고 만사가 형통하지만, 너희가 사악한 길에 계속 머물면 운명의 소리를 들으리라. 너희 죄가 곧 너의 멸망이 되리라." 그러나 그것은 "만일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않으면" 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다.

1. 그러면, 저들은 하나님의 저주에로 떨어질 것이리라. "내가 네게 저주를 보내리라" 고 하셨다. 

---하나님의 진노는 기록한 말씀의 경고에 따라서 그들에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율법의 명령을 범하는 자는 자신을 율법의 저주 아래 두는 것임을 알자.

2. 제사장들처럼 부름받은 일이나 누리는 특권이 그들을 깨끗하게는 못하리라. 

---"나는 너의 복을 저주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자신이나 백성에게 복이 되지 아니할 것이다. 너희가 풍년을 맞을 때에는 역병이 일 것이며, 또 자손에게 역병이 될 것이다."

3. 저들이 11조를 냈던 땅의 열매도 저들에게는 위안이 되지 못하리라.

--- "보라! 나는 네가 뿌린 씨앗을 썩게 하리라. 네가 심은 곡식은 땅 속에서 썩을 것이며, 결코 다시 나오지 못하리라. 그 결과로 필요한 양식이 부족하게 되고, 기근을 당하리라. 그러므로 제단에 아무런 소제물도 가져오지 않을 것이요, 그래서 제사장들은 제단을 떠나리라." 또는 그들이 전한 말씀의 씨앗을 가리킬 수도 있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전한 가르침에 대해 축복을 거부하겠다고 위협하신다. 그러므로 저들의 수고는 헛되고 말 것이다. 마치 씨가 썩으면 농부의 수고가 헛되듯이 말이다. "저희는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 한 경고와도 상통한다(렘 23:32).

4. 하나님은 제사장과 그들의 예배를 거절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미워하고 싫어하시는 만큼 그들에게서 즐거움을 거두어 가실 것이다. "나는 네 얼굴에 똥을 뿌릴 것이다. 바로 엄숙한 제물의 똥을 뿌리리라." 하나님은 제사에 바쳐진 제물을 두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희생 제물의 기름을 기뻐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 똥을 그들의 얼굴에 뿌림으로써, 불쾌감을 나타내실 것이다. 사실은, 그가 "더 이상 쓸데없는 봉헌물을 내게 가져오지 말라. 분향이 내게는 가증스런 것이 되었도다" 고 말씀하셨을 때, 이미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를 얻으려고" 똥이라고 생각해야 할 신앙의 외적 행위에만 안주하는 자들은, 하나님께도 영접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의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수치와 당혹을 당하게 될 것이다. 

5. 마지막으로, 저들의 무서운 파멸이 모든 것의 끝장이 될 것이다. 

---"너희는 그것과 함께 제하여질 것이다" (3절). 그들은 희생 제물의 똥으로 뒤덮혀, 그것들과 함께 내버려질 것이다. 그때 청소부가 너희를 내다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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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8537, 톰) 완전함, 무결, 성실
톰(명남)은 타암(!m'T; , 8552)에서 유래했으며, '완전함 completeness, 청렴, 무결, 순결, 성실 integrity'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4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완전함, 충분함'. 사 47:9에서 베툼마는 '완전히(충분히)' 또는 '완전한(충분한) 정도로'를 의미한다. 욥 21:23에서 베에첼 툼모는 '매우 완전함으로(하여서)'를 의미한다.
(b)  '순진, 단순, 순결'. 삼하 15:11에서 '단순(히), 순진(하게)'을 의미한다. 왕상 22:34에서 '단순(히)' 즉 아무 결정한 목적 없이를 묘사한다.
(c)  '청념, 무결, 정직, 성실'. 창 20:5, 창 20:6, 왕상 9:4, 시 78:72, 시 101:2, 잠 13:6, 욥 4:6, 잠 10:9, 잠 19:1, 잠 20:7, 잠 28:6, 시 26:1, 잠 26:11, 잠 2:7, 시 25:21, 시 41:13, 시 7:8,  잠 10:29.(참조: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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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1980, 할라크) 가다, 오다, 걷다
할라크(동사)는 기본어근이며, '가다, 오다, 걷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00회 나오며, 다양한 문맥에서 그 문맥에 따라 '가다, 오다, 걷다, 떠나다, 나아가다, 계속하다, 지나가다, 행하다, 생활하다, 여행하다, (물이) 흐르다, 추방하다, 파괴시키다, 돌아다니다, 함께 가다, 교제하다' 등 여러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할라크는 특히 다음과 같은 용법들, 즉 명령적인 외침의 용법(창 37:13, 창 37:20, 창 19:32, 창 31:44), 다른 동사의 역할을 확대시키는 부정사로서의 용법(창 8:3, 창 8:5), 다른 동사의 역할을 구체화시키는 한정사로서의 용법(창 27:14, 창 50:18, 왕하 3:7, 사 2:3)에 주목해야 한다.
(b)  여러 종류의 '가는 행위'에 대한 구체적 적용은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뱀의 '기어 다님' creeping(창 3:14), 여우의 '노님' prowling(애 5:18), 배의 '항해' sailing(창 7:18), 물의 '흐름' flowing(창 2:14), 나팔 소리의 '커져 감' laying(출 19:19), 사람의 '걸어감' walking(출 14:29) 등이다. 다른 특별한 용법에서, 이 동사는 어떤 것의 끝을 의미하는데, 예를 들면, 비(아 2:11), 이슬(호 6:4), 바람(시 78:39), 슬픔(욥 16:6), 인간의 생명(창 15:2, 수 23:14) 등의 '끝'을 의미한다.
(c)  이 단어는 가상적인 신(시 115:7)에 대해 사용되기도 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적용되기도 한다. 비록 신현현에 대한 기사에서는 일반적으로 다른 동사들이 사용되지만 신현현의 문맥에서 분명하게 할라크가 사용된 경우가 적어도 한번은 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창 18:33). 아마도 창 3:8도 역시 신현현의 문맥일 수 있지만 그 분사는 '여호와 하나님' 보다는 콜(음성)에 연결되는 것 같으며, 이때 그 번역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그날 바람결에 동산 전역에 퍼져 가던(going)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 신인동형론적으로 이해할 때, 하나님은 구름 위를 걸으시거나(시 104:3) 하늘에서 걸으신다(욥 22:14). 보다 더 흔하고 더욱 중요한 것으로서, 할라크는 심판이나 축복(삼하 7:23, 시 80:2), 특히 광야 방황 동안에(예. 출 33:14, 출 13:21) 그의 백성에게 오시는 여호와께 사용된다. 후자의 문맥과 관련하여 새로운 출애굽(사 45:2)을 기억하라. 광야에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궤를 뒤따랐듯이 그들은 의식에서 그 뒤를 따른다(드물게 할라크로 표현됨; 참조: 수 3:6, 민 10:32-36).
(d)  배교는 그들이 다른 신이나 거짓 신을 '좇는다'(출 32:1, 렘 5:23)거나, 자기 자신의 악한 꾀(렘 7:24, 시 1:1)나 악한 마음(렘 11:8)을 추구하거나 어둠 속에 행하는 것으로(사 9:2 [H1]) 표현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한다(레 26:24). 진실로 경건한 자들은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른다(즉,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 왕상 3:14, 시 119:1 이하). 이 개념은 할라크 만으로도 나타낼 수 있다(체다코트, 사 33:15 등과 같이 단어 아하레와 함께 쓸 필요가 없다).
히트파엘형은 이와 관련하여 동작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산 사람들의 좋은 예로는 에녹, 노아, 아브라함 등이 있다(창 5:22, 창 6:9, 창 17:1).
(참조: L. J. Coppes;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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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3212, 얄라크) 가다, 오다, 걷다
얄라크(동사)는 기본어근이며, '가다 go, 오다 come, 걷다 walk'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050회 나온다.
얄라크는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인 '움직임'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 단어는 다양한 문맥에서 여러가지 의미(수 17:7도 포함)로 사용될 수 있다. 특히 다음과 같은 용법들, 즉 명령적인 외침의 용법(창 37:13, 창 37:20, 창 19:32, 창 31:44), 다른 동사의 역할을 확대시키는 부정사로서의 용법(창 8:3, 창 8:5, GKC, 113u를 보라), 다른 동사의 역할을 구체화시키는 한정사로서의 용법(창 27:14, 창 50:18, 왕하 3:7, 사 2:3)에 주목해야 한다.
여러 종류의 '가는 행위'에 대한 구체적 적용은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뱀의 '기어다님' creeping(창 3:14), 여우의 '노님' prowling(애 5:18), 배의 '항해' sailing(창 7:18), 물의 '흐름' flowing(창 2:14), 나팔 소리의 '커져감' llaying(출 19:19), 사람의 '걸어감' walking(출 14:29) 등이다. 다른 특별한 용법에서, 이 동사는 어떤 것의 끝을 의미하는데, 예를 들면, 비(아 2:11), 이슬(호 6:4), 바람(시 78:39), 슬픔(욥 16:6), 인간의 생명(창 15:2, 수 23:14) 등의 '끝'을 의미한다.
이 동사는 가상적인 신(시 115:7)에 대해 사용되기도 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적용되기도 한다. 비록 신현현에 대한 기사에서는 일반적으로 다른 동사들이 사용되지만(Frank Schnutenhaus, "Das Kommen und Erschinen im Alten Testament", ZAW 76:1-12), 신현현의 문맥에서 분명하게 얄라크가 사용된 경우가 적어도 한번은 있다(창 18:33). 아마도 창 3:8도 역시 신현현의 문맥일 수 있지만 그 분사는 '여호와 하나님'보다는 콜(qol: 음성)에 연결되는 것 같으며, 이 때 그 번역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그 날 바람결에 동산 전역에 퍼져 가던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 신인동형론적으로 이해할 때, 하나님은 구름 위를 걸으시거나(시 104:3) 하늘에서 걸으신다(욥 22:14).
보다 더 흔하고 더욱 중요한 것으로서, 얄라크는 심판이나 축복(삼하 7:23, 시 80:2), 특히 광야 방황 동안에(예: 출 33:14, 출 13:21) 그의 백성에게 오시는 여호와께 사용된다. 후자의 문맥과 관련하여 새로운 출애굽(사 45:2)을 기억하라. 광야에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궤를 뒤따랐듯이 그들은 의식에서 그 뒤를 따른다(드물게 얄라크로 표현됨. 참조, 수 3:6, 민 10:32-36).
배교는 그들이 다른 신이나 거짓 신을 '좇는다'(출 32:1, 렘 5:23)거나, 자기 자신의 악한 꾀(렘 7:24, 시 1:1)나 악한 마음(렘 11:8)을 추구하거나 어둠 속에 행하는 것으로(사 9:2) 표현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한다(레 26:24). 진실로 경건한 자들은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른다(즉,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 왕상 3:14, 시 119:1 이하). 이 개념은 얄라크만으로도 나타낼 수 있다(체다코트[사 33:15] 등과 같이 단어 아하레와 함께 쓸 필요가 없다). 히트파엘형은 이와 관련하여 동작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산 사람들의 좋은 예로는 에녹, 노아, 아브라함 등이 있다(창 5:22, 창 6:9, 창 17:1). (L. J. Coppes).(참조: BDB;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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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4571, 마아드) 실족하다, 비틀거리다, 흔들리다, 떨리다
마아드(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미끄러지다, 실족하다, 비틀거리다, 흔들리다, 떨리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7회 나오며, 칼형으로만 사용되었다.
마아드는 하나님을 믿는 확신의 결과로서 안전함을 묘사한다(실족하지 아니하는 것, 삼하 22:37, 시 18:37, 시 37:31).
욥은 재앙이 실족하는 자를 기다린다고 말한다(욥 12:5). 시 26:1에서 "요동치 아니하고"는 '비틀거리지 아니하고'가 더 좋다. 시편기자는 그의 원수들에 대해 그 허리가 떨리게(또는 흔들리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잠 25:19에서 "부러진 이와 위골될 발"을 언급한다. "위골된 발"은 '비틀거리거나 저는 발'을 가리킨다.(참조: BDB; KB;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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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f'B;(982, 바타흐) 믿다, 신뢰하다, 의지하다, 안심하다, 안전하다
바타흐(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믿다, 신뢰하다, 의지하다, 확신하다', 여기서 '안심하다, 염려 없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의 기본적인 개념은 '확고부동' firmness이나 '견고함' solidity과 관련있는 것 같다. 어쨌든 히브리어에서 바타흐는 신뢰할 만한 것이나 사람이 있다는데서 오는 행복감과 안도감을 나타낸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20회 나오며, 칼형과 히필형으로만 사용되었다.
70인역본이 바타흐를 결코 피스튜오(4100: ~을 믿다 believe in)로 번역하지 않고 엘피조(1679: 소망하다, 기대하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다), 엘피스(1680: 소망, 기대), 아스팔레이아(803: 견고함, 안전함, 확실성)으로 번역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바타흐가 "믿음"에 포함된 계시에 대한 완전히 지적이고 의지적인 반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거나 확실하다고 느끼는 감정을 강조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 같다. 따라서 바타흐 어군은 '안전감'이나 '염려 없는 평온'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바타흐는 인간 관계에 사용될 때는 불안정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이웃과 함께 "마음 편히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쉽게 믿고 쉽게 속는 것으로 인하여 상처 받는 한편, 그들의 무방비한 태도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비난 받았다(참조: 세겜인들의 거짓된 안전대, 레위와 시므온의 잔인성, 창 34:25, 이스라엘의 거짓된 안전대, 곡의 잔인성, 겔 38:10-11). 잠 3:29은 믿고 있는 이웃을 속이는 것에 대해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의뢰한데서 오는 이런 확신감의 타당성을 다른 어떤 종류의 어리석은 안심과 대조 시킨다. 이런 모든 신뢰가 치욕과 수치로 끝날 것인데 반해(시 31:14, H15),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사람들은 원수에게서 구출되며(시 22:4, H5), 그들의 기도가 응답 받으며(대상 5:20), 그들이 똑바른 길로 가며(잠 3:5),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시 16:9, 시 33:21), 마음의 평안을 깨닫고 공포가 없어질 것임(시 4:8, H9, 사 26:3)은 분명하다. 그래서 여호와를 신뢰하라고 거듭 권고하고 있다(잠 16:20, 사 30:15, 렘 17:7).
바타흐는 가장 많이 사용되는 시편들(전부 181회 중 50회 사용)에서 대부분 일관성 있게 하나님을 믿는 것의 가치를 표현하고 있다. 이 구절들은 또한 소망의 근거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의 공적이나 일종의 "오는 말에 가는 말"(tit-for-tat)과 같은 그러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헤세드와 그의 확고한 신실하심과, 그의 자비로우신 애정에 있음을 지적해 준다.
겔 33:13은 어느 누구도 감히 생명의 소망을 자기 자신의 의로움에 기반을 둘 수 없음을 분명하게 말해주며, 렘 7:4, 렘 7:8, 렘 7:14은 신성한 문구(신근)와 건물을 믿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영생의 선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있다고 선포하는 신약성경을 예시해 준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소망은 일종의 불평하는 바람이 아니라 확신하는 기대이다. 그칠새 없는 근심이 통례였던 이방 종교들과는 달리 히브리 종교는 신뢰성과 확실성이 주된 성품이신 한 분 하나님을 알았다(신 33:28, 삼상 12:11, 시 27:3). 근심과 확신 사이의 이런 대조는, 이교도가 기교 없이는 결코 남아있지 못하고 이것을 통해서 자기가 스스로의 운명을 어느 정도 지배했다고 느낀데 반해, 경건한 히브리인은 개인적인 수단 없이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알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상기할 때, 훨씬 두드러진다. 변덕스러운 신들, 복수심에 불타는 악마, 그리고 불가사의한 마력의 바다에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인자하고 믿을 만한 하나님께 철저하게 의존하는 것이 더 낫다. 인간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다스림과 하나님의 완전한 신뢰성을 고려해 볼 때 인간이 하나님이 아닌 어떤 다른 것을 신뢰한다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든 해악으로부터 자동적으로 보호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기를 거부한다고 해서 반드시 가난과 박탈의 길로 들어서는 것도 아니다. 욥은 위로자들의 부드러운 확신에 대해, 어느 정도 통렬하게 비꼬면서 이런 분명한 모순을 지적하였다(욥 12:6, 욥 24:23). 그렇지만 욥도 고통가운데서 다른 어떤 안전의 근원도 결국에는 무가치해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욥 31:24, 욥 39:11, 사 50:10).
구약성경은 이런 거짓 안전의 근원을 어느 정도 상세하게 고찰하여, 하나님게 대한 소망의 탁월함과 대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거짓된 안전의 근원에는 인간(시 118:8, 시 146:3, 잠 25:19, 렘 17:5), 악(사 47:10), 폭력과 압제(시 55:23, H24, 시 62:10, H11, 사 30:12), 부(시 49:6, H7, 시 52:7, H9, 잠 11:28), 우상(시 31:6, H7, 시 115:8, 사 42:17, 합 2:18), 군사력(신 28:52, 시 44:6, H7 사 31:1, 렘 5:17, 호 10:13), 종교(렘 7:4, 렘 7:8, 렘 7:14), 자기 자신의 의로움(겔 33:13, 호 10:13), 이방인들과의 동맹(사 36:4 이하, 겔 29:16)이 포함된다. 특별히 성경은, 그런 만족의 보잘것없는 근거를 결코 평가하지 않고서 이런 만족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경멸한다(사 32:9-11, 겔 30:9, 암 6:1).
아마도 바타흐를 둘러싼 핵심 문제가 짧은 범위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곳은 왕하 18장 왕하 19장일 것이다. 여기에서 앗수르왕 랍사게는 하나님을 믿는 히스기야의 믿음의 가치에 도전하는데 이 믿음은 충분히 입증된다. 이 단어는 이 곳과 병행구절들에 20회 나온다(사 36-37장, 대하 32장). 인간관계에서는 단 하나의 믿음의 영역이 권고된다. 즉 현숙한 성품을 가진 아내를 믿는 남편(잠 31:11, NIV)에 대해서이다.(참조: J. N. Oswalt;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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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p;v;(8199, 샤파트) 재판하다, 다스리다, 통치하다
샤파트(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재판하다, 판결하다 judge, 다스리다, 통치하다 govern'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00회 나오며, 칼, 니팔, 포엘형으로 사용되었다.
샤파트의 기본적인 의미는 통치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현대 정부와 달리 고대의 정부는 입법, 행정, 사법적 기능(그리고 부서들)이 반드시 분립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재판하다'라는 일반적인 번역은 우리를 잘못 인도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샤파트의 역어로 사용되는 '재판하다' judge라는 말은 정부의 사법적 기능만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부-시민적, 종교적, 혹은 그밖에 다른-와 관련하여 '통치하다' to govern 혹은 '다스리다' to rule로 일정하게 번역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현대 세계에서 그러한 넓은 의미를 지닌 어떤 단어를 번역하기 위해 보다 더 특수화된 단어를 찾아야만 한다. NIV는 이 단어의 분사형을 '지도자' leader로 번역한다.
샤파트의 의미는, 비록 고대인들이 법률-시민 생활에 관한 법, 종교적인 법, 가정법 등등-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하더라도 그들은 현대인들과 달리 법에 의하여 다스림 받는다기보다는 사람에 의해서 다스림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층 더 복잡해진다. 인간에게는 법, 주권, 통치를 중심으로 하는 것은 깊이 뿌리 박혀 있었다. '초기 모든 동방의 국가에서 재판의 집행권은 오늘날 사막의 아랍인들처럼 존경할만한 연장자들에게 있었다... 그러한 연장자들은 필요한 여가를 가졌을 것이며 그들이 내린 결정은 존중되었을 것이고, 상급 지위로 인한 폭넓은 교제를 통하여 보다 충분한 경험과 원숙한 숙고로 결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통치의 수행을 나타내는 이 기본적인 단어의 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a)  지도자로 행동하는 것, 이것은 이스라엘의 회중(민 18:22-28), 개개의 사사들(신 1:16, 삿 16:31, 삼상 7:16, 삼상 7:17), 왕(삿 8:20), 메시야(시 72:4), 심지어 하나님 자신(시 96:13)에 의해서 행하실 수 있다. 하나님만이 참으로 궁극적인 주권을 행사하실 수 있다. 그는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이시기 때문이다(창 18:25). 그러나 모세가 소송 사건들(형사 사건, 가정 사건, 종교적 사건 등등)을 판결할 때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권위로 행동하는 것이며(출 18:13, 출 18:15), 이는 구약의 신권 정치(theocracy)에서 다른 통치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사실이다(신 1:17).
(b)  두드러진 것으로 샤파트는 민사, 가정사, 종교적 송사를 재판하는 것과 같이 논쟁을 일으키는 소송 사건을 판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우에 재판관의 임무는 특별히 미쉬파트(분별, 공의)와 체데크/체다카(의)로 재판하는 것이며(시 72:2-4), 고발한 사건에서 의인들을 의롭다 하고 악인을 정죄하는 것(신 25:1)이다.
(c)  단순히 법보다는 오히려 사람에 의하여 통치가 이루어지는 환경으로 인하여, 관원(쇼페트[재판하는 자])은 사법권은 물론 행정권도 가졌다. 관원은 또한 사법적인 판결을 집행하거나 집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다윗은 사울과 논쟁할 때 하나님께서 재판관으로 서실 것을 호소하면서 이렇게 선언한다: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판결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신원하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판단하시기를 원하나이다"(삼상 24:15). 따라서 여러 역본에서 건지다, 신원하다, 정죄하다, 벌하다와 같은 단어들과 사법적, 행정적 의미를 지닌 관련 단어들이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d)  모든 참된 권위는 하나님의 것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마지막 대심판에서 세상의 재판장이 되실 것이므로 그는 탁월한 쇼페트이시며(시 96:13, 시 50:6, 시 75:8), 한편으로 섭리를 통하여 그는 언제나 우주의 최고 쇼페트가 되신다(시 94:2, 참조: 시 103:19).
이상의 모든 용례는 칼형이다.
니팔형은 때때로 이 어간의 상호 관계를 나타내는 의미에서 통치 과정이라는 의미가 확대되어 소송 사건이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경우를 보여준다. 그러한 경우 에트(...와 함께)가 이 동사의 목적어 앞에 온다. 예컨대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내가 너와 함께 심판에 들어가리라, 렘 2:35, 참조: 겔 17:20, 겔 20:35, 겔 20:36, 겔 38:22, 매 경우에 하나님이 행위자이시며 화자이시다). 변론하다, 항변하다라는 법적인 의미에서 '변호하다' plead가 종종 나온다. 즉 "내가 여호와 앞에서 너희와 담론하리라"(삼상 12:7), "변론하다"(삼상 43:26, BDB, 'have a controversy'), '심판을 베푸시다'(사 66:16, RSV 'execut judgment').
포엘 분사는 "정죄하는 자"(시 109:31, 한글개역, "판단하려 하는 자"), "고소자"(욥 9:15, 한글개역, "심판하실 그"), "너에게 불리한 재판"(습 3:15, 한글개역, "너의 형벌")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위협적인 재판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샤파트는 그 파생 명사 미쉬파트와 더불어 어떠한 영역과 어떠한 형태이든지 통치(정부)의 기능을 지칭하는 가장 일반적인 용어이다. 이 단어는 보다 희귀한 딘과 분명히 다르다. 즉 딘은 보다 시적인 용어인 반면에 샤파트는 주로 보다 형식적이고 전문적인 용어로 쓰인다.
(참조: R. D. Culver; BDB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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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B;(974, 바한) 검사하다, 시험하다, 입증하다
바한(동사)은 기본어근이며 '검사(토)하다, 감찰하다', examine '시험하다' try, test '입증하다' prov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9회 나오며 다음 의미로 사용되었다.
1. 칼형에서
(a)  '검사하다, 자세히 보다'(시 11:5, 시 139:23, 욥 7:18), '시험해보다'(시 11:4).
히 12:5-8에 시사되어 있는 바와 같이, 이러한 검사나 시험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특권의 일부분이다.
(b)  '시험하다' test, try '입증하다' prove.
① 금의 은유와 함께 사후에 마음의 무게가 재어진다고 한 애굽 교리와는 달리, 여호와께서는 마지막에 그들이 금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백성들의 마음을 시험하신다(슥 13:9, 욥 23:10).
② 은유없이, 사람들을 시험 하시는(testing) 하나님에 대해(시 26:2, 시 66:10, 시 81:7, 렘 9:7), 그들의 길을(렘 6:27), 마음을(시 17:3, 렘 12:3, 잠 17:3, 대상 29:17), 심장 폐부를(시 7:10, 렘 11:20).
③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람에 대해 시 95:9은 백성들에게 므리바에서 하나님을 시험한 어리석은 자들을 상기시킨다. 말라기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시험하라고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오직 그들의 무관심 때문이었다(말 3:10, 말 3:15).
④ 말씀을 시험하는(try) 귀에 대해(욥 12:11, 욥 34:3).
(c)  '망보다, 지켜보다'. 이 의미에서 바한(@j'B' , 975: 망루, 감시탑), 바훈(969: 망루, 감시탑)이 유래되었다.
2. 니팔형에서
'입증되다, 시험을 받다'(창 42:15, 창 42:16, 욥 34:36).
3. 푸알형에서
'시험이 되어지다'(겔 21:13).(참조: BDB; Gesenius;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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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n:(5254, 나사) 시험하다, 유혹하다, 시도하다
나사(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시험하다 test, try, 시도하다 try, attempt, 유혹하다 tempt'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36회 나오며, 피엘형(강의형)으로만 사용되었다.
대부분의 문맥에서 나사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물건의 질을 - 종종 역경이나 고난을 통하여 - 시험한다는 개념을 지닌다. AV와 ASV가 빈번히 사용하는 역어인 tempt(시험하다, 유혹하다)는 대개 'entice to do wrong'(잘못 행하도록 꾀다)라는 현대 영어에서의 개념을 지니기 보다는 '입증하다' prove, '시험하다' test, put to the test를 의미한다.
많은 구절들에서 나사는 어떤 것을 시도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듣는 자의 마음에 거슬릴지도 모르는 말을 하려고 시도하거나 감히 그런 말을 하는 것에 대해(욥 4:2), 발로 땅을 과감히 밟는 것에 대해(신 28:56), 한 민족(이스라엘)을 다른 민족(애굽)에게서 인도해 내려 하는 것에 대해(신 4:34) 사용된다.
다른 문맥에서 나사는 갑옷과 무기(삼상 17:39), 즐거움(전 2:1, 참조: 전 7:23)과 같은 다양한 것들을 시험하는 것에 대해 사용된다.
그러나 가장 많은 수의 언급들에서 이 단어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나라가, 다른 사람이나 다른 나라가 가져다 준 시련이나 어려운 시기를 겪는 상황을 언급한다. 비록 인간이 하나님을 시험하지 못하도록 금했지만(신 6:16), 구약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기록한다.
맛사(시험)라는 광야의 장소는 이 점에서 하나의 격언 거리가 되며, 종종 말기교를 이용하여 나사(시험하다)와 함께 사용되어 있다(출 17:2, 출 17:7, 신 6:16, 신 33:8, 시 95:8, 시 95:9, 참조: 신 9:22). 광야에서 여호와를 시험한 저들은 가나안을 보지 못할 것이다(민 14:22-23). 이스라엘의 찬송시들은 이러한 반항적인 태도를 반영해준다(시 78:18, 시 78:41, 시 78:56, 시 106:14).
때로는 사람이 사람을 시험하기도 한다. 시바 여왕은 어려운 문제로 솔로몬을 시험하였으며(왕상 10:1, 대하 9:1) 느부갓네살의 환관장은 다니엘과 그 친구들에게 10일 동안 식물을 먹인 후 그들의 얼굴을 시험했다(단 1:12, 단 1:14). 거짓 선지자는 때로 사람의 믿음을 시험하는 도구가 되기도 하였다(신 13:3, H4). 그러나 종종,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고 인간에게 시련을 주시기도 하신다. 하나님은 애굽인들에게 "큰 시험"을 보내심으로 이스라엘을 건져내셨다(신 7:19, 신 29:3, H2). 그러나 후에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셨다(삿 2:22, 삿 3:1, 삿 3:4).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창 22:1)과 히스기야(대하 32:31)를 시험하신 경우에도 나사가 사용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와 같은 시험은 아무런 의미 없는 시험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성품을 정련하여 그가 하나님의 도에 더욱 가까이 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출 16:4, 신 8:2, 삿 2:22, 대하 32:31, 시 26:1-3).(참조: M. R. WILSON;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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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l]Ki(3629, 킬야) 콩팥, 신장
킬야(명여)는 켈리(yliK] , 3627)에서 유래했으며, '콩팥 kidneys, 신장 reins'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31회 나온다.
콩팥은 허리 아래 부분에 위치한 한 쌍의 기관을 언급하는 것으로 혈액에서 불순물을 걸러내는 구실을 한다. 기름과 함께 이들은 히브리인의 어떤 희생제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단어가 비유적으로 사용될 때 인간의 가장 내적인 면을 언급한다.
(a)  킬야는 기관으로서 '콩팥'에 대해 사용되었다.
시 139:13에서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자신의 "육체"를 소유하셨으며 모태에서 조직하셨다고 말한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욥 16:13, 애 3:13에서 죽음과 멸망은 화살이 콩팥을 꿰뚫는 것으로 말해진다. 근동의 전사가 등 뒤에서 화살을 맞게 되면 그는 상처 입기가 매우 쉬울 것이다. 여기에서 두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둘러싸서 우월한 힘으로 그들을 이기셨다고 주장한다.
(b)  킬야는 희생제물의 '콩팥'에 대해 사용되었다.
화목, 죄, 범죄의 제물에 쓰이는 동물들은 제사장들의 성직 위임 때 드려진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내장의 기름, 콩팥, 그리고 간 위의 꺼풀이 제거되어 제단위에서 불살라졌다(출 29:13, 출 29:22, 레 3:4, 레 3:10, 레 3:15, 레 4:9, 레 7:4, 레 8:16, 레 8:25, 레 9:10, 레 9:19). 성경에서 그러한 것들을 제거하는 분명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 않으나 다음과 같은 설명들이 있다. 기름은 하나님을 위해 예배된 특별한 진미이며 그 콩팥은 보통 기름으로 싸여 있었기 때문에 그분께 속한 것이었다(ISBE, Ⅲ, p. 1797). 아마 콩팥은 그 농도와 색깔을 보아 피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것 같다(IDB, Ⅲ, p. 9이하). 더욱이, 콩팥이 피를 청결케 하는 것과 매우 중요한 연관성을 지닌다는 것에 관한 이해가 있었다는 것이 암시되는 것 같다. 대체로 첫번째의 의견은 아마 무난한 것 같다.
특히 기름과 콩팥이 맛 있다는 개념은 신 32:14에서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선별된 밀은 "콩팥의 기름 같은 밀"(RSV는 "아름다운 밀"로 기록함)로 불리운다(참조: 사 34:6).
(c)  킬야는 속사람, 감정과 애정의 자리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것은 동물의 몸체를 분리하여 떼낼 때, "콩팥"이 가장 마지막에 이르는 기관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이와 같은 용법에서 이 단어는 종종 심장에 비견된다. 예레미야는 사악한 자들의 종교가 입술로 말하는 피상적인 것이며 콩팥(마음)에서 멀다고 말할 때 그러한 가장 깊은 사상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렘 12:2).
사악한 자들이 영화를 누릴 것이라는 사상은 시편 기자의 마음과 심장을 슬프게 하였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시 73:21).
그러나 아들이 정직을 말할 때 잠언 기자의 안에 있는 마음과 콩팥은 즐거워 한다: "만일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잠 23:16). 예레미야와 시편에서 5회 사용되며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심장을 감찰하신다고 언급되며, 이 때 내적인 중요성이 강조된다(렘 11:20 등).(참조: J. N. OSWALT;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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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e(3820, 레브) 내부 인간, 마음, 정신, 의지
레브(명남)는 레바브(bb;le , 3824)의 한 형태이며, '내부인간, 마음 heart, 정신 mind, 이해력 understanding, 의지 will'를 의미한다.
레브의 실제적인 의미는 내부기관과 유사 신체기관을 말한다. 그러나 추상적인 의미에서 "마음"은 인간내부의 총체 혹은 영적인 본질에 대한 가장 풍부한 성경 용어가 되고 있다. 성경 문학에서 이 단어는 성경에서 실제로 인간의 모든 영적인 기능이 "마음"에서 기인되기 때문에 기능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용어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영적인 인격 기능에 대한 가장 빈번한 용례이다.
본 항목에서 3820레브와 3824레바브를 다룬다.
구약성경에서 레브는 약 600회, 레바브는 약 250회 나온다.
율법서, 예언서, 시편은 종종 '마음'에 대해 언급한다. 이 단어의 어근은 아카드어, 앗시리아어, 이집트어, 우가릿어, 아람어, 아랍어, 후기 성경 히브리어에도 나온다. 상응하는 아람어 명사는 다니엘서에 7회 나온다.
'마음' heart은 창 6:5의 사람에 관한 언급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창 6:6에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레브( )가 사용되었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레브는 몸의 기관을 가리키기도 한다: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 판결 흉패를 '가슴' heart에 붙여..."(출 28:29), "요압이...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압살롬의 '심장' heart을 찌르니..."(삼하 18:14), "내 '심장' heart이 뛰고..."(시 38:10).
레브는 어떤 것의 내부나 한가운데를 가리키기도 한다: "...큰 물이 바다 '가운데' in the heart 엉기니이다"(출 15:8), "...그 산에 불이 붙어 화염이 충천하고..."(신 4:11, KJV는 '하늘 한가운데' in the midest of heaven, RSV는 to the heart of heaven),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잠 23:34).
레바브는 신 30:14에서와 같이 겉 사람과 대조되는 속 사람에 대하여 사용될 수도 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으리라"(신 30:14, 참조: 욜 2:13),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레바브는 종종 강조를 위해 '영혼' soul과 함께 사용되기도 한다: "또 마음을 다하고 '영혼' soul(한글개역 -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대하 15:12, 참ㅁ조: 대하 15:15).
네페쉬(영혼, 생명, 자아)는 KJV에서 15회, '마음'으로 번역된다. 모든 경우에 이 단어는 '속사람'을 나타낸다: "대저 그 마음(네페쉬)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 23:7).
레브는 그 사람 자체 혹은 그 사람의 인격에 대해 사용되기도 한다: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기를..."(창 17:17),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라"(전 1:16).
레브는 또한 이런 의미로 하나님에 대해서 사용된다: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렘 3:15).
욕망, 성벽, 의지의 자리를 '마음'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출 7:14), "무릇 마음에 원하는 자는 그것을 가져다가..."(출 35:5, 참조: 출 35:21, 출 35:29),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시 86:12).
레브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 의미로 사용된다: "정녕히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렘 32:4).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어울릴 때 그들은 동의한다고 한다: "내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과 같이 네 마음도 그러하냐"(왕하 10:15). 대하 24:4의 "요아스가 여호와의 전을 중수할 뜻을 두고..."에서 '뜻을 두고'는 히브리어로 '마음에 품다'라는 뜻이다.
'마음'은 감정의 자리로 생각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출 4:14, 참조: 삼상 2:1). 그래서 즐거운 마음(삿 16:25), 겁내는 마음(사 35:4), 떨리는 마음(삼상 4:13)들이 있다.
'마음'은 지식과 지혜의 자리로 간주되며 '정신, 지성'의 동의어로 생각되기도 한다. '마음'이 '알다'라는 동사와 함께 나올 때 종종 이런 의미를 나타낸다: "너는...마음에 생각하고..."(신 8:5, NASB는 '너는...마음으로 알고'), "그러나 깨닫는(아는) 마음과...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신 29:4, KJV, RSV, 'mind').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참조: 왕상 4:29). 기억은 마음의 활동이다: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욥 22:22).
'마음'은 양심과 도덕적 특성의 자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와 우리 주위의 세상의 계시에 어떻게 응답하는가? 욥이 대답한다: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욥 27:6). 이에 반하여, "다윗이...그 마음에 자책하고"(삼하 24:10). 마음은 인간 행위의 근원이다: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창 20:5, 참조: 창 20:6). 다윗은 '정직한 마음'으로 행하였고 히스기야는 '전심'으로 행했다.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한"(시 24:4)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레브는 반항과 교만의 자리를 나타내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 8:21)고 말씀하셨다. 두로왕도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다: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도다..."(겔 28:2). 그들은 모두 "죄가 마음 판에 새겨진"(렘 17:1) 유다와 같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지배하신다. 인간의 자연 그대로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놓여 있다: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그러므로 죄인들은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시 51:10),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시 86:11). 또한 다윗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대상 29:17)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승인을 구한다: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시 62:2).
'마음'은 인간의 내적인 존재, 곧 그 자신을 대표한다. 마음은 그 자체로서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다(잠 4:4). 사람의 모든 생각, 욕망, 말, 행동들은 그의 내부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렘 17:9). 사람이 자기 자신의 방식대로 행하기를 계속할 때, 그의 '마음'은 점점 더 완고해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여(마음의 부정함을 제거시켜) 그들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도록 하실 것이다(신 30:6).(참조: NEDOT;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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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x;(6884, 차라프) 정련하다, 정제하다, 시험하다
차라프(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정련(제련)하다, 정제하다, 깨끗게 하다 smelt, refine, 시험(실험)하다 test'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33회 나오며, 칼, 니팔, 피엘형으로만 사용되었다.
차라프는 주로 금과 은 세공인이나 훌륭한 그릇이 나오기까지의 금속제련 과정에 사용된다(잠 25:4). 대장장이의 솜씨를 크게 요하는 것 중의 하나는 우상을 주조하는 일이었다(삿 17:4). 우상에는 금 도금을 하거나 우상용으로 만든 금 사슬을 달기도 하였다(사 40:19). 그런데 우상을 만드는 일에 자기의 솜씨를 발휘하는 장인은 자기의 일로써 수치를 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형상들은 거짓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렘 10:14, 렘 51:17).
제련 과정의 여러 측면이 죄에 대한 심판 및 죄의 정화와 관련하여 생생하게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불타는 용광로, 풀무, 납, 불순물, 은 찌꺼기 등이다(예: 사 1:25, 렘 6:27-30, 겔 22:18-22).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그의 거룩한 존전에 설 수 있도록 그들로부터 모든 죄와 악을 제거하고자 하신다. 인간은 자신이 정련될 수 있도록 자신을 깨끗하게 할 책임을 지니고 있다. 즉 인간은 정화를 체득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적 반응을 나타내야 한다(단 12:10). 게다가 자기 백성이 방종하며 언약을 어길 때 하나님은 그들을 단련함으로써 돌이키고자 하신다(렘 9:7, H6). 하나님은 고통의 도가니 속에 그들을 넣어 연단하신다(사 48:10). 그들이 어려운 환경에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에 확고히 서 있는 한 그들은 결국 구원을 체험할 것이다(시 66:6-12). 약속과 그 성취 사이에서 말씀 그 자체는 그 말씀을 들은 사람을 시험하고 연단한다(시 105:19). 한편 때로는 그 백성이 심히도 완악하여 연단의 불이 제아무리 강렬해진다 할지라도 헛될 경우가 있다(렘 6:27-30). 그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심판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 중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를 위한 한 백성을 예비하고 계신다. 심판을 연단으로서 겪는 자들이 하나님께 돌아갈 것이며 다시 한번 그와의 언약 관계를 수립할 것이다(슥 13:9). 말라기에 따르면 하나님은 레위인들을 금과 은처럼 연단할 것이다. 그때 그들은 희생제사를 올바로 드릴 것이며 이 희생제사는 열납될 것이다(말 3:2이하). 하나님의 연단 과정은 그 정점에서 한 성의 건립을 낳게 될 것이며 그가 그 성을 완전히 통치할 것이다. 그 성은 "의의 성읍, 신실한 고을"이라 불릴 것이다(사 1:25이하).
의로운 사람은 여호와의 신실한 시험을 경시하지 않고 잘 견딘다. 그는 그 시련이 어떤 흠도 찾아내지 못하였다고 확신 있게 단언한다(시 17:3). 사실상 그가 하나님의 보호를 구할 때, 자기의 간구가 참으로 응답될 가치가 있는 것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그의 내적 심사와 태도를 시험하고 단련해 달라고까지 기도한다(시 26:2).
하나님의 말씀도 시험을 받는다. RSV에 따르면 "여호와의 약속은 진실임이 입증된다"(시 18:30, H31). 즉 하나님이 말하는 것은 신빙성이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연단을 받았기 때문에 완벽하게 신뢰할 수 있다(한글개역: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시 18:30). 시 12:6, H7은 여호와의 말씀을 "흙 도가니에 일곱번 단련한 은"에 비유한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섬기는 자신들은 그의 말씀을 사랑하고(시 119:40) 그들 자신들의 방패로 삼고 그에게 피난한다(잠 30:5).(참조: J. E. HARTLEY;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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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w]v;(7723, 샤우) 공허, 헛됨, 허무, 거짓
샤우(명남)는 '텅빔, 공허, 헛됨, 허무, 허위'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0회 이상 나온다.
샤우의 가장 친숙한 용례는 셋째 계명이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문자적으로 이 문장을 읽으면 이렇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랏샤우'로 들어 올리지 말라'. 십계명의 용례를 고찰하기에 앞서 이 단어가 그 밖의 곳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관찰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샤우의 일차적 의미가 '공허, 허무'라는 점은 아무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물질적 혹은 도덕적으로 비실질적이고 비실제적이며 무가치한 어떤 것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상을 뜻하는 단어가 된다(헤벨: 공허, 허무도 무가치한 우상 등을 의미하는 명칭으로 사용되듯이). 그렇다면 시 24:4은 이렇게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뜻을 '우상' idol에 두지 아니하며'(한글개역 "허탄한데"). 다후드(Dahood, Psalms)는 다음 구절들을 이러한 의미를 함축한 구절들로 열거하고 있다. 시 26:4, 시 31:6, 시 119:37, 사 1:13, 렘 18:15, 욥 31:5. 그러나 그 중 몇몇은, 특히 마지막 구절과 사 1:13은 모호하다. 우상들만이 '허위'일 뿐만 아니라, 회칠하고 겉을 번드르르하게 꾸며 암담한 상황을 호도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도 그러하다(애 2:14, 겔 13:6-9, 겔 13:23).
상기와 같은 증거는 다음 사실을 암시해 준다. 곧 여호와의 이름(즉 그의 명성)을 '헛되게' 거론한다는 것을 확실히,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바의 신성 모독이라는 뜻을 함유하며 또한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또한 여호와의 이름을 가볍게, 경솔하게, 혹은 기계적으로 사용한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70인역본이 랏샤우를 에피 마타이오(생각없이)로 번역한 것도 아마 이러한 뜻에서였을 것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단지 부사구 랏샤우의 형태로 나타난다(렘 2:30, 렘 4:30, 렘 6:29, 렘 18:15, 렘 46:11).(참조: V. P. Hamilton; BDB). 
>>hY;mir](7423, 레미야) 느슨함, 태만, 속임, 사기, 반역
레미야(명여)는 라마(hm;r; , 7411)에서 유래했으며, (a) '느슨함, 해이(된 상태), 태만, 나태', (b) '속임, 사기, 배반, 변절, 반역'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5회 나온다.
(a)  레미야는 '느슨함, 해이, 태만, 나태'란 의미로 사용되었다(렘 48:10, 호 7:16, 시 78:57, 잠 10:4, 잠 12:24, 잠 12:27, 잠 19:15).
(b)  레미야는 '속임, 사기, 배반, 반역'에 대해 사용되었다(욥 13:7, 욥 27:4, 시 32:2, 시 52:4, 시 101:7, 호 7:16, 시 78:57, 미 6:12, 시 120:2-3).(참조: BDB; Gesenius). 
>>hm;r]mi(4820, 미르마) 속임, 기만, 배반 [간사함..궤휼 =겉다르고 속다름 = 위선...SELF-RIGHTEOUS HYPOCRISY]
미르마(명여)는 라마(hm;r; , 7411: 기만하다, 속이다, 배반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속임, 기만, 변절, 배반'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40회 나오며, 시편에서 가장 자주 사용된다.
미르마는 야곱이 에서에게 행한 사기를 기술하는 창 27:35에서 최초로 나온다: "이삭이 가로되 네 아우가 간교하게 와서 네 복을 빼앗았도다". 미르마는 특히 배반하는 말이나 사람을 속이는 말에 대해 사용된다(창 34:13, 시 10:7, 시 17:1, 시 24:4 등).
미르마는 또한 거짓 저울에 대해 사용된다: "거짓 저울로 속이며"(암 8:5).
렘 9:6에서는 미르마의 흥미로운 용법이 나온다: "압제 위에 압제를 쌓고 거짓 위에 거짓을 쌓는다". 구약성경은 분명히 하기를 속이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가장 가증스러운 범죄 중의 하나라고 한다. 이 어근은 시편에서 의인의 기도와 찬양은 거짓이 없다는 것을 확실시 할 때 반복 사용된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참조: TWOT).
>> dovlo"(1388, 돌로스) 미끼, 올가미, 기만, 계략.[간사함]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돌로스(Homer. 이래)는 델로(devlw: 미끼를 잡다[, 라틴어 dolus]에서 유래했으며,
(a)  본래 '미끼, 유혹물, 가짜 미끼, 덫, 올가미', (b)  따라서 '교활, 술책, 기만, 계략, 간계'를 의미한다.
2. 구약 및70인역본의 용법. 
구약성경으로부터의 실제의 인용문 외에도, 구약성경 특히 금언서(예를 들면 시 10:7 [궤휼=미르마]; 시 36:4; 시 52:4; 시 55:12; 잠 12:5; 잠 12:20; 잠 16:28; 잠 26:4; 지혜서 1:5; 지혜서 4:11; 지혜서 14:25; 집회서 1:30; 집회서 19:26; 참조, 렘 5:27; 렘 9:5; 습 1:9)에서 흔히 불경한 사람을 "기만적"이라고 묘사하는 것(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의롭다" 하는 것과 대조적으로)은 분명하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돌로스는 신약성경에서 11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는 그의 적대자들의 의도는 그것이 엔돌로로 행해질 것이라는 말과 함께 명백히 부정적으로 묘사된다(막 14:1; 마 26:4, 돌로). 주어진 이유(백성들에 대한 두려움) 외에 이 이야기는 장차의 예수님의 수난은 죄 없이 유죄 판결을 받은 의로운 사람의 수난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적대자들의 바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불 경건한 행위로 이해된다.
(b)  행 13:8에서 마법사 엘루마의 반종교적인 행위, "모든 궤계"가 한 사람의 행위로 묘사되는 것과 대조적으로, 처음에 제자로 부름 받은 자들 중에서 나다니엘의 행위는 "참 이스라엘 사람", "그 속에 간사함이 없는" 행위이다(요 1:47). 참으로 "의로운" 자를 묘사한 구약성경의 구절들(참조, 시 32:2; 습 3:13)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는 성격 묘사이다(참조, 계 14:5).
(c)  신약 성경의 악덕의 목록(Vogtle 1; Wibbing 78)에서 돌로스가 막 7:22; 롬 1:29; 벧전 2:1에만 나타난다. 바울은 "경건하지 않은" 그리고 "불의한" 삶을 사는 자들의 성격을 돌로스로 묘사하여 구약성경을 따른다(참조, Vogtle 229-32).
(d)  막 7:22에서 돌로스는 예수님의 말씀에 '악' 즉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책임이 있는 죄를 구성하는 여섯 악의 두 번째 시리즈의 첫 머리에 나온다.
이것과 대조되는 일반적인 용법이 벧전 2:1의 교회에서의 구체적인 봉사에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을 버리라는 명령에 사용된다. 돌로스는 특히 개인들간의 관계를 흐리게 하고 "거룩한 제사장"으로서(벧전 2:5), "택하신 족속"(벧전 2:9)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함께 하는 교회 생활을 방해하는 행위의 특징의 하나이다.
(e)  죄 없으신 하나님의 종의 수난(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은 벧전 2:22에 "강포를 행치 아니하시고" 그의 입에 "궤사도 없으신" 자의 고난으로 묘사된다. 그 인용문은 그리스도에 대한 전통적인 찬양(벧전 2:21-25)을 구성하는데 그 찬양은 가족 규례에 대한 가부장적인 문맥에 인용된다: 종들은 그들 자신을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고난을 따름으로 증명해야 한다(벧전 2:21).
시 34:13-17과 함께 벧전 3:10-12은 삽입구에서 "너희가 다"(벧전 3:8)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에 기초한 삶에 목적을 둘 것을 권고함으로 끝을 맺는데, 그러한 삶은 악에 대하여 "축복"으로 응답(벧전 3:9)하지 않고 서로 보복하는 악한 무리에 의해 파괴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그의 입술이 "궤휼을 말하는 것"을 삼가는 것을 의미한다.
(f)  이미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바울은 그의 전도 사역을 변호한다: 그의 선포는 "궤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살전 2:3). 바울은 자기 자신을 특히 고린도후서에서 변호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변경하는(혼잡케 하는) 사람에 속하지 않는다(고후 4:2). 이것은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을 설교하는(살전 11:4) "거짓 사도들", "궤휼의 역군"(살전 11:13)의 특징이다. 바울이 고린도인들 앞에서, 모든 것이 그들을 위해서 한 것이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궤계로 얻었다는 그의 "특권"에 대해 변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얼마나 불합리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L. Oberlinner).(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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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7489, 라아) 악하다, 나쁘다
1. 라아(동사)는 라([r' , 7451)에서 유래했으며, '악하다, 나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75회 나오며, 칼, 히필, 히트파엘형으로 사용되었다.
이 어근의 본질적인 의미는 이 어근이 빈번히 어근 토브와 병렬되는 곳에서 엿볼 수 있다. 예컨대 모세는 이렇게 말을 끝맺는다: "보라 내가 오늘날 너희 앞에 생명과 선한 것, 사망과 악한/ 나쁜 것을 두노라"(참조: 미 3:2). 이 두 단어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표현에서 나온다(삼하 14:17, 삼하 19:35, 왕상 3:9, 사 7:15, 창 2:9, 창 2:17, "선악과"를 참조하라).
어떤 것이 나쁘다라는 결정은 주관적으로 결정하는 사람의 기호에 달려 있기 때문에 이 어근은 '...이 보기에'라는 관용어와 함께 번번히 나타난다. 따라서 이사야는 왜곡된 도덕적 판단을 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위협한다: "악을 선하다 하고 선을 악하다고 하는 자들에게 화 있을찐저". 그러나 여호와의 판단은 도덕적으로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객관적인 악, 즉 죄를 논할 수가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상투적인 어구인 아사 하라 '베에네 야훼'(여호와의 판단하시기에 악을 행하다)가 자주 나온다.
이 어근은 수동적인 의미를 지니거나 능동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즉 전자의 경우에는 '불행, 재난, 재앙'을, 후자의 경우에는 '사악'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모독적인 문맥에서 '나쁜' bad, '불쾌한'이라는 의미로, 도덕적인 문맥에서 '악한' evil, '사악함'이라는 의미로 쓰일 수 있다.
라아는 '불쾌하다, 유해하다'에서 '나쁘다' 혹은 '악하다'(위를 보다)까지 이르는 의미를 지닌다. 이 동사는 그 명사로부터 이중적 의미, 즉 하나님의 본래의 그리고 계속되는 의도와 관련하여 '잘못하다', 그것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의 견지에서 볼 때 '유해하다'라는 의미를 이어 받는다. 몇 몇 경우에 이 단어는 인간에게 미치는 그 유해한 영향-사람에게 끼치는 육체적 혹은 정서적 해악이나 고통스런 불쾌한 경험-만을 가리킬 수 있다. 이 단어는 실질적으로 신정설(theodicy-악의 존재를 신의 섭리라고 하는 주장-역주)이나 우주론과 관련된 철학적 혹은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 않다. 이 어근의 동사 형태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상호관계를 기술한다.
라아는 육체적 고통(민 16:15, 대상 16:22, 시 105:15)이나 정서적 고통(창 43:6, 민 11:10-11)을 일으키는 경험들을 지적하는데, 나오미의 경우에 가족을 잃은 경험을 지적한다(룻 1:21, 참조: 왕상 17:20).
이 동사가 도덕적?종교적 영역의 의미를 지닐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행동을 나타낸다. 빌닷은 욥 8:20에서 이와 같은 측면의 의미를 암시한다. 그리고 선지자 이사야(사 31:2)와 스바냐(습 1:12)는 이것을 보다 강력하게 나타낸다. 행동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평가하시는 것을 강조하는 어구는 "그의 보시기에" in his sight라는 말이다. 이 어구는 이 동사와 관련하여서는 3회 나온다(민 22:34, 잠 24:18, 미 3:4). 또 다른 용법은 하나님의 선하신 행동(수 24:15)이나 선한 사람과 라아의 행위를 대조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분사형이 사용되며 시편에만 국한된다(시 26:5, 시 37:9, 시 92:11).
라아와 연관된 행동 범위는 특히 우상숭배(왕상 14:9, 왕상 16:25, 왕하 21:11, 렘 25:6)와 한 번은 여호와의 성소를 파괴하는 것(시 74:3)과 같이 하나님을 거부함으로 시작한다. 백성을 학대하고 그 소유를 착취하는 일이 흔하다. 라아와 관련된 행위의 범주에는 육체적인 고통을 끼침(민 16:15, 시 22:16), 애굽에서의 혹독한 노예 생활(출 5:22-23, 민 20:15, 신 26:6), 부정직(창 31:7, 창 44:5, 신 15:9), 부도덕한 성관계를 요구하는 것(창 19:7, 삿 19:23), 욕설(시 27:2), 죽이려는 노력(삼상 25:34, 삼상 26:21, 렘 38:9)이 포함된다. 또한 귀에 거슬리는 맹세(레 5:4)와 다윗왕이 백성들에 대해 행한 인구 조사(대상 21:17, 이것이 군대 소집이었으리라는 가능성을 나타내주는 파카드를 참조하라-그러나 이것 역시 죄악된 행위다. R. L. H.)도 포함된다.
성경 기자들은 라아를 행동의 내적인 근원으로 이해한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의 참된 성격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렘 4:22). 하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고의적으로 다른 사람을 해할 궁리를 한다. 사실상 악을 행하는 것은 하나의 습관이 된다(렘 13:23). 보다 더 심각한 사실은 악을 행하는 것이 하나의 강박충동이 된다는 것이다(창 19:9, 잠 4:16, 잠 17:4). 그들의 이해력 부족은, 부분적으로, 너무 늦어서 그들이 해를 그들 자신에게 끼치기 까지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삼상 12:25, 시 44:2, 렘 13:23).
시 44:2, 렘 25:29, 렘 31:28, 미 4:6, 슥 8:14에서는 라아의 주어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사악함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회개하라는 요청에 응하지 않는 죄인들에 대한 마땅한 심판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그가 악인에게 라아를 행하실 때 부도덕한 행위를 하는 것으로 서술되지 않는다.
시편 기자는 그를 모욕하는 자들을 징벌하시기를 하나님께 여러 번 간구한다(시 64:2, 시 94:16, 시 119:115).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학대한 방법을 직시하고(레 5:4, 수 24:15) 그들의 길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라고 도전 받는다. 라아를 행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충고가 제시되었다(삼상 25:34, 시 15:4, 시 37:1, 시 37:8, 잠 24:19).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라아가 그의 거룩한 산에서 행해지지 아니할 것이라고 약속하신 미래에 대해 역설한다(사 11:9, 사 65:25).
2. 라아(동사)는 기본어근이며 '깨뜨리다, 부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0회 나온다.
몇몇 실례에서 이 동사는 부러진 감람나무 가지(렘 11:16)나 파괴된 땅(사 24:19) 등에서처럼 구체적인 의미로 사용되는데, 그런 경우에는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들이 묘사되어 있다. 렘 15:12에서 인용된 격언은 선지자의 메시지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항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잠 25:19에서 "부러진 이"(KJV, 'bad' [나쁜], RSV)는 악인의 우호의 보잘것없는 성질을 함축한다.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어떻게 징벌하시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이 동사를 한층 비유적으로 사용한다(욥 34:24). 시편 기자가 이와 거의 동일한 것을 말한다(시 2:9).
(G. H. Livings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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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7563, 라샤) 사악한, 죄를 범한
라샤(형용사)는 '사악한 wicked, 죄를 범한, 범죄의 criminal'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60회 나온다.
라샤는 죄, 악, 불법을 뜻하는 거의 모든 히브리 단어들과 병행어로 사용된다. 이 단어는 어떤 유형의 사람의 행동과 행실을 구체적인 말로 지칭하는 형용사의 역할도 한다. 때때로 문맥은 사람의 태도와 의도를 지적한다. 기본적으로 라샤는 주관적인 현상이라기보다는 객관적인 사실이다.
라샤의 정도는 하나님의 성품 및 태도와의 그 상반되는 정도에 달려 있다.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에서 나타나는 물음들은 하나님께서 악한 사람에게 적대적임을 암시한다. 출 23:7, 욥 9:22, 시 37:28, 겔 33:11, 미 6:10도 역시 그러하다.
악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사회적 권리를 침해하는 죄를 범했다. 그들은 난폭하고, 압제적이며, 탐욕스럽고 음모를 꾸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올가미를 씌우며,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살인까지도 하려 했다. 한 마디로 그들은 공동체를 위협했다. 그들은 사업 및 법정에서 부정직했다. 그 실례에 대하여 출 2:13, 민 35:31, 삼하 4:11을 보라. 대하 19:2은 이런 사람들이 여호와를 미워한다고 한다. 말 3:18에서는 그들의 주요한 특성은 여호와를 섬기지 않는 것이라고 언급한다.
잠언서에 사용된 라샤의 절반인 80회는 빈번히 체데크(의인)와 대조적인 병행에서 사용되며 이러한 대조에서 우리는 악한(라샤) 종류의 사람들의 가장 분명한 모습을 본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를 박해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을 대적하여 서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악인들로부터 보호해 주시기를 간구한다.
잠언서에는 라샤와 체데크를 분명하게 대조시키는 많은 대조적인 대구법이 나온다. 그 초점은 생활 방식의 성질과 이러한 두가지 삶의 방식의 결과에 주어진다. 악인은 하나님을 저버리는 반면에 의인은 하나님께 매달린다. 악인은 압제적이고 부정직하지만 의인은 정직하고 진리를 사랑한다.
악인들의 내적인 생명은 그들의 행동과 일치한다. 그들의 내적 생명은 악하고 교만하고 불실하고 비열하고 오염되어 있고 불안정하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이 항상 법과 질서의 제약을 받고 삶의 매 순간마다 패배 당하기를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욥은 지금 여기서 이상하고도 혼란된 성격의 도덕적 질서로 인하여 고통 당했다(욥 9:24, 욥 10:3, 욥 16:11, 욥 21:7, 욥 21:17, 욥 21:18). 전도자는 이러한 불합리와 씨름하였다(전 7:15, 전 8:14). 예레미야도 그러했다(렘 12:1).
어떤 사람들은 역경에 처할 때 회의를 품는다. 하지만 그러한 회의가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강하게 대적한다는 명백한 교훈을 흐리지 못한다. 시편 기자와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악인을 징벌하시기를 간청했으며,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겠다는 그의 의도를 선포하셨다. 그리고 그의 심판의 두려움에 대한 묘사들이 있다(욥 36:17, 시 9:5, 시 9:16, 잠 24:20-24, 렘 25:31, 습 1:3, 말 4:3).
우리는 하나님께 일단 악인을 징벌하시면 도덕 질서가 바로 잡힐 것이라고 결론 내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들은 심판이 하나님의 최상의 해결책이거나 가장 바라직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과 인간은 구원 행위가 악인을 다루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보았다. 시편 기자는 용서를 구했으며(시 71:4, 시 82:4)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사 55:7) 또한 용서해주셨다(사 53:9). 모세(민 16:26), 지혜자(잠 4:14), 이사야, 그리고 어떤 선지자(사 55:7)는 백성들에게 악한 생활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라고 권고하였다. 특히 겔 18장, 겔 33장에 의하면 이렇게 행할 책임은 직접적으로 개개인에게 있다. 하나님의 자비에 의한 그러한 구원의 실재에 대한 증거(시 1:1, 시 37:40)와 약속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시 39:1, 시 119:95).(G. H. Livingston)(참조: BDB; HELOT;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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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q;(6951, 카할) 모임, 집회, 회중
카할(명남)은 '모임, 집회, 회합, 회중'을 의미한다.
명사 카할이 동사 카할(lh'q; , 6950)에서 유래되었는지 그 반대인지 학인할 수 없다. 그러나 혹자들은 이 단어가 콜(l/q , 6963: 음성, 말하는 것, 어근은 '부르다'는 의미를 지님, Gesenius)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므로 결국 집회를 의미하게 된다는 것이다(KB가 그와 같은 견해를 말한다).
카할은 구약성경에서 약 120회 이상 나온다. 카할은 70인역본에서 거의 항상 에클레시아로 번역되었으며, 하지만 카할이 항상 엑클레시아로 번역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엑클레시아는 창세기에서 민수기까지 23개절, 예레미아 5개절, 에스겔 15개절에 나오지 않은다. 그 대신 쉬나고게(회중,회당; 창세기에서 민수기까지 21개절, 에스겔, 예레미아 등에서 나옴), 쉬스타세이스(모임,연합;창49:6), 오클로스(군중, 다수;렘31:8; 겔16:40; 17:17; 23:24 등), 플레도스(큰수, 회중, 무리;출12:6; 대하31:18)가 역어로 사용되었다.
어떤 종류의 그리고 어떤 목적을 가진 모임이든 모두 카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모임이 악한 모의나 행위(창 49:6, 시 26:5), 민간 업무(왕상 2:3, 잠 5:14, 잠 26:26, 욥 30:28) 또는 전쟁(민 22:4, 삿 20:2 등등)을 위해 이루어진다. 회집한 군대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구경한다(삼상 17:47). 기타 문맥에서는 이 용어가 국가들의 회중(창 35:11), 백성들의 회중(창 28:3, 창 48:4), 심지어 죽은 자들의 회중(잠 21:16)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 단어는 포로 생활에서 귀환하는 자들과 관련하여 사용되며(렘 31:8, 스 2:64), 다음으로는 재회복된 예루살렘 공동체가 카할이라 명령된다(스 10:12, 스 10:14, 느 8:2, 느 8:17).
70인역본에서 카할/ 엑클레시아는 '집회 assembly'를 뜻하며, 따라서 '모임, 회집'이란 의미(참조: 신9:10; 18:16의 총회)와 '모인 자들, 회중'이라는 의미(왕상8:65의 큰 회중)를 가진다. 실제적 의미는 '모인 자들' 곧 '집회를 구성한 자들'이다.  삼상 19:20의 "선지자 무리"라는 표현이 이를 지지한다.
신명기에서 카할/ 엑클레시아는 무엇보다도 시내산 언약을 맺기 위해 모인 회중을 의미하고 있다(신 9:10). 엑클레시아/ 카할은 여호와의 이름파 연결됨으로써 제한적인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엑클레시아 퀴리우: = 케할 예호와: 신23:2 이하; 참조, 대상28:8; 느13:1; 미2:5). 신명기(9:10; 10:4;  18;16)에서 케할 예호와의 결합이 정당화된 이유를 볼 수 있다.  야웨와 그의 그의 백성과의 관계를 처음 확립한 카할/ 엑클레시아는 시내산에 있는 회중이며, 야웨와 이스라엘이 함께 하는 날이 욤 학카할 곧 집회의 날(총회의 날)이다. 야웨는 그들을 모두 하나로 부르시는 분이시다.
여기서 카할/ 엑클레시아는 여호와께서 소집한 백성, 곧 여호와께서 주신 규례들에 구속을 받는 백성을 나타내며, 그들의 여호와 언약에 참여는 순종에 의해서만 이루어 지는 것이다. 따라서 카할/ 엑클레시아는 또한 특별하고 엄숙한 집회의 종교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솔로몬 성전 봉헌 때에 예배하는 공동체는 카할/ 에엑클레시아이며(왕상 8:14 이하; 대하 6:3),  에스라가 율법책을 남자, 여자. 아이들에게 "율법을 낭독하고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께 경배"했던 초막절에 집회(혹은 모인 회중)(느 8:2, 17), 히스기야의 명령에 따라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모인 백성(대하 30:2, 4, 13, 17), 국가적 위기에서 여호사밧이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소집한 이스라엘 회중은 카할/ 엑클레시아이다(대하 20:5, 14).
카할/ 엑클레시아가 30회나 사용되어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역대기에서 종교적인 결정(법궤를 옮기는 것, 대상 13:2, 4)이나 또는 제의적 행사를 포함하는 행사(대상 29:10)을 위해 왕이 소집하는 지도자들의 집회나 그런 집회에 모인 무리들을 모두 나타내는 대표적인 의미로 사용었다. 이(성전에 모인) 무리가 시편에서는 카할로 지칭된다(예를 들어 시 22:23; 89:7 "거룩한 자의 회중"; 149:1 "신도의 회중").
그리고 카할/ 엑클레시아는 전쟁을 위한 사람들의 소집(참조:삼상 17:47)이며, 다른 종류의 소집은 중대한 사건에 대처하기 위한 국가적 비상 집회로의 부름이다(렘 26:17; 44:15; 삿 21:6, 8).
우리는 포괄적으로 카할/ 엑클레시아를 전쟁을 위한 동원이나 시급한 사법적 모임과 같은 남자들만의 모임이든, 에스라에서와 같이 온 백성의 모임이든 특별한 경우나 행사에 소집된 집회나 회중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렇게 모인 집회일 때 카할/ 엑클레시아는 그것에 참예할 자격이 있는 자들에 대해 사용될 수 있다(신 23:2이하).
한편 카할이 다른 단어로 번역된 경우에 주로 종교적인 의미없이 전쟁터에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모든 남자들의 무리에 대해(쉬스타세이스/ 창 49:6; 쉬나고게/ 민 22:4), 그리고 이스라엘의 공동체에 대해 사용되었다(오클로스/ 렘 31:8; 플레도스/ 출 12:6; 대하 31:18). 에스겔서에서는 대부분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민족의 무리나 병력에 대해 사용되었다(오클로스/ 겔 17:17, 애굽; 쉬나고게/ 27:27, 두로;32:22, 앗수르). 창세기에서 민수기까지의 대부분의 구절에서는 많은 군중에 대해 양적으로만 사용된다.
특히 쉬나고게는 창세기 28:3; 35:11에서는 백성 people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레 4:13; 민 15:15; 16:3, 33; 20:6; 신 33:4 등에서는 여호와께 속한 한 백성으로서의 성전과 율법에 중심을 둔 신앙 공동체의 집회(혹은 모인 회중 전체)를 나타낸다. 이 의미에서 카할/ 쉬나고게는 에다 쉬나고게의 의미를 가진다.
에다는 어떤 사람이 태어나고 소속하며, 만일 그가 남자라면 정확하게 규정되고 한정된 분량의 특정한 권리와 의무를 가질 수 있는 영구한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를 소집하는 힘은 법률로 규제될 수 있는 엄정한 출생에 의한 공동체의 힘이다. 에다는 성전과 율법을 중심하고 것에 의해 결정되는 전체 유대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가장 세속적인 자들이라도 율법과 성소와 어떤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L. Coenen, DNTT).
그러나 카할/ 엑클레시아는 언약을 맺음으로써 생겨난 회중, 시내산 공동체 사회에 대한 의례적인 표현이다. 이 카할/ 엑클레시아는 부름을 듣고 이를 따르는 자들만을 포함한다. 따라서 카할/엑클레시아는 야웨의 부름에 응답함으로써 특징 지워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관한 문제가 제시되는 곳에만 사용된다,  확실히 카할/ 엑클레시아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위대성이 암시되는 곳에서 특별히 사용되며, 아마 헬라인 독자에게 단지 당시 유대 사회의 정치적, 생래적 주장을 암시할 수 있는 곳에서는 사용을 회피하였다. 아마 이것은 공동체 사회의 생활을 규정하고 있는 율법에 관한 구절들에서 카할이 쉬나고게로 번역되는 이유일 것이다(L.V.Rost, Op. cit., , 127).
카할이 신약성경의 엑클레시아로 발전한 것에 관해서, 우리는 이 말이 시내산에서 언약의 체결에 참예한 자들과 또한 에스라의 지도 아래 율법에 새로히 서약한 자들에 대해 사용된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카할/ 엑클레시아는 언약과,그리고 그것과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가진 자들을 가리키는 전문용어이다. 적어도 에스라 시대에(참조: 이미 렘 44:15에서)  여인들과 아이들이 카할/ 엑클레시아에 속했다는 사실 역시 의미심장한 것이다.  이것은 카할이 70인 역본에서 엑클레시아로 버역된 이유의 하나이다(K.L.Schmidt, TDNT).  사실은 카할이라는 용어 자체 여인들과 아이들도 충분한 자격이 있는 것으로 허락된 기독교 공동체을 뜻할 수 있는 적합한 용어인 반면에 쉬나고게는 그 요성이 남자들만의 참여와 관련되기 때문에 적합치 않은 용어이다.(참조: K. L. Schmidt, L. Coen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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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v'y:(3427, 야샤브) 앉다, 머무르다, 살다, 거주하다
야샤브(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앉다, 머무르다, 살다, 거주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080회 나오며, 칼, 니팔, 피엘, 히필, 호팔형으로 사용되었다.
1. 칼형에서
(a)  '앉다, 내려 앉다'(창 27:19, 욥 2:13, 시 9:5, 창 21:16).
사사나 왕(시 9:5, 사 10:13), 매복한 자(욥 38:40, 렘 3:2), 적(삼상 13:16), 애곡자(욥 2:13, 사 47:5), 게으른 자(사 30:7, 렘 8:14)에 대해 사용되었다.
(b)  '머무르다, 체류하다'(창 24:55, 출 24:14, 삿 19:4, 삼상 16:8 등).
(c)  '거주하다, 살다, 거처를 정하다'(창 4:10, 창 4:20, 시 107:10 등, 분사로, '거주자, 거주민이나 주민' 창 19:25, 삿 1:21).
2. 니팔형에서
'거주하다'(출 16:35, 렘 6:8, 렘 22:6, 겔 12:20, 겔 26:19 등).
3. 피엘형에서
(a)  '두다, 정하다, 치다' (겔 25:4).
4. 히필형에서
(a)  '앉게하다'(왕상 2:24, 대하 23:20, 욥 36:7, 왕상 21:10 등).
(b)  '살게하다'(삼상 30:21),
(c)  '거하게 하다'(창 47:6, 창 47:11, 레 23:43, 삼상 12:8, 왕하 17:6, 호 12:10, 사 54:3, 겔 36:33).
4. 호팔형에서
(a)  '살게되다, 거하게 되다'(사 5:8, 사 44:26, 겔 35:9)(참조: BDB; Gesen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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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Q;nI(5356, 닉카욘) 결백함, 무죄함
닉카욘(명남)은 나카(hq;n: , 5352)에서 유래했으며, '결백함, 무죄함'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5회 나온다.
(a)  닉카욘은 '죄없음, 무죄함, 결백함'에 대해 사용되었다.
창 20:5에서 아비멜렉은 그의 행위에 죄가 없다고 한다: "그가 나더러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시 26:6에서 시인은 "내가 무죄함으로 씻었다"고 하며, 시 73:13에서 "내가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고 한다. 이것은 결백한 마음과 행실을 나타내는 의식적인 정화를 언급한 것이다.
(b)  닉카욘은 '무죄함, 곧 형벌에서 자유'에 대해 언급한다. 호 8:5에서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하는 이스라엘("사마리아")의 지도자들에게 그들이 어느 때 어떻게 능히 무죄하겠느냐(형벌을 면하겠느냐)고 물으시면서 힐책하신다.
(c)  닉카욘은 물리적 의미에서 '이의 깨끗함'에 대해 사용되었다: "또 내가 너희 모든 성읍에서 너희 이를 한가하게 하며 너희 각처에서 양식이 떨어지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 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4:6). 여기서 "이를 한가하게"라는 표현은 '이를 깨끗하게 함'을 의미한다. 이 비유적 표현은 먹을 음식의 부족함을 의미한다.
(참조: BDB;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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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7364, 라하츠) 씻다, 목욕하다
라하츠(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씻다, 씻어내다, 목욕하다'를 의미한다.
이 어근은 제의적인 씻음을 가리키며, 어의학상으로는 아니지만 언어학상으로 아카드어 라하추(범람하다 to overflow, 넘쳐 흐르다 to flood)와 동족어이다. 이 단어는 동일한 의미를 지닌 이집트어 라하츠 및 우가릿어 라하츠와 동족어이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75회 나오며, 칼, 푸알, 히트파엘형으로 사용되었다.
최초의 용례는 창 18:4에 나온다: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신체의 부분들 중에서 의식적으로 씻어야 하는 곳들로 얼굴(창 43:31), 손(출 30:19, 출 30:21), 몸(레 17:16), 발(창 18:4 이하)이 있다. 레위기의 제사에서 희생 동물의 살도 씻었다(레 1:9 등). 이러한 씻음에는 일반적으로 많은 양의 물이 필요했다. 이러한 사실은 솔로몬의 커다란 청동 바다가 다른 의식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러한 물을 저장하는 통으로 이용되었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것 같다.
이 단어의 몇몇 흥미로운 용법이 이스라엘의 미용술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려주는 아가서에서 나온다. 어근 라하츠는 의식적으로 발 씻음(아 5:3)과 젖으로 눈을 씻는 것(아 5:12)을 묘사한다. 낭만적인 씻음을 가리키는 유사한 용법이 룻 3:3에도 나온다: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러나 이 어근 라하츠의 훨씬 더 중대한 용법은 죄로부터 깨끗케 하는 것을 나타내는 개념 속에 담겨 있다(사 1:16, 사 4:4). 이러한 의미는 에스겔 전체에 걸쳐 나타나며(겔 16:4, 겔 16:9, 겔 23:40), 계속하여 신약성경에서 요한의 세례(침례)와 예수님의 세례(침례)에서 나타난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의 씻는 관습에 대하여 많이 언급한다(요 2:6, 마 15:2, 히 9:10 등).(W. White)
이러한 물로 자주 씻는 행위는 틀림없이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일반적인 청결을 증진시켜 주었을 것이다. 이것은 또한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죄로부터 께끗케 됨을 뜻하는 것이 있다. 침례의 물이 특별히 깨끗하게 하는 자인 성령을 상징한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일련의 흥미로운 구절들도 있다. 막 1:8, 성령 세례(침례)가 예언됨; 행 1:5, 성령 세례(침례)를 그리스도께서 다시 언급하심; 행 10:47, 내적 의식의 표시로서의 외적 의식의 수행; 행 11:16, 행 1:5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언급하신다.(R. L. Har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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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5437, 사바브) 돌다, 주위를 돌다, 돌아다니다, 둘러싸다
사바브(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빙)돌다, 돌아(두루)다니다, 주위를 돌다, 돌아가다, 둘러싸다, 에워싸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60회 나오며, 칼, 니팔, 포엘, 히필, 포알형으로 사용되었다.
사바브는 주로 개인의 동작(삼상 7:16), 백성들의 동작(수 6:3), 돌쩌귀를 따라 도는 문의 동작(잠 26:14)이나 바람의 순환(전 1:6)을 뜻하는 단순 동사이다.
여러가지 비유적 표현들이 나타나는데 특별히 윤리적 또는 사법적, 율법적 문맥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어근은 왕국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는 것(왕상 2:15, 대상 10:14), 혹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지파간에 상속 재산 양도를 금하는(민 36:7, 민 36:9) 문맥에 사용되었다.
사바브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죄나(합 2:16) 그의 백성의 죄를 심판하시는 것, 즉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호세아(호 7:2)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는 바로 그 면전에서 사악한 행위로 그들 자신을 에워싸기까지 하였다고 슬퍼하였다.
예레미야(렘 6:12)는 사악하면서 또한 회개하지 않은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혹독한 심판을 예언하였다.
사바브는 또한 철저한 조사에 주의하기 위하여 마음을 돌리는 것을 나타낸다(전 7:25). 이 단어는 때때로 큰 슬픔에서 마음이나 자세의 변화를 뜻한다(왕상 21:4, 왕하 20:2). 이러한 마음의 변화는 하나님 앞에서의 어떤 변화된 상태, 즉 악한 상태든지(대하 99:6), 선한 상태(겔 6:22)를 포함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단어는 배교 후의 회개 및 은총의 회복과 관련된다(왕상 81:37).
밀접하게 뒤따르는 사상은 상황이나 환경의 변화의 사상이며(삼하 3:12, 삼하 14:20, 삼하 14:24, 렘 31:22), 때때로 사람(왕하 23:34, 왕하 24:17)이나 장소(민 32:38)의 이름을 고친데서 지적되었다.
어떠한 상황이라도, 어떠한 역경에서도, 가장 절망적인 "사태의 변화"에서도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통치(control)를 볼 수 있다. 신자가 아닌 어떠한 사람도 이러한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그가 비록 대적자들에게 완전히 포위되고(시 17:11, 시 109:3, 시 118:10-12), 또는 슬픔이나 시련에 에워 싸일지라도(삼하 22:6) 하나님께서 돌이키사 자기를 위로하시고(시 71:20, 시 71:21), 그래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구원의 노래로 자기를 에우실 것을(시 32:7, 시 32:10) 확신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모든 것은 메시야의 사역에서 가장 충분히 표현되고 절정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비록 그의 원수들이 힘센 황소들과 으르렁거리는 개들처럼 그를 둘러칠찌라도(시 22:12, 시 22:16), 그는 하나님과 인간의 모든 원수를 정복할 것이니 그의 백성을 구속하시고 변화되고 회복된 땅을 다스릴 것이다(슥 14:9-11).(참조: R. D. PATTERSON;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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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d;/T(8426, 토다) 감사, 감사 찬송, 감사제
토다(명여)는 야다(hd:y: , 3034)에서 유래했으며, '감사, 감사 찬송, 감사제, 고백'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32회 나온다.
야다에서 파생된 이 동족 명사는 기본적으로 죄나 하나님의 특성 및 사역에 대한 '고백'이란 의미를 지닌다.
이 단어는 한결같이 이스라엘의 희생제사 제도에 대해 사용되었다. 사람들은 "감사제물"(혹은 찬양제물)을 가져올 수 있었다. 여기에서 그들은 희생제물을 드리면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혹은 찬양을 드리거나)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였다. 수반하는 고백이 죄에 관한 것이었을 때, 이 제물을 "화목제물"로 분류되었으며,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열납될 수 있도록 그렇게 드려졌다(참조: 레 7:12-15, 레 22:29). 이런 제물과 고백은 그의 의를 인간의 죄와 대조시키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으며(시 50:23), 인간이 그의 길을 올바르게 정립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희생 제사가 하나님에 대한 찬양(고백)을 수반할 때, 이 때는 특히 기쁨의 때였다(시 95:2, 렘 17:26, 렘 33:11). 하나님은 이런 찬양으로 찬미 받았다(시 69:30). 시 100편은 그 내용뿐만 아니라 표제에 시사되어 있듯이, 이런 유형의 경우에 사용된 전형적인 찬양 시편이다. 노래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위대성을 고백하기 위한 일반적인 방법이었던 것 같다(시 147:4). 또한 특정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현재 상태에서 그들을 구원해주실 때, 그들이 성막(혹은 성전)에 와서 찬양과 고백의 희생 제물을 드리겠다고 서원했던 것 같다(시 56:12, 시 116:17, 참조: 욘 2:10의 요나와 대하 33:16의 므낫세).
희생 제사 없이 고백이 행해진 예들이 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망명자들은 찬양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했다(느 12:31-40). 아간은 여호수아 앞에서 여호와께 자기 죄를 고백했다(수 7:19-21).(참조: R. H. Aust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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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q(6963, 콜) 소리, 목소리, 음성
콜(명남)은 '소리, 음성, 목소리 sound, voice, nois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00회 이상 나온다.
콜은 주로 성대에서 말하는 소리를 의미한다(실제적으로나 비유적으로).
시적인 구절들(대부분)에서 그 의미는 다양한 여러 소리까지 포용한다. 빈도가 높지는 않지만 콜이 육성이나(창 3:17) 기록에 의해(왕하 10:6) 발성된 것을 뜻할 경우도 있다. 이 단어가 또한 감탄조의 "들으라"라는 뜻으로 작용하기도 한다(참조: GKC, 146b, 사 13:4, 사 66:6 등등).
'소리를 높여 울다'라는 문구는 광범하고 다양한 감정과 상황을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도와 달라는 울부짖음(창 39:14), 현실적 또는 예상되는 비극에 대한 슬픔(창 21:6), 재난이나(출 16:34) 기쁨(창 29:11)의 소리 등이다. 하나님께서는 산 위에서 그리고 후에는 속죄소 위에서 모세와 말씀하심으로써(출 25:22, 민 7:89, 참조: 출 20:22), 법궤를 어떤 수호신으로 여기면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 보이시고 확증하셨다(삼상 4:6, 삼상 4:14). 후에 하나님의 목소리가 블레셋인들을 뿔뿔이 흩어버렸다(삼상 7:10).
'아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라는 표현은 다음의 뜻을 함축한다. 주의하여 믿다(창 4:23), 아무의 제의에 따르다(창 3:17), 요청을 들어주다(창 21:12), 명령에 순종하다(창 21:18),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다(삼하 22:7).
본 단어가 다음과 같은 신학적 문제들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한다(더 좋은 이름들이 없으므로). 예언, 천둥, 언약, 나팔, 이 주제들은 종종 서로 뒤얽힌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음성과 모세의 음성(후에는 선지자들의 음성)은 상호 교환될 수 있다(참조: 출 3:18, 출 4:1, 출 7:1). 하나님은 그에게 특정한 표적들을 주시는데 사실상 이 표적들 자체가 말하는 역할을 한다(출 4:8, 한글개역: 난외주를 보라). 그리하여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셨음을 확증한다(그러나, 출 5:2). 천둥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상징한다. 즉 천둥이 심판을 초래하며 두려움과 복종심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출 9:23, 출 9:29, 참조: 시 29장). 하나님의 '콜'은 우르렁거리는 천둥소리이다. 반면 하나님께 나아갈 때의 인간의 '콜'은 딸랑 거리는 방울 소리이다(출 28:35). 언약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간명하게 선언하신 다음과 같은 원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종 모세의 명령(음성)은 하나님의 명령(음성)이며, 만일 백성이 그의 언약에 복종하고(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지키면 복을 받을 것이다(출 19:5). 그들이 불순종하면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시내산에서 충분히 설명된 바 있다(특히 신명기에서, 삼상 12:14-18, 예레미야의 용례들). 천둥 치듯 바로에게 심판을 내렸던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이 이제는 축복의 표적으로 등장한다(출 19:16, 참조: 삼하 22:7-14, 삼하 3:16, H4:16, 등등). 마지막으로 '콜'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들은 나팔소리이다. 그 나팔소리는 하나님의 능력(수 6:5)과 임재의 신호이다(삼하 6:15, 왕상 1:40-45, 고전 15:52).
바알(가나안의 천둥 신)의 거짓 선지자들과 엘리야의 싸움에서, 번개와 천둥을 일으키고(왕상 18:41) 비를 내림으로써(왕상 18장, 참조: 시 29편) 그 상황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실현시킨 이는 바로 하나님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 하심으로써(왕상 19:12), (바알이 그러하듯) 자신이 자연의 힘에 불과한 어떤 존재 이상임을 보여 주신다. 바알과의 이 싸움은 두 종교 사이에 있는 오랜 복합적 갈등의 일부이다(참조: W. F. Albrigth).
이러한 갈등은 구약성경의 선지서들과 시가에서 줄곧 입증되는 바이다.
마지막으로 콜이 아담이 동산에서 들었던, 바람을 타고 실려온 하나님의 음성이었음을 당연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창 3:8, 왕상 14:6).(참조: L. J. COPPES;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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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8085, 샤마) 듣다 hear
샤마(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듣다 hear'를 의미하며, '경청하다 listen to, 순종하다 obey'라는 의미도 지닌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15회 나오며, 칼, 니팔, 피엘, 히필형으로 사용되었다.
샤마는 '듣다'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 기본적인 의미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확대되는데, 대개 효과적인 들음이나 경청을 포함한다.
① '경청하다' listen to, '주의를 기울이다' pay attention,
② '순종하다' obey('명령'고 같은 단어들과 함께 쓰일 경우),
③ '기도에 응답하다' answer prayer, '듣다' hear,
④ '이해하다' understand,
⑤ '비판적으로 듣다' hear critically, '(법정에서) 조사하다, 심문하다' examine(in court).
파생 어간들은 이런 의미들에서 적합하게 수정된 의미를 지닌다.
샤마의 기본적인 용례는 무수하다(예를 들면 민 12:2에서 여호와께서 미리암과 아론의 불평을 들으셨다). 신 4:12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음성은 들었지만 형체는 보지 못했다. 창 3:8에서 아담과 하와는 동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무엇을 듣는지 하는 것은 종속절에서 표현된다. 창 37:17에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창 14:14에서 "그의 형제가 사로잡혔다는 것을 들었다", 삿 7:11에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
샤마는 '귀를 기울이다', '따르다' listen to라는 의미를 지닌다. 창 3:17에서 아담이 아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즉 그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랐다. 왕상 22:19에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라고 한다. 시 81:11, 잠 12:15에서도 예증된다.
샤마는 이러한 의미에서 점차 변하여 '순종하다' to obey라는 의미를 나타내게 되었다. 그 실례는 출 24:7, 사 42:24, 느 9:16, 렘 35:18에서 볼 수 있다.
삿 13:9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반응한다. 즉 응답한다는 의미에서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신다". 비슷한 용법이 겔 8:18, 시 4:1에서 발견되는데,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라는 표현은 "내가 부를 때에(내게) 응답하소서"라는 말과 병행된다. 또한 시 34:17에서도 발견된다.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기도의 응답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렘 11:10-11에서 매우 중요하고 진지한 원리를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환난 날에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을찌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신다(응답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그들은 알게될 것이다. 미 7:7은 의인의 확신을 표현한다. 즉 하나님의 음성에 스스로 귀기울이는 자는 하나님께서도 그의 기도를 진실로 들으시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보다 더 고무적인 강한 말씀이 시 94:9에 나온다.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않으시겠느냐?".
효과적으로 듣는다는 말은 '이해한다'는 개념도 역시 포함한다. 예컨대 창 11:7에 의하면 바벨탑 사건에서 언어가 혼란된 이후에 사람들은 더 이상 서로 "들을"(즉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J. E. Hartley)(참조: BDB; Gesenius;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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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P;(6381, 팔라) 뛰어나다, 비범하다, 기이하다, 놀랍다
팔라(동사)는 펠레(al,P, , 6382)에서 유래했으며, '뛰어나다, 비상하다, 비범하다, 기이하다, 놀랍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70회 나오며, '니팔, 피엘, 히필, 히트파엘형으로 사용되었다.
이 동사의 기본 의미는 "놀랍다"이며 히필형으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하다"라는 뜻이된다. 한편 피엘형에서는 "(서약을) 이행하다"라는 의미가 되며 레 22:21, 민 15:3, 민 15:8을 예로들 수 있다. 그러나 이 뉘앙스가 팔라의 다른 두 히필형 용례(레 27:2, 민 6:2)에도 존재한다.
이 동사와 실명사가 둘 다 하나님의 행위에 적용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우주의 이적 또는 이스라엘을 위한 역사적 위업을 가리킨다. 즉 성경에서 이 어근 팔라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이례적 일들을 말한다. 그리하여 인간에게 그것은 놀라움(팔라)을 심어 준다. 따라서 "믿음을 위한 기적의 진정한 중요성은 그것의 물질적 실제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증언적 성격에 있다...일반적으로 말하여 기적을 기적되게 만드는 것은 정상과 다른 그 사건의 특이성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강력한 충격을 주는 것은 기적 안에 내포된 하나님의 돌보심 또는 보응에 대한 뚜렷한 인상이다"(Eichrodt). 덧붙이건대 본질적인 것은, 기적이 너무 비정상적이어서 하나님의 돌보심 또는 보응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팔라는 인간에 대해서 약 15회 적용되었다. 그 경우 팔라의 핵심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다"에 있다. 그런 까닭에 풀 수 없고 접근할 수 없으며, 기이하고 권능있는 하나님의 행위가 바로 그런 것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① 신 17:8, "네가 판결하기 '너무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LXX에서는 adunatein).
동일한 헬라어 동사가 창 18:14의 번역문에서 사용되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예레미야의 두 구절(렘 32:17, 렘 32:27)에도 이와 동일한 수사 의문문이 나오는데 거기에서는 LXX이 그 단어 대신 크륍테인(kruptein)을 사용하였다.
슥 8:6: "이 일이 그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 하려니와".
② 잠 30:18, "내게 '심히 기이히'(LXX, adunatos) 여기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 서넛이 있으니".
③ 신 30:11,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KJV: hidden; LXX: huperogkos) 것도 아니요". 즉 그것은 접근할 수 있으며 따라서 알 수 있다. 삼하 13:2과 애 1:9에서도 동일한 헬라어 단어로 팔라를 번역하였다.
④ 이 어근은 또한 "믿을 수 없는"이라는 부정적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단 8:24과 단 11:36에서 "믿을 수 없는(한글개역: "비상하게") 음모"를 꾸미고 "믿을 수 없는(한글개역: "비상한") 참람한 것들"을 말하는 마귀적인 묵시론적 인물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 경우가 바로 이 의미이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팔라가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풀 수 없고 이성을 초월하며 믿을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팔라가 하나님께 적용되는 경우는 시편에서 그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서 펠레와 니플라오트 사이에는 아무런 의미상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듯하며, 일반적 의미에서이든 아니면 특별한 역사적 선행 사건에서든 양자가 다 하나님의 이적들을 가리킨다. 예상되는 바와 같이 이 어근은 감사의 찬송시 혹은 감사의 기도로서 분류되는 시편들에서 최다수가 나타나며 역사적 시편인 시 78편, 시 105편, 시 106편에서도 물론 출현한다. 종종 그러한 시편들에서 핵심적인 동사는 "호다"(찬양하다, 시 9:1, H2, 시 75:1, H2 등)가 되는데 니플라오트가 호다의 직접 목적어로 쓰인 경우는 시 107:8, 시 107:15, 시 107:21, 시 107:31 뿐이다.
나아가서, 하나님이 행하신 기이한 일들을 입으로 낭송하라고 백성들을 권면하고 있는 시편에서 명령형으로 사용된 동사들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예배 의식 거행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였다. 여기에서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동사는 사파르(말하다 tell)이다. 시 9:2, 시 26:7, 시 75:2, 시 96:3 등등. 그러나 다음과 같은 동사도 역시 사용되었다: 시아흐(...에 대해 이야기하다 talk of, 시 105:2(= 대상 16:9), 시 119:27, 시 145:5), 나가드(선포하다 declare, 시 40:5, H6, 시 71:17), 다바르(말하다 speak, 시 40:5, H6).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개개인이 묵상해야 함은 물론 공동으로 향유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사들이 갖는 기능은 단지 능력을 나타내는 데에 있지만은 않고 결국 그 수혜자나 낭송자가 자비를 얻게 하는 데에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시 107:8, 시 107:15, 시 107:21, 시 107:31에서는 니플라오트가 헤세드("자비" loving kindness, mercy)와 병행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기적"(시 31:21, H22)을 베푸신다(한글개역: "기인한 인자").(참조: V. P. HAMIL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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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s;(5608, 사파르) 세다, 자세히 말하다, 이야기하다, 서기관
사파르(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세다, 계산하다, 다시 세다(계산하다), 자세히 말하다, 열거하다, 이야기하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칼분사나 명사일 수 있는 소페르(rpes)는 '서기관, 계수(계산)자, 검열관'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60회 나오며, 칼, 니팔, 피엘, 푸알형과 실명사로 사용되었다.
사파르는 일반 수학에 사용된다. 사람들은 사물들(스 1:8, 사 22:10), 사람들(삼하 24:10), 때의 기간들(레 23:15 이하, 신 16:9, 욥 39:2), 행동(욥 14:16, 욥 31:4, 시 56:8, H9), 생각(시 139:17-18)을 셀 수 있다. 그리고 부정적으로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을 지적하는데 사용된다(창 41:49).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족장들(창 15:5, 창 32:12, H13)과 이스라엘(호 1:10, H2:1)에게 셀 수 없는 많은 자손을 약속하신 것이다. 이 약속들은 단순한 자연적 성취를 넘어서 그 안에서 이 약속들이 절정을 이루는 더 큰 다윗의 영적 씨(후손)를 바라는 약속들이다(렘 33:22, 참조: 롬 4:11-13, 롬 9:7-8, 갈 4:28, 호 1:10, H2:1, 참조: 롬 9:26).
피엘 어간에서 반복적 개념인 '다시 세다'는 '말하다, 선언하다, 보여주다'라는 추가적 의미를 취한다. 아버지들은 저들의 자녀들에게 삶에 있어서 하나님을 우선 순위로 해야 할 필요성과 하나님의 능한 기사들을 가르쳐야 한다. 이렇게 하여 저들의 자녀들이 차례로 저들의 자손에게 이러한 지식을 전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시 78:1이하). 모든 신자는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이적과 능한 행위들을 선포하여야 한다(대상 16:24, 참조: 시 9:1, H2, 15, 시 26:7, 시 73:28, 시 75:1, H2, 시 107:22, 렘 51:10). 신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해야 한다(시 102:21, H22, 참조: 시 22:22, H23, 수 1:8 등). 여호와께서 친히 그의 책에 기록하신다고 언급되어 있다(시 69:28, H29, 시 139:16, 참조: 출 32:32, 시 87:6, 사 4:3, 사 34:16, 단 7:10, 단 12:1, 말 3:16).
구약성경은 분명히 구약의 영감을 입증하며(출 24:7, 신 31:24, 수 24:26), 구약이 영감된 것으로 이해한다(보기로, 수 8:31-35, 단 9:2, 나 1:1 등). 따라서 신자는 이 책(성경)을 자신의 것으로 해야 하는데 이는 성경 안에 인생의 기본문제들에 관하여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신적 해석이 있기 때문이다(참조: 신 17:18-20, 수 1:8, 수 23:6등).
분사나 명사로 여겨지는 소페르는 '서기관, 검열관'을 의미한다(삿 5:14, 삼하 8:17, 삼하 20:25, 왕상 3:8, 왕상 4:3 등).(참조: R. D. PATTERSON;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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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4583, 마온) 거처, 거주
마온(명남)은 '거처, 거주'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9회 나온다.
마온은 이제 야생 동물들의 거처가 되어버린 황폐한 성읍들의 폐허를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이 단어는 매우 빈번히 여호와의 거처, 즉 하늘(항상 '거룩한' 이라는 말의 수식을 받음)과 성전을 지칭한다(시 26:8). 마지막으로 이 단어는 여호와를 그의 백성들의 피난처로 묘사한다(시 71:3, 시 90:1, 시 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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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yIB'(1004, 바이트) 집, 가정 house
바이트(명남)는 기본어이며, '집, 가정 house'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050회 나오며 '집' house, 혹은 '건물' building, '가정' home, '가족' household, '땅' land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 명사는 아람어 성서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다른 셈어에 동족어를 가지고 있다.
(a)  바이트는 어떤 종류의 재료로 만든 고정된, 세워진 구조물을 나타낸다. 이것은 '영구적인 거처'로서, 대개 장막과 구별된다(삼하 16:21, 참조: 삼하 16:22). 이 단어는 방 한 개의 거처에도 적용될 수 있다: "가로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창 19:2).
바이트는 또한 일시적인 '장막'(booth)이나 초가(but)와는 구별된다: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house)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booths)을 지은고로..."(창 33:17).
시 132:3에서 이 단어는 '생활 거처'를 뜻하며 '장막' tent(직역하면 '내 집의 천막')과 직접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 "내가 실로 나의 거하는 장막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며"(시 132:3). 이와 비슷한 용법이 대상 9:23에 나온다(직역하며 '천막 집' the tent house): "저희와 그 자손이 그 반열을 좇아 여호와의 전 곧 성막문을 지켰는데".
(b)  바이트는 많은 구절들에서(특히 이 단어가 '하나님'이란 말과 결합되어 사용될 때) 예배의 장소, 혹은 '성소'를 나타낸다: "너희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찌니라..."(출 23:19).
다른 구절에서 이 명사는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을 의미한다: "또 전의 벽 곧 성소와 지성소의 벽에 돌아가며 다락들을 건축하되..."(왕상 6:5). 때로 이 단어는 비록 상세하게 정의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런 의미를 지닌다(참조: 겔 41:7).
(c)  바이트는 방이나 가옥의 부속물을 의미한다: "전국 각 도에 관리를 명령하여 아리따운 처녀를 다 도성 수산으로 모아 후궁(harem, 직역하면 '여인들의 집')으로 들여..."(에 2:3). 이와 관련하여 바이트는 건물의 내부 혹은 바깥쪽에 반대되는 어떤 다른 구조물을 나타내기도 한다: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창 6:14, 성경의 처음 용례).
(d)  바이트는 종종 어떤 것이나 사람이 거하거나 안식하는 장소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지하세계(음부[sheol])는 '집'으로 불리운다: "내 소망이 음부에 내 집을 삼음에 있어서 침상을 흑암에 베풀고"(욥 17:13). '영원한 집'은 무덤이다: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전 12:5). '집'은 느 2:3에서처럼 '무덤'과 함께 사용될 때 '장소'를 의미할 수도 있다: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열조의 묘실있는 성읍이 어찌하여 황무하고".
(e)  바이트는 삿 3:20에서 용기(NASB, '상자' box)를 의미한다.
왕상 18:32의 '두 종자의 집' house of two seeds(한글개역 -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 만한 도랑")은 곡식 종자를 담는 용기를 가리킨다: "제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만한 도랑(직역하면, ~의 집들)을 만들고". '널판들의 띠' house of bars는 받침대를 의미한다: "그 널판들은 금으로 싸고 그 널판들의 장소(places, 직역하면, 집들 houses)들을 위하여(한글개역 - "널판들의 띠를 꿸) 금고리를 만들고..."(출 26:29). 이와 유사한 것으로 잠 8:2에 나오는 두 길의 교차로, 즉 '두 길의 장소' places('집' house, 한글개역 - "사거리")를 참조하라. 스텝지대(steppe)가 '짐승들의 집'으로 칭해진다: "...내가 들로 그 집을, 짠 땅으로 그 사는 처소(짐승들의 집)를 삼았느니라"(욥 39:6).
(f)  바이트는 가끔 한 집에 사는 사람들, 즉 '가족' household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창 7:1). 수 7:14에서 이 단어는 '가족' family을 의미한다: "...여호와께 뽑힌 지파는 그 족속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족속은 그 가족대로(직역하면, 집 혹은 단일한 거처에 사는 사람들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며"(수 7:14). 이 명사는 이와 유사한 의미에서 '자손'을 의미한다: "레위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었더니"(출 2:1). 이 단어는 '확대 가족', 심지어 주어진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을 삼았더라"(삼하 2:4).
그러나 창 50:4에서 바이트는 '왕궁' 또는 왕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house)에 말하여...". '왕궁'과 '자손'이란 개념이 삼상 20:16에서는 결합되어 있다: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삼상 20:16).
(g)  바이트는 몇몇 구절들에서 '영토' 또는 '나라'를 뜻한다: "나팔을 네 입에 댈찌어다 대적이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호 8:1, 호 9:15, 슥 9:8).(참조: NEDO;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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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K;(3519, 카보드) 풍부, 다량, 다수, 부, 영예, 영광
카보드(명남, 여)는 카바드(db'K; , 3513)에서 유래했으며, '풍부, 다량, 다수, 부, 영예, 영광'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40회 나온다.
카보드는 물건의 물리적으로 큰 무게나 '양'을 언급한다. 나 2:9에는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것이 풍부함이니라(모든 종류의 바라직한 물건이 '대량' 있음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 22:24에서 엘리야김은 "그 아버지의 집의 모든 영광(모든 중한 것들)"을 건 벽에 단단하게 박힌 못에 비유한다. 이 의미는 호 9:11에도 나타나는데, 여기서 카보드는 '큰 무리' 혹은 '군중'을 의미한다: "에브라임의 영광이(군중이) 새 같이 날아가리니...". 이 단어는 단순히 '무거운'을 의미하지 않고 물건의 무거운 양을 나타낸다.
카보드는 종종 '부, 재물' wealth과 중요하고 긍정적인 '명성'(구체적인 의미로) 모두를 나타낸다. 라반의 아들들은 다음과 같이 불평한다: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창 31:1 - 최초의 성경의 용례).
두 번째 의미는 창 45:13에 나온다. 여기에서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나의 애굽에서의 '영화'와 당신들이 본 모든 것을 내 아버지께 고하라"고 말한다. 이 때, 이 단어는 만약 가족들이 애굽으로 온다면 그들을 부양할 수 있다는 보증과 요셉의 지위에 대한 보고 모두를 내포하고 있다. 나무, 숲, 삼림도 위압하는 속성, 풍부함, '장려함(영광)'을 지닌다. 하나님은 앗수르왕을 벌하시어 그의 삼림의 대부분을 소멸시키실 것이다: "그 삼림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그 삼림에 남은 나무의 수가 희소하여 아이라도 능히 계산할 수 있으리라"(사 10:18-19).
시 85:9에서는 부요함 또는 풍성함의 개념이 두드러진다: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이에 영광(혹은 풍성함)이 우리 땅에 거하리이다". 이 의미는 시 85:12에 다시 나온다: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카보드는 또한 '영광, 즉 당당한 인물이나 지위를 강조하는 추상적인 의미를 지닌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다: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 시부와 남편이 죽었음을 인함이며"(대제사장들인 그들이 죽었다: 삼상 4:21).
사 17:3에서 카보드는 요새화된 도시, 주권(자치), 백성들을 포함하는 여러가지 사물들의 충만함이라는 보다 더 구체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이런 속성들 중에는 '영예', 존경, 지위가 있다.
사 5:13에서 '영예'의 개념이 카보드로 표현된다: "그 '귀한' 자는 주릴 것이요 무리는 목마를 것이며". 따라서 카보드와 그 병행어('무리')는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 즉 상류 계급과 평민을 나타낸다. 많은 구절에서 이 단어는 현실보다는 미래를 나타낸다: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사 4:2).
이 단어가 '영예' 혹은 '중요함'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는 두 가지의 어감을 지닌다.
첫째로, 카보드는 자기가 살고 있는 영역 내에서의 개인의 지위를 강조할 수 있다(잠 11:16). 이 '영예'는 그릇된 행위나 태도로 인해 잃어버릴 수도 있으며(잠 26:1, 잠 26:8) 바른 행동으로 증명될 수도 있다(잠 20:3, 잠 25:2). 따라서 이 단어의 강조점은 개인들 사이의 관계에 주어진다.
둘째로 카보드의 많은 용례들 중에는, 왕가에 속하는 '영예'와 같은 '고귀(성)'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도 있다(왕상 3:13). 따라서 이 단어는 귀족이 누리는 존경 받는 지위와 사회적 구별에 대해 사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단어가 하나님께 대하여 사용될 때는 하나님께 합당한 속성을 나타내며 그 속성으로 인하여 모든 인정을 받는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곧 하나님의 중요성과 가치와 의의를 인정하라고 아간에게 명했다(수 7:19). 이 구절과 이와 유사한 구절들에서 '영광을 돌리다'라는 말은 어떤 것을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인간이 해야만 할 일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다른 구절들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예배에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다(시 29:1). 어떤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즉 그런 구절들은, 찬미자들이 자연에서 그의 '영광'을 보고 예배에서 그것을 고백함으로써 자연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주권을 찬미한다는 것이다. 어떤 구절에서 이 단어는 역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내며 특별히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킨다고 한다(사 40:5). 그러나 몇몇 구절들은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을 역사와 백성을 주관하신 과거의 증거들과 연관시킨다(출 16:7, 출 24:16).(참조: NEDOT;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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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mi(4908, 미쉬칸) 거처, 장막, 성막
미쉬칸(명남)은 샤칸(@k'v; , 7931: 정착하다, 거주하다, 머무르다)에서 유래했으며, '거처 dwelling place, 장막, 성막 tabernacle'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40회 나온다.
(a)  미쉬칸은 '거처'에 대해 사용되었다(민 16:24, 민 16:27, 민 24:5, 렘 30:18, 사 54:2, 렘 51:30, 겔 25:4, 합 1:6, 욥 18:21, 욥 21:28, 욥 39:6, 아 1:8, 시 49:11).
(b)  미쉬칸은 '성막'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 성막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축조한 이동할 수 있는 성소를 말하며, 이것에 대해 출 25-31장과 출 30-40장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시온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는 성막을 가리킨다(겔 37:27, 시 132:5, 시 132:7, 시 43:3, 시 84:1) (참조: BDB).
[논문 참조 - 최근 수십 년에 이르기까지 성경 학자들은 이 성막과 관련하여, 19세기 벨하우겐(Wellhausen)의 재구성론적 접근법(reconstructionist approach)을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에 골몰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출애굽기의 성막 기사는 포로기 이후에 구성된 문학적 허구이며 솔로몬의 성전을 모델로 사용한 광야 시대의 이상화라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자기의 입장을 실증하기 위해 벨하우젠(Wellhausen)은 다음과 같은 "증거들"을 제시하였다. 이스라엘이 광야 시대에 필요한 기술을 소유하였는지 의심스럽다. 특히 솔로몬의 성전을 지을 때 뵈니게인들의 도움이 필요하였다는 사실로 보아 그러하다. 또한 소용되는 재료의 막대한 양과 거기에 드는 막중한 비용을 노예 생활에서 최근에 해방된 방랑하는 백성의 자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약점을 현대의 성경 학자들은 아주 명쾌하게 간파하였다.
구조물 그 자체를 살펴보면, 투탕크하눈(Tutankhamun)의 무덤 속 석관을 둘러싸고 있는 예배실에, 건축술이나 연대 면에서 매우 유사한 점이 존재한다. 이 예배실의 측면들은, 금을 입힌 골격 널로 만들어 미끄럼 나사못으로 죔으로써, 분해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 구조물 위에는 금으로 만든 장미꽃으로 장식된 아마포 휘장이 덮여 있었다. 이 구조물은 카이로 박물관(Cairo Museum)에 전시되어 있다(R. L. H.).
보다 긴요한 문제는 성막 제도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제성 개념의 조화 문제를 어느 정도까지 해결해 주느냐 또는 복잡화 하느냐이다. 성막은 자기 백성 중에 여호와께서 거하는 장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들의 하늘"이라고 그를 수용하지 못한다. 이 명백한 역설(paradox)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자료 검증과 자료 비평의 타당성을 인정하는 자들은 여기에서 두 자료 즉 P문서와, 신명기 및 신명기적 문헌 사이에 대립이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전자 곧 P문서는 유형적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임재 즉 자기 거처에서의 하나님의 실제적 거주에 대해 생각하고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것은 신인동성동형론적 신학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 하나님은 어떤 성막/집/천막에 거주하신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신명기는 성막을 "하나님이 거주하는/내가 거주하는" 장소로 이야기하지 않고, "그가 자기 이름을 거기에 거주하게 한다"(한글개역: "거기에 둔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신 12:11, 신 14:23, 신 16:2, 신 16:6, 신 16:11, 신 26:2, 모두 @k'v; , 7931의 피엘형). 그렇다면 신명기의 기자(들)는 하나님이 실제로 성막에 거주했다는 개념에 대항하고자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유형적 개념에 대 추상적 개념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둔다"는 것을 강조하는 성경 구절들은 Weinfeld의 저서에, 찾아보기 편리하게 열거되어 있다. 참고문헌, pp. 324-25를 보라). 성막에 거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다.
이러한 표현들과 개념들이 왜 동전의 양면처럼 상호 보충적이지 않고 상호 배타적인지 그 정확한 이유는 알기 어렵다. "하나님이 거주하신다"라는 하나의 표현은 이스라엘이 미혹되어 자기들의 하나님을 일선에서 물러난 자연신론적 하나님으로 만들지 못하도록 못박아 둔 하나의 반론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주한다"라는 한 표현은 하나님을 어떤 장소에 잘못 국한시키지 못하도록 못박아 둔 반론이다. 그러한 상황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변증법적 거주 개념을 기술하게 하였다. 태초의 기원에 관한 사건에 성경이 몇 장을 할애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성막의 중대성에 관한 어떤 일면을 측정할 수 있다. 말하자면 개괄적인 창세기의 창조와 타락 기사가 전부 세 장 밖에 되지 않는데 반하여 성막 기사는 출 25-31장, 출 35-40장까지의 열 세 장이나 된다. 만일 성막이 하나님과 인간이 예배를 위해 만나는 장소 즉 후자가 전자를 예배하기 위해 만나는 장소라 할찐대, 이 성막 시설이 복잡하고 자세히 설명되어야 한다는 점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모든 것은 명백한 내용을 담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만들어졌다. 이것에 관한 인간 건축가의 착상에 따라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출애굽기의 성막 기사 단락은 율법 수여와 언약 체결을 묘사하는 단락을 뒤따르고 있다. 시내와 성막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모세가 이 산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돌판을 받았는데, 산 꼭대기는 구름과 하나님의 영광에 완전히 싸여 있었다. 거기에서 모세는 또한 성막 건조에 관한 가르침을 받는다. 성막이 완성된 후 한때 시내산 위에 있었던 하나님의 영광이 이제는 성막을 가득 채우게 된다. 시내 산에서 일어난 현상이 성막으로 계속된 것이다. 자기 뜻에 관한 하나님의 이전 계시와 성막에서의 그의 계속적인 계시 사이에는 하나의 연속성이 있다.
참고문헌: 성막의 물리적 구조에 관한 항목은, 우수한 성경 사전이나 백과 사전이라면 어느 책에서든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언어학적, 신학적 관련 사항들을 부각시키고 있는 저서들만을 언급하기로 한다.(참조: V. P. HAMIL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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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hea;(157, 아헤브) 사랑하다 love, 좋아하다 like, 사랑스러운 lovely
동사 아헤브는 '사랑하다, 좋아하다'를 의미하며, 그 의미의 강도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무한한 애정에서부터 게으른 대식가의 육체적인 식욕에까지 이른다. 이 동사는 칼 어간의 모든 법(mood)과 니팔 분사형, 그리고 피엘 분사형으로 나온다. 16회의 피엘형은 강의적인 것이 아니라 대개 부정한 '연인' lover을 가리킨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00회 이상 나온다.
구약성경에서 사랑은 그 사람을 강요하여 그가 좋게, 또는 올바르게 평가하거나 인정하는 사물이나 사람에게로 이끌어 가는 자발적인 힘이다. 사람은 이 사랑의 힘에 제어를 받아 자기 자신을 주거나 혹은 사랑의 원인이 되는 대상을 확고히 붙잡거나 혹은 즐거움을 주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사랑은 내적 인격에 심은 영혼의 불가해한 힘이다. 사람이 사랑의 대상을 올바로 인정하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한다(신 6:5). 사랑과 미움은 생의 양극이다(전 3:8, 전 9:6). 사랑은 인간 상호간의 사랑, 하나님의 인간과의 사랑, 사물에 대한 사랑 등을 나타낸다.
(a)  이 단어는 남녀의 사랑에 대해 사용되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하나님과 관계, 그리고 남녀의 성적 관계를 시사해 준다. 이 남녀의 사랑은 이성(sexes) 상호간의 생명력 넘치는 충동을 의미한다. 선지자 예레미야(렘 2:25)나 호세아(호 3:1, 호 4:18), 그리고 에스겔(겔 16:37)은 사랑의 성적(sexual) 측면을 매우 진하게 묘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단어는 남녀의 연애나 열애(창 29:18이하, 창 34:3, 삿 16:4), 합법적인 부부의 행복한 사랑(창 24:67, 삼상 1:5)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창조의 기사는 성의 구별과 부부간의 사랑이 생을 풍요하게 하는 은사임을 설득력 있게 이해시켜 준다(창 2:18이하).
「그러나 이 사랑은 성적 사랑의 범위를 포함하지만 그것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헌신적 사랑과 생활의 충실함이 합쳐져 있다. 구약의 초기 기록에 의하면 이러한 사랑은 일부다처나 일처다부 사상과 부합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은 충실(참조: 창 20:13, 삿 14:16, 삿 16:4-5, 겔 16:8, 겔 23:17, 호 3:1), 상호의존(참조: 창 24:67), 책임(참조: 삼하 13:1, 삼하 13:4, 삼하 13:15)과 같은 인간 사랑의 다른 측면을 제외하고 성적인 것에 집중하는 위험을 이해시켜 준다(The interpertreter's D.B).」
더 나아가서 아가서는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라고 열정적인 사랑의 강력한 힘을 찬양까지 한다. 이 노래는 성적(남녀) 사랑의 기이함과 적극적인 힘을 찬양하지만 그 찬양에는 그 사랑이 근거를 두고 있는 상호의존과 신앙심(헌신)을 강조하고 있다(참조: 아 2:16, 아 3:1-8, 아 7:10, 아 8:6-7). 아가서에서 사랑을 묘사할 때 거의 대부분 아헵(아가파오)과 아하바(아가페)를 사용했다. 그러나 여자가 남자를 부른 칭호는 도드(d/D , 1730, 사랑하는 자)를 사용했다.
이러한 사랑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암논과 다말의 이야기는 성충동의 야수성, 즉 대상자와 성적 관계를 가지려는 무절제한 요구를 보여준다(삼하 13:1-22). 사랑은 성애 또는 성욕적인 영역에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근원, 곧 마귀로부터 기인한 원시적 힘인 미움을 부인함으로 맞서는 적극적인 능력이다. 이 이야기는 이 두 가지 충동의 야수성도 투명하게 보여준다(삼하 13:1-22). 결혼이나 부부 생활은 상대에 대한 사랑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 삼손의 신부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치 아니하는도다"라는 히스테릭한 말에서(삿 14:16, 참조: 삿 16:15, 창 29:31, 창 29:33) 동일한 요소가 표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심지어 법까지도 사랑과 미움의 성욕적 증상에 관여하고 있다(신 21:15이하, 신 22:31이하, 신 24:1이하).
아헤브가 '사랑의 행위를 하다'(일반적으로 이것은 야다<알다>나 샤카브<~와 함께 눕다>로 표현된다)라는 뜻을 가지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그러나 왕상 11:1에서 이 단어는 이러한 부가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참조, 렘 2:25).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바를 기록할 때, 이러한 의미를 사용하였다: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호 3:1). 이 단어의 이런 의미는, 이 동사가 사역동사의 어간(분사로서)으로 나올 때 현저하게 나타난다.
(b)  이 단어는 부모와 자식, 가족간의 사랑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사랑했으며(창 22:2), 리브가는 아들 야곱을 사랑했다(창 25:28). 야곱은 요셉과 베냐민을 사랑했다(창 37:3, 창 44:20). 잠언은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경계하느니라"고 했다(잠 13:24).
또한 이 단어는 며느리의 시어머니를 향한 사랑과 같은 가족간의 사랑을 표현한다(룻 4:15).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은 어느 곳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부모를 존중하고 존경하며 또 부모에게 복종해야 한다.
「참고 - 창 47:29에 보면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인애(헤세드: 친절, 자비)란 단어를 사용하여 자기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기를 요청했다. 이것이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족속이나 가족의 유대는 이스라엘에서 매우 강하였다. 그러므로 '근친' 관계의 중요한 요소인 사랑에 대하여 놀랄 일이 아니다. 그것은 룻 3:10에서 이성 곧 남녀 사랑과 관련되어 있다. 그곳에서 인애(헤세드: 친절, 자비)는 남녀 사랑의 개시와 가까운 친족에 대한 충실, 이 둘을 포함하고 있다.」
성경은 가족적 사랑이 너무 선택적일 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다(창 25:28). 그 결과로 야곱과 에서가 서로 반목하고 미워하게 되었다. 요셉에 대한 야곱의 편애로 인하여 다른 아들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하게 되었다(창 37:4). 배타적인 사랑은 증오가 들어올 수 있는 지점이 될 수 있다. 이는 사랑이 헌신적일 뿐만 아니라 책임을 다 해야 하기 때문이다.
(c)  아헤브은 때때로 종이 그 주인의 지배하에 남아 있기를 원하는 주인에 대한 특별하고도 강한 애착심을 나타낸다. 출 21:5에 보면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라고 한다. 아마 여기에는 가족애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아들이 그의 아버지를 사랑하듯이 종이 그의 주인을 사랑한다(신 15:16). 이러한 의미가 강조되는 구절로는 삼상 16:21이 있는데 여기에는 사울이 다윗을 크게 사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을 사랑하고(삼상 18:16) 심히 존경하게 되어 그의 모든 행동들을 경탄으로 바라보았다.
(d)  이 단어는 친구의 특별한 애착을 나타낸다. 다윗과 요나단 사이의 사랑은(삼상 18:1, 삼상 18:3, 삼상 20:17) 여인의 사랑보다 더 깊은 우정의 차원이었다 -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삼하 1:26).
(e)  아헵은 정치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솔로몬이 기름 부음을 받고 그 부친을 이어 왕이 되었다 함을 두로 왕 히람이 듣고 그 신복을 솔로몬에게 보내었으니 이는 히람이 평일에 다윗을 사랑하였음이라"(왕상 5:1). 다윗에 대한 히람의 "사랑"은 두 사람 사이의 국제적인 우호 관계나 화해 정책을 예증하는 것이다. 후자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그것이 그가 지극히 충성스러웠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f)  더 나아가 이 사랑은 사회적 공동 생활의 근본과 규범으로 나타난다 -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 19:18). 이러한 면에서 사랑은 이웃을 위한, 그리고 이웃을 향한 헌신이며, 이웃을 형제로서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웃이 당연히 받아야 할 대우를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특히 외국인(레 19:34)과 가난한 자(레 25:35)와 고아의 권리와 관련된 사회적 법률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이웃 사랑은 단순한 친절이나 호의로 해석할 수 없다. 이것은 편협한 배타주의를 배제한다. - 바로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웃이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적(enemy)으로 생각되는 것 같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의미한다.
그 이유로 신 22:1-4이 동포를 도울 의무를 부과하는 것인 반면, 출 23:4-5은 특별히 이 의무를 적대적인 사람에게 적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웃은 동료일 수도 있고 적일 수도 있으므로, 그는 사랑의 대상이지 법적 제한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개인은 법적 개인보다 우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형태에서 출 23:4이하의 요구와 아마도 한층 더 높은 수준인 잠 25:21에 있는 기본적 진술("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은 원수를 향한 성향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으나 한 특별한 방식의 행위의 의무를 지우는 것으로서,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적으로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요셉은 그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선으로 악을 갚는 그런 실례를 보여준다(창 50:19).
물론 구약성경에는 이러한 원수를 사랑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시 109편과 잠 14:20 및 적대 국가들에게 향한 일반적인 태도는 이에 대한 예증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해 부과된 윤리적인 요구의 고결함은 여전히 존재한다.
(g)  이 단어는 구체적인 것이나 추상적인 것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기름(잠 21:17), 은과 풍부(전 5:10), 뇌물(사 1:23)을 사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악(시 52:3-5), 사망(잠 8:3), 허사(시 4:2-3), 거짓 맹세(슥 8:17)를 사랑했다. 또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시 119:47), 율법(시 119:97), 증거(시 119:119), 법(119:159), 그리고 그들은 선(암 5:15), 진실과 화평(슥 8:19), 구원(시 40:16-17)을 사랑했다.
(h)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기를 "사랑하라"고 명하셨다(신 6:5). 그리고 시편에는 이 계명에 대한 순종의 증거들이 포함되어 있다(시 116:1, 시 145:20). 반대로 하나님은 사람들, 특히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신 4:37, 사 43:4, 말 1:2). 주님은 또한 시온의 문들(시 87:2), 정의와 공의(시 33:5), 성전(말 2:11)과 같은 것들을 "사랑하신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한다(수 22:5). 예레미야는 이 백성이 방황하기를 좋아한다고 질책하였다(렘 14:10).
(i)  이 분사형들은 종종 '친구' friend로 변역되곤 한다. 대하 20:7에 보면, 아브라함은 주의 "벗"이라고 한다.
(j)  위에서 지적하였듯이 피엘형 분사를 번역한 영어 단어 "lover" (연인)는 종종 매춘을 암시하는 경멸적인 뜻을 함축하고 있다. 선지자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등은 이스라엘의 부정한 관계를 언급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한다. 호 2:7, 호 9:12, 겔 16:33, 겔 16:36-37, 렘 22:20, 렘 22:22, 렘 30:14, 애 1:19, 슥 13:6 등).(참조: R. L. Alden; Nelson's ED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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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p,n<(5315, 네페쉬) 숨쉬는 존재, 영혼, 생명 등
네페쉬(명여)는 '숨쉬다, 원기를 회복하다'를 뜻하는 동사 나파쉬(vp'n: , 5314)에서 유래한 명사이며, '숨쉬는 것이나 호흡하는 존재(피조물), 영혼, 생명' 등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750회 나온다.
(a)  네페쉬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간에 육체를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어떤 경우에서(창 36:6) 소마(몸 body)로 번역되어질 수 있다. 네페쉬가 프쉬케로 번역되어 지면 프쉬케는 '넓은 의미에 있어서 인간의 생명적인 것을 의미하며'(G.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1, 1962, 153), 다른 말로는 살아 있는 것을 뜻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살아 있는 혼'이라는 말을 읽게 된다(창 1:20, RSV, living creatures). 죽어가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밖으로 불어내거나(AV 'gives up the ghost' 영혼을 포기한다. 참조: 렘 15:9), 혹은 영혼을 쏟아 붓는다(애 2:12). 영혼은 죽는 자에게서 떠난다(창 35:18). 그러나 영혼(즉 생명)은 육체로 되돌아 올 수 있다(왕상 17:21). '영혼은 영혼으로'라는 것은 '생명은 생명으로'라는 것을 의미한다(출 21:23). 생명의 좌소로서의 피(Blood)는 실질적으로 '네페쉬'나 프쉬케와 동일할 수 있다(창 9:4 이하, 레 17:11, 레 17:14, 신 12:23). (G. Harder).
(b)  "생물"(네페쉬 하이야)는 창 1:20에서 물에 사는 생명체 피조물에 대해 창 1:24에서는 땅에 사는 동물에 대해, 창 2:7에서는 사람(개역: "생령")에 대해, 창 9:10에서는 새들과 땅에 사는 동물에 대해, 창 9:16에서는 사람과 동물에 사용되었다. 동일한 용어가 '모든 생물', 그리고 '사람'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런 경우에 네페쉬 하이야라는 용어는 생명을 가지고 호흡하는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일 용어 '네페쉬 하이야'가 모든 생물에 사용되었다고 해서 모든 생물이 우리 인간과 같은 혼이나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분명히 네페쉬의 기능과 능력에 있어서 곤충과 물고기의 네페쉬와 소, 말 등의 네페쉬와 사람의 네페쉬가 다른 것이다. 기계의 가치와 능력에 따라 장착되는 동력이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있다.
특히 인간적 존재는 본래부터 충동, 욕구, 소망, 의지를 포함하기 때문에 네페쉬는 그런 의미들로도 사용되었으며, 한 개인의 생명을 의미한다. 소생시키고 회복시키는 대상으로서 네페쉬는 영혼(soul)이라는 개념과 생명 life이라는 개념을 모두 포함한다(R. V. Harris의 구약원어사전).
동물의 네페쉬와 사람의 네페쉬가 다른 것은 우선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대한 기사가 밝혀준다. 사람은 창조될 때 동물들과는 달리 생명의 숨(니셰마트 하임, 생명의 숨)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다. 그래서 '네페쉬 하이야'가 된 것이다. 이는 사람의 네페쉬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과 창조 의지에 의해 창조된 동물의 네페쉬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의 네페쉬와 동물의 네페쉬의 차이를 밝혀주는 또 하나의 성구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전 3:19-21을 보면 "19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것이 헛됨이로다 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 누가 알랴"
전 3:19에서 단지 한 사건, 즉 죽음이 사람과 짐승에게 똑 같이 찾아온다는 것, 전 3:20에서 '단 한 곳으로 간다는 것은 일종의 무덤을 가리킨다.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인간이건 짐승이건 간에 예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전 3:21에서 사람의 네페쉬와 동물의 네페쉬가 돌아가는 곳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전도서에서는 루아흐[영]가 사용되었지만 문맥상 네페쉬[혼]를 의미한다). 일부 학자들이 전 3:21을 회의적으로 해석하지만 매우 분명하고 명확한 어투로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간다'고 말한다. 이 사실을 누가 알겠는가? 오직 하나님 선만이 아신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자는 이 사실을 안다. 그러면 솔로몬도 알고 있었다.
(c)  네페쉬는 자아 생명의 민감한 부분으로서 감정, 사랑(Cant. 1:7), 갈망(시 63:1), 기쁨(시 86:4)의 좌소를 의미한다. 이것은 어떤 것을 더 숙고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영혼'은 그 생명의 운동과 감정의 여러가지 표현을 나타낸다. 영혼은 인간의 내적 능력을 결합한 요소이다. 따라서 "너의 영혼을 다하여"라는 말이 성립된다(신 13:3). 영혼의 내부에서 음식에 대한 욕망(신 12:20, 신 12:21), 육체의 욕망(렘 2:24), 살인과 복수에 대한 갈망(시 27:12)이 거주하고 있다. 영혼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즉 그것은 울고(시 119:28), 눈물을 흘리며(욥 30:16), "오래" 참는다(욥 6:11). 그러나 지식과 이해(시 139:14), 생각(삼상 20:4)과 기억(애 3:20)도 마찬가지로 영혼에 자리잡고 있다. "영혼"은 전 인격 곧 인간의 전 자아의 총체이다. 따라서 "영혼"은 의미상 "나 자신" 또는 "네 자신"과 동일시 될 수 있을 정도이다(삼상 18:1). 창 2:7에서 네페쉬는 '사람' person, 혹은 '존재' being를 의미한다.
살아있는 피조물 역시 혼(soul)으로 묘사되어 질 수 있다. 집합적 의미에서의 살아있는 모든 것, 곧 모든 생물들(레 11:10). 율법에서 영혼(soul)이라는 말은 특별한 법규와 관련된 당사자를 의미한다(레 4:2, 레 5:1, 레 5:2, 레 5:4, 레 5:15). 사람들을 계수할 때 영혼들(souls)이라고 계수한다(출 1:5, 신 10:22). 구약성경이 죽은 사람을 가리켜 그 사람의 영혼이라 말하며 따라서 이러한 표현으로써 죽은 시체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영혼이 몸과는 별개라는 개념 또는 죽을 때 영혼이 몸에서 분리된다는 개념에 구약성경이 전혀 친숙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해 주고 있다(민 6:6). (G. Ha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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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j'(2400, 핫타) 죄 있는, 죄 많은, 죄인(들)
핫타(형용사)는 하타(af;j; , 2398)에서 유래했으며, 형용사로 '죄 있는, 죄 많은 sinful', 명사로 '죄인 sinner'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8회 나온다.
(a)  핫타는 형용사로 '죄 있는, 죄 많은'을 의미한다. 민 32:14에서 '죄 많은 사람들'을 언급한다.
(b)  핫타는 명사로 '죄인들'을 의미한다(민 16:38, 삼상 15:18, 암 9:10, 사 1:28, 사 13:9, 사 32:14, 시 1:1, 시 1:5, 시 25:8, 시 26:9, 시 51:13, 시 104:35, 잠 1:10, 잠 13:21, 잠 23:17).
창 13:13에서 여호와에 범죄한 '죄인들'을 묘사한다.(참조: BDB; HE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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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j'(2416, 하이) 살아있는, 생존하여 있는
하이(형용사)는 하야(hy:j; , 2421: 살다)에서 유래했으며, '살아있는, 생존하여 있는 living, alive'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00회 나온다.
이 형용사는 종종 하나님에 대한 수식 형용사로 사용되고 있으며(수 3:10, 호 2:1, 시 42:3, 등), 또한 죽었거나 말라버린 것에 대조되는 사람, 동물, 채소에 대해서도 사용되고 있다. 복수어형은 흐르는 물 혹은 신선한 물을 묘사하고 있다(창 26:19, 레 14:5, 레 14:6, 민 19:17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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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622, 아사프) 모으다, 제거하다, 거두어 들이다
아사프(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모으다 gather, 옮기다, 제거하다, 떠나가다 remove, 거두어 들이다 gather in'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니팔형에서 (죽음에 의해) '모이다, 화합하다, 제거되다, 멸망하다', 푸알형은 '모이다', 히트파엘형은 '스스로 모이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99회 나온다.
(a)  이 단어는 죽음에 의해 '모이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열조에게로 모이다' gathered to he fathers(한글개역, '열조에게로 돌아가매)라는 어구는 자주 '죽다' die 혹은 '죽음' death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창 25:8, 창 25:17, 창 49:29, 창 49:33, 신 32:50, 왕하 22:20).
학자들 중에는, 이 어구가 비록 불분명하고 애매하기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내세에 있으리라는 인식과 함께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초기 신앙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뚜렷한 신학적 의미가 없이 죽음에 대한 완곡어법일 수도 있다.
이 단어는 저축하는 것(창 6:21), 사람들을 모으거나(출 3:16, 출 4:29), 사람들이 모이는 것(창 29:8), 사람을 가두는 것(창 42:17), 메추라기를 모으는 것(민 11:32), 손님을 영접하는 것(삿 19:15, 삿 19:18), 생명이 제거되는 것(삿 18:25), 병을 고치는 것(제거)(왕하 5:3 이하), 민족들이 회집하는 것(사 43:9) 등을 묘사한다.
(b)  이 단어의 주된 사용은 추수와 관련되어 있는데 추수를 뜻하는 일반적인 단어는 카치르이다. 이스라엘이 농경 민족이었으므로 그들에게 있어 이 추수(카치르)는 큰 의미를 지녔다(창 8:22, 창 45:6). 추수에서 유래했거나 아니면 추수와 관련된 여러 사건들이 있었다(창 30:14, 수 3:15, 삿 15:1, 룻 1:22, 룻 2:23, 삼상 6:13, 삼하 21:9, 삼하 23:13). 유대 종교 달력의 주요한 세 절기는 세 번의 추수 계절과 관련되어 있었다(출 23:16, 출 34:21-22). 유월절은 맥추 때에 있었고, 오순절은 밀 수확 때에 있었고(출 34:22), 그리고 연말에 거행되었던 장막절은 과일 수확기에 있었다. 보리 수확과 밀 수확기의 사이에는 몇 차례의 소나기가 내려서 밀 수확을 증가시켜 주었다(참조: 암 4:7). 밀 수확기에서부터 과일 수확기까지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삼하 21:10), 렘 5:24). 모세 율법에서는 추수가 이삭줍기(레 19:9), 첫 열매(레 23:10), 그리고 노동해서 얻은 것이 아닌 농작물 수확의 금지(레 25:5)에 관한 특정한 법률들과 관련되어 나온다.
게셀의 달력은 고대 이스라엘의 추수 계절들을 나타내준다. 올리브는 9월 중순부터 11월 중순 사이에 수확되었다. 이 때에 긴 막대기로 나무를 때렸다(신 24:20, 사 17:6). 삼은 3, 4월에 수확되었는데, 마당에서 삼을 잘라내어 다음에 이슬이나 수증기로 그 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물에 담그기라고 불리움 2:6). 4월이나 5월 초에는 보리 수확이 행해졌고, 5, 6월에는 밀 수확이 행해졌다. 무화과, 포도, 그리고 석류, 여름 과실들의 수확은 8, 9월에 행해졌다.
비유적인 용법들도 있다. 추수의 파괴는 하나님의 징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욥 5:5, 사 16:9, 렘 5:17). "추수 때"는 종종 멸망의 시기를 나타내곤 하였다(렘 51:33, 호 6:11, 욜 3:13). 추수의 즐거움은 큰 기쁨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나일의 추수는 풍성한 수확을 의미했다(사 23:3). 추수할 때가 지났다는 것은 기회를 잃어버려서 돌이킬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렘 8:20).(참조: BDB; C. L. Fein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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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zI(2154, 짐마) 방책, 의도, 사악함, 부정함, 음탕함
짐마 또는 잠마(명여)는 자맘(!m';z: , 2161: 생각하다, 궁리하다)에서 유래했으며, '계획, 계략 plan, 방책, 의도 device, 사악함, 부정함, 음탕함 wickedness'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9회 나오며, 다음 의미로 사용되었다.
(a)  짐마는 '계획, (목적 달성을 위한) 결심'이란 의미를 지닌다.
욥 17:11, "나의 날이 지나갔고 내 경영, 내 마음의 사모하는바가 다 끊어졌구나". 여기서만 좋은 의미로 사용되었고, 다른 곳에서는 항상 나쁜 의미로 사용되었다.
(b)  짐마는 나쁜 의미로 사용되었다.
① '악한 방책이나 의도'(사 32:7, 잠 24:9). 시 26:10, 시 119:150에서도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② 행위에 있어서 '사악함'(호 6:9, 잠 10:23, 잠 21:27).
③ 특별히 '부정, 음란(탕)'. 짐마는 근친상간(레 18:17, 레 20:14), 음란(레 19:29, 삿 20:6), 간음(간통)(욥 31:11)에 대해 사용되었다.
④ 더욱 자주 은유로, '음란'은 백성의 우상숭배를 지적한다(렘 13:27, 겔 16:27, 겔 16:43, 겔 16:58, 겔 22:9, 겔 22:11, 겔 23:21, 겔 23:27, 겔 23:29, 겔 23:35, 겔 23:44, 겔 23:48, 겔 23:49, 겔 24:13).(참조: BDB; HE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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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v'(7810, 샤하드) 선물 present, 뇌물 bribe
샤하드(명남)는 사하드(dj'v; , 7809)에서 유래했으며, '선물 present, 뇌물 breb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3회 나온다.
수뢰(아마 재판관 편에서)에 대한 금지 규정이 모세오경의 법률 부분에서 발견된다. 출애굽기와 신명기에서 법관이나 관리가 '뇌물' 즉 부정한 금품을 취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출 23:8, 신 16:9). 법의 공정을 기하기 위해 재판관에게는 특히 엄하게 '뇌물'을 받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 요구되었다(대하 19:7). 지배자들은 뇌물 받는 폐풍에 빠지는 자가 많아, 예언자들은 이것을 비난했다(삼상 8:3, 사 1:25, 사 5:23, 미 3:11). "뇌물을 받는 자의 장막은 불탈 것"(욥 15:34)이라는 말은, 법정의 부패에 관련된 표현으로 보고있다(BD).
비록 그 대가가 정당하다 할지라도 뇌물은, 무죄한 사람을 암살하게 되는 "청부 살인자" hitman를 생산할 수도 있으며(신 27:25, 겔 22:12, 시 26:10) 혹은 적어도 재판을 굽게 할 수 있다(잠 17:23).
도덕률과 형사법에 대한 이런 흉악한 위반 행위를 끊는 자만이 하나님의 면전에 설 수 있다(대하 19:7, 시 15:5, 사 33:15). 하나님 자신은 이 점에서 흠이 없다: 신 10:17(참조: 벧전 1:17).
어느 시대나 어느 문명을 막론하고 인간의 탐욕이 존재하지만 구약성경에서 뇌물 수수의 특정 사례가 단 3회(shohad가 사용됨) 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엘리의 아들들(삼상 8:3), 아사 왕과 벤하닷 왕(왕상 15:19), 아하스 왕과 디글랏 빌레셀 왕(왕하 16:8).
우리는 또 다시 이방 국가들과는 대조적인 구약성경의 독특성을 찾아 볼 수 있다. 핑켈스타인(Finkelstein)은 메소포타미아 문헌에 관한 그의 연구에서 말하고 있다: "뇌물 수수를 명확하게 금지한, 알려진 설형 문자로 된 법률은 없다(p. 79); "그것(즉 뇌물수수 행위)은 일반적 관습이었을 뿐만 아니라 법적 거래 행위로 인식되었다"(p. 80)(V. P. Hamilton).
(참조: BD; HELOT;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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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m;(4390, 말레) 채우다, 가득 차다, 충만하다
말레(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채우다, 가득 차다(채우다), 충만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50회 나온다.
(a)  말레는 칼형과 니팔형에서 그 용법들을 검토해보면 공간적인 의미를 지니거나 확대되어 시간적인 의미에 대한 중요한 신학적인 개념을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간적인 의미는 다음의 구절들에 나온다. 출 10:6(집들을 가득 채운 메뚜기), 욜 3:13(즙으로 가득 찬 포도즙틀), 그리고 왕하 4:6(가득찰 때까지 텅빈 그릇에 기름을 쏟아 붓는 과부).
시간적인 의미는 정해진 때의 완성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출산함으로써 완성된, 리브가의 임신의 날들(창 25:25), 여호와께서 나일강 물을 치신 후 경과한, 즉 끝나고 지난 7일간(출 7:25), 그리고 다니엘이 금식을 끝낸 3주간(단 10:3).
말레는 하나님의 편재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의미심장하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4). 그는 우주적으로 임재하시며 모든 땅을 그의 영광으로 가득 채우실 뿐만 아니라(민 14:21, 시 72:19, 사 6:3), 또한 장막을 채우는 구름에서 나타난 그의 영광(카보드)에 의해 지역적으로 보여지기도 한다(출 40:34-35, 왕상 8:10-11, 사 6:1, 겔 10:3, 겔 43:5, 겔 44:4).
말레는 또한 시작된 일을 완성하거나 혹은 약속된 말씀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피엘형은 말의 성취를 강조하는 것 같다.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겠다고 말한 대로, 우상을 숭배할 때, 그들은 자기네의 말을 이루는 것이다(렘 44:25). 70년 포로생활로 예레미야의 말이 이루어진 것처럼(대하 36:21), 솔로몬이 아비아달을 제사장직에서 쫓아내었을 때, 엘리의 말이 이루어졌다(왕상 2:27).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으셨을 때, 그는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 행동하신 것이다(왕상 8:15, 왕상 8:24, 대하 6:4, 대하 6:15). 하나님은 또한 그의 메시야의 도모와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행동하실 것이다(시 20:4, 시 20:5, H5, H6).
(b)  말레의 피엘형은 때의 기간을 나타내기 위해서도 사용된다. 즉 날수(창 29:27-28), 햇수(대하 36:21), 혹은 만료되어야 하는 임신의 기간(욥 39:2), 따라서 강조점을 오로지 예언적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해진 것을 이루고, 완성하고, 행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 있다. 예언과 그 예언의 성취 사이의 시간에는, 연대적인 시간(크로노스[chronos])을 적절한 순간(카이로이)으로 계속하여 채우시는 바로 그러한 능력 있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의미심장한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말씀이 약속한 모든 것의 저 최종적인 성취에 속한다.
비유적인 표현에서 땅은 종종 폭력으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창 6:13, 미 6:12, 렘 23:10, 렘 51:5, 겔 7:22), 때로는 하나님의 영광, 자비, 선, 그리고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가득 찬 것으로 묘사되곤 한다(시 33:5, 시 119:64, 사 11:9, 합 3:3). 땅은 죄로 가득 차게 될 수도 있다(렘 16:18, 겔 8:17).
(희생제물로) "손에 채우다"는 어떤 사람의 직무를 "신성하게 하다"(대상 29:5, 출 32:29)나 제사장을 성직에 임명하는 것을 말한다(삿 17:5).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욕망을 성취하는 것은 그를 "만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출 15:9).(참조: W. C. KAISER;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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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d:P;(6299, 파다) 대(구)속하다, 속량하다, 구원하다
파다(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대(구)속하다, 속량하다, 구조하다, 구원하다'를 의미한다.
파다의 기본의미는 값을 지불하거나 그에 상당하는 대체물을 줌으로써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소유권이 이전되는 것을 뜻한다. 이 어근은 앗수르어에서 '아끼다, 용서하다' spare를, 우가리트어에서 '속량하다' ransom을 의미한다(UT 19: no. 2013).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59회 나온다.
(a)  파다의 의미의 발전은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원래 이 단어는 소유권의 이전을 위해 요구되는 대금을 지불하는 것과 관련된 상업적인 용어였다. 그러나 삼상 14:15을 보면 이러한 금전적 개념이 이 단어에 본질적으로 내재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울이 요나단의 본의 아닌 잘못에 대한 대가로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으나 "백성이...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셨다". 노예 상태란 '속량'(ransom) 받을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출 21:8과 레 19:20에서 결혼을 위한 노예 소녀의 속량을 언급하고 있다.
(b)  파다는 초태생에 관한 율법과 관련이 있으며, 이것은 출애굽기에서 특별한 종교적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구원하실 때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에 있는 모든 첫태생을 죽이는 대가로 그 일을 행하셨던 것이다(출 4:23, 출 12:29). 하나님께서는 이로서 이스라엘의 사람과 짐승의 모든 첫태생의 생명에 대한 영원한 권리를 소유하시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 사건은 여호와께 사람과 짐승의 모든 첫태생을 바침으로써 이스라엘에서 영구히 기념되었다(출 13:12).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계수할 당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들을 대신하여 예배의식을 집행할 목적으로 레위 족속을 구별시키시고(민 3:40 이하), 백성들의 가축대신 레위인들의 가축을 자기의 몫으로 성별하셨다(민 3:44 이하).
레위인들의 수를 초과한 장자들의 수는 따라서 1인당 5세겔의 값으로 속량 되었으며 이 돈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졌다.
(c)  후대에서 사람이나 부정한 짐승들의 초태생은 속량 받아야 했지만 소, 양, 염소의 첫 새끼는 속량될 수 없었다. 이는 그것들이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었으므로 희생으로 드려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귀의 첫새끼는 어린양으로 대속하든지 도살되어야 했다. 여호와께 거룩한 것 즉 소나 양, 염소는 대속될 수 없었다(출 13:11-16, 출 34:19-20, 민 18:8-32).
마찬가지로 여호와께 "바쳐진", 즉 금지를 당해 사람이 소유하기에 합당하지 못한 사물이나 사람은 모두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였으므로 속량될 수 없었다(레 27:28-29).
(d)  대속에 관한 문제가 단지 이스라엘의 초태생에 관련된 것만은 아니었다. 이스라엘 자체도 하나님의 초태생이었으며(출 4:22) 여호와의 구속을 받았었다: "너는 애굽 땅에서 종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하셨음을 기억하라"(신 15:15, 신 24:18).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이스라엘은 애굽의 노예 신분으로부터 구원 받았으며 속량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그 후 수세기를 통해 히브리 사상의 특징을 형성시켰다(삼하 7:23, 시 78:42, 시 111:9, 미 6:4). 이사야는 아브라함이 우르에서 받은 하나님의 소명을 대속으로 보기까지 하였다(사 29:22, 참조: 벧전 1:18). 마찬가지로 그는 시온의 장래 구원을 그와 동일한 대속적 행위의 결과로 보았다(사 35:10, 사 51:11, 슥 10:8).
(e)  대속의 개념은 '구원하다'는 의미로 나아간다.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구속하신 하나님은 다른 어려움으로부터 또한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를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음을 확언할 수 있었고(삼하 4:9, 왕상 1:29), 따라서 그는 기도하였다: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시 25:22).
시편은 종종 하나님께서 어떤 위험(시 26:11, 시 31:5, 시 34:22, 시 44:26, 시 71:23) 또는 인간의 압제로부터(시 55:18, 시 69:18, 참조: 욥 6:23) 생명을 구원 내지 구속하는 것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인간이 직면하는 가장 큰 위험이나 재난은 사망, 스올, "구덩이"다. 시편 기자는 시 49:8, 시 49:9에서 인간의 부적격성을 날카롭게 표현하지만 하나님의 구속 능력은 한이 없다고 결론 짓는다(시 49:16).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궁극적 구속은 부활이다.
(f)  파다는 오직 한번 죄나 불의로부터 해방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저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리로다"(시 130:8).(참조: BDB; Gesenius; W. B. Co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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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j;(2603, 하난) 호의(은혜)를 베풀다, 자비롭다, 불쌍히 여기다
1. 하난(동사)은 기본어근이며, '호의(은혜)를 베풀다, 자비(은혜)롭다, 불쌍히 여기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80회 나온다.
(a)  칼형에서 '호의(은혜)를 베풀다, 자비롭다, 불쌍히 여기다'를 의미한다.
하난은 칼형으로 사용된 용례들 중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용례들, 즉 대략 41회 용례들이 여호와를 주어로 취한다. 청원의 말, '혼네니'(나에게 자비로우소서)는 시편에 19회 나온다. 시편기자는 여호와께 외로움(시 25:16, H17), 고통(시 31:9, H10), 죄과(시 51:1, H3)에 대하여 자기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간청한다. 죄과에 대해서 그가 구하는 은총은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고발을 말소시켜 달라는 것이다. 사 33:2을 참조하라.
여호와는 자비롭게 야곱에게 자녀를 주시고(창 33:5) 그를 번영하게 하셨다(창 33:11). 베냐민에게 내린 요셉의 축복(창 43:29)과 아론의 축복(민 6:25)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태도를 필요로 한다.
아모스(암 5:15)는 청중들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도록 의를 세우라고 촉구한다. 요컨대 여호와는 그가 선택한 사람들에게 자비롭게 행하신다는 점에 있어서 주권자이시다(출 33:19).
(b)  니팔형에서 '불쌍히 여기심을 받다, 동정의 대상이 되다'를 의미한다.
렘 22:23, "레바논에 거하여 백향목에 깃들이는 자여 여인의 해산하는 고통 같은 고통이 네게 임할 때에 너의 가련함이 얼마나 심하랴".
(c)  피엘형에서 '은혜(자비)롭게 하다'를 의미한다.
잠 26:25에서 말이 외적으로 친절하거나 동정적인 말에 대해 사용되었다.
(d)  포엘형에서 '자비를 베풀다, 불쌍히 여기다'를 의미한다(잠 14:21, 시 102:14).
(e)  호팔형에서 '은혜 받다(입다)'를 의미한다(사 26:10, 잠 21:10).
(f)  히트파엘형에서 '은혜(자비, 은총)를 구하다'를 의미한다.
히트파엘 어간은 약속의 땅을 보게 해 달라고 한 모세(신 3:23)와 성전 봉헌 때의 솔로몬(왕상 8:33, 왕상 8:47, 왕상 8:59, 왕상 9:3, 대하 6:24, 대하 6:37)과 시편기자(시 30:8 H9, 시 142:1 H2) 그리고, 야곱이 더불어 씨름한 천사에게 간구하는 것을 인용한 호세아(호 12:4 H5)가 하나님께 탄원할 때, 사용하였다. 빌닷에게서 하나님께 탄원하라는 충고를 받은 욥(욥 8:5)은 비록 자기가 의롭긴 하지만, 이 방법만이 그가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는 길일 것이라는 점을 시인한다(욥 9:15).
2. 하난(동사)은 기본어근이며, '싫다, 몹시 싫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욥 19:17에서 1회 나온다: "내 숨을 내 아내가 싫어하며 내 동포들도 혐의하는구나".(참조: E. YAMAUCHI;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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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vymi(4334, 미쇼르) 평지, 평원, 똑바름, 정직함
미쇼르(명남)는 야샤르(rv'y: , 3474)에서 유래했으며, '평평한 곳, 평지(원), 똑바름, 정직함'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3회 나온다.
(a)  미쇼르는 '평지, 평원, 평평함'에 대해 사용되었다(왕상 20:23, 왕상 20:25, 슥 4:7, 사 40:4, 수 13:9, 수 13:16-17, 수 13:21, 렘 48:8, 렘 48:21).
많은 절들에서, 미쇼르는 아르논 강북쪽, 히브리인들이 점령했던 요단의 특정한 지역을 가리킨다. 이곳은 목초지가 있는(대하 26:10) 광야에 위치해 있었다(신 4:43). 그 지역 안에는 도피성들 중의 하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수 20:8), 마을도 있었다(신 3:10). 렘 21:13에서의 "평원 반석"은 예루살렘에 있는 정확한 지형학적 위치(KB), 아마도 오펠궁(JB)을 가리키는 것 같다.
사 42:16에서는 "평평한 자국"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b)  미쇼르는 '평탄한 곳'(장애물이 없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다윗의 기도에서 사용된 것처럼(시 26:12, 시 27:11, 시 143:10), 이 단어는 "평평한 곳"이나 비유적으로 '안전과 안락과 번영의 곳'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단어는 재판관이신 여호와께 호소한다는 점에 비추어, 율법 준수 뒤에 오는 공의나 축복을 의미하는 것 같다(신 26:1).
(c)  미쇼르는 '정직함, 공정함'에 대해 사용되었다(시 67:5, 시 45:7, 사 11:4, 말 2:6).
(참조: BDB;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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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5975, 아마드) 서 있다, 위치를 취하다, 머무르다, 지탱하다
아마드(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서 있다, 위치를 취하다, 머무르다, 멈춰서다, 지탱하다, 견디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00회 이상 나온다.(참조: BDB; HE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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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eq]m'(4721, 막헬) 모임, 집회
막헬(명남)은 '모임, 집회'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시 26:12에서 한번 나오며, 예배를 위한 '모임, 집회'에 대해 사용되었다.(참조: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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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1288, 바라크) 무릎을 꿇다, 축복하다, 복을 주다, 찬양하다
바라크(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무릎을 꿇다, 축복하다(복을 주다), 찬양하다'를 뜻하며, 다른 의미로는 주로 하나님에 대하여 '저주하다, 욕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왕상 21:10, 왕상 21:13, 욥 1:11, 욥 2:5). 기본적으로 바라크는 '유익한 능력을 부여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구약성경에서 '축복한다'는 것은 '성공, 번영, 생산, 장수 등을 위한 능력을 부여한다'를 의미한다. 이 의미는 부여하는 과정과 부여 받는 상태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진정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다. 또한 바라크의 의미를 보면 무릎을 꿇는 것과 축복이나 복을 받는 것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1)  무릎을 꿇는 것, 곧 기도하는 것은 축복을 받는 비결이다.
대하 6:13(참조: 왕상 8:14, 왕상 8:54)을 보면 솔로몬은 성전 봉헌에서 놋대 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의 복은 백성들이 예배가 끝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갈 때 그들에게 내려졌다. 이렇게 하여 이 복은 그들의 일상 생활에 실현된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이삭의 신부를 구해오라는 주인의 부탁을 받고 메소포타미아 나홀의 성에 이르러 낙타를 그 성밖 우물 곁에 무릎을 꿇게 하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 종의 기도로 주인과 종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삭의 좋은 신부감을 얻는 복을 받은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열심히 기도하자.
(2)  무릎을 꿇는, 곧 여호와를 경배하는 것은 복을 받는 비결이다.
시 95:6이하에서 시인은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을 듣기를 원하노라"(빌 2:10, 빌 2:11)라고 말했다.
시인은 시 115:2이하에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무론 대소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라고 노래했다.
(3)  신앙 공동체는 자기가 받은 복에 대하여 여호와를 찬양함으로서, 곧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라는 외침으로 응답했다.
시 28:6, 시 28:7에서 다윗은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노래했다.
여러분 바라크라는 말을 기억하라.
바라크 -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다.
바라크 -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것이다.
바라크 -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이다.
바라크 - 받는 복을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이다.(참조: H. -G. LINK; 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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