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02.06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고전6.성전인 몸 시23.YHWH의어떠하심.기념이름의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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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고전6장   420너성결키위해 421내가예수믿고서 422거룩하게하소서 [423먹보다도더검은] [424아버지여나의맘을] 425주님의뜻을이루소서 426이죄인을완전케하시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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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적 관점에서 볼 때에는 [자기에게 어떤 손해가 오는 것을  허용할 필요가 없음이 일견 타당해 보이기에 (육적 관점에서는)쉽게 동의하며 그 손실을 보지 않기 위해 소송을 세상법정에 제기하는 것이 마땅한 권리인 것 같아 보이는 바로 그것에 대해조차, 그리스도인이라면  주 그리스도께 여쭈어 보아야 함을 잊지말라!!...혹시 자신의 거듭난 생명 JC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임을 망각하고, 무심코 옛사람의 혼적 생명의 관점에서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주목하고 명심하라, 회개하고 돌이키라!!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제자됨의 도리를 말씀해 주셨다."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자기의 의 - 주장 - 선호 - 취미 - 자랑/전문성 - 세상적 명예/가치추구들을, 그리스도께서 그리하심처럼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라 하신다)) 자기십자가를 지고((참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예비-공급-인도-보호-양육-산출의 근원으로서> 연합하여 하나되어동행하시며 완전히 보살펴 주시는주님 앙망하는 살아 생동하는 믿음 발휘함으로써 주하나님의 풍성부요충만으로부터 공급받도록 이끌고 계심을...비워야 채우심을!!> 알고 있고 그리 하려느냐<주하나님, JC의 패러다임으로 살아 보겠느냐!>...라고 물으신다)) 나를 따라 오너라"고 하신다....

**["요16:33...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기에, 그분의 평강안에 머물기 위해 모든 억울함-조롱-멸시-천대-박해/박대-모욕 당함에 마음 쓰지 말고 왕적 제사장 됨의 품위를 잃지 말고!!...친히 갚아주실 하나님만 바라봄으로써 일절 참고 견디라.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믿는 이의 어떠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여기며 , 사도바울이 가졌던 바로 그대로 [임의로 저항하지 말고 주께 묻고 경청 순복하여 , 오직 진리의 그리스도를 살아내며, 주께서 알아주시기에, 주를 신뢰함으로일절 오래 참으며, 주님을 모르는 세상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자로 살라  하신다...바로 이렇게 주안에서 참된 단독자 그리스도인 됨을 추구할 때, 작은 일들을 용서하기를 배우며, 그것을 통해 끝까지 견딤 통해 성도들의 십자가구원을 온전히 이루신 그리스도 주예수님을 배우게 될 것...)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의 영적 뜻을 묵상하라..먼저 형제에게, 더 나아가 이웃에게 적용하도록 하자 .."누구든지 억지로 너희로 오리를 가게 하면 십리를 그와 동행하고, 네 겉옷 달라 하는 자에게 네 속옷까지 내어주며.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이를 거절하지 말라" 하심을 꼭 기억하고 실행하는 자 되라.  

** 바로 그리함으로써 믿는 이마다 각자 그리스도와 연합한 단독자 됨을 온전히  이루게 되며 교회공동체에 임재해 계신 그리스도의 영안에서 상호 교통할 때, 교회내에서의 교인간 [육적 관점을 취함에서 오는] 상호분쟁의 여지는 더더욱 줄어들게 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필요한 경우라면, 교회 어른들의 중재를 거쳐서 해결함이 마땅하고. 세상법정에까지 소를 제기하는 것은 온당치 못함을 강조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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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법정에 송사하지 말라

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13.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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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새번역]제6장

===세상 법정에 소송하지 말라

1.  여러분 가운데서 어떤 이가 다른 사람을 걸어 소송할 일이 있을 경우에, 성도들 앞에서 해결지으려고 하지 않고,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소송한다고 하니, 그럴 수 있습니까?

2.  여러분은,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할 것임을 알지 못합니까? 세상이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겠거늘, 여러분에게 가장 작은 사건 하나를 심판할 자격이 없겠습니까?

3.  여러분은, 우리가 천사들도 심판할 것임을 알지 못합니까? 그러한데, 하물며 이 세상 일들이겠습니까?

4.  그러니 여러분에게 일상의 문제에서 생기는 소송이 있을 경우에, 여러분은 교회에서 멸시하는 바깥 사람들을 재판관으로 세우겠습니까?

5.  나는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신도들 사이에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해 줄 만큼 지혜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까?

6.  그래서 신도가 신도와 맞서 소송을 할 뿐 아니라, 그것도 불신자 앞에서 한다는 말입니까?

7.  ○여러분이 서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부터가 벌써 여러분의 실패를 뜻합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당해 주지 못합니까? 왜 차라리 속아 주지 못합니까?

8.  그런데 도리어 여러분 스스로가 불의를 행하고, 속여 빼앗는데, 그것도 신도들에게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음란한 자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남창노릇을 하는 자나 동성연애를 하는 남자나,

10.  도둑질하는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남을 중상하는 자나, 남의 것을 약탈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11.  여러분 가운데 이런 사람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씻어 주심을 받고, 거룩하게 하여 주심을 받고,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았습니다.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

12.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에도 제재를 받지 않겠습니다.

13.  "음식은 배를 위한 것이고, 배는 음식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저것도 다 없애 버리실 것입니다. 몸은 음행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며, 주님은 몸을 위하여 계십니다.

14.  하나님께서 주님을 살리셨으니, 그 권능으로 우리도 살리실 것입니다.

15.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떼어다가 창녀의 지체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16.  창녀와 합하는 사람은 그와 한 몸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두 사람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17.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그와 한 영이 됩니다.

18.  음행을 피하십시오. 사람이 짓는 다른 모든 죄는 자기 몸 밖에 있지만, 음행하는 사람은 자기 몸에다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

19.  여러분의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여러분 안에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스스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20.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사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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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rinthians 6  Amplified Bible

==Lawsuits Discouraged

1Does any one of you, when he has a [a]complaint (civil dispute) with another [believer], dare to go to law before unrighteous men (non-believers) instead of [placing the issue] before the saints (God’s people)? 

2 [b]Do you not know that the saints (God’s people) will [one day] judge the world? If the world is to be judged by you, are you not competent [c]to try trivial (insignificant, petty) cases? 

3 Do you not know that we [believers] will judge angels? How much more then [as to] matters of this life? 

4 So if you have lawsuits dealing with matters of this life, are you appointing those as judges [to hear disputes] who are of no account in the church? 

5 I say this to your shame. Can it be that there is not one wise man among you who [is governed by integrity and] will be able and competent to decide [private disputes] between his fellow believers, 

6 but instead, brother goes to law against brother, and that before [judges who are] unbelievers?

7 Why, the very fact that you have lawsuits with one another is already a defeat. Why not rather be wronged? Why not rather be defrauded? 

8 On the contrary, it is you who wrong and defraud, and you do this even to your brothers and sisters.

9 Do you not know that the unrighteous will not inherit or have any share in the kingdom of God? Do not be deceived; [d]neither the sexually immoral, nor idolaters, nor adulterers, nor effeminate [by perversion], nor [e]those who participate in homosexuality, 

10 nor thieves, nor the greedy, nor drunkards, nor revilers [whose words are used as weapons to abuse, insult, humiliate, intimidate, or slander], nor swindlers will inherit or have any share in the kingdom of God. 

11 And such were some of you [before you believed]. But you were washed [by the atoning sacrifice of Christ], you were sanctified [set apart for God, and made holy], you were justified [declared free of guilt] in the name of the Lord Jesus Christ and in the [Holy] Spirit of our God [the source of the believer’s new life and changed behavior].

==The Body Is the Lord’s

12 Everything is permissible for me, but not all things are beneficial. Everything is permissible for me, but I will not be enslaved by anything [and brought under its power, allowing it to control me]. 

13 Food is for the stomach and the stomach for food, but God will do away with both of them. The body is not intended for sexual immorality, but for the Lord, and the Lord is for the body [to save, sanctify, and raise it again because of the sacrifice of the cross]. 

14 And God has not only raised the Lord [to life], but will also raise us up by His power. 

15 Do you not know that your bodies are members of Christ? Am I therefore to take the members of Christ and make them part of a [f]prostitute? Certainly not! 

16 Do you not know that the one who joins himself to a prostitute is one body with her? For He says, “The two shall be one flesh.” 

17 But the one who is united and joined to the Lord is one spirit with Him. 

18 Run away from sexual immorality [in any form, whether thought or behavior, whether visual or written]. Every other sin that a man commits is outside the body, but the one who is sexually immoral sins against his own body. 

19 Do you not know that your body is a temple of the Holy Spirit who is within you, whom you have [received as a gift] from God, and that you are not your own [property]? 

20 You were bought with a price [you were actually purchased with the precious blood of Jesus and made His own]. So then, honor and glorify God with your body.

==Footnotes

1 Corinthians 6:1 I.e. a property or civil claim (not a criminal matter) before it goes to court.

1 Corinthians 6:2 This is the first of six “Do you not know” statements in this chapter.

1 Corinthians 6:2 Or to form the smallest courts.

1 Corinthians 6:9 This list of sinners, which continues into v 10, is used by Paul to describe various sinful lifestyles. All such lifestyles are impossible for true believers, who continue to sin but not to live lives of sin.

1 Corinthians 6:9 Lit male homosexuals. 

1 Corinthians 6:15 Corinth was famous for its prostitutes, and many if not all probably practiced their trade in connection with the worship of Aphrodite. Having relations with temple or cult prostitutes was considered acceptable behavior, and Paul’s admonitions here indicate that some of the Corinthian converts were continuing the prac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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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6장 (개요)

본장의 내용은 이렇게 요약된다.

Ⅰ. 사소한 일에 대하여 소송을 하며 이방인의 재판장 앞에 서는 것을 책망한다(1-8).

Ⅱ. 고린도 교인들이 이전에 행하던 큰 죄에 대하여 경고한다(9-11).

Ⅲ. 자유의 남용에 대하여 주의를 준 후에 여러 말로써 음행하는 것을 금지한다(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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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내의 소송 사건(고전 6:1-8)

---여기에서 바울은 사소한 사건으로 이방인의 재판장에게 소송을 내는 것을 책망한다. 

---성가시게 내는 소송을 비난한다. 

---전 장에서 바울은 극악한 죄를 벌하도록 지시했다. 여기에서는 교회의 충고에 의하여 분쟁을 해결하도록 지시한다. 다음을 관찰하자.

Ⅰ. 바울이 책망하는 결점을 이렇다. 그것은 소송 사건이다. 합법적으로 운영하면 법은 좋은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형제끼리 소송하는 문제를 의미한다(6절). 

---교회의 교인이 서로 소송하는 문제다. 가까운 이웃이 평화와 이해를 가지지 못했다. 형제애의 줄이 끊어졌다. 

:::: 솔로몬의 말과 같이 "괴롭히는 형제는 튼튼한 성을 정복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형제의 다툼은 성곽의 철장과 같다(잠 18:19). 다음을 주목하자.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싸우면 안 된다. 왜냐하면 형제이기 때문이다. 적당히 주의하면 이 생각은 소송을 막고 싸움을 끝내며 기소를 기각할 수 있다. 

::::고린도 교인들은 사건을 이방인의 재판관에게 가지고 갔다.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1절). 분쟁을 불신자 앞에 가지고 갔다(6절).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나 성도 사이에서 처리하지 않았다. 이것은 기독교의 비난거리가 되었다. 그것은 그들의 우매와 불화를 나타냈다. 그러나 그들은 지혜의 아들이며 어린양과 같이 온유하고 겸손한 평화의 왕 예수의 제자인 체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한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를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더럽힐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고린도 교인들은 사소한 일로 소송했다. 그래서 바울은 소송보다 차라리 손해를 당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7절). 이것은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 자신들이나 가정에 큰 손해가 온다면 법에 의존해도 좋으나 적은 일에는 참고 손해를 당하는 것이 더 좋으리라. 그리스도인은 용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서로 다투는 것보다 적은 손해를 당하는 것이 편하고 명예스럽다.

Ⅱ. 바울은 그들의 목전에 잘못의 극심함을 나타낸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2절).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3절). 

---성도가 이 세상의 작은 일을 판단할 자격이 없겠느냐? 이 세상의 작은 일을 이방인에게 가지고 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수치요 성도로서의 권위를 망각하는 일이다. 성도가 세상과 천사까지도 판단할 수 있는데 작은 분쟁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세상과 천사들을 판단한다는 것은 최후의 심판날에 그리스도의 배석판사가 된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는 말은 제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또 다른 곳에서는 이런 말씀이 있다.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유 14,15)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살전 3:13) 성도들도 심판을 받아야 한다(마 25:31-41 참고). 그러나 그들은 먼저 용서함을 받고 재판석으로 나아가 인간과 천사에 대한 그리스도의 의로운 판단을 증거하고 찬양한다. 

::::그러나 고린도 사람들은 제국이 기독교화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만일 알았더라도 어떤 의미로 그리스도인 왕들이 천사들을 심판하겠는가? 또 어떤 이들은 성도들의 믿음과 생활로써 세상을 정죄하며 기적적인 능력으로 악한 천사들을 몰아낸다고 생각한다. 첫째 해석이 가장 자연스럽다. 동시에 그것은 바울의 주장을 가장 잘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죄많은 사람과 나쁜 천사들을 심판하실 때에 지고한 재판자와 함께 앉을 명예를 가진다면 너희들이 이방인 재판자 앞에서 다투는 사소한 일들을 판단할 자격이 없겠는가? 성도들이 상호의 차이점을 해결할 수 없을까? 왜 이방인들 앞에 그것을 가지고 가느냐? 너희가 그들을 심판하여야 하는데 그들의 심판을 받느냐? 이 세상 일들에 대하여 교회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 자들로 재판하도록 하느냐?(어떤 이들은 4절을 이렇게 읽고 있다) 이방인 재판장이란 ‘엑수데네메누스’는 없는 것들(1:28)을 의미한다. "너희들이 그렇게나 천하게 생각하는 그들을 너희들을 재판하도록 불러들이느냐? 이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5절) 

---지금 사용하는 번역대로 읽는 사람들은 냉소적인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만일 너희가 그러한 분쟁을 가진다면 너희들 중에 가장 낮은 자를 재판하도록 세우라. 너희 중에 가장 미천한 자들도 이들 분쟁을 해결할 수 있다. 이 여러 사건을 이방인들에게 가지고 가는 것보다 너희들 중에 누구에게나 가져가라. 만약 너희들이 너희 자신들의 마음을 버리고 참다운 기독교 정신으로 받아들이면 그것들은 다툴 가치가 없고 쉽게 결정된다." "잘 참고 견디어라." 그리하면 너희 중에 가장 어리석은 자라도 싸움을 끌낼 수 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하노니"(5절) 작은 싸움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되고 형제들의 판단으로 해결되지 못함이 수치임을 주목하자.

Ⅲ. 바울은 두 가지 방법으로 잘못을 고치려고 한다.

1. 해결할 사람을 언급한다.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 할 만한 지혜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5절) 

---지식과 지혜를 그렇게 자랑하는 너희가 은사와 능력을 뽐내는 너희가 재판할 자가 아무도 없으며 이분쟁을 결정할 지혜를 가진 자가 없느냐? 지식과 지혜로 그렇게 유명한 너희가 형제간에 싸우고 이방 재판관에게 찾아가다니 웬 일이냐? 싸움을 말릴 현명한 사람은 하나도 없느냐?"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대책을 다 사용하기까지는 소송을 해서는 안 된다. 가능하면 사려깊은 교인들은 분쟁을 막아야 한다. 법정이 그들을 심판해서는 안 된다. 특히 사소한 문제에 있어서 그렇다.

2. 자기를 내세우기 보다는 차라리 손해를 당하는 것이 나올 것이다.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7절) 

---문제가 애매하거나 법에 밝은 자들에게 재판을 맡기자는 양편의 합의가 없는 한 소송은 항상 그 어느 편의 잘못이다. 바울의 주장은 차이에 대한 분쟁보다는 그 분쟁을 맡기는 일에 대한 책망이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7절) 

---다음을 주목하자. 남을 속이고 불의로 처리하는 일은 완전히 잘못이다. 더우기 믿는 형제를 속이는 것은 더 나쁘다. 상호의 사랑이 불신자들 사이보다 신자 사이에서 더 강해야 한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한다(롬 13:10).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찌 형제를 해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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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를 받지 못할 자(고전 6:9-11)

여기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전에 탐닉한 무서운 죄를 열거한다.

Ⅰ. 이들 죄악은 고린도 교인들이 모를 리가 없고 그런 죄인들은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이 명백한 진리로 나타낸다. 

---고린도 교인 중에 가장 어리석은 자라도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을 알아야 한다"(9절). 이들은 이 지상에서 참다운 교인으로 용납된 수도 없고 하늘의 교회의 영광스러운 형제로 용납될 수도 없다. 모든 불의가 죄이다. 모든 유행하는 죄가 고의적으로 범하고 회개하지 않는 모든 죄가 천국에로 차단되어 있다. 

---바울은 몇 종류의 죄를 상론한다. .

::::제 일 계명인 우상숭배자들, 제 칠계명인 간음하는 자나 음란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들, 제 팔 계명인 도적질하는 자와 토색하는 자들, 즉 폭력으로나 사기로 이웃을 해치는 자들, 제 구 계명인 후욕하는 자, 제 십계명인 탐욕하는 자와 술취하는 자들, 이들은 나머지 모든 계명을 엄밀한 의미에서 다 범하는 자이다. 신앙이 있는 자라면 천국은 그런 자들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의 찌꺼기로써는 천국의 저택을 채울 수 없다. 악마의 일을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삵을 받을 수 없다. 다만 사망을 받는다. "죄의 정당한 삵은 사망이다"(롬 6:23)

Ⅱ. 바울은 자기를 속이지 말라고 경고한다. "속임을 받지 말라." 

---위에서 언급한 진리를 아는 사람들도 그것에 주의하지 않기 쉽다. 인간은 하나님도 자기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며 죄 가운데서 살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악의 자녀의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자녀와 함께 천국에 가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큰 기만이다. 영의 문제에 있어서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의 큰 관심사이다. 우리는 육에 심고 영생을 거둘 것을 소망할 수 없다.

Ⅲ. 바울은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상기시킨다. 

---"너희들 중의 얼마가 그런 사람이었다(11절). 바울이 열거하는 그러한 나쁜 죄인이었다. 헬라어로는 ‘타우타’ 이다. 즉 "그런 것들"이며 인간이 아니고 괴물이다. 믿은 후에는 아주 선한 사람도 그 전에는 악한 사람인 것을 주목하자. 

::::Quantum mutatus ab illo - 즉 은혜가 얼마나 큰 변화를 일으키는가? 그것은 가장 사악한 사람을 성자로 만들고 하나님의 자녀로 만든다. 너희들도 그랬으나 지금은 그러한 사람이 아니다. "주 예수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11절). 

---다음을 주목하자. 믿기 전의 인간의 악이 중생이나 하나님과의 화목에 방해물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피와 중생의 씻음이 모든 죄와 더러움을 씻어버릴 수 있다.  

::::자연적인 순서의 도치가 있다. "너희가 거룩하여지고 너희가 의롭게 되었다" - 거룩함과 의롭다하심을 - 성화가 의인 앞에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름이 즉 의롭게 만드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하나님의 성령 앞에 있다. 

---우리의 의로움은 그리스도의 공적이요, 우리의 성화는 성령의 역사이다. 그러나 이 둘은 함께 일어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의 씻음과 하나님에게 화목하게 되는 것만이 아니고 그의 셩령에 의하여 또한 성화된 사람이어야 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거룩하게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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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범죄와 바른 사용(고전 6:12-20)

---12절과 13절의 전반은 식물 즉 고기에 대한 논쟁인 것 같다. 그러나 음행에 대한 서론이 되겠다. 사도들의 유명한 결정을 주시하면 이 연결은 분명해진다(행 15 참고). 어떤 음식에 대한 금지는 음행의 금지와 연결되어 있다. 고린도 교인들은 식물에 대해서와 같이 음행에 대해서도 자유롭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의 법은 그것을 금하지 않았다. 음행에 대해서도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고 말하였다. 이 유해한 생각에 바울은 반박한다. 

---바울은 법으로 가한 일이 때로는 유익하지 못하며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신앙과 자격과 관계와 소망을 생각하여 무엇이 가하며 뿐만 아니라 무엇이 유익한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12절). 

::::합법적인 일에 있어서도 바울은 세상의 권력이 지배하도록 하는 생각은 없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유케 한 그안에 확고히 서야 한다. 그러나 이 자유를 육체의 소욕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비록 모든 식물이 가하나 바울은 탐식가나 주정뱅이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바울은 음행의 죄를 찬성하도록 자유를 남용하기를 원치 않았다. 이것은 고린도의 법률이 허용하였더라도 자연법을 어기고 비기독교인이 되는 일이다. 

---바울은 이 자유를 이용하여 먹고 마시어 무절제하고 육욕을 채우는 일을 원하지 않았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13절) 비록 배는 식물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져 있고 식물을 배를 채우도록 되어 있으나 그것이 이롭지 못하고 또 나를 속박한다면 나는 삼가하리라.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인간의 육체가 식물 의 공급이 불필요할 때가 온다. 고대의 학자의 어떤 이들은 이것은 배와 음식의 없어짐을 의미한다고 한다. 비록 우리의 몸이 부활하더라도 모든 지체가 그대로 부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배는 필요없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참인지는 모르더라도 음식이 불필요할 때가 올 것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장래에 우리가 육체적인 식욕이 없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현 생활의 식욕의 지배를 벗어날 수가 있다. 이것이 바울의 뜻인 것 같다. 그리고 이 절은 음행에 대한 반대의 주장인 것 같다. 

::::어떤 이들은 이방인 앞에서는 소송 사건의 반대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가정하기를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가하나 유익한 것이 아니요 불경건한 재판장 이나 법관이나 변호인 앞에 서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적합하지 못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결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음행과의 연결이 자연스럽다.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13절). 음식과 배는 서로 위하나 음행과 몸은 그렇지 않다.

Ⅰ. 몸은 음란을 위한 것이 아니고 주를 위함이다. 

---이것이 바울이 주장하는 죄에 대한 경고이다. 이 죄에 대하여 고린도의 이방인들은 너무나 이름이 나 있고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도 지지하는 죄였다. 이것은 그들의 의향을 거슬리는 일이었다. 

::::몸은 음란을 위함이 아니다. 다만 주를 위함이고 하나님의 봉사와 명예를 위함이다. 다른 목적을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않았다. 그것은 거룩함에 이르는 의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롬 6:19 참고). 그러므로 불결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야하고 창녀의 지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15절). 

::::"주는 몸을 위하신다."즉 그리스도는 몸의 주요 몸을 소유하고 몸을 다스린다. 몸을 입고 우리와 같이 되시고 그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모든 일에 머리가 되신다(히 2:5, 8). 우리는 주민에게 속한 것을 우리의 것인 것처럼 혹은 불명예스럽게 사용하여서는 안 됨을 명심하자.

Ⅱ.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를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주는 몸의 부활과 영화를 위함이다. 14절의 말씀과 같이 명예가 우리 육체에 더하기로 되어 있으니 이 죄를 피하여야 한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날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는 능력으로"(빌 3:21)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14절). 

---주님이 죽은 자에서 살아나심은 우리의 몸의 영광이다. 그러므로 순수하게 보존하기만 한다면 모든 부족에도 불구하고 주와 함께 다시 살아날 몸을 나쁘게 사용하지 말자. 영광의 부활에 참여할 소망은 육의 정욕으로 죄를 범하는 것을 막도록 만든다.

Ⅲ. 세번째 주장은 이미 육체에 주어진 명예이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15절). 

---만약 영혼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면 그 사람 전체가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이것은 얼마나 명예스러운 일인가? 그의 육체가 그리스도의 신비스러운 몸의 한 부분이 된다. 우리가 어떤 명예스러운 관계에서 있는 가와 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유익하다.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리스도의 지체를 떼어서 남용한다면 얼마나 나쁜 목적으로 사용할 것인가. 이런 생각은 혐오스럽다. 그럴 수 없다.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었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16,17절). 

---그리스도인의 명예로운 관계와 연합에 이 음란의 죄보다 더 큰 방해물은 없다. 그리스도로 연합되어 있고 성령으로 참여한다. 한 성령이 머리와 지체에 호흡하고 움직이고 있다. 그리스도에 충실한 제자들은 한 몸이다(요 17:21, 22).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결혼에 의하여 정하여진 육체의 연합이다. 한 몸이 되도록 그렇게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어찌 한 몸이 되도록 창기와 합할 수가 있을까? 그리스도와 창기를 연합시키는 것이 사악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보다 더 큰 무례를 행할 수 있을까? 이보다 더 모순되고 신앙에 어긋날 수 있을까? 

---음란의 죄는 그리스도인에 있어서 그와 주와 머리에 있어서 큰 상처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음행을 피하라"(18절)는 권고는 당연하다. 피하고 유혹에서 멀리 떠나며 유혹하는 물건을 멀리해야 한다. 눈과 마음을 다른 생각과 사물로 돌리어야 한다. Alia vitia pugnando, sola libido fugiendo vincitur - 즉 다른 악을 싸워서 정복할 수 있으나 이 음란의 죄는 피하여야 한다고 많은 교부들이 그렇게 말한다.

Ⅳ. 네째 주장은 이 죄는 우리의 몸에 거슬리는 죄악이다.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 하느니라"(18절). 

---밖에서 짓는 모든 죄가 몸 밖에 있다. 이 죄는 술취하는 자만큼 몸을 혹사하지도 않고 탐식가처럼 몸을 괴롭히지도 않으나 특이한 방법으로 몸을 더럽힌다. 이 죄로 그리스도인은 몸을 더럽히고 타락시키고 죄인과 한 몸으로 만든다. 구속자가 최고로 위엄있게 만든 몸에 악한 일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악한 몸을 죄를 지어 더 악한 몸으로 만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Ⅴ. 이 죄에 대한 다섯째의 주장은 그리스도인의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계신 성령의 전"(19절)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 연합한 자는 한 영이다. 그는 하나님께 바쳐졌고 성별되었고 그의 뜻대로 사용되고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사로잡히고 점령되고 거하게 된다. 이것이 성전의 뜻이다. 하나님이 사시는 곳이며 성별되었고 바치는 곳이다. 그러한 성전인 참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태어났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바쳐졌으며 그에 의하여 그를 위하여 소유되었다. 하나님께 팔린 몸이다. "너희는 값으로 산 것이라." 우리의 몸은 하나님을 위하여 만들어주시고 매매되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가 그의 성전을 더럽히고 창기에게 넘겨 주겠는가? 무서운 신성 모독이다! 이것이 가장 무서운 도적이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게 유지해야 됨을 명심하자.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사용하시고 거하시기에 적합도록 보존되어야 한다.

Ⅵ. 바울은 "그의 것인 우리의 몸과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의무로써 주장을 세운다. 

---하나님은 이 둘을 만드시고 사시고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에 의하여 사용되어야 하며 더럽혀지거나 떨어지거나 다른 곳에 갖다 주어서는 안 된다. 아니 우리의 몸은 주님이 사용할 그릇으로 보존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의 것인 우리의 몸과 영혼으로 하나님을 금해야 한다. 육체로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금해야 한다. 주께서 말씀하시었다(마 5:28). 몸과 영이 깨끗이 보존되어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영광을 받아야 한다.(살전5:23) 그 둘이 짐승과 같은 죄로써 더럽힐 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다. 당신의 몸을 창조자이시며 주인 그의 영광과 봉사를 위하여 사용하라.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를 지배할 수가 없다. 우리의 쾌락으로 사용할 수가 없고 그의 영광과 뜻대로 사용하여야 한다.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를 섬겨야 한다"(행 27:23).


[고전6]------개역개정--------나의마음을정금과같이..정결한마음주시옵소서

9.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12.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13.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14.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15.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18.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19.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새번역)----------------

9.불의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음행을 하는 사람들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나, 간음을 하는 사람들이나, 여성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나,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이나,

10.도둑질하는 사람들이나,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이나, 술 취하는 사람들이나, 남을 중상하는 사람들이나, 남의 것을 약탈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11.여러분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씻겨지고,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되었습니다.

12."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에도 제재를 받지 않겠습니다.

13."음식은 배를 위한 것이고, 배는 음식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저것도 다 없애 버리실 것입니다. 몸은 음행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며, 주님은 몸을 위하여 계십니다.

14.하나님께서 주님을 살리셨으니, 그의 권능으로 우리도 살리실 것입니다.

15.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떼어다가 창녀의 지체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16.창녀와 합하는 사람은 그와 한 몸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두 사람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17.그러나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그와 한 영이 됩니다.

18.음행을 피하십시오. 사람이 짓는 다른 모든 죄는 자기 몸 밖에 있는 것이지만, 음행을 하는 자는 자기 몸에다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

19.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20.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들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NASB----

9.Or do you not know that the unrighteous will not inherit the kingdom of God? Do not be deceived; neither fornicators, nor idolaters, nor adulterers, nor effeminate, nor homosexuals,

10.nor thieves, nor the covetous, nor drunkards, nor revilers, nor swindlers, will inherit the kingdom of God.

11.Such were some of you; but you were washed, but you were sanctified, but you were justified in the name of the Lord Jesus Christ and in the Spirit of our God.

12.All things are lawful for me, but not all things are profitable. All things are lawful for me, but I will not be mastered by anything.

13.Food is for the stomach and the stomach is for food, but God will do away with both of them Yet the body is not for immorality, but for the Lord, and the Lord is for the body.

14.Now God has not only raised the Lord, but will also raise us up through His power.

15.Do you not know that your bodies are members of Christ? Shall I then take away the members of Christ and make them members of a prostitute? May it never be!

16.Or do you not know that the one who joins himself to a prostitute is one body with her? For He says, "THE TWO SHALL BECOME ONE FLESH."

17.But the one who joins himself to the Lord is one spirit with Him.

18.Flee immorality. Every other sin that a man commits is outside the body, but the immoral man sins against his own body.

19.Or do you not know that your body is a temple of the Holy Spirit who is in you, whom you have from God, and that you are not your own?

20.For you have been bought with a price: therefore glorify God in your body.

------AMP-------------

9 Do you not know that the unrighteous will not inherit or have any share in the kingdom of God? Do not be deceived; [d]neither the sexually immoral, nor idolaters, nor adulterers, nor effeminate [by perversion], nor [e]those who participate in homosexuality, 

10 nor thieves, nor the greedy, nor drunkards, nor revilers [whose words are used as weapons to abuse, insult, humiliate, intimidate, or slander], nor swindlers will inherit or have any share in the kingdom of God. 

11 And such were some of you [before you believed]. But you were washed [by the atoning sacrifice of Christ], you were sanctified [set apart for God, and made holy], you were justified [declared free of guilt] in the name of the Lord Jesus Christ and in the [Holy] Spirit of our God [the source of the believer’s new life and changed behavior].

12 Everything is permissible for me, but not all things are beneficial. Everything is permissible for me, but I will not be enslaved by anything [and brought under its power, allowing it to control me]. 

13 Food is for the stomach and the stomach for food, but God will do away with both of them. The body is not intended for sexual immorality, but for the Lord, and the Lord is for the body [to save, sanctify, and raise it again because of the sacrifice of the cross]. 

14 And God has not only raised the Lord [to life], but will also raise us up by His power. 15 Do you not know that your bodies are members of Christ? Am I therefore to take the members of Christ and make them part of a [f]prostitute? Certainly not! 

16 Do you not know that the one who joins himself to a prostitute is one body with her? For He says, “The two shall be one flesh.” 

17 But the one who is united and joined to the Lord is one spirit with Him. 

18 Run away from sexual immorality [in any form, whether thought or behavior, whether visual or written]. Every other sin that a man commits is outside the body, but the one who is sexually immoral sins against his own body.  

19 Do you not know that your body is a temple of the Holy Spirit who is within you, whom you have [received as a gift] from God, and that you are not your own [property]? 20 You were bought with a price [you were actually purchased with the precious blood of Jesus and made His own]. So then, honor and glorify God with your bo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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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법테두리내에서는 허용되는 일이라 해도 영적 측면에서 볼 때 때로는 유익하지 못하며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신앙과 자격과 관계와 소망을 생각하여 무엇이 가하며, 뿐만 아니라 무엇이 유익한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12절). 

비록 세상에서는 합법적인 일로 여겨지더라도  바울은 세상에 속한 그 어떠한 것도 자신을 통제하도록 허용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오로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음, 바로 그 안에 확고히 서 있어야만 한다. 결코 이 자유를 육체의 소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남용하는 것은 안 된다. 

비록 모든 식물이 가하나 바울은 탐식가나 주정뱅이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바울은 비록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죄에서 자유케 된 바 그 자유를 고린도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오용하기를 원치 않았다. 

특히 음행문제에 있어서 특히 그러한데, 이것은 고린도의 법률에 저촉되는 것은 아니라 해도 하나님의 자연법에 어긋나는 것이요 원수의 함정에 스스로 다시 걸려드는 것에 다름없는 일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자유를 남용하고 오용하여 무절제하게 먹고 마시며  육욕을 채움으로써 결국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게 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을 추호도 용납할 수 없었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13절) 비록 배는 식물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져 있고 식물을 배를 채우도록 되어 있으나 그것이 이롭지 못하고 또 나를 속박한다면 나는 삼가하리라. "하나님이 (부활의 몸 입은 후에는) 이것 저것(식물과 배=위장=를) 다 폐하시리라." 

인간의 육체에 음식물 공급이 불필요할 때가 온다... 고대의 학자의 어떤 이들은 이것은 배와 음식의 없어짐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비록 우리의 몸이 부활하더라도 모든 지체가 예전 그대로 부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배는 필요 없어진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참인지는 아직은 모르지만 음식이 불필요할 때가 올 것이다.....다음을 주목하자. 

장래에 우리의 육체적인 식욕이 없어질 것이라는 전망과 기대는 현 생활에서 그토록 중요하게 여겨지는 식욕의 지배를 상대화 하고 그 지배를 벗어날 수 있도록 한다. 이것이 바울의 뜻인 것 같다

그리고 이 관점은 성윤리, 우상숭배, 술취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요, 더 나아가 음행등 그리스도와의 전존재적 연합과 거룩함을 손상시키는 모든 것에 대해서 절대 반대하는 주장인 것 같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방인 관리 앞에 제기하는 소송조차도 반대한다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한다. 

이들은 가정하기를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가하나 유익한 것이 아니요 불경건한 재판장이나 법관이나 변호인 앞에 서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일면 부끄럽게 여겨지는 일일 수는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결은 자연스럽지 못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연합에 어긋나는 모든 것들과의 단절을 강조함이 더 자연스럽다.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13절). 음식과 배는 서로 위하나 음행과 몸은 그렇지 않다.

Ⅰ. 몸은 음란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주를 위해 있다. 

이것이 바울이 주장하는 바, 음란죄에 대한 경고이다. 이 죄에 대해서는, 고린도의 이방인들은 <온갖 종류의 성적 방탕-음란 추구에 열심인 것으로> 너무나 이름이 나 있고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도 <세상과 부딛히지 않으려고!! 어쩌면 그냥 슬쩍 넘어감으로써> 묵인-지지하는 죄였다. 

이것은 분명히 고린도의 불신자, 그들의 의향을 거슬리는 일이었다. 

몸은 음란을 위함이 아니다. 다만 주를 위함이고 하나님의 봉사와 명예를 위함이다. 다른 목적을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않았다. 

그것은 거룩함에 이르는 의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롬 6:19 참고). 그러므로 불결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야하고 창녀의 지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15절). "주는 몸을 위함이다."

즉 그리스도는 몸의 주요 몸을 소유하고 몸을 다스린다. 몸을 입고 우리와 같이 되시고 그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모든 일에 머리가 되신다(히 2:5, 8). 

우리는 주민에게 속한 것을 우리의 것인 것처럼 혹은 불명예스럽게 사용하여서는 안 됨을 명심하자.

Ⅱ.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를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주는 몸의 부활과 영화를 위함이다. 

14절의 말씀과 같이 명예가 우리 육체에 더하기로 되어 있으니 이 죄를 피하여야 한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날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는 능력으로"(빌 3:21)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14절). 

주님이 죽은 자에서 살아나심은 우리의 몸의 영광이다. 그러므로 순수하게 보존하기만 한다면 모든 부족에도 불구하고 주와 함께 다시 살아날 몸을 나쁘게 사용하지 말자. 영광의 부활에 참여할 소망은 육의 정욕으로 죄를 범하는 것을 막도록 만든다.

Ⅲ. 세번째 주장은 이미 육체에 주어진 명예이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15절). 

만약 영혼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면(=각각 반쪽인 두 사람이 결합-결혼한 하나의 새 사람-부부-가 됨 처럼)  그 사람 전체가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이것은 얼마나 명예스러운 일인가? 그의 육체가 그리스도의 신비스러운 몸의 한 부분이 된다. 

우리가 어떤 명예스러운 관계에서 있는 가와 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유익하다.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리스도의 지체를 떼어서 남용한다면 얼마나 나쁜 목적으로 사용할 것인가. 이런 생각은 혐오스럽다. 그럴 수 없다.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16,17절). 

그리스도인의 명예로운 관계와 연합에 이 음란의 죄보다 더 큰 방해물은 없다.((그리스도의 얻으신 바 참 인성에 손상 끼침이다!!)) 

그리스도로 연합되어 있고 성령으로 참여한다. 한 성령이 머리와 지체에 호흡하고 움직이고 있다. 그리스도에 충실한 제자들은 한 몸이다(요 17:21, 22).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결혼에 의하여 정하여진 육체의 연합이다. 한 몸이 되도록 그렇게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어찌 한 몸이 되도록 창기와 합할 수가 있을까? 

그리스도와 창기를 연합시키는 것이 사악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보다 더 큰 무례를 행할 수 있을까? 이보다 더 모순되고 신앙에 어긋날 수 있을까? 

음란의 죄는 그리스도인에 있어서 그와 주와 머리 되심에 있어서 큰 상처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음행을 피하라"(18절)는 권고는 당연하다. 

피하고 유혹에서 멀리 떠나며 유혹하는 물건을 멀리해야 한다. 눈과 마음을 다른 생각과 사물로 돌리어야 한다. Alia vitia pugnando, sola libido fugiendo vincitur - 즉 다른 악을 싸워서 정복할 수 있으나 이 음란의 죄는 피하여야(도망가야...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에게서 벗어나 도망하려 그의 옷조차 벗겨짐 감수했듯이, 쏜살같이) 한다고 많은 교부들이 그렇게 말한다.

Ⅳ. 네째 주장은 이 죄는 우리의 몸에 거슬리는 죄악이다.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18절). 

밖에서 짓는 모든 죄가 몸 밖에 있다. 이 죄는 술취하는 자만큼 몸을 혹사하지도 않고 탐식가처럼 몸을 괴롭히지도 않으나 특이한 방법으로 몸을 더럽힌다. 

이 죄로 그리스도인은 몸을 더럽히고 타락시키고 죄인과 한 몸으로 만든다. 

구속자가 최고로 위엄있게 만든 몸에 악한 일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악한 몸을 죄를 지어 더 악한 몸으로 만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Ⅴ. 이 죄에 대한 다섯째의 주장은 그리스도인의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19절)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 연합한 자는 한 영이다. 그는 하나님께 바쳐졌고 성별되었고 그의 뜻대로 사용되고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사로잡히고 점령되고 거하게 된다. 

이것이 성전의 뜻이다. 하나님이 사시는 곳이며 성별되었고 자신을 바치는 곳, 바쳐진 곳이다. 그러한 성전인 참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새로 태어났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바쳐졌으며 그에 의하여 그를 위하여 소유되었다. 하나님께 팔린 몸이다. "너희는 값으로 산 것이라." 

우리의 몸은 하나님을 위하여 만들어주시고 매매되었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가 그의 성전을 더럽히고 창기에게 넘겨 주겠는가? 무서운 신성 모독이다! 이것이 가장 무서운 도적이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게 유지해야 됨을 명심하자.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사용하시고 거하시기에 적합도록 보존되어야 한다.

Ⅵ. 바울은 "그의 것인 우리의 몸과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의무로써 주장을 세운다. 

하나님은 이 둘을 만드시고 사시고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에 의하여 사용되어야 하며 더럽혀지거나 떨어지거나 다른 곳에 갖다 주어서는 안 된다. 

아니 우리의 몸은 주님이 사용할 그릇으로 보존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의 것인 우리의 몸과 영혼으로 하나님을 금해야 한다. 

육체로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금해야 한다. 주께서 말씀하시었다(마 5:28). 

몸과 영이 깨끗이 보존되어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영광을 받아야 한다. 그 둘이 짐승과 같은 죄로써 더럽힐 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다. 

당신의 몸을 창조자이시며 주인 그의 영광과 봉사를 위하여 사용하라.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를 지배할 수가 없다. 

우리의 쾌락으로 사용할 수가 없고 그의 영광과 뜻대로 사용하여야 한다.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를 섬겨야 한다"(행 2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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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iko"(94, 아디코스) 불의한, 부정한

형용사 아디코스(Hes. 이래)는 부정을 뜻하는 접두사 a와 디케(divkh, 1349)에서 유래했으며, '부정한, 불의한, 불공평한'을 의미한다.

1. 아디코스 개념의 발전. 

(a)  형용사 아디코스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 '법률 위반자'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부정(의)한 것, 해로운 것 뿐만 아니라, 법률, 도덕, 관습, 예의를 위반하는 모든 것, 보기 흉하거나 말하기조차 싫거나 부정직하거나 사기적인 모든 것을 총망라한다.

(b)  여기서 '부정(의)한 unjust' 것은 아노모스(a[nomo", 459: 불법한 lawless)의 경우처럼 글로 쓰여진 명확한 법률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kovsmo", 2889, 땅)과 도시(povli", 4172)의 질서를 해치는 것을 나타낸다.

(c)  관습에 거스리는 것은 일반적으로 경건치 않은 것과 구별된다. 법률적인 근원은 70인역본과 연관된다.

(d)  아디코스는 종교적 개념도 지닌다(Plato Laws).(참조: Schrenk, TDNT; W. Gunther, DNTT).

2. 70인역본의 용법. 

형용사 아디코스는 70인역본에서 약 120회 나오며, 19개의 히브리어 단어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율법 위반자의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아디코스는 70인역본에서 주로 셰케르(8267, 속이다, 사기하다, 거짓말하다)와 아울라(부정, 불공정, 불의) 어군과 하마스(폭력, 부당 행위)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70인역본에서 이 단어는 '거짓말, 부정, 불공정, 불의, 폭력, 부당 행위'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행위들은 법률 위반이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아디코스는 신약성경에서 12회 나오며, 일반 헬라어 및 구약성경의 용법을 따르며, 정의를 해치거나 범하는 자, 법률 위반자를 나타낸다.

(a)  아디코스는 '불공정한, 불의한'을 의미한다. 롬 3:5; 히 6:9; 하나님은 심판자로서 불공정하신가? 그는 불공정하지 않으시다.

(b)  아디코스는 '부정직한', 곧 '불신실한'을 의미한다.

① 눅 16:10에서는 신탁품에 불신실한 자를 나타낸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② 눅 16:11에서는 '사기적인 것', 사기적이거나 불법으로 얻는 것을 나타낸다: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③ 눅 18:11에서 다른 사람을 '속임수로 대하는 것'을 나타낸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c)  아디코스는 하나님의 '법률을 위반하는, 불의한, 죄있는'을 의미한다. 마 5:45; 행 24:15; 벧전 3:18에서 불의한 자를 의인과, 고전 6:1; 고전 6:9; 벧후 2:9에서 불의한 자를 죄인들과 대조시킨다.(참조: G. Schrenk;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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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navw(4105, 플라나오) 길을 잃게 하다, 미혹하다, 빗나가다, 방황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플라나오(Homer 이래)는 플라네(plavnh, 4106: 배회, 방황, 이탈)에서 유래했다. 플라나오의 원래 의미는 공간에서의 움직임을 뜻한다. 즉, 능동태로 '길을 잃게(미혹)하다'이며 중간태와 수동태로는 '길을 잃다, 미혹(타락)되다'를 의미한다.

이 동사의 전이된 의미로는 행동이나 말로써 '속이다, 미혹하다'라는 뜻이 있다. 이것은 도덕적 차원에서의 판단이나 행위와 관련될 수도 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플라나오는 70인역본에서 약 12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타아(칼형, 이리저리 헤메다; 히필형, 길 잃게 하다, 미혹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 헬라어 단어의 고전 문헌적 의미가 70인역본으로도 이어져 내려갔다. 플라나오의 공간적 의미는 소경으로 하여금 길을 잃게 하는 것에 대해 언급한 곳에서 발견된다. 이 공간적 의미는 포도주를 마시고 비틀거리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의 배후에 있는 기본 개념이기도 하다(사 19:13이하; 사 28:7).

플라나오가 호도스(길 way)와 결합하여 자주 사용된 것은 이러한 공간적 의미에서 비롯되었다(사 35:8). 방황하는 양이 인간 존재의 한 실례로 사용될 때, 이 단어는 이스라엘의 생활 방식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신 22:1; 사 13:14; 사 53:6; 시 119:176). 창 21:14; 창 37:15에서 사람이 들에서 방황하는 것을 나타낸다. 출 14:3에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하게 된 것을 표현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알지 못하고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길을 잃는다(신 13:6). 그들로 하여금 길을 잃게 하는 요소들은 우상들(암 2:4), 거짓 선지자들(렘 23:32), 신실치 못한 왕(대하 33:9) 등으로 묘사된다. 하나님 자신까지도 길을 잃게 하는 자의 역할로 등장하신다(욥 12:24; 겔 14:9; 사 63:17). 때로는 이스라엘의 길(path)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길잃게 만들기 때문에, 회개와 구원이 필요하다. 하나님과의 이러한 기본적인 관계는 목자(Shepherd)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양의 모습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플라나오는 신약성경에서 2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a)  플라나오는 비유적 의미로 '잘못 인도하다, 속이다'는 의미를 나타낸다(마 24:4; 마 24:11; 마 24:24; 막 13:5이하; 요 7:12; 요일 2:26; 요일 3:7; 계 2:20; 계 12:9; 계 13:14; 계 19:20; 계 20:3; 계 20:8; 계 20:10).

(b)  플라나오는 수동태로 '길을 잃다, 잘못된 길로 이끌리다, 방황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마 18:12; 마 18:13; 그리고 히 11:38; 벧전 2:25; 벧후 2:15은 상징적 의미를 함축한다.

(c)  플라나오는 '잘못되다, 미혹되다, 속다, 정도에서 벗어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딛 3:3; 히 3:10=시 95:10; 히 5:2; 약 5:19; 마 22:29; 막 12:24; 갈 6:7; 고전 6:9; 고전 15:33; 약 1:16).(참조: W.Gunther; Walter Bauer; J.H.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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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vrno"(4205, 포르노스) 간음자, 간부.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포르노스(Aristoph., Xen. 이래)는 페르네미(pernhmi: 팔다)에서 유래했으며, '창녀와 성관계를 맺는 음행자, 간음자', 그래서 '비도덕적인 사람, 즉 돈 때문에 부도덕한 목적에 자기가 이용되는 것을 허용하는 자, 남창, 포주'를 의미한다.

2.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포로노스는 신약성경에서 10회 사용되었으며, 보편적으로 '불법적 성교에 탐닉하는 남자, 간음자, 간부'를 나타낸다(고전 5:9-11; 고전 6:9; 엡 5:5; 딤전 1:10; 히 12:16; 히 13:4; 계 21:8; 계 22:15).(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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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jdwlolavtrh"(1496, 에이돌롤라트레스) 우상 숭배자 idolater.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에이돌롤라트레스는 에이돌론(1497: 형상, 우상)과 라트리스(latriv": 고용된 자, 종, 노예)에서 유래했으며, '우상 숭배자'를 의미한다.

2.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에이돌롤라트레스는 신약성경에서 7회 나오며, '우상 숭배자'를 의미한다.

(a)  고전 5:10-고전 5:11에서 우상 숭배자들과의 교제의 한계를 언급한다: "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b)  계 22:15에서 우상 숭배자들은 성밖에 있다: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

(c)  우상 숭배자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

① 고전 6: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② 엡 5: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d)  고전 10:7에서 우상 숭배자들의 행위와 결과를 신 32:7에 근거하여 언급한다: "저희 중에 어떤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e)  계 21:8에서 우상 숭배자들에 대한 최후 운명을 언급한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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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icov"(3432, 모이코스) 간음하는 남자, 간부 adulterer.

1. 일반 헬라어와 70인역본의 용법 

기본어 모이코스는 '간음한 남자'를 의미한다. 모이코스는 70인역본에서 7회 나오며, 히브리어 나아프(간음하다)의 변형들의 역어로 나타난다.

2. 신약성경의 용법 

모이코스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a)  '간부(姦夫)'라는 의미로, 눅 18:11; 고전 6:9; 히 13:4에 나타난다.(b)  비유적 의미로는 약 4:4 LTTrAW에 나타난다. 여기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에 대하여 불신실하거나 불신앙적인 것을 나타낸다.→ moiceuvw, 3431 모이큐오

(참조: J.H.Thayer; H.Reis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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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lakov"(3120, 말라코스) 부드러운 soft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말라코스(Homer. 이래)는 기본어이며, '연한, 부드러운, 나약한, 여자 같은'을 의미한다.

2.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말라코스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마태복음, 누가복음, 고린도전서에만 사용되었다.

(a)  마 11:8(병행구 눅 7:25)에서 '부드러운' 옷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b)  고전 6:9에서 '여성적인, 미동' 즉 자기 몸을 변태적인 호색에 제공하는 남성에 대해 사용되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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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rsenokoivth"(733, 아르세노코이테스) 남색하는 자, 비역하는 자, 계간하는 자.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아르세노코이테스는 아르센(a[rshn)과 코이테(koivth, 2845)에서 유래했으며, `남색하는 자' 즉 `여자와 동침하는 것과 같이 남자와 동침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2. 신약성경의 용법. 

아르세노코이테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바울서신에 나온다.

고전 6:9에서 아르세노코이테스는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된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딤전 1:10에서 아르세노코이테스는 율법의 정죄를 받은 자에 속한다: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참조: 창19장; 레18:22, 레18:29; 레20:13; 신23:17).

(참조: J.H.Thayer; Walter Bauer; C.Brow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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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vpth"(2812, 클렙테스) 도적 thief.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클렙테스(Homer 이래)는 클렙토(klevptw, 2813)에서 유래했으며,

(a)  '도둑',(b)  '기만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클렙테스는 70인역본에서 19회 나오며, 히브리어 간납(도둑)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출 22:2; 시 50:18; 잠 29:24). 신 24:7에서는 사람 도적에 대해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클렙테스는 신약성경에서 1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고전 6:10에서 도둑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벧전 4:15에서 도적질로 고난을 받지 말라고 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다는 차원에서 도적질은 하나님의 뜻을 위반하는 것이며 인간 관계의 견지에서는 사랑이 없는 행위이고 또한 친교를 배반(요 12:6)하는 것이다.

(b)  마 24:43; 눅 12:39에서 클렙토는 메시야 시대가 도래한다는 경고도 없이 메시야 시대가 갑작스럽게 도래한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집주인이 빈틈없이 경계함으로써 도적이 몰래 들어 오는 것을 예방할 수 있듯이 제자들 역시 주님의 재림을 위해 깨어있어야 한다.

살전 5:2, 살전 5:4; 벧후 3:10; 계 3:3; 계 16:15 등에서도 이와 동일한 비유를 사용하여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오실 주의 강림을 설명하고 있다.

(c)  요 10:1에서 선한 목자에 관한 요한복음의 강화는 양 도적이라 할 수 있는 자를 가리켜 클렙테스 카이 레스테스라고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즉 양우리에 들어가는 비(非)정당한 방법인 몰래 들어가거나 또는 폭력을 사용하여 들어가는 자라는 것이다.

(d)  요 12:6에서 돈을 도용했던 유다는 클렙테스였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e)  요 10:8에서 예수님께서 자기보다 먼저 온 모든 자를 규정할 때 사용하신 복수 어구 클렙타이 카이 레스타이는 예수님 이전의 경건한 자들이 아닌 드다와 갈릴리 사람 유다와 같은(참조: 행 5:36이하) 거짓 메시야들을 언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온 자는 자"(요 10:8)라는 어구는 메시야, 즉 "오실 그 이"를 뜻하는 전문 용어를 암시하는 것이다(참조: 마 11:3; 막 11:9; 눅 7:19; 롬 5:14).

(f)  요 10:10에서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 하려 오고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생명을 주려한 것이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참조: Walter Bauer; H.Preisker; N.Hill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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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eonevkth"(4123, 플레오네크테스) 탐욕스러운 사람, 욕심꾸러기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플레오네크테스(Hdt. 이래)는 플레온(plevon: 더 많은)과 에코(e[cw, 2192: 가지다, 쥐다, 소유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을 더 많이 가지기를 원하는 자, 탐욕스러운 자'를 의미한다.

2.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플레오네크테스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탐욕스러운 사람, 욕심꾸러기'를 의미한다.

(a)  고전 5:10-고전 5:11, "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b)  고전 6:10,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c)  엡 5: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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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vquso"(3183, 메뒤소스) 술 취한 자, 술 고래 drunkard.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메뒤소스는 메뒤오(mequvw, 3184: 술취하다)에서 유래했으며, 형용사로는 '술취한', 명사로는 '술취한 자, 술고래'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메뒤소스는 70인역본에서 5회 나오며, '술취하는 자'(잠 23:21; 잠 26:9)를 의미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메뒤소스는 신약성경에서 고린도전서에만 2회 나온다.

(a)  고전 5:11에서 술취하는 자와 교제를 금한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b)  고전 6:10에서 술취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외된다: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참조: Walter Bau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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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ivdoro"(3060, 로이도로스) 욕하는 railing, abusive, 욕하는 자 a reviler.

1. 고전 헬라어 용법 

형용사 로이도로스(Eur. 이래)는 '욕하는, 비난하는, 욕하는 자'를 의미한다.

이 어군의 단어들은 비난, 모욕적인 언동, 중상, 심지어 모독 등의 일반적 의미를 나타낸다.

2. 70인역본의 용법 

로이도로스는 4회 나오며, '다툼, 논쟁'을 뜻하는 마톤, 미드얀(잠 25:24; 잠 26:21; 잠 27:15)을 집회서 23:8에서는 동의어 없이 등장한다. 히브리어의 의미에서 기인한 강조점의 가벼운 변화를 제외하고는, 70인역본에서 이 단어들의 용법은 고전 헬라어의 용법에 준하고 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로이도로스는 신약성경에서 고린도전서에만 2회 나온다.

고전 5:11에서 로이도로스는 기독교인에게 합당치 않은 행위를 지적하고 있는 목록에 끼어 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고전 6:10에서도 마찬가지이다: "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참조: Walter Bauer; H.Wahrisch; H.Ha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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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pax(727, 하르팍스) 탐식하는, 약탈자.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하르팍스(Hes. 이래)는 하르파조(aJrpavzw, 726)에서 유래했으며,

(a)  '탐욕스러운, 탐식하는, 게걸스럽게 먹는',(b)  실명사로 '강도, 약탈자, 사기꾼'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형용사 하르팍스는 70인역본에서 1회 나오며, 타라프(2963: 갈갈이 찢다, 분열시키다, 잡아 뽑다)의 역어로, '물어 뜯는' 것(창 49:27)을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하르팍스는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하르팍스는 마 7:15에서 '탐식하는, 게걸스럽게 먹는'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b)  하르팍스는 '강도'나 '약탈자'를 의미한다.

① 눅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② 고전 5:10; 고전 5:11, "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③ 고전 6:10,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양은 좀체로 누워 자는 법이 없다....그러나 목자 품에 안겨 있을 때 만큼은 곤히 잠들 수 있다

===필립 켈러라는 분은 원래 호주에서 양을 치는 목자였는데 목사가 된 이후 ‘목자가 바라본 시편 23편’이라는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는데, 그 책에서 소개하는 내용을 보면 양이 풀밭에 드러누울 때는 네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한다는 것.  ---첫째> 양을 잡아먹으려는 원수가 없어야 풀밭에 눕고 이리나 사자나 여우가 주위에 있으면 절대로 풀밭에 눕지 않는다는 것. 둘째> 양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화목해야 풀밭에 눕고 뿔로 싸우고 머리로 밀치고 하는 싸움이 있을 때에는 절대로 풀밭에 눕지 않는다는 것. 셋째> 몸에 빈대나 벼룩이 있을 때는 절대로 풀밭에 눕지 않는다는 것. 넷째> 충분히 꼴을 먹고 배가 불러야 푸른 풀밭에 드러눕는다는 것. 

===양의 특징 1 : 시력이 너무 나쁘다.<목자인지 아닌지 눈으로는 식별하지 못한다>. 2. : 앞길 분간 못하며/방향 감각이 없다<시력이 엉망이라서 수풀인지 낭떠러지인지 분간 못한다....목자를 따르는 앞의 양의 꽁무니만 따라 간다.>..3 : 잘 속는다 <하지만, 청력은 뛰어난 편이다..발달된 청력을 갖고 있어서 목자의 소리를 듣고 목자가 인도하는 데로 갈 수 있다>.  4 : <다리가 약해서 재빠르지 못하고 뛰는 속도가 느리며>잘 넘어진다. ...5. : 넘어지면 <벌러덩 누워버리면 스스로>못 일어난다.  6. : <일으켜도>중심을 금방 못 잡는다<목자가 일으켜도 혼자서는 중심 잡기가 어려워서 자꾸 쓰러지게 되므로 목자가 당분간 붙들고 있어야 함> . 7. : 이기적이고 멋대로이다<배고파 하는 새끼에게 젖을 물려야 할 때에도 먹거리를 찾아 매몰차게 제멋대로 가버리기도 한다>....8.반드시 왔던 길로 다시 돌아온다.<귀소 본능은 강한 편이다>.. 9.방어력 제로이다<지키는 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10.죽을 때가 되면 온순해진다.<죽을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체념한듯 온순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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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시23

-------[나의기쁨나의소망되시며95]너의마음에근심이. [내게로오라하신주님의389].내맘이낙심되며.하나님사랑은.주안에기쁨있네.주안에있는나에게.주음성외에는.주와같이길가는것.삶의작은일에도


@@따르다(추적하다. 추구하다.pursue)의 히브리어는 <라다프דףַרָ<....

[시23:6...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빌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골3:1...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추구하라..pursue)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라다프דףַרָ<가 긍정적으로 사용되면 좋은 일들이 흘러 들어 오는 것을 뜻한다.. 적극적-긍정적 측면에서 사용 례를 본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이 늘 따르는 것을 <라다프דףַרָ<라고 한다... 반면 소극적-부정적 측면에서의 사용 례를 본다면, 적군으로부터 끊임없는 추격을 받으며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이는 것도 <라다프דףַרָ<를 쓰고 있다....<라다프דףַרָ<가 긍정적이든 부정적 상황이든 간에 공통점은 한결같이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지속되어 일어난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부어 주셔서 [선하심...토브]과 [인자하심...헤세드]의 [추적/추격하시는] 은혜가 따르는 상황도 일시적이 아닌 오랜 시간에 걸쳐 축복하심을 강조하고 있으며, 반면 힘든 일들에 있어서도 인생의 모든 길을 추격하며 따라 오는 것이 한 동안 계속 되어서 끝없어 보이는 길이 펼쳐짐을 강조하고 있는 단어이다.....즉, <라다프דףַרָ<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면 절대적 적극적-긍정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면서 오는 고통을 상대적 소극적-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길이 바로 <라다프דףַרָ<에 있는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가 있느냐,  없으냐에 따라서 인생 길의 종점은 확연히 달라지게 될 것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달려 있는 것이다 또한, 똑 같은 길을 걷더라도 하나님의 인자하심<라다프דףַרָ<이 늘 따르는 자의 인생은 그렇지 않은 자들의 인생과 결코 똑같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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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가(오)다, 뒤따르다, 추구하다, 추적(격)하다, 괴롭히다, 박해하다(박격하다..바싹 뒤따라 공격하다)....#d'r;(7291, 라다프) 

라다프(동사)는 기본 어근이며, '뒤를 따르다, 추적(격)하다, 추구하다, 박해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50회 나오며, 칼, 니팔, 피엘, 푸알, 히필형으로 사용되었다.

(a)  대개 이 단어는 사람이나 집단이 전쟁을 하거나 복수를 할 목적으로 다른 사람이나 집단을 추적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1회): "그런즉 청컨대 여호와 앞에서 먼 이곳에서 이제 나의 피로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이는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삼상 26:20).

이 단어는 보다 신학적인 문맥에서는 하나님께서 악인을 추적하신다고 한다. 즉 괴롭힌다는 것이다: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따르게 하며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어 학대를 당하게 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쫓아 보낸 열방 중에서 저줏거리와 놀램과 치소와 모욕거리가 되게 하리니"(렘 29:18).

이 단어는 어떤 구절에서 신실한 자들이 그들의 원수들을 추적한다고 한다: "내가 저희를 쳐서 능히 일어나지 못하게 하리니 저희가 내 발 아래 엎드러지리이다"(시 18:38). 

이 단어는 특히 시적이고 아름다운 구절에서 여호와는 그의 신실한 자를 구원하시지만 홍수를 일으켜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신다: "그가 범람한 물로 그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나 1:8).

이 단어는 악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따르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의를 굳게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르고 악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르느니라"(잠 11:19).

(b)  라다프는 강조형 어간과 재귀형 어간으로 사용될 때는 '추적 당하다' 혹은 '박해나 괴로움 당하다'를 의미한다(시 71:11-13). 

하나님의 섭리의 가장 복된 측면들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추적 당하고 있는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시편 23편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에서는 하나님의 축복 자체도 '따르리니(즉, 따른다-거느린다-수종한다)'라고 하는데, 이는 이 어근의 의미에 비춰볼 때 충분히 강하지 않다. 보다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추적하리니(pursue)"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 

욥기에서 이 단어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며 몇몇 구절들(욥 30:15; 욥 19:22)에서 이 단어의 의미는 '추적 당하다'이다.(참조: W. White; BDB).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여호와 라아_로이, 여호와 이레)...예비-공급-양육-인도-보호-돌봄-지킴-이김-성장성숙-생산-동행

2.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여호와 샬롬)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여호와 라파, 여호와 치드케누/체데크)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임마누엘/여호와 삼마)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아라크.. 진설-정열-정리-간검하다, 한 줄로 세우다-순서대로 놓다, 제단 위에 나무를 올려놓다,)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호와 닛시, 여호와 메카디쉬켐)

6.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땅에 임한 새 예루살렘...Q의 집=교회..딤전3:15]에 영원히 살리로다 (토브-헤세드-에메트 : 엘로힘-엘 엘룐/엘 로이/엘 올람/엘 마겐-마시아-트수르, 아비르-깁보르, 아도나이 야웨 사바오트/엘 샤다이/임마누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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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새번역] 시23..다윗의 노래

1.  (다윗의 노래)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아쉬움 없어라.

2.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4.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위로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5.  주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6.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의 집에서 영원토록 살겠습니다.

거룩한 목자(시 23:1-6) Psalms 23편 [NASB]--------------  

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want.

He makes me lie down in green pastures; He leads me beside quiet waters.

He restores my soul; He guides me in the paths of righteousness(체데크..EQUITY, righteousness=토브/헤세드/에무나 ::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며, 인자와 진실이 무궁하신, 정의를 판결하시되 사유하기를 기뻐하며, 긍휼을 베푸시는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Q성품의 어떠하심 그대로 빼어닮음) For His name's sake.(Q의 존귀하신 기념이름의 영광)

Even though I walk through 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 I fear no evil, for You are with me; Your rod and Your staff, they comfort me.

You prepare a table before me in the presence of my enemies; You have anointed my head with oil; My cup overflows.

Surely goodness and lovingkindness will follow me all the days of my life, And I will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forever.

--------[NIV]---------------------

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be in want.

He makes me lie down in green pastures, he leads me beside quiet waters,

he restores my soul. He guides me in paths of righteousness for his name's sake.

Even though I walk through 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 I will fear no evil, for you are with me; your rod and your staff, they comfort me.

You prepare a table before me in the presence of my enemies. You anoint my head with oil; my cup overflows.

Surely goodness and love will follow me all the days of my life, and I will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for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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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3장 (개요)

다윗의 많은 시편들이 원망들로 가득 차 있으나, 이 시편은 위로로, 하나님의 위대한 선하심과 그를 의지함에 대한 기쁨의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 

이는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큰 즐거움과 만족감 속에서 노래되어 온 시편이며, 세상이 존재하는 한 계속 노래 불러질 것이다.

1. 시편 저자는 하나님은 자기의 목자이시라고 주장하고 있다(1).

2. 하나님께서 그의 목자로서 그에게 베푸신 친절에 대한 체험을 열거하고 있다(2-3, 5).

3. 따라서 그가 부족함이 없을 것이며(1), 해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4),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시거나 그에 대한 긍휼을 버리지 않으시리라 추론하고, 이에 따라 자신도 의무를 지키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것을 결심한다(6).

이 속에서 그는 그의 외적인 상태를 형통하도록 만든 하나님 섭리의 축복을 주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에 의해 얻은, 그리고 그의 영혼을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채워줄 진정한 예배 속에서 얻은 하나님의 은혜와의 교제를 주시하고 있다. 

앞의 시편에서는 양들을 위해 죽어가는 그리스도를 제시한 반면, 여기에서는 그 위대하시고 선한 목자의 모든 돌보심과 인자하심으로 혜택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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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이 시편에서 세 가지의 매우 위안을 주는 전제로부터 세 가지의 매우 즐거운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으며, 우리도 역시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소망에 의해 구원을 얻으며, 그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소망은 굳건한 토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주 하나님 안에서 격려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와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그리고 그 관계에 따라 우리가 체험한 그의 선하심 속에서 위로를 얻도록 지시받고 있다.

Ⅰ.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목자이시므로 그에게 유익한 어느 것도 부족함이 없으리라고 추론하고 있다(1절).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보라.

1.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크게 돌보신다. 

---그는 그들의 목자이시며, 그들은 그를 그렇게 부를 수 있다. 다윗 자신이 목자였던 때가 있었다. 그는 젖양을 지키는 중에서 택함을 받았다(78:70-71). 그러므로 선한 목자가 그의 양떼들에게 갖는 자상한 관심과 돌보심을 경험으로써 알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얼마나 목자가 필요한가 그리고 노련하고 성실한 목자가 그들에게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를 회고한다. 그 목자는 한때 한 마리의 양을 구하기 위해 그의 생명을 내건 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것에 의해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돌보심을 예증하고 있다. 

---우리 구세주께서 “나는 양들의 선한 목자라”(요 10:11) 하고 말씀하심은 이를 언급하는 것 같다. 

:::: 이스라엘의 목자이신(80:1), 보편적으로 온 교회의 목자이신 그는 믿는 자들 개개인의 목자이시다. 그는 가장 보잘것없는 자라도 경히 여기지 않으신다(사 40:11). 그는 그들을 품에 안으시고, 양떼를 지키는 목자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주의 깊고 꾸준하게 돌보시고 보호하시며 공급해 주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목자와 같으시다면 우리는 양들처럼 순종하고 온순해야 한다. 양털 깎는 사람 앞에서처럼 조용해야 하며, 또 도살자 앞에서처럼 유순하고 잘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목자의 음성을 알고 그를 따라야 한다.

2.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 커다란 신뢰를 갖고 있다. 

---“만일 주님이 나의 목자, 나를 먹이시는 자라면, 나는 내게 정말 필요하고 유익한 것은 그 어느 것도 부족함이 없으리라고 단정할 수 있다.” 

:::: 만일 다윗이 이 시편을 그가 면류관을 얻기 전에 지었다면, 비록 그것이 그에게 예정되어 있었을지라도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부족함을 두려워할 만한 이유를 많이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한때 그는 나발에게 청하러 그의 사람을 보냈고, 또 어느 때는 그 자신이 직접 아히멜렉에게 가서 요청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목자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그는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를 자기들을 먹이시는 자로 삼는 자들은 굶어죽을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 표현에는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는 뜻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뜻도 내포되어 있다. “나는 필요한 것은 무엇이나 공급받을 것이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나는 그것이 내게 합당치 않거나 유익하지 않다고 또는 합당한 때에 그것을 갖게 되리라고 단정할 수 있다.”

Ⅱ.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선한 목자로서의 직책을 이행하신 것으로부터 그는 그가 당하게 될 큰 위험이나 어려움에 대해 어떤 두려움도 느낄 필요가 없음을 추론하고 있다(2-4절). 

---그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어 돌보아주시는 이로움을 체험하고 있으므로, 그에게 그 유익이 매우 필요하게 될 때 그것을 또한 얻으리라고 기대하고 있다. 다음을 살펴보자.

1. 살아 있는 성도들이 얻는 위로, 하나님은 그의 목자이시며, 하나님은 모든 의도와 목적을 충족히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러하심을 발견했으며, 우리도 그래야 한다. 하나님의 초장에 있는 양들과 같은 성도들의 행복을 보라.

(1) 그들은 좋은 곳에 안치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도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손으로부터 이 생애의 도움과 위로를 받고, 우리 아버지 되시는 그로부터 매일의 양식을 얻는다. 그 충만함이 악인에게는 메마른 초장에 지나지 않는다. 악인은 오직 관능적인 즐거움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즐거움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비록 세상에 속한 것은 거의 갖고 있지 않을지라도 믿음으로써 그것을 즐기는 자들에게는 푸른 초장이 된다(37:16; 잠 15:16-17). 

.....하나님의 명령은 곧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푸른 초장이다. 생명의 말씀은 새 사람에게 공급되는 영양분이다. 그것은 아기를 위한 젖, 양들을 위한 초장으로서 결코 불모가 되지 않으며, 먹어서도 없어지거나 마르는 법이 없이 항상 믿음을 위해 공급되는 푸른 초장이다.

.....하나님은 그의 성도들로 하여금 눕게 하신다. 즉 그들의 운명이 어떠하든지간에 그들 마음에 평안함과 만족함을 주신다. 그들의 영혼은 그의 안에서 편히 거하며, 모든 초장을 푸르게 만든다. 우리는 명령의 푸른 초장으로 축복받고 있는가? 그곳을 지나가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말고 그 위에 눕고 거기에 거하도록 하자. 이것은 영원한 나의 안식이다. 영혼이 살찌는 것은 꾸준한 은혜에 의한 것이다.

(2) 그들은 잘 안내받고, 인도된다. 이스라엘의 목자는 요셉을 양과 같이 인도하신다. 그리고 모든 믿는 자들은 그와 같은 인도 아래 있다. “그가 나를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먹고 사는 자들은 그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그는 그들을 그의 섭리로써, 그의 말씀, 그의 성령으로써 인도하신다. 그의 뜻대로 가장 선하게 그들의 일을 처리하시며, 그의 명령대로 그들의 감정과 행동을 주관하시고, 그들의 눈과 길과 마음을 그의 사랑 안에 두도록 지시하신다. .....그가 그들을 인도하시는 쉴 만한 물가는 유쾌한 전망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목마르고 피곤할 때 풍성한 청량제와 활력제를 준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음식과 휴식뿐만 아니라, 원기 회복과 즐거움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로, 성령의 기쁨은 곧 이 쉴 만한 물가이며, 성도들은 살아 있는 물의 근원에서 흘러나오고, 우리 하나님의 성을 기쁘게 만드는 시냇물가로 인도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부패하고 더러운 물이 고여 있는 물가나 사나운 바다, 급히 흐르는 강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잔잔하게 졸졸 흐르는 물가로 인도하신다. 잔잔하게 흐르는 물은 하나님을 향해 조용히 흐르는 그들의 심령과 가장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베풀어진 거룩한 인도하심은 이것에 대한 은유를 벗겨주고 있다(3절). 즉 그가 나를 “의의 길로”, 의무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그 속에서 나를 그의 말씀으로 가르치시며, 양심과 섭리로 지시하시는도다. 이 길은 모든 성도들이 인도받고 지키기를 원하며, 결코 거기서 빗나가지 않기를 원하는 길이다. 이렇게 의의 길을 행하는 자만이 위로의 잔잔한 물가로 인도받는다. 의무의 길은 진실로 즐거운 길이다. 화평한 것은 의의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길로, 그리고 이 길에서 인도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행할 수 없다.

(3) 어떤 것이 그들을 괴롭힐 때 그들은 충분히 도움을 받는다. 그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도다.”

① “내가 방황할 때 나를 소생시키신다.” 

.....양처럼 쉽게 한눈을 파는 짐승은 없을 정도로 양들은 길을 잃어버리기 쉽고 또 길을 찾아 되돌아오기가 어렵다. 가장 훌륭한 성도들도 “잃은 양같이 유리하는” 자기들의 성향을 깨닫는다(119:176). 그들은 길을 잃고 샛길로 접어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잘못을 보여주시고 회개케 하시고 다시 그들의 의무로 돌아오게 하심으로써 영혼을 소생시키신다. 만약 그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끝없이 유리해 파멸했을 것이다. .....한 가지 죄를 범했을 때 다윗의 마음이 그를 징계했고, 또 다른 죄를 범했을 때는 나단이 보내어져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그에게 말해 줌으로써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소생시키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죄에 빠지게 하실지라도 그들로 하여금 계속 그 속에 누워 있게 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② “그는 내가 병들 때 나를 회복시키시고, 내가 기진할 때 활력 있게 해주시며, 내가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영혼을 소생시키신다.” 

.....그는 우리를 치료하시는 우리 주 하나님이시다(출 15:26). 우리가 믿지 않았다면 여러 번 활기를 잃었을 것이며, 우리를 기절하지 않게 하시는 이는 또한 선한 목자이시다.

2. 죽어가는 성도들의 용기를 보라(4절). 

---지금까지 여섯 번, 일곱 번 환난을 겪을 때에 “나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했으므로 나는 결코, 마지막 극한상황에서도 그를 불신하지 않으리라. 여지껏 나를 위해 모든 일을 행하신 것은 나의 어떤 업적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고, 단지 그의 이름을 위해 그의 말씀을 준행하고 그의 약속을 이행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의 특성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에 대한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은 계속 나의 강한 성이 될 것이며, 나를 일생 동안 인도하시고 먹이시는 그가 끝까지 나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확신케 해주실 것이다. 여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절박한 위험이 가정되어 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즉 죽음의 위험 속에 놓일지라도, 골짜기처럼 깊고 그림자처럼 어두우며 죽음 그 자체처럼 두려운 위험 가운데 처할지라도”, 또는 오히려 “내가 죽음에 사로잡히고 나 자신 안에 죽음의 판결을 받으며 모든 면에서 이 세상에서 죽어가는 자로 여길 수밖에 없을지라도, 나는 평안하리라.” 

.....병든 자들과 연로한 자들은 자신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여기에 정말 끔찍스럽게 여겨지는 한마디 말이 있다. 그것은 “사망”이라는 말로서, 우리가 항상 생각해야 하는 문제다. “이 전쟁에서 벗어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사망에 대한 가정 속에서도 두려움을 약화시키는 네 가지 단어가 있다. 즉 우리 앞에 있는 것은 정말로 사망이다. 그러나 그 사망은 다음과 같은 것에 불과하다.

① 사망의 “음침함”(그림자)이다. 

.....그 속에는 본질적인 해는 없다. 뱀의 그림자가 독을 뿜을 수 없으며, 칼의 그림자가 우리를 죽일 수는 없다.

② 정말 깊고 어둡고 더러운, 음침한 “골짜기”다. 

.....그러나 골짜기는 비옥하므로 죽음 자체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비옥한 위로가 된다.

③ 이 골짜기를 “다니는” 것에, 한가하고 즐겁게 걷는 것에 불과하다. 

.....악인들은 이 세상에서 쫓겨나며 그들의 영혼은 요구당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 세상을 떠날 때처럼 즐겁게 저 세상으로 간다.

④ 골짜기로 통과해(hough) 다니는 것이다. 

.....그들은 이 골짜기에서 잃어버리지 않고 저편에 있는 향기의 산에 안전하게 다다를 것이다.

(2) 이 위험은 훌륭한 근거에 의해 경험하게 될 것이고, 또 극복될 것이다. 

.....사망은 두려움의 왕이나, 그리스도의 양들에게는 그렇지 아니하다. 그들은 도살당할 양이 그런 것처럼 사망에 대해 떨지 않는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이 어느 것도 나를 요동케 하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자녀는 마음의 거룩한 안심과 평정을 갖고서 죽음의 사자를 맞이하고, 그 소환에 응할 수 있다. 젖먹는 아이는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할 수 있다. 그리고 은혜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떠나는 어린아이는 “사망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는가” 하고 바울처럼 죽음에 거룩한 도전을 하면서 뱀의 굴에 손을 넣을 수 있다. 이런 확신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①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악이 없기 때문이다. 

.....사망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에게 실질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없다. 그것은 몸을 죽이나 영혼을 건드리지는 못한다. 이처럼 해로움을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왜 두려워해야 하겠는가?

② 성도들은 죽어가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임재를 얻기 때문이다. 

.....그때에 그는 그들의 우편에 계신다. 그런데 왜 그들이 요동하겠는가? 선한 목자께서 그의 양들을, 먹이를 노리는 짐승들이나 으르렁거리는 이리들에 의해 공격당할 위험이 있는 이 골짜기에서 지휘하고 호송하신다. 그는 그들을 호위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위로가 매우 필요할 때 그들을 안위하신다.

.....그의 임재는 그들을 안위해 줄 것이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의 칼과 성령이,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그들을 안위하실 것이다. 이것은 목자의 지팡이나 양들을 세기 위해 그 아래로 통과하게 했던 막대기(레 27:32), 양들을 흩어지게 하거나 못살게 구는 개들을 쫓아내기 위해 목자가 썼던 장대를 언급하고 있다. 성도들이 거의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지하시고(“그는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아신다”), 그 원수를 꾸짖으시며, 그들을 그의 막대기로 안내하시고 그의 지팡이로 떠받치시리라는 것은 그들을 안위해 준다. “복음은 주의 권능의 홀”이라 불리고 있으며(110:2), 그 속에는 성도들이 죽게 될 때 그들을 위로하기에 충분한 것들이 있다. 그들 “아래”에는 “영원하신 팔”이 계신 것이다.

Ⅲ. 하나님이 그에게 하사하신 좋은 선물에서 그는 그의 인자하심이 견고하고 영원하다는 사실을 추론해 내고 있다(5-6절).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

1.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롭게 베풀어주신 것을 매우 높이 찬양하고 있다(5절). “주께서 내게 상을 베푸시나이다. 주께서 나를 위해 생명과 경건함을 모두 지킬 수 있는 것들을, 현세와 내세에서 육신과 영혼 모두에 필요불가결한 것들을 모두 마련하셨습니다.” 

--- 하나님은 그의 모든 백성들에게 관대한 은인이시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의 선하심을 크게 표명하도록 만든다. 다윗은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1) 하나님은 좋은 음식을 갖고 계셨다. 

.....베풀어진 상과 가득 채워진 잔, 그의 굶주림을 채울 고기, 갈증을 채울 음료를 갖고 계셨다.

(2) 하나님은 그를 위해 그것을 배려 깊게 쾌히 마련해 주셨다. 

.....그의 상이 펼쳐진 후에 어떤 음식이 그 위에 놓인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앞에 베풀어져 있었다.

(3) 그는 절약하거나 궁핍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풍족히 갖고 있었다. 

.....“나 자신과 내 친구들에게도 충분할 정도로 내 잔이 넘치나이다.”

(4) 그는 필수품뿐만 아니라 장식과 즐거움을 위한 것도 갖고 있었다.

..... “주께서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나이다.” 사무엘이 그를 왕으로 기름부었고, 그것은 더 큰 은총에 대한 확실한 담보였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를 풍족하도록 축복하셨다는 일례이거나 또는 특별한 친구들의 머리에 감람유를 붓는(눅 7:46) 독특한 환대를 언급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그가 아직도 그 자신을 양으로서, 주인의 음식을 먹고 그의 잔으로 마시며 그의 품에 눕는 그런 “가난한 자의 작은 암양”(삼하 12:3)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고귀하게뿐만 아니라 이처럼 자상하게 돌보심을 받는다. 그들의 풍족한 양식이 그들의 몸과 영혼을 위해, 현재와 미래의 생명을 위해 마련된다. 만일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자연적인 생명을 위해 이처럼 풍성한 것들을 베풀지 않을 때, 그것이 우리에게 영적인 축복으로 보상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우리 자신의 잘못 때문이다.

2. 그는 하나님의 은총이 계속될 것을 확신하고 있다(6절). 

---그는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고 말했다(1절). 그러나 이제 그는 더욱 긍정적으로, 더욱 알기 쉽게 이야기하고 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로다.” 시련당함에 따라 그의 소망이 자라나고 그의 믿음이 강해지고 있다. 다음을 주목하라.

(1) 그가 그 자신에게 약속하고 있는 것. 

.....그것은 선하심과 인자하심, 근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인자하심의 모든 시냇물, 용서하시는 긍휼, 보호하시는 긍휼, 부축해 주시는 긍휼, 마련해 주시는 긍휼이다.

(2) 그것이 전달되는 방법. 

.....그것은 광야를 통과하는 이스라엘 출정군을 따르던 바위의 물처럼 나를 “따를” 것이다. 그것은 어떤 곳이나 상황에도 따라올 것이며, 항상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3) 그것의 지속. 

.....그것은 “나의 평생에”, 마지막 날까지도 나를 따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를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4) 그것의 불변함. 

.....“나의 평생에”, 새날이 오듯이 어김없이 온다. 그것은 매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내려진 만나와도 같이 “아침마다 새로울” 것이다(애 3:22-23).

(5) 그것의 확고함. 

.....“정녕” 그렇게 될 것이다. 그것은 진리의 하나님이 하신 약속처럼 확실하며 우리는 우리가 누구를 믿어왔는지 알고 있다.

(6) 미래의 상태에는 축복의 온전함이 있으리라는 전망이 있다.

.....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 구절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이 세상에서 평생토록 나를 따랐으므로, 내 생명이 끝날 때에도 나는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기 위해 더 나은 세상으로, 거할 곳이 많은 위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집으로 갈 것이다. 내가 지금 가진 것으로 충만히 기뻐할 것이며, 내가 바라는 것으로 더욱 충만히 즐거워할 것이다.” 

.....이 모든 것, 그리고 또한 천국을 즐거워하리라! 그때 우리는 선한 주인을 섬기게 된다. 

3. 그는 하나님과 그의 의무에 집념하기로 매우 단호하게 결심하고 있다. 

---우리는 마지막 절을 다윗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으로 볼 수 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내가 살아 있는 한) 거하리로다. 그리고 내가 존재하고 있는 한 그를 찬미하리로다.” 

---우리는 영원히 그를 섬기기 위해 문기둥에 귀를 대고 구멍을 뚫은 종처럼 그의 집에 거해야 한다. 만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이 찬란한 대낮을 위해 점점 더 빛나는 아침 햇살 같다면, 우리는 그에 대해 곧 사라질 아침 구름이나 아침 이슬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집에 있는 충족함으로 만족을 얻으려는 자들은 그 의무를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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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펄젼의 시편 23편 강해

[개 요]주제

이 시에는 "다윗의 시"라는 말 외에는 다른 머리말이 없다. 사실 이 시는 특별한 상황에서 기록한 시가 아니기에 특별한 머리말이 필요 없으며, 어떤 상황에서나 있는 그대로 성도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시라고 볼 수 있다. 이 시는 다윗이 영감을 받아 지은 아름다운 시로서 어떤 음악으로도 이 시에 담겨 있는 아름다움을 다 표현할 수 없다. 전쟁의 나팔 소리를 울렸던 자가 평화의 노래를 부르고, 목자로서 재난을 당해 슬피 울던 자가 양 떼의 평안함을 인하여 즐거움으로 노래한다. 독자들은 이 시를 읽으면서 넓게 드리워진 나무 그늘 아래 앉아서 주위의 풍성한 양 떼를 바라보며 기쁜 마음으로 노래하는 목동 다윗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윗이 노년기에 이 시를 기록했다면 그는 자신이 어린 시절에 다녔던 시냇가를 회상하며 조용히 묵상하는 가운데 기록했을 것이다. 이 시는 시편 중의 진주와도 같은 시이다. 그 부드럽고 순수한 빛은 보는 사람들의 눈을 기쁘게 한다. 이 시에는 경건함과 시적 아름다움이 함께 나타나 있고, 그 감미로움과 영성을 따를 만한 다른 시가 없다. 

성경에서 이 시가 시 22편 다음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을 주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 22편은 십자가의 시이다. 시 22편에는 푸른 초장도, 잔잔한 시냇가도 없다. 우리는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부르짖음을 읽은 후에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고백을 대하게 된다. 우리는 목자장 되신 그분이 당하신 피 흘리는 고통과 그분을 공격하는 칼을 본 후에야 선한 목자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것인가를 알게 된다. 

이 시를 새에 비유한다면 종달새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종달새는 노래하면서 날아오르고, 날아오르면서 노래하며, 마침내 저 멀리 날아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에도 그 노래 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이 시의 마지막 말을 주의해서 살펴보라:"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 시는 하늘의 노래이다. 구름 아래 이 땅에서 부르기보다는 하늘의 영원한 집에서 하늘의 곡조로 불러야 할 노래이다. 아! 우리가 이 시를 읽으면서 이 시의 영적 세계에 들어간다면, 하늘 나라에서 누릴 삶을 이 땅에서 체험하게 될 것이다. 

[강 해]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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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무한하신 여호와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목자가 되시다니! 하나님은 얼마나 겸손하신 분이시며, 이것은 또한 얼마나 감격스런 일인가!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위대한 사랑과 돌보심을 나타내기 위해 자신을 목자로 비유하신 것은 진정 우리의 감사와 찬양을 받으실 일이다. 

다윗은 양을 지키는 자였으며, 그래서 양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또 목자가 하는 일은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약하고 아무 저항도 할 수 없으며 어리석은 피조물인 양으로 비유하고, 하나님을 공급하시고 보존하시며 인도하시는 분으로 비유했다. 아직 중생하지 않은 자, 하나님께 돌아서지 않은 자는 어느 누구도 자신을 여호와의 양으로 비유할 수 없고, 오직 늑대나 염소로 비유할 수 있을 뿐이다. 

양이란 주인의 소유물이며, 야생 동물이 아니다. 주인은 때로 양을 대량으로 키우며, 종종 비싼 값으로 사기도 한다. 다윗이 깨달았던 것처럼 우리도 여호와께 속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구절에는 다윗이 여호와께 속했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만일"이라는 조건이나 "바란다"라는 소망도 없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자신의 상태를 단순히 서술할 뿐이다. 우리는 하늘의 아버지께 의존하는 마음을 배양해야 하겠다. 

이 구절에서 "나의"라는 짧은 단어는 참으로 아름다운 말이다. 다윗은 "여호와는 이 세상의 목자시며, 그분의 수많은 양들을 인도하신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단순히 말했다. 그분이 다른 사람에게 목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나에게는 목자이시다. 그분은 나를 돌보시고, 나를 지키시며, 나를 보존하신다. "나의 목자시니"라는 말의 시제는 현재이다. 각 성도는 어떤 상황에 처했든지, 지금 현재 여호와의 돌보심 아래 있는 것이다.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은 앞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했는데, 여기에 함축된 뜻이 이 구절에 나타나 있다. 다윗은 간단하고 긍정적인 표현으로 말한다:"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아니라면 내게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겠지만,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면 그분은 나의 필요를 채워 주실 수 있으시며, 또한 그분은 그렇게 하기를 기뻐하신다. 그분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는 이 세상의 일시적인 것으로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분은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자라게 하시지 않는가? 그렇다면 어찌 그분의 자녀들을 굶주리도록 버리시겠는가? 나는 또한 영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분의 은혜가 내게 족할 것을 안다. 내가 그분을 의지하노라면, 그분은 내게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신 33:25)라고 하실 것이다. 

때로는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소유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보다 더 부유하고 더 지혜로운 자들이 부족함을 느낀다 할지라도, 나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4:10). 다윗은 "내가 부족함이 없다"라고 하지 않고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했다.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기근이 이 땅을 황폐하게 하고, 재앙이 이 도시를 멸한다고 해도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늙어 몸이 약해진다 해도, 죽음이 내 앞에 닥친다고 해도 나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소유했기에 풍족하다. 은행에 돈을 많이 쌓아 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일용할 양식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악인은 항상 부족하나 의인은 결코 부족한 법이 없다. 죄인은 결코 만족하지 못하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만족함을 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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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두 가지 특성이 있다. 성도들의 삶은 묵상하는 삶이며, 또한 활동하는 삶이다. 이것이 두 가지 특성이다. 

첫째, 성도들은 묵상하는 삶을 산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푸른 초장"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진리의 성경 말씀을 가리킨다. 이 말씀은 항상 새롭고 신선하며 영양이 풍부하기에 이 말씀을 가까이하는 자는 늘 만족함을 누린다. 풀이 무성하게 자란 푸른 초장에 누우면 풀을 뜯다가 자갈이나 흙을 씹을 염려가 없어진다. 성경에는 감미로운 복음의 교리가 풍성하게 들어 있다. 부드러운 풀이 양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듯이, 말씀은 영혼의 양식이 된다. 우리가 성경에서 약속의 말씀을 발견하고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초장에 누운 양과 같이 풍족함을 누리게 된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건초와 평안을, 안식과 새롭게 됨을, 평안과 만족을 발견한다. 

"그가 나를······누이시며"라는 표현을 주의해서 보라. 여호와,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여호와, 바로 그분께서 우리로 말씀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그 말씀의 양식을 먹게 하신다. 말씀 안에 있는 약속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는 마땅히 감사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영혼들은 세상에 연연하다가 세상을 따라 살아가기도 한다. 그들은 말씀이 복된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이 복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푸른 초장"을 알고 있지만, 이 초장에 누우려 하지는 않는다. 수년 동안 "믿음의 확신"을 누리는 성도들은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크게 감사를 드려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활동하는 삶이다. 우리는 생각할 뿐만 아니라 또한 행동한다. 우리는 먹기 위해서 누울 뿐만 아니라, 또한 온전함을 향해 행동하는 순례자들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했다. "쉴 만한 물가"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성령의 영향력과 은혜를 말한다. 그분의 영은 마치 물처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를 도우신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며, 풍성하게 하시고, 소중히 여기신다. 이것들은 "쉴 만한 물가"와 같다. 성령께서는 평화를 사랑하시며, 어떤 허식의 나팔 소리로 떠들어 대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 영혼에 오실 때에는 이웃 사람들에게 떠들어 대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이웃 사람들은 그분이 나와 함께하시는 것을 알지 못한다. 우리 마음에 성령을 홍수처럼 부어 주신다 해도, 우리의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자들도 이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내 마음 고요한 곳에서 하늘과 내 하나님을 만나네.

조용한 물은 깊이 흐른다. 속이 비어 있는 북보다 더 시끄러운 것은 없다. 하나님은 고요한 중에 성도들의 영혼을 만나신다. 하나님의 영은 택하신 양, 즉 성도들을 싸움과 다툼의 높은 파고가 있는 곳으로 인도하시지 않고, 거룩한 사랑의 평화로운 시냇가로 인도하신다. 그분은 독수리가 아니라 비둘기와 같으시고, 몰아치는 돌풍이 아니라 조용히 내리는 이슬과 같은 분이시다. 우리 주님은 이처럼 "쉴 만한 물가"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우리는 스스로 그곳으로 갈 수 없다. 우리는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가 나를······인도하시는도다"라고 했다. 그분은 우리를 그곳으로 몰아가지 않으신다. 모세는 율법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몰아갔으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본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사랑으로 이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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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우리의 영혼이 슬픔을 당하면 그분은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우리의 영혼이 죄를 지으면 그분은 거룩하게 하시고, 약할 때면 강하게 하신다. 이는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분이 하시지 않는다면, 세상에 살고 있는 그분의 종이라도 성도들을 위해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분의 말씀이 자동적으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여호와, 그분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신다. 우리들 중에 은혜를 받지 못한 자가 있는가? 우리의 영성이 지극히 낮아졌다고 느끼는 자들은 없는가? 밀물과 썰물을 주장하시는 분은 우리의 영성이 썰물처럼 낮아졌을 때 다시 밀물처럼 회복시켜 주신다. 그렇다면 그분이 축복해 주실 것을 기도하라. "내 영혼의 목자시여, 나를 소생시키소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리스도인들은 순종하기를 기뻐한다. 그러나 이 순종은 주님의 본을 따르는 것이며, 사랑으로 행하는 순종이다. 그분이 우리를 몰아가시는 것이 아니라 앞서가시며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어떤 계명은 순종하고 다른 계명은 무시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말씀 안에 있는 모든 명령에 순종한다. 성경은 "의의 길들"로 인도하신다고 했다. (KJV에는 히브리 원어를 따라 "의의 길들"이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이렇게 "길들"이라고 복수형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에 유의하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명하시든지, 우리는 그분의 사랑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그대로 행할 것이다. 어떤 성도들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그 축복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감미로운 축복이요 선물이다. 우리는 죄에서 구원받기를 소망하고, 또 거룩한 길로 인도함을 받는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은혜이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우리가 거룩한 백성이 되고, 좁은 의의 길을 걷는 것은 위대한 목자이신 그분께 영광이 되는 일이다. 우리가 이렇게 인도함을 받는다면, 하늘에 계신 목자의 돌보심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께 감사와 경배를 드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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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 구절은 사람이 임종을 맞이할 때 많이 암송하는 구절이며, 어두운 골짜기를 밝게 비춰 주는 구절이다. 이 구절에 들어 있는 단어들은 모두 풍성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내가······다닐지라도." 다닌다는 말은 잘 아는 길을 걷는 것을 말하며, 어느 곳으로 가는지를 알고 있으며, 그 길을 따라 걷기로 결심한 것이며, 안전함을 느끼고, 그리하여 온전한 평안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죽음을 앞둔 성도들도 당황하지 않는다. 놀라서 뛰어가거나,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멈추어 서는 것도 아니다.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지금까지 걷던 걸음으로 계속 걸어간다. 

"골짜기로." 계곡 안에서 이리저리 걷는 것이 아니라, 계곡을 가로질러 걷는다. (KJV에는 "in the valley"가 아니라 "through the valley"라고 번역되었다. 이것은 "골짜기를 가로질러"라는 뜻이다-역자 주.) 우리는 사망의 어둡고 검은 터널을 지나서 밝은 영생으로 나온다. 우리는 죽은 것이 아니라, 영광 가운데 깨어나기 위해 잠시 잠을 자는 것이다. 죽음이란 그곳에 머물러 거하는 집이 아니라, 그곳을 거쳐서 나오는 현관과 같고, 목적지가 아니라 목적지를 향한 통로와 같다. 

"골짜기." 산에 폭풍이 몰아칠 때에도 골짜기는 조용하다. 이처럼 성도들의 마지막 날들은 그들의 인생 중에서 가장 평화로운 날들이다. 민둥산과 같은 산이라도 골짜기에는 풍성한 곡물이 있는 법이다. 이처럼 성도들은 살아서 누렸던 즐거움보다 죽음을 당해서 더 많은 즐거움과 지식을 얻게 된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이 골짜기는 "사망의 골짜기"가 아니라 "사망의 그림자가 있는 골짜기"이다. (KJV에는 "사망의 그림자가 있는 골짜기"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사망의 본질은 사라졌고, 오직 그 그림자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또한 어디엔가 빛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의 순례 여행길에는 항상 죽음이 따른다. 그리고 하늘의 빛은 우리가 가는 길을 비추는 것이다. 죽음 저편에 빛이 있다는 것을 즐거워하자.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림자는 우리가 가는 길을 잠시라도 멈추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의 그림자는 물지 못한다. 칼의 그림자도 죽이지 못한다. 죽음의 그림자도 우리를 멸망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망의 그림자를 두려워하지 말자.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시편 기자는 아무런 해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께서 이 모든 악을 멀리 치워 버리셨다는 강한 확신 속에서 이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마치 모든 악이 영원히 사라지고 없는 것처럼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들 중에는 다만 우리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해만을 당한다면,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슬픔의 십 분지 일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는 한 번 죽는 죽음을 수천 번씩 느낀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이런 두려움에서 구원을 받았다. 그는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악한 사탄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탄은 이미 정복당한 원수이며, 앞으로 파멸을 당할 원수이다. 다윗은 이렇게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로서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고 했다.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즐거움이다. 바다 한가운데 있는 어린아이는 갑판에 있는 다른 승객들과는 달리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이는 엄마의 품안에서 잠들어 있다. 아이는 엄마와 함께 있다면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이것은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께서 그와 함께하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당신은 나와 함께하십니다. 당신을 소유함으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진 것입니다. 당신이 나와 함께하시므로 나는 완전한 위로와 절대적인 안전을 확보한 것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 당신은 이것으로 당신의 양 떼를 다스리십니다. 이것들은 당신의 주권, 그리고 당신의 은혜로운 보살핌의 상징입니다.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나는 당신이 지금도 다스리고 계심을 믿습니다. 당신의 지팡이가 내 영혼을 보호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소망을 품고서 위로를 받는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죽지 않고 살 자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이렇게 죽지 않는 것을 소망하며 살아갈 만한 특별한 가치나 이유가 있겠는가? 지혜로운 자라면 죽음을 맛보지 않는 것과 죽음을 당하는 것 사이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라면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 죽음을 당하지 않고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살전 4:17)하는 자는 사실 무엇을 얻는다기보다는 잃는 것이다. 죽음을 맞이하지 못한 성도들은 죽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교제를 상실한 것이다. 또한 바울도 살아 남은 자들이 자는 자들보다 더 특혜를 받는 것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했다. 바울은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고 했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빌 1:23)라고 했다. 시 23편은 낡은 시가 아니다. 이 시가 다윗의 시대에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처럼, 또한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감미로운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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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선한 사람에게도 원수는 있다. 원수가 하나도 없다는 것은 주님을 닮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에게 원수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없다.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 하나님과 벗이 되면 세상과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하나님의 사람은 원수의 목전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는 것을 주의해 보라. 그가 원수의 목전에서도 평안과 담대함을 유지한 것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주께서······내게 상을 베푸시고." 군인이 원수들과 전쟁을 할 때에는 식사를 급히 하고 전쟁터로 나간다. 그런데 여기서는 어떠한가? 주께서 상을 베푸시는데, 마치 하인이 평화스러운 때에 상을 펴서 식탁보를 정리하고 여러 가지 장식을 하고 잔치를 준비하는 것처럼 한다. 여기에는 어떤 혼란도, 소동도 없으며 서두르지도 않는다. 원수들이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지만, 마치 아무 일도 없는 평화로운 시기인양 하나님은 식탁을 준비하시고, 그리스도인들은 거기 앉아 식사를 즐긴다. 아! 이처럼 지극히 어려운 시기에도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에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주신다!

온 세상이 대적한다고 해도 성도들은 온전한 평강을 누리네.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기름 부음을 받는 축복을 누리기 원한다. 성도들은 모두 제사장이다. 그러나 기름 부음이 없다면 제사장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성령님께 나아가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한다. 기름 부음을 받지 않은 제사장은 그 자격을 상실한다. 또한 제사장은 하늘에서 새로운 은혜를 날마다 받지 않는다면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는 잔 가득히 충분히 담았을 뿐만 아니라 넘치도록 받았다. 가난한 사람이라도 가진 것으로 만족하고, 넘치도록 만족을 누릴 수 있다. 가난한 농부는 한 조각 빵과 냉수를 마시면서도 "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또한 주님이 저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며 감사할 수 있다. 그의 잔이 넘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부유한 사람이라도, 그가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의 잔이 넘칠 수 없다. 만족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한 사람의 잔은 금이 가고 그 틈을 통해 잔이 새는 것이다. 만족한 자는 무엇이나 그를 즐겁게 한다. 이 만족을 찾은 자는 행복한 자이다. 이것은 왕국보다 더 낫고, 이것을 가진 자만이 행복을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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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나를 따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우리는 이 사실에서 큰 위로와 격려를 받는다. 그러므로 "정녕"이라는 단어로 이 사실을 확증한 것이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은 "오직 선하심과 인자하심만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우리가 사는 동안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이 우리와 함께할 것이기 때문이다. (히브리 원어에 "아크"<^a>라는 단어가 "선하심과 인자하심" 앞에 나타나는데 이는 "분명히", "정녕"이라는 뜻으로 무엇을 확증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고, "만이"라는 뜻으로 "다른 것을 제외하고 오직 이것만"을 제한적으로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이 두 가지 뜻이 함께 어우러져 사용되기도 한다-역자 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항상 우리를 붙들어 준다. 왕자가 외국에 나갈 때 수행원 없이 떠날 수 없듯이, 성도의 삶도 이와 같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항상 그를 따른다:"나의 평생에." 우리가 사는 동안 때로는 어두운 날을 만나고, 때로는 밝은 날을 만나며, 때로는 배고픈 날을, 때로는 잔칫날을, 때로는 지루한 겨울을, 때로는 밝은 여름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날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고, 그분의 인자하심은 우리의 죄악을 지워 버린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요 8:35). 내가 이 땅에 거하는 동안,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집에 거할 것이다.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그분이 내게 주신 집이다. 내가 천국에 가도 역시 그분과 함께 거할 것이다. 이 땅이나 천국이나 모두 하나님의 집인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사 당신이 이 아름다운 시를 읽으면서 평화를 누리기를 바란다. 

[주해와 설명들]

시 23편 전체. 다윗이 지은 많은 시 중에서 시 23편이야말로 가장 감미로운 시라고 할 수 있다. 새가 공중을 날면서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하듯, 이 짧은 시는 이 세상을 노래로 가득 차게 한다. 이 노랫소리는 고난을 사라지게 하고, 슬픔에 잠긴 자들을 위로하며 안식을 준다. 이 시는 감옥에 갇힌 자를 위로하고, 의심을 사라지게 했다. 낙망한 군인들에게는 용기를, 병든 자에게는 새 힘을, 뼈아픈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과부와 고독한 고아들에게는 위로를 주었다. 죽어 가는 군인들은 이 시를 들으며 평안히 눈을 감았고, 음침한 병원은 이 시로 빛을 받았으며, 옥에 갇힌 자들은 이 시를 읽고 자유함을 누렸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노예 된 자들은 이 시를 읽으면서 주인이 누리지 못한 자유를 누렸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자들은 이 시를 읽으면서 위로를 받았다. 이 시는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것이다. 당신의 자녀들과 나의 자녀들, 그리고 자녀들의 자녀들을 향해, 그리고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노래하며 위로를 줄 것이다. 이 세상의 종말이 이르기까지, 그리고 마지막 성도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이 시는 그 날개를 접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고서 하나님의 가슴으로 날아가 하늘의 모든 소리들과 함께 합하여 영원히 아름답고 기쁜 노래로 노래할 것이다. -헨리 워드 비처(Henry Ward Beecher, Life Thoughts). 

시 23편 전체. 이 시는 "다윗의 목가시"라고 불린다. 다윗이 작사하고 노래를 부른 이 시는 참으로 귀한 시이다. 어떤 유대인들은 다윗이 헤렛 수풀에 숨었을 때에 지은 시라고 한다(참조. 삼상 22:5). 그러나 이 시는 그가 원수를 모두 정복한 후, 그 땅에 평화를 정착시키고서, 노년기에 이르러 한 발은 이 땅에 두고 다른 한 발은 천국에 들여놓았을 때에 지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식사를 할 때 이 시를 암송한다. -존 트랩. 

시 23편 전체. 어거스틴은 꿈 속에서 천국에 있었는데 시 119편이 생명나무가 되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시 23편은 이 생명나무 주위에서 피어 나는 가장 아름다운 꽃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시 119편은 모든 별들 중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태양과 비교되었다. 시 23편은 여러 별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로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존 스토턴(The Songs of Christ's Flock, 1860). 

시 23편 전체. 어떤 경건한 사람들은 이 시가 묘사하고 있는 충만한 삶을 보면서, 우리가 항상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슬퍼한다. 그러나 다윗도 오래 살았지만, 시 23편과 같은 시는 오직 한 편밖에 쓰지 않았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가 쓴 어떤 시들은 역시 이 시처럼 생생한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시 23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개개인이 갖는 확신, 즐거움, 승리 등으로 가득찬 시로서 독특하고 유일한 시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어두움의 시간이 있고, 또한 즐거움의 시간도 있다. -윌리엄 플러머.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어떤 사람들은 "내 땅이 나를 지키나니 나는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사업이 나를 도우리니 나는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할 것이다. 군인은 자신의 무기를 의지하고, 농부는 노동력과 기술을 의지하며, 예술가는 자신의 능력을, 상인은 사업을, 학자는 자신의 책을 의지할 수 있다. 그들은 "이것들이 나를 지키리니 나는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 노래하자:"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진정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자들은 여호와 외의 다른 것들을 경멸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다른 무엇을 더 사랑하는 자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할 수 없다. -존 헐(John Hull, B.D., Lectures on Lamentations, 1617).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구절은 미래형으로 기록되었으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라고 현재형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맥더프(J. R. Macduff, D.D., The Shepherd and His Flock, 1866).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우리는 이 비유에서 많은 교훈을 받을 수 있다. 다윗은 그가 말하는 대로 한때는 목동이었다:"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시 78:70, 71). 그 자신이 목동이었던 다윗은 이제 여호와를 목자라고 부른다. 그는 양 떼를 지키고, 사자와 곰 또는 다른 위험한 것들로부터 양들을 보호하고, 초장으로 인도하며 물가에 데려가 물을 먹였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이와 같은 일, 그리고 이보다 더 크고 위대한 일을 하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울도 이렇게 말했다:"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딤전 1:13). 우리는 이처럼 여호와의 돌보심을 야곱의 생애에서도 볼 수 있다:"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창 32:10). 이런 고백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명백하다. 첫째, 누구나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참된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은혜는 그 은혜를 받을 자를 구별하지 않는다. 은혜는 베푸는 자가 행하는 것이며, 받는 자가 행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모든 것을 영적인 일을 위해 사용한다. -사무엘 스미스(Samuel Smith, Chiefe Shepheard, 1625). 

1절. "목자." 여호와께서 목자가 되신다는 말은 진정 감미로운 말이다. 이 말을 듣고서 그리스도의 품에 안긴 경험이 없는 사람들, 그분의 양이 아닌 사람들도 목자의 선함을 생각하고 그분께 오게 되기를 바란다. 사탄은 우리에게 매혹적으로 다가오지만 결국에는 우리로 죄에 빠지게 할 것이며, 만약 당신이 그를 따른다면 당신은 그가 참으로 악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당신으로 죄를 짓지 못하게 하고, 가시로 죄의 길을 막아 버리므로 엄하게 보인다. 그러나 당신이 죄를 짓지 않고 그분의 양 떼 속으로 들어오면 참으로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양 떼 주위에 죄를 짓지 못하도록 가시 울타리가 쳐 있는 것을 보고서 그 안으로 들어가기를 꺼린다. 그러나 당신은 양의 우리를 싫어하지 말고 그 안으로 들어가라. 그리스도는 그분의 양이 방황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분의 양들이 방황을 하면 그분은 양들을 안으로 데려오시며, 때로는 양 떼를 지키는 개(성도들이 당하는 고난)도 함께 데려오신다. 

그분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다고 해서 그분을 악한 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분은 선하신 분이다. 사탄은 당신에게 미소를 짓고, 당신이 죄를 지을 때는 당신에게 친절해 보인다. 그러나 그가 결국에는 당신에게 악하게 대할 것임을 명심하라. 마침내 우는 사자처럼 당신을 삼키고, 또한 괴롭게 하며 학대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라. 그분을 당신의 영혼의 목자로 삼으라. 그리스도께서 당신으로 죄를 짓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것은 그분이 선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선하신 그분은, 당신이 죄를 지었을 때에는 당신을 죄로부터 구원하신다. 아! 예수께서 그분의 양 떼, 특히 죄를 지은 자에게 선하시다는 것을 알고서 죄인들이 그분의 양 떼가 있는 우리 속으로 들어간다면! -존 듀랜트(John Durant, 1652).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여호와는 나를 먹이는 목자시다. 목자는 양 떼를 먹이고, 인도하고, 다스리고, 보호한다. -헨리 에인즈워스.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여호와를 목자로 비유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째, 선한 목자는 자신의 양을 안다. 목자는 양털에 표시를 하고, 양이 길을 잃으면 그 양을 찾으러 밖으로 나가서 양을 찾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이런 일을 행한다고 말씀하셨다:"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하늘의 별을 헤아리고 그것들의 이름을 부르시며, 우리의 머리털 수까지 다 헤아려 아시는 그분은 그분의 자녀들을 특별히 보살피신다. 양 떼의 필요를 채우시고, 모든 위험에서 양을 보호하신다. 둘째, 선한 목자는 양을 치는 기술이 있어서, 양 떼를 풍성한 초장으로 인도한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양 떼로 척박한 땅에서 허기지게 내버려두지 않으신다······셋째, 선한 목자는 양이 곁길로 가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부지런히 양 떼를 지킨다. 양이 곁길로 가면 언제든지 그 양을 다시 데려온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가련한 양 떼들이 곁길로 갈 때에 자비를 베푸사 다시 데려오신다······넷째, 선한 목자는 자신의 기술을 활용하여 양을 먹일 의지를 품는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양 떼가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하기를 진정 원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부탁하셨다. 다섯째, 선한 목자는 그의 양 떼를 돌본다······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양 떼를 안전하게 지키신다. 다윗도 이 시편에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했다. 또한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내가 이 잡힐 양 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이라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락이라 하고 양 떼를 먹일쌔"(슥 11:7). 여섯째, 목자는 그의 양이 약하거나 너무 어리면, 그 양의 안전과 회복을 위해 품에 안고 다닌다.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이렇게 대하신다:"그는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 마지막으로, 선한 목자는 길 잃은 양이 집으로 돌아오면 즐거워한다. 이처럼 여호와께서는 죄인이 회개하는 것을 즐거워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사무엘 스미스.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나는 목자와 양을 주의해서 살펴보았다. 어떤 양들은 목자 가까이에 있어서 목자가 어디로 가든지 주저하지 않고 따르며, 다른 양들은 이쪽 저쪽으로 흩어지거나 멀리 뒤에 처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목자는 자주 뒤를 돌아보면서 날카롭고 엄한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거나 그들을 꾸짖고, 때로는 돌을 던지기도 했다. 목자가 양을 불구로 만드는 것도 보았다. 모든 목자가 선한 목자는 아니다. 나는 양 떼로 덮여 있던 그 언덕을 지날 때마다 선한 목자라는 이 주제를 생각하곤 했다. 우리 구세주는 선한 목자시다. 그분이 앞서가면 양들은 그분을 따른다(요 10:4). 이것은 문자 그대로 사실이다. 그들은 잘 훈련되고 길들여 있어서 지극히 온순하게 목자를 따른다. 목자들은 각자의 양 떼들을 우리에서 끌어내어 그들을 앞서가며 어디든지 원하는 대로 인도하는 것이다. 초장을 향하는 길에는 여러 양 떼들이 함께 있어서 양들은 각기 자신의 양 떼에 속해 자신의 목자를 따라간다. 그러므로 양 떼들은 목자를 항상 따라야 하며, 곁에 있는 옥수수밭을 향해서는 안 된다. 어떤 양이든지 곁길로 가면 반드시 문제에 빠지게 되어 있다. 목자는 종종 큰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 준다.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고, 그 소리를 따라간다. 그러나 낯선 사람이 부르면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머리를 높이 세워 긴장한다. 그 사람이 계속해서 부르면 양들은 도망을 간다. 그들은 이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재미있으라고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단순한 사실 그대로를 말한 것이다. 나는 이 실험을 계속해서 해 보았다. 

목자들이 앞서가는 것은 길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가는 길이 안전하고 풍요로운가를 보기 위한 것이다. 사나운 맹수가 공격이라도 하면 그들을 막아서기 위해 목자는 무장을 하고 앞으로 간다. 그래서 그들은 무척 용감하다.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바로 이 산에서 목자들은 야수들과 싸운 경험이 수없이 많다(삼상 17:34-36). 지금도 사자들은 없지만 늑대는 수없이 많다. 그리고 표범이나 다른 야수들이 어슬렁거리며 다니기도 한다. 그것들은 종종 목자가 있을 때에도 공격하므로, 목자는 항상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 야수들과 용감하게 싸운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또한 도둑이나 강도가 나타날 때에도 충성스러운 목자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며 양 떼를 지킨다. 이렇게 싸우다가 실제로 목숨을 잃은 이야기도 들었다. 지난 봄, 한 목자는 도망가지 않고 세 명의 강도들과 싸우다가 칼에 맞았다. 그래서 그가 지키던 양 떼들 가운데서 죽어 갔다. 어떤 양들은 항상 목자 가까이 따르며, 목자의 사랑을 받는다. 그런 양들에게는 이름이 있다. 목자가 그 이름을 부르면 즐거이 응답한다. 친절한 목자는 이들이 먹을 수 있도록 맛있는 풀을 주곤 한다. 그런 양들은 늘 만족하고 행복하다. 이들은 길을 잃을 염려도 없고, 야수나 도둑이 가까이할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양들은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한다. 그들은 여기 저기 마음대로 뛰어다니고, 맛있는 것을 찾아 돌아다닌다. 어쩌다 한 번씩 다른 양 떼가 어디 있나 보기 위해 머리를 들곤 하며, 목자의 야단을 듣기 일쑤다. 어떤 양들은 목자의 인도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밭에 뛰어들거나, 심한 경우에는 나무 위에도 오르다가 떨어져 다리를 부러뜨리기도 한다. 이런 양 떼들로 인해서 목자는 끊임없이 어려운 문제들을 수습해야 한다. -톰슨(W. M. Thomson, D.D., The Land and the Book). 

1절. "목자." 우리가 그 언덕에 앉아 있을 때, 갑자기 그 산에 생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목자들이 양 떼들을 몰고서 성문을 빠져나와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우리는 목자들과 양 떼들을 흥미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수천 마리의 양과 염소들이 떼를 지어 몰려왔다. 목자들은 양 떼들이 모두 나오기까지 그곳에 서 있었다. 그러자 목자들이 각자 흩어지고 자기 갈 곳으로 향했다. 그들은 자기 갈 곳으로 향하면서 각자 특유의 높은 소리를 지르며 나아갔다. 양들은 그 소리를 듣고서 자기의 목자들을 찾아 떠나갔다. 처음에는 양 떼가 이곳 저곳으로 혼란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기 목자들을 향해 방향을 잡기 시작했다. 양들은 각각 자신의 목자를 따라 길게 일렬로 늘어서 이동했다. 이런 광경은 내게 새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언제 보아도 이 광경은 흥미롭다. 이 광경은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생하게 증언해 준다:"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 10:3-5). 목자들의 삶을 생각하면 평화롭고 조용한 삶을 연상하게 되지만, 실제로 목자의 삶에서 이런 모습은 전혀 보기 힘들다. 그들의 삶은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을 연상시킨다. 어깨에는 장총을 메고, 허리에는 단도와 권총을 차고 있으며, 손에는 싸울 때에 쓰는 도끼를 들었다. 목자들은 이런 것들을 가지고 다녔다. 그들은 날카로운 눈매에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언제든지 전투를 벌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포터(J. L. Porter, A.M., The Giant Cities of Bashan, 1867). 

1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우리는 '빈곤'과 '결핍'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결핍'이란 무엇인가 없는 것을 말한다. '빈곤'이란 꼭 필요한 것이 없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걸어야 하는데 지팡이가 없다면 이것은 '결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걸어야 할 사람이 다리가 없다면 이는 '빈곤'이다. 선한 사람에게도 여러 가지 좋은 것들이 '결핍'될 수는 있지만, 필수적으로 있어야 할 것들이 없는 '빈곤' 상태에 이르지는 않는다. 내게 좋은 외투가 없다면, 이것은 빈곤이 아니라 결핍이다. 외투가 없어도 내가 걸어다니는 데는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동안 주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대로 그 길을 조심스럽고 명랑하게 걸어갈 수가 있다면, 내게 화려한 장식품이 없어도 나는 부족함이 없다. 내게 있는 작은 것으로도 만족하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타락하여 항상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 이상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야고보는 사람들이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이유를 말하면서, 이는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약 4:3)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그들의 타락한 정욕을 만족시키려고 모든 것을 공급하시지는 않는다. 당신의 무지와 불만, 그리고 교만과 감사하지 않는 마음은 당신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황무지에 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을 여시듯 당신의 눈을 여신다면, 당신은 샘과 시내와 자비와 축복을 충만히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치스럽지는 않지만 풍족하고, 부유하지는 않지만 적합하고, 당신에게 가장 적합한 만큼 채워 주신다는 것을 알라. 당신도 다윗과 함께 이렇게 고백할 것이다:"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오바댜 세지윅. 

1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선한 목자를 의지하고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믿는 것과 세상의 재물을 신뢰하며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생각이다. 선한 목자를 의지하여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세상 사람들에게 불가능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매우 어려울 것이고, 세상 재물을 신뢰하여 부족함이 없게 사는 것은 자연스럽고 쉬운 일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물질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약속에 의존하는 자는, 쌓인 재물을 의지하는 자보다 비교할 수도 없이 훨씬 더 확실한 보장을 확보한 것이다. 이 세상의 재물이 우리의 필요를 언제나 채워 준다는 절대적인 보장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가장 현명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들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약속이 가장 확실한 보증이 된다는 것을 누가 감히 부인하겠는가? -존 스티븐슨. 

1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리스도의 양 떼는 초장을 바꿀 수는 있어도, 초장이 없는 경우는 결코 없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 그분께서 우리에게 위대한 것을 허락하셨는데도, 우리는 지극히 작은 것으로 그분을 불신하겠는가? 우리에게 하늘의 축복을 주신 그분은 또한 이 세상의 것으로도 복을 주실 것이다. 위대한 농부와 같은 그분은 결코 물건을 쓸데 없이 쌓아 두지 않으신다. -윌리엄 세커(William Secker). 

1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당신이 아프다는 소식, 그리고 여호와께서 당신을 붙드시고 회복시키신다는 소식을 듣고서 이 편지를 통해 하나님께 찬송을 올립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할 때에 당신의 잔이 넘치도록 하신 하나님, 그분의 도우심에 대해 듣고서 내 믿음도 키우고 싶습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고백은 우리 메시아의 양들이 "메-" 하고 고백하는 소리가 아닙니까?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면, 우리는 결코 부족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목자는 모든 것을 채워 주시는 분이시니까요! 그분만으로 우리는 풍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짧은 구절에는 충만한 평화가 담겨 있으며, 이것은 그분의 양 떼만이 아는 사실입니다. 이 시의 다른 부분은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을 부연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시에서 우리는 안식, 새롭게 함, 회복시키는 자비, 인도, 죽음 가운데서도 얻는 평안, 승리, 넘치는 축복, 미래에 대한 확신, 삶과 죽음 가운데서도 누리는 영원한 안식, 영적 그리고 육적 번영 등을 발견하게 됩니다. 시 23편을 읽고서 우리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외쳐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면, 어떻게 부족함을 느낄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분의 모든 부를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그분의 부와 영광이 우리의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금하시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도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 목자장께서는 그분의 양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고 계십니다. 그분이 손수 체험하셨으니까요. 그분은 "도살할 양"처럼 여김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내가 내 양을 알고"(요 10:14)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양을 알기 위해서 스스로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셨고, 그래서 양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스스로 체험하여 양들의 연약함을 동정하고 체휼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양들은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어떤 고난도 아픔도 궁핍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어떤 경우에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애 3:24). -데오도시아 하워드, 파워스코트(Theodosia A. Howard, Mrs. Viscountess Powerscourt, Letters, 1861, 로버트 댈리 편집). 

1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한 가난한 성도가 나이 들어서 무척 빈궁함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불평하지 않았다. 어느 날 한 친절한 이웃이 길에서 그를 만나자, "참 살기 어렵지요?"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처럼 나이든 노인이 어떻게 생활을 꾸려 나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언제 보아도 쾌활하군요!" "천만에요! 우리는 빈궁한 것이 아닙니다. 내게는 부자 아버지가 있어요. 그분이 날 빈궁한 채 살라고 내버려두지는 않으신답니다." "뭐라구요? 아직도 아버님께서 살아 계시단 말씀이신가요? 아버님은 연세가 정말 많으시겠군요!" "아! 내 아버지는 죽지 않으신답니다. 그분은 항상 나를 보살펴 주시지요!" 

이 나이든 성도는 하나님이 날마다 공급해 주시는 연금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의 빈궁함과 그가 얼마나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지는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필요한 것은 결코 부족한 적이 없었노라고 단언했다. 그가 최악의 빈궁한 처지에 놓일 때면, 바로 그때가 하나님의 구원이 일어나는 때였다. 나이 들어 그가 손으로 일을 하지 못하게 되자, 여호와께서는 자비의 손을 그에게 내밀어 주셨다. 아침을 겨우 먹고 난 후, 다음 먹을 점심을 구할 길이 막연할 때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윗처럼 목자 되시는 여호와를 의지하고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하나님을 신뢰한 그대로 여호와께서는 전혀 예기치 않는 방법으로 그의 필요를 채워 주셨다. -존 스티븐슨.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요한복음 10장을 보면 그리스도의 양에 대한 여섯 가지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1) 그들은 그들의 목자를 안다. (2) 그들은 목자의 소리를 안다. (3) 그들은 목자가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는다. (4) 그들은 목자를 사랑한다. (5) 그들은 목자를 신뢰한다. (6) 그들은 목자를 따른다. -로저스(Mrs. Rogers, The Shepherd King, 1856). 

1-4절. 강가에는 목자들이 양을 인도하고 있었다. 목자가 앞서가고 양은 목자의 뒤를 따르는 모습을 보면서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을 생각했다. 목자는 양 떼가 강을 건너도록 인도하고 있었다. 목자를 따르는 양들은 모두 같은 모습으로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양들은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용감히 강을 건넜다. 이 양들은 목자의 발자취를 가까이서 따르며, 목자의 사랑을 받는 양들이다. 이 양들은 푸른 초장이나 잔잔한 물가를 거닐 때에도, 산에서 풀을 뜯어야 할 때에도, 그리고 정오의 뜨거운 태양을 피해 큰 바위 아래서 쉴 때에도 늘 목자 곁에 그를 따른다. 어떤 양들은 물에 들어가면서도 의혹과 두려움 가운데 들어간다. 그들은 강 저 아래로 떠내려가기도 한다. 그러나 양들은 한 마리 한 마리 모두 헤엄쳐서 강을 건넌다. 그런데 작고 어린 양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강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그들이 강에 뛰어드는 모습을 보면 가련하기 짝이 없다. 양 떼를 지키는 개들이 이 어린 양들을 쫓아 강으로 밀어넣는 것이다. 어린 양들은 "메애-" 하고 소리를 지르며 공포 가운데 물로 뛰어든다. 이 연약한 양들은 멀리 흘러 떠내려간다. 그러면 목자들은 강으로 뛰어들어가 두려워 떠는 양들을 안고 강을 건넌다. 모두 안전하게 건넌 후에는 양들이 기뻐하는 것이 역력하다. 나이 든 양들은 목자 주위에 모여들고, 어린 양들은 즐거워 뛰어다니며 목자에게 감사를 표시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요셉을 양 떼처럼 인도하시는 큰 목자 되신 그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가? 또한 그분의 양 떼인 우리 모두가 죽음을 맞이하여 건너야 할 강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분이 우리 앞서가시므로 그분을 가까이하는 양들은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목자께서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사 43:2)라는 말씀을 기억한다. 그분께 눈을 고정시키는 자들은 강을 보지 못하고, 그 강물이 차겁다는 것이나 높은 물결이 일어나는 것도 느끼지 못한다. -톰슨. 

2절.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그분에게는 "푸른 초장"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분에게 "푸른 초장"이 있다는 것은 그분의 능력을 말하고, 그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은 그분의 선하심을 의미한다. 그분은 다 시들고 말라 버린 초장이나 먹기에 맛이 없는 그런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나를 인도하시는 "초장"은 보기에도 좋고 먹기에도 좋은 "푸른" 초장이다. 초장의 풀이 푸른색이 아니라면 식욕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푸른색을 띠고 있는 풀은 식욕을 돋구고 먹기에도 좋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은 색깔이 푸르다는 것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푸르다는 것은 단지 색깔에 불과하고, 이 색깔은 외모에 불과하다. 푸른 색깔을 띠었어도 나뭇잎이나 깃발이나 골풀 같은 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 그러나 "푸른 초장"이기 때문에 내게 유익이 되는 것이다. 푸른 초장은 보기에도 좋고 먹기에도 좋으며, 먹은 후에는 소화시키기에도 좋다. 푸른 초장의 풀에는 수액이 많아서, 이것을 먹으면 별로 물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양들은 물을 마셔야 한다. 선한 목자는 양에게 필요한 물을 공급한다. 목자는 양을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한다. 이 물가는 물결이 높이 치고 겁이 많은 양들을 위협하는 그런 물이 아니다. 비록 조금씩 마시더라도 아무런 두려움 없이 마실 수 있는 고요하고 잔잔한 물이다. 여호와께서 나를 이렇게 대하신다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여호와께서 나를 푸른 초장으로, 그리고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배를 채우고 마른 목을 축이기도 전에 다른 곳으로 우리를 몰고 가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보기는 하되 먹지는 못한다면 우리는 비참해 지지 않겠는가? 그러나 선하신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양 떼를 푸른 초장에 누이신다. 양들은 모두 배불리 먹고 그 풀밭에 누워 쉬는 것이다. -리처드 베이커(Sir Richard Baker). 

2절. "인도하시는도다." 우리는 부드럽고 친절하게 인도함을 받아야 하며, 끌려가거나 쫓겨가서는 안 된다. 양처럼 연약한 우리는 외형적인 폭력으로 몰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감동을 통해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에서는 야곱의 가축을 사냥하듯이 몰아 속히 이동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야곱은 가축의 필요에 민감한 목자였기에, 천천히 이동을 하겠다고 에서에게 말했다:"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유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창 33:13). -랜슬롯 앤드루즈. 

2절. "인도하시는도다." 목자는 양 떼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여 풀을 뜯게 하며, 일반적으로 양 떼에게 풀을 뜯어다가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특별한 상황에 처했을 때는 먹을 것을 갖다 주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늦은 가을이 되어 초장이 마르거나 겨울에 눈이 덮이게 되면, 목자들은 삼림이 있는 지역으로 양 떼를 몰고 가서 하루 종일 푸른 잎이 있는 나뭇가지를 꺾어 양 떼를 먹인다. 삼림을 가꾸는 목적도 이처럼 양 떼를 먹이기 위해서이다. -톰슨. 

2절.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이 구절은 약한 양 떼를 보살피며 부드럽고 친절하게 인도하는 것을 표현한다. -에인즈워스. 

2절. "푸른 초장······쉴 만한 물가." 여호와께서 인도하시는 초장에는 풍성한 꼴이 있으며, 결코 황폐하게 되지 않는다. 그분이 인도하시는 시냇물도 깊고 넓어서 결코 마르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신 이래 양 떼들은 이 목장에서 꼴을 먹었으나, 이 초장에는 언제나 꼴이 풍성하다. 양 떼들은 아담 이후로 이 물가에서 물을 마셨지만 지금도 이 시내는 마르지 않는다. 양 떼가 모두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이 초장에는 꼴이 풍성하고 시내는 마르지 않을 것이다. -랠프 로빈슨(Ralph Robinson, 1656). 

2절. "푸른 초장······쉴 만한 물가." 카불의 아르반 산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꽃들이 만개하고, 여기 저기에 검은 텐트들과 수없이 많은 양과 낙타들이 떼를 지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아르반에 거하는 동안 대평원의 색깔이 계속해서 변하는 것을 보았다. 한때는 황금빛 꽃이 군락을 이루며 피었다가, 이내 새로운 꽃이 피고, 다시 하룻밤 사이에 주홍빛 꽃이 피었다가 갑자기 짙은 남빛을 띠는 꽃이 피곤 한다. 초장의 푸른 빛깔도 그 색도를 달리하며 변화를 거듭한다. 그 동안 베두인족으로부터 카불의 아름다움과 비옥함에 대해 소문으로 들어왔지만, 이처럼 직접 눈으로 보고서는 그 아름다움에 경탄했다. 아랍 사람들은 일년 동안 그 초장에서 세 종류의 풀이 자란다고 자랑했다. 또한 물가에는 나무들이 자라고, 길게 펼쳐진 잔디밭은 이곳 저곳 이동하는 유목민들에게는 천국과도 같았다. 주위의 지역은 모두 메마르고 생기가 없지만,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시원한 그늘을 즐기고, 야생 동물들도 신선하고 깨끗한 꼴을 먹을 수 있다. -오스틴 레어드(Austin H. Layard, 1853). 

2절. "쉴 만한 물가." 큰 강은 큰 소리를 내며 양들로 겁이 나게 한다. 또한 양들이 이런 큰 강에서 물을 마시다가 잘못하면 빠른 급류에 휩싸여 떠내려갈 수도 있다. 그러나 "쉴 만한 물가"는 이처럼 큰 강과 대조적이다. -매튜 풀. 

2절. "쉴 만한 물가." 히브리 표현을 직역하면 "안식의 물들"이다. 양들은 이런 물가에서 물을 마시기를 좋아한다. 여기에는 아무런 위험도 없고, 공기도 상쾌하기 때문이다. 복음의 교리는 실로의 물처럼(사 8:8) 평온하게 흐르고, 또 맛도 좋다. -존 트랩.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이 구절을 음미하면 몇 가지 함축된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성도들은 교회의 양 떼 속에 있으면서도 곁길로 가거나 실족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소생시키시고"라는 표현이 이곳에 나왔겠는가? 둘째, 선한 목자는 양을 구원하기 위해 신속히 행하신다. 그분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그 결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마지막으로, 이 일을 하시는 것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하신다. -토머스 데일(Thomas Dale).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우리를 위험과 파멸에서 구원하신 바로 그 손이, 우리를 실족하거나 탈선하지 않도록 지키신다. 하나님의 책망과 그분의 온유함은 함께 작용한다. "그들이 그 길을 굽게 하며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음이로다"(렘 3:21)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또한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렘 3:22)고 하신다. 우리는 이 부르심을 듣고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다:"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렘 3:22). -손턴(J. Thornton, Shepherd of Israel, 1826).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그분은 나를 죄와 무지에서 돌이키실 뿐만 아니라 내가 잘못된 것을 의지하지 않도록 인도하신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의의 길에는 항상 거룩함의 나무가 있고, 그 가는 길에는 위로의 샘이 있으며, 그 마지막 도달하는 곳에는 영원한 안식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길을 왜 꼭 "의의 길"이라고 해야 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을 것이다. 왜 '의무의 길'이나 '우리의 순종의 길'이라고 해서는 안 되는가? 거룩함이나 의로움은 우리 스스로의 능력에 의지한 순종으로 이루어질 수 없고, 우리 자신이 의무를 다 수행한다고 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이러한 능력과 노력에 의한 행동은 "푸른 초장"이 될 수 없고, 오직 메마른 황무지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들은 "쉴 만한 물가"가 아니라 거칠고 위험한 급류와 같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에 위로나 평강을 주지 못한다. 이제 영광을 얻으신 그리스도, 그분의 순종에 의지하여 이런 축복을 받게 된다. -제임스 허비.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히브리 표현으로 이 구절은 영혼을 돌이킨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을 돌이키시되 (1) 잘못된 것이나 방황에서, (2) 떠나기 전에 원래 있던 곳으로 돌이키신다. 그분은 나를 소생시키시고 위로하신다. -매튜 풀. 

3절. "의의 길." 아! 여호와여! 이 의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너무 없어서 이제는 그 길이 지워져 버린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이제는 그 길이 어디 있다는 것을 찾아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길을 찾을 수 있다고 해도 너무나 좁아서 특별한 도움이 없다면 그 길에서 쓰러지거나 곁길로 나가게 되기 십상이다. 천사들도, 그리고 훌륭한 사람들도 이 "의의 길"을 그들의 힘으로 걸어갈 수 없었다. 인도해 주는 손길을 따르지 않았기에 이 의의 길에서 멀어지고 마침내 멸망을 당하고 만 것이다. 내 영혼의 선한 목자 되신 여호와여, 당신이 기뻐하시는 대로 은혜로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이 길에서 실족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소서. 당신이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이후에 지켜 주시지 않으시면 이 길이 죄의 길이 되고 말 것입니다. -리처드 베이커. 

3절. "의의 길." 사막이나 광야에는 포장된 길이 없다. 때로는 여섯, 또는 여덟 개 정도의 길이 평행선으로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들은 모두 같은 목적지를 향한 길이 분명하다. 이런 길을 보면 나는 시 23편에 나타나 있는 길을 생각하게 된다.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이 길들은 모두 한 곳을 목표로 삼고 달린다. -존 개즈비. 

3절.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분은 "선한 목자"라는 이름을 가지셨다. 그분은 자신의 양을 위해 해야 할 일을 다하신다. 양들이 나쁜 양이라고 해도 그것 때문에 목자가 악한 목자가 될 수는 없다. 여호와는 변함없이 선한 목자가 되신다. 그리고 "자기 이름"을 위해 양이 나쁜 짓을 하는 경우에도 선을 베푸신다. 이것으로 그분이 어떤 이익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그분은 영광을 거두신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이 높임을 받을 것이다. -리처드 베이커.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면서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진실된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축복이다! 죽음이란 진실된 성도들에게는 죽음이 아니며,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며,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염려와 슬픔과 비극과 비참함으로부터의 구원이며,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영원한 기쁨의 시작이다. 이것은 하늘의 기쁨을 맛보는 것이며, 이 기쁨은 어떤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고, 이 세상에서는 누구도 보거나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모든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성경은 이 육체적 죽음을 잠깐 잠을 자는 것으로 표현했다. 죽음을 통해서 사람들은 잠시 동안 감각을 잃어버리지만 깰 때에는 죽음을 당했던 시절보다 훨씬 새롭게 되어 다시 살 것이다!······이처럼 육체의 죽음은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우리가 올바로 생각한다면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편안한 것이며, 우리에게 재앙이 아니라 그것을 고치고 치료하는 것이며, 원수가 아니라 친구이며, 잔혹한 군주가 아니라 온유한 인도자이며,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그리고 슬픔과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과 쾌락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영원히 누릴 것이다. -사망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짤막한 설교, 1547.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내가 에스겔이 보았던 해골 떼를 보아야 한다고 하더라도, 공포의 왕이 거리를 뽐내며 다니면서 내 주위에서 수천 수만을 사람을 죽인다 해도, 나는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내 친구들과 친척, 그리고 가족을 향해 활을 쏘고 내 사랑하는 자들과 친구들을 어두움에 떨어뜨리고 내게서 멀리 떠나가게 한다고 해도, 나는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나를 겨누고 화살을 쏜다고 해도, 화살의 독이 내 영혼을 삼킨다고 해도, 그 화살을 맞고 내가 중상을 입어 병들고 쇠약해진다고 해도, 죽음의 징후가 나를 사로잡아 내가 분해되는 과정에 있다고 해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내 육체는 떨 것이다. 그러나 내 육체의 약함을 아시는 그분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내가 고통스럽게 싸우는 것을 용서하실 것이다. 내가 죽음의 고통을 두려워할지언정, 죽음의 해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망의 쏘는 독이 제거된 지 오래이다. 사망이 쏘는 화살은 끝이 마모되어 버렸고, 그래서 내 육체만 쏠 뿐이지 그보다 더 깊이 파헤치고 들어가지는 못한다. 사망이 내 영혼을 죽이지 못한다. 사망의 화살을 보고서 난 미소를 지을 수 있다. 나를 파멸의 구덩이로 몰아넣고자 하는 자가 미친 듯이 날뛰며 내 육체를 공격한다고 해도, 내 육체에서 영혼이 거하지 못하도록 하고자 쉬임없이 공격한다고 해도, 나는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무엘 래빙턴(Samuel Lavington).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휴 스토웰(Hugh Stowell) 목사님은 죽어 가면서 그의 가족에게 "하늘에 대한 내 말을 들어보라"고 했다:"나는 이제 너희들의 얼굴을 오래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제 하늘에 가면, 영광의 보좌 주변에서 우리가 함께 만나자!" 이 말을 듣고서 그의 딸이 감격하여 이렇게 외쳤다:"그곳에 가는 동안 어떤 위험도 없다고 생각하세요?" 목사님은 아주 평안한 모습으로 아름답게 대답했다:"딸아, 위험이라니! 그런 말은 하지 말아라. 무슨 일이 있어도 성도들에게 위험이란 없단다! 만사형통이야! 하나님은 사랑이시란다. 만사형통이야! 영원한 평화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영원한 안식을 누린단다!" -존 스티븐슨.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이런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이처럼 어둡고 음침한 곳에서도 너와 함께 다니며 네 영혼을 지키는 친구는 도대체 누구란 말이냐? 이렇게 묻는다면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고, 그가 이처럼 위험한 길을 걸으면서도 하나님의 지팡이를 의지했기에 쓰러지지 않았다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유쾌하고 쾌활한 친구를 구할 수 있다면 구해 보라고 도전하고 싶다. 우리가 슬픔에 처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세상 사람들이 어두운 얼굴로 있으면 그들이 즐겁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겉으로는 미소를 짓지만 그들의 영혼이 저주받은 영혼일 때 그들은 진정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잠언에 나와 있는 사람과 같다:"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잠 14:13). 마음이 슬플 때에 노래하고 웃고 즐거워한다면, 하나님의 영은 이것을 미친 짓이라고 한다:"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전 2:2).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죽을 만큼 낙담이 되는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친구로 삼은 자들은 명랑하게 지낼 수 있다! 세상에서 아무리 용감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죽음을 바라보면서, 영원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볼 수 있겠는가? 누가 장작을 한 아름 안고서 불길로 들어가겠는가? 그러나 성도들은 이것도 할 수 있고, 이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영원한 공의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옥의 소리도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들을 수 있다. 마지막 심판의 날도 기쁨과 안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즐거운 친구와 함께 있다고 해도 이렇게 될 수는 없다. 세상 사람들아, 하프와 비올라를 가지고 즐겁게 노래를 불러 보라. 너희들이 원하는 모든 악기를 총동원하여 음악회를 열고 즐겁게 지내 보라. 그렇다고 마지막 심판의 날을 기쁨으로 바라보고, 지옥의 소리를 즐겁게 들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오늘 밤,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서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기분이 어떤가? 용기가 없다고? 즐겁고 유쾌한 친구를 불러 보라. 그들과 함께 지내며 즐거운 마음을 가져 보라. 술잔을 기울이고, 매춘부를 불러 보라. 낙담하지 말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경고를 아직도 조롱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얼큰하게 취하고 유쾌하게 지내던 자가 왜 이렇게도 풀이 죽었는가! 정말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났구나! 함께 즐겁게 놀던 친구들은 어디로 갔는가? 모두 도망가 버렸는가? 쾌락의 도구로 삼았던 여자들은 어디로 갔는가? 모두 너희를 버리고 떠나갔단 말인가? 왜 이렇게 버림을 당해야 하는가? 이제 누더기를 걸친 구차한 자가 되어 웃고 있는가? 뭐라고? 이제 평안이 없다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내일 아침 하나님 앞에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너희 마음속에 근심이 있는 것 같구나. 그렇다면 지금까지 누리던 그 즐거움과 쾌락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 결국이 겨우 이것이란 말인가? 

너희 앞에는 진정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자들이 있지 않는가? 너희는 영원에 대한 것은 생각하기도 싫어했지만, 그들은 영원에 대한 생각을 품고 있다. 왜 그들의 모습은 너희와 이렇게 대조적인지 아는가? 그들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친구가 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의 친구 되신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어둡고 더러운 길을 가야 할 때에도 그들과 함께하신다.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어 함께 거하는 것은 얼마나 유쾌하고 즐거운 일인가! 이것은 하나님을 친구로 삼는 것이다. 하나님과 친구가 된 영혼은 진정 축복을 받은 영혼이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144:15). -제임스 제인웨이.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어둡다는 것은 나쁜 것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가장 나쁜 것이다. 다윗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이라고 말한 것은 가장 좋은 믿음으로 가장 나쁜 환경을 지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가장 험악한 상황에서도 해를 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또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다는 것은 사망의 권세 아래 있으며, 언제든지 사망에 붙잡힐 수 있는 상황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라는 말은 '내가 죽음에 가까이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내가 언제든지 죽음에 잡힐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내가 극한 위험에 처하여 죽음을 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고 해도'라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조셉 캐릴. 

4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골짜기란 낮은 지역이다. 그 양 옆에는 산이 있다. 원수들이 산에 매복하여 있다가 여행하는 사람들을 향해 화살을 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이 골짜기를 지나가야 한다. 그래도 시편 기자는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탄이 불화살을 쏜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 은유가 사람의 죽음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원래 의미는 죽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원수들에게 둘러싸인 골짜기와 같은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다윗은 원수들이 매복해 있는 골짜기에서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고, 하나님은 그를 위해 상을 펴시고 잔치를 베풀어 주셨다(5절). 베두인족은 오늘날까지도 언덕에 올라 있다가 골짜기를 따라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괴롭힌다. -존 개즈비. 

4절.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옛부터 내려오는 속담에 무슨 큰 일을 행한 것을 두고서 "사자의 수염을 뽑았다"라는 표현을 쓴다. 죽은 사자의 경우는 어린 소년이라도 뽑을 수 있다. 소년들이 길에서 죽은 곰이나 사자나 늑대를 보게 되면, 그들은 털을 잡아뜯고 원하는 대로 그것을 가지고 논다. 몸을 밟고 올라서기도 하고, 살았을 때에는 생각지도 못할 일들을 죽은 시체를 가지고서는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죽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날뛰는 사자, 게걸스레 탐식하는 늑대, 이런 맹수들도 죽은 후에는 아무런 힘이 없다. 죽음도 이런 맹수와 같다. 죽음은 사람을 먹어 치우는 맹수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망에게 사망 선고를 내리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사망 위에서 뛰어놀 수 있다. 초대 교회의 순교자들은 즐거이 불에, 칼에, 그리고 배고픈 야수에게 자신의 육체를 주며, 죽음을 놀리고 조롱했다.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믿음으로 소유했기 때문이다(참고. 고전 15장). -마틴 데이(Martin Day, 1660). 

4절.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당신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는 말이 얼마나 힘이 있고, 감미로우며, 우리에게 보증이 되는 말인지 알고 있는가- 엄숙한 죽음의 순간이 다가올 때, 영원으로 들어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을 향해 "당신의 사랑이 나와 함께하는 동안 사망이 내게 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사망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꿀벌은 누군가를 일단 쏘고 나면 다시는 해를 끼칠 수 없다고 한다. 사망은 그리스도의 육체에 침을 쏘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더 이상 해를 끼칠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 승리는 곧 성도들의 승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네가 광야 길을 걸을 때 의지했던 그 팔, 네가 약하여 의지했던 그 팔로 내가 너를 붙들고 너와 함께하리라"고 하신다. 이 말을 듣고서 성도들은 "이 팔을 의지하고 나는 평안하나이다. 내 사랑하는 당신을 의지하고 안식하나이다. 당신은 내가 곤란에 처했을 때, 내가 두려움에 떨 때에 나를 도우시고 붙드셨나이다. 당신은 나를 깊은 곳에서 붙잡으시고 구원하셨기에 이 팔이 사랑의 팔인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라고 응답할 것이다. 성도들이 생명의 빛과 함께하는 동안에는 어두움이 있을 수 없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이런 성도들을 "안위"한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것을 시험해 보라. 이렇게 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그분은 당신의 연약함을 아시고 당신을 붙들어 주고자 하신다. 당신이 연약할 때 그분을 의지하면 힘을 얻을 것이다. 당신이 온전히 약해질 때 그분의 힘이 당신 안에서 온전히 나타난다. 전능하신 분의 사랑이 함께하는 동안에는 그분의 양들은 결코 멸망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파워스코트.

4절. "주의 지팡이." 지팡이는 세 가지로 유용하게 쓰인다. (1) 양의 수를 헤아리는 데 쓰인다. 이런 의미에서 양들은 막대기 아래를 통과한다:"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레 27:32). 목자는 막대기 아래로 지나는 양의 수를 헤아린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을 "그 산업의 지파"(렘 10:16)라고 했다. (시편에서 "지팡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쉐벳"(fbv)인데 이는 "지팡이", "막대기", "종족", "지파"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인용된 "막대기"와 "지파"는 모두 "쉐벳"(fbv)이 사용된 경우를 예로 든 것이다-역자 주.) 이런 의미에서 "주의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는 말을 이해해야 한다. 이 지팡이가 나를 붙드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도 같다:"내가 악한 사람들로 인하여 위험에 처했다 할지라도 이것이 나의 안위가 되었나이다. 당신은 나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당신은 나로 멸망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당신은 나를 기억하시고, 붙드시며, 보존하시나이다. 당신의 특별한 보살핌이 나를 지키시나이다." (2) 양이 뒤에 처져서 목자를 따라올 때, 목자는 지팡이를 들고서 양들이 따라오는 속도를 빠르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지팡이가 그를 안위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게으르고, 냉랭해지고, 뜨거움이 없어지면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들의 삶을 바꾸어서 더 적극적이고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성도들의 마음에 많은 기쁨과 위로가 샘솟게 한다. (3) 때로 양들은 게으름을 피우고, 아무 생각 없이 양 떼로부터 흩어져 혼자서 풀을 뜯기도 하며, 다른 초장에 가서 방황하기도 한다. 양들은 이처럼 혼자서 방황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목자들은 지팡이로 이런 양을 때려서 양 떼 속으로 몰고 오는데 이는 그 양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막대기가 그를 안위한다고 말했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양들을 이처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들의 잘못을 고쳐 주시며 방황하지 않도록 안위하신다. 양이 이처럼 홀로 방황하면 위험과 고난이 항상 따라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양 떼를 섭리 가운데 보존하신다. -오바댜 세지윅. 

4절.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 목자는 양을 칠 때에 꼭 지팡이나 혹은 막대기를 들고 다닌다. 그 한쪽 끝은 휘거나 갈고리처럼 구부러져 있다. 이 지팡이로 목자는 양 떼를 다스리고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기도 하며, 원수들에게서 보호하기도 한다. 양 떼가 순종하지 않으면 이 지팡이로 징계하여 고치기도 하고, 길을 잃어 헤맬 때면 인도하는 데 쓰기도 한다. 이 지팡이는 목자들이 소지해야 할 필수품인 것이다. -톰슨. 

4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시편 기자는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 바로 이 구절에 나타나 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여기에는 시편 기자의 신뢰가 가장 온전히 나타나 있다. 우리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무서워한다. 보일 때에는 위험한 것이라도 우리를 두렵게 하지 않는데도, 어두움 속에서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나도 우리는 두려워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신비스럽고 불확실하며, 불길한 예감이나 우울감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마음을 염려로 가득 채운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가장 불확실한 형태, 그리고 가장 두려운 것을 들어서 말하면서, 이런 가운데서도 그는 하나님을 신뢰할 것이라고 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보다 인간의 체험의 한계를 더 넘어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시편 기자는 이런 환경에서도,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황에서도 단호히 하나님을 의지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종종 보이지 않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주님의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구름이 덮이는 것을 보고서도 두려워했다. 우리는 현재 당하는 어려움이나 질병보다도 미래에 보이지 않는 불확실성 때문에 더욱 믿음의 시련을 받는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알고 있는 고난은 쉽게 견디고 그분을 의지한다. 그런데 왜 보이지 않는 것,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것일까? 불확실한 상황에서 우리는 왜 하나님의 자녀처럼 굳건한 믿음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일까! 어린이들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 6:34)는 말씀을 따라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 성인들은 이 점에서 어린이보다 지혜롭지 못하다. 우리는 불확실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상상을 하며, 하나님을 단순히 의지하는 삶을 잊어버리고 만다. -필립 베넷 파워(Philip Bennett Power). 

4, 5절.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모든 곤란한 일을 주장하십니다. 당신이 나와 함께하시므로 나는 아무리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당해도 승리할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내가 곁길로 갈 때는 당신의 지팡이로 책망하시고, 내가 기진해 쓰러질 때면 당신의 막대기로 나를 붙드시나이다. 선하신 여호와여, 나는 바로 이 두 가지를 가장 필요로 하고 있나이다. 내가 잘못할 때에는 나를 부르시고, 내가 힘이 없을 때에는 당신의 진리로 붙드시나이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팡이와 힘이 나를 지키신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우리가 곁길로 갈 때에 하나님의 경계와 징계를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자비롭고 유익한 일인가? 그분은 사랑하시는 자를 책망하시고, 그분의 백성에 속한 자들을 징계하신다.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분은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여 말씀의 꼴을 먹이시고, 마침내 우리로 영생을 얻게 하신다. 우리가 이 육신의 장막을 벗고서 하늘 나라에 가게 되면 그 나라의 아름다움과 부요함을 알게 되고, 그분의 영원한 잔치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을 기름으로 부으시고, 그들의 마음에 성령으로 기쁨을 주셔서 어떤 원수나 곤란한 일을 당하여도 슬퍼하지 않게 하실 것이다. 

옛말에 "어떤 일이든 이미 얻은 것을 잘 유지하고 다스리는 것은 그것을 처음 얻을 때보다 더 쉬운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다윗도 이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양 떼들의 의로움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덕과 공의가 지배하는 곳,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진리의 초장으로 인도함을 받고, 전능하신 분의 호의를 받아 그분의 양으로 헤아림을 받았다면, 이후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살피시고 은혜를 베푸사 진리의 초장에 거하게 하신다. 여호와의 양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혼자서 다닐 수 없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모든 위험을 지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함께하심으로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존 후퍼(John Hooper, 순교자, 1495-1555).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다윗은 푸른 초장에 있을 때,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을 때, 그의 이름이 높아지고 평화를 누리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뜻하시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비극의 골짜기를 다니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이 시를 기록했을 것이다. 이때에도 하나님 안에서 닻을 내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면 가장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진정한 지혜이다. 날씨가 좋을 때에 폭풍을 대비하고, 건강할 때에 병들 것을 생각하며, 부유하고 평화롭고 고요할 때에 가장 최악의 상태를 생각하고, 여름에는 다가오는 겨울을 생각하며 준비하는 것이 참된 지혜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수없이 많은 고난을 당할 수도 있다. 하나님을 믿는 자도 예외가 아니다. 죄인들은 책망을 받고 교훈을 받아야 한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방주를 만들 때는 물에 띄우기 위한 것이고, 배를 만들 때는 바다를 항해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 배를 타는 선원이 어느 곳에 닻을 내려야 하는지를 안다면 참으로 행복한 자이다.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는 동안 폭풍을 만나고 이때에 진정 의지할 자가 누구이며, 안전한 피난처가 무엇인지를 아는 자는 진정 축복을 받은 자이다. 다윗은 그가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고 했다. 이 시는 시편 기자가 늘 이렇게 살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고난의 시기에 그가 행할 의무가 무엇이고, 어떻게 노력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한없이 선하시다는 것, 그리고 지팡이와 막대기로 인도하시고 안위하신다는 것을 증거했다. 이것을 근거로 시편 기자는 그가 두려워하지 않으리라고 서원을 드렸다. 베드로는 그의 연약함으로 두려워하여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다. 그러나 후에 그가 회개했고,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베드로에게 형제를 굳게 하라고 부탁하셨다. 하나님은 마음을 굳게 다짐한 자, 그분을 따르는 자를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윗도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면서 자신이 때때로 잘못한 것을 생각하고 새롭게 결심하는 것이다. 좋을 때만 하나님을 섬기는 자, 어려움이 닥치면 두려워하거나 신실하지 못한 마음으로 물러서는 자가 되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불확실한 안개를 두려워하는 자, 멀리서 일어나는 폭풍의 검은 구름을 두려워하는 자, 고난의 날이 지나가기까지 얼굴을 숨기고 있는 자, 곁에 서서 팔짱을 끼고서 구경만 하는 자, 하나님을 섬기기로 용감하게 뛰어들지 않는 자, 이들은 모두 책망을 받아야 한다. -존 프라임(John Prime, 1588). 

4절. "사망." 죄의 세력 아래 있는 자들의 죽음은 범죄자의 죽음과도 같다. 범죄자가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게 되면, 그는 법정에서 끌려나가 온 몸을 결박당하고, 팔은 뒤로 돌려서 묶이게 된다. 그러면 이 사형수는 슬픔과 두려움으로 죽음을 당하기 전에 죽는다. 그러나 의인의 죽음은 이와 같지 않다. 그의 종말은 평안하고, 마치 정직한 자가 침실에 들어가 잠을 자는 것과 같다. 그의 하인은 존경심으로 그의 옷을 벗기고 침대에 눕힌다. 양심의 거리낌이 없기에 그의 마음에는 평안이 있다. 죽음으로 그는 소망에게 이별을 고하게 되는데, 천국에서는 이런 소망도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 평화, 기쁨, 하나님께서 주신 이런 은혜들은 죽음 이후 천국에 들어갈 때에도 우리와 함께한다. -윌리엄 스트러더(William Struther). 

4절.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에 그분을 부르기를 바라시며, 우리가 부르면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다윗은 어떠한 고난을 당한다고 해도 두려움을 버리고 여호와를 의지하겠다고 약속했다. 그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고 해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그는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는 약속을 붙잡았다. 이 약속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약속이다. 하나님의 "막대기"를 우리가 의지한다면, 그 막대기가 너무 약해서 부러지지 않을까? 그분은 이 약속을 하신 후 마음이 변하신 것은 아닐까?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지금까지 하신 것과는 달리 우리에게 지팡이와 막대기를 내미시고, 손을 내밀어 우리를 붙들어 주실까? 의심할 여지도 없이 우리가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도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즉시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토머스 타임(Thomas Tymme). 

4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주의 지팡이와 막대기." 그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인하여 그분을 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난 이제 눈을 감고 편히 죽을 수 있습니다. 나는 흙으로 돌아가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내가 죽는다고 슬피 울지 마십시오." 이어서 마귀가 그를 얼마나 괴롭게 하고 유혹했는지 돌이켜보면서, 자신이 잘못했을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책망하신 것이 진정 하나님의 선하심의 표현이었다고 말했다. -제임스 제인웨이의 회상.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봄베이에서 선교사로 일하던 허비(Hervey) 부인이 죽어 가고 있을 때, 그녀의 친구가 "당신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구세주께서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서 그녀는 "어둡다고요? 어두움이 하나도 없는데요. 모두가 빛이에요"라고 했다. 그녀는 병들어 있는 동안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보고서 이렇게 말했다:"그분은 참으로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다른 속성보다도 이 거룩함이 가장 소중하게 보입니다." 그녀는 또한 그리스도의 영광과 위엄을 보고서 그 광경을 표현했다:"그분에게 속한 다른 모든 영광이 사라지고 그분만이 홀로 남는다면, 그래도 그 영광이 우주에 충만할 것입니다!" 

4, 5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고난받을 각오를 기꺼이 하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의 삶을 진정으로 누릴 수 있는 자들이다······죽음과 영원을 묵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한 성도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생명을 더욱 감미롭게 누리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삶에 종말을 고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그렇게 슬픈 일이 아니다. 이것은 더 감미로운 삶을 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차 잔치에서 배불리 먹고 그 잔치가 끝나지 않으면 2차 잔치가 시작될 수 없다. 2차 잔치에서는 1차 때보다 더욱 맛있는 음식이 많이 나오지만, 1차가 끝나지 않으면 시작될 수 없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풍성한 잔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5절), 또한 죽음에 대해서도 말했다(4절). 만일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신다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또 베드로는 어떠했는가? 그도 역시 인생을 진정으로 즐겁게 누리며 살지 않았는가? 그는 감옥(바람직하지 못한 곳)에 있을 때에도 두 병사 사이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편안하지 못한 자세로) 단잠을 잤다. 이 밤이 지나면 헤롯은 그를 죽일 수도 있었다. 어떤 사람도 이런 시간에는 단잠을 잘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깊은 잠을 잤기에, 천사가 그를 구하기 위해 왔을 때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워야만 했다(행 12:6, 7). 헤롯도 그 밤에 그토록 깊이 잠을 자지는 못했을 것이다. 베드로는 무엇 때문에 이토록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었는가? 그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죽음을 당한다면 다음 세상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터인데, 무엇 때문에 죽음을 당한다는 생각으로 이 세상에서의 안식을 깨뜨릴 수 있겠는가? -윌리엄 거놀. 

4, 6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시편 기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깊은 신뢰를 표현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닌다고 생각했다. "사망"이란 가장 악한 것이고, 모든 악한 것을 다 모아 놓은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가장 어둡고 두려운 곳을 표현한 것이다. 다윗은 자신이 이런 상태에 빠져들 경우를 생각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빠지면 모든 종류의 악이 그를 뒤덮고, 그는 슬픔에 차서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은 짧은 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기간 동안 지속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골짜기로 "다닐지라도"라고 했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상황이 지속되는 것이다. 그가 이런 상황에 떨어진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런 소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고귀한 결심이다. 만일 이 결심을 하게 된 근거가 확실한 것이라면, 이것은 진정 영적인 용기이고 거룩한 결심이다. 그러나 아! 여호와께서 이런 상황에서 당신을 버리신다면, 당신을 원수들에게 넘겨 버리고 유혹과 위협에서 구해 주지 않으신다면, 그리고 당신은 그분에게서 영원히 떨어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영원히 사망에게 삼킨 바가 될 것이다. 물이 당신의 영혼을 덮치고, 당신은 영원히 사망의 그늘에 누워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이와는 정반대되는 확신을 품고 있다:"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존 오웬(John Owen).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종을 축복하기 위해서 악인에게 의존하지 않으신다. 악인들은 하나님과 협력할 수 없고, 또 하나님 그분이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주권자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악인이 없어도 그분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을 축복하실 수 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고, 또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축복하는 것을 저지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뜻과 그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시는 것을 막을 능력이 없다. 한 방울의 물로 불을 끌 수는 없다. 물은 불과 반대되는 성질을 가졌지만, 한 방울의 물은 불을 끌 능력이 없는 것이다. 악한 사람들의 악의와 계략은 너무 약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과 축복을 대항할 수 없다. 악한 사람들은 사람에 불과하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다. 여호와는 그분을 대적하는 자들을 제하시고, 이 땅을 다스리시며, 그분의 뜻을 이루실 것이다. 그분이 축복하는 자가 축복을 받고, 그분이 저주하는 사람이 저주를 받는다. 피조물에 불과한 악인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랴! 하나님의 백성들은 잔혹한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하나님의 돌보심과 사랑을 받고 살아간다. -오바댜 세지윅의 글을 요약한 것.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 원수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후대하시는 것을 보고서 질시하고 불평은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저지할 수는 없다. -매튜 풀. 

5절.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동양에서는 사람들이 집을 방문하게 되면 향기로운 기름을 머리에 바르고, 아주 좋은 포도주를 한 잔 대접한다. 포도주를 대접할 때는 잔이 넘치도록 채워 준다. 기름을 바르는 것은 사랑과 존경을 나타내고, 포도주를 넘치게 대접하는 것은 손님이 그 집에 머무는 동안 무엇이든 풍족하게 누릴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런 것을 이 시에서 언급했을 것이다. -사무엘 버더. 

5절.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머리에 기름을 바르면 기분을 상쾌하게 하고 피로를 풀어 준다. 기름에는 세 가지 기능이 있다. 기름은 만지기에 부드럽고, 보기에 윤기가 나며, 냄새가 향기롭다. 기름은 이렇게 우리의 감각을 만족하게 한다. 그러므로 기름을 바르는 자에게는 기쁨이 있다. 이 점에 대해 솔로몬은 즐겁게 살 것을 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전 9:8). 이것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을 상징한다. 성령의 기름 부음만이 사람의 영혼을 진정 기쁘고 즐겁게 할 수 있다. 이 기름을 "즐거움의 기름"(시 45:7)이라고 했으며, "성령의 기쁨"(살전 1:6)이라고 했다. -나다나엘 하디. 

5절.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특별한 손님이 왔을 때, 머리에 향기로운 기름을 바르는 것은 큰 존경을 표현하는 것이다. 복음서에서 어느 여인은 구세주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서 "매우 귀한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부었다(마 26:7). 한 영국 부인이 아라비아 배의 내부를 구경하고, 물건을 좀 사고자 배에 승선하여 선실에 앉았다. 그러자 아라비아 소녀가 그녀에게 와서 향기로운 기름을 머리에 부었다. -조셉 로버츠. 

5절.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동양에서는 손님을 환대할 때, 반드시 머리에 기름을 바른다. 목욕을 하면 몸이 상쾌해지듯이, 이렇게 하면 몸의 피로가 풀리고 상쾌해진다. 그러나 이 시편에서는 영적 기름과 영적 즐거움으로 이해해야 한다. -바르트. 

5절.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당신은 내게 생활 필수품만 공급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사치스러운 것도 내게 주시나이다. -A Plain Explanation of Difficult Passages in the Psalms, 1831. 

5절.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시신에 바르는 애굽 사람들의 연고는 시체가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고, 무덤 속에서도 오래 보존되도록 한다. 그러나 오, 여호와여! 당신께서 은혜로 우리의 영혼에 부어 주시는 보배롭고 향기로운 기름은 우리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 아름답게 단장하고, 힘을 주고, 영생의 씨앗을 심고, 이 세상에서 타락하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당신의 품에 안겨 영원한 축복을 얻기까지 우리를 보존하나이다. -장 밥티스트 마시용(Jean Baptiste Massillon, 1663-1742). 

5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분은 충분하게 주실 뿐만 아니라 남아서 넘치도록 주신다. 이 행복을 가진 자는 잔을 똑바로 들고서 넘치는 것은 가난한 형제들의 빈 잔에 흐르도록 해야 한다. -존 트랩. 

5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잔이 넘치도록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입술로 그 맛을 보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높은 산에서 내리는 비는 가장 낮은 골짜기로 흘러내려야 한다. 사람들은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눅 6:38)라는 말씀을 잘 믿지 않는다. -윌리엄 세커. 

5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틴어로 쓰인 불가타 역본에는 이 구절을 "나의 취하게 하는 잔, 이것은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라고 되어 있다. 순교자들은 이 잔을 마시고서 취했다. 그리하여 고난을 당하러 잡혀갈 때, 그들은 슬피 우는 아내, 자녀들, 친척들, 친구들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들은 감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내가 구원의 잔을 들리라!" -어거스틴. 

6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을 향해 어쩌다 한 번씩 기도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거하겠다고 했다. 그는 항상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간구하는 것이다. 마치 수탉이 울고서 잊어버리고, 또 울다가 잊어버리는 것처럼, 기도하고 곧 잊어버리고, 또 기도하고 곧 잊어버리는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서둘러 기도를 끝내고 다시는 생각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마치 소가 "음매-" 하고 울고, 돼지가 "꿀꿀"거리는 것 이상으로 생각지 않으신다. -윌리엄 페너(William Fenner, The Sacrifice of the Faithful, 1600-1640). 

6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것은 우리가 미래에 이렇게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며, 인생의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이다. 우리가 살면서 슬픔과 기쁨을 겪고, 순례자의 길을 걷다가 또 휴식을 취하고, 잠시 동안 평안을 누리다가 또 다투고, 이런 모든 일을 경험하면서 언젠가 이 모든 것들을 판단하는 최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이날을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광야 인생길을 걸으면서 여호와께서 베풀어 주시는 상을 받는다. 마치 위대한 왕의 아들이 외국에서 아버지의 나라로 돌아오면서 이곳 저곳에서 환영을 받고 잔치를 벌이는 것과도 같다. 그러다가 여행이 끝나면 마침내 아버지의 궁으로 돌아가 여행 중에 더러워진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고서, 아버지와 함께 앉아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알렉산더 매클라렌(Alexander Maclaren, 1863). 

6절.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거하기로 굳건히 결심했다. 그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여러 번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체험하고서 이렇게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런 결심을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여러 가지 은혜를 헤아려 보았다. 그분은 푸른 초장에서 그를 먹이셨고, 하나님의 말씀의 물을 먹이셨다. 여호와는 그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그를 새롭게 하셨다. 또한 위험한 지경에 처해서는 힘을 주셨고, 죽음의 위험을 당해서도 그를 지키셨다. 그에게 원수들이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많은 축복을 내려주셨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이 많은 자비로움을 체험했기에,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설교힌트]

1절. 목자와 양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라. 목자는 다스리고, 인도하고, 먹이고, 보호한다. 그러면 양들은 목자를 따르고, 순종하고, 사랑하고, 신뢰한다. 우리가 진정 여호와의 양인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라. 양과 함께 먹는 염소의 운명을 말하라. 

1절 하반절. 이제부터 영원까지 부족함이 없는 사람. 

2절 상반절. 성도들의 휴식. (1) 하나님께로서 온다-"그가 나를." (2) 깊은 휴식이다-"누이시며." (3)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을 받는다-"푸른 초장에." (4) 우리가 끊임없이 찬양할 내용이다. 

2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들. 

2절. 성경-날마다 새롭고 풍성한 위로와 교훈을 주는 말씀. 

2절 하반절. 지도자, 길, 우리가 얻는 위로, 길에 있는 여행객. 

3절. 은혜로운 회복, 거룩한 인도, 하나님의 동기. 

4절. 성령께서 하시는 일. 

4절. 하나님의 임재는 사망 가운데서 얻게 될 유일한 힘. 

4절. 사망 중의 생명과 어두움 중의 빛. 

4절 중반절. 선한 사람이 얻은 평안함. 

4절 하반절.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증거-겸손한 자에게 베푸시는 안위. 

5절. 잔치에 참여하는 군인,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 만족함을 얻은 손님. 

5절 하반절. 성령의 계속적인 기름 부음, 그 방법과 효능. 

5절. 풍성한 잔치, 이것과 관련된 우리의 의무. 

6절 상반절.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축복. 

6절. 집으로 가는 길과 우리가 도달할 집. 하늘의 집과 그곳에서 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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