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02.13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온유와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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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1]==

JC는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하기 위해 아버지께로부터 보냄받으신(참된 선교사로서) 당신의 실존과 정체성을 팔복으로 묘사하셨음.... 하나님 누림과 영생을 잃어버린 심령의 절대적 비참(전존재의 가난, 죄로 인한 애통)을 (겟세마네동산과 십자가상에서) 친히 맛보시며, (참되고 새로운 하나님의 의를 친히 공급하시는 바)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위해 중보하시는 분이요, 극락의 기쁨 가운데 절대적으로 아버지께 의지하고 헌신하는 온유와 겸손의 종의 모본을 보이시며, 구원 이루시는 하나님의 긍휼의 극치로써 자신을 내어주시며, JC를 믿는 믿음 통해 회개에 이른 자들로 날마다 자신의 죄를 보혈에 씻으며 성령따라 행하는 마음의 청결함/순전, 성결과 통해 참 생명하나님을 보고(알고) 누리고 동행하게 하시며, 더 나아가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하나님의 화평케 하는 아들들을 산출하시며, 마침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 곧, 교회를 위한 JC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하늘에 속한 백성들이 되게 하신다.


“하나님, ((일상 가운데서))당신의 선하심을 따라 당신 자신을 저에게 주십시오. 저에게는 당신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만일 제가 당신 아닌 어떤 것을 구한다면 저는 늘 부족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오직 당신 안에 있을 때, 저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노리치의 줄리안


십자가보혈로 속량하사 부활생명으로 사는 새로운 피조물 되게 하신 아버지여!.. 내 하나님만 의지하나이다...

주께 사랑받고 주님 사랑하는 종된 자로서, 이제 JC께서 주 되심, 나의 머리 되심 인정하며 기쁨으로 나를 내려 놓고 열어 비워 내어드리오니, 

충만한 임재로 오늘 모든 호흡하는 순간마다 이끄시며 친히 행하시어 아드님의 어떠하심따라 나를 변화되게 하옵소서, 

나를 안아주시며 내안에 살아계신 주JC여 !.. 친히 말씀과 행하심으로 나타내시는 주님 영광, 사람들로 발견케 하사 회개하며 주께 돌이키게 하소서. 

HS하나님!, 내 영, 내 마음눈 여시는 견고한 반석, 참생명과 평강의 하나님...

더 이상 육신의 감각들로 감지된 현상과 처한 상황에 압도되어 염려-근심으로 사는 것 아니라 

그 보배로운 말씀, 기록된 말씀을 붙들어 새기고, 열어 주심따라 깨달아 잘 배우며 평강의 아버지를 살아내신 아드님의 그 믿음으로 살게 하소서

영으로 깨닫게 하사 보이시는 바 ( 예언의 영으로 보이심까지도) 인도하심을 따라 찬송-기도하며, 살아 생동하는 믿음 통해 주님과 하나됨 이루소서


25.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영적 진리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항상 새로이 순전, 명민하게 기쁨으로 마음 열어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추구하는. 구주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At that time Jesus said, ""I praise You, Father, Lord of heaven and earth, that You have hidden these things from the wise and intelligent and have revealed them to infants. 

26.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Yes, Father, for this way was well-pleasing in Your sight. 

27.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완전히 알고 정확히 이해하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 All things have been handed over to Me by My Father; and no one knows the Son except the Father; nor does anyone know the Father except the Son, and anyone to whom the Son wills to reveal Him.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Come to Me, all who are weary and heavy-laden, and I will give you rest.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제자로서 JC와 동행, 하나되어 섬기며 따름으로 JC를 빼어닮음, 참선교사이신 그분의 섬김을 계승함)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영혼 구원/소성, 늘 새로움, 평강의 진복)을 얻으리니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for I am gentle and humble in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S.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For My yoke is easy and My burden is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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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u?th"(4240, 프라위테스) 온유, 친절, 겸손, 동정심.

1. 일반 헬라어의 용법 

프라위테스는 프라위스(prau?", 4239)에서 파생되어 투키디데스(Thucydides) 시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온유, 온화, 친절'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프라위테스는 70인역본에서 11회 나오며, 히브리어 아나와 안와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에 3:13에서 아하수에로 왕은 자기가 온유하게 처신하기로 작정했다고 한다. 에 5:1에서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온유하게 변화시켰다고 한다. 시 45:4에서 왕과 관련하여 나온다: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시 90:10; 시132:1에는 '고생'이란 의미로 나타난다. 집회서 1:17; 4:8; 10:28에서 '유순, 온유, 겸손'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프라위테스는 신약성경에서 7회 나온다. 신약성경이 프라위테스를 주장할 때, 그것은 순전히 인간의 의지에 따라 좌우되는 태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구원의 징표이다. 즉 그것은 '부름'(엡 4:2)과 선택(골 3:12)의 표식이며 성령의 역사(갈 5:23)이다. 그것은 헬라적 의미에서의 미덕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생활과 행위의 가능성이다. 그것은 인간의 한 기질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결되고 그의 형상과 일치될 때에 생겨나는 것이다.

고후 1O:1에서 바울은 프라위테스와 에피에이케이아(ejpieivkeia, 1932)를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동안 사람에게 보여주셨던 태도의 특징으로 언급하면서, 그것을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교회에 제시한다: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프라위테스는 또한 죄를 범한 기독교인을 처리하는 일에 있어서 가져야할 태도에 관해서 언급된다(고전 4:21; 갈 6:1; 딤후 2:25).

약 1:20에서 프라위테스는 올게(ojrghv, 3709:성내는 것)와 대조되어 있으며, 선생에 대하여 분노를 터뜨리는 것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는 온유하고 겸손한 자세를 가리킨다. 온유는 신적 지혜로 영감된 참된 의인의 표식이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약 3:13). 여기서 온유는 의인의 전 행위에서 나타나며, "독한 시기와 다툼"과 반대된다(약 3:14; 참조: 집회서 3:17; 벧전 3:4).

 

벧전 3:15에서 당국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의 이유에 대하여 물었을 때 친절하게 온유 겸손히 응해야 한다고 한다. 비록 그들의 부당한 대우가  분개와 반항하도록 자극할지라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적대와 박해의 상황과 관련하여 언급한 것이다.(참조: F.Hauck/S.Schulz; W.Bauder).→ prau?", 4239b 프라위스 


prau?"(4239, 프라위스) 온유한, 친절한, 겸손한, 동정심(인정) 많은.

1. 고전 헬라어 문헌 

프라위스는 호머 시대로부터 사용된 단어로서 어원상으로는 고트어의 프뤼온(사랑하다), 프리온드스(친구) 등과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온화한, 온유한, 즐거운'을 의미한다.

프라위스 단어군에서 나온 단어들은

(a)   사물에 관해서는 '진정시키는, 온화한' (예: 진정제, 온화한 말),

(b)   동물에 관해서는 '길들인' 또는 '유순한'(길들인 유순한 짐승), 짐승을 길들이거나 짐승이 화나거나 흥분할 때 달래거나 진정(안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c)   사람에 관해서는 분노, 난폭, 매정, 잔인하지 않고 '온화한, 친절한, 온유한', 그리고 '즐거운',

(d)   행동이나 감정 혹은 징계와 같은 것들의 '친밀한, 친절한, 관대한, 너그러이 대하는, 오래 참아 기다려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들은 적에게서는 인정 사정 없는 가혹한 행위가 예상되는 것과 반대로 친구에게서 예상되는 어떤 성질을 가리킨다.

이 파라위스 단어군과 에피에이케스(ejpieikhv", 1933) 단어군의 개념, 이 개념은 모두 억제되지 않는 분노, 가혹함, 야수성 그리고 이기심과 반대된다. 이 개념은 고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 즉 모욕을 받고도 화를 내지 않는 현인, 재판에 임하여 인정 많은 재판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자비로운 왕 등이 지닌 성격의 특징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 단어들은 이상적 통치자에 관한 묘사나 고위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찬사 속에 자주 등장한다.

헬라 및 헬라 철학에서 이 개념은 높은 가치를 지닌 사회적 미덕이자 이상을 표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개념을 정열과 무감정의 양극단 사이에 있는 복된 중용의 덕이라고 생각하였다 (F.Hauck/S.Schulz).

2. 70인역본의 용법 

프라위스는 70인역본에서 모두 l9회 사용되었으며, 그 중 3회는 히브리어 아니(억압받는, 가난한, 괴로움 당하는, 비천한, 낮은, 겸손한)의 역어와 아나우(가난한, 겸손한, 온유한)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는 아니가 21회, 아나우가 65회 나오는데, 프토코스, 페네스, 타페이노스, 그리고 프라위스 어군 등으로 번역하였다는 사실은 이 히브리 단어들이 광범위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서 나누어 번역할 특별한 신학적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가난한 자란 토지 재산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부당하게 억압당하고, 권리를 빼앗기고, 하나님께서 물려주신 풍성한 유업을 수탈당했다. 그들의 가난은 상속권 박탈과 불법적인 손에 의한 것이지 그 사람 자신의 잘못에 의하여 비롯된 것이 아님이 이 단어(아니)가 재산이 아니라 폭력과 대조되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그들은 불법적인 착취의 희생물인 경우가 많았다(욥 24:4; 참조: 사 32:7; 시 37:14). 일반적으로 아니는 무방비 상태인 사람, 권리가 없는 사람, 억눌린 사람, 속임을 당하고 착취당하고 비천한 사람을 의미한다(참조:시편 9편과 10편).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아니의 편이시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심판자께서 그들을 보호하시며, 그들은 오직 이 사실을 신뢰하며, 이에 소망을 두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권리 없는 자들의 하나님인 까닭에, 동료 인간들에게서는 자비를 얻지 못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위로하시며 구원하신다(시 l49:4; 시34:2; 욥 36:15; 참조: 사 29:19). 마침내는 지금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것을 뒤엎으실 것이다(사 26:6). 그들은 땅을 차지하고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한다(시37:11). 여호와는 그들을 붙으시고(시 147:6). 공의로 지도하고 그 도를 가르치신다(시 25:9).

민 12:3에 보면,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다". 온유는 지도자의 중요한 자격 중 하나이다. 집회서 3:8에서 "훌륭하게 되면 될수록 더욱 더 겸손하라 주의 은총을 받으리라" 하였고, 집회서 10:14 에서 "주님께서는 군주들을 그 권좌에서 몰아내시고 그 자리에 온유한 사람들을 앉히신다". 욜 3:11에서는 프라위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없다. 선지자는 성전(聖戰)을 위해 부르고 있다. 평화의 도구가 전쟁의 무기로 바뀌워져야 하고 온유한 자가 용사들이 되어야 한다. 온유한자가 땅을 차지하고 다스린다.

앞에 살펴본 바와 같이 아니 및 특히 아나우는 사회적으로 억압당하고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는 의미로부터 깊은 곤궁과 곤란속에서 겸손하게 여호와의 도움만을 바라보는 사람 또는 그렇게 함으로써 도움을 얻은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다(습 3:12; 참조: 습 2:3; 사 41:17; 49:13; 66:2).

쿰란 문서에서 이 단어들은 일반적으로 공동체의 구성원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쿰란에 있던 가난한 자들의 공동체는 사유재산의 포기를 질서의 한 규칙으로 정했으며, 종말론적인 구원을 기대하는, 조직이 잘된 공동체 생활을 이룩하였다(ptwcov", 4434 프토코스).

슥 9:9에서 아니/프라위스는 메시야에게 주어진 영광의 칭호로 사용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적으로 보잘것 없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동물을 타셨을 때 그 길은 가난한 자와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에게로 향하셨다(역사의 초기에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은 나귀를 타고 다녔지만(삿 5:10; 삿 10:4; 삿 12:14; 삼하 16:2), 후에는 말이 권력가진 자들에게 걸맞는 탈것이 되었다(그러나 슥 9:10에 나오는 병마에 대한 저주를 주목하라, 사 2:7; 사 31:1을 참조). 나귀는 평화를 위해 오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탈것이었다(J.G.Baldwin).

아니의 의미는 슥 9:9을 비롯한 수많은 구절에서 변화되어 있다. 즉 70인역본은 이 단어를 프라위스로 번역함으로써 보다 수동적인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단어를 능동적이며 윤리적 의미를 가진 헬라어 단어로 바꾸어 놓았다. 문자 그대로 결핍을 의미하는 단어가 온유나 겸손 따위의 찬양할만한 미덕으로 변화되었다. 그것은 그 이상 그 단어의 비밀을 헬라어가 보다 분명하게 나타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프라위스는 신약성경에서 마태복음에 3회, 베드로전서에 한번 나온다.

(a)   프라위스는 마 5:5에 나오는 세번째 축복, 즉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는 축복 선언에 나타난다. 일반 헬라어의 용법에 따르면, 프라위스 곧 온유한 자는 본능과 충동, 격동 등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훈련된 인격자이다. 이 단어의 통상적 용법은 인간에 대한 태도, 특히 자신을 평가 절하하고 부당하게 대우하며 해롭게 하는 자들에 대한 마음의 성향 및 행동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온유의 그리스도교적 개념은 이러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훨씬 더 깊은 것이다.

신약성경 히브리 역본에서 마 5:3에 "가난한 자"와 여기에 "온유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다같이 아니이다. 이것은 "온유한 자"는 "가난한 자"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아니는 '가난한, 억압받는, 괴로움 당하는, 비천한, 낮은, 겸손한'을 뜻하는데, 제 1복에서는 자신의 문제인 "가난한"이란 의미가 더 강조되어 있고, 여기서는 타자(他者)와 관계에서 자신의 문제인 '억압받는, 괴로움을 당하는, 겸손한'이란 의미가 더 강조되어 있다. 따라서 온유는 나 자신에 대한 자세인 동시에 타자, 곧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관계에서 나의 자세의 표현이다.

그리고 동사 클레로노메오(klhronomevw, 2816)는 70인역본의 신 4:1; 신 16:20 및 시 68:36에서 이스라엘의 땅을 소유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구절에서 의미하는 것은 새로운 약속의 땅을 소유하는 것, 또는 상속받는 것이다. 신명기 기자에게 복종과 의로움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조건인 것처럼, 축복선언에 나오는 가르침에 겸손히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새로운 땅으로 들어가는 조건이다. 이 구절은 시 37:11의 그것과 같은 주제를 말하고 있다. 이 시편의 주제는 축복 선언 전체의 주제와 매우 유사하며, 다위비드 힐은 쿰란 종단은 이 시편을 그들의 메시야적 공동체의 확립을 통하여 성취될 과정에 관한 예언으로 채택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한다(4 QpPs 37; 참조: Op.cit , 112).

이 축복선언은 지금 억눌리고 멸시 당하며, 마치 가나안 정복 이전의 이스라엘처럼, 자기 것이라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장래에 하나님의 땅의 통치의 상속인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동시에 그것은 예수님 자신에 관한 암시적 언급이기도 하다.

벧전 3:4에서 프라위스는 기독교 사랑의 구체적 표현인 미덕의 목록에 나온다.

(b)   프라위스는 마 11:29; 마 21:5에서 예수님과 관련하여 나타난다. 온유는 그리스도의 통치의 표시이다. 정치적 메시야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져오기 위하여 힘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따라서 그는 사람들이 메시야 왕으로 예측하지 않는 형태로 자기를 모든 기대에서 어긋나게 처신하셨다. 즉 투구와 갑옷을 입고 군마를 타고 무장하여 무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지상에서의 주님의 사역은 힘이나 전쟁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구원을 가져오는 왕의 사역이었다(슥 9:9). 하지만 마 11:29 은 그 배후에 셈적 사고를 가지고 있으므로(참조:사 42:2 이하; 사 53:1 이하;슥 9:9 ), 이 구절에 프라위스는 히브리적 의미에서의 아니를 암시하고 있으며, 따라서 메시야의 인간적인 빈궁함을 강조한다. 루터는 메시야를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방도도 없고 궁극적으로는 갖가지 불의에 수난을 당했던 '거지-왕'(Begger-King)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로 통치하고 통치 방법은 온유이다.

(참조: F.Hauck/S.Schulz; W.Bau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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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MEEK, MEEKNESS)

가. 형용사

프라우스(prav/o") 상냥한, 온화한, 온유한을 의미한다. 마 11:29에서 그리스도는 이 낱말을 자신의 성품을 나타내는데 사용하셨다. 마 5:5에서는 이 단어가 그리스도의 산상수훈 팔복 중 세번째로 언급되어 있다. 슥 9:9을 인용한 마 21:5에서는 메시아 왕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벧전 3:4에서는 기독교인의 신앙인이 단장해야 할 하나의 품목으로 언급되어 있다. 살전 2:7, 딤후 2:24에서 차분한 성품을 나타내는 온화한이란 의미의 에피오스(h[pio")와 비교해 보라.

나. 명사

1. 프라우테스(prau?th")온유함을 의미한다. 이 단어가 성경에서 사용될 경우에는 성경 외의 다른 헬라 문헌들에서 사용될 때보다 훨씬 더 완벽하고 심오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온유함이란 단지 한 인간의 외관적 형태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며, 동료와의 관계 속에서 정립되는 것도 아니다. 즉, 온유함이란 단순히 인간의 고유한 본성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영혼에 깃들어 있는 일종의 은혜이다. 그 은혜는 최초로, 그리고 항상 하나님께로 향할 때만 비로소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에 대한 그분의 처우를 좋게 받아들일 때, 즉 아무런 저항감이나 거부감이 없이(지고지선의 진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하나님의 처분에 대해 고집부리거나 반항하지 않고 합당히 여겨 그대로) 받아들일 때 생기는 심령의 평정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타페이노프로쉬네 (tapeinofrosuvnh 겸손)와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실제로 엡 4:2, 골 3:12에서는 타페이노프로쉬네 바로 다음에 프라우테스가 따라 나온다. 70인 역의 습 3:12의 “곤고하고 가난한(meek and lowly)”이란 형용사들과 비교해 보라. “곤고하고 가난한” 이들 온유한자들이야말로 하나님께 대항하거나 맞설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겸손한 마음의 소유자들이다. 하나님 앞에서나, 인간들 앞에서, 특히 온유한 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무례하고 해악을 끼칠지도 모르는 사악한 인간들 앞에서 조차 겸손해 하는 이러한 온유함은 모든 온유함 중에서 으뜸가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택하심을 위해 순화하시고 정결케 하시는 가운데 기꺼이 열납되고 인정받게 될 것이다. 갈 5:23에서는 이 단어가 절제라는 뜻의 엥크라테이아(ejgkravteia...성령안에 깨어 있어서 신중함, 의로움, 경건함으로 사셨던 JC께서 내안에서 이끄시는대로 따라가는 [새자아]를 살며, [옛자아의 습관적인] 불경건과 세상 정욕(=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대해 한 영되신 그리스도의 탁월한 능력과 기쁨을 누림안에서 "나는 날마다 [십가가에] 죽노라.." 선포하고 끊어버림((사용하지 않으면 결국 말라 죽게 됨)))와 연결되어 있다. [[성령의 9가지열매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로서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면서 맺어지는 바, 삼위일체 하나님의 어떠하심이다...하나님은 사랑-희락-화평의 근원으로서 자신을 온통 내어주시기를 기뻐하며, 그것을 믿음으로 누리는 믿는 이들마다 참생명하나님으로 충만케 하셔서 하나남의 성품, 곧 오래참음(노하기를 더디하심), 자비, 양선(...지고지선의 유익 위해 자신을 온통 내어주심), 충성(..신실하심) , 온유의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경험통해 주님을 체득하게 하시며 절제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을 완전케 하신다.]] 

프라우테스의 뜻은 영어로 손쉽게 표현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영어의 온유함(meekness), 온화함(mildness)이란 말 속에는 다소 연약함이나 무기력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프라우테스라는 말속에는 그러한 종류의 뜻이 전혀 내포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유함(meekness)이란 말보다 더 적절한 용어를 발견해 내기란 쉽지가 않다. 상냥함(gentleness)이란 말도 프라우테스의 번역으로 가정될 수 있는데, 프라우테스가 마음이나 심정의 상태를 묘사하는데 비해 상냥함은 행위에 더 가까운 개념이므로 적합하지가 않다. 그러므로 주님에 의해 드러나고 신자들에게 권유된 이 온유함은 곧 (하나님과 사랑-희락-화평의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지고지선으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주요 머리되심 에 자신을 드려 완전히 순복함으로써 하나됨에 따르는) 능력의 열매임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한 인간이 온유할 때 그것은 그가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무한 자산을 그분의 명령에 따라 가지고 계셨으므로 유순한 분이 되셨다. 또한 온유함은 아집이나 사리(私利)의 반대 개념으로도 사용된다. 온유함은 흥분하거나 낙심함이 없는 심령의 고요함을 나타낸다. 그 이유는 온유함 그 자체가 단지 자아에 얽매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후 10:1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로 간구하고 있다. 딛 3:2에 따르면 기독교인은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권유받고 잇다. 왜냐하면 온유함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특성이기 때문이다(골 3:12). 딤전 6:11에서 특히 “하나님의 사람”은 이러한 덕목을 촉구받고 있는데, 그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온유를 좇아야만 한다. 또한 기독교인은 그의 봉사에 있어서, 특히 무지하고 과실을 범한 자들에 대한 그의 처우에 있어서 온유한 심령을 드러내지 않으면 안된다(고전 4:21, 갈 6:1). 또한 자신을 거역하는 자들 조차도 온유함으로 징계해야만 한다(딤후 2:25). 야고보는 그의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고 권고하고 있다. 베드로는 온유함을 기독교인의 소망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언급하고 있다(벧전 3:15). 

2. 프라우파디아(prau>paqiva) 온순한 성품, 온유함이란 의미로, 온유한 이란 뜻의 프라우스(prau")와 당하다란 뜻의 파스코(pavscw)에서 유래했다. 가장 훌륭한 사본들에서는 딤전 6:11에서 발견된다. - W. E. V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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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peinofrosuvnh(5012, 타페이노프로쉬네) 마음의 낮음 lowliness of mind, 겸손 humility.

tapeinovfrwn 타페이노프론....겸손한 마음을 가진

1. 일반 헬라어 및 70인역본 

명사 타페이노프로쉬네는 형용사 타페이노프론에서 유래했으며, 이 명사와 형용사는 1세기와 2세기의 세속적 헬라어 문학작품에 나타나며(Josephus, Plutark, Epictetus), '비열하게 생각하는 것, 나쁘게 생각하는 것, 잘못 마음먹는 것, 마음이 약한 것, 비굴한 마음을 가지는 것' 등, 품위를 떨어뜨리는 의미로 언제나 사용되었다. 그러나 70인역본과 신약성경은 긍정적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70인역본에서 잠 29:23에 형용사 타페이노프론이 단 한번 사용되었는데 좋은 의미로 심령이 '겸손한' 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2. 신약성경의 용법 

신약성경에서 형용사 타페이노프론이 1회, 명사 타페이노프로쉬네가 7회 사용되었으며, '마음을 낮추는 것, 다른 사람의 가치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 겸손'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a)  형용사 타페이노프론은 벧전 3:8에 한번만 나온다: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b)  행 20:19에서 사도로서의 자신의 일에 대한 바울의 생각을,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이라는 말로써 충실히 전해주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분쟁(행 20:20)과 부도덕(행 20:2lc 이하)에서 드러난 자신의 실패를 통하여 그를 겸손하게 하심 속에서, 그리고 분쟁과 마음의 두려움(참조: 고후 7:5 이하; 사 49:13)으로 낮추어진 자들을 안위하심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인식한다. 사역을 하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어려움들 속에서 바울은 오실 주님이 우리의 낮은 몸을 변화시켜 주님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만드시리라는 소망을 의지하였다.(참조: 빌 3:21).

(c)  겸손에 대한 바울의 권면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모범에 근거한다. 엡 4:2(1절 참조)과 골 3:12(l절 참조)은 교회를 하나되게 하고 결속시키도록 섬길 용의를 가지라고 분부한다. 전자에서 "겸손"으로 행하라고 권한다. 후자에서는 "겸손…으로 옷입으라"고 권한다.

겸손은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그리고 그로 하여금 자신을 비워 종이 되게 한 겸손한 마음이다. 그러므로 겸손은 연합을 이루는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모든 불화의 뒤에는 교만이 숨어있는 반면에, 조화를 이루는 가장 귀중한 한 가지 비결은 바로 겸손이다. 이 사실을 경험을 통하여 증명하기란 어렵지 않다. 우리가 쉽게 본능적으로 좋아하여 사이 좋게 지낼 수 있는 사람들이란,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존경을 우리에게 돌리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우리가 쉽게 본능적으로 싫어하게 되는 사람들이란 바로 우리를 하찮은 존재로 취급하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허영은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의 주된 요소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존경하려고 억지로 무리하게 애쓰는 대신에(이것은 교만이다), 모든 장단점에도 불구하고 본래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인 나와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그들에게 부여하신 본질적 존재가치를 인정함과 동시에 하나님이 손수 생기를 불어넣어 지으시고 존귀히 여겨 아끼고 사랑하사 진정한 영생복락(구원)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 십자가 희생을 감당케 하시기까지 하나님의 사랑받기에 합당한 자로서의 그들 한사람 사람을 바로 그렇게,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며 지고지선의 유익을 위해 섬겨준다면 이것이야말로 참된 겸손이다. 이런 겸손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에서 한층 더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J.R.W.Sott).

벧전 5:5에는 겸손을 옷 입는다는 은유가 나온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여". 여기서 권면하는 것은 실제로 겸손한 마음으로 겸손을 실천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섬기며, 그들로부터 명령을 받고 그들의 요구에 맞게 행동함에 있어서 겸손을 나타내라는 것이다. 겸손히 섬기는 일을 옷 입는 것처럼 하라는 것이다.

빌 2:3에서는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한다. 이것은 겸손으로 가장한 비열한 굴종에 대한 호소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모르는 단점을 가지고 있으며, 또 내가 가지지 못한 장점을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진정한 자아 평가를 할 것을 요망한 것이다(John A.Knight).

(d)  골 2:18에서 그는 일부러 겸손한 척하고, 천사를 숭배하며, 금욕주의를 따르는 적대자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는 매번 타페이노프로쉬네를 사용하고 있다.

 

(참조: H.H.Esser; W.Grund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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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peinov"(5011, 타페이노스) 낮은, 비천한 Iowly, 겸손한 humble.

1. 고전 헬라어 문헌 

기본어 타페이노스는 핀다르(Pindar, B.C 55세기)의 작품에서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 단어는 본래는 '낮게 놓는 것'이라는 의미였으며,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비유적 의미가 발전되었다.

(a)  이 단어는 '낮은, 천한, 하찮은, 중요하지 않은, 약한, 가난한'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도시, 나라, 국가, 정치가, 군사력, 별, 강, 상품, 영향력, 인간의 정신과 용기 등에 대해 사용되었다.

(b)  이 단어는 정신적이거나 윤리적인 상태에 관해서 사용될 때는 '천한, 비굴한, 노예의'를 의미한다. 보통 아첨이나 굴종에 대해 경멸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가문이 좋지 않은 태생, 가난한 낮은 신분,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것, 사회적 신분에 기인한 신복의 아부성 등에 대해 사용되었다.

(c)  이 단어는 어려운 상황이나 비천한 상태, 또는 탄원자들과 같이 스스로 비하하는 상태를 표현한다.

(d)  이 단어는 '겸손한, 순종하는, 유순한'을 의미하며, 이러한 행위는 훌륭한 군대나 가족에 적용될 수 있다. 이런 복종은 단순한 가장(假裝)이나 비굴하게 굴종하는 자기 포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e)  이 단어는 종교적 문맥에서는 앞의 윤리적인 의미에서와 같이 '비천한' 을 의미하지 않고 '겸손한, 순종하는'을 의미하며, '신들의 옳은 법에 자신의 행위를 일치 시키는것' 등을 의미한다. 이 모든 용법에 있어서 이 단어의 본래의  실질적 의미, 즉 위에 있는 것, 높은 것에 대하여 '아래 있는, 낮은'이라는 의미의 흔적이 전부 남아있다.

2. 70인역본의 용법 

타페이노스는 70인역본에서 약 70회 나오며, 12개 히브리어형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나타난다.

(a)  이 단어는 '낮은, 평평한, 아래의'를 의미한다(수 11:16; 삿 1:15; 시 123:6이하; 시 137:6; 레 13:3-26; 레 14:37).

(b)  이 단어는 '굴복한, 작은, 빈약한, 하찮은, 비열한, 천한'을 의미한다(집회서 25:23; 29:4; 레 27:8; 겔 29:14 이하; 단 3:37; 삿 6:15).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작거나, 보잘 것 없는 자를 택하신다(삿 6:15; 삼상 18:23). 하나님은 타페이노이(복수)의 하나님이시다(유딧 9:11). 타페이노이는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자이다(습 2:3).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을 구하는 자들을 이스라엘 중에 남겨 두신다(습 5:12).

(c)  이 단어는 '굴복당한, 억압받는, 압제받는'을 의미한다. 외부 세력이나(유딧 16:11; 마카베오일서 14:14) 부한 자들에 의해(암 2:7; 사 58:4) 이런 압제를 받는다.

(d)  그러나 하나님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억압받는 자들을 높이신다(시 18:27; 54:18). 낮은 자들을 하감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이다(시 138:6).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멸시치 않으신다(시 1O2:l7). 메시야는 온유한 자들을 위해 공의를 세우시고 억압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심판을 선언하신다(사 11:4). 여호와께서는 시온을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피난처를 삼으셨다(사 14:32; 참조: 25:4). 사 49:13에서도 이와 유사한 말씀을 하신다. 평강에 대한 언약은 낮은 자에 대하여는 불변적이다(사 54:10,11). 하나님은 겸손하고 심령에 통회하는 자를 돌보신다(사 66:2).

3. 신약성경의 용법 

타페이노스는 신약성경에서 8회 나오며, '비천한, 겸손한'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a)  눅 1:52은 눅 3:5에 대한 결론이며,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역사에 대해 언급한다: "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b)  이 약속과 교훈과 경고의 근거는 예수님의 삶의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삶의 방식은 마 11:28이하에 나오는 초대의 말씀에서 해석되어 있는 것과 같다. 주님은 "온유하고(프라위스) 마음이 겸손하다(타페이노스 테 카르디아)". 이 두 개의 표현은 대등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순종하셨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셨으며, 하나님께 헌신하셨다는 사실을, 동시에 주님은 사람에게도 겸손하셔서 그들의 종이자 조력자로 되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눅 22:27; 막 10:45; 마 20:28). 이것이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이 주님을 따를 때 그들에게 종말론적 안식을 주신 까닭이다. 이것은 율법교사의 윤리적 모범을 따르라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는 집회서 51:23-30과는 대조적이다.(참조: A. Schlater).

(c)  고후 10:1에서 바울은 그가 적대자들을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이라고 호소할 때 이는 적대자들의 모욕적인 말을 인용하고 있다. 사도의 이 호소 배후에는 그가 고린도 교인들과 '마주 대하여 있을 때'에는 "겸비"(비열하거나 빈약한 것을 뜻할 수 있음)하지만 떠나 있을 때에는 그 방법에 있어서 담대하다는 비난이 스며 있다. 그의 대적자들은 평소의 방법대로 진리를 비진리 - 바울의 관용을 연약함으로 해석함 - 로 왜곡했다(참조: F.G.Carver).

(d)  겸손에 대한 바울의 권면도 역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명백한 실제 모습에 근거한다. 롬 12:16(참조: 1절)은 자만과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는 것을 경고한다. 이 구절은 토이스 타페이노이스를 중성으로 보느냐 남성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너희 자신을 비천한 일에 바쳐라'(RSV의 난외 주)로 번역할 수도 있고, '낮은 자와 함께 행하라'라고 번역할 수 있다. 필립스(Phillps)는 '거만히 굴지 말고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관심을 가져라'고 의역하였다.

(e)  야고보서와 베드로전서에 나오는 권면들을 겸손에 대한 구약성경과 바울서신의 의미에 아무 것도 새로운 뜻을 추가하지 않는다. 약 1:9 이하는 부자와 대조하여 사회적으로 낮고 가난한 자를 언급한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낮은 형제"는 가난에 찌든 형제이지만 단순히 가난한 자를 가리키지 않는다. 가난한 그리스도인은 비참한 빈곤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다. 그는 그가 겪는 궁핍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을 물질적인 부족에서 들어 올리는 참 기쁨의 근원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높임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갖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보실 때 인간의 가치 있는 인식이라 하시기에 적합한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그리스도께 속했음을 알고 인생의 영적인 가치의 중요성을 헤아리게 된다면 그는 만족하며 기뻐하는 자가 되는데 많은 물질적 편의가 필요치 않을 것이다(빌 4:10이하).

한편 부한 형제가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면 이 절들은 물질적인 부요를 의지하는 개종자들에 대해 경고하는 동시에 다음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부한 형제가 누릴 진정한 기쁨의 근원은 그가 낮아진다는데 있다. 이러한 겸비의 과정은 부한 자가 그리스도를 따를 때 겪는 가치의 재정립이다(A.F.Harper의 야고보서 주석 참조).

(f)  약 4:6b와 그 병행구절 벧전 5:50는 잠 3:34(LXX)을 인용하는데, 그것은 겸손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약속하고 있다. 이 두 구절은 모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끌어낸다. "주 앞에서 낮추라"(약 4:10과 그 병행구절인 벧전 5:6; 참조 : 창 16:9; 집회서 2:17). 이 두 서신들이 서로 문학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증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유사성은 '기독교의 일상적인 권면'(참조:M.Dibelius)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g)  교회의 "겸손" 개념은 점차로 종말론적 기대와 그의 일치하는 삶의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부터 참회와 금식에로의 경향과 그 구체적인 행동을 묘사하는 말로 변화되었다. 이런 현상은 특히 클레멘스일서와 헤르마스(Hermas) 문서에서 두드러지게 볼 수 있다.

(참조: H.H.Esser; W.Grundmann). → tapeinovw, 5013 타페이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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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jpiginwvskw(1921, 에피기노스코) 알다, 이해하다, 인식하다....깨달아 알고 인정하다....알아채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내 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
...아들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고..(마11:27)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에피기노스코(Homer 이래)는 에피(ejpiv, 1909: 위에)와 기노스코(ginwvskw, 1097: 알게되다, 지각하다, 인식하다)에서 유래했으며, '확실히 알다, 이해하다, 인식하다, 배워서 알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에피기노스코는 70인역본에서 약 15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야다(알다, 이해하다)와 나카르(알다, 인식하다, 분별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에피기노스코는 신약성경에서 43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에피기노스코는 대체로 마태와 마가에 의해 신학적 배경 없이 사용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발견된다. '알다' know(마 7:16; 마 7:20; 마 14:35; 마 17:15; 막 6:54), '알아채다, 인지하다, 알게 되다' observe(막 2:8; 막 5:30; 막 6:33), '인식하다, 인지하다' recognize(마 17:12).
마 11:27에서는 신학적 의미를 지닌다(눅 10:22의 병행구에는 단순형이 나옴):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관계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관계가 계시의 기초요 내용이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지적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의 선택적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b)  누가의 문헌에서도 에피기노스코는 거의 전적으로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알다' know(눅 24:16; 눅 24:31; 행 3:10; 행 4:13; 행 27:39), '인지하다' observe(눅 1:22; 눅 5:22; 행 19:34), '배우다' learn(눅 7:37; 눅 23:7; 행 9:30; 눅 2:14; 눅 22:24; 눅 22:29; 눅 23:28; 눅 24:8; 눅 24:11; 눅 28:1), '이해하다' understand(행 25:10), 그리고 '정확히 알다, 충분히 알다' know exactly, fully(눅 1:4)라는 의미를 지닌다.
엠마오 기사에서 에피기노스코는 (더 깊이) 인식하는 것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는 것' 혹은 '발견하는 것'을 가리킨다(눅 24:16; 눅 24:31).
(c)  에피기노스코는 바울 문헌에서 10회 나온다(특히 고린도후서에서 자주 등장함). 또 골 1:16; 딤전 4:3; 벧후 2:21에서도 나온다. 롬 1:32의 디카이오마 투 데우 에피그논테스("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는 롬 1:28에서처럼 하나님에 대한 이론적인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적인 인정을 나타낸다(참조: 롬 1:29-21).
고전 16:18(인식하다)과 고전 14:37; 고후 1:13 이하(알다, 이해하다)에서 에피기노스코는 특별한 신학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참조: 고후 6:9).
고전 13:12에서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은 종말론적 약속의 내용이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후 13:5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언급되어 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골 1:6은 진리 안에서(엔 알레데이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지식에 대해 말한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참조: E. Schutz; W. Hacken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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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3045, 야다) 알다, 이해하다....전인적인, 친밀한 관계를 맺고 존재중심으로 경험하며 알아가다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출애굽기33:17)

야다(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알다 know, 이해하다 understand'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944회 나오며, 모든 어간에서 사물이나 사람 또는 상황등을 감각 기관으로 얻은 약간씩 차이 나는 여러 가지 지식을 나타낸다. 이미 알려진 것은 감각으로 나타나야 하며 그 자체는 그렇게 알려지게 되어있다. 그래서 우리는 듣는 것(듣다)과 보는 것(보다)에 관한 동사가 아는 것에 관한 동사와 병행되어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예: 출 16:6 이하, 신 33:9, 삼상 14:38, 사 41:20). 야다는 인간(창 18:19, 신 34:10)과 그의 길(사 48:8, 시 1:6, 시 37:18)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에 사용되었으며, 여기에서 지식은 심지어 탄생 이전에 시작된다(렘 1:5). 하나님은 또한 들새도 아신다(시 50:11).
야다는 또한 인간의 지식과 짐승의 지식에도 사용되었다(시 1:3).
야다는 구약성경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야다는 '알아채다, 인지하다, 경험하다, 관찰하다'를 의미한다(예: 창 3:7, 창 41:31, 삿 16:20, 전 8:5, 사 47:8, 호 5:3).
(b)  야다는 '구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선악을 아는 것'(창 3:5, 창 3:22)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이다. 좋고 흉한 것을 구별하는 것은 필요하다(삼상 19:36). 어린 아이는 왼손과 오른손을 구별하지 못하며(욘 4:11) 또 선과 악도 구별하지 못한다(사 7:15). 후자의 구절의 문맥과 사 8:4에 나오는 이와 비슷한 언명은 이 언급이, 어린 아이는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을 구별할 줄 모른다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 주는 것 같다.
좋고 흉한 것, 좌우와 같은 것에 대해 관찰하는 것은 결국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이 된다.
(c)  야다는 '배워서 알다' know by learning라는 의미를 지닌다(잠 30:3).
(d)  이 분사는 사냥(창 25:27), 학문(사 29:11-13), 애곡(암 5:16), 바다를 항해하는 일(대하 8:18),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일(삼상 16:16)에 능함을 묘사하는 어구에 나온다.
(e)  야다는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한다.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창 29:5, 출 1:8, 삼하 3:25). 푸알 분사형은 '친척'(왕하 10:11 등)과 '아는 사람'(욥 19:14, 룻 2:1 등)을 지칭한다.
(f)  야다는 '관계하다, 관심을 가지다'(시 1:6, 시 37:18, 시 119:79), '~와 관계를 맺고 싶다'(예: 신 33:9). 신학적인 문맥에서 자주 이 단어가 적절한 지식을 얻지 못해서 결국 관심의 결여를 초래하고 마는 것에 대한 문제로 나온다(예: 렘 8:7, 시 95:10).
(g)  야다는 '성적 관계를 가지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았다"고 하는 유명한 완곡 어법과 그 병행구들(창 4:1, 창 19:8, 민 31:17, 민 31:35, 삿 11:39, 삿 21:11, 왕상 1:4, 삼상 1:19)에서 남녀 쌍방의 성적인 관계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남색(창 19:5, 삿 19:22)이나 강간(삿 19:25)과 같은 성적 도착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h)  야다는 '다른 사람과 인격적이며 친숙한 관계를 맺다'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름으로, 대면하여 모세를 아신다(출 33:17, 신 34:10).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이나(렘 1:5) 어떤 민족을(암 3:2) 아실 때 하나님께서 그를 선정하시거나 선택하신다(참조: 민 16:5 70인역본). 선택으로 이해되는 이 지식은 은혜롭고 자애로운 것이지만 이것은 인격적인 응답을 요구한다.
(i)  야다는 일반적인 문제에 대한 지식 외에도, 다른 신들을 아는 것이든(신 13:3, 신 13:7, 신 13:14) 여호와를 아는 것이든(삼상 2:12, 삼상 3:7) 간에,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렘 10:25) 선지자들에 의하면,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렘 4:22). 애굽의 재앙은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애굽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 보내졌다(출 10:2 등). 그는 그가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사 60:16) 그들을 파멸시키시고(겔 6:7) 회복시키실 것이다. 특히 선지자 에스겔은 위협할 때,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는 어구를 사용한다(겔 6:7, 겔 6:10, 겔 6:13, 겔 6:14, 겔 7:4, 겔 7:9, 겔 7:27 등).
(j)  요약하면 희랍인들이 초연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또한 사물의 형이상학적 본질에 사변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반해, 구약성경은 지식을 끊임없이 인격적인 만남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구약성경이 하나님과 창조에 관해서 언급한 것을 보고서, 우리가 이 언급들을 존재론적 추론으로 여겨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는 믿음의 선포로 간주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역사적 과거와 약속된 미래 즉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존재하고 있는 이 지상의 영역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찾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예배와 행동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과 요구를 식별할 수 있었던 것이다.(참조: E. D. Schmitz; Bult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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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초청(마 11:25-30)

이 구절들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늘을 우러러보시면서 구속 언약의 주권과 안전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이 세상을 둘러보시면서 이러한 선물들(역주:28, 29절의 선물들)이 장차 주어지게 될 모든 어린아이들에게 은혜 계약의 특권과 유익들을 제시(제공)하고 있다.

Ⅰ. 그리스도는 화제를 돌려 여기에서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어진(계시된)" 복음의 신비함을 가진 그들(어린 아이)에게 대한 하나님의 호의를 인하여 그에게 감사하고 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25절), 그 자신이 하신 말씀 이외에는 어떠한 말씀도 앞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여기에 "대답"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것이 앞에 진술된 우울한 숙고(consideration)에 대해 위로를 주는 대답이며 또한 그것들과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지독한 고을들의 범죄와 멸망은 의심할 여지없이 주 예수님에게는 슬픈 일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향해 우셨던 것처럼(눅 19:41)그들을 향해 우실 수밖에 없으셨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생각하심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것을 더욱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그는 그러한 것을 감사로 돌리고 있다. 

이것은 즉 비록 "어린 아이"일지라도 복음에 관한 일들이 "계시되는 남은 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이스라엘은 모여지지 않았지만 그는 영화롭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의 주위에서 실망할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을 때 하나님을 우러러봄으로써 용기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행복에 대하여 얼마나 무관심한가를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현명하고 신실한 하나님께서 어쨌든 그 자신의 이익(이해 관계)을 효과적으로 확고히 하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위로가 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감사하나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감사"는 어둡고 불안한 생각들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며 또한 그것들을 잠잠케 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찬송가는 낙심한 영혼들에 대한 특효가 있는 강심제이며, 우울증을 치료하는 것을 협조할 것이다. 우리가 슬픔과 두려움의 암시들에 대해 준비된 답변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가 호소할 수 있는 말은 "오 아버지여, 내가 감사하나이다." 그것보다 더 나쁘게 되지 않았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그런데 그리스도의 이러한 감사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 볼 수 있다.

1. 그가 하나님께 대해 붙이신 칭호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다음의 사실들에 유의하라.

(1) 기도와 마찬가지로 찬송에 의해 하나님께로 접근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자비를 구하거나 또는 우리가 받은 자비에 대해 감사를 드릴 때에는, 그를 하나님으로 바라보고 그 관계를 굳게 고수하는 것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다. 자비를 아버지의 사랑의 표식으로, 아버지의 손의 선물로 받아들여질 때, 그때에는 그 자비가 갑절로 은혜롭게 되고, 찬양의 마음을 샘솟게 할 것이다.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2). "아버지여, 기도하오니"와 같이 "아버지여, 감사합니다"라고 감사드리며 말씀드리는 것은 어린아이들에게 합당하다.

(2)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 나아올 때 우리는 그가 "천지의 주재이심"을 동시에 기억해야만 한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들의 주권자이신 그에게로 존경심을 가지고 나아오도록 하며, 또한 우리가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실 수 있으신 그에게로 신뢰를 가지고 나아오도록 한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사악함에서 방어하도록 하며 모든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공급하게 하신다.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에게서(멜기세덱 안에서) 오래 전부터 "하나님"을 소유주로써, "천지의 주재"로 찬미해왔다. 우리는 시내에서 자비에 대한 감사를 드릴 때 샘 안에 있는 풍족함에 대하여 그에게 영광을 드려야만 한다.

2. 그가 감사 드린 일.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이것"(These things), 그는 어떤 일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복음의 큰 일들, 즉 "우리의 평화에 속한 일들"(눅 19:42)을 의미하고 계시다. 그가 이렇게 "이것들"에 관하여 강조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그것들이 그를 채웠던 일들이었고 또한 우리를 채워야 할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밖의 다른 모든 일들은 "이것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1) 영원한 복음의 위대한 것들(things)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 즉 학식이 뛰어나고 세상적인 수단에 탁월한 자들에게는 숨겨져 왔으며 또 숨겨지고 있다. 위대한 학자나 위대한 정치가들 중 어떤 사람은 복음의 비밀에는 매우 낯선 위대한 나그네였다. "이 세상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고전 1:21). 아니,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에 (딤전 6:20) 의해 복음을 반대하는 일도 있다.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일에 가장 익숙한 자는 흔히 영적인 일을 거의 체험하지 못하는 법이다. 사람들은 자연의 신비나 상태(state)의 신비에 깊숙이 빠질 수는 있다. 그러나 천국의 능력에 대한 체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천국의 신비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또 오해하는 것이다.

(2) 세상의 "현명하고 슬기로운 자들"이 복음의 신비의 둘레에 있는 어두움 속에 있는 동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 아이"들은 그것들에 대한 "거룩케 하는 구원의 지식"을 가진다. "당신은 그것들을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다 이와 같은 사람들로서, 보잘 것 없는 태생이며 하찮은 교육을 받은 자들이다. 학자도 아니요, 예술가도 아니요, 무식하고 무지한 자들이었다(행 4:13). 지혜의 오묘는 이와 같으며(욥 11:6), 이것을 "어린아이와 젖먹이"에게 알게 하신 것은 "그들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시고(시 8:2) 이로써 하나님의 "찬송이 완전케 되게 하려" 하심이다. 세상의 학식 있는 자는 복음의 전도자로 선택받지 못하였지만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고전 2:6, 8, 10)은 택함을 받았다.

(3) "슬기로운 자"요 "어린 아이" 사이의 이러한 차이는 하나님 자신이 만드신다.

①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신"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들에게 직분과 학식,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이해력을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이에 대하여 자만하며 거기에 만족하며 더 이상 찾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공평하게 지혜와 제시의 성령을 그들에게 주시지 않으셨다. 비록 그들이 복된 소식의 소리를 듣는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그들에게 한낮 "이상한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들의 무지와 오류의 창시자는 아니시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그들 자신에게 내버려두시며 그들의 죄는 그들의 형벌이 되는 것이다. 또한 주님은 그 안에서 의로우시다. 요한복음 12장 39, 40절, 로마서 11장 7,8절, 사도행전 28장 26, 27절을 보라. 만일 그들이 가진 지혜와 슬기를 가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다면 그는 그들에게 이러한 좋은 것들에 대한 지식을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것들을 가지고 자기들의 욕망을 채웠으므로 하나님은 "이러한 이해력을 그들의 마음에서" 숨기셨다.

② "그것들을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나타난 일은 우리의 자손(어린아이들)에게 속하며(신 29:29), 또한 그는 그들에게 이러한 것들을 받을 수 있는 "이해력"과 그것들에 대한 생각을 주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약 4:6).

(4) 이 세대는 신적인 지배를 받게 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는 이것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26절)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이러한 일들에서의 그의 뜻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즉 "옳소이다"라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자신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그가 기뻐하시는 방법을 취하시도록 하며 또한 그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가 기뻐하시는 수단을 사용하시도록 하자. 그의 은혜는 그의 자신의 것이며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주시기도 하시고 보류하기도 하신다. 우리는 왜 어부인 베드로는 사도가 되었지만,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인 니고데모는, 그도 역시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사도가 되지 않았는지에 대해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이다."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그의 제자들이 듣는데서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이와 같이 존귀하게 되고 구별되어진 것은 그들 자신의 어떤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기쁘신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는 그것들을 구분하셨다.

(5) 신적 은혜를 베푸는 이러한 방법은 우리 주 예수님에 의해 인정된 것처럼 감사함으로 우리에 의해 인정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만 하는 이유는,

① "이러한 일들이 계시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숨겨진 비밀이 나타내어진 것이다. 그것들은 소수의 사람들에 나타내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세상에 널리 선포되어 있다.

② 그것들이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어지기" 때문이다. 온유하고 겸손한 자는 이 구원으로 아름답게 되어진다. 또한 이러한 영예는 세상이 염려시하는 자들에게 두어진다.

③ "이것들이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 숨겨진 것은 어린아이들에게 대한 자비를 크게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다. 구별된 은혜는 가장 정중하다. 욥이 "주의 이름"을 "주실 때"와 같이 "취해질 때"도 찬미한 것(욥기 1:21 -역주)처럼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낼 때"와 마찬가지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겨질"때도 찬미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비참한 것은 아닌 것처럼, 그것은 자아가 낮추어지고 교만한 생각이 끌어 내져지고 모든 육체가 잠잠케 되고 신적 능력과 지혜가 더욱 빛나게 되는 방법이다. 고린도전서 1장 27, 31절을 보라.

Ⅱ.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의 유익함을 은혜스럽게 제공하고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어진" 것들이다(25절 등).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우리의 주의를 이러한 부르심과 초청에 집중하도록 명령하기 위하여 또한 그것에 순응하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이것들(부르심과 초청)을 안내하는 엄숙한 서문이다. 우리가 "우리 앞에 두어진 이러한 소망"에로 피난을 위해 날아갈 때 "강한 위로"를 얻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그의 권위를 앞세우고 있으며 그의 신임장을 제출하고 있다. 우리는 그가 이러한 것을 베풀기 위해 권한을 부여받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27절).

(1) 그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사명.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다."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는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일하시다. 그러나 중보자로서의 그는 그의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일하시다. 그러나 중보자로서의 그는 그의 능력과 영공을 아버지께로부터 받고 있다. 또한 "모든 심판은 그에게 맡겨졌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또한 패역한 세계에 평화와 행복을 주기 위하여 그가 적합하다고 생각하였던 이러한 조건들(terms) 에 의거하여 권한을 위임받고 있다. 그는 이러한 큰 임무(affairs)를 협의하고 확립하기 위하여 거룩케 되셨으며 또한 유일한 전권대사로 인 쳐졌다. 이것을 위하여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능력"을 가지셨으며(마 28:18), 모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요 17:2)와 심판을 행하시는 권위(요 5:22, 27)를 가시셨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게 하는 데 용기를 북돋아준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에게로 온 것을 받으시고 또 요구하는 것을 주시기 위하여 "모든 것이 주재이신" 분에게서 위임을 받으셨으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목적으로 그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모든 능력 모든 보화들이 그의 손안에 있다. 아버지는 그의 모든 것을 주 예수님의 손에 넘겨주셨다. 우리의 모든 것을 그에게 넘겨드리고 그 일이 수행되도록 하자. 하나님은 그를 우리에게 손을 두시는 위대한 심판인(Referee)과 판결자(Daysman)로 삼으셨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이 불행한 논쟁을 그치게 하기 위하여 그의 판결(언급)에 동의하고 주 예수님의 조정(중재)에 순응하는 일이며 또한 그의 판결을 고수하기 위하여 계약을 맺는 일이다.

(2) 그와 아버지 사이의 친밀성.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29절). 이 말씀은 보다 더 큰 만족과 풍성한 것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잇다. 전권대사들은 그들이 제출할 위임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교제가 있을 때 사용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가르침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님은 그의 임무를 위하여 권세뿐만 아니라 능력도 가지고 계셨다. 우리의 큰 구속 사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는 주요하게 관계된 당사자들이다.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슥 6:13).

그러므로 그들이 이 일에 있어서 서로 잘 이해하셨다는 사실, 즉 다시 말하면 성부는 성자를 아셨고 성자는 성부를 아셨으며 또한 양자를 완전하게 아셨으므로[우리는 이것을 성부와 성자 사이의 상호적인 자각(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일의 결정(settling)에 있어서는 어떠한 오류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확증을 시키는 데 큰 격려가 되어야만 한다. 종종 사람들 가운데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약을 전복하거나 강구된 조처를 파기하는 경우가 있다. 성자는 영원 전부터 "아버지의 품속에 있었다." 그는  secretioribus(숨겨진 계획)이셨다. 그는 "그가 데리고 있는 자로서 그 곁에 계셨다."(잠 8:30). 그러므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으며," 그는 더 첨부하기를,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27절)고 하셨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① 사람들의 행복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요," 이성적인 존재들의 완전성이다.

② 하나님과 더불어 친교를 맺으려는 자는 모름지기 그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의탁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영광의 지식의 빛은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빛나기 때문이다(고후 4:6). 우리는 아담이 범죄한 이래로 우리가 가진 하나님의 모든 계시들, 즉 아버지의 뜻과 사랑을 인하여 그리스도에게 감사를 드려야만 할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스러운 인간 사이의 교제는 위안을 주는 교제가 아니다. 그러나 중보자 안에 있는, 중보자에 인한 교제는 위안을 주는 교제이다(요 14:6).

2. 여기에는 우리들에게 제공되는 기증물(offer)과 그것을 받아들이라는 초청장이 있다. 그렇게 엄숙한 서문 후에 우리는 매우 큰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신실한 말씀"이며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말씀"이다. 또한 우리가 "구원받게 될 수 있는 말씀"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구원받도록, 그것을 위하여 그의 지배와 가르침을 받도록 우리의 제사장이시며 왕, 선지자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초대를 받고 있다.

(1) 우리는 우리의 휴식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로 나아와야만 하며, 또한 그 안에서 휴식을 얻어야 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28절).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

① 초청 받은 사람들의 특성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었다. 이것은 피곤하신 그에게 적합한 말씀이다(사 50:4). 견딜 수 없는 멍에였으며 장로들의 유전에 의해 더욱 견딜 수 없는 멍에가 되었던(눅 11:46) 의식적인 법의 무거운 짐에 대해 불평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에게로 오도록 하라. 그리하면 그들은 편안함을 얻게 될 것이다. 그가 오신 것은 그의 교회를 이러한 멍에에서 자유케하기 위함이며, 그러한 육적 계율들의 부담을 없애 주고 또한 보다 순수하고 영적인 예배 방법을 소개해 주기 위함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죄의 짐, 즉 범죄와 그 능력에 대해 깨닫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무거운 짐인 죄를 깨닫고 그 아래에서 신음하는 자들은, 또한 그들만이 그리스도 안에 쉬도록 초청함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들 자신의 죄의 사악함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하여 영혼 가운데서 깊이 뉘우치는 자들이다. 또한 그들은 실제로 그들의 죄에 대해 병든 자들이며 세상과 육신의 고역에 지친 자들이다. 또한 그들은 죄 때문에 자신들의 상태가 슬프고 위험하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이며, 또한 에브라임(렘 31:18-20)과 탕자(눅 15:17), 세리(눅 18:17),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자들(행 2:37), 바울(행 9:4; 6, 9), 간수(행 16:29, 30)처럼 그것을 괴로워하고 두려워한 자들이다. 이것은 사죄와 평안에 대한 필수적인 준비이다. 보혜사는 먼저 깨닫게 해야만 한다(요 16:8). 내가 찢어질 그 때에 고침을 받게 될 것이다.

② 초청은 "내게로 오라"이다. 우리가 지닌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의 위대성의 영광스러운 현현은 우리를 놀라게 할지 모르지만 여기에서는 우리가 "그 황금홀"의 끝 부분을 만질 수 있고 또한 살 수 있도록 그가 어떻게 그것을 잡고 계신가를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오는 것"은 피곤하고 "무거운 짐을 진"죄인들의 의무이며 권리라는 사실이다. 그를 반대하거나 그와 불화하는 모든 것들을 다 버림으로써 우리는 그를 의사(physician)요 대언자로서 받아들여야 하며 우리 자신들을 그의 행위와 지배에 완전히 맡겨야만 한다. 그에 의하여, 그 자신의 방법대로, 그 자신의 조건에 의거하여 구원함을 받도록 기꺼이 자신을 포기해야만 한다. "와서," "무거운 짐진 것"을 그에게 "맡기라."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오라." 이것이 복음의 부르심이다.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목마른 자들아 나아오라."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오라."

③ 오는 자들에게 약속된 축복은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노아(그 이름의 뜻은 "휴식"이다)이시다. 왜냐하면 "이 동일하신 분이 우리를 쉬게 하실"것이기 때문이다(창 5:29; 8:9). 참으로 "휴식은 좋은 것이다"(창 49:15). 특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는 그러하다(전 5:12). 예수 그리스도는 휴식을 위하여 살아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에게로 나아오는 피곤한 영혼들에게 확실하게 보장된 휴식을 주실 것이다. 이 "휴식"은 죄의 두려움에서 떠나 잘 기초가 된 양심의 평안 속에서 누리는 휴식이며, 죄의 능력에서 떠나 영혼의 정상적인 질서와 그 적절한 지배 속에서 누리는 휴식이며 또한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영혼의 만족함이다(시 11:6, 7). 이 휴식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남아있는 안식"(히 4:9)으로써, 은혜 가운데서 시작하여 영광 가운데서 완성되는 휴식이다.

(2) 우리는 우리의 지배자이신 그리스도에게 나와서 그에게 자신을 맡겨야만 한다(20절). "나의 멍에를 메라." 이것은 전자와 동일한 보조를 맞추어 가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의 보좌 위에 왕과 구세주, 제사장"으로 높여지기 때문이다. 그가 약속하신 "휴식"은 죄의 고역으로부터의 해방으로써, 하나님의 봉사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우리가 그에게 마땅히 해야할 의무에 대한 책임으로 할 것은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를 위해 "면류관"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우리의 목을 위한 "멍에"를 가지고 계시며 또한 우리는 그가 기대하시는 이러한 "멍에"를 "메고"끌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피곤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멍에를 지우는 것"은 설상가상으로 "고통받는 자들에게 더욱 고통을" 부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의 정당성(pertinency)은 "나의"(my)라는 말속에 들어있다. "너희는 너희로 하여금 피곤케 만드는 멍에 아래에 있다. 너희는 그것을 떨쳐 버리고, 너희를 편하게 해 줄 나의 멍에를 시험해 보라." 종들은 "멍에 아래에"(딤전 6:1) 놓여 있거나, 또는 예속(왕상 12:10 역주: 본문에는 멍에로 되어 있음)되어 있다고 말해진다. 그리스도의 "멍에를 진다"는 것은 자신들을 그의 종과 예속물의 관계에 두는 것이며, 그의 모든 명령에 의식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이에 준한 행동을 하는 것이며 또한 그의 모든 처분에 즐거움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순종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주님께 복종시키2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멍에"이며, 그가 지시하신 "멍에"이다. 그 "멍에"는 그가 우리 앞에서 끄신 멍에이다. 왜냐하면 "그는 순종을 배우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기" 때문이다(롬 8:26). "멍에"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만일 짐승이 끈다면 "멍에"는 그를 도울 것이다. 그리스도의 명령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모든 것(all in our favour)이다. 우리는 이끌기 위하여 이 멍에를 메어야만 한다. 우리는 일하도록 멍에가 메어져 있다. 그러므로 부지런해야 한다. 우리는 복종하도록 멍에가 메어져 있다. 그러므로 겸손하고 참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동료종(fellow-servants)과 함께 멍에가 메어져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교제를 계속해 나가야만 한다. "현명한 사람의 말은" 이와 같이 멍에를 멘 자들에게 "염소와 같다."

그런데 이 말씀은 우리의 교훈 중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가치가 있다(30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① 그리스도의 명령들의 "멍에"는 쉬운 멍에이다. 그것은 crhstov"하다. 즉 "쉬울" 뿐만 아니라 은혜스러운 것이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뜻이 그와 같다. 그것은 고상하고 유쾌한 것이다. 그 속(명령들의 멍에)에는 순종하는 목에 상처를 내는 것(스쳐서 벗겨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또한 다치게 하는 것도 없다. 그 반대로 우리를 더욱 상쾌하게 한다. 그것은 사랑과 이어지는 "멍에"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명령들의 성질은 이와 같이 그 자체가 매우 적당하고, 우리에게는 매우 유익한 것이며, 한 마디로 그 성질을 종합할 수 있다. 그것은 아름다운 말, 즉 사랑이다.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도움은 매우 능력이 있고 그 격려는 매우 적절하며, 또한 의무의 길에서 발견되는(역주:의무를 행할 때 알게 되는) 그 위로는 매우 강하기 때문에 우리는 참으로 그것이 즐거움의 "멍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멍에는 새로운 성품을 가진 자에게는 쉬운 것이며, "이해하는 자"에게는 매우 쉬운 멍에이다(잠 14:6) 그 멍에는 맨 처음에 조금 어려울지 모르지만 후에는 쉬운 멍에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늘의 소망은 그 멍에를 "쉽게" 만들 것이다.

②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짐"은 매우 "가벼운 짐"이다. 이 짐은 사람인 우리에게 닥쳐오는 그리스도로부터의(from) 고통, 또는 기독자인 우리에게 닥쳐오는 그리스도를 위한(for) 고통이라고 볼 수 있는데, 특히 후자를 의미한다. 이 "짐"은 그 자체가 "즐거운 것"이 아니라 "비참한 것"이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이 고통에 대해 잘 알았는데, 그는 이것을 "환난의 경한 것"(고후 4:17)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사 43:2)나 그리스도의 동정(사 63:9; 단 3:25), 특별히 성령의 도우심과 위로(고후 1:5)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가볍고 쉽게" 만든다. 고통이 많아지고 오래 지속될수록 위로도 많아지고 오래 지속된다.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난관을 극복하게 하며 또한 우리가 일을 하거나 고난을 받게 될 때 직면하게 되는 실망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자.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잃게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에 의해" 잃어지지 않을 것이다.

(3) 우리는 우리의 선생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와야 하며, 또한 그에게 배워야만 한다(29절). 그리스도는 큰 학교를 세우셨으며 우리를 그의 문하생으로 초청하셨다. 우리는 들어가서 그의 학생이 되어야만 하며, 날마다 그가 그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 가르치는 교훈의 말씀을 경청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가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많은 대화를 가져야 하며 그것을 모든 경우에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가 행하신 것에 순응해야 하며 또 반드시 나타나 그의 발자취를 따라야만 한다(벧전 2:21). 어떤 사람은 다음의 말씀, 즉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를 우리가 그리스도의 실례로부터 배우도록 요구된 특별한 과목으로 삼고 있다. 우리는 그에게서 "온유하고 겸손한 것"을 배워야만 하며 또한 그에게 합당치 못하도록 하는 우리의 교만과 정욕을 억제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배우기"(엡 4:20) 위하여 "그리스도에 대해 배워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는 선생이시요 교제이시며, 안내자이시요, 길이시며,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 배워야"만 하는 두 가지 이유가 제시되어 있다.

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그러므로 너희를 가르치기에 합당하다.

첫째, 그는 "온유하시며," 또한 다른 사람들이 성을 내게 될 "무지한 자들에게 대하여 동정심"을 가시실 수 있다. 유능한 많은 선생들은 열정적이고 성급하기 때문에 우둔하고 더딘 사람에게는 크게 실망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러한 것을 참고 그들의 이해심을 열어 주는 방법을 알고 계신다. 열두 제자들을 향한 그의 태도는 이러한 것의 본보기였다. 그는 그들에게 온유하고 온화하였으며 또한 실망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셨다. 비록 그들이 부주의하고 곧잘 잊어버린다 할지라도 결코 그들의 어리석음을 탓하시지는 않으셨다.

둘째, "그는 마음이 겸손하시다." 그는 보잘 것 없는 문하생들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풋내기들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셨다. 그는 제자들을 궁전이나 학교가 아닌, 해변에서 선택하셨다. 그는 첫째 원리, 즉 어린 아기에게 우유와 같은 이러한 것들을 가르치셨다. 그는 가장 하찮은 자격에 자신을 낮추고 계신다. 그는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셨다(호 11:3). 그와 같이 가르칠 자가 누구냐? 우리가 이러한 선생님에게 배운다는 사실은 격려가 된다. 이러한 겸손과 온유는 선생으로서의 그에게 대한 자격이었던 것처럼 그것은 그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는 자들의 최고의 자격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은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시 25:9).

② "너희의 마음이 쉼을 얻을 것이다." 이 약속은 예레미야 6장 16절에서 인용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두 계약 사이의 조화를 보여 주시기 위하여 선지자의 글로 나타내시는 것을 좋아하셨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마음의 쉼(Rest for the soul)은 가장 바람직한 쉼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마음으로 하여금 "편안히 쉬게"하는 것이다.

둘째, "마음이 쉼"을 얻는 오직 유일한 방법과 확실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발 곁에 앉아 그의 말씀을 경청하는 일다. 의무의 방법이 곧 쉼의 방법이다. "이해"(understanding)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Knowledge) 안에서 "쉼"을 얻게 되며, 또한 모든 피조물들을 거치면서 헛되이 찾았던 지혜(욥 28:12)를 복음에서 발견함으로써 충족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진리는 우리의 마음을 내어 맡겨볼 만한 것들이다. 고통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쉼을 얻게 될 것이며, 또한 그 속에 그들에게 풍족함과 고요함, 확신을 영원히 주시는 것을 직면하게(알게)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만족들은 천국에서 완성하고 영속될 것이다. 우리는 그 천국에서 하나님을 뵙고 즉각적으로 즐거워할 것이며 그가 계신 그대로를 보게 될 것이며 우리의 하나님이신 그를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쉼(rest)은 그리스도에 대해 배운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자, 이것이 복음적인 부르심과 선물(제공물, offer)의 종합이며 본질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 마디의 말씀으로 주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고 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 대하여 여러 번 말씀하셨던 것과 일치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벧전5]-----------------

1.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Therefore, I exhort the elders among you, as your fellow elder and witness of the sufferings of Christ, and a partaker also of the glory that is to be revealed,

2.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shepherd the flock of God among you, exercising oversight not under compulsion, but voluntarily, according to the will of God; and not for sordid gain, but with eagerness;

3.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nor yet as lording it over those allotted to your charge, but proving to be examples to the flock.

4.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And when the Chief Shepherd appears, you will receive the unfading crown of glory.

5.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피차)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You younger men, likewise, be subject to your elders; and all of you, clothe yourselves with humility toward one another, for GOD IS OPPOSED TO THE PROUD, BUT GIVES GRACE TO THE HUMBLE.

5.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Therefore humble yourselves under the mighty hand of God, that He may exalt you at the proper time,

6.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casting all your anxiety on Him, because He cares for you.

7.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Be of sober spirit, be on the alert Your adversary, the devil, prowls around like a roaring lion, seeking someone to devour.

8.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But resist him, firm in your faith, knowing that the same experiences of suffering are being accomplished by your brethren who are in the world.

9.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After you have suffered for a little while, the God of all grace, who called you to His eternal glory in Christ, will Himself perfect, confirm, strengthen and establish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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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들에게 주는 권면(벧전 5:1-4)

우리들은 여기에서 아래와 같은 점을 주시해 볼 수 있다.

Ⅰ. 사도 베드로의 권고의 대상은 장로들, 목사들, 그리고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인데, 장로는 나이에 의한 것보다 직무에 의한 것이며, 사도 베드로가 이 서신을 써 보낸 교회의 사역자들이다.

Ⅱ. 이 권고를 하고 있는 사람은 사도 베드로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라는 말씀을 보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권고에 힘을 더하기 위해 사도 베드로는 그가 그들의 형제 장로 혹은 동료 장로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자신이 몸소 행하도록 마음먹은 것외에 다른 아무 것도 그들에게 지우지 아니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동산에 있었고 대제사장의 뜰에 그와 함께 갔었으며, 무리들 가운데 섞여서 멀리 떨어져서나마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시는 그리스도를 목격했던 것 같다(행 3:15). 그는 또한 변화산상의 영광에 다소나마 참예하였으며(마 17:1-3).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참석하여 크게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첨가하고 있다.

1.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직분을 가진 사람들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의 임무와 아울러 자신의 임무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2. 베드로의 정신과 태도가 그의 교만한 후계자들의 것과는 얼마나 상이한가! 그는 명령하거나 지배하는 일이 없이 다만 권고했다. 그는 모든 목사들과 교회에 대해 주권을 행사하려 하지 않았고 "사도들의 제후, 그리스도의 대리자 혹은 교회의 머리"로 자처하지도 않았으며, 다만 자신을 하나의 "장로"로 평가하고 있다. 모든 사도들이 장로였으나 장로들마다 모두 사도는 아니었다.

3. 자신이 장로이자 동시에 사도였음은 베드로에게 특별한 영광이나, 더욱 큰 영광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장래에 나타나게 될 영광에 참예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누릴 수 있는 특전권이다.

Ⅲ. 목사의 임무가 기록되었고 그 임무가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가 하는 방법이 기록되었다. 목사가 시행하여야 할 세 가지 임무는 아래와 같다.

1. "양 무리를 치라"는 것이다. 이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신실한 말씀을 전파함으로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명하는 바 지시와 교훈을 따라 양무리를 다스림으로 할 수 있다. 말씀을 전파하고 양무리를 다스리는 일은 "양 무리를 치라"고 하는 표현 가운데 모두 암시되어 있다.

2. 교회의 목사들은 양무리를 감독하여야 한다. 그들에게 위탁된 모든 양 무리를 위한 보살핌과 경계로써 장로들은 감독의 임무를 행하라고 권고한다.

3. 그들은 "양 무리에 본이 되어야"하며 경건, 자기 부정, 절제, 그리고 그들이 사람들에게 전하고 권고한 모든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를 준행해야 한다. 이러한 임무는 "부득이 함으로나" 꼭 하지 않으며 안된다는 이유 때문에 해서는 아니되며, 타의에 끌리어서거나 혹은 두려움이나 부끄러움의 강박감 때문에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만 그 일 자체에서 기쁨을 취하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지 않으며 안된다.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라." 즉 여러분들이 거하는 장소에 따르는 급료나 이익을 위해서나 직분에 따르는 어떤 부수입을 위해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라." 양털보다 양을 더 생각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신실함과 기쁨으로 섬기기에 노력해야 한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아야 한다." 억압과 완력으로 그들에게 폭정을 하거나, 그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지 말아야 한다(마 20:25, 26; 고후 1:24).

(1) 하나님의 교회와 모든 진실한 성도들의 뚜렷한 위엄이 있음을 기억하자. 이 가난하고 멸시당하며, 고난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양 무리다. 세상에 남은 자들은 사나운 짐승떼이다. 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거룩한 사랑과 상호간의 교제 속에 살면서 목자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구속함을 얻은 순종하는 양 무리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맡기운 자들 혹은 목사"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하나님의 특이한 무리는 그들의 특별한 축복을 즐기며 하나님께 특별한 봉사를 행하도록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평범한 무리들로부터 선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이 말씀은 신약 성서에서 볼 때 목사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2) 교회의 목사들은 그들의 교우들을 하나님의 "양 무리"로, 하나님의 "맡기운 자"로 생각해야 하며, 이에 따라 그들을 다루어야 한다. 성도들은 목사의 소유몰이 아니며 쾌락을 위한 이용물이 될 수도 없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을 위한 사랑, 온유, 그리고 친절로써 하나님께 속해 있는 그들을 대하여야 한다.

(3) 필요에 의하여 일에 이끌린다든지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게 된다면 그들이 꼭 해야 할 바 그들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것을 자원함으로 또는 즐거운 뜻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4) 목사가 성도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들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태도로 그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며, 동시에 그들에게 계속적으로 훌륭한 모범을 보여 주는 것이다.

Ⅳ. 많은 사람들이 사업에 있어서와 또는 목사의 직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기본적인 동기로 내세우는 더러운 이득에 반대하여 사도 베드로는 모든 그의 신실한 목자들을 위하여 위대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준비된 영광의 면류관을 그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양 무리와 맡기운 자들의 "목자장"이 되신다. 그는 양 무리를 사들이었으며 그들을 치리하신다. 곧 그는 세세토록 그들을 보호하시며 구원하신다. 그는 또한 모든 보다 못한 목자들에 대해 목자장이 되신다. 그들은 목자장으로부터 그들의 권위를 이끌어낸다. 그의 이름으로 행동하며 드디어는 그에게 책임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2. 이 목자장은 모든 목자들과 보다 못한 목자들을 심판하고 그들이 신실하게 공적인 면에서나 사적인 면에서 앞서 언급한 지시를 따라 그들의 임무를 신실하게 수행했는지 그들에게 책임을 묻기 위하여 나타나실 것이다. 

3. 그들의 임무를 이룩한 사람들은 세상적 이득보다 더욱 끝없이 좋은 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곧 그들은 목자장으로부터 영원한 영광의 드높은 지위,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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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들에게 주는 교훈(벧전 5:5-7)

사도 베드로는 교회의 목사 또는 영적 지도자들의 임무를 설정하고 설명한 다음 무리들을 교훈하는데 이르고 있다.

Ⅰ. 그들의 목사와 또한 교인들이 피차간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할까? 사도 베드로는 무리들이 일반적으로 그들의 연장자인 목사들보다 젊기 때문에 그들을 젊은이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낮음을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 주님께서 낮은 자를 의미하기 위해 사용하신 젊은이라는 말을(눅 22:26) 사용하였다. 그는 젊은이와 낮은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어른들에게 합당한 존경과 경의를 나타내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바라고 있는 것과 같이(히 13:17) 어른들의 훈계와 책망과 권위와 요청과 명령에 순종하라고 권한다. 서로가 책망을 받고 또한 피차간 격려를 받는 한, 또한 "서로간의 짐을 나누어지도록" 준비하며 피차간 우애와 사랑의 모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피차간에 복종하라"는 규율을 주고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사회의 모든 지시에 순종해야만 한다(엡 5:21; 약 5:16). 연령으로나 직분상으로 위에 있는 자들에게 순복해야 할 의무, 그리고 서로가 복종해야 할 의무는 인간들의 교만한 본성과 이기적 관심에 배치되는 것이므로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여러분의 마음, 태도, 의상, 그리고 전체의 몸가짐을 여러분이 지닐 수 있는 최상의 아름다운 습관인 겸손으로 단장하라. 이렇게 함이 복종과 의무를 용이하게 그리고 즐겁게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들이 불순종하며 교만하게 된다면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반대하며 통솔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이는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되 교만한 자는 대적하시기 때문이다."...((어느 한 사람이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관하여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거나 다 알 수 없기에(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서로 겸손과 온유함으로 의지하고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따라 [하나님, 그분의 계획, 경륜과 지금 일하심을] 잘 듣고 배우려는 [생명충만한 겸손의 ]명민한 마음으로 협동하며 행할 필요가 있음.))

1. 겸손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와 사회 안에서 평화와 질서의 위대한 보지자가 된다. 결과적으로 교만은 이 모든 것을 흩어 버리는 자가 되며, 교회 안에서 가장 큰 불화와 분열의 원인이 된다.

2. 말씀이 의미하는 대로 하나님과 교만한 자 사이에는 상호간에 반대되는 점이 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은 그들을 비웃으신다. 그들은 마귀와 같고 하나님과 사람들 중에 있는 그의 왕국에 대해 원수가 되므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잠 3:34).

3. 하나님이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실 경우 그는 더 많은 은혜, 더 많은 지혜, 믿음, 거룩함 그리고 겸손을 주실 것이다. 여기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말을 첨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6절).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서로만이 아니라 그의 심판을 세상에 내리시며 또한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하실 크신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겸손하여야 한다(4:7). 곧 그의 손은 능하시며 만일 여러분이 교만하면 여러분을 쉽게 끌어내리실 수 있으며, 여러분이 만일 겸손하다면 그의 손이 여러분을 높이실 것이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위한 최선의 것으로 아시게 되면 이 생에서나 그렇지 않으면 심판의 날에 그의 손이 이를 분명히 행하시게 될 것이다." 아래의 두 가지 점을 기억하자.

(1)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을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시는 모든 일을 인하여 우리를 겸손하게 하며 그에게 순복하도록 한다.

(2) 하나님의 손 아래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하는 것은 구원과 높임을 받게 되는 지름길이 된다.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 인내하며, 그의 뜻에 순복하며 회개와 기도 그리고 그의 긍휼을 소망하는 일은 적당한 때에 이르러 그의 도우심과 구원을 이루게 하여 준다(약 4:7, 10).

Ⅱ. 이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대단히 어려운 환경에 있음을 안 사도 베드로는 그가 앞서 말한 크나큰 시련이 이르고 있다는 것과 따라서 그들 안에 이 어려움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이 고조되고 있다는 것을 예상하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의 문제는 그들 자신에 관한 것이 아니면 그들의 가정,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것이다. 이런 조심스러운 염려가 무거운 짐, 그리고 혹심한 시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예견한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최선의 뒷받침하고 있다. 그의 권고는 "너희의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라"는 것이다. "여러분들의 심령을 꿰뚫고 여러분의 영혼을 상하게 할 만큼 매우 통렬하며 정신을 혼미케 하는 여러분의 염려를 하나님의 지혜롭고 은혜로우신 섭리에 맡겨 버리라. (형통할 때에는 주안에서 주닝이 그리하셨음을 기뻐하고 어려움 닥칠 때에는 주안에서 심사숙고하고 성찰해 보아 회개하되 마땅히 배워야 할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주님의 지고지선의 섭리를 믿는)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돌봐주신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염려에서 해방시키기를 원하시며, 여러분의 염려를 모두 맡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두려움을 막아 주시며 두려움 가운데 있는 여러분들을 도와주신다. 하나님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여러분을 향한 그의 부성애와 친절을 신뢰할 수 있을 만큼 모든 일들을 명하여 주신다. 따라서 전개되는 모든 일들이 상함이 없이 서로 합력/합동하여 선을 이루는 일들만이 여러분에게 임할 것이다"(마 6:25; 시 84:11; 롬 8:28). 아래와 같은 사실을 알아두자.

1.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지나친 근심과 염려의 짐으로 괴로워하기 쉽다. 그리스도인들의 염려가 다양하며, 하나 이상의 것, 다시 말해서 개인적인 염려, 미래에 대한 염려, 자신에 대한 염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염려, 그리고 교회에 대한 염려들이 라는 것을 암시하면서 사도 베드로는 그것을 "너희 모든 염려"라고 부르고 있다.

2. 선한 사람들의 염려일지라도 대단히 무거운 짐이 되며 때로는 큰 죄가 될 수도 있다. 그들의 염려가 불신앙과 무기력한 것으로부터 야기될 경우, 그들의 염려가 마음을 괴롭히며, 혼미케 하며, 우리들의 직분 이행에 부적합하며,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는 일에 방해하게 것이 될 때 그 염려는 모두 죄악된 것이다. 

3. 극단적인 무관심에 대한 가장 좋은 양약은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관심을 맡겨버리는 것"이며 매사에 있어서 모든 결정권을 그의 지혜와 그의 은혜로우신 결정에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하심과 그의 인도하심을 확실히 믿는 신앙은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적으로 안전하게 한다.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행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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