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03.10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에스겔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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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jk_park1128/199425  에스겔이 본 성전이 주는 意味 중의 둘 


에스겔이 본 성전이 주는 意味 중 하나(겔40:48-41:11)

겔 40:48 그가 나를 데리고 전문 현관에 이르러 그 문의 좌우 벽을 척량하니 광이 이편도 오척이요 저편도 오척이며 두께가 문 이편도 삼 척이요 문 저편도 삼척이며 *49 그 현관의 광은 이십척이요 장은 십 일척이며 문간으로 올라가는 층계가 있고 문 벽 곁에는 기둥이 있는데 하나는 이편에 있고 하나는 저편에 있더라

겔 41:1 그가 나를 데리고 성소에 이르러 그 문벽을 척량하니 이편 두께도 육척이요 저편 두께도 육척이라 두께가 이와 같으며 *2 그 문통의 광이 십척이요 문통 이편 벽의 광이 오척이요 저편 벽의 광이 오척이며 그가 성소를 척량하니 그 장이 사십척이요 그 광이 이십척이며 *3 그가 안으로 들어가서 내전 문통의 벽을 척량하니 두께가 이척이요 문통이 육척이요 문통의 벽의 광이 각기 칠척이며 *4 그가 내전을 척량하니 장이 이십척이요 광이 이십척이라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지성소니라 하고 *5 전의 벽을 척량하니 두께가 육척이며 전 삼면에 골방이 있는데 광이 각기 사척이며 *6 골방은 삼층인데 골방 위에 골방이 있어 모두 삼십이라 그 삼면 골방이 전 벽 밖으로 그 벽에 의지하였고 전 벽 속은 범하지 아니 하였으며 *7 이 두루 있는 골방이 그 층이 높아갈수록 넓으므로 전에 둘린 이 골방이 높아갈수록 전에 가까와졌으나 전의 넓이는 아래위가 같으며 골방은 아랫층에서 중층으로 윗층에 올라가게 되었더라 *8 내가 보니 전 삼면의 지대 곧 모든 골방 밑 지대의 고가 한 장대 곧 큰 자로 육척인데 :*9 전을 의지한 그 골방 바깥벽 두께는 오척이요 그 외에 빈터가 남았으며 *10 전 골방 삼면에 광이 이십척 되는 뜰이 둘려 있으며 *11 그 골방 문은 다 빈터로 향하였는데 한 문은 북으로 향하였고 한 문은 남으로 향하였으며 그 둘려 있는 빈터의 광은 오척이더라 


에스겔이 본 성전의 규모를 보면 성전 벽의 두께에서부터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다.

먼저 성전의 벽은 두 겹으로 되어있고 이 벽의 두께가 외벽은 5척(약2.5m)이고 내벽은 6척(약3m)로 되어있으며 내 외벽 사이에는 4척(약2m) 넓이의 방으로 되어있어 전체 두께가 15척(약7.5m)이다.

이런 벽의 설계는 형식으로는 내 외벽 사이에 공간을 두어서 일정한 온도유지((보온-방열/냉방))효과를 극대화 하고 외부소음을 차단하며 완전한 보호를 제공해 주는 점으로는 어찌 보면 동일하다 할 수 있지만 두께가 가지고 있는 효과에서 본다면 요즈음의 건축물로도 따라올 수 없는 탁월한 설계임에 틀림없다. 만일 이렇게 건축된 집에서 산다면 난방 열의 손실이나 여름의 무더위에도 따로 냉방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런 건축의 형식이 주는 意味에는 매우 중요한 意味를 주고 있는데 그것은 성막을 통해서 보여주던 意味와 같은 意味로써 좀더 세분화된 意味를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런 점에서 살펴보면 그림의 치수에서 보듯이 그 입구에서부터 제시하여 주고 있는 상징적인 意味를 볼 수 있다.

번제단이 놓여 있는 성전앞뜰(동쪽임!!)을 지나서 야긴과 보아스 두 기둥으로 표현된 현관문을 지나서 (참된 구원이랄 수 있는) 성소와 지성소로 구성된 성전내부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세상과 성전된 성읍을 분리하는 그 성전벽안쪽으로 들어 와서 백성의 뜰(바깥뜰)에 있어야 하고... 여기에서 비로소 성전앞뜰의 번제단에 이를 수 있는 7계단을 올라야 안뜰(백성 입장에서는 안뜰...안뜰로 가는 문은 북, 동, 남쪽에 3개 있고 북쪽문 옆에는 제사장이 번제물을 씻는 장소가 있음)을 가로지르는 문을 통과할 수 있는데 각각 그 계단의 너비는 40척이고 계단의 수는 일곱 개로 되어있다. 이것은 일곱이라는 성령의 役事를 통하여 성전앞뜰의 번제단에 이르는 그 입구로 들어가야 (안뜰을 통과해서) 번제단에 이르고 번제단을 거쳐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8계단을 올라야 야긴과 보아스의 두 기둥이 서 있는 현관문을 거쳐서 참된 구원, 즉 성소로 들어 올 수 있되 가장 먼저 40이라는 연단의 7계단을 통해서라야 들어 올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즉, 교회만 나가서 예배에 참석했다고 해서 누구나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니라는 뜻으로, 온전한 구원은 성령의 役事와 연단이라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연단없는 성령의 役事가 없고 성령의 役事가 없는 연단이 없다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비록 번제단((예수그리스도 십자가 대속))을 지나기는 했지만 그림에서 보듯이 이 단계는 아직까지는 온전한 참된 구원에 이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음은 이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을 개인적으로 적용함의 의미인] 8계단을 더 지나야만 두 기둥(야긴[그가 세우신다]과 보아스[그에게 능력이 있다]...현관문간임을 시사...전적으로 주하나님께 의지할 때에야 비로소 그 다음 목적지인 성소에 도달가능 의미 )이 나오는데, 이 두 기둥의 동쪽에 8계단이 있고 그 아래가 성전앞뜰이고 그 두 기둥사이, 즉 현관 입구 통로의 너비는 20척으로 줄어들어 있다.

이것은 40이라는 숫자의 반으로, 성령의 役事와 연단을 통해 믿음을 가졌다고 해도 합격률은 반밖에 안 된다는 뜻과도 같다.

다시 말해서 40명의 성도가 연단과 성령의 役事를 받고 믿음으로 나아갔을 때 막상 더 추구하여 그 문에 들어가는 사람은 20명 뿐으로 2:1의 비율로 믿음의 크기를 겨루어야 하고 여기에서 탈락한 성도는 더 연단과정이 필요하다는 뜻이며, 이것은 [아버지를 지성소에서 누리는 궁극적 구원에 이르기를 힘써 추구하는] 믿는 이 자신의 전존재를 쏟아 붓는 열과 성이 없이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노력을 경주한 결과로 비로소 온전한 구원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는 현관에 오르게 되면 그 다음의 성전의 외전(=성소)의 문 너비는 또 반으로 줄어들어 있다.

이 성소외전문은 성소로 들어가는 문으로써 이 문은 10척으로 되어있고 이곳에 들어가면 바깥 세상과는 영영 결별하는 순간이 되는 것이다. 즉, 그 성도의 삶의 성격이 세상의 삶을 완전히 떠난다는 의미이며, 그의 삶의 목적은 오로지 성소가 가지고있는 意味대로 예수님만을 위한 삶이 된다 함이다. 동시에, 이 성소의 이중벽의 의미는 단열 효과가 크다는 점에서 밖의 온도변화가 어떤 영향을 주지 못하는 이른바 주님 품에 안김, 다른 세상에 속한 삶을 산다 함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성소로 들어선, 다른 세상에 속한 사람과 같은 삶을 사는 성도, 바로 그는 비로소 바로 하나님의 役事와 歷史를 이루는 사명자의 임무를 감당할 수 있게 된 후보자가  됨을 뜻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소로 들어온 사명을 감당할 후보자는 이제 더 나아가서, 두 단계로 자기의 믿음과 智識을 쌓아야 하는데, 그것은 성소의 크기가 지성소의 두 배의 크기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즉, 성소 문 쪽의 위치에서 서서히 안 쪽으로 들어감으로써 (문통로 너비가 다시 줄어들어서 5척밖에 안되는) 마지막의 문인 성소내전의 문을 통과해서 지성소로 들어갈 때 비로소 완전한 사명자가 되는 것이다.

즉 40명의 성도가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고 할 때 마지막으로 지성소안에 들어가는 성도는 다섯 명에 불과하다는 뜻이 되기도 하는 것으로 전체의 12.5%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에서 2080, 또는 8020이라는 숫자가 가지고있는 뜻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이 숫자는 대다수의 단체나 집단을 이끄는 사람은 전체의 20%라는 뜻으로써 교회도 역시 다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100명의 성도가 예배드리는 교회의 경우, 그 모두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그 교회가 돌아가는 것은 20명에 의해서 움직이고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2080의 확률은 母數가 많아질수록 분포율이 낮아져서 심할 경우에는 5%까지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해 볼 때 본 성전의 문이 가지고있는 수치의 意味인 12.5%는 평균수치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과연 나는 이 평균 비율 안에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는가...?"를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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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이 본 성전이 주는 意味 중 두번째

에스겔이 본 성소의 모습은 100척X50척(약500mX250M)의 성전 자리가 있고 그 자리는 100척X100척 크기의 대지 위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그 대지 앞에는 같은 크기(100척X100척)의 뜰이 있고 그 뜰의 가운데에는 번제단이 위치하고 있다.

또 성전대지의 뒤에는 역시 같은 크기(100척X100척)의 대지가 있고 그 위에는 용도가 알 수 없는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의 크기는 90척X70척으로 성전(100척X50척)보다 더 약간 더 크다.

여기에서 같은 크기(100척X100척)의 대지 셋이 주는 意味를 살펴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구원의 役事를 이루어 나가는 세 단계를 意味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意味는 우선 번제단이 있는 성전 앞뜰이 주는 意味로써 모든 성도는 번제라는 희생(犧牲)을 통하여 일단의 구원의 役事가 이루어지며 그 다음의 과정이 바로 성전이 주는 意味인 예수그리스도의 뜻을 이루는 사명의 감당을 통해서 완성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완성된 믿음과 아들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확보한 성도가 마지막으로 성전의 뒷건물이 주는 意味인 하나님이 준비하신 곳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뒷건물은 마지막의 장소인 천국, 즉, 재림과 함께 있게될 "어린양 혼인잔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意味를 보여주는 이 세 구역은 다음 그림과 같은 모양으로 되어있어서 또 다른 意味를 부여하고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에서 보듯이 성전이 있는 가운데 구역 중에서 성전이 서있는 지면과 성전 뒷건물이 있는 구역이 번제단이 있는 구역과 그 높이가 다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주는 意味는 성도가 계단을 통해서 성전에 들어간다는 意味인 사명의 감당을 하지 않고도 성전의 구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意味로써 번제라는 희생을 통하여 구원에 이른 성도가 성전의 옆뜰로 들어옴으로 성전 가까이 들어올 수 있듯이 이는 사명감당이 모든 성도의 의무는 아니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물론 구원이라는 意味와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일은 사명을 감당한다는 거대한 임무를 실천하지 않아도 가능한 것이다.

바로,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성도가 번제를 드리고 같은 높이로 되어있는 성전 건물 옆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듯이 예수를 믿고 그 삶의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실천함으로써 義에 이를 수는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계단을 올라서 성전에 들어가듯이 한 계단 승화되는 사명의 감당을 통하지 않고는 성전 뒷건물이 주는 意味인 "어린양 혼인잔치"에 초대되는 일은 불가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있다고 한다.

그러나 연단과 사명의 감당을 통해서 재림을 볼 수 있으며 또, "어린양 혼인잔치"에 초대되는 "신부"나 "청함을 받은 자"가 되어야 "어린양 혼인잔치"를 볼 수 있다고 하면 부정하려고 한다.

이것은 예수만 믿고 삶을 통해서 예수님의 향기를 나타냄으로써 구원에 이른다는 이론을 믿고싶은 마음과 연단을 피하고 천국에 가고싶은 마음에서 나오는 부정인 것이다.

물론 에스겔이 본 성전의 모습이 주는 意味에서 보듯이 믿고 회개함을 통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고, 또, 사명에 들어가지 않고 삶을 통한 실천만으로 구원은 이루어진다.

이것이 번제단이 있는 뜰의 높이와 성전 옆 뜰의 높이가 같은 높이로 되어있는 모습이 주는 意味이다.

그러나 이런 성도는 결코 어린양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어린양 혼인잔치로 상징되는 성전의 뒷건물이 있는 땅의 높이가 다르다는 것이 주는 意味인 것이다.

즉, 계단이 주는 意味인 연단을 통해서 성전에 들어갈 수 있고, 그리고 그 성전 안이 주는 意味인 "구원의 役事를 아는 智識"을 얻는 성소가 주는 意味, 그리고 지성소가 주는 意味인 "완성된 성도", 또는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가 되었을 때 같은 높이로 되어있는 성전 뒷건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건물이 바로 "어린양 혼인잔치"를 意味하는 것이므로 그 높이로 성도의 믿음의 위상이 부상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거치는 과정의 시작이 성소 앞에 있는 연단의 계단인 것이다.

그러나 혹은 번제라는 과정을 통해서 중생한 성도가 연단이라는 계단을 통하지 않고 성소 옆뜰에 서성이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여 어린양 혼인잔치가 열리면 턱을 기어올라가서 어린양 혼인잔치에 참예하면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그런 기회를 부여하지 않겠나...?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없는 것이 이 성소의 구조가 주는 意味로써 그 한 예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문을 통하지 않고 담을 넘어 들어온 자는 도둑이라고 성경은 정의하는 것이 같은 意味인 것이다.

즉, 어린양 혼인잔치가 시작될 때는 이미 "신부"로 초대된 자가 있고 "청함을 받은 자"가 준비된 후이기에 혼인잔치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들이 바로 지성소에 들어갔다는 意味의 사명자로써 이들이 "신부"이며 아직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성소에 머물러서 智識을 얻고 있던 자들이 "청함을 받은 자"들로써 등불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던 열 처녀들 중에서 기름을 준비하고있던 다섯처녀가 바로 그들인 것이다.

그리고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던 다섯 처녀는 아직 성소의 현관에 있거나, 또는 성소 옆뜰이나 앞뜰에 있던 자들로써 그들은 기름을 사와야 하고 그들이 기름을 사왔을 때는 이미 어린양 혼인잔치는 끝이 나게 되어있으며 그들은 잔치가 끝난 후에 신랑을 맞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으로 그들을 심판하는 자는 바로 지성소라는 사명의 감당을 이루고 신부가 된 "아들들"인 것이다.

이런 상징적인 意味로 보여주는 성소가 주는 意味에서 과연 나는 어디에 위치하고있으며, 지금 무엇을 추구하고있으며, 어떤 생각으로 천국에 이르려고 하고있는가...? 한번 생각해 볼 일일 것이다. 

혹시... 연단의 계단을 오르지 않고 성소 옆뜰에서 서성이다가 턱을 기어 올라서 혼인잔치에 참여하려고 하고있지는 않은지.....?

그러면서도 천년동안 있게 될 안식기간에 왕노릇 하려는 욕구를 가지고있지는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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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이 본 성전이 주는 意味 중 세 번째

에스겔이 본 성소의 전체크기는 500척X500척(약250mX250m)로 되어있다.(1척=0.534m)

그리고 그 정 가운데에 성전 앞뜰(100척X100척)이 있고 그 중심에 번제단이 있다.

이것은 성소의 전체가 주는 意味에서 구원의 틀이라는 意味와 함께 그 구원의 가장 중점적인 것이 번제가 주는 意味인 "속죄"가 구원과 밀접한 意味를 가지고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意味이다.

이런 意味는 두 말할 것 없이 희생이라는 과정을 몸소 실현하신 어린양예수님이 단번이 이루신 십자가를 통한 속죄를 뜻하는 것으로 그 구원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또 예수그리스도의 意味는 성전 전체가 가지고있는 意味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이 때의 "예수"라는 意味는 십자가에 돌아가신 인자예수라는 意味와는 달리 "구원의 役事"라는 意味에서의 "예수"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그런 구원의 役事 안에 들어오는데는 필히 문을 통해서 들어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이 문들이 가지고있는 意味또한 예수그리스도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수그리스도라는 意味의 문을 통해서 들어온 모든 인간은 다 구원의 役事 안에 있는 것으로 그들은 일단 "박석 깔린 곳"에 위치한다는 상징적인 意味가 본 성전이 주는 일차적인 意味인 것이다.

여기에서 "박석"이라 함은 예수님이 빌라도로부터 십자가형을 언도 받은 자리를 뜻하는 것으로 곧, 십자가라는 속죄의 役事 안에 들어왔으므로 성도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일단의 구원에 이른 성도는 그림의 "박석깔린 곳"에 위치한다는 상징과 함께 그 위에 있는 방에 거한다는 상징도 함께한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를 뜻하는 것으로 이 그림이 보여주듯이 어떠한 체제인 세상에서 격리되어있다는 것을 意味하는 것으로 곧, 이 성전의 밖이 세상을 뜻하는 셈이다.

이러한 세상이라는 곳에서 믿음을 갖기 위해 그는 계단을 오르는 연단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스스로가 믿음으로 나오기로 결단한다는 意味가 될 것이다.

그러나 믿음에 이른다는 일은 자의로만은 될 수 없는 일이고 모든 행위에는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役事가 있어야되는데 그것은 사람이 계단을 오르는데 힘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되듯이 하나의 연단을 통과하는데는 성령의 役事가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힘으로 믿음 안에 들어왔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고 성령의 役事인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짐을 알아야할 것이다.

이렇게 첫 관문을 들어와 성도가 되었고 그 성도는 박석깔린 곳에 위치한 방에 거한다는 상징성으로 곧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위치에 있는 사람은 모두 구원받았지만 그가 완전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안뜰로 들어가는 문을 통과해야한다는 것이 이 성전의 두 번째 문이 주는 意味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박석깔린 곳에 위치한 성도인 교회 다니는 사람은 구원은 받았지만 그 구원은 마지막 심판 때에 지옥에 떨어지는 판결만 피했다는 것 뿐으로 그가 소망하는 천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다음의 문 앞에 있는 계단에 발을 올려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성도들은 이 박석깔린 곳이 좋은지 거기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는 것이 현금의 세태이다.

여기에서 전에 언급했던 2080이라는 비율이 성립되고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즉. 전체성도 중 20%정도가 두 번째 문을 통과해서 번제단에 이르고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 다음의 과정인 성전의 계단에 오르는 성도는 얼마나 될까?

아마도 이 비율도 2080에 적용되지는 않을까.......?

이 또한 적중되는 확률이라면 20% 중의 20%이므로 전체에서는 4%밖에 되지 않는데 이 4%가 성소현관에 이르는데 반으로 줄어 2%, 그리고 또 성소 안으로 들어가려면 다시 반으로 줄어서 1%, 이렇게 되면 이 세상 사는 동안에 마음-뜻-힘, 즉 열과 성을 다하여 하나님아버지를 추구함으로써 지성소문을 지나 자성소안으로 들어가 아버지를 누리고, 어린양의 신부로써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성도는 다시 반으로 줄게 됨으로 0.5%에 불과하다는 결론인 셈이다.((구주 믿는 믿음 고백한 모든 성도들 기준으로 볼 때 1/8정도에 불과??))

이런 추이를 한국의 1000~ 1200만 성도에 비교한다면 약5~ 600,000이라는 결론인데...... 생각보다 많은 수가 아닌가....? 한다.

즉 1,000명의 성도가 모이는 교회의 경우 5명이라는 말로써 이 정도면 오늘날의 교회는 희망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희망이 있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役事와 歷史가 완전하게 이루어진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0.5%는 언제까지나 0.5%에 불과한 것이고 그들은 어린양 혼인잔치의 신부로써의 자격을 받은 성도들일뿐, 모든 성도의 구원은 어떠한 절차를 통해서라도 다 완전하게 되어야하기 때문으로 모든 성도는 육체가 죽은 후에라도 그 연단의 계단을 마저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상징성으로 되어있는 "백성의 뜰"과 "박석 깔린 곳"에 거하는 성도들과 함께 거하는 부류가 있으니 그들이 제사장들이다.

이 제사장은 오늘날의 교회 지도자들을 뜻하는 것으로 그림과 같이 제사장의 방은 백성들의 뜰과 안뜰에 걸쳐져서 세워져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아마도 백성들을 뜻에 세워져있는 부분은 박석 깔린 곳에 거하는 성도, 즉, 성도라고 이름하기보다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적절할 성도들과 늘 같이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을 것이고 그런 반면에 지도자들이 추구함이 성전과 가까이함으로 안뜰에도 거하는 것으로 상징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좋은 意味로만은 볼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제사장들의 방이 안뜰에 세워진 부분은 3층으로 되어있는 점이다.

그런데 건물 구조와 기록된 통로 위치를 보면 안뜰에 있는 건물의 1층은 지하일 가능성이 높다.

즉, 지하1층, 지상1층, 그리고 옥탑방으로 되어있어서 모두 3층으로 되어있으며 이 옥탑방에는 툇마루까지 있어서 요즈음의 주택 구조로 본다면 아파트의 베란다로 보거나 아니면 발코니가 있는 호화저택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 상층의 툇마루가 반은 성전을 향하여 있고, 반은 백성의 뜰을 향하고있어서 앞에서 생각해 본대로 밖으로는 성도를 살피고 안으로는 하나님을 향하는 지도자의 모습으로 상징될 수 있으나 3층이라는 구조와 노출되어있는 툇마루가 높은 층에 위치해있다는 것은 무언가를 시사하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그 意味가 그리 좋은 意味는 아닌 것 같아 느낌이 편치만은 않다.

그리고 그 방으로 통하는 통로 또한 유일하게 건물의 동편에 담에 의지하여 나있는 통로밖에 기록된 것이 없어서 이 통로만을 사용하게 되는 이유가 나름대로는 이해가 되는 것은 현금의 대형교회를 섬기는 지도자들의 처세와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아 이 상징이 이해는 되기도 한다.

그러나 북편 뜰의 제사장 방과 통로의 위치를 기록하는 중에 "제물 잡는 상"과 가까이하게 하여 제사장들이 "성물을 밖으로 가지고 나갈 경우 백성들을 거룩하게 할까 함이라"(겔46:20)라는 기록대로 외부와의 접촉이 여의치 않도록 건축한 점으로 볼 때 성도가 지도자의 삶에 관하여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만 아무튼 이 구조와 크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것 같다.

이렇게 여러 가지의 意味와 상징을 보여주는 이 성전이 주는 意味에서 성도로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역시 각 층에 오를 때마다 거쳐야하는 계단으로 이는 성도가 한 단계씩 성화되기 위해서는 계단이라는 연단이 필연적이라는 싱징이다.

즉, 성전 밖인 세상에서 믿음에 이르는데부터 연단은 시작되어서 "박석깔린 곳"인 믿음의 자리에 이르고, 그 다음은 성전 안뜰에 이르기 위해서 다시 연단의 계단을 올라야하며 또, 성전에 오르는 성화를 위하여 연단의 계단을 올라야하는 이 모든 과정은 성도가 살아서 오르는 계단이 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성령의 役事와 은혜로 이룰 수 있겠지만 만일 그가 연단을 거치지 않고 죽는다면 죽은 후에라도 이 과정들은 피할 수 없는 연단의 계단이라는 뜻인 것이다.

이런 상징을 가지고있는 성소가 주는 意味에서 과연 나는 지금 어느 계단을 오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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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이 본 성전이 주는 意味 중 네 번째(겔41:16-17)

(겔 41:16) 문통 벽과 닫힌 창과 삼면에 둘려 있는 다락은 문통 안편에서부터 땅에서 창까지 널판으로 가리웠고(창은 이미 닫히었더라)

(17) 문통 위와 내전과 외전의 사면 벽도 다 그러하니 곧 척량한 대소 대로며


에스겔이 본 성전을 좀더 자세히 보면 그 내외부가 나무판으로 둘러있고 위에는 창이 있는데 이미 그 창은 닫혀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볼 때 이 모양과 상태는 노아방주와 같은 意味를 가지고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창이 이미 닫혔다는 기록으로 노아방주의 창이 열린 상태에서는 아직 비가 오기 전이었고 비가 오기 시작하면서 이미 창은 닫혀있었던 것이 이 성전의 창이 이미 닫혔다는 기록과 관련성을 갖는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성전이 주는 意味의 시기는 진노가 시작되는 시점으로 노아 때에 진노의 비가 올 때 이미 창이 닫혔듯이 예수님께서 일곱 번째 인을 떼면서 시작되는 첫째 나팔이 불어지는 시점임을 알 수 있다.

또 노아방주와 이 성전이 가지고있는 동일성은 형태뿐만 아니라 규격에서도 일치를 이루고 있다.

이 성전의 넓이는 50척으로 노아방주의 폭이 50규빗이라는 점과 같다.

물론 그 기본 단위의 크기는 차이가 있지만 그 또한 意味를 가지고있는 단위이다.

즉, 본 성전에서의 1척은 1규빗((45.72cm=1.5ft)에서 한 손바닥넓이가 더해진 단위로써 약 53.34cm이다.

이렇게 기본 단위가 늘어난 것이 주는 意味로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서 증가된 役事의 질과 양과 믿음의 깊이가 늘어남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증가된 시대를 통해서 役事하는 구원의 役事의 틀에는 변함이 없는데 그것이 50규빗이라는 치수와 50척이라는 수치의 동일성이다.

이렇게 폭이 가지고있는 수치가 같다면 이 성전의 높이는 기록되어있지는 않지만 노아방주의 높이를 대입하여 볼 때 30척이 분명하다.

그러나 길이의 경우에는 노아방주의 경우 300규빗으로 본 성전크기인 100척의 3배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런 규격도 노아방주가 가지고있는 300규빗이 지닌 意味를 분해해볼 때 같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그것은 300규빗이 주는 意味가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全 歷史의 크기인 6,000년에 해당되므로 이를 시대별로 나누면 100규빗이 되어 결국 이 성전의 규격과 같게 된다.

이렇게 일치되는 치수는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하는 중에 사용한 성막으로 그 회막의 크기가 본 성전의 크기와 같은 50규빗x100규빗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 성전에 들어간다는 상징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는 본 성소의 전체크기인 500척 안에만 들어와 성도가 "박석깔린 곳"이 주는 意味에만 거해도 일단의 구원은 이루어진 것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 본대로 회막의 크기(100x50)와 노아방주의 크기에서 마지막 시대로 상징되는 크기(100x50), 그리고 본 성전의 크기(100x50)가 주는 意味를 구원이라는 측면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가장 처음으로 보여준 상징인 노아방주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그 시대(제1시대=아담과 노아시대)에는 일단 노아 방주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은 모두 멸망하였고 구원을 받은 사람은 오로지 노아를 비롯한 여덟식구 뿐이었다.

이렇듯이 그 다음의 시대인 제2시대(구약시대)에는 성막이라는 상징을 통해서도 일단 회막(100x50) 안에 들어온 백성은 모두 구원받았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시대(제3시대=신약시대)에 보여주는 구원은 어디까지를 뜻하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구원의 완성이 500척x500척이라는 성전 전체크기 안이라면 무언가 일치성이 없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구원은 회막의 크기가 주는 치수의 意味대로 100x50안에 들어와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 장소가 바로 이 성전(100x50)이라는 말로써 곧 완전한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길은 (어쩌면) 사명의 길로 나간 성도로써의 사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다시 말해서 신약시대에 있어서의 구원의 커트라인은 사명의 감당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사명을 감당한 성도들인 이 성전 안에 들어왔다고 말 할 수 있는 성도들이 예수님의 재림 때에 있을 혼인잔치에 "신부"와 "청함을 받은 자"들로써 참여하게 될 것이고 그런 성도들만이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어지는 천년 동안의 안식기간의 주인이 될 것이고 그런 안식이 진행되는 기간을 통해서 나머지 성도들은 그들이 오르지 않고 있었던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그것은 죽은 후라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연단으로 어쩌면 아들들이 천년동안의 안식을 누릴 동안 연단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연단의 결과를 판정 받아야 하는데 그것이 천년의 안식이 끝나면 있게 될 심판으로 곧 성도심판인 "양 7,000 심판"인 것이다.

물론 이 심판 때에 믿지 않던 영혼들은 심판도 필요없이 "불못"이라는 연단으로 들어가야 하며 그들의 심판은 각기 가지고있는 크기대로 순차적으로 심판에 임해야하는 또 다른 절차가 있는 것이다.

자기의 知識에 의지하여 살던 사람들, 물질에 의존하여 살던 사람들, 하나님 믿는 믿음을 자신의 욕구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사이비들에게는 각각 합당한 심판이 이미 예정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연단의 계단을 기꺼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오르고 더 나아가 [성소로 들어가기 위한 8계단을 경험한 믿는 이, 즉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부활생명 경험함으로써] 사명을 감당하고자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성도만이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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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이 본 성전이 주는 意味 중 다섯 째

에스겔이 본 성전의 벽은 이중으로 되어있고 그 사이는 30개의 골방이 세 개 층으로 나뉘어져있다.

이렇게 골방들에는 각층마다 10개씩 있다는 것은 10이라는 숫자가 주는 意味대로 세상에서 이루는 완성을 意味하며 세 개 층으로 되어있음은 각층이 가지고있는 단계적인 믿음의 성장을 意味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성을 보여준 것이 노아방주가 3층으로 되어있는 것으로 이것은 방주 안에 들어갔던 종류가 주는 意味와 본 성전의 골방이 주는 意味가 연관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즉, 방주에 들어갔던 종류를 대별하면 1/육축, 2/새, 3/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것은 그 이름이 가지고있는 단계를 뜻하는 것으로 가장 낮은 단계를 "육축", 다음단계를 "새", 그리고 가장 높은 단계를 "사람"이라는 이름을 빌어서 설명하고있는 것이다.

이렇듯이 이 성전의 골방에 해당되는 단계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즉, 가장 아래층의 골방에는 "육축"과 같은 신앙이 그 대상이 될 것이고 중간층은 그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는 "새"에 해당하는 단계, 그리고 3층에는 "사람"에 해당되는 대상이 될 것이다.

이러한 골방의 각층이 가지고있는 상징적 意味는 본 성전의 "현관", "성소", "지성소"가 가지고있는 意味, 또 "박석깔린 곳", "번제단 뜰", "성전 안"으로 분류되는 믿음의 성장 상징과 관련을 갖는 것으로 그 단계적 성장과 실천의 결과대로 이 골방의 층과 관련을 갖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골방의 용도는 과연 무엇일까...?

여러 가지로 기록을 살펴 볼 때 이 골방은 성전에 종사하는 레위인들이 사용하는 곳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 판단은 각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는 기록이 없으며 또 출입하는 문이 없고 다만 창문만 있다는 기록을 하고있는데 이 창문마저도 닫혀있는 상태이다.

단지 기록이 있다면 아래층에서 중층으로, 또 중층에서 상층으로 올라간다고만 되어있다.

이것은 앞에서 설명한 각층이 가지고있는 단계적인 성장의 意味를 설명하는 부분으로써 이 골방은 성도의 신앙, 또는 사명의 감당과 관련을 가지고있음이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이 골방은 "영혼의 방"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사명을 감당한 성도가 그이 육신의 삶이 끝났을 때 영혼들이 쉬는 곳인 "낙원"의 상징을 가지고있는 장소로써 성전 뒷건물이 주는 상징대로 어린양 혼인잔치가 열리게 되는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때까지 영혼들이 머무르는 "낙원"의 상징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영혼들은 그 믿음의 분류가 필연적이고 그 분류대로 그들이 거하는 위치를 달리하여 놓은 것이다.

즉, 믿음을 가지고는 있되 "육축"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영혼은 가장 아래층의 골방에 거하고

"새"와 같은 믿음인 명예를 얻을 만한 믿음을 가졌던 영혼은 중층에 거하고

그리고 가장 완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 즉, 노아 방주에 오른 종류를 단계로 볼 때 사람에 해당하는 것은 노아의 여덟식구 뿐으로 그들의 믿음이 곧 사명의 감당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는 상징은 바른 믿음이자 완전함으로 믿은 자들로써 곧 사명을 감당한 자들이 상층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단계에 따라서 그 거하는 방의 크기도 달라지는데 그림에서 보듯이 하층의 방은 4척(약 2m)으로 가장 좁고 그 다음부터는 건물의 외벽으로 걸쳐져서 조금씩 넓어져서 3층이 가장 넓다.

이것은 그 단계가 가지고있는 공로에 따라서 거하는 면적이 넓어지는 반면에 단계에 따라서 대상 수가 줄어들으므로 영혼이 거하는 밀도의 차이는 더욱 심해지게 된다.

즉, 1,000명의 영혼이 거한다고 가정 할 때 각 층과 각방에 거하는 수는 다음과 같이 분포된다고 볼 수 있다.

* 1층/ 1,000x80%=800명/ 1층 전체=800명/ 각방=80명씩(믿음=박석깔린 곳)

** 2층/ 남은 200명x80%=160명/ 2층 전체=160명/ 각 방=16명씩(믿음=번제단 뜰)

*** 3층/ 남은 40명/ 3층 전체=40명/ 각 방=4명씩(성소에 들어온 사명자들)

또 이것은 일단의 믿음을 가지고 구원을 받은 영혼들이 거하는 곳과 믿지 않고 죽은 영혼이 거하는 것이 분류됨을 보여주는 것으로 일단 믿기만 하면 이런 상징적인 장소에서 안주하게 될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있는 모든 영혼이 다 어린양 혼인잔치에 참예하게 될 것인가...?

결코 그렇게는 될 수 없음은 이미 설명한대로 창문은 위에만 있고 그 아래에는 널판으로 가려져 있음이 그것을 말하고있는 것이다.

즉, 1층과 2층이 가려져 있다는 것은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가장 위에 창문이 있다는 것은 때가 되면 그 문이 열리고 그 안에 있는 영혼은 그 다음의 절차에 따라서 나오게 될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어린양 혼인잔치의 신부들이며 또 청함을 받은 자들로써 사명을 감당한 영혼들인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세 단계의 믿음을 통해서 그들이 받는 결과가 다른 그 시발점은 어디인가?

그 시발점이 바로 "박석깔린 곳"으로 그 자리에는 골방의 수와 같은 수인 30개의 방들이 있어 그 상징의 장소에 믿음으로 나온 성도들이 모이는 것이다.

그런 자리에서 일부가 다음의 장소를 향해서 출발하게 되는데 그 비율을 2080이라는 비율에 대입하여 볼 경우 다음의 자리로 출발하는 성도는 20%뿐이라는 예측이다.

이렇게 출발한 20%의 성도는 안뜰의 문을 거쳐서 번제단이 있는 성전 앞뜰에 이른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또 20%가 다시 성전의 계단을 향하여 출발하여(전체의 4%) 계단을 오르게 되고 

또 그들 중에 일부(전체의 2%)가 현관으로.... 

또 그들 중의 일부(전체의 1%)가 성소 안으로...... 

또 그들 중의 일부(전체의 0.5%)가 지성소로 들어가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役事와 歷史는 이루어져 나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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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삼마 1

(겔 48:35)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에스겔이 본 성전은 4,500척x4,500척의 크기로 된 성읍 안에 있고 이 성읍을 이름하여 "여호와 삼마"라 하였다.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는 뜻으로써 곧,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고 이 성읍 전체에 계심을 뜻하는 것으로써 성경의 도처에 기록되어있는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이 意味하는 것과 맥을 같이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意味를 또 한번 해석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그러한 예를 기록된 말씀 중에서 들어보면 

"예루살렘이 군대가 에워싼 것을 보거든...(막21:20)"에서의 예루살렘으로 같은 뜻으로 된 또 다른 기록을 보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눅13:14)"의 내용과 같은 것으로 곧, 믿음을 가진 마음이 욕구에 젖은 상태가 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意味인 이 "여호와 삼마"인 성읍은 "거룩하게 구별된 땅" 안에 있고 그 땅을 중심으로 위로는 일곱 지파, 아래로는 다섯 지파에게 분배 된 땅이 있다.

이렇게 중심에 위치한 거룩한 땅의 크기는 25,000척x25,000척으로 요즈음의 단위로는 약 15kmX15km정도의 크기가 된다.

이런 크기의 거룩한 땅의 좌우에는 같은 크기의 왕의 땅이 있다.

그러므로 그 땅의 길이는 25,000척이 세 번 반복되므로 75,000척이 되며 이 길이로는 약 45km가 된다.

그러나 이렇게 환산된 크기를 기록의 내용대로 현재의 지도에 대입하여보면 문제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지금 이스라엘의 땅의 넓이가 약 80km에 이른다는 사실과의 차이이다.

그리고 또 지금의 예루살렘의 위치와 성읍의 위치가 맞지 않음이다.

그러므로 기록된 치수(15kmX15km)를 근거로 하여 그 크기대로 그려서 중심을 예루살렘에 맞춰보면(지도에서 빨간색 점선) 기록된 내용과는 다르게 거룩한 땅의 동쪽에 있는 왕의 땅은 거의 비슷한 크기가 되지만 서쪽에 있는 왕의 땅은 약 세배의 크기가 된다.

즉, 거룩한 땅이 있는 중심이 동쪽으로 치우친 셈이다.

그렇다면 기록된 내용과는 차이가 크게 되는데 과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분명히 기록된 바로는 25,000척이 세 번 반복되어서 동으로는 요단강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대해(지중해)에 이르는 것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척을 km로 환산하는 단위에 있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동서의 치수를 셋으로 나눈 치수가 25,000척으로써(78km/25000척x3=약1.04m) 1척의 단위는 약 1.04m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단위를 가지고 규빗을 산출해 내면 1규빗은 약0.78m이고 한 뼘은 0.26m가 되고 에스겔은 한 규빗에서 한 뼘을 더한 단위가 한 척인 잣대를 사용하였고 그 잣대는 6척이었으므로 지금의 치수로는 약 6.24m의 크기의 잣대로 잰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에스겔이 사용한 잣대를 기준하여 그 사람의 신장을 예측해 볼 수 있는데, 1규빗이 1.5ft를 기준되는 지금의 환산으로 통상적인 키가 약 1.7~1.8m 정도라면 에스겔서에 등장하는 에스겔의 신장은(1/0.4572mX0.78mX1.7m(1.8m)=2.9m(3.07m) 약 3m가 되게 된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통상적인 신장이었거나 아니면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본 특정한 자신의 신장으로써 6.24m의 잣대를 사용할 정도라면 그 잣대의 반 정도가 신장이 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의 통상적인 신장이었다고는 볼 수 없음은 당시 사용하던 규빗이라는 단위가 지금의 단위의 기준이 되어 인치, 피트라는 단위로 남아있는 것을 볼 때(1규빗=45.72cm=1.5ft)(1ft=12인치(1"=2.54cm) 지금의 신장과 과히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에스겔이 사용한 잣대의 한 척은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큰 것이었고 이것은 또 다른 意味를 가지고있는 기록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에스겔은 자신의 신장이 부쩍 커버린 상태의 환상을 본 것이었고 이렇게 환상 속의 자신이 커졌다는 것은 그렇게 믿음이 성장하였으므로 하나님의 비밀스런 부분을 볼 수 있고, 또 본 것을 예언할 수 있는 사명자가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믿음의 크기가 자신의 외적, 내적 인격보다 훨씬 커졌을 때 하나님은 그 성도를 사명자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흔히들은 자신의 인격보다 더 큰 믿음의 품격을 보이지 못하는 것이 통례인 것이다.

그러나 에스겔은 당시 밖으로 보여지는 인격보다 훨씬 큰 믿음의 품격을 소유하였고 이런 믿음의 품격을 가진 에스겔을 통해서 하나님은 미래를 예언하시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이 에스겔이 본 환상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자신의 인격과 믿음의 크기로써 본 기록에서 보여주는 비율(1.7~8m가 약 3m로 성장=약 70%성장)로 인격보다 믿음의 품격이 더 성장하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음을 말씀하시는 기록이기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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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삼마 2(겔47:7-12)


(겔 47:7)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

9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 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11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거룩하게 구별한 땅 안에는 그 중심에 성읍이 있고 나머지는 레위인의 땅과 제사장의 땅으로 나뉜다.

그리고 남은 성읍의 양쪽의 땅은 성전의 땅으로 성읍에서 종사하는 자들의 양식을 생산하는 땅으로 구별되었다.

이와 같이 성읍은 백성들이 살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장소가 아니고 오로지 성전만을 위한 장소로써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도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들 뿐이다.

이렇게 성읍이 구별되는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의 국가의 중심점이 되는 意味가 아니고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구원의 役事와 歷史를 이루어 나가는 하나의 歷史的인 장소라는 상징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징성은 거룩한 땅의 양쪽에 있는 왕의 땅도 마찬가지의 意味로써 여기에서의 왕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왕이 아니고 구원의 役事에서의 왕인 예수님을 상징한 것이다.

즉, 이 땅은 죽은 바다인 사해가 주는 意味인 영적으로 죽은 인간을 살아있는 바다인 대해(지중해)와 연결시키는 통로로써 이 연결이 이루어질 때 죽은 사해는 살아나는 것이며 이렇게 살아난다는 것이 곧 인간이 구원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위치한 왕의 땅과 거룩한 땅, 그리고 그 거룩한 땅의 중심에 위치한 성읍과 성전, 이 모두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구원의 役事와 歷史의 상징인 것이다.

이러한 상징을 보여주는 이 성읍과 왕의 땅, 그리고 레위인의 땅과 제사장의 땅, 등은 위아래 지역으로 분배된 지파들의 삶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고 자치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意味를 가지고 있기도 한 것으로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구원의 役事와 歷史는 전적으로 자치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자치적으로 이루어나가는 구원의 役事와 歷史의 구도는 그 중심이 예루살렘이라는 믿음이 중심이 일치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나있는데 그렇다면 혹시 성읍의 위치가 그림과 같이 한쪽으로 치우쳐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음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모든 役事와 歷史는 중앙에서 통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왔다.

그런 예가 이 성읍과 성전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성막의 예를 들 수 있는데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중심으로 하여 각기 여덟 방향으로 둘러서 장막을 치고 생활하도록 하였다.

그렇듯이 지금의 이 성읍도 역시 거룩하게 구별된 땅의 중심에 위치하여야하는데 본 기록에 기록된 대로 그 위치를 대입해보면 일치하지 않음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것은 지금 이루고있는 役事가 진행되고있음을 나타낸 것으로써 이전의 役事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는 그 중심이 예루살렘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이전의 役事가 진행될 때는 역시 예루살렘이 중심이 되지 않았던 役事로써 그 당시의 예루살렘의 위치는 거룩한 땅의 서쪽으로 치우쳐져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役事와 歷史를 처음부터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된 것이다.

구원의 役事와 歷史의 시작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구원의 役事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면서 완성되기 시작하였고 그리고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오면서부터 본격적인 구도가 완성된 것이다.

이 때 이들을 인도한 사람이 여호수아였고 이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예수라는 뜻으로써 구원의 役事의 주체인 예수님에 의해서 이스라엘이라는 믿음의 役事는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이 처음 발을 디딘 가나안 땅은 길갈이었고 그들은 그림과 같이 요단강을 건너서 첫 役事와 歷史의 현장에 들어온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이루어진 役事로써 그 당시에는 예루살렘이라는 중심점이 없었고 그들에게는 가나안이라는 천국을 상징하는 지역을 확보하는 일에만 급급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루어진 첫 번째 役事는 다음의 役事로 들어가게 되고 그 두 번째 役事에서는 예루살렘이 중심이 되는 役事로 진행된 것이다.

이 때가 다윗으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歷史로써 그 役事는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끝나게 되고 그 이듬해 군대장관인 느브사라단에 의해서 성전이 파괴되면서 그 役事는 모두 끝나고 그 때 하나님이 성전을 떠나시는 것을 본 기록의 저자인 에스겔은 보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세 번째의 役事인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役事는 그 중심이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이 중심이 되지 않았고 그 役事는 한번 더 진행된 모습으로 나타나고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 번째의 役事가 곧, 예수님이 오시는 役事로 이루어지는 신약의 役事인 것이다.

이상의 歷史를 더듬어 볼 때 지금 이 기록이 시사하는 바는 구원의 役事라는 틀이 계속해서 서쪽으로 진행하고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써 이 다음의 歷史는 또 한번 진행된 모습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그것이 네 번째의 役事로써 지난 歷史를 돌이켜보면 종교개혁의 役事를 빼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바로, 그 종교개혁의 役事를 통하여 오늘날의 기독교가 출발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 기독교가 모든 役事를 마무리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役事가 지금 진행되고있는 役事이고 그리고 이 役事는 다음의 진행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그 마지막의 役事가 바로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役事인 것이다.

이 役事는 예수님이 왕 예수로써 일곱 번째 인을 받으시면서부터 시작되게 되며 그 시작이 반시동안의 고요의 役事이다.

이 고요의 役事를 통하여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시는 이른바 그 날을 감하신다는 말씀을 이루시고 계시는 것이다.

이렇게 진행된 役事와 歷史를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그림으로 그 순서를 보일 수 있는데 이런 役事와 歷史를 큰 틀로 보면 하나님이 이루시고 계시는 6,000년이라는 상징의 役事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오른쪽(사해)부터 시작된 役事의 구도로서 그 시작은 제1시대인 아담과 노아시대가 되며 이 때의 役事에는 성전이라는 구심점이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의 役事인 아브라함을 통한 구약의 役事에서부터 예루살렘이라는 구심점이 등장하였고 이를 이름하여 구약의 役事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의 役事는 초림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役事로서 신약의 役事이며 그 다음은 역시 종교개혁의 役事를 빼 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의 役事는 역시 마무리의 役事인 준비의 役事인 것으로 이미 진행되고있는 役事일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론은 어떤 모습으로 정리될 것인가...?

그것은 이미 설명한대로 사해라는 죽은 바다가 役事의 진행에 따라서 왕의 땅이 거대한 강이 되면서 진행되는 役事를 따라오다가 결국은 대해를 만나서 다시 살아나는 상징으로 끝나는 것이다.

(9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들어 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11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이러한 役事를 이루시기 위하여 그 모든 준비와 시작이 있었고 그 役事는 지금도 진행되는 役事이며 앞으로도 진행되는 役事로써 곧. God-Walk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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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십자가 사건의 시간별 순서정리와 문제점

*밤 12시경/마가의 다락방에서 성찬을 나누신 예수님이 겟세마네로 올라가셔서 기도를 하신다.

(마26:36-46 막14:32-42 눅22:39-46 요18:1-2)

*새벽 3시경/유다와 함께 대제사장들의 종들이 나타난다.

(마:26:47-56 막14:43-52 눅22:47-53 요18:3-11)

*그리고 바로 안나스에게로 보내진다.

(마(없음) 막(없음) 눅(없음) 요18:12-14와 19-24) 

*새벽 4시경/대제사장 앞에 서셔서 욕을 당하신다.

(마26:57-68 막14:53-65 눅22:54과 63-71 요(없음)

*같은 시간대/베드로는 밖에서 불을 쬐고 있다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고 그 때에 닭이 운다

(마26:69-75 막14:66-72 눅22:55-62 요18:15-18과 25-27)

*새벽 5시경/빌라도에게 넘기기 위하여 예수님을 끌고 간다.

*새벽 6시경/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

(마27:1-2과 11-14 막15:1-5 눅23:1-5 요18:28-40)

*같은 시간 대/유다가 후회를 하고 자결한다

(마 27:3-10 막(없음) 눅(없음) 요(없음)

*아침 7시경/빌라도가 갈릴리 사람이라는 이유로 헤롯에게로 보낸다.

(마(없음) 막(없음) 눅23:6-12 요(없음)

*아침 8시경/다시 빌라도에게로 오신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 선다

(아마도 정상적인 재판 시작 시간은 9시나 10시가 되었을 것이다.)

*오전 9시경/재판이 시작되나 빌라도는 죄를 찾지 못하므로 태형으로 처리하려고 한다.

(마(없음) 막(없음) 눅23:13-16 요(없음)

*오전 10시경/빌라도는 일단 태형을 내린다

(마27:27-30 막15:16-19 눅(없음) 요19:1-3)

*오전 11시경/그리고 군중들에게 보인다, 

이 때 예수님은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홍포를 입고 군중들 앞에 나오신다.(요19:5)

그러나 군중들은 바라바를 사면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면서 빌라도와 씨름을 한다.

(마27:15-22 막15:6-12 눅23:17-23 요19:4-12)

*같은 시각/빌라도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꿈 이야기를 전한다

(마27:19 막(없음) 눅(없음) 요(없음)

*낮 12시경/빌라도가 마지막으로 판결하기 위해서 박석의 죄수석에 앉는다.

(마(없음) 막(없음) 눅(없음) 요19:13-14)

*그리고 판결을 내린다

(마27:26 막15:13-15 눅23:24-25 요19;15-16 18:39-40)

*그리고 태형과 능욕이 시작된다

(마27:31 막15:20 눅(없음) 요(없음)

여기에서 마태복음(27:27-30)과 마가복음(15:16-19)의 기록이 앞의 요한복음19:1-3의 기록과 같은 것이라면 요한복음의 기록이 순서가 바뀌었던지 아니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록이 바뀐 것일 것이다.

그러나 요19:5을 보면 예수님이 가시 면류관과 홍포를 입고 군중 앞으로 나오시는 기록이 있으며 마태복음(마27:31)과 마가복음(막15:20)의 기록은 홍포를 벗기는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러므로 이 순서대로 빌라도는 일단 태형을 가하므로 군중들로 하여금 소요를 그치게 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군병들이 홍포와 가시면류관을 씌웠고 그리고 내내 입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홍포와 가시면류관이 나중에 씌운 것으로 기록하고있으므로 혼란을 주고있는데 이 기록 부분 중 홍포와 가시면류관을 씌우는 부분은 앞으로 이전에 기록될 것이 나중에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골고다로 가신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골고다에 도착한 시간은 최소한 오후3시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그 다음의 기록을 보면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정오부터 어두움이 몰려왔으며 오후 3시에 운명하신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그 날 오후 6시가 되기 전에 무덤에 안치되신 것이다

이렇게 시간대가 안 맞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렇게 안 맞는 시간대를 다시 한번 정리해 보면 

목요일 저녁/마가의 다락방에서 식사를 하신다 ---목요일 밤12시경/게세마네로 올라가신다

금요일 새벽4시경/대제사장의 종들에게 잡히신다---금요일 새벽5시경/안나스 앞에 서신다. 거의 비슷한 시간/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인계된다. ---금요일 새벽6시경/긴급 재판을 받으신다. ---금요일 아침7시경/빌라도에게로 보내진다.---금요일 아침8시경/헤롯에게 보내진다 ---금요일 아침9시경/다시 빌라도에게 보내진다. ---금요일 오전10시경/재판이 시작되고 태형이 선고된다. ---금요일 오전11시경/태형을 가해지고 능욕을 받으신다. 거의 같은 시간대/가시면류관과 홍포를 입고 군중들 앞에 서신다. 그 순간부터/군중들이 바라바를 사면하고 예수를 못 박으라고 한다. ---금요일 정오 경/빌라도가 다시 정식 재판에 들어간다. ---금요일 오후 1시경/재판이 끝나고 다시 태형이 치뤄지고 모욕을 받으신다. ---금요일 오후 2시경/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출발하신다. ---금요일 오후 3시경/골고다에 도착하여 십자가에 달리신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다음 기록인 제삼시(오전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제육시(정오)부터 시작한 어둠이 제구시(오후3시)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시에 운명하셨다는 기록과 연결이 안 된다.((본디오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사도신경의 의미상 해석??))

=====[에스겔서 40-42장 난해부분 주석 설명]===== http://m.blog.daum.net/antiochministry/878?np_nil_b=-1

에스겔 40장 주석 
=====40:1 
 본절부터 시작하는 본서의 마지막 아홉 장은 연대기상 1-39장보다 훨씬 후대에  기술된 것이며(33:21) 그 내용 또한 전혀 판이한 성격을 가진다. 그래서 혹자는 이 부분을 지적해 본서가 여러 저자의 기록을 편집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본장 또한 본서의 뒤에 삽입된 별개의 문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다음 두 가지 근거를 고려할 때 설득력이 없다. (1) 본서의 초두(1-3장)에서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을 방문하시는 하나님의 이상이 본서 후반부(40-48장)에서는 고토로 귀환하여 옛 성읍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이상으로 나타난다. 이로 볼 때  두  부분(1-39장;40-48장)은 밀접한 연관이 있다. (2) 성전의 타락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떠난 여호와의 영광이(8:1-11:25) 재건된 성전으로 다시 돌아오는 광경의 대비적 묘사(43:5)가 두 부분의 일관성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새 성전(40-43장), 새 예배(44-46장), 새 땅(47,  48장)으로 대별되는 마지막 아홉 장은 고토 귀환과 뒤이어 이어질 이스라엘  회복  사업(39:25-29)의 궁극적인 지향점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1-39장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나아가서는 본서의 절정인 동시에 결론이라고 볼 수 있다. 
   사로잡힌 지 이십 오 년이요 성이 함락된 후 십 사 년 정월 십 일 곧 그 날에 - 이는 B.C. 573년으로 에스겔 선지자가 소명을 받을 때(B.C. 593)로 부터 약 이십년이 경과한 시기이다(1:1, 2;33:21). 한편 본 구절은 원전상 '그 해의 시작'(*    , 베로쉬 하솨나)이란 구절이 두 문장 사이에 첨가되어 있는 바, 이 구절의  해석과 '새달'이란 문자적 의미의 '정월'(*     , 호데쉬)의 해석 여하에 따라 두  가지 견해로 대별된다. 먼저 첫 번째 견해는 '그 해의 시작'에 '정월'의 의미를  찾아,  이 '정월'을 이스라엘 종교력상의 첫 달인 '아빕 월'(민간력-7월)로 보는 것이다. 곧  이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유월절을  예비하던  날인(출 12:3, Havernick, Delitzsch, Schmieder) 동시에 요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첫 발을 내디딘 의미있는 날이었다(수 4:19). 두 번째 견해는 본 구절의 연도를  B.C. 575년으로 보고, 그 해가 희년이라는 사실에 주안점을 두어 '그 해의 시작'을  '신년' 곧 49년이 지난 후 오십 년째 되는 '희년'으로, '정월'을 1월이 아닌 종교력상의  '첫 달'이란 의미에서 희년을 시작하는 첫달로서의 7월 10일인 '속죄일'(레 25:9)로  이해한다(Hitzig, Rdak). 곧 이 속죄일은 희년에 이루어질 자유와 회복을 위한 전제로서의 속죄가 행해지는 날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견해중 어느 것을 취해야 할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본 구절에 특정하게 제시된 '그 날'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잘  알려진 날이었으며, 회개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함축하고 궁극적인 자유와  회복의 의미를 내포한 특별한 날이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40:2 
  극히 높은 산 위에 내려 놓으시는데 - 여기서 '극히 높은 산'은 1장 이하에 언급된 에루살렘의 멸망과는 대조적으로 온전한 회복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들  거룩한 산 '시온'을 지시한다(17:22, 23;욜 2:32). 곧 시온산은 본래  기드론과  두로베온 골짜기 사이에 솟아있는 봉우리의 명칭이었으나, 후에 예루살렘 동남쪽에 위치한  '다윗 성'(왕상 8:1;대하 5:2)을 지칭했으며, 더 후대에는 예루살렘 전체를 가리키는  포괄적인 명칭으로 바뀌었다(사10:24). 따라서 이 '시온 산'은 곧 새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예루살렘을 이처럼 탁월하게 묘사한 것은  여기서의 새 성전이 궁극적으로 온전하게 회복될 하나님 나라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그 나라의 영광스런  위상을  강조하기  위함이다(사  2:2;미  4:1;계  21:10,  Michaelis, Delitzsch, Schroder). 
 성읍 형상 같은 것 - 혹자는 이것이 실제적인 성읍을 가리킨다고 말하나(Kliefoth, Havernick) 실제 성읍에 관한 기사는 45:6;48:15, 30에 가셔야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는 하나님의 도성, 곧 성읍까지를  포괄하는  새  성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히 12:22, Hengstenberg). 
=====40:3 
  놋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  1:7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천사를  가리킨다 (Delitzsch). 비록 이 사람이 44:2, 5에서 '여호와'로 불리웠지만 본절에서 유추해 볼 때 여호와의 천사를 가리키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놋'은 성경의 용례상  '견고함', '확실성'(렘 15;20),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상징하는 바, 여기서는 천사의 초자연적 특성을 암시하고 있다(Hengstenberg).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 - 이들을 모두 건축에 필요한 도구들로 먼저 '삼줄'은 긴 공간을 재는 도구로서 주로 땅의 길이를 잴 때 사용되었으며, '척량하는 장대'는 비교적 짧은 공간 곧 성벽 등의 높이를 잴 때 사용된 도구였다. 따라서 이러한 도구가 언급된 것은 앞으로 기술될 성전의 구조가 극히 세밀하게 제시될 것임을 암시한다. 한편 이들은  이스라엘의  심판  때  사용된  파괴적  기구들(9:1)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Hengstenberg). 
   문에 서서 있더니 - 여기서의 '문'은 에스겔이 남으로  성전을  바라보았다는(2절) 점에서 최초로 다다른 '북문'으로 생각된다. 곧 천사는 그곳에서 에스겔을 '동문'으로 안내했을 것이다(6절, Hitzig, Delitzsch). 
=====40:4 
눈으로 보고...생각할지어다 - '눈으로 보고'는 성전의 실재성을,  '귀로  듣고'는 천사를 통한 세밀한 성전 구조의 해설을(5절 이하), '마음으로의 생각'은  모든  것을 보고 들은 사실에 근거해 성전의 전체적인 윤곽을 마음속에 그려 볼 수 있었음을 가리킨다(Schroder). 비록 새 성전이 역사적으로 세워지지는 않았으나, 이미 완성된  것으로 묘사하여 성취의 확실성을 강조한다. 
=====40:5 
 이제 본격적으로 새 성전의 구조가 지시되는 바, 본절은 성전의 가장 기본적  요소인 바깥 성벽에 관한 기사이다. 
   집 바깥 사면으로 담이 있더라 - 여기서 '집'은 곧 새 성전을 가리킨다. 한편 '담' (*   , 호마)은 특별한 보호와 안위를 위한 '방어벽'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성벽이 성전 바깥쪽을 에워쌌다는 것은 모든 부정한 이방적 요소의 침입을  차단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는 바, 이 벽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철저하게  구분짓는 경계인 것이다(42:20;시 16:1-6). 
   그 장이...육 척이라 - 이는 히브리의 길이 측정 기준 단위인  '규빗'을  설명하는 것으로, 여기에 나타난 규빗은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규빗(팔꿈치에서 손가락까지의 길이-45.6cm)보다 손바닥 넓이만큼 더 긴 왕실 규빗(53.2cm)이다(43:13). 곧 본 구절의 척량하는 장대는 그 길이가 여섯 왕실 규빗이었다. 한편 이전 솔로몬 성전은  일반 규빗에 의거해 지어졌다(신 3:11;대하 3:30. 
   그 담을...두께가 한 장대요 고도 한 장대며 - 그 장대의 길이가 여섯 왕실 규빗이라는 점에서 이 성벽의 두께와 높이는 모두 약 3.2m 정도였다. 한편 본 구절의 '담'은 상반절의 '호마'와는 달리 '건물'의 의미인 '하빈얀'(*         )으로  쓰여졌다(42:1 주석과 비교). 
=====40:6 
  동향한 문에 이르러 층계에 올라 - 6-16절은 성전 바깥 뜰의 동쪽 문에 관한  설명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성전 동문 단면도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40:7 
  문지기 방들이 있는데 - 이 방들(단면도 (3))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 당시부터 성전 주변과 문을 수비하기 위해 있었던 경비실(왕상 14:27, 28, guardrooms, LB)과 유사한 것으로 그 크기와 모양은 3평방 미터 정도의  정방형(장,  광이  한  장대)  방이었다 (Havernick). 한편 이 문지기 방은 모든 속되고 가증하고 거짓된  것으로부터  성전을 거룩하게 지키는 영적 의미를 내포한다(계 21:27, Schroder). 
   매 방 사이 벽이 오 척이며 - 그 방의 장이 육 척(한 장대)인데 비해 방 사이의 벽이 오 척이라는 사실은 벽 자체가 오 척이라는 말이 아니라 각 방의 옆벽 사이에 있는 오 척의 공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이 공간들은 방과 방 사이를 연결하는  앞벽으로 막혀 있었다(Kliefoth). 
   안 문통 - 이는 6절의 '문 안 통'과 동일한 곳으로(단면도 (5)), '입구 문통'(6절) 에 이은 '현관 문통'을 가리킨다. 
=====40:8,9 
안 문의 현관을...한 장대며...팔척이요 - 히찌히(Hitzig)와 칠십인역(LXX)은 현관 (단면도 (6))에 대한 측정치가, 8, 9절에서 서로 다르게 기술된 점을 들어 현관의  측정 기사를 생략해 버린다. 또한 많은 학자들도 이 상이점에 대한  설득력있는  견해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클리포스(Kliefoth)는 8절의 길이를 현관 자체의 길이로, 9절의 길이를 안문의 문기둥(문벽)까지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현관의 길이로 해석한다. 이는 하반절에서 그 문벽의 장이 이 척으로 기술된 사실에서 유추한 듯하다. 
   그 문벽은 이 척이라 - 여기서 '문벽'(*       , 에일로)은  '단단하다',  '튼튼하다'란 '아일'(*     )의 복수형인 바, 여기서는 '기둥'(posts, KJV)의 의미보다는  문을 떠받치기 위해 벽에 박아놓은 '버팀대'(jambs, NIV, RSV)를 가리킨다. 
=====40:10 
 문지기 방은...셋이 있으니 - '3'이란 숫자가 성경의 용례상 하나님의 숫자란 점에서(사 6:3;막 9:31;계 9:15) 문지기의 방(도면 (3))이 좌우로 각각 세 개씩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직접 성전의 수비자가 되신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한편 본절의 '좌우편 벽'은 9절의 '문벽'과 같은 '버팀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40:11 
  처음으로 전 문통의 폭이 십 척으로 제시된다. 한편 '장이 십 삼 척'이란 말은  이미 그 문통의 장이 '한 장대'(육 척)로 언급되었다는 점에서(6절) 해석상의 난제로 취급된다.  단지  학자들은  이를  문통의  높이로  추측할   뿐이다(Schroder,   Lyra, Kliefoth). 
=====40:12 
 문지기 방 앞에 있는 '퇴'(*       , 게불)를 언급한다(도면 (4)), 이는 그 원어상 의미가 '경계'란 점에서 통로와 문지기 방과의 경계를 짓는  '울타리용  퇴'(barrier, RSV)를 가리키는 듯하다. 한편 그 장이 일 척이라는 것을 NIV는 11절에서와  마찬가지로 퇴의 높이로 번역하나, 그보다는 그 방에서 통로쪽으로 접한 길이, 곧 폭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40:13 
  이 방 지붕 가에서...반대되었으며 - 서로 마주 대한 문지기 방이 지붕과 지붕으로 연속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바, 그 남북간의 총폭이 이십 오 척이란 뜻이다.  곧  뒷벽(1.5척)+문지기방(6척)+문통(10척)+문지기방(6척)+뒷벽(1.5척)=25척이다 (Delitzsch). 
=====40:14 
 원전상의 핵석은 '그 기둥들은 60척이며 그 문 주위에 들이 있어 기둥에까지  이르렀으며'라고 볼 수 있다(KJV, NIV, LB). 여기서 '기둥들'(*         , 엘림)은 곧  현관의 기둥들이다. 하버닉(Havernick)은 이 기둥의 60척이란 높이가  무리하다는  많은 주석가들의 이견에 대해 고대 애굽의 오벧리스크 등의 예를 들어 반박하고 그  높이에 걸맞는 전문 현관의 장엄함을 제시한다(Delitzsch, Schroder). 또한 그  사면의  뜰은 현관 안에 별도의 뜰이 있다는 뜻(Hitzig)이 아니라 성전의 바깥 뜰을 가리키는  것으로, 곧 동문 건물이 성전의 바깥 뜰 안에 건축되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서론  에스겔 성전 도면 참조). 
=====40:15 
 곧 바깥 문통 6척(6절)+문지기 방 28척(방 6+6+6, 방 사이의 공간 5+5 7절)+안  문통 6척(6절)+현관 8척(9절)+현관 문벽 2척(9절)=50척이다. 
=====40:16 
  닫힌 창(*  , 할로 노트 아투모트) - 좁은 창살로 짜여진 격자창을 가리킨다(narrow windows, KJV).  종료나무를 새겼더라 - 종려나무는 성경의 용례상 생명력과 풍요,  영광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성전 조각에 자주 사용된 소재이다(왕상 6:29-35). 
=====40:17-19 
 성전 동문에 이어 성전의 바깥뜰이 설명된다. 이후의 설명은 서론 '에스겔  성전의 도면'을 참조하면서 이해하라(이하에서 언급되는 성전 도면 번호는  서론에서  언급된 도면의 번호를 의미한다). 본문에서 '박석깔린 땅'(*   , 리체파)은 원어상  '돌을 깔아 포장하다'란 뜻으로 흙이 묻지 않게 돌을 깐 포도(鋪道)를(대하 7:3)  가리킨다(성전 도면 (9)), 또한 그 위에 있는 30개의 방(성전 도면 (7))들은 동, 북, 남으로 각각 10개씩 산재(散在)해 있는 것으로 주로 제사장들이 거주하거나 화목제 잔치를 위해(삼상 9:22, Schroder)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18절은 박석깔린  땅의  위치와 크기를 설명하는 바, 이는 동, 북, 남쪽의 문간 좌우에 성벽 안쪽을 따라 50규빗의 폭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특히 서쪽으로는 성전 안뜰의 좌우편까지  이르렀다.  19절은 '아래 문간', 곧 바깥 문의 안문간부터 그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안 뜰의 바깥 문간까지 이르는 바깥 뜰의 규모이다(100척=약 532m). 
=====40:20-23 
  내용상으로는 16절에 연결되는 구절로 바깥 동문에 이어 바깥 북문이 언급된다. 이는 동문의 측량과 동일하다(6-16절 참조). 게단의 수(일곱)를 밝히고 있다(22절).  한편 23절은 바깥 뜰의 규모를 19절보다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 바, 그 바깥 뜰의 규모가 동, 북, 남쪽 모두 동일함을 밝힌다. 
=====40:24-27 
  동문, 북문과 동일한 내용의 남문에 관한 언급이다. 특별히 여기서는 문지기  방이 생략되는 대신 각각의 창들과 종려나무 조각이 언급된다(16절). 
=====40:28-31 
 이제 바깥 뜰로 나가는 세 개의 문에 이어 그 문들에 각각 마주 대하고 있는  안뜰로 세 개의 문이 37절까지 언급된다. 이들 문들은 바깥 문과 그 측량에  있어서  거의 동일한 바, 단지 그 문에 이르는 계단의 수가 바깥문보다 하나가 더 많은 여덟 개라는 점(22, 26절)과 바깥 문의 현관이 성소쪽 곧 서쪽을 향해 있는 것과는 달리 본문의 현관은 바깥 문쪽 곧 동쪽을 향해 있어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점(9, 15절)만이  다를 뿐이다(31절). 곧 계단을 제외한 모든 규격이 동일하나 단지 그 배열이 바깥  문과 정반대로 되어 있는 것이다(Delitzsch). 특별히 계단의 수가 하나 더  많다는  사실은 성소으 위상과 그 거룩함에 대한 특별한 신앙적 의미에 기인하는 듯하다. 한편 이러한 문의 언급은 본문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성전과 안뜰을 둘러싼 벽이 있음을  암시한다. 먼저 본문은 남쪽의 문을 언급하고 있는 바, 이는 선지자가 바깥  남문에서(24-27절) 곧장 안 뜰의 남문에 이른 사실을 보여준다. 특별히 30절은 현관에  대한  별도의 측량치를 제시하는 바, 이는 해석상의 난제로 등장한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이  부분을 무시해 버렸으며(Michaelis, Bottcher, Ewald, Hitzig,  Maurer)  칠십인역(LXX) 또한 이 구절을 생략해 버렸다. 
=====40:32-34 
  동문에 관한 언급으로 모든 규격이 남문과 동일하다. 한편 성전 안 뜰까지  이르는 계단의 수가 모두 15(7+8)개인 바, 이는 시편 중에서 성전에 올라가는 시의  편  수와 일치한다(시 120-134편). 이처럼 시 한편과 계단 하나가 서로 상응한다는 사실은 성전에 나아가는 자가 하나님 앞에 가져야 할 감사와 찬송의 자세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40:35-37 
  동일한 방식으로 북문의 규격과 모습이 소개된다. 
=====40:38 
  안 뜰로 들어가는 새 문을 언급한 데 이어 희생 제사시 제물을 다루는  데  필요한 방과 장비들이 43절까지 기술된다. 본절은 현관의 문벽(*  ,  베엘림),  곧 현관 문기둥 곁에 있는 작은 골방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바, 그 방은 '번제물의  내장과 다리를 씻는 곳'(레 1:9;대하 4:6, Delitzsch)이거나 '제단에 올려진 제물을  최종적으로 손질하는 곳'(Schroder)이다. 
=====40:39-43 
  문의 현관에 위치한 희생 제사용 상(床)이 언급된다. 모두 12개인 이 상들의  위치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39-41절에 언급된 8개의 상은 희생 제물을 잡는 데  사용된 도살용 상이며, 42절에 언급된 보다 작은 4개의 상은 그 희생 제물을 잡을 때 쓰이는 도구들을 올려놓기 위한 것이다. 한편 이 희생 제사용 상들은 46:2에 비추어 볼 때는 동문 현관에 위치한 것으로, 40절;46:19 이하에서는 북문 현관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온 자들이 어느  문(일반  백성-북문, 남문.....왕 : 동문, 46:1, 2)을 통해서도 편리하게 제물을 드릴 수 있도록 세 개의 문 현관 모두에 비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Delitzsch). 
   갈고리가 사면에 박혔으며 - 여기서 '갈고리'(*  , 쉐파타임)는 원어상 '두다', '걸다'란 뜻에서 파생된 말로 '마구간', '(이중의) 갈고리'를 각각 의미하는 바, 혹자는 이를 희생 제물들을 묶거나 가두기 위한 '마구간'이나 '말뚝'을 가리킨다고 본다(Gesenius). 그러나 본 구절에서는 그 가죽을 벗기기 위해 제물들을 걸어놓는  두갈래로 갈라진 갈고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Delitzsch, Schroder). 이는 '사면에  박혔으며'란 말에 의해서도 지지된다. 곧 그 갈고리들이 현관 사면 벽에 박혀 있다는 것이다. 
=====40:44-46 
 본문은 44절의 '방 둘'(* , 리쉐코트 솨림)이 원어상  '노래하는 자의 방들'이란 뜻을 가지는 바, 원전상의 해석으로 볼 때 44절은 최소한 3개 이상의 망을 지칭하는 반면 같은 문맥의 45, 46절은 단 두 개의 방만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난해한 점이 있다. 따라서 칠십인역(LXX)과 많은 학자들은 '노래하는 자들'이란  뜻의 '솨림'을 '둘'을 뜻하는 '쉐타임'(*       )에 대한 필사상의 오류로  이해하여  이를 '방 둘'이란 뜻으로 수정하고 있다(Delitzsch). 혹자는 새 성전의 예배에 있어서 노래하는 자의 위상이 특별하게 규정지워질 것이란 전제 하에 그들이 제사장들과 함께  언급된 것이라고 이해하여 원전상의 해석을 지지한다(Hengstenberg, Schroder).  그러나 45, 46절은 분명하게 이 두 개의 방이 제사장들만을 위한 것임을 밝힌다. 
   성전을 수직하는 제사장 - 본래적으로 성전과 성물들을 관리하는 책임은 레위의 게르손, 고핫, 므라리 자손들이었으나(민 3:25-38) 새 성전에서는 그 직책마저 사독  계열의 제사장들에게 위임될 것임을 보여 준다(44:10-16 주석 비교). 
   제단을 수직하는 제사장 - 문자 그대로 희생 제사시에 제단에서 수종드는 제사장들이다.  이  또한   본래는   아론의   후손에게   주어진   직책이었으나(출   27:20,21;28:1-4;29:9, 44) 새 성전에서는 사독 계열의 제사장들에게만 위임되었다(44:15 주 석 참조). 
=====40:47 
  그 뜰 - 일명 '제단 뜰'로 불리워지는 곳으로 번제단을 중앙에 둔  정방형의  성전'안 뜰'을 가리킨다(서론 '성전 도면' 참조). 
=====40:48,49 
 본격적인 성전 성소의 측량이 41장까지 전개된다. 본문은 그 측량의 초두로서 성전안 뜰에서 성소로 들어가는 입구에 설치된 현관(성소 도면 (6))을 설명한다(왕상  6:3 비교). 먼저 48절에서 '벽'(*   , 알)은 원어상 문을 지탱하기 위한 '곁 기둥'(jambs, NIV)을 가리키며, '두께'(*     , 로하브)는 '폭'의 의미인 바, 본문은 그 문의 곁 기둥의 폭이 좌우편 가각 오 척이고 그곳에 연속된 문의 폭이 좌우 각각 삼 척이란 의미로 전체 문의 광이 곁 기둥까지 포함하여 총 16척이란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편 이제까지의 장(동서간), 광(남북간)의 개념과는 달리 49절의 장은  남북간의  길이를, 광은 동서간의 길이를 가리킨다(Schroder). 한편 혹자는 49절의 장의 길이인 11을  12 에 대한 필사상의 오류로 생각한다(LXX, NIV, RSV). 
   올라가는 층계가 있고 - 많은 학자들이 10개의 게단으로 생각한다(Delitzsch).    
  문 벽 곁에는 기둥이 있는데...저편에 있더라 - 문자적으로는 기둥 곁에  또  다른 두개의 기둥이 있다는 의미로, 여기서의 '문 벽'(jambs, NIV)은 48절의  '좌우  벽'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의 두 기둥을 솔로몬 성전의 야긴, 보아스(왕상 7:15-22)와  같은 원주형의 기둥(columns)으로 생각할 수 있다(Delitzsch, Hengsten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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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41장 주석 
=====41:1,2 
 성소의 현관을 설명한 40:48, 49의 연속되는 기사로 4절까지 현관을  제외한  성소(1, 2절)와 지성소(3, 4절)의 측량이 언급된다. 여기서 '성소'(*    , 하헤칼)는 특별히 지성소를 제외한 외소(外所), 곧 성소만을 지칭하는 제한적인 의미로 쓰여졌다 (왕상 6:1, 7, Delitzsch). 한편 1절은 문 곁기둥의 동서간의 폭(개역 성경의  '두께' 라는 번역이 적절함)이 각각 육 척씩임을 지시하는 것이며, 2절은 10척의 문과 문  양 쪽 벽의 남북간 폭이 각각 오 척씩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는 곧 하반절과 광 20척과 일치한다(Cooke). 이러한 측량은 솔로몬 성전의 성소와 같은 것이다(왕상  6:2,  17). 특별히 1절은 원전상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는 '성막'(*  , 하오헬)이란  말이 '성소'와 중복되는 의미로 첨가되어 있다. 이러한 점은 새 성전의  독특한  성격을 지시하고 있다. 즉 '성소'를 의미하는 '하헤칼'은 원어상 '능력있는', '위대한'  등의 뜻을 가진 '야콜'(*     )에서 파생된 말로서 솔로몬 성전과 같은 장엄한 특징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며, '성막'을 의미하는 '하오헬'은 문자 그대로 모세 당시에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며 역동적으로 역사하시던 곳이란 뜻을 내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새 성전은 솔로몬 성전과 같은 장엄함을 가질 뿐만 아니라 모세의  성막에서처럼 결코 백성들을 떠나지 않으시며 친히 인도하시는 구원 사역을  시행하시는  곳임을 암시해준다. 
=====41:3,4 
  성소의 내전, 곧 가장 거룩한 곳이 될 지성소에 대한 측량이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서 - 여기서 '그가 들어가서'(*   , 바)란 말은 이제껏  사용된 '그가 나를 데리고'(*   , 예비에니)란 표현과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40:1-3, 17, 28, 32), 선지자를 인도한 천사 혼자서 내전(지성소)에 들어갔다는 의미이다. 이는 에스겔 선지자의 신분이 제사장이었기에 성소까지는 들어갈 수  있었으나,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 때에야 출입하는 지성소에는(레  16장;히  9:7) 들어갈 수 없었던 사실을 시사한다. 한편 문통의 폭(6척)과 문옆 벽의 폭이 14척(7+7) 이라는 것은 그 남북간의 폭이 성소와 같은 20척(4절)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결국 새 성전의 지성소는 장과 폭이 모두 20척인 정방형으로서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와 동일한 크기이다(왕상 6:20). 특별히 그 문통의 폭이 육 척이라는 본문의 기사에 비추어 볼 때 현관부터 시작된 각 문의 폭이 16척(40:48 주석 참조), 10척(2절),  6척으로 점점 좁아진다는 사실은 문의 크기와 거룩성의 증대가 반비례한다는 영적 의미를 함축하는 것이다. 
=====41:5 
 전 삼면에 골방이 있는데 - 성소와 지성소의 바깥 벽, 남, 북, 서쪽에 연접해 있는 골방들이 11절까지 언급된다. 이 골방들의 규모는 솔로몬 성전의 그것과 비슷하나  약간의 수치상의 차이를 보인다(왕상 6:5-10). 또한 이 골방들은 성전의 비품과  제사시 의 성구(聖具)들 그리고 십일조와 각종 예물들을 보관하기 위한  장소였다(Schroder). 
혹자는 이 방들이 제사장과  레위인의  숙소일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시  134:1, Thenius). 한편 본절의 '골방'(*   , 첼라)은 원어상 단수로 쓰여졌으나 실질적으로는 이 골방이 각 층에 30개씩 3층, 곧 모두 90개의 방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여기서 사용된 단수형은 전체 방을 총괄하여 지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Delitzsch). 
   광이 각기 사 척이며 - 골반의 남북간의 폭을 말한다. 
=====41:6  
골방은 삼층인데...모두 삼십이라 - 개역 성경의 번역은 약간 모호하다. 본 구절의 '골방 위에 골방이 있어'란 말은 곧 3개의 골방이 나란히 상하로 배열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바, 그러한 배열이 성전의 삼면을 둘러서 삼십 번 계속된다는 뜻이다. 영역본들은 보다 쉽게 '삼층으로 이루어진 방들이 각 층에 삽십 개씩 있다'로  해석한다 (NIV, LB, RSV). 
   전 벽 밖으로...범하지 아니하였으며 - 이 골방들은 솔로몬 성전의 그것과 같은 방법으로 지어졌다(왕상 6:6, 10). 곧 이들은 성전 벽에 접해 있으면서도 일반적인 건축에서처럼 각층의 대들보가 벽을 뚫고 삽입되어 잇는 것이 아니라(not  inserted  into the wall..., NIV) 계단식으로 축조된 성전의 외벽 벽에 나무 들보(왕상 6:10)와 함께 얹혀져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축조 방식은 곧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에 외부적  요소를 허용치 않음으로써 그 거룩성이 침해당하는 것을 철저하게 방지하려는 영적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Bahr). 
=====41:7 
  곧 6절에 언급된 성전 외벽의 계단식 축조 방식을 입증하는 구절이다. 곧 본절에서 '높아갈수록'(* , 레말라 레말라)은 원어상  '(계단이나  사다리를) 오리다'란 뜻의 '알라'(*     )에서 파생된 말로서, 이중적인 반복을 통해  3층까지 계속되는 계단식의 오름을 강조한다. 이는 본절의 말미에  '올라가게  되었더라'란 동일한 말로 반복되고 있다. 또한 그러한 이유에서 그 방들은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넓어진 것이다. 
   전에 가까와졌으나 전의 넓이는 아래 위가 같으며 - 성전의 벽이  6척이나  된다는 점에서(5절) 성전의 내벽은 그대로 두고 성전 외벽에만 터를 만든  사실을  증거한다. 따라서 성전의 벽은 그 윗층으로 오를수록 점점 얇아진다. 여기서는 구체적인  치수가 제시되지는 않았으나 솔로몬 성전에서는 각층마다 1척씩 앓아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왕상 6:6). 한편 성전 벽에 접한 이 방들은 비록 한편에는 다른 벽을 의지하고  있었지만 그 성소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골방은 아랫층에서...올라가게 되었더라 - 여기서 '올라가게 되었더라'(*   , 야알레)란 말 역시 상반절의 '높아갈수록'과 같은 '알라'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성전 벽의 계단식 축조 방식을 표현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었던 반면  여기서는 아랫층에서 윗층으로 계단을 오르는 실제적인 의미로  쓰여진  것이다(Astairway went up, NIV). 한편 이 계단은 왕상 6:8과 마찬가지고 나선형의 계단을 지칭하는  듯 하다(왕상 6:8 주석 참조). 
=====41:8 
 전 삼면의 지대...육 척인데 - '고가 6척인 지대'라는 말은 그 골방 건물이 지면과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니라 지면으로부터 6척 높이의 지대 위에 축조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는 그 방들이 속해 있는 성소의 건물 역시 그만한 높이의 지대 위에 있음을 알게 한다. 이 사실은 40:49에서 성소의 현관이 계단을 오른 후에 있다는 진술과도 일치한다. 한편 혹자는 이를 골방의 높이와도 연결시켜, 각층이 6척의 높이를 가졌으며 이에  따라  전체  건물의  높이가  지대를  포함하여  총  24척이라고   주장한다(Kliefoth, Hengstenberg). 
=====41:9 
  성소에 부속해 있는 골방 건물의 바깥 벽이 5척이란 의미로서, 이는 6척의 성전 벽(5절)보다 1척이 더 얇다.   그 외에 빈 터가 남았으며 - 문자적으로는 '그 전에 속한 골방 건물에 남겨진  것'이란 모호한 의미의 구절이다. 그러나 여기서 '남겨진'이란  뜻의  '문나'(*      )가 '홀로 두다', '제쳐놓다'란 뜻의 '야나흐'(*     )의 호팔형 분사로서, 특별히 건축의 경우에 있어서는 건물이 세워지지 않은 빈 공간을 가리킨다(Delitzsch). 따라서  여타 영역본(NIV, LB, RSV)과 개역 성경이 이를 '빈 터'로 번역했다. 이 단어는 명사형으로 쓰여진 11절에서 더욱 명확한 의미로 나타난다. 또한 델리취(Delitzsch)는 문두에  있는 접속사 '와우'(* )를 특별히 '그리고 똑같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며 그에  따라  이 빈터의 폭 역시 상반절의 외벽의 치수와 같은 5척(11절)이라고 밝힌다.  한편  혹자는 골방 건물 전체를 지칭하는데 쓰여진 '베트'(*     )를 10절에 나타난  '...사이에'라 는 뜻의 '벤'(*     )의 필사상 오류로 보고 본 구절과 10절을 하나님의 절로  이해한다(Bottcher, Hitzig). 
=====41:10 
 원전상 문장의 초두에 '그리고 그 방 사이에'(*   , 우벤  할레솨 코트)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는 바, 여기서 '그 방'은 42:1에 언급된 부속 건물을 가리킨다. 따라서 '사이에'란 말은 골방 건물과 그 부속 건물 사이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성전 뜰이 남, 북, 서쪽 각각 20척이 된다는 의미이다. 
=====41:11 
 그 골방 문은 다 빈 터로 향하였는데 - 골방 건물의 출입구가 밖을 향해 있다는 의미로, 성소와 골방들 사이가 아무런 출입구 없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음을  알게  한다. 한편 개역 성경의 번역은 각 골방들의 문 모두를 지칭하는 것으로 오해되기  쉬우나 여기서의 '골방'(*       , 하첼라)은 5절에서처럼 골방 건물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이는 하반절과 함께 골방 건물의 출입구가 각각 남쪽과 북쪽을 향해  있는 두 개뿐임을 시사하는 것이다(1, 2절의 성소 도면 참조). 
   그 둘려 있는 빈 터의 광은 오 척이더라 - 9절 주석을 참조하라. 
=====41:12  
서편 뜰 뒤에 건물 - 문자적으로 '서쪽길 끝의 분리된 지역 앞에 있는  건물'이다. 이러한 표현은 그 건물이 성전과 분명하게 분리되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솔로몬 성전에도 이와 유사한 건물이 있었으나 그 용도는 확실치 않다(왕하  23:11;대상 26:18). 단지 '분리된 지역'이란 표현과 이 건물을 출입하기 위해서는 성소와  완전히 분리된 길을 사용하였다는 점에 미루어 아마도 성전에서 유출되는 모든 종류의 쓰레기나 오물을 처리하여 성전 밖으로 내보내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진 일종의 창고로  내 보내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진 일종의 창고로 추측할 수 있다(Delitzsch). 한편 여기서 광 70척은 동서간의 길이를, 장 90척은 남북간의 길이를 말하는 바, 각 5척의 벽과 함께 그 장은 성소를 포함한 성전 뜰과 광과 같은 100척이다. 
=====41:13 
  본절부터 15a절까지는 성전의 전체적인 규모가 언급된다. 
   전을 척량하니 장이 일백 척이요 - 이는 곧 현관 벽  5척(40:48)+현관 12척(40:49 주석 참조)+성소의 문벽 6척(1절)+성소 40척(2절)+내전 문통 벽 6척(1절)+골방  4척(5 절)+바깥 벽 5척(9절)=100척이 되는 성소 건물의 동서간 길이이다. 
   서편 뜰과...장이 일백 척이요 - 이는 성전의 서쪽 외벽부터 서편  건물을  포함한 서쪽의 바깥 성벽에 이르는 길이를 말하는 바, 서쪽 성전 뜰(기즈라) 20척(10절)+서쪽 건물의 동쪽 벽 5척(12절)+서쪽 건물 70척(12절)+서쪽 건물의 서쪽 벽  5척(12절)=100 척이다. 
=====41:14 
  전면(前面)의 광이 일백 척이요 - 곧 성소와 남북 쪽의 성전 뜰을 포함한 폭이  일 백 척이란 의미인 바, 남쪽 성전 뜰 20척(10절)+남쪽 빈 터 5척(11절)+남쪽 바깥 벽 5 척(9절)+남쪽 골방 4척(5절)+남쪽 성전 벽 6척(5절)+북쪽 골방 4척(5절)+북쪽 바깥 벽 5척(9절)+북쪽 빈 터 5척(11절)+북쪽 성전 뜰 20척(10절)=100척이다. 
   동향한 뜰의 광도 그러하며 - 곧 번제단이 있는 성전 앞 뜰의 남북간 광이 100척이란 의미이다(40:47 참조). 
=====41:15 
  뒷뜰 뒤에 있는 건물을...일백 척이더라 - 본 구절은 '다락'(*  , 아티우케하)의 모호함 때문에 두 가지 견해로 대별된다. (1) '다락'이  원어상  '감소하다'란 기본 어의에서 파생된 '희랑'(통로)이란 뜻을 가진다는 점에서, 여기서의  건물을 42:5에 언급된 상층으로 갈수록 툇마루(회랑)로 인해 폭이 좁아지는 방들의 건물로 이해한다(Hengstenberg). 곧 이들 건물의 동서간 길이는 성전의 동서간 장과 일치하는 100척이었다. (2) '다락'의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그 원어적 의미에  '벽'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는 점에서 여기서의 건물을 12절에 언급된 서편 뜰 뒤의 건물로  이해함으로써(the building west of the Temple, including its two walls, LB)  본  구절이 그 건물의 길이(90+2X5)를 다시 한번 언급한 것으로 본다(Schroder). 
=====41:15-17 
  성전(내전, 외전, 현관)과 그에 부속된 건물(삼면의 다락)의 안쪽 벽 모두가  조각이 장식된(18절) 널판으로 치장되어 있음을 밝힌다. 단지 창문은 이미 닫혀  있었기에 널판을 대지 않았던 것 같다. 한편 혹자는 15b절을 상반절의 '척량하니'란 동사의  계속적인 수식을 받는 부분으로 생각해 15b절을 '내전과 외전과 그 뜰의 현관을  척량한 것 역시 100척이더라'란 뜻으로 해석함으로써 16절과의 연관성을 배격한다(Delitzsch, Hengstenberg). 
=====41:18,19 
  21절까지 성전 곧 성소와 지성소의 내부 장식을 기술한다. 
   그룹들과 종려나무를 새겼는데 - 이러한 양식은 솔로몬 성전의 그것과 유사하다(왕상 6:29 주석 참조). 한편 혹자는 이 조각을 팔레스틴의 고고학 유물에서 발견되는 상아 조각으로 보기도 하나, 그보다는 솔로몬 성전의 조각에서처럼 그 조각  위에  금을 도금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왕상 6:29-32). 
   매 그룹에 두 얼굴이 있으니 - 19절까지 이어지는 조각의 묘사이다. 여기서 그룹의 얼굴은 1장에서 에스겔이 이상 중에 보았던 그룹의 네 모습(사람, 사자, 소,  독수리) 과는 달리 사람과 사자의 두 얼굴 모습만 나타난다. 곧 그 두 얼굴이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면서 종려나무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는 형상이 전(殿) 사면을 둘러  연속적으로 조각된 것이다. 한편 사람의 얼굴은 이성과 지혜를, 사자의 얼굴은 힘과  용기를 각각 상징하는 바, 이들이 승리와 생명의 상징인 종려나무를 향해 있다는 것은  악의 세력에 대한 절대적이고 선재적인 승리의 확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혹자는 본 구절에서 그룹의 두 얼굴만이 언급된 것은 이들이 하늘과 땅이라는 창조의 수를  가리킨다고 이해하여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께 봉헌된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Hengstenberg, Bahr). 
=====41:20 
 여기서 '성전 벽'은 곧 성소와 지성소의 안  벽을  가리킨다(inner  wall  of  the Temple, LB). 따라서 본절은 성소와 지성소의 안 벽 모두가 그룹과 종려나무의 연속적인 조각으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는 의미이다. 
=====41:21 
 외전 문설주는 네모졌고 - 성소의 문기둥에 대한 보충적인 설명이다. 곧 성소의 문기둥이 솔로몬의 성전에서와 같이 네모지게 만들어진 사실을 부가적으로  기술한다(왕상 7:5). 한편 이를 비롯해 성전의 전체 규격은 물론 성전의 주요 기물들이 네모 반듯하게 만들어졌다는 사실(43:16, 17;45:2;48:20;출 27:1;28:16)에 대해,  어떤  학자는 여기서 '넷'이라는 수는 하나님의 온전한 임재를 상징하는 수인 바, 이 하나님의 성소에서 궁극적으로는 전우주에까지 이르는 하나님의 임재와 그 계시의 완전한 성취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Kliefoth). 
   내전 전면에 있는 식양은 이러하니 - 혹자는 이 구절을 22절의 '제단'과 연관시켜 개역 성경의 번역 '곧'과 같이-22절이 본 구절의 구체적인 설명이라고  이해한다(LXX, Ewald). 그러나 본 구절이 문자적으로 '내전 앞의 형태가 그것의 형태와 같다'란 뜻인 바, 여기서 '내전 앞'(*   , 페네 하코데쉬)은 성소에  들어가는  사람의 눈 맞은 편에 보이는 지성소의 문전을 가리키는 말이며, '그것의 형태'는 곧 상반절에 언급한 성소 문설주의 식양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 구절은 지성소 문설줄의 식양 역시 성소 문설주의 식양과 같이 네모 반듯하다는 의미이다(Delitzsch, Schroder). 
=====41:22 
'하'(* )가 붙어 새로운 문장을 시작하고 있다는 점(Bottcher)에서 이를 21절과 관련시키는 개역 성경의 '곧'은 불필요한 첨가이다(21절 주석 참조). 한편 여기서  지성소 앞 성소의 중앙에 위치한 '나무 제단'은 모세의 성막(출 30:1-6)과 솔로몬 성전(왕상 7:48)에 있었던 분향단(금향단)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제단이 솔로몬 성전에서처럼 불꽃을 견디기 위해 금을 입혔는지는 확실치 않다. 단지 학자들간에 본 성전과 솔로몬 성전과의 연관성을 비중있게 취급하는 학자는 금 도련의 견해를, 이 제단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에 대한 상징으로 이해하는 학자들은 순수한 나무 제단으로 이해한다(벧전 2:24). 이는 또한 본절에서 특별하게 '나무'(*   , 에츠)란 말을  강조적 으로 사용한 사실에서도 유추해 볼 수 있다. 부가적으로 원전에는  '모퉁이'와  '옆과 면' 사이에 '그 장은'(*  , 아르코)이란 말이 첨가되어 있으나, 이미 상반절에서 그 '장'이 이 척으로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이는 그 제단의 '기초'(its  base,  NIV)를 가리키는  '아드노'(*        )에  대한  필사사의  오류로  보기도  한다(Delitzsch, Schroder). 
   이는 여호와의 앞의 상이라 하더라 - 이전 성소에 있던 다른 기물의  언급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무 제단이 이전의 분향단과 진설병 상의 역할을 함께  담당하는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Bottcher). 곧 새 성전에 있어서 이 제단 위에 두는  것은 영적 음식이며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란 점에서 이 제단은 '하나님의  상' (44:16)과 같은 것이며, 그 음식은 진설병 상의 진설병과 같이 하나님의 음식(말 1:7) 이 되는 것이다(Hengstenberg). 
=====41:23,24 
 성소 안에 있는 두 문(1-4절)에 대한 보충적인 설명이다(왕상 6:31-35). 곧 외소에 속한 문은 현관과 외소(성소) 사이에, 내소(지성소)에 속한 문은 외소와 내소  사이에 각각 위치했으며 그 문들은 모두 두 짝으로 된 여닫이 문이다. 한편 여기서  '접치는' (*   , 무사보트)은 원어상 '회전하는'이란 뜻을 가지는 바, 개개의 문짝이 여닫을 수 있도록 되어 있음을 알게 한다.   
=====41:25 
 성소 안에 있는 두 문(1-4절)에 대한 보충적인 설명이다(왕상 6:31-35). 곧 외소에 속한 문은 현관과 외소(성소) 사이에, 내소(지성소)에 속한 문은 외소와 내소  사이에 각각 위치했으며 그 문들은 모두 두 짝으로 된 여닫이 문이다. 한편 여기서  '접치는' (*    , 무사보트)은 원어상 '회전하는'이란 뜻을 가지는 바, 개개의 문짝이 여닫을 수 있도록 되어 있음을 알게 한다.   
=====41:26 
 현관 좌우편에는...새겼고 - 문자적으로는 '(현관에는) 닫힌 창문이  있고  그리고 종려나무가 새겨진 현관의 좌우편(벽)이 있고'이다. 곧 종려나무가 새겨진 것은 '닫힌 창'을 제외한 좌우편 벽이다(40:16 주석 참조). 
   전의 골방과 디딤판도 그러하더라 - 곧 현관에서처럼 전의 골방에도 닫힌 창과  종려나무 조각이 있으며, 그 디딤판(25절)에도 종려나무 조각이 새겨져 있음을 가리키는 듯하다(Schro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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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42장 주석 
=====42:1 
 성소에 대한 측량에 이어 성전의 부속 건물에 대한 설명과 측량이 제시된다.  먼저 14절까지는 성전의 남북편 뜰에 연접해 있는 4개(남2, 북2)의 방이 언급된다.  혹자는 이 방들을 40:17이나 40:44에 언급된 방들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나(Havernick)  이 방의 용도(13, 14절)에 비추어 볼 때 타당하지 않다(Delitzsch). 
   북편 뜰 - 곧 성전 안 뜰(41:10)의 북쪽을 가리키는 바, 다음에 언급된 건물이  이 성전 뜰과 잇닿아 있음을 시사한다. 
   그 두 방의 하나는...북편 건물을 향하였는데 - 여기서 '방'(*   ,  할리쉐카)은 41:5의 '골방'과 마찬가지로 집합적인 의미, 곧 그 방들이 소속된 건물  전체의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한편 '골방 앞뜰을 향하였고'(*   , 네게드  하기즈라)는 원어상 '분리된 지역과 마주 대하였고'라는 뜻이다. 여기서 '분리된  지역' (기즈라)은 성전 뒤편의 서쪽 들을 가리키는 바, 이러한 표현은 선지자가 41:12의  서편 건물 북쪽, 곧 성소의 북서쪽에 위치한 까닭에 그 '기즈라'와 본절의 건물이  마주 대한 모습으로 보여진 때문으로 이해된다(Delitzsch). 따라서 이는 개역 성경의  번역대로 성소의 북편 골방 앞의 뜰에 잇닿아 이 건물이 위치하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여타 영역본들 또한 이를 일반적인 성전의 북쪽 뜰로 번역한다(NIV, LB,  RSV). 이 모든 사항을 유추할 때 지금 언급된 이 방은 8b절에 언급된 바, 장이 100척에 이르는 성전 앞을 향한 건물을 지시하는 것이다. 한편 또 다른 방의 건물은 8a절에 언급된 장 50척의 '바깥 뜰로 향한 방'을 가리킨다. 여기서 이 건물이  향해  있다고  언급한 '북편 건물'의 '건물'(*     , 하빈얀)이란 말이 원어상 40:5에서 성벽의  의미로 쓰인 '담'(하빈얀)과 동일  하다는  점에서  이  '북편  건물'은  곧  '북쪽의  성벽' (opposite the outer wall on the north side, NIV)으로 추측할 수 있다(Cooke). 
=====42:2 
 그 건물의 장 곧 동서간의 길이는 성소와 같은 100척이다. 한편 '광'이 50척이라는 것은 '두 방'으로 언급된 두 건물 사이의 10척의 통로까지를(4절) 포함한  전체  폭을 언급한 것으로서, 옆으로 나란히 서 있는 안뜰 문통의 길이(40:35, 36)와  같은  것이다. 
=====42:3 
 그 방 삼층에 툇마루들이 있는데 - 여기서 '툇마루'(*       ,  아티크)는  늘어선 방 앞에 있는 일종의 복도용 발코니로 생각된다. 이 두 건물은 3층으로 이루어졌으며, 3층의 모든 방들 앞에 툇마루가 있다. 
   한 방의 툇마루는...박석 깔린 곳과 마주 대하였으며 - 복도(4절)를 사이에 둔  두 건물의 3층 툇마루의 방향을 지시하는 것으로, 한 건물의 툇마루는 '20척 되는 안뜰', 곧 북쪽의 성전 안뜰(41:10)을 향해 있고, 또 다른 건물의 툇마루는 바깥  뜰을  향해 있는 바, 이들은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 
=====42:4 
 북편 뜰에 있는 두 건물 사이에 폭 10척의 통로가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원문에는 '안쪽을 향하는'이란 뜻의 '엘 하프니미트'(*    )란  말이  첨가되어 있는 바, 혹자는 하반절의 '장이 일백척이며'(*   ,  데레크  아마에하트)라는 말이 원어상 '1척의 길'이란 뜻을 가진다는 점에서 그 '안쪽을 향하여'라는 말을 성전 안뜰을 향한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아울러 본절을 폭 10척의 길  이외에 안뜰로 들어가는 별도의 폭 1척의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Schroder, Hengstenberg). 그러나 여기서의 '안쪽'은 특별한 지점을 말한다기보다는 단지 통로를 따라  들어간다는 단순한 방향 제시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문들은 북을 향하였으며 - 곧 성전 안뜰과 연접해 있는 건물의 각 방의  문들은 그 앞에 길게 연접한 통로를 향해 열려 있으며, 제사장들은 그 통로에서 직접  방들로 들어갈 수 있다. 한편 바깥 뜰을 향한 건물의 문 또한 북으로 향해 있다는 것은 그 건물이 안뜰의 담과 어느 정도의 간격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혹자는 이러한 점에서 9절의 '통행구'를 이들 방 문앞의 통로로 말하나(Schroder) 개연성은 없다. 
=====42:5 
  건물의 대략적인 구조를 설명한다. 
   이는 툇마루들을 인하여...더 줄어짐이라 - 3층으로 구성된 방들은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더 좁아진다. 왜냐하면 툇마루(3절, 회랑)가 공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본절에서 '툇마루들로 인하여'의 '인하여'(*     , 아칼)는 원어상  '삼키다',  '먹어버리다'란 뜻을 가지는 바, 그 회랑의 폭만큼 상층의 방들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한편 본절에서 '하층'(*    , 메하타흐토노트)과 '중층'(*  메하티코노트)의 '메'(* )는 비교적인 용법으로, 하층과 중층에 비교해 3층의 방을 진술한 '메헤나'(*       )와 함께 각 층이 위를 향할수록 작아진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Delitzsch, Hengstenberg). 
=====42:6 
  5절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다. 그러나 여기서 '뜰의 기둥 같은 기둥'에  대해서는 어느 학자도 명확한 뜻을 설명하지 못하므로, 그 구체적인 구조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제시된 견해가 없다. 단지 본절의 '기둥이 없다'란 말에서 암시되듯이 이 건물의 방들 또한 성전 골방의 방들처럼 계단식의 들보를 가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Delitzsch, Schroder). 
=====42:7,8 
그 한 방의 바깥 담 곧 뜰의 담과 마주 대한 담 - 여기서 '뜰'은 곧 성소 외곽  지역에 있는 제사장의 뜰을 가리키는 바, '뜰의 담'은 바깥 뜰과 경계를 이루는 담을 가리킨다. 또한 '마주 대한'(*           , 엘 페네)은 문맥상 '평행'(parallel, NIV)의 의미로 볼 수 있는 바, 본 구절은 '그 한 방의 바깥 담'과 '뜰의 담'이 서로 마주  보며 평행을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한편 본 구절을 통해 제기되는 문제는 관연 '그  한 방의 바깥 담'의 위치가 어디인가 하는 것인데, 이는 4절과 8절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곧 본절의 '그 한 방'은 8절에 언급된 바깥 뜰로 향한 방(건물)을  지시하는 바, 그 방의 장이 50척이라는 사실은, 성전 뜰을 향한 방의 장이 100척이라는 것(8절)과 그러한 두 건물 사이의 통로가 100척이라는 것(4절)과 비교해 50척의 여지를  남겨 놓는다. 따라서 이 50척의 담이 그 50척 되는 방(건물)의 통로쪽에  연접해서  세워져 있음을 알게 한다. 한편 본 구절에서 '담'으로 쓰인 '가데르'(*     )는 원어상  마당이나 포도밭 또는 가축 우리용의 '울타리'나 '벽' 등을 가리키는 말인 바, 이는  본장에서 성전의 성벽('사방 담', 20절)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 일종의 방어용 벽을 뜻하는 '호마'(*       )와는 그 성격이 다른 벽이다. 
=====42:9 
  이 방들 아래에 동편에서...통행구더라 - 여기서 '이 방들'은 곧 8절에 언급된 '바깥뜰로 향한 (건물의) 방'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바깥 뜰을 향해 있는 건물의 동쪽 끝에 잇닿아 바깥 뜰에서 직접 들어올 수 있는 별도의 문이 있다는 의미이다. 한편 이 문은 모든 안뜰문의 경우와 같이 8개의 계단 위에 있게 된다(40:31, 34, 37). 
=====42:10-12 
  성소 북편에 있는 두 건물에 이어 동일한 위치와 규격의 남편 건물이 언급된다. 북편 건물과 동일하므로 간략히 언급된다. 
=====42:13 
 이제껏 언급된 그 방의 용도와 목적이 서술된다. 
   제사장들이 지성물을 거기서 먹을 것이며 - 그 방의 첫 번째 용도이다. 여기서 '지성물'(*  , 코드쉐 하카다쉼)은 제단에서 불사르지 아니하였던 소제물(레 2:3, 10;6:14-18;10:12)과 대제사장과 회중을 위해 바쳐진  속죄물을  제외한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 그리고 전 밖에서 태울 제물들의 거룩한  부분들을  가리킨다 (레 6:19-23;7:6). 곧 이러한 제물들은 여자를 포함한 그 가족 모두가 먹을 수 있었던 '거제'나 '요제'의 제물(레 10:14)과는  달리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는  것이다 (Delitzsch). 한편 이전 성전에 있어서 제사장들은 그 제사 음식을 성소, 그것도 안뜰의 제단 곁에서만 먹을 수 있었다(레 10:12, 13).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구절에서  제사장들에게 이러한 방이 주어진 것은 그들의 편의를 위한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을 거기 둘 것이며 - 그 방의 두 번째 용도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5대 제사(번제, 소제, 속죄제, 화목제, 속건제) 중 3가지만이 언급된 것은 이 3가지 제사의 제물만이 제사장들에게 거룩한 분깃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거룩한 곳이라 - 이 방들이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에서의 절대적인 성결(거룩) 유지를 위하여 주어졌음을 시사해준다. 한편 여기서의 '거룩'(*     , 코데쉬)은 신적 거룩에 부합되는 철저하고도 절대적인 '거룩'을 의미한다(Shroder). 
=====42:14 
 13절에 이은 이 방의 세 번째 용도는 제사장들이 거룩한 예복을 보관하고 갈아  입는 장소로서 사용되었다. 
   제사장의 의복은 거룩하므로 - 제사장들이 제사시의 예복과 평상복을 엄격하게  구분해야 함을 지시하는 구절로, 그들의 직무의 거룩성을 보여준다. 제사장은  평상복을 입고 제사를 드릴 수 없듯이 제사 예복을 입고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기  때문에 제사 직분을 마친 후 이 '거룩한 방'에서 이 예복을 벗어 보관시키고 평복으로  갈아입은 후에야 바깥 뜰로 나올 수 있었다. 한편 여기서 '성소에 들어갔다가'의  '들어 갔다가'(*       , 베보암)는 제사장들이 제사를 집행하기 위해 제단이나 성소에 오는 것을 가리킨다(Delitzsch). 
=====42:15 
  40:3에서 시작된 성전의 측량이 일단락되는 부분으로, 20절까지 성전의 외곽 곧 바깥 뜰을 둘러싼 성벽의 측량이 제시된다. 
   동향한 문 길로 나가서 - 완전히 성벽의 바깥쪽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선지자가 14절까지 언급된 성전 안뜰에서 동문으로 나와서 성전 바깥 뜰에 이른 사실을 가리킨다. 
이는  20절에  언급된  '사방  담  안마당의  장과  광'이란   구절에서도   확인된다(Delitzsch). 혹자는 '안에 있는 전'을 그 성벽가지 이 성벽을 측량한 것으로  생각하나(Schroder) 이는 20절의 '안마당'이라는 표현과 잘 조화되지 못하는 것 같다. 
=====42:16-19 
그 성벽의 측량은 선지자가 위치한 동쪽부터(15절) 시작된다. 한편 이 성벽의  남북간 폭은 500척인 바, 이는 북문 50척+북쪽 바깥 뜰 100척+안의 북문 50척+안뜰  100척+안의 남문 50척+남쪽 바깥 뜰 100척+남문 50척=500척이다. 또한 그  동서간의  장  역시 500척으로서 서편 건물과 뜰 100척(41:13)+성전 100척(41:13)+안뜰  100척+안의  동문 50척+바깥뜰 100척+바깥 동문 50척=500척이 된다. 곧 그 사면의 성벽은  길이와  폭이 각각 500척인 정방형이다(45:2). 특별히 여기서 동, 북, 남쪽 바깥 뜰의 문 50척은 그 안에 성벽의 두께 6척을 포함하고 있다(40:6, 15 주석 참조). 따라서 본문의  500척은 장과 광 모두 성벽의 두께까지를 포함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제 동쪽에서 시작된 성벽의 측량은 북, 남, 서쪽 순으로 진행된다. 
=====42:20 
  사방의 성벽에 대한 측량을 총괄하는 부분으로, 여기서 '안마당'은 16-19절 주석에서도 보여지듯 성벽까지를 포함하는 성전 전체를 가리킨다.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 - 성벽의 높이가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벽으로는 적당치 않은 6척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40:5)에서도  보여지듯, 성벽의 의미는 성역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속된'(*    , 홀)은 원어상 '평범한'이란 뜻을 함축하고 있는 바, 이 성벽이 보편적으로 타락한  세속으로부터 성전을 구분하고 있다기보다는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통상적인 신앙인의 삶을 영위해 가는 일반 백성들의 영역과 성전을 구분한다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48:15 주석 참조). 이러한 사실은 구약 시대에 있어서 성전의  독특성을 각별하게 주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전의 거룩과 성결의 강조는 성전 그 자체의 거룩함 때문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에 기인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출 3:5;레 11:45;19:2;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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