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절 영의 밤
1. 영의 밤 (감성이 영에 순복한 상태에서, 오직 일편단심 굳센 믿음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 영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순수하고도 온전한 합일을 이루도록 예비함)
앞에서 보았듯이 감각의 밤은 자기 사랑(자기 연민과 집착, 애집, 자기 의, 자기 신뢰, 자기 주장)으로 대표되는 거짓 자아를 거의 무력하게 만든다. 더불어 평온기-잠시동안의 영적안식의 기간, Plateau-의, 하나님이 주신 영적선물과 하나님과의 기쁨에 찬 신비의 교통으로 인한 감사로 충족케 됨의 시간-가 선물로 주어진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거짓 자아의 찌꺼기는 영적인 기능들 가운데에도 남아 있을 수 있다. 그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든지 또는 특별한 소명을 받았다는 비밀스런 만족감으로 나타난다. 겉으로는 "나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아무튼 "그분이 '나'에게 이러한 은총을 주셨어!"라고 은근히 자랑하며 흐믓해 하며 나타내고 싶은 것이다. 다시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해도 하나님 그 자신 보다 더 소중히 여겨질 수 있는 하나님이외의 모든 자산(property, 물질적 또는 은사들을 포함한 영적 자산들)들까지 또한 무의식이나 영적 수준에서 소유하고픈 경향이나 영적 자부심까지도 정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영의 밤 동안에 처리되는 일이다. 이 때 특별히 이성과 의지에 있는 거짓자아의 잔재조차도 하나님의 사랑의 불에 살라져 소멸되어 버린다.
십자가의 요한이 신성한 일치(변형되는 일치)의 시작이라고 부르는 영의 밤은, 다만 겸손과 순종의 마음으로 믿음-소망-사랑만 부여 안고 일편담심 주님말씀만 따라 가는 칠흙같이 어둔밤, 한밤중의 걸음걸이다, 여기에 비하면 감각의 밤은 저녁때즈음이라 할 수 있겠다. 영의 밤은 좀 더 깊은 정화를 하는 더 높은 단계의 전환기이다. 성 요한은 "기쁨에 찬 신비의 체험 중에도 "경고의 경종"은 언제나 울린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무의식(잠재의식) 안에서 감각의 밤에도 교정되지 않은 거친 곳들, 예를 들면 마음이 습관적으로 산만해진다든지, 문화적 조건화의 잔재라든지, 영적 자부심 같은 것들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영의 밤은 우리의 무의식(잠재의식)에 남아있는 거짓 자아의 모든 잔재들마저부터로도 해방되어 우리로 하여금 변형하는 일치를 준비하게 한다.
영의 밤이 시작되면, 하나님영광의 현존에 대해 "생생하게 느껴지던" 모든 신비한 체험들이 현저히 줄어들어 사라져 버리고 오히려 바싹 말라버려, 기쁨에 찬 길로 인도되었던 사람들은 그 체험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상태에 들어간다. 이전에 받았던 영적 위안에 비례하여 이제는 온전한 벌거벗음 곧 [임재감각의 결핍]의 고통스런 체험을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숨겨진 사다리로 인도되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생하게 느껴진" 현존을 별로 누려보지 못했기 때문에 영의 밤이 와도 덜 고통스러울 것이다. 어쨌든 영의 밤은 하나님과의 일치로 나아가기 위해 마지막으로 거쳐야 하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이러한 정화의 과정 없이는 거짓 자아의 잔재가 완전히 멸절될 수는 없기 때문에,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던 영적인 원시 상태가 다시 솟아올라 그 상태로 되돌아갈 위험이 있는 것이다.
이 시기에는 보통, 하나님에 대한 애경심은 더욱 깊어져만가고 감각의 밤에서보다 더 심한 하나님의 현존 감각에 대한 갈망과 하나님을 상실한 것 같은 느낌과 버림받음의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괴롭고 답답함, 두려움이 문득문득 엄습해 온다.
하나님의 나무를 태우되 나무를 소멸시키지 않는 부활영생안의 정화의 빛
사랑겨운 하나님의 예비하신 지견 스스로가 사랑받는 영혼을 완전히 하나님께 합일시키고자 정화시키고 준비하는 그 방법은 마치 불이 불의 특성과 작용을 제 안에 가지고 있는 나무를 불태워 재가 되게 함과 같다. 이 경우, 나무로 보아서는 불보다 중량과 분량이 더하다는 이외에 수동도 능동도 없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갈망만이 점점 더 고양된다. 맨 처음 나무에 대해 불이 하는 일은 습기를 없애는 바싹 말리기인데, 보통 불완전한 연소로 인해 처음엔 고약한 냄새를 동반한 그슬림이 생기고 검고 보기 흉한 색깔이 되고 이윽고 완전히 바싹 말라지면 거기에 불이 붙게 되고, 그 때 불과 상극되는 모든 어둠-그슬림-더러움은 밖으로 쫓겨나고 마지막엔 나무자체가 벌겋게 타올라 불과 하나되어 뜨겁디 뜨거운 열을 내면서 밝디 밝은 불이 되고 소멸되어 간다. 이로써 그 전보다 훨씬 가벼워지는데, 이 특성과 결국은 나무안에서 내어주는 불의 힘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가 보았던 불에 소멸되지 않는 가시떨기 나무처럼 부활생명을 통해 재가 된 나무를 다시 나무로 살리사 완전한 합일로서 영원히 불에 타오르게 하신다. 거짓자아가 완전히 소멸되고 새로운 영의 참자아로서 하나님과의 완전한 합일로써 다시 살게 하시는 것이다..
2. 영적 선물
즈의하라!! 기쁨에 찬 신비의 길로 이끌리던 사람들은 이러한 은근한 거짓자아의 유혹에 넘어갈 기회가 더욱 많다. 그들은 심령의 혹은 영적인 선물을 받은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은총 받은 선생이나 은사적인 지도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겸비함으로 부단히 깨어 있지 않으면!!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가르침에 매력을 느끼게 하던 그 은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은근히 자신의 이미지를 미화하도록 만들게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영적으로 얻은 것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예언자, 기적을 행하는 자, 깨달은 선생, 순교자, 희생자, 성령 은사의 지도자의 역할, 쉽게 말해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유혹을 받을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영의 밤은 이러한 유혹의 발호될 기회를 불식시키는데, 그 이유는 정화의 활동을 거치면서 참으로 언제라도 주님의 도움과 보호하심이 없이는 자기자신이 모든 악을 저지를 가능성을 항상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우리가 악한 행동을 저지를 것이다' 라는 뜻이 아니라, 개인적인 죄의 가능성을 불식시키고 죄로 이끄는 거짓 자아의 잔재를 피하기 위해서는 늘 깨어 겸비함으로써 온전히 하나님에게 의존해야만 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이를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는 심령 선물, 탈신 경험, 초월적 존재와의 교신(예를 들면 천사와의 대화), 부양, 신체 기능의 조절, 여러 형태의 치유, 예언, 기타 등등의 정신적 선물에 대해 많이 접할 수 있게 미디어가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종류의 유혹을 이해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영적 선물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그 자신들도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인 체험을 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특히 이러한 것은 "성령 안에서의 쉼"이라고 부르는 현상에서 자주 나타난다. 불행하게도 온전히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경우에는, 그 성공으로 우쭐해진 마음이 그 사람들 머리로 들어가, 자신을 특정한 이상적 자아상으로 동일시하려는 유혹에 넘어가게 되고 결국 거짓 자아의 손아귀로 들어가게 만들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3. 봉사
봉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진 사람이라는 증거이다. 진정한 예언자, 순교자, 영적인 지도자, 혹은 교사들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 들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께서 자주 자신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졌고 자신의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 것에 주의해야 한다. "그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그대로 할 뿐이다"(요 5:19)라고 하셨고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주로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 8:16)라는 말씀으로 자신을 변호하셨다.
하나님에게 영감을 받아 일하는 사람은 특별한 부르심(소명)을 받고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활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세상에서 핍박당하신 것처럼 하나님 일을 하는 도중에, 반대와 배척과 실패와 실망과 박해 그리고 아마도 죽음에 이르기까지도 감당해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과 자신의 가르침을 방어하기 위하여 심령적 힘이나 특권을 행사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신이 보내지셨음을 증거 하는 일부로서 지극한 고통과 배척을 받는 체험을 자신에게 허락하시어, 궁극적 실재(하나님)의 본성이 무한한 사랑과 용서임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의 죽음과 부활은 거짓 자아가 행복과 성공이라고 보아 왔던 모든 것에 대해 커다란 의문을 제기하셨다.
영적 여정은 성공담이 아니라 자아를 축소시키는 일의 연속이다. 12세기 시토 수녀회 수도원장이던 클래보의 성 버나드는 자신을 낮추는 것이 겸손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였다. 낮은 자아상을 가진 사람은 겸손과 신경질적인 자기 비하 사이에서 혼란을 겪을 것이다. 후자의 것은 물론 겸손이 아니다. 자칫하면 겸손이라는 말은 잘못 이해될 수 있다. 겸손이란 기본적으로 신성한 빛으로부터 오는 경험적 인식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 없이는 모든 죄를 지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의 밤은 겸손을 배우는 집중적인 과정인 것이다.
4. 영적 밤이 맺는 열매
영적인 밤은 다섯 가지 의미 있는 열매를 맺는다.
1). 영의 밤에 얻는 첫번째 열매는 우리가 영적인 선물과 은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명예스러운 역할을 맡으려는 유혹((영적 자부심))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도록 선택되었다는 은근한 만족감을 정화시켜 준다. 그것은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나를 뽑으셨다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를 다루셨음을 인식하고, 자기를 다루어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그 안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상에서 우리를 대표하시어 자신을 죄의 결과와 동일시하셨는데 그것을 통해 보여주신 주된 현상은 예수님도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이다. 그의 신성한 특권을 희생함으로써 세상의 구원자가 되시고 그의 완전한 영광으로 이르신 것이지, 그분이 세속적인 성공을 이루어서 또는 그분에게 주어지지 않은 역할을 스스로 택해서 이루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2). 영의 밤에 얻는 두 번째 열매는 어떤 정서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정서들 때문에 또 정서들과 지나치게 동일시하려는 경향 때문에 쫓겨 다니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서들이 원하는 것은 얻으려 하고 원치 않는 것에서는 벗어나려고 끊임없이 애쓰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다. 영의 밤은 정서적 변화나 마지막으로 남은 기분의 지배의 흔적에서 해방시켜 준다. 이것은 원하지 않는 정서를 단순히 의지의 힘으로 억압하거나 누르는 것이 아니고, 그 정서를 받아들여 우리 본성에 있는 이성과 직관에 응화시키는 것이다. 그 후에 정서는 이성과 의지의 결정을 따르고 지지하는데, 그것이 처음의 정서의 자연스런 목적인 것이다. 우리의 정서 생활을 이성과 믿음에 응화시키고, 우리 전 존재를 하나님께 맡겨 드리는 것이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정의하는 인간의 행복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그들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어 활동하면서 그렇게 활동하는 것을 즐기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조화를 이루는 상태는, 우리 본성의 영적 부분에 남아 있는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에 따르려는 마지막 흔적을 제거함으로써 영의 밤에 이루어진다. 정서적이고 감각적인 이미 감각의 밤에 잠재워졌다.
3). 영의 밤의 세 번째 열매는 어린 아동기에 가졌던 혹은 우리가 속한 집단에서 숭배하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정화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전에 알고 있던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것만이 아니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기쁨에 찬 신비의 기간 중(그것이 우리가 겪었던 길이었다면)에 즐기던 친밀한 일치의 경험을 통하여 발달시킨 하나님에 대한 개념도 정화시킨다. 영의 밤에 하나님은 아주 초자연적인 방법,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시듯, 호렙 산에서 엘리야에게 나타나시듯 무한하시며 이해할 수 없고 더 이상 형언할 수 없는 방법으로 나타내 보이신다. 순수한 믿음이 주는 체험은 아무도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강력하고도 표현할 수 없는 에너지가 내부에서부터 솟아오름을 느낄 뿐이다. 그 강력한 에너지는 분명히 인격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다루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비인격적인 것으로 경험되기도 한다.
4). 영의 밤의 네 번째 열매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신학적 덕"이라고 부르는 믿음, 사랑, 희망이 정화되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 여정을 지탱해 주고 우리가 의지해 오던 신앙 집단, 신심 행위, 영적 지도, 성지 순례, 성물과 같은 것들로부터 믿음이 정화될 때에, 우리는 인간적이며 종교적, 영적으로 동일시를 해 왔던 집단으로부터 배척받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또 영적인 지도자, 혹은 우리의 영적인 발달과 삶의 의미를 위해 우리가 의존하던 사람들과 갈라서기도 한다. 우리가 가졌던 영적인 여행과 그것을 위해 택했던 방법들, 우리의 성소, 교회, 예수 그리스도, 심지어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조차 흔들릴 수도 있다. 이러한 체험은 성서의 위대한 인물들, 욥, 모세, 마리아, 그리고 예수 자신 안에 반향되어 있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은 그분의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일치 위에 세워졌던 것이지만, 그분은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와 같은 의미 있는 질문을 하시면서 보여주는 관계를 경험한 것 같다. 성서의 이야기에 따르면, 욥은 그 시대에 완전한 모범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선망 받는 표본이었다. 그러나 불과 며칠 사이에 그는 그의 재산과 가족과 명성, 심지어 그의 건강까지 모두 잃어버렸다. 자신의 친구의 삶에 이러한 비극을 허락하고 보내 준분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인가? 욥은 자신의 가련한 처지에 대해 통렬히 불평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미숙한 생각을 끝내게 해주었던 체험을 거치지 않았다면 과연 그는 하나님이 참으로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배웠을 것인가? 영의 밤에 얻어지는 가장 큰 열매는 하나님을 하나님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마음가짐이다. 그 결과로 그분이 누구신지 혹은 그분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알지 못해도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받아들이게 된다. 비록 우리는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자아 승복과 포기가 영의 밤에 강력하게 자라난다. 하나님의 빛은 너무 순수해서 우리 인간적인 기능으로는 그것을 감지할 수 없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 따르면, 순수한 믿음은 어둠의 빛줄기이다. 하나님에게서 위안이나 확신도 없고 우리가 의존하던 지주들이 모두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이러한 승복은 실존적인 의혹에서 극단적으로는 절망의 순간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시든지 간에 그분이시기를 허용하고 또 무엇을 하시든지 간에 그것을 받아들일 때 보이지 않는 신뢰가 솟아난다. 그러한 신뢰는 우리의 선행, 역할, 그 무엇에도 기초를 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에 신뢰를 갖는 것이다. 그분의 자비는 본성적으로 허약한 사람이나 극심하게 결핍된 사람에게 손을 뻗치신다. 우리는 그분의 자비하심에 동의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한 승복과 복종의 온상에 주입하시어 영의 밤을 통하여 변형하는 일치로 우리를 데려가신다. 참으로 믿음은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실상을 알게 함으로써 <이미>아는 것을 비워 어둡게 하고, 소망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가져다 줌으로써 <이미 가진>기억을 비워 어둡게 하고, 사랑은 의지에 있어서 하나님 아닌 것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정과 낙을 비우고 벗어던지게 함으로써 어둡게 하여 하나님과 합일을 이루게 한다.
5). 영의 밤의 다섯 번째 열매는 우리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이기심을 떠나보내고, 하나님과의 일치 안에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열망을 갖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 따르면, 영의 밤에 고통스럽게 체험하던 하나님 사랑의 불길이, 변형하는 일치 안에서는 부드럽고 충만한 사랑으로 체험된다. 자아 중심의 "나"는 아주 작은 "나"로 작아지고 출애굽기의 "나로다" 하신 거대한 분이 그 자리에 우뚝 들어서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 본성을 신성으로 변형시키시는 것인데, 무슨 특별한 역할을 주거나 예외적인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삶을 비범한 사랑으로 살 수 있게 하시는 것이다.
5. 주의할 것
마지막으로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과 개요에 대하여 우리 전통의 위대한 스승들이 제시한 영적 여정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영적 여정에서 절대적으로 도는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기대하는 것들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이나 의견에 얽매이실 분이 아니다. 때때로 영의 밤은 즉시 시작되기도 하고, 감각의 밤과 뒤바뀌어서 일어나기도 하며, 때로는 동시에 일어나기도 한다. 폭넓은 독서를 통해서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리라고 기대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그와 반대로 일을 꾸미신다. 어떠한 길을 따르든지 간에 우리는 무지의 세계로 자신을 내어 맡기는 신뢰의 도약을 해야만 할 것이다.
제 3 절 변형하는 일치
변형하는 일치의 체험은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일치하고 있다는 보이지 않는 확신 속에서 우리의 일상생활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세계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것은 세상을 떠나지 않으면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방식이며 세상 안에 존재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1. 변형하는 일치의 특징
1). 더 이상 정서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변형하는 일치에서는 더 이상 정서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그리고 정서의 변동도 사라진다. 우리가 알고 있던 정서는 사실 실제와 다르며 다만 우리가 그렇게 해석할 뿐이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정서가 그 이전과 같거나 더 강할 수도 있지만 귀찮게 구는 감정이라든지 기분이 바뀐다든지 하는 후유증은 없다. 이때의 정서는 그 순간의 특별한 내용에 따라 반응하는 적절한 것들이다. 예수께서 분노에 차서 환전상들을 쫓아내신 것은 이러한 예이다. 그 상황이 끝나면 그 정서도 마찬가지로 끝난다. 결과적으로 정서 때문에 죄짓게 되는 일은 없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죄지을 수 있음을 인식하지만 죄를 짓도록 하는 자극은 없어졌다. 거짓 자아로부터, 그리고 정서의 지배로부터 자유를 얻는 일이 끝난 것이다.
2). 정서의 개입이 없어진다.
사막의 교부들은 이러한 체험을 "무감정" 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때때로 "무관심"의 뜻을 갖는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크게 관심을 갖는 것이라 해도 거짓 자아의 특징인 정서(주관적감정)의 개입 없이 일어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정서적 고통에 필요 이상으로 빠져 들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을 자유로이 헌신한다. 우리는 가장 깊은 내면에서 그들에게 자신을 내어 보이면서 그들 안에서 고통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본다. 우리에게 주어진 내적 자유를 그들과 나누고 싶어 하지만 불안한 마음이 든다거나 그들을 바꾸려 한다거나, 또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순수한 선물인 신성한 생명을 가지고,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과 나누려고 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은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하지 말아야 되는지를 아주 자세하게 일러 주신다.
3). 의식의 재구성이 일어난다.
이러한 상태의 의식은 잠시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온 삶을 자동적으로 감싸 주는 영구적인 인식이다. 믿음의 X선은 표면에 나타나는 것을 투과하여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과 모든 것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본다. 그러므로 거룩한 상징(즉 기도어)에서부터 출발하여 영적인 주의성으로 옮겨가고, 거기에서 하나님 안으로 더욱 깊이 빠져 들어가며, 그리고 다시 무의식의 정화로 옮겨가는 일들이 변형하는 일치에서 모두 끝난다. 변형하는 일치에서는 새로운 차원에서 모든 실재를 지각하는 의식의 재구성이 일어난다. 현재 우리는 과거에 위안을 주었던 영적 경험 없이 살고 있지만, 거룩한 은총의 에너지에 직접적이고 계속적으로 열려 있는 순수한 믿음과 사랑을 성숙하게 인식하면서 살아간다.
4). 하나님의 현존의 발산((임재 영광의반사))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무엇이든지, 또 얼마나 기름에 찬 것이든지 간에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현존을 발산해 줄 뿐이다. 이 세상 삶의 어떤 체험도 하나님 그 자신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구분과 체험을 무한히 초월하시기 때문이다. 변형하는 일치에서는 믿음과 신뢰와 사랑의 에너지가, 우리가 그것을 체험하든지 아니든지 관계없이 언제나 우리에게 비추어진다. 육체는 덕의 수련 그리고 감각과 영의 정화를 통하여 준비되고 안정되었기 때문에 육신은 아무런 중단 없이 하나님의 의사소통을 받아들일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제 우리의 모든 활동, 심지어 아주 평범한 활동 속에서도 드러난다. 그 속속들이 퍼진 일치는 관상기도 중에서와 마찬가지로 길을 걸어갈 때나 이를 닦을 때에도 나타난다. 외적인 그리고 내적인 실재들은, 모두가 하나님 안에 뿌리를 두고 하나님을 나타내기 때문에 하나가 된다. 인간의 전 유기체는 감성화(感性化 : 감각할 수 있는 기능을 갖게 되는 것)되어서 하나님의 현존을 그대로 받아 나타내지만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사랑을 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잘못 판단하지는 않는다.
신성한 에너지는 그 자체가 무한한 잠재력이며 또한 실재력이다. 피조물들은 그 에너지가 국소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만일 우리 안에 장애, 즉 거짓 자아가 없다면 우리는 영적인 전도체가 되어 무한한 사랑과 자비로서의 하나님의 현존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시켜서 그 영향의 범위를 점점 더 넓혀 가게 한다.
2. 변형하는 일치의 열매
1). 거짓자아를 무너뜨려서 익은 열매이다.
변형하는 일치는 거짓 자아를 무너뜨려서 익은 열매다. 거짓 자아가 사라지면 곧 변형하는 일치가 일어난다.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에 대한 비소유적인 태도가 형성되는데, 그것은 이제 무엇이든지 소유하려고 드는 자기중심적 "나"라는 것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삶의 좋은 것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으면서 다만 하나님의 현존으로 나가는 디딤돌로 삼는다는 것이다. 성령의 에너지가 정점(靜点)에서 다른 모든 기능으로 여과되어 들어가서는 외적인 감각들을 정화시켜 주어, 경험하는 모든 감각에서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을 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 있는 진실하고 아름다우며 선한 것들은 투명해진다.
변형하는 일치는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다. 욥에서 보듯 질병과 외적인 시험에 대한 참을성, 안토니오에게서 보듯 극심한 고독, 그리고 바쁜 목회 활동 등. 그러나 그것은 평범한 방법 이상으로 표현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신성한 일치가 좋은 것에 대해 방출해 내는 에너지가 굉장하기 때문이다. 분자 물리학에는 한 분자가 파형 안으로 들어갈 때에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그 파(波)의 힘은 독립 분자 자체의 힘보다 훨씬 크다. 안토니오는 하나님 사랑의 근원으로 들어가는 움직임을 통해서 그의 사랑의 힘을 얻어냈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늘나라의 임금으로서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시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그분은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 그러나 그분은 언제나 피조물에 봉사하심으로써 그 권위를 행사하신다. 그분은 이 지구를 창조하시고 매일매일 공기와 물과 음식을 비롯한 모든 자연 자원을 주시며 절묘한 돌보심으로 키워 주신다. 봉사하시되 대가를 바라지 않으시는 것이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 : 하나님)의 특징이다. 변형하는 일치에 있는 사람은 그것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그들 또한 지배자가 아니라 봉사자가 된다.
2). 그리스도인의 영적여정의 첫 번째 목표이다.
변형하는 일치는 크리스찬 영적 여정의 첫 번째의 목표다.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정상적인 크리스찬의 삶이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관계(하나님과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우주와의)를 이러한 시각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법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변형하는 일치로 이르는 근본적인 수단은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 사랑이다. 여정의 다음 부분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 10:30)라고 하시고, 곧이어 "그들이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 17:21)라고 기도하신 예수님 말씀의 뜻을 배우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