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도의 영적인 삶에 대해서
***옛사람과 관련된 여러 항목의 구분 -롬6:3에 따르면 구주 예수님의 보혈-부활-승천을 마음에 믿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얻은 우리가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안으로 대속과 연합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마귀와 죄는 정죄되어 몸안에서 멸절되었고, 질고-간고-사망의 율법의 저주는 무효화 되었으며 그리스도는 우리 영혼을 세상과 사탄의 흑암의 권세로부터 아들의 나라로 구별되어 옮겼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타고난 혼생명, 죄된 옛성품과 죄성(=육신), 곧 옛자아와 육신의 옛사람, 죄의 몸인 육체, 심지어 옛역사 전체를 끝내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주셔서 그분의 모든 삶과 경험(죽음-부활-승천-영생)을 우리 것으로 삼아주시며 하나님의 영원생명을 주어 영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고 신적성품을 주어 영원한 자녀삼고, 새자아의 새사람, 거룩한 성전의 강건케 된 거룩한 몸, 새역사, 그분의 영광, 하늘의 신령한 모든 복과 땅의 기름진 모든 복, 모든 은혜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일을 하게 하신다. 접붙임 받은 우리가(롬11:24) 내주하시는 생명의 성령을 누림에 의해서만 체험하는 바, 그 생명의 유기적 접붙임은 *우리의 모든 부정적요소를 배출시키고*하나님이 창조하신 기능들을 부활시키며 *그 기능들을 향상시키고 * 더욱더 풍성하게 하며 *우리의 온 존재를 적셔서 변화시켜서, 롬8:29에 따르면 우리는 완전히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형상이 된다. 성령은 (육신도 마찬가지이다!) 그 인격의 성숙과 완전함을(=성화와 영화)위해 완전한 복종을 새사람에게 요구한다. <생각을 조심하라.그것은 말이 되기 때문이요, 말을 조심하라.그것은 행동이 되기 때문이며, 행동을 조심하라. 그것은 습관이 되기 때문이다. 습관을 조심하라. 그것은 인격이 되기 때문이요, 인격을 조심하라.그것은 마침내 인생의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 윌리엄 제임스(1842~1910), 미국의 심리학자 이며 철학자 >생각은 말을, 말은 행동을, 언행은 습관을, 습관은 인격의 됨됨이를, 인격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기에, 결국 거듭난 새자아의 마음의 지향이 평소 무엇을 향하고 생각하느냐가(썩을 육체가 원하는 바 곧 육체의 일이냐 아니면 영원한 성령이 원하시는 성령의 일이냐)모든 것을 결정한다. <(롬8:5b)성령을 좇는 자는 성령의 일=부드럽고 열린 경청의 마음과 영으로 기름부음의 가르침과 계시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며 성령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나니=성령을 따르는, 성령께 순종하는 새사람은 성령의 일을 생각함이 마땅합니다> 이때 (십자가죽음처럼 완전히 죽는데에 시간이 걸리며 그 애착이 끈질긴)육신과 옛자아는 결국 완전히 멸절되어 처리되어지고, 생명과 부활의 성령에 의해 몸조차 완전히 점유되기에(=성화) 죽을 몸조차 살게되는 역사가 일어난다.<..너희의 죽을 몸조차 살리시리라-롬8:12>.**옛사람(=옛자아=옛인격)=죄에 굴복한(길들여져 이끌리는)아담 안에 있는 혼생명을 소유한 옛창조의 타락된 사람으로서[객관적측면], 마귀의 체현인 죄에 점유되어 부패되고 소유되고 힘을 받고 활동적으로 이용되어 죄악이 가득한 일을 하는 죄의 도구요 죄의 종된 죄의 몸이 기계적으로 죄를 범하게 함으로서 육체가 되게 한다. 인간의 인격인 자아는 혼에 거하며 인격은 혼생명 즉 지정의로 기능하며 체현된다. 본래 영의 능력으로서 영을 섬기던 혼은 철저히 의존적으로, 영이 아니면 육체에 종속된다. 마귀는 혼의 자아에게 <너는 혼자 설 수 있는 존재>이며 <네 인생은 너의 것>이라고 속여 결국 마귀(체현은 죄, 죄의 생명은 마귀임)가 넣은 죄성을 따라 행하는 종으로 삼는다.**육신(또는 육체)=좁은 의미로는 죄에 끌리는 죄된 인간의 습관적 이기적 죄된 본성 즉 성품(=죄성), 넓은 의미는 거듭나지 않은 옛사람의 실상, 또는 타락한 사람의 인격(지정의)의 혼생명의 활동을 통해 드러난 옛사람의 실상[주관적측면], 이 때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는 <육신의 일>이 드러난다. *때로 사람의 유한한 인간조건(무지-빗나감-연약한 의지)이나 미성숙을 강조함(*예:육신이 연약하여) 또는 사람의 죄없는 몸자체(*예:성육신)를 일컬음 **자아Ego =사람의 인격, 의식하는 자기자신, <자기Self>란 무의식적부분까지 포함한 개념. 혼생명(내적)이 인간적인 관념과 의견(지정의, 외적)으로 표현된 상태, **나=옛사람이 자신을 부르는 명칭, **혼생명Psuche=혼Soul의 생명,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 만든 영이 몸과 만남으로써 얻게된 혼(*보통, 성경에서는 혼을 사람으로 부른다.)에게 힘과 능력을 가져다 주는 사람의 유한한 생명, 곧 목숨. 이것의 외적 표현이 지정의이다. 하나님은 이 혼생명을 소망 없는 것으로 여기시고 십자가에서 처리하신다. **기질=사람의 타고난 성향, 특히 나쁜 성향을 말함, **타고난 성분=재능, 우리의 타고난 능력과 소질과 재치, **(육체의) 정과 욕심(=정욕과 욕심=정욕)=헛된 열정-탐욕-욕망들 곧 죄(하나님의 뜻을 벗어남을 의미하는 측면)로서, 그것들의 외적 근원은 집단적초자아로서의 세상의 영향력과 가치요 내적 근원은 마귀의 속임(1차적 본능적 욕구의 결핍감을 기만적으로 과대포장시켜 유발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다.
--영성(Spirituality)이란 무엇인가. 영성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여정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혼을 가진 영의 현재 성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지향하는 바는, 철저히 우리의 삶 가운데서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행하시는 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예수님을 온전히 닮아가게 하시기 위함이요, 이 목표는 믿음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온전케 되는 <신의 성품에 참여케 하시려는, 벧후1:4-7> 사역에 대해 우리의 전존재가 기쁨으로 반응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그 결과 삶속에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고, 예수님의 장성하신 분량까지, 곧 예수께서 순종으로 완전히 자신을 드리신 헌신에까지 자라가게 되는 것이다. 예수는 아버지께 자신의 삶안에 그 영광을 나타내시고 드러나시도록 자신의 전인을 완전한 그릇-성전-진실한 종-아버지의 능력과 영광의 통로로 내어드리고 아버지와 하나되어 아버지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그 삶안에 아버지와 그의 뜻만을 나타내시고 아버지의 부탁하신 바 만유를 위한 희생제물로 자신을 드리셨다. 이것이 바로 주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며 그대로 따르기를 바라시는 신자의 영성의 원형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오직 <주바라기>의 경건생활, 우리안에 거하시는 삼위일체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되어 순종하며 우리를 품으시는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 안에 거함의 비밀을 날마다 이루어 나갈 때 온전케 된다. 내안에 계신 주께서 나의 진짜 자아(the real I, the big I is My Lord.)이며 나는 작은 자아(the little I is me.)이자 그분이 자기를 나타내는 수단이 되는 것을 아는데 이르는 것이 올바른 신자의 영성이다. 우리 존재 깊은 곳에서부터 <내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라는 울림이 참으로 인정되어지며 알아지게 되는 것이요, 참으로<이제는 나 사는 것 아니요 주 내 안에 사네>의 고백, 자신은 진정한 주인되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종인 작은 그리스도로서 우리안에 내주하시는 그분과 함께 그분의 이끄심에 따라 이미 승리하신 왕이요 대제사장이신 주예수님의 삶을, 곧 그분의 남은 고난(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몸된 교회와 지체들의 성숙을 위한 고난과 구원이 예정된 불신자의 구원을 위한 고난)을 작은 그리스도로서 살아가는 삶이 바로 영성생활인 것이다.
-- 실제로 영성생활은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인한 구원의 말씀에 심령을 열고, 예수님을 심령에 구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바로 그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신자의 옛사람이 죽고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신자가 새사람이요 새 피조물로 거듭났음-중생하였음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고백함과 동시에 시작된다. 믿음으로 받은 바 그 말씀과 예수의 영, 곧 성령께서 내주하심, 바로 이것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다. 이때 불신 상태의 몸에 연합되어 있던 거짓의 영인 마귀가 쫓겨나고, 옛사람이 죽고, 빛이요 하나님의 생명이신 예수께서 신자가 된 영에 연합하여서 새사람을 창조하신다. 그러나 이 때부터 아주 중요한 결정이 남아 있다. 옛자아가 마귀에게 속아서 행하던 계속 예전의 방식대로, 자행자제하는 주인된 자아를 내세우는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인 <자아인>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주님이 진정 주인되시고 거듭난 자아가 종의 자리에 내려가는, 순종하는 영에 속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것인가에 대해 성령님은 신자에게 그 선택을 촉구하신다.
--성경에서 나타내는 바 사람의 창조의 목적에 따라 우리 사람은 주님의 종이요, 담는 그릇인 담지자가 아니면 마귀의 종이요, 마귀의 담지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fate이다. 타락하여 불신 상태에 있었을 때 마귀는 옛자아를 속였다. 실제로 옛자아는 <너 자신이 너의 삶의 주인이다>라고 거짓말을 하는 마귀에게 속아서 자기자신이 실제로 자신의 삶의 주인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마귀의 종이요, 마귀의 현존을 드러내는 그릇이었고 결국 그 결과는 파멸이요, 불행만을 쏟아 놓는 통로였다. 운전을 배워 본 적이 없는 어린아이에게 시동을 건 차를 운전시킨다면 온전하게 운전을 해 낼 수 있는 아이가 있을까? 우리는 이 땅에서 단 한 번 인생을 산다. 믿는 이 안에 계신 주님은 이미 그 인생의 길과 운전법을 완전히 알고 있는, 틀림이 없는 운전자이시다. 우리는 좋은 조수가 될 수 있는 자 들이나 좋은 운전사이지는 않다. 어거스틴은 말한다. <하나님안에 쉬기까지 내 영혼은 안식이 없습니다>라고. 그러나 감사하자. 한번 주님께서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백성은 자신이 스스로 물러나서 마귀에게로 돌아가지 않는 한 절대로 포기하는 법이 없으시다. 비록 지금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아닌, <자아인>으로서의 광야의 삶을 살고있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삶을 통해 결국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리로 나아오도록 인도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은 여전히 우리의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존중하신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 진정으로 죄에 대해 깊이 자각하고 죄에 대한 심령의 깊은 애통함과 가난함으로 인해 주 예수께 나아 온 자로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님의 하늘안식을 경험한 자들은 결코 침륜에 빠져서 세상과 짝할 수 없다. 오히려 믿다가 침륜에 빠지고 결국 배교하고 타락하여 마귀에게 내어준 바 되는 자들은 *일시적인 거짓 믿음, 곧 본질상 죄에 대한 깊은 자각과 더불어 이에 대한 깊은 애통을 경험한 적이 없는 위선적인 믿음이거나, 참믿음에 들어선 자들이라 해도 곧 한번 빛을 받아서, 하늘의 선물인 성령을 나누어 받아 맛보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장차 올 세상의 권능을 경험한 사람들일지라도*선 줄로 생각하는 자존망대하는 믿음이요, *항상 깨어 근신함이 없는, 영적 경계함이 없는 자요, *죄에 대한 양심의 경고와 자각을 무시하고 고집부려서 결국 화인 맞은 양심이 되어버린, 회개함 없는 자요, 이들의 결국은 강퍅함의 악순환으로 인해 예수님의 인격을 경멸하고 보혈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며 성령을 욕되게 하고 훼방함에 이르게 될 수 있다.(그러므로 성령훼방죄, 즉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죄라고 할 수 있다.-행3:19, 롬2:5-성령 하나님이나 그의 사역을 상대로 방해를 하는 말이나 행동으로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사망에 이르는 죄,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로 칭하기도 한다.) 후자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지상에서의 그들의 수명을 단축시켜서라도 소환하셔서(....) 백보좌심판에서의 둘째사망의 해를 받지는 않는, 이른바 그들의 구원을 유지하기는 하시지만, 그의 옷이 더러워져서 합당치가 않기에 그 이전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공중영접을 위한 부활-천국잔치에의 참여는 그들에게서 박탈하신다.<..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롬6:1-13,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선택은 오직 롬6;1-13과 갈2:20에 따라서, 창조의 본래적 목적에 따라 거듭난 새자아가 주인으로 살기를 고집하지 않고 참 주인되신 주님께 삶의 보좌를 내어드리고 그분의 영광과 능력의 현존을 드러내는 그릇이요, 성전이요, 통로로 살 것이냐 아니냐이다.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계획하여 신자에게 입혀주신 새사람은 이 땅에 하나님의 진실한 종으로서 오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담는 그릇이요, 성전이요, 아버지의 영광과 능력을 드러내는 통로로서 자신을 드리신 것처럼, 유순한 의지로 자신을 생명나무이신 예수님께 연합되어 붙어있는 열매맺는 산 가지요 성삼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피조물 됨의 자각가운데서 종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겸손한 새자아로 산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 영이 빛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과 연합됨으로써, 우리의 몸에서 마귀는 쫓겨났지만 우리 가운데 예전에 구원받기 전에 사탄과 함께 연합되어 있었을 때의 습관과 가치들, 마귀가 예전에 넣어준 생각과 행동방식대로 아직도 자행자제하려는 옛자아와 그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소멸하여지지 않고 있음을 본다. 이 옛자아를 멸하여 쓸모없게 만드는 것은 매일 매일 옛사람이 죽었음을 믿으며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옛자아를 대적하면서 자신이 진정한 주님의 영광과 능력을 드러내는 그릇이요, 성전이요, 종됨을 믿음으로 선포하며 바로 그러한 자로 여기는 믿음으로써, 그리고 계속적인 그분의 말씀과 임재가운데에 거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주님안에 거함과 더불어 주 내 안에 거하심>은 그분의 말씀 안에 거하며, 사랑 자체이신 살아계신 그분이 내 안에서 그분의 임재의식을 일깨우시고 나와 함께 행하심을 깨닫고, 그분과 연합한 종으로서,나무 본체에 붙어 생명을 공급받고 열매를 맺는 산 가지로서 자신을 겸손히 낮추며, <사랑의 능력으로 행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 당신이십니다.>고 고백하며 이미 세상과 마귀를 이기신 그분을 지속하여 바라봄으로써 가능해 진다.
-- 여기에서 한가지 반드시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은 신자의 믿음생활 과정중에 있을 수 있는 성령세례나 성령충만의 경험, 은사나 표적의 나타남은 매우 귀하고 중요하며 지상대사명을 다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지만 이것들이 곧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가장 귀한 보배인 믿음을 뛰어넘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거나 믿음 그 자체의 척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은사나 표적은 믿음에 따라 주어지는, 그래서 주님의 몸된 교회와 성도를 유익하게 하시기 위한 표시나 선물이라는 것 외에 구원과 구원의 복음의 말씀 자체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세례를 받거나 처음 믿었을 때 불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나 방언을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즉 성경이 모든 신자들은 주예수께서 나의 구주이심과 그 분외에는 다른 구원이 없음을 심령에 믿고 입으로 시인함으로써 처음 믿었을 바로 그 때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유일 최고 가치의 세례- 곧, 나와 한 영되어 영원히 내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의 영=구원받은 자녀로 인침의 기름부음인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영원생명능력의 성령-위에 다른 세례를 반드시 덧붙여야 한다는 자리에로 미끄러지지는 않도록 하자. 물론 믿을 때 그 즉시 주어지는 은사와 표적, 그리고 순종하는 자녀들에게 주시는 마귀를 멸하여 뭇영혼을 자유케하고 구원함에 필요한 왕권의 기름부음인 성령세례의 은사나 표적은 얼마나 감사한지!! 그것들을 전적으로 부인함은 마귀가 원하는 극단에 치우치는 것이며, 또한 은사나 표적이 반드시 있어야 그 믿음이 올바른 믿음이라고 고집하며 주장하는 것도 또 다른 극단에 치우치는 것이라는 뜻이다. 성경에 기록된 성도들처럼 복음을 받아들이자. 곧,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모든 것 되신 바로 그분,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비밀이요, 감추인 지혜요, 복음의 전부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성령의 은사나 성령세례, 성령충만이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넘어서는 어떤 특별한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이란 <내 안에 나타나신 그 아들 -갈1:16>,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갈2:20>이다. 그분은 내 몸안에 있던 마귀-거짓 영을 몰아내시고 대신 들어오셔서 새로워진 내 영과 연합되어 계신다. 한편 나의 인간적 자아 즉 혼과 몸은 바뀌지 않았다. 왜냐하면 악이나 선이 원래부터 내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전에 악한 자의 종이었던 것처럼 이제는 선이신 그분에게 속한 종이 되었을 뿐이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모든 것안에서 모든 것이 되신 분이다. 복음이란 다름아닌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키셨는데 그 변화란 것은 종이요, 담는 그릇인 우리가 담아서 나타내고 있었던 주인이 마귀에서 예수님자신으로 바뀌었다는 것이요. 넓은 의미에서는 동시에 그분과 연합된 우리가 변화된 것인데 그 이유는 담고 있는 생명의 질이 현저히 다른 , 즉 <사랑의 자아-자신을 내어주는 자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본적이면서 유일한 변화이며 은혜의 첫번째 역사이다. 은혜의 두번째 역사란 즉 두번째 축복이란 또 다른 변화를 받는 것이 아니라 첫번째 변화가 드디어 실제로 믿는 이의 삶 가운데에서 드러남에 다름아니다. 중생했을 당시는 뭐가 뭔지 모른다. 그저 신이 나고 가장 목소리가 크고 무슨교회가 이리도 시시하냐고 떠들 수도 있다. 그러나 두번째 역사로 들어가면 <자기가 사는 게 아니라 주님이 사심을 아는 자>들은 죽은 듯이 말이 없게 된다. 자아가 죽어버린- 오직 주님의 자아만이 살아 있고 자신의 자아는 멸하여진 자들은 말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창세기의 선악과 사건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배우기를 원하시는 교훈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그분을 위하여 하는 일조차도 전혀 할 수 없다는 것을 체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 변화받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계신 주님이 손수 행하셔야 하는 것이요, 연합된 나는 주인공이 아닌 그분의 종으로서 얼마나 정말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느냐로 그 존재의 위대성을 가늠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생각을 다른데로 돌려 보자. 에덴동산에서의 선악과를 다른 측면에서 보아 아담과 이브가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고 선을 따라 살도록 주어진 명령이라고도 볼수 있다면, 사실 아담과 이브가 그곳에서 마땅히 배워야 했고 주님께 고백해야 했던것은 그들 스스로는 그것들을 판단하여 준수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음을 깨닫고 겸손히 그것을 대신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생명나무요 그 열매되신 예수님께 그들 대신 그것들을 해 주시기를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즉 그들 가운데 주님께서 오셔서 그들의 주인으로서 계시고 자신들은 그분과 연합된 종의 자리로 내려가 섬기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바 였으리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 원형은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은 후에 언약을 선포하는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는 결코 완벽하게 지켜내지 못할 율법을 주셨다!!! 그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됨과 진정한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대속을 대망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그것을 다 지켜내겠습니다>고 당당히 외친다. 사실 그들은 <우리가 그것을 도무지 지킬 수 없나이다. 오로지 우리는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라고 고백했어야 했다!!!.. <율법은 하나라도 못지키면 모든 것을 안지킨 것이나 다름없다!!!> ...결과적으로 이론적으로는 너무나 그 지식에 해박하고 또한 부분적으로는 지킬 수 있었지만 그것을 마치 다 지킨 것처럼 하는 <바리새파주의>가 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에 맞게 왜곡시키는 <사두개파>적인 태도를 나타낼 수 밖에 없다. 신약의 서신서를 통해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크나큰 심각한 죄짐의 인식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구속을 앙망하는 백성들을 주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율법아래에 가두어 보호하기 위해> 율법이 필요했고 주예수님이 오신 후로는 더 이상 율법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씀하시지 않는가? 우리는 어떤가? 혹시 주님없이 내 자아가 삶의 주인으로서 <내 스스로 주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낼 수 있다>고 고집부리는 자아인이 아닌가?
- 성도는 십자가 보혈로 새롭게 거듭난 영적존재로서 영(sprit-숨은사람, 내적존재inner being)은 혼(soul,mind-자유의지를 가진 좁은 의미의 마음)을 가지며, 몸(body)에 거한다. 비록 외부로 나타날 때 혼이 마치 주인인 것처럼 더 뚜렷하게 나타나지만 본래 영이 진정한 주인이요, 혼은 순종하고 명령을 받은 청지기이며, 몸은 현장에서 일하는 종이다. 이것이 본래적 질서이다. 본래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의 거소로서 지음을 받았다. 그분의 영광의 현존을 드러내기 위한 담는 그릇이요, 그분이 거하실 성전이요, 본체인 나무에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는 산 가지이며 영광과 능력의 통로로서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을 떠나서는 쉴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수용성의 특징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주인으로서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사탄을 주인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타락기사에서 사탄은 거짓말로써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그 수용성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종이 될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 스스로가 자존할 수 있고 자신의 삶의 주인이라고 착각하며 살도록 거짓말하고, 결국 하나님의 어린 자녀를 유괴하여 그 영이 사탄의 영과 연합하여 결국 사탄 자신을 닮고 철저히 사탄적이며 사탄 자신인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이 관점이 매우 중요하다. 사람은 담지자이다!!!
--성경말씀에 따라 인간을 성전으로 비유하면 영은 지성소요, 혼은 성소이며, 몸은 바깥 뜰이다. 몸은 혼을 통해야만 영과, 영은 혼을 통해 몸과 교통한다. 하나님은 영안에 거하시고, 자아는 혼안에 거하며, 감각은 몸안에 거한다. 혼을 가진 영을 영혼 또는 심령(heart)이라고 하며, 이때 다른 사람들은 혼의 영역인 지성(이성과 생각), 감성(**감정<=희<기쁨>노<분노>애<슬픔>구<두려움>애<사랑>오<미움>욕<바램>>, 감각<시-청-후-미-촉>과 느낌<=관능:만족-부족>, 욕구<식욕-성욕-수면욕-재물욕-명예욕>), 의지와 영의 양심을 가리켜 광의의 마음(heart)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이것이 본래적인 마음의 기능이다. (**한의학에서는 노(간)-희(심)-사(비)-애(폐)-우(근심-폐비)-공(두렴-신)-경(놀램-오장)으로 배당함) 또 다른 마음(Mind)의 뜻은 좁은 의미로 지적인 영역 즉, 생각과 이성만을 뜻하기도 한다.혼은 자아(Ego)로 외부에 인지되고, 자아는 자기(SELF)의 의식되어지는 부분이다. 영은 <하나님 의식>의 부분이며,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으로서 하나님과 영적교류(영적예배communion)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고 조용히 기다림으로써 직관(영감, 직감intuition)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진정으로 알게 되고(성경적 앎의 의미), 영적 영역에 속한 능력과 생명을 받고 표현하며, 양심(판단기능conscience-진정한 양심은 이성과 믿음의 바탕위에서 자라난다.)으로 외부, 즉 혼과 몸의 행위들과 세상을 인지한다. 우리의 영 안에 성령이 거하신다. 그러므로 가장 고상하다.
--혼은 지성(생각과 논리, 판단력, 지식, 지혜), 감성(관능=감각적느낌Sense-7정Emotion-5욕Desires, Appetite, Cravings, Passions :감정과 감각과 느낌, 욕망) 등 지적인 것을 접하고, 자유의지를 행사하며 몸과 영을 중개하며, 타락 이전의 혼은 완전히 영의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혼의 능력은 바로 영의 힘이었다. 혼은 원래 영이 밖으로 나타난 형상이요, 바로 지성, 감성, 의지 기능의 총체인 인격이 머무르는 곳이다. 인격을 논함에 있어서는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영의 부분을 떼어내서 제외하면 결코 안된다. 실제로 인격이란 (Personality)단어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나타내는 Persona에서 유추되었다. 그러나 개개인의 사람됨, 즉 혼은 영의 외부로의 드러남을 포함하므로 인격Personality는 본래적의미에서 개개인의 영과 혼의 됨됨이로 정의해야 마땅하다. 하나님 앞에서, 관계성 속에서의 진정한 본래적 <자아의식>-인격인 자신을 바라보는 또 다른 자기인식-은 영과 혼이 동시에 있음으로써 나타나며 , 육(죄된 육적본성)과 영의 중간에 서 있어서 자유의지로서 영이 지배하게 할 것인지 육이 지배할 것인지를 분별하고 결정하는 능력을 행사한다.
--그렇다면 <자아>와 <자기>는 어떻게 다른가? <자아 실현>이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의해 보면 <자아(EGO)>란 의식으로 느끼는 의식되어지는 자기의 부분이요, <자기(SELF)>란 의식되어지지 않는 무의식-잠재의식까지 포함한 더 큰 존재의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자아실현>이란 비그리스도적인 영역에서는 자기의 자아가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것이나, 본래 창조의 목적에 비추어 볼 때 사람은 하나님을 담는 그릇인 담지자요 그분의 영광과 능력을 드러내는 통로이며, 창조주와 연합을 통해서만이 합목적성을 달성하고 자기성취감과 만족과 평강을 누리도록 창조되었는데 사탄에 속아서 사탄과 연합된 자기가 스스로 주인되어 살고자 하는 <자기중심적>인 삶은 결국 실패와 염세주의와 파멸로 끝날 수 밖에 없게 되어 있다. 사탄은 거짓말하고 본질적으로 죽이고 멸하는 영이기 때문이다. 한편 진정한 기독자의 <자아실현>은 불신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그야말로 <자아파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의 입장에서 보면 주님의 종인 <자아>는 자신을 창조하신 주님이 자신의 모든 존재를 기울여 사랑하는 종이요, 창조주하나님이 주인되시므로, <자아>가 원하는 바가 아닌 주님의 원하시는 바를 따라,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고 개발할 뿐 아니라, 진정한 자신의 존재의미에 대한 깨달음을 가지고 이에 의지적으로 동의하며, 오히려 겸손한 종으로서의 자각 가운데서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단한 자신의 자유의지가 연합하여 자아의 생각을 내려놓고 창조의 근본목적인 삼위하나님을 담는 그릇인 <담지자>요 영광과 능력을 나타내는 <통로>로서, 기꺼이 그분과 연합되어 그분의 뜻을 따르게 되는 것이 진정한 <자아실현>임을 안다.
--사람의 인격과 자기인식은 3차원적인 공간감과 시간관념을 갖는다. 그래서 4차원 시공간이라 한다. 영의 세계는 4차원을 - 시공간의 개념을 초월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적 진리는 이처럼 3차원과 시간의 개념을 초월한 것임을 잊지 말자. 현재 스티븐 호킹과 초끈이론을 주창한 파인만 등 기타 물리학자에 따르면 11차원으로 우주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공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원자-양자, 전자, 중성자, 쿼크 등의 미립자는 4차원 공간에서 3차원공간으로 이전되는 매개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눈에 보이는 딱딱한 물체도 실은 그 안에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수많은 힘으로 (*현재까지는 <중력>, <전자기력>, 물질붕괴의 <약력>, 물질의 핵구조를 만드는 <강력>이 있음이 알려져 있다) 조화를 이루어 소우주처럼 움직이고 있는 양자-전자-중성자 아니 그 전에 그것들의 원물질인 쿼크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이요, 실은 특수상대성이론의 공식과 질량-에너지 법칙에 의하면 에너지는 E=mc2(m : 질량, c : 광속=3×108m/s)의 공식에서 보듯이 곧 정지상태의 물질로 변환이 가능한 것이요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얼마나 다이내믹한가! 그러나 현재 21세기를 살고 있는 자연인의 논리나 지각 능력은 아직도 18세기적이다.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을 믿는 우리는 이런 차원을 초월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동시에 하늘에 그리스도 우편에 앉아 있다. 하나님은 한분이시면서 세분이요 세분이시면서 하나이신 삼위일체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안에 거하고 , 또한 하나님은 우리안에 거하신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의 지체요, 모든 성도는 한 교회요, 한 몸인 그리스도를 이루며, 동시에 그분과 연합한 그분의 몸의 지체인 우리 각자가 독특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 것이다.. 동물의 경우 어느정도 지적인 능력이 있어도 면에 대한 감각인 2차원적인 공간감 밖에 없고 통합과 통찰의 개념이 없으며 자기인식-자기의식-자기의지-자기결정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드물게 도구를 사용하는 3차원적인 공간감이 있는 아무리 지력이 발달한 영장류라 해도 그렇게 관찰되어진다. 그러므로 감정이 있고 지력이 있다 해도 인격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새로워진 영이 전 인간을 지배하는데는 반드시 혼의 동의가 필요하다. 즉 영이 전 인격을 지배하려면 혼의 의지적 자아가 기꺼이 겸손한 종의 자리로 내려가야만 한다. 또한 혼은 그 지성을 통하여 인간을 통제함으로써 이른 바 관념의 세계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생령이라 할 때 그 의미는 완전한 자기결정권인 자유의지를 가진 혼을 소유한 영이라는 뜻이다. 몸은 <세계에 대한 의식>을 가지며, 혼을 통해서 영으로 하여금 세상을 사랑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몸은 자기 존재의 유지를 위한 *식욕(영양)-생존/안정욕구, *성욕(생식)-사랑,애정/존중, 인정 욕구, *자기방어-힘,권력/통제,조절 욕구 등, 1차적 욕구인 육적본능, 또는 육적본성을 가진다. 생명을 분류해보면 생물학적 생명을 Bios라 하며 동물적, 1차원적인 본능적인 삶을 주관하고, 현실적인 불신자의 목숨인 혼적생명 Psuche는 육신과 자아가 주인이 되어 사는 혼적인, 육적인 삶을 주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 본래의 영적생명인 Zoe는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 사는 영적인 삶을 주관한다.
(죄로 인해, 마귀에 의해 주입된 실락원의 거짓된 감각적느낌으로 오도되고 타락한 관능은 육적본능을 극대화시키고) 만족을 잊어버린 육적본능은 그 이끄는 힘이 너무나도 강력하여서, 아담의 타락이후에는 통제력을 상실하여 절제가 전혀 안되는 방종과 방탕으로 인해 죄로 충만하여 죄로 굳어져버리고 죄가 그 본성이 되어버림으로써 죄된 정욕(정과 욕심) 또는 죄된 본성 곧 육신이라고 불린다. 또한, 이 죄된 본성의 유혹에 굴복해서 죄의 몸만 위하는 타락한, 자행자제하는 혼의 자아와 함께 타락한 육적 본능은 죄를 낳는 죄의 근원이 되어 완전히, 전적으로 무익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로써 아담의 타락 이전에는 비록 혼적생명-Psuche-상태이긴 했지만 죄를 몰랐고 하나님의 생명인 영적생명-Zoe-으로의 전환가능성이 있었던, 주님과 교제가운데 살던 생령이 영적생명으로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부패한 혼적생명(곧 영적으로 죽어버린)이 되었다.-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창6:3, 결국 타락한 혼의 기능은 더욱더 증대되고 혼에 포위된 영은 눌리고 위축되어 거의 없는 것처럼 혼에 압도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자연인에게 있어서는 영이 기능을 잃어 (=멸하여졌으므로) 거의 없는 것처럼 되어 버렸으므로 사람=혼은 거의 같이 사용된다. 서로 물고 뜯어 먹고 사는, 인격이 아닌 동물들도 영이 없을 뿐 혼과 육체가 있다. 즉 동물과 비슷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예수님 오시기전까지 기름부음받은 이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성령이 없고 영이 위축된 상태에 처해 있었다. 또한 지금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모든 사람은 모두 다 이런 상태에 처해 있다. 오직 그 결과는 죽음 뿐인 피조된 혼적생명(Psuche)만 그 속에 존재한다. 그 자체로서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진정한 행복과 기쁨, 삶의 의미를 알 수도 없고 ,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할 수 없다. 원죄로 인해 타락한 사람을 <육체-육신>이라고 성경은 정의 한다. <(창6:3)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저들이 육체가 됨이라>. <육>이라 함은 타락한 죄된 육적-혼적본성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몸>의 개념은 선악을 상정하지 않은 중립적인 개념이다. 구원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영적 생명이신 주님에 접붙임을 받아서 그분과 연합된 새 영으로서 혼도 거듭난 새사람을 입었으되 혼적인 몸에 거하며 이 혼적인 몸은 썩어질 것이며 주님은 우리를 위해 하늘에 영적인 몸을 준비해 두셨다. 우리에겐 이 소망이 있다. 또한 타락한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고 죽었을 때 몸을 떠난 그 영혼은 영원히 안식할 수 없으니 얼마나 비참한지. 주님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니>라 하신다. 아무리 독실한 그리스도인의 자녀라 해도 <예수님의 십자가죽음-부활-승천을 믿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마음에 믿고 입으로 시인함>으로써 거듭나지 못하면 이와 똑 같다는 것을 잊지 말자. 한 편 타락한 자아와 육신은 언제나 악한 일만 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 자선이나 자기희생처럼 선한 일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역겨워하시는, 자기의 의를 나타냄-악으로 이어진다. 주님은 다시 말씀하신다. 전적으로 <육은 무익하다>고 하신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참으로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 영을 살리시는 분은 내주하시는 성령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생명나무의 실과로 표상되어진 하나님 자신의 피조되지 않은 영원한 생명(영적생명 Zoe)을 거듭난 그의 자녀에게 나누어 주셨다. 바로 그분이 우리 영 안에 오신 예수이시다. 생명이신 예수님은 죽었던 우리의 영과 연합하여 새로운 한 영이 되어 주셨다. 이것을 성령께서 완전케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리고 성삼위 일체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로 이끌어 들어 오게 하셨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오지않은, 타락한 자아와 육신에 속한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적용하여 십자가로 가져가서 십자가에서 죽이도록 하시며 삶의 방식을 성령의 조명과 인도하심에 따라 새로운 자아와 신령하게된 몸이 전적으로 순종하는, 영적인 삶으로 전환시키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새롭게 예수안에서 하나님 말씀인 물과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거듭난, 영혼몸 모두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 전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선언하신다. 거듭난 영적존재인 그리스도인은 이제 이 본래적 질서를 회복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락한 옛자아를 부인하고 성령에 순종하는 예수의 형상인, 온유, 겸손, 순종이 그 특성인 새로운 거듭난 자아로 살며, 자행자제하려하는 옛자아와 육신의 죄의 경향을 십자가에 못박아(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것이 죽었음(육적본성이 죽었고 죄에 대해서, 죄의 권세에 대해서도 죽었음)을 선포하고, 날마다 의의 병기로 우리의 지체를, 산 희생제물로 우리의 몸을 아버지께 드리고(성별하고), 오직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며 유혹의 순간마다 십자가에서 우리 육신의 죽었음과 옛자아를 부인함을 선포하고 적용시키며 그것을 이기는, 성령을 따라 사는 새롭게 된 영으로서, 예수와 연합된 영적 존재이다.
(롬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5For if we have become one with Him by sharing a death like His, we shall also be [one with Him in sharing] His resurrection [by a new life lived for God]. 2000년전의 바로 그 십자가에서부터 주님과 나의 연합이 시작되고 적용된다.!!! 이 1차적 은혜의 역사로 인해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말씀자체요, 빛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과 연합되어 새롭게 된 영-좀 더 나아가서 <예수와 합한 영은 한 영-바로 예수님 자신-이라>고 말씀하신 바를 적용하면 진정한 의미에서 본래적 창조의 목적-하나님을 담고 그 영광을 드러내는 목적을 이룬 영으로서 이어서 이제 새로운 혼을 갖게 되는데 바로 예수님의 혼, 예수님을 닮은 혼이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예수님의 자아, 예수님을 닮은 자아(=BIG-SELF 또는 Big I)가 내 안에 있고 더불어 본래적 자아인 나의 자아(=little-self 또는 little I)가 함께 내 안에 나타나 있음을 본다. 이어서 자아가 주인의 자리에서 종의 자리로 내려오는 자아의 파쇄가 이루어지고 삶의 보좌에 주예수님의 자아가 진정한 주인으로 앉게 될 때 완전한 연합이 달성되는 것이요, 이것이 갈2:20에서 말하는 바, 두번째 은혜의사건이다.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인 <자아인>에서 전환되어 이제는 영에속한 그리스도인인 <진정한 그리스도인> 됨이 일어난다. 그 이전에는 비록 구원받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자아가 주인 노릇을 하여 롬7장에서 처럼 운전을 안해 본 어린 아이가 운전대를 잡고 운전하듯이 유혹에 빠져 율법의 정죄를 받기도 하고 절망감과 무력감에 사로잡히는 삶을 위태위태하게 살았지만 자아의 파쇄-진정한 종의 자리에 자아가 내려오고 주께서 보좌에 앉으신-그 후로는 모든 일에 완전하신 운전자 되시는 예수께서 나의 최선의 삶을 운전해 주시고 진정한 주님 안에서의 현재적인 하늘 안식과 평강과 승리가 항상 충만하도록 해 주신다. 롬8장에서의 삶으로 옮아감이다. 그러므로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는 고백은 자아의 파쇄를 의미하지만 신자에게 있어서 본래적의미의 자아실현이 되는 것이다. 이 땅에서부터 우리안에 계시며 우리를 품으시는 하나님은 이 은혜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그분의 임재로 충만한 안식을 주기를 기뻐하셨다고 서신서는 말한다. 그러므로 단순한 어린아이처럼 믿음으로 그분을 전존재로 받아들이고 그분안에서 안식을 누리자.
*하나님께서 몸을 만드시고 생기(영)을 불어넣으셨을 때 몸과 영의 매개로서 혼이 생겨나서 생령(즉, 자유의지를 가진 혼-을 소유한 영적존재, 그러나 그 생명은 피조된 혼적생명이다.)이 되었다. 자유의지를 가진 생령인 아담은 당시에도 혼적생명을 가진 존재이기는 하나 죄를 몰랐고 동시에 영생을 소유하지도 못했다. 죄를 짓기 전에 하나님의 생명자체인 영생나무의 과실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자신의 혼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용함으로써 영생(-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것)을 참으로 알게 되고 진정한 영적존재가 되어 그것은 진정한 축복이 될 수 있었겠지만, 선악과를 선택함으로써 범죄 이후에는 영원히 죽지 않음은 오히려 저주가 되어 버렸다. 거듭난 신자가 주님께 받은 새 생명은 바로 피조되지 않은 생명나무의 과실로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생명임을 잊지말자. 성경말씀은 영혼(혼을 가진 영)의 양식이요, 말씀을 먹을 때 혼은 산 영에 길들여지고 진정한 영적존재로서 구원과 영생의 빛 안에서 행하는 것을 배우며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세상의 자랑을 따르는 죄된 육적본성을 따라가지 않게 된다.
한가지 알아야 할 사실은 죄(원죄-죄의 뿌리, 죄의 경향을 유발), 옛사람(옛자아, 또는 원죄를 따라 유혹받고 죄를 범하고자하는 동기를 제공하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비실체적인 것)과 죄의 몸(죄의 동기와 유혹에 따라 죄를 범하는 꼭두각시인 실체적인 몸), 이 세가지 요소가 순서대로 범죄의 역할에서 독특한 역할을 하고 있고, 주님과 함께 그리스도안에서(즉, 신자가 주님과 연합되어)단번에, 영원히 십자가에서 처리된 것은 그 중에서도 옛사람임을 잊지말자. 롬6:6에서는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은> 또한 <죄의 몸이 멸하여>라고 한다.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다!!! <멸한다>의 원 뜻은 <시들게 하고 못쓰게 만든다>는 뜻이다. 쓰지 않으면 없는 것처럼 된다. 오히려 우리몸을 의의 병기로, 산 제사(희생제물)로 주님께 드릴 때 신령한 몸이 된다. 또한 죄가 작동되어 몸으로 범죄하게 하고자 해도 옛사람이 죽어서 옛사람의 동의를 얻지 못하므로 죄는 더 이상 신자를 유혹하지 못한다. 그렇게 하신 목적은 <죄의 종이 되지 않게 하시려고>이다. 할렐루야. 죄는 더 이상 권세가 없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를 그치셨다>고 말씀에 기록되어 있다. 롬6:11에서는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지어다>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여김>, 이것이 믿음의 진수이다!!! 믿음을 발휘하라!!! 나는 죄에 대해 죽었다. 나는 더이상 죄와 상관 없다. 옛사람도 죽었다. 말씀을 붙들고 하나가 되며 말씀하신 분을 신뢰, 의뢰, 의지할찌어다. 말씀이 그대 자신이 되게 잠겨들지어다!!! 많은 이들이 진정한 축복된 영적인 삶을 누리는 것을 실패하는 이유는 첫째, <십자가에 못박힌 것>과 <부활한 것>을 느끼고, 보고, 경험하고 난 후에야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려하는 데 있다. 그러나 성경을 전체로서 꿰뚫는 하나님의 방법은(제시하신 진리는) 다르다. 먼저 말씀을 심령에 믿어야 하고 그 후에 경험이 따라 오게 된다.
또 하나, 롬6:13은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예수님같이 - 범사에, 생각과 행동에서 그분과 자신을 동일시하라)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성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라>고 한다. 성별하여 드림의 순종이 필요하다. 결국, 실패는 다름 아닌 <믿음의 부족>이나 <불순종>에, 또는 두가지 모두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경말씀에 있는 대로 주예수께 적용되는 모든 것은 바로 우리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완전히 적용됨을 잊지말고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고 행하고 선포하고 누리는 것을 잊지말자 . 주예수님과 그리스도인된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여, 그러나 피조물의 겸손 가운데서 행하는 그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시고 예수이름의 권세를 몸된 교회에 주셨고 그 지체인 우리를 통해 마귀까지 포함한 만물을 다스리는 예수 이름의 권세를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 예수이름의 권세는 우리 것이다. 우리안에 주께서 계시고 우리는 그분과 하나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고 하신 주예수님, 그러면서도 동시에 <내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여기에 왔나이다>고 겸손히 아버지의 영광을 인정하신 그분처럼 겸손히, 그러나 담대히 예수의 이름의 권세를 이 땅에서 선포하며 누리자.
주님께서는 자아(혼)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자아)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신다. 먼저 <자기(자아)를 부인>하라고 하신다. 전적으로 타락한 혼생명의 체현인 옛자아의 자유의지가 영의 통제와 주권을 벗어나서 범사에 멋대로 자행자제하고 죄된 육적본성에 동조함으로 인해서 결국 <영적 사망>이라는 판정을 받은, 옛자아가 주관하는 혼적인 삶을 부인하라고 하신다. <온유>란 반대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는 것이다. <겸손>은 자존감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다.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자기의 유익을 위한 일이나 자신을 위한 일은 전혀 하지 않았고, 아버지의 뜻에 순복하는 것 그 자체를 기쁨으로 삼으셨기에 평강과 안식 가운데에서, 아버지의 뜻으로 충만하셨다, 그 다음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이다. 자기보존이 근본 동기가 되는, 손해 보기를 원치 않는 혼적 생명-곧 육적인 생명-의 모든 현상들, 자기 연민, 자기 사랑, 고통에 대한 두려움, 십자가로부터의 후퇴, 자기의 사랑하는 자인 이삭에 대한 애착, 혼적인 생명으로 부터 나온 혼적인 삶 전체를 십자가로 가지고 가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야 한다고 하신다. 옛자아의 육적본성에 따라 살고자하는 의지와 자기의 의를 추구하는 옛습관을 대적하며 부정하고 , 자연적인,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혼적인 삶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때 비로소 예수님을 닮은 새로운 자아가 새로운 영에 복종하고, 영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다고 하신다. 예수를 닮아 순종적인, 거듭난 혼인 새자아는 지성, 지식과 감성, 마음의 의식적, 무의식적인 생각, 가치, 의견에 있어서도 보혈과 말씀과 성령으로 날마다 새롭게 함을 받고 예수를 닮은 할례받은 귀를 가지고, 온유, 겸손, 충성, 순종의 띠를 맨 오로지 내주하시는 성령에 따라 살아가는 자아이다. 그리스도인이여, 그러므로 범사에 항상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그리스도를 따라서 자신의 혼적생명과 혼적인 삶 전체와 육체와 정과 욕심, 즉 절제 안된 일차적 욕구들 - 방탕과 방종의, 절제 안된 식욕과 성적 탐욕과 자기유익과 영광을 구하는 헛된 열정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써, - 죽었다고 날마다 선포하고 그렇게 여기고, 그렇게 살고 - 자신의 자연적인 삶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다시 살아난 자임을 (갈5:24) 날마다 순간마다 고백하고, 주님의 사심처럼, 온전히 내주하시는 성령을 좇아서 사랑에 따라 살아가라 (눅9:23)고 하신다. 사도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한다. 여기에서도 죽는<나>는 혼적생명의 옛자아이다.
믿는 그리스도인이 참으로 진실로 예수님을 따르는, 주님의 완전한 영광의 임재가 그 삶에 배어서 외부로 나타나는 지극히 풍성한 영적 생명과 영적 삶을 희구하면서, 날마다 자아와 함께 자아에 속한 모든 것을 매일 매일 십자가로 가져가서 그 위에 산제물로 올려 놓을 때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되신 예수께서는 어떤 날선 칼보다도 예리한 말씀으로 혼을 찔러 쪼개어 안에 감추인 영을 드러내 놓으시고 번제단의 불과 같은 성령님을 통해 변화를 일으켜 주셔서, 자행자제하던 자아가 -혼이 완전히 죽어 정결케 되고, 새로운 혼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은 예수님과 연합한 영이 주인이 되는 영적 삶으로 전환시켜 주신다. 즉, 새로운 혼과 영의 부활의 경험이 우리 가운데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가 그 임무를 완수하는 그 때, 지성소(영)와 성소(혼) 사이를 갈라놓았던 휘장이 찢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지성소에서부터 성소까지 가득하고 주님의 원하심대로(주님은 당신의 영광이 성소까지 충만하기를 바라신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영교는 날이 갈수록 깊어지게 되며 성소는 성화되고, 마침내 지성소와 성소는 통합되고 주님의 영광으로 충만케 된 몸으로부터 성령이 흘러 나오리라. 오 신앙의 신비여!!! 그러므로 날마다 우리의 헌신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혼적생명을 , 우리 자신을 망설임 없이 십자가로 가져가서 죽음에 내어 주어 지성소 안에 거하시는 주님이 그분의 일을 마칠 수 있도록 해 드리자. 문제는 믿는 그리스도인인 <내가 그것을 원하느냐?>이다. 하나님은 정말정말 Gentle하시다. 신자가 원치 않으면 못하신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성경말씀에 바탕을 둔 1)권위있는 성령의 음성 2)양심의 소리 3)내적증거에 의하며 데살로니가전서 5:23에는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 말한다.
###육신의 본성(육적본능=죄된 본성)과 옛자아의 죽음
정당하게 인간의 몸을 유지하기 위한 본질상 중립적인 몸의 1차적 본능-식욕(영양), 성욕(생식), 자기방어본능 등- 3가지 필요가 죄를 범한 이후로부터는 절제의 도를 상실하고 오로지 죄를 위한 매개수단으로 전락하여 육체와 혼이 원하는 바(엡2:3) 즉, 오로지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에 빠지고, 성적 탐닉과 육정에 빠지고, 죄로 말미암아 정직하지 못한 자기를 스스로 변호하고 방어하기 위해 이기심, 자기 생존, 자기 영광, 자기 의견 등의 변명과 정당화의 과정을 통해 모든 죄를 확산 시키게 된다. 영적인 일을 돕는 데 있어서 보면. 마음의 1차 기능을 이성과 의지라 하면 2차기능은 상상(+생각)과 느낌(또는 관능)이다. 관능Sense은 내부와 외부의 감각기관을 통해 수용된 감각적 느낌으로서, 영적 측면을 보조하는 마음(혼)의 2차적 기능 가운데 두번째에 해당된다. 관능은 칠정오욕(식욕-수면욕-성욕-재물욕-명예욕, 희노애구애오욕)의 감정과 욕구를 불러 일으킨다. 죄가 이성에 대한 관능의 작용과 순응에 어떤 영향을 미쳐왔을까. '관능'은 우리의 모든 육체적 반응들에 영향을 주고 통제하는 마음(혼)의 기능으로, 우리는 이를 통해 유쾌하거나 불유쾌한 육체의 창조물을 알고 체험한다. 즉 내부(배고픔-만복감)나 외부(시-청-후-미-촉각)로 부터 느끼는 육체의 감각의(쾌감-만족) 분별 창구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두 가지 기능을 하는데 하나는 소극적 측면에서 육체적 필요를 보살피는 기능이요, 다른 하나는 적극적 측면에서 과다하게 육체적 정욕과 욕심을 불러 일으키는 기능이다. 이는 동일한 기능으로서, 육신에 없어서는 안 될 필요조건들(1차적 본능 욕구들=생존/안정, 사랑/존중, 힘/권력 욕구들)이 채워지지 않으면 으르렁대며 불평하고, 필요가 충족될 때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욕구를 유지하고 조장하는 데 필요한 것 이상을 얻어내도록 밀어붙인다. 이로써 육체의 정과 욕심(육신의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이 드러난다. 관능은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불평하고 이어서 실락원의 원초적 감정들을(*수치감-정죄감-열등감, 두려움-불안, 분노) 유발시키며, 충족되면 무척이나 즐거워한다. 관능은 자신이 싫어하는 것이 있으면 불평하고, 그것이 사라지면 아주 좋아한다. 이 기능과 그것이 작용하는 통로는 모두가 마음에 포함된다. 인간이 죄를 범하기 전에 관능은 자신의 주인격인 의지의 통제(절제력)에 유순하게 순종했고, 그래서 의지의 통제력(절제력)를 거역하여서 영혼의 원수가 우리의 세속적인 마음속에 인위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왜곡된 육체적 쾌락이나 고통, 또는 거짓된 영적 즐거움이나 고통으로 끌어들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타락한 관능은 의지의 절제력 안에서 구원의 은총으로 다스림 받아서 원죄의 결과들(관능이 원죄의 결과로 느끼는, 평소에 즐기던 순간적 쾌락의 욕망들)을 내려놓는 반면에, 자신의 전인에게는 실제로는 더없이 유익하지만 타락한 관능의 측면에서는 짜증스럽게 느껴지는(?) 바로 그 일들을 겸허하게 그리고 온전히 견디어낼 채비를 갖추지 않는 한, 그리고 평소에 욕망의 쾌락들을 누리고 있을 때 곧바로 자신의 격렬한 욕망들을 통제하는 자신에게 선익한 짜증거리들이 사그러들 때, 밀물처럼 밀려드는 탐욕스런 환희를 제어하지 않는 한, 타락한 관능은 세상의 온갖 재물과 육신의 음욕을 진창에서 구는 돼지처럼 천박스럽게 무턱대고 탐닉하려 들 것이며, 그리하여 그 삶은 인간적이고 영적이기보다 온통 동물적이고 물질적인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로 말미암는 육체의 일들은 갈5:19-21에 따르면 1)몸을 더럽히는 죄-음행, 호색, 더러운 일 2)술취함 방탕함 등 함부로 하는 것 3)시기, 분쟁, 분노, 원한, 원수맺기 등 악한 기질과 그 특성들 4) 투기-분열-파당 같은 내적 분열 5)이단, 우상숭배-술수 등의 사탄적 세력과의 악하고 신비적인 교통 등이라고 말한다. 롬1:21-32에는 (사형=죽을 죄에 해당됨을 지적하면서)좀더 세밀하게 지적하여서, *개인적인 죄악=스스로 내어버림의 방탕, 더러운 일(변태성욕-동성애-간음-음란-음행), 악행들(불의-추악-탐욕-악의), 자랑-교만 *타인에 대한 죄악= 시기-살인-분쟁(다툼), 사기(부정)-악독함, 무자비(용서없음)-무정(몰인정)-배약(신의 없음)*공동체에 대한 죄악=파당-험담-비방-음모, 하나님을 미워하고 모독함-우상숭배-거짓으로 참진리를 왜곡함-죄를 서로 두둔함-우매(미련함), 불효 등을 말하고 있다. 오호라, 참으로 중심으로 애통하고 회개하며 눈물을 흘릴지어다!!!
-우리는 <육에서 남으로써 육이 되었다> 결국 이에 대한 출구는 오직 하나, 죽는 길이다. <죽은 자는 죄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갈5:24에서는 예수님과 한 영이 되어 연합하여 함께 죽음으로써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고 말한다. 영적 진리로서 사실적 측면에서 볼 때, 우리는 죽었다!!! 우리 육신도 죽었다!! 죽었으므로 더이상 육체의 지배를 받지않아도 되게 되었다. 타락 이전의 본래의 위치대로 몸이 혼에, 혼이 영에 복종하게 되어 오직 영만이 그 본연의 통치권을 회복케 된 것이다. 단지 문제는 내가 <거듭났느냐?>이다. 예수를 구주로 믿은 자는 누구든지 자기가 인정하든지 안하든지 이미 그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죄를 짓는데..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 육체가 십자가에 못박혔다 내 성깔이 그대로인데.. 그래도 하나님은 선언하신다. 너희 육신이 십자가에 못박혔다!!
- 하나님의 말씀에 단순히 반응하라. 그러면 경험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너희의 육체가-육신이-자아가-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씀하시면 <아멘.,실로 나의 육체는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고 대답하면 된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자. 말씀을 굳게 붙들고 말씀 그자체와 하나되고 말씀하신 분을 신뢰, 의뢰, 의지하고 그렇게 선포하자. 의심의 영을 대적하자. 우리는 <보는 것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행하는 자들이다>. 제대로 시인하는 문제에 있어서 확고하다면 나아가서 실제적으로 그렇게 육신을 다룰 수 있게 될 것이다. #(골3:1-10)<1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골3:3에서는 하나님에 의해 <..너희가 죽었다..>고 말씀하며 그러므로 한편 우리쪽 에서, 너희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즉, 순종할 것을 말씀하신다. 전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위치요, 후자는 실제의 우리의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 갈5:16에서는 <그러므로 (살아계신 하나님과 모든 말씀에 대한 참믿음으로 나아가서)성령을 좇아(=성령의 일 곧, 성령이 바라시는 것을 생각하고 그 인도를 따라 순종하여)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하신다.
-육신을 죽이려면 우선 내가 주님의 죽음에 동참했음을 아는 것이 필요하고 그것을 안 후에는 실제로 죽어야 한다. 이 두 가지는 병행해야 한다. 이제 신자가 해야 하는 일은 이 확실한 죽음을 그의 영에서 이끌어 내어 악한 정욕이 발동할 때 마다 그의 지체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혈로 새롭게 하신 자기 몸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희생제물로),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성별해 드려야 한다. 이것을 지속적으로 계속해 나갈 때 우리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죄의 몸을 멸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끝내 관철시키시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