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3.09.04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폴 워셔-10가지 기소장(1), 워드패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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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워셔-교회에 대한 열 가지 기소장*열 가지에 대한 고발 (역사에 남을 만한 21 세기의 메세지)


주님께 기도로 나아갑시다.
아버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신 앞에 나아갑니다. 주님,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모든 것은 펼쳐진 책과 같이 주님 앞에 있습니다. 누가 당신의 임재하심과 당신의 눈앞에서 그들의 마음을 숨길 수 있습니까?  가장 영리한 사람들의 행동들도 주님 앞에서 다 드러납니다. 당신의 전지하심은 한계가 없으며, 은혜가 아니었다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 나는 더욱 두려움에 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약한 자들에게 부어지며 당신의 영광에 풍성한, 풍부하고 영광스러운 은혜가 있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당신되심과 당신의 하신 모든 일들을 인하여 당신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하늘이나 땅이나 땅 아래에 당신과 같은 분이 없습니다. 당신은 왕이시며 다른 왕은 없습니다. 당신은 구원자시며 당신은 그 영광을 다른 누구와도 나누어 가지지 않으십니다.
아버지, 오늘밤 당신은 나를 아시며 내가 커다란 은혜를 필요로 하는 것을 아십니다. 당신께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약한 자, 형제들 중에 가장 미천한 자를 부르셨고, 당신의 은혜로 때로는 더 작은 자가 더 큰 자를 가르친다는 사실 외에 내가 왜 여기에 있겠습니까?  그것이 언제나 나의 경우이며 나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을 경배합니다.
아버지, 오늘밤 우리를 도와주소서. 말의 유창함이나 탁월한 지성 따위는 사라지게 하소서. 진리가 앞서 나아가게 하소서. 당신의 교회의 상태가 더 영광스럽게 되도록 내가 변화하게 하소서. 나 자신과 여기에서 듣는 자들을 위해 은혜위에 은혜와 자비위에 자비를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도와주소서, 오 하나님, 그러면 우리가 도움을 받을 것이고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는 그 도우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자랑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저녁 내가 여기에 선 것은 커다란 특권입니다. 여기 여러분 앞에 서서 부흥, 개혁, 하나님의 백성과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 등과 같은 일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그러나 오늘밤 나는 여러분들과 함께 기소장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소망의 기소장입니다.
이 일련의 모임들 가운데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기도하는 동안, 하나의 커다란 결론, 커다란 부담감이 내 마음에 지워졌습니다. 우리는 부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각성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께서 내려오셔서 우리가 만든 모든 문제들을 다 청소해 주시기만을 단순히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이 하신 일과 그분이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 지와 우리가 어떻게 그분의 교회를 이끌어가기를 원하시는지에 대한 분명한 방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적 원칙이 우리 모두 가운데서 위반되고 있으면서 여분의 성경적 계시를 달라고 외치는 것은 사람들에게 무익합니다.


 이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과 교회의 개혁을 위해 진실로 노력하고 있지 않다면 악마나 악한 사람들이 그가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것에 반대할 이유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진리가 주어졌지만 우리는 우리가 단순히 우리 보기에 옳은 것들을 행하면서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노력을 축복해주시기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구약을 볼 때 모세에게 어떻게 성막을 지어야 하는지에 대한 아주아주 세부적인 설명들이 주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모세를 위해 주어진 것일까요 아니면 교회를 위해서 주어진 것일까요?  제 생각에는 여기서 낱낱이 설명하시고 계신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의 뜻에 대해 특별히 정하신 것을 우리가 그중 가장 작은 세부사항이라도 빼버리거나 무시해도 될 것이라고 추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연약한 사람이며 많은 약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의 기소장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나의 기소장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누구관대 다른 이를 기소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감히 이것을 하나님의 기소장이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추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말하겠습니다. 내가 교회를 둘러보면서 성경과 비교해 볼 때, 변화해야만 하는 분명한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마틴 루터가 아닙니다. 이것은 비텐부르그의 문에 못 박힌 95개조의 선언문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 마음에 지워진 부담이며 나는 이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반드시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을 지금 말하겠습니다. 내가 하려고 하는 말들은 일부 여러분들을 화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경고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나를 건방지다고 비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전달한다는 사실이 여러분에게 싫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건방진 적도 많이 있었고 진리를 잘못된 방법으로 전달한 적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변명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잘못된 전달자를 통해서든 아니든 간에 내가 말하는 것이 사실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 어떤 이들은 여러분이 듣는 것을 기뻐하며 “아멘” 이라고 말하고 싶으며, 팔을 번쩍 들어 올리고 싶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어떤 영적 경지에 도달했다면, 내 형제가 했던 이 말을 하겠습니다. “네가 가진 것 중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며, 만약 받은 것이라면 왜 자랑하는가?”
 

겸손함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더 낫지 않습니까?
만약 당신이 젊은 성직자라면, 이 진리들에 사로잡혀서 그것을 가지고 가서 사랑 없이 여러분의 교회에 휘두르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의 제안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종류의 개혁이라도 하기 전에 여러분의 무릎에 피가 나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주님을 여러 해 동안 섬겨 오신 더 나이든 성직자라면 제발 거만하지 않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늙고 어리석은 왕이 그의 하인들 중 가장 약한 사람으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부탁드립니다. 오늘이 당신의 삶의 마지막 날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을 바꿀 용기를 가지십시오. 적어도 당신이 성경적인 개혁을 시도했다는 것을 알고 영광중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이 드신 분들께 경고로써 이것을 말하겠습니다. 자, 내말을 잘 들으십시오. 나는 내가 여러분들에게 설교하는 방법에 대한 디모데전서 5장의 훈계를 알고 있고 그 방법으로 여러분께 설교합니다. 그러나 이 나라 안에 커다란 각성이 일어나고 있고, 이 나라 뿐만 아니라 내가 다녀왔던 유럽과 남미 그리고 많은 다른 장소에서도 나는 젊은이들이 그들이 잘려져 나왔던 반석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펄젼과 휫필드를 읽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레이븐힐, 마틴 로이드 존스, 토저 그리고 웨슬리의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그것은 훌륭하고 놀라운 운동입니다. 단지 인기 있는 대중매체와 저명한 기독 잡지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15년 전에는 나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각성을 내 사역이 아닌 것을 통해 보게 될 거라고는 꿈꾸지 못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 곳에 다니면서 내 사역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하시고 계시는 일을 봅니다.
 

밤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성경의 진리를 위해 부르짖으며 “변화해야 한다”하고 천명의 젊은이들이 선포하고 있는 네덜란드에서든, 미국으로부터 온 전도에 대한 심리학과 각종 얄팍한 기술들에 의해 너무나 많이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고 지금 울면서 상한 심령으로 그들의 교회로 돌아가서 전도하고 있는 남미에서든,  내가 때때로 새벽 두세 시까지 앉아, 오늘날 그 누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설교를 하도록 하나님께서 일으키실 두건을 쓴 젊은 흑인들과 신학을 논하곤 하는 미국 내부의 어느 도시에서든 간에 말입니다. 각성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부드럽게 말하고자 합니다. 40세 이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매번 각성을 가져왔었던 옛 사람들과 옛날 방식들과 진리들에게로 눈을 돌리는 많은 젊은이들, 그 대부분은 아주 어립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에게 가서 말합니다, “이것 좀 보세요, 우리가 발견한거요. 웨일즈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보세요. 아프리카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보세요. 이것 좀 보세요, 저것 좀 보세요, 그리고 이 가르침을 좀 보세요. 이건 정말로 놀랍습니다.”
그러면 그들 대부분은 그것을 외면하거나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내가 지난 25년간 설교해온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그들이 25년간 설교해 왔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마치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부흥 가운데 기도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부흥은 네가 기도하든 안하든 올 것이다.”
나는 이중 어떤 진영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압니다. 내가 전 세계의 남녀와 젊은이들이 각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볼 때에, 내게 그것은 부흥의 첫 열매들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첫 열매들을 주신 분께서 모든 추수를 가져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시간이 있으시다면, 이제 10 가지의 고발들, 내가 믿기로 우리가 변해야 할 것들을 보기 원합니다.
 

무엇보다도 첫 번째 고발은 이것입니다: 성경이 충분하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부인하는 것.


특히 나의 교파에서 성경이 충분하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부인하는 것.
디모데후서 3:15 부터 이렇게 말 합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지난 몇 십년간 성경의 영감에 관한 강력한 전투가 있어왔습니다. 지금 여러분 중 일부는 그 전투의 일부가 아니었지만, 우리 중 더 자유주의적인 교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분명히 성경을 위한 전투에 참여해 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오직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다함께 성경이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믿게 된다면 그것은 전투의 반밖에 싸우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제는 성경이 영감을 받은 것인가 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경이 오류가 없는가 하는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따라오는, 반드시 응답되어야 할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교회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알려면, 성경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소위 말하는 모든 사회과학과 문화연구를 들여와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제 의견에는, 사회과학이 우리들 대다수가 보지조차 못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선시되어 왔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교회와 전도와 선교학에 살금살금 기어 들어와서 이제 더 이상 우리가 하는 일이 기독교적이라고 말 할 수도 없습니다. 심리학, 인류학, 사회학이 교회에 주요 영향력이 되었습니다.
몇 년 전에, 여러해 전에, 내가 신학교에 다닐 때 한 교수가 들어와서 칠판에 발자국들을 그리기 시작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칠판을 가로질러 간 후 그는 우리 모두를 돌아보며 단지 이 말만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학교의 복도들을 누비고 있다. 주의하라. 이 발자국 소리가 사도 바울이나 그와 함께 하였던 영감의 무리의 발자국 소리, 심지어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발자국 소리보다 더 분명히 들린다. <***모든 영역에서 자기부인이 필요함 :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 16:24)">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교회 생활의 극히 작은 어떤 영역들은 다룰 수 있지만 일이 정말 힘들어지면 사회적 전문가들에게로 갈 필요가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거짓말입니다. 여기 성경에 말하기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이 로마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모든 현대 사회과학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리고 왜 전도와 선교와 소위 말하는 교회 성장이 고고학자나 사회학자 그리고 모든 문화의 영향을 받는 월스트리트의 학생들에 의해 더 많이 형성됩니까?
우리 교회의 모든 활동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해야 합니다. 선교의 모든 활동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해야 합니다. 우리의 선교 활동과 교회 활동,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이, 성경을 펴고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오 하나님?’ 이라는 한 가지 질문만 하는 신학자과 성경학자로부터 흘러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세속적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떤 교회에 참석할 것인지를 알아보려고 설문지를 보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찾는 자에게 친절해야 하지만, 찾고 발견되어야 할 분은 오직 한분이라는 것을 교회가 인식해야 합니다. 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이며, 만일 당신이  누군가에게 친절하고 싶다면, 누군가에게 순응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다른 모든 사람들로부터 배척받는다 할지라도 그분과 그의 영광에 순응하십시오. 우리는 제국을 건설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게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부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교회가 별난 사람들의 집단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기 원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무언가를 원하는 것입니다. 잠시 이사야 8장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사야가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19절 – 역자 주). 이것은 사회과학과 교회성장 도사들과 그 외의 것들에 대한 완벽한, 아주 완벽한 정의, 또는 적어도 삽화가 됩니다. 왜냐하면 삼사년마다 한 번씩 그들의 모든 이론들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그를 계도할 것인가부터 교회란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성장시킬 수 있을까 까지입니다. 삼사년마다 무엇이 여러분의 교회를 세상이 볼 때 최고로 만들 수 있는지에 관한 다른 유행이 찾아옵니다.
최근에 최고 또는 가장 잘 알려진 교회 성장 전문가가 자신의 모든 이론이 전적으로 틀렸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상한 심령과 눈물로 무릎을 꿇고 성경으로 돌아가는 대신 그는 다른 이론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들은 명료한 말을 주지 않습니다. 여기 이사야서에서 말합니다.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8:19 – 역자 주) 교인으로서, 설교자로서, 목회자로서, 크리스챤으로서, 성령께서 살리신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나아가 상담을 청해야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두 번째 고발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 (성경에서 계시된 객관적 하나님을 각자의 주관적 체험 통한 공동고백으로 확인함의 결여)


때때로 사람들이 이렇게 요청합니다. “폴 형제님, 와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일주일간 시리즈를 해 주십시오.”
그러면 여러 경우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글쎄요, 형제님, 이것에 대해 잘 생각해 보셨나요?”
그는 말합니다, “잘 생각해 봤냐니 무슨 뜻입니까?”
“글쎄요, 그건 상당히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젠데요, 당신의 교회에 가서 가르치라고 하는 그 주제가요...”
그들은 말합니다. “ 논쟁의 여지가 있다니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인데요. 우리는 크리스챤들 이잖아요. 이것은 교회이구요.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나는 말합니다. “친애하는 목사님,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제가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최고위,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당신의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할 때, 어쩌면 당신의 가장 훌륭하고 오래된 교회 구성원들 중 일부가 일어나서 이런 말을 할텐데요. ‘그건 내 하나님이 아닙니다. 나는 그런 하나님은 결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마음에 스스로 만든 하나님이 있고 그들은 자신이 만든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9:23-24: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시편 50편.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21, 22절 – 역자 주)
자, 여기서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한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 하나님의 속성이나 신학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적용할 데가 없는 높은 상아탑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실제적으로 적용할 데가 없다고 말하는 자신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여러분은 왜 모든 기독서점들이 자기 도움에 관한 책들과 ‘그것을 하는 다섯 가지 방법’과 ‘독실해지는 여섯 가지 방법’과 ‘넘어지지 않는 열 가지’에 대한 책들로 가득한지 아십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양들이 걸어가야 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걸어가기 위해 모든 종류의 사소한 작은 육신적 장치들이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조차 죄악이 만연합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해서입니다. 이제 여러분께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집회에 마지막으로 참석했던 것이 언제입니까? 목사로서 일 년 내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마지막으로 가르쳤던 것이 언제입니까? 미국에서 일주일 내내 행해지고 있는 가르침 중 하나님이 누구신지와 관계된 것이 얼마나 됩니까? 그러면서 우리는 의문을 가집니다. 흐름에 따라, 다른 사람들 모두를 그냥 따라가다가 어느 날 이런 소리를 듣고 갑자기 “나는 누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가르친 적이 있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라고 말하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우리가 지금 이런 모습의 사람들인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그것이 모든 것입니다. 그것이 영생입니다. 그리고 영생은 여러분이 영광의 문들을 지나갈 때 시작되지 않습니다. 영생은 변화로부터 시작됩니다.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원히 진주 문을 여닫고 금 길을 걸어가는 것에 대해 여러분이 정말로 신나 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영원 속에서 미치지 않을 이유는 이것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영광이 무한하신 분이 계시고 여러분은 그분을 좇아가는데 영원의 영원을 보내게 될 것이며 그래도 결코 그분의 산기슭 주변에조차 여러분의 팔이 미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시작하십시오. 여러분이 알고 싶고 하기 원하는 많은 여러 일들과 모든 책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책을 꺼내십시오, 이 책(성경 – 역자 주)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기 위해,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이 책을 공부하십시오.
일요일 아침, 이런 모든 것들 때문에, 차라리 일요일 아침이 없는 것이 더 낫겠다고 여러분께 말하고 싶습니다. 일요일 아침은 미국에서 일주일 전체 가운데 우상숭배가 가장 심하게 행해지는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 적어도 대다수의 군중들은 – 그들 자신의 육신에 의해 자기 마음대로 만든 하나님, 사탄적 장치들과 세상적 지성을 숭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똑같은 신을 만들었고 그 신은 여호와보다는 산타클로스를 더 닮았습니다.
우리 가운데 주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없습니다.
 

세 번 째 고발입니다: 인간의 고질적인 병폐(전적인 죄됨 전적인 타락과 정죄)를 언급하지 못하는 것.


성경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중의 하나인 로마서를 볼 때, 이것은 체계적 신학은 아닙니다만, 성경 중에서 어떤 책이 체계적인 신학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로마서가 가장 근접할 것입니다. 바울이 그 책의 처음 세 장을 한가지만을 하려고 썼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 모든 사람들을 정죄아래 데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정죄가 그의 가장 위대한 신학적 업적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결말도 아니고 최종 목적도 아닙니다. 그것은 독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기 전에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람은 아주 타락한 존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데려가려면 그들로부터 절대적으로 모든 육신의 소망을 잘라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모든 것에 있어 중요합니다만 전도에 있어서는 특히 중요합니다. 나는 기억합니다. 그것은… 내가 21살 때, 설교하도록 막 부르심을 받았을 때였는데, 나는 성직자들에게 반값으로 양복을 파는 어느 오래된 가게에 갔습니다. 그들은 50, 60년을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거기로 들어가서, 캔터키 파두카에서, 양복을 찾고 있었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습니다. 벨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닫혔습니다. 거기에는 한 늙은 노인이 서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도 몰랐는데, 그가 걸어 들어와서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습니다.
“젊은이, 설교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구만, 그렇지?”
나는 말했습니다. “네, 선생님.”
그는 아주 늙은 전도자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이 건물 바로 바깥에 있는 저 건물이 보이나?”
나는 말했습니다. “네.”
그가 말했습니다, “거기서 내가 설교했었지. 하나님의 영이 내려와서 영혼들이 구원받곤 했지.”
나는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것에 대해 좀 더 말씀해 주세요.”
그가 말했습니다. “그때는 요즘의 전도와 같은 게 없었어. 우리는 이삼주 동안 설교를 하고서 죄인들에게 영접하도록 초대하지도 않았지.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영이 일하시기 시작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깨뜨리실 때까지 그들의 마음을 쟁기질하고 쟁기질하고 또 쟁기질하기만 했지.”
내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의 마음을 깨뜨리러 오셨을 때를 어떻게 아셨나요?”
그리고 그가 말했습니다. “ 글쎄, 그냥 예를 하나 들어주지. 수 십 년 전에 내가 이 가게에 양복을 사러 왔었다네. 누가 나한테 30불을 주면서 말하더군, ‘목사님, 내일 가서 양복 한 벌을 사십시오.’ 그리고 내가 문으로 들어왔을 때 가게를 맡고 있던 젊은 점원이 돌아서 나를 보았고 나를 봤을 때 그는 바닥에 엎드려서 소리쳤다네, ‘누가 나 같이 악한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 나는 하나님의 영이 그곳에 임했다는 것을 알았지.”
지금 우리는 그냥 사람들에게 가서 얘기하고, 세 가지의 입문적인 질문을 하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들어오시도록 요청하는 기도를 할 것인지 그들에게 물어봅니다. 그리고 전도자로서 우리가 우리 입으로 토해 놓은 종교적 삶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두 번 다시는 복음에 마음을 열지 않을, 두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합니다. 레오나르드 레이븐힐이 즐겨하던 말을 하겠습니다. “이제 당신은 내가 왜 많은 장소에서 오직 한번만 설교하는지 이해할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입니다.
우리가 죄를 피상적으로 다룰 때, 무엇보다도 우리는 성령님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16:8 – 역자 주)
오늘날 여러분들에게 영원보다는 지금 가장 좋은 삶을 주는데 더 신경 쓰는 아주 유명한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설교에 죄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자랑합니다. 나는 이것을 말 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그럴 때 그들과 싸우게 될까봐 그들의 사역에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유일한 것입니다.
왜냐구요? 사람이 인간의 죄를 다루는 사역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성령께서 하십니다. 오셔서 죄의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이 성령의 주된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아십시오. 여러분이 특정하게, 열정적으로, 사랑으로 사람들과 그들의 타락한 상태를 다루지 않는다면, 성령은 여러분 주변에 절대 거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예레미야 시대의 목자들처럼 우리가 인간의 고질적 병폐를 가볍게 다룬다면 우리는 속이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렙6:14 – 역자 주)
누군가에게 나쁜 소식을 전하기 싫어서, 그 사람이 자신을 싫어하거나 자신에게 화를 낼까봐, 그 사람이 슬퍼질까봐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부인하는 의사와 같이 우리는 속이는 자일뿐 아니라 부도덕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 의사는 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사실을 그들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요즘 설교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폴 형제, 당신은 이해를 못하는군요. 우리는 요한과 찰스 웨슬리 시대의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휘트필드나 에드워즈가 설교했던 문화와도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마음이 따뜻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깨어져 있어요. 우리는 자존감도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의지도 약합니다. 우리는 그런 설교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 말을 들으십시오. 그 사람들의 삶을 연구해 본적 있으십니까? 그들이 설교했던 것들은 그들의 문화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도 복음의 설교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짐승의 사나움을 가지고 대적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개심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더 의지가 박약하고 자존감이 없다는 부분에 대해 한마디 하겠습니다. 우리  나라와 이 세상은 이 혐오스러운 자존감의 병폐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보다 자신을 더욱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많이 말하지 않을 때 우리는 또한 도둑들입니다. 우리는 도둑들입니다.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오늘 오후, 오늘 아침, 별들이 다 어디로 갔나요? 어느 우주 거인이 바구니를 타고 와서 별들을 다 따서 담아가지고 다른 곳으로 가져갔나요? 오늘 아침 별들이 다 어디로 갔을까요? 그것들은 거기에 그대로 있었지만 여러분은 그것들을 볼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점점 어두워져서 밤이 칠흑같이 캄캄하게 되면 별들이 그 영광의 풍성함 가운데 드러나게 됩니다.
여러분이 인간의 급진적 타락성에 대해 가르치기를 거부할 때 여러분이 하나님과 그분의 그리스도, 그리고 그의 십자가에 영광을 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영광은 우리의 타락성의 바탕위에 놓여 졌을 때 가장 광대해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그 여인은 많이 사랑하였고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악한지 알았기 때문에 얼마나 많이 용서받았는지 알았습니다. (눅7:47 – 역자 주)
오,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악한지 말하기를 두려워하고, 그로인해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훈계를 따를 기회를 사람들로부터 강탈하였습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찌니라.” (고후10:17 – 역자 주)
 

네 번째 고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속죄와 화해)에 대한 무지


오늘 나는 여러분께 이 나라에 복음이 굳게 서 있지 않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나라는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그렇기 때문에 복음에 대해 무지합니다. 다시 말하겠습니다. 이 나라의 병폐는 자유주의적 정치인들도, 사회주의의 근본도, 헐리우드나 다른 어떤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소위 복음주의 목사와 우리 시대의 설교자와 우리 시대의 전도자입니다. 거기에 병폐가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모릅니다. 우리는 마지막에 하는 약간의 미신적 기도와 함께 우리의 축복의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사영리’와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기 원하시는 다섯 가지’로 축소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가 우리가 하는 기도를 충분히 진지하게 따라하면 그들이 거듭났다고 천주교적으로 선언합니다.
우리는 ‘중생’을 ‘결심주의’와 맞바꾸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지금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단 몇 분 동안 말한 후에 얼마나 많은 30, 40대의 신실한 분들이 나에게 와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하는지 아주 놀랍습니다. “폴 형제, 내 인생에서 이런 것은 한 번도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속죄와 화해의 역사적 교리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이 복음에 대해 말할 때,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그냥 분명히 얘기합시다. 복음은 하나님의 본성으로 시작해서 사람의 본성과 그로 인한 타락에 이릅니다. 거기로부터 시작해서, 그 두 복음의 위대한 기둥들은 모든 믿든 사람들의 입에서 위대한 딜레마 (진퇴양난) 라 불리고 알려진 것에 이르게 합니다. 그 딜레마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용서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이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면서 동시에 악한 사람들을 정당화 할 수 있습니까? 성경 말씀, 특별히 잠언의 한 본분을 인용하자면, “악인을 의롭다하는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습니다” (17:15 – 역자 주). 그런데도 우리 모든 기독교 노래들은 얼마나 하나님이 악한 자를 정당화하시는지를 자랑합니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와 찰스 스펄전과 로마서를 세 번은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말했듯이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성채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것을 사람들 앞에 내놓아야 합니다. 큰 문제는 하나님은 진실로 공의로우시며 모든 사람들은 진실로 악한데,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려면 악한 자를 정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사랑하신 위대하신 사랑을 두셨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서 완전한 인간으로 사셨던 자신의 아들을 보내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었던 그 계획대로 그는 그 나무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 위에서 그는 우리의 죄를 지고 그의 백성들의 법정에 서서 우리의 죄악을 지고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것들에 따라 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 저주를 받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저주에서 속량하시고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로마 제국의 상처 아래 고난 받고 나무에 달려 있을 때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이 고난 받는 것을 볼만한 도덕적 인내심이 없어서 외면하셨다는 이런 낭만적이고 능력 없는 견해의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 죄가 되었기 때문에 외면하셨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 라고 외쳤을 때, “그 잔에 뭐가 있었을까? 아, 로마의 십자가구나. 채찍이구나. 못이었구나.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고 추측해 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그 나무 위에서 겪으신 육체적 고난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잔은 그 아들에게 부어져야 했던 아버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었습니다. 누군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지고,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버려지고, 하나님의 진노에 짓밟혀 죽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를 짓밟으시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내가 독일에, 아니 유럽의 독일 신학교에 있었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라는 책, 존 스토트가 쓴 책이 아닌 다른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하늘에서 사람들에 의해 그의 아들에게 주어진 고통을 보시고 그것을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로 여기셨다.”
그것은 이단입니다.
그 육체적 고통과 나무에 못 박은 것은 다 하나님의 진노의 일부였습니다. 그것은 피의 희생이어야 했습니다. 나는 그 사실로부터 아무것도 삭제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친구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거기에서 멈춘다면 여러분은 복음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물어보겠습니다. 오늘날 복음이 설교되고 개인 전도에서 나누어질 때 내가 지금 얘기한 것들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거의 없을 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공의 아래 짓밟히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속량하실 수 있었고, 자신의 신적인 공의가 만족되었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면서도 악한 자들의 공의롭게 하시는 분이 되신다는 것이 결코 분명하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복음 축소주의.
우리는 왜 복음이 능력이 없는지 의아해 합니다. 이상할 이유가 없지요… 무슨 일이 있었냐구요? 말씀드리죠. 여러분이 복음을 뒷전에 남겨두고, 여러분의 그럴듯한 복음 메세지라는 것에 더 이상 능력이 없을 때, 사람을 개종시키려면 요즘 가장 저명하게 사용되는 속임수나 상업으로 향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대부분, 아니 전부가 효과가 없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나의 친구 여러분, 이 말을 하겠습니다. 몇 년 전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박사과정에 들어가야 할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나의 영적 삶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은 나를 학문의 세계에서 할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페루의 정글 한 가운데로 보내셨습니다. 거기서 나는 무언가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스펄젼이 말했듯이, “나보다 더 위대한 마음을 가진 더 위대한 사람들이 재림에 대한 이 교리에 접근했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위대하고 강력한 교리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이 입장을 고수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과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씀드리죠. 이게 나를 아주 화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복음이 마치 상담하는데 10분밖에 걸리지 않는 기독교로 들어오는 첫발걸음일 뿐이고, 그 다음에 더 훌륭한 것들로 넘어가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것들을 아는 지식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보여줍니다.
친구여, 재림의 날에 재림에 대해 여러분은 완전히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천국의 영원의 영원 속에 있으면서 갈보리의 하나님의 영광을 이해하는 것은 시작조차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것입니다.
젊은이들, 젊은 설교자들은 제 말을 잘 들으십시오. 그분을 따라 그 나무로, 그것이 의미하는 것으로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이 만약 그가 그 나무 위에서 하신 일, 그분이 그 나무 위에서 하셨던 그 일을 눈곱만큼이라도 안다면, 여러분의 오븐에 희한한 불을 지피는데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을 하는 것을 나는 아주 좋아합니다. 이것을 나는 백 만 번은 말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그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산으로 데려갔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뭔가를 말하려고 하셨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아들은 전혀 저항하지 않고 누워 있었고, 아버지는 자기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드려 자기 자신의 아들의 심장을 찌르려고 돌칼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손은 머물러 있었고 그 노인은 하나님께서 수양을 준비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 그 이야기의 결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것은 결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막간일 뿐입니다. 수 천 년 후에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그가 사랑하는 외아들의 이마에 손을 대고 아브라함의 손에서 돌칼을 취하여 그의 충만한 진노 아래 그의 유일한 아들을 죽이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전하는 그 알량한 복음이 왜 능력이 없는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으로 돌아가십시오. 평생 동안 무릎 꿇고 기도하십시오. 사람들로부터 떠나십시오. 십자가를 공부하십시오.
 

네 번째 고발: 중생(재창조, 부활)의 교리에 대한 무지,

 

친구 여러분, 이것을 직설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나는 여기에 칼빈주의자도 있고 아르미니우스파도 있고 그 중간의 온갖 종류의 동물들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비록 내가 스스로 5점짜리 스펄젼주의자라고 부르듯 이쪽으로 치우치기는 하지만, 이것은 아시기 바랍니다. 칼빈주의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가 뭔지 말씀드리죠. 중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웨슬리와 레벤힐과 토저와 나머지 모두와 교제할 수 있습니다. 다른 문제들에 대해 그들이 어떤 입장을 취했든 간에, 그들은 구원은 설교자에 의해 조작되어서는 안 되며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광대한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었다는 입장을 고수합니다.
성령의 중생하게 하시는 일에는 이 세상과 우주를 창조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의 능력이 크게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 세상을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타락한 인간으로부터 사람을 재창조하십니다.
그것은 우리 구세주가 죽음에서 부활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설교자라면, 설교하는 데는 선생들도 있고 설교자들도 있고 해설자들도 있고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는데 그들 모두가 다 교회의 건강을 위해 매우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해하셔야 합니다. 캠벨 몰건처럼, 그분이 그 위엄 있는 강대상으로 설교하러 올라갈 때 이렇게 스스로 인용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털 깎는 자들 앞의 양같이.” 그는 광대하신 중생시키시는 성령의 나타남이 없이는 그가 하는 모든 말이 죽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령께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그런 의미에서 선포하는 우리 모두는 선지자로서 선포해야 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구요? 우리는 항상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언제나 아주 메마를 뼈들이 있는 골짜기에 서 있는 에스겔입니다. 그 뼈들은 아주 메말라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거기로 가서 무엇을 합니까? 우리는 예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바람이 이 살육당한 이들 위에 불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심령 가장 깊은 곳에서 이것을 굳게 붙잡는다면,  이 나라에서 전도의 이름으로 너무나 많이 행해지고 있는 조작에 더 이상 자신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선포할 것입니다.
중생의 교리. 웨슬리를 보십시오. 잠시 동안 그들이 직면했었던 것을 보십시오. 그리고 나의 친애하는 휘트필드, 그는 무엇이었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그들이 철저히 그리스도인이라고 믿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글쎄요, 그들은 유아세례를 받았구요, 언약으로 인도되었습니다. 그들은 확증되었습니다. 그들은 악마처럼 살았습니다. 중생은 그 시대의 종교적 지도자들에 의해 권위가 주어진 어떤 신조와 맞바꾸어졌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웨슬리가 있습니다. 아닙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바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영적 삶의 증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이 믿음 안에 있는지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당신이 부르심을 받은 것과 택함을 받은 것을 확실히 하십시오. “여러분은 거듭나야 합니다.”
여기 미국에서는 지난 몇 년, 몇 십 년간의 전도자들 때문에, 거듭남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버렸습니다. 이것은 단지 신앙단체에서 언젠가 여러분이 한번 결단을 한 적이 있고 그것이 진지했었다는 것만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의 삶에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재창조의 일에 대한 증거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일부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직면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직면한 것이 무엇인지 말씀드리죠. 그것은 대체로 꼭 일종의 유아세례가 아닙니다. 그것은 교구의 권위에 의한 고교회의 견진성사도 아닙니다. 우리가 직면한 것은 ‘죄인의 기도’ 입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내가 전쟁을 선포했던 대상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말합니다. “폴 형제…”
그렇습니다, 유아세례가 내 의견에는 종교개혁의 금송아지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침례주의자와 복음주의자와 오늘날 그들을 따르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 ‘죄인의 기도’가 이 지구상의 어떤 것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냈습니다.
여러분은 말합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성경으로 같이 가서 나에게 보여주십시오. 누구든 그렇게 전도했었다는 것이 어디에 있는지 일어서서 나한테 보여주시면 좋겠습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 나라로 가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는 가깝다. 자 이제 나를 자신의 마음으로 초대할 사람이 누구냐? 손 든 사람 있구나.’ 하고 말했다고 써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회개하라. 그리고 복음을 믿으라.”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들의 삶속에 적어도 한번은 기도를 했고 누군가 그들에게 그들이 충분히 진지했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구원에 대해서 당신이 그들에게 “구원받았습니까?” 라고 물으면 그들은 “그럼요, 나는 지금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고 나에게 거듭났음의 확신을 주는 강력한 증거가 있기 때문에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니요.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삶 가운데 나는 한번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귀처럼 삽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나는 한 전도자가 그런 짓을 하도록 한 사람을 꼬시고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 마침내 그 사람은 너무 불편하게 느낀 나머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이렇게 합시다. 내가 하나님께 당신을 위해 기도할테니 그것이 당신이 하나님께 하고 싶은 말이면 내 손을 꽉 쥐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보십시오.”
결심주의, 우상적인 결심주의. 인간들은 자기 자신의 결심의 진지함을 판단했기 때문에 천국에 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갔을 때 그는 그들에게,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삶 가운데 있었던 그 기도를 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서 여러분들이 진지했었는지 한번 봅시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니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을 시험하십시오. 자신을 살펴서 여러분이 믿음가운데 있는지 보십시오.”
내 친구들이여, 나는 구원이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기 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것은 은혜위에 은혜입니다. 그러나 개종의 증거는 여러분이 개종하던 순간의 진지함에 대한 조사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 삶에 계속해서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오, 나의 친애하는 친구들이여, 우리가 한 짓을 좀 보십시오. 나무는 열매로 알 수 있지 않습니까? 60, 70%의 미국인들이 자기들은 개종했고 거듭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에 몇 천 명의 아기들을 죽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비윤리성 때문에 전 세계에서 미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에 대한 책임을 정면으로 설교자들에게 돌립니다.
 

다섯번째 고발: 비성경적인 복음으로의 초대


우리는 이것에 대해 이미 조금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더 깊숙이 들여다보기 원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하는지 보십시오. 내 말은,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더더욱… 나는 이것을 어디서나 보아 왔습니다. 칼빈주의자들, 아르미니우스파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똑같은 표면적 초대입니다. 그들은 많은 것들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하고서 그 초대로 나아옵니다. 그리고 마치 모든 사람들이 정신이 나가는 듯합니다.
전도인이 누군가에게 다가가서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의 삶에 대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을 미국인에게 말하는 것이 상상하실 수 있으십니까?
“선생님,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의 삶에 대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뭐라고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구요? 와, 굉장한데요, 나도 나를 사랑하거든요! 와, 이거 놀랍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세요? 나도 내 삶에 대해 놀라운 계획이 있는데요. 그러므로 만약 내가 그를 내 삶에 받아들이면 내가 최선의 삶을 지금 갖게 될거네요. 이거 완전 놀라운데요.”
그것은 성경적인 전도가 아닙니다.
그것 대신에 다른 것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와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여호와라, 자비하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리가 풍성하신 하나님이라. 그는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천대까지 인자를 베푸시며, 허물과 죄악을 용서하신다. 그러나 그는 죄인에게는 결코 형벌을 면치 않으시고 3-4대에 걸쳐 그 죄과를 물으실 것이다.  
모세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모세는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성품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이십니까? 타락하여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자신과 비교할 기준이 없다면 자신의 죄에 대해 어떤 것이라도 깨달을 수가 있을까요? 우리가 그에게 그의 타락한  세속적 마음을 속일 수 있도록 하나님에 대한 사소한 것들만 이야기한다면 그가 진짜 회개와 믿음으로 나아올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라고 시작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완전한 조언의 설교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처음부터 그에게 이것이 그의 생명을 치르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먼저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놀라운 계획>을 말해버고 난 다음, 우리는 입문적인 질문으로 들러갑니다. “그런데, 이봐요, 당신은 당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압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것은 몇 년 전에 나의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을 때와 같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의사가 들어와서 “이봐요, 바바라, 당신은 당신에게 암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안 그렇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너무나 표면적으로 대하고 말하는 것 아닙니까? 거기엔 하나님의 영광의 무게도 없고 엄숙함도 없습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해 먼저 말한 후, “선생님, 당신에게 끔찍한 병폐가 있고 심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단지 “선생님, 당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라고 한다면, 마귀에게 가서 자신이 죄인인지 아느냐고 물어보십시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글쎄요, 예, 그렇죠. 죄에 대해서라면 나는 아주 잘 하고 있으며… 아니면 보기에 따라 못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예. 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건 압니다.”
그러나 실제로 문제는< 당신이 죄인임을 아는가> 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복음의 설교를 통해서 성령께서 경청하는 여러분의 마음에 실제로 일하고 계심으로 인해 내적 변화가 일어나서, 여러분이 한때 사랑했던 죄가 지금은 미워지고, 한때는 품기를 원했던 죄로부터 지금은 마치 용을 피해 도망가는 것처럼 피해 도망가고 싶은가"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야 바로소 오는 질문이 “천국에 가기 원하십니까?” 입니다.
이것이 내가 내 아이들을 98%의 복음주의 교회의 주일학교와 여름성경학교에 보내지 않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 관한 영화를 보여준 다음에, 좋은 의도를 가진 어떤 사람들이 서서 말하기를 “예수님이 너무 훌륭하지 않니?” 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너희 어린이들 중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니?” 라고 말합니다.
“오, 저요.”
“누가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기 원하니?”
“오, 저요.”
그리고 그들은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일종의 기독교 문화, 적어도 교회 문화 속에 자라고 있기 때문에 얼마 동안은 잘 따라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15, 16세, 의지력이 생기는 때가 되면 매였던 줄을 끊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죄악가운데 살기 시작하고, 우리는 그들을 쫓아다니며 “너는 크리스챤이야. 너는 단지 크리스챤이 아닌 것처럼 살고 있을 뿐이야. 타락하지 마라.” 라고 말합니다. 성경적으로 그들에게 접근해서 “너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했었다. 너는 심지어 세례식에서도 그를 선언했었다. 그러나 지금 보니까 너는 그분에게서 떠나간 것 같구나. 자신을 살펴봐라. 자신을 시험해 보아라. 네가 정말로 개종했다는 증거가 거의 없구나. 라고 말하는 대신 말입니다.
그런 다음 대학 졸업 후 24, 25세, 또는 30세가 되었을 때, 그들은 교회로 돌아와서 그들의 삶을 재헌신하고 미국에서 기독교를 둘러싸고 있는 바로 그 모조와 가식의 기독교적 윤리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날에 그들은 주예수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개 되겠지요. “너희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여러분은 말합니다. “폴 형제, 당신은 너무 화를 내는군요.”
내게 그럴 권리가 없습니까? 누군가는 부흥을 위해서 외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초도 바로 세워놓지 못했습니다.
아, 물론 부흥이 와서 우리의 기초를 바로 세워주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멀쩡한 눈과 귀를 가지고 있고 성경이 우리 앞에 있는데도 이런 문제들을 고치지 않아야 합니까?
천국에 가고 싶으십니까?
친구 여러분들, 사람들은 누구나 천국에 가고 싶어 합니다. 다만 그들은 그들이 천국에 갔을 때 하나님이 거기 있기를 원하지 않을 뿐입니다. 문제는 천국에 가고 싶은가가 아니라, 이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진정 원하십니까? 당신은 하나님 증오하는 것을 진정으로 멈추셨습니까? 그리스도가 당신에게 소중해졌습니까? 당신은 그분을 갈망하십니까?
그것이 바로 정치적 이론에서 말하는 유토피아의 모든 것입니다, 친구 여러분. 누구나 천국에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여러분이 더 이상 상처받지도 않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곳으로 가기 원하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당신은 그분을 원하십니까?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소중하게 되었습니까?
어떤 사람이 기도할 때, 그 다음에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천국에 가기 원하십니까?”
“음, 네.”
“음,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마음으로 들어오시도록 기도하시겠습니까?”
자, 친애하는 친구들이여, 이것을 말하겠습니다. 그 방법을 사용해서 구원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방법 때문이 아닙니다. 그 방법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입니다.
“선생님, 당신은 예수님을 갈망하십니까? 당신의 죄를 알겠습니까?”
“오, 그럼요. 예, 그렇습니다.”
“선생님, 회개가 어떤 것인지, 당신의 삶에 이것이 일어나고 있다는 성령의 증거가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보여주는 여기 몇 구절의 성경을 봅시다. 상한 심령을 보십니까? 당신이 싸워왔던 모든 것들이 붕괴된 것과 지금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생각들과 새로운 열망들과 새로운 소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십니까?”
“예, 그것이 보입니다.”
“선생님, 그것이 회개의 첫 열매들일 수 있습니다. 자, 자신을 그리스도께 던지십시오.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그런 다음 제 말을 들으십시오. 당신은 복음을 말할 권세가 있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어떻게 구원받는지 말할 권세가 있고 당신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확신에 대한 성경적인 원칙을 가르칠 권세가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말할 권세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들을 그 하찮은 일로 데려올 때,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 역자 주)
“예수님을 당신의 마음에 초청하셨습니까?”
“예.”
“당신은 그때 진심이었습니까?”
“예.”
“당신은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잘 모르겠는데요.”
“물론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진심이었고, 그분은 당신이 그분을 초청하면 들어오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
그러고는 그들은 5분 동안의 상담 후에 교회 밖으로 나갑니다. 그 전도자들은 ‘데니스’ (미국의 체인 레스토랑 이름 – 역자 주)로 먹으러 가고, 그 사람은 길을 잃습니다. 그 사람은 길을 잃습니다.
비성경적인 초청. 만약 그들이 의심하게 된다면, 만약 그들이 그들의 구원에 대해 다시 의심하게 된다면. 다시 말합니다. 만약 그들이 그들의 구원에 대해 의심하게 된다면, “예전의 한 시점으로 돌아갑시다. 당신의 삶속에 당신이 기도했고 예수님이 들어오시도록 초청한 시점이 있었나요?”
“예.”
“진심이셨나요?”
“그런 거 같은데요.”
“마귀가 당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계속적인 세속성 속에 두려움이 없고 성장이 없는 교회의 견지에서조차 성장이 없이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개인적 제자도의 부족의 탓으로 돌리고 그것을 세속적 그리스도인의 교리로 치부해 버립니다. 실상은 세속적 그리스도인의 교리가 더 많은 생명을 파괴시켰고 더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죄와 씨름합니까? 예.
그리스도인이 죄에 빠질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 생명>의 성숙함의 열매 없이 계속적으로 세속성 안에 살면서도 진짜 그리스도인일수 있을까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신약의 언약에 대한 구약의 모든 약속들은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히브리서에서 훈련에 관해 말씀하신 모든 것들도 거짓말이 됩니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개종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해 사역하고 있을 때… 나는 하나님의 것들에 대해 무척이나 많이 이해하고 있는 설교자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시범적으로 복음을 제시할 때 그들은 또 다시 이런 방법론에 빠집니다.
제가 이야기 하나를 들려 드리고, 그 다음에 다음 고발 내용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일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순간들 중 하나입니다. 내가 캐나다에서 설교하고 있었을 때인데… 사실상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거기는 알라스카에서 30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그 동네에는 사람보다 북극곰이 더 많았습니다, 진짜로요. 거기는 사람이 15, 20명쯤 되는 작은 교회였고 나는 설교 중이었습니다. 내가 강대상에 서자마자 60대나 70대 초반쯤의 산같이 커다란 사람이 들어왔는데, 그저 산처럼 거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건물 안에 있는 우리 모든 사람들을 두들겨 팰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설교하면서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는 내가 본 가장 슬픈 인간이었습니다. 나는 다 때려치우고 <모든 사람의 죄인됨과 구속하는 십자가 복음>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복음, 복음, 그리고 단상에서 내려왔을 때 나는 곧장 그에게로 걸어갔습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선생님, 무엇이 문제입니까? 무엇이 당신의 영혼을 괴롭히고 있습니까? 나는 내 평생 그렇게 슬프고 낙심한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서류봉투 하나를 꺼냈는데 그 안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엑스레이 사진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의사를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나는 3주 후에 죽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그가 나에게 한 말이었습니다. “나는 평생 소  목장에서 살았습니다. 거기는 산 같은 것들을 지나서 경비행기나 말을 타야지만 갈수 있는 곳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한 번도 교회에 간 적이 없습니다. 성경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고 있고, 누가 예수라는 이름의 사람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나는 평생 어떤 것도 두려워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 나는 공포에 질려 있습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설교내용을 이해하셨나요, 복음을요?”
그가 말했습니다. “예.”
자, 그 순간 거의 대다수의 설교자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그럼, 예수님을 당신의 마음속에 들어오시도록 초대하시겠습니까?”
그게 그들이 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해하셨군요.”
그가 말했습니다. “이해했지요. 그런데 그게 전부입니까? 그냥 그게…” 그가 말했습니다. “애라도 그건 이해했을 겁니다. 누구라도 말입니다. 내가 이해하고 기도하는 게 전부입니까, 아니면…?”
나는 말했습니다. “선생님, 당신은 3주 후에 죽을 겁니다. 나는 내일 떠나야 합니다. 내가 비행기 표를 취소하겠으니, 우리가 여기 머물면서 당신이 개종하거나 죽어서 지옥에 갈 때까지 성경과 씨름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읍시다."
그래서 우리는 시작했습니다. 나는 구약과 신약의, 속량과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다루고 있는 모든 구절들을 여러 번 반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복음 3:16을 읽으면서, 잠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그 사람에게 회개에 관해, 믿음에 관해, 확신에 관해 질문하면서, 그의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질 때까지 일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날 저녁 그저 지친채로 아무런 돌파구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기도합시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했습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요한복음 3:16을 다시 읽으십시오.”
그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백만 번은 읽었을 것입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위대한 구원의 약속중의 하나입니다. 그 본문을 다시 읽으십시오.”
그리고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그의 산같이 커다란 손으로 그의 무릎 위에 나의 성경을 들고 말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아, 아, …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폴 형제님, 내 모든 죄는 다 사라졌습니다. 나는 영원한…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내 말은…”
내가 말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시죠?”
그가 말했습니다. “이 성경 구절을 한 번도 안 읽어 보셨습니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하나님의 성령의 일하심입니다. 당신들이 시도하는 그런 작은 속임수 대신에 말입니다. 뭐, 식사하러 가신다구요? 뭐, 여러분 생각에 설교란 구경거리고 그 다음엔 호텔로 돌아가신다구요? 아닙니다. 설교 후는 일을 시작하는 때입니다. 영혼을 다루면서 말입니다. 집회 중에 사람들은 상담하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 상담을 하려고 앞으로 나옵니다. 5분 동안, 그들은 상담을 받고, 빨리 카드를 목사에게 줍니다. 그러면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합니다. 그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환영해 주십시오.”
감히 어떻게!
만약 그를 소개하고 싶다면 이렇게 말하십시오. “오늘밤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경외심과 사람들의 영혼을 향한 우리의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의 안에서 진정으로 이루어지고 그가 정말로 회개와 믿음과 위대한 구원의 확신과 성령 안에서의 기쁨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가지는 것이 확실해 지도록 이제 우리는 그와 함께 일할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할 일입니다.”
우리가 한 짓을 보십시오. 여러분께 간청합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짓을 좀 보십시오. 이것은 어떤 종교집단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멈추십시오. 멈추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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