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3.04.01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자아의 파쇄와 영의 해방<퍼옴>가나안7족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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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거짓자아, 옛자아)의 파쇄와 영의 해방

** 육신  Flesh  :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기중심적인, 타고난 성품(=천연적 생명) -- h를 빼고 거꾸로 쓰면 self, 육신은 자신의 생각대로 사는 , 자행자제하는 타락한<자아>임 = 옛성품인 죄된 본성, 마귀의 성품임 

**그외의 표현들로서 피부(살갗), 몸을 지칭..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은 언젠가 그의 사역을 저지하는 요인이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임을 발견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자기 겉사람과 속사람의 불일치 곧 속사람은 한 방향을 향하고 겉사람은 다른 방향을 향하는 것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모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다 자신의 겉사람이 영의 통제에 불순종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최고의 명령대로 행할 수 없음을 언젠가는 느끼게 될 것이다. 모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다 언제인가 그의 사역에서 가장 큰 문제거리가 영을 사용하는 것을 저지하는 그의 겉사람임을 발견해야 한다.
 

본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영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하고, 다 영을 사용하여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으며, 영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사람의 상태를 만지며, 또한 영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며, 하나님의 계시를 영으로써 만지고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겉사람의 방해 때문에 영을 사용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인 일도 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의 겉사람이 아직 기본적으로 다름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기본적인 다름이 결여될 때 결국 기본적인 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흥분이든 어떤 열성이든 어떤 고초이든 모두 헛수고가 된다. 오직 이 기본적인 다룸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유용한 사람으로 만든다.

 

 

속사람과 겉사람


로마서에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라는 말씀이 있다(7:22). 우리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 또한 에베소서는 우리에게,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하는 것을 보여준다(3:16). 또 다른 곳에서 바울은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말한다(고후 4:16).


성경은 사람을 속사람과 겉사람으로 나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그 사람의 영은 속사람이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그 사람 밖은 겉사람이다. 바꾸어 말해서 우리 사람의 영이 바로 속사람이고 보통사람들이 감지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겉사람이다. 우리 속사람은 옷 한 벌을 입은 것같이 겉 사람을 입고 있다. 하나님이 그분 자신과 그분의 영과 그분의 생명을 두신 곳은 바로 우리의 속사람인 것이다. 이 속사람 밖에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있으며 가장 밖에는 우리 전체의 육체인 우리의 몸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속사람이 흘러나오는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속사람이 겉사람을 뚫고 나올 수 없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문제이다. 속사람은 겉사람이 뚫릴 때 비로소 나올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은 우리의 일의 첫째 되는 문제가 상대편에게 있지 않고 우리 편에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 속사람은 옥에 갇힌 것처럼 감금된 사람이 되었다. 우리의 영은 덮개로 덮여진 것 같아서 밖으로 나오기가 쉽지 않다. 우리의 영이 겉사람을 뚫고 밖으로 홀러나오는 훈련을 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사역하지 못한다. 겉사람보다 우리를 더 제재하는 것은 없다. 우리의 사역이 효과적인가는 우리 겉사람이 주님에 의해 파쇄되어서 속사람이 파쇄된 겉사람을 통해 나올 수 있는가에 있다. 이것이 기본적인 문제이다. 주님은 속사람이 출구를 얻도록 우리 겉사람을 파쇄하신다. 속사람이 나올 때 많은 죄인들은 축복을 얻게 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입게 될 것이다.

 

 

죽음과 열매 맺음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주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생명은 밀알 안에 있고 밀알 밖에는 상당히 두꺼운 한 겹의 껍질이 있다. 이 껍질이 갈라지지 않는 한, 밀알은 자라나지 못한다.『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에서 이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땅 속의 온도와 수분 등이 작용하여 껍질을 갈라지게 한다는 것이다. 껍질이 갈라져야만 밀알이 자란다. 그러므로 문제는 당신 속에 생명이 있는가만이 아니라 밖의 껍질이 갈라졌는가이다.


이 구절에 이어서,< 자기 혼을 사랑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혼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주님은 밖의 껍질이 바로 우리 자신의 생명이고, 안의 생명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영생하는 생명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속에 있는 생명이 나오게 하려면 밖의 생명은 반드시 해를 입어야 한다. 밖의 것이 파쇄되지 않는 한, 속의 것은 나올 수 없다.  


이 세상 사람들 중에 주님의 생명을 소유한 한 무리가 있다. 주님의 생명이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 두 가지의 다른 상태가 있다. 하나는 생명이 제한받고 감금되고 포위되어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께서 그의 몸에서 길을 뚫어서 그에게서 생명이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유형이다. 오늘 문제는 어떻게 생명을 얻는가에 있지 않고 생명이 어떻게 우리 몸에서 나가느냐에 있다. 우리가 주님에 의해 파쇄되어야 한다는 말은 한낱 지나가는 말이나 교리가 아니다.  


이것은 사람인 우리가 정말 파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주님의 생명이 온 땅을 충만케 할 수 없는 데 있지 않고 그분의 생명이 우리에게 봉쇄되어 있는 데 있다! 주님께서 교회를 축복하시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봉쇄되고 우리 안에 감금되어서 나갈 출구를 얻지 못하시는 것이다. 겉사람이 파쇄되지 않을 때 우리는 결코 교회의 축복이 될 수 없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우리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를 바랄 수도 없다!

 

 

옥합을 깨뜨려야 함


성경은 우리게게 순전한 나드 향유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하나님의 말씀에 특별히 「순전한」이라는 단어가 추가되었다. 그러므로 이 향유는 순전한 나드 기름이고 진실로 신령한 것이다. 그러나 옥합이 깨지지 않으면 결코 순전한 나드 기름이 흘러나올 수 없다. 기묘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향유보다 옥합을 더 감상하고 향유보다 옥합을 더 값어치 있는 것으로 느끼며 속사람보다 겉사람을 더 보배롭게 생각한다. 이것이 교회 안의 어려움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총명을 귀히 여기어 자신을 놀라운 사람으로 생각하며,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감정을 귀히 여기어 자신을 놀라운 사람으로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귀히 여기어 자신을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남보다 구변도 있고 남보다 일도 빨리 처리하며 일에 있어서 남보다 더 결단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골동품을 가지고 노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옥합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향기 냄새를 맡는 사람들이다. 겉의 것이 파쇄되지 않고 속의 것이 나오지 않으면 우리 자신에게 갈 길이 없을뿐더러 교회에도 또한 갈 길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귀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성령의 역사는 멈추지 않는다. 많은 사람에게서 성령의 역사가 멈춘 적이 없었다. 한 가지 환경 뒤에 따라오는 다른 환경, 한 가지 일 뒤에 발생하는 다른 일들은 성령의 통제로서 그 목적은 오직 우리 겉사람을 파쇄하여 우리 속사람으로 뚫고 나올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약간의 괴로움을 당할 때 불평하고 약간의 좌절이 있을 때 원망하는 데 있다. 주님은 우리를 사용하시기 위해 길을 예비하시는데 우리들은 주님의 손이 우리를 한번 만지기만 해도 그것을 싫어하고 심지어는 하나님과 의견을 달리하며 소극적이 되어 버린다.


구원받은 때부터 오늘날까지 주님은 수차 여러 모로 우리 몸에서 역사하셨다. 그 목적은 우리 자신들을 파쇄하시려는 데 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주님의 목적은 우리 겉사람을 파쇄하는 것이다. 보배는 질그룻 안에 있다. 누가 당신의 질그릇을 원하겠는가? 교회 안에 필요한 것은 질그릇이 아니라 보배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도 질그릇이 아니라 보배이다. 그러나 질그릇이 파쇄되지 않는다면 누가 그 속의 보배를 볼 수 있겠는가? 
 

주님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역사는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 목적은 바로 질그룻을 깨뜨리고 옥합을 깨뜨리며 밖의 껍질을 깨뜨리는 것이다. 주님은 그분께 속한 사람에게서 그분의 축복이 세상으로 통하는 하나의 길을 얻고자 하신다. 그러므로 겉사람의 파쇄가 얼마나 중요한지! 파쇄되지 않고서는 결코 사역이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자신을 주님께 헌신하고 주님을 섬기기 원한다면 반드시 파쇄될 준비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의 겉사람이 완전히 파쇄되고 주님의 사역으로 길을 얻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풀어놓지 말고 우리 자신을 보류하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몸에 대해 의도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찾아 내야 한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서 그들에게 어떤 역사를 하시며 그들에 대해 어떤 의도를 갖고 계시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주님이 갖고 계신 의도를 찾아낼 수 있기를! 주님이 우리 눈을 열어 주실 때 비로소 우리가 일생 동안 거친 모든 일들이 다 의미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주님은 어떤 일도 헛되이 하시지 않으신다. 주님의 목적이 우리 겉사람을 파쇄하는 것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모든 환경이 다 의미가 있고, 그것들이 다 주님의 동일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며 우리 자신을 파쇄하기 위한 것임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손을 대기도 전에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체험들과 혼란과 환경들이 다 우리의 최고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들이 가장 좋은 것들이므로 우리는 주님에게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도록 요구할 수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님 앞에 나와서, 『주여! 가장 좋은 것 한 가지를 택하도록 허락해 주소서! 』라고 간구한다면, 주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내가 네게 준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매일 네가 만난 환경이 네게 가장 큰 유익이 된다. 』 주님이 우리를 위해 안배하신 모든 것들은 우리 겉사람을 헐어 버리기 위한 것이다. 우리 겉사람이 파쇄되고 영이 나올 때 비로소 우리는 영을 사용할 수 있다.

 

 

파쇄와 시간

 

주님은 우리의 겉사람을 파쇄하기 위하여 두 가지 서로 다른 방법을 사용하신다. 하나는 점차적인 것이고 하나는 돌연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주님이 먼저 그를 돌연적으로 파쇄하시고 그런 다음 다시 점차적으로 파쇄하신다. 이것은 돌연적인 것이 먼저이고 점차적인 것이 나중인 경우이다. 어떤 사람에게 주님은 날마다 환경과 시련을 주시다가 어느 날 돌연히 대대적인 파쇄를 행하신다. 이것은 점차적인 것이 먼저이고 돌연적인 것이 나중인 경우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받은 파쇄는 돌연적인 것이 먼저이고 점차적인 것이 나중이거나, 점차 적인 것이 먼저이고 돌연적인 것이 나중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주님은 올바르게 이 길을 가는 사람들 위에 파쇄 작업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보통 수년의 기간을 사용하신다. 우리는 이 기간을 연장시킬 수 있을 뿐 단축시킬 수 없다. 어떤 사람에게 주님은 몇 년의 시간으로 이 일을 성사시킬 수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십 년, 이십 년을 사용하셔도 이 일을 완성시키지 못한다. 이것은 매우 엄숙한 문제이다! 하나님의 기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더 가련한 일은 없다. 많은 때 교회가 축복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 때문이다! 우리는 생각 안에서 전도에 능하고 우리의 감정은 사람들을 전도하라고 격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영을 사용할 줄 모른다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통하여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을 만지실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시간을 길게 끌게 되고 아주 큰 손실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과거에 한 번의 철저한 헌신을 하지 않았다면, 오늘 우리는 반드시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리면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 교회의 앞날을 위하여, 복음의 장래를 위하여, 그리고 당신의 길을 위하여, 나 개인의 생명을 위하여 아무 조건 없이, 아무 보류 없이 내 자신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 주여! 내 자신을 기꺼이 당신 손에 맡깁니다! 당신이 내 몸에서 나아갈 길을 얻으시기 원합니다』 
 


십자가의 의미


우리는 십자가에 대하여 계속 들어왔을 것이다. 십자가가 우리 귀에 아주 익숙할 정도로 들었는데, 대체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십자가는 겉사람의 파쇄를 의미한다. 십자가는 겉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껍질을 갈라지게 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당신의 겉사람 일체를 다 헐어버린다. 당신의 의견과 당신의 방법 그리고 당신의 총명과 자애(自愛)를 헐어버리고 당신의 모든 것을 헐어버린다. 당신의 겉사람이 파쇄되어야 속사람이 나오고 당신의 영이 나올 수 있다. 이 길은 너무나 분명하다.
 

우리의 겉사람이 파쇄될 때 우리의 영은 쉽게 나온다. 어떤 형제가 있는데 그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그가 예리한 생각과 강인한 의지와 냉철하고 깊은 감정의 소유자라는 것을 시인한다. 그러나 그를 만나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강인한 의지와 총명한 생각과 냉철하고 깊은 감정을 만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을 만진다. 사람들은 그와 교제를 나눌 때마다 그에게서 깨끗한 영을 만진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는 그 사람이 파쇄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 한 자매가 있는데 그녀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그녀가 아주 빠르고 생각과 말이 빠르고 죄의 자백도 빠르고 편지도 빨리 쓰고 빨리 찢어버린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녀를 만나본 사람은 누구나 그녀의 빠른 것을 만지는 게 아니라 그녀의 영을 만진다. 이는 그녀가 파쇄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겉사람이 파쇄되는 것이 기본적인 문제이다. 우리는 주님의 오 년, 십 년의 다루심을 받으면서도 계속 우리의 결점을 보유하고 전과 같은 냄새를 풍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주님으로 하여금 우리 몸에서 출구를 얻으시도록 그분께 양보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에 대한 주님의 기본적인 요구이다. 
 


파쇄되지 않은 두 가지 원인


왜 어떤 사람은 수년간의 다룸을 받고서도 그 다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르는가? 주님께서 어떤 사람의 강한 의지를, 어떤 사람의 강한 감정을, 어떤 사람의 강한 생각을 헐어버리실 수 있는데, 왜 어떤 사람은 수년간 다룸을 받고서도 아직 파쇄되지 않았는가? 우리는 이것에 두 가지 큰 원인이 있다고 믿는다.
 

첫째는, 그들이 흑암에 거하고 하나님의 손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헐고 계시는데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모른다. 그들에게 빛이 결여되어 있고 그들이 빛 안에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는 것은 사람뿐이고, 항상 누구누구가 자기와 대적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환경만 보고 환경이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환경을 탓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를 주사 이것이 하나님의 손임을 보고 그분께 무릎 꿇고, 『주여, 이것은 당신이시요, 당신이심으로 나는 다만 영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기 바란다.
 

최소한 우리들은 우리를 다루는 손이 누구의 손인지를 인식해야 한다. 최소한 우리를 다루는 손이 세상 사람이나 가족이나 교회 형제 자매들의 손이 아닌 하나님의 손임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를 다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귀용 여사처럼 무릎을 꿇고 그러한 손에 입 맞추고 그 손을 귀히 여겨야 한다. 우리에게 이런 빛이 필요하다. 우리는 주님이 하신 일이라면 그것이 틀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만 그것을 받고 믿어야 함을 보기 바란다.
 

둘째의 원인은 그들이 자기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사람이 파쇄되는 데 하나의 큰 장애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제하여 주시도록 그분께 간구해야 한다.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에 의해 제해질 때 우리는 그분을 경배하며, 『주여, 이것이 당신의 손이라면 내 마음 속에서 이것을 받게 하게 하소서』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의 모든 오해와 모든 불평과 불만의 유일한 이유는 은밀하게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임을 기억하라. 우리가 은밀하게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를 구출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한다. 이것은 극히 큰 문제이다. 많은 경우 일이 터지는 것은 우리가 또 다시 자기를 구출하려고 하기 때문인 것이다.
 

십자가에 올라가서 쓸개 탄 신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사람만이 주님을 아는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은 억지로 십자가에 올라가서 그의 감정의 고통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쓸개 탄 신 포도주를 마시려고 한다. 무릇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않으리요』라고 말하는 자만이 쓸개 탄 신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다. 그는 한 가지 포도주를 마실 뿐 두 가지를 마시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자기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기본적인 문제이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말씀하시어 우리가 다음과 같이 기도할 수 있기 바란다. 『나의 하나님! 이 모든 것이 당신으로부터 온 것임을 보았습니다. 지난 오 년, 십 년 또는 이십 년 동안 제가 걸어온 모든 길은 당신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당신이 이렇게 행하심은 당신의 생명이 내 몸에서 살아 나타나는 당신의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어리석어서 이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을 구출하기 위하여 많은 방법을 사용하여 당신의 시간을 지연시켰습니다. 오늘 당신의 손을 보고서 내 자신을 당신께 드리기 원합니다. 다시 한 번 당신의 손에 내 자신을 맡겨 드립니다』. 
 


상처 보기를 바람


파쇄된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 강팍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파쇄될 때 그의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구약의 야곱을 보면 그는 모태에서부터 형과 다투었다. 그는 말썽장이에다 간사와 궤술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고통으로 가득했는데, 젊었을 때에는 밖에서 도망다녔고 이십 년 동안 라반의 꾀임에 넘어갔으며 마음에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길 도중에 죽었고 사랑하는 아들 요셉도 팔려갔다. 몇 년이 지난 후에 베냐민은 애굽에 구류되었다. 그는 연이어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았고 순조롭지 않은 많은 일들을 당했다. 그는 한 번 두 번 하나님에게 매를 맞았다. 야곱의 역사는 하나님께 매맞는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여러 번의 다룸을 받은 후 야곱은 변화되었다. 그의 말년은 정말 빛이 청청하였다. 야곱이 바로의 말에 답할 때 그는 얼마나 장엄했는지! 임종시 지팡이를 잡고 하나님께 경배했던 그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들들과 자손들을 위한 그의 축복은 얼마나 분명한지! 그의 마지막 역사를 읽어볼 때 우리는 고개 숙여 하나님께 경배할 것이다. 여기에 성숙하고 하나님을 아는 한 사람이 있다. 야곱은 수십 년의 다룸을 통하여 그의 겉사람이 파쇄되었다. 
 

우리는 그의 노년을 통해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을 그에게서 볼 수 있다. 우리 개개인은 누구나 어느 정도 야곱의 성품을 갖고 있다. 어쩌면 조금이 아니라 아주 많이 갖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주님이 우리 몸에서 길을 열으심으로써 우리 속사람이 흘러나와 보일 정도로 우리 겉사람이 파쇄되는 것이다. 이것은 귀한 일이자 주님을 섬기는 사람의 길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그분을 섬길 수 있고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도록 그들을 인도할 수 있다. 이것이 아닌 교리와 신학들은 다 쓸모 없다. 성경 지식만 가지고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나님이 그에게서 흘러나올 수 있는 사람이 유용한 사람이다.
 

우리 겉사람이 매맞고 처리를 받으며 여러 환경들을 거침으로 말미암아 우리 몸에 상처가 생길 때, 우리 속에 있는 영은 비로소 우리 몸에서 흘러나갈 수 있다. 우리는 처리받지 않고 변화되지 않고 그의 온 존재가 완벽한 그대로 남아 있는 형제나 자매를 만나기를 두려워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흘히 여기사 우리 앞에 이 길을 분명히 두심으로 우리에게 다른 길이 없고 오직 이것이 유일한 길임을 알게 하시기를!
 

또한 지난 십 년, 이십 년 동안의 우리 몸에서의 주님의 모든 다루심이 이 목적을 위한 것임을 보여주시기 원한다. 그러므로 우리 몸에서 이루신 주님의 역사를 경멸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겉사람의 파쇄가 무엇인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참으로 보여주시기를! 겉사람이 파쇄되지 않은 사람의 모든 것은 머리 속에 있고 지식 안에 있는 것이므로 이것들은 다 무익하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철저한 다룸을 주시기를!


워치만 니 [자아의 파쇄와 영의 해방, "제1장, 파쇄의 필요성", 한국복음서원]

 

http://blog.naver.com/6103sun?Redirect=Log&logNo=90092286136새예루살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점 없고 흠 없으신 주예수께서 아버지 뜻에 따름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혼생명을 버리사 세상에 의해 무고히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사 머리-손, 발,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흘려 혼생명 죽음 통해 영을 자유케 하고 부활에 이르시고 그 부활생명을 나누어 주심으로써 많은 자녀 얻으신, 죽음으로써 영원히 다시 사는 본을 보이셨듯이)  (날마다 이기적 혼생명인) 자기를 부인하고(주 앞에 자신을 내려 놓고, 벌거벗고 비워 내어드림으로써 주님의 뜻, 생각과 심정이 하나되어 동행함으로써 주 되심 인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세상고난을 통해 주께서 자행자제하는 자아, 곧 옥합을 깨뜨림의 자아 파쇄를 하실 수 있도록, 하여 그 안의 영을 자유케 하시도록 허용해 드림으로써 ) 나를 따를 것이니라 - 막 8:34하

 

 

<가나안7족속>영적 의미 (=수3:10 ) : 우상(세상과 자아)과 귀신들이 그 실체 === 사탄마귀-악령들-귀신들 <하늘의 악한 영-어둠세상의 주관자, 정사(통치권)-권세(행정권)-능력(가정-개인)-귀신>  두배교탐전향정

-- 자기애가 그 근본동기 : 타락한 자기마음 신뢰 + 세상가치 추구/세상의 말에 동의-->자기사랑/유익추구-->자기 의/주장 내세움-->우상숭배/세상일락에 빠짐-->두려움/짓밟힘(분노) 

***가톨릭의 대죄 7가지(그레고리1세의 7죄종) = 교만-탐욕-정욕(색욕)-탐식(폭식)-시기(질투)-분노-나태, 

 

1. 헷 족속 (넘어뜨림, 무너뜨림, 려움/위협을 뜻함 )
---갑자기 엄습하여 멸절시켜버릴 듯한 위협의 기세.  Q 사랑의 충만알고 경험하며 열정적으로 반응함과 Q을 피난처-도움-방패-산성으로 취하여 경험함 통한 믿음의 신뢰 가운데 아버지와 자녀의 친밀함의 감사-찬양으로 살도록 하는 대신, Q신앙을 공공연히 반대하여 믿는 이들을 위협하거나  벌 주기 좋아하는 진노의 Q으로 오해하도록 두려움(공포)로 하나님을 대하게 하는 마귀의 영
===두려움-악몽, 우울증, 거짓, 속임으로 <죄사함의 확신 흔드는> 영적 두려움의 고통 야기..

 

2. 기르가스 족속(진흙탕, 크게 됨-우수/자랑/초과-과장하여 말함, 돌아서게 함을 뜻함=/기만/자랑..시기-헐뜯음-비방)
---Q과 세상 동시에 추구/양다리 걸치기.. -- 빛 비춤 아래 <순결>과 <온전함>의 일편단심을 떠나, <스스로 무엇 이루었다> 착각하는, 영적 우월감 또는 세상적 성취를 자랑...<성령 체험>없어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 반신반의세상 인정/가치추구,
===때로 <내 눈에 보이는 것만 중시하고 더 신뢰함>의 <역사적, 물질적, 논리적>실증주의를 고집. 세상의 것에 뜻을 두게 하며 영에 속한 일을 믿지 않음으로 인해 말씀의 영적 이해와 삶에의  적용을 거부.

 

3. 아모리 족속(산에 오르는자, 산중 사람을 뜻함=만-오만-무례히 행함/자고함-합당치 못한 모든 )
--- <견고한 진-산성>안에 거하며 자칭 고결하여 속세를 떠난 자, 속세 떠난 높은 자기 의로움/명예--자기자랑-고결함 주장-육적교만, ...산은 <하나님과 함께 머문 호렙산의 모세처럼>하나님의 이상과 비전을 보는 곳이어야함...아직도 이루었다 함 아니함의 <겸손/온유함> 가운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전심으로 생존하시는 하나님의 이상과 비전 구하지도 않고 참된 JC경험도 없이 말로만 신앙생활 하는자. 
===명예욕을 추구,  또한 거만-흉폭하여 자신의 권세로 다른 사람들에게 횡포를 부림.

 

4. 가나안 족속 (낮은 땅/평야지대, 악덕상인을 뜻함=존중받지 못하는, 종된 자기를 비하/한탄-자기연민-자포자기.. 스스로 일어나 빗겨가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 자기유익추구/모든 만족함 없는 욕/성냄(성급)/악함/불의 행함-기심)
---원래 그리스도인은 낮은 데로 오사 부어주신 은혜를 받아  감사/자족함의 믿음-이웃사랑의 의로움으로 자원하여 섬기는 자녀들.. 은혜안에 잠겨 머물 때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 누림으로써 풍성한 알곡 열매 (산출하는생명)-우양(구속하는 생명)의 불어남을  얻고, 금은동철을(변화되고 건축하는 생명) 얻어  JC의 몸을 건축케 됨... 그러나, 하나님을 중심에서부터 영접하여 <주><아버지>라 부르지 않으며, 다만 육적자신만 바라보고 자행자제함으로써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이익된다고 여겨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리낌없이 행함. 자기이익만 추구하는 <상인>...진리 대적-왜곡/의심--거역-오류-불신...더럽고 비천함
===제일 지저분한 마귀의 영으로 끝없이 의심과 과장, 모든 종류의 중독에 빠지게 함,  의심에 사로잡혀 진실과 진리를 왜곡, 임마누엘 주님 임재를 떠나 눈앞의 세상-사람의 눈치를 보며 사람을 의식하며 인정받고 이용하고자 함.

 

5. 브리스 족속(성곽없는 촌락,  타락한 마음에 속한 자를 뜻함 = 방비, 안정되지 못함, 준비 없는 충동적 싸움 좋아함/태만, 방심, )
---타락한 자기 마음 신뢰..<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있다=좋은 게 좋은 것=남에게 피해 안끼치고 나만 착하게 살면 되지=될대로 되라지>생각 가운데 처함--<남은자-법대로 경기하며 경기장안에서 끝까지 전력투구함과 견뎌냄으로 승리하는 자>의 사상을 버리고, 영안에 깨어 있어 기도함, 주님 신뢰하는 믿음, 성령충만, 성령의 검으로 완전무장 갖추고 함께 서서 싸워 이김의 <영적전쟁>을 부러 잊으려 함, 따라서 하나님을 피난처/도움/구원자로 누림의 경험 없음. <참진리>인지 아닌지에 대한, 영적 대적에 대한 경계심/분별 없고 우유부단...하나님 생명의 성장성숙열매맺음  제한 --- 스스로 미개한 상태로 방치 함.
===멀리 보지 못하고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으므로, 결국 말씀의 빛을 깨닫지 못하기에 참 교회  되지 못하며 약한 자립심과 낮은 존재감으로 인해 신앙의 올곧음 없는 정함없는 상태로 머무르게 됨. 따라서 마귀의 삼킨 바 될 것임.

 

6. 히위 족속(마을/시골/촌사람의 뜻 --- 기브온족속이 이에 해당.= 어울려 놀며 탕진하는 도시문화의 화려함<락-락>을 흠모하며 세상 의견과 가치에 부화뇌동/휩쓸림)
---자기 스스로 무능함을 인정-진취적 추구를 포기해버림으로써 자기 발전을 제한, 게으름으로 인해 <말씀을 믿고 추구하며 따름의 신앙의 참 깊이>에 다다르지 못하고, 봉사로<몸으로>만 신앙생활 하고자 함. 영혼따로 몸따로 시키는 일만 하고 깊이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추구하여 알기를 게을리 함..
..영적으로 장성하지 못함..세상 즐거움 추구-->혼미/우상숭배--> 하나님을 그 대용물로 대치(거짓자아-이기심이 그 뿌리)
===또한 세상의 가짜<모조품>에 미혹되고 <참된 것의 실상>을 오해함으로  <참된 것> 추구하는 열정이 식어짐.. "마을 사람(교회) 또는 생명을 주는 곳"이라 속이는 가짜...  즉, <참된 것>흉내를 내어 모독하거나 <참된 것>의 진리를 헐뜯어 혼잡케 하는<사이비> 마귀의 영
===예술, 음악, 스포츠, 오락등... 땅의 것을 탐닉케 하는 향락과 쾌락제일주의(자기사랑이 그 뿌리인 우상숭배)로 빠지게 하며 세상이 제공하는 모든 즐김-취미-오락 등 추구케 함으로써 주님이 맡기신 모든 것 <신자의 시간-재물-영혼몸의 건강등>을 탈취하여 낭비케 하는 영들.

 

7. 여부스 족속(-무언가 얻기 위해-밟음, 짓밟힘, 밀까부르는 타작마당의 뜻 = 죄/죄책/잔인/잔멸---)
--- 고난가운데 오래참음과 견딤을 통해 이루시는 궁극적 자아파쇄/자기십자가 짐으로 얻어지는 <주와 한 영됨 이룸>의 샬롬< 평강>의 땅인 예루살렘 추구하는 대신,  물질주의<기복신앙>와 세상 힘과 권력 추구케 함으로 왜곡 ===> 연약한 자를 체를 치듯 죽일 듯이 선악간에 권위 또는 지식으로 생명 억압/기죽임/참소/조소/멸시/수치감/모욕감-비판, 정죄/증오/분노/원망/블평 쏟아냄) --- 눈에 드러나는 물질적 풍요를 얻을 때만 [평강 있다]고 외치는 <현세천국>의 물질주의의 속성을 따름.
=== 권위로  억압하는 영,  잘못된 율법주의 또는 행위구원론을 통해  참된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정죄하고 판단.. 자기(유익)를 위해 주위사람들을 자신에게 복속시키려 함.

 

 @@@ 7가지 족속 그외의 영들(삿 10 : 11-12) 

: 애굽---세상,  아말렉(=에돔)---육신<자행자제>,  암몬(/모압)---정욕,  블레셋---요동/방황/불안정/변덕,  마온---속박/종됨,  시돈---게으름/나태(태만) 

 

http://ritsapu-kr.com/main/index.html리츠메이칸아시아태평양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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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7족속 멸절 사건이 주는 영적인 교훈

==마음속에 있는 적들을 정복하라

1991년 5월  구약학자 브루스 워키(Bruce Waltke) 교수님이 학교를 떠나게 되셨고, 워키 교수님이 그해 졸업에서 설교를 하셨는데, 그가 졸업생들에게 남긴 마지막 설교는 깊은 감명을 주었다.

지금부터 약 25년 전에 들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설교 핵심 메시지는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7족속을 진멸할 것을 명령하셨는데, 이것의 영적 의미를 선명하게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는 말할 것도 없고 허리가 휜 노인들과 아무것도 분간을 못 하는 젖 먹는 유아에 이르기까지 모두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다. ]

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현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설명해 주셨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렇게 잔인한 명령을 하셨을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가나안 7족속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렇게 철저히 죽이라고 명령하셨는가? 

여호수아서를 읽을 때마다 필자의 머릿속에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아마 많은 성도가 동일한 의문을 가졌으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구약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과 신약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이 아닌가 의문을 품기도 한다.

한번은 나이 많은 권사님 한 분이 나에게 질문을 했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시고, 신약성경의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시죠?" 

그 권사님 질문은 구약성경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솔직한 질문이었다. 아마 적지 않은 사람이 그 권사님 생각과 비슷한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 권사님과 동일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초대교회 시대에도 있었다. 그들이 바로 그 유명한 영지주의 이단들이었다. 

이들은 구약성경의 하나님과 신약성경의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으로 여기고 구약성경 자체를 배격하게 되었다. 

구약성경을 배격했을 뿐만 아니라 신약 저자들이 인용한 구약성경까지 지워 버리기도 했다. 이들은 이들 자신만의 특별한 지식을 가졌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육신을 천하게 여겨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까지 부정하여 초대교회 당시 대표적인 이단이 되었다(요이 1:7).

이들은 또한 구원 얻은 자들은 구약 율법에 메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십계명을 지키지 않는 "도덕률 폐기론"(antinomianism)의 오류에 빠지게 되었다. 이들은 오늘날 구원파 이단과 매우 흡사한 이단적 교리를 갖고 있었다. 

왜 이 말을 하는가? 구약성경에 계시된 메시지를 잘못 해석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일단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되면 초대교회 시대에 나타난 영지주의 이단이나 현시대에 활동하는 구원파 이단의 함정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의미와 예표적인 의미를 동시에 가진 구약 본문들

구약성경에 나타난 사건이나 제도나 인물 등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 신약시대에 완성될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 

예를 들면, 구약시대 제사 제도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제의(祭儀)이다. 

하지만 제사드릴 때 드리는 제물의 피에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죄인들을 용서하실 것을 미리 보여 주시는 예표(豫表)적인 의미도 담겨 있다. 일 년에 한 번씩 지성소에 들어가 염소의 피를 뿌림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속죄했던 대제사장의 사역은 과거 이스라엘 역사 속에 있었던 제도이다. 동시에 대제사장 사역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를 들고 하늘나라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속죄할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사역도 예표하고 있다. 

그렇다면 가나안 7족속을 멸절하도록 명령하신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죄도 분간하지 못하는 젖 먹는 유아들까지 멸절하라는 명령에 대한 정당성은 무엇인가? 

만약 오늘날 이런 사건이 일어난다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지하드의 테러 행위에 못지않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한 해석은 구약학계에서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는 구약 해석의 난제 중에 하나로 아직까지 남아 있다.1)

==가나안 7족속 멸절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해석학적 원리

이제 졸업식에서 워키 교수가 설교했던 가나안 7족속 멸절의 의미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지금까지 서론적인 이야기를 했다. 

가나안 7족속의 멸절은 역사적 사건 자체를 뛰어넘는 의미가 들어 있다. 

하나님의 경륜은 바로 이 점을 새 언약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전하시고자 의도하셨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성경에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계시 방식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살게 하셨는가? 왜 이들을 인도해 내셨는가? 왜 이들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게 하셨는가? 왜 이들로 하여금 40년간 광야 생활을 하게 하셨는가? 왜 이들로 하여금 가데스바네아의 반역을 경험하게 하셨는가?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많은 시험을 경험했는가? 왜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이들에게 약속하셨는가? 왜 '예수'라는 이름과 같은 '여호수아'를 세워서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셨는가? 등의 의문은 구약 역사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무엇보다 가나안 7족속 멸절 명령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깨닫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구원하시고 40년간 광야 생활을 통하여 훈련하신 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은 새 언약 시대를 사는 우리를 위한 하나의 삶의 모형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과거 애굽 땅과 시나이반도와 요르단 지역과 팔레스타인 땅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 자체를 뛰어넘는 귀중한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이들을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교훈하셨다.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의 귀중한 예표(모형)로 보여 주신 것이다. 

특히 유월절이라는 특별한 절기를 주신 것은 출애굽 사건의 중요한 구속사적인 의미를 밝히 드러낸다. 

유월절 밤에 애굽의 장자들은 죽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흠 없는 어린양이나 염소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해 살아남게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신다는 것에 대한 귀중한 모형론적 사건이다. 

그래서 찬송가 가사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유월절 어린양이시다. 

주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을 구속하셨으니  그 피를 보고 믿는 자는 주님의 진노 면하겠네

내가 그 피를 유월절 그 양의 피를 볼 때에   내가 널 넘어서 가리라(265장 1절).

유월절 밤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를 바름으로 살아난 것처럼 예수님의 피가 나의 죄를 씻는다고 믿는 자에게 영적으로 살아나는 은혜가 임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예수 믿는다'는 말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의 피가 나의 죄를 씻는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요 1:29).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넌 사건은 역사적으로 일어난 하나님의 기적임과 동시에 중요한 영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바울은 이에 대해 설명하기를, 홍해를 건넌 사건은 세례의 예표라고 한다(고전 10:2). 

갈라진 물속을 들어갔다가 나오는 이미지는 세례의 이미지와 통하는 면이 있다.

광야 생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은 시험들은 우리의 시험을 또한 예표한다. 

원망, 불평, 탐욕, 우상숭배, 간음, 지도자에 대한 도전, 불신앙 등은 우리가 날마다 겪고 있는 시험들이다(고전 10:6-10).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후에 구원의 증표로 세례를 받고, 그 이후 성도들은 신앙생활의 여정으로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시험을 받으면서 영적으로 성장했던 것처럼, 똑같은 시험의 과정을 거쳐 한 단계씩 성장해 간다. 그들의 삶의 모습은 마치 우리 자신을 보는 것과 같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시험을 열거한 후에 우리에게 이런 경고로 결론을 맺는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 

이스라엘 역사는 현시대를 사는 우리를 위한 본보기이다. 

40년 광야 생활 후에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요단강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정착한 것은 성도가 생을 마감하는 시점에 천국에 입성하는 것을 예표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천국을 상징하는 예표적인 장소로서 의미가 크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느낀 점은 이스라엘 땅이 정말 젖과 꿀이 흐를 정도로 비옥한 땅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물론 시나이반도에 비하면 좋은 땅이지만 대한민국 땅에 비하면 여러 가지로 열악한 땅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가나안 땅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을까? 그 답은 가나안 땅이 천국을 상징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듯이 새로운 여호수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 준다. 

히브리식 여호수아라는 이름의 헬라식 이름이 예수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음을 보이는 예표적인 인물이다.

위대한 영도자 모세는 단 한 번의 실수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모세는 율법을 예표하는 인물로서 율법의 준수를 통하여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예표적으로 보인 것이다. 

모세라는 인물 자신을 생각할 때, 그렇게 40년간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섬겼는데 어떻게 단 한 번의 실수로 가나안 땅을 놓치게 되었을까? 많은 의문이 든다. 그의 인물이 가진 예표적 의미 때문이다. 

만약 문자적으로 이를 받게 된다면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용서의 기회를 주시지 않는 잔인한 하나님으로 묘사될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구약의 사건, 제도, 인물 등은 모형론적인 의미를 갖는 경우가 많다. 

그 의미를 바로 파악해야 구약성경의 의미를 우리 삶에 바로 적용할 수 있다.

==가나안 7족속 멸절이 갖는 모형론적 의미는?

이제 가나안 7족속 멸절 명령은 어떤 영적인 의미를 지닐까? 

가나안 땅은 천국을 상징한다고 앞에서 말했다. 천국, 즉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곳이다. 

불신 영혼에게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미치게 될 때, 그 영혼에 천국이 임한 것이다. 

전도는 천국이 임하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복음이 들어갈 때 그 영혼에 천국이 임했다고 말씀하셨다(마 12:28).

또 질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통치하심이 미칠 때, 천국은 더욱 깊은 차원으로 임하게 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마음속에 천국이 임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완전하신 통치하심은 믿는 순간에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화의 과정을 거쳐서 서서히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더욱 온전하신 통치하심이 임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임한 우리의 마음을 상징한다. 그런데 아직 수많은 정복되지 않은 옛 사람의 성품들이 남아 있다. 

미움, 시기, 질투, 욕심, 정욕, 교만, 이기심, 등등 수많은 적들이 우리 속에 남아 있다. 

가나안 7족속들이 바로 우리 속에 정복되지 않은 육신적인 옛 사람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워키 교수가 졸업식 설교에서 한 말의 핵심이다.

우리 마음속에 진정한 안식은 언제 찾아오느냐? 우리 마음속에 있는 적들이 정복될 때, 마음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온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나라가 임했지만,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힘써 우리 마음속에 있는 적들을 정복해야 했다. 

그래야 하나님나라의 진정한 평화가 우리 마음속에 찾아온다. 워키 교수는 졸업식에서 바로 이 점을 강조했다.

==왜 우리 마음에 평안이 없는가?

예수님을 믿지만 우리 마음속에 왜 평안이 없고 각가지 불신자들이 겪는 동일한 괴로움을 경험하고 있는가? 

많은 경우에 그 이유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적들을 온전히 정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남아 있는 쓴 뿌리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자주 괴로움을 당하는가? 마음속에 남아 있는 탐욕 때문에 얼마나 자주 넘어지고 쓰러지는가?

마음속에 남아 있는 교만 때문에 사람들의 멸시거리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마음속에 남아 있는 미움 때문에 얼마나 자주 주위에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을 괴롭게 만드는가? 

마음속에 남아 있는 헛된 명예욕 때문에 얼마나 자주 허황되고 방황하는 삶을 경험하는가? 모두 정복되지 않은 가나안 족속들이 아직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남아 있는 한 우리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가 되고 눈에 연기처럼 되어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왜 수많은 한국교회의 영적인 거장들이 치욕과 멸시와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가? 그 원인은 바로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정복되지 않은 적들 때문이다. 

자리에 대한 탐심 때문에 교회 세습으로 사회의 지탄 대상이 된 적이 얼마나 많은가? 물질에 대한 탐욕 때문에 헌금을 유용하고 치욕을 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육신의 정욕을 통제하지 못해서 유례없는 영적인 업적을 쌓고도 세상의 조롱과 멸시를 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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