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8.09.14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사명, 소원, 묵시 비전 꿈 환상-소송에 대한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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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 비전, 꿈, 환상의 개념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묵시(하나님의 뜻을 나타냄=계시, 신탁, 경고의 말씀, 일깨움=  Oracle, Revelation>때로 Vision)는  그것을 직접 듣고 보는 자와 선포된 그것을 듣는 이 모두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이냐 아니냐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게 공동으로 이루어 가야 할 대 위임령, 곧 곧동의 사명을 주셨고, 또한 믿는 이 한사람 한 사람의 삶에 대해서도 특별한 계획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아주 독특한 하나밖에 없는 그것들은 함께 모여 영광된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을 완성하는 모자이크를 이루는 조각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신분과 실재가(Identity, Reality)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해 <나는 십자가에서부터 주와 합한 한 영된 하나님의 사랑하고 기뻐하는 자녀요, 종이요, 친구며 동역자>라고 고백하는 믿는 이들은 그 어느 누구도 예외없이, 하나님께 갈망하며 신뢰와 사랑의 믿음으로 나아가면, 얍복강에서의 야곱처럼 기꺼이 개인적으로 만나주십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꿈에 대해 주께 나아가 묻고 직접 들어서(하나님 음성들음인 레마의 말씀과 예언과 꿈과 환상vision으로) 확인하고, 개인적으로 확증해 주심을 따라 그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여 일단 자신의 삶을 그 뜻에 헌신하여 죽기까지 순종하기로 결단할 때, 순종하기로 결단한 이 계시된 하나님의 뜻은(=DESTINY=천명, 하나님의 꿈, 부르심의 목적과 소망) 바로 자신의 사명이(삶의 목표와 의미가 되는, 보냄받은 자의 수행할 명령=미션Mission, Appointed Task, individual, unique ->개인적 소명) 됩니다.  삶속에서 주께서 맡기고 명하시는 작은 일들(missions)을 믿음과 인내로 순종하며  잘 해나갈 때 이 사명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영적체력이 길러집니다.  비전Vision이란  최근들어  사명자의 순종의 삶을 통해 장차 최종적으로 이루어질 완성된 삶의 미래상 자체에 대해 쓰입니다.  즉 인생을 불러내어 구원해주시고 세상에 파송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그 마음을(부르심의 목적) 보고 들어 잘 이해하며 깨달아 알고 그것을 자신에 대한 사명으로 확증해 주심에 따라 그것을 받들고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 순종하며 살아감으로 인해 나타내어질 삶의 완성된 개인의 최종적 미래상인 것이지요.  그것은 그 인생에 대한 하나님이 계획으로 인한 것이기에 하나님과 당사자에게 있어서 지고지선의 영광과 기쁨이 됩니다.  비전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온 개인적인 야망이나 포부가 결코 아닙니다!!! 여기에서 또한 소원과 비전의 차이를 잘 이해하고 인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할 수 있습니다.  인자하신 하나님은 그와 평생 동행하시며 필요한 모든 것을 은혜로 부어주셔서 그뜻을 온전히 이루게 하시며 더불어 주안에서 (은혜를, 곧 하나님 경외함-이웃사랑-경건-하나님나라 이룸에 필요한 모든 것들인 친밀-축복과 부요- 예수이름의 영광과 권세들을- 넘치도록 공급함과 더불어) 주님 뜻을 행하는 그 길에서 (세상이 전혀 눈으로 보지도 귀로 듣지도 못하고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까지 크나큰 -고전2:9-10) 소원Desires(원어적 의미로는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하나님을 궁극적으로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길에 반드시 필요한 단계적인 뜻을 깨우쳐 주셔서 그 이룸을 갈망하게 하시고 그 일을 이룸으로써 당신의 자녀를  영광스럽게 하시려는, 하나님께서 넣어주시는 소원)을 품게 하시며 또한 그 개인적인 모든 소원과 도모를 이루도록 허락하십니다. ( -시81:10<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또한 그 사명을 일상의 삶속에서 수행하는 과정에 즉 무엇에 종사함으로써, 어떻게 이루어나갈 지에 대해 잠잠히 신뢰로 주께 나아가 물을 때, 지도하시는 성령님의 생동하는 음성인 레마(자연스러운 내적 평강, 직관적 깨달음 등)와 환상vision(꿈속의 환상과, 보통 예배 중에 체험되는 비몽사몽간의 또는 생시의 열린환상이 있음), 꿈, 예언을 통해서 미래지향적인 인도하심인 신적 통찰력(=영적 지혜와 총명, 분별력)을 얻게 되는데 이것 또한   비전(=Vision)으로 불리워집니다.  실은 이것이 본래적 의미의 비전이지요. 또한  이로써 매일매일 사랑과 긍휼, 성실과 정직 인내로 순종하며 동행하는 경건의 삶가운데  이 땅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행하심과 말씀해주심을 본  그대로만 사역하셨던 예수님처럼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기록된 성경 말씀은 기록되기전에는 삶속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레마였습니다.  따라서 기록된 로고스의 말씀은 마음의 눈과 귀, 지성과 감성 의지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인도와 조명하에 <렉티오 디비나>, 곧 기도로 말씀읽기(Lectio)와 묵상을(Meditatio) 통해서 기도(Oratio)와 관상(Contemplatio)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이윽고 삶속에서 직접 보고 듣는 생동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레마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말씀에 기록된 하나님을 우리는 현실 속에서 살아계시며 지금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만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은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영원히 살아계시는 분이십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 알며 사랑하며 누리기>인 관상은 사명을 이루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마음과 뜻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계시하며 일깨우는 통로가 되기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또한 실상을 말한다면  묵시와 사명, 그에 따른 비전이 없는 백성은 제멋대로 행하기 마련입니다!!!  또한 진실을 말한다면  믿는 이에게 있어서 성공이란 세상사람들처럼 개인적인 바램, 포부나 야망을 이룸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삶속에서 투명하고도 정결한 주님의 성전이요 그릇인 동역자로서 진정한 종의 자발적인 순종을 통해 주님 영광을 넘쳐나게 표현함 그자체인 주님과의 연합(UNION with GOD,참된 경건)의 온전함으로 판단되어야합니다.  주님은 경고하십니다. 주님을 자신의 야망을 이루는 도구로 삼는 것은 우상숭배하는 것입니다!!!. 주객이 전도되면 자신과 세상을 해롭게 하는 끝이 비참한 파괴적인 성공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니까요.(시37:9, 34)(렘17:6-11)<5*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중생한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삶을 살아가면서 마음의 중심이 주님으로부터 떠나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6*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7*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살아계신 주님을 자신의 보배요 모든 것으로 고백하며 범사에 그분의 주되심을 인정하며 온맘과 정성, 뜻을 다해 그분을 사랑하며 앙망하고 그분에게 묻고 들은 바대로 그분이 주시는 무한한 능력과 공급으로 살아가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11*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Tips>
1. 보여주시는, 생동하는 레마로서의 하나님의 계시는 국가, 민족, 개인에게 두루 헌신의 결단을 내리도록 이끕니다. 또한
신자 개인에게 있어서의 사명은(=Mission)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의 가치를 인식하는 바탕위에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인생의 지상명령으로서 그 인생의 의미와 목표를 뜻하는데, 그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인생계획(천명:Destiny)을 묻고 확인받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사명은 주님께로부터 온 천명을 내 것으로 삼음이기에, 세상에서 말하는 개인적인 포부나 야망(Ambition=본질적으로 허망하고 파괴적인 탐욕적 인생목표)이 아니며,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생동하는 인도하심과 지시 (곧 레마Rehma)로서, 파노라마적 환상이라는 의미의 비전이나 미래지향적인 신적 통찰력을 의미하는 비전과는 그 의미가 좀 다르지요.
2.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시는 과정에 또한 꿈과 환상은 성도들에게 중요한 길잡이가 됩니다.
<(행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에서 말씀하는 꿈과 환상은 물론 하나님의 모략과 그 계획을 드러내시는 묵시요 계시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의미로서는  신자의 삶의 걸음걸음마다 하나님의 행하심과 깨닫게 하심으로 행하도록 지도하심과  하나님의 레마의 말씀의 인도하심인 계시의 일환으로서 주시는, 믿는 이가 실제로 자고 있는 동안 꾸는 꿈과, 수면중이든 생시든 마음의 눈으로 보는 환상을 말하기도 합니다. 특히 여기에서의 영어로 비전vision 이라고 쓰기도 하는 환상은, 다름아니라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뜻- 곧 하나님 경외함과 이웃사랑, 경건의 삶, 하늘나라를 이땅에 이룸-에 꼭 필요한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의 일환으로서 , 믿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주께 드려 영광의 주님을 마음에 그리며 주님께 집중할 때, 생명의 성령의 생수의 강의 원천인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주어지는, 파노라마적인 주님의 행하고 말씀하심의 환상으로 그 흐름을 운행하시는 지혜와 계시의 성령께서 우리 마음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행하심과 말씀하심을 보고 듣게 하셔서, 예수께서 아버지의 하시는 일과 말씀하심을 보고 듣는 그대로만 행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현실에서 사는 것을 우리로 가능하게 하며 그 과정에 예언의 은사를 비롯한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납니다.

###비전이란? ---내용출처 : <비전의 사람>(이재철/홍성사)
---- 하나님께서는 잠언 29장 18절을 통해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묵시’(khaw-zone)란 ‘비전’을 말하며, ‘방자히 행한다’는 히브리어 ‘파라’(paw-rah)는 ‘신중함이나 자제력을 상실한 경거망동’을 뜻합니다. 따라서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는 말은 ‘계시-비전이 없으면 인간은 경거망동한다’ 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좀더 살펴보면, 비전이란 미래지향적인 통찰력입니다. 위대한 비전의 시인이란 위대한 통찰력을 지닌 시인을 일컫습니다. 따라서 비전을 지닌 자의 시선은 언제나 오늘을 뛰어넘어 보다 먼 곳을 향해 있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시선이 맞닿아 있는 그곳에 자기 자신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 흔히 장래성이 있어 보이는 사람을 가리켜 “비전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미래에 대한 통찰력으로 지금부터 미래의 자신을 스스로 일구어 가기에 그에게는 장래성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비전이 없는 인간이 방자해 지는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비전이 없다는 것은 그의 시선이 목전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자는 눈에 보이는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감정대로, 욕구대로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그 결과 그의 삶은 방자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비전이 없으면 목사든, 교인이든, 그 누구든 방자해집니다. 이런 관점에서 크리스천은 반드시 비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비전과 관련하여 우리가 혼동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 첫째, 비전은 (실현불가능한 일시적 망상으로서의) 꿈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때때로 미국인들은 비전과 드림(dream, 꿈)을 구별없이 사용하기도 합니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이 링컨 기념관 앞에 운집한 흑인들을 향해 “I have a dream 이라 설교할 때, 그 때의 꿈(드림)이란 곧 비전을 뜻했습니다. 흑인과 백인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미래를 향한 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 미국인들 역시 “꿈깨라” 고 말합니다. 이 경우의 꿈은 (실현불가능한)공허한 망상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미국인들은 비전과 드림(꿈)을 구별없이 사용하지만, 영어의 본고장인 영국에서는 이 양자를 분명하게 구별하여 사용합니다.  영국 수상을 역임했고 누구보다 명문장가로 알려져 있는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대처 여사가 오래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비전과 드림의 차이를 명쾌하게 풀이해 준 적이 있습니다. 즉 비전이란, 반드시 그 비전에 상응하는 행동을 수반하기에 어떤 형태로든지 결과를 초래한다는 의미에서 일반적인 꿈(망상)과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 둘째, 비전은 야망(ambition)이 아닙니다. 야망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수반한다는 면에서 망상과 구별됩니다. 또 야망을 가진 자는 오늘에 안주하지 않고 무엇인가 새로운 목표를 향해 계속 나아간다는 면에서 야망이 비전과 동일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전은 오늘을 뛰어넘어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자기 계발과 자기를 가꿈이기에, 비전은 이루어지면 이루어질수록 모두에게 유익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야망은 욕망의 산물입니다. 아무리 높은 곳에 야망을 설정했더라도 그 근본은 욕망입니다. 따라서 야망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이 참되거나 바를 수 없습니다. 야망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법이기에, 야망은 성취되면 될수록 자기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해치는 흉기가 됩니다.

###비전의 왜곡
----그러나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비전을 망상과 혼동하거나 야망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역사적으로 교회가 비전이라는 미명하에 망상과 야망을 부추겨 왔다는 것입니다.  2천 년의 교회 역사를 되돌아보건대 천년왕국이니 지상천국이니 하며 크리스천들이 주어진 삶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외면, 현실을 도피하고 허황된 망상을 좇았던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 피해가 얼마나 극심했으면 공산주의자들이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폄하했겠습니까? 마르크스가 인민의 아편이라 단정한 종교는 불교가 힌두교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말한 종교는 바로 기독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구 크리스천들은 비전과 야망을 동일시, 자신들의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 아프리카 대륙을 강탈하고 그곳 흑인들을 노예로 팔거나 부렸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중동 땅마저 앞다퉈 훔쳤습니다.
----지난 3월 2일은 이슬람교 최대 명절인 ‘하지’였습니다. 그때 성지순례를 위해 온 세계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 모인 이슬람 교도의 수는 무려 200만 명이었습니다.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또 다른 손으로는 중동과 아프리카 대륙을 강탈했던 서구 크리스천들이 도리어 이슬람 교도들을 똘똘 뭉치게 해주었습니다. 그들에게 크리스천이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은 폭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뭉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백인들의 손에는 어김없이 성경이 들려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의 야망은 역설적이게도 이슬람교의 단결을 초래하는 촉매가 되었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백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에게 아메리카 신대륙 경영은 자신들의 새로운 야망 경영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야망을 위해 수없이 많은 인디언들을 죽이고 그 땅을 자신들의 소유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인디언들을 사람으로 대접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날 미국을 여행하면서 인디언 집단거주지역을 한 번이라도 찾아가 본다면,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이 백인에게 반드시 임할 것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세기 일본 삿포르에 농업학교를 세운 클라크 박사는 그 학교에 입학한 일본 학생들에게 설교하던 중 이렇게 말했습니다. “Boys, be ambitious(소년들이여, 야망을 품으라)” 이 말이 훗날 미국으로 역수입되었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일어난 대부흥운동의 중심엔 항상 ‘be ambitious'란 구호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마치 신앙이 야망인 것처럼, 야망을 품지 않으면 신앙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풍조를 지금까지 미국 크리스천 사이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미국은 어떤 사회가 되어 있습니까? 불과 30년 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우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거짓말다운 거짓말도 아닌 거짓말로 인해 탄핵의 위기에서 스스로 사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클린턴 현직 대통령은 백악관 집무실에서 르윈스키와 부적절한 성적 관계를 갖고서도 거짓말했음이 백일하에 밝혀졌음에도, 여전이 대통령직을 굳게 지키고 있습니다. 미국의 도덕성이 그만큼 붕괴되었다는 예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대통령이 거짓말을 하고서도 자기 자기를 지키는 판에 어느 공직자가 정직하게 일하겨 하겠습니까? 그런 사회 속에서 자라는 어린이들이 어떻게 정직을 반드시 지켜야 할 삶의 덕목으로 삼으려 하겠습니까? 미국 사회는 이렇듯 내적으로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미국을 여행하다 보면 대부분의 대도시에서는 밤거리를 걸을 수 없습니다. 여행객뿐만 아니라 미국 백인 역시 밤거리보행을 피합니다. 흑인들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입니다. 미국이 갖고 있는 핵무기만으로도 온 세계를 초토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강력한 무기와 세계 유일의 슈퍼 파워를 지닌 미국 대통령의 권력도 자국 밤거리의 안전을 지키지 못합니다. 자기 야망을 위해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잡아다 짐승처럼 혹사시켰던 죗값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밤거리를 흑인에게 빼앗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작년 8월 미국 콜로라도 검찰이 열한 살 된 소년 라울로를 아무런 법적 절차없이 체포, 형무소에 수감했습니다. 옆집 할머니가 라울로를 경찰에 고발했기 때문입니다. 스위스인인 라울로의 부모는 미국 이민 후에 라울로를 낳았기에, 라울로는 법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미국 시민권자였습니다. 그 라울로에게 다섯 살 된 여동생이 있었는데, 라울로가 여동생을 ‘터치’(touch)했다고 옆집 할머니가 고발한 것입니다. 이 동사가 성적인 의미를 지니면 추행이 된다고 합니다. 열한 살짜리 소년이 다섯 살짜리 여동생을 어떻게 추행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전혀 없었습니다. 단지 옆집 할머니의 전화 한 통에 경찰은 즉시 라울로를 체포하여 수감하였습니다. 이 사실이 유럽에 전해지자 미국의 처사를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국제사면위원회는 즉각 콜로라도 법정의 부당성을 지적했고, 라울로 부모의 조국인 스위스는 미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항의했습니다. 어린아이를 수감하려면 소년원에 보내야 하고 그것도 정확한 죄목이 있어야 하는데, 그 어느 쪽도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콜로라도 법원은 73일 만인 작년 11월 10일 면소(免訴)판결을 내려 라울로를 석방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의 조건을 달았습니다. 첫째 라울로는 부모와 함께 미국이 아닌 스위스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요, 둘째 스위스 도착 즉시 정신과 의사의 진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미국이란 사회는 할머니의 전화 한 통에 열한 살짜리 소년을 즉각 체포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청소년 성문제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미국 사회가 더 이상 청소년의 성범죄를 막지 못합니다. 이 불행한 현실이 대체 어디에서부터 유래되었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비전과 야망의 혼동입니다. 야망의 성취를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정당화하는 사이, 미국 사회는 모든 면에 걸쳐 자정능력을 스스로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라고 예외인 것은 아닙니다. 신앙촌, 오대양, 휴거 등 별의별 이단이 다 창궐한 것은, 한국 크리스천 중에 그만큼 망상을 좇는 자가 많다는 반증입니다. 그동안 대부분의 부흥회는 인간의 야망에 불을 지르는 집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1천만 크리스천이 있다고 하면서도 날로 타락 일변도입니다.

<성도의 일반적 송사 문제 (마 5:25~26)>

1. 성도들 세계에서 일반적 송사가 있게되면 퍽 거리끼는 생각을 하거나 심하면 그런 것을 증오하는 경향까지 있습니다. 때때로 현실속에서 성도간의 송사는 교회의 재산이나 명예 문제일 수도 있고, 개인적으로는 서로의 실질적 피해에 대한 변상 문제로 송사 하게 되는데 이런 송사가 없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을 하여야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불가피함을 인정해야 될 때도 있다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조건 부정하고 증오하기 전에 상대방 또는 동기와 목적에 따라 신중하게 대처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좀더 자세한 지식을 배워보자는 목적으로 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송사하여 그 풀어가는 과정 중에 화해나 양보로 어느정도의 이득이나 손해를 감수하고 중단해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또 어떤 경우는 인간의 완악이 극도에 달하여 서로 화해하거나 양보하지 못할 때 결국 송사의 최종판결로 문제를 끝내야 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송사의 원리를 잘 모르면 부당한 손해를 볼 수도 있고, 또 불법을 계속 덮어둔 상태로 묵인하게되면 하나님의 공의를 훼손시킬 경우도 있음을 감안하여야 할 것입니다. 과연 성경은 송사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2. 성경에 나타난 송사에 대한 근거

1) 교회재판에 관한 근거
① 출 18:13~27에 보시면 모세가 재판기관으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임명하였고, 출 20:22~23:33에서 형법과 민법을 발표한 일이 있었는데 그 효력은 이스라엘 성민국 안에서 시행되다가 바벨론의 침략으로 나라가 없어져서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 계율은 신약시대 교회의 재판법을 만드는데 근거가 될 수 있었고
② 마 16:19에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교회에 주셨다는 뜻)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심으로 교회적 권징의 근거를 말씀하셨고, 또 교회적 권징의 효력이 하나님의 역사와 상관된 것을 말씀하셨으며 또 교회 안에서 범죄가 발생하였을 때 교회의 재판 건으로 올리기 전에 화해의 절차를 밟으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곧 마 18:15~17의 말씀입니다. 거기에 보면 범죄한 성도가 있을 때 먼저 한 두 사람의 권면을 해보고 끝내 돌이키지 않을 때는 교회에 말하라(고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권면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 하셨으니 이것은 교회의 시벌이요, 믿지 않는 자로 내쫓는 출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③ 그리고 율법에 근거한 신정국은 아니지만 유대인들 세계에서 바리새인들이 율법적 근거에 의한 재판으로 출교한 사실이 있고(요 9:22) 또 그것을 두려워한 사실도 있었으며(요 12:42) 예수님이 빌라도의 재판을 받기 전에 대제사장의 재판을 받아 사형선고를 받는 것도 역시 율법에 의한 재판이었습니다. 출 22:20에서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죽이라”는 형법도 있는데, 이를 이용하여 저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셨다” 하여 사형을 선고한 것입니다.(마 26:66)
④ 또 신약적인 교회와 재판법에 의하여 재판한 사례로써는 사도들이 직권으로 시벌한 사실이 있었을 뿐 치리회가 시벌한 사실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벌한 사실이 있고(행 5:9), 바울이 음행죄 범한 자를 사단에게 내어준 일이 있었으며(고전 5:8) 사도와 장로들이 모여서 신앙생활의 규례를 만들어 지도한 사실이 나타나 있을 뿐입니다.(행 16:4) 초대교회 당시에는 사도들에게 권징권이 주어졌으니까 직접 시행한 것이고, 출 19:15에서 “공의롭게 재판할 것”을 또 잠 17:23, 18:5, 24:23 등에서도 공정하게 재판할 것을 명하시므로 신약시대의 교회들도 그와 같은 성경적 근거에 의하여 권징 조례를 제정하게 된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들은 교회 안에 당회, 노회, 총회의 삼심제 재판법이 성경에 근거하였음을 설명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재판을 받을 자는 오직 성도뿐입니다.

2) 일반 재판에 관한 근거도 있습니다.
① 마 5:25에서 “너를 송사하는 자와 (법정에 이르기전 아직 시간이 남아 있는 동안에)...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어… 너를 가둘까 염려하라” 하셨지요. 이 말씀은 성도가 세상사람 누구에게 명예-신체-재산에 손해를 입혀 잘못한 일이 있으면 고발당하기 전에 속히 회개하고 사과하고 화해하라는 말씀이요, 또 고발을 당하면 일이 커지니까 그 전에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성도는 잘못한 사실이 있으면 속히 사과하고 용서를 빌어 재판 받지 않도록 하여야 하며 일반적 재판 제도에 대하여 예수님이 인정을 하신 것입니다.
② 일반 재판을 예수님이 인정하신 사실은 눅 18:6에서 “(판단의 근거가 되는 세상의 기준 자체가 불의하기에 재판관은 그 자체가 불의함) 불의한 재판관의 ...” 하신 말씀에서도 나타나고, 또 롬 13:1~4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하시고 세상의 권세(즉 국권- 비록 세상 자체가 불의하지만, 이를 유지하기 위한 제도를 주심)를 주신 목적이 (일반적인)선을 행하고 악을 응징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국가의 사법제도를 인정하고 활용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말씀입니다. 사회적 또는 국가적 사법제도가 없으면 이 세상에는 상대적으로 착한 사람이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제도의 대상은 모든 국민이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왜 기독교계에서 일반법정소송을 거리끼는 것으로 여기느냐? 할 때 두 가지 성경말씀에서 제재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먼저,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성령충만 가운데 그 인도하심을 따라서 모든 일에 진실한 믿음과 사랑으로 살아가며 <무엇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너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주님음성(로고스와 레마)과 하늘의 지혜(영적 지혜와 총명, 분별력)를 따라 순종하여 살아감으로써 세상의 삶속에서도 하나님영광을 위하며 실수가 없도록 잘 살펴 근신함으로 지혜로우라,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말씀하십니다.***하나님의 용서받은, 사랑하는 자녀된 우리는 오직 은혜로 (한 영된 하나님의 친밀한 안아주심, 우리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모든 부요와 축복, 예수이름의 권세와 권능) 이것을 행할 힘과 능력을 얻습니다.***
1) 마 5:39~43에서는 대적하는 악한 사람들과 원수에 대한 용서와 사랑을 말씀합니다.  그들도 또한 하나님의 예정하신, 아직  양우리에 들지 않은 예비된 자 일수도 있다고 생각합시다.
①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전제하셨습니다. 악한 자는 이유가 있든 없든(오해든 아니든) 악의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악하게 성도를 대하는 모든 사람으로서 막가는 사람입니다. (시편 말씀을 보면 성도들 주변의 악한자들은 시시때때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아 어떤 빌미로든 성도들을 핍박할 뿐 아니라 죽이려까지 합니다. 물론 지금은 그 정도가 약할 수도 더 강할 수도 있겠지만요) 그런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뜻은 당한 만큼 원수를 갚고자하여 육신으로 상대하여 싸우지 말고  가능한한 상대방을 자극하지 말고 지혜롭게 그 자리를 피하고, 십자가로 나아가 그를 호출하며, 불쌍히 여기며 그 배후의 악한 영을 예수이름으로 대적하고, 자신의 그 억울한 심정을 주께만 남김없이 쏫아 놓으라는 것입니다. 다 들으신 주께서 그를 정죄하고 징계하시려 할 때 막아서서 그를 먼저 용서하고 위해 중보하며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땅한 바 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의 완악함을 주께 솔직히 아뢰고 도와주십사고 요청하십시요..그리고 끝까지 반복해서 용서하십시요, 주님은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때때로 우리의 신앙을 북돋는 좋은 촉매 역할을 합니다.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본인에게 달려 있지만요) 다음은 주께서 일을 하시도록 맡겨 드리고 그냥 잊으십시요. 용서했는데 불현듯 다시 떠오르면요? 선포하십시요 이미 용서했노라고, 그래도 다시 떠오르면요? 다시 선포하십시요..다시는 떠오르지 않을 그때까지... 용서는 자신이 쥔 끈 한 쪽을 놓아버리는 행위요, 상대가 변하지 않았어도 십자가사랑으로 먼저 맨 것을 풀어버리고 놓아주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러셨으니까요.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하늘의 악한 영, 어둠의 세상 주관자, 정사, 권세, 능력 들이기 때문입니다> 싸움의 대상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악한자가 많았는데 예수님은 끝까지 그들과 직접 다투신 일이 없으셨고(마 12:19) 결국 고스란히 모욕과 수치를 감당하셨습니다. 지혜롭게 성령께서 말씀하심을 따라 인도하심을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이 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도 그냥 내버려둔 채, 피하여 지나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런 자는 개인이 대항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때로 공권력차원에서 응징할 수도 있음을 롬 13:4에서 말씀하였습니다.
② 이어서 악한자가 그 어떤 경우라도 상관없이 “오른뺨을 치면 왼편도 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싸워 이길 힘이 있다 해도  악한 자에 맞서 싸우지 말고, 또한 (심지어 모욕당하고 나아가 순교당하기까지라도) 그 폭력에 대항하지 말라는 말씀이며, 오기로 그렇게 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함으로 일절 참음으로 그렇게 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제자의 마음의 동기를 보십니다. 하나님께만 인정받읍시다. <우리는 화평케 하는 하나님의 아들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먼저 그 길을 가셨습니다.
③ “송사하여 속옷을 갖고자 하면 겉옷까지 주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잘못하여 또는 실수로 남에게 손해를 입혔다고 판단되면 그 사람이 본래 악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속히 겸손히 인정하여, 송사를 당할 때까지 버티지말고 후히 보상해 주고, 구태여 어쩔 수 없이 송사를 당하여 최종판결이 났다면 그 결과에 속상해 하지 말고 후하게 그 위에 더 얹어서 보상하라는 뜻입니다.  때로 기업을 송두리째 잃는 일도 있겠지요.. 평소에도, 주님은 말씀하셨지요.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우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 때, <주라..>말씀하신 한량없이 풍성하신 그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감당하고도 남을 만큼 더 회복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④ 억지로 5리를 동행하자 할 때 흔쾌히 10리까지 동행해 주고, 또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때때로 과도하게 요구하는 자가 형제된 이들이든 아니든 모두 기꺼이 선대하고 섬겨 봉사하기를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처럼 범사에 전지전능한, 풍성한 사랑의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영광의 한없는 부요와 축복, 권세와 권능을 가진 자로서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여 마음을 비우고 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천국백성된 제자가 마땅히 살아내야 할, 살아 낼 수 있는 심비에 새겨진 헌장이요, 선하게 사는 삶의 원리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그것이 가능함을 아시는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먼저 그 모범을 보이셨으므로 그대로 하라고 교훈하신 것입니다. 

2) 고전 6:1~11에서 교회내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일반적 송사와 관련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때 모든 과정에 상호간에 잘잘못은 반드시 가려져야 합니다. 그래야 피차 하나님의 공의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 후에야 비로소 사랑을 나타내는 일이 적용된다는 것임을 잊지마십시요.
① 1절에 보시면 “성도간에 일(송사)이 있을 때 왜 (먼저) 성도 앞에서 송사하지 않고 불의한 자(불신자) 앞에서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지혜로운 목사, 장로 앞에서 잘잘못을 가리고 지도 받는 것이 좋다는 뜻입니다. 불의한 자들보다 성도가 더 양심적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② 2절에서 “성도는 세상을 판단할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심판석에 앉으셔서 심판하실 때 성도는 거기에 배석한다는 뜻입니다. 거기는 세상과 천사도 심판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교회내에서 성도가 작은 일 판단하는 것을 감당치 못한다면 퍽 부끄러운 일일 것입니다.
③ 4절에서는 “세상 사건이 있을 때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에게 판단을 받으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건”이란 교리와 신앙에 관한 것이 아니고 성도들 사이의 현실적 사건을 의미하는데 그런 판단을 할 때 교회내에서 (당사자들로부터)권위와 지혜를 인정(존경)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세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자칫하면 공의롭지 않게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지혜롭고 존경받는 성도를 재판자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④ 5절에서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고 하시므로 성도의 세계에 지혜롭게 잘잘못을 판단할 만한 자격자가 없음을 탄식하신 것이요
⑤ 6절에서 “형제끼리 송사하고 또 믿지 않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하셨으니 이 말씀도 책망의 말씀으로 “형제간에는 자기가 설령 손해를 본다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먼저 사랑으로 부드럽게 깨우쳐줌으로써 상대방이 그대로 인정했을 때는 용서해 주는 것이 다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명백한 뜻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완악함으로인해 문제가 해결 안될 때에는 일단 깨우침-2-3사람의 공적인 권면-교회내의 고소제도를 따르는 교회제도 내에서 처리해야지 왜 먼저 송사함으로써  믿지 않는 재판관에게까지 가서 성도가 재판을 받으니 부끄럽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당연한 말씀이지요.
⑥ 7절에서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피차 송사란 성도간 쌍방이 교회가 아닌 불신법정에 직접 고소하는 것을 뜻합니다. 성도끼리 싸우면서 믿지 않는 법관을 괴롭히는 것이니까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또 이런 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되니까 그렇게 되지 않게 하려면 어느 한 쪽이 불의를 감당하는 것(즉 손해를 보는 것)이 나을 것이고 차라리 속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송사의 핵심은 성도와 성도간에 서로 불의를 당하였고, 속임을 당하였기 때문에 손해를 본 자가 있으나, 어느 한 쪽이 또는 양쪽이 사랑으로 다 손해를 감수하거나 교회 앞에서 가려내고 불신법정에 안 가는 것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일반적 이권에 손실이 있어도 그것을 포기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분량이 크다면 당연히 그만한 신앙을 갖고 송사를 포기하는 결단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다른 이유들로 인하여 송사를 지속하는 것이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된다고 생각할 때는 확실한 명분을 갖고 시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4. 성도가 불신법정에서 일반적 송사에 임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송사의 대상과 사건의 성질에 따라 신앙적이고 건설적으로 대처하여야 합니다.

1) 불신자와의 관계에서
① 성도가 불신자에게 의도적으로 피해를 주어서는 절대 안되고, 혹 우발적 사고나 실수로 (명예나 물질이나 신체상으로 )피해를 주었을 때는 후하게 또는 화해되는 입장까지 잘 변상해 주므로 소송을 받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편에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변상을 요구해 올 때는 부득이 소송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때 소송을 당했으면 법원의 판결대로 하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때도 <...후히 보상하라>는 뜻을 잊지 마십시요.
② 반대로 성도가 불신자로부터 명예나 물질이나 신체상으로 손해를 입었다고 할 때에 당연히 법에 호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악하게 나오지 않고 선한 태도를 취할 때는 정도에 따라 양보하면서 사랑을 베푸는 것이 그리스도의 명예를 선양하는데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불신자가 과오를 범했음을 시인하는 상태에서 긍휼을 구한다면 성도의 편에서는 성실을 기울여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③ 그러나 서로 잘잘못을 규명하려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몰아 붙이려 할 때는 공의로운 판단과 공평한 보상이 필요한 만큼 재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재판을 할 때는 사실대로 입증하고 판결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2) 성도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문제가 또 있습니다.
① 우선 성도간에는 송사발생이 없어야 정상적입니다. 예를 들어서 성도가 성도의 잘못을 깨우쳐 주는 것은 성경적이고(약 5:16, 계 2:2, 마 14:4) 죄를 지적 받았거나 깨달았으면 회개하고 피해를 보상해 주는 것이 성도의 의무이니까(눅 19:8) 그대로 시행하면 싸울 일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② 그러나 서로의 잘못을 시인하지도 않고 보상하지도 않으면서 서로가 상대방의 잘못한 것만 탓하고 일방적으로 회개와 보상을 요구할 때는 재판을 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마 5:37) 이 때에 먼저 교회의 재판을 받는 것이 순서입니다.(마 18:17) 교회의 믿을만한 지도자들이 공의롭게 재판해 주고 성도가 거기에 순종하면 싸움은 끝날 것입니다.
③ 그런데 교회가 공의로운 재판을 안 하거나 성도의 송사문제를 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 성도간에 중재자가 없을 때는 일반법정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싸움을 계속 할 수는 없으니까 공의를 밝히고 싸움을 끝내기 위하여 일반법정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④ 그리고 사건의 성질에 따라 재판하는 목적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서로 잘했다는 입장에서 “잘한 것과 못한 것을 가리기 위하여” 재판을 하는 경우는 피할 수도 없거니와 법을 배우고 깨우치기 위해서라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⑤ 그런데 한 쪽 성도가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를 하였다고 할 때는 우선 관용하여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데(마 18:22) 그 잘못으로 인한 후유증과 피해가 너무 클 때는, 잘못을 시인한 쪽에서 사과하는 표로 상당한 성의를 기울여 변상을 하면서 “도와달라”고 요청하거나 사랑을 베풀어 달라고 할 때는 너그럽게 대하는 것이 신앙적인 것입니다.
⑥ 그런데 또 어느 한 편이 불법을 행하고도 뉘우치지 않고 믿을 만한 증거를 보여도 여전히 시인하지 않을 때는, 신앙양심이 없는 태도이므로 그 태도 자체를 불신앙적 태도로 간주하여 불신자를 상대하는 소송처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시인하고 고백하여야 하듯이(마 16:16, 롬 10:10) 죄도 고백하므로 회개가 성립되는 것입니다.(눅 18:13, 약 5:16) 그러니까 “무엇 무엇을 잘못하였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진심어린 긍휼을 구할 때는 너그러운 사랑을 베풀 것이나 상대방이 성도라 할지라도 명분만 그러할 뿐 불신앙적 태도를 취할 때는 불신자를 대하는 것처럼 할 수 밖에 없으므로 소송이행에 거리낄 바가 없는 것입니다.
⑦ 이런 상태로 성도간에 소송이 계속 될지라도, 항상 서로 인사하고 미워하지 말며 법이 밝히는 대로 복종한다는 태도로써 사랑의 관계를 유지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롬 12:19) 따라서 공의실현을 위하여 재판하고(미 6:8, 렘 7:5~7) 재판으로 선악이 가려진 다음에 관용의 사랑을 베푸는 것이 성경적 순서인 것입니다.
⑧ 왕상 3장에 보시면 솔로몬 왕이 재판을 잘하여 두 여인의 싸움을 해결해 준 일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국가적인 일반송사도 국민 생활에 큰 유익을 줍니다. 사람의 힘으로 밝힐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마지막 심판에 의존하여야 하겠지만 사람의 힘과 지혜와 제도로 밝힐 수 있는 것은 사회의 부조리를 예방하고 축소하는 차원에서 시행할 수 있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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